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해결연구 2014; 12(2) Dispute Resolution Studies Review 2014, Vol.12, No.2:137~164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3) 최 준 영** 목 차 Ⅰ. 서 론 Ⅱ. 퍼즐1:왜 노무현 대통령은 허니문 기간이 없었는가? Ⅲ. 퍼즐2:왜 떨어진 지지율은 반등하지 못하였나? Ⅳ. 결론: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논문요약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다른 대통령의 지지율 패턴과는 다른 두 가지 특이한 양 상을 나타냈다. 첫째, 노무현 대통령의 허니문 기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짧았다는 점이다. 둘째, 한 번 떨어진 지지율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에 나타난 이와 같은 두 가지 퍼즐을 푸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연구결과 임기 첫해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이유는 도덕성에 입각한 가치쟁점의 효력이 조기에 상실되면서 조 건적 지지층이 이탈하고, 불리한 국내 국제정치적 환경에서 파생되었던 문제들에 의해 핵심 지지층마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리고 이렇게 떨어진 지지율을 다시 반등시키는데 실패한 이유는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 춘 국정의제가 당시 국민들의 선호와 어긋나 있었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거 그 어느 야당보다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되었다. 결론에서는 이 와 같은 분석결과에 입각하여 우리가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주제어:대통령 지지율, 노무현 대통령, 정치개혁, 가치쟁점 * 이 논문은 2014년 여의도연구원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인하대학교 부교수 - 137 -
138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Ⅰ. 서 론 일반적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핵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는 대통령 개인의 업무성과 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통령 지지율은 대 통령의 업무성과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직접적으로 측정하고 있는 지표로서, 국정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 고 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이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필연적 하락의 법칙 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필연적 하락의 법칙이란 대통령은 임기 초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 임기 말에는 거의 예외 없이 매우 낮은 지지만을 받는 현상을 일컫는다. 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이 필연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지만(문우진 2012; 한귀영 조성대 2010; Mueller 1970; Sigelman and Knight 1983; Stimson 1976), 그 이유야 어떻든 다음의 [그림 1]은 한국의 대통령들도 이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 1]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7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임기를 시작하였고, 그 보다 조금 낮기는 하나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도 임기 초에 상 당히 높은 지지를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1]은 또한 이처럼 높게 형성되어 있던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대부분의 대통 령들이 30%대의 낮은 지지율로 임기를 마감하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회과학에서 법칙 이라는 것을 찾기 어렵다고 는 하나 지지율의 하락 현상은 진정 법칙으로 간주할 만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필연적 하락의 법칙이 모든 대통령에게 적용된다고 해서 각 대통령의 지지율의 변화양상이 모두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39 왼쪽 끝은 높고 오른쪽 끝은 낮은 좌고우저( 左 高 右 低 )의 패턴이 형성되어 있기 는 하지만, 그 중간 지점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지율은 대통령마다 서로 다른 모 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런데 이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다른 대통령들의 지지율에 비해 특히 독특한 변화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그림 1] 민주화 이후 역대 한국 대통령의 지지율 변화 출처:R & R 1) 대통령 지지율이 그와 같이 변동하고 있는 원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상황이 좋고 나쁨에 따라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하거나 하락할 수 있다 (가상준 노규형 2010; 이곤수 2009; 조성대 한귀영 2010; Hibbs 1982; Kenski 1977; Kernell 1978; Monroe 1984; Mueller 1970; Norpoth 1984; Ostrom and Simon 1985). 둘 째, 임기 초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높은 지지율이 형성되는 허니문 효 과가 존재한다(Kernell 1978; Stimson 1976). 셋째, 국제적으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통 령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결집하여 지지율이 상승하는 결집효과가 있다(Mueller 1970, 1973).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연루된 스캔들도 대통령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Kernell 1978; MacKuen 1983; Norpoth 1984; Ostrom and Simon 1985).
