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배호남 *1) 차례 Ⅰ. 머리말 Ⅱ. 종교적 순수성의 정신세계 :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의 경우 Ⅲ. 차가운 겨울밤의 정신세계 : 溫 井 과 長 壽 山 1 의 경우 Ⅳ. 명징한 여름 낮의 정신세계 : 白 鹿 潭 의 경우 Ⅴ. 맺음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정지용 연구의 새로운 지평으로 개별 작품에서 보다 더 미시적으로 파고들 어가 특정한 개별 시어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 한 문제의식에 아래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이 나타난 시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이 시어가 의미하는 바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1934년 9월 카톨닉 靑 年 16호에 발표된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기리며 찬양하는 종교시이다. 정지용의 종교시는 聖 과 俗 이라는 종교적 대립이 시적 대상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고 단지 종교적 추상성과 관념성만이 노출된다.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서 사용된 조찰한 이라는 시어 역시 종교적 순수성의 정신세계만을 나타내는 데 그치고 있다. 조찰한 이 사용된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는 시집 白 鹿 潭 Ⅰ부에 실린 溫 井 과 長 壽 山 1 이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조찰한 은 차가운 겨울 밤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겨울 밤의 상황이란 일제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의 시기에 대한 정지용의 현실인식이다. 그리고 조찰한 은 그가 동경하는 이상향이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 평온, 아직은 분리되 *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602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어 있는 타인의 의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리와 거리감은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마지막 으로 등장하는 시 白 鹿 潭 에 이르러 일정 부분 해소되고 합일된다. 白 鹿 潭 에서 조찰한 이 의미하는 바는 명징한 여름 낮의 세계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 오면 시적 화자는 그토록 동경하던 白 鹿 潭 이라는 자연 대상과 하나가 된다. 그러 나 이 하나됨은 완결된 조화로움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이고 수척한 광경을 이루고 있다. 정지용은 결국 자아와 자연이 합일을 이루어 沒 我 의 정신적 경지에 가 닿는데 실패한다. 이는 그가 후기 산수시를 통해 이루려 했던 고전적 은일의 정신으로의 초월이 실패한 기획이었음을 뜻한다. 주제어 : 정지용, 조찰한, 조찰히,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溫 井, 長 壽 山 1, 白 鹿 潭 Ⅰ. 머리말 현재의 연구자들이 정지용의 시를 연구할 때 겪는 가장 큰 곤란은 더 이상의 연구거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80년대 중반 해금 이후로 정지용에 대한 연구는 단행본으로 160여권 이상, 박사학위논문만도 90편 이 넘는다. 지금까지의 연구사는 그 분량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다양하다. 유종호는 60년대부터 정지용의 문학사적 가치를 인식한 선구적 연구자 다. 그는 정지용에 대해 시란 언어로 만들어진다는 평범하나 중요한 진리 를 열렬히 자각하고 실천한 최초의 시인 이었으며, 한국 현대시의 아버 지 라 상찬했다. 1) 반면 비슷한 시기 송욱은 정지용, 즉 모더니즘의 자기 부정 2) 에서 정지용의 시를 연속하는 리듬이 아니라 짧은 산문의 모임 에 불과하며, 시어가 威 儀 를 획득하지 못하고 재롱 에 떨어졌으며, 표현방식 도 현대시의 주제를 휩싸기에는 매우 폭이 좁은 것이었다. 고 비판했다 1) 유종호, 현대시 오십년, 사상계, 1962. 5. 2) 송욱, 정지용, 즉 모더니즘의 자기부정, 시학평전, 일조각, 1963.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03 1980년대 이후 김학동, 최동호, 김재홍 등의 연구자들이 정지용 시문학 을 통시적으로 해석하는 연구에 주력했다. 김학동은 정지용 연구 3) 에서 정지용 시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행하였으며, 주로 전기적인 사실을 밝혀 통시적인 해석을 제시하는데 주력하였다. 아울러 그는 작품의 발굴과 연보 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최동호는 정지용의 長 壽 山 과 白 鹿 潭 4) 과 산수시의 世 界 와 隱 逸 의 精 神 5) 을 통해 정지용 후기시의 정신적 특질을 동양적 고전주의에 침잠하는 은일의 정신으로, 시형식의 특질을 역시 동양 적 전통에 회귀하는 산수시로 특징지은 바 있다. 특히 산수시의 世 界 와 隱 逸 의 精 神 에서 정지용의 시를 1) 1925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감각적 인 이미지즘의 시, 2) 1933년 不 死 鳥 이후 1935년경까지의 가톨릭 신앙 을 바탕으로한 종교적인 시, 3) 玉 流 洞 (1937), 九 城 洞 (1938) 이후 1941년에 이르는 東 洋 的 인 정신의 시 세 단계로 통시적으로 구분했다. 김재홍은 정지용의 시를 진보의식과 보수의식의 갈등, 낭만적 성향과 주 지적 성향의 갈등, 전원지향성과 도시 의존성의 갈등, 모더니티 지향성과 전통 지향성의 갈등 등으로 파악하여 그를 갈등과 방황의 시인으로 규정 했다. 6) 이 외에도 이기서, 이기현, 권수진 등의 연구자들이 정지용의 시가 초기에는 모더니즘 지향세계 를 보이다가 후기로 오면서 동양적 정신세 계 를 구축하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분석했다. 7) 3) 김학동, 정지용 연구, 민음사, 1987. 4) 최동호, 정지용의 長 壽 山 과 白 鹿 潭 (1983), 현대시의 정신사, 열음사, 1985. 5) 최동호, 산수시의 世 界 와 隱 逸 의 精 神 (1985), 하나의 道 에 이르는 詩 學, 고려대 출판부, 1997. 6) 김재홍, 갈등의 시인 방황의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문학의 비극론,시와시학사, 1993. 7) 이기서, 1930년대 한국시의 의식구조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3; 이기 현, 정지용 시 연구 : 내면의식의 변이양상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권수진, 정지용 시의 모더니즘 특성 연구 : 변모과정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604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정지용에 대한 통시적 연구보다는 시 작품 개개의 구조에 보다 주목한 연구도 있다. 박철희는 정지용의 몇몇 시를 분석하여 그의 시가 서구적인 요소와 전통적인 요소를 잘 결합하여 새로운 시적 구조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8) 문덕수는 정지용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를 바다 들 신 앙 산의 관련체계로 구분하여 각 이미지의 원형심상을 추적하여 그 변이 과정을 시대적 상황과 관련지어 고찰하고 있다. 9) 김훈은 구체적인 시어의 분석을 통해 정지용 시의 구조적 특성을 밝히려 시도하였다. 