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동북아역사논총 34호 명 여진의 관계와 조선 여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중국 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조선, 여진, 명 3세력 사이에 놓 인 변경지대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 왜곡된 변경이론을 만들어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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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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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 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 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한일청구권협정 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한 2011년 8월 헌 법재판소는

아니라 일본 지리지, 수로지 5, 지도 6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근대기 일본이 편찬한 조선 지리지와 부속지도만으로 연구대상을 한정하 기로 한다. Ⅱ. 1876~1905년 울릉도 독도 서술의 추이 1. 울릉도 독도 호칭의 혼란과 지도상의 불일치 일본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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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잡이 배와 어부, 사냥하는 광경, 다양한 수륙동물 등 약 300여점의 그림이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 세계적 암각화입니다. 오랜 기간 새겨진 그림들 가운데 고래를 잡는 배와 어부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그 중요성과 가치가 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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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상기술연구 실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 3D 영화를 관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아바타> 이후, 티켓 파워에 민감한 국내 대형 극장 체인들이 2D 상영관을 3D 상영관으로 점차적으로 교체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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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295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 남의현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중국은 근세사 역사서술에서 명대의 女 眞 은 명나라의 屬 衛 로, 朝 鮮 은 명나라 의 부속국 곧 藩 國 으로 이해하고 있다. 중국이 정의하고 있는 屬 衛 는 자치성 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명나라 강역에 소속된 지방정권의 개념에 해당한다. 이것은 명대 사료에 外 夷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여진 지역을 일종의 명나라의 강역으로, 여진을 명에 종속된 세력으로 이해한 다는 의미이다. 조선에 대해서는 事 大 之 誠 의 개념을 도입하여 명나라 곧 종주국과 밀접 한 관계를 가진 독립된 국가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진과 조선은 명나라 를 섬기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향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명조와 여진의 관 계는 정식적 관계로,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비정식적 관계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것은 여진이 초기부터 명과 조선을 상대로 외교관계를 지속하였지만, 투고일: 2011년 6월 25일, 심사일: 2011년 8월 17일, 게재 확정일: 2011년 11월 23일

296 동북아역사논총 34호 명 여진의 관계와 조선 여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중국 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조선, 여진, 명 3세력 사이에 놓 인 변경지대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 왜곡된 변경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처럼 여진에 대한 왜곡된 중국의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서 는 16~17세기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여진의 역동적인 변화, 조선과 여진의 접 경지역 상황분석을 해 보아야 한다. 16세기 여진은 만주 지역의 海 西 女 眞 에 해당하는 扈 倫 4 部 ( 哈 達, 輝 發, 烏 拉, 葉 赫 ) 등 제 세력을 建 州 女 眞 중심으로 통합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나 가고 있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조선의 울타리 역할을 하던 수천 호의 여 진인들 곧 藩 胡 들은 조선으로부터 이탈하여 建 州 女 眞 으로 통합되어 흡수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조선의 울타리 역할을 하던 여진족 藩 胡 들이 부락 8,000여 호를 구성하여 최소 4~5만의 인구를 유지하는 등 조 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그 발전단계로 보면, 야만 의 단계도 아니었고 순수한 유목 수렵민도 아닌 농경민으로써 정착생활을 하 며 발전된 농업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여진의 성장은 두만강과 압록 강 유역에 명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었음을 말해 주며 16세기 후기 명의 요동 방어선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명대 요동변장을 만리장성으로 규정하고 장성의 동단기점을 압록강변의 호산산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명나라는 요동에 견고한 벽돌장성을 축조하기 힘든 대내외적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었고 여진을 견제하는 데 한계력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16세기 여진의 역동적인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북방 의 몽고와 동쪽의 여진을 방어하려 한 명대 요동변장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 그만 전초기지 중심의 성보였으며 결코 산해관과 같은 만리장성이 될 수 없었 음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명대 만리장성 동단기점이 압록강이라는 주장의 진위문제는 여진의 발전 을 배제하고 그 자체적으로 고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만리장성 동단기 점설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숨어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우선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297 만리장성 동단기점을 압록강 虎 山 山 城 으로 고착화시킴으로써 요동도사가 명 대 요동을 방어하는 견고하고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요동도사 가 요동팔참 지역을 명의 강역으로, 압록강을 명과 조선의 국경선으로 고착화 하려는 목적이 있다. 1) 遼 東 都 司 의 안정된 지배는 다시 奴 兒 干 都 司 의 진출로 두만강 유역을 명이 지배했다는 것과 연결되어 여진 지역은 명의 강역으로, 압 록강과 두만강은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된다는 중국의 주장과 연결된다. 이것 은 요동사에서 보자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성장한 국가와 정권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적이 없다는 기존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을 합 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여진의 성장과 명 요 동 지배력의 약화라는 시각에서 명대 만리장성 압록강 동단기점설의 허구를 밝혀 보고자 하였다. 中 朝 邊 界 史 와 같은 중국의 저작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정권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지 못한 것으로, 여진은 명나라의 종속세력이라 는 시각에서 강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2) 이로써 조선의 사신이 압록 강을 넘는 순간 명과 조선 사이에 존재하던 국경지대는 사라지고 명나라의 강 역이 시작된다. 또한 조선이 두만강을 넘으면 명의 강역이자 명에 종속된 여진 지역으로 입경하는 것이 됨으로써 명나라 중심의 역사서술에 종속되며 여진은 후금 건국 전까지 명의 강역에 사는 소수민족이 된다. 본 연구는 중국의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 16~17세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우선 16세기 여진의 성장과 통일과정, 그에 대응하는 명나라 변경정책 1) 현재 중국은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을 山 海 關 에서 鴨 綠 江 으로 변경하고 벽돌성의 흔 적이 없던 鴨 綠 江 에 虎 山 山 城 이라는 호화로운 거대한 벽돌 성벽을 수축하여 고구 려 석성을 벽돌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동단기점 이라는 거대한 푯말과 간판을 세우고 크고 작은 홍보물을 유포함으로써 세계인들의 관광지로 만들 고 있다. 2) 楊 昭 全 외, 1993, 中 朝 邊 界 史, 吉 林 文 史 出 版 社. 이 저서는 고대 중국의 영향력 을 漢 나라 시기에는 청천강, 한4군 시기에는 조선반도 중북부, 唐 나라 시기에는 한 강이나 대동강, 金 나라 시기에는 압록강, 元 나라 시기에는 철령, 明 나라 시기에는 압록~두만강으로 그 강역을 설정함으로써 중국 중심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대표적 인 강역 관련 연구서이다.

298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의 한계를 분석해 명대 장성의 동단기점 鴨 綠 江 說 의 허구성을 밝혀내 중국의 왜곡된 관점을 바로잡는 데 기본적인 목적을 두었다. 3) 일반적으로 본 논문과 관련된 16~17세기의 연구는 명청교체기 여진의 성 장, 이로 인한 조선 명관계의 동요, 조선과 후금관계의 재정립, 명 요동지배 의 와해 등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魏 志 江 의 中 韓 關 系 史 硏 究 ( 中 山 大 學 出 版 社, 2006)와 論 後 金 努 爾 哈 赤 正 權 與 朝 鮮 王 朝 的 交 涉 及 其 影 響 ( 民 族 硏 究, 2008. 2)은 명과 조선관계에 초점을 둔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후금에 초점을 둔 연구로 蘭 立 新 의 簡 述 後 金 與 明 朝 關 系 的 逐 步 演 變 ( 滿 族 硏 究, 1997. 1)을 언급할 수 있는데, 누르하치의 建 州 女 眞 통합과정 시 기부터 북경 함락까지 넓은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최근 한국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와 관련하여 선진적인 연구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김 선민의 명말 요동 변경 지역을 둘러싼 명 후금 조선의 삼각관계 ( 중국사 연구 55집, 중국사학회, 2008), 노기식의 명대 몽골과 만주의 교체 ( 사총 59, 2004),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소나무, 2007) 계승범의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 격 ( 역사학보 제193집, 역사학회, 2007), 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등이 대표 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연구성과로는 周 遠 廉 의 淸 朝 開 國 史 硏 究 ( 遼 寧 人 民, 1981), 趙 鐸 의 淸 開 國 經 濟 發 展 史 ( 遼 寧 人 民, 1992), 中 國 東 北 史 (3 4권, 吉 林 文 史, 1998)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시각으 로 16~17세기를 분석한 대표적인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중 3) 명대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수축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개방과 폐쇄, 海 禁 과 冒 險, 收 縮 과 膨 脹, 專 權 과 民 權, 王 朝 와 近 代 國 家, 重 農 과 重 商, 被 動 과 主 動 의 시대로 정의해 보면 세계사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시기에 오히려 고립된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영락제 이후 이러한 수동적 고립적 폐쇄적 15세기 명의 변경 정책은 16세기에도 세계사적 해양사적 개방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였는데 몽골 과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장성수축사업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299 국의 연구성과들은 여진 지역을 명의 변경, 중국 강역으로서의 변경으로 접근 하여 중국 중심적 시각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다. 특히 여진의 성장과 명 북방정책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만리장성이 압 록강에서 시작된다는 동단기점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에서 동단기점설이 1990년대 발표된 이래 정식으로 논문을 통해 그 상황을 치밀하게 정확하게 분 석한 논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인 저술로는 景 愛 의 中 國 長 城 史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2006), 劉 謙 의 明 遼 東 鎭 長 城 及 防 御 考 ( 文 物 出 版 社, 1989) 등 을 들 수 있는데, 실제 벽돌로 된 그리고 연결된 요동변장을 고증하고 있지는 못하다. 4) 중국이 압록강 동단기점설과 같은 변경과 강역의 문제를 이론화하고 정형 화시켜 가는 과정과 목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명 대 요동경영의 핵심인 遼 東 都 司 와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遼 東 邊 墻 의 기 능을 긍정적으로 과대평가하여 요동도사가 전 요동 지역을 지배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는 여진 지역을 명 나라의 강역으로 인정함으로써 이러한 遼 東 邊 墻 바깥에 존재하는 길림과 흑룡 강 지역이 명의 판도였다는 것으로 그리고 이에서 더 확대하여 명대 요동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여진세력을 명왕조의 기미체제에 종속된 번속세력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더구나 이전 몽골제국을 명나라가 계승했다는 것을 정당화시키며 전 요동 지역은 元 제국의 판도였으므로 명이 이 지역에 대 해 관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주장대로 만리장성 동단기점이 압록강이 된다면, 그리고 여진 지역 역시 명나라의 강역이 된다면, 한국사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압록강은 자연스 럽게 조선과 명의 경계가 됨으로써 조선과 명 사이에 수백 년간 놓여 있던 변 경지대는 명의 강역이 될 수밖에 없다. 5) 4) 이 외에도 朱 耀 廷 의 古 代 長 城, 戰 爭 與 和 平 的 紐 帶 ( 遼 寧 師 範 大 學 出 版 社, 1996), 華 夏 子 의 明 長 城 考 實 ( 檔 案 出 版 社, 1988), 遼 寧 省 長 城 學 會 의 遼 寧 長 城 (1998), 佟 冬 主 編 의 中 國 東 北 史 ( 吉 林 文 史 出 版 社 1998) 등을 들 수 있다. 5) 南 義 鉉, 2004, 明 前 期 遼 東 都 司 와 遼 東 八 站 占 據, 明 淸 史 硏 究 21집