140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5년의 임기 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 좀 더 구 체적으로 살펴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하자마자 실시된 한 여론조사 에서 75.1%의 지지율을 보이는 등 매우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 그 직후 수직 하강하기 시작하여 동년 말기에는 20%를 약간 웃도는 매우 낮은 지지율을 나타 냈다. 다시 말해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허니문 기간(honeymoon period )이 전 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취임 직후 아주 짧은 기 간에 국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기 첫해 심각하게 추락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 지율은 2004년 탄핵정국을 제외하고 20%~40% 사이에서 매우 낮게 유지되다가 임기 4년차에 들어서는 아예 10%대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임기 5년차에는 어느 정도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0% 선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다른 대통령의 지지율에 비해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퍼즐 때문이다. 첫 번째 퍼즐은 왜 노무 현 대통령의 허니문 기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짧 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허니문 기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에 대해 높 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고 야당이나 언론 등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기 초 대통령의 지지율을 높이는 허니 문 효과를 만들어 낸다(가상준 노규형 2010; Brody 1991; Mueller 1970). 김영 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허니문 기간 동안 국민들로부터 매우 높은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러한 높은 지지는 거의 일 년 가까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2)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취임을 하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한 지지율의 하락이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허니문 기간에 나타나는 허 니문 효과를 향유할 수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관련된 두 번째 퍼즐은 왜 한 번 떨어진 지지율이 좀 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 령의 경우도 노무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임기 첫해 심각한 지지율의 감소를 경 2) 집권 첫 해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평균 지지율은 각각 74%, 63% 이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첫 해 평균 지지율은 37.8%에 머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41 험하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인해 임기 첫해 발생한 촛불정국 속에 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였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이명박 대 통령의 지지율은 다시 반등하여 임기 2년차 말부터 4년차 초까지는 40%~50% 선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임기 첫해에 떨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좀처럼 40% 선을 넘지 못하고 계 속 낮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연구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에 나타난 이와 같은 두 가지 퍼즐에 대한 필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제2절에서는 허니문 기간의 부재라는 첫 번째 퍼즐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가치쟁점 효과 의 조기 상실과 비우호적 국내 국제정치적 환경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떨어진 지지율이 다시 반등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던 이유를 과녁이 빗나간 국정의제의 선정과 강력한 야당의 존재에서 찾고자 한다. 제4절은 결론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 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에 대한 분석결과에 입각하여 향후 대통령 지지율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함의를 모색하고자 한다. Ⅱ. 퍼즐1:왜 노무현 대통령은 허니문 기간이 없었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첫해 지지율은 1분기 60%, 2분기 40%, 3분기 29%, 4분 기 22%로 나타나 이미 2분기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지지율의 하락 현상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허니문 기간이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취임 직후 겨우 두세 달 정 도에 그칠 만큼 매우 짧았던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을까? 크게 두 가 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제16대 대선을 거치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창출하였던 가치쟁점의 효력이 조기에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노무 3)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첫해 평균 지지율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으로 인해 35.7%라는 매우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142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현 대통령이 자체적으로 통제하기 힘든 비우호적인 국내 국제정치적 환경이 임 기 초에 조성되어 있었고,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는 현실적으로 극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임기 첫해에 조건적 지 지층뿐만 아니라 핵심 지지층의 등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결과적으로 노 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요 인이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첫해 지지율을 떨어뜨렸는지 좀 더 구체적으 로 알아보도록 하자. 1. 가치쟁점 효력의 조기 상실 문우진(2012)은 대통령 지지율이 필연적으로 하락하게 되는 이유는 대선 당시 대통령에 의해 제시되었던 가치쟁점(valence issue)이 효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조건적 지지층 4)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점차적으로 철회하기 때문이라고 주장 한다. 5) 그렇다면 가치쟁점이란 무엇인가? 가치쟁점은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위치쟁점(position issue)과는 달리 대부분의 유권자가 동의할 수 있는 그러한 쟁 점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위기 극복, 정치개혁, 경제성장, 경제민주 화 등 역대 대통령들이 선거에서 제시한 일종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따라서 광 범위한 유권자들의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그러한 쟁점들을 말한다. 문우진 은 이러한 가치쟁점과 지지율의 하락 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 고 있다. 선거승리를 목표로 하는 포괄정당은 가능한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후보의 국가 지도자로서 유인적 가치(valence)를 생산한다. 이러한 가치 4) 여기서 조건적 지지층이란 대통령과 이념이나 소속정당이 달라도 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제시한 가치쟁점에 대한 기대 때문에 조건적으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의미한다. 5) 문우진의 이론은 필연적 하락의 법칙의 내재적 동학을 설명하는 뮬러(Mueller 1970)의 소 수자 연합론(coalition of minorities)이나 스팀슨(Stimson 1976)의 기대 환멸이론을 비판 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는 문우진의 이론적 논의에 입각하여 노무현 대통 령의 임기 첫해 지지율을 설명하고자 한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43 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일부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념을 대변하지 않는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 그러나 임기의 진행과 동시에 대통령의 정책결과가 노출되 게 되면서, 후보가 내세운 가치를 기준으로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지지를 철 회하기 때문에 대통령 지지도는 필연적으로 하락한다(문우진 2012: 176). 