10) 정지용 시문학 전체가 아닌 특징적인 시 한, 두 편에 집중하여 분석한 개별 작품론 역시 상당수 존재한다. 이러한 개별 작품론으로는 이진홍, 이 숭원, 마광수, 노병곤 등의 연구가 있다. 11) 또한 단행본으로 묶여 간행된 다시 읽는 정지용시 12) 에는 최동호, 맹문재, 이성우 등 다양한 연구자들 이 행한 개별 작품론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정지용 시의 상징성을 중점 적으로 분석한 연구자로 신진, 이승복 등을 들 수 있다. 13) 신진은 색채 상 징의 해석을 통해 정지용이 지녔던 畵 論 에의 취향과 색채에 대한 관심과 시적 변용을 토대로 하여 그 상징성을 살피고 있다. 이승복은 정지용의 시 에 드러난 정형률과 자유율의 뚜렷한 대비의 양상을 체계화하여 운율에 따 석사학위논문, 1997. 8) 박철희, 현대한국시와 그 서구적 잔상, 한국시사연구, 일조각, 1979. 9) 문덕수, 한국 모더니즘시 연구, 시문학사, 1981. 10) 김훈, 정지용 시의 분석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11) 이진홍, 정지용의 작품 유리창 을 통한 시의 존재론적 해명, 경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79; 이숭원, 白 鹿 潭 에 담긴 지용의 미학, 어문연구 12호, 어문연구회, 1983; 마광수, 정지용의 시 온정 과 삽사리 에 대하여, 인문과학 51집, 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 1984; 노병곤, 白 鹿 潭 에 나타난 지용의 현실인식, 한국학논집 9집, 1986. 12) 최동호 맹문재 외, 다시 읽는 정지용시, 월인, 2003. 13) 신진, 정지용 시의 상징성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이승복, 정지용 시의 운율 체계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05 른 상징성의 차이를 분석했다. 90년대 중후반에 주목할 만한 정지용 연구로는 장도준, 정의홍, 김동근, 김신정 등의 연구가 있다. 14) 장도준은 정지용 시 연구 에서 형식주의적 비평 방법과 역사주의적 비평 방법이 지니는 장점을 통합하여 시 분석과 전기적 해설을 고루 행하고 있다. 정의홍은 정지용 시 자체에 대한 분석보 다는 그의 의식구조와 갈등 양상을 해명하기 위해 심리학적 이론을 원용하 여 분석했다. 김동근은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를 기호학적 방법론을 원용하 여 비교 분석함으로써 1930년대 순수시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의 한 지평을 열었다. 김신정은 정지용 시의 특징이 감각 에 있다고 보고 그의 시에서 감각 이 지니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정지용의 고향의식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맹문재는 鄕 愁 의 내용과 의미 15) 에서 鄕 愁 의 각 행과 연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정효구는 정 지용의 시 鄕 愁 와 陰 의 상상력 16) 에서 동양의 음양오행론을 가져와, 鄕 愁 가 陰 의 체험인 농촌공동체의 경험과 陽 의 체험인 근대문명 체험 사이에서 정지용의 실존이 음양의 균형 있는 조화를 꿈꾸고자 한 과정에 서 나온 시라고 평가했다. 한편 고향 이 정지용의 시에서 어떠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연구로 이숭원의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17), 김종태의 정지용 시의 공간과 죽음 18), 이태희의 정지용 시의 체험 14) 장도준, 정지용 시 연구, 태학사, 1994; 정의홍, 정지용 시 연구, 형설출판사, 1995; 김동근, 1930년대 시의 담론 체계 연구 : 지용시와 영랑시에 대한 기호학적 담론 분석,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김신정, 정지용 시 연구 : 감각 의 의미 를 중심으로,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8. 15) 맹문재, 鄕 愁 의 내용과 의미, 최동호 맹문재 외, 위의 책. 16) 정효구, 정지용의 시 鄕 愁 와 陰 의 상상력, 한국시학연구 19호, 2007. 17) 이숭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1999. 18) 김종태, 정지용 시의 공간과 죽음, 월인, 2002.
606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과 공간 19) 등을 들 수 있다. 위의 연구들은 고향 을 공간적 이미지로 설 정하고 정지용의 시에서 이러한 고향의 의미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추적한 연구들이다. 신범순은 정지용 시에서 병적인 헤매임과 그 극복의 문제 20) 에서 정지용의 시 고향 에 주목하였다. 신범순의 연구는 정지용 의 근대 체험을 그의 정체성 문제와 연관시켜 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 다. 이정미는 고향 - 서늘한 고향 체험의 긴장 21) 에서 시 고향 에 나 타난 정지용의 자의식을 갈등하는 자의식 이라 규정했다. 오성호는 鄕 愁 와 고향, 그리고 향토의 발견 22) 에서 鄕 愁 와 고향 두 편을 비교 분석했다. 오성호는 일본 유학생이었던 정지용이 계몽의 주체이면서 동시 에 대상이었으며, 근대 와 전근대 사이에서 불안하게 유동하는 정체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2000년대 초반 정지용 탄생 100년을 맞아 이숭원, 최동호, 권영민 등 연 륜 있는 연구자들에 의해 정지용 시에 대한 발굴과 정리, 재해석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숭원은 원본 정지용시집 23) 을 통해 발표 당시의 정지용 시 의 본래 모습을 복원했다. 최동호는 정지용 사전 24) 을 통해 정지용 시에 나타난 시어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까다로운 작업을 이뤄 냈다. 권영민은 정지용시 126편 다시 읽기 25) 를 통해 정지용 시작품 전체 에 대한 개별 작품론을 전개했다. 이 세 연구자의 업적은 해금 후 20여년 19) 이태희, 정지용 시의 체험과 공간, 어문연구 129호, 2006. 20) 신범순, 정지용 시에서 병적인 헤매임과 그 극복의 문제, 한국 현대시의 퇴폐와 작은 주체, 신구문화사, 1998. 21) 이정미, 고향 - 서늘한 고향 체험의 긴장, 김신정 편, 정지용의 문학 세계 연구, 깊은샘, 2001. 22) 오성호, 향수 와 고향, 그리고 향토의 발견, 한국시학연구 7호, 2002. 23) 이숭원, 원본 정지용시집, 깊은샘, 2003. 24) 최동호, 정지용 사전, 고려대출판부, 2003. 25) 권영민, 정지용시 126편 다시 읽기, 민음사, 2004.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07 가까운 정지용 연구를 종합 정리하는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방법론에 의한 다양한 정지용 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상오는 정지용 시의 풍경과 감각 26) 에서 정 지용의 산수시에 나타난 자연을 근대적 풍경의 시적 발견으로 해석하고 있 다. 금동철은 정지용의 시 白 鹿 潭 에 나타난 자연의 의미 27) 에서 白 鹿 潭 한 편에 집중하여 자연의 의미를 새롭게 고찰하고 있다. 남기혁은 정 지용 중 후기시에 나타난 풍경과 시선, 재현의 문제 28) 에서 정지용의 기 행시와 기행산문시가 산 의 풍경을 이루는 자연물들을 주체의 시선에서 조합하여 전체의 풍경을 재현한다고 보았다. 한편 정지용의 시론에 집중한 연구도 있다. 김춘식은 유기적 통일과 시어의 신성성-정지용의 시론과 시 어관, 감각의 상관성 29) 에서 정지용의 시의 옹호, 시와 발표, 시의 위 의, 시와 언어 네 편의 산문에 나타난 시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 다. 