300 동북아역사논총 34호 변경지대로서의 요동을 16세기 여진의 성장과 압록강 유역 성보에 관한 미 시적인 접근과 분석을 통해 장성의 동단기점이 압록강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동시에 재검토한다면 다음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를 보충하고 해결하는 중요한 단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1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에 대한 비판과 再 考, 2 조선과 명 사이의 두만강 압록강 경계설의 모순에 대한 대응이론 설정, 3 전통시대 국경선과 국경지대의 설정과 의미 4 요동도사의 기능과 성격에 대 한 재평가, 5 명과 여진 종속관계의 재검토, 6 명대 강역 범위의 재설정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한 실마리 제공, 7 16세기 변경지대의 특징과 여진 사회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Ⅱ. 16세기 建 州 部 의 動 向 建 州 部 는 두만강 유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나 14 15세기경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여 渾 河 유역으로 이동해 왔다. 혼하는 지금의 渾 江 인데, 혼강은 백두 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다가 桓 仁 을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 라서 渾 河 유역은 서쪽으로는 요동도사와 가깝고, 동남쪽으로는 조선을 마주 하는 위치에 있다. 成 化 年 間 건주여진은 혼강 유역에 거주하다가 朝 鮮 과 明 의 협공으로 타격을 받아 요동도사의 방어선에 너무 근접할 수도 없었고 조선의 변경에도 접근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成 化 年 間 이후 여진의 거주지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우선 15세기 중엽 건주위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劉 得 吉 이 당시 건주 위의 위치를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劉 得 吉 은 압록강변 義 州 에 살다가 1461년(세조 7)에 建 州 衛 李 古 赤 등 80여 명의 군 사에게 사로잡혔고 10일 후 愁 愁 厚 에 사는 佟 答 馬 赤 의 집에 이르러 노예가 되 었다. 그 후 7년 후 산에 들어가 산삼을 캐다가 도망하였는데, 그가 조선에 전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01 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1 佟 答 馬 赤 의 酋 長 은 充 尙 인데, 금년에 휘하 520인을 거느리고 明 나라 에 入 朝 하였다가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50여 인이었다. 2 지난해에 명나라의 군사와 우리나라의 군사가 협공한 뒤에, 야인들은 우리나라 군사와 명의 군사를 두려워하고 있다. 3 매양 약탈을 시도할 때는 火 剌 溫 兀 狄 哈 의 甫 乙 可 土 와 甫 乙 可 大, 建 州 衛 의 羅 夏 그리고 李 古 赤 등과 더불어 군사 연합을 시도하였다. 4 佟 他 麻 赤 의 집은 동쪽으로 李 滿 住 部 落 과 거리가 3일 路 程 이고, 북쪽 으로 화라온올적합( 火 剌 溫 兀 狄 哈 ) 지방과 거리가 5일 노정이고 남쪽으로 義 州 와 거리가 10일 노정이며, 서남쪽으로 요동과 거리가 6일 노정이다. 6) 이것을 보면 조선 義 州 와 당시 建 州 女 眞 의 거리가 대략 10 日 程 떨어져 있 고, 서남쪽의 요동과는 대략 6 日 程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쪽 火 剌 溫 兀 狄 哈 과는 5 日 程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程 의 개념을 정의 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1 程 은 50 鮮 里 이며 1 鮮 은 대략 400미터 정도 이다. 그렇다면 건주좌위는 의주와 대략 400여 리, 서남의 요동과는 240여 리 정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현재 지도의 거리와 비교해 보면 조선의 의 주에서 渾 河 까지의 거리는 대략 350여 리 전후가 나오며 요양에서 동쪽의 渾 河 는 240여 리가 나온다. 이것은 劉 得 吉 의 보고가 그렇게 틀리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으로 본다면 당시 혼하 유역의 중심이던 桓 仁 과 新 賓 (현 재의 신빈 滿 族 自 治 縣 )을 중심으로 건주좌위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명의 협공을 받은 이후 1478년(성화 14) 5월 여진의 일파는 초기 거 주지인 두만강 會 寧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롭게 조선과 접촉하고자 하였다. 그 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7) 6) 朝 鮮 王 朝 實 錄 睿 宗 卷 2, 卽 位 年 11 月 癸 亥 7) 朝 鮮 王 朝 實 錄 成 宗 卷 92, 9 年 5 月 乙 亥. 기록을 살펴보면, 愁 州 에 거주하는 兀 良 哈 의 柳 尙 同 哈 이 와서 말하기를, 斡 朶 里 의 甫 乙 加 大 등 10인이 군사 1천여 騎 를 거느리고 遼 東 에서 도둑질하며 사람과 가축을 사로잡아 군사가 돌아올 때에 중국 군사 5만여 명이 찾아 쫓아왔으며, 그날 밤에 협격을 당하여 여진 군사가 모두 피살

