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A Study on the Legal Thoughts of Jeong Gwang-Hyeo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to change Korean Name 51) 임 상 혁* (Ihm, Sahng Hyeog) <차 례> Ⅰ. 들어가며 Ⅳ. 성씨논고 에 나타난 성씨론과 창씨론 Ⅱ. 성씨논고 발간 시기의 상황 Ⅴ. 성씨논고 에 담긴 법사상 Ⅲ. 창씨개명과 성씨논고 Ⅵ. 맺 음 말 Ⅰ. 들어가며 한국 가족법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데 이론이 없는 분이 설송( 雪 松 ) 정광 현( 鄭 光 鉉 : 1902~1980) 선생이다. 사실 가족법이란 말을 한국인으로서 처음 사용한 이가 선생이다. 때문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저술도 적지 않았다. 스 스로의 연구를 집대성한 한국가족법연구 1) 에 대한 여러 평가도 있었고, 2) 그의 학문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조명 3) 도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대표적인 *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투고일자 2009년 3월 7일, 심사일자 2009년 3월 7일, 게재확정일자 2009년 3월 19일. 1) 정광현,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67. 2) 이희봉, 서평 韓 國 家 族 法 硏 究 ; 조미경, 정광현,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 법 학, 제48권 3호(2007.9). 3) 박병호, 鄭 光 鉉 先 生 의 學 問 世 界, 가족법연구, 도서출판 진원, 1996; 최종고, (한국 의 법률가상 29) 설송 정광현, 사법행정, 제25권 제8호(1984.8); 최종고, 정광 현, 한국의 법학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88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것은 1995년에 손꼽는 학자들이 함께하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집> 으로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를 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여기에서는 그 동안의 법학 발전을 뒤돌아보는 여러 글들과 함께 정광현의 업적을 되새기 는 논문들이 다수 수록되었다. 5) 이런 많은 연구 속에서 정광현의 첫 저서라 할 수 있는 성씨논고( 姓 氏 論 考 ) 조선가족법논고( 朝 鮮 家 族 法 論 考 ) 6) (이하 성씨논고 라 함)에 대한 분석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의아스럽다. 7) 특히 이 책은 조선총독부의 창 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자마자 나온 것으로, 법학자로서 시대적 상황에 대하 여 보인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곧, 1939년 11월 10일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 제20호 조선인의 씨명 ( 氏 名 ) 변경의 건(이들 법령을 통칭하여 창씨령 이라 표현하기도 함)이 공포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8) 성씨논고 는 같은 해 3월 10일에 발간되었다. 때문에 창씨의 과정이 마무리되기 전인, 곧 결과가 나오기 전 인 시행초기에 제시된 견해라는 점에서 그의 법사상을 더욱 심층적으로 들 여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까지 들어왔듯이 창씨개명정책은 우리에게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조선인과 일본인 9) 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므로 10) 차별을 4)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집>, 길안사, 1995. 5) 김주수, 鄭 光 鉉 博 士 의 婚 姻 法 ; 배경숙, 韓 國 相 續 法 과 鄭 光 鉉 博 士 의 見 解 와 學 說 ; 최병욱, 鄭 光 鉉 博 士 의 婚 姻 申 告 性 質 論 ; 황적인, 鄭 光 鉉 敎 授 와 著 作 權 法 등. 6) 정광현, 姓 氏 論 考 朝 鮮 家 族 法 論 考, 동광당서점, 1940. 姓 氏 論 考 에 대한 한글표기 는 성씨론고 와 성씨논고 가 가능한데, 저서의 내용이 성씨에 대한 논설들을 고찰한 것이 아니라, 성과 씨에 대해 스스로 논구한 것이기 때문에 후자로 하였다. 7) 박병호, 앞의 논문, 141면에서는 간략히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가족법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고 평가하였다. 이희 봉, 앞의 서평에서는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에 실린 논문 家 族 法 의 法 源 에 대하여 설명하 는 가운데 성씨론에 대하여 創 氏 令 에 對 한 反 撥 의 所 産 이고, 우리의 姓 에 對 한 唯 一 한 文 獻 이기도 하다 고 하면서, 식민지 정책을 단면과 일본과 다른 한국 가족제도의 원리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최종고, 설송 정광현, 73면에서는 성과 씨 및 성씨 의 의의와 본관의 의의 및 성과의 관계 등 한국인의 성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는 지 엽적인 파악에 머무르고 있다. 8) 정주수, 창씨개명연구⑴, 사법행정, 제44권 제11호(2003.11), 42면. 9) 일제 강점기에는 양자를 구별하는 용어로 조선인과 내지인( 內 地 人 )이라 하였으나, 여 기서는 원칙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말을 쓰기로 한다. 다만 직접 인용의 경우 에는 내지인이라는 용어도 사용된다.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89 철폐하려는 정책이라는 주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당시 정광 현의 집필 상황은 이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 다. 