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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스포츠의 관점에서 본 화랑과 기사의 신체활동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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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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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I. 경기부양을 위한 지방채 발행 년 2월 국무원에서 발표한 2009년 지방정부 채권 발행에 관한 보고 에 따라 지방채 발행이 초읽기에 들어감 -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시행될 2009년 지방채 발행 규모는 2,000억 위안에 달할 전망이며, 지방채로 조달된

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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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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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제주 일상생활 연구 양 진 건 제주대학교 교수 Ⅰ. 서론 Ⅱ. 제주도에서의 일상생활 Ⅲ. 결 론 161

추사 김정희의 제주 일상생활 연구 양 진 건 제주대학교 교수 Ⅰ. 서론 추사의 제주도에서의 일상생활은 헌종 임금과 제자 허련과의 대화에 서 잠작할 수 있다. 헌종 임금이 먼저 추사의 귀양살이에 대해 물었다. 이에 허련은 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전한다. 김추사의 귀양살이는 어떠하던가? 하시기에 이렇게 대답했습 니다. 그것은 소신이 목격했사오니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 겠습니까? 위리 안의 벽에는 도배 하지 않은 방에 북창을 향해 꿇어 앉아 정( 丁 )자 모양으로 좌장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마음 놓고 편히 자지도 못하며 밤에도 늘 등잔불을 끄지 않습니다. 숨이 163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이 됩니다. 1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허련의 말은 과장이 다. 실인즉 제주도에서 힘들게 지내기는 했지만 추사는 장수를 하였다. 허련의 과장에는 스승을 어떻게든 제주도에서 구해내 보려는 속내가 담겨 있다. 계속하여 헌종 임금은 추사의 먹는 것에 대해서도 물었다. 먹는 것은 어떠한가?, 생선 등속이 없지 않사오나 비린내가 위 를 상하게 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혹 멀리 본가에서 반찬을 보내옵죠 만 모두 너무 짜서 오래 두고 비위 맞출 수는 없습니다. 2 허련의 대답처럼 추사는 바다 고기의 비린내를 싫어하여 여러 가지 반찬을 부인이 따로 보내주면 먹었다. 추사의 하루를 물어오자 아이들 을 가르치며 적막한 유배생활을 견뎌내는 모습을 전한다.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는가?, 마을 아이들이 서넛 와서 배우므 로 글씨도 가르쳐 줍니다. 만일 이런 것도 없으면 너무 적막하여 견 디지 못할 것입니다. 3 1. 小 癡 實 錄, 問 曰 金 秋 史 居 停 凡 如 何 耶 曰 此 小 臣 之 目 擊 敢 不 詳 陳 圍 籬 之 內 壁 無 塗 長 跪 向 北 以 丁 羕 小 木 支 軀 晝 夜 寐 從 以 夜 不 滅 燈 奄 奄 氣 息 似 可 朝 難 保 矣 2. 小 癡 實 錄, 且 曰 所 食 何 如 耶 對 曰 魚 鰒 之 類 不 無 矣 厭 腥 敗 胃 㦯 家 來 皆 太 醎 不 能 乆 供 安 胃 矣 3. 小 癡 實 錄, 問 曰 金 秋 史 居 停 凡 如 何 耶 曰 此 小 臣 之 目 擊 敢 不 詳 陳 圍 籬 之 內 壁 無 塗 長 跪 向 北 以 丁 羕 小 木 支 軀 晝 夜 寐 從 以 夜 不 滅 燈 奄 奄 氣 息 似 可 朝 難 保 矣 且 曰 所 食 何 如 耶 對 曰 魚 鰒 之 類 不 無 矣 厭 腥 敗 胃 㦯 家 來 皆 太 醎 不 能 乆 供 安 胃 矣 且 日 遣 日 維 何 對 曰 村 童 數 軰 來 學 㦯 敎 以 書 敎 以 字 無 此 太 寂 不 也 且 問 曰 濟 州 風 土 民 物 何 如 耶 對 曰 山 野 草 木 人 物 居 室 耕 鑿 的 是 異 域 苦 非 聖 化 攸 及 難 治 㦲 164 유배연구논총

마을 아이들이 서넛 와서 배운다는 말도 역시 과장이다. 비록 제주도 귀양살이 신세였지만 배움을 위해 추사를 찾아온 사람은 육지에서는 물론 제주도 내에서도 많았다. 적막한 귀양살이를 강조하기 위한 대답 일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추사의 제주도에서의 일상생활의 면모를 밝혀보 고자 한다. 이를 밝힘으로써 추사의 유배생활은 물론 조선조 유배인들 의 생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유배라는 것이 비록 참담한 격리 장치이기는 하지만 정작 들여다보면 매우 여유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함께 함을 알 수 있어 유배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 각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본고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Ⅱ 제주도에서의 일상생활 1. 잦은 질병 제주도에서 추사는 잦은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한다. 추사는 눈 병 다리 병이 한결같은 데다 또 소화불량증까지 더하니 백 천 가지가 맵고 쓰곤 하여 갈수록 더욱 견뎌낼 수 없다오. 4 라며 눈병, 다리의 병, 소화불량증 등을 호소했다. 환갑에 가까운 몸으로 제주도에서 적응하 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침과 혈담으로 고생을 했고 특히 눈 4.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四, 與 張 兵 使, 其 九, 累 狀 苦 無 勝 相 眼 疾 脚 疾 一 如 又 添 阻 胃 百 辛 千 蓼 去 益 無 以 抵 得 耳 適 因 李 君 之 去 有 此 暫 申 李 是 此 行 入 海 初 初 遇 之 人 而 于 今 九 年 凡 百 巨 鎻 皆 與 之 關 涉 窮 途 之 一 善 緣 165

