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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인에서초기황반변성질환과 연관된위험요인연구

Transcription: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 에드워드 J. 베이커(한양대 /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이번 심포지엄의 제목을 처음 읽을 때, 나는 1987년 6월민주항쟁에 대한 직 접적인 이야기를 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이 세션의 주제를 더욱 자세히 살펴본 결과,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인 큰 그림을 고찰하고 판단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임을 깨달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추후에도 자주 재조명해야 할 커다란 명제이다. 원래 역사적 고찰은 사실적 분석에 뿌리를 두어야 하나, 이 명제에는 분석적인 논문보다는 사유를 담은 글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왔다. 초창기의 질문은 한국은 과연 민주 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진화했다.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는 발전이 (예를 들어 반 유신운동, 광주항쟁, 1987년 6월의 사태, 그리고 1987년부터 현재까지 정치와 선거에서 일어난 사 건들) 과연 진정으로 민주적이었는가? 내 생각에, 한국인들은 위의 모든 사건 을 자체적으로 잘 풀어왔고,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많은 한국인 들이 민주화의 현 주소와 계속되는 불평등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 또한 나의 조국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불만족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상식 있고 민주적인 사람들이 과연 현 상황을 박정희 시대 나 전두환 시대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 부부는 1966년 미국 평화봉사단 소속 자원봉사자로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다. 아내는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에서, 나는 당시 용두동에 위치했던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는 한참 뒤에야 평화봉사단의 한국진출은 박정희 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대가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 평화봉사단에서 그런 루머를 접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미 의회 프레이저 위원회의 조사관으로 일 하면서 소위 브라운 각서 를 읽게 되었을 때 나는 경악했으나, 이제와 돌이켜보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 9

면 결국 박정희 와 미국정부는 이 거래로 각자 바라던 결과를 얻게 되었다. 본 취 지가 어떠하였던지, 이 거래는 결과적으로 양국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 예로, 미국의 젊은(!) 한국 전문가 대부분은 평화봉사단 출신이다. 당시 나는 서울사대에서 근무하게 되어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몇 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를 하게 된 반면, 일류 영문학도였던 학생들은 부임 첫날 부터 나와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양심적 이고 사회정치적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의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학생들이 조국이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발전하길 바 라는 신세대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가치란 바로 민주적인 가치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 라고 표방한 권위주의적 태도는 근거 없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학생 들의 가치관과 박정희 의 통제적인 가치관은 완전히 상반된 입장에 있었다. 내가 한국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박정희와 김형욱 등이 얼마나 인도주의와 정의를 무시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로 인해 사범대 교수들 중 한 명이 체포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우리 교수진 모두는 충격에 빠졌다.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큰 사건은 박정희의 세 번째 대통 령 당선을 방지하기 위한 삼선개헌 반대운동이었다. 동베를린 사건에서와 마찬 가지로, 중앙정보부 국장 김형욱이 이 사건에 대한 대처 방안을 꾸몄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이 사건과 (국제적 납치사건이 포함된) 성공적인 동베를린 간첩 단 공작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랑했다. 학생들은 매일 시위를 했다. 시위대가 학교 밖으로 진출하려 할 때마다, 전경들이 이들을 저지하고 구타하며 최루탄을 터트렸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최루탄 냄새를 맡게 되었고, 이후 몇 년 간 자주 그 냄새를 맡게 되었다. 지금의 내 제자들은 최루탄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참 기쁘게 생각한다. 미국인으로서 나는 (다른 미국 시민들과 함께) 문에 USAID 로고를 부착한 미 국산 다지(Dodge) 트럭이 전경들을 캠퍼스로 운송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 았다.(나는 서울사대와 고대에서 직접 목격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개헌은 한국 의 내정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은 어떤 쪽으로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 했다. 미국은 1987년까지 이 해에 무엇이 개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 박정희와 전두환 이 국민을 억압하는 동안 이러한 입장을 고수 했다. 유일한 예외는 한 정치인이 극도로 가혹한 일을 당했을 때였다. 그는 김 대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두 건의 사건은 1973년 김대중 씨가 납치당했을 때 10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와 1980년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이다. 당시 미국은 김대중의 목숨을 구하 기 위해 개입했다. 이 개입은 정치적이 아닌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 러한 미국의 외교방침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그 문제에 대해 책을 한 권 쓰고도 남을 만큼 자료가 방대하다. 미국은 필리핀에서도 그렇게 하였고, 현재 파키스탄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유신정권은 특히나 인권탄압이 심했던 시대였다. 당시 유명했던 사건으로는 김지하의 재판과 구속을 들 수 있다. 김지하는 결국 7년 간 독방에서 갇혀 지내 게 되었다. 그 밖에도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의 심문 도중 사망한 사건, 구 국서명운동의 서명자들을 징벌한 사건, 동아일보의 언론자유운동 등이 있다. 그 러나 이 가운데 어떠한 것도 유신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는 없었다. 그래 서 사람들이 아무리 싫어해도 탄압은 효과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위 험 앞에 나서서 모험을 하는 것은 극도로 궁지에 몰렸을 때와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므로 모험의 가치가 있다고 믿을 때뿐이다. 최 교수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운동가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능한 법학과 교수 였다. 당시 최 교수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학교 일에 개입을 하자 화가 나있었 다. 1972년 하버드대에서 나와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나빠졌다. 교수들이 교수회의에서조차 생각한 바를 말하지 못한 다. 그들과 달리, 최 교수는 생각한 바를 말한 것으로 보이며, 그로 인해 체포 되고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도 남았다. 물론 언제나 타협을 거부하는 특출하게 용감한 사람들은 있는 법이다. 1976년 구국선언문의 서명자들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런 행동을 하 기엔 너무 겁에 질려 있었다.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줄곧 도전을 받았으나, 국민의 지지가 거의 전무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존속은 전혀 위협받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국민의 뜻에 반대되는 것임이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김재 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1979년 10월 26일 밤, 그 동안 유신정권을 지지했었다 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계획하며 들떠 있었다. 많은 단체들이 각자 새 헌법을 만들어 공개했다. 어느 누구도 또다시 박정희 식의 군부독재가 시작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이 토론하고 상상하는 동안 전두환은 힘을 모으고 있었다. 5월 17일, 전 두환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학교들을 폐쇄하고 국회를 해산시켰으며, 모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 11

