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센터 http://www.civiledu.org 제목: 사무엘 프리먼의 < 정의와 사회계약Justice and the Social Contract> 번역: 이한 제3 장 결과주의, 공지성, 안정성 그리고 재산소유 민주주의 1 이 장은 롤즈가 공리주의 및 다른 결과주와의와 맺는 복잡한 관계들의 측면을 추가적으 로 성찰한다. 이 장은 세 가지 별개의 자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I절과 II절에서 나는 왜 롤즈가 공리주의, 즉 완결적으로 합리적인 도덕을 제공하고 상충하는 요구들을 체계적으로 순서지울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이론을 그토록 강력한 도덕관으로 여겼는지를 살펴보겠다. 공리주의의 이 바람직한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부정의로 갈 수 있는 잠재성에 대한 반론을 피하기 위하여 현대의 일부 결과주의자들은 정의의 이유를, 합리적 행위에 의해 증진되어야 하는 좋은 결과에 통합시켰다. 롤즈의 일부 논급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이 제안들의 잠재 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자 하며, 특히 A.K. Sen 의 판본에 집중할 것이다. 2 III과 IV 에서 나는, 롤즈가 공리주의에 대하여 꽤나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던 공지성 및 안 정성에 근거한 논변을 논한다. 실현가능하고 지속하는 " 질서- 정연한사회" 의 여건 하에서 공 지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의관은 인간본성에 대한 사실을 도덕의 제 1 원칙의 정당화에 짜넣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나는 여기서 롤즈가 심리학, 경제학 그리 고 사회적 정치적 관계에 관한 사실들을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이라고 본 이유를 논하겠다. 즉, 인간본성과 정의의 양립가능성 및 그것들과 인간 선의 양립가능성을 보이겠다. 우리는 만일 그 도덕관을 규칙적으로 (regularly) 준수하는 일이 우리의 통상적인 도덕능력을 넘어서는 행위를 요구한다면 공리주의 같은 도덕관의 타당성을 의문시할 이유를 갖게 된다. 문제는 단지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불공정하거나 인간 본성에 반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 당위는 가능을 함의한다") 이에 더하여, 도덕과 정 의가 그토록 달성될 수 없는 요구를 부과한다는 것은 인간선과 양립불가능함을 시사한다. 나는 롤즈의 연구를 움직인 야망 중 하나는, 초기든 후기든, 도덕과 정의가 인간선의 일부 는 아닐지라도 인간선과 양립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정의의 좋음에 대한 설 명은 이 책 5 장에서 훨씬 더 자세히 논의된다) 3 정의관의 안정성은 그 자체로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온전한 공지성을 대변해주지(speak for) 않는다. 시즈위크가 논하였듯이 공리주의는 그것이 일반대중(the vulgar_ 로부터 숨겨지 되 극소수의 엘리트만 알고 있음을 뜻하는 " 소수만이 이해하는 도덕" 으로 활용될 경우에 안 정적인 사회의 기초를 제공한다. { 주석1- Henry Sidgwick, The Methods of Ethics, 7th ed. (Indianapolis, Hackett, 1981), 490 (Methods 로 인용표기) 주석 1 끝}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공리주의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안정성을 지닌다는 롤즈의 주장은, 각 교설이 공지 되고 공적 정치적 앎(awareness) 의 일부여서 정당화의 공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점을 전제 한다. 명백히도 공리주의자와 다른 이들은 위와 같이 이해된 공지성이 정의관의 정당화와 유관하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IV절에서 나는 롤즈가 공지성을 요구하는 이유를 논한다.
4 마지막으로 V절에서 나는 롤즈가 공리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의해서 각각 정당화된다고 본 자유주의 사회의 선택지를 논한다. 많은 이들은 < 정의론> 을 현대 복 지국가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로 본다. { 주석 3 - 예를 들어 Michael Sandel in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66} 다면 롤즈가 복지국가를 거부했으며 현재 형태의 복지국가는 확실히 거부했다는 점은 얼마 간 놀라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이유는, 롤즈가 복지국가를, 총 사회적 부의 극 대화를 목표로 하는 거의 규제 없는(unfettered) 자본주의를 동시에 지지하기도 하는 공리 주의적 틀에 밀접하게 묶여 있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롤즈는 (G. A. Cohen 에 의해) 자본주의적 축적을 차등의 원칙과 양립가능하며 아마도 심지어 그것에 의해 요구되는 것으 로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이 비판에 따르면, 차등의 원칙은 자본주의의 날카로 운 가장자리를, 가난한 이들에게 " 노회한 사업가buccaneer" 자본주의자들의 탐욕스러운 (rapacious) 실천들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양을 재분배함으로써, 둥글게 깎아내려는 도구 로 독해된다. V 절에서 나는, 4, 8, 9장에서 추가적으로 분배 정의에 대한 롤즈 설명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이것이 왜 차등원칙이 경제제도에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오해인지를 설명하겠다. 그렇 I. 롤즈와 공리주의 5 롤즈는, 공리주의에 대하여 복합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 주석4 - 롤즈의 공리주의에 대 한 철저한 논의로는 Samuel Scheffler, "Rawls and Utilirarianism"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Rawls, ed. Samuel Freem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을 보라. 주석 4 끝}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자임과 아울러, 그는 또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주된 도덕적 정의관과 철학적 기초로서 공리주의의 입자응ㄹ 대체하 고자 고안된 정의관을 제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롤즈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공리주의를 가장 지적으로 강력한 입장으로 여겼다. 그는, 공리주의의 정교함 (sophistication)과 포괄성 그리고 그것의 체계적 명료성에 비견될 만한 이론이 없었다고 생 각했다. 그는 공리주의를 300 년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발전해온 전통으로 보았다. 샤프츠베 리(Shaftsbury) 와 허치슨(Hutcheson) 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흄과 아담 스미 스를 통해, 고전적 공리주의자 벤덤, 에지워스, 시즈위크를 거쳐, J.S. Mill의 수정주의에도 살아남아, 마침내 20 세기의 학문적 사상으로 이동하였다. 그 사상에서 공리주의는 철학, 그 리고 또한 후생경제학, 비용- 편익 분석, 그리고 법과 경제학 운동 및 다른 분야에서 추가적 인 진화를 보였다. 6 시즈위크가 롤즈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enormous) 롤즈는 시즈위크의 < 윤리학 방법 The Methods of Ethics> 이 공리주의자들을 통틀어 가장 철학적으로 심오한 저작이라고 말한다. 그 독창성은, 도덕관의 정당화는 역사적으로, 즉 철학적 전통에서 더 중요한 도덕 관들을 온전히 알고 체계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진행해 나가야 한다 는 시즈위크의 깨달음에 내재한다. (Methods, vi) 이것은 롤즈 자신의, 원초적 입장으로부터의 정의관의 비교 평가 를 하게끔 한 동인을 제공한다. 롤즈는 시즈위크의 도덕 이론 분류 중 공리주의, 직관주의, 완전주의의 분류를 따른다. 그러나 시즈위크와는 달리, 롤즈는 칸트를 도덕관의 독창적이고 구별되는 종류-도덕 구성주의- 로 간주하며, 윤리적 이기주의 가 도덕의 방법 중 하나라
는(Methods, 89-95) 시즈위크의 입장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도덕관은 상식적 도덕의 숙 고된 직관을 고려하고 정당화하여야 한다는 시즈위크의 요구사항 역시, 롤즈의 정당화에 대 한 설명과 반성적 평형에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시즈위크처럼 롤즈는 정의에 대한 어떠 한 도덕관도 충족해야 하는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여, 상이한 관념들이 이 선결조건들을 각 각 얼마나 실현하는가를 비교하고 평가한다. 7 롤즈에게, 정의관이 만족시켜야 하는 형식적 기준은 우선순위 확립(ordering) 조건이 다. 롤즈는 말한다. 정의관이 완전하다는 것, 즉 제기될 수 있는 ( 또는 실제상에서 제기될 가능성이 높은) 요구들의 우선순위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히 바람직하다. (TJ, 134/ 115 rev) ( 시즈위크에서처럼) 롤즈에게 공리주의의 진정한 철학적인 인기를 끄는 사항 (drawing card) 은, 그것의 우선순위 확립 능력(ordering capacity),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행위가 무엇인가라 는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determinate) 답을 제공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에 놓여 있다. 롤즈에게 고전적 공리주의는 완결적으로 합리적인 도덕을 위한 모델을 제공하며, 어떠한 상 황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최선인 행위지침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인 도덕관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롤즈는 그의 정의론이 공리주의의 우선순위 확립 능력에 대적할 수 있다는 어떠한 호나상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도덕 원칙이 부과하는 조건 및 반성적 평형에서의 우리의 숙고된 도덕적 확신과 양립가능하면서도 그 정도의 능력 에 최대한 가까이 가기를 희망하였다. 롤즈가 다양한 형태의 직관주의에 제기하는 주된 반 론은 직관주의가 상충하는 요구들의 우선순위 확립의 문제를 직관에서의 도덕적 고려사항의 형량에 맡겨 둔다는 점이다. 8 동시에 롤즈에게 그것은, 공리주의의 실패 원인으로 판명되는 공리주의의 강력한 특성-행 위의 합리화- 이다. 왜냐하면 완전히(completely) 도덕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고전적 공리주 의는 지배적 목적- 단일한 합리적 목적 (TJ, 556/487 rev) 또는 하나의 합리성 (CP, 360) 이라고 롤즈가 말하는 것-이 모든 인간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전제하 기 때문이다. 합리적 선택이 [ 항상] 가능하다고 인정하려면, 그러한 하나의 [ 지배적인] 목 적이 존재해야만 한다 고 롤즈는 말한다. (TJ, 555/486 rev). 시즈위크에게, 합리적으로 모 든 행위의 우선순위를 확립하기 위해 하나의 궁극적 선 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실천 이 성의 요구사항이었다. 유일하게 합당한 목적- 반계몽주의(obscurantism), 광신(fanaticism), 그리고 잔인함(inhumanity) 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합당한-으로서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으 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pleasurable experience) (Methods, 400-407). 9 시즈위크의 논변을 하나의 사례로 삼아, 롤즈는 도덕철학의 역사 전반에 걸친 쾌락주의의 힘을 설명해주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합리화하고자 하는 야망이라고 주장한다. 그 는 말한다. 쾌락주의는, 그것이 도덕추론의 명료하며 적용가능한 방법을 정식화하려는 한 에서 목적론적 이론의 증후적인 이동(drift) 이다. (TJ, 560/490 rev) 10 그러나 롤즈는 어떠한 지배적인 목적관도 오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misguided) ( 인용문 시작) 인간의 선은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목표들이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모든 목표들을 하나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합리적 선택을 위