의 아픔을 호소했다. 가래 기침이 크게 더쳐서 그 기침이 급하여 기가 통하지 않을 때는 혈담까지 아울러 나오는데, 이는 모두 장습이 빌미가 된 것이네. 게 다가 수천도 좋지 않아 답답한 기운이 뱃속에 가득 차서 풀리지 않 고, 눈이 어른어른한 증세도 더하기만 하고 줄지는 않네. 5 특히 눈이 자주 아팠던 관계로 근래에는 안질이 더욱 심해짐으로 인하여 도저히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쓸 수가 없다 6 고 했다. 이런 이유 로 추사는 직접 안질조치대법( 眼 疾 調 治 大 法 ) 을 남겼다. 안질의 증상 과 원인, 치료법 등을 항목별로 자세히 설명한 글이다. 얼마나 눈이 불 편했으면 이런 치료법을 본인이 직접 썼을 것인지 짐작이 간다. 그 세부목록을 보면 안병소인( 眼 病 所 因 ), 안병무한( 眼 病 無 寒 ), 안무 화불병( 眼 無 火 不 病 ), 내장( 內 障 ), 가미사물탕( 加 味 四 物 湯 ), 자신명목탕 ( 滋 腎 明 目 湯 ), 충화양위탕( 沖 和 養 胃 湯 ), 양간원( 羊 肝 元 ), 정전양간원( 正 傳 羊 肝 元 ), 속방( 俗 方 ), 석결명과법( 石 決 明 裹 法 )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석결명과법( 石 決 明 裹 法 )은 제주도와 관련이 깊다. 석결명 이란 전복을 말하며 예로부터 약재로 쓰였다. 전복 살은 맛이 짜고 성 질은 서늘한데 눈을 썩 잘 밝게 하고 껍질로는 예막을 삭힌다. 7 고 하였 5.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二, 與 舍 季, 其 五, 吾 狀 一 如 前 邈 樣 而 痰 嗽 大 爲 添 劇 其 嗽 急 氣 不 旋 之 時 血 症 幷 發 無 非 瘴 濕 爲 崇 水 泉 不 佳 積 欝 痞 滿 不 散 眼 花 有 加 無 减 春 瘴 又 早 作 不 能 耐 瘴 較 益 甚 焉 恐 無 以 支 吾 矣 6.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二, 與 舍 季, 其 七, 近 因 眼 花 轉 㞃 萬 無 由 執 管 臨 池 王 靈 攸 曁 費 得 十 五 六 日 工 力 厪 得 寫 就 扁 三 卷 三 而 餘 外 二 卷 以 若 花 翳 萬 萬 無 續 寫 之 道 未 免 還 爲 呈 納 據 棠 陳 白 於 吳 君 書 中 極 知 萬 萬 悚 凜 而 不 可 以 强 所 不 可 强 亦 以 此 狀 另 及 於 吳 圭 一 爲 好 7. 黃 度 淵, 方 藥 合 編, 石 決 明 肉 鹹 凉 劑 最 能 明 目 殼 消 166 유배연구논총

다. 예막이란 눈에 끼는 백태를 말하는데 이를 없애기 위해 전복 껍질 을 밀가루 반죽에 싸서 잿불에 묻어 구워 익혀 쓰거나, 소금물에 삶아 서 보드랍게 가루 내어 쓴다고 했다. 추사는 아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심지어 며느리에게 조차 나 구챵으로 오 신고 니 민망 다 겨오 그린다 8 고 호소할 정 도였다. 과로를 했을 때 입안이 헤어지고 혓바늘이 돋기도 하고 입술 주위에 물집이 잡히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창이다. 그런가하면 담 체로도 고생했다. 추사를 많이 도와주었던 제주목사 장인식에게 이를 호소했다. 누인의 병은 그 사이에 또 담체가 더치어 수십 일 동안을 크게 앓 고도 상기 위가 막혀 먹지를 못할뿐더러 신기가 전혀 수습되지 않으 니 답답하외다. 9 피풍도 심했다. 피풍이란 피부에 발진 없이 심한 가려움증이 있는 이 른바 피부소양증이다. 추사는 노인성 피부소양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 다. 피풍으로 가려움이 심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나 아직 모양이오나 피풍으로 소양이 지금가지 낫지 못 아 밤을 양 새와 나오니, 갓득 변변치 아니 잠을 더고나 못 자고 실 8.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343. 9.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四, 與 張 兵 使, 其 十 五, 累 病 間 又 痰 滯 添 頓 十 數 日 大 疼 尙 此 阻 胃 不 喫 神 氣 全 不 收 拾 悶 然 167

노 어렵 오나 식음범 은 별노 못 지 아니 오니 견디여 가 10 2. 잦은 질병에 대한 대비 1) 상비약 이렇게 아프다보니 당연히 상비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사 는 부인에게 건위제로 이용되는 계피와 진해, 이뇨 및 강장제로 애용되 는 천문동을 보내달라고 하고 수수엿도 요구했다. 그런데 요청한 것 가 운데 귤껍질도 있다. 슈슈엿슬 고아 보내게 되 너흘 약 을 어더 너허 고오개. 합 이량 계피 삼전, 쳔문동 이량 귤피 삼전을 셔울 구 야 오. 길경 일량 우세말 당일두 조화 재오 11 백자 즉 잣과 호두, 그리고 곶감 등을 보내달라고 했다. 잣, 호두 등 의 견과류는 건강식품이자 중요한 기호식품이었기 때문에 곶감과 함께 추사가 제주도에서 즐겼다. 평소 잘 먹고 잘 살던 추사의 입버릇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와 호도가 여긔 업 거시오니 어더 보내개 고, 죠흔 10.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302. 11.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304. 168 유배연구논총

곳감이 거긔셔 엇기 어렵지 아니 올 듯 오니 편의 오졉 어 더 보내야 쥬. 쇼의 양 구급이 되기 이리 긔별 오며 부치 개. 12 2) 인삼의 장복 추사가 특히 장복했던 것은 인삼이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다만 인삼을 배추나 무 씹듯이 할 뿐이오. 13 라고 했다. 그러가하면 엿냥의 인삼을 두 사발씩이나 마시며 14 라고도 했으니 그 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엿 냥쭝의 인삼을 시험 삼아 복용한 것이 이미 오륙근이 넘었 답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또한 그 힘인지 모르겠습니다. 제8신 15 추사에게 이런 인삼의 힘을 제공해준 사람은 식구 외에 친구 권돈인 이 있었다. 실낱같은 목숨을 연장시켜준 그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이 애 절하다. 보내주신 인삼에 대해서는 주는 대로 사양치 않고 받아서 마치 나 12.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p.294~295. 13.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五, 與 草 衣, 其 十 三, 此 中 頑 恙 一 味 作 苦 但 喫 三 稏 如 菘 菔 而 己 14.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四, 與 張 兵 使, 其 十 六, 六 兩 蔘 二 椀 尙 待 人 而 臥 起 15. 瀛 海 朶 雲 帖, 第 八 信, 賤 今 己 五 十 日 如 止 水 之 不 進 日 試 六 兩 重 蔘 己 爲 五 六 斤 之 多 至 今 支 拄 而 來 者 亦 其 力 耶 169