302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이러한 조선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비교적 토지가 비옥하고 명의 압력을 받지 않던 압록강변이 새로운 여진의 이동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은 平 安 道 節 度 使 李 克 均 의 치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野 人 金 劉 里 介 가 부락 사람을 거느리고 皇 城 들에 옮겨 살면서 조선의 울타리가 될 의사가 있음을 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서도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우선 황성 이 비록 邊 鎭 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나 저들이 와서 살면서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 거주를 금하면 그 귀순하는 마음을 막게 되고 금하지 않으면 많은 종족이 섞여 살게 되어 상호간에 갈등이 쉽게 생기는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김유리개가 황성에 옮겨 살면서 우리의 허실을 엿 보고 도둑질하여 장차 혐의와 틈이 생길 수 있으므로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대의견도 제기되었다. 8) 곤경에 처한 建 州 女 眞 管 內 의 童 約 沙 등은 滿 浦 江 바깥 지역에 와서 거주 하며 조선의 경고를 무시하고 집을 짓고 밭을 갈면서 떠나가지 않았다. 9) 오히 려 建 州 女 眞 은 조선에 조공을 표시하며 우선 생존의 방책으로 조선과의 접촉 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과 연산군대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종합해 보면 건주3위의 동 향과 위치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三 衛 敬 差 官 童 淸 禮 등이 승정원에 나와서 그 노정을 보고한 것을 근거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교지를 받들 고 滿 浦 에 이르러 강을 건너 강변에서 2 息 쯤 되는 三 岐 峴 에 당도하여 휴식, 2 10월 초1일에는 亐 知 岾 을 넘어 朴 古 伊 에 당도하여 숙박하였는데, 삼기현과 의 거리는 1 息 반쯤, 3 초2일에 白 磻 巖 앞길을 경유하여 蒲 州 강변에 도착, 4 3일 첫새벽에 포주강을 건너 3, 4리를 가서 李 加 乙 豆 의 집에 도착, 구경하 되고, 오직 10여 인만 겨우 蒲 州 방면으로 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妻 子 를 이끌고 東 良 北 과 無 乙 界 등지로 옮겨와 살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에 조선의 韓 明 澮 沈 澮 尹 士 昕 등은 보을가대 등이 그들의 본토가 불안하여 동량북 등지로 와 살려고 하나 조선에 이롭지 않으므로 변경에 마음대로 살기를 허락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합 당하다고 주장하였다. 8) 朝 鮮 王 朝 實 錄 成 宗 卷 154, 14 年 5 月 辛 丑 9) 朝 鮮 王 朝 實 錄 成 宗 卷 241, 21 年 6 月 戊 子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03 는 남녀노소가 무려 200여 명이었음, 5 초5일에는 달한과 신이 함께 금산적 하가 사는 마을의 추장 王 夫 里 介 의 집에 도착, 이튿날은 그대로 부리개의 집 에서 머물렀는데, 눈이 많이 쌓여 길이 막히면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 같고, 또 부리개의 아들 등도 제때에 돌아오기가 어렵겠으므로 신은 8일에 回 程 하면서 달한과 작별, 달한이 사는 마을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2 息 쯤 되는 곳에 있으며, 左 衛 는 여기서 서쪽으로 2 息 쯤 되는 곳에 있고, 우위는 여기서 8, 9일 정도의 길이 되는 곳에 있음. 10) 이상에서 언급한 동청례의 노정 속에서 건주위의 거주지가 대략 파악되고 있으며, 그곳에 건주추장 이달한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료에 나타나는 만포는 지금의 북한 만포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지금의 길 림성 집안시이며, 이곳에서 포주강 곧 지금의 혼강까지는 5식반이다. 1식은 鮮 里 로 30리이므로 5식반은 대체로 165 鮮 里, 1 鮮 里 는 대략 400미터이므로, 대 략 132리라는 계산이 된다. 건주좌위는 왕가의 집에서 서쪽 2 息 의 거리이므로 48리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건주우위는 이곳에서 8일정에 있었으므로 대략 320 360리 밖에 위치한 것이 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15세기 건주 3위는 혼하를 중심으로 매우 넓은 지역에 크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주 위는 혼하 유역 부근에, 건주좌위는 혼하 상류에서 동쪽 富 爾 江 방면으로 형성 되었고, 건주우위는 혼강을 중심으로 서쪽 蘇 子 河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누르하치가 권력을 집중하기 전까지 건주 3위의 형태로 혼하 일대 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1) 16세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조선과 여진, 명과 여진이 큰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여진이 혼강을 중심으로 충분히 세력을 성장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과정은 생산력 이외에 곧 인구의 증가를 의미한다. 인구증가의 요인은 자생적인 생산력 발전과 북부 여진의 인구이동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10) 朝 鮮 王 朝 實 錄 燕 山 卷 19, 2 年 11 月 甲 辰 11) 明 武 宗 實 錄 正 德 13 年 正 月 癸 卯

304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있다. 이러한 여진의 성장시기 16세기 명의 요동도사는 위소제도의 폐해와 이로 인한 衛 所 兵 의 도망, 屯 田 의 와해 등 그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 진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이 오히려 약화되어가던 시기였다. 1532년 건주세력 이 요동도사의 중요 관문이자 조선 사행로인 봉황성을 공격하여 守 備 李 漢, 指 揮 佟 恩 등을 죽이고 약탈을 시도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나라의 변경 방어력 의 약화와 한계를 보여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1544년(가정 23)에는 여진의 李 撒 哈 赤 등이 800여 군사를 이끌고 역시 요동도사의 중요한 관문에 해당하 는 鴉 鶻 關 등을 침입하여 명나라 군사 80여 명을 죽이고 160여의 사상자를 발 생시켰다. 12) 16세기 중엽 이후 건주여진은 명의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 서서히 그 추 진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16세기에 이르자 王 杲, 鵝 頭, 忙 子 勝, 兀 堂, 李 奴 才 등의 건주 추장들은 海 西 女 眞 과 각축을 벌였다. 당시 이들 해서의 추장들은 蘇 克 蘇 滸 河, 渾 河, 棟 鄂, 折 陳 등의 5부를 나누어 통솔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 5 부는 대부분 海 西 女 眞 에 속한 여진세력으로 이들을 건주의 추장들이 나누어 관할했다는 것은 16세기 건주의 영향력이 일부 海 西 女 眞 에게 미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3) 王 杲 는 16세기 건주부의 강성함을 알리는 강력한 추장이었다. 14) 1562년(가 정 41) 王 杲 등은 요동도사의 동쪽 방어선인 東 州 堡 와 撫 順 등 여러 차례 요동 동부 요충지를 공격하였다. 15) 또한 1572년(융경 6), 1574년(만력 2)에도 여섯 차례 요동을 공격하였다. 물론 당시 요동총병관 李 成 梁 의 전략으로 그들의 공 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16세기에 여진의 요동동부 변경에 대 한 공격이 날로 강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왕고 이후에는 다시 王 兀 堂 이 동부 변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1580년 12) 明 世 宗 實 錄 嘉 靖 23 年 5 月 丙 午 13) 王 臻, 2005, 朝 鮮 前 期 與 明 建 州 女 眞 關 系 硏 究, 中 國 文 史 出 版 社, 133쪽 14) 趙 維 和, 1999, 試 論 建 州 右 衛 王 皐, 滿 族 硏 究 1999 年 第 1 期 15) 明 世 宗 實 錄 嘉 靖 41 年 5 月 庚 寅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05 (만력 8) 永 尊 堡 를 공격하였다. 이에 명나라의 李 成 梁 이 그들을 공략하여 750여 명을 참수하고 16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다시 王 兀 堂 은 寬 甸 堡 와 그 인근을 침략하였으나 부총병 요대절의 선방으로 여진인 67인이 참수되고 11명이 사로잡혔다. 이후 1582년(만력 10)에도 여진인의 공격에 맞서 여진인 1천여 명을 사로잡거나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여진 세력이 요동도사에 치명적인 공격은 가하지 못하였으나 중요한 사실은 이전의 어느 시대 보다 요 동에 대한 공격이 가속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누르하 치가 등장하는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Ⅲ. 누르하치의 등장과 建 州 部 의 통일과 팽창 건주부의 통일과정이 완성된 것은 일반적으로 누르하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시기인 1583(만력 11)~1589년(만력 17)의 7년은 建 州 女 眞 의 통합과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만력 11년 누르하치는 薩 爾 滸, 嘉 木 湖 등의 城 寨 와 연맹을 결성하는 것을 시점으로 부락 을 통합해 나갔다. 1585년(만력 13)에는 薩 爾 滸 城 의 추장이던 界 凡, 東 家, 八 兒 答 의 3추장을 대패시키고 蘇 克 蘇 滸 河 部 가 자리 잡고 있던 부락을 통합시켜 나갔다. 16) 당시 蘇 克 蘇 滸 河 部 는 건주 세력 중 비교적 강대한 세력으로 寧 古 塔 6 王 이 이들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선 통합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1586년에는 누르하치에게 대항하며 소자하 하류에 자리 잡고 있던 折 陳 部 의 托 漠 河 城 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패시키고 1587년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리 고 당시 파저강 유역에는 棟 鄂 部 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동악부는 1584년 누르 하치와 哈 達 部 사이에 모순이 격화된 틈을 이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하고 있 16) 王 臻, 2005, 앞의 책, 136쪽

