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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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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논문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김동철 유배인 김약행의 < 遊 大 黑 記 >를 통해 본 조선후기 대흑산도 / 최성환 식민지기 부산지역 회사자료의 정리와 분석 釜 山 府 勢 要 覽 자료를 중심으로 / 장지용 정이근 朝 鮮 日 報 의 1930년대 영화 관련 활동 / 김승구 공간과 장소를 통해서 본 어업공동체 임자도 전장포의 사례를 중심으로 / 박정석 <자갈치 아지매>를 통해 본 로컬의 경계 허물기 방식에 대한 고찰 / 차윤정 국가 중심화의 표상, 국민교육헌장 의 은유 분석 / 박수경 周 易 巽 卦 命 題 에 관한 硏 究 / 정해왕

한국민족문화 36, 2010. 3, 107~137쪽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1)김 동 철** 1. 머리말 2. 水 利 土 木 기술 3. 造 船 기술 4. 捕 鯨 業 5. 산업기술의 본산, 商 都 大 坂 6. 맺음말 <국문초록> 일본에 대한 조선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표현은 島 夷 이다. 일본을 섬 나라 오랑캐로 인식한 것이다. 1748년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 왕은 도 로, 산천, 무예, 인심, 습속 등을 잘 관찰하라고 당부하였다. 통신사는 인식의 공간 일본 이 아니라, 實 地 의 일본 을 보려고 하였다. 그들이 본 18세기의 일본은 과연 島 夷 의 나라였을까? 이 논문은 이 물음 에 대한 시도로서, 통신사가 본 일본의 산업과 기술의 실상을 살펴보았 다. 검토 대상은 1763~1764년 통신사를 택하였다. 특히 물[ 水 ] 과 관련된 일본의 산업과 기술 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통신사는 일본의 水 車, 선박, 蛇 籠 등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 선박과 일본 선박의 장점을 살린 배의 모형도 만들었다. 그러나 일 본의 선진 문물이 수용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통신사가 귀국하여 왕에게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KRF-2007-361-AL0001). **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history@pusan.ac.kr) - 107 -

2 / 한국민족문화 36 보고할 때, 왕은 일본의 실정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왕의 질문과 통신사의 보고 어디에도 산업과 기술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일본 오사카[ 大 坂 ]는 당시 인구 40만 명 정도의 대도시였다. 오사카는 상공업의 발달로 일본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商 都 인 오사카는 당시 천 하의 台 所 [부엌] 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오사카의 성격이야말로 교토( 京 都 ) 와는 구분되는 오사카의 지역성이다. 그렇지만 통신사는 오사카를 일본 경제의 중심지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사치와 향락에 빠진 병든 도시로 인식하였다. 통신사는 일본을 바다 속에 있는 文 明 의 나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이 처럼 일본을 야만인의 나라가 아닌 문명의 나라로 인식하는 변화가 일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바라보는 지식인 통신사의 눈은 여전히 착시 가 심하였다. 통신사는 일본의 실정을 정확하게 보겠다고 하면서도, 사실 은 島 夷 라는 인식 空 間 의 일본 을 보고, 인식하고 온 것은 아닐까. * 주요어: 통신사, 島 夷, 오사카[ 大 坂 ], 수차, 蛇 籠 1. 머리말 조선시대에 일본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의 하나가 섬나 라 오랑캐를 뜻하는 島 夷 이다. 1) 일본을 島 夷 라 부른 것은 1719년 通 信 使 의 正 使 洪 致 中 이 귀국한 후 보고하는 내용에도 나온다. 2) 洪 致 中 이 국경 에 들어간 뒤로부터 알아둘 만한 사정이 있을까 해서 각별히 유의했다 3) 고 한 것처럼, 통신사는 일본의 실상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1748년 통신 사 파견 때, 英 祖 는 軍 官 趙 東 晉 등을 불러, 일본의 사정, 도로의 遠 近, 1)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조선왕조실록 DB에서 島 夷 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태조 실록 에서 헌종실록 까지의 원문에서 242건이 검색된다. 242건이 모두 같은 의미인지 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에 대한 인식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島 夷 외에도 일본에 대한 인식으로 倭 奴, 蠻 夷 등 표현을 들 수 있다, 2) 숙종실록 권65, 숙종 46년(1720) 1월 신묘(24일). 3) 숙종실록 권65, 숙종 46년(1720) 1월 신묘(24일). - 108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3 산천의 險 易, 무예의 長 短, 인심과 습속을 잘 관찰하라고 당부하였다. 4) 1763년 통신사의 정사 趙 曮 은 전후의 (통신사)일기가 이와 같이 많아 서 없는 말이 거의 없다. 산천, 풍속, 관직, 법제, 의복, 음식, 器 皿, 花 卉, 儀 節, 日 供 등 일본에 관한 것이 거의 다 기록되어 있다. 앞 사람들 이 이미 기록한 말을 다 빼어 버리면 실제를 기록하는 것이 되지 못하므 로, 직접 보고 들은 것과 자신의 견해를 통해 사행록을 작성한다 5) 고 밝 히고 있다. 이처럼 통신사는 일본을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認 識 의 空 間 日 本 이 아니라, 實 地 의 日 本 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면 통 신사가 본 18세기 實 地 일본은 과연 인식의 공간처럼 島 夷 의 나라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시도로서, 통신사가 본 근세 일본의 실상을 산업과 기 술의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검토 대상으로 1763년 통신사를 택하였다. 그 이유는 1 일본 본토를 본 마지막 통신사란 점, 2 통신사 사행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점, 3 大 坂 은 이 무렵(1765년) 인구가 최고였다는 점, 4 和 國 志 와 같은 日 本 國 志 를 저술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물에 둘러싸인 섬나라이므로 배를 말처럼 부린다 6) 고 한 것처럼, 산업 과 기술을 물[ 水 ] 과 관련한 제한된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물[ 水 ]은 扶 桑 의 나라 일본, 島 夷 의 나라 일본의 表 象 이기 때문이다. 1763년 통신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필담창화를 비롯한 문학, 문예 등 문화교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7) 산업과 기술에 대해서는, 水 車 나 지 4) 영조실록 권66, 영조 23년(1747) 11월 계묘(17일). 彼 中 事 情 道 路 遠 近 山 川 險 易 武 藝 長 短 人 心 習 俗 善 覘 以 來. 5)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계미 (1763) 10월 6일, 53쪽 참조. 6) 南 玉, 日 觀 記, 總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594쪽. 7) 硏 究 史 에 대해서는 구지현, 계미 통신사 사행문학 연구, 보고사, 2006; 한태문, 通 信 使 使 行 文 學 硏 究 의 回 顧 와 展 望, 국제어문 27집, 국제어문학회, 2003; 장순순, 朝 鮮 時 代 通 信 使 硏 究 의 現 況 과 課 題,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통신 사 왜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조광, 통신사에 관한 한국학계의 연구성과 와 쟁점,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통신사 왜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 - 109 -

