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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51 여성노동자의 투쟁은 1970년대 말 제2차 오일쇼크로 일자리를 위협 받으면서 격화했고, 이것은 유신 독재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 다. 여성노동운동은 여성운동에 힘을 주고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동일방직 노조는 여성 조합원 주길자(1972) 이영숙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대부분 민주노조는 조합원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해태제과 여성노동자의 8시간 노동 쟁취는 6년에 걸친 싸움 끝에 확보한 역사 적 사건이다.(1975~80) YH 사건에서 희생당한 김경숙의 죽음은 유신 체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콘트롤데이타노조와 삼성제약노조는 여성노동자의 특수 과제를 제 기해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콘트롤데이타노조는 생리휴가 확보, 결혼퇴직제 철폐(1977), 남성 관리자들의 성차별적 언행 금지, 산전산 후 휴가의 정착(1980), 생산직 여사원의 승진 승급 쟁취, 결혼휴가 6 일과 축의금 확보 등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삼성제약노조도 비 슷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특히 관행으로 난무하는 성희롱을 없애려고 가해자 해고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교섭해 성희롱을 없앴다. 38) 공장이 아닌 여성노동자로 저임금과 몸 수색 등 인권유린에 시달린 버스 안내양들이 투쟁했다. 1970년 버스 안내양 이란희가 삥땅을 해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고백했다. 지학순 주교는 생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삥땅은 정당하다고 했다. 39) 1970년 12월 2 일 서일교통 안내양 30여 명이 체불임금지급과 숙소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1973년 신촌교통 입석버스 안내양 128명이 지나친 몸 수색 에 항의해 집단행동을 일으키고, 자동차노조도 불법검신의 폐지를 요 구했다. 1978년 10월 7일 부산 대창여객 안내원 36명이 몸 수색에 항 의하며 취업을 거부하고, 광주고속 안내양 120여 명이 남산 야외음악 37) 구해근, 2003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 비평사, 197쪽 38) 유경순, 2005 여성 노동자 투쟁의 역사 노동자의 힘 74호 참조. 3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산업선교25주년기념대회, 앞의 책, 101쪽

2 552 김영곤 당에 모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 시위했다. 동부운수 소속 안내 양은 기숙사를 탈출해 노동청 사업소에 몰려가 시위했다.(1976) 1976 년 1월 5일 버스 안내양 이영복은 삥땅 추궁에 시달려 할복 항의해 1 월 17일 계수기를 철거했다. 1970년대 말 실직한 여성노동자들 가운 데 재취업이 안 돼 유흥업소 등에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40)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현장을 떠난 뒤 생활현장 속에서 새 로운 민중운동의 사례를 만들었다. 그들은 1970년대를 지나 노동자뿐 아니라 여성으로, 어머니로, 주민으로, 국제 노동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로운 민중운동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권력에 덜 편 입돼 자율적인 사회운동을 계속했다. (5) 노동자의 조직 뿌리가 깊은 한국노총의 어용성은 내적으로 관료화하고 외적으로 독재와 결합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한국노총은 유신체제 이전에는 산업선교회, JOC 등 지원 단체들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에 있었으나, 1972년 10월유신체제를 지지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어용성을 더하고 민주노조 활동을 탄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영향 등이 작용해 1971년 1,656건이던 노동쟁의는 1972년 346건, 1973년 367건으로 급감했다. 조직의 어용성 비판을 의식한 한국노총과 민주노조를 지원하는 종 교계 사이에 비판이 오갔다. 한국노총(위원장 배상호)은 1974년 1월 5 일 산업선교 활동이 종교인의 직분을 망각한 노동조직 침해 행위 라고 비난하고, 12월 9일에는 전국노동자대표 궐기대회를 열어 도시 산업선교회의 노조 조직 침투를 단호히 응징하겠다 는 성명을 채택 했다. 또 1975년 1월 22일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에 공개 경고문을 보 40) 알랭 리피츠, 1994 범세계적인 포디즘을 향하여 현대노동과정론 (허석렬 편), 자작아카데미, 360쪽

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53 냈다. 이에 1월 25일 16개 도시산업선교단체들이 한국노총에게 본연 의 업무에 충실해 관제 어용 노동귀족의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노동자를 위해 투쟁할 것 을 권고했다. 3월 10일 한국 노동운동 자율 화추진발기회는 민주 노동운동을 위한 자율화 투쟁 선언문 을 발표 해 한국노총은 노동귀족의 도피처이며 부정부패의 복마전으로 전락 했다 고 비판했다. 41) 섬유노조의 김영태 위원장은 동일방직의 해고노동자 블랙리스트를 전국사업장과 노조에 뿌려 관료화하고 부패한 노총의 모습을 단적으 로 드러냈다. 1970년대 전국섬유노조위원장은 일반 노동자보다 수십 배나 많은 한해 540~600만 원의 임금을 받았다. 42) 독재와 협력한 노 총의 위원장 등 간부 한 두 명은 임기를 마치고 여당 국회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어용 지도부의 순환구조를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섬유화학, 금융, 자동차노조 등에서 학생운동 출신 활 동가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열중했다. 1970년대에 설립한 노조 수는 2,500여 개였다. 민주노조와 지원활동 1970년대에는 약 2,500개의 새로운 노조를 조직했다. 19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19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 동차 노조 결성이 있었고, 삼성재벌 산하 제일제당 김포공장의 노조 결성 투쟁(실패, 1977)도 있었다. 금융노조는 오랜 투쟁 끝에 대리급 의 노조 가입을 실현해 조직을 확대했다.(1973) 1970년대의 민주 노동운동은 자주성과 투쟁성에서 수준이 높았으 며, 연대 의식도 어용노총에 반대하는 연대활동으로 나타났다. 43) 노 41) 이상우, 1986 박 정권 18년:그 권력의 내막, 동아일보사, 366쪽 42)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씨 노조비리에 쓴소리 한겨레 2005년 5월 19일자 43) 반도상사 동일방직 원풍모방 노조의 조직운동은 국제적으로 훌륭한 사례로 소

4 554 김영곤 조민주화 운동은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 타 코리아, 한일공업, 청계피복 등의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전개했 다. 한국모방 노조는 1973년 회사가 부도가 나고 박용운 사장이 해외 로 달아나자 4개월 동안 회사를 인수하고 자주관리에 들어가 흑자를 내고 임금체불 없이 임금을 35% 인상했다. 회사가 원풍으로 넘어간 뒤 이름을 바꾼 원풍노조는 쉼 없는 조합원 교육과 활발한 소모임 활동으로 조직력이 있고 투쟁성이 강했다. 민주노조들은 조직력을 강화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청계피복노조는 노동교실을 만들어 조합원 교육, 소모임 조합활동을 폈다. 유신 독재 는 1977년 8월 노동교실을 폐쇄하고 실장인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시 켰다. 노동조합의 민주성은 원풍모방 등에서 아주 높아 민주노조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영등포 산선에서는 원풍모방, 해태제과, 롯데제과 등의 노동자들을 회사별, 교대조별로 구성해 소모임 활동을 전개했다. 소모임에서는 근로기준법, 노조활동, 노동운동사, 다른 회 사의 사례 연구 등 노동교육, 여성 건강 상식 노래 부르기 등의 교양 활동, 한자 등의 야학활동, 꽃꽂이 음식 만들기 인형 만들기 등의 취 미활동, 노래반 연극반 풍물반 등의 문화활동, 다람쥐회, 공동구매조 합, 치과진료 건강 상담 등의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44)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실시한 중간집단 교육(1974~79)은 교회, 여 성, 산업, 청년, 농촌사회 등의 활동가 수십 명이 사회 양극화를 한 국 사회의 핵심 문제 라는 주제를 사나흘씩 함께 먹고 자면서 깊이 있게 논의하는 집단 대화 방식으로 썼다. 이 방식으로 노동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조직능력이 발전했다. 개하고 있다.(이광택, 년대 노동운동 평가 나의 청춘 나의 조국, 나남출판, 582쪽) 44) 신철영, 2003 영등포산업선교회 - 70~80년대 노동자들의 보금자리 기억과 전망 겨울호, 184쪽

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55 한국노총이 노동자들에게서 지도력과 신뢰를 잃은 것만큼 민주 노 동단체 종교단체의 지원이 활발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산업선교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단체들이 노동자들 의 의식 조직 투쟁사업을 지원하거나 노동문제의 사회여론화에 기여 했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청년 학생들이 노동운동에 기울인 관심 과 지원은 전태일 사건의 진행과 그 이후 현장 투신으로 이어졌다. 45) 또 1970년대 초부터 노동자들이 공장 단위 투쟁에서 연대투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의 연대를 경인지역으로 확대했다. 한영섬유 김진수가 노조활동과 관련해 회사의 사주를 받은 정진헌 에게 드라이버로 머리를 찍혀 죽자 200여 명이 모여 장례식을 열고 제2의 전태일 사건 이라고 평가했다.(1971) 46) 협신피혁 민종진의 사 망에 항의해 청계피복, 동일방직, 방림방적, 반도상사, 남영나일론, 인 선사 노동자 3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했다.(1977) JOC가 주도해 인선 사(이후 삼고사로 개명)의 유령노조와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해고되자 이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전개한 불매운동(1977)을 했다. 동일방직 사 건에 경인지역 노동자 150여 명이 기독교방송 보도국을 찾아가 언론 이 똥물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데 항의하고 그 중 10여 명이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를 점거해 방송을 중단시켰다.( ) 동일방직 원 풍모방 삼원섬유 방림방적 등의 6명의 노동자가 남산 야외음악당에 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서 노동3권 보장하라,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사건 해결하라, 산업선교회는 빨갱이가 아니다, 방림방적 체불노임 해결하라, 우리도 인간이다. 박 정권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이런 연대투쟁은 정치투쟁의 의미도 가졌다. 47) 45) 정윤광, 2005 저항의 삶, 내가 살아온 역사, 백산서당, 252쪽 46)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산업선교25주년기념대회, 앞의 책, 657~658쪽 47) 이목희, 월유신과 민주노조운동의 외로운 출발 1970년대 이후 한국

6 556 김영곤 노동자의 연대는 유신체제 몰락 직후 활발해져 노총의 민주화와 섬유노련 김영태 위원장, 금속노련 김병룡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경인지역 노동자들의 연대농성(1980)의 기초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정권의 지원을 받는 대기업 자본에 저항했으나, 정권에 대해 직접적인 투쟁은 거의 없었거나 수위가 낮았다. 그러나 YH 사 건에서 보듯이 대기업을 향한 투쟁이 정권의 기초를 와해해 유신체 제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 언론노동자 언론인들은 아직 자신을 노동자라기보다는 언론인의 임무에 치중 하면서도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노조를 결성했다. 자신의 업무 와 관련한 점에서 일종의 사회적 노동으로 본 것이다. 기자들은 기사 삭제에 항의하는 밤샘 농성을 종종 벌였다. 48) 1973 년 가을 유신 독재에 저항해 처음으로 일어난 시위를 보도하지 못하 게 되자 이에 자책감을 느끼고 1973년 10월 경향신문, 11월 동아일 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기자들이 언론 자유를 선언했다. 1973년 11월 29일 기자협회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10. 2)를 보도하지 못하자 사실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 다. 이어 동아일보( )와 한국일보( )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자유언론실천선 언 을 발표했다.( ) 정권의 압력으로 광고주들이 광고를 무 더기로 해약하자, 기자들은 광고 탄압에 항의해 광고를 백지로 비워 노동운동사 (한국민주노동자연합 엮음), 동녘, 85쪽 48) 유신 기간에 동아일보의 장봉진 성락오 이부영, 중앙일보의 김인호 이영석, 경 향신문의 윤대종, 동아투위 소속 안종필 장윤환 안성열 등이 반공법, 긴급조치 로 처벌 받았다.

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57 둔 채 신문을 발행했다. 곧 전국의 31개 신문, 방송 기자들이 일제히 자유언론수호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선일보(32명)와 동아일보 (134명)에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를 해고했다. 해고된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면서 언론 자유수호운동은 민주화운 동으로 발전했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1977년 말 민중에게는 자 유를, 민족에게는 통일을 이라는 내용의 민주민족언론 을 발표하고 제도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했다. 1978년 6월 7일 중앙일보 기자들은 우리의 주장 에서 삼성그룹의 영향에서 탈퇴하고 편집의 자율성을 요구하고, 9월에는 월간중앙 10월호가 정부정책을 비판한 글을 문제 삼아 압수되자 3개월간 자진 휴간했다. 학생 종교단체 등의 지하신문 외에도 국내의 소식을 국외로 알리 는 지하언론이 있었다. 민중운동가들은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지명 관을 통해 한국의 소식을 일본으로 보내고 TK통신 을 발간했다. 1973년 짐 스텐즐(Jim Stentzel)의 제안으로 슈 라이스 부부(Sue and Randy Rice), 루이스 모리스(Louise Morris), 문동환 목사 부부 등은 한국 의 상황을 기록한 팩트 쉬트(Fact Sheet) 를 유신 직후부터 광주민중 항쟁까지 9년 동안 모두 63호를 만들어 미국 캐나다 독일 등에 배포 해 한국 상황을 외국에 알렸다. 이들은 한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다. 3) 개발에 저항하는 민중 (1) 개발독재와 도시주민 정책 경제개발을 본격화하면서 도시로 들어오는 이농민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서울의 경우 1960년에 240만 명이던 인구가 1980년에는 3.5 배가 넘는 840만 명으로 늘었다. 이 농민들 중 상당수는 안정된 일자

8 558 김영곤 리를 찾지 못하고 변두리의 판자촌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도시빈 민을 형성했다. 1966년 당시 서울시 인구 380만 명 가운데 1/3에 해 당하는 127만 명이 무허가주택에 거주하였을 정도이다. 무허가 주택이 서울시 전역에 걸쳐 생겨나자 서울시는 본격적인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1967년 이후 1970년 중반까지 서울에서 14만여 동의 판잣집을 세우고 그 가운데 약 9만 동을 철거했다. 49) 유신 독재 는 도시빈민을 강제로 몰아내고 그 땅에 건물과 아파트를 지어 건설 업자의 이익을 챙겨주는 정책을 폈다. 이런 재개발 정책은 전국에 걸 쳐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서울의 청계천 등에서 밀려난 빈민은 그 뒤 30여 년에 걸쳐 성남 봉천동 목동 안양 수원 등을 거쳐 김포 구 리 오산 등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부산 초량의 빈민은 물만골, 사상, 구포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 부산 등 중 심 도시를 생활근거로 삼고 있다. (2) 도시 빈민 운동 전개 농촌을 떠나 썰물처럼 도시로 밀려온 유리농민 가운데 일부는 도 시 빈민이 되고, 노동자보다 가격이 낮은 노동의 원천을 형성했다. 도시주민 50) 특히 도시빈민은 저임노동의 원천이고 도시 변두리의 부 동산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빈민운 동이 일어났다. 빈민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계획 에 의한 대단위 강제 철거가 자발적이고 순간적인 폭동 으로 나타나자 당시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적극화된 민중운동의 열기 속에서 빈민 4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 Ⅰ,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63~64쪽 50) 1970년대 이후 도시변두리에서 일어난 주민운동을 도시빈민운동으로 불렀는데, 이 글에는 도시빈민운동을 주민운동을 구성하는 일부 개념으로 규정한다. 도시 빈민운동이라는 개념에는 사회병리학적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59 들을 운동의 주체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학생, 지식인들이 빈민지역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불만이 있는 곳에 변혁이 있 다 면서 본질 폭로보다 는 승리할 수 있는 작은 싸움 (화장실 짓기, 도 로 포장, 상하수도 시설 확충, 전기 시설 등)을 통해 빈민을 조직하고 의식화사업을 했다. 이들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 알린스키(S. Alinsky) 의 영향을 받았다. 51) 1971년 9월 1일에 조직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솔 알린스키(S. Alinsky)의 지역사회 조직이론과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ie)의 민중 교육론 52) 에 따라 활동했던 빈민운동 초기 조직이었다. 53) 전태일 분신 전후에 김진홍, 제정구(1944~99), 이해학 등이 빈민을 민중의 하나로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김진홍은 1970년대 사회적 빈민층이 모여 살던 서울 청계천에서 두레공동체운 동을 시작해 1971년 활빈교회를 세웠다. 제정구는 1972년 야학 교사 로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갔고, 1975년 양평동 뚝방 동네로 이주했다. 양평동에 철거가 시작된 1977년 주민들과 함께 집단 이주를 계획하 고 정일우 신부와 함께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에 이들의 마을 을 일구었다. 박형규 목사가 지도하는 빈민 선교단체인 수도권특수선 교위원회(KMCO) 실무자로 성남에 파견된 이해학은 1973년 3월 1일 성남에 주민교회를 설립해 성남지역에서 주민운동의 터전을 마련했 다. 허병섭은 1970년대 후반 서울 월곡동에 동월교회를 세우고 빈민 공동체 활동을 전개했다. 51) 양연수, 1990 도시빈민의 태동과 그 발전과정 한국사회운동사 (조희연 편), 죽산, 228쪽 52) 한국천주교평신도협의회가 1979년 번역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 (Pedagogy of the Oppressed) 53) 프레이리의 주민공동체 이론은 1980년대 부문운동의 발전으로 소강 상태를 이 루었으나, IMF 통치 뒤 도시빈민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재조명하고 있다.(양재 덕, 2003 필리핀 지역공동체조직 연수보고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참조)

10 560 김영곤 제2차 오일쇼크 뒤 부산 마산의 저임 노동자와 실업자가 부마항쟁 의 주요한 구성원이었다. 54) (3) 개발에 밀린 도시주민의 저항 도시주민의 저항 개발과 부실공사의 피해를 본 주민들이 저항했다. 1971년 6월 28일 서울 시민아파트 주민 3천여 명이 시청 앞에서 시위했다. 1971년 10 월 6일 천안시 완초동 주민 100여 명이 시청에 몰려가 무허가 건물 강제 철거 뒤 대책을 요구했다. 제주도 용담동 주민 250여 명은 소음 공해와 택지값 저하를 우려해 1972년 4월 28일 제주공항에 몰려가 국제공항 확장 반대 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원 면담 요청을 하다가 경찰 저지로 해산했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1960년대에 날림공사와 낮은 공사비 책정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연 세대 도시문제연구소에서 이 사건의 일어날 가능성을 조사한 김혜경 은 제정구 등과 함께 천주교 도시빈민회를 만들어 빈민운동을 하고 철거민 투쟁에 참여했다. 1977년 광주에서 박흥숙은 철거반원이 자신의 무허가 판잣집을 철 거하는 것을 보고 격분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했다. 언론은 그를 무 등산 타잔 이라고 부르며 엽기적으로 보도했지만 사실 그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지던 때 도시빈민층을 형성한 이농민의 전형이었다. 월간 대화 가 이 사건의 본질을 알리는 글을 싣고, 또 1978년 그가 사형판결을 받자 광주에서는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1980년 사형 당하기 직전 최후 변론에서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국가 권력을 비판했다. 54) 양연수, 앞의 책 참조;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9 부마민주항쟁10주년 기 념 자료집 참조

1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년대 도시 철거 반대 주민투쟁은 청계천과 창신동 현장에서 시작했다. 1969년 2월 27일 창신동 철거투쟁 때 700여 명의 창신동 엄마들이 서울시청에까지 몰려가 경기도 광주로 집단 이주를 거부하 며 시위했다. 이런 노력으로 창신동 철거민 98% 정도가 철거 이후 세운 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오랜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었다. 55) 1970 년 11월 6일에는 영동포구 사당동 주민 1천여 명과 철거반원이 100 여 명 기동경찰 70여 명과 충돌해 주민 6명이 부상당했다. 56) 광주대단지 주민항쟁 1971년 용두동 마장동 숭인동 등의 집을 뜯고 광주로 사람들을 집 단 이주시켜 광주대단지 사건 의 원인이 되었다. 서울에서 밀려나 광주에 온 광주대단지 주민 3만여 명이 토지불하 가격 문제를 둘러 싸고 주민항쟁을 일으켰다.( ) 이들은 관공서를 습격하고 거 리 시위를 하고 청와대로 진격하려 했다. 이 사건은 노동운동의 전태 일처럼 주민운동에서 일어난 선구적인 사건이다. 57) 부마항쟁 1979년에 일어난 부마항쟁은 가난한 민중이 독재정권에게 저항하 는 측면과 실직한 노동자와 민중의 생활에서 절망을 표현한 두 측면 이 있다. 신민당의 총선 승리, YH 여성노동자의 투쟁, 김영삼 제명이 라는 상황과 결합해 학생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했고, 마침내 10월 15일 부산대에서 시국선언문을 배포한 것을 계기로 16일과 17일 도 55) 조배원, 바람에 눕는 풀 기억과 전망 2003년 겨울호, 172쪽 56) 자유의 종 1970년 11월 12일자 57) 필자가 당시 방문한 광주읍 단대리에서는 배고픔에 지친 아기 어머니가 자신의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학생들은 이 소문을 한맥 지에 실린 르포기사 광주는 죽지 않았다 를 통해 알렸고, 박정희는 피살당하기 직전까지 이 사건은 학생들이 왜곡한 것이라고 되뇌었다.(신동호, 제4화 고려대 한맥회/ 안암골 전설은 계속된다 뉴스메이커 2004년 1월 6일자)

12 562 김영곤 심지에서 학생들의 선도 아래 노동자, 영세상인, 도시빈민이 가세해 대규모 가두시위를 일으켰다. 부산 시내에서 격렬하게 진행한 이 시 위로 KBS 부산 방송국을 비롯해 세무서와 서대신동 사무소를 파괴, 방화했으며 경찰차량 6대를 전소시키고 12대를 파손했다. 부산의 격 렬한 시위에 놀란 정권은 18일 0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개 여단 의 공수부대를 파견해 시위를 진압하고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산의 경남대생들이 시내에 진출해 시민과 합세해 공화당 당사, 방송국,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부마항쟁의 파급을 두려 워한 정권은 10월 22일 경북대, 23일 영남대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 러나 24일 계명대생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부마민중항쟁은 전국 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26일 박정희가 피살돼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부산의 부마항쟁과 뒤이어 일어난 광주의 5 18 민중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용솟음을 예고했다. (4) 조세저항 1960년대 이래의 세제는 직접세가 대부분이고 세무 당국이 일방적 으로 과세해 이 과정에서 탈세와 부조리가 심각했다. 세율도 소득세 율 8~70%, 법인세율 27~40%, 물품세는 수십에서 수백%를 매겨 더 이상 세율을 높일 수도 없었다. 1971년 8월 26일 서울 동대문시장 상 인들이 당국의 세금 중과에 항의해 철시했다. 58) 31일 서울 평화통일 상가 상인 1천여 명이 시위했다. 같은 해 9월 27일 대구 서문시장 상 인이 세무서 앞에서 시위했다. 그러자 정부는 조세저항을 피하려고 1977년 조세를 간접세(소비 세:부가가치세, 특별소비세, 주세, 전화세, 인지세, 증권거래세)와 목 적세(교육세, 교통세, 도시계획세, 사업소세) 위주로 조세정책을 바꾸 고, 모두 일률적으로 10%의 세율을 부과하는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58) 한승헌 외, 앞의 책, 246쪽

1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63 가난한 민중에게 중과하는 유리지갑 조세정책의 기조는 이후 30, 40 년간 변함이 없었다. 3. 지식인의 민중 지향과 연대 학생, 교수, 언론인, 종교인 등의 지식인들은 개발독재에 저항했다. 동시에 이들은 개발독재 아래 가장 피해를 받는 민중의 삶을 개선하 기 위해 민중운동을 지원하고, 일부는 스스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삶 을 같이했다. 1) 지식인과 조직 사건의 민중 지향 (1) 청년 학생의 민중 지향 청년 학생들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선도하는 한편, 민중운동에 대 한 관심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농촌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크게 선회했다. 학생 출신 다수가 민중운동에 투신해 민중운동에 활력을 주었다. 이런 활동가의 공급원은 광주민중항쟁 뒤에 더욱 늘었다가,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학생운동을 넘어 민중운동의 주류를 형성하 면서 쇠퇴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자주 통일 평화라는 현안의 비중 이 크기 때문에 NL계 중심으로 학생들의 민중운동 진출은 비록 수적 줄었지만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민중운동이 일본과 같은 노 후한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쇠퇴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원인이다. 전태일 분신 이후 학생들은 물론 종교계에서 민중운동에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민중성을 강화한 것이 다. 학생 신분으로 노동야학과 농촌봉사 활동을 통해 민중운동의 현 장을 익히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계급적 각성을 도왔다.

14 564 김영곤 학생들은 이전의 민족주의 농민문제에서 노동문제로 관심의 중심 을 이동했다. 이런 인식은 서울과 지방의 공업지대에서 선행했다. 대 구나 광주와 같이 농업지역을 배후로 가진 지역의 학생들은 민족주 의와 농민문제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컸다. 1970년 가을 고려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생학술토론대회에서 경북대생 임구호는 미국과 일본의 신식민주의에 경제적으로 예속 당하는 것을 비판하며 신민족주의 를 주장했다. 노동현장을 거쳐 복학했다가 광주 이후 노동현장으로 다시 간 사 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종교계와 전통적 사회운동의 간접적 영향을 받았는데 편차가 있었다. 전태일의 희생과 1971년 위수령 사태의 학 생 퇴출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노동현장, 공장에 갈 때에는 보일러 냉동 선반 전기 용접 기술 등 을 배우고 자격증을 갖추어 현장으로 갔다. 미숙련 노동자로는 노동 자의 대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처음에 재단사가 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농촌의 경우는 농 민이 되어 농사를 지었다. 도시빈민운동은 직접 빈민가에 살면서 교 회 주민운동과 복합적으로 결합했다. 서울대의 한국사회연구회 이론경제학회 국제경제학회 후진국경제 학회 후진국사회연구회 문우회 사회법학회 농촌법학회 사회의학연구 회 산업사회연구회, 고려대의 한맥 한국민족사상연구회, 연세대의 한 국문제연구회 통일문제연구회, 이화여대의 새얼, 경북대의 정진회 정 사회, 부산대의 한얼 사회문제비교연구회 등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동시에 민중운동을 지향한 이념을 가지고 활동했다. 59) 1970년 학생들 59) 1970년대 말 학생운동에서 정치투쟁과 현장 진출의 선택을 놓고 민중무림 진영 은 학생세력을 민중운동의 주도체로 보고 근로대중의 의식화 조직화에 주력해 야 하고, 학림 진영은 학생운동을 민중운동의 선도체로 보았다. 후자는 1980년 8월 드러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으로 드러났다. 이 논쟁은 1980년대에 C-N-P 논쟁과 NL-PD-CA 논쟁으로 발전

1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65 은 전태일 분신을 초래한 현실에 항의하는 행동을 했다. 장기표는 청 계피복 노동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민청학련의 민중 민족 민주 선언 이 민중의 요구를 내걸었다. 조영래는 전태일평전 을 썼다. 여 정남(1945~75)은 서울에 올라와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인턴 파업현장 을 지지 방문했다.(1971) 지역적으로 부산의 학생들도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다. 60) 유신 독재 에 저항하는 부산의 학생운동과, 부산 양서조합, JOC, 앰네스티 61), YMCA 등이 전개한 사회운동이 결합해 부마항쟁을 기폭시키고 지지 했다. 광주에서도 비슷해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전남대의 박기순 신 영일 등이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을 학당으로 해 노동자들을 의식 화하고 조직화하려고 만든 노동야학이었다. 윤상원은 다니던 주택은 행을 그만두고 아예 자취방까지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옮겨 그곳 주 민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그곳에서 김영철을 만났다. 62) 1970년대에 많은 대학생들이 농촌 노동 빈민 의료복지 민중예술의 현장으로 이전해 민중운동의 새로운 인적자원이 되었다. 대학생들의 민중 현장 진출에는 전태일의 분신 이외에도 1968년부터 시작한 중 국 문화대혁명 때 전개한 하방운동( 下 方 運 動, 강제 파견)의 영향도 받았다. 1960년대에도 김정강 같은 이가 개별적으로 노동현장에 취업 했다. 전민노련은 1981년 조직구성원이 구속돼 노동운동 조직 결성의 시급함을 제안하는 정도로 활동을 마감했다.(노동자대학 교재편찬위원회, 1990 일하며 배우는 노동운동사, 백산서당, 188쪽) 60) 이런 움직임은 전국적 현상으로 전두환 집권 직후 서울에서는 이른바 학림사 건, 부산에서는 부림사건, 대전에서는 한울회 아람회 금강회, 전주에서는 오송 회 사건으로 드러났다. 61) 앰네스티는 원칙적으로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지원하지 않았다. 1972년 3월 28일 한국 앰네스티(이사장 김재준 1905~87, 총무 윤현)를 결성했다. 62) 필자는 대한광학을 다니면서 저녁시간에 회사 앞에 있는 은성교회에서 한자를 통해 풀이하는 사회과목과 노동법을 가르치는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김낙중- 민우지 사건으로 수배 당하면서 야학을 중단했다.