배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비합리적이거나 또는 더 정확하게는 미친 짓처럼 보인 다. (more likely as mad) 그 자아는 형태가 일그러지고(disfigured) 체계 그 자체를 위하 여 그 목적에 봉사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TJ, 554/486 rev, 강조는 추가) ( 인용문 끝) 그러나 왜 쾌락주의가 다른 목적론적 견해에 내재한 잠재적인 광신(fanaticism) 이나 광기 (madness) 를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 사람들은 많은 상이한 종류의 목적과 추구목적 (pursuits) 에서 그들의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가. 롤즈는 고전적 공리주의 선관의 주관적인 성격 이 근대 사회와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에 단일한 합리적 선이라는 개념을 적응시킬 방 안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인정한다. { 주석 7 - Rawls, "Social Unity and Primary Goods" (1982), in Collected Papers, ed. Samuel Freeman (Cambridge, MA: Harv ard University Press, 1999). 384, (CP 로 인용표기됨)} 그러나 그는 이러한 외관은 오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쾌락주의는 여전히, 무엇을 하더라도 어떠한 목표를 추구하더라도 그것의 유쾌한 사후효과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되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롤즈에게 다른 목적, 예를 들어 자유, 권리, 권력, 신의 비전 (Vision of God) 또는 다른 어떤 것의 외곬수적인single-minded 추구와 동일한 정도로 미 친 짓은 아닐지라도,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는 것(wrongheaded) 으로 여겨졌다. 측정 가능한 느낌의 상태로, 쾌락이 유일한 본질적 선이며,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발상은 우리의 가치에 대한 숙고된 판단 에 부합하지 않는다. (TJ, 432/ 379 rev). 그 발상은, 우 리가 본질적으로(intrinsically)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관하여 우리의 삶을 구축하는 많은 최종적 목적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해줄 수 없다. 11 여기서 공리주의자는 가치에 대한 우리의 숙고된 판단은 신뢰할 수 없다거나 간단히 틀 린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우정,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예술적 창조 성과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음미, 그리고 자기 행위와 목적의 자기결정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활동이 아니라고 우리를 납득시킬 수 있는 논변이 무엇이 있는가? 이 부분이 바로 시 즈위크가 행위의 완전한 우선순위 확정과 체계화를 실천이성의 요구조건으로 삼을 실제적 필요 에 호소하는 지점이다.(Methods 406) J.S. 밀이 벤덤에 대한 그의 에세이에서 동일한 논지를 펼쳤듯이 ( 인용문 시작) 공리주의적 논쟁(The utilitarian controversy) 는, 실천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질서(arrangement) 와 논리적 종속 관계(logical subordination) 의 질문이다. 원치적으로 순 수 과학적인 견지에서 윤리철학의 통일성(unity) 과 상관성(coherency) 를 위해 중요한 질문 말이다. [ 벤덤에게] 체계적 통일성은 그 자신의 지성에 대한 자기 확신의 필수불가결한 조 건이었다... 도덕이 참조해야 할 목적이 행복이건 아니건, 즉 행복이 일종의 목적으로 참 조되고 가치 느낌의 영역이나 설명할 수 없는 내적 확신의 영역에 무언가 남아 있지 않는 것, 그리고 도덕이 이성과 계산의 문제가 되지 단순히 감성의 문제가 아닌 것은 도덕철학의 발상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다.( 인용문 끝) { 주석 8 Mill, "Benthan", in Essays on Political and Culture ed. Gertrude Himmerlfarb (Garden City NY: Doubleday, 1963). 114-15} 12 궁극적으로 ( 롤즈와 시즈위크 또는 공리주의자들 사이의) 그 논변은 실천이성의 의도된 (purported) ( 공지성 같은) 다른 제약 및 우리의 숙고된 도덕 판단 및 가치 판단에 부여된
중요성에 비해, 인간 행위의 완전한 합리적 우선순위 확립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부여하느 냐에 대한 판단으로 좁혀진다. 롤즈는 시즈위크보다, 도덕 판단과 숙고된 가치 판단 양자 모두에 대하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는 시즈위크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주체가 된다 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선의 추구를 포함하여 개인의 선은 그 개인이 이상적인 여건 하에서 욕구하는 것이 합리적인 인생계획으로 파악된다는 점도 받아들인다. ( 이것은 롤즈의 숙고된 합리성에 대한 설명에 함의되어 있다. [TJ 416/ 366 rev] 이에 대해 그는 시즈위크의 개인 의 선에 대한 설명을 따른다.[Methods 111-12]) 그러나 롤즈는 시즈위크의 자명한, 실천 이성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개인들의 선이 무사공평하게 구성하는 단일한 합리적 선을 극대 화할 것을 요구한다고(Methods 387, 382) 말하는 철학적 직관, 합리적 이타성의 격률 에 설사 비중을 부여한다 하더라도 거의 부여하지 않는다. 시즈위크의 공리주의에 깔려 있 는 이 근본적인 원칙은 우리의 숙고된 판단과 너무 자주 충돌한다. 또한 롤즈는 그것이 우 리의 숙고된 확신에서 확인하는 가치의 이질성과 선의 다원성과도 상충한다고 주장한다. 도 덕 판단의 체계적인 우선순위 확립은 실천이성이 필요로 하는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숙고된 도덕적 평가적 확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도 우선성을 가져서는 안된다. 다른 필요저건들( 그 중에는 공지성과 도덕관의 안전성이 있다) 과 함께 이 숙고된 힘에 비추어보았을 때, 실천이성은 우선 순위 확립과 도덕 판단 및 가치 판단의 체계화를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뿐이다. { 주석 9 - 여기서 롤즈가 고전적 공리주의가 도덕 판단과 행위의 온전한 체계화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즈위크에 대한 그의 강의노트에서, 롤즈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인구정책을 결정하기에 왜 적합한 원칙이 아니며, 어떤 다른 원칙으롭 보충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우리가 ( 인간이 나 다른 종의) 숫자를, 세상의 총 쾌락이 최대화되는 한계까지 계속 증가시켜야 한다는 발 상은 롤즈에게는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정신나간 짓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이것이 왜 많은 공리주의자들이 평균 공리에 이끌렸는지를 설명해준다고 추측한다. 롤즈는 평균 공리주의를 고전적 공리주의와는 상이한 종류의 도덕관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을 최대화하는 일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Rawls, Lectures on the 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 ed, Samuel Freema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forthecoming 2007), lecture 3 Sidgwick 를 보라. 주석 9 끝) 13 현대 공리주의자에 의해서 옹호된 쾌락주의적이지 않게 효용 을 정의하는 방법들이 있 다. 사람들의 선호 또는 합리적 선호의 만족이, 현대의 많은 공리주의자들의 효용에 대한 이해로 선호된다. 롤즈는 사회적 통일성과 기초재 So cial Unity and Primary Goods ( 케 네스 애로우와 S. C. Kolm 에 답하면서) 에서 만일 공리주의가 체계적으로 모든 인간 행위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확립하려면 이 관념들조차도 결국에는 개인들이 그들의 선호를 기꺼이 수정해야만 하는 지배적인 목적으로 쾌락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Rawls, "Social Unity and Primary Goods" in CP, 374-85 를 보라. 여기서 롤즈는 근본적인 선호 라는 kolm의 발상이 어떠한 성품도 그들의 목적에 대한 어떠한 애착도 갖고 있지 않으며 유쾌한 느낌만을 최대화하려는 동기로 움직이는 벌거숭이 인간 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382-83)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의해 전제된 확정적이지만(determinate) 통약불가능한 재화를 대조한다. 여기서 Kolm의 기- 서수적(co-ordinal) 공리주의( 역주: 기수적 공리주의는 모든 효용을 양화가능한 것으로 다루며, 서수적 공리주의는 종류가 다른 효용이나 상이한 사람들 간의 효용을 직접 비교하지 못하고 다만 효용묶음의 순서만을 다룬다. 기-서수적 공리주의
는 개인에게 여러 효용들은 서수적이나 개인간 비교에 있어서는 기수적이라고 가정한다.) 에 대한 반론이, 마이클 샌델의 롤즈의 인간관이 그 모든 속성이 박탈당한(shorn of) 존재이 며 모든 특정한 목적과 헌신으로 분리된 존재라고 비판하는 것과 그토록 닮았다는 점은 매 우 아이러니하다. 샌델의 그 주장에 대해 롤즈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와, 인간에 대한 롤 즈의 설명을 잘못 혼동(conflation) 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Sand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93-95, esp, 94; 또한 Rawls, CP, 403n 을 보라. 주석 10 끝} 대부분의 현대 도덕 철학자들은, 어떻게 구성되든 효용이 내재적(intrinsic) 가치에 대한 적절한 설명 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효용은 인간 선의 다원성을 만족스럽게 설명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배적인 목적의 목적론적 도덕관-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서 최대화되어야 하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발상- 을, 도덕관을 위한 적합한 틀로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나 많은 도덕철학자들이-아마도 다수가-여전히 지배적인 목적의 목적론적 관념(dominant end teleological conception) 의 잔여물(remmants) 을 꽉 붙들기를 (hang onto) 바란다. 특히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 결정함에 있어 문제되는 모든 것은 우리 행위의 결과이며, 올바른 행동은 전반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효과적으로 낳는 행위들이라는 발상에 말이다. 다음 절에서 나는 일부 비공리주의 결과주의 관념에 대한 롤즈의 태도를 논 의하겠다. II. 다원적이고 혼합된 결과주의 관념 14 도덕이 증진하는 목적에 관한 고전적 공리주의의 수용할 수 없는 결과 중 일부를 피하 는 한 가지 방법은, 체계화의 잠재력은 그대로 보유하되 최적으로 증진되어야 할 결과에 선 의 다원성을 짜넣는 것이다. 이 다원적 선의 일부는 주관적인 것( 유쾌한 경험이나 선호의 만족 같은) 일 수도 있고, 다른 일부는 객관적인 것, 예를 들어 지식이나 다른 탁월성, 창조, 아름다움에 대한 관조, 사랑과 우애 등등일 수도 있다. G. E. Moore 의 이상적 공리주의 는 그러한 다원주의 교설이다. 롤즈는 그러한 견해를 직관주의의 목적론적 형태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 행위인지를 결정함에 있어 본질적(intrinsic) 가치 들의 직관적인 형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TJ, 40/35 rev) 그러한 다원적 결과주의 설명이 우리의 숙고된 확신에 더 잘 부합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종종 여전히 공리주의를 겨냥한 정 의의 반론에 취약하다. ( 예를 들어, 개화되지 않은 소수에 대한 불평등과 억압은 고전적 공 리주의보다는 목적론적 완전주의 견해에서 합리화하기가 더 쉽다). 다원적 결과주의자들이 이 반론에 대처하기 위하여 추구한 한 가지 방식은 정의라는 가치를 증진되어야 할 선한 결 과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incorporates) 이것은 두 단계의 tow-tiered 입장을 넘어선 다. 이중의 입장은 정의의 원칙을 자유, 평등, 자율성 등등과 같은 선들을 성취하기 위해 도 구적인 이차적 규칙을 간주하는 입장이다. ( 주석 11- 그의 계약론보다 앞서 나왔던 predating 한 논문에서 T. M. Scanlon 은 권리 및 정의의 다른 규범을 자유, 일정한 재화의 평등 분배, 그들의 삶의 중요한 측면을 통제할 개인의 권리 같은 최종 목적을 증진하는 이 중의 원칙으로 두 단계의two-tiered 의 결과주의적 접근을 개관하였다. 스캔런의 논문 전 집을 The Difficulty of Tolera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에서 보라} 대신에 평등한 권리와 공정한 절차 같은 정의의 어떤 원칙들은, 개인이나 제도적 행 위에 의해 최대화되거나 증진되어야 하는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에 직접적으로 통합된다.
