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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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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2 1. 자연 지리적 환경 2 2. 고고 역사적 환경 9 Ⅲ. 조사내용 31 1. 조사지역 일대의 문화재 현황 31 2. 조사지역 일대의 민속 지명분야 39 3. 조사지역 일대의 고고 역사학적 분야 41 (1) 조사방법 41 (2) 조사지역의 현황 및 변화상 41 (3) 조사내용 46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48 1. 종합고찰 48 2. 조사단 의견 49 도 면 목 차 도면 1 조사지역 일대의 지질도(S=1:25,000) 2 도면 2 조사지역 일대의 지형분포도 (S=1:10,000) 7 도면 3 조사지역 일대의 토양모재도 (S=1:10,000) 7 도면 4 조사지역 일대의 심토의 주토색도 (S=1:10,000) 8 도면 5 조사지역 일대의 표토의 토성도 (S=1:10,000) 8 도면 6 조사지역 일대의 퇴적양식도 (S=1:10,000) 9 도면 7 부여일원의 고지도( 左 -지승, 右 -해동지도) 26 도면 8 조사지역 위치도 및 주변유적현황도 (S=1:25,000) 29 도면 9 조사지역 일대의 1910년대 지형상황 (1917년 제작, S=1:25,000) 42 도면 10 조사지역 일대의 2010년대 지형상황 (2014년 제작, S=1:10,000) 45 도면 11 조사지역 세부지형도 (S=1:3,000) 47 표 목 차 표 1 조사지역 주변유적 및 문화재 목록 30 표 2 조사결과 및 조사단의견 요약표 48

사 진 목 차 사진 1 조사지역 일대의 1940년대 지형상황 (1948년 촬영, S=1:10,000) 42 사진 2 조사지역 일대의 1960년대 지형상황 (1966년 촬영, S=1:10,000) 43 사진 3 조사지역 일대의 1970년대 지형상황 (1978년 촬영, S=1:10,000) 43 사진 4 조사지역 일대의 1980년대 지형상황 (1984년 촬영, S=1:10,000) 44 사진 5 조사지역 일대의 1990년대 지형상황 (1996년 촬영, S=1:10,000) 44 사진 6 조사지역 일대의 2000년대 지형상황 (2008년 촬영, S=1:10,000) 45 사진 7 조사지역 원경 (남동쪽에서) 51 사진 8 조사지역 전경 (남동쪽에서) 51 사진 9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사면부 전경 (남서쪽에서) 52 사진 10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북동쪽 사면부 근경1 (남동쪽에서) 52 사진 11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북동쪽 사면부 근경2 (남동쪽에서) 53 사진 12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사면부 근경1 (동쪽에서) 53 사진 13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사면부 근경2 (남서쪽에서) 54 사진 14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사면부 내 경작지 전경 (동쪽에서) 54 사진 15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경계면 부근 임도 절개면 전경1 (남서쪽에서) 55 사진 16 조사지역 서쪽 구릉지 남쪽 경계면 부근 임도 절개면 전경2 (남동쪽에서) 55 사진 17 조사지역 골짜기 전경1 (남쪽에서) 56 사진 18 조사지역 골짜기 전경2 (남쪽에서) 56 사진 19 조사지역 동쪽 구릉지 남동쪽 사면부 근경 (서쪽에서) 57 사진 20 조사지역 동쪽 구릉지 남쪽 사면부 근경 (남쪽에서) 57 사진 21 조사지역 동쪽 구릉지 동쪽 경계면 인근 임도 절개면 근경1 (남서쪽에서) 58 사진 22 조사지역 동쪽 구릉지 동쪽 경계면 인근 임도 절개면 근경2 (남동쪽에서) 58 사진 23 조사지역 동쪽 구릉지 노두 노출 근경 (남쪽에서) 59 사진 24 부여 상천리 아래삽티 유물산포지 (남동쪽에서) 59 사진 25 부여 상천리 토동유물산포지 (남쪽에서) 59 사진 26 부여 홍산 상천리 마애불입상 (남쪽에서) 59 사진 27 부여 상천리 와천고분군1 (남쪽에서) 59 사진 28 부여 토정리 갈은내 고분군 (남쪽에서) 60 사진 29 부여 홍산향교 (남쪽에서) 60 사진 30 부여 청일사 (남서쪽에서) 60 사진 31 부여 가교비 (남서쪽에서) 60 사진 32 부여 토정리 산성, 토정리 여단 석관묘 (동쪽에서) 60 사진 33 부여 북촌리 산성 (남쪽에서) 60 사진 34 부여 태봉산성 (남서쪽에서) 60

Ⅰ. 조사개요 가. 조 사 명 : 부여 상천리 산70-1번지 일원 태양광발전소 신축부지내 매장문화재 지표 조사 나. 조사경위 이번조사는 (주)티에스에너지에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일원에 건립예정인 태양광 발 전소부지 부지에 대한 매장문화재 지표조사이다. 금번 조사는 조사면적이 30,000m2 이하 인 관계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대한 법률 시행령 제5조에 따른 국비지원 지표 조사에 해당한다. 이에 (주)티에스에너지는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에 국비지원을 요청하 였으며, 이후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 본 연구원과 협의를 거쳐 2015년 6월 23일에 계 약을 체결하였다. 조사는 2015년 6월 24일부터 6월 29일까지 6일간의 일정으로 지표조 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70-1번지 일원 29,880 m2를 대상으로 한다. 금번 지표조사의 목적은 사업 구간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를 통하여 사업 시행 전 문화재의 존재여부, 특히 매장문화재의 잔존여부를 파악하여 향후 발굴조사 에 대비한 기조자료를 확보하여 개발과 문화재 보존을 조화롭게 하는데 있다. 다. 조사지역 및 범위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70-1번지 일원 면적 : 29,880m2 라. 조사기간 : 2015. 6. 24(수)~2015. 6. 29(월)(총 6일간, 현장조사 1일) 마. 조사단 구성 조 사 단 장 : 박 영 복(충청문화재연구원 원장) 책임조사원 : 최 봉 균(충청문화재연구원 조사1팀장, 선임조사연구원) 조 사 원 : 천 승 현(충청문화재연구원 선임조사연구원) 준 조 사 원 : 이 상 직(충청문화재연구원 조사원) 바. 조사의뢰기관 : (주)티에스에너지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1. 자연ㆍ지리적 환경 1)부여지역의 자연 지리적 환경 1) 조사대상지역이 위치한 부여군은 충청남도의 남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중 서부 지역에 해당한다. 행정구역상 동쪽으로는 논산, 서쪽으로는 보령 서천, 남쪽으로는 전 북 익산, 북쪽으로는 공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질은 크게 선캄브리아기,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 그리고 신생대 지질로 구분이 된다. 선캄브리아기에는 운모편암과 편마암이 주 지질을 이루고 쥐라기에는 남포층군과 화강암류 가, 백악기에는 공주층군이 주 지질을 이루며 상호간에 부정합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신 생대에는 제4기 충적층이 저지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선캄브리아기의 운모편암은 북서부인 外 山 恩 山, 남동부인 石 城 일원에 분포하며 주로 흑 운모가 많은 흑운모편암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풍화가 심해 적갈색 토양으로 변해 있는 상 황이다. 편마암은 주로 중앙부에 넓게 분포하며, 흑운모 등의 유색광물대에 의한 뚜렷한 편 마구조를 보이는 화강편마암이고 일부 호상편마암이 분포한다. 쥐라기의 남포층군은 선캄 도면 1 조사지역 일대의 지질도(S=1:50,000) 1) 1 夫 餘 郡 誌 編 纂 委 員 會, 2003, 夫 餘 郡 誌 제1권- 夫 餘 의 地 理. 2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文 化 遺 蹟 分 布 地 圖 - 夫 餘 郡 篇.

브리아기의 운모편암 및 편마암 위에 부정합으로 형성되어 있으면서 역암, 사암 그리고 셰 일의 호층대로 구성되며, 북서부 外 山 일원에도 일부 분포한다. 남포층군에는 석탄층이 협 재하여 화석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화강암류는 주로 중부지역에서 오래된 지질들을 관입하 면서 형성되어 있다. 이후 백악기의 퇴적암인 공주층군이 동남부에서 선캄브리아기의 편암 및 편마암과 쥐라기의 화강암류 위에 부정합으로 퇴적되어 있다. 그 후 오랜 침식이 있었고 위에 신생대 제4기의 충적층이 형성되었다. 지질 구조 중 주요 지형의 영향을 미치는 남포 층군과 화강암류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포층군은 하부로부터 역암 위주의 월명산층, 아미산층, 조계리층, 백운사층, 성주리층으로 구분되며, 이 중 아미산층에는 석탄 층이 개입되어 있다. 주로 부여 북서부지역에 분포하며 단층 등에 의해 복잡한 지질구조를 보이고 선캄브리아기의 운모편암 및 편마암과 부정합을 이룬다. 화강암류는 대보화강암이 라고도 불리고 주로 흑운모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공주층군은 부여 북동부 지역에 분 포하는데, 금강변을 따라 북동-남서방향으로 발달되어 있으면서 주로 적색의 역암, 사암, 셰일로 구성된 퇴적암층이다. 이러한 지질계통과 각론을 바탕으로 한 부여군의 전반적인 지질 변화상을 보면 선캄브리 아기 시생대에 충남지역은 얕은 바다였다고 추정되며, 이곳에 니질 및 사질 퇴적물이 계속 두껍게 퇴적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선캄브리아기 원생대에 들어와 화강편마암의 근원이 되는 화강암이 관입하였고 큰 지각변동으로 인해 이로 인해 퇴적암과 화강암의 변성작용이 일어나 편암, 편마암 및 화강편마암 등의 변성암이 형성되면서 습곡을 형성하였다. 쥐라기 에 들어와 도처에 생긴 얕은 호수에 남포층군이 형성되었고 다시 대보조산운동으로 인해 변 동과 변성작용을 받으면서, 대보화강암이 관입되었다. 백악기에 들어와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단층작용이 발생하여 현 지형에 가깝게 변화되 었으며 신생대 제4기 무렵에 들어와 낮은 지역을 따라 넓게 충적층이 형성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지질적 기반을 둔 지형 및 지세는 해발고도 50m, 100m, 200m, 300m를 기준으 로 구분을 할 수 있는데, 크게 청양 보령과 접하는 북쪽과 서쪽은 300m 이상의 높은 산지, 玉 山 忠 化 南 林 泉 場 岩 世 道 面 으로 연결되는 남부 일원과 石 城 草 村 面 의 동부 일원은 50~100m 정도의 낮은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북쪽과 서쪽의 산지라 하더라도 300m 이상의 산지는 星 台 山 (631m), 文 奉 山 (640m), 萬 壽 山 (432.2m), 峨 嵋 山 (581.9m), 月 明 山 (544m), 玉 女 峰 (367.9m)으로 이어지는 부여와 보령의 경계를 이루게 되는 차령산 지 주능선과 그 안쪽의 일부 산지만 해당된다. 즉, 차령산맥에 의해 형성된 주요 산지를 제 외하면 대부분 50~100m 이하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충적지대를 합할 경우 50m 이 하의 저평한 지역이 거의 전 지역을 이룬다 할 수 있다. 지질과 산지 분포상황에 따른 부여의 전반적인 地 形 은 대체로 서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은 西 北 高 東 南 底 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관내의 서쪽과 북쪽이 차령산맥 의 말단부에 해당되며, 남쪽과 동쪽은 금강유역의 충적평야와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 따라 크게 1 西 北 部 山 地, 2 中 央 部 低 地 帶, 3 東 南 部 丘 陵 地, 4 南 東 部 低 地 帶 로 구분할 수 있다.