든 정치행위를 불법화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수 천명의 정치지도자들과 재야인사 들을 체포했다. 물론 광주항쟁이 시작된 직접적인 이유는 전두환의 이러한 행위 와 김대중의 체포였지만, 항쟁의 근본적 토대는 1950년대 이래의 탄압, 특히 유신정권의 탄압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믿는다. 5월 17일은 낙타의 등을 부러 뜨린 마지막 지푸라기 였다. 내가 보건대, 당시 한국인들은 사실상 1945년부 터 계속되어온 독재정권의 탄압을 더 이상 견디지 않기로 한 듯했다. 모두 알다 시피, 그 노력의 결실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주요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광주항쟁은 여러 권의 책으로 씌어져야 하 는 주제이다. 사실 광주항쟁에 관한 많은 책들이 영어와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시 광주시민들의 분노와 좌절이 극에 달해서, 자신들의 신념과 믿음에, 일상생활의 잣대에 그리고 미래를 위한 꿈에 위반되는 정치적 현실에 억지로 동조해야 하는 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전경들이 5월 18일에 저지른 잔학한 행위를 참을 수 없었고, 게다가 전국에서 같은 항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부산에 미군을 태운 미 해군함정이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도착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꿈같은 생 각이었으나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 광주시민들은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 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두환이 광주항쟁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대표한 지미 카터 정부의 묵인 덕분이 었다. 그때 이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미국 정부를 깨우치려면 그들이 지지하는 한국, 필리핀, 콩고, 파키스탄의 실상을 보여주면 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원래부터 한국을 해방시킬 뜻이 없었고, 한국의 해방은 결국 한국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와 같은 미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서 벌 어지고 있는 상황을 미국과 전 세계에 알려서 그 정보가 미국정부의 외교방침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1970~80년대에 국제사면위원회는 1985년 합세한 아시아 워치 와 함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북미한국인권연합 등등의 단체들에게서 받은 방대한 한국의 인권유린 관련 자료들을 세계적으로 배포했다. 이런 조치가 효과를 거둔 예로는 미국정부 가 김대중과 같은 개인을 대신하여 중재에 나선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미국은 항상 정치적 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개입했다. AI와 HRW를 비롯 한 여러 인권단체들이 만든 자료들은 당시의 상황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는 금광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다. 12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전두환의 개헌은 유신헌법만큼 살벌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나빴고, 여전히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수단은 박정희와 마찬가지였으나, 내 생각에 전두환은 자신의 재임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예측 하에,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 나을 바가 없는 똑같은 독재자 로 자신의 후임자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김대중 사건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 의 거센 세계적인 반대여론과 미국의 압력을 받게 된 전두환은 미국정부와 김대 중에 대한 감형조치를 약속하는 계약을 맺게 된다. 비록 광주항쟁 때에는 창피 스러운 행동을 했지만, 카터 정부는 김대중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그의 사면을 간곡히 주장하고 이 문제를 레이건 정부로 넘겼다. 결국김대중 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레이건 정부는 그에 대해 분에 넘치는 대가를 전두환에게 지불했 다. 전두환을 레이건 정부의 첫 국빈으로 초대한 것이다. 이것은 결코 행할 이 유가 없는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 국민들은 그런 일들에 속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 시 전두환 정부에게 감옥에 있는 김대중은 큰 창피거리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1982년 12월 석방된 김대중은 타의에 의한 미국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 사 건은 한국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물론 한국 인들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억했다. 김대중 씨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당사자와 한국 국민들 그리고 상황을 주시 하던 미국인들은 그가 하버드대에 1년 간 초빙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하 버드대 페어뱅크센터의 소장이었던 필립 쿤 교수와 함께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갔 다. 페어뱅크센터는 수년 간 김대중 씨를 초청했던 하버드대 소속 연구기관들 중 하나였다. 쿤 교수는 김대중 씨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페어뱅크센터가 그의 도착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 후 쿤은 중개인을 통해서 김대중 씨가 학자가 아닌 정치인이므로 페어뱅크센터에 올 수 없다는 연락을 보냈다. 나는 무척 창피하고 화가 났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소 장이었던 앨버트 크레이그 교수는 만약 다른 초청이 무산되면 김대중 씨를 옌칭 연구소 소속으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또한 상당히 어색했을 것이, 1928년 이래로 기자나 정치가 등 학자가 아닌 사람이 옌칭연구소에 소속된 적 은 한번도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필리핀의 베니뇨 아키노 의원이 소속되었던 국제문제연구소의 벤저민 브라운 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브라운 씨는 김 대중 초청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김대중 씨는 그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던 1973년 8월 이전에 에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 13

드윈 O. 라이샤워 교수가 초청한 때로부터 꼭 10년 만인 1983년 8월 드디어 하버드대에 도착했다. 김대중 씨는 미국에서의 2년을 알차게 보냈다. 처음 1년은 하버드에서, 그 다음의 1년은 워싱턴에서 지내며 저명한 정치인, 지식인, 학자들을 많이 만났 다. 또한 영문으로 대중 참여민주주의 (Mass Participatory Democracy) 를 집필했다. 그는 북미 한인사회에서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자신과 자신의 사명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의 상황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어 전두환 정권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 김대중 씨가 만난 정치인들 중에는 필리핀의 베니뇨 아키노 의원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키 노 의원은 김대중 씨와 같은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당시 졸업을 앞둔 단계였다. 아키노 의원은 1983년 8월에 보스턴을 떠나 8월 21일 마닐라에 도 착한 직후 비행기에서 끌어내려져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아키노와 필리핀에게 큰 비극이었으나, 이로 인해 마르코스 정권과 그 부인의 대통령 당선 계획이 무 너지게 되었다. 아키노의 암살은 김대중 씨의 귀국길에 우려의 먹구름을 드리우 게 된다. 우리는 그가 아키노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당시 한국에 있 지 않았지만, 한국인들도 이 두 사건 사이의 유사성을 보았으리라 믿는다. 한편 전두환은 그의 동지인 노태우 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면서도 자신이 최대한의 권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계획을 만들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전두환이 선택한 수단은 대기업들의 투자를 받아서 자신의 호를 딴 일해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전두환은 재임기간에 9억 달러를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1987년 초, 그 수단은 난관에 봉착했다.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 군이 경찰에 끌려가 다른 학생이 어디에 숨었는지 밝히라는 심문을 받게 된다. 자백 을 받아내기 위해 경찰은 그의 머리를 수 차례 물에 집어넣는 물고문을 하다가 몇 시간 후 박 군이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내 생각에 이것은 딕 체니가 테러 용의자에게 사용하도록 지시한 물타기 와 같은 고문이다.) 그 증거들이 너무나 확연했기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박 군이 고문으로 죽은 사실을 인정할 수 밖 에 없었다. 국민의 요구가 폭발하자 정부는 내무부장관과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두 경찰관을 기소했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는 그것으로 잠재워지지 않았고 누그러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몇 달 간 시위가 계속되었다. 김수환 추기경 휘하 천주교 사제들이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알리는 큰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6월에는 오십만의 시위대 14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가 매일 거리를 메웠다. 처음에는 주로 학생들이었으나 차츰 노동자와 회사원 등 여러 부류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6월 10일 여당이 노태우 를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하자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6월 10일부터 20일 까지 모든 도시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그러한 대중적 분노의 표출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져온 수년 간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이 제 자신들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시의 상황이 1980년의 광주와 비슷하다고 본다. 그것은 분노와 국가를 위해 무언가 를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융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큰 차이는 1987년의 항쟁이 전국적이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기다리던 미국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대대적이지는 않았지만, 미군의 개입이 있었다. 물론 자 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개스턴 시거가 서울을 방문했다. 그가 처음으로 방문한 사람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이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인 행위였다. 다음으로 그는 주요 정치인들도 만났다. 또한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 6월 사태에 대한 어떠한 군사적인 해결방 안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 발언을 포함하여 군사적 개입에 반 대한다는 미국 정부의 의사표현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가 군을 동원해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고 나는 믿는다. 1987년 6월 항쟁이 미국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흥미로운 점이 다.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에서 정기적으로 다루어졌다. 그 시기에 나를 비롯하여 한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것은 가슴이 뿌듯한 일이었다. 이제는 핵을 둘러 싼 미국과 북한의 대립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많지 않다. 또 많은 필요도 없다. 당시 한국 국민들의 가장 큰 요구사항은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의 정치사회 적 권리 회복이었다. 결과적으로 6월 29일, 전두환과 노태우는 국민의 성화에 떠밀려 여덟 가지 개혁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대통령 직선제, 김대중 과 기타 정치범들의 권리회복, 인권보호, 언론규제 철폐, 지방과 대학의 자율성 증대, 정당발전 촉진, 그리고 과감한 사회개혁 등이 포함되었다. (Carter Eckert et al., Korea Old and New: a History, p, 383) 부디 여러분께서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미국의 개입은 도움이 되었지 만, 한국인의 투쟁으로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미국 정부 가 당시 올바른 편에 섰던 것이 기쁠 뿐이다.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 15

물론 모두 알다시피, 6월의 승리로 당장 민주주의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태우의 임기 는 무수한 반민주적 행위와 인권유린 사건들로 얼룩져 있다. 당시 국제사면위원 회와 아시아 워치는 그와 같은 사건들을 조사하고 보고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 다. 그 시기는 겨울공화국 이었고, 나쁜 일들이 많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당시 우리들은 대중이 어떠한 행동을 하던, 또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대중이 그것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이었다. 당시 나는 상황이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진 행되었다. 나는 민주주의란 마음의 상태라고 믿는다. 민주주의적 마음이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정치 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비록 상대편이 이길지라도 개의치 않고 말이 다. 나는 한국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또 는 미국 민주주의가) 문제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28년 간 지켜본 한국의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향상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16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Edward J. Baker(Hanyang University / Harvard-Yenching Institute) 1. June 4, 2007 Reading the title of this conference I thought I would be talking specifically on the issue of the June 1987 Democracy Struggle, but looking more closely at the topic of this session I realized that I have been assigned to look at the bigger picture of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and to make some judgments and reflections on it. This is a big subject and one thatwill have to be revisited often through the years. Although such consideration must be based on factual analysis, it seems to me that the topic calls for a thought piece rather than a research paper. I have been thinking for many years about a series of questions which changed over time from Will Korea develop democracy?, to Is this apparently democratic development (e.g. the anti-yushin struggle, the Kwangju Uprising, the June 1987 events, and the political/electoral events from 1987 to the present) really democratic? All in all I think the Korean people have conducted themselves very well and that indeed Korea has become a democracy. I understand that many of you are dissatisfied with the current state of your democracy and with persistent social injustices. I have always been unhappy with my country s democracy and I am even more unhappy with it now than I have been in the past. However, I ask you Could any thoughtful, democratically inclined person really believe that Korea was better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17