15 A. K. Sen 은 최근 이런 종류의 견해의 정교화된 판본을 제안하였다. 그는 말한다. 자 유, 권리 그리고 의무-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침해- 를 주목(take note of) 하는 결과주의적 평가는 바로 누군가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어떤 권리와 의무가 침해당했다는 그 점에서 나쁜 사태가 벌어졌다고 논할 것이다 { 주석 12- A. K. Sen, "Consequential Evaluation and Practical Reason," Journal of Philosophy 97 (September 2000): 477-502 at 494 (강 조는 인용자) (CE 로 인용표기됨) } 그리고 권리의 실현(fulfillment) 은 결과주의적 관점에 서 이해했을 때 발생하면 좋은 상태-더 많이 발생할수록 더 좋은 사태- 이다. (CE, 498) 센 은 이어서, 권리의 결과주의 를 결과주의적 평가의 일부로서 제안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 은 내용이다. (1) 권리 침해의 나쁨 또는 권리 실현의 좋음 은 결과들에 포함되어야 한 다. (2) 권리들 사이의 맞교환 관계 가 있을 수 있고, 권리 실현의 좋음과 다른 좋은 결 과들 사이에 맞교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CE, 499, 499n) 16 롤즈가 이 혼합된 결과주의 입장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는 전적으로 명료하지는 않다. 내가 그 입장을 혼합되었다 고 하는 이유는 최대화되고 최적화되거나 증진되어야 하는 좋 은 결과에 자연적 사태와 도덕 원칙 양자 모두를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롤즈가 그 입 장을 의무론적 직관주의의 한 판본으로 이해했을 것이라 추측한다.(suspect) 먼저 ( 바람직 한) 재화의 평등이라는 궁극적인 선을 고려해보라. 롤즈는 분배는 통상적으로(normally) 옳 음의 원칙 하에 고려된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 분배 평등에 대한 질문은 비목적론적 원칙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원주의적 결과주의 입장에서 증진되고 평등화되어야 하는 재화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내의 용어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의 가능한 것이라면, ( 예를 들어 평등한 행복이나 복지, 또는 행위의 평등한 능력에 대한 어떤 설명이라면) 왜 그런지 는 그리 명료하지 않다. 롤즈는 어떤 자연적 선의 평등한 분배는 최대화되어야 하는 목적론 적 최종 상태(end state) 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선들의 총량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총분배를 최대화한다는 것 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종종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한 사태가 다른 사태보다 더 평등하다 는 것을 안다. 비록 그 여건 하에서의 다른 점들과 비 교하여 평등에 상대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일이 더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 주석 14-100,000 달러의 돈은 (a) 우리 중 90명이 1111달러를 갖고 10명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 을 때와 (b) 우리 중 50명이 440달러를 갖고 나머지 50명은 1560달러를 가졌을 때 중 어 느 때 더 평등하게 분배된 것인가? (a) 의 경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 들에 비해 오직 1111 달러를 덜 가졌을 뿐이지만 (b) 의 경우 440달러를 가진 이들은 나머지 보다 1120 달러를 덜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b) 의 경우에 더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a" 선택지를 선호하는 행정적 결정에 실제로 반영되어 있는 평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덜 절대적인 불평등이긴 하나 소수의 완전한 궁핍(destitution) 인가? 나 자신 의 견해는 a 를 b 에 비해 선호하게 하는 어떠한 것도 이야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 어 Te mkin 의 입장처럼 분배의 평등이 다른 선들과 형량되어야 할 하나의 선에 지나지 않 는다는 입장에서도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례는 평등 분배가 그 자체를 위해 최대화되어야 하는 선들이라는 발상의 현명함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Temkin, Inequality 를 보라. 주 석 14 끝} 평등분배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부여할 것인가는 다른 이슈다. 시즈위크는 최적 사태들 사이에 동점이 성립될 때, 형평의 원칙은 효용ㅇ의 더 평등한 분배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Methods, 416-17)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 공리주의와도 양립가능하
다. ( 왜냐하면 평등은 최대화대상maximand 의 일부가 아니므로.). 이와는 대조저그로 다원주 의적 입장은 평등에 더 많은 비중을 부여하며 최대화 대상에 평등을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내재적 선에 대비한, 평등 분배에 적합한 비중을 부여하는 지수를 구축하는 일이다. 17 그러나 자연상태의 평등 분배가 결과주의 입장에 통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절 차, 인권, 평등한 권리 또는 도덕적 의무의 통합은 롤즈의 설명에 의하면 단순히 직관주의 의 한 형태일 뿐더러 비목적론적 견해이기도 하게 된다. 그러한 혼합된 결과주의관은 증딘 되어야 할 궁극적 선에, 공정한 절차를 구체화하는 옳음과 정의의 원칙, 또는 권리의 평등 한 배분, 또는 개인의 의무 달성을 포함시키게 된다. 궁극적 선의 일부로서, 공정한 절차, 권리에 대한 존중, 의무의 달성은, 어떤 다른 선을 위해 단지 도구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과 그것들이 통합시키는 옳음의 원칙은 그 자체를 위한 선으로 간 주된다. 18 그런 방식으로 생각된 혼합된 결과주의의 한 가지 잠재적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선을 최대화하는 것이나 최선의 결과를 증진하는 것을 옳음의 유일한(sole) 원칙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궁극적 선을 부분적으로 구성하며 다른 궁극적 선 및 그것들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과 형량되는 비결과주의적 도덕 원칙이 이미 있으므로 공정한 절차나 권 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도구적으로 증진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동일한 권리들과 절차들을 침해할 것( 예를 들어 다수가 향유하는 유사 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경우 어떤 원칙이 우선하는가? 최대화 대상의 일부인 도덕 원칙에 어느 정도라도 비중 이 부여된다면, 우리는 사실상 둘( 이상) 의 별개의 도덕 원칙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선을 최대화하라고 말하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한 절차를 따르고 개인의 권 리를 존중하거나 그 자체를 위하여 평등한 분배를 달성하라고 말하는 원칙이다. 무엇이 옳 은 일일지 결정하기 위해서 이 별개의 원칙들이 어떻게든 서로 형량되어야 한다. 만일 이것 이 우선성 규칙 없이, 그리고 특정한 환경에 반응하여 직관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혼합된 결 과주의는 실제로는 ( 롤즈의 의미에서) 도덕 직관주의의 의무론적 형태이다. 19 내 자신의 견해는 ( 그리고 내가 믿기에는 롤즈의 견해도) 우리가 혼합된 결과주의에서 선을 최대화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증진하는 척 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옳음의 원칙( 예를 들어 공정한 절차, 또는 평등한 권리, 인권에 대한 존중이나, 의무의 충족) 이 그 자체는 궁 극적인 내재적 선으로 간주되는 경우, 우리는 목적론적 원칙과 의무론적 원칙 양자 모두의 형량을 요구하는 완전히 성숙한(full-fledged) 직관주의적 입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직면 하는 것이 낫다. (we might as well) 그러한 혼합된 다원주의적 입장이 최선의 전반적 결 과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약화된(attenuated) 의미에서 뿐이다. 대부분의 도덕관들은 그것이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최선의 것을 하기를 요 구한다는 약한 의미에서 최선의 결과를 증진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W. D. Ross 의 직관주의는 최선의 결과를 증진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로스는 일견 의무론적인 정의, 충직, 감사의 원칙 등과 함께 목적론적인 자애(benevolence) 의 원칙을 형량할 것을 요구한다. { 주석 15 - W. D. Ross, The Right and the Good(Oxford: Clarendon Press,
1939), pp. 18-33, 41-42} 로스의 입장이 혼합된 결과주의 입장과 유의미한 어떤 방식으 로든 다른 것 같지 않다. ( 보통보다 더 의무론적 원칙을 통합한다는 점은 아마 제외하고 말 이다. 그러나 로스의 직관주의는 의무론적 도덕관의 표준적인 사례다. 20 여기서, 센이 그의 결과주의적 평가를 설명하면서, 센의 최대화한다 라는 용어의 용법- 그가 집합론(set theory) 과 현대의 공준적인(axiomatic) 경제 분석으로부터 가져왔다고 이 야기하는(CE, 484)- 은 고전적 공리주의자가 사용하는, 그리고 롤즈가 목적론적 관념을 설 명하면서 사용하는 용법과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센의 최대화 틀은, 사태에 관 한 서수적 우선순위를 포함하고 더 나아가 우선순위의 완전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보 인다. (CE, 483) 그 고려사항들 중에서 센은 사태의 우선순위를 더 낫고 나쁘다고 확립함에 있어, 어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며 그들의 의무가 달성되는 정도,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어느 정의가 완수된 정도를 고려하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 일부는 통약불가능할 수도 있는 사태의 서수적 우선순위 중에서 최고의 우선순위를 갖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것은, 측정 가 능한 사태로 인식되는 총 선을 최대화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그들의 서수적 우 선순위를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결과를 최대화 한다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 또한 센이 개진 하는 종류의 선택함수에 의해 사람들의 평가를 표현하는 상이한 방식들도 존재한다. 21 시즈위크에 대한 강의에서 롤즈는 최대화 그리고 효용 이라는 용어가 의사결정이론 과 경제적 분석에 의하여 고전적 공리주의로부터 찬탈되어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쓰이 는 사태를 한탄한다. 효용함수 나 후생함수 가 아니라, 다목적 함수 와 같은 용어를 써 야 한다고 롤즈는 말한다. 그런 용어는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복수의 목적을 통합하 는 방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말한다: ( 인용문 시작) 어떤 이의 도덕 판단 또는 정치적 판단도 어느 수학 함수에 의해 표현 될 수 있다. 이 함수에 기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마치 각 경우에 사회는 이 함수값을 최대화해야 하고, ( 이 함수에 의해서 정의된) 최선의 결과를 증진해야 하는 것 처럼 판단한다고 말이다 [ 그러나] 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표현함수는, 행위자가 어떤 것을 최대화한다는 어떠한 자연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복수의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며 축차적 서열( 비연속적 표현함수) 일지도 모른다 [ 어떤 것을 최대화한다고] 말하는 이같은 방식은 어떤 특정한(no specific) 정치관도 함의하지 않 는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이 함수의 형태는 무엇인가 또는 그것의 특 별한 특성(special features) 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관념과 원칙이 행위자( 개인과 사 회) 의 사고와 판단의 배후에 있는가? ( 이탤릭체 강조는 원문) ( 인용문 끝) 22 여기서 롤즈는 결과주의이건 의무론적이건 어떠한 특정한 정치관도 복수의 대상 을 최 대화하는 함수에 의해 함의되지 않는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목적과 대상이 추구 되고 최대화되느냐 에 따라 달려 있다. 더 심층적인 함의는 내가 생각하기에, 일단 우리가 이 목적과 대상들, 즉 혼합된 결과주의적 관념에서 좋은 결과 및 사태의 서열에 대한 판단 에 깔려 있는 이유들과 도덕 원칙을 포함하는 목적들과 대상들을 파악하면, 우리는 좋은 사 태를 최대화하는 것이 유일한 궁극적 도덕 원칙이라고 말하는 견해를 더 이상 가진 것이 아 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최대화되어야 할 정의 및 권리에 대한 존중 등등의 도덕적 고려사항