4 / 한국민족문화 36 도 등 일본의 문물, 기술문명 등의 도입 문제를 중심으로 단편적인 연구 가 이루어졌다. 8) 1) 水 車 제조 2. 水 利 土 木 기술 조선후기 통신사가 오랜 海 路 의 路 程 을 끝내고 육지에 올라 가장 먼저 보고 놀란 것의 하나가 淀 城 의 수차였다. 9) 그러므로 수차는 일본 기술의 수용을 시도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趙 曮 등 1763년 통신사 일행은 大 坂 을 출발하여 淀 川 을 거슬러 올라가서 1월 27일에 도착했다.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인 淀 城 의 밖에 있는 수차를 보았다. 趙 曮 은 使 行 錄 海 槎 日 記 에 서 성 밖에 수차 두 대가 있어 모양이 물레[ 繅 車 ]와 같은데, 물결을 따라 스스로 돌면서 물을 떠서 통에 부어 성안으로 보낸다. 보기에 매우 괴이 하므로 別 破 陣 許 圭, 都 訓 導 卞 璞 을 시켜 자세히 그 제도와 모양을 보게 했다. 만약 그 제작 방법을 옮겨다가 우리나라에 사용한다면, 논에 물을 대기에 유리하겠는데 두 사람이 꼭 이룰런지 여부를 알 수가 없다 10) 고 하였다. 趙 曮 은 이용후생의 실용적인 입장에서 농업 생산의 증진을 위해 수차 제작에 관심을 가지고 그 제도와 모양을 그리게 하였던 것이다. 11) 趙 曮 은 海 槎 日 記 에 대마도지도, 일본지도, 일본지도 개정본, 수차, 주교와 제 언, 고구마 등 민생에 도움이 될 만한 이국의 정보는 빼놓지 않고 기록하 사, 2005. 8) 金 義 煥, 趙 曮 이 본 18 世 紀 後 半 期 의 日 本 社 會 와 朝 日 關 係, 玄 岩 申 國 柱 博 士 華 甲 紀 念 韓 國 學 論 叢,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5; 하우봉, 조선시대 한국인의 일본인식, 혜안, 2006; 임형택, 계미통신사와 실학자들의 일본관, 한국18세기학회 편, 18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 태학사, 2008;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일인식, 한국18 세기학회 편, 18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 태학사, 2008. 9) 한태문, 戊 申 通 信 使 (1428)와 朴 瑞 生, 洌 上 古 典 硏 究 29집, 열상고전연구회, 2009, 163쪽. 10)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7일, 157쪽. 11) 金 義 煥, 앞의 논문, 180~181쪽. - 110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5 였다. 이러한 일본의 주요 정보를 수집 기록한 것은 海 槎 日 記 의 주요한 서술 특징의 하나였다. 12) 제술관 南 玉 은 수차 제도는 긴 기둥을 물속에 세우고 기둥 끝에는 긴 가로막대를 댔으며, 가로막대 끝에는 둥근 바퀴를 달아서 그 모양이 마치 繅 車 같다. 작은 물통 4~5개를 바퀴 모퉁이에 달아서 바퀴가 돌면 물이 통에 담긴다. 한 바퀴 돌아서 가로막대 꼭대기에 닿으면, 기둥 끝에 부딪 혀서 통이 저절로 기울어진다. 그러면 물이 水 槽 로 들어가서 성 안의 뱃 길로 흘러들어 간다 13) 라고 하여, 수차 구조 및 水 槽 를 통해 물이 성안으 로 유입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수차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書 記 元 重 擧 乘 槎 錄 이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큰 홈통을 끌어 밖에 수차를 매달아 물 속에 세웠다. 제도가 물레 [ 繅 車 ]와 다름이 없었다. 바큇살이 열다섯 개이니, 머리 두 대를 합치 면 서른 개의 가지가 된다. 각각 가로질러 놓은 나무가 있어 서로 떨 어뜨려 놓았다. 앞뒤는 둥근 바퀴로 기울어지거나 빠지지 않게 했다. 가운데에 수레멍에 나무를 설치하여 여러 바큇살 구멍을 모두 꿰었다. 양쪽으로 바퀴를 내 놓은 밖으로 앞뒤에 큰 기둥을 세워 둥근 지름 막 대를 만들어 수레멍에의 양끝을 받아 옮겨 움직이며 두루 돌게 했다. 앞바퀴의 바큇살 머리는 매 사이가 한 폭이고 큰 나무통을 매달았다. 나무통은 모두 합쳐서 일곱 개로 물결을 따라 서쪽으로 도는데 바큇살 의 축이 물에 가까이 이르면 통이 떨어져 물을 받고, 물을 가득 받으 면 폭축이 서쪽으로 올라가고, 통이 폭을 따라 위로 가서 바로 수레멍 에 기둥 위에 마주한다. 통이 동쪽으로 엎어지려 하면 조그만 못이 있 어 통을 막아 물이 앞 기둥에 떨어지고, 동쪽이 기울면 대롱통은 그것 을 받아 성 안으로 흘러들여 보낸다. 일곱 개의 통이 순환하여 대롱통 의 흐름 또한 응하여 멈추지 않으니, 그것이 능히 움직이며 항상 도는 것이 마치 큰 기계로 말미암은 것 같다. 큰 통에 물을 가득 담은 무게 12) 구지현, 앞의 책, 57~58쪽. 13)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갑신 (1764) 1월 27일, 364쪽. - 111 -

6 / 한국민족문화 36 가 빈 통에 치우쳐 맡는 데 이르지 않으니, 빈 통이 만약 나무에 부딪 히면 물이 서쪽으로 내려가고 기구는 동쪽으로 돌아, 통 하나가 서쪽 을 올라가면 다른 통 하나는 동쪽으로 부딪히고 잡아당기는 힘이 항상 있다. 거기다가 사이 바큇살 하나마다 통을 매달았기에 하나가 올라가 면 하나가 내려오고 하나가 곧바로 되면 다른 하나가 엎어져, 물에 부 딪히는 힘은 긴밀하고 엎어지는 통의 형세는 가득 차니, 올라가는 것 과 바로 하는 것이 있고 없음을 나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元 重 擧 는 자력으로 회전하는 원리와 그 모습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 다. 수차는 통신사의 눈을 끌기게 충분하였다. 1711년(신묘) 통신사 서기 南 聖 重 은 물로 쳐서 돌리는 수차 곁에 客 의 배를 매고, 저 이상한 기계 를 보는 것도 기묘한 유람거리 15) 라고 감회를 읊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南 玉 은 江 戶 에서 귀환하는 길에는 직접 거룻배에 옮겨 타고 바짝 다가가서 수차의 제도를 보고, 別 破 陣 許 圭 로 하여금 상 세하게 살피게 해서, 돌아간 뒤에 제조하고 설치하는 법으로 삼게 했 다. 16) 그리고 1655년 통신사의 종사관 南 龍 翼 은 물가에 두 수차가 있어 물을 자아 성을 넘게 하는데, 제작이 매우 기묘하여, 중국의 제도와는 조 금 다르다 17) 고 인식할 정도로 일본 수차에 밝았다. 일본 수차( 倭 水 車 )와 중국 수차( 唐 水 車 )의 구분이나, 일본 수차를 조선에 도입하는 문제는 세종 때 활발하게 논의된 적이 있었다. 18) 통신사가 본 바퀴살이 16개 달린 淀 城 의 수차는 筒 車 라는 수차다. 筒 車 는 직경이 큰 수레바퀴의 둘레에 水 筒 을 비스듬하게 매어 달고, 흐르는 14)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1월 27일, 256~257쪽. 15) 南 聖 重, 謹 次 別 宗 長 老 路 中 惠 示 韻, 쇼코쿠지 지쇼인( 相 國 寺 慈 照 院 ) 所 藏 朝 鮮 通 信 使 遺 物 圖 錄,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8, 100쪽; 한태문, 앞의 논문, 183쪽. 16)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갑신 (1764) 4월 4일, 464쪽. 17) 南 龍 翼, 扶 桑 錄, 성락훈 역, 국역 해행총재 Ⅴ,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을미 (1655) 9월 11일, 487쪽. 18) 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1431) 10월 신유(30일); 11월 기묘(18일); 12월 병진(25 일); 문중양, 조선후기 水 利 學 과 水 利 담론, 집문당, 2000, 158쪽. - 112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7 물의 힘에 의해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물을 퍼올리는 수차이다. 통차는 하 나의 수레바퀴만 있으면 충분했고, 그 수레바퀴의 둘레에 목통을 달고, 또한 물살을 받는 受 水 板 을 달아서 흐르는 물의 힘에 의해서 자동으로 수 레바퀴가 돌아가도록 했다. 이 통차는 직경이 무려 7.6m 정도나 되는 것 이었다. 이 수차는 실용적인 의미는 없었지만, 보는 사람에게 수차의 구 조와 기능을 알게 하는 情 報 源 으로서, 그 기술이 일본 전역에 미친 의의 는 컸다. 19) 수차에 대한 관심의 淀 城 의 筒 車 뿐 아니었다. 1764년 4월 2일 趙 曮 이 彦 根 과 森 山 사이에 있는 八 幡 山 에서 점심을 먹을 때, 길 옆에서 방아찧 는 소리가 나므로, 별파진 許 圭 에게 잘 살펴보고 와서 그 만듦새를 전하 도록 하였다. 물레방아는 톱니바퀴가 서로 물려서 돌며, 前 杠 에 3개 방아 와 2개 杵 臼 를 달고 後 杠 에 맷돌을 달고 있는데, 물의 형편을 보아 가감 할 수 있으며, 인력을 허비하지 않고 오직 한 수력을 빌려서 6~7군데에 서 舂 磨 하는 좋은 기계였다. 허규가 그 제도를 자세히 보고 모형을 그렸 으므로, 비용만 많이 투자하면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20) 통신사는 수차를 이용하여 화재를 진압하는 기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 졌다. 수차를 뜰 가운데로 가져오게 하고, 왜인으로 하여금 시험하게 하 니, 공중을 향하여 뿜으매 물의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르는데 그것은 불을 끄는 기구라고 하였다 21) 마치 오늘날 소방차 호스와 같은 기능을 하는 수차에도 주목하였다. 2) 護 岸 水 制 기술 護 岸 (revetment)은 河 岸, 海 岸 등에서 水 流 나 파도로 인한 침식 파괴를 막기 위하여, 지반의 표면이나 제방의 경사면을 덮어서 보호하는 구조물 19) 出 水 力, 水 車 の 技 術 史, 思 文 閣 出 版, 1987, 13~14쪽; 문중양, 조선후기의 水 車, 한 국문화 15,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4, 270쪽. 20)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4월 2일, 240~241쪽. 21) 柳 相 弼, 東 槎 錄, 양기식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신미 (1811) 4월 17일, 310쪽. - 113 -

