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설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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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미션-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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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설계1129(앞4도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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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 1 부 입례송영 32장(만유의 주재) 예배에의 부름 시 68:19 사회자 송영 찬양대 기원 사회자 찬송 303장(날 위하여 십자가의) 다함께 기도 2부 : 윤영길 장로 /5부: 신동현 장로 신앙고백 사도신경 다같이 찬송 528장(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Transcription:

2001년 설교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 (창세기 39:1~23)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2001.11.30] 새벽기도-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마가복음 11:1~11)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홍순관 전도사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신 너는 행복자로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개역, 신명기 33:1]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 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개역, 신명기 33:29] 명기의 뜻이 뭐죠? 하나님의... 하나님의? 그러면 신 자가 하나님이란 뜻이겠네요? 명 은 명령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명 령이라고 이해하면 그럴 듯한데 사실은 앞에 있는 신 자가 귀신 신 자가 아니라 펼칠 신 자인데 더 찾 아보면 다시 되풀이 할 신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申 命 이란 것은 명령을 되풀이 한 책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령이란 출애굽하면서 시작한 광야생활에서 주신 율법을 가리키는데 출애 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요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명기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 중에 한가지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 탄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전부 뭘로 물리치셨죠? 말씀으로 물리치셨는데 그 말씀 전부가 신명기 말씀입 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는 말씀이 신명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신명기를 가장 애독하셨고 인용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코 신명기 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책이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두어 달 전쯤에 요단강 건너편 모압 지방에서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모세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쭉 되풀이하면서 정돈한 것이 바로 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출애굽기, 레위기에 나왔던 이야기들과 중복이 많이 됩니다. 반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렇 습니다. 지금 모세가 보고 있는 이 세대는 출애굽한 세대가 아닙니다. 출애굽할 때에 아주 어렸거나 나중에 태어나서 광야에서 자란, 다음 세대입니다. 출애굽할 때 어른이었던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지금 몇 사람 남았죠? 세 사람 남았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이죠. 이 세 사람 중에 모세는 이 얘기를 다 한 후에 여기서 죽고 두 사람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다음 2세대에게 모세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당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를 요약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아 과 거를 돌아보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후에 너희 부모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과거를 돌아보라. 제발 너희 부모들이 악행과 불 순종한 것을 본받지 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켜라. 그리고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가 놓여 있다. 그것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너희들의 책임이다. 이런 이야기가 신명기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요약이면서 동시에 모세가 남기는 유언의 핵심입니다. 신명기 전체는 어 떻게 본다면 모세가 남기는 유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순종하지 않았던지 구약 성경 어디를 펴보아도 그런 예를 발견할 수 있을 정 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 이야기라기보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은 이야기만 쭉 기록된 것이 구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불만을 할 그 때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 불평불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애 굽에서 열 가지 재앙이 내릴 때 그 중에 몇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도 고통을 당했지만 진짜 고통스러운 재 앙이 내렸을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전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기분 이 좋았겠습니까? 홍해를 건넜습니다. 영화의 그 장면을 보고도 감탄을 하죠? 그런데 실제로 눈으로 보면서 마른 땅을 건 넜던 사람들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불평불만이 터지는 거죠. 낮에는 구름기둥 - 1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이 햇빛을 가려주고 밤에는 불기둥이 앞을 밝혀주기도 하면서 따뜻한 기온도 제공을 해주었을 겁니다. 그 걸 매일 보면서도 하나님께 불평불만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리지 마라 더 이상... 안 말리면 어떡하는데요? 말리지 마라 어떡하겠다고요? 이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 쓸어버 리고 너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하나 만들겠다라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그랬겠습니까? 모세가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차라리 내 이름을 제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여기서 그런다면 저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능력도 없 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끌고 간다고 가서 결국 광야에서 다 죽였다면 누가 창피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서 마음을 돌이키시죠. 이런 얘기 듣고 나중에 뚱딴지 같은 질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랬단 말입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지난번에 모세 이야기 하면서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렇게 대답하고 이렇게 될 걸 엄연히 아시면서 그 속마음을 한번 털어놓은 겁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그 교제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믿을 수 있을 만큼 모세가 자랐다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서 그러진 않겠다. 그러나 내가 너희하고 같이는 못 가겠 다. 네가 인솔해서 네가 데리고 가거라 같이 못 가겠다. 같이 못 가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앞장서서 데리고 가다가는 이놈들 불평불만할 때 한순간에 멸해버릴지 모르는 그런 위험이 있으니 까 차라리 같이 안 가는 게 낫겠다. 네가 인솔해서 가라. 모세가 거기서 또 하나님께 그러시면 안됩니다. 이래서 결국은 같이 갑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많이 했는지는 구약 성경을 찾아보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까지 인내하시 면서 인도해 가셨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남의 얘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게 우리 자신의 얘기라고 생각해 보시면 비슷한 점이 아마 없지 않 아 좀 있긴 있을 겁니다. 저는 신학교 가야 한다는 생각을 고등학교 때부터 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 면서 한 삼십 년을 버텼습니다. 안 두들겨 맞은 게 참 용하죠. 저하고 같이 있는 어느 전도사님이 저 보고 그래요. 자기가 아는 분 얘기를 하면서 전도사님은 다리 하나 안 부서지고 멀쩡하게 신학교 갔으니까 감 사 헌금 해야 합니다. 이러더라구요. 맞는 얘기죠. 저 자신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가야 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참 많이 버텼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예가 어디 하나 둘인가! 내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어떻게 이 모양으로 사느냐 해서 이거 하나는 고쳐야지 하는데 참 어렵지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이런 백성들 을 이렇게 끌고가신 하나님께서 이 정도는 용서해 주시겠지요? 얼굴에 철판 좀 깔아도 됩니다. 용서는 하 십니다. 그로 인해 내가 좀 힘이 들어서 그렇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데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하이라이트가 있습니다. 하이 라이트 아시죠?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압권? 불순종하는 그 많은 장면들 중에서 압권. 제일 멋진 장면. 뭐지요? 금송아지 만든 것. 금송아지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가 십계명 돌판 깨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끝났습니다. 그것보다 더 혹독한 사건 있죠? 이게 압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순종을 안 했으면 이랬을까 가장 큰 벌 받은 사건요. 불뱀. 불뱀요? 그것도 작지 않지만 더 큰 불순종이 있어요. 신명기를 시작하면서 모세가 바로 그 사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신명기 1장 2장에 걸쳐서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에서부터 모세가 과거 회고를 시작합니다. 그 사건이 뭘까요? 벌을 40년간이나 받았는데요? 불뱀도 큰 사건이었고 금송아지 만든 것도 큰 사건이지만 그건 짧은 시간에 끝났잖아요. 40년간 벌을 서야 했던 사건이 뭐였죠? 가데스 바네아 - 2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예.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출애굽한지 약 2년만에 드디어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 한 겁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정탐꾼을 12명 보냈습니다. 정탐을 해오라고 보냈더니 갔다와서 10명이 우리는 메뚜기 같고 저 사람들은 거인 같아서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고 보고를 한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거기서 앉아 울며 차라리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에 어디 묻을 데가 없어 서 우리를 여기다 끌어다 묻을려고 하느냐? 이러면서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죠. 그때 두 사람이 아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했으니까 올라가자. 저 사람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저 사람들은 우리 의 밥이다. 올라가자. 이 두 사람 누구죠? 여호수아와 갈렙이죠. 밥이다? 표현이 참 재미있어요. 밥치고는 너무나 큰 밥이었어요. 올라가자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신앙적인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모세를 향하여 돌로 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징벌을 선언하십니다. 40년을 이 광야에서 방황해야 할 것이다. 왜 40년이죠?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탐하러 갔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이고, 또 다른 목적은 그때 불평불만 하고 하나님께 끝없이 도전했던 그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 다.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을 때까지 40년. 그 세월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겁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부터 모세는 신명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갑니다. 너희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 했고 그로 인해서 얼마만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보라는 얘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33장은 신명기의 사 실상 끝부분입니다. 뒤에 34장이 있지만 그것은 모세의 죽음을 기록한 내용이니까 실질적인 내용은 33장에 서 끝납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다 당부한 마지막 중에도 마지막에 남긴 말이 뭐냐 하면 너희는 행복자 라 는 겁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한 후에 너희는 행복자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 고 그러죠?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고 그럽니까?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겁니다. 조상들이 잘못한 거 수 없이 많이 있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구원을 너희같이 받은 백성이 없다는 말 입니다. 그것 때문에 너희는 행복자 라고 모세가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행복한지 한번 살펴봅시 다. 실제로 행복한가요? 행복한지 안 한지를 살피려면 제일 먼저 의식주 문제를 따지죠? 의식주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야 우선은 행복한 겁니다. 이 사람들 옷 말입니다. 이 옷 어디서 샀을까요? 애굽에서. 몇 년 전에요? 40년 전에. 누가 샀어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이 사람들은 애굽을 모릅니다. 누가 샀어요? 부모님들이. 부모님들이 40여년 전에 사서 입고 있던 것을 광야 생활하면서 물려받아서 입고 있는 옷입니다. 사십년 동안 해어지지도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셔서 40년 동안 해어지지 않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해어지지 않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해어지지 않는 옷 좋아요? 아마 나이 좀 드신 분 들은 그런 경험 있으실 텐데요. 저도 옛날에 고무신 제발 좀 떨어져야 새로 하나 살 건데 싶어서 세맨(시 멘트) 벽에도 문질러 보고 유리 조각 주워서 긁어 봤는데 안 떨어지더라구요. 왜 그렇게 질긴지 모르겠어 요. 이게 떨어져야, 시커먼 고무신인데요, 이것이 떨어져야 내버리고 다른 애들 신는 하얀 고무신 한번 신 어볼거라고 세면 벽에도 문질러 보고 유리조각에 긁어봐도 안 떨어져요. 옷요? 별로 좋지도 않은 옷이 질기긴 왜 그렇게 질겨요? 물려받은 옷요? 요즘 물려받은 옷은 그래도 질 이 좋아서 괜찮은 편입니다. 제가 너댓살 적에 어느 집사님께서 옛날말로 돕바 라는 거 있죠? 그것 한 벌 주셨던 것 같아요. 그 돕바를 우리 형제 다섯 명이 물려가면서 다 입었어요. 떨어져야 말이죠. 대를 물려가 면서 다 입었는데 워낙 옷이 없으니까 그것도 감지덕지죠. 저는 맏이가 되서 물려받아 입을 옷도 없어서 중학교 들어갈 때 우리 누나 바지 입고 시험 치러 갔던 모양인데 우리 어머니가 그 얘기만 하면 지금도 - 3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울어요. 저는 못 느꼈는데 면접하는 선생님이 야, 너 누나 있지? 나 잘 안다. 이러더랍니다. 밖에서 우리 어머니가 그걸 들었나봐요. 그 놈의 선생, 알기는 잘도 안다. 그랬다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40년 동안 입고 있는 이 옷은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몸서리 나는 옷이 아닐까 싶어요. 옷 얘기만 나오면 제가 빠뜨리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런 모습은 절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씀 드립니다. 어떤 분이 모처럼 유행하는 멋진 옷을 입고 왔어요. 남 자들보다 주로 여자분들이 그러죠. 한 벌 입고 오면 그 다음에 그 옷이 살금살금 번져나가는 거예요. 저는 그런 거 잘 못 느꼈는데 누가 얘기를 하길래 그런가 싶어서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좋은 옷 있으면 절대 로 교회에 입고 와서 폼잡지 마세요. 교회는 내가 이 옷 입고 감으로 해서 혹시 마음 다치는 다른 성도가 있지 않을까 이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 다른 성도가 샘을 내거나 새 옷 해 입지 못하는 성도 가 마음 아파할지 모르겠다 싶으면 안 입고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옷은 어디에 입고 가야죠? 동창 회 갈 때는 입고 가세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못 살고 못 먹는다고 받았던 구박을 거기 가서 다 푸세요. 야! 너 요새 잘 사는가보다. 그런 말 들어도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안됩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 들의 옷은 그렇습니다. 먹는 거 어때요? 광야 40년을 살면서 뭘 먹고 살았어요?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는 굉장히 맛있었다고 그러거든요. 맛있었다고 그래요. 그럼 됐죠? 누가 아이고... 하시내요. 아무리 맛이 있어도 똑같은 음식을 40년 먹으면 몸서리날 겁니다. 제가 가끔 집에 오면 한번씩 라면도 먹고 어디 나가서 뭐 먹자 그러면 국수 잘 시켜먹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래요 그것 먹고 힘 나냐? 그럼 대답을 이렇 게 하죠. 밥을 한 40년 먹었더니 인제 질린다. 농담입니다. 한국 사람들 밥을 40년 먹어도 안 질려요. 참 복입니다. 그런데 밥 말고 다른 것 한 번 잡숴보시죠. 어려울걸요. 고기 좋아하시는 분에게 다른 것 다 제 쳐두고 고기만 한번 잔뜩 먹여 보시죠. 얼마나 갈려는가. 저는 올해 예전보다 먹는 것도 적게 먹고 설치기는 더 설치고 그런데도 살이 쪘더라구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데 결국 내린 결론은 토요일, 주일 교회서 먹은 밥 덕분입니다. 혹시 집에서 밥맛이 없거들랑 주 말 저녁에 교회 와서 얼쩡얼쩡 해보십시오. 외식보다 나은 밥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디서 나오든지 나와요. 아주 중요한 비밀입니다. 그 밥이 살찌게 하더라구요. 우리 교회에서는 먹는 것 하나는 정말 풍성합니다. 몇몇 분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다 대면 40년동안 똑같은 것만 먹었습니다. 다른 것 뭐가 있겠어요? 40년동안 같 은 음식만 먹고 지금 쭈그리고 앉아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있는 거예요. 너희는 행 복자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그런데 이게 뭐 행복할까요? 마지막 남은 것, 주! 집은 어때요? 어디에 삽니까? 천막 아닙니까? 그리고 둘러보면 사방 풍경은 삭막하 죠. 제가 포항시내에서 10년을 출, 퇴근했는데 이쪽 지곡 안으로 들어와 볼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상도 중학교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무라고는 잘 안 보여요. 주택가 한복판이거든요. 마지막 3년은 항도여중 에 있었는데 항도여중 바로 앞에는 수도산이 있어요. 수도산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몇 년 전에 불이 나서 꼭 중학생 머리 빡빡 밀어놓은 것 같아요. 사방이 그러니 계절 바뀌는 걸 몰랐거든요. 그러다가 경주로 발령이 났는데 이야! 첫날부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포항시내에서 제 가 안개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경주로 첫 출근하던 날 외팔교 지나가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어요. 그 안개 속을 뚫고 운전하는데 기분이 참 좋데요. 전설의 고향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분위기가 좋더라구요. 계절의 변화를 날마다 느껴요. 출근 때마다 꽃이 얼마나 피는지 몰라요. 어느 날은 도로변 수 킬로미터에 걸쳐 전기줄에 새가 좌악 앉아 있는데 분위기가 참 묘하더라구요. 그래서 수업 시간마다 한 5분 정도 출근 길의 그 소감을 영어듣기 훈련도 시킬 겸 영어로 들려주곤했죠. 참 재미있었어요. 어려운 점은 꽃이 철따라 계속 피는데 이걸 영어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미국 사람 붙들고 어떡하 면 되냐고 물어 보니까 자기도 모른데요. 니는 미국 사람이 영어로 못하면 어떡하냐? 하니까 꽃이 다 다 르데요. 미국에서 보는 꽃하고 여기서 보는 꽃하고 달라서 자기도 설명을 못하겠대요. 미국 사람도 설명 못 - 4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하는 걸 할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제 교실이 2층인데 소나무가 교실 유리창 높 이하고 똑같아요. 수업하다가 내려다 보면 소나무 위에 앉은 학이 된 느낌이에요. 소나무! 참 아름답고도 운치있는 나무입니다. 소나무가 가지를 뻗치고 있는데 그 위에서 수업을 하다가 가끔가끔 내려다봐요. 정원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같이 있던 선생님들은 벚꽃만 피면 점심을 교실에서 안 먹어요. 차 몰고 시내로 나가요. 벚꽃 피는 곳을 휙 둘러서 먹고 들어오죠. 저도 한 두번 따라가 봤죠. 벚꽃 피어 있을 때보다는 벚꽃이 지면서 눈처럼 휘날 릴 때 그 속을 차로 한바퀴 돌면 멋져요. 포항에 있을 때는 계절의 변화를 몰랐는데 경주 몇 년 다니면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낙엽이 아주 예쁘게 드는 곳이 있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내년에는 낙엽 드는 곳에 한번 올라가 볼거다고 작정했는데 못 가보고 왔습니다. 포항 시내에 있다가 경주 풍경을 보니까 세상 에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어요. 자,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아갑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만 뜨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광야에서 40년 살았습니다. 거기 뭐 볼 게 있겠습니까? 포항 시내보다 더 거칠고 삭막한 이런 곳에 백성들을 앉혀놓 고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의, 식은 고사하고 주거지마저 이 모양인데도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참 좋아 보 이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지금 누가 있어요?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지금 들어가면 누가 어서 오십시오 하나요? 안 합니다. 전부 싸워서 밀어내야 합니다. 싸움 언제 한번 제대로 해봤나요? 군사훈련 한번을 해봤나요? 싸움 잘 하는 훈련된 군인들이야 전쟁이 일어난다면 신난다 하고 뛰어갈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40년 전에 자기 아버지 세대들이 그렇게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발버둥쳤다가 40년 동안 하나 님께 징벌을 받았던 그 민족과 이제 싸워야 합니다. 그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런 때입니다. 말하자면 미래가 불안한 거죠. 이런 형편에 처해 있는 이들을 향해서 모세는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 하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희같이 받은 백성이 없다는 것 때문에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을 만한 행복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행복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단정코 말하기를 가능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누구죠? 사도 바울. 사도 바울도 틀림없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이 한 사람 있잖아요? 욥. 맞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 왜 먼저 안 나와요? 여름 내내 무화과 나무 열매 없으며... 해놓고요. 더군다 나 그 노래 부르시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께 설명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무화과 나무 열매 없으며 하는 설교를 한 적이 얼마 안됐는데요. 농사를 1년 내내 지었는데 소출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그래도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다구요? 그게 하박국의 노래입니다. 하박국 얘기 대신 우리 얘기합시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죽어라고 공부했는데 미끄러졌습니다. 그래도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서 감사할 수 있다구요? 불가능한 거 아니에요? 하박국의 노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리라. 그것이 하박국의 노래입니다. 비록 바울은 고생을 엄청나게 했지만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걸 눈 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정말 험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눈으로 보면서 그 길을 갔습니다. 고 통의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큰 위로가 늘 함께 있었습니다. 하박국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리라고 하는 이 고백이 사실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욥의 고백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리고 친구들과 끝없는 논쟁을 했지만 나 중에 하나님의 모습을 알고나서 원망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말로, 도대체 이치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것이 - 5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안다고 떠들어대는 게 누구냐? 나중에 보니까 자기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욥이 무얼 잘못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앗아갔는데? 욥이 하나님께 다시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전에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만큼 더 알고 나니까 이제 모든 것이 해결이 됐다는 말입니다. 재산을 다 회복시켰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님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모든 소유 를 다 잃어버린 상태임에도 행복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추가로 주신 것입 니다. 물질의 복은 보너스일 뿐입니다. 욥이 받은 복이 뭐냐고 할 때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난 것에 너무 관 심을 두지 마십시오. 욥이 받은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된 것, 이것이 욥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 렇게 기쁨을 완전히 회복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이전보다 배로 많은 재물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경우를 가리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고 하셨거든요. 먼 저라는 말이 참 죄송합니다만 사람 죽이는 표현입니다. 신앙대로 갈 것이냐 아니면 내 생각으로는 이쪽으 로 가야 출세하는데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는 갈등이 생겼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라는 고백을 먼저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때로는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쪽으로 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이런 고민이 생겨나거든 모험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고 그런 갈등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도 잘 믿고 이 땅에서 잘 살고 참 좋겠죠.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거 의 없어요.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의 길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주가 그 모양임에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행복을 찾는지 확인 해 봅시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뭐부터 생각을 하죠?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파트 평수대로 모인다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이 주택단지 안에는 아파트 평수가 비슷해서 괜찮으리라고 생각합니 다만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게 용흥동 우방아파트가 들어설 그 무렵인데 거기는 학교에서 아파트 평수끼리 모인다는 겁니다. 아파트 평수나 차 종류 가지고 끼리끼리 모인대요. 이게 참 문제는 문젭니다. 오늘 강 집사님이 안 보이시는 것 같아서... 여기 계셔야 오해가 없는데... 제가 이 교회 처음 왔던 날 제 차를 마당에 두었는데요, 어느 집사님께서 어느 O이 폐차할 차를 교회 마당에 버리고... 그랬다나요. 제 차가 고물이라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사실은 먼지가 끼어도 잘 닦지도 않습니다. 학교에서 지난 가을에 하늘 쳐다보면서 비가 와야 되는데... 그때 사람들 비가 와야 된다고 걱정하던 때입니다. 수업 중 에 비가 와야 되는데... 했더니 어느 녀석이 물어요. 왜요? 비가 와야 내 차가 깨끗해질건데... 아파트 평수 시원찮고 차가 시원찮아도 괜찮은 세상이어야 합니다. 외국에 한번 갔다왔냐를 따지데요. 꼭 갔다 와야 합니까? 애들 기 안 죽일려고 보내야 되는 풍토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불행합니까? 막말로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불행하거나 기죽는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 고 생각합니다. 차 때문에 행복했던 얘기를 한번 드리고 지나가는 게 좋겠네요. 제 차는 멀리 가지 말라고 선고를 받은 차입니다. 그래서 멀리는 못 가는데 여기 부임한지 두 달만에 평택에서 하는 수련회에 다녀와 야 하겠는데 교통편이 어려웠습니다. 고물 차지만 몰고 갔다와야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무사히 다녀오도록 기도를 부탁했더니 어느 집사님이 자기 차 갖고 갔다오시라 해서 갔다가 내려오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차를 몰고 가서 행복한 게 아니고 자기 차 열쇠를 제게 넘긴 최초의 사건입니다. 뭘 믿고 나에게 차 열쇠를 넘기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설픈 사람을 그래도 전도사랍시고 생각해주는 것이 눈물 겹도록 고마웠답니다. 제가 무얼 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나 하는 이 생각 때문에 운전하는 동안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든 것은 결코 차 때문이 아니라 그 집사님 부부의 마음이었 습니다. 벌써 1년이 다 된 얘기지만 그 행복이 아직도 제 가슴에 찡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 평생 잊기 어려울 겁니다. - 6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직설적으로 얘기해서 여러분들의 행복은 절대로 집 평수나 자동차나 외국물에 있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잘해줘서 행복하고 아내가 잘해줘서 행복하고 자식이 잘해서 행복하면 큰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근원을 거기서 찾지 는 마십시오. 자식은 언젠가 부모를 배신합니다. 배신을 해서 배신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부모는 섭섭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예 자식은 언젠가 나를 배신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계십시오. 저 녀석들이 애비 애미를 몰라보고...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게 본전입니다. 떠나갈 때 한번쯤 뒤돌아보고 떠나가면 고마운 줄 아시고 안 돌아보고 그냥 떠나가면 정상이려니 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이 저희 집에 부모님이 같이 계십니다. 제 나름대로는 섭섭하게 안 해 드 릴려고 애를 쓰죠. 그러나 저의 의도와는 달리 섭섭함을 많이 느끼시더라구요. 부모가 자식들에게 내가 너 거 키울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건 자식이 안 알아주는 겁니다. 아 낌없이 주고, 떠나갈 때 깨끗이 떠나보내시는 게 옳습니다. 자식에게 행복을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 다. 남편이나 아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옛날에 밤새도록 기침하면서 고 생할 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괜히 자다가 일어나서 위로하는 말이랍시고 한마디 거들면 이게 방해가 되지 도움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침 소리 듣고 잠 이 깨면 깬 척 하지 않는 것 뿐이었습니다. 잠은 안 와요. 저러다가 죽을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을 하니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돌아누운 채 잠자는 척 하면서 밤을 새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월이 좀 지나서 우리 집사람이 숨을 제법 잘 쉴 때 동생들과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옛날 얘기 하면서 그때 당신 잘 자데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그 날 집사람이 한방 맞았습니다. 딴 것은 모르겠는데 그건 용서가 안되더라구요. 잘 자는 것 좋아하시네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데도 도울 수 있 는 방법이 없더란 얘깁니다. 아내나 남편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 의 근원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효자제일교회 다니는 우리 성도님들은 교회 생활이 참 행복하 시죠? 그 행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요? 목사님 아니에요? 뒤에 목사님 계실 때 대답도 좀 그렇게 해주고 그러세요. 그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이래! 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이 아마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큰 복 중 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복의 근원이 목사님은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교회나 가도 괜찮겠 네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징검다리라고 생각을 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목사님이 하나의 징검다리가 돼서,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되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건너가야 하는데 이 징검다리가 부 실한 징검다리가 가끔 있어요. 견고한 줄 알고 꾹 밟았는데 휘청하고 넘어지면 물에 빠지는 거죠. 튼튼하게 놓여서 우리가 굳건하게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징검다리가 있다면 참 고맙긴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근원 은 아닙니다. 그 징검다리를 건너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근원은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요소도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집 평수 넓으면 행복하죠? 좋은 자동차 가지고 폼나게 살면 기분 좋 잖아요. 남들이 아무 소리 못할 때 외국 갔다 온 이야기 한번씩 하면 어깨가 올라가잖아요. 다 좋은 것입니 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은 아니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느끼지 못하면 이 땅에서 진 실된 행복자는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가고 다 없어지더라도 최후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행복을 누리죠? 말씀대로 사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과 욕심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면 눈 딱 감고 말씀대로 실천해 보세요. - 7 -

[2001.01.03]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1, 29) 그 다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시면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그 길만이 이 땅에서 진실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나와 계시는 여러분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 비해서 정말 행복한 사 람들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우리처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 8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성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 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 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 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 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 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 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 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 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 시니라 [개역, 마태복음 1:1~16] 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 봐야겠다고 신약을 읽으면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부터 읽는 것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작전상 불리한 점이 많습니다. 첫 장을 열면 재미있겠다 싶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길다란 족보가 먼저 나오는 것은 숨부터 막힙니다. 그래 서 작전상 마태복음부터 읽게 하는 것은 유리하지 못합니다. 어떤 순서로 읽는 게 좋을까요? 요한복음 요한복음요? 요한복음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조금 어렵습니다. 차원이 높은 감이 있지요. 그러면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먼저 읽는 것이 작전상 유리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순서대로 되어 있다는 점과 그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이 같은 저자라는 점에서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가 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면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무엇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족보. 족보입니까? 족보 같기는 한데 족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세계라. 그 말이 족보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성경에 예수님의 족보라는 소제목이 있어요. 저런 성경 가지고 있는 분들 때문에 설교하기 겁납니다. 제발 저런 거 안 써야 되는데... 잘못했다간 바 로 들통 나거든요. 그렇습니다. 세계 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쓰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을 계, 혹은 핏줄 계 라고 하는 系 자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면 족보와 같은 뜻입니다. 내용상으로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 인 것이 틀림없는데 세계라는 단어를 조금 주의하셔야 합니다. 한문 성경을 보시는 것이 이런 잘못에서 벗 어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건 분명히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족보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본 문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기네스 북에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가 어느 나라 어떤 족보인지 혹 아십니까? 김해 김씨 김해 김씨 족보요? 짐작이죠? 저도 김해 김씨 쪽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랍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건 맞아요. 그 분이 자기 성씨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을 하고 있더라구요. 우리나라에 있는 안동 권씨 족보가 기네스 북에 올라 있는 세계 최고의 족보라고 합니다. 자랑이 대단하더라구요. 안동 권씨 족보 하고 우리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예수님의 족보하고 비교하면 어느 것이 오래된 것 같습니까? 비교가 안돼 요. 그런데 왜 기네스 북에는 이 족보가 안 올라가고 안동 권씨 족보가 올라갔을까요? 이게 참 묘한 사람 들의 편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들은 무조건 기록으로 취급을 안 하는 묘한 버릇들이 있습니다. - 1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똑같은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고 만약에 다른 데도 있으면 다른 데 있는 것은 자료로 취급하고 성경은 제외시켜 버립니다.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냐면, 성경에 많이 나오는 헷 족속 있죠? 창세기 공부할 때 이야기 드렸는데요 헷 족속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고고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헷 족 속에 대한 기록이 성경 외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틀렸다고 이야기했죠. 고고 학이 발달하면서 헷 족속에 대한 자료가 뒤늦게 쏟아져 나온 겁니다. 그러고 보니 헷 족속은 굉장한 철기 문명을 지녔던 대단한 민족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거지요. 지금은 역사책에 힛타이트 족이라고 나옵니다. 근 동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한동안 위세를 떨쳤던 대단한 민족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노아 홍수와 비슷한 이야기가 바벨론 설화에 있는데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성경 이 훨씬 논리적이고 과학적입니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바벨론에 있었던 그 홍수 설화가 성경에 영향을 주 어서 성경에 노아의 이야기가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바벨론 설화의 주인공은 누우 라는 노인입니다. 방주의 크기가 정육면체로 되어 있습니다. 바다에 정육 면체 배가 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떠 있을 수 없습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의 장, 광, 고에 관한 비율 은 1844년 영국의 브루넬이 The Great Britan(98m 15.5m 9.9m, 방주의 2/3 크기)을 건조하면서 설계에 처음으 로 사용하여, 항해보다는 잘 떠 있기 위한 대형 선박에 즐겨 사용하게 된 비율입니다. 이 비율은 현대 유조 선이나 대형 전함의 비율과 흡사한 것이며, 1000년 동안 축적된 영국 조선기술의 결정판인 셈인데 이런 비 율이 수 천년 전의 유목민의 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혜로 현실에 맞게 수정 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기록은 전설로 돌리고 앞뒤가 잘 맞지도 않는 바벨론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실로 인정을 하는 묘한 버릇이 있단 말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죠. 학교에서 수업시간 중에나 특별활동 시간에 고전문학반을 만들어서 고전을 가 르친다면 허용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반은 안돼요. 성경은 고전 아니냐 고전 중의 왕고전 아니냐라고 우겨가지고 억지로 성사될 듯 하다가도 끝내 잘 안됩니다. 성경은 좋은 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허용이 안됩니다.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이런 편견 때문에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혜롭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 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족보를 왜 기록하지요? 심지어 족보 없는 집은 옛날에 돈을 많이 주고 사기도 하고 남의 족보 를 도용하기도 했습니다. 왜 집에 족보를 두려고 할까요? 우리 가문이 적어도 이 정도 가문이 된다라는 것 을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30년은 된 듯 싶은데 우리 누님이 전라도 영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 쪽에는 광산 김씨가 아주 양반으로 행세를 한다고 그래요. 우리 자형이 광산 김씨인데, 양가의 어른들이 만났을 때 우리 아버지는 조 금 젊어 보이기도 하고 그 쪽은 양반 동네니까 사돈 어른이 우리 아버님 보고 말을 놓겠네 라고 했답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20세가 많은 큰아버지가 따라 가셨는데 뒤에서 보고 있다가 이런 상놈들이 있나 하고 난 리를 친 거죠. 우리 큰아버지가 족보 책을 넣어 갔답니다. 그 곳에서 광산 김씨 족보 내놓아라 이렇게 된 거죠. 두 영감님이 쭈그리고 앉아서 족보 싸움을 했는데 결국 남양 홍씨가 광산 김씨보다 더 양반이다라고 결론이 나고 그 다음부터 대접을 얼마나 잘 받았느냐면요 누나가 시댁에 가서 뭘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 지... 좀 잘 하면 역시 양반집 규수는 달라 이렇게 나온 거지요. 지내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남양 홍씨 얼마 나 양반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만 은기철 집사님이 언젠가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나중에 물어보세요.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 족보 가지고 왜 그렇게 싸우는지 그 이야기를 듣고나니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 도 하고 그래요. 집집마다 이런 족보를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자기들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을 가지고 있 느냐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읽어봐도 별로 재미는 없을 겁니다. 시간을 조금 드릴테니까 예수님 의 족보 중에서 여러분들이 알만한 사람이 몇 명쯤 되나 헤아려 보십시오. 대강 보세요. 조금 틀려도 괜찮 - 2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습니다. 전체가 약 60명 가량 됩니다. 아는 사람이 40명 넘는 분 있어요? 없습니까? 30명은요? 없어요? 30명 넘는다고 하면 제 자리가 좀 위태 합니다. 20명은 넘겠다 싶으신 분? 몇 분 계시네요. 내리세요. 10명도 안될 것 같다 하시는 분? 없습니까? 손을 안 들어도 괜찮은데 10명이 안 되시는 분들은 반성하시고, 지금부터라도 성경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 20명 가까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은 20명에서 30명 사이 가 될 것이고, 아무리 몰라도 20명에서 10명은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을까 요? 남의 족보에... 구약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만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이 족보가 보통 족보가 아닙니다. 왕의 족보입니다. 여러 분들이 알만한 많은 사람들은 왕의 조상이거나 왕입니다. 그러니까 알만한 거지요. 왕의 족보이므로 얼마나 아름답게 되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족보를 유심히 보면 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빼냈으면 하는 사람 한번 불러봅시다. 다말. 또 있습니까? 여로보암. 여로보암도 빼고 싶으세요? 우리 권사님 대단합니다. 왜 여로보암을 빼야 하는지 이해 안 가시는 분도 더러 계실 테지요. 여로보암은 악한 왕의 대명사이지요. 라합. 라합도 빼고 싶어요? 기생이라고 빼버려요. 또? 우리아의 아내. 그렇습니다. 왜 빼요? 다시 말하면 족보에 넣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이 족보에 들어와 있다는 뜻입니다. 기피 인물 1번이 다말인데 다말을 왜 빼야 하죠? 다말은 참으로 곤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하나님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공부를 해 보셔야 할 문제지만 겉으로만 본다면 다말은 시아버 지와 관계해서 아들을 낳은 여자거든요. 동네 소문나면 그 동네에 못 삽니다. 다말에게는 분명 이유가 있었 습니다. 이유가 있었고 그 시아버지가 죽이려고 끌고 나가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나보다 이 여자가 더 옳다라고 고백을 하고 죽이지 못했던 거지요. 이유야 어떻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 다. 그 여자 이름이 다말이란 말이에요. 그런 여자를 족보에 버젓이 올려놓았단 말입니다. 아까 라합이 기생이라고 했었는데 어쩌면 기생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긴 해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에게 큰 도움을 준 여자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배신자 입니다. 그리고 신분이 기생이었단 말이에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 족보에 그냥 두자는 사람도 있겠고 반대도 있긴 있는 모양이지요. 결정적으로 빼고 싶은 사람은 우리아의 아내지요. 예전에 성경 보면서 우리아의 아내라는 걸 보고 성경 에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 이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기가 막히다는 느낌을 받은 구절입니다. 우리 아의 아내...? 이 여자는 이름이 없습니까? 밧세바라는 이름이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밧세바에게서 솔로 몬을 낳고 라고 기록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밧세바에게서라고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라고 적었거 든요. 느낌이 오세요? 우리 아버지가 옆집 아줌마에게 가서 나를 낳고 와 똑같은 말입니다. 다윗은 누구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아야 정상이지요? 자기 아내죠.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아의 아내 대신에 밧세바라고 써 주면 사람들이 다윗과 밧세바는 부부 사 이겠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오해하지 말라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쓴 것 같아요. 이것은 감추기는커녕 고의로 소문내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고칠 때는 밧세 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지만 솔로몬을 낳을 때는 다윗의 아내가 맞거든요. - 3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오래 전에 장군 한 명을 모셔다가 군인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월남까지 갔다 오신 분이거든요. 간증 삼아 들으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 자기 소개를 이렇게 하더군요. 자기 어머니가 유관순하고 동기 동창인데 만세 부르다가 도망가서 어느 다 리 밑에서 떨고 있었답니다. 이웃 마을에서 밤새 노름하고 돌아오던 백마 탄 젊은 분이 오다 보니까 다리 밑에 처녀 둘이 떨고 있었는데 그 두 처녀를 주워다가 잘 생긴 것은 자기하고 못생긴 것은 친구 주었는데 잘 생긴 게 자기 어머니라는 거예요. 제 표현이 아니라 그 분의 표현대로입니다. 자기 어머니는 일본에 한이 맺혀서 내가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을 많이 낳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들을 12명 낳았는데 그 중에 자기가 7번째라던가 그랬습니다. 세상에! 자기소개를 그렇게 하는 분 은 처음 봤어요. 그것도 남의 이야기하듯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습기는 우스운데 함부로 웃기도 그렇 고... 난감하더라구요. 그때 그 당혹감보다 여기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는 것이 훨씬 더 당혹스럽더란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잘못한 것을 덮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밝히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지요.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서 빼고 싶은 사람들을 그대로 넣어 놓았다는 것은 이 족보가 조상들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다면 악한 왕들과 몇 여자를 빼야 된다는 것입니다. 홍씨 족보에도 여자가 몇 있습니다. 요즘에는 여자 이름도 족보에 올린다고 합니다만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지요. 그런데 남양 홍씨 족보에는 여자 분이 몇 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양반 족보라는 것을 감안하 셔서 대답하세요. 수절한 사람... 수절했다고 족보에 올려요? 왕의 처... 왕의 처가 뭡니까 왕비지요. 혜경궁 홍씨가 남양 홍씨거든요. 왕비정도 되니까 족보에 올려놓은 겁니다. 족보에 여자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은 대단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여자들은 오히려 빼내고 싶은 여자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족보는 사람들이 기록하는 그런 의미의 족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대답은 하나 뿐입니 다. 사람의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뭔가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 의 모든 약점이나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이 족보가 사람의 글이라면 이렇게 기록하지 않 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쓰신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이 남았다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같은 원리가 다른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성경의 어떤 인물이라도 흠을 잡을려면 잡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완벽한 인물은 없습니다. 위대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 도 성경을 읽어보면 다 흠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을 봅시다. 예수님을 뭐라 불렀죠?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는 말은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부름에도 그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지요? 베드로도 쪽팔리는 일 많이 했지요? 뭐 했습니까? 많이 했어요. 세상에! 지금 교황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호령하던 그 시절입니다. 마가가 그것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얘기를 자세하게 다 기록합니다. 죽은 사람 이야기를 쓴 것도 아닙니다. 현재 살아서 교회를 이끌고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렇게 창피한 얘기를 다 쓰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입니다. 또 누가 있나요? 모세... 모세가 위대해 보이지만 바보짓을 얼마나 했습니까! 아브라함... - 4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자기 살자고 마누라 팔아먹은 사람 아닙니까? 누구라도 성경에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 경은 하나님이 쓰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사람의 잘못을 감추지 않습니다.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어릴 때부터 정말 특이한 것으로 나옵니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님과 족보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 족보를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했더니 그 분 대답이 참 재미있어요. 누구나 예수님에게 편안하게 나아오라고 이렇게 기록했다는 겁니다. 그런 점도 있겠다 싶어요. 예수님의 족보가 왕의 족보라서 으리으리한 사람으로만 꽉 차 있으면 조상을 생각해 보면 기가 죽어서 예수님께 못 나올 수도 있다는 거지요. 예수님 족보보다 우리 족보가 좀 더 훌륭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면 누구나 예수님에게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이죠. 교회 가자는데 내가 어떻게 교회 가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족보를 한 번 보라는 겁니다. 당 신이 바람을 많이 피웠어요? 다윗만큼 피웠어요? 다윗같이 한 번 해 보셨어요? 아니라면 안심하고 나오라 는 겁니다. 여자 분들도 한마디 해야 되겠네요. 다말보다 나으시죠? 그러면 안심하고 나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께 기죽지 말고 나아오라는 뜻에서 족보를 이렇게 기록했다고 그 분이 말씀하시는데 동감 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잘난 사람을 부른 것 아니고 머리 좋은 사람을 부른 것 아닙니다. 재산 보고 부른 건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불러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런 뜻을 살피는 것도 은혜가 되 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적용을 해보면 우리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완 벽하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면 완벽하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꿈이 너무 큰 겁니다. 포기하십시오. 하 나님 앞에서는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마음을 그렇게 먹고 노력을 하 십시오. 그러나 사람 앞에서 완벽한 존재로 서기는 포기하세요. 이유는 내가 완벽하고 흠이 없는 사람 같으 면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내게 이끌기 위해서는 완벽한 존재로 서지 말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허물 투성이의 인간,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이 더러 더러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런 면이 조금 있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게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헛점이 있는 게 좋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때에 만만해 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 더 좋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고 얘기를 하죠? 이 말은 썩 좋은 말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너무 깐깐하고 모나게 살지 말고 두루뭉실하게 살아야 된다는 뜻에서 이런 말을 쓰기도 합니다. 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이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어울려 살 때 원리원칙만 따 지는 그런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푼수 짓도 가끔은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벽한 사람 중에 이런 사람 있죠? 꼭 필요한 말 이 외에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코 잘 하는 것 아닙니다. 믿는 성도들이 모였는데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쓸데없는 말은 안 하면 분위기가 어떻겠어요. 딱딱하고 냉 냉해요.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성경공부, 예배드릴 때는 헛소리하면 안되죠. 전도사가 여기 서서 헛소리하고 있어봐요. 누가 오겠어요. 그러나 항상 그러면 안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꼭 필요한 말 적절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갖고 계시면 빨리 바꾸 십시오.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필요한 이야기가 뭐 있겠습니까? 몇 층 가십니 까? 그게 뭐 필요해요? 그렇게 물었는데 내가 몇 층 가거나 무슨 상관이야! 하면 어떡하죠? 그래서 입 다물고 서로 외면하고 있어 보세요. - 5 -

[2001.01.10] 이걸 무슨 재미로 읽지? (마태복음 1:1~16) 안녕하세요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지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분위기를 바 꿔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꼭 필요한 말만 해야 된다. 이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별 도움이 되지 않 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잘 해야 합니다. 왜요?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완벽 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엄숙하지 마세요! 성탄절 전야에 헤롯 역을 했는데 제가 태어나고 연극 무대에 서 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어색 했고 뒤에 그것만 생각하면 자꾸 얼굴이 붉어져요. 나를 헤롯 시키려고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한가지는 이쁜 시녀를 둘이나 붙여준다고 한 겁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시녀를 둘 붙여준다고 했는데 제가 그것에 넘어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말에 넘어갔느냐 하면 전도사님이 이걸 하면 성 도들이 좋아합니다 는 말에 기꺼이 하기로 한 겁니다. 애들 말로 쪽이 좀 팔리면 어떻고 연기가 어설프면 어때요? 성도들이 좋아한다는데. 그래서 한 겁니다. 형제를 위하는 일이라면 푼수짓도 좀 하고 체면 깎이는 일도 좀 합시다. 본인은 스스로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것이죠. 나는 허물이 너무 많은데... 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푼수짓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본인 생각인지 남의 생 각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치셔야죠. 남들이 좋아하거든 완벽하지 않은 자신의 그 모습을 사랑하십시오. 정리를 해 봅시다. 성경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미화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 기 때문에 인간을 미화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이 사람의 책이 아니란 좋은 증거입 니다. 이 성경을 더욱 사랑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가문의 추한 모습조차 그대로 다 공개함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죽지 않고 오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왕의 족보에도 이렇게 추하고 악한 사람을 그대로 다 기록해 두었는데 우리는 너무 깔끔하고 깨끗 하게 자신을 나타낼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낚시밥이 됩시다. 만만하게 보이고 한 입에 집어삼킬 수 있어 보이는 낚시밥이 됩시다. 그 속에 낚시바늘을 숨긴 채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나에게 접근했다가 나 때문에 예수님에게 영원히 낚이도록 말입니다. - 6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씨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 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 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 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 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께 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 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 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 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개역, 마가복음 4:1~20] 뿌리는 자가 밭에 나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가 주워 먹었고, 돌밭에 떨어진 것은 싹이 조금 났지만 말라버렸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조금 자랐지만 결실치 못하 였고, 좋은 밭에 떨어진 것은 결실을 많이 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할까요? 네 종류의 밭이 있고, 씨가 떨어졌고, 씨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 중에 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이 이 비유를 듣고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들었으니 우리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씨 뿌리는 자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씨가 중요한 건지, 밭이 중요한 건지 생각을 하고 계십시오. 다른 부분을 조금 살펴보고 난 뒤에 이 점을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과 그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에 관한 비유입니까? 예 수님께서 무얼 말하기 위해 이걸 말씀하셨을까요. 11절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하신 말씀을 봐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비유들은 거의가 천국 은 이와 같으니 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대체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기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도 이 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왜 따라 다녔지요? 예수님이 무엇이 되길 바랬죠? 왕이 되면 하다못 해 장관이라도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왕이 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누누이 말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라고 믿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 제자들은 주님께서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니이까라고 또 물어요. 그런 제자들이었으니 예수님의 가르 침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유대인, 바리새인들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겁니다. 율법을 어겼단 말 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했어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 왔었 죠. 예수님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거듭나야 한다고 했거든요,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뭐라고 물었죠?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납니까? 제가 엄마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까요? 이 얘기거든요. 예수님 말씀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제자들 은 나중에 예수께 다시 가서 묻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밀을 잘 모르면 예수님께 다시 - 1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묻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면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참 많지요. 그런데 성경은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 훌륭 한 학자 중에 성경을 잘 아는 박사들 많이 있어요. 그럼에도 그들이 성경의 본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학문 연구하듯이 열심히 봐서 내용은 잘 알아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 는 한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하고 외운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확하게 일러 주셔야 아는 것입 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 령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하고 읽지 않으면 내 머리로, 내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경을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깨달은 대로 살아보지 않으면 여전히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가 모르면 최종적인 답은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 주셨습 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에게 설명한 내용이 뭐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는 그 분이 예수님인 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결국 어디서 알아채지요? 떡을 떼서 축사하시며... 기도할 때에 알아봅니다. 아! 이 분 이 예수님이다 하고 눈떠 보니까 안 계시더라는 거예요. 봐라 길에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가 슴이 뜨뜻하지 않더냐? 거기까지는 갔단 말이에요. 그러나 정작 기도하는 가운데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 는 눈이 뜨여졌더라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 씀은 꼭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차선책으로 성경을 잘 풀이해 주시는 분이 있으면 그런 분들에게 배우는 것이 좋은 점이 많지요. 예를 들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추방령이 내렸습니다. 생활 터전을 다 버리 고 약소 민족의 설움을 안고 쫓겨갔지요. 바울을 만난 것이 일생 일대의 큰 복이었습니다. 바울을 만난 그 자체가 복이 아니라 바울을 만나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 복이죠. 이것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장 큰 복입니다. 좋은 목사님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 그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얼마 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느냐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이 교회 와서 듣고 참 기분이 좋았던 말은 우리 전도사님이 여기 오래 있겠나? 계실 동안에 본전 빼자 라는 겁니다. 주일 오후에 한숨 잔다고 누워 있다가 성경공부 시간 됐다고 아이들 둘 데리고 헐레벌 떡 뛰어오는 그 모습이 기분 좋은 정도를 넘어서 감격스럽더라구요. 본전 빼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 보면 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뽑을 수 있는대로 뽑으십시오. 그렇게 열심이었는데 본전도 못 빼고 오늘 서울로 이사갔습니다. 저도 몹씨 안타깝습니다. 그런 자세가 소중한 자세이며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 나님을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습니다. 비 유를 쓰면 알아듣기가 참 쉬워요. 어려운 것이나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비유로 설명해 주면 알아듣기 쉽습니다. 어떤 비유인지 알아 맞추어 보세요. 가령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나의 필요한 모 든 것을 챙겨 주시고, 위험할 때는 돌아보아 주시고, 쉬어야 할 때는 나를 쉬게도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 이시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 그렇게 짧은 말 속에 긴 내용이 다 들었잖아요. 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안된다. 내게서 힘을 얻고 내 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렇게 비유로 말하면 전하려는 내용도 아주 선명하고 기억하기도 좋습니다. 비유 - 2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의 일차적인 목적은 내용을 아주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기 좋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다른 목적이 하 나 더 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모르는 사람들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쓰는 은어, 군인들이 쓰는 암호 따위가 그렇지요. 옛날에 아이 들이 어제 어디 갔더니 깔치가 꼰대하고 뭐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예사롭게 해요. 선생님이 그 말 뜻을 모르면 옆에 선생님을 두고 선생님 흉을 보는 겁니다. 깔치는 여선생님, 꼰대는 남선생님이지요. 은어라는 것이 아는 사람들끼리는 뜻이 아주 명확하게 통하고 모르는 사람은 들어도 못 알아듣게 하는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죽여야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시면 무슨 소리 인지 모르니까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는 거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용도를 잘 활용하셨습 니다. 타락하고 범죄한 사람을 불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이 땅에서 고난 당 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랑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알아듣는 사람 에게는 내 마음을 더 전해주고 싶지만 그 외 사람에게는 말하기도 싫어지는 거예요. 하나님도 감정이 있으실까요? 예. 감정이 있다고요?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감정이 있다고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감정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기분 좋을 때는 크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면 줄 것도 안 주 겠다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노하시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맞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고 싶을 때 마음껏 주고 싶은 거죠. 대신에 이런 길을 터 놓았는데도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백성에게는 말도 하 기 싫은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경 전체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이렇게 사랑했다는 사랑 고백입니다. 사랑 고백을 아무렇게나 하나요. 하나님의 사랑 고백은 그냥 누구에게나, 아무렇게나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진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보고,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감격할 이런 방법으로 주셨고 모르는 사람은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도록 해 놓으신 것이죠. 온갖 사랑을 다 쏟아도 거절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싫 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된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걸 뭐라 하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특별히 더 사랑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애를 받고 있는 거지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그러실 수 있나요?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받기는 받지만 조금 미안합니까? 하 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왜? 이런 사랑 받을 수 있는 문을 열어 놨거든요. 열어놓고 특별히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 들어오고 저기 앉아서 하나님 그거 편애 아닙니까?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싫으면 들어오면 될 것 아니에요. 들어오는데 자격 있습니까? 심사합니까?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만 하나님께서 따지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왜 편애하십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사랑하는 백성에게 더 주시기를 원하시고 끝까지 이 사랑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도록 묻어 놓겠다는 뜻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감정을 지닌 분은 참 좋은 분입니다. 기분파일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많이 사랑하 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는 말을 많이 하면 복을 쏟아 부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다윗을 보 면 그런 일 많이 했어요. 하나님 내가 무엇이관대 이런 복을 주십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은 봐라 다윗의 저 런 태도를 봐라 내가 어떻게 안 주겠느냐 그러시면서 복을 가져다 부으셨답니다. 그걸 보면 하나님은 너무 나 기분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3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물었던 질문 있지요?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 뿌리는 자, 씨, 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죠? 밭. 밭이 가장 중요하다구요? 밭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결론이 어떻게 나요? 좋은 밭이 되 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밭이 되나요? 좋은 거름을 많이 먹으면 좋은 밭이 되지요. 그러면 어떻게 좋 은 거름을 많이 먹나요? 좋은 주인을 만나야...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 해 놓고 보면 어떻게 하면 좋은 밭 이 되는지 자기가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밭이 나가서 거름을 해 올 겁니까? 자기가 자기를 뒤집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본인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밭이 중요하다,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묵은 밭을 기경하라는 말씀도 있으니까 우리 마음 밭이 좋 은 밭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여기서는 조금 어색합니다. 밭을 보고 좋은 밭이 되라는 것은 씨가 길가에 떨어져서 결실을 조금도 못했을 때 너 길하지 말고 밭이 되라는 말입니다. 이건 논리적으로 어색합니다. 밭이 아니면 그 다음 씨가 중요하지요. 싹이 안 나는 씨를 밭에 아무리 뿌려도 안됩니다. 씨가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씨를 구해서 좋은 씨를 뿌려야 됩니다. 씨가 참 중요합니다. 새벽을 깨우리라 하는 책이 나온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 책인데 읽어보면 감동 을 참 많이 받아요. 아마 그 책 읽으면서 울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걸요. 눈물 나는 대목이 참 많습니다. 옛 날에 다른 교회에서 청년 회장님에게 요약해서 30분 간 발표를 하라고 했는데 이 분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 던지 울고불고 훌쩍거리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분의 고생담이 아닌데 왜 중요한 부분을 빠뜨렸느냐고 물었더니 다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제가 볼 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빈민촌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도와 가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자꾸 사고가 나는 거예요. 어느 집사님이 헌금가지고 날라버 리는 거지요. 자꾸 문제가 생겨서 교회가 안되는 거예요. 왜 이럴까 하다가 크게 반성을 합니다. 내가 이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돕느라 헌신했지만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 가르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때부터 이 사람들을 위해서 몸으로 때우고 뛰는 것보다는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 게 됩니다. 그때부터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분의 책에서 감동이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지 만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대목은 이 부분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웃들에게 아무리 선을 베푼다고 해도 그것 자체로는 싹이 안 나는 씨앗이라는 겁니다. 싹이 나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열심히 들어 도 싹이 안 나는 겁니다. 그렇다고 선한 행실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많이 베풀고 그 행위들로 인해서 우리 이웃들이 우리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은 잘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 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온 그 분들이 결국은 거듭나고 열매 맺게 되는데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씨앗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엇을 뿌려야 한다고요? 좋은 씨앗, 즉 하나님의 말씀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가지고는 안되요.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서 뭐부터 하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생 각나지요?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가셨을 때 언니는 부엌에서 바쁘고, 동생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열심히 들었단 말이에요. 누가 잘 했지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 듣고 있는 마리아를 잘 했다고 했단 말이에요. 말씀 듣는 이를 더 칭찬했다는 것을 기억을 합시다. 싹이 날 수 있는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의 미에서 씨앗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싹 나는 씨앗을 누가 관리를 해요? 씨 뿌리는 자. 씨 뿌리는 자가 하지요. 결국은 씨 뿌리는 자가 중요한 거예요. 이 씨 뿌리는 자가 뭐 합니까? 좋은 씨 앗을 구해 와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씨앗을 뿌리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자가 가장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씨는 뭐라고 했지요? - 4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말씀. 말씀을 뿌리는 자가 누구예요? 인자. 예수님. 예수님이지요.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씨를 뿌린단 말이지요. 씨를 뿌렸더니 길가에 떨어진 것도 있고 자갈밭에 떨어진 것, 떨기나무에 떨어진 것, 좋은 땅에 떨어져서 결실을 하는 씨앗도 있더라는 이야기거든요. 결국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른 바리새인들과 유대 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죽일려고 노리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뿌린다. 일부는 싹이 나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일부는 싹이 났다가 말라 죽을 수도 있고 일부는 났지만 결실을 안 할 수도 있지만 일부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것이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데 왜 길가에 떨어져요. 잘못 뿌려서. 잘 뿌리면 안 떨어져요? 바람불어 가지고. 거의 모든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가 길가에 떨어질 수도 있는 거지요. 길가 에 떨어지는 것이나 자갈밭에 떨어지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결국은 좋은 밭에 떨어져 풍성한 결실을 맺는 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천국의 비밀이 무엇이냐?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의 선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결과를 보세요. 이 씨앗이 큰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이야기지요. 비록 열매 맺지 못하는 수가 있다 할지라도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1차적으로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씨 뿌리는 자가 나오죠. 2 차적인 의미에서 씨 뿌리는 자는 누가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 그러면 지금은? 우리. 지금은 우리가 씨 뿌리는 자입니다. 무엇을 뿌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열심히 뿌립니다. 뿌 리는 족족 열매가 맺어집니까? 아무리 뿌려도 잘 안될 때가 있지요. 그렇지만 결국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뿌리는 그 씨앗이 제대로 된 말씀이라고 한다면 큰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어느 때보다 말씀이 풍부한 때가 아닐까 싶어요. 텔레비전만 켜도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말씀이 말씀대로 대접을 못 받는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말씀이 많이 전파되고 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데도 말씀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흔히 하 는 말로 바닷물에 들어 있는 것은 잘 안 썩어요. 왜 그렇죠? 소금 때문 바다의 소금이 얼마나 들었으면 안 썩어요. 3%라고 합니다. 굉장히 싱거운 소금물입니다. 그런데 그 바 닷물이 썩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믿는 사람이 3%만 있으면 이 나라가 괜찮 아야 정상인데 3%는커녕 적어도 두 자리는 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인데 우리 사회 한 번 보십시오. 이게 제대로 간 사회인가 썩어가는 사회인가... 믿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 이 말씀대로 살아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살아서 과거 그때부터 지금까지 왔습니 다. 때로는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종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고야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서 우리가 그 말씀대로 열심히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퍼져있는 밭이 - 5 -

[2001.01.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좋은 밭인지, 자갈 밭인지, 가시떨기 나무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뿌리기만 합니다. 열매를 맺고 거두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까요. 말씀의 매듭을 짓겠습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라고 설명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뿌 린 말씀은 결국 좋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것과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서 뿌리는 이것이 큰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으로,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된 말씀을 가지고 제대로 활동을 한다면 효자제일교회의 앞날은 환하게 밝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단지 이 말씀을 하는 가운데서도 이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한 제자들이 있 는 반면에 11절에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이 말씀 속에 하 나님께서 모두가 깨달아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6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 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 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 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 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 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 망하여 나갔나이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 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개역, 창세기 39:1~23] 본 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이야기입 니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 합니다. 야곱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지만 야곱 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수단껏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에 가나안 땅에 정착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생애에서 모든 고난이 끝이 났을 법한데 그에게는 마지막 시련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는 야곱의 시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시련이 완전히 끝나는 것 은 요셉은 물론 베냐민마저 포기한 그때에 자유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식을 사기 위해서는 베 냐민을 데려가야 합니다. 고 아들들이 말을 해도 그를 보내지 않으려고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만 끝내 보내 고 맙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이후에 참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 일이 생기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마지막 남았던 시련이 바로 아들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었 습니다. 형들이 시기해서 팔아 버렸지요. 그렇게 팔려간 요셉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총리가 되는 이 이야기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은혜가 되고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것을 사실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도 적어도 이 부분만은 한편의 드라마 처럼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우리가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당한 고통을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중에 아 무리 위대한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당했던 고난은 너무나 심한 고난이었습니다. - 1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어쩌면 인생을 포기하고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었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갔는지 살펴봅시다. 처음에 형들에게 팔려갔을 때 세상에 형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이 좌절감이 아마 어떤 고 통보다 견디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형들이 왜 동생을 팔아버렸지요?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습니다. 죽이려 고 하는 이유가 시기심 때문이라고 하면 대충 맞습니다만 그때 형들이 죽여버리자. 죽여버리고 나서 그가 꾼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번 보자. 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시기심이기도 합니다만 형들이 이런 악 독한 마음을 품고 그를 팔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요셉의 고통을 비교해 보십시오. IMF가 닥쳐왔을 때에 직 장을 잃고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요셉이 당했던 고난과 비교해 보면 자신의 고난이 그렇게 큰 게 아 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어쩌면 인간이 싫어졌을지도 모 릅니다.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죠. 종살이를 하다가 겨우 살만 해지니까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 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항변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했던 노력 때문에 결국 옥에 들어갔습니다. 또 좌절했을 수도 있습니다. 간수의 신임을 받아서 견딜만 했을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는 바람에 곧 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남의 처지를 그렇게 잘 기 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살아 나가서 이걸 잊어버렸습니다. 만 2년이 지났습니다. 혹시 라도 그 술 맡은 관원장이 내 말대로 살아났으니 나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2년은 끔찍한 세월이었을 겁니다. 2년을 못 기다리고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장면들을 생각해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겪었던 아픔과 고통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 청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애굽을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닐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요셉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노력이 보이질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어서 포기를 한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요셉의 처지가 되었다면 이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보입니다. 영 화를 많이 보신 분들은 이 방법이 금방 보일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이지요? 영화에 잘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지요? 보디발의 아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잘 이용하면 고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 길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보디발의 아내와 특별한 내연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힘을 이용해서 가끔은 외부로 나갈 수도 있을테고 애굽을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렇게 좋은 기회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요? 요셉이 이런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고향에서 특별한 꿈을 꾸었던 것도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생각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은 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때에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보디발에게만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은 그런즉 어찌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라고 하는 것입니 다. 내가 이를 행하면 이것은 보디발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가졌던 생각 중에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 니는 학교의 교훈이 코람데오Coram Deo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라틴어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항상 하 나님 앞에서 산다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이때에 하나님 앞에서 산다라는 의식이 확고했음을 알 - 2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대충대충 해치우면 누구에게 미안합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께라는 사실을 기억해 야 합니다. 가정에서 원만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가정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단순히 부부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더 고생하는 길로 갔지만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쉽게 출세하거나 떼돈 벌 기회가 가끔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보지 않는다면 큰 돈도 벌 수 있고 잘하면 출세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번만 눈감아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갈등이 없다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갈등이 올 때마다 힘들더라도 힘든 길을 선택하여 가는 것이 길 게 보아 오히려 형통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의 기간을 요셉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 모든 과정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 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잘 모르니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39장 본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복 주시고 만사 형통케 하셨더라는 구절이 여러 군데 나옵니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형통케 했다는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 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아무런 고통도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는 않습니까? 요셉의 경우를 유심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는 것이 그에게 아 무런 고통도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까?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라고 되어 있지요? 바로 그 앞에 요셉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애굽으로 팔려갔습 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면 종으로 팔려가지 않게 해주셔야 정상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셨다 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니까 그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셔서 요셉이 거기서 조금 출세합니다. 떨어진 폭이 큽니까 출세한 폭이 큽니까? 떨어진 것은 천리 만리이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것은 조금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것을 뿌리칩니다. 그러자 그가 옥에 갇혔 습니다. 또 언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했는지 보세요. 2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 고라는 표현이 또 나옵니다. 바로 그 앞에 뭐가 있나요.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 고 라고 말합니다. 함께 하시면 옥에 갇히지 않아야지요? 옥에 갇히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또 이야 기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 전에 나타나지 않고 꼭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에야 비로소 그와 함께 하셨다라고 말씀하시냐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옥이냐 하면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입니다. 시시한 옥이 아니고 한번 잘못 들어가면 평생 헤어날 수 없는 무서운 범죄자만 있는 옥입니다. 어쩌면 더 이상 헤어날 길이 없는, 왕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빠 져 나올 수 없는 옥에 갇혔더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애굽으로 팔려가는 일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하 나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애굽에 팔려갔고 그곳에 함께 하셨다가 또 옥에 갇혔고 옥에 갇혔는데 또 그와 함께 하셨더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아무런 어려움도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길래 이럴까요? 우리에게 닥쳐오는 사고나 어려움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거의 똑같이 옵니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런 어 려움이 닥쳐오는 것을 막으시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똑같이 옵니다. 악인에게나 의인에게 비가 같이 내리는 - 3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고 인내하며 견디어 나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이 땅에서 출세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소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 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 함께 살았던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이 땅 의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서 고생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 님의 말씀을 따라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얼마나 이 땅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아 브라함이 가장 힘들었던 게 뭘까요? 고향을 떠나 혼자서 그것도 외국에서 떠돌이 신세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마 가장 큰 고통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아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거짓말 했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죽했으 면 그랬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들이나 여럿 있었으면 몰라도 의지할 아들 하나 없이 그렇게 떠돌 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많이 받았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는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 함의 생애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바보짓은 안 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 라고 할 때 모세가 얼마나 바보짓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달래고, 확신도 주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주었음에도 못 간다고 버티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자 혼이 날까봐 할 수 없이 갔습니다. 그런 모 세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 모릅니다. 모세가 민족을 위한 사명감에 불타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어서 걸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 에 그 고생길로 들어선 것이죠. 다윗은 어릴 때 들에서 양을 치면서 평화롭게 살았죠. 어느 날 사무엘이라는 선생님이 오셔서 머리에 기 름 부으며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왕이 되리라고 말씀 하신 그후 얼마 안돼서 다윗은 쫓기기 시작합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나와 사망의 차이는 한 걸음밖에 안된다. 는 말을 다 했을까요? 더군다나 이웃나라로 망명갔다가 신분이 들통나는 바람 에 미치광이 짓을 하며 간신히 빠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손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 다. 그런 세월을 십수년 정도 보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냈는지 모릅니다. 그가 왕이 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해서 그 고난의 세월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인간적인 고뇌로 봐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원치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 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바로 그 기도 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들어주십니다라고 자랑하시는 분이 있어요. 자 랑치고는 조금 좋은 자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떼를 쓰면 기도하는 그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 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집의 아이들 보세요. 아이들이 떼를 쓰기 시작하면 특히 요즈음은 아이에게 이기는 어른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떼를 이겨낸 어른들은 아 주 악하거나 아주 독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웬만한 부모는 못 견딥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기도하는 대로 척척 잘 들어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잘 아는 위대한 신앙인이거나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철없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만할 때가 되어서도 떼를 쓰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생각 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 뜻을 마구 - 4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내세울 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이 뜻을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 나름대로 계획이 있으시면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인도하십니다. 이 말은 우 리에게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떤 고난 속에는 하나님 의 그런 섭리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이 어려운 고난이 왜 자기에게 주어지는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항변해 보 아도 자기가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지는 못합니다. 단지 요셉을 통해서 당시의 모든 사람 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들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서 어떤 특별한 뜻을 갖고 계시는구나라고 믿고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이겨나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하 시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만 내버려두시지 왜 가끔 나타나셔서 함께 하시며 그를 형통케하셨다고 할까요? 요셉이 이 고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시며 격려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했지만 다윗이 쫓겨다닐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많이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한번 은 어떤 성에서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데 다른 지방에 블레셋 족속들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도 쫓기는 판에 하나님 가서 저 성을 구할까요? 했더니 하나님께서 가서 도와주라고 합니다. 가서 도와주고 그 성을 지켜냈는데 들리는 소문에 사울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과연 이 성으로 올까요? 올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내 줄까요? 하나님께서 내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그 성에 더 머물러 있지 못하고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를 조금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울을 못 오게 한다거나 이 백성들이 자기 의 편이 되게 한다거나 그런 방법이 있는데 묻는 대로 대답은 잘 해주시면서 다윗의 고통을 즉시 없애버리 는 방식으로 그를 도와주시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 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낙심하고 포기해 버릴 때 쯤이면 어떤 방법으로든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 다. 그러면서 그래도 내 사랑하는 자녀가 이 정도는 이겨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팔려갔을 때 하필이면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것 이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총리로 세우실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 다. 옥에 갇히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만약에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고 다른 감옥이었다면 왕과 접촉하게 되거나 왕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을지도 모릅 니다. 요셉으로서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요셉의 삶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뜻대로 간섭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삶 속에서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어떤 환경에서든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면 출세할 수 있다. 이런 뜻입니까? 아니면 꿈을 잘 꾸어야 된다라는 교훈을 얻습니까? 요셉이 나중에 형통한 자가 되어 총리가 되고 출세하게 된 원인을 요셉에게서 찾으려면 잘못입니다. 요 셉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 계획을 어떻게 인도해 가 셨느냐 하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그 믿음 위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요셉보다 더 큰 아픔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요셉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견디기 어려운 아픔 속에 있 - 5 -

[2001.01.24]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만큼 성숙된 신앙인이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을 돌아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날 이렇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때 이런 아픔을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지금의 아픔을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 재수없이 왜 하필 나만 이러느냐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 스도인이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계신다고 믿는 것은 훌륭한 믿음입니다. 이런 고 통 가운데에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하는 분은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백성 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은 이제 하나님 나라에 입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집사님 중에 몸이 불편해서 고생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기가 힘이 들어서 집사님 그렇게 아파서 어떡하지요? 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또 나에게 무슨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시비를 거십니까? 라 고 기도한답니다. 그 분의 말을 들으면서 이 분 믿음이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하면서 공감을 표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굳게 믿으시고, 인내하시며 승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 6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성 군대 귀신 자수하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 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 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 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 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 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 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 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 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 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 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개 역, 마가복음 5:1~20] 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느 본문을 택하든지 그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목을 이상하게 붙여 놨습니다. 군대 귀신 자수하다? 붙여놓고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무슨 의미로 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할까요? 왜 귀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제목을 붙였을까요?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마태복 음은 마태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왜 마태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마태가 기록한, 전하여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누구의 계시지요? 하나님. 맞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런데 왜 요한계시록이죠? 요한이 전하여 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대 귀신 자수하다 무슨 말일까요? 군대 귀신 예수 앞에 자수하다. 비슷합니다만 조금 정돈합시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 잘 안 잡히는 범죄자를 공개해서 잡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언젠가 한번은 방송을 시작하면서 이 방송이 준비되고 방송이 나간다는 것이 소문이 나자 이 범죄 자는 이미 자수를 했습니다 하고 방송을 하니 시시하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야, 그놈 자수했다더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에 대한 감탄이지요? 텔레비전의 위력이 그만큼 크더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거죠. 군대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원어를 살펴보면 로마의 한 군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말 하면 사단병력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마어마한 것이지요. 이 군대 귀신이 자수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예수님 앞에 아예 포기하고 스스로 자수하고 나올 만큼 예수님의 능력이 컸더라는 이야기입 니다. 우리가 성경의 어느 본문을 어떻게 표현하던지 간에 그 속에서 귀신을 자랑하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실컷 해놓고 아브라함은 정말 위대했더라고 결론을 내는 것은 성경을 잘못 보신 겁니다. 다윗이 위대하더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자랑했다가 다윗이 남의 여인이 목욕하는 것 훔쳐 보고 사고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했 느냐는 것을 설명해 내지 못하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설교 제목 - 1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을 이렇게 붙이더라도 이 말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를 하시라는 겁니다. 적어도 설교이고 성경에 관한 이야 기라 하면 제목을 그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명절기간 동안 새벽기도 시간에 마가복음 진도를 많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 인 문맥을 좀 살펴볼까 합니다. 저번 수요일 저녁에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드렸습니다. 그날 설교하면서 참 힘이 들었습니다. 한 이틀 동안 혼자서 앓았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잘 못해도 고민이 되는데 설교가 왠지 답답하고 힘들어서 혼자서 앓았는데 여러분께서 설교를 참 잘 들었다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제가 느끼는 것하고 여러분들이 느끼는 것이 조금 다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조금 놓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일반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하나가 우리는 자꾸 밭을 생각합니다. 좋은 밭이 되 어라 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본문에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좋은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많이 맺어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씨를 뿌립니다. 그 씨 중에 극히 일부는 길가나 가시떨 기에 떨어지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밭에 떨어져서 결국은 풍성한 수확을 맺을 수밖에 없다. 하늘나 라의 복음은 널리널리 확장이 되고 풍성한 수확을 맺을 수밖에 없다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으냐 하면 바로 뒤이어 씨 뿌리는 비유, 등불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이 등불 을 켜는 것은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나와요. 씨를 심어놓으 면 농부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 때문에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씨는 저절로 자란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지만 이것이 자라면 엄청난 나무가 됩니다. 이 네 가지 비유를 들면서 이것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으니까 이 네 가지 비유는 전부 한꺼번에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와 연결지어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너희들은 좋은 밭이 되어라, 좋은 열매를 맺어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한 부분만 보고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고 4장 전체가 그런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문맥에서 의미를 찾아내면 오해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집니다. 4장 맨 마지막 기사와 5장 전체 이야 기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바다와 파도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와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가 나오고, 야이로의 딸을 고친 것과 12년된 혈루증 여인의 병을 고 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핵심은 예수님은 이렇게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라는 겁니다. 이 안에 이야기 가 네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은 이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라는 의 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5장 2절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라는 서론격의 말씀이고 본론은 3절부 터 시작이 됩니다.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이들이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지요? 있다고 합니다. 있다고 하면 곤란할 텐데요?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귀신이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는 아이에게 있다고 하면 더 문제가 커질 텐데요? 어떻게 해야 해요? 어릴 때 많이 들은 그런 귀신은 없습니 다. 그런 귀신은 어떤 귀신이죠? 달걀 귀신. 우리 어릴 때 달걀 귀신은 주로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달걀 귀신은 없습니다. 이사가는 집에 뭐 하러 간 다고 하죠? 지신 밟으러 가지요? 지신이 뭐예요? 땅 귀신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귀신이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런 유의 귀신을 염두에 두고 아이들이 흔히 물어요. 귀신이 있냐고 묻거든 없다고 그러세요.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런 귀신은 없어요. 우리 어릴 때 보면 몽당 빗자루 귀신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지 곳곳에 다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귀신 있냐고 물을 때는 주로 그 런 걸 물어요. 그럴 때는 없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졸개가 되는 그런 귀신은 대단히 많습 니다. 이런 귀신들은 좋아하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무덤, 산, 조금 뒤쪽으로 가면 무덤 말고 하나 있지 요? - 2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물 물로 가기 전에 돼지로 가야지요. 돼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짐승이지요? 부정한 짐승. 이스라엘 사람들을 박해하는 방법 중에는 돼지고기 먹으라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돼지고기 안 먹고 죽 은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분이 그걸 읽으면서 자기 같으면 얼른 먹고 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돼지라는 것은 그만큼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런 곳을 좋아하는 것 이죠. 지저분한 곳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게 청소된 곳이 있으면 들어가서 더럽혀 놓는 것이 귀신의 특징입 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귀신 부르는 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게 귀신이 온다는 것은 그만 큼 내가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놀이 중에서도 귀신 부르기 놀이가 있습니다. 교실에 둘러 앉아서 귀신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기 도 하는데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장난 삼아 하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그림도 보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겁니다. 일본에서 그려진 만화들 보면 귀신을 등장시키 고 아이들 좋아하는 포켓몬스터 같은 것도 다 귀신입니다. 친근감 있게 그려 놓았지만 다 귀신 종류입니다. 어쨌든 귀신들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 다음 특징은 쇠고랑을 깨뜨렸다고 했지요?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도 끊을 정도로 힘이 셉니다. 힘센 것은 복입니까? 힘만 가지고는 복이 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힘이 약하면 사고를 안칠 것인데 힘이 있기 때문에 사고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잘 나가는 자동차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브레이크가 잘 들지 않 으면 잘 나가는 자동차일수록 위험하지요. 잘 나가는 것만큼 성능 좋은 브레이크와 핸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귀신은 힘은 좋지만 그 힘으로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하고 고함을 질러대지요. 힘은 있지만 하는 짓이 이 모양일 때 그 힘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교회를 허물거나 형제를 넘어뜨리면 귀신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더라 도 교회를 허물거나 성도를 낙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탄이 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 다. 나중에 이들이 전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지요. 돼지 떼 속에 넣어 달라고 해서 돼지 떼 속에 들어갔 으면 그 다음 돼지와 다정하게 살아야 하는데 물 속으로 몰아갔습니다. 이게 귀신이 하는 짓입니다. 능력 있고 힘 있지만 하는 짓은 이 모양입니다. 그 다음 특징은 멀리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이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뛰어 와서 예수를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 서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귀신은 본 적도 없는 예수가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걸 알아채고 뛰어 옵니다. 귀신들은 영적 존재이며 영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주 위에 무당이나 귀신들린 자들이 이런 영역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 적을 행하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는 믿지 마십시오. 귀신의 능력일 수 있습니다. 질병이 고쳐지고 기적이 행하여진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으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을 여러 군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 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라고 합니다. 이 악한 자들에게도 능 력과 표적이 나타난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하 게 하리라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가 표적을 행하고 기사를 행한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 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는 말씀이 나오죠? 기적을 행하고 이적을 행한다 하더라도 무조건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정말 하나님께 속하였나 확인하라고 합니다. 왜 요? 귀신도 영적존재로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걸 보고 사람들은 알지 못해도 귀신은 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거 죠. 그것 말고 귀신이 알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두 가지나 더 있습니다. 자기를 괴롭게 하 려고 오셨다. 예수께서 괴롭히려고 오셨을까요? 귀신의 입장에서는 괴롭히려고 온 게 맞네요. 예수님께서 - 3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괴롭히려고 오셨으면 마귀는 꼼짝말고 괴롭힘을 당해야지 별 수 있나요? 자기가 들어 있는 사람에게서 이 미 나오라고 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요. 대단한 능력이죠. 그러니까 미리 자수하러 쫓아 내려오는 거지 요.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은 자기를 괴롭히려고 왔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 귀신이 항변을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것인데 이 항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정당 성을 인정해 줍니다. 그래 내가 너하고 상관이 없어. 예수님께서 지금 귀신을 멸하러 오셨습니까? 다른 성 경에도 이런 부분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항의했던 것 중에 아직 올 때가 아닌 데 왜 벌써 오셨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귀신들이 완전히 결박되어서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날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날이 언제지요? 심판 날 때까지는 귀신들이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활동이 허용되어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가 좀 어렵지요? 그런 귀신들에게도 일정한 능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허용 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귀신들이 알아요. 아직은 그들이 쫓겨나야 하고 결박되어야 할 때가 아닌데 왜 벌써 오셨습니까?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결박하거나 귀신들을 꼼짝못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신들을 쫓아내기만 하셨습니다. 그런 걸 알고 이 귀신들은 뛰어와서 예수님께 자수부터 먼저하고 제발 여기서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간구함을 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귀신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 믿음의 크기는 하나 님을 얼마나 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것이 효도하는 지름길입니다. 제 친구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 집에만 가면 발 씻겨 달라고 발을 내민대요. 할머니가 다 된 어머니가 세수대야에 물 떠와 자식 발을 씻겨주고 그런다는데 너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 더니 자기 어머니는 자식 발 씻기는 걸 즐거워 하고 그래서 자기는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발을 내민 것 뿐이랍니다. 우리가 볼 때는 말이 안되요. 우리 어머니 같으면 징그럽다고 치우라고 할 텐데 그 집은 안 그렇더라는 거예요. 엄마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밀고 있는 거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면 잘 알수록 우리의 신앙은 자라게 되고 그로 인하여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귀신들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압니 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쫓겨나야 되지요? 옆에 있는 제자들은 이 사건이 다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안해요. 5장에 보면 아무 말이 없어요. 왜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말이 없을까요? 그 앞의 어느 사건 때문 에 그렇습니다. 야단을 많이 맞았거든요. 함께 배 타고 가다가 우리가 죽겠사오니 살려주십시오 하고 난리 를 쳤거든요.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니다. 그후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 믿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 꾸중을 듣고 제자들이 돌아서서 뭐라고 했지요? 도대체 저 분 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가 다 순종을 하느냐 했단 말이에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예수 님의 능력에 대해서 전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상황에 할 말도 없어요. 그런데도 이 제자들은 복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아는 귀신들은 쫓겨나는 겁니다. 잘 아 는데도 왜 이럴까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면서까지 고난을 당한 대상은 고맙게도 우리 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특별하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특별하게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쏟는 존 재로 만들어서 사람을 귀하게 대접하십니다. 사탄은? 사탄의 유래에 대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천사중 일부 가 타락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수종들고 섬기는 역할이 었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잘 알아도 나 중에 징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 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요 사 랑의 대상이라는 것,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 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 4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돼지 2000마리를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요? 이거 예수님이 물어내야 되지 않아요? 남의 멀쩡한 돼지 를, 2000마리니까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날 겁니다. 이 돼지 2000마리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께서 지셔야 되 는 것 아닐까요? 일개 사단이나 군단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귀신들이 단체로 돼지 떼에 들어갔는데 돼지 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돼지에게 있느냐 예수님에게 있느냐는 겁니다. 사탄은 적어도 일정한 범위 내에 서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 받은 것을 보면 그런 예가 있지요. 온 세상을 둘러보고 온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고 자랑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욥의 고난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 정한 한계가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사탄이 전권을 가지고 흔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탄이 예수님께 항의 하는 거예요. 그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오셨습니까? 불만이 많은 거지요. 예수님 보시기에 그 말이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지 않았지만 너가 들어 있는 거기서 나오라는 겁니다. 왜? 아마 귀신이 한마디 하긴 했을 겁니다. 나오라니까 나가겠지만 어디로 갈까요? 네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일단 나와라. 여기서 나가서 제자들에게 들어갈까요? 맞아 죽을려고? 아니면 돼지 치는 사람들에게 들어갈까요? 그것도 안된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그럼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것은 너 알아서 해! 돼지 떼에게로 갈까요? 알아서 해! 귀신이 어디로 가던 그것은 예수님의 소관이 아닙니다. 내버려두면 귀신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죽을 것 이고 죽고 나면 또 이동을 할 겁니다. 어디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디로 갈 겁니다. 예수님께서 허락 하셨다는 것은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고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어차피 이 귀신들은 어딘가 들어갑니다. 예수 님의 소관이 아니예요. 왜? 적어도 결박당할 마지막 때가 될 때까지는 어딘가 돌아다니면서 설치고 다닐 거니까요. 귀신들과 예수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겠지만 제자들도 모르고 돼지치는 사람들도 모릅니 다. 결국은 그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보이는 거지요. 예수님께 제발 이 지방에서 떠 나가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는 것이 그런 연유입니다. 결국 이 귀신은 이름을 개명해야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군대 귀신이었다가 돼지 귀신, 그 다음에는 물 귀신이 되나요? 예수님께서 만들어 가신 것이 아니라 귀신 마음대로 이름 바꿔 가면서 돌아다니는 것입 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잘못이라고, 예수님더러 물어내라고 말할 것은 못 되지만 예수님께서 피해를 보기는 본 셈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 여러 모습들 중에서 우리 모습하고 가장 많이 닮은 모습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내 모습이 이곳에 등장하는 귀신과 사람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혹 귀신과 닮았다는 사람 있습니까? 아는 것과 힘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분은 아 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혹 닮았다 싶은 뭐가 있나요. 귀신들린 사람도 우리와 닮은 바 없습니다. 왜? 귀신들려 있는 사람은 적어도 주인이 귀신입니다.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입 니다. 얼마 후에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귀신이 쫓겨난 후 그 사람의 모습이 자신을 닮았습니까? 정신이 온전하 고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려 할 때 따라가려 한 이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이 듭니까? 그런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아무래도 귀신들린 사람보다 제자들과 닮은 사람이 더 많을 것 같 - 5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습니다. 예수님께 꾸중듣고 풀이 죽어 할 말도 없고 그냥 옆에서 어떻게 돌아가나 구경만 하고 능력도 별 로 없고 아는 바도 없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이 제자들. 어쩌면 우리 모습이 이 제자들을 많이 닮지 않 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야 난 여기 나온 예수님을 닮았어. 그런 분이 많으면 더욱 좋겠지요. 여기 나오는 삶을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탄을 닮은 사람은 능력은 있고 힘은 있지 만 분란만 일으키고 문제만 일삼는 사람입니다.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그것 자체가 반드시 복은 아닙니다.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능력도 열심도 다 있는데 결국 교회를 파괴하고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아마 사탄을 많이 닮은 사람일런지 모릅니다. 귀신들린 사 람, 자기의 의사는 아니지만 귀신이 주인이 되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경우인데 적어도 이런 두 가지 경우는 우리 속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래 모습이 그러했건 안했건 예수님께 긍휼하심을 입어서 예수님 앞에 기쁨으로 나와서 따르기를 원하 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군대 귀신이 쫓겨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나 려 할 때에 함께 가겠습니다 할 때에 따라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데에서 병자를 고치거 나 기적을 일으킬 때 당부한 것이 뭐냐면 이것을 비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만은 네 친 족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왜 다를까요? 여기 나오는 지명이 거라사라고 하고 맨 마지막 20절에 보면 데가볼리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이 데가볼 리라는 지명이 유대인의 지명이 아니고 이방인 지역입니다. 데가볼리라는 말은 데카폴리스라고 음역하는데 데카라는 말은 10개라는 말입니다. 데카메론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이야기가 100개가 들어 있 습니다. 왜? 10명이 천연두를 피하여 숨어지내면서 심심하니까 10명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이야기를 하나씩 했습니다. 그것을 10번 돌았거든요. 10명이 10번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제목이 데카메론입니 다.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10개의 성읍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아마 폴리스라고 불려질만한 도시가 10개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상당히 넓은 지역에 이방인들이 살았던 곳을 가리키는 말 입니다. 이방인 지역이므로 돼지를 그렇게 길렀던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가 달라고 하니 남아서 이 놀라운 일을 증거하라고 하는 거죠. 지역적인 차이 때문에 당부의 내용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한사람이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쇠사슬을 끊고 미치광이처럼 돌아다니던 사람이 예수님 앞에 얌전히 앉아 있단 말이예요. 그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정상입니까? 유대인들 같으면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놀라운 이적을 보이셨다 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보고 떠나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귀신에게 잡혀서 이렇게 고통 속에 살던 사람이 정상인 으로 돌아온 것은 별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관심은 돼지 2000마리, 저 사람 때문에 돼지가 2000마리나 죽 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만한 복이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습니다. 돼지 2000마리가 적습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그것이 더 큰 복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떨까요? 돼지 2000마리까지 갈 것 없습니다. 줄여서 돼지 100마리에 우리 신앙을 팔아먹는 사람은 없을까요? 신앙을 팔아먹는 사람들이 큰 돈 때문에 팔아 먹는 게 아닙니다. 정말 작은 일에 넘어져 서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간의 돈, 쥐꼬리만한 자존심 때문에 신앙이 흐려지고 넘어지는 경 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학교에서 점수 몇 점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얼마 나 큰 손해라는 걸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재산 전부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가 내게 있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 잃어버리고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복일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예수만 내게 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다라는 확 고한 신앙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방송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그런 사람이 대체로 40대 예요. 주로 빚 때문에 그렇다는데 그걸 들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워요. 현재 우리나라 상황이 어렵긴 한데 그 - 6 -

[2001.01.31] 군대 귀신 자수하다 (마가복음 5:1~20) 렇다고 돈 때문에 목숨을 끊어야만 합니까? 그런 사람이 복음을 받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문 제로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에 대한 확고 한 믿음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구원에 관해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이 있 으면 어떠한 경우라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 7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불 부담스러운 십계명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 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 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1~7]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기독교가 너무 편협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특별히 근래에는 천주교 신부들이 절을 방문하고 절의 스님들이 천주교 행사에 참석하는 걸 보면서 아무래도 그 쪽은 조금 통이 커 보이고 포용력이 있어 보이는데 개신교, 특히 장로교회는 여기도 이단 저기도 이단 이래서 너무 편협해 보인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좀 지혜롭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딱! 부러지게 표현하는 것보다 이단 자체는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혜롭게 처 신해서 그들과 벽을 쌓지 않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의 신은 너무나 독단적이고 편협하다. 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자기만 신이냐? 는 거죠. 그럴 때에 주로 언급되는 것이 십계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데 믿는 우리들은 이 십계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십계명 이라 하면 뭐부터 생각이 나죠? 십계명! 좀 부담스럽습니까? 은혜롭습니까? 평소에 잘 안 느끼고 사시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으면 잘 사시는 편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십계명이 마음에 걸리면 조금은 삶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십계명도 구약의 율법처럼 지금은 폼으로 있는 것이지 그것을 문자 그 대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십계명이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또 한가지 이유는 십계명이 주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다가 모세가 들고 내려오는 십계명을 깨뜨려버린 사건이 있었죠. 그 때 많은 사람이 징계를 받았기 때문 에 십계명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예전에 예배 순서중에 십계명을 늘 교독했습니다. 교 독문 대신에 십계명을 교독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좀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십계명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인지 확인을 해봤으면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십계명이 주어진 배경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감행한지 두 달만에 시내산에 도 착하게 됩니다. 그 두 달 사이에 애굽에 많은 재앙이 있었고 홍해를 건넜던 기억도 있고 바위에서 물이 터 져나와서 물을 마셨던 기억도 있고... 좌우간 놀라운 기억이 대단히 많았던 두 달간입니다. 두 달만에 시내 산에 오게 됐는데 특별히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내라는 명을 받았을 때 모세가 여러가지 이유로 못한다고 했던 산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스라 엘 백성들이 네게 하나님이 나타난 증거를 대라면 내가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분명히 이 산, 여기서 다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라고 모세에 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증거치고는 좀 이상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신 증거가 뭐냐고 물으면 보여줄 증거를, 엄밀히 말하면 증거를 안 보여 주셨습니다. 그냥 네가 그런 소리하든 말든 어쨌든 간에 네가 내 백성을 이끌고 이리로 오게 될 것이다. 그때 가 봐라.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내가 널 보낸 증 거가 된다. 말이 되나요? 그러나 그것이 참 은혜스러운 것은 이런 느낌을 줍니다. 아이를 실컷 키워놨더니 이 아이가 어느 날 아 빠, 정말 우리 아빠 맞아요? 하고 물으면 황당해지죠. 그래 맞다. 그랬는데 증거 있어요? 증거대라고 하 면 어떡할랍니까? 혹시 그렇게 나오면 제시할 만한 증거물을 준비해두셨습니까? 아버지가 증거를 댄다고 출생신고서 가져오고 주민등록등본 갖다 대고 태어날 때 옆에서 지켜봤던 삼촌 할머니 다 불러와서 증인 세우고 이러면 모양이 좀 이상해지죠. 저는 증거 삼을 만한 것을 분명히 하나 해놨습니다. 우리 둘째 애 낳 - 1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고 난 다음에 머리가 하도 작아서 금방 태어났을 때 머리가 이렇게 작다는 것을 기억해 두려고 엄마 손을 머리 옆에 대어놓고 사진을 찍어놨습니다. 요건 네 엄마 손, 이건 너 머리. 그래서 확실하게 증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 앞에 이것들을 갖다 놓고 봐라. 네가 분명히 엄마 아빠가 낳은 자식이 아니냐. 하고 증거물 을 갖다 대면 우스운 꼴입니다. 증거대라 할 때 뭐라고 답변하죠? 증거댈 필요 없습니다. 빙긋이 웃고 말아 야 합니다. 한마디 더 붙인다면 커 봐라 알게 된다. 그 얘깁니다. 하나님께 증거를 보여주십사 하고 말했 던 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 산에 다시 나를 만나러 여기 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다. 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내산에 두 달만에 도착한 겁니다. 그 산에서 약 1년간 머무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가 방금 읽었던 출애굽기 19장부터 자그마치 민수기 10장까지인데 장수를 계산해보면 약 60장 가까이 됩니다. 그 1년 사이에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분량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분량들이 뭐 때문에 기록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아주 유명한 구절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서 남의 집 포도밭에 들어가서 포도를 마음껏 따 먹어도 됩니까? 안됩니까? 남의 포도밭에요?... 마음대로 따 먹어도 괜찮습니다. 뭐만 하지 말고요? 광주리에 담지는 말고요. 가난한 자를 위한 법입니 다. 남의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마음대로 베어 먹는 것은 안됩니다. 시장해서 뜯어 먹는 것은 괜찮습니다. 뭐만 하지 말고요? 낫을 대지 말고요. 이런 규정들이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죠. 젊은 사람들이 제일 애용하 는 구절은? 결혼하거든 군대도 보내지 말고 일도 시키지 말고 집에서 결혼한 그 아내를 기쁘게 해 주라. 얼마동안요? 1년간요? 그런 것 잘 외우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것 참 은혜스러운 구절입니다. 저도 신혼시절에 그 구절만 외우고 다녔죠. 설마 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해 놓으셨는데 새벽기도 좀 안 나가면 어떨라구... 이러면서 담대하게(?) 새벽기도 잘 안 나갔는데 그게 1년간이 아니고 기간이 많이 늘어지더라구요.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긴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 구절이 얼마나 고마운지... 신혼부 부가 새벽기도 나오는 건 참 대단합니다. 참 존경스러워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명하신 말씀들이 약 60장에 걸쳐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이 바로 오늘 읽은 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이론을 우리가 이해 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냐? 아 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한 것을 기록한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기록일까요? 아니면 우리 보고 하라고 하는 이야기일까요? 너무 뻔한 질문을 합니까? 십계명은 우리 보고 하라고 하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우리가 할 일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더 많이 기록된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서론 부분과 본론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것은 십계명의 본론 부분 뿐입니다. 서론을 자꾸 잊어 먹어요. 여러분, 만약에 십계명을 찾으라면 어디서 찾죠? 성경 앞장. 예? 성경 앞장에요? 성경 앞장에는 없을 텐데요? 찬송가 앞에 있죠? 한번 찾아보세요 지금. 찬송가 어딘 가 십계명이라고 있죠? 제일 처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는 하고 점... 찍힌 찬송가 많죠? 십계명 서문을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증겁니다. 아예 없는 찬송 가도 있죠? 십계명이란 제목을 달아놓고 바로 제 일은... 이라고 적힌 찬송가 있죠? 더러 있을 겁니다. 갖다 버리십시오. 그런 생각으로 십계명을 달아놓은 찬송가는 갖다 버리십시오. 서문을 완벽하게 기록해놓지 아 니하고 나는 하고 점찍고 처리한 것조차도 굉장히 불만입니다. 왜요? 십계명 서론을 이렇게 무시하고 있 다는 뜻입니다. 이 십계명의 서문을 빼놓고 보면 밑에 계명 열 가지는 그렇게 은혜롭지가 못합니다. - 2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서론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옛날 공부할 때 어떤 교수님은 1년 동안 강의를 위해서 두꺼운 책을 사라 고 해놓고 1년 동안 서론 강의밖에 안 했어요. 서론만 갖고 1년간 강의를 합니다. 교수님 이 책 언제 뗄 겁니까? 응 서론만 하면 돼 서론만 분명하게 익혀놓으면 나머지 부분은 스스로 읽으면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꺼운 책의 서론은 몇 장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분명하게 해 놓으면 나머지는 스스 로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서론은 이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계명의 서론을 소홀히 취급하 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서론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냐를 설명해주는 부분이 출애굽기 19장에 있습니다. 19장 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 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 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와서 백 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애굽기 19:3~8) 무슨 얘기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너희들이 다 알지 않 느냐. 이제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그랬더 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는 장면입니다. 일종의 계약처럼 보이죠? 이 내용을 간략하게 줄인 것이 십계명의 서문입니다. 20장 2절을 한번 봅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 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라고 선언하십니다. 어떤 하나님요? 너의 하나님.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뭐가 되죠? 종. 종이 되요? 누구의 종요? 하나님의 종도 좋은데 그러면 하나님이 저쪽 동네의 종되었던 걸 붙들어와서 자기의 종으로 삼아버렸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만 같은 값이면 느낌이 좋은 표현을 씁시다. 아까 읽었던 그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가 내 백성이 된다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 성들을 구해 내서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다라는 선언을 하시고 계명 열 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서론과 본론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요? 서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이 서론없이 하나님께 서 계명 열 개를 주셨다면 얘기가 이렇게 되죠. 이 계명을 다 지켜라 그러면 너희가 내 백성이 된다는 얘 기죠. 그런데 십계명은 달라요.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선언해 놓은 다음 계명 열 가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르죠?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서론이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그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선언하고 그 다음 내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 내 백성답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된 것이 먼저냐, 계명을 지키 는 것이 먼저냐는 차이입니다. 서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하시고 난 다음에 후속 조치로 계명 열 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훨씬 큽니다. 서론은 비록 짧은 한마디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엄청난 일을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한 일을 해 놓으셨으니 너희는 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잘 지키는 방법은 이 십계명 열 가지에 눈을 먼저 돌리면 안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계명의 서문입니다. 서문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 법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집에 새 식구가 들어왔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요즘이야 뭐 시집살이라는 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새로 며느리가 들어오면 이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좀 시키죠. 일부 - 3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러 고생시키는 것은 접어두고 보통 몇 달간은 함께 살게 했다가 내보냅니다. 이왕 몇 달 뒤에 내보낼 거 바로 내보내지 왜 몇 달간 붙들어 놓죠? 한식구가 되었으니 이 집안의 풍습을 좀 익히고 적응을 하라는 얘 기죠. 그렇게 해서 내보내야 나중에 서로가 편하다는 얘깁니다. 내 식구가 되었으니 새 집의 가풍을 익히라 고 하는 것에 대해서 좀 힘들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하고 좀 다르다고 해서 반발하고 뛰쳐나가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항상 기억할 것은 나를 이 집 식구로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야 한가족으로 서 편안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지난번 우리 장모님 장례 치를 그 때에 우리 조카 한 녀석이 삼성전자에 취직을 해서 장례식 끝나고 다 음날 오리엔테이션 받으러 올라갔는데 이 어려운 때에 참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됐다고 많은 사람들의 부러 움을 받으며 갔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고 어쩌면 저 집에는 복도 많다 이러고 있는데 얘가 그걸 진정 복으로 생각하고 얼마쯤 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취직 을 하게 되면 참으로 행복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순간에 내가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암 담함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대학생활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직장생활에 비하면 바쁜 게 아닙니다. 거기 들어가서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된다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눈앞에 오 는 그 답답함 거기에 자꾸 집착하게 되면 회사생활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것보다 이 어려울 때에 내가 그래도 취직해서 여러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그 모습을 잊지 않으면 회사생활 하기가 참 편해집니다. 제가 중학교 있으면서 학년 초에 새로운 아이들 만나니까 너무 엉망이에요. 기본적인 질서도 제대로 모 르는 겁니다. 여학생들도 아무 때나 침을 택택 뱉고... 저는 여학교가 그렇게 지저분하다는 것을 여학교 가 서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형제가 전부 남자들밖에 없는데다가 남자학교만 돌아다니다 처음으로 여학교에 발령이 났는데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었죠. 마지막엔 여학교에 몇 년 있다가 나오게 된 걸 정말 다 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여학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지저분할 수가 있는지 몰라요. 여학교는 좀 다르리라 했는데 안 그렇더라구요. 어느날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선생님들 몇 명 모아놓고 이렇게 해서 안되겠습니다. 기 초적인 것부터 가르칩시다. 교칙에도 없지만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을 정리했습니다. 함부로 침 뱉어서 안된 다. 실내화와 운동화를 구분해라는 이런 종류들만 쭉 뽑아 프린트해서 나누어주고 애들 군기를 잡기 시작 했죠. 저도 그 방면에는 못됐다고 소문이 났거든요. 잡아서 벌주기 시작하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든요. 보통은 이런 일을 잘 안합니다. 심할 때는 남학생 1, 2, 3학년 천명이 넘는 숫자를 저 혼자서 다 막았습니 다. 그러려면 욕을 엄청나게 먹어야 합니다. 여학교에서 일단 설명하고 가르치고 난 후에 어떻게든지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세월이 좀 지난 다음에 제게 아이들이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학기초에 그런 방송을 들으면서 숨이 탁 막히더래요. 그래서 제가 물 어봤어요. 어느 것이 할 수 없는 일이더냐?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정상적으로 생활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일만 하라는데도 어쨌건 숨이 탁 막히더래요. 한번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 었데요. 교무실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하지 말고 들어가거라. 이건 공동으로 쓰는 사무실이기 때문에 그것 노 크하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도 두들겨요. 얘 그냥 들어와 해도 들어올 때마다 두들겨요. 가까이 앉아 있는 선생님은 입이 아파요. 그래서 교무실 들어갈 때 노크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인사하고 선생님 찾으면 된다. 이게 어떻게 숨이 막히는 얘기입니까? 함부로 침 뱉지 마라. 복도에서 뛰지마라. 욕하지 마라. 이렇 게 간단한 문제도 숨이 막히더라는 거예요. 잠시 숨이 막힐런지 모르지만 익숙해지면 전혀 문제가 안됩니 다. 학교 입학해서 이런 선생님을 만나서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즐거움이냐 하는 생각이 먼저 와야 하는데 지금 아이들에게는 그게 없어요. 우리 어릴 때는 선생님이 불러서 심부름 한번 시키면 그게 고마워서 죽을동 살동 뛰어다녔는데 요새 아이들 심부름 한번 시켰다가는 잘못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선생님을 만나서 함께 즐거울 수 있고 그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주는 이것 이 아름다운 학교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낙이 없는 겁니다. 서문과 본론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비유도 한번 들어보는 게 좋겠네요. 둘이 좋아서 결혼하려고 하는데 한쪽 집에서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절대 안된다. 그런데 뭐 아무리 부모가 반대한다 해도 자식에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우기면 할 수 없죠. 그래서 결국은 허락하는 대신에 조건이 딱 한가지 - 4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떤 느낌이죠? 까짓 조건이야 몇 개가 되든 그 앞의 한 마디에 감격하고 말 것입 니다. 이 십계명을 보면서 그런 감격을 가져야 합니다. 반복이지만 한번 더 얘기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 보고 하라고 하시는 이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해 놓 으신 일이 훨씬 많은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인 내가 이만큼 해놨다. 그러니 너희는 계명 열 가지 이거 만 지켜라. 그 중에 무리한 계명 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만큼 해놔놓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그 다음 너희는 나만 섬겨라 이것 뭐 잘못됐습니까? 전혀 잘못된 거 아닙니다. 청춘남녀가 결혼하면서 당신은 이 제 나만 사랑해야 합니다. 잘못됐습니까? 아니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인정하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이 되면 나머지 십계명 열 가지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그런 마음 으로 살아야 되겠다라는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십계명 전체를 잘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잊지 않고 그것을 먼저 기억하는 것입니다. 낳은 자식보다 양자로 데려온 자식이 부모 말을 더 잘 들어요. 왜요? 혹시나 말 안 듣 다가 쫓겨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서죠. 자기가 낳은 자식은 참 말 안 들어요. 조금 크더니 요새는 반말 틱 틱 하다가 자기 할아버지에게 쥐어 박히기도 하고 아까도 제가 방문 열었더니 제 친구 하나 와 있는데 반 말을 툭툭 하길래 너 이리와 하니까 안 와요. 그나마 너 안 오고 이따가 두 방 맞을래 지금 한방 맞을 래 해서 할 수 없어서 한 대 쥐어박긴 쥐어박았지만 낳은 자식 말 참 안 들어요. 제가 왜 이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으니 정 안되면 이 정도 배짱이라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이 랬다 저랬다 하겠습니까? 한 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이제 날 어쩔겁니까? 하는 배짱을 가지셔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늘 그러지 마십시오. 한 대 두들겨 맞을 수는 있어요. 한 대 두들겨 맞을 수는 있지만 그런다고 어쩌겠습니까? 한 번 하나님이 내 백성이다라고 삼으셨으니까요. 서문의 역할이 그런 역할을 합니 다. 십계명을 못 지킨다고 해서 너 이놈 다시 애굽에 갖다 집어넣겠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왕 한 번 자녀 로 삼으셨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있어서도 항상 십계명의 서론을 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항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늘 먼저 있는 것이 중요 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또 한번 말씀드립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하는 게 아홉 가지, 못 하는 게 한 가지, 그러면 싸움이 납니까? 안 납니까? 잘 하는 거 아홉, 못 하는 거 한 개, 그러면 싸움 납 니까? 안 납니까? 싸워요. 왜요? 잘 하는 게 아홉인데 왜 싸워요? 못 하는 것 한 개만 자꾸 보거든요. 성질 되게 돋거든 잠깐만 숨을 돌리세요. 그것을 가라앉힐 만한 장점들을 찾아보세요. 그 중에 제일 큰 것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들 중에 나를 택해서 남편으로, 아내로 삼았다 이것보다 더 큰 거 있습니까? 그걸 잊지 않고 사시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잘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찬찬히 살펴보면 잘 하는 것이 많습니다. 늘 잘 하는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자녀 사이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공부 못한다고요? 공부 잘 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것요? 서울대학교 정원이 오천 명일 때 전국의 중학교가 학급수로 이만을 넘더라고요. 그러면 한 학급당 하나도 안 돌아가네요. 학급의 일 등만 모인다해도 4:1이죠. 1등만 잘 합니까? 2등은 못 하나요? 2등까지 집어넣으면 8:1입니다. 학급의 1등 2 등은 쉬운 줄 아십니까? 학급의 10등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부모는 자꾸 내 자식 하나만 보고 있지만 학교 선생님은 교실에서 쳐다보면 때로는 40등짜리도 고마울 때가 참 많아요. 공부 잘 하는 것, 얼마나 어 려운지 모릅니다. 공부 공부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나마 건강하면 얼마나 고마워요! 우리 자식이 몸이 불 편하고 장애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공부만 제외하고 건강한 것 만으로도 참 고마울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사람은 좋은 것은 다 접어놓고 자꾸 욕심을 내는데 끝이 없어요. - 5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1등짜리 부모는 만족스러운지 아십니까? 자기 혼자 일등하나요? 고등학교 올라가면 그 1등이 몇 십 등이 되고 또 몇 백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적어 도 십계명을 대할 때나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먼저 기억하지 않으 면 십계명은 부담스럽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 삼백육십 가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 다 못 지켜요. 사람이 어떻게 그 계명을 다 지켜냅니까? 자기 말마따나 잘 한다고 그렇게 노력했던 그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해버리셨거든요. 이유는 십계명의 서문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들이 이걸 왜 지켜야 하는지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뭐만? 그 규정 하나하나만 지키려고 온갖 애를 다 썼는데 예 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외식이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라고 말 씀하십니다.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얘깁니다. 설령 그것을 착실하게 다 지켰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양자를 데리고 왔는데 이 녀석이 하라는 대로 정말 잘 해요. 정말 말 잘 듣고 하라고 하는 대로 잘 합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을 경우가 있어요. 쟤가 왜 저렇게 말을 잘 들을까 해서 유심히 보니까 쫓겨날까 싶은 두려움이 있구나라는 것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말 잘 듣는 것이 오히려 섭섭해집니다. 왜 요? 아직도 쟤가 잘못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를 진정한 아버지로 여기 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당당한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율법 을 그렇게 잘 지킬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 상관없이 오로지 그 계명에 집착하고 있 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는 것이죠. 반면에 예수님의 행위는 유대인이 볼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짓밟는 것처럼 보였어요. 예수님은 서론을 잊어버리고 계명 지키기에 급급했던 그들에게 새 로운 계명을 주셨죠.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죠. 둘째는요? 그와 같은데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개만 명확하게 잘 살리면 모든 계명을 다 이룬거나 마찬가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연구하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 라. 어떻게 지킬 것이냐.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할거냐를 생각하면 답은 나온다는 겁니다. 그 답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않느냐 이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십계명 서문에 대해서 참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어요. 정확하게 외우라 하면 잘 안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글자가 한자씩 바뀌기는 하지만 십계명의 서문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라는 걸 대단히 강조하고 즐기기까지 합니다. 찬송가에 십계명 서문이 제대로 안 붙어 있는 찬송가는 버리 십시오. 신대원에서 시험을 쳤는데 이번 시험에는 성경 원문이 한 절 나옵니다. 해석하고 1년 동안 배운 걸 밑 에다 쓰시오. 정 뜻을 모르면 10분쯤 뒤에 해석을 해주겠습니다. 그래서 시험지 받아 들었어요. 히브리 글 자로 이렇게 한 줄쯤 나왔어요. 아는 글자도 몇 개 있네. 뭔가 싶어서 한참 들여다 보니까 어 이거 십계명 서문같다라는 느낌이 딱! 들잖아요.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십계명 서문 맞아요. 어찌나 반갑든지요. 외우 고 있는 구절이니까. 신나게 써내려가는데 10분쯤 뒤에 설명을 해주겠다고 교수님이 약속을 했는데도 아무 도 안 묻는 거 있죠. 좀 싱겁더라구요. 괜히 좋아했나? 나만 아는 게 아니고 남도 다 아는 거 괜히 좋아했 나 좀 섭섭하더라구요. 어쨌거나 써놓고 나왔는데 나와서 물어봤어요. 그 본문 해석했냐? 해석한 사람이 절반이 안되요. 묻지도 안 했어? 글쎄 누가 물어보면 싶었는데... 절반 이상이 그걸 해석도 안하고 쓴 거 예요. 문제는 나와 있어요. 1년동안 배운 거 다 쓰라 했으니까 본문과 상관없이 소신껏 쓰면 됩니다. 배우지 않은 본문이 시험에 나온다더니 하필 그걸 시험지에 내주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분이 우 리가 흔히 하는 말로 조직신학 가르치는 분이시거든요. 지금은 조직신학이라는 용어는 안 쓰고 교의학이란 - 6 -

