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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논문은 2009 년도성신여자대학교학술연구조성비지원에의하여연구되었음. 2)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National Interest, No. 16 (Summer 1989), p. 4. 3) 이러한구분에관해서는존베일리스

Transcription:

전후소설과 허무주의적 미의식

머리말 전후소설을 연구하기로 결정하고 작품과 비평, 사상계 를 읽기 시작하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년이 흘렀다. 비록 손창섭과 장용학에 제한된 연구 이지만 여기 그 결과를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내놓는다. 너는 왜 전후소설을 연구하냐 고 한 선배 연구자가 물었을 때, 그냥 웃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 을 그리는 것이 근대 소설일 텐데, 전후소설에 그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 확한 일이 아니냐, 연구할 의욕이 생기냐고 질문했기 때문이고, 나로서는 그러 나 상황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말로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구로만 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지금도 전후소설은 리얼리즘이 없다, 외래사조에 무비판 적으로 편승하였다 등등 절름발이 문학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 나 이 책은 오히려 전후소설이 우리들에게 소설을 바라보는 그 동안의 패러다 임을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니까 실 패한 혹은 일어나지 않은 시민혁명을 문학에서 이루어내려는 쉴러의 시민문학 론 이래, 우리의 경우 1960년대 이래 모든 것은 근대적 시민문학의 관점에서 평가되어 왔던 것이고 이로부터 벗어날 때만 전후소설은 온전히 평가될 수 있 다는 문제의식 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후소설의 고유성을 온전히 밝혀내 는 일이었고, 그것이 문학상의 패러다임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만큼 미학 적 차원에서 꼼꼼히 분석해 내는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의 연구결과는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과 연구를 진행한 과정 자체는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머리말 그 결과물인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1부에서는 손창 섭과 장용학의 허무주의와 미의식을 규명하고 있다. 최소한 개인에게 한국전쟁 은 이념적 규정과는 무관한 대재앙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 이를 가장 철저하게 내면화한 작가가 손창섭과 장용학이고 이들은 전후 2세대 작가들과는 질을 달 리한다는 점, 그들의 허무주의는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일 상의 감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점, 무엇보다도 그 허무주의가 우리 문학사 에서는 유례가 없는 고유의 미의식을 산출하게 만들었다는 점, 결과적으로 그 들의 문학은 반시민문학이라는 점 등등. 결국 기타 등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간의 평가와는 달리 손창섭이 니체, 특히 루소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미학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밀접히 연관이 있다는 것, 장용학이 사르트르보다 오히려 니체에 크게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장용학이 요한 시집 을 쓸 때 보았다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수기를 이곳저곳의 도서관을 뒤 져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 다. 연구 과정은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라는 깨달음의 연속이었는데, 이러한 깨달음의 기쁨은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 손창섭과 장용학이 영향 받은 사상가들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루소, 니체,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독서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사상의 힘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학문과 사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2부는 손창섭의 작품과 아이러니의 관계를 규명하고 있다. 근대소설의 핵심에 아이러 니가 놓여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손창섭을 통해 아이러니 일반론을 넘 어서 절대희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말 이 책이 나로서는 두 번째 책이다. 또 한권의 책을 내면서 그 동안 나를 지도 해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수년 동안 참 미련하게도 굴었는데, 항상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던 조남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선배, 동학, 후배들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이 책은 물론이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만 현재 의 나 역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었던 아내, 오히려 나보다 어른스러운 아들 재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항상 믿 고 격려해주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감사드린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 그 리고 막내아들 걱정에 항상 노심초사 하시는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친다. 2005년 봄에 조현일

차례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1 1.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 11 1) 세대론, 세계관, 미학적 특성 11 2)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그 내면화 18 2.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 역사철학, 허무주의 23 1)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문학 23 2) 부정적 역사철학과 신화적 폭력, 운명 28 3) 허무주의의 두 가지 계보 32 4) 허무주의적 미의식 41 제2장 신화적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우울자와 희극성 49 1. 두 가지 인물 유형 : 동물적 인간과 우울자 49 1) 동물적 인간과 도덕적 무구성 49 2) 우울자와 심미적 슬픔 65 2. 신화적 운명과 죄의식 80 1) 운명의식과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 80 2) 죄의식과 역설적 상황 93

차례 3. 우울자의 악마적 저항과 희극성 106 1) 악마적 저항으로서의 나태와 침묵 106 2) 자연적 삶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희극성 121 제3장 신화적 폭력에 대한 초극으로서의 비인과 알레고리 134 1. 超 人 에 대한 추구와 대재앙으로서의 근대성 134 1) 非 人 과 초인사상 134 2) 대재앙으로서의 근대성과 부정적 역사철학 147 2. 근대의 신화적 폭력과 디오니소스적인 심미적 현상 164 1) 근대적 세계의 두 가지 원리와 신화적 폭력 164 2) 고통의 강화와 디오니소스적인 심미적 현상 179 3. 알레고리와 비극적 구조의 원용 196 1) 상형문자로서의 알레고리와 신화 파괴적 성격 196 2) 알레고리의 이율배반과 비극적 구조의 원용 209 제4장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허무주의적 미의식 227 1.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근대의 신화적 폭력 227 2. 허무주의적 인간상과 허무주의적 미의식 237 제5장 결론 254

차례 제2부 허무주의와 아이러니 제1장 주체의 분열과 아이러니 263 1. 미해결의 장 과 아이러니 263 2. 아메리카 드림, 성실성 윤리의 거부와 주체의 분열 268 3. 경험적 자아의 전복과 아이러니의 심층구조 271 4. 자아의 이중화와 공간적 거리 274 5.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서술적 자아 278 6. 미해결의 장 의 전체적인 구조 282 제2장 허무주의 극복의 노력과 추상적 휴머니즘 284 1. 허무주의와 소설창작 284 2. 행위의 무의미성과 견딤의 미학 287 3. 허무주의와 자기-아이러니 295 4. 의미의 추구와 추상적 휴머니즘 305 5. 허무주의의 원형적 모습들 309 참고문헌 311 찾아보기 321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 1) 세대론, 세계관, 미학적 특성 본 연구는 손창섭과 장용학의 1960년대 초반까지의 소설을 대상으로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이 산출한 허무주의와 이로부터 발생한 미의식 을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손창섭과 장용학에 초점을 맞춘 것은, 첫째 이들이 전후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점, 둘째 각각 고유의 작품 세계 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공통점을 보인다는 점, 셋째 무엇보다도 허무주의 적 미의식의 극단으로까지 나아갔다는 점 때문이다. 전후소설은 시기상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전후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가 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절망의식과 이를 넘어서려는 휴머 니즘에 핵심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후 2세대 작 가들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나 가능한 평가이고 정작 전후소설의 대표적 작가라 할 수 있는 전후 1세대 작가, 즉 손창섭과 장용학의 경우에는 핵 심을 벗어난 평가이다. 1) 대표적인 전후 2세대 작가인 이호철, 서기원, 오 1) 전후 소설가들 내부에서의 세대 구분은 출생연도와 등단연도를 기준으로 해서 이루

12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상원 등의 문학이 근본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상황에서 근대 적 인간상, 시민적 인간성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손창섭 과 장용학의 문학은 시민적 인간성에 대한 거부, 탈근대적 인간상의 탐 구라는 전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바라볼 때, 기존의 연구는 매우 다양하게 진 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에게서 발견되는, 작품 세계의 공통된 모습 을 발견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손창섭과 장용학 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첫째, 다른 전후 작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후소 설 전체의 특성을 밝히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연구들과 둘째, 각각의 개별 작가론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전자의 경우 당대 비 평에서 세대론 2) 의 형태로 제기되었으며 최초의 종합적인 연구인 김상선 의 신세대작가론 이후 다양한 관점 속에서 진행되었다. 3) 세대론의 관 어질 수 있는데, 양자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전후 1세대란 1920년대 생이면서 한국전쟁 이전 혹은 전쟁 중에 등단한 작가들을 가리킨다면, 전후 2세대 작가란 1930년대 생으로서 휴전 이후, 1955년을 전후하여 등단한 작가들을 가리킨 다. 전자에는 손창섭(1922년 출생, 1953년 등단), 장용학(1921년 출생, 1950년 등단), 곽학송(1927년 출생, 1950년 등단), 김성한(1919년 출생, 1950년 등단) 등이 포함되며, 후자에는 이호철(1932년 출생, 1955년 등단), 서기원(1930년 출생, 1956년 등단), 오 상원(1930년 출생, 1955년 등단), 선우휘(1922년 출생, 1955년 등단) 등이 대표적이라 고 할 수 있다. 2) 세대론과 관련된 대표적인 글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이봉래, 신세대론, 문학예술, 1956.4. 장용학, 감상적 발언, 문학예술, 1956.8. 이어령, 화전민지역, 경향신문, 1957.1. 김상선, 신세대 작가론, 일신사, 1964. 김윤식, 앓는 세대의 문학, 현대문학, 1969.10. 3) 대표적인 연구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천이두, 50년대 문학의 재조명, 현대문학, 1985.1. 신경득, 한국전후소설연구, 일지사, 1988. 김동환, 한국전후소설에 나타난 현실의 추상화 방법 연구, 한국의 전후문학, 한 국현대문학연구회, 태학사, 1991. 김윤식, 6 25 전쟁문학 : 세대론의 시각, 1950년대 문학연구, 문학사와 비평연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3 점에 설 때, 특히 주목되는 것이 68문학 을 중심으로 한 신세대들과 전 후 세대 작가들 간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이후 세대론의 관점에서 진행 된 연구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세대의 문학을 언어 이 전의 체험의 문학으로 규정하고 단절론을 내세웠던 김현과 김주연의 주 장은 궁극적으로 시민문학의 관점에서 전후세대의 문학을 비판한 것으 로서 양자 간의 대립에 시민문학 대 反 시민문학의 대립이 숨겨져 있었 음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다양한 관점에서 전후소설의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정희모, 김동환, 유철상, 한수영, 최강민 등의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정 희모의 논문은 전후소설이 전후의 불안상태를 서구적 개념을 통해 거짓 보편화시키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부정적 평가 속에서도 장용 학의 현대성 주장에 주목하여 전후작가들의 내면에 깔려 있는 허무주의 구회 편, 예하, 1991. 이재선, 전쟁과 분단의 인식 : 6 25 한국전쟁의 소설적 의미망, 현대 한국소설 사, 민음사, 1991. 정호웅, 1950년대 소설연구, 1950년대 문학 연구, 문학사와 비평연구회 편, 예 하, 1991. 한수영, 1950년대 한국소설 연구 1950년대 남북한 문학연구, 평민사, 1991., 1950년대 문학의 재인식, 작가연구 1호, 1996.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1945-1990, 민음사, 1993. 엄해영, 한국전후세대소설연구, 국학자료원, 1994. 김 철, 냉전체제의 고착과 50년대의 문학, 민족문학사 강좌(하), 창작과비평사, 1995. 구인환, 전후 한국문학의 지형도 : 소설의 서사문법을 중심으로서, 한국전후문학 연구, 삼지원, 1995. 박동규, 전후 한국소설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전후문학의 연구를 위한 몇 가지 전제, 한국전후문학의 분석적 연구, 월인, 1999. 정희모, 1950년대 한국장편소설 연구, 1950년대 한국문학의 서사성, 깊은샘, 1998. 유철상, 한국전후소설의 관념 지향성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최강민, 한국 전후 소설의 폭력성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0.