off under Park Chung Hee or Chun Doo Hwan than it is now? My wife and I came to Korea as US Peace Corps Volunteers in 1966 and taught English she at Seoul Sadae Pugo and I at Seoul Sabom Taehak, then located in Yongdudong. I only fully realized later that the Peace Corps was sent to Korea as part of the deal which compensated the Park Chung Hee government for sending ROK troops to Vietnam. Although I was horrified when I first heard rumors of this during Peace Corps training and again later when I read the Brown Memorandum as an investigator for the Fraser Committee, I do think that in the end both Park and the US government got more than they bargained for and that the end result has been very positive for both countries. For example, most of us young (!) American Korean specialists came out of the Peace Corps. I was particularly lucky to be at Sadae because it was part of SNU, where a lot of the action was, and because my students, all first-rate English majors, could communicate with me from the first day whereas it took several years for my Korean to get up to speed. Being with my students put me in a good position to observe the political thinking and actions of a conscientious, socially and politically concerned group of young people who I soon realized were representative of their generation in their concern for the democratic, socially-just development of their country. It was by talking with and observing them that I came to believe that Korean values were basically democratic values and to know that the authoritarian attitude which later culminated in Park Chung Hee s Korean-style democracy was a fraud. The students values and the values of the authoritarian Park government were completely at odds. My inauguration into Korean politics was the East Berlin Spy Case which showed the complete disregard for human rights and justice of Park Chung Hee, Kim Hyung Wook, et al. Since a Sadae 18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professor was among the arrested, the case had an impact throughout the faculty, even on the apolitical faculty members. The next major event was the Anti-3rd Term Amendment Campaign which aimed to prevent Park from getting a 3rd term as president. The maneuvering was managed again by KCIA Director Kim Hyung Wook who later bragged to me about this and his successful E. Berlin spyring operation which included international kidnapping. The students demonstrated every day and whenever they tried to leave the campus they were confronted, struck, and tear-gassed. It was my first smell of tear gas, followed thorough the years by many others. I m glad to report that my current students don t know exactly what tear gas is. As an American I (and other US citizens) were shocked to see Dodge Power Wagon trucks with USAID symbols on their doors bringing the riot police to the campuses. (I personally saw them at Sadae and Kodae.) At the time the US government took the position that the amendment was a Korean internal affair and that the US could take no position on it. This was the basic US position on every thing that Park and Chun did to repress the Korean people and there was basically no change until 1987, when there was an improvement to be discussed later. The only exceptions came when particularly egregious treatment was accorded an individual. Two examples that jump to mind are US intervention to save President Kim Dae Jung s life after he was kidnapped in 1973 and again when he was sentenced to death in 1980. These were framed in humanitarian terms rather than political ones. There is a least one book to be written about this aspect of US foreign policy which was by no means restricted to Korea. Then the US was behaving in the same way in the Philippines and it is doing the same in Pakistan right at this moment.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19

The Yushin period was one of particularly severe repression of human rights. There were many famous cases and incidents such as the trial and imprisonment of Kim Chi Ha and his ultimately spending 7 years in solitary confinement, the death of Professor Tsche Chong-gil while being interrogated by the KCIA, the Declaration to Save the Nation and punishment of the signators, the Donga Ilbo Freedom of Speech Movement, etc. None of these events produced an immediate threat to the survival of the Park government. I believe that no matter how much the people hate it, repression works. People are only ready to step out in front and take risks when they are driven to complete desperation or when they can see some possibility of success that makes it worth taking the risk. The case of Professor Tsche is illustrative. He was not an activist. He was a well-qualified law professor who had studied in Germany. But he had become upset at the way the government was constantly interfering in campus affairs. When we parted at Harvard in 1972 he said to me, It s really getting bad. A professor can t even speak his mind in a faculty meeting. That is apparently what he did and what led to his arrest and death. Matters like this had an extremely chilling effect on people s behavior. Of course, there are always exceptionally brave individual who refuse to concede, like the signators of the 1976 Declaration, but most of us are intimidated by such actions. Throughout the 1970s the Yushin system was challenged but its survival was not threatened even though it clearly had almost no support. How could it when anyone could see that it was completely contrary to the peoples wishes? The minute Kim Jae Kyu killed Park on the night of October 26, 1979 it was hard to find anyone who would admit to having been a supporter of Yushin. Seoul Spring, the spring of 1980, was exhilarating and people 20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dreamt of and planned for democracy. Various groups came out with their on draft constitutions. Most of us did not imagine that there soon would be another Park Chung Hee-style dictatorship. Unfortunately, while the people dreamtand discussed, Chun Doo Hwan was consolidating his power. On May 17 Chun declared full nation wide-martial law, closed the campuses, dissolved the National Assembly, banned all political activity, and arrested thousands of political leaders and dissidents, including Kim Dae Jung, were arrested, the campuses were closed. This lead directly to the Kwangju Uprising. Of course, Chun s actions in particular the arrest of Kim Dae Jung were important causes of the uprising but I believe that all of the repressionsince the 1950s and particularly the Yushin repression laid the ground work. You could say that the actions of May 17 were the straw that broke the camel s back. In my view the Korean people were never again going to accept the kind of government that had been forced on them for so long, in fact for most of the time since 1945. Of course, as we all know, it would take some time to realize this new state. The Kwangju Uprising, like many other parts of this story, requires books to be written about it and in fact many have been in Korean and English. The important thing for our purposes seems to me to be that the people of Kwangju had reached the point of anger and frustration where they could no long tolerate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ir beliefs and values, their code of daily conduct, their hopes for the future and the political reality being forced on them. They couldn t stand what the riot police and troops did on May 18. Moreover, they saw that all the people of the city agreed and there is strengthin numbers. Moreover, according to testimony by participants, they believed that the same kind of uprising was happening or about to happen all over the country and they believed that the US navy had sent a ship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21

into Pusan which would send American troopsto help them. This may have been wishful thinking but I believe it was powerful. People had reached the point where they were ready to die and of course many did. True the Chun regime succeed in putting down the uprising with at least the acquiescence of the US government of President Jimmy Carter represented in Korea by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It was at this point that, I and I think many others, realized that our long held belief that if we could only wake up the US government to the reality of thekind of government the US was supporting in Korea (the Philippines, Congo, Pakistan.) the problems could be solved. But in fact it was clear that the US was never going to liberate Korea. Korea would have to be liberated by the Koreans. The only thing that Americans like me could do was to try to keep the people of the world and of the US in particular informed about what was going on in Korea and hope that the information might have some impact on our government s policy. During the 1970s and 80 AmnestyInternational and after 1985 Asia Watch internationally circulated an enormous amount of information on human rights violations supplied to us by the KNCC, the Catholic Office of Justice and Peace, the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and other organizations. The one way this effort was somewhat successful was in getting the US government to intervene on behalf of individuals like Kim Dae Jung which, of course they always did for humanitarian not political reasons. The materials produced by AI, HRW, and other human rights organizations remain a gold mine for anyone who wants to study or write about this period. Chun s written constitution was not as draconian as the Yushin constitution but it was bad enough and it still did not provide for direct election of the president. The quality of governance was in the same spirit as Park s, although I think Chun realized that 22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prolonging his hold on the presidency was not a way to live a long life, so instead he began to think about picking hisown successor, an alternative not much better from the point of view of a public fed up with dictatorship and longing for democracy. Faced with US government pressure against the prospect of the execution of Kim Dae Jung and a possible overwhelming international reaction to that prospect, Chun made a deal with the US government to commute the sentence. The Carter administration, despite its disgraceful showing in the Kwangju Uprising, did insist that Kim be spared and they passed the job on to the incoming Reagan administration. Kim s life was saved, but Reagan paid Chun a higher price than necessary. He welcomed Chun as the first state visitor of his new administration. This was totally unnecessary and greatly enhanced Chun s legitimacy and prestige. However, I don t think it fooled the Korean people at all. In prison, however, Kim Dae Jung remained an embarrassment to the Chun regime. Therefore, suddenly in December 1982 Kim was released and sent into exile in the US against his will. This was another step in the groundwork that would eventually lead to the end of authoritarian government in Korea. All of this, of course, was observed and remembered by the Korean people. When Kim Dae Jung arrived in the US, he, everyone in Korea, and any American who had been paying attention, thought he had a standing invitation to spend a year at Harvard. I took the Director of Harvard s Fairbank Center, Professor Philip Kuhn, to meet Mr. Kim. The Fairbank Center was one of several Harvard institutions which had invited Kim over the years. The Director greeted Kim warmly and assured him that the Fairbank Center was awaiting his arrival in Cambridge. A few days later Kuhn informed me through an intermediary that because Kim was a politician not a scholar he could not come tothe Fairbank Center. I was embarrassed and very angry. I knew I had to do something.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23