[2001.02.07] 부담스러운 십계명 (출애굽기 20:1~7) 용어를 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오로지 그 분야에 대해서만 강의하시는 분이니까 히브리 원문을 하나 낸다 했지만 뭐 낼지 그건 알 수 없는데 하필이면 이걸 낸 이유가 이해가 되요. 안그래도 그 런 교수님을 쳐다볼 때마다 은혜가 되는데 그 시험을 치르고 나니 더욱 은혜가 되더라구요. 결론을 냅시다. 우리가 십계명의 계명 하나하나에만 집착하면 짜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면에 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짐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명에 집착할 게 아니라 서론을 보면서 서론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능력과 우리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면 저절로 감 사와 감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래야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우리가 충실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벽할 수 없거든요.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럴 때 본문을 보면 답답하지만 그때라도 또 서문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 제가 약해서 넘어졌고 잘못했 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백성으로 삼고 자식으로 삼으셨으니 어쩌겠습니까라면서 회개하고 나 면 당당해질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너무 애용은 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못하시는 건 아닙니다. 한 번 두 번은 용서하시겠지요. 세 번 네 번쯤 되면 한 대 얻어맞을 수는 있겠죠. 얻어맞을 수는 있을지언정 다시 내어버리지는 않는다는 선언이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더욱더 용기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십계명을 순서대로 쓰라하면 저도 정확 하게는 잘 몰라요. 왜요? 그것 뭐 중요합니까? 학교교칙을 외우는 것보다는 교칙을 전혀 몰라도 전혀 어기 지 않는 학생이 훨씬 많습니다. 항상 서론을 애용하고 이런 서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사시기 바랍 니다. 기도합시다. - 7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십 질투하시는 하나님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 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 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개역, 출애굽기 20:1~7] 계명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난주에 십계명이 결코 그런 것이 아 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시 지난 주간에 찬송가 바꾸신 분 안 계십니까? 찬송가 뒤에 있는 십계명들이 왜 서문을 잘라먹는지... 그건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아예 서문 자체도 없는 십계명 이 뒤에 실려 있거든 찬송가를 바꾸십시오. 십계명 서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런 찬송가 못 들고 다닙 니다. 그나마 나는 너를 하고 점... 찍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라고 해둔 것은 그래도 아까우니까 쓰긴 써 야겠죠. 십계명 서문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잠깐 요약을 하고 오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 서문은 어떻게 본다면 대학교 합격 통지서입니다. 그러면 그 밑의 계명 열 가지는 그 학교 들어 가서 지켜야 할 교칙에다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학교 들어가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해 가면서 열심 히 공부해서 가고 싶었던 대학의 합격 통지서 받아든 그 기분을 아시는 분은 아시죠? 합격 통지서 하나 받 아들고 나면 그 밑에 입학금 고지서, 주의 사항들이 밑에 주루룩 붙어서 두툼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별 관계없죠? 잘 보지도 않죠? 합격 통지서 받아든 이상 그 밑의 학교 교칙이 어떠하며 어떻게 학교 다니 며, 이런 것들은 일단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합격 통지서 만 확인했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합격 통지서를 받은 기쁨은 잊어버리고 그 밑의 교 칙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학교가 머 이 따위냐고 불만을 토하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에 십계명 을 주어서 사람을 이렇게 얽어매느냐는 불만을 가진 분이 바로 그런 꼴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종 되었던 곳에서 불러내어서 내 백성으로 삼았다라는 선언 이것이면 족합니다. 그 다음에 내 백성이니까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데 거기에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너희는 이제부터 내 자녀요, 내 백성이다 라고 선언한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만 섬기라 고 하시는데 유감 있습니까? 유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서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다 이제 이 집에서 이 렇게 살자고 하는데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십계명의 서문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 서문이 있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한 은 혜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선언한 이상 우리는 그 사랑에 감격하고 놀라워 서 십계명 대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는데도 내가 부족해서 잘 못 지키면 어떻게 되나요? 서문이 우리를 살려줍니다. 못 지키고 못 산다고 해서 너를 다시 애굽 땅에 갖다 집어넣지는 않는다는 선언이 그 십계명의 서문입니다. 일단 내 백성 삼았으니까 잘 살아야지요. 그런데 내 자녀가 됐는데 잘 못하면 어쩝니 까? 그래도 할 수 없이 내 자녀죠 뭐. 여러분, 자녀가 좀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짓이 시원찮다고 갖다 버립니까 어떡합니까? 아이고 원수 하면 서도 자녀는 여전히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원수 짓을 해도 도리 없습니다.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입 니다. 하나님이 한번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선언한 이상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고 간에 여전히 자녀란 말 입니다. 너무 이렇게 말하면 함부로 살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강조점은 아무렇게 살아 도 좋다는 게 아니라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겁니다.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여기에 한번 나오고 뒤에 한번 더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백성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이다 라는 선언은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 1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우리의 주인이 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런 느낌을 가지면 십계명이 우리에게 참으로 은혜가 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며칠 전에 보니까 어떤 젊은 친구가 불만이 많은 모양이에요. 구약 성경 한번 읽어보십시오. 구약 성경 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요, 징벌하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하고 격분하는 투로 글을 써놓았더군요.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구약에 보면 심판, 징벌 이런 얘기들이 굉장 히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셔야 합니다.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 이 무엇이었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은혜롭습니다. 그렇게 심판하시면서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나 이 심판을 덜어볼려는 노력들이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왜 그걸 못 보는지 모르겠어요. 부모가 매 를 들 때 우리 부모가 나에게 매를 들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이해할 수 있는 아들이면 그 부자 관계는 문제가 없습니다. 야단을 좀 맞고 매를 맞는다 하더라도 조금 지나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 마 련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실 때에도 심판, 징벌 이런 데만 관심을 갖지 말고 이런 심판을 행할 수밖에 없 었던 하나님의 그 안타까움과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애하심을 보여주는 대목이 무엇일까 하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꼭 있습니다. 정말 있습니다. 그런 것에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질투하 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 친구가 불만을 좀 늘어 놓았더라구요. 하나님이 질투하신다? 나쁘단 의미죠? 십계 명 안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에 대해서 오늘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언젠가 제가 아이들 데리고 이런 질문을 해본 적 있습니다. 성경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 냐? 하고 물으면 있습니다라고 답이 나올 것 같아서 제가 유도 심문을 했죠. 먼저 질투에 대해서 설명하고 얘들아 질투는 남자가 더하냐? 여자가 더하냐? 하고 물어봤어요. 질투는 누가 더하죠? 남자. 남자요? 세월이 언제 그렇게 변해 버렸나요? 아니 우리 교회만 그런 겁니까? 아니면 시대가 변한 겁니 까? 제가 알기로는 여자가 더 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 교회 남자들 큰일 났습니다. 남자라고 대답하는데도 가만 앉아 웃고만 있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잠시 제쳐놓고 일반적인 얘기를 좀 합시다. 과거로 부터 질투 그러면 여자가 하는 걸로 돼 있었습니다. 칠거지악에 질투가 있습니까? 있었던 것 같아요. 질투 라 했는지 투기라 했는지 뭐 하나가 좌우간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는 질투 안 하고요? 우리 교회 말고요. 옛날에 남자는 질투 안 했습니까? 여자는 질투를 해도 이걸 바깥에 표현할 곳이 잘 없어요. 그러니 까 주로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죠. 남자는 질투를 하면 바깥으로 문제가 드러납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 뉴월에 서리가 내리죠. 남자가 질투를 하면요? 함박눈이 내려요. 함박눈이 내려요? 남자가 한을 품으면 주로 탈영을 잘 하죠. 군에 가 있는 남자들이 애인이 변심했다 소 리 들리면 주로 총 둘러메고 수류탄 차고 튀어나옵니다. 나와서 뭐해요? 군에서는 근무지를 이동 할 때마 다 꼭 신상명세서를 씁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애인 이름과 주소입니다. 쓰라는데 없는데요 했다 가 맞아 죽을 뻔했어요. 없으면 임마, 친구라도 쓰고 친구라도 없으면 옆집 처자[처녀] 이름이라도 쓰라 는 거예요. 그 칸은 절대 못 비웁니다. 왜 그렇게 쓰라고 하는지 그 때는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바로 탈영해서 총 빵빵 쏘면서 누구 불러도 이런 거 할 때 모셔올려고 써놓는 거예요. 지금도 기억에 선한 것이 동대구역 2층에 가면 다방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옛날 누가 올라가서 점령 을 했거든요. 주변에서 소리만 나면 총을 쏴 대는 바람에 기차가 밤중에 불을 다 끈채 소리 없이 밑으로 기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소리만 나면 쏴 대니까요. 한때 유명했던 사건입니다. 거기 앉아서 누구 불러도 이러죠? 만약에 본인이 해당되면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남자들은 고민 할 필요 없어요. 여자들은 잘 안그러니까. 가야 되요 말아요 되요? 좀 어려운가요? 갔다가 잘못되면요? 죽는데 어떻게 가요? 누가 제일 잘 불려가죠? 엄마나 누나죠. 아버지는 그때 잘 안 가더라구요. 애꿎은 엄마나 누나가 불려가서 달래야지요. 그런데 잘 안되더라구요. 거기 가서 엄마나 누나가 마이크 쥐고 아무 것이야! 내 왔다. 하면 엄마 말고 - 2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누구 불러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대개의 경우 결국은 죽는 걸로 끝이 나요. 남자들이 질투가 심해서 문제 가 발생하면 주로 탈영입니다. 아니면 살인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학교 구내에서 변심했다고 해서 살인사건 났던 적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질투 를 안한다구요? 옛날에도 정말 심했습니다. 칠거지악에 그런 항목을 넣은 것은 역으로 남자들이 더 심하다 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괜히 지레 놀래서 넣은 셈이겠지요. 여자가 질투하면 정상이지요? 남자가 질투하면 요? 정상이에요? 멋있어 보여요? 픽픽 웃는 폼이 좀 시원찮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면 요? 하나님이 질투하신답니다. 어떤 느낌이 들어요? 제가 이쯤 얘기하다가 끊어놓고 얘들아 성경에 하나님 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이 있냐? 하고 물으니까 없대요. 아무도 없대요. 이게 소위 유도심문에 걸린 겁니 다. 예배시간에 십계명을 늘 교독하던 때이거든요. 매주 교독하는 그 십계명을 앞에 펴 놓고 성경에 질투하 는 하나님이란 표현 있냐는데 애들이 없대요. 질투가 그런 거라면 하나님이 질투하신다 이건 말이 안된다 는 거죠. 그러냐? 십계명 한번 펴 보렴 펴 보니까 있는 거예요. 우리 성도님들은 괜찮겠어요. 남자들도 질투한다니까 그럼 하나님도 할 수 있겠네 그죠? 질투하시는 하 나님 이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질투의 다른 면을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이런 얘 기 자꾸 하면 집에 가서 야단 맞을 소지가 있는데 다른 적절한 예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제 얘기를 좀 하 겠습니다. 여태까지는 아직 야단 안 맞았거든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3년 했었는데 연애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서로가 결혼을 약속하고 이렇게 지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친구, 내가 옛날에 만나던 여자들하고 자연스럽게 다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도 마찬가지로 다른 남자들을 여전히 만날 수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게 옳습니다. 둘이서 연애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약속하고 교제를 한다고 해서 주변에 있던 남자와 여자들을 다 끊어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폭이 좁아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줄일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만 나던 사람들은 그대로 다 만나는 것이 맞아요. 그래야 되는데, 하루는 헤어지던 때에, 그러니까 결혼 약속하고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고 기억을 하는데 그 때 시외버스 터미널이 남부교회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 보시면 아, 저게 옛날 에 터미널이었구나 싶은 지역이 그 모습대로 남아 있습니다.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대구로 보내고 저는 집 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거기서 버스를 태웠는데 버스 타러 올라가더니 뺑 돌아서서 다른 남자들 여전히 만 나도 괜찮죠? 하는 거죠. 그런데 엉겁결에 안돼 라고 고함을 팍 질렀는데 다음 순간에 굉장히 부끄러웠어 요. 나는 그래도 사람이 좀 멋있게 생각하고 멋지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안돼 했으니 이건 실 수다 싶었죠. 여전히 멋지게 목소리를 착 낮춰서 아, 그럼 당연히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면서 그 가운데 서도 나를 제일 좋아해야 되는 것이지 뭐 이렇게 말을 했어야 했는데 느닷없이 입에서 안돼 소리가 튀 어나간 거죠. 그것도 박력있게 튀어나갔던 모양이에요. 박력있게 나가긴 나갔는데 그게 웬지 모르게 자꾸 부끄러웠어요. 그때 영해에서 하숙을 하고 있을 때인데 하숙집에 올라가 있는데도 며칠 동안 자꾸 부끄러웠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좀 더 멋있게 보였어야 했는데... 그리고 좀더 멋진 남자로 남았어야 했는데... 웬지 자꾸 부끄러워요. 편지가 바로 왔더군요. 그때는 일주일에 편지를 거의 두통씩 썼으니까요. 두통씩 쓰 면 재미있습니다. 오는 편지에 답장을 써서 보내면 답장 오기 전에 그 전의 편지가 또 오거든요. 편지가 겹 치면서도 행복하던 때였는데 제가 일주일에 두통 정도는 부지런히 썼어요. 제가 많이 쓰고 우리 집사람이 농땡이를 쳤어요. 그 편지에 제가 제일 부끄러워했던 그 대목이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돼 라는 그 소 리를 듣는 순간에 아, 이 사람이 이제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게 굉장히 기쁘더랍니다. 그 편지를 받 아들고 제가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쁘고... 이게 뒤죽박죽이 돼서 느낌이 참 묘했답니다. 부끄럽고 행복하고... 전혀 실감이 나지 않으면 연애를 해보세요. 누군가를 몹시 사랑해보신 분 은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질투하는구나 이게 얼마나 기쁜지 아시지요? 남이 볼 때 질투는 참 부끄러운 얘깁니다. 쪼다 같은 짓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로 인해 질투한다는 걸 느꼈을 때에 행복감요? 큽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부부 사이가 뻘쭘하고 문제가 있을 때 남편 보고 아이고,당신 질투하나? 이건 놀림입니다. 그러나 쳐다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울 때 남편이 슬쩍 질투하는 낌새가 보이면 속으로 엄청나게 즐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요? - 3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질투란 놀라운 사랑의 한가지 표현 방식일 뿐이란 뜻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뭡니까? 성경이 뭘 기록한 책입니까? 간략하게 줄여서 표현하면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죠? 하나님의 무슨 얘기가 기록된 게 성경입니 까?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성경은 하나 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고백입니다. 그 사랑 고백을 다른 말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 이라고 표현한 것 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쪽팔리게 나도 질투할 줄 안다. 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 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느냐는 얘깁니다. 조금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절에 심판을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심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해서 심판한 이후에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몹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것이 다시는 내가 심판하지 않겠다 라는 의미로 나타나죠. 한번 찾아봅시다. 창세기 8장입니다. 주일 오후에 저하고 같이 창세기 공부하신 분들은 대답하지 마세요. 우리 구역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네요. 8장 21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 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이런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유가 뭐라고 되어있죠? 어 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요? 악하면 심판을 해야지요. 어려서부터 악하니까 심판을 해야지요. 어려서부터 악 한데 왜 심판을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사람의 계획이 불완전하다... 그런데 왜 심판을 안 하느냐는 얘기예요? 심판 하나 안 하나... 방법이 없다 이 말씀이죠? 그럴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이 악한 놈들 을 잘못 할 때마다 심판했다가는 남아날 게 없으니까 심판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 시각으로 보셔 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심판 안 하신다고요?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게 아주 대차게 한번 나가보십시오. 부모님이 안 머라[꾸중]합니다. 왜요? 갋아서 될 인간이 아니니까 아예 내버려두는 거죠. 그 다음부터 참 편(?)합니다. 옛날에 어느 집에 며느리가 둘이 있었는데요. 시아버지가 위 의 첫 며느리한테는 얼마나 구박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잘 하는 며느리한테는 그렇게 구박을 하고 둘째 며느리한테는 아예 말도 안해요. 이웃사람이 물었어요. 잘 하는 첫 며느리는 그렇게 구박을 하고 둘째는 왜 저렇게 내버려둡니까? 인간이 인간 같아야 갋지 그게 답이거든요. 홍수 심판을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심판 안 하겠다는 것은 사람들이 개과천선했거나 뭐 달라져서 가 아닙니다. 해봐도 이게 되지 않을 일이니까 이 방법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 잘 했나요? 아니요. 즉시 돌아서서 여전히 또 반항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작 전을 바꾸시는 겁니다. 아니야. 이 방법으로는 안되겠어. 그래서 아브람을 불러냅니다. 아브람을 불러내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습니다. 그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서 자기 백성으로 삼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고 키워나가겠다 하는데 이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잘한 백성입니까 안한 백성입니까? 지독하게 안한 백성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사사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는 평온하게 살지만 우상숭배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이 민족을 들어서 칩니다. 그러면 이 민족의 압제를 받습니다. 괴로워 괴로워 못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 또 사사를 보내서 해방을 시키죠. 평온하게 좀 살다보면 또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또 이민족이 쳐들어옵니다. 이걸 계속 해서 반복하는 게 사사기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겠는데 한 여덟 번 정도 반복할 겁니다. 사사기 의 전체 내용은 그것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느냐를 기록한 것 이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독하게 안 들었어요. 왕정시대로 넘어가면 선지자들이 많은 지적을 하다가 끝에 가면 너희가 이렇게 하다가는 멸망당한다고 - 4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수없이 경고를 합니다. 특별히 소선지서에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망해버렸죠. 하나님은 그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 너희가 끝내 말 안 들으면 그 다음 방법 또 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던 하 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셨던 하나님께서 또 불러낸 것이 뭐죠? 교회입니다. 교회의 의미가 불러내 신다는 뜻입니다. 믿는 성도들을 불러내서 교회를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셨고 그를 믿는 자를 불러내서 교회를 만드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던 그 뜻을 이루고 야 말리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쩐다고요?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표현을 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하나님이 한을 품으신 겁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내가 한번 마음먹은 이 사랑 을 끝까지 이루고 말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다하다 안되면, 심판 안 하겠다고 하셨으니 심판 안 하겠다 그러 나 이 사랑 꼭 이루고 만다. 누굴 희생시켜서라도 이루고야 말리라?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희생시켜서라도 이 사랑을 이루고 말겠다 라는 선언이 담긴 것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랑하겠다는 것이죠. 끝까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목이 터져라고 외쳤던 이야기를 요약하면 전부 하나님만 섬겨라 는 겁니다. 하 나님만 섬겨라. 이것이 주된 메시지입니다. 그 외에 선지자들이 할 얘기가 별로 없었어요. 출애굽한 목적을 뭐라고 설명하죠?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왜 우리 백성을 보내달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출애굽기 8장을 한번 봅시다. 이 표현은 8장, 9장, 10장에 걸쳐서 계속 나옵니다. 8장 1절, 여호와께서 모 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 임이라 나를 섬기도록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서 이끌어 나가고자 하시는 목적은 나를 섬기게 함이다라는 선언이죠. 여호수아 24장으로 갑시다. 24장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약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아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 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마지막에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 삼아 당부하는 이야기도 이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여호와만 섬기라 그것이 너희가 평탄하고 너희가 잘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선지자들 모두가 목청 높여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내 그 말씀대로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마저 버린다면 교회를 통하여서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새로 이루어가신다라는 선언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 란 표현에 들어있는 겁니다. 끔찍하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섬기라는 얘기만 계속 반복하지만 하도 말을 듣지 않으니 여호와를 섬기지 않으면 징벌을 받게 된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만 섬기라고 외치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라고 애절할 정도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얘 기를 계속 반복합니다. 잘 아는 구절이지만 확인해봅시다. 이사야 1장 입니다. 어떻게 보면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애걸복걸하는 듯 합니다. 이사야 1장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 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 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요? 울부짖 음요? 절규요. 집사님! 표현이 참 좋습니다. 울부짖음보다 절규 하니까 더 실감이 나네요. 이스라엘 백성들 향해서 뭐라 고 합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식으로 하면 야, 이... 뭡니까? - 5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야, 이 짐승아. 점잔은 표현이네요 그죠? 야, 이 짐승아, 소나 나귀보다 이 못한 인간들아 하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뭐 가 답답해서 그렇게까지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셨다는 사실입니다. 호세아서로 갑시다.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한번 더 반복하죠. 우선 호세아 2장을 펴 놓으세요. 우리 교회에서 정말 아끼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전도사가 한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역 앞에 가서 이상한 여자 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가 바로 이런 꼴입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위대한 젊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 님께서 어느 날 이 선지자를 보고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가령, 여러분들 교회의 젊은 전도사가 역 앞에서 이상한 여자를 구해다가 결혼하겠다면 어떡하겠어요? 그냥 두겠 어요? 그 창녀였던 여자를 사모님 이라고 부르겠어요? 당장 쫓겨나고 말지요. 이런 일을 호세아가 저지른 겁니다. 호 1:2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에게 그렇게 결혼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행음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결혼하면 온 천지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입니다. 그러 면 호세아가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결혼했다고 나를 비난합니까? 내가 이런 여자를 사랑하듯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이렇게 결혼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 음란한 여자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 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를 따라서 집나간 아내를 찾아다 놓고 뭐라고 하는가 보세요. 호 2:19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 와를 알리라 몇 번이나 장가든다고 하십니까? 장가 못 들어서 안달이 난 분 같아요. 다른 남자에게 홀려서 집을 나갔을지라도 찾아와서 장가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네가 나를 알게되리라는 것입니다. 수 없 이 반복되는 경고에도 끝내 우상숭배에 열심이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장가들겠다는 것입니다. 호 6:1-3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 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제발 여호와를 알자는 것이 호 세아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아니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당부입니다. 이렇게까지 이스라 엘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애 타는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이사야 1장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다른 말로 하면 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이 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애타게 부르짖고 있을까요? 이걸 무엇이라고 표현 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절규.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사람의 질투는 너와 네 가족이 죽고 나도 죽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하나님의 질투는 내가 이렇 게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고백입니다. 아니,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결국은 사랑하게 만들고야 말겠다 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합시다. 이런 질문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 6 -

[2001.02.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1~7) 부자관계. 대답 잘 하셨습니다. 부자관계 맞아요? 요즈음 아들은 아버지 말 잘 들어요 안 들어요? 잘 안 들어요. 데려온 자식이 잘 들어요 낳은 자식이 말을 잘 들어요? 데려온 자식. 왜 데려온 자식이 말을 더 잘 듣지요? 쫓겨날까 봐서요. 그렇습니다. 낳은 자식은 말을 잘 안 듣는 수가 많아요. 왜요? 쫓겨날 염려가 없어요. 그런 두려움 때문 에 말을 잘 듣는 데려온 자식을 쳐다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두려워서 말을 잘 듣는 데려온 자식 아닙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무를래야 무를 수도 없 는 부자지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말 안 듣는다고 어쩌시겠어요? 한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입니다. 그 대답이 아주 바른 답입니다. 그러나, 긴 설교 끝에 본론은 제쳐두고 귀퉁이만 기억하는 것은 무슨 놀 부 심뽀입니까? 오늘 제가 부지지간 얘기를 했습니까? 사랑하는 사이. 사랑하는 사이를 다른 말로 무슨 관계라고 해요? 연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연인관계라고요? 부부. 연인관계와 부부관계? 어느 쪽이 더 나아요? 연인관계는 취소될 수 있고 부부관계는 취소될 수 없는 관 계인가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무르거나 파혼은 않으시니 같은 관계네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부자관계를 넘어서 연인같은 부부관계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의 질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지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죠? 벌이 두려워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러 분들은 아직도 두려워하는 종의 마음을 가진 어정쩡한 부자지간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 지 마세요. 하나님이 질투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범죄할 수 없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연인관계에 들어 선 것입니다.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 맙시다. - 7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제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 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 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 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개역, 창세기 4:16~24]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 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오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 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 더라 [개역, 창세기 5:6~14] 목을 이렇게 붙여놓고 저도 한참 웃었습니다. 좀 점잖지 못하다는 느낌도 들고 이렇게 붙여도 되 는 건지... 올해부터 설교를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우게 되면 좀 세련되겠지요. 여러분, 교회를 재미로 다닙니까? 누가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교회를 재미로 다닙니까? 교회를 재미로 다니면 안됩니까? 질문을 조금 바꿀께요. 교회 다니는 게 재미있습니까? 아멘. 재미있다면 재미로 다니는 것 아닙니까? 다른 분들이 가끔 물어요. 야! 고리타분하게 거기 뭐하러 가 냐? 뭐라고 대답하면 되죠? 재미있으니까 가죠. 재미있어서 간다고 대답을 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재미로 다니는 건 아니지만 다니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는 애보다 더 무서운 애가 어떤 애인지 아십니까?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는 애는 이길 장사가 없어요. 언 젠가 학교에서 학부형들이 모였습니다. 엄마들이 학교에 모이면 참 고민이 많아요. 선생님, 우리 애는 어떻 고 우린 애는 어떻고 이러는데요, 한 애 엄마는 선생님 참 걱정이에요. 왜요? 얘가 잠을 안 자요. 잠 안 자고 뭐 하는데요? 자라 자라 해도 안 자고 공부만 해요. 그 학부형에게 다시는 학교 오지 말라고 쫓 아버렸습니다. 왜요? 다른 학부형 어디 기죽일 일 있어요? 실제로 그 아이가 공부를 엄청나게 잘 합니다. 송래 란 앤데 애들이 가끔 학교 오는 길에 오락실 갔다 가 옵니다. 오락실 갔다가 늦게 와서 혼나는 애들이 더러 있거든요. 오락실 갔다가 늦어서 야단을 맞는데 한 녀석이 선생님 송래도 오락실 갔는데요. 하는 겁니다. 니[너] 말 잘 했다. 송래는 오락실 갈려고 하면 내가 돈을 줘 가지고도 보내고 싶은 아이다. 너 송래 따라하려고 한다면 오락실 얼마든지 보내줄게. 송래 공부하는 것 반만 따라해라. 그랬더니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손을 싹싹 비는 겁니다. 걔 흉내 못 내 요. 걔는 공부하는 게 즐거운 아이입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끝나고 애들이 흥청망청 지낼 때, 온 천지가 뒤집어져도 꼼짝 않고 앉아서 책 붙들고 있는데 긴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재미있냐? 재미있어요 정말 잘 합니다. 다른 애들 선수( 先 受 ) 학습한다고 학원 쫓아다닐 때 학원 안 가고 혼자 앉아 책 붙들고 고등학 교 1학년 과정을 거의 마쳐버린 아이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거예요. 공부를 재미로 합니까? 아니오. 아니지만 공부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하는 아이는 이겨낼 장사가 없는 겁 니다. 교회를 재미로 다닙니까? 아니오,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교회 다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라는 고 백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거의 다 된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즐겁다라는 고백만 나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거의 다 제대로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얘기를 좀 해볼려고 합니다. - 1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별 의미가 없는 듯 싶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묘미가 있어요. 이 안 에 족보가 두 개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4장 16절에서 24절까지 입니다. 이건 누구의 족보일까요? 가인. 예. 가인의 족보입니다. 5장 전체는 누구의 족보일까요? 아담의 족보라고 해도 되겠고 셋의 족보라고 해 도 되겠는데 편의상 우선은 셋의 족보라고 하고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셋의 족보와 가인의 족보를 비 교해 보십시오. 지금은 간략하게 살펴보고, 댁에 돌아가셔서 다시 찬찬히 보면서 비교해 보십시오. 아주 특 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대충 보니까 어떤 차이가 있어요? 나이가 있고 없고. 가인의 족보는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나이는 없고 셋의 족보에는 나이가 많이 있고요? 좋습니다. 또 있습니까? 가인의 족보는 자손들이 거창한 일들을 많이 했는데 셋의 족보는 그냥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이것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또 있습니까? 향수가... 아, 향수( 享 壽 )가... 수를 누렸다는 얘기죠? 가인의 족보는 그냥 낳았다는 족보만 있고 셋의 족보는 그 수 명을 누렸더라는 얘기가 있답니다. 대단한 발견 중의 하납니다. 또 있나요? 가인의 족보를 보면 한 절이 대체로 좀 길어요. 길쭉길쭉해요. 아까 성경 교독을 할 때 왜 잘 안됐죠? 셋의 족보를 읽을 때는 끊어야 하는데 계속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데요. 왜 그래요? 너무 짧아서 그래요. 짧 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할 말이 별로 없다는 얘깁니다. 셋의 족보에는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할 얘기가 별로 없어요. 그냥 낳고 향수하고 또? 쉬운 말로 하면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이렇게 갔다는 얘깁니다.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가인의 족보에는 할 얘기가 셋의 족보에 비하면 훨씬 많은 겁니다. 거창한 일들을 많이 정리해 놓은 족보입니다. 겉으로 보아도 이런 표가 금방 납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 다. 이 가인의 족보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진화론과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식 하셔야 합니다. 진화론에 의하면 세상은 원래 아무 것도 없던 세상인데 거기에서 아주 미세한 미생물이 생 겨나고 차츰차츰 발전해서 이렇게 문명 사회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처음에는 어떻게 살았죠? 미개인. 물론 미개인이죠. 미개인이 주로 뭐하고 살았겠어요? 처음엔? 숲에서 꼭 짐승같이 살았죠. 주로 원숭이같 이 살다가 내려와서 목축도 하게 되고 문명화 되어갔다고 이야기를 하죠. 제가 어릴 때 공룡 백만년 이라 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 첫 장면에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금 있다가 보면 숲 속에 털복숭이 원숭이 몇 마리가 나와서 설치는데 몇 장면 안 지나서 현대인과 복장만 조금 다른 사람들이 등장 하는 겁니다. 얼마나 빠르게 진화하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원숭이나 짐승처럼 살았다라는 전제 하에서 진화론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성경은, 처음 인류가 지금 현대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도저히 동의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처음부터 원시인처럼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 터 목축했고 처음부터 농사를 다 지었습니다. 우리보다 나은 점이 몇 가지 있어요. 제일 부러운 것이 수명 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잘 살아야 백년이죠. 한 80쯤 살고 돌아가시면 호상이다라고 하죠. 이 사람들 은 구백년정도는 거뜬히 넘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 됐을 때는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도 구백년 넘어 살았습니다. 이것을 신화로 취급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 - 2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백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충분히 설명이 되어질 만큼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하고 비할 바가 아니에요. 또 하나 있습니다. 아담과 노아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이 우리보다 머리가 월등히 좋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 많은 생물을 이끌고 와서 아담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잘 붙였습니다. 여러 분 같으면 몇 마리 정도에게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제일 애로사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상한 짐승이 왔습 니다. 너 말, 그 다음에 너는 개, 너는 생긴 게 지저분하니까 돼지... 이렇게 붙여나갑니다. 몇 종류 정도 붙 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어 부족으로 아마 곧 포기할 겁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나중에 뒤섞여 버 리면 가만 있어봐라 얘한테 이름을 내가 뭐라고 붙였던가? 야는 이름을 붙였던가 안 붙였던가? 헷갈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못 해냅니다. 아담이 그 많은 생물들에게 이름을 일일이 붙일 수 있었다라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차원, 다른 두뇌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건 쉽게 설명이 돼요. 머리가 우리 신체 중에 제일 무거운 부분입니다. 떨어질 때 항 상 머리가 먼저 떨어져요. 이게 무거우니까 교통사고 나면 어디를 먼저 다쳐요? 여기(목)부터 다치잖아요. 이 무거운 걸 이고 다니다가 쿵 하니까 여기부터 안 다칩니까? 이 무거운 머리 가지고 다니시면서 이 속에 들어 있는 두뇌를 평생토록 열심히 쓰면 얼마나 쓰시는지 아십니까? 그런 얘기 많이 하니까 들으신 적 있 을걸요.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 약 5% 정도 쓴답니다. 그러니까 평생토록 쓰면 3% 내지 5% 정도 쓰고 아 주 뛰어난 천재같으면 한 10% 쓴다고 그러네요. 쓰지도 않을 95%를, 이 무거운 두뇌를 왜 가지고 다닙니 까?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아담은 이 머리를 완전하게 다 썼을 겁니다. 그 흔적인지 몰라요.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자생존이란 먹고 살기 위해서, 즉 생존을 위해서 투 쟁을 하다 보니까 발달하게 되었고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놈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 의 두뇌가 원래 조그만 했는데 자꾸 머리를 쓰고 쓰고 하니까 차츰차츰 커갔다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사람 의 두뇌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저축해놓고, 쓰기는 한쪽 귀퉁이 조금밖에 쓰고 있지 않 는 부동산 부자 같습니다. 진화론은 그렇게 넉넉하게 저축해놓고 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화론의 얘기가 그런 점에 있어서도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앞부분을 여러 군데 찾아보면 진화론의 얘기보다 초기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두뇌와 여러가지 나은 점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꼭 공부하시라고 권합니다. 인 류 초기에 발달했던 문명이 노아 홍수시대에 완전히 사라지면서 수명도 줄고 두뇌도 더 이상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서 비참한 처지로 떨어졌다가 사람들이 이제 조금 회복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얼마 전 신문에 게놈이라 하기도 하고 지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생명체의 비밀을 해독하고 난 다음에 신의 영역에 사람이 들어섰다고 막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고요? 하나님께서 금지 해 놓은 곳에 겨우 한 발짝 들이민 것 같은데 혹시나 잘못해서 더 위험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감히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일을 해놓 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놀라운 세상에 겨우 구멍 하나 내고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있 는 정도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세계가 지금 우리의 세계와는 엄청나게 달랐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 인의 족보를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아주 아주 먼 옛날에 이 가인의 후손들이 성을 쌓았답니다. 성을 쌓는 것이 보통 기술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쌓아올리면 성이 쌓아지는 것 아니죠? 이게 어 느 정도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한 실력의 기술이 있어야 가능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옛날에 성을 쌓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조금 넘어가니까 아다라는 인물이 나오죠?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얘기는 지금 식으로 말을 한다면 당시에 가장 중심 되는 산업이 목축이고 육축이었으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경제계의 거물이 되었다라는 표현과 비슷할 겁니다. 유발이라는 사람은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라고 나와 있 습니다. 지금 식으로 하면 문화 예술계의 거장인 셈이죠. 씰라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각종 날카 - 3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쇠가 만들어진 게 도대체 언젠데 이 먼 옛날에 기계 얘기가 나 오느냐라고 말씀하실 분이 있죠? 우리가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문제는 다른 문제로 남겨두고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었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공업 혹은 중공업계의 거물이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날카로운 기계라고 하는 걸로 봐서 무기 체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 니다. 어떻게 본다면 최첨단 무기를 제조하거나 활용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깁니다. 이 경제계의 거물, 예술계의 거장, 최첨단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아들들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죠? 이 세 아들의 아버지가 라멕입니다. 그러니까 라멕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시 세계의 중요 한 부분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사회를 완전히 장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까 이 라멕이 큰 소리를 치는 거죠. 엄청나게 큰 소리를 칩니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라멕이 두 아내를 가 졌다고 하는데 두 아내를 가졌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까? 별 문제 아닙니까? 단순하게 아내를 둘 가졌다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때까지 그렇게 잘 지 켜왔는데 라멕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두 아내를 가졌다는 얘기가 남자 가 바람을 피우고 외도를 좀 했더라는 그런 얘기와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이 라멕을 최초의 중혼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두 아내를 거느렸다는 차원이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라멕의 큰 소리가 23절에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지금 큰 소리를 치는 거죠.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창상 이라는 것은 조금 다쳤다는 겁니다. 조금 찔렸거나 베였거나 하는 정도죠. 내가 조금 다쳤는데 그 일로 인 해서 사람을 죽여버렸다는 얘깁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칩니다. 가인을 위하여 는 벌이 칠 배일진대 가인이 자기 동생 죽인 거 있죠? 가인이 자기 동생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 럼에도 가인을 해하는 사람에게는 벌이 칠 배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는? 정당하 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내가 죽였다. 그러니까 나를 해하는 사람은 벌이 칠십칠 배가 될 것이다라 는 얘기예요. 내게 큰 손해를 입힌 거 아닙니다. 내게 상처를 좀 입혔지만 내가 그를 죽인 것은 정당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엎고 큰 소리를 쳐대는 것이 라멕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가 인의 족보입니다. 반면에 셋의 족보는 그저 낳고 죽고 낳고 죽고 그것밖에 없어요. 도중에 조금 특이한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낳고 죽고 외에? 비로소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과 관련된 얘기가 조금 있죠? 22절 23절에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처럼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만 조금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더라는 얘기를 보면 야, 그 사람들 참 멋지게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드십니까? 하나님과 삼백년간 동행하였더라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야 그 사람 참 행복하게 살았다. 이 런 느낌이 들어요? 그런 느낌 안 들죠? 괜히 하나님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대답하시기가 부담스러운 모양인데 조금 바꿉시다. 어떤 사람이 시집 을 갔어요. 스물다섯에 시집을 가서 칠십이 되도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러면 이야 재미있게 살았 겠구나 그래요? 뭐라고 그러세요? 시집살이 많이 했겠다 그러죠? 하나님과 삼백년 동행했다더라 그러면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고생 많이 했겠다. 고생 많이 했겠다 이러세요? 우와 재미있게 살았다 이건 아니죠? 아니 하나님과 동행했더라 하면 왜 그 렇게 좋은 느낌이 안 들어요? 우리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부담스런 어른 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좌우간 셋의 족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특이한 기록이 있다면 하나님과 이런 관계가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할 말이 있다면 이것 뿐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요. 이것이 셋의 족보입니다. 혹시 - 4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여러분들도 셋의 족보를 읽으면서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 동안 동행하였으며라는 그 구절 보면서 아 참 고생 많이 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이 분문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 나 행복했는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여기시면 성경을 읽다가도 이 부 분이 눈에 확 들어오겠지요. 아! 에녹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느낌은 안 들 고 고생 많이 했겠다, 아니면 시집살이 되게 했겠다,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이런 느낌이 드시면 내가 지금 그렇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두 족보를 조금 더 비교해봅시다. 가인의 족보에서 가장 매력적인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인 의 족보에서 아! 이거 참 매력적이다 싶은 것 말입니다. 두 아내를 가졌더라 이게 좀 부럽지 않습니까? 말 잘못했다가 집에 가서 큰일나겠다 싶어서 조심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런 심리가 다분히 있을지 모르겠 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놀라운 창조의 질서에 거역하는, 하나님을 향한 범 죄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아내 아니 가능만 하다면 셋, 넷의 아내를 가지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분이 바람을 피우고 두 집 살림을 더 하는데 고층 아파트에서 자기는 아래층에 살면서 한 집 더 사는 아파트가 같은 동의 위에 있었다고 합 니다. 오래도록 비밀이 유지가 되었답니다. 왜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 좀 하고 올게 하고 나가서 밑 으로 안 가고 올라간 거죠. 거기 가서 운동(?)하고 오니까 절대 거짓말도 아니죠. 참 오래 살았답니다. 그게 들통이 안 날 텐데 왜 들통이 났을까요? 우유 배달하는 아줌마. 어떻게 알아요? 우리 김범하 집사님 참 아는 게 많아요. 우유 배달하는 아줌마가 어 이상하다 저 아저씨 언제는 보니까 아래층에 있더니 언제는 또 위층에 있다? 그 생각이 들었던가 봐요. 한번 그렇게 생각이 들 면 그 다음에 주목해서 보게 되지요. 유심히 보니까 위에도 살고 밑에도 사는 게 맞더랍니다. 이래서 들통 이 났다는 거죠. 정말 간이 큰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그렇게 살더란 얘깁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애인 하나 없이 무슨 낙으로 사느냐구요. 저는 그게 한때 유행처럼 그러고 지나간 줄 알았어요. <애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죠? 저도 말만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만큼 든 유부남 유부녀들이 애 인을 하나씩 만들어 둬야 한다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져서 이게 하도 사회적인 문제가 되니까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됐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게 한때 그러다가 끝난 줄 알았는데요. 요즘도 그게 끝난 얘기는 아니라 그러네요. 이 시대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음란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전들 구체적인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없어서 그냥 말로 조금 들은 상태밖에 안되죠. 그러니 실제로 어느 정도로 음란한 세 대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게 나이 많은 친구들이 몇 분 계시는데요. 이 분들이 십여년 전에 춤을 배우기로 했답니다. 춤을 배우는데 기간은 관계없이 삼십만원만 내면 다 배울 때까지 항상 그 집에 가서 배울 수가 있었다고 그래요. 십년 전에 삼십만원입니다. 좀 젊은 분은 그 과정을 다 떼었고 조금 나이 드신 분은 한 1주일 다니다가 때려치웠답니다. 돈 아까워서 그걸 어떻게 때려치워요?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어서 등록을 했는데 하도 꾸중을 들으니까 도저히 못 하겠다고 때려치워 버렸는데 물론 그 사모님은 그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춤을 왜 그렇게 배울려고 열심히 다닐까요? 춤 추는 게 좋아서요? 단순히 춤 때문이 아닙 니다.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놀기에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 방면에 성공할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더군요. 간단한 포크댄스 하나 제대로 박자 못 맞춰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가서 제대로 춤을 추겠어요. 카뱌레라는 곳을 저도 한번 가보고 싶 은 마음은 있었는데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포항에서 만기되서 경주로 떠나기 전에 선생님들이 환송회 한다고 가자 가자 하길래 제가 단서 딱! 하나 붙이고 따라갔습니다. 가만 앉아서 옷만 지킬께, 나가자 소리 만 안 하면 갈께 하고 따라갔습니다. 제철 가다 보면 전화국 맞은편에 새로 지어진 근사한 캬바레가 하나 있어요. 처음에는 약속대로 잘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만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구경할만 하대요. 그런 데 처음 약속, 술 먹는 사람들 약속 믿을 게 못 되요. 기어코 붙들려 나갔죠. 그 바람에 제가 하나 배운 게 - 5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있습니다. 무대라고 하면 될텐데 플로어라고 그러데요. 올라가서 서 있지를 못하겠어요. 자꾸 넘어지는 거 예요. 몇 번을 넘어지니까 봐 주더라구요. 나중에 물어봤어요. 바닥을 왜 저렇게 미끄럽게 해놨어? 아시는 분 계세요? 얘기하다가 또 찍힐 것 같아서 얘기 안하죠? 집사님 몰라요? (김범하 집사님께서 손가락을 빙빙 돌림) 이러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닥이 왜 저렇게 미끄럽냐 하니까 하는 얘기가 잘 돌아가라고 그렇게 해 둔답니다. 익숙한 사람은 올라가면 거기서 팽팽 잘 돌아가는데 익숙치 못한 사람은 걷지를 못해요. 미끄러 워서요. 그래서 그날 여러 번 넘어지고, 넘어진 게 아니라 미끄러진 거죠. 구제불능이다는 판정을 받고서야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지 않았겠어요? 아이고 서 있지도 못하는 주제에 오기는 뭣 하러 왔냐고? 이것이 어쩌면 우리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른 작은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 사는 것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돈 좀 있는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돈 뿌리며 사는 재미로 삽니다. 제가 듣기로는 제철 직원 중에 묘한 분이 한 분 계셔서 아주 옛날 이야기 입니다만 높은 데에 올라가서 만원짜리 쫙 뿌리고 그랬다고 하데요. 왜 그러냐 하니까 그것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고 그래요. 사람들 많이 있는 높은데 올라가서 만원짜리 다발 한번 풀어서 쫙 뿌리고 내려다 보십시오. 그렇게 재미있다나요. 그런 방법이 아니라도 돈을 펑펑 쓰며 사는 재미난 방법이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예술계의 거장요? 예술하는 사람들을 욕보일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라고 하는 그 화 려함 속에 숨어 있는 뒷면의 모습을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가끔 터져 나오는 얘기들을 들어 보면 물론 깨끗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어요. 지난 주에 설교 작성을 하면서 신문을 잠깐 보니까 오현경이라는 사람이 귀국했다고 신문마다 한쪽 귀퉁이에 다 나 있더라구요. 오현경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기는 한데 이 사람이 누군데 자꾸 신 문마다 귀국했다고 그러냐 제가 암만 봐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한 며칠 뒤에 다른 친구들 만나서 물었다가 욕 한마디 들었어요. 빙시 같은 게 이러더라구요. 한때 시끌벅쩍했던 오양 비디오 사건의 장본인이다는 거 죠. 좋은 소리는 못 들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화려함 이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음란과 좋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베어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보고 그렇게 환호하는데 그것은 드러나는 겉모습 뿐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화려하 게 사는 모습이 멋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화려하죠. 조그마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권력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른답니다. 권력에 맛을 들이면 마약보다 더 심하다고 그래요. 너무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저도 세상을 보는 눈이 굉 장히 좁습니다. 기껏해야 남에게 들은 한 두 마디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험악한 세상인지 알기가... 그냥 상상이 될 뿐입니다. 돈이 나쁘고 예술이 나쁘고 과학의 발달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이렇게 멋진, 휘황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가면서 살았는데 그 문화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나쁩니까? 16절을 보십시 오. 이 가인의 후손들의 문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16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라 고 말합니다. 이 문화는 화려하고 보기에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이 문화가 여호와를 떠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과 상관없이 저희들끼리 화려한 문화를 이루어 갔다는 것이 이 문화의 문제점이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면서 교회생활 하는 것 이 자유롭습니까? 구속이 많습니까? 구속이 없어요. 전혀 없어요? 좀 놀려고 하니까 또 주일이가? 돈 좀 쓸려고 하니까 뭐 어디 좀 내야 하고 괴롭습니까? 안 괴로우세요? 안 믿는 사람은 내 돈 내 맘대로 쓰고 내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삽니다. 어떻게 보면 얼 마나 자유스러워요. 우리는 못 하는 게 많아요. 왜요? 돈이 넉넉지 못하고, 그 다음? 새벽기도 가야지요. 아 니면 구역예배 가야지요. 뭐 이리저리 걸려서 못 가요. 얼마나 괴롭습니까? 어떤 친구가 날 보고 물었어요. - 6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야, 도대체 너 무슨 재미로 사냐? 저도 간단하게 물어봅니다. 너 그렇게 사는 거 정말 즐겁냐? 진지하게 물어보세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자유롭고 정말 즐겁냐고 물어보세요. 단, 내가 괴로워서 천날 만날 찡 그리고 살면서 그렇게 물으면 소용없어요. 내가 정말 믿는 사람으로서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 저들 눈에 보일 때에 너 정말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냐고 한마디 물으면 대답 잘 안 해요. 글쎄요. 어 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거지요. 이게 제가 들은 대답입니다. 다른 낙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아니, 진짜 자유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떨 때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 되어갈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이 기다려지는 사람에게는 이게 절대 구속이 아니에요. 예배 시간요? 예수 좀 제대로 믿을려고 하면 거의 날마다 교회 가야 되죠? 새벽기도니까 날마다는 확실하네요. 새벽에만 갑니 까? 저녁에요? 한번 두번 갑니까? 조금 열심을 내려고 하니까 특별 새벽기도, 특별새벽기도 끝나면 그 다음 새벽기도 없습니까? 예수 믿노라고 발을 들여 놓으면 자꾸 들어가죠? 그게 괴로운 사람에게는 한량없이 괴 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롭고 기쁜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에게 이런 자유로움과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때에는 돈도 명예도 기술도 다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이기 때문에 이렇게 화려한 가인의 족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족보의 특징이 과연 무엇일까요? 5장은 우리가 흔 히 셋의 족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4장은 가인의 족보입니다. 그렇다면 5장은 당연히 셋의 족보여야 합니 다. 그런데 5장 1절에 보시면 셋의 족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족보요? 아담 자손의 계보라고 말합 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것은 아담의 족보란 뜻입니다. 가인은 누구의 후손입니까? 가인도 아담의 후손 아닙니까? 4장을 가인의 족보라 해놓고 5장을 아담의 족보라는 것은 이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4장은 첫째 아들 가인의 족보입니다. 5장은 당연히 셋의 족보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을 아담의 족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4장은 뭐예요? 하나님의 족보에 안 들어간다는 얘기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합시 다. 족보에서 빼버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4장의 이 화려하고 멋진 족보는 아담의 족보에서 빼내버린 사 람들의 족보 란 얘깁니다. 족보에서 파버린단 말을 하죠. 4장의 족보는 아무리 화려하고 모양이 번듯해도 족보에서 파버린 사람들의 족보란 사실입니다. 이 4장 족보의 화려함을 보고 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이 정말 이 땅에서 멋지게 살고 큰 소리 치며 사는구나. 그러지 마십시오. 족보만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돈 써가며, 큰소리 쳐가며 멋지게 사는 것 보시면서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 요. 그것이 진정한 자유도 아니며 진정으로 즐거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통사고 제발 내지 마십시오. 한국 사람들은 참 좋은 전통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 났으면 뭐부 터 해야지요? 안면에 완전히 철판 깔고, 자기가 분명히 잘못해 놓고도 무조건 큰소리부터 쳐야 됩니다. 붙 어 싸울 자신 있으세요? 없거든 사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속도 내 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속도 많이 내시는 분 저 좀 알아요. 내지 마십시오. 교통신호요? 철저하게 지키십 시오. 왜요? 안 믿는 사람들의 큰 소리와 붙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들에게는 없어요. 싸우는 거 보면 철판 깔고 완전한 거짓말을 마구 해댑니다. 큰 소리 좀 쳐볼려고 해도 우린 잘 안됩니 다. 왜요? 그 사람들은 정말 자유롭고 우리는 뒤에 누가 보고 계시는데요. 큰 소리 칠 재간도 없고 거짓말 할 재간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요. 아예 사고 근처에 얼씬도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저 바보같은 게 거짓말을 조금만 하면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 그 조그마한 거짓말 할 능력이 없는 우 리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세상에 쪼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말을 들으면 전 가슴이 몹시 아픕니다. 사고 내지 마십시오. 당하지도 마십시오. 누구는 당하고 싶어서 당하나 하지 마시고 제 말의 의미를 잘 새겨 주십시오. 왜냐면 교통사고가 나니까 사람들이 너무너무 비참해지는 거 있죠. 그런데 만약에 내가 실수로 잘못했으면 믿는 성도가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 너무 낮아지는 것을 상상만 해도 전 괴롭습니다. 그런 일이 생겨나지 않아 야 한다는 뜻에서... 그 사람들은 마음껏 큰소리 치며 활개 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언뜻 보기 - 7 -

[2001.03.04] 교회를 무슨 재미로 가(?) (창세기 4:16~24) 에는 화려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족보에서 빼낸 사람들의 삶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그것이 그렇게 부 러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이 아담의 족보 말이죠.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열심히 갑니다. 왜 그래요? 다른 얘기도 좀 넣어서 족보 좀 멋있게 만들면 안됩니까? 다른 얘기 다 빼버리고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열심히 뛰어가는 것 같아 요. 목표가 어딥니까? 예수님이죠. 다른 얘기 다 잘라 내고 낳고 죽고 열심히 했어요. 빨리 가자는 겁니다. 어디까지요? 예수님께까지요. 이 족보의 끝은 일단 예수님까지 가는 족보입니다. 그게 무슨 얘깁니까? 이 족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져 내려오는 통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내리는 족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저래서 무슨 낙으로 사느냐 싶어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녹아있는 삶이라는 얘깁니다. 지난 주간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질투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질투를 다 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를 정말 사랑하셔서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그 사실 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심판을 해도 되지 않으니 더 이상 심판 안 하겠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겠다.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것이 자기 희생이죠.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이 족보에는 흘러 내려가 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급하다 급해 다른 얘기 다 빼고 빨리 예수님에게까지 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런 식으로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잘 살았던 내용이 나오면 잠시 언급을 하고 또 달 려갑니다. 하나님과 삼백년간 동행하였더라? 고생 많이 했겠구나?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우 리에게 얼마나 멋진 삶을 살게 하셨는지를 알면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오 히려 그 삶을 느끼고 살면서 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삶을 살면 이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골치 아픈 노인네 모시고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가장 소중한 것까지 아낌없이 주시며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그 분을 언제까지 뒷방 늙은이 취급 을 하려 하십니까? 무슨 재미로 교회 가느냐구요?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을 때에 여러분들은 당당하게 너 그렇게 사 는 거 정말 재미있냐? 내가 가진 재미 한번 보여줄까? 라는 정도는 돼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보자 하고 데 리고 왔더니 아! 이 교회 좀 다르네. 이런 마음이 들만한 교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 지금 만들 어져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 온지 아직 1년도 채 안되서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 를 날마다 체험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편안하다고요? 잠시 쉴 틈이 없이 바쁘지만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 습니다. 허준 이야기가 어떻게 됐는지 궁예가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몰라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화려한 삶에 너무 부러움의 눈길을 주지 마세요. 여러분이 진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화려함보다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비참함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 인의 삶이 무미건조합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 는 족보지만 이 족보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족보입니다. 낳고 죽고 낳고 죽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는지 체험하며, 느끼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8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주 안식하신 하나님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개역, 창세기 2:1~3]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 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개역, 출애굽기 20:8~11] 일을 어떻게 지키는 게 좋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같이 나눠보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을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의 핵심을 보면 안식일은 아무 것도 안 하는 날 이라고 규정을 짓고 무엇이든 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뭐냐에 대해서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가축을 끌고 가도 되느냐 안되느냐? 이게 일이냐 아니냐를 따져야 하는 거죠. 특히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바늘을 안 잃어버리도록 애를 많이 썼다고 그래요. 바늘을 잃어버리면 안식일에 바늘을 찾고 싶어도 그것이 일이냐 아니냐를 따져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거 죠. 지금이야 바늘이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이 안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대단히 소중하고 요긴한 것이었습 니다. 그렇게 요긴한 바늘을 잃어버렸다? 당장 찾아야 하는데 이게 일이냐 아니냐는 겁니다. 녹쓸기 전에는 결론이 나야 할 텐데... 아마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을 겁니다. 안식일에 아이를 낳아도 되느냐 안되느냐? 이런 고민이 생기니까 어떻게든 안식일을 피해서 아이를 낳 으려고 주의를 많이 했다고도 합니다. 심지어는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어도 되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했 다니까 얼마나 논쟁거리가 많았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일이냐 아니냐 그건 답이 나와 있습니다. 손수건 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일이다. 그러나 옷에 꿰매서 붙이고 다니는 것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굳이 쓸려면 옷에 꿰매서 다녀라. 이런 식이었죠. 이런 건 사소한 문제지만 심지어 전쟁 도중에 전쟁을 포기한 적도 있 습니다. 안식일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그래서 전쟁 도중에 안식일이라고 전쟁을 중지해버린 채 전원이 몰살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번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다음 번 에는 태도를 바꾸어 용감하게 싸우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까 덕을 본 적도 있습니다. 로마에서 군인들을 징집해 갈 때 유대인들은 포기했습니다. 징집 을 안 했습니다. 전쟁 중에 잘 싸우다가 안식일이다 하고 손 놔버리니까 문제가 많은 겁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징집에서 면제되기까지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목숨을 걸었습니 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그렇게 애쓴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보존해주는 역할마저 도 했습니다. 유대인이 멸종되지 않고 끝없는 박해를 이기고 오늘의 유대인답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안식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좌우간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무엇이든지 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일하러 나갔다가 붙들려서 돌에 맞아 죽은 예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느냐에 대한 생각은 없 었던 것 같아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만 기를 쓰고 지킨 것이죠.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안식일 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큰 이유는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탓도 있지만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안식일을 - 1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완전히 파괴한 사람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시급한 일은 할 수 있지만 손 마른 자를 고치 는 것이라든가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병자를 고치는 문제는 사실은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 그날이 안식일 이니까 하루 쉬어서 그 다음날 고치셔도 되는 일인데도 예수님은 많은 대적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는 그 가운데서 굳이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의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미룰 수 있음에도 굳이 그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치셨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 보시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었지만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셈이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안식의 진정한 의미가 예수님 자신에게서 이루어짐을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안식일에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일을 하시면서 맨 처음에 안식일 제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안식일의 근거는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장 본문의 이 짤막한 구절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의 뜻은 편 안하게 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안식은 아무 것도 안 하고 푹 쉬는 것입니다. 주일에 편안하십니까? 주일에 저도 새벽부터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바쁘다 보면 어디서 한숨 잤으면 싶은데 잘만한 시간도 없고 공간도 마땅치 않지만 잘 버티는데 이유는 워낙 단련이 잘 돼 있어서 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하루종일 교회에서 뛰어다니다가 저녁예배 마치고 늦게 기숙사로 돌아오면 올라오는 길 이 약간 비스듬하게 경사졌는데 그 길을 제대로 못 올라가서 길 옆 잔디에 누워서 하늘 쳐다보면서 히죽히 죽 웃다가 쉬어서 올라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수업을 거의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월요일만 되면 계속 조는 거예요. 내가 왜 이러나 왜 이 러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주일의 과로 때문이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불만이 있을 것 같아요? 전혀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며 가르친 덕에 저렇게 착하고 예쁜 부인을 얻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주일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어다니는 것은 아예 버릇처럼 되어서 잘 견딥니다. 그게 좋은 훈 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농담 삼아서 많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주일이 뭐냐? 발음을 조금만 잘못하면 됩니다. 주일은 주기는[죽이는] 날이다. 그러면서 주일이 안식일 아니냐? 안식일! 푹 쉬는 거 아니냐? 푹 쉬어야 하는데 우리는 하루종일 이러고 있으니까 이것 잘못하고 있는 거다. 이거 안식일 어기는 거다 이러면서도 참 열심히 뛰어다녔죠. 교회 열심 히 다니시는 분들이나 교회 일 맡으신 분들은 주일이 죽이는 날 맞습니다. 예배, 기도, 회의는 또 얼마나 많아요! 주일학교, 성가대, 전도회... 그럴 때에 주일은 이게 아니고 푹 쉬는 날인데라는 생각을 많이 하시 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쉬셨으니까 우리도 따라서 푹 쉬어야 된 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가 뭘까요? 하나님은 육일 동안에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칠일 날 푹 쉬셔야 할 이유가 사실은 없습니다. 이 질문의 대답이 참 재미있더라구요. 하나님은 푹 쉬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죠? 피곤하지 않은 분이시니까. 예,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일 동안 큰 일을 해놨더니 아, 피곤하다. 그래 서 좀 쉬자?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피곤을 느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친구가 정말 재미있는 대답을 했어요. 하나님은 쉴 이유가 없다. 왜? 하나님이야 말씀밖에 더 했어요? 말씀으로 모든 걸 다 창조해 버렸으니까 별로 쉴 이유가 없다는 겁니 다. 그것도 참 좋은 대답이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말씀 하나로 다 창조하셨는데 그러지 마세요. 말하는 건 어디 쉬운지 아십니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말 많이 하시는 분들은 오래 사는데 지장 - 2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있습니다. 말 많이 하는 게 참 힘든 일이에요. 그렇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말, 필요한 말, 분위기 좋게 만드는 이런 말은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도 많이 안 하셨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안식이 우리가 푹 쉬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로를 느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 만 생각해도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을 읽어 가면 서 이런 문제를 머리 속에 두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시면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이유가 없는데... 왜 쉬셨을까?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가 뭘까라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만큼 완성했다라는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성하셨으니까 그 다음 뭐 하셨어요? 완성하시고 보시니 보기에 좋았더라, 매우 좋았더라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역사해 놓으신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할 일을 다 해놓고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사역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바 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뭘 보시고 그렇게 기뻐하셨죠? 사람을 만들어 놓고요. 사람이 사실은 창조의 꽃입니다. 제일 멋진 작품입니다. 그 사람을 보시고, 즉 우리를 보시고 그렇게 기 뻐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셨기에 그 기쁨을 우리와 함께 누리시기 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따라하라는 것이 바로 안식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기쁨을 우리와 함께 누리 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듣기도 많이 듣지만 그만큼 소중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1번 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뭐냐? 이건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근본된 목적을 뭐라고 말씀하시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참 조심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을 영원토 록 즐거워하는 거냐 즐겁게 하는 거냐는 사실입니다. 잘못 아시는 분은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라고 오해를 하십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을 우리가 즐거워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뭐죠? 어떤 상태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상태입니까? 찬양하고 예배하고요? 하나님만 생각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즐겁습니까? 아멘. 정말입니까? 조금 바꾸어서 물어볼까요? 내일 당장 예수님이 오신다면 오늘 저녁에 환영 준비한다고 기 쁘게 뛰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잠시 조금만 미루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연기를 요청하시겠습니까? 준비하겠습니다. 준비요? 우리 교회에는 워낙 믿음 좋으신 분들이 많아서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할 겁니다만 다른 교회 나 안 믿는 분들은 어떡하죠? 조금만 더 연기해 주십시오. 왜요? 우선 그 동안 회개할 게 많으니까 회개도 조금 더 하고 그리고 지금 오시면 아무래도 내가 천국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겠 죠. 아니면 지금 오시면 내가 칭찬 듣기보다는 벌 받을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 죠.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정말 즐거워하는 자세로 우리의 삶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 열심히 좇아다니고 전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예배 드리고 헌금 많이 하고요? 아뇨! 그 모든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자관 - 3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계로 비유하면 이해하기가 참 좋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키우면서 때로는 자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아도 기분 좋을 때가 있죠? 없습니까?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죠? 마, 전혀 안 그러면 제외 하고요. 얼마나 기쁩니까? 자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 기분이요? 그럴 때에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너 빨리 커서 돈 벌어서 나한테 좋은 선물 내 놔라. 그런 생각하십니까? 우리 집 애가 할머니가 워낙 잘해 주셔서 커서 돈 벌어서 할머니 좀 잘해 드려야겠는데 내가 커서 돈 벌 때까지 할머니가 살아 계실까? 이러더라구요. 제일 빨리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는데 해 볼래? 신문이라도 돌려서 할머니 기쁘게 해 드려라. 재미로 그런 소리를 한번씩 합니다. 할머니 뭐 해주기 위해서 얘가 신문 돌린다고 쫓아다니면 할머니가 좋아할 것 같아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뭔가 해줘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녀답게 잘 자라가기만 하면 그걸 바라보 는 부모는 그 자체로 한없이 기쁜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쨌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하고 하나님께 뭘 드리는 게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쁘시다고요? 하나님을 그렇게 궁핍한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십 시오. 헌금하는 게 아깝거든 하지 마세요. 왜요? 내 이거 아까워서 달달달 떨면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 것 받아들고 아이고 고맙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렇게 기뻐하셨던 그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있으면 그 다음에 내가 뭘 할까 하 다 보니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드리고 싶어지거든 그 때 하십시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뭐해라. 잔소리도 많고 시키는 것도 많은 듯 하지만 실제로 부모가 원하는 것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닙니다.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잘 자라 주는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가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의미는 우리는 굉장한 부자 란 뜻입니다. 굉장한 부자예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조그만 일이나 사소한 일 에 웃고 울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더 여유를 크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쪽 구석에 보면 오토바이 한 대 있죠? 누구 건지 아시죠? 저 오토바이가 왜 저기 있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어요! 그 집에 차가 하나도 없어보세요. 저거? 저기 안 있습니다. 벌써 사 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요새 그 집에 시동이 걸리거나 말거나 차가 두 대쯤 된다 그러데요. 차가 두 대나 되니까 오토바이가 집에도 못 가고 교회 마당에 밤낮없이 서 있는 거 아닙니까! 안 답답하잖아요. 그렇다 고, 집사님! 치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차가 두 대나 있으면 오토바이 저거요. 별로 시세없는 겁니다. 하나님 을 기뻐한다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 입니다. 남보다 돈도 없고, 애들은 시원잖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그렇습니까? 그럴 때마다 시선을 하나님께 로 돌리세요.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께 엄청난 복을 받았음을 기억하 십시오. 웬만한 세상 일은 마당에 처량하게 서 있는 저 오토바이 정도밖에 안될 겁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 는 의미가 그거예요. 그래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하나님이 없어 도 감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 다. 자기 부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탈렌트를 보고 그렇게 예쁘다 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멘! 이럴 때 빨리 아멘하시는 분은 부인에게 점수를 엄청나게 딴 겁니다. 자기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 남의 남편 쳐다보고 이런 저런 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내 남편이 훨씬 더 좋은데요! 여러분,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 떠하다는 걸 잘 인식한 분입니다. 이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여유를 가지시면 우 - 4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리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다른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 때에 조그만한 일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어른 들이 싸우면, 어른들이 싸운다는 것을 아이들 들으면 이상하게 여길런지 모르겠어요. 어른들도 싸움을 해 요? 예. 어른들도 가끔 싸워요. 어른들은 큰 문제 가지고 싸웁니까?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싸움할 때 큰 문제 가지고 싸웁니까? 아니오. 잔잔한 것 가지고 싸울 때도 많아요. 목숨걸고 싸워야 할 만큼 큰 일 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그마한 자존심 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라면 웬만한 일로 싸우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가 보기에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떻게 일을 저 모양으로 할까? 저거는 왜 속이 좁아서 저 모양일까? 짜증스런 일이 많이 생기더라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고 계시고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정도는 능히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내 가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의미가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보고 참으로 기뻐하신 일이란 걸 기억합시다. 그 기뻐하는 중심에 사람이 들어있습니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 뻐하시고 안식하며 푹 쉬시는데 그 안식을 깨버리는 거죠. 누가 깼어요? 하나님의 그 안식을 누가 깨버려 요? 아담이 깨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안식을 아담이 깨버리니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다시 휴식을 그 만 두시고 일을 시작하시는 거죠. 무슨 일을 시작하시죠? 아담이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 보통 일이 아닙 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이 떠나버린 인간들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 로이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기를 이것을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재창조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재창조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사람들을 다시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이 재창조 사역을 위한 뿌리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수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전하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목청 높이 외쳤습니다. 이것 은 나무와 잎에 해당이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위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시 재창조하신 재창조 사역의 꽃과 열매에 해당됩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 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안식은 먼 훗날에 또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 안식의 의미가 너무나 왜곡되고 잘못됐다 해 서 고쳐 놓으셨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의 마무리인 셈입니 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은 바로 우리에게 재창조 사역이 완성되는 또 다른 복된 날인 것입니다. 그래 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되신다는 그 의미를 깨달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주일을 우리가 어떻게 지키면 잘 지킬 것인가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열심히 뛰어다니다 가 아 내일이 주일이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요? 정신없이 이리 저리 쫓아다 니다가 어 주일이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오시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이고 또 주일이가? 이런 분 안 계시나 모르겠어요. 주일이 왜 이리 빨리 오냐? 그런 분도 없지 않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주일학교라도 맡아 놓으면 아이고 공과준비 안해놨는데 벌써 또 주일이야? 이런 경 우는 선생님들한테 잘 닥치는 일이죠.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해서 주일이 닥쳐오면 기쁘고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아이고 또 이번 주일을 어떻 게 때우고 지나가나? 고민이 되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병희 집사님은 당분간 걱정이 많이 될 겁니다. 찬 양대 지휘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일만 생각하면 참으로 기쁜 날이 되기를 바랍니 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창조하신 날이란다. 이런 기쁨이 주일마 다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니까 앞 뒤 이야기는 다 빼먹고 예수님은 뭐하러 또 부활까지 하셔 - 5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가지고? 혹시 그런 분 안 계세요? 40일 새벽기도. 1년 중 어느 때 하죠? 꼭 부활절이 다가오면 40일 새벽 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 뭐하러 부활하셔서... 이때만 되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빨리 말씀을 배우 고 주 안에서 자라나시기를 바랍니다. 학교 아이들 보면 간혹 그런 경우가 있어요. 어느 학교 불났단다 그 래서 그 학교 당분간 수업을 못한다 하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나요. 우리 학교는 불 안 나나? 좋은 생각이죠? 병원에 입원 한번 안 해본 아이들은 옆집 애가 입원하니까 친구들 위문가는 것 보고 병원에 입 원하는 게 소원인 애들도 있어요. 나도 병원에 입원 한번 해봤으면... 철없는 애들 생각입니다. 제 조카 애 가 옛날에 병원에 입원할 때 큰 병은 아니지만 수술한다고 날 잡아 놓으니까 이게 그렇게 좋은가봐요. 목 록을 작성했더라구요. 너는 몇 일 날 뭐 사오고 너는 몇 일 날 뭐 사오고... 이걸 쫙 짜놓고 병원 들어가더 라구요. 여러분, 우리가 주일을 생각할 때에 이 주일날 기억해야 할 기쁜 일이 있는데 이걸 잊어버리고 엉뚱한데 자꾸 신경 쓰고 있으면 주일이 괴로울 수 있어요. 힘든 일입니다. 주일 참 빨리 오죠? 좋아서 빨리 오면 다 행이지만 이게 걱정거리가 되고 근심이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여러분, 주일이다는 생각이 들면 뭐부터 생각이 나야 합니까? 주일이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우 리를 창조하시고 정말 기뻐하셨다 이것부터 먼저 생각하십시오. 웃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먼저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창조입니다. 그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해 버린 인간을 향해서 독생자까지 희생 시켜가면서 다시 우리를 불러 주셨다. 이것은 재창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까지 희생하시며 우리를 불러주셨단다 이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창조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될 것입 니다. 현재 우리의 주일이란 것은 장차 우리에게 있을 영원한 안식일의 상징입니다. 예표로 주어진 것이란 말이죠. 주일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 드리는 이것이 나중에 천국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아름다운 시간을 지내게 될 예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일이 다가오면 이것부터 먼저 기억을 하는 게 옳 습니다. 그래야 주일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주일의 의미를 잘 잊고 삽니다. 주일이 무슨 날이죠? 일요일 아닙니까? 주일을 일요일했다가 우리 목사님께 큰 일 날려구요. 여기 안 계 시네요. 주일을 자꾸 일요일로 표현하시는 분이 우리 교회에 있어요. 도중에 쿡쿡 지적을 해도 습관적으로 나옵니다. 주일하고 일요일하고 같은 거 아니에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여러분, 현충일 뭐 하는 날이죠? 현충일 날 뭐해요? 노는 날. 놀아요? 현충일 노는 날 아닙니까? 현충일 노는 날이라고 했다가 누구한테 잘못 걸리면 맞아죽을 가능 성도 있습니다. 제가 어디서 그 얘기를 했더니 전도사님 우리 아버지는 현충일만 되면 지금도 국립묘지로 가셔요 갔다 오셔서 하루 종일 슬퍼하신답니다. 그 분 앞에서 현충일은 노는 날 하고 웃었다가는 난리 나 죠. 현충일은 웃는 날 아니에요! 현충일에 모여서 단체로 놀러 다니는 것 아닙니다. 원래 뭐하는 날이에요? 6.25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조국을 위해서 전사하신 분들의 넋을 기리며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희 생에 대해서 감사하고 함께 슬퍼하고 힘들어 했던 그 날이 현충일 아닙니까? 세월이 지나니까 현충일의 의 미를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거예요. 잊어버리고 뭐만 남아요? 노는 날이란 생각만 남아 있는 거죠. 현충일이 되면 조국을 위해서 산화하신 분들의 넋을 기리며 엄숙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국민의 절반이라도 될까요? 어림도 없을 겁니다. 현충일은 원래 그런 날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노는 날이 되는 거예요.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영어로 휴일을 뭐라 그러죠? Holiday라 그러죠. 그게 원래는 Holy day 입니다. Holy day가 뭐예요? 거룩한 날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거룩한 의미는 다 잊어버리고 뭐만 남 았어요? 우리말하고 똑같아요. 노는 날이 되어버렸죠. 노는 날의 본래 의미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 6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주일 얘기하다가 이 얘기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느꼈던 주일의 의미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일을 뭐처럼 느끼느냐? 그냥 일요일처럼 느껴요. 주일이 뭐냐? 일곱날 중에 첫째날로 생각하 시죠? 첫째날이 있고 그 다음 둘째날이 있고 셋째날이 있고 그러면 그 일곱날이 의미가 다 동일하다고 생 각하시는 거죠? 좋은 예가 있습니다. 제가 5월 달이 되기 전에 이 이야기를 꼭 한번 드려야 되겠다라고 했 는데 집사 시절에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를 않아요. 이제 전도사 이야기니까 조금 들어 줄까 싶 어서 한번 해볼랍니다. 5월 5일이 무슨 주일이죠? 어린이 주일.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누구예요? 어린이 주일에 주인공은 누구죠?... 우리 성도님들이 눈치도 빠르고 말끼를 잘 알아 들어서 대답을 안 하시는데 어린이 주일이란 말을 풀이 하면,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 앞에 어린이를 붙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어린이를 위한 주님의 날. 아, 어린이를 위한 주님의 날. 그러면 누가 주인공이 되나요? 주님의 날은 주님의 날이지 이 앞에 다른 어떤 사람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인데 여기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붙여요? 어린이 주일. 그 다음 뭐예요? 어버이 주일. 부모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감사하고 고맙긴 하지만 세상에 주님의 날을 빼앗아서 그 앞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주님의 날. 주님께서 우리 위해서 희생하시고 고난 겪으시고 부활하신 그 놀라운 감격이 스며있는 그 날에 주님 대신에 다른 분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단 말입니까? 부모님이 우리 위해서 고생하신 것은 어 마어마하죠. 평생 애써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이기도 하죠. 그러나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버이 주 일. 그 다음에는요? 스승의 주일. 스승의 주일요? 5월 달은 모르긴 몰라도 우리 주님이 굉장히 섭섭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하면 서 그럼 어린이 주일의 이름을 어떻게 바꾸면 좋겠냐 하고 제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답이 안 나 와요. 이걸 어떡하면 좋겠느냐 아무리 애를 써도 답이 잘 안 나오더라구요. 왜요? 주님의 날을 어떻게 바꿀 수가 없어요. 주님의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이건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이 주님을 기억하는 날인데 특별히 어린이를 전혀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날이 있어야 함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주 님의 날입니다. 어린이가 소중하고, 부모가 소중하고, 스승이 소중해도 주님의 날 앞에 붙일 만하지는 않다 는 뜻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안합니다. 영어 얘길 해서요. 영어는 소유격이 두 개가 겹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어린이 주일이란 말은 소유격 두 개가 겹칩니다 (Children's Lord's day). 어린이의 주님의 날? 그러면 날은 하나고 주인공은 둘이고... 말이 잘 안됩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주일이라는 말이 주님이 주인되시는 날이라는 생각보다는 일요일이나 월요일을 가리키 는 말처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닥쳐오는 5월에 어떻게 해야 될는지 대책이 없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을 합시다. 정, 용어가 부 족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린이 주일이라고 쓰더라도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어린이를 특별히 좀더 기억하는 날이다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주의 날! 주일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이루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를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이걸 먼저 기억해야 우리가 주일을 바르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정말 기뻐하는 그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 7 -

[2001.03.11]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 출 20:8~11) 주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기쁘지 않은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느냐는 것을 먼저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배워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이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생각해도 기쁘고 즐겁게 된 다음에 다른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하고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새벽마다 일어나는 것 어렵죠? 정말 어렵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랑없이 힘으로 어떻게 해볼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만끽하는 이번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 8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성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 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 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 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 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 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 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개역, 사도행전 4:32~5:11] 경을 읽을 때 납득이 잘 안 되거나 이상한 점들이 더러 나옵니다만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 늘 본문도 그런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한 때는 저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어쩌면 너무하지 않느 냐고 느꼈던 구절입니다. 이런 구절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왜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하시 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그저 아멘 하고 지나가면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주에 신대원 갔다가 집에 오니까 제가 앉던 큰 밥상 위에 조그마한 메모지가 하나 있어요. 아빠는 못땠[됐]다!!! 또 그 밑에 아빠는 착하다??? 못땠다 다음에는 느낌표 세 개가 있는데 착하다에는 물음표 세 개가 있는 게 아마 못됐다는 거죠. 그걸 보고 화를 내면 쓴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요. 어린아이가 쓴 글은 그냥 씩 웃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걸 가지고 따지고 드는 게 아닙니다. 머리 나쁜 사람이 쓴 글은 한 번 읽고 치우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이 깊은 사람이 쓴 글은 그냥 읽고 지나가면 안돼요. 이 사람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글을 썼을까? 때로는 반대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연애하는 사람들의 글 있죠? 여자가 No 하면 그걸 No로 받지 말고 Yes로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짜 No인지 아니면 Yes를 No라고 하는지 판별해야 하는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 것처럼 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쓴 글은 한 번쯤은 다시 되씹어 보고 무슨 이유로 이랬을까를 생각해 보는 게 옳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IQ가 얼마쯤 되신 분이 쓰셨나요? 한번 읽고 치워도 되는 겁니까? 성경은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밝히려고 애를 쓰고 썼던 책입니다. 다 밝혀졌습니까? 성경은 지금도 들여다 보면 새로운 의미로 새롭게 와 닿습니다. 성경을 쓰신 분의 IQ는? 글쎄요, 몇 백이 될지 몇 천이 될지 알 수 없 는 분이 쓰신 겁니다. 그냥 읽고 지나갈 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거든 혼자서 고민을 하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든지 얘기를 나누든지 아니면 목사님께 여쭈어 보시든지 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지 마세요. 이 본문은 헌금을 제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헌금을 많이 하라는 본문도 아닙니다. 헌금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상황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왕이 되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도 한자리씩 차지할 것이다. 베드로야 영의정 자리 따 놓은 것이니까 탐 못내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에도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 이 왕이 되실 때가 되었나보다! 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사도행전 1:7) 입니다. - 1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그랬던 제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뀐 거예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설교를 합니다. 설교 한 번에 삼천명도 돌아오고 오천명도 돌아옵니다. 삼천, 오천, 그 다음은? 셀 수 없는 무리더라고 합니다. 오천 까지는 헤아릴 수 있었는데 그 다음은 못 헤아렸나 봅니다. 갑자기 완전히 변해 버린 거예요.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외치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들어온 겁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변해버 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이루어냈습니다.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다 내 놓고 서로 공유하면서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하는 이 모습을 보고 놀랬던 사람이 마르크스라는 사람입니다. 공산주의를 만든 사람입니다. 아, 바로 이거다! 마르크스가 이 본문을 보고 사람들이 서로 협동해서 일하고 서로 같이 나누면 정말 좋은 세상이 되겠다! 해서 만든 게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 나쁜 거예요? 의도는 참 좋죠. 그랬던 공산주의가 왜 실패로 끝나버렸습니까? 성경을 보고 만들었는데 왜 실패를 하나요? 하나를 놓쳤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볼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회를 만드시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밀고 갔으면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깡그리 배격해버린 상태에서 사람들 이 해 볼려고 했으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아름다운 모습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이런 모습을 만드셨습니다. 표현을 바꾸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이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임재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까 화가 됩니까?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시부모가 닥쳤습니다. 복입니까 화입니까? 평소에 정돈 잘 해 놓고 깔끔하게 사시는 분에게는 느닷없이 닥친 시부모 님이 복입니다. 아, 우리 며느리 역시 잘 해! 이렇게 되지요? 집안이 지저분 하고 설거지도 안 하고 양말 도 아무데나 쿡쿡 쑤셔놨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치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 씀에 어긋나게 사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희미한 성도가 한 사람도 없었 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믿든지 아니면 안 믿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인심 쓰듯 이 교회에 가주는 류의 성도는 없었어요. 적어도 초대교회 때는 복을 받는 사람은 크게 받고 벌을 받는 사 람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장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 든지 간에 받았다 하면 무조건 큰 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잘 한 것이 있기는 있죠? 재산을 팔아서 헌금을 드리겠다는 것이 쉬운 일입 니까? 제 평생에 집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데 저걸 팔아서 교회에 헌금할 일이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보았 는데요, 우리 아들이 제일 놀랄 것 같아요. 언젠가 그 놈이 저건 내 거다! 한 적이 있거든요. 이 집을 팔 아서 헌금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생각을 해 보았는데 없을 것 같아요. 모교회에서 교회당을 지을 때 어떤 권사님이 집을 팔아서 헌금한 적이 있습니다. 참 귀한 분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두고 두고 그 분은 존경을 받아요. 그것 하나만으로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작은 일입니까? 큰 일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기 위해서 재산을 팔았다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해도 칭찬받을 만 한 일입니다. 만약에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더라도, 전세금 정도는 떼어 놓고 헌금을 하더라도 당신 왜 집 을 팔아서 떼어 놓고 헌금을 하냐? 다 내어놓지! 이럴 사람 없어요. 그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팔아 가지고 얼마를 바쳤어요? 정확하게 얼마를 바치고 얼마를 감추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 액수를 왜 희미하게 해 놓았을까요? 금액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금액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를 바쳤든 대단히 소중한 일입니다. 쉬운 분에게는 정말 쉬운 일입니다. 지난 설날에 아이들 이 세뱃돈 받은 것에 대해서 십일조를 했는지 나중에 물어 보니까 했다고 그래요. 얼마 했느냐고 물어 보 니까 동그라미가 하나 빠졌어요. 모르긴 몰라도 자기들로서는 들어온 것보다 헌금해야 되는 돈이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르죠. 십일조라는 것이 쉬운 사람에게는 쉽고 자연스럽고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어려운 사람에 게는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 2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일년에 헌금하는 것 자세히 알고는 하는 말이 있어요. 야! 교회에 그렇게 갔 다 바치고 뭘 먹고 사냐? 하고 물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 어마어마한 일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십일조 하는 그 자체로도 대단한 일 입니다. 재산의 절반까지 안 가더라도요. 그런데 액수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헌금을 하려니까 아까와 죽겠 고 덜덜 떨리고 아, 꼭 해야 되나? 싶으면 하지 마세요. 헌금하는 게 절대로 우선이 아닙니다. 기꺼이 드리려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그 헌금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께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배워요? 그냥 예배만 열심히 출석하십시오. 예배만 부지런 히 출석하시고 그 다음에 마음 내키면 성경공부 시간에 아니면 평신도 신학교에 등록해 다니시고 하다 보 니까 정말 감사해진 다음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시면 하셔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남들 하니까 해 봐야 되겠 다? 헌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마음이 먼저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부분에서 약간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거 집 판 돈인데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조금 남기고 가져왔습니다. 라고 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감추어 놓고 감추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마 기쁨으로 드리진 않았을 거예요. 그 외에 이 부부가 칭찬받을 만한 것이 하나 있긴 있다 싶어요. 부부는 일심동체여야 하지요? 이 부부는 죽을 때 죽더라도 생 각이 똑같았다는 것은 잘한 것 아닙니까? 예전에 서울에서 춘천으로 통근하던 어느 부인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안되어 남 편이 그 자리에 와서 죽어 버렸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슬픔을 못 이겨서 거기 가서 죽었죠. 그게 신문이 났 거든요. 가령 여러분의 부인이 그 기사를 보면 남은 아이들은 어쩌라고? 하면서 그 남자 욕을 좀 하면서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한다면 옆에 있던 남편이 뭐라 해야죠? 그래 맞다! 하면 안돼요. 속으로는 그렇 더라도 말로는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면 그랬겠냐? 라고 해야 됩니다. 괜히 그래 맞다! 고 했다가는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 그럼 당신은 내 죽고 나면 혼자 살래? 할지 모릅니다. 부부는 닮아야 하고 철저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닮아야 할 것은 반드시 닮아야 합니다. 신앙은 똑같이 닮아야 합니다. 음식도 닮아야 합니다. 닮아야 할 것은 철저히 닮고, 닮지 말아야 할 것은 철저히 안 닮아야 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안 닮아야 할 걸 똑같이 닮은 겁니다. 그러면 둘 다 망하는 거죠. 부부가 둘 다 남에게 있는대로 퍼주는 것 이거 닮는 게 좋습니까 안 닮는 게 좋습니까? 정답이 없는 거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닮을 것은 철저하게 닮고 안 닮을 것은 철저하게 안 닮아야 하는데 이 부 부는 나쁜 쪽으로 닮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불행이 가정에 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 부가 닮은 것도 잘 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잘못한 것을 찾아봅시다. 3절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라고 합니다. 4절에도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 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 에도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같은 말이죠?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재산을 팔아 가지고 상당 부분을 들고 왔는데 돈은 쳐다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고 책망 하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이 뭡니까? 그 행위 자체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만 문제는 때를 잘못 택했다는 겁니다. 거짓말을 할 때 하더라도 어디가서 해요?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안 계신 곳에 가서 거짓말을 했더라면 좀 괜찮은데 지금 어디서 거짓말 하는 거예요? 하나님 면전입니다. 하 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지금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 다. 그래서 죄가 크다는 얘깁니다. 사람도 면전에서 욕하는 것과 안 보는 데서 하는 욕은 좀 다르죠? 제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학여행을 갔어요. 저녁에 여관 바깥 한 모퉁이에 앉 아서 쉬고 있는데 윗쪽 창가에서 애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다른 말은 기억이 안 나 는데 딱 한마디가 기억나요. 제가 아이들에게 욕을 그리 듣는 편이 아닌데 그 녀석이 무슨 심사인지 홍순 관이 그 새끼 장가 갔다매? 하는 거죠. 애들 말투가 평소에 그렇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흔히 있을 수 있 는 일인데 어쩝니까 웃고 말지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는 알아요. 마침 그 이튿날 그 근처에서 그 놈을 만났어요. 야, 어제 저녁 몇시쯤에 내가 여기 앉아 있었거든? 그랬더니 이 놈이 손이야 발이야 비는 겁니 - 3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다. 점잖게 타일렀죠. 선생님이 있든 없든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없다고 그런 말을 하면 안되는 거다. 그렇게 끝나는 거죠. 애들 말은 거칠어요. 거칠긴 한데 안 보이는 데서 하는 말까지 시비를 따질 순 없죠. 면전에서 그랬다가는 작살나는 거죠.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 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다? 이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라는 얘깁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에 또 하나 있습니다. 아간이 그렇죠? 전쟁을 치르고 점령한 곳에서 탈취물을 꺼내어 가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뺑뺑이를 잘 돌아서 무너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뺑뺑이를 도니까 여리고 사람들이 궁금해서 저 사람들이 뭐하는 거냐 그래서 한꺼번에 담 위로 올라갔더니 그 무게를 못 이겨 무너졌다? 어느 신학자의 설명입니다. 참 성 경 해석 잘 한다 싶어요. 인간적으로 말이예요.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함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친히 임재하셔서 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어겼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범한 범죄는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먼 옛날 이야기라서 참 다행이죠? 우리가 있는 이 현장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일하시는 경우가 있을까요? 가장 조심해야 될 때가 초신자가 왔을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안 믿던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 안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 들이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는 현장입니다. 우리 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때가 그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 앞에서 그를 실족케할 만한 일을 했다면 이건 아 나니아와 삽비라 이상입니다. 아간의 범죄보다 더 큰 범죄라는 겁니다. 혹시 싸울 일이 있고 힘든 일이, 한판 붙어야 될 일이 있거든 나가서 싸우십시오. 직장에서 들어 엎든 지... 물론 그게 좋은 건 아닙니다마는 정 안되면 그렇게라도 하십시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적어도 초신자 앞에서, 아니 자라나는 어린아이 앞에서, 신앙이 들어가고 자라가는 그 앞에서 실족케 할 일은 죽어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이 어린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메고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걸 목에 걸고 빠져 죽으라는 겁니다. 그만큼 심각한 죄이 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자는 초신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자고, 하나님을 받아들인다고 나타났을 그 앞에서 그를 실족케 할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얘깁니다. 하나 님께서 자기의 독생자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그를 구원하기로 하시고 그 일을 하는 그 앞에서 초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밖에 나가서는 드물긴 해도 어쩔 수 없으면 싸우기도 합니다만 교 회 안에서는 얼굴 한번 찡그려 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 나로 인 해서 누군가가 실족하거나 누구 보니까 교회가기 싫다! 는 말이 나올까 싶어서 교회 안에서만은 어떠한 일 이 있어도 밝은 얼굴로 지냈습니다. 집에서 짜증내고 화가 난 일이 있어도 교회 올 때는 표시 안 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여리고성의 아간, 효자제일 교회의 나,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이 들어가서는 안되겠죠? 안됩니다. 정말 죽을 각오 아니면 초신자 앞에서 그런 모 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통이 터져 열심히 싸우다가도 초신자가 온다 하면 화생방 싸이렌이 울린 것처럼 즉시 중 지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폼잡고 있다가 그 분이 가시고 난 다음에 다시 하세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교회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헌금이 들어온 것 아닙니 까? 교회로서는 이득이 아닙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 하나 하나에 관심이 있지 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재산 목록이 있다면 그 항목 중에 돈이라는 항목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갖다 부었다고 해도 하나님 장부에는 돈이라는 항목이 없어요. 항목도 없는 돈을 아무리 갖다 부었다 해도 나로 인하여 한 영혼이 실족케 된다든가 한 영혼을 죽이게 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이죠. - 4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이 부부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어떻게 보면 큰 일을 했는데도 이렇게 비극적인 끝을 맺게 된 원인이 뭘까요? 왜 이렇게 거짓말을 했을까요? 왜 헌금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앞에 바나바 이야기가 있죠? 그렇게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갖다 바쳤던 것이 바나바만 한 일이 아니고 그 앞의 내 용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러니까 아나니아도 우리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남들이 다 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른 체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리도 해야지.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결국은 그 체면 때문에 남들이 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는 겁니다. 헐레벌떡 교회 쫓아와 보니까 헌금 할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예요. 헌금 주머니가 돌고 있는데 헌금할 돈이 없다고 보고만 있으면 남들 보기가 민 망스럽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실수든 어쨌든 다가오는 헌금 주머니를 보면 마음이 편치않는 것이 분명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체면 때문에 달라지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헌금만 그렇습니까? 고등학생들이 새벽기도 나오던 시기가 있었는데 고등학생이 기도 열심히 하고 갈려고 보니까 중학생이 기도를 하고 있단 말이예요. 중학생이 있는데 고등학생이 어떻게 먼저 가? 좀 더 기도를 하고 가려고 하니 까 중학생이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몇번 이러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중학생이 자고 있었어요. 헌 금이든 기도든 전도든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 야 되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격해서,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헌금제도에도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선을 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안되더라구요. 사람 체면 때문에 헌금을 하지 않도록 하자고 해도 제대로 안되더라구요. 제가 여기 온 지 며칠 안되어서 헌금함 안 쓰기로 한 것을 보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교회 제도든 무엇이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고쳐 나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우리는 참으로 신중하게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한 생명의 값이 얼마나 되죠? 정말 천하보다 귀해요? 십만원을 들여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쓰시겠습니까? 백만원을 써서 한 생명 을 구할 수 있다면 쓰시겠습니까? 아멘! 그런 각오로 삽시다. 돈, 돈, 돈만 하며 살게 아닙니다. 적어도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문제라면 쓰 면서 산다 라는 각오로 삽시다. 그렇다고 돈을 함부로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벌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아껴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구원하는데 보탬이 된다면 써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세로 살자는 겁니 다. 그런 곳에 쓰기 위해서 엉뚱한 데 쓰지 않고 줄이고 아껴서 살아야 합니다. 쓸 때 써야 합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돈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의 자존심입니다. 자존심만 접어놓고 직장생활, 가정생활 해 보십시오. 많은 문제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저 사람 때문에 교회 한 번 나가보고 싶 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자존심을 접을 수 있다면 접으십시오. 자존심을 접 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어쩌면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순교자적인 각오를 해야 가능한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에게 양보해 가면서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다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적어도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야 그것이 올바른 신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서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때가 되면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줬다가 경우에 따 라서는 그 후배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도 있고 형편이 달라지면 다시 내가 맡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위 아래가 뒤집어질 수도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 교회에서 자리가 제일 많이 바뀌는 곳이 성가 대 지휘자 같습니다. 일년이 채 안된 사이에 지휘자가 벌써 세 명째지요. 아마 우리 이병희 집사님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겁니다. - 5 -

[2001.03.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억울한 죽음 (사도행전 4:32~5:11) 열심히 해서 잘 할려고 하는데 혹시 지휘 잘하는 사람이 오면 자리 비켜 주겠습니까? 비켜준데요. 자존 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내가 이걸 잘 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오면 깨끗하게 물려줄 수 있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인된 자세이고 교회 전체를 위해서 그럴 수 있다면 귀한 일 입니다. 정말 쉽지가 않아요. 그런 자세로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돈도 쓸 때는 쓰고 자존심을 구겨야 할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존심을 구겨야 합니 다. 저는 지난 해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던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한이 맺혔던 사람이지요. 그 많던 한이 여기 와서 몇 달만에 깨끗이 다 풀려 버렸 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특별히 우리 신대원에 설교를 특별히 구수하게 잘 하시는 교수님이 있 습니다. 그 분이 설교 시간에 서울대학 나와서 신학교에 간 이유를 목사님들이 설교를 그렇게 밖에 못하 나? 이래서 갔다는 거예요.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셔도 될만한 분이예요.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찡해 오는 것 있죠. 저는 설교를 잘 하겠다고 간 게 아니고 여러 목사님들을 봐오면서 난 저런 짓은 안 할 거야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갔습니다.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되면 변질될 시간도 별로 없을 거라는 생 각도 했지요.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요 근래에 오신 분들은 알아 두십시오. 우리 교인들이 다들 고 참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 고참 아닙니다. 사실은 얼마 안된 분들입니다. 저 분은 교회 되게 오래 다녔나 싶어도 자기나 내나 비슷해요. 제가 여기 온지 오래된 것 같습니까? 일년도 안되었습니다. 일 년도 안되었지만 제 뒤에 꽉 있습니다. 제 앞에 있는 분들 다들 오래 되었는가 싶었는데 겨우 며칠, 한달, 두달 수북히 있습니다. 그렇게 오신 여러분들이 초신자들이라고요? 초신자 아닙니다. 여기와서 초신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가슴 속 한쪽에 아픈 마음을 가지고 온 분들이 많죠? 얼마 안되어 그런 것들이 깨끗이 다 치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 만큼은 되지 못하겠지만 초대교회와 비슷한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임재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큰 복을 받고 있는 이런 때 혹시 실수해서, 다른 실수 아닙니다, 새로운 신자들을 실족케 할까 염려스러워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어제 아래 오셨다고 내가 새신자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새신자 아닙니다. 우리 교회 정말 새신 자는 적습니다. 새신자가 뭡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신앙에 입문하려는 분을 가 리킵니다. 그런 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가꾸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다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다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일로 여기 모였습니다. 모두가 나무에 비하면 뿌리입니다. 뿌리는 뿌린 데 튼튼한 뿌리도 있고 조금 상한 뿌리도 있어요. 이 상한 뿌리는 이내 치유되어 서 왕성하게 뻗어나가는 겁니다. 뿌리가 튼튼하면 땅 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곧 줄기가 돋고 싹이 올라오게 됩니다. 우리 모두 뿌리가 되어 우리에게 접촉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싹 이 트고 줄기로 자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들을 정말 소중하게 여겨서 성도로 거듭나게 해야 할 것입 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모습이 하나 님께서 친히 임재하셨던 초대교회 정도는 안되더라도 그 흉내는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펄펄 뛰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우리가 희생하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만 들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6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저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 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 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 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 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 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 어 오니라 [개역, 사무엘하 6:1~15] 번 주 설교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이렇게 억울할 수가? 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비슷한 예로 구약에서 아간의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죽 을 일이겠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너무 심하시지 않느냐? 좀 억울하다라는 느낌을 주는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차마 말을 못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느낌이죠? 그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귀중한 일 을 하시는 그 앞에서, 바로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망치게 하는 일을 결코 해서는 안됩 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의 문제가 단순하게 돈 문제도 아니고 제물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성도의 마음을 실족케 하거나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복음을 거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질문을 보냈습니다. 아간보다는 구약의 웃사 가 더 억울해 보이는데요? 그 질문을 받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설교를 듣고 의문이 생기거나 질문이 생기 거든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든지 의견을 말씀하시는 것이 서로 도움이 됩니다. 그 분이 오늘 여기 계셔야 하는데... 웃사가 아간보다 더 억울해 보인다? 과연 그런지 내용을 살펴봅시다. 웃사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하나 님이 하신 일이니까 말을 못해서 그렇지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 나도 언젠 가는 이런 경우를 당할지 모른다라는 두려움을 가지는 분이 더러 계시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엉뚱한 고민 을 하지 않도록 부디 열심히 성경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실 때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지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을 보다가 두 렵고 걱정이 되면 다시 생각을 하든지 아니면 목사님께나 저에게 의견을 나누어 보십시오. 그 속에는 하나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사랑의 메세지가 틀림없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죽이고, 심판하고, 벌 준 것만 보이니까 하나님이 자꾸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눈이 그 쪽으로 발달된 것 같아요. 구약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메세지를 보게 됩니다. 과연 웃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느냐를 살펴봅시다. 법궤를 가져오는데 이스라엘에서 3만 명이나 모아서 올라갑니다. 궤 하나 메고 오는데 무슨 군사를 3만 명씩이나 동원합니까? 그것도 엄선해서 3만 명을 데리고 갑니다. 5장을 보면 다윗이 왕이 된 것을 알고 블 레셋이 처음부터 기를 꺾어야겠다고 전쟁을 걸어오는데 그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궤를 가지 - 1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러 갑니다. 이 궤를 가지러 갔다가 잘못하면 블레셋과 전투를 치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쟁에 대비해서 3 만 명이나 거느리고 간 것이죠. 또 다른 의도는 이 궤를 몇 명이 가서 가져오는 것보다 각 지파 별로 대표 를 뽑아서 거국적인 행사를 치름으로써 한 민족의 단합을 노리는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3만 명을 이끌고 궤를 메러 갔습니다. 하나님의 궤이기 때문에 다윗은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다윗이 하 나님의 궤를 정중히 모셔오려는 모습이 있지요? 새 수레. 예, 수레가 새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려면 지금 식으로 하면 새 차를 한대 뽑아서 단장을 다 했겠지요? 새 수레를 동원했습니다. 5절에 보면 여러 가지 악기가 총동원 되고 있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앞에 악대를 세우고 새 차로 실어오려고 간 겁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고적대 퍼레이드라고 말하죠. 북도 치고 나팔도 부는 악대를 가리켜서 고적대라 하는데 바로 이런 고적대를 앞세우고 새 수레에 궤를 실어오 려고 하는 것이지요. 상당히 예를 갖춘 것입니다. 다윗은 나름대로 정중하게 모셔오려고 방법을 동원했으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궤를 모셔오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고 선한 동기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 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내 방법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 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 것이니 죽을까 하노라 라고 합니다.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고핫 자손이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와 여리고를 도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항상 제사장들이 메고 움 직였습니다. 강물에 들어가던 장면 생각나시죠? 제사장들이 궤를 메고 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그 강물에 발을 먼저 디뎌야 했습니다. 반드시 메고 운반하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갔던 것 이 잘못입니다. 메고 가는 것보다 수레 타고 가는 것이 좀더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거 나 말거나 하나님의 말씀은 메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서 법을 위반해 가면서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그냥 해 놓읍시다. 갋을[따지고 들] 사람이 없어요. 이런 방식으로 교회 일을 많이 추진해 온 바 있습니다. 그랬을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그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비슷한 예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민족을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이 살찌고 귀 한 것을 다 빼돌렸습니다. 사울의 생각에 이것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사무엘이 와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고 책망을 하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랐던지 알았던지 수레에 궤를 실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잘못은 떨어지려는 궤를 웃사가 손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반드시 메야 한다, 손대지 말라. 그 렇게 명해 놓았지만 웃사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 곁에 있었으면 떨어지는 것을 일단은 손으 로라도 잡아야겠지요. 손으로라도 잡긴 잡아야겠고 하나님의 방식에는 맞지 않고 그러면 어떡하죠? 방법은 없습니다. 바로 그런 난처한 형편에 처하지 않아야 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본다 해도 회개하거나, 아니 면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하나님께서 바로 웃사를 친 것은 너무 심한 행위가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 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기억할 게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혹시라도 기도 중에 하나님이 눈에 보일까봐 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기도한다고 하던가요? 혹시 보이면 죽을까 싶어서 그런다는데 그 분들 꿈도 야무지다 그지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눈에 나타난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해서 살 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 2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분 앞에 당당히 나서도 아무 탈이 없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 아올 수 있고 담대하게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용감하게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간격을 깨뜨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 앞에서는 사소한 잘못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셨답니다. 그러면 아비나답의 집에는 이 궤가 얼마쯤 있었을 것 같아요? 3년... 20년. 20년이라고 대답하시는 분은 성경을 많이 보신 분입니다. 어디선가 20년이라는 기록이 있는 곳이 있거든 요. 또 다른 답은요? 이 궤가 몇 년 동안 그 집에 있었느냐를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궤가 언제 빼앗겼다가 돌아왔는지 생각해보면 적당한 기간이 나와요. 이 궤가 언제 빼앗겼지요? 엘리 제사장 때 빼앗겼지요. 엘리 제사장 말년에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이 죽음을 당하고 그 궤가 블레셋 지경에 가 있다가 얼마 후에 스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돌아와서 갖다 놓은 곳이 어디입니까? 아비나답의 집입니다. 그게 엘리 제사장의 말기입니다. 엘리 제사장 다음에 사무엘이 등장하지요? 어린 사무엘이 성장해서 사사로 서 임무를 다 감당하고 죽고 난 한참 뒤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엘리 제사장이 죽고 사무엘이 등장했다가 그 다음 사울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40년간 통 치했습니다. 그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 얼마 경과된 때입니다. 어림잡아도 70-80년이 나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는 적게 잡아도 70년이 넘습니다. 3개월의 몇 배나 되나요? 210배라고 하지 마세요. 280배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 습니다. 그럼에도 이 집에는 아들이 죽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비유 생각나세요?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아침 일찍 일을 시켰습니다. 정오에 나가서 또 데려오고 오후 3시, 오후 5시에 또 데려 왔습니다. 임금을 똑같이 줬습니다. 누가 불만이 있었지요? 아침 일찍 들어온 사람이 당연히 불만이지요? 하루종일 일한 사람에게 1시간 일하는 사람과 같이 임금을 똑같이 준단 말입니까? 여기는 더 심합니다. 3개월과 280배 이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그런데 3개월 있었던 집에는 복을 많이 주고 280배나 더 오래 있었던 집에는 아들이 죽어요?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몇 시간 차 이 가지고도 데모를 하는 판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그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오벧에돔의 집과 아비나답의 집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봅시다. 삼상 7:1-2절에 오벧에돔의 집에 궤가 들어올 때의 장면이 있습니다. 기랏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 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랏여아림에 들어간 날 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기에 20년이라는 말이 나오 죠? 좀 전에 20년이라고 대답하신 것은 아마 이 구절을 생각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20년 동안 오래 있었다 는데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20년입니다. 사무엘이 어릴 때에 궤를 빼앗겼다가 돌아왔는데 본문의 다윗이 등장할 때가 아니라 사무엘이 사사로 나설 때까지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등장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기랏여아림 사 람들이라는 말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는데 이 궤가 벧세메스에 돌아왔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 안에 뭐 가 들어있나 궁금해서 뜯어 본 거예요. 이 법궤를 들여다 보았다가 한 마을에서 70명이 죽었던 사건이 있 었습니다. 궤를 여기에 두었다간 큰 일 나겠다. 그래서 옮길 곳을 물색하다가 기랏여아림 사람들이 억지로 갔다 맡겼을 겁니다. 아비나답의 집이 산에 있지요? 왜 산에 있는 집에 갔다 놓나요? 아무래도 외따로 떨 어진 집에 맡겨놓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니 그 집에서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 3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여기에서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더라라는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이것이 오벧에돔과 다른 점입니 다. 오벧에돔은 민수기에서 읽어 드렸던 것처럼 고핫 자손입니다. 웃사가 죽고 다윗이 두려워 궤를 포기했 을 때 오벧에돔이 이 일은 내가 감당해야 될 몫이다라고 나섰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억지로 진 십자가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위험한 물건을 자기 집에 메다 놓은 겁니다. 대상 13:14절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 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아비나답은 자기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그 궤를 지키게 하였더라고 했지요? 오벧에돔의 집에서 는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고 합니다. 표현이 다르지요? 권속과 함께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온 식구들이 함께 그 궤를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아들 하나를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이름은 엘리아 살이라 했는데 본문의 죽은 아들은 웃사지요? 히브리 언어에서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손자라는 뜻으로도 쓰 입니다. 웃사는 엘리아살의 아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처음에는 엘리아살이 라는 아들을 구별해서 궤를 지키게 했다가 그 다음에 엘리아살의 아들에게 대물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 연스럽습니다. 그렇게 해서 궤를 지키게 했는데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룩이라는 단어가 무조건 좋은 의미라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제사 장들이 취급하는 물건 중에 어떤 물건은 거룩하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물건은 하나님께 지극히 거룩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물건은 제사장만 사용해야 되는데 혹 다른 사람에게 갈 위험이 있는 것은 특별히 거룩한 것이다라고 말씀해서 남용이나 오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더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향 재료 같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다라고 표현하는데 특별히 더 조심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위험천만한 하나님의 궤가 들어 왔습니다. 아마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 그 근처에 얼씬 하려고 하지 않으니 제비뽑기를 하던지 어떻게 해서 떠맡겼을 가능성이 많은 거지요. 그런 모습을 가 리켜 거룩하게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어른들을 거룩하게(?) 모시는 경우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교장 선생님과 함께 회식을 가면 한 사람이 희생타가 돼야 합니다. 그 분의 역할은 교장 선생님을 가급적 빨리 모시고 나가는 일입니다. 식 사만 하고 교장 선생님 모시고 빨리 가줘야 다른 분들이 마음놓고 놀지요. 그럴 때는 높은 사람은 빨리 가 야 합니다. 버티고 앉아 있으면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특별히 좋은 곳으로 따로 모십니다. 집에 어른들 과 함께 있으면 너무 거룩하게(?) 모시지 마십시오. 한쪽에 거룩히(?) 모셔 놓으면 어른들은 궁금하고 답답해 서 못 견뎌요.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이런 방식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궤가 자기 집에 들어오면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지킬 것인지 알았어야 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왔을 때 그런 내용을 알아두어야 했습니다. 가전제품을 사더라도 설명서 를 잘 읽어야 하고 시집을 갔으면 신랑 식성이라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하나님의 궤를 들여놨는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책망을 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웃사가 다윗이 새 수레에 싣자고 하더라 도 다루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넘어진다고 해서 함부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루는 법을 전혀 몰랐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이 궤가 들어왔을 때 온 가족과 함께 궤를 즐거워했다 고 합니다. 그래서 한쪽 집에는 70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런 복도 내리지 않았고, 반면에 겨우 3달밖 에 머무르지 않았던 오벧에돔의 집에는 표나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는 표시가 날 만큼 쏟아 부어버린 것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궤가 왔을 때 그 는 무척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얘들아 저 궤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느 냐?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었던 것 기억하지? 그러니까 절대 손대지 마라 그래서 잘 모셔다 놓고 감춰두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엘리아살이 맡아라. 그랬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역할 분담은 우리도 종종 합니다. 가족끼리 역할을 분담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할테니 너는 공부만 해라. 좋은 방법입니까? 굉장히 위험한 방법입니다. 하 나님 섬기는 일은 내가 할테니 당신은 돈이나 열심히 벌어 오세요. 이런 식의 역할분담을 하고 있지는 않 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위험합니다. - 4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여러분, 웃사를 즉석에서 치시는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왜 죽은 웃사만 생각하고 7, 80년 동안 뒷방 늙 은이 취급당했던 하나님의 서러움은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서러움을 겪으셨는지 한번 볼까요? 엘리 제사장 때 이 궤를 빼앗겼습니다. 전쟁터에 이걸 메고 가면 이길 수 있겠다 해서 메고 나갔지요. 왜? 우리 조상들이 싸울 때마다 이 궤를 메고 싸웠다는 말을 기억해 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른 채 악한 짓만 골라가면서 하던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터에 이 궤를 메고 나갔습니다. 하 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빼앗겼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포로로 잡혀가셨지요. 하나님 혼 자서 블레셋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니 블레셋 사람들이 우연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사람 이 없는 들에다 방치해 놓고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우연인 지 살펴보자. 궤가 벳세메스로 돌아온 사건 기억하시지요? 그 전에는 하나님의 궤가 어떻게 취급되었습니까? 성막 지성소 안에 모셔놓고 대제사장이 그것도 1년에 1번 분향을 했던 바로 그 궤입니다. 일반 사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대제사장의 겉옷에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들어가 있을 동안 딸랑딸랑 소리가 나면 살아 있다는 증거이 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었구나. 죽었을 때 누가 끌어냅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몸에 긴끈을 묶어서 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취급했던 하나님의 궤입니다. 그 궤가 블레셋 지방으로, 벧세메스로..., 벧세메스 사람들이 속을 들여다 본 것이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치욕적인 일일지 생각해 보세요. 그 후에도 이렇게 괄세받고 천대 받으면서 아비나답의 집에 70년, 80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어디 가고? 모두 사라진 채, 모두에게 잊혀진 채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진노가 없었던 것만 해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다윗이 나타나서 그 궤를 옮겨올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라면 자식에게 이런 푸대접을 받고 몇 일이나 견디실 것 같습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으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소리가 대번에 나올 겁니다. 그런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동안 참고 참았는데 막판에 결국 터진 겁니다. 웃사의 죽음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웃사의 억울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으며 위엄은 다 떨어 진 채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웃사의 죽음만 억울하고 하나님의 버림받은 세월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웃사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픔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살펴보세요.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보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신, 구약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일이 생겼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입니다. 부모님이 때로는 자식에게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 니다. 그럴 때 자식이 조금만 잘하면 복이 쏟아지는 법입니다. 매맞는 자식보다 때리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아는 자식에게는 더 많은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겨우 3달 있었고 아비나답의 집에 70년, 80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 이런 큰 복을 주고 아비 나답의 집에 이런 재앙이 내리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기간을 따지거든요. 내가 예수 믿은지 얼마인데? 내가 교회를 얼마나 섬겼는데? 그런 생각은 포기하십 시오. 하나님께는 기간이 결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느냐가 중요 한 것이지 내가 몇 년을 다녔는데? 이거 소용없는 짓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를 참 오래 다녔다고 하는데 낯설어요. 20년을 다녔다길래 그럴 리가 없는데 했더니, 2주 에 한 번씩 낮 예배만 갔어도 500번은 넘네요 이러더라구요. 계산 맞습니까? 계산은 맞아요. 낮예배 500번 갔다. 대단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횟수, 기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마음이 없이는 오 래 다녔다, 많이 일했다, 그건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느냐? 바르게 잘 섬기느냐 입니다. 웃사를 치시는 하나님이 두렵게 여겨지십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 5 -

