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Journal for Preacher ISSN 2383-8485 www.stu.ac.kr 설교자를 위한 전문 저널 설교와 소통 2015 September Vol.10
목차 설교자를 위한 전문 잡지 설교와 소통 2015 September Vol.10 -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대 설교학) 03 12 19 29 주일설교 1 오순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설교 주일설교 2 오순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설교 주일설교 3 오순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설교 주일설교 4 오순절 후 열여덟 번째 주일설교 - 교육설교 유재덕 교수 (서울신대 기독교교육) 37 42 47 52 교육설교 1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삭개오 교육설교 2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그리스도 교육설교 3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니고데모 교육설교 4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베드로 설교와 소통 제 1권 제 10호 2015년 9월 1일 발행 발행처 서울신학대학교 대외협력실 발행인 유석성 57 62 특수전도주일 설교 소형근 교수 (서울신대 교양학부) 전도와 영혼 돌봄 : 예수님의 비전 자료마당 설교를 위한 예화 (편집부) 하나님의 사랑 / 가시밭의 백합화 등록 1988년 5월 9일 제388-2003-00049호 주소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호현로 489번길 52(소사본동) 서울신학대학교 전화 (032)340-9106 팩스 (032)349-9634 홈페이지 http://www.stu.ac.k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Press Printed in Korea * 본지에 실린 기고자의 글은 본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으며, 본지에 실린 모든 콘텐츠에 대한 본지의 사전 허락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사를 금합니다. 2
9월을 위한 주일설교 1 오순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 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 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예배기도 결실의 계절 가을을 허락하신 주님, 우리 신앙과 삶에도 풍성한 결실이 있게 하옵소서! 오늘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 주일의 찬송 빛나고 높은 보좌와(27장/ 통일 27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455장/ 통일 507장), 너 시험을 당해(342장/ 통일 39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516장/ 통일 265장) 성시교독 27번, 시편 51편 3
봉헌기도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중 지극히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예물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도 드립니다. 받아 주 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생명을 주고 얻은 재물이오니 가장 가치 있게 사용되어, 하나님 께는 영광이 되게 하시고, 세상에는 축복이 되게 하시며, 드리는 성도들에게는 제물에 맞 는 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생명의 말씀 우아한 가난 잠 30: 7-9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의 문턱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7월과 8월이 너무 더워서 손 을 놓고 있었다면 9월은 새로운 힘을 내는 달입니다. 9월이 중요한 것은 새롭게 출발하겠 다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일 년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마음의 허리 띠를 조르는 분들에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는 성경말씀들이 많이 있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장 2 절의 말씀이 힘이 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4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장 24-26절 말씀도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너의 행 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 16장 3절 말씀은 얼 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또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좋아하는 말 씀입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 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 를 붙들리라! 이렇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믿고 힘차게 출발하는 성도들은 참 복된 분들입니 다. 아마 이런 분들은 하나같이 야베스가 드렸던 기도를 드리고 싶어 하실 겁니다: 나의 지 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 역대상 4:9~10). 실제로 굳건한 믿음으로 산 사람들 가운데는 큰 복을 누린 분들이 많습 니다. 당장 성경에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갈데아 우르의 촌노로 한평생을 마칠 뻔한 아브라함 아닙니까? 그런 그가 갈바를 알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당시 도시문명의 중심지인 고향을 떠 납니다. 15년간 머물던 교통의 요충지 하란을 떠납니다. 그리고 물설고 낯설은 척박한 불 모지 가나안에 이릅니다. 고생했지요. 죽을 전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버틴 결과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받지 않습니까? 다윗도 하나님 신앙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가 된 인물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하나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인물입니다. 너무 성경 인물이라서 실감이 안 납니까? 여러분은 혹시 백화점 왕으로 널리 알려진 워너메이커를 아시나요? 1908년 종로2가에 있는 YMCA회관이 지어졌는데 이것을 지어 기증한 인물이 바로 워너메이커입니다. 필라 델피아 변두리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서 초등학교 2년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워너메이커 는 교회학교에서 신앙훈련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랐습니다. 21살에 베다니 주일 학교를 설립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60년 넘게 주일학교 교사로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1958년 27명으로 시작한 주일학교는 1892년 3천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수 천 명의 주일학교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 일학교 어린이 숫자는 형제교회를 포함해 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엄청난 갑 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투자는 10살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산 빨 간 가죽 성경책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 성경책을 얻기 위해 1년 반 동안 벽돌 나 르는 일을 했습니다. 5
워너메이커가 주일을 지키는 열정은 유명했습니다. 체신부 장관이 돼달라는 요청을 받 았을 때도 주일 성수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장관직을 수락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워싱턴과 필라델피아를 오가며 4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베다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는 아무리 사업이 바빠도 매 주일 아침 9시 반부터 밤 9시 반까지 12시간 이상을 교회에서 봉사했습 니다. 사업 초창기부터 주일날에는 모든 점포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 사원에게 알렸습니다: 1. 주일에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절대 출근하지 마세 요. 2. 주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세요. 3. 교회에 적어도 1년에 5달러 이상 은 헌금하세요. 4. 주일에 댄스홀이나 유흥업소에 가려면 회사에 그 이유서를 제출하세요. 매출 증대를 위해 주일에도 문을 열자는 직원들의 제의가 있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날 을 세상 제물과 바꾸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워너메이커가 성공하기 까지 일곱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매일처럼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기상, 낙관적 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 절약하고 저축하는 습관, 때를 가리지않고 책을 읽는 독서습관, 메모하고 정리하는 습관, 칭찬하고 격려하는 습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습관. 그는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화점 건물을 지 을 때도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방음시설이 갖춰 진 기도실을 따로 만들 정도였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새출발을 하고 새결심을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런데 이런 일반적인 경향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발견하실 겁 니다. 오늘 본문은 아굴의 잠언인데 아굴은 솔로몬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30장 7절을 보 니까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옵소서 한 걸로 보아 아굴이 이 잠언을 기록할 때 매우 위중한 상태였나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본문에는 모두 세 가지 기도 의 내용이 나오는데 첫 번째 기도 내용은 이겁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 소서! 두 번째 내용은 나를 가난하게 마옵소서! 입니다. 여기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여러분도 다 좋아하시는 기도내용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기도후반부와 세 번 째 기도입니 다: 나를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건 좀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모두가 부하기를 원하는데 부하지 말게 해 달라니요? 이 런 기도는 우리 심정에 저항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열심히 일하면 거기 대가가 따르는 것 이고 또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부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리되지 말게 해달라니요. 거기다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라는 내용도 부담되지 6
않습니까?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릅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따라서 오늘에 모든 걸 다 걸고 살 수는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려 면 필요한 양식만 필요한 게 아니라 필요 이상의 재화와 음식이 곡간에 쌓여 있어야 합니 다. 그래서 본문은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려는 분들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듯한 분위기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를 너무 기분나빠하지 않기 바랍니다. 왜 냐하면 돈이 너무 많으면 돈이 신앙위에 군림합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게 너무 많다 보니 굳이 하나님 찾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돈이 신앙을 먹어 치웁니다. 무슨 일이 있으 면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돈의 위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부를 갖지 않게 해달라 는 것은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아굴의 이 기도를 너무 부정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경은 부자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부분 가난한 사 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버틸 때 그들이 먹은 것은 만나와 메 추라기였습니다. 그것도 창고에다 쟁여놓고 먹는게 아니라 매일 그날 먹을 것만 허용이 되 었습니다. 이건 절대 빈곤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가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게 다 뭡니까? 직장 있고 일에 바쁜 사 람들은 거기 그렇게 몰려들 여유가 없어요. 다들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 안되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들이 부자가 된들 얼마나 되었겠어요? 성경은 그리 몰려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부자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일차적인 관심은 부자 만들기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 만들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가 부자 되 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사람으로 구원받고 온전히 서 가는 거, 그것이 하 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입니다. 돈과 부는 하나님이 부가로 주시는 은혜의 한 방편일 뿐입니 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열두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 중에 갑부된 사람이 누가 있나 요? 제법 잘살았던 세리 마태는 되려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갖고 있던 재산 전부 날렸어요. 아굴의 기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 교수이자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이 경제학의 향연(Peddling prosperity) 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에서 크루그만은 1990년대 미국 경제를 두고 기대 체 감의 시대(the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라고 했어요.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데다 장래마저 암울했던 당시 미국 경제를 빗댄 말인데요, 어딜 둘러봐도 기댈 구석을 찾지 못하던 미국민들이 점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고 체념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는데 자본주의는 백만장자로 성 7