16 566 김영곤 했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집단적으로 공장 빈민촌 농촌의 노동현장 을 향했다. 이런 흐름을 갈수록 확대되어 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학생 출신 1만여 명이 노동현장으로 갔다. 다음은 청년학생 지식인 종교인이 민중운동과 결합한 사람들이다. 노동운동은 필자와 정윤광, 농민운동은 권영근, 의료운동은 양요환의 증언에 따른 것이며, 실제 인원은 더 많으며 노동 농촌 현장에서 스 스로 성장한 사람보다 대학생 출신 활동가에 치중해 조사에 한계가 있다. 63) 1. 노동운동 1 지식인 학생의 노동현장 활동 1960년대:김정강, 손정박 1970년대:김문수, 김삼수, 김수길, 김영곤, 김영준, 김용석, 김일섭, 김화곤, 도천수, 문성현, 양재덕, 장경옥, 정윤광, 최규엽, 함상근, 황인범, 김정길, 박용훈, 송운학, 여익구, 이학영, 임규영, 정진태, 황승주 2 기구 기관 도시산업선교회:김경락, 김근태, 안광수, 이창식, 인명진, 정진동, 조승혁, 조지송, 조화순, 최영희 제일교회:김은예, 박형규 새문안교회:서경석, 윤조덕 크리스챤 아카데미:김세균, 신인령, 장명국 JOC:이창복, 정인숙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권두영, 김낙중, 김윤환, 손정박, 노중선, 이문영 이론:박현채, 박찬일 63) 김영곤, 2005 한국노동사와 미래 2, 선인, 205쪽

1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노동조합 청계피복노조:장기표, 조영래 한국노총:김금수, 김성우, 김승호, 노진기, 박찬억, 신금호, 유영표, 이목희, 이원보, 정성진, 조성준, 조춘구, 천영세, 최영주, 피정선 2. 도시빈민운동 김진홍, 허병섭, 제정구, 정일우, 이해학 3. 의료지원 양요환, 고한석, 심재식, 양길승 4. 농민운동 1 한국농업근대화연구회:고현석, 권영근, 권형원, 김경자, 김기영, 김낙중, 김서정, 김영식, 김현식, 노재창, 민인기, 박덕재, 박미숙, 박성자, 박진도, 박현채, 서동우, 신영숙, 양정규, 유영신, 이계천, 이관우, 이범영, 이수구, 이영기, 이우재, 이재오, 임동규, 임수태, 정명옥, 정명채, 정영숙, 조희부, 차성환, 최강호, 최병규, 최석진, 허훈순, 홍갑표, 황민영, 황연수, 황한식 2 크리스챤 아카데미:권영근, 문경식, 민인기,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3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파:권형원, 김준기, 김현식, 박만수, 임수태, 조희부 4 가톨릭농민회:권종대, 박재일, 서경원, 이길재, 이병철, 정성헌, 정연석, 최병욱 5 농촌현장 출신:권종대, 노금노, 배종열, 송창기, 윤정석,

18 568 김영곤 장영근, 정광훈, 조개선, 홍영표 6 기독교농민회:김기영, 김성순, 나상기, 문경식, 배종열, 윤기현, 정광훈, 정만호, 최종진 7 YMCA:민인기, 이학영, 정찬용, 조희부, 최석진 1970년대 청년단체는 1971년 민주수호청년협의회(민수청), 1978년 민 주청년협의회(민청협) 그리고 기독청년들이 전개한 기청협 등이 있다. 1971년 4 27대선을 앞두고 각계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박정희의 장 기 집권을 막는 공동대책을 모색했다. 1971년 4월 19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단 등의 각계 인사들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 대표위원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를 결성하자 6 3항쟁에 참여했던 청 년들이 중심이 되어 1971년 2월 결성한 민주청년협의회는 민수협을 결성하자 이를 보조하는 청년단체로 재편하기로 결정하고 4월 21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청, 초대회장 백기완)로 재탄생했다. 민수청 은 대체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활동 목표로 삼았으며, 닉슨 독트린 이후 동아시아에서 정치 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획책하고 이에 편승 해 박정희 정권이 친일 정책을 노골화하자 배일운동을 편 것이 특징 이다. 민수청은 민수협과 학생운동을 매개해 1970년대 초반 통일전선 운동의 교량 역할을 했다.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청년활동가들이 1978년 5월 12일 민주청년인 권협의회(의장 정문화, ~ )를 결성하고 민주회복운 동에 앞장설 것을 밝혔다. 그 뒤 1978년 9월 민주청년인권협의회는 조직 위상을 재정립하고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의장 조성우)로 새롭 게 탄생했다. 민청협은 민주화운동 이외에도 1979년 8월 도시산업선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 언론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등 재야 세력과 연계하여 YH무역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했다.

1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69 민청협은 민주주의국민연합( )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으로 이어진 당시 상층 전선운동을 추진하는 실 무 역할을 했다. 그 뒤 민청협은 1979년 YWCA 사건으로 회원 모두 가 수배되어 조직활동을 중단하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와해되었다. 민수청과 민청협은 민중운동의 입자에서 보면 여러 제약과 한계를 가졌지만 1970년대 상층 재야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64) 특히 유신체제 말기에 민중운동을 지지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2) 종교계 종교인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 레드 콤플렉스에서 비교적 자유스 러운 종교인의 특성과 조직력 자금력을 살려 독재에 항거하고 농민 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 민중운동을 지원했다. 첫째, 기독교계의 도시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이바지했다. 산업선교는 1957년 예장 총회 전도부 산하에 산업전도위 원회를 조직하면서 시작했다. 감리교는 1961년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했다. 1961년 4월 윤창덕 목사가 동일방직주식회사와 한국기계공 업주식회사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시카고 매코믹 신 학교에서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교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경험한 오 명걸 선교사(조지 오글 목사)가 인천에 부임해 1962년부터 산업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도시산업 선교로 발전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영산)는 소그룹활동 을 통해 산업선교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부분이 이후 노 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교회 등의 지원으로 건립한 영산 의 공간은 1970, 80년대에 노동운동 집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64) 전상봉, 2004 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 두리 미디어, 229쪽

20 570 김영곤 전태일 분신에 자극을 받아 1971년 1월 한국산업문제협의회를 조 직하고 9월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세웠다. 유신정권은 노조를 지원하 는 도시산업선교를 탄압했고 노총과 언론도 산업선교 관계자를 자생 적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한국기독교협의회는 산 업선교 수호위원회를 조직하고 1978년 산업선교신학 선언 을 발표했 다. 도시산업선교는 재정을 서유럽 교회에 크게 의존했다. 인천의 조화순 목사는 1966년 당시 최대 규모의 방직공장인 동일 방직에 들어가 노동자 생활을 경험하고, 1971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를 세웠다. 1972년 조승혁 목사가 동일방직,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 주식회사의 노동쟁의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당해 고문을 받는 등 산업선교가 탄압을 받았다. 1973년 산업선교회 조지 송 김경락 목사를 연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기독교 청년학 생들의 모임인 EYC의 민주화선언이 있었다. 청주산업선교회(1972)의 정진동 목사는 1975년 신흥제분 노조를 지키는 과정에서 구속당했다. 그밖에 경수산업선교회, 성수산업선교회, 구미산업선교회가 있었다. 기독교계 민중조직에는 도시산업선교회,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 회(KMCO), NCC 인권위원회 등이 있고, 기존 교회 가운데 서울의 서 울제일교회, 창현교회, 한빛교회, 수도교회, 새문안교회, 동대문감리교 회 등과 지방의 여러 교회가 대학부를 중심으로 민중을 위해 활동했 고, 민중을 위한 교회에는 성남 주민교회(이해학), 사랑방교회(이규상), 활빈교회(김진홍), 형제교회(김동완), 희망교회(정명기), 노동교회(성문밖 교회 조지송), 실로암교회(청계천 뚝방교회, 모갑경), 동월교회(허병섭), 광야교회(인천 백마교회 조화순), 구로동 신명교회 등이 있었다. 6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인권위원회를 조직해 목요기도회 를 통해 민중의 소리를 듣고 박해를 고발했다. 한국기독학생연맹은 65) 정상시가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의 제82회 포럼에서 발표한 글 민중교회 운동 소고 ( ) 참조.

2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71 학생사회봉사개발단을 통해 민중 지향성을 가졌다. 기독교계 농민의 조직은 1970년대 중반부터 농촌 교회의 평신도와 청년 세력 일부가 지역 농민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태동했는 데, 1978년 전남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된 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1982년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를 창립했다. 1965년 설립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교회 여성 산업 청년 농촌의 영역에서 중간집단 교육 프로그램(1974~79)을 진행했다. 1975년 내 일을 위한 노래집 을 냈다. 1976년 월간 대화 를 창간해 어느 돌멩 이의 외침 무등산 타잔 과 같은 노동현장 생활현장의 목소리를 실 었다. 대화 는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폐간됐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9년 3월 간사 6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교육 생 700여 명이 구금 혹은 조사를 받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활동 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도시빈민 문제를 두고 1968년 미국 연합장로교회 후원으로 연세대 학교에 세운 도시문제연구소에서 도시빈민선교 실무자를 훈련시켰다. 1971년 3천 명의 시민아파트 주민들의 6월 시청 앞 시위와 8월 광주 대단지 주민항쟁을 계기로 이 훈련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1971년 수 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자 정치적 민주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주민 조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 고 활동을 중단했다. 둘째, 가톨릭에 소속한 농민과 노동자는 가톨릭농민회와 가톨릭노 동청년회(JOC)를 조직했다. JOC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노동자조직으 로 노동현장에서 노동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동일방직 콘트롤데이 타 서울통상 YH무역 등의 현장에서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했다. 가톨 릭계의 정의구현사제단( 조직)처럼 종교인 자신을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1977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인권회복 기도회를 열 고 77선언을 발표했다.

22 572 김영곤 셋째, 불교계에서는 민중불교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서 6 25전쟁 사이에 종교계에 널리 퍼졌던 반민중적 친일의 흐름을 반성하는 행동이었다. 1970년 중반부터 여익구, 고은, 황석영 등이 민중불교 의 실천을 모색했고, 전재성은 민중불교론 을 월간 대화 (1977년 10월)에 실어 이론화를 시도했다. 66)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발전한 노동운동이 독자성을 갖추면서 현장 선교를 중심으로 종교성을 강조하는 종교계와 독자적인 관성을 갖고 자율성을 강조하는 민중운동은 서로 분해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현 상은 노동운동과 연관이 깊은 산업선교회와 노동운동 사이에 두드러 지게 나타났다. 가톨릭계의 JOC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결국 JOC를 가톨릭 내부의 조직으로 내재화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원풍모방 등 수도권의 노동자들은 1984년 한국노동자복 지협의회를 조직했다. 67) (3) 교육 법조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는 1968~72년 노조 간부들과 농민들을 대 상으로 노동교육과정 과, 협동 교육 과정 을 마련하고, 잡지 민주노 동 과 민주농민 을 발간했다.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는 지역사회 실 무자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창신동 등 철거민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1971년 8월 23일 교수 600여 명이 대학자주화선언 을 발표했다. 1973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의문사를 당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찬국과 김동길 교수가 구속당했다. 1975년 유신 독재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학도호국단을 결성 66) 여익구는 근본불교=유물론, 대승불교=관념론이라는 도식에 입각해 민중불교 철학은 근본 불교에 근거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조성렬, 민중불교 논쟁 어 디까지 왔나, ) 67)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1984년 노동절에 발표한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언 을 참조

2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73 해 대학을 병영화하고 대학교수 400여 명을 교단에서 추방했다. 이렇 게 해직된 교수들이 구속 학생과 민주 인사 석방, 해직교수 복직을 요구하는 민주교육선언 을 발표하고(1977), 다음해 해직교수협의회 (회장 성내운)를 결성했다. 연세대 성내운(1926~90)과 송기숙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대학교 교 수 12명이 유신 교육의 이념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국민교육헌장 을 비판하고, 참다운 민주교육, 참다운 인간교육 을 주장하는 우리 의 교육지표 를 발표하여( ) 유신 교육 체제에 정면으로 도 전했다가 모두 교직에서 해직되고 송기숙과 성내운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71년 1월 11일 최봉길 판사 등 고법 판사 100여 명이 권력에서 독립하자고 법관 정화 운동을 벌였다. 법원은 1971년 신민당사 농성 사건 피고자 10명 전원과 월간 다리지 사건 피고인 3명 등에게 무 죄를 선고했으며, 이 판결을 내린 목요상은 판사직을 그만 두었다. 6 월에는 대법원이 군인 군속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에 대 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또 이범렬 판사가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위 반 사건에 대해 영장을 기각하자 박정희는 사법권 독립은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 발끈하고, 검찰은 1971년 7월 28일 그를 제주도 출장 중 의뢰인에게서 술대접을 받은 것을 빌미로 뇌물 수수죄로 기소했다. 이것은 유신체제 선포를 앞두고 법조계를 정비하 는 작업이었다. 이에 유태흥 부장 판사 등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 전원이 집단사표를 냈다. 이튿날 검찰이 다시 영장을 신청하자 전국 판사 415명의 1/3이 넘는 153명이 사표를 내 사법권 수호 투쟁으로 확산했다. 결국 검찰이 강경 방침을 철회하고 대법원장은 박정희와 면담해 사법권 보호에 필요한 사항을 보장받기로 합의하면서 8일 만 에 끝났으나 사법개혁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듬해 유신체제가 들어서 면서 50여 명의 판사들을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 사법부의 위헌법률

24 574 김영곤 심사권을 박탈하고 국가배상법 위헌에 찬성했던 대법관을 재임용에 서 모두 탈락시켜 법원을 행정부의 시녀로 격하시켰다. 유신 독재 아래 사법부가 권력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과는 달리 이병린(1911~86), 태륜기, 이돈명, 한승헌, 조준희, 홍성우, 황인 철(1940~93), 강신옥, 고영구 등 민권변호사가 민중운동을 법률적으 로 지원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변론하던 중 사법 살인 중단을 요구했다가 재판정에서 구속당했다. 한승헌 역시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을 변호하다가 구속됐다. (4) 문화예술 1970년대에 진보적 이념을 펼치려고 많은 이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공연했다. 아직 출판(1983) 되지 않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68) 과 조영래의 장시 노동자의 불 꽃 (당시는 작자 미상)을 등사본으로 노동현장에서 돌려가며 읽었다. 황석영의 객지 삼포 가는 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 은 공 (문학과 지성사, 1978), 유동우(본명 유해우, 삼원섬유)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대화출판사, 1978) 등을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 며 읽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은 공단 근처에 사는 노동 자와 빈민 가족이 겪는 저임과 공해를 그렸다. 필자는 인천 대우중공 업에 냉동공으로 근무하며 이 책의 배경이 인천인 것 같다고 생각하 며 읽었는데 실은 구로공단이었다. 이런 문학작품을 노동자 대중 속 에 노동자의 투쟁과 조직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크 게 기여했다. 69) 68) 일본 가톨릭정의와 평화 협의회는 전태일평전 을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 炎 よ, わたしを つつめ-ある 韓 國 靑 年 勞 働 者 の 生 と 死 ) ( 金 英 琪, 飜 譯 李 浩 培, た いまつ 社, )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69) 당시 민중운동을 지지하고 실천한 청년학생 지식인들은 일어판 마르크스의 공

2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75 농민과 빈민의 현실을 그린 작품에는 황석영의 객지 (창작과 비평 사, 1971), 신경림의 농무 (월간문학사, 1973),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화다, 1977), 이동철 꼬방동네 사람들 (현암사, 1981), 김현장 무등 산타잔 (월간 대화 1977년 8월호) 등이 있다. 1970년대 노동 현장에서 노래 가사를 바꾸어(노가바) 부르던 것을 모은 노래집 노동과 노래 (허병섭, 1981?)가 있다. 크리스챤 아카데 미에서 연수교육을 받던 참가자들이 당시의 유행가 아 미운 사람들 을 개작해 농민들이 얼마나 농사를 더 져야 아 살 수 있나/우리 모 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왔는데 아 슬픈 현실 이란 노가바 를 부른 것이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의 화근이 되었다. 70) 김민기는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 (1978)을 카세트 테이프에 담 아 전파했다. 민중운동의 정세와 이론에 관한 것은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1974), 김윤환의 노동문제의 구조 (광민사, 1978), 송건호(1927~2001) 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의 페다고지 (한국천주교평신도회, 1979) 등이 나왔다. 이들은 대부 분 불온 을 이유로 반공법 혹은 긴급조치로 당국의 제재를 받아 금 서목록 54종에 들어갔다. 71) 한승헌 변호사는 여성동아 1975년 3월 호에 기고한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 - 어떤 조사, 이영희 교수는 8억인과의 대화 (창작과 비평사, 1977)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당했다. 산당선언 자본론 해설서나 경제학 서적, 중국어판 마오쩌뚱의 모순론 실 천론 등을 돌려 읽고, 국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 서고에서 먼지를 쓰고 있던 8 15해방 정국에 출판한 신남철의 역사철학 (서울출판사, 1948),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 改 造 社, 1933) 등 사회과학 서적을 찾아 읽으며 민중문제를 해석하려 했다. 70) 임락경, 2005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 삼인 참조 71) 박원순, 1992 국가보안법연구 2, 역사비평사, 135쪽

26 576 김영곤 창작과 비평 (1966년 창간, 백낙청), 씨 의 소리 (1970년 창간, 함석헌), 월간 대화 (1976년 창간,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이 유신 독 재를 폭로하고 민중의 현실을 알렸다. 당국은 월간 대화 가 불온 하다는 이유로 폐간시켰다. 광민사(대표 이태복, 1977 설립) 등은 민 중운동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영인본 출판업체인 진흥문화사의 정성 기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을 제작 판매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72) 김태경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 을 영인해 배포하고 (1977), 자본론 을 완역하고 정진영과 함께 광화문에 민중서림을 열 어 사회과학서적을 배포했다. 3 1민주구국선언서 등을 제작한 세진 문화사의 강은기(1942~2002)가 구속되었다. 이런 인쇄소에 인쇄물을 맡긴 운동권들은 인쇄한 뒤에 돈이 모자라거나 구속 수배돼 대금을 갚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73) (5) 자주 통일 운동 자주 통일운동은 활발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지배와 대일 경제 예속화 그리고 핵 문제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한미행정협정 발효 4주년인 1971년 한국측이 적발한 미군 범죄는 6,194건인데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4.2%(272건)에 불과하고 실형 확정 은 4건(6명)에 그쳤다. 1970년 5월 20일 파주군 주민이 미군과 투석전 을 벌이고, 9월 7일 서울 이태원 주민 100여 명이 미 헌병과 투석전 을 전개했다. 1971년 평택에서 흑인 병사와 백인 병사의 충돌 과정에 72) 김기선, 인쇄는 나의 힘 강은기 1 희망세상 2005년 5월호 참조 73)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할 때 고은 이호철 신경림 염무웅 황석영 등 진보적 문인들이 모여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를 결성하고 문학인 101 인 선언 을 발표해 김지하 양성우 등 구속 시인 석방, 서민대중의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YH 사건 등 시국 현안에 대한 성명을 통해 민중운동을 지지하 는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자실은 1987년 6월항쟁 뒤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로 발전했다.

2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77 서 피해를 입은 주민 2천여 명이 흑인은 이제 필요 없다. 목화밭으 로 돌아가라 고 시위했다. 74) 한편 1971년 1월 5일 흑인 병사 600여 명 이 38선 부근의 제2사단 제1휴양소에 모여 인종 차별에 반대해 시위 했다. 같은 해 5월 17일에는 사복 미군 31명이 서울 중심가에서 반전 시위를 했다. 75) 1971년 6월 서울대에서 사또 일본 수상의 방한을 반대해 성토대회 를 열고 전국학생연맹이 사또 수상의 방한은 정치 군사적으로 지배 하려는 포석이라는 성명을 냈다. 대학생들은 1974년 3 1절에 일제상 품 소각 운동을 전개했다. 통일문제연구협의회 사건으로 최덕길과 이 경식이 구속됐다.(1976) 임종국(1929~89)은 한일협정의 왜곡에 충격을 받고 친일문학론(1966) 을 낸 데 이어 1970년대에 연구범위를 넓혀 10권으로 된 친일파 총 서를 준비해 1980년대 들어 일제침략과 친일파 (1983), 밤의 일제침 략사 (1984), 일제하의 사상탄압 (1985), 친일논설전집 (1987)을 냈다. 이 연구는 민족문제연구소 건립과 친일 잔재 청산작업의 기초가 되 었다. 한편 유신 독재는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 과정에서 사망 실종한 5,100명의 한국군, 파병 군인들이 겪은 고엽제 피해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80여 건 9천여 명의 베트남 양 민학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반핵 문제 자주 통일 평화는 민중운동에게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영역이었 으나 6 25전쟁의 폐해와 독재의 영향으로 단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던 것이 1971년 오키나와의 미군 핵무기를 한국으로 일부 이전하면서 76) 74) 청사편집부, 1984 칠십년대 한국일지, 청사, 63쪽 75) 청사편집부, 위의 책, 55쪽 76) 청사편집부, 앞의 책, 59쪽

28 578 김영곤 이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1974년부터 한국 원폭 피해자를 지원했다. 북한은 1976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국문제 긴급 국제회의 에 서 한반도 비핵 평화지대화 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소설가 표문태(1914~ )는 1969년 랩(Ralph E. Lapp)의 핵전쟁:무 서운 핵전쟁의 내막(Kill and Overkill:the strategy of annihilation) (현암 사, 1979)을 번역 출간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준 공(1978)했지만 반핵의 의미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983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반핵 문학가회의에 참석했다. 그 때 발표한 주 제문은 마굿간의 진실 이라는 에세이집 안에 아시아의 등불에 빛 을 이란 제목으로 수록했다. 이 글에서 그는 약소국의 희생을 가볍 게 보는 미국의 에고이즘이 세계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 깊이 작용하 고 또 강대국의 개입을 갈망하는 무리가 한국에서 각계각층의 주도 권을 쥐고 있어서 핵폭탄이 투하될 위험이 가장 높다 고 했다. 77) (6) 조직 사건 유신 독재 아래 조직 사건은 주로 공안 당국이 조작한 사건으로 당장 정적을 배제하고 여론을 반전시킬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 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적 자원을 죽이거나 그 주변과 새로운 세대 에게 공포심을 주어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인적 자원을 청소하는 정책이었다. 4 3에서 조봉암의 간첩 조작과 사형, 민족일보 조용수 사형, 민족주의비교연구소 사건을 거쳐 광주로 이어지는 제노 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의 한 부분이다. 인적 자원은 적어도 해방 이후 형성된 인적 자원이 조직 사건으로 파괴되었지만 인적 단절이 민중운동에게 주는 피해는 통시대적으로 77) 김승국, 1989 겨레의 칠성판, 황토, 169쪽

2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79 영향을 미쳤다. 또 여기에서 비롯한 레드 콤플렉스는 사건의 당사자 에게나 민중운동에 참여하려는 이들에게 죽음과 고통의 공포로 다가 왔다. 이에 비해 종교계는 유물론을 부정하는 종교의 일반적 속성과 국제적 연계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가 덜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그에 앞선 이승만의 극우 독재의 차이는 후 자가 일정하게 진보당 등 혁신계의 정치활동을 용인했지만 박정희 통치시기에는 혁신계가 철저한 탄압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 을 하지 못하게 한 차이점이 있다. 78) 유신 독재 아래 여러 건의 조직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대체 로 성장하는 민중운동과 확산된 사회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하 는 움직임을 반영했다. 79) 그 가운데 공안기관이 조직한 조직, 자생적 인 조직, 느슨한 인적 연계의 형태 등이 있었다. 그 구성원들은 대체 로 정치와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아가 사회 변혁을 지향했고, 80) 사업 내용은 전위적인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주된 것이었다. 정치노선 에서 대부분 전통적인 혁명노선을 걸었고 일부가 친북적 경향을 띠 었다. 전반적으로 대중과 연결이 약했지만 유신체제 후반으로 갈수록 대중과 결합하는 정도가 높았다. 81) 민가협의 조사에 따르면 1970년 이전에는 남파 간첩 이외 유형의 78) 1961~80년 국가보안법, 반공법, 정치활동 정화법, 사회안전법, 집시법, 비상사 태 특별조치법, 국가보위 특별조치법, 긴급조치 등으로 검거한 인원은 모두 11,384명(1972~79년 3,814명)이다.(박원순, 앞의 책, 31쪽) 79) 부경역사연구소, 2003 한국사와 한국인 근현대편, 선인, 181쪽 80) 이런 점 때문에 사회변혁 또는 혁명을 지향하는 단체를 전위조직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위조직 사건의 명칭은 대부분 그 구성원 스스로가 아닌 독재 의 공안기관이 붙였다. 81) 조직 사건은 현재 그것이 북한과 관련된 것이라 해도 장기수 문제의 처리에서 보듯이 인권문제 차원의 검토를 하는 단계이다. 조직 사건의 역사적 평가는 남 의 입장에서, 북의 입장에서, 남북 공동의 입장에서 재평가하는 과정을 거처야 할 것이다.

30 580 김영곤 간첩사건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또 1960년대 말 북한이 민주기지 론을 버리고 남북이 7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에는 간첩 남파가 거의 종식되었다. 그런데도 1970년 이후 재일동포, 납북 어부와 국내 민중운동가들을 이용한 조작 간첩 사건이 늘어난 것은 정권에게 간 첩 사건이 계속 필요한 존재였음을 말한다. 82) 1970년대 일어난 사건을 서술하기 앞서 먼저 1960년대 후반에 일 어난 사건을 열거해 서술의 연결성을 갖고자 한다. 1967년 윤이상 이 응로 등 예술가 학자 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200여 명을 검거하는 동베를린공작단 사건이 일어났다. 불법 납치로 한 독간에 외교분쟁이 일어나고 유신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 당했다. 이 사건으로 화가 이 응로와 작곡가 윤이상 등은 오랜 망명생활을 했다. 윤이상(1917~95) 이 망명 기간에 작곡한 예악( 禮 樂 ) 은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궁중 아악, 제례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송두율은 남북 사이를 잇 는 경계인 역할을 하다가 노무현 정권 때 귀국해 구속됐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관련 자 158명을 검거하고 73명을 송치했다. 결국 김종태(1926~69), 이문 규, 김질락 세 명이 사형 당하고, 최영도가 검거 과정에서 사망하고, 박성준 신영복 등이 중형을 받았다. 이들은 북한한테 받은 자금으로 청맥 지와 학사주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또 1968년 8월 중앙정보부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을 발표하고 권재혁(1927~ ) 이일재 이형 이강복 등을 구속했다. 이 사건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서클 수준의 모임이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권재 혁의 논문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 이라는 논문에서 이름을 따 와 조작한 것이다. 권재혁이 사형 당했다. 중앙정보부는 1971년 호남 재건 통혁당 간첩단 사건, 통혁당 조직 82)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양심수후원회, 1989 장기복역양심수실태보고서, 3쪽

3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81 및 사회혼란 사건 발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을 기획해 발표했다. 이들 사건에는 3선개헌 반대 학생 시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작용 했다. 1974년 울릉도 거점 통혁당 경북위원회 사건이 일어났다 년 통혁당 재건 기도 사건(임동규 간첩 사건)을 만들어 임동규와 박 현채 등을 구속했다. 재일동포를 이용한 간첩 조작 사건이 많았다. 서승 서준식 형제 사 건(1971), 재일교포 강석만 간첩단 사건(1971), 고려대 부산대 한신대 서울의대 학생을 구속한 학원간첩단 사건(1975), 한민통 사건과 연결 한 김정사 사건(1977) 등이다. 1973년 김낙중-민우지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민우 지를 배포하는 행위를 탄압하고 아울러 고려 대 노동문제연구소가 노동자 농민과 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이미 법원의 판결을 받은 김낙중의 월북 사실을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한국모방의 여성 노동자 일부가 이 사건에 연 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통을 받았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해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가 기소할 가치 가 없다 고 기소를 거부해 흐지부지됐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 데 이어 5월 27일 2차 인혁 당 사건 관련자를 기소했다. 모두 24명을 구속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은 내란 예비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혐의로 기소돼 군사재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진술할 기회를 한 번 갖지 못한 채 이듬해 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9일 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 로 규정하고, 앰네스티는 야만적 살인행위 로 규정했다. 83)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는 강령과 규약을 채택한 적이 없는 당

32 582 김영곤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로 84)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 세력 으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 는 데 민청학련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이들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학생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윤보선 지학순 박형규 김지하 등은 국 제적 연관이 있어 정권에게 부담되므로 치지 못하고 국제적 연결이 없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영남지역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씌 워 희생시켰다. 85) 인혁당 사건과 뒤의 남민전 사건으로 영남권에서 진보적 인사들의 상당 부분이 희생당했다. 영남지역은 6 25전쟁을 거 치면서도 보존하고, 대구는 이승만 정권시절 섬유도시로 개발해 도시 노동계급이 일찍 형성되고 인근 지역에서 들어온 이농민과 빈민층이 운집해 도시 하층민이 집중했고, 이들은 4 19 이후 대중운동의 동력 으로 작용했다. 인혁당 관련자 가운데 일부는 4 19혁명 때부터 한일 협정 반대와 반유신 투쟁을 한 민주화운동의 헌신자였다. 서도원은 1973년 대구 11 5시위 때 사용한 반독재민주국 선언문 을 작성했 다. 86) 필자는 민청학련 관련자 가운데 경북대생 여정남을 사형시킨 것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본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의 희생은 독재가 반독재 저항 세력을 예비 검속해 민족민주운동의 잠 83)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은 인혁당 사건은 4 19 전후 활동했던 혁신세력들 이 5 16 이후 합법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전국 규모의 비합법 지하운동 조직 건 설을 시도하다 공안 당국에 적발된 것"이며 북한에서 주장한 반제반봉건 민주 주의 혁명 과 상당부분 일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 분석했다. 또 인혁당 관련자 들이 당을 결성하기 위해 당명과 강령을 언급한 적이 있으나 실제 당 으로서의 조직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고 이 때문에 이들을 기소 재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따랐다 고 보았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년대 공 안사건 의 전개양상과 평가 한국현대사 3, 풀빛, 176~182쪽) 84)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기자회견( 한겨레 2005년 12월 8일자) 85) 지승호, 75년 4월 9일, 그 미망의 기억 기억과 전망 2005년 봄호, 184쪽 86) 신동호, 인혁당 실체, 이제 말한다 뉴스메이커 2005년 8월 2일자

3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83 재력을 말살해 장래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의 지도력을 상실하게 하 는 인적 상실이었다. 87) 1979년 10월 9일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73명) 사건을 발표했다. 남민전은 유신 독재를 타도할 목적으로 1976년 2월 29일 신향식 이재문 김병권 등이 민족문제 88) 에 주안점을 두고, 유신체제 말기에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지하조직 방식으로 조직했다. 남민전은 전위조직을 지향해 노동자 농민 대중과 결합을 시도했으나 당시 상당히 발전한 노동조합 농민회 빈민운동 등 공개 적인 대중조직과 결합한 정도는 높지 않았다. 동시에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의 집을 터는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은 테러활동도 계획했는 데, 이것은 갑오농민 전쟁이 패배한 뒤 활빈당 영학당 등이 했던 방 식과 유사하다. 박현채는 통혁당이나 남민전의 도시게릴라 시도가 아 직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89) 이 사건으로 이재문이 옥사하고(1981) 신향식은 사형당하고(1982) 전수진은 병보석 뒤 병사했다. 1979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 일어났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노동자 농민과 결합해 이전의 조직이나 사건에 비해 민중과 결합 정 도가 높았다. 1965년 설립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60, 70년대 산업 화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 여성 등을 대상으로 중간집 단 이론 강의를 통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 참여케 했다. 1979년 87) 정화영의 증언( , 인천) 88) 남민전은 잠정강령 제1항에서 미 일을 비롯한 국제 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 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 주적인 연합정권을 세운다 고 민족모순의 해결에 주안점을 두고, 남베트남민족 해방전선과 보조를 맞추려 했다.(김정남, 앞의 책, 270쪽) 89) 박현채는 전위당을 통한 혁명이 현실적이 아니라고 판단해 통혁당이나 남민전 에 비판적이었다. 10대에 빨치산 활동을 한 그는 1978년 2월 남민전을 하던 임 동규가 그에게 한국의 현 시점에서 도시 게릴라가 가능하나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아직 안 돼, 배겨나지 못해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경제학자여, 잠에서 깨 민중의 삶을 보라 프레시안 2005년 5월 2일자)

34 584 김영곤 크리스챤 아카데미 간사 이우재 한명숙 황한식 장상환 신인령 김세 균 등 6명과 한양대 정창렬 교수를 불법 지하 용공 서클을 구성해 중간 집단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하는 혐의를 씌워 남한 체제 전복을 위한 6인 서클 구성 이란 사건으로 구속했다. 유신 독재는 1965년부터 본격화한 비전향 장기수 1천여 명의 사상 전향 공작을 고문 폭행 회유의 방법을 써서 계속했다. 1973년 전향공 작반을 만들고, 1975년 사회안전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이 법에 따라 이미 출소한 150여 명의 비전향 장기수에게 보호감호 처분을 내려 다시 옥에 가두었다. 1978년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마친 뒤 유신 독 재의 전향 강요를 거부해 10년을 추가로 보호감호소에 갇혔다. 전향 을 거부하던 손윤규(1976년 강제 급식 과정에서 숨짐, 53세), 최석기 (1974년 타살, 42세), 박융서(타살, 53세), 최한석(타살), 김규호(자살), 이용훈(자살), 황필규(자살), 탁혜섭, 신춘복, 변치수, 송순형, 송기숙, 노동운, 김홍직 등 적어도 79명이 교도소 안에서 숨졌다. 90) 이들은 대부분 북한의 대남공작 차원에서 남으로 온 사람으로 민족해방 민 중해방과 민주주의에 소신을 가졌다. 91) 유신체제 아래의 조직 사건의 인적 청소와 그 뒤도 계속 국가보안 법을 민중운동 탄압에 적용한 결과로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인자가 줄어들고 자본주의를 용인하는 시민사회적 인자를 늘리는 후과를 가 져왔다. 또 미래 지도력 상실은 대중투쟁의 조직적 추진을 어렵게 했 다. 이런 흐름은 1987년 이후 사회운동이 국가보안법의 규제 대상이 되는 위험한 민중운동보다 노동조합 농민회 등 대중조직과 합법적 정당 활동을 우선하는 이른바 양날개론에 치중하게 했다. 그러나 21 90) 김석형 구술, 이향규 녹취 정리, 2001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선인, 613쪽 ; 김정남, 앞의 책, 609쪽 91) 노무현 정권 시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공산주의자도 인간 이라는 기조를 갖고 손윤규 최석기 박융서를 최종길 교수와 함께 의문사로 인 정했다.