에 여하한 독립적인 비중이라도 부여하려면 총 좋음의 최대화를 제약하는 도덕적 이유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어떠한 독립적인 비중 도 부여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최대화 대상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목적을 수행하지 않으며, 무엇이 최선의 행동인가를 판단하는데 진정으로 필요한 정보가 되는 좋은 결과를 애매하게 만들 뿐이다. 23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롤즈는 결코 결과주의 라는 용어를 독립된 도덕관의 한 종류 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롤즈는 전반적인 최선의 결과를 증진한다거나 최대화한다는 발상의 결과주의적 활용이, 구별되는 일군의 도덕관의 토대가 되기에는 충분 히 잘 정의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대신에 롤즈는 의무론적 관념을 목적론적 관념과 구별한 다. 고전적 공리주의 및 다른 목적론적 관념 ( 예를 들어 목적론적 완준주의) 에 진정으로 특 유한 점은, 그 관념들이 (a) 궁극적 선의 총량을 최대화하고 (b) 좋음을 어떠한 도덕 개념이 나 원칙을 참조하지 않고 자연적인 조건이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적합한 조건에 의거 하여 정의한다는 점이다. 롤즈는 ( 시즈위크와 함께), 만일 선이 이 방식으로 규정되기만 한 다면, 합리적 선택 원칙에 따른 행위의 완전한 체계화라는 발상을 이치에 닿게 할 수 있다 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인용문 시작) 제안된 지배적 목적이 목적론적 이론에 속한다고 나는 이제껏 가정하였다. 목적론적 이론에서 선은 정의 그 자체로, 옳음과 독립적으로 특정된다. 이 목적의 역할 중 일부는 옳음이라는 관념을 합당하게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TJ 565/495 rev) 24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센과 다른 이들에 의해 제안된 결과주의가 그러듯이 일단 우리가 최대화되어야 하는 선을 비도덕적으로 특정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면, 목적론적 입장의 주요 한 혜택- 옳음의 관념을 합당하게 정확하게 만드는 것 (TJ, 565/495 rev)-은 내던져진 것 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중 일부는 옳음과 의무의 달성에 의해 도덕적으로 규정되 고 그 비중이 최종적으로 고정되지 아니하고 여건이 허용하는 대로 직관에의 호소에 의하여 결정되는, 선들의 총묶음(assortment) 의 합계와 분배를 동시에 최대화한다는 발상을 이치에 닿도록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진다. 이 지점에 이르면, 비결과주의적 관념의, 그 역시 결과주의적 원칙과 의무론적 원칙의 혼합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직관주의의 형태( 로스의 직 관주의 같은) 와의 논쟁의 진정한 지점이 무엇인지가 더 이상 명료하지 않게 된다. 25 더군다나, 옳음, 공정성, 의무, 그리고 다른 도덕 개념을, 결과주의의 최대화 대상에 포 함시키는 것이 정합적인지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과주의를, 옳음과 정의의 궁극적 원칙이 좋은 결과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별되는 종류의 도 덕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의 권리를 독립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 이나, 권리와 공정한 절차가 존중되고 의무가 달성되는 사태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증진되 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개념적 공간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옳음 과 정의의 요구가 증진되어야 할 궁극적 선에 통합되고 그 결과 여하한 독립적인 비중이라 도 부여되는 한, 옳은 행위의 유일한 궁극적 원칙이 선을 최대화한다는 것은 더 이상 성립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화되어야 할 좋은 결과들 가운데서 이 사전적인 ( 공정성,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등등 같은) 비최대화 도덕 원칙에 따라 사람들이 행위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이 왜 이 원칙을 준수하는지를 묻는다면, 그러는 이유에 대한 그들 의 정당화는, 단지 ( 권리, 공정성 등등을 위한 존중 같은) 이 원칙들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결 과를 증진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논변은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포함하는 좋은 결과를 최대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타 인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 이러한 순환을 피하기 위하여 혼합된 결과주의자들은 이 옳 음의 원칙들을 존중하는 것이 그 자체를 위해 ( 센의 말에 따르면 권리와 의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확히 그 이유로 ) 좋다고 말하는 양보를 한 것 같다. 이러한 경우 궁극적 선 그 자체는 사전적인 비최대화적 옳음의 원칙 없이는 기술될 수 없다. 옳음의 원칙이 궁극적 선 의 정의 자체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선을 최대화하는 것은 유일한 옳음의 궁 극적 원칙이 아니므로 우리는 결과주의적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니다. 26 더욱이 우리가 이 사전적인 옳음의 원칙이 그 결과들과는 독립적으로 행위할 충분한 이 유를 준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원칙들을 그 자체를 위해 준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선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가 항상 좋은 결과를 최대화하기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결과주의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 하게 된다. 그렇기보다는 이, (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의 권리의 존중 같은) 비결과주의 원칙이 충분한 정당화이며, 우리는 그것이 증진하는 좋은 결과를 진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그 자체를 위해 이 원칙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최대화 옳음 원칙을 준 수함으로써 선을 최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27 여기서, 혼합 결과주의 접근의 지지자들은 옳음의 두 상이한 개념을 구분할지도 모르겠 다. (notion of rightness) (a) 첫째로, 대체로 정의와 같은 것이며, 개인의 권리, 공정한 분 배 등의 개념에 의거하여 뽑아낸 (cashed out) 실질적인 도덕 가치로서의 옳음의 관념이 있다. 그리고 (b) 둘째로, 우리가 실천 이성과 이유들의 형량에 의해 요구되는 행동이라는 의미에서 하기에 옳은 것 이라고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옳음의 일반적인 개념이 있다. 결과주의자들이 추구목적에 포함되는 것은 a 유형의 가치, 즉 권리 및 정의의 요구 존중이며, 선을 최대화하는 결과주의 원칙은 b 의 의미에서 옳음의 궁극적 원칙, 즉 실 천이성의 궁극적 원칙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문제를 피하는 길이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방금 개략적으로 그은 구별선을 따라 옳음의 상이한 개념의 구분을 받아들이면, 정 의와 인권 같은 실질적인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일은, 그 실질적인 가치들의 비중이 충분히 커서 그것들을 존중하기 위하여 행위하는 것이 최선의 전반적인 결과들을 낳을 때, 때때로 좋은 결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행위에도 해당한다고 말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 이 센이 권리의 결과주의 를 제안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옳음의 원칙 의 두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내가 제기한 문제를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명히도 a 에 의해 커버되는 개인의 권리와 정의는 그 자체로 개인들 및 사회 정치 제도의 일부에 특정한 상관된 의무를 함의하며, 이 의무들은 하기에 옳은 일에 관한 지침을 이미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정의의 이 권리와 의무가 최대화 대상에 포함되면, 우리의 행동으로 증진해야 하는 내재적인 선은 우리가 다른 이들 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때때로 a 의 의미에서 정의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b 의 의미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옳은 일은, 모두 그 자체 를 위하여 개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의무 및 정의의 다른 요구를 준수하는 것임을 시사한
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최대화해야 한다는 b 의 옳음 원칙과는 상 이하며 잠재적으로 상충하는 것이다. 29 이 문제를 설정하는 다른 방식은 다음과 같다. 권리들이 존중되고 물질적 자원이 공정하 게 분배되며 정의의 다른 가치들이 관철되는 것이 내재적으로 가치 있다고 가정해보자. 행 위들의 결과는, 이 조건들이 실현되었을 때 여하한 추가적인 결과와는 독립적으로 더 나아 진다. 이제 이것이, 즉 정의가 이 원칙들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유일한 가치 있는 사태라고 가정해보자. ( 이것은 아마 특이한 입장이겠으나, 논의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히 이치에 닿 는다). 정의 또는 사람들이 정의를 준수하는 것이 유일한 내재적인 선이라고 할 때, 분명한 함의는 사람들이 항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때때로는, 다른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공정 하게 자원을 분배하는 등등의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면 하는 것이 옳은 일(the right thing to do) 이 되며, 정의가 내재적인 선이므로, 그것은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옳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결과주의자들은, 만일 정의를 행하는 것이 유일한 내재적 선이라면 우리는 좋은 결과로서 항상 정의와 사람들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등등의 사태를 증진하거나 최대화해야 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사태들을 증진 하거나 최대화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옳은 일이다. 결과주의 원칙의 성격과 그것이 -우리는 항상 좋은 사태를 최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결과주의 관념 내에서 하는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제 모순(contradiction) 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 모순은, 결과주의 관념 내의 결과주의 원칙의 역할로부터 나온다. [ 선을 최대화하려는] 명령injunction 은 항상 적 용된다 (TJ, 566/495 rev) 이 점을 인정하더라도, 만일 결과주의 원칙이 정의로운 결과를 증진하기 위한 일단 진실로 여겨지는(prima facie) 의무라면 ( 로스의 선행beneficence 의 결 과주의 원칙에서처럼) 그것은 다른 이들의 권리와 정의의 요구사항을 그 자체를 위해 존중 하는 것 역시 옳음의 궁극적 원칙이라는 주장에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모 든 것을 고려했을 때 무어이 옳은일인지 결정하기 위하여 서로 형량해야 하는 두 개의 옳음 의 원칙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결과주의를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그 주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결과주의 도덕관을 가진 것 이 아니게 된다. 30 그런데 센과 같은 혼합 결과주의 입장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그들 역 시 다원주의라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 분별있게 sensibly) 증진되어야 할 내재 적 선의 다원성이 존재하며, 정의는 그 중 하나라고 인식한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는 다른 더 큰 선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의 그 자체의 더 큰 선을 달성하거나 ( 예를 들어 홀로코스 트 같은) 참혹한horrendous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정의의 원칙을 타협해야 할지도 모름 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의 고려는, 최대화되거나 최적화되어야 하는 궁극적 선의 오직 일 부일 수 있다. 그것은 최대화되거나 최적화되어야 하는 다목적 함수 mutiple-objective function (Rawls) 에 산입되는 (figure into) 다수의 목적(objective)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입장은 분별있게(sensible) 들리지만, 문제는 그 견해는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숨은 모순 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궁극적인 결과주의 옳음의 원칙에 따라 최대화되어야 하는 전 반적 선은 여전히 경합하는 옳음과 정의의 궁극적인 비결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 예를 들어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자유를 부여하여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같은) 이 궁극적 인 비결과주의 원칙들은 우리가 그 결과가 총 선의 합계를 더 작게 만들지라도 그 자체를
위하여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 옳음의 궁극적 원칙의 이러한 다원성을 이치에 닿게 만 들려면, 로스가 했던 일을 하여 상충하는 원칙들은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하는 것이 옳은 일을 결정하기 위하여 그 여건에서 서로 형량되어 비중이 정해져야 하는 일견적인 의무들을 부과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혼합된 결과주의자들이, 만일 정의를 그 자체를 위해 행하는 것이 내재적으로 좋다고 주장하려면, 서명해야(sign on) 하는 견해가 바로 이 비결과주의 입 장과 같은 무언가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일한 궁극적인 옳음의 원칙은 좋은 결과를 최대화 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맞게 결과주의 입장의 통합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그들이 우리가 시작 했던 출발점이 된 주장, 즉 권리를 존중하고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내재적으로 가 치 있으며 궁극적인 옳음의 원칙을 부과한다는 주장을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31 마지막으로 롤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주의를 끌 가치가 있는 모든 윤리 교설 은 옳은 판단에서 결과를 고려한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윤리 교설은 그저 비합리적이고 미친 것이다. (TJ, 30/26 rev) 이것은, 도덕관이 결과주의자의 소위 목적-수단 추론에 공 간을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이 결과주의 도덕관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롤즈 에게 의무론적 관념은 수단- 목적 추론과 심지어 결과주의 ( 또는 최대화) 원칙도 포함할 수 있다. 그 원칙들이 다른 모든 원칙에 궁극적인 우선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위의 나 의 논평에서 시사되었듯이 결과주의 도덕관을 한편으로, 그리고 결과주의 원칙과 결과주의 추론을 통합하는 도덕관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구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롤즈 의 차등 원칙은, 의무론적 도덕관의 일부인, 규칙 결과주의적인 종류의 원칙이다. W. D. Ross 의 선행(benficeince) 의 일견적 원칙 처럼. 그러나 차등의 원칙은 일정한 기초재의 분 배에 그 영역이 제한되어 있으며, 그 적용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 공정한 기회 평등, 부담을 진 사람들에 대한 조력의 의무 및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에 의해 제약된다. 다른 사례는 롤 즈의 정의의 의무다. 그 의무는 정의의 제약을 준수할 완전한 의무에 더하여, 정의로운 제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정의로운 제도를 설립할 불완전하 의무를 부과한다. 우리는 이 불완전한 의무를 정의로운 제도와 사태를 효과적으로 증진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 롤즈의 용어를 쓰자면) 합당한 것을 합리적으로 증진함으로써- 행한다. 정의의 합리적 추구가 그 자체로 정의나 다른 합당한 원칙의 제약에 의하여 규제되지 않는다면, 정의의 불완전한 의 무는 더 많은 이들의 동등하거나 더 중요한 권리를 증진하기 위하여 일부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그 경우에 정의의 합리적 추구는 더 큰 정의 ( 또는 아마도 어떤 다른 더 큰 선) 이 그 총계에서 충분히 실현되는 정의의 제약 그 자체를 으뜸패로서 누 르게 된다. 이것은 센의 혼합 결과주의가 고려하고자 하는(contemplate) 선택지이나(CE, 499n) 롤즈는 그 선택지를 그의 의무론적 견해에서 배제시킨다. (rules out) 32 도덕 원칙을 포함하는 선을 최대화함에 내재된 순환성에 관한 나의 이전 주장의 결과는 모든 결과주의 원칙이 결과주의 도덕관에서 근본적인 원칙으로 분별있게(sensibly)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를 증진할 의무가 주된 예다. 증진되어야 할 도덕 개념 이나 원칙을 담고 있는 여느 다른 결과주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 예를 들어 센의 권리의 결과주의 나 노직의 권리 공리주의 제안), 이것은 결과주의와 의무론 사이에 비대칭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의무론적 관념이 우선성 규칙이나 일견적 의무에 의해 결과주의 원칙을 수용할 수 있음에 반해( 정의로운 제도나, 이타심의 의무, 또는 차등의 원칙을 촉진하기 위한 불완전한 의무처럼), 결과주의 도덕관은 의무론적 원칙을 분별있게(sensibly) 포함할 수 없