공한 접시닦이의 신화로 우리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줍니다. TV에서는 수시로 슈퍼스타나 백만장자가 되라는 꿈을 강요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공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위로 올라설 수 있다고 말합 니다. 이렇게 희망을 주는 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심각한 후유증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복해지지 못하는 자는 실패자요 낙오자로 간주됩니다. 이런 딜레마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의 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입 니다. 그는 미국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를 여행한 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집필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출생과 소유의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모든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놓고 무한한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리 고 자신들이 위대한 것을 이루도록 소명 받아 태어났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경험을 통해 수정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경 우에 극심한 불평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등한 경우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체제하에 사는 사람들이 풍요한 가운데서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 이유이다. 나는 부자들이 누리는 것을 희망과 부러움 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다. 무한한 가능성에 대 한 믿음 때문에 처음에는 피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일부 뛰어난 재능소유자와 행운아들 은 그들의 꿈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한 다. 그들의 영혼은 비통함에 숨이 막힌다. 여러분, 토크빌의 이야기가 어디 미국만의 이야기겠어요? 우리 주변에도 곤궁한 사람들 이 너무 많습니다. 직장을 못 잡는 이들은 수두룩하고, 직장이 있다 해도 언제 해고될지 모 르는 두려움에 빠져 삽니다. 수명은 늘어가는 데 50대 중반이면 직장을 나와야 합니다. 돈 쓸 곳은 많은데 돈 들어올 데는 없습니다. 수명은 길어지는데 일자리는 없고 당연히 수입 도 없으니 우리 미래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인류가 더 잘살기 보다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고 예측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아야겠지요. 주께서 약속하신 게 있으니까 그걸 믿고 기도해야지요. 구하라 주실 것이라 했으니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구하는 내용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구하는 기준은 나의 필요나 나의 요구가 아닙니다. 아굴이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 과 나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들어와 쌓였을 때 하나님과 내 사 이가 위태로워지는가 그렇지 않은가? 또 하나, 기도는 하는데 응답이 오기까지 어떻게 해 8
야 하는가? 어떤 이들에게는 응답이 빨리 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응답이 늦게 옵 니다. 심지어 원하는 응답이 안 오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응 답이 올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응답이 안 온다면 그래서 빈곤과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걸 위해 필요한 것은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고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빈곤의 시 대가 도래할 때 그것을 대비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알 렉산더 폰 쉔부르크라는 독일인이 지은 우아하게 가난해 지는 법 이라는 책이 우리나라 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자는 우아하게 가난해진 사례로 언어철학의 대부인 비트 겐슈타인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최고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 지가 남긴 엄청난 유산을 한 푼도 안남기고 포기했습니다. 그 엄청난 돈을 릴케 같은 가난 한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다 나눠주고는 평생 동안 극도로 검약한 생 활을 했습니다. 재벌2세에다가 철학의 역사를 두 번이나 쥐락펴락한 천재임에도 철학교 수직이 아니라 산골초등학교 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약간의 돈말 고는 탁자와 의자, 침대가 전부였습니다. 친구가 찾아와도 기껏 딱딱한 빵과 코코아 정도 만 대접할 정도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자였다가 자발적으로 가난해졌고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어디 에도 없습니다. 신앙과 상관없이도 우아한 가난을 스스로 자청해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가난하고 불행하다 며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를 줄이지요. 마음에는 영 못마땅함과 불평불만이 가득한 채 말이지요. 여기 서 한걸음 더 나가면 자존감을 포기해 버리고 품위도 잃어버립니다. 옷입는 것도 그냥 대 강 걸치고 다닙니다. 차림새에도 전혀 신경을 안씁니다. 마음이 불편하니까 아예 그런 거 귀찮아하는 거지요. 그러면 이런 모습이야 말로 최악의 가난이지요. 이런 모습이야 말로 물질뿐 아니라 정신 과 인간의 격도 잃어버리는 거지요. 가난해도 의연해야 합니다. 궁핍해도 품위를 잃지 말 아야 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한달 용돈 4만원으로 살았습니다. 사실 식권사고 책 몇권 사면 금새 돈 이 다 떨어집니다. 그때는 왜 그리 책사기를 좋아했던지 책을 몽땅 산 다음 라면을 박스 로 사서 밥대신 하루 세끼 라면을 끓여 먹으며 버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때에도 철 칙이 하나 있었어요. 언제나 옷은 반듯하게 입는다! 그래서 항상 옷은 반듯하게 다려 입고 9
다녔습니다. 그래서 밥을 굶어 배에서 전쟁이 나도 겉으로는 핸섬한 청년의 모습이었습니 다. 제가 그리한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교인들 앞에서 궁색한 모습을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밥을 굶더라도 겉모양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해야 한 다! 여러분 이것은 가식이 아닙니다. 가난은 제 곁에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적으로 가난하다고 제가 정신적으로까지 가난할 이유는 없는 거지요. 제 품위를 스스로 손 상시킬 이유는 없는 거지요. 저자 폰쉔베르크가 책에서 자기 삼촌 이야기를 하는데, 삼촌도 몰락한 귀족이었다고 합 니다. 겨우 방 두 칸 짜리 집에서 아이들 네명과 여섯 식구가 복작거리고 살고 수입도 변변 찮아서 항상 가난이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삼촌은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넥 타이를 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귀족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지요. 남들이 비싼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삼촌은 낡은 전축에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싸구려 차를 우아하 게 마시며 그 순간을 즐겼다고 합니다. 가난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거, 너무 중요한 거 아닌 가요? 앞으로 우리 앞에 궁핍과 가난이 들이닥치더라도 그 가난에게 우리의 품위를 내주 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 때문에 우리가 흐트러져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 앞으로 전 세계는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덜 풍요롭고 더 궁핍한 시대를 살아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합니다. 당장 여러분들이 은퇴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돈 으로 생활해야 하잖아요? 평균 수명은 늘어나서 100살을 산다는데 살수록 물질적으로는 점점 궁핍해지는게 사실이잖아요? 이러한 궁핍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 아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미래를 하나님과 상의하십시오.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 해오던 그 기도 하세요. 하시되,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세요. 궁핍하면 그 궁핍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서 여러분의 품위와 품격을 잃지 마세요. 고상하고 우아하게 결핍의 현실을 받아들 이는 겁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오묘한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여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아이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줍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핸드폰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다 른 애들 다 가지고 있는데 내 자식만 안가지고 있으면 기죽어서 안 된다! 그래서 그 비싼 핸드폰을 사줍니다. 사실 그 아이에게 핸드폰이 뭐가 필요합니까?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 들은 결핍을 모릅니다. 부모는 결핍해도 자식은 풍족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결핍을 모르 고 자라면 그들이 나가야 하는 결핍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아이가 자라서 제 대로 경쟁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결핍 을 가르쳐야 합니다. 넘치게 베풀어 기른 아이들 10
은 애정 결핍 때문에 힘든게 아니라 결핍을 모르고 자란 결핍의 결핍 을 겪으며 점점 나약 해지는 겁니다. 인생은 다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아야 합니다. 결핍을 알 면 절제력이 생깁니다. 이게 아이들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실제 미 듀크대 심리학 신경과학과 테리 모피트 교수 연구팀이 뉴질랜드 아이 1000명을 30년 동안 추적해 자기 통제력이 삶의 각 분야에 끼치는 영향력을 연구했습니다. 연구팀은 열 살이 되기 전 아이들을 자기 통제력 기준으로 5분위로 나눈 후 성인이 된 후의 삶을 조사했어요. 그 결과 통제력이 가장 약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 가장 강한 아이들에 비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비율이 2.7배 높았고 약물중독과 범죄는 각각 3.3배, 저소득층으로 사는 비율은 3.2배가 높았습니다. 연 구팀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환경과 지능을 교육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아이에게 자기 통제력을 적극적으로 길러줄 필요가 있다. 이리보면 결 핍은 부모가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 마지막으로 시작하는 새 출발에 힘 빠지는 이야기가 되었나요? 가까이 보면 그런 지적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멀리 보면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잘되 게 해달라고 번영과 발전을 위한 기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곁에 와 있 는 부족과 결핍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품위 있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생활 상태이 든 품위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바라기는 내 만족과 기쁨을 내가 가 진 것에서 찾지 말고 있는 바를 족히 여기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성도들 되시길 축 원합니다. STU 11
9월을 위한 주일설교 2 오순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 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노래 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 하리이다(시 51:10, 14-15) 예배기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저희들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오니 받아 주옵소서! 찬양과 기도를 받으시고 저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내려 주옵소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고 성령의 권능을 주시사 능히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아 하나님의 은혜로(310장/ 통일 410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463장/ 통일 518장), 나 맡은 본분은(595장/ 통일 372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597장/ 통일 378장) 성시교독 28번 시편 63편 12
봉헌기도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 부족한 저희들을 사용하여 주 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드린 충성 과 봉사를 받으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드린 것을 비록 작사오나 오병이어를 축복 하신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축사 하시사 영광스런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 름으로 드린 예물을 받아 주시고 더욱 많이 드릴 수 있도록 저희들의 산업에 복을 내려 주 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겨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 나이다. 아멘 생명의 말씀 내면의 행위 약 2:14-17; 잠 16:2 (양극설교) 첫 번 째 관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속담이지요. 하지만 사람에게 다가갈 때 말보다 무언가를 가지고 가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목마르 시지요? 이 말만 하지 말고 이거 쥬스 좀 드세요! 하고 쥬스를 드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 지요. 이것은 남녀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에릭 프롬이 쓴 사랑의 기 술 (Art of Loving)이라는 책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재해석했기 때문 에 좀 딱딱하긴 하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연애하고 사랑하고픈 청춘들이라면 한번쯤 떠들 13
