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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Ⅰ. 서론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남성이 풍자 잡지 주간 샤를리 의 본사에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열두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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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도시행정학보 제25집 제4호 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다양성과 복합성의 요소는 증가하게 된다. 도시의 발달은 사회의 다원 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화된 도시는 경제, 사회, 정치 등이 복합적으로 연 계되어 있어 특

Transcription:

中 東 硏 究 2007년 제26권 2호, 277-298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1) 장 병 옥 ** 차 례 Ⅰ. 서 론 Ⅱ. 나-카 분쟁의 초기정황 Ⅲ. 나-카 분쟁의 전개과정 Ⅳ.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평화과정 Ⅴ. 결 론 <Abstract> Nagorno-Karabah Conflict and Azerbaijan-Armenia Peace Process Chang Byung-Ock (HUFS) This article examines the social contexts of Nagorno- Karabah conflict and its peace process, and Azerbaijan -Armenia peace process. In investigating international relations around this conflict, this article will focus on the functions of other countries including Iran, Turkey, Russia and the U.S. as well as international organizations such as U.N. * 이 논문은 2007학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학과 교수

278 중동연구 제26권 2호 The antagonism between Armenians and the Azerbaijanis had with time transcended cultural-religious differences. In the eyes of some scholars, the position of Armenians in Azerbaijan resembled that of Jews in the parts of Europe where they were they were both threatened and feared. Scholars with a Middle Eastern perspective noticed similarities with the Maronites and Copts. Key Words: Nagorno, Karabah, Azerbaijan, Armenia, Iran, Turkey, Russia, the U.S., U.N. I. 서 론 1988년에 재발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분쟁은 나고 르노-카라바흐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이 경제적 문화적 차별에 항거하여 바쿠 정권에 대항한 폭동을 일으키면서 표면화되었다. 이 러한 양 국민 간의 역사적인 반감은 종교 문화적 차이에서 나온 것 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자치를 요구했고 그 요구가 묵살되자 아 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 결국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 국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소연방이 붕괴됨으로써 분쟁과 관련 양측 진영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점차 전 면적인 전쟁의 형태로 변해 갔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의 갈등지역이자 자치주인 나고 르노-카라바흐 분쟁은 1988년 2월, 그곳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에 의 해 거행된 일련의 파업과 시위에 뒤이어 시작되었다. 나고르노-카라 바흐 분쟁은 1988년 이래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원인이 국내적으로는 영토적이고 민족적이며 종교 적인 분석이 많다. 국제적으로 이 분쟁은 몇몇의 인접국, 특히 북쪽 으로 러시아와 남쪽으로 터키와 이란, 그리고 외부세력은 미국에 지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79 대한 영향을 끼치며 위협해 왔다. 이 지역의 동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와 에너지 자원 송출루트로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이들 열 강들은 패권게임을 벌여왔다. 이 논문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둘러싼 주변 이해 당사국 이란, 터키, 러시아, 미국, 그리고 유엔을 위시한 국제기구의 역할과 평화과정을 연구하고자 한다. Ⅱ.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초기정황 1988년 2월 11일에 일어난 일련의 파업과 시위는 위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아제르 바이잔 당국의 문화와 경제정책에 항의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는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탈퇴하고 아르메니아로 합병 허용을 위 하여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소련 정부에 호소하였다. 이 요구는 즉시 아르메니아의 지지를 받았다. 100만에 이르는 아르 메니아인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시키고자 하 는 요구를 지지하며 2월 하반기 동안 매일같이 시위를 벌였다. 며 칠 동안 아르메니아는 파업과 대중 폭동으로 인하여 정부의 기능이 실질적으로 마비되기도 하였다(Roy 2005: 137). 이 때까지 이 분쟁의 첫 번째 난민들은 아르메니아를 떠난 아제 르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했다. 2월 25일, 나고르노-카라 바흐 내의 아그담 도시 근처에서 2명의 아제르인이 피살되었으며 이들은 분쟁의 첫 번째 희생자들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2월 28일 -29일에 바쿠 북쪽의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반아르메니아 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카르바흐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제르 폭도들에 의해서 100명이 살해되었다. 고르바초프는 폭력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것은 일시적 방편에 불과하다(Johnson 2007: 168). 공식 자료에 따르면 32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 폭동 기간 동안 피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르메니아인 측 다수의