에게 본디 있는 것처럼 복용하고 있으니 이 어떤 공덕입니까? 만일 지난번에 주신 것으로 바싹 마른 창자를 적셔주지 않았더라면 이 실낱 같은 완둔한 목숨을 지금까지 연장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에 그 것이 떨어졌는데, 또 계속하여 대주시는 성대한 은덕으로 끊임없이 감 로수를 정수리에 부어주심을 입으니, 우러러 감사할 뿐입니다 16 권돈인은 인삼 외에도 담배도 보내주었는데 담배를 풍토병인 습하고 더운 땅에서 나온 독기를 막는 약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인삼과 연초를 연해서 많이 내려주시므로 우러러 높으신 비 호에 의탁하여 인삼은 먹어서 원기룰 보충하고 연초는 피워서 장기를 막게 되었으니, 더없이 머리 들어 사례하는 바입니다. 17 친구인 권돈인 외에도 제주목사 장인식도 가까이서 추사에게 인삼을 제공해 준 인물이었다.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제주목사가 여섯 명 이나 갈렸는데 장인식은 이 가운데 마지막 목사로서 추사에게 인삼을 제공하는 등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약과 인삼을 아울러 염려해주시니 어찌 천만 번 감사하지 않으리까. 안질이 근자에 더하여 간신히 적으니 글자가 되지 않는구려. 나머지는 16.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三, 與 權 彝 齋, 其 十 五, 下 送 靈 稏 有 頒 不 辭 若 固 有 之 是 何 功 德 如 非 前 貺 之 沾 槁 潤 乾 無 以 延 此 一 縷 之 頑 17.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三, 與 權 彝 齋, 其 六, 况 三 稏 鼻 烟 連 蒙 便 蕃 之 貺 仰 託 崇 庇 服 之 以 補 元 嗅 之 以 禦 瘴 到 底 翹 謝 170 유배연구논총

뒤로 미루고 갖추지 못하외다. 18 이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추사는 인삼을 복용하면서 병치레를 견디어 낸다. 현재의 병은 지금 오십 일이 되어 가는데 날로 엿 냥의 인삼을 두 사 발씩이나 마시며 오히려 부축을 받아서 눕고 일어나곤 하고 삶은 밥도 쾌히 씹지를 못하는 형편이니 이울어지는 볕은 돌아오기 쉽지 않음이 마침내 이러한 것인지요. 19 해린척소 의 1845년 1월로 추정되는 장요손의 편지에도 김정희 가 먹은 인삼에 대해 자세히 알려 달라 는 내용이 있던 점으로 미루어 조선 인삼의 가치와 추사의 인삼을 이용한 건강관리는 청나라까지 입 소문을 탔던 것이다. 3) 단전호흡 그리고 허련이 그린 초상화 해천일립상 을 보면 추사는 왼손으로 수염을 어루만지고 오른손으로는 배꼽 근처를 움켜쥐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연단도인의 몸짓이라고 하는데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하 18.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四, 與 張 兵 使, 其 五, 藥 稏 之 並 及 到 底 念 注 安 得 不 篆 感 萬 千 餘 眼 花 比 添 艱 草 不 成 字 姑 不 備 狀 19.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四, 與 張 兵 使, 其 十 六, 見 病 今 將 五 十 日 而 日 喫 六 兩 蔘 二 椀 尙 待 人 而 臥 起 不 能 夬 嚼 煮 飯 頹 景 之 不 易 回 乃 如 是 耶 171

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추사가 호소하는 여러 가지 질환들은 생사여탈을 결정짓는 치 명적인 병이기 보다는 잔병들이다. 이런 잔병 치례를 하면서도 추사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삼이나 단전 훈련의 덕이 컸을 것이다. 추사가 인삼 장복이나 단전 훈련을 지속적으로 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이유는 아버지를 제외한 저의 모든 식구들이 단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 래서 아버지는 물론이고 추사 역시 건강관리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을 것이며 그 덕에 부자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 다. 그래서인지 단전에 대한 추사의 지식이 매우 해박하다. 여기서도 특 유의 박학 정신과 함께 건강관리를 위한 노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양생가들이 심신과 신신으로써 비( 脾 )의 곳에 어울리게 하는데 그곳 을 황정이라 일러 약간은 배꼽과 더불어 서로 마주하며 황정 아래에 관 이 있어 대략은 위장의 교관과 더불어 서로 마주한다. 여간의 칠문에 이 문이 가장 중요하여 숨을 내쉬면 관이 열려 심기가 신과 통하고 들 이쉬면 관이 닫기어 신기는 심에 달한다. 이곳이 개합과 호흡이 골라지 면 온 몸의 관절이 조화되지 않는 곳이 없다. 관 아래 단전이 있어 이를 정해라 이르는데 신선가들이 흔히 심 신으로써 어울리게 한다. 20 20.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七, 書 示 金 君 奭 準, 大 抵 人 身 鼻 受 天 氣 自 嚨 喉 而 降 下 通 前 陰 共 有 七 門 日 受 水 穀 自 嚨 喉 而 降 下 通 後 陰 養 生 家 以 心 神 賢 神 交 於 脾 地 其 地 謂 之 黃 庭 略 與 臍 相 對 黃 庭 下 有 關 略 與 胃 腸 之 交 關 相 對 廬 間 七 門 此 門 最 要 呼 則 關 開 而 心 氣 通 於 腎 噏 則 關 闔 而 腎 氣 達 於 心 此 處 開 闔 呼 噏 調 而 通 身 關 節 無 有 不 調 矣 關 下 有 丹 田 是 謂 精 海 神 仙 家 多 以 心 腎 交 172 유배연구논총