그는 정지용의 시론이 시적 감각과 언어적 감각의 일치를 통한 승화 과정을 통해 정신과 기법 의 유기적 통합을 추구했다고 보았다. 또한 정지 용의 후기시를 산수시로 보는 기존의 견해에서 벗어나려는 해석도 있다. 최윤정은 근대의 타자담론으로서의 정지용 시 30) 에서 정지용의 중 후기 시를 탈근대와 생태주의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에는 白 鹿 潭 Ⅰ부에 실린 18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석의 대상에 서 제외돼 왔던 Ⅱ부와 Ⅳ부의 시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 26) 이상오, 정지용 시의 풍경과 감각, 정신문화연구 98호, 2005. 27) 금동철, 정지용의 시 白 鹿 潭 에 나타난 자연의 의미, 우리말글 45호, 2009. 28) 남기혁, 정지용 중 후기시에 나타난 풍경과 시선, 재현의 문제, 국어문학 47호, 2009. 29) 김춘식, 유기적 통일과 시어의 신성성-정지용의 시론과 시어관, 감각의 상관성, 한국시학연구 31호, 2011. 30) 최윤정, 근대의 타자담론으로서의 정지용 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0집, 2011.
608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다. 이는 정지용시 연구의 소재가 갈수록 고갈돼 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주로 유선애상 과 파라솔 에 연구가 집중되는데, 그 이유는 이 두 편이 다른 정지용 시에 비해 형식이나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기 때문이다. 한숙 향은 정지용의 시 유선애상 고찰 31) 에서 유선 이 환기하는 것을 기존 의 지배적인 해석인 자동차 와는 다르게 선율로 상정하고, 그 선율을 내는 악기를 아코디언이라 밝히고 있다. 이 아코디언의 선율은 1930년대 암울한 시대적 상황의 잠재된 주제 의식으로 사용되면서 애상 이라는 제목을 얻 게 된다고 보았다. 김승구는 근대적 피로와 미적 초월의 욕망-1930년대 중반 정지용 시를 중심으로 32) 에서 시집 白 鹿 潭 의 Ⅰ부에서 Ⅳ부까지 의 작품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규명하고, Ⅱ부의 유선애상 과 Ⅳ부의 파라솔 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뒤, 이 두 편의 시가 정지용이 종교시에서 산수시로 건너가는 연결고리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영복은 정지 용의 파라솔/ 明 眸 연구 33) 에서 파라솔 의 원본으로 1936년 중앙 에 시화순례 라는 제목 아래 실린 明 眸 를 제시했다. 그는 파라솔 의 해석 이 화문 양식으로서의 明 眸 라는 텍스트의 혼종성을 고려해야한다고 보 았다. 김예리는 정지용의 시적 언어의 특성과 꿈의 미메시스 34) 에서 정지 용 시의 특이성을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범주 속에서 환상성과 미메시 스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연구사 검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지용에 대한 연구는 통시적 관점 이나 공시적 관점에서의 시인론, 방법론에 있어서 실증주의 역사주의 구 31) 한숙향, 정지용의 시 유선애상 고찰, 비평문학 40호, 2011. 32) 김승구, 근대적 피로와 미적 초월의 욕망-1930년대 중반 정지용 시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41호, 2011. 33) 조영복, 정지용의 파라솔/ 明 眸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36호, 2012. 34) 김예리, 정지용의 시적 언어의 특성과 꿈의 미메시스, 한국현대문학연구 36호, 2012.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09 조주의 정신분석비평 현상학, 시세계의 지향점에 대해 모더니티 지향 전통지향 혹은 둘 사이의 갈등, 개별 작품론에 있어서 대표작으로 평가받 는 작품들뿐 아니라 유선애상 이나 파라솔 과 같이 최근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난해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에 본 논문은 정지용 연구의 새로운 지평으로 개별 작품에서 보다 더 미시적으로 파고들어가, 특정한 개별 시어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을 지니고 있다. 최동호는 정지용 시어의 다양성과 통계적 특성 에서 적 확한 시적 감정의 표현을 위해 남다르게 모국어를 갈고 다듬은 그의 공과 를 확인하기 위해 지용 시의 뿌리가 되는 시어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도 다각적으로 시도되어야 하며, 정지용의 시어에 대한 연구가 더 이상 나 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추구될 때 우리는 지용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35) 이라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본 논문을 통해 정지용의 시어 중 조찰한 과 그 부사형인 조찰히 가 나타난 시들을 집중 적으로 분석하고, 이 시어가 의미하는 바가 개개의 시 안에서 어떻게 변화 해 가는지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Ⅱ. 종교적 순수성의 정신세계 :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의 경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36) 에 조찰하다 는 다음의 두 의미로 기재 되어 있다. 35) 최동호, 정지용 시어의 다양성과 통계적 특성,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 서정 시학, 2013, pp.347-348. 36)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 URL http://stdweb2.korean.go.kr/search/ List_dic.jsp
610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1) 조찰( 照 察 )하다 ; 사정이나 형편을 비추어 보아 잘잘못을 따지다. 2) 조찰( 澡 擦 )하다 ; (가톨릭) 죄를 씻고 닦다. 한편 최동호가 편찬한 정지용 사전 에는 다음과 같다. 조찰하다 ; 깨끗하다. 37) 최동호는 표준국어대사전 의 2)의 의미에서 유추하여 정지용이 시에서 사용한 조찰하다 라는 시어의 의미를 깨끗하다 로 유추한 듯하다. 이는 정 지용 독실한 가톨릭신자였으며,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그의 종교시편 중 하나인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 무리가 없다. 1934년 9월 카톨닉 靑 年 16호에 발표된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는 조찰 한 이 2번, 조찰히 가 1번 도합 3번의 조찰하다 가 나타난다. 새남터 욱진어 뽕닙알에 서서 녯어른이 실로 보고 일러주신 한 거륵한 니야기- 압헤 돌아나간 푸른 물구비가 이땅과 함께 영원하다면 이는 우리 겨레와 함께 끗까지 빗날 기억이로다. 一 千 八 百 四 十 六 年 九 月 十 六 日 방포 취타하고 포장이 압서 나가매 무수한 힌옷 입은 백성이 결진한 곳에 이믜 좌긔ㅅ대가 놉히 살기롭게 소삿더라. < > 실로 군소리도 업는 알는소리도 업는 뿔도 업는 조찰한 피를 담은 한 羊 의 목을 베이기 위함이엇도다. 37) 최동호, 정지용 사전, 고려대출판부, 2003, p.287.