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이익주 외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58
발간사 한국과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습니 다. 이러한 양국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형편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부진한 편에 속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학계가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분화되어 소통이 쉽지 않다는 것과 주제의 특성상 동아시아세계라는 거시적 관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중관계사의 특수성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어려 움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에 재단은 연구의 심화를 위해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 책은 그 성과물의 하나입니다. 이번 연구는 주요 논점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떤 것이었나, 과 연 책봉 조공체제(冊封朝貢體制)가 역사상 한중관계를 설명하는데 이 론적 틀이 될 수 있는가에 두고 있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는 전통시대 한중관계를 설명해온 이론적 틀이지만, 한중관계사의 긴 흐름을 수렴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번 연구 를 기획하면서 참여 연구진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개진 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 뿐 아니라, 그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설명의 틀이 마련되어야 한 다는 주장도 견주어 보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이번 연구를 위해 시대를 달리하는 한국사와 중국사 전공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연히 연구시각의 차이가 노출 되었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러한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가 한국과 중국이 속해있던 거대한 지역세 계의 역사적 개념이며, 시대별로 그 범위의 신축이 있었고, 국제질서 로써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론이 유효한가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성 과입니다. 정착된 제도라는 고정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시대적 상황과 유기적으로 조응했던 책봉과 조공의 실체에 접근해 볼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이번 연구의 여러 제언들은 향후의 한중관계사 연구가 나아 갈 길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기에서 촉발된 새로운 관점 의 연구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기획 의도에 흔쾌히 동의해주고 어려운 작업을 수행해주신 참여 연구진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울러 연구의 주제와 방 향을 마련하고 사업을 주관한 연구위원을 비롯하여 이 책이 나오기까 지 수고해준 출판팀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2010년 12월 15일 발간사 5
차례 책머리에 10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김병준 ㆍ - 조공ㆍ책봉의 보편적 성격을 중심으로 I. 머리말 21 II.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 1. 조공의 기원 : 선진시기 조공 용례 검토 23 2. 조공ㆍ책봉의 제도화 : 한대 조공 용례 검토 29 III. 3세기 이전 조공ㆍ책봉의 성격 32 1. 조공ㆍ책봉의 비정형성 32 2. 조공ㆍ책봉의 다목적성 38 3. 조공ㆍ책봉의 시공간적 보편성 44 4. 조공ㆍ책봉의 상호성 48 IV.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55 V.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중관계 -맺음말을 대신하여 61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김창석 I. 머리말 71 II. 고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 73 1. 책봉체제론의 성과와 한계 73 2. 동아시아 의 범위 78 III. 6~8세기 한중관계의 명분과 실제 86 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 기왕의 논의의 문제점 86 2. 6~8세기 책봉질서의 구조와 변화 92 IV. 맺음말 117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윤영인 I. 머리말 127 II. 10~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130 III. 10~12세기 한중(고려와 거란 금) 관계의 특징 139 IV.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범위 설정 145 V. 맺음말 153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이익주 I. 머리말 161 II. 13~14세기의 세계질서와 고려인의 천하 인식 164 1. 13~14세기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164 2. 13~14세기 고려인의 천하 인식 168 III.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의 양상 176 1. 책봉ㆍ조공관계의 요소 176 2. 책봉ㆍ조공관계 이외의 요소 192 IV. 맺음말 207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계승범 I. 머리말 237 II. 전근대 동아시아와 조선 239 1. 중국적 질서 와 그 비판자들 : 구미 학계의 논쟁 239 차례 7
2. 동아시아세계론 의 양면성 : 일본 학계의 담론 248 3. 조공과 책봉 : 국내 학계의 시각 254 III. 조명관계와 동아시아 262 1. 동아시아 권역 : 조선의 국제 반경 262 2. 조명관계 관련 용어의 의미 분석 265 3. 명질서의 성쇠와 조선의 역할 277 IV. 맺음말 282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구범진 I. 머리말 293 II.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대한 비판적 검토 295 1.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295 2.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과 역사적 현실의 괴리 304 3. 명ㆍ청의 불연속성 과 중국 319 III. 청제국과 다중체제의 형성 327 1. 시야의 확대 : 동아시아 에서 동유라시아 로 327 2. 국제질서의 재편과 다중체제의 형성 331 IV.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 344 V. 19세기 후반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선-청 관계 353 VI. 맺음말 370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배경한 - 20세기 한중관계사 의 새로운 시각과 서술방안 모색 I. 머리말 383 II. 연구시각의 검토와 모색 386 1. 기존의 연구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 386 2. 새로운 연구시각의 모색 393 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III.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401 1.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401 2.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403 3. 냉전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405 4. 탈냉전 시대(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국제질서 407 IV. 20세기 한중관계 409 1.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한중관계 409 2.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한중관계 411 3. 냉전체제와 한중관계 413 4. 탈냉전 시대의 한중관계 415 V. 맺음말 418 Abstract 427 찾아보기 431 차례 9
책머리에 한중관계사 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이 연구는 이 물음에 답하 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고 현재도 정치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아직 부진한 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역사학계가 한국사 학, 동양사학, 서양사학으로 분화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된 것을 그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동양사 연구자들은 중국 사의 특수 분야인 한중관계사 연구를 언제부터인가 외면해왔고, 한 국사 연구자들은 자국 중심의 대외관계사(對外關係史) 연구 시각을 극 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사와 동 서양사를 막론하 고 연구자들의 관심이 각 시대사 별로 세분화되는 추세 속에서 한중 관계에 대한 통사적 접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한중관계사가 최근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동북공정 에서 비롯된 중국발 역사 분쟁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칫 자기중심 적 역사인식의 강화로 귀결될 수도 있었던 이 역사 분쟁에서 오히려 우리 안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반성하고 학문적 대응의 필요성을 제 기한 것은 우리 학계의 성숙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 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공정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중관계사 연구의 중요성이 확인되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연구의 양적 확대가 두드러졌지만 아 직도 한중관계의 통사를 구성할 정도의 연구 역량이 축적되지는 못 했고, 무엇보다도 한중관계사 연구를 위한 연구자들 간의 소통이 충 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관계사는 다른 분야사에 비해 역사적 사실을 보는 관점의 문제가 중요하다. 국가 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일국 중심의 편향된 시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중관계사 연구 에서 객관적인 관점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구체적 으로 모색하기 위해 2008년 한 해 동안 한중관계사 연구의 시각 을 주제로 공동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 구자는 박원호, 박장배, 배경한, 윤용구, 이익주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 공동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일국사( 一 國 史 )에 기초한 한중관계사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고, 그 대안으로 한국과 중국이 속 해 있던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질서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중관계사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 중관계사 는 그렇게 출발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 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2009년에 또 한 번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는 김병준(중국사, 고대), 김창석(한국사, 고대), 윤영인(한국사, 고려전기), 이익주(한국사, 고려후기), 계승범(한국 사, 조선전기), 구범진(중국사, 청대사), 배경한(중국사, 근현대) 등 일곱 사람이었다. 연구진은 각 시대별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양상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종래 한중관계를 설 명함에 있어 중요한 틀로 사용되었던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에 대해 책머리에
시대별로 검토하고, 기존의 동아시아세계론, 즉 니시지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의 책봉체제론( 冊 封 體 制 論 ) 과 페어뱅크(John K. Fairbank)의 조공 시스템(Tributary system) 이론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구상했을 때 가장 먼저 문 제가 되었던 것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였다. 동아시아 는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으로서 아시아의 동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 개념으로, 한국과 중국이 속해 있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당 연히 시대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졌다. 따라서 동아시아 의 신축( 伸 縮 )을 염두에 두면서 각 시대별로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 안에 존재했던 국제질서를 구조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이 공동연구의 첫 번째 주제였다. 두 번째 주제는 각 시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 에서 한중관계의 양상을 탐구하되, 종래의 책봉 조공 패러다임 이 유용한지를 시대별로 검토하는 것이었다. 김병준의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되기 전인 3세기 이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조공과 책 봉 사례를 검토하고 그 성격을 밝힌 글이다. 이에 따르면 3세기 이 전에는 동아시아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제질서가 성립해 있던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지역 국제질서가 중층적으로 존재하고 있 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중관계는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까지) 한반 도의 여러 세력들이 중국 중원의 정치질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한다면 3세기 이전에는 한중 관계를 선험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한국이 어떤 국제질서에 귀속되어 있었는지부터 탐구하게 됨으로써 한중관계의 새로운 설정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공 책봉에 대해서는 3세기 이전 동아시아의 곳곳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의 사례를 검토하여 그것이 동아시아 1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지역에만 국한된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존재했던 보편적 정치행위였음을 밝히고, 더 나아가 그것이 4세기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데 있어 조 공ㆍ책봉이 유효한 개념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창석의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에서는 6~8세기의 고 대 동아시아 를 상호 외교교섭과 문화교류, 대외교역 등을 통해 구 성되는 교류의 권역 으로 정의하고, 구체적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지 역의 국가와 여러 종족을 비롯하여 중원과 강남의 한족 왕조, 5호 ( 胡 )의 유목 왕조, 거란 해( 奚 ), 말갈, 돌궐 유연 설연타, 토번 토욕혼, 강국( 康 國 ), 왜, 하이( 蝦 夷 ) 등의 종족과 정치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고대 한중관계에 대해서는 책봉관계를 바 탕으로 설명하되, 책봉관계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통일적 파악과 그 것을 변화하는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보 았다. 그에 따르면 중국 남북조 시기에는 한중 간에 책봉관계의 상 하질서와 피책봉국의 독립성이 공존했으나, 이후 수당제국이 일원적 세계질서를 지향함으로써 결국 신라가 당의 기미지배를 좌절시켰지 만 당에 대한 종속성은 남북조 시기에 비해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윤영인의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북방에서 흥기한 정복왕조가 중원 의 한족왕조와 남북으로 대치하는 가운데 그 주위의 고려, 대하, 남 조, 티베트, 그리고 북방 초원의 여러 부족들이 모두 국제질서의 한 축으로 존재하며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이 것을 다원적 국제질서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 속에서 고려와 거란 금 사이에 존재했던 조공체제 에 대해서 살폈는데, 실 제로는 조공과 책봉이 상하관계가 아니라 상호 불간섭, 호혜주의, 실 책머리에