8 / 한국민족문화 36 이다. 22) 하천이나 바다의 護 岸 공사는 水 制 (spur dyke) 공사가 따르게 마 련이다. 수제는 강 언저리를 안정시키거나 홍수가 제방이나 하천변을 파 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방이나 하천변에서 강의 중심부를 향하여 돌 출한 형태로 설치하는 공작물이다. 즉 수제는 물줄기를 조절하는 둑과 같 은 기능을 하는 구조물이다. 倭 亂 과 胡 亂 의 兩 亂 으로 황폐된 농촌을 개건하려는 운동이 17세기에 국 가사업으로 나타났다. 농촌 재건, 복구 사업은 농업생산과 직결된 수리시 설의 보완을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1662년(현종 3)에는 堤 堰 司 가 설치되 었다. 그리고 1778년(정조 2)에는 堤 堰 節 目 이 반포되어, 국가 지원 아래 제언, 보, 저수지 등이 새로이 축조되거나 보수되었다. 통신사들은 일본의 호안공사 등 水 利 技 術 에 관심을 가지면서 많은 기록 을 남겼다. 元 重 擧 가 1764년 2월 9일 藤 枝 에 이르렀을 때, 호안 구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水 災 가 할퀴고 감이 많았다. 물 옆에 있 는 밭에는 모두 큰 대나무를 묶어 배롱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竹 夫 人 같 다. 대개 길이는 여러 길, 크기는 한아름은 되었다. 밭두둑에서도 물이 할퀴고 간 곳 옆에 두고, 돌을 채워서 대여섯 번 쌓아서 물의 형세를 줄 어들게 하여, 물이 돌아 흐르는 곳에서 다하도록 하여 흙을 모아 그 위에 다가 둑을 만들었다. 23) 竹 夫 人 처럼 생긴 큰 竹 籠 을 설치하여 홍수 피해 를 줄이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竹 籠 에 대해 南 玉 은 냇물 가에는 모두 대바구니를 성글게 엮어서 돌을 채워 가지고 제방을 만들었는데, 대략 죽부인과 같다 24) 고 제방 호 안 시설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竹 籠 에 대해, 趙 曮 은 물결이 사나와서 浦 落 한 곳에는 큰 대나무로 죽부인 모양 같이 엮었는데, 둘레가 한 아름, 길이가 한두 길도 더 되었다. 거기에 조각돌을 담아 제방을 하면 1~2년 22) 平 凡 社 編, 日 本 史 モノ 事 典, 平 凡 社, 2001, 64쪽. 23)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2월 9일, 288쪽. 24)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갑신 (1764) 2월 3일, 382쪽. - 114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9 을 지탱할 수 있으며, 그 후에 풀이 나서 언덕이 된다고 한다. 이 법을 만일 우리나라의 서남해 제언에 사용한다면 힘입을 수 있을 것이다 25) 라 고 하였다. 趙 曮 은 竹 籠 을 우리 서남해안의 제방에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 다. 26) 조엄은 靜 岡 富 士 川 의 경우도 좌우로 제언을 쌓아서, 죽부인 모양 처럼 생긴 것을 수없이 펼쳐 두었다라고 하였다. 27) 元 重 擧, 南 玉, 趙 曮 등이 藤 枝, 州 股, 富 士 川 [ 靜 岡 ]에서 제방을 보호하는 시설, 구조물로서 죽 부인처럼 생긴 큰 竹 籠 에 주목한 점이 흥미롭다. 이 죽부인처럼 생긴 구조물은 일본에서 蛇 籠 (gabion)이라 부르는 도구 라고 생각한다. 蛇 籠 은 하천의 호안 공사에서 토사의 유출 방지나, 水 流 의 제어 등에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용구이다. 큰 뱀이 엎드려 있는 모 습이라서 사농이라 불렀다. 대하천의 치수는 물론 河 川 舟 運, 논밭의 관개 등 利 水 에도 큰 공헌을 한 일본의 대표적인 水 制 用 具 다. 28) 籠 은 대나무로 써 엮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통신사들은 蛇 籠 을 죽부인에 비유했던 것이 다. 蛇 籠 는 다양한 형태의 水 制 의 한 종류이다. 29) 水 制 는 水 流 를 조절해서 低 水 路 의 형태를 안정시키고, 하천의 이용도를 높여 홍수 때의 위험을 줄이려고 만든 공작물이다. 수제 역할은 1 물줄 기가 제방에 충돌하는 것을 막고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 것, 2 물줄기를 하천의 중심부로 이끌어 제방 가까이에서는 흐름을 완만하게 만드는 것, 3 低 水 路 의 너비를 일정하게 제한해서 적당한 수심을 유지하는 것 등이다. 元 重 擧 는 밭두둑에서도 물이 할퀴고 간 곳 옆에 두고, 돌을 채워서 대 여섯 번 쌓아서 물의 형세를 줄어들게 하여, 물이 돌아 흐르는 곳에서 다 하도록 하여, 흙을 모아 그 위에다가 둑을 만들었다 라고 蛇 籠 등 水 制 의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죽부인 같이 생긴 蛇 籠 에 대해서 1748년 통신사 때 종사관 조명채는 25)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2월 3일, 168쪽. 26) 金 義 煥, 앞의 논문, 183쪽. 27)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2월 11일, 180쪽. 28) 佐 藤 常 雄, 蛇 籠, 國 史 大 辭 典, 吉 川 弘 文 館, 1986, 198쪽 참조. 29) 平 凡 社 編, 앞의 책, 64~65쪽. - 115 -