3. 다도생활 추사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삼과 단전훈련 외에도 차를 좋아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추사는 제주도에서 설사병을 차로 고치기도 했 고 본인 스스로 차 덕에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미천한 사람은 그 사이 갑작스런 설사병에 걸려 몸의 기운이 몽땅 탈 진되었으니 세상살이의 고통이 마침내 이런 것인가 하오. 다행히 차의 힘으로 말미암아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으니 21 추사의 차에 대한 높은 안목은 옹방강과 완원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북경에 갔을 때 완원의 서재인 쌍비관에서 승 설차를 맛본 후 차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 勝 雪 道 人 )이라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축척된 추사의 차 에 대한 식견과 경지는 후일 다성( 茶 聖 )이라고 불리게 되는 초의의 제 다법을 완성하는데 실제적인 조언을 가능케 하였다. 사실 초의는 추사와의 교유를 통해 청나라 문물에 대한 안목을 확장 할 수 있었고 신학문인 고증학이나 실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북학파 경화사족과 교유를 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차의 애 호층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초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추사였던 것이다. 21.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五, 與 草 衣, 其 三 十 七, 賤 間 經 㬥 寫 眞 元 敓 下 世 趣 之 苦 乃 如 是 耶 幸 因 茗 力 得 延 煖 觸 173

추사는 말차를 끓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나라 육우의 다경을 보고 끓는 물에 말차를 넣어 휘저은 다유를 흰 꽃에 비유하였고, 손수 끓인 뇌협차를 초의와 함께 마셨다. 추사는 완당 외에 다로( 茶 老 ), 고 정실주인( 古 鼎 室 主 人 ), 승설차의 이름을 본딴 승설도인 등 차와 관련한 아호를 많이 가졌었다. 추사는 차를 구하기 어려운 귀양살이 동안에도 손수 덖은 차를 보내 준 초의 덕에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초의에게 해마다 차를 얻어 마셨지 만 그럼에도 추사의 갈증은 대단했다. 원래 서신은 역시 차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차를 구하 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스님도 아는 바입니다. 스님이 스스로 법제한 차는 당연히 연례로 하는 일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절에 서 만든 소단을 3, 40편쯤 조금 좋은 것을 가려서 보내주시기를 간절 히 바랍니다. 22 추사가 대흥사 사중에서 만든 단차 중에서 품질이 좋은 소단차 30, 40편을 골라서 보내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흥사에서 소단차를 만들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차( 團 茶 )란 차의 가루를 뭉쳐 만든 덩이차를 말하는데 다산 정약용도 여린 찻잎으로는 잎차를 만들고 늦게 딴 찻잎 으로는 단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재 제주도에는 녹차 재배단지가 여러 군데 있지만 그 역사는 오래 22. 瀛 海 朶 雲 帖, 第 六 信, 原 書 亦 以 茶 懇 矣 此 中 茶 事 甚 艱 師 所 知 耳 師 之 自 製 法 茶 當 有 年 例 不 必 更 言 寺 中 所 造 小 團 三 四 十 斤 稍 揀 其 佳 惠 及 切 企 174 유배연구논총

되지 않았다. 이곳은 차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라는 추사의 지적 처럼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도에서 차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의 차 문화는 추사와 초의 덕분에 소개되기 시작했 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조선후기 유배인 김윤식 이 유배인들과 제주도 지식인들과 조 직했던 귤림 이라는 시회( 詩 會 ) 활동 등에서 제주도의 차문화가 본격 적으로 성숙되기는 했지만 당대의 척박한 제주도의 환경 탓에 여전히 한정된 몇 사람만이 향유하는 고급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차에 대한 추 사의 탐닉은 편지 곳곳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며 도무지 먼 사람 생각은 아니하는 건가. 삼십대의 봉( 棒 )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 구료. 23 추사의 차에 대한 재촉은 30대의 봉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료. 라 는 구절에서 보듯 매우 익살스럽다. 추사가 초의가 차품을 완성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초의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친교의 깊이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차에 대한 갈증임과 동시에 농담을 건네받을 수 있는 우정의 과시였다. 그런데 추사는 하필 왜 이 런 농담을 했을까? 알다시피 추사는 안동김씨 측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6차례에 걸친 혹 23.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五, 與 草 衣, 其 三 十 二, 六 茶 可 以 霑 此 渴 肺 但 太 畧 又 與 熏 衲 曾 有 茶 約 丁 寧 不 以 一 搶 一 旂 相 及 可 歎 須 轉 致 此 意 搜 其 茶 篋 以 送 於 春 裭 (?) 爲 好 爲 好 艱 草 便 忙 不 式 新 茶 何 以 獨 喫 於 石 泉 松 風 之 間 了 不 作 遠 想 耶 可 以 痛 棒 三 十 矣 175

독한 고문을 당하고 36대의 곤장을 맞고는 망신창이 몸으로 죽음 직전 에 제주도에 유배를 온 사람이다. 혹시 36대의 곤장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친구에게 30대의 봉을 농담으로 건네 본 것이 아닐까? 어떻든 그것은 우정의 농담이었다. 이렇게 차를 매개로 그들의 우정은 익어갔 다. 나는 스님이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 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 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 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24 이런 깊은 우정이기에 차를 받고 답으로 일로향실 과 같은 걸작의 편액글씨를 써줄 수 있었다. 4. 한글편지쓰기 추사는 누구보다도 많은 편지를 썼다. 마치 편지를 쓰기 위해 일생을 보냈다고 할 만큼 많이 썼다. 특이한 것은 그가 당대 최고의 한문지식 인이었음에도 불구, 한글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추사의 한 글편지는 34통이 발굴, 정리되었으며 그 중 15통은 제주도에서 써진 24.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五, 與 草 衣, 其 三 十 四, 吾 則 不 欲 見 師 亦 不 欲 見 師 書 唯 於 茶 緣 不 忍 斷 除 不 能 破 壞 又 此 促 茶 進 不 必 書 只 以 兩 年 積 逋 並 輸 無 更 遲 悞 可 也 176 유배연구논총

것이다. 아버지의 제삿날을 유배지에서 맞는 비통한 심회가 적나라하게 표백 되어 있는 편지가 우선 눈길을 끈다. 제사에 참례하지 못한 원통함이 하늘과 땅에 사무치고, 너무나 억울하여 죽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 처 지를 두고 나 샤라잇다 올 길이 업다 고 하여 그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달 회일 졔사 지나오시니 쳘쳔쳘지 망극지통 더욱 원통운 박 야 즉지의 죽어 모르고 시브오니. 고금쳔하의 샤 의 정니 광경 이 어 잇 을잇가.(중략) 나 샤라잇다 올 길이 업. 25 비단 아버지만이 아니라 양부의 제사에도 참례하지 못하여서 원통함 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여름철에 제사 음식 장만하는 일 에 대해 걱정을 표시하고 있다. 초 의 년 와 신날과 졔 지내오시니 외오셔 망극지통 더욱 원박 고 졔 엇지나 야 지네와. 잇 의 향듕은 더옥 졔품 이 무론 어육 과품 고 다 어려올 듯 오니, 그런 각을 올수록 더옥 죄롭기 측냥 야 이를 길이 업. 26 종손으로서 추사는 후사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사는 적 25.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1. 26.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5. 177