유권자들은 후보의 이념이 자신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혹은 자신이 지 지하는 정당의 후보가 아니더라도 그 후보가 제시한 가치쟁점에 공감하였다면 그에게 투표한다. 6) 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경우 그가 지니고 있는 가치쟁 점의 효력은 이 쟁점에 대한 가시적인 노력이 전개되기 이전인 임기 초반에 가 장 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허니문 효과가 발생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쟁점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던지 혹은 제대로 된 결 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한 기대는 환멸로 바뀌어 결국 지지를 철회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필연적인 과 정이다. 왜냐하면 가치쟁점에서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존재하지도 않고 설령 존재한다하더라도 제대로 구현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김병준 2012; 문우진 2012). 이러한 가치쟁점의 특성상 가치 쟁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통령 지지연합은 상당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으며, 결 국에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필연적으로 하락하는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제16대 대선에서 제시한 가치쟁점은 무엇이었는 가?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에서 제시한 가치쟁점은 도덕성과 이에 기반을 둔 정 치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노무현재단 2010; 문우진 2012; 이호은 2004; 한귀영 2011; 한귀영 조성대 2010). 김대중 대통령 집권 말기 친인척 측근들의 부정 부패가 상당히 많은 논란을 만들어 낸 상황에서 제16대 대선은 정책적 대결보다 는 후보들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에 노무현 후보는 낡은 정치 청산 및 반칙 없는 사회라는 가치를 표방하며 선거에 임하였다. 7) 아 6) 이에 대해서는 한귀영 조성대(2010)의 경험적 연구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7) 노무현 대통령은 16대 대선을 한마디로 분열주의와 기회주의, 특권과 반칙에 대한 투쟁 으로 개념정의하고 있으며(노무현재단 2010: 177), 주요 공약으로 상식이 통하고 원칙이 지켜지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나라, 정경유착, 반칙, 특혜, 특권이 없는 사회 를 만들
144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들의 병역비리 의혹에 휘말린 이회창 후보는 도덕성과 정치개혁이라는 가치쟁점 에 있어서 노무현 후보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선거는 노무현 후보의 승 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과 정치개혁이라는 가치쟁점에 대해 상당히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2003년 2월 14일 실시된 SBS-TNS 여론 조사는 노무현 정부에게 가장 기대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복수로 응답해 달라고 물어보았는데, 정치개혁분야 104.7%, 경제분야 75.2%, 사회분야 17.7% 순으로 나타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귀영 조성대 2010, 96). 한편 비슷한 시기에 동아시아연구원에서 중앙 일보와 공동으로 수행한 여론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로 최우선적으로 개혁해야 하 는 분야로 국내정치를 뽑은 응답자가 가장 많이 나타났다(강원택 2003).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취임을 전 후해서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쟁점이 지니고 있던 효력은 취임 첫해부 터 깨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정치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순결함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비도덕적인 인물이 정치적 정화를 위한 개혁운동을 펼친다 면 그 운동의 정당성 자체가 의심을 받게 되며 따라서 개혁운동의 성공을 위한 동력, 즉 광범위한 지지연합을 창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 나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사건들이 취임 이후부터 줄줄이 터져 나왔다. 대선 불법자금 수수에 노무현 대 통령의 최측근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들이 연이어 제기된 것이다. 우선 나라종금 사건이 제기되었다. 김대중 정권 당시 나라종금의 대주주는 자 사의 퇴출을 막기 위해 유력 정계인사들을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활동을 했고, 이러한 로비자금의 일부가 노무현 후보의 대선캠프로 흘러들어 갔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염동연, 안희정씨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또 한 5월에는 김문수 한나라당 기획위원장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 가 거제도에 땅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 되었고, 동시에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노무현 재단 2010: 205).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45 마련하기 위해 부적절하게 생수사업에 개입하였다는 장수천 사건도 터져 나왔 다. 또한 8월에는 양길승 청와대실장이 청주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향응과 함께 선거자금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썬앤문이나 SK, 삼성 등으로부터 최도술, 이광재, 안희정씨 등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이 불법으 로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논란도 발생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16대 대선 선거유세에서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이제 이상 더 대통령의 의혹 사건을 가지고 국회에서 밤낮 조사하자, 이렇게 싸우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부정부패 없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국회 일의 절반을 넘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03년 5월 재산관련 특별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의 돼지 저금통을 비롯한 성금에 의 해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너무나 투명한 돈이고...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 나 측근들이 대선불법자금 수수에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러한 깨끗한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8) 다른 가치쟁점과는 달리 도덕성에 연계된 가치쟁점은 한번 흠집이 나면 좀처 럼 원상태로 회복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이라는 가치쟁점은 한두 번 실수를 한다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좀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 를 가져볼 수 있다. 즉 한두 번의 실수가 그러한 가치가 지니는 효력을 즉각적 으로 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기 보다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실수라도 그 가치가 지니고 있는 효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더구나 알고 봤더니 비도덕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인물이더라는 배신감은 도덕성에 연계된 가치의 효력을 더욱 떨어 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임기 첫해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8)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취임 첫해부터 도덕 성과 정통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취임하자마자 1년 내내 이 문제로 시달렸다. 내 운 명은 새 시대의 첫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노무현재단 2010: 207). 한편 나라종금 사건에 대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안희 정, 염동연씨가 나라종금에서 받은 자금이 단순한 투자금과 용돈이라는 주장에 대해 국민 들의 압도적 다수인 87.8%가 믿지 않는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가상준 노규형 2010).