The Director of the Harvard-Yenching Institute, Professor Albert Craig told me that if all else failed we could affiliate him with the H-Y Institute, but that would have been very awkward because i all of the affiliates of the Institute since 1928 had been scholars, not reporters, politicians, etc. Fortunately I was able to turn to Mr. Benjamin Brown of the 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 where Senator Benigno Aquino had been affiliated. Mr. Brown saved the day and is really an unsung hero. So Mr. Kim Dae Jung came to Harvard in August, 1983, 10 years after Professor Edwin O. Reischauer s original invitation made before he was kidnapped from Tokyo in August, 1973. Kim s 2 year stay in the US was time well spent. He spent the first year at Harvard and the second in Washington DC. He wrote a book in English Mass Participatory Democracy.He met many prominent political, intellectual, and academic figures. He became widely acquainted in the North American Korean community where he had a great many supporters. He was frequently covered in the media, making him and his cause much better known. This also made Korea better known to the detriment of the Chun regime. One of the leaders Kim met was Senator Benigno Aquino of the Philippines, who as I have indicated was just finishing up at Harvard in the same program Kim entered. Aquino left Boston in August 1983 and arrived in Manila on August 21 where he was taken off the airplane and assassinated. This was a tragedy for Aquino and the Philippines (although it contributed to the fall of Marcos and his wife s election to the presidency), but it also cast a shadow over Kim s later return to Korea which we all feared might end the same way. I was not in Korea at the time of the assassination but I m sure those events were closely followed by a Korean public who surely noted the similarity of the 2 cases. Meanwhile Chun Doo Hwan was working on his plan to have his compatriot Roh Tae Woo succeed him while maintaining as much 24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power as possible in his own hands. The vehicle he chose was the Ilhae Foundation, named after his ho, which was funded by large Korean corporations (according to Bruce Cumings Chun raised $900 million during his presidency.) Then in early 1987 the wheels came off. An SNU student named Pak Chong-ch ol was picked up by the police for questioning about the whereabouts of another student. Within a couple of hours Pak was dead, having had his head repeatedly shoved under water and held there to try to force him to give the information. (I believe this is the same as "water boarding" which VP Dick Cheney endorsed for questioning terrorist suspects.) The evidence was overwhelming and the government was forced to admit Pak had been tortured to death. The popular outcry caused the government to prosecute two policemen for murder and to dismiss the Minister of Home Affairs and the Director of the National Police. The public s deep-seated anger at the government was not dissipatedby these measures and was not about to be. Demonstrations when on for months. The Catholic clergy under the leadership of Cardinal Kim Soo-hwan played a large and vocal role. Eventually in June there were 500,000 demonstrators in the streets every day originally most were students but gradually more workers, salarymen, etc. all kinds of citizens joined them each day. Then on June 10 the ruling party nominated Roh to succeed Chun and all hell broke lose. From June 10 to 20 all urban areas were "battlefields."surely the anger expressed by the public had to be the result of the years of repression under Rhee, Park, and Chun. Moreover, I think it had come to the point where people decided to risk participation because they were so angry, but also because they began to feel that their fate was in their own hands. I think this was very similar to what happened in Kwangju in 1980 a combination of outrage and a sense they could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25

accomplish something good for the country. There was a big difference, however, this time the movement was nationwide. Moreover, this time the longed-for American intervention happened not with troops and not very publicly, but it did happen. Of course we don t know the inside story, but 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 Gaston Sigur visited Seoul. His first stop was at the home of Kim Dae Jung, who was still under house arrest a highly symbolic gesture. He met the other key political figures. He made clear public statements against any kind of military solution. I have to believe that this and other American statements against military intervention strongly influence Chun and Roh not to use the military against the civilian protestors.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is period was the period of greatest interest in and knowledge of Korean domestic affairs among the American people. The situation was regularly covered by the news and current events programs. I and every other person who knew something about Korea was constantly on TV and radio. It was very heartening. It no longer happens much, except on the question of the US-NK nuclear confrontation, but then again it is not so needed. The public s strongest demands were for direct election of the president and restoration of the political and civil rights ofkim Dae Jung. Finally on June 29 Chun and Roh capitulated to popular demand and announced an eight-point program of reform that began with an endorsement of direct presidential elections and included restoration of civil rights for Kim Dae Jung and other political prisoners, protection of human rights, the lifting of press restrictions, the encouragement of local and campus autonomy, promotion of political parties and a call for bold social reforms.. (Carter Eckert et al., Korea Old and New: a History, p, 383) 26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Please don t misunderstand me. The American intervention helped, but it was the struggle of the Korean people that won the day. As an American I am just pleased when my country is on the right side of an issue. Of course we all know that the Junevictory did not complete the achievement of democracy. It was very unfortunate that Roh was elected president. His presidency was also marred by many undemocratic acts on many human rights violations. Amnesty International and Asia Watch remained very busy adopting cases, writing reports, etc. There was the period of the Kyoul Konhwagook and many other bad things. However, by that time I think we had all come to believe more or less that no matter what the public did there could not be another coup d etat because the public would not stand for it. It seemed that things were moving in the right direction. And indeed they were. I believe that democracy is a state of mind, a state of mind in which each individual believes (or knows) that she or he can think and express his/her own thoughts freely and that he/she can participate the political process in a meaningful way, even if the other side wins. I think Korea has reached this stage. Whatever you may find wrong with Korean democracy (or American democracy), the situation is far superior to what it was for the first 28 years of my Korean experience. Judgment of and Reflections on the Korean Democracy Movement 27

28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와다 하루키( 和 田 春 樹, 동경대 명예교수) 1.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간행한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 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년)는 1954년 3월 5일 웅크라(국제연합한국재건단) 한인 직원들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을 첫 항목으로 하여 1992년 12월 18일 김 영삼 대통령의 당선으로 끝난다. 마지막 항목은 하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지만 처음 시작은 어떠한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의 민주주의 요구 운동을 접하게 된 것은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 씨의 사건을 통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통해서 가 처음이었다. 김대중 씨는 1972년 10월에 선포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 에 따르지 않고 투쟁하기 위해 망명을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 우 리는 한국 민주화운동을 군사독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유신체제에 대한 투 쟁이라 이해하고 연대해 왔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승리로 대통령 직선제 가 부활하자 우리는 연대운동조직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러나 군인 출신의 노태 우 대통령이 출현해 씁쓸한 기억을 남겼기에 군인 대통령이 아닌 문민정부의 김 영삼 대통령이 출현한 1992년 12월이 되었을 때 이것을 더욱 중요한 분기점으 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오 랜 세월 학수고대하던 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 리의 생각에 따르면 1972년 유신쿠데타부터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까지 가 역사적 특색을 지닌 한국 민주화운동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시작시기와 종료시기를 언제로 볼 것이냐는 역사적 현상의 정의에 따라 정해 지는 것이므로 중요한 사안이다. 게다가 대상이 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의 또한 그 역사적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영향을 받는다. 즉, 한국 민주화운동을 민주개혁운동에 불과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민주혁명으로 볼 것인지의 문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29