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11 지극히 유순한 羊 이 제대에 오르매 마귀와 그의 영화를 부수기에 백천의 사자떼 보다도 더 영맹하엿도다. < > 포학한 치도곤 알에 조찰한 뼈를 부술지언정 감사의게 소인 을 바치지 아니한 오백년 청반의 후예 안드레아 김대건! < > 오오 그들은 악한 권세로 죽인 그의 시체까지도 차지하지못한 그날 거룩한 피가 이믜 이 나라의 흙을 조찰히 씨섯도다. < > -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부분 (밑줄 인용자) 38)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기리며 찬양하는 종교시이다. 조찰히 씨섯도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 시어는 명백히 가톨 릭에서 죄를 씻고 닦다 는 의미의 동사인 조찰( 澡 擦 )하다 를 전용( 轉 用 ) 한 것이다. 조찰한 피, 조찰한 뼈 에서의 조찰한 도 마찬가지로 김대건 신 부가 흘린 피와 그의 주검을 종교적 의미로 승화하기 위해 사용된 시어다. 동사인 조찰( 澡 擦 )하다 를 정지용이 조찰하다 라는 형용사로 전용한 이유 는 무엇일까. 최동호는 정지용이 표준어와 달리 변형된 시어를 사용하기를 즐겼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이후에도 지용은 이 통일안을 적용하 지 않고 그 나름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라 여겨 진다 고 했다. 특히 모음이 ㅡ 와 ㅣ 로 자주 변화하는 것과, 자음에서는 연음현상과 음운첨가(주로 ㅎ 이 가장 많이 첨가됨)을 지적했다. 즉 자신 만의 시어를 조탁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던 정지용이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 는 조찰하다 라는 동사를 깨끗하다 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 전용했음을 38) 정지용 전집1, 민음사, 1988, pp.110-112.
612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의 중기시에 해당하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3년 카톨닉 靑 年 誌 발간에 관여 하면서 시작하여 1935년에 이르기까지 정지용은 臨 終, 별, 恩 惠, 갈릴 레아 바다, 다른 한울, 또 하나의 다른 太 陽, 不 死 鳥, 나무,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悲 劇 등 10편의 종교시를 카톨닉 靑 年 에 발표했다.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정지용의 종교시는 그 자체의 미학적 방법적 성취보다는 정지용 개인사에서 그것이 어떤 진화적(혹은 퇴행적) 의미를 가지는가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정지용의 종교시는 白 鹿 潭 의 동양정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퇴행이나 한시적인 심 연으로, 즉 정지용 시문학의 연속적인 동질성에서 벗어난 일종의 일탈행위 로 간주되어 왔다. 정지용 종교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앙적 자아와 세속 적 자아, 聖 과 俗 이라는 종교적 대립이 어떠한 시적 대상을 통해서도 매개 되지 않고 단지 종교적 추상성과 관념성만이 노출될 뿐이라는 점이다. 39) 위의 인용시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서도 이러한 정지용 종교시의 단점은 잘 드러난다. 위 시는 단순히 김대건 신부의 순교라는 종교적 이벤트를 찬 양하고 숭상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동원된 시어나 이미지들이 구체성을 확 보하지 못하고 종교적 관념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아 나 오오 같은 감탄 사의 남발이나 느낌표의 과도한 사용 등은 종교시 이전에 정지용시가 지녔 던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무색케 한다. 시의 언어가 지녀야할 구체적 인 감각과 미의식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이러한 문제점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5년 10월 鄭 芝 溶 詩 集 의 발간 이후로 정지용이 종 교시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종교시를 실패한 기획으로 인 39) 유성호, 정지용의 이른바 종교시편 의 의미, 김신정 편, 정지용의 문학세계 연구, 깊은샘, 2001, pp.154-155.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13 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정지용의 종교시는 그의 정신주의적 면모 가 극단적인 모더니티 지향으로 경사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의 종교시는 가톨릭이라는 서구 보편 종교의 시적 수용을 통해 수직적 초월을 시도하려 했던 일종의 정신적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서 정지용이 사용한 조찰한 ( 조찰히 ) 이라는 시어는 주목을 요한다. 1934년에는 이 시어는 단순히 종교적 순수 성의 정신세계 를 드러내는 시어에 불과했다. 이는 그의 종교시에서 갈릴 레아 바다 나 이오니아 바다 와 같은 공간, 혹은 불사조 나 별 이나 태양 과 같은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와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이나 이미지들은 시가 아니라 종교적 찬송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평면적인 시어들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적 대상이나 종교적 시어들이 1935 년 이후에는 그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이후 에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정지용은 조찰한 이라는 시어에서 본래의 가톨 릭적 의미를 지우고 거기에 새로운 정신주의적 의미를 더해나간 것은 아닐 까. 시집 白 鹿 潭 Ⅰ부에 실린 산수시의 분석을 통해서 조찰한 이라는 시 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Ⅲ. 차가운 겨울밤의 정신세계 : 溫 井 과 長 壽 山 1 의 경우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시는 1938년 4월 三 千 里 文 學 2호에 발표한 溫 井 이라는 시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 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 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치놋다 밤 이윽자 화로ㅅ불
614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여라. - 溫 井 전문 (밑줄 인용자) 40) 이 시는 일종의 산행기( 山 行 記 )로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의 제목인 溫 井 은 따뜻한 우물 이라는 의미와 함께 금강산 산행의 길목에 있는 溫 井 里 라는 지명을 지시하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정지용은 1937년부 터 1940년까지 국토순례를 통해 금강산에 몇 차례 오른다. 溫 井 은 시적 화자인 나 와 동행한 그대 가 금강산 등반을 마치고 온정리에 돌아와 잠 이 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시에 등장하는 그대 를 정지용과 절친했던 시인 박용철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지용은 1937년 2월 조선일보 에 愁 誰 語 라는 표제 로 내금강소묘 1, 내금강소묘2 를 발표한다. 이 두 편의 산문에는 喆 이 라는 이름의 동행자가 병자의 행색으로 묘사돼 있다. 이 산문이 발표된 1937년 2월 이전에 함께 금강산을 여행했을 것이며, 이 무렵은 박용철의 지병이 극심해지기 전이다. 