306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지도 1> 16세기 누르하치에게 통합된 동악부와 완안 여진부락 었다. 누르하치는 동년 9월 당시 동악부의 추장이던 阿 海 巴 顔 을 두 차례 공격 하여 동악부의 瓮 郭 洛 城 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동악부의 추장 하화리 등이 부중을 거느리고 투항함으로써 동악부 역시 누르하치에게 통일되었다. 완안부 는 당시 蘇 克 蘇 滸 河 와 동악부 사이의 파저강 상류의 작은 부락이었는데 역시 1588년(만력 16) 9월 누르하치가 완안성을 공격하여 통합되었다. 17) 혼하부는 혼하 북쪽 源 英 額 河 유역에 자리잡고 蘇 克 蘇 滸 河 部 와 상호 경쟁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07 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누르하치가 1584년 혼하부의 兆 佳 城, 1586년에 播 一 混 城, 1587년에 八 兒 答 城 등을 함락하면서 1589년에 마침내 혼하부를 통합하 였다. 7년 동안의 내부 전쟁은 누르하치의 세력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성장은 명과 조선을 상대로 통호를 요구하고 사신을 파견하 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시 그들의 특산품이던 인삼, 모피 등을 매개로 마시를 요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16세기 건주부의 통합과정은 누르하치 통일전쟁과 성장의 서막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다시 海 西 女 眞 扈 倫 4부의 통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호륜 4부 는 건주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海 西 女 眞 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건주 북부에서 가장 비옥한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비교 적 좋은 농업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인삼, 모피 등을 이용해 명나라와 비교적 많은 교류를 진행하였다. 따라서 건주부가 통일된 후 누르하치의 통합 목표는 자연스럽게 海 西 女 眞 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호륜 4부 중 누르하치 의 초기 목표가 된 것은 哈 達 部 와 輝 發 部 였다. 16세기 중엽 1551년(가정30) 王 台 가 哈 達 部 의 추장이 된 이후 海 西 女 眞 은 성장세에 있었는데 18) 나머지 3부인 葉 赫, 烏 拉, 輝 發 이 그에게 복종할 정도였 으며 명나라도 그들을 東 夷 長 으로 삼을 정도였다. 19) 1582년 王 台 사후 哈 達 部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3세력은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20) 당시 건주의 일부세력이 누르하치를 등지고 哈 達 部 의 歹 商 에게 투항하였 는데 이를 계기로 누르하치가 공격을 시도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海 西 女 眞 에 대한 1차 공격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歹 商 을 지지하였고 건주에서 투항 해온 건주인 장해를 추방하도록 명하는 등 이후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해 지 속적으로 哈 達 部 를 지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누르하치의 哈 達 部 공격은 계 17) 黃 栢 棟 主 編, 2006, 桓 仁 建 州 女 眞 志, 桓 因 建 州 女 眞 志 編 纂 會, 155쪽 18) 萬 曆 武 功 錄 卷 11, 王 臺 列 傳 19) 東 夷 考 略 卷 14, 建 州 20) 萬 曆 武 功 錄 卷 11, 虎 兒 罕 赤. 猛 骨 孛 羅, 康 古 六, 歹 商 列 傳

308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속되었고 17세기 초기인 1603년(만력 31) 결국 哈 達 部 는 누르하치에 정복되 었다. 21) 哈 達 部 를 정복한 이후 누르하치의 목표는 다시 輝 發 部 로 향했다. 당시 輝 發 部 는 세력이 비교적 약했고 건주부가 북쪽으로 확장해 나가는 길목에 위치 했기 때문에 훗날 烏 拉 部 를 정복하기 위해 우선 정복해야 될 대상이었다. 22) 당 시 輝 發 部 는 건주에 비해 약세에 있었으나 葉 赫 部 와 혼인을 통해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고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누르하치의 공격은 쉽지 않았다. 그러 나 그는 상인 등 첩자를 이용하여 내통자를 포섭하고 거짓으로 동맹관계를 맺 음으로써 결국 輝 發 城 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 록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老 土 部 落, 汝 包 車, 件 退 등 오랑캐가 있는 곳에는 奇 兵 과 간첩을 두 고 소재를 탐문하여 치계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이 일에 유념하여 여 러 길로 탐문한바 이곳에서 回 波 (즉 휘발부: 역자주)까지는 도로가 몹 시 멀고 山 外 에 왕래하는 여러 오랑캐들도 서로 통보함이 없으며 간혹 듣고 아는 자가 있어도 극비로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여 저들의 진상을 얻어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 藩 胡 를 통하여 암암리에 탐문하니, 당초에 老 酋 가 回 波 를 도모코자 하여 몰래 精 兵 수십 騎 를 상인으로 분장시켜 화물을 가지고 회파로 보내어 머물면서 장사하게 하고 또 수 십 명을 보내어 이에 의해 일을 행하게 하였는데 수십 명씩 100여 명 에 이르게 하여 저들의 事 機 를 자세히 탐문하여 내응하게 한 다음 갑 자기 大 兵 을 출동시켜 곧장 회파에 이르렀습니다. 내응자가 난동을 부 리고 성문을 열어 병사를 맞이하였으므로 성중에 몰아 들어가니 성중 이 크게 어지러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23) 휘발부의 붕괴 이후 다음 정복대상은 烏 拉 部 였다. 당시 烏 拉 部 의 추장은 布 占 太 였는데, 布 占 太 는 葉 赫 등 8부가 누르하치를 공격할 때 포로가 되었다 21) 明 神 宗 實 錄 卷 528, 萬 曆 43 年 正 月 乙 亥 22)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216, 40 年 9 月 癸 卯 23)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217, 40 年 10 月 庚 辰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09 <지도 2> 건주여진 지역에서 조선으로 통하는 여러 교통로 ( 黃 栢 棟 主 編, 2006, 桓 仁 建 州 女 眞 志 참조) (16세기 여진 지역은 지리적인 특성상 그리고 명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으며 조선과 여 진이 다양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명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될 수 없었다. 압록강은 국경지대로, 두만강은 조선과 여진 사이의 경계지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조선과 여진의 국경에 대해서는 차후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 烏 拉 部 의 추장 만태가 죽은 후 누르하치에 의해 다시 오랍부의 추장이 된 경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布 占 太 는 누르하치에게 공손함을 표할 수밖에 없었 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布 占 太 를 이용하여 烏 拉 部 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烏 拉 部 는 계속 동진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건주는 葉 赫 部 와의 전 쟁으로 잠시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갈 수 없었고 이틈을 이용해 布 占 太 는 17세기 초 두만강 유역 종성과 24) 온성, 경원 등지로 진출하여 조선의 藩 胡 들을 약탈하고자 하였다. 25) 24)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166, 36 年 9 月 甲 寅, 丙 辰 25)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169, 36 年 12 月 癸 卯, 己 酉. 藩 胡 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 과로는 한성주의 조선전기 두만강유역 여진 藩 籬 藩 胡 의 형성과 성격, 고려

310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이러한 烏 拉 部 의 동진에 대해 누르하치는 방치할 수 없었고 1607년(만력 35) 누르하치는 3천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縣 城 의 여진족을 모두 취하여 흡수 하였다. 烏 拉 部 는 이 소식을 듣고 건주부의 귀로를 차단하고자 하였고 결국 건 주와 오랍은 조선 종성 부근의 鳥 碣 岩 에서 충돌하였다. 결국 烏 拉 部 가 대패한 이후 26) 누르하치는 동쪽 지역에 군사를 파견해 동부 여진인 세력을 그들에게 종속시켰다. 그리고 다시 1613년(만력 41) 3만여 명의 군사로 烏 拉 王 城 을 공략 하자 추장 布 占 太 는 葉 赫 部 로 도망하였고 이후 烏 拉 의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27) 哈 達 部 가 멸망한 이후 명나라는 건주의 성장을 막기 위하여 葉 赫 部 를 지 지할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1604년(만력 32) 葉 赫 部 의 추장 納 林 卜 祿 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오랍으로 공략해 들어와 취하였다. 1613 년(만력 41)에는 葉 赫 部 와 이전 烏 拉 部 의 추장 布 占 太 가 누르하치를 피해 망 명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이유로 다시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葉 赫 의 길 당강, 올수, 압합, 흑아소 등 19처를 공략하여 엽혁은 점차 위기의 국면으로 빠 져 들어갔다. 이에 엽혁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명나라는 엽혁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건주에게 명하였다. 그러나 건주는 1618년(천명 3) 오히려 더 군사력을 키워 명나라 동부의 중진인 무순, 청하 등 2성과 16보를 공략하 고, 1619년(천명 4)에는 엽혁의 중앙부로 공격해 들어갔다. 1619년은 명과 여 진이 사르후에서 대전이 있던 시기로, 명나라의 葉 赫 部 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구나 명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승세를 잡은 누르하 치는 더 이상 명나라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로써 海 西 女 眞 의 주축이었던 호륜 4부 역시 모두 누르하치에게 정복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았다. 사학보 41, 2010.11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두만강 유역 번호와 번리 문제를 통해 두만강 유역의 성격과 강역 등 근세 변경 문제의 새로운 관점정립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26)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209, 40 年 3 月 辛 卯 27) 滿 文 老 檔 上 冊, 12~24쪽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11 호륜 4부와 더불어 누르하치는 백두산 지역의 여진도 통합하고자 하였다. 장백산 지역의 여진은 소위 瓦 爾 喀 이라고 불렸다. 28) 누르하치의 瓦 爾 喀 공략 은 대략 1595년경부터 진행되었다. 1595년 조선의 신충일은 두만강 유역 瓦 爾 喀 의 모련부 추장 老 佟 이 만력 23년 12월에 건주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9) 건주의 두만강 유역의 瓦 爾 喀 부 정벌은 인구 확보와 팔기제도의 강화라는 시각에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조선으로 많이 이주하 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쇄환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30) 1636년 청 태 종은 두만강 유역으로 군사를 파견하여 瓦 爾 喀 부의 장정 2,306명과 부녀자와 어린아이 등 2,435명을 흡수하였다. 31) 1635년과 1637년에는 우수리강과 그 동쪽을 대상으로 瓦 爾 喀 부의 인구를 조사하여 많은 瓦 爾 喀 민을 다시 흡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635년(천총 9)에만 3,500명에 이르는 瓦 爾 喀 인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建 州 女 眞 의 통일과 인구 흡수는 그들의 국력을 성장시키고 강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명나라의 요동도사를 향한 팽 창이었고 1618년을 전후하여 명의 동부방어선인 무순과 청하에서의 대전투는 명나라의 동부방어선이 무너져가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요서를 통 과해 북경을 점령하는 여진의 성장과정과 팽창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으로 보고 있는 요동변장은 여진과의 분명한 국경의 상징 물이며 여진과 명을 구분하는 국경선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여진의 점거지역이 었으므로 견고한 명의 벽돌장성은 수축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경의 상징인 요동변장을 만리장성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입장은 타당한 것인가. 28) 瓦 爾 喀 은 명말 청초 시기 주로 두만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을 말하는데, 상당 수의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이 조선을 보호하는 藩 胡 와 藩 籬 로 존재하다가 누르 하치의 성장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는다. 29)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71, 29 年 正 月 丁 酉 30) 淸 太 宗 實 錄 卷 15 天 聰 7 年 9 月 癸 卯 31) 淸 太 宗 實 錄 卷 285 天 聰 10 年 4 月 庚 申, 己 丑, 辛 丑, 卷 29, 崇 德 元 年 5 月 丙 午