280 중동연구 제26권 2호 자료에서는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르메니아인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숨가이트를 떠났다. 어떤 이들은 바쿠를 떠나 다른 아제르바이잔의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 다. 스탈린 시대의 집단 강제추방과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사람들의 이주 이후 처음으로 소련은 난민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숨가이트 사건 이후 한달 사이,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던 약 16만 명의 아제르 인구의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으로 탈출했다. 이 분쟁으로 인한 첫 번째 집단 탈출기는 이곳을 참혹한 상태로 몰아갔다. 많은 가족들 이 무장한 갱들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그들의 고향을 떠나 산을 넘어야만 했다. 반면, 약 30만의 아르메니아인 1) 이 그들 의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탈출은 더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 었고, 1990년 1월에 있었던 바쿠에서의 학살 전날 밤조차, 바쿠에 는 3만 명 가량의 아르메니아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록 숨가 이트의 비극 이후로 2008년 현재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긴 했어 도, 많은 의문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양 공화국의 불만은 커졌고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지역의 반환 을 요구하는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의 파업과 집단폭동은 카라바흐 꼼짝 마라! 라는 슬로건 아래 아제르바이잔 에서 조직된 시위대와 맞닥뜨려졌다. 이들과 함께, 파업과 시위에 동참한 자들은 점차 다른 요구 사항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제르 바이잔에서 이러한 요구는 민족주의 증대 경제적 주권 민족문화 발 전 사회정의 등 문제와 연계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고르바 초프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대중 사이의 여론으로 굳어졌고, 사 람들은 공화국이 소연방으로부터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양쪽 모두 군중의 격앙된 감정 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제1서기 Demirchian과 Bagirov를, Arutiunian과 Vezirov로 동시에 교체함으 1) Baku, Kirovobad(현재는 Gyandja), Mingechaur, Shusha, 그리고 다른 도시 의 시민들.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81 로써 상황을 호전시켜 보려 했던 모스크바의 시도는 공화국의 분위 기나 혹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입장에 선 그들의 자세를 그다지 바꾸지는 못했다. 6월 15일, 아르메니아 최고회의는 만장일치로 분 쟁지역이 아르메니아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틀 후, 아 제르바이잔 최고회의는 역시 만장일치로 그 투표가 소비에트 헌법 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급진주의자들이 양 공화국 내에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전국적 파업과 집단폭동, 예레반과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의 시민 불복종 운동과 폭력, 그리고 예레반의 Zvartnots공항 점거 사건 등 아르메니 아에서의 이런 저런 상황 전개는 급진주의자들이 공화국을 점차 지배 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급진세력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르메니아로 합병되는 것 이외의 어떠한 해결책도 단호히 거부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두려워한 것은 아제르바이잔 지도부의 발표에 도 불구하고 모스크바가 아르메니아의 합병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 었다. 이런 우려는 아르메니아 외무부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비롯되 었는데, 여기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 화국의 공식적 동의 없이도 아르메니아의 관할권 하에 들어갈 수 있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한 합법성을 얻는 데 실패한 후, 나고르노-카라 바흐 당국은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조직 간, 그리고 정당간 연계는 끊어졌고 경제적 유대관계도 허술해졌다. 각계각층의 아제르바이잔인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진행되고 있 는 상황에 대해 실망과 분노를 표했으며, 그 지역이 공화국에서 고립 되는 것을 도운 것에 대해 모스크바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러 한 상황 전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한 아제르바이잔 당국도 공격 하였다. 이런 모든 것은 아제르바이잔 주민을 더 깊은 흥분의 도가니 로 몰아넣으며 실질적으로 1988년 하반기 아제르바이잔인의 정상적 인 삶을 마비시켰다. 파업과 대중 소요, 그리고 폭동이 바쿠 나히체 반 키로보바드(Kirovobad) 세키(Sheki) 자카털리(Zakataly)에서 발

282 중동연구 제26권 2호 생하였다.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인의 환경 역시 더 악화되었 다. 많은 사람이 해고되었고 폭도에 의해 공격당했으며 집이 불탔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국제적인 민족적 긴장감이 위험 수위에 도달하게 되었다. 1988년이 끝나갈 무렵부 터 사실상 아르메니아에 남아있는 아제르바이잔인은 아무도 없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에 남아있는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은 불안 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떤 정치적인 협상도 거의 불가능하 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분쟁은 거친 불길처럼 번져갔다. 논란이 되 었었던 지역과 국경지대에서는 두 공화국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했 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수많은 도시는 점점 무질서해지 고 그러한 상황은 지속되었다. 소연방 최고회의 회기 중에, 볼스키는 즉시 내란에 대한 전망을 내놓았다. 두 민족 간의 희생자 수는 매일 증가했고, 그리고 1989년 에는 분쟁이 더 심한 유혈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양국 간의 철로는 파괴되었다. 바쿠와 예레반을 연결하는 두 갈래의 철로 가 있었는데 나히체반을 통과하는 남부철로와 가자흐(Gazakh)를 경 유하는 남부 철로가 그것이다. 1989년 초, 나히체반에 진입하기 전 에 46km의 아르메니아 지역을 달리는 기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 었고, 그 결과 10km에 달하는 철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과정 에서 기차 승무원들과 승객들도 희생되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쪽의 나히체반 지역이 봉쇄되었다. 북부 철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의 해 봉쇄되었는데, 이는 전시 중에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이 철로로 물자들을 운반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Alieva, 1995: 293). 