14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를 현대성의 추구로 규정하고 있다. 김동환과 유철상의 논문은 각각 추 상화 방법, 관념 지향성이라는 차원에서 전후소설 전체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유철상의 경우 전후소설의 본질을 밝히려는 포괄적인 시 도였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전후소 설의 관념 지향성 이 사실상 시민문학의 이념 지향성과 그로 인한 비판 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한수영의 논 문은 민족문학론의 입장에서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전후소설의 리얼리 즘적 측면을 규명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학론과 그에 입각한 리얼리즘 론으로는 손창섭, 장용학 등으로 대표되는 전후소설의 본질적인 면모를 밝히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연구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주 목할 만한 연구는 최강민의 논문이다. 최강민은 전후소설의 핵심으로 폭 력성을 설정하고 전후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양상을 정신분석학적 관점 에서 분석하고 있다. 손창섭 소설에 대해서는 폭력의 가해자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함으로써 폭력이 전근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하며 장 용학의 소설에 대해서는 폭력의 원인은 개인적이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작가의 태도는 사회적이기에 필연적으로 논리적 결함을 갖게 된다고 비 판한다. 개별 작가론의 경우, 손창섭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특이성으로 인해 인물 유형 분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정신분석학적 연구 4), 문체론 및 수사학적 연구 5) 등이 이루어졌다. 이 글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4) 주요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송기숙, 창작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 현대문학, 1964.9. 정창범, 손창섭론 : 자기모멸의 신화, 문학춘추, 1965.2. 배개화, 손창섭 소설의 욕망 구조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5. 김지영, 손창섭 소설에 나타난 주체형성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7. 5) 주요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유선희, 손창섭 소설의 문체론적 연구, 전북대 석사학위논문, 1985.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5 만한 연구는 손창섭의 인물 유형을 분석함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미학 적, 세계관적 특성을 밝히는 연구들이다. 6) 손창섭의 등장인물들은, 자조 의식 속에서 인간 동물론의 괴뢰 7) 를 묘사하고 있다는 유종호의 지적 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계보를 잇는 비정상적 치인들, 절망적 인간들 8) 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조연현의 지적 이후 다양한 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손창섭의 인물은 권태형 인간 과 백치형 인간 으로 규정되는가 하면 9), 실존주의의 자율적 주체 개념에 입각해 몰주체적 인간 과 수동 화된 개인 으로 유형 분류되기도 한다. 10) 한상규, 손창섭 초기 소설에 나타난 아이러니의 미적 기능 외국문학, 1993 가을. 조현일, 주체의 분열과 아이러니에 관한 고찰, 현대소설연구, 1996.6. 배개화, 손창섭 초기 소설에 나타난 아이러니 구조, 한국전후문학의 분석적 연 구, 월인, 1999. 6) 대표적인 연구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조연현, 병자의 노래, 현대문학, 1955.4. 윤병로, 혈서의 노래, 현대문학, 1958.12. 유종호, 모멸과 연민( 上 ),( 下 ), 현대문학, 1959.9-10. 이광훈, 패배한 지하실적 인간상, 문학춘추, 1964.8. 이선영, 아웃사이더의 반항, 현대문학, 1966.12. 김 현, 허무주의와 그 극복, 사상계, 1968.12. 김영화, 손창섭론 : 권태형 인간상과 그 소설사적 의미, 월간문학, 1978.4. 최종민, 손창섭소설에 나타난 인간형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2. 조남현, 손창섭의 소설세계, 한국현대소설의 해부, 문예출판사, 1993. 한상규, 손창섭 초기 소설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유형화, 관악어문 연구, 1993.12. 서준섭, 정지된 세계의 소설, 한국전후문학의 형성과 전개, 태학사, 1993. 조현일, 허무주의의 심연과 극복의 노력, 한국전후문학연구, 삼지원, 1995. 하정일, 전쟁세대의 자화상, 작가연구 1호, 1996. 임경순, 혈서의 세계와 욕망의 좌절, 1950년대 문학의 이해, 조건상 편저, 성균 관대학교출판부, 1996. 김진기, 손창섭 소설에 나타난 무의미의 미학, 박이정, 1999. 7) 유종호, 모멸과 연민( 上 ), 현대문학, 1959.9, p.77. 8) 조연현, 앞의 글, p.78, p.79. 9) 김영화, 손창섭 소설론 : 권태형 인간상과 그 소설사적 의미, 월간문학 1978.4. 10) 한상규, 손창섭, 초기 소설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유형화, 관악어문연구, 1993.12.

16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인물 유형 분석은 결국 작가의 미학적, 세계관적 특성을 밝히는 것으 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당대 비평가들은 인물 분석에 기초하여 손창 섭 소설의 세계관적 차원에 대해 통속적인 씨니시즘 11) 혹은 비개성 적 허무주의 12) 라고 규정하여 비교적 일관된 평가를 내렸지만, 미학적 차원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비극성 13) 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화적 묘사, 상식에서 벗어난 일장 희화 14) 라고 하여 희극성을 지적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후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대 비평가들에 의해 직관적으로 포착된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구 체화하고 좀더 발전시킨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준섭은 손창섭 작품세계의 본질이 등장인물의 허무주의와 그로 인한 정지된 세계의 탐 색에 있다고 보며, 하정일은 손창섭의 허무주의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는 인간성의 문제라고 하면서 항상 성격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비판한다. 하정일의 경우 손창섭 소설에 대해 비개성적 허무주의라고 평가하였던 김현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연구라 할 수 있다. 또한 미학 적 차원에서 희화적 묘사 가 나타난다는 당대 비평가의 지적은 최근 들 어 아이러니에 대한 연구로 구체화되고 있다. 장용학 소설은 실존주의 논리가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특성으 로 인해, 그의 소설의 실존주의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다가 90년대 이 후 장용학 소설의 관념 소설적 측면 15), 알레고리, 환상성 16) 등을 중심으 11) 유종호, 모멸과 연민( 下 ), 현대문학, 1959.10, p.96. 12) 김 현, 앞의 글, p.292. 13) 조연현, 앞의 글, p.77. 14) 윤병로, 앞의 글, p.238. p.239. 15)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장수익, 한국관념소설의 계보, 1960년대 문학연구, 예하, 1993. 황순재, 한국관념소설의 세계, 태학사, 1996. 유철상, 한국전후소설의 관념지향성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이정숙,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관념의 소설화 : 장용학론, 한국현대소설연구,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7 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장용학 소설의 실존주의는 주로 사르트르의 실존 주의와의 비교 속에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한국적 풍토에 맞지 않는 서 구 사상의 단순한 모방이라는 비판적 평가로 귀결된다. 17) 이 글의 문제 의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연구로는 장용학 소설의 미적 모더니티에 대 한 연구 18) 와 알레고리에 대한 연구 19) 를 들 수 있다. 박창원은 장용학 소 설의 핵심을 사회사적 모더니티나 철학적 모더니티와는 구별되는 미적 모더니티의 추구에 있다고 보며,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수용에 대해 장용학 자신이 일정한 질곡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0) 장용학 소설의 알레고리에 대한 연구들은 단순한 우화성으로 간주되던 장용학 소설의 알레고리를 상징 미학과 대립되는 현대적 알레고리 미학 깊은샘, 1999. 16) 박정수, 현대 소설의 환상적 상상력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01. 17) 장용학 소설의 실존주의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서수생, 사르트르와 장용학의 비교 고찰, 현대소설연구, 정음사, 1982. 김송현, 장용학론 : 태양의 아들 까지, 현대문학, 1970.5. 염무웅, 실존과 자유, 현대한국문학전집4, 신구문화사, 1964. 김 훈, 존재의 자각과 탐구, 국어국문학, 1982.12. 김양수, 전후실존주의소설연구, 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2. 18) 박창원, 장용학 소설연구, 세종대 박사학위논문, 1995., 비인탄생 에 나타난 모더니티 연구, 현대소설연구, 1999.12. 19)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김윤식, 우화성과 이데올로기 비판, 속 한국현대작가론, 일지사, 1980., 90년대 연구진과 알레고리론, 문예중앙, 1996 겨울. 방민호, 전후소설에 나타난 알레고리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3. 서영채, 알레고리의 내적 형식과 그 의미, 민족문학사연구 제3호, 1993.4. 김건우, 장용학 소설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5.,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 론, 한국전후문학의 분석적 연구, 월인, 1997. 이현석, 전후소설의 서사구조와 수사적 성격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7. 20) 박창원은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유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기대어 있음에 반해 장 용학은 이원론을 초월한 존재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보며, 그 결과 이원론의 질곡에 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존재구원의 문제가 사상되었다는 점을 장용학 스스로 깨 닫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박창원, 장용학 소설연구, 세종대 박사학위논문, 1995, pp.18-28.

18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의 표현으로 규정하고 언어의 환유적 성격과의 관련 속에서 그 특성을 규명하고 있다. 2)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그 내면화 본 연구는 이상의 연구에 기초하여 다음 두 가지 문제의식 속에서 손 창섭과 장용학 소설을 연구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은 장용학과 손창섭 소설의 핵심에 이념과 무관한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이 자리 잡고 있 으며 이것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그들의 작품세계가 밝혀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앞서 언급한 전후소설가 서기원, 선우휘와 68문학 을 중심으로 한 신세대들, 즉 김현, 김치수, 김주연, 김병익, 박 태순 사이에 있었던 1969년의 논쟁 21) 은 어느 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전 후소설의 이와 같은 본질적 모습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선우휘와 박태순의 논쟁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논쟁의 핵심은 특 21) 68문학 동인들과 전후세대 작가들의 논쟁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김주연, 새시대문학의 성립 : 인식의 출발로서의 60년대, 아세아, 1969.2. 김치수, 한국소설의 과제, 68문학, 1969. 김 현, 세대교체의 진정한 의미, 세대 1969.3., 분화 않된 사고의 흔적, 서울신문, 1969.5.6., 오히려 그의 문학작품을, 서울신문, 1969.5.29. 서기원, 전후문학의 옹호, 아세아, 1969.5., 대변인들이 준 약간의 실망, 서울신문, 1969.5.17., 맛이나 알고 술 권해라, 서울신문, 1969.6.7. 선우휘, 현실과 지식인, 아세아, 1969.2. 박태순, 젊은이는 무엇인가 : 선우휘씨의 현실과 지식인 에 대한 반론, 우리문 학의 논쟁사, 홍신선 편, 어문각, 1985. 김병익, 60년대 문학의 위치, 사상계, 1969.12. 68문학 동인들과 전후세대 작가들의 논쟁은 전상기, 1960 70년대 한국문학 비 평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 홍성식, 1960년대 한국문학 논쟁 연구, 명지대 박사학위논문, 1997에서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19 히 서기원과 김주연, 김현의 대결 속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주연은 전후세대가 생애의 충격 (=체험)만을 중시할 뿐 문학이 언어로 된 하나 의 질서라는 점을 잊고 있었으며 결국 현실에 기초하지 않는 외래 사조, 뿌리 없는 각종 언어들이 마치 구호처럼 거리를 뒹굴었다 고 비판한다. 반면 자신들의 문학, 즉 60년대 문학의 중요성으로 문학에 대한 인식의 비로소 싹틈 을 주장하면서 그 특성을 자기만의 의식으로의 개별화, 소시민의식 이라고 규정한다. 22) 전후문학에 대한 완전한 부정에 대항하 여 서기원은 신세대 문학의 소시민의식에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한편, 전후문학의 문학사적 위치는 김동리, 황순원 류의 순수 문학의 언어가 전쟁체험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바로 기존 언어질서에 대한 도전이고, 파괴작용 23) 을 수행했다는 점에 있으며 한마디로 새 세 대의 문학은 전후문학의 안티테제나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발전적 전 개 24) 라고 주장한다. 서기원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는 도구적 언어관에 입각해 있었던 만큼, 김현에 의해 언어에 대한 미분화된 사 고 25) 의 소유자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68문학 동인들은 전후 문학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험 대 언어, 비현실성 대 현실성, 심지어는 문학 이전 대 문학이라는 근본적 단 절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고 26) 이러한 근본적 단절의 핵심에 대재앙으 로서의 전쟁체험이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2) 김주연, 새 시대문학의 성립 : 인식의 출발로서의 60년대, 아세아, 1969.2. 23) 서기원, 앞의 글, p.232. 24) 위의 글, p.233. 25) 김 현, 분화 않된 사고의 흔적, 서울신문, 1969.5.6. 26) 이와 같은 평가는, 김병익의 경우 단절이 아닌 계승을 주장하는 등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김치수, 한국소설의 과제, 68문학, 1969 ; 김병 익, 60년대 문학의 위치, 사상계, 1969.12에서도 공통된다고 볼 수 있다.