312 동북아역사논총 34호 Ⅳ. 만리장성 동단기점 虎 山 山 城 說 의 비판 위에서 언급한 건주부의 이동과 통일, 그리고 후금의 건국은 최근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으로 압록강변의 虎 山 山 城 을 강조하고 있는 문제와 어떠한 상관 성이 있는가. 본 장에서는 여진의 성장과 위협으로 압록강 가에는 견고한 벽돌 장성이 설치될 수 없었으며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이 될 수 없음을 고찰해 보고 자 한다. 명나라는 여진 방어를 위해 산해관에서 압록강을 향해 방어선을 설치하였 으며, 이것을 遼 東 邊 墻 이라 불렀다. 설치된 명대 요동변장 동쪽 방어선은 북 부 開 原 에서 撫 順 방면으로 진행되어 압록강변 요동변장로 연결되는 것으로 중국은 이해하고 있다. 이에 기초하여 그 노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靖 安 堡 松 山 堡 柴 河 堡 撫 安 堡 花 抱 冲 堡 三 岔 兒 堡 會 安 堡 撫 順 所 城 堡 東 州 堡 馬 根 單 堡 散 羊 峪 堡 淸 河 堡 堵 墻 堡 鹹 場 堡 孤 山 堡 酒 馬 吉 堡 靉 陽 堡 新 安 堡 鳳 凰 城 湯 站 堡 鎭 江 堡 로 연결되고 또한 압록 강 변으로 險 山 堡 大 甸 子 堡 寧 東 堡 江 沿 臺 堡 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32) 우선 문제의 시작은 중국의 연구성과들이 요동변장을 長 城 으로 인식하고 요동장성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장성의 의미는 벽돌로 방어 벽을 만들고 이 방어벽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綿 延 不 斷 的 高 大 城 牆 한 것을 의미한다. 33) 그렇다면 요동변장은 구조적으로 어떠했을까. 요동변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우선 요동변장은 벽 돌로 축조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변장은 벽돌로 연결될 수가 없었 으며 강과 산 등 자연적인 험세를 주로 이용하면서 적이 들어올 만한 중요한 길목과 거점에 작은 규모의 성 곧 堡 를 설치하고 그곳에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 32)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2, 邊 防, 499쪽 33) 景 愛, 2006, 中 國 長 城 史, 上 海 人 民 出 版 社, 288쪽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지도 3> 명대 遼東邊墻을 묘사한 大明輿地圖 산해관에서 압록강변으로 연결된 요동변장 지도. 우측 아래쪽에 압록강이 보이며 遼東邊墻이 압록 강으로 연결되다가 단절되어 있다. 압록강이 명의 강역 속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압록강이 만 리장성의 동단기점이 될 수 없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한 지도에는 산해관에서 출발하는 요동변장 이 견고한 벽돌장성처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일선으로 연결된 벽돌성벽 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목책, 석축, 자연지세 등을 이용해 중요한 거점에만 堡를 축조해 세운 일종 의 방어선이었다. 키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34) 즉 공격보다는 중요한 길목의 방어와 감시를 목 적으로 구성된 방어선이었다. 서쪽을 향해 일선으로 연결된 만리장성과 같은 것은 산해관 동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35) 撫順에서 압록강 虎山( 곧 강연대보)으로 연결되는 명대 방어선은 축조된 시기도 각각 다르다. 또한 15세기 성화연간 이만주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 이 34) 朱耀廷 외, 1996, 古代長城, 戰爭與和平的紐帶, 遼寧師範大學出版社, 87쪽 35) 劉謙, 1989, 明遼東鎭長城及防御考, 文物出版社, 10쪽 313

314 동북아역사논총 34호 후 명나라는 무순을 기점으로 동부 방어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36) 사료에 나타나는 요동변장의 동부 거점을 구성하는 성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馬 根 單 堡, 鳳 凰 城 堡, 湯 站 堡, 新 安 堡, 草 河 堡, 靉 陽 堡, 鹻 場 堡, 淸 河 堡 등이다. 37) 이러한 요동 동부변장은 대부분 험준한 산세로 인해 380여 리를 조사해 보면 堡 와 보가 만리장성처럼 일선으로 연결된 것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산지의 주요한 험준한 지역 곧 關 에 해당하는 지역에 관문과 조그만 성보를 설 치하는 형태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38) 변장 동쪽을 지키는 대표적인 험 준한 지역의 관문이 鴉 鶻 關 과 撫 順 關 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험준한 산의 길 목을 지키는 관문이었으며 기타 성보와 성벽으로 연결되지 않은 고립된 성보 였다. 鴉 鶻 關 은 新 賓 縣 서남쪽에 위치하며 명대 遼 東 都 司 에서 여진지역으로 통 하는 중요한 길목에 해당하였다. 鴉 鶻 關 은 1468년(성화 4) 요동부총병 韓 斌 이 보수 증축하였는데 三 道 關 이라고도 불렸다. 이곳은 여진이 명의 요동도사를 공략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고 이곳을 돌파하면 요동도사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6 17세기 이곳에서는 명과 여진의 빈번한 전투가 발생하였 다. 이러한 빈번한 전투로 이 지역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서쪽에 散 羊 峪 堡 를 신축하였다. 이것은 원래 險 山 堡 를 구성하는 散 羊 峪 臺 였으나 군사적 중요성 으로 散 羊 峪 堡 로 전환되어 鴉 鶻 關 을 지원하는 배후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 이다. 39) 만력연간 여진의 침입이 더 빈번해지고 강도가 더해지면서 요동 동부방어 선에 설치된 고립된 성보들은 더 이상 그 군사적 기능을 더 할 수 없었다. 이러 한 상황을 파악한 당시 요동총병이었던 李 成 梁 은 1606년(만력 34) 요동 동부 지역을 地 孤 難 守 지역으로 인식하고 동부방어선 6곳을 여진에게 내어줄 수밖 에 없었다. 이것은 실제로 동부방어선이 자연의 험준함에 기초하여 일선의 성 36) 遼 海 叢 書 本 遼 東 志 卷 3, 兵 食, 396쪽 37) 遼 海 叢 書 本 遼 東 志 卷 3, 兵 食, 398쪽 38) 朱 耀 廷 외, 1996, 앞의 책, 90쪽 39)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2, 邊 防, 563쪽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15 벽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보와 보가 일선의 벽 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만리장성이 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鴉 鶻 關 과 같은 관문 밖 여진 지역으로 명군이 결코 진출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명나라 요동방어선의 붕괴과정과 원인을 본 연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결국 명 요동변장은 일선의 성벽으로 준비된 방어선이 아니라 고립된 중요한 요충지에 주둔하는 군사방어체제였고 연결된 장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무 너졌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보 중심의 전진기지가 여진의 위협이 거 세질수록 압록강까지 확대되어 고립적으로 보가 증축되어 있던 것이 요동변장 체제였기 때문에 연결된 일선의 성벽 과는 기본적으로 개념적 유사성이 없다 고 할 수 있다. 당시 撫 順 關 역시 撫 順 市 에서 동쪽 20여 리 지점에 위치한 험준한 고개 甸 鄕 關 嶺 과 渾 河 의 협곡의 험준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순마시는 여진을 통제하기도 하고 교류하는 가장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로 여진인에게도 중요 한 길목에 해당하였다. 40) 무순은 이미 15세기 여진의 추장 이만주 시절부터 중 요한 공격대상이 되었고 여진인이 마시를 진행하는 통로였다. 41) 누르하치 시 기에는 초기의 중요한 공격대상이자 철과 농기구 등을 사들여 여진의 생산력 과 생산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곳이었다. 이처럼 무순성은 명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진을 방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여진의 입 장에서 보자면 무순관은 무순성을 점령하기 위해 넘어야 할 국경이었다. 42) 대명여지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요동변장은 거점을 구성하다가 압록 강 쪽으로 와서는 자연의 험준함을 만나면서 더 이상의 방어선을 설치하지 못 40)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1, 山 川, 538쪽 41) 朱 耀 廷 외, 1996, 앞의 책, 92쪽 42) 朱 耀 廷 외, 1996, 앞의 책, 93쪽. 청 건국 이후 乾 隆 황제는 1778년(건륭 43) 조상 누르하치의 무순성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무순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그 공적 을 기릴 정도로 무순을 중요시하기도 하였다.

