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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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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의사학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2015년 8월 Korean J Med Hist 24 ː457-496 Aug 2015 c대한의사학회 http://dx.doi.org/10.13081/kjmh.2015.24.457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조성산* 1. 머리말 2. 성호학파의 유의( 儒 醫 ) 전통과 그 면모 3. 고학적 학술경향과 본초학의 상호관련성 4. 성호학파의 본초학에 대한 관심과 민간의료에 대한 문제의식 5. 맺음말 1. 머리말 제자백가( 諸 子 百 家 )와 사기( 史 記 ) 등의 고문헌들의 광범위한 출판을 통 하여 형성된 명대( 明 代, 1368-1644) 학술의 고학적( 古 學 的 )인 학술경향은 중 국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1) 여기 에서 고학은 주자학 중심의 송( 宋 )나라(960-1279) 학술체계를 비판하고 선진 양한( 先 秦 兩 漢,?-220) 시대의 문헌들을 직접적으로 학습하고 연구하는 학술 과 학술활동 전반을 의미한다(조성산, 2014a: 33-38). 이 시기 형성된 고학적 학술경향에 대한 연구는 그 동안 주로 한문학( 漢 文 學 )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 어져서 그것이 한문학 이외 다른 학문 분야, 특히 의학( 醫 學 ) 분야에 어떠한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이메일: csungsan@skku.edu 1) 명대 문헌편찬에 대해서는(Chow, 2004; Brokaw & Chow eds., 2005; 大 木 康, 2005; 2009; 황지영, 2012; 井 上 進, 2002; 2011) 참조.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57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연구가 부족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식에서 본 글은 일본 도쿠가와 시기(1603-1867)의 요시마스 토도( 吉 益 東 洞, 1702-1773)로 대표되는 고방파( 古 方 派 )에 우선 주목하였다. 요시마스 토도로 대표되는 고방파는 의학 분야의 주자학이라고 부를 수 있 는 금원사대가( 金 元 四 大 家 )의 의학이론을 비판하면서 한 대( 漢 代, BC 206- AD 220) 장중경( 張 仲 景, 150-219)의 상한론( 傷 寒 論 ) 을 중심으로 하는 고의 학( 古 醫 學 )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명대 고학적 경향, 구체적으로는 선진양한 시대의 문체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진한고문파( 秦 漢 古 文 派 )의 영향을 받아서 고문사학( 古 文 辭 學 )을 주장하였던 오규 소라이( 狄 生 徂 徠, 1666-1728)의 출 현에 비견된다. 2) 양자 사이에는 고학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성 이 있었으며, 실제로 요시마스 토도는 오규 소라이의 영향을 받았다(신현규 외, 1997 :41-42; 박현국 외, 2007: 233; 寺 澤 捷 年, 2013: 32-34). 명나라에서 시작된 고학의 문제의식이 일본 도쿠가와 시기에 한문학과 경학을 넘어 의 학 분야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 렇다면 조선에서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 본 글의 주요 한 문제의식이다. 조선에서도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1592-1598) 이후 명대 진한고문풍의 문 학사조가 유입되어서 17세기 초 조선의 진한고문파가 성립되었다(강명관, 1995: 304). 이것은 당색과 학파를 넘어 서인( 西 人 )과 남인( 南 人 ) 모두에게 영 향을 끼쳐서 당시 대표적인 문장가들이었던 윤근수( 尹 根 壽, 1537-1616), 이 수광( 李 睟 光, 1563-1628), 신흠( 申 欽, 1566-1628), 허목( 許 穆, 1595-1682) 등 의 인물들은 진한고문풍의 문학과 학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문장과 학술 의 경향은 18세기에 들어서 주로 남인 학맥의 허목과 이익( 李 瀷, 1681-1763) 문도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서울 경기지역의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를 중심으 2) 狄 生 徂 徠, 徂 徠 集 卷 27 答 屈 景 山, 李 王 二 公 沒 世 用 其 力 於 文 章 之 業 而 不 遑 及 經 術 然 不 佞 藉 其 學 以 得 窺 經 術 之 一 斑 焉 是 不 佞 所 以 俾 從 游 之 士 學 二 公 之 業 者 亦 以 其 所 驗 於 己 者 敎 之 也 豈 有 它 意 乎. 458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로 계승되었다. 명대의 고학적 학술경향은 각 학파별로 계승되었지만, 서인( 西 人 )-노론( 老 論 )의 학술전통에서는 거의 단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론 학술계에 광범 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안동김씨 김창협( 金 昌 協, 1651-1708)은 고학 단절에 중 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학이 갖는 이단성과 비현실성을 비판하였다(조 성산, 2003: 376-387). 이 과정을 통하여 노론 내에서 고학은 배제되었고, 그 것의 발전은 상당 부분 차단되었다. 이에 반해서 허목은 고학적 학술경향을 발전시켰다(김도련, 1998: 57; 정옥자, 1991; 김준석, 1987; 한영우, 1989). 명 대 형성된 고학적 학술경향은 18세기 이후 근기남인계를 중심으로 발전되었 다고 할 수 있다(김동준, 2013: 134). 성호학파는 이익의 친인척과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정약용( 丁 若 鏞, 1762-1836) 또한 이익의 학술적 영향관계 속에 있었다(강세구, 2000: 55-72). 