자가 없어 제주도에 유배된 다음 해에 12촌 태희의 아들 상무( 商 懋 )를 입양하였다. 이를 기뻐하는 편지도 보인다. 양자를 들이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조상이 도우신 것이며 하늘이 힘쓴 덕택이라 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양아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다고 하면서도 기꺼워하는 모습이 선하다. 기뻐하는 모습 에서 추사의 부인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후사에 대한 추사의 그 동안의 걱정을 짐작할 수 있다. 아 을 완졍 와 죵됴 의탁이 되 고, 우리가 근뉵십의 부모 말을 드르니 문호의 이런 경 어 잇. 아직 보지 못 야 오나 보나 답지 아니 개 듯 고, 이리 궁박히 된 이런 대 가 슌셩 옵고, 일 무비됴선이 음우 오시고 쳔심이 회화 오시 일갓 와, 더욱 일변 견츅 고 일변 긍구 와 가지로 안 잇지 못 일 섭섭 오나, 이런 졍은 오히려 둘재 올쇼이다. 27 이렇게 귀하게 입양한 양자 상무가 추사를 상면하러 제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극구 만류한다. 부 간 잇 가지 못 보오나 인졍이 뎡 어 렵 오나 오히려 둘재의 일 이라고 하고 있다. 아무리 부자간의 의리가 중하다 하지만 조상의 중한 것에 비하면 하 잘 것 없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생겨 혹 후사가 끊기는 일이라도 없을까 추사의 염려가 대단하다. 27.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7. 178 유배연구논총

아 두고 볼 록 샤 되오미 가쟝 긔특 온가 보오니 일문의 다 고, 게셔가 만 의 효양을 바드랴 그러 온가 이리 츅슈 오며. 부자간 잇 가지 못보오니 인졍이 뎡 어렵 오나 오히려 둘재 의 일이오며, 제가 와셔 보랴 다 오니 졍니의 고히치 아니 오 나 녀을 엇지 경경이 올가 보. 즉금 우리가 슈지년의 겨요 져을 어더 노코 천금만금가치 어로고 고이 져을 엇지 여긔 드려보 며 엇지 드러오개 보 개. 졔 몸이 즁난 기 우리 두 샤 만 가지고 올 식이올잇가. 28 추사는 입양한 아들 상무의 각정식( 各 鼎 食 )을 만류한다. 각정식이란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식사는 같이 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선비의 법도에 어긋난 다고 본 것이다. 아들 부부가 부모와 따로 기거하게 하기 위해 방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나, 각정식 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동의 편지의 놈이 내외을 로 내여 각뎡식을 쟈 야 오나, 방 변통 로 내기 못 일리 업스나 아직 각뎡식은 부질업 올 듯 오니, 엇지 야 이리 긔별 말 이 지 므슨 긔미 조짐을 보 고 그리 온 일이압. 의 가 츨. 더고나 그러쇼록 그쳐로 버릇 길 업 니 방 음기되 각뎡은 아직 부질 업 29 28.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8. 29.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305. 179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대해 물으면서, 그 모든 것이 가르치기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는 편지도 있다. 물론 운도 작용하기는 하나 사람의 힘을 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가르치기에 달려 있다는 추사의 교 육적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며 리 그 이 다려 와 온 듯 오니 집모양 죠곰 일워 의뢰가 히 되 가 이리 축슈 올 이며, 범 을 보오니 과연 엇더. 도모지 인도 야 가르치기의 잇 오니 거셔 혼 츄슈러 가시 일 오쟉 심녁이 쓰이. 도모지 문운이련이와 인녁을 엇지 아니 드리 올가 보 30 그런가하면 부인에게 적소의 사정과 정리되지 않은 심사를 전하고 있 다. 적거지가 그런대로 살기에 괜찮았던 모양이며 자신의 처지에 과하 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초일일 대졍 쇼의 오오니 집은 넉넉히 용신 올 만 을 어더 간방의 마로 잇고 집이 졍 야 별노 도 도 것 업시 드러 오 니 오히려 과 온 듯. 먹음 아직은 가지고 온 반찬이 잇 오니 엇지 견 여 가올거시요, 복이 쇼산이오니 글노 견 듯. 쇠고기 절귀 오나 혹 가다가 어더 먹을 도리도 잇 가 30.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300. 180 유배연구논총

. 아직은 두셔 졍치 못 오니 엇더 줄 모 개. 31 그렇지만 추사는 권문세가에서 태어나 넉넉한 생활을 했던 습관이 여 전하다. 부인에게 음식과 의복 등을 부쳐 달라는 편지 내용이 많다는 점은 그런 단면을 보여준다. 제주에 유배된 이듬해인 헌종7년(1841)에 보낸 편지에는 부인이 보 내온 반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 음식을 보 낼 때에 주의할 것을 세심하게 적고 있다. 이번의 보내오신 물은 여슈이 와. 민셕어의 약간 두샹잇 오 나 못먹개 되지 아니 와, 병구의 죠곰 개위가 되오며 어란도 셩히 와셔 히 입맛시 붓치오니 다힝. 이번의 온 진샹이 집의 것시. 죵시 쇼곰 맛시 과 야 쓴 맛이 나고 단맛시 업 오니, 그젼은 쟝이면 쟝으로 만근 것시 다 그러 야 먹을 길이 어렵 오니, 셔울도 그 말 야 거이와 죠끔 단맛 잇는 지령을 살지라도 죠곰 어더 보내 개. 32 반찬투정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추사는 이미 자신의 생활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비치고 있다. 편지 내용 속에 짐 라는 말이 나오 는데 다른 편지에는 비슷한 표현으로 침채 라는 말도 나온다. 31.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00. 32.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5. 181