20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역사적인 대 사건이 문예 사조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한 다면 소위 전후파로 규정되는 50년대와 제3세대로 명명된 60년대 작가의 변모는 6 25와 4 19의 성격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 새벽의 기습이 일으켰던 한국전쟁은 그 자체로서 대재난(Catastrophy) 이었고 적어도 개인이 예감할 수 없었던 외부의 타박( 打 撲 )인 데 대해 2 28, 3 15, 4 19 등 잇따른 데모로 터진 학생 운동은 이미 예기된 바였고 적어도 개인이 그렇게 되어지기를 소망한 내부의 진통이었다. 10년을 간극 한 이 두 개의 사건에 보이는 인간의 느낌과 반응은 따라서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불의의 타격이 일으키는 효과는 경악과 비명이며 현실에의 저주와 패배주의며 관념으로의 도피와 안이한 허무주의와의 결속이었다. 여기서 언어의 무력함과 체험의 비굴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유발된다. 27) 신세대들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근대적 시민사회를 지향하게 만든 4 19 체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체홉식의 리얼리즘을 주장하 는 유종호에 대하여 얼마 전에 네이팜탄이라는 것이 떨어지던 푼수로 보아서는 그렇게 태평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28) 라고 비판하는 장용학 이나, 1969년까지도 6 25전쟁은 과거에 지나쳐 버린 기억과 체험이 아 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 있는 현실이라고 29) 생각하는 서기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전후소설가와 그들 문학의 본질은 김주현에 의해 비 판되었던 생애의 충격, 즉 전쟁체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용문에 서 김병익이 지적하고 있는 대재변(catastrophy) 으로서의 전쟁체험, 즉 인간의 의지나 이성과는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무차별적인 폭 력의 체험이라는 데 핵심이 있다.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이 대표적인 27) 김병익, 위의 글, p.213. 28) 장용학, 편리한 비평정신, 문학춘추, 1964.8, p.237. 29) 서기원, 앞의 글, p.231.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21 전후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대재앙의 체험을 철저하게 내면화함으로 써 가능했다. 상이한 내적 체험은 상이한 문학적 패러다임으로 귀결된다 고 볼 수 있는데, 신세대의 문학적 패러다임이 이념상 근대적 시민문학 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때 30), 전후세대의 문학적 패러다임은 이상과 같 은 전쟁체험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매우 이질적인 성격의 것으로서 근 본적으로 反 시민문학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본 연구는 손창섭과 장용학 소설에서 대재앙의 체험이 소재적 차원을 넘어서 좀더 본질적 차원, 즉 세계관적, 미학적 차원에서 표현되 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규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대재앙으로서의 전 쟁체험은 실존적 기호학적 차원 모두에서 의미와 가치의 붕괴를 산출 함으로써 진리, 신, 도덕 등 최고 가치들의 가치저하, 즉 허무주의를 도 래케 하였다.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은 이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세대의 문 학적 패러다임에 전쟁체험이 놓여 있다고 할 때, 그것의 핵심은 허무주 의 라 할 수 있으며, 손창섭과 장용학으로 대표되는 전후세대의 문학적 패러다임은 시민적 이상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0) 당시 68문학 동인들은 한편으로는 전후 세대와 논쟁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시민 문학을 주장하면서 창작과 비평 의 시민문학론 (백낙청)에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본고는 시민문학을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에서 유래하는 문학이념, 즉 시민혁명이 좌절된 상황에서 문학에서, 혹은 문학을 통하여 시민적 인 간상을 완성하려 했던 문학이념으로 규정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설 때, 창작과 비 평 의 시민문학론이나, 68문학 에서 문학과 지성 으로 이어지는 소시민문학론 모두 시민문학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 작과 비평, 1969.6 ; 김주연, 계승의 문학적 인식 : 소시민의식 파악이 갖는 방법 론적 의미, 월간문학, 1969.8 ; 김치수, 백낙청의 시민문학론 과 문학의 사회참 여-자유의 나무는 시민의 손으로 심어지는가, 세대, 1969.12 ; F. Schiller(안인희 역),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청하, 1995 참조.

22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손창섭 장용학 소설에 나타나는 허무주의의 특수한 모습, 구체적 양 상이 문제가 될 것인데, 이때 중요시해야 할 것이 바로 폭력의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신화적 폭력과 운명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근대의 대재앙적 성격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건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근 대의 대재앙적 성격이 인간 개체들에게 가하는 가공할 폭력을 형상화하 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소재상의 차원에서 전쟁의 폭력성을 형 상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폭발한 근대의 대재앙적 성격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문학적 내면화를 거치며, 그들은 그 결과 자 연의 마성적 힘, 즉 신화적 폭력 과 운명 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될 수 있는 고유의 작품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신화적 폭력과 운명이 지배하 게 될 때, 모든 인간적 가치, 시민적 이상에 입각한 가치들은 무의미해지 며, 이러한 폭력의 근원이 근대적 세계를 지탱하는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할 때, 최고의 가치들에 대한 저항이 시도될 수밖에 없다. 신화적 폭력과 운명 개념으로 요약되는 그들의 작품세계는 곧 허무주의의 내면화와 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상과 같은 허무주의와 근대 적 세계의 신화성은 작품 내용상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허무주의에 기초한 고유의 미의식 의 표현으로까지 나아간다. 신화적 폭력 과 운 명 개념은, 고대 그리스 비극 이후 주요한 미학적 범주로 자리 잡고 있 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체로 특정한 미의식을 표현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손창섭, 장용학의 미의식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이상의 문제의식 하에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 허무주 의, 신화적 폭력과 운명, 미의식 이라는 네 가지 사항을 중심축으로 손 창섭과 장용학 소설에 나타난 허무주의와 그에 기초한 미의식을 분석하고 자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검토는 다음 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23 2.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 역사철학, 허무주의 1)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과 문학 클라우비츠는 전쟁이란 오직 다른 제반 수단에 의하여 수행되는 국 가 정책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31) 라고 주장하는 반면, 존 키건은 전 쟁은 언제나 문화의 표현이며, 종종 문화의 형태를 결정짓는 핵심요소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는 문화 그 자체 32) 라고 주장한다. 전쟁은 이처럼 논리적 차원에서 정치의 연장 혹은 문화의 표현 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피해당사자에게는 전쟁이란 극한적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중지되지 않는 폭력행위 33), 개체의 이성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갑작스 럽게 가해지는 엄청난 폭력, 대재앙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20세 기에 들어 전쟁의 대재앙적 성격은 1, 2차 세계대전 특히 2차 세계대전 과 더불어 극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라빈바흐(A. Rabinbach)에 따를 때,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세계대전이 었다고는 하나 1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민족국가간의 전쟁이었고 전투원 들만이 희생되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선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서 민간인과 전투원의 구별 없는 대량 학살이라는 가공 할 만한 현상을 낳았다. 아우슈비츠의 학살로 상징되는 2차 세계대전은 그 결과 최소한의 휴머니티의 관념이나 시민성 개념의 붕괴, 궁극적으로 문명의 붕괴를 의미하였으며, 역사 내재적인 모든 구원적 전망을 상실하 게 하여 영원한 재앙으로서의 역사라는 감각을 낳게 만들었다. 34) 31) C. Clausewitz(김홍철 역), 전쟁론. 삼성출판사, 1998, p.39. 32) J. Keegan, 세계전쟁사, 까치, 1998, p.31. 33) C. Clausewitz, 앞의 책, p.51 34) A. Rabinbach, In the Shadow of Catastrophe : German Intellectuals Between Apocalpse and

24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한국전쟁 역시 논리적 차원에서 민족해방전쟁, 자유주의 수호 전쟁 등의 상이한 규정 35) 을 낳을 수 있지만, 한 개체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의 지와는 무관하게 가해지는 엄청난 폭력, 대재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손창섭과 장용학은 각각 1922, 1921년 생으로 1920년대로부터 현재의 1956년에 이르기까지 신세대(전후 1세대 소설가들 : 인용자)는 전쟁의 초 연 속에서 그네들의 육체를 성장시켜 왔고 그네들의 청춘을 영위하여 왔다 36) 라는 이봉래의 지적처럼 전쟁 속에서 청 소년기를 보냈다. 식 민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10대 때 중일전쟁(1937)을 겪었고, 20대 때 태평 양전쟁(1941)을 겪었으며 30대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는 점에서, 그들에 게 한국전쟁이란 1930년 만주사변 이후의 연속적 사건의 하나였다고 평 가할 수 있다. 홉스바움의 지적처럼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20세기 전반의 인류사를 대재앙의 시대(Age of Catastrophe)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할 때 37), 한국전쟁 역시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 없는 대량학살, 민족 내부의 전쟁을 넘어서는 세계 대전적 면모 38) 등으로 인 해 1, 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며 2 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휴머니티 관념에 대한 철저한 회의를 낳는 대재앙의 발발을 의미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nlightenment, Un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p.9-15, pp.30-35 참조. 35) 와다 하루끼는 한국전쟁을 중미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와다 하루끼(서동만 역), 한국전쟁, 창작과비평사, 1999 참조. 36) 이봉래, 신세대론, 문학예술, 1956.4, p.132. 37) E. Hobsbawm(이용우 역),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상), (하), 까치, 1999 참조. 38) 와다 하루끼에 따르면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다. 여러 통계를 종합할 때, 대략 한국 군인 23만명, 민간인 37만명(학 살 13만명, 사망 24만명), 미군과 유엔군 3만 6천 명으로 추정된다. 북한과 중공의 경우 공식 발표의 정확성이 떨어져 정확한 인명 피해를 밝히기가 더 힘들다. 브루 스 커밍스는 피해상황을 가장 크게 본 경우인데, 그에 따르면 북한 측의 사망자는 민간인 200만명, 군인 50만명, 중국군 100만명으로 추정된다. 와다 하루끼, 앞의 책, pp.325-332 참조.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25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 문 학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 소로킨(P. A. Sorokin)에 따르면, 모든 사회에서 삶의 역사는 상대적 안녕의 시대와 재난 시대의 부단한 교체로 이루어 져 왔으며, 다양한 재난들 중 가장 빈번하고 파괴적인 것은 기근, 역 병, 특히 전쟁 혁명 이다. 이러한 재난은 인간의 감정과 정서, 인식 적 과정 들에 대해 영향을 미침으로써 당대의 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변 화를 낳는다. 첫째, 재난은 갑작스럽고 격렬한 정서적 삶의 변화를 가져 온다. 기근, 역병, 전쟁 혁명 등의 재난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정서적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고감도의 정서적 강렬 성을 산출한다는 점, 즐겁고 쾌활한 감정 대신에 고통스러운 울증적 감 정들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둘째, 재난은 전체적인 인식과정 즉, 감각 지각 등 비교적 단순한 인 식들로부터 기억 상상 창조적 사고 등의 복잡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차원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선 재난은 인간의 모든 인 식적 과정이 직 간접적으로 재난 및 재난과 관련된 현상들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와 무관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재난의 폭력성이 극단적일 때, 우리 인간의 자아의 통 일성이 붕괴되고, 정신적 기능이 붕괴된다는 점이다. 재난과 무관한 대 상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인간의 사고는 점차 외적 영향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외적 자극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통제 하는 자율성이 감소하면서 급기야는 점차적으로 정신적 무질서와 분열 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39) 재난의 이러한 영향이 재난의 희생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개체들의 생리학적, 사회 심리학적 차이에 따라 재난들은 39) P. A. Sorokin, Man and Society in Calamity, Greenwood Press, 1973, pp.13-89 참조.