다.(incorporate) 만일 결과주의가 우리는 항상 선을 최대화하거나 증진할 의무를 지고 있 다는 주장을 유지하려면, 그것은 증진되어야 할 좋은 결과의 요소로든, 아니면 우선성 규칙 을 적용받으며 선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결과주의 의무에 종속적인 도덕 원칙으로든, 의무론 적 원칙을 통합할 수 없다. 이 비대칭성은, 결과주의 관념이 비록 궁극적 선의 다원성을 통 합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옳음의 원칙, 즉 좋은 결과가 최대화되어 야 한다는 원칙만을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이 최대화 원칙에 부여된 우 선성에 비추어 볼 때, 좋은 사태의 최대화와 형량되어야 할 경합하는 옳음의 원칙에 남아 있는 개념적 공간은 없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롤즈가 목적론적 관념은 선을 도덕 개념이나 원칙에 독립적으로 최대화되는 것, 그리고 순수하게 자연적인 조건으로 특정해야 한다고 주 장했던 진정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33 이것은 센의 것과 같은 혼합된 결과주의 입장이 비정합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 기보다는 그것은 그것이 그런 척 하는 바의 관념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우리가 결과주의 원칙이 의무론적 원칙과 서로 형량되는 전통적인 직관주의 틀 내에서 혼합된 공리주의에서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원칙들에 부여된 비 중에 의존하여, 때때로 개인의 권리는 총합에서 더 큰 권리의 달성을 증진하기 위하여 때로 는 다른 선을 증진하기 위하여 맞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개인의 권리는 (Sen 이 시 사했듯이 [CE, 499n]) 단지 그 자체를 위하여 관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결과주의 원칙 과 의무론적 원칙들 사이의 형량에는 어떤 유의미한 의미에서 최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 으며, 확실히 플라톤의 완전주의에서부터 오늘날의 공리주의에 이르기까지 목적론적 관념을 추동하였던 하나의 합리적 선 을 최대화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주 석 18 - 단일한 힙리적 선의 교설에 관하여는 Social Unity and Primary Goods, in CP 를 보라) 우리가 수학 함수에 의해서 그 논리를 기술할 수 있다는 점은 비록 그것이 그와 반대의 환상을 창출한다 할지라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34 이것은 그저 도덕 분류 체계의 공허한 연습이 아니다. 그 질문은 실천적 추론의 구조에 관한 것이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함에 있어 최종 이유를 제공하는 고려사항 들의 종류에 관한 것이다. 롤즈에게 정의의 도덕적 이유들은 실천적 추론에서 최종적인 결 정권자(arbiter) 이다. 정의의 이유들은 궁극적으로 권리와 권리의 공정한 배분의 질문에 관 계하며, 이 이유들이 좋은 사태를 최대화한다는 측면에서(in terms of) 해명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롤즈는 목적론적 교설의 구조는 근본적으로radically 잘못된 misconceived 것이다. 출발부터 그 교설은 옳음과 좋음을 잘못된 방식으로 관련짓는 다. (TJ, 560/ 490 rev) 라고 말한다. 나는, 만일 목적론이 잘못된 생각이라면, 도덕과 정의 를 권리와 의무의 달성이라는 좋음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특징짓는 혼합된 결과주의자들의 노력은 이중적으로 잘못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매력적인 발상일 수는 있으 나 결과주의를 진지하게 고려할만한 진정한 결과들을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but it is of little genuine consequence for consequentialism worth taking seriously) 35 이 논의를 결론짓자면, 많은 이들을 결과주의로 향하게 하는 것은 버나드 윌리엄스가 논 의한 종류의 Pedro 와 인디언 유형의 문제다. { 주석 19 - Beranard Williams, Utilitarianism : For and Against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p.98-104} 그 발상은 확실히 우리는, 19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쏘아야 한다. 특히 우리가 쏘려는 희생자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어쨌거나 살해당할 것인 경우에는 말이다 라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를 쏘아야 하는지 도 모른다는 의문도 당연히 일어난다. (It may well be that)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 리가 그러한 행위가 허용되는지 또는 심지어 그렇게 할 의무를 갖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 하기 위하여 결과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롤즈 자신의 무지의 베일 뒤의 합리적 합의 의 틀 내에서도 이해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요구를 존중할 완전한 의 무로부터의 면제를 허용하거나 심지어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정도의 심각한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한 개인이나 심지어 소수의 권리를 침해(impinge) 하는 조치를 취 할 불완전한 의무를 요청하게 되는, 일련의 여건에 동의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정의로운 명분에서 전쟁을 할 때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정의의 자연적 의무에 대한 최고 비상상황의 면제에 대한 롤즈의 논의에서 발견된다. { 주석 20- Rawls, The Law of People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LP 로 인용표기됨) 주석 20 끝} 이것은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다. 롤즈가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여기서 조심스 럽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 (LP, 98) 그러나 이런 종류의 더 많은 수를 구하는 종류의 경 우를 다룸에 있어 우리는 좋은 결과를 최대화해야 한다는, 우리가 규칙적으로 다른 이들의 지위의 한계적 개선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부의 권리나 통합성을 침해해야 한다고 외견상 요 청하는 것 같은(seemingly) 결과주의적 처방(prescription) 에 따라야 (consigned to)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not consigned to) III. 공지성, 안정성, 그리고 정의의 원칙 공지성 조건 36 전기이건 후기이건 롤즈의 정의에 대한 설명의 더 논쟁적인 특성 중 하나는, 그가 정의 의 도덕관을 정당화시키는 기준으로 공지성과 안정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기준 모두 질서정연한 사회라는 발상에 함의되어 있다. 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의 선택에 대한 형식적 제약 중 하나는 정의관이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그것의 요구사항을 따라야 하는 이들 에게 공적으로 활용가능하며, 인정된다는 것이다. { 주석 21- 옳음의 다른 형식적 제약조건 은, 그 원칙이 형태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요구들의 우선순위를 제공하며, 이유들의 최종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 정의론 23 절) 우선순위 확립 조건(ordering condition) 에 대하여는 이 장의 1 절을 보라.}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그 사회의 원칙이 합당한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며, 일반적으로 공적으로 알려져 받아들여지며, 제도에 효과적으로 배태되어 있는 사회로 정의한다. 공지성 조건의 중요한 함의는 정의의 원칙은, 실현가능한 질서정연한 사회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실현가능한 사회세계에서 실천적 심 의와 공적 논증에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사회는 그렇다면 달성가 능하고 안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 롤즈는 나중에 옳은 이유들로 안정적 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PL, xlii]) : 그 정의의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이 정의의 원칙들을 받아들이며 준수하기를 원하는 실현가능한 사회세계를 묘사해야하만 하며, 이 사회는 사람들에게 세대 를 걸쳐 정의로운 제도가 지속될 수 있도록, 그 제도를 지탱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어넣어야 만 한다. 사실, 안정성은 정의의 원칙들이 인간 본성과 양립가능할 것을 요구한다. 이 원칙
들을 충족하는 제도들이 그 원칙을 따라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의감을 또는 이 원칙들에 따 라 그리고 근거하여 행위하고자 하며 그것이 지지하는 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발성 (willingness) 와 성향을 낳아야 한다. 37 롤즈는 한 곳에서는 안정성 조건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된 정의관을 확인 (confirm) 하기 위하여 호소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안정성은 당사자의 선택의 조건 이상의 기능 을 한다. 왜냐하면 최소극대화 기준으로부터의 논변에 더한 정의의 원칙을 지지하는 세 논 증은 모두 안정성이라는 요구사항에 의존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공약의 부담, 공지성, 그리고 자존감의 조건에 근거한 논증들이다. (TJ, sec29 를 보라) 공약의 부 담 은 당사자들이 신의성실 하게 합의하며, 그들이 그 사회에서 어떤 입장에 처하는 것으 로 판명되건 간에 지지하고 준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정의의 원칙만을 선택할 것을 요청 한다. 당사자들이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면 그러한 법들이 지나친 요구를 하기 때문에 정 의로운 법들을 존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 원칙들을 선택하여서는 안 된다. 공지성 논증은, 선택되는 원칙들이 사회협동의 기초가 공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된다는 조건 하에서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명한다. 공지성은 정의의 원칙들이 정치적 토론, 비판, 그 리고 정당화의 공유된 공적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질서정연한 사회의 합당하고 합리적인 구성원들로부터 앎과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할 수 없는 원칙들은, 그러한 것을 획 득할 수 이는 원칙들에 밀려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존감에 근거한 논증은 당사자들이 그 들이 확언할 것이라고(affirm) 믿는, 또는 적어도 시민으로서의 그들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원칙들을 선택해야 함을 명한다. 이 조건은 결국 자유로우며 시민으로 서 평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시민들의 관념을 확언하는 원칙들에 의존한다. 38 이 세 가지 근거에서, 롤즈는 정의의 원칙들이 고전적 효용 원칙과 평균 효용 원칙 양자 에 비해, 또한 그가 나중에 주장하길 목적론적 완전성의 원칙에 비해서도 선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 주석 22 - 이 세논변은 각각을 지도하는 발상은 롤즈가 TJ, sec26에서의 논증 의 두번째 및 세번째 단계에서 이미 개진되어 있다. 거기서 롤즈는 효용의 원칙이 잠재적으 로,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특히 최소 수혜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곤궁(hardship) 을 부과하기 때문에 다른 더 나은 대안이 있음에도 그 원칙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롤즈는 정의의 원칙에 의해 보장되는 혜택, 특히 기본적 자유를, 평균 효용의 원칙을 선택함으로써 추가로 얻을 수는 있으나 예측할 수는 없는 사회 경제적 이 득을 위하여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Raws, Justice as Fariness: A Restatement, ed. Erin Kelly (Cambridge, MA: Belknap Press, 2001) (Restatement 로 인용표기됨) 을 보라. Restatement 에서 롤즈는 최소극대화 논증은 대체 로 이 두 특성에 의존하며,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확률 평가를 형성할 아무런 기초가 없으므로 불충분한 이유의 원칙을 적용하여 사회의 어느 구성원이 될 확률이 동일하다고 가 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논쟁적인 주장에는 설사 의존한다 하더라도 덜 의존한다고 말 한다. 첫번째 조건은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만을 한다. 우리가 살펴볼 바와 같이 결정적인 것은 두 번재 및 세번째 조건이 높은 정도로 성립한다는 점이다. (99) 롤즈가 나중에 원초 적 입장에서 확률 개념은 적용되지도 않는다 는 주장의 역할을 최소화시킨 이유는 그의 정 치적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는 완전한 불확실성 조건 하에서 베이