리주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윤영인의 글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분석틀로써 사용되고 있는 조공체제 이론이 한 족( 漢 族 ) 중심의 문화론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적극 비판하고 조공 체제 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서구 학계의 세계체제 이론 (World-Systems Theory)을 소개하였다. 세계체제 이론은 여러 사회 사 이에 형성된 다양한 연계망(network)을 통해 일어나는 무역과 전쟁, 정보 등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생필품 연 계망(Bulk Good Network), 사치품 연계망(Prestige Good Network), 정치 군사 연계망(Political-Military Network), 정보 연계망(Information Network)의 네 가지 연계망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정치 군사 연계 망이 조공체제 이론에서 강조하는 국가 대 국가의 정치적 교류에 대 하여 새로운 시각의 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익주의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는 13~14세기 몽골제국이 성립해 있던 시기를 대상으로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 몽골 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 로 볼 수 있는지 탐구한 글이다. 13~14세기에 고려가 속해 있던 세 계로서의 동아시아 는 몽골제국의 팽창에 따라 지리적인 동아시아를 훨씬 뛰어넘어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장되었는데, 여기에는 몽골 제국에 편입된 국가, 지역뿐 아니라 고려, 일본, 베트남 등 동남아시 아의 여러 국가들처럼 몽골제국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 지역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려와 몽골의 관계 에서는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로 책봉, 인장( 印 章 ) 수여, 연호 시행 과 반력( 頒 曆 ), 견사( 遣 使 ), 조공의 사례를 찾아 정리했고, 책봉 조 공관계 이외의 요소로 국왕의 친조( 親 朝 )와 이른바 6사( 六 事 ) 의 문 제, 몽골 군대의 주둔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이 글의 결론은 고려 1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책 봉 조공관계의 전형을 설정하지 않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장기 지 속한 국제관계의 형식으로 보아 시기별 양상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러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계승범의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은 15~17세기의 동아 시아 권역을 명과 조선의 외교 반경이 겹치는 공간에 중점을 두어 살폈다. 그리고 조선과 명의 국제외교에서 많이 사용된 조공 책봉 내속( 來 屬 ) 속국( 屬 國 ) 기미( 羈 縻 ) 번국( 藩 國 ) 외국( 外 國 ) 내복( 內 服 ) 중외( 中 外 ) 배신( 陪 臣 ) 등과 같은 용어들의 용례와 의미를 고찰 하였다. 이 글에서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에 관한 것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차원에서 보면 조선-명관계는 명이 일방적으로 형성하고 주도한 관계가 아니 라 조선의 선택과 호응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관계였음을 강조하 였다. 한편,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세계론에 대한 서양학계의 연구동 향을 이른바 중국적 질서(Chinese world order) 와 한화( 漢 化, sinicization) 이론 및 그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일본학계 의 동향도 15~16세기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구범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 청 관계 는 17~19 세기 청 제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작동하던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 하고, 그 국제질서의 특징을 밝힌 글이다. 그에 따르면 17~19세기 의 동아시아 는 청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중국, 몽골, 티베트, 동투 르키스탄 등과 청 제국 주변의 여러 국가들 러시아, 조선, 일본,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을 포괄하 는 역사 공간이었다. 그리고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 제질서는 1조공체제, 2호시체제, 3조약체제, 4번부체제 등 네 가 책머리에
지 하위체제로 구성되는 다중체제( 多 重 體 制 )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설 명하였다. 이러한 다중체제 안에서 조선은 조공체제에 속해 있었지 만,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에서 한인 관료를 배제하고 기인( 旗 人 ) 관료에 국한했던 사실로부터 조공체제에 함께 속해 있던 베트남 이나 유구와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배경한의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20세기 한중 관계사의 서술을 위하여 그간의 연구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비판적으 로 검토하고 구체적인 서술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우선 연구시각과 관련해서는, 일국사 중심의 시각을 뛰어 넘어 동아시아사 내지 전 지구사( 全 地 球 史 )라고 하는 폭넓은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기존의 한중관계사 연구에서 구사되어 오던 중심과 주변이라 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한중관계 자체를 하나의 주변으로 보는 시각 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주변적 시각에 설 때 한중관계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종속되는 일방적인 형 태의 것이 아니라 보다 호혜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기존의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 어지지 않은 분야들, 예컨대 한중 양국 혹은 양 지역(도시) 간의 경 제적 교류나, 정보 지식 교류를 포함한 문화적 교류, 중국 내 한인 사회나 한국 내 화교사회와 같은 이민사회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의 한중관계의 구체적인 서술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 계사 를 공통의 인식으로 하면서 각자 맡은 시기의 특징적 양상을 드 러내는 동시에 시기별 차이를 뛰어넘어 동일한 관점의 통사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와 중국사 연구자 1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로서 가지고 있던 인식의 차이와 각 시대별 연구자로서의 분절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서로 소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 랜 세월 동안 한국사와 중국사로, 또 각 시대사로 나뉘어 진행되어 온 역사 연구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연구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이해부터가 그러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책봉과 조공의 개 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국 역사학계의 오랜 전통이지만 그것이 중 국 중심의 편향성을 가질 우려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 에 의해 지적된 바이고, 이 공동연구에서도 모두가 공유한 문제의식 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두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편에서는 조공 책봉이 시공간을 초월 해 도처에서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설 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과(김병준), 한족 중심적 문 화론에 입각한 조공체제 이론이 역사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윤영인), 한 문 사료에 등장하는 책봉 조공의 일방적 성격에 주목하여 책봉 조 공 패러다임 이 역사적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폐기하고 새 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제언(구범진) 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책봉 조공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실질적 대등관계론의 입장에서 고대 한중관계를 책봉 조 공관계로 설명하거나(김창석), 조선과 명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보되 조공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고(계승 범), 더 나아가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을 재정리하여 고려와 몽골의 관계도 책봉 조공관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익주) 등이 있었다. 책머리에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그 이론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중국 중심적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그간의 노력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한국사와 중국사 중 어느 편에서 보는가 하 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중국사에서 본다면 책봉 조공관계는 중국 왕조가 주변 국가들과 맺었던 여러 가지 관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봉 조공관계의 틀을 대체하거나 또는 그것 을 포함하는 다른 분석틀을 모색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할 것으로 생 각된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볼 때는 고구려 이후 조선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중국 왕조와 책봉 조공관계를 맺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고, 때문에 책봉 조공관계의 틀을 폐기 하기보다는 책봉 조공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켜 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대의 한중관계와 조선시대 의 한중관계를 모두 책봉 조공관계로 설명하지만, 책봉과 조공에 대 한 이해가 각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바람에 서로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고구려와 북위( 北 魏 )의 관계는 조선-명, 조선-청 관계와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 두 책봉 조공관계로 설명되는데, 이 경우 양 시대의 연구자들이 생 각하는 책봉 조공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 시대사 연 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책봉 조공의 개념을 논의한 적은 없는 듯 하고, 각 시대별로 세분화되어 가는 한국사학계의 풍토 속에서 그러 한 논의의 가능성은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사이에 특정한 시기 한중관계의 양상을 책봉 조공관계의 전형으 1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로 설정함으로써 이론의 경직화를 불러오고 통사적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가 있었는지 반추해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일국사에 바탕을 둔 기존의 한중관계사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제안한 것이지만,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논 의는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서술을 위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 의 시대별 신축을 고 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게다 가 종래 니시지마 사다오와 페어뱅크의 동아시아세계론 이 가지고 있 는 중국 중심의 인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중관계사를 상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책봉과 조공,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에 대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은 일국사를 뛰어 넘는 폭넓은 역사 이해와, 시대사를 넘어서는 통사적 이해 체계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 국사와 중국사, 그리고 각 시대사 연구자들이 함께 지혜를 모음으로써 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연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찾아서 제기 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게 되었다. 또한 한중관계사를 직접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 서술의 방향을 모색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 유에서 이 책에 제언과 모색 이라는 부제를 붙이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연구가 우리 학계에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0년 12월 15일 저자를 대표하여 이 익 주 책머리에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 조공 책봉의 보편적 성격을 중심으로 김병준 한림대학교 I. 머리말 II.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III. 3세기 이전 조공 책봉의 성격 IV.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V.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중관계 - 맺음말을 대신하여