어봤을 사랑지침서인데요. 거기서 에릭 프롬은 현대인이 사랑을 본인이 상대에 대해 사랑 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문제로 생각한다고 지적을 합니다. 하지만 에릭 프 롬은 사랑이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능동적인 사랑 이 뭐냐? 사랑을 준다는 행위 자체에서 나의 힘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게 에릭 프롬 의 말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말을 너무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사랑은 주는 겁니다. 만난 지 십년이 다 되갑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런 데 그 흔한 반지도 선물 받지 못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랑이 의심스러운 거지요. 왜냐 하면 사랑하면 알거든요. 뭐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주고 싶은 거에요. 말로만 하는 사 랑? 그것은 말로만 하는 효도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경우가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되지요.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신 분들 이 계실 겁니다. 선물을 받으실 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너무 괴롭고 기분 나쁘고 그러던 가요? 모르긴 해도 상대방에 대해 뭔가 각별한 마음이 들겁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많이 생각하는구나! 아 저 사람이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구나! 그러면서 선물을 보내오지 않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 겁니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 나는 별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 구나! 서운할거 까지는 없어도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개중에는 정말 부담되는 선물도 있지요. 뭔가 반대급부를 생각해서 보내는 그런 선물 말이지요. 삶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쓰는 거다 (웅진주니어 출판)라는 책이 있어요. 카네기 메 달 수상 작가인 시본 도우드가 작품을 구상하고, 패트릭 네스가 완성한 청소년 소설인데 요. 매일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와 대화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코너 오말리 라는 청소년의 성장을 다룬 소설입니다. 오말리에게 몬스터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삶은 말로 쓰 는 게 아니다. 삶은 행동으로 쓰는 거다.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네 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행 동이 없는 말은 참 공허합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하면서 말만 많고 행동은 안하는 사람은 다들 싫어합니다. 반대로 말은 많지 않은데 조용히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귀하게 봅니다. 오늘 야고보서 기자도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사 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 슨 유익이 있느냐? 여기 나온 것처럼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주목하고 있 습니다. 여기 나온 믿음이란 단어가 바로 우리 성도에게만 해당하는 거거든요? 성도는 믿 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 14
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 성도에게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매우 주관적이잖아요?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어요. 말로는 다 내가 주 님을 구주로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야고보서 기자는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행동이라는 겁 니다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주 쉬운 예를 들잖아요? 15절-16절 입니다: 만일 형 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 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성도가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려면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 와주라는 겁니다. 믿음이 있다면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라는 겁니다. 헐벗은 사람 에게는 입을 것을 주고, 몸이 아픈 이에게는 병을 고쳐주라는 겁니다. 겨울 추위에 떨고 있 는 사람에겐 방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 말로만 걱정해주는 것은 진정 그를 돕 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아가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걸 보면 예수를 믿 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행동과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두 번 째 관점 그런데 오늘 두 번째 말씀인 잠언을 보면 정반대의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 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원래 잠언 16장 2절 말 씀이 속한 단락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계획해도 마지막 결 정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리실 때 근거가 있어야 하잖 아요? 그게 바로 2절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 때때 로 망각의 동물인 우리 인간이 자기가 저질러놓고도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은 절대 잊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포장할 수 있습니다. 세무사 한분이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본적이 있어요. 이분이 유산상속을 둘러싼 온갖 사연 들을 접하고 유산상속의 노래 라는 걸 지었습니다: 제각기 이 세상에 태어나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입장료를 내고 오후 7시에 세종문화회관에 모인다. 무대 위에 체구와 음성과 분장과 의상이 다른 네 사람의 남녀가 등장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딸은 아버지를 잃어서 슬퍼하고 아들은 재산이 생겨서 기뻐하고 사 15
위는 장자상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며느리는 보석상에 진 빚을 갚아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사는 부부가 있었 다. 우리와도 다정하게 지내면서 살아왔다. 이 집은 딸만 일곱이었다. 모두 시집을 가서 제 법 잘 사는 것으로 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어느 딸이 오든지 부모와 함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앞집 같으면 아들이 필요 없겠다고 했다. 딸들이 그렇게 부모에게 잘 해드리니 말 이다. 그러다가 그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딸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내 사무실까지 찾 아왔지만 나는 중재할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은 헤아려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유산상속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너무나 비일비재하지요. 매일같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극진히 섬기면 누구 라도 칭찬합니다. 용돈 듬뿍 드리고 명절 때 마다 선물꾸러미 가득 들고 내려가고... 겉으 로 보면 너무 효도가 극진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는 세무사 앞집 딸 같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 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행위의 문제와 마음의 문제는 생각할게 많은 주제이지요. 우리는 착함 을 판단할 때 어떤 일(행동)을 하는 가 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착한 사 람 이라고 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 닌가요?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생각에는 한 가지 놓치기 쉬운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은 착함 을 그 사람의 행동 또는 행위 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어 요. 마음 과 내면 은 행동으로 들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이걸 잊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합 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에게 기부를 하는 기부 천사들도 있습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와 그 리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자기 선행을 매스컴에 알려서 자신의 인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런 블랙 코미디가 있어요. 어느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 자리를 피해 사람 들이 많은 곳으로 갔는데 저쪽에서 경찰관 두 사람이 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 순간 움찔했어요. 보니까 길거리에 신문지며 휴지가 떨 어져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얼른 몸을 낮추어서 휴지들을 줍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근 16
처에 있던 사진 기자가 보고 사진을 찍고 즉석 인터뷰를 요청합니다. 요즘 세상에도 이렇 게 휴지를 줍는 선행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 선한 시민으로 표창까지 받게 됩니 다. 불랙 코미디이긴 하지만 내면과 외면이 다른 오늘의 인간상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내용 아닌가요? 우리 사회에는 겉으로 보여지는 행동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 다. 그러다보니 착함 도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통해 평가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믿음까지 도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리되는 사회적 원인이 있어요. 산업화사회, 경쟁사회가 되면서 모든 수치는 일구어낸 성과라는 객관적인 것으로 매겨지잖아요? 우리는 성과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것이 모든 가치 를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성과주의와 결과주의가 도덕적인 가치평가에 까지 확장되어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분야 이던지 간에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데? 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며, 그 것이 모든 영역에 다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확장된 적용을 휴리스틱 (heuristic)을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휴 리스틱 은 찾아내다, 발견하다 라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로, 불확실하고 복 잡한 상황에서 몇 가지 법칙에 근거해 가능한 한 손쉽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리적 작동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한다! 즉 착한지 아닌지를 보려 면 그 사람이 착한 행동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착한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습니 다. 왜냐하면, 행동과 마음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 쁜 행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살아날 가망이 있다 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를 편하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그 거짓말이 오히려 착함이지 요. 또한 불우이웃을 돕는 것은 착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올리려는 불순한 마음이 있다면 그 행동은 절대 착한 것이 아 니지요. 그래서 착한 사람 을 보이는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두 관점의 조화 자, 여기까지 듣다보니 갑자기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지요? 처음에는 행동하라, 행동하 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행동이 다가 아니다. 얼마든지 가식적인 행동으 17
로 진실을 속일 수 있다. 마음이 중요하다! 언뜻 보면 상호모순 되는 것 같고 복잡한것 같 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내면의 행위 인데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에 해 답이 들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행위, 즉 나의 마음, 나의 진정 이 뒷받침된 행위가 해답이란 말입니다.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 는 행위! 그래서 내 행동의 근본 동기가 나 나 나의 이익 에 있지 않고 상대방에게 맞춰져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 그것이 참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침저녁으로 이제 가을 분위기가 확연히 납니다. 조금 있으면 만물이 열매를 맺고 농부들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 분주할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인이라면 우리도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식 없는 마음, 진정 사랑하는 마음, 그 것이 사랑의 행동으로 나오면 그것이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열매일 것입니다. 진정이 느껴지는 작은 행동, 그거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에서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고 있다고 상대가 느낀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한 것입니 다. 그 성공, 그 열매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STU 18
9월을 위한 주일설교 3 오순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 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잠 1:8-9) 예배기도 오곡백과를 주셔서 만물로 감사 찬송을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추석 명절을 허락하신 주님,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귀한 예배되게 하소서. 오늘 예배를 통하 여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대대로 임하는 은총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592장/ 통일 311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통일 308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579장/ 통일 304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559장/ 통일 305장) 성시교독 59번 시편 136편 19