316 동북아역사논총 34호 하다가 강에 인접한 호산에 성보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43) 장성의 동단기점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의 압록강변 虎 山 山 城 은 명대에 江 沿 臺 堡 가 설치 된 지역이다(지도 4 참조). 이 江 沿 臺 堡 역시 다른 보와 마찬가지로 험준한 지 세를 이용해 축조된 고구려 석성을 활용한 전초기지이다. 당시 虎 山 山 城 지역은 조선과 명의 국경 완충지대 곧 遼 東 八 站 지역에 해 당하였기 때문에 조선과 명의 직접적인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다. 명나라는 이 러한 지역의 특성상 여진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요동도사를 보호하고 조선의 사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의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소규모 보를 설치하 였는데 이것이 명대 江 沿 臺 堡 곧 지금의 虎 山 山 城 이다. 더구나 설치시기가 명 중기 여진이 성장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초의 사료에는 江 沿 臺 堡 를 축조했 다는 기록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명대에 제작된 지도에 요동변장이 압록강까 지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명 중후기에 갑작스럽게 기존의 산성을 이용해 증 축 활용한 성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虎 山 지역은 이전 고구려 석성을 그 대로 활용했으므로 44) 지금과 같이 일선으로 된 그리고 산 능선을 따라 신축된 벽돌성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오랫동안 조선과 여진의 경계지 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서북쪽 일대는 建 州 三 衛 와 국경이 연접해 있 어 조상 때부터 누차 그들로 인한 환란을 받았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압록강은 오랫동안 조선과 여진 사이의 분쟁지역이었고 명은 중기에 가서야 조그만 전초기지를 세운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45) 虎 山 은 압록강변에 접하여 조선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명 후기 점차 그 침입의 강도를 더해가고 있던 여진을 방어하는 중요한 곳으로 변해 갔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명나라가 江 沿 臺 堡 를 설치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湯 站 과 義 州 사이에 새로 江 沿 臺 堡 를 설치하였는 43) 景 愛, 2006, 앞의 책, 289쪽 44) 朱 耀 廷 외, 1996, 앞의 책, 88쪽 45) 朝 鮮 王 朝 實 錄 宣 祖 卷 30, 25 年 9 月 甲 戌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지도 4> 명대 遼東邊墻 전체도( 全遼志 참조) 데, 堡官이 이제부터는 사신들이 오갈 때 탕참에 알리지 말고 本堡(역 자주: 江沿臺堡)로 直通할 것을 본국에 이미 移咨하였다. 46) 虎山은 지리적으로 압록강과 접해 있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될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애하(애양하)보와 연결되어 요동도사 동쪽 관문이자 사행 로인 봉황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남쪽으로는 險山 곧 명 대의 馬耳山과 연결되었는데, 이 險山堡는 요동도사의 동남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鎭江堡 역시 江沿臺堡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鎭江堡는 九連城이라 칭하며 성 남쪽은 압록강과 접하고 있었다. 鎭江堡는 서남쪽이 압록강을 따라가며 바다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육지가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의 중진이었으며, 원대의 婆娑府로 추정하기도 한다.47) 江沿臺堡는 이전에 설치된 湯站堡, 靉陽堡, 險山保 등과 함께 후기로 갈 수록 여진의 위협이 심각해짐에 따라 동부방어선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江沿臺堡는 명 중기 관군 383명이 주둔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던 46) 朝鮮王朝實錄 明宗 卷9, 4年 1月 辛卯 47) 朱耀廷 외, 1996, 앞의 책, 89쪽. 이 鎭東堡에서는 1974년에 元代의 萬戶之印 이 나오는 등 역대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17

318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전초기지였다. 그리고 이 군사력을 통해 후방의 탕참을 보호하는 전진기지의 역할도 병행하였다. 48) 현재 중국은 명대 江 沿 臺 堡 자리 곧 현재의 虎 山 에 대규모 최신식 벽돌장 성을 축조하여 마치 명대 江 沿 臺 堡 가 벽돌로 축조된 것처럼 벽돌장성을 신축 해 나가며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虎 山 山 城 은 원래 고구려식 석성이 있던 자리이다. 명나라 시기 이 지역에 江 沿 臺 堡 를 설치할 때 이 고구려성을 이용하여 성보로 활용하였다. 이 때문에 명대 역시 이 강연대보를 老 邊 墻 이라 고 불렀다. 49) 위 지도상의 요동변장을 살펴보면 변경선의 중요한 지점에 보와 봉수대를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동북부 開 原 을 거쳐 압록강으로 오다가 역 시 방어선이 단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변장의 재료 역시 벽돌이 아 님을 한눈에 알 수 있으며 여전히 압록강변에는 명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 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동동부 변장을 구성하는 중요한 보의 군사주둔수를 명 중기에 편찬된 全 遼 志 를 통해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全 遼 志 에 나타난 동부 변장의 중요 보 주둔군사수 동부변장보 주둔관군 동부변장보 주둔관군 기타 靉 陽 堡 1044 鳳 凰 城 堡 113 新 安 堡 526 鎭 東 堡 40 險 山 堡 3074 鎭 夷 堡 74 寧 東 堡 500 草 河 堡 44 江 沿 臺 堡 383 靑 苔 峪 堡 40 湯 站 堡 306 甛 水 站 堡 81 48)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2, 邊 防, 564쪽 49) 朱 耀 廷 외, 1996, 앞의 책, 88쪽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19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요동 동부의 중요한 방어선은 보를 중심 으로 방어선이 설정되고 있으며,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에는 비교적 많은 수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연대보는 애양보와 험산보에 비해 압 록강변에 치우쳐 있고 조선의 변경에 해당되는 지역이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사를 주둔시킴을 알 수 있다. 군사의 수로 본다면 적의 대대적인 침입 이 예상되는 지역에는 많은 수의 군사를 파견하였지만 중요도가 떨어지는 조 그마한 보에는 수십 명의 군사만이 주둔하고 있다. 또한 보와 보 사이에는 험 준한 지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군사를 두고 있지 않으며 山 海 關 장성과 같이 선으로 연결된 성벽을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江 沿 臺 堡 의 경우 명 중기 이후 점차 그 중요성이 강화되어 탕참보, 진동보 와 더불어 중요한 군사거점이 되면서 383명이 주둔하는 최전방 전초기지로 되 었다. 50) 이러한 군사는 성의 규모에 비해 넓은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이 대대적으로 나누어 공격해 온다면 적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으며, 전면 전을 전개할 경우 패할 위험이 높았다. 실제로 변방에서 올라오는 치계를 보면 강연대보를 비롯한 요동 동부변장 은 16세기에 들어 이미 여진인들을 방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안도 관찰사 兪 絳 의 장계에 달자가 江 沿 臺 湯 站 지방에 그들의 營 을 세우 고 모여 살며 멋대로 출몰하여 날로 강성해져서 강연대를 굴착 파괴하려 한다 는 비보가 도착하는가 하면, 毛 憐 海 西 3 衛 의 달자가 상호 결탁하여 애양 보 탕참 강연대 지방에서 도적질을 하였고 또한 달자는 그 수효가 매우 많 아 애양보 험산보 탕참 등지에 영을 세우고 모여 살며 멋대로 作 亂 하며 강 연대를 굴착 파괴하려 한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었다. 51) 결국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여진족의 팽창과 변장의 공격으로 호산 산성을 비롯한 애양, 험산보와 같이 동부는 견고할 수도 없었고, 벽돌로 축조 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연결된 방어선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50)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2, 邊 防, 563~564쪽 51) 朝 鮮 王 朝 實 錄 明 宗 卷 25, 14 年 3 月 丁 亥