[2001.03.25] 아간보다 더 억울한 웃사(?) (사무엘하 6:1~15) 믿고 고백한다면 더 이상 이런 두려움은 깨끗이 버리십시오. 무엇 때문에 벌주시는 하나님을 보고 계십니 까? 벌 안 주려고 70년을 참고 견디신 모습을 기억하셔야지요. 겨우 석달 만에 이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셔야지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오른편 강도가 잘 한 것이 뭐 있습니까? 단 한마디,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옵소서 라는 한마디에 그 강도는 천국 갔습니다. 억울합니까? 저런 강도가 저런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이걸 생각해야지 왜 억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강도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셔도 됩니다. 그 강도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나은가 하는 자부심을 가 지십시오.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진실로 열심으로 섬깁시다. 효자제일교회가 세워진 지 오래 됩니다. 그 긴긴 세월 동안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려울 때 에 이 교회를 지키고 애써왔던 분들은 아마 오벧에돔이 받았던 그 복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복을 주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눈치채고 뛰어오신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 분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까요? 아멘. 성경에 그런 구절 있어요? 눈치빠른 사람이 이 본문에도 있어요. 다윗이죠. 하나님의 궤를 메고 가다가 이 재앙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다윗이 분하여 그냥 가버렸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뛰어옵니다. 지난 번에 뭐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옵니다. 이번에는 새 수레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메고 갑니다. 그 사이에 다 알아챈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는 분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단다 그 말 듣고 바로 뛰어오는 겁니다. 그래 서 메고 갑니다. 오벧에돔이 복을 더 받았을까요. 다윗이 더 받았을까요. 엄청난 복은 다윗이 받습니다. 다 윗처럼 눈치 빠르게 뛰어오신 분들이 여기 상당히 계십니다. 다윗이 받은 복이 바로 이렇게 뛰어오신 여러 분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모르고 이 근처에 이사오는 바람에 오신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멘.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는데도 아멘해요? 무조건 아멘하는 것은 좋은 것 아닙니다. 본문 한 번 볼까요? 19 절에 보면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했으며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고 합니다. 다윗이 받은 복을 온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왔다가 이 교회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신 분들도 백성들이 받았던 그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온 백성이 다 복을 받을 때 못 받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갈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는 집에 가셔서 읽 어보세요. 다윗과 오벧에돔과 백성들이 받았던 그 풍성한 복이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효자제일교회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후로는 웃사가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웃사는 쳐다보지도 마시고 오벧에돔을 보십시오. 웃사를 치시는 하 나님을 보지 마세요. 차라리 벌을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는 하나님을 보세요. 더욱 좋은 것은 기회 만 되면 복을 주시려고 안달이 난 하나님을 보십시오. - 6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하 하나님을 아빠라고?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개역, 로마서 8:12~17] 나님을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에 있는 사이비 중에 하나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된다고 했던 사이비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할아버지라고 불 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한 구절이 오늘 본문 중에 있는 아바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아버지 라고 불렀으니까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터무니없는 엉 터리를 추종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그렇게 모르고도 사 이비 교주 노릇을 할 수 있었고 그런 엉터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 묘한 일입니다. 아 바 아버지 가 어떤 의미며 이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얼 요구하시는지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2절에 보면 우리가 빚진 자로되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빚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빚이 있습니까? 아멘. 아멘? 무슨 빚이 있기에 아멘 하십니까? 사랑의 빚. 사랑의 빚? 괜히 놀랬잖아요. 좋은 빚을 지고 계십니다. 여러 종류의 빚이 있지만 돈 때문에 어려운 모 습으로 살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우리 부대에 성질이 좋지 않은 고참이 있었어 요. 휴가 나갈 때마다 갔다오면 갚을 테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하여 빌려서 갑니다. 갔다오면 주겠지 하고 빌 려주는데 갚은 것은 없습니다. 고참이 이런 식으로 졸병들의 돈을 많이 걷어가서 갚지 않아요. 그런데 졸병 중에 지독한 졸병이 하나 들어 왔습니다. 항상 그 고참을 따라다니면서 돈 내놔라 하는 거 지요. 돈 갚으세요 하면 야, 곧 준다. 그까짓 거 떼먹을 줄 아냐? 하고는 미루다가 집합하는 기회가 있 으면 더 두들겨 패지요. 그런데 이 졸병이 실컷 두들겨 맞고도 틈만 나면 내무반에 앉아 있는 고참에게 손 가락질을 하여 불러냅니다. 불러내면 이 고참이 슬슬 따라 나오죠. 그러면 내무반 뒤에 가서,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습니다. 언제 갚을랍니까? 야 갚는다 갚아 그러다가 집합했다 하면 이 친구는 훨씬 더 얻어터 집니다. 또 틈만 나면 손가락질해서 고참을 불러내고 그 때마다 그 고참이 딸려나가요. 어차피 돌려주려고 빌려 간 것도 아니지만 그 빚 때문에 졸병이 불러도 불려나가는 거지요. 아무리 고참이라도, 사람 취급도 않는 졸병의 손가락질에 불려나가는 것이 바로 빚의 위력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유의 빚은 지지 않았 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가령 부부 사이에 사랑의 빚 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에게 진 빚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 의 빚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남편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졌다 그런 생각이 드시면 참 행복합니 다. 나는 아내에게 정말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고 생각하시면 참 행복합니다. 빚은 전혀 없고 베푼 것밖에 없는데요? 그런 관계는 좋지 못합니다. 부부 사이란 것은 정말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선택해서 남편을 삼고, 나를 선택해서 아내를 삼았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의 빚 아닙니까? 자기 집안을 떠나서 본적까지 바꾸어가며 시집와서 내 아이를 낳아주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까짓 거 이불 좀 개어 달라는 것이나 치약 옆구리 누르지 말라는 잔소리 정도야 감지덕지 아닐까요? 그 빚을 갚 기 위해 부부끼리 노력을 하십시오. 참 아름다운 생활이 될 겁니다. 식사하면서 밥 한 그릇 속에서 농부에게 감사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농부에게 내가 빚을 지고 있다는 - 1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생각이 들고, 신발 한 켤레 신으면서 공장에서 수고하는 노동자를 생각한다면 그 역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빚을 많이 졌으면서도 못 느끼는 것이 부모에 대한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부모가 되기 전에 부모의 사랑을 깨닫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 었느냐는 것을 아는 자녀가 있다면 자녀도 행복하거니와 부모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랑의 빚은 하나님께 받은 겁니다.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기억하는 것만으 로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모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될 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써 어떤 자세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부정적인 표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라,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긍 정적 표현으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다 라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후사이기도 한 것 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라고 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에게 살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빚을 지긴 졌지만 육신의 빚을 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빚을 지 지 않았다는 것은 육신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빚쟁이만 보면 괜히 기분 나쁘고 피해가고 싶 지요? 그러나 빚을 다 갚고 나면 아무 관계가 없잖아요. 군에 갔다온 사람은 잘 압니다만 모처럼 외박을 나가면 헌병이 무서워요. 당당하게 외출증 끊어 나가도 헌병이 있나 없나 멀리서 눈치만 보고 서 있다가 헌병 없을 때 기차에 오릅니다. 헌병이 안 보이는 곳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러다가 헌병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간이 덜컹해요. 헌병? 무서워요! 그런데 제대하고 포 항 들어오는데 검문소 헌병이 올라와서 검문 있겠습니다 하니 웃음이 나요. 왜? 이제는 검문을 하든 말든 아무 관계없어요. 지금도 헌병을 보면 옛날 생각을 하면서 웃어요. 저 헌병이 그 때는 그렇게 무서웠나 싶 은 것이 우스워요. 육신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가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면 어 떻게 사는 것이 육신대로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몸의 행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까? 스스로 육신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뭐가 생각나요? 육신에 빚져서 육신대로 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 다니면서 술 먹는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겁니까? 아닙니까? 담배 피우면? 가끔씩, 봐서는 안될 음란 비디오를 보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겁니까? 아닙니까? 문제가 어렵습니까? 돈을 너무 사랑해서 남에게 베풀기도 어렵고 헌금도 아깝고 남 도와 주는데 돈을 쓰기는 정말 어려운데 그러면 몸의 행실이 살아 있는 겁니까? 죽은 겁니까? 육신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데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표현을 바꾸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 의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살기를 원하십 니까? 아멘.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 녀냐? 육신대로 살고 있느냐 하는 판별이 술이나 담배를 더 사랑한다? 시기나 질투심이 있느냐? 따위를 가 지고 판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11절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리스도 예수를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 리시리라 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7장 8장을 보시면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 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술 도 못 끊고 담배조차 못 끊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멘. - 2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우리 속에 부족한 점이 있고 못 하는 게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됩니 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그 예수를 믿는 한 비록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여러분, 부모 마음에 만족스러운 자녀를 보았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매우 만족스럽습니까? 공부도 못 하고 날마다 사고 쳐서 학교에 불려 다니면 내 자식 아닙니까? 못난 자식은 자식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의 자녀가 되었지만 완전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너무 심하게 자책하지 말라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겨우 술, 담배 가지고, 겨우 돈 몇 푼이나 성질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겨우, 술? 담배? 성격 이 좀 더럽다고? 그런 보잘 것 없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를 따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따져 보십시오. 그렇게 살고 있으면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우리는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 족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가야지요. 당장에요? 그러면 더욱 좋지만, 시간이 좀 걸린들 어떻습니까? 흔히 교회 갑시다 하면 끊을 것도 끊고 사람이 온전하게 된 다음에 교회 나가야지요라고 말합니다. 거 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버릇이 끊어야지 한다고 그게 끊어집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한 분은 담배 를 조절하는 분이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끊어요. 한달, 두달 그러다 가 좀 나아지면 또 피워요. 그러다가 또 문제가 있다 싶으면 또 끊어요. 그 사람을 가리켜서 친구들이 뭐라 고 하는지 아세요? 저건 인간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담배를 끊는 것 이 그렇게 어렵답니다. 담배만 그럴까요? 도박도 그렇습니다. 간증을 듣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데요. 도박 외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좋은 남편이 밤 늦도록 도박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아무리 말려도 안되니 새벽에 돈 다 잃고 들 어오는 남편을 보고 부인이 펑펑 울었더니 남편이 칼을 가지고 와서 실제로 손가락을 잘랐답니다. 다시는 안 한다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싸매가지고 또 합니다. 김 집사님은 그런 거 참 잘 알아요. 그게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좋지 않은 버릇이 내게 있는데 그것을 끊어야지? 잘 안 끊어집니다. 국민일보에 사이버 음란이 마약보다 더 무섭다고 기사가 났더군요. 마약이 참 무섭습니다. 그런데 사이 버 음란이 더 문제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50대 법무사를 지낸 퇴직 공무원인데 명문대 법대 졸 업하고 25년간 법원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신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아내 이야기가 지금까지 외박 한번 안 하고 술, 담배도 멀리한 모범 가장이었답니다. 퇴직하고 인터넷의 음란 사이트에 접속하더니 본인 이 음란 사이트를 51개를 만들어서 차마 보여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을 실어서 운영하다가 결국 경 찰에 입건된 거죠. 그 기사 끝에 이런 분에 대해서 인제대 신경정신과 어느 교수가 처방을 하면서 조금씩 줄이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완전히 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조언을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조언이지만 그렇게 각오를 한다고 끊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로마서 7장 22절 24절을 봅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 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대로 살고 싶다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내 속에는 나 아닌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누구 이야기입니까? 바울의 탄식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고쳐요? 제일 좋은 답은 확실하게 단번에 끊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게 참 어렵습니다. 끊어야지 한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양봉을 하시는데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카시아 꿀이 한참 날 때 지나가던 사람이 여기 설탕 안 들어갔지요? 그러면 어떻게 대답을 해요? 넣은 사람은 넣었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 3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물으나마나 한 질문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 그럴 때는 간단하게 대답한답니다. 꽃에 꿀이 있을 때는 벌이 설탕물을 줘도 안 먹습니다. 벌 한통을 키우려면 1년에 설탕 1포는 들어간답니다. 물에 타서 주 면 다 가져가서 벌통에 채웁니다. 그러나 꽃에 꿀이 많으면 설탕물을 안 가져갑니다. 나쁜 습관을 끊어야 한다면서 왜 벌이야기를 할까요? 여러분에게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고 할 때 이것 을 끊어야지 한다고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려워요! 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더 좋은 쪽으로 시선이 나 관심을 옮겨놓으면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내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어디로 관심을 옮깁니까?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새벽기도에 참석하려면 사는 방식을 바꿔야 가능합니 다. 늦게까지 텔레비젼 연속극 즐기면서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영, 육간의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이 그렇게 되기에는 세상적인 유혹 이 너무나 큽니다. 연속극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하는 것 외에도 이런 세속적인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 다. TV 드라마를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해도 그런 다음 무엇을 할 것이냐가 분명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새벽기도 가기 위해서 일찍 자지 않으면서 TV나 비디오에서 멀어지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 다. 좋지 못한 습관을 끊어야지 하는 노력보다 예배, 새벽기도, 찬양, 성경공부, QT,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 정신을 쏟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습관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설탕물보다 더 단 꿀이 있다는 것을 알면 벌이 설탕에 달려들지 않는 것처럼 무조건 끊어야지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즐거움 을 배워야 우리의 습관도 따라서 변하는 것입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라! 어떻게 죽여요? 우리의 관심을 이런 것으로 의도적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열심과 관심을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 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다라는 것입니다.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이라 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 이란 단어를 마음이라고 바꾸어서 이해하시면 쉬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양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과 양자 중 누가 더 말을 잘 들을까요? 종. 아니, 종하고 양자 즉 아들하고 누가 더 말을 잘 들어요? 종. 종이 왜 말을 잘 들어요? 종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이유가 뭡니까? 쫓겨날까 봐. 종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지요. 성경이 기록될 때의 종을 생각 해 보세요. 말 안 듣는 종은 죽습니다. 종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두려 워하니까 주인의 말에 잘 순종할 수밖에 없잖아요. 아들은 부모의 말을 잘 안 듣습니까? 집에 있는 아이들 이 부모에게 순종을 잘 합니까? 잘 한다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겠지요? 죄송합니다. 착한 아들, 딸들을 흉봐서요.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커 보십시오. 아무리 야단을 쳐도 별 소용이 없어요. 제가 학교에서 종종 아이들에게 물어봐요. 얘들아 집에 들어갈 때 무엇이라고 인사하니? 기대하는 대 답은 다녀왔습니다. 인데 제가 상상도 못했던 답이 많이 나오더군요. 다녀 왔데이... 이건 양반입니다. 심 지어는 내다 그러고 들어 간대요. 그게 이해가 안 되어서 그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 면 자기가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아니고 엄마나 아빠가 있다가 누고? 한답니다. 그러면 내다 하고 들어 간대요. 집에 그런 아이 없습니까? 간이 부었잖아요. 그런 아이가 선생님이 부르면 예 하고 선생님보다 더 나이 많은 엄마가 부르면 와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아이 붙들고 존대말 쓰라고 가르쳐 보십시오. 잘 안 통해요. 우리 아들이 저기 앉아 있는데 자기 엄마도 선생이고 학교 담임도 선생이지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뭐 - 4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하나 시켜놓았습니다. 엄마가 그거 이렇게 하면 된다. 하면 듣습니까? 어림도 없어요. 그러면 제가 옆에서 돕습니다. 야, 네 엄마도 선생님 아니냐.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된다. 해도 안 들어요. 부모 말을 정말 안 들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겁니다. 성경을 번 역할 때 왜 아바 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어상 ABBA입니다. B가 둘이니까 아빠지요. 아빠라고 번역하 기는 뭣해서 아바라고 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두렵습니까? 교회를 하루 빠지 면 천국 가는 사닥다리가 하나 빠진다 그래서 교회를 빠지지 않고 꼭 가야 한다. 이건 두려움입니다. 그것 을 로마서에서 무엇이라 표현하지요? 종의 마음. 그렇습니다. 종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렵고 무섭습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종의 마음을 가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대신 양자의 영을 받았지 요. 다시 말하면 아들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받아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입 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형성되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내일 하나님이 오시면 환 영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잠깐만요. 며칠이라도 더 있다 오십시오. 하겠습니까? 내일이라도 오실 까 겁이 납니까? 이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록 내 생활에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나를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셨으면 나의 잘, 잘못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남들처럼 차도 없었으니까 자전거에 태워서 시내를 잘 돌아 다녔습니다. 좀 거 창하게 세상 구경하러 가자 면서 돌아 다녔는데 유치원 다닐 때 어느 날인가 아빠 하고 부르더니 내일 부터는 아빠 안 하고 아버지 하겠어요. 이러는 거예요.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느낌이 어땠을까요? 징그러워요. 맞아요.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이 징그럽다는 것은 부자지간 은 예의보다 친근함이 우선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의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으니까 그냥 두다보면 때로는 아이같은 어른도 생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친밀한 부자지간 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능력이 있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2차 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 하기는 했지만 감히 그렇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홍길동이 집을 나가서 온 천하를 요란케 한 이유가 무엇입 니까?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인간사에서도 서자라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데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어린 아 이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너무 과분합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존심이라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까?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 한마 디에 잠을 못 이루는 따위의 자존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존심은 가지 고 삽시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친아들이 죽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삽시다. 영적으로 우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푼돈 얼마에 목숨을 걸 만큼 값어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주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것은 푼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을 예수님의 목숨과 비교해 봅시다. 우리의 잘못이 예수님의 죽음을 무효화시킬 만큼 큽니까? 우리의 어떤 잘못도 예수의 보혈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너무 애용하면 곤란하지만 정 안되면 이 정도 배짱도 가지십시오. 못생겼으면 자식 아닙니까? 부모 마음에 쏙 드는 자식만 자식입 니까? 언젠가는 부모 마음에 쏙 드는 자식이 되겠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하나 님도 잘 아시는 일입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 5 -

[2001.04.08] 하나님을 아빠라고? (로마서 8:12~17)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을 늘 기억함으로서 점점 자녀다워지는 것입니다. 가끔 술값 인상이나 담배 값 인상 때문에 난리를 치더군요. 관계 있으세요? 에이즈가 만연하고 있다고 걱정이 많습니다. 걱정되세요? 기본적으로 우리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 다만 동정인 처녀 총각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천연기념물. 예,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답니다.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뜻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천연기념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길이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과 교사 생활을 실제로 몇 년이라도 해본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니, 실제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엄청나게 다릅니다.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발령 받자마자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 에서만 자란 어떤 여선생님이 시골로 발령 받아서 화단을 정리한다면서 과꽃을 풀인 줄 알고 모조리 뽑아 내는 따위는 아주 약과입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스스로도 이래서 어떻게 선생이라고 하겠느냐는 자괴감이 엄청나게 듭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학생이나 동료 교사들이나 심지어 학부형까지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이라고 추켜 세워줍니다. 자신은 아이고 이런 나를 선생이라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바로 이 기대감이 교사를 교사답게 만듭니다. 자격증이 있어도 교단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가 바로 이 기대감입니다. 실제로 자격 미달일지라도 주변의 이런 기대감이 진짜 제대 로 된 교사를 만들어 버립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비록 못난 자식이지만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칭찬하고 기대감을 심어주세요. 그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츰 차츰 그렇게 변해갈 것입니다. 남에게 그런 기대감을 주는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만 자신에게 먼저 그런 기대감을 심어 주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결코 잊지 않으시면 바로 그 기대 감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자신을 향하여 그런 기대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로 옆의 형제들을 향해서 그런 기대감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 형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로 여러 분의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입니다. 그 기대감, 바로 그 믿음이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아 바 아버지 라고 불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 6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본 부활의 첫 열매 예수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 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 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 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 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개역, 고 린도전서 15:19~24] 문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불쌍하지요? 만약에 내가 예수만 안 믿었으면 오늘 뭘 하실 것 같습니까? 저기 웃는 분은 다른 계획이 있었던 분이고 아예 웃지 않는 분은 상상조차 못한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만약에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오늘 뭘 하시겠어요? 경주 갔어요. 경주 갈 수도 있을 테고 꽃 많이 피어 있는 산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놀러 도 많이 못 가지요. 제 친구들이 등산갈 때 꼭 제게 전화를 합니다. 못 가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해서 한대요. 학교에도 결석이 있고 병결도 있는데 아무리 교회지만 한번쯤은 갈 수도 있지 않겠나 하면서 전화를 합니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봐요. 같이 가면 도움이 되거든요. 제가 가는 날은 마음껏 술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운전은 제게 맡겨 놓고 자기들끼리 실컷 마실 수가 있거든요. 술 병 하나 꿰차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한잔 하고 내려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답니다. 꽃피는 이 계절이 얼마 나 놀러 가기에 좋은 때인지 모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혹시 먹고 싶은 것 못 먹는 분 계십니까? 교회 가기 싫은데 교회 가야 되고, 먹고 싶 은데 교회 때문에 못 먹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 못 보는 것 있어요? 내가 교회만 안 나간 다면 실컷 보겠는데 못 보는 것 있어요? 차마 교회 집사가 이래서 되겠나 싶어서 못 보고 안 보는 것 있 습니까? 계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보며 놀고 싶은데 예수 믿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니까 불쌍하다고 느껴지십니까? 더군다나 지난 주는 고난주간이라고, 아무 생각없이 잘 지내신 분도 계시겠지만, 고난주간이라서 특별히 더 엄숙하게 지내셨나요? 제가 다니는 신대원에서도 이번 주간은 가만히 놔 둬도 알아서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어른 한 분이 나오셔서 축구도 하지 말고 농구장도 가지 말고 탁구장도 가지 말고 테니스장도 가 지 마세요. 고난주간입니다. 이래 놓으니까 아무것도 안돼요. 유일하게 남은 낙이 뒷산 올라가는 길밖에 없 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산에 올라가는 것은 고난에 합당한 것이라 해서 새벽기도 마치면 우루루 몰려 갔어요. 30분 짜리 등산 코스가 하나 있습니다. 산에만 바글바글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습니다. 고난주간 때문에 못하신 일이 참 많으시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이런 생각을 또 해봤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쓰고 싶은 돈을 얼마나 많이 썼을 것인가? 돈을 많이 못 쓰는 이유가 교회 다니면서 교회에 얼마나 많이 헌금을 하십니까? 저도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감사헌금 하고 십일조 했는데 지금까지 적어도 20여 년이 넘는데... 모았으면 꽤나 큰 돈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교회에 그렇게 헌금하고 나니까 나머지는 아껴 써야지요. 혹시 그런 생각을 안 해 보셨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불행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령, 이 글을 쓴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아니면 지지리도 고생하면서 살 았을까요? 바울은 참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정말 괴로움 가운데서 살았을 것 같 습니까?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 1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구요? 바울이 이 땅에서 무슨 기쁨을 누리며 살았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이 있었어요? 늘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한번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런지 모르겠습 니다. 한번 떨어져 있어보세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은 한번 떨어져 살아봐야 압니다. 그런데 바울 은 평생 가족 없이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오직 낙이라고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살았는데 자신이 당 한 고통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신서를 읽어보면 바울만큼 이 땅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산 사람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감옥 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주요 내용이 뭐죠? 감옥에 앉아서 뭐 라고 합니까?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는 얘기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죄수로 묶여 총독 앞에 갔을 때 뭐라고 합니까 각하! 내가 지금 묶여 있는 것 이것만 제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 니다. 손이 묶인 이것이야 본을 볼 필요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 니다. 도대체...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게 했는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 니다. 좀 전의 말씀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불행한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요. 가령, 우리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컴퓨터, 이거는 말이야, 정말 목사를 위해서 만든 거야. 왜 컴퓨 터가 목사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 생각하실까요? 공책에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새로 쓰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쓰고... 이거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모르는데 컴퓨터로 쓰면, 쓰다가 틀리면 고치기가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이 편리함을 아시는 분은 지금도 설교 원고를 손으로 쓰고 계시는 분 을 보면 참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쌍한 본인들은 전혀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왜요?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불 편하다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집의 아이들한테 컴퓨터는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지 한번 물어 보세요. 틀림없이 자기들 오락하라고 만 든 거라고 할 겁니다. 그 아이들은 가난한 나라 아이들이 컴퓨터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불쌍하 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쟤들은 모르고 산다? 아마 자기들 눈에는 한없이 불쌍할 겁니다. 정작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왜 불쌍합니까? 전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아요. 무엇을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모 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그 걸 알면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그거 다 잃어버리고 지금 여기서 너무나 불쌍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들었을 때에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죠?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들 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수명이 줄었습니다. 얼마나 줄었죠? 대강 천년 정도 로 줄었습니다. 성경을 펴놓고 아! 이건 거짓말이다. 사람이 어떻게 구백 몇년씩 살았단 말인가? 하고 안 믿는 사람이 많아요. 왜요?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원래는 죽지 않고 무한 대로 살 수 있었던 존재가 천년으로 줄었다는 것은 비참해도 보통 비참해진 게 아닙니다. 무한대( )분의 영(0)은 0입니다. 수학에서 그렇게 말해요. 무한대 분의 영은 영입니다. 그러니까 즉시 죽은 거예요. 우리가 볼 때 구백 몇 년 살았으니까 너무나 많이 살았다고 생각이 되지요. 어디에 기준을 두니까요? 겨우 백년도 못 사는 우리에게 비하니까 너무나 오래 살았죠. 그분들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자기들은 구백 얼마씩 살았습니다. 우리 보고 뭐라 할까요? 우리는 백년 사는데 십년 밖에 못 사는 아이를 보고 뭐 라고 하겠어요? 우리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그 모습과 우리를 비교하면 우 리는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원숭이처럼, 산에서 원시인처럼 살다가 이렇게 발달했답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원숭이처럼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높았습니다. 짐승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여러분 같으면 도대체 몇 종류의 짐승에게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뭐가 제일 어렵겠어요? 지상에 있는 짐승의 종류가 몇 종류나 될까요? 이 짐승들을 줄 세워 놓고 이름을 한번 붙여보세요. 얼마나 붙이시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제일 어려운 것이 - 2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단어 부족 아닐까요? 이름을 몇 개쯤 붙이면 밑천이 딸릴 것 같습니까? 야, 너는 소, 너는 개, 너는 말... 얼마쯤 갈 것 같아요? 많이 갈 것 같죠? 얼마 못 갑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내가 저놈한테 이름을 붙여줬나 안 붙여줬나 헷갈리기 시작하거나 어느 놈한테 뭐라 고 이름을 지어 줬는지 모르면 더 이상 못하는 겁니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손자가 이십명쯤 되면 이 름을 잘 못 외웁니다. 우리 큰집에 사촌들이 일곱명인가 됩니다. 어릴 때 보면 큰아버지나 큰어머님이 아이 들 이름을 부를 때 바로 딱 찍어서 못 불러요. 항상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쭈루룩 불러 가다가 찾는 애 이 름이 걸리면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 거예요. 자녀가 많은 분들은 아마 이해가 갈 겁니다. 아들 몇 명 가지 고도 이러는 판에 그 많은 짐승들에게 이름을 일일이 붙였다는 것은 보통머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신체 부위 중에 머리가 굉장히 무겁습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항상 머리가 먼저 떨어집니다. 이 무거운 머리 속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두뇌, 골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우리 평생에 이 두뇌를 많이 쓰면 3%, 아주 많이 쓰면 5% 쓴답니다. 쓰지도 않을 머리를 왜 무겁게 가지고 다녀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하 셨을 때는 다 썼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이후에 다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조금만 쓰고 있는 겁니 다. 이렇게 조금만 사용하면서 IQ가 100이면 보통이고 IQ 200이면 몇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합니다. 천재요? 겨우 5%-10%만 쓰는데요? 이것을 100% 다 쓴다면 IQ가 20배, 30배로 뜁니다. 원래는 그렇 게 만들었는데 범죄한 이후에 벌을 받아 사용 부위가 엄청나게 축소되어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원시인들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산 게 아닙니다. 그만한 머리가 있었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 을 때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지금 이 모습으로 쭈그러든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모르 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모습만 보고 행복하니 불행하니 하고 따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었 던 그 모습과 비교하면 우리가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처음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을 회복하시는 것인데 계시록을 보면 하나 님께서 그대로 에덴을 회복하시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처음 창조하셨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 복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은... 그것은 하나 님께서 보시기에 비참한 상황 속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서 산다는 것 자체가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원하셨던 놀라운 모습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다 잃어버린 채 우리는 이 땅에서 그저 조그마한 거 가지고 웃었다가 울었다 가 이러고 있는 것이죠. 부활이 없으면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장 불쌍한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 놀라운 복을, 그 놀라운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 입니다. 20절을 한번 봅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첫 열매라는 것이 참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마당에, 없어져 버린 감나무 한 그루 있었죠. 지난 겨울에 참 궁금했습니다. 이게 살 았을까? 죽었을까? 내년 봄에 싹이 날까? 안 날까?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그 감나무가 허리까지 파묻힌 나무입니다. 땅을 많이 돋워 올리면서 허리까지 잠겨 버렸거든요. 이렇게 깊이 파묻혔는데 싹이 날 까? 어느 분이 그런 얘기를 합디다. 감나무는 꺽꽂이가 안되기 때문에 많이 묻히면 중간에서 뿌리가 안 나 서 결국은 죽습니다. 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죽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죠. 저거 안 베어 버리나 하고 눈 독 들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어요. 아마 독이 올라서라도 저 나무는 제명에 살기는 어려울 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무를 차로 박은 분이 여러 분 계십니다. 심지어 혼자서 세 번이나 박았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저렇게 차에 받히고 눈총 받고도 살아나겠나 싶더군요. 이게 살았을까 죽었을 까 늘 궁금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새파란 순 하나가 삐져 나오는 거 있죠! 그 순 하나를 딱 보는 순간에 야! 요게 끝내 사는구나. 그 순 하나가 나왔다는 것은 앞으로 이 나무 전체에 이런 순들이 많이 나온다라 - 3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는 것을 의미하죠. 그 순 하나는 앞으로 무성한 잎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 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만 혼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해서 그렇게 살아나셨구나? 아니에요. 예수님은 첫 열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뒤 를 이어서 앞으로 같은 모습으로 많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죠. 과일 나무를 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는다고 바로 열매 맺히는 거 아니죠? 몇 년은 걸립니다. 몇 년 걸리는 동안 농부는 참 궁금할 겁니다. 과연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이며 맛은 어떻고 향은 어떨런지... 그러나 어느 날 열매 하나가 맺히는 걸 보면 됐구나 싶죠. 그 다음부터는 이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을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는 의미는 바로 그 예수님의 모 습을 닮은 부활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 있을 그 때에도 그걸 못 믿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는 얘 기입니다. 15장 3절부터 한번 보세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 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 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증인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증인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왜 합니까? 그 당 시에도 이미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증인들이 있었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늘 우리는요? 그것을 목격한 증인들이 전혀 없음에도 믿어진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요 하나님 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안 믿어지신다구요? 안 믿어지시면 참 불행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이 주어지도록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한번 매어 달려 보십시오... 그것이 믿어진다면 엄청난 행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다시 22절부터 보겠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 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 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여기서 나중이니 하는 표현은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말이 있을 때에는 아 오늘 하나... 표현이 조금 안됐습니다마는 오늘 하나 건졌다 라는 느낌으로 묵 상도 하시고 다른 성경과 비교도 해 보시고 꼭 그러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을 해 가면서 읽어야 할 부분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중이니 하는 표현의 의미는 그 후는 끝 이라는 표현입니다. 그 후 면 마지막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나중이니 하는 표현은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이 구절 들의 내용들을 요약을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는 말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무어라 묘사를 해 놓았는가 한번 보십시오. 20절입니다. 그러 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잠자는 자는 누구를 가리킬 것 같습니까? 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에서 잠자는 자가 누구예요? 예수님 당 시에 죽었던 사람요? 예수 믿고 돌아가신 분요? 그 다음도 한번 봅시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여기에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22 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라고 말하죠? 죽은 사람이 누구예요? 모든 사람을 가리키 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자라는 겁니다. 살아 있다고 해 서 산 것이 아니라 처음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셔서 만들었던 그 모습과 비교하면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입니다.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죽었다구요? 현재의 모습만 보면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셨던 그 모습과 비교를 하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사 람입니다. 잠자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죽은 모습을 벗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을 거라는 얘기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난 후에 24절을 보시면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 4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때에 완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가졌던 사탄의 권세, 능력,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께로 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서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후에 나타나셨던 모습 들을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문을 다 걸어 잠근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죠. 문이 꼭, 꼭 잠겨 있는데 어떻게 나타나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모습이 장차 우리의 모습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문을 다 잠궈 놨는데 어떻게 나타나셨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서 고생하는 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들에게 모처럼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이 문을 다 잠그고 덜덜덜 떨고 있는데 귀신처럼 나 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뭐 하셨어요? 평안할지어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인사고 본론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한 일? 거기서 축복기도를 했습니까? 아니 면 뭐 죽으신 이후에 보고 들은 것이나 지옥 갔다 온 이야기 하셨어요? 먹을 것이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아, 예, 그러니까 사흘동안 잡수신 게 없으니까 그렇겠네요! 정말 먹을 것을 찾으셨어요? 맞습니다. 먹을 걸 찾으셨어요. 왜요? 배고파서요? 아니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셔셔 모처럼 제자들에게 찾아오셔 서 왜 먹을 것을 요구하시나요? 귀신이 아니란 걸 증명하시기 위해서... 예, 그렇습니다. 육신이 멀쩡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음식을 찾는 겁니다. 내가 귀신이 아 니라 몸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먹을 것을 찾으셨고 잡수셨다는 겁니다. 거기 없던 도마 에게 나중에 뭐라고 하셨어요? 내 품에 손을 넣어보고 그 흔적을 확인해 보라고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져 보니까 아니면 음식 잡수시는 것을 보니까 분명히 몸이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몸이 있는 그 예수님께 서 가실 때에는... 가실 때에는 어떻게 가셨죠? 가실 때에는 말없이 또 사라지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성경은 언젠가 이 몸을 장막처럼 벗어버릴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몸이 새로운 모습으 로 변하여 갈 것이라는 예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완전한 몸으로 회복시 켜 주실 것을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주일에 창세기 공부도 있고 계 시록 공부도 있는데 뭐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의논하면서 하다 보니까 한쪽에서는 창세기 공부 를 하고 한쪽에서는 계시록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복은 누가 제일 많이 받는지 아십니까? 전도사님요... 제가 뭘 알아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냥 같이 공부합시다 하면서 하는 거지요. 그런데 창세기도 보고 계시록도 보니까 제가 받는 충격이 참 놀랍습니다. 아하! 이게 이렇게 되어 가는구나 참 놀라워요. 복은 누가 제일 많이 받는지 아십니까? 가르치는 사람이 제일 많이 받습니다. 은혜도 더 많이 받아요. 열심히 공 부합시다. 창세기도 보시고 계시록도 다 보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작정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만물을 회복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생명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가 강을 따라서 달마다 열 두 과실을 맺고 있습니다. 황금 보석 밟고 다니실 것만 생각하시죠? 회복된 낙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영광 스러울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루 기분 좋으려면 어디를 가라고 하죠? 이발소 - 5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맞습니다. 이발소 가면 하루 기분이 참 좋아요. 그런데 이발소도 잘 만나야 합니다. 자동차 처음 사면 기분이 참 좋지요? 지금은 영 형편이 없는 차지만 저 차 처음 가지고 왔을 때 우리 집 아이들이 그 차에 가서 놀았습니다. 집에 안 가고 거기서 그냥 잔데요. 그 기분이 얼마나 갑니까? 요새는 탈 때마다 무슨 냄 새가 난다나요? 우리 어머님이 늘 셋집에 사시다가 제가 결혼을 하고 모처럼 전셋집을 좀 넓은 것 하나 얻었습니다. 집 산 거 아니에요. 나루 끝에 전셋집을 하나 얻었는데요 우리 어머니가 야, 좋다 정말 좋다. 뭐가 그리 좋 은지 아십니까? 방이 좀 큰 게 좋은 이유입니다. 이불을 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불을 펴지 말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러다니면 좋겠다는데 방이 넓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 집도 아닌 전셋집인데 요. 하긴 그럴 만도 할 겁니다. 아들 다섯에 부모님까지 일곱이 한 방에서 같이 누웠다 하면 잠깰 때까지 차렷 자세를 해서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합니다. 여자 형제가 없었다는 게 그때에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 르는데 그런 세월을 많이 보내고 난 다음에 넓은 방 하나 얻어 가지고 뒹굴뒹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 니다. 정말 좋습니다. 그 기분이 얼마를 가나요? 얼마쯤 지나면 집을 하나 사야 할 텐데... 새 집을 사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또 조금 있으면 평수를 조금 넓혀야지요. 이번 주간에는 아마 실컷 잠이나 좀 잤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겁니다. 어제 목사님께 전 화를 드렸더니 어쩐 일인지 다 잔다 고 하시더라구요. 연이은 부활절 행사를 잘 마쳤으니 만사를 제쳐 두 고 실컷 한번 자 보십시오. 그러나 조금만 더 자면 잠 많이 자는 것도 얼마나 고역인지 모릅니다. 허리는 허리대로 아프지요. 개꿈이란 개꿈은 다 꾸지요... 이 땅에서 즐거운 일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행복의 근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릴 행복은 따로 있습니 다. 이번에 우리가 40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제가 들은 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많이 들은 게 아이고 죽겠다 입니다. 심지어 요새 어느 교회가 40일 새벽기도를 하노? 하는 말도 들었어요. 아이고 죽겠다...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뭐 한 2주만 지나니까 입술이 터지는 분이 있던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이 정도 가지고 죽겠다, 디다, 힘들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은 고생을 별로 안해 본 사람인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고생요? 무슨 고생인지 아십니 까? 장사하는 두 집이 나란히 있는데요 한 집에는 손님이 바글바글... 쉴 틈도 없어요. 이 주인 하구요, 옆집 에는 손님이 전혀 없어요. 하루 종일 파리만 잡고 앉았습니다. 누가 힘들까요? 파리 잡는 집 주인 아니? 파리 잡는 게 그렇게 힘이 들어요? 마음이 힘들어요 마음은 힘들고 몸은 힘 안 들겠네요? 몸은 편하겠네요? 한 집에는 손님이 바글바글 하구요 한 집에는 손님이 전혀 없어요. 누가 더 피곤하냐 말이죠? 손님이 없는 집이 더 피곤해요. 가만히 파리만 잡는 것이 몸이라도 편하면 다행이게요, 마음만 피곤한 게 아니라 몸도 더 피곤합니다. 손님이 바글바글 하는 집 주인 이 손님 없는 집에 가서 아휴 힘들어 죽겠다 하면 잘못하다가 맞아 죽어요. 누구 약올리는 겁니까? 아휴 힘들어 죽겠다. 이제 손님이 그만 왔으면 좋겠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십시오. 여러분들 중에는,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한때 손님이 없어서 힘들었던 분들입니다. 그렇게 아픈 기 억이 있는 분들은 이거 가지고 아휴 힘들다, 디다 소리 안 합니다. 이런 아픔을 겪어 보지 않은 분은 손 님이 많이 오는 게 귀찮은 겁니다. 그래서 아이고 힘들다, 피곤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 러니까 힘들다, 피곤하다, 디다, 이런 분들은 진짜 힘든 것을 못 봤겠구나, 나름대로는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모처럼 교회다운 교회 만나서, 믿는 것처럼 한번 믿어봐야겠다 는 분들은 말만 죽겠다 하고 실은 죽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표정 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 속이 다 보이니까요. 전 아예 그런 말도 꺼내기 싫어요. 물 만난 고기가 물이 너무 많다구요. 돌아다녀야 할 공간이 너무 넓다구요? 택도 없는 소리 마세요. - 6 -

[2001.04.15]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고린도전서 15:19~24) 또 하나는 아이고 디다[고되다] 하면서 안 오면 될 건데 꾸준하게 잘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아! 이건 달리 말하면 칭찬을 좀 듣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제 혼자 생각입니다. 디다, 디 다, 입이 터진다 어쩐다 하면서 잘 나오시거든요. 새벽기도 광경을 한번 보세요. 주일 낮예배와 다른 게 있는가? 누가 효자제일교회는 꼭 공산당 같다 는 얘기를 했답니다. 공산당의 특징이 뭐죠? 모여 하면 쫙 모이고, 해산 하면 쫙 헤어지고, 새벽기도 시간에 흰옷에다가 양복을 입고, 오늘 새벽에 오셨던 분들은 아 실 겁니다. 여기 주차장이 꽉 찾습니다. 이거 공산당이 아니냐는 것이죠? 글쎄요, 더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뭐 잘못된 거 있습니까? 뭐 잘못된 거 있느냐구요? 이것이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즐 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어떤 것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몸은 고달 프고 힘들고 교회를 위해서 아까운 것 다 내어놓고도 기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때 파리만 잡으면서 힘들어 했던 그 때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평생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어려 운 때를 지나고 이제 손님이 바글바글 하는데 거기서 아이구 힘들어 죽겠다? 어림도 없지요. 한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매듭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에게 현실의 이러한 복도 있지만 먼 훗날에 그 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런 고난을 스스로 겪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친구를 위 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십자가에 못박 혀 돌아가신 거요? 정말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 이 울부짖음이 제가 볼 때에는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어릴 때 정말 좋아하던 선생님에게 무언가 잘못해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습니까? 정 말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실수했거나 잘못하였을 경우에 얼마나 그것이 마음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차라리 매맞는 것은 오히려 시원한 일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분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 고통을 상상해 보세요. 학생들을 데리고 가끔씩 수학여행을 가 봅니다. 학교끼리 패싸움이 잘 붙어요. 그래서 가끔 당부를 합니 다. 얘들아 패싸움을 할 때 하더라도 저런 학교 하고는 절대로 하지 마라 어떤 학교요? 공학입니다. 남녀 공학하고 싸움을 하면 저쪽이 숫자가 훨씬 작아요. 숫자가 작다고 해서 패싸움 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왜 안되는지 아세요? 남녀공학 학교의 남학생들은 일단 싸움이 붙었다 하면 후퇴를 모릅니다. 왜 못해요? 여학 생들 때문에요. 거기서 후퇴를 하고 도망을 갔다가는 여학생들한테 평생 찍힙니다. 그 눈이 무서워서 후퇴 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을동살동 덤비는 거예요. 그래서 공학 애들은 건드리지 마라고 반 협박적으로 얘 기를 해주곤 합니다. 그것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리심을 받는 것하고 비교를 해서 미안합니다마는 적절한 예가 잘 생각 이 나질 않아서 그럽니다. 단순한 남학생, 여학생 사이도 이러하거든 완벽한 사랑을 나누시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다고 할 때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든지 아니면 로마병정들에게 당했던 수모든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버려진 아픔이든지 이 모든 아픔들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알고 그 길을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가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도 예수님 자신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서 그 길을 가신 것이죠. 우리를 이토록 끔찍하게 사랑하셨던 그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것으로 끝냈다면 모르 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 나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더 휘황찬란 한 부활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분이 계시면 조금 더, 조금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해 보십시오. 예배에, 기도에 좀 더 열심히 출석하시고 공부를 열 심히 하시면 우리 앞에 이 놀라운 복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 주지 못하는 참다운 기쁨이 우리의 것입니다. - 7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본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 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개역, 여호 수아 8:30~35] 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다 끝내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 어옵니다.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워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호수아 1장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러분이 그 구절을 많이 기억하시는데 조금 내용을 추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시험치러 가는 학생을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 시험 잘 쳐라 고 말하죠? 다른 이야기 할 것 있 습니까?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앞으로 남은 건 오로지 전쟁밖에 없습니다. 그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이야기 해야 됩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은혜롭기 그 지없지만 더 은혜받을 말씀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말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하셨나 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이상한 얘기죠? 장 군이 전쟁터에서 막사에 앉아서 성경공부나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 게 그걸 시키셨습니다. 그런 후에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치고 그 다음에 아이 성까지 쳤습니다. 아 이 성을 친 바로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친 것은 마치 우리나라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비기면 조금 비슷합니다. 인천에 상륙해서 옆구리를 치고 들어옴으 로써 적군이 남북으로 갈라져 버리죠. 적을 아래 위로 갈라지게 해서 싸우려고 했던 인천상륙작전과 여호 수아가 여리고와 아이 성을 친 것은 아주 흡사합니다. 이 두 성을 치는 것이 옆구리를 치는 셈입니다. 가나 안의 옆구리로 들어와서 장차 남쪽으로 연합군과 싸우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북쪽 연합군과 싸우게 됩니다. 적진의 옆구리로 치고 들어와서 군인들이 상륙을 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되죠? 제일 급하게 해야 될 것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지만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보초를 세우는 일부터 해야죠. 보초를 세우고 진 지를 구축하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굉장히 위급한 때입니다. 이제 겨우 인천 부두가에 군인들을 상륙시 켜 놓았단 말이에요. 온 천지가 적군이고 적진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전후사방에 적이 쫙 깔려 있는 상태에서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을 기록한 것이 이 본문입니다. 30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라고 합니다. 이 에발 산이 라는 곳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겜이라는 곳인데 아이 성에서 약 30Km 조금 넘는 지역입니다. 이 거 리를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한다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혼자서 가면 하루만에 갈 수 있을 겁니다만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하려면 적어도 2, 3일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방에 적이 깔 린 적진 한가운데서, 지금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에 있는 가나안 여러 족속들 이 연합을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우려고 벼르고 있는 그 속에서 갑자기 전투를 중지하고 이스라엘 백 성 전체를 이끌고 한 30여Km 떨어진 세겜으로 가서 양쪽 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다고 합니까? 단을 쌓고 - 1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하는 겁니다. 적들이 보면 기분이 나빠요. 왜요? 저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 는 건가?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에 작대기와 돌맹이 다섯 개를 들고 갔습니다. 골리앗이 뭐라고 그랬습니 까? 야, 너 지금 나를 개로 알고 오느냐고 얘기를 하지요? 개 잡으러 갈 때 막대기를 들고 가나 봐요. 골리 앗이 기분이 아마 대단히 나빴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조그만 녀석이 작대기로 개 잡으러 오는 것처럼 온단 말이냐?. 네가 나를 개로 알고... 그랬는데, 주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런지 모릅니다. 저것들이 도대체 우리들이 이러고 있는데 무섭지도 않단 말이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동해서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율법을 기록했고 35절 제일 끝에 보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그 율 법책을 전부 낭독을 했더랍니다.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말이죠. 지금 적과 싸울 준비를 정신 없이 해야 될 판국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율법을 기록하고 그 율법을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낭독을 했 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슨 부흥회쯤 될까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대전투 를 앞둔 이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요? 여호수아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이 무엇인가 살펴보자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자체가 하 나님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청년부 성경공부 하는데 올라갔더니 여호수아서를 읽고 있었는데, 싸움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 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습니다. 그 군대장관에게 여호수아가 뭐라고 묻습니까? 당신은 우리를 위함입니까? 우리의 대적을 위함입니까? 그 말은 내편입니까 아니면 적입니까라고 물었죠. 그 군대장관이 뭐라고 대답 했죠?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지금 여기에 왔노라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말을 바꾸면 난 하나님 편이다 입니다. 내 편입니까 적 편입니까? 난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에요.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하죠? 나에 게 득이 될까 안될까? 늘 이런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내 기준입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네 편도 적군 편도 아닌 하나님 편이다 입니다. 모든 생각의 기준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넜던 일, 강을 건너서 할례를 행한 일, 여리고 성을 쳤던 일,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적어도 하나님 중심으로 민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준비해야 될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남았지마는 여호수아가 보기에 여호와를 위하 여 행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여호와께서 내게 명한 것이 무엇이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내게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신 이 말 씀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부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이 말씀대로 순종 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순종하지 않아서 벌을 받을 것이냐? 이 두 산이 갈라진 것처럼 이 산에서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적들이 잔뜩 벼르고 있지만 저 적들이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호수아는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 나님만이 나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만이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지 적들에 의해서 좌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호수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변 형편이나 상황을 살펴보았더라면 여호수아가 이런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언가 일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시선을 너무나 많이 둡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생각하기 전에 주변 형편을 먼저 살펴봅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 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밤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께서 밤에 바다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가 그 바다 위로 걸었습니까 못 걸었습니까? 예수 님, 만약에 당신이 예수님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나로 하여금 오라 하여서 내가 걸어서 갈 수 있게 해 주십 - 2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시오 예수님이 오라고 했습니다. 걸었습니까 못 걸었습니까? 분명히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빠졌지요? 왜 빠 졌습니까? 무얼 보고요? 물결을 보고 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아니라 바람입 니다. 바람 때문에 아마 물결이 거칠었나 봐요. 바람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거든요. 주원인은 바람입니다. 무엇만 보고 갔으면 괜찮았을 건데요? 그게 참 어렵습니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무서운 바람이 들 이치는데 그 바람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 보고 갔으면 안 빠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도전을 우리에게 많이 줍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열심히 다니다가 마지막에 예루살렘 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어떤 고난이 있 을지 모른다라고 예언합니다. 다 뜯어말립니다. 바울이 그걸 모르고 예루살렘으로 갔을까요? 본인도 압니다. 지금 이 길을 계속 가서, 예루살렘에 가면 나에게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 르지만 있다는 것은 압니다.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고난의 길이란 걸 알면서도 왜 갑니까? 차라리 가지 말 고 밖으로 돌면서 열심히 전도여행을 하면 되지? 앞으로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할는지 모르지만 이 길을 걸 어가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압니다. 마땅히 자기가 체포되고 고난당할 걸 번연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야 될 이유가 바울에겐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시리라는 것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체포되고 이유없이 몇 년간 옥에 갇혔다가 결국은 죄수가 되어서 로마로 호송되죠. 그 것을 사도 바울이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뻔히 그걸 알면서 왜 갔느냐 말이죠? 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이 열심히 애를 썼던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 해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이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가져 가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을 무릅쓰고도 갔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변 환경이 어떠하든지,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지 간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환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차고 나가는 용기있는 신앙인이 다 되었으면 합니다. 흔히 학생들이 많이 듣 는 것은 고3이 교회는 무슨 교회냐? 이런 얘기 참 많이 들어요. 언제까지 좀 미뤄두라 그러죠? 대학 갈 때까지만 좀 미뤄두라고 그럽니다. 맞는 것 같죠? 아니, 맞습니다. 가장 현명한 길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낭독하는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 을 하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렸을 것입니다. 좀 미뤄두라고요. 언제까지요? 적어도 이 가나안 땅에 있는 적 들을 어느 정도 평정할 때까지는 좀 미뤄두라고 누군가가 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그대로 시행을 해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분류한다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계신다 는 것도 믿고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도 분명한데 그럼에도 지금 시국이 하도 급하니까 자기 열심, 자기 방식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이럴 때 잘 하는 말이 있죠. 하나님 잠깐만 좀 기다려 주십시오. 뭐 할 때까지만요? 내가 이 일을 다 마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대학가거든 열심히 교 회 다니겠습니다. 아니면요? 제가 돈을 많이 벌거든 그 다음에 교회를 위해서 정말 큰 일을 하겠습니다. 아 니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거든, 이사장이 되거나 장군이 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교회로 막 인도하게 되면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심지어 엄마들도 그런 얘기를 잘 하지요. 내가 이 아이들만 잘 키워놓고는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아이가 클 동안만 잠시 좀... 이런 방식이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맞습니다. 그럼에도 이 길은 그렇게 현명한 길은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앙생활에는 역할분담이란 없습니다. 특별히 야 야,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기도는 누가 하고요? 기도는 엄마가 열심히 할 터이 니까. 새벽기도 열심히 갈 테니까 너는 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만 해라. 그 새벽기도가 언제까지 열심이죠? 입시날까지요. 맞습니다. 입시날까지. 확인하러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새벽기도 오실 때 이쪽으로 들어와 보면 확실히 알아요. 입시철이 가까워지면 이쪽에 차가 차츰차츰 늘 것입니다. 그러다가 11월쯤 되면 바글바글해서 길가 에 차 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갑자기 한 대도 없어요. 교회만 그렇습니까? 저 쪽으로 가 - 3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면 복잡한 곳이 한 군데 있죠? 팔공산이던가요? 갓바위도 그런 식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는 그런 방식이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출세해서, 돈 많이 벌 때까지 하나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 있다가... 이건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도 못 되 지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내 방식보다는 하 나님의 방식대로 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위험한 듯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참된 기쁨이 그 속에 있는 것이죠. 여호수아처럼요. 시급한 일을 많이 두고도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이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학생들이 학교 다 그만두고 교회 와서 하루 종일 살아라 하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먼저 생각해서 그 말씀 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은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할 때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 나님께서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야 될 때라고 말씀하시면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회사생활 열심히 하는 것도 성도의 당연한 의무 입니다. 가정을 아주 아름답게 꾸미고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회사, 가정, 학 교 가릴 것 없이 잘 해야 합니다. 일등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득점을 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500명이 있는 학교에 일등은 몇 명 나옵니까? 한 명 뿐입니다. 천명 있는 학교의 일등은 몇 명입니까? 두 명 아니에요? 여전히 한 명 뿐입니다. 일등은 어떻게 해도 한명밖에 없어요. 죽어도 일등해야 된다? 그러지 마십시오. 혹시나 우리 자녀들이 공부를 하는데 꼴찌를 했느냐 일등을 했느냐? 등수 따지지 마십시오. 열심 히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만 따지십시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일등 안돼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등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2등은 몇 사람 나오죠? 여전히 한 사람이에요. 열심히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만 살 펴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 꼴찌를 했다? 그러면 칭찬하십시오.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꼴찌를 하느냐 구요?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오래 있어서 잘 압니다. 열심히 해도 꼴찌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관 심을 가져야지 성적표 받아 오는 날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도 계속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꼴찌를 하 느냐고 물으신다면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충격이 클까 싶어서 참습니다. 다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문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생각해 보고 그 뜻대로 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 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참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사는 경 우 있죠? 요즘 아이들이 가끔 그런 얘기들을 하데요. 내 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끝까지 말 안 해도 아시 죠? 내 버려둬! 이렇게 말하지도 않아요. 막 가는 판에 표준말로 하겠어요? 내비도! 이러더라구요. 이대로 살다가 죽을란다! 이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또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먹는 거나 먹고 잠이나 자고 그 러다가 죽으면 죽을 거야. 이건 짐승이죠.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도 살아가는 방식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 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도웁시다, 선교를 합시다, 이러면 뒤에서 지금 내 먹고살기도 바쁜데 돈이 어디 있어요? 우선 내 가 먹고 살아야죠. 이런 건 인간중심, 혹은 자기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나 중심입니다. 어렵지 만, 정말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해야 합니다라고 마음먹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이죠. 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누구 것까지 챙길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나오면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뭐 죠? 내 먹고 살기도 바쁘고 내 일도 하기 힘든데 남 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느냐? 말이 좀 거칩니까? 짐승 이 꼭 그렇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어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 했던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우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이런 모습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주 찬란하게 빛이 났죠. 그러나 대부분의 역 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이민족에게 짓밟히며 어려운 삶들을 살았던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다급한 시기에 전쟁을 잠시 멈추어 놓고 태평스럽게 이런 일을 했던 것은 여호수아 자신 - 4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뜻일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모세가 명한 대로란 표현 이 두 번 나오고,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란 말이 또 두 번 나옵니다. 말하자면 여호수아가 자기의 생각대로 한 것이 아니고 모세, 자기의 전임자인 모세가 명했던 대로 시행했을 뿐입니다. 모세는 자기 생각을 기록했 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했고 기록해서 여호수아에 게 물려주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전임자 모세가 기록해준 대로, 명령한 그대로 시행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대로 살려면 성경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어 라고 말씀하시는지 궁금하십니까? 혹 주무시다가 꿈에 하나님께서 허연 수염을 기르고 도사 지팡이 하나 짚고 나타나셔서 한 말씀 해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옛날엔 그럴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경말씀을 통해 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 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는지 들 으려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모여서 공부해야 합니다. 설교말씀을 통해서도 들어야 합니다. 주의할 점은 성경말씀, 성경중심이라 말할 때 성경을 열심히 배우라는 뜻도 되지만 강조점은 배우라 에 있지 않습 니다. 어디에 있죠? 말씀대로 살아라 혹은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성경중심이라 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산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어떻게 알지요? 그래서 배워야 하고, 들어야 하고,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지식을 넓히자고 성경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이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서 책을 몇 권쯤 떼나요? 돈은 얼마나 들어갑니까? 영어를 떼는 것과 성경 한번 떼는 것, 어느 것이 쉬울까요? 성경책을 만만히 보지 마십시오. 내 몇 독 했다! 아 그러세요? 그 러면 다 아나요? 골치 아픈 영어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뗐다. 그러면 다 아나요? 아뇨. 몇 번이나 읽으 면 다 알게 될까요? 공부하는 학생이 한 과목을 떼기 위해서 책을 얼마나 읽어야 하는지, 그걸 읽으며 외 우려고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외우며 배우려고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50독을 하니까 성경이 보이고 100독을 하니까 하나님이 보이 더라 이런 광고를 많이 하더니 요즘 뜸하네요. 성경은 읽어도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쭉 읽어가 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그 나름대로 은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더 은혜로운 방법이 있습니다. 이 무거운 머리를 하나님께서 왜 주셨을까요? 이 머리가 참 무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머리를 왜 주셨 을까요? 쓰라고요. 주로 어디에 쓰지요? 해딩하는 데요? 못 박는데. 맞아요. 머리 가지고 못 박는데 쓰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건 안되겠고, 축구하면서 해딩하는데 쓰는 것은 그래도 좀 낫네요. 정말 그런데만 쓸 겁니까? 성경말씀 펴놓고 그냥 주욱 지나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는데 머리를 쓰셔야 합니다. 아무리 머리 써도 안 보이 던데요? 그러면 목사님도 계시고 전도사님도 계시잖아요? 어떻게든지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려고 애 를 많이 써야 합니다. 성경을 과외공부처럼 배웠다는 분 얘기 들으신 적 있어요? 제가 십여년 전에 과외공부 합시다 하고 글 을 썼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과목이 영어는 물론이고 중학생 정도면 수학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성경인데요 성경과외는 무료로 하겠습니다고 했는데도 아무도 안 오잖아요. 성경을 과외공부 하듯이 배운 분들이 간혹 있더라고요. 저는 참 귀하게 봅니다. 그렇게 좀 하셔야 합니다. 제가 대흥교회 있을 때 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건 제 자랑입니다, 정말 많이 가르쳤습니다. 처음 - 5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에 조금 가르쳐 놓았더니 이 녀석들이 재미를 붙여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들이 먼저 나서서 성경만 공부하 는 수련회를 하자는 겁니다. 전 그럴 것 같다는 예상을 하고 6개월 동안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 우리 지난 여름 수련회 같은 수련회를 하면 안될까요? 하더라구요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하고 했죠. 저 혼자서 고등학생들 몇십명 데리고 2박 3일 동안 성경책 한권만 들고 공부하기를 매년 했습 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얘들아, 학교 때문에 빠지는 애들이 가끔 있으니까 걔들을 생각해서 우리도 보충 수업하자 그럽시다 방학 중 자율학습이 보통 6시에 끝나요. 6시에 끝나면 마치고 바로 교회로 옵니다. 그럼 교회에서 저녁 먹고 7시부터 10시까지 낮에는 학교에서 자율학습 하고 저녁에 교회와서 보통 3시간씩 성경공부만 했습니다. 그때 어떤 분들이 와서 이 교회 아이들 참 희한하다 그랬어요. 왜요? 하니까 무슨 아이들이 성경공부하러 교회를 다 옵니까? 이러더라구요. 제가 웃으면서 대답했죠. 우리 아이들은 좀 그래 요. 한 3년을 그렇게 버티고 간 아이들이 서울 가서도 꽉 잡고 있답니다. 여러분, 촌놈들이 서울 가서 그 교회 휘어잡고 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근데 어떻게 된 판인지 서울에 가서 제법 큰 교회인데 그 교회 대학부 회장은 포항대흥교회 출신들이 내리다지 점령을 하고 있답니다. 반 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간 아이들 중에는 그러고도 남을 아이들이 많아 요. 왜요?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교회생활 충실히 한 아이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까 이 촌놈들이 올라가서 서울 애들을 움켜쥐고 살지요.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는 선배들이 1학년 들어왔다고 붙들어 가지고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고 가르쳐 보 니까 정말 뜻밖이더래요. 그래서 저희들끼리 한 얘기가 어떻게 된 게 올해는 4학년 같은 1학년이 들어왔 다. 는 말이 다 나왔을까요? 1학년을 가르치려고 보니까 이게 자기 선배같더라는 겁니다. 이런 아이들이 나 중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런지 저도 상당히 궁금합니다. 그렇게 공부 열심히, 성경 열심히 익히고 간 아이들이 아마 나중에는 정말 멋진 일꾼들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 놓지 않으면 아이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엉뚱한 대로 빠질 가능성이 굉장 히 많습니다.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정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가서 엉뚱한 대로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놓지 않는다면 누구 말마따나 죽 쒀서 남 준다 는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른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라도 대학가면 완전히 애가 바뀌어 버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착하고 안 착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SFC수련회를 참 많이 쫓아 다녔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이 어렵겠지만 수련 회라면 보통 7박 8일이나 6박 7일입니다. 주일이 끼면 7박 8일이 되고 주일 안 끼우려고 발버둥치면 6박 7 일간 수련회를 합니다. 무지막지한 수련회예요. 얼마나 잠이 모자랐으면 그 수련회 기간 동안에 잠 때문에 터진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죠. 수련회 하면 보통 표제가 있지요. 20년도 훨씬 넘은 얘깁니다. 저쪽 진주 어느 지방 인데 수련회 표제가 주의 숯불을 내 입술에 였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시면 얘기가 잘 안되는데 어느 성경본문일까요?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이사야가 내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말했을 때에 천사가 숯불을 가지 고 와서 입에 대니 입이 정하여졌더라. 그리고 난 후에 주여 나를 보내소서 라는 고백이 나왔던 그 본문에 서 표제를 따와서 주의 숯불을 내 입술에 이런 표제로 수련회를 했는데 대회장을 맡은 친구가 얼마나 피 곤했던지 대회장을 맡아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마지막 날 표제 제창을 하는데 대회장이 먼저 선창을 하 면 학생들이 따라하죠. 그래서 먼저 외쳤습니다. 주의 입술(숯불이 아니고)을 내 입술에! 정신이 없는 거죠. 그분이 그 수련회 기간동안 실수를 세 번 했는데 제일 걸작은 하나 더 있습니다. 설교 직전에 목사님 나 오실 때까지 통성 기도를 하겠습니다 해 놓고 자기는 자리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렸 어요. 그냥 목사님께서 나가셔서 설교를 했으면 됐을텐데 통성기도가 너무 길다 싶어서 목사님께서 보니까 엎어져 자더랍니다. 그래서 툭툭 깨워가지고 손짓만 했는데 얼결에 이 대회장이라는 친구가 나와서 하는 말이 이제 목사님 나오셔서 축도하시고 예배 마치겠습니다 한 거죠. 문제는 그렇게 잠 못 자면서도 오로지 성경말씀을 배우는 일에 몰두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SFC출 신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성경을 배우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지. 특별히 학교공부 열심히 해야 할 그 때가 여전히 성경배우기가 좋은 때입니다. 학교 - 6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공부로 바쁜 그 때가 아니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좋은 때가 달리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느라고 너무 여유가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것이 성경이 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 개의 산이 마주 보고 서 있는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다 모였습니다.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 를 드리고 그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빠짐없이 다 낭독했습니다. 이 모습이 마치 무엇처럼 보입니 까?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무슨 모습이에요? 전교인 야외예배 나간 모습이 아닐까 싶은 느낌도 좀 듭니다. 교회 중심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곧 성경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 그런 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바 람직합니다. 혼자서 신앙생활 잘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 어릴 때 많이 들은 이야기인데 숯불을 하나만 집어서 밖에 내 놓아두면 금방 꺼져 버립니다. 꺼져 갈 듯 싶은 숯불을 다시 갔다 넣어 놓으면 피어납니다. 모여 있을 때 아주 화력이 센 불이 되는 것이죠. 따로 떼어두면 어느새 식어 버립니다. 교회에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사는 법을 배우고 결단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힘을 얻고 나가서 가정과 사회와 회사에서 또 학교에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 다가 또 교회에 모여서 힘을 얻고, 나가서 또 열심히 사는 것이죠.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중심이요 성경 중심이요 교회 중심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SFC 헌신예배를 맞이하면 서 학생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학교공부 열심히 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아이들이 학교가서 게으름 피우는 것을 종종 보게 됩 니다. 그건 굉장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일등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꼴찌를 해도 괜찮습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 하라는 얘기입니다. 최선을 다 했음에도 꼴찌를 했다? 그건 본인 책임 아닙니다. 누구 책임 이죠? 아시는 것 같아서 넘어가겠습니다. 학교 공부도 나중에 여러분이 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중요한 때에 중요한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학교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 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기 바랍니다. 요즘은 성경책이 분철되어서 얇은 게 더러 있대요. 두꺼운 성경책은 못 넣고 다녀도 얇은 성경책은 넣어 다니면서 틈틈이 읽으세요. 쉬는 시간에만 읽어도 꽤나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얼마씩 분량을 꼭 정해 놓고 읽으세요. 학교에서 믿는 친구들 모임이 있으면 적극 참석하고, 참석했더니 놀기만 하던데요 하 지 말고, 그러면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성경 읽고 공부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바꿔갈 수 있도록 노력하세 요. 모처럼 오늘 학교 일찍 마쳤다, 시간이 좀 남았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뛰어가는 곳이 오락실이래요. 야! 모처럼 시간 좀 났다, 성경 좀 공부하자, 이러면 너무 꿈같은 얘기입니까? 꿈같은 일이 우리 교회에서는 가 능하기 바랍니다. 전도사님! 우리 모처럼 시간 좀 생겼는데 공부 좀 하면 안될까요? 이런 부탁 받고 제가 사양해 본 적 이 없습니다. 추석날 성경공부 한다고 모였다가 제가 집에 가서 야단 많이 맞았습니다. 왜요? 추석날 고향 안 가고 여기 남은 친구들 있길래 모여서 공부 잘 했죠. 추석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요? 시간만 나면 공 부합시다.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기회를 찾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배운 대로, 성경이 내게 요구하는 대로 산다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자세히 모르고 설령 잘 모른다 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기 바랍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떠나는 아이들에게 제가 종종 들려주던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 결론을 삼으려 고 합니다. 거지와 왕자라는 아이들 동화 아시죠? 왕자를 아주 닮은 거지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떻게 하다보니까 이 둘이 바뀌어 버렸어요. 둘이 옷을 바꿔 입고 장난치다가 그만 떠밀려 가지고 갈라지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거지는 왕자복을 입고 왕궁에 들어가게 되고 왕자는 거지옷을 입고 왕궁 밖으로 밀려났습 니다. 거지가 된 왕자가 거지 소굴에 붙들려 가서 거지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거지가 아니 - 7 -

[2001.04.29]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수아 8:30~35) 고 왕자다. 왕자란 말이야. 네 이놈들! 하니까 어떻게 돼요? 미친 놈 아니야, 이거 그래서 미쳤다고 두들 겨 맞고 갇혀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결국 도망을 칩니다. 도망쳐 나와 가지고도 행색은 거지면서 도 말은 왕자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기사가 어린 것이 저렇게 정신이 가 버려서 참 안 됐다. 나라 도 좀 지켜줘야겠구나 하고 이 아이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자기도 미친 짓 해야 되지요. 아이가 미친 짓을 합니다. 여봐라 하면 멀쩡한 기사가 예 하고 가서 엎드리는 거예요. 하 라는 대로 다 합니다. 그래서 왕자 대접을 해 주는 거죠. 왕자 대접을 해 주다가 어느 날 문득 이 아이가 미친 게 아니고 진짜 왕자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 때문에 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아세요? 궁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하게 되지요. 거지가 자기 대신 매 맞는 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궁중 에 있을 때 내가 잘못하면 매 맞는 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말을 듣고 기사가 아, 이 아이가 미친 게 아니다. 어쩌면 진짜 왕자일런지 모르겠다 는 생각을 가지고 그때부터 진짜 이 아이가 왕자의 자 리를 찾도록 노력합니다. 그 다음 얘기는 생략합니다. 결국 이 기사의 도움을 받아서 왕자의 자리를 되찾아요. 어느 날 왕이 돌아가시고 궁중에 있던 진짜 거 지가 왕으로 등극하려는 그 순간에 거지 왕자가 간신히 거기까지 들어갑니다. 졸지에 왕자가 둘이 됐습니 다. 옥새를 찾는 것으로 판정을 내립니다. 옥새가 없어져서 오래토록 못 찾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온 이 거지가 옥새를 찾아냅니다. 가짜 왕자가 호두 까먹을 때 쓸려고 다른 데 감추어 놓았더랍니다. 옥새를 찾느 라고 난리가 나도 가짜 왕자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거죠. 밖으로 나갔다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받았 고 고생을 많이 했던 거지 왕자가 결국은 자기 자리로 찾아갑니다. 아이들 읽는 동화예요. 저는 그 동화를 읽으면서 이 거지 왕자는 어떤 환경에 갔다 버려두어도 생각은 왕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안 믿어줘 도 자기는 왕자라는 겁니다. 결국 그 생각 때문에 자기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더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SFC운동원 여러분, 어떤 형편에 처하고,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 의 자녀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몇년 동안 공부하다가 얼 마 있지 아니하면 결국은 부모 곁을 다 떠나게 됩니다. 떠나게 되면 여러분들을 잡아 먹으려고 벼르는 이 리떼 같은 이상한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음란하고 말초적인 세파가 더 무서울지 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라는 믿음과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뜻대로만 산다 라는 각오가 분명하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굳건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 - 8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작 여자의 머리는 남자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 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 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 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 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개역, 고린도전서 11:2~16] 년 5월 첫주에 부임을 했으니 1년이 지났습니다. 여러가지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나름대로 너무 감사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던 한 해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전도사나 강도사들을 보면서 잔소리 한 것이 있습니다. 툭하면 기사 하려고 왔어요? 하고 물었는데 전도사로 와서 왜 기사 노릇만 하고 있느냐는 말인데 그런 예를 많이 보았거든요. 그런 것 보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이 교회에 와서 일년 동안 차 운전이라고는 2번 했습니다. 교회 일이란 것이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 도 전도사로 불러서 1년 동안 성경 가르치는 것 외에 거의 다른 일을 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고 마운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협력해서 교회 일을 잘 감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교회에 오기 전에 초등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 본 가장 최근의 경험이 30년 전이었습니다. 고등 학교 시절이었는데 이제 전도사라고 하니 초등부 설교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해야 될 것 같기도 해서 몇 번 하다보니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시간만 되면 다른 집사님들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 다 할까 하는 욕심도 나는데 시간에 너무 쫓기다 보니 무리다 싶고, 중고등부도 들어가 봤는데 제가 하는 게 났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고등부 학생들과 오랜 기간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준비하는데 그렇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서 거의 제가 맡았습니다. 주일 오후에 창세기, 계시록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쉬는 것보다 함께 공 부하는 것이 제게는 훨씬 은혜스러웠습니다. 준비하느라고 시간이 걸리고 머리 아프지만 그 이상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녁 설교까지 맡겨주신 것을 포함해서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웠는지 모릅니다. 전도사가 매주일 저녁 설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더라구요. 한 달에 한 번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더군요. 그럴려면 뭣하러 신학교 왔어? 이런 큰 소리를 칠 수 있도록 해 주신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려야지요. 이것 외에도 감사하 다고 인사드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만 대표적인 것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후 시간에 피곤해서 쉬고 싶을 텐데 와서 함께 공부하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전 도사를 전도사로 인정을 해 주는 귀한 분들이기에... 아울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잔일들을 열심 으로 맡아 해 주시는 집사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1년을 보내면서 감사할 일만 많았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합니다. 1년을 맞으면서 무슨 설교를 할까 생각 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결론은 1년 전에 했던 그 설교를 다시 한 번 했으면 좋겠다라는 것 이었습니다. 전도사로 부임해서 최초로 행한 설교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사는 모습들을 보면서 부부간의 근본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기만 하면 거의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해결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경의 원리를 떠나 살기 때문 에 온갖 문제가 다 생기고 해결책 없이 가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너지는 가정이 너무 많아요. 성경말씀에 예방약, 치료약이 다 들어 있습니다. 흔들리는 가정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습 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예방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저희 형제가 5남 1녀인데 그 중 걱정스런 형제가 절반입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살면 그런 문제가 쉽게 - 1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해결될 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같은 설교지만 또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1년 전의 설교(말씀대로 삽시다)를 그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방향을 바꿔가면서 말씀을 드리 지만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설교 제목을 여자의 머리는 남자 라고 붙였는데 요즘처럼 남녀 관계가 미묘한 때에 조심스럽습니다. 잘 못했다가는 밉보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되겠다 싶은데 이런 말을 남겨 놓은 분이 있으니까 책 임은 그 분에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 유행하던 [간 큰 남자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어떤 남자가 간 큰 남자지요? 늦게 들어와서 밥 달라고 하는 남자. 그 정도를 간 큰 남자라고 했으니 옛날 어른들이 들으면 말세다 말세야 할 겁니다. 나갔다가 식사시간 지나서 들어와서 밥 달라는 남자를 간 큰 남자라고 하였지요. 심지어 이사 가는 날 부인이 이삿짐 나르고 열심히 일 시키고 있는데 남편은 어디 가 있어요? 조수석. 왜요? 빼 놓고 갈까 봐서... 혹시 버려두고 갈까 봐서 일찍 조수석에 가서 앉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도 바울은 옛날이니까 그랬겠지요. 간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한 번 봅시다.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8절 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자 리에 와서도 담대하게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 간이 상당히 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 도 바울은 여자를 굉장히 천하게 여겨서 여성 운동을 하는 분들이 바울에게 비난을 많이 퍼부었습니다. 어 떻게 보면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는 여자를 무시한 듯한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면서 가장 복음의 덕을 많이 본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여자입니다. 그 다음은 아이 들입니다. 노예들도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권에 관심있는 분들은 사도 바울이 노예 제도를 인정했다고 비난하지요. 노예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했지요? 그대로 있으면서 주인을 잘 섬기라고 했습니 다. 그런 구절을 보면 바울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일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 이 여자를 무시한 듯한 말을 많이 했는데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여자의 권위가 높아졌고, 노예를 인정 하는 교훈을 담은 성경이 전해지는 곳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말 한마디만 듣고 하고자 하는 본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을 비난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어리석 은 짓입니다. 바울은 결코 여자를 깔보았거나 노예는 영원히 노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바울에게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한 가지 씩 답변을 한 편지입니다. 7장부터 결혼문제, 독신, 이혼, 재혼, 우상에게 받쳐진 제물, 은사에 대해서 하나 씩 답변합니다. 오늘 본문 11장의 내용은 공중 예배 시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을 했 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 마 지중해 지역은 다 그랬던 것 같아요. 머리에 작은 수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중동지역의 여자들을 보면 온 몸을 다 가리고 얼굴도 거의 가리고 눈만 내 놓고 다니는데 그 정도는 안되어도 지중해 주변, 헬 라 지역의 여자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지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자들의 몸매를 나타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시대라서 가급적이면 많이 벗고, 짧게 입고, 몸에 달라붙게 입고 그래서 몸매를 드러내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가급적이면 다 가렸습니다. 다 가리고 남은 부분이 머리였지요. 그러니까 여자다움이 드러나는 유일한 부분이 머리인데 이것마저 좋지 않게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최대한 가릴려고 애를 썼습 - 2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니다. 그것은 동, 서양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여자들이 외출하려면 장옷을 덮어쓰고 눈만 내놓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린 주된 원인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용감하게 이거 안 쓰겠다는 거예요. 주로 외모에 자신이 있는 부유한 상류층에서 내가 꼭 이래야 하느냐? 고 반발을 한 것입니다.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귀부인들이나 우리가 그 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어떻 게 보면 당시의 신세대들이 얼굴 가릴 필요가 없다고 벗고 예배에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지금 보면 별일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게 큰 충격이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전국이 시끄러웠습니다. 경찰이 자를 들고 다녔어요. 왜요? 무릎 위 몇 센티까지는 안된다고 규정하는 바람에 경찰이 자를 들고 다니다가 치마 짧은 처녀만 보이면 길 이를 쟀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파마를 처음 하기 시작 했을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어떤 사모님은 저질러 놓고 보자 해서 파마하고 들 어 왔다가 목사님께 쫓겨 나기도 하고... 난리가 났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때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은 그만한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실감이 안 나지만 우리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텔레비전에 어깨 다 드러내고 야하게 나 오는 모습으로 왠 처녀가 예배하러 왔다고 칩시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텔레비전 쳐다보듯이 쳐다보고 있을 겁니까? 나둬야 됩니다. 나[놓아]둬야 된다고 이야기 한 분은 엉큼한 데가 좀 있지요? 예배만 아니라면 저도 그냥 두고 싶긴 한 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한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너무 야한 차림으로 왔는 데 어떻게 할까요? 이런 질문이었단 말입니다. 벗은 사람도 아마 할 말이 있을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보다 더 했는데요? 그 문제에 대해서 11장에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대답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우선 칭찬부터 시작합니다. 2절에 보면 야단을 칠 때 치더라도 우선 칭찬부터 시작합니다. 참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좀더 칭찬하기에 익숙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 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낯이 간지러워서 칭찬을 잘 못하잖아요. 이쁜 사람을 보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은 잘 안 나와요. 특별히 열심히 칭찬을 해야 합니다. 정 칭찬할 게 없으면 거짓말을 하더라도 칭찬하는데 익 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하여 준 대로 잘 지키는 것 에 대해서 칭찬을 하면서 은근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잘 따라주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라는 말이 나오죠? 여자들이 취해야 할 행동인데 남자들이 머리 에 뭔가 쓰고 예배에 왔다고 생각을 해봐라 그것이 얼마나 보기에 이상하겠는가 하는 이야기지요. 만약에 제가 이 자리에 나오면서 브리지도 좀 넣고, 이쁜 것 하나 꽂아 가지고 여기에 나왔다면... 역으로 생각을 해 보라는 겁니다. 남자가 쓰고 나온 게 이상하면 거꾸로 여자가 안 쓰고 나오는 것은 그만큼 보기가 싫은 것 아니냐는 거죠. 간접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신대원에서 만난 신세대 전도사에게 염색했느냐고 물었더니 무식하게 염색이라고 안 하고 브리지 라고 한답니다. 전체를 안 하고 한 줄씩 염색 한 거 말이지요. 그것을 보고 요즘 신세대 전도사 나왔구나 했는데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을 하더니 까맣게 해 가지고 다녀요. 그 브리지 어떻게 했느냐 하니까 하고 싶 어 죽겠는데 차마 못하겠어요 하더라구요. 지금도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남자가 남자답지 못한 모습 볼 때 답답하지요? 그러면 여자는 여자 다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4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단호하게 책망을 합니다. 어느 구절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보세요. 6절에 쓰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깎아 버려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이 깎아 버리라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죠. 깎아 버리면요? 보기 싫은 것을 훨씬 넘어서서 있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녔던 그 당시 사람들은 질이 좋지 못하거나 창녀였다고 합니다. 6절은 단호하게 책망하는 이야기입니다. - 3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창조의 원리를 들어가면서 차근차 근 설명해 나갑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실 때 에 주권적인 사역을 남자에게 위임해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통치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말씀을 하신 거지요. 지금도 그러냐구요? 그렇게 대답하기가 조금은 곤란하지요. 처음에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범죄한 이후에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불행이 야 기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시고 맡기신 사명이 있는데 감당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표현한 말에서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에 특별히 여자에게 주 어진 임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창세기는 돕는 배필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돕는 배필이 조수라는 뜻입니까? 돕는 배필에 대해서 말은 안 하지만 남자들이 오해를 많이 합니다. 당신은 나를 돕는 사람이야.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돕는 배필이란 용어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에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조수가 필요하면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힘있고 능력있는 짐승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 중에 똑똑한 놈 불러다가 시키면 되잖아요. 굳이 여자를 만들어서 그를 가리켜서 돕는 배필이라고 말하는 의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구약을 잘 살펴보면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도우시는 분 이라고 번역되어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 그 도우 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고 말할 때 그 도우시는 분 하고 돕는 배필 은 같은 단어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말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서 많이 사용되었다 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조수라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돕는 배필의 의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수의 의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편 54편 4절, 시편 58편 7절, 신명기 33장 29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 는데 전부 돕는 배필과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가리켜서 돕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만약에 그 표현을 남녀 관계에 대입을 시키면 어쩌면 여자는 남자에게 하나님과 같은 위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돕는 배필로서 그 정도 위력을 가졌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잘 하느냐 못 하느냐 에 따라 남자가 죽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조종합니까? 여자가 남자를 조종합니까? 남 자가 여자를 조종할 때는 주로 속임수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럴 때가 많아요. 여자가 남자를 조종 할 때는 여자가 여자의 위치에 제대로 서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남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조종이 가능 해 집니다. 바보 온달을 잘 조종한 평강공주와 비슷한 이야기는 참 많아요. 단순하게 조수처럼 뒷치닥거리 나 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 아니라 완전하지 못한 남자를 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 다. 남편이 부인을 잘 격려해서 위대한 인물로 만든 예가 설마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여자의 능력만큼 크 지는 않아요.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해요. 남자는 머리다. 그러면 여자는 뭐죠? 머리카락. 머리카락요? 전 이런 대답을 상상도 못했는데...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자를 그렇 게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은 남자는 머리고 여자는 목이라는 것입니 다. 목의 기능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머리를 지탱하는 일과 머리를 움 직여 주는 기능입니다. 머리가 스스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목이 돌려요. 남자가 머리면 여자는 목이 다?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머리가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목이 합니다. 목은 머리를 받쳐주기도 합니다. 높고 낮은 의미가 아니라 목이 없이 머리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으며 목이 도와주지 않으면 머 리 혼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결코 혼자서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말할 때에 성경의 머리는 위에서 군림하다 라는 뜻이 아니고 머리가 몸을 위해 서 희생을 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면서 그 머리가 교회를 위해서 죽으 셨습니다. 몸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머리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생각하시는 남편 이라면 아내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아내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래도 바울을 가리켜 여자를 - 4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얕잡아 본 간 큰 남자라고 비난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처음부터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쓴 것은 아니었지만 쓰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전 통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전의 풍속에다 성경적인 의미까지 보태서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죠. 옛날 고린 도 교회의 풍속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와는 엄밀한 의미에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예배드릴 때 머리에 꼭 써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너무 문자적인 것에 매여서 그런 것이지요. 이 말씀의 의도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배에 참석하실 때 가능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참석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특별히 이 구절을 보면서 감동이 되는 것은 머리에 쓰는 것이 좋을까요 안 쓰는 게 좋을까요라는 물음 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렇게 해답을 찾아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성경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을 듯한 질 문에 성경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는 과정에서 주목하고 싶은 다른 한 가지는 남자와 여자는 좀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입니 다. 어떤 점에서 다르죠? 요즈음 현실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어디가 다르냐는 문제 때문에 계속 싸우고 있 습니다. 남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데 대하여 여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와 다르지 않다고 해 서 싸움을 걸고 최근 들어서는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싸워서 남자와 여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즘 남녀관계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남녀관계 때문에 재미없는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성희롱 한번 잘못하면 벌금을 5,000만원 내야 한다, 이런 이런 것은 성희롱이다, 이런 내용들이 관보에 나 오고 신문에 나오고 그럴 때입니다. 같이 근무하던 여 선생님께 나 요즘 돈이 좀 없는데... 하면 여 선생 님들이 말끼를 잘 알아들어요. 돈 좀 벌게 해 줄까? 하면서 자, 5,000만원이다. 하면서 손을 내밀어요. 한번 만졌는데도 신고 안 하면 5,000만원 번 것 아니냐는 말이죠. 사이가 좋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쳐다만 봐도 본인이 수치감을 느꼈다면 성희롱방지법에 걸린대요. 남 선생님은 여학생들을 함부 로 대해서도 안되고 함부로 쳐다봐도 안되고 이쁘다는 말도 잘못하면 안됩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 대 학 생이 아니고 남자 대 여자가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선생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무서워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여자와 남자가 열심히 싸워온 대가인데 부작용이 많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 게 살아가면 남자도 행복하지 못하고 여자도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인정하는 차이를 우리도 인정해야 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대표로 세웠고 여자를 돕는 배필로 세웠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 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같은 말이라고 이해합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못나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이루기 위한 소중한 교훈입니다. 어쨌든 아내되는 분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 가셔야 합니다. 우리 남편 디 디해서[어리숙하다] 안되겠다 내가 어떻게 해 봐야지 하고 앞장 서서 밀고 나가지 마십시오. 효과는 있을 듯 싶지만 조금 길게 보면 분명히 두 분 다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요? 모든 기계도 사용설명서에 따라 사용해야 수명이 깁니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도록 되어있는 것을 그렇게 사용하면 무리가 따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했는데 이것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몸을 버리신 것처럼 아 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남편이 할 일이 더 어려워요. 부부가 싸우는 이유 중에 가장 흔 한 게 뭐죠? 양말 벗을 때 뒤집지 말아요. 그것은 좀 큰(?) 문제지요! 집에서 싸우는 이유는 대체로 작은 일로 싸웁니다. 그럴 때 두 분이 따로 생 각하세요. 아내 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남편을 머리로 세우셨고 순종하라고 했는데 라는 것을 먼저 생각 하고,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께서 목숨 버려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럼 목숨까지 버려야 되는데 양말 한 짝 가지고 싸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면서 싸우시면 됩니다. 그러면 싸움도 그렇게 크게 가지 않습니다. 쉽게 해결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그 생각을 - 5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늘 갖고 계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남편치고 아내를 사랑 안 하 는 사람이 어디 있나? 누가 그렇게 따질 수도 있습니다. 다 사랑하지요.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는데요? 사랑 받는 사람이 사랑 받는구나 하고 느낄 만큼 사랑하셔야 합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그런 말 많이 하시죠? 받는 사람은 받은 것 같지 않은데 주는 사람은 주었다 는 거예요. 내 기준과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사람이 확실하게 받았다고 느끼게 사랑하셔 야 합니다. 분명히 사랑했는데,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부인이 아니 라고 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은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고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결국 성품, 사랑하는 방법 이 다르고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 겁니다. 다르다는 것은 싸울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실컷 싸우고 난 뒤에 뭐 남자가 그런 일로 그렇게 성질을 내고 그러냐?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대단한 걸로 생각하신 모양인데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이런 걸 누가 노래 제목으로 만들었지요? [슈퍼맨 의 비애]. 남들이 다 자기를 보고 슈퍼맨으로 생각하는데 본인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남자는 으레껏 용감하다? 실제로 안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구하면 이건 스트레스입니다. 남자가 머 째째하게... 본인은 원래 그렇게 째째한데 여태까지 안 그런 척 살아왔단 말입니다. 이게 소위 슈퍼맨의 비애입니다. 남자를 너무 슈퍼맨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남편만은 안 그렇다? 꿈 깨세요. 두드리면 깨질 수 있는 그릇임을 잊지 마세요. 어떤 방식으로든 격려하고 용기를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씩씩한 사나이 라고 너무 안심하지 마세요. 순종함으로 남편을 남편답게 세우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남자들이 부인에게 가끔 하는 얘기가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을 해봐라 하지요. 그런 말 쓰지 마 세요. 중,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켜 보면 남학생과 여학생이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과목이 몇 과목 있습니 다. 영어, 국어는 여자가 월등히 잘 하고, 수학, 과학은 남자가 잘 합니다. 수학, 과학을 어려워한다는 것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다는 뜻입니다. 영어, 국어 잘 하는 여자들을 상대로 입으로 싸워 이길 남자는 그 리 많지 않아요. 이런 차이를 미리 인정하세요. 하나의 예에 불과 합니다마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십시오. 여자가 손이 커서 있는 대로 다 퍼주고... 잔소리해서 고쳐 보셨어요? 잘 안 고쳐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구요? 내버 려두십시오. 살림을 다 걷어 먹더라도 부부 사이가 원만한 게 더 좋습니다. 걷어 먹다 없으면 못 걷어 먹겠 지요. 괜히 잔소리 해봤자 사이는 사이 대로 나빠지고 살림은 어차피 다 거덜날 텐데 부부 사이라도 제대 로 남아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차라리 해결책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선배는 여자인데 참 당당하고 멋져요. 그런데 선배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것을 옆에서 보니까 문제가 있어요. 앉아 있는 자세가 좀 비스듬 했나봐요. 그러니까 남자가 좀 단정하게 앉아라. 속옷 다 보인다 하니까 이 친구가 뭐라 하느냐면 내가 너희들에게 여자여야 할 필요가 뭐 있느냐? 어떻게 보 면 괜찮은 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저래 가지고는 좀 곤란하겠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결과는 간단합니 다. 남자들이 이 여자 선배하고 친구로는 지내지만 연인이 되지는 않는 겁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책 보신 분 있지요?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습니다. 이거 잘 될까요? 얼마나 차이가 많겠습니까? 이런 책도 한번쯤 읽어보세요. 여성과 개의 천국이 라는 미국에서 1월에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책 제목이 항복한 아내 라고 합니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 어 나왔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은 아내여 남편에게 항복하라 입니다(그린북, 7800원). 여권운동과 이혼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간단하게 내용 소개한 것을 보았 습니다. 카드빚을 지고 연체료를 내는 남편을 보고 욕을 했더니 결과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작 전을 바꾸어 TV 좀 그만 보고 집안 일 좀 도와 달라 고 입이 달싹거리는 것을 참고 당신이 그립다 고 했 더니 사람이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저자가 이런 원리를 성경을 보고 알았는지 오랜 세월 아픔을 겪은 지혜 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런 현상이어야 합니다. - 6 -

[2001.05.06] 여자의 머리는 남자 (고린도전서 11:2~16) 남자와 여자는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생각대로 뜯어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고쳐지기도 하지요.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까? 남자가 여자에게서 났습니까?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30점짜리 답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그것도 30점밖에 안 되겠는데요.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70점은 되겠지만 만점은 아닙니다. 아, 여자는 남자에게서, 남자는 여자에게서,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역시 열심히 성경공부하시는 분이 다르네요. 잘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입 니다. 역할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사고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난 것 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점을 기억함과 동시에 여자에게서 났다는 점을 기억하고, 여자는 하나 님에게서 났다는 점과 동시에 남자에게서 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차이와 동등함을 인식하 면서 말씀대로 살며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바른 신앙을 전할 수 있고 어른들을 바르게 섬길 수 있으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어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부부관계가 제대로 정립되 지 않으면 다른 날들이 아무리 있어도 헛일입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아내며 남편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 32절에 보면 부부 관계란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를 허무는 것은 곧 교회를 허무는 것이란 뜻이 됩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결코 가볍 게, 함부로 대할 사이가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7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출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 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할지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 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들 섬 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특별 병거 육백 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 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 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개 역, 출애굽기 14:1~14] 애굽기 14장 14절은 외워 둘만 합니다. 워낙 간단하고, 분명해서 외우기가 참 좋습니다. 여호와께 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 도 됩니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가훈으로 새겨 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이 어떤 환경에서 주어졌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형편에서 이런 말씀이 주어졌는지 생각도 안 하고 덮어놓고 이 구절만 외우면 행복하게 살기보다는 집안 살림 다 떨어먹기 쉬운 구절이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 이런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사건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 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출애굽이라는 역사가 있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쯤 전에 이것이 미리 예고 되었을까요? 야곱이 자식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갈 때에. 예, 야곱이 자식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 네 후손들이 반드시 애굽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셉이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을 때 애굽에 가매장을 해두었다가 나중 에 너희의 후손들이 나갈 때 내 해골을 메고 나가라. 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해골을 출애굽할 때 메고 나갑니다. 정식 매장을 할 때까지 몇 년을 메고 다녔을까요? 해골을? 광야 길을 다 메고 다녔으니까 근 40년을 메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에 요셉의 해골을 메고 다녔다는 묘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왜요? 출애굽이 나중에 일어난다는 것을 요셉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이 100점짜리 답은 아닙니다. 야곱이 알기 전에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후손이 애굽에 가서 이런 이런 일을 겪고 난 후에 4대 만에 나오리라고 하 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출애굽이라는 역사가 우연하게 생겨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찌감치 계획을 하 셨고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일입니다. 이 일을 바로는 최대한으로 버티어 본 것이지요. 바로가 하나님의 뜻에 버티고 저항을 하면 할수록 피해 는 컸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이 내렸습니다. 마지막에 장자가 다 죽는 벌까지 받고서야 이스라엘 백성 들은 결국 쫓겨나다시피 애굽에서 나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 - 1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하심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발해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이동해 갑니 다. 그런데 14장을 자세히 보시면 참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1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돌쳐서라는 말을 사전에 찾 아보면 잘 안 나옵니다. 제가 찾아 본 사전에는 이게 나오지가 않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시면 확인 을 해야 하는데 확인 안 하고 지나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죠?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쉽게 설명을 하면 돌 이켜서 라는 뜻입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서, 혹은 돌아서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곧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 습니다. 좋은 길을 놔두고 하나님께서 우회하도록 하셨습니다. 우회해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또 방향을 틀어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비유컨 대 애굽을 포항으로 치고 가나안 땅을 경주 쪽이라고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길을 따라 경주쪽으로 똑바로 나가면 아주 좋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향을 틀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 가지 말고 저 오천 쪽으로 가라는 거예요. 대군이 그리로 움직여 갔습니다. 방향이 약간 이상하지만 돌아서 가긴 갈 수 있겠다 싶은데 하나님께서 방향을 또 틀어서 그리 가지 말고 송도 바닷가(포항)로 가서 거기서 진을 치라는 겁니다. 이스 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만 굉장히 이상한 명령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면 3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제 그들이 그 땅 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할지라 아득하여라고 하는 표현이 좀 애매합니다. 목적지 없이 방황하 고 있다는 의미를 이렇게 번역해 놓았는데 잘된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지 없이 방황하다가 드 디어 광야에 갇혀 버렸다고 바로가 생각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된 말들 중에서 돌쳐서 라는 말이나 그 다음 그 땅에서 아득하여 란 말이 이해하기 도 좀 애매하고 또 썩 그렇게 잘된 번역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만 현대 어법에 맞게 고쳐놓은 개역 성경 개정판이 나와 있습니다. 혹시 참고하실 분은 그런 성경을 참고 해도 좋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이 왜 이렇게 말이 좀 현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또 어렵게 번역이 되 었나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조금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이 지금처럼 이렇게 보편화 되고 모든 한 국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게 한 일등 공신은 성경책입니다. 적어도 몇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 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글을 잘 읽지 못했습니다. 글을 열심히 배운 이유가 성경을 읽기 위함이었습니 다. 한글을 배울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위해서 한글을 배웠고 성경 때문에 한글이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한글 보급의 일등공신은 성경입니다. 한국의 표준말을 정할 때에 성경공회와 협력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그것을 거절한 것이 조금 안타까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성경이 이렇게나마 번역이 되었을 때에는 성경이 가장 앞서나가는 책이었죠. 여기에 맞 추어서 한국말들이 다 따라왔어야 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성경은 원본 그대로 있고 우리말은 다소 달라지면서 시대에 뒤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라도 번역이 되면서 우리 한글을 보급하 는데 아주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어서 자부심을 좀 가지셔도 됩니다. 프랑스를 옛날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죠? 불란서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들이 들으면 우리 아빠 참 무식하 다 프랑스를 왜 불란서라고 그래? 애들이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식한 게 아닙니다. 옛날에 는 한자로 옮기다 보니까 그렇게 불렀거든요. 예를 들어서 네델란드를 뭐라고 불렀죠? 화란이라고 그랬습니 다. 요즘 아이들한테 그런 말 쓰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 좀 구식이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 나 예전에는 그런 말들을 사용했습니다. 조금 어려운 것을 한번 물어봅시다. 덴마크를 뭐라고 불렀는지 혹 아세요? 이건 조금 어렵습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이 덴마크를 정말 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거 거꾸로 한번 맞춰보세요. 오지리는 어느 나라일까요? 오스트레일리아는 호주니까 오스트리아겠는데요. 어른들이 이런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 아빠 참 이런 얘기하는 아이가 잘못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번역 - 2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해서 쓰다가 지금은 원어와 가깝게 번역한다는 원칙에 따르느라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혹시 이런 표현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이 왜 이 모양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이 성경이 더 좋은 말과 아름다운 말로 번역이 되어야 하긴 합니다. 그러나 한글에 끼친 공헌이 컷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런 표 현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부심을 좀 가져도 됩니다. 옛말이라서 어려우시더라도 꼭 뜻은 알고 보셔 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해서 결국은 바닷가에 진을 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바로의 궁에서는 신하들이나 참모들이 바로를 부추겨서 저 아까운 노예들을 다 보낼 수 없습니다. 도로 잡아옵시다. 옆에서 막 부추겨 대고, 바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저 바보 같은 자식 들, 가나안으로 갈려면 똑바로 갈 일이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저 바보 같은 것들을 보냈다는 것이 너무나 원통한 겁니다. 그래서 도로 잡아오려고 군대를 보냅니다. 바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냥 보내고 나니까 바로가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저들이 나갈 때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8절 뒷부분을 한번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라는 말이 있 습니다. 여기 담대히라는 말을 다르게 번역을 한다면 1 하고 난 밑에 보면(난하 주) 다시 설명을 해 놓았는 데 높은 손으로 라는 표현이 있죠. 높은 손으로 나갔다? 말을 바꾸면 손을 높이 들고 나갑니다. 손을 왜 높 이 들고 나가요? 팔 아프게? 손을 높이 들고 찬송을 부르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신이 나서 나간 거죠. 그걸 뒤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바로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특별 병거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을 합니다. 추격을 할 때, 병거를 인솔하는데 보면 장 관들이 다 거느렸더라는 표현이 7절에 또 있습니다. 여기에 장관들이라고 번역된 말이 그러면 문교부 장관 도 나오고 농수산부 장관도 나와 가지고 병거를 인솔했다? 이것도 좀 이상하죠? 여기에 장관이라고 번역된 말 역시도 군대 지휘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각 부대 지휘관들을 총 동원해서 추격에 나섰더 라는 얘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우리가 애굽에서 나간다 해서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면 서 큰 감격에 벅차서 나갔는데 얼마 가다 보니까 바로의 군대가 추격을 해온단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11절부터 원망을 시작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유명합니다. 일만 생기면 원망하고, 대들고 그랬었죠. 여기서부터 터져 나오는데 11절에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 에게 하느뇨 그렇게 원망을 합니다. 일이 좀 잘 돼간다 싶으면 좋아가지고 그렇게 찬양도 하고 감격하다가 조금 어려우면 내가 뭐라고 하더냐 봐라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꼭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모세는 믿는 데가 있었을 겁니다. 모세의 신앙이 많이 자랐습니다. 13절에 보니까 백성 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이런 말로 백성을 위로합니다. 그 끝에 나온 말이 여 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는 말씀입니다. 모세에게도 고민이 참 많 았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했을 때에 모세가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모세 자신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무슨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지 하는 생각밖에 전혀 없습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원망할 때 나도 모르겠다 이 소리는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가만히 있어 봐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런지 기다려 보자 그런 유의 의미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백성들 몰래 돌아서서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모양입니다. 15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하는데 이게 아마 모세의 갈등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뭔가 하시기는 분명히 하실텐데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백성은 원망해 댑니다.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나 마저 그럴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도, 장로님도 때로는 성도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야 마음 놓고 이래서 되겠습니까 할 수 있지만 설마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앞장 서서 가시다가 우리처럼 차마 그러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그 길은 때로는 어떤 일이 생겨날지 알 수도 없고 하 - 3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나님을 믿고 나가다 보면 이런 답답한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뛰어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 방식대로 그냥 자버리면 됩니다. 여기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거든요. 본문 배경이 그렇습니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좀 더 살펴보길 원합 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사형통하고 편안한 길은 절대 아닙니 다. 예수 믿고 복 많이 받았죠? 아멘. 아멘은 아멘인데 좀 희미하네요. 별로 복을 못 받은 거 같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다 했는데 내가 예 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좌악 풀려 나가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예수 믿고 하나 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이 내 눈에 만사형통한 길은 절대로 아닙니다. 때로는 불평불만도 얼마든지 터져나 올 수 있는 길이란 것을 기억합시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만사형통 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성경을 한번 봅시다. 하나님 만나서 만사형통했던 사람 있어요? 없습니까? 바 꿔봅시다. 하나님 만나서 고생길로 들어갔던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누구요? 요셉이요. 네, 요셉도 고생했죠. 또요. 바울요. 바울은 예수를 만나서 자신은 굉장히 기쁘다고 했는데 그 고생 말로 다 못합니다. 바울. 또 있어요? 누 구요? 욥요. 예. 욥도 하나님 때문에 고생을 참, 엄청나게 한 사람입니다. 또 있습니다. 야곱요! 대답을 잘 안 하시는 데요. 아는 사람 아무나 부르면 거의 다 맞습니다. 내용도 모르는 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사람 이름을 불 러대면 거의 다 맞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 초등부 선생 님 중에 설교하면서 사람 잡는 어부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예수님을 따라가서 제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지요? 아브라함을 왜 말하지 않나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는 가나안 땅,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죠?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오죽하면 마누라 뺏기고 자기 죽을까 싶어서 누이라고 속여 가면서 한번도 아니고 두번 씩이나... 가나안에서의 삶이 그렇게 행복하고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 다. 하나님을 만나서 모두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겪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 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자라가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 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자기 부모의 하나님, 자기 할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을 죽도록 고생했는데 죽을 때 다 돼서야 깨달은 바가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하신 하나님 요? 지키시는 하나님. 조금 비켜갔습니다. 자기는 그것을 몰랐어요. 평생을 고생하다가 죽을 때가 다 돼서 돌아보니까 아하, 이분이 나의 하나님이었구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그 험악한 세월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기르고 계신 세월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편안하고 정말 고통없이 잘 먹고 잘 살기를 희망할 때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예수님 말씀 따라 사는 길은 그렇게 만사형통한 길만은 아니더라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편안한 길보다 조금 힘든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그런 자세가 필 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따른다면 나 스스로 이 어려운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때 로는 필요합니다. - 4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처녀가 시집 갈 때 제일 안 좋은 신랑의 조건이 뭐죠? 가난하고 장남. 혹시 집사님! 가난하고 장남 아니셨어요? 맞아요. 바로 그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제 선배 중에 안동 있는 분인데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 이가 서른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난 사람인데도 결혼을 못 했습니다. 저보다 훨 씬 일찍 장로가 된 분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욕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 분을 욕한 게 아니고 그 분이 있는 교회 처녀들을 보고 하는 거지요. 왜요? 맏이인데 가난하고 동생들이 많다고 아무도 시집갈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가서 몇 년만 고생하면 저런 신랑감이 없는데 신앙, 신앙 해놓고 시집갈 때는 저것 봐라 아 무도 안 간다 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다고 하면서도 막상 현실적으로 부닥치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편안함을 더 찾는 겁니다. 결혼 이야기를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 입니다. 매사에 이런 식이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직장에서 힘든 일을 내가 하겠습니다. 라고 나서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것이 옳다고 여겨질 때 어려움이 보인다 해도 그 길로 과감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 는 방법입니다. 잘 먹지 못하고 환경이 좋지 못할 때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밖에 매달릴 곳이 없었 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면 하나님보다는 의사를 먼저 찾고, 병원을 먼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좋으면 하나님을 그렇게 잘 찾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보다는 다른 것을 더 의지할 수 있는 이런 상황 이 신앙적으로는 아주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넉넉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우린 그렇게 부 유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난하게 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돈 벌지 말라는 뜻 아닙니다. 벌 수 있으면 최대한으로 벌어야 합니다. 단 부 자처럼 살지 말자는 뜻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왜 가난하게 살아요? 좋은 데 쓰면 되죠. 부자가 되긴 되어 야 하지만 자신을 위한 부자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우 리가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은 부자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의 식한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되겠죠. 예전에 중학교 3학년짜리 하나가 시집을 안 간데요. 중학교 3학년짜리가 시집을 안 간다고 하면 웃고 넘 길 일이지 그걸 붙들고 시집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선생도 참 이상한 선생님입니다. 웬만한 경우에 는 안 그럽니다. 그런데 걔는 아주 예리한 아이입니다. 특별히 눈 여겨 볼 만한 아이였는데 얘가 안 간다고 할 때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느꼈어요. 조용할 때 불렀죠. 왜 안 갈 거냐니까 답은 간단해요. 시 집가면 귀찮을 것 같대요. 그럼 넌 편안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겠네. 편안하게 살고 싶대요. 그래서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설명을 시작했는데 2시간만에 제가 설득을 시켰습니다. 시집가겠다는 대답을 듣고 얘기를 마쳤거든요. 중학교 아이 앉혀 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가 장 행복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을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똑똑한 아이입 니다. 2시간 이상 걸렸어요. 지금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편안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행 복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군에 갔다 오신 분들은 잘 알지요? 모두가 훈련을 나가는데 무슨 꾀병을 부려가지고 혼자 부대에 남아 딩굴딩굴 구르고 있으면 깨소금 맛입니다. 다들 지금 죽을 고생하고 있을텐데 혼자 부대 안에서 딩굴고 놀 면 맛이 좋지요. 그러나 그것이 평생에 손해입니다. 죽을 고생하고 난 다음 목청이 터져라고 군가 부르면서 돌아와서 그 동안 있었던 오만가지 고생담 털어놓고 떠들어 댈 때 이 친구 뭐합니까? 뭐해요? 그것이 결코 신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제대해 가지고요 야! 내가 군대에서 어땠는지 아느냐? 하고 열심히 뻥튀기를 합니다. 남들은 평생 이야깃 거리를 만들고 있을 때 이 사람은 평생 거짓말 거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이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평탄한 길이 아니 - 5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라 이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길이란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길은 바 로가 볼 때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불 신자들이 보기에는 믿는 사람들의 삶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야! 저 놈들 사는 것 보면 참 희한 하다, 이상하다. 그런 말을 여러분들이 좀 듣고 사셔야 합니다. 나 보고 아무도 안 그러던데? 이상한 삶을 안 사니까 그렇죠. 앞서 갔던 위대한 선조들의 삶을 잠깐만 살펴 보십시오. 대부분 그랬습니다. 토마스 목사라는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제대로 전도 사역을 감당치도 못하고 대동강변에 왔다가 순 교를 했습니다. 그 분이 태어난 고향이 포항 근처의 신광쯤 될까요?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 회당보다도 작아요. 영국이라는 그 큰 나라의 시골 조그마한 구석에 있던 젊은 청년이 그 당시 알려지지도 않은 미개한 나라, 땅 끝에 있는 조그만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젊은 나이에 떠났습니다. 주변 사 람들이 보고 뭐라고 했겠어요? 안 믿는 사람이 정상으로 봤겠습니까? 믿어도 좀 적당히 믿지 저 친구 완전 히 미친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살자는 것은 아니 지만 신앙대로 산다고 한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 정말 좀 이상한 사람들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 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래서 교회나 교인이 관련된 일이 있으면 꼭 봉으로 여기고 덤비죠. 예수 믿는 사람이 사고 한번 쳐 놓으면 완전히 봉 잡듯이 덤빕니다. 교통사고 내지 마십시오. 혹시 내셨거든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를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교회 다닌다 하 면 봉 잡으려고 덤빕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교통사고 내지 마세요.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머리 수그리고 사정하는 꼴을 저는 못 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정말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말을 바꾸면 우리가 바보짓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 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 생각하고 일을 해 나가는데 그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 왜 저렇게 바보같고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실은 그런 말을 듣고 사셔야 합니다. 안 믿 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너무 똑똑하게 살지 마십시오. 내가 본래 바보라서 바보 짓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으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 고 싶진 않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다 싶으면 그 어려운 길로도 좀 들어가 보시기를 바랍니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방향도 못 잡고 이리저리 가게 하다가 바닷가에 진을 치게 해 놓 았는데 가야 할 곳은 저 바다 건너편입니다. 바로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이상하게 보이도록 해서 바로의 군대를 유혹하는 거죠. 그 군대를 불러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왜 이렇게 대합니까? 애굽에 그 많은 재앙을 내리고도 하나님께서 또 바로의 군대를 불러들여서 완전히 깨뜨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4절 끝을 보십시오.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4절 끝에 보시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그게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두들겨 맞고도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화근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저 바보 같은 놈들하고 욕을 해대고 그들을 따라 잡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예수 믿는,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와 봤자 그것은 그들의 비극으로 끝날 뿐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의 싸움을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그렇게 편안한 길이 아니요 험난한 길이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에 정말 어리석은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믿는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볼 때에 이해되지 않는 길입니다. 참 힘든 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는 길이 여기에 있는가 하고 회의를 하면서도 이 길이 맞다 싶을 때에 우리는 그 어려운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6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여러분!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야 그 다음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이리저리 꾸불꾸 불하게 돌다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야 거기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싫든 좋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갔을 때에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서 이제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지 보기 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 난관을 극복하게 하실지 백성들도 몰랐고 모세도 몰랐 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에 세상 사람들의 비난도 받고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왜 내가 이 길을 왔던가 싶은 생각이 들 그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다가 도저히 내 힘으 로 어찌할 수 없다 싶을 때에는 손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놓고 가만히 계세요. 아니면 들어가 주무세요. 하 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병으로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신세 타령도 하고, 내가 왜 이 길로 왔던가 아니면 왜 내게 이런 고 난이 닥치는가 싶을 때 원망도... 정 안되겠거든 원망도 하십시오. 그러나 기대감 하나는 꼭 갖고 계십시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보여 주실 것이며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렇게 인도하셨을까? 상상도 안되고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기대감 하나를 가지고 계십시오. 그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두렵게 했던 그 애굽의 군대가 나중에 홍해에 완전히 수장되고 그 건너편 바 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그 감격과 그 노래 는 후손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감격의 노래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 우리를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이렇게 도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죠. 경제적인 문제로 어 려울 수도 있고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성격이 고약한 동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참 불행한 처지처럼 보여질 때도 있습니다. 도무 지 가능성도 없고 희망이 없다 싶을 때에도 내가 신앙대로 바르게만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언젠가 영광스러운 때를 주실 것이라고 믿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안되겠거든 원망도 하고 짜증도 좀 부리십시오. 성경에 하나님께 짜증을 부리며 대들었다가 복 받은 선지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하나님 왜 내게 이러십니까? 하고 대들었을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언젠가 홍해가 갈라지는 이 기적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감격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나 를 이 길로 인도하셨습니까라고 감사의 기쁨을 누릴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그런 아픔이 없었더 라면 내가 제대로 인간이 되기는 됐겠습니까? 하고 고백할 그런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그만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이 은혜고 감사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건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집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이런 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 나님의 그 길을 따라서 그 힘든 길을 갔기 때문에 이런 복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을 향하여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 였으나(시편 81:10) 라고 말씀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입만 벌려라 채우겠다 하는데 그 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 벌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서 입을 벌리라고 하 시는 겁니다. 벌리면 거기다 채우겠다는 얘기죠. 그 입을 벌리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따라 힘들어 보여도 그 길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길을 따라 가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친 히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시잖아요?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을 보셔야 합니다. 예배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럴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거죠. - 7 -