그것은 뒤에 서술하겠지만, 당시가 자신의 사상 문제가 걸려 있던 시기 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 분명한 것은 이 때에는 그 누구도 총독부 의 창씨 정책에 대해 대놓고 비판할 수 없는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정이라면 외면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 만 그는 굳이 성씨논고 를 써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 배경과 의 의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Ⅱ. 성씨논고 발간 시기의 상황 1. 경제연구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 성씨논고 가 출간되던 해는 정광현에게 매우 미묘한 시기였으리라 여겨 진다. 그 이태 전에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 하여 관련 연구에 나타난 행적이나 연표에는 1938년 5월 12일에 배일( 排 日 )사상 사건으로 피검되어 서대문구치소에 190일간 구치되었다고만 11) 어 있을 뿐, 구체적인 관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비밀 표지 가 붙어 있는 당시의 치안관계 자료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파악된다. 이 른바 적화( 赤 化 )교수그룹 사건, 일명 경제연구회 사건 12) 에 연루되어 5월 16일에 구속된 것이다. 13) 경제연구회는 연희전문학교의 상과( 商 科 ) 학생들이 1926년 5월 3일 경제 문제 및 실제문제의 토구( 討 究 )와 친목 도모 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아리이 다. 이 모임에 대하여 상과 교수들은 적극 지원하였고, 당시 백남운 등이 주도한 연희전문 상과의 분위기는 마르크시스트적 경향과 함께 일선동조론 10) 실제로는 호적에 성과 본이 기재되기 때문에 구별이 가능하다. 11) 鄭 光 鉉 博 士 年 譜, (서울대학교) 법학, 제9권 제2호(1967), 244면. 12) 경제연구회 사건이 적화교수그룹 사건이란 용어보다 널리 쓰이는 듯한데, 정광현과 같은 교수들은 경제연구회 멤버가 아니기도 해서, 앞으로 여기서는 후자의 표현을 쓴 다. 13) [ 特 高 秘 ]< 關 係 者 名 簿 >( 地 檢 秘 13.6.10 제943호), 京 城 西 大 門 警 察 署, 4면. 되
90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이나 만선사관 등에 대한 비판의식도 높았다고 한다. 14) 1938년 서대문경찰 서는 이 단체에 대하여 민족공산주의적 성향이 농후하며 그 배후에 좌익교 수 그룹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여 2월부터 수사에 들어가 대대적인 검거를 진행하였다. 15) 방대한 압수 수색도 벌였는데, 16) 이를 통해 이른바 흥업구락 부( 興 業 俱 樂 部 )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도 제공되었다. 17) 흥업구락부는 1924년 11월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 안재홍, 구자옥 등 민족진영의 대표자들이 민중계몽과 국산 장려를 표방하며 세운 단체로 되 어 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동지회( 同 志 會 )와 연계된 민족운동의 비밀결사 로 파악하였다. 동지회는 1921년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노 선을 수행할 결사를 조직한 데서 기원한다. 이때에는 그 단체를 표면화하 지 않고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안창호의 흥사단에 대항하는 파벌 투쟁이 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 결사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 고, 디트로이트, 하와이 등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이 확대되었다. 1923 년 2월에는 재미 한인이 많이 사는, 특히 이승만의 지지자가 많은 하와이 로 본부를 이전하였고, 이 즈음에 동지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지회는 학 교와 교회를 운영하여 배일 사상을 고취하고, 기관지로 <태평양주보>를 발행하였다. 조선에 있는 동지회원은 김영섭, 윤치영 등 15명 가량이었다. 동지회의 연장단체라 할 수 있는 흥업구락부가 1925년 3월 23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 申 興 雨 )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신흥우는 1924년 5월 뉴욕에 서 개최된 북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10월 하와이 호놀룰루 에 들러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과 감옥생활을 같이 한 동지이기도 한 그 가 이승만의 동지회 활동에 감복하여 그 방침에 따라 조선 독립을 위해 매 진하기로 서약하고서 조선에 돌아와 조직한 비밀결사가 흥업구락부라는 것 이다. 이 단체의 특징은 각 계급의 지도자를 동지로 얻되 엄선( 嚴 選 )주의를 14) 홍성찬, 일제하 연전상과의 경제학풍과 경제연구회사건, 한국경제학보, 제1호 (1994), 275면. 15) 이 전개 과정은 위의 논문, 286~298면 참조. 16) 이때 정광현에게서는 25종의 불온문서가 압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위의 논문, 290 면). 17) 이의 검거에 관해서는 同 志 會 及 興 業 俱 樂 部 の 眞 相, 思 想 彙 報, 제16호.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는 김상태, 1920~1930년대 同 友 會 興 業 俱 樂 部 연구, 한국사 론, 제28권(1992) 참조.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91 취하여 파벌을 방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부원은 겨우 50명 남짓 이지만,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망라하였다. 이들이 신간회와 같은 문화단체, 연희전문과 같은 학교, 기독교를 반( 反 )내선일체( 內 鮮 一 體 )적으로 지도하였다고 치안당국은 파악했다. 18) 연희전문학교 적화교수그룹 사건 조사에 따른 압수수색 중에 우애회( 友 愛 會 )라는 교직원 친목단체가 발견되었고, 19) 정광현도 회원으로 올라 있다. 20) 이 조직의 실질적인 중심인물로 지목된 유억겸이 동지회와 연관됨에 따라 동지회의 회원들이 검거되면서 흥업구락부의 간부인 구자옥( 具 滋 玉 )이 노출 되었다. 이후 구자옥에 대한 가택 수사가 이어졌고, 이때 흥업구락부 명부 와 일기가 발견되었다. 이에 1938년 5월 20일 일제검거가 이루어졌다. 