3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85 세기에 들어와 합법적이고 대중의 경제적 요구의 수렴에 치중하는 조합주의 의회주의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2) 민중운동의 연대 (1) 연대조직 민중운동의 연대조직은 6 25전쟁 뒤 철저히 무너지고 4 19의 공간 에서 잠시 등장했다. 5 16군사 쿠데타 이후의 연대조직은 전혀 새롭 게 조직해야 하는 과제였다. 국내에서 노동자나 농민의 투쟁을 지원 하고 연대하는 흐름을 형성했지만 아직 통일전선 조직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 저임과 저곡 가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인식하거나 연대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 했다. 재야조직은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는 활동에 그쳤으며, 비합 법 전위조직은 준비 단계에서 탄압을 받아 대중운동과 연결하지 못 했다. 그런 가운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연대조직이 발전했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하고, 이 단체는 1973년 유신 독재를 규탄하 는 성명을 발표했다. 1974년 구속자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11월 18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했다. 1977년 12월 29일 20여 개 단체가 한국인권운동협의회를 발족했다. 1978년 민주주의국민연합을 결성했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을 결성 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했 으며, 카터 방한 반대 시위를 했다. 잇따른 긴급조치의 폭압 속에서도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으로 저항 해왔던 각 부문운동들은 1979년에 들어서면서 연합의 형태를 만들었 으며, 이렇게 고양된 민중의 역량은 부마항쟁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36 586 김영곤 총체적 투쟁의 결과로 10 26사건을 유발했다. 92) 민중운동은 농민 노동 등 부문 내부의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했으 나 부문을 넘은 연대는 거의 없었다. 아직 비공개적이고 비공식적인 연계가 있었을 뿐이다. 민중운동은 민중의 생활과 권익을 위한 움직임인 동시에 반유신 민 주주의 운동의 성격을 겸했다. 기층민중의 경제적 요구와 반독재 운동 이 민주화운동의 저변을 형성했다. 각 부문에서 축적한 민중운동은 YH 사건, 부마항쟁을 일으켜 개발독재가 붕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조직된 연대조직 재야 93) 는 처음에는 민주화운 동을 위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YH 사건 등 민중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개발독재 과정에서 사회와 가족 안에서는 경쟁에서 희 생당한 약자를 불쌍하다, 도와주자 는 생각을 당연시했다. 재야의 민중운동에 대한 지지 지원은 1970년대 말 종교계와 신민당의 YH 사건 개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신민당과 김영삼이 YH 사건이 일어 나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이것은 신민당의 정치적 지위 향 상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야당과 재야의 민주주의 운동이 민중 운동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2) 국제연대 이주민정책 외국으로 노동자를 이주시키면서 국내에서는 혼혈인과 중국인을 배제하는 이중 정책을 썼다.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에는 종속하면서 도 국내외의 이민자들에게는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쇼비니스트적 민 족주의의 정책과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비철학적인 정책의 기조가 92) 소준섭, 긴급조치 9호 시기의 민주화운동 희망세상 2005년 5월호, 21쪽 93) 재야 는 제도권 정치과 민중운동 현장의 중간에 위치해 민주주의와 민중문제 현안을 다루는 집단을 말하며 1970년대를 특징짓는 용어이다.

3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87 만든 결과이다. 유신 독재는 한국적 민족주의 라는 유사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단 일 혈통 을 주장하는 배타적 인종주의 정책을 폈다. 그리고 유신정권 은 국제적으로 약자들에게 제국주의적 배제 정책을 썼다. 이것은 현 재 영호남 지역 갈등이나 국내 조선족 동포 및 탈북인 차별 등과 같 이 종족적 이질화에 의한 타자화 의 특징이다. 이런 모습은 생활 영 역에 들어온 외국인을 배척하는 단일 혈통 을 강조하는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풍토에 기인한다. 다문화 가족을 배제하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1960, 70년대에 베트남 중동 독일 미국에 적극적으로 노동 력을 수출하거나 이민을 보내는 정책을 폈다. 고아와 가정형편이 어 려운 어린이, 혼혈아를 미국 북유럽 등지에 홀트재단을 통해 내보냈 다. 미국 측의 노동력 수요와 한국의 혈통주의 호주제의 관습에 따른 입양 기피 때문이었다. 이렇게 외국에 정착한 한국 이주민은 주로 3D업종에 종사했다. 국내에서 중국 이민자들에게 참정권, 공무원 임용권, 영주권 일체 를 배제하고 2, 3배의 높은 세금을 매겨 화교 94) 들은 절반 정도가 해 외로 다시 이주했다. 이런 모습은 한국 사회가 다른 나라의 피지배 국가이면서도 동시에 제3, 4세계에 대해 아류 제국주의, 국수주의, 소 지배자 노릇을 하는 태도이다 95). 94) 1884년 인천항의 북성동 선린동이 청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체결되면서 화교들 이 몰려들어왔다. 1949년 중국혁명과 한국전쟁 시기에 급격히 늘어났으나 해방 직후부터 이어진 한국 정부의 각종 화교 차별 정책으로 한국 화교는 이민의 길 로 나갔다. 1970년대 유신정권의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 에서 같이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 시행과 화교 학교 학력 불인정해 발생한 교육 문제는 한국 화교들이 미국 대만 일본 캐나다 호주로 이주하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 대 4만여 명이던 화교는 1970년대에 그 절반으로 줄었으며, 1980, 90년대에도 약 6천명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한국을 떠난 한화들은 미국에 1만 5천여 명, 대만에 1만여 명, 일본에 6천여 명이 살며 본적지인 산동 다음으로 한국을 제2의 고향으 로 여기고 있다.(한국중화총상회 홈페이지 )

38 588 김영곤 해외 한국인의 활동과 국내 민중운동 지원 해외에 나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신 동포들은 국내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알리고 항의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더러는 국내에 끌 어와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는 망명했다. 독일을 중심으로 파견된 광산 노동자, 간호사 그리고 유학생 등은 독일 회사의 부당한 국내 송환에 항의해 싸웠고 96), 고국에서 박정희 정권이 영구 집권을 선포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하자 해외에서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다. 독일에서 이영빈 송두율 윤이상 등이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민건)를 결성하고, 1979년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한국대사관 점거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베를린 노동교실(회장 윤운섭),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 본부 (대표 김대천) 등을 결성하고, 원풍모방 동일방직 투쟁을 지켜본 재 독한인여성모임 회원들은 한국여성노동자 지원에 힘을 쏟았다. 이 95)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내자불거( 來 者 不 拒 )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 는 포용책을 펴 많은 외래인을 귀화시키고 우월한 고려 문화의 용광로 속에 녹여 서 문화 단일민족의 구성원으로 만든 것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지혜의 소산이 다.(정수일, 긴 여정을 마치며 한겨레 2005년 5월 10일자) 96) 파독 노동자들은 재독한인노동자연맹(노연, 1975, 이후 노동교실로 바뀜)과 재 독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독일 자본과 한국 대사관 이 야합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에 항의 하였는데, 이는 제2의 동백림사건 으로 불리는 발지움 사건 (1974)으로 비화되어 다수 노동자들이 귀국하지 못했 다. 이들은 또 독일의 민주주의와 국내의 독재를 비교하며 사회정의에 눈을 뜨 게 되면서 국내의 3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공동성명 서 ( )를 발표하고 노동열사 합동추모제 (1989)를 여는 등 국내의 민주 화운동을 지원했다. 박정희 유신 독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빨갱이 라는 누명 을 씌웠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향을 못 본다 고 각오하거나 독 일에 정치적으로 망명했다.(강무의, 1998, 발지움사건과 나 분단을 딪고 (이 한경 선생 회갑기념 논문집), 67쪽) 이들은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회, 1976) 를 조직해 북한 바로알기 운동 등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1989년 독일통일 과정 을 지켜보면서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1990년 범민족대 회 추진과정에서 남북한과 독일 일본 미국 등의 통일운동 단체들을 매개했다. (재독한인노동자연맹 강무의의 증언, , 서울)

3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89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한국 정부에게서 반체제 인사 친북 인사 심 지어 북한 공작원 이란 낙인을 찍히고, 결국 정치망명의 길을 걸었 다. 97) 재일동포들은 유신 독재의 탄압과 맞물려 수많은 간첩단 사건을 일으키는 쪽으로 악용 당했다. 19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재일교포 출신 학생인 서승 서준식 형제를 간 첩사건으로 구속했는데, 고문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씨 형제를 고문하 지 말고 사면하라는 시위를 일본을 중심으로 벌여 한 일간에 외교문 제가 되었다. 1972년 10월유신 쿠데타 당시 해외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은 1973 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조 직한데 이어, 한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재일동포를 규합해 한국민주 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1989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한통련 으로 바뀜, 의장 곽동의)를 결성하기로 했다. 한민통의 결성식을 앞두 고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한민 통은 김대중 구명 운동을 벌였고, 8월 15일 한민통을 결성했다 년 국내에서 민주구국헌장 을 발표한 뒤 한민통의 제의로 유럽 미국 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이 도쿄에 모여 해외한국민주운동대표자회의 를 열고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 (한민련)을 결성해 전세계의 반유 신 운동을 하나로 모았다. 미국의 김순경 김응택 이정식 등은 1974년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날 하우스에서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임창영 목사, L.A.)를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의 현황을 알리는 강연회와 좌담 회를 열고 간행물을 발간하고 약 44,500달러의 지원금을 한국으로 송 97) 당시 유럽동포들은 이제 초로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 번 돈을 모두 조국 민주화 운동에 쏟아 붓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다들 힘든 상태에 있다.( 유럽동포운동이 걸어온 길, 한민족유럽연대 -kr.htm, )

40 590 김영곤 금해 모국의 구속자와 그 가족을 도왔다. 강연과 좌담에는 제임스 시 노트, 패리스 하비, 문동환, 함석헌, 문익환(1918~94) 등이 참가했다. 1977년 북미한국민주화운동연합을 발족했다. 세계민중의 지원 세계의 민중운동과 서유럽 미국 일본 등의 활동가들은 한국의 민 주화운동을 연대 지원하고, 자국 정부의 독재 지원을 비판했다. 지원 의 내용은 독재 비판, 단체와 독재 피해자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재정 지원 등이었다. 이런 지원은 그 나라의 오랜 민중운동의 경험과 양심 그리고 68혁명 이후 제3세계 민중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했다. 미국 독일 등의 민중운동가들이 한국의 민중운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호주의 활동가들이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상호 교류하며 한 국의 민중운동을 지원했다. 98) 호주의 딕 우튼 목사 등이 1960~80년 대에 주로 영등포산업선교회를 통해 한국의 민중운동을 지원했다. 딕 우튼은 나중에 호주 멜버른에 호주 아시아 노동자연대 Australian Asian Workers' Link (AAWL)를 조직해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영등포산 선 동역자인 호주인 스티븐 라벤다(Stephen V. Lavender)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방림방적의 상품 불매운동을 일본 여성단체와 추진하다가 추방당했다.(1978)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을 비판한 일본인 사와 마 사히코( 澤 正 彦 ) 목사도 추방당했다.(1979) 유신 독재가 일본에게서 메이지유신의 국민동원 체제를 모방하고 박정희 김종필 박태준 등이 인적으로 기시 노브스게( 岸 信 介 ), 세지마 류조( 瀨 島 龍 三 ), 고다마 요시오( 兒 玉 擧 大 夫 ) 등에게 지원 받는 것과는 반대로 일본의 민중운동이 한국의 민중운동을 지원했다. 1970년대는 일본 민중운동이 노농 대중운동에서 신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과도 기로 일본의 민중운동가들은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 98) 신준식의 증언( , 서울)

4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91 의 성장에 관심이 깊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1973년 한국 정부의 김 대중 납치 사건을 해명하고 한일관계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일본 민중운동은 한일 경제협력이 한국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일본 환 경 공해를 한국에 수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와타 하루키( 和 田 春 樹 )는 일본에서 한국 민중의 이해를 대변했다. 주간현대 기자 다찌가와 마사끼( 太 刀 川 正 樹 )와 하야가와는 이철 유인 태에게 학생운동을 취재하고 약간의 사례금을 지급한 것이 민청학련 에 일본 좌익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조작 구속당해 징역을 20년씩 받았다. 일본 오사카의 츠네나리 카츠코( 恒 成 和 子 ), 오쿠다 아에코( 奧 田 八 重 子 )는 김지하 민청학련 사건을 지원했다. 1977년 유신 독재는 일본 요미우리신문 지국장의 평양 발언을 문제 삼아 서울지국을 폐 쇄했다. 일본인 목사 쇼지 츠토무( 東 海 林 勤 )는 서승 서준식 형제가 재일동 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자 구명활동을 벌였다. 일본인 안 도 이사무 신부와 독일인 폴 슈나이스(Schneiss) 목사는 유신정권의 민 중운동을 탄압을 세계에 폭로했다. 일본인 아리모토 모토코는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를 지원했다. 일본인 무토 이치요는 전후 반세기 동안 아시아 민중의 저항과 함 께 했다. 그는 일본프레스서비 기자로 베트남전쟁, 한국의 유신 반대 와 광주항쟁, 필리핀의 민중항쟁 등 아시아 각 지역의 민중과 시민의 행동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연대했다.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George Orgle)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설립을 돕고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한 것임을 폭로해 결국 추방당했 다.(1974) 신부 제임스 시노트(James Sinnot) 역시 인혁당 사건을 폭로 하고 동아투위의 해직 언론인과 시위를 같이하다가 추방당했다. 목사 패리스 하비(Paris Harvey)는 민청학련 사건을 지원하다가 추방당했다. 린다 존스와 데이비드 존스 부부는 1972년부터 한국기독학생연맹

42 592 김영곤 (KSCF), 영등포 청주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하고, 귀국한 뒤에는 아시 아인권교회위원회(CCHRA)에서 일했다. 세계 민중운동 기구의 지원이 있었다. 앰네스티 일본지부의 쓰네나 리 가즈코 등은 19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앰네스티 세계 총회에서 윤현 한국지부 대표를 만나 민청학련을 비롯한 민주화 인 사를 도왔다. 이들은 1974년 민청학련 이후 7년간 모금과 자선 바자 회를 통해 600만 엔을 모아 한국의 양심수를 지원했다. 최열은 쓰네 나리가 보낸 환경 관련 책들을 보며 환경문제에 눈을 떴다. 세계기독교협의회(WCC)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지원이 있었다. 일본 의 오에 겐자부로( 大 江 健 三 郞 ) 등 세계 문인들이 김지하의 석방을 요 구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문인들이 1979년 서울에서 연 제4 차 세계시인대회에서 세계문학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를 배포하다가 연행 당했다. 반면 미국의 AFL-CIO는 미국의 해외개발지원금의 도움을 받아 1972년 아시아 아프리카 자유노동기구(AAFLI)를 설립하고 한국노총을 지원해 결과적으로 유신체제의 노동자 탄압을 간접적으로 지원했 다. 99) 미국 노총의 행위는 자국 자본이 저지른 문제를 은폐하고 자국 의 노동조건 저하를 막으려는 정책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한국노총과 고대 노동문제연구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서독 사 회민주당 계열의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Ebert)재단의 한국 주재 대표인 홀체(Holze)는 유신 독재가 들어서고 민중운동 탄압이 강화되 자 한국에서 철수했다. 100)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은 정부의 탄압이 미치자 프랑 스, 독일, 미국, 일본 등에 망명 신청을 하고 그 나라 정부가 이를 받 99) 윤영모,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연대 현장에서 미래를 1997년 5월호 참조 100)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편, 1998 고대 노연30년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212쪽

4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93 아들여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국 민중운동을 지원하는 움직임은 1970년대 초기의 주로 종교적 인 것에서 후기의 민중운동적인 것으로 다양화했다. 한편 이런 지원 이 제국주의가 제3세계의 민중운동을 체제내화 하려는 의도로 돕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세계 민중의 민중적 연대와 정치 경제적 영 향력을 크게 하려는 의도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운동은 미국 등 선진국의 영향력으로 독재를 약화시키려는 희망에 따라 미국이라 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대미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동 시에 민중 지향성이 취약했다. 이는 5 18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토대 로 1980년대에 가서야 극복했다. 101) 한국의 민중운동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 역사, 높은 대중투쟁의 전통 그리고 1970년대 이후 국제 민중운동의 지원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으 며, 이것이 태국 등 다른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자극했다. 김지하의 오 적 과 비어 는 민주화운동의 내용을 민중의 구술 언어로 서술한 것으 로, 아프리카 케냐의 작가 은구기 와 시옹오(1938~ )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어가 아닌 모국어인 기쿠유어로 케냐의 독립 이후 탈식 민지의 탈을 쓴 식민지의 탈을 아프리카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진 구술 문학의 형식을 빌어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 를 지었다. 102) 3) 민중운동의 사상과 이론 독재와 자본의 이데올로기 유신 독재는 개발독재 이래 써온 기존의 불균형성장이론, 비교우위 론, 파이이론의 경제이론과 독재 군사주의에 민족주의를 덧붙였다. 101) 소준섭, 앞의 책, 21쪽 102) 케냐 응구기 와 시옹오 김지하 오적에 큰 감동 경향신문 2005년 5월 25 일자

44 594 김영곤 민족주의를 덧붙인 것은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미국 일본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군사적 사상적 대립만으로는 독재를 합리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종필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외자 기업의 보호를 말하 면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기업 1개가 미군 1개 사단의 한국 주둔과 맞먹는 안보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가 경제적으로 미국 일본 경제에 종속되어 103)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종속되었지만 정권 안보 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었다. 7 4남북공동성명도 대외적으로 민족의 자주와 단결을 말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권력강화의 수단이 되었다. 위와 같은 내용들을 결합해 하나로 표현한 것이 한국적 민족주의 이다. 한국적 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 독재, 대외적으로는 군사 경제 적 종속을 결합한 표현이다. 유신체제가 군사 정치 경제 인적으로 친 미 친일 구조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적 민족주의는 주로 내부 단속을 겨냥한 이데올로기이다. 유신체제는 국내적으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는데, 대미 종속, 외자 의존 정책과 비교할 때 사실 대중을 향 해 독재를 합리화시키는 거짓 민족주의에 불과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한국적 민족주의는 독재의 방편인 동시에 우리 민족 우선주의 로 민중 속에 고착되고 그 결과 민중운동조차 우리 민족 이기주의 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은 착취와 자본의 축적, 부의 독점을 파이이론 등으로 정당화 했다. 먼저 파이를 크게 키운 다음에 나누자, 나중에 보자 라는 논 리였다. 민중을 돌보지 말고 고속성장하자는 논리였다. 개발독재는 1960년대에는 저임을 인내하라며 1970년대는 소비가 미덕인 사회 가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1970년대가 되어 민중의 분배 실현 요구 를 외면하고 탄압했다. 거대 재벌이 되어버린 자본은 파이를 나눌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 103) 곽태영은 이를 친일독재라고 불렀다.( 수유리 묘역에서 짓밟힌 박근혜 화환 한겨레 2005년 4월 20일자)

4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95 에게 효,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써서 무력화하려고 했다. 정권과 대기 업주들은 충효를 유난히 강조하며 노동자의 단결권, 소비자의 권리, 중소기업 등 하위 관련자를 무시했다. 대우그룹의 김우중은 대우그룹 산하의 노동자를 대우가족 이라고 불렀는데 정작 노동자들은 자신들 이 대우가축 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는 말 속에는 기업 안 의 노사는 동일체이며 경영이 잘되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 할 터이니 충성하고 만족하라는 기업별주의의 논리가 숨었다. 삼성의 이건희도 제일제당 노조를 해체하는 과정을 기업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인데 노조는 안 된다 는 말로 합리화했다. 104) 노사 관계에서 민중의 평등과 노동자의 단결을 주장하는 노동자와 주장을 빨갱이, 기업을 도산시키는 도산 세력 이라고 매도했다. 그 래도 저항하는 여성노동자에게는 군사주의를 들이대고 이데올로기적 으로 압제하고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탄압했다. 군사주의가 강해지면 서 군사화된 민족주의가 커지고 여성의 가난이 심해지고 억압적 통 제가 강화되었다. 군사문화는 반여성의 기조를 가졌으며 이는 여성, 여성노동과 대립했다. 사학자 이선근(1905~83)은 신라 통일을 뒷받침한 화랑정신 과 10 월유신의 정신 을 연결했고, 철학자 박종홍(1903~76)은 국민교육헌장 의 저자이며 박정희의 보좌관으로 동양적 사유 와 유일한 참된 것 인 민족의 얼 을 끌어들이고 긍정과 건설 의 논리로 지식인들에게 유신 지지를 호소했다. 헌법학자 한태연 갈봉근 박일경은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법학자 함병춘은 주미대사로서 박동선 스캔들 을 잠재우고 한국적 민주주의 의 정당성을 설명해 유신체제를 옹호 했다. 한국적 민족주의를 선전하려고 1974년에 국민윤리, 국사, 한문, 교 104) 구영식, 납치, 미행, 매수, 유령노조 공포의 무노조전략 말 2000년 9월 호, 103쪽

46 596 김영곤 련 등을 새 학과로 독립시켜 이데올로기 교육을 강화했다. 또 유신 독재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 창출 기관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 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을 설립했다.(1978) 1975년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사회에 민방위대를 결성해 모든 사람 을 준군사적 조직에 편입시켜 사회를 병영으로 만들었다. 군인을 중 심으로 하는 병영국가에서 국적을 신성시해 국적 있는 교육 국적 있는 문학 국적 있는 역사학 을 유도했다. 또 대학에서는 독재를 반대하고 진보적인 교수를 제거하고 그 자 리에 미국 박사들을 대거 고용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해 대 학의 역할을 테크노크라트의 산실로 국한하게 했다. 105) 윤천주(서울 대) 이종우(고려대) 이인기(숙명여대) 총장 등은 유신을 지지하고 앞 장섰다. 남덕우 이승윤 등 서강대 교수 중심의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서강학파를 형성해 유신체제의 경제정책 입안을 뒷받침했다. 해방 민주 민중 내재적 발전 분단 극복 의 이론 민중의 투쟁은 민중 자신의 기본권을 신장시키고 민주적 사고와 행동의 수준을 높였으며, 이것은 사상과 이론 부문에서 현저하게 나 타났다. 민중의 사상 이론 작업은 민중 스스로의 인식 발전에서 비롯 하는 것이지만 1970년대에 해직돼 독재의 탄압과 가난에 시달린 해 직교수 문화예술인 등 지식인들의 노력도 사상 이론의 발전에 큰 역 할을 담당했다. 이런 이론작업은 식민사관을 넘어 한국 사회가 독자 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105)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기는 독재 외세의존 착취가 결합한 이데올로기였다. 그 러나 상호간에 모순이 있었다. 박정희 피살은 상호 모순 속에서 발생한 사건 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안보가 만든 레드 콤플렉스, 스포츠 애 국주의 수출의 종교화, 승자독식 사회, 국가 경쟁력주의 등은 식민적 사회진화 론의 계보에 속해 있다.( 사회진화론에 비춘 한국적 생존경쟁 한겨레 2005년 4월 23일자)

4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597 첫째, 1970년대를 시작하면서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 간 이라고 선언하며, 노동해방 을 주장했다. 그는 민족해방운동 8 15해방 에서 쓰던 해방 을 잠시 잊었던 민중에게 해방 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해방이라는 말은 노동이든 사회든 이념이든 통 제 질곡을 벗어나 자기 것을 자율로 한다는 의미로 1970년대 민중운 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청계피복노조의 농성장에서는 노동해방 이라는 말이 나왔고 106) 1980년대에 해방 은 대중의 과제가 되었다. 둘째, 민주는 1970년대를 일관한 화두였다. 1970년대의 민주는 1960 년대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로 의미가 넓 어졌다. 직장, 노동조합, 가정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을 의미했다. 셋째, 민중의 개념은 저항하는 인민을 의미하며 민주화운동 속에서 정착했다. 민중(minjung)은 한국의 민중운동이 만든 세계적인 개념이 다. 민중은 원래 신채호 한용운 등이 중생 구제를 앞세워 민중불교를 주창하며 제기한 개념이다. 1970년대에 민중 개념이 널리 퍼져 민중 경제론 민중사회학 민중사학 민중문학이 등장했다. 민청학련은 1974년 민중 민족 민주선언 에서 민중 민족 민주 를 이념으로 표방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와 대척점에 서서 유신 독재 타도 활동을 하다가 의문을 죽음을 당 한 장준하(1918~75)는 민중운동을 특히 민족화해를 담당할 민중적 지반 107) 이라고 하며 민중운동을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바탕이 된 다고 이해했다. 진보적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1970년 대 진보교회 사회참여 해방신학과 연결된다. 서남동(1918~84) 안병무 (1922~96) 현영학(1921~2004) 등 신학자들은 민중신학론을 제기했다. 106) 김환기, 2005 그 때 그 이야기-이승철의 이야기 마당 (13), 박정희 정권과 청 계피복노동조합 사람세상 98호(전태일기념사업회), 13쪽 107) 백범사상연구소, 1974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선생 추모 문집, 33쪽

48 598 김영곤 서남동은 1973년 기독교사상 4월호에서 민중신학을 정신적 심령 적 구원보다는 역사적 정치적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 고 해 그리스도 교 민중사와 한국민중사를 신의 선교에 합류시켰다. 안병무는 마르 코의 복음서 를 연구해 성서의 민중적 성격을 찾고, 예수의 복음이 민중을 수용했으며 예수 속에서 민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정창렬은 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 ( 역사와 인간, 두레, 1982) 에서 지배계층의 권위에 복속되어 순종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 를 획득하려고 싸우는 인민이 민중이라는 동태적 개념을 제시했다. 한 완상은 민중과 사회 (1980)에서 민중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 외된 자로 규정하고 민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보았다. 108) 1970년대 민중이라는 개념은 분화와 통합의 과제를 안고 있는 아 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표현이 막히면 서 민중이라는 용어를 더욱 널리 사용했고, 민중 개념이 상징성에 비 해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다. 민중 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서 기층 대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분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분 화가 확산돼 2000년대 들어와서는 각 부문운동이 분과해 상호 배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원인은 1970년대 임노동 농업노동 도시 빈민이 타자를 희생시켜 각자의 이익을 얻는 경제지배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층 대중운동과 시민운동은 자본주의의 존폐 시장경제 의 효용성 을 두고 서로 대립했으나, 다수의 민중이 자본주의 발전의 피해 당사자라는 점에서 새로운 민중 의 개념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포괄, 용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넷째, 1960년대 이래 발전한 내재적 발전, 내포적 발전의 이론을 형성했다. 박현채(1934~1995) 유인호 주종환 등은 개발독재에 대립해 내포적 경제발전의 민족경제론을 주창했다. 내재적 발전의 인식은 108)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교수신문 2002년 7월 9일자

4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년대 국가독점자본주의 논쟁으로 발전했다. 박현채는 1970년대에 개발독재에 대응해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에서 내포형 공업화로 가자 고 주장하며 민주주의, 민중론, 민족경제론 의 사상 개념을 형성 했다. 박현채는 민중적 삶, 중소기업의 중요성, 민족경제 등의 개념을 담은 민족경제론 (1978)을 펴냈고, 그는 김병태와 함께 사용자보다는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해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내용의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 (대중경제연구소편, 범우사, 1971)의 집필에 직 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09) 민족경제론의 구성은 일본 오쓰카 히사오 ( 大 塚 久 雄, 大 塚 史 學 )의 비교경제사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110) 민족경 제론은 이후 경제문제의 왜곡을 예견하고 한국의 지식인 운동가들에 게 민주화와 자주화, 통일의 과제가 지닌 중요성을 제시하고 특히 노 동자 계급과 민중에게 변혁을 위한 무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선진 적이다. 111) 주종환은 한국의 재벌구조가 가지는 문제를 지적하고 토 지공개념을 제기했다. 1970년대 활발했던 실학 연구와 더불어 김용섭, 강만길, 김영호 112) 등은 한국 역사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아 사회의 내재적 발전 과 정을 밝혀 민중사학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재일동포 역사학자 역시 한국사 복원과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 당 한 당사자 혹은 2, 3세인 재일동포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김달 수(1919~97)는 1972~1991년 사이에 일본 속의 조선문화( 日 本 の 中 の 109) 박승옥, DJ 대중경제론 은 박현채 작품 프레시안 2005년 7월 12일자 110) 타키자와 히데키, 2002 한국의 민족경제론 과 일본의 비교경제사학 (제1회 세계한국학대회 기조보고, ) 111) 윤건차, 2003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당대, 63쪽 112) 이에 관한 저서는 다음 것이 있다. 김용섭, 1975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하, 일조각;강만길, 1973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김영 호, 1968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도시상업의 새로운 전개 한국사연구 2, 한 국사연구회