10 / 한국민족문화 36 [ 佐 渡 川 ] 좌우에 물이 먹어들어가 무너진 곳에는 큰 대나무를 베어다가 길이 그대로 부수어, 길이가 열 뼘, 둘레가 한 아름 되는 죽부인 모양으 로 엮어서, 雜 石 을 그 안에 채워 놓고 겹겹이 쌓아서 막아 두는데, 점점 흙이 쌓여 둑이 되어 물이 무너뜨리지 못한다. 防 川 하는 방법은 이것이 제일이다. 倭 國 에는 산야에 큰 대나무가 쌓아 놓은 듯이 많아서 베어도 금하지 않고 써도 다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 이것으로 수해를 막는 힘을 얻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삼남에 조금 대밭이 있을 뿐이므로, 이 방법을 본뜨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있으랴? 30) 고 하였다. 조명채는 사농이 일본에서 방천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강조하면서도, 우 리나라는 대나무가 부족하여 이 제도를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고 본 데 비 해, 趙 曮 은 이것을 서해안 제언을 쌓는 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山 가까이는 堤 가 있어서 貯 水 하고, 들 가까이에는 洑 를 두어 引 水 하 고, 바다 가까이에는 堰 을 두어 防 水 하니, 堤 洑 堰 삼자는 水 功 을 일으키 고 한재에 대비하는, 조선후기 수리정책의 전형이었다. 31) 그러므로 趙 曮 은 제언을 쌓는 수제로 蛇 籠 에 주목한 것이다. 3. 造 船 기술 1763년 통신사가 대마도 佐 須 浦 에 도착하기 전에 제1, 제2 騎 船 의 鴟 木 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32) 대마도에서 壹 岐 島 로 가는 도중에도 치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33) 통신사 선박의 치목이 부러지는 사고는 1655년 통신사, 34) 1711년 통신사 35) 때 등 자주 발생하였다. 특히 30) 曺 命 采, 奉 使 日 本 時 見 聞 錄, 정연탁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무진(1748) 5월 7일, 129쪽. 31) 李 泰 鎭, 韓 國 社 會 史 硏 究, 지식산업사, 1986, 347쪽. 32)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계미(1763) 10월 6일; 10월 7일, 49~55쪽. 33)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계미(1763) 11월 13일, 81~85쪽. 34)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계미(1763) 狀 啓, 509쪽. 35) 任 守 幹, 東 槎 日 記, 장순범 역, 국역 해행총재 Ⅸ,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신 - 116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11 1763년 사행 때는 치목 사고로 여러 번 위험을 겪었다. 趙 曮 은 통신사행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한 후, 치목을 비롯한 통신사 선 박의 구조적인 결함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바다를 건너는 선척은 제도가 불편하고 치목 역시 상하기 쉽다. 이것이 소위 전후의 통신사의 뱃길을 위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여러 번 위험을 겪은 때문에 沙 工 ㆍ 耳 匠 등이 일본 선박과 우리 선박을 상호 참작하여 두 개의 배 모형을 가지고 왔다. 나는 널리 工 匠 과 의논하여 만들어서, 명년에 역관이 바다를 건널 때 한 번 시험해 보라 는 뜻으로 統 營 에 關 文 을 보냈다. 과연 뒷날 힘이 될지 모르겠다. 36) 부산 경상좌수영에서 사공과 耳 匠 이 和 船 과 韓 船 의 장점을 반영하여 만 든 모형을 통제영에 보내어, 통제영 工 匠 들이 검토한 후 새로 배를 만들어, 내년 대마도에 가는 역관사의 問 慰 行 때 시험해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37) 통신사 일행은 大 坂 의 江 口 에 정박한 후 일본배로 옮겨 탔다. 趙 曮 은 金 樓 船 제도는 크기가 우리나라 水 上 船 과 같았다. 안팎으로 칠을 칠하고 좌우에는 난간이 있으며 황금으로 龍 鳳 의 형상을 장식하고, 層 閣 에 금수 모양을 조각하였다 38) 라고 하여, 처음으로 타 보는 일본 金 樓 船 의 구조에 도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일본 선박인 和 船 에 대해, 南 玉 이나 元 重 擧 는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술관 南 玉 의 사행록 日 觀 記 에는 和 船 에 관해 기록한 舟 楫 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은 戰 艦 만큼 크고 어떤 것은 거룻배만큼 작다. 모두 그 머리 를 뾰죽하게 만들어서 들어올린다. 안팎을 겹겹이 싸고 얇은 판자를 완성된 배 바깥에 입힌다. 다락은 넓고 노는 많다. 종려나무 껍데기로 만든 밧줄을 뱃머리에 묶어 늘어뜨리고 물살을 헤쳐 나아간다. 돛의 나무는 완전한 재목을 쓰지 않고 散 木 을 합쳐 하나로 만들어서 쇠사슬 묘(1711) 7월 5일, 165쪽. 36)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6월 24일, 327쪽. 37) 김문식, 앞의 논문, 132쪽. 38)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0일, 147쪽. - 117 -

12 / 한국민족문화 36 로 묶는다. 돛을 매달 때에는 도르레로 쳐올려서 세운다. 돛포는 반드 시 면직물을 쓰는데 배보다 넓게 만들어서 바람을 받게 한다. 배 제도 가 지극히 가벼우면서도 견고해서 실터럭 하나만큼의 틈도 없으므로, 애초에 헝겊 쪼가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새는 것을 방비할 수 있다. 그 래서 투박하고 엉성한 우리 배를 보면 모두 비웃는다. 39) 매우 가볍고 견고하며, 造 船 기술이 뛰어나서 물 새는 것을 방비할 수 있는 것을 和 船 의 장점, 투박하고 엉성한 것을 韓 船 의 단점으로 들고 있다. 1763년 통신사 元 重 擧 는 金 樓 船 에 대해, 넓이는 세 길, 길이는 그 다 섯 배는 된다. 가운데 배 부분은 부풀었으며, 머리와 고리는 점점 좁아진 다. 칸막이를 하여 셋으로 나누었는데, 숙이고 다닐 수 있다. 종이 창문 의 板 格 에는 검은 칠을 하였다. 위는 重 樓 가 되는데 칠을 한 사다리를 방 앞에 설치하였다. 방 앞에는 구석방을 만들어 판격을 숨겼다 밀었다 한 다. 사다리를 밟고 위로 올라가면 넓은 마루가 있다. 배의 이마 부분과 꽁무니는 모두 네모나고 평평하다. 금으로 이마에는 용을, 꼬리에는 翼 鳥 를 그렸다 40) 라고 하였다. 金 樓 船 의 외형, 내부 구조, 치장 등은 물론, 금루선을 따르는 뒷간으로 쓰는 배, 支 應 船 등 선박의 편성, 운항 방법 등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는 새로 만드는 것은 매우 드물고 옛 재목을 고쳐 만드는 것이 많 다. 넓은 판자를 조각으로 나누어 못을 치는데, 전체를 짠 못은 모두 숨 겨서 못질하되 흔적이 없어 기름처럼 반드르하다. 일을 마친 사람은 배 아래를 따라 불을 살라 구우니 벌레를 없애는 방법이다. 기름이 응고하여 습기가 배지 않는다. 재목은 모두 건조한 것이고, 黃 膓 木 이었다 41) 고 하 여, 和 船 의 선재 종류, 선재 건조방법, 造 船 術, 표면을 기름칠하는 방법 39) 南 玉, 日 觀 記, 總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594~595쪽. 40)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1월 26일, 249~250쪽. 41)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4월 16일, 436쪽. - 118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13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763년 通 信 使 행 동안에 관찰한 和 船 에 대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 和 國 志 이다. 和 國 志 는 종합적인 日 本 國 志 이다. 舟 楫 은 和 國 志 에서 중 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舟 楫 내용을 중심으로, 和 船 의 構 造 와 造 船 技 術 을 韓 船 과 비교하여 보면 대략 다음 <표>와 같다. 42) 韓 船 和 船 배울 점인가의 여부 杉 (외판), 개오동, 船 材 의 종류 주로 소나무 무궁화, 소나무( 黃 膓 만 사용) 船 材 의 두께 두꺼움 견고하지만 船 舶 의 크기를 줄여 얇음 민첩하지만 민첩함을 보완하기를 무거움 견고하지 않음. 제안 船 材 의 처리 건조하지 않음 장기간 건조하여 사용 造 船 기술 도끼만을 사용하여 거칠게 깎음 틈이 많고 이를 메우는 데는 짚으로 꼬은 새끼와 찰흙, 헝겊을 쓴다. 그래도 배 안이 젖는다. (여러 도구를 사용하여) 고르게 깎고 치밀하게 다듬음. 여기에 더하여 선체를 얇은 판자로 다시 옷을 입힘 틈이 적고, 배 안의 방수가 완벽함. 틈은 재를 발라 메운다. 쇠못을 많이 사용한다. 완성된 배에 그을음을 쐬게 한다. 船 體 의 腐 蝕 방지. 선박의 형태 平 底 尖 底 (고르고 치밀하게 다듬는 것만을 부분적으로 수용)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기에 편리하나 물을 부담하는 힘이 없어서 얕은 곳에서 42) 李 德 懋, 靑 莊 館 全 書, 蜻 蛉 國 志 에도 船 舶 가 있다. 和 國 志 에 비하면 매우 소략 한 내용이다. 船 材 는 소나무의 黃 膓 을 쓰는데 그 햇수가 오래고 마른 것으로 만든다 고 하여, 和 國 志 와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대동소이하다. 한선에 대해서 는, 김재근, 한국선박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4; 한국의 배, 서울대학교출 판부, 1994; 우리의 배: 구조와 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을 참고하였다. - 119 -