봉헌기도 만물의 창조자이며 오늘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봄철 에 씨를 뿌리고 뜨거운 여름에 열심히 가꾸는 농부의 수고를 어여삐 보시고 이른 비와 늦 은 비를 주셔서 이 가을에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이렇게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하심이 저들 가정에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부모는 자녀를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고 자녀들은 믿음의 부모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옵 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고향에서 고향으로 히 11:13-16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이번 주 우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습니다. 추석이 되면 많은 분들이 고 향을 찾습니다. 고향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곳입니다. 부모님과 어릴 적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내 인생의 어릴적 추억이 담겨 있는 곳입니다. 정지용이 지은 향수 라는 시를 보면 눈앞에 고향이 아스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 얼룩빼기 황소가 20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 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 베개 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아란 하 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 마 꿈엔들 잊힐 리야. 물론 오늘날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산업화의 여파로 정지용식의 고향은 더 이상 찾 아보기 힘듭니다. 어쨌든 우리는 추석에 고향을 찾아 내려갑니다.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3-4시간 걸려가기도 합니다. 전남이나 경남에 고향을 둔 분들은 24시간 꼬박 운전하 는 괴로움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TV로 귀경행렬을 보노라면 끝도 없는 차량행렬 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굼벵이처럼 움직입니다. 저래서 언제 고향엘 갈까 싶어요. 얼마나 고생스럽겠어요?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 엄숙함마저 느껴집 니다. 왜 저리 내려갈까? 일차적으로 성묘 때문이겠지요. 부모님 뵙기 위해서, 친척과 친 지 만나기 위해서 이겠지요. 어떤 분은 추석이면 이유 없이 무조건 내려가는 거라고 말하 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귀소본능에 가깝지요. 영어로는 homing instinct라고 하는데, 집, 고향으로 가는 본능이라는 의미입니다. 귀소본능하면 가장 대표적인 게 연어 아닙니까? 강 상류 얕은 물에서 태어난 연어는 초 여름이 시작되는 5월이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 바다와 강물의 냄새를 새기고 먼 바다로 나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양양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는 베링해 까지 가서 알라스 카만을 오가며 거기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3년을 보냅니다. 다 자란 연어는 이후 기억했던 고향 바다와 강물의 냄새를 찾아 고향 길에 오르는데, 떠나서 다시 고향을 찾기 까지 2만 km의 대장정을 합니다. 중간에 어부에게 잡히고 곰에게 잡히고 갈매기 독수리에게 잡히 고... 그러면서도 끝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와서 알을 낳은 뒤 장렬한 최후를 마칩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회귀본능 혹은 귀소본능은 연어만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집 으로 돌아갈 줄 압니다. 소나 염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에 붙어사는 조개도 낮에는 이 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밤이 되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여우의 회귀본능을 가리켜 수구 초심( 首 丘 初 心 )이라고 합니다. 죽을 때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새들 도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만큼 고향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여기 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노래, 세상의 모든 시, 세상의 모든 이야기의 주 제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사랑이고 두 번째로 많은 것이 고향입니다. 고향이 없으면 그 많은 21
노래가 사라지고 그 많은 시가 없어집니다. 고향이 없는 인생을 우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 습니다. 잘 될 때도 그립고, 잘 안될 때도 그리운 곳이 고향입니다. 해외 유학생이나 이민 자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다 향수병에 걸리기도 하고,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 민들은 애끓는 속울음을 삼키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추석연휴에 그 고생을 하면서도 귀향 길에 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귀소본능 때문인 듯 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엘 내려가면 좋긴 한데... 다 좋은 건 아니지요. 오가는 길 막힐 것만 생 각해도 아찔합니다. 어떤 가정은 모처럼 친지들 만나서 돈 문제 땅 문제 등으로 멱살잡이 하고 돌아옵니다. 특별히 자기 고향 가는 시즌에 남의 고향 즉 남편고향가야 하는 아내들 은 속이 편하질 않아요. 많은 부부가 추석이 다가오면 신경전을 펼치잖아요? 언제쯤 내려 갈 건지...차례상은 어머님이 준비 하실건지 내 아내가 준비해서 내려 갈건지...동서들 에게 연락해서 차례비용 1/n 부담시킬건지, 부모님 용돈은 동기들이 모아서 드릴 건지, 드 리면 얼마를 드릴건지... 처갓집은 언제 갈건지... 주부들 100명에게 추석소감을 물어보았더니 10대 대답으로 이런 내용이 꼽혔습니다: 10위: 아 지겨운 날들이었어, 평상시가 이리 좋은 줄 이제 알았네 9위: 도대체 내가 시가에서는 식모야 며느리야? 시누이들은 왜 추석날이 어둡기도 전에 늑달같이 친정으로 달려들 오는거지? 8위: 왜 시부모님은 생활비를 드리는데도 우리만 가면 생활이 어렵다고 자꾸 말씀하시 는지 모르겠네... 7위: 남편, 이 배반자야, 어쩜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데 코빼기도 안보이니? 적당히 놀다 시간되면 처갓집 갈 생각을 해야 하잖아? 그렇게 교육을 시켜도... 6위: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왜 더 미운지 알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심부 름시키는데 신문에 무가지 끼워 넣듯 꼭 추가를 하더군요. 같은 여자인데 어쩜 이럴 수 가 있나요? 5위: 시아주버님이 술을 한잔 권하는데 얼른 받아서 마시고는 취해버렸죠. 그리고 막 주정을 해버렸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놀래서 눈치를 보더군요. 이 방법 참 좋은 것 같아요. 22
4위: 남편, 이 평생 웬수야 나 몰래 꼬불쳐둔 비자금 그리 많아서 시댁에 펑펑 썼냐? 나 만 몰랐지 시댁식구들은 비자금 많은 줄 다 알더라! 3위: 친정에 오니 살것 같네. 이제 추석날의 불행은 끝이자 추석날의 행복 시작이네. 받 은 대로 주고 갚은 대로 꾸리라... 기대해라 올케들이여! 2위: 우리는 추석을 탈출했습니다. 미리 성묘하고 미리 제사 지내고 비행기에 오르니 몸 도 마음도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1위: 추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보다 간소하게 치루고 시어머님 시누이 다같이 일 하니 힘들지도 않고 또 시댁만 오면 고스톱만 치고 술 먹고 잠만 자던 남편도 이런 저런 일도 도와주고, 그러다 보니 일이 일찍 끝나 온 식구가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 다. 저녁에는 시동생 남편, 시아주버니 고스톱을 치는데도 끼워주셨습니다. 시아주버님께 서 똥을 싸셔서 제가 얼른 먹었습니다. 남편은 잘 먹었다고 칭찬을 했지요. 피를 하도 많 이 봐서 돈도 땄지요. 왜 추석이 일 년에 한번 뿐인지 모르겠어요.내년 구정이 빨리 왔으 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석이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부모님 뵙고 동기들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조상님들 묘지를 찾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은 극히 부분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고향가면 얼마 안 있어 빨리 집에 가 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친지들이 있어도 며칠만 지나면 집에 가고 싶어요. 고향이 그리 그립다 해도 며칠만 지나면 내가 사는 나의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좋 은 감정으로 혹은 회귀본능으로 가는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강제로 가기도 합니다. 이 런 걸 보면 정말 내가 고향을 그리워한 게 맞나? 고향이니 부모친척이니 하는 그리웠던 얼 굴들도 며칠 못가 데면데면해지는 게 현실이잖아요? 이걸 보면 우리가 진정 고향을 그리워했나 싶어요. 문병란 이란 시인이 고향상실이란 시 를 썼는데 우리 현실을 너무 잘 표현한 거 같습니다: 고향은 이미 아무 데도 없다. 3천만 귀성객이 왔다가 가도 그들은 과자 부스러기와 외국 주정 위스키 몇 병 새벽녘 똥덩이 얼 마 남긴 뒤 여편네 엉덩이 같은 귀한 텃밭을 텅 비어 둔 채 떠나 버린다. 빈 텃밭에 달빛만 곱고 뒤뜰에 서걱이는 갈대 소리 폐가가 된 生 家 주인 잃은 대숲에선 바람이 칼을 간다. 실존주의자들도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인간은 정신 23
적인 고향을 상실하고 데라시네(deracine) 즉 고향으로부터 추방된 자가 되었다는 겁니 다. 원래 데라시네란 단어는 전쟁이나 정치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민중을 일컫는 프랑스 말이지요. 즉 자신들이 자란 토지, 자신과 관련 있는 토지로부터 잘려 나간 자를 말합니다 마는 이 단어는 동시에 오늘의 인간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지요. 오늘날 도시 화가 진행되면서 인간 소외현상이 보편화되고 인간들은 데라시네 상황으로 몰리고 있습니 다. 반대로 인간 스스로 출세를 위해 자기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향했다가 데라시네가 되기도 하지요. 가톨릭 실존 철학자인 마르셀은 고향 잃은 인간이 사는 세계를 가리켜 파 괴된 세상 고장난 시계라고 했어요. 확실히 실존철학자들의 진단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 호들갑을 떠는 고향이 정작 우리 안에 며칠 지나지 않아 어서 빨리 떠나야 할 곳이라니요? 그리 그리웠던 부모님도 평생 모 시고 살라면 손사래치는 부담이라니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향을 상실했다는 실존주 의자들의 진단을 곱씹게 하는 현상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은 평생 자기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의 고향이 갈대아 우르라는 것은 다들 기억하시지요? 갈대아 우르라는 말은 갈대아인의 우르, 즉 갈 대아인들이 살고 있는 우르라는 뜻입니다. 우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하류 유역, 바 벨론과 페르시아 만 사이에 있었던 갈대아의 대표적인 성읍입니다. 고고학의 발굴에 의하 면 우르는 그 시대에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목욕탕과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 추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고향으로는 우르만큼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만 나도 갈대우 우르 출신이다 하면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고향에서 풍족한 삶 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싸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짐을 싸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짐을 싸니까 이웃 사람들이 물었을 겁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고향을 두 고 어디로 갈려고 이삿짐을 쌉니까? 어디로 갈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이 짐을 싸 서 떠나라 해서 그리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다가 하란이라는 곳에서 15년을 머뭅니다. 그러는 사이 아버 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하나님께서 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15년이 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을 시간인데 아브라함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짐을 쌉니다. 그래서 마침내 도착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의 나이가 75 세였습니다. 그는 175세에 죽었습니다. 타향살이 한 기간이 정확히 백 년입니다. 그 백 년 24
동안 아브라함은 한 번도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창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 우자를 선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의 결혼을 위해 아브라함은 신실한 종 엘리에셀 을 고향으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고향에서 이삭의 아내 될 처녀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 다. 그러자 엘리에셀이 묻습니다. 주인님, 만일 여자가 저를 따라서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 때는 제가 도련님을 모시고 주인님의 고향으로 가서 결혼을 시 켜가지고 올까요? 엘리에셀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종의 이야기를 듣고 시집을 올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엘리에셀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아들을 내 고향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 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돈 떼먹고 야반도주한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 돌아갈 체면이 없는 무슨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만 먹으면 고향인 갈데 아 우르를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이삭까지도 고향에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타향에서 죽어 타향에 묻혔습니다. 대체 아브라함은 왜 그랬 을까요?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100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 나 아브라함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6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 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 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은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믿음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도 사람인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겠어요?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 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래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음을 아브라함은 먹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은 더 나 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 라 (15-16)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 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소망했 는데 그 본향은 하늘에 있다? 이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거기 가기까지 인간은 나그네이다! 일차적으로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도, 그 아들 야곱도, 모세 25