50 600 김영곤 朝 鮮 文 化 ) 전 12권( 講 談 社 )을 집필 간행했다. 박경식(1922~ )은 조 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の 記 錄 ) ( 未 來 社, 1969), 일본제 국주의의 조선지배( 日 本 帝 國 主 義 の 朝 鮮 支 配 ) ( 靑 木 書 店, 1973), 재일 조선인운동사( 在 日 朝 鮮 人 運 動 史 ) ( 三 一 書 房, 1979)를 저술해 일본의 조 선 재침략을 경계했다. 강재언(1926~)은 조선근대사연구( 朝 鮮 近 代 史 硏 究 ) ( 日 本 評 論 社, 1970)에서 갑오농민전쟁의 혁명사를 역사로 복원하고 재일동포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이진희(1929~)는 광개토왕비 탁본 을 분석해 광개토왕비의 연구( 廣 開 土 王 碑 の 硏 究 ) ( 吉 川 弘 文 館, 1972)를 저술해 임나일본부설을 뒤집었다. 강덕상은 관동대지진을 연구해 재일 조선인의 고통스런 삶을 밝혔다. 113) 한국경제가 저개발과 대미채무 증가가 악순환하는 남미형으로 갈 가능성을 두고 제3세계와 종속이론 (염홍철 편저, 한길사, 1980), 제3 세계의 경제발전 : 저개발과 종속 (변형윤 김대환 공편역, 까치, 1980), 제3세계연구 1 2(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등의 종속이론을 소개하 는 책을 발간했다. 사미르 아민(Samir Amin), 프랑크(A. G. Frank), 월러 스틴 등이 전개한 종속이론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대외의존 종속 의 심화와 극심한 빈부격차를 반영해 나타났지만 한국에서는 내재적 발전론과 경합해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다섯째,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후퇴와 베트남 통일, 동서독의 교섭 특 히 7 4공동성명의 충격은 통일문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만길 114) 은 분단시대의 역사, 백낙청은 분단체제 와 백낙청 115) 등의 개념을 제시해 남북을 아우르는 한반도 전체를 인식지평으로 끌어들였다. 여섯째, 문예 이론 부문에서도 큰 발전이 있어 백낙청 염무웅은 민 113) 강덕상 지음(홍진희 역), 1995 조선인의 죽음: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의 진상, 동쪽나라 참조. 114) 강만길, 1978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창작과 비평사 참조 115) 백낙청, 1994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 비평사 참조

5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01 족문학론을 전개했다. 민중의 기본권 회복, 민족통일 실현을 과제로 삼았다. 독재와 자본의 천민성 잔혹성 폭력성에 저항하는 민중문학론 이 나와 민중의 현실을 형상화했다. 한편 조정환은 1970년대의 민족 문학론이 가진 이념적 총체성과 객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민중 성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계급적 시각을 결여해 시민적 헤게모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116) 이런 이론은 서서히 또는 급격히 민중에게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하고 권리, 단결, 저항 의 의미를 알게 했다. 유신체제 아래 민중 운동이 형성한 해방, 민주, 민중, 내재적 발전, 분단 극복 의 개 념은 이후 발전을 계속했다 년대에 나타난 민중운동 영역의 확장 유신 독재 시기에는 산업사회의 변화에 따라 공해 반대 운동, 도시 주민운동, 성 평등 여성운동, 환경농업과 도시 농촌의 협력과 같은 새로운 민중운동 분야가 생겼다. 그러나 장애인, 동성애자, 희귀병 환 자와 같은 소수자의 운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1970년대 운동가들이 이후 계속해 나중에는 운동 분야로 발전한 부분이다. 민 중운동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지표이다. 주민운동 개발독재가 민중의 생활을 파괴한 것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와 그 관념의 파괴이다. 농촌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내세우며 전통적인 단결 과 관용의 개념인 두레, 굿, 서리 등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행정조직, 농협 등의 동원 체제로 흡수했다. 주민운동은 이에 대한 저항으로 농 116) 강만길, 1997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402쪽

52 602 김영곤 촌보다 도시에서 먼저 일어났다. 도시빈민운동에서 출발해 주민 일반 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농촌의 공동체처럼 도시 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려는 협동운동, 주민운동이 일어났다. 서울 난곡의 주민들은 자립적 주민공동체를 지향해 1976년 난곡희 망의료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성남 주민교회의 이해학과 주민들이 만 든 주민신용협동조합(1979)은 고리채 안쓰기와 월세를 전세로 바꾸기 운동을 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74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용 협동조합을 조직했으며 1979년 정부의 설립인가 취소로 다람쥐 로 개칭했다. 농촌에서 관 주도로 새마을문고를 설립한 것과 달리 도시에서는 민중이 도서운동을 전개했다. 부산에서 김형기는 당시 한국의 신용협 동조합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코디(Moses Coady) 신부의 안 티고니쉬 운동(Antigonish Movement)의 철학과 전략 을 읽고 캐나다 동 부 연안의 노바스코샤주의 안티고니쉬 지방에서 전개한 협동조합운 동에서 양서조합을 구상했다. 그의 제안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중 부교회 신자들이 회원 개개인의 출자금으로 양서를 확보해 돌려보고 협동조합을 지향하는 독서클럽을 추진했다. 1978년 4월 부산양서판매 이용협동조합(이사장 이흥록)을 설립했다. 그 뒤 마산, 대구, 울산, 서 울, 수원, 광주 등 여러 도시로 전파돼 대부분 부마항쟁과 5 18항쟁 을 거치면서 해산했고 가장 오래 존속한 서울 양서협동조합도 1982 년 해산했다. 양서조합 회원들은 부마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의 주체로 활동했고, 117) 부림사건(1981)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1982)으로 이어 져 수십 명이 구속당했다. 광주의 녹두서점 은 유신체제 말기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시 국토론을 벌이던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밤 전국에 경찰이 전국에서 117) 차성환,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 1 기억과 전망 2004년 가을호 참조

53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03 많은 민주인사들을 예비 검속하자 청년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격문과 현수막을 제작했다. 광천동 들불야학 에서 활동하던 강학(교사)들과 노동자들도 항쟁 기간에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투사 회보 를 제작해 광주시내에 살포해 민주민중항쟁의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대전의 이규호 등은 한울공동체 를 구성하고 뻐꾸기 둥지 에서 공 동생활했다. 이들은 신 구교회의 신앙공동체를 연구하고 홍성의 풀무 학원, 경기도 양주의 풀무원, 초교파 모임인 떼제공동체와 교류했 다. 118) 1980년쯤 대전에서만이 아니라 서울과 옥천에서도 모임을 가졌 으며, 전두환 정권은 이들은 한울회 금강회 아람회 등으로 엮어 구속 했다. 여성운동 여성 노동운동은 운동의 내용 면에서 노동계급 일반을 위한 계급 문제만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성 문제(gender issue)를 포함하는 것이 당위이다. 후자는 여성운동의 과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아래 여성 노동자는 임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남녀차별이라는 이중 질곡의 희생자였다. 1970년대에 여성은 공장에서 여공이라고 부르는 시다( 下 )였고, 가 정에서는 식모였고, 거리에서는 버스차장이거나 때로는 기지촌 여성 이었다. 공순이라는 말에는 이미 젠더 계급 나이의 차원에서 형성된 강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119) 해태제과에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한 순점순은 우리의 적이 도처에 깔려있음을 알았다. 가장 가슴 아픈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동료 노동자(남자)들인 것 이라며 남성노동자 가 여성노동자를 차별한 행위를 지적했다. 120) 118) 김정남, 2005, 앞의 책, 413쪽 119) 김원, 2005 그녀들의 반역사-여공 1970, 이매진 참조 120) 순점순, 앞의 책, 13쪽

54 604 김영곤 그러나 최저생계비를 보장하지 않고 임금체불 부당해고 구타 폭행 등의 비인간적인 대우가 흔했던 1970년대의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운 동은 여성노동자들은 성희롱 남녀불평등 모성보호와 같은 사항을 상 대적으로 경미한 사항으로 취급했고, 1980년대에 이르도록 여성노동 자조차 이런 여성 특수과제에 의식을 갖고 그것을 요구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121) 당시 교육받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은 여성문제를 심각 하게 느끼고 서양의 여성해방운동에 공감하면서 활동을 전개했지만 자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하지 못한 채 주로 법적 제도적 영역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남녀 불평등 사례를 시 정하고자 노력했다. 여성계는 1972년 4월 61개의 여성단체들이 모여 범여성가족법개정 촉진회 를 결성했다. 이들은 1 호주제도 폐지, 2 친족 범위 결정에 남녀평등, 3 동성동본 불혼 제도폐지, 4 소유가 불분명한 부부재산 의 부부 공유, 5 이혼배우자의 재산분배 청구권, 6 부모의 친권 공 동행사 등을 10개의 요강으로 지적했다. 또 전국에 지부조직을 결성 하면서 활동가 훈련, 문서발간 및 배포, 강연회 그리고 가족법개정안 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전국 유림단체와 보수 지도층은 국회를 상 대로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고 강화된 군사 정권이 이 운동을 대대 적인 탄압해 무산되었다. 여성의 가족법 개정 운동과 노동자의 생존권투쟁 지원 등의 과정 에서 지식층 여성들이 여성문제 연구와 여성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1970년대 말부터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를 설치했다. 생태환경운동의 태동 세계적으로 보면 선진국들에게는 1950, 60년대가 환경오염 피해가 121) 이옥지, 2001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 1권, 한울, 29쪽

55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05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런던 스모그, 뉴욕 스모그처럼 대도시들 이 대기오염을 겪고 공업지역에서도 환경오염 사고로 많은 인명피해 가 있었다. 특히 일본은 미나마타병, 이타이타이병, 요카이, 천식 등 의 사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환경문제로 시끄러웠던 나라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보다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줄 것을 기대 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선진국은 대응은 두 가지였다. 먼저 그들은 여론에 밀려 공해산업 을 후진국에 수출하는 손쉬운 대책을 썼다. 다음으로 공해물질을 줄 이는 적극적인 생태환경 보호대책을 강구했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 름에서 하나뿐인 지구 를 슬로건으로 최초의 지구환경회의인 유엔환 경회의가 열려 유엔환경계획(UNEP)이 탄생했다. 1960, 70년대에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경제개발에만 몰두하던 한국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선진국들의 도움으로 경제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공해산업을 위주로 산업을 도입했다. 이 때 들여온 외국 기 업들은 대부분 공해산업들이었다. 정부는 공해 방지에 들어가는 비용 을 줄여 수출을 늘리는 공해 덤핑 정책을 썼다. 또 산을 마구 허물고 강과 바다를 매립해 택지와 도로를 마련하고 농지를 늘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1960년대 말부터 공해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민중들은 공해를 사회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이 보다 앞서 1968년 발족한 연세대 의대에 공해연구소(초대 소장 권숙 표)가 처음으로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폭로했다. 122) 유신 독재는 환경 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국가적 반역 행위 로 취급하고 환경문제 거론 을 금기시했다. 123) 정부는 공해문제 연구를 마산지역에 공단을 유치 하는 정부 정책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고 탄압했다. 그러나 공해 연구 122) 이 시기에 그린피스(Green Peace), 세계야생기금(World Wildlife Fund:WWF), 지 구의 벗(Friends of the World) 등의 국제 생태환경 단체들을 설립했다. 123) 김정욱, 우리나라 환경문제의 현안과 대책 녹색교육, 2002년 가을 겨울호 참조

56 606 김영곤 는 정부에게 1980년 환경청을 설립하게끔 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도로 개설, 댐 건설, 공단 조성 등 끊임 없는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국민 대다수는 아직 환경의식이 싹트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울산 여천 등 일부 공단에서 주민들이 대기 오염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다고 문제제기 하였다. 1970년대 바닷가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한 중화학공업 단지는 울산 남해 광양 등에 중점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온산지역에 들어선 공단에서 나오 는 오염 물질로 인근 지역 주민들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질이 발 생했다. 전신 신경통, 부스럼과 같은 피부병, 심한 경우에는 수족 마 비, 전신 마비 등이 경남 울산군 온산공단 일대에서 발생했다. 이 공 해병으로 인해 1982년 10월 이 지역 주민들은 이주 대책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정부에 냈다. 1977년 경남 양산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발전을 시작해 전력 부 족이 완화된 반면, 1979년 미국 드리마일 섬 핵발전소의 방사능 가스 유출을 보면서 핵의 안전 문제가 등장했다. 유신 반대 활동을 한 최열은 1975년 6월 긴급조치 9호로 안양교도 소에 수감되었을 때 공해가 모순된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공해로 고 통받는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와 빈민, 어린이들이다. 그렇다면 공해 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또 다른 운동 이라는 인식 을 가졌다. 그는 복역 기간에 250여 권의 책을 읽으며 환경전문가가 되어 124) 1981년 풀려난 뒤부터 반공해 운동을 시작했고, 1982년 공해 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한편 한일협정 이후 특히 1970년 4월 제2차 한 일 각료회담에서 일본측 위원인 야쓰기 矢 次 (야쓰기안)는 일본 간사이( 關 西 ) 경제권과 한국 남해안공업지대를 연결시켜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비롯한 남해안 124) 최열, 온산부터 새만금까지-최열의 환경운동 20년 회상기 신동아 2005년 5월호 참조

57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07 일대와 인천 아산만 일대에 공해산업수출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따라 마산에는 수출자유지역 안에 한국후지 한국고리 등 14개, 마산 시내에 145개 공해 업종이 입주했다. 울산무기화학은 일본화학과 합 작해 폐암 비중격천공 등을 유발하는 6가크롬을 사용하는 제비표 페 인트 공장을 가동했다. 일본의 미노베 료키치( 美 濃 部 亮 吉 ) 도쿄도 지 사가 최악질 기업으로 밝혀진 일본화학이 공해문제를 해결하지 않 고 한국에 중크룸산공장을 세우려는 것은 일본 시민과 한국민에 대 한 도전 이라고 비판했다. 수은을 원료로 하는 머큐롬을 생산하는 일본의 도야마화학이 1973 년 생산을 중단하고 인천 삼화화학과 합작으로 인천에 공장을 세우 기로 했다. 그러자 인천 YWCA는 인천시에 머큐롬공장 건립을 중단 하라 고 요구하고, 일본의 노동자 학생 수백 명이 도야마화학 도쿄 본사 앞에서 공해 수출 반대 시위를 했다. 이와 같은 한 일 양국 민중의 반대로 도야마화학은 머큐롬공장 한국 건설을 중지했다. 125) 부문 운동 사이의 협력 1970년대의 산업화는 자연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파괴를 초래하고, 녹색혁명은 자연의 순환고리를 끊고 농업을 화학비료에 의존하게 하 는 정책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농촌의 전통과 환경이 파괴되고, 농 민 노동자 도시빈민 사이의 격차가 심화되는 가운데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농촌과 도시의 협력, 환경문제와 관련해 도시와 농촌의 협력 문제가 대두했다. 부문운동 사이의 단절을 반대하는 흐름이었다. 1972년 남한강 일대의 대홍수로 농촌 농민이 피폐해졌을 때 원주 지역의 장일순(1928~94) 지학순(1921~93) 등은 외국 구호재단에 긴 급구호를 요청해 복구사업을 마친 뒤 농촌 광산촌 등의 지역개발사 125)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의 성명서, 일본의 공해산업수출을 반대한다 ( ) 참조

58 608 김영곤 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는 방안의 하나로 남한강 일원에서 주민협 동조합운동을 일으켜 신용협동조합 등을 발족했다. 그 뒤에 박재일은 지학순 장일순 등과 함께 갈수록 심해지는 불신과 공해가 만연하는 죽임 의 삶을 협동과 화합, 믿음이 가득 찬 살림 의 삶으로 올바른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루려고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 의 소비자를 연결하는 한살림을 1986년 12월에 조직하고, 서울에 한 살림농산 이라는 쌀가게를 내 8종류의 물품으로 직거래를 시작하고, 경남소비자협동조합을 세웠다. 1975년 일본 애농회( 愛 農 會 )의 고다니 준이치( 小 谷 純 一 )가 한국을 방문해 유기농업을 소개한 것을 계기로 바른 농사에 정진한다 는 취 지 아래 1976년 원경선 등 30여 명이 유기농업을 실천하려고 정농회 (초대 회장 오재길)를 설립했다. 정농회는 가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가 농민의 권리 찾기에 주력하는 것과 다르게 유기농법 보급 활동에 주력했다. 홍성의 풀무농업기술학교(1958년 이찬갑 주옥로 등이 설립)는 일본 애농회와 교류하며 유기농업을 시작하고 신협 생협 어린이집 설립에 참 여했다. 서울YMCA는 농촌에 쌀과 송아지를 빌려주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흐름은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고 도시민의 건강과 생태환경 을 되살리는 입체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민중운동 부문 사이 에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맺음말 6 25전쟁과 5 16군사 쿠데타로 파괴당한 민중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여러 부문을 복원하고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을 선도하는

59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09 역할을 했다. 산업화에 따라 농민의 수가 줄고 노동자와 도시거주자 가 늘어나면서 노동운동 도시주민운동이 민중운동의 중심 영역이 되 었다. 동시에 생태환경운동 주민운동 여성운동은 새로운 영역으로 등 장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은 1979년 유신체제를 붕괴시 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0년대에 저변을 넓힌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성은 1980년 광주를 거치며 사회를 자주 민주 통일로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질적으로 발 전하고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며 민중운동의 전국 조직을 구성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1960년대를 독재 반대, 1970년대를 민주주의와 기초 생활 요구, 1980년대를 사회변혁 요구, 1990년대를 민중운동 조직화 시대, 2000 년대를 민중 자율 요구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1970년대는 민주화를 넘어서는 사회변혁과 친일반미의 문제는 아직 민중운동의 주요 과제 로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두고 질풍노도의 1980년대에 1970년대의 민중운동을 개량적이라고 평가했지만 126), 길게 보면 1970 년대는 민중운동의 발전 과정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1970년대 민중운동은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 첫 째, 노동자 농민 도시주민 여성 등의 대중은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흐름을 만들고 유신 독재를 무너뜨리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 경험 은 그 뒤에도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키고 민중의 권익을 신장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둘째, 민중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로 넓어졌다. 민중운동은 민중의 생활에 필요한 임금, 농산물가격, 주 거, 8시간 노동제, 여성의 평등한 권리 등 기본권 요구를 구체화했다. 셋째, 민중운동간의 연대는 민주회복국민회의(1974), 민주주의국민 126) 이목희, 앞의 책, 85쪽

60 610 김영곤 연합(1978) 결성으로 발전했다. 민주화운동의 전국 조직이 생기고 노 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내부에 가톨릭농민회의 조직처럼 연대하 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되거나 사형 당한 가족들이 활발하게 투쟁한 것도 특징이다. 넷째, 대중운동의 주체와 지원 세력의 혼재, 대중과 중산층의 혼재 했으나 1970년대 말 분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학계와 종교계의 지원 을 받던 노동운동이 종교운동에서 분해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분화는 1980년대에 사회의 민주적 자주적 발전을 구상하는 변혁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의 노농 혼합 조직 이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부정적인 한계도 있었다. 첫째, 이 시기 민중운동은 대중의 높은 참여와 달리 조직의 밀도가 낮았다. 민중의 투쟁으로 유신 독재를 붕괴하도록 했으나 4 19 뒤에 쿠데타가 일어난 것처럼 1970년대 민중운동의 조직력은 1980년 광 주 의 민중학살과 군사 정권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 둘째, 공업을 우선하고 농업을 희생시키는 불균형 발전의 경제정책 에 따라 민중 내부에 노동 농민 빈민 사이에 경제적 조건과 생태환 경 조건에 격차가 발생했다. 그러나 민중운동은 이런 차이를 분명하 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국제 민중운동은 1970년대 전반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한국의 민중 운동을 집중적으로 지원해 민중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갚아야 할 빚을 많이 진 것이다. 반면 한국의 민중운동은 국제 민중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베트남전쟁 반대와 프랑스 68혁명 이후 형성한 세계 의 반권위 운동의 한 축을 구성했다. 사상이론의 측면에서 민주, 민중, 내재적인 민족주의의 의미를 구체화해 민족, 내재적 발전, 분단 극복 등의 개념을 만들고 발 전시켰다.

61 1970년대 민중운동과 민중 지향 611 민중운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주민운동, 여성운동, 생태환경 운동의 태동과 핵문제 제기, 부문 간의 협력으로 도시와 농촌의 협력 시도가 있었다. 이것은 뒤에 제기된 민중운동의 분과화, 단절, 분절을 극복하는 통합적인 사회운동의 맹아 현상이다. 요약컨대 우리 민중운동이 8 15해방 이후 60년 동안 희망과 좌절 을 거듭하는 가운데 1970년대 민중운동의 활발함은, 4 19 이후 성장 했지만 5 16군사 쿠데타로 한풀 꺾인 사회변화 역량이 산업화 이후 성장한 민중운동과 더불어 재기한 성과이다. 이런 힘은 지배세력이 광주 민중 학살과 6 29선언 등으로 반전시키려 했지만 길게 보아 민 중의 해방을 전망하게 하는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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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주 강 현127) 목 차 머리말 : 저항, 혹은 침묵 및 암묵적 동조의 상대적 거리 1) 물리적인 탄압시대이자 본격적인 문화운동의 서막시대 2) 중앙정보부의 힘으로 통제 유지되던 문화예술계의 회색지대 1. 유신체제의 국가파시즘적 문화예술정책 1) 유신체제의 의사민족주의와 민족문화관 2) 유신체제의 총동원 체제적 민족문화관과 새마을운동 3) 문화예술의 법치적 통제시스템 구축과 유신체제의 재생산구조 2. 유신체제 하 민족연희운동 1) 민족의 재발견 과 탈춤의 시대 2) 무형문화 복고주의 정책과 탈춤 운동의 연관관계 3) 마당극 마당굿 마당놀이로의 전환 4) 중앙집중문화에서 지역문화로의 확산 5) 국풍 81의 의미망 : 70년대식의 결산과 방향 전환 3. 유신체제 하 문학예술운동 1) 문학 및 출판분야 2) 미술분야 3) 노래분야 4) 영화분야 맺음말 : 미완의 과제들-유신체제 하 문화예술계의 몇 가지 풍경들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장

64 614 주강현 머리말:저항, 혹은 침묵 및 암묵적 동조의 상대적 거리 1) 물리적인 탄압시대이자 본격적인 문화운동의 서막시대 1970년대 문화예술의 상황과 당대의 운동적 대응을 한마디로 말하 라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입이 있어도 말 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말 을 하면 잡혀가야 하는 군사파시즘적 예술관이 지배하던 시대였기에 말 하는 자체가 운동이 되 던 시대 21세기 벽두의 입장에서 이를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할 수는 있어 도 당대는 분명 강요된 침묵의 세월 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해 방 이후에 최초로 우리 것 에 관한 관심, 즉 자민족 문화에 관한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준, 20세기 들어와 대단히 중요한 의미망을 지니는 민족문화운동이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였다. 문화예술에서 반 유신운동의 문화적 근거 틀은 문학이나 민족문화분야에서 마련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운동의 사전적 정의부터 해두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문화운동의 범주 문제에 관해서는 1980년대 초반에 정리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문화의 범주에 예술 말고도 언론 출판 교육 종교 같은 분야들이 당연 히 포함되어야 한다. 예술운동과 마찬가지로 언론운동 출판운동 교육운 동 종교운동 등은 모두 문화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운동이라 함은 주로 문학예술계의 움직임에 국한해 서 설명되는 실정이다. 그것은 문화의 개념 자체에서 비롯된 현상만은 아 닌 것 같다. 문학이나 예술 이외의 다른 부분과 비교했을 때, 그 실천경험 과 자기 역량에서 비롯되는 운동의 위상차 때문에 문화운동을 주로 주창 했던 문학 예술패들이 언론 출판 교육 종교 부분들을 포괄할 수 없었던 사정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1).

6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15 이 같은 관점은 1970년대 반유신문화운동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 세분화된 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1970년대 에는 문학 및 예술운동이 문화운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운동사적으로 볼 때 1970년대는 그 첫해인 1970년의 극적인 두 사건 에 의해 개막되었다. 김지하의 오적 사건과 전태일 분신 사건이 그것 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 고, 70년대 문화예술운동의 험로를 예견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 자는 4 19~6 3 이래 축적되어 온 민중 민족의식의 발로로서 지배체 제의 심장부를 급습, 민중문학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등 사회의 전 분 야에 걸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첫 사례였다. 박정희 시대의 지배력은 공고한 듯 보였으나 일개 시인의 시가 던 지는 화살에도 파열구가 열릴 정도로 공고한 것이 못되었다. 원시적 야만적 탄압으로 대응했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 정권의 자신감 결여 를 의미하는 대목이기도 하였으며, 문화예술 분야의 반유신운동이 장 차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였다. 시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황석영의 객지 같은 소설이 등장함으로써 단 단한 서사성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은 지식인운동, 종교운동 등이 노동운동과 연대 하는 극적 접점을 제공함으로써 1970년대 민중민족운동의 방향을 크 게 결정짓는 역할을 했으니, 문화 예술인들에게 미친 파급 또한 컸 다. 1970년대 후반부터 문화예술인들이 이른바 현장으로 들어가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니, 때로는 인텔리적 강박증이나 조급성으로 일을 그르친 적도 없지 않았으나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하는 문화 예술 인들의 열정은 자신을 버리고 현장으로 떠나게끔 만들었다. 작가 예술인들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시대를 예감했다. 한 노동자의 1) 정이담, 1985 문화운동시론 문화운동론, 공동체, 14~24쪽

66 616 주강현 죽음을 바라보면서 작가 예술인들은 탁상물림만의 지식인적 정서가 갖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에서 2년 여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태는 더욱 급작스럽게 휘몰아쳐갔다. 민란에 가 까운 광주단지의 민중항쟁, 곳곳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노동투쟁 의 격화, 학원 민주화 투쟁(소위 교련 반대 투쟁)의 확산, 종교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결집 등 걷잡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1971년 선거 에서의 사실상의 참패 등에 불안을 느낀 지배체제는 위수령, 비상사 태 선포에 이어 1972년 드디어 총체적 파쇼체제인 유신체제를 출범 시킨다. 유신 선포로 인하여 잠시 숨죽인 듯 보였던 민중민족운동은 대학가에서 터져 나오는 저항의 목소리로 다시금 뜨겁게 일어섰다. 1974년에 이르면 민청학련 사건, 언론인들의 노조 결성 및 자유언론 운동 등으로 다시 폭발적으로 솟아오른다. 긴급조치에 연속으로 맞물 리면서 투옥을 반복하던 당 시대적 저항의 치열성을 보여주었다. 작가 예술인들은 사회과학자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예감 하고 시대에 저항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네들은 역시나 작품으로 말 하기 시작하였다. 선험적으로, 이른바 치고 나오기 도 하고, 매우 늦 게야, 그러나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면서 다가올 시대를 예감하는 전 혀 다른 방식으로 당대를 알리기도 한다. 때로는 분석틀에 매몰되는 사회과학자의 이론 틀에서 운동의 낭만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대 운동은 문화운동뿐 아니라 모든 부문이 제한성 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과학 일변도의 소아병과 편견은 낭만성 못지 않은 해독이 되기도 하였다. 김지하의 오적 이 반유신운동의 개막을 알리는 전주곡 같은 것이 었다면 기층민중들의 고난과 투쟁에 관한 대서사시는 황석영의 객 지 같은 작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은 70년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기나긴 노동의 아 픔들이 한 시대를 누를 만큼 누르던 시절에 세상에 나왔다. 70년대의

6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17 유신 시대는 문학의 시대 였으며, 또한 활자가 무기가 되어 세상을 전복시키는 만큼 동시에 출판의 시대 가 열리는 전야제 이기도 하였 다. 1980년대의 무수한 출판운동의 밑거름은 70년대 유신 치하에서 성숙되어 갔다. 1970년대의 공간에서 비롯된 문학 출판운동의 성과와 기반 없이 1980년대의 공간은 창조되기 어려웠으리라. 1970년대 유신체제는 역설적으로 민족연희 운동의 발전에 교두보 를 놓는 시대였으니, 이는 이전의 문화예술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초 월하되 전통의 복합적 총체적 예술양식에 부합되는 민족문화에 기반 을 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탈춤이 추어졌으며 그 탈춤은 창 작 탈춤으로 전환되고 마당극, 마당굿으로 번져갔다. 광대들은 노동 현장으로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교회에서, 농촌에서, 공장과 야학에서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공연을 했다. 광대들과 관중들이 모인 주변에는 으레 형사들과 전투경찰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한국식 공연시위 문 화 의 한 상징을 웅변해 주었다. 그렇게 70년대의 공간을 수놓던 수 많은 연희들 그리고 문화운동의 중심에는 그네들 광대 들이 있었다. 그래서 70년대는 문화예술사적으로 황석영의 장길산 이 암시하는 바, 광대들의 시대 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민족문화운동은 어떤 역사적 위상을 지니는가. 채광석은 민족문화운동은 민족운동의 통합적 부분이고 그 총체적 결과이며, 민족운동은 민족문화의 모태이다 라고 하면서, 민중의 역사적 주체 로서의 삶과 자유와 해방을 향한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의 모든 싸움터, 모든 과정에서 민중문화는 그 운동의 통합적 부분으로 발현, 전개되었고 그 운동의 총체적 표출이었다 고,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 면 조금은 거칠게, 그러나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2) 2) 정이담, 앞의 책, 35쪽

68 618 주강현 2) 중앙정보부의 힘으로 통제 유지되던 문화예술계의 회색지대 그렇지만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듯이 당대의 유신체제 내의 문화예 술에 관하여 일정한 반성도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수가 유신체제 의 문화 정책에 대하여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만 하였는가. 이 문제는 운동사 서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운동의 담 당주체들이 벌인 운동의 양상과 지향점, 과정과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대 문화예술의 문화적 헤게모니의 재평가와 파쇼적 체제에 서 양성 배양된 신문화권력이 유신 이후에, 심지어 오늘에까지 이어 지는 뚜렷한 계승 현상까지도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견지 에서 볼 때 1970년대를 저항의 시대 로만 서술하고 싶지만 실상은 불충분 하였다는 고백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백은 당대 문 화예술운동의 투쟁의 강렬함을 부정함이 아니라, 그 투쟁의 강렬함을 갉아먹는 또 다른 기득권적 양태가 문화예술계에 보다 강력하였음 을 시사한다. 수많은 언론인들이 쫓겨 나간 자리를 정권의 나팔수들이 차지하였 고, 문화예술인들은 문예진흥기금을 비롯하여 정권의 문화공보부에서 나누어주는 부스러기 돈을 받아가면서 침묵을 전가의 보도로 휘둘렀 다. 저항이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저항의 힘을 뛰어넘는 일상적 침묵,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민중에 대한 배반의 시절이기도 하였음을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채광석은 다음과 같이 70 년대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축출 투옥 판금 폐간 등 물리적 억압에 의해 운동 당사자들은 운동기반으로부터의 부단한 격리 그리고 그 기반의 파괴를 겪어야 했다. 제도교육 매스미디어 상업주의적 소비문화 등을 통한 대중조작에 의해 일반 민중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일방적으로 길들여져 민중민족운 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 사회에서는 갖가지 형

6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19 태의 분산 이산이 행해졌다. 이들 분산 이산의 본질적 형태는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참 인간으로서의 존재양식인 역사적 사회적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분단되어 허위적 비인간적 존재양식인 객체로서의 인간, 물화된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회색지 대 를 둘러싼 강압과 동의에 관한 논쟁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다수 가 유신정권의 대중문화에 노출되었고 노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 다고 하더라도 혹독한 철권통치를 감내하기 힘들어 하고 그에 저항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왜곡된 청년문화를 즐기면서도 그 왜곡을 또 하나의 저항으로 바꿔낼 수밖에 없는 환치 의 작업을 끊 임없이 해내고 있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선진 적 지식인이 아니라도 이른바 동아일보 사태를 비롯한 너무나도 유 치하고 자명한 물리적 원시적 탄압에 대처하면서 시대를 예감하였다. 특히 감수성이 영민한 문화예술인들의 경우 유신체제는 시대를 창 작 하는 거대한 감옥으로 다가왔다. 조희연은 한국현대사를 억압과 저항이라는 틀로만 파악해온 기존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논리가 독재에 협력하거 나 식민지배를 지지한 사람들을 정당화시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데 반대하는 논지를 전개한 바 있다. 박정희 체제는 안정된 동의가 아니 라 겨우 권력을 유지해나갈 정도였음을 주목하였다. 3) 일례를 든다면, 유신 시대의 전통문화 분야의 세력들은 양대축으로 확연하게 갈려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권력축은 해방 이전부터 식민권력에 의지해온 축으로서 여전히 각종 제도적 유착을 통하여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던 반면에, 탈춤 등으로 새롭게 무장한 신진 세력들, 대부분 청년 학도들이거나 갓 졸업한 연 배들로서 자신들의 구호와 선명성, 대담한 철학에 비하여 연소하였 3) 조희연,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 역사비평 2004년 여름호, 135쪽