14 / 한국민족문화 36 기울거나 뒤집어지기 쉽다. 따라서 평저를 유지하면서 뱃머리를 뾰족하게 하는 것만 수용) 넓은 본체 좁은 본체 평균적으로 선체가 큼. 외돛, 쌍돛 큰 닻을 한 개 사용? 평균적으로 선체가 작음. 배꼬리( 鴟 閣 ) 있음 선박 전체에 櫓 의 구멍이 있음 외돛 작은 닻을 여러 개 씀 元 重 擧 는 배의 정교함은 천하에서 일본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고 전제하 면서, 배 만드는 기술의 정교함, 우리 배와의 장단점 비교, 일본 배 장점 의 수용 등을 제안하였다. 43) 전체적으로 和 船 과 韓 船 을 비교한다면, 한선 은 크고 견고하지만 빠르고 정밀하지 못하며, 和 船 은 빠르고 정밀하지만 견고하지 못하다는 점으로 대별할 수 있다. 元 重 擧 는 和 船 도 단점이 많으 므로 잘 취사선택할 것을 강조하였다. 내가 일찍이 喬 洞 知 事 公 이었던 堂 叔 父 를 따랐을 때, 공의 명령으로 飛 船 이라는 작은 배 하나를 만들었다. 公 은 기해년(1711)에 실제로 통신사 를 따라 갔으므로, 저들과 우리 배의 장점을 섞어, 머리는 조금 뾰쪽하게 하고, 본체는 조금 좁게 하며, 정교하게 깎아 매그럽게 다듬었다. 쇠못은 두껍게 하고 끝을 줄이지 않고 구멍을 뚫어 박았다. 모두 옷 입히는 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재목은 지난 해 겨울에 깎아서 금년 가을에 사용한 것 이다. 다섯 명을 타게 하여 京 江 을 가게 했는데 역풍에도 능히 파도를 부 43) 河 宇 鳳, 앞의 책, 188쪽; 朴 在 錦, 元 重 擧, 和 國 志 해제, 일본 경계를 위한 일본 알 기, 元 重 擧, 和 國 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 출판, 2006, 9~10쪽. - 120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15 수며 갈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飛 船 을 능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다 44) 라고 한 것처럼, 元 重 擧 는 그의 堂 叔 父 45)의 지시로 和 船 과 韓 船 의 장점을 딴 韓 和 船 인 飛 船 을 직접 만든 점이 주목된다. 이 배는 1711 년 통신사 때의 조선기술의 수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조선기술은 오랜 전통과 경험을 토대로 하므로, 기술 자체가 쉽게 바뀌 지는 않는다. 통신사 때 일본의 조선술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元 重 擧 와 그 堂 叔 父, 趙 曮 등은 韓 船 에 和 船 의 장점을 접목시켜 韓 和 船 을 만들 어 시험해 보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4. 捕 鯨 業 통신사가 본 일본의 어업 기술 가운데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고래잡이 [ 捕 鯨 ] 기술이다. 통신사는 직간접적으로 보거나 들은 것을 토대로, 고래, 고래잡이, 고래잡이 놀이, 고래 관련 풍속 등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元 重 擧 일행은 對 馬 島 에서 壹 岐 島 로 가는 도중에 고래를 직접 보았다. 갑자기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뿜으며 안개를 만들면서 머리와 꼬리가 나 왔다 사라졌다 하였다. 고래 앞쪽에서 뿜어 나오는 물보라는 모두 물고기 가 뛰어 도망치는 것이니, 고래가 빨아들이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46) 고 하여, 직접 본 고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고래 잡는 것을 살 피는 관리가 있어, 삼사십 척의 飛 船 을 이끌고 고래가 오는 것을 살피다 가 잡는다. 고래잡이 배는 다른 것에 비해 더욱 뾰족하고 찬찬하며 붉은 색과 검은 색을 칠하였다 47) 라고 하여, 壹 岐 島 風 本 浦 ( 勝 本 浦 )의 포경선 44) 元 重 擧, 和 國 志 권2, 舟 楫,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341쪽. 45) 金 潝 의 扶 桑 錄 에 수록된 1719년 通 信 使 명단에 元 氏 는 副 使 軍 官 인 元 弼 揆 ( 宣 傳 官 ) 1명뿐이다( 信 原 修, 雨 森 芳 洲 と 玄 德 潤, 明 石 書 店, 2008, 359~362쪽 참조). 원중거가 지칭하는 堂 叔 父 는 元 弼 揆 일 가능성이 크다. 46)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계미(1763) 11월 13일, 126쪽. 47)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 121 -

16 / 한국민족문화 36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 고래 잡는 것을 살피는 관리 는 捕 鯨 將 48)을 가리키는 것 같다. 포 경장은 대마도의 金 浦 에도 있었다. 49) 포경장은 壹 岐 島 에서 가장 부자여 서, 통신사행의 접대를 거의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50) 1763년 11월 18일에는 통신사 일행은 風 本 浦 포구에서 고래잡는 놀이를 관람하였다. 10척 정도의 飛 船 으로 시끄럽게 떠들며 노를 빨리 저으면서, 뛰는 듯이 하고 소리쳐 부르면서 둥글게 둘러싸기를 여러 차례 하는 놀이 였다. 51) 趙 曮 은 고래를 만나면 꼭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飛 船 이 매 우 빠르다고 하였다. 52) 고래잡이 놀이에 대해 成 大 中 은 붉은 배가 항구를 에워싸고 앞에서는 노래하고 뒤에서는 소리 지르며 사나운 기운으로 승리를 다투니 하나의 장관이라고 하였다. 53) 이에 반해 南 玉 은 5~6척의 작은 포경선이 물을 저 어서 재빨리 몇 겹으로 에워싸면서, 대략 주살로 고래를 잡는 모양이었을 따름이지 별다른 볼거리는 없었다고 하였다. 54) 이 고래잡이 놀이는 1748년 통신사 때도 실시되었다. 종사관 조명채는 5~6척의 작은 배가 항구 안에서 나오더니, 산 앞의 바다에 이르렀다. 수 십 명의 櫓 夫 가 벌거숭이로 시끄럽게 외치며 노를 젓는데, 모양이 마치 적진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捉 鯨 將 이 旗 하나를 세우고 뱃머리에 앉아 있 계미(1763) 11월 16일, 134쪽. 48)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계미 (1763) 11월 18일, 265쪽; 11월 27일, 271~272쪽. 49) 申 維 翰, 海 游 錄, 성락훈 역, 국역 해행총재 Ⅰ,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기해 (1719) 7월 17일, 421쪽. 50)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계미 (1763) 11월 27일, 271~272쪽. 51)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계미(1763) 11월 18일, 141쪽; 趙 曮, 海 槎 日 記, 같은 날. 52)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계미(1763) 11월 18일, 88쪽. 53) 成 大 中, 日 本 錄,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판, 2006, 계미(1763) 11월 28일, 51~52쪽. 54)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계미 (1763) 11월 18일, 264~265쪽. - 122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17 다가 용맹을 뽐내며 일어서서 옷을 반쯤 벗고 좌우 손을 뽐내며 춤추듯 하다가 주살을 높이 휘둘러서 공중을 향해 멀리 쏘니, 다른 배들도 나는 듯이 번갈아 나와서 그와 같이 하고서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55) 고, 놀이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고래잡이 놀이 등 견문에 의해 曺 命 采 나 南 玉 은 포경기술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각각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면 여러 배가 사면에서 에워싸고 갈고리가 달 린 창을 연속해서 얽어 쏜다. 고래는 크고 성질이 둔해서 멀리 달아나 지 못하므로 船 夫 중 용감한 자가 고래 등에 뛰어올라 날카로운 칼로 고래의 등을 찌르고서, 밧줄로 지느러미에 구멍을 내어 단단히 묶고, 배로 다시 들어와서 천천히 당겨서 급히 성내지 않게 한다. 또 다투어 창을 던져서 고래가 죽으면, 배 끝에 매고 노래를 부르고 떠들면서 돌 아온다. 56) 날랜 배 수십 척에 오르는데 모두 밧줄을 싣는다. 밧줄 끝에 큰 쇠 를 잡아 묶어서 바다에 던져 놓고 고래를 만나면 엇갈려 찔러 댄다. 고래가 노하여 이리저리 날뛰면 가는 대로 밧줄을 내버려둔다. 그놈을 따라서 5백~6백리 적게는 3백~4백리를 가면, 고래가 기운이 바닥 나 서 달아나는 것도 조금 느슨해진다. 이때 다시 밧줄을 잡아서 끌어당 긴다. 달아나면 다시 놓아주고, 멈추면 다시 끌어당긴다. 이렇게 반나 절을 해서 항구에 가까이 오도록 유인한다. 그러면 거룻배를 탄 자들 이 좌우에서 에워싸서 열 명, 백 명으로 무리를 지어 날카로운 칼로 그 등을 마구 벗겨 내면, 고기가 여러 배에 가득 찬다. 고기가 다하면 뼈가 드러난다. 한 해에 고래잡이를 서너 차례 하는데 그 값이 수만에 이른다고 한다. 57) 통신사 일행은 직접 고래잡는 것을 본 것처럼, 포경선, 포경법, 고래를 55) 曺 命 采, 奉 使 日 本 時 聞 見 錄, 정연탁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무진(1748) 3월 27일, 70쪽. 56) 曺 命 采, 奉 使 日 本 時 聞 見 錄, 정연탁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무진(1748) 3월 27일, 71쪽. 57)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 2006, 계미 (1763) 11월 18일, 265쪽. - 123 -