도, 예언자들도, 베드로도, 사도 바울도 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마 는 그들만이 아니지요. 우리 인간 자체가나그네입니다. 둘째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말속에는 이 땅의 어떤 것도 진정한 본향이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땅은 모세와 여호수아 때에 이 루어지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된 것인가?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그 땅을 빼 앗기게 되었고 디아스포라 상태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1948년도에 팔레스틴 땅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약속이 실현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 성서 기자는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 땅은 그림자일 뿐이고 여행객인 우리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관방일 뿐입니다. 이 런 이야기를 오늘 우리와 함께 사는 현대인들에게 하면 우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겁니 다. 전혀 안 받아들일 겁니다. 현대인이 그리도 아등바등하며 이 땅의 일들에 집착하는 것 을 보면 그들 의식속에 저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땅이 영원한 고향이고 이 땅 에서의 삶이 전부입니다.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가 블레이드 러너 입니다. 1982년 미국에서 제작된 SF 액션 스릴러 영화인데요, 인간들은 리플리컨트를 만듭니다. 리플리컨트가 뭐냐 하면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지녔고, 사고의 능력도 동일한 인조인간을 말합니다. 인간은 노동을 시킬 목적으로 이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리플리컨트의 최대 약점이 뭔가 하 면 수명이 4년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인조인간들은 더 오래살기 위해 자신을 만 든 과학자를 찾아가서 수명연장을 요구합니다마는 거절당하자 창조주인 세바스찬과 타이 렐을 살해하고 말지요.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이 가져온 고향상실의 징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창조주인 아버지 하나님을 살해 하고 그 자리에 자연선택이라는 냉정한 생물학적 법칙을 대치하였습니다, 프로이드의 심 리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성령의 입김을 제거하고 리비도라는 동물적 욕망을 대치하 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화에 승리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속성을 점 점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5천년 이래 가장 풍요한 시대를 사는 우리 민족은 뒤늦게 받아들인 자본주의라는 달콤 한 꿀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됩니다. 왜 사는지 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묻지도 않습니다. 돈이 최고입 26
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기에 가치관 운운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리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이 천박해지는 법입니다. 이리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야수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이미 그런 전조는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어요. 일례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중산층의 기준이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 아왔습니다: 1.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2.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3. 자동차는 2,000cc 급 중형차 소유. 4. 예금액 잔고 1 억 원 이상 보유. 5. 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 상 다닐 것. 공통적인 특징이 모든 기준이 물질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옥스퍼드 대학 에서 제시한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이렇습니다: 1. 페어플레이를 할 것. 2.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3.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4.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5.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많이 부끄러워지지 않나요? 2000년 전 당시 인간이 만든 최고의 문명은 바로 로마였습 니다. 바울이 그 로마에 도착해서 뭐라 했는지 아시나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 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누군가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면 바울과 똑같은 진단을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추석을 맞아 고향을 방문하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아야 합니다. 로버트 프 로스트가 지은 불모지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나운 비바람에 우지끈 소리를 내 며 길에 내던져지는 나무는 우리의 여로를 영원히 가로막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자신 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있을 뿐! 추석은 분주하게 고향을 찾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에서 비바람에 내동댕이 쳐진 나무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 추석 귀향 앞에서 우리 성도들은 믿지 않는 분들처럼 생각 없이 바쁠 일이 아니지요. 내가 누구인지, 진정한 고향이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성도를 가리켜 나그네이고 잠시 체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영어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 신자를 parishioner라 했는데 이 단어는 헬라어 로는 paroikos의 영어 번역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속한 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이 된다는 것은 본향을 떠난 자들이 임시로 몸을 의탁하는 곳 즉 데라시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오늘 본문도 확인하듯이, 우리 인간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임을 알면 라이프 스타 일이 달라지지요. 나그네는 길에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길 위에 자기 모든 것 을 쏟아 붓지 않습니다. 잠시 잠간 머물 곳에 생명을 걸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를 듣고 고향으로 가기를 포기하는 분들이 안생기기를 바랍 니다. 가셔야지요! 아브라함이 안 갔다고 여러분까지 안갈 필요는 없습니다. 편안히 잘 다 27
녀오십시오. 가실 때 선물 꾸러미 싸가지고 가신다면 오실 때에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 에게 큰 선물 꾸러미를 안겨 주십시오. 내가 돌아갈 나의 영원한 고향이 따로 있구나. 거기 제대로 가려면 이 땅에서 잘 살아야지. 하나님이 마련해 두셨다 했으니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 살아야지!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추석 선물입니다. STU 28
9월을 위한 주일설교 4 오순절 후 열여덟 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 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 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예배기도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거룩한 주일을 주시고 우리의 심 령과 발걸음에 복을 주셔서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린아이가 내어 놓은 오병이어가 수많은 굶주린 자들을 먹여 살렸듯이 저희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하 여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하옵소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433장/ 통일 490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315장/ 통일 512장), 어두운 내눈 밝히사(366장/ 통일 485장),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는(556장) 29
성시교독 44번, 시편 100편 봉헌기도 고마우신 주님, 주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가정에서 아름답고 복된 일들만 일어나길 원합 니다. 가정을 통해 천국을 미리 맛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생명을 살리기를 소원합니다. 감사가 습관이 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민감함을 우리에게 허락하 소서. 예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추석에 받은 선물 창 2: 7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이번 주간은 한가위 추석으로 무척 분주했습니다. 모처럼 고향을 방문해 가족들과 정겨 운 시간을 갖는 것은 추석이 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고령임에도 살아계신 부모 님, 그리고 흩어져 살다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처럼 살아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 고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선물을 우리는 추석에 받습니다. 그것은 이미 돌아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추석 아침에 우리가 성묘를 갑니다. 할아버지 할머 니의 묘앞에 둘러앉아 추도의 예배를 드립니다. 죽은 분은 아무 말이 없지만 살아있는 우리 30
는 말없는 분들이 주시는 큰 선물을 받습니다. 바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 선 물입니다. 함께 성묘를 온 가족들도 천차만별이지요. 부유하고 가난하고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나이가 많고 나이가 적고 건강하고 병약하고... 천차만별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요. 시간은 각기 다르지만 성묘 간 모든 친지들이 언젠가는 저렇게 묘에 눕게 된다는 사실! 지금 은 우리가 성묘를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죽어 성묘를 받는다는 사실... 지금은 다 살아 있 지만 언젠가는 다 죽어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대개들 성묘를 하게 되면 무덤 주위를 돌아보며 풀도 뽑아주고 흙도 밟아 주곤 합니다. 무덤 속에 계신 분은 우리가 밟는 것과 동 일한 흙이 되었고 우리도 언젠가 그 흙이 될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흙이 된다! 이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큰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고 했어요. 땅의 흙 이란 말의 히브리어가 아파르 민-하 아다마 인데 아파르는 땅의 먼지 즉 땅의 티끌을 의미 하고 하 아다마는 땅을 의미합니다. 사람이라는 히브리어도 아담입니다. 아담의 복수형이 땅을 의미하는 아담하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인간이란 땅의 먼지나 티끌에서 왔다 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리고 인간, 아담은 으면 다시 인간이 왔던 아다마, 흙으로 돌아갑니 다. 실제로 무덤에 서서 이 말씀을 읊어 보면 인간이 참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 이란 존재가 정말 보잘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음을 알게 되지요. 우리는 사실 언제 죽을지 모 르고 삽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어떤 사고에 의해서 곧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지요. 내 자신, 혹은 내 주위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질병이나 사고로 죽는 예가 허다합 니다. 내 어머니, 형님, 친구 등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면 인 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모든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한 말이 무엇인가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뒤에 다시 있고, 이미 한 일을 뒤에 다시 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 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서 허무주의자들이 나옵니다. 염세주의 자들이 나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자기를 찾기 위해 속세를 떠나 불문에 귀의합니다. 매년 300여명 되는 사람들이 계를 받고 중이 되는데 고교 교장선생님, KBS사장을 지냈던 분, 행정고시에 합격한 공무원 연극배우 등 직업도 다양합니다. 확실히 화장장에서 고로에 들어가는 주검이 얼마 후 한줌 재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 31