70 620 주강현 다. 전통문화에서의 기득권적 권력은 이러한 틈새를 이용하여 가능하 였다. 1970년대의 각종 반공 궐기대회나 유신 지지 대회에 고명하신 국악계 민속계의 원로들이 줄지어 서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그네 들의 문화권력이 어떠한 대가로 주어졌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 리는 식민청산 은 논하면서도 이러한 유신 문화예술인 들에 관한 올 바른 정리를 지금껏 해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 온갖 회색이론 들 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여하튼 이 후에 당대의 유신 시대의 청년들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변화된 판수에서 새로운 주역으로 문화예술 분야를 이끌게 된다. 유신 시대의 일반 문화예술 분야의 헤게모니는 이른바 순수 참여 논쟁에서 보여지듯 순수파의 득세로 특징지어졌다. 음악 사진 건축 미술 무용 등 제반 예술 분야는 어차피 일부 예술가를 제외하고는 민중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그 순수성,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 상의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두기를 반복하는 순수란 이름의 반리얼 리즘, 혹은 비리얼리즘적인 조건에 노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문학 분 야는 조금 달랐다. 1970년대 벽두를 깨고 나온 김지하의 오적 이나 황석영의 객지 그리고 70년대 말을 풍미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 아 올린 작은 공 등은 문학 분야가 당대 문학예술운동의 전위 이자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출판 분야의 진출은 창작과 비평 을 비롯하여 대단한 수 위를 노정하고 있었으니, 유신체제가 양산해낸 해직 교수를 비롯한 무수한 잠재적 필자군을 등에 업고 당대의 운동을 선도하는 힘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탈춤 운동 등의 연희패의 대두는 말할 것도 없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볼 때, 반유신운동에 있어 각 분야의 간극이 눈에 뜨인다. 동시에 유신체제가 만들어낸 풍부한 자금의 잉여를 그 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누리는 방식까지 포함한 일정한 회색지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 회색지대란 것도 문화적 헤게모니를 쥘 정도의

7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21 것은 못되었다. 가령 앞에서 예로 들은 1970년대를 풍미한 김지하 황석영 조세희 등의 문인들이 차지하던 대중적 열광 에 가까운 찬사 와 지지, 옹호 등을 고려한다면 독일 파시즘 시대의 중산층의 침묵 따위나 일상적 침묵 따위의 원론을 수입하여 유신체제를 논하는 방 식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권두에서 이 문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음은 작금의 박정희 시대 재평가와 맞물려 문화예술계 일각에 서 제기되는 유신시기 문화예술 진흥기 등 문화예술의 발전론적 도 식에 관한 엄정한 비판도 의도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우리가 너무 자주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중앙 정보부의 존재이다. 문화예술인들에게 이른바 중앙정보부는 남산학 교 였으니 무단 체포와 감금, 고문과 회유가 난무하였으며, 역으로 문 화예술인들에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를 알려주는 민주주의학 교이기도 하였다.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 어느 곳에나 존재하였고 아 무 때나 출몰하였으니 반유신운동의 대척점에 그네들이 존재하고 있 었음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정보부의 탄압과 감시를 통 해서만 유신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음은 역설적으로 유신정권이 국민 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즉 이른바 회색지대는 분 명히 존재하였으나 그 회색지대의 창출과 유지에는 막대한 정보비가 소요되었으며, 중앙정보부식의 정보 경찰국가적 통제 없이는 불가하 였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본고에서는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으나 통일문화 형성을 둘러싼 간고한 투쟁도 남한 및 해외에서 벌어졌음을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가령 동백림 사건 으로 촉발된 문화예술계를 둘 러싼 논쟁, 그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음악인 윤이상과 미술인 이응로 등에 관한 재평가도 반유신운동의 지평에서 가능할 것이다. 통일혁명 당 사건으로 귀결된 잡지 청맥 으로 인한 파문들, 그리고 청맥 에 기고한 필자들이 이후에 문화예술계에서 한 일정한 역할 등 남북관

72 622 주강현 계에서 빚어졌던 통일문화 형성의 일 과정들도 70년대 반유신 문화 예술운동사에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1. 유신체제의 국가파시즘적 문화예술 정책 1) 유신체제의 의사민족주의와 민족문화관 유신체제는 박정희 시대의 백미 이다. 왜 백미냐 하면, 1972년 자 신에 의한 유신헌법 선포로부터 1979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정권을 보위하고자 했건만 스스로 제물이 되어 사라져버린 세계사적 시간 이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유신 시대의 파쇼적 통치는 성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엄청난 저항을 불러왔 으며, 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저항의 강도 역시 강해졌다. 유신 통 치란 중앙정보부의 직접적 탄압 없이는 존립 자체가 힘겨웠다. 왜냐 하면 범국민적인 유신 반대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실 의사민족주의( 疑 似 民 族 主 義 )와 유신 및 일본식 문화 정책의 연관성은 폭압적 정책에 가려져 그동안 덜 주목받아 왔다. 박정희는 의사민족주의, 즉 민족을 내세워야만 살 수 있는 태생적 약점을 지니 고 있으되 철저히 군국주의가 내면화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배 운 법에 따라 명칭만이라도 메이지유신( 明 治 維 新 )을 연상하게 하는 10월유신( 維 新 ) 을 선포하였으며 새마을식 집단동원주의를 작동시켰 다. 10월유신 과 메이지유신 은 시공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문화사 적으로 한 궤를 이룬다. 박정희가 10월유신 을 일본의 메이지유신 에서 그 명칭 철학 방식 제도 등을 모두 빌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인 데 왜 양자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을까. 총통제 로서의 1 인 파쇼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대만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제도를

7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23 연구하였음은 분명하나 박정희의 뇌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것 은 유신 의 원조들에 관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가 철학자 박종홍 을 불러들여 1968년에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한 것도 유신체제의 전야 제 같은 행위였다. 한반도를 침략한 원흉의 뿌리가 바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다. 그 러한 역사적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박정희가 내놓고 유신 이란 명칭의 폭압 체제를 선포한 것은 그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행 위였다. 메이지유신에서 사쓰마( 薩 摩 ), 죠슈( 長 州 ), 히젠( 肥 前 ), 도사( 佐 士 ) 등 네 지역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논 의의 핵심이자 메이지유신의 핵심 중의 핵심은 이른바 삿쵸동맹( 薩 長 東 盟 )이라는 사쓰마와 죠슈다. 이네들은 모두 한반도 정벌을 부추긴 인물들인데, 정작 박정희가 가장 존경한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4) 가령 죠슈한 군부의 맹주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 縣 有 朋 )를 주목하자. 5)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大 正 ) 시대에 걸쳐 육군 출신들 중 야마가타 의 위엄과 덕망을 견줄 자가 없는 것으로 비쳐졌으며 이른바 죠수벌 ( 長 州 閥 )을 형성했다. 죠슈 출신은 이상할 정도로 군인이 많다. 야마 가타는 1896년 5월 크레믈린궁에서 열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여하여 러시아에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고자 제의 한 육군 군벌의 수령으로 내각 총리대신, 또한 러일전쟁 당시에 전군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지휘하였으며, 이후에 원로로서 정계를 막후 조 정하였다. 1890년 수상을 할 당시에 외교정략론 이란 의견서에서 조 선은 일본의 이익선( 利 益 線 )이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육 군은 죠슈가 장악하고, 해군은 사쓰마가 장악하는 역사가 열리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던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야마가타였 다. 10월유신의 뿌리는 이 같은 사상적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는 4) 주강현, 2005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웅진, 참조 5) 주강현, 위의 책, 241~249쪽

74 624 주강현 셈이니 박정희가 친일이냐 아니냐 식의 논쟁은 그 얼마나 허무한 것 일까. 이쯤 설명하고 박정희의 민족문화관으로 들어간다. 1950년대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민족문화 분야에 관하여 법 적 제도적 장치를 비로소 마련한 이는 역설적으로 박정희 정권이었다. 이승만의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기 그지없어 자칭 애국자 란 칭호에 걸맞지 않게 미국 문화 일변도의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달랐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다. 6) 이 법은 문화재보호에 관한 기본법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을 발휘한다. 문 화재위원회가 설치되고 유형문화의 국보 및 보물 지정, 무형문화재 지정 등이 법적 근거를 부여받는다. 제2조 2항에, 연극 음악 무용 공 예 기술 기타의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 을 무형문화재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왜 박정 희 시대의 개막 과 더불어 이 법이 만들어졌을까. 박정희는 몇 가지 측면에서 의사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7) 대 일본제국 관동군 장교 출신으로서 박정희는 외견상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박정희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민족문화 정책의 기본 모 범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을 유심 히 들여다보면 토씨만 바꾸었을 뿐 일본법을 송두리째 번역해서 들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법 제도를 여과장치도 없이 졸속으로 들여 와 우리의 법으로 둔갑시켜 문화재보호법으로 선포한다. 유신 시대에 박정희의 친일잔재 미청산에 관해서는 늘 논란이 존재했지만 문화재 보호법이 일제 직수입품이라는 점에 관한 비판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문화예술계의 비판 능력이 그 정도였을 것이다. 문화재법이 발효되자마자 1964년에 종묘제례악 양주별산대(1964) 남 6) 문화재보호법( , 법률 제961호) 7) 주강현, 1999 무형문화 정책, 왜 개혁되어야 하는가 (전통문화 정책포럼 제2차 리포트)

7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25 사당놀이 갓일 판소리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가 먼저 지정되고, 이어서 1966년에 강강술래 은산별신제 진주삼천포농악 1967년에 강릉단오제 한산모시 북청사자 거문고산조 봉산 탈춤 동래야유 등이 지정된다. 여 기서 주목되는 것은 박정희 시대에 지정된 종목들 안에 탈춤 같은 놀 이 종목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이른바 민속극 부흥 운동과 어떤 연맥관계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2) 유신체제의 총동원 체제적 민족문화관과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군국주의시대 제국의 꿈 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적어도 그의 시대 문화 정책에서는 분명히 그러하였다. 군사 쿠데타 이후에 재건국민운동 을 추진하면서 이미 1970년대의 병영국가,이 른바 유신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통치 기반을 이미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8) 이는 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직결된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1970년대 전국의 농촌은 물론이고 도회지까지 새마을노래가 메아 리쳤고 증산 수출 건설 을 내걸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라며 깃 발 들고 나아갔다. 한편에서는 방송에서 연일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 를 틀어주었다. 국적 불명의, 좀더 정확하게 말한 다면 일제 말기의 강제동원풍을 연상케 하는 이들 노래들은 당대의 문화적 정서를 충분히 설명해주고도 남는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성장제일주의의 공업화 정책은 농업과 농민의 희생 위에서 8) 허은,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의 성격 역사문제연구 11집, 45쪽

76 626 주강현 가능하였으며, 남부여대하여 이농하는 농민들로 농촌은 공동화현상이 극심해졌다. 1971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문제의 본질을 외면 한 채 농민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오로지 농민의 근면 자조 협동정 신을 강요하였다. 황석영의 소설 객지 에서처럼 농촌을 떠나 그야말 로 객지로 떠돌아야 했으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 내 에서처럼 광주대단지로 내동댕이쳐진 채로 민란 에 휩싸이지 않 으면 안 되었고, 그도 아니면 농촌의 딸들은 이른바 공순이 아니면 도심의 호스티스로 떠돌며 별들의 고향 을 그리워해야 했다. 이같이 농촌이 와해되어가는 시점에 새마을운동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하 여 1970년대는 새마을 자( 字 )가 붙지 않는 행사가 없을 지경에 이르 렀으며 이 70년대식 새마을운동은 전시 행정의 표본으로 당대를 풍 미하였다. 이들 집단주의적 전시 행정이 당대 문화 및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자. 새마을노래에 초가집도 없애고 가 등장한다. 초가집은 두말할 것 없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이래로 최고의 장기지속적인 지붕 문화를 지탱해왔다. 초가집이라는 전통을 천하에 없는 낡은 문화로 규정하고 꺼풀을 훌러덩 벗겨 내리는 순간,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여 름에 덮고 겨울에 추운 슬레이트로 바꾸는 순간, 한국 건축사에서 지 붕의 문화적 정체성은 일거에 사라졌다. 어느 건축가도 이러한 폭압 에 저항하지 않았다. 당대 최고로 칭송받는 건축가가 남양동 대공분 실을 설계하는 시대, 서울의 산동네마다 와우아파트 가 들어서던 시 대에 빚어졌던 일이다. 혹자는 슬레이트업자들의 이권, 혹은 수출길 이 막힌 시멘트 사용처를 찾는 대안으로 새마을운동이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로 관권과 자본의 힘이 전통을 갈아엎었다. 지붕이 일거에 벗겨지자 지붕의 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졌다. 이후에 한국 농 촌의 지붕은 갖가지 형태의 지붕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지붕의 정 체성, 즉 건축에서의 문화적 정체성이 일거에 사라지는 혹독한 후과

7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27 를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그 후과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가 지붕을 대체하되 자생적으로 천천히 해나갔더라면 초가집의 정체성은 필경 다른 방식으로 전환을 거듭하면서 전통의 정체성을 이어갔을 터인데, 유신체제의 문화관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새마을운동의 관제성은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전개된 조선총독부 주도의 관 제농민운동이었던 조선농촌진흥운동과 새마을운동은 하나의 맥으로 통한다. 9) 이들 운동은 각기 상이한 시대배경 속에서 추진된 운동이 므로 주체와 방법, 성격과 의미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 가주도의 관제 국민동원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닮은꼴이다. 1930년대 군국주의적 노동력 동원책과 1970년대의 방식은 본질에서 다를 것이 없다. 진흥운동 이래의 모든 관제 국민운동은 그것을 추진 한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대체로 동일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국민총동원 운동 이었으며, 또 개혁 주체에 기여하기는커녕 도리어 시민사회의 성장을 저해한 일종의 대항시민운동이었다. 10) 농촌 새마 을운동은 비자립적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농민들의 주체적 참 여가 배제된 운동이었다. 11)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을 최고정점으로 해서 모든 정 치 관료조직을 동원하여 전국 농촌의 말단 리동까지 조직하여 수행한 모든 사업을 상징하는 대명사다. 새마을운동은 10월유신의 실천도량, 혹은 10월유신은 곧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이 10월유신이다 라는 박정희 자신의 표현에서 보듯이 12), 10월유신의 통치방식인 대중 동원 9) 農 村 振 興 運 動 の 全 貌, 朝 鮮 總 督 府, ) 지수걸, 1999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조선농촌진흥운동 역사비평, 17쪽 11) 한도현, 1989 국가권력의 농민통제와 동원 정책-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한 국농업 농민문제연구 2, 연구사, 113~150쪽 12) 연두 기자회견( )(문화공보부 편, 1973 새마을운동, 235쪽)

78 628 주강현 에 기초한 강압적 통치방식이 농촌 지역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드는 과 정이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수행된 모든 사업은 매 우 권위주의적, 급진적, 대중 동원적, 관료주의적,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새마을운동은 옛것을 무조건 낡은 것, 또는 헌 것으로 치고 버리는 속성이 강하였다. 마을의 종교의례나 민속놀이 등을 없앤 것이 대표적이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이와 같은 문화혁 명 은 지역사회가 축적해온 공동체적 전통, 지역 아이덴티티라는 또 다 른 사회적 자산을 파괴하는데 기여하였다. 13) 문화재관리국에서 민족문 화를 보호해야 한다고 공문을 내려 보내는 동안, 보다 강력한 힘을 지 닌 내무부에서는 강력하게 농촌의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있었으니, 유신 체제의 민족문화관은 이렇듯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한편으로 유신체제 하의 동원 체제적 문화예술관의 대표격으로 주 목되는 것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이하 민 경)였다. 민 경의 출발은 처음에는 소박하게 1958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 간 정부수립 10주년 행사로 장충단과 육군회관에서 시작되었다. 방송국에서 해설 을 하였으며, 그 전통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덕수궁과 경복궁, 창경원 등 비교적 좁은 장소에서 열렸으니, 애초부터 민 경이 거대 규모는 아니었다. 사라진 민속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던 많은 이들이 덕수궁 마당에 몰려들었고, 거기서 예술적 감흥을 받는 이들도 많았 다. 1960년대 이래의 탈춤 부흥 운동의 일꾼들도 이 마당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민 경은 7회 대회인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 8회 는 부산 공설운동장 등 넓은 장소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1967년부 터는 지방 대도시를 순회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968년 공설운동장 에서 300여 명의 안동 고교생이 출연한 차전놀이가 대통령상을 받으 13) 박진도 한도현, 1999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 역사비평, 72쪽

7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29 면서 인원 동원의 대형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이후 국 가문화재가 된 민속예술 기능 보유자들이 다수 이 대회를 통하여 발 굴될 만큼 민속예술을 이해하는 계층이 출연하였으나, 제9회 대회에 이르면 단기 연습을 받은 학생이 전체 출연자의 80%를 차지할 정도 로 동원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로 접어들면 민 경은 거대 매스게임화로 치닫게 된다. 대형화 바람은 군사문화와 맞물린다. 14) 1960년대 이래의 산업화 전 략은 밀어붙이기식 으로 근대화를 완성하겠다는 방식이 통용되는 시 대였다. 문화적으로는 군사문화 발상 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현 장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민속전승 정책이 아니라, 매스게임이 펼쳐 질만한 큼직한 운동장에서 보여줄뿐더러, 경쟁을 붙여 민중들의 축제 인 민속놀이에 대하여 대통령상을 위시한 다양한 상과 상금을 수여 한다는 경연방식 자체는 다분히 권위주의적 다중동원 문화 정책 에 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았다. 보무도 당당하게 정연하게 입장하여 줄 지어 서는 개회식, 우승팀에게 상을 내리는 폐막식을 거행하는 전국 체전과 형식면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오랫동안 이 분야의 심사위 원을 겸해온 측에서도 자성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15) 민 경의 순기능이 없던 것은 아니다. 민속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갈 때,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주민 화합의 마당을 연출한 것 등 은 순기능에 속한다. 그러나 차츰 경연화에 따른 상타기 경쟁이 시작 되면서 애초의 순박성과 화합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치열한 경쟁을 위한 경쟁 이 연출되었다. 갖가지 낭비와 외형적 화려함, 고증을 무시 한 창작과 인원 동원, 주민 간의 갈등 심화, 잘못 연출된 작품이 고 14) 주강현, 199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개혁과 전망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선방안 자료집, 한국문화 정책개발원 15) 신찬균, 199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회고와 개선점 전국민속예술경연대 회 개선방안 자료집, 한국문화 정책개발원

80 630 주강현 스란히 문화재로 둔갑하여 민속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등 병폐가 심화되었다. 민 경이 안고 있는 문화적 황량함이란 40여 년 묵은 역 사적 뿌리에서 연원되고 있음을 새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6) 이러한 시대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탈춤 운동이 전개되고 시대적 의식을 연희에 담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반유신운동이란 관점에서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동원 체제적 관제적 민속 부흥에 대항하면서 민속은 새롭게 정의되고 발현되고 있었다. 3) 문화예술의 법치적 통제시스템 구축과 유신체제의 재생산구조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된다. 17) 이듬해인 73년 3월 30일 한 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같은 해 문공부는 문예진 흥 제1차 5개년 계획이 1974년부터 시작되어 1978년까지 이를 완수 하게 된다고 발표한다. 3대 목표를 정하였으니, 1 올바른 민족사관을 확립하고, 2 예술의 생활화 대중화로 국민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 고, 3 문화예술의 국제교류를 적극화함으로서 문화 한국의 국위를 선양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막대한 2백 76억 원이 투입 되었으 니, 경제적 여건이 빈약한 문화예술계에 자본이 퍼부어짐으로써 일정 한 문화 예술진흥을 할 수 있는 기반도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장악한 자본에 의하여 문화예술의 방향이 조정될 수 있는 여지를 열 어놓았다. 실제로 1970년대 유신 치하에서의 문예진흥기금은 올바른 민주시민 가치관을 가진 영역에는 쓰이지 않았으며, 한반도에서 어떻 게 하면 살아남고 출세할 수 있는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문화예 술인들에게 집중적 선택적 편애적으로 쓰였다. 문예진흥기금은 준조세로서 강제 로 설치된 것이 다름없었으니, 16) 주강현, 세기 우리문화, 한겨레신문사, 340~346쪽 17) 문화예술진흥법( 법률 제2337호)

8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31 즉 경연장 고궁 능 박물관 미술관 기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적 및 사적지를 관람하거나 이용하는 자에 대하여 모금할 수 있다 고 규 정하였다. 제1조의 목적에, 이 법은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 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의 중흥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고 하였다. 제3조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예술의 진흥 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고, 국민의 문화예술활동을 권장하며 이를 적 극 보호 육성해야 한다 고 하였으며, 제4조에 이르러,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문화공보부장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요청이 있 을 때는 모든 기관이나 단체는 이에 협조하여야 한다 고 못 박았다. 문화예술진흥위원회는 위원장 국무총리, 부위원장은 문화공보부장관 과 예술원회장, 위원은 내무부장관, 재무부장관, 문교부장관, 학술원 회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회장, 대한출판문화협회장, 문화재위 원회위원장 등으로 하였다. 준조세 로 거두어들인 국민성금 을 가지고 국민과 무관하게 지출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선택된 문화예술인, 그것 도 유신에 찬동하는 이들에게만 쓰여졌으며, 그야말로 수요자 중심의 대다수 국민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수요자 중심이란 단어 자체도 2000년대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니, 국민 은 이 렇듯 자신들이 돈을 내고도 문화예술에서는 소외되었다. 구로공단의 여공들이 가리봉동의 삼류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본 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문예진흥기금을 거두어들였고, 시골 촌로 가 본 영화에서도 준조세 를 거두었으나, 정작 여공과 촌로들에게 어떤 문화예술적 혜택이 돌아간 적은 없었다. 18) 18) 당대의 문예진흥기금에 관한 공정하고 올바른 시각은 이같이 준조세와 배분의 원칙에서 주어질 것이다. 이 법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 강제모금 규정의 위법성으로 인하여 폐지되기에 이른다.

82 632 주강현 왜 하필이면 유신헌법이 반포되기 불과 2달 전에 문예진흥법이 반 포되었을까. 1960년대가 급격한 산업화의 길로 나섰다면, 문화 역시 일거에 증산 수출 건설 식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 매개되 어 있다. 언뜻 보면 이렇게 해서라도 문화예술을 진흥시키겠다는 취 지로 이해되지만, 일반 시민들의 강제적 모금에 의한, 가령 이른바 3 류 극장의 극장표나 가난한 연극인들의 입장 수익에까지 간접세로 붙은 세금과도 같은 문예진흥기금은 기실 정권을 지지하거나 암묵적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술인과 작품에만 쓰였다. 당대의 흐름을 비판하 는 예술이나 예술인에게 진흥기금이 돌아갈 여지가 없었으며, 시골 극장에서 표를 구매한 농민이나 구로동 공단가의 노동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리가 만무하였다. 19)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신의 개막과 더불 어 문예진흥원의 설치는 문화예술에 관한 국가의 노골적 통제가 시 작되었음을 알리는 측면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 자신 유신 체제에 적극 가담하면서 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한바 있는 문덕수 는 이렇게 말하였다. 50년대까지는 문인들에 의한 문단의 자주관리체제였으나, 60년대부터 근대화와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국가의 문예중흥정책이 요구되고, 이에 따라 문단도 크게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즉 문단 관리에 국가의 정책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북괴의 끊임없는 무력 도 발, 남북대화 중단, 국가안보라는 민족적 차원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예진흥법에 의한 문예진흥원이 설립되어 창작 기금 원고료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하여 국가가 목표로 하는 문예중흥 정 책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의 문예정책 제시는 뚜렷한 환 경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0) 문화예술인들이 비록 가난하기는 하였으나 자주관리체제 였다가 19) 문화복지 나 찾아가는 문화, 수요자 중심의 문화 등이 등장한 것은 아주 최 근의 일이다. 20)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문예총람, 39쪽

8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년대에 국가관리 로 넘어왔으며,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문예진 흥기금에 복속되는, 국가 문예정책 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음을 자평 하고 있는 대목이다. 국민에게 거두어들인 자금을 밑천 삼아서 국가가 직접적으로 문화예술을 지도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하게 되며, 반유신 문화예술운동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2. 유신체제 하 민족연희 운동 1) 민족 재발견 과 탈춤의 시대 19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민속극 부흥 운동의 조짐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가히 열풍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식문화론과 전 통단절론을 극복하고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이기 도 하였다. 이식문화론은 일제 강점기에 시인 임화에 의해 논리적으 로 최초로 제출되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 학사는 이식문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문화가 이식되었다는 생각은 전 통의 단절이라는 명제를 부른다. 일제시대의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 론은 1970년대에도 예외 없이 이어졌다. 민속극 부흥 운동은 이식문 화론의 극복 노력이었으며 전통단절론의 거부이기도 하였다. 1964년 8월부터 김질락 명의로 발간되었다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폐간된 잡지 청맥 에 전통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가 창 작과 비평 으로 논의의 장이 옮겨진다. 당대의 논객 이어령을 위시한 전통단절론자들에 맞서서 조동일 등의 반론이 제시된다. 21) 1963년의 21) 조동일의 전통지속론 에 관한 구체적 증거들은 이후 탈춤의 역사와 원리 로 반

84 634 주강현 이른바 향토의식 초혼굿 22) 그리고 1964년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 식 은 문화운동사에서 모태로 일컬어지는 것인바, 당시 지배권력의 한일 굴욕외교 및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에 대 해 전통문화 형식을 통해 벌인 싸움이었다. 23) 이들 행위가 설사 낭만 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민족운동이 전통과 만나는 본격적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60년대 민속극부 흥운동 당사자들의 문화적 전투성은 과시되었으나 계속 이어지지는 못하였고, 개인 중심의 학구적 작업으로만 지속된다. 다만 이들 행사 를 주도하였던 조동일 김지하 등은 꾸준히 민속에 관심을 기울여 1965년에 서울대 문리대에 민속극연구회-말뚝이 라는 모임을 조직 한다. 이 모임이 1970년대에 들어와 채희완 등에 의한 탈춤 부흥 운 동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의 문화운동사 서술은 오로지 이들, 즉 서울대 중심 에 의하여 1970년대 대학가의 탈춤 운동의 씨앗이 뿌려진 것으로 여 겨지고 있지만 다른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 백기완이 전통연희에 관 심을 두고 있었으며, 훗날 민속학자가 된 심우성 김세중(훗날 무세중 으로 개명) 등의 그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영향이 역으로 대학으로 접수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반대로 당시 서울대 이두현 교수는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으로서 해서탈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 이고 있었고, 가면극연구회를 꾸려서 탈춤 분야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화재관리국을 위시한 대표적인 관변학자로 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24) 영되어 나오며 1970년대 민속극 부흥 운동의 교본과도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22) 1963년 11월 향토개척단이 탈춤의 현대적 재현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23) 1964년 3월 21일 서울고등학교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강연회 가 개최된 이후에 5월 20일에 장례식이 열렸다. 상여를 멘 1,500명의 상여꾼이 뒷소리를 받으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는바, 년대로 계승된 마당굿의 한 전형으로 여겨진다. 24) 채희완 등이 그의 학문적 제자임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소 복잡한

8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35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문화운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 는 조짐은 196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탈춤 부흥 운동일 것이다. 대학으로의 확산 및 학교 현장을 넘어선 종교계, 생 산현장으로 확산이 이루어져 문화운동의 양적 확산 및 재생산구조 확립을 이루었고, 계속하여 마당극 마당굿 및 대동놀이로 발전해 나 간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김지하였으 며, 그의 이론적 제자이자 후배인 임진택, 채희완 등이 역할을 했다. 물론 김지하 주변의 서울대연극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세력들, 즉 이애주 김민기 장선우(장만철) 김명곤 등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는 가히 전 대학의 탈춤화 시대였으니 대학 탈춤의 시대 였다. 탈춤과 더불어 천대받아오던 농악 민요 판소리 따위도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미신으로 내몰린 굿이 재평가될 조짐을 1970년대에 마련하였다. 25) 탈춤 운동을 주도하였기에 지금껏 채교주 로 불리는 채희완은 당대의 탈춤 운동의 원인을 이렇게 평가한다. 질풍노도와 같이 탈춤이 대학사회를 휩쓸어 힘을 다져가고 있는 데에 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의 문화운동으로서 어떤 이념적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대학의 이념과 민속극의 이념이 일치하는 데 에서 찾을 수 있다. 탈춤이 민중 스스로의 생산활동과 문화적 투쟁을 그 들 자신의 몸과 말로써 나타내는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같이 탈춤의 민중의식 및 민중적 미의식 그리고 민중의 행동력과 지식인의 민 중 지향적인 문화의식 및 행동력이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선진적인 문화 창조체인 대학사회에서 탈춤은 한층 그 뜻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 여 대학 탈춤이 민족 주체의식을 강조하여 전통문화 속에서 창조적인 힘 을 찾아 대학문화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의 실체 맥락은 문화운동사서술의 객관성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다. 25) 탈춤이 주목된 반면에 풍물굿과 굿은 사실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문화 원형상으로 풍물굿과 굿이 보다 중요했으나 탈춤이 선호된 배경에는 풍자 를 무기로 한 연극적 지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를 논평자에 따라서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선후가 바뀐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86 636 주강현 인 오늘의 민중의 삶 속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어쩌면 마땅한 귀결 인지도 모른다. 오늘 이 땅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되면 서 대학 탈춤은 단순한 민속극 부흥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지역사회나 생 산 근로층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를 의식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범문 화운동이 되었다. 26) 탈춤을 추는 이유에 관하여 낭만적인 민족의식을 넘어서 한국적인 것과 민중적인 것을 하나로 보는 이른바 민중적 민족의식 또는 민족 적 민중의식이 이들의 행위를 부추긴다고 보았다. 당시의 청년 학생 들은 탈춤을 추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자기 확인의 계기를 맛본 다. 일상적 억압에서의 해방감을 보장해 주는 판에서 놀이꾼과 구경꾼 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적 일체감은 집단적 신명을 불러일으켰다. 하지 만 70년대의 탈춤 운동은 다음과 같은 자기비판에 도달하게 된다. 지배계층 속에서 눌림과 수모 또는 일제시대의 탄압과 단절의 위기 속 에서 뚜렷한 나타냄 없이 역사의 흐름을 같이 해온 정심, 그 혼의 맥락이 없는 탈은 귀족적 사치품으로 전락하여 대학가의 축제용이나 외국인에 대한 전시물의 역할밖에 못할 것이다. 민중의 끈적끈적한 생명력이나 정 신의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춤사위나 대사만을 흉내 내는 것으로 민중예 술을 승화시키고 재현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27) 이러한 지점은 탈춤 운동이 반유신적 저항운동으로서의 맥락을 지 님과 동시에 복고주의에 빠져 몰정치적으로 문화주의의 늪에 빠져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탈을 무기로 저항의 전선으로 나아간 측면 이 있는 반면에, 탈춤을 추는 것만 가지고 저항이란 이름으로 허장성 쇠의 놀음에 몰두하였던 또 다른 흐름을 지적한 말이다. 그리하여 탈 춤의 원형적 전수만으로는 새로운 문화이념을 실현할 수 없음을 통 감하면서 민속극의 창조적 계승 문제를 필연적으로 대두시키게 된다. 26) 채희완, 년대 문화운동-민속극운동을 중심으로 문화와 통치, 민중 사, 170쪽 27) 봉산 탈춤단오 공연 팸플릿(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1979년 5월)