내금강소묘 에서 정지용과 박용철의 여정은 비교적 상세히 찾을 수 있다. 내금강 장안사 표훈사 명경대 정양사 표훈사 중향여관(1박) 비로봉 구성동 외금강 옥류동 온정리(1 박) 41) 으로 추정된다. 박용철은 1938년 5월 12일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溫 井 은 1939년 4월에 발표되었으니, 이 시는 정지용이 박용철 사후에 그 40) 정지용 전집 1, 민음사, 1988, p.135. 41) 최동호, 정지용의 금강산 시편 에 대하여,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 서정시학, 2013, p.529.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15 와 함께한 금강산 기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시로 추측할 수 있다. 나 와 그대 는 한나잘 걸려서 멀고 험한 골짜기를 함께 벗어나온 동반자이다. 이 시에서 그머흔 골작 은 금강산 등산길의 여정이기도 하면 서, 그대 를 박용철로 볼 경우 시인이 그와 함께 지내온 인생의 행로로 볼 수도 있다. 42) 길고 고달픈 길을 함께 걸어온 나 와 그대 는 이제 溫 井 이라는 따뜻한 공간에 당도한다. 그러나 이 溫 井 역시 결국에는 안락 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남지 못한다. 파람 이 불고 밤 이윽자 화로ㅅ 불 은 사그라들고, 촛불도 바깥의 추위로 인해 아사리느니, 즉 작게 움 츠러들며 떨리게 된다. 그처럼 불안하고 괴로운 상황 속에서 나 와 그 대 는 둘만의 따뜻한 공간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나 와 그대 는 끝까 지 같이 있지 못한다. 그대 는 이내 잠들이고 나 는 홀로 깨어 있게 된다. 43) 그렇다면 이 시에 나타난 차가운 겨울 밤, 나와 그대의 하룻밤 평온한 잠을 방해하고 화롯불도 촛불도 위협하는 이 겨울밤의 상황이란 어떠한 것 인가. 우리는 이를 정지용이 해방 후인 1948년 10월 문장 27호에 발표한 산문 조선시의 반성 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白 鹿 潭 을 내놓은 시절이 내가 가장 정신이나 육체로 피폐한 때다. 여러 가지로 남이나 내가 내 자신의 피폐한 원인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환 경과 생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환경과 생활에 책임을 돌리고 돌아앉는 것을 나는 고사 하고 누가 동정하랴? 생활도 환경도 어느 정도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親 日 도 排 日 도 못한 나는 山 水 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42) 강호정, 산문시의 두 가지 양상 : 지용 과 이상 의 산문시를 중심으로, 한성어문학 20집, 2001, p.14. 43) 마광수, 정지용의 시 溫 井 과 삽사리 에 대하여, 인문과학 51집, 1984.
616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그래도 버릴 수 없어 詩 를 이어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 國 民 文 學 >에 협조하든지 그렇지 않고서는 朝 鮮 詩 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위협을 당 하게 된 것이다. < > 위축된 정신이나마 정신이 조선의 자연풍토와 조선인적 정서 감정과 최후 로 언어 문자를 고수하였던 것이요, 정치감각과 투쟁의욕을 시에 집중시키기 에는 日 警 의 총검에 대항하여야 하였고 또 예술인 그 자신도 무력한 인테리 소시민층이었던 까닭이다. 44) 정지용이 자기반성조로 고백하듯이, 대동아공영권의 시기에 친일도 배 일도 못한 정지용이 선택한 시적 태도란 무엇이었던가. 이 서슬 퍼런 시기 에 정지용은 동양 고전이라는 전통 지향 을 통해 山 水 라는 선험적 자연으 로 숨어들어 은일하려 했다. 은일 이란 자연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려하지 않는 정신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은일 속에서도 정지용이 차마 벗어 놓지 못한 현실인식이 溫 井 에 나타난 겨울 밤의 정신세계다. 그리고 이 겨울 밤의 상황에서 이제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잠든 (죽어버린) 그대 가 베고 있는 벼개 를 수식한다.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에서는 오로지 종교 적 순수성만을 지시하던 조찰한 의 추상적 의미는 이제 정지용이 가지려 하나 가질 수 없는, 동경하는 이상향이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 평온을 의미하게 된다. 시 溫 井 에서 그러한 정신적 평안은 오직 잠든 (죽어버린) 벗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대 는 조찰한 벼개 를 안은 채 나 에게서 멀어지고, 나 는 그대 가 없는 공간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며 외롬 을 이겨낼 수밖에 없다. 이 외로움 의 정서, 바로 옆에 잠든 동반자를 깨우지 못하고 스스로의 슬기 로 밤을 새울 수밖에 없는 시적 화자의 내면이야말로 1930년대 후반 산수시로 隱 逸 할 수밖에 없었던 정지 44) 조선시의 반성, 정지용 전집 2, 민음사, 1988, pp.266-267.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17 용 자신의 내면 풍경일 것이다. 이러한 정지용의 내면적 갈등은 조찰히 이 라는 시어와 더불어 長 壽 山 1 에 다시 나타난다. 伐 木 丁 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 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 간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 然 히 45)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속 겨울 한밤내 - - 長 壽 山 1 전문 (밑줄 인용자) 46) 시 첫머리의 伐 木 丁 丁 은 詩 經 의 소아( 小 雅 ) 벌목( 伐 木 ) 편에 있 는 구절로서, 커다란 나무를 산에서 벨 때 쩡 하고 큰 소리가 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伐 木 丁 丁 은 단순히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동양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지시 한다. 시적 화자는 長 壽 山 을 통해 동양 고전의 정신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45) 본고에서는 几 然 히 를 兀 然 히 의 오식으로 본다. 長 壽 山 1 이 1939년 3월 문장 2 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에는 올연( 兀 然 )히 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1941년 9월 문장 사에서 간행된 시집 白 鹿 潭 에는 궤연( 几 然 )히 로 고쳐졌다.(본 논문이 일차자료로 삼은 민음사판 정지용 전집 에서도 1941년 白 鹿 潭 에 따라 几 然 히 로 표기하고 있다.) 올연히 는 올올( 兀 兀 )히 와 마찬가지로 산이나 바위 등이 우뚝하게 서 있는 모습을 말하며, 궤연히 는 점잖고 침착하다 는 뜻을 가진다. 올연히 나 궤연히 모두 그 앞에 오는 차고 와 문맥상 무리없이 연결된다. 그런데 해방 후인 1946년 6월 을유 문화사에서 간행된 지용 詩 選 에서는 다시 올연히 로 고쳐놓았다.(권영민(2004), 앞 의 책, p.531.) 지용 詩 選 이 정지용 생전에 간행된 시선이고 이 시선의 검토를 정지용 자신이 마쳤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지용 詩 選 에 표기된 兀 然 히 가 정지용의 본래 의도였으리라 본다. 46) 정지용 전집 1, 민음사, 1988, p.139.