146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있는 인물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노무현 대 통령 자신의 도덕성도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쟁점이 임기 첫해부터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 현실로 이어졌다. 가치쟁점이란 전술하였던 것처럼 이념이나 정당이 달라 도 그 후보를 지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문우진 2012; 한귀영 조성대 2010). 보수적 이념을 보유한 유권자나 야당인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였다면,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니고 있던 도덕성과 정치개 혁이라는 가치쟁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즉 이들은 노무 현 대통령에 대한 조건적 지지층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기 첫해부터 연 이어 터져 나온 측근비리 스캔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도 다른 부패한 정치 인들과 별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인식 을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쟁점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매우 빠르게 실망과 환멸로 전환시켰다. 결국 도덕성과 이에 입각한 정치개혁이라는 가치쟁점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였던 다수의 조 건적 지지층들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이와 맞물려 노무현 대 통령의 지지율도 떨어지게 된 것이다. 9) 도덕성의 위기와 이에 따른 지지율 추락의 심각성은 누구보다도 노무현 대통 령이 잘 인식하고 있었다. 10)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10일 청와대 춘 9)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 이들이 제시한 가치쟁점의 효력은 적어도 3년차 정도까지는 유지 된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 발전을,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자신의 가치쟁점으로 제시하여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가치쟁점은 그 성격상 이를 구현하기 위한 각 대통령의 노력이 어떠한 결실을 맺 었는지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일정 기간이 경과될 필요가 있었다. 즉 국민들의 가치 쟁점에 대한 기대가 결국 환멸로 바뀌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는 것이 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에 입각한 정치개혁이라는 가치는 한번 도덕성에 손 상이 가자마자 그 효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10) 노무현 대통령 자서전에는 재신임 선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선 불 법 자금 문제로 참모들이 구속되어 지지율이 곤두박질 쳤을 때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제 안했다. 집권 초부터 국정수행 지지도가 바닥으로 내려간 대통령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의미 있는 고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고 민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노무현재단 2010: 235)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47 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측근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들의 재신임을 받겠다 는 핵폭탄급 선언까지 하게 되었다. 재신임 선언을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저 는 모든 권력적 수단을 포기했습니다. 도덕적 신뢰 하나만이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밑천일 뿐입니다. 그 문제에 적신호가 왔기 때문에 이제 국민들에게 겸 허히 심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호소하였다(한귀영 2011, 52쪽 에서 재인용).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호소는 부정적 여론만을 형성시킬 뿐이었 다. 심지어 한겨레신문과 같은 진보적 언론매체마저도 국정 전반을 두루 건사 해야 할 대통령이 도덕성 확보에 급급해 재신임까지 거론한 것은 지나치게 결벽 하다 못해 무책임하다 라고 비판할 정도였다(이호은 2004: 82).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은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결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정치개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 였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들의 지지는 자신과 정권의 도덕성에서 비롯될 터였 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성 자체가 크게 훼손된 상황에서 정치개혁의 실현 가능 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 탈출구가 안 보이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결국 재신임 선언은 도덕성의 위기를 타파하여 떨어지고 있는 지지율을 만회하고 이 를 기반으로 정치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조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은 한 국가 를 이끄는 통치자로서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지나치게 개인의 도덕적 자 부심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등 부정적인 여론만을 형성시킨 채 끝나버렸다(한 귀영 2011). 이미 등을 돌려버린 조건적 지지층을 다시 돌려 세우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2. 비우호적인 국내 국제정치적 환경 측근비리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이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 조건적 지 지층이 이탈하게 된 이유라면 임기 첫해 조성되어 있던 비우호적인 국내 국제 정치적 환경은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의 상당수가 임기 첫해부터 지지를
148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철회하는 이유가 된다. 김대중 정권에서 발생하였던 사안들이나 9.11 테러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던 국제정치적 상황은 노무현 대통령의 통제범위를 넘어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국제정치적 문제가 취임 첫해인 2003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발 목을 잡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대응은 임 기 첫해부터 핵심지지층이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국내정치적 문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취임식 바로 다음날 여의도에서 고약한 선물 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다(노무현재단 2010: 230). 당시 국회의 과반수 이 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처리하여 정부에 보낸 대북송 금특검법안 을 일컫는 말이다. 이 특검법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당시에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비밀리 에 북으로 보냈고, 이러한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그대로 수 용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러한 결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호남의 전통 적 지지층이 크게 동요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노무현재단 2010; 한귀영 2011).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 로 비춰진 탓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이 당시 국내정 치적 환경 상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1) 첫째, 도덕성 을 국정운영의 기치로 내세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자금 문제는 그냥 덮고 지나가기 힘든 이슈였다. 이유야 어쨌든 북으로 보내진 비자금은 국 민들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조성된 것이고 따라서 정치인의 권력남용의 결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만약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핵심 지지층인 호 남의 지지는 유지할 수 있겠으나, 전 정권의 부도덕한 권력남용을 그대로 용인 11) 특검법을 수용한 이유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설명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인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을 참조하시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49 하는 형국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선명성에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 다. 