카라바흐로부터, 그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간 국경으로 부터 오는 뉴스는 점차 군대 보고서와 유사해져 갔다. 피를 흘렸고, 집이 불탔으며, 인질들이 붙잡혔고, 그리고 자동차가 부서졌다. 중 무장 포병부대와 헬리콥터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양 공화국의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매스컴은 각각 심리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분쟁의 참상은 민족주의를 낳았고 양 공화국에서는 반대 운동의 핵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83 심을 차지하는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강화되었다. 1989 년 여름까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전선(PFA) 진 영이 득세하였다. 1989년 7월, 아르메니아의 무장단체들은 나히체반-아르메니아 이란 터키로 둘러싸인 아제르바이잔의 일부-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8월에 PFA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무역금지 조 치와 통행로 차단 즉, 경제적인 봉쇄를 조직적으로 강화했는데, 이 는 그들이 수입품의 약 90%를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통해서 받아들 이기 때문이었다(Johnson, 2007: 168). 바쿠에서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 아르메니아로부터 탈출해 온 약 10만 명의 난민이 불안정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PFA 대변인이 모 스크바 주재 독일 기자에게 난민들은 인종적 불안의 원천이다. 마치 화약고와 같아서 그들은 언제라도 아르메니아인을 죽이기 시작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이렇듯 PFA는 반 아르메니아 폭동을 두려워했기 때 문에, 바쿠 거리에 민족학살을 부를 소지가 있는 유발행위 의 유혹 에 넘어가지 말 것을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전단을 붙이기도 했다. PFA의 대표자들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공격 을 비난하고, 그것을 아제르바이잔인의 적들이 조직한 훌리건이즘 (hooliganism)의 행동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PFA는 과격한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극렬한 폭동의 분위기 속에서도 혁명군들은 유리 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반 아르메니아 정서는 행동으로 옮겨져서 1990년 1월 13-14일에 끔찍한 학살이 아르메니아인에게 자행되었고, 바쿠를 뒤흔들었다. 추방되어 집이 없는 난민들에 의해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이 학살 기간 동안 살해되고 부상당했다. 1991년 해 9월 2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모든 계층의 대 의원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11월에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카라바흐 자치권의 지위상태를 폐지하자, 12 월에 그곳의 아르메니아인은 국민투표를 하였고 스스로 독립공화 국임을 선포하였다.

284 중동연구 제26권 2호 Ⅲ. 나-카 분쟁의 전개과정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관계는 1991년 11월 들어 급격 히 악화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평화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내무부 장관을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고위급 공무원들을 태우고 카라바흐 지역으로 가던 헬리콥터가 격추 된 직후였다. 전쟁 선포의 위협은 매우 현실화되었으나, 아제르바이 잔 정부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문화적 자주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자치권을 말살하는 행위를 자제했다(Alieva, 1995: 293). 점차적으로 민간인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1991년 말에 이 르러서는 이 지역 주둔 소비에트 군대가 해체되면서 양 진영 모두 더 많은 무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40개의 로켓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Grad' 미사일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연방의 붕괴에 따라 더 많은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주로 스테파나케르 트에 주둔하고 있었던 종전의 소비에트 군대인 366자동화 소총연 대도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은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많은 희 생자를 내며 더욱 격렬해졌다. 1992년의 처음 3달 동안 회생자의 숫자는 과거의 3년 동안의 수를 넘어섰다. 아르메니아군이 인구 약 8,000명의 작은 아제르바이잔의 마을 호드잘리(Khodzhaly)를 점 령했던 2월 말경에 가장 비극적이고 잔인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 량 학살과 잔학 행위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도시가 불탔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소련군 366연대의 장교들과 병사들을 그 학살의 주범으로 고발하였다. 책 임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학살은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 종의 불복종 행위 의 결과였다고 러시아 언론은 발표하였다. 호드잘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군대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의 서 막이었으며 매우 위험스런 상황 전개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인상적인 아르메니아군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호 드잘리 사건 이후 곧 카라바흐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마지막 본거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85 지들-아그담과 슈샤-이 함락되었다. 1992년 5월말까지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 지역이 아르메니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나고르노-카 라바흐와 인접지역에 거주하는 6만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그 지 역에서 탈출하거나 추방당했다. 그 이후 아르메니아 군은 아제르바 이잔의 라친(Lachin) 시를 점령하고,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가로질 러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까지 직접 통하는 새로운 통 행로의 확보를 가능케 했다(Winrow. 1995: 99) 아르메니아는 그것을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 써 라친 통행로의 부설을 정당화했다. 