Ⅰ. 머리말 1960년대 니시지마 사다오[西島定生]가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를 책봉체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이래, 그 타당성 여부를 두고 국내외에 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1 초기 일본학자들의 논의가 동아시아세계 형성에 일본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6~8세기 특히 당대(唐 代)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반면,2 점차 논의의 초점은 위진남북조(魏 晉南北朝)시기로 이동해 갔다.3 특히 국내의 연구는 이 시기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 책봉관계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까닭은 기본적 으로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제국의 여러 나라들이 본격적인 고대국 가로 성장해 간 시기가 4세기 이후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3세기 이전에 책봉체제 혹은 조공 책봉체제라는 개념이 성립하는가? 사실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은 기본적으로 6~8세기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화권을 형성하는 기반으로서 책봉체제 라는 정치구조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고, 나중에 그 이론을 3세기 이전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3세기 이전에 는 후대와 같이 유교, 불교, 율령, 한자를 공유하는 문화권이라고 할 1 西嶋定生(1962), 六-八世紀の東アジア, 岩波講座 日本歷史2 古代2, 岩波書店 [ 西島定生東アジア史論集 第3卷, 岩波書店, 2002 재인용]. 2 李成珪(1996), 中國의 分列體制模式과 東아시아 帝國, 韓國古代史論叢 8,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64쪽. 3 坂元義種(1978), 五世紀の日本と祖先-中國南朝の冊封と關連して, 古代東アジア の日本と祖先, 吉川弘文館; 堀敏一(1979), 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 汲古書院.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1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책봉체제와 유사한 정치구 조가 3세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 결과 자 연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세계 질서가 매우 오래전까지 소급 될 수 있다는 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역으로 3세기 이전에는 동아시아세계에 동일한 문화권이 형 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의를 다시 시작한다면, 3세기 이전과 4세 기 이후의 조공 책봉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점은 동아시아세계의 책봉 체제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즉 3세기 이전의 조공 책봉 형식과 실질적 성격이 4세기 이후 전 근대시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나아가 그것이 동아시아 지역에만 국한된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확 인되는 보편적 정치행위라는 점을 밝힐 수 있다면, 3세기 이전 동아 시아를 조공 책봉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4세기 이후 동아시아 질서를 조공 책봉이 라는 개념으로 호칭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여 지가 생길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곳곳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의 사례를 검토하여, 조공 책봉이 갖는 보편적 정치행위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한편 이렇게 조공 책봉의 보편성에 주목할 경우, 그동안 중국이 중 심이 되어 설명되어 온 논의구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조공 책봉이 반드시 중국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면,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중국이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국제질서 에서도 가능하다. 즉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복수의 국제질서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 중심이 아닌 다양한 국제질서를 상정한다면, 3세기 이 2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전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새로운 설정이 가능해진다. 단일한 동아시 아질서를 상정할 경우는 그 질서에 참여하는지 여부만이 문제가 되지 만, 다양한 국제질서를 상정한다면 그 당시 어떤 국제질서에 귀속되어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반드시 중국과의 관계를 선험적으로 설정하지 않 아도 되기 때문이다. Ⅱ.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조공의 기원 : 선진시기 조공 용례 검토 조공( 朝 貢 ) 의 조( 朝 ) 는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고, 공( 貢 ) 은 천자 에 공물을 헌상한다는 뜻이며, 조공 이 제후가 정기적으로 공헌물을 갖고 직접 천자를 배알하는 신례( 臣 禮 )를 행함으로써 천자와 제후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공을 적어도 서주( 西 周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대 해서도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서주시대 이래의 조공제도가 한대 그리고 나아가 4세기 이 후의 조공 책봉제도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춘식( 李 春 植 )은 조공제도가 서주 봉건체제하의 천자와 제후의 군신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로 출발하여 중국과 이민족의 관계에까지 확대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3
적용되었고, 그 뒤 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민족과의 관계에만 적용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4 전해종(全海宗)은 진한 이후의 대외적 조공 제도가 선진의 대내적 조공제도의 단순한 적용 연장 또는 발전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했고 전한(前漢) 후반기 제도화 과정을 거쳐 후대 의 성숙한 조공제도로 이어져 간다고 보았다.5 그 후 김한규(金翰奎)는 이를 계승하여 조공제도와 책봉제도를 합쳐 봉조체제(封朝體制) 라고 칭하고 서주시대의 봉조체제를 국내 작제(爵制)에 편입된 제후국을 지 배하기 위한 수직적 체제라고 보았으며 이것이 진대(秦代)에 존립 근거 를 상실했으나 다시 한대(漢代) 이후 부활하여 점차 주변 민족에까지 확대되어 수직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하였다.6 가장 큰 견해 차이는 서주시기 조공이 이민족에게 확대 적용되었는 지 여부이다. 우선 김한규가 지적한 대로 서주시대 이민족이 내조(來 朝) 한 사실을 적은 문헌 자료에 대해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후대 문헌이라고 해서 그 기록의 사실을 모 두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공과 책봉은 금문(金文) 자료와 같 은 1차적 자료에 의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문에서는 후대의 표현인 조공 과 책봉 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확인되지 않지만 책명(冊 名) 견(見) 등 동일한 의미의 용어는 대단히 많이 찾을 수 있다. 금 문의 주요 작성 원인이 다름 아닌 조회(朝會)와 책명(冊命)이었다는 점 4 李春植(1969), 朝貢의 起源과 그 意味-先秦時代를 중심으로, 中國學報 10, 한국중국학회 ; 李春植(1970), 漢代의 羈縻政策과 事大朝貢, 史學志 4, 단 국대학교사학회. 5 全海宗(1973), 漢代의 朝貢制度에 대한 一考察, 東洋史學硏究 6, 동양사학회. 6 金翰奎(1982), 古代中國的 世界秩序硏究, 일조각; 방향숙(2005), 古代 동아 시아 冊封朝貢體制의 원형과 변용,이석현 외, 한중외교관계와 조공책봉, 고 구려연구재단. 2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을 상기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주시기의 조공 책봉은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다음은 조공 책봉 의례가 이민족에게 확대 적용되었는지에 관한 것 이다.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서주시기의 이민족의 개념은 후 대의 이민족 개념보다 그 범위가 휠씬 크다는 것이다. 설사 희성( 姬 姓 ) 제후( 諸 侯 ) 이외의 상족( 商 族 )을 이른바 화하( 華 夏 ) 세력으로 간주한다 고 하더라도, 그밖의 다수의 주변 족속은 이민족의 범주에 속한다. 주지하듯이 서주의 왕기( 王 畿 ) 지역 가까이에 다수의 융적( 戎 狄 )이 거 주하고 상당한 규모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만큼 서주와 빈 번한 군사적 접촉이 불가피했는데, 이들 사이의 전쟁은 선주( 先 周 )시기 부터 서주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7 이러한 사실은 금문 자료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8 1976년 부풍장백( 扶 風 莊 白 ) 에서 발견된 백동과( 伯 冬 戈 )의 동기( 銅 器 )도 회이( 淮 夷 ) 전쟁의 무공( 武 功 )을 기록하고 있으며, 9 1978년 원씨현( 元 氏 縣 ) 서장촌( 西 張 村 )에서 발 견된 신간수( 臣 諫 皂 殳 ) 에는 신간이 왕명으로 저국( 軧 國 )을 방어하고 형후 ( 邢 侯 )가 대출( 大 出 ) 이라는 융인( 戎 人 )을 격파한 사건을 기록하는 등 10 그 사례는 대단히 많다. 7 許 倬 雲 (2001), 西 周 史 ( 增 補 本 ), 三 聯 書 店. 8 金 翰 奎 와 方 香 淑 은 竹 書 紀 年 에 나오는 來 朝 와 來 賓 의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분석 대상은 竹 書 紀 年 에 국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중 諸 夷 의 來 朝 에 관한 기록은 전체 29개 중 8개에 불과하다고 했 으나 그 비율은 28%에 달한다는 점, 諸 夷 는 來 賓 의 주체로서 대등적 수평 관계라고 했으나 金 文 에서는 王 에게 入 見 한다는 것 자체가 곧 비수평적 관계 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9 扶 風 縣 文 化 館 陝 西 省 文 管 會 等 (1976), 陝 西 扶 風 出 土 西 周 伯 冬 戈 諸 器, 文 物 1976-6. 10 河 北 省 文 物 管 理 處 (1979), 河 北 元 氏 縣 西 張 村 的 西 周 遺 址 和 墓 葬, 考 古 1979-1.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5
이렇게 서주 왕조와 이른바 이민족들 사이에는 부단히 전쟁이 이어 졌는데, 그중 많은 경우 서주의 우세하에 서주 왕도( 王 都 )에서 조공과 책봉의 의례가 진행되었다. 소왕( 昭 王 )시기 종주종( 宗 周 鐘 ) 은 주( 周 ) 가 남방을 정벌한 후 동이( 東 夷 ), 남이( 南 夷 ) 26국으로 하여금 주왕( 周 王 )을 조회( 朝 會 )하도록 한 내용을 적고 있다. 11 1974년 섬서( 陝 西 ) 무 공( 武 功 ) 출토의 구부수( 駒 父 盨 ) 도 남회이( 南 淮 夷 ) 사무를 관장하는 상주( 常 駐 ) 관원인 고부( 高 父 )를 설치하고 이들이 남회이를 이끌고 조 견( 朝 見 )하는 임무를 담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12 1976년 발견된 장백 ( 莊 白 ) 1호갱에서는 미족( 微 族 )의 계보를 전해주는 103개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사장반( 史 牆 盤 )에는 주 무왕( 武 王 )이 상( 商 )을 정 벌했을 때 미( 微 )의 열조( 烈 祖 )가 주의 왕실에 와서 무왕을 알현했고, 무왕은 주공( 周 公 )에게 명령하여 수도 근처 주원( 周 原 )에 영지를 주었 다. 13 미족이라는 이족( 異 族 )의 입조와 책봉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이 처럼 금문에서는 이민족의 조공과 그들에 대한 책봉 사례를 쉽게 찾 을 수 있다. 춘추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김한규는 진( 秦 ) 초 ( 楚 ) 오( 吳 ) 월( 越 ) 등 이민족계 국가들이 스스로 중국 의 범주에 편입 되어 스스로 내조 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 중국 은 여러 힘으로 분 산되었기 때문에 봉조체제 를 통해 이민족을 지배하는 일은 현실적으 11 陳 夢 家 (2004), 西 周 銅 器 斷 代, 中 華 書 局, 王 肇 遹 省 文 武, 覲 疆 土, 南 國 報 子 陷 處 我 土, 王 敦 伐 其 至, 撲 伐 厥 都, 報 子 遣 閒 來 逆 昭 王, 南 夷 東 夷 具 見, 廿 又 六 邦, 唯 皇 上 帝 百 神 保 余 小 子, 朕 猷 有 成 亡 競, 我 唯 司 配 皇 天, 王 對 作 宗 周 寶 鐘, 倉 倉, 雝 雝, 用 卲 各 丕 顯 祖 考 先 王. 12 吳 大 焱 羅 英 杰 (1976), 陝 西 武 功 縣 出 土 駒 父 盨 蓋, 文 物 1976-5. 13 陝 西 周 原 考 古 隊 (1978), 陝 西 扶 風 莊 白 一 號 西 周 靑 銅 器 窖 藏 發 掘 簡 報, 文 物 1978-3. 