618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위치하고 있는 실제 공간은 伐 木 丁 丁 소리 가 들리지 않는,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 공간이다. 이 고요 속에서는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오직 시적 화자의 고 독만이 도드라진다. 좃지 않고 나 울지 않어 에 사용된 부정형 술어나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 이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이 고요 는 시적 화자가 위치한 실제 공간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장수산속 겨울 한밤내 의 깊은 고독을 의미한다. 長 壽 山 1 의 배경 역시 溫 井 과 마찬가지로 차가 운 겨울밤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어 조찰히 가 수식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늙은 사나히 다. 이 늙은 사나히 는 앞구절에 나오는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 간 웃절 중 이다. 그는 세속의 승패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탈속적 인물 이다. 그런데 溫 井 에서 나 와 그대 가 분리되어 있듯이, 長 壽 山 1 에 서도 시적화자와 웃절 중은 나뉘어져 있다. 47) 웃절 중 은 이미 절로 올라 간 뒤 이고, 시적 화자는 단지 조찰히 늙은 사나히 가 남겨 놓은 내음새 만을 줏는다. 시적 화자는 여섯 판을 지고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나히 의 나타남을 그리워하며 또 사라진 그의 흔적을 찾고 있다. 이 사나히 야 말로 차가운 겨울 밤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올연함을 잃지 않는, 정지용이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이 다. 그렇기 때문에 조찰히 라는 시어는 늙은 사나이 에게 바쳐진다. 반대로 시적 화자는 그저 고요 속에서 심히 흔들리는 시름 을 지니 47) 김정숙은 이 웃절 중 을 시적 화자와 동일시하여 그가 정적과 부동의 공간에 동참 하여 이 고요의 공간에 넉넉히 동화되어 있는 것 (김정숙, 정지용의 시 연구:전통의 식을 중심으로, 세종대 박사논문, 1999, p.89.)이라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한편 김신정은 웃절 중 을 뒤에 오는 조찰히 늙은 사나히 와 동일시하 여 이 시의 시적 자아가 찾고 있는 세계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 (김신 정, 앞의 논문, p.132.)라 해석했다.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19 게 된다. 溫 井 에서의 외롬 의 정서, 長 壽 山 1 에서의 시름 의 정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정지용의 후기시가 동양 전통의 고전적 정신세계에 완전 히 회귀해버린 시들이라면, 시적 화자의 외롬 이나 시름 은 자연과의 합 일에 의해 소멸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長 壽 山 1 의 시적 화자는 몰아 ( 沒 我 ) 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바람도 일지않는 고요 속에서 그가 지닌 시름 에 심히 흔들리우 고 있다. 이 시름 에 대한 시적 화자의 대응 방 식은 그것을 벗어버림[ 脫 俗 ]이 아니라 견듸랸다 이다. 이 견딤의 자세는 슬픔도 꿈도 없이 차고 兀 然 한 것이다. 차고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결국 앞서 살펴본 1930년대 후반의 시대 상황에 대한 정지용의 인식을 확 인할 수 있다. 결국 溫 井 과 長 壽 山 1 에서 나타난 조찰한(조찰히) 이라는 시어의 의미는 정지용이 가지려 하나 가질 수 없는 정신세계, 그가 이상향으로 동 경하지만 아직은 분리되어 있는 타인의 인식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러한 분리와 거리감은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 白 鹿 潭 에 이르러 일정 부분 해소되고 합일된다. Ⅳ. 명징한 여름 낮의 정신세계 : 白 鹿 潭 의 경우 마지막으로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시는 두 번째 시집의 표제 작인 白 鹿 潭 이다. 1 絶 頂 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 耗 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620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花 紋 처럼 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 鏡 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 조 없어지고도 八 月 한철엔 흩어진 星 辰 처럼 爛 漫 하다. 山 그림자 어둑어둑하 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嚴 古 蘭, 丸 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 樺 옆에서 白 樺 가 髑 髏 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 樺 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鬼 神 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 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海 拔 六 千 呎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 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 길 百 里 를 돌아 西 歸 浦 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 山 客 을 보고도 마고 매여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 色 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7 風 蘭 이 풍기는 香 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 州 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21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때 솨- 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避 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 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 山 植 物 을 색이며 醉 하며 자며 한다. 白 鹿 潭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 脈 우에서 짓는 行 列 이 구름보다 莊 嚴 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 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 鹿 潭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不 具 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 온 실구름 一 抹 에도 白 鹿 潭 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 鹿 潭 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 禱 조차 잊었 더니라. - 白 鹿 潭 전문 (밑줄 인용자) 48) 김우창은 이 시에 대해 한라산 등반 기록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상승 에 대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그는 白 鹿 潭 의 물이 주관이 해소되고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透 明 한 인식만 있는 세계를 암시 49) 한다 고 보았다. 최동호 역시 白 鹿 潭 이 더없이 명증한 물의 심상 이며 이 명 증성은 정지용이 그의 정신주의를 통하여 도달한 서정정 의식을 투시하는 뛰어난 통찰을 반영한다 50) 고 분석했다. 필자 역시 白 鹿 潭 이 지닌 명증 성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화자가 한라산 등반 과정에서 일관되 48) 정지용 전집 1, 민음사, 1988, p.142. 49) 김우창, 한국시와 形 而 上, 세대, 1968, pp.324-328. 50) 최동호, 정지용의 長 壽 山 과 白 鹿 潭, 현대시의 정신사, 열음사, 1985, p.261.