26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생리학적으로 질병에 강한 자는 역병에 의한 영향을 적게 받으며, 사회적으로 부유한 자들은 대기근의 시기에도 피로, 허약, 공허, 무관심의 감정에 덜 지배될 수밖에 없다. 전쟁의 경우 일반적으로 일반 주민과, 부상 죽음의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 는 전투원간의 구별이 필요하다. 전투는 모든 군사적 행위들이 물 속의 공기 혹은 공기 속의 새들처럼 진행되는 위험의 분위기를 야기한다.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것이 불가능할 때 공포와 두려움이 발생한다 는 클라우제비츠의 지적처럼 전 쟁이라는 재난의 시기에 가장 지배적인 정서는 공포이며 이외에도 걱정, 연민, 울증, 성공의 찬양과 분노, 증오 등의 다양한 격렬한 감정을 야기 한다. 일반 주민 역시 (1) 공격과 부상의 위험, (2) 경제적 변화들, (3) 가 족들과의 분리의 위협, (4) 사치와 쾌락의 박탈과 음식 부족의 위협 등에 서 유사한 정서적, 감정적 변화를 겪게 되지만 전투원에 비할 때 상대적 으로 약하다고 할 것이다. 40) 그러나 앞서 지적한 한국전쟁의 성격은 이 러한 구별을 무색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학살과 후방에 대한 폭격, 두 차례나 반복되었던 북의 점령 등으로 인해 전투원과 일반 주민의 경계를 유례없이 약화시킨 전쟁이었고 그만큼 일반 주민들이 겪 게 되는 정서적 감정적 변화의 강도를 매우 강렬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50년대, 무엇보다도 그것은 두 가지의 근원으로 만들어졌다. 처절 하고 무모한 듯한 죽음과 삶이 그것이다. 죽음은 동작동 묘지, 삶은 손창 섭과 장용학의 세계가 대변한다. 41) 라는 고은의 지적은 대재앙으로서의 한국전쟁에 고통 받았던 50년대 인간의 내면상태에 대한 진솔한 지적이 라고 볼 수 있다. 40) 위의 책, pp.22-26. 41) 고은, 1950년대, 청하, 1989, p.19.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27 소로킨에 따를 때,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크 게 두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일시적인 효과들이다. (1) 재난은 일 시적으로 예술현상뿐만 아니라 심미적 창조성에 대한 흥미를 약화시킨 다. 예술가 역시 재난의 직 간접 희생자인 만큼 전쟁시기의 예술적 활 동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2) 재난은 문학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와 그것의 중심적 제재가 된다. (3) 전쟁은 상당한 정도로 문학을 선 전의 단순한 도구로 만든다. 주제, 외적 형식에 있어서 문학은 전쟁이라 는 비상사태의 목적에 종사하게 된다. (4) 재난은 예술에 비장함, 공포의 분위기와 멜랑꼴리, 페시미즘 그리고 절망의 정조를 주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단계가 지나면서 문학은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데, 대재앙의 체험을 표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새로운 기술들을 도입하 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심미적 가치들을 표현하며 때로는 천재적인 대작 의 생산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42) 첫 번째 단계의 (2)와 (3)은 우리 전후 소설의 경우 전쟁문학, 전시문학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들의 일정한 의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43) 전쟁체험의 내면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만큼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고자 한다.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 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의 (4)와 두 번째 단계에서의 결과들이다. (4)와 관 련하여 손창섭과 장용학 소설은 각각 멜랑꼴리와 절망(손창섭), 고통(장 용학)의 정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단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손창섭의 경우 심미적 슬픔과 희극성, 장용학의 경우 디오니소스적인 심미적 현상과 알레고리 및 비극성이라는 우리 문 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심미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이다. 42) P. A. Sorokin, 앞의 책, pp.253-262. 43) 조남현, 한국전시소설 연구, 한국현대소설의 해부, 문예출판사, 1993 참조.

28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2) 부정적 역사철학과 신화적 폭력, 운명 한국전쟁은 근대의 대재앙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발휘된 사건으로서, 전쟁이 인간의 개체들에게 가하는 가공할 폭력으로 인해 당대의 인간들 을 역사에 대한 절망에 이르게 만들었다. 전술한 바 있듯이 대재앙으로 서의 전쟁체험은 최소한의 휴머니티의 관념이나 시민성 개념의 붕괴를 야기하며, 역사 내재적인 모든 구원적 전망을 상실하게 하여 영원한 재 앙으로서의 역사라는 감각을 낳게 만드는데, 손창섭과 장용학의 소설은 각각의 고유의 방식으로 이를 철저하게 내면화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손창섭과 장용학 소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감각은 벤 야민과 아도르노의 부정적 역사철학(die negative Geschichtsphilosophie)을 통해 분명하게 규명될 수 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부정적 역사철학은 대재앙으로서의 근대 체험 의 사상적 표현이라는 데 핵심이 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존재와 이 성이 역사의 높은 수준에서 결국 통합된다는 헤겔의 동일성 이론을 비 판하고 양자의 비동일성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은 20세기 전반의 인류사 에서 전면화된 근대의 대재앙적 성격(Der Katastrophische Zug der Moderne) 을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총괄적으로 수행되는 필연적 결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44) 특히 1,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 으면서 결국 자살을 택했던 벤야민은 진보라는 개념은 카타스트로페의 이념 속에 자리잡고 있다 45) 라는 진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진보로서 의 역사를 영원한 재난 (the permanent Catastrophe)의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진보, 목적론에 대한 단순한 거부를 넘어서 역사적 과정 내 44) L. Heidbrink, Melancholie und Moderne : Zur Kritik der historischen Verzweiflung, München, 1994, S.15. 45) W. Benjamin(차봉희 역), 중앙공원, 현대사회와 예술, 문학과지성사, 1994, p.130.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29 에서 긍정적 가치를 설정하려는 모든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대재앙의 시대에 유대교적 메시아주의 에 입각해 있던 벤야민은 역사를 보편적인 몰락사, 고통의 역사로 규정 하는 한편, 구원의 전망을 역사적 내재성(진화, 진보, 개혁, 혁명), 역사적 시간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역사를 중지시키고, 야만으로서의 문명사를 폭파시키는 것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46)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부정적 역사철학은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 에서 자연 개념을 제거해버린 것과는 달리, 자연 개념을 재도입하여 자 연 을 역사 의 변증법적 대립 항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자연과 역사는 상호 교정적 개념으로서 각각의 신화화를 비판하고 결국 이성과 현실의 동일성에 대한 주장을 비판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아도 르노는 자연이 신화적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 이성에 의한 자연 통제를 요구하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통제가 사물화, 신화 화를 의미할 때 자연 개념에 입각하여 이성의 신화화를 비판한다. 그 결 과 자연 개념은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되는데, 자연 은 한편으로는 인간적 통제 외부에 있는 세계로서 자연의 마성적 폭력, 즉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폭 력성에 고통 받는 감각적, 물리적 세계를 의미한다. 47) 부정적 역사철학 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개념은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세계를 해명하 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손창섭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46)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역사와 메시아적 사건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있다. 기독교는 역사에 대한 메시아적 개입을 강조하는데 반 해 유대교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메시아적 사건을 역사적 시간의 중지와 동의로 파악한다. M. W. Jennings, The Permanent Catastrophe : Benjamin Philosophy of History, Dialectical Images, 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pp.42-57 ; W. Benjamin(반성완 역), 역사철학테제,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pp.343-356 참조. 47) S. Buck-Morss, 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 The Harvester Press, 1977, pp.52-62.