8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37 민속극 재창조는 대학가에서 마당극 마당굿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실 험되었다. 탈춤을 통한 문화인식의 변화 28) 문화의식 1. 민족문화에 대한낭만적 태도 2. 탈춤에 대한 젊은 의식 3. 민중의식으로서의 진전 4. 새로운 예술운동으로 방향 정립 변화 내용 1 민속의 발견과 충격 2 자기 정체성의 확인 3 휴머니즘적 태도 4 서구 문화 극복의 의지 5 민족주체의식 각성 6 민족예술의 세계성 인식 1 젊음의 발산통로 2 탈춤의 개방 구조에 의한 집단적 신명과 해방감 3 삶의 여유와 사회 저항성 4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표현 통로 5 공동체적 유대감의 확충 1 현실적 시선으로의 회귀 2 매몰되어 가는 놀이판의 현실 3 대학 민속극의 자기반성과 민중적 삶의 문제 제기 4 민속을 통한 민중의 실체로의 접근 5 민속극에 대한 반민중적 행위의 배격 6 민속극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이념 정립 7 대학을 넘어서 사회 전반 8 민중문화 정립을 위한 사회적 토대 9 기층 현장으로의 확산과 새로운 문화 선교의 방향 1 대학연극과의 만남 2 민속극의 현대적 수용 문제 3 마당극으로의 실험 4 공동창작을 통한 공동작업 5 창작 탈춤의 과제 6 마당굿 운동으로 7 여타 예술 분야와의 연계 8 총체적 민중문화운동으로 민중과 민족을 동일 개념으로 파악하는 대학민속극 운동은 식민 주의적 불평등구조가 지속적인 억압상태로 되어있는 제3세계의 민족 해방운동과 그 뜻을 같이 하고 있다고 채희완은 바라보았다. 곧 사회 28) 채희완, 앞의 글, 190~191쪽

88 638 주강현 의 일차적인 모순구조를 지양하고 피억압자인 민중의 요구를 실현하 는 피지배 민족의 민중운동으로 스스로 정리한 바 있다. 2) 무형문화 복고주의 정책과 탈춤 운동의 연관관계 군사 정권으로 출발한 제3공화국은 의사민족주의 정책으로서 정 권의 민족적 취약성을 보완할 목적으로 문화재관리국을 창설하고 무 형문화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보다 근본적인 목적으로는 산업화 의 대두에 따른 농촌문화 근거지의 파괴, 무형문화의 소멸, 급격히 인멸해가는 무형문화를 계승시켜야 할 사회적 필요성이 요구되면서 무형문화 정책이란 개념이 처음으로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그 법제적 기준을 일본 문화재법을 고스란히 복사해오는 방식으로 시급히 서두 른 이면에는 정권보위라는 이유가 강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가 경과한 지금의 입장에서 박정희 시대의 민족문화 정책을 유 심히 들여다보면 대북관계의 대응이라는 새로운 측면도 발견할 수 있다. 그동안 이러한 측면은 거의 간과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9월에 북한의 물질문화유물보존위원회 에서 조선의 민간오락 이란 책을 통하여 일단 1차적으로 놀이의 개 괄적 조사가 집대성된다. 편싸움 등 17개의 놀이가 정리되고 특히 봉 산 탈춤과 꼭두각시극의 대본이 채록 보고된다. 여기에 실린 봉산 대 본은 당시 봉산탈의 거장인 봉산군의 고( 故 ) 리장산 옹이 구술한 것 이고 꼭두극은 황해도 신천군의 꼭두각시 조종사 고( 故 ) 양성룡 옹의 구술을 기초로 한 것이다. 동시에 과학원 물질문화사연구소에서 제작 한 봉산 탈춤과 유물보존회에서 제작한 꼭두의 사진을 싣고 있다. 즉 봉산 탈춤을 중심으로 다양한 탈놀이와 노래, 춤 등에 대한 조사연구 가 이루어지고 그 목적은 우리 문화의 유래를 고찰하고, 사회주의적 이면서도 민족주의적 내용을 가진 오락형태를 창작할 수 있는 자료

8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39 로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5년 8월에 민속학 연구자들이 사리 원을 방문하여 봉산 구읍을 현지 조사하고 서흥 탈놀이에 대한 조사 도 이루어진다. 1955년 가을에는 기록영화 봉산 탈춤 이 영화화되어 많은 예술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1987년에 재편집되어 상영됨). 물 론 북청지방의 다양한 민속놀이들도 이때에 조사가 이루어진다.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300여 종 이상의 놀이가 조사되며 조선의 민속놀 이 (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실)란 책으로 1차 집대성된다. 29)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 북에도 지역마다 많은 민속놀이가 전 승되고 있었다. 특히 탈놀이 유산이 많아 강원도의 통천 탈놀이, 함 경도의 북청 사자놀이, 봉산 사리원 황주 안악 재령 송화 은율 장연 신천 해주 강령 금산 추화 송림 등 황해도 탈놀이가 일부 전승되고 있었다. 꼭두각시극으로는 장연 꼭두각시극이 유명했다. 이 밖에도 황해도의 장연 시절윷놀이, 평남 온천의 봉죽놀이, 함경도의 돈돌라 리와 달래춤, 북청의 관원놀이, 종성의 방천놀이 같은 향토색 짙은 놀이들이 다수 있었다. 30) 당시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북한에서의 연희 연구를 주도하던 김일출 31) 의 연구성과는 남한쪽의 연구자에게도 비밀리에 전달되었 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북에서의 연구성과가 남쪽에서 부당 하게 표절 된 것이다. 부당한 표절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이가 남쪽 에서의 무형문화재 정책을 이끌었다. 북한에서 주목한 탈춤들이 당연 히 남쪽에서도 주목되었다. 이러한 논지 전개는 이북에서의 탈춤 연 구가 곧바로 남한에서의 탈춤 연구를 추동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비 약할 수는 없지만, 이북에서의 연구성과가 고스란히 남쪽으로 수정 보완 확대된 채 반복되었으며, 그러한 주도 세력들이 문화재정책을 29) 주강현, 1992 북한민속학사, 이론과 실천사 30) 조선의 민속놀이, ) 김일출, 1958 조선민속탈놀이연구, 과학원출판사

90 640 주강현 이끄는 주도 세력이기도 하였으며, 당시 탈춤에 관심이 있던 학생층 에도 역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운동사의 이면으로 반드시 기록 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 가령, 1970년대에 출발한 탈춤 운동의 길이 두 가지로 갈려나감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탈춤에 머무는 갈래, 새로운 창작의 길로 나가 는 갈래로 나뉜다. 통계상으로 일치하는 대목은 아니지만, 전자의 경 우에 훗날 본의 아니게 체제순응적인, 단순 전통 연희자의 길로 나아 간 대목이 적지 않다. 심지어 전두환 정권이 마련한 국풍 81에까지 출연하는 세력들이 나타난다. 이로써 탈춤은 민주화의 길과는 전혀 무관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껏 춤을 추고 있으며 이른바 전통 연희계의 주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반면에 마당극 운동으로 보다 한 걸음 나아간 세력들은 애초부터 연극반 출신의 연극 지향적인 컬러 를 지니고 있었으며, 훗날 민족극 운동의 씨앗을 뿌린 이들이었으나 막상 전통 탈춤과는 무관하게 된다. 채희완, 임진택, 김명곤 등은 이 러한 맥락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탈춤의 복고적 기능주의적 접 근에 반론을 제기한 이들일 것이다.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고 2년 뒤인 1964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가 지정되었다. 문화재보호법 제1조(목적)는 이 법 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서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 문화의 발전에 기 여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고 규정되어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무형문 화재 정책의 목표를 (1) 원형 보존 (2) 민족문화 계승 (3) 활용과 문화 향상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처럼 문화재정책이 가동되기 시작하였지 만, 전근대사회의 전통적 문화층위가 와해된 상태에서 새로운 층위를 모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앙문화와 지방문화가 균형을 이루면서 존재했던 균형감도 깨진 상태에서 오로지 중앙집중문화 방식으로 문 화 정책이 구사되기 시작하였다. 읍치문화가 지녔던 향촌문화의 독자

9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41 성이 와해된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중앙문화 따라하기 풍조만이 성 행했다. 군사 정권의 중앙집중적 속성은 문화적 중앙집중도를 더욱 조장하였다. 따라서 짧은 시간 내에 투망식, 건수식 으로 무형문화 재를 지정하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운동장에서 여는 방식에 따 라 군사문화적인 속도감 이 창출되었다. 속도와 효율성은 증산 수출 건설 시대의 화두였으며, 무형문화 정책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1970년대의 지방 군소 도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향토축제 가 선보였지만, 미인 뽑기 대회, 글짓기 대회 따위의 천편일률적인 행사로 가득 찼을 뿐 어떤 지역적 전통성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같은 기형적인 전통은 사실 일제시대에 조장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촉진되었고, 군사정부 아래서 적극 권장되었다. 그 결과 21세기 초까 지도 지방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거개의 지역축제들은 천편일률적인 내용물과 관에 의한 획일적인 프로그램이 선보일 뿐, 우리 문화의 자 생력을 이어주는 문화적 전통성은 약하다. 일본이 마쯔리라는 지방축 제를 현대화하면서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꾀하는 사례와 대비된다. 이러한 모순들이 1970년대에 대략적으로 완성되었다. 이 같은 문화환경 속에서 건수식 투망식 연구와 조사, 그에 따른 문 화재 지정이 촉진되었으니 이른바 제도권의 물량 공세는 민주화운동 에 역행하는 방어막으로 작동하였다. 1960, 70년대 무형문화 전문가 집단은 양으로도 작았으며, 그나마 소수의 전문가가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면서 무형문화 정책을 독점하였고, 독점의 피해는 21세기 초까지 도 이르고 있다. 당시에 정부가 수행한 복고주의적 무형문화 정책이 얼마나 민중의 삶과 무관한가는 문화재관리국과 내무부의 입장이 판연하게 다른 데 서 판단된다. 내무부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전통문화의 파괴와 문화부서의 문화재 보호라는 무형문화재 정책은 상반되는 이 중성을 보여 주었다. 개발과 전승이란 양립할 수 없는 이중적 잣대가

92 642 주강현 제3공화국만큼 극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탈춤 등을 지정하면서 민중의 삶의 정신적 지주인 서낭당 등은 미신 타파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대학에서의 일부 진보적인 탈춤 운동 의 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다. 원형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탈춤을 박제화된 골동품으로 만들어 민속 극으로서의 현장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마멸시키면서, 자생적인 발전의 길을 막고 오히려 민속을 일반 민중의 생활에서 격리시켰으며, 관 주도형 인 관제문화 속에 민속을 편입시키고 말았다는 비난을 회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32) 대학 탈춤이 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하여 위와 같이 비판하였음은 분명하지만, 마을의 당산나무 등이 베어 넘겨지는 상황에서 다분히 연극적 주제 에 함몰되었던 인식의 한계로 인하여 민중의 거대한 잠 재적 민족문화의 저수지였던 당굿 등이 파괴되어 나가는 현실에 대 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당대 대학에서 탈춤 운동을 이끈 주체들이 연희라는 매개물에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빚어진 제 한성이자, 민족문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데서 비롯된 시대적 제한성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도시의 지식인들만 모든 민속이 사라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전국 곳곳에 여전히 다양한 민속이 존재하였다. 탈춤 부흥 운동의 역 군들조차, 마을 단위 현장에서 당시까지는 여전히 수많은 민속놀이와 당산굿 등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민중의 축제를 읽 어내기에는 지나치게 지식인적 한계에 머물고 있었다. 1960, 70년대 지식인 탈춤 운동 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편향과 한계, 즉 민중의 삶과 괴리된 현행주의를 극복하는 다른 방식으로서 마당 굿 마당극으로의 전환이 모색되었으니, 이는 강력한 현실비판의 무기 를 지니며 1980년대를 준비할 새로운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32) 채희완, 앞의 논문, 302쪽.

9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43 3) 마당극 마당굿 마당놀이로의 전환 1970년, 1971년의 필화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지하의 나폴레옹 꼬냑 과 구리 이순신 이 각각 이화여대와 서울대에서 공연된다. 1972년에 는 금관의 예수가 성당의 수녀, 신부 등을 대상으로 순회공연 된다. 그 해에 김지하의 비어-소리내력 이 창조 지에 실리자마자 문제가 되었는데, 1978년에 임진택에 의하여 판소리로 재창작된다. 1973년에 는 김지하의 진오귀굿 이 서울, 광주에서 공연을 갖는다. 1974년에는 이종구의 소리굿 작곡 발표회를 통하여 기생관광을 소재로 전통 탈 춤이 창작 탈춤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친다. 33) 1975년에는 동아일보 해직 사태를 그린 진동아굿 이 벌어진다. 1975년 4월 11일, 서울 농대생 김상진이 양심선언하고 할복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달 4월 30일에는 사이공이 함락되고 월 남이 공산화(통일)되자 박 정권은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 고 유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전면 봉쇄한다. 그러나 5월 22일 이른바 5 22사건이 터지면서 긴급조치9호 선포 이후의 첫 시위가 벌어진다. 이 사건 이후로 대학에서 정치적 행동과 연행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70년대 전반기의 이러한 기반 위에서 긴급조치 9호 시대인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탈패, 연극패들은 차츰 민중운동과 깊은 연대를 맺 으면서 민중의 삶의 현장을 찾아 나서게 된다. 특히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단체들의 농민 노동자교육 프로그램이나 대중집회 등에 참여해 서 창작 탈춤이 봇물을 이루게 된다. 1976년에 상경한 농촌 처녀를 다룬 미얄, 1978년에 연행된 예수전 등이 그것이다. 33) 이 소리굿은 이후에 1980년 봄에 서울대에서 재공연되고 놀이패 한두레에서 초 연 10주년 기념으로 재공연되었다..

94 644 주강현 1970년대 마당굿 공연현황 34) 문제의식 공연 이름 주요 내용 공연연도 기타 농촌 문제 진오귀 미얄 고구마 농민 협업문제 이농문제 함평 고구마사건 1973년 1976년 1978년 탈춤 판소리 마당극 탈춤 농악 탈춤 농악 공장 문제 미얄 동일마당 공장의 불빛 노동조건 노사문제 노사문제 1978년 1978년 1979년 서사무용극 서사마당극 서사노래굿 변두리 및 지역사회 문제 돼지꿈 덕산골이야기 한줌의 흙 난장이 변두리삶 박홍숙사건 박홍숙사건 변두리삶 1977년 1978년 1979년 1979년 마당극 서사마당극 서사극 마당극 종교 문제 금관의 예수 예언 민족해방놀이 애순이 예수의 생애 예수전 민중선교문제 광야의 시험 출애급과 민족해방 에스더 생애 예수의 생애 예수의 생애 1972년 1975년 1975년 1975년 1977년 1978년 마당극 무용극 마당극 탈춤 마당극 마당굿 역사의식 동학 허생전 노비문서 동학농민혁명 조선후기 사회문제 천민항거 1974년 1977년 1979년 서사노래 마당극 마당극 일반사회 및 기타 상여행진 진동아굿 씻김굿 마스게임 대학장례 언론문제 사회문제 매스컴 문제 1975년 1975년 1977년 1978년 판굿 서사마당굿 탈춤 마당극 한편 새로운 창작 탈춤의 시도와 거의 동시에 대학 연극회를 중심 으로 마당극이 대두한다. 1976년의 서울대 극회의 허생전, 1977년 서울여대 야산에서의 돼지꿈, 같은 해의 이화여대 문리대 극회의 유랑극단, 1978년의 이화여대의 매스게임, 79년의 노비문서, 80년 서울대의 녹두꽃 등 일련의 작업이 그것이다. 서울대 연극반을 비 롯한 연극부에서 창작으로의 전환을 주도하던 현상을 엿볼 수 있다. 왜 대학생들이 이러한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학생들이 주동한 그러 34) 채희완, 앞의 논문, 211쪽

9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45 한 예술운동이 사회적으로 무슨 의미를 지닐까. 1970년대의 한국 연 극의 관객층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당대 한국 연극은 대 학생을 위한 연극 이었으니 관객의 8할이 학생이었으며, 그 학생층의 9할이 여대생이었으니 가히 여대생의 연극 이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당대 학생 연극계에서 제기된 문제제기는 그대로 기성 연극 계를 향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설명해 나가야 옳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 국문과 2년에 재학 중이던 유인열은 연극에서 의 민중 배제, 연극에 대한 민중의 외면-연극의 소외 시대 를 말한 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으니 당시 생각 있는 연극반원들의 일반적 생각이었으리라. 35) 한국사회의 위기의식에 부응하는 민족 연극은 이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우리 사회는 민중문화 운동으로서의 연극을 갈구하고 있다. 민중을 소외시키는 연극, 소수를 위한 미분화로서의 연극, 소수의 항구적인 문화 독점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민중과 호흡하는, 즉 사적 예술 을 탈피함으로써 새로운 집단적 주체를 위한 길을 열어서 연극은 극장의 담을 넘어서 저자의 거리로, 극장에서뿐 아니라 시장의 공지에서, 광산촌 에서, 어촌에서, 노동자 합숙소에서 그리고 농촌의 구석구석에 가마니를 깔고 공연할 수 있어야한다. 민중의식의 각성을 막는 현대적 우민정책의 일익을 탈피해야 한다. 탈춤이나 연극 공연 후에 소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하여 정부 당국이나 학교 당국은 공연 불허 취소 중지 등의 사태가 일어났으니 탈춤과 함께 마당극공연은 당시 대학문화운동의 대변자였던 셈이다. 1978년의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박홍숙 을 구명하기 위한 덕산골이야기, 1978년 초반의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가 연행되었고, 1978년 11월에는 광주 YMCA에서 고구마 수 매정책이 불러일으킨 농민들의 집단적 저항을 담은 고구마 가 공연 35) 유인열, 1977 민중문화운동으로서의 연극 대화 5호, 137쪽

96 646 주강현 되었다. 고구마 등은 현장 농민과 문화예술인들이 결합한 가장 전형 적인 작품으로 인정된다. 사건의 요체는 이러하다. 고구마 생산 농가 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실시된 농협의 고구마 수매 정책이 오히려 농민들에게 손실을 안겨준 결과를 빚고, 급기야는 농민들의 집단저항 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함평군은 해남군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로 매 년 2만 톤을 생산해왔다. 그런데 1975년에 가격이 오른 데 자극받아 30%로 생산량을 늘린 데다가 농협이 76년산 고구마를 17.4% 인상된 가격으로 전량 수매한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농민들은 희망에 차 있 었다. 그러나 농협에서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면서 약속을 위반하 였다. 이것이 이른바 함평 고구마 사건 이 터지게 된 계기였다 36). 가 톨릭농민회가 주동이 된 이 사건은 당대 농민운동사에서 기록될 만 한 일이었으니 고구마는 민중적 전형성을 획득한 뛰어난 작품으로 기록된다. 고구마는 1980년 3월 광주 YMCA 체육관에서 공연된 전대미문의 돼지 값 파동을 다룬 돼지풀이로 연결된다. 이들 작품들은 운동현장 자체에서의 마당놀이가 지니는 의미와 기능을 되살려 내는 마당굿의 전형으로 파악되어 이후 1980년대 들어와 제기된 마당극은 마당굿으 로 회귀되어야 한다 는 명제의 실천적 토대가 된다. 사실 탈춤 부흥 운동의 움직임을 보면, 거의 관제화된 탈춤 전수소 의 박제화 되어 가는 전통 탈춤에 매달려 어떻게 그것을 공연으로 올릴 것인가에 골몰하는 것이 일반적 모습이었다. 창작 탈춤 마당극 은 대체로 표현양식이나 표현기법 등 작품 내재적 문제에 함몰되어 있었다. 현장적 운동성은 1970년대 현장과의 관련 속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 말 대학 연행 집단의 기회주의 그리고 그 한 변형 인 현장중심주의는 1980년대를 맞이해서야 비로소 자기반성을 하기 36) 조영호, 1977 르포-함평고구마사건 대화 4호, 162~166쪽

9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47 시작한다. 37) 이제 서울의 봄 과 함께 연행운동은 80년대의 지평으로 그 몫을 넘겨주게 되었으니, 이는 70년대의 축적된 역량이 이 시기에 일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80년대 중반쯤에 나온 다음과 같은 자성의 목소리를 참조할 만하다. 이즈음 돌이켜보건대, 70년대 격변기에 사회문화운동의 흐름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80년대 초두에 이르러 마치 질풍노도와 같이 기존 문화 풍토에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던져진 마당굿을 두고, 정치편향에 로의 지나친 경도, 관념적 과격주의, 사물인식의 도식적 상투화, 표현 욕구의 무절제, 무정견한 아마추어리즘의 예술 폭력, 예술의 이념적 도 구화 등을 빌미로 단순한 연극양식주의자가 아닌 몇몇 뜻있는 이들조차 도 탈미학의 형태라는 마땅찮은 판정을 내린 것에 못지않게, 아직까지도 마당굿이 감상적 향토주의, 전근대적 전통의 시대착오적 단순회귀, 무 정부적 쟁이 근성의 자기 해체, 예술기량의 무장해제가 빚은 저급한 즉 물주의, 무양식적 예술로서의 자폭 등으로 따가운 비판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음은 이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몇몇 마당굿판이 실제로 보여준 실질 내용이 위 에서 지적한 언표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 다 타당할지도 모른다. 38) 물론 이 같은 비판에 귀 기울이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연희 양식을 비롯하여 서사극 리얼리즘 극표현주의극 총체연극 거리극 게 릴라극 등 제3세계 민중극의 다양한 전통이 모두 백과전서식으로 나 열되고 활용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4) 중앙집중문화에서 지역문화로의 확산 탈춤 운동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실제로 오광대 등의 탈춤은 그 현주소와 뿌리가 지역문화였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서, 경상도 대구 37) 문호연, 1985 연행예술운동의 전개 문화운동론, 도서출판 공동체, 63쪽 38) 채희완 임진택, 1985 한국의 민중극, 창작과 비평사, 9쪽

98 648 주강현 지역의 연희패의 경우를 살펴보자. 1977년 계명대 민속문화연구반에서 고성 오광대 가 공연되고, 1979년에 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에서 창작 민중극이 시도된다. 1977년 계명대 민연반의 발족은 뒤이어 다른 여러 대학에서의 이 같은 모임의 탄생에 기폭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초반 에 쏟아져 나왔던 민중극 단체들이 70년대 후반에 씨앗을 준비하고 있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에서 출발하여 점차 사회 및 일반 단체로 확산되어 온 민중극 패들이 다른 지역의 전통민속극과 놀이 등을 통해 익힌 틀 속에 이 시대의 시각에 의한 주제와 내용을 담으려고 애썼던 결과였으며, 용 기 있게 지속적인 추구가 쌓아온 역량들이 차츰 조악함을 극복하게 하였던 것이다. 대구지역 민중극 공연 연표 39) 민중극명 연희자 구경꾼 놀이 날 놀이판 주제 유천별산대 놀이 야학교사 학생 야영지 야학생활의 풍자 선한 사마리아인 대학생 고교생 대학생고교 생 및 일반 마당 강당 성경내 용을 담은 가면무극 냄새 대학생및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요소의 대학생 마당 굿놀이 교수 풍자와 그 정정 기원의 굿 흑수야! 대학생 대학생 마당 기숙사 비용 및 학내문제 풍자 유천 교사 및 교사 야영지 서민생활을 그림 오광대 학생 노동3권 야학학생 학생 및 근로자 교실 노동현장에서의 노동3권 보장을 주장 이처럼 연희 운동의 경우 여타 문화예술운동과 달리 지역문화로 확산되었으며, 반대로 지역문화에서 중앙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가능 해졌다. 가령 1980년 벽두에 수눌음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1970년대 힘의 원천이다. 탐라민속문화연구회 수눌음의 수눌음선언에 39) 김사열, 년대 이후 대구지역의 민중극운동 일꾼의 땅1-거친 들판에 씨앗을, 분도출판사, 106쪽

9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49 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탐라는 문화적 변방이며 행정적 벽지이기 이전에 틀림없이 민족의 얼 과 맥박이 살아 뛰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국토이며, 중앙에 비교하여 변방 이 아니라 사실은 쓰러져 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할 전위의 자리인 것이다. 이제는 이곳에서 파문을 던져 외래문화가 범람하 는 저 한복판까지 전파시켜야만 할 것이다. 40) 사실 중앙에서 지역으로 라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기도 하였다. 오 광대 탈놀이를 비롯하여 민족문화의 상당수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니 위의 수눌음선언에서 보이듯이 전통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할 전위 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역으로의 확산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지역은 광주였다. 광주에서 황석영 김남주 이강 윤한봉과 청년문화예술운동가들이 일 으킨 일과 놀이 문화패 활동은 전국적 규모를 의도한 것이기도 하 였다. 김남주는 전국의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을 연대하여 문화운동조 직을 흡사 장길산의 천민적 유랑예인들의 봉기처럼 엮기를 희망하였 다. 김남주 등 광주의 움직임은 서울 중심의 연희운동과는 다른 전국 적 조직과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이었다. 그동안의 문화예술운동사에서 이 대목이 간과되어 왔던 것으로 여 겨지므로 제대로 규정지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의 수눌음 선언에 도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개입하고 있다. 즉 김지하 등이 서울 중심 으로 연희운동을 사고하고 있었다면, 황석영 김남주 등은 지역이란 거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역에서 민족 연희패들이 진지를 공고하게 마련하게 되자, 이제 서울과 각 지역이 모두 엮여진 본격적인 연합전 선이 만들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40) 제주도 탐라민속문화연구회, 수눌음(황파두리놀이 공연팸플릿) (1980년 10월) 제주도 수눌음의 맥락은 1990년대 한라산 등의 연희패로 이어지면서 그 맥락 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100 650 주강현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지자 문화패 운동 문화소공동 체 운동이 전투적 문예운동으로 학생운동을 선두에서 견인하기 시작 하였다. 가령 서울대 가면극회가 주동이 된 일명 오둘둘(5 22)사건 은 긴조 이후에 최초의 시위 사건이었기에 정부는 혹심하게 탄압하였다. 채광석 이호웅 김도연 천희상 김정환 장선우 황선진 정선현 채만수 등이 그들이었다. 이는 이른바 연행 중심 문화패의 본격 등장을 보 여주는 일이었다. 대매체가 되어버린 창작과 비평 등이 생산해낸 공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화운동의 비합법적 투쟁 공간까지 확보해내려는 것이 긴조 9호시대의 연희패 문화운동의 양상이었다. 긴조 9호 시대는 학생운동사에서 문화서클운동의 양상과 형태로 의 식화되고 조직화되고 나아가서 현장으로 이입되는 아지프로적인 성 격마저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은 노동조합과 결합하여 노동자 탈춤반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니, 김봉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이 없었더라면 그 전에 전 국의 연희패들이 모여서 장길산적인 반란, 매우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집회를 대대적으로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 변란에 의한 박정희의 죽음으로 그만 전국적인 탈패의 움직임은 좌절되고 말았다. 역사에서 하나의 가정법은 설득력이 약하겠지만 탈패들이 유 신정권 말기에 보여주려 했던 역량의 최고치였다. 비록 거사는 무위 로 돌아가지만, 이후 1980년대의 공간에서 이들 민족연희운동 세력의 기반은 폭압적 전두환 정권하에서의 문예운동을 새롭게 꾸려나가는 기반이 된다. 실제로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윤상원 윤한봉 등 지 역 문화패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980년대 공간에서의 성과는 70년대 라는 간고의 세월 속에서 숙성되고 발효된 결과물이었다. 80년대에 발족한 대구의 우리문화연구회, 광주의 민중문화연구회 같은 지역문 화패들은 1970년대의 성과에 기반한 조직들이었다.