2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로 불가능했다고 한다. 14 그러나 춘추( 春 秋 ) 에는 융( 戎 )이 주( 周 )에 조( 朝 ) 했다는 것과 같은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15 또 서주시대와 마 찬가지로 여러 제후국은 인접한 이적( 夷 狄 )들과 숱한 전쟁을 치루었을 것인데, 주의 금문( 金 文 ) 사례에서 보았듯이 전쟁이 끝난 뒤 쌍방 간 에는 승패를 확인하는 정치적 의례가 실시되었을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된 중국 이 되어야만 주변 이민족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4세기 이후 분열된 중국 도 각자 주변 이민족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듯이, 패자를 자처한 춘추시대의 분산 된 여러 국가들도 얼마든지 주변의 이민족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춘 추시대에 융( 戎 )이 노( 魯 ) 정( 鄭 ) 등의 여러 제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회맹( 會 盟 )을 맺고 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제후국 사이에 조공관계 가 성립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융 등 이민족과 제후국 사이의 조공 관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한편 춘추 에 기록되어 있는 내조 등 조공 책봉 관련 기사는 춘 추 가 노국( 魯 國 )의 역사서라서 노국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 었다는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춘추 에는 단지 노 양공( 魯 襄 公 )이 진( 晋 )에 갔다고( 如 ) 되어 있는데, 16 사기( 史 記 ) 노세 가( 魯 世 家 )에서는 노양공이 진국( 晋 國 )에 조공( 朝 )했다고 기재했다. 17 즉 조공 책봉 관련 서사방식은 본질적으로 자국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마련이라는 상식을 잊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편 진( 秦 )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아예 봉조체제가 유지되지 14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1~124쪽. 15 春 秋 左 傳 隱 公 7 年 條, 戎 朝 于 周. 16 春 秋 左 傳 襄 公 4 年 條, 公 如 晋 聽 政. 17 史 記 卷 33, 魯 周 公 世 家, 1537쪽, 四 年, 襄 公 朝 晋.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7
못했다는 것이 김한규 등의 입장이다.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전국( 全 國 ) 이 일원적으로 지배되어 천하 가 진의 군현( 郡 縣 )으로 편입됨으로써 봉조체제가 그 존립의 근거를 상실했고, 황제 역시 군현체제에 의해서 만 인민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치권력이기 때문에 내조 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8 그러나 대내적으로 제후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대외적으로 조공 책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별개의 사정이 다. 19 이념상 천하 를 통일했지만, 만리장성의 축조는 곧 흉노의 존재 를 강하게 의식한 결과이며, 그밖에 주변 이민족에 대한 관계도 단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현지배 하에 편입된 외경( 外 境 ) 과 내경( 內 境 ) 사이의 만이( 蠻 夷 )들이 조공을 지속했다는 후대의 여러 사례들은 20 진에서도 외경 안쪽의 이민족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21 이와 같이 서주시기 이래 줄곧 조공은 대내적 조공관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민족에 대해서도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기 존의 연구에서는 조공 책봉관계를 천자와 제후라는 군신관계로 정의 했기 때문에 이민족과의 대외적 조공 책봉관계도 대내적 조공 책봉관 계의 외연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대내적 조공 책봉관계 가 성립하기 어려운 조건하에서는 대외적 조공 책봉관계 역시 존립하 18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4쪽. 19 李 成 珪 (1982), 書 評 : 金 翰 奎 著, 古 代 中 國 的 世 界 秩 序 硏 究, 東 洋 史 學 硏 究 17, 동양사학회. 20 李 成 珪 (2005), 中 華 帝 國 의 팽창과 축소:그 이념과 실제, 역사학보 186, 역 사학회, 98~99쪽. 21 秦 의 통일 직전 상황이기는 해도 秦 王 政 9 年 長 信 侯 嫪 毐 의 반란 때에 縣 卒 등과 함께 戎 翟 君 公 이 동원되었다( 史 記 卷 6, 秦 始 皇 本 紀, 227쪽, 長 信 侯 毐 作 亂 而 覺, 矯 王 御 璽 及 太 后 璽 以 發 縣 卒 及 衛 卒 官 騎 戎 翟 君 公 舍 人, 將 欲 攻 蘄 年 宮 爲 亂. 2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대로 조공 책봉이란 것은 원래 대내외를 불문하고 오로지 왕의 권위( 權 威 )와 덕화( 德 化 )의 범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따라서 철저히 자국 중심의 서술 방 식이 될 수밖에 없으며 종종 과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조공 책봉의 제도화 : 한대 조공 용례 검토 전해종은 한대에는 조공관계가 제도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면 서 그 이유로 조공이 숙어로 사용되지 않은 대신 조공을 뜻하는 용어 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한 후반기에 조공 기사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그 내용도 조공제도의 제도화 과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제도화 과정의 방향에 들 어섰다고 했다. 22 김한규는 이러한 제도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먼 저 한대 조근의법에 대한 저소손( 褚 少 孫 )의 기록을 바탕으로 대내적 조 공제도의 특징을 정기적 입조, 매년 정월( 正 月 ) 장안에서의 조근지례 시행, 법견( 法 見 ), 치주( 置 酒 ), 회사( 回 賜 ) 등의 의식절차에서 찾고, 의 례와 실제 시행과정에서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천자가 있는 장소에 서 의무적으로 그리고 정규적으로 제후가 천자에게 조근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보았다. 이어서 대외적 조공제도 도 의무적이고 정규적인 내조, 정월 장안( 長 安 )에 내조, 봉헌, 치주, 회사 등에 대한 규정 등 여러 면에서 대내적 조공제도와 근사한데, 22 全 海 宗 (1973), 앞의 글 참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9
특히 책봉제도와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23 그렇지만 이러한 특징을 두고 한대에 조공제도가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첫째, 이러한 조공의 제도적 특징들은 이미 주례( 周 禮 ) 와 예기( 禮 記 ) 등의 문헌자료에서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 들이다. 여기에는 조( 朝 ) 의 원의( 原 義 ), 내조의 기간, 공물( 貢 物 )의 내 용, 조공의 주체, 조공의 예의절차 등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 다. 24 주례 와 예기 가 대상으로 하는 시기가 서주시대보다는 늦지만 주례 의 많은 부분이 금문자료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등, 예 기 의 여러 편들이 전국시대 중기 이전으로 소급되는 출토자료에 의해 인증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문헌들이 적어도 한대보다 빠른 전국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이 문헌의 제도적 규정은 한대의 것과 비교할 때 일부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유사하다. 즉 기간, 장소 및 절차 등 한대에 제도화되었다는 특징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조공제도 중 정기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규정한 내용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부분이었다. 후술하듯이 흉노를 비롯 해 한대의 주변 이민족들은 결코 정기적으로 입조하지 않았다. 제도 23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6~141쪽. 24 周 禮 秋 官 司 寇 大 行 人 條, 邦 畿 方 千 里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侯 服 歲 壹 見 其 貢 祀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甸 服 二 歲 壹 見 其 貢 嬪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男 服 三 歲 壹 見 其 貢 器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采 服 四 歲 壹 見 其 貢 服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衛 服 五 歲 壹 見 其 貢 材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要 服 六 歲 壹 見 其 貢 貨 物. 九 州 之 外 謂 之 蕃 國 世 壹 見 各 以 其 所 貴 寶 爲 摯 ; 禮 記 明 堂, 昔 者 周 公 朝 諸 侯 于 明 堂 之 位, 天 子 負 斧 依 南 鄕 而 立. 三 公, 中 階 之 前, 北 面 東 上. 諸 侯 之 位, 阼 階 之 東, 西 面, 北 上. 諸 伯 之 國, 西 階 之 西, 東 面, 北 上. 諸 子 之 國, 門 東, 北 面, 東 上, 諸 男 之 國, 門 西, 北 面, 東 上. 九 夷 之 國, 東 門 之 外, 西 面, 北 上. 八 蠻 之 國, 南 門 之 外, 北 面, 東 上. 六 戎 之 國, 西 門 之 外, 東 面, 南 上. 五 狄 之 國, 北 門 之 外, 南 面, 東 上. 九 采 之 國, 應 門 之 外, 北 面, 東 上. 四 塞, 世 告 至. 此 周 公 明 堂 之 位 也 등 참조. 3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화의 증거로 제시되었던 원정( 元 鼎 ) 4년 남월왕( 南 越 王 ) 상서( 上 書 )의 청비내제후( 請 比 內 諸 侯 ), 삼세일조( 三 世 一 朝 ) 나 신작( 神 爵 ) 원년( 元 年 ) 조칙( 詔 勅 )의 기령제후열후만이군장당조이년자( 其 令 諸 侯 列 侯 蠻 夷 君 長 當 朝 二 年 者 ), 개무조( 皆 毋 朝 ) 25 는 모두 청( 請 ) 한 것 혹은 기령무조( 其 令 毋 朝 ) 한 것이므로 현실과는 무관하다. 셋째, 정기적 입조라는 규정을 제외하면 나머지 규정은 장소 및 치주, 회사 등과 관련한 것인데 이것 들은 모두 입조( 入 朝 ) 이후 예식 절차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국제질서 혹은 외교질서로서의 조공 책봉제도에 대한 제도 규정이 아 니라, 일단 그들이 입조한 뒤 궁정에서 벌어지는 의식에 대한 규정이 다. 넷째, 조공이라는 용어의 횟수 혹은 조공이 숙어로 정착되었는지 여부가 곧 조공의 제도화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의 역 사적 상황 혹은 서사자의 표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공 책봉은 한대에 들어와 제도화된 것이 아니었다. 전 술했듯이 인접세력과의 전쟁 및 복속이 시작되는 초기부터 일찌감치 왕권을 선전하기 위해 실시된 보편적 정치행위였다. 이하 3세기 이전 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5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36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1
Ⅲ. 3세기 이전 조공 책봉의 성격 1. 조공 책봉의 비정형성 조공 책봉의 제도적 규정에 의하면 국내의 제후는 일정한 시기마다 한 번씩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해야 했다. 따라서 대내적 조공 책봉제 도의 외연 확대로 간주되었던 주변 이민족의 조공 책봉도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입조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국 내 제후들조차 정기적 입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만큼 주변 이민족의 정기적 입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다. 이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먼저 한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한 무제 이후 한과 흉노 사이의 조 공 책봉 기록을 보자. 흉노사회에 내분이 일어나 질지선우(郅支單于)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전한 선제(宣帝) 지절(地節) 3년 (기원전 51) 한(漢)에 직접 입조했고, 한은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그 지위를 제후왕 위에 두었다. 선우(單于)의 칭호를 그대로 쓰고 칭신(稱 臣)하되 일반적인 신례(臣禮)와 달리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26 책봉의 예로 주어진 인장도 선우(單于)의 칭호를 사용한 흉노선우새(匈奴單于 璽) 였다.27 그동안 많은 연구에서 지적한 대로 흉노에 대해 절대 우위 26 漢書 卷94上, 匈奴傳, 3798쪽, 明年, 呼韓邪單于款五原塞, 願朝三年正月. 漢遣車騎都尉韓昌迎, 發過所七郡郡二千騎, 爲陳道上. 單于正月朝天子于甘泉宮, 漢寵以殊禮, 位在諸侯王上, 贊謁稱臣而不名. 27 漢書 卷94上, 匈奴傳, 3820쪽, 故印文曰, 匈奴單于璽. 3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에 있지 못했던 상황을 전한다. 28 그 다음해 지절 4년(기원전 50)에는 직접 입조한 것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봉헌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황룡( 黃 龍 ) 원년(기원전 49)에는 선우가 다시 직접 입조했다. 원제( 元 帝 )가 즉위(초원 원년, 기원전 48)하자 사신을 보내어 상서( 上 書 ) 했다. 적어도 이 시기만큼은 매년 조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여 기서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호한야선우가 입조한 해 에 호한야선우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동시에 한과도 적대적 관계 에 있었던 질지선우 측에서도 사신을 보내 봉헌했고, 이어 그 다음 해에도 사신을 보내 한에 입조했다는 것이다. 29 호한야선우처럼 직접 입조( 入 朝 )하지는 않았지만,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자들도 입조하여 봉 헌( 奉 獻 ), 즉 조공을 했다. 일반적으로 한에 항복한 호한야선우와의 관계만을 강조하지만, 그렇지 않은 적국과도 조공 책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조공 책봉제도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둘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기 이전, 즉 화친 의 단계에서도 조공 책봉이 이루어졌다. 악연 구제선우( 握 衍 朐 鞮 單 于 )가 화친을 회복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봉헌하도록 했던 것이다. 30 셋째, 호한야선우의 신하였던 좌이질자( 左 伊 秩 訾 )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한에 항복하자 그를 관내후로 책봉 하였다. 호한야선우와의 조공 책봉관계와 동시에 그 휘하에서 도망하 여 내항( 來 降 )한 자들과도 복수의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31 나 28 방향숙(2005), 앞의 글, 32쪽. 29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是 歲, 郅 支 單 于 亦 遣 使 奉 獻, 漢 遇 之 甚 厚. 明 年, 兩 單 于 俱 遣 使 朝 獻, 漢 待 呼 韓 邪 使 有 加. 明 年, 呼 韓 邪 單 于 復 入 朝. 30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89쪽, 握 衍 朐 鞮 單 于 立, 復 修 和 親, 遣 弟 伊 酋 若 王 勝 之 入 漢 獻 見. 31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7쪽, 呼 韓 邪 之 敗 也, 左 伊 秩 訾 王 爲 呼 韓 邪 計, 勸 令 稱 臣 入 朝 事 漢.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3