30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자연적 삶에 대한 긍정은 부정적 역사철학의 긍정적 자연 개념을 통해 서 해명될 수 있는 것이며 장용학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 세 계의 신화적 폭력성은 부정적 자연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부정적 역사철학을 체계화한 것은 아도르노이지만, 대부 분의 근본 개념을 창조적 사고 속에 최초로 제기한 것은 오히려 벤야민 이었다. 특히 벤야민은 자연 개념에 기초한 부정적 역사철학에 입각해 근대적 세계의 신화성을 규명하고 있는데, 이때 제기되는 핵심적인 개념 이 신화적 폭력, 마성적 운명이라는 개념이다. 메닝하우스에 따르면 신 화를 기만으로서 간주한 계몽주의와, 신화를 복구하고자 한 낭만주의 이 래 신화 개념은 크게 공포(fear) 와 시(Poesie) 라는 두 가지 상반된 범주 하에서 파악되어 왔다. 이에 대해 벤야민은 신화의 자율적 차원을 인정 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신화의 본질을 폭력성과 기만성에서 찾는 부정 적 신화 개념을 개진한다. 48) 벤야민은 이성과 대립하는 자연의 힘 폭력 을 마성적인 것, 신화적인 것의 본질로 간주하고, 자연의 마성적 폭력을 폭력비판 에서는 신화적 폭력(mythical violence) 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49) 독일비애극의 기원 에서는 마성적 운명(demonic fate)으로 규정하고 있 다. 50) 고귀한 인간들은 일단 그의 삶의 부분이 된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비극은 그러므로 그들의 특권이다 라는 루카치의 발언은 죄가 있다 라는 것은, 위대한 인물에 있어서는 명예이다 라는 헤겔의 문구의 변형이 48) W. Menninghaus, Walter Benjamin s Theory of Myth, On Walter Benjamin, ed. G. Smith,, The MIT Press, 1995, pp.295-300. 49) W. Benjamin,, Critique of Violence, Reflections, ed. P. Demetz, Schocken Books, 1978, pp.296-300. 50) 벤야민에게서 마성적 은 신화적 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W. Benjamin,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 trans. J. Osborne, NLB, 1977, p.109.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31 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항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에 의해서 죄 진 자의 죄이다. 반면, 마성적인 운명의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가 그 악의적 인 우연에 의해 아무 잘못 없는 자를 일반적인 죄의 나락으로 끌어 들인다. 고대 비극에서 고대의 저주, 즉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저주는 영웅적 인물 스스로의 손에 의해 발견되는 내적인 장소가 되며 저주는 그로 인하 여 소멸된다. 그러나 운명극의 경우 저주가 그 기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비극적인 것이 방황하는 유령처럼 피에 젖은 비극의 인물들의 사이를 왕 래한다 는 점이 흔히 이야기되는데, 이것은 그리스 비극과 근대 비애극의 차이의 하나를 지적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근대비애극에서 운명의 주체는 결정될 수 없다. 비애극은 어떤 개인적 주인공도 갖지 않으며 오로 지 주인공들의 성좌만을 갖는다. 51) 특징적인 것은 벤야민이 이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독일의 근대 비애극의 본질적 차이를 규명한다는 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비극은 신화적 폭력과 마성적 운명에 대한 영웅적 초월을 표현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죄진 자로서 비록 파멸해가지만 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영웅적 행 위를 통해 자연의 마성적 폭력, 즉 저주를 소멸시킨다. 반면, 독일의 근 대 비애극은 신화적 폭력에 대한 익명적 종속을 표현한다는 점에 결정 적인 차이를 보인다. 운명극 혹은 근대 비애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 지와는 무관하게 죄의 나락으로 빠져든 인물들로서 어떤 초월적 극복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는 달리 악마적 운명에 의해 익명적으로 고통받는 자들일 뿐이다. 벤야민에게서 신화적 폭력과 운명 개념은 이처럼 심미적 범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 51) 위의 책, p.131.

32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는데, 특히 독일 근대 비애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화적 폭력, 운명 개 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 세계는 바로 이러 한 신화적 폭력과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 세계에 대한 규명에서 벤야민의 개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3) 허무주의의 두 가지 계보 라빈바흐의 지적처럼 대재앙의 체험이 최소한의 휴머니티의 관념이 나 시민성 개념의 붕괴를 낳는다고 할 때, 이는 손창섭과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손창섭과 장용학의 허무주의 는 비개성적 허무주의 52) 와 거점없는 냉소주의 53) 라고 하여 당대 비 평가들에게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지만, 손창섭과 장용학 소설의 세계 관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재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대재앙의 순간 개체에게 갑작스럽게 가해지는 엄청난 폭력은 주체의 정체성 혼란과 개체의 시공간 감각, 의식 내의 인과적 감각의 붕 괴를 낳게 되고, 현상세계에 대한 가치절하, 즉 실존적 차원과 기호학적 차원 모두에서 의미의 상실을 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54) 장용학과 손창 섭의 허무주의는 대재앙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의 이와 같은 실존적 위기감의 표현으로서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이 허무주의를 도래케 했 고 그에 기초한 미의식을 낳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손창섭의 경우 키에르케고르가 심미적 실존에서 개진하는 허무주의가, 장용학의 52) 김 현, 허무주의와 그 극복, 사상계, 1968.2, p.292. 53) 유종호, 씨니씨즘 기타, 문학춘추, 1964.7, p.323. 54) M. Pensky, Melancholy Dialectics: Walter Benjamin and the Play of Mourning,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93, p.118.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33 경우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능동적 허무주의가 각각의 작품 세계를 규 명하는 이론적 문맥을 제공한다. 고드스블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허무주의(nihilism)는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는 정신상태 를 의미하는데, 역사적으 로 허무주의자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이 다. 당시에 허무주의자는 정치적으로 편견이 없는 자로부터 건달패 이르 기까지의 다양한 인간들을 가리켰다.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녀서, 19세기 전반까지 이성만을 신봉한 채 종교와 전통을 배격하는 계몽사상 의 해로운 산물로 이해되다가 1860년대의 러시아에서 긍정적 의미를 획 득한다. 아버지와 아들 에 이르면 니힐리스트란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비록 그것이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액면 그대로는 어 떤 원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 즉 사회 개혁의 지지자, 불의와 허위에 대한 용감한 투사를 의미하게 된다. 55) 한편 레슬리에(C. K. Leslie)는 이상과 같은 통시적 차원의 분석과는 달 리, 공시적 차원의 고찰을 행하고 있다. 그에 따를 때 허무주의는 부정의 대상에 따라 다음 다섯 가지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다. 첫째, 인식의 가 능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인식론적 허무주의. 이는 모든 지식 주장 은 동등하다 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둘째는 진리의 실재성을 거부하는 허무주의. 이는 어떤 진리도 없다 라는 주장으로 표현된다. 셋째, 독립 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허무주의. 이는 무가 현실적이다 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넷째, 도덕적 윤리적 가치의 실재성에 대해 거부하는 윤리적 혹은 도덕적 허무주의. 이는 어떤 신도 없다 혹은 모든 윤리적 주장들은 동등하게 유효하다 라는 주장으로 표현된다. 다섯째, 실존적 혹은 가치론적 허무주의. 이는 삶은 어떤 의 55) J. Goudsblom(천형균 역), 니힐리즘과 문화, 문학과지성사, 1988, pp.23-44.

34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미도 없다 라는 판단으로부터 유래하는 공허와 무의미함의 감정을 표현 한다. 56) 그러나 니힐리즘은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 이르러서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니힐리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지적한 통시적, 공시적 고찰을 넘어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대 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공통된 주제 속에서 각각의 사상을 개진하되, 완전히 상반된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한 사상가들이다. 일반적으로 니체에 이르러 허 무주의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견해가 제시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는 점에서 먼저 니체의 경우를 살펴본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 에서 최초로 명시적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데, 이는 곧 허무주의의 도래를 의미한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 지 도착하지 못했다 57) 라는 주장에서 드러나듯, 신의 죽음은 이미 발생 한 그러나 아직 규범적 통찰에서 가시적이지 않은 유럽 고유의 문화적 사건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허무주의는 근대의 독특 한 산물로 간주되는가 하면 인간의 영원한 속성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니체의 사상은 유럽 문화 고유의 귀결, 즉 기독교에서 표현되는 금욕주 의 필연적인 결과로 간주한다는 데 특색이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권력 에의 의지 에서 니힐리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의 가치들이 스 스로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것. 목적은 결여되어 있다 : 왜라는 질문은 어 떤 대답도 발견하지 못한다 58) 라고 정의한다. 최고의 가치들이란 우리 56) C. K. Leslie, The banalization of nihilism : twentieth century responses to meaninglessnes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 pp.14-21. 57) F. Nietzsche(권영숙 역), 즐거운 지식, 청하, 1998, p.185. 58) F. Nietzsche, The Will of Power, trans. W. Kaufmann, Landom Hause, 1967, p.9.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35 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핵심적 가치 평가들(진리, 신, 도덕)들을 가리키며 니힐리즘이란 그에 기반한 모든 가치 의미 바람직함의 붕괴, 전면적 재평가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어떤 목적도 없는 권력의지에 불과하며 최고의 가치들은 단지 권력의지의 양에 기초하여 삶을 지탱시켜 주게 만드는 해석 에 불과하다. 니체는 권력의지의 양을 기준으로 허무주의를 크게 정신의 상승된 힘의 징후로서의 니힐리즘, 즉 능동적 니힐리즘 과 정신 의 힘의 쇠퇴와 후퇴로서의 니힐리즘, 즉 수동적 니힐리즘 으로 구별한 다. 59) 능동적 허무주의는 하나의 정상적 정신적 상태, 강함의 징후로서 이제까지의 목적들(확신과 신앙)이 자신에게 부적합할 정도로 그 자신이 강하여 목적들을 파괴하는 폭력적 힘으로서 작동하는 경우이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기독교와, 가장 극단적인 형식으로서 불교로 대변된다. 그것 은 약함의 징후로서 정신의 힘이 극도로 쇠약해져 지금까지의 목적들이 자신에게 부적절하게 되었을 때 등장한다. 수동적 허무주의에서는 생을 마비시키고 위로하는 모든 것이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미적 위장을 통 하여 나타난다. 60) 뢰비트에 따를 때, 강함과 약함에 입각한 니체의 구별 은 니체가 허무주의를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했음을 보여준 다. 니체에게 허무주의는 몰락의 증상이면서 피로의 증상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강함과 상승의 잠정적 표현일 수 있다. 61) 허무주의에 대한 59) 허무주의는 논자에 따라 다양한 분류가 이루어졌다. 틸리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 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순진한 허무주의와 절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 문제 를 추구하는 성찰적 허무주의로 분류하고 있으며 야스퍼스는 가치를 부정하는 입 장(현실적 유물론자)과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불교)으로 분류한다. J. Goudsblom(천 형균 역), 앞의 책, pp.79-82. 60) F. Nietzsche, 앞의 책, pp.17-18. 61) K. Löwith, Kierkegaard und Nietzsche oder philosophische theologische Überwindung des Nihilismus, in: Sämtliche Schriften6, hrsg. von K.Stichweh, Suttgart, 1987, S.65.

36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니체의 모순적 평가, 즉 허무주의를 퇴폐의 징후 로 평가하는가 하면, 위대한 사건 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것은 두 가지 상이한 허무주의에 대 한 평가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허무주의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니체는 능동적 허무주의 개념을 통해, 유럽 니힐리즘의 도래에 대해 그로부터 도피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 는 것뿐만 아니라, 유럽 니힐리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이성적 노력 도 거부하며, 오히려 가치의 몰락을 의식적으로 촉진함으로써 현존재의 긍정으로 나아가가고자 한다. 62) 그의 초인 개념은 이와 같은 능동적 허 무주의를 구현하는 인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니체가 이 두 가지 허무주의의 사이에 또 하나의 허무주의, 즉 불운한 자(the underprivileged)가 어떠한 위안도 갖지 않는다는 것의 증후로서의 허무주의 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그들은 파괴되기 위해 파괴한다는 것, 강자가 그들의 처형자가 되게 강제하는 권력을 원한다는 것, 모든 존재가 그것의 의미를 상실한 후에 부정적 행위를 한다(doing No)는 것 등으로 규정한다. 63) 불운한 자의 허무주의는 아직 강자의 허무주의, 능동적 허 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강자에 의해 스스로가 파괴되기를 원할 정도만 의 권력량을 갖고 있다는 점, 강자의 영원회귀에 대한 믿음을 저주로 경험하고 어떤 행동도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는 점에 서 능동적 허무주의와 구별된다. 그러나 가치의 파괴 즉 부정적 행동 (doing No)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위안을 추구하면서 긍정적 행동 (doing Yes)과 생의 마비로 귀결되는 수동적 허무주의와도 구별된다. 고 드스블룸은 이에 대해 니체가 만년에 이르러 제시한 또 다른 형태의 허 62) L. Heidbrink, 앞의 책, S.124-128. 63) F. Nietzsche, 앞의 책, pp.37-38.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37 무주의라고 규정하지만,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불행한 자의 허무주의는 이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부터 제시되고 있다. 저 슬픔의 능력을 지닌 그런 인간들 - 그들의 수는 얼마나 적은가! -에 게서, 인류가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 한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중략) 모든 것은 필연이다 - 라고 새로운 인식은 말한다. 그리고 이 인식 자체도 필연이다. 모든 것은 죄 없으며, 인 식이란 무죄를 향한 통찰에 이르는 길이다. (중략) 수 천 년 후에 아마도 현명하고 죄 없는 (무죄를 인식하는) 인간을 규칙적으로 산출해 낼 힘을 인 류에게 부여할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지금 인류가 현명하지 못하고 부당하며 죄의식을 가진 인간을-그들은 전자의 필연적인 예비단계이지 반 대는 아니다-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64) 불운한 자의 허무주의는 인용문의 지적처럼, 슬픔의 능력을 지닌 인 간의 허무주의로서 수동적 허무주의에서 능동적 허무주의에 이르는 예 비적 단계의 허무주의라는 데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니체의 견해에 따를 때, 손창섭과 장용학의 작품 세계는 크게 보아 각각 어떤 위안도 발견하지 못하는 불운한 자의 허무주의 와 능동적 허무주 의 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장용학 소설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 요소이다. 그 간 장용학의 소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표피적인 현상에만 주목한 데서 온 결과였다 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장용학은 사르트르 수용 이전에 니체에 의해 이 미 영향 받은 바 크고 사르트르의 수용 역시 니체의 사상에 입각해 이루 64) F. Nietzsche(김미기 역),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책세상, 2001, pp.120-121.