제인 것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획을 그은 6월민주항쟁으로부터 20년 이 지난 지금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의와 그 역사적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볼만 한 때가 아닌가 싶어 우선 이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혁명의 정의 나는 1990년대 중반에 소련의 사회주의 종식이라는 사태를 보면서 근본적인 사회 변화 (Fundamental Social Change)로서의 혁명에 대해 고찰했던 적이 있다. 그 즈음 출판된 최신 혁명론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우선 1989년에 일본 의 현대 정치학 총서 중 한 권으로 출판된 일본 정치학자 나카노 미노루( 中 野 実 ) 저서의 혁명 이 있다. 이 책을 보면 혁명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보면 체 제변동의 한 형태이며 상대적으로는 급격한 변화이다., 혁명적 변화는 대개 비합법적 내지는 초법규적이며, 정치적 권력 유지자와 그 기강의 전면 적인 치환, 지배계급의 이행, 즉, 권력 이동이 완수된다. 권력이동은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나아가서는 심리적인 일련의 분열 및 붕괴를 포 함한다 고 되어 있다. 1990년에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킴멜은 혁명 사 회학적 해석 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는 혁명이란 정치적 권력의 사회적 토대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종속자 집단의 시도 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혁명 을 기성 국가권력의 전복, 새로운 국가권력의 창출, 이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 체제의 변혁 개시라는 3가지로 정의했다. 프랑스혁명, 러시아혁 명, 중국혁명을 비교사적으로 분석한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은 이러한 혁명을 사회혁명 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너무 넓은 개념이다. 원래부터 혁명 이란 반대로 좁은 의미에서 정의하면 쿠데타와의 차이가 문제시 되지만 나는 혁 명과 쿠데타를 절대적으로 구별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쿠데타는 군대를 움 직여서 하는 변혁이지만 사회적 변혁의 개시를 수반한다면 혁명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혁명의 기존 정의에 충실한 사람들은 혁명의 형태나 과정을 비본직절인 것 인 양 경시해 왔다. 나카노( 中 野 )도, 킴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혁명의 과정 을 배제하고 혁명을 이해할 수 없다. 혁명은 흔히 한번의 전투 인 것처럼 이 해되곤 한다. 한국의 경우는 1960년의 4월 학생혁명이 그 전형으로서, 4월 19 일을 전후한 2주일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역사상의 대혁 명은 많은 막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와 같이 수년간에 걸쳐 진행된다. 프랑스 혁 명이 그 전형이다. 나는 이것을 수도 연극형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수도가 30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 되고, 정치적 공간이 수도에 만들어져 있고, 군사력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형태이다. 수도에 있는 여러 집단 내주체간 갈등에 의해 국면의 변화가 생기면서 여러 장, 여러 막으로 구성 되는 연극처럼 진행되는 혁명의 클라이막스는 독재와 테러이다. 그리고 마지막 은 테르미도르로 종식된다. 19세기 유럽의 각종 혁명,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도 동일한 형태를 이루었으며 러시아대혁명은 제1기인 1917년의 단계에 바로 이와 같은 형태를 보였다. 1918년의 독일혁명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혁명의 두 번째 유형은 수도 진격형 인데, 그 전형으로는 멕시코혁명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수도가 통치권력에 의해 일원적으로 통제되어 있고, 다원적인 주체의 등장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국가, 군사력이 지방 에 산재되어 있는 국가에서 발생한다. 지방에서 생겨난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하 여 반란군의 수도 입성으로 혁명이 성취된다. 이것은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경우 가 많다. 중국혁명은 신해혁명에서 시작되어 1949년 모택동의 혁명까지 동일한 유형을 보인다. 사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도 수도 진격형에 속한다. 혼슈( 本 州 ) 서쪽 끝의 초슈( 長 州 ), 규슈( 九 州 ) 남쪽 끝 사쓰마( 薩 摩 )의 막부( 幕 府 )토벌 세력 을 기초로 천황을 추대하여 관군들이 교토( 京 都 )에서 에도( 江 戸 )로 치고 올라와 막부를 항복시키고 수도인 에도에 무혈입성하여 신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메이 지유신은 프랑스혁명 등과 비교하면 혁명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멕시코혁명과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면 혁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자 혁명은 또다시 새로운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인 레닌이었다. 세계전쟁 중에 레닌 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회주의혁명(사회혁명)은 한번의 전투가 아니라 부 르조아지의 수탈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경제적 및 민주주의적 개혁의 모든 문 제를 위한 많은 전투들로 이루어지는 한 시대이다. (레닌전집, 21권, 421쪽) 이제 사회주의혁명 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 한번의 전투가 아니라, 많은 전투들로 이루어지는 한 시대이다 라는 혁명관은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리고 하나의 시대를 형성할 정도로 긴 세월에 걸쳐 영속적으로 이어지 는 전투, 장기 연속형 혁명을 나는 혁명의 제3유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모든 과정을 통해 볼 때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혁명의 형태 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31

3. 한국 민주혁명의 단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쿠데타를 일으켰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를 실시 하려는 유신체제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10월 18일, 김대중 씨가 즉 시 일본에서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국외로 망명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이 에 대한 보복이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생한 이듬해 1973년 8월 8일의 김 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은 권력에 의해 법의 보호 권 밖으로 밀려나면서 목숨을 담보로 한 비타협적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폭력적인 저항은 이미 3 1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 때부터 비폭력적 혁명의 성격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4월 3일의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커다란 조직적 연계가 존재한 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나, 권력은 사건의 배후 조종자라는 이유로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중 인혁당 관련자 8명은 이듬해인 1975년 4월 9일에 처형되었다. 체제와 저항자의 관계는 비화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 때 시인 김지하 는 2번에 걸쳐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양심선언과 옥중일기, 법정진술이 전 세계에 전해지면서 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게 된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처형된 2일 후인 1975년 4월 11일에는 서울대학생 김상진 씨가 양심선언을 하며 할복자살을 했 다. 그 후에도 적지 않은 청년들이 이러한 항의 행동을 취했다. 운동의 주도적 형태가 된 것은 투옥을 각오한 양심선언 공표였다. 이것은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같은 형태를 보였다. 운동의 주요 무대는 대학교였으며 주요 세력은 학생운동이었으나 1978년, 1979년이 되자 운동은 공장과 노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야당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씨의 투쟁이 정권을 동요시켰 고, 이러한 중앙의 움직임에 반발한 부산과 마산지구에서 학생시민의 반발이 일 어났다. 파출소, 방송국 등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자 부산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권 핵심부에 위기의식이 팽배해지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른팔이었던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운동세력 측에서 는 한 건의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던 반면 운동의 대응세력이던 권력 측의 움직 임에 의해 살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후 정세가 변하여 공공연한 정치활동이 확대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 필 3명이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자 전두환 국군보안 사령관은 1980년 5월 17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 씨 등을 체포하였다. 운 32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동이 중앙 및 지방에서 완전 봉쇄되어있던 때, 광주지역에서 5월 18일 학생들 이 저항하며 들고 일어났고,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계엄군을 밀어내 자유 광주에 저항공간이 만들어졌다. 쿠데타에 대한 불복종의 의사는 시민 무장으로 표출되었으나 이것은 결국 계엄군의 일제 공격에 의해 제압당하게 된다. 사망자 는 시민 168명, 군인 23명, 경찰관 4명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압살 당한 광 주의 무장저항은 전체적으로 운동의 비폭력적 성격과 모순되지 않는, 비폭력운 동의 혁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80년 후반부에는 잡혀 온 김대중 씨를 사형에 처하겠다는 권력의 의사에 대해 국제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1981년 1월 김대중 씨는 사형판결이 대법원에 서 확정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이렇게 커다란 희생을 낳으면서 도 비폭력적인 투쟁으로 이어져온 이유로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 북한이 한국 정세에 대해 개입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권력이 북한에 의한 배후조종이라는 탄압의 수단을 이용하는 상황이 라 단호하게 자신들의 주체성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단, 1980년 12월 광주의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때는 사망자가 없었으나 1982년 3 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때는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이 저지른 폭거가 1983년 10월의 버마 사건이다. 그 러나 이 사건은 한국의 운동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김대중 씨는 1982년 12월,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풀려나 미국으로 출국했 으나 1984년 2월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귀국하여 되살아나기 시작한 운동에 합 류하기로 했다. 되살아난 운동은 고문으로 살해된 학생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 해 항의하는 국민대회를 통해 1987년 6월 10일, 서울에서 폭발했다. 연속적인 행동에 시민이 들고 일어났고, 드디어 권력은 6월 29일 민주화를 약속한다는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6월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폐지를 얻어냈다. 다음 국면은 부활된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통해 정치적으로 구세력을 배제해 가는 제2국면이다. 1987년 12월 선거에서는 군인인 노태우 씨가 당선되었으나 1992년 12월에는 문민정부의 김영삼 씨가 당선되었다. 이 정권 하에서 1997년 전두환과 노태우 라는 전 대통령이 체포되어 군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일소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혁명의 성과는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즉 남북정상회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33