즉,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 한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부과되었던 4년 간의 긴 경제적 그리고 교 통상의 장벽을 끝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르메니아의 유일 한 주장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창설되었을 당시 아르메니아와는 공동 경계선이 있었다고 했다. 단 지 1930년대 초반,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 사이에는 아 제르바이잔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6km2 너비의 가설 통행로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르메니아 측은 이 가설 통행로를 아제르바 이잔 당국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훔쳐갔다 고 주장한다. 이 전투는 아제르바이잔의 자치 구역인 나히체반으로 번져갔다. 1921년의 카르스(Kars) 조약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나히체반 국경 의 보증인이라고 생각한 터키가 이 분쟁에 위험스럽게 관여한 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CIS 육군 참모총장인 샤포쉬니코프 (Marshal E. Shaposhnikov)는 199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기 자회견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분쟁에 제3국이 조금이 라도 개입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라친 시의 점령과 전투의 나히체반으로의 확대는 국제적으로 크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공동체 터키 이란은 이 행위를 도발 행 위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나히체반의 지위에 대한 어떠한 강제적 변화도 단호히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92년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전투 진행 과정은 아제르바이잔

286 중동연구 제26권 2호 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이 변화는 다음 전개 과정으로 설명이 가 능하다. 1992년 6월 4일, 아제르바이잔의 PFA 지도자 엘치베이와 알리예프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에 따라 정권을 잡았다. 나고르 노-카라바흐와 관련된 엘치베이의 정책은 그 지역에 관해 타협하 기를 꺼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새 정부는 국군의 창설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5월 15일 타쉬켄트에서 러시아와의 협정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은 소련 영토 내에 배치되어 있던 기존 소련군 창고에서 다량의 현대식 무기를 공급받았다. 같은 원칙에 따라 무기거래 협정이 그 후인 7월 에 아르메니아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소식통은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보다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무기를 공급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아제르바이잔이 더 많은 군사 장비를 공급받 았든 그렇지 않든, 지상 전투에서는 명백히 아제르바이잔 군대들이 승리하고 있었다. 1992년 여름의 전투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은 잃 었던 몇 군데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는 오 래 지속되지 못했다. 1992년 말까지 아르메니아는 다시 반격을 시작 하였고 지상 전투의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최초로 승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 기간 은 상당히 짧았다. 1993년 초반, 아르메니아는 바샤르두스티 (Bashardusti) 주변 지역을 접수하고 켈바자르를 합병하였으며, 카 라바흐의 경계를 벗어난 외곽도시 아그담시까지 점령하였다. 분쟁 이 격화되자, 엘치베이는 부패하고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신랄한 비 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러한 비판은 끊일 줄을 몰랐다 (Amir-Ahmadian, 2000: 501).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르메니아인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 르메니아를 연결하는 전략적으로 중대한 라친 회랑을 장악했다. 1993년 4월까지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대략 1/10 정 도를 점령했다. 거기에는 켈바자르 도시가 포함되어 있어서 결국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두 번째 회랑을 열게 된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87 셈이었다. 또한 남서부의 피줄리(Fizuli)로 진격함에 따라 국가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나히체반의 아제르 지역을 효과적으로 봉쇄 하였다. 당시 아르메니아에 의해 사용된 일부 무기는 아르메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제7부대가 양도한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Smolansky, 1995: 202). 폭력적인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제르바이잔인에게는 내부 분쟁에 대한 책임도 주어졌다. 1993년 6월 18일 후세이노프 장군이 옛 공산당 제1서기이자 아제르바이잔 국회의장으로 예기되던 나히 체반 의회의 수장 격인 알리예프를 방문한 후, 엘치베이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하자, 의회는 알리예프로의 정권 교체를 승인하였다. 1994년이 시작될 무렵, 아르메니아군의 승리에 따라서 아제르바이 잔 영토의 거의 20%가 아르메니아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2006년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약 14%점령하고 있는 상태인데, 소규모 국경 충돌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Johnson, 2007: 168). Ⅳ.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평화과정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터키와 이란을 넘어서 국제문제로 떠 올랐다. 이 분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제르바이잔이 CIS의 가입을 거부하게 된 주된 요인이 되었다. 처음에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의 약화된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아르메니아를 지원해 주고 분쟁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1992년 중순경, 모스크 바와 앙카라 사이의 국교 회복에 뒤이어 아르메니아의 분노와 이란 의 우려 속에 러시아-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은 현재 양측이 모두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문제는 아르메니아의 투쟁이 민족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원리가 민족 자결권이나 국경 보전보다 우선순위에 있다는 것이다.