약식 인졀미가 앗갑.. 슈이 와도 셩이 오기 어려온 일곱 달 만 의도 오고 쉬어야 두어 달 만의 오 난 거시엇지 셩히 올가 보. 셔 울셔 보낸 침채 원악 염을 과히 거시라 변미 야시나 그려도 침채의 쥬린 입이라 견 여 먹어. 33 짐 또는 침채는 어떤 음식일까? 소금을 많이 친 것이라 는 구절 로 반찬임을 알 수 있고 침채에 주린 입이라 는 구절로 늘 먹는 일상 음식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침채. 한자로 쓰면 침채( 浸 菜 ) 이다. 즉 채소를 절였다는 뜻이 되는데, 지금의 김치 이다. 우리나라의 김치 역사는 길지만 오늘날 주로 먹는 배추김치의 역사 는 짧다. 19세기 중반에야 통배추에 마늘과 고추로 양념한 배추김치가 본격 등장했던 것이다. 침채 는 이후 짐채 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짐치 로 되었다가 김치 라는 음으로 굳어졌다. 당시 배추김치를 먹는다는 것은 서민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배추김치는 왕족과 부호들만 먹는 고가의 첨단식 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추사가 제주도에서 먹던 침채 는 왕실김치의 일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민셕어의 약간 두샹잇 오나 못먹개 되지 아니 와 라는 편지 구 절에서 보이는 민석어는 추사가 매우 좋아 했던 생선으로 보인다. 추사 가 해배되어 제주도를 떠날 때 짐을 꾸리고 4기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맨 나중 물목 끝에는 민석어 봉지 하나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예산 33.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1. 182 유배연구논총

에서 온 것이기에 라고 적혀있다. 추사는 부인이 서울에서 보내온 반찬이 자신의 분에 넘침을 토로하고 있다. 물론 보내온 반찬들이 그가 질병에 시달려 보신하기 위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유배지의 생활에서는 과하다는 느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생활에 점차 추사가 적응하고 있음 을 보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의복에 관한 것으로 더 욱 잘 나타난다. 편의 글월은 보 고 보 오신 찬뉴들은 슈대로 시 밧다 긔별 신 로 먹 오니, 셔울 맛시라 비위가 열니오나 이러 개 야다 가 니밧긔셔 구복을 위 야 일이 도로혀 어분의 과. 34 명주옷은 보내지 말고 무명옷을 보내라는 사연을 통해서 추사의 생활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주옷을 입는다는 것은 유 배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아 내내 마음에 걸리다가, 무명옷을 입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얘기한다. 그가 유배 생활 1년여 사이에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생활환경에 적응하려는 추사가 쉬 이해된다. 바지는 무명것 고쳐 보내고 명지바지 보내지 마. 여긔 토쥬바 지 나 잇 것 죠곰 둑겁기 입지 아니 고 아직 두어. 두루마 34.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7. 183

기나 둘다 고쳐 보내. 무연 두루막이가 롭지 아니 오니 샹량 야. 35 추사는 순조6년(1806), 21세에 한산이씨의 상을 당하여 23세에 부인 예안이씨와 재혼을 했다. 그 부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발굴된 34통의 한글편지 중 32통이 예안이씨에게 보낸 것이다. 추사의 부인에 대한 애정은 제주에서 보낸 편지에 한층 뚜렷하다. 유배된 이듬해, 56세 때 쓴 것으로 부인의 병에 대한 측량할 길 없는 염려를 보이고 있다. 나았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들었으나 그것을 믿지 못하여 거듭 확인하려는 추사의 마음이 애처롭다. 거셔도 년 여 관겨치 아니 오시. 나앗도다 여 겨오시나 나 으실 이가 잇. 진졍 나으시면 원외의셔 이 위로되오량마 그 러 이가 업 올 듯 오이다. 36 유배되어 3년 되는 해에 보낸 것으로 부인에 대한 염려, 자애가 더욱 뚜렷이 드러나 있다. 부인 역시 노경이라 한번 병을 앓게 되면 쾌유될 길이 없음을 얘기하면서 게 몸으로만 아지 마오시고 이쳔리외의 잇 마음을 각 오셔 십분 신셥 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렇듯 노경에 이른 추사의 부인에 대한 자애가 어떠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5.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3. 36.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2. 184 유배연구논총

그대 병을 지내오시고 요 이야 져기 쇼셩이 되오신가 보오나 여 슈가 죵시 복지 못 오신가 보오니, 게셔도 쇠경이라 번 병 드오 시면 본 적샹적 오신 근녁의 오작 오시랴 이러 동동 념녀 못 내 노흘 걸업 졈졈 츈화 고 인편 후 달이나 너머 오니 범 졀 엇더 오시. 부 게 몸으로만 아지 마오시고 이쳔 리외의 잇 마음을 각 오셔 십분 신셥 야 가오시기 바라오며(하략). 37 애지중지 하던 부인 예안이씨는 헌종8년(1842) 11월 13일 죽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추사는 부인의 사후 하루 뒤, 사후 5일 뒤에도 편 지를 보낸다. 두 편지 모두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부인에 대한 걱정으 로 채워져 있다. 부인의 복용하는 약, 음식과 잠자리 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 다. 위의 편지가 애절한 것은 모두 부인이 죽은 것도 모르고 부인의 생 일이 가까워 오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광경을 멀리서 생각하는 내용 때문이다. 추사는 이미 부인의 죽음에 대한 예감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천리의 먼 곳에서 돌아가는 사람을 붙잡고 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경득 회편을 어 드러갓. 그 후로 션편이 거 가 막히여 쇼식을 오 못 듯 오니 어 듯 동지가 지격 온 미령 오심 엇 더 오시. 그 증이 돌연 이각이 어렵 오나 이 동안 가감동졍이 엇 37.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298. 185