[2001.05.13]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출애굽기 14:1~14)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하고,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바닷가에 장막을 치는 이 일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 니다. 바닷가에 장막을 쳤는데 뒤에서 밀고 들어오면 도망갈 데가 없는 걸요. 목숨이 걸린 문젭니다. 이거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거 하고 어느 게 어렵습니까? 설마 여기서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대답하시면 큰 일 나죠? 사랑하려니까 사랑할 무슨 건덕지가 있어야 하죠? 설마 그럴까요? 생각을 좀 바꿔 보시면 사랑할 게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바닷가에 장막을 치는 일보 다는 쉬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라 생각하시고 남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라고요? 죽도록요? 그 죽도록 사랑하라 하는 것은 결혼식장에 가면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별 효력이 없습니다. 죽도록 사랑했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언제했냐고 그러데요. 사랑 받는 본인이 받았다고 느낄 만큼 해야 됩니다. 나는 죽도록 했다는데 본인은 그런 적이 없 다는데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에게 복종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니 남자가 무슨 남자같이 놀 아야 복종하든지 무얼하든지 하지. 쪼잔하기 이를 데 없는데 어떻게 복종합니까? 그 말도 맞기는 맞습니다. 그러나 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 랑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실 때에 교회가 그만한 사랑을 받을 만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것 하고 목숨 걸고 바닷가에 장막 치는 것하고 또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나은가? 제가 지금 하나의 예 를 들었을 뿐입니다. 남편에게 잔소리 아무리 갖다 퍼부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한번 고쳐 보십시오 고쳐지 는가? 요즘은 잔소리로 고치려고 안 하고 공갈로 고치려고 하죠? 요즘 공갈치는 아내가 많다고 합니다. 서 로 불행할 뿐입니다.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젭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가기란 정말 어 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갔을 때에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 일 이 몸서리 나는 일이지만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고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생각을 바꿉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직장, 우리가 속해 있는 마을, 이웃, 심지어 내가 속해 있는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 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지라고 알고 이해하고 그렇게 믿읍시다. 선교라는 것이 꼭 외국 가야 되고 물 건너 가야 합니까? 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멀리 가기 전에 내가 속해 있는 이 곳이 하나님 께서 내게 맡기신 선교지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정말 힘들다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믿고 따라 가십시오. 남이야 웃든지 말든지, 남이야 비웃든지 어쩌든지 간에 바닷가 에 장막을 치십시오. 거기에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 8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지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 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개역, 시편 51:1~4]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 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 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 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 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 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사무엘하 12:7~15] 난 달 신문을 보다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더라구요. 부산의 어느 전도사님이 목욕탕 에 카메라를 들고 가서 몰래 찍다가 잡혔답니다. 집에 가서 조사를 해 보니까 한번 찍은 게 아 니고 여탕을 여러 번 찍었더랍니다. 그래 부산에 있는 전도사님이라... 우리하고 같은 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군지 자수해라 하고 한참 동안 떠들었죠. 그런데 그 비디오 카메라가 교회 비품이더라구요. 26살 먹은 전도사가 교회 비품을 들고 나가서 목욕탕을 몰래 찍다가 경찰 서에 잡혀 들어간 거지요. 여러분, 만약에 제가 그렇게 했으면 용서하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경찰서에 갔다 가 며칠 있다가 나왔습니다. 여기에 세워 놓겠습니까? 다윗은 이것보다 더 했습니다. 훨씬 더 심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고생은 좀 했지만 하나님께서 깨끗하 게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형편에 빠지게 되었고, 또 그가 어떻게 해서 용서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어떻게 교훈을 받아야 할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만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8절을 한번 보세요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 니다. 여기에 네 주인 이라고 하는 것은 사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나라를 네게 주었다 라고 말씀하 시는데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라고 하는 이 말과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라고 하는 것은 뜻이 같은 말입니다. 실제로 사울의 처를 다윗이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없는데 왜 성경에 이런 표현을 썼을까 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표현을 세 번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게 되면 정복했다라는 의미에서 선왕의 후궁이나 첩들을 차지했던 그런 풍토에서 나온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왜 김치국부터 마시느냐? 는데 그 말을 듣 던 사람이 김치국이 어디 있느냐? 하고 나오면 대화가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의 김치국은 실제의 김 치국이 아니고 하나의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는 것일 뿐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처들을 차지했다고 하더라... 이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내용 중에는 아이들이 보면 좀 곤란한 미성년자 관람불가 라고 딱지를 붙여야 할 내용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한 설명은 안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이 일로 인해서 지은 죄가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 조 - 1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목조목 한번 따져 봅시다. 다윗이 지은 죄가 무엇 무엇이죠? 우리아의 남편을 죽인 것. 살인죄인데 직접 죽인 건 아니고 부하들을 시켜서 죽도록 만들어 버렸으니까 살인교사 가 되겠지요. 살 인 이나 살인교사 나 마찬가지입니다. 큰 죄지요. 충신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일 먼저는 아니 죠? 그 전에?... 다윗이 별로 죄지은 게 아닌 모양이네요? 간음죄 남의 아내와 몰래 동침을 했습니다. 또 있습니까? 제일 먼저 지은 죄는 아마 근무태만죄 가 아닐까 싶어 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이 나와서 지금 암몬과 전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충신들이 전부 나 와서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인데 이 때에 다윗이 왕으로서 낮잠을 한잠 자고 나와서는 왕궁 옥상을 어슬렁거 리고 다녔습니다. 이거 어떻게 보면 근무태만죄 가 아닐까요? 직접 나가서 싸우지는 않을 망정 일선에 나 가 있는 부하들을 생각하면서 좀 자중하든지 아니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도 와주십사 하고 기도를 하든지 해야 될 터인데 오후에 한숨 자고 일어나서 옥상을 어슬렁어슬렁 다녔습니 다. 그러다가 보니까 무엇이 눈에 보였어요? 웬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단 말이죠. 눈을 감아야 합니까? 계 속 봐야 합니까? 감아야 합니다. 감아야 된다고요? 왜 그리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남자들은 절대로 눈을 안 감아요. 그런데 감기는 감아 야 되겠지요. 그런데 안 감고 그것을 몰래 봤습니다. 이것도 죄가 되나요? 조금 전에 그 얼빵한 전도사는 붙들렸는데,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동네 목욕탕들이 좀 부실했어요. 담장도 판자로 얽어져 있어서 어쩌다가 잘 찾아다니면 행운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 틈새가 벌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목욕탕 담에 기어올 라 갔다가 물을 뒤집어 쓴 아이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몰래 숨어서 열심히 들여다 보면 분명히 죄입니다. 죄목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몰카 라고 하는 거 있지요.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고 해서 몰카 라고 하 던데 좌우간 그 전도사 모양으로 잡혀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이 일도 상당히 심각한 죄지요. 제가 초임으로 발령 받은 곳이 문경 산양이라는 시골인데 저녁에 나와서 강바람 쐰다고... 참 좋더라구 요. 강바람 쐰다고 강을 따라 산책을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맞아 죽을 뻔 했더라구요. 굉장히 놀랐습 니다. 시골에는 강에 남자들이 목욕하는 곳이 있고 여자들이 목욕을 하는 곳이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강을 따라서 저녁에 산보를 간 거죠. 아! 시원하다 하고 올라갔거든요. 다녀와서 어두운 데서 여자 들 떠드는 소리가 나더라고 했더니 큰일날 뻔했다고 하대요. 그 동네의 남자들은 그 근처에는 절대로 안 가는데 외지에서 온 게 멋도 모르고 지나갔으니... 들켰으면 혼날 뻔했죠. 좌우간 다윗이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는 것은 요즘 말하는 몰래 카메라의 원조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드네요. 그 때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죄가 늘어나는 것이죠. 몰래 들여다 보다가 불렀습니다. 부른다고 왜 가는지 모르겠어요. 왕이 오라고 하니까 가야겠지요. 왔으면 만나서 식사나 하고 헤어지지 왜 또 잡니까? 그래서 임신한 것이 더욱 큰 화를 부른 것입니다.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잔꾀를 부리기 시작합 니다. 나중에 자세히 한번 읽어보십시오. 다윗이 나름대로는 굉장히 머리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그게 잘 안되는 거예요. 결국은 남편을 죽이는 수 밖에 없다 해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어 버렸죠. 사실은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죄를 지었는데 도 용서가 됩니까? 왕이니까 용서가 됩니까?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진정 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겁니다. 그 전임자였던 사울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이 지은 죄는 다윗이 지은 죄에 비하면 가벼울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중한 죄 를 짓지 않았다 싶어도 사울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정말 많은 죄를 짓고 심각한 죄를 지었다고 도덕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던 이 다윗은 그로 인해서 벌은 좀 받기는 받았지만 용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좀 기억을 해야 될 것이 다윗이 이런 범죄를 지었을 때 나이가 얼마쯤 되었 을까 하는 것이 참 궁금합니다. 저도 이 나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많이 뒤졌는데 끝내 확인을 못했습니 - 2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다. 그런데 어느 분이 마흔아홉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던데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그쯤 되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여러분, 나이 오십이나 된 사람이 남의 여인 목욕하는 것을 요렇게 들여다 보고 있을까요? 한 오십쯤 되 면 그런 일에 초월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위대한 사람의 반열에 들기 일보 직전에 이런 문제에 걸려서 도중하차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분들 나이가 대략 얼마나 됩디까? 이런 성추문에 의해서 그 동안 쌓아놓은 공적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거나 파묻혀 버린 사람들의 나이가 대략 얼마 쯤 됩니까? 오십? 사십요? 이 문제에 관한한 나이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나이에 주책스럽게? 나이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남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이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경각심을 품고 더 주의하셔야 합니다. 대 신에 여자분들은 우리 남편이 나이는 저 만큼 들었지만 저 문제에 관한한 그럴 수 있다라는 생각에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어떻게 신경을 써요? 붙들어 매어놔요? 조금 더 내려가서 얘기를 다시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런 잘못을 한번 저지르면 인생이 깨끗이 끝납니다. 훌륭한 목사님이셨던 분들이 이런 일들로 인해서 평생에 쌓았던 일들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도중하차한 예는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자기 남편이 이런 일을 했으면 용서를 하시겠습니까? 아마 잘 안 할걸요. 젊은 새댁들도 이를 악물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하던데요.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용서받는 길이 있습니다. 부인에게는 도저히 용서를 못 받아도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인에게 용서받기가 하나님께 용서받기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부인에게 용서를 못 받고 자식에게 용서를 못 받아도 하나님께는 용 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까? 있어요. 있어요? 전도사님이 강단에 서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고 하는데도 있다고 하시는 분은 나중에 좀 봅시다. 어떤 죄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못 받죠? 성령훼방죄. 성령훼방죄에 대하여 한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령훼방죄에 대하여 오해하시는 분들이 하도 많 아서요. 내가 혹시 성령훼방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해서 두려운 분이 있습니까? 단연코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성령훼방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분들은 평생에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없 습니다.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수 많은 이적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를 하나 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아무래도 저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서 저런 일을 하고 있다. 귀신의 왕이다 라고 모함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성령훼방죄 를 말씀하 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거부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가 주어졌음에도 고의로 그것을 하 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그것이 성령훼방죄 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일을 하게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나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성령이 말씀하시는 거라고 하던데... 그런데 내가 그렇게 못 살았다. 이거 혹시 내가 성령훼방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고 의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하나님, 애를 한번 잡숴 보이소 하고 대들지 않는 한 성령훼방죄는 없습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억지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가 성령훼방죄입니다. 혹시나 내가 성령훼방죄 를 짓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있는 여러분은 결코 성령훼방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 빼놓고 하나 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설령 부인에게 용서받지 못하고 남편에게 용서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단이 와서 다윗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합니까? 나단이 다윗에게 지적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9-3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절에도 있고 10절에도 있는데 9절을 한번 보실까요?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다윗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까? 10절을 보세요.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 다. 몰래 우리아의 아내를 훔쳐본 것이나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인 것이나 간음한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무 엇부터 말합니까?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가 무엇입니까? 살인죄, 간음 죄, 몰래 훔쳐본 죄, 이린 죄 이전에 더 큰 죄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죄입니까?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입니다. 자, 이제부터 다윗을 생각하면 우리아를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 왔다 이거 생각하기 전에 뭐부터 요?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도 괜찮다고요? 이건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언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까? 다윗이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기 전에 하나 님을 업신여겼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만만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야단치고 고함지르고 성내고 분풀이를 막 해대는 것 있죠? 무슨 죄인지 아십니까? 아동학대죄요? 아동학대죄 이전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이 아이가 나중에 하나님을 제대 로 섬기지 않게 됩니다. 그 부모 때문에 이 아이가 하나님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리켜서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실 것 같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지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들이라고 함부로, 내 기분 따라서 멋대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라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제일 만만한 것이 아이들일 수도 있지만 흔히 부인일 수도 있죠. 그 부인을 향해 서 바깥에서 쌓였던 억울함, 스트레스, 다 풀어버립니다. 주의 깊게 말하기보다는 함부로 말을 막 해 버립 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죄요? 하나님은 그걸 뭐라고 해석하지요?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분명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내를 생각할 때에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막 퍼부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죠? 경우에 따라서 맺힌 한이 많은데 나이가 조금 들면, 옛날에는 기죽어 살았지만 나이가 좀 들면 살아납니다. 기가 많이 살아서 경우에 따라서 는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막 퍼부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걸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네가 나를 업신여 기고 라고 하십니다. 이거 참 어렵습니다. 저는 부부관계, 가정이 원만하게 잘 가꾸어져 가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참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이 얘기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제하고 아껴 살아야 한다라고 1년간 설교를 했답니다. 웬만하면 쫓겨나 기 알맞은데 같은 주제로 1년 동안 설교를 했답니다. 그래도 안 쫓겨 난 것 보면 그 분이 대단한 분입니 다. 1년쯤 하고 나니까 교인들이 생각을 좀 해봐야 되겠다는 표가 나더라는 겁니다. 너무 좋은 차를 살게 아니고 설교 말씀을 생각해 보니까 조금 여진[못한] 차를 사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 래서 그랜저를 살려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하고는 살아가는 차원이 조금 다른 동네의 얘기입니 다. 1년쯤 그런 설교를 반복하니까 그제서야 겨우 그런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더라 싶더니 나중에 보니까 외제차를 샀더라는 얘기입니다. 설교 한 두 번에 우리가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계속 반복해서 하 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가정이 먼저 완성이 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이 다 어렵습니다.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집과 같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이 게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 집안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는데, 밖에 나가면 한없는 호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호인이라고 칭찬을 다 듣습니다. 집에만 들어오면, 가족에게만은 독재 자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그걸 많이 보고 자랐거든요. 정말 이상하다?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 은 자기 식구일텐데 왜 자기 식구들은 윽박지르고 말도 함부로 하면서,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 말 잘 하는 걸까?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런 집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좀 바꿉시다. 밖에 나가서는 싸우든지 깨든지 어쩌든지 마음대로 하되 집에만 들어오면 자기 식구들을 - 4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 장 소중한 사람이 하나님 다음으로 아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느냐? 그 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가 사랑 받을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을 받으 시는 줄 생각하십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했으니, 그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거기 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도 흉내를 좀 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상대로? 아내를 상대로 연습을 하라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이 되면 아내를 상대로 사랑하는 연습을 좀 하십시오. 그러면 아 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내도 남편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그래서 그렇 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참 이상한 게 집에 있을 때에는 화 장도 잘 안 하고 몸빼바지 비슷한 거 아무렇게나 입고 있다가 나갈 때는 참 공을 많이 들이데요. 그것 좀 이상해요. 나갈 때에 누구한테 잘 보일려고? 아니 다른 사람의 체면은 중요하고 남편의 눈에 드는 것은 아 무렇게나 해도 됩니까? 남편을 잘 붙들어 두어야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 는 아내는 남편에게 성적매력이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만 특히 아내들 이 이 점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런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범죄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라는 사실을 즉 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뒷 이야기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서 간단하게 요약을 하겠습니다. 이 범죄 함으로 낳은 아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윗은 살려달라고 금식을 하고 밤낮으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이 이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감히 못합니 다. 저렇게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는 왕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어떻게 감히 할 수가 있겠느냐? 했다 가는 혹시 자살을 해 버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챈 다윗이 아이 가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예, 죽었습니다. 그러자 툴툴 털고 일어나더니 상 차려라 밥 먹자. 그리고 목욕 을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러 갔습니다. 신하들이 도대체 이해가 안돼요. 아니?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는 울고불고 하더니 죽었다는 말 듣고 깨끗 이 털고 일어나더니 밥 먹자는 거예요. 아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얘기지요. 다윗의 입장은 하나님께 서 데려가겠다고 작심을 하셨으니까 그 뜻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울부짖으면 혹시 뜻을 돌이키실까 싶어서 그랬지만 하나님의 뜻이 확고해졌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식의 죽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라는 이 다윗의 자세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십니다. 다윗의 울부짖는 그 기도를 안 들으셨는 것 같은데 그 후에 솔로몬 이 태어나지요. 그 솔로몬의 별명이 여디디야 입니다. 이름이 좀 디디하다고 그랬죠? 여 디디야 이거든요. 여디디야의 뜻이 뭡니까? 여호와께 사랑하심을 입었더라 입니다. 솔로몬이 태어날 때 이 이름을 얻었는데 언제 사랑받을 짓을 했나요? 다윗의 그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그 눈물어린 기도,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을 때에 거기에 순종하겠다라는 그 자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그 기도를 솔로몬을 통하여서 응답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큰 죄 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깨끗이 고백을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그 자세가 되면 하 나님께 얼마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 기서부터 회복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집나간 탕자가 어떻게 눈이 뒤집혔는지 모르지만 재산 들고 나가서 참 잘 살았습니다. 신나게 즐겼습니 다. 돈 다 떨어지고 친구가 다 떨어졌습니다. 돼지와 경쟁을 하면서 돼지의 먹이를 빼앗아 먹을려고 경쟁을 하다가 돼지한테도 치였습니다. 그것마저도 못 먹게 되었을 때에 그가 무엇을 생각해 내지요? 아버지께 용 서를 구하겠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생각난 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먹을 것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아버지 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런 것 아니에요. 아버지 집에 있는 먹을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 는 양식이 얼마나 풍족한고... 이 생각을 하는 그 순간, 그 때부터 바로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 5 -

[2001.05.2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시편 51:1~4, 사무엘하 12:7~15)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때부터 우리에게 희망이 생기기 시 작합니다. 다윗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골리앗하고 싸우던 것? 그 다음에는 무슨 장면이 떠오릅니 까? 밧세바와...? 그 장면을 조금 다른 장면으로 대치시킵시다. 다윗을 생각하면 다윗이 행한 그 범죄가 생 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범죄에 빠진 다음에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라 하면 엄청 난 범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고백을 하면서 거기서 빠져 나온 사람 우리가 이걸 기억하는 게 유익합니다. 혹시 우리가 잠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식에게, 혹은 아내에게, 남편에게 분을 내고 화를 내고 또는 밖에 나가서 우리 이웃들에게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린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잘못을 나 혼 자서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두려운 일 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면 회복될 수 있다 는 사실입니다. 5월은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열심히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마는 그것 이 우리의 가정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지나간 얘기입니다마는 스승의 날은 제게는 상당히 괴로웠 던 날이기도 합니다. 스승의 날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선생님이 좋아서, 감사해서 드리는 경우가 거 의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스승의 날이 되면 저는 늘 기분이 안 좋습니다.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고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서 선물을 왜 들고 오느냐는 겁니다. 오전 내내 마음이 안 편했다가 애들을 다 돌려보내고 난 오후에는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졸업한 아이들 이 찾아오거든요. 졸업 후에 찾아오는 아이들은 정말 반갑습니다. 제일 심할 때는 학교 앞 분식집을 하나 빌려서 잔치를 하듯이 즐겼던 적도 있습니다마는 그 때는 선생님이 주머니를 다 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이 즐거워요. 진정한 마음이 오고가지 않으면서 스승의 날, 어버이 날... 조심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그 다음에 자녀와 부모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오고가는 5월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잠시 반짝 할 수는 있지만 우리 가정에 아름다운 화목이 유지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가족 간에 흔 히 저지르는 작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 고 책망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혹은 부모가 자식을, 경우에 따라서는 자식이 부모를 업신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 역시도 하나님을 업신여기 는 행위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이 엄청나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한마디로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유혹에 이끌려 하나님을 잊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잘못한 많은 일들도 사실은 하나님을 잠시 잊은 데서, 잠시 잊고 내 생각, 내 혈기가 앞서서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아니 그런 잘못을 절대로 저지르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십시 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 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인지는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이 압니다. 세상에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던 사건, 그건 기억할 만합니다.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건 좀 바꿉시다. 뭘로 바꾸지요? 그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그 순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 께 용서를 구하고 깨끗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무슨 죄를 용서받았죠?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마저도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 죄는 아마 안 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 다 더한 죄마저도 하나님께 나아옴으로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안심하고 부부끼리 싸 우세요. 여기에 아멘 하시면 은혜를 잘못 받은 겁니다. - 6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여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 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 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 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세기 12:1~10] 러분, 아브라함의 별명이 뭐죠? 믿음의 조상.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이 얼마나 좋은 별명입니까? 여러분들이 학창 시절에 가졌던 별명과 비교해 보시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하도 영특해서 옛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선생님들을 골탕 먹입니다. 어느 여선생님이 교실에 갔다 오더니 화를 몹시 내요. 자기에게 붙인 별명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좋 은 별명도 많이 있는데 이 녀석들이 귀신 할망구 같다고 한다. 면서 아주 화를 내더라구요. 그 학급 애들에 게 좋은 말로 야단을 좀 쳤죠. 얘들아, 좋은 별명 많이 있는데 가령 백설공주도 있고... 그런데 하필이면 귀신 할망구가 뭐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야, 백살공주 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분의 별명이 백살공주 예요. 백설공주가 아니고 백살 먹은 공주라는 거죠. 아니 얼핏 들으면 백설공주 처럼 들려요. 본인은 속으로 좋아하는데 실상은 놀리는 겁니다. 요 녀석들이 발음을 정확하게 안 하죠. 백 설공주 인지 백살공주 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살짝 흘리면서 백살공주라고 하더군요. 요즘 아이들이 얼마 나 영특한지요. 대부분의 별명이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닌데 아브라함의 별명이 믿음의 조상 입니다. 얼마나 훌륭하고 멋 졌길래 그가 이런 이름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다 말씀 드리자는 것은 아니고 한 부분만 살펴보려고 합니 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멋진 이름을 얻게 된 사건이 몇 가지 있죠? 아브라함을 무엇 때문에 위대하다고 그 럽니까? 아들을 바친 것. 그럼요.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위 대하다고 말하면서도 한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런 신앙을 가졌느냐 하 는 문제입니다. 아들을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맨 마지막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런 신앙을 가졌으면 그건 아브라함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신앙을 가 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애 마지막에 그런 신앙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런 고생 저런 고생 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가서 그런 신앙을 갖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살아 보고 저렇게 도 살아 보았는데 어떤 말씀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내게는 유익이더라는 믿음이 말 년에 가서 생겨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정말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 위대함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 야 할 것은 그 위대한 신앙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셨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입학시험은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입니까? 합격시키려고 치는 시험입니까? 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을 나를 입학시키기 위해서 치르는 시험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런데도 사람들은 떨 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시험을 쳐야 하거든 나를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치세요. 하나 - 1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시험은 어떤 성격일까요? 교수님들이 시험칠까요? 하면 학생들이 교수님 조금만 미룹시다 하고 땡깡을 놓아요. 그럼 일주일만 미룰까요? 하고 미룹니다. 시험을 언제 치르지요? 시험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지만 학생을 공부시키려고 하는 시험은 학생이 시험칠 준비가 되었을 때에 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마 아브라함 생애 초기에 그런 시험 을 쳤으면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이 이런 시험도 통과할 때가 되었다 하는 것을 하나 님이 아시고 적절한 때에 시험을 치르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보기 좋게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아브라함이 그런 위대한 신앙을 갖도록 하나님께 서 만들어 가셨고 마지막에 가서 그 위대한 신앙을 그런 모습으로 드러내고 아브라함의 생애가 끝이 났다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게 만들어 가신 하나님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면이 있음에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던 그 위대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또 하나가 뭐죠?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이죠? 바랄 수 없는 중에 아들을 바랐다. 그것은 시비를 걸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 이런 얘기 자꾸 하면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서 좀 세밀하게 설명을 해야 되는데 지금은 자세하 게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이상하다 싶으면 저에게 개인적으로 좀 물으십시오. 적어도 아들 문제에 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한 증거가 두 개 있습니다. 그게 뭐죠? 첫째, 이스마엘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래를 통해서 아들을 주신다고 확신했더라면 다른 여자 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을 리가 없잖아요.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집에 있던 종 엘리에셀이 있잖습니까? 아 들을 주겠다고 하는데 하나님, 내 집에서 길리운 이 엘리에셀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던 증거가 두 사람이나 있어요. 그런데도 그것이 어떻 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설명을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그것 말고 또 있잖아요. 고향을 떠나라고 할 때 순종하고 떠나갔 던 사건. 그것 또한 아브라함이 위대하다고 할 때 흔히 잘 드는 예입니다. 이것도 성경을 자세히 한 번 보세요.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아브라함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 까?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아브라함과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갈려고 갈대 아 우르를 떠나갔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떠나서 바로 갔습니까? 안 갔 습니다. 가다가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러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버지가 죽고 재산이 많이 는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떠나라 해서 가나안으로 떠나갔습니다. 순종을 잘 했다고요? 흔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즉각 보따리를 싸서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란에서 오래 있었다는 증거가 오늘 읽은 본문 중에 12장 5절을 한번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 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라고 말하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먼 곳, 하 란에서 재물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많이 얻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얻었을까요? 낯선 타향에 가서 다시 재산을 모으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 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가나안 땅으로 간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믿음하고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아무 고민도 없이 덜컥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 문을 자세히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명령이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디를 떠나라고 합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고 있지요? 거기에 쉼표를 하나씩 찍어 놓으면 - 2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좋겠어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본토,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고향이지요. 고향 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친척도 떠나고 아비 집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독하게 안 듣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본적지 가 포항이거든요. 그러니까 고향을 안 떠났지요. 그렇게 많은 친척은 아닙니다만 포항 주변에 많이 있습니 다. 우리 이모는 건너편 아파트에 계시거든요.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전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본문이 그런 뜻입니까? 고향을 떠나서 먼 여기에 와 계시는 분은 저보다는 좀 더 성경적인가요? 너무 자부심을 갖지 마십시오. 직장 따라왔거나 결혼해서 고향을 떠났거나 이것은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자기 삶의 근거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가라 하였는데 왜 하란에 그냥 머물러 있었느냐 하면 하란을 지나가면 국경을 넘게 됩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말이 달라지고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긴 떠났습니다. 떠날 때도 온 가족이 다 간 것은 아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가족끼리 분란이 많이 있었을 것입 니다. 가자 못갑니다 하다가 고향에 그냥 퍼진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은 그냥 남았습니다. 가족간의 일치를 보지 못했죠.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난 그들이 왜 국경을 넘지 않고 하란에 그냥 머물러서 또 오랫동안 있었을까요? 여기만 넘어 가면 국경을 넘어갑니다. 이제는 말도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나를 지켜줄 사람도 없는 외국 땅으로 들어가 게 됩니다. 두려웠다는 뜻이지요.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기는 가야 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어려운 길이었다는 것을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직장 따라, 신랑 따라,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하셨느냐?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그 곳을 떠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곳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만 이렇게 하셨던 것이 아니고 이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이 구원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전부 하나님께서 불러내는 역사입니다. 나 와라! 거기 있지 말고 나오라는 겁니다. 나오라 는 것과 그들과 함께 섞여 살지 말고 구별되게 살아라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메세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가인의 후손과 어울려 살지 말고 나오라고 불러낸 것이 셋의 후손입니다. 홍 수 이후에 사람들이 또 타락하고 범죄할 때 아브라함을 불러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도 이제는 나와야 된다 해서 데리고 나와 버립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또 불러냅니다. 불러내서 뭘 만드셨죠?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불러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해서 불러내서 따로 떼어 놓은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 다. 앞으로 한번 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려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염소와 양 을 가려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러내시고 갈라 놓는 이런 일들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장 살기 좋았던 그곳에서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나오라는 겁니다. 나와서 어디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떠나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만약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께선 그것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를 따져보십시오. 정 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행복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그 어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다면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떠나야 할 곳인 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예를 좀 든다면, 정말 행복하다면 누구 때문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때문에 행복하다? 남 편 때문에 행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만큼 감사한 일이지만 그 행복이 과연 하나님에게 근 - 3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거를 둔 것인지 아닌지를 한 번쯤 꼭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면 사상누각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든든하니까? 자식이 믿음직스럽고 돈 걱정도 없으니까 안심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면밀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좋지만 진짜 우리의 기쁨은 하나 님 때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든든한 다른 기초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것을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을 다 버리고 보따리 싸서 아브라함처럼 먼 곳으로 훌훌 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일은 아브라함으로서 끝났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서 거기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소중하게 여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의지하고 소중하게 여 겼던 것을 버리기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가기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는 뜻이죠.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 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떠나야 했던 하란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여러분들이 가야 할 가나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내신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봅시다. 그 당시에 갈대아 우르라는 도 시는 세상에서 가장 발달된 문명의 도시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았던 곳입니다. 유브라데스강과 티그 리스강이 합쳐지는 곳이지요. 강물이 흘러가는 곳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유명한 문명의 발생지나 도시는 대부분 강을 끼고 있습니다. 여기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것이죠. 가나안요? 가나안은 물이 그렇게 풍 부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가나안 땅 그러면 뭐부터 생각나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스라엘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어떤 땅에 어떻게 하고 살고 있지요? 그 땅이 그렇게 기름진 땅이 아닙니다. 대부분 사막이요 산악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세우고 그곳의 사막을 개간해서 옥토를 만들었 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시면 9절까지가 한 단 락인 것 같은데 왜 10절까지 읽었겠습니까? 기근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가나안 땅에 왔더니 제일 먼저 생긴 일이 무엇입니까? 기근이 닥쳐왔더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무슨 이런 땅에 가라고 하셨느냐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나 님께서 가라고 했던 곳에 왔더니 세상에 기근이 웬말입니까? 그 기근 때문에 아브라함이 큰 실수를 저지르 게 되지요. 여러분,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가나안 땅이 글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고생 안 해도 먹을 것이 풍 부한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땅이 아닌데도 왜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합니까? 기 름지지도 않고 강수량이 풍부하지도 않은 곳이지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그런 곳을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자 그대로 기름지고 사시사철 먹을 것이 풍성한 땅 이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때문에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멋지게 산 것 아닙니다. 바로에게 갔다가 죽을 고생을 한 번 했지요? 아비멜렉에게 갔다가 부인을 빼앗길 뻔했지요? 이리저리 얼마나 방황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불우합니까? 자식이 많은 것을 복으로 칠 그 시대에 자식 하나 없이 얼마나 오래 지냈습니까? 하나 낳기는 낳았는데 똑똑한 아들이에요 어리숙한 아들이에요? 아브라함이 100 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똑똑한 아들입니까? 어리한 아들입니까? 잘 모르시겠습니까? 성경을 보시면서 보신 그대로 얘기하면 됩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이삭이 신앙이 좋았구나 이렇게만 보지 말고 그저 단순하게 보십시오. 이삭은 바보짓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늘그 막에 겨우 하나 낳은 아들이 희미한 아들이었습니다. 하긴 이렇게 늙어서 낳은 아들이 똑똑할 턱이 있겠습 니까? - 4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예전에 제가 성경을 보면서 받은 느낌은 이상하다. 창세기에 이삭의 이야기를 왜 기록했을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삭이 잘 한 것 뭐 있습니까? 아버지가 죽이려고 할 때 순종 잘했다 이 얘기하시고 싶지요? 그러면서 똑똑한 여러분은 만약 아버지가 그런 일을 벌리면 총알같이 내 뺄걸요? 이삭은 정말 순종 잘했다 고 말하면서 여러분들 같으면 그 순간에 그러고 있겠습니까? 이삭이 어리숙합니다. 우물을 파 놓았는데, 옛 날에는 그것이 재산 1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니 양보하고 다른 곳에 가서 팝니다. 또 와 서 뺏습니다. 또 물러갑니다. 몇 번이나 싸우지 않고 물러갑니다. 이런 이삭의 모습이 어떠냐니까 이해심이 넓다 이러데요. 거꾸로 물어보았어요. 만약에 당신 남편이, 깡 패들이 재산 1호를 내 놓아라 해서 아무 소리도 않고 빼앗기고 왔다가 이튿날 또 다른 것도 뺏겼다 그러면 그 남편 보고 이해심이 많은 남편이라고 하겠어요? 그 때는 뭐라고 하겠어요? 이혼하자고 한답니다. 남의 이야기니까 이해심이 많다고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라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자식에게 속 아넘어간 아버지잖아요. 전 어릴 때 이삭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해가 안됐어요. 왜 이렇게 어리한[어리숙한] 사람의 이야기를 성경에 넣어 놓았을까? 참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인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아들 하나 데리고 평생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렇게 복된 삶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는지 봅시다. 2절에 보니까 내가 너로 큰 민 족을 이루고...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이후로 이 땅에서 사라져 간 민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군다 나 이스라엘이라는 그 땅이 평온한 땅이 아닙니다. 전쟁이 났다 하면 반드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 어가는 곳입니다. 유대인만큼 수난을 많이 당한 민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이 지상에서 가장 영향 력 있는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 라고 말할 때 믿는 우리의 조상이라는 뜻도 되지요. 그러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 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는 그리스도인들 말고 또 있어요. 누군지 아세요?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랍족 속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또 있을까요? 천주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 있죠? 무슬림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도대체 얼마 나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다음 보세요.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4장에 그 당시 세계대전이 터지는데 아브라함이 전쟁 한복판에 끼어 들어가서 자기 집에서 길리운 군사 318명으로 그 연합군을 격파하고 자기 조카를 구해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사건 하나로 아 브라함의 이름은 그 근방에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가서 거주할 때입니다. 그 나라의 왕 아비멜렉이 외국에서 들어온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사이 좋게 지내자고 조약을 청해 옵니 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지요. 내가 가서 예물을 많이 주고 사이 좋게 지냅시다 하여도 들어줄 까 말까 하는 판인데 왕이 직접 찾아와서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겁니다. 그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내 민 조건이 뭐였죠?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내건 조건은 딱 한가지입니다. 너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 것 이었죠. 세상에 부족간에 혹은 국가간에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런 것 보셨어요? 제발 거짓말만 하지 마라 그러면 우리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어. 왜 거짓말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는데 벌은 자 기가 받더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편이 되어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면서 복을 주시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보잘 것 없는 아브라함을 상대로 왕이 찾아와서 사정사정 하면서 사이 좋게 지 내자는 것입니다. 내거는 조건이 겨우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이런 조건으로 사이 좋게 지내자 하면 꼭 그런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고 살 때에 이 땅에서 이런 복을 누리며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릴 때 교육을 좀 잘못 받아 가지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있는데 우리는 누구처럼 살자고요? 주일학교에 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나사로처럼 살아야 된다 그렇게 가르쳐 놓으니까 나사로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 아 니고 거지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을 더 기억하는 겁니다. 아니 거지처럼 사는 것을 동경하지는 않더라도 부 자처럼 사는 것을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왜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멋지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아야지요. - 5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3절을 한 번 더 보십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 리니 라고 말씀하셨죠. 전 이 구절을 보면서 아이들 만화 생각이 자꾸 나요. 도대체 아이들이 무슨 만화를 읽는가 궁금해서 빼앗아서 종종 봤어요. 보니까 재미도 있더라구요. -그러나 요즘 만화는 참 문제가 많습니 다- 전투를 하다 보면 사람인지 로봇인지 잘 모르겠는데 방탄막이란 것이 주위에 쳐져요. 총을 팡 쏘면 총 알이 튕겨 가지고 어디로 갈까요? 쏜 사람에게 도로 날아가는 거예요. 몽둥이 가지고 때리면 딱 튕겨 가지 고 되레 자기를 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한 번 보세요. 너에게 복을 주는 자가 있으면 내가 복을 주고 너 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를 한다니까 아브라함은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나한테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 와서 감동적인 말을 여러가지 들었습니다. 신앙문제로 우리 남편을 괴롭힌 사람치고 아 직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멋진 말 아닙니까? 신앙대로 살려고 애쓰는데 그걸 괴 롭히고 핍박하던 사람들 중에 이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요.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살면서 참으로 힘든 고통도 많이 겪었고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그러는 가운데에서라도 그 삶 자체 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복을 누리며 사는 삶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의지하고 살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였을 때 순종하고 갔으면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삶은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야 할 가나안 땅은 어디라고 생각하십 니까? 우리가 가야 할 가나안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삶 그것입니다. 더 줄이면 우리가 가야 할 가나안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비록 삶이 어렵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복되게 하시는 그 것이 우리가 사는 가나안이라는 것이지요. 한국 사람들 복 받는 것 얼마나 좋아합니까? 요즘은 좀 덜합니 까? 숟가락, 밥그릇, 심지어 젓가락에 복 자 안 새겨진 것 찾기 어렵습니다. 온통 복입니다. 심지어 예전에 많이 쓰던 담장 무늬도 복이라는 글자에서 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곳곳에 복 자를 써 두면 복이 들어옵니까? 우리 어릴 때 밥 먹다가 숟가락 흔들면 야단을 막 쳐요. 뭐라면서요? 복 나간다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밥 먹다가 다리를 흔들면 그것도 복 나간다고 야단쳤단 말이에요. 어디 앉으 면 안되죠? 문지방에 앉는 것하고 복 나가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옛날 어른들은 복 나간 다고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문지방에 앉지 말고, 숟가락, 밥그릇, 옷에 온통 복 자 써 붙이고 밥 먹을 때 털지 않고 그래 먹으면 복이 들어오나요? 복을 애 쓴다고 받는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할 때 떠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는 거기에서 복을 누리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버리라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을 받는 지름길 입니다. 아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복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제목을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2절 끝에 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이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달리 표현한다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이 말씀과 똑같은 것이 어디에 있나 보세요. 3절 뒤쪽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라는 이 말씀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은 같은 말입니다. 복 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은 너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복 받 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니까 여기서부터 복이 나가는 거예요. 아브라함 주위에 있으면서 복 받은 사람이 누구예요? 예수 믿는 사람요 맞습니다. 여기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낼 것이고 그 메시야를 통해서 천하 만 민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좋은 곳에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서 가나안 땅이라는 곳으로 가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구원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늘 우리를 - 6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부르시듯이 우리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을 부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다면 그 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온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 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합니까? 아니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복을 누리고 있습 니까? 그래야 됩니다. 안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크게 반성을 하셔야 합니다. 나로 인해서 우리 가 정이 정말 복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내가 속해 있는 이 아파트 단지가, 나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정말 복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셨습니까?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까? 보디발의 집에요. 누구 때문입니까? 요셉 때문에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사회가 복을 받고, 나 때문에 우 리 가정이 복을 받고, 우리 사회는 너무 머니까 나 때문에 우리 교회가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의 뜻입니다. 나 때문에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이 복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이라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라도 나로 인해서 직장이 기쁨이 넘치고 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듯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복을 받게 하겠 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복중에 가장 큰 복이 그들도 우리와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내가 속 해 있는 직장이 나 때문에 분위기가 좋아지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것도 큰 복입니다. 잘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큰 복은 나로 인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 먼 곳에서 불러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가장 큰 뜻입니다. 우리가 바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이 속해 있는 지역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 도 참 부끄럽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 만큼이나 민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 본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전도사가 되니까 눈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내 가정, 나, 우 리 교회를 너머가서 나로 인해서 우리 주변이 복을 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사명 을 좀 더 넓혀 가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로 내용을 요약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처음 명령하신 것은 떠나라는 것 이었습니다. 어디에서 떠나야 합니까? 내가 버려야 할 것, 나쁜 습관, 남의 알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 내게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즐기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 는 그 어떤 것이 내게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거기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고생스러워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큰 복을 누 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가나안 땅은 자체로 복이 있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만 의지 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복을 누리며 살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뜻 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만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런 복을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에 천하만민이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 자 신들도 복의 근원이 되어서 나로 인해서 누가 복을 받아야 하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 부터 행복하게 하시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나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게 안돼 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너무 많이 봅니다. 참 많아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나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인간적인 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차츰차츰 넓혀 가면서 우리 이웃들에게까지 나로 인해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복이 정말 큰 복이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복음을 받고 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이 즐거운 삶이 아니라면 전도하지 마십시오. 왜요? 자기 닮은 사람 - 7 -

[2001.06.0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1~10) 만들면 곤란합니다. 다른 사람이 전도하게 놔두십시오. 내가 예수 믿고 정말 행복하다 느끼신다면 이 복을 전하기 위해서 정말 노력하십시오. 돈이 좀 들면 아낌없이 투자하셔도 됩니다. 내가 받은 이 기쁨이 정말 크고, 정말 좋은 것이라 싶으면 자꾸 나누십시오. 우리 효자제일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가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8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신 그만해도 족하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 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 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 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기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 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으로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우리가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하 였었느니라 [개역, 신명기 3:21~29] 명기라는 책의 이름 뜻이 무엇입니까? 신 자가 무슨 신 자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아마 귀신 신 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펼칠 申 자 입니다. 펼친다는 것은 재차 라는 뜻도 있고 자세히 살핀다 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 령들을 다시 되풀이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세 권에 들어 있는 내용들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들과 작별하기 전에 한 번 더 되풀이 하면서 설명한 책이 신명기입니다. 두 번째 되풀이한 명령 혹은 두 번 되풀이한 율법 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신명기가 가지고 있는 큰 특징 중에 한가지는 예수님께서 가장 애용하셨던 책이라는 점입니다. 특별히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여러 가지로 물었을 때에 예수님 께서 하신 대답 있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시험치 말라 하셨 느니라 이런 모든 구절들을 신명기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애용하셨던 책이기에 더욱 애착 이 가는 책입니다.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모세가 지나온 과거를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1장에서부터 3장까지는 지나온 역사를 회고합니다. 그 다음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여러 가지 율법을 다시 되풀이 합니 다. 애굽의 고센 지역을 출발해서 가야 할 목표는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지방에서 출발해서 가나안까지 간다면 가장 손쉬운 길은 바닷가를 따라서 가는 길입니다. 바닷가를 따라서 가면 아주 평탄합 니다. 마지막에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데 일주일이나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길로 둘러 간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돌 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쳐라 였습니다. 똑바로, 좋은 길로 가면 되는데 바로가 보니까 이상하게 빙빙 돌더란 말입니다. 몇 번 돌다가 결국 바닷가에 가서 멈추어 섰더라. 바로가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했죠? 아니 저 런 머저리 같은 녀석들을 내가 내보냈단 말인가? 그래서 다시 추격해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득하여 광야에 갇혔다라고 생각하고 따라왔는데 사실은 그렇게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이끌고 가면 바로가 분명히 쫓아올 거다. 그 바로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떠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홍해 사건이 벌어진 것이죠. 홍해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이 있는 곳으로 곧장 내려갔습니다. 거기까지 약 50일이 걸렸습니다. 거기에 1년간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위시하여 여러 가지 계명들과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그 유명한 가데스바네아까지 올라갑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무슨 일이 생겼죠? 그것을 빼면 출애굽 역사가 안됩니다. 가데스바네아라는 지역은 거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목적지가 되는데 정탐꾼 12명을 보냈더니 돌아와서 하는 소리가 우리는 도저히 싸워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돌 아갑시다. 하고 반항하며 모세를 돌로 치려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 1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들에게 이렇게 말 안 듣는 백성들을 향하여 좋다. 그렇게 못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그럼 너희들은 들어가 지 마라. 너희들이 다 죽을 때까지 지금부터 광야를 헤매다가 너희들이 다 죽고 그 후손들만 이 땅으로 들 어간다. 그래서 얼마 동안을 광야 생활하게 하죠? 40년인데 어디를 어떻게 방황하며 40년을 돌아다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후에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까지 왔습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과거를 회고하면서 당부를 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설명하 고 모세는 거기서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요단강을 건너서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데스바네아라는 지명과 몇 군데 지명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 모세가 유언을 남긴 곳이나 심지어 시내산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대강 짐작만 하는 정도입니다. 시내산도 성지순례 한다고 가면 옛 날에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았던 자리라는 곳도 있고 근처에 유명한 기도원이 서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현 재의 시내산이 모세가 있었던 그 시내산인지 조차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냥 추정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 갔던 경로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좀 분명하면 좋을텐데 왜 그런 것이 명확치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내산이 그보다 훨씬 위쪽 다른 곳에 있는 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다른 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명확치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 야기가 사천년쯤 전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같은 지명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보면 적 어도 몇 천년 전의 그 지명이 지금 지명하고 일치한다고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명이 명확치 않 다는 것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좀 분명하면 좋을 텐데 분명치 않은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성경의 원본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 다. 만약에 성경 원본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원본이 아닌 사본으로 몇 천년 된 것들도 값으로 주 고 살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가격에다가, 누가 손도 못 대도록 엄중하게 보관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 데 만약에 원본이 나왔다면 모르긴 몰라도 거기에 기록된 내용보다는 원본 자체를 더 소중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우상시 여길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하나님께서 그런 의미에서 다 감추어 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혹은 무덤에 누웠을 때 입었던 옷이라고 하는 옷이 많이 있습 니다. 진짜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다 감추어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성탄절, 12월 25일이 성탄절이 아니다 하고 떠드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 씀드립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언제 출생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12월 25일이 진짜 예수님의 생일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날을 그렇게 정해서 기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탄절도 그렇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 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법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을 섬 기고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는 것보다 그런 것에 사람들의 신경이 더 쏠릴 거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 런 것들 일체를 감추어버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론은 이쯤하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얘기를 가 데스바네아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얘기, 시내산에서 하나 님께서 언약을 주셨던 얘기,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다녔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40년 동안 이렇게 방황하게 된 원인과 그 과정 을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 맨 마지막에 여호수아를 세우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렇게 여러분들 에게 승리를 줄 것이니까 이것을 믿고 3장 22절에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 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도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인도해 오신 그 하나님께서 앞 으로의 삶을 분명히 인도하시고 너희들에게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로서 지나온 40년의 역사 회고 를 마칩니다. 그런데 그 역사를 회고하고 마치려다 보니까 모세가 굉장히 섭섭한 거 있죠. 어떻게 본다면 모세의 소원 - 2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이기도 하고 어떻게 본다면 욕심이기도 합니다. 무슨 욕심요?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해 왔는데 하나님 나도 이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라는 욕심이 생깁니다. 모세에게 이런 욕심이 생기는 것이 잘못됐습니까? 이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으며 이 백성들을 인도해 왔는데 여기 서 다 들어가고 자기는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려서 하나님 나도 들어가서 이 땅을 밟게, 이 레바논 땅, 이 좋은 땅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는데 26절에 하나님의 대답이 있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만해도 족하니 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한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너는 들어갈 수 없다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왜 못 들어가게 합니까?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 를 모세가 뭐라고 하느냐니까 26절에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때문에 내가 지 금 못 들어가는 거다 라는 겁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백성들에게 미루어도 됩니까? 왜 못 들 어가는지 아시죠? 신 광야의 므리바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하나님께 엄청나게 원망을 했습니다. 도대 체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이렇게 거칠게 나올 때에 모세도 백성들의 원망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마는 그 때는 견디기가 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을 때에 모세의 죄는 뭡니 까? 하나님께서 바위를 치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두 번 쳤다고 하나님께서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다 하셨단 말입니다. 좀 심하지 않느냐는 얘기죠. 모세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얼마나 모세를 괴롭히고 모세 말을 듣지 않는데 그 말을 듣고 사실은 화가 난 거죠. 그래서 바위를 두 번 쳤는데 그 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의 잘못이 뭐라고 했죠? 바위를 두 번 쳤다? 아닙니다. 두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 모세의 잘못입니다. 그런 일로 인해서 생긴 일인데 일이 그렇게 된 것은 바로 너희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로 하 여금 이런 잘못을 범하게 했다라는 이야긴데 결국은 그 일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는 겁니다. 그래 놓고 아마 하나님께서도 조금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27절에 보니까 뭐라고 했죠? 들어가지는 못 한다. 다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경이나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다니까 안된다. 들어가지는 못 한다. 그러나 구경은 해라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것으로 모세는 만족해야 했습니다. 대신에 그 다음 일을 맡을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오늘 읽은 본문의 요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동안 모세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 많은 원망과 불평과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는 그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 해왔는데 단 한 번 반석을 두 번 친 것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얘깁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어느 분이 그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언젠가 이걸 한 번 설명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됐었는데 마침 장본인이 오늘 오셨네요. 때 맞춰 서 잘 오셨습니다. 가만히 한 번 따져보십시오. 하나님 이거 너무 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이뤄 놓은 업적과 잘못을 비교했을 때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죄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랬 다면 용서가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닌 지도자가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 러내지 않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더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민수기 20장에 그 내용이 자세 하게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자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은 죄,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 3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죄란 뜻입니다.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목사님이 이 강대상에 서서 화를 내고 분을 냈다? 그러면 모세가 반 석을 두 번 친 것하고 똑같은 죄가 되죠? 전도사는 좀 봐줄런가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 사만 하고 말건데 괜히 전도사 한다고 나왔다가... 어차피 저도 각오를 단단히 하긴 했습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작심을 하고 신학교 갔습니다마는 사람의 작심이 얼마나 갈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 다.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목사하고 전도사에게만 상관이 되고 여러분들은 아무 관계없죠? 관계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 혼자 야단 맞기 싫어서 말씀 드리는데요 분명히 관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하 느냐? 여러분들이 지도적인 입장에 섰을 때에 여러분들에게 배워야 하는 학생들과 여러분들이 가르쳐야 할 이웃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 앞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 마 찬가집니다.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싸우는 건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싸우다가도 언제 중지하라고요? 집사님 끼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목사님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장로님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새신자들이 나 타나면 무조건 중지해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어린 아이들이 나타났죠? 중지해야 합 니다. 중지하지 않으려면 목에다 연자맷돌을 감고 물에 빠지라고 그랬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 는 것이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받은 벌이 너무 크지 않느냐는 것도 이런 면에서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 한 죄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리란 뜻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뺑뺑 돌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아니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후손들이 자꾸 물었을 겁니다. 우리 목표가 가나안이라면서 왜 안 가고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이 곳을 자꾸 돌고 있습니까? 부모들이 아마 자식들에게 대답하기가 굉장히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얘기는 정확 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뭐라고 얘기하죠? 부끄럽지만 가데스바네아에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 긴 죄로 이렇게 돌고 있는 거다. 그 때 하나님께 반항했던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어야 할 사람이 모세입니다. 후손들이 그 걸 보고 아마 질문하겠지요? 아니,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그런 죄가 있어서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죽어야 합니까라고 안 물었겠어요? 그때 뭐라고 설명할거냐? 바로 이 대답이 나오는 겁니다. 지도자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죄, 그것이 바로 우리 위대한 지도자 모세 의 잘못이라고 설명을 했을 겁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것이 가장 큰 죄목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어떻게 본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 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정말 너무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본인 스스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섭섭한 감정을 깨끗이 덮고, 아니, 섭섭한 감정조차 없이 나머지 일 들을 잘 수행합니다. 나머지 일이란 것은 신명기 4장부터 시작해서 신명기 끝까지 모세가 해야 할 일들을 그대로 잘 감당했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따르면서 날마다 반항하고 불평하고 원망했던 그들이 나중에 여호수아서에 보면 순종을 잘 합니 다. 여호수아를 따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잘 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 사후에는 또 문제가 생깁니 다만 모세를 따라 다니면서 그렇게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를 따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순종했 을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 이유도 있겠지만 모세가 마무리를 잘 지어준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모세가 그렇게 기꺼이 순종하기란 어떻게 본다면 좀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 다. 우리가 뭔가 애착을 가지고 오랫동안 고생했던 일을 어느 날 갑자기 손을 놓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특별히 우리가 고생을 많이 했고 애를 많이 썼던 일 같으면 그것을 그만두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개인 적인 일이라서 말씀드리기가 조금 미안합니다만 제가 오랫동안 고등학생들만 상대로 성경공부를 많이 했습 니다. 아이들 몇 십 명을 데리고 수련회를 저 혼자서 했거든요. 다른 선생님들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습니 다. 그냥 성경책 한 권만 펴들고 3박 4일을 성경공부만 합니다. 다른 분들이 물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옵니 - 4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까? 글쎄요, 오는 거는 저희들 사정이고 나는 앉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데 오긴 잘 와요. 심지어 어느 여 름에는 얘들아 우리도 보충수업 하자 했더니 좋다고 그래요. 포항 시내 여름 보충수업은 유명합니다. 주 일에 교회 오기도 어려운 판국이니까 심한 경우는 방학이 없습니다. 방학이 딱 하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죠. 올 여름에는 학교 너무 빼먹는 것도 미안하니까 우리도 보충수업하자 그랬죠. 학교 보충수업이 보통 6시에 마칩니다. 가방 메고 교회로 바로 와서 저녁 먹고 7시부터 한 세시간 정도 매일 모였죠. 새로 오신 전도사님, 강도사님이 보고 참 이상합니다. 어떻게 성경공부 하러 교회로 다 옵니 까? 제가 볼 땐 너무나 당연한데 다른 분들이 볼 때는 이상한가봐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저 녁 먹으면서 어느 집사님이 제 머리 쳐다보고 한참 웃던데 머리 윗부분이 원래는 푹신푹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쿠션이 없어졌더라구요. 아, 이상하다 했는데 이 앞머리 센 것하고 윗 부분 쿠션이 사라진 게 그 아 이들 공부 가르치느라고 고생한 탓입니다. 3박 4일 가르치려면 보통 6개월 동안 준비해야 합니다. 굉장히 보람 있었고 평생 하라 해도 기쁨으로 할 일이다고 생각하면서 참 열심히 했죠. 주위의 격려와 칭찬을 들으면서 멋진 세월을 보냈는데 단 한 분의 압력으로 그걸 못하게 됐죠. 몇 년 동안 알게 모르게 직, 간접으로 압력이 들어와도 굴하지 않고 잘 견뎠는데 어느 해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목회 방침이니까 순응은 하겠는데 손을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걸 어떻게 그만 둔단 말입니까? 순종하기로 했는데 한 석달 동안 제가 밤잠을 못 잤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그만 둔 단 말입니까? 아이들이 왜 올해는 수련회 안 합니까? 하고 졸라대는데 제가 할 말이 없었어요. 차마 사실 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지요. 한 석 달 동안 참느라고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거의 밤잠을 못 잘 정도로 힘 이 들었는데 이것이 나름대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하던 일을 그만 둘 때의 아픔입니다. 얼마나 힘든 일 인지 모릅니다. 모세가 자기 평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가나안 입구까지 왔는데 그만두라 는 겁니다. 여호수아에게 물려주라는 겁니다. 어쩌면 모세가 그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이라고 생각이 되는데도 모세는 그 일을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제게 그런 아픔이 있었던 것이 우리 효자제 일교회 입장에서는 복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랬으면 지금도 여전히 그 일에 열을 내고 있었을 테니 까요. 그런데 어떻게 모세는 하나님의 어려운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죠? 본문에 그대로 있습니다. 오늘 제목에 붙어 있는 그 말씀 그대로 그만해도 족하다 는 겁니다. 이 표현을 신약에 있는 표현으로 바꾸 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그만해도 충분하다는 것입니 다. 너는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지만 그것 안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충분하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모세가 하나님께 은혜를 그만큼 받았습니까? 출애굽기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네가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내 라. 그럴 때에 모세가 즉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증거를 보여주고, 강압적인 태도로 가라고 해도 안 간다고 얼마나 버텼는지 모릅니다. 결국 어떻게 갔죠? 틀림없는 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 를 발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사 더 이상 못 버티고 간 겁니다. 성경은 점잖케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럴 때 흔히 뭐라고 하지요? 이노무 자식... 하나님이 노를 발하사... 쫓겨났습니다.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던 그 모세가 어쩔 수 없으니 정말 쪼다 같이 시작합니다. 정말 맥없이 시작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몇 번이나 체험했을까요? 열 가지 재앙은 말할 것도 없고 광야생활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을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살 았던 모셉니다. 우리는 이런 기적을 한 번만이라도 몸소 체험하면 평생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거라고 기도 많이 하시죠?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것 체험하신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만 제대로 체험하면 그 하나님을 평생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놀라운 체험을 모세는 날마다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준 은혜가 족하다 는 말씀이 족할 뿐만 아니라 넘칠 정도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를 생각해 보면 그 얘기 더 이상 하지 말라는 하 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무런 불만 없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 5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족하다고 할 만큼 받았습니까? 족할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많이 받아야 합니까? 아직 많이 모자라시죠?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박국 3장 17절부터 나오는 노래 있 죠?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 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 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없다 하더라도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 도,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희생시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야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구하는 것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 을 기억하는 데서 가능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준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식들은 잘 모릅니다. 자식 이 섭섭해 하는 이유를 보세요. 큰 일로 섭섭해 합니까? 작은 일로 그럽니까? 정말 사소한 일로 부모에게 섭섭한 감정을 표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큰 것은 느끼지도 못합니다. 우리도 그런 때가 많지 않은지 살펴 봅시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무하시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반석을 두 번 치는 일로 인해서 평생 소원이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말라 하는 것은 그래도 너무 하지 않 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모세가 알지 못했던 다른 계획을 하나님은 또 갖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여기서 죽어야 할 이유가 또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잘 설명 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모세가 살아 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못 한다는 전제가 이미 서 있습니다. 그 율법의 대표자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살아 있는 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1장 1, 2절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 게 일러 가사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 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고 합니다. 그냥 건너가라 하면 좋을텐데 그 앞에 단서가 뭐라고 붙어 있습니까?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가라는 거예요. 그럼 여태까지 왜 못 갔는데요? 모세가 안 죽 고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모세가 죽을 때까지 뺑뺑이를 돌게 하고 이제 죽었으니 가라고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모세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인계해 주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는 같은 글자입니다. 즉 예수님을 상징 하는 여호수아가 이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가나안 땅에 들 어갈 수 있는 자격을 그 동안의 공로를 가지고 따진다면 모세만큼 더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공로 때문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가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모세가 율법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 리에게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라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모세의 삶 자체 를 하나의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불만이 없었습니 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면 그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데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아 니,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다 하더라도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너무한 것 아 닙니까? 그렇게까지 따지신다면 다시 말씀을 드리죠. - 6 -

[2001.06.13] 그만해도 족하다 (신명기 3:21~29)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소원했던 가나안 땅에 모세는 들어갔습니다. 얼마 전에 한 번 말씀 드렸는데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실제로 그렇게 비옥한 땅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그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일 뿐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고 찬송하시죠? 요단강 건너면 어딘데요? 천국이에요?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 땅이죠. 요단강 건너서 들어가는 그 가나안 땅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보 기를 소원했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저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 이 진정한 의미의 가나안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누려야 할 가나안은 하나 님의 나라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가나안 역시 하나님 자신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한 소원으로 나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저 땅을 보게 해 주옵소서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안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사실은 더 좋은 가나안 땅을 예비해 두시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비록 내 기도를 아니 들어주신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 더 큰 복을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가 너무 하나님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너무 모세를 야박하게 대했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족할 만큼 은 혜를 베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의 소원이 없어져 버리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7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나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을 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 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 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 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 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 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개역, 마가복음 9:14~24] 중에 이 본문으로 결론을 내기로 하고 그냥 간단하게 하나 물어봅시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지금 아주 급하지요? 뭐가 있어야 돼요? 당장 필요한 게 뭐예요? 믿음이 필요하지요?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가 지금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박용규)... 있어요. (여러명) 이렇게 갈려야 공부가 되는 겁니다. (웃음) 다 있어요 이러면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그런데 반은 있 어요, 반은 없어요 라고 해야 공부가 재미있어질 징조입니다. 어느 쪽부터 볼까요? 있어요? 그럼 없어요 쪽에서 반론을 한 번 해 보시죠. 24절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박용규) 그래 거기 없다 그랬잖아요. 그럼 또 할 말 없어요? 그 앞에 내가 믿나이다. (이필환) 그렇죠. 앞에 믿나이다 했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뒤에 있습니다. (박용규) 그렇죠. 중요한 건 뒤에라? 그런 걸 미괄식이라 그럽니다. 그럼 앞에 중요한 게 있을 때에는? 두괄식이 라 하죠. 이 글이 두괄식인지 미괄식인지 어떻게 알아요? 믿음이 없다는 건 자기의 겸손함이고. (이옥엽) 아, 그럼 믿음없다는 건 겸손함이고 진짜는 믿나이다 그래요? 앞의 믿음하고 뒤의 믿음하고 믿음의 성격이 다릅니다. (이필환) 아! 그럼 진짜 어려워지는데요? 믿음의 종류가 있다는 말이죠?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정강율)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 예. (일부) 없다고 하신 분 대답해 보시죠?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어떤 믿음이냐는 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믿음이 아 니고 단지 어떤 병 고침을 받은, 의사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한, 이적을 행한 사람으로서의 믿음. (박용규) 그럼 이필환 집사님하고 학파가 같은 학파네요? 믿나이다 할 때는 예수님이 내 아이를 다른 사람을 치료한 것처럼 내 아이도 낫게 해 줄 것은 믿는데 - 1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다라고 할까. (김혜영) 그것도 같은 학파네요. 그러니까 믿음의 종류 문제가 걸려 있네요? 그죠? 그쯤하고 넘어갈까요? 그래놓 고 잠시 접어 둡시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끝에 가서 매듭을 지어 볼께요. 안다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에 뭐가 있죠? 보고. 보고 알지요? 보는 것도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을 통해서 아는 거죠. 또 있어요? 듣고. 예. 그것도 보는 겁니다. 들어본다고 하잖아요. 배우는 거. 배우는 거요? 맞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배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배우는 방법 으로 보는 것이 제일 먼저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죠. 백문이 불여일견 이 라 그러죠? 이것도 보는 것의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보고, 맛도 보고, 사람 은? 겪어보고... 그 렇죠. 사람도 보고 아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이 다 보고 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고 아는 게 맹점이 있어요. 사람을 겪어보면 다 알 수 있나요? 몰라요? 몰라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몰라요. (김은옥) 지금 결혼한지 몇 년 되었지요? 16년이요. (김은옥) 16년이나 겪어봤으면 이제 알겠네요? 그래도 잘 몰라요. (폭소) 아니? 김 집사님이 머리가 나쁜 거예요? 아니면 박 집사님(남편)이 복잡한 거예요? 오리무중 속에 사나봐요. (김혜영) 아마 그럴 걸요. 평생을 겪어봐도 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걸요. 그러면 겪어보고 안다는 말은 맞아요? 틀 려요? 조금만. 겪어보면 조금 안답니다. 보고 아는 것 중에 맛본다는 것도 있는데 맛보면 아나요? 맛보면 알 수 있는 게 있긴 있는데 반면에 맛봐도 알 수 없는 것도 있어요. 전라도에 가면 아주 좋은 음식 중에 홍어를 삭혀 서 만든 요리가 있다 그러데요. 경상도 사람이 그 요리를 처음 먹으면 아마 기겁을 한다 하던데요. 썩은 냄새가 나니까... 먹어보면 안다고 했는데 왜 먹어보고 기겁을 하는 거죠? 자기가 아는 맛은 먹어보면 알지만 모르는 맛 은 먹어본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파라과이에 가 계신 선교사님이 모처럼 고향 음식 한번 한다고 된 장을 끊였답니다. 동네에 난리가 났대요. 어디서 화장실 푸나? 하구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그 냄새를 맡으 면 구수 하답니다. 그 쪽 사람들은 그게 화장실 냄새하고 구별이 안되는 겁니다. 냄새 맡아보면 아는 거 아니에요? 청국장이 그래요. 청국장요? 선교사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집에서 먹는 된장을 말하는 거예요. 그것을 끊였는데 그렇게 - 2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되었답니다. 맡아보면 안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냄새도 아는 사람이 맡아야 알지 모르는 사람은 맡 아도 모른다 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가 보고 아는 것인데 보고 안다는 것이 완벽한 게 아니고 사실은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전형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는 사물을 눈으로 보고 알잖아요. 그런데 어떤 분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눈은 단지 그냥 감각을 받아들이는 센서밖에 안된다. 보는 것은 머리로 본다는 거예요. 눈이 받아들인 정보를 두뇌가 해석을 해서 우리가 보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분이 묘한 안경을 하나 만들 었습니다. 안경이 망원경처럼 튀어 나왔는데요 상이 눈에 들어가면 망막에 똑바로 서도록 만들었어요. 일반 적으로 보면 상이 눈에 거꾸로 서 있어야 우리가 정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렌즈를 조합을 해 가지고 상이 똑바로 맺히는 안경을 만든 겁니다. 그 안경을 쓴 사람은 눈뜨고 있을 때는 항상 이걸 써야 합니다. 잠잘 때만 벗어 놓고, 눈뜨기 전에 먼저 안경을 쓰고 눈을 뜹니다. 처음에는 책상에 마주 앉게 해 놓고 사과를 굴리면서 잡아 보라고 하는 거지요. 처음에는 이걸 못 잡아요. 상이 거꾸로 되어 있으니까. 상 상을 해 보세요. 일단 이 사람에게는 세상이 뒤집어져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다 사과를 두르르르 굴려 놓으니 천장에서 굴러가는 것 같을 것 아닙니까? 그걸 못 잡아요. 나중에 연습을 거듭거듭 한 뒤에 그것을 잡아요. 그 다음엔 일어서서 돌아다녀요. 그 실험의 끝에는 이 사람이 비행기 조종까지 하고 땅에 내려옵니 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뭐냐면 우리가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머리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눈 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보고 알 수 있으면 피카소 그림 보셨어요? 눈물 한번 흘려 보셨어요? 돈 많이 들여서 사고 싶은 생각 들었어요? 그거 왜 사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그림같지가 않으니까. (박용규)... 이해를 못하니까. 그걸 그림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 그림을 사기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한 사람은 무슨 차이지 요? 느낌의 차이요. 느낌의 차이요? 솔직히 말하면 보는 눈이 없는 거죠. 봐도 모르는 거죠. 저는 옛날에 어느 친구하고 음 악회에 갔는데 비싼 돈 들여 가지고요 저는 그냥 가슴을 떨어가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 자식이 옆에서 코 골고 있어요. 왜 그래요? 보는 눈이 없어서 (다수) 아니? 음악을 눈으로 봐요? (폭소) 듣는다고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듣고 감격을 하고 흥분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자는 거예요. 왜 그래요? 듣는다고 다 아는 게 아니란 뜻 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래요? 잘 알아들은 것 같아서 설명은 이만하고 정돈을 해 봅 시다. 감각과 관련된 것은 보고, 느끼면 알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도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봐야 알지 하는 말을 너무 즐기면 안됩니다. 보아서 알 것 같으면 연애 결혼한 사람은 절대로 이혼 안 하게요? 연애 결혼하고 중매 결혼하고 어느 게 이혼 확률이 높은지 아십니까? 연애가 높아요. 안 보고 결혼한 중매보다 는 연애해서 결혼한 사람들의 이혼율이 높아요. 왜냐하면 본다고 아는 게 아니거든요. 아무하고나 그냥 결 혼해 버리세요. (웃음) 왜? 어차피 내가 고르고 고르고 애를 썼는데... 그게 완전하지 않거든요. 그럼 뭐가 완전한데요? 차라리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눈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누가 소개 시켜 주거들랑 아무 소리 말고 가버리되 단 그 다음부터 주의하고 신경쓰고 노력하는 게 어쩌면 그것이 훨 씬 더 중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어차피 결혼은 위험한 도박입니다. 연애를 아무리 오래도록 해도 참 위험한 도박이나 마찬가집니다. 왜? 사람은 어차피 본다고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여기 좋은 예가 있잖아요. 결혼해서 16년이나 살았는데도 잘 모르겠다는 판이니... 그러니까 <하나님 보 여줘봐 믿을 게> 하는 사람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보여줘도 제대로 못 보는 판에 하나 님을 보여주면 어쩌겠다는 말인지... 우리의 감각과 관련된 것들은 보면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 3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1차원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차원이라고 합니다. 혹은 동물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동물적인 차원이라고 표 현합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어디서 힌트를 얻었냐 하면 영어 시간에 문장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이 게 뜻이 뭐냐고 물으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얘들아 단어 4개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몰라? 그래서 다시 들 려주었어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날 제가 독이 올라가지고 너희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내가 돌리겠다. 녹음 테이프를 한 20번 정도 돌렸습니다. 저도 깡다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려도 모르겠다는 거예 요. 하도 신경질 나서 야, 이 만큼 들었는데도 모르겠냐? 그러니까 애들이 뭐라 하는 줄 압니까? 알아야 들리지요. 너 방금 뭐라 그랬니? 그러니까 알아야 들리죠. 그래놓고 저희들도 놀라는 거예요. 자기들 입 으로 말해놓고 다들 놀라는 거예요. 야, 들으면 아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모르니까 들어도 안 들리네요 라는 거예요. 지금 그 문장을 잊어버린 것이 안타까운데 칠판에 그 문장을 적어 줬어요. 단어 4개를요. 그 래놓고 다시 들어보더니 그 문장이 또렷이 들리더래요. 모르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영어 공부할 생각 있거든요 제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잘 모르는 거 죽자사자 들으면 언젠가는 들리겠지 해도 안 들려요. 그 방법은 포기하시는 게 좋습니다. 차라리 문장을 미리 외우세요. 다 외운 다음 에 들어보면 잘 들려요. 그게 오히려 효과적이고 빠르지 모르는 거 수백번 들어보십시오. 들리는가. 안 들 려요. 제가 그 아이들 공부시키면서 그 소리를 듣고 아! 맞다. 아는 사람은 한 번만 들어도 선명하게 들리 는데 모르는 사람에겐 그것을 아무리 들려줘도 안 들린다!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거기서 눈치를 챘지 요. 그래서 어떤 게 그런 것이냐 했더니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 가미된 것은 듣고 본다고 아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런 예가 아까 얘기했던 그림, 음악, 어학 등 많습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사진 있지요? 그 사진 보면 예수님이 있다 그러지요? 아마 처음부터 잘 안 보였을 걸요. 그 그림 속에 예수님이 있다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아요. 이거 안 보인다 하면 믿음이 없는 거 아닐까? 그게 안 보일 때는 아무리 봐도 안 보여요. 그런데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보면 잘 보이거 든요. 이런 차원이 있어요. 이런 걸 제가 이름 붙이기를 인간적인 차원 혹은 지성적인 차원 이라고 했습니 다. 신비한 동물의 세계 보면 정말 신비롭지요. 언젠가 보다가 굉장히 놀랐어요. 암술에다 다른 꽃의 꽃가 루를 묻혀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며 촬영을 해 놓았어요. 오래 전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반응이 없어요. (이옥엽) 반응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걸 확대해 가지고 촬영을 했는데... 암술이 그 꽃가 루를 털어 버려요. 식물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거 한 장면만 봐 도 진화론 은 말이 안되는 거예요. 우연히 되어간다는 얘기, 말이 안되는 겁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얼마 나 지혜로운지 말로 다 못해요. 그러나 그 모든 지혜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표현을 바꾸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만 동물에게 주어져 있어요. 사람들이 동, 식물의 그런 반응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 면 인간의 교만이 다소 묻어 있는 겁니다. 저 하등동물에게 저런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 았기 때문에 놀라는 거죠. 놀라운 지혜가 그 속에 있지만 생존을 위한 본능적 지혜 그 이상의 지혜는 없어 요. 그래서 동물적인 차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감각이나 본능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모두 동물적인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혜가 살짝 가미되면 그 다음부터는 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혹시 바둑 두시는 분 계세요? 대흥교회 선배 중에 바둑에 도사같은 분이 계세요. 이 분이 가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회사 두 사람이 내기 바둑을 두는데 옆에서 불쌍해서 못 보겠다 그래요. 왜냐 하면 하수 가 상수한테 돈을 걸고 도전을 하는데 이 분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말을 안 듣 는데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수가 보이니까. (구송준) 자기는 수가 보이지요 그러나 불쌍한 것은 하수예요. 하수가 왜 지면서 자꾸 도전하는지 아십니까? 될 것 될 것 같으니까. (김혜영) 그런데 결국 안됩니다. 상수는 아주 수가 높아서 옆에서 보니까 내기를 할 만한 수준이 아닌 거예요. 그 런데 문제는 수 낮은 사람이 자기 상수의 수준을 짐작하지 못하는 거예요. 바둑 두는 분 계시면 알 거예요. - 4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절대로 짐작 못합니다. 그러면 이 상수는 내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절대로 많이 안 이겨요. 조절을 해 가면 서 그냥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거지요. 오늘 큰일 날 뻔했다 그러면서... 그러면 이 하수는 뭐라고 생각해요? 아, 아깝다. 조금만 잘 했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못 오를 나무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꾸 덤비는데 이걸 또 다른 상수는 보면 대번에 알아요. 그러나 이 하수는 절대로 모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의 지혜가 동원된 것은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죽어도 모릅니다. 이런 차원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위대한 예술가가 그림을 그렸거나 위대한 음악가가 작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아느냐 해도 모르는 사람은 그거 봐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는 굉장히 많습니다. 근래에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라는 책이 있는데 한 번 보세요. 볼만 해요. 그 책을 본 많은 사람들이 탄복을 하는 겁니다. 나도 거기 가 봤는데 나는 아무 감동이 없던데 어떻게 선생님은 구구 절절 감동적으로 그렇게 잘 써 놓으셨습니까? 나도 그거 아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런 질문을 유홍준 교수 한테 많은 사람들이 했나봐요. 그 교수가 대답을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아는만큼 본다. (김혜영) 유명한 말입니다만 그 교수는 그렇게 표현 안 했습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사랑하세요. 사랑하는 것만 큼 보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공익광고에 비슷한 게 나오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기는 많 이 가는데 갔다와서 하는 말이 별 거 없더라. 구경할 것 하나도 없더라 이러면서 물건만 잔뜩 사서 들어오 는 거죠. 모르고 가니까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제발 사전에 공부라도 좀 하고 가라고 광고가 다 나오 는 겁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요.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가야 보이는 게 많아요. 모르고 가서 그냥 돌 아다니니까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사람의 지혜가 가미된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 열심히 배우면 어느 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차원 중에 어느 차원에 들어갈 것 같아요?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알아야 보인다고요? 지혜와 관련된 것은 알아야 보이는 차원이고 감각과 관련된 것은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입니다. 몇 차원이나 더 높은지조차 알 수 없어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차원은 어 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어요. 믿어야 보입니다. 그 얘기 들으신 적 있어요? 하나님을 보여다오 그러면 믿을 게! 그러니까 유명한 헬라 교부가 남긴 말이 있어요. 알기 위해서 믿어라! 그랬어요. 그게 무식한 말일까요 아니면 깊은 진리가 담긴 말일까요? 진리가 담긴 말요. (모두) 진짜요?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아무 개념없이 그냥 덜렁덜렁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요? 알기 위해서 믿으라 하는 말이 할 말이 없으니까 마구 하 는 소리가 아니라 믿음과 관련되면 그 이상의 적합한 말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거 맛있니? 하니까 먹 어봐라 이게 정답이지요. 그 속에 당도가 몇 %고 수분이 몇 %고 하는 따위는 대부분의 경우에 별 도움이 안돼요. 사과의 당도가 몇 %면 달고, 꿀은 몇 %여야 꿀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나도 몰라요. 먹어보면 알지 만... 결국 먹어보면 안다 이게 답이에요. 하나님을 어떻게 알 것이냐 하는데요 이것은 먹어 볼 수도 없고, 배워 알 수 있는 사항도 아닙니다. 유 일한 방법이 믿는 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알기 위해서는 믿으라 하는 말이 할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기가 아 니고 깊은 철학이 담긴 놀라운 얘기입니다. 앞으로 예수 믿으라든가, 하나님을 믿으라든가 하는 말을 쓸 때 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용하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려면 이 용어 외에는 다른 용어가 없어요. 음 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저것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봐라 그러면 안돼요. 실컷 듣고 뭐라 하겠어요? 잠만 오더라. 시끄럽다. 그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많아요. 어떻게 해야 돼요? 설명을 해 가면서 많이 공부시켜야 하고 본인은 믿고 따라가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듣고 감동이 되는 겁니다. - 5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적어도 인간의 지혜가 가미된 것은 가르치고 배우면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르쳐도 안 돼요. 아무리 가르쳐도 안돼요. 유일한 방법이 일단 믿는 것밖에 없어요. 믿고 들어가야 그 다음 일이 진행 이 됩니다. 이런 차원을 영적인 차원, 신적인 차원 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믿음이란 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방법이지만 사람의 경우에도 그런 예가 많이 있어요. 비유를 조금 더 들 면 부부 사이에 있어서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상실된 병을 뭐라 하지요? 의처증, 의부증 그걸 뭘로 고치죠? 믿음으로... 사랑으로... 그것도 약이에요? (웃음) 어떻게 아세요? 다른 병 같으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보거나 만져서 해결될 문 제 같으면 약을 쓸 수가 있는데 이건 무엇인고 하니 믿지 않아서 생긴 병은 약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별로 없는 데가 아니고 전혀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텔레비젼에서 의처증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아나운서가 김동건 아나운서이고 정신과 의사들이 여러 명 나왔습니다. 거기 한 여자 분이 등장했는데 얘기를 이렇게 해요. 우리 집에는 전화가 6대입니다. 왜요? 남편이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았단 말이 죠. 어디 있었냐? 마당에 있다가 못 들었어요 그러면 마당에 1대, 화장실에 있는데 전화 왔던데 하면 화장 실에 1대, 이래 가지고 집안에 전화가 6대입니다. 장보러 갔다가 못 받았는데요. 안 믿는 거예요. 옆집 아주 머니하고 같이 갔다 왔다고 증인을 세워도 안 믿어요. 뭐라 하면서? 거짓말... 짜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둘이 짰다고 생각하고 안 믿는 거예요. 그러는데 텔레비젼에서 무슨 방법을 제시한 줄 압니까? 정신과 의사들이 뭐라고 해답한 지 압니까? 병원에 한 번 오세요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못해요. 정신과 의사 5-6명과 변호사가 앉았는데도 아무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프로그램을 끌고 가야 하잖아요. 그럼 누가 고생을 해요? 아나운서 혼자서 해결을 다 봐야 하는 거예요. 동생 한 명과 같이 보고 있었는데 아따, 오늘 김동건이 날리네 라고 하더라구요. 전문가가 나와서 해결책을 제시 못하고 할 말도 없으니 프로그램은 끌고 나가야 하고 김동건 아나운서가 이 소리했다 저 소리했다 하면서 그 시간을 끌고 가는데 아닌 게 아니라 김동건 아나운서 대단하더라구요. 결과적으로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거예요. 믿 음이 상실되면 해결책이 없다는 겁니다.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심은 가지만 믿는 것밖에 없어요.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래도 믿음이 말장난이라구요? 믿는다는 것이 결코 말장난이 아닙니다. 굉 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상실하면 남자들은 이발소 못 갑니다. 면도칼 어떻게 생겼지요? 그걸 가지고 목 위로 쓱쓱 문지르고 있는데 이발사를 못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안해서 못 살아요. 버스타고 가는데 저 운전수가 정신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떡하나? 이러면 못 사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믿 음이 완전히 상실된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이래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우습게 여기겠어요? 우리는 알게 모 르게 믿음에 근거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믿음이 상실된다면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이렇게 소중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겁니다. 참 소중한 겁 니다. 비유를 하나 더 들지요.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쳐 가지고 교장 선생님이 퇴학을 시키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한 번 데리고 와라 해서 데리고 갔더니 요즈음은 이런 교장 선생님이 없을 겁니 다만 옛날에는 많았어요. 저 놈의 자식 생긴 꼴을 보니 사고치고 남을 놈이네 퇴학시켜! 이것은 3가지 차원 중에서 감각적인 차원이죠. 보니까 사고 칠 놈이네. 이런 차원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을 붙들고 말합니다. 얘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고, 조금만 지도를 잘 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아이를 어느 정도 겪어보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인간적인 차원이 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 엄마를 불러다 놓으면 뭐라 하는 줄 아세요? 학교 선생님들이 학부모님하고 자꾸 싸우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이런 거예요. 엄마는 무조건 자기 아이가 나쁜 게 아니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지 우리 - 6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아이는 절대 나쁜 아이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입이 거친 선생님이 뭐라 하는 줄 압니까? 친구 때문에 얘가 나쁜 게 아니고 야, 때문에 다른 친구 다 베려놨습니다 사실 그게 정답일 때가 대단히 많아요. 사실 이 그럼에도 엄마는 죽어도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선생님 말이 맞을까요 엄마 말이 맞을까요? 선생님 말 이 맞아요. 그런데 이 아이가 진짜 선한 아이로 돌아온다면 교장 선생님 말 때문도 아니고, 담임 선생님 말 때문도 아니고, 엄마 때문에 선해지면 선해진다는 거예요. 맞아요? 예. 엄마 말이 사실이 아닌데요? 사실이 아닌데도 엄마 말 때문에 착한 아이로 될 가능성은 있지만 교장 선 생님 이야기나 담임 선생님 이야기로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요? 맹목적이고 정당한 근거가 없음에도 믿어 준다는 것은 그만한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에 근거한 정당한 말이 중요한 거예요? 근거도 없 고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믿어 주는 게 중요한 거예요. 후자요. 진짜요? 신랑이 바람을 피우고 사고를 치고 돌아다녀도 왜 그러느냐고 따지고 야단쳐도 별 효과는 없지 만 그래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믿고 앉아 있으면 약이 더 되는 겁니다. 적어! 적어! (이희근 집사, 부인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증거를 대라! 했을 때 증거를 대라 하는 이 말 이 참 무식한 거예요. 증거라는 게 몇 차원 같습니까? 1차원입니다. 사람의 모든 관계가 1차원으로 걸려 있 으면 이건 정말 피곤합니다. 법대로 하자. 부부 사이에 법대로 하자. 이건 끝난 거예요. 그렇죠? 법대로 하 자가 뭐예요. 그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물적인 관계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진짜 중요한 것은 증거 를 대가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증거를 가지고 따지자는 것은 스스로 관계를 깨는 것 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 단계는 최소한도 올라가야 합니다. 대학교 처음 가서 영어 시험을 봤는데 미국 사람이 불러주고 시험을 쳤는데 맞으면 C(correct), 틀리면 I(incorrect)로 답을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 맞았다 했는데 답지 돌려주는데 보니까 빵점이 되어 있더라구 요. 이럴 리가 없는데 가만 보니까 착각을 해 가지고 거꾸로 써 놓은 거예요. 그래서 백점이 빵점이 된 거 지요. 그래서 답지를 들고 올라갔습니다. 가서 제가 incorrect하고 correct하고 착각을 해서 거꾸로 써서 그렇 습니다. 사실은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이러니까 가만히 듣더니 그 자리에서 전부 수정을 하더라구요. 백 점으로 고쳐가지고 다시 줘요. 몇 차원이죠? 2차원. 믿어준다는 면도 있지만 상황을 보니까 그럴 것 같다고 이해가 되기 때문이라면 2차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은 남의 말을 믿어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그걸 1차원 식으로 하면 어떻게 되지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이게 어디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1차원적 인 사고방식으로 너무 많이 살아요. 그런데 참고로 한국에 살려면 증거가 없으면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을 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각한 이야기 하나만 더하죠. 한국이 얼마나 1차원적인 문화인가? 이거 하나 아실 필요 있습니다. 학교 에서 숙직하다가 교실에 불이 난 걸 알았습니다. 제일 먼저 뭐 해야 하는지 아세요? 신고 아닙니다. 불꺼야죠. 아닙니다. 도망가야죠? 그건 정말 큰 일이죠. - 7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잠을 자지 않았다는 증거를... 그렇죠.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어떻게 증거를 대죠? 일지부터 쓰나요? 예 맞습니다. 일지부터 써야 됩니다. 불이 타고 있는데도요? 타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몇 시에 순찰 중 화재 발견 이거 써 놓고 그 다음에 불을 끄든지 신고를 하 든지 해야 됩니다. 와, 미치겠다. 사람을 믿어주지 않으면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기자가 오거나 감사 원에서 왔을 때 제일 먼저 당직일지부터 압수하거든요. 일지에 순찰중 화재 발생 이라고 쓰여 있으면 이 사람은 임무를 제대로 한 것으로 되어서 별로 문책이 안됩니다. 일지가 비어 있으면 잠자다가 늦게 튀어나 온 것밖에 안돼요. 그래서 교실이야 타든지 말든지 물 한 바케스만 뿌리면 끝날 일이라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일지부터 써야 합니다. 불부터 끄면 안돼요? 그러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러다가 제대로 끄지 못했다면 다 뒤집어 쓰는 겁니다. 학교에 무슨 사고가 나서 선생님들이 쫓겨나는 경우 중에는 나쁜 선생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 이 쫓겨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되어있 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한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도가 이런 식이 니 그럴 수 있는 겁니다.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결코 증거를 제시해서 증명을 하 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 문화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십시오. 어때요 답답하지 않아요? 1차원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최소한으로 2차원, 사람의 말을 믿을 줄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차원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나라 문화는 그거 꿈꾸지 마세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밖에 나가 실수 많이 하는 것 중에는 그쪽 문화를 이해 못해서 곤란한 경우 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늑대들이 볼 때는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양들이지요. 교회 안에 서는 그래도 더러 믿어 주지요? 교회 안에서도 믿어 주지 못한 것이 더러 있더라구요. 믿음이라는 이 차원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계시 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정말 짐승같이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겁니다. 최소한도로 가 정에서는 3차원까지 가야 되지 않겠어요. 1차원적인 가정 이야기를 설교 때 한번 드렸는데 기억 나세요? 어느 장로님 이야기 말입니다. 부인이 시장갈 때 콩나물 값까지 얻어서 가는 부인이 있다고 했지요? 숨 이 막혀요. 남의 일이지만 그 집 이야기 들으면 숨이 막혀요. 그게 1차원 아닙니까? 두부값, 콩나물값, 왕복 버스비 얻어가지고 시장간다는 게... 그런데는 죽어도 (시집)가면 안돼요. 우리 삶에도 이런 3차원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믿는 것 외에 다 른 방법이 없음을 확실하게 합시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말인지 이해해 둡시 다. 그림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그림에 입을 갖다대거나 귀를 갖다대면 얼마나 우스울까요?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는 것은 그것보다 더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떻게 생기나요? 이쯤에서 처음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이 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고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거예 요. 그렇죠? 믿음이 있다라고 결론이 났습니까? 반반으로.. 그런데 그 분이 자기 아들을 고칠만한 믿음이 있다면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정확하게 표현 - 8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하면 다급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고친다는데 자기 안을 들여다 보니까 고칠만한 믿음이 현재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데요 하면 어떻게 됩니까? 못 고치죠. 그러면 안되잖아요. 뭐라 해야 돼요? 내가 믿나이다 해야지요. 믿나이다 해놓고 보니까 사실은 없으니 예수님께서 그 믿음 없는 것마저도 도와 주셔야 됩니다. 이게 아버지의 심정이에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 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없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믿습니다 해 놓고 도와 달라 하는 거지요. 믿음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 본문을 택했느냐 하면 우리 뿐만 아니라 많 은 사람이 믿음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이라도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신을 보니까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필요를 느끼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서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런 믿음이 나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판 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복인지 모릅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여러가지로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증거라는 것은 1차원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확정하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보고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 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능력 바깥의 것을 어떻게 끌어들여요? 무조건 믿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걸 전제로 해 놓고 그래도 증거를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 류의 증거는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는 데, 증거가 없는 이유는 증거를 제시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관계된 것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데 증거 대봐 2차원으로 들어갔는데 받기는 뭘로 받아요? 1차로. 왜 끌어 내려요? 제대로 된 인간관계라면 증거 대봐라는 말 하면 안돼요.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다 끊어 졌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제가 여학교 있을 때 약간 좀 별난 여 선생님 한 분이 있었어요. 장난치다 보면 뒤에서 끌어안고 좀 그래요. 와이셔츠 차림이었는데 어쩌다 잘못해서 등에 입술 자국이 찍혔나봐요.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오늘 큰 일 났다는 겁니다. 너 오늘 집에 가면 죽었다 하는 거예요. 그 래 말 잘했다. 내가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내기할래? 집에 가서 여보 등에 뭐 하나 찍혔단다. 한 번 볼래? 보더니 아! 그럴 수 있어요. 나도 버스타고 가다가 기사가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앞 사람 등에 하나 찍었어요. 그 다음날 학교 가서 내기한 선생님들한테 다 이겼지요. 그런데 내가 버스를 타고 다니 나? 어쩌다 찍혔는지 묻지도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 치우더라. 이러니 그 분들이 얼마나 실망했겠어요. 사람의 심리가 얼마나 고약한지 남의 집에 싸움이 나야 시원한데 이건 너무 싱거운 거죠. 부부 사이에 이 정도의 믿음도 없어서야 되겠어요? 저기 뭐야 춤추는데 있죠? 캬바레... 우리 집 사람이 몇 번 갔는데 거기 경치 좋더라. 고 그래요. 뭐? 하니까 야한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 정신 다 빠지겠더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집사람을 그런데 보내요? 내가 보냈나요? 자기가 갔지. 직장 사람들하고 어울리다 보면 갈 수도 있는 거죠. 간다고 뭐 별일 생기나요? 그래[그렇게] 좋은데 있으 면 다음에 나 좀 데려가도! 그랬는데 전 아직도 구경 못했어요. 이제 신학교까지 갔으니 야한 캬바레는 영 영 졸업이겠죠.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는, 그렇게 소중한 것 임을 기억하면 우리 스스로 이 높은 차원에서 기어 내려와서 증거 대봐라 이런 식의 이야기는 안 해야 됩 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사람이 사는 방식에도 이런 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적어도 하나님은 이런 차원이니까 증거를 대라, 하나님 데리고 와봐라! 라는 질 문에 하나님은 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건 필요합니다. - 9 -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 성경공부의 서론 (마가복음 9:14~24) 가청거리, 가시거리 아시죠? 사람의 가청거리가 얼마쯤 되냐 하면 맑은 날 높은 산에 올라가면 어느 정 도 보이느냐 50km쯤 보일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키는 얼마쯤 될까요? 사람만 해요. 하나님은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사람만한 키로 우주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이것 다 만드실 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으니까요. 어, 잠깐,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은 키, 체중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다 시 설명되어야겠네요. 현충일 청년 집회 때 설명할께요. [참고, 홈페이지 설교에 보시면 6월 6일 날짜로 된 것이 셋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공부하기로 하고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신 분이에요. 가시거리 50km밖에 되 지 않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겠다는 얘기는 끝도 없다는 이 우주전체를 봐야 믿겠다는 거지요. 50km가 멀어 보이지요? 끝이 없다는 우주와 비교하면 이 50km가 얼마쯤 된다고 생각해요? 바로 눈앞이에요. 한치 앞도 못 보는 게 사람의 눈입니다. 눈이 먼 것과 똑같아요. 이 눈 가지고 하나님을 봐야 되겠다는 거예요.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사람의 귀가 모든 소리를 다 듣습니까? 너무 크면 못 들어요. 개는 듣는데 사람은 못 듣는 소리가 있어 요. 개가 듣는 소리를 누가 스피커로 만들었는데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스피커를 눕혀 놓고 탁구공을 넣으 니까 공이 튕겨 올라오더래요. 공기의 울림에 공이 튀고 있는데도 사람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범위가 좁아요. 이런 소리를 가청주파수라 하지요. 색깔도 마찬가지입니 다. 볼 수 있는 색을 가시광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도 아니요 배워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게 됐다는 자체가 얼마나 복이 많은 것인지 모릅니다. 의부증, 의처증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아내를 믿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 보신 적 있으면 이해가 될 겁니다. 보고 믿겠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입니다.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글이 성경이 낯선 분은 이리 오세요 란 에 있습니다.] - 10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오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 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 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 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 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 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 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 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 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 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 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 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개역, 창세기 22:1~1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 에서 나가시니라 [개역, 요한복음 8:56~59] 후에 청년들이 잘 안 보이기에 다 어디 갔어? 하니까 시험 공부하러 간 사람이 여러 명 있다고 하던데 저녁 예배에도 시험 때문에 못 나온 청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번 주간과 다음 주간은 시험 때문에 신경 쓰이는 분들이 많겠죠. 오늘 이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시험받은 내용입니다. 마침 시험 기간이라서 아주 좋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식을 번제로 드려라 하는 이런 야만인 같은 하나님을 나는 섬길 수 없다. 자기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너무 쉽게 평가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어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내 지식을 동원해서 따져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 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맞든지 틀리든지 간에 무조건 따라가 봐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진짜 대가에게 뭔가 한 수 배우려면 이해하기 전에 순종하거나 모방해야 하는 법입 니다. 말이 전혀 안되더라도 따라 해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알려면 더 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하나님 같으면 나는 못 믿어? 이것은 깊고 오묘한 하나님을 내 짧은 지식으로 속단해버린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보훈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 다고 그랬죠?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을 어떻게 청결하게 합니까? 비누 가지고? 누가 속을 청결하게 한다고 하이타이 마셨다는 사람이 있습디다마는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고 비누 써서 될 것 같으면 비누회사 사장이 제일 하나님을 잘 볼 걸 요?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을 깨끗하게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그 - 1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말씀이 이해가 되든 안되든 순종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다? 나는 그런 하나님 못 믿어! 너무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을 주셨는데 그 시험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의 내용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 기말고 사도 학생 잡고 부모 잡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 이런 시험은 사람 잡는 시험입니다. 시험을 왜 칩니까? 대학교 입학시험은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입니까? 합격시키기 위한 시험입니 까? 합격시키기 위한 시험. 아! 서울대학교에서 나를 합격시키기 위해서 시험을 친다? 좋은 시험이죠! 그런 마음으로 시험치러 가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나를 합격시키기 위해서 시험을 친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생각이 좀 다르죠?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평소에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답이 다릅니다.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은 나를 합격시키기 위해서 시험을 치는구나. 평소에 좀 농땡이 친 사람은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치는구나라고 생각합 니다. 입사시험은요? 여러분 대부분이 시험치르고 회사에 들어가셨죠? 입사시험은 내게 직장을 주려고 하는 시험입니까? 아니면 나를 떨어뜨리려고 치는 시험입니까? 줄려고. 줄려고 하는 시험요? 몇 분이 대답을 하셨는데 축하합니다. 그런데 학교 아이들 중간고사는 왜 치죠? 이 미 들어간 아이들이 중간고사 왜 쳐요? 그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치는 시험입니다. 선생님들이 어떨 때는 좀 악랄합니다. 시험 날짜 잡을 때 중간에 꼭 주일 끼우죠? 토요일 두 과목 치고 월요일 몇 과목 치고... 왜 그래요? 토요일, 주일, 우리는 주일이지만 그 분들에게는 주일 아닙니다. 토요일, 일요일 악착같이 공부 하라고요. 공휴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현충일 앞뒤로 끼워서 시험을 칩니다. 왜요? 딴 짓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요. 학교에서 시험기간을 일부러 그렇게 잡는 걸 보면서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놀 때는 좀 놀게 해주면 안되나? 잔인하다 싶을 만큼 공부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런 불평을 하면서도 냉정하게 생각 해 보면 시험이 있어야 공부가 되는 것도 맞습니다. 시험이 없어지니까 공부 안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 험이 있기는 있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 시험은 입학시험 같습니까? 아니면 중간고사 같습니 까? 중간고사. 중간고사 같습니까?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요? 아브라함에게 무슨 공부하라고요? 성경의 시험은 보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걸 유혹이라고 표현하죠. 주로 내가 잘못해 서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나 아니면 사탄이 우리를 시험해서 넘어뜨리는 경우입니다.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해서 더욱 훌륭한 신앙인으로 키우기 위해 주시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이라기보다는 시련 혹은 연단이라고 표현하죠.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거니까 유혹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연 단이라고 보아야겠는데 어딘가 연단이라고만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이 어떤 시험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시험치는 시기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때에 친 시험이냐에 따라서 그 시험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 21장 1절에 보시면 시험 친 시기가 그 일 후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을 부르셔서 시험을 치셨습니다. 그 일이 바로 아비멜렉과 화친을 맺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이유 에선지 잘 모르겠지만 이방지역인 아비멜렉의 지역에 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두려워서 거짓말 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했더니 벌을 누가 받았어요? 아비멜렉이 받은 겁니다. 아비멜렉은 가만히 생각해 보 니까 도저히 안되겠어요. 저 친구 말이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주신다? 도 - 2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저히 안되겠다.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우리 사이 좋게 지내자. 조건이 하나 있다. 무슨 조건이 죠? 너, 제발 나한테 거짓말 좀 하지 마라. 그것만 지켜주면 우리는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그래서 조약을 맺고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 다. 왜요? 상대가 안되거든요. 아비멜렉은 일국의 왕입니다. 자기는 그 나라에 살러 온 외국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찾아와서 거짓말만 안 하면 사이 좋게 지내겠는데 그러니 거짓말만 좀 하지 말아다오. 하는데 아 브라함이 마다 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그 후에 아브라함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 팔자가 어떤 팔자냐? 내가 거짓말을 막 해도 벌은 누가 받고 요? 저 왕이 받는다. 저 왕이 답답하니까 나를 찾아와서 사이 좋게 지내자고 한다. 기분 좋겠어요? 안 좋겠 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게 복주고 계 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가 중 요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시험치를 준비가 다 됐을 때 시험을 치신 겁니다. 학교에 입학시 험이나 중간고사 말고 또 이런 시험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다음 주에 여태까지 배운 것 시험 한번 칠 거 야 중고등학교는 그게 잘 안되는데 신대원에는 나이 제법 드신 분들이 모였다고 교수님! 공부할 분량이 너무 많기도 하고 다음 주에 이 시험도 있고 저 시험도 있는데 일주일만 연기하면 안됩니까?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 는 듯이 야단치다가도 교수님들이 못 이긴 척 하고 미루어줍니다. 그 다음 주에 와서 인제 쳐도 되지? 하는데 아이고, 마, 꼭 쳐야 되겠습니까? 기말에 한꺼번에 칩시다. 준비할 겨를이 없어 서... 하고 미루어 버린 게 더러 있습니다. 그게 이번 주부터입니다. 미룰 때는 좋았는데 이제 막상 기말이 닥치니까 범위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왜 자꾸 미루어 주나요? 준비가 덜 됐다 하니까 미루어 주는 겁니다. 시험 중에는 때때로 그렇게 미루어 가면서 치는 시험이 있습니다. 왜 미루어 줍니까? 시험 잘 보라고, 좋은 성적 내라고 미루어 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치는 이 때는 생애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주었는데 깨끗하게 통과했으면 그건 아브라함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노년에 이 시험을 치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 이런 시험을 줘도 충분하게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시험을 치뤘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근래에도 포철 직원들 중에 더러 시험치러 가시는 분들이 있데요. 무슨 시험입니까? 시험치러 간다고 공 차러도 안 나가데요. 진급하기 위한 시험입니까? 떨어지면 그만이고 붙거나 좋은 점수 따면 상도 준다면서 요? 상 줄려고 치는 시험이죠? 그런 시험 같으면 한 번 쳐봤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치르는 시험이 뭔 가를 주시기 위해서 치르는 시험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을 잘했습니다.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은 워낙 믿음이 좋은 사람이어서 자녀를 바쳐라 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아침 일 찍 이삭을 데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자식을 죽이러 갔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입 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생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슬픈 건 슬프고 두려운 건 두려운 겁 니다. 우리 목사님이 중국 가셔서 숨어 지내다시피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오셨는데 정말 겁이 전혀 없었을 까요? 나중에 한 번 물어보십시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두려운 건 두려운 것이고 슬픈 건 슬픈 건데 다 른 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손양원 목사님,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 이라고 합니다. 자녀 둘을 억울하게 잃어버렸습니 다. 그 죽은 두 아이의 장례를 치르면서 10가지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저도 다 기억 을 하지 못하는데 대강 기억나는 것이 한 집에 순교자 한 사람도 나오기 어려운데 한꺼번에 순교자를 둘 이나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아이들 여기 살면서 참 고생할텐데 정말 좋은 하늘나라로 일찍 불러주셔서 감 사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10가지를 감사드렸습니다. 웃으면서 감사를 드렸을까요? 울면서 감사를 드렸을까 요? 울면서. - 3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확실해요? 그렇게 신앙 좋은 목사님이 울었어요? 그 감사 기도를 들으면서 그 식장에서 울지 않은 사람 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가 자기 아들 둘 죽인 범인을 찾아서 자녀로 삼겠다고 했을 때 딸이 나는 아버지도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다. 고 하면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작년에 그 분이 나의 아버지 손양원 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렇게 신앙 좋은 아버지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마음 이 어떠했는지 사서 보십시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식을 죽이거나 자식이 겪는 아픔만큼 부모가 크게 아픔을 느끼는 경우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은 산에 갖다 묻지요. 자식은 어디 갖다 묻죠? 가슴에 묻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권사님들이 아시는 거야 당연하겠죠. 부모님은 산에 갖다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고 합니다. 자식의 아픔과 자식의 죽음은 부모에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 모릅니다. 믿음이 좋으면 아무렇지 도 않을 거라고요? 아닙니다. 이겨낼 힘이 있을 뿐이지 아픔조차 없다는 것은 아니란 얘깁니다. 특히 아브 라함에게 있어서 자식을 죽이는 것은 남들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이 아이 하나 얻기 위해서 몇 년을 기다 렸는데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고 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든 것 을 포기했을 때 다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겨우 노년에 하나 얻은 자식입니다. 이 자식 하나 얻으려고 얼 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이 자식 죽이려고 몇 일을 걸어갔습니까? 사흘 길을 갑니다. 덜컥 죽이는 것은 쉬울런지 모르 겠는데 사흘동안 이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분은 워낙 순종을 잘 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갔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아브라함이 밤새 잠이 왔겠습니까? 밤새 뒤척뒤척하고 괴로 워하다가 에라, 이럴 바에야 빨리 가는 게 편하겠다. 그만 가자. 그런 마음으로 일찍 갔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어쨌건 사흘 길을 아픈 심정으로 가야 했습니다. 비록 서자였지만 데리고 있던 이스마엘도 이 사건 이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보내라 해서 내보냈습니다. 이 이삭이 죽고 나면 이제 자식이라곤 없 어요. 자녀를 길러본 분은 압니다. 어린 애 하나도 있다가 없으면 얼마나 허전한가를... 혹시 자다가 꿈에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면 깨어나서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아니면,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탄의 장난일거야. 아니야 내가 평소에 개꿈을 많이 꾸었는데 이것도 개꿈일거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쉽게 순종하기가 어 려울 겁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자기 손으로 어떻게 죽입니까? 이건 더더욱 어려워요. 제가 이 교회 부임하고 첫 번 행사장 갔던 날, 닭 한 마리 풀어 놓고 온 성도들이 잡으려고 뛰는 걸 보 니까 닭이 불쌍해 죽겠어요. 나중에 잡아서 전도사님 이것 가지고 가세요. 라고 하시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압니까? 제가 보기보다 마음이 좀 여립니다. 닭 목을 어떻게... 그런데 자녀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깨끗하게 실천합니다. 도대체 아브라 함이 뭘 믿고 그렇게 순종했을까요? 아브라함에게는 적어도 이 이삭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표가 안 나는데 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고 할 때 영어성경이나 다른 성경을 보면 주어가 우리 라 고 되어 있는데 이삭과 함께 돌아온다라는 뜻이 됩니다.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하나님께서 이루시리라 는 것을 아브라함은 확실하게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후손은 반드시 이삭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라 는 약속이 이미 그 전에 있었습니다. 이삭이 만약 지금 죽는다면 하나님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경 우에 따라서는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믿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17절부터 봐야 되겠네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 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주 번창할 것을 말씀하시죠? 이 지구상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천주교의 교인들도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 교인들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 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예요? 아마 아브라함의 후손보다 많은 후손 - 4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크게 약속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의 문을 얻는다, 정복한다는 얘기죠. 이것은 사탄을 완전 하게 정복해버린 예수님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한다지만 예수 님께서 다 이겨 놓으신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죠. 또 하나는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복을 약속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금 처음 하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언제 하셨습니까? 고향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그때 네 씨가 많아 지게 하겠고 땅을 얻게 하겠다라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하셨습니다. 이미 약속했던 것이라면 이번 일로 아브라함이 얻은 게 별로 없는 것 같네요.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복을 약속한 이유 는 나의 말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니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 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이 전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몰랐단 말입니까? 복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도 이 사건이 있기 전인데 새삼스럽게 이 일로 이런 복을 주 시겠다니 도대체 어느 말이 맞는 겁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순종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시험을 친 것이 그 이유입니 다. 말을 조금 바꾸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이라도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 렇게 만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편이 돼서 보호하고 돌 보아 주셨습니다. 평생을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오면서 아브라함이 느낀 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말 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득이더라는 겁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다? 결과가 어 떻게 될는지 나는 모르지만 어쨌건 간에 말씀에 순종하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유익이더라는 사실을 아 브라함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가슴 아프지만 하는 겁니다. 어 떠한 명령, 어떠한 시험에라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만들어 오셨다는 사실입니 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을 바친 믿음입니다. 대단한 거죠? 대단한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믿음 을 하나님께서 차곡차곡 만들어 오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기는 내가 믿었음 에 도 성경은 분명히 믿음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믿음도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기는 분명히 내가 믿고, 교회 오는 것도 분명히 내가 왔습니다. 고백도 내가 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 록 나를 만들어 오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런 시험을 충분히 통과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능력이 좀 부족한가 요?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하고 싶어서, 아니 이런 칭찬을 하고 싶 어서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제가 언젠가 마당에서 톱질을 하고 있는데, 우리 딸 애가 세 발 자전 거를 타던 녀석이 옆집 애 두 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아파트를 한바퀴 돌고 오더라구요. 멀리서 그걸 보는 순간에 아, 자전거 하나 사줘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바퀴를 돌고 오니까 친구 녀석이 빼앗아 버렸습니다. 내놔 찍 소리 못하고 주더군요. 저한테 털레털레 오더니 아빠 자전거 사 주 세요 하더라구요. 사 줄게 이야!... 빨리 사러 가자는 거예요. 바빠 죽겠는데 하도 땡깡을 놓다가 그 날 은 결국 한대 터졌습니다. 아빠가 사준다 했으면 사줘야지 지금은 안된다 하는데도, 당장 사준다 했잖아. 왜 약속 안 지켜 이러다가 결국 한 대 얻어 맞았습니다. 그러고는 자전거 소리 안 하더군요. 성탄절이 다 가올 쯤에 학교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잘 했더라구요. 이야 공부 잘했네. 자전거 사러 가자 그래서 갔 습니다. 사 왔어요. 얘는 아빠가 자전거를 왜 사줬다고 생각할까요? 공부 잘해서. 내가 공부 잘해서 우리 아빠가 자전거를 사줬다.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까? 문제가 너무 어렵습 니까? 맞아요? 틀려요? 맞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안 맞습니다. 그 자전거는 쟤가 세 발 자전거를 타다가 남의 두발 자전거 빌려서 타는 걸 아빠가 보는 순간에 자전거는 이미 생긴 겁니다. 이 아이가 공부 - 5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잘했다고 아빠가 자전거 사줬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 시험에 멋지게 통과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신 겁니다. 그래 놓고도 아브라 함에게는 이야! 이제 보니까 네가 정말 나를 믿고 순종하는구나! 선물을 줄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 라함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일은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입니다. 내 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자꾸 생기나 하고 얼굴 찡그리지 마십시오. 내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내가 부족해서 자꾸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최대한 노력해서 그러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게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나 싶거든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건 맞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내게 또 무슨 복을 줄려고, 무슨 건수 하나 잡아서 그 핑계대고 복을 주시려고 내게 이런 어려 움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자녀를 번제로 드리라 할 때 하나 님, 무슨 고약한 심보가 있어서 하필 이런 걸 시키십니까? 아브라함이 그렇게 생각하면 괴로워요. 하나님 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이러시는가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면 고통을 견디기도 쉬워요. 결 국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다른 많은 사람을 내버려두고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창세기 18장 17-19절까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 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행하는 건 아브라함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건 누굽니까? 하나님이에요. 그를 그렇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더 관심을 갖고 싶은 부분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는 구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도저히 아브라함에게는 숨길 수가 없더라는 얘깁니다. 왜 못 숨 겨요? 여러분, 속에 비밀을 간직한 채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사랑하는 경우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묻어놓고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려고 하는 일을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지를 못합니까? 이런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 계를 야고보 2장에서는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죠? 자녀. 백성. 그것은 평소 실력이고, 자녀나 백성정도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표현해놨습니다. 하 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의 벗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하 나님께서 비밀을 묻어놓고 계시지 못해서 아브라함에게 털어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들을 번제 로 드리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은 비밀이 뭘까요? 요한복음 8장을 꼭 보십 시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이 붙어서 싸우다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너 나이가 지금 얼만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느냐? 그러면서 나이 오십도 안된 게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님 그때 연세가 얼마죠? 겨우 서른 넘었으니 사십도 안된 게 이러면 이해가 될텐데 오십도 안된 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보고 어떤 분이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고생을 얼마나 하셨으면 겨우 서른 조금 넘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이가 오십도 안된 게 하느냐? 는 거죠. 그 분 성경 참 잘 보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단 말이냐라고 예수님께 따지고 들 때 예수님이 뭐라 고 하시느냐 하면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기뻐하다가 보 고 기뻐하였노라 고 하십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했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눈으로 친히 보았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죽이기 위해서 사흘 길을 가는 그 아픈 고통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온 인류를 위해서 자기의 아 - 6 -