지언주의의 현명함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피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논쟁은 공적 이성의 기초 위에서는 해결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석 22 끝} 롤즈는 주장한다. (1) 잠재적인 곤궁(hardship) 때문에 효용의 원칙은 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기꺼이 지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공약의 부담을, 특히 최소수혜자들에게 부과한다. 그들이 최소수혜자의 입장에 처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신의성실하 게 효용의 원칙에 합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은 준수할 수 없는 합의를 하 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덜 유리한 사람들이,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혜택을 주기 위한 부정적(adverse costs)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효용 의 원칙은 스스로를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 정당화의 공적 기초로 기능할 수 없다. 효용의 원칙은 따라서 질서정연한 사회의 안정성을 낳을 수 없다. (3) 효용의 원칙은 최소수혜자의 자존감과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을 훼손할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공리 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지위와 기본적 자유의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덜한 전망을 직면할 것이 강제될 수 있으며,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들의 선을 희생할 것이 요구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9 이 논증들은 인간 본성과 사회협동에 대한 여러가지 경험적 가저엥 의존하고 있다. 롤즈 는 이 가정들을 < 정의론> II부와 III 부에서 제시(sets out) 하고 옹호한다. 여기서 특별히 중 요한 점은 TJ의 8 장에서 주의깊게 정교화된 심리학, 7장에서 개진된 인간의 선에 대한 설 명, 그리고 TJ의 II 부에서 개진된 실현가능한 사회제도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여기서는 공 지성에 근거한 논변에 초점을 맞추어, 질서정연한 사회의 공지성과 안정성이라는 발상이 롤 즈가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롤즈의 논증 및 그의 전체 견해에 어떤 방식으로 중심적인지를 강조하겠다. (highlight) 40 공지성에 근거한 논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박을 살펴보라. 효용 원칙의 공적 앎은, 진 지하고 (since re) 양심적인 공리주의자들의 사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최대의 효용이 궁극적인 선이며, 그들은 그것을 항상 증진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효용 원칙이 그들의 사회관계의 기반을 제공한다는 공적 앎은 아무런 ( 특정 한 조정 문제를 아마도 제기되지 못하게 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낳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공리주의적인 질서정연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공리주의 적 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어넣어 옳음 이유로 안정적일 수 없는 이유가 불분 명하다. 41 이 반론에 답하자면: 공지성에 근거한 논변은, 효용 원칙이 양심적인 도덕 행위자, 그들 모두가 이미 전체 효용을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서 최대화되어야 할 궁극적인 선으로 받아 들이며 그 요구를 준수할 수 있는 도덕 행위자들에게 공적으로 수용가능하다는 사소한 주장 일 수 없다. 그 논변은 거의 아무런 증명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probative value) 공지성 논변은 그렇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룬다: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합당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의 다원성과 다른 이들의 목적 및 추구목적과 잠재 적으로 상충하는 목적을 추구한다는 불가피한 사실에 비추어, 그러한 목적 추구를 함에 있 어 스스로 정당화된다고 생각할 정의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추구 목적(pursuits) 의 다원성의 불가피성은 롤즈가 호소하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할지도 모른다: 정의의 주관적 여건 때문에 생기는 다원적인 추구목적을 가 정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이 그들의 특정한 목적을 총 효용에 대하여 우선성을 가지는 것으 로 여기는 한, 그들은 틀린 평가적 신념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틀린 신념이 왜 고려되어서 정의의 원칙을 평가하는 심사로 쓰여야 하는가? 정의의 원칙을 평가함에 있어 공지성 조건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더 낫다. 42 그렇다면 공지성 조건에 관하여 무엇이 쟁점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롤즈가 왜 정의 원칙에 대한 공적 앎에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롤즈는 공지성 조건이 계약론적 입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그것은 또한 칸트의 교설에도 함의되어 있다 고 말한다. (TJ, 113/115 rev) 일반적으로 롤즈는 공지성 조건을 정당화함에 있어 두 종류의 고려사항에 호소한다. 첫째로, 그의 계약론으로부터 나오는 것 으로 그는 우리의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비추어 무엇이 합당한가에 관한 발 상에 호소한다. 둘째로, 칸트적 해석에서 그는 공지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의 이 상과 여러 형태의 자율성의 선을 달성하는 것을 실현하는 조건으로 정당화한다. 전자부터 논하겠다. 43 공지성, 합당성, 그리고 상호 존중: 계약관은 공지성 조건을 도입한다 그것은 계약 이론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 중 하나다 (CP, 249) 여기서 그 사고는, 정의의 원칙을, 합의 의 산물로 인식함은, 그 원칙들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공적으로 알려지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오해 정의의 원칙을 합의의 산물로 간주해야 하는가? 롤즈 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인간에 대한 존중, 인간 존엄성,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제 공하며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가치는 어떤 가격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TJ, 586/ 513 rev) 라고 한다. 상호 존중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 요구, 그리고 그들 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치를 그들 모두가 ( 어떤 유관한 능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에 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들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중은, 그들이 정당화된다고 이해하는 바에 따라 그들을 대우함에 의해서 보여진다. (ibid) 도덕 원칙의 공 지성, 그리고 그것이 일부인 도덕관은 만일 이 정당화가 소위 한계까지 완전히 수행되려 면 필수적이다. (cf. TJ, 582/ 510 rev) 사회 정치 관계가 현재대로 구조화되는 이유들이 있으며, 공지성은 이 이유들이 모든 이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활용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장한다. 44 T. M. Scanlon 의 계약론은 롤즈 사고의 이 측면을 발전시키며, 그것을 더 일반적으로 확장한다. 스캔론의 발상은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What we owe to each other 의 도덕은 다른 이들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잊넝은 우리가 다른 이들 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행동과 제도를 정당화하는 위치에 있을 것을 요구하 며, 그러한 정당화는 그들이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이유들과 규칙에 의거하여 이루어 질 것을 요청한다. { 주석 23 - T. M. Scanlon, What We Owe to Each Oht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이와 유사하게 롤즈에게도, 다른 이들 을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함의 일부는, 우리가 그들이 그들의 자유롭고 평등하 며 합당하고 합리적인 사람의 능력으로 ( 또는 롤즈가 이후에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듯 이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그들의 능력으로) 합당하게 받아들이고 지지할 수 있는 조건에 의
거하여 우리의 행동과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cf. TJ 586/ 513 rev) 이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을 한 개인에게, 개인의 양심 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건 우리가 정당화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기 보다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가진 다른 이 들에게 우리가 모두 [ 원초적 입장에서] 인정하는 원칙들 에 호소하며 그들으 이 원칙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라 대우함으로써 정당화한다. (TJ, 519/ 544 rev) 나는 이것을 공지성 조 건의 계약론적 정당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캔론의 입장과 닮아 있으며, 또한 공지성이 계약론적 입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방식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TJ, 133/ 115 rev, cf 17/15 rev) 여기서 공중의 삶을 제약하고 규제하는 원칙들의 제정 에 대한 이런 종류의 정당화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려면 무엇이 합당한가를 고려한 바에 기초한 도덕적 요청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지성의 설명은 인간의 선이나 근본적인 이해관심에 대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45 합당성의 이러한 고려사항에 유관한 것은 도덕관의 온전한 공지성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정의관에 특별히 적합하다는 점이다. { 주석 24 - Kantian Constructivesm in Moral Theory (The Dewey Lectures, 1980) in CP. 325 를 보라. 롤 즈는 여기서 말한다. 의문의 여지 없이 공지성은 다른 도덕 개념보다는 덜 강력하다 이것 은 정말로 공지성이 롤즈가 제안한 대로의 공정으로서의 옳음 (TJ, 17/15rev) 같은 더 일 반적인 도덕관을 위한 적합한 조건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우리가 정치적 자 유주의를 논의할 때 (chaps 5-7) 우리는 롤즈가 어떠한 포괄적인 도덕관 이 온전한 공지 성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잇다는 점에 대하여 유보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PL, xviii) 주석 24 끝} 롤즈는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한다. 첫째, 어떤 강제 기구 some machinery of coercion 가 심지어 우호적인 여건 하에서조차도 그 원칙을 관철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둘 째, 정치적 원칙이 규제하는 기본적 사회 제도는 그토록 장기적이고 주된primary 영향을 미 치며, 사회 구성원들의 목적과 성품,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며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 고 싶어하는가 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CP, 325-26) { 주석 25- The Independence of Moral Theory (1975) CP, 249 도 보라}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들 사이의 사회 협 동의 근본적인 조건이 온전한 공지성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은 적합한 것으로 보인 다. 왜냐하면 제도가 강제적 제재에 의존하고 사람들의 가장 심층적인 열망에 영향을 미 친다면, 이 제도들( 그리고 제재들) 의 근거와 경향은 공적 심사를 견뎌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CP, 293, 326) 여기서 롤즈의 사고는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에게 정당화 할 의무는,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강제할 때 적용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 제는 그 본성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부인하는 불평등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계약 교설이라는 직관적인 발상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그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 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관철되는 협동의 조건을 수용하고 합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6 공지성, 그리고 도덕적 합리적 정치적 자율성 : 이제, 공지성 조건의 칸트적 배경을 살펴보자. 롤즈는 말한다. 나는 각자가 이 [ 정의의] 원칙을 이해하고 그의 숙고에서 그 원칙을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TJ, 132/ 114 rev) ( 주 석 26 - 여기서 롤즈는 내가 나중에 다시 살펴볼 논지를 덧붙인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복합적일 수 이는지의 종류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그을 수 있는 구별의 종류와 수에 대 하여 상한을 부과한다 (TJ, 132/ 114 rev) 도덕 원칙은 실천적 추론의 원칙으로서 도덕행 위자에게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 양자 모두에서 심의를 지도하 고, 공적 정당화와 비판에서 역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롤즈가 칸트로부터 받아들인 유산 이다. 여기서 그 발상은,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과 제도가 그들의 삶과 이해관심에 심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하여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는 관심을 넘어선 다. 그렇다기 보다, 강조점은, 행위주체로서 도덕적 행위자(moral agency) 로서 능력의 지위 로 이동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도덕적 능력, 더 일반적으로는 실 천적 추론 능력을 행사하면서 활용해야 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칸트처럼 롤즈는 그의 커 리어 중 한 지점에서 정의의 도덕 원칙을 실천적 추론 그 자체에 의해 제공되는 명세에 어 떻게든(somehow) 재단되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이것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칸트적 해석과, 이후 칸트적 구성주의에서 동일한 발상의 발전에서 출현한다. emerges ( 칸트적 해 석은 5 장에서 훨씬 더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47 칸트적 해석과 칸트적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발상은 정의의 도덕 원칙이 어떻게 자유롭 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도덕적 인격 ( 우리의 실천적 추론)ㅢ 특히 정의감의 도덕적 능력의 표현인지를 보이는 것이다. 