288 중동연구 제26권 2호 러시아 터키 미국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2) 민스크 그룹 이란 등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주도적으로 교섭을 개시했지만 여전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아제 르바이잔군과 아르메니아군 간의 적대감이 증폭되면서 마침내 터 키-이란군은 아제르바이잔 국경을 침범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 며, 결국 1994년 5월 양측은 임시 휴전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전쟁 에 돌입했다. 이에 공화국이라 선언한 나고르노-카라바흐 등의 이 슈에 관한 여러 가지 평화적 제안이 나돌았다. 이 고립된 분쟁지역 의 장래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아르메니아 부대가 아제르바 이잔의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하는지, 러시아인은 어디에서 평 화로운 지역에 거주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의 문제점들이 논의되었 다. 심지어 현재 집권하고 있는 알리예프조차도 의혹의 눈길을 보 내며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편을 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터키와 아 제르바이잔은 역사 인종 문화적으로 매우 가깝기 때문에 터키가 그 분쟁에 있어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CSCE는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의 여파에 대비하여 유럽 안보를 위한 대단위 활동에 착수했다. 이 지역은 지리 문화 역사적으로 아 시아에 훨씬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는 남부 카프카스 지방 을 유럽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이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유럽 본토의 국가들에게 일종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 식에 비추어,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와 코소보를 비롯한 카라바흐 사 이프러스 그리스 터키 쿠르드 지역 내의 분쟁은 유럽 국가들에게 상 당히 민감한 문제로 다가선다. CSCE에 가입한 미국 러시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민스크 그룹은 1994년 5월 9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휴전을 선포했 다. 교전국 양측의 합의와 러시아의 지원 하에 휴전 협정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간간이 총성이 들리기는 하였으나, 그 후 10년 이 2) 7개월 뒤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CSCE 정기총회에서 OSCE 로 개칭되었다.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89 상 지난 지금도 휴전 협정은 유효한 상태이다. 그러나 분쟁의 진정 한 종결을 위한 효과적인 조처는 취해진 바가 없다.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으며, 수백만 전쟁 난민은 그들의 고향 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면서 한숨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르메니아의 철수를 확고히 하고, 아르메니 아 내부의 정치 경제적 혼란에서 오는 기회를 틈타 양국 간의 관계 를 재정비하려고 했다. 1997년 5월,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르메니아 와의 협력 구도를 위한 제안 폭을 넓혀, 아제르바이잔의 송유관이 아르메니아를 통과하는 것에 동의했다. 알리예프의 서한에 대한 답 신에서, 페트로시안은 아제르바이잔의 석유 수송관이 아르메니아를 지나는 것이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아르메니아가 송유관 건설을 기꺼이 수락한다는 입장을 밝 혔다. 또한 그는 석유 수송관 건설 사업은 카라바흐 분쟁과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건설 사업이 가시화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를 통해 석유를 수송하고 아르메니아와 터키가 가능한 한 양국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1997년 6월, 민스크 그룹은 카라바흐 분쟁의 종식을 이끌어 내려 는 노력의 일환으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국 대통령과의 회 담을 비롯하여 카라바흐 독립운동 대표들과의 회담 일정을 잡았다. 아르메니아는 그들의 점령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전부터 민스크 그룹은 이미 아르메니아의 군대가 두 단계에 나누어 퇴각하 는 안을 내 놓은 상태였다. 그 제안을 단계별로 살펴보자면, 우선 아 제르바이잔 동남부 지역에 분포한 도시들 3) 의 독립을 승인한 후에 다음 단계로는 난민의 본토 귀향과 동시에 교전국 간의 연락망을 구 축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Amir-Ahmadian, 2000: 494). 그러나 민스크 그룹의 이러한 노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 분리주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주장하면서 카라 3) Kalbajar, Zangelian, Qobadli, Jebrail, Fizuli, Aqdam

290 중동연구 제26권 2호 바흐 분리론자들과의 교섭을 거절했다. 카라바흐 분쟁 및 계속되는 아르메니아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점 령, 그리고 아르메니아와 러시아 간의 결탁은 아제르바이잔을 국제 적으로 고립시켰다. 국내 정치 위기를 비롯하여, 개혁주의와 과격 주의 사이에 벌어진 주도권 싸움은 자연히 경제 침체와 국고 수입 감소로 이어졌으며, 실업률 증가와 국민의 불안에 불을 붙였다. 결 국, 이러한 제반 현상은 정치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데도 한 몫을 한 셈이다. 페트로시안과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아르메니아가 국제사 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계기 마련의 차원에서 카라바흐 분쟁의 신속한 처리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카라바흐 분쟁위원회의 위원장이자 카라바흐의 새 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 코차리안은 페트로시안이 변절한 것이라 고 비난했다. 