[2001.06.17] 네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창세기 22:1~19, 요한복음 8:56~59) 들 독생자 예수를 죽이는 하나님의 마음이더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체험으로 알았단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 브라함에게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아픈 마음, 그걸 아브라함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 다. 다른 사람은 몰라줘도 좋지만 아브라함에게만은 얼마만한 아픔을 가지고 이 일을 행하고 있는지 알리 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이러 올라가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죽게 만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더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 내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고 아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자신의 아픔은 어디 가고 하나 님의 아픔만 남았더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바로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그 날을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자기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눈으로 본 것보다 더 강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 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이상 기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는 셈입니다. 아 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 기쁨을 알리고자 하셨고 아브라함은 그런 기쁨을 누렸습니다. 학교 시험은 입학을 시키려고도 치고, 공부하라고도 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시험 종류가 늘었습니다. 요즘 학교마다 새로 생겨서 유행하는 시험이 뭔지 아십니까? 상 줄려고 치는 시험이 생겼어요. 요즘에 무 슨 상이라도 무조건 줄려고 안달입니다. 상급학교 진학할 때 상 받은 게 점수가 되니까 학교에서도 자기 학교 학생을 유리하게 하게 위해서 상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상을 줄려고 자꾸 치게 하는 겁니다. 안 치는 애 보면 누가 답답해요? 선생님이 답답합니다. 야! 치기만 치면 상 준다. 쳐라! 쳐! 오늘 주일학교 초등부 달란트 시상을 했는데 달란트 시상을 열 때마다 결석하는 아이를 보고 누가 답답 해 할까요? 선생님들이 답답해요. 몇 년째 그런 아이가 있다고 그래요. 그게 왜 답답해요? 아이들에게 선물 을 줄려고 하는데 하필 그 날 자꾸 빠진단 말이에요. 걔는 몇 년 째 달란트 모아놓기만 하고 그 때마다 빠 지니까 선생님들이 달아서 야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는 시험은 무슨 시험일까요? 상 주시려고 치는 시험입니다. 무슨 상일까요? 이 상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은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타이틀을 주시려고 시험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알리고 싶어서 시험을 치시는 거예요. 아브라 함이 그걸 체험적으로 알아버렸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 이 가장 큰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여야 하는 뼈저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아픔이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 예수를 아브라함은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 까요? 만약, 여러분에게 피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 닥친다고 생각이 되시거 든 왜 내게, 왜 이런 아픔이 닥치느냐? 혼자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아픔 을 겪었는지를 먼저 기억하시고 나의 이런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지 그걸 생각하십시오. 기대한 것보다 아니,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식을 바치 라는 무식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하고 자기 생각대로 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 7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저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 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 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 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 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 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 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 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 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 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개역, 마가복음 8:27~38] 는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의외로 베드로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일 은혜가 안되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을 보면 늘 기가 죽는데 베드로를 보면 때때로 용기를 얻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늘 잠이 모자랐습니다. 고3 때도 새벽기도 쫓아 다녔으니까 학교는 학교대로 바쁘고 교회는 교회대로 빠지지 말아야 했으니 저녁 예배 시간에 잘 졸았습니다. 그 때마 다 생각나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해서 우리들을 위로해 줍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얼마나 덜렁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일만 있으면 먼저 뛰어나왔다가 사고치는 경우 가 베드로에게 제일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베드로가 가장 위대한 사역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에 게 큰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래서 제자들이 들은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하나 라 고도 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전해주었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십니까? 오다 보니까 차들이 굉장히 많이 밀리고 있었 습니다. 오늘 무슨 날인데 차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은데 교회 오는 사람보다 식당에 가서 먹고 노는 사람 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야 지금 무슨 짓을 하 든지 간에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뭐라고 하느냐는 것보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생활을 하다 보면 그 비슷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부인 생일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회사에서 직장 동료들이 Happy birthday to you! 다 해 주었을테고 아들 딸도 선물 하나쯤 하곤 했으니까 뭐 나까지 나서서 생일 축하합니다 할 필요 있겠 냐? 케익 하나 사 놓을까 말까? 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많이 했으니까 안되었겠나 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부인이 뭐라고 그럴까요? 오늘 생일축하 많이 받았으니까 당신은 안 해도 됩니다. 이럴까요? 당신은 여 기 가서 축하 받고 저기 가서 축하 받고 많이 받았으니 됐잖아? 라는 남편의 말에 부인이 뭐라고 할까요? 다른 사람들 축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당신이 축하를 해야지... 일년내내 괴로울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남편이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는 능력이 있다고 칭찬을 잔뜩 듣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서 부인 에게 바가지를 긁히는데 그 칭찬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누구한테 칭찬을 들어야 제대로 된 칭찬인가요?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 됩니다. 부부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노력하십시다. 헛말일지라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에게서 말입니다. 자식들도 가끔 부모에게 이런 헛말을 합니다. 학교에서 수련회나 야영을 가면 꼭 집에 편지를 쓰라고 해 - 1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요. 한결같이 집나와 보니까 집이 그립다, 효자되고 효녀되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입니까? 빈말입니까? 편지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건데 막상 쓸려고 하면 그런 말 빼고는 별로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으레껏 그렇게 쓰는 거죠. 집에 온 애 보고 뭐라 그래요? 야 누가 시켜서 쓴 거지? 괜히 해 보는 소리지? 그런 부모는 잘 없어요. 시켜서 썼건 어째서 썼건 자식이 헛말로 했더라도 그런 말 듣는 것이 부모에게는 기쁨 입니다. 저는 지킬 수 없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하겠습니다. 이런 각오로 입 꼭 다물고 있 는 아이들보다는 헛말일지라도 한마디씩 하는 아이들이 더 예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우리가 하는 말 이 듣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헛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내 능력으로 이런 일을 잘 할 수 없으니까 꼭 할 수 있는 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세요. 자신있는 것이 뭐가 있는가! 때로는 빈말이 될 때 되더라도 하나님께 작정도 하고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당당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말에 베드로가 대답을 잘 했습니까? 못했 습니까? 우린 잘 했다고 기억을 하죠. 조금 넓게 보세요. 대답을 잘 했다면 어떻게 바로 뒤이어 사탄아 라 고 책망을 듣습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기뻐하시면서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뭘 잘 모르고 얼떨결에 말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굉 장히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 고백을 보면서 얼떨결에 나와서 홈런치는 것 그것 도 실수로 친 홈런이 아닐까 싶어요. 제게 비슷한 기억이 있거든요. 대학 입학해서 첫 친목회 모임에서 소프트 볼을 했는데 실수로 장타가 나 버렸어요. 야, 잘했다 하고 야단인데 실수 아이가 라고 대답을 했거든요. 그 다음부터 저만 나가면 실수 해라. 실수해라 고 야단법석인데 사실은 4년 동안 한번도 그런 실수를 더 이상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생각 을 하면서 베드로가 얼결에 실수로 홈런친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역할에 대해 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그 고백을 예수님께서 참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비록 능력이 없어서 잘하지도 못하고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는 수도 허다하지만 그래도 예수 님께 이런 고백을 드리고 이런 작정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예수 님은 우리 입을 통해서 그런 고백 듣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위대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동안에 안 하시던 이야기를 하십니다. 31절을 보니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고 말씀하십 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그리스도란 어떤 일을 하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지 않았던 모양입 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니까 그제서야 그리스도는 이러이러한 분이다 하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절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다 배우고 아, 이런 분이구나 그래서 교회 오 셨습니까? 그런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뭔지도 모르고 따라왔을 가능성이 더 많죠. 어디 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배워가지고 교회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음식이 맛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죠? 먹어보면 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어보면 다 압니까? 포항 사람 들은 옛날부터 콩잎을 잘 먹었습니다. 장에 삭혀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젓갈에 절여서 먹기도 하죠. 서울 친구 하나 내려오더니 이걸 어떻게 먹어? 소나 먹지 하더라고요. 야, 이것 얼마나 맛있다고... 그래도 절 대 손대지 않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여름에 콩잎 삭혀서 쌈 싸 먹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여 주겠다고 별렀는데 아직도 못했습니다. 지방따라 음식이 다른데 먹어보면 알 수도 있지만 먹어봐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경상도 사 람들이 못 먹는 것 있지요? 전라도 홍어 삭힌 것이 유명한데 저도 아직 근처에 못 가봤습니다. 과연 먹어 보면 맛을 알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은 군침이 돌지 몰라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냄새가 독 하다던데요? 파라과이에 계시는 어느 선교사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 중에 거기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 2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된장국을 끓였답니다. 된장국을 끓여 놓으니까 아, 구수한 냄새 하고 군침이 도는데 이웃집에서 무엇이라 고 하는지 아십니까? 야, 이게 어찌된 게 오늘은 화장실 냄새가 이렇게 많이 나냐? 하더랍니다. 좀 비슷 하지요? 한국 사람이 맡으면 얼마나 구수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구수한 맛과 화장실 냄새가 분간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구수한 냄새가 아닙니다. 맡아봐도 모릅니다. 음식도 먹어보면 압니까? 어 떤 음식은 맛을 아는 사람이 먹으면 맛있는데 맛을 모르는 사람이 먹으면 고문입니다. 음악도 어떤 것은 들어보면 좋다 나쁘다 알 수 있죠. 그러나 어떤 음악은 들어본다고 압니까? 들어봐도 모르는 음악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는 사람이 알지, 모르는 사람은 들어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 음식을 맛보는 것이나 음악을 듣는 것보다 이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가르 쳐 주시면 알지만 안 가르쳐 주시면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 은 방법은 믿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믿고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 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유명한 말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믿으라 는 것입니다. 하 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믿고 들어가 보면 거기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분들도 하나님을 알고 믿은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믿고 순종해 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전보다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예수 안 믿는 사 람들이 보는 세상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이 세상이 살만 합니까? 제겐 참 살만한 곳인데, 얼마나 좋은 곳 인지 압니까? 제가 딴 데 가면 별 시세가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만 오면 시세가 좀 있습니다. 왜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오죽하면 제가 빨리 졸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원래는 3년 다녀야 될 학교를 4년 다닐 생각이었거든요. 그곳이 워낙 좋은 곳이라서요. 텔레비젼도 없고 신문도 없고 놀 곳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공부만 하고 성경만 보기 참 좋은 곳입니다. 오죽하면 선배들이 절간이라고 했을까 요? 참 좋은 곳입니다. 기숙사비나 식대도 아주 쌉니다. 그 생각을 얼마 전에 고쳐 먹고 더 빨리 졸업할 방 법이 없어서 3년 만에 졸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변하기 때문에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됩니다. 중세 1000년을 암흑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천년동안에 발달된 게 거의 없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사람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는 그 자체를 굉장히 악한 것으로 여겼습니 다. 그 천년동안 발달된 게 전혀 없었습니다. 특별히 건축 같은 분야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암흑의 시대로 있었습니다. 그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서 지금까지 약 500년이 안됩니다. 그 사이에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 면서 온 세상을 다 집어 삼켜 버렸습니다. 천년동안 꼼짝 안 하던 그 유럽이 어떻게 해서 그 후 400년만에 온 세상을 집어 삼킬 수 있었느냐 원동력이 뭐냐 그걸 누가 연구했습니다. 열심히 연구해 보고 난 후에 내 린 결론이 뭐냐 바로 종교개혁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일을 열심히 해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이라고 외치기 시작했거 든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서구의 문 명이 저렇게 발달을 하면서 동양, 서양,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전부 점령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 님을 보고 세상을 보니까 세상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가 일해야 할 곳이더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참 묘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는 게 좋으냐 사는 게 좋으냐 내가 죽어서 하나님이 계신 그 곳에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죽지 않고 여기 그냥 살아 있으면 누구에게 좋다고 요? 여러분들에게 좋으니까 나는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있어도 좋고 아니면 하나님께로 지금 당장 가도 좋고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고달프고 살맛 안 나는 곳일지도 모릅니다마는 예수 믿는 사람은 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가 일해야 할 나의 사명이 담겨 있는 곳이 이 세상이고, 이 직장이고, 내가 속해 있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가 이 땅에 있는 한 이 일이, 이 곳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곳이다라 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매력적이고 멋있을 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실려면 우선 텔레비전 뉴스를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쩌다 아버님 방에 들렀다가 함께 뉴스라도 보게 되면 저는 아무 소리 안 하고 봅니다마는 우리 아버지는 뉴스 끝날 때 까지 그냥 안 계십니다. 계속해서 좀 험한 말을 하지요. 전부 도둑놈! 이런 반응을 계속 보이시거든요. 그 - 3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옆에서 아버지 거기다 대고 욕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요 라고 말해도 그게 안되나 봐요.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별 낙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에게 오히 려 희망이 넘치는 것이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어야 합니 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을 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 희망을 주는 말 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란 말이 곧 메시야란 말인데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 땅에 왔으면 오랫동안 외국에 짓밟혀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던 이 이스라엘에 나라를 회복 할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님이 새 임금이 되면 못해도 장관 한 자리는 한다는 생각으로 따라 다녔는데 그리 스도의 역할이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겁니다. 어쩌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장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멀리 바라보면 하나님을 아는 삶이 결코 그런 비극의 삶 은 아닙니다. 좁게 보면 버림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크게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힘없이 돌아가신 분 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계시록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마는 그 중에 많이 쓰는 표현이 어린 양입니다. 어떤 어린 양이라고 하죠? 그냥 어린 양도 아니고 앞에 한마디 붙었어요. 하나님의 어린 양. 좋은 대답입니다마는 요한복음에 그렇게 많이 나와요. 계시록에, 그러니까 이 세상 끝날에 나타나는 예 수님은 어떤 어린 양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것도 같은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로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은 앞에 다 섯 자가 더 붙어요.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씁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뭘 할까요? 여러분, 양 자체도 순하디 순한 짐승인데 죽임을 당해 버렸으니까 뭐하 겠어요? 그런데도 계시록에 나오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은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 와 권세가 다 그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 양의 진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린 양의 진노가 두려워서 세상의 군왕들이 바위틈에 숨어서는 산들이 무너져서 자기를 덮어 달라고 소리 소리 지릅니다. 뭐가 무서워서요? 어린 양의 진노가 무서워서요? 여러분, 어린 양의 진노?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주일날 보세요. 조그마한 아이들 뛰어다니고 있죠? 글쎄 요 어린 양이 저 애들 같지 않을까요? 저 어린 양이 노를 발하고 진노를 품습니다. 두렵습니까? 귀엽죠! 그 조그만 아이가 성을 내고 화를 잔뜩 내고 덤비면요? 더욱 귀엽죠? 그런데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의 진노 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세상의 군왕들과 지도자들이 바위틈에 숨어서 산이 무너져서 자기를 덮어주기를 소 리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임 당하신 초라한 모습이었지마는 조금 더 넓게 보면 부활하셔서 온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잡는 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는 사실만 듣고는 자기들의 희망이 완전히 깨어져 버립 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매, 즉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표현 그 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붙들고 간하매 하는 이 단어가 우리말로는 아주 순하게 번역이 되어서 그렇지 실제 느낌은 좀 다릅니다. 여기 간하매 하는 말씀과 그 다음 33절에 예수께 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할 때 꾸짖어 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다니요? 이 단어는 어른 이 아이들을 아주 무서운 자세로 책망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간이 부었죠? 예수님을 향해서 아주 무섭게 책망합니다. 그러면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게 아니네요? 아닙니다. 이런 비슷한 장면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하면 가령 옛날에 5.16을 일으켰던 박정희 장군이 어느 정도 사회를 평정을 해 놓은 다음에 자기 부하들을 모아 놓고 자, 우리는 본래 군인이야. 우리가 목적을 달성했 으므로 이제 군인의 신분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의사가 있었는지 없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군인이었다면 바르게 잡아 놓을 것은 잡아 놓고 다시 군인 - 4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죠. 이럴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충성스럽게 지도자를 따라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 중에 어느 놈이 총 빼들고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여태까지 오는 것은 당신이 그렇게 했 지만 이제는 안됩니다. 하고 총 빼들고 나올 수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제대로 한번 해 볼 수 있을 거야 하고 우리가 기대를 하고 뽑은 대통 령이 최소한 두 명은 되지요? 아니 대통령이 되기 전에 저 분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으면 분명히 나라가 되 어도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왜 저 모양이 될까요? 그리고 대통령쯤 되면 과감하게 못하나 싶은 게 참 많죠? 그런데 왜 못할까요?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한번 해 보자 하고 밀고 나가고 싶어도 누구 때문에 못하는지 아십니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안돼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하고 대들면 못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명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라고 말 했을 때에 베드로가 안됩니다 고 합니다. 어떤 자세로 그랬을까요? 진짜 총 빼들고 달려드는 그런 자세입 니다. 예수님을 어린 아이 꾸짖듯이 꾸짖으며 대들었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오늘 우리 주변에 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좋은 일을 하자고 해도 그렇게 뜻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 어 학교에서도 말이죠 아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 번 해 봅시다 한다고 선뜻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방해꾼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속 한 공동체나 국가나 타인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곳에나 끼어 있기 때문 입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이것 이렇게 한 번 해 봅시다 할 때에 온 성도들이 밀어주면 나갈 수 있지만 몇 명이 그것 안됩니다 하고 대들면 잘 안됩니다. 쉬운 것 아니에요. 곳곳에 이런 베드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베드 로를 그렇게 단호하게 꾸짖으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보통 꾸짖어 가지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칼을 품고 다니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이라는 친구들은 품속에 칼 을 품고 다니다가 민족의 반역자요 마땅히 처단해야 될 사람이다 싶으면 군중 속에서 사람을 찌르고 도망 가는 일을 했습니다. 그 열심당이 예수님 제자 중에 하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힐 때 칼 휘두른 베 드로를 보세요. 여차하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던 상황이 그 리 간단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호하게 꾸짖을 필요가 있었 을 것이고 제자를 향하여 사단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했던 메시야의 일과 제자들이 생각했던 메시야의 일에는 그 만큼 차이가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야단을 쳐놓고 제자들에게 메시야가 어떤 분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만 부른 것이 아니고 제자들 외에 다른 무리까지 다 불러모아서 메시야가 어떠해야 할 것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참된 길이 어떤 길인지를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일은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고자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개인적으로 이 땅에서 출세하고 좀 더 나은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가장 요긴한 게 뭡니까? 사람의 일을 잘 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열심이 있 어야겠죠. 또 한편으로는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줄을 다른 말로 뭐라 그러죠? 빽이라고 그럽니까? 특별히 군대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어느 사람 밑에 서느냐에 따라서 참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빨리 장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줄을 잘 서야 됩니다. 교인수가 줄어드는 교 회에 붙어 있으면 어렵습니다. 성장하고 교인수가 자꾸 늘어가는 교회에 미리 가 있어야 장로가 빨리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요런 계산이 사람의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은 이렇게 머 리도 잘 써야 되고 줄도 잘 서야 됩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도 사람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의 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머리 쓰지 마시고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5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예수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쓰던 말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였습니다. 그래서 왜 예수 믿지요? 하면 복 받을려고 믿지요 합니다. 일단은 교 회 처음 나올 때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받는 복이 정말 어마어마한 복입 니다. 그러나 조금 좁혀서 보면 예수 믿는 길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길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예 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 수님을 따르라구요? 예수님이 어디 가시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죽으러 가시는 그 길 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이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표현 중에도 제일 순한 것이 예수의 말을 부끄러워 아니하는 자 인데 요건 좀 낫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라가는 것보다는 조금 쉬울 것 같네요. 이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생애 중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핍박이 다가올 성도들에게는 유효하지만 우리 에게는 별 관계없네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 지만 예수 믿기 때문에 자제하고, 예수 믿기 때문에 양보하고, 하기 싫지만 예수 때문에 해야 한다 는 뜻입 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 놓을 각오를 한다면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지 않을까요? 때로는 살다 보면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딱 눈감아 주시면, 요게 정말 생애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인데 요번 한번만 딱 감아 주시면... 할 때가 혹 있습니다. 정말 좋은 기 회인데 그 유혹을 따라 갈 것이냐 아니면 과감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끊을 수 있느냐 하는 그것이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성질을 부릴 대로 다 부리면서 예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 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거든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먼저 버리도록 노력하십시오. 바로 이웃 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결국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차이가 날 때에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뜻을 따라가면 그것은 내가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고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줄을 잘 서서 한 건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줄을 잘 서 서 성공하면 몇 십년 동안 재미를 누리며 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 섰다가 완전히 망하는 경우도 있기 는 하겠지만...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은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 평생동안 힘들게 살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 는다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느냐? 사람들이 이해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힘들고 어렵게 사는 그 삶 때문에 나중에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 까? 가장 소중한 것, 더 놀라운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아무리 커 보여도 그것은 작은 것입 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메시야가 와서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죽음을 당하고 이런 고난 을 당하므로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믿는 모든 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을 보고 계 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뭘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정말 멋진 자리를 한 자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고 계시는 것과 제자들이 보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대답을 잘 했느냐 못했느냐는 답을 쉽게 내리기 어렵습니다. 좁게 보면 잘했습니다. 그걸 예수 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넓게 본다면 그렇게 썩 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예 수님이 보실 때 이 제자들은 덜렁대기만 했지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제자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칠 때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주 쉽게 고쳤습니다. 그냥 말씀만으로 고치시기 도 하고 아니면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는데 믿고 와서 옷자락만 만져도 나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 6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그 만한 능력이 있었던 그 분이 이 본문 앞에서 소경 하나를 고칠 때는 침을 뱉어서 귀에다 대고 주문을 외우듯이 말씀을 하시면서 요란스럽게 병을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시 고 난 다음에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보이느냐? 다른 때는 말씀 한마디 안 하셔도 눈이 뜨였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기도하고 여러가지 치료하는 일을 했는데도 소경이 뭐라고 그래요? 보이느냐니까 사람이 보입니 다. 그래 놓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그래요. 보인다는 얘기입니까 안 보인다는 얘기 입니까? 보이느냐? 니까 사람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다니고 있어요. 보인다는 얘기입니까 안 보인다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보면 보입니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닙니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중간해요. 기 도를 두 번이나 하셔서 간신히 눈을 완전히 뜨게 하셨습니다. 능력이 있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그 때만 능 력이 좀 떨어졌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렵게 고친 유일한 경우인데 그 이야기를 바로 이 사건과 붙여 놓은 것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경의 어중간한 상태가 바로 여기에 나와 있는 제자들, 너희들은 나를 누구냐라고 말했을 때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는데 그 내용을 보니까 제대로 알 고 하는 말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어중간한 상태를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 그 앞에 소경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그 소경의 모습이 여기에 나와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보기는 보는데 뭔가 분명하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제법 있지요. 어떨 때는 잘 믿는 것 같고, 뭘 좀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떨 때 보면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은 경우가 우리 삶 속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보아도 그렇고, 다 른 성도들을 보아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교회 충성하고 신앙이 좋아 보인다 싶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흔히 있을 수 있 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가르쳐서 위대한 사역을 감당케 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예 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정말 멋지고 훌륭한 제자들이었으면 우리에게 별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제자들도 한 때는 예수님에게 칭찬듣고 돌아서서 책망도 받는 이렇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자들이었 음에도 예수님께선 이 제자들을 훌륭하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현실의 모습을 바라보면 실망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금 모습보다는 먼 훗날에 되어질 그 모습들을 늘 그리며 제자들을 키워 가셨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범죄한 이후로 사람이 이럴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일단 인정합시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선 잘 알고 계십니다. 이런 나를 가꾸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문제 많았던 사람들이 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늘 이끌어 가시면서 끝에 가서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바꾸어 놓은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참 고달프고 힘든 일이 많이 닥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이런 아픔들을 다 겪으면서 지나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런 아픔, 그런 원망스러움 속에서도 하나님 께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자식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이 됩니다. 여 러분 자식들이 부모 마음에 싹 드는 일이 잘 없지요. 아! 어째 저 모양일까 싶을 때 그걸 극복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몇십년 전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 부모님 께 물어보면 좋지요. 우리 부모님을 찾아가서 내가 쟤만 할 때 어땠습니까? 하면 우리 부모들이 흔히 하 는 말은 너는 더 했다 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잘못한 것을 다 잊고 삽니다. 우리 아이들 보면 참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나 내가 쟤만 할 때는 쟤보다 더 했다라는 걸 기억만 해내면 자식 대하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지금은 쟤가 하는 짓이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장차 어떤 애가 될 것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참 도움이 됩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이런 짓을 잘 했어요. 제일 말썽 많고 시끄러운 애를 뭐라고 부를까? 보통 선생님들이 그런 애들을 뭐라 부르죠? 좋게 부른 말이 농땡이입니다. 아이고 저... 좋지 않은 말이라 서 생략합니다. 저는 그런 애들을 동창회장감이라고 불렀죠. 얘들아! 쟤 괄세하지 마라. 나중에 너희들 동 창회 나가봐라. 쟤가 회장할 거다. 선생님도 동창회 가보면 학교 다닐 때 말썽만 치고 공부도 안 하던 녀석 들이 밥값도 내고 후원비도 내더니 회장하더라. 현재 하는 짓으로는 칭찬할 게 하도 없으니 장래의 희망 - 7 -

[2001.06.27] 덜렁대는 제자, 심각한 스승 (마가복음 8:27~38) 사항을 담아서 동창회장이라고 불렀더니 글쎄 사고도 덜 치고 점잖아지더라구요. 학교 다니는 재미가 생기 나 봐요. 눈 앞의 현실보다는 먼 훗날의 모습을 그리면 말썽꾸러기도 믿음직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렇게 덜렁대는 제자들의 장래 모습을 그려보며 이들을 훌륭한 사역자로 키워가셨습니 다. 여러분들도 현재 자신의 모습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훌륭한 신앙인으로 키워갈 기대감 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닌 바로 우리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작은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백성 아닌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건 상관없습니다. 믿는 우리만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설퍼도 괜찮습니다.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야단을 좀 맞으면 어떻습니까? 베드로 는 사단 이라고 꾸중을 들었는데 잘하려고 하다가 실수를 좀 하면 어떻습니까? 작은 헌신이라도 우리의 헌 신을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오늘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힘들어 보여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입 니다.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여도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 까? 그러나 그 어린 양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어린 양의 진노가 무서워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외칩니다. 산아, 바위야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가려다오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죽 임 당한 예수님이 영원한 승리를 차지하는 날 우리도 거기에 동참한다면 목숨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입니 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삽시다. - 8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설 미션 임파서블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 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 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 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개역, 고린도전서 1:18~24] 교 제목을 미션 임파서블이라 정해놓고 설교 전에 비디오 한편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 데 결국은 못 봤습니다. 시간도 안 나고 어디 가서 빌려야 되는지도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갔습니 다. 대신에 비디오 잘 보는 친구들에게 그 영화의 내용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구에 가까이 다가오는 유성이 있어서 그대로 있으면 지구와 부딪쳐서 지구의 종말이 다가올 지 모른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우주선을 미리 보내서 그 다가오는 유성이 지구에 가까이 오기 전에 핵 폭탄을 터뜨려 서 쪼개버리는 영화가 있더라 싶어서 그런 얘기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얘기는 아니래요. 그 정도 되어야 제목이 미션 임파서블 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란 뜻입니다. 불가능한 임무라 는 뜻인데 그런 내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와 비교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 일, 곧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이 일이 어떤 의미에서 글자 그대로 미션 임파서 블 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사명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정말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하면 보통 KS라고 불렀어요. K고 등학교와 S대학을 마쳤다는 뜻이지요. 그런 사람이면 장래가 보장이 되는,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릴 때부터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불렸고 특별히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바리새인으로 장래가 아주 창창한 젊은이였습니다. 지금은 부나 권력이 세습이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부는 거의 세습되는 경 향이 좀 있습니다. 민주사회니 어쩌니 해도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잘 보시면 거의 대부분이 부모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물며 저 2,000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부유 한 환경, 좋은 환경은 바울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그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란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해서 박멸시키기로 작정하고 선봉에 섰던 사람입니 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가장 앞장 서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던 정말 멋진(?)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예수님 을 만난 후에 사람이 너무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이후에 정말 멋진 설교를 거침없이 하니까 그들을 잡아서 취조하던 제 사장들이 이 사람들이 원래 학문이 없는 범인인 줄 알았는데...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원래 무식한 사람들 이었는데 어떻게 말을 이렇게 잘 하느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하는데 바울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바 울이 청산유수같이 말을 하였을 때 그 말을 듣고 있던 아주 높은 고관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바울아 네가 미쳤다. 왜 미쳤다고 하지요? 미친 이유가 뭐라고 하죠?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제자들의 경우는 말을 잘 하니까 저것들은 본래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인데라고 말하는데 바울이 말하니 까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열두 제자들과 아예 바탕이 다른 사람이었습니 다. 그 만큼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예수를 믿고 사람 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즉시 유대인들하고 싸워서 말로 굴복을 시켰던 바울입니다. - 1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그 장면을 보면 자동 소총을 들고 적을 향해서 막 쏘아대던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뒤에 있는 아 군에게 쏘아대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앞장 서서 죽 이러 다니던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유대인들하고 싸워서 오히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강력하게 증거하면서 이겨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군에 가서 가끔 고문관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한데, 사격 연습하러 총알 열 발을 넣어 가지고 사대에 올라가고 대기하는 병사들은 언덕 밑에 있었습니다. 사대에 올라가서 움푹하 게 파진 구덩이에 들어가서 방아쇠를 당기는데 총알이 안 나가잖아요. 옆에 있는 사람은 빵빵거리는데 나 는 방아쇠를 당겨도 안 나가길래 총을 들고 구덩이에서 나와서 삥 돌아서니까, 뒤에 우리 중대가 있었는데 요, 돌아서니까 고참 졸병 할 것 없이 땅바닥에 딱 붙어버렸습니다. 아차 싶어서 참호 속으로 다시 들어갔 죠.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보니까 총알이 나가요. 오늘 죽었구나 싶더라구요. 내려가면 얼마나 터질는지 모 르는데... 걱정하면서 내려왔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셔서 꾸중만 세게 듣고 그 일로 큰 탈은 없었습 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아군을 향하여 방아 쇠를 당긴 사건입니다. 돌아 서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아군을 향하여 자동소총을 갈겨버린 셈입니다. 그러 니 유대인들이 어떻게 당해요. 모조리 굴복시켜 버렸습니다. 그런 바울이 일생을 통해서 열심히 외쳤던 한마디가 뭐냐 하면 십자가의 도 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사람들이 볼 때 참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무슨 도가 있느냐 말이죠. 우리 교회에도 도사가 더러 있죠. 낚시에 도가 튼 사람도 좀 괜찮아요. 요즘에는 영어에 도 텄다 하면 출세길이 훤하게 보이죠. 율동에 도가 트인 사람이 있고 찬양에 도가 트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유익합니까! 찬양 의 도(?) 이것 괜찮습니다. 율동의 도(?) 이것도 괜찮습니다. 십자가의 도는요? 우린 십자가라는 것을 워낙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에 십자가라 해도 거리낌이 전혀 없지만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라고 말할 그 때에 십자가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나게 하는 것이요 불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도라는 말은 표현을 바꾸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도대체 이게 납득할 수도 없고, 굉장히 기분 나쁜, 모욕스런 표현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 았음이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란 말 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납득이 안되는 것입 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구원자인데 그가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모독하는 말이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생각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메시야가 오 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고 했거든요.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로 다 돌려 놓은 다음에 메시야가 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온다는 것은 나라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는 그런 시절을 기다리는 것인데 바울이 말하는 메시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전한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도 할 수 없 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반복해서 얘기를 했음에도 그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했느 냐 하면 제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메시야의 개념하고 예수님의 말씀하고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면 듣기는 듣는 데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적어도 부활한 이후까지도 그 말씀의 의미를 못 알아들었습 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말할 때에 이사야 53장을 잘 얘기하지만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사야 53장이 예 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빼고 구약성경을 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창 3: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는 표현도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쉽게 알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의 의미가 뭔 지를 지금도 잘 모릅니다. 그럴 정도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 - 2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기에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모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내시는 메시야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릴 수 있느냐?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란 말은 네모난 동그라미 요, 기름에 튀긴 얼음 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자꾸 하면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사도 바울이 열심히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다녔지 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고 모욕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은 정말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건 누구건 십자가에 달렸다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시야는 당연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라는 말이 거리끼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정말 저주를 받은 겁니까? 갈 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분명히 저주받은 것입니다. 그 저주를 왜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했습니까? 우리가 져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 서 대신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알기는 잘 알았는데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하나 님의 이 방법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렇게 모독으로 여겼던 것이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한 사람을 보고 교회 다니는가보다 하 고 반갑다고 인사를 했더니 교회 안 다니는데요 라고 하더랍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십자가를 왜 달 고 다니는지 아세요? 예쁘답니다. 우리 교회 뒤에 있는 십자가를 어느 분이 저렇게 만들었는지 정말 예쁘 게 만들어 놓은 십자가입니다. 참 이뻐요. 예수님께서 달려서 고난을 받았다는 생각보다는 참 예쁘게 만들 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지금은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소름끼쳐 하거나 떠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던 그 시절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던 그 시절의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입에 담기 싫은 험한 말이었습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든다면 어떤 분이 얼룩덜룩하게 뭐가 많이 묻은 새끼줄을 하나 구해가지 고 꼭 새끼줄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그렇다고 칩시다. 새끼줄을 들고 와서 이게 뭔지 아십니까? 사형수를 사형시킬 때 목졸랐던 밧줄입니다. 여기 묻은 것이 사형수의 피입니다. 이러면 어쩌겠어요? 십자가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이건 사형수의 목을 졸랐던 오랏줄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식사할 때마다 꼭 화장실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지요. 밥 먹을 때 그런 얘기를 하면 비위 약한 사 람은 밥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게 재미있다고 자꾸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들고 다니던 그 십자가의 도라는 말은 그 말보다 더 비위 상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겐 그렇게 거리끼고, 화나고, 보기 싫고, 생각도 하기 싫은 그 십자가의 도를 사도 바울은 입만 열었다 하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접촉했던 사람은 유대인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헬라인입니다. 헬라인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거의 철학자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아테네)이라는 곳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헬라인들은 지식을 구한다 는 표 현은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철학자인 셈인데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철학자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요즈음 학교에서 철학을 안 가르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마는 철학이라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는 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 사변적이어서 그 냥 머리 속을 자꾸 복잡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에게는 굉장히 힘든 점이 있습니다. 철 학자들이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한 것 중에 사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경의 대답이 아닌 철학자들이 하는 답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뭡니까? 아직 해답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철학자들이 아주 심도있게 토론을 해서 이 문제의 답을 하나 냈습니다. 털이 없고 두 발로 똑바로 선 짐승 그렇게 결론을 내린 데 대해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했던 어떤 철학자가 집에 가서 - 3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닭을 산채로 털을 다 뽑았답니다. 그런 다음 그 회의장에 집어 던지며 하는 말이 자, 이게 너희가 말하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철학자들이 모여 앉아서 그렇게 결론을 내었겠습니까? 철학적인 방법은 어렵습니다. 유명한 어느 철학교수님께서 옛날부터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기의 사상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꼼 꼼하게 설명을 잘 안 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요? 그걸 꼼꼼하게 설 명을 안 하고 그냥 대충대충 해 놓고 나니까 그 사람의 사상을 연구하고 먹고 사는 철학교수가 얼마나 많 으냐? 자기도 칸트를 연구해서 먹고 살고 있는데 칸트를 연구하고 먹고 사는 사람이 수천명이 넘는 답니 다. 위대하다는 철학자들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했더라면 철학교수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느냐는 거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이런 식으로 가르쳐 놓았으면 우린 하늘나라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알기조차 어렵습니다. 지난 겨울 방학 때 신론에 관한 철학책 두 권과 개혁주의 신론 한 권, 이 세 권을 읽어야 되는데 개혁 주의 신론은 책이 굉장히 두껍지만 급하면 안 읽고도 보고서를 쓰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서 쭉 적은 책이니까요. 그런데 앞의 두 권, 신론에 대한 철학책인데 도저히 못 읽겠어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읽다가 보니까 아는 말도 나오긴 나오데요. 데카르트가 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느냐 그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눈 앞에 보이는 것도 못 믿겠고 세상이란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 고 아무것도 모르겠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끝에 가 보니까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이 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이러고 있는 자신은 부정할 수 없더라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니까 나는 존재하는구나.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론으로 내린 말이 그것 한마디입니다. 신론이라는 철학책이 이 모양이니 죽자고 머리 싸매고 다 읽어도 겨우 신은 존재한다 는 한마디밖에 얻 을 게 없습니다. 그 신이 무엇을 했으며 어떤 분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신이 어떤 존재냐고 따지고 고민하 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성경을 보고 쓴 개혁주의 신론이라 하는 책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상세하게 잘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머리만 잔뜩 아프지 끝까지 가보면 한마디밖에 없어요. 고로 신은 존재한다 만약에 철학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전해 주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어려울런지 모릅니다. 헬라인들은 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고 우 리를 사랑해서 독생자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게 안 먹혀 들어가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풍성하게 알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원하는 그 분들에게는 이게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원시인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신학자들 이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신학을 하는 이상한 신학자들입니다. 그런 사람 들을 상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열심히 전했습니다. 믿는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여러분, 예수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믿을 수 있을 만한 무슨 증거를 주셨습니까? 아니 그 분이 근래 사신 분도 아니잖아요? 2,000년 전에 사셨 던 분입니다. 그 분이 뭘 어떻게 했다고 여러분들이 그 분을 믿고 평생을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해 서 헌신하며 그 분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겁니까? 오늘만해도 대단히 더운 날인데 하루종일 시달리고 저녁에 어디 시원한 데 퍼져 있는 게 좋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이리 나와서 이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그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믿 게 되었습니까? 뭐 본 게 있습니까? 들은 게 있습니까? 우리 효자제일교회 성도님들이 그렇게 만만한 분들 이 아닙니다. 남의 말 함부로 듣고 왔다갔다 할 분들도 아니에요. 나름대로는 다 똑똑한 분들입니다. 함께 사는 식구들의 이야기도 거짓말인지 진짠지 분간하면서 지내는 분들이 2,000년 전 그 예수님의 사건을 어 떻게 그렇게 잘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여러분들에게 일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있을 수 없는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도무지 듣기 싫은 말입니다. 헬라인들이 들을 - 4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때에도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서 우리가 잘 믿고 있습 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방법을 사도 바울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합니다. 전도라는 것이 미련한 짓이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놀라운 일이 전해져 왔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헬라인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이건 미련한 짓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머리 좋은 사람을 골라서 천국에 넣기로 했다면 우리는 좀 어렵습니다. 인물 좋은 사 람을 골라도 몇 분이야 가능하겠지만 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묘하게도 정말 미련한 방법을 통 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놀라운 복을 허락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이 전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런 큰 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런다고 되냐? 싶은 때가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 도 그 일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미련해 보이는 짓 이라도 열심히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사용한 전도라는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면이 또 하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 전도라는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선포한다 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참 애를 많이 썼던 분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도 그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떻게든지 기회를 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 력을 많이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냥 목소리만 높여 가지고 예수 천당, 예수 믿으시오 하고 다녔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보다 주로 큰 도시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큰 도시에 오랫동안 머물 면서 성경을 꾸준히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을 배웠던 그의 제자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향에 교회 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보지 못한 교회도 있습니다. 보지도 못한 성도들에게, 자기의 제자가 세 운 그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 잘 섬기다가 예수님 오시면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 이 생각보다 조금 생각을 넓힙시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가 몰려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많은 나라들의 교회가 문을 닫고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복 음을 받았으니 또 다른 민족에게 전해야 할 큰 책임을 한국교회가 지고 있습니다. 효자제일교회라는 교회 하나만 딱 이루어 놓고 여기서 열심히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좀 지난 후에라 도 여러분들 각자 각자가 기회를 타서 복음을 들고 흩어져 나갈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회가 분명히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꼭 목사님만, 선교사님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웠던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향에 교회를 세워서 복음이 널리 널리 전파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느 때에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여러분들 스스로 노력하고 귀하게 사용될 그 날 을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예상하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 교회에 붙어 있을려고 합니까? 배울만큼 배워서 떠나십시오. 가정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기회를 찾으십시오.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삶을 삽시다. 배울 만큼 배우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정돈해서 선교사로 나가고 약한 성도를 도우러 떠나기도 해야죠. 여러분들에게 이런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참된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분명히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소리소 리 높여가면서 돌아다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정착해서 꾸준하게 말씀을 가르쳐서 그 사람들을 통 해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 효자제일교회 성도들은 바쁩니다. 또 얼마 나 열심히 섬기는지 모릅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 제가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몰라요. 세상이 이렇게 아 름다웠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요즘 제 눈에는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우리 효자제일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하는 것들을 보면 저는 그렇게 아름다 - 5 -

[2001.07.04] 미션 임파서블 (고린도전서 1:18~24) 울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아요. 며칠 전 새벽기도회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세상은 정말 우리가 살아 볼 만큼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신문보고 방송보면 도대체 아름답지 않 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 에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믿는 성도들과 어울려서 아름다운 세상을 살되 우리가 언젠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그 날을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늘 외치고 다녔던 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것을 누가 듣고 싶어합니까? 좋아합니까? 물 론 그것을 기뻐하고 감격하며 그것을 누렸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 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요 듣기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늘 열심히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 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미 션 임파서블 입니다.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미 련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 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0:42) 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것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자의 이름으로 라 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행하는 물 한 그릇 이것도 예수님께서 결단코 잊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행하는 전도라는 것이 꼭 복음을 들고 나가서 열심히 예수님 믿 으십시오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 냉수 하나 베푸는 것,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하나, 하기 싫은 일이지만 내가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행하는 이 작은 일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번 전한다고 해서 그 말 듣고 불신자가 교회 나온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알 게 모르게 누구를 통했건 한 사람이 백번 정도 복음의 찔림을 받았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 불려 나온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미련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기쁨으로 알고 열심히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시 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미련해 보이는 전도의 일에 한평생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말씀을 배우고 또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더욱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 다. - 6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오 왕 노릇 한번 해봅시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 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 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개역, 요한계시록 22:1~5] 늘도 무척 무더웠습니다. 천국 가면 이런 고생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각오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천국 가면 무엇을 하며 지낼까요? 이런 더위나 다른 고생은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하는 게 있을 텐데...? 우린 천국 가면 뭐 할까요? 찬양? 예배? 그밖에 없습니까? 본 문 5절 끝에 보시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 가면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왕이 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할텐데 우리가 왕 이 되면 백성은 누가 하지요? 우리가 왕이 되면 예수님은 무얼 하시죠? 우리가 왕 노릇하리라는 구절이 여 기 계시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우린 분명히 천국에 가면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 다. 여러분이 만약에 왕이 되어서 왕 노릇하신다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한 번 해 보시렵니까? 천국가서 어 떻게 왕 노릇을 해야 하는지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계시록 이야기를 조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계시록을 잘못 생각하는 경 향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계시록 하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좀 신비로운 책? 아니면 좀 어려운 환상이 나 상징으로 가득 차서 알기 어려운 책입니까? 계시록은 해석이 하도 다양해서 내용을 알기 어렵다거나 사 람을 현혹시키는 그런 책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마술책처럼 생각해서 이 속에 종말 의 어떤 비밀이 수수께끼처럼 숨어 있을 것이라 해서 그걸 찾고 뒤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단들이 사람들을 미혹할 때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구절의 대부분이 계시록에 있습니다. 계시록의 몇 구절만 떼어내면 아주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에 딱 알맞지요. 그래서 우리로서 잘 알기 어려우니까 그만 덮어놓자. 그래서 공부도 잘 안 하고, 읽기는 해도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이 칼빈도 계시록은 주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칼빈 선생이 성경 전체의 주석을 다 남겼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계시록만 빠져 있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칼빈도 주석하지 않은 책이다라는 말로 계시록을 신비롭고 두려움이 가득한 책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계시록 1장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 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록 말씀을 읽고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데도 이 책은 알기 어려우니까 덮어놓고 지내자?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가 덮어놓고 지 낼 책이 결코 아닙니다. 이 책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이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이 내용을 어떻 게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용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전혀 어려운 것만 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사도 요한이 교회대표로 활동하다가 밧모 섬에 귀양가서 어려움에 처 해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 이 바로 이 계시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사용된 책을 오늘날 이상한 사람들이 사람을 겁주고 공갈치는데 사용하고 있으 니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계시록은 결코 그렇게 사용될 책이 아닙니다. 본문 22장은 계시록에서도 거의 끝입니다. 완전히 끝입니다. 성경전체로 보았을 때도 물론 끝이지요. 계 시록의 마지막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했던 그 에덴동산,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내용입니다. 처 음 창조했던 그 에덴동산을 범죄한 이후에 잃어버렸는데 마지막에 와 보면 그것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길 고 긴 하나님의 이야기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막을 내립니다. - 1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이 본문을 보시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것 두 가지가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무엇이 회복되고 있지요? 1절 2절에 반복되어서 나오는 단어가 생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생명수의 강이 보이 고 생명나무가 있고 2절 끝에 보면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세 군데를 비교해 보면 에덴동산 에서 잃어버렸던 생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되찾아 주시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창세기 앞부분을 살펴보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으면서 참으로 아름다웠던 그 에덴동산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은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닙니다. 창세기 의 곳곳을 짓누르고 있는 그 죽음의 그림자가 여기에서는 깨끗이 사라지고 생명이 풍성하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회복된 낙원에 생명수의 강이 아주 크게 흘러갑니다. 엉뚱한 생각입니다마는 생명수 강에는 빠지면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생명수도 강인데 거기에 완전히 빠져들면 죽을까요 안 죽을 까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죽을 수 없는 곳입니다. 생명나무 과실이 풍성하게 열립니다. 그걸 배 터지게 먹으면 탈이 날까요 안 날까요? 더 이상 죽음도 없 고 배 터질 일도 없고 탈 날 일도 없는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는 더 이상 보이 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더라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한 그루만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강가에 생명나무가 쭉 늘어서 있고 12가지 과실을 달마다 맺더라는 것은 처음 창조하셨던 에덴동산보다 훨씬 풍성 하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 나타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만드실 것은 하나님의 처음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수를 해서 아담이 범죄하게 되고 혹은 하나님께서 예측을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선악과 이야기를 또 한번 하겠습니다. 다시 회복시켜 놓은 이 에덴동산은 창세기의 에 덴동산과 비교했을 때 여기가 훨씬 더 내용이 풍성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젠 선악과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선악과는 역할을 다 했습니다. 대신에 생명나무가 풍성하게 많아졌습니다. 이 생명나무가 한 때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화염검으로 그룹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공부를 하면서 그룹 이라니까 Group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천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천사가 이 생명 나무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화염검은 뭡니까? 검은 칼이고 화염은 불과 연기죠. 불과 연기를 푹푹 뿜어내는 칼이 빙빙 돌면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그 생명나무입니다. 인간 게놈 지도를 그려냈다고 하면서 사람이 드디어 신의 영역에 도전했다, 생명을 사람이 찾아냈다고 하 는데 글쎄요? 아마 엄청나게 넓은 바닷가에서 발 하나 겨우 물에 담근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생명의 길로 들어섰다고 그러고 있는데 사실은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위험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막아두 신 곳입니다. 그 생명나무가 회복된 낙원에는 풍성하게 있다고 합니다. 또 에덴동산에는 저주가 없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하셨습 니다. 그 저주는 정말 무서운 저주였습니다. 그전에는 고통이라는 것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 다음에 엄청난 고통이 다가왔죠. 우리는 그런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그런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 에 고통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주가 없는 세상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아담의 입장에서 범죄한 세상을 바라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어쩌면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던 부잣집이 갑자기 가세가 기울 어서 거지가 된 꼴하고 비슷할 것입니다. 범죄한 이후에 아담과 모든 인류의 삶은 거지형상이나 비슷합니 다. 원래 우린 참 부자였었는데 그런 거지꼴로 살던 우리의 삶이 전부 회복되리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저 주가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밤이 없고 등불과 빛이 쓸데없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밤이 왜 있습니까? 사실은 휴식을 위해서 있는 것 이 밤입니다. 쉬라는 밤에 쉬지 않는 것이 현대 문명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마는 결코 인간을 이롭게 하 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이 없다는 것은 쉬어야 할 육신의 피곤도 괴로움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몸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몸에 질병이 있어서 고통을 많이 겪지요? 내 몸에 병 이 없을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성하게 사는 줄로 알았는데 내가 병이 들어서 아프고 힘들어 보니까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군요. 우리 여기 모인 성도님들이 그냥 봐서는 병 때문에 고통받는 분이 - 2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없는 듯 하지만 한사람 한사람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다들 무슨 병이 있어도 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애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은 완벽하게 건강하게 사는 분은 참 드뭅니다. 거의 모두가 이런 질병들을 안고 삽니다. 이것이 회복된 낙원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 습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서는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말합니다(4절). 그의 얼굴? 누구의 얼굴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읽어갈 수 있다면 강심장입니 다. 전에 이런 얘기를 한번 한 적이 있죠?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할 때 항상 얼굴을 땅에 대고 엉덩이를 바 짝 드는 이유가 혹시라도 하나님이 나타나면 보고 죽을까 싶어서 그런다고요. 그렇게 두려웠던 하나님입니 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죠. 그랬던 그 하나님을 회복된 낙원에서는 그의 얼굴을 본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가요? 더군다나 생명나무에 있는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여기에 소성하기 위하여란 표현은 조금 바꾸어서 치료하기 위하여라고 번역해도 좋은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 모든 인류는 치료받아야 할 인생이 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죽음이 없이 만들어진 존재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은 치료해야 할 중병에 걸렸다는 뜻입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이 우주가 하나님께 치료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저주, 병들이 회복된 낙원에서는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그 에덴동산보다 나중에 회복될 낙원은 훨씬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 의 사랑이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임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바로 그 아름다운 낙원이 우리가 거할 곳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기억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좀 쉬울 수 있습 니다. 어릴 때 이야기 입니다마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한끼 굶어도 배가 덜 고프더라구요. 주머니 돈이 다 떨어지고 한끼 굶으면 배가 훨씬 더 고파요. 우리 주머니 속에는 돈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이 땅에서 한 두끼 굶어도 배가 덜 고파요. 마음이 넉넉하면 배가 덜 고픕니다. 그 에덴동산에 가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무얼 할 겁니까? 해야 할 일이 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의 이마에 있으리라. 그 다음에,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이것이 천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 니다. 앞에서 낙원에서 회복이 될 것이 두 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는 생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드 리지 않은 하나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가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복된 낙원에서 할 일 중에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듭니까? 종들이 그를 섬기며, 하나 님의 얼굴을 보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있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있다는 것은 너 는 내것이다라는 표시입니다. 그 다음,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까? 왕 노릇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들지요? 우리가 이 곳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서 피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 다고 말씀하시는데 문제는 그렇게 산 모든 성도들이 다 왕 노릇하면 국무총리는 누가 하며 장관은 누가 하 며 아니 그것은 놔두고 그 밑에 백성들이 좀 있어야 왕 노릇해도 재미가 있을 것 아니에요? 좀 쉬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게 낫겠습니까? 천국 가서 문지기하는 게 낫겠습니 까? 천국 문지기가 낫습니까? 그럼 조금 문제를 바꿉시다. 천국 가서 왕 노릇하는 게 낫겠습니까? 천국 가 서 문지기하는 게 낫겠습니까? 천국 가서 왕 노릇하는 게 낫다고요? 그렇게 대답하시면 여러분들은 십자가 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시는 그 예수님 앞에서 네가 높냐 내가 높냐 따지던 제자들과 비슷해집니다. 천국 가서 너는 문지기해 나는 왕 노릇할 거야? 좀 생각 해 보세요. 하늘나라에 가기만 한다면 거기서 문지기를 하든 왕 노릇을 하든 그게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천국 들어 갔으면 하나님 앞에서 문지기면 어떻고 왕이면 어떠냐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면 왕 노릇을 하든 문지기를 하든 전부 다 넘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84편 10절에 - 3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보시면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얼마보다 낫다고요? 천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악 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거기다가 여러분이 덧붙이세요. 이 왕지사 천국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보다 왕 노릇하는 게 낫다고요. 전도사가 진급을 하면 뭐가 됩니까? 강도사가 됩니까? 강도사가 진급을 하면요? 목사가 됩니까? 이런 생 각은 문제가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 개인적으로는 성경 말씀을 가르칠 수 있고 전할 수만 있다면 전도사건 강도사건 목사건 아니, 집사인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말씀만 제대 로 증거할 수 있고 배우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전도사인들 뭐 어떠냐 말이죠. 여러분, 천국 가서 하나님 앞에 섰다면 문지기를 하든 왕 노릇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천국 까지 가서 계급 따지시렵니까? 천국 가서도 내가 남편이고 당신이 아내니까 내 말 들어 이것 하시렵니까? 천국에는 그런 게 없어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니까 그런 것이 없겠네요. 그러면 문지기는 무 엇이며 왕 노릇은 무엇입니까? 이 땅의 문지기나 왕의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천국 가서 내가 왕 노릇하고 너는 문지기나 하라는 이 생각이나 예수님이 내일 십자가에 달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예수 님 뒤에 앉아서 누가 높냐고 따지는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왕 노릇한다니까 야, 좋다. 날 예수 믿는다고 네가 날 그렇게 핍박했지? 내가 왕 노릇하거든 그 때 한 번 보자 뭐할려고요? 원수 갚으려고요? 저 사람은 나를 핍박했는데 내 백성 노릇하려면 저 사람도 천국가야 되네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거기 가서 날 핍박하고 괴롭혔던 저놈들 원수를 좀 갚아야겠다 이 런 자질구레한 일은 필요도 없습니다.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게 좀스러운 일을 하는 곳 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가 천국에서 왕 노릇할 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이 땅에서 너무 좀스럽게 살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늘 머리 속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그 아름다운 나라를 기억하시고 그 나라에서 내가 왕 노릇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계시록이 초대교회의 고통 당하던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그랬지요? 이 성도들은 세상 왕들 에 의해서 혹은 로마 황제의 명에 의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 고통 당하는 성도들에게 요한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거기서 왕 노 릇할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했을까요 참말을 했을까요? 천국 가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행복함을 이렇게 왕 노릇하리라고 표현한 것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왜요?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그것보다 천국 가서 하나님 앞에 선 모습이 훨씬 더 행복할테니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한 그 어려움들 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위로의 말씀으로서 참 좋은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 노릇과 문지기 노릇을 다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는데 천 국에서 우린 주로 무엇을 하지요? 찬양하고? 설교는 없죠? 목사님들은 천국 가시면 설교가 없어져서 상당 히 심심하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미리 다른 것을 준비 좀 하셔야겠네요. 우리가 천국에서 무엇을 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아는 것은 우리 입에서 찬송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행복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노래를 죽어도 못한다는 음치가 혼자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는 어떨 때죠? 아니 남이 노래시키 면 죽어도 안 하는 음치가 혼자 앉아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어떨 때입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럼요. 천국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찬송을 아무리 잘해도 이 상태로 천국 가면 다 음치입니다. 그런 음치의 입에서 찬송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부르는 찬송은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기쁨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 찬송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우 리는 잘 몰라요. 이유는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왕 노릇하리라고 하신 것이죠. 이왕에 거기 가서 왕 노릇할 것 같으면 지 금부터 연습을 좀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지요?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올 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 4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낮아져야 돼요. 올라가는 게 목표인데 낮아져 버려야 되요? 성경 곳곳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면 천국 가서 왕 노릇할려면 지금부터 열심 히 낮아져야 되네요. 이것 큰일입니다. 어쨌건 왕 노릇은 좋은 것이니까 오늘부터 연습을 좀 해야 될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낮아지는 것이 즐겁습니까? 안 즐겁죠?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한 녀석이 집에 가면 맨날 문지방에 턱 걸터앉아서 발을 내밀 었어요. 나이 많은 자기 엄마가 세수 대야에 물 떠와서 아들 발을 씻겨요. 친구들이 그 말을 듣고는 한 번 씩 쥐어박아요. 다 큰 녀석이 뭐 하는 짓이냐고. 이 놈 답이 무엇인지 압니까? 이 놈 한마디에 더 이상 말 을 못했어요. 난 지금 효도하고 있는 거야. 우리 엄마가 내 발을 씻기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알아? 행복해 하는 일을 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틀려요? 우린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맞 습니다. 다 큰 아들 발 씻어주는 그 엄마가 얼마나 행복할까요? 씻겨 본 사람만 알지요. 아니 어떻게 본다면 꼭 종노릇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행복할까요? 그 종노릇이 돈 받고 하면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안 하 면 안된다는 의무감에서 하면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어디서 나온 것인데요?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 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저는 식사 후에 어머님께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편입니 다. 빈 그릇이라도 싱크대까지 나르려고 애를 좀 씁니다. 우리 어머니 고생을 참 많이 한 것을 생각하면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동생들이 한 번씩 집에 들르면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볼 때는 참 답답하다 싶은데 내가 잘하는 것인지 우리 동생들이 잘하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 잘 모르 겠습니다. 그냥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서 몸이 닳도록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제발 그만 좀 쉬세요 해도 움 직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게 의무감이나 누가 시켜서 하는 일 같으면 못해 낼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낮아지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 다. 묘하게도 우리가 보았던 구절을 보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는 말씀도 있고 바로 그 앞에 그 종들 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거기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일 은 사실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요? 어떤 점에서 같은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 묻혀 있 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누가 왕 노릇합니까? 남편이 합니까? 그러면 행복할까요? 가정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니까 좀 이상합니다만 가정에서 폭군처럼 아니면 내 마음대로 왕 노릇할 때 그 것이 행복합니까? 마누라도 시키고 아이들도 시키고, 시키면 시킨 대로 말을 척척 잘 듣고 이러면 만족감 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입니다. 보 다 더 큰 행복은 가족을 위해서 서로 섬길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정에서 왕 노릇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합 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낮은 자리에서 섬길 수 있고 부부가 서로 종 노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설마 우리 성도님 중에 그런 분이 안 계시겠지만 부부가 아직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있다면 반성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안 믿는 사람들이 평생 그럽니다. 결혼하기 전부터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정에서 서로 섬기면 서로 왕 노릇하는 것 입니다.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꽉 눌러 꼼짝 못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뒤집어져서 아 내가 남편을 쥐고 흔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즘은 매 맞는 남편들도 상당히 많이 있고 쫓겨나오는 남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쫓아내고 아내가 집에서 큰소리 딱 치고 있으면서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버티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피차간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피차간에 서로 섬김으로서 서로 왕 노릇하는 그것이 정말 참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데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과 문지기 노릇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섬기면서 왕 노릇하는 관계는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의 맛을 조금 보게 되 - 5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지요. 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 교회 내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섬기는 겁니다. 왜 섬깁니까?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매일 섬기라고 그러니까 꼬라지는 보기 싫지만 섬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아니, 그래 가지고는 안됩니다. 섬길 수 있는 것은 성도들 간에 사랑 이 있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어차피 저렇게 무능하고 하는 짓마다 말썽 뿐인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냐구 요? 해답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 형제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걸요. 하나님께서 이 형제를 위 해서 아들을 희생하셨다는 것만 확실하다면 능력이 좀 떨어지고 성질이 좀 못됐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 섬김으로 서로가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이 교회에서 가능해져야 합니다. 제 동생이 있는 어느 교회에 소위 말하면 끗발이 센 장로님이 한 분 계세요. 원래 변두리의 조그마한 교회의 장로였는데 주변에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동시에 교회가 크게 되어버린 경우죠. 작은 교회가 엄 청나게 자라면서 동시에 수석장로라는 직분을 즐기게 된 겁니다. 그릇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가는 거죠. 그 분 때문에 큰 문제랍니다. 장로 입장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러고 있으면 그것 재미있습 니다. 교인이 몇 천명 되는 교회인데 내 성질 건드리면 일 되나 봐라 이러고 딱 고집부리고 있으면 그것 재미있습니다. 답답하면 와서 살살 달래고... 나중에 하나님께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는 제껴 놓고 일단은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터지기는 터지겠지만 일단은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즐기고 있 을 동안에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섬기면서 왕 노릇하는 것인데 바로 이 장로님은 그 재미가 어떤 것인지 알 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냥 낮추는 척, 그냥 겸 손한 척 해가지고는 안됩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 정하고 소중하게 대할 때 진심으로 그를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게 되면 왕 노릇하는 그 이 상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 예를 우리는 신앙 선배를 통해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 사람 행복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행복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오로지 자기 한 몸 다 버려서 교회를 섬기고 섬기는 일에 한 평생을 다 보냈습니다. 그러나 바 울만큼 행복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쁨이 있길래 스스로 문둥병이 들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멀쩡한 사람이 문둥병 들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어도 보통 낮춘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기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기쁨은 남이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유럽에서 볼 때는 야만국이죠. 미개하고 야만스런 불쌍한 민족이었 죠. 그런데 뭐 믿고 여기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그 선교사들이 왔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 진 것은 88 올림픽 때라고 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6.25 전쟁만 생각하는 거죠. 6.25 전쟁 때 다 부서 지고 깨지고 거지가 즐비했던 그 장면만 서양 사람들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코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88 올림픽 때문에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게 후진 나라에 무엇 때문에 잘 먹고 잘 살던 나라에서 선교 사들이 그것도 많이 배운 의사요 엘리트들이 찾아왔습니까? 자신들을 그렇게 낮춤으로 해서 거기서 참다운 기쁨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 누가 설명하고, 가르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짜 왕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가서 왕 노릇할 것이므로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왕 노릇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멀리 가서 하기가 어렵더라도 우선 내 가정에서라도 연습을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을 섬긴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자식, 참 마음대로 안되거든요. 곱게 곱게 큰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 디 가서 사고 한 번 쳐 놓으면... 며칠 전에, 제 기분으론 아마 제 평생에 가장, 흔히 말하는 남사스럽다고 할까요? 난생 처음으로 학부형 자격으로 학교에 불려갔거든요. 22년이나 들락거리던 학교지만 남사스럽고, 부끄럽고... 그 날 하루 애 많이 먹었습니다. 자식, 그것 마음대로 안됩니다. 성질 난다고 어떡하겠어요? 강 제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자녀조차도 우리는 섬기는 자세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 니다. 세월 지나면 그래도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6 -

[2001.07.11] 왕노릇 한 번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2:1~5) 가정에서 서로 낮추고 섬김으로 왕 노릇하시고 우리 교회에서도 이렇게 왕 노릇하는 모습이 이루어지기 를 바랍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자신을 낮춘 그 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왕 노릇하는 것 입니다. 천국에서 왕 노릇은 그렇게 섬기는 모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섬기면서 왕 노릇하는 이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7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믿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을 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 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 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 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 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 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 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 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으니라 하시니라 [개역, 마가 복음 9:14~29] 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 입이고, 교회에 나오는 것 도 내 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입니까? 내가 하는 일인데? 교회를 부지런히 다니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는 것 전부 내가 하는 일 아 닙니까?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 일을 열심 히 한다, 봉사도 열심히 한다, 예수 열심히 믿는다 하는데 조용히 앉아서 생각해 보면 내가 과연 믿기는 믿 는 것이냐라는 회의가 들 때도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믿음이 아주 많이 있는 것 같 다가 또 어떨 때 보면 믿음이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믿음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현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항상 믿음 가운데서 살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 우 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믿음이 뭐냐고 물으면 좀 분명치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답답한 사람은 누구겠습 니까? 아버지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이 아버지가 아마 가장 답답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답답하고 그 다음 아버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답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버지 다음으로? 예수님요? 예수님도 답답한 것 맞습니다. 도대체 가르친다고 가르쳐 놓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제자들을 만났을 때 항상 답답한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답함보다는 좀 더 답답한 사 람들이 있어요. 누굴까요? 제자들요? 제자들도 다 같은 제자는 아닙니다. 제자들 중에 세 명은 변화산에 예수님하고 올라갔다가 지금 내려오 는 중입니다. 그러면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은 산 밑에 있었는데 이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고쳐달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 아홉 명이 고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 왜 우리는 못했습니까 하는 말로 봐서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열심히 고함도 질렀을 겁니다. 그런데 안됐단 말이에요. 전에 예수님께서 전도하라고 보냈을 때는 분명히 됐습니다. 귀신도 쫓겨 나가고 병도 나았는데 이번에 해보니까 안되더라는 말이에요.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고쳐달라고 하는데, 구 경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아무리 해도 안 고쳐집니다. 나중에 그 일로 예수님께도 책망을 들었지만 자기들 도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도 답답했습니다. - 1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 세 명은 이 장면을 보고 아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거기 있었더라면 나도 저런 어려움을 당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제자들이 일 이 다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 조용히 묻기를 왜 우리는 이 일을 하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 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기도를 열심히 해 야 될 필요를 느끼곤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면서 병 고치는 분들을 옆에서 지켜 보면 정말 열심으로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제가 많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본 몇몇 분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거나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질병 에서 그 병을 고쳐달라고 죽도록 기도하면서 능력을 얻은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 능력을 얻었으면 어떡합 니까? 평생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면서 삽니다. 기도해서 얻은 능력으로 기도하면서 병을 고치기도 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생 기도하면서 삽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실제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기도를 통해서 이런 앉은뱅이들을 고치기도 하고 병을 물리치기도 합니다. 그런 예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많이 나 타나는 것을 봅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나타났었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그런 이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처음 증거 되는 어려운 곳에서 열심으로 기도하고 말 씀을 증거 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런 능력을 더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 히 보면 제일 싱거운 사람들이 좀 있어요! 정말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제자들이 고칠 수 있는가 가 보자 해서 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그런 데 제자들이 못 고치더란 말이죠. 좀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것을 보고 또, 무리들이 놀라 하면서도 우 하고 뛰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보고 나오라고 명했더니 아이가 거품 을 흘리고 구르다가 쓰러진 모양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겨우 한마디 한 게 뭐였죠? 아[애] 죽었다! 그리고 는 더 이상 얘기가 없어요. 다른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 때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다고 찬송을 부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등장했던 이 무리들은 죽었다 한마디 하고 그 다음 다시 살아난 걸 보고 어떻게 했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주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볼 수가 있지요. 기적을 보아도 믿음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이런 무리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 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성도 여러분! 어릴 때부터 이 아이가 귀신이 들렸다고 했는데 지금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귀신들린 자녀를 가진 아버지의 아픔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아픔일까요? 제 자신도 체험 적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기록과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서 어렴풋 이 짐작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책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 보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이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 인데 일본에서는 이 사람이 좀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진 않았는데 제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작년이나 올 초에 한번 우리나 라에도 다녀간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양팔이 없습니다. 여기 손처럼 보이십니 까? 발바닥입니다. 양팔이 없고 왼쪽 발이 제 기능을 못합니다. 왼쪽 발이 오른쪽 발보다 한 절반 정도나 삼분의 일 정도가 짧아요. 그래서 왼쪽 발에 의족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이를 보니까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입니다. 이 사람이 일본에 많이 알려지고 일본에 매년 와서 연주회를 하는 모양인데 일본에서 선교사가 하지 못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일을, 복음을 전하는데 선교사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아이를 가지게 된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기 록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렇게 슬프지가 않아요. 부모가 어느 정도 아픔을 가졌고 얼마나 고통을 가졌을 건 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흘이 되도록 의사들이 이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 아이를 부모가 맡아서 키울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부모가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다 는 말을 하면서 이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럽게 키웠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슴 아 픈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신앙으로 얼마나 밝게 자라났는지 그렇게 슬프지 않 - 2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합니다. 식당에 가면 두 팔이 없으니까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합니다. 옆의 식탁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 흉 내를 내는 겁니다. 어떻게 흉내를 낼까요? 양팔을 스웨터 안으로 집어넣고 식탁에다가 발을 올리는 거지요. 그 어린 아이가 볼 때에는 아주 재미있는 겁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기 록하고 있는데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이렇게 키우면서 그 부모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딛고 기도로 키운 아이가 지금은 결혼해서 누구보다 도 더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저도 못 들어 봤습니다만 이 분이 음반도 여러 개 를 냈답니다. 복음송 가수로서 활동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국민일보에서 본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하고 14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아이를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14년 만에 아이를 낳고 보니까 아주 장애가 심하더랍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항의 비슷한 기 도를 하게 되죠. 하나님! 그렇게 기도하고 애썼는데 모처럼 준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분들이 받은 기도의 응답이 뭐냐면 나도 이 아이를 14년 동안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너 희들이 맡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너희들에게 맡겼다 하는 음성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 아 이를 기쁨으로 키우기 시작을 했지요. 믿음으로 이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성도에게는 있지만 실 제로 이 아이를 키우면서 당하는 아픔은 말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자녀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는 가정이 몇 가정 있습니다. 그런 가정들에게 위로의 말씀 을 드리고 싶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말이 짧은 것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혼자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렇게 위로해 드렸으면 좋겠다 하다가도 막상 만나면 제대로 말씀도 못 드리고 위로의 말씀도 못 드리는 것이 참 미안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권하고 위로하 던 일을 참 잘했던 분입니다. 참으로 큰 은사입니다. 혹시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으면 덮어놓고 숨기지 말 고 우리 성도들에게 알리는 게 좋습니다. 부모님들의 기도에 온 성도들의 기도가 합쳐진다면 비록 힘들고 어려울런지 몰라도 기도로 키운 자녀는 장애를 지녔다 하더라도 나중에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사 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경상도 말로 재바르다라고 하지요. 아이들 이 얼마나 재바른지 모릅니다. 재빠르다는 말과 비슷한데 어감이 조금 달라요. 아이들을 키우신 분들은 잘 알지만 어느 때에 아이 보기가 제일 어려워요? 애가 뱃속에 있을 때, 눕거나 업혀서만 지낼 때, 그리고 이 아이가 잘 걸어다닐 때 어느 쪽이 제일 키우기가 힘들죠? 걸어다닐 때요. 아니,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힘들지 않을까요? 남이 보기에는 힘들어 보이겠다 싶어도 그 때가 제일 편 하답니다. 태어나서 누워 있고 등에 업혀만 다닐 때는 제 발로 걸어다니기만 해도 다 키웠을 것 같다는 소 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때가 편하답니다. 제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하면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든 지 모릅니다. 요즈음 민찬이 보면 알 수 있죠. 가만 놓아두면 어느새 사라집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상 적인 애 키우기도 그래요. 하물며 이 아이는 귀신이 툭하면 불에다 집어 던지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는 말 입니다. 눈만 잠시 떼버리면 불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의 고생이 얼마 만 했겠어요? 이 아이를 고치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찾 아 온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못 고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 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아들을 빨리 고쳐주셨으면 좋은데 예수님 말씀이 조금 깁니 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숨도 잘 못 쉬어서 병원 응급실에 쫓아가면 어떻게든 빨리 조치해서 숨을 좀 쉬게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물어요.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아니 말도 못하는 사람한테 자꾸 물으면 어떡해요. 언제부터 그랬냐고 자꾸 묻고 환자는 대답도 못하고, 또 피 검사하러 가자, 엑스레 이 찍으러 가자, 옆의 사람은 속이 탑니다. 그냥 덜렁 고쳐주면 좋은데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되나 봐요.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 담당의사한테 미리 이 환자가 이런 증상으로 병원에 들 어오면 이렇게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처방을 하나 받아서 코팅을 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 편합니 - 3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다. 그래서 병원 응급실에 가면 아무 소리 않고 그것만 던져 주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걸 가지고 담당 의 사한테 전화를 걸더라구요. 그래서 치료절차가 간단히 됐어요. 예수님께서도 좀 쉽게 고쳐주면 될 텐데 얘기도 많이 하고 책망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자꾸 그럽니다. 예 수님의 관심은 이 아이의 병을 한방에 고쳐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을 교육시켜야 하고 또 이 아버지가 믿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 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아버지의 믿음과 신앙의 상태 그리고 주변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교육시 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 아이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다급해서 이런 저런 대답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 아버지가 듣기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로 들렸을까요 아니 면 속이 뜨끔 하는 소리로 들렸을까요? 믿기만 하면 이 아이를 고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 아버지가 속이 뜨끔했겠습니까? 아니면 귀가 번쩍 뜨였습니까? 뜨끔했어요!.. 귀가 번쩍 뜨였어요! 왜 답이 다르죠? 이 아버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믿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귀가 번쩍 뜨이지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거 곤란하지요. 예 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을 하였는지 보십시오.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했죠? 그것만 있어도 되는데 한마디 덧붙였어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럼 이 사람 지금 믿음이 있 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기는 있습니다. 있습니다 하니까 뭔가 이상해서 나온 대답이 있기는 있습니다. 아니 본인이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 서라고 말하잖아요. 앞뒤가 안 맞아요. 믿나이다 해놓고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게 믿음 있다는 얘기야 없다는 얘기야? 없다는 얘기입니까? 그럼 못 고치겠네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믿습니다 해놓고 자신을 돌아보니까 믿음이 없더랍니다. 그러면 못 고치네요. 설교시간이 아니고 공부시간에 모여서 이런 것을 가지 고 토론을 해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그런 시간들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더 길게 묻고 답할 수가 없습니다. 실상은 이 분이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왜요? 일단은 믿음이 있어야 고친다고 하니까 무조건 있다고 해 야 되는 겁니다. 그래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정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쳐 주셨습니까 안 고쳐 주셨습니까? 고쳐 주셨거든요. 결과로 보면 이분은 믿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있는 겁니다. 잘 한번 보세요. 본인이 자기 스스로 볼 때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분의 이런 상태를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고쳐 주시는 것이지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을 볼 때는 믿음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 때에도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들 스스로 앉아서 내가 이래 가지고 어떻게 믿는 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믿음이 뭐냐를 알기를 위해선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별명 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어서 의로움을 받았다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아브라함 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 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 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는 이 구절을 근거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었습니까? - 4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굳게 믿었다면 이스마엘이 탄생할 수 있습니까? 사라의 몸을 통해 자식을 주겠고 그 자식을 통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한 것을 굳게 믿었다면 아무리 사 라가 원한 일이라 해도 이스마엘을 낳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한 증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삭의 이름 뜻이 뭐지요? 웃음입니다. 어쩌다가 애 이름이 웃음이 되었나요?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낳으리 라고 했는데 누가 웃었습니까? 사라가 웃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왜 웃느냐? 사라가 뜨끔했어요. 안 웃었 습니다. 찔리면 시치미부터 떼놓고 보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싶어요. 천사가 정녕 웃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죠.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고 유머가 풍부하시며 참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엄마가 아들을 부릅니다. 뭐라고 불러요. 이삭아! 할 때마다 뭐가 생각나요? 웃음이 생각나요. 무슨 웃음요?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주리라 했는데 피식피식 웃었던 웃음이 생각납니다. 그 다 음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해도 사라는 더 이상 웃지 못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 시는데 한번 웃었다고 애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으니 애를 볼 때마다 또 내 말에 웃을래?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웃지 않았다구요? 웃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그 약속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스마엘을 봐도 알 수 있고 이삭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인정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 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뭐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이런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던 이 아비의 믿음에 서도 그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그런 믿음을 발견하기는 좀 어려우리라 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을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러면 믿음이 뭐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증거니 익숙한 구절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믿음이 뭐냐? 바라는 것들의 실 상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믿음 뿐이다는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볼 수 없는 걸 보여 달라고 할 때 방법은 믿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 속에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고 하는데 좀 보여 주실 래요? 라고 하면 뭘로 보여줘요?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나쁜 사람입니다마는 보여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마는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밖에 볼 수 없다라는 설명과 비슷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뭐냐에 대한 답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믿음에 관한 글을 읽고 기가 죽었는데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누가 밧줄을 걸쳐 놓고 그 밧줄 위로 통 하나 짊어지고 건넜습니다. 이 사람이 건너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 고는 여러분, 제가 이 밧줄 위를 걸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믿습니다 했겠 지요.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누구 한 사람 내 위에 올라타세요. 나와 함께 걸어갑시다. 했더니 아무도 안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믿음이란 이와 같이 나오라고 할 때 나와서 그 통에 올라 타고 함 께 이 폭포를 건너가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릴 때 얼마나 기가 죽었는지 아십니까? 난 하 나님이 나타나서 올라타라 건너가자 해도 난 못 건너가. 그럼 나한테 믿음이라곤 아예 없네요? 그런 비유 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기가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정말 이런 것이라면 천국가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최고봉에 해당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믿음 이 아주 완성된 상태인 셈인데 우리가 보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 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많은 훈련을 겪고 난 뒤에는 어디까지 순종하게 되지 요?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을 바치는 그 믿음을 믿음의 최고봉이라고 친다면 그런 믿음에 이르기 전, 예 믿습니다 해 놓고도 이스마엘을 낳고, 또 다른 아들에게 - 5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이름을 이삭이라고 붙이는 사건들을 저지르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하시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위대한 신앙만, 위대한 믿음만 원했다면 우리는 아마 다 불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무통에 올라 타고 밧줄 위를 건너가는 그런 믿음입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이지요. 겨자씨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요. 겨자씨를 OHP 필름에 뿌려가지고 스크린에 비추어놓고 얘들아 저 기 뭐가 있냐? 하면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무 것도 없대요. 없을 수밖에요. 보일 둥 말 둥 점만 찍어져 있으니까 애들 눈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태산같이 큰 믿음이 아니 라 겨자씨 같은 작은 겁니다. 우리 속에 떨어져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표도 나지 않는 조그마한 그 무엇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이 작은 겨 자씨 만한 그 하나를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키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츰차츰 자라나서 새가 깃들고 사람이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 속에 뿌려진 그 작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매달려야 되겠다 는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라고 입으 로 고백할 때 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고백,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쩌 면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이 작은 것이 거대한 믿음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서 뭔가 거창한 것을 찾지 마시고 우리 속에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에게만 매어달려야겠 다고 하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를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귀신들린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외줄 타는 사람의 등에 올라타고 가서 함께 그것을 건널만한 그런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많 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본 후에나 가능한 산꼭대기에 해당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 다. 여러분, 에베레스트 산이 높다고 말할 때 그 산 꼭대기만 에베레스트 산입니까? 산 중턱은 딴 산입니 까? 아니 그 산 밑은? 에베레스트 산은 밑도 에베레스트고, 중턱도 에베레스트고, 꼭대기도 에베레스트입니 다. 우리의 믿음이 산에 비유했을 때 산 밑에 있는지, 중턱에 있는지, 아니면 꼭대기에 있는지 각자 다를 것이지만 산 밑에서 이제 올라가려고 한발 들여 놓은 것조차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이 아이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향하여 믿음이 있느냐 혹은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냐고 물어볼 때가 많 이 있습니다. 이 때에는 꼭 이 장면을 기억하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만 있으면 못할 일 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가 엉겁결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있습니까? 우리가 일반적 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따르면 없어요. 그러면 이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는 있습니다 라는 뜻이 뭡니까? 지 금부터 믿겠다는 이야기예요? 애만 고쳐주면 믿겠습니다는 말인가요? 이 아버지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 은 자신의 소망을 나타낸 겁니다. 이 아이를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고쳐 주십시오라 는 간구일 뿐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아이를 고쳐 주셔야 한다는 것입 니다. 자신의 소망이요, 예수님을 향한 간구를 믿습니다 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을 돌아보았더니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더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대답을 두 가지 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고맙게도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밖에 안 보셨습니다. 어느 걸 보셨지요? 내가 믿나이다라는 엉터리 고백을 보셨습니다. 이 아이를 반드시 고쳐 주십시오라는 이 마음만 보시고 고 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요? 그런 간절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 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생각이 들면 무엇부터 따지십니까? 믿는다는 사 람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자신을 향해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 6 -

[2001.07.18]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14~29) 에게 믿음이 있느냐를 보실 때 여러분이 무슨 짓을 했느냐를 따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부터 보시는 데요? 우리 속에 하나님 외에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먼저 보신다는 사 실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됐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다면 우리가 할 일은 감사밖에 없지요. 자신을 향해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필요없이 이런 부족한 나를 받아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미리 압니다. 아이들이 아빠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 하기 전에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압니다. 그냥 덜렁 사주면 좋은데 그냥 덜렁 사주기 전에 가끔은 사달라고 조르기를 은근히 기다릴 때도 더러 있죠? 내가 이걸 사주고 싶은데 무슨 좋 은 핑계거리가 없나 하고 기다릴 때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무슨 건덕 지가 없나? 해서 우리 속을 뒤적이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안타까 움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속에 무 슨 핑계거리가 없을까 해서 찾아낸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더라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것도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위대한 믿음으로 키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만 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으면 차츰차츰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마침내 아들을 바치라는 말 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 7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저 부제: 성경 기자는 성경을 자신의 뜻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 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여짜 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개역, 마가복음 14:27~31] 는 성경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도를 지나서 좀 별나다 싶을 만큼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같은 종류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을 가끔 만나 게 되면 굉장히 반갑게 생각을 하면서 저 분은 왜 저런 성경을 가지고 있을까?라고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성경 내용은 똑같은 데도 요즈음은 종류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기는 합니다. 어느 것을 어떻 게 보든지 관계는 없습니다. 많이 보시고 많이 읽으시면 좋습니다. 그러나 유독 제가 좋아하는 성경은 이것 입니다. 관주가 붙어 있고 한글 한자를 병용하되, 찬송가와 주석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 성경책이 좋은 이유는 찬송가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찬송가가 붙어 있으면 굉장히 편리하지요. 잇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느낌상, 찬송가하고 성경책은 붙여 놓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게 어떻게 동급이 될 수 있느냐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찬송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겁니까? 아닙니다. 이건 우리 나름 대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 께 드리는 것은 비슷합니까? 차이가 많이 납니까? 찬송도 귀중한 것이지만 성경말씀과 감히 비교할 수 없 을 뿐만 아니라 같이 붙여두기에는 급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프로 선수가 아마츄어 선수와 함부로 게임을 합니까? 저는 성경과 찬송가를 합본해 두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같이 붙여 놓으면 편리하지요. 그 러나 불편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조금 별나다 싶을지 모르지만 성경말씀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라는 기분으로 들어주시면 고맙 겠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찬송가 다 뜯어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잘 갖고 다니시고, 더 잘 활용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성경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 랍니다.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가 더 큽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을 연속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을 읽었습니다. 왜 마가복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마가가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준 책 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마가가 기록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었고 초대 교회 성도들도 아무 이의 없이 마가복음이라고 부른 그 책을 마가복음의 저자는 하나님 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비슷한 예를 든다면 이런 걸 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연설을 굉장히 많이 해야 되지요. 가는 곳마다 연설을 해야 됩니다. 그 연설 원고 언제 다 작성합니까? 원고 한 편 쓰기도 얼마나 힘든데 가는 곳마다 멋 진 연설문을 어떻게 그렇게 날마다 작성합니까? 대부분 비서들이 합니다. 비서들이 원고를 작성해서 가져오 면 대통령이 보고 잘 됐으면 그대로 읽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대통령은 그 밑의 참고사항까지 읽어서 청중을 즐겁게 한 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안 든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수정도 합니다. 비서가 쓰고 읽기는 대통령이 읽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연설문입니까? 그건 대통령의 글입니다. 대통령이 할 말을 비서가 대신 쓰는 것 뿐입니다. 비서가 열심히 썼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대통령의 뜻입니 다. 비서들이 아무리 잘 써 와도 대통령이 읽고 마음에 안 들면 아니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이 다르다면 그건 소용없는 겁니다. 써온 원고로 연설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연 설이 되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아는 명 연설 대부분이 대통령 본인이 처음부터 생각하고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 1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심지어 우리나라의 큰 교회 목사님들도 밑에서 설교 원고 써주시는 목사님들이 여러 분 계시답니다. 설교 원고를 여러 분이 써오면 그걸 그대로 읽던지 소화를 해서 설교를 하시는 분이 있답니다. 그러면 누구 설 교예요?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설교를 써 왔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제대로 된 것은 이것이야 하고 판별해 내고 그 전하려는 뜻을 선택하는 그 분의 뜻이 담겼다면 그 분의 설교입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이 마가복음 본문 을 보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니 마가복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성경들을 잘 살펴보시면 글 쓴 사람이 자기 의도대로 다 쓰지 못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을 중심해서 생각을 해 보고 또 성경의 여러 다른 예들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선 성경 본문을 한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에 달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27절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되어 있었던 얘기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그러니까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너희들은 갈릴리로 가서 나를 기다리라는 의미가 되지요. 그 말을 듣고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기다린 제자는 한 명도 없었 습니다. 그런데 29절에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칩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 다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지만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합니다. 이 말을 베드로 혼자 했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했다라고 마가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글을 쓰고 있는 마가의 입장에서 베드로나 제자들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세요. 마가는 베드로의 양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로마에서 설교를 할 때 마가가 통역을 했다고 그럽 니다. 어느 정도로 마가가 베드로를 존경하고 따랐을까요? 마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은 베드로가 열심히 설교 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걸 듣고 옮겨 적은 것입니다. 마가가 베드로를 얼마나 존경했을까요? 아니 마가의 입장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베드로가 그 당시에 성도들에게 혹은 마가나 다른 추종자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았을지 상상을 한번 해 보십시오. 오래 전입니다마는 교황이 우리나라에 다녀간 후에 교황이 깔고 앉았던 의자와 방석이 전부 경매에 붙 여졌습니다. 제 기억에 깔고 앉았던 방석이 30만원 정도의 경매로 나왔습니다. 10년도 넘은 일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신을 본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지나갈 때 그 림자라도 덮여지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살아 있는 신보다 더 하면 더 했을 것입니다. 그렇 게 존경받던 베드로입니다. 아니 베드로 뿐만 아닙니다. 그 나머지 제자들도 마가가 보기에 마찬가지입니 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한 곳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때 마가는 젊은 청년이 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베드로, 다른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 같아요. 그 베드로와 제자들이 참으로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그 이야기를 지금 마가가 적고 있습니다. 마 가의 입장에서는 정말 하늘같이 존경하는 아버지 베드로, 정말 좋아하고 따르는 삼촌이나 형님들의 이야기 를 쓰고 있습니다. 그 형님들의 무슨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까? 잘한 이야기예요? 못한 이야기예요? 모 든 성도들에게 최상의 존경을 받던 그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좋은 얘기 쓰고 있어요? 부끄러운 얘기 쓰고 있어요? 그래도 좀 창피한 얘기같으면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지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마가가 그렇게 위대한 분의 이야기를 쓰면서 좀 창피한 이야기면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지나갈 수도 있는데 얼버무리기는 커녕 꼬치 꼬치 다 기록합니다. 이 위대한 스승들을 흔히 하는 말로 물 먹이기로 작심한 듯 기록하고 있습 니다. 마가가 개인적인 의도로 썼다면 이렇게 안 썼을 거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 초등부 하기학교 가서 예로 든 것이 전도사님 형제가 다섯 명인데 어릴 때 부모님 주머니에서 잔 돈 훔쳐서 만화책 보러 가거나 군것질 안 한 사람은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이고 네 명이 그랬어요. 이랬더 니 한사코 그런 일을 안 한 사람은 우리 전도사님이래요. 제가 얼마나 고맙던지요. 기대를 깨뜨릴 수 없어 서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고 여하튼 다섯 형제 중에서 그런 짓을 안 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고 했어요. - 2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얘들이 참 고맙게도 우리 전도사님은 안 했던 한 사람으로 믿어주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워요. 그런 아이 들이 세월 지나서 우리가 어릴 때 우리 전도사님이 말이야 하고 얘기했을 때 전도사님이 잘못한 것 쓰겠어 요? 그 아이들 같으면 다 빼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가는 왜 좋은 얘기 많이 있을 텐데 그 얘기 접어놓고 이 창피한 얘기부터 기록했을까요? 마가가 개인적으로 베드로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그것은 이 글을 쓰는데 전혀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뒷 얘기 잘 알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피 땀 흘려 기도하실 때 이 베드로 뭐 하고 있었습니까? 잤지요. 사실 우리에게 은혜로운 본문이지만 베드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창피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그걸 그대로 다 기록했습니다. 마가만 그렇습니까? 다른 복음서 기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을 마태복음과 비교를 해 보면 마태는 한 술 더 뜹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 이 누구 앞입니까? 건장한 청년이 칼을 들이댄다거나 아니면 총을 들이대고 너 죽을래 살래 이러는 바람에 예수님을 부인했다면 조금 이해가 될 텐데 누구 앞에서? 조그마한 계집애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 합니다. 몇 번 부인하죠? 3번 부인합니다. 처음에는 야! 나 모른다. 부인입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 고, 내 말이 거짓말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놈아!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 더 붙어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그냥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했다고만 해도 부끄러울 텐데 이걸 미주알 고주알 그대로 기록하는데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하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베드로의 위치를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복음서 기자든지 쓰고 싶은 대로 쓰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합니 다. 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들의 그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기록한 것은, 가령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마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왜 들어갔죠? 전 이렇게 결론을 맺고 싶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마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 이불 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가니라 이 구절이 성경에 들어와서 무슨 은혜가 됩니까? 아마 이 청년이 자다 가 베 홑이불을 둘둘둘 감고 병사들을 따라왔던 것 같습니다. 안에 내의를 안 입었던 모양이지요. 그 쪽 사 람들 옷이 그러니까요. 도망가는데 걸리적거린다고 벗어 던지고 도망갔는데 결국은 알몸으로 도망갔더라. 성경에 이런 이야기를 왜 적어 놓습니까? 제가 어릴 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도망친 제자가 누굴까 하고 늘 궁금했는데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전혀 없습니다. 마가복음 에만 있습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 틀림없이 자기 얘기다. 마치 남의 얘기인 것처럼 슬쩍 끼워 놨지만 자기 얘기일 것이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의 글을 확인해보니까 그런 의견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아마,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떠났습니다. 마가는 그날 밤에 잤던가 봐요. 얼 마 후에 그 길로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지나갔습니다. 어? 좀전에 예수님이 가셨는데 무슨 일일까? 싶어서 자다가 일어난 채로 담요를 둘둘둘 감고 따라왔는데 보니까 일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엉겁결에 벗어 던지 고 도망갔다는 것이 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마가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51절의 그 분이 누군지 아세요? 아, 예 알지요. 누군데요? 말하긴 좀 곤란한데요. 쓰고 싶은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 요. 자기와 관련되었건 자기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이야기였건 기록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복음서가 일반책과 다른 점 중에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 대충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서 4권에 기록돼 있는 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자랑스러운 이야 기가 많습니까? 아니면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많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 빼고 제자들의 이야기 중에 자 랑스러운 것과 좀 부끄러운 것을 분류하면 어느 쪽이 더 많을 것 같습니까? 이건 답이 확실하게 나올 것 같아요. 부끄러운 게 훨씬 많습니다.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했나요? 마태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마가, 누가는 복음을 전하는 스승님들을 따라 다니면서 헌신적으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들이 왜 자기들이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좀 좋게 쓰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 - 3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뜻대로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을 기록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경이 이렇게 기록된 이유를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예 들을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한번 찾아보자 하고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예 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큰 인물은 아무래도 바울입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이끌어 갔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을 갈 때 심히 싸우고 갈라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뜻이 안 맞아서 둘이 갈라졌다? 이런 이야기를 꼭 기록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일로 인해서 무슨 큰 일이 벌어졌다면 또 모르지만, 큰 부작용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뒤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는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인생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바울과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런 것까지 다 기록하나요? 교단이 갈라지고 교회가 갈라질 때 바울과 바나바를 봐라 하면서 갈라지는 것 을 당연히 여겼던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큰 부작용이 없다면 그 얘기를 생략시켜 주면 위대한 바울의 흠집을 내지 않고 참 좋겠는 데... 쓸데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전에 다녔던 반대 방향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 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처음에 갔던 방향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 이후 바나바의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위대한 바울의 흉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바울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리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바나바에게 그러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 가 아닙니다. 구약으로 가 봅시다. 성경의 앞 부분 다섯 권은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서 모세 오경이라고 합니다. 그 중 의 한 권인 출애굽기를 요약한다면 모세가 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는 이야기와 율법을 준 이야기, 성막을 건설하는 이야기, 세 가지 정도입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도 모세처럼 멍청하게 지도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는 민족의 지도자로 나설 때 하나님께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가라 내 가 네게 이런 능력을 주겠다. 가라. 가라. 해도 선뜻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갔죠? 마지 막에 어떻게 되어 있죠? 그 부분을 꼭 한번, 유심히 보십시오. 무슨 사명감에 불타서 간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사... 성경은 참 점잖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사? 우리 식의 직 접화법으로 표현하면 이노무 새끼... 이런 말 아닐까요? 모세가 자기 얘기를 쓰면서 자기가 민족의 지도 자로 나설 때 좀 멋지게 나갔다고 기록하면 안될까요? 아니면 부끄러운 일이 있었으면 좀 간략하게 요약하 면 안될까요?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 하셨는데 내가 생각해 보니까 도저히 힘들 것 같아서 몇 번 거절, 사양을 하다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갔다. 이렇게 기록하면 좋잖아요. 양 무리를 치던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장인에게 갔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같으면 이렇게 말하는 게 정상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해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애굽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멋있어요? 장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애굽으로 가도록 허락을 받아냅 니까? 성경퀴즈에는 이런 문제를 내야 재미있어요. 애굽을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내 형제들이 잘 있는가 안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가게 해 주세요. 그래 장인이 가 보라고 그러죠. 떠난 지 40년이나 되었 으니까 형제들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하는데 장인인들 마다 할 이유가 없죠.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제 나름대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모세가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이들 말로 어딘가 좀 쭈굴딱스럽지[창피스럽지] 않았을까요? 니가 가서 뭘 한단 말이냐? 하고 장인이 말할지 모르니까 말을 빙빙 돌린 거죠. 그렇게 해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걸 자기가 기록했습니다. 좀 빼면 안될까요? 아니면 적 당히 얼버무리고 지나가면 안될까요? 여러분, 출애굽기의 그 부분을 얼마나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십시오. 모세는 그 본문을 기록하면서 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 모세는 자기의 부끄러운 얘기를 가감없이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자기 뜻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 4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모세가 많은 율법을 전해 주었습니다. 십계명요? 모세가 궁리한 것입니까? 십계명에 이어서 많은 율법이 나옵니다. 모세가 궁리한 겁니까? 아니에요. 전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겁니다. 모세가 적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모세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세웠습니다. 모세가 궁리해서 세운 것 입니까? 성막을 어떻게 만들었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성막 자체를 보고 만들 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여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출애굽기 전체 내용은 모세가 기록했을지라도 모세의 뜻대로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제사제도도 모세가 고안한 겁니까? 아니면 어떤 제사장이 고안해 낸 이야기입니까? 결코 그렇 지 않습니다. 그 제사제도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뜻이 다 담겨 있습니다. 레위기 읽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합 니다. 저도 한 때 레위기를 읽으면서 잘 잤습니다. 잠이 안 와서 걱정이신 분은 성경책을 펴세요. 레위기나 출애굽기 뒤쪽을 보세요. 뜻도 모르겠고, 그 말이 그 말 같아서 잠이 잘 옵니다. 그러나 레위기가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수면제 효과가 완전히 떨어져 버렸습니다. 레위기를 읽어도 잠이 안 와 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되면 잠 오 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흥분시키는 책이 되고 맙니다. 어쨌거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성공적으로 인도했고 오경이라는 다섯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모세가 특별상을 받았거나 특별 사례를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특별 대우 해 주셨습니까? 모세 업적을 한 번 보십시오.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공을 세운 모세가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 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무런 특별 대우를 해 준 것이 없 습니다. 왜요? 일하신 분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모세 오경을 통해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모 세가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서운하기는 했겠지만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여호수아서에 가서 예를 또 한 번 찾아보길 원합니다. 여호수아가 민족을 이끌고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동안 여호수아는 자기 결정 하에서 행한 일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마어마한 업적 을 남겼지만 자신이 결정해서 한 일은 하나쯤 있을까요? 전부 하나님이 시킨 대로만 했습니다. 여호수아 4 장을 봅시다. 여호수아 4장 10절입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이렇게 말이 이어져 갑니다. 여호수아에게 명한 분은 누굽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라고 되어 있지요? 곧 이어 하는 말이 같은 내용인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 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 는 이 명을 누구에게 들었을까요? 모세에게 들었습니다. 그럼 모세에게 누가 말씀하셨구요? 하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했고 그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이 일을 여호수아가 했다는 것입니 다. 여호수아 11장 15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 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고 기록합니 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명하셨구요? 모세에게 명했고, 그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한 것을 여호수아가 다 지켜 행하였더라 이것이 여호수아의 전체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서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제목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제목은 여호수아인데 주인공은 결코 여 호수아가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한 것은 적어도 기록상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성경을 보시면서도 우리 스스로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기록은 사람이 했을지라도 자기 뜻대로 기록한 것 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만 확실하게 인식하셔도 성경을 아주 은혜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저자는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저자라기보다는... 제가 오 늘 설교제목을 이렇게 붙여 놨더니 우리 목사님이 제게 물으셨어요. 그러면 기록한 사람은 뭔데? 하시더라 구요. 도구인 셈이죠 하니까 기자잖아 기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자고 모세, 마가, 마태... 는 기자입니 다. - 5 -