38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개념은 노예도덕과 귀 족의 도덕,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 등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 보, 선악을 넘어서 등에서 우열의 구별이 귀족의 도덕이라면 현재의 선악의 구별은 원한 감정에 따라 이를 전복시킨 노예 도덕이라고 보고 노예 도덕을 초극하여 생의 긍정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노예도덕은 죄의식을 낳게 되는데 이는 자율적 주체 개념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서 선악의 구별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죄의식과 자율적 주체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차라투스 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노예도덕을 극복하는 존재로서 초인을 주장 하고, 이에 이르는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삼 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이는 각각 체념의 단계, 신과 대적하는 단계, 어린아이와 같은 무 구성, 망각과 쾌락의 단계를 가리킨다. 65) 이를 고려할 때, 다양한 해석에 도 불구하고 능동적 허무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초인은 선악의 구별을 넘어서서 죄의식과 자율적 주체 개념의 부정에 이른 자이며 어린아이 같은 무구성의 단계에 이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초인개념은 장용학 소설의 주인공들, 즉 비인 의 정체를 해명하는 데서 결정적인 역 할을 하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니힐리즘은 심미적 실존, 절망, 우울 그리고 실존적 범주로 재해석된 심미적 범주들을 중심으로 개진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의 삼 단계, 즉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을 구별하고 각각의 단계의 통합에 이르러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중 이것이냐 저것 이냐 의 심미가의 삶, 즉 심미적 실존을 통해 허무주의 개념을 구체적으 로 제시하고 있다. 심미적 실존을 통해 제시되는 허무주의는 진정한 절 65) F. Nietzsche(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0, pp.38-41 ; G. Wohlfart(정해창 역),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체, 담론사, 1997 참조.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39 망에 대한 심미적 전 단계를 의미하고, 하나의 잠재적인 절망 66) 을 의미 함에도 불구하고 실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뢰비트에 따를 때, 그것은 첫 째, 인간에게 벌거벗은 현존과 직면하게 하며, 둘째 그로써 인간을 세계 의 무와 대면하게 하며, 셋째 이것이냐 저것이냐, 즉 절망할 것인가 신 앙으로 도약할 것인가에 대한 결의에 직면하게 한다. 67) 결혼하라 그러 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않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68) 라는 심미가의 연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그는 행위의 무의미성에 빠진 자, 삶에 대 한 허무와 권태, 무관심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슬픔과 우울로서 직접성, 감각성을 대변하지만, 단순한 감각적 본성의 대변자가 아니라 정신에 대립하는 악마적 원리로서 규정된 감각적 에로틱한 것의 구현자라는 데 특성이 있다. 69) 키에르케고르는 이상에서 지적된 심미가의 절망, 즉 니힐리즘의 상황 에서 비롯되는 절망 을 통해 역설적으로 종교적 실존에 도달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데, 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절망을 크게 네 가 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감성적인 것에 의해서만 지배되어 스스로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 즉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 이며, 둘째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면적인 것에 절망하는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 이며 셋째는 자신의 자기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지 못 하는 영원한 것 에 대한 절망(은폐)이다. 둘째와 셋째 절망은 절망을 자 각하되 자기 자신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면서도 전자의 경우 66) K. Löwith, 앞의 글, S.62. 67) K. Löwith, 위의 글, S.56. 68) S. A. Kierkegaard(임춘갑 역), 이것이냐 저것이냐1, 종로서적, 1981, p.54. 69) S. Walsh, Living Poetically : Kierkegaard's Existential Aesthetics,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ty Press, 1994, pp.67-73.

40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절망이 외적 수난, 운명으로만 나타나는데 반해, 후자의 경우 완전하지 는 않지만 자발적 행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 다르다. 네 번째 절 망은 자신의 절망을 지각하되,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반항)이다. 이 는 니체가 지적한 바 있는 능동적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단계로서 자신 에 대해 실험적 관계를 가지면서 무한한 자기 창조를 시도한다는 점에 본질이 있다. 70)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계와 기독성을 구별하여 세속화된 기독계를 비 판하고 신 앞에 단독자로 대면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하는 반면, 니체는 기독계와 기독성 양자 모두를 부정하고 신에 대한 초극을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71)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결의적 절망(종 교적 실존)과 前 결의적 절망(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의 구별 속에서 신앙으로의 종교적 비약을 주장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허무주의의 가능성 앞에 눈감음을 의미할 뿐이다. 72) 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목 할 점은 양자 모두 시민-기독교적 세계의 붕괴를 기본적인 분석의 주제 로 삼았으며, 그들의 허무주의 극복 노력이 시민적 기독교적 인간성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다는 점이다. 뢰비트에 따를 때, 키에르케고르의 참된 기독교란 시대의 경과와 더불어 생겨난 것, 즉 인간주의(Humanität) 와 교양의 반대물 73) 이다. 또한 니체는 세속화된 기독교의 인간성에 대 한 항의 가운데서 근대적 인간에 대한 그의 비판을 전개하였던바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인간성 자체를 파기하는 인간초극에 대한 요구 74) 를 의미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초인의 대척점 70) S. A. Kierkegaard(임춘갑 역), 죽음에 이르는 병, 평화출판사, 1965 참조. 71) H. Schrey, Die Überwindung des Nihilismus bei Kierkegaard und Nietzsche, in: Sören Kierkegaard, Darmstadt, 1971, S.90-92. 72) K. Löwith, 앞의 글, S.64. 73) K. Löwith(강학철 역), 헤겔에서 니체에로, 민음사, 1997, p.369. 74) K. Löwith, 위의 책, p.371.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41 에 있는 인간으로 최후의 인간 을 설정하고, 이들에 의해 제창되는 시민 적-기독적 인간성 관념을 행복, 이성, 미덕, 정의, 교양, 연민 등으로 규 정하는데, 75)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허무주의는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시민적 인간성 관념 전체에 대한 부정 및 극복의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 다. 4) 허무주의적 미의식 손창섭과 장용학의 소설은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으로 인해 발생 한 허무주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에 입각한 고유의 미의식을 구현하고 있다. 힐레르브란드에 따르면, 낭만주의로부터 다다이즘, 초현 실주의 등의 모더니즘에 이르는 모든 진보적인 예술은 실존적 공허, 아 무 데도 없음이라는 위치상실 속에서의 형이상학적 권태, 정처없음, 무 등을 의미하는 허무주의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허무주의에 기 초한 예술은 신 없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재해석으로부터 등장하여 원 근법주의, 상대주의, 부정주의의 미학을 특성으로 한다. 76) 키에르케고르 와 니체는 각각의 허무주의에 기반하여 허무주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본고는 그들의 관점에 기초해 손창섭과 장용학의 미의식을 규명하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심미적 실존에서 제기 되는 허무주의가 우울이라는 정조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 그것이 심미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우울로부터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발생한다. 우울은 인간을 가능적 실존 으로 개별화하고 내면화하여 인간을 폐쇄적 75) F. Nietzsche(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다, 책세상, 2000, pp.16-19. 76) B. Hilleberand, Ästhetik des Nihilismus, Stuttgart, 1992, S.3-17.

42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를 자기 자신에게 열려짐Sich-offenbar-Werden 으 로 강제하고 그를 이러한 폐쇄적 개별화 속에서 불안, 절망의 무 앞으로 운반한다 77) 라는 지적에서 드러나듯 우울은 심미적 실존을 위시한 윤리 적 실존, 종교적 실존 전체의 핵심적 범주이다. 또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우울은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악마적 성 격을 띠며, 그 악마성으로 인해 심미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키에르케고 르는 불안의 개념 에서 악마적인 것 의 본질을 내용상 지루함, 형식 상 폐쇄적 침묵(das Verschlossene), 시간상 갑작스러움(suddenness) 에서 찾고 있는데 78), 이는 보러(Bohrer)에 따르면 심미적 현상의 본질을 규명 하는 기념비적 고찰이다. 79)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우울의 악마적 성격은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는 부정해야 할 성질의 것이지만, 미학적인 차 원에서는 심미적인 것의 근본적 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며, 그로 인해 심미가의 우울은 일상적 경험적 우울과는 구별되는, 악마적 성격의 심미적 우울로서 규정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의 키에르케고르의 우울 개념에 입각하되, 우울에 대 한 좀더 구체적인 천착을 위해 벤야민과 하이드브링크의 이론을 원용하 고자 한다. 우울(Melancholy)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연원하는데, 원래는 검은 체액을 가리키는 말로서 흑담즙(black bile)의 영향으로 차가울 때 완전한 무감각, 우울증을 낳고, 뜨거울 때 조광적 증상, 발광에 이르는 기질을 의미하였다. 철학, 정치학, 시에서 모든 탁월한 인간들은 왜 우 울자로 증명되는가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 이후 우울은 병리학적 장애와 천재적 능력이라는 양의적 의미를 갖게 되고 시대에 따라 병리 77) K. Löwith, Kierkegarrd und Nietzsche, S.38. 78) S. Kierkegaard(임규정 역), 불안의 개념, 한길사, 1999, pp.331-339. 79) K. H. Bohrer, The Prehistory of the Sudden : The Generation of the Dangerous moment, Suddennes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p.41-45.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43 학적 증상으로 배척되는가 하면 천재의 표지로 숭배되기도 한다. 80) 근대 에 이르러 우울이 정신병리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정신병적 멜랑꼴리와 비정신병적 멜랑꼴리의 확고한 구별이 이루어진다. 이때 문 제가 되는 것은 발병의 원인 내지 시대경험과의 연관이 간과되기 쉽다 는 점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정상적 감정으로서의 슬 픔(Trauer)과, 포기된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우울 (Melancholie)에 대한 프로이드의 구별 81) 역시 이러한 문제를 여전히 남기 고 있다. 우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의 접근도 중요하지만, 이상의 한 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울(Melancholy)을 근대 이후 보편적 인간 경험 에 기초한 시대적 현상으로서 접근해 들어가면서, 그것의 실존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우울자(Melancholiker)는 주위 대상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서 실패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감정상 우울(die Schwermut), 슬픔(die Trauer)에 사로 잡혀 있는 자이다. 탈현실화(현실에 대한 무관심), 탈인격화(자아정체성의 해소), 불행의식, 죽을 수 없음에 대한 상상, 죄 의식 등 우울자에게는 매우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82) 손창섭 소설의 동물적 인간을 제외한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서술하는 작가의 관점 자체에서 이와 같은 다양한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벤야민에 따 를 때, 다양한 증상 가운데 우울자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식과 운 80) M. Pensky, 앞의 책, pp.20-25. 81) 프로이드에 따르면 슬픔은 세계상실을 보이는 반면, 우울증은 자아와 관련된 상실 을 보이며, 나타나는 증상의 차원에서 슬픔은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등의 증상을 보이는 데 반해, 우울증은 이러한 증상 외에도 자기비하감과 그로 인한 자기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 를 특징으로 한다. S. Freud, 슬픔과 우울증, 무의식에 관하여, 열린 책들, 1998 참조. 82) L. Heidbrink, 앞의 책, S.25-30.