4. 일본의 초기 반응 한편 일본은 4월 학생혁명과 30년 간의 민주혁명, 쿠데타를 굳이 꼽자면 3번 을 경험한 한국과 전혀 달리 개혁적인 변화를 경험한 나라이다. 특히 전후 개혁 은 전쟁을 실시한 천황제 정부가 점령군의 지휘 하에 헌법을 개정하고 기본적으 로 위에서부터의 민주화와 비군사화 개혁 을 한 것으로서 변화의 규모는 컸으나 형태는 연속적인 변화일 뿐이었다. 특히 1955년 이후는 자유민주당=영구적인 집권당, 사회당=만년 야당이라는 형태의 55년 체제가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한 국과 전혀 다른 이질적 국가이자 사회이다. 그러한 나라가 이웃나라의 30년에 걸친 민주혁명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내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은 처음부터 일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 다. 이유는 충격적인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본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씨의 납치 뉴스를 접했을 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납치사건 당일 발표된 잡지 세계 10월호에 실린 김대중 씨와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安 江 良 介 ) 씨의 대담 한국 민주화로 가 는 길 을 앞다투어 읽어 내려갔다. 김대중 씨는 생사도 알지 못했다. 그 때 일 본인들은 처음으로 생명을 걸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육성을 들었으 며,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세계 에는 이 때 이미 TK생의 한국통신 이 게재되고 있다. 1972년에 도 쿄로 망명한 한국인 학자 지명관 씨가 기독교인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에서 은밀 히 전해지는 자료를 기초로 쓴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황 보고서 격이었다. 이웃 나라 정부에 도전하는 내용의 지하 통신이 계속 나온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들 은 경외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납치사건이 일어난 것은 김대중 씨가 의장직을 맡기로 되어 있던 한국 민주 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약칭 한민통)의 창립대회 전날 밤이었다. 이 조 직은 8월 13일 김재화, 배동호, 곽동의 씨 등이 창립해 활동을 시작했다. 기관 지인 민족시보 의 편집장으로는 평론가인 정경모 씨가 취임했다. 한민통의 활동은 정경모 씨의 평론과 함께 일본인들의 활동을 크게 도와주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그 때까지 한국의 일에 무관심하던 일본 여론 사 이에서 큰 관심이 생겨 났다. 지식인과 정치인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최초의 운 동은 김대중 씨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김대중 씨의 원상회복, 일본으로의 귀환 34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8월 23일 아오치신( 青 地 晨 ) 씨를 비롯한 83명이 성명 을 발표했다. 김대중 씨와 친분이 있던 자민당 AA연구그룹의 우쓰노미야 도쿠 마( 宇 都 宮 徳 ) 의원은 중의원 결산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0월 9일부터 스스로 위 원회에서 한일관계의 유착현상을 주제로 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한일간 의 검은 유착이 주간지의 보도 대상이 되면서 커다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 다. 그러나 1973년에는 일본인들의 운동이 부진했다. 집회는 2회, 데모도 2회 이루어졌지만 12월 15일에 열린 데모의 참가자는 150명 정도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른바 기생 관광 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이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남성 승객들에게 홍보지를 뿌린 일이었다. 이 일로 관광업계는 일말의 불 안감을 떠안게 된 것 같았다. 드디어 1974년에 들어서 일본인 운동은 자립적인 시민운동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선봉에 선 것은 프로테스탄트교회 신자였다. 1974년 2월에 한국문제 기독교인 긴급회의가 나카지마 마사아키( 中 島 正 昭 ), 쇼지 쓰토무( 東 海 林 勤 )를 중 심으로 결성되어 매 달 기관지인 한국통신 을 냈다. 김대중 씨 문제로 운동을 펼쳐 온 지식인들은 아오치신( 青 地 晨 ), 와다 하루키( 和 田 春 樹 ) 등을 중심으로 1974년 4월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일본 연 락회 (약칭 일한연 )이 발족되었다. 바로 이 때, 한국에서는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시인 김지하가 배후 조종자라 며 체포되었고 상황은 일변하였다. 일한연 은 4월 18일에 발족식을 가지고 서 둘러 활동을 시작했다. 결성선언에는 한국 민중이 떠안고 있는 무거운 짐을, 일본을 변화시켜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이 우리들의 의무일 것이다. 이것은 우 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다. 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 단체는 베트남 반전시민 운동을 펼쳐 온 베평련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의 사무실 한 켠에서 시작되었으며 베평련의 젊은이들이 운동에 참가했다. 일한연 도 기관지인 일한연대 뉴스 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표인 아오치신( 青 地 晨 )은 중앙공론 의 편집자였는데 1944년에 요코하마 사건 이라는 언론탄압 사건으로 체포되어 허위자백을 강요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2번에 걸쳐 서울의 김대중 씨를 방문하는 등 운동의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컸던 것은 시인 김지하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 의 문학자들이 우려를 표명하며 봉기했던 일이다. 이 일은 일본의 여론에 커다 란 영향을 미쳤다. 1972년에 마산의 요양원에 있던 김지하를 방문한 적이 있는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35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鶴 見 俊 輔 ) 씨와 김지하 시집의 첫 번역판 간행에 관여했던 편집자 나카이마 리에( 中 井 毬 栄 ) 씨, 그들의 친구이자 베평련 대표인 작가 오다 마코토( 小 田 実 ) 씨의 역할이 컸으며, 김지하를 존경하던 문학자 오에 겐자부로 ( 大 江 健 三 郎 ) 씨와 재일교포 지식인 김석범, 이회성, 김달수, 이진희 씨 등의 참 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람들은 김지하를 돕는 모임을 만들어 2번에 걸 쳐 도쿄의 스기야바시 공원에서 단식농성을 펼쳤다. 김지하를 돕는 모임의 활동 은 일한연이 도와주었다. 2번의 단식농성은 작가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 켜 7월 25일의 김지하 등 전 피고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 에는 1,500명 이 참가했고, 한국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활동이 일본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 다. 나아가 오다 씨와 아오치 씨는 사회당, 공산당, 공명당 3당과 일한연대연락 회, 김지하를 돕는 모임 등 5자 공동주최로 9월 19일에 3만 명의 국민 대집회 를 여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는 한국 정보기관에 의한 일본의 주권 침해 사건이라는 해 석이 대세였으나 김지하 씨 사건 때는 한국 민주화투쟁에 대한 순수한 연대의식 이 고취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 연대의식이었다. 와 다 하루키는 한국의 운동에 대한 감동에서 시작된 자신들의 운동에 대해 그 의 미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자 한반도인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 하는 제3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식민지 지배가 끝난 8 15 직후와 한일조약 체결, 이렇게 우리는 2번의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야말로 기회 를 잡아야 한다. 와다 씨는 이러한 생각을 잡지 전망 의 1974년 12월호에 실었다. 리진희 씨를 비롯한 재일교포 지식인들은 잡지 계간 삼천리 를 1975년 2 월에 창간하여 일본 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중요한 포럼을 만들었다. 1975년에는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항의한 시민의 격려광고가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켜 동아일보를 지원하는 모임(연락책 구라쓰카 다이라, 이누마 지로)이 탄생했다. 그리고 격려광고를 읽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 작했다. 이 해에 김지하가 석방되어 3월 1일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호소문 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3 1운동은 피해자인 우리 민족뿐 아니라 박해를 가한 일본민족까지도 구해주려 했던 것. 이라고 했다. 이 일도 한국 민 주화운동과의 연대에서 일본과 조선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그 해 김지하는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라며 기소를 당했다. 다시금 36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작가 오에 겐자부로 씨를 중심으로 한 35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김 지하의 새로운 작품집이 간행되었다. 그 후에는 1976년 3월의 민주구국선언 중에 김대중, 문익환 씨 등이 체포된 것이 관심을 불러모았으나 일본에서는 그리 큰 관심이 생겨나지 않았다. 일한연 대운동은 1978년이 되면서 약해졌고 사무국장의 사정으로 일한연대연락회의가 축소개편 되면서 지식인 중심의 일한연대위원회로 바뀌었다. 당시는 한국에 대 해 소개를 해 줄만한 사람도 적어 일한연대운동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한국문화 소개나 번역출판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와다 하루키와 다카사키 소지 ( 高 崎 宗 司 )가 편찬한 분단시대의 민족문화 한국 <창작과 비평> 논문선 사 회사상사, 1979년 을 들 수 있다. 5. 1980년의 암흑시대 일한연대운동의 최대 고조기는 1980년 봄에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간신히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오르던 중 5월의 쿠데타로 암흑기가 찾아왔다. 광주시민의 용기 있는 저항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나 그것보다 도 일본인들의 관심을 산 것은 김대중 씨가 내란음모 등의 사건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게 될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와다 씨는 자유 광주의 제 압을 통해 생각해 보다 라는 글을 세계 7월호에 게재하고 이어서 8월호에는 김대중 씨 말살 음모와 가담자들 이라는 글을 써서 호소했다. 우리가 비판한 것은 산케이신문 의 시바타 미노루( 柴 田 穂 ) 씨, 마이니치신문 의 시게무라 도시미쓰( 重 村 智 計 ) 씨, 전 아사히신문 의 다나카 아키라( 田 中 明 ) 씨였다. 시 바타 씨는 김대중 씨에 관한 그야말로 괴문서를 일본에 퍼트리면서 한국에서는 김대중 씨가 죽임을 당해도 당연하다고들 여긴다 고 했고, 시게무라와 다나카 는 이러한 결과는 한국 정치문화의 탓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극 소수에 불과했다. 일한연대위원회, 한국문제기독교인긴급회의, 가톨릭정의와평 화협의회는 손을 잡고 운동을 펼쳤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씨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유례없는 동정과 연대감의 기운이 높아졌다. 7월에는 아오 치신, 나카지마 마사아키, 양심적인 여성참의원의원 이치카와 후사에( 市 川 房 枝 ) 3명이 주도하는 시민서명운동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아라 가 시작되었다. 청 년과 주부들이 운동 사무실로 몰려들었고 집회와 데모가 반복되었다. 일본노동 조합총평의회와 같은 노동조합도 운동을 벌여 대규모의 데모가 일어났다. 운동 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TV도, 신문도, 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37