[2001.07.2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Ⅰ (마가복음 14:27~31)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끼고 다 니면서 성경을 날마다 가르치는 사람 중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사람의 말이라고 믿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사람들은 굴러들어온 복을 스스로 차 내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저 자는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 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동화입니다. 거지와 왕자가 뒤바뀐 이야기 있죠. 그 이야기 마지막에 거지가 되었던 왕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옥새입니다. 똑같은 놈이 둘이 나타났어요. 왕자는 나는 왕자가 아닙니다. 하고, 거지같은 녀석이 하나 나타나서 내가 왕자다. 하니 난리가 났어요. 신하들 이 누가 진짜 왕자냐 판정을 내려야 하는데 옥새 가지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옥새가 없어진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을 진짜 왕자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 같은 녀석이 어디어디 가보면 있노라 고 합니다. 신하들이 가 보니까 없어요. 그런데 분명히 거기 두었는데 왜 없느냐 고 이 거지가 힐난을 하다가 이 왕자한테 묻습니다. 너 저번에 우리가 호두 까먹을 때 쓴 것 있지 그거 치웠지? 그러니까 왕자가 치웠답니다. 어디 치웠어? 어디어디에 숨겨두었데요. 찾아보니까 나왔어요. 거지와 왕자가 뒤바뀌어 가지고 거지가 왕자노릇을 얼마동안 했는데 이 가짜 왕자는 옥새를 다른 데 감 추어 놓고 몰래 호두 까먹을 때 썼어요. 호두 까먹고 자기만 아는 데 숨겨 놓은 거예요. 그러나 진짜 왕자 가 돌아왔을 때 그 옥새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왕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 이 성경은 놀라운 기적을 안겨다 줍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성경을 옆에 끼고 읽으며 연구하 면서도 성경이 사람의 책이고, 사람이 자기의 뜻을 따라 이렇게 저렇게 편집을 했고, 이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저런 의도로 기록했고... 구구한 설명을 다는 사람은 옥새들고 맨날 호두나 까먹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놀라운 신비로움이나 경험이나 기적은 결코 체험하지 못합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죠. 아니 그 옥새마 저 없으면 호두 까먹을 때 안 깨져서 땅바닥에 내리치고 하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없는 것보다는 분명히 낫습니다. 성경이 사람의 책이라고 믿고 그렇게 읽는 사람도 안 읽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그 옥새로 호두 라도 까먹으면 도움이 되잖아요. 그러나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을 안겨줄 이 귀중한 책을, 이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 을, 맨날 호두나 까먹는데 쓰고 있어야겠냐는 겁니다. 그건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그 날이 그 날이고, 매일매일이 고통스럽고, 누가 왜 사느냐 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다 그런 것이 아니고 혹시 그런 분이 있을까봐 하는 말씀입 니다. 왜 사느냐? 무슨 재미로 사느냐? 물으면 할 말이 별로 없으십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으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모릅니다. 이 망할 놈의 세상이 아니고 살 만한 세상입니다. 살 만한 세상에 열심히 살다가도 하나님께서 오라 하면 기꺼이 떠날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믿고 그 말씀대로 따를 때에 우리에 게는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런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계 속하고자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시고, 끼고 다녀서만 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반드시 펴져 있는 책이어야 한다고 언젠가 한 번 말씀 드렸습니다. 늘 펴 두십시오. 그리고 읽고, 묵상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 6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Ⅱ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같 부제: 성경에는 위인이 없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 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 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 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개역, 사무엘하 11:1 5] 은 제목으로 여러 번 연이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드린 말씀을 간단하게 정돈해 봅시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 기자가 자신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 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기록해야 할 사명감을 느꼈고 자기의 실력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기록 했으나 기록해 놓고 보니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기록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사람의 기록이라고 보기엔 도 무지 왜 기록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글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에 대해 서 기록하면서 그 분의 온갖 잘못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도 결코 미화하 지 않았다는 점이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은 성경에는 위인이 없다 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위인이 얼마나 많은데 위인이 없다니? 그런 느낌이 드십니까? 오늘부로 생각을 좀 바꾸시기 바랍니다. 아니, 바뀌어질 것입니다. 거듭 말 씀드리지만 성경에는 위인이 없습니다. 그래도 있다고 하신다면 제가 양보를 하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은 사람이 만든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위인이라는 것에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 다. 성경의 위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인이 아닙니다. 도무지 위인이라고 할 만한 자질이 보이지 않음에도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갖은 고난을 겪은 후에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위인이 되었기 때문입 니다. 위인전을 읽는 이유가 뭡니까? 아이들에게 위인전 많이 사 주시지요? 왜 그러세요? 더구나 예전에는 한 권씩 팔았는데 요새는 아예 위인전도 한 질씩 파니까 경제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다른 것 제쳐두고 위인전을 읽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죠?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본받으라는 것입니 다.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기를 바라는 탓이지요. 위인전에는 어릴 때 에 사고치고 말썽부린 이야기는 절대로 없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그것도 성인들을 염두에 둔 책에서는 가 끔 고뇌하는 모습의 위인도 더러 보이긴 합니다만 원칙적으로 위인들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거죠. 우리 어릴 때의 위인이라면 으레껏 이순신이었지만 한 번도 사고를 치거나 부모의 속을 썩인 적은 없더 라구요.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본 이야기 같은데 이순신 장군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기는 늦게 했지만 그래 도 어릴 때 전쟁놀이를 하면서 장군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답니다. 과거 시험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 져 뼈가 부러졌지만 스스로 나뭇가지를 대고 묶어서 다시 말을 탔다고 하는데 전 그 장면을 보면서 기가 많이 죽었습니다. 나하곤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어린 시절도 얼마나 검소하고 착한 학생이었나를 구구절절이 기록하면서도 오줌을 싸 거나 말썽을 부린 이야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랜 세월 이 지난 뒤에야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위인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의 위대 함과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합쳐진 것이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위인은 사람이 만든 위인이라고 말하고 싶 은 겁니다. 어버이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어느 효부가 사석에서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뱉었답니다. 병든 시부모 를 지성으로 돌보았다고 표창을 받게 되었지만 진심으로 효도를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남들 - 1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처럼 노인네를 갖다버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지 효부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느냐? 이 런 상 안 받고 효부 안 하겠다. 고 몸부림을 쳤다는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처지를 원망도 하고 형제를 욕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방송은 이런 아픔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훌륭한 점만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사 람들의 이런 기대가 실제와는 동떨어진 효부, 열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일종의 허위의식이지만 그래도 비슷한 인물들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나마 최근에는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 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 니다. 본문에는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이야기는 교회에 가 보지 않은 사람도 잘 아는 이야 기입니다. 물맷돌을 휘두르며 골리앗에게 달려가며 외친 그 말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사무엘상 17:45),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 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17:47) 이 놀라운 다윗의 모습을 저도 어릴 적에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게 은혜 를 준 게 아니고 기를 꺾어 놓았습니다. 닮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고 나는 결코 신앙인이 못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가 아니고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라 는 속담이 더 생각나더군요. 학교에서 친구들 보는데 식사기도하는 것조차 당당하지 못한 판에 언감생심 다윗의 신앙을 본받자구요? 자주 실수해서 예수님께 책망 듣고, 졸다가 야단맞는 베드로를 보고는 은혜를 받아도 다윗은 결코 제게 은혜로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 보니 다윗이 더욱 감동적인 것은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에게 쫓기면서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고 하는데도,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해치진 않겠다는 자세는 아무나 함부로 따 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후배들의 기를 무참하게 꺾어놓을 수밖에 없는 정말로 위대한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그런 다윗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제가 다윗에게 기죽지 않게 되었더란 말입니다. 바로 오늘 이 본문의 사 건을 제대로 이해하면서부터입니다. 다윗이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마침내 왕궁으로 불러들여 간음 을 저지른 것입니다.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라는 4절의 이 말씀은 원문에 따르면 동 침한 후 그녀는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 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레 15:18 에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정결의식을 잘 지키는 셈입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그들이 씻어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의식적 정결에는 신경을 쓰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범 죄행위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도둑질하기 위하여 차를 구입하고 영업이 잘 되도록 고사를 지내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 후 자신의 범죄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그 여인의 남편을 죽게 하고는 그 전황보고서를 보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있죠.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는 이 말은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뜻이지만 너그러운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범죄함을 감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다윗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왜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몰래 봅니까? 봤으면 됐지 누군지 알아보기는 왜 알아봅니까? 불러서 동침한 것, 남편을 집에 보내서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한 것, 정신이 희미해지도록 술을 먹인 것, 충성스런 신하(들을)를 죽게 한 것,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은 것... 잘못을 열거하기에 숨이 가 쁠 지경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위대한 다윗의 신앙이 이 한 번의 사건으로 깨끗이 무너져 내린 것 아닙 니까? 더 이상 무슨 염치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왕이니까 그래도 봐줄 수 있습니까? 이런 잘못 - 2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으로 인해서 그의 가정에는 부끄러운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오빠가 동생을 추행하고 동생이 형을 죽이 고 아들이 아비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집니다. 비록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지만 징계마저 없는 것 은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적이고 모범적이었던 다윗마저도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만 나쁜 사람이고 밧세바는 아무 잘못이 없나요? 밧세바의 잘못도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집에 가셔 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 토론을 해 보세요. 재미있을 겁니다. 여자가 왜 눈에 뜨이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고등학생들 데리고 공부하다가 자유롭게 이야기 해 보라고 했더니 어떤 남학생이 당당하게 그래요. 이럴 때 여기서 안 쳐다볼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 참으로 용감한 남학생이었는데 다들 웃으며 동의했습니다. 남 자들의 속성이 그렇다는 걸 알고 주의를 좀 해야지요. 또, 왕이 부른다고 덜렁 갑니까? 갔더라도 그렇게 쉽 게 동침하느냔 말입니다. 목숨걸고 정조를 지킨 여자가 어디 한 둘입니까? 남편이 죽자 쉽게 다윗에게 시 집을 가 버린 점이 아무래도 잘못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밧세바는 누구입니까? 솔로몬 왕의 어머니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왕의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모독해도 괜찮은 겁니까? 다윗은 어떤 왕입니까? 그냥 단순한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 손 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요, 모든 왕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왕중왕입니다. 이런 분들의 잘못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해서 흠집을 내도 되는 겁니까? 성경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성경 은 어떤 사람도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보다 힘있는 사람의 잘못은 적당히 덮어주고 조금이라도 약하다 싶으면 철저하 게 짓밟아 버립니다.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과 왕비를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 나님 보시기에는 다윗도 밧세바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 문에 다윗이 왕중왕이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잘못을 까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짓밟고 까발린다는 표현이 우 리가 보기에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런 일도 아닙니다. 그냥 흔히 있는 일일 뿐입니다. 만 약 여러분이 성경의 주인공이 된다면 여러분의 자서전에는 등장하지 않을 이야기도 모조리 기록되고 말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라도 흠을 찾아보면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사람이 나빠서 남의 허물을 잘 찾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남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여유도 조금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위인들의 허물을 어떻게 잘도 봅니까? 제 탓이 아니라 성 경이 그런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도 사실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군복무중 일등병 시절에 마산통합병원으로 후송을 갔는데 그 때만 해도 대학생이 그리 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학 나왔으니 저녁에 명상의 시간 을 좀 인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군 병원의 병실이라서 인원이 적지 않습니다. 학교 교실 두 개 정도의 크기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은 했는데 문제는 계급입니다. 군대라는 곳은 인격도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계급이 낮으면 소위 말빨이 서지 않는 곳이 군대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계급이 낮으면 바보입니다. 일등병 시절이었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저보다 낮은 사람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쫄따 구[졸병]가 명상의 시간이랍시고 좋은 얘기 하다 보면 틀림없이 한 쪽에서 집어 치워라 소리가 나오게 마 련이고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온갖 핍박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공격을 피해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죽지 않아도 될 만한 일에 죽도록 충 성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해 보겠다고 대답은 했는데 이 놈의 고참들을 어떻게 요리를 하나? 궁리를 하 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사람이란 게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남의 좋은 얘기는 잘 안 들어도 헐뜯는 이야기는 다 재미있어 하거든요. 친구들 만나서 남편이나 시댁 흉을 한참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들 많지요? 정상처럼 보이지만 정상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그게 정상인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것이지 결코 정상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남편 흉보지 말고 존경한다고 말하세요. 그 러면 속이 편치 못하다구요? 순교하겠다는 자세로 해 보세요. 그래서 위장병이 들고, 죽게 되면 그것도 순 - 3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교입니다. 남편이 잘못한다고 같이 잘못할 수는 없죠.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하려는 각오로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도무지 사랑할 건덕지가 없는 아내를 사랑하려면 순교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송 합니다. 잠시 옆으로 샜군요. 그래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생각을 했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이 다윗 의 이야기였습니다. 남의 부인이 목욕하는 것을 남몰래 훔쳐본 왕이 있었습니다. 했더니 안 쳐다 보는 고 참이 없더라구요. 저녁마다 몇 십명이 되는 고참들을 침상에 정렬시켜 놓고 남의 흉만 본다고 생각해 보세 요. 그렇게 시선을 끌어놓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설명해 나갔죠. 정말 고마운 것은 그런 이야기의 재료를 찾으니까 성경에는 무한정 있더군요. 처음에는 몇 번 하다가 밑천이 떨어질 거 라고 생각했는데 막히지 않을 만큼 자료가 풍부했습니다. 제가 사람이 나빠서 단점만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 찾은 것입니다. 굳이 작전이 아니라도 정직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그런 것이 보입 니다. 여러분, 성경을 볼 때 항상 좋게만 보려고 하지 마세요. 좋게만 보면 주근깨도 매력으로 보이는 법이지 만 성경은 일단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의미로만 해석하려는 것도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성경은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잘못을 눈꼽만큼도 미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까발려 버립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쓰셨기 때문입니다. 성 경의 저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행적이 남아 있는 인물이라면 흠을 잡기가 아주 쉽지만 많은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 중에서 흠이 없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털어도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건 퀴즈문 제로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니엘입니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 마당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언 제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살벌한 곳입니다. 더구나 포로로 잡혀온 이방인으로서 정적들에게 도무지 흠이 잡히지 않았을 정도였다면 정말 완벽한 인물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도 있다는, 그러나 극히 드문 예외적인 인물입니다. 다니엘을 제외하면 진정한 모범생은 정말 찾기 어렵습 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곧장 가나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란 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차 떠나라고 해서 떠났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여차하면 아내를 버리고 혼자라도 살아 남겠다는 뜻입니다. 아 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제대로 믿지 않은 증거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았고 한번은 집에서 길리운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 라고 하여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웃지 못하게 했을까요? 이런 불신앙(?)의 사람을 아들을 바치라고 해도 바칠 만큼 위대한 신앙인으로 바꾸어 놓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보세요. 그가 위대한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앞 부분을 매정한 눈으로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며, 능력을 주시며 친히 나타나 셔서 사명을 주시는데 못 한다고 버티는 모세를 보세요. 여러분 같으면 이 장면의 어디에서 하나님의 명령 에 순종할 것 같습니까?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 장면을 짚어 보세요. 아마 여러분들은 모세보다 더 나은 신앙을 가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라는 위대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라든가 아니면 동 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코 아닙니다. 단순하게 불구경을 갔던 것입니다. 산에 불이 붙었다면 더 크게 번지 든지 아니면 다 타고 꺼지든지 해야 하는데 계속 타는 것이 이상해서 올라갔던 것이죠.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너를 통하여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 바로가 쉽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이 은혜를 입도록 하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 4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반면에 모세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셨다고 증거를 대라고 할텐데요? 말 에 능치 못해서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얼마나 말이 많고 핑계가 많은지 모릅니다. 이 모세의 구구한 변명과 도무지 지도자답지 못한 모습에서 5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신대원에 입학한 제 모습을 발견하면서 저는 은혜를 받습니다만 혈기왕성하고 뜨 거운 열심을 가지신 분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결국 마지막 결정타는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 신 것입니다. 이노무 자식이... 그래서 맞아죽지 않으려고 떠밀려 내려온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의 지 도자가 이렇게 사명을 받았을까요? 위대한 사명을 받고 장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형제들을 보려하니 보 내달라는 것입니다. 동족을 구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웠을까요? 자, 드디어 모세는 바로 앞에 섰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제대로 못 하고 죽을 쑤고 나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이 되긴 하지만 모세는 처음부터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애굽에 내린 후에라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 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치실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재앙으로 애굽을 치시기 전 에 우리를 보내시오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바로에게 가서 항의하는 패장들이 더 용기가 있어보입니다. 첫 시도에 낙담한 모세는 하나님께 항의성 짙은 말을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것 보세 요 내가 못한다고 그랬잖아요... 이런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하 신 일입니다. 성경은 인간승리의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기록이라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배교하고, 도망가 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끝없이 달래고, 야단치고, 심지어 매질까지 하며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 들어 가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성경을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을 본 받으라고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위인이라는 사람들이 머 이래요? 하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뒷감당 못합니다. 이삭이나 야곱은 별로 본받을 것도 없지 요? 성경이 인간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이삭의 이야기는 성경에 왜 기록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예 번듯한 이 야기도 없어요. 장가가는 일만 해도 아버지가 다 준비해주었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종이 문제를 다 해결해 주기까지 기다리다가 맞아들인 것밖에 없어요. 아비멜렉에게서 밀려나올 때 우물을 빼앗긴 사건을 두고 어 떤 분은 이삭이 참으로 온화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당시의 우물은 재산 1호에 해당하는데 여러분의 남편 이 재산 1호를 깡패들에게 3번씩이나 순순히 내어주면서 피하기만 한다면 남편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말하 겠습니까? 온화하다고 대답한 그 분이 병신... 이라고 또 대답을 하시더군요. 야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해서 재미는 있지만 무엇을 본받아야 할 지 애매합니다. 본받기보다는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아 보이는데요? 신약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베드로의 실수는 워낙 많으니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 습니다. 위대한 바울도 나쁘게 보면 성질이 고약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바울이 있도록 그를 이끌어준 사람 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처음에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도 바나바요 고향에 묻혀 있는 그를 안디옥에 데려 와서 할 일을 맡긴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그 바울이 바나바를 능가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크더니 드디어 말을 듣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뜻이 맞지 않는다 해도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바나바가 이 다툼으로 몹씨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마가를 데리고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그만 한 일로 위대한 사도들이 이렇게 다툴 수 있느냔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이라고 너무 잘 봐주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세요. 모두가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평범한 인간 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성경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을까요? 성경이 들어가는 곳마다 귀신이 쫓겨나고 어두웠던 사람들의 삶이 밝아졌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켜 새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 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성경의 인물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가신 하나님이 위대하시 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졌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잡혀 살 때 위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추켜 - 5 -

[2001.08.01]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Ⅱ (사무엘하 11:1~5) 세우려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인간을 모범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시기 때문이다. 영어, 수학을 열심히, 그것도 과외공부까지 하면 성적향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외로 수영과 헬스를 배우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배우시지 않으렵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과외공부 하듯 이 하시면 놀라운 복을 얻게 됩니다. 그 속에는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6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같 부제: 성경에는 자랑스런 역사가 없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헤레스에 장사하 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 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 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 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 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 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였으나 그들이 그 사사 도 청종치 하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 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그 사자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 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하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 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 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 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개역, 사사기 2:7~23] 은 제목으로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성경의 기자가, 즉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빼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얘기조차 그대로 다 기록했더라는 말 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성경에는 위인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위인전을 읽어 보면 위인 들은 전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인물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완 벽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뛰어난 점보다 오히려 부끄러운 점, 불리한 점, 인간적인 약점마저도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을 높이기 위한 책이라면 인간의 장점을 더 부각 시켰겠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사 람들의 장단점을 가감없이 그대로 기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나는 역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상당한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 입니다. 이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와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훑어보면서 성경 에 기록된 이 역사는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을 위해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록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역사를 무엇이라고 말하죠? 아니면 역사를 왜 기록하죠? 성경공부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질문이긴 합니다마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전제입니다. 흔히 오해하기를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아주 순진하게 들립니다. 역사는 결코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흔히 사관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관입니다. 역사 를 어떻게 보느냐는 눈이 중요하다는 거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사료라고 합니다. 사 료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관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든다면, 우리나라의 모양을 토끼라고 합니까? 호랑이라고 합니까? 토끼라 하다가 지금은 호랑이라고 합니다. - 1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그 사이에 우리나라 모양이 좀 바뀐 모양이죠? 왜 우리나라 모양을 토끼라고 했다가 지금은 호랑이라고 할까요? 땅은 변화가 없습니다.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을 자꾸 바꿉니까? 대보 등대가 있는 저 부분을 가리켜서 우리가 어릴 때는 토끼 꼬리라고 했는데 지 금은 토끼 꼬리라고 하지 않고 호미곶이라고 하대요. 호미는 호랑이 꼬리겠죠? 왜 똑같은 땅을 두고 토끼 라고 했다가 호랑이라고 하느냔 말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누가 우리나라를 가리켜 토끼라고 했죠? 일본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순하디 순한, 싸울 능력이 없는 그 런 모습으로 묘사하고 싶어서 일본 사람들이 토끼라고 했는데 우리는 멋도 모르고 열심히 잘 배웠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일본 사람들의 속셈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호랑이로 바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 리나라 모양이 무엇을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토끼보단 아무래도 호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죠? 한국 사 람들은 우리 국토를 가리켜 호랑이 같다고 생각하고 일본 사람들은 토끼같이 생겼다고 자꾸 그럽니다. 역사를 볼 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자료들을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없애 버렸습니다. 없애 버리고 일본 사람들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 뽑아서 역사를 새로 구성해서 우 리에게 가르쳐 놓았습니다. 해방된 이후 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아직도 완전하 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써 놓은 우리 역사에 지금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를 왜 기록하느냐? 명백한 것은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하지만 대체로 자기 민족 혹은 자기 조상들이 얼마나 뛰어 났느냐를 나타내기 위해 역사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 역사는 가급적 길게, 가급적 아 름답게, 멋지게 기록하려고 애를 쓰고 다른 나라 역사는 가급적이면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볼 수가 있습니 다. 최초의 우리나라를 단군조선이라 말합니다. 단군조선이 과연 우리나라 역사냐 중국 역사냐? 사실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라 하기가 참 곤란한 구석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역사로 인정합니다. 가급적이면 길게 잡으려는 의도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쯤 되죠? 4,300년. 4,300년 하시면 정확히 잘 알고 계십니다. 보통 이렇게 물으면 4,300년이라고 잘 안 하는데요? 반만년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반만년이라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도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었고 지금 도 반만년입니다. 그 역사는 왜 늘어나지 않고 계속 반만년입니까? 지금은 4,300년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4,300년에서 조금 모자랐습니다마는 4,300년이라 하기보다는 반만년이라면 좀더 커 보이는 모양입 니다. 4,300년이 큽니까? 반면년이 큽니까? 반만년이라고 하는 것이 더 길어 보이잖아요? 표현을 그렇게 하 는 겁니다. 장삿군은 숫자를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요즘 대리운전 9,000원대 라고 많이 써 붙여 놓았더라 구요. 9,000원대 대리운전이면 정확하게 얼마입니까? 9,9000원요. 9,900원이면 10,000원짜리 주고 100원 거슬러 받겠습니까? 그냥 주고 끝나겠습니까? 실제 요금은 10,000원 입니다. 10,000원이면 많아 보인다 싶으니까 어쨌건 9,900원이라고 요금 책정을 해 놓고 광고할 때는 9,000 원대 라고 합니다. 마치 9,000원쯤 되어 보이는 것 같죠? 장사하는 사람들은 숫자를 줄이려고 요런 소리를 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 역사는 4,300년임에도 반만년이라는 표현을 씁니까? 역사를 좀 길게 보이게 하려 고 애를 쓰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니실 때 동명성왕, 해모수, 주몽에 대한 이야기를 배운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 역사책에 보면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역사책에 들어 가기도 했다가 때로는 빠지기도 합니다. 왜 들어갔다가 빠졌다가 할까요? 역사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런 이야기들을 역사책에 집어 넣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입각한 것만 기록해야 된다는 - 2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주장이 강해질 때는 이런 이야기가 빠졌다가 우리 역사를 좀더 화려하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사람들의 주장 이 강해지면 이런 이야기들이 또 역사책에 슬그머니 들어갑니다.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합니다. 일본 교과서 개편에 대해서 시끌벅쩍합니다마는 일본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정도 차이일 뿐 어느 나라건 다 있습니다. 백제가 아주 아주 옛날에 지금 북경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백제가 한 때는 아주 왕성한 나라였대요. 그래서 중국의 북경 근처를 식민지로 삼았답니다. 그렇 게 주장할 만한 근거가 조금은 있는가 봅니다. 공인을 받지 못한 채 일각에서 그렇게 한 번 주장을 하고 끝난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런 주장을 하고 싶어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펄쩍 뛰겠지만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남쪽지대에 옛날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지금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 니다. 왜요? 자기 나라 역사는 좀 더 강하게, 넓게, 크게 기록하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 변조 사건 아시죠? 일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글자를 파내고 엉뚱한 글자를 붙여 가면서 변조하려고 애를 씁니까? 자기들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보다 어쨌건 우월하게 기록하려고 온갖 애를 다 쓰는 겁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개인 가정의 족보도 마찬가지고 위인전을 기록하는 것이나 거의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 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인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기록이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란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기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등장할 때에,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사건에 이 스라엘 민족이 공헌한 게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그 노예생활의 지긋지긋한 고통 속에서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울부짖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서 해외에서, 아니면 국내에서 일본과 투쟁했던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거나 아니면 애굽군대와 싸운 적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 교해 보아도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저 괴롭고 힘드니까 살려달라고 울부짖은 것밖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만약에 자기 민족을 자랑하고 싶었으면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우 리 민족의 누구 누구가 어떤 일을 했다는 기록을 좀 남겨 놓고 싶지 않았을까요? 출애굽기 서두에 그런 이 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조 건이 출애굽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했는지 이스라엘 에 어떤 장점이 있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그 약속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지 자신들의 어떤 공로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 니란 말입니다. 자신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결코 이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전혀 없다는 것은 그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면서 광야로 들어갑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맛 보며 바위가 터져서 생수가 나오는 걸 마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까? 사건마다, 일 이 터질 때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광야 40년을 살게 됩니다. 사실은 광야 40년이지만 그들이 제대로 왔으면 한 열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지금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까지는 200만 대군이 움직인다 해도 열흘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그 곳을 왜 40년이나 방황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반역하고 또 반역하다가 결국은 좋다.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렇게 반항했던 그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 방황해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도저히 못 가겠다. 난 따로 갈테니까 모세야 네가 인도해서 네 백성을 이끌고 네가 가거라 난 함께 못하겠다. 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못 하겠다고 하는 중요한 이유가 뭐지요? 만약에 동행을 하면 가다가 홧김에 전부 죽여 - 3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난 너희와 함께 동행하지 못 하겠으니까 네(모세)가 인 솔해서 가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에 이게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셨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께 해도해도 너무 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이렇게 말을 안 들을 수 있을까라는 표본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출애굽기 같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렇게 위대했다는 기록이 아 니라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께 말을 이렇게 지독하게 안 듣다가 이렇게 혼이 났다는 기록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묘한 역사입니다. 출애굽기 다음에 여호수아는 어떨까요? 여호수 아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 중에 큰 일은 우선 여리고 성의 함락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무너뜨렸 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멋진 작전을 썼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왜 무너졌죠? 소리질러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면 그 다음 성에 가서도 소리를 질러야지요. 그 다음 전쟁 치를 때 소리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여리고 성이 소리질러서 무너진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왜 무너졌죠? 뺑뺑이를 돌아서? 뺑뺑이 돌아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으면 그 다음 성에 가서도 뺑뺑이를 돌아야죠? 돌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이렇게 해서 무너뜨렸다고 어디 가서 자랑을 한 번 해 보십 시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너희들은 싸울 줄도 모르냐? 전쟁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아닙 니까? 여호수아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전쟁을 잘해서 이겼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 보 같은 짓밖에 안 했다. 무너뜨린 것은 누구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일 어났다는 것이 여호수아서의 전체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서에 유명한 전쟁 이야기가 나오지요. 벧호론 골짜 기에서 아모리 군사들을 추격할 때 해가 넘어 가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유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해가 넘 어가지 않고 달도 중천에 그냥 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군을 많이 무찔렀습니다. 그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적군을 누가 무찔렀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칼에 죽은 숫자보다 어디 에 죽은 숫자가 더 많았다고요? 자기들의 칼에요. 다른 전쟁에서 그런 적이 있지만 이 때는 우박에 맞아 죽은 군사나 구덩이에 빠져 죽은 군사가 이스라 엘의 칼에 죽은 군사보다 더 많았습니다. 우박에 맞아 죽은 군사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군사는 누가 죽인 겁니까? 그건 하나님이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투를 잘해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싸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뒤를 다 돌봐주셨다는 기록이 여호수아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참 은혜스럽다. 하나님께서 저렇게 도와주셨구나 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민족들이 볼 때 뭐라고 그러겠어요?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만 기록해 놓은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겁니다. 여호수아 맨 마지막을 한 번 봅시다. 여호수아 23장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에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 호와를 섬겼더라 이 말이 주는 느낌이 참 재미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며 이 놀라운 일들을 감당했 던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더라.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라는 말을 묻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어디서 본 듯하지요? 방금 읽은 이 구절이 어디서 본 구절입니까? 어디서 본 듯 할 텐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이적들을 본 사람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다가 그들이 죽고 나자 그 이후 세대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라는 겁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대해서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이적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더라 그런 뜻입니다. 그 여호수아와 당대에 위대한 용사들이 다 죽었습니다.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가 사사기니까 사사기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이야기가 계속되 는 겁니다. 처음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명하실 때는 네가 밟는 땅을 다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 4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이 할 일은 땅을 돌아다니며 밟기만 하면 됩니다. 밟든지 아니면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우는 시 늉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다 점령하지 못합니다. 철 병거가 무서워서 이것을 다 점령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아무래도 싸워서 우리가 이길 수 없겠다 싶어서 싸 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원주민들이 상당 부분이 그대로 남습니다. 그들이 남아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고통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죠. 오늘 읽은 사사기 본문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시대 동안에 어떤 모 습으로 살았는지를 요약한 부분입니다. 7절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았던 그들이 죽고 난 다음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 다. 재미있는 것은 압제를 당한 기간이 7년이나 20년으로 조금 짧습니다. 그렇게 이민족의 압제를 당하다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섭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해방을 시켜 주었 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40년동안 태평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행복하게 지냈던 기간이 40년이고 고통받는 기간이 보통 7년 내지 20년입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평화 로운 기간을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 기간이 40년이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경험 이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그들이 죽고 나면 또 돌아섰다는 의미 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신앙이 좋다고 해서 자녀들이 저절로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위 대한 신앙이 자녀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은 저절로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기르는 데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가졌던 하나님의 놀라운 경험이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더라는 것을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보면 아주 명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 상숭배했다가 이민족의 압제를 받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이런 일은 한 번만 있어도 충 분히 교훈을 받지 않을까요? 이런 똑같은 이야기가 사사기 전체에 7번쯤 반복됩니다. 7번이라고 해야 되는 지 8번이라고 해야 되는지 좀 애매하긴 합니다마는 한 7번쯤 똑같은 사건이 반복됩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교회 잘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세상에 재미를 느껴서 하나님도 몰라라 교회도 몰라라 하고 열심히 살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망하고 문제가 생겨서 하나 님께 울부짖었다가 주님께 다시 돌아왔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셨더라 이런 경험은 평생에 몇 번이 면 됩니까? 한 번 한 번 해보고 싶어서 한 번이라고 하십니까? 그런 경험은 없는 게 잘하는 겁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경 험은 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있다면 두 번은 안 그럴 겁니까? 그런 경험이 한 번만 있어도 두 번은 안 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두 번 있었다면 세 번까지 안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기 전체를 통해서 그 기록이 7번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세상 에,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어도, 안 들어도 어떻게 요렇게 안 들을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가 사사기 전체 내용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사사기를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참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사사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기드온 이 되겠지요? 기드온의 위대한 일들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기드온의 위대한 업적이 소개되기 전에 기드온이 정말 바보같았다는 기사가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기억에 잘 남아있지 않지 요? 성경은 그런 부분을 자세히 언급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좋은 이야기만 기억하고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일반적인 사람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 다. 기드온이 정말 그렇게 위대하였던가 위대한 일을 남기기 전에 바보 같은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자 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꼭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사사기 앞 부분이니까요. (설교란에서 너무 많다, 아직도 많다 를 참고하세요) - 5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사사들 중에 이 사람도 사사인가 하는 분도 있어요. 삼손이지요. 사사란 민족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입 니다. 삼손이 진짜 민족의 지도자입니까? 삼손? 이야기로는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이야기꺼리로는 얼마 나 좋습니까? 민족의 지도자라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지도자가 자기 혼자 여자만 보면 좋아서 쫓아다니다가 결국에는 눈 뽑히고 힘도 다 잃어버리고 잡혀가서 혼자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요 그 사람을 보고 여러분이 지도자라고 부르겠습니까? 삼손도 엄연히 사사의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마는 저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도대체 무얼 했느냐 싶어요. 정말 웃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 보실 때 성경에 기록되었다 는 이유만으로 다 좋게 보지 마세요. 가끔 웃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삼손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왜 이렇게 웃기는 사람들이 자주 나옵니까? 사람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뒷편에 보면 부록같은 이야기가 몇 개 붙어 있습니다. 그 부 분은 미성년자가 읽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왜요? 성경에 무슨 이런 이야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추악하고 비열하고 더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예를 하나 들까요?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은 전도사가 첩을 두 었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첩이 집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데려 오려고 가서 데려 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죽어버렸습니다. 레위인이 분통이 터져 시체를 열두 토막으로 나눠 가지고 지파별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있어서 되겠느냐? 그래서 온 지파가 연합해서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씨를 말려버릴 정도로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사사기의 결론은 21장 25절입니다. 사람이 각 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걸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말하면요? 지 멋대로! 맞습니다. 지 멋대로 입니다.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하고 싶은 대 로 다 하고 살면 좋은 세상이 될까요? 그래서 엉망진창인 세상이었더라. 그것이 사사기 전체의 결론입니다. 다른 성경도 참으로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면들이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사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 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이야기로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이 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조상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실패 한 왕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 다음에 다윗왕과 솔로몬왕 때에 국가로서는 큰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그 가정사를 들여다 보십시오. 다윗은 가정적인 면에서 어떻게 본다면 참 불행한 사람입 니다. 자기 아들과 딸 사이에서 성폭행 문제가 대두되지요. 형제가 형제를 죽이지요.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날뛰지를 않나, 그 아들이 왕의 후궁들을 대낮에 겁탈하는 장면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다 윗과 솔로몬의 이야기 역시도 참 부끄러운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지요. 갈라져서 이후에 탄생하는 왕이 합쳐서 39명입니다. 왕조가 둘 로 갈라지는데 남쪽 유다는 한 개의 왕조에 왕이 20명 나옵니다. 반면에 북쪽 이스라엘은 9왕조에 왕이 19 명 나옵니다. 9왕조에 왕이 19명이란 말은 한 왕조에 왕이 평균 두 명밖에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면 쿠데타가 일어나서 암살이 되거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이 19명이나 등장합니다. 남쪽하고 합쳐서 총 39명의 왕입니다. 그 39명의 왕 중에서 성경에서 선하였더라고 표현하고 있는 왕이 몇 명쯤 될까요? 다섯 명입니다. 선하다고 평가를 받은 왕이 5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님 쪽 유다 20명 중에서 5명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19명의 왕은 전부 악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역사의 결말이 장차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내다 보면서 하나님만 섬 기라고 얼마나 경고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때 그때마다 보내져서 하나님만 섬기라고 수 없이 경고를 했지만 그런 경고에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옆으로 옆으로 빠지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나라가 망해 버렸다는 게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특히 남쪽 유다가 망할 때에 마지막 왕은 눈알이 뽑힌 채 바벨 론까지 포로로 잡혀간 걸로 역사가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세하게 자기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역사가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 6 -

[2001.08.08]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Ⅲ (사사기 2:7~23) 역사에 대한 결론으로 이사야 1장을 한번 봅시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서 하나님 의 심정을 잘 밝혀 놓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2절부터 봉독하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진 백성이여 행악의 종자요 행 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 러갔도다(이사야 1:2~4)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뭐와 같다는 것 이죠? 짐승보다 못하다. 소보다 못하고 나귀보다 못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결론입니다. 어느 나라가 자기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기록합니까? 이스라엘 사람인들 자기 조상들의 얘기를 아름답고 위대한 역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역사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성경은 확연히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그 후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보면 그런 대로 자기 민족들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들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마카비 가문에서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용감히 싸웠는가? 장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과 성경을 비교해 보았을 때 기록 방 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유대인들이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를 남기려고 기록한 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쓰기는 유대인들이 썼죠. 그 기록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 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니까 얼마나 위대한 역사겠느냐 해서 성경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이 스라엘의 역사는 반역의 역사요 약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불륜의 역사입니다. 특이한 역사이긴 하지만 다 른 민족들이 본을 보거나 따라야 할 모범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다가 어떻게 멸망해 버렸는가를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주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사실이죠. 이렇게 보면 이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고 성경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 입니다. 여러분, 수박을 쪼개지 않고 겉만 핥아 본 적이 있습니까? 수박 껍데기에만 혀를 한 번 대 보신 적이 있냐고요? 단맛이 좀 묻어 있을까요? 이 여름에 수박을 쪼개지 않고 껍데기만 빨고 있는 것은 세상에, 세 상에 불쌍한 짓입니다. 쪼개셔야지요. 속을 먹어야지요. 성경이 나쁜 책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 이 좋은 책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좋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읽으 면 아무래도 남는 게 있겠지 하고 읽으시면 수박 껍데기 핥는 정도의 맛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 속에 들어가서 살기로 작정을 하고 실제로 그 말씀대로 행해 보면 껍데기와는 전혀 다른 단맛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맛을 여러분의 것으로 마음껏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7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Ⅳ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같 부제: 예수는 스스로 죽으려고 왔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 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 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 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 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 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 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 라는 뜰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 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 니라 [개역, 마가복음 15:1~20] 은 제목으로 계속해서 설교하는 것이 쉽지 않군요. 이쯤에서 일단 중지하고 내년 겨울이나 여름 쯤에 또 계속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얼마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같은 제목으로 연속 설교를 해도 될 만큼 재료가 성경에 있느냐는 겁니다. 제가 구 상하기로는 열 두 편정도 하면 어지간히 하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그것을 설명할 만한 충분한 재료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보면 성경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보면 그렇게 믿 을 수밖에 없는 많은 내용들이 성경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공부를 하기 전에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말씀드린 것이 성경의 저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지 않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빼고 싶은 이야기, 차마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담겨있다는 것은 성경의 기자가 자신의 뜻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위인들이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했는가 한 번 살 펴봅시다 하고 내용을 살펴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도 많이 나옵니다. 반면에 아브라 함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는 요소들도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라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어려운 점이 생깁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답이 정확하게 나옵니다. 성경의 어느 곳을 펴든지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느냐 하고 찾아가면 공부가 제대로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주인공이 우리가 흔히 말하 는 그런 위인들이 아니라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좋은 증거가 됩니다. 바로 지난 시간에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를 기 록하는 이유를 표면상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실제로는 자기 민족의 위대한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대 체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미화도 하고 좀 안 좋은 이야기는 뺄려고 합니다. 일본이 교과서 문제 로 이웃나라와 그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자기들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힘이 있다고 무리하게 시도하니까 반발이 심한 겁니다. 반면에 성경에 나타나는 유대인들의 역사는 결코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비굴한 역사, 반역의 역사, 부끄럽기 그지없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 기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남기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기록하셨기에 하나 - 1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님의 뜻에 부합한 대로 성경을 기록해 나갔습니다. 추악한 면들을 도무지 감추려 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을 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절이나 고난주간에 어울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좋게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죠. 표현을 바꾸면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 러 오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죽으러 온 분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 중에 이 땅에 죽으러 온 사람 있어요?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일반적인 책 과 다르다는 좋은 증거가 됩니다. 제일 비교하기 좋은 것이 중국 무협지입니다. 중국 무협지나 중국 영화를 보면 대체로 줄거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처음 장면은 자기 도장에 다른 파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도장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 니다. 사부님도 죽고 사형들도 다 죽죠. 그런데 반드시 한 사람이 살아 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죠? 현장 에서 살아 남는 사람은 보통 사부님의 딸이더라구요. 사부님의 딸이 살아 남는데 묘하게도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현장에 없어서 살아 남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보통 주인공이 되지요. 간신히 살아 남은 사부님의 딸이 멀리 가 있는 주인공을 찾아갑니다. 가서 뭔 얘기를 하죠? 우리 아버님과 우리 도장의 사형 들이 누구에게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 미주알 고주알 다 고합니다. 그 다음부터 무슨 이야기가 진행됩니 까? 이 주인공이 열심히 수련을 하지요. 제가 어릴 때 봤던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높이뛰기 수 련을 할 때 보니까 옥수수를 타넘고 뛰어 다니더군요. 옥수수를 타넘다 보면 조그마한 옥수수가 자라면서 차츰차츰 높이 뛰게 된다고 옥수수 타넘고 다니는 걸 봤는데 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정권을 단련한다고 불 피워 놓은 솥에, 달궈진 자갈 같던데 그런 곳에 손을 반복해서 찌르기도 하더라구요. 그런 과정을 거쳐 서 마지막에 원수 갚으러 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복수를 합니다. 그러면 끝입니까? 마지막 남은 일이 하나 더 있지요. 원수를 다 갚고 난 다음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부님의 딸하고 결혼하데요. 이게 무협지나 중국영화의 뻔하게 정해진 줄거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아주 상세하게 전 하면 그 뒷이야기는 반드시 복수로 이어집니다. 줄거리가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가 한번 찾아보세요. 우리 선생님이, 우리 형제가, 우리 부모가 이렇게 죽었더라는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시작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복수 이야기가 이어져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지 비교해 봅시다. 우선 예수님의 일생을 출생, 성장, 전도여행, 고난 네 가지 정도로 대별하면 성경에 어느 부분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까? 전도가 제일 내용이 많아 보일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외 하고 순수하게 활동만 대상으로 생각해 보시면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 을까 생각해 보세요.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까? 조금 있습니다.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두 구절 정도에 불과합니다. 전도하시면서 3년 동안 다니신 내용이 제일 많습니다. 그러나 전도여행은 3년 동안 있 었던 일이고 고난은 불과 1주일의 기록입니다. 기간까지 감안해서 비교하면 고난에 대해서는 얼마나 기록 되었을까요? 오늘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이 본문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하지 않은 마태복음이나 누 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어느 정도로 바탕에 깔고 복음서가 기록되고 있는지 정돈을 해 보세요. 사실 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약 성경 앞의 세 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세 권은 동일하게 맨 마지막 장은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앞의 두 장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그 앞의 한 장은 장래에 대한 종말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28장까지 있는데 28장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그 앞에 있는 27, 26은 고난에 관한 이야기이고 25장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은 2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 로 24장은 부활, 그 앞의 23, 22장은 고난, 21장은 종말에 관한 기록입니다. 마가복음은 전체가 16장입니다. - 2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마지막 16장은 여전히 부활한 이후의 이야기이고 그 앞의 두 장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 그 앞의 한 장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직접적인 고난의 기록은 두 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죽음을 전제로 한 예수님 의 행동까지 포함시키면 분량이 훨씬 늘어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유언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13, 14, 15, 16장 4장에 걸쳐 있습니다. 17장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면 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18, 19장이 고난이고 20, 21장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부 활에 관한 것이 끝에 두 장 들어 있습니다. 고난도 2장, 부활도 2장입니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21장인데 예 수님의 죽음을 전제로 한 기록이 13장부터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야기를 예수님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찬송가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찬송들을 분류해 보면 어느 것에 관한 찬송이 제일 많을까 요? 예수님의 고난은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한 주간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 한 주간에 일어난 이 야기를 기록하는데 성경은 굉장히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찬송가에서 고난은 1등이 아니고 2등입니다. 예 수님에 관한 찬송 중에 제일 많은 것은 예언과 탄생입니다. 성탄절에 부르는 노래가 사실은 제일 많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고난을 가장 많이 노래합니다. 부활보다도 고난에 대한 찬송이 더 많아요. 복음서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강의 윤곽만이라도 기 억하십시오.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입니다. 인자가 많 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에 대한 이 야기를 시작합니다. 9장 9절을 봅시다.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 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 다음 9장 30절로 갑니다.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 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죽음에 관한 이야기죠? 10장 1절로 갑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 늘 했는데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으러 가시는 중입니다. 예 수님께서 계속해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증거하시다가 이제 어디로 내려오셨습니까?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 너편으로 내려오시는 겁니다. 돌아가셔야 할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려오시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죽 을 장소를 위해서 가시는 것이지요. 10장32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 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루살렘 을 향하여 내려가시면서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실 이야기를 계속 하고 계신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 장면을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도마가 이 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자 해서 따라가고 있는데 도저히 갈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마가 조금 반항을 하지요. 무 어라고요? 아니, 얼마 전만 해도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곳으로 또 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가자 하니까 도마가 뭐라 하면서 따라 왔습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자 하고 따라 내려오는 겁니다. 여기의 이 장면은 심각하고, 엄숙하고, 비장감을 줍니다. 우리도 죽으러 가자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겁니다. 예루 살렘으로요? 죽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마가복음 11장과 12장은 예루살렘에 오신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셔서 무엇을 했을까요? 11장과 12 장을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죽기 위해서, 참 표현이 안 좋습니다. 죽을려고 뭐 하는 이야기요? - 3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환장하는...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죽으려고 환장을 해요? 여기에 적합한 표현이 잘 없어요. 죽으려고..., 예수님 께 죄송합니다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죽으려고 지금 발악을 하는 것이 11장 12장입니다. 왜요? 자기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자꾸 일을 일으키는 거예요. 11장에는 예수님께 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 면서 환호성을 지르거든요. 그걸 바라보는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도저히 이 사람을 살려둬서는 안되겠다 고 마음을 굳힙니다.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그 장사꾼들이 그냥 거기서 장사 하는 것 아닙니다. 대제사장들이 뒤를 봐 주지 않고는 거기서 그렇게 폭리를 취하는 장사를 할 수 없습니 다. 그걸 뒤엎었다는 것은 대제사장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도저히 이대로 두어서 안되겠다는 생 각이 들도록 예수님께서는 자꾸 일을 일으키시는 거예요. 상대도 아주 다양합니다. 대적자들이 아주 골고루 등장합니다. 11장 27절을 봅시다.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 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고 심문을 하는데 누구인가 보십시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적인 권세를 지닌 사 람들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말싸움을 벌였죠. 12장 1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누 가 왔죠? 바리새인과 헤롯당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책잡으려고 대드는 것이지요. 12장 18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사두개인들까지 등장합니다. 이쯤 되면, 소위 권력 있고 빽 있고 힘있다고 하는 사람들 전원이 예수님께 대항해서 덤비고 있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그 당시에 힘이 있다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에게 대항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요? 예수님이 그들 모두에게 다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루 살렘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기 위해서 지금 그들에게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사 굴에 손을 집어 넣고 독사 약 올리는 거 하고 한 가지입니다. 독사굴에 손을 집어넣고 물어라 물어 하고 있는 겁니다. 더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유월절 어린 양이거든 요. 유월절에 잡는 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이번 유월절에 돌아가시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데 대적자들이 이빨을 부득부득 갈면서도 이번 명절에는 말자고 그랬어요. 왜요? 예수라는 자를 죽이긴 죽 여야 되지만 저 백성들의 눈이 무서워서 안되겠다 이번 명절에는 말자. 명절이 끝나고 난 후에 좀 조용해 지거든 그때 죽이자. 이것이 지도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이번 유월절에 죽어야 돼. 그래서 죽으려고 악을 쓰는 겁니다. 표현이 영 이상하지만 좌우간 죽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14, 15장 이 두 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14, 15장에 보시 면 제자들의 배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배신을 하지요? 유다가 배신하지요. 또? 예수님 근처에 있었던 제자들 전원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대표적으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가 부인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현장에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으니까 누가 더 낫고 못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전부 예수님을 배신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습니다. 잡혀가셔서 심문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 대답을 합니까? 안 합니 까? 안 합니다. 안 합니다는 정답이 아닙니다. 합니다도 정답이 아닙니다. 조금 더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조금 낫습니다만 핵심을 잘 찔러야지요. 대답하셔서 자신의 형량을 줄이거나 무죄로 풀려날 만한 대답은 일체 안 하십니다. 반면에 불리한 질문에만 대답하셨습니다. 심문을 할 때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 4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가끔 한마디씩 하셨습니다. 대답을 하심으로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만 대답하셨습니다. 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고소를 했지만 그 증인들의 고소 내용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질문을 해도 이상하다 할 정도로 대답을 안 하셨던 그 분이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작정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5장 17절입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예수님께 왜 자색을 입혔을까요? 예수님 자신이 왕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왕이 입는 옷을 입어라고 놀리느라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면류관이 뭐예요? 왕이 특별한 행사 때에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그 모자가 면류관입니다. 네가 왕이지 않느냐 왕다운 모자를 써야지 그래서 면류관을 씌운 겁니다. 뭘로 만들었어요? 가시로 만든 면류관입니다. 예 하여 가로되 예절을 차렸습니다. 왜 예수님 앞에서 예절을 찾았습니까? 네가 왕이라니까 내 절을 받으라고 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일종의 조롱입니다. 그 옆에서 신하처럼 폼을 잡은 로마 병사 들도 있었을 터이고 배를 두드리며 웃는 병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좀 굵은 매로 쳐야 아플텐데 갈대로 치면 머리가 아프겠습니까? 머리에 가시 로 만든 관을 씌웠으니 갈대로 쳐도 가시가 살을 파고 드는 것입니다. 굳이 굵은 막대기가 필요 없습니다. 가는 갈대로 쳐도 살을 찢는 아픔이 있습니다.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침을 뱉으면 뱉었지 왜 꿇어 절 까지 합니까? 이것을 통틀어서 20절에서 뭐하고 표현하고 있지요? 희롱을 다한 후에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철저하게 희롱을 받으셨던 겁니다. 로마 병사들에게만 이렇게 희롱을 받은 것이 아니고 14장 65절을 보십시오.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눈 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선지자 아니냐 그러니까 누가 쳤는지 안 보고 맞추어 보라는 겁니다. 철저하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과 정을 마가는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두 장에 걸쳐서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께서 이렇 게 고난과 멸시를 당하면서 죽어갔습니다라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부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진 통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가운데서도 진통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거부 하 셨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이므로 나는 맑은 정신으로 다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을 잘 못하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 이 예수님께서 받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잠시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고통입니다. 안 겪어본 사람은 이해도 안되고 상상도 안되죠. 혹시 젊 은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사나이답게 호기롭게 큰소리 치고 돌아섰지만 밤잠 못 자고 고민해 보고 고통스러워 해 본 적이 있었던 분들은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 이가 어떤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지, 남녀간의 사랑과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는 깊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사랑입니다. 그 분에게서 잠시라도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참으로 악독한 것이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발음이 조금 다르게 들렸나 봅니다. 십자가에 달 려 고통 가운데 지르는 비명이었으니까 발음이 이상했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들고 뭐라고 했어요? 엘리야를 부르는 모양이다 하기도 하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이 고통이 극심함 을 이해하고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좀 도와줄려고 했더니 뭐라고 해요? 야, 야, 그만 둬! 엘리 야가 와서 저를 구하는가 한번 보자. 세상에, 사람이 악독해질 수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악독해질 수 있습 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만큼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는지 마가복음은 아주 상세하게, 그것도 많은 분량을 할 애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부터 봐왔으니까 마가복음 전체 16장의 절반 정도가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간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성경도 예수 님의 죽음과 어떻게 그 본문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 5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앞에서 말씀 드렸던 무협지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무협지의 죽음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죽음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스스로 죽을 길로 찾아갔고 안 죽일려고 하는데도 죽으려고 죽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서 죽으신 이야기입니다. 이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협지에서 선생님과 사형들의 죽음을 상세하게 전하는 이유는 오직 원수갚기 위함입니다. 예수 님의 죽음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난 다음에 그 예수님의 죽음을 전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원수를 갚았습니까? 안 갚았습니까? 안 갚았어요? 이런 배은망덕한 제자들이 있나요? 그때 제자들이 갚지 못했던 원수들을 우리라도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의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진 고난을 겪고 돌아가셨으니 그 원수를 우리라도 갚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 원수를 갚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원수 갚을 능력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옛날 본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랬던 제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모여들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전하 고 외치는 복음의 핵심이 뭡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원수 갚자는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열심히 전하고 다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외쳤던 것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이걸 외치고 다녔습니다. 바울은 한 술 더 뜹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 다.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 음이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무협지와 비교해 보십시오. 너무나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야기와 는 도무지 맞추어 볼 수가 없는, 이것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그 계획에 맞추 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죽으러 오셨고, 이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다고 열심히 증거했을 뿐 원 수 갚으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외치고 오히려 이것을 기념하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이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금삼의 피>라는 소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역사 소설인데, 제 기억으로는 박종화씨가 쓴 것 같아요. 하 도 오래 전에 본 것이어서 기억이 희미합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타까워하던 임금님에게 어떤 노파가 비단 한 조각을 들고 옵니다. 금삼이란 비단 조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피 묻은 비단 조각을 하나 들고 오는데 이것이 몇 십년이 지났으니 핀지 뭔지 어떻게 알아요? 이게 사람 피인지 돼지 피인지도 알 수 없는 뭔가 거무튀튀하게 묻은 비단 한 조각을 들고 와서 왕의 어머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열이 오른 임금님이 궁중에 피 바람을 몰고 오지요. 누 구 얘기입니까? 연산군인지 광해군인지 자꾸 헷갈려요. 왕과비 라는 사극드라마가 있던데 같은 내용일 겁니 다. 그거 끝났습니까? 아직 해요? 몇 십년 동안 감춰 놓았던, 비단 한 조각에 거무튀튀하게 묻은 그 피가 모친의 피인지 돼지의 피인지, 무슨 피인지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모습을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친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뻔한 겁니다. 피비린내가 들이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부모가 이렇게 죽었고 이런 아픔을 겪었고... 어떤 이야기든지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복수 이야기가 따라 나오는 것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분량을 할애해서 죽 음의 이야기를 늘어놓고도 전혀 원수 갚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것은 사람의 책이 아니란 말씀입니 다. 성경이 도무지 사람의 글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타의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죽음이요,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 리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신 분이었고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이 섰을 때에 그분은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 가셨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시비를 걸었으며 없는 죄목을 찾기 위해서 온갖 비난과 거짓 증거를 내어 - 6 -

[2001.08.15]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Ⅳ (마가복음 15:1~20) 놓을 때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던 그분이 정작 자기에게 불리한 장면에서만 불리한 진술을 함으로써 스 스로 사형 언도를 받아내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가르치 셨던 그 분이 바로 친구라고 생각했던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이것 이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어느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이야기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록하신 책이다 고 믿고 성경을 보시는 분에게는 하나님의 놀 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 열심으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후에도 교육관에서 두 팀이 2시 반에 시작해서 6시에 다 마쳤습니다. 도중에 휴식시간 거의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인도하는 제가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있는 자가 더 받아서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는 일에 또 공부하는 일에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7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계 어린 양의 신부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 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 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 을 척량하니 일만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 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 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 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개역, 요한계시록 21:9~27] 계시록은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책인가? 시록을 가지고 이상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단들이 많이 인용하는 구절은 대체로 계시록입니다. 이단들이 자신의 전유물처럼 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요한계시록은 신비롭고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초대교회 시절에 고난 받던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이며 그분들이 읽으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책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와 이천년이란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에 좀 이상하게 보이는 점이 있지만 우리 가 그 당시 상황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새겨 보면 이것이 마냥 신비롭기만 하거나 어렵기만 한 책은 아닙니다. 어렵다고 덮어두는 것이 상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 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고 합니다. 이 말씀은 덮어놓았다가 폼으로 가지고 다닐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책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때, 참으로 어려웠던 상황 가운데 있었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라고 준 책입니다. 성도들이 겁을 내고 두려워하라고 준 책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일곱 가지 재앙도 끝나고, 일곱 나팔의 재앙도 끝나고, 마지막에 나오는 일곱 대접의 재앙도 다 끝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부분입니다. 새예루살렘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9절에 보면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겠다 면서 천사가 요한을 데려갔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늘에 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해서 길게 기록하고 있는데 본 문이 길기도 하고 알지도 못하는 보석 이름들이 많이 나열되어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 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예루살렘의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보석이 굉장히 많아요. 그 중에 아는 보석이 들 어 있습니까? 녹보석인지 황보석인지...? 하도 많아서 그게 그거 같고, 무슨 보석인지 알만 한 것이 잘 없어 요. 아마 보석을 좋아하는 분이나 보석에 관심 많은 사람이 여길 보면 눈이 번쩍 뜨일지 모르죠. 야, 천국 엔 꼭 가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 만한 보석이 있기는 있습니다. 남보석은 영어 로 사파이어라고 하고 녹보석은 에메랄드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잘 모르겠어요. 담황옥은 글자의 뜻으로 - 1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보면 누런 옥종류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영어를 보니까 토파즈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용흥동 우방아 파트 쪽에 가면 고급스런 대형 상점 이름이 토파즈인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걸 보니까 일종의 보 석이네요. 나머지 보석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보석이 이렇게 많이 나온 곳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복장입니다. 대제사장의 복장은 속치마와 비슷한 속옷 위에 겉옷을 입고 그 위에 사각형으로 된 흉배라는 것을 답니다. 이 흉배에 세 개씩 네 줄로 각기 다른 열 두개의 보석이 박혀 있는데 이것은 이 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12지파를 가슴에 품고 주를 섬기는 역할을 합니 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계시록에 나오는 이 열 두가지 보석은 바로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이 아름다운 보석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완전히 보석으로 만들어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은 바로 여러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새예루살렘의 모습을 좀 더 살펴봅시다. 1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라고 말하 는데 이것이 새예루살렘 전체의 대략적인 윤곽입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본다면 수정과 각종 보석으로 된 유리성, 꼭 아이들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 나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맑은 보석으로 되어있는 그리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되어있는 유리성 같은 곳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상상이 됩니까? 전 사실 상상 이 잘 안됩니다. 보석이 어떤 것인지 보석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전시회가 있으면 구경을 한 번 가야 되겠습니다. 천국 꼭 가야겠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으로 되어 있는데 가서 한 쪽 귀퉁이라도 차지해야 되지 않겠어요? 이렇게 많은 보석을 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내버려둔다면 얼마나 배가 아픕니까? 여러분, 천국이 그런 보석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보석이 아니란 증거는 11절에 보면 같더라 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라는 표현이 여기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나옵니다. 왜 보석 같다 고 합니까? 보석 같고 란 말은 보석 같은 걸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보석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우리의 느낌이나, 모양이나 전하고자 하는 대로 전달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 다. 인간의 언어에 한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가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았을 때 큰 맘을 먹고 컴퓨터를 한 대 샀습니다. 거금을 들여 서 산 것까지는 좋은데 좀 어려운 점은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 시면 실내에 켜져 있는 형광등을 보고도 뭣하러 대낮에 쓸데없는 불 켜놨냐 고 다 꺼버립니다. 그런 아버 지 앞에 비싼 컴퓨터를 샀다고 말씀드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옷을 한벌 사드려도 제 값을 말하면 비싸다고 입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적당히 가격을 낮추어 말하거나 둘러대지 않으면 난리가 나거든요. 그런데 컴퓨터 가 얼마나 멋진 것이냐를 설명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이게 얼마나 요긴하고, 일을 잘 하고, 신통하다 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별로 반응이 없어요. 하도 컴퓨터, 컴퓨터 하니까 필요하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 각은 하시지만 너무 비싼 물건이라서 여전히 속이 편해 보이지가 않더라구요. 여러 해 지나서 앨범에 있는 사진을 전부 스캐너로 떠서 화면에 띠웠는데 키 한번 쳐 놓고 가만히 있어 도 컴퓨터가 사진을 한장씩 넘겨주면서 보여주거든요. 평소에 잘 안 보이던 사진이 커다란 화면에 나타나 니까 잘 보인단 말예요. 야, 그 놈 참 대단하다 이러시더라구요.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치고는 별로 대 단한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해서 컴퓨터가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을 일부 이해하시게 되 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알 수 있게 설명하기에는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뛰어난 도구가 아니란 말입니 다. 이것이 우리 언어의 한계성입니다. 언어보다는 그림이 나을 수도 있는데 요한은 새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주느라고 보석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딸이 학교 행사로 며칠 전에 싱가폴을 다녀왔대요. 제가 오니까 피곤해 죽겠는데 붙들고 앉아서 좋더라 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듣는 제가 그렇게 기분 좋을까요? 무슨 얘기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에 없어요. 제 눈에는 멋지고 희한한 것이지만 그걸 전해 듣는 나는 그렇게 신이 나지 않습니다. 왜 그래요? 자기가 보았던 그 감탄스러움이 자기 입을 통해서, 자기의 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 광경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애가 어설프게 전해도 뭔 말인지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같이 즐거워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광경을 본 적이 없는 제 눈에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는 거죠. - 2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요한이 본 이 새예루살렘은 정말 휘황찬란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성도들에게 전하기에는 우리의 언 어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가장 비슷하게 전하려고 이용한 것이 보석입니 다. 천국가서 새예루살렘에 도착하기만 하면 나는 문짝부터 뜯어가지고 내가 차지해야지? 이런 생각은 요한 이 전해주고자 하는 그 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성은 보석 같고, 같고 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새예루살렘의 모양은 정말 특이합니다. 장, 광, 고가 같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 광, 고가 같다는 것은 길이와 폭과 높이가 같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새예루살렘은 정육면체라는 말입니다. 한 변의 길이가 만이천 스다디온이라고 했는데 약 2,200km입니다. 한 변의 길이가 2,200km인 정육면체 보석입니다. 어마어마한 크기 지요. 이 지상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건물 중에서 정육면체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 고 있었던 정육면체 건물이 뭐였죠? 건물이라 해서 미안하지만 방입니다. 외양은 아니지만 그 방은 분명 정육면체입니다. 약 높이가 4.5m, 폭도 4.5m, 길이도 4.5m인 방입니다.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는 그 지성소가 바로 이 새예루살렘과 모양이 똑같습니다. 이 말씀은 곧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 던 그 곳이 새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거기에 우리가 들어가리라는 말이죠. 간혹 어떤 분이 한 사람을 전도하면 1평을 주고, 두 사람을 전도하면 2평을 주고, 세 사람을 전도하면 3평을 주고... 이런 얘기하는 것을 가끔 듣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전히 이 땅에 있는 집 모양 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도는 잘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헌금은 좀 할 수 있는데 왜 헌금 액수는 말 안 하나? 십만원에 1평씩 준다면 내가 어떻게 평수를 넓힐 수 있을 텐데... 이런 사고 방식은 속임수라 고 생각하십시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휘황찬란한 하늘의 새예루살렘입니다. 조명을 위해서는 햇빛이나 달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23). 설계, 시공, 감리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10).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상향을 건설해보 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과학의 힘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왔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높 여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진정한 나라는 하늘로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참으로 아름 다운 곳입니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새예루살렘은 교회입니다 그 곳에 열두 성곽, 열두 대문이 있었고, 열두 기초석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 름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 열두 사도가 새예루살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루고 있는 이 교회의 기초가 바로 열두 사도란 말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열두 사도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교회의 기초는 사도란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기초는 예수님이지요. 열두 사도의 기초란 예수님 께서 열두 제자에게 가르친 그 교훈 그리고 그 열두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준 그 교훈 바로 거기에 교회의 기초가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전해준 것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한 것이 사도신 경입니다. 사도신경을 열두 제자가 기록하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 아닌데 왜 사도신 경이라고 말합니까? 제자들이 가르친 것을 가장 알맞게 요약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 이라서 이름을 사도신경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신경에 기초한 교회여야 합니다.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성경에 기초한 교회여야 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의 근거는 성경말씀이어야 합니다. 혹시 집에서 부부싸움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해야지요. 싸울 일이 있으면 당연히 싸워야지요. 싸우기 전에 한번쯤은 생각하십시 오. 성경말씀에 의하면 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거든 성경을 펴십시오. 거기에 해당되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읽으세요. 한참을 읽다가 싸워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면 싸우세요. 아무리 읽 어도 싸워야 된다는 결론이 안 나오면 관두세요. 농담같이 들립니까? 싸울 일이 있으면 성경말씀 따라 생 각해 보시고 싸워야겠다고 결론이 나오면 싸우세요. 그럴 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평소에 많이 읽어놓 아야 결론이 빨리 나지요. 만약에 싸우더라도 말씀에 근거해서 싸우세요. 열심히 싸우다가 말씀에 근거해서 - 3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중지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중지해야지요. 싸움에 관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뭐가 있을까요? 특히 부부간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 도록 분을 품지 말고(에베소서 4:26) 싸우긴 싸워도 해지기 전까지만 싸우면 되잖아요. 한번 싸우면 며칠씩 가 는 분들 있죠? 하나님 말씀대로 싸우는 것 아닙니다. 싸워야 될지 말아야 할지, 언제 싸워야 할지 그쳐야 할지 말씀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믿는 성도들이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농담 비슷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 자녀와의 문제, 이웃과의 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남에게 가서 묻기 전에 평소에 읽어서 알고 있으면 아, 이럴 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 하는 나름대로의 결론이 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묻고 다니시렵니까? 그나마 묻는 것은 낫습니다. 묻지 않고 멋대로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배운 삼강오륜이나 유교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몸만 교회에 와 있는 그런 식의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우리 개인적인 삶도 철저하게 사도들의 가르침, 즉 성경 말씀에 근거한 삶 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한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었을까? 사도 요한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휘황찬란한 새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왜 이런 환상 을 보여 주셨을까요? 요한은 현재 밧모섬에 귀양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그가 나이 많 이 들어서 황제를 숭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밧모 섬에 귀양가 있습니다. 밧모섬은 돌과 갈매기만 있는 황량한 섬이었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다가 그 모든 성도들을 떠나서 혼자 나가 있는 게 어떤 아픔인지 아십니까? 교회 출석하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있는 그 아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바다, 갈매기, 바위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그 곳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 냈습니다. 그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 믿는다는 죄 하나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여차하면 죽음을 당할 위험에 처해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믿는 것 때문에 화려한 문명 세계에서 밀려나 어두운 토굴에서, 혹은 직장에서 쫓겨나서 힘들게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록 현실은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너희를 기다리는 새예루살렘을 보라는 것입니 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이 위로를 얻고 거기에 이를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라는 격려의 말씀 이지요.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천사가 요한을 데려갈 때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천사가 어 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었습니까?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보여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양의 신부가 곧 새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새예루살렘은 어 린 양의 신부입니다. 성경에서 어린 양의 아내라는 것은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는 새예루살렘입니 다. 어떤 예루살렘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완전한 보석 같은, 보석도 보통 보석이 아닙니다. 사방 2,200km면 우리나라 남북보다 크나요? 우리나라를 최대한 길게 표시한 것이 삼천리 아닙니까? 삼천리면 1,200km밖에 안되는군요. 그런데 2,200km! 이렇게 거대하고, 보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곳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비난을 받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아름답고 놀라운 곳이라고 생각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때로는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세우실 것입니다. 교회의 장래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부족으로 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지나간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어떤 역사를 이루어 가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이 새예루살렘의 모습은 우리가 상 상할 수도 없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상상을 뛰어 넘는 놀라운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 4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여러분이 정말 교회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고 있는지 한번쯤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효자제일교 회요? 외지에서 찾아오면 찾기도 힘듭니다. 왜 이렇게 구석에 쏘-옥 들어와 지어 놓았는지 모르겠어요. 교 회당도 조그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우리 교회가 온통 아름다운 보석으로 보여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눈에 그렇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 아름다운 보석이 종탑이고, 대문이고, 현관입니까? 아니요,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고 보석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완전히 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이 새예루살렘은 바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교회에 소속돼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뭐 잘났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계실까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들을 보았을 때 그렇게 아름답습니까? 전 옛날부터 제 자신을 보면 난 왜 이렇게 못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 습니다. 축구를 하면 풀백을 서고, 구인제 배구를 하면 제일 뒤쪽에 서고, 학교 다니면서 감투라고 겨우 한 자리한 것이 부반장입니다. 제 경력에는 부 자가 많습니다.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1등도 하고 부 자 없는 장 노릇도 했을텐데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하고 난 왜 이렇게 못하는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 니다. 자신감을 가진 적이 참 적었어요. 그래서 50이 다 돼가는 이 나이에 겨우 전도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늦게 전도사 해도 괜찮죠? 지금은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감을 많이 회복한 상태지만 옛날 버릇이 불현듯 나 타나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볼 때 난 왜 이리 못난 놈이냐? 라고 자신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자 기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인정하십시오. 성질을 봐도 그렇고, 하는 짓을 봐도 그렇고...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볼 때는 이러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눈이 조금 이상해서 그럴까요? 너무 사랑하셔서요?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시는 이유가 있어요. 못 생기고 못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희생시킨 제물이 있습니다. 우리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켜서 불러들인 자식들입니다. 독생자의 목숨과 바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값을 많이 지불한 자식일수록 더 귀한 자식이지요. 내가 이 놈아 너 낳을 때 어떻게 낳았는데... 낳을 때 고생 많이 하고, 키울 때 고생 많이 한 자식일수록 더 귀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희생시키면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아무리 어설프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정말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런 자부 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놀라운 보석 같은 새예루살렘이 바로 우리를 가 리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 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느 정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희가 자랄 때 입시제도가 자꾸 바뀌었습니다. 저는 입시제도에서 막차를 많이 탔습니다. 제가 시험을 치고 난 바로 다음 해부터 평준화가 되기도 하고, 대입자격 고사가 바뀌기도 하고 대학이 전공별 선발에서 계열별 선발로 바뀌기도 하고... 이상하다? 나만 지나가면 입시제도가 자꾸 바뀐다? 왜 그때 3년마다 입시 제도가 차곡차곡 바뀌어졌는지 저와 나이가 비슷하신 분들은 아실텐데요. 그 때 떠들었던 소문이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박지만이 때문에 입시제도가 바뀌었다고 소문이 났어요. 박지만이란 사람은 저보다 나이가 조금 적을 겁니다. 박지만이가 입학하기 전에 입시제도를 바꾸는데 저는 바뀌기 전에 먼저 들어갔으니까요. 대통령의 아들이 시험을 쳐서 떨어지면 창피 아니냐 그러니까 시험 치지 말고 뺑뺑이 돌리도록 바꿔버 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를 판단할 형편도 아니지만 여하튼 우리 자랄 때 그런 말이 많이 돌았어요. 왜 삼년마다 입시제도가 자꾸 바뀌느냐? 대통령의 아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리가 있을까요? 대통령이 시키지 는 않아도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지레짐작해서 미리미리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대통령의 아들이면 그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대통령의 아들 하나를 위해서 전국의 - 5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모든 학생들이 영향을 받았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이 나로 말미암아 있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 하나를 위하여 오지 않을 비가 올 수도 있고, 나 하나 징계하기 위해서 오지 않을 태풍이 불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우 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결혼한지 5년 만에 큰 맘을 먹고 조그마한 금목걸이를 아내에게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10년이 되었 습니다. 5년 때 금목걸이를 했으니 10년째에는 등급이 높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살짜기 물어 봤는데 반지에 진주 하나 박힌 게 꽤 비싸더라구요. 대충 값을 알아봤는데 조금 무리하면 되겠다 싶어서 시치미 뚝 떼고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진주 반지를 하나 선물할까 하는데... 했더니 가자는 겁니다. 제가 생 각해도 간이 부었습니다. 평소에 통이 좀 큰 사람이면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저와 같으면 경제가 안 돌아갈 겁니다. 치장하는 일에는 결코 돈을 쓰지 않거든요. 가서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비싸 요. 그 조그마한 것이 왜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거 하나 어떻게 해보려고 여러 달 동안 모으 고 모아서 큰 맘 먹고 갔는데 그냥 그거 하나만 팔면 되지 무슨 세트라고 하네요. 손가락에 하나 붙이면 됐지 목에 하나 걸고 귀에까지 다네요. 그러면 몇 개입니까? 야, 이거 괜히 말 꺼냈다는 생각이 들더니 오 만가지 생각이 다 나는 겁니다. 대구에 동아쇼핑이 처음 생겼을 때 어쩌다가 구경이나 한번 가자 해서 명색이 신랑이 옷이라도 한 벌 사주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보니까 옷이 참 좋더라구요. 그래서 곁눈질로 가격부터 봤지요. 저 정도면 한 벌 사도 되겠다 싶어서 구경 좀 해 그랬더니 너무 비싸다 는 겁니다. 저는 뭣도 모르고 자꾸 구경하라고 했는데 한참 있다 자세히 보니까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 있어요. 정말이에요. 동 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 있더라구요. 그 동그라미가 없다면 조금 비싸다 싶어도 한번 해보겠다 싶던데 동그 라미 하나 더 붙어 있다는 것이 눈에 탁 보이는 순간에... 그 이후 그 백화점에는 다시 안 갔습니다. 갈 생 각도 안 합니다. 어느 백화점인지 아시지요? 옛날 대구백화점 말고 큰 길 건너 편에, 아마 동아쇼핑이 맞지 싶어요. 그 이후에는 근처에 얼씬도 안 했습니다. 여긴 내가 갈 때가 아니다고 생각이 든 거죠. 저도 좀 짭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산 모자를 5년간 쓰니까 윗부분이 바래서 머리카락이 쏙쏙 나옵디다. 원래는 짙은 감색이었는데 색깔이 바래서 회색이 된 것을 안쪽에 천을 대서 누벼 버렸죠. 교련 선생님이 모자 바꾸라는데도 그냥 쓰고 다니니까 찢으려고 잡아 당겼는데 안 떨어졌어요. 결국 졸업할 때까지 회색 모자를 썼죠. 그걸 왜 바꿔요? 색깔이 조금 바랬을 뿐인데. 저도 아끼고 고쳐 쓰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인데, 진주 하나만 해도 비싸다는 걸 간신히 참고 갔는데 진주는 세트로 하는 거라 는 그 주인이 얼마나 밉던지 요. 결국 세트는 물 건너가고 조그마한 반지 하나 정말 큰 맘 먹고 사왔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 20주년이 다가오는데 또 고민이 시작될 판입니다. 제가 느끼는 진주에 대한 기억이 그래요. 그런 제가 이 본문을 보 니까 뭐가 눈에 띄는지 아세요? 본문에 진주 얘기가 있어요? 21절 보세요. 12문은 12진주입니다. 문마다 한 진주요 문 하나가 진주 하나 입니다. 그럼 진주가 얼마나 크겠어요? 문이 어떻게 열릴 것 같아요? 이스라엘 무덤 문은 굴려서 연다더니 이 진주로 된 대문도 굴릴 수밖에 없잖아요. 대문 자체가 진주 한 알이란 말이에요. 거대한 진주 하나가 문 이에요. 그걸 열려면 굴려야겠구나. 굴리면 금가거나 깨지면 어떡하지요? 바닥은 뭘로 되어 있어요? 정금으 로 되어 있습니다. 정금 바닥에 진주 한 알이 대문입니다. 진주요? 콩알만한 진주 하나 때문에 발발 떨던 제가 이 본문을 보니까 어떻겠어요? 다른 모습은 별로 실감이 잘 가지 않습니다. 에메랄드도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고, 다 모르겠는데 진주는 당해 보았거든요. 성경이 보석이야기를 괜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렇게 귀한 진주입니다. 그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손가락에 한 알, 목에 진주 한 알 건 사람이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어요? 이거 하나 달고 길에 나서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지 않을까요? 진주목걸이는 진주를 줄줄줄 꿰어 만드 나요? 그건 정말 대단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이런 진주라는 사실을 꼭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에 그렇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진주를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기죽지 마세요. 우리 집 대문이 대형 진주다 임마! 이런 마음으로 사세요. - 6 -

[2001.08.26] 어린 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27) 제가 진주 대문에 이렇게 감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받는 느낌이 이것보다 더 크 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진주에 흠집을 내면 어떻게 하죠? 죄가 크지요. 나만 진주입니까? 나만 하나 님 보시기에 진주입니까? 옆에 있는 성질 더러운 모 집사도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진주입니다. 왜 진주 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왜 그렇게 아름다워요? 아들을 주고 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진주가 아 니라 내 옆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다 아름다운 진주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표 현했죠? 네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 어떤 형제를요?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건 기억하셔야 합니다. 네 옆 에 있는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 어떤 형제인데요? 롬 14:15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 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입 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었다면 평생 그를 위하여 살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의 독생자 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으면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형제를 사기 위해서 그리스도 께서 피로 값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형제를 내가 어떻게 해요? 실족케 해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있 을 수 없는 일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집에 가시거들랑 부부가 서로 쳐다보면서 이 남편이, 이 아내가 어떤 아내요, 어 떤 남편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성질난다고 고함을 질러요? 조금 게으르다고 막말을 할 수 있 어요?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계시니까요.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형 제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참 으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특별히 이번 여름을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우리 자신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조용히 앉아서 지난 여름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은 혜로운지 모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한 발자국만 나가 보면 교회마다 가슴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하나 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교회여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안타까운 장면들이 많이 보입니까? 이유가 여러 가 지 있겠죠. 그러나 해결책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보시는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형제, 내 이웃들이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대문 크기만한 진주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진주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러면 그 진주에 흠집을 낼 수 있 어요? 못 합니다. 이게 어떤 보석인데요? 우리 집 앞에 가끔 배달되는 어느 교회 주보 앞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납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인생의 방황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끝나고, 좋은 아내를 만나도 끝나고, 좋은 남편을 만 나도 끝납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납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들이 방황할 필요가 없는 좋은 교회입 니다. 방황할 이유가 없도록 모든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 운 이런 모습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우리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이렇 게 아름다운 교회에서 성도간에 얼굴을 찌푸린다거나 성도간에 있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새예루살렘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치 장된 맑은 유리성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나도 그렇고 내 옆에 있는 형제들 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특별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십시오.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가 그렇습 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 사는 이웃들 속에 하나님께서 부르고 싶은 우리의 이웃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래 서 우리 효자제일교회가 지금도 아름답습니다마는 더욱더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나기를 소원합니다. - 7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우 답답하십니까?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 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 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 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 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 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 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 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개역, 누가복음 11:1~13] 리의 삶이 날마다 기쁨이 넘치고 행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삶에는 때때로 답답하고 짜 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말은 예수 믿 는 사람들이 쓰지 말아야 합니다. 팔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 은 팔자 타령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팔자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팔자 고친 사람 입니다. 원래 여러분들이 타고 났던 팔자가 엉망진창일지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팔자가 바뀐 사람입니 다.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또 내가 전생에 뭔 죄가 많아서 하는 일마다... 이럽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전생이 어디 있습니 까?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에게 전생이 어디 있으며 조상의 죄는 무슨 말입니까?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어떻고... 이런 말은 예수 믿는 우리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 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생길 때, 이런 말 대신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하겠습니까? 본문을 보시면 주기도문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짤막한 기도가 나옵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실 때 마다 삭제했으면 싶은 게 없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구절은 좀 빼고 싶죠? 어떤 분이 한 20년 동안 주기도문 외울 때마다 이 구절에는 입을 다물었답니다. 형제간에 원수진 사 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주기도문 외울 때마다 이 부분만 건너뛰는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자 신있게 이 부분을 암송하시는 분은 다른 사람의 죄를 아주 잘 용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생각없이 외우시 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이 말을 깊이 묵상하면서 외우면 걸릴 때가 참 많습니다. 뺏으면 싶을 때가 있죠?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가능한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리라고 마음먹는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 다. 이 구절이 찔릴 때마다 주님 가르쳐 주신 대로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라고 마음먹고, 시도하면서 어 렵더라도 빼먹지 마십시오. 빼고 싶더라도 빼지 말고 꼬박꼬박 외우십시오. 그러면서 가능하면 내게 죄 지 은 모든 자를 용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야지요. 빼는 대신에 수정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 없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수정했으면 좋겠습니까? 평생 먹을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면 매일 기도를 해야 되잖아요?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평생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그렇게 바꿔볼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단 말입니까? 욕심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외우는 겁니까? 이왕 주실 것이면 매일 매일 조금씩 주실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욕심이 안 드신단 말이죠? 우리 효자제일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으로 만족하고, 잘 살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반드시 하루 분만 거두 - 1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라고 하셨는데 이틀 분을 거두었더니 썩고 냄새가 났더라고 합니다. 매일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 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매일의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한꺼번에 왕창 읽어버리고 한 며칠 푹 쉬는 것도 곤란하고, 기분 내키면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출석 하다가 기분이 이상하면 한참 푹 쉬고...? 아니요. 평생토록 꼬박꼬박 밥먹듯이, 말씀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예배 참석하는 것을 꾸준하게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보다 한꺼번에 왕창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고 하나님께서 원하 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잘 안 틀리지만 가끔 틀리시는 분이 있습니 다. 나라에 임하옵시며 라고 외우는 분이 가끔 있는데 자세히 보십시오. 나라이 임하옵시며 입니다. 이것은 옛날 표현이라서 그렇습니다. 옛말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말씀은 현대말로 하면 나라가 임하옵시며 입 니다. 나라이 라는 말이 틀리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본문 중에 조금 이상한 말이 있죠? 5절 제일 끝에 보세요.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빌리라 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려온다 는 뜻이 아니고 빌려준다 란 뜻입니다. 이게 표준 말인데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 잘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리라 는 말은 빌려다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을 위하여서 기도할까요? 아 니면 어떻게 기도할까요? 이런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한번 봅시다. 2~4절도 답변이 되지만 그 뒤에 이어 나온 5~13절까지도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어느 쪽에 더 무 게가 있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더라고 알고 계시죠? 그 러나 주기도문은 세 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그 뒤에도 길다랗게 붙어 있습니다. 길이로 따져도 뒤쪽이 훨씬 더 깁니 다. 예수님의 답변, 즉 5~13절까지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라 는 말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걸 전부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무엇 을 위해서 기도할까요? 했더니 딴소리 하지 말고 기도하라 는 이야깁니다. 어떻게 기도할까요? 라고 묻지 말고 기도하란 얘깁니다.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선생님, 어떻게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라고 열심히 물어요. 영어공부 잘 하 는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영어 잘 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떼돈 벌기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습니까? 자꾸 묻는데 정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열심 히 하는 거예요.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어떻게 기도할까요? 예수님의 답변은 기도하라 는 겁니다. 거기 에다 한마디 더 붙인다면 강청하듯이 기도하라는 겁니다. 꼭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느냐고 자꾸만 묻는데 정답은 열심히 공부 하라 입니다.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길도 보이죠. 선생님이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는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길이 열립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 리 좋은 방법, 좋은 교재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할까요, 무엇을 기도할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 런 소리 자꾸 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멋진 기도를 남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멋지지 않은 기도도 많습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하나님 내겐 왜 자식이 없습니까?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꼭 기도해야 될 중요한 사실 맞죠? 아내가 아기 를 갖게 되자 이삭이 또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뭡니까? 아이가 뱃속에서 싸우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런 기도죠. 야곱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대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얍복 강가에서 답답함을 못 이겨 가슴을 쥐어 뜯고 헤매었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될 지 길을 알지 못하는 그 상태 에서 가슴 졸이고 있었을 겁니다. 오로지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나 이제 형님을 만나야 되는데 우리 형님 이 우리 가족을 다 죽일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기도였습니다. 멋있는 기도입니까? 아 니면 좀 인간적인 기도라고 생각이 됩니까?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죠? 여러분, 너무 멋진 기도를 하 려고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심을 토하는 기도가 좋은 기도입니다. - 2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저는 저의 아버지를 보면서 안타깝다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먹을 양식을 위해 평 생 기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드셔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내 먹고 입는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겠냐? 그러면 도대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아주 고상한 기도만 하셨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풍성하게 되고... 그런 기도만 하셨던 거죠.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기 도를 하려니까 어쩐지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 고생을 얼마나 하 셨는지 모릅니다. 속으로 저 혼자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러니까 평생 먹는 것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셨 지요. 우리 아버지는 기도를 좀 고상하고 멋지게만 하고 싶어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힘들면 힘들다고, 심지어 욕이라도 하고 싶으면 한번 해보세요. 하나님 앞에 가식없는 진실된 모습으로 엎 드리셔야 합니다. 어제 저녁 성경공부 모임에서 재미난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인이 밤중에 일어나서 교회 잘 안 다니는 남 편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려니까 남편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 하더랍니다. 국가를 위해서 앞에 생략된 말은 뭘까요?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그 말은 결국 기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한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기도하려거든 나를 위해서 하지 말고 적어도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하라 지만 이 말은 기도하지 말란 뜻입니다. 소용없는 짓 왜 하냐는 내용이 포함된 얘기지요. 기도 할 때 거창하고, 위대한 것만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우선 내게 소용되는 그것부터 기도를 하는 게 좋습니다. 우린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까요? 그것을 생각 하다가 기도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기도를 내가 바르게 했느냐 잘못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 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면 좋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신 앙적으로 성숙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현실 이대로 하나님께 조용하게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할까요 보다는 기도하는 순서도 모르겠고 뭘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겠거든 그냥 하나님 앞에 엎 드려서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십시오. 그러다가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기도를 어떻게 하는 건 지 순서를 잘 익혀서 그렇게 기도를 배우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다가 잘못 되면 거기서 또 배우는 것 입니다. 안 믿는 집안에 어떤 아버지가 교회를 나오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식구들이 다 둘러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아버지도 이제 교회 가기로 했으니까 오늘 기도는 아버지가 하십시오 하고 다 눈 을 감아 버렸습니다. 이 아버지가 언제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야지요. 한참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습 니다. 예수님, 만세! 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라곤 가 본 적이 없는 분에게 느닷없이 기도하라고 하니까 뭐 라고 그러겠어요? 잘못된 기도일까요 잘된 기도일까요? 잘된 기도죠. 형식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 나 진심은 담긴 기도입니다. 울릉도 사람이 남겼다는 유명한 기도가 있어요. 저도 몰랐는데, 울릉도에 감자가 많이 난다고 그러대요. 오징어만 나는 줄 알았는데 감자가 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 얘기 때문입니다. 울릉도에서 어떤 분이 기 도하시면서 하나님, 내 죄를 감자 껍데기 뻬끼듯이 싹싹 뻬껴주십시오! 라고 했다더군요. 표현이 좀 거칠어 도 실감나는 표현이고 참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너댓살쯤 되는 아이가 떡국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했는데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눈을 딱 뜨고는 이거 이름이 뭐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밥을, 아니 밥이 아닌데? 그래서 눈을 뜨고 할머니께 이름을 물었겠죠. 떡국이라고 가르쳐 주니까 다시 기도하더랍니다. 세상에 그 조그만 아이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겠습니까? 벌써 그 아이가 장가갈 때가 넘었 을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아이 얼굴은 희미한데 그 장면은 선명해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선 그 모습이 제게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단은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고 그로 인해서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기도를 하라고 하시면서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될건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기도할까요? 다른 것 - 3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보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하게 표현되고 있는 말이 강청함을 인하여 입니다. 강청이 뭡니까? 경상도 식으로 말하면 땡깡이죠. 떼를 쓰는 거죠. 떼를 쓰다시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끈질기게 하라는 얘기죠. 저는 이런 표현들을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듯이 하는 기도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대체 자식들이 부모 대하는 것은 막무가내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어릴 때인데 여름에 수영장 한 번 데려 가기로 약속을 하고 날을 잡아 놨거든요. 한 며 칠 기다리면 되는데 그 사이에 하도 말 안 듣고 야단 북새통을 쳐서 말 안 듣고 자꾸 애 먹이면 수영장 취소다! 일종의 공갈입니다. 그런데도 말썽을 자꾸 피워서 수영장 가기로 한 그 전날 취소라고 선언해 버 렸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큰 머슴아는 아이고, 우리 아빠는 한 번 안된다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 러고는 더 이상 얘기를 안 하는 겁니다. 되게 화가 나서 취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빠, 잘못했어요. 갑시 다! 하면 못 이긴 척하고 가려고 마음은 먹고 있는데 다시는 얘길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작은 딸 아이 는 아버지 말을 완전히 묵살하는 거죠. 그러면 안된다고 야단을 쳐도 말을 안 듣고, 그러면 수영장 못 간다 했음에도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그래도 가자고 졸라대는데 둘 중에 어느 애가 더 이뻤겠어요? 그래도 아 빠 말 무시하고 대드는 놈이 더 이쁘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를 거저 키우는 것 아닙니다. 아이 키우면서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격증 따서 아이 키우는 분 계십니까? 애가 애를 키우면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 모에게 떼쓰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앞뒤가 도대체 맞지도 않고, 말도 안되고, 일관성도 없고, 제 고집 뿐이 고, 자기 생각만 하고 덤비는데 자식의 그런 모습이 그렇게 밉지 않더라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게 부자지간이라는 얘기죠. 우리가 하나님께 너무 점잖아서, 고상한 기도만 드릴 것이 아니라 자녀와 같은 자 세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앞뒤 따지지 않고 어린 아이의 심정 으로 부르짖어 매어 달리는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가 응답 될 때는 화끈하게 되어지고 점잖게 체면 차려 가면서 기도하는 분에게 기도의 응답은 여전히 그런 식이더 라구요. 기도를 어떻게 잘할 거냐는 것도 사실은 중요합니다. 신앙적으로 성숙되면 잘 해야죠. 그러나 그렇게 되 기까지 내 소원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해서 될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 따지기 전에 무조건 매달리라는 얘깁니다. 그 기도가 잘못되고 잘 되었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다 됩니까? 열심히 했는데도 잘 안되던 데요? 어떤 분들은 꼭 마술하듯이 기도응답을 받는다는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 저 길이 막 급한데요, 빨리 택시 한 대 보내주세요! 길에 서서 기도했더니 택시 한 대가 왔더라. 진짜 응답일까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 일까요? 응답이예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응답인지 아닌지는 남이 몰라요, 본인이 압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그렇게 응답이 되고 뭐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지!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식으로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기도했는데 그것이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그런 경우도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응답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그랬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습니까? 필요 한 것을 주신다고요? 본문의 제일 끝을 보십시오.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어? 하나님 난 성 령달라고 구하진 않았는데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얘깁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고 매듭짓고 있을까요? 몇 사 람 예를 들어야 되겠네요. 누구의 기도 혹은 찬송인가 맞춰보십시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 시며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 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1:6~7) 찬양치고 어때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는 표현 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 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다라는 고백입니다. 누가 이렇게 거창한 기도를 합니 까? 사무엘의 엄마가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아니 사무엘의 엄마가 그런 기도를 했어요? 변한 기도입니다. 처음엔 뭐라고 기도했어요? 한나의 처음 기도 내용이 뭡니까? 아들 달라 였죠. 저 대적 브닌나가 나를 이 - 4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렇게 괴롭히는데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울고불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 주셨어요. 그 아들을 받아 들고 한나가 하는 기도를 보면 하나님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 사합니다. 내게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은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한나가 기도한 것은 아들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하나 얻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를 깨달아 알아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한나가 요구한 걸 주셨느냐 는 말입니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준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아들을 주시면서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표현이 바로 이겁니다. 요구하는 그에게 응답하시면서 응답하실 때에는 요구한 그대로 주시는 것 아닙니다. 보너스가 따라오는데 이 보너스가 훨씬 더 큽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예를 더 들어봅시다. 다윗이 범죄하고 낳은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그 아이 를 살려달라고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안 들어 주셨어요?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이 수군수군하니까 눈치를 채고 죽었느냐? 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가 두려 웠습니다. 이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저렇게 고통스러워 하던 그 임금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하면 혹시 나 자살을 할지도 모르니까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안 알릴 도리가 없잖아요. 예, 죽었습니다. 그러자 다윗 이 툴툴 털고 일어나더니 목욕하고는 야, 밥 먹자! 그런 게 성경에 있습니까? 있습니다. 자식이 죽어갈 때 살려주십사고 금식하며 엎드려 기도하던 그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툴툴 털고 일어나더니 밥 먹자 는 얘기예요. 다윗의 놀라운 신앙을 이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기로 작정하셨으면 깨끗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린 보통 머리로만 순종하죠.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습 니다 하면서 징징 울잖아요. 다윗은 머리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지사 이 아들을 데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감정까지 깨끗이 순종합니다. 신하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우리 임금님이 살 짝...?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다윗의 대답은 이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혹 살려 줄지 모르잖느냐.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니 하나님 의 뜻이 확실해졌으니 내가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깨끗하게 순종하는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겠어요? 그렇게 눈물 뿌려가 며 기도하는 그 기도를 모질게 안 들어주셨단 말이죠. 참으로 하나님은 모질다는 생각이 듭니까? 사무엘하 를 읽다가 그 부분을 보시거든 조금 더 보십시오. 바로 그 뒤에 솔로몬의 출생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었다 는 뜻입니다. 금방 태어난 아이 가 무슨 일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나요? 사실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렸던 다윗의 기도 를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도 깨끗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 하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다윗에게 쏟을 사랑을 솔로몬에게 더 풍성하게 쏟았더란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도무지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가 한 기도는 결코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닙 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때에 더욱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다윗의 기도는 이루어진 것입니 까? 작게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도 크게 보면 더 크게 이루어진 겁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틀 린 기도를 하더라도 그 기도를 응답하실 때는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이 성령을 주시리라는 말씀 의 의미입니다. 부모치고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이 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시니까 달라는 것 주고 거기다 가 보너스로 더 보태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왜 안 해요? 여러분, 살다 보면 답답하고 도저히 분에 못 이겨 이래서야 어떻게 살겠느냐? 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 오려 하거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럴 때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 기도가 맞고 틀리고 를 떠나서 하나님께 매어 달릴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은 조 금 더 달리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마는 그냥 쉽게 기억합시다. 우리가 기도하고 애쓸 때에 하나님께 서는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풍성한 것으로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 5 -

[2001.09.09] 답답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3)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옆집 아이가 내게 와서 아무리 떼를 쓴다고 해도 못 줄건 절대로 못 주죠.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때로는 야단을 치면서도 또 한편으로 기분 좋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떼를 쓰고 말도 안되는 것을 내 놓으라고 버틸 수 있 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성령이 와 있다고 그러죠. 성령님의 사역을 이야기 할 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사역은 성령께서 우 리 속에 충만하게 오셔서 우리에게 힘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가리켜서 흔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인치심으로 우리에게 온 이 성령 은 여러분들을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령을 주시리라라는 것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차원을 조금 뛰어 넘읍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 더 큰 것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대신에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께서 또 내게 무슨 복을 주시려고? 입니다. 성경에는 가만히 있 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집적거려서 복 준 사람이 많습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던 한나도 하나님이 집적거린 겁니다. 시비를 누가 걸었어요? 하나님이 건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공연히 아들을 안 주셨느냐 말입니다. 안 주니까 울고불고 하며 문제가 생겼잖아요. 시작은 대체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생 많이 한 사람 중에 욥이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왜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쓸데없이 자랑해서 문제가 생겼잖아요. 욥은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 님께서 욥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밤새 씨름을 했다고 그러죠? 씨름이 왜 벌어졌겠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야 곱이 씨름한 게 아닙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세기 31:24)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밤새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 고 쥐어뜯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나 타나서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야곱이 지금 씨름이나 할 형편이 못 됩니다. 그런데 옆에 와서 자꾸 시비 를 거는 거예요. 아마 성질이 나서 한판 붙었는지도 모르죠. 붙어 싸우다가 알아채는 거죠. 이거 보통 사람 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느닷없이 붙들고 왜 축복하라고 달려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신 거예요. 진짜로 이긴 것도 아니잖아요. 이기게 해 준 거죠. 그러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 다 라는 이름을 주시는 겁니다. 야곱이 언제 이름 갈아달라고 그랬어요? 전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바꾸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런 걸 하나님께서 시비 걸었다고 표현해서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또 나를 건드리십니까? 혹시 어려움이 생기거든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왜 건드리 십니까? 기도하라는 거예요. 기도해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더 큰 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구하지 아니한, 우리가 육신의 것을 구할지라도 하나님은 우 리가 구하지 아니한 영적 축복까지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을 기억하시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힘들 고 고달프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 6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 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 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 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 이며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 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 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 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 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그 기름 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 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 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 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그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고 피는 단 곁에 흘릴 것이며 멱통과 그 더러운 것은 제하여 단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던지 고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단 윗불 위의 나무 위에 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개역, 레위기 1:1~17] 위기의 책이름이 왜 레위기입니까? 마태복음은 마태가 썼기 때문에 마태복음이라고 합니다. 물론 마태복음의 주인공은 마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전하여 준 분이 마태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입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레위기는 레 위에 관한 책입니까 아니면 레위가 전해준 책입니까? 레위 족속이 해야 할 일을 기록했기 때문에. 가장 근접하고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감사합니다. 레위기 에 레위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훑어도 없습니다. 억지로 찾아보면 레위란 이름이 한 두 번 쯤 나올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레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일을 맡은 자들이 레위 족속이어서 이 책을 레위기라고 합니다. 주된 내용은 제사 드리는 일, 정결에 관한 것들입니다. 제사 드리는 것과 정결하게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출애굽기를 기록합니 다. 출애굽기에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맨 마지막에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막을 짓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레위기는 그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성경책 중에서도 제일 재미없는 책이 레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 피흘린 예 수님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은혜가 되는 책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보물지도보다 더 소중한 책입니다.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보물지도라면 아무리 어렵더 라도 그냥 처박아 두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도 보고 또 볼 것입니다. 레위기가 그런 책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2절을 보니까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말이 곧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크나큰 복입니 다. 2절 끝에 보시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고 합니다. 소나 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상태에서 소나 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모든 재산을 다 내 놓아야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 1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모든 재산을 다 내놓고 하나님께 가겠습니까?... 좀 곤란합니까? 모든 재산 다 내 놓으면 하나님께 올 수 있다고 하면 내 놓고 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 까?...가야죠. 대답이 느린 것을 보니 재산이 많이 아까운 것 같네요. 이단 추종자들을 보세요. 이단에 속아서도 모든 재산을 다 내놓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 참 생명되신 그 하나님께서 모든 재산을 다 내 놓 고 오라고 그러면 가야죠. 당연히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내 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소나 양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면 영원한 생명이 있지만 어쨌든 이 땅에서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다 안 내도 된단 말입니다. 소나 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오라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크게 분노하면서 요단강에 씻는다고 이게 나을 수 있느냐? 못한다! 고 돌아갈려고 할 때 현명한 부하가 뭐 라고 합니까? 나아만 장군을 향해서 아버지여, 이것보다 더한 걸 요구한다 해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라 고 합니다. 문둥병은 단순한 병이 아닙니다. 그가 가졌던 모든 명예와 부와 모든 가족을 버리고 죽은 자처 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을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해도 할 참인데 까짓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는데 못할 것 뭐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이 병을 고쳤죠. 문둥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한 것도 하라면 해야지요.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문둥병보다 더 심한 병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전 재산이 아니라 가진 것 다 내놓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만 있다면 가야죠! 요셉이 애굽에 있으면서 부모님과 형제 식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그때 부탁을 한 가지 합니다. 너희는 가서 빨리 아버지와 내 형제 내 식구들을 다 데려 오라면서 부탁을 한 가지 합니다. 너희 기구를 아끼지 말라고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모든 걸 다 버려두고 오라 는 겁니다. 그 살림살이라는 게 전부 구닥다리 아니겠습니까? 지금 어디로 갑니까? 요셉이 살고 있는 으리으리한 곳으로 가는데 쓰던 걸 들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 좋은 곳으로 오면서 뭣하러 가져올 것이냐? 다 버리고 오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면 모든 것 다 희생하고라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 우리가 무엇에 미련을 가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나 양을 가지고 하나 님께 나아올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신다는 뜻 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신앙적으로 다가와서 모든 재산을 다 바치고 나를 따르라고 하거든 사이비다! 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 삶을 인정하시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했는데 어째서 전 재산을 다 바치라고 하느냐? 그러면 아, 이건 이단이겠 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거의 맞습니다. 이전의 설교(하나님 앞으로, 2001.5)를 조금만 되풀이 하겠습니다. 소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안수를 하라 고 했습니다. 소도 안수를 받나요? 사람만 안수하는 줄 알았는데... 드리기 전에 제물에 안수를 하라고 합니 다. 이것은 이 소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이 소는 죽는 겁니다. 나 때문에 이 소 가 죽는다는 것이 안수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치는 제물의 죽음은 누구의 죽음입니까? 나의 죽음입니 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하고 계속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제물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소고기, 양고기를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별식으로 비둘기도 자시나요? 하나님께서 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드리라고 합니까?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마는 간단하게 말씀 드리고 오늘은 다른 내용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드 리는 제물은 전부 그림자입니다. 진짜 제물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제물이 있기 때문에 이 제물이 - 2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효력을 발휘합니다. 소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진짜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소나 양으로 예물을 삼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나 양을 드릴만큼 가정 형편이 안되는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비둘기요. 소를 바칠 형편이 못 되면 양이나 염소로 예물을 드리고, 양이나 염소도 부담이 되면 비둘기를 드리라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와 양의 가격차가 몇 배쯤 납니까? 대충 열배 정도 되나요? 가령 소 한 마리에 2백만원쯤 하고 양 한 마리가 20만원쯤 되나요? 대충 그 정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비 둘기는요? 2만원될까요? 2000원. 그래요? 그럴 형편도 안되면 산으로 잡으러 가면 되지 않습니까? 아마 통닭 한 마리보다 싸다고 봐야 될 겁니다. 소가 안되면 양이라도 드리고 양도 안되면 비둘기라도 드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하나님 께서 왜 이렇게 약하실까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적어도 신이라는 분이 제물을 깎아주 는 것을 보신 적이 있어요? 심청이 아버지가 눈을 뜨는데 필요한 것이 공양미 삼백석이었습니다. 그 어려 운 집에 공양미 3백석? 이게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300가마보다는 더 많은 것 같은데 좌우간 어 마어마하게 많은 양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만들어 낼 방법이 없으니까 처녀가 팔려가는 거죠. 좀 깎 아주면 안되나요? 동화든지 전설이든지 어디든지 신이라는 존재가 제물을 깎아준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편이 안되면 열배 백배 천배까지 깎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박력 이 있이 보입니까? 아니면 좀 약해 보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켜 약하다고 하기에는 입이 잘 안 떨어집니까? 그러나 본문 보세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은 이런 면에 있어서 굉장히 약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약하실까요? 적어도 천지만 물을 창조하신, 주인 되시는 분이 소 가지고 나오라 그랬으면 그 한마디로 끝내야죠. 하나님께서 왜 이렇 게 약한 모습을 보일까요? 아니면 너무나 너그러운가요? 너그러운 것도 보통 너그러운 정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약한 자세를 보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겠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누 구든지 오라는 겁니다. 부자도 오고 가난한 자도 오고 능력 있는 자도 오고 능력없는 자도 오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대한 양보하시면서 누구든지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지 봅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 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돈 없는 자도 오 라는 겁니다. 와서 뭐하는 데요? 목마른 자가 불려왔으면 와서 뭘 사먹어야 되죠? 물을 먹어야지요. 돈 없 는 자도, 목마른 자도 오라 해 놓고 값 없이 뭘 사라고요? 와서 물 말고 물보다 더 나은 포도주와 젖을 사 라는 것입니다. 돈 없는 자도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러면 물보다 더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약 속입니다. 요는 돈 없다 소리하지 말고 오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은 여 러분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뭔가 일을 좀 해 보자고 그러면 능력이 없는데요. 잘 하시는 말씀이죠? 그런 소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겁니다. 흔히 안 믿는 사람들에게 교회갑시다! 하면 비꼬는 투로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니는 거 아닙니까? 교회도 보니까 돈 있는 사람만 사람 대접을 받던데요? 그러죠? 하나님의 말씀은 소가 없으 면 양이라도, 양이나 염소 형편이 안되거든 비둘기를 들고라도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돈 때문에 불신자가 교회 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면 크게 회개 해야 합니다. 교회 갑시다 하면 어떤 분들은 제가 행실이 이 모양이 돼서요. 술도 못 끊고 담배도 못 끊고 노름도 열 심히 하는데 이것 때문에 어떻게 갑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대답은 양도 염소도 없거든 비둘기라도 들고 나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떻게요? 비둘기라 고 하는 것은 좀 전에 2천원이라고 하셨는데 빈손으로 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 없거든 빈손으로 라도 나오라는 것입니다. - 3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중요한 것은 무얼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오라는 초청입니다. 집 나간 탕자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뭘 들고 오지요? 빈손. 빈손 들고 오는 것도 들고 온 겁니까? 그래요 빈손 들고 돌아옵니다. 아니 빈손보다 더 못한 형편으로 돌아옵니다. 입고 있는 옷 다 벗기고 새로 다 해 입혀야 될 판이니 빈손 들고 오는 것보다 더 험한 꼴로 돌아옵니다. 그 아들을 아버지가 정말 기꺼이 맞이하지요. 아들은 아마 아버지가 그렇게 자기를 반겨주리라 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하기는 쉽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하기는 훨씬 어 려워요. 어느 때 올지 어떻게 압니까? 나갈 때 모습 그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서, 사람이 바뀌어서 돌아옵니다. 그러나 멀리 나타난 것을 보고 아버지가 바로 알아본다는 것은 그런 꼴로 올 지라도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릴 게 없고 내 능력이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일단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 지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드리지 만 사실은 내게 하나님께 드릴만한 제물이 없습니다. 설령 소를 들고 오고 양이나 비둘기를 들고 왔다 하 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 죄가 용서되거나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참 좋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고기를 잘 고를 줄 모르시나봐요. 황소가 맛있습니까? 수소가 맛있습니까? 암소요. 황소와 수소 중에서 고르라는데 웬 암소입니까? 암소 한 마리 라는 간판을 옛날에 봤는데 불고기 집 간 판에 수소 전문 은 없더군요. 그런데 하나님은 뭘 바치라고 하시죠? 하나님께서 고기 맛을 잘 모르시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은 남자를 좋아하셔서... 기막히는 답입니다만 저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이단 소리를 듣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고기가 좋아서 수 소를 가져와라 양을 가져와라, 태워 놓고 하나님께서 저 위에서 아, 향기 좋다!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며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짐승의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죽음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서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지폐 있지요? 종이돈. 엄밀히 말하면 종이돈이 아니고 일종의 헝겊입니다. 지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데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주는데 왜 물건을 주는지 모르겠어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원래 지폐 의 기원은 금 보관증서입니다. 은행에 금을 보관해 놓았다는 증서로 준 겁니다. 이걸 가지고 은행에 가면 언제든지 금과 바꾸어 줬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주는 지폐를 태환지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행에서 항상 이 증서와 금을 바꾸어 주다가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굳이 바꾸어 줄 필요가 없더랍니다. 가져가 봐야 잃어버리거나 닳으니까 금은 아예 은행에 가만히 놓아두고 보관증서만 통용시킨 겁니다. 지폐가 그렇게 생 긴 겁니다. 만약에 은행에 금이 싹 없어지면 지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낙엽은 폴란드 망령정부의 지 폐 라는 싯귀가 있었습니다. 망명정부는 아무런 재산이 없어요. 그 정부가 열심히 지폐를 만들어 돌렸습니 다. 누가 그것을 지폐로 쳐주나요? 그 지폐를 뒷받침해 줄만한 금이 없는 한 이 지폐는 아무 소용이 없습 니다. 언젠가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어쩌다 잠시 보다가 말다가 해놓으니 제목과 내용이 뒤죽박죽이 되어 제목은 잘 모르겠고 좌우간 폭탄을 지하철에 터트리고 경찰력을 다 빼돌려 놓고 미국의 중앙은행 터는 장 면 나오데요. 세상에! 금을 대형트럭 여러 대에 실어갑니다. 웬 금이 그렇게 많아요? 실제로 그 금이 다 털 리거나 없어지면 달러가 전부 무용지물이 됩니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로 드리는 이 예물 자체를 하나님께 서 좋아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지폐에 불과합니다. 그 뒤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시고 - 4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그것을 기쁘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결국은 우리를 보고 소로 예물을 드려라 아니 그것도 안되면 양이나 염소로 드려라 그것도 안되면 비둘 기라도 들고 하나님께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실은 자신이 기뻐 받으실 예물을 스스로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물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고 우리더러 나오기만 하라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소나 염 소, 비둘기 이 제물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효력이 있을 것 같습니까? 소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좋 아하시겠습니까? 비둘기 제사를 좋아하시겠습니까? 똑같아요. 어떻게 소하고 비둘기하고? 이백만원하고 이천원이라면 천배 정도 차이가 나네요. 그게 효력이 똑같아 요? 똑같습니까? 그러면 소를 드리나 비둘기를 드리나 하나님 받으시기에 똑같은 것이면 교회에서 내가 좀 중한 일을 한다고 잴 필요가 없네요. 아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할 때 무슨 일을 하면 소정도의 예물이 될까 요? 설교하는 정도면 소정도 될까요? 비둘기는요?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면 이게 비둘기에 해당될까요? 화장실 청소. 화장실 청소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청소 제대로 안 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한 가! 각자 마음대로 생각하십시다. 저 분이 하는 저 일은 하나님께 소를 바치는 것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하나님께 비둘기를 바치는 것 같다고 생각해도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비둘기나 소나, 하나님께서 받 으시기에 효력이 똑같은 것이면 더 귀하고 덜 귀한 게 없네요.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작은 일 한다고? 교 회에서 빛이 덜 나는 일을 한다고요? 교회 안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일을 맡았든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 소중한 일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좀 빛이 나는 일을 한다고 아이들 말로 재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시고, 놀 라운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실 거라고요? 그런 생각하는 것을 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마 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귀한 형제란 것을 잊지 맙시다. 혹시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일 아니냐고요? 아니요. 비둘기를 들고 가나 소를 가지 고 가나 하나님께서 같이 받으신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값어치 없고 사소하고 무시해도 될 일 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상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하신 것 중에 제일 작은 것은 뭡니까?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 릇, 지금은 물도 돈주고 사는 시대가 되어서 냉수 한 그릇도 좀 귀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냉수? 돈 드는 것입니까 힘이 드는 것입니까? 아무 가치없는 작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어느 임금님에게 드렸으면 조금 값이 나갔을텐데, 누구에게? 어린 아이에게.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숫자에도 넣지 않았던 어린 아이에게 물 한 그릇 준 것조차 예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걸 기억하시면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데에는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모 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다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유창하게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시 겠습니까? 더듬더듬 말도 잘 안되는 기도를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좀 유창하고 멋지고 그런 기도 를 더 좋아하시겠지요? 유창하고 멋진 기도를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뒤 한쪽 구석에서 말도 안되는 기도를 어설프게 하고 울고만 갔던 세리를, 그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진짜 기도로 받으셨 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와 기준이나 보는 눈이 확실 히 다른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얼마나 담겨 있느냐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멋진 기도, 그것도 하실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거기에 진실한 마음을 담아서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가끔은 구역예배에 서 기도도 못 하는데 느닷없이 시켜서 당황한 적이 적잖게 있지요? 이게 기도가 되느냐 마느냐? 관계없습 니다.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회라고는 생판 모르는데 예배 참석했더니 모처럼 오셨는데 하면서 기도 - 5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를 시켜버렸습니다. 시작은 했는데 끝을 못 맺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른 분이 재치있게 이어서 기도하고 끝을 맺었답니다. 그렇게 기도의 앞뒤 순서를 모르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마음이면 끝을 맺든 못맺든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똑같은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소를 드리나 양을 드리나 비둘기를 드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똑같이 받으신다 면 여러분은 무얼 드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 때 다 똑같단 말이에요. 무얼 드리시겠어요? 소. 소를 드려요? 비둘기를 드려도 같은 것으로 받는다는 데요? 하나님께서 말은 이렇게 하시지만 그래도 큰 걸 좋아하실 것... 그것은 집사님 마음입니다. 가진 게 소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정말 행복하시겠습니다. 가진 게 소밖에 없으면... 우리 교회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무래도 하 나님께서 소를 좋아하시겠죠? 그러면 땡빚을 내서라도 소를 드려야 하나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비둘기라도 가지고 오라고 했지만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비둘기를 드리겠냐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 가지 고라도 소를 드려야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속으로는 이런 생각하시면서 말만 그렇게 하신다고요? 그건 우 리가 잘 하는 짓이지요. 괜찮다, 없어도 괜찮다 하면서 받아 챙기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짓이지요. 정 없으면 비둘기라도 들고 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심일까요? 아니, 그냥 해 보는 말씀일까요? 진심입니다. 그러면 무얼 드리시겠습니까? 소를 드려도 될만한 형편인데 양을 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레위기 공부하 면서 이 질문을 했더니 참 명답이 나왔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비둘기를 드릴 형편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 니다. 참 명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 딱 부러지게 말씀하시면 될텐데 이렇게 드릴 수 있는 제물을 여러 가지로 지정하셨느냐는 것은 우리를 생각해서입니다. 우리 형편을 잘 생 각해서 형편에 맞게 드리라는 겁니다. 무리하게 하지 말고, 그리고 남이 이렇게 하니까 형편에 어울리지 않 게 무조건 큰 것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안 하시겠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은 범죄한 이후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내 능력으로 내 노력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해입니다. 한 번쯤은, 얼마 동안은 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 너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없는 인생입니다. 잠시 잘 나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생은 결코 이 땅에서 만족스런 삶이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참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 니다. 길을 열어 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지만 또 감사드릴 것은 아무나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죠. 힘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뇌물을 가져다 주는 것도 어렵습니다. 아무에게나 불쑥 들고 갔다가는 문전박대 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힘있고 권세있는 사람에게 무언가 뇌물이라도 좀 바쳐야 되겠는데 바로 들고 가면 안됩니다. 누굴 찾아야 되지요? 비서. 비서면 다행이게요. 권세있고 힘있는 사람 밑에 어떻게 조금 연줄이라도 닿는 사람에게 가서 통사정을 해서 겨우 맡깁니다. 사실 별 것도 없으면서 되게 위세 부려가면서 받아갑니다. 일부는 자기가 착복하기도 하고.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학교 아이들 중에 가끔 사고쳐서 갇힌 경우가 있어요. 그 아이들 때문에 학 부형과 같이 가보면 순진한 학부형들이 어떻게 돈을 좀 모아가지고 들고 갑니다. 검사가 받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어떻게라도 해 볼려고 애를 쓰면 검사에게 불쑥 내밀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대충하고 넘어갑 시다. 계속하면 안될 것 같아요. - 6 -