페트로시안은 코차리안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아르 메니아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르메니아의 과격주의자는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을 끝내서 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운동의 중심 에서, 페트로시안에 의해 해산되어 불법 정당으로 규정된 다쉬낙션 (Dashnaction)당은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97년은 아제르바이잔이 큰 폭으로 퇴보한 것으로 기록된 해이 다. 아제르바이잔 민족화해당 4) 의 당수인 로스탐한리 (Rostamkhanli)가 1997년 발표한 바에 따르면, 카라바흐 분쟁 해 결을 위해 국제기구들이 쏟은 노력에 비해 기대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강대국들이 자국의 직접적인 이익만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경제 상황과 어찌할 수 없 는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아제르바이잔 국민의 불만은 새로운 정점에 달하였다. 국민이 전쟁을 겪고 강제 추방당했던 난민이 귀 향하는 과정에서 불만은 널리 퍼져나갔고, 그것은 그 자체적으로 분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가운데, 정적( 政 敵 )들 4) Azerbaijan's National Reconciliation Party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91 은 현 상황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코차리안이 아르메니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카라바흐 분쟁은 좀 더 복합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아르메니 아에서 코차리안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이미 공산 주의 시절부터 독립을 옹호했던 자들이 아르메니아의 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제르비잔인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서방과의 정치 군사적 협력 시대로 들어선 것 이다. 그루지야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아, 아제르바이잔의 뒤를 잇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이 두 나라에게 있어서 석유의 생산과 탐사 그 리고 수출은 국가 안보의 보루이다(Huttenbach, 1995: 100), 1998년 중반, 코차리안은 예레반에서 민스크 그룹 정상들과 대 면하여 아르메니아는 카라바흐 분쟁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있어 서 그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카라바흐 분쟁을 해결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은 그 지역을 둘러싸고 일어나 는 정치적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며, 모든 회담에서 이 분쟁을 주요 안건으로 다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 잔의 영토로 복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그에 이어 아르메니아 대통령 코차리안은 지역 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국가적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 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민스크 그룹 정상들과의 회담에 참석한 알리예프는 카라바흐 분쟁이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매듭지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표명했다. 또한 알리예프는 카라바흐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있어서 OSCE의 잠재적인 역량에 대한 아제 르바이잔의 큰 기대를 내비추었다(Amir-Ahmadian, 2000: 505). 1999년 7월 초, 룩셈부르크에서 가진 연례회의에서 유럽연합은 카 프카스 지역의 끊임없는 분쟁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의 협력 구도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됨과 동시에, 지역의 정치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 지역에 분쟁 을 종결하고 평화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292 중동연구 제26권 2호 같은 해 10월 11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알리예프와 아르메니아 대통령 코차리안은 국경을 따라 펼쳐진 나히체반에 속하는 사드락 (Sadrak) 시의 한 전원 마을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세 번째 열린 것으로서, 두 시간 10분 동안 비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회담은 카라바흐 분쟁에 관한 정치적인 해결을 도출하려는 양측의 결의를 표명하는 것으로, 제3국의 중재 없이 이루어졌으며 양국의 관계에 있어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였다. 양국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최종 적인 화해에 이를 때까지 제3국의 중재 없이 회담을 하길 원한다고 밝혔으며, 카라바흐 분쟁은 상당히 복합적이므로 쉽게 해결될 수 없 다는 사실 또한 인정했다. 이 분쟁은 3년 전에 발발한 것으로, 종전 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장기간에 걸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 협상의 두번째 모임은 이전에 미국의 주최로 이미 제네바에서 열린 바 있다. 이는 민스크 회담의 끝 무렵인 7월이었다. 그렇지만 카라바흐 분쟁은 몇 번에 걸친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 님은 너무도 명백하다. 복합적이라는 면에서, 도무지 풀 수 없는 인 도아 대륙의 카시미르 위기와 어느 정도 흡사한 카라바흐 이슈는 오늘날 가장 복잡한 정치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좋지 않은 건강 상태로 알리예프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치 무대에 서 물러나 있었던 1999년 초, 국민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 다. 