44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명의식이 특히 중요하다. 이때의 죄의식은 개체의 결정행위로부터 발생 하는 윤리적 죄가 아니라 살아 있음 자체가 죄가 되는 자연적 죄(die natürliche Schuld)에 대한 의식이며, 운명의식은 행복과 무구함이란 존재 하지 않는, 불행과 죄만이 존재하는 신화적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이 신화적 운명에 대한 순간적 초월 에 이르는 것과는 달리 우울자들은 신화적 운명에 대한 익명적 종속에 머문다. 그들의 우울은 신화적 운명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비 참함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83) 키에르케고르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니힐리즘으로 인 한 우울을 심미적 범주로서 제시함과 더불어, 자신의 실존철학에 입각해 고유의 체계적인 실존적 미학(existential aesthetics)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이다. 그는 심미적 이상을 물질적 형식(예술작품)보다는 인격적 형식(인 간적 자아)에서 완성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 결과 서정, 서사, 희 극, 비극 등의 심미적 범주들을 예술 생산물을 위한 인지적 범주가 아니 라 생산자(작가) 자체를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실존적 범주로 재해석한 다. 84) 손창섭의 소설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희극성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타인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이래 웃음, 희극적인 것은 크게 우월성의 이론(the Superiority Theory)과 부조화 이론(Incongruity Theory)으로 설명되 어왔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조화 이론을 최초로 개진한 사상가이다. 85) 인 간존재가 유한성과 무한성의 부조화, 모순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키에르케고르는 희극과 비극을 유한한 것(외적인 것, 시간적인 것) 83) W.Benjamin, 앞의 책, pp.138-145. 84) S. Walsh., 앞의 책, p.4. 85) J. Morreall, Comedy, Encyclopedia of Aesthetics1, ed. M. Kelly,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403.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45 과 무한한 것(내적인 것, 영원한 것)간의 모순과 불일치라는 인간 존재상 황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이중 전자를 전경화할 때 희극성(웃음)이, 후자 를 전경화할 때 비극성(슬픔)이 발생한다고 본다. 86) 키에르케고르가 시적으로 살기, 즉 자신이 파악한 허무주의를 심미 적 범주로 제시하는 것처럼 니체 역시 능동적 허무주의를 구현하는 초 인의 삶을 심미적 현상과 결부시키고 있다. 비극의 탄생 에서 제시된 가장 근본적인 명제는 삶과 세계는 단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긍정된다 라는 주장이다. 삶을 부정하는 도덕 신에 대항하여 니체는 창조에의 의 지로서의 예술만이 삶을 긍정하고 신성하게 할 수 있으며 예술이 진리 보다 더 가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87) 이는 비극적인 것을 디 오니소스적인 심미적 현상 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통해 구체화된다. 니체 는 비극의 탄생 에서 고대 비극을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의 관계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디오니 소스적인 것이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 에서 묘사하고 있는 디오니소스 적인 황홀, 즉 고통이 쾌락을 불러일으키고 환희가 가슴으로부터 고통 에 가득찬 소리를 자아내는 현상 88) 은 일차적으로 능동적 허무주의자, 니체 자신이 경험한 경지, 즉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무수한 순수한 전율의 명료한 의식을 갖고 있는 무아의 경지 89) 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무조건적인 자유의 감정, 힘과 신성의 감정 90) 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것은 보러에 따를 때, 심미적 현상의 세 가지 표지, 즉 갑작스러움(die 86) J. E. Hare, The Unhappiness One and the Structure of Kierkegaard s Either/Or, International Kierkegaard Commentary : Either/OrⅠ, ed. R.L. Perkins, Mercer, 1995, pp.91-97. 87) B. Hillebrand, 앞의 책, S.10. 88) F. Nietzsche(김대경 역), 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청하, 1998, p.43. 89) F. Nietzsche(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97, p.272. 90) B. Hillebrand, 앞의 책, S.74.

46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Plötzlichkeit)이라는 시간적 양식, 전율(der Schrecken), 개체화 원리의 상실 을 의미하는 이성적 주체 부재 상태의 황홀(die Verzückung qua absentia des Vernunftsubjukts) 중 마지막 표지를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니체가 주 장한 디오니소스적인 것 이란 이 세 가지 표지를 특성으로 하는 심미적 현상을 의미한다. 91) 장용학은 비인탄생 과 역성서설 에서 주인공들이 고통스러운 자기 초극을 통해 도달한 비인의 영역을 한편으로는 관념적 진술을 통해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갑작스럽게 이성적 주체가 붕괴 하고 전율에 싸이는 심미적 현상을 형상화함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이상 의 니체의 개념은 장용학의 미의식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 는다. 끝으로 본고는 장용학 소설의 알레고리에 대해 벤야민의 알레고리론 을 원용함으로써 그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장용학 소설은 주로 폴 드 만의 알레고리론에 입각해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장용학 소설에 등장하는 알레고리가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체험 그리고 그로 인 한 사물들의 가치 상실, 즉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보 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벤야민의 알레고리론이다. 벤야민에 따를 때, 단순한 우화 개념을 넘어서는 근대적 알레고리는 독일의 30년 전쟁 (1618-1648) 직후의 시대 경험, 즉 대재앙으로서의 전쟁이라는 시대 경 험에 기초해 있다. 대재앙 체험의 핵심은 세계의 무상성에 대한 깨달음 이며, 근대적 알레고리는 바로 이 자연의 무상성을 표현한다는 데 본질 이 있다. 근대적 알레고리는 상형문자를 기호와 지시물 간의 어떤 자의 성도 배제한 보편적 언어로 간주하고 상형문자의 해독과 새로운 형태의 상형문자의 창출을 시도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노력에서 기원한다. 그 91) K. H. Bohrer, Der Abschied, Theorie der Trauer : Baudelair, Goethe, Nietzsche, Benjamin, Frankfurt a.m. 1997, S.425 ; K. H. Bohrer, Asthetics and Historicism : Nietzsche s Idea of Appearence, Suddennes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참조.

제1장 손창섭, 장용학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론적 근거들 47 러나 근대적 알레고리는 파편화된 조각들에 의미를 할당함으로써 새로 운 형태의 상형문자를 창출하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의 자의성 으로 인해 자의적 의미 생산에 머문다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그 결 과 신성한 의미를 산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 고 새롭게 산출된 상형문자 역시 자연의 무상성을 표현하는 파편들을 의미하게 된다. 92) 벤야민은 이상과 같은 입장에 입각하여 상징과 알레고리를 대립시키 고 있는데, 이는 벤야민의 고유의 신학적 언어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학적 관점에 서 있던 벤야민은 인간의 언어를 에덴에서의 추방 이전의 기원적 언어와 추방 이후의 타락한 언어로 구별한다. 그는 기원 적 언어의 경우를 사물과 이름의 신성한 통일, 존재와 의미의 통일로 규 정하고 이름name 이라 칭하는 반면, 타락한 언어의 경우 기표와 기의 간의 순수한 도구적 관계, 자의성에 빠져 있는 언어로 규정한다. 이와 같 은 관점에 따를 때, 상징과 알레고리는 도구적 관계에 빠져 있는 단순한 기호보다는 우월하지만 이름 에 비해서는 기호와 지시물 간의 상호 연 관의 부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시의 불완전한 양식을 의미하게 된 다. 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징보다 알레고리를 중요시하는 것은 양 자가 신화와 정반대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상 징과 미적 가상을 신화의 계승으로 간주하는 반면, 알레고리 속에서는 신화의 해독제가 있어야 한다 94) 라는 주장에서 드러나듯 알레고리의 경 우 신화를 폭파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 결과 알레고리를 反 신화적 표현양식으로 규정한다. 미적 가상의 화해적 형식 이나 상징의 유기적 총체성이 의미와 감각적인 것의 융합이라는 신화의 92) W. Benjamin, 앞의 책, p.184, pp.167-171. 93) M. Pensky, 앞의 책, pp.47-59. 94) W. Benjamin(차봉희 역), 중앙공원, 현대 사회와 예술, 문학과지성사, 1994, p.122.

48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형식적 특성을 계승하여 허위적 총체성을 산출하는 반면, 알레고리는 기 표와 기의간의 심연에 집중하고 파편으로서의 상형문자를 지향하여, 이 러한 허위적 총체성을 파괴하는 데 본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95) 폴 드 만 역시 알레고리가 비자아와의 환상적 동일시로부터 자아를 방어한 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벤야민이 지적한 알레고리의 신화 파괴적 성 격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96) 95) W. Menninghaus, 앞의 글, pp.310-318. 96) Paul de Man, The Rhetoric of Temporality, Blindness and Insigh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207.

제2장 신화적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우울자와 희극성 1. 두 가지 인물 유형 : 동물적 인간과 우울자 1) 동물적 인간과 도덕적 무구성 손창섭은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 지에 公 休 日 (1952.6), 死 線 記 (1953.6) 1) 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70년 말( 棒 術 娘 (1978))까지 창작을 계속하였다. 본고는 신문연재 소설인 夫 婦 ( 동아일보, 1962.7-12.29) 이전, 즉 肉 體 醜 ( 사상계, 1961.11)까지 의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연구 대상을 60년대 초반까지로 한정한 것은, 비록 부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일정한 의의를 인정하더라 도, 이후의 통속적인 신문연재소설이나 역사소설은 생계의 확보가 일차 적인 창작 동기였다는 점 2), 특히 고유한 전후소설적 면모, 즉 역사에 대 한 절망과 그에 기초한 특유의 작품세계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 1) 문예 에 발표될 당시에는 死 線 記 로 되어 있으나, 비오는 날 (일신사, 1959)과 특 히 김동리의 소설추천기 ( 문예, 1956.6, p.77)에 死 緣 記 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 아, 線 은 緣 의 오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2) 손창섭은 부부 와 같은 신문연재 소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첫째, 생활을 위해서이고, 둘째, 일반 대중에게 더 친근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왜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가, 세대, 1963.8, p.208.