서북부 산지지역은 차령산맥과 그 말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外 山 內 山 鴻 山 玉 山 恩 山 面 일원이 전체 혹은 일부 포함되고 있으며, 부여 지역 내에서 가장 지형이 험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 청양지역에서 칠갑산, 성태산 등의 높은 산을 이루면서 내려온 차령산맥은 萬 壽 山 (432.2m), 峨 嵋 山 (581.9m), 月 明 山 (544m) 등 대체로 해발고도 약 4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산지 주변으로는 좁은 곡저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어 각력질의 사면퇴적물과 혼합되어 있어 경작지를 이루는 경우에도 비옥 한 토양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이다. 주로 중생대 쥐라기의 남포층군에 속하는 퇴적암류로 구성된 지역으로서, 석탄 매장이 많아 탄광개발이 이루어졌으며, 하천 연변을 따라 탄광촌 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중앙부 저지대는 부여읍 서쪽 금강 대안의 구룡평야 지대와 금강연 안인 정동펄, 저석펄, 대왕펄 등의 지역으로 부여 일원에서 가장 넓은 충적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錦 江 川 (지천), 恩 山 川, 九 龍 川, 金 川, 石 城 川 등의 주요 하천이 흐르고 있 다. 주요 하천의 분포에 따라 형성된 충적지대는 대부분 범람원으로 후빙기 무렵 하천 주변 에 충적물질이 넓게 퇴적됨에 따라 형성된 지형이다. 특히 금천 주변으로는 자연제방, 배후 습지 같은 범람원 지형에서 보이는 지형들이 나타나는데, 근대까지도 넓은 배후습지와 자연 제방이 잘 남아 있었다. 동남부 구릉지대는 중앙 및 남동부 저지대 사이인 玉 山 南 場 岩 忠 化 林 川 世 道 面 및 논산의 石 城 草 村 面 일원에 위치한다. 이 구릉지대는 연속적인 양상으로 서 서남~동북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대체로 해발 100m 이하 의 낮은 저산성 구릉지대를 형 성한다.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류 분포지역에는 구릉성 저산지, 중생대 화강암류가 분포하 는 지역에는 완사면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이러한 저산성 구릉지대 주변으로는 松 菊 里 靑 銅 器 時 代 遺 蹟, 支 石 里 支 石 墓 등 주요 선사시대 유적들이 위치해 있어 선사시대부터 인간 활동을 영위하기에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동부 저지대는 남동 구릉지대의 남쪽 으로 良 化 林 泉 世 道 石 城 草 村 面 일원에 발달한 충적지대로 후빙기 海 進 시 해성퇴적층이 범람원층 하부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는 금강 하구둑으로 인해 그 영향이 적은 편이지 만 하구둑 조성 전에는 조석간만의 차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던 지역이다. 수계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모두를 포함한 총칭으로 공통배출구를 가진 유로의 집합체를 말한다. 그리고 하나의 유역분지 내에서 본류 하천과 이에 합류하는 수많은 지류들로 이루 어지는 것을 하계망 또는 水 系 網 이라고 한다. 하계망의 패턴에는 크게 수지상 패텬, 직각상 패턴, 방사상 패턴, 격자상 패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일련의 하천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하 계망의 공간구조, 즉 하계망의 패턴은 지층의 경사, 암석의 경연, 지질구조, 지반운동 등 여 러 지질적인 요인을 예민하게 반영한다. 따라서 하계망의 패턴에 관한 분석은 어떤 지역의 지형과 지질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수계는 금강을 중심으로 하여 위치하는데, 대부분 금강 수계와 연결되고 있는 반 면, 外 山 面 의 熊 川 은 萬 壽 山 과 峨 嵋 山 사이의 협곡을 지나 보령의 熊 川 川 으로 유입된다. 주 요 하천으로는 錦 江 川, 恩 山 川, 九 龍 川, 石 城 川, 寺 洞 川, 林 川 川, 院 山 川 등이 있으며, 하천 연변에는 크고 작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부여 일원 하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해의

潮 汐 差 영향을 받는다는 것으로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 밀물 때에는 부여 일원까지 강물이 역류했다. 그리고 이러한 충적지대 및 하천 주변을 따라 汎 濫 原 聚 落, 驛 院 聚 落, 市 場 村, 河 岸 聚 落, 寺 下 村, 鑛 産 村, 同 族 村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마을들 이 형성 소멸 혹은 확대되고 있다. 주요 하천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錦 江 은 공주시와 청양군을 직선으로 지나다가 부여읍에 이르러 부소산, 파진산 협곡 등의 지형 장애물에 의해 전체적으로 S자 형태를 이룬다. 이 금강주변에 접하여 정동펄이나 대왕 펄, 딴펄 등의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錦 江 川 은 청양군에서 발원하여 嵌 入 蛇 行 하면서 부 여 청양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금강천의 지류로는 長 閥 川 이 있다. 恩 山 川 은 은산면의 차령 산지에서 발원하여 규암을 거쳐 금강에 합류하며, 주변에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지류로는 日 光 川 과 合 首 川 이 있다. 金 川 은 옥산면의 차령산지에서 발원하여 구룡평야 지대를 관통한 후 금강으로 유입된다. 금천의 가장 큰 지류로는 九 龍 川 이 있는데, 옥산 저수 지 상류는 加 川 이라고도 부른다. 금천이 흐르는 구룡평야는 거대한 배후습지지역으로서 많 은 앞서 구룡천과 함께 많은 지류들이 분포해 있다. 즉, 新 安 川, 天 寶 川, 舟 亭 川, 鴻 山 川, 校 院 川, 馬 井 川, 元 門 川 등이 주요 지류를 이룬다. 石 城 川 은 공주 이인면 城 項 山 에서 발원하여 灘 川 面 을 지나 부여 草 村 石 城 面 과 논산 光 石 城 東 面 을 따라 흘러 世 道 江 景 의 중간지점에 서 금강에 합류한다. 이 석성천에 합류하는 주요 지류로는 下 觀 川 (마름내), 鷹 坪 川 ( 蓮 花 川 ), 甑 山 川 ( 正 覺 川 ), 縣 內 川 등이 있다. 寺 洞 川 은 세도면 중앙을 곡류하면서 금강에 유입되 고 林 川 川 은 임천면 중앙부를 흐르면서 금강에 유입된다. 그 중 충화면의 마가신고개에서 발원하여 복금저수지로 들어왔다가 임천면으로 들어오는 천으로서 鉢 山 川 이 지류를 형성하 고 있다. 笠 浦 川 은 임천 옥곡리에서 발원하여 양화면 입포리에서 금강에 합류하고 院 山 川 은 양화면에서 발원하여 금강에 유입되는데, 상류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원산천은 본래 서 천 한산면 원산리 앞을 지나는 하천을 부르는 것으로 한산면 余 士 村 앞에 흐를 때는 余 士 川 이라고 한다. 熊 川 川 은 외산면에서 복잡한 하천수계를 이루고 있는데, 여러 지류들을 가지 고 있으면서 지형이 험해 沙 礫 으로 이루어진 하상 역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세립물질이 상 부에 얇게 피복되어 있는 양상이다. 지류로는 福 德 川, 花 城 川, 萬 壽 川, 盤 橋 川, 葛 山 川 등이 있다. 이외 自 旺 川, 佳 增 川, 石 木 川, 旺 浦 川, 鹽 倉 川, 亭 岩 川, 北 皐 川 등 좁은 곡간지대를 지 나는 다수의 소하천들이 부여 일원에 분포한다. 부여 일원의 土 壤 은 금강유역에 위치하여 여러 토양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금강 하 구 일원은 感 潮 河 川 의 특성으로 인해 海 性 土 壤 도 분포하고 있다. 토양을 지역에 따라 구분 을 하면, 1하 해온성 충적평탄지, 2하성 충적평탄지, 3곡간충적지 및 선상지, 4홍적대 지, 5저구릉지, 6구릉지 및 산악지, 7산악지, 8곡간선상지 및 산록경사지의 8개 토양분 포군으로 구분된다. 하 해온성 충적평탄지의 토양은 금강 조류의 영향을 받는 유역에서 확 인되는데, 미사 식양질로 되어 있고 토양배수가 약간 불량하며 토심이 깊은 편이다. 이 토양 이 분포하는 곳에서는 대부분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성 충적평탄지의 토양은 금천, 구룡 천, 은산천 등 주요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하청 충적물을 중심으로 한 사양질 토양으로서, 배수가 약간 불량하고 토심이 깊은 편이며 대부분 논으로 이용된다. 곡간충적지 및 선상지

의 토양은 화강암류의 풍화물이 곡간에 충적된 곡간 충적물을 모재로 한 토양이며 사양질이 다. 배수가 약간 불량하고 토심이 깊은 편으로서 대부분 밭으로 이용된다. 홍적대지의 토양 은 미사질 식양토, 미사실 식토로 비옥도가 보통이며, 대부분 논과 밭으로 이용된다. 저구릉 지는 화강암류의 풍화 잔적물을 모재로 한 토양으로 낮은 구릉지에 분포하며 토심은 보통이 다. 비옥도가 낮고 유기물 함량이 적으며,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구릉지 및 산악지 의 토양은 화강암류 풍화물로 형성되어 있고 배수가 양호한 사양질 및 식양질토양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관목 등의 임지로 되어 있으며, 일부 밭으로 이용된다. 산악지의 토양은 화강 암, 반암, 편암계 등의 잔적층으로 사양질 및 자갈이 섞인 양질 토양으로 되어 있으며, 배수 가 매우 양호하다. 그렇지만 비옥도는 낮으며 유기물 함량이 낮아 대부분 산림지역을 이루 고 있다. 곡간선상지 및 산록경사지의 토양은 사양질 및 식양질의 토양으로 배수가 양호하 고 토심이 보통이며 곡간 충적층 및 붕적층의 자갈이 섞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평 탄하거나 약간 경사진 곡간 및 곡간선상지를 이루고 있으며, 논이나 밭으로 이용되기도 한 다. 부여의 氣 候 는 연평균 기온이 약 12.0, 1월 평균기온은 -1.0, 8월 평균기온은 25.0 정도로 기온 분포상 중간 양상을 보이며, 최근에는 여름에 몹시 덥고 겨울에는 추운 현상을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은 1,200mm 정도로 역시 전국 기준으로 할 때, 중간 정도를 차지하는 데,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에 집중되어 계절적 변동이 매우 큰 편으로 6~9월에 약 60%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7월에는 약 30%를 차지한다. 2)조사지역의 자연 지리적 환경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일원에 해당된다. 부여군의 서부 중앙에 위 치하는 상천리는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150~300m의 산악지와 저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상천리 주변으로는 월명산(해발 543m), 비홍산(해발 267m), 망신산(해발 345m) 등이 분 포하고, 하천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교원천, 북쪽에서 남쪽으로 구룡천이 흐르고 있다. 조사지역은 북쪽의 해발고도 350m의 구릉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의 남동쪽 사면부와 그 주변 밭경작지에 해당한다. 각종 토양도를 통해 조사지역 일대의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사지역은 지형분포도상 저구릉지/구릉지, 산악지, 선상지/곡간지, 산록경사지에 해 당되며, 조사지역 주변에는 저구릉지/구릉지와 산악지, 선상지/곡간지, 그리고 산록경사지와 홍적대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도면 2). 조사지역에 분포하는 토양모재를 살펴보면, 대부분 퇴적암에 해당되고 주변으로 산성암와 퇴적암, 변성암이 다수 분포한다(도면 3). 조사지역의 심토의 주토색을 살펴보면, 적색과 갈색이 분포하며 주변지역으로 적색과 갈 색, 그리고 회갈색이 확인된다(도면 4). 토양의 심토란 표토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표토를 제거한 후 가장 먼저 나타나는 토양의 색깔로 토양의 퇴적당시 자연환경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적색토는 퇴적 당시 건조한 환경 하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토양이 적색을 띠는

도면 2 조사지역 일대의 지형분포도(S=1:10,000) 도면 3 조사지역 일대의 토양모재도(S=1:10,000)

도면 4 조사지역 일대의 심토의 주토색도(S=1:10,000) 도면 5 조사지역 일대의 표토의 토성도(S=1:10,000)

도면 6 조사지역 일대의 퇴적양식도(S=1:10,000) 이유는 토양속에 존재하는 철이 산화되어 나타내는 현상이다. 갈색계는 습윤 건조한 환경하 에 퇴적된 토양이며, 대부분 밭경작지에 많이 분포하는 토양이다. 따라서 조사지역은 지형 상 곡부와 구릉지에 해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조사지역의 토양 중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표토의 토성은 모두 양토와 미사질양토가 확인 되며 주변으로 양토와 미사질양토가 분포한다. 표토의 토성은 모래, 점토, 미사 등의 함유 비율에 따라 분류되는데, 양토는 7~27%의 점토, 28~50%의 미사, 52% 이하의 모래로 구 성된 토양을 말하며 보통 구릉지 및 밭경지로 이용되는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도면 5). 조사지역의 퇴적양식은 대부분 잔적층과 충적붕적층, 붕적층에 해당되고, 주변 지역도 마 찬가지로 잔적층과 충적붕적층, 붕적층, 충적층이 분포한다. 잔적층은 모암이 풍화되어 제 자리에 남아서 형성된 모재층이 다시 풍화작용과 더불어 토양생성작용을 받아 생긴 토양을 의미한다. 지표에 자란 식생이 퇴적되어 이룬 유기질토 또한 잔적토의 일종이나, 주로 모암 이 풍화되어 모재가 되고 다시 모재가 토양생성 작용을 거쳐 이룬 토양을 말한다(도면 6). 2. 고고ㆍ역사적 환경 부여지역은 최근 많은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발굴조사가 꾸준히 증가하여 최근 많은 고 고학적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부여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지는 문헌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조사 례가 드물었을 때에는 소상히 알기가 어려웠지만, 근현대 이후 각종 개발사업과 지역발전에