신아제르바이잔당 5) 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차기 대통령 후보를 거 론하고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현 대통령의 아들, 엘함 알리예프 (Elham Aliyev)였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지지하는 언론사들은 이미 선거 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아제르바이잔의 미래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992년 활동을 시작한 신아제르바이잔당은 현 대통 령 헤이다르 알리예프(Heidar Aliyev)를 당수로 두고 있으며, 아제 르바이잔 의회의 전체 의석 수 85석 중 70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5) New Azerbaijan Party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93 런데 만약 현직 대통령 알리예프가 재임 기간 내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지 못하게 된다면, 신아제르바이잔당과 엘함 알리예프의 정치 적 입지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알리예프가 현직을 떠나면 뒤이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정적은 이 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 로 아제르바이잔은 정권교체 기간 동안 장기적인 불안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짙고, 수십 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는 국가 경제의 안정을 저해하게 될 것이다. 1999년 6월 23일, 독립국가연합과 유럽국가 대표들이 모인 룩셈 부르크 회담 말미에 한 공식 성명서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성명 서에 따르자면, 현존하는 카프카스 지역의 분쟁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문서는 지역 내 관련 국가들이 분쟁을 해결하고 지 역적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Amir-Ahmadian, 2000: 510). 아제르바이잔 외무부 장관은 NATO와 EU에게 그들이 코소보 사태에 개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라바흐 분쟁 해결을 위해 적 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시 말해서, 아제르바이잔은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 수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이 최단 기간 내에 이 분쟁으로부 터 벗어나 경제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전쟁 과정에서 발생 한 수많은 난민의 고통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할 당면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아르메니아 당국 은 협상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분쟁은 알리예프 정 권 하에서 정체 현상을 빚었으므로 알리예프가 해결해야 한다. 그 러나 알리예프는 그가 정권을 손에 넣도록 도와주었던 러시아 세력 을 외면할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하고 노련한 정치가이다. 이번 문제 가 어떤 식으로 평화를 회복하여 어떤 결과가 빚어지든, 국민들에 게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를 구해낼 것임은 패배를 자연스레 무마

294 중동연구 제26권 2호 시켰던 예전과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니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으며, 서로 이웃한 두 국 가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없다. 알리예프의 정치 고문 콜리자데의 충고처럼, 다게스탄에서 시작되는 분쟁은 어 렵지 않게 아제르바이잔 본토에까지 퍼지게 될 것이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현재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가려는 계산에서 카라바흐 분쟁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을 대표하는 세력 들은 이러한 알리예프의 계산을 간파하고 그가 취하는 정책에 반대 한다. 그들은 알리예프가 카라바흐 분쟁에 적용하는 정책에 반대하 기 때문에, 카라바흐 분쟁을 서둘러 종식시킬 것과 1999년 11월에 임명된 줄파가로프(Zulfagarov) 외무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아제르인은 아제르바이잔의 법체계 구조 하에서 카라바흐의 자치 권을 확대하는 데 동의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르메니아 군대 가 점령지에서 무조건적으로 철수한다는 선결조건을 내세운 채였 다. 아르메니아는 그러한 요구 사항을 거부하였고, 카라바흐의 법 적 지위를 명확히 할 것과 카라바흐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은 비 롯하여 국제위원회에서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아제르바이잔에 요구했다 (Amir-Ahmadian, 2000: 495). 1999년 12월 12일, 아제르바이잔은 오랜 각고 끝에 카라바흐의 운 명이 달린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통치하는 합 법적인 정부라는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분쟁 지역의 대략 적인 피해 규모는 다음과 같다 (Amir-Ahmadian, 2000: 511-14).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지역이 점령당한 상태이다. 이 지역 내의 아제르바이잔 인구는 전체 30%에 달한다.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소유한 아르메니아인은 라친 시의 인접지역을 비롯하여 여 러 도시 6) 를 침략하여 황폐화시키는 등 700여 개에 달하는 도시와 전원 마을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있다. 6) Kalbejar, Qobadli, Zangilan, Jebrail, Aqdam, Fozuli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95 2만 명이 넘는 아제르바이잔인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4천여 명이 전쟁포로로 붙잡혔다. 이 중에 71명은 어린이, 320명은 여성, 그리고 173명은 노인이다. 그들은 여러 지역에 포로로 남아있다. 1992년 1월 26일 일어난 하잘리(Khajali) 대학살 사건은 세기를 통틀어 가장 무자비한 대학살로 불린다. 210만이 넘는 아제르바이 잔인은 지금 강제추방 당한 상태이며, 많은 아르메니아인 또한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점령지 내에서는 4,000여개의 산업, 농업 근거지와 6백만m2에 걸 친 18만 가구, 1천여 개의 교육 시설, 그리고 3천개의 문화 시설, 7 백개에 달하는 건강센터가 파괴되었다. 