검 거된 이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구자옥 등 50여 명이 구락부원으로 확정된 다. 이들은 결국 9월 3일 민족자결 의 망상에서 벗어나며, 식민지조선 을 지양하고 신일본구성 의 유력한 일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장문의 전향 서를 전체 명의로 발표하고 흥업구락부를 해산하였다. 적화교수그룹 사건도 12월 15일에 수사가 종결되어, 이순탁, 백남운, 노동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으로 검찰 송치되었다. 정광현과 이용은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 처분이 되었다. 21)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같은 시기에 이들 동지회, 흥업구락부, 경제연구회를 해체시키는 탄압을 자행한 것은 군국주의적 황민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반일적인 사상과 세력을 척결하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서대문경찰서는 이 관련자들을 하나의 계보로 그리고 있다. 22) 곧, 미국에 있는 혁명동지회 중 앙부 아래에 유억겸 그룹, 신흥우 그룹, 윤치호 그룹으로 배치한 것이다. 짜맞추기식 조작의 냄새도 나는 편성이라 하겠는데, 정광현은 윤치호의 사 18) 昭 和 十 三 年 に 於 ける 鮮 內 思 想 運 動 の 槪 況, 思 想 彙 報, 제18호(1939.3), 9면. 19)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112~113면. 20) 구속자 가운데 우애회 회원인 사람은 이순택, 노동규, 백남운, 정광현, 현정주이다(앞 의 < 關 係 者 名 簿 >). 21) 홍성찬, 앞의 논문, 293면 각주 114: <조선일보> 1938.12.27. <불기소사건기 록>(1938년 형 제6284호, 경성지법검사국) 1938.12.26. 둘 다 유죄는 인정되나 의식수준이 낮고 전비( 前 非 )를 뉘우치며 전향을 서약하는 등 개전의 정이 뚜렷하여 기소유예했다. 특히 정광현은 교직에서도 사퇴(1928.11.22.)했으므로 불기소하였다. 22) [ 京 西 高 秘 제3213호의4]< 延 禧 專 門 學 校 學 內 組 織 ニ 關 スル 件 >( 地 檢 秘 13.5.10 제843호), 西 大 門 警 察 署 長, 1938.5.18, 6면.
92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위인데도 우애회 유억겸 그룹에 배치되어 있다. 23) 그의 경력은 1919년 일 본에 유학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와 경 제학부에서 수학하였으며, 1928년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 고, 1930년에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원이 되어 법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다. 연희전문에 부임하였을 때 공산학교와 같은 분위기가 자신과 맞지 않 았다고 수사과정에서 진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정광현이 일본에 있 으면서 가와카미 하지메( 河 上 肇 ) 24) 로부터 공산주의의 교육 또는 영향을 받았 으며, 교내에서 직접 공산혁명이론에 터잡은 강의를 한 것으로 보았다. 25) 정광현은 이 사건으로 거의 200일간이나 구금되었다가 12월에 기소유예 결정이 내려졌다. 여기에는 윤치호의 노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26) 풀려나 긴 하였으나 정광현은 교단을 떠나야 했고,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27) 에 따 른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음해 1월부터 대화숙( 大 和 塾 )이 라는 사상전향기관에서 여러 달 동안 강제수련을 받기도 했다. 28) 모멸스러 운 일도 따랐다. 1940년 3월 7일에는 장인인 윤치호가 조선호텔에서 보호 관찰소장인 야마시타( 山 下 )와 보호사 4명을 저녁식사 초대하였는데, 유억겸, 23) [ 京 高 特 秘 제725호의2]< 在 米 革 命 同 志 會 ノ 朝 鮮 支 部 タル 秘 密 結 社 興 業 俱 樂 部 事 件 檢 擧 ニ 關 スル 件 >( 地 檢 秘 13. 5. 23 제860호), 京 畿 道 警 察 部 長, 1938.5.22, 13, 16면. 24) (1879~1946)일본의 경제학자. 교토( 京 都 )제국대학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연구하다 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공산주의의 실천활동을 하였다. 일본공산당의 당원으로 검거되 기도 했다. 25) [ 京 西 高 秘 제10181호]< 延 專 赤 化 事 件 ニ 關 スル 件 >( 地 檢 秘 13.11.1 제1709호), 西 大 門 警 察 署 長, 1938.10.31, 2~4면. 26) 정광현이 검거된 얼마 후인 5월 25일 윤치호는 일기에 4 p.m. Mr. Kim phoned me after he had talked with the Public Safety Chief( 安 保 課 長 ) 先 生 님께 關 한 것과 先 生 님께 가장 갓가운 니께 關 하야난 걱정 마시라고 합니다. Be not anxious about yourself and about him who is nearest you ( 鄭 光 鉉 ) in this case? 라고 쓰고 있어[ 윤 치호일기 제11권, 52면. 윤치호일기 는 국사편찬위원회(http://www.history.go.kr)에 서 원문 서비스를 한다], 힘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사위의 선처를 위해, 자신에까지 확대된 데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로비, 국방헌금, 시국강연 등을 하며 애를 썼다(정병준, 앞의 책, 112면). 27) 1936년 제령 제8호(1936.12.12. 공포)로서 일본의 思 想 犯 保 護 觀 察 法 을 의용하는 것이 내용이다. 정광현 관련 연구들에서는 거의 조선사상보호관찰령 이라 표기하는데, 朝 鮮 思 想 犯 保 護 觀 察 令 이 정식 법령명이다[ 外 務 省 編, 外 地 法 制 誌 제7권( 制 令 前 篇 ), 文 生 書 院, 1990, 177면]. 28) 박병호, 앞의 논문, 139~140면 참조.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93 정광현, 윤치영이 거들었다. 이 자리에서 요코다라는 보호사가 공산주의 전 향자들은 탐욕스러운 비굴함과 배은망덕으로 성가시게 하며, 말만 잘하고 일은 못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윤치영에게 하는 것이다. 29) 성씨논고 가 발 간되기 불과 3일 전의 일이다. 2. 