기독교인들은 자주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일한연대위원회의 지식인들과 시민 서명운동의 청년들도 이에 참가하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동참활동도 발 전하게 되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는 변함없이 운동의 선두에 섰고 시바 료타 로 작가와 마쓰모토 세이초( 松 本 清 ) 작가도 김대중 씨의 구명을 위해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스즈키( 鈴 木 ) 수상과 이토( 伊 東 ) 외무상은 적극적 인 움직임을 보였고 미야자와( 宮 沢 ) 관방장관은 밀사를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 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일본 전역을 뒤덮는 듯했 다. 이러한 움직임에 냉소적이었던 것은 사토 가쓰미( 佐 藤 勝 巳 ), 니시오카 쓰토 무( 西 岡 力 )와 같은 소수의 사람이었고 그러한 움직임은 미니커뮤니케이션에 국한 된 것이었다. 반응은 미국과 독일에까지 번져나가 드디어 1981년 1월 한국 정 부는 사형선고를 확정한 후 감형을 실시했다. 6. 6월 승리의 영향 그 후 일본에서는 나카소네( 中 曽 ) 수상이 등장하여 전두환 정권에게 거액의 원조금을 제공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일본의 운동은 문제는 역사 문제와 북 한문제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1982년, 교과서 문제가 한국, 중국에서 크 게 부각되었을 때 일한연대위원회는 8월 14일 이제는 진정한 조선 식민지 지 배의 청산을 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아오치, 쓰루미, 와다를 비롯한 8명의 이름 으로 발표했다. 1983년에 버마사건이 일어나자 와다 씨는 북한에 대한 의혹을 표명하며 진상이 무엇이든 북한의 고립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세계 12월호에 발표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사회당과 공산 당의 갈등이 깊어졌다. 1984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에 맞추어 조선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국회 결의를 요구하였으며 이것을 통해 한일조약 제3조의 한국 측 해석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한일협상의 개시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지식인과 기독교인 135명이 7월 4일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때 그러한 국회결의를 구성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꿈만 같은 이야기로 보였다. 1985년 귀국 도중에 김대중이 나리타에서 하루를 머물자 관계자들은 크게 흥 분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단, 이 즈음 김대중 씨의 옥중서신이 간행 되어 조용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 6월, 민주화가 드디어 승리했을 때 일본의 운동관계자들은 커다란 기쁨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일한연대위원회도, 한국 기독교인 긴급회의도, 감사한 마음으로 활동을 멈추었다. 세계 에 게재 되던 한국통신 도 1988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38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이 북한에 대한 불안감을 한층 고조시키자 일한연 대운동을 추진해오던 활동은 야스에 료스케( 安 江 良 介 ), 와다 하루키를 중심으로 북한과 일본의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에 기울여졌다. 1988년 8월 15일, 도이 다카코( 土 井 たか 子 ) 사회당위원장은 한반도 2개국 건국 40주년에 맞추어 성명을 내고 조선식민지지배청산을 위한 국회 결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9월 8일,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정부에게 식민지지배 청산을 목적으로 한 북한과의 정부 간 협상을 실시하라고 건의했다. 1989년 1월에 쇼와( 昭 和 ) 천황이 서거하 자 지식인 12명이 조선식민지 지배를 반성, 사죄하는 국회결의를 요구하며 성명 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9년 3월 1일에는 국회 결의를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 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전후 체제는 전쟁은 싫다 라는 것 이상의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못했 다. 1972년에 중국과 국교수립을 할 때 전쟁을 통해 피해를 준 점을 반성한다 고 처음으로 표명했으나 조신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도, 표명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에 눌려, 일한연대운동을 펼쳐 온 세력의 결집된 힘에 의해 북한에게 반성을 표명함으로써 한일관계를 타개하 도록 정부에 압력이 가해졌고, 드디어 일본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7. 일본의 변화 1990년 9월, 가네마루( 金 丸 ) 다나베( 田 辺 ) 방북단이 총리의 서신을 들고 북 한을 방문해 가네마루 씨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김일 성 주석은 이를 받아들이고 북일 국교협상 개시를 제안했다. 이 협상은 1991년 1월 개시되었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민주화가 발전된 한국사회의 분위기 를 반영하듯 1990년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어 일본 정부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일본 정부는 진지한 자세로 임했으며 1993년 6월 고노( 河 野 ) 관방장관이 담화문을 발표해 사죄를 표명했다. 이것은 자민당 정부가 야당 사회당의 촉구 등에 영향 받아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은 사건이었다. 이 고노 담화가 자민당 단독 정부의 마지막 발표문이 되었으며 그 후 호소카와 ( 細 川 ) 수상의 비자민당 정부가 탄생했는데 자민당 내의 우익세력은 호소카와 수상 의 침략전쟁인식, 식민지지배인식에 반대하며 궐기를 하게 된다. 이듬해 무라야마 ( 村 山 ) 내각이 구성되자 자민당이 집권여당으로 복귀하기는 했으나 우익세력의 위 기의식은 더욱 높아져 1994년 12월에 자유민주당의원의 종전 50주년 국회의원 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연맹의 임원은 회장 오쿠노 세이스케( 奧 野 誠 亮 ), 사무국장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39