따른 고고학적 조사가 현저하게 진행되면서 많은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부여지역은 금강 본류 및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들이 위치해 있어 선사시대 이래로 다양한 자원을 활용 하기에 충분한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정착하 거나 빈번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여지역에서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발굴 사례가 많지 않으나, 향후의 지표 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에 대한 조사사례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군 외 산면 盤 橋 里 에서 구석기시대 긁개가 수습되었으며, 홍산면 坐 鴻 里 에서는 마모가 심해 날의 형태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석영암제의 양날찍개가 1점 수습된 바 있다. 定 林 寺 址 蓮 池 와 雙 北 里 窯 址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상부에서 흘러들어온 양날찍개와 다면체석기, 몸돌 등의 석 영제 석기들이 확인되었고, 부여향교 뒷산에서는 새기개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부 여 규암우회도로 건설공사 구간 중 규암면 羅 福 里 일대에서 석영제 몸돌과 격지 등이 출토 되고 있어 향후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2). 이렇게 발견된 구석기유물은 수 점에 불과하며, 현재까지 자세한 양상이 확인되지 않아 시기 등을 명확하 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부여지역 구석기시대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이해된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기후는 현재보다 온난하여 활엽수림의 분포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약 1만년 전후 빙하기가 물러가고 현재와 비슷한 기후가 형성되면서 상록침엽수림 이나 낙엽활엽수림의 혼합림이 한반도 전역을 덮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는 여러 화분분석 결과를 통해 10,000 ~ 6,700년경에는 고온다습한 기후로 참나무류가 무성하고 4,500년경 까지는 기온이 더더욱 올라가면서 건조해지자 소나무류가 급증하게 되었다 3). 이후 BP 3,000(약 1,000년경)까지는 가장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로 침엽수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4). 한편, 경기도 일산지역에 대한 화분분석 결과, 중서부지역에서는 약 BP 6,000 ~ 2,500 사이에 오리나무속이 가장 우세하며, 그 다음으로 참나무가 우점종으로 확인되었 다 5). 이러한 기후변화에 따른 주변 식생의 변화는 생업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신 석기시대 양양 오산리 6), 지경리나 서울 암사동 7), 미사리유적 등에서 보이는 도토리와 경남 합천 봉계리유적 8) 에서의 도토리, 가래, 살구 등의 씨앗류 출토를 감안할 때, 임산자원 채집 을 통한 식량자원 획득이 생업경제의 일부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전기 말~중기 무렵부터는 위 기후변화에 따라 건조한 기후 속에서 활 2) 1(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2국립공주박물관 2005, 금강의 구석기문화 신축개관 1주년기념 특별전 도록. 3) 安 田 喜 憲 외, 1980, 韓 國 における 環 境 變 遷 史 と 農 耕 の 起 源, 韓 國 における 環 境 變 遷 史. 4) 曺 華 龍, 1979, 韓 國 東 海 岸 における 後 氷 期 花 盆 分 析 的 硏 究, 東 北 地 理 第 31 卷 1 號, 東 北 地 理 學 會. 5) 1최기룡, 1992, 꽃가루 분석, 자연과 예사람의 삶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1. 2최기룡, 2002, 韓 半 島 後 氷 期 의 植 生 및 氣 候 變 遷 史 韓 國 新 石 器 時 代 의 環 境 과 生 業,동국대 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6) 1서울대학교박물관, 1984, 오산리유적Ⅰ. 2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오산리유적Ⅱ. 3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오산리유적Ⅲ. 7) 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암사동. 8) 李 東 注, 1992, 陜 川 鳳 溪 里 出 土 의 食 用 食 物 遺 體, 考 古 學 38.

엽수림의 축소로 인해 임산자원 획득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 로서 초기 농경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최초로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 농경활동이 이루어 졌음이 확인된 유적은 다소 늦은 시기이기는 하나, 신석기 후기의 평남 궁산리유적과 황해 도 봉산 지탑리유적을 통해서다 9). 이러한 기후 변화는 식물생태의 변천을 가져오고 또 다 른 한편으로는 지형의 변화도 가져왔다. 부여지역에서 신석기시대 관련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된 예는 많지 않은 편이지만, 신석기시 대인들이 선호하였던 지형을 띠고 있어 유적이 입지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 라서 향후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많은 유적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부여지역 에서 신석기인들이 생활하였던 흔적은 규암면 나복리와 은산면 은산리에서 확인되었다. 羅 福 里 遺 蹟 10)은 현재는 멸실되어 원래 위치조차 알 수 없으나, 이미 일제강점기에 빗살무늬 토기편이 수습된 바 있으며, 恩 山 里 遺 物 散 布 地 에서는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과 사면일대에 서 빗살무늬토기편과 무문토기편, 석검편 등이 함께 수습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이 지속적으로 점유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주석 등을 합금한 주조술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청동기를 제작사용한 시기를 말하며, 청동기라는 물질문화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킨 교역 분업 畜 力 에 의한 농경 도시 문명 국가의 발생 세습적인 신분제 문자의 사용 및 정복전쟁 등이 나타나는 문화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느 지역이든 동일 기준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복합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하여 각 지역의 특징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하게 되 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대비되는 무문토기의 출현, 형태상 정제된 마제석기 의 사용, 농경도구와 농경지로 확인되는 농경의 보편화, 정형화된 지석묘 등 새로운 무덤의 출현, 그리고 이와 더불어 청동기의 제작사용 등을 그 시기의 특징으로 보고 있다. 농경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생산경제 단계로 발전한 청동기시대에는 사냥이나 어로 등에 의존하는 채집경제 단계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독립된 하나의 마을 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의 취락은 대개 강가나 하천 주변의 농경지나 평탄하고 나지막한 구릉에 주로 있으며, 주변이 잘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청동기시대인들의 생활근거지는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앞둔 구릉지 일원으로서 식생활이 농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농경의 확산에 따라 한 장소에서 오랫동 안 정주하면서 취락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구 증가, 생활 영역의 확대와 개념이 성립되게 되었다. 유적 수에서도 신석기시대에 비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인구 증 가와 농경이 확대됨에 따라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집단간 혹은 개인 간 불균등과 긴장감이 생기게 되었다. 보령 오천면 校 成 里 에서 발견된 주거지를 대표로 하 여 소위 高 地 性 聚 落 이라 부르고 있는데, 바로 집단 간 경쟁과 긴장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고고학적 사례로 꼽힌다. 한편, 청동기시대의 주거양상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여러 유적조사가 늘어나면서 점차 밝 9)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1, 북한문화유적발굴개보. 10) 金 元 龍, 1961, 扶 餘 羅 福 里 의 櫛 文 土 器, 考 古 美 術.

혀지고 있는데, 적어도 청동기시대 및 이후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와 뚜렷하게 정착했을 것으 로 보이는 흔적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부여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그 조사사례도 많 은 편이며,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은 부여 合 井 里 11), 佳 中 里, 甑 山 里 12),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13), 羅 福 里 14), 松 菊 里, 石 隅 里 15)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松 菊 里 遺 蹟 16)은 한국 청동기 사회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전기의 세장방형주거 지와 구별되는 원형주거지와 외반구연의 호형토기, 삼각형석도 등과 독특한 문화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적 양상은 시 공간을 달리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들과 뚜렷하 게 구별되어 松 菊 里 型 文 化 로 지칭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중기문화를 대표하는 대 단위 마을유적으로, 수차례의 연차조사 결과 주거지 57기, 석관묘 5기, 옹관묘 6기, 토광묘, 木 柵 과 環 濠 施 設 등의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송국리형 문화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송 국리형 주거지는 인접한 공주 산의리 태봉동 귀산리 안영리 장선리 17), 논산 원북리 마전 11)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忠 南 發 展 硏 究 院, 2003, 百 濟 歷 史 再 現 團 地 造 成 敷 地 內 扶 餘 合 井 里, 忠 淸 南 道 百 濟 文 化 圈 發 展 事 業 所. 12)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院, 2004, 夫 餘 甑 山 里 遺 蹟. 13)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14)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4, 扶 餘 羅 福 里 遺 蹟. 15) 韓 國 考 古 環 境 硏 究 所, 2011, 부여 석우리 절골 나복리 건지말유적. 16) 1 金 永 培 安 承 周, 1975, 扶 餘 松 菊 里 遼 寧 式 銅 檢 出 土 石 棺 墓, 百 濟 文 化 第 7 8 合 輯, 公 州 師 範 大 學 附 設 百 濟 文 化 硏 究 所. 2 姜 仁 求 外, 1979, 松 菊 里 Ⅰ, 國 立 中 央 博 物 館. 3 池 建 吉 外, 1986, 松 菊 里 Ⅱ, 國 立 中 央 博 物 館. 4 安 承 模 外, 1987, 松 菊 里 Ⅲ, 國 立 中 央 博 物 館. 5 權 五 榮, 1991, 松 菊 里 Ⅳ, 國 立 中 央 博 物 館. 6 金 吉 植, 1993, 松 菊 里 Ⅴ- 木 柵 (1)-, 國 立 公 州 博 物 館. 7 金 吉 植, 1998, 扶 餘 松 菊 里 無 文 土 器 時 代 墓, 考 古 學 誌 第 9 輯,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所. 8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내용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였으며(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 2012, 부여 송국리유적 제 15차 발굴조사 약보고서 ), 송국리 유적에 대한 조사연혁은 다음과 같다. 조사순서 조사기관 조사내용 1974년 석관묘 수습조사 (요령식동검, 동착, 옥, 석검, 석촉) 1975~1978년 (1~4차) 국립중앙박물관 집자리 19기, 옹관묘 4기 1985~1987년 (5~7차) 국립중앙박물관 집자리 14기, 부속유기 1기 등 1991~1993년 (8~10차) 국립공주박물관 목책, 집자리 23기, 대지조성면 등 1996년 (11차) 국립부여박물관 목책, 집자리 7기, 백제 토광묘 등 2008년 (12차) 한국전통문화학교 청동기시대 대형굴립주건물지 2기 및 울책시설 5기, 굴립주건물지 5기,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주거지 13기, 토광묘 1기, 백제 토기가마 2기 등 2009년 (13차) 한국전통문화학교 청동기시대 주거지 8기, 수혈유구 6기, 원삼국 주구 1기, 백제 토기가마 한국전통문화연구소 1기 등 청동기시대 주거지 27기, 수혈 22기, 목주열 4조, 울책시설 4기, 2010~2011년 한국전통문화학교 지상건물지(주공군) 5기, 원삼국~삼국시대(백제) 추정 분구묘(주구) 2기, (14차) 고고학연구소 삼국시대(백제) 옹관묘 2기 등 청동기시대 주거지 3기, 수혈 19기, 목주열 7조, 주공열 2조, 울책시설 2012년 (15차)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 6기, 주공군 3기, 원삼국~삼국시대(백제) 추정 분구묘(주구) 2기, 토광묘 1기, 고려~조선시대 토광묘 3기, 시대미상 구 1기, 토광묘 2기 등

리 18), 대전 구성동 19), 보령 진죽리 관창리 20), 서산 휴암리, 서천 오석리 21), 천안 남관 리 22), 청원 내수리 23) 등 충청권 전역에 고루 분포해 있는 양상이다. 羅 福 里 遺 蹟 에서는 주거지 22기, 석관묘, 석개토광묘등의 분묘유구 11기 및 저장공 등이 조사되었다. 정상부에는 주로 원형주거지가 있고 사면에는 원형계와 방형계가 혼재되어 있 는데, 16기에서 확인된 타원형 구덩이와 주공의 배치는 모두 4개 유형으로 구분이 된다. 즉, Ⅰ형은 타원형 구덩이 내부 양단에 주공이 있는 형태, Ⅱ형은 Ⅰ형을 중심으로 4개의 주공 이 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 Ⅲ형은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 4개의 주공이 있는 형태, 그 리고 Ⅳ형은 2~3개의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 각각 2개의 주공이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양 상은 Ⅰ Ⅱ형이 가장 일반적인 양상으로 Ⅲ Ⅳ형은 주거지의 공간확장이나 개보수 등의 주 거 수정행위와 관련되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주요 유물로는 구순각목문의 토기를 포함 한 송국리형토기, 마연토기, 원형점토대토기, 석도, 석부 등이 있다. 주거지군이 위치한 능선 의 남쪽으로 따라서는 공간이 분리되어 석관묘, 석개토광묘, 토광묘 등이 조성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분묘로는 석관묘와 지석묘, 옹관묘 등이 다수 확인되었다. 석관묘는 송국리 를 비롯하여 蓮 花 里 24), 中 井 里 堂 山 佳 塔 里, 佳 增 里 25), 井 洞 里 26)에서 확인되었으며, 내부에 서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銅 鑿, 마제석검, 석촉, 관옥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청동 기 제작의 기술수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최근 조사된 大 陽 里 遺 蹟 에서는 석관묘 2기가 조사되었는데 27),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송국리형 석관묘 형태로서 대체로 판석형 할석재를 여러 매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천장의 덮개돌 역시 판석재를 사용하였고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내부에서 마제석 검 1점이 출토되었다. 석우리 절골유적에서는 모두 15기의 분묘유구가 조사되었는데, 지석묘 3기, 석관묘 12기 가 확인되었다. 석관묘는 여러 매의 판석재를 세워 벽을 구축하였고 내부에서 일단병식 석 검이 의도적으로 파손된 채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破 劍 은 다른 지역에서도 다수 발견되어 청동기시대 부장 풍습으로 추정된다 28). 이외 지석묘는 山 直 里 29), 街 谷 里 30), 楮 石 里 31), 石 17) 1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1999, 公 州 山 儀 里 遺 蹟. 2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公 州 胎 封 洞 遺 蹟. 3( 財 ) 忠 淸 埋 藏 文 化 財 硏 究 院, 2000, 公 州 貴 山 里 遺 蹟. 4( 財 ) 忠 淸 埋 藏 文 化 財 硏 究 院, 2000, 公 州 安 永 里 遺 蹟. 5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安 永 里 遺 蹟. 6 忠 南 發 展 硏 究 院, 2003, 公 州 長 善 里 土 室 遺 蹟. 18) 1( 財 ) 中 央 文 化 財 硏 究 院, 2001, 論 山 院 北 里 遺 蹟. 2 高 麗 大 學 校 埋 藏 文 化 財 硏 究 所, 2002, 麻 田 里 遺 蹟. 19) 韓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7, 大 田 九 城 洞 遺 蹟. 20) 1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保 寧 眞 竹 里 遺 蹟 現 場 說 明 會 資 料. 2 高 麗 大 學 校 埋 藏 文 化 財 硏 究 所, 2001, 寬 倉 里 遺 蹟. 21)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1996, 烏 奭 里 遺 蹟. 22)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1995, 南 館 里 遺 蹟. 23) 國 立 文 化 財 硏 究 所, 1995, 淸 原 內 秀 里 遺 蹟. 24) 金 載 元, 1964, 夫 餘 慶 州 燕 岐 出 土 銅 製 遺 物, 震 檀 學 報 25 26, 震 檀 學 會. 25) 百 濟 文 化 開 發 硏 究 院, 1989, 忠 南 地 域 의 文 化 遺 蹟 - 扶 餘 郡 篇. 26)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27)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8, 扶 餘 大 陽 里 遺 蹟.