18 / 한국민족문화 36 항구로 유인하는 법, 작은 배를 타고 고래를 해체하는 법, 포경장, 고래 가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719년 통신사 때 신유한은 일본 通 事 에게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종신토록 부귀를 할 수 있다는데 과연 그런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58) 그리 고 고래고기 회를 가장 중하게 여겨서 비싼 값으로 사서 손을 접대하는 화려한 찬으로 하나, 부드럽고 미끄럽고 기름져서 별다른 맛이 없었다. 公 侯 貴 家 에서 고래 회ㆍ고래 젓갈을 제일의 명품으로 여겨 비싼 값을 아 끼지 아니한다. 일본의 燈 燭 은 다 고래의 기름을 쓴다. 고래고기의 크기 가 주먹만하면 기름 한 사발을 취할 수 있으니, 기름을 파는 이익만도 당 장 1만금을 얻을 수 있다. 이[ 齒 ], 등지느러미, 수염도 器 物 을 만들 수 있 어 이익이 많다 59) 고 한 것처럼, 고래 회, 고래 식해 등 고래고기를 먹는 법, 고래고기 맛, 고래 기름, 이빨, 뼈, 지느러미의 용도, 그리고 고래고 기 파는 법 60) 등 고래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경 작살이나 그물 달린 작살이 고안되어 널리 활용 되면서, 고래 포획량이 증가하였다. 浦 를 단위로 鯨 組 가 조직되면서 보다 집단화가 이루어졌다. 기술적인 선진지대인 紀 伊 로부터 전국적으로 기술 과 방법이 전해지면서, 紀 伊, 土 佐, 肥 前, 長 門 등지에서 포경업이 성행하 였다. 서해의 長 崎, 佐 賀 지역의 포경업은 明 治 期 에 이르기까지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베링해에서 남하하는 한류인 親 潮 와, 난류인 黑 潮 의 합류점 인 때문에 포경업이 발달하였다. 61)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통신사가 서술한 포경업 내용은 對 馬 島 金 浦, 壹 岐 島, 壹 岐 島 의 風 本 浦 ( 勝 本 浦 ), 赤 間 關 ( 下 關 ) 등으로 지역이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 서해의 대표적인 포경업 발달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 58) 申 維 翰, 海 游 錄, 附 聞 見 雜 錄, 성락훈 역, 국역 해행총재 Ⅱ,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42~43쪽; 成 大 中, 日 本 錄, 靑 泉 海 遊 錄 抄, 飮 食,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 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판, 2006, 211~212쪽. 59) 위의 자료. 60)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계미(1763) 12월 30일, 202쪽 참조. 61) 葉 山 禎 作 編, 生 産 の 技 術 ( 日 本 の 近 世 4), 中 央 公 論 社, 1992, 도판 24~27쪽. - 124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19 리고 포경업이 발달한 다른 지역은 통신사의 노정상 해당 지역을 통과하 지 않기 때문이다. 고래잡이를 위해서는 빠른 성능을 가진 포경선, 포경선의 조직화, 작살 과 그물의 발달 등 어로기술의 발달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포경업은 일 본 근세 어업기술의 최고 수준이며, 그 종합판이다. 고래잡이 놀이가 壹 岐 島 風 本 浦 ( 勝 本 浦 ) 지역의 놀이문화로 정착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 포경 업 발달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徐 有 榘 의 林 園 經 濟 志 에서는 일본인은 鉾 를 던져 고래를 잡는 방법이 있으나, 우리나라 어부는 이 기술이 없다고 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생명을 걸고 고래를 잡아도 관의 수탈이 심하므로, 우리 어민은 포경법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62) 포경업은 일본 어업기술의 종합판으 로, 기술 總 合 力 시대 63) 의 한 상징이다. 5. 산업기술의 본산, 商 都 大 坂 大 坂 은 자연적인 수로뿐만 아니라 東 橫 堀, 西 橫 堀 을 비롯하여 많은 堀 川 으로 둘러싸여, 大 坂 의 교통망을 형성하였다. 이 堀 川 은 물의 도시[ 水 都 ] 大 坂 의 상징이다. 64) 처음 河 內 에 들어오니 뭍에 올라가는 듯하여 위안이 되었다 65) 고 한 것처럼, 통신사는 험난한 해로의 긴 여정을 끝내 고, 육로에 오르는 안도감으로 大 坂 을 만나게 되었다. 大 坂 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큰 강에 걸쳐 있으며, 內 海 에 임해 있 으며, 수로와 육로가 서로 모여드는 水 陸 都 會 地 이므로, 온갖 물화, 공예 품, 용품들이 없는 것이 없었다. 66) 부자 상인들이 재화를 교환하는 상품 62) 朴 九 秉, 韓 半 島 沿 海 捕 鯨 史, 太 和 出 版 社, 1987, 77쪽. 63) 葉 山 禎 作 編, 앞의 책, 16쪽. 64) 渡 邊 忠 司, 町 人 の 都 大 坂 物 語 - 商 都 の 風 俗 と 歷 史, 中 公 新 書 1150, 中 央 公 論 社, 1993. 65)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0일, 147쪽. 66) 元 重 擧, 和 國 志 권1, 風 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61쪽;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5월 4일, 278쪽. - 125 -

20 / 한국민족문화 36 유통의 중심지로서, 일본의 大 都 會 地 였다. 67) 이러한 大 坂 의 번화함은 몇 갈래고,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수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68) 大 坂 에서는 집집마다 溝 渠 를 가지고 있어서 배로 통하였다. 大 坂 의 23 만호는 대문이 물에 임하지 않는 것이 드물며, 물에 배를 매어두지 않는 곳도 드물었다. 사람들은 배에 의지해서 다니는데, 땔나무와 물, 糞 尿 와 재[ 灰 ] 및 남녀가 서로 왕래하는 데도 모두 배를 사용하였다. 69) 기름을 짜는 집이 있어 높고 넓은 집 10여 칸이 되었다. 안에는 빻는 사람, 볶는 사람, 짜는 사람, 깨를 볕에 쬐는 사람이 합해서 백여 명이나 되는데 힘을 합치고 있었다. 사방이 한 되가 되는 크기에 가운데가 오목 한 곳에 마 껍질을 넣고, 기름을 짜는데 절구공이가 누르는 바였다. 그 아래에는 배 두척이 있는데 하나는 마 껍질을 가득 싣고 와서 내리고 다 른 하나는 바야흐로 이끌어 실었다. 날마다 이렇게 한다고 한다. 70) 大 坂 인구의 대부분은 상인이나 職 人 ( 職 工 )이었다. 1679년에 간행된 자 료에는 약 400종에 달하는 상인이나 職 人, 1747년 간행된 자료에는 348 종의 상인과 직공이 보일 정도였다. 71) 이처럼 다양한 직종의 상인과 장인 이 존재하는 경제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수상교통의 발달 때문 이라고 통신사들은 보았다. 1763년 통신사들은 일본의 선박 매매 실태와 大 坂 의 조선 기술의 발달 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67)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0일, 149쪽; 1월 24일, 155쪽. 68)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4월 16일, 437~438쪽. 69) 元 重 擧, 和 國 志 권1, 風 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62쪽. 70)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4월 16일, 437쪽. 71) 渡 邊 忠 司, 앞의 책, 15~20쪽. - 126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21 배를 사는 사람이 사방의 바다에서 줄을 지어 온다. 먼저 船 奉 行 에 게 고하여 봉행이 공문을 내주어서 매매를 허락한 후에야 매매가 이루 어진다.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城 臺 ( 御 所 司 臺, 一 名 大 坂 尹 )에게 세금을 내고, 선봉행이 배에 烙 印 을 찍어 표시한다. 그런 후에야 배가 사해를 돌아다녀도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對 馬 島 나 壹 岐 島 같은 곳에서도 大 坂 에서 배를 산다. 오직 고기잡는 작은 배는 各 州 의 관청에서 만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략 大 坂 의 배 만드는 법 과 같으며 또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72) 이처럼 선박 매매를 大 坂 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로 새로 건조하 는 것이 아니고, 낡은 배를 수리하여 사용할 경우에도, 각 州 에는 기술자 가 없으므로 반드시 大 坂 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이 때문에 大 坂 에서 배를 많이 만든다고 하였다. 73) 그러므로 大 坂 浪 華 江 여덟 갈래의 갈래마다 각각 양 언덕에는 모두 배 만드는 목재가 가득하였다. 74) 장인들 가운데, 목수, 톱쟁이, 船 大 工 등은 당시 職 人 集 團 을 형성하고 있었다. 75) 浪 華 江 강가 언덕에서 배를 만드는 데, 큰 배에는 깎는 사람, 船 板 을 얽어 만드는 사람, 船 閣 을 닦고 꾸미는 사람 등이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 정도였다. 76) 船 大 工 의 조선 기술자 집단 내에서 이미 상당한 분업체계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근세도시는 城 下 町, 港 町, 宿 場 町 등 다양한 성격의 도시가 있었 다. 三 都 라 불리는 江 戶 京 都 大 坂 은 이러한 성격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대도시였다. 大 坂 은 서일본이나 北 陸 등 각 지역의 물산의 72) 元 重 擧, 和 國 志 권2, 舟 楫,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334~335쪽; 李 德 懋 의 靑 莊 館 全 書, 蜻 蛉 國 志, 船 舶 에도 이와 대 동소이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73) 元 重 擧, 和 國 志 권2, 舟 楫,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339쪽. 74) 元 重 擧, 和 國 志 권2, 舟 楫,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334쪽. 75) 渡 邊 忠 司, 앞의 책, 24쪽. 76)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4월 16일, 435~436쪽. - 127 -