함을 느낍니다. 온갖 사연을 뒤로 한 채 말없이 누워 한줌 흙이 되어버린 나의 어머니 나의 가족을 생각하면 인생이 덧없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후반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다 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허무감을 줍니다마는 그 다음 이야기는 다른 생각 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당신의 입을 대고 후~ 하고 숨을 불어넣었다는 겁니 다. 생령이란 네페쉬 하야 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인데요, 네피쉬는 존재(Being)라는 의미이 구요, 하야는 살아있다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 야기입니다. 무엇이 특별하나구요? 우선 창1:1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기사에 쓰인 바라라는 동사가 본문에 다시 나옵니다. 바라는 창조하다 라는 동사인데 오직 하나님의 행 위에만 국한해서 쓰는 단어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바라라는 동사를 쓰 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 신이 손으로 티끌을 빚어서 창조하신 겁니다. 이러니 얼마나 특별한 존재입니까? 게다가 인간 창조를 다루고 있는 창 1: 26-28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겠다는 특단 의 결의를 표명하면서 창조 작업을 시작합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 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두 단어가 형상과 모양입니다. 형상은 체 렘 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모양은 대뭇 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두 단어에 대한 번역은 매우 복잡합니다. 가령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체렘 즉 형상을 인 간의 이성적인 면으로 번역했습니다. 대믓 즉 모양은 인간의 영적인 면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대믓 즉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은 잃어버리고 동물과 구분되는 이 성 즉 체렘만 남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구분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주전 9세기 시리아의 텔 파카리에에서 출 토된 앗수르-아람어의 이중 언어로 쓰여진 비문에는 왕 하두-이시의 상을 가리켜 형상과 모양이라고 짝을 지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창 5:1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모양(대믓) 대로 창조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형상이란 말을 생략한 거지요. 5장 3절에는 아담이 셋을 그의 모양대로 그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성경의 용례는 둘 을 구분해서 쓴다기보다는 통합적으로 쓴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내 면과 외면 등 하나님의 총체적인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32
왜 하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면 1장 26절에 그 목적이 나 와 있지요?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 리게 하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인 간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입니까? 왕이 신 하나님을 대신해 대리 통치자로 세움을 입었지요, 이를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지요!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순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 다.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창공을 만드시고 육지와 바다를 나누시며 식물 계를 창조하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며 생물과 동물을 만드십니다. 창조된 순서로 보면 인간은 소나 돼지 닭이나 들풀보다 늦게 만들어졌습니다. 순서는 맨 마지막이지만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의 창조가 인간을 향해 있습니다. 인간이 이땅에서 먹고 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완벽하게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뒤 인간을 창조하신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인간이 특별한 존재입니까? 자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본문 7절 이전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행동은 없고 상태만 나 타납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에 와서 하나님의 행위가 처음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 간을 흙으로 짓습니다.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인간을 짓는 행동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 님이 흙을 사용하심으로 인간과 땅 사이에는 창조적인 생명의 결속이 맺어지게 됩니다. 흙 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으로 비로소 산 존재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력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질료적인 신체에 들어감으 로 비로소 인격화되고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흙으로 만든 인간 그리고 하나 님의 숨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인간을 두 가지로 구분하게 합니다. 그것은 몸과 영혼으로 구 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적인 몸과 생명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것이 실 재적인 몸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당신의 입을 대고 불어넣어준 하나님의 숨이 참 생 명인 겁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숨이라는 생명은 없습니다. 시 104편 에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숨을 거두시면(시 104:29-30; 욥 34: 14-15) 인간은 다시 생명 없는 질료가 됩니다. 즉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특별한 대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유일하게 인간을 위 해 에덴에 한 동산 혹은 정원을 세우십니다. 고대 동양세계에서 일반적으로는 채소밭의 경 작이 주를 이룹니다. 정원을 세운다는 것은 위대한 왕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33
이런 왕을 위한 정원을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세워주신 겁니다. 에덴 의 유래는 불명확하지 만 어원으로 보면 에덴의 어의가 환희 로 낙원과 동의어로 나타납니다(사51:3; 겔 28:13, 31:9).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위해 이 동산을 은혜의 선물로 세우셨으니 이보다 더한 특권이 어디 있겠어요? 자, 이리 보면 인간이 허무한 존재가 아닙니다. 너무나 특별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중심으로 세운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준비해 주셨습니다. 해와 달, 먹 고 살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아침 밝아오는 새날을 보며 하 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라고 흑암의 어둠까지 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겨 두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걸 보고도 어찌 인간이 허무한 존재라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우리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저버리고 하나님 의 명령을 어김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땅은 쓴물을 토해내고 인간을 위 해 마련해 주신 자연은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조시 인간에게는 모든 식물 이 음식으로 주어졌고 동물에게는 들의 풀이 주어졌습니다. 종목의 수는 다르지만 인간과 동물은 동일한 식탁을 지정받은 셈이지요.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말처럼 신체적 필 요에 관한한 인간은 동물과 동일한 식탁을 지정받았고 인간과 동물 간에 혹은 동물과 동물 간에 피 흘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은 동물을 잡아먹고 동물까리도 서로 잡아먹 지요. 인간이 스스로 부끄러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인간이 스 스로 하나님과 맞먹는 기쁨을 꿈꾼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인간이 낙원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짓을 한 이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변했습니다. 환희의 동산 에덴에서 나온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에덴에서 세상으로 나온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울음으로 이 땅과 인사를 나눕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속에는 태초의 슬픔이 묻어 있는 겁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미카엘 솔로호프가 지은 인간의 운명 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영화 로도 만들어져 1959년 모스코바 국제영화제 대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 줄거리가 인간의 고통을 농축해 놓은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가족을 전부 읽은 청년 소콜로프는 이리나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얻고 17년을 행복 하게 삽니다. 그러던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소콜로프는 가족과 기약없는 이별을 하고 전장으로 향합니다. 전쟁터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힌 소콜로프는 탈출을 시도하지만 4일만에 잡혀 2년간 포로수용소에서 노역을 합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에게 패할 무렵 소콜로프는 독일 대대장의 운전병으 로 일하다가 술 취한 독일군의 군복을 뺏어 입고 독일군 비밀문서를 가지고 탈출에 성공합 34
니다. 소콜로프는 소련군에 복귀하여 꿀같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오지만 고향집은 폭격으 로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아내와 딸도 폭격으로 죽고 아들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듣습 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소콜로프 앞으로 아들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듭니다. 실의와 좌 절속에 빠진 소콜로프는 전쟁통에 고아가 된 바냐라는 아이를 양자로 삼습니다. 한 남자의 인생이 기구해도 너무 기구하지 않습니까? 소설거 솔로호프는 주인공 소콜로프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비극과 고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의 삶이 고달픈 거 맞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슬픔과 탄 식, 고통과 아픔이라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속하더라도 들으세요. 이걸 운명 이라 한다면 이 운명을 택한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거나 강요한적 없습니다. 스 스로 에덴이라는 환희를 박차고 나온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더 이상 이러니 저러 니 말할 필요가 없어요. 회색빛인 우리의 상황, 이게 현실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보고 수고하여야 먹고 산다고 하셨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비록 우리가 에덴동산의 환희속에 살지는 못해도,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고통과 슬픔에 둘러 쌓여 있다해도 하나님의 보호막 안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 다. 따라서 우리가 자초한 현실을 놓고 불평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는 행동입니다.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어리석음이 아니에요. 인생이 속절없다고 비관하고 염세주의자가 되 는 것도 아닙니다. 헛되고 헛되다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하게 지음 받은 특별함에 걸맞게 인생을 사는 거,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어떻게 살라는 이야기냐구요? 본문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상 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하는 것이 창 1: 26-28절인데요, 흥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게 복을 주셨다고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보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29절에서 식물계를 인간에게 양식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8절에 아주 장 황하게 우리가 해야 할 과제를 말씀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 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런 과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직접 다 스리시는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 35
을 다스리고 보존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위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이 하시 는 것처럼 이 땅을 보존하고 우리 인간을 통해 만물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겁 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한다는 것,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 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생 태계를 보존하라는 일차원적인 명령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좀더 상세 하게 알려주셨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라! 그래요, 우리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바쁜 사람들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고 헛되다고 푸념할 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덤 을 보고 인생무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동일한 무덤을 보고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브라함의 품에서 휴식하는 평안을 봅니다,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자랑스런 순간을 그 립니다. 같은 하늘아래 같은 태양을 쬐며 살아도 이렇게 다른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번 추석에 받은 선물을 잘 기억하십시다. 살아계신 분들 과의 화목이라는 선물, 이거 너무 귀한 겁니다. 잘 간직하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무 덤 앞에서 깨달은 우리 인생의 참된 존재 의미에 대한 자각, 이건 더더욱 중요한 선물입니 다. 우리가 무덤에 누워 평안한 휴식을 취하기 전까지 바쁘게 살아갑시다. 낭비할 시간이 없 습니다. 고민할 시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보잘것 없는 흙으로 만 들었지만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숨을 불어넣은 존재, 하나님의 숨을 가진 존재, 살아있는 영 이 된 존재,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리도록 사명을 받은 존재! 그래서 너무나 존귀 한 존재, 바로 그런 존귀한 자 답게 사랑하는 여러분 자긍심을 갖고 열심히 삽시다. 하나님 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분주하고 바쁘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갑시다. 여러분 안에 하 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STU 36