城 里, 羅 福 里, 太 陽 里, 溫 蟹 里, 支 石 里 玄 眉 里, 敬 屯 里 등에서 확인되는데, 충남지역에서는 비교적 넓게 다수가 분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벼농사 등 본격적인 농경활동이 전개되는데, 九 鳳 蘆 花 里 遺 蹟 에서는 기원전 100~ 900년의 탄소연대측정값을 보이는 청동기시대 水 田 이 조사된 예가 있다 32). 상면에서는 반월형석도가 출토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복리 통실유적에서는 경작지 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灌 漑 施 設 로 보이는 수로유구가 부분적으로 조사되었던 바 있다 33). 이외 窺 岩 里 遺 蹟 34)에서 구상유구가 조사되었고 羅 福 里 통실유적 石 隅 里 遺 蹟 35), 井 洞 里 遺 蹟 36)에서는 옹관묘가 조사되기도 했다. 최근까지 알려진 자료로 보는 한 松 菊 里 型 文 化 로 대표되는 이 시기는 그 이전에 비해 집약 도가 높은 농경문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으로 사회발전이 가속화되었을 것으로 이 해되고 있으며, 대규모 취락 주위에 조성된 목책과 환호, 분묘유적에서의 출토유물,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지석묘 등을 고려하면 앞서 본 유적과 유구들은 당시의 사회 분화 및 경제 문 화상을 보다 분명하게 반영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37). 또한 이러한 청동기 중기 및 후기 사회의 발전은 銅 鐸, 동검, 동경 등의 청동기와 철부 및 鐵 鑿 등의 철기유물이 공반 출토된 규암면 合 松 里 遺 蹟 에서 보이듯이 초기철기시대로 교체되는 시기까지 단절 없이 지속되었으 며, 이를 기층문화로 하여 원삼국시대의 문화가 성립 영위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서 元 門 里 遺 蹟 에서 토광묘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38). 청동기시대에 뒤이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충청권에서는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아 산시 서쪽에 인접한 당진 素 素 里 遺 蹟 39)을 들 수 있다. 소소리유적은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것으로 유구의 내용과 출토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료가 부족한 이 시기의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고된 유물로는 세형동검 1점, 동제검파 두식 1점, 精 文 鏡 2점, 鐵 斧 1점, 鐵 鑿 2점, 유리 관옥 2점, 석촉 1점, 砥 石 1점, 흑색토기 1점 등으로 이들은 분묘 1기로부터 출토된 일괄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각종 무기 류를 포함한 위세품들이 다량으로 한 기의 무덤에 부장되는 양상은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 리, 아산 남성리유적 등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으로 청동기시대 후기 사회가 이미 상당한 권력을 소지한 유력자에 의해 통솔되는 권역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을 시사한다 40). 28) 河 仁 秀, 2000, 남강유역 무문토기시대의 묘제, 진주 남강유적과 고대 일본, 인제대학교 가야문 화연구소. 29) 金 武 龍, 1962, 夫 餘 郡 草 村 面 의 支 石 墓, 考 古 美 術 3-9, 國 立 博 物 館. 30) 李 殷 昌, 1968, 夫 餘 恩 山 佳 谷 里 兄 弟 支 石 墓 調 査, 考 古 美 術 9-2, 考 古 美 術 同 人 會. 31)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扶 餘 의 文 化 遺 産, 忠 淸 南 道. 32)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4, 扶 餘 九 鳳 蘆 花 里 遺 蹟. 33)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34) 大 田 保 健 大 學 博 物 館, 2004, 扶 餘 窺 岩 里 遺 蹟. 35)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36)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37) 朴 淳 發, 1995, 甲 川 의 古 代 文 化, 甲 川 의 文 化 遺 蹟, 大 田 西 歐 文 化 院. 38)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39) 李 健 茂, 1991, 唐 津 素 素 里 遺 蹟 出 土 一 括 遺 物, 考 古 學 志 第 3 輯,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所.

원삼국시대 三 韓 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되고 자세한 것은 3세기 중엽 중국 晉 代 陳 壽 가 편찬한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이다. 기록에 의하면 馬 韓 에는 54개국이 있었는데, 마한의 國 들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분포하였다. 각 소국들은 인구가 평균 1~2만명 정도였으나 큰 것은 5만여 명에 이르렀고, 작은 것은 3천여 명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충청권에는 目 支 國 을 위시하여 臣 雲 新 國 冉 路 國 致 利 鞠 國 臣 蘇 塗 國 支 侵 國 監 奚 卑 離 國 狗 盧 國 萬 盧 國 卑 彌 國 兒 林 國 臣 蔥 國 不 雲 國 臣 雲 新 國 등이 위치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 54개 소국 중 부여일원이 어느 소국에 해당하였는지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 나, 古 蒲 國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翰 苑 에는 楚 山 을 없애고 성곽을 만들었 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마한 54국 중 楚 山 國 이 현 부여 일원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보기 도 한다. 마한 소국들은 한강유역에서 일어난 백제국의 발전과 세력확장으로 그 지배력이 점차 위축되어 약화되다가, 4세기경 백제 근초고왕대에 백제에 편입되어 갔다. 그렇지만 아직 이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가 미진한 상황이어서 앞으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소국과 같은 정치집단들이 널리 형성된 것은 철기문화의 보급이 본격 화되면서이다.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위만조선의 건국(기원전 180~190년 경)과 멸망, 기원전 108년 漢 郡 縣 의 설치 등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유이민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중국 군현세력과의 직 간접 접촉을 통해 정치 문화적으로 많 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철기제작의 광범위한 보급, 그리고 외래 물품의 유입은 토착세력의 물자교역과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집단들이 통합되어 소국이라는 보다 큰 정치조직체로 성장 대두하게 되었다. 또한 우세한 소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를 구성하였는데, 3세기 전반경 마한지역 에서는 두 개의 주요 소국연맹체가 있었다. 하나는 伯 濟 國 을 맹주로 하였고, 다른 하나는 目 支 國 을 맹주로 삼았다. 전자의 활동무대는 한강하류역과 경기북부지역이며, 후자는 충남 아 산만을 중심으로 경기 남부와 금강 이남의 소국들을 다스렸다가, 이후 백제국의 팽창으로 목지국의 통합기반은 해체되었고 이후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마한소국 연맹체가 결성되어 상당기간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앞서와 같이 마한 소국들 의 위치비정에 대해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청동기시대 유적 과 함께 원삼국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생활이 영위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지역이 원삼국시대에도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원삼국시대의 유적은 조사예가 많지 않아 자세한 양상은 알 수 없으나, 그간의 각종 조사 과정에서 존재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최근에는 조사 성과로 확인되고 있다. 우선 송국리유적의 木 柵 施 設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주거지 내부에서 격자타날 된 토기편이 확인되어 원삼국시대 주거지로 추정되었으며, 구룡면 竹 橋 里, 양화면 時 音 里, 五 良 里, 足 橋 里, 장암면 元 門 里 등의 10여 개소에서 격자문과 승문이 타날된 토기편 등이 수습된 바 있어 취락이 입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부여읍 宮 南 池 에서는 유 40) 李 健 茂, 2003, 韓 國 式 銅 劍 文 化 의 硏 究 高 麗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물이 확인되었으며, 論 峙 里 에서는 祭 祀 遺 蹟 이 확인되었다. 甑 山 里 遺 蹟 에서는 원삼국시대 마 한의 묘제로 알려진 周 溝 墓 14기가 확인되었으며,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에서 최근 실시한 佳 中 里 遺 蹟 발굴조사에서 모두 7기의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모두 말 각방형을 이루며, 대부분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41).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에서는 土 壙 木 棺 墓 와 원형 수혈유구들이 조사되었고 42) 佳 塔 里 遺 蹟 에서는 토광묘와 옹관묘가 조사 되었다 43). 佳 塔 里 가탑들 遺 蹟 에서는 주거지 수혈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44).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앞으로 부여에서 원삼국시대 유적이 조사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지금까지 원삼국시대 문화상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조사의 빈도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원삼국시대 무렵인 기원전 18년 경 오늘날의 한강유역 일원에 위치해 있던 마한 54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점차 영토를 넓혀 나가다가 4세기 후반경에는 마한의 제소국들을 모두 병합하게 되었다. 이후 樂 浪 郡 과 帶 方 郡 을 몰아내고 남하해 오던 고구려와의 충돌을 이겨내며 최대 영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국가 단계로 접어드는 3세기 중후반까지 중서부지역은 마한이 확고한 정치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목지국으로 대표되고 있었다. 그래서 3세기 후반 무렵 백제 에 의해 병합되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백제의 영역화 이후에도 국지적으로 원삼국문 화가 잔존하는 면을 통해 볼 때, 초기 백제의 영역화과정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본다 45). 그리고 三 國 史 記 의 기록 중에서 온조왕 36년 湯 井 城 의 축성기사가 확인 되는데 46), 이미 기원 직후에 백제 영역에 속하였을 것으로 취신하기도 하지만, 초기 기록의 경우 후대의 기록이 소급적용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어 이후의 기록은 3세기 고이왕대 이후 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5세기 이후가 되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압박에 따라 수세 에 몰리게 되었으며, 결국 한강유역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즉, 삼국시대 충남일원은 백제 의 웅진천도 이후 위상이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남진에 따 른 군사적 대처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지방세력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47), 백제 는 남천 후 왕권강화와 더불어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웅진 도읍기 동성왕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무령왕이 대내외적 안정된 기반을 토대로 국력을 신장하였는가 하 면,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한 교섭을 통해 선진문물의 도입을 단행하였다. 당시 웅진도읍 지의 범위는 현재의 공주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공산성과 곰나루, 금학동지역과 옥룡동지역 내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 바깥 남쪽 일대로 비정하 는 견해가 있다. 이후 사비기 말기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으로 백제가 멸망의 기로에 서 있 을 때, 당군은 공주일원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다. 당에서 처음 임명한 웅진도독은 왕문 41) ( 財 ) 忠 淸 埋 藏 文 化 財 硏 究 院, 2006, 夫 餘 佳 中 里 가좌 산직리 및 恩 山 里 상월리 遺 蹟. 42)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 43)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院, 2007, 扶 餘 佳 塔 里 遺 蹟. 44) (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2, 扶 餘 佳 塔 里 가탑들 遺 蹟. 45) 成 正 鏞, 2000, 中 西 部 馬 韓 地 域 의 百 濟 領 域 化 過 程 硏 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46) 三 國 史 記 百 濟 本 紀 溫 祚 王 36 年 條. 47) 李 南 奭, 2002, 熊 津 時 代 의 百 濟 考 古 學, 서경.