중에는 흉노에서 도망친 신하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바뀌기도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이는 고사( 故 事 ) 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원제 이후로는 조공의 기록이 크게 줄어든다. 영광( 永 光 ) 원년(기원 전 43) 호한야선우의 시자( 侍 子 ) 호송 이후에는 성제( 成 帝 ) 경녕( 竟 寧 ) 원년(기원전 33)에야 선우가 다시 직접 입조했다. 성제 하평( 河 平 ) 원년 (기원전 28) 정월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하( 朝 賀 )였으며, 하평 4년(기원전 25) 정월에는 직접 입조했다. 그 뒤로는 원연( 元 延 ) 2년(기원전 11) 입 조를 하려다 병사( 病 死 )하자 다음 선우의 아들을 입시( 入 侍 )하게 했다. 원수( 元 壽 ) 2년(기원전 1)에도 입조 기록이 있다. 32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입조 이전에 입조 여부를 묻고 이에 대해 한이 응답하는 과 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며, 33 이는 곧 주변민족의 조공이 정기적 성 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애제( 哀 帝 ) 건평( 建 平 ) 5년에는 흉노가 입조를 문의하자 신하들은 입조가 헛되이 창고의 재 물을 낭비할 뿐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정기적인 입조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입조 자체가 거부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34 그 중요한 이유는 과도한 회사였는데, 호한야선우가 처음 입조한 이후부터 줄곧 엄청난 재물을 하사했음이 기록에 잘 남아있다. 35 32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8쪽. 33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呼 韓 邪 單 于 款 五 原 塞, 願 朝 三 年 正 月 ;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8쪽, 明 年, 單 于 上 書 願 朝 河 平 四 年 正 月, 遂 入 朝. 34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12쪽, 建 平 四 年, 單 于 上 書 願 朝 五 年. 時 哀 帝 被 疾, 或 言 匈 奴 從 上 游 來 厭 人, 自 黃 龍 竟 寧 時, 單 于 朝 中 國 輒 有 大 故. 上 由 是 難 之, 以 問 公 卿, 亦 以 爲 虛 費 府 帑, 可 且 勿 許. 35 첫 번째 입조에는 賜 以 冠 帶 衣 裳, 黃 金 璽 盭 綬, 玉 具 劍, 佩 刀, 弓 一 張, 矢 四 發, 棨 戟 十, 安 車 一 乘, 鞍 勒 一 具, 馬 十 五 匹, 黃 金 二 十 斤, 錢 二 十 萬, 衣 被 七 十 七 襲, 錦 鏽 綺 縠 雜 帛 八 千 匹, 絮 六 千 斤. 又 轉 邊 穀 米 糒. 前 後 三 萬 四 千 斛 을, 두 번 째 입조에는 加 衣 百 一 十 襲, 錦 帛 九 千 匹, 絮 八 千 斤 을 하사했다( 漢 書 卷 94 上, 3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이처럼 입조가 흉노 측에 의해 주동적으로 요구 되었다는 것은 원 칙적으로 상하 신속의 의미를 갖는 조공 책봉관계가 맺어졌음에도 불 구하고 그것이 항상적인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 해준다. 원제( 元 帝 ) 영광 원년(기원전 43) 한의 한창( 韓 昌 )과 장맹( 張 猛 ) 이 호한야선우와 맹약을 맺으며 오늘부터 한과 흉노는 합하여 한 집 안이 되었으니, 대대로 서로 속이거나 서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쌍방 간에 몰래 훔치는 일이 발생하면 서로 통보하여 절도한 자는 처벌하고 훔친 물건은 보상한다. 침략이 있으면 군대를 일으켜 서로 돕는다. 한 과 흉노 가운데 감히 먼저 맹약을 배반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의 징벌 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했는데, 흉노의 조공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그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36 실제로 왕망시기에 외교정책 이 급변하여 주변 이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조처가 행해지자 흉노는 결국 변새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는데 37 이것 역시 조공 책봉관계가 구 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조공을 하다가도 변방 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는 상황은 후한에 들어가 더욱 빈번해졌다. 광 무제 광무 26년(기원후 50)에 남흉노 선우가 시자를 보내 입조하도록 하고 그 대신 엄청난 물품을 받게 되었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남흉 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북흉노 역시 사신을 보내어 입조, 공헌을 하 匈 奴 傳, 3798~3799쪽). 그리고 元 帝 즉위 후 呼 韓 邪 單 于 는 다시 상서를 올 려 邊 郡 인 雲 中 郡 과 五 原 郡 에서 곡식 2만 곡을 지급받는 등 매번 엄청난 양 의 하사품이 지급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3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1쪽, 自 今 以 來, 漢 與 匈 奴 合 爲 一 家, 世 世 毋 得 相 詐 相 攻. 有 竊 盜 者, 相 報, 行 其 誅, 償 其 物 : 有 寇, 發 兵 相 助. 漢 與 匈 奴 敢 先 背 約 者, 受 天 不 祥. 令 其 世 世 子 孫 盡 如 盟. 37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21쪽, 單 于 果 遣 右 骨 都 侯 當 白 將 率 曰 : 漢 賜 單 于 印, 言 璽 不 言 章, 又 無 漢 字, 諸 王 已 下 乃 有 漢 言 章. 今 卽 去 璽 加 新, 與 臣 下 無 別. 願 得 故 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5
며 회사품( 回 賜 品 )과 호시( 互 市 )를 요구했다. 38 다시 말해 후한도 전한 과 유사한 패턴이 지속되고 있었다. 흉노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오환( 烏 桓 )의 경우를 살펴보면, 오환 은 흉노에 복속해 있었는데 한( 漢 ) 무제( 武 帝 )시기 이 지역을 점령하면 서 호오환교위( 護 烏 桓 校 尉 )가 설치되었고 오환의 대인( 大 人 )은 일정 기 간 동안 매년 입조하여 조공했다. 그러나 소제( 昭 帝 )시기 곧 오환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 관계는 단절되었는데 오환이 흉노에 패전한 틈을 이용해 한이 오환을 격파하자 오환은 다시 한에 항복했다. 그 뒤 왕 망시기 오환은 또 반란을 일으켜 변경을 노략질했으나 후한 광무제 건무 25년(기원후 49)에 궁궐에 와 조공을 바치는 등 계속해서 적대와 화친이 반복되었다. 39 즉 입조의 시기가 오환의 정치적 세력의 강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음과 아울러 조공 책봉이 결코 국제질서의 안 정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확인할 수 있다. 군사적 대립관계가 없는 남쪽 혹은 서역의 경우에는 조공 책봉이 더욱 무정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흉노와 오환, 오손 등에 대해서는 막대한 경제적 선물을 제공하면서까지 조공 책봉을 지속시키려고 했 던 반면, 현실적 필요가 적은 이 지역의 경우는 전적으로 조공 주체 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조공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일남( 日 南 ) 의 남쪽에 있는 황지국( 黃 支 國 )은 한 무제시기 조공을 한 뒤 왕망시기 에 다시 한 번 서우( 犀 牛 )를 공물로 조공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 38 後 漢 書 卷 89, 南 匈 奴 傳, 2946~2948쪽, 二 十 八 年, 北 匈 奴 復 遣 使 詣 闕, 貢 馬 及 裘, 更 乞 和 親, 幷 請 音 樂, 又 求 率 西 域 諸 國 胡 客 與 俱 獻 見. 帝 悉 納 從 之. 二 十 九 年, 賜 南 單 于 羊 數 萬 頭. 三 十 一 年, 北 匈 奴 復 遣 使 如 前, 乃 璽 書 報 答, 賜 以 綵 繒, 不 遣 使 者. 39 後 漢 書 卷 90, 烏 桓 鮮 卑 傳, 2981~2984쪽. 3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이다. 40 반면 동일한 교주( 交 州 ) 지역에 구진( 九 眞 ) 요외만( 徼 外 蠻 ), 일 남( 日 南 ) 요외만 등의 조공이 불규칙하게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동시 에 이들의 반란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41 한과의 거리가 매우 멀었던 서역의 상황도 동일하다. 서역 여러 나라들은 한에 다수의 사자를 보 내 조공했지만, 그 목적은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에 있었다. 42 자연 히 조공의 시기와 규모는 이들의 의지에 의해 주도적으로 결정될 수밖 에 없었다. 왜( 倭 )와 위( 魏 )의 조공 책봉관계도 일회성에 가깝다. 위가 사마대 ( 邪 馬 臺 )의 여왕 비미호( 卑 彌 呼 )에게 친위왜왕( 親 魏 倭 王 ), 그 신하들에게 솔선중랑장( 率 善 中 郞 將 ) 솔선교위( 率 善 校 尉 ) 등의 인수( 印 綬 )를 하사했 지만, 위나 왜 모두 왜노국( 倭 奴 國 )이 위의 판도에 속한다는 것을 의 식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단지 위에 입공( 入 貢 )한 노국왕( 奴 國 王 )에게 계속 조공을 기대하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던 것이다. 43 이상과 같이 한대 주변 국가와의 조공 책봉은 각 시점에 양자가 처 한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으며, 조공 책봉이라는 행위는 차후 의 조공을 규정할 수 없었다. 조공은 한에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고 그에 대한 회사품을 받는 형식임에 틀림없지만 때로는 화친( 和 親 )의 관 40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6쪽, 逮 王 莽 輔 政, 元 始 二 年, 日 南 之 南 黃 支 國 來 獻 犀 牛. 41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6쪽, 建 武 十 二 年, 九 眞 徼 外 蠻 里 張 游, 率 種 人 慕 化 內 屬, 封 爲 歸 漢 里 君 ;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7쪽, 肅 宗 元 和 元 年, 日 南 徼 外 蠻 夷 究 不 事 人 邑 豪 獻 生 犀 白 雉. 和 帝 永 元 十 二 年 夏 四 月, 日 南 象 林 蠻 夷 二 千 餘 人 寇 掠 百 姓, 燔 燒 官 寺. 42 Byung-joon, Kim(2010), Trade and Tribute along the Silk Road before the Third Century A.D., Journal of Central Eurasian Studies 2, Center for Eurasian Studies(Seoul National University). 43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5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7
계에서 심지어는 적대국( 敵 對 國 )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졌다. 또 신속을 표방한 국가와 적대적 국가에 대해 동시에 조공 책봉관계를 유지하는 가 하면, 주변국가 휘하에 소속된 군장들과도 개별적으로 조공 책봉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흉노와 오손, 오환 등 한과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국가에 대해 한이 각종 경제적 재물로 조공관 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반면,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조공 주 체의 주도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2. 조공 책봉의 다목적성 한과 격렬한 전쟁을 치루며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 오던 흉노가 직 접 선우의 입조라는 결정을 내린 까닭은 흉노사회의 내분으로 호한야 선우가 질지선우에 의해 격파되어 절대적인 위망에 몰린 시점에서 한 의 세력에 의탁하고 동시에 한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 해서였다. 또한 그 뒤 지속해서 입조한 것도 역시 군사적 경제적 이익 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조공을 하면서 호시( 互 市 )를 열어줄 것을 요 구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현상은 흉노만이 아니라 모든 조공 책봉관계에 적용된다. 남월( 南 越 )의 사례를 살펴보자. 사기 와 한서 에는 한( 漢 ) 문제( 文 帝 )가 즉위(기원전 180)하여 육가( 陸 賈 )를 남월에 사신으로 보내자, 남 월왕이 두려워하여( 恐 )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한 후 입조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한서 에는 사기 와 달리 한 문제의 서신 등 상세 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4 먼저 육가가 지참한 것은 조칙이 아니라 서신이었는데[ 賜 佗 書 ], 이는 같은 시기 흉노와 주고받았던 형식과[ 遺 匈 奴 書 ] 유사하다. 그 서신은 황제( 皇 帝 )가 남월왕( 南 越 王 )에게 근문( 謹 問 )한다 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도 흉노의 선우에게 보낸 편지 의 황제( 皇 帝 )가 흉노선우( 匈 奴 單 于 )에게 경문( 敬 問 )한다 는 말과 역시 유사하다. 45 물론 양자를 비교하면 남월에 비해 흉노를 훨씬 존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칙이 아니며 그 문투도 상하소속관계라고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또 육가가 사신으로 갈 때 한은 어떤 군사적 위협[ 兵 威 ]도 동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저( 上 褚 ) 50벌, 중저( 中 褚 ) 30벌, 하저( 下 褚 ) 20벌 등 많은 양의 재물을 선물로 함께 보냈다. 46 그리고 서신의 내용은 두 명 의 황제가 양립하면 사신( 使 臣 )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싸움이 날 수밖 에 없으니 남월왕에게 양보를 요청하고 예전처럼 사신을 주고받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월왕은 제호( 帝 號 )를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 면서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표현은 한껏 스스로를 낮추었던 것이지만 그 실질 내용은 경제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즉 여후( 呂 后 ) 시기에 한( 漢 )이 만이( 蠻 夷 )인 외월( 外 越 )에 대해 철기와 농기구 등의 수급( 輸 給 )을 금지하고, 말 소 양은 주되 수컷에 한하며 암컷은 주어 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월이 경제적으로 크게 타격을 받았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적절한 화친관계를 맺겠 44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쪽, 上 召 賈 爲 太 中 大 夫, 謁 者 一 人 爲 副 使, 賜 佗 書 曰, 皇 帝 謹 問 南 粵 王, 甚 苦 心 勞 意. 45 史 記 卷 110, 匈 奴 傳, 2897쪽, 孝 文 皇 帝 前 六 年, 漢 遺 匈 奴 書 曰, 皇 帝 敬 問 匈 奴 大 單 于 無 恙. 46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쪽, 上 褚 五 十 衣, 中 褚 三 十 衣, 下 褚 二 十 衣, 遺 王.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