9월을 위한 교육설교 1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삭개오 (눅 19:1-10 찬송 450장)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세월은 우리 생각보다 정말이지 빠르게 흘러갑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니, 바울 선 생의 교훈처럼 세월을 아끼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언젠가 클래식 방송을 듣다보니 기막힌 시 한 구절이 흘러나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출신 여성 시인 비스와바 심브로스 카(Wisława Szymborska)의 작품입니다. 그녀의 시를 찾아보니까 <Nothing Twice> 라는 시가 유명합니다. 우리말로 <두 번은 없다>라고 옮길 수 있는 그녀의 시는 이렇게 시 작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Nothing can ever happen twice).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할 기회도 잡지 못하고 죽음 을 맞이합니다 (In consequence, the sorry fact is that we arrive here improvised and leave without the chance to practice). 전개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왔다가 허무하게 갈 수도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서 180도 달라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삭개오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삭개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잖습니까?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 사실 따져보면 알려진 것과 달리 뽕나무가 아닙니다만, 어쨌든지 삭개오는 우리에게 무척 37
친숙한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삭개오로부터 세월을 허비하지 않고 의 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시류를 아주 잘 탔습니다. 로마의 세금정책을 이용해서 부와 권력을 손 에 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기나 죄인과 동급으로 분류했습 니다. 함께 어울리는 것은 물론, 식사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반 인들에게 무시당한 것 같지만, 사실 세리들은 부와 권력을 함께 손에 넣고 있었습니다. 요 즘 말로 바꾸면 지역의 유지입니다. 동네에서는 실세 중에 실세였습니다. 로마 당국 대신 에 세금을 걷는 게 세리가 할 일이었고, 세리장은 그런 세리들을 밑에 두고 부리는 권력자 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의 세금징수권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징수권을 낙찰 받은 사 람은 정해진 금액만 국가에 지불하면, 얼마든지 더 걷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부하들도 세 리장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삭개오는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좋 지 않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지금이야 소외된 이들과 죄인들 을 구하러 왔다는 것을 우리고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우리가 해석하지만, 당시에는 모욕적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세 리였습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세리 마태를 불러다가 제자를 삼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세상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세리를 제 자로 삼은 그 사람은 누군가? 세리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분이 누 군지 직접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기도 세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삭개 오의 키가 작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운집하다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자 그는 체면도 내려놓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전에는 뽕나무라고 번역하 다가 우리 말 개역개정판 성경은 돌무화과나무로 번역을 바꾸었습니다. 잘한 겁니다. 사실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파리는 누에 먹이로 사용하는 검은 오디가 맺히는 뽕나무가 아니라 돌무화과입니다. 무화과처럼 비슷한 열매가 많이 맺히지만, 맛은 덜합니다. 이 돌무화과 는 낮은 쪽에도 가지가 자라서 삭개오처럼 키가 작아도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38
믿음에는 이처럼 무엇보다 정성이 필요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은 그의 정성에 있었습니다. 옛날 어른들, 기독교가 무엇인지 잘 몰랐을 때는 가족을 위해 치성을 들였습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샘에서 물을 길어다 놓고 간절히 빌 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위공자열전> 에서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정성을 다해 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얼마나 정성을 다해야 할까요? 가톨릭 사제들은 우리 개신교와 달 리 미사 직전에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집전하기를! 정말 도전이 되는 기도 아닙니까? 우리 역시 예배드릴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용>( 中 庸 )을 보면 성자 천인도, 성지자 인지도 ( 誠 者 天 之 道, 誠 之 者 人 之 道 )라 는 말이 나옵니다. 뜻을 새겨보면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 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배하고 찬양할 때, 기도할 때, 성경을 읽 을 때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성 이고,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받아주세요.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눈빛을 주고, 말을 건넵니다. 삭개오가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 또 다른 비결은 주님과 단독으로 눈빛을, 말을 주고받은 것입니다. 사실, 삭개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그를 올려다봅니다. 여기서 예수님 이 보셨다 는 게 중요합니다.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겁니다. 얼굴과 얼굴, 눈 과 눈이 마주친 겁니다. 많은 사람을 둘러보듯이 그렇게 본 게 아닙니다. 지명하여 한 사 람을 집중적으로 보신 겁니다. 삭개오를 보신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오고가는 말이 없어도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저 사람이 어째서 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저렇게 간절히 나를 보려고 하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 니다. 삭개오의 고민, 삭개오의 깊은 관심, 삭개오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모두 읽으셨 습니다. 그러니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오늘날에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 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용한 게 카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과 아이 컨택을 해줄 사람이 없는 겁 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뜨는 신종사업이 가족대행업이랍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차를 마시 고 싶은데 사람이 없거나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을 때 전화하면 와서 같이 먹어주는 것 을 관리하는 사업이랍니다. 자식을 낳는 것보다 강아지를 기르는 비율이 높아지는 현실이 다 보니 앞으로 사업전망이 있겠죠? 여러분,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맞추 39
세요. 그게 바로 사랑이고, 전도입니다. 감신대 페친 교수가 있습니다. 연세가 저보다 윕니 다. 그런데 페북을 보면, 사용하는 말 수준이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학생들보다 더 학 생스럽게 페북에 글을 남깁니다. 감신대 학생들과 하루에 3시간씩 페북을 해요. 그런데 얼 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등록금을 교직원 연금에 보탠 것 때문에 감신대에서 말이 많았는 데, 페북 덕분에 학교와 학생들이 함께 벽보를 붙였답니다. 감신 역사상 처음이랍니다. 눈 을 맞추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세 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 이 첫 번째 건넨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세리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았 습니다. 어쩌다 돈을 받았더라도 도로 던져버렸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 하지도 않는 세리에게 잠자리를 청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손가 락질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과 10 절이 답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리라고 해도, 그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어 떤 잘못을 했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축 복을 물려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골고루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그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을 되찾는 일이었기 때문에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러자 삭개오에게 심경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미 있는 삶의 단계에 들어선 겁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열리자 놀라운 말이 터져 나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그대로 선 채로 말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 들에게 주겠사오며 그냥 의미 없이 살다가 갈 수 있는 운명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 나서 180도 달라졌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 나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 잃어버렸던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겁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불어넣어주신 사랑을 회복했습 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만일 누구 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양심까지 완전하게 회복된 겁 니다. 변화의 완성입니다. 언젠가 일간지에 연재 되던 광수 생각 이라는 만화에서 본 내용입니다. 어떤 친구가 자 기 친구에게 말합니다. 자네 요새 여자 교제한다며? 그래 그런데 그 여자가 부탁해서 술을 끊었다며? 아 끊었어, 자꾸 끊으라고 해서 끊었어. 이번에는 또 다른 친구가 말합 40
니다. 자네 그 좋아하던 도박도 끊었다며? 아 그 내 지금 교제하는 여자가 도박하지 않 는 게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위해 끊었어. 또 한 사람이 아 자네 요새 그 담배도 끊었다 며? 그 줄담배를 피우더니 아 그 내 사랑하는 사람, 그 교제하는 여자가 담배 피우지 말 라고 해서 담배 끊었어.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자네 그럼 그 여자하고 왜 결혼하 지 않나?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다 끊고 착한 사람 이 되고 보니까 내가 괜찮은 놈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 같아서 결혼하지 않았네. 이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이런 삶은 언제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삭개오는 만화 속 인물과 달리, 전적인 변화였습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은 거짓으로 자 백하거나 훔친 것을 배상하려면 20퍼센트를 추가해서 돌려주라고 규정합니다(레 6:5). 도 둑질을 한 것으로 밝혀지면 2배로 돌려주어야 합니다(출 22:7). 그런데 중요한 것을 훔치 면서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에는 4배로 갚아야 합니다(출 22:1; 삼하 12:6). 삭개오는 자신의 잘못을 가장 중한 마지막 수준으로 인정하고, 되갚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선언은 강제로 한 게 아닙니다. 기쁨으로 한 겁니다. 찬송가 285장을 보면 가사가 이렇습 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맘 못 이겨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한다고 노래합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기쁨에 못 이겨 서 소유의 절반은 물론이고, 토색질한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한 겁니다. 결말 여러분,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과 눈빛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와는 다 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연 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할 기회도 잡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 리 모두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과거와 다른 의미 있는 삶 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STU 41
9월을 위한 교육설교 2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그리스도 (요 1:35-42 찬송 510장)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요즈음 교회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데, 거꾸로 사 회가 교회를 걱정합니다. 전혀 근거 없는 모습이 아닙니다. 언젠가(2005년)는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종교 인구를 조사했는데, 전체 종교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가톨릭은 10년 사이에 74% 증가했지만, 개신교는 14만 명 정도가 감소했습니다. 2010년 말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호감 종교를 조사했습니다. 가톨 릭 41.4%, 불교 33.5%, 그리고 개신교는 20%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한국기독교 장로회(기장)가 3년 만에 2만6천 명이 감소했다고 보고했는데, 어린이는 2년간 18%가 줄 었습니다. 우리 교단 역시 20년간 어린이들이 4만6천 명 줄어든 것으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미국의 기독교교육학자인 웨스 터호프(J. Weterhoff)가 1976년에 <Will our children have faith?>라는 저서를 발표 했습니다. 당시 주류 교단이 오늘날 우리처럼 급속히 인원 감소했는데, 그런 현실을 걱정 한 저서였습니다. 우리의 미래 역시 그런 걱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해답은 어디 에 있을까요? 당연히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전개 예수님이 직접 보여준 삶의 원리를 따르면 지금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예 수님은 영적 욕구에 예민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절대 불변하는 게 있습니다. 바 42