도였다. 그러나 곧 병사하고 661년에 후임으로 유인궤를 파견하였다. 664년에는 다시 웅진 도독을 유인원으로 교체하였다가, 당에 억류되어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당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임명한 것도 말할 것도 없이, 백제 유민의 동요를 무 마하자는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뒤 665년 8월에 공주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 는데, 취리산에서 이루어진 백제와 신라의 회맹이 그것이다. 就 利 山 會 盟 은 당시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된 백제땅에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는 과정에서, 백제를 내세워 신라에게 화친하도록 가용하여 이루어진 동맹이다. 회맹이 있었던 취리산은 공주 농고 뒷산인 치미산으로 여겨져 왔는데, 최근에는 이 취리산이 연미산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백제 사비기에 들어오게 되면 지방제도에 있어 큰 변화가 일어나고 城 을 중심으로 한 담로제의 기본은 유지하면서 지역의 중요성별로 方 郡 城 制 를 마련하였다. 한편,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부여지역이 백제사에 등장하는 것은 熊 津 에 도읍하던 시기의 동성왕대 수렵 축성 등과 관련된 기록 48) 에서 확인되고 있으나, 진정 중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부역지역에 백제의 왕도가 설치된 이후로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는 지속되 었다. 三 國 史 記 百 濟 本 紀 에는 성왕 16년(538)에 부여지역으로 왕도를 옮기고 국호를 南 夫 餘 로 개명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49), 이전 동성왕대의 기록 등과 관련지어보면 당 시 부여지역은 所 夫 里 라는 지명 외에 泗 沘 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백 제는 22 部 의 중앙관부와 5 方 의 지방행정제도를 갖추는 등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 였으며,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불교 미술 건축 등 전반에 걸쳐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50). 부여지역은 백제가 나 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면서 당에 의해 설치된 熊 津 都 督 府 의 관할로 예속되었다. 唐 軍 이 축 출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문무왕 12년(672)에 총독부가 설치되어 泗 沘 州 혹 은 所 府 里 州 로 개편되었다가 51), 경덕왕 7년(748)에 이르러 부여군으로 재개편되면서 熊 川 州 ( 公 州 )의 관할지역으로 편제되었다. 이는 앞서 본 삼국사기 지리지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백제시대 부여지역에서는 所 夫 里 郡 과 加 林 郡 의 2개 군과 영현으로서 珍 惡 山 縣 과 大 山 縣 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에 기록되어 있다 52). 가-1 扶 餘 郡 本 百 濟 所 夫 里 郡 文 武 王 二 十 年, 置 摠 管, 景 德 王 改 名, 今 因 之, 領 縣 二, 石 山 縣, 本 百 濟 珍 惡 山 縣, 景 德 王 改 名, 今 石 城 縣. 가-2 嘉 林 郡, 本 百 濟 加 林 郡, 景 德 王 改 加 爲 嘉, 今 因 之, 領 縣 二. 翰 山 縣, 本 百 濟 大 山 縣, 48) 三 國 史 記 卷 第 26 百 濟 本 紀 第 4. 東 城 王 12 年 (490 年 ) 9 月 王 田 於 國 西 泗 沘 原. 23 年 (501 年 ) 8 月 築 加 林 城, 以 衛 士 佐 平 苩 加 鎭 之. 10 月 王 獵 於 泗 沘 東 原. 11 月 獵 於 熊 川 北 原 又 田 於 泗 沘 西 原 阻 大 雪 宿 於 馬 浦 村. 49) 三 國 史 記 卷 第 26 百 濟 本 紀 第 4 聖 王 16 年. 50) 李 基 東, 1996, 百 濟 史 硏 究, 一 潮 閣. 51) 三 國 史 記 卷 第 7 新 羅 本 紀 第 7 文 武 王 11 年 治 所 夫 里 州 以 阿 湌 王 爲 都 督. 52) 三 國 史 記 卷 第 36 雜 誌 第 5 地 理 3.

景 德 王 改 名, 今 鴻 新 縣.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편찬된 것으로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9 州 를 중심으로 각 군현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수록하면서 이전의 고지명과 연혁을 기록하였는 데, 이를 통해 백제지역의 지역적 세력범위나 세력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 사기 의 기록을 근거로 보면, 현 부여읍을 중심으로 한 부여지역이 백제시대에는 所 夫 里 郡 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대에 扶 餘 郡 으로 개명되어 고려시대까지 이 郡 名 이 그대로 이어졌으며, 현재의 임천지역은 부여군에 속하지 않고 관할지역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임천지역은 본래 백제의 加 林 郡 으로 현재의 鴻 山 지역과 舒 川 郡 의 한산지역을 속현으로 관할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이후에 부여군에 편제되었다. 이전 시기 두 지역 간의 관계는 상 호 영속적 또는 대등적인 위치에서 발전해 온 것으로 이해되며, 임천의 경계는 백제시대 이 후의 영속관계 변화와 관할지역을 검토해 보면 현재와 같이 대체로 금강을 경계로 유지되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부여지역은 삼국 중 백제에 속하며, 천도 이후에는 정치 경제 문 화의 중심지로서 더욱 발전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에 王 都 내외의 곳곳에서는 다 양한 성격의 문화유적이 형성되어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부여지역에서 현재까지 조사된 백제시대 유적은 생활유적, 분묘유적, 관방유적, 생산유적, 불교유적 등 그 성격이 다양하며, 조사례도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생활유적 중에서는 부여읍 일원에서 여러 건물지 및 주거지들이 조사되었다. 즉, 官 北 里 百 濟 遺 蹟 ( 傳 王 宮 址 ) 53), 龍 井 里 建 物 址 54), 中 井 里 建 物 址 55), 扶 蘇 山 瓦 積 基 壇 建 物 址 56), 窺 岩 里 57), 合 井 里 Ⅱ 58), 錦 城 山 瓦 積 基 壇 建 物 址 59), 雙 北 里 두시럭골 60), 羅 福 里 통실 61),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62), 井 洞 里 63), 佳 塔 里 가탑들유적 64) 등이 있다. 이 외 東 南 里 65), 舊 衙 里 66), 花 枝 山 67), 東 南 里 172-2 68) 702 69), 佳 塔 里 旺 浦 里 軍 守 里 遺 蹟 70) 등의 생활유적과 53) 1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Ⅰ), 忠 淸 南 道. 2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Ⅱ), 忠 淸 南 道.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Ⅲ- 2001~2007 年 調 査 區 域 百 濟 遺 蹟 篇. 4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9,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Ⅳ- 2008 年 度 調 査 區 域. 54) 尹 武 炳 李 康 承, 1985, 扶 餘 龍 井 里 百 濟 建 物 址 發 掘 調 査 報 告, 百 濟 硏 究 第 16 輯, 忠 南 大 百 濟 硏 究 所. 55) 忠 淸 南 道, 1996, 文 化 財 大 觀. 56) 장경호 홍성빈, 1984, 扶 蘇 山 城 內 建 物 址 發 掘 調 査 略 報 告, 文 化 財 17, 文 化 財 管 理 局. 57) 大 田 保 健 大 學 博 物 館, 2004, 扶 餘 窺 岩 里 遺 蹟. 58) 忠 南 發 展 硏 究 院, 2003, 扶 餘 合 井 里 Ⅱ. 59) 國 立 扶 餘 博 物 館, 1992, 扶 餘 錦 城 山 百 濟 瓦 積 基 壇 建 物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60)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 61)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62)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遺 蹟. 63)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64) (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2, 扶 餘 佳 塔 里 가탑들 遺 蹟. 65) 1 朝 鮮 古 蹟 硏 究 會, 1938, 부여に 於 げる 百 濟 寺 址 の 調 査 ( 槪 報 ), 昭 和 十 三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2 藤 澤 一 夫, 1982, 日 本 の 百 濟 系 双 塔 伽 藍 - 双 塔 樣 式 の 伽 藍 系 譜 (1), 馬 韓 百 濟 文 化 第 4 5 合 輯, 圓 光 大 學 校 馬 韓 百 濟 文 化 硏 究 所. 3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4, 扶 餘 東 南 里 寺 址 發 掘 調 査 略 報 告 書. 66)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3, 扶 餘 舊 衙 里 百 濟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宮 南 池 71)와 같은 조경지가 확인되었다. 또한 각 유적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백제 당 시의 격자형태의 도로유구 72) 들은 도성의 도시계획 및 평면구조 상 사비도성 전체를 연구하 는데 기초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분묘유적으로는 현재까지 陵 山 里 古 墳 群 73), 陵 山 里 東 古 墳 群 74), 上 錦 里 75), 松 谷 里 증산 골, 원적골, 楮 石 里 76), 鹽 倉 里 77), 豆 谷 里 78), 太 陽 里 79), 亭 岩 里 80), 芝 仙 里 81), 舊 校 里 聖 興 山 城 古 墳 群 82), 佳 中 里, 大 陽 里 83), 正 覺 里 陵 山 里 84), 合 井 里 Ⅱ 85), 羅 福 里 월구리 佳 中 里 안 새울 86), 可 化 里 87), 北 皐 里 88), 오수리 큰독골 오실골유적 89) 등의 유적이 조사되어 백제 묘 제의 다양성과 변화양상이 확인되었으며, 이 외에 부여읍 縣 北 里 희어티, 나말, 雙 北 里 90), 靑 馬 山 城 古 墳 群, 加 神 里, 細 塔 里, 素 沙 里 91), 新 里, 新 里 왕안, 合 井 里, 咸 陽 里, 鴻 淵 里, 鳳 山 里, 玄 岩 里, 草 旺 里 古 墳 群 등이 지표조사 등을 통해 확인되어 보다 분명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외 雙 北 里 靑 山 城 주변 92), 中 井 里 당산 93) 에서는 火 葬 墓 가, 井 67)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0, 花 枝 山 遺 蹟 指 導 委 員 會 資 料. 68)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7, 東 南 里 172-2 番 地 一 圓 遺 蹟. 69)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7, 東 南 里 702 番 地 遺 蹟. 70)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3, 扶 餘 佳 塔 里 旺 浦 里 軍 守 里 遺 蹟. 71) 1 洪 思 俊 1970, 宮 南 池 와 土 器, 考 古 美 術. 2 宮 南 池 發 掘 調 査 團, 1990, 宮 南 池 發 掘 調 査 略 報 告. 3 申 光 燮 外, 1993, 扶 餘 宮 南 池 第 2 3 次 發 掘 調 査 槪 報, 考 古 學 誌 5,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會. 4 國 立 扶 餘 博 物 館, 1999, 宮 南 池. 5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001, 宮 南 池 Ⅱ- 現 宮 南 池 西 北 便 一 帶. 6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007, 宮 南 池 Ⅲ. 72) 1(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6, 扶 餘 陵 山 里 東 羅 城 內 外 婦 百 濟 遺 蹟. 2(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2, 扶 餘 佳 塔 里 가탑들 遺 蹟. 3 扶 餘 郡 文 化 財 保 存 센터, 2010, 扶 餘 佳 塔 里 百 濟 遺 蹟. 4( 財 ) 百 濟 文 化 財 硏 究 院, 2011, 扶 餘 雙 北 里 280-5 遺 蹟. 73) 1 朝 鮮 總 督 府, 1916, 朝 鮮 古 蹟 圖 譜. 2 有 光 敎 一, 1979, 夫 餘 陵 山 里 傳 百 濟 王 陵 益 山 雙 陵, 橿 原 考 古 學 硏 究 所 論 集 4.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扶 餘 郡, 1998, 陵 山 里 - 扶 餘 陵 山 里 公 設 運 動 場 新 築 豫 定 敷 地 百 濟 古 墳 1 2 次 緊 急 發 掘 調 査 報 告 書. 74) 梅 原 末 治, 1937, 夫 餘 陵 山 里 東 古 墳 の 調 査, 昭 和 十 二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朝 鮮 古 蹟 硏 究 會. 75) 姜 仁 求, 1977, 百 濟 古 墳 硏 究, 一 志 社. 76) 國 立 夫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2, 夫 餘 楮 石 里 古 墳 群. 77)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3, 塩 倉 里 古 墳 群. 78) 徐 聲 勳, 1979, 豆 谷 里 百 濟 廢 古 墳 群, 韓 國 考 古 學 報 5 6, 韓 國 考 古 學 會. 79) 李 康 承 申 光 燮, 1983, 扶 餘 太 陽 里 百 濟 古 墳 一 例, 百 濟 文 化 15, 公 州 師 範 大 學 附 設 百 濟 文 化 硏 究 所. 80) 洪 珷 基 徐 聲 勳, 1981, 扶 餘 亭 岩 里 古 墳 群, 中 島 Ⅱ, 國 立 中 央 博 物 館. 81)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1, 扶 餘 芝 仙 里 古 墳 群. 82)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7, 林 川 聖 興 山 城 古 墳 群, 扶 餘 百 濟 古 墳 地 表 調 査 Ⅱ. 83)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8, 扶 餘 大 陽 里 遺 蹟. 84)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4, 正 覺 里 陵 山 里 古 墳 群. 85) 忠 南 發 展 硏 究 院, 2003, 扶 餘 合 井 里 Ⅱ. 86)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월구리 古 墳 群 佳 中 里 안새울 古 墳 群. 87)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7, 扶 餘 忠 化 面 可 化 里 遺 蹟 扶 餘 東 南 里 216-17 番 地 遺 蹟. 88) ( 財 ) 百 濟 文 化 財 硏 究 院, 2011, 扶 餘 北 皐 里 遺 蹟. 89) ( 財 )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09, 부여 고령친화모델 시범사업지구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부여 오수 리 큰독골 오실골유적 현장설명회자료집. 90) 姜 仁 求, 1975, 百 濟 의 火 葬 墓, 百 濟 文 化 7 8, 公 州 大 學 附 設 百 濟 文 化 硏 究 所. 91) 安 承 周 外, 1971, 百 濟 古 墳 文 化 의 硏 究, 百 濟 文 化 5, 公 州 大 學 附 設 百 濟 文 化 硏 究 所.