다음은 전쟁이 지정학 상의 전략적 위치에 불러일으킬 주된 파장을 살펴 본 것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서방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은 아 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야 두 나라 모두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 시 말해, 이 두 나라에서 러시아는 예전의 정치 경제 양면 구도의 막 강한 입지를 차츰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루지야에서 러시아의 국 경 수비대가 철수하고 그루지야 내에 주둔하던 러시아 군대가 철수했 다는 사실은 곧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또 다른 러시아의 군대가 쫓겨날 것임을 잘 말해 준다. 러시아 대선 후, 남부 카프카스 지역에서의 역 할이 크게 감소하면, 지역 분쟁은 긴장을 불러올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손을 잡을 것을 선언하고 전략상의 중요성을 들어 러시아의 군대 주둔을 승인했다. 카프카스 지역 내의 정치 경제적 장( 場 )에서 미국인의 존재가 뚜렷해 졌다. 이스라엘과 터키 간에 맺은 군사 조약으로 인하여 카프카스 지역 내 에서의 이스라엘의 교전 가능성이 높아져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양국은 NATO의 평화계획을 의한 파트너 십 7) 에 참여하고, 조만간 NATO의 회원으로 자리 매김할 것이다.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은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기구를 마련하여, 예상되는 러시아의 봉쇄정책을 대비한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터키는 카프카스 지역 내에서의 자국의 입장을 표명하여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7) Partnership for Peace Plan

296 중동연구 제26권 2호 Ⅴ. 결 론 군사적 패배를 맛본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수복 계획은 수포로 돌 아갔다. 그리하여, 아제르바이잔은 경제적 수단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 또한 성공적이지 못한 전략이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일단 국력을 충분히 회복하기만 하면, 곧 카라바흐를 재탈환하고 아르메니아 남부로 연결되는 회랑 지대 인 장게주르(Zangeh Zur) 점령에 뒤이어, 나히체반까지 합병하려 들리라는 속셈을 아르메니아인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연유 로 아르메니아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바로 앞에 놓인 여 러 문제를 여러 차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그들에 대한 러시아의 옹호적인 입장을 지켜내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적절한 시기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면, 카라바흐 분쟁을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은 카라바흐뿐만 아니라 그 외의 넓은 지역을 점령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은 아르메니 아를 침략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르메니아의 공격에 잇따른 피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자신들이 직접 배상해야만 할 입장에 처해 있다. 결론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지역의 미래를 위한 광범 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중앙아시아, 중동, 그 리고 심지어 전세계의 세력균형을 바꿀 수도 있다. 분쟁을 종식시 킬 수 있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경제적 자원의 고갈 2) 장기간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의 심각성 3) 국제사회의 중재노력 등이다. 그러나 카라바흐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발견되기까지 이 문제는 계속적으로 분출하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화산처럼 남 아있을 것이다. 주제어: 나고르노-카라바흐, 아르메니아, 아제르비잔, 알리예프, 러시아

나-카 분쟁과 아제르-아르메니아 평화과정 297 참고문헌 Alieva, L. (1995). The Institutions, Orientations, and Conduct of Foreign in Post-Soviet Azerbaijan, A. Dawisha & K. Dawisha(eds.) The Making of Foreign Policy in Rusr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onk: M. E. Sharpe. Amir-Ahmadian, (2000). Karabakh Crisis and Development, Amu Darya-The Iranian Journal. Ginat, R. & Vaserman (1994). National, Territorial or Religious Conflict? The Case of Nagorno-Karabakh, Studies in Conflict and Terrorism, Vol. 17. Huttenbach, H. R. (1995). Post- Soviet Crisis and Disorder in Transcaucasia, V. Tismaneanu(ed.), Political Culture and Civil Society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onk: M. E. Sharpe. Johnson, Rob. (2007). Oil, Islam, Conflict: Central Asia since 1945, London: Reaktion Books. Roy, Oliver. (2005). The New Central Asia: The Creation of Nation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Swietochowski, T., 1994a The Problem of Nagorno- Karabakh: Geography Versus Demography under Colonialism and in Decolonization, H. Malik(ed.) Central Asia, N. Y.: St. Martin's Press 1995 b Azerbaizan: A. Borderland at the Crossroads of History, S. F. Starr(ed.), The Legacy of History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rok: M. E. Sharpe Smolansky, O. M. (1995). Russia and Transcaucasia: The Case of Nagorno-Karabakh, A. Z. Rubinstein & Smola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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