22 / 한국민족문화 36 집산지로서 번영을 누린 대도시로서, 천하의 부엌[ 台 所 ] 으로 불리었다. 大 坂 이 이러한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이다. 전국 각 지 역에 상품생산이 증가하고, 각 지역의 물산이 전국 시장 속에서 유통되 어, 본격적으로 일본 전국이 연결되는 속에서 大 坂 이 일본 전국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77) 천하의 부엌[ 台 所 ] 은 商 都 大 坂 의 표상이었다. 1763년 통신사행의 기록 내에서도 大 坂 의 호수를 15만, 78) 23만, 79) 27 만 호 80) 라고 기록할 정도로 편차가 크다. 大 坂 의 인구는 1625년에는 약 28만명이고, 1765년에는 41만 9863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점차 감소하였다. 근세에는 평균 30만~40만 명 정도였다. 인구 의 대부분은 상인이나 職 人 ( 匠 人 )이었다. 81) 이러한 인구 증가는 大 坂 경 제성장의 지표였다. 그러나 통신사들은 大 坂 의 상공업 발달의 결과가 사치 풍습과 사기 습 성의 폐단을 낳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82) 사람들은 즐거움에 빠져 있고, 풍속은 사치하며, 음식, 의복, 聲 色, 珍 玩, 技 藝, 舟 楫, 室 閭, 器 用 등은 기교를 다하지 않음이 없다. 거의 다 荒 淫 의 물결에 푹 빠져 있으 며, 기회를 틈탄 이익을 서로 주고받으며, 화려하게 단장하여 눈을 취하 게 하는 데 마음을 다한다. 공교로운 물건은 완전성이 없고 그 사람들은 타고난 재주를 온전히 한 자가 드물다 83) 고 보았다. 경제 중심지가 된 商 都 大 坂 로 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과 荒 淫 의 도시로 보려고 하였다. 77) 脇 田 修, 近 世 大 坂 の 經 濟 と 文 化, 人 文 書 院, 1994, 31~37쪽; 特 別 展 商 人 の 舞 臺 - 天 下 の 台 所 大 坂, 大 阪 市 立 博 物 館, 1996. 78)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4일, 154쪽. 79) 元 重 擧, 和 國 志 권1, 風 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62쪽. 80) 成 大 中, 日 本 錄, 大 坂,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판, 2006, 168쪽. 81) 渡 邊 忠 司, 앞의 책, 15~16쪽. 82)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1월 24일, 155쪽. 83) 元 重 擧, 和 國 志 권1, 風 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61~62쪽. - 128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23 趙 曮 은 이번 사행길에서 문사에 대해 보고 들은 것으로 말하면, 별로 일컬을 만한 학술은 없었고, 다만 문자에 조금 뛰어난 자가 있었다. 大 坂 에는, 호가 斗 南 인 合 離 와 호가 獨 嘯 菴 인 永 富 鳳 이란 자가 특히 우수하 며, 호가 蒹 葭 堂 인 木 弘 恭 이란 자는 시문은 비록 칭할 것이 못 되지만 奇 書 를 많이 갖고 있었다 84) 라고, 日 本 의 문화, 문예수준을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技 藝 로 이름난 자와 협객들이 다리 위에서 방탕을 일삼았으면서 도, 혹 시문 등을 짓는 우아한 모임을 열기도 했다. 85) 木 弘 恭 은 자는 世 肅 인데, 강가에 蒹 葭 堂 을 짓고 책 5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평소에 그 의 문도 9명과 함께 고아한 모임을 갖고는 그림을 그려 나에게 부쳐 주었 다. 장삿일로 집안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혹 이러한 사실을 헐뜯기도 한 다 86) 고 할 정도였다. 成 大 中 은 木 弘 恭 을 높이 평가하였다. 양조업자인 木 村 蒹 葭 堂 ( 木 弘 恭 )은 詩 書 畵 篆 刻 에 능통하였으며, 전적, 지 도, 金 石 博 物 標 本 등 진기한 물품의 수집가였다. 장서가로 유명하였으며, 本 草 學, 박물학에도 정통하였다. 87) 大 坂 의 경제적 부를 토대로 형성된 수 준높은 상인문화, 도시문화는 통신사들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는 자양분 이었다. 88) 商 都 大 坂 은 이익을 탐하여 돈만 모으는 守 錢 奴 상인만의 도시는 아니 었다. 문화 문예의 향기가 높은 도시였다. 木 村 蒹 葭 堂 등 많은 町 人 학자 를 배출하였다. 외형적으로는 상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소설가, 극작가, 대본작가, 학자인 사람이 많았다. 축적한 부를 문화예술에 쓰거나, 문화 적 소양을 몸에 지니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大 坂 商 人 들 은 상인과 문화인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89) 84)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6월 18일, 314쪽. 85) 成 大 中, 日 本 錄, 大 坂,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판, 2006, 168쪽. 86) 成 大 中, 日 本 錄,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판, 2006, 갑신(1764) 5월 6일, 105쪽. 87) 水 田 紀 久, 水 の 中 央 に 在 り 木 村 蒹 葭 堂 硏 究, 岩 波 書 店, 2002. 88) 강동엽, 조선시대의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 북스힐, 2006; 高 橋 博 巳, 東 アジアの 文 藝 共 和 國 - 通 信 使 北 學 派 蒹 葭 堂, 新 典 社 新 書 26, 新 典 社, 2009. 89) 渡 邊 忠 司, 앞의 책, 146쪽. - 129 -