로 영적 갈망, 갈급함입니다. 모두에게는 영적 갈망이 존재합니다. 이게 바로 사람과 동물 의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하나는 베 드로의 형제 안드레였고, 또 하나는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인물입니 다(40절).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둘을 돌아보면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38절) 이때 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중심, 영적 갈망을 이미 알고 계셨습 니다. 두 사람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만, 세례 요한의 가르침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 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본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에게 사람들 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누구냐? 그러자 요한복음 1장 23절에서 말합니다. 광야에서 외치 는 자의 소리로라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RSV; I am only someone shouting in the desert, Contemporary EV;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아무개 다) 자신은 메시지를 담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 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만 열심히 바라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님이 둘의 입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둘이 되묻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어찌 보면 동문서답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 을 다시 질문으로 받았지만, 이미 대화는 그것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해 하 던 둘은 예수님의 질문에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갈급함 을 채우고 싶다는 뜻을 솔직하게 내비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풍족해도 결국은 하나님을, 예수 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과학이 발달하면, 사회가 줄곧 발전하면 기 독교가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앞으로 건강한 사 회가 되면 신경증의 일종인 종교, 즉 환상(illusion)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 지만 사회과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주장과 달리 종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 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시들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 킴블(Dan Kimball)이라는 작가가 집필한 책 제목이 They Like Jesus, But Not The Church입니 다. 그 책처럼 예수님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책이 미국에서만 6만 6천 권이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4권이 출판된 셈입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명왕성까지 탐사선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갈망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43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적 욕구, 갈망에 아주 예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 무 밑에서 묵상하고 있는 나다나엘을 유심히 관찰하셨고, 영생을 묻는 니고데모와 늦은 시 간까지 대화하셨고, 여섯이나 남편을 두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과 수가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대화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서 무엇을 구하느냐 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영적 갈망을 그리스 도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말로써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어디계 십니까? 하고 묻자 와서 보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직접 경험해보 라는 말씀입니다. 경험은 정말 중요합니다. 말로 백 번하는 것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효과 적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미국의 도넛 회사 가운데 두 곳이 아주 유명합니다. 한 곳(던킨)은 광고를 많이 해서 유명하지만, 또 다른 곳(크리스피크림)은 전혀 광고를 하지 않는데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도넛가게는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누구든지 가 게에 들어서면 도넛을 무조건 한 개씩 손에 쥐어줍니다. 네 명의 가족이 들어가도 한 개씩 골고루 나눠줍니다. 그러니까 TV에 광고하는 대신에 직접 자신들의 제품을 맛을 보게 해 서 입맛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이게 효과가 좋아서 다른 도넛회사를 압도할 정도라고 합니 다. 이게 바로 경험의 능력입니다. 배움도 그렇습니다. 배움은 말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말과 경험이 함께 결합될 때 일어나는 게 바로 배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어야 합니다. 눈으로 읽으면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언젠가 TV에서 유대랍비학교의 교육방식을 소개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학대학원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낱말 한 개를 놓고서 둘러앉아서 책상을 두드리고 목청을 높이면서 시간 가 는 줄 모르고 대화와 토론을 벌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어느 신학대학원을 가도 그런 열띤 토론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눈으로만 읽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읽고 앵무새처럼 암기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 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진짜로 먹을 때, 경험할 수 있 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예언자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일 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했습니다.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 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겔 3:1)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만 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웨슬리가 바로 그 런 사람입니다. 웨슬리가 미국 선교사로 가려고 3개월간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1735년 12 44
월 10일 승선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습니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 습니다. 하지만 대서양의 겨울 폭풍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했 지만, 함께 배를 탄 26명의 초라한 차림의 모라비안들은 달랐습니다. 저녁 때 그들과 함께 예배하다가 찬송을 부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여자와 어린 이들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웨슬리는 크게 깨달았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올 더스게잇에서의 회심 사건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눈으로 읽는 사람의 한계 입니다. 경험하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아는 것, 이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험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교회에서 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장난삼아 어느 어른이 그 성경을 구 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펼쳐보진 마세요. 왜? 그러면 하나님이 나오게 될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을 먹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초대해서 함께 지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관계를 형성하는 게 교육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식도 통로가 마련되지 않으면 전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래포(rapport)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1 세기 교사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함께 생활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교사들은 대개 한 곳에 자리 잡고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든지 제자를 찾 아가서 함께 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지내는 순간에 배움이 일어날 수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먹기를 탐하는 자 (마 11:19)입니다. 세리와 죄인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친밀감을 형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 다는 것을 알고 있었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서 어울리셨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습니다. 교 육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스스로를 개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 다. 탁월한 교육으로 훌륭한 제자를 배출한 스승들은 모두 개방적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와 플라톤이 그랬고, 70명의 제자를 훌륭하게 길러낸 공자 역시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 했습니다. 이렇게 개방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언행일치, 삶과 교훈이 일치하는 것에서 나 옵니다. 아무리 열린 자세로 살더라도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영향력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말씀 이 육신이 되어 (요 1:14) 영원한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태초부터 계셨던 말 씀이 인간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었고,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삶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정이라면 반드시 문설주 오른쪽에 부착하는 게 있 45
습니다. 메주자입니다. 앞에는 Shema(신 6:4-9, 11:13-21), 뒤에는 Shaddai( 전능한, el shaddai는 전능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메주자는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 의미는 나와 내 가족은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주자를 자신들의 신앙의 상징으 로 삼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메주자로 삼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중세교회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이 어거스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암부로시우스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했던 어 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암브로시우스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7장 6절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 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 은 것으로 아니할찌라 육신의 모습대로 살지 않겠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고, 그대로 실천 했습니다. 언젠가 데살로니가에서 소요가 일어나자 로마황제가 유혈 진압을 했습니다. 황 제가 예배하러 교회에 오자 암브로시우스가 문을 막아선 채 피를 흘린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냐고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황제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사실, 그는 사형감이 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고 찔려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8개월간 꼼 짝하지 않다가 결국 회개하고 암브로시우스에게 가서 굴복했습니다. 이런 암브로시우스를 보고 어거스틴이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다. 누군가 내 생각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교훈을 삼더라도 내 것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촛불에서 빛을 받아들여 자기 초를 밝힌다 해도 내 촛불이 어두워지는 게 아니다. 예수님 처럼 우리가 부지런히 삶을 나눠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말 요즘을 위기라고 부릅니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미래를 불안해합 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성경에, 예수님의 교훈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 람들의 영적 욕구에 예민해지고, 진리를 경험하게 하고, 그리고 삶을 함께 나누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STU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