더구나 정치개혁은 성역이 없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전 정권의 문제를 묵과 하고 넘어간다면 개혁자체가 정파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었 고, 따라서 개혁의 정통성 자체가 약화될 위험도 존재하였다. 둘째,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국회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한나 라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몸담고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모자랐고, 그나 마도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상당히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과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만약 한나라 당이 보낸 고약한 선물 을 거부한다면 이는 임기 초부터 거대야당인 한나라당과 대결국면으로 돌입하겠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과 다름 아닌 형국이 되는 것인 데, 이는 소수당 대통령이 쉽게 선택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송금특검법안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이 결정의 후폭풍은 결코 작지 않았다. 대선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굳건한 지지기반이 되었던 호남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급감하였고 또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내의 일부 세력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대의 목소 리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한편 2003년 소위 카드대란이라 불리는 심각한 경제위기가 발생하였다. 사실 이 당시 발생한 경제위기의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문제의 뿌리는 1997년 외환위기로까지 이어진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신용카드 시장을 포함한 금융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제금용을 통해 자본을 확충한 금융회사 들은 일반 가계를 대상으로 공격적으로 영업을 확대시켜 나갔고, 일반 국민들은 외환위기로 인해 취약해진 구매력을 신용카드로 대체해서 소비를 하는 구조가 만 들어지게 되었다. 12) 결국 2002년 말부터 가계신용의 위기가 나타나게 되었고 12) 정부는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현금서비스 한도 규제를 풀어버렸는데 이러한 결정은 신 용카드 대출 경쟁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쟁은 결국 신용카드 한 장으로 최
150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2003년부터는 카드사 파산을 비롯해 신용불량자의 수가 급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그룹은 경제적 빈곤층이었 는데, 진보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서 이들은 중요한 핵심지지층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구조적으로 혼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에 대해 신속하고 효 과적으로 대응하기는 힘들었고, 이는 또 다른 핵심 지지층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13) 국내정치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2003년 국제정치적 환경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는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을 수행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 들어갔다. 그리고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와 일방주의적인 외교노선이 미국의 외교정책의 주된 흐름으 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으며, 이에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 으로 선언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문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 현 대통령은 대선과정을 거치면서 자주국방이나 미국과의 보다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등 국가안보에 있어서 자주독립적 노선을 강조했고, 이는 미국의 이해 와 모순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와 같은 입장은 진보진영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요인 이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의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파워에 입각한 현실정치적 측면과 충돌하면서 딜레마적 상황 을 유발시킬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딜레마는 미국이 이라크 파병을 요 청하면서 실제로 현실화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면 누구든 한미 우호관계와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를 고 1000만 원까지 아무런 대출 상담 없이 인출이 가능해지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정 부는 2002년 중반에 다시 한도 규제를 실시해야만 했다. 13)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5년의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이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하고 있 다(노무현재단 2010: 218).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51 잘 관리하고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파병 문 제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야 할 문제이다. 대북송금특검법이 한나라당이 보낸 고약하지만 수령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취임 축하 선물 이었다면 이라크 파 병 요청은 미국이 보낸 고약하지만 수령을 거절하기 어려운 취임 축하 선물 이었다. 취임 직후 부시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이라크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 의 북한폭격론이 떠돌던 시점이라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비전투병력 인 공병부대와 의료부대를 소규모로 보내는 방안을 만들었다. 서희부대와 제 마부대는 쿠웨이트의 이라크 접경지역 미군기지 안에 주둔하기로 했다. 시민 단체의 파병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여당인 민주당 안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국가인원위원회도 반대 입장을 공식 천명했다. 4월 2일 국회 가 파병동의안을 가결했다(노무현재단 2010: 243). 이라크 파병이 결정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미국 순방길에 올라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 때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 이라는 발언을 하여 또 다시 대등한 한미관계를 원하였던 진보적 지지층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귀영 2011: 68).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년 6월에는 미국으로부터 전투병 파 병 요청이 들어 왔고, 시민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투병 파 병이 결정되었다. 이라크 파병문제는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한 핵심 지지층의 향배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는 점을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노무현재단 2010: 2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익의 차원에서 노 무현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결정은 예상한대로 핵심 지지층의 이반을 가져오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왜 노무현 대통령은 허니문 기간이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퍼즐 에 대한 답은 조건적 지지층과 핵심 지지층이 임기 첫해부터 대거 이탈해 나갔 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측근비리에 의해 노무현 정권의 부도덕한 측면이 노출 되자 도덕성과 정치개혁이라는 가치쟁점에 입각하여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였던 다수의 조건적 지지층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연합에서 급속히 이탈해 나갔다.