창씨개명 정책 실시 1937년 4월 17일 조선에서의 사법법규의 개정에 관한 사항을 조사 심의 하기 위하여 사법개정조사위원회( 司 法 改 正 調 査 委 員 會 )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조선민사령은 주요 개정 심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는 2년 뒤 1939년 11월 10일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으로 공포되었다. 여기에 창씨 개명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제령의 시행일은 1940년 2월 11일로 되었 는데, 시행 후 6개월 이내, 곧 1940년 8월 10일까지 새로 씨( 氏 )를 정하여 신고하여야 한다(제11조 제3항, 부칙 제2항). 그때까지 신고를 하지 않는 경 우에는 호주의 성( 姓 )을 씨로 직권 등재시키게 되었다(부칙 제3항). 전자를 설정창씨, 후자를 직권창씨라 부르기도 하는데, 30) 어떠한 방식으로든 창씨 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창설한 씨에 조화되도록 명( 名 )을 고칠 수 있었다(1939년 제령 제20호 조선인의 씨명 변경의 건 제2조). 이전까지의 성명에 대한 원칙은 1 성과 함께 본관을 기재한다는 것, 2 예외적인 경우 이외에 성명은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현재와 같음). 종래의 이러한 방식에 대해 총독부가 창씨개명이라는 일대 수술을 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당국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31) 가장 본질적인 배경은 두말 할 것 없이 내선일체이다. 시행 이전과 초기에 는 미나미( 南 ) 총독부터 강제가 아니라는 언명을 하였고, 32) 그리하여 강제 29) 윤치호일기 제11권, 273~274면. 30) 구광모,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 국제정치논집, 제45집 제4호(2005), 41~ 42면에서는 설정창씨 와 법정창씨 라 부르는 기존의 연구를 비판하고, 어느 쪽이나 법령으로 정해진 법정창씨였다고 주장한다. 31) 미즈노 나오키( 水 野 直 樹 ), 조선총독부는 왜 창씨개명 을 실시했을까, 내일을 여는 역사, 제15호(2004.3), 185면에서는 1 가 ( 家 ) 관념의 확립, 2 이성( 異 姓 )양자를 제도화하기 위한 불가피성, 3 조선인의 요망, 4 평등을 지향하는 천황의 성지, 5 일본과 조선의 교류(특히 결혼)를 위한 필요성, 6 성( 姓 )을 통한 개인 식별 불능으로 정리한다.
94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측의 연구도 없지 않다. 하지만 시행 상황을 보면, 첫달인 2월에는 매우 저조한 신고 실적을 보 이다가, 4월 하순 도지사( 道 知 事 )회에서 총독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씨 제 도의 정신을 관할 민중 각층에게 철저히 추구하라고 발언한 이후 신고는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다. 33) 이런 사정과 함께 신고를 독려, 강제한 자료도 남아 있어 창씨 신고가 사실상 강요였다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할 것 이다. 결국 1940년 8월 10일로 기한이 만료되었을 때 신고율은 80%에 이 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당연히 내선일체를 향한 조선인의 열의를 표출하 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34) 이처럼 창씨개명 정책의 시행이 내 선일체를 심화하려는 것이라 할 때, 앞에 나온 적화교수그룹 사건, 흥업구 락부 사건 등과 맥을 같이 하며, 차라리 이들 사건은 그 사전 정비작업이 라고 볼 수도 있다. Ⅲ. 창씨개명과 성씨논고 1. 성( 姓 ), 씨( 氏 ), 가( 家 ), 호( 戶 ), 창씨개명 일반적으로 성( 姓 )과 씨( 氏 )는 같은 뜻으로 쓰이고 둘을 붙여서 이루어진 성씨란 말과도 같은 뜻이 된다. 그리하여 창씨( 創 氏 )개명이란 성을 바꾸는 일로 이해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특히 일제강점기의 법제에서는 성 이란 부계혈통을 표시하는 지표이고, 씨는 가( 家 )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가 는 가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일컫는 실질적 개념이라 할 수 있겠는데, 호적상 가족으로 편제한 단위를 말하는 호( 戶 )와는 구별된다. 35) 하지만 법 32) <만선일보> 1940.3.9, 6면에서도 창씨개명의 기회를 줄 뿐, 강제실시하지 말라, 일반 오해를 일소하고 취지 이해토록, 南 (미나미) 총독 국장회의에서 강조 라고 기사 제목을 달고 있다. 33) 위의 논문, 189~190면. 34) 感 激 の 創 氏 實 績, 朝 鮮 通 信 제173호(1940); 驚 くべき 創 氏 改 名 の 數 字, 朝 鮮 及 滿 洲 제395호(1940). 35) 임상혁, 고려의 호적과 별적이재금지, 법학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제3 호(1994) 참조.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95 률상으로는 같은 호적에 들어 있는 친족 집단으로서 호주와 가족으로 구성 되는 것을 가라고 하기 때문에 가와 호는 차이가 없다. 실제로 당시 일본 민법 제746조는 호주와 가족은 그 가의 씨를 칭한다 고 하여 가와 호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36) 이 가를 나타내면서 호적상 호의 표지가 되는 것이 씨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이 같아도 가통을 달리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일반 적이다. 곧, 성만으로는 부계혈통이 완전히 표시되지 않는다. 때문에 함께 표시하는 것이 본관( 本 貫 )이다. 과거 동성불혼( 同 姓 不 婚 )을 따질 때 성과 함께 본관을 비교하였고, 이는 호적에 본관과 성이 함께 기재되었기 때문에 가 능하였다. 다시 말해, 공적 장부에 개인을 표시하는 방식은 부계혈통을 나 타내는 본관과 성, 그리고 명( 名 )을 기재하는 것이었다. 가족관습을 존중하 겠다는 조선민사령의 태도에 따라 이러한 호적기재의 방식은 일제시기에도 초기부터 지켜져 왔다. 창씨개명 정책은 이 원칙에 대해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성은 아버지쪽 핏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같은 가의 안에도 성을 달리 하는 이들이 있다. 