50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다. 손창섭 소설의 작품세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작중인물의 특이성이다. 의미 있는 것으로 장식된 가면을 벗기고 맨얼굴 3) 을 드러내려 했다는 평가에서 드러나듯 그의 작품 속에 묘사되 고 있는 인물은 기존의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고 있는데, 손창섭 고유의 작품세계는 이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人 間 動 物 園 抄 라는 작품명이나 나는 염소이고 싶다. 노루이고 싶다, 두더지이고 싶다 4) 라 는 당선소감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물적 인간에 대한 탐구는 손창섭이 뚜 렷하게 내세운 고유의 과제이다. 창녀 옥화(강영실)의 방에 대해 동물적 인 표정, 동물적인 대화, 동물적인 행동만이 반복되어 온 동굴 5) 이라고 묘사하는 泡 沫 의 意 志 ( 현대문학, 1959.11)를 고려하면 동물적 인간은 50년대 작품 전체에 걸쳐 제시된다고 할 수 있다. 손창섭 소설에서 제시 되는 동물적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는 면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동물과 인간의 완전한 분리란 불가능하며 동물성이라는 개념 자체 가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규정하기 위해 설정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때, 6) 손창섭의 동물적 인간 역시 일종의 해석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 이 합당하며 그의 고유의 관점, 해석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적 인간에 대한 손창섭의 해석에서 주목할 점은 동물적 인간의 본성을 자기 보존 self-preservation 으로 간주하는 관점과 권력에의 의지 the will to power 로 간주하는 관점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루소와 니체는 모두 문명화된 사회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을 위해 도덕적 가치 3) 김윤식, 6 25전쟁문학, 1950년대 문학 연구, 문학사와 비평연구회 편, 예하, 1991, p.29. 4) 손창섭, 당선소감, 현대문학, 1953.6, p.76. 5) 손창섭, 포말의 의지, 현대문학, 1959.11, p.50. 6) D. Lestel(김승철 역), 동물성 : 인간의 위상에 관하여, 동문선, 2001, pp.64-72.

제2장 신화적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우울자와 희극성 51 와는 무관한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한 규정을 시도하고 있다. 루소의 핵 심개념이 자기보존 이라고 할 때 이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권력에의 의지 로서의 삶이라는 니체의 개념이다. 루소와 니체의 대립 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자연 상태의 인간의 본성 으로 포함시킬 것이냐(니체) 배제할 것이냐(루소)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 의 인간에서 지배욕이 배제된 도덕의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해 나가는 반면, 니체는 도덕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나아간다. 7) 그 무렵 루소와 니이체에 도취되어 나는 열병환자처럼 된 적이 있었다. 특히 루소에게는 더 경도되었다 8) 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손창섭은 작가수업 시절부터 자연적 상태의 인간에 대해 전혀 상반된 관점을 제 시했던 니체와 루소에 심취해 있었으며 특히 루소적 관점에 더 경사되 고 있었다. 성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生 活 的 의 춘자와 봉수, 먹고 자고 배 설하는 것 외에는 먹는 이야기와 여자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인간동물 원초 의 인물들, 수염이 석자라도 사람은 먹어야 사는 거야. 점잖은 사 람이 어딨어. 남자구 여자구 나이를 들면 다아 저 볼 재미를 채우구 싶 은거야! 9) 라고 주장하는 流 失 夢 의 누이, 그리고 少 年 의 母, 저녁놀 의 父 와 술집여자 등 대표적인 동물적 인간을 중심으로 고려할 때, 손창 섭 소설에서 등장하는 동물적 인간이란 일차적으로 성욕과 식욕 등의 감각적, 육체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1) 조끼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 하나하나 기장해 나가던 장인 영감은 오늘두 또 쳐먹었어? 하고 하나밖에 없는 눈을 부릅떠 보이는 것이 7) K. Ansell-Person, Nietzsche Contra Rousseau,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102-112 참조. 8) 손창섭, 나의 문학수업, 현대문학, 1955.9, p.138. 9) 손창섭, 유실몽, 사상계, 1956.3, p.270.

52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다. 그리고는, 자기는 육십이 다 된 오늘날까지 하루 세 때의 끼니 외에는 군것질이라고는 해 본 예가 없노라고 하며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다. 그러 며 順 實 은 멋적게 씩 웃어 보이고, 먹구 싶은 것도 못 먹구 뭣하러 살아, 세상 재미란 먹는 재미지 뭐유, 난 아버지처럼 살래문 당장 자살해 버리구 말겠소, 하고 말대답을 하는 것이다.(밑줄-인용자) 10) (2) 만주와 북지로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을 녹여내던 이야기에서부터, 나 체 땐스며, 미루미루캉캉 이야기에까지 번져나가는 결국 남자란 여자 없 이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성현군자로부터, 곤충 과 같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그 문제에서만은 벗어날 수 없지 않았 느냐는 것이다. 두고 보매 春 子 와 동거하면서도 東 周 는 지나치게 점잖다는 것이다. 남자가 성욕을 잃게 되면 그건 폐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꼭꼭 빼놓지 않고 한다는 소리가 또한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이야기인 것이다.(밑줄-인용자) 11) (1)에서 단순히 군것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고 과부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결혼한 被 害 者 의 순실은 먹는 것에서 유일한 즐거움을 느끼고, (2)에서 호시탐탐 춘자를 노리고 있는 생활적 의 봉수는 남자란 여자 없이 살 수 없는 동물 이며 성자도 곤충도 성욕으로부터만은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봉수의 주장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 이때의 성욕과 식욕은 도덕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는 문명화된 인간의 욕망이 아니 라 단순한 감각적 육체적 욕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동물적 이라고 규 정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이란 수하를 막론하고, 종국적인 목적은 돈 모 으는 데 있다 ( 생활적 의 봉수), 남녀관계와 돈만이 인생의 전부 ( 유 실몽 의 누이) 12)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인물들은 식욕과 성 10) 손창섭, 피해자, 신태양, 1955.3, p.215. 11) 손창섭, 생활적, 비오는 날, 일신사, 1959, p.81( 현대공론, 1953.11).

제2장 신화적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우울자와 희극성 53 욕 외에도 발전된 인간사회의 산물인 돈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 으로 제시되지만, 이때의 돈에 대한 욕구 역시 근본적으로는 감각적, 육 체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물론 손창섭 의 소설에 등장하는 동물적 인간들이 실제적인 동물일 수는 없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극도로 거친 촉각과 미각을 소유하는 반면, 시각, 청각, 후각은 매우 예민하다. 따라서 촉각과 미각의 발달은 이미 문명화된 상 태를 의미한다 는 13) 루소의 견해에 따를 때, 등장인물들의 식욕과 성욕 에 대한 과도한 추구 자체가 이미 문명화된 사회의 촉각과 미각의 발달 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육체적 재생산만을 위해 먹고 교미하는 동물들 의 그것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세상 재미란 먹는 재미지 뭐유 ( 피해 자 의 순실)와 다아 저 볼 재미를 채우구 싶은 거야 ( 유실몽 의 누이) 의 재미 라는 표현은 그들의 욕구가 이미 인간화된 욕구로서 동물적 생 존과는 거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자연은 인간화된 자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인간을 형상화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측면이 다. 14) 중요한 것은 비록 인간화된 욕구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연적 상태 의 인간의 본성으로 의식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독특한 유형의 인물들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적 인간을 성욕과 식욕 등 감각적, 육체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로 형상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손창섭은 다른 한편으로 동물적 인간 에서 권력에의 의지 로서의 삶을 도출하고자 시도한다. 이는 동물적 인 12) 손창섭, 생활적, p.81 ; 유실몽, 사상계, 1956.3, p.270. 13) J. J. Rousseau(박은수 역),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관한 논문, 사회계약론 외, 인폴리오, 1998, p.45. 14)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부정적 역사철학에 입각할 때, 현재의 자연적 현상은 역사적 으로 이미 생산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불변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은 자 연에 대한 신화화를 의미한다는 점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 S. Buck-Morss, 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 The Harvester Press, 1977, p.49.

54 제1부 손창섭, 장용학 소설의 허무주의적 미의식 간들의 삶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동물원초 에서 뚜렷이 드 러난다. (1) 그런 가운데서 아무래도 통역관만은 다른 것이다. 깔보는 것 같은 웃 음을 담은 눈으로, 방장과 주사장의 부어 오른 태도를 암만이구 오래 지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결론이라도 나리 듯이 그는 또 엉뚱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란 늘 싸워야 하는 거요. 싸울 줄 모르는 인간은 송장이요. 그러나 반드시 저보다 강대한 적과 싸우는 싸 움만이 신성합니다. 약자끼리의 싸움이란 언제나 강자를 위한 자멸입니 다. (밑줄-인용자) 15) (2) 모두들 푸른 하늘이 저 드높은 하늘이 그리운게지! 저 하늘을 차지 하고 싶거든 용감해져야 합니다. 강해져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도 통역관 은 그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꺼린 것이다. 양담배는 도무지 통역관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통역관의 언동에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약자 는 언제나 이렇게 하늘만 사모하다 죽는답니다. 통역관은 그런 말도 했 다.(밑줄-인용자) 16) 감옥에 갖혀 있는 인간동물원초 의 인물들은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 외에 여자 이야기와 먹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중심적 사건은 핑핑 이, 양담배, 쓰리군 등 계간의 대상을 놓고 벌어지는 주사장과 방장의 대 결이라 할 수 있는데, 특이한 점은 주사장과 방장이 감각적, 육체적 욕구 의 만족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제일의 권력자가 되기 위해 서로 싸운다 는 점, 즉 생존에 대한 추구와 권력에 대한 추구가 동시에 제시된다는 15) 손창섭, 인간동물원초, 문학예술, 1956.4, p.25. 16) 손창섭, 인간동물원초, p.17.

제2장 신화적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우울자와 희극성 55 점이다. 타인에 대한 지배욕이 권력의지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손창섭이 자연상태의 인간의 본성에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삶 을 발견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인용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통역관 의 주장은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삶을 지향하고자 했던 작가의 관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용문 (1)의 살아 있는 사람은 늘 싸워야 하며 반드시 강대한 적과 싸워야 한다 는 주장은 동물적 인간들이 모든 생명 있는 것에서 가장 명료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보존하 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 17) 라는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삶을 추구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역관이 주장하는 삶에 이를 때, 감옥 안의 동물적 삶은 삶의 비참함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으로 전환되고, 도덕은 미래를 위하여 개체의 삶 을 희생하도록 동기화하는 환상 18) 을 의미하게 됨으로써 도덕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 (2)의 약자는 언제나 하늘을 사모하다 죽는답니다 라는 통역관의 비판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 해 있다. 하늘을 사모하는 약자 란 통역관이 주장하는 삶에 이르지 못한 자, 결국 도덕적 가치와 형이상학에 대한 갈망을 떨쳐 버리지 못한 존재 를 의미하는 만큼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삶을 주장하는 통역관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등지고 앉아 있는 통역관, 그의 요구와는 달리 인간동 물원초 의 도입부와 결말 부분은 통역관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창밖 의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주사장과 방장의 치열 한 대결 후에도 여전히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감옥으 로 상징되는 삶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뿐, 동물적 삶을 생에 17) F. Nietzsche, The Will To Power,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 Random House, 1968, p.366. 18) 위의 책,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