10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51 5) 국풍 81 의 의미망: 70년대식의 결산과 방향 전환 1981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무참하게 스러져간 뒤 서울 여의도 벌판 에는 이상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여의도 광장의 아스팔트 주변에 들어선 고층 빌딩 전면에 국풍( 國 風 ) 81 이란 거대한 플래카드가 나 부끼고 있었다. 팔관회도 아닌데 때 아닌 나라바람이 묘한 적막 속에 몰아치고 있었다. 돌연 요란한 꽹과리 부대의 신호음에 따라 만장을 앞세운 풍물패가 행렬지어 지나갔고, 탈춤 패거리, 그리고 무수한 전 통 연희패가 광장을 채웠다. 무형문화의 뛰어난 예능인들이 전국에서 긴급 소집되었으며, 정당한 출연료를 받은 만큼 성심성의껏(?) 축제를 준비하였다. 41) 무형문화 전문가들은 이들 계획을 방조하고 인원을 동원하는 데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방송공사에서는 국풍에 관한 학문적 이론 정립을 위하여 많은 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하였다. 동원된 순진한 학자 들이 정치권력의 의도를 몰랐던 탓일까. 1981년 5 18을 앞두고 5월 8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국학 관계 학술강연회와 세미나를 열었다. 그 결과 국풍론 이란 책이 발간되었으니, 연세대 김동욱 교 수의 국풍론 권두논문을 비롯하여 조동일(전통예술의 발전적 계승), 지춘상(민속놀이의 활성화 방안), 이두현(민속극의 기능과 그 계승 방 향), 한만영(한국 전통음악의 원류), 김한식(실학사상과 근대의식), 이 택휘(정신문화의 변용과 그 방향) 등의 글이 한 권으로 묶여서 전국 공공도서관과 대학에 무료로 배포되었으며 일반에게는 200원에 판매 되었다. 대개 일반적인 수준의 학술논문 초록 수준으로 발표에 임하 였으나, 김동욱 교수와 같이 적극적 신국풍론을 제기한 이도 있었 다. 42) 41) 주강현, 세기 우리문화, 한겨레신문사, 340쪽 42) 한국방송공사, 1981 國 風 論, 한국방송공사, 20쪽

102 652 주강현 더구나 국풍 81 행사 한번으로 학문이 일률적으로 정렬을 가다듬을 수 는 없는 노릇이니만큼, 이런 문제를 장기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면서, 매스 컴을 통하여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도 필요하고도 충분한 여건이라 고 여겨지는 바이다. 과거의 국학이 학자의 서재에서 고독한 분투로 이루 어졌다면, 국풍 운동이 학자의 서재를 뛰쳐나와 국민 사이에서 여론화하 는 것은 이제까지 고독한 행군에 지친 학자를 고무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 는 바이다. 이런 성공의 예를 우리는 일본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은 매스미 디어와 출판사가 학자를 이끌어가는 형편이다. 거의 대부분의 민속학자들이나 국악자들이 어쩌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두환 정권의 파쇼 문화예술 대전에 동참하고 들러리, 혹은 자진하여 앞장을 섰다. 광주 학살과 강압적 군사 정권 아래서 그 당 시에 학자들이 서재를 뛰쳐나와 관제 언론과 결합하여 무엇을 하겠 다는 것이었을까. 이택휘 교수는 새로운 민족문화 형성을 위하여 민 족구성원의 의식구조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장기적인 사회 화 과정을 촉구하면서, 의도적 조직적 변용을 추진해야 함을 역설하 였다. 정신적 기조의 변용을 추진해야 하며, 정신문화의 변용은 건전 한 사회화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박정희가 세운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은 유신체제 이론의 거점이자 정권의 나팔수였으 며 43), 지금도 그 잔재를 완전히 씻지 못하고 있듯이, 보수 우익적이 며 군국주의적 사고에서 흡사 일제 말 군국주의의 도래를 보는 듯하 였다. 이 같은 시대적 침묵 속에서 때 아닌 화려한 전통의 축제가 치러 진 것이다. 곳곳에는 방패를 든 전투경찰들이 축제의 주역들을 옹호 하고 보위하였다. 국풍 81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의도 광장 복판에 서서 모두들 전율하였다. 말로만 들었던 국가 파시즘, 파시즘의 축제 43) 가령, 정신문화연구원의 정간물인 정신문화 2호에 실린(1979) 제9대 대통령 취임사 박 대통령 신년사 5호(1979)의 고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고하는 글, 같은 사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0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53 란 이런 것이었다. 국풍은 1970년대가 일구어낸 연희 운동에 대한 정권적 차원에서의 반대급부, 즉 방어책의 일환으로 급조된 것이었다. 허문도 등은 연희 운동의 실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방어책을 구사한 것 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꼭두극 등에 관심이 많았던 허술 등이 전두환 정권에 가담한 것도 모두 이 같은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불행 하게도 1970년대에 확산된 일군의 탈춤꾼들이 다수 이들 국풍 81에 동원되고 자발적 반자발적으로 동참하였음을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반유신운동의 진지로서 민주화운동의 방편으로서 탈춤이나 마당극 등을 택하였던 일군의 세력이 있었다면, 반대로 탈춤의 형식논리에만 매몰되고 국가관리 체제에 놓여 있는 이른바 관제 탈춤의 맥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복고주의의 늪에 매몰된 다른 일군의 세 력이 존재했음을 국풍 81은 스스로 웅변해 주었다. 이제 70년대 탈춤 부흥 운동은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1980년을 기 점으로 대략 두 세력으로 분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비극적인 잔치 인 국풍 81이 역설적으로 지난 1960, 70년대의 연희 운동이 두 가지의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폭로시켜 주 었다. 3. 유신체제 하 문학예술운동 1) 문학 및 출판 분야 1970년 3월 17일 고급 요정의 호스티스 정인숙이 한강변에서 살해 되었다. 미모의 정 여인의 죽음은 1970년대 서두를 장식하는 의미 있 는 통과 의례 였으니, 1979년 박정희가 여인들 틈에서 총을 맞고 사 라지는 결말의 서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치적 치정 관계 는 죽음

104 654 주강현 조차도 치정적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하게 하였으니 연극으로 치자면 필연적 스토리였던 셈이다. 정인숙의 죽음의 배후로 중단 없는 건설 의 주역이었던 박정희와 정일권 등이 애욕의 대상자로 떠올랐다. 요 정 호스테스의 죽음은 밀실 공포 치정 부패 등으로 얼룩진 당대 정 권의 뒷 그늘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해 4월 8일에는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내렸다. 불도저 소리를 들 어야 했던 김현옥은 그야말로 하면 된다 고 밀어붙어 서울 곳곳을 파헤치고 산꼭대기마다 아파트를 지었다. 높은 곳에 지어야만 각하 가 볼 수 있다 는 천재적 발상이 개입되었다. 와우아파트의 붕괴는 박정희 시대가 밀어붙인 하면 된다 가 안 될 수도 있다 거나 그렇 게 하면 안 된다 를 암시하는 와해의 징조이기도 하였다. 열흘 뒤인 4월 18일, 으레 그렇듯이 4 19 전야제를 겸하여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당시 동숭동 교정에서 초혼제를 열어 와우아파트 사망자 진혼과 정 인숙살해사건을 풍자하는 마당극을 공연한다. 그 직후인 5월에 잡지 사상계 에 김지하는 오적 을 발표한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 원 장성 장차관, 이들 5적이 뒤뚱거리면서 등장하여 판소리 장단에 춤을 추면서 고혈을 짜는 판을 벌인다. 그의 풍자냐 자살이냐 에 압 축되어 있듯이 풍자 아니면 이 긴박한 죽음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 었던 정황을 그리고 있다. 시는 곧바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며 70 년대 벽두에 필화 사건 1호를 기록한다. 시가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 고, 시가 정치적으로 탄압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그는 감옥으 로 간다. 그렇게 1970년대 시는 김지하의 오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해 11월 13일에 청계피복 노동자 분신 사건, 일명 전태일 분신 사 건이 터진다. 이 사건은 문학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은 당연히 뒤따랐다. 1971년 4월 8일 에 발족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

10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55 학계 등 각계 발기인 44명 중 문학계가 10명으로 다수였으니, 구중 서 김지하 남정현 박용숙 박태순 방영웅 이호철 조태일 최인훈 한남 철 등이었다. 당대 문화예술운동사에서 음악, 건축, 미술, 연희 등은 이름 석 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단계였으며 대부분 유신체제 내에 안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1970년대 문화예술운동의 대부분의 몫을 문 인들이 떠맡고 있었으며, 나아가서 당대 재야 운동 의 연락책 실무 책 등의 역할을 문인들이 떠맡았다. 문화예술운동이 조직적으로 움직 이지 못하고 여전히 명망가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던 현실에서 문인들의 살신성인적인 동력은 대단하였다. 특히 원로작가들까지 직 접은 모르되 심정적 물질적 후원자로서 움직였다는 점에서, 가령 부 산의 김정한의 경우에서처럼 문단의 내부적 힘이 문화예술운동은 물 론이고 전체 민주화운동에 끼친 힘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 민 족연희 운동 세력들은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한층 어린 세대였기에 사회운동에 뛰어들만한 시점이 아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에서도 괄목상대할 만한 역작이 나오기 시작한다. 1971년 황석 영의 객지 는 이전 김승옥 등으로 대표되던 소설에서 한 단계 뛰어 넘는 그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감옥이야 김지하가 갔지만 황석영 문학은 실천적 리얼리즘의 보고로 당대 독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분명히 황석영 같은 작가를 동시대가 얻은 것은 행운이 었고, 그에게도 당시대의 억압과 고난은 역설적으로 문학적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 행운은 유신체제에게는 심장을 겨누는 화살 같은 것이었다. 후일 그가 문화예술운동의 전위와 배후를 오가게 된 어떤 조짐 같은 것이 그의 소설에서 예감되기 시작한다. 객지는 황 토가 드러난 언덕길과 하얀 모래펄 바다가 차례로 이어진 곳, 대처 에서 기차를 타고 오다가 철로가 끊기는 지점에서 마지막 육십리 길 을 걸어가야만 이르는 곳 이었다. 그 객지는 1970년대 초반의 풍경이 기도 했다.

106 656 주강현 1972년부터 문인들이 줄지어 끌려간다. 이른바 동백림사건 으로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치안국과 서울시경 및 각 경찰서 정보과에도 문학 전담 부서와 전담 경찰관이 배치된다. 국 가권력이 문인의 상상력과 원고지를 검열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검열과 통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검열의 결과, 국가병영 체제에 저 항하는 이들은 여지없이 비법적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김지하 는 중앙정보부의 기이한 빛깔의 방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못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달아가리/일어섰다가도 /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서도 한번/잠들면 끝끝내. 박태순은 중앙정보부와 한국 문학의 본격적인 만남을 세 가지 유 형의 사회적 문학 생산양식으로 정리하였다. 44)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 니는 문학, 끌려 다니지 아니하려는 문학 그리고 끌려가야 할 문학을 자진하여 고발 밀고하는 유신문학 생산양식이라고 정리하였다. 이제 유신 선포는 필연적이었다.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는 위수령 선포 로 학원질서 확립 9개항을 발표한다. 1972년 10월 17일 화요일 저녁 7시 라디오와 TV정규방송이 돌연 중단되고 대통령 특별선언문이 발 표된다. 박정희는 예의 엄정한 목소리로 톤을 낮게 깔며 이렇게 국민 을 협박한다. 나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약 2개월 간 헌 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 다.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모리배 로 몰린 정당과 정치활동은 전면 금 지된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유신 44) 민족작가회의 공식 사이트에 박태순이 연재하는 자실문학사(자유실천문인협의 회문학사)를 참조로 하였음

10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57 시대로 접어든다.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가령 김남주는 절친한 친구 이강과 등사판에 함성 을 찍어 광주에서 배포한다. 김남주란 문학전 사가 유신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1974년 1월 7일 신년에는 문인 61인 개헌지지선언 이 발표된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 이 나온 시점 이다. 이 선언의 기초는 백낙청이 직접 하였으며, 이호철 김지하 영 무웅 등과 백방으로 돌아다닌 결과였다. 그해 12월 백기완이 이끈 항일민족문학의 밤 이 열린다. 이 자리는 개헌청원운동본부의 출정 식을 거행하는 자리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남사당을 이끌던 심우성 김세중 등 마당극 문예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당대에 발간된 항 일시집은 시대적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1974년 2월 5일 도하 신문에는 문인 지식인 간첩단 적발 사건 이 전면 도배를 한다. 드디어 간첩 이 문단에서 출현함으로써 당대의 마녀 재판이 시작된다. 그해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이 벌어진다. 긴 급조치시대, 이른바 긴조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백일 정을병 등은 간첩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그네들이 아니 라 문학 자체가 법정으로 끌려간 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한국문 인협회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등이 어떤 입장표명을 공식적으로 한 적은 없었으며, 단지 개인 자격으로 서명을 하였다. 당대 문학 권력 의 위상과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로원 문학 은 한 국 문학의 보수우익 문예조직과 운동을 장악하고 유신정권에 아부하 면서 사태를 호도하고 있었다. 조연현 등은 문학유신 을 선포하였으 니, 문협선거에서 선거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이사회에서 추대 형식으 로 이사장을 선출하자는 궤변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중앙정보부와 경찰력은 이들 조연현 류의 유신 문학인 들과 유기적으로 협조하였 고 내통하였으며, 그 대가는 지금껏 공개된 바가 없으나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 18일자 신문에는 자유실천선언-30여 문인 가두데모

108 658 주강현 좌절 이란 해프닝 같은 기사가 실린다. 윤흥길 황석영 이문구 이호 철 염무웅 양성우 백낙청 조태일 최민 한남철 조해일 조선작 송영 이시영 송기원 석지현 이정남 김국태 김연균 백도기 고은 박태순 등 이 몸으로 종로거리에서 밀어붙인 셈이다. 긴조시대는 이렇게 문인들 이 몸으로라도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둡고 칙칙하였으 며 원초적이었다. 1974년에는 백낙청 교수가 서울대에서 파면 당한 다. 창작과 비평 으로 상징되는 민족문학 논쟁의 중심이었던 그의 파면은 어찌 보면 당사자로서는 불행일 수도 있었지만 광야로 나와 보다 넓게 보고 넓게 일할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하였다. 유신정권은 이렇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이는 넉 넉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겨우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결론적으로 문인들의 저항은 때로는 성명전과 각종 단체에 참여하는 조직적 운동으로, 또는 작가 예술인들 개개인의 작품을 통하여 발현 되었다. 작가들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있었으며 이를 시와 소설 등으로 써내려갔다. 문학 분야에서 희곡 분야는 거의 저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는 연극 분야의 저항의 몫을 민족연희운동 세력이 담당하고 있던 조건에서 극작계의 대부분은 유신체제에 몸을 던진 상태였기 때문이 다. 기성 연극계의 헤게모니를 쥔 세력들은 유신정권에 밀착하거나 방조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본격적 인 TV 드라마 등이 시청자를 끌어안기 시작하였으나 극작가 중에서 반유신 운동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당대 연극이나 드라 마 작가들의 체제 지향성을 그대로 드러내거니와, 1980년대의 개막과 더불어 개국 같은 체제 옹호적 드라마로 발현하게 된다. 유신정권의 제도적 폭력에 맞선 문화계의 저항은 문인들과 결합된 언론 출판운동으로 맞물린다. 일찍이 창비학교 문지학교 로 대비되 는 학교 아닌 학교 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창비 와 문

10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59 지 는 그 성격이 많이 달랐음에도 양대산맥을 형성하면서 청맥 이나 사상계 이후에 공개적 지면을 확보하고 공개적으로 정권에 저항하 였다. 45) 단순 문학잡지로 볼 수 없었으니, 문학인이 아닌 이들이 다 수 창비 등을 보면서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던 시절이다. 백낙청은 창 비는 물론이고 민족문학 진영의 든든한 이론가였으며, 훗날 그의 역 할은 비단 70년대에서 그치지 않고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 다. 당시만 해도 양성우가 겨울공화국 으로 구속되고, 문인이자 변 호사였던 한승헌이 어떤 조사-어느 사형인의 죽음 앞에서 라는 수 필 때문에 찬양고무죄로 반공법에 걸려드는 처지에 창비는 시대정신 의 저수지이기도 하였다. 1975년 8월 4일 창작과 비평 1975년 여름 호가 괘씸죄 에 걸려서 긴조9호로 판매 금지와 회수 명령에 처해진 다. 8월 25일에는 15종의 일반도서와 4종 정기간행물 판금 조치가 이 루어졌으니, 신동엽 전집과 조태일의 시집 국토 등이었다. 정권은 지식인들의 운동을 억제할 요량으로 신규 출판사 등록을 거의 받아 주지 않았으며 뒷거래로 판권을 사서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반체제운동의 하나로 출판운동이 급격히 시작되었다. 동아투위를 비롯한 언론 탄압의 결과로 쏟아져 나온 많은 기자들과 감옥을 갔다 온 학생들, 해직 교수 등 문단 이외에도 다른 유형의 재야 문필가들 이 생산되었고 문학 이외에 사회과학 서적의 열기를 몰고 오기 시작 하였다.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해고 된 지식인의 다량 증가는 곧바로 출판운동에 강력한 에너지를 부어넣는 격이 되었다. 유신체제에 도전 할 목적으로 아니면 단순한 계몽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그도 아 니면 먹고 살기 위하여 글과 책을 쓰고 번역을 했다. 결과적으로 유신 시대의 반유신적 계몽의 지평이 넓어져 갔으며, 체제가 위기로 내몰리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45) 물론 문지와 창비의 근본적 차이, 체제를 대하는 차이 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0 660 주강현 1970년대는 리영희의 책 제목처럼 전환시대 였다. 1970년대 중반 을 고비로 60년대에 절정을 치달았던 전집 출판의 기세가 꺾인다. 그 빈자리를 염가의 문고본이 메워갔다. 1976년에는 무려 30여 곳에서 1 천여 종의 문고본 신간을 출간한다. 세대교체 바람도 거셌다. 1970년 대 들어서면서 한글세대가 독서 시장을 주도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정권과 불화하였던 해직 교수와 해직 언론인, 운동가들이 대항문화운 동의 거점을 찾아 출판계로 뛰어들었다. 기왕에 1960년대부터 존재하 던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1975), 두레(1978) 등이 그 면면이었 다. 광민사 같은 곳은 노동운동의 교본을 찍기도 하였으니, 이렇게 1970년대식 사회과학 서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유신 시대는 금서와 판금도서로 얼룩진 출판 암흑기였다. 긴급조치 위반 협의로 걸린 김지하의 황토 (한얼문고, 1970)를 필두로 리영희 의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1974), 송건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등이 판금도서로 불온한 시대를 증언했다. 46) 리 영희나 송건호는 문인은 아니지만 당대인들에게 던져 준 시대의 스 승 으로서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유신정권은 책을 검열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출판인 및 필자를 감옥으로 보내거나 물리적 탄 압을 가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른바 금서목록은 나날이 두꺼워져 갔 으며 이러한 전통은 1980년대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편 다른 맥락에서 1970년대를 고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격적 산업화사회로 접어든 1970년대는 소설의 전성시대 였다. 최인호의 별 들의 고향 (예문관, 1974),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민음사, 1974), 한수산의 부초 (민음사, 1977) 등은 호스티스, 창녀, 서커스단처럼 근 대화에 밀려난 소외 계층을 새로운 감각과 문체로 그려냈다. 황석영의 객지, 한씨 연대기 등이 도도한 리얼리즘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 46) 박천홍, 광복60주년 책을 말하다-1960~1979, 한겨레 2005년 8월 13일자

11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61 는 동안 호스티스를 무기로 일면 당대의 청년문화 사조에 부응하고, 일면 호스티스형 연애의 미학을 추구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대개 영화화되어 장안의 관중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호스티스 문 화의 만연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농해온 젊은 여성들의 불행한 사회 적 진출 방식을 말해주기도 하였다. 1970년대는 무수한 투사를 길러내기도 하였지만 그 공포의 시절은 동시에 당대 문학의 산실 이기도 하였다. 황석영은 객지 에서 부랑 노동자의 좌절과 열려진 끝을 펼쳐 보임으로써 산업화에 밀려서 떠 도는 객지의 새로운 삶을 펼쳐보였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는 광주대단지 사건을 통하여 도시빈민의 수난을 포착하 였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을 통하여 난장이들의 나 라를 적나라하게 그려냈으며, 노동력만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으로서의 소설이 가능한 대목을 보여주었다. 47) 이문구는 우리동네 를 통하여 소위 공동체라고 믿었던 우리동네가 얼마나 절단 나고 있 던가를 그려냈다. 반드시 반유신적 내용이 아니더라도 김성동의 만 다라 (한국문학사, 1979)같이 인간 소외나 구원의 문제를 파고드는 문 학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반유신 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중을 역사발 전의 주체로 주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밖에도 고은 시인을 비롯 한 무수한 시인들이 반유신 운동에 몸을 바쳤다. 저항이란 측면에서, 가령 감옥을 가는 일에서는 김지하의 시가 선언적 성과를 지니고 있 었다면, 신경림의 농무 (월간문학사, 1973)를 필두로 한 그의 70년대 를 관통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1970년대는 노동자들의 직접적 진출 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석정남의 불타는 눈물,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 글모음집인 비 바람 속에 피어난 꽃 등은 노동자의 소외를 밝힘으로써 전태일의 47) 이재현, 1983 문학의 노동화와 노동의 문학화 실천문학 4권, 206쪽

112 662 주강현 죽음과 더불어 시대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백낙청 염무웅 등의 민족문학론,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론, 박 현채 정윤형 유인호의 민족경제론 등은 1980년대로 이월되며 사회과 학의 시대 를 꽃피운다. 따라서 1980년대의 시대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1970년 후반의 풍경이 반드시 매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70년대 말로 올수록 유신정권의 노골성은 두드러지고 탄압의 강도도 강해진다. 그만큼 정권의 말기적 증상도 다가오고 있었다. 1978년 그 유명한 동일방직 오물세례 사건이 터진다. 1979년에는 YH 노동자 사건 이 터진다. 이제 유신정권은 마지막 길을 가고 있었다. 이 같은 정황 속에서 나온 1979년의 문학인선언 (8.24)은 유신의 몰 락을 재촉하는 가을비였다. 이 선언문은 1979년 8월 11일의 YH 사건 과 그 사건으로 인한 자유실철문입협의회 대표 간사 고은 시인이 문 동환 이문영 인명진 서경석 등과 함께 구속된 사건에 관한 성명서이 다. 문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지만 문학은 가둘 수 없다 고 하였다. 황석영은 70년대의 문학적 진전을 이렇게 스스로 묘사한 바 있다. 작은 물골이 바위를 넘거나 돌 틈을 비집고 또는 암벽을 휘돌고 적당 한 깊이와 물의 힘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하는 비유와도 같이, 이 무수한 일상화된 장애와의 싸움은 생활에든 조직에든 역량의 축적이라는 좋은 결과를 안겨주는 듯하다. 사실 국가보안법, 긴급조치법 등의 각종 일방적인 제약을 뚫고 생존권을 지키고 되찾으려는 근로자들의 외로운 항쟁은, 칠십년대의 후반에 접어들수록 마치 밀폐된 찜통과 같이 폭발적 으로 급진전되어 갔다. 그리고 동조층은 두텁게 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정 치적 민권투쟁의 성격으로 변모해갔었다. 48) 2) 미술 분야 문학 분야나 연행 분야에 비한다면, 미술 분야의 1970년대의 투쟁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발아단계였다. 미술계의 운동성이란 국전 출품 거 48) 황석영, 1983 일과 삶의 조건-문학에 뜻을 둔 아우에게 실천문학 4권, 156쪽

11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63 부 운동 등의 소극적 미술운동으로 출발되어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국전 에서의 상 획득이 사회적 예술적 명예와 돈을 보장하던 시 절에 국전 출품 거부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가 적 명분이 곧바로 반유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술이론 진영에 서는 김윤수 등의 제한적 역량만이 진보적 관점에서 추동하고 있던 단계였다. 그러나 1969년 현실동인의 결성과 전시(신문회관, ~31) 는 70년대 미술운동의 하나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미술사 발전의 필연적 방향과 현실의 줄기찬 요청에 따라 새롭고 힘찬 현실주의의 깃발을 올린다. 우리는 미학적 불모와 현실에 대 한 무기력, 외래 신형식에의 몰지각한 맹종과 조형질서의 무정부상태, 그 리고 순수의 미신이 지배하는 이 척박한 조형 풍토에 그것들의 극복을 위 해 마땅히 도래해야 할 치열한 현실주의 바람의 필요성과 그 정당성을 확 신한다. 49) 3선개헌으로 장기독재가 현재화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 현실동인의 출현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20세기 한국미술사에 잔재한 봉건적 문 인 취미의 무의미한 복고적 유한미술과 심미적 예술지상주의, 서구 북미의 형식주의 따위를 철저히 비판하고 민족미술의 수립을 위한 대안으로 현실주의의 혈연적 토대를 이루는 이조 속화와 진경산수의 전통 의 계승과 발전을 강력히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 실주의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전시회는 좌절되고 그 선언의 논리로만 미술사에 남고 말았다. 당시 현실동인의 조직은 오윤 등 세 명의 작 가와 두 명의 이론적 지도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작품 발표가 차단 당함으로써 선언문만 전해진다. 차단 과정에 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없으나 필경 중앙정보부의 손길이 미쳤을 것이다. 비록 행사 자체가 차단당하였으나 이러한 동인의 출현은 미술운동 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서구의 비판적 사실 49) 현실동인 제1선언( )

114 664 주강현 주의와 민족 전통 미술의 통일이라는 매우 탁월한 창작방법론은 실 제로 1980년대 미술운동에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됨으로써 역사 적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50) 즉 그들의 현실주의 제창은 70년대 전 기간을 통하여 냉동되었다가 1979년에 새롭게 현실과 발언 으로 탄 생한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문은 다음과 같다. 현실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 현실 인식의 각도와 비판의식의 심화, 자 기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의 통찰로부터 이웃의 현실, 시대적 현실, 장 소적 현실과의 관계, 소외된 인간의 회복 및 미래의 긍정적 현실에 대한 희망 51) 이들 예술가들은 유신 시대에 그저 냉동 으로만 존재하던 것은 아 니었다. 예술가 특유의 감수성과 저항으로 시대와 불화하면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최열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회적 관심과 역사에 대 한 책임 있는 태도를 유발시킨 새로운 국면을 개진시켰던 이 시기의 개인과 집단의 의미는 미술에 운동성을 획득하게 하였다는 점 이며, 한편으로는 리얼리즘의 정신과 민족 미술의 전망에 대한 소중한 과 제를 제기하였다는 점 이다. 52) 미술운동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였으니 1980년대를 기다 려야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어떻게 보면 70 년대에 전성을 이루었던 연희 운동이 쇠퇴 조짐까지 보이는 것과 반 대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보이면서 판화운동 같은 명실상부한 미술운 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그 판화운동의 중심과 출발점과 정상에 화가 오윤이 위치해 있었듯이 1970년대에 준비된 것들이었다. 병기해야 할 점은 이응로 화백으로 대표되는, 동백림사건으로 인하 50) 최열, 1991 민족미술의 이론과 실천, 돌베개, 21쪽 51) 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 ) 52) 최열, 1985 우리시대의 미술운동 문화운동론, 도서출판 공동체, 232~234쪽

11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65 여 고난을 치러야 했던 해외에 있던 미술가들의 존재이다. 이는 미술 의 문제가 비단 국내뿐 아니라 해외동포를 포함하는 민족 전체의 문 제로 확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통일전선에서 미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법으로 다가온다. 이응로 예 술의 내용과 형식은 민족의 실천적 과제와 민족적 양식을 세계 속에 서 구현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3) 노래 분야 1973년 10월부터는 문공부에서 해마다 국민가요 건전 보급을 위하 여 새로이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순수음악 분야 작가들에게 위 촉하여 만든 국민가요들이 대중들에게 크게 영합하지 않자 대담하게 대중가요 작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하여 국민가요를 만들기 시작하였 다. 이러한 노래들을 음반화해서 전국에 보급하였다. 한국음악가협회 에서는 국민가요를 유행가 작가에게 만들어 보급케 했다고 해서 이 정책에 항의하였으며, 이 문제로 인하여 대중작가들과 순수음악 분야 와의 논란이 벌어졌다. 이 토론은 방송에까지 번졌다. 결론은 순수 분야는 물론 대중가요 작가도 상업가요만 만들 것이 아니라 국민가 요 창작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 후 문공부에 서 주관하여 해마다 순수 시인들이 기꺼이 시작을 했고, 실력이 있는 가요작가들이 곡을 만들었다. 순수 분야에서도 대중을 위한 건전 가 요곡을 기꺼이 만들었다. 53) 1975년 6월, 한국예술윤리위원회에서는 특별심사위원회를 구성, 종 래에 이미 발표되어 있는 가요 전반에 걸쳐 재심의한다. 해방 후 현 재에 이르는 수많은 음반과 가요를 재심의하기란 방대한 작업이어서 1, 2, 3차에 나누어 8월에 가서야 재심의 작업이 끝났다. 1970년대 당 5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문예총람, 655쪽

116 666 주강현 대의 가요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모든 가요를 심사한다는 것은 물 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국가가 시민 다중의 대중가요 까지 통제하겠다는, 군국주의 전쟁기에나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백 주에 일어났다. 심사는 결국은 졸속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임의성이 강하였다. 제1차 심의 발표가 있자 가요계에서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심 지어는 주한 외국기자들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취재경쟁을 벌였다. 세기의 코미디 로 외신을 탔다. 1차 재심에서 43곡이 금지되었는데, 이 중에는 꽤 히트했던 노래들이 있었다. 2차 심의 때의 문제점은 일 제시대부터 불리던 옛날 노래 중 월북 작가의 작품을 재정리하는 것 이었다. 작곡가나 작사자가 월북을 하였을 뿐이지, 일반 민중들은 그 러한 것에 개의치 않고 부르던 친숙한 노래들이 일거에 공식석상에 서 사라졌다. 대중가요의 반공주의적 차단막이 이렇게 그어졌다. 방 송윤리위원회에서는 이미 규제되어있는 곡과 동일하게 음반 제작 판 매를 금지시켰다. 예술윤리위원회의 규제는 음반에만 국한시키지 않 고 야간업소에서 쇼무대를 통해 직업적으로 노래 연주하는 것까지 일일이 심사하였다.(황문평의 평가) 54) 다중을 상대로 하는 음반뿐 아 니라 쇼무대까지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니, 국가는 이제 술집까지 장악 하였다. 이해성은 이렇게 국가적 통제를 정리하였다. 팝뮤직은 수용자들의 순간적인 공감을 최대공약수로 심오한 음악적 해 석이나 다양한 예술적 반응을 거부하고 있는 성격이어서 사람들의 호기 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섹스 폭력 LSD 마리화나 같은 환각제가 팝송가 사에 많이 나타나고 이러한 팝송들은 최신 해외 유행곡이라고 앞을 다투 어 방송에 소개한 여파는 결국 1975년 말 대마초 연예인들의 검거에서 나 타났고 젊은층에 마리화나 흡연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비로 소 반성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5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문예총람, 656쪽

11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67 는 불건전 외국가요에 대한 심의를 시작했다. 이 심의에서 사회저항 및 불온사상 고취 31건, 환각제 음악 8건, 폭력 및 살인 표현 8건, 외설 21건, 반전사상 고취 16건, 불륜 퇴폐 범법 조장 51건 등 135건의 금지곡이 발 표되었다. 55) 그리하여 1975년을 기점으로 무분별하던 외래 대중음악의 유입은 차츰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으로 정화되기 시작하였다 고 하였다. 한 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불건전외국가요백서 까지 발간하였다. 이러한 통제 속에서 가요계는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통기타를 즐 기면서 미국의 컨트리송 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하드록 뮤직에 심 취하기 시작하였다. 사이키델릭 음악이 상륙했고 소울리듬이나 고고 리듬이 어떤 노래에나 파고들었다. 청바지와 통기타, 이것은 청년문 화의 상징처럼 사회문제화되었다. 기타 칠 줄 모르면 간첩이다 라는 유행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청년문화에 대한 구박이 시작 되었다. 신중현의 미인 은 저속한 가사, 거짓말이야 는 불신풍조 조 장으로, 고래사냥 과 아침이슬 은 시의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엄금 되었다. 사실 신중현의 미인 은 박정희의 영구 독재를 비꼬아 한 번 하고 두 번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라는 개사곡이 문제였다. 고래사 냥 이나 바보들의 행진 은 대중문화의 굴절과 비굴을 드러내는 것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이를 처벌하였다. 대마초 가수들이라는 닉 네임이 붙여졌으며 대중예술에도 족쇄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사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은 대중문화와 파쇼와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1970년대 초반의 청년문화 붐 은 새로운 대중문화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면서 여전히 대중문화 적 사랑타령과 미국식 자유주의적 흉내내기였다. 당시 베트남전쟁으 로 미국에서 강하게 불었던 반전가요 풍의 미국 포크의 진보적 사회 적 측면이 거세된 채 이식된 포크는 막연한 미국식 히피이즘과 대마 55) 앞의 책, 679쪽