곧, 일반적으로 가장의 어머니와 아내는 그와 성이 다르다. 이들까지도 모두 묶어 하나의 가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씨를 만들어 붙이라는 것이 창씨이다. 따라서 창씨를 한다고 해서 성과 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호적상에도 성과 본은 그대로 둔 채 새 로 씨의 항목이 상위로 들어가는 것이다. 37) 새로 만든 일본식 씨를 신고하 지 않은 경우에는 호주의 성이 씨로서 전가족에게 부여되었다(직권창씨). 이 후 개인에 이름에 대한 공식적인 표시는 성명이 아니라 씨명으로 하게 되 었다. 매우 엄격했던 개명( 改 名 )도 씨와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허용되었듯이, 명( 名 )을 이끄는 것도 성이 아닌 씨가 되었다. 그리고 씨명 표기가 일반화 되면 성을 씨로 한 이들은 티나는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 사상에 대한 의심 과 사회적 불이익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도 새로 씨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이 일본식 씨명을 갖게 되 었다. 결국 성명은 사실상 말살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36) 坂 本 眞 一, 明 治 民 法 의 성씨제도와 創 氏 改 名 ( 朝 鮮 ) 改 姓 名 ( 臺 灣 )의 비교분석, 법 사학연구, 제22호(2000.10), 169면. 37) 민족말살정책이 아니라는 주장들은 대체로 이에 근거를 둔다.
96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2. 성씨논고 의 내용 일제시기의 우리 법률가들의 저서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 들마저 대체로 해설서나 교과서인 정도이며, 한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연 구 논저는 매우 드물다. 때문에 정광현의 성씨논고 는 본격적인 법학연구 서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더구나 이후 살펴보겠지만, 총독부 정 책의 취지와 그 여파에 대하여 정확히 예상하면서, 그에 대처하여 가족법 의 전통을 될 수 있는 대로 지켜보려 했던 고뇌의 저작이기도 하다. 그것 이 성과 씨에 관한 논설에서 주로 나타나며, 부제를 조선가족법논고 라 하 였듯이 그 밖의 여러 가족법적 문제에 대하여도 싣고 있다. 더불어 가족법 관계의 주요 법령들도 부록으로 붙였다. 책의 내용에서는 우선 조선민사령과 조선 관습의 관계를 설명하고서 성 씨에 관한 논증과 함께 창씨령과 그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다(제1장~제3 장). 이어서 서양자( 壻 養 子 ) 문제를 중심으로 이성양자, 입양, 파양, 상속 등 에 대하여 논술하였다(제4장~제7장). 이후에 <조선민사령 개정을 중심으 로> 38) (제8장), <조선 여성의 법률> 39) (제9장)과 같이 이미 발표했던 글들도 수록하였는데, 성씨 및 창씨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에 이어지는 총독과 법 무국장 등의 담화와 통첩들(제10장, 제11장)은 본문 제2장과 제3장에서의 성 씨와 창씨령을 이해하도록 하는 자료들이다. 저자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 는 부분은 창씨정책 아래서 성씨가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지 하는 점 이라 할 수 있다. Ⅳ. 성씨논고 에 나타난 성씨론과 창씨론 1. 창씨령 시행에 대한 인식 1939년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에 시행에 대하여 법리적 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고 38) 朝 鮮 民 事 令 改 正 을 中 心 으로, <조선일보> 1939.11.17~18, 20~21. 39) 女 性 의 法 律, <조선중앙일보> 1934.11.16~1935.1.20.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97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40) 1 씨 제도가 새로 생겨 조선인의 가에도 일본처럼 가의 칭호인 씨를 설정하게 되어, 각 가의 호주 와 가족은 1가1씨의 원칙 아래 동일한 씨를 개인 칭호로 호칭하게 되었으 며, 이 점에서 재래( 在 來 )의 성을 대신하게 되었다. 2 이성불양( 異 姓 不 養 )의 관습이 타파되어 일본인도 조선인의 양자가 될 수 있다. 3 이제까지의 초 서혼( 招 婚 ) 형태를 폐지하고, 서양자 제도가 새로 채용하게 되었으며, 4 그 부산물로 이른바 호내( 戶 內 ) 혼인도 할 수 있게 되었다. 5 재판상 파양 에 관한 규정이 조선에 의용되게 되었다. 2. 성과 씨에 대한 접근 씨는 호적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확고한 인식 아래 다음과 같이 파악한 다. 부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성이고, 소속된 가적( 家 籍 )을 표시하는 것이 씨이다. 가 ( 家 )라는 용어는 법률용어로서 일상용어로서의 가와 다르다. 곧, 가는 사실상 또는 실질상의 가정생활이 아니라 호적상의 가, 이를테면 종 이 위[ 紙 上 ]의 가에 불과하다. 가의 칭호 라는 것도 호적상의 가의 칭호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가옥의 명패, 곧 문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 므로 호적상의 가라는 것은 단지 장부상의 족적집단( 族 的 集 團 )이지, 사실상 의 가족과는 상당히 인연이 멀다. 41) 이제까지 성이 개인칭호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가 내의 개인칭호의 앞부분이 통일되지 못했는데, 민사령 의 개정으로 민법 제746조가 적용되어 호주와 가족은 씨를 개인칭호로 사 용하여야 하고, 마침내 성의 개인칭호로서의 지위는 씨에게 이전된다. 42) 성 씨에 관한 고찰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조선의 성과 공통되는 일본의 씨, 그 리고 조선의 성에 다른 글자를 덧붙여서 만들 수 있는 일본의 씨를 찾아서 정리 43) 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4) 40) 성씨논고, 1~2면. 41) 이상 위의 책, 19~20면. 42) 위의 책, 30면. 43) 위의 책, 47~64면. 44) 善 生 永 助, 朝 鮮 の 姓 氏 と 同 族 部 落, 刀 江 書 院, 1943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구이다.