다는 것이었다. 47 이 남월왕의 요구에 대해 한서 서남이양월조선전(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 에는 한 측의 구체적 대응이 생략된 채, 크게 기뻐했 다 고만 기록되어 있다. 48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한서 문제기( 文 帝 紀 ) 12년 (기원전 168) 3월조의 제관무용전( 除 關 無 用 傳 ) 이라는 기록이다. 49 앞서 답신에서 남월왕이 제기한 철기와 농기구의 금수( 禁 輸 ) 문제는 사실 관( 關 )의 통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최근 출토된 장가산한간( 張 家 山 漢 簡 ) 이년율령( 二 年 律 令 ) 에는 진관령( 津 關 令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율령은 여후( 呂 后 ) 2년을 즈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년율령 진관령에 따르면, 관을 통과하려면 한에서 발행한 통행증( 傳 ) 을 제시해야 했고, 그 통행증에는 소지하고 있는 물품이 상세하게 기 록되어 있었는데 동( 銅 ), 황금, 말 등 금수( 禁 輸 ) 품목에 적힌 물품은 철저히 검색되어 관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50 여후시기에 남월국으로 유출하지 말 것을 명령한 철기와 농기구, 암컷 동물은 바로 통행증( 傳 )을 사용한 방식으로 통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 12년에 제관무용전 이라는 조칙은 기존의 통제 정책을 철회한 것으로 주변국 가와의 교역이 다시 활발해졌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 조칙은 남월에 대해서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시점이 육가를 남월에 사신으 로 보내 남월왕의 서신을 받은 이후임에 틀림없으므로 그 시간적 선후 47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3852쪽. 48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53쪽, 陸 賈 還 報, 文 帝 大 悅. 49 漢 書 文 帝 紀 12 年 條, 三 月, 除 關 無 用 傳. 50 彭 浩 陳 偉 工 藤 元 男 編 (2007), 二 年 律 令 與 奏 獻 書, 上 海 古 籍 出 版 社, 493쪽, 制 詔 御 史, 其 令 諸 關, 禁 毋 出 私 金. 或 以 金 器 入 者, 關 謹 籍 書, 出 復 以 閱, 出 之. 籍 器, 飾 及 所 服 者 不 用 此 令. 4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관계로 보아 남월에 대한 경제적 특혜를 의식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남월왕이 비록 문제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칭신( 稱 臣 ) 하였으나 정작 남월에서 사신을 보내 입조하게 된 것은 문제 12년 제 관무용전 이라는 조칙이 반포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시행된 후인 경제 ( 景 帝 )시기에 들어와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남월은 사신을 보내 입 조함으로써 외견상 한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지만 그 전제조건은 자 국의 이익이 철저히 관철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남월은 사신을 보내 입조를 하기는 했으나 끝내 내부에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 점은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으나 여전히 선우라는 호칭을 사용한 흉노 의 사례에 비견된다. 물론 남월은 경제적 이익 이외에도 한이 남월의 주변에 있는 민월( 閩 粤 )에 대해 적절히 군사적으로 견제해 줄 것을 기 대했을 것이다.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은 서역의 경우 조공 책봉의 비정치적 목적은 더욱 잘 드러난다. 4세기 이후 서역의 상인들이 사신의 신분 으로 조공을 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 만, 돈황( 敦 煌 ) 현천치( 懸 泉 置 )에서 발견된 한간( 漢 簡 )은 3세기 이전에 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51 이 자료는 서역의 제국 으로부터 왔던 사신들이 국경을 넘어선 뒤의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 다. 이에 의하면 서역의 사신들은 일단 돈황( 敦 煌 )에 도착하면, 돈황 태수가 호송 담당자에게 통행증을 발급하여 이들을 황제가 있는 행재 소( 行 在 所 )까지 호송시키도록 했다. 호송하는 도중에 현천치라는 곳에 머물렀던 상황이 기록에 남게 된 것인데, 그 호송대상을 살펴보면 사 신들이 단독으로 온 경우가 있는가 하면 천 여 명이 넘는 규모도 있 51 Byung-joon, Kim(2010).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
으며52 동일한 집단 안에 2개국 이상, 때로는 8개국의 사신이 함께 포 함된 경우도 발견된다. 여러 나라 외교사절이 함께 왕래하고 때로는 수백 명의 규모에 이르기도 했던 것은 일단 이동의 어려움 때문에 비 롯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그들의 주요 목적이 양국 간의 특 별한 외교적 사무가 아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한 성제(成帝) 때에 계빈(罽賓)의 사신을 호송하려 했을 때 두흠(杜欽)은 사신을 보 내 객(客)을 호송하는 것은 노략질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이기 는 하나 이들이 사신이라고 칭하고 조공을 바쳐도 그들은 모두 장사 를 하는 천민(賤民)일 뿐이고 상품을 교환하고 장사를 할 뿐 봉헌(奉 獻)은 명분일 뿐이다 라고 한 바 있다.53 현천치한간(懸泉置漢簡)에 등 장하는 서역 사절들의 상당수가 두흠(杜欽)이 말하는 만이지가(蠻夷 之賈) 였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돈황현천치(敦煌懸泉置) 한간(漢簡) 의 영광오년강거왕사자소송책(永光五年康居王使者訴訟冊) 이다.54 이 간 52 胡平生 張德芳(2001), 敦煌懸泉置釋粹, 上海古籍出版社, 遣守属田忠送自來 鄯善王副使姑彘, 山王副使烏不腞, 奉獻詣行在所, 爲駕一乘傳. Ⅱ0214②:78 53 漢書 卷96, 西域傳, 3886쪽, 凡遣使送客者, 欲爲防護寇害也. 今悔過 來, 而無親屬貴人, 奉獻者皆行賈賤人, 欲通貨市買, 以獻爲名 今遣使者承至 尊之命, 送蠻夷之賈, 勞吏士之衆, 涉危難之路, 罷弊所恃以事無用, 非久長計也. 54 敦煌懸泉置釋粹, 康居王使者楊佰刀 副扁闐 蘇韰王使者姑墨 副沙囷卽 貴人 爲匿等皆叩頭自言, 前數爲王奉獻橐佗入敦煌關, 縣次贖(續)食至酒泉昆歸官, 大 守與楊佰刀等雜平直肥瘦. 今楊佰刀等復爲王奉獻 橐佗入關, 行直不得, 食至酒 泉, 酒泉大守獨與小吏直畜, 楊佰刀等不得見所獻橐佗, 姑墨爲王獻白牡橐佗一匹, 牝二匹, 以爲黃, 及楊佰刀等獻橐佗皆肥, 以爲瘦, 不如實, 冤. 永光五年六月癸酉 朔癸酉, 使主客諫大夫漢侍郞當移敦煌大守, 書到驗問言狀, 事當奏聞, 毋留如律 令. 七月庚申, 敦煌大守弘 長史章 守部候脩仁行丞事, 謂縣, 寫移書到, 具移康 居 蘇韰王使者楊佰刀等獻橐佗食用穀數, 會月廿五日如律令. 掾登 屬建 書佐政 光. 七月壬戌, 效穀守長合宗 守丞敦煌左尉忠, 謂置, 寫移書到, 具寫傳馬止不食 穀, 詔書報, 會月廿三日, 如律令. 掾宗 嗇夫輔. Ⅱ0216②:877-883) 4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독에는 서역( 西 域 )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주천( 酒 泉 )에 와서 봉헌한 낙 타의 가격을 결정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행 재소 로 가서 공물을 바치고 황제를 알현하기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사신의 관심은 오로지 낙타의 가격을 정당하게 받는 데에 있었 다. 이들이 돈황에서 주천까지 오는 길 동안 숙식 제공을 요구했던 것도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손익과 관련되어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번 봉헌 이전에도 여러 번 동일한 패턴으로 와서 낙타와 같은 공헌품을 팔고 돌아갔던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두흠( 杜 欽 )이 간파한 대로 만 이지가( 蠻 夷 之 賈 ) 였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흉노, 남월, 서역 여러 나라의 조공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 정치 군 사 경제 등 다양한 목적에서 기인했겠지만 어느 경우에라도 그 이익 에 맞도록 조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조공행위의 목적이 한 측의 책봉과 하사품에 의해 보증된다면 조공 책봉은 지속적으로 운영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공 책봉체제를 보증할 수 없는 것 이다. 물론 한 측에서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재물을 이용하거나 혹은 군사적 위협을 통해 조공 책봉을 유지했을 것이다. 결국 조공 책봉이 란 당사자 양자의 이익에 기초한, 철저히 합목적적인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3
3. 조공 책봉의 시공간적 보편성 그동안 조공 책봉제도 논의는 주로 중국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하고 이를 중국이 책봉하는 도식을 전제하고 전개되었다. 그러 나 4세기 이후 고구려를 중심으로 별도의 소중화세계가 존재했고, 55 백제와 신라 역시 소천하( 小 天 下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베트남( 越 南 ) 역시 10세기 이후 칭제의 전통을 지키며 전형적인 소천하세계를 형성 했다. 56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반도 혹은 베트남에 국한되는 것이 아 니며 그 시기도 3세기 이전에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들이다. 전한 초중기 서남이 지역의 사례를 보도록 하자. 장건( 張 騫 )이 서역 사행( 使 行 )을 마치고 돌아와 한 무제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는 서남이 쪽으로부터 촉포( 蜀 布 )와 공죽장( 邛 竹 杖 ) 등 각종 물품이 서역으로 전 해 들어갔을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 뒤 한은 이곳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한의 사자( 使 者 )가 전( 滇 )에 이르 자 전왕( 滇 王 )은 한의 사자에게 한나라와 우리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가 라고 물었다. 똑같은 상황은 인근의 야랑( 夜 郞 )에서도 똑같이 벌어 졌다. 57 이를 두고 일주( 一 州 )에 지나지 않는 왕이 제국( 帝 國 )을 자랑하 는 한의 광대함을 알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 그 뒤 야랑자대( 夜 郞 自 大 ) 라는 숙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 고사를 뒤집어보 면 곧 전과 야랑이 각각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갖고 있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5 盧 泰 敦 (1988), 5세기 高 句 麗 人 의 天 下 觀, 한국사시민강좌 3, 일조각. 56 劉 仁 善 (1988), 中 越 關 係 와 朝 貢 制 度, 尹 乃 鉉 等, 中 國 의 天 下 思 想, 민음사. 57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1쪽, 滇 王 與 漢 使, 漢 孰 與 我 大, 及 夜 郞 侯 亦 然, 各 自 以 一 州 王, 不 知 漢 廣 大. 4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전은 본래 소읍(小邑)에 불과 하지만,58 인근의 여러 세력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문헌기록에는 전의 동북쪽에 있는 노심(勞深) 과 미막(靡莫)이 모두 전과 동성 (同姓)으로서 상장(相杖)하고 있 었기 때문에 한의 요청을 듣지 않았다고 했으므로59 이들을 전 그림 1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조공) 의 동맹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 다. 한편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도 전국(滇國)의 휘하에서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들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운남성(雲南省) 진녕(晉寧) 석 채산(石寨山)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2개의 폐동고(廢銅鼓)로 만들어진 청동저패기(貯貝器)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왕에게 조공을 바치 는 여러 부족의 인물들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림 1). 동고 위에 표현된 인물과 공납품은 모두 7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조 합은 공납을 하러 온 각 종족의 대표자 혹은 사절과 그를 따라온 수 행원 그리고 공납품을 직접 운반하는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 정되고 있다.60 각각의 조상(彫像)에 해당하는 부족을 정확히 비정하 는 데에는 아직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전왕에 공납을 바 치는 자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함께 출토된 청동기에 58 漢書 卷95, 西南夷兩粤朝鮮傳, 3842쪽, 滇, 小邑也, 最寵焉. 59 漢書 卷95, 西南夷兩粤朝鮮傳, 3842쪽, 滇王者, 其衆數萬人, 其旁東北勞 深, 靡莫皆同姓相杖, 未肯聽. 60 張增祺(1997), 滇國與滇文化, 雲南美術出版社, 172~175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5