[2001.09.16]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레위기 1:1~17)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아오라 해 놓고 우리가 들고 온 비둘기를 하나님께 직접 들고 나갈 수 있다는 것 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존전에 무얼 들고 왔어요? 그렇게 온화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 드려야 되는지 모릅니다. 오라 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그것도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안되면 비둘기라도 들고 오라고 쉬운 방법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해야 됩니다. 이런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얼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무엇부터 해야 되지요? 하나님 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걸 배우는 일부터 먼저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교회 가서 다른 사람 눈치도 보이니까 헌금도 해야 되고 교회 일도 좀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느껴지기 전에는 그렇게 무리하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예배 참석하 시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일단 열심히 배우십시오. 배우고,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 정말 크구나. 그 다음부터 어떤 제물이든지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선은 하나님 에 대해서 배우는 일에 더 힘을 써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더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언젠가 부활절 헌금할 때에 부활절 헌금봉투를 받아들고 제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봉투에 그런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액수를 적는 칸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데 헌금을 얼마나 해야 되나요? 그런 고민 을 안 해보셨어요? 어째 저 혼자만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고 컸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데 그 밑에 얼마나 써야 돼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결론은 헌금 주머니를 커다 랗게 만들어 가지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아니 무얼 드리겠어요? 만원을 쓰겠어요? 십만원을 쓰겠어요? 백만원을 쓰겠어요? 백만원을 쓴들 예수님께서 내 몸값이 이것밖에 안되냐고 물어보시면... 헌금 봉투를 왜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고민스럽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소도 양도 비둘기도 아닙니다. 진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은 아까 우리의 마음이라 했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인들 뭐 그리 가치가 있겠습니까마는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거기에 편승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렸으니 그 제물을 받으시는 거기에 나를 끼워서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 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그 제물에 나를 얹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 로 기뻐하시는 제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나마 그것도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옛날에 우리 누나가 하나님이 너무 하는 것 아니야? 라고 하더라구요. 찬송가를 펴놓고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죽었다 쭉 내려가서 그 밑에 너 날 위해 뭐 하느냐 뭐 주느냐 는 가사의 찬송이 있거든 요. 야, 예수님께서 뭘 바라고 이러신 것은 아니잖아? 만약 여러분에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피흘려, 몸버려 이 고난을 당하였는데 너 날 위해서 뭐 주느냐? 뭐 하느냐고 묻 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걸 바라고 돌아가신 것은 아니잖아? 찬송가 잘못 되었습니까? 너 뭐 하느냐 무슨 뜻 입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무얼 요구하고 계시길래 그러냐구요? 그 찬송가 분명히 많이 부르셨을텐데 고민 좀 하면서 부릅시다. 성경 읽을 때도 고민 좀 하면서 읽읍시다. 찬송가도 경우에 따라서 고민을 좀 해야 합 니다. 그래서 한참 고민을 하다 보니까 이건 도저히 부를 찬송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면 부르지 마세요. 내 너를 위하여 이렇게 몸을 주었는데 너 무엇하느냐?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돈 내놓으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죽은 것을 믿 으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진짜 제물은 하나 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 보고는 폼만 잡으라는 것입니다. 비둘기라도, 작은 정성만이라도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감사함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 7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 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개역, 시편 23:1~6] 늘이 추석전야라서 전례대로 모두 고향 가고 얼마 남지 않은 우리끼리 아는 본문을 가지고 예쁜 그림을 감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본문을 봅시다. 4절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이라고 합니다. 이 해 는 태양을 가리킵니까 손해를 뜻합니까? 이 단어는 하늘의 태양이 아니고 해로운 것을 가리 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게 닥쳐올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5절에 보면 상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릴 때 상을 못 받아서 그런지 이 구절을 읽으면 늘 학교에서 주는 상 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상은 무엇을 뜻합니까? 잔칫상. 저는 밥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잔칫상이면 저보다 좀 더 낫네요.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잔칫상을 풍 성하게 차려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지 마시고 제가 읽을테니까 어디가 틀렸는지 찾아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러면 어디 틀린 데가 있습니까?...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아니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 으리로다 하는 말과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의 차이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대로 다 채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음에도 나 스스로 만족을 누린다는 뜻입니 다. 그런데 이 부분은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도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읽는 분들이 꽤 됩니다. 틀렸으니 까 고치세요 라고 가르쳐 줘도 다음에 읽을 때 보면 또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읽더라구요. 왜 저렇게 틀릴까? 생각을 많이 해 보았는데 주일학교 출신이기 때문이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일학교 열심히 다 닌 사람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입에 익숙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 부 르는 찬송에 내게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으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겁니다. 어느 분이 그 가사를 그렇게 고쳐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는지 정말 탄복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부족 함이 없다 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안 그렇겠어요? 아이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면 만족이지 만 아무 것도 없는데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이 아이들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 수준에 맞 게 가사를 살짝 바꾼 건데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도 아이들 같은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필요한 걸 다 채워줄 때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조금만 부족해도 감사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내게 부족한 것이 많이 있음에도 하나님께 오히 려 감사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과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은 아 주 다릅니다. 적어도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고백을 할 것입니다. 어린 아 이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늘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어느 성경인지 모르겠지만 개정하면서 23장 1절의 내가 를 아마 내게 라고 고쳐놓은 모양입니다. 그건 굉장한 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잘못입니다. 남이 볼 때에는 내게 부족한 것이 많다 하더라도 여호 - 1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와가 나의 목자시라면 나는 부족함이 없다 라는 이런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하나 더 해 봅시다. 본문을 보지 마세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틀린 데 있어요? 보지 마시라니까요. 쉴만한 물가. 쉴만한 물가 라고 대답하시는 분은 주일학교 잘 안 다니신 분이시죠?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이나 어른들 이 즐기는 찬송이나 둘 다 잔잔한 물가 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쉴만한 물가로 되어 있습니다. 잔잔한 물 가나 쉴만한 물가나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강물들은 대체로 급류입니다. 급하게 흐르는 물가는 쉴만한 곳이 아니라 위험합니다. 그래서 잔 잔한 물가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쉴만한 물가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본문을 3등분을 한다면 1, 2절을 따로 떼어내고 3, 4절 그리고 5, 6절을 갈라 낼 수가 있습니다. 1, 2절 을 보면 다윗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기 위해서 다윗의 집을 찾아왔을 때 다른 형제들은 모두 면접 시험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혼자서 양치고 있었죠. 왜요? 감히 안돼서. 맞습니다. 감히 안돼서. 아예 후보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어리니까 넌 나가서, 흔히 하는 말로 애들은 가 라 죠. 어른들 모여서 중요한 일을 하는데 넌 나가서 양이나 보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불려와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어릴 때 이렇게 양을 치고 있던 모습이 1, 2절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3, 4절은? 특히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언제 음침 한 사망의 골짜기를 다녔습니까? 사울에게 쫓길 때. 그렇죠. 꽤 오랫동안 사울에게 쫓기면서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는다 고 고통스러워했 습니다. 적어도 15년 내지 20년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렇게 힘들 었던 세월을 3, 4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고통스럽게 쫓겨다니던 장면이 생각나야 그림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5, 6절은 무엇에 대한 노래입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 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건 언제적 같아요? 고통스런 세월 다 지나고 왕이 되어서 평안한 나날 을 보낼 때의 이야기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전 생애를 잘 묘사해 주고 있는 하나의 그림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내 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면 정말 부족함이 없을까요?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도,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고 말합니까? 아니면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합니까?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디에요? 그게 3절과 4절, 특별히 4절이죠.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에도 다윗은 사 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적어도 십 수년간 쫓겨다녔습니다. 아니 그것만 아닙니다. 왕이 되고 난 후에도 다윗 이 고통스런 세월을 얼마나 겪었는지 우리가 잘 압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도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사장 에게 거짓말을 해 가면서 양식을 구해가기도 했고, 또 이름이 이상한 사람이 있죠? 나발이라는 사람, 그 집 에 양식을 얻으려고 부하들을 보냈다가 심한 모독을 당하기도 했죠. 심지어 자기 부하들의 손으로 돌에 맞 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족과 처자를 적군에게 빼앗기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돌아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블레셋에 피난을 갔을 때 신분을 감추고 들어갔다가 들켰습니다. 미친 척 하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 세월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 시니 정말 부족함이 없는 겁니까? - 2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다윗의 삶에 있어서 이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에도 그 집안에 칼부림이 끊 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도 말할 수 없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 아 들들을 보세요. 맏이요? 형제간의 부끄러운 일로 동생 손에 죽었습니다. 동생은 반역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나섰다가 결국은 전쟁터에서 다윗의 부하 손에 죽었습니다. 또 한 아들은 왜 죽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윗의 가족들을 살펴보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면 이런 어려움 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다윗은 모든 것을 포함해서 내가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고 신앙이 좋으면 아무런 어려움도 닥치지 않나요? 그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천국에 서 사는 것처럼 행복하기만 합니까? 믿는 성도에게 어려움이 안 닥칩니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아 무리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삶과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덜 어렵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윗이 겪었던 것보다 더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동시에 내가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 증거가 있어요. 죽을 고생을 하면서 쫓겨다니다가 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격하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주변 에 있는 모든 장수가 이건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죽입시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 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 스스로도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하나님의 종을 내가 손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손 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옷자락을 살짝 베어낸 것조차 마음에 찔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이 사 람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단 하나 뿐입니다. 이런 일이 한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 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결코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굳이 내가 애를 써서 그럴 필요가 없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이죠.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이 다윗에 게 상을 받으려고 내가 사울을 죽였습니다 하면서 증거품을 가지고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그 아말렉 소 년이 어떻게 됐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추격을 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압니다. 그 원수를 내가 죽였습니다 하고 다윗에게 신고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정상적이라면 엄청난 상급을 받겠죠. 그러나 아말렉 소년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감히 나도 손대지 아니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네가 손댔다는 말이냐? 다윗이 속았습니까 안 속았습니까? 이 질문은 어려워요. 다윗이 속았습니까 안 속았습니까? 속았습니다. 아말렉 소년이 거짓말을 했는데 그 말을 곧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 소년이 사울을 죽인 것은 아니에요. 다윗이 소년의 말을 곧이 듣고 아말렉 소년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다윗은 이 소년에게 속았습니다. 속아서 이 소년에게 상급을 주었다면 다윗은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속긴 속았습니다. 그럼에도 잘못되지는 않 았습니다. 나도 손대기를 두려워했던 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을 네가 손댔단 말이지? 상을 준 것 이 아니라 처형해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속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목숨이 위태롭고, 쫓기는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니 내 목숨이 사울의 손에 달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곧 내가 부족하지 않다라는 고백의 증명이 되는 셈이죠. 다윗이 정말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걸 확신했다면 다윗이 할 일은 뭡니까? 목자는 양을 인 도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양을 보호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평안한 곳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 면 양이 할 일이 뭡니까? 딱 한가지 뿐이에요. 목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죠. 목자를 따르면서 혹시 늑대가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없습니다. 사자가 나타날지 늑대가 나타날지 이것은 양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목자만 따라가면 됩니 - 3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다. 다윗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어려운 시기가 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풍성하게 은혜를 베푸 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고백을 하면서 나는 어떤 양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 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생각하고 나의 모든 염려를 맡기고 하나님만 따라가는 삶인 지, 아니면 목자와는 관계없이 혼자 걱정할 것 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목자되신 여호와를 잘 따 라갔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하 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 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품을 떠나서는 안되죠? 주일 하루 빼먹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천벌을 내리실지 몰 라서 빼먹고 싶긴 싶은데 무슨 벌을 주실지 모르니까 에라 모르겠다 교회로 가자? 용감하게 탈출해서 딴 곳에 놀아도 마음이 편치 않지요? 이런 류의 신앙을 가지신 분이 참 많아요. 십일조 한 번 빼먹으면 도둑 놈이라 하더라. 그래서 아깝긴 아깝지만 달달달 하면서도 내야 합니까? 다른 교회 어느 분이 주일 아침에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망설였답니다. 낚시갈까 교 회갈까 망설이다가 제철 다리 건너 강원산업 앞 큰 길에서 차에 부딪혀 버렸죠. 탁 부딪히는 순간에 아이 고 진작 교회갈건데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일어나서 상대방 운전수를 봤더니 그 교회 장로님이시더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는 주일날 낚시 안 갈거다 그랬답니다. 그 사고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경 고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주일을 범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 로는 주일을 범했다, 아니면 예배 시간 한번 빼먹었다, 헌금을 좀 잊어버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 같아서 꼼짝없이 여기 있을 수밖에 없다? 다윗이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라는 표현이 그렇 게 보입니까? 아니에요. 우리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빨리 그런 마음들을 털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하시기 바랍니다. 가라고 해도, 떠나라고 해도, 도저히 떠날 수 없는 그런 관계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사랑 생각하면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다닌다고 할지라 도 하나님께서 이 큰 사랑을 베푸시고 나를 인도하고 계시니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내가 어디로 가오리까 했던 베드로의 그 고백이 바로 우 리 자신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벌을 주실지 두려워서 못 떠나겠다는 이런 신앙의 초보에 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것은 그 여호와의 집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따, 예수 좀 믿는다 하니까 주일에 종일 교회에서 지내고도, 수요일 가야지, 구역예배 있지, 평신도 신 학교 있지, 전도하러 가라 그러지, 저녁에 기도회 하라고 그러지,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눈총주지... 사실은 효자제일교회는 다니기 좀 어려운 교회입니다. 한번쯤 빠질 수도 있는 거지 그냥 넘어가면 될텐데 안 나왔 다고 이름 불러가면서 물어대지, 오랜만에 나오니까 기도시키지... 어렵습니까? 힘들고 어렵고 눈총 맞아서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그게 감격스럽고 기뻐서 나올 수 있는 교 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하고 인자하심을 평생 토록 아니 영원토록 베풀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다윗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 면 되는데 그 사이에 한 마디가 들었어요. 뭐라고요? 자기 이름을 위하여. 누구 이름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 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취소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건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걸 잘 써먹은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걸 들어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했던 사 람이 누구죠?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됩니다. 이것이 누구의 기도죠? - 4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모세의 기도. 예, 모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서 저 범죄하고 날마다 반역하는 무리들을 깨끗이 없애 버리고 너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이루리라고 말했을 때 모세가 했던 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죠. 하나님! 만약에 그렇게 하신다면 저 애굽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 백성을 끌 고 가서 광야에서 다 죽였단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겁니다. 그 기도를 모 세가 두 번이나 하지요. 하나님도 이름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십계명에도 내 이름을 망령 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은 영원히 내 게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이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다윗은 뭐라고 묘사하는지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일까요? 상을 베풀어 놓았는데, 잔칫상 말이에요. 참 맛있을 것입니다. 맛있고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다가 차려 놓았어요? 원수의 목전에 차려 놓으면 더 맛있습니까? 이런 표현하기는 뭐 하지만 남 의 음식을 뺏어 먹을 때가 더 맛있어요. 죽도동에 하이몬드 빵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사장님이 밤 식 빵을 처음으로 개발해서 한 때 우리나라 밤 값을 올린 장본인입니다. 솜씨가 있으니까 그분더러 누가 물었어요. 빵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뭡니까 하니까 이 분 얘기가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대요. 어느 빵이 맛있느냐 따지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으래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것 같아요. 배불러서 먹는 것보다는 배고플 때 먹는 것이 맛있고, 남하고 나하고 같이 먹는 것도 맛있 지만 남은 못 먹어서 껄떡거릴 때 나 혼자 먹고 있으면, 좀 취미가 안되었긴 안되었지만 맛있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상을 베풀어 놓으셨는데 원수의 목전에서, 이 원수가 한 때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 원수 앞에서 하나님께서 풍성한 상을 차려 놓 으신다는 고백입니다. 잔은 어떻게 하는 것이죠? 잔은 넘치도록 채웁니까? 술 먹는 사람들이 잔은 꽉꽉 채우는 것이라고 그러 대요. 넘치게 채운다고는 안 합디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에서 기 도한 분들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고 얼마나 큰 복을 받는지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대 로 딱 들어주시더라 그런 예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요만큼 하고 받기는 이렇게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아들하나 달라는 기도였죠. 그게 내용이 썩 좋은 기도입니 까? 적어도 민족을 위해서라든가 교회를 위해서라든가 이런 기도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기껏 아 들 하나 달라는 기도입니다. 너무나 개인적인 기도잖아요? 오늘 돌아가셔서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와 아들을 얻고 난 다음 한나가 부른 기도를 꼭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 기도 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이 세상만물을 다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한나가 아들 하나 달라고 간절하게 매어 달렸는데 그 일을 통해서 한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목격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뭘 모르고,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 지 않고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가 되면 풍성하게 베푸신다는 사실을 꼭 기 억해야 합니다. 전 이 효자제일교회를 생각하면 참 은혜가 되고 감격스러운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지나온 연 혁들을 한 번 보세요. 이 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 지냈는가! 그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 니었습니다. 참 길고 어려운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려고 할 때에 현재 효자제일교회가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만 해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기 온 생애를 돌아보면서 이 시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이런 것 이루어 주십시오 이런 원수 갚아 주십시오 이런 내용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뭐만 남았습니까? 오로지 남은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 어려운 시절 힘든 고비고비를 다 돌아보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얘기는 감사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인도하실 때 무엇을 가지고 인도한다고 말 - 5 -

[2001.09.3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1~6) 합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지팡이는 뭐하는 겁니까? 땅 짚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갖고 있는 지팡이는 좀 길쭉하고 끝 에 이렇게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것 보셨죠? 목자들이 지팡이를 가지고 짐승들과 싸울 때 봉술하듯이 사용 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끝이 이렇게 휘어진 것은 좋은 용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늑대와 사자와 싸울 때는 이게 무기가 되지만 양이 말 안 듣고 옆으로 나갈 때는 이 끝에 휘어진 것이 참 좋을 것 같아요. 이것 가 지고 목을 걸어 당기기 딱 좋잖아요. 임마 이리와! 목자가 나를 지팡이로 인도한다는 말은 무기로 쓰면서 동시에 내가 옆길로 나아가면 걸어서 끌어당기는 역할도 하더라는 고백입니다. 지팡이 말고 막대기도 있네요. 막대기는 뭣에 쓰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물매를 돌릴 때에도 사용했을 것이고 짐승과 싸울 때도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양을 어떻게 기르고 치는지 한 번 보아야 말이 될 것 같 은데 일단은 어떤 분이 이런 설명을 해 놓은 걸 보았습니다. 양이 지독하게 말 안 듣고 못된 놈이 있으면 일부러 다리를 두들겨 버린답니다. 그런 다음에 싸맬 때 부목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신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의 못된 성미를 꺾기도 하시고 인간이 안되겠다 싶으면 내게 혹독한 매를 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좀더 깎여져야 하고 좀 고쳐져야 할 점이 있다면 깎이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 채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온 생애를 돌아보면서 이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시 한편이 그저 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동 시절에 아버지께 서 맡겨 놓은 양을 잘 돌보지 아니하고 꾀를 부리거나 농땡이를 쳤으면 감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 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최선을 다해서 맡겨진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감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죠. 사울에게 쫓길 때에도 잠시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내게 맡겨진 일들을 성실하게 애쓰 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 나이 많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참 편안함을 누릴 때 우리의 인생이 정말 아름다운 시 한편 같은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아름다운 시 한편을 남깁시다. 우리 의 삶이 다윗의 고백 같은 이런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6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옛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 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 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 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 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 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 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 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 하리라 [개역, 레위기 12:1~8] 날에는 남자의 반대말은 여자라고 그랬습니다. 요즘은 반대말이라 하지 않고 상대어라고 합니다. 득남의 상대어는 득녀입니까? 득남의 상대어는 득녀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쓰지 않더군요. 아들을 낳으면 득남이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요? 순산하셨다고 하지요. 아직도 득남이라고 하면 기분이 좋고 득녀하면 섭섭합니까? 우리가 아직도 아들 딸 구별하면서 차별을 하고 있다면 믿는 성도로서 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들과 딸의 구별이 필요없다라고 하는 성도 중에 혹시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자 여자를 상하 관계로 구별하면서 남자니까 좀 더 위에 있는 것 같고 여자니까 좀 얕잡아 보는 이런 생각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래도 남자가 머리같고 여자가 돕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던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짧은 기간에 설교만 해도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리고 다 른 설교 도중에도 가끔 그런 언급을 하면서 부디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아서 서로 도우며 아 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처음 의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범죄한 이후에 그것이 깨어져서 문제 가 많이 발생했을 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그렇게 살면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예수 믿는 사 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좀 다르게 사셔야 합니다. 아들이건 딸이건 동일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보에 당당하게 어느 집사님 득녀하셨습니다라고 나와야 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편 128:3)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신대원에서 젊은 전도사들과 같이 지내는데 이 친구들은 결혼하고 아이 낳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자기 부인이 아이 낳을 때가 다 되니까 아예 중계방송을 하더라구요. 신대원 친구들끼리 모이 는 인터넷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우리 부인이 어떻게 어떻게 되었는데 기도해 주세요, 지금 배가 아파서 야단인데 기도해 주세요, 약을 뭐뭐 쓰고 있는데도 아직도... 이런 식으로 중계방송을 합니다. 나중에 비디오 카메라까지 찍어서 나왔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옆에 짤막하게 한마디 썼습니다. 누가 이 렇게 방방 뜨고 있냐? 겨우 애 하나 가지고... 그게 우스개가 되곤 했습니다. 어쨌든 출생은 축하할 일입니 다. 성경에서는 출생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봅시다. 본문에 아들을 낳고 딸을 낳은 것을 가리켜서 무엇이 라고 말하죠? 아들을 낳았거나 딸을 낳은 여인은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축하할 일인데 왜 부정하다고 말하나요? 무슨 나쁜 짓 했나요? 더군다나 아들을 낳으면 칠일간 부정하고 또 삼십삼일이 지나야 깨끗해지 니까 완전하게 깨끗해지는 데는 사십일이 걸립니다. 여자아이는 이칠에다가 육십육일 이니까 팔십일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사십일이 부정하고 딸을 낳으면 팔십일이 부정합니다. 아니 무슨 나쁜 짓 했나? 왜 그래요? 원죄가 있기 때문에? - 1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대답 잘 하셨습니다.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축하하고 성경도 자식은 복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복된 아이를 낳았는데 부정하다고 말하는지 생각을 좀 해야 합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이 여인이 해서는 안되는 것들은 성물을 만져도 안되고 성소에 들어가도 안됩니다. 성물이라고 하 는 것은 좁게 말하면 성소 안에 있는 집기류를 말하겠지만 여기의 성물은 제사드릴 때 드리는 제물을 포함 해서 좀 넓게 보아야 합니다. 성소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소에 딸려 있는 부속 마당이나 뜰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들어가면 안된다는 겁 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스라엘 백성이면 다 나아가야 하는 성소까지도 오지 말라는 얘기죠? 이 정도 면 죄치고는 큰 죄입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하니까 예배 참석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얘깁니다. 아이 낳은 게 무슨 죄길래 이리 부정하다고 하죠?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 라 풍속에도 아이 낳은 집의 대문간에 뭐 걸어 두는 것 있죠? 그걸 뭐라고 그럽니까? 금줄요? 금을 발라 놓았습니까? 금한다는 금 禁 자입니다. 사람의 출입을 금합니다 라는 표시로 붙여놓은 겁니다. 그것을 보면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알지요. 기본적인 의미는 아이를 낳았으니까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뜻에서 금줄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이유 중에는 적어도 이 여인이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하게 되기까지는 모든 것을 금한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 다는 겁니다. 동시에 이 여인이 성소에 나아가거나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것까지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군에서 표현하는 말을 쓴다면 모든 일에서 열외입니다. 모든 일에서 빠지라는 뜻입니다. 예배에도 당 연히 빠져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녀를 낳은 여인은 모든 의무 에서 벗어나서 쉬어야 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충분하게 육체적으로도 쉬고 정신적으로도 쉬어야 하고 남편에 대한 의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까지도 손 놓고 쉬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이 여인은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돌아다니면서 만지는 것은 모두가 부정 해지기 때문에 만져도 안되고 돌아다녀도 안됩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상 책이죠. 그 기간에 남편이 다가오면 남편도 부정해집니다. 그러니까 남편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애 기를 낳아 보신 분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당분간은 남편의 접근을 막아주는 일이 가장 어렵고 도 중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새댁들이 아이를 낳고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도 아이를 안고 와서 자 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반드시 야단을 쳐서 들어 눕혀야 합니다. 이 때 괜찮은데요! 하고 무 리하면 평생 고생합니다. 평생 팔을 못 쓰게 될 가능성이 많죠. 적어도 이 기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는 꼼짝 하지 않고 누워서 주는 것만 먹고 땀만 흘리며 누워있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집 사람이 애기를 낳고 우리 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였는데 굉장히 맛있겠더라구요. 그런데 끓여놓은 양이 엄청나게 많아요. 집사람에게는 국그릇이 아니고 양재기에다 담아서 갖다 주는데 난 안 주더라구요. 저걸 어떻게 다 먹어치우나 했는데 그런데 다 먹더라구요. 적어도 애기 낳고 누워 있는 그 기간 동안은 여 왕의 처지보다 못할 게 없습니다. 모든 일에 손을 떼고 편안하게 쉬라는 말이나 40일 혹은 80일 부정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내용상 동일합니다. 부정하다고 해서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본다면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린 특별 명령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출산한 이후 40 일이나 80일 누워가지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가져오라고 시키고 할 일이 있어도 못 나가고 편안히 쉬고만 있어야 합니다. 군에서 조교들이 신병들을 고생스럽게 훈련시키는데 마침 자기가 아는 신병이 하나 끼였어요. 빼내어 쉬 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요? 티내면 안됩니다. 험하게 말하면서 데리고 나갑니다. 데리고 나가서 고함만 질러대고 신병보고는 야, 잠깐 쉬어! 그러는 거지요. 남이 보기에는 저 자식 끌려 나가서 혼나는구나 하는 데 실제로는 쉬고 있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서 출산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건강을 돌보기 위한 충분한 휴식의 기간을 하나 님께서 제공하시는 겁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더 근본적인 이유가 또 있 습니다. - 2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범죄한 이후에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준 것과 이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아까 원죄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쪽으로 가서 또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출생은 누구나 축하하고 기뻐할만한 경사스러 운 일인데 하나님께서 출산 때에 왜 그렇게 아픈 고통을 주셨을까 하는 얘깁니다. 아니 다른 짐승들도 다 고통가운데 새끼를 낳는다고 하면 사람만이 특별히 억울할 게 없죠. 그런데 짐승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는 합니다마는 그래도 사람에 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짐승들은 수월하게 낳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해야 할 일 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늘 머릿속에 두면서 생각하며 묵상하다 보면 언젠가 그 해답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생각하면서 성경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범죄한 이후에도 우리 조상들은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 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조상들이 분명히 900년 이상씩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범죄한 그들이 오래 사 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수명을 줄여버립니다. 노아 홍수 때 절반 정도로 줄어버립니다. 그 이후에 단계적으로 차차 줄여서 순식간에 지금보다 조금 긴 정도로, 백 몇세 정도로 나이 가 줄어든 걸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생들이 천년 가까이 사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는 뜻 입니다. 지구 환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기껏해야 백년 정도만 살 다가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도록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오랫동안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생들에게 벌을 주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데 사람이 오래 살면 이 속도가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요? 하나 님께서는 범죄한 채 오랫동안 살아가는 이 인류의 모습을 오래도록 두고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다 거치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면 이 험한 세상을 그렇게 오래도록 놔둘 이 유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마 그런 의도로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 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곳곳에는 출생이 죄 가운데서 이루어져서 고통스러워 하는 노래들이 있는 겁 니다. 우리의 출생이 마냥 기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을 성경에서 군데 군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죄 가 운데서 태어난 인생, 범죄한 이후 범죄한 가운데 출생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히 알 수가 있습니다. 범죄한 가운데서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고 새로 태어난 그 탄생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기의 탄생을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녔던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새로 태어난 그것 때문에 인생이 가치 가 있으면 가치가 있고, 기뻐하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기뻐해야 될 것은 어머 니에게서 태어난 것보다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 하려는 큰 계획의 틀 속에서 본다면 범죄한 인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그렇게 복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하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우리의 입 장에서 보면 자녀의 출생은 대단한 기쁨이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하시기 때문에 자녀가 하나님 께서 주신 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의 출생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부정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기뻐하는 일도 되는 겁니다. 해산의 고통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해산의 고통을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해 못할 이상한 것이 보이거든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남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습니까? 남자 중에 해산의 고통을 겪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한 생명을 예수의 피로 거듭나게 하는 것 - 3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것을 가리켜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라디아서 4:19)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범죄한 인생을 하나님의 자녀로 돌 이키는 이 작업을 가리켜서 해산의 수고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바울이 해산의 고통을 알기나 알고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힘들다는 것을 들어서 아는대로 그런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결코 해산의 고통에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그 과정을 가리켜서 해산의 고통이라 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이후에 하나 님께서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킬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추진해 갑니다. 그 과정에 누가 희생이 되지요? 이럴 때는 예수님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하면 하 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 이후에 다시 온 인류를 불러 들이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그것이 해산의 고통보다 못할까요? 여인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면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안겨준 것은 하나님께서 겪는 아픔을 거 기에다가 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해산할 때 당하는 그 아픔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아픔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고통을 견디어 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이 없는 분 아니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 가실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비명을 지르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뭐 하셨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까? 아니 그 때 뭐 하셨어요? 눈을 감으셨습 니다. 눈을 감으셨다는 것은, 아니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눈 감는다고 안 보이나요?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나타내죠? 해가 빛을 잃고 온 세상 이 캄캄해졌더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 현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서 간단하게 일을 처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 난을 겪으셨는데 여인이 해산할 때에 그 마음을 이해하라는 뜻에서 그런 아픔을 심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2:15절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아주 묘한 말씀이 하나 나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맨 마지막에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조금 논란이 있긴 합니다마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본다면 해산을 통해서 구원을 얻 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했는데 왜 여자는 해산을 통해서? 이게 무슨 말이죠? 해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애기 낳을 때 욕 잘 하대요. 남편 보고 욕하는 것은 별 것 아니고 정상이고요, 시어머니 붙들고 욕을 해대더라구요. 야, 저래도 괜찮은가 싶은데 나중에 낳고 나니까 수고했 다고 하는 것 보면 괜찮기는 괜찮은가봐요. 그런데 그 소중한 때에 남편이나 시어머니 붙들고 욕을 퍼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만 있다면 구원을 받고도 남으리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 만큼 이 해산의 고통의 의미와 해산한 이후에 부정하다고 하는 의미는 적어도 범죄한 이후에 여자의 후손 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편치 못한 심정으로 이해를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고 잘 견디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 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고통을 통해서 태어난 새생명입니다. 그 외에 몇 가 지는 작은 문제지만 성경공부 하듯이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남자아이를 낳은 경우보다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가 부정한 기간이 배로 길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왜 길 까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다 낳아 본 사람에게 남자를 낳았을 때와 여자를 낳았을 때에 어떤 육체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물으니까 별반 차이가 없다고 그래요. 이건 아무래도 의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여기 저기 물어봤는데 뭐 별로 답이 없어요. 답이 없다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가 됩 니다. 다른 측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딸을 낳았을 때에는 아들 낳았을 때보다 더 천대 받는 것 같아요. 제 친구 하나가 둘째 딸을 낳았을 때 이야기인데요, 이 친구가 아들 낳는다고 얼마나 큰 소리를 빵빵 - 4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전히 딸이예요. 제주도 사람인데 시어머니가 제주도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딸 낳았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주도로 돌아가 버렸답니다. 신랑은 아들이라고 그 렇게 큰소리 치고 돌아다니다가 그 말을 듣고는 집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그냥 술집을 다녔다고 그러네 요. 부인은 울어가지고 눈이 퉁퉁 부어 있고요. 무슨 죄로 그럽니까? 그 친구가 사전에 아들이라고 큰소리 를 하도 치길래 좀 놀렸습니다. 니가 그 재주로 무슨 아들이냐? 고 몇 번 그랬는데 딸 낳고 난 다음에 제 가 그 분 근처에 얼씬도 못했습니다. 입만 떼면 잡아 먹을 듯이 달려드니까요. 이스라엘도 남녀 차별이 심 했던 곳입니다. 이런 것을 감안해 보면 적어도 딸을 낳았다는 섭섭함이나 후유증들이 깨끗하게 가라앉으려 면 남자아이 낳았을 때보다 이 기간이 긴 것이 유리하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아이를 낳은 경우에 이 기간이 짧은 것이 남자아이에게는 할례라는 절차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라 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아이가 할례를 받는 대신에 여자아이는 어머니가 사십일을 더 채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제사 제도를 들 수 있습니다.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드릴 것 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다른 노력을 조금 추가 시키면 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남자아 이가 받는 할례와 사십일은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부정한 팔십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뜻 입니다. 기한이 다 차면 다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번제는 일년된 어린 양으로 속죄제는 비둘기나 산비둘기로 드리라고 하면서 만약에 가난해서 어린 양을 속죄제로 드릴 수 없는 경우는 집비둘기 새끼 둘 이나 산비둘기 둘을 하나는 번제로 드리고 하나는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하나 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지 모릅니다. 핵심은 두 가지가 됩니다. 하나는 아무리 가난해도 번제와 속죄제는 반드시 드려라는 뜻입니다.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능력이 안되면 어린 양 한 마리에 비하면 산비둘기의 가격은 굉장히 작은 액수입니다. 그 걸로 대신 드려라는 뜻입니다. 교회 갈 때 도저히 형편이 안되면 백원도 좋고 십원도 좋으니 드리라는 겁 니다. 백원밖에 안 내도 백만원만큼 효력이 있습니까라고 한번 물어보세요. 양으로 번제를 드려야 하는데 정 안되거든 산비둘기로나 집비둘기라도 드리라고 했는데 효력이 같을까요? 레위기에서는 분명히 같은 효 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서 충분하게 감안하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 람이 예수 믿는 게 어렵다는 말을 적지 않게 듣곤 합니다. 그건 누가 잘못하는 겁니까? 그건 하나님의 잘 못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 믿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돈없고 가난해서 교회 못 나가겠다 이런 소리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죄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예수 믿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물이 없고 능력이 없으면 정 안되면 흉내라도 내라는 뜻입니다. 속 죄는 반드시 해야 된다는 의미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번제물은 어린 양인데 속죄물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라는 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죄를 많 이 지은 사람이 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속죄 제물을 드리는 것과 그렇게 용서를 받고 난 후에 감사 합니다 하고 선물 드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커야 될 것 같습니까?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 이 커야 정상일 것 같은데 하나님의 요구는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속죄를 위해서 요구하는 제물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할 때는 어린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그 것도 정 안되면 낮추어 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더라 도 속죄는 반드시 해야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제물로 속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을 테니까 속죄를 위해서는 누구나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정 능력이 없으면 흉내라도 내고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의 표 현입니다. 속죄하는데 큰 제물이 필요하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와서 속죄함을 받고 난 이후에 감사함으로 헌신함으로 제사를 드리려거든 번제를 어린 양으로 드리라는 얘깁니다. 그것도 능력 이 안되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드려도 좋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이, 어떤 위대한 권력자가 이렇 게 양보하면서 명령 받는 사람의 형편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려준 명령이 있는가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 - 5 -

[2001.10.03] 득남, 순산도 부정하다? (레위기 12:1~8) 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또 범죄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통을 겪고 계시는지 이 출산의 규 정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출생은 정말 복되고 기쁜 일입니다. 그건 마음껏 축복할 일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 할 때에 하나님은 한편으로 고통 가운데 그것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 다. 그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서 범죄한 가운데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하나 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 6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 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 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 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 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 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 감을 보고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 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 하여 나갔나이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 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 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개역, 창세기 39:1~23] 난 설날에 했던 설교인데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고향에 가버린 탓에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망스런 상황에 부닥칠 때 어떻게 이겨냅니까? 팔자소관이라고 치부합니까? 아니면 타고난 운명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까?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참 좋은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 께 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최근에는 아이들이 자살 을 많이 합니다. 주로 무슨 문제입니까? 사고 많이 치는 아이들이 자살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도 아주 잘 하는 모범생이 자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어른들은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남이 당한 고통은 크게 못 느낍니다. 쉽게 비난하지요. 그러나 정작 자신들에게는 심각한 겁니다. 이런 고통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있을 수 있고 다 큰 어른들에게도 언제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닥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극복해 나 가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 두시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냈을까요? 요셉은 어린 시절에 참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특별히 채색 옷을 입혀서 귀하게 키웠습니다. 형 들은 전부 양 치러 나가서 열심히 일할 동안에도 요셉은 아버지와 집에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요셉이 특 별히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그 아버지가 부인이 여럿 있었 는데 그중에 가장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사랑했던 부인은 묘하게 일찍 죽습 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아마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그가 어느 날 꿈을 꾸고 그걸 다 이야기해 버렸습니다. 하루는 들에 나가 곡식을 다 묶었는데 곡식 단들이 다 일어나더니 형님들의 곡식 단들이 자기가 묶은 단을 보고 - 1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절을 하더라? 형님들이 듣고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성경에는 언사가 불편하였더라고 합니다. 좋은 말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쯤 그랬으면 눈치를 챌 일이지 또 어느 날 꿈을 꾸고 난 뒤 엉뚱한 꿈 이야기를 하죠. 하 늘에 열한 별들이 나를 둘러서더니 나를 향하여 절을 하는데 별만 절을 하는 게 아니고 해와 달도 절하더 라.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화를 좀 냈지요. 감히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네게 가서 절한단 말이냐? 하고 화를 냈는데도 아버지는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형님들은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모릅 니다. 어느 날 형님들이 먼 곳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멀리서 동생이 옵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보냈거든요. 멀리서 오는 동생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라고 합니다. 꿈쟁이가 오는데 저 놈의 자식을 죽여서 꿈 이 제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한번 보자고 하는 겁니다. 형님들이 얼마나 악이 받쳤으면 동생을 죽여서 없애 버릴 생각까지 다 했을까요? 그래서 형님들이 동생을 죽일 궁리를 했고 그 형님들 중에 한 명이 우리 손으 로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해서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이라는 고관의 집에 팔려가서 가정 총무를 하다가 억울하게 또 감옥에 들어갑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전옥의 은총을 받아서 간수 일을 돕다가 결국은 애굽의 총리로 뛰어 오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부분들은 재미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재미없으시면 창세기 뒤쪽 이 부분을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부분입 니다. 워낙 높은 자리에 올라간 탓에 요셉의 고통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남의 고통이 기 때문에 잘 못 느끼는 데다 결말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요셉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겪은 고통에 대해 서 생각을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치고 우리가 그런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 을 해 보십시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에 있을 때에 가장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아닐까요? 두고 온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며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반면에 형들을 생각하 면 저것들이 나하고 피를 나눈 형이냔 말이야? 언제 만나기만 해 봐라! 이러면서 이빨을 갈았을지도 모릅 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시편 105편 16절에서 19절까지 읽어봅시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며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 셉이 어디에 상했다고요? 발이 착고에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그랬죠? 그 몸이 란 말을 잘 보 세요. 글자 위에 아라비아 3자가 쓰여 있나요? 그러면 난외주 3을 보세요. 히, 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러니까 히브리어에 따르면 혼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발이 착고에 상하고 몸이 혹은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표현은 요셉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잘 보 여줍니다. 그런 고통이 1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 지 요셉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그 고통이 결국은 저를 단련하였다고 말합니다. 단련이라는 단어는 요셉이 얼마나 그 안에서 혹독한 시절을 겪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이 겪었던 고난은 간단하 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애굽으로 끌려가는데 얼마나 걸렸을 것이며 끌려가서 처음에 어디에 갔겠습니까? 노예시장에 갔겠죠. 노 예시장에 가면 어떻게 사고팔아요? 혹시 소 사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소를 뭐 보고 사나요? 이빨 보고요? 이빨을 보면 건강상태 다 알 수 있죠. 요셉도 팔릴 때 입 벌려 봐! 안 그랬을까요? 이빨만 보면 되나요? 색동옷 입고 즐겁게 지내던 그가 노예시장에 끌려갔으니 인격적인 대우라는 게 있었겠습니까? 제가,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목욕 가자 하면 참 싫었습니다. 목욕 안 가려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 데요, 참 싫었습니다. 그러다가 군에 간다고 신체검사 하러 갔는데, 학교에서 매년 신체검사 하는 것과 좀 다릅디다. 참 싫대요. 왜 싫은지 남자들은 아시죠? 그것도 싫은데 하물며 노예시장에 내놓았을 때 사람들이 노예를 사 가기 위해서 무슨 검사를 다 했을까요? 그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 2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얼마만한 아픔이 있었을까요? 그렇게 팔려갔습니다. 거기서 고향 생각하며 도대체 어떻게 지낼 것인지 고민하던 요셉을 생각해보면 아마 우리가 당한 어지 간한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요셉만큼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에게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 을 때 이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요셉이 이래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는 생각을 가졌을 때가 언제였을 것 같습니까? 아마 첫번째가 형님들에게서 팔려 갈 때 아닐까 요? 모르긴 몰라도 삶에 대한 의욕이 깨끗이 상실되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형님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야? 형님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아마 인간이 싫다는 말이 나올만 합니다. 좌우간 팔려 갔습니다.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조금 형편이 나아졌죠? 아니 어떻게 본다면 굉장히 나아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이 보통 감옥이 아닙니다.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니 역적이나 반역죄에 해당되는 죄수들이 갇힌 곳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웬만하면 나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갇혔을 때에 또 절망 했을 수도 있죠. 요셉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은 거기에 들어왔던 죄수 두 사람입니다. 해몽을 잘 해 주면서 한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거든요. 자기의 꿈 해석대로 살아나가면 나를 꼭 기억해 달라. 난 잘 못이 없다. 얼마나 눈 빠지게 기다렸을까요? 자기 꿈대로 되었거든요. 그리고 복직이 되어서 장관노릇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억울함을 호소해서 나를 불러내 줄 것이라고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실제로 얼마를 기다렸죠? 그 분이 나가서 요셉을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만 이년이 흘러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다림이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번이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더 이상 삶의 희망을 버릴만 한대도 요셉은 끄떡없이 견디어 냈습니다. 그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로 살면서 형편이 좀 나아졌습니 다. 요셉에게 꿈이 있다면 무엇이었겠어요? 거기서 출세해서 총리가 되는 것? 그러지 마세요.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요셉에게 단 하나의 꿈이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여기 서 빨리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것 이상의 소원이 없었다고 봐야죠. 어떻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 문제를 골똘하게 연구하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 속에 있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이용해서 고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보디발의 아내를 잘 이용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생깁니다. 영화 많이 보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많은데요. 영화에서는 주로 미인계를 잘 쓰죠. 여자를 잘 이용하 면 탈출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집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그 힘을 잘 이용만 하면 탈출해서 고향으로 내뺄 기회가 있겠다 생각하고 보디발의 아내와 눈을 좀 맞춘다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을 합니 다. 성경이라 이렇지 일반적인 소설이나 영화 같으면 틀림없이 그런 방법으로 해서 국경까지 바람 쏘이러 나가든지 어떻게 나가든지 해서 내뺄 가능성이 있죠.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 다. 제가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 겁니까?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탈출은 아니더라도 보디발의 아 내가 날 유혹하고 있는데 거절하는 게 쉬울까요? 아니면 함께 노는 게 쉬울까요? 인생을 즐긴다고 생각하 는 사람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전에 언제 신문을 이렇게 읽다가 보니까 하도 기가차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걸 읽어주었습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요점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자유스럽지 못한 주원인은 성적인 억압 에 있다. 그래서 순결을 강조하고 건전한 성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본이 된다. 그래서 성적 억압을 철폐하라. 청소년들이 순결이니 뭐니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남녀가 함께 충동을 느낄 때는 마음껏 하게 해야 된다. 결혼은 필요 없는 짓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속하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이죠. 제가 그걸 다 읽고 얘들아 어떤 느낌이 드냐? 하니까 한 녀석이 정말 명답을 하더라고요. 그냥 개같이 살자는 뜻이네요! 아주 명답이었습니다. 이런 글이 신문에 버젓이 실린다? 이런 설명을 해야 할 때마다 사용하려고 가방에 잘 넣어 다녔는데 얼 마 후에 잃어버렸습니다. 참 아깝더라고요. 영남일보 몇 월 달인지 이걸 어떻게 찾냐 하고 얘기를 했더니 - 3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빙긋이 웃으면서 그런 글이 신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찾으려고 하면 인터넷에 들어가 그 사람 이름만 딱 치면 수북이 나옵니다. 하더군요. 그 사람이 그런 글을 많이 써 놓았대요. 누군지 아마 아실 겁니다. 현 시 대가 그렇습니다. 인생을 즐기자, 즐기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성적인 억압을 다 철폐하라는 겁니 다. 바람 피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피우고, 이 나이 들도록 애인 하나 없으면 처녀 총각 두고 가리키는 것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이 애인 하나 없으면 말도 안되죠. 한 때는 애인이 없으면 팔불출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사람 사는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런 식으로 즐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몰래 먹는 떡이 맛있고 훔쳐 먹는 떡이 맛있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만화책 얼마나 재미있게 보는지 아십 니까? 국어책 펴놓고 그 안에 만화책 끼우고 있으면 대체로 들켜요. 앞에서 보면 표가 나요. 만화책 보다가 한 번씩 선생님도 쳐다보다가 조금 가다보면 선생님 잊어버립니다. 여기 홀랑 빠져가지고 있으니까 들킬 수밖에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십니까? 도시락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수업 중에 까먹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잠시 돌아섰을 때 잽싸게 한 숟가락 입에 딱 털어놓고, 선 생님이 보면 가만히 있다가 돌아서면 씹고, 잡아놓고 보면 기가 차지만 그래도 본인은 스릴 만점에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맛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깨끗하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본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 다 고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고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잊 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면 누구에게 범죄하는 겁니까? 정상적으로 생 각하면 누구에게 범죄하는 거죠? 보디발에게 범죄하는 것이죠.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보디발에게 범죄한다 고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함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는 것이 요셉의 큰 특징입니다. 저 여자를 잘만 이용하면 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해서 고향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옳으냐를 먼저 따지는 것 때문에 이런 큰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때때 로 하나님께서 잠시만 눈 좀 감아주시면 정말 큰 거 한 건 할 수 있겠다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 이건 정말 아까운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만 한 번 눈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는 유혹이 종종 들지요. 그것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지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게 아니다 생각하고 정도를 따라 걷는 길이 결코 쉽지 는 않지만 그러나 형통한 길입니다. 본문에서도 요셉이 형통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형 통했다고 말합니다. 39장 3절을 보세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 을 보았더라 범사에 형통케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표현이, 20절 끝에서 21절 한번 보세요....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라는 표현이 있고, 23절 제일 끝에...여호와 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고 말합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것 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형통이 뭡니까? 우리는 여기에 한 자 더 붙여서 만 사형통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만사형통이란 어떤 걸 말하죠? 가만히 뒹굴고 있는데도 일이 저절로 풀리는 겁니까? 요셉의 경 우에 만사형통이 뭔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데 일이 저절로 풀리더라? 그게 만사형통 입니까? 우리 식으로 생각해서 요셉이 만사형통하려면 노예로 팔려왔는데 저절로 일이 척척 풀려서 고향으 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감옥에 들어갔는데 만사형통이면 어떻게 됩니까? 누명이 곧 벗겨지고 감옥에서 나와야 되는 것 아녜요? 만사형통인데 여전히 보디발의 집의 종입니다. 그러다가 억울하게 감옥까지 또 들 어가 버립니다. 거기 갔더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셨는데 여전히 감옥에서 있는 겁니다. 요셉 에게 있어서 만사형통이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조금 위로해 주신 것 이걸 가리켜 서 만사형통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만약에 이걸 위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어느 정도 떨어진 것이라고 표현을 할까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천국에서 지옥까지 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 정도 떨어 - 4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셔서 높여주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 자리까지 높여주셨습니다. 총무는 총무지만 여전히 신분은 종이죠.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셔서 조금 올라왔 습니다. 형통케 되었지요? 그런데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또 감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얼마만큼 떨어 졌나요? 아주 깊은 수렁의 골짜기에 떨어졌습니다. 감옥에 갇혔더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거예요. 두 번이나 추락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서 올려주셨습니다. 얼마만큼 올려주셨나요? 추락한 것은 엄청나게 추락하고 올라온 것은 많이 올라온 것 아닙니다. 조금 올라왔어요. 조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신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어려움이 깨끗하게 풀려질 것이라고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 두십시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 께 하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신다는 것은 견뎌 낼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만큼 하 나님께서 조금 힘을 북돋아 주시는 정도가 아닐까 적어도 요셉의 삶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형님들에 의해 팔려간 것과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것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도저히 살 아갈 힘이 없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해 주셔서 조금 높여주시고 재차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졌 을 때 또 조금 높여주시며 힘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한 길 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고 영적으로도 풍족하게, 결국 이 땅에서 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면서도 이 땅 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대할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하늘 나라로 오너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일까요? 어차피 이 땅에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나 험하고 불행한 일들이 많이 닥쳐오게 마련입니다. 네가 나를 믿는다면 이 어려운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 를 내라, 믿는 신자답게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를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하나님을 만나서 갑 자기 벼락부자가 되어 멋지게 산 사람이 누가 있어요? 찾기 힘들 겁니다. 바울을 볼까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쨌거나 출세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얼마만한 고난을 받았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걸 후회했나요? 아닙니다. 바울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 만 본다면 바울이 예수를 만나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물질적으로는 한없는 고통이 었지만 영적으로는 바울만큼 부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잘 살고 있는 그를 불러내서 가라는 거예요. 일가친척 떠나서 가라는 겁니다. 가서 편안하게 잘 살았습니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부인을 여동생이라고 속이고 그 망신을 당하면서 살았겠습니까? 참으로 고통스러운 세월 을 살았습니다. 물론 뒤에 가서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죠.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 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양을 잘 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러서 갔더니 이상한 사람이 기름을 부으 면서 네가 왕이 될 거라고 말한단 말이예요. 그 이후 얼마 만에 왕이 되었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15년 안팎이 될 것 같습니다. 한 때 잘 나갔죠. 국방장관까지 올라가서 왕의 사위가 되기도 했지만 이내 사울에 게 쫓기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심한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나와 죽음은 한 걸음밖에 안된다는 고 백을 남길 만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갔다가 신분이 들통나는 바람에 침 을 질질 흘려가면서 미친 척 해서 간신히 빠져 나옵니다. 얼마만한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그 고 난의 길을 걷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지 접어놓고 무조건 매달려 떼를 써 봐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왜 맞는지 아세요? 내 신앙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맞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떼를 쓸 때 앞뒤 안 가립니다. 무조건 하고 자 기 생각만 하고 매어 달립니다. 우린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하면 안됩니까? 해도 괜찮습니다. 철이 조금 들 었다면 기도할 때 한마디만 더 붙이면 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 다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는 제쳐 놓고 무조건 매달리십시오. 그건 효력이 있는 겁니다. - 5 -

[2001.10.0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1~2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내 뜻대로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고 인내하고 나아가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기 도입니다. 요셉이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든 나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 오. 라고 매달리며 기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 감옥 에 갇혔을 때는 기도가 조금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큰 목표고 작은 목 표는 감옥에서 내보내 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셨다면 뭐라고 얘기를 했을 것 같습니까? 요셉아 힘이 드느냐?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을 수가 없겠니? 조금만 참으면 내가 정해 놓은 때가 되면 네가 나와서 온 민족을 구원해 내 야 한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네가 구원해 내야 한다. 그 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너 조금 더 참을 수 없겠 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요셉 그것 알았을까요? 전혀 몰랐습니다. 요셉은 전혀 몰랐지만 요 셉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이었단 말이예요. 요셉은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시편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을 시련 속에 두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니까 그 깊고 깊은 지하 감방에서 순식간에 국무총리까지 올려버리는 것이죠. 저는 그 장 면을 보면서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누굴까요? 보디발의 아내죠. 그 얘기를 왜 기록하지 않았는지 참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풍성하게 갚아주신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인 도하시며 내가 좀 더 인내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조금씩 힘을 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형통하였더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우리가 뭘 배우겠습니까? 만약에 요셉의 이야기를 실컷 해 놓고 요셉처럼 인내하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면 출세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 면 참 잘못된 겁니다. 아니면 요셉처럼 이렇게 되려면 꿈을 잘 꾸어야 합니까? 꿈을 잘 꾸려면 잠을 자야 죠. 잠도 적게 자면 꿈을 잘 안 꿉니다. 잠이 늘 모자라서 가서 눕기만 하면 잠들어 버리고 새벽기도 가야 된다고 발딱 일어나시는 분들은 꿈꿀 겨를이 없어서 못 꿉니다. 요셉처럼 출세하려면 꿈을 꿔야 합니까? 아니요, 그런 얘긴 아닙니다. 요셉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형통 한 자가 되었고, 요셉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위대한 총리가 되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느냐 이런 것 찾지 마시고,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이루어 가셨느냐 이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요셉에게 이런 고난을 견디어 내라고 하시면서 그를 형통케 하신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려운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당한 고난이 요셉이 당한 고난보다 더 크다면 요셉보다 더 위대한 계획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에 미칠 것이 아니지만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아픔을 주시는지 생각을 해 봅시 다. 때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뜻이 있 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복을 주시려고 내게 이런 고 난을 주십니까라는 기도가 정말 아름다운 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고 말하죠.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 그렇다면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복을 주시려고 그러시는 지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내하고 승리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 6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여 유사복음, 유사설교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 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 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 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 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 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 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 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 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 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 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 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 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개역, 누가복음 10:21~37] 러분들이 학교 다닐 동안 교장선생님이나 아니면 담임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좋은 훈화가 기억 이 나는가 더듬어 보십시오. 혹은 그 훈화 한 편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변화되었다거나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런 생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할 만한 그런 교장선생님 이야기나 담임선생님의 이 야기가 기억에 나는지 더듬어 보십시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훈화 한 편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예가 종 종 있습니다. 제게는, 섭섭하지만 없습니다. 재미 삼아서 같은 방에 있는 전도사님더러 혹시 학교 다닐 때 생각나는 훈화 있느냐고 그랬더니 하나 있답니다. 뭐냐 그랬더니 교장선생님의 학교 운영방침이 절대 정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정숙 이 라고 액자를 만들어 걸어 놓고 그랬대요. 그런데 자기 담임선생님은 친절하게 절대 정숙을 우리말로 풀이 해 주었답니다. 절대 정숙을 교장선생님이 하도 강조하니까 담임선생님이 우리말로 풀이해 주었는데 간단합 니다. 떠들면 죽는다 생각해 보면 그것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보면 참 비극입니다. 그 좋은 학 창 시절에 인생의 등대가 될 만한 교훈 하나없이 지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제가 중고등학교 다 거칠 동안, 심지어 대학을 마칠 때까지 교장선생님이 내게 해준 쓸만한 이야기는 기 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 기억나는 훈화(?)가 있긴 있습니다. 아마 그 해 12월 24일이 월요일이었던가 싶 은데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토요일에 방학을 하려고 계획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22일이 방학이 되 죠? 시내 교장선생님들이 모여서 다른 학교는 다 24일 방학하려고 하는데 우리 학교만 22일 방학을 하면 우리 입장이 좀 곤란하지 않느냐? 그래서 월요일날 같이 방학하자 그렇게 교장선생님들끼리 이야기를 했 나봐요.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날 아침에 우리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운동장에 다 모아 놓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22일날 방학하고 싶은데 시내 교장선생님들이 24일 하자고 한다. 내가 방학을 하루 당긴다고 해서 제군들이 공부를 안 할 겁니까? 하잖아요. 난리가 났죠. 고함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교장선생님이 한 술 더 떴습니다. 잘 할 것이라고 믿고 방학을 하루 더 당기겠습니다 금요일에 방학을 해버렸습니다. 정말 난리 났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교장선생님 멋쟁이라고... 섭섭하지만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교장선생님이 남겨놓은 기억이라곤 이것 뿐입니다. 이게 훈화에 들어가 는지 안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방학을 하루 당겨준다고 공부를 정말 더 했겠 습니까마는 대답은 그렇게 하는 거죠. 정말 기억에 남아서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주었을만한 이야기가 전 혀 없다는 것은 참 비극입니다. 아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1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얼마 전에 선배 한 분을 만났는데 이 분이 참 걸작인 것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모임을 하나 만들었더 군요. 고향친구, 중고 동창들, 군에 가서 만난 사람들, 대학 선후배들 이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다 초대해 서 모임을 가졌더군요. 그 모임을 위해서 자기의 프로필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교장선생님이 내게 끼친 영향 이라면서 그 교장선생님이 남긴 훈화들을 종목별로 제목을 쭉 적어 놓 은 겁니다. 한 두 편이 아니라 굉장히 많아요. 그 중에 어떤 훈화는 저도 내용을 압니다. 왜냐하면 출판이 되었거든요. 그 중에 어떤 것은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인데 그 제목을 가지고 교장선생님이 어떤 훈화를 했 다는 것을 졸업생들이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자기 혼자 기억하면서 제목을 적어 놓은 것을 보니까 수십편 이 돼요. 중고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삶이 얼마만큼 아름다 울 것인가 감동스러워지더라구요. 여러분, 감동적인 훈화 한 편이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합니다. 제대로 기억할 만한 훈화 하나 없는 학창시 절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별로 느끼지 못하지요? 작은 손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진짜 큰 손해는 느끼지도 못합니다. 제 기억에 학교 훈화는 없지만 은혜로운 설교가 많이 있습니다. 훈화대신 설교가 제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SFC 수련회 열심히 다니면서,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 은 시절에, 목사님의 제대로 된 설교 한 편의 영향력이 일 년은 가더라구요. 참으로 고민하고 힘들어 할 때 설교 말씀이 힘을 주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학교 아이들을 학교에 부지런히 보내서 공부 열심히 시키는 것 잘 하는 일입니다마는 그 아이들 의 인생 방향을 결정지을, 가슴 속에 평생 간직할 만한 중요한 교훈이 적어도 중고등학교 6년동안 한 편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기억하십시오. 설교 한 편으로 그 아이 인생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이 교회 안에서 많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학교에 아이들을 너무 맡겨 두지 마시고 제가 지금 하는 훈화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보면서 어쨌든 교회에서 좋은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부지런히 예배에 출석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령, 아주 유명한 훈화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서 말씀드립니다. 교장선생님이 한 이야기라고 가정하십시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벌과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거미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벌과 같 은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꿀을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개 미는 벌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인간입니다. 벌과 같은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인간입니다. 그러 면 개미는 있으나 마나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거미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거미는 어두컴컴한 곳에 거미줄을 쳐 놓고 걸려드는 곤충을 잡아먹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인 간들은 없어져야 할 인간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 무엇과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벌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교장선생님이 이렇게 훈화를 하면 멋지죠!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아, 벌과 같이 다 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인간이 되어야겠다 고 생각을 하게 한다면 A급 훈화입니다. 현실은 불행하게도 이 정도의 이야기도 우리 아이들은 듣고 자라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그런데 이런 훈화를 잘 듣고 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이 아이가 구원을 받을까요?... 이건 대답하셔야 합니다. 이 아이가 구원을 받을까요? 못 받습니다. 못 받습니까? 확실히 이 이야기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얘기를 조금 바꾸어 봅시다. 교 장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학교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회에서 교장선생님 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구원을 받을까요? 안됩니다. - 2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그래도 안됩니까? 그러면 교장선생님 대신에 목사님께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 들이 구원을 받을까요? 안됩니다. 그것도 안됩니까? 그러면 설교를 한번 해봅시다.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오늘 우리가 읽고 이 본문을 쭉 설명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설교의 결론을 맺습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강도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져야 할 인간입니다. 두 번째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있으나마나한 인간입니다. 반면에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 됩시다. 성경을 펴놓고 목사님이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계속해서 많이 들으면 구원을 받 을까요? 설교인데요? 성경을 펴놓고 하는데요? 아니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요? 이런 설교를 계 속해서 들으면 구원을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대답을 잘 하시더니 이제 좀 고민이 되십니까? 고민하실 것 없어요. 앞에서 말씀드린 교장선생님의 훈화 이야기와 이 설교는 어때요? 똑같습니다.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목을 왜 유사설교라고 붙였는지 아십니까? 짐작하시죠? 유사하다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이죠. 설교 비슷하다는 얘깁니다. 감히 단언컨데 설 교하고 비슷하지만 이건 엄밀하게 말하면 설교라고 하기가 곤란하다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만한 설교가 못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설교의 출처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근거로 설교 시간에 목사가 설교를 했음에도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면밀하게 살피셔야 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따 왔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서 전혀 언 급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좁게 범위를 잡은 셈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래야 그것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넓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 는 대상, 즉 인간이 어떤 존재냐를 설명해 주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고난이요 희 생이었더라는 것을 부분적으로라도 아니면 전혀 언급하지 않아도 그 밑바탕에 그 정신이 쫙 깔려 있어야만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설교가 됩니다. 그것이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듣기에 좋은 듯 싶어도 설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던 그 선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회에 다닌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정 말 잘 한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은 일주일에 낮 설교 딱 한 번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안 한답니다. 그것만 잘 해서 방송에도 많이 나온대요.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른다고 하도 자랑을 하길래 듣고 배우게 보낼 수 있거든 테이프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잘 부쳐 주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통씩 테이 프 다섯 개 정도 들어간 것을 꼬박꼬박 부쳐요. 그래서 제일 먼저 온 것 하나를 한 번 듣고 나니까 나머지 것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그만 부치라고 할려니까 미안하기도 해서 이 만큼 재어 놓았 습니다. 뭔가 한마디 해 주긴 주어야겠는데 어쩔까 고민 중입니다. 정말 잘 조직되었고 정말 깔끔하고 정 말 세련된 설교다. 그런데 영양가가 없다. 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여러분, 한국에서 최고가는 설교가라고 칭찬을 잔뜩 하는데 포항 촌구석에 있는 전도사가 간이 굵어도 많이 굵지요? 영양가가 없는 것을 계속해서 먹으면 영양 실조 걸릴 소지가 있습니다.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 보니까 이게 건방져도 보통 건방진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긴 들어요. 그러나 분명히 그 설교는 영양 가가 없는 설교이고 계속해서 들어서 될 설교가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그 정도는 분간 할 줄 압니다. 설교에 영양가가 있느냐 없느냐는 스스로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중에 여러분들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에 누가 여러분의 보증이 되어 줍니까? - 3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예수님. 당연히 예수님 때문에 들어갑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소개시켜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친히 배우신 분은 괜찮습니다만 목사님께 복음을 전해 듣고 잘못 배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 목사님이 와서 내가 잘못 가르쳐서 문제가 되었으니까 저를 벌주시고 저 분은 좀 넣어주세요. 얘기가 됩니까? 예수 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천국문 앞에서 나를 보증서 줄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가능합니까? 나는 열심 히 목사님 말씀 듣고 따랐는데 목사님이 잘못 가르쳐서 그럽니다. 핑계가 됩니까?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설교가가 나를 가르쳤다고 해도 그 분이 천국문에서 내 보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그 분이 과연 거기에 오기나 올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건방지다 어쩐다라는 말이 나올지라도 적어도 생명하고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이냐 안된 것이냐를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콩나물에 농약이 좀 들었다고 왜 그렇게 난리를 칩니까?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그래요? 실제로 계산해보면 지극히 적은 양일 뿐이지만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예민하게 죽일 놈, 살릴 놈 하지 않습니까? 한 백년 살다 가는 육신에 조금 영향을 끼치 는 것 가지고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관대합니까? 저를 보고 건방지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오늘부터 콩나물 농약 가지고 방방뜨지 마십시오. 저는 적어도 농약이나 오염 에 신경쓰지 않고 아무 것이나 잘 먹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얘기일 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 이 우리 교회에 되게 건방진 전도사 하나 있다.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건방진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가 걸려 있는데 건방지다 소리를 무서워 할 형편이 아닙니다. 여러분, 좋은 세월이 되어서 들을만한 설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텔레비젼 틀어도 항상 나옵니다. 인터넷 들어가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책방에 가면 설교집은 넘쳐납니다. 목사님 설교니까 다 좋은 것 이다? 아뇨! 들으면서 이 설교는 나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만한 설교다, 이것은 형식상으로는 아주 잘 된 설교지만 내용은 아니다 정도는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인 듯 한데 잘 들여다 보면 설교라고 하 기 곤란한 설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에 누가 보증을 선단 말입니까? 여러분들을 잘못 가르쳐서 그 렇게 되었다고 대신 벌서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올바른 설교를 분간해서 들을 수 있는 능력 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뭡니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저 사람의 말은 이상하다? 그 사람의 타이 틀에 매이지 마십시오. 그 분이 어느 대학에 가서 신학을 얼마나 배웠고, 얼마나 훌륭한 목사고, 어떤 큰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유명한 부흥사이고... 그 타이틀을 믿지 마십시오. 왜요?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을 제대 로 믿지 않는 신학자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듣고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이 있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게 안되면 그래도 건전하다고 하는 교단을 찾는 게 그 다음 순서죠. 좌우간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열심히 배워서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내게 뭐라고 말씀 하시는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에 쉴 시간이 없이 교회에 모여서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적어도 이것을 분간해 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필히 당부합니다. 여러분, 여기 나와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 가지고 얼 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자세히 한 번 봅시다. 이 이야기에 무슨 영양가가 그렇게 많아서 다들 잘 기억하고 이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많이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여러분 들이 받은 영양가가 가령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되겠구나 외에 뭐 있습니까? 괜히 은혜를 잘못 받아 서 우리 목사님은 여기 나온 제사장을 닮았나? 이러면 더욱 문제가 되지요. 그것말고 또 무슨 영양가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어떤 율법사가 찾아와서 예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사 - 4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가 예수님께 질문해서 배운 게 뭡니까?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이 뭔지 한 번 생각해 보 십시오. 처음에 무엇을 물었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이 하신 답변이 이 율법사가 알고 있는 것입니까 모르는 겁니까? 자기가 물어 놓고 대답은 누가 합니까? 자기가 하잖아요. 예수님은 그 냥 그래 그렇게 하면 되지 라고 동의를 표하는 것 뿐입니다. 이 율법사가 하나 더 물었습니다. 뭘 물었죠? 29절에 한 번 보세요. 묻는 의도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자기 자랑을 하려고 묻는 겁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거든요 예수님의 답변 이 뭡니까? 이 이야기를 길게 한 다음에 다시 거꾸로 묻습니다. 이 중에 누가 네 이웃이냐? 율법사가 압니 까 모릅니까? 끝에 한 번 보세요. 37절에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라고 답합니다. 이게 누구의 말입니까? 율 법사 얘기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율법사가 알고 있는 겁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것이 뭡니까? 가르쳐 준 것이 없습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건 아무 것 도 없습니다. 자기가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아는 얘기를 확인시켜 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유명하고 왜 설교의 주제가 많이 되 었느냐는 말입니다. 저도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좀 전에 제가 짤막하게 인용한 이야기는 다 설교 시간에 들은 것입니다. 실컷 듣고도 은혜가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이 얘기 전체가 노래로 된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출을 하고 애들 데려다가 연극도 했습 니다. 강도 역할을 제 동생 중에 하나가 했는데요 강도라는 것이 참 맥없이 야, 돈 내 놓아라 돈! 하길래 제가 뒤에 앉았다가 야! 강도가 어째 그 모양이냐? 차라리 돈 빌려달라 해라! 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페 레타라고 노래 부르면서 연기를 했는데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사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하는 걸 살펴봅시다. 본문을 길 게 잡아서 미안합니다. 그 앞부분부터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앞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서 전 도를 시켰는데 전도하고 돌아온 후에 이 제자들이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다 기쁘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더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그 뒷부분을 보십시오. 21절에 이 때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냄을 감사하나이다 여기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굉장히 많이 하십니다. 24절까지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어떤 느낌이 드세요? 성령으로 기뻐하사...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어 떤 느낌이 드세요? 예수님께서 지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성령에 취해서 말이 좔좔좔 나오는 듯합니다.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죠? 그걸 일일이 대꾸하려면 참 힘들어요. 술 취한 사람은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런 경향이 좀 있나봐요. 예 수님께서 술에 취해 기분 좋은 사람처럼 성령에 취해 기뻐하고 계시는데 율법사가 와서 질문을 하는 겁니 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는 죄송합니다마는 술 먹는 사람의 표현을 빌린다면 술이 확 깨는 이야기 를 하는 겁니다. 기분 좋아서 이러고 있는데 완전히 기분 잡치게 하는 얘기를 이 율법사가 한 겁니다. 율법사가 왜 찾아왔을까요? 시험하려는 뜻도 있고 자기를 좀 나타내려는 의도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 님은 지금 제자들이 놀라운 일을 하고 난 후에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정말 기뻐해야 될 것은 너 희들이 하늘에 기록된 것 이걸 기뻐해야 된다 는 말씀을 하시면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권세 가진 사람들을 놓아두고 이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복음을 보여주셨고 알려 주신 것, 이걸 예수님께서 기뻐하고 있는데 이 율법사가 와서 밥맛 떨어지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유명 하고 설교 주제로서 많이 사용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셨던 그 구절에 우 리의 눈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것을 우리도 좋아해야 할텐데 많은 사람들이 선한 사마리아 인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분별력에 문제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5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들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으로 이끌어 갑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이 야기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 계속하면 싫증이 나기도 하 겠죠. 그것을 싫증이 나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어 가며, 모양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다 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 밑바탕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서 예수 그리 스도께서 희생하셨음을 증거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 다. 밥 많이 먹었다고 밥 먹기 싫은 사람 있습니까? 가끔 다른 것을 먹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밥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 다른 것은 별로 흥미없고 밥만 잘 먹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면 싫어요? 연애중인 처녀총각이 하루종일 얘기하고 헤어져서 집에 가서 전화 를 겁니다. 또 얘기해요. 할 얘기가 실제로 많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가만 히 들어보면 전부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들일 거예요. 남이 들으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 반 복하는데 옆에서 들어보면 눈꼴시려울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들의 내용보다는 밑바탕에 깔 려있는 사랑입니다. 밑바탕에는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엉뚱하고 시시한 이야기도 계속하는 것입니 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마디 안해도 그것은 사랑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싫증나지 않는 겁니다. 싸우고 있어도 그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여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은 모든 설교의 바탕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고 이런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랑의 메시지가 여러 가지 모양으 로 포장이 되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게 싫증이 납니까? 설교 밑천이 그렇게 없나? 또 그 얘 기 하나?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절절이 느낄 때는 그 얘기가 반복된다고 밑천이 그렇게 없나 소리가 안 나올 겁니다. 오히려 아는 것을 계속해서 즐기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는 것은 그 사람이 레코드판을 얼마나 모았느냐는 게 아닙니다. 레코드판을 몇 백장씩 모았다고 음악 애호가가 아니라 진짜 음악 애호가는 반복해서 듣는 레코드판이 몇 장이냐 그걸 따져야 합니다. 아, 이거 나 잘 아는 곡이야 하면서 넘어가는 사람은 애호가가 아니라는 거 죠. 잘 아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이 진짜 음악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한, 두 번 듣고 아, 잘 아는 말이다 이게 아닙니다. 잘 아는 얘기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고, 감격스러워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목사의 책임이 더 큽니다마는 듣는 성도들 도 무엇이 영양가 있는 설교인지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 가끔 남편이 아내를 보고, 용기를 내야 이것도 가능하죠, 당신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송이 장미 했는데 부인이 듣고 마, 시끄럽다! 이러면 어떤 관계죠? 이렇게 되면 좀 문제 있는 겁니다. 나이 들어 도 남이 보면 참 웃기고 있네 싶은 그런 소리 들으면서 기분 좋아하고 가끔은 속보이는 아양도 좀 떨고 그러는 게 부부 아닌가요? 좀 모자란 겁니까? 아니, 다른 데서는 안 그런데 부부사이 정도는 그렇게 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이 드신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듯 싶어서요. 나이를 생각해서 밖 에서는 점잖지만 아무도 몰래 이러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부부사이 는 남이 들으면 웃기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이여야 합니다. 세상에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어디 있 냐? 고 하는데 또 거짓말하고 있다! 이건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뻔한 소리 또 한다고요? 그건 아닙니다. 문제는 똑 같은 내용일지라도 우리가 듣기 좋도록 얼마나 요리를 하느냐는 것은 목사님의 몫이지요. 그러나 저것이 내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고 들어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마음에 잘 새기려고 하는 노력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셨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생각하시고 그렇게 기뻐하셨는데 이 율법사가 와서 영 기분 잡치게 만들어 놓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우리는 뭘 보고 좋아합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잘 알고, 재미있습니까? 뭔가 잘못되 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셨느냐 그것이 우리에게도 기쁜 것이어야 합 니다. - 6 -

[2001.10.21] 유사복음, 유사설교 (누가복음 10:21~37)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설교를 할 때에도 복음의 핵심되는 내용을 잘 심어줘야 합니다. 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린이 여러분, 착하게 살아야지요! 이게 잘못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근거 가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보통은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끝내죠. 그러나 우리가 착해 야 하는 근거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으니 하나님 백성 답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잘 연결시켜 줘야 합니다. 다음 네 가지 종류의 사람 중에 어느 부류가 제일 나은지 한 번 봅시다. 예수믿고 선하게 사는 사람, 예 수는 믿는데 선하게 살지 않는 사람, 예수는 안 믿는데 선한 사람, 예수도 안 믿고 선하지도 않은 사람? 네 번째는 괄호 밖이죠.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선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별로 선하지 않는 사람과 예수는 안 믿는데 정말 선한 사람은 어느 쪽이어야 합니까? 예수 믿어야죠. 믿음을 강조하다 보면 행실이야 아무리 나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 이 예수 안 믿고 행실이 아주 좋은 사람 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조금 위험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행실이 나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잘 믿는데 전혀 선하지 않다는 것은 불가사의입니다. 예수 를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실이 나 쁠 수가 있습니까?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가르쳐야 하는 목표는 예수를 잘 믿고 선하게 사는 것 이어야 하 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예수는 잘 믿는데 행실은 좀 나쁜 아이 가 결과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의 목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항상 그 말씀 속에 이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잘 심어주어야 합니다. 혹시 실수하지 않으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듣던지, 성경을 가르치든지 그 핵심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반드시 깔려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예수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없더라도 밑바탕에는 확실 하게 깔아 놓은 채 메시지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설교이고 진짜 복음이라는 것이죠. 우리 교회 전도사가 건방지더라는 얘기는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전도사도 건방지고 성도들도 건방지기 이를 데 없 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복음이냐 아니냐는 것에 관한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꼭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한 분도 낙오없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7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성 찾아 오시는 하나님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 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 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 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 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 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 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 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 로 내가 먹었나이다 [개역, 창세기 3:1~12] 도 여러분, 일생 중에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했을 때일 수도 있고 오래도록 고생한 끝에 집을 샀을 때일 수도 있죠. 저의 부모님이 오래도록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집을 산 것도 아니고 좀 넓은 전세방 하나 얻 어 가지고 참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 넓은 방이었습니다. 옛날에 우리 다섯 형제가 단칸방에 살았거든요. 다섯명 눕고 양쪽에 어른 두 명이 누우면 꼭 끼입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책상에 앉으면 차라리 조금 편했어요. 그런 방에서 오래도록 지냈는데 전세방이라도 넓은 방이 그렇게 소원이셨던 모양이에요. 방 이 넓으니까 이불을 펴고 갤 필요 없이 야, 정말 좋다! 하시면서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굉장히 기분이 좋으셨나 봐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야 다르겠지만 갖고 싶어 소원하다가 가졌을 때에 그 짜릿한 기분을 생각해 보 십시오. 이런 기억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기쁨들이 지속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 지는 못합니다. 새 집을 사서 들어가면 몇 년쯤 기분이 좋을까요? 결혼을 하면 그 기쁨이 얼마쯤 갑니까? 통계적으로 3년쯤 간다고 그래요. 아무리 불꽃같은 사랑도 그대로 두면 3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기쁨 을 주지는 않습니다.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에 사진기 하나 샀으면 하고 벼르고 별러서 하나 샀습니다. 그 때 태어난 아이는 사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번에 태어난 아이는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없다가 하나 사면 좋 아서 마구 찍어대는데 조금만 지나면 시들해지면서 카메라 두고도 잘 안 찍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기쁨이 그렇게 왔다가 이내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온 몸으로 부르짖은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라고 생을 바쳐 가면서 부르짖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제가 군에서 늑막염을 앓았는데 후송되어 가는 곳마다 물어요. 누구한테 맞았냐고요. 늑막염이 맞거나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생기는 병인 모양입니다. 병이 날만큼 맞은 적은 없어요. 5군단 본부대에 근무했었는 데 부대에서 밤낮없이 사무만 보다가 전방에 훈련을 나갔습니다. 19일간 이쪽 산에서 저쪽 산으로 토치카 를 만들 자갈을 날랐습니다. 군대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횟수만 채우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쪽 산에서 자갈을 지고 저쪽 산으로 가는 도중에 고의로 거의 다 흘려버립니다. 그래야 가볍거든요. 줄줄줄 흘려 버리 고 절반도 안되는 걸 갖다놓고 왔다는 확인만 받고 횟수만 채우는 식인데 전 그 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자 갈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다 날랐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학생활을 마칠 때 내게 참 기쁨이 있었는데 그렇게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 때 누군가가 이 산에서 이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갚아야 할 때가 됐다. 그래서 열심히 날랐죠. 그 - 1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게 좀 무리가 돼서 늑막염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 때에 기쁘다는 얘기를 참 많이 하고 다녔는데 그 기쁨 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디에서 오는 기쁨일까요? 기뻤던 일만 쭉 나열하면 저도 남 못지 않게 기쁜 일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도 식지 않고 끝없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모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을 아는 기쁨입니다. 그 위에 작은 기쁨들이 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 쁨은 여러분 평생에 끊이지 않는 기쁨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 많은 재앙이 떨어졌습니다. 그 재앙을 퍼부으면서 하나님께 서 모세에게 늘 해준 말씀이 있습니다. 애굽에 왜 그런 재앙이 떨어졌을까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마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 너희가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리라 고 합니다. 또 한가지는 이런 재앙으로 인해서 애굽인들이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리라 는 것입 니다. 결국은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모질게 재앙을 두들겨 맞는 원인을 찾으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입 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복이요 재앙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를 읽으실 때 이 점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서에서 이런 예를 찾아봅시다. 에스겔 6장 7절을 보십시오. 또 너 희 중에 살육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말하자면 너희를 죽인다는 얘기입니다. 엎드러지게 하여 너희로 나 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육을 당하는 이유가 너희가 나로 하나 님인줄 알게 하려함이라는 겁니다. 10절 보십시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는 표현이 나옵 니다. 14절 끝에도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고 합니다. 6장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표현 이 3번 나옵니다. 7장에도 3번이 나옵니다. 12장에도 3번 나옵니다. 매 장마다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러분, 에스겔서 전체에서 여호와인 줄 알리라 는 표현이 몇 번쯤 나오는지 횟수를 헤아리면서 읽어보 십시오. 에스겔서를 읽는 재미가 날 겁니다.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일, 이십 개가 아닙니다. 이 표현이 굉장 히 많아요. 에스겔이 하고 싶은 얘기는 당시의 모든 재앙과 모든 일들을 통해서 인생이 배울 수 있는 유일 한 것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인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호세아 1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노래합니다. 호세아에게 있어서 단 한가지의 소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죠. 선지자들이 피맺힌 절규처럼 외치는 것 이 제발 너희가 하나님을 알라 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의 그 외침은 바로 하나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우 리가 다른 복을 다 누리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목놓아 외쳤던 소리가 너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이 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섬겨 왔던 여러 가지 신들은 실 체가 없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 분인지, 어떤 분인지, 어떤 인격을 갖추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 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신지 잘 보 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거의 사랑의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시는 것은 저하고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공의의 하 나님이라고 대답하신 분은 간이 굉장히 크신 분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표현입니다. 공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지은 사람에게 반드시 벌주는 분이다라는 말이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공의라는 말은 굉장히 두려운 말입니다. 함부로 쓰지는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잘못하면 눈꼽만큼도 에누리 없이 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난 하나님이 와도 별 문제 없다 싶으신 분은 애용하십시오. - 2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교통위반으로 경찰에게 적발이 되었을 때 적당히 봐 주는 경찰이 좋아요 아니면 악착같이 스티커 끊는 분이 좋아요? 악착같이 끊는 경찰이 공의로운 경찰입니다. 끊기고 돌아가면서 좋은 말 아무도 안 하는 것 같더군요. 공의로운 경찰 보고도 그렇게 투덜대면 공의로운 하나님에게 걸리면 약도 없습니다. 그건 무서운 말입니다. 흔히 구약을 잘 아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 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다를까 요? 한 분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다를 리가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매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매를 들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옛날 표현으로 국민학교 5학년 때 다니던 학교에 6학년 담임이 세 분 계셨습니다. 세 분 중에 어느 한 분이 무섭다고 소문이 났어요. 저 선생님한테 걸리면 6학년 올라가서 뼈도 못 추린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그 반에 배당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지나고 보니까 아주 좋은 분이에요. 혹 심하게 매를 드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무섭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 무섭다고 하는 분의 마음 을 알고 나니 무서운 분이 아니더라구요. 제 친구가 야, 너도 학교가서 애들 패냐? 고 물어요. 안 팰 것 같냐? 안 팰 것 같대요 저도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천사표였지만 잘 모르는 학생들 편에서는 모질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만 되 어도 몸으로 때우겠다고 버티는 애들이 있습니다. 여름 방학 숙제를 한 번 되게 맞으면 끝나지 뭐 굳이 방학동안 내내 애쓸 것 있나? 이런 애들이 중학교 1학년에도 있어요. 여름방학 숙제 검사를 한 후에 해오 지 않으면 되게 혼을 내고는 보통 그걸로 끝나요. 어느 해 심한 녀석이 한 번 걸렸어요. 실컷 맞고 일주일 기한 줄테니까 다음 주 토요일까지 해와! 일주 일 뒤에 다시 불렀습니다. 여전히 손도 까딱 안하고 그냥 와요. 그래서 또 두들겼죠. 그 다음 일주일 기한 주고 또 부르고... 여름 방학 숙제가 12월 달에 끝났습니다. 이 녀석이 한 번 꺾이더니 그 다음부터는 숙제 를 해와요. 아이고, 저 선생님한테는 안되겠다 이런 아이들일수록 점잖게 대해서는 일이 안됩니다. 일단 꺾은 다음에 부드럽게 다독여 주어야지 처음부터 상담으로 들어가면 거꾸로 선생을 갖고 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매 주일 불러서 두들기는 선생님 마음은 어떤지 아십니까? 속으로 빕니다. 야, 제발 좀 해 와라 그런데도 표정은 죽일 듯이 하고 덤비는 거죠. 그렇게 여름방학 숙제를 12월 달까지 끌고 가 보세요. 선생님도 참 힘든 일입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더 이상 애살도 없고 꿩이 내 꿩 이가? 산이 내 산이가? 이런 마음이 들면 포기해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매를 들고 야단치는 그 장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선생님이 왜 그러느냐는 마음을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노아 홍수 때 다들 죽고 노아만 살아났습니다. 노아가 살아난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 뭐라고 그러죠? 의인이었더라. 노아가 그 당시에 의인이었으면 노아 자신의 공로 같아 보이네요. 창세기 6장 8절을 한 번 봅시다. 노아 가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말씀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셔야겠지만 이 구절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인데 이 말은 우리 말로 약간 의역해서 뜻을 살려 놓은 것인데 아마 영어 성경 가진 분들은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그렇습니다. 노아는 하 나님의 눈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더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멸하시려는, 이글이글 타는 그 분노 의 눈빛 속에서 은혜의 빛을 노아가 봤다는 얘깁니다. 죽일 듯이 야단을 치는 그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눈 빛 속에 선생님이 정말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신도 굉장히 가슴 아파 하면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에 그 매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 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두려워 떨 때에 혹시 그 속 한쪽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면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을 살 펴볼 눈만 있으면 구약의 하나님도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그 분노에 - 3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면서도 그 눈빛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슴아파 하시면서 힘들어 하고 계신다는 것을 노아는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아는 하나님을 잘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홍수 후에 다시는 이런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지개였죠? 왜 심판하지 않겠 다고 말씀하셨죠? 이렇게 심판해도 사람들이 계속 악을 행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어요. 그렇게 심 판을 받았으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 잘 순종해야 정상 아닐까요? 그렇게 심판이 끝난지 얼마되 지 않아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럴 것을 아시면 서도 심판을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어릴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창 8:21). 어릴 때부터 악한 인간들을 일일이 심판했다가는 막말로 씨도 안 남겠다 그래서 심판을 않겠다는 것입니 다. 바벨탑을 무너뜨릴 때도 지진이나 태풍으로 뭉개 버리지 않고 사람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공사는 중 단시키는 절묘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다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매를 들고 치시는 그 하나님의 눈빛 속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노아는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본문에 하나님의 아픔이 어떻게 묻어나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선악과를 하나님께서 저 인간들이 내 말을 잘 듣나 안 듣나 시험해 볼려고 만들어 놓은 것 으로 이해하 는 것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었죠?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마 는 이런 비유를 들겠습니다. 노예를 사랑하게 된 어떤 주인이 이 노예를 진짜 사랑하게 되면 노예를 노예 로 그냥 두지 않습니다. 노예로 두고는 사랑이 안돼요. 그래서 노예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등한 교제가 가능해지거든요.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람을 교제가 가능한 위치에 두려고 만든 것이 선악과입니다[자세한 것은 설교란의 사랑에 눈먼 하나님 을 찾아보세요].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악용하고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가버렸습니다. 떠나간 그 인간을 되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성경의 전체 이야기입니다. 누가 답답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그를 찾 으려고 애쓰는 하나님과 누가 답답해요? 하나님이 답답해요. 완전히 배짱이네요! 옛날 우리 옆집 애가 아침에 아침 안 먹고 도망가면서 하는 소리가 이래요. 내, 밥 안 먹는다. 누가 답답한가 보자 하고 학교 가더라구요. 밥 안 먹고 학교 가면 누가 답답합니까?... 지가 답답하죠. 질문이 어렵나요? 엄마가 답답하죠. 사랑하니까요. 애는 엄마의 사랑은 몰라도 자기가 아침을 먹지 않고 그냥 가면 엄마가 답답하다는 것은 압니다. 엄마가 오냐, 니 답답지 하고 내버려두나요? 기를 쓰고 붙잡으 려고 쫓아가지요.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냥 놔두지 못하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누가 답답한 겁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멀리 도망쳐 나간 이야기가 창세기의 전부입니 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가는 이야기가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누가 답답한지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더 답답해 합니다. 실제로 답답한 건 누군데요?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이 불쌍한 건데 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진짜 답답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짐승보다 못한 자식들아(사 1:3) 하 나님이 왜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배신하고 떠나갈 수 있느냐는 외침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아마 아담과 하와는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입 한번 닦아버리면 설마 하나님이 아시겠나?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셨죠? 하나님이 알기 전에 아담 과 하와 자신들이 변해버린 겁니다. 그걸 따먹었더니 최초의 변화가 뭡니까? 부끄러움을 알았고 두려움이 생긴 겁니다. 이게 예전에는 전혀 없던 겁니다. 이게 얼마만한 변화인지 우린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린 이미 버린 몸이거든요. 그러니까 버려지기 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만한 변 화인지 모르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부끄러움을 알았고 두려움이 생긴 겁니다. 그 이전엔 두려움이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그늘에 숨은 겁니다. 스스로 따먹었습니다 하고 자신도 모르게 공개하고 있는 겁 - 4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니다. 아담과 하와는 따먹는 순간에 자신들의 변화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알았을까요? 물어 보고 아신 것이 아니에요.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를 찾아오 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독사발을 마시듯이 그 자리에서 탁 거꾸러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얘들이 어디 갔지? 모르는 척하고 찾아 오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가 정말 먹었느냐고 확 인을 합니다. 몰라서 확인합니까? 경찰서에 붙들려 있는 아이들 데리러 학부형과 간 적이 있습니다. 학부형들 모시고 경찰서에 아이들 찾 으러 가보면 참 천태만상입니다. 어떤 엄마는 붙들고 하염없이 울어요. 좀 점잖은 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딱 한마디 합니다. 너, 정말 그랬냐? 몰라서 물을까요?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아이를 찾으러 가서 너 정말 그랬냐고 묻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 같아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그 말 속에는 자식에 대한 잘못을 부모가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상할 일 있으면 내가 변상하고 혹시 잘못된 것 있으면 내가 다 당하기로 작심하고 묻는 말입니다. 너 정말 그랬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 아 버지를 적잖게 봤거든요. 옆에서 지켜 보기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정말 먹었냐는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 다. 그렇게 찾아와서 아담에게 먹었느냐? 왜 먹었느냐? 하와에게 네가 그랬느냐? 꼬치꼬치 묻고 있는 것 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망가 버린 그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친히 찾으러 오셨다는 사실 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뭐 답답해서 금지된 과일을 먹고 도망가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 셨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깊은 산속에 은둔하고 있는 뛰어난 스승에게 한 수 배우려고 찾아갑니다. 찾아가 보면 처음부터 받 아주는 경우가 잘 없죠. 문전박대를 얼마나 하는지 모릅니다.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오만 괄세를 받으면서 빌다시피 해 가지고 겨우 허락을 받습니다. 그 놈 참 능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마는 고집 하나는 쓸만하구 나. 그럼 들어와 보아라 간신히 허락을 받아도 몇 년 동안 청소나 하고 밥이나 하고 물만 기르고... 무예를 배우는 이야기나 다른 어떤 종교도 내가 노력하고 내가 애를 써서 신을 찾아가고 스승을 찾아갑 니다. 그런데 성경만 유독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건 아담과 하와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어떨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는가? 대체로 아브라함이 힘들고 어려워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기습작전을 펴서 롯을 구출해 낸 사건 있죠. 구출해 내고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하나님께서 거 기 나타나셔서 두려워말라 하시면서 위로하실까요? 기습작전을 펴서 작은 전투 하나는 이겼지만 그 많은 왕들 속에서 아브라함이 계속 버티어 낼 수 있을까 얼마나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 서 위로하십니다. 친척이라고는 롯 하나를 데리고 이방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둘이 헤어지고 난 다음에 그래도 의지했던 롯이 자기를 떠나간 후에 얼마나 쓸쓸할까 싶을 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 게 위로하시며 또 약속을 하십니다. 야곱은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죠? 고향을 떠나서 외삼촌 집으로 멀리 멀리 떠나가면서 들판에 외로이 누 웠을 그 때에, 야곱이 하나님을 부른 게 아니에요. 야곱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지키며 돌아올 때까지 너와 함께 하 며 보호하며 지키겠다 고 약속을 하죠.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고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이 여기도 계시는구 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공헌한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양떼나 치 고 있던 모세를 불러서 내 백성 구해내라고 하시죠. 하나님이 가라 가라 하고 이적을 행할 능력까지 주셔 가면서 내 백성을 구해내라고 할 때 모세는 예 하고 갔습니까? 아니요, 못한다고 얼마나 발뺌을 했는지 모 릅니다. 그랬던 그 모세를 억지로 쫓아내다 시피해서 백성을 이끌어내게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 많은 선 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위대한 스승님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절 제자로 삼아주십시 - 5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오라고 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 예수님이 하나씩 하나씩 불러 모은 제자들입니다. 초대교회 기초를 놓았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죠. 사도 바울은 전직 박해자입니다.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 고 살기 등등해서 설치던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해 버렸습니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미리 알고 이런 하나님 같으면 한 번 섬겨 봐야겠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아간 사람은 성경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셨고 스스로 나 이런 분이다 하고 소개해서 사람들이 알게 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지 잘 되씹어 보십시오. 여러분, 만물의 주인되신,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신다는 것이 얼 마나 놀라운 복인지 모릅니다. 임금님이 아무도 몰래 날 만나러 왔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 찾아오신 것이 바로 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에덴동산을 거 닐며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던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을 향하여 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 지금 예배시간인데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여기 있습니다 이런 대답 안 하시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는 특별히 어떨 때 찾아오셨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피 해서 두려워 도망갈 그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내같이 이렇게 죄 많은 놈이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이래가지고 무슨 인간이 되겠느냐 싶을 그 때에 사실은 하나님 께서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는 성경하고 약간 다릅니다. 어디가 틀렸는지 확인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오랜 여정 끝에 드 디어 가나안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어디가 틀렸습니까? 가는 곳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는 것. 틀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맞을 텐데요.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게 살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어디가 틀렸나? 아브라함은 오랜 여행 끝에 드디어 가나안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 디가 틀렸죠?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게 틀렸다고요? 답을 잘 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누구에게 단을 쌓았다고 하죠? 그냥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한마디가 더 붙어 있습니다. 나타나신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고 되어 있습 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먼저 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약속을 하고 난 것을 보고 그 나타나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 아닙니다. 머나먼 고향을 떠나서 타국에 들어와서 이곳에서 어떻게 살까 고민하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귀중한 약속을 해 주시는 것에 감사해서 단을 쌓았더 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나고 또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 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오셨고 심지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는 맨손으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할 때마다 그 약속에 변함없이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것이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후손은 누구를 겨냥하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 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잘 보면 그 이야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보입니 다. 하나님께서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이걸 따먹고 범죄하므로 도망가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걸 - 6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원상 회복시키겠노라. 그걸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시키겠노라는 각오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 속 에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손에 독생자의 피를 들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손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묻혀 들고 찾아와서 이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 하는 것이 성경 전체 이야기입니다. 그걸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죠. 예수 믿어라! 뭘 믿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것만 믿으 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이 약속, 이 초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수 도 없이 찾아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 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좋은 방법인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 이 있어도 성경을 읽고 배우고 또 묵상하고 성경을 깨닫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니님께 서 우리를 초청하신 초청에 응하는 것이죠. 우린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 그냥 피상적으로 아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그 말 한마디가 확실한 고백이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이 넘치는 삶이 될지 모릅니다. 모든 사소한 아픔이나 슬픔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이 말 한마디 속에 다 묻혀서 쓸려가 버리는 기쁨을 마음껏 누 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이야기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뭐라고 부르죠? 아담이 볼 때 하와 는 어떤 여자입니까? 아니, 어떤 사람입니까?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 하나님께서 처음 데리고 왔을 때 감탄을 하면서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대는 나의 엑기스라는 표현인 셈입니다.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뽑아서 만든 사람이니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 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라고 합니다. 좋은 말입니까 나 쁜 말입니까? 아니, 그 말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이죠. 뜻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나쁘죠. 왜 나빠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 그러니까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고 은근슬쩍 돌려대는 겁 니다. 아담이 볼 때는 어떤 여자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준 여자, 좋단 말입니까 싫단 말입니까? 거참 애매 한 표현이죠. 둘이 쫓겨나가 살면서 하와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어요? 선악과를 따 먹여가지고 나를 이런 고생을 시키는 여자... 내 신세를 망하게 한 여자. 그러면 우리는 하와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무슨 생각합니까? 선악과 따 먹어가지고 우리 신세도 망쳐 놓은 할머니. 하나만 더 물어 봅시다. 하나님은 하와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라고 볼까요? 하나님도 하와를 보고 선악과 를 따먹고 하나님의 세계를 다 버려 놓은 여자로 볼까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이젠 뭘로 볼까요? 먹지 마라 한 것을 먹고 사고친 저 놈들. 그런 겁니까? 사고쳐서 일은 얼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내 가 사랑하는 아담과 하와 입니다. 매 맞고 쫓겨 나갈 형편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아담과 하와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 신세 망쳐 놓은 어설픈 조상요? 하나님이 그 렇게 보시면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다 망쳐 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 시오. 왜요? 그건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왜 이 이야기를 끝에 덧붙이는지 짐작하시죠? 옆에 있는 형제를 한 번, 아니 옆에 있는 형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제일 밉생이, 아, 저 꼴 좀 안 보 았으면 좋겠다! 하는 형제를, 고개를 돌리지 마시고 생각만 하십시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 까? 머리 속에만 넣어 놓으십시오. 그 밉생이를 보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 요? 아뇨. - 7 -