공지성 조건과 관련하여 그 논지는, 정의감을 위한 우리 의 능력의 표현 인 공적 도덕 원칙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면서 추론하며 이 원칙 자체를 위 해 그리고 그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을 알면서 행위하는 것은 자유로운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도덕적 자율성을 갖추고 행동한다는 것은 실천적 추론을 위한 우리의 능력이 결정적인 결정 요소 인 곳에서 그 능력에 기반하여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 는 원칙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면서 행동하는 것이다.(knowingly) (TJ, 252/ 222 rev) 칸 트적 해석은 정의의 워닉이 그리하여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본성 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보여준다. (TJ, sec 40) 우리가 도덕적으로 자율적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의 정치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구조화함에 있어 우리의 도덕 추론과 정치적 추론을 우리 의 이 정의의 원칙에 근거하여 공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하며, 기댈 수 있어야만 한다. 48 칸트적 해석에 근거한 롤즈의 합치성 논증(argument for congruence) 는, ( 우리가 이후 에 살펴볼 바와 같이), 도덕적 자율성-정의감을 위한 우리의 도덕적 능력에서 지지하는 원 칙에 따라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것-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내 재적인 선임을 보이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롤즈는 이후에 칸트적 구성주의에서, 인생 계획을 합리적으로 형성하고, 수정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의 행사와 발전도 도덕적 인간 에게 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를 구조화하고 규제하는 정의의 원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에 더하여, 그들 자신의 선택인 인생계획을 합리적으로 형성하고 성공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선에 책임을 지는 것도 사람들에게 내재적인 선이라는 점을 시사 한다. 이것은 합리적 자율성 이며, 그것을 도덕적 자율성과 결합하여(and the conjunction of it with moral autonomy) 롤즈는 완전한 자율성 (full autonomy) 라 부른다. (CP, 308) 도덕적 자율성 처럼, 합리적 자율성 역시 공지성 조건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제도는 사람들의 성품, 목적, 미래의 전망에 그토록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규범적 기초, 사회 협동을 규제하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합리적인 인생 계획 을 설정하게 되는 정의의 원칙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환상(illusions) 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롤즈는 이것을 이런 종류의 진실된 신념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좋다는 완전주의 적 이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 주석 27 - 합리적 자율성은 J. S. Mill의 개별성이라 는 발상을 닮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자유주의에 대한 완전주의적 정당화의 일종으로 서 지지된다. 예를 들어 Joseph Raz, The Morality of Freedo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을 보라) 또한 Ronald Dworkin, Sovereign Virtu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SV 로 인용표기됨) 도 보라. 주석 27 끝} 그렇기 보다는 그의 이유는, 우리의 성품과 목적을 형성하는 도덕적 기반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관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CP, 326) 정의의 원칙이 공적으로 알려질 때, 사람들은 사회적 제약과 기대의 진 정한 이유들을 알 수 있으며, 이 이유들을 그들의 행동과 추구목적을 계획할 때 적용할 수 있다. 행위의 도덕적 토대는, 개인적 숙고에서 가려져(occluded) 있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 다. 이것은 인간이 완전히 책임 있는 도덕 주체가 되기 위해서 결정적이다. 공지성은 이런 측면에서 완전한 자율성의 조건이며, 개인이 창출하거나 스스로를 위해 택하는 인생계획에 책임을 지기 위한 조건이다. 49 마지막으로, < 정치적 자유주의> 에서 롤즈는 칸트적 해석에 깔려 있는 포괄적 교설을 내 던진다. 그 교설은 자율성( 즉, 정의 그 자체를 위해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규제 되는 합리적 자율성) 이 최고로 규제적인 선이라고 말한다. { 주석 28 -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 aperbook edition, 1996/2004, (PL 로 인용표기됨; 인용쪽수는 페이퍼백에 대한 것임.) 주석 28 끝} 그러나 그 는 여전히 온전한 공지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의 조건으로 간주한다. 합당한 다원주의 대문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모두가 도덕적으로 자율적이기를 원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 신앙을 지닌 많은 시민들은 도덕적 자율성을 그들의 삶의 방식의 일부라고 하길 거부한다 [PL, xlv])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롤즈는, 그들이 정치적 자율성을 목표로 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롤즈는 정치적 자율성 을 시민들의 법적 독립 과 확보된 정치적 통합성, 그리고 정치 권력의 행사에 다른 시민들과 함께 평등하게 참여하 는 것 이다.(PL, xlivi; CP. 586) 온전한 정치적 자율성 에 대하여 롤즈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 인용문 시작) 시민들은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적합한 헌법 및 모든 하위법들과 함께 합당하게 정의로운 여건 하에서 살 때, 그리고 그들이 이 헌법과 법률을 온전히 이해 하고 지지하며, 또한 그 법들을 변화하는 사회적 여건 요청하는 바대로 항상 그들의 정의감 과 다른 정치적 덕에 의하여 적합하게 동기화되어 조정하고 수정할 때, 온전한 정치적 자율 성을 획득한다. 정치적 자율성의 합리성( 또는 선) 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합리적 인생계획을 자유롭게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와 사회적 협동에 필수적인 도덕 능력을 발전시키고 행사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근본적인 이해관심으로부터 나온다.(stems from) 공지성에 관하여 보자면, 이 맥 락에서 롤즈의 발상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적 시민들이 그들 스스로를 도덕 능 력에의 고차적인 이해관심을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에 비추어, 사회적 정치적 관계의 기반을 알고 싶어하는 것, 그리고 그 기반이 모두에게 공적으로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하여 민주적 시민들이 그들의 이해관심을 보호하고 그들의 집단적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그들의 근본적인 이해관심과 그들의 개인적인 선관을 성공적으로 실현 하고 싶어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 주석 29 - 롤즈가 언급하는 정의의 원칙의 공지성을 위 한 추가적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연합(social union) 이라는 선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우 리가 사회 연합이라는 발상과, 그러한 연합들의 사회적 연합으로서의 사회라는 발상을 진지 하게 생각한다면, 확실히 공지성은 자연스러운 조건이다. 그것은 질서정연한 사회가, 그 구 성원들이 따르며 서로가 그 동일한 규제적 관념을 따른다는 점을 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모든 이들이 각자가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방식으로 모두의 노력의 혜택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활동이다. (one activity) (TJ, 582/ 501 rev) 사회 연합은 복잡한 발상이 며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지성의 이 이유를, 위에서 언급한 합 리적 도덕적 자율성과 마찬가지로 로르가 나중에 인간의 선에 관한 포괄적 이유들 이라 고 부르는 것에 호소한다는 점은 강조할 가치가 있다. (PL, VI; esp. 251n) 주석 29 끝} 여기서 롤즈는 정치적 정의관의 공지성에 의하여 달성되는, 시민들로 하여금 질서정연한 사 회의 기본구조에서 표명된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이상을 알도록 해주는 교육 적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56 나는 롤즈가 사회의 정의의 원칙과 정의관의 공지성을 정의관에 의하여 요청되는 것으 로 여기는 몇 가지 이유들을 검토하였다. 이 중 일부는 롤즈의 합당성이라는 관념 그리고 정의 원칙의 계약론적 기초와 관련 있다. 다른 일부는 그의 인간에 대한 칸트적인 ( 또는 정 치적인) 이상 및 개인의 합리적 선에 대한 포괄적인 ( 또는 정치적) 설명과 관계 있다. 이 모 든 것에 대하여 공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할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도덕 원칙들의 공 지성이, 상호 존중, 우리의 목표와 성품에 대한 책임, 정치적 자율성 그리고 ( 구성주의가 이 치에 닿는다고 했을 때) 도덕적 자율성까지 아우르는 그러한 가치들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하건, 이 가치들의 요구는 여전히 궁극적인 선인, 전반적 효용의 중요성보다 비중이 크 지 않다. 여기서 < 정의론> 3 부에서 롤즈의 선의 이질성 논증이, 기본적 도덕 원칙의 공지 성의 적합성에 대한 공리주의자의 회의주의에 답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모든 것이 그 가치를 그에 의거하여 가지게 되는 궁극적인 비도덕적 선이 있다면, 그 선에 대하 여 행위자들에게 공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증진하도록 고안된 도덕 원칙에 대한 사람들 의 지식은( 사소한) 종속적인(subordinate) 가치만을 지님에 틀림 없다. 정확히도 이 이유 때 문에 시즈위크는 공리주의자들이 소수만이 이해하는 도덕 으로 남아 있으면, 즉 공리주의 에 대한 앎이 계몽된 극소수 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 주석 30 - Methods, 490} 그러나 선의 다원성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선들 중에서 그 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인생계획에 어떤 선을 포함시킬지를 결정할 개인의 자유가 있다 면, 정의의 도덕 원칙의 공지성에 반대하는 공리주의적 논변은 그 힘(potency) 을 잃는다. 51 이것은, 공지성 조건에 근거한 롤즈의 정의의 원칙 논증의 결정적인 측면은, 단일한 합 리적 선에 반대하는 그의 논증 및 가치의 다원성 논증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 정의론> 에서 롤즈의 선의 다원성에 대한 설명은 < 정치적 자유주의> 에서 나중에 포괄적 교설 이라고 불 렀던 바다. (PL, xviii) 만일 그렇다면 ( 여기서는 순수한 정치적 정의관으로 인식된) 공리주 의에 반대하는 공지성 논증의 힘은, 더 이상 < 정의론> 에서 개진된 가치에 대한 다원적 설 명에 의존할 수 없다. ( 또한 합리적 자율성 및 도덕적 자율성, 그리고 사회적 연합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논증에 의존할 수도 없다.) 이것은 롤즈가 합리성으로서의 선 에 대한 설명을 < 정치적 자유주의> 에서 포기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PL, 176) 그러나 그 는 정말로, 그것이 인간의 직관적인 선에 대한 필수적인 설명을 적절하게 제공한다는 이전 의 주장은 포기해야만 한다. < 정치적 자유주의> 에서 롤즈는 합리성으로서의 선을 가치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이기보다는,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구조를 위한 정의관에 적합한 가치에 대한 관념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PL, 176n)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상이한 포괄적 교설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치의 본성 및 가치 의 객관성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 같은 것에, 그리고 하나의 합리적인 선이 존재하는지 아니 면 내재적 선의 다원성이 존재하는지에 합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롤즈는, 그들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여기는 합당한 사람들은 합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필연적으로 상이한 선관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판단의 부담 및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의 결과를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스스로를 정치적 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우 리가 많은 사람들의 선관의 궁극적인 가치에 관하여 무엇이나고 생각하건 ( 우리 중 많은 수 는 예를 들어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 불합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의 선관을 추구할 자유를 가지는 것이 자유주의적 관념에서는 더 중요 하다. 롤즈가, 합리성으로서의 선이 자유주의적 정의관의 맥락 내에서 선에 대한 설명으로 서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위에서다. 이것은 그것이 모든 목적에 적합하 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롤즈의 선에 대한 기초론( 얇은 이론) (TJ,m 396/ 347-8 rev) - 그 기초론은 민주적 시민들이 선관을 결정하고 수정할 능력을 포함하는 도덕적 능력을 행사 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이 공리주의 및 다른 목적론적 관념들을 포함 한 어떠한 합당한 포괄적 교설과도 양립불가능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는 것 같다. 즉, 기초 론은 질서정연한 사회 내의 정치적 자유주의 정의관에 대한 중첩적 합의에서 모든 그러한 합당한 교설에 의해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 { 주석 31- 여기서 Samuel Scheffler 는 이것이 벤덤과 시즈위크의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하여 참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Rawls and Utilitarianism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Rawls, 452 를 보라. 주석 31 끝} 안정성의 요청 (The Stability Requirement) 52 이제 질서정연한 사회의 안정성이라는 발상에 관하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롤즈가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논변에서 하는 가장 중대한 가정 말이다. 