그림 2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제례) 그림 3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전쟁) 전왕이 사람을 희생으로 삼아 거행하는 대규모 의례행사(그림 2), 황 금을 덧입힌 기마인물이 타부족민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전쟁 장면이 표현된 것(그림 3) 등은 모두 전왕의 세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즉 비록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과 그 주변 세력 사이에는 한과 그 주변 국가 사이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야랑왕(夜郞王)도 그 동맹세력으로 동성인 구정왕(鉤町王), 루와후(漏臥 侯)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도 전국과 그 주변 세력 사이의 정 치적 관계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남월(南越)도 마찬가지이다. 남월은 동성인 창오(蒼梧)를 주요 동맹 세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61 그 외에도 주변의 여러 부족을 역속 (役屬)시키고 있었는데 야랑은 그중의 하나였다. 남월왕 조타(趙佗)가 스스로 제(帝)를 칭하고 황옥좌독(黃屋左纛)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 를 뒷받침해준다. 한과 천하를 두고 대적했던 흉노가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고 그 우 위를 드러내는 조공을 받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오환(烏桓)은 기 61 史記 卷116, 西南夷列傳, 2994쪽, 南越以財物役屬夜郞, 西至同師, 然亦 不能臣使也. 4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원전 2세기 흉노의 묵특선우( 冒 頓 單 于 )에게 파망( 破 望 )한 후 그 무리가 고립되어 약해졌고 그 이후로는 늘 흉노에 신하로 복속했다. 그리하여 오환 사람들은 해마다 소 말 양 가죽을 바쳤는데, 날짜를 넘겨 물자 를 바치지 못하면, 흉노 사람들은 오환 사람들의 처자를 빼앗아서 노 비로 삼았다. 62 그밖에도 누란( 樓 蘭 ), 오손과 같은 서역 여러 나라들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흉노가 선우의 예( 禮 )로 주변국의 사신을 맞이했 다는 것은(후술) 흉노를 중심으로 한 조공 책봉의 존재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주변 민족만이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그 세력이 분열되면 그 각각 의 세력이 모두 정치적 중심이 되어 주변국가와 조공 책봉관계를 맺 을 수 있었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에 노국이 그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진국( 晋 國 )은 물론 그 당시 만이( 蠻 夷 )로 간주되었던 초 진 오 월 등도 모두 그 주변으로부터 조 공을 받았다. 초국( 楚 國 )이 백월( 百 越 )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들 이 여기에 속한다. 63 이처럼 조공 책봉의 기본적 형식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언 제 어디서든지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국제질서이다. 다시 말해 4세 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베트남만이 아니라 그 이전 다른 곳에서 도 자기 중심의 천하질서와 그 구체적 형식으로서 조공 책봉이 보편 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62 後 漢 書 卷 90, 烏 桓 鮮 卑 傳, 2981쪽, 烏 桓 自 爲 冒 頓 所 破, 衆 遂 孤 弱, 常 臣 伏 匈 奴, 歲 輸 牛 馬 羊 皮, 過 時 不 具, 輒 沒 其 妻 子. 及 武 帝 遣 驃 騎 將 軍 霍 去 病 擊 破 匈 奴 左 地, 因 徙 烏 桓 於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五 郡 塞 外, 爲 漢 偵 察 匈 奴 動 靜. 其 大 人 歲 一 朝 見, 於 是 始 置 護 烏 桓 校 尉, 秩 二 千 石, 擁 節 監 領 之, 使 不 得 與 匈 奴 交 通. 63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5쪽, 及 楚 子 稱 霸, 朝 貢 百 越.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7
4. 조공 책봉의 상호성 앞서 서역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자국( 自 國 )에서 한까지 왕래하는 과 정에서 한의 사신이 동행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64 조공 책봉 관련 기술이 자국을 중심으로 자국에 유리하게 쓰일 수밖에 없다면, 한으 로 온 조공사절 외에 한에서 상대편 국가로 간 사절 역시 조공의 의 례를 바쳤을 가능성은 없을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사기 대완열전( 大 宛 列 傳 ) 과 한서 서역전( 西 域 傳 ) 에 나오는 장건 의 오손 사행( 使 行 ) 관련 기록이 좋은 사례가 된다. 장건이 금폐( 金 幣 ) 를 갖고 사신으로서 오손에 갔을 때 오손의 왕인 곤막( 昆 莫 )이 마치 선우처럼 행동하자 장건이 크게 참담해 했는데, 오손이 한의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고 장건이 오손 왕에게 한의 천자가 하사품을 내리는 데[ 賜 ] 예를 다하지 않으니[ 不 拜 ] 그냥 돌아가겠다 고 하자 오손의 왕이 예를 갖추었다는[ 起 拜 ] 내용이 적혀 있다. 65 이 기록에 따르면 오손의 왕이 한이 사여한 물품에 대해서 만큼은 다른 경우와 달리 예우했다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배사( 起 拜 賜 ) 했다는 장건의 전언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하사품에 대 64 倭 國 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魏 의 明 帝 가 사신을 시 켜 조서와 각종 하사품 을 갖고 倭 로 가서 假 倭 王 으로 임명하자 倭 王 이 사 신을 시켜 上 表 했다는 기록은 결국 魏 의 사자가 倭 로 직접 건너가고 이 사 절을 따라 倭 의 사절이 魏 로 건너갔다는 것을 말한다.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 奉 詔 書 印 綬 詣 倭 國, 拜 假 倭 王, 幷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倭 王 因 使 上 表 答 謝 恩 詔. 65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68쪽, 騫 既 至 烏 孫, 烏 孫 王 昆 莫 見 漢 使 如 單 于 禮, 騫 大 慚, 知 蠻 夷 貪, 乃 曰, 天 子 致 賜, 王 不 拜 則 還 賜. 昆 莫 起 拜 賜, 其 他 如 故 ; 漢 書 卷 96 下, 西 域 傳, 3902쪽, 武 帝 卽 位, 令 騫 齎 金 幣 往. 昆 莫 見 騫 如 單 于 禮, 騫 大 慚, 謂 曰, 天 子 致 賜, 王 不 拜, 則 還 賜. 昆 莫 起 拜, 其 它 如 故. 4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해서 예를 갖춘 것을 제외하고는 오손왕의 행동이 여전히 선우의 예와 같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우례( 單 于 禮 )라고 함은 그들의 조공 책봉 형식에 맞추어 진행했음을 의미하므로, 이 상황을 오손 측에서 기록 했다면 장건은 조공사절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오손이 하사품에 예를 갖추었다는 표현도 당시의 조공 책봉 관례상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한 선제( 宣 帝 )가 호한야선 우의 입조 때에 보여준 모습은 오손왕 곤막이 보여준 것과 다르지 않 기 때문이다. 즉 호한야선우가 감로 3년(기원전 51) 정월에 입조를 원 하자 한은 거기도위( 車 騎 都 尉 ) 한창( 韓 昌 )을 보내 영접하고, 기병이 도 열하게 했으며, 감천궁( 甘 泉 宮 )에서 조하( 朝 賀 )할 때 선우를 특별한 예 로 대우하여, 선우의 지위를 제후왕 위로 하고, 천자에게 배알할 때 신이라고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수도의 조하에서 는 선우가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했다. 66 또 광 무제 건무 6년에도 한과 흉노가 모두 사신을 보내 공헌을 했는데 중 랑장( 中 郞 將 ) 한통( 韓 統 )에게 금과 비단을 뇌물로 보내어 옛 우호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자 선우는 교만하게 스스로를 옛 묵특선우에 비기면서 사자를 업신여겼던 반면 광무제는 예전과 같이 했다고 한다. 67 한과 6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明 年, 呼 韓 邪 單 于 款 五 原 塞, 願 朝 三 年 正 月. 漢 遣 車 騎 都 尉 韓 昌 迎, 發 過 所 七 郡 郡 二 千 騎, 爲 陳 道 上. 單 于 正 月 朝 天 子 于 甘 泉 宮, 漢 寵 以 殊 禮, 位 在 諸 侯 王 上, 贊 謁 稱 臣 而 不 名. 賜 以 冠 帶 衣 裳, 黃 金 璽 盭 綬, 玉 具 劍, 佩 刀, 弓 一 張, 矢 四 發, 棨 戟 十, 安 車 一 乘, 鞍 勒 一 具, 馬 十 五 匹, 黃 金 二 十 斤, 錢 二 十 萬, 衣 被 七 十 七 襲, 錦 鏥 綺 縠 雜 帛 八 千 匹, 絮 六 千 斤. 禮 畢, 使 使 者 道 單 于 先 行, 宿 長 平. 上 自 甘 泉 宿 池 陽 宮. 上 登 長 平, 詔 單 于 毋 謁, 其 左 右 當 戶 之 群 臣 皆 得 列 觀, 及 諸 蠻 夷 君 長 王 侯 數 萬, 咸 迎 於 渭 橋 下, 夾 道 陳. 上 登 渭 橋, 咸 稱 萬 歲. 單 于 就 邸, 留 月 餘, 遣 歸 國. 67 後 漢 書 卷 89, 南 匈 奴 傳, 2940쪽, 建 武 初, 彭 寵 反 畔 於 漁 陽, 單 于 與 共 連 兵, 因 復 權 立 盧 芳, 使 入 居 五 原. 光 武 初, 方 平 諸 夏, 未 遑 外 事. 至 六 年, 始 令 歸 德 侯 劉 颯 使 匈 奴, 匈 奴 亦 遣 使 來 獻, 漢 復 令 中 郞 將 韓 統 報 命, 賂 遺 金 幣, 以 通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9
흉노 모두 상대방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있었으며, 흉노 측 이 오히려 고압적 자세에서 선우례를 과시했던 사례이다. 따라서 장 건의 사례도 한이 주변 민족에게 조공을 한 경우에 속한다고 해도 좋다. 사실 3장 1절에서 설명했듯이 화친관계나 심지어 적대관계에서 도 조공 책봉이 이루어졌다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에서 모두 조 공 책봉의 형식이 치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서역 사신을 호송한 한의 사신의 경우도 상대편 기록에 조공으로 기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서역인만이 아니라 한인 역시 서역의 물산으로 상업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자가 많았는데, 서역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는 자가 한 번에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백 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외국의 기이한 물자에 대해 상소를 올려 사신이 되기를 바랐다는 기록 68 등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들이 서역 여러 나라로부터 일정한 하사품을 기대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편 그들이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되면 서역 사신이 한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선부터 상대편 국가의 호송을 받게 되었을 것이 다. 또 서역 사신이 황제가 있는 행재소 혹은 궁궐로 안내되었던 것 처럼 한인 사신이 황제의 부절을 갖고 있는 이상 이들 역시 왕도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한서 서역전 에 의하면 무제가 처음 안식( 安 息 ) 으로 사신을 보냈을 때, 안식왕은 2만 명의 기병을 동쪽 경계까지 보 내서 사신을 맞이하도록 했으며, 이 동쪽 경계로부터 왕도( 王 都 )까지 는 수천 리 떨어져 있어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수십 개의 성을 지나 舊 好. 而 單 于 驕 踞, 自 比 冒 頓, 對 使 者 辭 語 悖 慢, 帝 待 之 如 初. 68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70~3171쪽, 而 天 子 好 宛 馬, 使 者 相 望 於 道. 諸 使 外 國 一 輩 大 者 數 百, 少 者 百 餘 人, 人 所 齎 操 大 放 博 望 侯 時 自 博 望 侯 開 外 國 道 以 尊 貴, 其 後 從 吏 卒 皆 爭 上 書 言 外 國 奇 怪 利 害, 求 使. 5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야 했다고 한다. 69 왕도에 도착하면 한의 황제가 조공국의 사신들을 알현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해당 국가의 왕이 한의 사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의 황 제는 자신의 권위를 한껏 드러내기 위해 개별적으로 만나기보다 상림 원( 上 林 園 ) 안의 큰 건물에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한꺼번에 모두 모아 기예( 技 藝 )와 연회( 宴 會 )를 베풀었다. 70 안식( 安 息 ), 즉 파르티아 왕국의 이전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 부조 등에 나타난 조공행렬도를 보면, 71 서역 여러 나라를 비롯한 다른 국가도 한과 유 사한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때 한의 사신들은 자신들이 들고 간 각종 물품을 전달했을 것이 다. 전한 초기 이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변 민족에 전달한 물품은 대단히 많았다. 잘 알려져 있는 바로는, 전한 초기 흉노와 화친관계를 맺으면서 한이 흉노 측에 전달한 다량의 비단 및 장식품 등이 있다. 한문제가 육가를 보내 남월왕에게 전달한 서신에도 각종 고급 의복이 동반되었으며, 왜에게도 황금과 비단, 동경 등 다양한 물품을 전달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72 장건이 서역에 황제의 부절( 符 節 )을 갖고 사 행( 使 行 )했을 때에도 1만 마리의 우양( 牛 羊 ), 수천만 전에 이르는 황금 69 漢 書 卷 96, 西 域 傳, 3890쪽, 武 帝 始 遣 使 至 安 息, 王 令 將 將 二 萬 騎 迎 於 東 界, 東 界 去 王 都 數 千 里, 行 比 至, 過 數 十 城. 70 漢 書 卷 96, 西 域 傳, 3905쪽, 天 子 自 臨 平 樂 觀, 會 匈 奴 使 者 外 國 君 長 大 角 抵, 設 樂 而 遣 之. 71 Nadereh Nafisi eds.(2003), Persepolis:Achaemenian Souvenir, Iran : Gooya House of Culture & Art. 72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 拜 假 倭 王, 幷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1