洞 里 遺 蹟 94)에서는 公 州 丹 芝 里 橫 穴 墓 와 같은 횡혈묘가, 그리고 鹽 倉 里 95)에서는 甕 棺 墓 가 확인되기도 했다. 불교유적은 定 林 寺 址 96), 傳 天 王 寺 址 97), 軍 守 里 寺 址 98), 陵 山 里 寺 址 99), 龍 井 里 寺 址 100), 佳 塔 里 寺 址 101), 新 里 王 興 寺 址, 虎 岩 里 寺 址 102), 外 里 寺 址 103), 琴 谷 里 金 剛 寺 址 104) 등이 보고 되었거나 조사되었으며, 이외에도 佳 增 里 廢 寺 址, 鶴 里 寺 址, 舊 衙 里 향교밭 廢 寺 址, 東 山 里 寺 址, 東 南 里 寺 址, 石 木 里 廢 寺 址, 觀 音 寺 址 井 洞 里 밤골사지 105), 부소산 西 腹 寺 址, 雙 北 里 寺 址, 雙 北 里 廢 寺 址, 臨 江 寺 址 등 여러 절터들이 보고되어 있다. 최근에는 王 興 寺 址 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보다 적극적으로 泗 沘 時 代 의 사찰 양상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가 축적되었다 106). 부여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절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분포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편으로 능사에서 출토된 목탑 심초석과 금동대향로 등은 불교 유적과 관련하여 매우 큰 성과 중의 하나로 판단된다. 다음 주요 유적으로는 관방유적이 있다. 이러한 관방유적이라는 것은 백제라는 국가의 중 앙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백제가 건국되던 초기 지방사회는 아직 백제의 통 제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방세력들도 주변 세력으로 부터의 방어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관방 및 기타유적 중에서 산성은 扶 蘇 山 城 107), 羅 城 108), 92) 姜 仁 求, 1975, 百 濟 의 火 葬 墓 (3), 百 濟 文 化 7 8, 公 州 大 學 校 師 範 大 學 百 濟 文 化 硏 究 所. 93) 姜 仁 求, 1977, 百 濟 古 墳 硏 究, 一 志 社. 94)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95) 姜 仁 求, 1977, 百 濟 甕 棺 墓 의 一 型 式, 百 濟 硏 究 6,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96) 1 尹 武 炳, 1981, 定 林 寺,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2 尹 武 炳, 1987, 扶 餘 定 林 寺 址 蓮 池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11, 扶 餘 定 林 寺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97) 1 申 光 燮 金 鐘 萬, 1992, 扶 餘 金 城 山 百 濟 瓦 積 基 壇 建 物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3, 扶 餘 傳 天 王 寺 址 文 化 財 保 存 地 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98) 1 朝 鮮 古 蹟 硏 究 會, 1937, 扶 餘 軍 守 里 廢 寺 址 發 掘 調 査 ( 槪 要 ), 昭 和 十 一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2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10, 扶 餘 軍 守 里 寺 址 Ⅰ- 木 塔 址 金 堂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99) 1 國 立 扶 餘 博 物 館, 1996,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함. 2 金 壽 泰, 1998, 百 濟 威 德 王 代 扶 餘 陵 山 里 寺 院 의 創 建, 百 濟 文 化 27, 公 州 大 學 校 百 濟 文 化 硏 究 所.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扶 餘 郡, 2000, 扶 餘 陵 山 里 第 6 次 發 掘 調 査 指 導 委 員 會 資 料 輯. 100)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扶 餘 郡, 1993, 龍 井 里 寺 址. 101) 朝 鮮 古 蹟 硏 究 會, 1938, 扶 餘 に 於 けるたら 百 濟 寺 址 の 調 査, 昭 和 十 三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102) 洪 思 俊, 1974, 虎 岩 寺 址 와 王 興 寺 址 考, 百 濟 硏 究 5,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103) 朝 鮮 古 蹟 硏 究 會, 1937, 扶 餘 窺 岩 面 に 於 ける 文 樣 塼 出 土 の 遺 蹟 と 其 の 遺 物, 昭 和 十 二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104) 尹 武 炳, 1969, 金 剛 寺, 國 立 博 物 館. 105)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6, 扶 餘 觀 音 밤골 寺 址 試 掘 調 査 報 告 書. 106) 1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2, 王 興 寺 發 掘 調 査 報 告 書 Ⅰ. 2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7, 王 興 寺 址 Ⅱ- 기와가마터 發 掘 調 査 報 告 書.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09, 王 興 寺 址 Ⅲ- 木 塔 址 金 堂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07) 1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5, 扶 蘇 山 城 發 掘 調 査 中 間 報 告 書. 2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6, 扶 蘇 山 城 發 掘 調 査 中 間 報 告 書. 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7, 扶 蘇 山 城 Ⅱ 發 掘 調 査 中 間 報 告 書. 4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9a, 扶 蘇 山 城 Ⅲ 發 掘 調 査 中 間 報 告 書. 5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1999b, 扶 蘇 山 城 緊 急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08) 1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0a, 百 濟 泗 沘 羅 城. 2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0b, 百 濟 泗 沘 羅 城 Ⅱ.

聖 興 山 城 109), 靑 山 城, 靑 馬 山 城 110), 錦 城 山 城, 新 城 里 甑 山 城, 北 皐 里 甑 山 城, 石 城 山 城, 梨 木 峙 山 城, 北 村 里 山 城, 沙 浪 山 城 (시랭이산성), 土 城 山 城, 土 亭 山 城, 南 村 里 山 城, 누르개재산 성, 論 峙 山 城, 鳳 凰 山 城, 二 重 山 城, 九 鳳 山 城, 獅 子 峰 山 城, 盤 山 城, 外 里 山 城, 主 葬 山 城, 浮 山 城, 鶴 洞 山 城, 店 上 里 山 城, 美 女 峰 山 城, 大 興 山 城, 蔚 城 山 城 등이 있다. 이 중 현재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論 峙 山 城 과 九 鳳 山 城 의 경우 백제 초 기의 土 城 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靑 山 城 과 靑 馬 山 城, 聖 興 山 城 등은 부여를 방비하 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임천면에 위치한 성흥산성은 발굴조사결과 백제시대 에 축성되었으며, 加 林 城 으로 비정되고 있어 역사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부소산성과 부여 읍내를 감싸고 있는 羅 城 은 여러 차례의 시 발굴조 사를 통해 그 구조와 축성기법, 축성시기 등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 백제시대의 토목기술은 물론 방어체계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생산유적으로는 窯 址 와 경작유적들이 확인되었다. 요지는 亭 岩 里 111), 雙 北 里 北 瓦 窯 址 112), 雙 北 里, 東 南 里, 龍 井 里 소룡골, 井 洞 里, 縣 北 里, 新 里, 鹽 倉 里 가마골, 瓦 窯 址 등이 보고되었다. 부여일원은 충적지대가 넓은 만큼 선사시대 이래로 다양한 경작유적들이 조사되었다. 그 중 삼국시대 경작유적은 능산리 113) 와 구룡면 九 鳳 里 114), 軍 守 里 115),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 골 116), 雙 北 里 현내들 北 浦 遺 蹟 117), 佳 塔 里 118), 羅 福 里 통실 119), 宮 南 池 120), 舊 衙 里 121) 등 에서 조사되었다. 꿩바위골유적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경작유구는 밭경작로서 2지점에서 백 제시대 경작면이 3층에 걸쳐 확인되었다. 가장 하부에 위치한 백제시대Ⅰ층은 해발고도 6.8~7.3m 정도에 걸쳐 조성되어 있고 Ⅱ층은 7.0~7.8m, Ⅲ층은 7.8~8. 6m 정도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데, Ⅱ Ⅲ층에서 구획된 경작지들이 확인되었다. 특히 Ⅲ층 밭의 조성시기에 이르러서는 경작지가 전면에 걸쳐 완연하게 확인되었는데, 경사면의 완만한 起 伏 을 따라 3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2, 百 濟 泗 沘 羅 城 Ⅲ. 4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3, 泗 沘 都 城. 5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扶 餘 石 木 里 羅 城 遺 蹟. 109) 1 愈 元 載, 1996, 百 濟 加 林 城 硏 究, 百 濟 論 叢 5, 百 濟 文 化 開 發 硏 究 院. 2 安 承 周 徐 程 錫, 1996, 聖 興 山 城 - 門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忠 南 發 展 硏 究 院 忠 淸 南 道. 110) 洪 再 善 1981, 百 濟 泗 沘 城 硏 究 - 遺 物 遺 蹟 을 中 心 으로 東 國 大 學 院 碩 士 學 位 論 文. 111) 1 金 誠 龜 外, 1988, 扶 餘 亭 岩 里 가마터(Ⅰ),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 申 光 燮 金 鐘 萬, 1992, 扶 餘 亭 岩 里 가마터(Ⅱ), 國 立 扶 餘 博 物 館 扶 餘 郡. 112) 尹 武 炳, 1982, 扶 餘 雙 北 里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百 濟 硏 究 13,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113)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6, 扶 餘 陵 山 里 東 羅 城 內 外 部 百 濟 遺 蹟. 114)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4, 扶 餘 九 鳳 蘆 花 里 遺 蹟. 115) 1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2000, 扶 餘 東 羅 城 西 羅 城 發 掘 調 査. 2(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1, 扶 餘 軍 守 里 耕 作 遺 蹟 略 報 告. 116)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7, 扶 餘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遺 蹟. 117)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扶 餘 雙 北 里 현내들 北 浦 遺 蹟. 118) 1(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3, 扶 餘 佳 塔 里 旺 浦 里 軍 守 里 遺 蹟. 2 扶 餘 郡 文 化 財 保 存 센터, 2010, 扶 餘 佳 塔 里 百 濟 遺 蹟. 119)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120) 國 立 扶 餘 博 物 館, 2007, 宮 南 池. 121) ( 財 )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2, 扶 餘 舊 衙 里 434 番 地 百 濟 遺 蹟.

상 하단의 段 差 를 두고 조성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다시 두둑 및 이랑 분리조성을 통해 여 러 소구획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피트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수회에 걸쳐 경작 되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122).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도성 내외의 각 유적에서 생산된 토기와 기와 및 식량 자원 등의 생산품들이 도성내외로 공급되었을 것으로 고려하면 도성과 주변지 역과의 물자수급관계 및 경제활동 등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唐 은 熊 津 (공주), 馬 韓 (익산), 東 明, 舍 璉, 德 安 (은진)에 각각 도독부를 두었는데 얼마 후 개편하면서 웅진도독부를 最 高 로 하여 밑에 7개 州 52개 縣 을 두었지만, 670년을 전후로 하여 신라가 당군을 축출하면서 무산되 었다. 당군 축출 후 신라는 확대된 영토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게 되었으며, 이후 문무왕 17~8년(677~678)경부터 신문왕 7년(787)에 걸친 시기에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인 9 州 5 小 京 制 를 완성하였다. 통일신라 말인 헌덕왕 14년에 金 憲 昌 의 반란이 있게 되는데, 이때 웅진도독이었던 김헌창 은 慶 雲 이란 연호를 내걸고 武 珍 州, 菁 州, 沙 伐 州 등과 國 原, 西 京, 金 官 을 비롯한 小 京 의 사신 및 여러 城 縣 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長 安 國 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덕왕대에 이르러서 는 지배귀족의 부패와 골품제의 모순이 증가하면서 귀족세력이 발호하게 되었으며, 진성여 왕 이후에는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기능이 거의 상실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소위 후삼국시대라 일컫고 있는데, 경기 강원지역은 궁예가 장악하였고 웅 주 전주 무주 등 백제 故 址 는 견훤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남하하면서 충북과 경북 일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가 904년 공주를 지키던 후백제의 장군 弘 奇 가 궁예에게 투항하면서 궁예의 후고구려 영향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남하하는 궁예와 지키 려는 견훤간에 충남일원에서 잦은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후 왕건 세력에 의해 쫓겨나면서부 터 왕건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주지역에서 다시 견훤이 북상하면서, 후백 제 및 고려는 충남 북부일원에서 대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이후 왕건 세력에 의해 쫓겨나 면서부터 왕건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서는 대표적으로 官 北 里 百 濟 遺 蹟 123), 中 井 里 建 物 址 124), 無 量 寺 舊 址 Ⅱ 125) 등이 있다. 관북리에서는 고려 조선시대까지 걸쳐 건물지, 가마, 축대, 고상건물 지, 우물지, 공방지, 담장, 매납유구, 도랑유구, 湖 岸 石 築 등 다양한 유구들이 2001년도부터 2008년도까지의 연차 발굴조사 동안 확인된 바 있고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 중정리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주거지는 모두 4기가 확인되었고 사면상에 일직선상으로 위치해 있다. 평면형태는 대체로 방형이고 대부분 구들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ㄱ 자형으로 시설하였으며, 처음 주거지 조성당시부터 구들시설을 계획하였던 양상이 관찰되었다. 내부 122)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遺 蹟. 123) 國 立 扶 餘 文 化 財 硏 究 所, 2011, 扶 餘 官 北 里 百 濟 遺 蹟 發 掘 報 告 Ⅴ- 2001~2007 年 調 査 區 域 統 一 新 羅 時 代 以 後 遺 蹟 篇. 124)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8, 扶 餘 中 井 里 (85 86-3 番 地 ) 百 濟 土 器 가마 및 統 一 新 羅 竪 穴 住 居 址 遺 蹟. 125)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9, 扶 餘 無 量 寺 舊 址 Ⅱ.