롤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공리주의 정의관의 조건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확고부동하게(steadfastly) 헌신하고자 하는 실현가능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사한 다. 공리주의적 공약의 부담은 덜 유리한 처지로 판명되는 이들 그리고 더 나은 처지에 있 는 이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그 복지가 훼손되거나 박탈당하는 이들에게 너무 큰 것 이며, 더 나아가 효용 원칙이 공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세계는 많은 성원들의 자존감과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을 훼손할 것이다. 공약의 부담 논증은 더 나쁜 처지의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이 다수를 위해 희생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 라는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연히도, 덜 유리한 처지의 사람들은 이때까지의 역사상 거 의 모든 사회에서 그들의 복지를 다른 이들의 복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 논증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희생 하에 다른 이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도덕 원칙과 제도를 기꺼이 따르고 그 자체를 위해 행동하도록 이끄는 확고부동한 (steadfast) 정의감을 발전시키리라 기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 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복을 희생하여 그들이 알지 못 하는 다른 사람들이 한계적 혜택을 얻도록 하는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기 희생 또는 복종(subservience) 의 성향을 북돋워야 할 건강한 경향인지 아니면 억제되어야 하는 자기 파괴적인 태도인지는 다른 질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확실히 예외적이 며, 안정성 논증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모든 ( 또는 거의 모든) 합당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공리주의 원칙에 의해 형성되는 정의감을 알면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knowingly) 고 요구한다. 롤즈가, 우리의 심리적 본성을 특징짓는다고 이야기하는 호혜성의 원칙은, 우리의 선에 대한 감각을 부인하기보다는 확언하는 인간과 제도에 대한 애착을 발전시킨다고 모두 이야기한다. 정의감은, 호혜성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관계와 제도를 지지하도록 갖춰지는 (geared) 것이지, 자기 희생을 위하여 갖춰지지 않는다. 이것은 질서정연한 공리주의 사회 의 안정성이 매우 위태롭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에 비추어 볼 때, 효용 운 칙에 의해 숙지된 규제적 정의감을 모든 이들에게 고취할 것이 요구되는 동정심의 광범위한 유대나 심지어 무사공평한 자애심을 사람들이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일어날 법하지 않기 때 문이다. 53 롤즈의 도덕 심리학이 참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본성상, 일반적인 인구 전체를 향한 광 범위한 동정심이나 무사공평한 자애심을 가질 것으로 신뢰될 수 있는 자기 희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공리주의자들이 제기한, 그리고 G. A. Cohen 이나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비공리주 의도 제기한 한 가지 반박은 다음과 같다. 왜 인간의 본성 또는 다른 경험적 경향이, 정의 의 도덕 원칙의 진리나 합당성의 조건이 되어야 하는가? 인간 본성의 경험적 한계와 사회적 협동에 관한 불가피한 사실들은, 도덕 원칙의 적용과는 확실히 관련이 있지만, 그들의 진리 치( 眞 理 直 ; truth value) 에는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라 개념적인 문제다. ( 굳이 그렇게 부른다면) 순수 이성 의 문제다. 도덕관의 진리성-또는 합당성-의 조 건은 (a condition upon the truth),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고 ( 단지 인간적으로 실 현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여건을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로 인간의 취약성(human vulnerabilities) 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없다. 54 이것은 복잡한 반론이며, 여기서 제시한 논증을 다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간략하게 이 야기하자면, 질서정연한 사회의 안정성 - 또는 실현가능성이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롤즈의 집중(focus) 는, 전기이든 후기이든 더 telling 한 특성 중 하나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낳은, < 정의론> 에서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위한 논증에 그가 그토록 상당한(substantial) 수정을 가한 이유이다. 그것은 < 만민법> 에서 그의 수수께끼 같은 태도라고 많은 이들이 보 는 것을 설명해준다. 안정성 조건을 향한 추동력(impetus) 은 루소의 사회계약과 ( 롤즈가 그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LP, 6-7] 그의 현실적 유토피 라는 발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롤 즈가 종종 인용하였던 < 사회계약론> 의 서두에서 루소는 말한다: ( 인용문 시작) 나의 목적은, 정치 사회에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법을 가능한 바대로 다루는(taking men as they are and law as they might be) 통치의 정당성 있는 확실한 원칙이 만일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탐구에서 나는 항상 권리가 허용하는 것과
이해관심이 요청하는 것을 합쳐서bring together 정의와 효용이 결코 (in no way) 분리되 지 않도록 할 것이다. ( 강조는 인용자) { 주석 32- Jean Jacques Rousseau, On Social Contract or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 (1762) in Rouseau's Political Writings, ed. Alan Ritter and Julia C. Bondanela (New York: Norton, 1988 [originally published 1762]), book. I. p ara I. 이 문구는 롤즈가 LP, 13에서 인용하고 그곳과 7쪽에서 논의한 것이다} 55 있는 그대로의 인간 을 롤즈는, 도덕적 심리학적 본성 그리고 그 본성이 사회 정치 제도의 틀 내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발전하는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가능한 바 대로의 법 Law as they might be 은 합당하게 정의로우며 질서정연한 민주적 사회라는 이 상적인 조건 하에서 그래야 할, 마땅히 그래야 되는 법이다. (LP, 7, 13) 그러므로 안정성 쟁점의 첫번째 측면은 이상적 여건을 위한 ( 루소는 유토피아적 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즉 인간 본성에 비추어, 우리가 달성할 수 있으며 계속되 는 사회질서에 작동가능하고 적용가능한 ) 질서정연한 사회의, 정의의 원칙을 발견하는 것 이다. (PL, 13) < 정의론> 8 장 정의감 의 주된 역할은, 롤즈의 정의 원칙이 인간 본성 및 인간의 도덕 심리의 잠재성과 어떻게 양립가능한지를 보이는 것이다. 56 안정성 논증의 두 번째 측면은, 루소의 문구(phrase) 에 의해 시사된다. 권리가 허용하 는 것과 이해관심이 요청하는 것을 합쳐서 정의와 효용이 결코 분리되지 않게 한다 는 문 구. 정의와 효용 의 조합은,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의 근본적인 이해관심에 반응적 인 정의의 원칙을 요청하며, 인간선과 합치 되지는 않을 지라도 양립가능할 것도 요청한 다. 여기서, 사회연합에 근거한 논증 (sec 79) 및 옳음과 선의 합치 논증 (sec 86) 을 포 함하는 < 정의론> 9 장의 정의의 선 The Good of Justice 의 과제는, 정의는 우리의 본성 에 비추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 선의 핵심적인(essential)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롤즈가 ( 앞에서 넌지시 언급되었듯이) 정의의 원칙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 의 본성의 표현 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그 원칙들은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인격을 표현하 도록 고안된 절차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할 원칙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원칙들에 따라 그리 고 그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 함께 (therewith)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내 재적 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 이 논증을 자세히 보려면 이 책의 chap 5 를 보라) 57 그렇다면, 롤즈가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focus on) 에 깔려 있는 두 가지 일반적인 종류의 이유가 있다. 58 1. 정의와 인간 본성: 첫째, 만일 정의관이 사람들이 그 정의관을 알게 되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정의의 내용이 관철되는 최선의 조건 하에서의 실현가능한 사회세계-질서정 연한 사회- 에서 실현되고 지속될 수 없다면, 그 정의관은 롤즈에게 [ 비] 현실적인 유토피 아 다. 그 경우 그것은, 심지어 현실세계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도 인간 본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당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모두 준수할 수 없는 정의관의 조건(term) 을 일반적으로 준수하리라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유토피아적 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어떤 이는 여기서 어떠한(any) 사회세계의 합당한 사람들도, 동일한 정의관- 특히,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합의하고 그것을 일반적으로 지지할 수 있으리라는 롤
즈의 기대야말로 유토피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일 그 기대가 유토피아적이라면, 일 반적인 숭요가능성은 어떠한 도덕관에 대해서도 부과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조건이라고 한 다. 그러나 롤즈는, 아무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해도, 사람들이 정의관을 준수하리라 가 정할 만큼 인간 조건에 대하여 충분히 낙관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했다거나 전적으 로 이기적이어서 정의 그 자체를 위해서 정의가 요구하는 바대로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못 하게끔 하는 것이 인간 본성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말년에 공적 이성이라 는 발상의 재검토 The Idea of Public Reason Revisited 에서 롤즈는, 질서정연한 민주적 사회에서는 판단의 부담 때문에 다원적인 자유관이 합당한 시민들에 의하여 지지될 것임 을 인정하였다. { 주석 33- Rawls, "The Idea of Public Reason Revistied" (1997) in CP, 573} 이 측면에서 그는, 그의 이전 희망, 즉 특히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현가능한 사회세 계에서 합당한 사람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지지되리라는 희망에 무언가 비현실적인 점이 있 다는 양보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지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록 모든 이들이 공정 으로서의 정의의 정확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지라도, 롤즈는 모든 합당한 사 람들은 적어도 기본적 자유의 우선성, 공정한 기회, 그리고 일종 사회적 최소치를 제공하는 이런 저런 비슷한 자유주의관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9 안정성 조건의 대안은 무엇인가? 하나의 대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준수할 수 없는 정의관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달성되는 목적이 뭔가? (But What could be the point in that?) 도덕적 정의관으로서 그것의 목적이나 역할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상호 존중 의 조건 위에서 함께 살게 해주는 사회 협동의 기초를 제공하려는 롤즈의 야망과는 다른 무 언가여야만 한다. ( 아마도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세계 에서 좋음의 총합을 최대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롤즈는 ( 칸트 및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 함께), 모든 도덕관의 정당화에 부과되는 조건은, 그것이 작동가능하고, 달성가능한 것이어 야 한다는 점, 즉 그것이 인간 본성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당위는 가능을 함의한다. ought implies can 이라는 칸트의 격언 (adage) 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60 여기서, 공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용 원칙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본성 및 다른 많은 환경에 적응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존재로 판명되든지- 벤덤이 가정했듯이 심리적 이기주의자건, 흄이 주장했듯이 제한 된 이타주의자건, 또는 심지어 완전히 잘 변하고malleable하고 무사공평한 자애를 발휘할 수 있는, 공리주의자로서 가장 열렬한sanguine 형태의 존재건- 말이다. 공리주의의 장점은, 합리적 존재가 어떤 종류의 피조물로 판명(turn out to be) 되건 간에, 효용 원칙은 그들의 여건이 무엇이건,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구체화하는 일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61 공리주의자들이 대부분의 어떠한 사회에 대해서도 인간 본성과 관계 없이 정의의 규범 을 제공하도록 적응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의 큰 장점 중 하나로 여 겨진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공리주의 사회는 올바른 강제(enforcement) 메커니즘을 갖 고 있다면 홉스주의적인 안정성 의 의미에서 안정적일 수 있다. ( 그런 의미에서, 로마제국 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경쟁하는 이익들 사이의 타협이라는 의미에서 안정성은 롤즈가 관심을 가졌던 종류의 안정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홉스가 보여주었듯이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