더 오시고, 벌셔 석 달이 너머 오니 원긔 범졀이 오쟉 귀 여 겨오 시랴. 이리 외오서 동동 념녀 엇더타 올 길이 업 오며, 침식범 은 엇더. 이 동안은 무 약을 시며 아조 위석 야 지내. 간 절 심녀 갈 록 지졍치 못 개.(중략) 인편이 하 업 기 쥬셩이 나 므 인편 이실지 대강 두어 안부만 이리 브치오니 히 평복이 되신 쇼식 이리 날로 기 이.(중략) 임인 지원 십 일 샹장 신이 지격 오시니 아 들 고 한가지로 지내오실 일 요요히셔 각 이. 38 5. 유배지 밖으로의 외출 추사의 제자 강위는 선생은 10년을 머물면서 한 번도 담장을 나가 지 못했다.( 先 生 居 停 十 年 未 嘗 一 出 檐 外 )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감시 책임을 맡은 관내 수령의 재량으로 추사는 대정을 떠나 제주목까 지 기행을 할 수 있었다. 우재의 유허비 라는 시를 통해 추사가 직접 현재의 제주시 칠성통에 위치해 있는 우암 송시열의 적거지를 직접 찾 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재의 유허비 길 가는 사람들도 단비 앞에 말 내리니 김환심의 집에서 옛 자취를 전해오네 38. 金 一 根, 諺 簡 의 硏 究, 建 國 大 學 校 出 版 部, 1991, pp.301~302. 186 유배연구논총

귤림에 잔 올려 심사를 밝혔으니 생강 심던 그 해에는 지금도 눈물짓네. 39 당시에는 그 적거지에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尤 庵 宋 先 生 謫 廬 遺 墟 碑 ) 가 세워져 있었으며 그것을 추사가 직접 보았던 것이다.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죽은 후 눈을 감겨 주었다는 권상하의 증손 자인 권진응이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47년 (1771) 제주도에 유배되어 창천리 적거지를 창주정사( 倉 洲 精 舍 )라 이 름 부쳐 지방의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이듬해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현재의 제주시 칠성 통에 있는 송시열의 유배터를 방문한 후 제주도 유생들을 불러 모아 기 념비를 세울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우암송선생적 려유허비 인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적거지는 제주 성안 산지골의 당시 아전이었던 김환심의 집이었지만 경종4년(1724) 불에 타서 터만 남아 있고 거기에 영조48년(1772)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유홍준은 완당평전 에서 추사가 오현단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40 그 것은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가 현재 제주시 오현단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말한 것이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는 제주 성 안 산지골에서 1935년에 제주향교로 이건되었다가 제주중학교를 정비 할 때 다시 오현단 성내로 옮겨 온 것이다. 39.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十, 詩, 尤 齋 遺 墟 碑, 行 人 下 馬 短 碑 前 金 煥 心 家 舊 躅 傳 一 酌 橘 林 明 志 事 至 今 彈 淚 種 薑 年 40. 유홍준, 완당평전 2,학고재, 2002. p.475. 187

그런데 정후수 교수는 김환심이 추사가 처음 귀양가서 살던 귤림서원 집터의 주인이라고 했는데 41 이것도 잘못된 지적이다. 귤림서원은 제주 목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추사가 처음 귀양 가서 살던 곳은 대정현 송계순의 집이었다. 그리고 추사가 오현단을 찾아갔다는 유홍준의 또 다른 잘못은 당시에 는 오현단이 없었고 귤림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 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후, 1892년 제 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이 오현단인 것이다. 그러니까 추사가 제주도 유배생활 을 할 당시는 여전히 귤림서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위리안치는 유배인의 행동범위를 실제 가시울타리 안으로만 제 한하는 형벌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조치로서 그렇게 엄격하 게 집행되지는 않았다. 유배인의 감시 책임은 관내의 수령이었던 까닭 에 수령의 성격이나 재량권 활용에 따라 대개는 형식에 그치는 수가 많 았다. 추사는 이런 이유로 귤림서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귤림서원은 선조11년(1578)에 조인후 판관이 중종16년에 기묘사화 로 유배와서 죽임을 당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묘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42 성혼의 문인으로 당대의 명문장가인 임제가 절도사인 아 버지를 뵙고자 내도하였다가 조인후의 부탁으로 기( 記 )를 썼고 43 효종 10년(1659)에 이회 목사가 제주유림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장수당 41. 정후수, 추사김정희논고,한성대학교출판부, 2010. p.133. 각주120번 참조 42. 金 錫 翼, 耽 羅 紀 年, 宣 祖 十 一 年 春 判 官 趙 仁 後 建 沖 庵 廟 于 嘉 樂 川 東 43. 林 悌, 南 溟 小 乘, 金 先 生 祠 宇 成 趙 侯 屬 余 記 之, 李 元 鎭 耽 羅 志 詞 廟 條 188 유배연구논총

을 건립하자 44 현종6년(1665)에 최진남 판관이 김정의 묘를 장수당 남 쪽으로 옮기어 이를 사( 祠 )로 하고 장수당을 재( 齋 )로 하여 귤림서원이 라 현판을 달았다. 45 현종10년(1669)에는 김상헌과 정온을 배향하여 숙종1년(1675) 3신 의 서원으로 사액을 요청해 보지만 비변사에 의해 거절되었다. 46 숙종8 년(1682)에 가서야 송인수를 배향하면서 4신 서원으로 사액되어 서원 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47 숙종21년(1695)에는 송시열을 배 향함으로써 오현 배향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48 추사의 행동 범위가 대정의 가시울타리로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증거 는 또 다른 시 에서도 엿보인다. 급고천 물을 떠다 차를 대린다 사나운 용의 턱 아래 박힌 여의주는 송풍간수도 에서 따온 것 일세 성 안팎의 샘물 맛을 시험 삼아 가려보니 제주사람들도 또한 차를 품평할 수 있을까 49 44. 金 錫 翼, 耽 羅 紀 年, 牧 使 李 建 藏 修 堂 是 因 金 晉 鎔 議 遂 建 學 堂 于 南 城 內 高 得 宗 舊 基 扁 藏 修 伋 興 學 事. 45. 金 錫 翼, 耽 羅 紀 年, 顯 宗 六 年 判 官 崔 鎭 南 移 建 沖 庵 廟 于 藏 修 堂 南 揭 額 橘 林 書 院. 46. 肅 宗 實 錄, 元 年, 九 月 ( 庚 戌 ), 三 臣 書 院 亦 宜 宣 額 下 備 局 備 局 回 啓 言 賜 額 事 重 有 難 輕 議 47. 金 錫 翼, 耽 羅 紀 年, 肅 宗 八 年 以 宋 麟 壽 金 尙 憲 鄭 蘊 從 享 于 沖 庵 廟 伋 宣 額 曰 橘 林 書 院 48. 金 錫 翼, 耽 羅 紀 年, 二 十 一 年 以 文 正 公 宋 時 烈 從 享 于 橘 林 書 院 宋 時 烈 字 英 甫 號 尤 菴 恩 津 人 己 巳 春 淪 謫 本 州 踰 月 被 逮 受 後 命 于 中 道 官 左 議 政 從 祀 文 廟 49. 阮 堂 先 生 全 集, 卷 十, 詩, 汲 古 泉 試 茶, 獰 龍 頷 下 嵌 明 珠 拈 取 松 風 澗 水 圖 泉 味 試 分 城 內 外 乙 那 亦 得 品 茶 無 189