622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게 정신주의적 상승과 초월을 경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白 鹿 潭 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에 나타나는 많은 시적 대상들이 시적 화자의 내면의 갈등과 관계 맺고 있는 양상이다. 이성우가 지적했듯이,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주된 관심은 외부 세계의 여러 대상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비 추고 또 그 대상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읽어내는 일 51) 이기 때문이다. 白 鹿 潭 의 시적 상황은 앞서 살펴 본 溫 井 과 長 壽 山 1 과는 전혀 다른, 명징한 여름 낮의 세계다. 이 명징함 덕분에 시적 화자는 한라산을 오르는 등반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자연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며 바라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여러 자연물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면서 갈등을 표 출한다. 1연에서 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 耗 된다 는 표현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식물의 키가 작아지는 변화에 시적 화자 자신의 상황을 중첩시킨 것이다. 시적 화자 스스로 絶 頂 에 다가갈수록 정신의 힘이 고 갈되어 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 다. 花 紋 처럼 版 박힌다. 에서 보듯 시적 화자로부터 거리를 두던 뻑국채 꽃 의 이미지는 다음 순간 흩어진 星 辰 처럼 爛 漫 하게 된다. 뻑국채 키 가 아조 없어 진 곳에서 갑자기 꽃밭에서 별들이 켜 들고 제자리에서 별 이 옮 겨 다니는 이 환영 속에서, 시적 화자는 긔진했다. 시적 화자가 기 진하는 이유는 육체적인 피로나 산의 정취에 취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신 적 에너지가 소진한 자리에서 그가 바라는 초월의 환영을 보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2연에 부과된 죽음과 소생의 이미지 역시 시적 화자의 내면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연에서 시적 화자가 살어 일어섰다. 고 할 때 이 부활의 이미지는 1연의 긔진 을 정신적인 죽음의 상태로 이해하게 51) 이성우, 높고 쓸쓸한 내면의 거울, 최동호 맹문재 외, 앞의 책, 2003, p.201.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23 한다. 삶과 죽음을 분별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극한에 다가서고자 하는 시 적 화자의 욕망이 드러나는 표현인 것이다. 52) 3연과 4연에서도 역시 시적 화자의 내면이 자연물에 투영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髑 髏 가 되기까지 살아가는 白 樺 에 대해 내가 죽어 白 樺 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고 하 여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고 있다. 또한 鬼 神 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쓸 쓸 한 모퉁이에서 파랗게 질 려 있는 도체비꽃 을 통해 악화된 현실 상 황 속에서 생존 그 자체에 위기를 느끼고 있는 시인 스스로의 두려움과 쓸쓸함을 투영하고 있다. 5연에서 8연까지 시적 화자는 산행에서 마주치는 자연물에 친화와 감정 이입의 경험한다. 5연의 海 拔 六 千 呎 이라는 높이 에서 더 이상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 는 합일을, 6연에서는 태 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송아지가 말을 보고도 登 山 客 을 보고도 마고 매 여달 리는 것을 보며 우리 새끼들도 毛 色 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라는 표현을 통해 식민지 문학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염려를 은연중 에 드러내고 있다. 53) 7연에서는 風 蘭 의 향기, 꾀꼬리 새소리, 회파람 새 회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 길때 솨- 솨- 솔소리 등 여러 자연물을 감각적 대상으로 치환하며, 8연에 서는 여러 고산식물 의 열매를 1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별과 같은 방울을 달 았다고 묘사하면서, 그 대상에 색이며 醉 하며 자며 하는 일체감을 드 러낸다. 그리하여 화자의 산행은 마침내 白 鹿 潭 조찰한 물 에 도달한다. 조찰 한 이 白 鹿 潭 의 물 을 수식할 때 그 의미는 長 壽 山 1 에서의 조찰히 52) 위의 글, 위의 책, p.204. 53) 이숭원은 이 구절을 두고 일제 강점하에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잠깐 연상해 보고 그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숭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1999, p.202.)고 분석했다.
624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늙은 사나히 처럼 시적 화자가 동경하는 맑고 깨끗한 동양적 고전의 정 신세계이기를 바라는 시인의 열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핵심은 長 壽 山 1 에서는 시적 화자와 늙은 사나히(웃절 중) 이 철저히 분리된 반면 에, 白 鹿 潭 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白 鹿 潭 의 마지막 연에 오면 시적 화자는 그토록 동경하던 白 鹿 潭 이라는 자연 대상과 하나가 된다. 이제 白 鹿 潭 은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얼골 과 하나가 된 白 鹿 潭 은 쓸쓸하다. 시인이 동경하던 조찰한 대상과 잠시 하나가 됐음에도 외롬 이나 시름 이나 쓸 쓸함 과 같은 정서는 계속해서 남는다. 조찰한 대상과의 하나됨은 정지용 이 전통적 고전주의를 통해 지향하던 완결된 조화로움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수척한 광경을 이루고 있다. 산 과 물 을 동시에 표상하는 동 양적 山 水 의 상징인 白 鹿 潭 과의 합일이 이토록 쓸쓸하고 수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좇겨 온 실구름 一 抹 가 白 鹿 潭 을 흐리우 기 때문이 다. 좇겨 왔다는 표현은 이 가냘픈 실구름 한 조각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밀려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실구름이 시적 화자의 얼굴에 포개 어진 白 鹿 潭 을 흐리우는 것은 長 壽 山 1 에서 시적 화자를 겨울밤 내 내 흔들리우 게 하는 시름 과 동일한 것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정지용 은 결국 자아와 자연이 합일을 이루어 沒 我 의 정신적 경지에 가 닿는데 실패한다. 이는 그가 후기 산수시를 통해 이루려 했던 고전적 은일의 정신 으로의 초월이 실패한 기획이었음을 뜻한다. Ⅴ. 맺음말 한 시인의 시세계의 가장 밑바닥에는 결국 그가 썼던 시어들이 놓여 있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25 다. 그런 점에서 특정 시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단순히 미시적인 개별 작품 연구를 넘어서서 그 시인의 시세계의 핵심에 다가가는 열쇠를 제공할 수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인들 중 다른 누구보다 시어의 감각과 조탁 에 능숙했고 열정적이었던 정지용시를 분석함에 있어서, 이제 시어 연구는 부수적인 자료 정리 수준이 아닌 본질적인 방법론이 될 시기에 다다랐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정지용의 시 중에서 시어 조찰한 이 나타나는 네 편의 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시어의 의미 변화를 살펴 보았다. 