152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통제하기 힘들었던 국내 국제정치적 환경 속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핵심 지지층이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노무현 대통령 임기 첫해에 한꺼번에 발생하였고, 이러한 문제들이 야기한 악영 향이 중첩되고 증폭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첫해 지지율은 곤두박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림 2] 정권별 언론노출빈도:국정혼란(갈등 + 분열) 실제로 국정혼란(갈등+분열)을 키워드로 하여 정권별로 언론노출빈도를 조사 한 [그림 2]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첫해에 다른 대통령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언론노출빈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노 무현 대통령의 임기 첫해는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한 해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 자체의 문제 도 있었겠지만 지독히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측면도 간과하기 힘들다고 판 단된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53 Ⅲ. 퍼즐2:왜 떨어진 지지율은 반등하지 못하였나?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대한 두 번째 퍼즐은 왜 임기 첫해 떨어진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14) 임기 첫해의 지지율이 낮았다 하더라도 4년의 임기가 남은 상황에서 지지율을 다시 올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실제 로 임기 첫해 떨어진 지지율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첫해 떨어진 지지율을 반등시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계속 낮게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 엇인가?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라 생각한다. 하나는 국정의제 선정에 있어서 문 제가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역대 그 어느 대통령들보다 강 력한 야당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우선 국정의제 선정의 문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과녁이 빗나간 국정의제 2004년 탄핵국면을 거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매우 높게 상승하였 고, 연이어 제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 게 되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선 매우 훌륭한 정치적 환경이 조성된 듯이 보 였다. 이 여세를 몰아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제17대 국회 첫 정기회의 에서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등 4대 개혁입법 14) 물론 짧은 기간이나마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했던 적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일본의 과거 역사왜곡 행위에 대해 집권 초 일본에 대한 실용적 중립노선을 철회 하고 강경한 비판을 가하였고, 이에 지지율이 잠시 동안 30%대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 다. 또한 임기 말인 2007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서 지지율 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교 분야에서 달성한 업적은 지지율 에 단기적인 효과만 미칠 뿐 장기적으로 상승세를 유지시켜 나가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 다(정한울 정원칠 2013).
154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추진을 자신의 중요한 국정의제로 국민들에게 제시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춘 국정의제이며, 대선 당시 정치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 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일면 당연한 의제선정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지지율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의제선정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측근비리 스캔들을 통해 정치개혁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에 이미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도덕 성에 입각한 정치개혁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쟁점을 보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였던 조건적 지지층들의 다수는 이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 한 상태였다는 말이다. 정치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념이나 정파를 넘어서 광범위하고 굳건한 지지연합이 국민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 나 상당수의 조건적 지지층이 이미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4대 개혁안을 중심으 로 한 정치개혁은 탄력을 받기가 매우 힘들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은 4대 개혁안을 4대 국론 분열법 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한 한나라 당의 공세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4대 개혁안은 누더기 법 이라 불 릴 정도로 원래 취지와는 크게 동떨어진 상태로 국회를 통과하게 되어 절반의 성공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정치개혁을 위한 최초의 본 격적인 시도가 실패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이에 탄핵정국을 통해 일시적으로 상승했던 지지율은 또 다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2004년 정치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정치개 혁을 위한 시도를 감행하였다. 바로 2005년 8월 대연정 제안이다. 원래 이 제안 은 노무현 대통령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국무회의에서 비공개로 논의한 뒤 공식 적으로 의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포기한 것이었다(노무현재단 2010). 그러나 이것이 언론에 누설되는 바람에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KBS <국 민과의 대화>를 통해 대연정을 공식적인 의제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 제안은 지 역구도를 타파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반응은 극히 부정적 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아예 이 제안 자체를 무시하여 무대응으로 일관했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55 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과 열린우리당도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반응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신 혼자 잡은 정권인가? 당신 혼자 넘겨줄 것인가? 이렇게 되묻고는 차 갑게 돌아서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권력과 정치를 보는 국민의 시선과 의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연 정 제안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던 열린 우리당과의 관계가 더 심하게 뒤틀렸고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까지 흔들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할 수 있는 사 람이 당을 깨자고 하는 데까지 갔다(노무현재단 2010: 288).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의제가 일관되게 정치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또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을 때 많은 국민들의 관심은 이미 경제문제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서 국민들이 가장 많은 관심과 기대를 표명하였던 분야는 정치개혁 분야였었다. 그 러나 취임 이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복수 응답) 물가안정(51.5%)과 실업문제(36.3%)가 꼽혀 경제문제가 국민들 사이에 가 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한귀영 2011). 노무현 정부는 평균 4.42%의 경제성장률이라는 결코 나쁘지 않은 경제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시장분배의 측면에서 지나친 불균형 현상이 나타났고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서민경제는 극히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더구나 부동산 가격도 매우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고, 이에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 감도 커져갔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정치개혁보다는 경제문제를 더 중요한 문 제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의 체감경기가 극히 안 좋은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중요한 국정의제로 일관되게 정치개혁을 고집 하였다. 15) 지지율을 올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국정의제의 과녁이 빗나가 15) 2006년 협상이 시작되어 2007년 체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정치개혁이기보다는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슈였다. 그러나 이것도 경제적 약자보다는 재벌기업에 더