24 / 한국민족문화 36 천하의 부엌[ 台 所 ] 이란 표현은 京 都 가 경제의 중심이었던 때에는 사용 되지 않은 표현이었다. 90) 이러한 大 坂 의 성격이랴말로 京 都 와 구분되는 大 坂 의 지역성이다. 동시에 그것은 商 都 大 坂, 水 都 大 坂 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大 坂 이 천하의 부엌( 台 所 ) 이 된 것은 근세 일본의 산업기술 발달 의 산물이었다. 江 戶 京 都 大 坂 의 三 都 중에서 大 坂 은 근세 일본의 또 다른 표상이었다. 6. 맺음말 1682년 통신사 때 軍 官 尹 就 五 ( 前 副 正 )가 일본에서 보고 온 수차 제도 를 토대로 忠 州 牧 使 沈 楫 이 수차를 만들어 그 효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 다. 91) 元 重 擧 는 1711년 통신사에 참가했던 그의 堂 叔 父 의 지시로 和 船 의 기술을 도입한 飛 船 을 만들어 시운전을 해 보았다. 1763년 통신사 이전에 도 수차나 선박 등 일본의 기술을 수용한 후 그것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 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적극적인 일본 기술의 수용과 적용은 아니었다. 그러므 로 丁 若 鏞 은 1719년 통신사 申 維 翰 이 일본 器 物 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 련하는 법을 관찰하여 조선에 도입하지는 않고, 시인으로서 풍월이나 읊 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면서,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六 合 이 서로 얽혀 운 행하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남에게 기만을 당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 다. 92) 1763년 통신사는 丁 若 鏞 이 비판한 이런 점을 극복하면서, 일본의 산업 과 기술을 관찰하고 또 그 기술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수 90) 脇 田 修, 앞의 책, 31~37쪽; 特 別 展 商 人 の 舞 臺 - 天 下 の 台 所 大 坂, 大 阪 市 立 博 物 館, 1996. 91) 비변사등록 숙종 26년(1700) 7월 27일; 李 泰 鎭, 앞의 책, 366쪽; 문중양, 앞의 책, 158쪽. 92)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제1집 시문집 제14권, 跋, 跋 海 槎 見 聞 錄 ; 제22권, 雜 評, 申 靑 泉 聞 見 錄 評. - 130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25 차, 물레방아, 蛇 籠, 선박 등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和 船 과 韓 船 의 장점을 살린 和 韓 船 의 모형까지도 만들 었다. 그러나 근세 일본의 산업과 기술이 조선의 현실에 수용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763년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국왕 英 祖 에게 보고할 때, 英 祖 는 일본의 사정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다양한 질문을 하였다. 그 내 용은 承 政 院 日 記 와 趙 曮 의 海 槎 日 記 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93) 關 白 의 거처, 용모, 접견시 兵 衛 나 侍 者 유무, 궁실, 문의 색, 복색, 음 식, 관광객 유무, 拜 禮, 시작 활동, 군관 試 才, 왜인의 삭발, 부녀의 관 광, 치마 착용, 對 馬 島 主 의 사람됨, 국서 전달시 朝 服 착용, 돌아올 때 예 단 卜 物 의 운반 등이다. 특히 詩 作 활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英 祖 의 질문이나, 통신사의 보고 내용 어디에도 일본의 산업과 기술에 관한 내용 은 없었다. 趙 曮 은 일본의 길의 너비가 우리나라의 것보다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 으나, 직접 본 바로는 水 路 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陸 路 는 우리나라보다 못하다고 보았다. 94) 1719년 통신사 正 使 洪 致 中 등은 일본이 부강하고 풍 요로운 이유를 簡 約, 儉 約 때문이라고 보았다. 95) 朴 齊 家 는 통신사가 여러 차례 일본에 갔지만, 일본의 훌륭한 법을 한 가지라도 배워오는 자가 없 으면서, 왜놈[ 倭 奴 ]이라고 비웃는 것을 비판하였다. 96) 1763년 통신사 元 重 擧 는 일본을 海 中 의 文 明 之 鄕 97) 으로 인식하고, 丁 若 鏞 은 技 藝 論 에서 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보았다. 98) 일본이 扶 桑 의 島 夷 之 國 이 아니라 海 中 의 文 明 之 鄕 으로 인식하는 변화 93) 승정원일기 1232책, 영조 40년 7월 8일; 趙 曮, 海 槎 日 記, 筵 話,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7월 8일, 543~553쪽. 94) 趙 曮, 海 槎 日 記, 筵 話,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갑신(1764) 7월 8일, 550쪽. 95) 숙종실록 권65, 숙종 46년(1720) 1월 신묘(24일). 96) 朴 齊 家, 北 學 議, 外 篇, 兵 論. 97) 元 重 擧, 和 國 志 권2, 詩 文 之 人,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 하다, 소명출판, 2006, 281쪽. 98) 趙 誠 乙, 韓 國 과 中 國 의 華 夷 觀 의 變 化 와 相 互 認 識,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15쪽. - 131 -

26 / 한국민족문화 36 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착시가 심하였다. 直 視 와 錯 視 의 간격을 좁히기는 쉽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로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實 地 日 本 을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시와 착시가 교차하고 있었다. 18세기 일본의 실체가 상공업의 발달이 가져온 綜 合 力 시대 의 산물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통신사가 실지 일본 을 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島 夷 라는 인식공간의 일본 을 보고, 아니 인식하고 온 때문이 아닐까.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가르치고 전한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근세 일본의 앞선 산업기술을 배우고 수용하려는 자의 시선으로 통신사연구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방적 시선이 아닌 쌍방적 시선의 통신사연 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 132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27 참고문헌 1. 자료 金 潝, 扶 桑 錄. 南 玉, 日 觀 記,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 판, 2006. 南 龍 翼, 扶 桑 錄, 성락훈 역, 국역 해행총재 Ⅴ,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朴 齊 家, 北 學 議, 안대희 옮김, 돌베개, 2003. 成 大 中, 日 本 錄, 홍학희 옮김,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소명출 판, 2006. 申 維 翰, 海 游 錄, 성락훈 역, 국역 해행총재 Ⅰ, Ⅱ,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元 重 擧, 乘 槎 錄, 김경숙 옮김,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소명 출판, 2006., 和 國 志, 박재금 옮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 柳 相 弼, 東 槎 錄, 양기식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李 德 懋, 靑 莊 館 全 書. 任 守 幹, 東 槎 日 記, 장순범 역, 국역 해행총재 Ⅸ,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曺 命 采, 奉 使 日 本 時 見 聞 錄, 정연탁 역, 국역 해행총재 Ⅹ, 민족문화추 진회, 1989 중판. 趙 曮, 海 槎 日 記, 김동주 역, 국역 해행총재 Ⅶ, 민족문화추진회, 1989 중판. 쇼코쿠지 지쇼인( 相 國 寺 慈 照 院 ) 所 藏 朝 鮮 通 信 使 遺 物 圖 錄, 朝 鮮 通 信 使 文 化 事 業 會, 2008. - 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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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한국민족문화 36 <Abstract> Japanese Industry and Technology in the Eighteenth-Century from Chosun Envoy's Point of View Kim, Dong-Chul The word that clearly showed Chosun's views on Japan is 'Doi( 島 夷 )'. Chosun regarded the Japanese as barbarians of an island country. When Chosun envoys were dispatched to Japan in 1748, the king of Chosun asked them to look at roads, mountains and streams, martial arts, public sentiments, folkways, and so on. The envoys aimed to look at not 'Japan in the mind' but 'Japan in the reality'. How did they understand Japan in the eighteenth-century? This thesis tried to answer the question, examining Japanese industry and technology that were seen with Chosun envoys' eyes in the eighteenthcentury. I chose envoys sent to Japan from 1763 to 1764 as an object of my study. I looked into water-related industry and technology of Japan in particular. The envoys tried to introduce the techniques of making waterwheels, ships, revetments and others. They made a model ship, strengthening each strength of Chosun's ship and Japanese ship. However, it was not easy to adopt the advanced products of Japan. When the envoys returned home, the king asked them many questions about the real state of affairs in Japan. But the king's questions and envoys' reports didn't include the subject of Japanese industry and technology at all. Osaka was a large city that had a population of half a million at that time. The city became an economic center of Japan by its development in commerce and industry. Osaka, an commercial city, was called 'a kitchen of the whole country'. Such a character of Osaka that distinguished it from - 136 -

通 信 使 가 본 18세기 일본의 산업과 기술 / 31 Kyoto was its locality. But Chosun envoys regarded Osaka as a sick city which was trapped in pleasure-seeking rather than as an economic center. On the other hand, some envoys considered Japan as a civilized country in the sea. It shows that changes in their views on Japan from a uncivilized country into a civilized country occurred gradually. However, they still had a prejudice against Japan. Though they tried to look at the real state of affairs in Japan, their views seemed to be tied to 'Japan in the mind', that is to say 'barbarians of an island country'. * Key Words: Chosun Envoy, Barbarians of an Island Country, Osaka, Waterwheel, Gabion ㆍ논문투고일: 2010년 2월 5일 ㆍ심사완료일: 2010년 2월 26일 ㆍ게재결정일: 2010년 3월 22일 - 1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