조찰한 은 1934년 9월 카톨닉 靑 年 16호에 발표된 勝 利 者 金 안드레 아 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에서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가톨릭에서의 죄 를 씻고 닦다 라는 뜻의 조찰( 澡 擦 )하다 를 전용하여 정지용 나름으로 정 신적 순결과 깨끗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에서 조찰한 의 의미는 종교적 순수성의 정신세계 로 요약할 수 있다. 勝 利 者 金 안드레아 는 신앙적 자 아와 세속적 자아, 聖 과 俗 이라는 종교적 대립이 시적 대상을 통해 매개되 지 못하고 종교적 추상성과 관념성만이 노출된다. 정지용의 종교시는 그의 정신주의적 면모가 극단적인 모더니티 지향으로 경사된 경우이며, 가톨릭 이라는 서구 보편의 수용을 통해 수직적 초월을 시도하려 했던 일종의 정 신적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해도 이 시에서 사용한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주목을 요한다. 1934년에는 이 시어는 단순히 종교 적 순수성의 정신세계 를 드러내는 시어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른 종교적 대상이나 종교적 시어들이 1935년 이후에는 정지용의 시에서 사라진 반면, 조찰한 이라는 시어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정지용은 조찰한 이라는 시어에서 본래의 종교적 의미를 지우고 거기에 새로운 정신주의적 의미를 더해나간 것이다. 조찰한 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시는 1938년 4월 三 千 里 文
626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學 2호에 발표한 溫 井 이라는 시이며, 세 번째 시는 1939년 3월에 발표 된 長 壽 山 1 이다. 두 시에서 시어 조찰한 의 의미는 차가운 겨울 밤의 정신세계 로 요약할 수 있다. 溫 井 과 長 壽 山 1 의 공통된 공간적 배경 인 깊은 산 속의 겨울밤 은 당시 정지용이 맞닥뜨렸던 대동아공영권이라 는 엄혹한 시대상황을 의미한다. 이 상황 속에서 시인은 溫 井 의 그대 나 長 壽 山 1 의 웃절 중 과 같은 인물을 동경한다. 그러나 이 동경은 시인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이며, 시적 화자는 이상향의 인물과 분리되 어 있다. 위의 두 시에서 시어 조찰한 의 의미는 정지용이 가지려 하나 가 질 수 없는 정신세계, 그가 이상향으로 동경하지만 아직은 분리되어 있는 타인의 인식을 의미한다 하겠다. 조찰한 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시는 1939년 4월 발표된 白 鹿 潭 이다. 이 시에 이르러 앞서 언급한 시적 화자와 이상향의 분리와 거리감이 일정 부분 해소되고 합일된다. 白 鹿 潭 에서 조찰한 의 의미는 명징한 여름 낮 의 정신세계 로 요약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이 명징성으로 인해 한라산 등반 여정에서 마주치는 자연 대상을 보다 가깝게 관찰할 수 있다. 1연에 서 8연에 이르는 등반 과정에서 시적 화자는 여러 자연물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면서 갈등을 표출한다. 마지막 9연에 이르러 시적 화자는 마침내 白 鹿 潭 조찰한 물 에 도달한다. 長 壽 山 1 에서는 시적 화자와 늙은 사 나히 가 철저히 분리된 반면에, 白 鹿 潭 의 마지막 연에 오면 시적 화자는 그토록 동경하던 白 鹿 潭 이라는 자연 대상과 하나가 된다. 이제 白 鹿 潭 은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다. 그러나 시인이 동경하던 조찰한 대상과 잠시 하나가 됐음에도 외롬 이나 시름 이나 쓸쓸함 과 같은 정서는 계속 해서 남는다. 조찰한 대상과의 하나됨은 정지용이 전통적 고전주의를 통 해 지향하던 완결된 조화로움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수척한 광경을 이루고 있다. 좇겨 온 실구름 一 抹 가 白 鹿 潭 을 흐리우 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27 좇겨 왔다는 표현은 이 가냘픈 실구름 한 조각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 제로 밀려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실구름이 시적 화자의 얼굴에 포개어 진 白 鹿 潭 을 흐리우는 것은 長 壽 山 1 에서 시적 화자를 겨울밤 내내 흔들리우 게 하는 시름 과 동일한 것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정지용은 결 국 자아와 자연이 합일을 이루어 沒 我 의 정신적 경지에 가 닿는데 실패한 다. 이는 그가 후기 산수시를 통해 이루려 했던 고전적 은일의 정신으로의 초월이 실패한 기획이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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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韓 民 族 語 文 學 第 65 輯 Abstract A Study for Meaning Change of Jung ji-yong's Poetic Word 'Jochalhan' Bae, Ho-Nam This Thesis focused on a poetic word of Jung Ji-yong 'Jochalhan(조찰 한)'-included 'Jochalhi(조찰히)'as the adverb form of 'Jochalhan'- and how this word's meaning changed in Jung Ji-yong's 4 poems ; Champion Andrea Kim, Onjung, Jangsusan 1, Baekrokdam. Because of heavy volume of academic studies for Jung Ji-yong's poetry, a study of specific poetic word as microscopic study is necessary in recently. The first poem which the poetic word 'Jochalhan' in is Champion Andrea Kim. In this poem, 'Jochalhan' represents 'the spirit of religious purity'. Jung Ji-yong's poems so called 'religious poems' had a weakness as ideal and conceptional poems, and Champion Andrea Kim is also one of them. However, after Champion Andrea Kim Jung Ji-yong had left this weakness and developed other meanings of the poetic word 'Jochalhan'. The second and Third poems which the poetic word 'Jochalhan' in are Onjung and Jangsusan 1. In These poems, 'Jochalhan' represents 'the spirit of cold and dark winter night'. The circumstance as a winter night was the very hard time for Jung Ji-yong himself because it was Japanese Imperial colonial period in Korean history. The forth and last poem which the poetic word 'Jochalhan' in is Baekrokdam. In this poem 'Jochalhan' represents 'the spirit of clean and hot summer day'. At this poem Jung Ji-yong finally reached a peaceful state of mind that he had always wanted. But even in this poem he failed to gain a harmony between his consciousness and the circumstances of Japanese Imperial colonial period surrounding him.
정지용의 시어 조찰한 의 의미 변화 연구 631 Key Word : Jung Ji-yong, Jochalhan(조찰한), Jochalhi(조찰히), Champion Andrea Kim, Onjung, Jangsusan 1, Baekrokdam. 배호남 소속 :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주소 : (139-053) 서울시 노원구 월계3동 건양노블레스A 1905호 전화번호 : 061-450-1827 / 010-2423-3476 전자우편 : ontheroad56@naver.com 이 논문은 2013년 11월 15일 투고되어 2013년 12월 6일까지 심사 완료하여 2013년 12월 10일 게재 확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