156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도 너무 빗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과녁이 빗나간 국정의제 선정은 임기 첫해 떨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하지 못하고 임기 내내 낮은 상태에 정체 되어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한귀영 2011). 2. 강력한 야당의 존재 시겔만과 나이트(Sigelman and Knight 1983)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임 기 초 대통령에 대한 높은 기대와 이어지는 환멸 때문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필 연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지지율이 하락 하는 속도는 대통령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 자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이들에 의하면 잘 조직된 반대 혹은 부정적 연합이 존 재하는 경우 하락의 속도는 그 만큼 더 빨라질 수 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의 경우 임기 초부터 퇴임할 때까지 한나라당이라는 강력한 보수세력의 십자포 화 속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율을 반등 시키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전체에 걸쳐 평균 지지율이 여당인 열 린우리당보다 10% 정도 높게 나올 정도로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어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정당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었다(한귀영 2011). 야당 지지 자들은 일반적으로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간주된다. 전체국민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면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이끌어가 는 국가수반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정파의 리더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 에 없다. 그만큼 국정운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또한 한나라당 안에는 이명박, 박근혜, 김문수, 정몽준 등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는 차기 대권주자들이 여럿 포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 중 한 명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광범위한 국민들 많은 이익이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되어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지지층인 진보진영의 강력 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57 의 지지를 결집하여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단순히 존재감만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힘겹게 한 것이 아 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는 것부터 중요한 정책의제를 좌절시키는 것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지속적인 비판과 반대를 해왔 다. 한나라당은 또한 자주노선을 강화하고자 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안보의 측면에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권의 안보관리 능력 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낮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지지율을 올리는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16) 그리고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진보정권은 경 제무능력 정권 잃어버린 10년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등 노무현 정권 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형성시켜 왔고, 이러한 한나라당의 노력은 정치개혁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의제와 대비되면서 상당히 부정적인 효과를 창출하였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권 당시만큼 야당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김영삼 정권 때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씨가 다시 복귀하기 전까지 야당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야 당의 힘은 그리 강력하지 못하였다. 김대중 정권 당시에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죄 때문에 한동안 김대중 정 권에 대해 강력하고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는 힘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에 도 민주당 보다는 오히려 같은 당에 있던 박근혜와 친박의 존재가 더 부담스러 웠을 정도로 야당의 존재감은 강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현재 박근혜 정권에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존재감도 마찬가지로 미약한 상황이다. 민주화 이 16) 정한울 정원칠(2013: 278)에 따르면 안보위협이나 위기감에 따른 결집효과가 일시적임 에 비해 평소의 대통령과 정부의 안보관리 능력에 대한 인식은 국정지지율 관리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다. 즉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통령의 안보관리 능력에 대 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대통령의 업무평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 다는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한나라당이 지속적으로 안보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대통령의 안보관리 능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힘들었을 가 능성이 높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은 상태에 정체되어 있었던 또 다른 이유 가 된다.
158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후 그 어느 대통령보다 강력했던 야당과 임기를 함께해야 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게 주워졌던 정치적 환경은 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암울했 던 것으로 판단된다. 17)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첫해 떨어진 지지율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한 이 유를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들은 정치개혁보다는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상태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실기한 정치개혁 을 주요 국정의제로 고집하여 정치개혁과 경제문제 두 가지 모두 제대로 해결하 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강력한 야당인 한나라당의 존재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을 자신의 지지연합으로 결집시키기 매우 어렵게 하였고, 따라서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을 창출하였다. Ⅳ. 결론: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관련된 두 가지 퍼즐에 대한 분석을 해 보 았다. 임기 첫해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이유는 도덕성에 입각한 가치쟁점의 효력 이 조기에 상실되면서 조건적 지지층이 이탈하고, 불리한 국내 국제정치적 환 경에서 파생되었던 문제들에 의해 핵심 지지층마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 를 철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떨어진 지지율을 다시 반등시키는데 실 패한 이유는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춘 국정의제가 당시 국민들의 선호와 어긋나 있었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거 그 어느 야당보다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에 대한 분석에 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대통령은 자신이 대선을 통해 제시하였던 가치쟁점의 효과가 오랜 기간 17) 강력한 야당의 존재는 대통령 지지세력의 결집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에 있어서 지지부진한 성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 력이 노대통령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결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59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지율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 미를 가질 수 있다. 