에서는 인화문토기 연가 기와 등 다양하다. 파수부호는 얇고 길게 휘어 말려있는 파수가 특 징적이고 인화문 뚜껑은 개정부가 돔형으로 높고 구연쪽으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S 자 형을 이룬다. 표면에는 반원점문을 종장연속으로 시문하였다. 이러한 이른 시기의 인화문토 기류는 부여일원에서 다수 확인되는데, 부소산성 능사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군수리유적 증 산리유적 등이 있다 126). 고려는 통일신라 말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호족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들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난관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광종~성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안정되고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었고 혜종~문종대를 거치면서 귀족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즉, 건국 초에는 호족세력의 발호로 지방통치의 어려움이 있었다. 초기에 천안을 비롯한 경주 상주 안주 등지에 大 都 督 部 를 두기는 했으나 州 府 郡 縣 등 각 행정단위별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없어 호족세력의 반자치구조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성종 2년에 12 牧 을 설치 하고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성종 14년에는 다시 唐 式 에 따라 대개편을 단행하여 전국을 5 都 護 府 10 州 節 度 使 10 道 制 로 전환하였다. 이때 공 주 運 州 (홍성) 등 주현은 下 南 道 로 했고 예종 원년(1106)에 합하여 楊 廣 忠 淸 州 道 로 했다가 명종 원년(1171)에 두 개의 도로 다시 분리했다. 충숙왕 원년(1314)에는 楊 廣 道 로 했다가 공민왕 5년(1356)에 비로소 忠 淸 道 로 하였다. 지방관제는 성종에 이어 목종~현종대에 대 대적으로 정비되는데 현종 9년(1018)에 기본구조가 완성되었다. 즉, 按 撫 使 를 파하고 4 都 護 8 牧 56 知 州 軍 事 28 鎭 將 20 縣 令 을 설치하였다. 이외 지방관이 설치된 州 府 郡 縣 이 있 었으나, 모두 京 牧 都 護 府 에 영속되어 있었다. 高 麗 史 지리지에는 고려의 군현제가 왕경 開 城 府 를 비롯하여 5도(양광도 경상도 전라 도 교주도 서해도), 양계(동계 북계)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京 都 護 府 牧 의 행 정구역이 있고 그 아래에 州 府 郡 縣 鎭 이 영속되어 있으며, 다시 外 官 이 파견되지 않는 고을이 외관이 파견된 군현과 주속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고려 말기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부여는 扶 餘 加 林 石 城 鴻 山 등 4개 縣 으로 유 지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林 川 郡, 石 城 縣, 鴻 山 縣 으로 구분되어 각각 公 州 와 洪 州 의 관할 하에 있었다. 부여군의 자세한 연혁은 高 麗 史 와 朝 鮮 王 朝 實 錄 및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邑 誌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高 麗 史 地 理 志 에는 부여군의 연 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6) 1국립문화재연구소, 1995, 부소산성 발굴조사 보고서. 2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5, 부소산성 발굴조사 중간보고. 3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7, 부소산성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5, 부소산성 발굴조사 중간보고Ⅲ. 5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5, 부소산성 발굴조사 중간보고Ⅳ. 6국립부여박물관, 2000, 능사. 7윤무병, 1987, 扶 餘 定 林 寺 址 蓮 池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百 濟 硏 究 1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8박순발 외, 2003, 泗 沘 都 城,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9충남발전연구원, 2002, 부여 증산리유적.

나-1 扶 餘 郡 本 百 濟 所 夫 里 郡 [ 一 云 泗 沘 ] 百 濟 聖 王 自 熊 川 來 都 之 號 南 扶 餘. 至 義 慈 王 時 新 遣 金 庾 信 與 唐 將 蘚 定 方 來 攻 滅 之 唐 師 旣 去 新 羅 盡 得 百 濟 舊 地. 文 武 王 十 二 年 置 摠 管 景 德 王 改 今. 顯 宗 九 年 來 屬 明 宗 二 年 置 監 務. 有 天 政 臺 釣 龍 臺 落 花 巖. 나-2 石 城 縣 本 百 濟 珍 惡 山 縣 新 羅 景 德 王 改 名 石 山 爲 扶 餘 郡 領 縣 高 廬 初 更 今 名 顯 宗 九 年 來 屬 明 宗 二 年 置 監 務 後 罷 之. 恭 愍 王 十 二 年 以 扶 餘 監 務 來 兼 恭 讓 王 二 年 復 置 監 務. 나-3 嘉 林 縣 本 百 濟 加 林 郡 新 羅 景 德 王 改 加 爲 嘉. 成 宗 十 四 年 置 林 州 刺 史 顯 宗 九 年 更 今 名 置 令 忠 肅 王 二 年 以 元 阿 孛 海 平 章 妻 趙 氏 內 鄕 陞 知 林 州 事. 屬 郡 一 縣 四. 나-4 鴻 山 縣 本 百 濟 大 山 縣 新 羅 景 德 王 改 名 翰 山 爲 嘉 林 郡 領 縣. 高 麗 初 更 今 名 顯 宗 九 年 仍 屬 明 宗 五 年 以 韓 山 監 務 來 兼. 高 麗 史 는 조선 문종 6년(1451)에 정인지와 정창손 등이 정리한 고려시대 正 史 로서 부여군에 대한 연혁은 志 에 해당하는 卷 56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부여군의 연혁은 三 國 史 記 에 수록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하위의 지방행 정지로 격하되어 그 역할이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 9년(1018) 에 부여군은 公 州 牧 의 속군으로 편제되어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분되지만 독립적인 군현으로 운영되지 못하였으며, 명종대(1172)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監 務 가 파견되었다. 이에 반하여 임천지역은 당시 嘉 林 縣 으로 고려 초 성종 때 林 州 로 개편되어 林 州 刺 史 가 설치되었으며, 현종 때에는 嘉 林 縣 으로 다소 낮추어지기는 하였으나, 현령이 파견되는 영현이었다. 또한 충숙왕 때에는 知 林 州 事 로 승격되면서 서림군과 庇 仁 縣, 韓 山 縣, 藍 浦 縣, 鴻 山 縣 을 관할하 면서 부여의 지역적 위상이 축소되는 것에 비해 고려시대 주요 거점의 위치를 줄곧 유지하 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는 漕 倉 이 운영되었는데, 현종 9년 전국 수로 연안에다 각지의 조세를 취합할 목적으로 설치된 租 米 倉 을 두었으며, 호서지역에는 牙 州 沙 涉 浦 ( 打 伊 浦 )에 河 陽 倉 을 설치 했다 127). 한편, 군현제 영역과는 별도로 鄕 所 部 曲 등의 지역도 군현제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향 127) 高 麗 史 食 貨 2, 漕 運 條.

부곡은 대체로 현이 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읍이었다. 이 향 부곡의 주민은 신분적으로 천 민집단이었다는 견해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良 人 이었다는 주장이 유력시 되고 있다. 소는 고 려 초에 발생한 것으로 주로 공납품을 제조하여 국가에 바치는 곳이었다. 이 소의 주민 역 시 천민이었다고 이해해 왔으나, 근래에는 양인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장처는 왕실 이나 궁원, 사원에 속한 마을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위 기관에 소속되었 다. 이들을 이른바 部 曲 制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향리들이 존재하여 나름대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고려시대에 부여지역에도 부곡제영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부여지역의 향 소 부곡은 世 宗 實 錄 地 理 志 와 東 國 輿 地 勝 覽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유적은 그리 많이 조사된 예가 없는데, 분묘유적으로서는 大 陽 里 遺 蹟 의 토광 묘 128),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의 石 槨 墓 및 토광묘 129) 가 있다. 생활유적으로서는 東 南 里 216-17 番 地 에서 통일신라시대 석축 우물지와 함께 고려시대 우물지가 조사된 바 130) 있고 井 洞 里 遺 蹟 131)에서는 주거지와 수혈유구가 조사되었으며, 생산유적으로서 토기가마가 함께 확인되었다. 그리고 北 皐 里 遺 蹟 에서는 주거지와 함께 수혈유구가 조사되었다 132). 한편, 하 부층에서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피트상에서 확인되어, 보다 創 建 時 期 가 올라갈 가능성 있는 寺 蹟 으로서 無 量 寺 에서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133). 조선이 건국된 후 지방통치체제는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고려시대 5 道 兩 界 로 편 제되었던 지방행정조직은 태종대에 전국을 8 道 로 나누고 그 아래에 府 - 牧 - 郡 - 縣 을 두었 으며, 고려의 主 屬 縣 체제로 되어있던 군현제는 대폭적으로 개편되어 속현들이 개명 혹은 독립되거나 통폐합되었다. 이후 단종 2년(1454)에 완성된 世 宗 實 錄 地 理 志 에는 고려시 대 이전의 부여지역 연혁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내용은 동일하고 현재와 같이 군명이 개명된 시기가 조선 太 宗 때의 일임을 적고 있으며 134), 이후 편찬된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과 與 地 圖 書 등의 각종 관련사서의 내용들은 대체로 세종실록지리지 의 연혁내용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부여지역은 林 川 郡 이 일시적으로 府 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나, 곧 환원되어 임천군의 1 郡 과 扶 餘 縣, 石 城 縣, 鴻 山 縣 의 3 縣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이러한 행정 조직체제는 조선말기의 갑오경장 이후 행정조직이 재편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驛 院 烽 燧 는 교통과 통신시설로서 중요한 정보전달의 수단이 되어 왔는데, 부여지역은 조 선시대 利 仁 道 에 속하는 역원시설로서 驛 이 4개소 있었으며, 小 路 驛 에 해당하여 大 馬 1필, 驛 馬 2필, 卜 馬 3필, 驛 吏 31인이 있었지만, 노비는 없었다. 지역별 역시설로서는 扶 餘 縣 의 銀 山 驛 龍 田 驛, 林 川 郡 의 靈 楡 驛, 鴻 山 縣 의 宿 鴻 驛 이 있었다. 院 은 부여에 3개소, 홍산 3개 128) 公 州 大 學 校 博 物 館, 2008, 扶 餘 大 陽 里 遺 蹟. 129)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 130)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7, 扶 餘 忠 化 面 可 化 里 遺 蹟 扶 餘 東 南 里 216-17 番 地 遺 蹟. 131)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132) ( 財 ) 百 濟 文 化 財 硏 究 院, 2011, 扶 餘 北 皐 里 遺 蹟. 133) 1( 財 ) 忠 淸 埋 藏 文 化 財 硏 究 院, 2001, 無 量 寺. 2 忠 南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5, 扶 餘 無 量 寺 舊 址 Ⅰ. 3 忠 南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7, 扶 餘 無 量 寺 舊 址 2 次 試 掘 調 査 報 告 書. 4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硏 究 院, 2009, 扶 餘 無 量 寺 舊 址 Ⅱ. 134) 世 宗 實 錄 卷 第 149 地 理 志 忠 淸 道 公 州 牧 扶 餘 縣 條.