98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3. 창씨 시행에 대한 견해 씨 제도를 창설하는 의의에 대해서 스스로의 설명 없이 내선일체를 표방 하는 법무국장, 법무국 사무관, 총독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하 지만 세부 해설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뚜렷이 한다. 곧, 반드시 일본인식의 씨를 선정하여야 하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 대한 법령상 근거가 없다. 하고 똑 부러지게 밝힌다. 45) 그와 함께, 강제하려는 것이 아 니라 일본인식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라는 총독과 법무국 장의 담화를 인용한다. 나아가 개명하지 않으면 내선일체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이 46) 에 대하여 법무국장 담화와 모순되는 바로 생각한다. 까지 말한다. 47) 더욱이 <매일신보>(1940.1.5.)에 실린 경성복심법원 판사 김준평( 金 準 枰 )의 글을 다음과 같이 길게 인용하기까지 한다. 48) 씨를 새롭게 선정하지 않는 것이 내선일체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 는 것은 큰 오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희적이 아니고 참된 태도로 서 신중히 고려하여 실로 자기의 감정과 실제상의 편의에 들어맞는 씨를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색의( 色 衣 ) 장려를 위하여 다른 사 람의 흰옷에 먹을 뿌려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내지인식의 씨를 설정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서 그를 비국민으로 보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한다. 정광현도 같은 생각이라서 인용한 것임은 두말 할 것 없다. 하지만 끝자 락에 가서는 당국은 내지인식 씨의 선정을 강제는 하지 않으나 내지인식 씨의 창설을 희망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 마무리 짓는다. 그 런데 일본인식 씨에 대해서도 두 자 이상이거나 씨명이 네 자이거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며, 임( 林 ), 류( 柳 ), 남( 南 ), 계( 桂 )와 같이 일본인의 씨와 동일한 조선의 성은 훈독하기만 하면 된다고도 하였다. 일본식 성의 사용 을 권장하고 요령을 설명하는 오쿠야마( 奧 山 仙 三 )의 견해를 소개하면서도, 45) 성씨논고, 77면. 46) <국민신보> 제42호라 하였다. 47) 성씨논고, 77~78면. 48) 위의 책, 78면. 여기서 김준칭( 金 準 秤 )의 글이라 되어 있으나, 김준평( 金 準 枰 )의 오기 이다. 김준평은 <조선일보> 1940.4.13.과 4.16.에 성씨논고 에 대한 서평을 (상), (하)로 싣기도 했다.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99 씨의 선정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신중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4. 제도 시행의 문제점 지적 창씨권은 호주에게 있다. 49) 그러므로 가족은 자신이 원하는 씨를 창설하 기 위해서는 분가하는 수밖에 없는데, 분가도 호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를 이유로 창씨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정광현은 그것은 핑계가 아니라 법률상 일리가 있는 것이라 변호한 다. 창씨를 위한 분가는 조선의 현행 관습법상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50) 더 욱이 상속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고등법원은 1924년 판결에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이는 그 가 에 있는 자이어야 한다 51) 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면이 없지 않아 1933년 연합부(합의부) 결정에서는 위의 취지를 변경하여 어머니의 유산은 호적을 같이 하는지 않는지를 따지 지 않고 자녀가 상속한다고 하였다. 52) 이에 대하여도 정광현은 이 판결이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서도 취지를 변경한다고 확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여, 자기가 호주가 아니라서 마음대로 창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핑계가 아니라 법률상 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체로 상속인이 어머니와 호적이 달리하는 일이 많으므로 위와 같은 연합부 결정이 나온 것이고, 그 취지는 상속에서 동일가적( 同 一 家 籍 )의 여부가 요건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임은 누구에게나 쉽게 읽혀진다. 정광현도 또한 이처럼 이해하지 않았을 리 없겠지만, 일부러 모른 체한 것이리라. 이처럼 완고한 호주의 반대, 분가에 대한 부동의( 不 同 意 ), 가족부양의무, 49) 1939년 개정 조선민사령 제11조 제3항: 씨는 호주(법정대리인이 있는 때는 법정대리 인)가 정한다. 50) 성씨논고, 93면. 51) 1924.9.2. 판결 다이쇼 13년 민상 제202호[ 朝 鮮 高 等 法 院 判 決 錄 제11권(민사), 16 8~172면]. 52) 1933.12.8. 연합부 결정 쇼와 8년 민항 제33호( 朝 鮮 高 等 法 院 判 決 錄 제20권(민사), 461~464면): 어머니의 유산은 남녀를 묻지 않고서 그의 자녀가 상속하며, 같은 가적( 家 籍 )에 있는지 아닌지는 구별할 것 없다. 이는 조선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 습으로 현재에도 다를 바 없다.