전술하였던 것처럼 가치쟁점은 실제로 실현되기 힘든 속성 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망하는 지지자를 많이 만들어내어 필연적으로 지지율을 하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가치쟁점을 완벽하 게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부분적인 성과라 도 임기 중에 간헐적이나마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러한 지지율의 하락현상을 최 대한 늦출 수는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가치쟁점이 효력을 상실했을 때는 국정의제의 과감한 변화를 추구할 필 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있어서 도덕성에 입각한 정치개혁이라는 가치는 임 기 첫해 도덕성에 손상을 입으면서 사실상 그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탄핵정국과 제17대 총선 승리에 탄력을 받아 임기 2년차에 시도하였던 4대 개혁 안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다른 의제, 특히 경제문제에 초점을 맞춘 국정의제를 국민들에게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임기 3년차에 노 무현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을 함으로써 재차 정치개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제안은 반대세력을 더욱 결집시키고 핵심 지지층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듦으 로써 지지율을 심각하게 떨어뜨렸고, 결과적으로 임기 후반의 국정운영이 더욱 어렵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대통령 지지율 관리를 위해 보다 나은 경제지표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경제문제가 대통령 지지율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검증 된 사안이다(Mueller 1970; Norpoth 1996; Ostrom and Simon 1985). 그러나 신 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등장하고 경제의 세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소득의 불균 형 현상이 악화된 상황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거시경제지표가 실제 경제 상황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근래 들어 자주 제기되고 있다(Stiglitz 2012).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에 한국의 거시경제지표는 비교적 괜찮았지만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매우 안 좋은 형편이었다.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상황이 대통령의 지 지율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할 때,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 는 경제지표를 개발하여 국정운영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넷째, 성공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획득한 지지율의 유통기간은 그리 길지 않
160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강경발언이나 김정일 국방위원 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 한 상승효과는 극히 짧았고 떨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을 장기적인 관점에 서 반등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만 될 정치적 자본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는 인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정치개혁에 매진하였다. 마치 낮은 지지율은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길 을 뚜벅뚜벅 걸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큰 것으로 보아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간 길은 올바른 길이었다 해석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길이라 하더라도 지지율이 낮다면 목표한 것을 이루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성공한 정치인의 뒤에는 언제나 광범위하고 굳건한 지지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지율은 이러한 지지세력이 실제로 존재 하는지 여부를 밝혀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운명은 이를 간과했을 때 치러야 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61 참고문헌 가상준 노규형(2010). 지지율로 본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5년. 한국정당학회보 9: 61-86. 강원택(2003). 노무현 정부의 성격: 김대중 정부와의 연속성과 차별성. 이내영 이 하경 편. 노무현 정부의 딜레마와 선택 서울: 동아시아연구원. 김병준(2012).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서울: 개마고원. 노무현재단 엮음(2010).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파주: 돌베개. 문우진(2012). 대통령 지지도의 필연적 하락의 법칙: 누가, 왜 대통령에 대한 지지 를 바꾸는가? 한국정치학회보 46: 175-201. 이곤수(2009).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의 영향요인 분석: 취임 1년차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중심으로. 행정논총 47: 105-137. 이호은(2004).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수용태도에 관한 연구. 정치커뮤니케이션 연구 1: 77-100. 정한울 정원칠(2013). 국정지지율 관리. 이숙종 강원택 편. 2013 대통령의 성공 조건 서울: 동아시아연구원. 조성대 한귀영(2010). 대통령 국정지지, 정당지지, 그리고 경제전망의 동태적 관계 에 관한 연구: 비대칭 효과(Asymmetric Effect)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 보 44: 161-186. 한귀영(2011). 진보대통령 VS 보수대통령 서울: 폴리테이아. 한귀영 조성대(2010).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 필연적 하락과 주체적 대응의 동학: 노무현 이명박 임기 초반 비교 및 노무현 재임기간 분석. 한국정치연구 19: 77-105. Brody, Richard(1991). Assessing the President: The Media, Elite Opinion, and Public Suppor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Hibbs, Douglas. Jr.(1982). The Dynamics of Political Support for American Presidents Among Occupational and Partisan Groups.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26: 3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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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에 나타난 두 가지 퍼즐 163 Abstract Two Puzzles in the Presidential Approval Rating of President Roh Moo-hyun 18) Choi, Jun Young* The presidential approval rating of President Roh Moo-hyun has two distinct and intriguing features that set it apart from other presidential approval ratings. First, the honeymoon period for Roh was so short compared to other presidents that inauguration effects did not seem to exist for him. Second, once fallen significantly in the first year of his presidency, the approval ratings of Roh failed to increase later and stayed at low levels for the rest of his term. These two features comprise of puzzles that this study aims to solve. This study identifies two reasons why his approval fell into abyss in the first year. First, his valence issue based on his morality lost its strength immediately after his inauguration and this turned his conditional supporters against him. Second, unfavorable domestic/international environments and Roh s poor responses to them made even his core supporters desert him. The reasons why his fallen approval got bogged down in low levels for the rest of his term are as follows. President Roh sticked to the policy agenda gunning for political reform even when most of the people wanted him to do something for the bad economic situation. Besides, the Grand National Party, the most powerful opposing party since the democratization in 1987, was very successful in frustrating Roh s policy initiatives in various areas. This study presents in conclusion the lessons we can glean from Roh s presidential approval rating. Key words:presidential approval rating, President Roh Moo-hyun, political reform, valance issues * Inha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164 분쟁해결연구 제12권 제2호 논문투고일:2014년 06월 12일 심사완료일:2014년 07월 27일 게재확정일:2014년 08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