118 668 주강현 초 흡연 스트리킹 등으로 수입 되었다. 그러나 일부 젊은이들은 그 포크마저도 막연한 저항으로 받아들였고 장발조차도 체제에 대한 보 이지 않는 저항 으로 받아들였다. 유신정권은 일제시대처럼 훈육주 임 이 되길 원하였다. 유신체제는 장발 미니스커트 등의 단속을 통해 미국식 풍조조차 금지시켰으니 박정희의 사고는 군국주의 훈육교사 그대로였다. 이장희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추자 등이 구속, 활동정지를 당한다. 새로운 음악적 흐름을 주도하던 이들이 굴비 꿰 듯이 끌려가고 포크는 분위기로나마 가지고 있던 반문화적 요소를 상실하고 기성세대로 넘어간다. 사실 당시에 대마초는 해피 스모그 라는 이름으로 다방, 길거리 등에서 넘쳐나고 있었고 담배 피우듯 나 눠 피우는 소일거리로 번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 강하게 불고 있 던 반전과 히피들의 풍조와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었다. 정권은 여기 에 강하게 메스를 들이대었다. 구속된 이들은 두들겨 맞는 고문을 당 하였으며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물론 가요계는 물론이고 밤무대에서조차 추방된다. 금지곡이 너무 많아져서 방송국에서는 틀 어줄 음악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드물게 남은 김민기는 다소 민중가요의 중심이 된다. 친구, 아침이슬 등이 그러하다. 그리하여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에서 연 유한 노래무용 형식의 공장의 불빛 은 당대 노래운동에서 민중 지향 성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소리굿 아구 의 삽입곡인 이종구의 마라데 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산, 김영동이 윤동주의 시에 노래 를 붙인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의 작품이 눈에 뜨인다. 어느 덧 1970년 김민기가 작사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아침이슬 은 한대수 의 희망의 나라 와 함께 반체제 가요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대수가 성장배경에서 비롯된 한국적 현실에서의 현실 부적 합성 을 반전가수풍의 음악에 실어보이고 있음에 반하여, 김민기는 비록 초기에는 나약하고 개인적 차원의 노래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지

11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69 만 건강한 역사의식을 배경으로 끝끝내 결정적인 패배주의나 소비주 의로 빠지지 않는 건강함을 보여준다. 1979년에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이 거둔 예술성도 이 같은 역사의식에 기반을 둔 것이리라. 그러나 김민기의 노래, 혹은 김민기적인 것 에 관한 것의 극복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각 대학의 메아리 (서울대)를 위시한 노래운동 서클 에서 새롭게 정리된다. 56) 사실 엄밀하게 말하여 유신체제 하의 노래에 관하여 운동 이란 표 현은 거의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대학가에 서울대의 메아리, 이화 여대의 한소리회 등이 있었지만 이들 모임은 1970년대 후반의 치열 했던 민주화운동과는 아무런 연고를 맺고 있지 않았다. 77년에 결성 된 메아리와 78년의 한소리는 특정 범주의 노래에 대한 감각적 선호 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대중가요가 제공하지 못하는 중산층 출신 대학생들의 세련, 섬세, 정돈의 관념적 지성과 추상적 정서들은 기존 의 대중가요에 대한 철저한 문제의식이나 새로운 노래문화 건설이라 는 매우 초보적인 대의명분조차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다만 이들 메 아리류의 노래서클은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하게 되거니와 70 년대 후반의 잉태기를 간과할 일은 못된다. 당시에 대학생층에서 인기를 누렸던 70년대 초 포크송들이 그 선 호 범주의 거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대중가요계 일반은 대략적으로 저항이라기보다는 용 비어천가 를 부르고 있었다. 문승현은 노래책에 수록된 노래들을 대 개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70년대의 포크송들로 한대수의 바람과 나 하룻밤, 양병집 의 역 서울 하늘, 김민기의 친구 아침이슬 바다 꽃피우는 아 이 가뭄 등이다. 여기서 김민기의 노래들은 한국노래운동사에서 하 56) 김남일, 1984 노래의 운동성 확보를 위하여 공동체문화 2집, 282~283쪽

120 670 주강현 나의 분명한 획을 긋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이 상황 속에서 한 지식인의 고뇌를 추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둘째는 미국의 반문 화, 반전 가요들과 찬송가들이다.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Blowing in the wind), 들에 핀 저 꽃들은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등이다. 이들 60년대식 미국 포크 송들은 미국 사회에서 문화혁명적 국면을 연출하였거니와 그대로 수 입된 것이 청바지 장발 통기타 선풍이었다. 셋째로는 타박네여, 진 주남봉가 같은 전래민요와, 사노라면, 허재비 같은 그리 많지 않 은 구전가요들이 꼽힐 수 있다. 오히려 당대 민중들의 가슴을 채워준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전 신민요였다. <쫌백이 서울 가는데> 쫌백이 쫌백이 서울 가는데 서울 가는 기차삯이 너무 비싸서 걸어가겠네 걸어가겠네 남이야 걸어가든 남이야 타고가든 다 같이 서울 가긴 마찬가지다 쫌백이 쫌백이 담배 피는데 거북선 한 갑 500원 너무나 비싸서 꽁초 피겠네 꽁초 피겠네 남이야 꽁초 피든 남이야 거북선 피든 다 같이 담배 피긴 마찬가지다 <사노라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쭉 펴라 마지막으로 노래집단 성원들이 만든 소수의 창작곡들이 있는 바, 진달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농민의 노래 등 비교적 선

12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71 명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980년 광주의 충격은 노래운동에서도 하나의 선명한 전환점이었으니, 역으로 1970년대 말까지의 노래 운동 은 운동 이란 표현이 불가할 단계였음을 알려준다. 57) 이 시절에 1960년대의 대중가요인 아다다, 민요인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도 민중가요의 목록에 진입하였다. 해방가, 탄아탄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훌라송 과 정의가,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등의 교회운동, 복음성가, 외국반전가요 번안곡 등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대중의 각질화된 감수성을 뚫고 들 어갈 수 있는 일상의 노래, 곧 생활가요는 노래운동이 겨누어야 할 최초이며 최후의 표적이었으나 그 단계로 나아가려면 보다 많은 시 간을 기다려야 했다. 참고로 앞의 미술 부문에서 이응로 화백의 경우처럼 음악에서 동 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윤이상의 존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윤 이상은 단순한 재외음악가를 뛰어넘어 남북을 아우르는 음악성, 나아 가서 동서를 아우르는 음악성을 통하여 민족음악이 무엇을 할 것인 가를 화두로 남겨준 경우이다. 국제사회에서의 반유신운동에 있어 윤 이상의 음악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박 정권에 위협적이었다. 4) 영화 분야 21세기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1970년대의 영화계는 문화운동사적 으로 볼 때에 침체 정체 그 자체였다. 1980년대 벽두에 지난 10여 년을 반성하면서 내놓은 장선우의 고백은 70년대 영화 상황을 압축 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은 60여 년의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겨울이었다. 외세의존 형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사회문제는 심화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57) 문승현, 1985 노래운동의 몇 가지 문제들 문화운동론, 공동체, pp.196~200

122 672 주강현 강화된 영화법은 영화에 있어서의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왔던 셈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영화는 서민 대중의 일상적 슬픔과 기쁨, 노 여움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반영해준 기억조차 갖고 있질 못하고 소비적 인 성( 性 ) 유희를 창녀, 호스티스, 여대생, 유부녀 할 것 없이 모두 끌어내 어 분칠했으며, 정체불명의 권격물을 양산하고, 기껏해야 그 사회적 역 사적 성격이 모호한 종교물과, 현실과 유리된 소위 문예물로 한 시대를 일관해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들 가운데는 상업적 성공 을 상당히 거둔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몇 개의 성공 때문에 얼마 나 많은 정열들이 헛됨 꿈에 젖어 수포로 돌아갔으며 낭비를 일삼았던가. 한번도 다수 민중의 여망과 아픔을 반영해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채 늘 많 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보아주길 기도했으며, 얼마나 많은 밤을 지레 의기 소침하여 물러나기만 했던가. 영화가( 街 )는 불쌍한 사람들, 또는 자기도취 에 빠진 사람들이 모여 소주나 홀짝거리는 뒷골목으로 취급받았다. 영화 제작권을 독점한 몇몇 제작자에게, 또는 감독에게 팔려나가길 기다리며, 좀더 비싸게 팔려나가길 매춘( 賣 春 )의 겨울이었다. 58) 70년대의 영화계 사정은 말할 수 없이 나빴다. 영화를 유신 이념의 구현 수단으로 정책화하기 위한 이중검열제도 그리고 기업화정책을 일층 강화할 목적으로 한 영화제작의 등록제로부터 허가제로의 전환 등 1973년의 제4공화국 영화법 개정은 영화 자체보다 기업을 살리는 것이었으며, 영화를 한층 소비상품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대중문 화 범주와 겹치거나 일치되는 영화의 경우, 영화산업이란 명칭에서 주어지듯이 유신체제의 산업통제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의 가이드 라인이 정해졌다.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우수 영화 를 선별적으로 지원하는데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 국 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런 극심한 외적 압박 속에 70년대 한국영화의 주류는 창부나 호 스티스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었다. 그네들을 통하여 한국사회를 분 58) 서울영화집단편, 1983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학민사, 11~12쪽

12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73 석 비판한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관객층의 변 화도 주목된다. 70년대의 한국영화는 온 가족이 저녁에 부담 없이 극 장에 가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젊은 아베크족이나 할 일 없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59) 70년대 한국 영화에 특징적인 것은 창부나 호스티스를 소재로 하 는 여자의 육체적 방황에 관한 영화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짧 게 끝난 영상시대 란 잡지를 중심으로 모인 젊은 영화인들의 등장 이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74),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75), 김호 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75) 등은 70년대 들어 전통과 단절되어 새로 운 윤리관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제작하여 젊 은층을 끌어들이기는 하였으나 치열한 작가적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 홍기선은 그들은 1930년대 전후의 경향파 영화인 들에게 발견되는 이론적 방법론도 제시하지 못하였으며 제작에서 조 직적 적극적이지도 못하였다 고 지적하였다. 즉 70년대 한국영화의 주류는 사회를 분석 비판할 수 있는 리얼리즘 측면에서 본다면 대단 히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60) 70년대 전반기를 살펴보자. 제작면에서 보면 70년도 237편, 71년도 202편, 72년도 122편, 73년도 125편, 1974년도 139편, 1975년도 94편으 로 줄어들었고, 특히 75년도의 94편은 백편 이하로서 1950년도 중반 기 한국전쟁 당시의 제작 수준을 나타낸다. 한국 영화의 관중 동원 숫자도 나날이 감소하였으며, 1975년을 기준, 서울 시내에 개봉극장 11관에서 한국 영화 전문 개봉관은 국제극장 하나뿐이었다. 외화의 수입쿼터를 얻기 위하여 한국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 59) 서울영화집단편, 위의 책, 300~302쪽 60) 10 26사태와 제5공화국 출범 사이에 제작되어 밑바닥 생활의 묘사를 통하여 현 실문제를 지적한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 (81), 꼬방동네의 애환을 그린 배 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 (82) 같은 연속성을 고려할 일이다.

124 674 주강현 있는 것은 유신정권이 선포된 다음인 1974~75년 사이에는 19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우수 영화에 대한 집중 보상책이 정책적으로 이루 어지면서 이른바 두 번째의 문예영화 붐을 가져왔다. 1974년: 13세 소년(선우휘 원작, 신상옥 감독),별들의 고향(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그대의 찬손(강신재 원작, 박종호 감독),파계(고은 원작, 김기영 감독), 신설(강신재 원작, 조문진 감독), 갈매기의 꿈(황순원 원작, 최하원 감독), 환녀(이영일 각본, 김선호 감독), 꽃상여(하유상 원작, 김기덕 감독), 토지(박경리 원작, 김수용 감독). 광화사(김동인 원작, 주동진 감독), 이중섭(고은 원작, 곽 정환 감독), 본능(이종호 각본, 김수용 감독)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 김선호 감독), 극락조(김동리 원 작, 김수용 감독), 빛은 어디에(강신재 원작, 정소영 감독), 인간 단지(여수중 각본, 이원세 감독), 삼포로 가는 길(황석영 원작, 이만희 감독), 10대의 영광(김용진 각본, 고영남 감독), 애종(송 숙영 원작, 정진우 감독), 바보들의 행진(최인호 원작, 하길종 감독), 안나의 유서(오영수 원작, 최현민 감독), 내일은 진실(김 지연 원작, 김수용 감독). 소(유치진 원작, 최하원 감독), 마지막 포옹(유동훈 각본, 최하원 감독), 약속(하근승 원작, 김응천 감 독), 황토(조창래 원작, 김수용 감독), 불꽃(선우휘 원작, 유현목 감독), 숲과 늪(황석영 원작, 홍파 감독)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은 개봉 성적이 40만을 넘는 관객을 동원했 고, 김선호의 영자의 전성시대 도 30만,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도 18만을 동원하였다. 이들 작품은 한결같이 당대 젊은이들의 생활과 사랑 때문에 방황하는 젊은이들, 생활의 밑바닥 젊은이들 그리고 대 학 캠퍼스의 고민들을 작품 내용으로 했다. 그밖에 주목할 것은 국책 영화다. 평론가 이영일은 1975년 이후의 외화 수입 쿼터의 배정 방 침 변경으로 이른바 문예영화가 주춤하였으며, 그 대신에 민족사관의

12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75 정립, 건전한 사회기풍을 위한 계몽적 작품, 또는 반공사상을 높이기 위한 작품 등 당대에 새로운 낱말로 등장한 국책영화 제작에 쏠려 있다 고 하였다. 61) 개정된 영화법, 게다가 고도의 지원 통제 정책 등으로 새로운 영 화 는 극소수 영화인들의 꿈으로만 간직되었던 시절이었다. 가령 1973 년 영화법 시행령 개정으로 정식등록업자가 아닌 소위 PD메이커들인 군소업자들이 제작한 영화들은 5월 17일부로 제작된 것 이후에는 일 체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아 영화계는 날벼락을 맞은 분위기였다. 끝 내 기일 내에 완성하지 못한 작품 30여 개는 사장되고 말았다. 이러 한 통제된 조건에서 새로운 영화는 출현되기 어려웠다. 유신 선포 이후에 유난히 법적 통제장치가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강화된다. 영화법 은 1966년에 제정되고 1973년 2월 16일에 개정된다. 제3장에 영화 검열 조항을 보자. 모든 영화는(예고편을 포함하여) 상 영 전에 문화공보부장관의 검열을 받아야 하며, 당연히 검열을 통과하 지 못하면 상영불가였다. 검열 받은 극영화라 할지라도 TV에 방영하 고자 할 때는 재검열을 받아야 했다. 검열의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⑴ 헌법의 기본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 ⑵ 공서양속을 해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⑶ 국제 간의 우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을 때 ⑷ 국민정신을 해이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물론 통과가 되더라도 가위질은 예사였다. 외국영화 수입도 영화 법시행령 11조에 62), ⑴ 반국가적인 내용이 있다고 인정되는 영화, (2)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미풍양속을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 61)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문예총람, 582~583쪽 62) 대통령령( )

126 676 주강현 되는 영화 를 엄금하였다. 게릴라식 소형영화나 비디오기 등이 개발되지 못한 시절에 기성의 영화판이 반유신의 대열에 포함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하였다. 제 작검열이라는 1차적 검열장치 그리고 대중에게 공급되기까지 무수하 게 거쳐야 하는 제도적 장벽 앞에서 반유신 영화의 제작은 이루어지 지 못하였다. 불행하게도 수많은 영화인 중에서 망명영화인 하나도 없던 시절의 아픔이었다. 맺음말 : 미완의 과제들 -유신체제 하 문화예술계의 몇 가지 풍경들 1970년대는 국가폭력으로 상징되는 지배권력의 자의적 폭력과 광 기, 야만의 세월을 의미했다. 반공주의에 포획된 자유민주주의, 감옥 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반공주의 체계화 시대, 그리하여 전 사회의 병영화와 폭력적 군사문화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던 침묵의 사회였 다. 63) 그렇다면 당대의 운동사는 운동단체 소속이나 명망가들만의 잔 치였던가. 감옥에 끌려가는 것도 학력순이었고 벼슬이었던가. 운동에 관한 보다 열려진 지평에서는 당대에 처해있던 현실을 다시 볼 필요 도 있을 것이다. 학교는 연일 휴교를 밥 먹듯 하였으며, 1970년대 학번의 일과란 일 단 입학하고 나면 곧바로 데모 로 돌입하고 연이어 휴교령으로 집에 서 놀게 되는 반복성이었다. 경제적 부의 축적이 일천한 상태에서 학 생들이 일할 곳은 마땅하지 않았다. 공장에는 공돌이, 공순이 란 이 63) 조연현, 2003 군사독재와 반공주의, 그리고 우리안의 군사문화 기억과 전 망, 118~135쪽

127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77 름의 새로운 부족 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마당에 철야는 물론이고 산 재조차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노동문화 따위의 이름 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시다의 꿈 만 꾸어야 할 상황이었다. 문학예술인 중에도 새로운 세상을 희구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이들 이 있었고, 70년대 후반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이들이 양산되었지만 당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투쟁 에만 함몰되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고 투쟁이 일상사였다고 서술할 수는 결코 없다. 어느 시대에나 선도와 후진은 있는 법이었다. 운동사의 관점에서는 역시나 문화투쟁의 시대였지만, 보편적으로는 문화소비의 시대를 열었으며 침묵의 문화로 일관한 측 면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대의 보다 보편적인 문화는 역시나 통기 타나 생맥주 문화, 혹은 별들의 고향 류의 호스티스 및 창녀들 이야 기였다. 유신 시대의 개막 당시에 요란하던 청년문화론의 실체는 사 회적 저항을 호도시키는 또 다른 전략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억압된 사회적 분위기를 호도하기 위하여 언론이 주도했던 왜곡된 형태의 소비문화이기도 하였으니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를 통하여 돈과 명 예를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외견상 물리적 폭압에 의한 저항보다는 일상의 삶에 전념하는 이들이 다수였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란 공간에서의 반유신운동은 일부의 유신 추종 세력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실 적인 삶이 남루하고 체제에 온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반유 신의 정신은 전일적으로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다는 정서의 문제를 인 식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말기로 갈수록 사회적 모순관계가 극심해 지고, YH 사건에서 보이듯이 노동문제가 극단적으로 불거지면서, 이 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은 전면적으로 여공들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 실에서 반유신운동의 지지와 성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객지

128 678 주강현 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 불후의 스테디셀러로 읽히고 있 었고 창작과 비평 이 신문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판매되고 있었으 며, 김민기의 노래가 음유시인의 노래처럼 구전으로 번지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이중적 측면을 두루 고려하면서 당대의 이면적 주제와 표면적 주제를 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제 몇 가지 당대의 풍경을 통하여 당대 문화예술운동사의 이면을 빛 바랜 활동사진 보듯이 보는 것으로 본고의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그 활동사진 중에는 흡사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처럼 유신을 옹호 지 지하면서 이득을 얻고 있었던 일군의 세력에 대한 역사적 비판도 당 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복사물과 구전과 유언비어 김지하의 오적 이 당대를 풍미하였으나 물리적 탄압이 강력하게 가해지자 은밀하게 복사된 채, 혹은 구전문학 수준으로 전국을 떠돌 았다. 그동안의 문화예술운동사 서술을 대학으로 치자면 서울대 중 심 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짙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른바 변방 에서 는 문화예술인 특유의 시대적 예감 으로 한 시대의 폭압을 받아들였 을 뿐이며, 그렇듯 세련된 문화운동사 서술 방식으로 서술되기는 어 려울 것이다. 신동엽의 시들이 구전을 통하여 암송되기도 하였으며, 노래에 실려서 퍼지기도 하였다. 등사기로 대비되는 당대의 복사물과 구전, 유언비어의 힘은 문화예술운동에서 매우 소중한 대목이었다. 대중가요의 가사들은 민중의 힘으로 개사되어 노가바로 바뀌어 세상 을 풍미하면서 마음껏 정권을 조롱하였다. 한 장의 외신지에 실린 숨 겨진 정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정리되고 알 수 없는 손 에 의하 여 퍼져나갔다. 알 수 없는 손 은 중앙정보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민중

129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79 의 손이 그러하였다. 운동이란 이런 계량 측정이 불가한 것까지 포함 하리라. 구전과 유언비어조차도 잘못되었을 때, 김지하의 비어( 蜚 語 ) 에서처럼 국가보안법으로 사라지던 시절이었으니 운동사의 작은 귀 퉁이에 써둘 일이다. 21세기가 인터넷의 시대인 만큼 누리꾼들의 엄 청난 정보량과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정보민주화 시대라고 한다면, 그 만큼 정보가 통제되고 감시되는 빅 브라더의 시대 이기도 하다. 그 런 점에서 70년대의 제한된 정보를 공유한 민중들과 역시나 제한된 정보밖에 가질 수 없던 국가와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반유신 운동에서 유언비어의 힘, 민중적 비어의 힘을 밝혀내는 일 은 지식인 중심의 운동과 또 다른 차원에서의 당대의 진실일 수 있 다. 민중에 의하여 펼쳐졌던 알 수 없는 힘 의 운동사를 작은 귀퉁 이에 적시할 일이다. 관료 집단과 문화예술인들의 맹목적인 충성 경쟁과 침묵의 동의 1972년 유신이 선포된 이후에 이듬해의 공연예술계에는 갑자기 국 가주의를 칭송하고 새마을운동과 새로운 국민의 자세를 강조하는 건 전 드라마 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음악회와 목사님들의 조찬 기도회가 줄을 이었으며,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낭자하였다. 이 부끄 러운 일에 관한 치밀한 행적조사와 역사적 기록은 아직 이루어진 적 이 한 번도 없다. 문화예술계에서 유신체제를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 로 지지한 이들은 관료 집단과 지식인들이었다. 관료들은 유신체제의 문화예술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고 자본을 분배하고 감독하는 일까 지 떠맡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훗날 유신 시대의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았다. 가령 70년대를 총정리한 듯한 1980년 대벽두의 국풍 81에서 돌연 요 란한 꽹과리 부대의 신호음에 따라 만장을 앞세운 풍물패가 행렬지

130 680 주강현 어 지나갔고, 탈춤 패거리, 그리고 무수한 전통연희패가 광장을 채웠 다. 무형문화의 뛰어난 예능인들이 전국에서 긴급 소집되었으며, 정 당한 출연료를 받은 만큼 성심성의껏(?) 축제를 준비하였다. 소위 무 형문화 지정 보유자들이나 대학의 탈꾼 중에도 이들 파쇼의 제전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이름을 일일이 들이댈 필요도 없이 너무도 많 은 이들이 이 행렬에 동참하였다.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 등 곳곳에도 오로지 직 업 이란 이름으로 유신체제를 암묵적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우 리는 유물만 조용히 챙기고 있었으니 아무런 죄가 없다 고 하는 이들 에게는 당시에 유신 기념 전시회에 내걸린 품목과 팸플릿을 다시 한 번 읽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학 강단을 장악한 이들도 학문이란 이름으로 유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 분명한 현실이었다. 가령 20세기 한국철학의 중심으로 손꼽히던 철학자 열암 박종홍(1903~1976)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면서 철학과 권력의 퇴행 적 결합을 해버린 사례에서 당대 지식인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64)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았다 년대의 풍경이었고 이후의 연속되는 풍경이었으니, 현하 박정희 신 드롬 의 배후에는 이 같은 세력들이 깔려있는 셈이다. 반유신운동사 서술의 과정 못지않게 이들 유신의 대열에 나선 이들에 관한 역사 서술의 춘추대의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검열관으로 나선 동업자들 동업자들이 주동이 된, 방송윤리위원회 신문윤리위원회 도서-잡지 -주간신문윤리위원회 공연윤리위원회 등은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64) 홍윤기, 2001 박종홍 철학 연구-철학과 권력의 퇴행적 결합 역사비평, 161 ~213쪽

131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81 문화예술을 통제하였다. 영화에 대한 가위질은 일상적이었고 자기검 열의 장치들이 움직였다. 제작자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검열 장 치는 중앙정보부와 경찰 같은 보안부서들은 물론이고 공보부의 해당 책임자들과 말단 공무원들, 각종 위원회를 장악한 자체 검열단들 그 리고 각종 윤리위원회에 적극 소극적으로 가담하여 검열관으로 나선 동업자들이 존재하였다. 그네들 동업자들의 손에 의하여 작품이 잘리 기도 하거 공연 불허를 받기도 하였다. 더 무서운 검열관들은 정보부 를 필두로 하여 간첩단까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손들 이었다. 가 령, 1974년 2월 5일 도하 신문에는 문인 지식인 간첩단 적발 사건 이 전면으로 도배를 한다. 드디어 간첩이 출현하게 되면서 당대의 마녀 재판이 시작된다. 그해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치 시대, 이른바 긴조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검열관들 은 이런 행위를 지켜보면서 공산주의 정치선동꾼으로 내몰은 문화예 술인들의 조직이 존재했다는 점이며, 좀더 무서운 검열관들은 재갈 물린 언론의 자발적 충성이었다. 1971년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단 없는 전진 을 외치는 체제안정론과 파쇼독재 권력사회로 나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민주사회위기론이 바야흐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서술이란 진보라는 관점에서만 서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해 6월 24일부터 7 월 4일까지 열린 국제펜대회에서 감옥으로 끌려간 김지하 석방 운동 은커녕 놀아나는 침묵 으로 일관한다. 한국펜클럽은 아예 김지하가 정치선동꾼 이라는 추태까지 부렸다. 문학평론가 조연현 등은 일찍 이 정권과 어우러지며 정권을 지탱하고 문학의 진보적 흐름에 역행 하고 있었다. 한국 문인들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을 찬양 하는 시를 쓰거나 새마을 지도자 연수를 받는 문인들도 줄서기 시작 하였으며, 그네들 중 일부는 후일 자유실천문학운동에도 이름을 걸어 놓아 양수겹장을 노리기도 하였다. 65)

132 682 주강현 그리하여 이러한 기대효과는 곧바로 자기검열이라는 사전 제어장 치로 작동하였으니 무서운 검열관은 민중들 가슴에 들어차버렸던 것 이다. 이것이 유신체제의 조건이었고 파쇼의 힘이었으며, 이를 뛰어 넘어 인간의 자존심을 내걸은 싸움의 길을 걸어간 것이 당대의 문화 예술운동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자기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낭비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유신체제란 이처럼 반인 간적 반역사적 범죄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반유신운동의 역사 못지않 게 검열관으로 나섰던 동업자들에 관한 유신의 역사 역시 역사 서술 에서 제외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통금과 애국가, 장발과 스커트로 압축되는 병영문화 문화예술적 상상력으로 집약하자면 유신 시대의 문화적 상황은 통금 시대의 문화 란 상투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국가와 법이 정한 테두리에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도심은 정적으로 접어들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금을 깰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차만이 오가는 통금의 시대에 문화적 환경 역시 통금의 문화 그 자체였다. 그 통금은 1982년 1월 5일에야 독재정권의 주어진 시혜 로 풀려졌다. 기나긴 통금의 시대는 애국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자발적 애국이 아 닌 동원 체제적 국가주의적 애국의 결과는 코미디였다. 가령 당대 극 장의 풍경은 엄숙한 학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면 영화를 보기 전에 문화영화를 한편 보고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 기립해야 했다. 아무리 저질 영화를 보러 갔어도 문화영화를 통하여 문화인이 되던 시절이 었다. 성적 호기심으로 야한 영화를 보러 왔다가도 애국가를 들으면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예의를 갖추어야 했고, 예의의 절차가 끝나면 다시 야한영화의 세계로 접어들었으니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 65) 박태순은 자실문예사( 쓰면서 이 대목에서 차마 더 이상 쓸 수 없노라고 하였다.

133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83 었다. 길 가던 사람들도 애국가가 들리면 모두 멈추었으니 시내 중심 가가 정지 상태였다. 민방위 사이렌은 그 극치였으니 병영국가에서 모두들 동작 그만 하는 코미디배우가 되고 말았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고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장발에 대한 저항의 심리가 존재하였으니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보존하기 위 해 어두운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곤봉과 함께 가위와 심지 어 바리깡 을 들고 다니면서 장발족을 사냥하였다. 아예 70년대 말 에는 파출소로 끌려와 밤을 새운 뒤에 통행금지 윤락행위 위반녀와 함께 즉결에 넘겨지기도 하였다. 경찰뿐 아니라 당대 어른들도 장발 을 싫어하였다. 장발이 민주화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것이고, 미국 히피 문화의 잔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치부는 할 수 있어도 머리를 지키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도망 다니기를 그렇듯 한심한 것 으로 보는 문화운동사 서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장발 그 자체가 저 항 그 자체는 분명히 아니지만, 머리를 자르는 국가훈육주임과 자유 청년의 대립에서 병영국가를 거부하는 문화적 층위는 분명히 엿보인 다. 가수 윤복희가 귀국하면서 처음 유행시켜 열풍처럼 뒤덮였던 미 니스커트 역시 무릎 위 15센티는 위법이었다. 경찰관이 자를 들고 다 니면서 젊은 여성의 허벅지를 재던 시절이 지나가자 핫팬츠가 유행 하였는데 실은 미니스커트보다 더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단속 논의는 나왔으나 미니스커트에 대해서보다는 관대하였다. 치마 는 길이를 재고, 바지는 아무리 짧아도 봐줄 수 있다는 병영국가의 논리 속에 미적 감각이라거나 문화예술정책이 가능할 수 없었다. 박 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코미디였으니, 찰리 채플린이 희극으로 풍자하 였듯이 독재란 언제나 코미디와 연결되는 법이었다.

134 c 684 주강현 참고문헌 <한글논저> 김남일, 1984 노래의 운동성 확보를 위하여 공동체문화 2집 김사열, 년대 이후 대구지역의 민중극운동 일꾼의 땅1-거친 들판 에 씨앗을, 분도출판사 김일출, 1958 조선민속탈놀이연구, 과학원출판사 박진도 한도현,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 역사비평 1999년 여름호 박천홍, 광복60주년 책을 말하다; 한겨레 신찬균, 199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회고와 개선점 전국민속예술경대회 개선방안 자료집, 한국문화 정책개발원 유인열, 1977 민중문화운동으로서의 연극 대화 5호 이재현, 1983 문학의 노동화와 노동의 문학화 실천문학 4권 정이담, 1985 문화운동시론 문화운동론, 공동체 1964 조선의 민속놀이, 사회과학원민속학연구소 조영호, 1977 르포-함평고구마사건 대화 4호 조희연, 박정희시대의 강압과 동의 역사비평 2004년 여름호 주강현, 세기 우리문화, 한겨레신문사,199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개혁과 전망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선방안 자료집, 한국문화 정책개발원, 2005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웅진 지수걸,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조선농촌진흥운동 역사비평 1999년 여 름호 채희완, 년대 문화운동-민속극운동을 중심으로 문화와 통치, 민 중사 채희완 임진택, 1985 한국의 민중극, 창작과 비평사 최 열, 1991 민족미술의 이론과 실천, 돌베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문예총람 한국방송공사, 1981 國 風 論, 한국방송공사

135 반유신과 문화예술운동 685 한도현, 1989 국가권력의 농민통제와 동원 정책-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한 국농업 농민문제연구 2, 연구사 허 은,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의 성격 역사문제연구 11집 홍윤기, 박종홍 철학연구-철학과 권력의 퇴행적 결합 역사비평 2001년 여름호 황석영, 1983 일과 삶의 조건-문학에 뜻을 둔 아우에게 실천문학 4집 農 村 振 興 運 動 の 全 貌, 朝 鮮 總 督 府,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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