100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유산상속 따위와 관련한 문제들 때문에 8월 10일까지 일본인식의 씨의 설 정을 못한 자에 대한 복음이 개정 조선민사령의 부칙 제3조라는 것이다. 이 규정에 의해 호주가 기한 안에 설정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기의 성으로 씨를 삼을 수 있다. 53) 그리고 종중이 협정하여 씨를 선정하는 데 대해서는 씨가 가를 구별하기 위한 칭호라는 것을 몰각하는 것으로서 씨를 족칭화( 族 稱 化 )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54) 그리하여 이러한 결정은 종중원들을 강제하는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Ⅴ. 성씨논고 에 담긴 법사상 1. 내선일체에 대한 태도 수사기관에서는 흥업구락부나 적화교수그룹을 반내선일체 활동을 하는 단체로 보아, 검거하고 해산시켰다. 구속된 흥업구락부원들은 내선일체에 힘을 다하겠다는 전향서를 쓰고 풀려날 수 있었고, 정광현도 역시 전향서 를 쓰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 따로 사상교육도 받아야 했고, 보호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그에게 다시 내선일체에 대한 저항 의식의 소유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는 일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 여 성씨논고 에서는 그런 의심으로부터 피해가려 애쓴 흔적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내선일체를 고무, 찬양하는 언명까지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실은 정광현의 마음에는 내선일체, 곧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심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이 창씨 제도 의 의의가 내선일체임을 설명할 때 총독, 법무국장 등의 담화를 인용할 뿐 자신은 한 마디도 그에 관해 하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당시의 독자는 그의 진정한 본심을 행간에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굳이 성씨논 고 의 집필하여 발간하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조선의 전통 법제와 관습을 연구해 온 학자에게는 실존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 53) 성씨논고, 96면. 54) 위의 책, 97면.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101 족 관습은 1911년의 조선민사령에 의해 일본 민법의 의용에서 예외로 하 여 조선의 독자성이 인정되었으나,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 면 의미가 없어진다. 이는 결국 조선민족의 고유성이 말살되는 것이며, 그 의 고유법 사상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이다. 2.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 법령으로 되어버린 창씨제도는 법학자에게 부인할 수 없는 대상이다. 성 씨논고 에서는 이 창씨개명에 대한 해설, 설정 방법을 자세히 서술한다. 일 견 제도의 원활한 시행을 뒷받침하는 저술로 보인다. 하지만 정광현의 객 관적인 해설을 듣고 나면 마음에 어느 정도 일정한 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창씨개명의 시행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는 가운데에서 조선의 고 유한 전통이 최대한 보존되길 바라는 그의 심정이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성으로 씨를 삼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법률적 편의를 제공한다. 우선 일본식으로 창씨해야 한다는 것은 법령상 근거가 없다고 뚜렷이 밝 힌다. 그리고 창씨의 방법으로 설정 신고하는 방식과 함께 아예 신고하지 않는 방식이 있음을 친절히 알린다. 특히 자신의 성으로 씨를 삼을 수 있 는 방법으로서 아예 신고하지 않는 수가 있다고 알려 주며, 신고할 수 없 는 사정에 대해 판례의 태도를 들면서 변호해 주기까지 한다. 성씨에 대한 기초연구에서는 일본인의 씨에 들어 있는 조선인의 성을 일람표로 만들어,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이 그대로 씨가 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제공하였다. 그냥 훈독하면 된다는 설명도 해준다. 부득이 신고를 하게 될 때를 생각하여 기존의 자기 성에서 한두 글자만 덧붙여서 씨로 삼 을 수 있는 일본의 씨들도 정리해 놓았다. 55)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조선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창씨개명의 시행 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씨제도의 시행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유명무실하게 하거나, 최소한 그 제도에서도 조선의 독자성이 표출 되도록 하려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창씨개명을 내선일체의 초석으로 삼 55) 이 점만 떼어놓고 보면 창시개명을 유도하는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 인 맥락에서는 설정창씨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우의 방편으로 제시하는 것이라 파악된다.
102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는 일제 정책에 대한 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성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의 탓이 가장 큰 요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창씨 신 고는 3월말까지 1.5%에 그쳤고, 신고기간의 절반이 4월말에도 3.9%에 지 나지 않았다. 56) 이러한 결과에 당황한 총독 이하 관계 당국이 본심을 감추 지 않게 되자 갑작스레 증가하여 8월 10일에는 80%를 넘기게 되었고, 이 후에도 일본식 씨의 변경이 이어졌다. 결국 정광현의 노력은 좌절되었다고 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1941년 5월이 지나서는 해방될 때까지 거의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Ⅵ. 맺 음 말 성씨논고 가 쓰여질 당시는, 전쟁 수행을 위해 배후의 안정과 지원을 얻고자 내선일체가 무엇보다 강조되었으며, 그것을 내면화하려는 주요 정책 으로서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 특히 이때에는 정광현의 개인적 인 입장에서도 참으로 부담스러운 처지였다. 공산주의와 내선일치에 관련된 사상 문제로 입건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지 1년 남짓한 정도이고, 더 구나 전향서를 쓰고 최근까지 사상교육을 받았으며, 그제까지도 보호관찰중 이다. 성씨논고 는 이런 험난한 시기에 필자의 치열한 소명의식에서 나온 역작인 것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그 동안의 연구 역정으로 볼 때, 1 민족의 전통을 연구하며 길러진 역사정신, 2 내선일체에 맞서던 항일사상, 3 학자적 양심에 따른 소명의식 따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그 소산을 통해 설송 정광현의 다음과 같은 법률관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1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57) 민족 감정을 해치지 않고 그에 상응하여 법을 운용해야 한다는 민족법사상, 2 저마다의 합리적 관 습들이 집적되어 그것이 입법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고유법사상. 하지만 본 연구는 이제까지 묻혀 있던 저작에 대한 새로운 의의를 찾아보려는 초 56) 미즈노 나오키, 앞의 논문, 189면. 57) 정광현은 전래 관습이라 하더라도 동성불혼, 여성 차별과 같은 불합리한 것들에 대 해서는 그 폐지를 선구적으로 주장했다.