[2001.10.28]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3:1~12) 비록 능력은 없고 어설프기는 하고 맨날 빌빌거리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가리켜 내 백성이 라고 하면 우리는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좋은 때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 라고 해놓고 사정이 달라졌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라고 하는 이런 못된 습성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담은 여전히 존귀한 존재입니 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아니 능력 도 없고 열심도 없고 못나빠진 나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의 토대 요 변하지 않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 8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지 말씀 많으신 하나님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 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 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 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 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 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 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 시니라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 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개역, 창세기 3:9~21] 난 한 주간 지나면서 누구를 많이 생각하셨나요? 아담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셨습니까? 아담이 어떤 사람이죠? 선악과 따먹고 우리 신세를 다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 아닙니까? 그런 아담 많이 보셨어요? 집에서 내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다 당신 때문 아닙니까? 하면 당신이 바로 아담이지요.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니더니 지금은 시큰둥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이죠. 처음 에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하더니 선악과 따먹게 했다고 하와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 라고 마음이 싹 돌아서는 사람이 아담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아담이 얼마나 많은가? 하와는 오늘 뺍시다. 워낙 욕을 많이 얻어 먹 었을테니까요. 그런데 이런 아담을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 인생을 이런 고생길로 들어가게 한 아담과 하와이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잘못한 아담이 아닙니다. 그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아니면 집안 식구들끼리도 저 아담 같은 인간 하는 소리가 나오더라도 그 다음 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이십시오. 저런 아담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지? 아담 같은 저 인간을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아담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범죄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그 아담을 기억합시다. 우리 주변에는 아 담도 많고 하와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 있는 아담과 하와를 볼 때마다 그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더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노아를 기억하면 더욱 좋지요. 노아는 어떤 사람이 지요? 노아 홍수 때 다 죽고 살아난 사람. 그것도 기억할만 합니다마는 그것보다는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눈빛 속에서 은혜를 발 견한 사람이 노아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만 보이거나, 하나님만 생각하면 겁 이 나는 신앙생활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시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사람이 노아입 니다. 노아, 아담, 하와 같은 사람들을 기억하시되 범죄한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잊지 않으 셔야 합니다. 범죄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빈손으로 그냥 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자기의 독생자를 죽여서 그 피를 들고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절하게 부르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입니다. 이 말씀을 성경은 곳곳에 - 1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서 반복합니다. 특별히 많은 곳이 에스겔서인데 그런 표현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찾아오시라고 말씀드렸습 니다. 그래서 찾아보고 답이 맞는지 횟수를 물어본 분이 있다는 것이 대단히 기쁩니다. 일주일만에 다 읽으 려면 힘들어요. 내용이 어렵거든요. 그 어려운 내용을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제발 내가 어떤 분인지를 알 라고 반복해서 하시는 그 말씀만 찾아가면서 읽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답해 주신 분에 대해서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발 좀 알아달라 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시 길래 이렇게 목놓아 외칩니까? 어떤 하나님이죠? 답이 너무나 많을 수 있으니 아무렇게 말해도 다 맞을 겁 니다. 문제는 어떤 대답을 하실 거냐는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드러나는 답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이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서 찾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 려운 일인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한 수 배우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가까운 친구 중에 바 둑을 잘 두는 친구가 있습니다. 고기 먹고 싶냐더니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갈까? 하더군요. 아주 으리으 리한 고기 집에 자기는 공짜래요. 가서 바둑 한판 두어주면 됩니다. 그 사장님이 왜 그러실까요? 이 사람한 테 한 수 배워보겠다는 거지요. 바둑 두는 사람이 한 수 배우겠다고 얼마나 투자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하나라도 우리 노력으로 배운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아담처럼 범죄하고 영영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계속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좀 외람되지만 하나님은 참으로 말씀이 많으신 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으면 따먹는 순간에 독약을 마시듯이 죽어버려야 그 게 하나님다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음에도 그들이 죽지 않고 지금 숨어 있습니 다. 숨어 있는 그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 와서 뭐라고 그랬죠? 오늘 분문에서 봅시다. 찾아와서 물었더니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니까 하나님이 누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했던 그 과실을 먹었느냐? 고 묻는 거죠. 하나님께 서 모르고 묻는 것 같습니까? 알고 묻는 것 같습니까? 알고 묻는 겁니다. 네가 먹었느냐? 그랬더니 아담이 말도 안되는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이것 참, 차라 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내가 먹게 되었습니다는 뜻으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대답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다시 여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고, 찾아오셔서 왜 그랬느냐고 자꾸 묻는 겁니다. 이게 자연스러워 보입니까? 제가 학교 있을 때에 옆 반에 정말로 무서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 생각해 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무섭다고 소문이 났는지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중학교 배정을 위 해서 뺑뺑이를 돌리고 집에 들어오면서 자기 아빠보고 아빠 살았어요. 상도중학교 안 걸렸어요 하더랍니 다. 상도중학교에 무서운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초등학교까지 알려져서 상도중학교 배정만 안돼도 살았다 할 정도로 소문난 선생님입니다. 애들이 뭘 잘못하면 흔히 하는 말로 한 방에 끝납니다. 이 선생님은 절대 질문이 없습니다. 왜 늦었느 냐? 언제까지 가져올 것이냐? 이런 질문이 없어요. 잘못해서 걸리면 질문 없이 그대로 한 방에 끝납니다. 그 반은 일년 열 두달 지각도 없고 조퇴도 없고 결석도 없고 사고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연말에 저 보고 선생님, 제가 좀 방법을 바꿔야겠습니다. 왜요? 생활기록부에 쓸 말이 없어요. 생활기록부에 애들의 행 동이나 특징을 써 주어야 되는데 쓸 말이 없더라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다 똑같으니까요. 이 분의 특기 가 말이 없어요. 잘못하면 한 방에 끝납니다. 그 반은 말썽이나 사고라고는 일체 없습니다. 바로 옆반이 저희 반인데 지각 한 애를 예로 들면, 왜 늦었냐? 내려오는데 차가 가 버리잖아요. 다 음에는 조금 일찍 내려와라. 그 다음날 또 지각합니다. 오늘은 왜 늦었냐? 엄마가 아침을 안 해 줘서 - 2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요. 엄마가 아침을 몇 시에 해 주더냐고 물어보면 시간에 맞게 해 줬어요. 나중에 따져보면 자기가 늦게 일어났어요. 네가 늦게 일어났네. 왜 그랬냐? 고 물어보면 저녁에 텔레비젼 보다가 늦은 거예요. 야, 저녁 에 일찍 자라, 늦게 잔 게 원인이다. 일찍 자라. 예 그 다음날 또 지각하는 거예요. 오늘은 왜? 제가 탄 차가 빵구 났어요. 세상 천지에 학교 오다 버스가 빵구나서 지각한 놈은 니밖에 못 보았다. 어째서 니 가 탄 차만 빵구 나고 사고 나고 왜 그러냐? 일년 열두달 이 모양입니다. 한 쪽 반에는 담임이 없어도 조용합니다. 우리 반은 담임이 있어도 조용한 게 5분을 못 넘깁니다. 시끄러워서 옆 반 선생님들이 야단을 칠려고 문을 열어보면 선생님이 그 앞에 떡 앉아 있거든요. 그럼 미안합니다. 하고 그냥 가요. 제가 애들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너희들 나한 테 고맙다고 해라. 내라도 여기 앉아 있으니 너희들 그렇게 시끌벅적해도 야단 안 맞지 내 없을 때에는 제 발 조용해라. 오늘 내 없었으면 틀림없이 단체 기합 받았을 거다. 조용해라. 그러면 조용해요. 문제는 그게 오래 가지를 않아요. 잠깐 있다보면 또 속닥속닥거리기 시작하거든요. 얘기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놔둡니 다. 스스로 공부할 능력이 잘 없으니까 모르거든 물어가면서 공부해라면서 놔두거든요. 그러면 몰라서 묻는 아이들은 몇 안되고 엉뚱한 녀석들이 더 설치는 겁니다. 왜 그냥 놔 두냐고요? 저는 나름대로 아이들을 너무 눌러가면서 키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인격에 손상이 갈까 싶어서 가출한 아이를 붙들고도 늘 묻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재미있는 것이 영해(영 덕군 영해면) 있을 때 아이 하나가 가출했다가 사흘만에 왔는데 물었죠. 왜 갔니? 고추따기 싫어서요. 고추따는 것 힘들긴 힘든다더라. 그럼 어디 갔었니? 대구요. 대구 어디 갔었니? 뭐, 시내 여기저기요. 됐다. 그럼 왜 왔니? 다리 아파서요. 그게 이해가 퍼뜩 안 가는 거예요. 대구 갔는데 다리가 왜 아플까? 몇 마디 더 물어 보니까 이해가 가 요. 시골 애가 가방 들고 시내를 다니는데 화장실이 없더라는 겁니다. 이해 가죠? 시골 아이들에게는 화장 실이 곳곳에 널렸는데 대구 시내를 들어가 보니까 화장실이 없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앉아 있을 곳이 없더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줌은 마렵지요, 가방은 놓을 데가 없지요, 앉을 데는 없지요, 돌아다니고 돌아다니 다가 도저히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 싶어 그 길로 차를 타고 내려와서 그 이튿날 학교는 안 들어오고 학 교 뒷산에 올라가서 하루종일 누워서 야, 이렇게 좋은 데를 놔두고 내가 어디를 갔더란 말이냐? 그 이튿 날 학교 들어왔어요. 제가 더 이상 야단 안 쳤습니다. 나가보니까 알겠지? 그래도 고추따면서 학교 다니는 게 나으니까 학교 잘 다녀라. 이렇게 얘기하고 끝내는 거죠. 반 애들에게는 가출해서 대구 갈 사람은 에게 물어보고 가거라. 이러면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는 겁니다. 사실은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이렇게 대하기가 좀 힘들어요. 왜냐하면 형편 따져 가면서, 상황 봐줘가 면서 대화를 통해서 가르친다는 게 웬만한 인내심 없이는 어렵습니다. 어렵긴 어렵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그렇게 키워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인데 옆반 담임보면 정말 편해요. 그 분은 학교 오지 않아도 교실이 조용 합니다. 하나님이 만약 정말로 제대로 심판할 의사가 있다고 하면 옆반 선생님의 방식대로 선악과 따먹는 순간에 군말하지 말고 단칼에 끝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찾아와서 이것 저것 물으면서 얘기 가 그렇게 깁니까? 이유가 뭘까요? 그냥 끝내고 싶지않다는 뜻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랑하기 때문입니 다. - 3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좀 더 살펴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안타까움도 묻어있고 이대로 끝낼 수 없다. 어떻게든 다시 관계를 회 복시켜야겠다 는 하나님의 의도가 그 속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벌을 주면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하 나님께서 말씀이 많습니다. 진짜 무서운 선생님은 벌줄 때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기껏 해보아야 엎드 려! 이 한 마디로 끝냅니다. 그런데 잘못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네가 오늘 무슨 죄를 지었으니까 매를 몇 대를 맞고... 이것이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러면 애들이 겁을 안내요. 아무 말없이 엎드 려! 하는 선생님께는 꼼짝없이 딱 엎드려 두들겨 맞습니다. 네가 이렇게 이렇게 잘못했지 않냐? 하면서 말이 많으면 한 대 맞고 나면 죽는다고 온갖 엄살을 다 떱니다. 적당하게 중간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아요. 벌을 주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이 많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도 이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하나님의 분노의 눈빛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더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하고 비 교하면 누가 더 잘못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담보다는 좀 낫지요? 아마 아담보다 훨씬 나은 분들이 여기 많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래 가지고 어떻게 믿는다고 하겠습니까라는 아픔이 있어도 그것하고 아 담하고 비교해 보십시오. 좀 낫지요? 아담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 많이 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실 말씀이 많다.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 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이 많으셔도 뱀에게 어떻게 하셨나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에겐 왜 이렇게 했느냐 왜 먹었느냐 묻던 그 하나님께서 뱀에게 뭐라고 물으셨어요? 묻지 않으셨습니다. 뱀에게는 왜 이랬냐고 묻 지 않았습니다. 바로 선고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많으시다 해도 아무에게나 말이 많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요? 아담과 하와에게는 말씀이 많으신 하나님일지라도 이 뱀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그대로 선고가 떨어져 버립니다. 15절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 들어요. 네가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방해를 놨단 말이지? 좋다. 그렇다고 나도 너에게 직접 손대지 않겠다. 네가 유혹했던 그 여자의 후손에게 한 번 당해봐라. 그 여자의 후손이 너 머리를 박살낼 것이다. 너도 발악을 하기는 하겠지만 겨우 발꿈치 정도밖에 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 섞인 선고입니다. 이 사탄이 뱀입니다. 뱀에게 하시는 이 말씀 속에는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한마디로 관계 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많이 나죠. 사실은 이 일로 인해서 사탄은 여자의 후손, 앞으로 내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이 온단 말이지? 눈독을 단단히 들였 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는 길을 막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애굽과 아비멜렉 에 갔을 때 누이라고 했다고 가서 나중에 들통난 사건이 있죠? 분명히 아브라함이 잘못했음에도 하나님께 선 아비멜렉이나 바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그 바로와 아비멜렉이 하는 일이 바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시 는 그 여자의 후손의 길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혈통이 결코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다윗의 후손들 중에 어떤 경우는 그 자손들이 한꺼번에 몇십명이 전부 몰살을 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단 한명이라도 반드시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를 죽이려 하는 그 노력이 사탄의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롯 을 통해서 모든 유아를 학살하려는 것도 역시 여자의 후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마 이 3장 15절의 말씀 을 사탄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3장 15절이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역할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기 때문에 이 구절을 보면 바로 여기 언급한 여자의 후손이란 이 땅에 와서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낼 예수 그리스도 란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릅니다. 아담은 이 말을 들으면서 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한 얘기가 아니고 뱀에게 한 얘기를 그냥 옆에서 엿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장 1 절을 보면 하와가 가인을 낳았는데 아담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누가 낳았는 데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낳아놓고 왜 이 아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느냐 말입니 까? 아마 아담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보내시리라고 하는 여자의 후손이 드디어 태어나는 것 아니냐고 생 각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지요. 아마 아담은 하나님의 이 말뜻의 깊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하 나님께서 분명히 내게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틀림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의사와는 - 4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조금 달랐습니다. 비록 범죄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과 하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약속을 왜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하지 않을까요? 간접으로 하는 겁니다. 부모님 이 자식에게 몹시 화가 났을 경우에 이 자식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를 직접 안 하는 경우가 있지요. 어디에 다 대고 해요? 만만한 집사람이나 아니면 동생에게 대고 고함을 질러 대지요.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그 고 함소리의 목표가 쫓겨 나가는 아들을 향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아비의 심정은 그런 아들을 한 번 겪어 보아야 이해하기 쉬운데... 그런 복은 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지금 착잡합니다. 형벌은 내려야겠고 희망은 주어야 하겠고, 야단은 쳐야 하는 데 너무 기죽지 말았으면 하는 두 가지 감정이 이 말 속에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여자에게 잉 태하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짐승은 새끼를 낳을 때에 어느 정도 고통은 있지만 사람과 비교할 바는 전혀 아닙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글쎄요, 저도 어차피 남의 얘기를 듣거나 간혹 한 번 정도 본 적은 있네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마음놓고 욕을 해도 되는 때가 그때 밖에 없지요? 세상에, 참 가관이데요. 며느리가 시어머니 붙들고 욕을 마구 퍼부어 대는데도 시어머니가 야야, 조금만 참아라 이러면서 달래기만 하더라 구요. 아프긴 많이 아픈가보다 싶은 생각이 옆에서 들긴 들데요. 아니 얼마나 아프면 그 때 욕하는 것은 전 혀 흉이 안되는 모양입디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주셨을까요? 네가 잘못했으니 맛좀 보라는 겁니까? 그런 의미도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그 벌로 인하여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것인가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고통입니다.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재탄생 시킬려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겪는 고통이 이만큼 크다는 것을 여자는 체험으로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여자는 해 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는 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니 해산함으로 구원 얻는다 하면 애 낳은 여자는 다 구원 받는다는 얘기입니까? 해산의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구원의 길 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나 다 애 낳고 고통스러웠으니까 다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걸 로 인해서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면 감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가끔 부모님들이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하시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낳았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옆에 있는 형제를, 믿는다고 하면서 저럴 수가 있는가? 비난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형제를 향하여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낳은 자식인데... 하시는 것입니다. 거꾸로 자식도 그 말을 잘 활용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들 딸을 몹시 차별하는 아버지에겐 별로 효과가 없지만 엄마에겐 효과가 있어요. 딸이라고 구박을 많이 하는 엄마 에게 딱 한마디를 하면 됩니다. 엄마는 아들 낳을 때만 배 아프고 딸 낳을 때는 배 안 아팠나? 이것은 굉 장히 효과있는 말입니다. 엄마가 딸이라고 괄세하거든 시험삼아 해 보십시오. 어머니가 자식 낳은 아픔을 기억하는한 이 말은 대단한 위력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같은 그런 아픔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아 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이야기를 오래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자식 죽이는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마는 그 과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깨달아 안 것은 내가 자식을 죽이느라고 당하는 이 고통, 아픔이 바로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걸 아브라함은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시기 위해서 당하시는 그 아픔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아기를 낳은 분들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사실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벌입니까? 복입니까?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또 이상한 벌이 하나 있는데 16절 뒷편에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 이라는 말씀 이 여전히 해석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남편을 사모한다는 것이 벌입니까? 복입니까? 남편을 사모한다? 그리움에 사무쳐 있는 견우 직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견우와 직녀는 서로를 얼마나 사모하고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떨어져 있으니까요. 떨어져 있지 않으면 사모함이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사모한다는 말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전에 없던 커다란 간격이 생겨났다는 뜻 - 5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입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을 보고 남편들은 집에 가서 봐라 하나님께서 남편은 아내를 다 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글쎄요 그것 큰일날 짓입니다. 그걸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남 편과 아내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싸우게 되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 남편과 아내를 상하관계로 규정한 적이 없어요. 서로가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가 안되고 갈 라져서 둘이 되더니 서로가 위로 올라서서 누르려고 하더란 말입니다. 내가 남편이고 당신은 아내니까 당 신이 순종해야지! 그러지 마십시오. 믿는 성도는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죠.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땀 흘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합니다. 열심히 애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절대로 불로소득을 노리지 마십시오. 복권 사가지고 긁고 있거나 복권 한 장 사가지고 당첨되면 하나님 교 회 짓는데 보태겠습니다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과연 복권당 첨 되기 바라고 긁는 것이나 당첨되어 가지고 들고 온 헌금을 기뻐하실까? 아니면 내가 땀 흘려가면서 마 땅히 내가 써야 할 것 애써가면서 저축하고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실까? 그건 너무나 명확합 니다. 어느 분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돈은 벌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버셔야 합니다. 그 말은 노력하라 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아끼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껴야 합니다. 한 디 더 붙여서 최대한 주라는 겁니다. 벌 수 있는 한 벌고 아낄 수 있는 한 아껴서 최대한으로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는데 아담에게 땀을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그런 것임을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은 범죄하고 난 후에 분리되어 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 에게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실 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분 리를 뜻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 이 뭐였죠? 선악과 따먹는 순간에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두려움이었죠? 두려움이 왜 생깁니까? 분리가 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로 있을 땐 두렵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간격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생기 는 거예요. 그 다음 변화는 부끄러움을 몰랐었는데 부끄러움을 알게 되지요. 부끄러움을 알았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음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그러면 아직은 거리가 좀 있 다는 뜻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부끄러움이 없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왜 부끄러움이 생깁니까 분 리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남편을 사모하고 아내를 다스리는 것도 남편과 아내 사이가 분리되어 간다는 뜻 입니다. 땅이 소산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담과 땅이 분리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고 말씀하시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해서 모든 것이 분리되어 나가는 모습을 3장이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이 징계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약속 첫째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 급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관계를 전부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마지 막에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입니다. 이때까지 에덴동산에는 죽음이란 없었습니다. 짐승도 죽음을 몰랐고 사 람도 죽음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가죽옷 한 벌을 해 입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가죽옷을 볼 때마다 무엇이 생각나겠습니까? 이 가죽옷 한 벌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짐승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우리를 위해 희생당할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은연 중에 비추 고 있습니다. 범죄로 인하여서 분리되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창세기 3장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쪽에서는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다가도 낙심하고 좌 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일까라는 생각이 들면 제일 나쁜 것은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교회 가겠느냐? 그만 때려치우자!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별히 토요일 저 녁에 부부싸움 않도록 당부합니다. 사탄이 부부 싸움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 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토요일 저녁이죠. 토요일 저녁에 대판 싸우고 나면 주일 아침에 교회 올 맛이 납니까? 토요일 오후에 싸움이 되겠다 싶거든 아, 이게 사탄의 장난이겠구나! 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스스로 자신 - 6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감을 잃어버릴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은근하게 훗날을 약속하시던 그 하나님을 기 억하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 같은 사람이 주변에 많이 깔려 있다고 하여도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오시는 하 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우린 방법이 없어요. 내가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셔서 당신의 그 아픈 심정을 숨겨 놓은 채 말 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만이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굳건하게 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자녀가 실수해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면 본인 자신도 힘들고 괴롭죠. 그러나 정작 누가 더 괴롭죠? 부 모 괴로운 것 아세요? 경주 검찰에 아이들 인수하러 학부형 데리고 종종 간 적이 있습니다. 중학생이 내남 교도소에 임시로 가 있다가 검사가 불러서 올 때 보면 중학생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데리고 옵니다. 저는 도저히 못 보겠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는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자녀가 잘못했을 때에 부모 가 몹시 아파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믿는 성도로서 제대로 살아야 할 때 살지 못하면 나도 답답하지만 정말 답답하신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그걸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내 속에 임하여 계시는 성령님이 고통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 보다 내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힘들어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죠? 밥 먹고 학교 가라는데 밥 안 먹고 도망가면서 한다는 소리가 내 밥 안 먹고 학교 간다. 누가 답 답한가 보자 하고 도망가면 누가 답답한대요? 실제로는 자기가 답답하죠. 그런데 밥 못 먹이고 보내는 엄 마가 왜 그리 답답해요? 가끔 한강 철교에 그런 일 생기데요. 내 여기서 뛰어 내릴 거다. 누가 오기만 해봐라 뛰어내린다.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요. 밑에서 마이크 대고 야, 제발 참아라. 잠깐만 기다려봐라. 사정하는 사람이 누구 지요? 그런 광경을 못 보셨어요? 이상하다? 요새 그런 일이 잘 없나요? 마이크에 대고 고함치는 사람은 주 로 경찰서장입니다. 올라오기만 해 봐라 나 뛰어내린다 고함지르는 놈이 답답한 놈이에요? 마이크에 대고 제발 조금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하는 사람이 답답한가요?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번 수요일 날도 그린 1차 아파트 전도 나갑니다. 전도하러 가는 사람이 답답한 거예요? 문 안 열어주 고 누구요? 하고 고함지르는 사람이 답답한가요? 누가 답답한 사람이예요? 전도하는 사람이 답답해요. 전도 하는 사람이 왜 답답해요? 세상에 뒤집어 진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만 싫은 소리 다 들어가면서 억지로 억지로 전도시켜 가 지고 예수 믿게 해 놓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때 괄세한 것 정말 미안합니다 하면서 평생토록 감 사하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전도하는 사람이 답답한 법입니다. 우리보다 더 답답하고 힘들어 하시는 분은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나온 교리가 우리가 잘 아는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라고 웃고 있을 때 사탄이 가소롭게 여깁니다. 잘못해서 내가 이렇게 해서 되겠냐고 그러면서도 이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으니 내가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안되지 하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방법이 없어요.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사탄이 아마 제일 싫 어하는 교리가 이신칭의일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자빠졌으니까 이 놈이 끝나야 되는데 이게 부시시 일어난단 말이에요. 뭐 때문에요?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니 하고 일어나니까 사탄이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 하는 사람에게 사탄은 빙긋이 웃습니다. 그런 사람은 넘어뜨리기가 쉽거든 요. 여러분, 어떤 형편,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힘들고 고통스런 가운데 있더라도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 님이 계시니 그 하나님을 보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혹시 주변에 있는 성도들끼리라도 정말 밉거든 욕을 한마디 하십시오. 그러나 욕하기 전에 저런 인간도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하실까라고 꼭 한 번 생각하고 그 다음에 욕을 하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십시오. 성질대로 하기 전에 하나님을 한 번은 꼭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 그리고 노아, 누구를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 7 -

[2001.11.04] 말씀 많으신 하나님 (창세기 3:9~21) 분은 성경에 나오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고 그 인물들에게 피 묻은 손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 땅에 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 8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다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 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 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 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 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 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 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 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 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 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개역, 신명기 26:1~11] 음 주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가끔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주일이 냐? 는 말을 듣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거기다 십일조 매달 내면서 추수감사절에 무슨 추수감사헌금이냐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라니까 그냥 감사드리고, 또 추수감사절에 헌금한다 하니까 그냥 헌금하는 겁니까? 하라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는 것은 그렇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를 생각해 보 시는 것이 잘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추수감사절 잘 지내고 헌금 잘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누가 옆구리 콕 찌르면서 말합니다. 농사 짓냐? 농사도 안 지으면서 무슨 추수감사절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럴 것 같네. 그러 면 이제까지 했던 것 헛일이잖아? 봉급쟁이는 매월 월급 받으면 십일조 다 했잖아. 그런데 무슨 추수감사 헌금이냐? 그것도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네.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교회생활 하던 분들이 간혹 누군가 가 옆에서 이런 식으로 질문하면 그 때까지 잘 해오던 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예가 종종 있 습니다. 구원파들이 득세했던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구원받았느냐? 자신있게 받았다. 고 그러면 언제 받았 냐? 말이 막혀 버리는 거죠. 거기서부터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신앙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봅 니다. 열심히 교회 생활하면서도 그것이 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니까 하는 것도 잘 하시는 것입 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시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추수감사절에 이 본문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선 본문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추수 때가 되면 제일 먼저 한 일은 맏물을 거두어서 하나님께 드린 일 입니다(2절). 맏물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이 계신 성전의 제사장에게 가서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정상 적이라면 제가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서 얻은 수확의 첫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고 하겠죠. 그 런데 본문에는 제사장에게 추수한 것을 가지고 가서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 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하라는 거예요. 조금 이상하게 시작됩니다. 어쨌든 제일 먼저 거둬들인 충실한 곡식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첫아 들이나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맏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어릴 때 그 구절을 볼 때마다 나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제가 맏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목사될 주제가 못되는 것 같아서 도망 다녔 죠. 세월이 흐른 후에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가 맏아들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바로 위에 세 - 1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살 더 많은 형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누나하고 제가 여섯 살 터울이거든요. 이상하다 싶어서 물어보았더 니 위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첫아들이 아니네. 그 러면 이제 더 이상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마음을 놓았죠. 이런 생각이 얼마나 성경 적입니까? 성경을 잘 보는 겁니까? 잘못 보는 겁니까? 잘 보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목사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생각해보니 맏아들을 다 하나님께 드리면 잘못하다간 온 세상이 목사 천지가 될 판인데 그것도 아닐 것 같아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맏아들과 첫새끼는 대속하라는 겁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마 땅히 드려야 하는데 드리지 않는 대신에 속전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 속전이 많은 액수가 아닙니다. 제사장 에게 속전을 드림으로 아들이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니까 무조건 목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꽤나 늦게 알았습니다. 일찌감치 가르쳐 주는 분이 있었으면 참 좋았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첫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이 첫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귀중품은 전부 하나님께 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도 너희가 취하면 안된다. 그런데 어긴 사람이 한 사 람 있었죠? 아간입니다. 결국은 그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 슨 욕심이 그렇게 많으셔서 한 성을 점령하고 거기서 얻은 탈취물을, 전쟁을 하게 되면 전쟁에 참가한 사 람들이 좀 나눠가지는 것이 정상이지, 그걸 하나님께 전부 드리라고 합니까? 아, 이렇게 몰인정한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도 계속 그랬다면 그건 하나님의 몰인정이겠지만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한 번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모든 아들을 다 내놓아라? 그게 아니고 맏아들 뿐입니다. 짐승이 새끼를 낳으면 모든 새끼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아니요. 첫 새끼, 그것도 대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첫아들, 첫 새끼, 첫 노략물을 전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우리가 얻는 모든 소득, 후손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과자 한 봉지를 사다 주고 야, 하나만 줘 하면 아이들이 잘 줍니까? 안 줍니까? 한 봉지 사다주고 그 옆에 앉아서 하나 줘 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잘 줍니까 안 줍니까? 안 주면 섭섭 합니까? 주고 안 주고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아이에게 이런 것 하나 달라는 것은 어른들의 재미입 니다. 안 준다고 뱅뱅 도는 애 따라 다니면서 하나 내 놓으라는 것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뭐 궁색 한 것이 있어서 내 놓아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라고 우선 인정하라는 뜻에서 맏물, 첫 번째 성에서의 탈취물, 첫 아들, 첫 새끼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욕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도 그런 비슷한 현상들이 좀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학교 다니다가 직장에 취직하면 첫 월 급은 어떻게 하나요? 엄마 빨간 내복을 사 드린답니다. 왜 그러세요? 모르긴해도 그동안 키워주신 것에 대 한 감사의 표시 아니겠나 싶어요. 그 동안에 키우고 먹이느라고 고생 많이 했는데 빨간 내복 한 벌로 때울 수 있나요? 없지요. 그걸로는 안되죠. 그러나 그 빨간 내복 한 벌이 어머니에게 주는 느낌은 어떤 걸까요? 그 동안의 모든 고생을 아마 깨끗이 잊게할 만큼 큰 것일 겁니다. 계산이 되나요? 어머니들이 다 바보 아 닌가 모르겠어요. 그런 심정으로 우리가 얻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할 때에 그런 느낌을 가 져야 합니다. 빨간 내의가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하셔야 죠.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라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 야죠? 하나님은 빨간 내의가 필요하신 분은 아닐테니까요. 내게 주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음을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가장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라는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우리 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 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2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그렇게 맏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고백하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걸 내게 주셔서 감사 합니다 가 아니고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내가 이르렀나이다 그렇게 제사장에게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하고 감사하는 기본 전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 속하신 이 땅에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걸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그 한마디를 다시 더 자세하게 풀이해 주는 말입니다. 제사장을 가리켜서 무슨 제사장이라 부르는가 한 번 보세요. 3절에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께 이 제물을 드리나이다 하면 좋을텐데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라고 부르느냐는 겁니다. 지금 우리만큼 이스라엘 백성들 은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그 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적어도 구약을 읽어 나가면서 하나님을 가리켜서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한 번 보세요. 그걸 찾는 즐거움, 그것도 성경 읽는 재미 중에 한 가지 입니다. 그 만큼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공식적으로 잘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에 우리는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의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어야 합 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나의 하나님이라기보다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들이 제사장을 향하여 사용되었던 것은 그 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감사하는 것은 5절입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 리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기들 조상은 유리하는, 즉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얘기죠. 떠돌아다니는 아 람 사람이었고 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크고 강한 민족이 되긴 됐지만 여전히 거기서 압제받는 민족이었다고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압제받던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구해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갈 때 몇 명이나 갔습니까? 애굽에 70여명이 내려가서 400년 후에 적게 잡아도 200만이 넘어요. 70여명이 내려가서 그만큼 큰 민족이 되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어마어마하게 주셨다는 겁니다. 그걸 고백하라는 거예요. 손에 추수한 맏물 곡식을 들고 하나님께 가서 이걸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떠돌아다니는 아람 사 람이 누굴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아람 사람 은 없어요.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런 얘길 하는 것 같습니까? 아람에 가서 살았던 사람 야곱이죠. 야곱의 외가집이 밧단아람이라는 곳입니 다. 아람 지역에 가서 20년을 살았고 거기서 처자식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가나안 땅에 왔다가 또 식구들을 다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내려갔으니까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야곱의 일가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가서 많이 번성했지만 7절에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 를 하감하시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이 당했던 것을 세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고통, 하나는 신고, 하나는 압제입니다. 우리말로 분간하기는 좀 어렵습니다마는 원어적인 의미를 살펴본다면 고통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말합니다. 신고하는 것은 육제적인 고통을 말하고 압제는 자유로운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노예신 분을 뜻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고통을 애굽에서 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내셨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졌던 이 세가지 고통이 우리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건지 생각해 보십시 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 그 다음에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노예같은 신분, 이것이 우리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생각해 보세요. 요즘 좀 조용합디다만 몇 년 전에 40대 돌연사 얘기가 참 많았거든요. 40대 돌연사의 주원인이 뭡니까? 스트레스죠. 오죽하면 저하고 같이 교회생활 하던 남전도회에서 월례회 때 무슨 안건이 나왔는고 하니까 집에나 교회나 절대 연락하지 말고 우리 한꺼번에 하루쯤 싹 사라져 보자. 왜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가 워낙 크니까 마 아무 소리하지 말고, 어디 가는지 알리지도 말고 저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앉았다가 우 - 3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리끼리 한 번 웃고 떠들다 내려오면 어떻겠느냐? 이게 월례회 안건에 나왔습니다. 전 그게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거든요. 40대 돌연사라는 것이 말로만 들었는데 스트레스를 받기는 엄청나게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정에 돌아오면 이런 게 전혀 없으면 좋지만 가정에서조차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들어가면 정말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눈치를 봐야 합니까? 대답하면 안되죠. 적어도 가정 에서만은 이런 눈치, 저런 눈치 안 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받았던 고난이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를 제대로 믿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서 보니까 그것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앞에 나와서 고백을 하라는 것은 애굽에서 우리 조상들이 이런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 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뭘 들고요? 맏물 추수한 곡식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와서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르 는 좋은 땅입니까? 그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농사짓기에 훨씬 불리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입니다. 농사지을 곳이 별로 없어요. 비가 넉넉한 곳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건설하 고 그렇게 농사를 잘 짓고 있는 것은 엄청난 투자를 해서 사막에 물을 끌어들여 가지고 간신히 이루어 놓 은 것입니다. 농사짓기에 결코 적합한 땅이 아님에도 가나안 땅을 가리켜서 성경은 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가나안 땅이 그렇게 좋은 땅인 것은 토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기후가 좋아서도 아닙니 다. 단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그 땅을 아브 라함의 후손들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는지 잘 알기는 어렵지만 한가지 짐작이 가는 것은 그 땅은 하나님께 서 조금만 손놓아 버리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됩니다. 우리처럼 물을 많이 받아 놓고 가두어 두고 농 사짓는 곳이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조금씩 조금씩 주어지는 그 비, 늦은 비와 이른 비와 이슬이 농사에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만약에 조금만 끊어진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입니다. 하 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할 땅이 사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 자체가 좋은 것 아닙니다. 하나 님이 함께 하셔야만 복을 누릴 수 있는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이 복된 삶은 아닙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 님이 나와 동행하고 함께하는 삶이라면 그것이 참된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감사하라는 것이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이란 무엇을 감사 하는 날인가 잘 보세요. 단순하게 추수하고 얻은 곡식에 대한 감사가 아니고,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복을 주셨고, 압제받는 애굽에서 구해 내셨고, 하나님께서 그 옛날에 하셨던 그 약속을 우리에게 이렇게 잘 이루어 주셨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본 내용입니다. 떠돌아다니던 우리 조상들을 가나안 땅 이곳에 정착케 해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까지 포함된 것이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뭘 감사해야 될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농사도 안 짓는데 뭘 감사 드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감사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 것을 반복해서 기억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 곡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늘 바라시는 것은 이 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기념일도 많이 만드셨고 기념물도 많이 세웠습니다. 툭 하면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뭘 기념하라 하셨죠? 나를 기 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성만찬을 계속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고 살 찢고 돌 아가셨음을 잊지 말라. 그런 의미로서 우리에게 성찬예식을 주신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습니다. 그러 면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뭘 기억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했던 것을 우리 삶에 한 번 적 용시켜 봅시다. 예를 들면 지금 현재 우리가 소득을 얼마나 얻었고 올해 농사는 아니지만 올해 얼마나 돈 을 벌었고 그래서 보니까 아, 이걸 하나님께 드려야겠다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맞이하면서 돌아보라는 겁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었고 그런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이걸 돌아보라는 것이 추수감사절의 의미입니다. - 4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효자제일교회 역사를 몇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참 어려운 시절이 있었죠. 모든 성도들이 다 떠나고 겨우 7, 8가정이 남아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분들은 그때를 기억하면 지금 자리가 비좁은 이 예배 광경을 보기만 해도 감격스럽지요? 그런 아픔들이 있었던 분들은 몇 년 전에 이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하던 그 모습을 기 억하면서 지금 이 모습을 감사하라.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각자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기에 모여 있는 성도님들은 예전에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분 들이 많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을 거쳐서 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계십 니다. 이럴 때에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전에 그 때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 었느냐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어서 고생스러웠 던 기억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죠? 그런 분들은 집이건 어디건 음식투정을 안 합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침 못먹고 밥 대신에 술찌기 먹고 학교 갔다가 선생님에게 얻어터진 친구가 있습니다. 왜 얻어 맞 았겠어요? 조그만 녀석이 아침부터 술 먹고 온다고요. 밥이 없어서 그것을 먹고 갔는데 야단 맞고 나면 얼 마나 서럽겠습니까? 그런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은 반찬이 좋으니 나쁘니 하지 않습니다. 그런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어떤 상이든 받아 놓으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다는 것 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이걸 기억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번 한 주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은혜로운 추수감사절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출애굽사건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무엇이 출애굽 사건인지 꼭 되돌 아 보는 한 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추수 감사절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내는고 하니까 10절을 봅시다. 조상들에게 베풀어 주신 이 일을 제사장에게 다 고하고 마지막에 보세요.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그 일 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걸 뭐라고 그럴까요? 신고식이라고 그럴까요? 하나님 이 은혜에 감사해서 제가 이 맏물 곡식을 가져왔나이다 하나님께 신고를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 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경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 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신고하고 그 다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그러면 끝 납니까? 11절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누구하고 즐거워하라고요? 레위인과 객과 함께 객은 어떤 사람입니까? 손님 추수감사절에 손님 없으면 어떡하죠? 레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직자 여기 레위인을 성직자라고 하시면 그 다음 줄 보세요. 12절 중간쯤에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여기 네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꺼번에 어 떤 사람입니까? 추수할 것이 없는 사람. 과부하고 고아는 추수할 게 없는 사람 아주 좋은 표현이네요. 다른 말로는? 불쌍한 사람. 맞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레위와 객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 뒤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 - 5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과부라고 해서 현대식 과부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혼자서 먹고 살 방법이 없던 시절입니 다. 그럴 때 과부는 아주 불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레위인하고 과부하고 고아를 같은 급수에 넣습 니다. 결국은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즐거워할 일은 누구와 함께 즐거워하라고요? 불쌍한 사 람과 함께 즐거워하라. 이것이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방법입니다. 전도사는 레위인 측에 들어가나요? 왜 대 답 안 하세요?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먹고 살았습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을 안 섬기고 성전에 안 나오고, 툭 하면 우상 섬기던 사람들이니까 아무도 하나님을 안 믿어 버리면 레위인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 것 같습니 까?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마찬가지겠네요. 아무도 제사 드리러 안 나오고 아무도 하나님께 안 나오면 제 사장과 레위인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고민 안 해 보셨어요? 성경 읽으면서 제발 고민 좀 하십시오. 성경 말씀대로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떻게 됩니까? 죽으라는 얘기죠. 이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죽으라는 얘 깁니다. 제사장이 죽었다더라! 레위인들이 굶어 죽더라! 그러면 우상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될까요? 어떤 느낌이 들까요? 굶어 죽는다더라 불쌍해서 곡식을 갖다 줬더니 우리는 이것 못 먹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이것 못 먹습니다. 그러고 굶어 죽더라.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그 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혼자서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거예요. 레위인이 죽어야 하고 제사장이 죽으면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는지 저는 그 모습 을 보면서 어떨 때는 하나님의 지독하심에 대하여 감격해 마지 않습니다. 뭐가 지독해요? 너희는 내 백성 이니까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라는 걸 이중 삼중으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최후의 보루로서 정 안되면 제사장이 죽고 레위인이 죽으라는 얘깁니다. 얘기가 조금 옆으로 나갔습니다마는 과부와 고아를 대접하듯이 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얘깁니다. 전도사 대접하라는 얘기하고 비슷하지요? 제가 이 교회에 와서 전도사로서 대접을 얼마나 받는지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이 상상 못할 정도로 전 기분이 좋습니다. 주일에만 설교나 성경공부를 6번내지 7번 이나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예배 마치고 나가실 때에 뭔가 한마디 할려다 가 안 하고 가시는 것도 훌륭한 대접입니다. 무슨 말을 할려다가 가는지 대충 알 것 같거든요.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빼 놓고... 참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 좌우간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도 고마 운 답변입니다. 제가 학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학부형이 가끔 선물이다 뭐다 하고 찾아오는데 그거 괴롭습니다. 뿌리 치고 도망가는 일도 쉽지 않고 받은 것 돌려주기도 쉽지 않고요. 심지어 어떤 경우는 되돌려 주었더니 작 다고 그러나? 하면서 곱빼기로 다시 보냈어요. 어떡합니까? 섭섭하지 않게, 오해하지 않게 일일이 편지를 다 써야 합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고 구구절절이 해명을 다 해야 합니다.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구 구절절이 나의 교육관부터 시작해서 교육이란 이런 거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다 적어서 되돌려 보내는데 몇 번 그러다가 지쳐버립니다. 그런 일들을 피하고, 말리고, 거절하고, 돌려보내고... 참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한번도 학부형에게 대접 잘 받았다고 기분 좋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 되고 명절 때 우리 성도님들의 선물을 받아 놓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꾸 내놓으 라는 소리 아닙니다. 아! 이렇게 어설픈 사람을 전도사라고 생각하고 이런 대접을 하느냐 하는 것이 참 고 마워서... 혹시나 제가 실수를 했으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고맙다고 전화 잘 못합니다 우리 전도사님 받아 놓고 입 싹 닦아버리더라. 이러지 마세요. 고맙기는 한없이 고맙지만 부끄러워서 전화를 못하는 겁니다. 그 러니 너무 그런 일에 열심을 내지 마십시오. 진짜 고마웠던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도사 대접을 제일 잘 하는 것이 주일 오후에 집 에 가서 한숨 자다가 피곤한 몸 끌고 성경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제게는 그 분들이 제일 고맙습니다. 우리 전도사님께 성경 배워야 된다면서 기를 쓰고 오시는 분이 더 이상 고마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전 도사님 계실 때 본전 빼야 된다. 면서 애를 둘이나 들쳐업고 뛰어오시던 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 6 -

[2001.11.11] 농사도 안 짓는데 무슨 추수감사? (신명기 26:1~11) 전도사를 레위인이라고 친다면 저는 여기 나오는 레위인보다는 형편이 훨씬 낫습니다. 유대인들이 레위 인 대접하는 방식보다는 공부합시다! 고 할 때 열심히 나오는 것이 제게는 가장 좋은 대접입니다. 그것보 다 더 전도사 대접을 잘하는 것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전도사님 저번에 이런 말씀 하셨죠? 그 말씀대로 이렇게 이렇게 살아 보았더니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씀이 아마 가장 전도사 대접을 제대로 하 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번에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너희가 여호와를 알리라 는 표현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찾아가면서 한 번 읽어보십시오 했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읽어보았더니 몇 번 나오던데요? 하는 대답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아십니까? 한 번 읽어볼려고 했는데 중도에 말았던 분들이 아마 더러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전도사님 얘긴데 한 번 읽어보았더니 이렇게 되었던데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전도사 대접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 주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정말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뭣 때문에 즐거워요? 올해 소득을 많이 주셔서요? 그것도 즐거운 일이죠. 그러나 추수감사절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대접하셨고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지를 꼭 기억합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는 분이 있을런지도 모 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죽이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 다. 그 죽은 독생자의 피 묻은 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는 사실 이것 외에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한 주간 준비 잘 해서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합시다. - 7 -

[2001.11.30] 새벽기도-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마가복음 11:1~11) 예 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 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 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 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개역, 마가복음 11:1~11] 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 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면서도 틈틈이 자신이 죄인들의 손에 팔려 죽을 것이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죽으셔야 할 시기인 유월절에 맞추어, 죽어야 할 장소인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감람산을 돌아가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느닷없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나귀 새끼를 타고 많은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 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한꺼번에 수 많은 군중들이 들이닥치면 교통신호도, 경찰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 처럼, 예수님과 무리들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손쓸 틈도 없이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까요?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겸손한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실 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지 500년이 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일시적 으로 왕을 세운 적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지 만 실권은 로마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분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셨답니다. 이스라엘 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 분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니까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 니다. 그런데, 왕의 위엄을 갖추려면 말을 타고 근엄한 모습으로 들어오셔야 하는데 왜 나귀를 탔을까요? 그것 도 새끼를 말입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였으니 사람을 태울 줄이나 알았을까요? 휘청거리지는 않았을 까요? 다 큰 어른이 나귀 새끼를 타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요? 다 큰 어른이 아이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 습이 아닐까요? 코미디에나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왕은 왕이로되 겸손한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겸손한 왕,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보이셔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는 모습 대로 믿고 행동합니다. 도무지 세상을 호령할 것같지 않은 모습으로 오셔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야 뭐라 하시던 자기 생각대로 처신하고,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있 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가 나를 끌고 가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세요. 성경을 펴놓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피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 분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귀기울이시 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겸손한 왕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성경 말씀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점입 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고 합니 - 1 -

[2001.11.30] 새벽기도-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마가복음 11:1~11) 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움직이셨던 분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에도 기록된 말씀을 의지하셨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받은 혹독한 고문과 수 많은 거짓 증언들과 멸시 가운데서도 원망 한마디 않으 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목마르다 고 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마름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까요? 차라리 외마디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왜 목마르다고 하셨을까요? 요한 복음 19:28절에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목마르다고 말 씀하심으로 곁에 섰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때에도 예수님은 시편 69:21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 오니 라고 기록된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우리는 알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고통스러웠 던 순간을 되돌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고통의 순간에 무엇을 기억하셨습니까?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더란 말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순간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사신 예수님입니다. 교회 문만 나가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잊고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러 나왔을 때만 하나님이 보이고 교회문을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 는 분이 계십니까? 앞에 가는 차가 조금만 천천히 가도 욕이 튀어나옵니까? 조금만 마음이 맞지 않아도 견 딜 수 없는 갈등에 빠집니까? 분함에 잠을 못이루는 밤이 더러 있습니까?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던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도무지 어울 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귀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의 머리 속에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말 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슥 9:9). 그 모습이 영구 를 닮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영구보다 더한 바보짓이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이 되십시다.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 씀과 하나님의 임재를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환호하는 무리들은 자기들 멋대로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왕의 행차치고는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이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라고 외칩니다. 나귀 새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쫘악 깔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으니 눈에 보이는 모습보다는 자신 들의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위대한 왕으로 보이겠지요. 나라를 빼앗긴 채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며 서 럽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이제야 좋은 세상이 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길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까는 것은 예수님을 왕과 메시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들은 예수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위대한 왕으로 생각하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의 기대와 달라지니까 태도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늘 동행하던 제자들도 분명히 예수님은 죽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해서 따라왔음에 도 엉뚱한 꿈에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무엇하러 새벽기도에 나와서 이 고생을 하십니까?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복을 더 받기 위해서? 나오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억지로 나오십니까? 그렇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 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렇게라도 기도하십시다. 자식이 잘 되길 비는 것도 부모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기도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래서는 안됩니다. 차츰차츰 어른스러운 기도로 변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던 이들이 며칠 뒤에 겪게 되는 슬픔과 좌절은, 예수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 한 탓입니다. 나 혼자 복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다면 여러분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을만큼 많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공로라곤 전혀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옛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종을 위하여 주인이 목숨을 버렸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 종에게는 무슨 소원이 있을까 요? 자신을 위해 죽은 주인을 위해서 사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보고 사는 것이 아 - 2 -

[2001.11.30] 새벽기도-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마가복음 11:1~11) 니라 죽은 주인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교회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요? 내 욕심만 잔뜩 내어놓고 기도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를 십 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를 우리가 아닙니까? 야, 나도 한 때는 교회 다녀봤는데 별 것 없더라, 돈이나 내라 하고... 전도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전도를 가장 방해하는 사람이 바로 이렇게 해 서 탄생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4. 예수님은 외로이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하게 드 러내십니다. 스스로 왕인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 이라는 죄목으로 죽습니다. 죽을 때가 되 었으니 스스로 원수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맞은편 마을에 나귀 새끼가 있는 것과 주인이 허락할 것이라는 점 을 미리 알고 계실만큼 예지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전혀 주( 主 )라고 하지 않던 분이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주 라고 합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같은 능력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능력도 보여주시지 않고 묵묵 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외롭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환호하는 이 무리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아 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흥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조용하게 생각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다 그렇게 하는데... 다른 교회가 다 하는 일이 라도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살펴봅시다.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고독한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이렇게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는데... 다들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 님의 길인지 생각해 봅시다. 아니라면 예수님처럼 외로운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세상의 단 한 사람도 알아 주지 않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우리의 스승이요, 우리의 구세주십 니다. 불의한 길이 아니라면 기꺼이 불신자들과도 교제를 나누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만, 옳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외롭더라도 세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하나 님의 백성이 됩시다. - 3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조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 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 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 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개역, 출애굽기 30:11~16] 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 여... 예수님께서 내 너를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려, 내 몸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 라고 하세요? 너는 날 위해 무엇 주느냐고 하십니다. 이 찬송가를 헌금 시간에 불러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찬송을 부르면서 헌금을 하신 경험이 있다면 그 때에 얼마를 헌금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생명까지 다 주었다 너 나 위해 무 엇하느냐 하시는데 얼마를 하셨어요? 천원, 이천원 했으면 강심장이죠? 아니, 아무 생각이 없이 부르는 것 따로, 헌금 따로 하셨어요? 헌금시간에 그 찬송을 부르게 하는 분이 참 잘못하시는 거예요. 그건 헌금 찬송 이 아니에요. 아니, 예수님 몸값을 도대체 얼마로 하라고 헌금 시간에 그 찬송을 부르게 합니까? 그 찬송은 우리에게 헌금 많이 내라고 하는 찬송이 아닙니다. 너 날 위해 무엇하느냐고 할 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뭐예요? 너 위해 이렇게 주었는데 그걸 받 아들이라는 겁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너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내 모든 것을 주었다는 말입니 다. 무엇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이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헌금시간에 아무 생각이 없 이 부르면 별 지장이 없습니다만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 도대체 얼마를 헌금하라는 거예요? 앞으로는 헌 금 시간에 절대 이 찬송을 부르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헌금하라고 몸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쯤은 짚어봐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고 생 각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철딱서니 없는 전도사가 겁도 없이 할말 안 할말 다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본문을 한번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숫자를 헤아릴 때에 너희가 만약에 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속전을 내라 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 사람을 다 드리면 곤란하니까 대신에 속전을 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얼마를 내라 고 요구하셨지요? 반 세겔인데 반드시 내야 합니다.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12절) 는 말씀은 만약에 내지 않으면 온역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온역은 쉽게 말하면 전염병입니다. 전염병이 돌아서 죽는다 그러니까 내라. 이것은 반드시 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 때에 보면 성전세로 반 세겔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십세 넘은 성년은 1년에 반드시 성전세를 반 세겔 내도록 되어 있습니 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값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죠. 중요한 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반 세겔입니다. 부자가 좀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좀 적게 내야 타당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생명에 대한 속전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반 세겔, 부자라고 해 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하다고 해서 적게 내지도 말고 똑같이 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은 예물을 요구하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명확하게 똑같이 반 세겔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생 명의 값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상관없이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공부 좀 많이 하고 아는 게 많으면 하나님께 더 값나가고 공부 못하고 배운 것 없고 힘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값이 좀 덜 나갑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다는 뜻에서 하나 님의 백성에 대한 속전은 동일하게 반 세겔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사람 앞에서는 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보다 뛰어나고, 남보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했고, 봉사도 많이 했고, 이만하면 되 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교회 안에서는 가난한 자, 약한 자, 힘없고 능력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 - 1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다. 정말 잘났고 위대한 인물 앞에서도 니나 내나(당신이나 나나) 값이 똑같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삽시다.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 에 반드시 속전을 내야 한다는 것과 그 속전의 값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헌금에 대 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절에 다니시던 어떤 분이 어떻게 교회를 나오게 되었더랍니다. 그런데 나오던 첫날부터 헌금을 그렇게 잘 하더래요. 목사님이 하도 감사하기도 하고 참 신기하다 싶어서 물어 봤대요. 어떻게 헌금생활을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이 분 대답이 절에 다닐 때도 시주를 했는데요. 하더랍니다. 교회에 와서 도 여전히 시주를 했다는 겁니다. 잘 하는 겁니까? 그저 많이만 하면 잘 하는 겁니까? 문제는 아무런 생각 이 없다는 겁니다. 습관적으로 절에 가서 하던 일을 교회에 오면 그 버릇 그대로 하는 거죠. 왜 헌금을 하 며 그 헌금에 대한 의미를 전혀 생각지 않더라는 얘기입니다. 혹시 우리의 헌금이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시 기 바랍니다.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참 많은데 그 중에 헌금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은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까? 속전으로 내라고 한, 반 세겔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반 세겔이 계산 방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너 무 많이 납니다. 한 세겔이 보통 노동자의 4일 품삯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 세겔이면 이틀 일당이 되는 셈이죠. 은으로 따져 보니까 한돈 반 정도가 됩니다. 은 한돈 반이 얼마 정도 가격이 되는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원 안 넘어갈 것 같아요. 그리고 노동자의 이틀 임금이라고 하면 10만원을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구요. 대강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추산을 해 본 것인데 한 2-3만원 정도의 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은돈 하나면 두 사람의 목숨 값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내라고 했을 때에 바닷가에 가서 고기 한 마리 잡아보면 고기 입에서 한 세겔짜리 은전이 하나 나올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너하고 나 하고 둘이 성전세를 내라고 했을 때에 그것입니다. 현재 돈의 가치로 환산했을 때에 2만원 정도거나 조금 넘을런지 모르겠습니다. 1년에 2만원입니다. 52주로 나누면 한 주에 약 400원 정도가 되나요? 그러면 우리 는 굉장히 많이 하고 있는 셈이네요. 우리 헌금궤에 동전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400원, 500원 헌금하시는 분은 없다는 뜻이거든요.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헌금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는 셈 입니다. 쉽게 말해서 생명의 속전을 반드시 내라고 하시면서 많은 것을 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는 표를 내라는 것입니다. 기념입니다. 표를 내라고 하시면서 무리하게 많이 해 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균일하게, 성의 표시만 하는 정도로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액수에 욕심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리빙스톤이라는 분이 어릴 때 왜 헌금을 하느냐고 물었대요. 어린 리빙스턴이 내가 헌금궤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헌금을 하지요 했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못 들어가니까 내 대 신 이것이 들어가는 것이죠. 이것이 헌금의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믿음을 가졌으니 결국 자기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드린 액수는 비록 적을지라도 이것이 자 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도 가급적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리하게 헌금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저 의 조카 녀석이 대학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 위로도 할 겸 격려 차원에서 대학에 합격도 되기 전에 등록금 의 일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합격했다는 소식이 안 들려요.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 전 화가 왔는데 되돌려 보내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십일조를 했다는 겁니다. 아니 그것은 소득이 아니고 애 등록금에 보태라고 보낸 것인데 그걸 왜 십일조를 해요? 십일조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릴 때에 들은 칭찬 중에는 어떤 학생이 등록금을 받아 가지고 가다가 십일조를 떼고 나니 까 돈이 모자라 등록을 못했다는 것이죠. 그걸 칭찬하는 얘기를 제가 어릴 때에 들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십일조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에도 십일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2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어떤 분이 자개가구 공장을 하면서 자개농을 하나 팔면 정확한 값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약 5백만원에 팔린다고 칩시다. 그런데 5백만원짜리 농을 팔면 5십만원을 떼어서 십일조를 했답니다. 제가 얼마나 야단을 쳤는지 모릅니다. 5백만원짜리 자개농을 하나 팔려면 대충 들은 얘기로 처음에 백골을 사온답니다. 백골이 라고 하면 아무 무늬도 없는 농의 재료인 셈이지요. 아무 장식이 없는 뼈대만 짜놓은 농을 사 온대요. 그것 을 사 오면 그 공장에서는 거기에 자개만 입히고 마무리해서 파는 거죠. 그러면 농 하나를 팔면 내게 남는 소득이 얼마가 되느냐를 계산해야 합니다. 백골 값을 빼고, 자개 값도 다 빼고, 그 다음에 직원들의 월급도 다 계산하고 뿐만 아니라 공장 유지비 를 다 계산을 해서 자기에게 떨어지는 게 얼마가 되는지를 계산해야 합니다. 가령 5백만원에 팔았다면 원 가 계산을 해보면 450만원이 들어갔다고 하면 자기 손에 남는 것은 50만원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팔 때 마다 50만원씩 헌금을 하다보면 결국은 공장 문 닫습니다. 자기는 안 먹고 사나요? 열심히 해서 많이 벌었 고 헌금도 많이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면 원금을 다 까먹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시던 십일조를 하 실려면 원가계산에 철저해야 됩니다. 집 수선하시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십일조 하기가 참 어렵대요. 집 한채 뜯어 고치거나 방 한칸 을 수리하는데 자재비하며 이것 저것 다 계산해 보지 않으면 도대체 얼마를 벌었는지 주먹구구식으로 해서 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꼼꼼하게 계산하시는 분들은 그것 때문에 자기 삶이 튼튼해집 니다. 제 친구 중에 그런 계산을 해 보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번에 얼마를 벌었다고 생각하면서 잘 쓰 고 다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빚만 잔뜩 남고 원금은 어디 가고 없더랍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하기 위해 서는 이런 계산을 철저히 해야 됩니다. 반면에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참 쉽죠? 월급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받은 총액에서 하면 됩니까? 받은 현금을 보고 합니까? 월급 외에 부정기적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게 있으면 이것은 어떻게 하 지요? 월급 총액 중에는 전혀 소득이 아닌 것도 들어 있습니다. 연말에 세금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복잡한 절차를 한번 따져 보세요. 내가 어느 부분에 대해서 십일조를 해야 될지를 한번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아이고, 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걸 뭘 계산을 하고 그러나? 가급적 많이 하면 좋은 것이죠?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조건 많이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월급을 받는 분도 십일조를 어느 금액으로 할 것이냐? 끝에 조금 남는 것은 떼서 올릴 것이냐 잘라버릴 것이냐? 왜 십일조 봉투에 동전은 안 나와요? 잘라 냅니까 아니면 올려붙입니까? 올려 붙입니다. 무조건 많이 드려야 하니까요? 다른 때는 보통 잘라 버리거나 사사오입 하는데요? 다른 경우에는 자르 지만 헌금할 때만 자르지 않고 절상을 하고요? 왜요? 야단치실까 싶어서요? 중요한 것은 무조건 우리가 하 나님께 많이 드려야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집 팔고 십일조하는 분을 봤어요. 집을 팔면 그것이 소득입니까? 감사 헌금을 하겠다는 것은 말이 돼요. 그러나 집을 팔고 십일조를 하겠다? 이사 자주 다니는 사람은 집 한 채 날아가기 일도 아닙니다. 열심히 십일조하면 하나님께서 그만큼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십일조만은 소득이 얼마인지를 분명히 계산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약 5천만원짜리 집을 샀는데 한 20년 살았는데 1억에 팔렸습니다. 그러면 얼마를 십일조로 해야 되나요? 계산이 어렵습니다. 살 때에 5천만원, 팔 때에 1억이니까 차액 5천만원에 대해서 십일조를 하면 됩니까? 아니면 판 값 1억에 대해 서 십일조를 합니까? 이것 저것 따질 필요없이 그냥 집을 판 값에서 십일조를 합니까? 분명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정말 끝도 없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무조건 해야 하고, 많이 드리는 것이 잘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헌금, 즉 돈이 아닙니다. 무얼 하나님께 드려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 립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 계산을 하라고 하느냐? 계산을 한다고 하면 어쨌든 좀 적게 낼려고 그러는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복을 계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만큼 복을 주셨느냐 를 따져 보고 분명한 사실을 알고 감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계산을 실컷 해 보니까 손해가 났어요.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감사하면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비록 손해를 보았지만 내가 감사합니다. 하는 - 3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가 난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이만큼의 소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서 열 심히 십일조를 떼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분명히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기 위해서 입니다. 계산을 분명하게 해서 세금 계산을 하듯이 좀 깎아 내라 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헌금은 무조건 많이 해야 된다 무조건 해야 한다 하는 이 생각이 잘못된 헌금 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또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을 의식하는 헌금입니다. 남부끄러워서 헌금하는 흉내를 내는 수가 참 많죠. 저 자신도 그런 느낌을 종종 가지기도 하고, 그런 경우를 목격한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헌금 당번 할 때의 일인데 그 날 따라 추수감사절 예배를 다른 교회들보다 한 주일 늦게 드렸어요. 마침 설교하러 오 신 분이 어느 선교사님이셨어요. 선교사님이 설교를 하셨고 사모님이 제일 앞에 앉으셨어요. 그런데 그 날 헌금 주머니를 두 번 돌렸습니다. 처음 한번은 괜찮았어요. 두 번째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추수감사절 헌금을 하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또 나갔죠. 헌금주머니를 비우고 돌아서는데 사모님이 당황해 서 여기저기를 뒤지고 계셨는데 기다려야 할지 지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 사모님은 지난 주 어디에서 예배를 드렸는지 모르지만 추수감사절 헌금을 분명히 했을 겁니다. 그런 데 여기에 왔더니 느닷없이 추수감사 헌금을 또 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안 하면 되잖아요. 분명 히 안 하면 됩니다. 준비도 안 해온 헌금을 왜 할려고 부랴부랴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왜 뒤지고 그럽니 까? 선교사님 부인도 헌금주머니를 보고 이런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 래서 저는 헌금주머니 돌리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고 반대하고 반대했는데도 개선이 안되더라구요. 우리 교 회는 그럴 걱정이 전혀 없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헌금을 하나님만 생각하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알게 모르게 많이 본다는 뜻입니다. 제발 하나님만 봅시다. 많든지 적든지 내 마 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다른 공부 모임에서 장난삼아 한번 물어봤어요. 왜 헌금궤에 동전이 없을까? 명답이 무엇인지 아십 니까? 소리가 나니까요. 동전을 넣어서 소리가 나면 안되나요? 좀 챙피하니까요? 그러면 밑바닥에 소리가 안 나도록 무엇을 하나 깔아야 될까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마는 우리가 헌금 준비를 잘 해서 헌금을 한다 면 헌금궤에서 동전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왜 나와야 하는지는 조금 후에 설명을 드리죠. 괜히 우리 재정 부 집사님들께 야단을 맞을런지 모르겠네요. 동전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면 그것을 처리하기가 얼마나 어려 울런지 모르겠습니다. 소리가 나기 때문에? 집사가 돼서 어떻게 헌금궤에 동전을 넣겠나? 천원짜리 넣는 것 도 부끄러운데 백원짜리를 넣는다? 있을 수 없다고요? 아니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헌금을 할 때에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름을 감추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 자랑을 하고 싶죠? 자랑하고 싶을 때 헌금을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해답이 간단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헌금이 될 때에는 무명으로 하고 좀 감추고 싶을 때, 헌금을 그것밖에 안 하나 부끄러울 때가 좀 있 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에는 또 거꾸로 합니다. 내가 어떻게 헌금을 하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지 오직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헌금을 드릴 때에 준비를 좀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사실은 별 준비없이 헌금드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동전이 사라진 이유가 제가 보기에는 딸그락거리는 그 소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준비를 안 하 기 때문에 동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일마다 액수를 정해두고 하 시는 분들도 있을테고 아니면 그 날 기분 따라서 많이 하시기도 하고 적게 하시는 분들도 있을테고 지갑을 열어보고 형편을 봐서 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고정적으로 한다고 할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가령 올해에 천원을 헌금하시던 분이 내년에는 얼마를 합니까? 이천원 합니까 천원 합 니까? 그런 고민을 안 해보셨는가 보네요. 지금부터 합시다. 올해 천원을 하시던 분이 내년에 천원을 합니 까 이천원을 합니까?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 4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네! 내려가지 않으면 그러면 여전히 천원을 하네요. 그러면 올해 천원을 하고 그 다음 해에 또 천원을 했습니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천원을 하나요 이천원을 하나요? 형편 따라요. 물론 형편 따라 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좀 해 보세요. 천원씩 헌금을 몇 년간 계속하다가 그 다음은 이 천원으로 가지요? 헌금하는 기준을 나름대로 정해놓고 합시다. 가령 올해 우리 집안 형편을 감안해서 천원 만 하기로 한다면 천원을 하시면 됩니다. 자, 한해가 지났습니다. 내년에는 그대로 천원을 하면 됩니까? 아 무래도 생각을 좀 하자는 거예요. 우리 봉급이 전체적으로 약 10%가 올랐고 물가도 좀 올랐다. 교회의 재 정도 조금 늘었다. 그러면 내가 맡은 부분에서 최소한 그 정도는 하는 게 맞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하던 헌 금에서 얼마를 조금 보태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얼마요? 10% 그러면 1100원이 되고 조금 더 마음을 써 서 20%를 한다면 1200원이 되어야 맞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헌금을 한다면 동전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하니까 올해는 무조건 천원이다 해서 계속하고 내년에 이천원으로 올리려니 너무 인플레가 심하다 그러면 올해도 천원을 그대로 하고 내년에는 천원씩 2년을 했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천원으로... 이것은 헌금하는 사람의 편의주의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 주부터는 꼭 동전으로 헌금하라는 뜻이 아니고 최소한도 그렇게 생각을 해보 자는 뜻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헌금에 천원짜리가 들어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고 하데요. 그건 말이 안됩니다. 형편이 안되면 동전도 들어가고 형편이 넉넉하면 큰 돈도 들어가는 것이지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액수에 대해서 그렇게 시시비비를 따지셨습니까? 어떤 기준으로,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뜻입니다. 지폐로만 하면 서로가 편리하지요. 헌금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보면 동전이 나올 수도 있 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헌금하는 기준을 무엇 으로 잡을까? 어떤 분은 한끼 식사의 평균치를 주일마다 헌금을 하겠다 그렇게 정했답니다. 좋은 생각이라 는 느낌을 제가 받았습니다. 아니면 한끼 식사의 절반정도만 하겠다는 등 이런 기준이 있으면 동전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동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준비를 잘 하자는 뜻입니 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것이 헌금하는 사람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헌금할 때 지폐를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서 헌금을 했다고들 하거든요. 다리미로 다린 지폐하고 꼬깃꼬깃 접힌 지폐하고 어느 것이 가치가 더 있습니까? 똑같죠? 뭐가 차이가 나요? 헌금하는 사 람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것입니다. 오늘부터 열심히 다리자? 다리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 은 하나님께 이런 기준에 의해서, 이런 생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 다리미로 다리는 것보다 더 잘 하는 일입니다. 지폐만으로 헌금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각이 조금 부족하지 않느냐는 뜻입니 다. 겸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이들 헌금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헌금을 하게 합니까 아니면 부모의 헌금을 아이가 전달만 합니까? 주로 배달만 시키는 경우가 많죠. 주일 아침에 아빠나 엄마에게 헌금 받아 가지고 가서 선생님께 전하기만 하는 것은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빨리 고쳤으면 좋겠네요. 아이들 용돈을 일정하게 정해두고 그 용돈 중에서 일부를 자기가 아껴 두었다가 헌금하게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헌금하는 마음을 기르고 자기 것을 드린다라는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하나라 도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에 대해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저 나름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바르게 하는 헌금은 반대 로 하면 되지요. 바르게 하는 헌금은 액수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 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서를 보면 제사를 드릴 때마다 단서를 붙이는 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입니다. 열납하시도록 하는 것은 기쁘게 받으시도록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헌금도 그렇고 봉사도 그렇고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없으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제물을 많이 갖다 드렸습니 - 5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누가 저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없느냐고 외치는 거죠. 제 발 저 문을 좀 닫으라는 겁니다. 왜요? 그런 제사 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헌금이 하나님에 대한 감 사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마음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고, 성의도 없고, 심지어 아까운데 이것 좀 안 하면 안되나 이런 생각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제발 저 문 좀 닫아 걸 수 없느냐라는 것입니 다. 헌금을 가장 잘 하시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이만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마음으로 드릴 때에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하는 헌금이 되는 것이지요. 기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헌금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헌금하는 게 별로 기쁘지는 않고 또 헌금하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면 특히 십일조 같은 것은 얼마나 아깝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십일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경이로운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그렇 게 교회에 다 갖다 바치고 어떻게 살아요? 함께 근무하던 어떤 분이 그래요. 연말 정산 자료를 힐껏 보더 니 아이구 선생님 헌금을 이렇게 하고 뭘 먹고 살아요 하더라고요. 제가 간단하게 얘기를 했죠 당신 신랑 술값보다는 적으니까 괜찮아. 당신 신랑이 술집에 그렇게 갖다 주고도 어떻게 살아?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대단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십일조 이거 아까워서... 그런 생각이 들 때에 우리는 어떻 게 하지요? 내가 안 기쁜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가능하다면 그럴 때는 안 하는 게 좋겠습니 다. 하지 마십시오. 왜요? 아까운데 억지로 하면 내게도 좋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분이 안 좋으실테니까요. 그러면 헌금을 중지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만한 은혜를 주셨고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먼저 배우시는 게 순서입니다. 부지런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 셨다는 것을 느끼고 감사하거든 그때에 헌금을 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실 테니까 헌금을 드 리자?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건 좀 고칩시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할 때, 신앙적으로 어릴 때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아빠한테 선물을 하나 했더니 아빠가 기분이 좋다고 그 다음 에 더 큰 선물을 하나 주었습니다. 기쁘게 받아야지요. 그런데 눈치 빠르고 꽤 많은 아이가 그걸 눈치를 챘 습니다. 야 우리 아빠한테는 작은 선물 하나 드리면 더 큰 것이 온다 그걸 알고 선물을 하는 것을 아버지 가 알아버리면요? 하나님도 그런 감정이 있고 인격이 있고 우리 속을 훤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서 가장 기쁘시게 받으시도록 헌금을 해야 합니다. 헌금은 자기 수준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남이 얼마를 하니까 내가 해야 되겠다 이건 좀 위험합니다. 항상 자기 수준에 맞추어서 헌금하시는 것을 잊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이런 경우가 더러 있죠. 어 떤 부흥회나 특별한 집회에서 특별한 목사님이 오셔서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감동이 되어 있는데 자! 헌금 을 얼마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어요. 작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부부가 상의해서 하면 헌금 액 수가 줄어요. 그러니까 집에 가기 전에, 지금 약간 흥분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작정을 해야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흥분도 좀 되었고 감격도 되고 해서 무리인데 할까말까 하다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과 감하게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 혼자만 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작정을 했는데 집에 가보니까 자기 부인이 믿음이 더 좋아가지고 더 크게 해 놓았네요.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께 한 약속이니까 해야죠? 그렇게라도 해서 무조건 하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고요? 그렇게 흥분된 상태에서 앞뒤를 재어 볼 것 없이 과감 하게 결정을 하도록 인도한 분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헌금을 작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유도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아요. 헌금은 절대로 흥분된 상태에서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맞추어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부부는 혼자가 아닙니다. 헌금생활에 있어서도 남편이나 부 인이나 혼자서 독단적으로 하는 것은 안됩니다. 반드시 남편이나 아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가끔 부인은 신앙이 좋고 남편은 초보인데 부인이 남편 몰래 십일조를 하는 경우가 있죠.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드리고 싶죠? 십일조를 하 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으면 남편 몰래 십일조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기쁜 마음으 - 6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로 십일조를 할 수 있도록 신앙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이 하나님 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도록, 내가 만약에 이 남편에게 종노릇을 해서라도 남편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부터 먼저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둘이서 기 쁜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어렵습니다. 종노릇이라도 해서 할 수만 있다면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남편 몰래 헌금부터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일단 부부가 되었으면 서로 의논을 하셔야 합니다. 합의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 이 더 좋아서 내가 끌고 가야 한다? 아니오. 신앙이 더 좋다고 생각이 되면 내가 데려가야 할 이 사람이 나와 같은 수준이 될만큼 신앙으로 이끌고 가야 합니다. 이게 헌금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봉급이 적을 때와 봉급이 많을 때 어느 쪽이 십일조를 하기가 더 어려울까요? 많을 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복을 주시면 안되겠네요.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셔서 소득이 많아지면 십일 조하기가 어려워지나요? 똑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봉급이 많아지면 십일조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거예요. 일반적인 경향이 좀 그런 것 같아 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못 먹고 살 때는 십일조를 잘 하더니 복 을 많이 줘서 돈이 많아지고 풍성하게 되니까 십일조 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니 소득이 적을 때나 많을 때 나 비율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봉급이 적을 때야 10분의 1을 떼어도 액수가 얼마 안되는데 봉급이 많을 때 10분의 1을 떼니까 액수가 많죠. 우리 눈이 액수에 관심이 있으니까 자꾸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이왕 액수를 볼려면 거꾸로 보면 좋지요. 봉급이 작을 때는 십일조를 떼고 나니까 요것 밖에 안 남았네. 봉급이 많을 때는 십일조를 떼고 나도 이만큼 많이 남았네! 이렇게 하면 은혜가 안되나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에는 소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형편이 정 어려워서 안되면 양이나 염소를 드 리라고 했습니다. 그럴 형편도 안되거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둘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 하면 참 재미있어요. 요즘 소 한마리에 얼마정도 하지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몇 백만원이라고 하는 모양 입니다. 염소 한 마리는요? 몇 십만원요. 그러면 몇 십분의 1로 떨어지지요. 그것도 안되면 산에 가서 비둘기를 잡아서 오면 돈이 안 드네요. 잡 을 힘이 없어서 산다면 비둘기를 산다면 얼마할까요? 닭값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몇 백분의 일로 떨어지네 요. 가격차는 이렇게 나는데도 제사의 효력이 동일합니다. 그럼 뭘 드리죠? 다 같은 제사인데요. 다 같은 번제인데 무얼 드릴까요? 소를 드려요... 형편 따라. 형편 따라 드린다는 분도 있고 소를 드린다는 분도 있는데 소를 드리는 분은 형편이 아주 좋은 분이군 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번제를 드려야 할 때에 마땅히 번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 드리는데요 이런 소리 하지 말고 번제는 반드시 드리라는 겁니다. 다만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고려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마는 자신의 형편을 잘 고려해서 드 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힘에 지나도록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세요. 야구 선수라고 야구 방망이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도 합니다. 선교를 위해 떠나는 친구, 등록금 이 없는 전도사, 교회 건축,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때로는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 다.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신학 공부를 하는 동료가 있더라구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어요.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 양식을 날라다 준 까마귀 말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힘을 써야 - 7 -

[2001.12.02] 헌금궤에서 사라진 동전들 (출애굽기 30:11~16) 할 때는 써야 합니다. 이것은 평소의 헌금이 아니라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교회 행사나 자선을 베풀 때 가난한 사람이 기가 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육관에 피아노를 누가 기증했을까요? 알려고 하지 마세요. 궁금하지만 본인이 무명으로 하겠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지만 악착같이 살펴보고 이 경우, 저 경우를 다 따져서 누가 한 것인 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린다구요? 정말 나쁜 버릇입니다. 남의 연애편지를 뜯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요지는 헌금을 많이 해라? 입니까? 하지 마라? 입니까? 해라도 아니고 하지 마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액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 관심 이 있습니다. 마음을 드립시다. 아까운데 억지로 하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을 배우세요! 하나님께서 내게 베 푸신 은혜가 무엇인지 배우는 일에 노력하세요. 그런 다음에야 헌금이 기뻐질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뼈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자식을 입히고 먹일 때 아까운 느낌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어머 니가 듣기에 가장 기쁜 소리는 자식의 목구멍에 젖넘어가는 소리랍니다.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기쁨이 이 와 같기를 바랍니다. 제 친구 중에 너무 가난해서 주일학교 초등부 시절에 헌금을 드리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자기 말로 약속어음을 발행했답니다. 액수를 적고, 커서 반드시 갚겠다고 적어서 헌금주머니에 넣었답 니다. 장난쳤다고 선생님께 몹시 야단을 맞았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 릅니다. 눈물을 흘렸답니다. 헌금할 형편이 못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 때문이지요. 헌 금할 수 있음을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다 아시기 바랍니다. - 8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살 말씀이 생각났더라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 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 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 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 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 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개역, 사도행전 11:1~18 ] 다 보면 때로는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흔히 생기죠? 억울해서 잠이 잘 오지 않는 밤 에 무얼 하셨습니까? 잠은 잘 안 오고, 이 억울한 것을 어떻게 갚나? 시간이 약입니까 아니면 좋 은 방법이 있습니까? 저도 드물긴 하지만 이 억울함을 어떻게 갚나 해서 밤새 공상을 하기도 하 고 머리 속에서만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봅니다. 그러다가 내리는 결론은 내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슈퍼맨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이 세상이 다 뒤집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잘한 일에 화를 내고, 머리 속 에서지만 이렇게 원수를 못 갚아 안달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 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어떤 분이 어릴 때에 가출을 해서 깡패들 소굴에 붙잡혀 가서 도둑질 교육을 받았는데 도둑질을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엄청나게 혼이 났답니다. 주일 학교 때에 배운 선생님의 말씀 도둑질은 나쁜 것이다 는 한마디가 생각이 나서 못하겠다고 버티었다가 거 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맞았답니다. 꽃동산교회라고 어린이 전도로 아주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를 개척해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어릴 때 고아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도둑질을 해서 는 안된다는 이 한마디 때문에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은 우리나라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서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그 한마디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죠. 가끔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 더 이상 나쁜 길로 가지 아니하고 행동을 조절할 수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말씀이나 누구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생을 붙들어 주고 있습니까? 오늘은 성서주일이라고 합니다. 성경주일이라고 하면 더 좋겠는데 성서주일이라고 하는군요. 성서주일을 맞이해서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힘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어려울 때나, 분함을 이기 지 못하여 잠 못 이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힘들고 어려울 때에나 잠 못 이루는 밤에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와 닿기를 바랍니다. 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그 말씀으로 인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불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더니,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절을 보세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문하여 가 - 1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로되 라고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 형제들, 그리고 할례자들입니다. 이 세 종류의 사 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그 소문을 듣고 이 사람들 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충격을 받고 실망한 사람들은 할례자들입니다. 할례자들이 라고 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을 그대로 지키는 유대교 신자같은 사람들이죠.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대교적인 사고방식을 전혀 버리지 못한 이런 사람들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사고 방식은 여전히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유교적이라든가 우리 조상들이 전해준 전 통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도 읽고 배우지만 뭔가를 결정할 때는 부모들의 그릇된 충고나 이기적인 본능에 따르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물도 필요없고 신앙만 좋으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결혼할 때가 되면 신앙이 제일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경우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사고 바탕이 성경적이어야 하고 성경말씀이 내게 무 어라고 하느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우리가 성경대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삽시다 하면 체면상 아멘 하고 교회 문 밖을 나서면 목사님이야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말씀을 그리 하시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살아 갈려면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한 거야! 그러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아갑니다. 말씀 따로, 사는 것 따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힐난했던 사람들이 아 마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버렸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말씀대로 살면서 자랑할만한 것, 좋은 것, 귀한 것들을 깨끗하게 버렸습니다. 무엇으로 여기고요?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구약의 모든 율법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 던 이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돌아오자 아주 심하게 질책을 합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그 베드로를 향해서 질책을 합니까?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 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베드로, 베드로, 이웃집 아저씨 부르듯 이 잘 부르지만 초대교회 때의 베드로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교황을 떠받드는 것 이상으 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한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는데도 그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 게 힐난할 수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이 할례자들은 간이 굉장히 큰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거꾸로 생각 을 해보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가 잘못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이건 예사 일이 아니다. 아무리 베드로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담대히 나설 수 있 을 만큼 할례자들이 볼 때는 베드로가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이기에 이럴까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 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까지 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던 일입니 다. 왜요? 유대인들이 생각을 할 때에 이방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기도에는 이방인을 가 리켜서 지옥의 불쏘시게로 쓸 사람들 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사람 취급도 않던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 씀이 전해진다? 이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해라고 했을 때에 요나가 왜 도망을 갔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것을 자기에게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슨 왕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겼지 결코 세상의 구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의 사고방식 속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도 안되고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교제도 안 했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을 따라서 이방인의 집에 가서 먹고 자면서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할례자들만은 아닙니다. 사도들도 놀랐고 형제들도 여전히 놀랐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할례자들이었지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2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큰 잘못을 베드로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3절에서 15절까지 보면 베드로가 경과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이 부분만 보면 베드로가 성질이 참 좋은 사람 같지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베드로의 인품이 아주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질이 얼 마나 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시면 맞고 틀리고를 가리지 않고 제일 먼저 나서는 사람입니 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말고의 귀를 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명답을 말한 사람도 베드로이지만 돌아서서 이 사탄아!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역시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해변가에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 라고 한 분이 있어서 말씀대로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요한입니다. 저 분이 누굴까 하고 한참 바라보던 요한이 아! 예수님이다! 그 말을 듣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 다. 고기를 잡느라고 벗어두었던 옷을 입고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어가서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배를 몰고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얼마나 급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 할례자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3절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해 나갑니다. 베드로가 언제 사 람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오순절 때에 성령을 받고 수양이 많이 되었거나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에 이렇게 유순해졌을까요?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쉽사리 변하는 게 아닙니다.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베드로 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미대로 급 하게 설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베드로가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차 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잘 읽어보면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이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신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럴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의 성격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성미가 급하고 불같은 사람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에 그렇게 나설 문제가 아니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바쁜 사람이더라도 중요한 문제에 부닥치면 사람이 차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미 급한 베드로조 차 차분하고 끈기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여기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면 복음은 이스 라엘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을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질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뒤를 이은 바울도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바울이 그 뒤에 등장할 수 있도록 베드로가 지금 길을 닦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이런 작업을 못해 놓았으면 다음에 바울이 나와서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기초를 닦은 것입니다. 본문을 차 근차근 한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환상 속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보자기입니까 그릇입니까? 그릇입니다. 보자기라고 기억하 시는 분이 많이 계시죠?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보자기가 아니고 보자기 같은 그릇 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여기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때로는 작은 관찰 하나가 엄청난 은 혜를 주기도 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 왔는데 그 그릇이 보자기 같더라. 어마어마하게 크더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여러 짐승들이 내려왔는데 부정한 짐승입니까 먹 을 수 있는 짐승입니까? 이 말씀만으로는 부정하다는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6절을 보면 땅에 네 발을 가진 것, 들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 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 자체만 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뒤에 말하는 베드로의 말을 보아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부정한 짐승을 먹을 수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 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고 말씀하시는 환상을 세 번 보았을 때 밖에 사람들이 찾아왔더라는 거예요. 환상 때문에 갔습니까? 그 사람들이 오라고 해서 갔습니까? - 3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환상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갔죠? 성령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입니다. 가서 보니까 누 군가가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했더니 그들에게도 성령 이 임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도 놀랐습니다. 베드로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이것은 나의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된다라고 깨달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 본문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세 번의 환상이지요? 이 환상 때문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전해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아닙니다. 환상을 보고도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데 사람이 찾아온 거 죠. 이런 환상을 보고 묵상 중인데 웬 사람이 찾아왔다? 날 데리러 왔다? 아하!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겁니 까?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성령이 가라고 하면 말귀를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이방인들하고 같이 가면서 환상의 의미를 깨달아 알 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래도 몰랐습니다. 가서 말씀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했더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더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아!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깨달았습니까? 여전히 아닙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언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나 한번 보세요. 16절입니다. 중요하니까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고 합니 다. 놀라운 경험을 연속으로 하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베드로는 지금 모르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의사 가 아니에요. 일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는지 베드로는 모르는 겁니다. 그러 다가 문득 떠 오른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요한 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각났더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에 아!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에게까지 증거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죠. 여러 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밤에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았으니까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되어가는 상황을 보니까 아!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무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자기가 말씀을 전했을 때 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음을 알 수가 있음에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 히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그 때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 예수 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 습니다. 모르고 들어놨던 그 말씀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딱 떠올랐습니다. 아!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 리키는 것이구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말씀이 떠올라줌으로 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꿈에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에 부합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민스럽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 소에 입력을 좀 해 놓아야 합니다. 다 알고 입력을 하는 게 아니고 잘 모르더라도 그냥 입력을 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보니까 아참, 성경에 이런 말씀이 들어있더라 는 생각이 나지요. 평소 에 입력해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실 때에 걱정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 면서 내가 가면 너희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이것을 가장 크다고 해야 할지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가르 쳐주신 그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령의 사역이 그것만은 아니 지만 중요한 사역의 일부인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말씀이 예수님에게도 얼마나 소중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항상 성경말씀을 인용하 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록된 대로 움직이시면서 사역하셨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길 때도 항상 성경말씀을 가지고 이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 하고 맹세하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죠? - 4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 예, 맞습니다.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는데 닭이 울더라는 말입니다. 닭이 우는 순간에 닭소리를 듣고 회개했습니까? 닭이 우는 그 순간에 머릿속에 팍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 라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지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펑펑 우는 겁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다고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 그 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고민되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 다 할 때에 성경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입력이 된 게 없으면 떠오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시끌벅적한 이상한 영화가 하나 들어와 있죠? 니코스카잔차키스라는 사람이 1950년 경 에 마지막 유혹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나라에 영화로 들어와서 시끌벅적 하거든요. 이 분이 기독교를 깎아 내리거나 해롭게 할려고 그 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이 소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앙적으로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썼고 그와 비슷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 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작가는 예수님을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아주 위대한 위인으로 보는 것이죠. 내용인즉 예수 께서 위대한 인물로서 사역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정신이 혼미할 즈음에 이전에 물러갔던 마귀가 다시 찾아와서 예수님을 미혹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내려와서 이 고난을 당하지 말고 평범 한 사람으로 살라는 거예요. 소설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부분이 가장 비중이 높게 그려집니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다른 게 있습니까? 메시야의 임무를 버리고 내려와서 평범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 고 살다가 나이가 많아서 해가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처자식을 데리고 즐기고 있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좀 길어요.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에게 마귀가 환상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길게 진 행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립니다. 아, 이게 마귀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구나. 내가 이 마귀의 유혹에 넘 어갈 수 없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전하게 다 감당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걸 영화로 만든 사람이 원저자의 그 의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살렸는지 다른 의도적인 왜곡은 없는지... 조금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을 읽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고 질문을 좀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은 읽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런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듣기로는 결혼하고 연애하는 장면이 너무 사실적이고 외설스럽게 묘사된 모양입니다. 이 소설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순간에 사탄의 그런 유혹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건 누구의 생각이죠? 이 소설을 쓴 그 저자의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볼 때에 예수 님은 위대한 인간으로서 그 어려운 때에 그런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또 그 유혹을 이겨내었으니까 더욱 위대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 분이 생각하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건 그 작가가 그려 낸 그 작가의 생각이며 위대한 위인들은 그런 어려움을 견디어낸 사람이니까 그렇게 묘사하면 예수님이 더 위대한 인간으로 보여진다는 의도입니다. 기적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게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시편을 찾아보겠습니다. 69편 16절부터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란중에 있사오니 속 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 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21절을 주목하십시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 니...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순간에 묵상하고 계셨던 성경구절입니다. 십자가에 달 - 5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려서 고통이 극심할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구절을 묵상하고 계셨다고요? 말이 될까요?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다 동원해도 예수님의 그 고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약한 고통을 당하면서 힘 들어 할 때에 성경구절을 생각하시는 분이 잘 계실까요?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이 심하다고 하데요. 그 고 통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으며 이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야! 하신 분 계세 요?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에 달려서 그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사실은 시편의 이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 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기억하시면서 내 주변에 있는 저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나에게 쓸개를 먹이며 초를 먹이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깨달으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목마르다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하실 말씀이 그렇게도 없었을까요? 아니 목마른 게 제일 고통일까요? 십자가에 달려서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목마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다급한 일이었겠느냐는 겁니다. 하실 말씀이 그것 외에 없어서일까요? 다 이루었다 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함으로 저기에 있는 저 무리들이 시편에 예언된 대로 이 일을 이루게 함이었다는 사실입니 다. 말이 좀 이상합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요한복음 19장 28절입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왜 목마르다 하셨어요?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무슨 성경요?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구절입니다. 조금 전의 그 구절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 셨다는 겁니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동의 할 수 있구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조금 전에 니코 스카잔차키스의 그 소설 얘기를 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예수님의 위대함은 바로 그 소설 의 내용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이 순간에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작가는 철학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분입니다. 당대에 유명한 철 학공부를 다 섭렵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위대한 사람으로 그린 것이 그 소 설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그런 식의 위대한 인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극심한 고통 가 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 한 말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그 말씀들을 묵상하고 계셨더라는 얘기 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 중에 남은 일이 있느냐를 그 십자가상에서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쭉 생각해 보니까 아! 하나 남았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는 겁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던 예수님입니다. 그 후에야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얼마나 소 중하게 여기고 계셨으며 예수님의 행동근거 하나 하나가 구약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삶이었다는 것을 이 것 하나로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다 큰 사람이 나귀새끼를 탔으니 어울리겠습니까? 더군다나 어른을 태워본 나귀라면 좀 낫겠지요?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 귀새끼를 다 큰 어른이 올라탔습니다. 위엄에 가득 찼겠죠? 아니, 어떻게 본다면 다 큰 어른이 애기 자전거 를 타고 가는 것하고 비슷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코메디 같은 일을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그것 역시도 스가랴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말씀 을 생각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보았던 그 세 번의 환상보다도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더 중요합니다. 아니 이적보다 중요하고 기적적인 병고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더 중요합니다. 성 경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말씀을 여러분은 하루에 몇 장이나 읽으시나요? 중요하다, 중 - 6 -

[2001.12.09] 말씀이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11:1~18) 요하다 아무리 증거해도 안 읽는데는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읽으셔야 합니다. 도저히 눈이 아파서 못 읽고 안 보여서 못 읽고 바빠서 안되면 어떡합니까? 들으면 되잖아요. 듣는 테이프가 있다고 지난 번에 말씀드 렸습니다. 읽을 수가 없으면 들어야 합니다. 읽어도 모르겠고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면 열심히 배 워야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교회가 성경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 공부할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더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GBT 선교사라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번역 선교사라고 합니다. 이 분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훈련을 받고 일정한 지역으로 갑니다. 거기에 가서 그냥 살아요. 살면서 그 나라말과 문 화와 언어를 전부 배웁니다. 다 배워서 성경을 그 나라말로 번역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 로 영어는 물론이고 외국어 몇 개 정도는 잘 하는 분들입니다. 아주 능력이 뛰어난 선교사 한 분이 선교사 로 지원하고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마침 한 방에 나이가 많은 외국인과 같이 거주하게 되었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려니까 외국 노신사가 먼저 일어나서 성경을 보고 있더랍니다. 아침 인사를 해야지요. 밤 새 잘 주무셨습니까? 이걸 영어로 해야 되는데 뭐라고 할까? Do you have a good sleep? 한참 궁리하다 생 각해낸 게 이겁니다. 한참 궁리 끝에 이제 깨는 것처럼 일어나면서 Do you have a good sleep? 했더니 빙긋 이 웃으면서 Good morning 하더랍니다. 미국 사람이 아침인사를 Good morning이라고 한다는 거 모르는 분은 안 계시지요? 아니, 선교사님이 그 인사를 몰랐을까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영어 배우고 공 부하면서 서양 사람들의 아침인사가 Good morning이라는 걸 수도 없이 배웠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 현장 에서 열심히 생각해낸 게 왜 그 모양입니까? 인사를 그렇게 한다는 거 많이 배웠지만 실제 경험이 없으니 구체적인 상황에 들어가니까 그런 코메디 같은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을 잘 알죠. 중요 한 것은 그렇게 많이 읽어놓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실천해서 내 것으로 살아보기 전에는 구체적인 상황에 부닥치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잘 아는데 현장에 부닥치면 성경말씀이 안 튀어나 오고 엉뚱한 게 튀어나온 예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천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번 더 정리를 합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보고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 이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할만 한데도 선뜻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아! 하나 님의 뜻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말씀이 베드로를 인도해 갔습니다. 말씀이 초대교회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어렵 고 힘든 가운데 있어도 성경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적절한 성경말씀이 머리 속에 문득문득 떠올라서 말씀 이 우리를 인도하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7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예 교회 성장의 주역들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 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 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 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 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 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 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 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개역, 사도행전 11:19~30] 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왜 교회를 세우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려고 찾아 온 사람들과 병을 고치러 온 무리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붙들어서 교회 를 세우지 않았을까 참 궁금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종이 나타나 교회를 세우면 참 쉬울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려고 오셨 습니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만 제공하시고 교회가 성장하고 세워지는 것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가셨 습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본문에서 초대교회, 특히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보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한 주역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누구에 의해서 이렇게 자라났지요?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의 무리를 나누어 보면 자그마치 일곱 종 류의 무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누가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킨 주역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9절에 보시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 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라는 말씀에 흩어진 자들 이 나옵니다. 베니게는 페니키아입니다. 그리고 구브로는 지중해 위쪽에 있는 키프로스 섬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여기서 못 살겠다 해서 저기 만주쯤에 피난을 간 셈입니다. 스데반 때에 박해가 일어나서 많은 성도들이 이방족속 의 땅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면 목숨 걸고 교회를 지켜야 합니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가야 합 니까? 가야죠! 과거에 교회를 지키겠다고 교회에서 기도만 하고 있다가 순교당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어느 것이 현명한지 저도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우면 일단 도망을 가야죠. 그렇게 목숨을 구하고 교회를 위해서 크게 헌신한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더 잘했는지 저로서는 판단이 좀 어렵습니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 있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고향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건 박해를 피해 멀리 도망갔건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곳에서 여전히 복음을 전했더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더라는 겁니다. 포항에서 진짜 포항 사람을 만나 는 건 어렵습니다. 여러분들도 거의 다른 곳에서 오셨을 줄로 압니다. 포항에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지난주에 벌교 갔다 왔는데 참 멀더라고요. 난생 처음 갔습니다. 참 머네요. 했더니 벌교는 먼 축에 들 지도 않는답니다. 강원도 화천, 제주도... 그렇게 멀리서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게 왔다면 후대에 교회의 역사를 쓰는 분들이 우리를 얼마나 위대하게 기 록하겠습니까마는 섭섭하게도 그렇게 오지 않았습니다. 시집을 왔다든지, 직장을 따라 오게 되었죠. 어떤 이유로 여기에 왔던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로 여기에 왔건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으 - 1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교회 성장의 주역으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쩌다가 이 효자 제일교회에 오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찾아오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 니다. 어떤 이유로 왔든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서 이 교회에 왔건,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고 왔건 그건 아무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그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 중에 20절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 게도 말하여... 라고 합니다. 구부로는 섬이고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있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식으로 말하면 하나는 섬 사람이고 또 하나는 저쪽 아프리카 지역 사람이니 까 촌놈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까 이 사람들도 따라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큰 실수를 한 거예요. 누구에게 복음을 전했다고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답니다. 이 말 씀의 의미를 지난 번 앞부분을 설명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해도 헬라인에게나 이방인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환상을 세 번이나 보고도 이것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인지 몰랐겠습니까? 심지어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성령이 임하더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향하고 있다는 사실 을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기에 아, 이 환상과 이런 현상들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구나. 베드로가 그제야 간신히 깨달았던 그 시절에 촌놈들이 말도 안되는 짓을 한 겁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큰 실수를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실수가 오히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 고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더라는 사실입니다. 왜 이 사람들의 실수가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까?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데 이 사람들은 잘 몰랐기 때문에 아무 에게나 복음을 전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람들의 실수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런 실수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에서 나온 실수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 다. 아이들도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 잘 들으면 크게 되긴 어려워요. 부모 말씀을 잘 안 들으면 크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방에 들어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모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는 그렇게 큰일은 저 지르지 않지만 오손도손 가족과 잘 어울려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주관도 없이 무턱대고 부 모 말씀을 안 듣는 사람은 감방가기 딱 알맞지만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소신이 뚜렷해서 말 안 듣는 아이 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것이 결국은 교 회가 자라나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을 불러일으킨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서 어떤 분들이 너무 중구난방이다, 조직적이지도 못하고 체계적이지도 못하 다는 말들을 가끔 합니다. 분명히 당회를 거쳐서 의논이 되어야 할 사항인데 어떤 분이 단독으로 혼자서 홈페이지에 올려 일이 진 행되기도 합니다. 아니면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어떻게 가야 될텐데 의논도 부족한 상태에서 발표가 되고 진행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이 예산 편성된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도 합니다. 가 끔 그렇게 조직적이지 못하고 그렇게 체계적이지 못한 모습이 우리 교회에 더러더러 보이기도 합니다. 각 자가 열심히 하다보니까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죠.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복음에 대한 열정, 교회에 대한 뜨거움이 있다면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뛰 는 것이 오히려 교회를 위해서 유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조직적으 로 체계적으로 잘 해 나가느냐는 것보다 정말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심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꼭 기억합시다.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함부로 나가서 복음을 엉뚱한 데 전한 그 실수가 오히려 안디옥 교 회를 형성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2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제가 고등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어느 분이 실수로, 그걸 실수라고 해야 되는지 좀 애매하긴 합니다마는 껄렁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청소년감호소에 갈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바람에 교회에 데리고 왔는데 이 친구가 전도를 참 잘 했습니다. 문제는 꼭 자기 같은 놈들만 전도해 온다는 사실이죠. 교회 오기 전에 담벼락에 붙어 서서 담배 한대씩 피우고 교회로 들어옵니다. 다른 아이들이 가끔 그래요, 선생님, 쟤네들 담배 냄새가 나요. 나중에 심지어 어떤 집사님들한테서도 간접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고등부 아이들이 담배 피우네? 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가끔 교실에 성냥개비가 떨어져 있기도 합니 다. 본인들이 내색을 안 하려고 애쓰지만 선생님들은 그걸 금방 알 수 있죠. 그래도 제가 아무 소리 안 하 고 은단을 사서 나눠주기도 하고 조금 힘들지? 하고 은단을 사서 나눠준 기억도 납니다. 여러분, 껄렁껄렁한 아이들이 열심을 내면 전도를 참 잘 합니다. 그래서 수북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 까? 우리 아이들 다 버린다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애 데리고 온 게 실수입니까? 교회가 진정 건강한 교회라면 그런 아이들을 얼마든지 받아들여서 선한 아이로 만들어 가야죠. 교회 다니는 아이들의 행동이 어떻게 저 모양이냐? 하기 전에 아! 저런 아이들을 우리가 품어서 제대로 키워나가야 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 건강한 교회의 표지입니다. 아마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비난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그런 사람들을 교회 불 러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디옥 교회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 친 위대한 실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실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실수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실수를 하게 했다면 오늘 우리가 교회에 대한 열심과 복음에 대한 열심만 있다면 어 떤 사람 어느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이것이 교회 성장의 밑 바탕이 된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헬라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절을 봅시다. 22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 니... 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의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때 쯤에 아마 베드로의 환상과 그 대답을 통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달되어야 된다는 걸 예루살렘 교회가 아마 이해했을 것 같습니 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가 자라고 있더라는 소문을 듣게 된 겁니다. 여러 분, 우리가 만일 예루살렘 교회 교인인데 저쪽에서 말도 안되는 녀석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웠다면 정말 기 뻐하며 그 교회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을 돌 아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가 개척교회를 세우면서도 성도들 중에 일부가 그 개척교회를 돕겠다고 하면 기꺼이 보내주지 않습 니다. 막말로 막아버립니다. 개척교회를 세운다고 해 놓고 성도가 간다고 할 때 기꺼이 보내주지 않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교회가 정말 크게 성장하고 잘 자라가면 정말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교회가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참 쉽지가 않아요. 교회가 크게 자라나면 대부분 눈을 이상하게 뜨고 봅니다. 저거 또 무슨 이단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의 성장을 기뻐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교회를 위해 서 누구를 보낼지 고민을 하다가 바나바가 가장 적합하고 생각하고 보냅니다. 좋은 인물이 있어도 다른 교 회에 잘 안 보내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보냈다는 것은 예루살 렘 교회도 안디옥 교회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는데, 바나 바가 없어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꼭 필 요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조금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교 회만 출석 하면 됐다 하고 안심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겠다 하고 교회에 발을 들인 것은 이제 출발입니다. 출발했으면 성장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 일은 세월만 지난다고 저절로 되는 일 은 아닙니다. 신실한 지도자가 있어서 그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으로 잘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냥 - 3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교회만 왔다 갔다 해서 성숙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그런 의미에서 바나바는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사 람입니다. 더군다나 바나바는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라고 그러죠? 24절에 보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 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그 다음에 보면 이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그러한 사람이었기 때 문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었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열두 사도는 아닙니다마 는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권위자였죠? 권하고 위로하는 일을 참 잘 했던 온화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안디옥에 가서 그래도 내가 예루살렘에 파송을 받은 사도 의 명을 받은 사람이라 고 폼 잡지 않고 교회를 잘 다스렸던 것 같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 이렇게 온화한 사람은 꼭 필수적인 사람입니다. 거기서 전도 받아 나온 이방인을 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성장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좋은 지도자가 중요합니 까, 좋은 교인이 중요합니까? 좋은 지도자가 있어야 교회가 성장합니까, 좋은 교인이 있어야 교회가 성장합 니까? 둘 다 필요하지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지도자가 중요합니까, 교인이 중요합니까? 둘 다 필요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좋은 지도자가 있어야 되지요? 이건 굉장히 좋은 말이면서 한편으로 굉장히 나쁜 말 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점점 쇠퇴할 때에 목사님을 향해서 교회가 성장하려면 좋은 지도자가 있어야 하지요! 이거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 때문에 교회 이 모양입니다 이런 뜻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목사 님은 또 뭐라고 합니까? 교회가 성장하려면 좋은 교인이 있어야 성장하지요! 이 말은 여러분 때문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이 되거든요. 어떤 말이라도 자기에게 적용을 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목사님과 장로님은 자신들을 향해서 지도자가 중요하지. 하면 좋은 것이고, 반 면에 교인들은 우리야 어떻게 하든 목사님과 장로님만 잘 하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건 아닙니다. 훌륭한 교인들이 있어야 훌륭한 목회자가 나오고 교회가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적용을 잘 해야 됩니다. 학교에서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선생님이 있어야 좋은 학생이 나온다 이것도 맞지만 좋은 학생 이 있어야 좋은 선생님이 나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이 큰 복입니다. 잘 만나야 합니다. 선생님은 좋은 학생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학생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학생을 잘 만나서 선생님이 유명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 중 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좋은 지도자 좋은 교인이 되어서 교회가 성장해 가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열 심 있고 뜨거운 성도들이 있었고 또 바나바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파송되어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습니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다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사역을 하다가 25절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 교회에 데리 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라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왜 사울을 찾으러 갔을 까요? 아마 사역을 하다보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에 사울이 회심하고 예루살렘에 갔더니 문제가 너무 커져서 제자들이 사울을 고향에 돌려보냈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지 추측컨 대 10년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고 돌아서서 바로 전도자가 된 게 아닙니다. 고향 에 가서 근 10년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을 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바울이라는 사람이 고 향 가서 얌전하게 있을 사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추측컨대 그 지방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 소문을 바나바가 들었겠죠.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헬라 문화도 잘 이해하고 유대 문화도 잘 이해하는 양쪽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사울이 이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 고 바나바가 사울을 데려다가 둘이서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바나바는 잊을 수 없 는 사람입니다. 회심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에 사울을 소개시켜 준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고향에 근 10여 년 묻혀 있을 때 그를 불러서 다시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그런 데 사울은 성격이 좀 과격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2차 선교여행 떠날 때 갈라서게 되죠. 바울이 좀 양보하 면 좋겠다 싶은데도 바울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 4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이때까지 이름이 사울이라는 사실은 기억해 두십시오.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에는 사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뒤에 바울이 되었다고 쉽게 말합니다마는 적어도 이 긴 세월이 지나고도 여전히 사울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을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울을 불러서 위대한 사역자로 만들어 낸 사람이 바나바고 그를 그렇게 만든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울은 위대한 사역자가 될 만한 능력과 소질이 다분히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를 불러서 복음의 전선에 세워서 위대한 사역자로 만든 교회 가 안디옥 교회더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안디옥 교회가 없었으면 어쩌면 사울이 등장할 기회가 없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가 키운 인물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혼자서 많이 웃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혹 시 압니까?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어서 하다못해 전기를 쓴다면 한 구절에 이런 구절을 쓰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이 듭니다. 나로 하여금 이런 목사가 되게 한 교회는 효자제일교회다. 맞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바울을 어떻게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바울을 불러서 바울이 열심히 가르치 는 것을 안디옥 교회는 열심히 배웠을 뿐입니다. 거기에서 위대한 바울이 탄생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전 도사 하나 불러가지고 가만히 놔두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게 하고 일하게 만들어야 합니 다. 어떻게요? 공부합시다 하고 붙들어 대면 전도사가 공부 안 하고 배깁니까? 제가 어느 해 OO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이 학교는 이 근처에서 제일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이 모 여 있는 학교입니다. 교실에 가니까 자꾸 잠이 와요. 무슨 탈이 났나 싶어 병원에 갔더니 이상 없대요. 그 런데 교실에만 가면 잠이 와요. 고등학교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게 중학교 2학년 수준 이상을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재연구나 가르칠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갑니다. 가서 50분을 못 버팁 니다. 그러니까 한 20분 지나면 잠이 자꾸 쏟아지는 거예요. 이 학교 오래 있다가 사람 버리겠다 싶어서 1 년 만에 간신히 도망을 쳤지요. 공부 열심히 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모인 곳에는 선생님도 눈이 반들반들해 지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같은 이칩니다. 바울이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안디 옥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키워놓았고 그것이 결국은 교회 성장에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26절 끝부분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고 합니다. 이 때 그 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칭송하는 말이었는지 조롱하는 말이었는지 좀 확실치 않습니다마는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믿는 성도들은 초창기부터 안 믿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칭송받는 사람들이었음을 꼭 기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다른 사건들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굉장 한 칭송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물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그리 스도인다운 사람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 하면 참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시절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며 왜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부끄러운 이름일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성장하면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났 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조차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성도라고 하면 어디 나가도, 어느 누가 봐도 칭찬 받을만한 삶을 살아야 합 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살면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내 버릇은 성 령도 못 고친다 는데 믿는다고 해서 나쁜 버릇이 저절로 고쳐지거나 습관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마 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면 영영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자기 버릇이 성령보다 더 셉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고쳐야 하는 버 릇이나 고쳐야 하는 성격은 고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격이나 특정한 버릇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 이 외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혹시 함께 생활하는 부인이나 남편의 버릇을 고쳐본 적이 있습니까? 그건 고치려고 마음먹지 마십시오. 안 고쳐집니다. 우리 신랑 저 버릇만은 어떻게든 고쳐야 되겠다? 아무리 해 보십시오. 안 고쳐집니다. 상대 방 버릇은 못 고친다고 해도 자기 버릇은 고쳐야 되겠다 생각이 되면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 - 5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로는 잘 안됩니다. 적어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바뀌어 된다고 생각을 하면 바뀌셔야 합니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전에 가족에게 칭찬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다 뭐라 그래도 내 남편은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말이 부인한테서 나와야 하고 자식 들에게서 그런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서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이런 칭찬을 들은 것 역시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성장할 만한데 기여했던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까?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21절을 보세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고 말합니다. 몇몇 구레 네 사람과 구브로 사람들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더 라는 얘깁니다. 거기에 주의 손이 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의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사도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주인공이 된 책입니다. 성령이 앞장서서 이 모든 일을 행하여 가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몇몇 사람이 복음의 열정에 불타서 실수하듯이 복음을 전했지만 거기에도 주의 손이 함께 하시니 그런 결과가 나타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 일이 가능해졌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자 라 고 말을 꺼낸 것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렇게 해야 된다고 강요한 분이 성령님이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실수하여 복음을 전했더라도 성령이 함 께 하심으로 그 일이 가능해졌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은 어떤 한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만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한 교회 성장의 주역이 누구냐는 이야기입니다.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본문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가운데 교회가 성장되어 갔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은 절대로 어 느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계획하셨던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하셨고 다윗까지 언약을 통해서 약속하셨던 그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 의 기초를 놓으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이 진두지휘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럴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시고 교회를 세우실 때 사람을 배제한 채 하나님 단독으 로 일을 이루어 가지 않았더라는 겁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그 일을 함께 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오늘 이 본문에 나온 여러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상관없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 에,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을 때에 교회가 놀랍도록 성장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고 계십 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해야 되겠다고 작정하셨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셨습 니다. 그 때 눈에 뜨였던 사람이 노아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 잊어버리고 있을 그 때에 하 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눈에 뜨였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을 계획하시고 추진하려고 하실 때 사람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단독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요?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사람, 교회를 위해 헌신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교회 가 성장되게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흔히 바나바나 사울을 예로 들기가 쉽습니다. 물론 안디 옥 교회가 성장하는 데는 바나바나 바울이 기여한 바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르고 교회 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채 복음을 전하러 다녔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크게 - 6 -

[2001.12.19] 교회 성장의 주역들 (사도행전 11:19~30)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수다한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습니 다. 많이 배워야 전도한다? 아닙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오히려 잘 못합니다. 아까 예를 들었던 것처럼 껄 렁한 아이가 하나 교회에 들어오더니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데려오는지 모릅니다. 몇몇 선 생님들이 짜증을 내기도 하고 이러다가 교회 어떻게 됩니까? 걱정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전도를 하는지 뭘 가르쳐야 하는지 이런 것 알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복음에 대한 열심이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역사하시며 그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이루 어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효자제일 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바울 같은 사 람이 되고 싶습니까? 누가 어떤 사람이 되건 간에 그건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진 사람 효자제일교회가 성장하는데 주역이 될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던 사람들은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미 세워진 교회에 들어와서 잘 이끌어 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다시 이 사람들을 선교사로 내 보냅 니다. 이 두 사람이 도착하기 이전에 교회가 이미 형성되어 잘 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이름도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간 사람들이었고 뭣도 모르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후대에 이름이 남건 안 남건, 내 이름이 드러 나든 안나든 관계없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은 주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