도면 7 부여일원의 고지도( 左 -지승, 右 -해동지도) 소, 임천 2개소, 석성 2개소 등이 분포했다. 院 施 設 로는 扶 餘 縣 의 古 省 院 福 泉 院 金 剛 院, 鴻 山 縣 의 鹿 閒 院 廣 明 院 栗 峴 院, 林 川 郡 의 南 原 古 多 津 院 그리고 石 城 縣 의 水 湯 院 臨 江 院 이 있었다. 부여 일원에 위치한 烽 燧 施 設 로는 임천에 2개소, 석성에 1개소 있었는데, 세종실 록지리지 에서만 보이며, 이후 관찬 지리지나 읍지류에서는 부여지역의 봉수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초기의 지방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이를 모체로 다소의 수정을 거쳐 태종 13년(1413)에 확립되었으며 대체로 1894년의 갑오경장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조 선 초기 군현은 330여 고을로 정리하고, 지방 군현을 연결하는 상위기구로 8도의 관찰사제 가 확립되었는데, 관찰사제가 확립된 이후의 조선시대 각 대 소 군현은 관찰사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고 군현 상호간은 행정적으로 병렬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전기 진관체제하에서 지방 수령은 각각 군직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는데, 충청도의 경우 충주 청주 공주 홍주가 각각 거진으로 설정되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소군현이 관찰되 었다. 그 중 공주진관에는 임천 한산 전의 정산 은진 회덕 진잠 연산 이산 부여 석성 연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面 里 制 의 실질적인 시행으로 공주목의 내부구조 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면리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주읍 관내에 直 村 과 任 內 가 병렬해 있었으며, 임내에는 속현과 향 소 부곡 등이 있었고, 직촌에는 지역촌과 자연촌의 구별이 있었다. 고려후기까지 일정한 지역 내에 존재했던 鄕 所 部 曲 은 군현제가 개편되는 과정에 서 14세기 말~15세기 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이속되었다. 이때 하나의 지역단위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할하거나 그 명칭이 소멸하지 않고 존속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 지 의 기록에는 임천 古 多 只 所 와 홍산의 非 刀 所 만 보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고 적조에는 임천의 古 多 只 所 召 羅 所 今 岩 所 安 良 部 曲, 부여현의 楓 枝 所 石 田 部 曲, 홍산현의

非 刀 所 吾 合 所 등 8개소의 鄕 所 部 曲 이 확인된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이르면 주 부 군 현에 각기 고을의 치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등 몇 개의 방위면을 나누고, 방위면 아래 리 촌 동의 자연촌을 예속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촌에서 자연촌이 성장하여 면리제가 시행 되기 시작한 것으로 17세기에 이르러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정착되며, 輿 地 圖 書 에서 이 러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행정체제는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맞게 되었다. 1895년 5월 26일에 칙령 제97호 監 營, 按 撫 營 과 留 守 를 폐지할 데 대하여 와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 의 개정에 대하여 를 비준하여 반포하였다. 이 조치로 과거 8도체제가 폐지되고 대신 전국 이 23부로 개편되었으며, 부 밑에는 한결같이 군을 두어서 부윤 대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 다양하던 이전의 지방관이 군수로 통일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은 대체로 충주부 홍주부 공주부의 3부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23부제는 바로 폐지가 되고 1896년 8월 4일에 비준하여 반포된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를 개정할 데 대하여 에 의해 13 도제가 실시되었으며, 이때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 행정지방제도는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개편되었으며, 충청도에는 4목 1도 호부 14군 5현이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에 다시 지방제도 개편이 있으면서 8도를 폐지 하고 전국을 23부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유적으로서는 생활유적인 佳 塔 里 遺 蹟 135), 合 井 里 Ⅱ 136), 元 門 里 遺 蹟 137), 羅 福 里 월구리 佳 中 里 안새울 古 墳 群 138), 北 皐 里 遺 蹟 139)이 있고, 분묘유적인 井 洞 里 遺 蹟 140), 窺 岩 里 遺 蹟 141), 合 井 里 Ⅱ,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 142), 石 隅 里 遺 蹟 143) 등이 있다. 그리고 생산유적으로서는 원료채취를 위한 채취 土 坑 이 羅 福 里 통실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고, 羅 嶺 里 遺 蹟 에서는 백자 가마 작업장 폐기장 배수로 집석유구 석축유구 등 백자 생산 을 위한 시설들이 밀집조사되기도 했다 144). 그리고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遺 蹟 145), 정동 리 정동펄 146), 旺 浦 里 中 井 里 耕 作 遺 蹟 147), 구봉 노화리 148), 구교리 왕포리 149) 등지에서 는 경작유적들이 확인되었다. 조선 말 ~ 근대의 부여지역은 1895년 5월 28일 칙령 제 98호(1895년 5월 26일 공포)로 독립되었던 군 현이 군( 扶 餘 郡, 鴻 山 郡, 林 川 郡, 石 城 郡 )으로 일원화되고, 1914년 3월 1일 135) 忠 淸 南 道 歷 史 文 化 院, 2007, 扶 餘 佳 塔 里 遺 蹟. 136) 忠 南 發 展 硏 究 院, 2003, 扶 餘 合 井 里 Ⅱ. 137)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138)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월구리 古 墳 群 佳 中 里 안새울 古 墳 群. 139) ( 財 ) 百 濟 文 化 財 硏 究 院 2011, 扶 餘 北 皐 里 遺 蹟. 140)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5, 扶 餘 井 洞 里 遺 蹟. 141) 大 田 保 健 大 學 博 物 館 2004, 扶 餘 窺 岩 里 遺 蹟. 142)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雙 北 里 두시럭골유적. 143)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羅 福 里 통실 石 隅 里 元 門 里 遺 蹟. 144) ( 財 ) 百 濟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扶 餘 羅 嶺 里 遺 蹟. 145) ( 財 ) 忠 淸 文 化 財 硏 究 院 2008, 扶 餘 井 洞 里 오얏골 꿩바위골 遺 蹟. 146) (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2, 扶 餘 井 洞 里 정동펄 耕 作 遺 蹟. 147) ( 財 ) 嘉 耕 考 古 學 硏 究 所 2012, 扶 餘 旺 浦 里 中 井 里 耕 作 遺 蹟. 148) 忠 南 大 學 校 百 濟 硏 究 所 高 麗 大 學 校 埋 藏 文 化 財 硏 究 所 2004, 扶 餘 九 鳳 蘆 花 里 遺 蹟. 149) ( 財 ) 錦 江 文 化 遺 産 硏 究 院 2011, 扶 餘 舊 校 里 旺 浦 里 耕 作 遺 蹟 略 報 告.

조선총독부령 111호로 이들 4개 군을 부여군으로 통합하면서 16개 면을 관할 하에 두었다. 일제의 군면 폐합 당시 자연촌락은 강제로 해체된 뒤, 행정리로의 전환 작업을 추진되면서 洞 里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1960년 1월 1일 부여읍으로 승격되면서, 2000년 현재 부여읍 1개소와 더불어 규암면,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 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등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28개 의 통리, 428개의 행정리, 191개의 法 定 里, 1,657개의 반, 그리고 858개의 자연마을로 편제 되어 있다.

도면 8 조사지역 위치도 및 주변유적분포도 (S=1:25,000)

표 1 조사지역 주변유적 및 문화재 목록 ( 번호는 도면 8과 동일함) No. 유 적 명 시 대 성 격 소 재 지 이격 거리 비고 1 부여 상천리 아래삽티 유물산포지 신석기~청동기 유물산포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 아래삽티 일원 462m 2 부여 토정리 토동유물산포지 신석기~철기 유물산포지 부여 홍산 상천리 3 마애불입상 통일신라~고려 불상 4 부여 상천리 와천고분군 고려 고분군 부여 상천리 5 산90-42번지 토석채취장 유적없음 유적없음 부지 지표조사 6 부여 토정리 갈은내 고분군 고려 고분군 부여 상천리 토석채취 7 부지 내 시굴조사 유적없음 유적없음 8 홍산향교 조선 향교 9 청일사 조선 향교 10 부여 가교비 조선 비갈 11 부여 토정리 산성 역사시대미상 성곽 12 부여 토정리 여단석관묘 청동기 고분군 13 부여 북촌리 산성 백제 성곽 14 부여 태봉산성 삼국 성곽 15 부여 홍산 대첩비 현대 비갈 통합 숲 가꾸기 사업 16 (3차) 작업로 개설 삼국 유물산포지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 부여 교원리 379-17번지 17 단독주택 신축부지 내 청동기 생활유적 유적 18 부여 좌홍리유적 청동기~조선 생활유적, 분묘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1리 토동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 104-1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1리 와천 일원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 90-42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1리 갈은내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내로21번길 61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옥산면 상기리 산15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리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3리 여단마을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산12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양리 산10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379-17번지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좌홍리 일원 797m 891m 1,206m 1,210m 개발 완료 1,250m 1,317m 개발 완료 1,555m 1,722m 1,879m 2,032m 2,036m 2,389m 2,391m 2,427m 2,501m 2,871m 개발 완료 2,914m 개발 완료

Ⅲ. 조사내용 1. 조사지역 일대의 문화재 현황 150) (1) 부여 상천리 아래삽티 유물산포지(이격거리 462m) 소 재 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 아래삽티 일원 시 대 : 신석기~청동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지정여부 : 비지정 유적현황 : 상천리 아래삽티 유물산포지는 홍산면에서 보령으로 가는 61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상천1리와 상천 2리가 차례로 나오고, 마을을 지나면 바로 상천저수지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는 내산면과 경계를 짓는 해발 300m 이상의 높은 산줄기에서 뻗어 내린 해발 100m 내외의 완만한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613 번 지방도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는 마을 앞을 가로질러 마을 동북쪽을 감싸고 흐르 는 능선을 횡단하면서 동쪽의 가느실골로 연결된다. 이 길의 서쪽에 나무를 깨끗이 베어 낸 공터가 존재하는데, 유물이 확인된 곳은 이 공터에 길을 내면서 생긴 삭토면에서 확인 되었다. 위 경도상으로 이곳은 북위 36 14'29", 동경 126 45'30" 부근이다. 지표에서 확인 된 유물은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편을 비롯하여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저부편과 석 부이다. 빗살무늬토기편은 짙은 적갈색의 태토에 얕은 침선문이 새겨져 있다. 문양이나 태토로 보아 신석기시대 만기의 토기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편은 축약된 저 부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부여지방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확인된 곳은 규암면 羅 福 里 와 은산면 恩 山 里 이다. 특히 은산면 은산리 유물산포지에서는 이 아래삽티유물산포지와 비슷 하게 빗살무늬토기편부터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까지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물 분포양상 으로 미루어 이 일대는 신석기시대 이래 꾸준히 선사인들에 의해 이용되어진 지역으로 추정된다. 지표채집유물1 빗살무늬토기편 적갈색조의 토기편으로 태토에는 사립이 섞여 있다. 외 면에는 폭 0.25cm 정도의 침선이 새겨져 있는데, 문양은 삼각집선문으로 판단된다. 토기 의 깨진 단면에서 테쌓기한 흔적이 관찰된다. 기벽 두께는 0.55cm 정도이다. 2 무문토기 저편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으로 저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바닥과 동체의 연결부는 축약되어 있으며, 태토에는 굵은 석립이 다량 섞여 있다. 저경 8cm, 현존 높이 2.6cm이 다. (2) 부여 토정리 토동유물산포지(이격거리 797m) 소 재 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1리 토동일원 조사지역 및 주변 문화재 현황 분야는 다음의 글과 웹사이트을 인용하여 재구성하였다. 1 忠 南 大 學 校 博 物 館, 2003, 註 1)-2의 前 擖 書. 2 문화재청 GIS 지리정보시스템(http://gis-heritage.go.kr/re)

시 대 : 신석기~철기 종 류 : 유물산포지 지정여부 : 비지정 유적현황 : 토정리 토동마을에 이르는 행로는 부여에서 서천방면으로 향하는 4번 국도 로 홍산면 소재지가 있는 남촌리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2km 가면 된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토동마을에서 북으로 난 길로 약 1km 더 올라가면 골짜기에 돼지축 사가 나오는데, 이 축사 서편이다. 고분은 위 경도상으로 북위 36 14'00", 동경 126 44'42" 부근이다. 이곳은 해발 140m 내외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의 정상부 남사 면 하단에 있는 민묘 주변에서 豆 形 土 器 1점과 무문토기 여러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 표에서 수습되는 유물들로 보아 이 유적지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복합 유적으 로 판단된다. 지표채집유물1 두형토기 신부와 대각의 연결부가 남아 있는 적갈색 연질의 토기편이다. 대각은 신부와 접하는 부분에서 폭이 가장 좁다. 그 폭은 4.5cm이다. 태토에는 석립이 다 량 혼입되어 있어 비교적 거친 편이다. 현존 높이는 8.8cm이다. (3) 부여 홍산 상천리 마애불입상(이격거리 891m) 소 재 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104-1번지 일원 시 대 : 통일신라~고려 종 류 : 불상 지정여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유적현황 : 홍산에서 內 山 面 방면으로 가는 613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고개 하나를 넘 어면 상천리 '부엌바위' 마을에 이른다. 마애불은 바로 이 도로 좌측의 산 약 8부 능선쯤 에 솟아있는 거대한 바위단애면에 새겨져 있다. 약 8 8m의 바위면에 돋을 새김된 마애 불은 蓮 花 臺 座 위에 서 있는 부처의 형상이다. 手 印 은 釋 迦 如 來 의 施 無 畏 印 및 與 願 印 과 유사하나 左 手 를 위로 올리지 않고 가슴쪽으로 옆으로 뉘어 손바닥이 정면에서 보이도록 비틀고 있는 점과 右 手 역시 아래로 내리고 있으나 손바닥이 정면으로 보이면서 새끼손 가락이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 점 등에서 자연스런 자세가 아닐 뿐 아니라 해부학적으 로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편 大 衣 의 衣 襲 은 동심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비교적 사실적이고 塊 量 感 이 있다. 佛 頭 는 素 髮 의 肉 가 표현되어 있으며 입은 좀 작은 느낌이다. 이러한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이 불상은 신라말 고려 초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된다. (4) 부여 상천리 와천고분군(이격거리 1,206m) 소 재 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1리 와천 시 대 :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