과 비단을 갖고 갔다. 73 물론 이 내용은 모두 중국 측 사서에 기록되 어 있으며, 그 때문에 물품을 전달했다는 표현은 종종 중국 측 권위 를 내세우기 위한 방식인 하사품 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74 그러나 이 러한 표현은 전적으로 한 측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라면, 상대 편에는 이를 조공품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흉노를 비롯해 주변 민족의 여러 왕과 장군들이 내항( 來 降 )한 경우,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한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식을 취 한다. 이들 사례는 사기 와 한서 의 공신후표에 자세하다. 75 그런데 한의 장군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흉노에 항복했다. 그 때문에 한 초 이래 한과 흉노가 조약을 맺을 때마다 언급되고는 했다. 76 그렇다면 흉 노에게 항복한 한의 장군들은 흉노의 선우에게 공물을 바치고 선우로 부터 책봉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한과 흉노의 조공 책봉 관계는 양쪽에서 모두 설정되는 상호성을 갖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3세기 이전에 보이는 조공 책봉은 시간적 73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68쪽, 拜 騫 爲 中 郞 將, 將 三 百 人, 馬 各 二 匹, 牛 羊 以 萬 數, 齎 金 幣 帛 直 數 千 巨 萬, 多 持 節 副 使, 道 可 使, 使 遺 之 他 旁 國. 74 漢 初 和 親 시기에 漢 이 匈 奴 측에 전달한 물품에 대해서는 謁 者 令 肩 遺 單 于, 그리고 南 越 측에 전달한 물품에 대해서는 遺 王 이라고 해서 遺 를 사 용한 반면, 적극적인 대외정책이 실시된 이후에는 賜 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 하였다. 烏 孫 에 대해 漢 遣 惠 持 金 幣 賜 烏 孫 貴 人 有 功 者, 都 護 廉 褒 賜 姑 莫 匿 等 金 人 二 十 金, 繒 三 百 匹 ( 漢 書 卷 96 下, 西 域 傳, 3905쪽)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倭 에 대해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예이다. 75 그밖에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0쪽, 日 逐 王 素 與 握 衍 朐 鞮 單 于 有 隙, 卽 率 其 衆 數 萬 騎 歸 漢. 漢 封 日 逐 王 爲 歸 德 侯. 單 于 更 立 其 從 兄 薄 胥 堂 爲 日 逐 王 등 여러 사례가 있다. 7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64쪽, 單 于 既 約 和 親, 於 是 制 詔 御 史. 匈 奴 大 單 于 遺 朕 書, 和 親 已 定, 亡 人 不 足 以 益 衆 廣 地, 匈 奴 無 入 塞, 漢 無 出 塞, 犯 今 約 者 殺 之, 可 以 久 親, 後 無 咎, 俱 便. 朕 已 許. 其 布 告 天 下, 使 明 知 之. 5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쉽게 확인되는 보편적인 외교 형식이었다. 즉 조 공 책봉은 정기적인 조공을 강제하지도 않았고, 그때마다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때로는 화친의 시기에, 때로는 적대적 관계 에 있으면서도 조공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대립하는 두 나라를 동시 에 조공 책봉관계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조공국가의 군사적 경제 적 요소가 근본적인 동인이 되지만, 조공을 받는 측의 필요에 의해서 도 그 조공 책봉 여부가 결정되었다. 한편 조공 책봉은 반드시 중국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주변 국가들은 자기 나름의 천하질 서를 갖고 조공 책봉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며, 따라서 중국이 이들 세계 와 접촉할 때에는 그들에게 조공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국 3세기 이전의 조공 책봉이란 자국의 왕이 천하의 중심에 위치 하며 그 권위가 대내외적으로 널리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사절이 공물을 바치고 입조하여 그 상하관 계를 대내외에 인식시키려고 하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래 모든 국가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다. 인류학적으로도 선사시대 이래 모든 공동체는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관을 만들었다고 확인된다. 천하에 제( 帝 )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 동의만 해주면 흉노와 막대한 재물을 증여하고 남월에게 중대한 혜택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한의 천하질서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적이었던 까닭도 여기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 형식은 물론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 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종종 존재하지 않은 조공관계를 날조할 수도 있었다. 물론 주변 민족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 서 지나친 추측은 곤란하다. 그러나 한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한쪽 의 기록일 뿐이라는 상식을 잊어서도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상에서 살펴본 3세기 이전의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3
현상이 4세기 이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 조 공 책봉체제와 관련한 많은 연구는 4세기 이후 중국 중심의 조공 책 봉체제를 비판하는 데 집중되었지만, 그 연구 결과를 보면 이 글에서 살펴본 것과 다르지 않다. 가령 조공국과 책봉국 사이의 교섭이 대등 한 입장에서 이루어졌다든가, 피책봉국의 자주성이 인정되었다든가 또 는 고구려와 백제가 상호 적대관계에 있는 남북조 왕조 모두에게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다든가 하는 현상은 77 모두 3세기 이전부터 확인되는 것들이었다. 상대가 전혀 조공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상대 에게 보내는 공식문서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표현된 외교가 조공으로 기록되는 등 존재하지 않은 조공관계의 날조도 불사했다는 사실은 4 세기 이후만이 아니라 78 3세기 이전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 공간을 초월해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인 조공 책봉이라는 개념으로 동 아시아 국제질서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77 김창석(2009), 한일학계의 고대 한중관계사 연구동향과 과제, 한중일 학계 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 여호규(2006), 고구려와 모 용연의 조공 책봉관계 연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 노태돈(2006), 고구려와 북위 간의 조공 책봉관계에 대한 연구, 여호규 외,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등 참조. 78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3쪽. 5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Ⅳ.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조공 책봉이 시공간을 불문하고 확인되는 보편적 정치행위라는 사 실은 그동안 조공책봉을 근거로 동아시아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이해해 왔던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문화적 공통성도 찾을 수 없고 또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본격적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 던 3세기 이전이라면, 그동안 선험적으로 설정해 왔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범위와 구 조에 대해 살펴보자. 동아시아세계의 범위는 논자가 설정하는 기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니시지마 사다오는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범위 를 중국과 그 주변의 조선, 일본, 베트남으로 제한하고 이들 지역에 한자와 유교, 불교, 율령제 등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게 된 것이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의한 결과라고 보았다. 79 호리 토시카즈[ 堀 敏 一 ]는 유목사회의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주변 문명세계에 대한 군사적 침탈 이나 평화적 교역이 불가피했던 만큼 북방유목민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80 김한규는 세계 를 사람들이 정치 사회 경 제 문화적으로 서로 유기적 관련성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범주로 이해 하면서, 동아시아세계의 공간적 범위에 몽골과 티베트를 포함시키고 있다. 81 니시지마 사다오의 경우 문화적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 79 西 島 定 生 (1962), 앞의 글 참조. 80 堀 敏 一 (1994), 古 代 東 アジア 世 界 の 基 本 構 造, 堀 敏 一 著, 律 令 制 と 東 アジア 世 界, 汲 古 書 院. 81 金 翰 奎 (2000), 고대 동아시아세계질서의 구조적 특성, 서강대학교 동양사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5
를 규정했다면, 호리 토시카즈와 김한규는 인적 교류를 기준으로 삼 았다. 만약 물적 교류를 기준으로 삼게 된다면, 동아시아세계의 범위 는 훨씬 넓어질 수밖에 없다. 청동기 등의 금속과 마차 등 상당한 문 화 요소가 서방에서 전래되어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전한 중기 장건 의 서역 여행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물건들이 오고 갔다. 이러한 물적 교류를 가능하게 한 상인들의 활동과 그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동아시아세계는 몽골과 티베트를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대된다. 또 실질적인 교류가 없어도 간 접적인 정보를 통해 넓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 니는 상인들에 의한 전언 혹은 사신들에 의해 자신들과는 정치적으로 나 문화적 경제적으로 상관이 없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 며, 이러한 정보가 외교적으로 일정한 기능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국제질서라는 주제에 맞추기 위해 기본적으로 정치외 교적 관계를 기준으로 삼겠다. 외교적 관계는 두 국가 사이에 성립되 지만, 두 국가 사이의 외교관계는 다시 인접 국가와의 관계에 의해 크 게 좌우된다. 문화적 습속, 생태적 환경 그리고 교통과 정보의 제약 등으로 말미암아 국제질서는 인접한 지역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으므 로 특정 국가와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 사이의 외교관계가 일차적인 국제질서의 범위가 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근접해 있지 않아도 외 교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도 적지 않다. 가령 중국과 같이 상대 국가가 여러 개의 지역 국제질서에 동시에 연계되어 있다면 결과 적으로 자신도 커다란 국제질서의 흐름 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동아시 아세계의 범위는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복수의 국제질서를 모두 포괄 구실 편, 동아시아 역사의 환류, 지식산업사, 9~10쪽. 5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하는 범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범위의 동아시아세계가 단일한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수의 국제질서가 각기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운영되었 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기존의 동아시아세계를 배경으로 한 페어 뱅크의 조공체제론이나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은 모두 중국 중심의 사고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 왔는데 82 그 주요한 이유는 일원 적인 국제질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성격을 띠는 현 대의 국제질서와는 달리 전 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나라를 관통하는 단일한 국제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제질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 제질서가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과 국제관 계를 맺고 있는 주변 국가가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입되어 주변 국가들 끼리 상호 위치가 결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4세기 이후 중국으로부 터 받은 책봉 관작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모두 의미가 없었다. 83 조공 책봉관계는 그 시점에서 양 당사자의 정치적 상하질서를 확인하 는 작업이다. 따라서 중국과의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오로 지 중국이 설정한 천하 질서 속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었던 것은 아니 다. 다시 말해 주변 국가는 중국의 국제관계와는 별도로 자신의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중국과 단독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전 근대 사회의 동아시아세계는 이렇게 형성 된 복수의 국제질서가 중층적으로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3세기 이전 이 정도의 범위를 갖는 동아시아에 과연 어 82 이익주(2008),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재검토, 박원호 등, 새로운 한중 관계사의 구축에 필요한 시각 (내부자료 연구-3), 동북아역사재단, 50~51쪽. 83 李 成 珪 (1996), 앞의 글 참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7
떤 국제질서가 있었던 것일까? 이미 3장 3절에서 주변의 국가들이 자 기 중심의 천하질서를 갖고 조공 책봉 형식을 시행했을 것임을 추정했 지만, 여기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지역별 국제질서가 어 떻게 구성되었는지 소묘해 보도록 하자. 편의상 한대를 중심으로 살 펴보겠다. 먼저 흉노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범위를 보면 남쪽으로 한, 동 쪽으로 오환과 선비, 북쪽으로 정령, 서쪽으로 오손 및 서역 여러 나 라로 이어지는 국제질서가 확인된다. 그 가장 주요한 대상은 한이었 다. 유목민이 필요한 곡물 및 각종 물품을 구득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은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으며 3세기 이전 다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선진적 문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흉노는 한 외에도 같은 유목지대에서 성장한 다른 인접 국가들과 끊임없이 접촉하였다. 한 문제가 즉위하고 난 뒤 선우가 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누란( 樓 蘭 ), 오손( 烏 孫 ), 호게( 呼 揭 ) 및 그 주변의 26개 나라가 모두 흉노에 귀속하여 인궁지민( 引 弓 之 民 )을 모두 아우르는 일가( 一 家 )를 이 루었다 고 명언하고 있듯이, 84 흉노는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세계에 걸 친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관계는 늘 변하는 것이다. 한과 전쟁을 치루면서 흉노는 점차 약해졌고 거기에 내분이 겹쳐지자 주변의 오환과 정령, 오손은 기회를 틈타 흉노를 공격하는 등 기존질 서가 크게 바뀌었다. 한편 한으로부터 물자 구득이 어려워지면서 서 역 오아시스 정주민들은 흉노가 필요로 하는 농산품과 생산품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85 한은 다시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서역 여러 나라와 84 漢 書 卷 94, 匈 奴 列 傳, 3757쪽, 樓 蘭 烏 孫 呼 揭 及 其 旁 二 十 六 國 皆 已 爲 匈 奴. 諸 引 弓 之 民 幷 爲 一 家. 85 Nicola Di Cosmo(2002),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 The Rise of 5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