320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지도 5> 명대 요동 동부변장과 江沿臺堡 지도 오른쪽 압록강변 오른쪽 아래 원으로 표시된 곳이 중국이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 고 주장하는 江沿臺堡 곧 현재의 호산산성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 시대 석성이 존재할 뿐 벽돌장성이 수축된 적이 없다. 이와 같이 虎山山城을 포함한 遼東 東部邊墻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문제는 우선 명나라의 강역과 그 범위를 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연 구성과들이 명대 여진에 대한 성장을 왜곡하고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을 압록강 의 호산산성(명대 강연대보)으로 주장하려는 배경은 명나라의 요동지배가 매 우 견고했다는 것을 기본적 시각으로 정립하면서 중국 강역사의 한 부분을 완 성시키려는 1차적인 목적이 있다.52) 명대 동북강역을 다루고 있는 출판물을 분 52)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논저로는 楊暘 主編의 明代東北疆域硏究 (吉林人民出版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21 석해 보면 그 공통점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의 연구성과들은 명나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모두 지배한 것 으로 보고 있다. 즉 명대 요동도사 지역(현재의 요령성 지역)은 물론이고 여진 족이 분포하고 있던 길림성과 흑룡강 유역도 명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 다. 둘째, 흑룡강 하류 지역에 奴 兒 干 都 司 라는 임시군사기구를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는 운영에 실패하여 정통연간(1436~1449)에 이미 사라졌음에도 중국 은 이 奴 兒 干 都 司 가 명 후기까지 존재하면서 여진을 관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53) 셋째,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주장이다. 넷째, 중국은 요동도사가 압록강 유역까지 관할한 것이기 때문에 압록강이 명과 조 선의 국경선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압록강 대안지역은 조선과 명의 국 경중립지대였으며, 명으로 들어가는 柵 門 은 봉황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요약 하면 虎 山 山 城 이 명나라의 만리장성 동단기점이 되는 순간 압록강이 조선과 명의 분명한 경계 곧 界 河 가 되며, 奴 兒 干 都 司 에 대한 확대해석으로 명대 흑 룡강 유역까지 분포하던 모든 여진 세력이 명에 종속되었다는 이론이 완성되 는 것이다. 이로써 두만강을 둘러싼 조선과 명 사이의 10처 여진인 관할 문제, 4군 6진 의 개척, 조선의 수직정책 등 조선과 여진 사이에 전개되었던 역동적인 조선 변경의 역사가 명나라의 그늘에 가려 그 역사적 위치를 찾지 못하고 왜곡 침탈 당하게 되며, 조선의 역사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지 못하는 한반도만의 축소 된 역사가 되고 만다. 社, 2008)가 있다. 이 저술은 길림성사회과학원 학술연구총서로 2008년에 출판되 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명대 강역을 다룬 최근의 종합적 연구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명대의 강역이 遼 東 都 司 와 奴 兒 干 都 司 를 통해 전 만주지역을 석권했다는 시각에 고정되어 연구됨으로써 그 간 연구된 외국의 연구성과들이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 다. 특히 遼 東 都 司 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 293쪽 중 200여 쪽에 달하는 지면을 명대 설치된 奴 兒 干 都 司 와 흑룡강 지역 등 여진 지역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명이 설치했다고 하는 여진위소에 기초하여 만주 전 지역이 명대 강역이었 다고 주장하고 있다. 53) 남의현, 2007, 明 前 期 奴 兒 干 都 司 의 設 置 와 衰 退, 東 北 亞 歷 史 論 叢 16호

322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차후 올바른 역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명의 관계를 여진과 몽골을 포함하여 4자 관계 속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특히 국경문제와 관련하여 첫째, 중국의 연구성과와는 달리 압록강은 조선과 명의 국경이 아니며, 오히려 조선과 여진의 관점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나아가 사신 이 출입하는 명나라의 봉황성과 압록강 사이의 넓은 지역이 국경 중립지대였 음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명나라 쪽 기록에는 鴨 綠 江 이 아니라 봉황성을 넘으 면 조선의 국경지대로 들어선 것이고, 조선은 鴨 綠 江 을 건너면 국경지대로 들 어갔다는 기록에 더하여 조선과 여진의 관점에서 압록강 유역의 변경문제를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명대의 사료들은 조선과 명의 경계를 표시할 때 요동을 방어하는 성보가 설치된 지역, 遼 東 邊 墻 근처의 靉 陽 堡, 鳳 凰 城 堡 등 요동변장 동쪽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柵 門 들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한 경 우가 많다. 또한 변장 밖의 女 眞 衛 所 들을 종속되지 않은 外 夷 로, 요동변장을 臨 境 (경계에 임한 지역), 通 賊 道 路 (적의 도로와 통하는 지역), 邊 界, 邊 門 곧 여진과 몽골 등의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54) 둘째, 두만강 유역은 조선과 명의 국경 경계가 될 수 없다. 명초 대외원정 을 가장 많이 시도한 영락연간(1403~1424)에도 두만강 유역의 10처 여진을 관할할 힘이 없어서 조선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명과 갈등을 낳던 수많은 여진 세력이 명을 피해 두만강 유역으로 많이 이동해 왔다. 명나라 시대 두만 강이 명의 지배지역이었다면 명을 피해 여진 세력들이 두만강으로 온다는 것 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즉 두만강 지역은 명의 관할 지역이 아니었 다. 두만강은 조선과 명의 국경 문제에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여진의 관계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하며, 여진을 일방적으로 명에 종속된 세력 으로도 볼 수 없다. 셋째, 요동변장은 몽골과 여진의 국경선이었으며, 변장의 동단 기점은 압 록강으로 오다가 멈추었고, 虎 山 곧 江 沿 臺 堡 에는 명대 山 海 關 과 같은 견고한 54) 遼 海 叢 書 本 全 遼 志 卷 2, 邊 防, 560~564쪽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23 벽돌성이 축조된 적이 없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虎 山 山 城 의 모습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성이 없는 위작(창작물)에 불과하다. Ⅴ. 맺음말 15세기 후반 여진은 이미 渾 江 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하며 누르하치를 중심으 로 16세기 팽창을 준비하고 있었다. 16세기 여진의 성장에 비하여 명의 遼 東 都 司 는 永 樂 年 間 이후 위소제도의 폐해와 이로 인한 衛 所 兵 의 도망, 屯 田 制 의 와해 등 대내외적 요인으로 그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여 진에 대한 통제력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평안도 관찰사 등은 여진족이 강연대 탕참 애양보 험산보 지방에 그들 의 營 을 세우고 멋대로 출몰하여 날로 강성해져서 결국 강연대를 굴착 파괴하 려 한다는 비보를 중앙에 수시로 신속하게 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압록강변의 위기는 15~16세기부터 꾸준히 진행된 것으로 여진족의 팽창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사료를 통해 호산산성을 비롯한 동부를 구성하는 모든 변 장이 견고한 성보가 아니라 일개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영을 치 고 거주하며 정세를 염탐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료들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王 杲, 鵝 頭, 忙 子 勝, 兀 堂, 李 奴 才 등의 건주 추장들은 그 역량을 확대하 여 海 西 女 眞 과 각축을 벌이며 누르하치 등장까지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당 시 이들 추장들은 蘇 克 蘇 滸 河, 渾 河, 棟 鄂, 折 陳 등의 5부를 나누어 통솔해 나가고 있었다. 1583년(만력 11) 누르하치는 薩 爾 滸, 嘉 木 湖 등의 城 寨 와 연맹 을 결성, 만력 13년에는 薩 爾 滸 城 의 추장이던 界 凡, 東 家, 八 兒 答 의 3추장을 대패시키고 蘇 克 蘇 滸 河 部 가 자리 잡고 있던 부락을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 다. 1586년(만력 14)에는 소자하 하류에 자리 잡고 있던 折 陳 部 의 托 漠 河 城 을, 1587년(만력 15)에는 折 陳 部 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리고 당시 파저강 유