급고천은 제주목의 산지천 가에 있는 우물로서 조선시대 제주 성안 사람들의 생명원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산지천 샘터로는 급고천( 汲 古 泉 ), 감액천( 甘 液 泉 ), 산저천( 山 低 泉 )이 있었다. 따라서 추사가 이런 시 를 남겼다는 것은 대정에서 현재 제주시 건입동까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아마도 제주 성안 산지골에 들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尤 庵 宋 先 生 謫 廬 遺 墟 碑 ) 를 보고 송시열의 유허비 앞에서 읊는다 라는 시를 쓰던 시기와 같은 때가 아니었는지 짐작된다. 성 안팎의 샘물 맛을 시험 삼아 가려보니, 제주사람들도 또한 차를 품평할 수 있을까 라는 구절을 보면 추사가 제주도의 샘물 맛을 가려가 며 차를 시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의 선사가 쓴 다신전( 茶 神 傳 ) 에도 언급되지만 다경 에 이르기를 산( 山 )물이 상등이고, 강물은 하 등이며, 우물은 최하등이다 라고 했듯이 추사 역시 물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다. 이 시를 통해 한편으로 추사가 제주도의 다도문화에 끼친 영향 도 알 수 있다. 우물 얘기가 나오면 유명한 것이 중종 때 충암 김정의 일화다. 그가 기묘사화를 당하여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을 적에 자신의 적소 곁에다 우물 하나를 파서 얻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시원했으므로, 후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이 우물을 판서정 이라 이름 하였다는 것이다. 추사도 친구인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정의 나쁜 물 사정을 전하며 판 서정을 언급했다. 수천( 水 泉 )은 과연 좋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여름철에는 빗물, 겨 울철에는 눈으로 밥을 짓는 일도 간혹 있습니다. 금년 여름은 특히 가물지 않았는데도 우물이 멀리 5리 밖에 있으므로 물을 길어오기가 190 유배연구논총

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만일 충암( 冲 庵 )의 판서정( 判 書 井 )의 고사 와 같이 우물을 파서 얻을 수 있다면 또한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만, 이 위리 밑에 어디서 샘을 엿볼 수 있겠습니까. 50 따라서 추사가 이런 시를 남겼다는 것은 적어도 대정에서 현재 제주 시 건입동까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급고천과 귤림서원은 가까운 거 리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두 장소를 같은 시기에 들리지 않 았는지 추측을 해보게 된다. 추사는 한라산도 찾았다. 겨울 한라산에 올라 언 먹을 입김으로 녹이 며 글씨를 쓰는데 남들은 먹이 얼어붙어 글씨를 쓸 수 없었지만 추사만 은 신채를 빛내는 글씨를 썼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한라산을 찾았던 대표적인 유배인으로 최익현이 있고 그는 유한라 산기 라는 기행문도 남겼다. 추사는 기행문을 남기진 않았지만 한라산 에서 감로수를 만난 감회를 친구에게 전했다. 추사가 말하는 감로수는 고로쇠나무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는 감로수가 있어 나무의 굵기는 겨우 한 뼘 혹은 두세 뼘쯤 되는데 밑동을 자르면 나무의 즙이 폭포처럼 솟아 나와서 한 나무에 서 큰 병으로 가득히 하나 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은 마치 유천 과 같고 단맛은 상품의 석밀과 같아 맑고 차가우면서도 향기가 있어 다른 꿀의 달기가 모두 이만 못하니 참으로 기이한 산품이라 하겠습 50.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三, 與 權 彝 齋, 八, 泉 果 不 佳 夏 雨 冬 雪 之 炊 亦 或 有 之 今 夏 特 不 旱 耳 井 爲 五 里 之 遠 汲 運 極 難 若 鑿 而 得 之 如 冲 庵 判 書 井 故 事 亦 幸 甚 顧 此 籬 底 何 處 覘 泉 耶 191

니다. 51 Ⅲ 결 론 추사의 제주도에서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추 사는 제주도에서 교학활동과 예술 활동 그리고 독서활동만으로 일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생생활은 일반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눈에 띠는 것은 건강관리에 힘을 쏟았고 이를 위해 인삼을 장복했다는 것과 다도생활을 즐겼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위리안치의 생활이라 는 것이 유폐된 채 아무것도 못하는 줄로 알지만 추사를 보건대 지금의 제주시까지도 자유스럽게 외출을 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한라산도 올라 갔음을 볼 때 일상생활이 비교적 자유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 로 제주도에서의 일생생활만을 두고 보이도 추사는 갇혀있으면서도 갇 혀있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備 邊 司 謄 錄 小 學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朝 鮮 王 朝 實 錄 日 省 錄 濟 州 敎 育 通 史, 濟 州 道 敎 育 硏 究 院,1974. 51. 阮 堂 先 生 全 集, 卷 三, 與 權 彝 齋, 其 十, 此 中 有 甘 露 樹 樹 身 大 厪 一 握 或 二 三 握 截 其 本 則 樹 汁 湧 如 瀑 泉 一 本 可 得 水 一 大 瓶 水 如 乳 泉 味 甘 如 石 蜜 之 上 品 淸 冽 有 香 他 蜜 之 甛 皆 不 如 也 儘 奇 品 異 産 矣 仙 家 之 瓊 漿 玉 液 恐 不 多 於 是 樹 在 深 山 或 有 遇 之 而 不 多 見 此 中 人 亦 不 知 也 年 前 有 一 行 脚 如 道 人 者 渡 海 而 來 入 出 渴 甚 取 其 樹 截 而 飮 之 其 時 樵 夫 一 人 旁 見 之 能 道 其 事 今 從 樵 夫 得 之 恐 其 傳 播 而 爲 此 島 大 患 故 亦 秘 而 不 發 192 유배연구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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