설송 정광현의 성씨논고 에 나타난 법사상과 창씨개명 103 보적인 작업에 지나지 않아, 그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법의 전통적 요소를 보존해오며 발전한 가족법학을 민족의 수난과 함께 지켜가려 했던 설송 정광현 선생의 의지를 확인할 수 는 있었다고 하겠다. 앞으로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로이 밝혀진 그의 사상적 기반이, 이후의 저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하는 지경까지 학계 의 연구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설송 정광현, 성씨논고( 姓 氏 論 考 ), 창씨개명, 내선일체, 가족법, 흥업구락부, 경제연 구회(적화교수사건), 성, 씨, 가, 호, 윤치호 Jeong Gwang-Hyeon, Seongssinon go(a study on the clan and family name), Changssigaemyeong(policy of changing Korean family names to Japanese ones), Naeseon ilche(policy of uniting Japan and Korea together), family law
104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참고문헌 정광현,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67. 정광현, 姓 氏 論 考 朝 鮮 家 族 法 論 考, 동광당서점, 1940. 정광현, 女 性 의 法 律, <조선중앙일보> 1934.11.16~1935.1.20. 정광현, 朝 鮮 民 事 令 改 正 을 中 心 으로, <조선일보> 1939.11.17~18, 20~21. 鄭 光 鉉 博 士 年 譜, (서울대학교) 법학, 제9권 제2호(1967).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집>, 길안사, 1995. 윤치호일기 제11권(http://www.history.go.kr). 善 生 永 助, 朝 鮮 の 姓 氏 と 同 族 部 落, 刀 江 書 院, 1943. 外 務 省 編, 外 地 法 制 誌 제7권( 制 令 前 篇 ), 文 生 書 院, 1990. 朝 鮮 高 等 法 院 判 決 錄 제11권, 제20권. 구광모,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 국제정치논집, 제45집 제4호(2005). 김상태, 1920~1930년대 同 友 會 興 業 俱 樂 部 연구, 한국사론 제28권(1992). 김주수, 鄭 光 鉉 博 士 의 婚 姻 法,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 집>, 길안사, 1995. 미즈노 나오키( 水 野 直 樹 ), 조선총독부는 왜 창씨개명 을 실시했을까, 내일을 여는 역 사, 제15호(2004.3.). 박병호, 鄭 光 鉉 先 生 의 學 問 世 界, 가족법연구, 도서출판 진원, 1996. 배경숙, 韓 國 相 續 法 과 鄭 光 鉉 博 士 의 見 解 와 學 說,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집>, 길안사, 1995. 이희봉, 서평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 법학, 제48권 3호(2007.9.). 정주수, 창씨개명연구⑴, 사법행정, 제44권 제11호(2003.11.). 조미경, 정광현,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 법학, 제48권 3호(2007.9.). 최병욱, 鄭 光 鉉 博 士 의 婚 姻 申 告 性 質 論,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집>, 길안사, 1995.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상 29) 설송 정광현, 사법행정, 제25권 제8호(1984.8.) 최종고, 정광현, 한국의 법학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坂 本 眞 一, 明 治 民 法 의 성씨제도와 創 氏 改 名 ( 朝 鮮 ) 改 姓 名 ( 臺 灣 )의 비교분석, 법 사학연구, 제22호(2000.10). 홍성찬, 일제하 연전상과의 경제학풍과 경제연구회사건, 한국경제학보, 제1호(1994). 황적인, 鄭 光 鉉 敎 授 와 著 作 權 法, 법학교육과 법학연구 <고 정광현 박사 추모 논문 집>, 길안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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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家 族 法 硏 究 第 23 卷 1 號 A Study on the Legal Thoughts of Jeong Gwang-Hyeo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to change Korean Name 58) Ihm, Sahng Hyeog* The first book of Jeong Gwang-Hyeon(정광현: 1902~1980), who has been called the father of Korean Family Law in no doubt, was released right after the implementation of the Japanese Changssigaemyeong(창씨개 명) policy of changing Korean family names to Japanese ones. Therefore it would be served as the materials for looking back on the attitude of the scholar on the social situation of the colonial times. 1940s were the times when Japan emphasized the Naeseon ilche(내선일체) policy of uniting Japan and Korea together to acquire the stability needed for engaging war, which resulted in the policy of changing Korean names. At that time Jeong was in the very difficult situation. One year didn t pass after he was suspended from the charge of ideological matters related to anti-naeseon ilche and communism. He had written up the pledge of ideological conversion and had been under the probation. Seongssinon go( 姓 氏 論 考 : A study on the clan and family name) is the masterpiece which came from the writer s urgent calling despite his hard position. His desperate state of mind is read in the book, that he is eager to preserve Korean s own tradition as ever under the Changssigaemyeong policy. It looks like somewhat of a resistance. 1 Jeong s historical consciousness owing to his research of the Korean legal tradition, 2 his spirit against the Naeseon ilche, and 3 his scholastic sense on calling might make all the works possible. * Professor, College of Law, Soongsi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