324 동북아역사논총 34호 역 棟 鄂 部 는 1584년 9월 동악부의 추장이던 阿 海 巴 顔 을 두 차례 공격하여 동 악부의 瓮 郭 洛 城 을 점령해 버렸다. 파저강 상류의 완안부는 1588년(만력 16) 9월 누르하치에게 통합되었다. 哈 達 部 를 정복한 이후 누르하치는 輝 發 部, 烏 拉 部, 葉 赫 部 등 해서여진 호륜 4부를 통합해 나가기 시작하였다.호륜 4부와 더불어 누르하치는 장백산 지역 瓦 爾 喀 여진을 공략하였다. 누르하치의 瓦 爾 喀 공략은 대략 1595년경부터 진 행되었고 1635년에만 3,500명에 이르는 瓦 爾 喀 인을 흡수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建 州 女 眞 의 통일과정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시켰고 마침 내 만력 16년(1618) 누르하치는 명의 동부방어선을 구성하는 鴉 鶻 關 을 붕괴시 켰다. 그리고 요동도사의 군사와 경제의 거점이자 여진으로 통하는 撫 順 關 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두 요충지역이 여진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요동도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 동부의 명의 요동방어선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 었다. 명나라 요동도사 방어선 곧 요동변장의 붕괴과정은 본 연구의 관점에서 살 펴보자면 여진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결국 명 요 동변장은 그 관할 범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진 지역을 포함시킬 수 없었으며, 여진의 성장으로 더 이상 팽창할 수도 없었다. 구조적으로도 요동변장은 일선의 성벽으로 된 방어선이 아니라 고립된 중 요한 요충지에 소규모 보를 세우고 이를 중심의 군대가 주둔하며 좌우의 관할 지역을 방어하는 체제였다. 그 때문에 결코 여진의 대대적인 공격에는 효과적 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오히려 긴 방어선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허술한 변장을 따라 고립적으로 설치된 소규모 보 중심의 전진기지가 시기를 달리하며 압록강까지 고립적으로 산재해 있던 것이 요동변장 체제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장성의 개념 곧 연결된 일선의 성벽 과는 기본적으로 개념적 유사성 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동부변장을 구성하는 湯 站 堡, 靉 陽 堡, 險 山 堡, 新 安 堡, 寧 東 堡, 그리고 虎 山 山 城 에 해당하는 江 沿 臺 堡 와 같은 것들은 모두 작은 보에 해당되며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설치된 것들이다. 이들 작은 보들은 자 연지세를 이용했기 때문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될 수도 없었고, 벽돌로 수축될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25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성이라고 할 수 없다. 55)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압록강은 조선과 명의 국경이 될 수 없으며 사신이 출입하는 명나라의 봉황성과 압록강 사이의 넓은 지역은 국경 중립지대였다. 이 때문에 명은 요양에서 가까운 연산관을 넘어 1480년대 이후 봉황성으로 동진하여 성보를 수축하며 선점하는 기록이 다수 나타나는 것이다. 봉황성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은 명의 행정구역에 편입 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당시는 국경의 개념에 선의 개념도 있었지만 조선과 명 사이에 나타나듯이 遼 東 八 站 이라는 지역 개념의 국경지대가 설정되어 있었 기 때문에 압록강은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압록강은 명 중 후기로 갈수록 조선과 여진의 관점에서 그 성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건주여진이 성장하면서 조선은 압록강을 조선과 여진의 경계로서 인식하였다. 압록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두만강 유역 역시 조선과 명의 경계가 아니 라 조선과 여진 사이의 경계지역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명초 대외원 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영락제(1403~1424)도 두만강 유 역의 10처 여진을 흡수하려다가 포기한 것도 이러한 명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이 만리장성 동단기점이 압록강의 호산산성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 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현재 한국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 조선과 명의 국경 중립지대인 遼 東 八 站 지대를 인정하고, 중국이 주장하는 조선과 명 사이의 압록강이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될 수 없다는 위기에 직면한다. 나아 가, 명대 여진 세력의 성장과 팽창, 만주 지역이 명의 강역이 될 수 없는 문제, 조선과 명의 두만강 경계설의 허구성 등 중국의 강역문제와 관련된 근세의 문 제들이 모두 새롭게 설명되어야 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주장처럼 호산산성이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으로 인정 된다면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압록강이 되고, 압록강은 두만강과 연결되므로 두만강 역시 조선과 명의 국경이 된다. 이에 따라 한반도 문명과 역사는 압록 55) 景 愛, 2006, 앞의 책, 289쪽

326 동북아역사논총 34호 강과 두만강 이남에 묶이게 되어 선사시대를 포함하여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 는 한반도의 역사는 북방과 단절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이 장성의 동단기점을 압록강으로 확장시킨 배경에는 강역의 확장 이라는 관점을 넘어 만주 역사에 대한 선점, 동북공정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만주 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의 변경의 안정 유지, 북한에 대한 대응 등 현실과 미래에 닥칠 다양한 문제를 풀어 나가고자 하는 현재 중국의 역사적 상 황이 그 속에 녹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27 참고문헌 朝 鮮 王 朝 實 錄 明 史 明 通 鑑 明 會 典 明 會 要 奉 天 通 志 使 朝 鮮 錄 遼 海 叢 書 1 5 姜 龍 範 劉 子 敏, 1999, 明 代 中 朝 關 系 史, 黑 龍 江 朝 鮮 民 族 出 版 社 郭 大 順 主 編, 1998, 遼 寧 長 城, 遼 寧 省 長 城 學 會 董 曜 會, 2004, 瓦 合 集 長 城 硏 究 文 論, 科 學 出 版 社 景 愛, 2006, 中 國 長 城 史, 上 海 人 民 出 版 社 佟 冬 主 編, 1998, 中 國 東 北 史 吉 林 文 史 出 版 社 簿 音 湖, 王 雄, 2000, 明 代 蒙 古 漢 籍 史 料 彙 編,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楊 昭 全, 1993, 中 朝 邊 界 史, 吉 林 文 史 出 版 社 楊 暘 外, 1982, 明 代 奴 兒 干 都 司 及 其 衛 所 硏 究, 中 州 書 畵 社 楊 暘, 1988, 明 代 遼 東 都 司, 中 州 古 籍 出 版 社 楊 暘, 1991, 中 國 的 東 北 社 會 十 四 ~ 十 七 世 紀, 遼 寧 人 民 出 版 社 牛 建 强, 1997, 明 代 中 後 期 社 會 變 遷 硏 究, 文 津 出 版 社 魏 志 江,2006, 中 韓 關 系 史 硏 究, 中 山 大 學 出 版 社 劉 謙, 1989, 明 遼 東 鎭 長 城 及 防 御 考, 文 物 出 版 社 趙 東 升, 2005, 扈 倫 四 部 硏 究, 吉 林 文 史 出 版 社 趙 云 田, 2002, 中 國 治 邊 機 構 史, 中 國 藏 學 出 版 社 朱 誠 如, 2002, 管 窺 集, 紫 禁 城 出 版 社 華 夏 子, 1988, 明 長 城 考 實, 檔 案 出 版 社

328 동북아역사논총 34호 [ABSTRACT] The Growth of Jurchens and the Character of the Liaodong Border Area: A Criticism on the Eastern Point of the Great Wall through the Change of Border Areas Nam Euihyeon This study aims at illuminating the fabrication of the Amnok ( 鴨 綠 ) River being the eastern point of the Great Wall in the light of the dynamic development of Jurchens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background, meaning, and intention of the extension of the eastern part to the Amnok River shall be examined. A critical change was in progress in the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century. While Japan tried to take dominance in East Asia through the Imjin War, Ming still took a pride as the superpower in East Asia, reinforcing close relations with Chosun. However, a significant change in the sixteenth century was also witnessed in Jurchen areas as Jurchens attempted to become involved in new international affairs by absorbing large Manchurian tribes. However, the sixteenth century situation has not been the focal point because it has been blocked by a Chinese centered historical view which includes the Amnok River hypothesis of the Great Wall. Why is it important to examine the Chinese position academically through the sixteenth century Jurchens? Is it justifiable or necessary? The reason for China to extend the eastern point down to the Amnok River was to preoccupy Manchurian history beyond a view of expanding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 변경지대의 변화를 통해 본 만리장성 동단기점설 비판 329 river area, to keep stability in the midst of Northeast Asia s political environment surrounding Manchuria which has already been revealed in the Northeast Project, and to counter North Korea. Accordingly, it might be said that the current historical situation in China to solve contemporary and future problems that they face might be an actual pivot in the background. When Zhu Yuanzhang ( 朱 元 璋 ) founded the Ming dynasty in 1368, had to withdraw to the Mongol area. When the Yuan government lost dominancy, Ming progressed into Liaodong and established the Liaodong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 遼 東 都 司 ) and succeeded in occupying a part of Liaodong. They intended to spread out to Mongolia and Heilongjiang ( 黑 龍 江 ). However, after Emperor Yongle s in 1424, death (1403~1424) as no more active foreign policy was available, they changed their strategy to defend Liaodong through the Liaodong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he which was leading to founding a solid Liaodong defense line in the middle and late Ming dynasty. Soon, became a military organization in the far eastern area to defend Liaodong in the beginning of the fifteenth century. Although there was some time to seek expansion during Yongle s reign, they had a defensive role in general in the relation with northern territory tribes. Along with this background, the Liaodong defense line was moved back and they began to establish an outpost at the Amnok River. China today has nearly completed a theory that the eastern point of the Great Wall was the Amnok River, allegedly arguing that the Liaodong defense line was part of the Great Wall. This results from falsely assuming that some outposts created by Ming were part of the Great Wall. This in turn logically generates a frame that Ming had a

330 동북아역사논총 34호 solid reign over Liaodong. This reflects the current intention of China to remove any possible future conflicts with nearby countries over the riverside domain and Manchuria. Whether the eastern point of the Great Wall can be the Amnok River is especially important for determining the Ming dynasty s sovereignty and territorial coverage. When China started the Northeastern Project, river territory in Ming became an important topic of study, and the book A Study on Northeastern Area in Ming dynasty (Jilin People Press, 2008) was a typical work published in 2008 as a result of research to date. This book also argues that the Manchuria area during the Ming dynasty belonged to Ming. However, as this study shows, the Amnok River cannot be the starting point in the east. The Amnok River met the border with Joseon, Ming, and the Jurchens, who were struggling for power. Furthermore, what Ming constructed in the river area of the River huge wall, but a small outpost. That outpost is a small fort that utilized the natural topography. And even it was not constructed with bricks. If China presumes the basic concept of the Great Wall is a line, Liaodong border area linked from Shanhaiguan ( 山 海 關 ) through Kaiyuan ( 開 原 ) itself cannot be part of the Great Wall. Keywords the Great Wall, Jurchen area, 遼 東 (Liaodong), 虎 山 (Hushan), Zhu Yuanzhang ( 朱 元 璋 ), Liaodong dusi ( 遼 東 都 司 ), Shanhaiguan ( 山 海 關 ) Kaiyuan ( 開 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