이타가키 다다시( 板 垣 正 ), 사무국 차장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등이었다. 이 의원연 맹의 결성취지서를 보면 지난 전쟁은 일본의 자존자위( 自 存 自 衛 )와 아시아의 평화 를 위한 것 이었으며, 그 전쟁에 대해 후세에 역사적 화근을 남기는 국회 결의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며 저지할 것을 맹세하고 있다. 이 연맹에 자민당 의원의 3분의 2가 소속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으나 고 노 총재와 하시모토( 橋 本 ) 후생대신, 가토 고이치( 加 藤 紘 一 ) 정조회장 등의 노력 으로 1995년 6월에는 일본도 침략적 행위, 식민지 지배 로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깊은 반성의 뜻을 표명한다 는 국회 결의가 채택되었다. 또한 사회당과 자민당의 합의로 7월에는 위안부 출 신 여성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었고, 8월 15일에 는 각의 결정에 따라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의 혁명에 부응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은 도착지였다. 그 러나 이 중 국회결의는 일본 국내외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아시아여성기금 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8. 파급 효과 그 후 1996년에 위안부 문제 관련 기술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일제히 등 장하자 오쿠노, 이타가키, 무라카미( 村 上 ) 등은 밝은 일본국회의원 연맹 을 결 성해 이 기술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1997년 2월에는 일본의 앞 날과 역 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이 이 활동을 계승했다. 이 모임의 대 표가 나카가와 쇼이치( 中 川 昭 一 ) 씨이며, 아베 신조 씨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여 기에서 지식인들에 의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발족을 이끌었 다. 이 모임의 줄기가 전국으로 급격히 퍼져 나가면서 우익세력과 새로운 국수 주의 세력을 결집시켰다. 바로 이때 한국혁명에 대한 노골적 대항의 움직임이 일본 내에서 조직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요코다 메구미 씨의 납치사건이 문 제시되어 북한의 납치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가족들의 모임, 구출을 위한 모임도 만들어졌다. 역사문제와 북한문제가 완전히 합쳐지면서 처 음부터 반한국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 때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했다. 일본의 국민들은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존경하는 현대 한국인 김대중 씨의 당선을 환영했다. 대통 령의 방일, 국회에서의 연설은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부치 수상과의 한일 40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공동선언도 획기적이었으며, 무라야마 담화를 한일 공동선언에서 확인, 인정한 것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해소되지 못했 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가 1998년 5월에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지 않겠다고 서약 한 할머니에게 300만 엔의 일시금을 주겠다고 한 것이 모순의 확대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우익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실시한 일본과의 문화교류 촉진, 대일 문화개방 정책은 일본 측의 환영을 받았고 결국 일본인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끌어내 한류열풍 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것은 우익의 공격을 뒤집는 저력으로 작용했다 기승을 부리던 일본의 우익세력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 포용정책을 강 하게 공격했다. 2000년 봄의 방북은 일본 국민 전체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졌지만 우익세력은 공격 강도를 높였다. 일본은 남북회담 직전에 8년 간 중단되 어 있던 북일국교협상을 재개했으나 납치를 문제 삼는 세력의 거센 활동으로 불 과 3회만에 끝나고 말았다. 2001년 북미관계가 긴장도를 높여가던 중 북한이 비밀 협상을 제안하자 외무 성의 다나카 아시아국장이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를 얻어 비밀협상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2년 9월 고이즈미 수상의 방북, 북일정상회담, 북일평화선언 조인 이 실현되었다. 북한은 13명의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한 후 생존자 5명의 존재 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납치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적 반발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김정 일체제에 부정적인 의견이 잡지, TV를 뒤덮었고, 일본 내의 여론 앞에 고이즈 미 수상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비밀협상에서 배제되어 있던 아베 신조 관방 장관이 대북정책을 주관하게 됐다. 한일연대운동에 관여하고 있던 사람들도 참 가하여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회장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2000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 맺음말 북한을 대하는 입장을 보면 한국혁명 후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골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모든 문화적, 생활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마음을 일본 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혹은 한국의 30년 간에 걸친 변화가 혁명이다, 혁 명적 변화다라고 하는 사실을 일본인이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골을 빨리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 41

메우는 것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동북아의 지역협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일 것이다. 42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

韓 国 民 主 革 命 の30 年 と 日 本 和 田 春 樹 1.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をどうみるか 韓 国 民 主 化 運 動 記 念 事 業 会 研 究 所 が 刊 行 した 韓 国 民 主 化 運 動 史 年 表 ( 民 主 化 運 動 記 念 事 業 会 2006 年 )は 1954 年 3 月 5 日 のUCLA 韓 国 人 職 員 の 賃 上 げ 要 求 ストから 項 目 をおこし 1992 年 12 月 18 日 金 泳 三 大 統 領 に 当 選 ま でで 終 わっている この 終 わり 方 は 一 つの 選 択 であるが はじまりはどのような 考 えに 基 づくものかは 分 からない 私 たち 日 本 人 が 韓 国 における 民 主 主 義 を 求 める 運 動 を 発 見 したのは 1973 年 8 月 8 日 日 本 から 拉 致 された 金 大 中 氏 の 事 件 を 通 じて 金 大 中 氏 という 政 治 家 を 通 じてである 金 大 中 氏 は 1972 年 の10 月 に 宣 布 された 朴 正 煕 大 統 領 の 維 新 体 制 に 従 うことなく それと 闘 争 するために 亡 命 した 人 であった だから それ 以 後 私 たちは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を 軍 事 独 裁 政 権 の 最 高 の 形 態 としての 維 新 体 制 に 対 する 闘 争 と 理 解 し それと 連 帯 してきた 1987 年 6 月 抗 争 の 勝 利 によって 大 統 領 直 選 制 への 復 帰 が 実 現 すると 私 たちは 連 帯 運 動 の 組 織 を 終 息 させた しかし 軍 人 の 盧 泰 愚 大 統 領 の 出 現 は 苦 い 思 いをのこしていたことはたしかであり 軍 人 大 統 領 に 代 わって 文 民 の 金 泳 三 大 統 領 が 出 現 した92 年 12 月 にいたり これをより 重 要 な 区 切 りと 受 け 入 れた そして 1997 年 12 月 金 大 中 大 統 領 が 実 現 したとき に 私 たちは 長 く 待 ち 望 んだその 時 が 到 来 したと 思 うにいたったのであった とい うわけで わたしたちの 気 持 ちからすると 1972 年 の 維 新 クーデターから19 97 年 の 金 大 中 大 統 領 の 当 選 までが 歴 史 的 に 個 性 的 な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の 時 期 という ことになるのである 始 期 と 終 期 をどこにとるかは 歴 史 的 現 象 の 定 義 によって 決 まるのであるから これは 重 要 である さらに 対 象 としての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の 定 義 はまたその 歴 史 的 性 格 をどうみるかということにも 影 響 をうける つまり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は 民 主 改 革 韓 国 民 主 革 命 の30 年 と 日 本 43

運 動 にすぎないのか それとも 民 主 革 命 なのかという 問 題 である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の 重 要 な 画 期 である6 月 民 主 抗 争 から20 年 が 経 過 した 今 日 は 韓 国 民 主 化 運 動 の 定 義 とその 歴 史 的 性 格 について 考 えてみうる 時 であろう まずこのことを 検 討 す る 2. 革 命 の 定 義 私 は1990 年 代 の 半 ば ソ 連 における 社 会 主 義 の 終 焉 という 事 態 に 直 面 して 根 本 的 な 社 会 変 化 Fundamental Social Change としての 革 命 について 考 察 したことがある そのころ 出 版 された 最 新 の 革 命 論 をいくつか 取 り 上 げると ま ず1989 年 に 日 本 の 現 代 政 治 学 叢 書 の 一 冊 として 出 た 日 本 の 政 治 学 者 中 野 実 の 著 書 革 命 がある それは 革 命 は 最 広 義 では 体 制 変 動 の 一 形 態 であり 相 対 的 には 急 激 な 変 化 である 革 命 的 変 化 は 概 ね 非 合 法 的 ないし 超 法 規 的 で 政 治 的 権 力 保 持 者 とその 機 構 の 全 面 的 な 置 換 支 配 階 級 の 移 行 すなわ ち 権 力 移 動 が 果 たされる 権 力 移 動 は 政 治 的 レベルばかりでなく 経 済 的 社 会 的 さらには 心 理 的 な 一 連 の 分 裂 崩 壊 を 含 む としている 1990 年 に アメリカの 社 会 学 者 マイケル キンメルは 革 命 ーー 社 会 学 的 解 釈 という 本 を 書 いた それは 革 命 とは 政 治 的 権 力 の 社 会 的 土 台 を 変 革 しようとする 従 属 者 集 団 の 試 みである と 定 義 している 私 は 革 命 を 既 成 の 国 家 権 力 の 転 覆 新 しい 国 家 権 力 の 創 出 それによっ てひきおこされる 社 会 体 制 の 変 革 の 開 始 という 三 点 で 定 義 した フランス 革 命 ロ シア 革 命 中 国 革 命 を 比 較 史 的 に 分 析 したテーダ スコッチポルはこれらの 革 命 を 社 会 革 命 と 呼 んでいるが これは 広 すぎる 概 念 である もとより 革 命 を 逆 に 狭 く 定 義 すると クーデターとの 違 いが 問 題 となるが 私 は 革 命 とクーデターを 絶 対 的 に 区 別 することは 難 しいと 考 える クーデターは 軍 隊 を 動 かしてする 変 革 だが 社 会 的 変 革 の 開 始 を 伴 えば 革 命 と 言 っていいであろう 従 来 革 命 の 定 義 に 熱 心 な 人 たちは 革 命 の 形 態 過 程 を 非 本 質 的 なことである かのように 軽 視 してきた 中 野 も キンメルも 同 様 である だが 革 命 の 過 程 を 抜 きにして 革 命 は 理 解 できない 革 命 はしばしば 一 回 の 戦 闘 のように 理 解 される 韓 国 の 場 合 であれば 1960 年 の4 月 学 生 革 命 がその 典 型 で 4 月 19 日 の 前 後 2 週 間 のうちになしとげられている だが 歴 史 上 の 大 革 命 は 多 くの 幕 からなるド ラマのように 数 年 にわたって 進 行 する フランス 革 命 がその 典 型 である 私 はこれ を 首 都 演 劇 型 と 名 付 けている これは 首 都 が 政 治 文 化 の 中 心 となっており 政 治 44 한국 민주주의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