이들을 중심으로 문장으로는 상고적( 尙 古 的 )인 문장을 구사하는 문풍이 발전 하였고(김동준, 2013: 133-137), 또한 학술적으로는 송대 주자학에 의지하지 않고 선진양한 문헌 그 자체에 입각한 경전해석을 시도하려는 학풍이 형성되 었다(최봉영, 1987; 최석기, 2010: 137-154).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일본에서 요 시마스 토도가 등장하였던 학문적 토양은 근기남인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조 선에서도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익과 그의 학문적 후예 정약용 또한 의학에 대해서 많은 논 의들을 남겼다. 기존 연구들은 이익, 정약용의 의학을 살펴봄에 있어서 주로 서학( 西 學 )의 영향관계에 주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김두종, 1966: 361-362; 三 木 榮, 1972: 231-233; 김성수, 2008; 여인석 외, 2012: 174-175). 그들이 서 학을 수용하였고 이를 통하여 선진적인 의학이론을 전개했던 것은 사실이지 만, 서학의 영향관계만을 강조할 경우 서학 수용 이전에 그들이 이미 가졌던 사상의 독특성은 주목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이 가졌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학의 영향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서학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59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그들의 내적인 학문토양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의학사상을 객관적으로 이 해하는 데 중요하다. 기존 연구에서 정약용의 의학과 서학과의 관련성에 대하 여 재고를 요청하고 한의학 이론의 발전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 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서봉남 김남일, 2003), 정약용의 의학과 그의 고학적인 학술경향을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서학보다는 전통 적인 고학 학술체계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호학파의 고학적 학술경향은 그들의 서학 수용과 함께 주자학의 학술체 계를 비판하는 데 많은 부분 기여하였다. 서학의 영향을 강조하는 입장 속에 서 그 동안 많은 부분 주목받지 못하였던 명대 고학풍의 영향을 그들의 의학 담론을 통하여 새롭게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성호학파 지식인들 의 의학 연구와 그들의 고학 연구와의 상호 관련성을 조명함으로써 의학에서 의 고학적 학술경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요시마스 토도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며, 명대 고학의 학술체계가 어 떠한 모습으로 조선의 의학지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성호학파의 유의( 儒 醫 ) 전통과 그 면모 성호학파의 의학 연구의 구체적 양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전제와 배경 으로서 성호학파의 선배 격이 되는 북인계 남인들과 그 후예들, 그리고 성호 학파의 의학에 대한 관심을 대략적으로 개관해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성호 이익 집안은 정치적으로는 북인계와 연결되며 학문적으로는 서경덕( 徐 敬 德, 1489-1546)의 문도들, 즉 화담학파( 花 潭 學 派 )의 학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 다(이성무, 2000: 14-23). 성호학파의 근간이 되었던 허목과 윤휴( 尹 鑴, 1617-1680) 또한 모두 그 선대는 정치적으로 북인계, 학문적으로는 화담학파와 깊 은 관련성을 가졌다(신병주, 2004: 163-176). 따라서 성호학파의 의학에 대한 관심을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460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조선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시기, 유의( 儒 醫 ) 가운데에는 유독 북인계 지 식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음양오행( 陰 陽 五 行 )과 오운육기( 五 運 六 氣 ) 를 중심으로 내재적 상응과 연결을 중시하는 내경( 內 經 )의 의학담론과 화담 학파의 소옹( 邵 雍, 1011-1077) 상수학( 象 數 學 ) 연구는 의학과 역학( 易 學 )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친연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상세히 말해서, 그들의 주요 연구대상이었던 소옹 상수학이 갖는 세계이해가 상( 象 ) 과 수( 數 )를 통하여 우주와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음양오행과 오운육기를 통하여 인체를 이해하고자 했던 내경학의 세계관과 그 시도 면에서 많은 점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북인계가 가졌던 도가적 학문성향(신병주, 2000: 241-252) 또한 양생학과 관련하여 그 들의 의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김호, 2000: 134-150). 따라서 이 학파에서 의학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렴( 鄭 磏, 1506-1549)은 의학 분야에 해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3) 정북창방( 鄭 北 窓 方 ) 이라는 의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김호, 2000: 138). 그의 아우 정작( 鄭 碏, 1533-1603)은 동의보감( 東 醫 寶 鑑 ) 편찬의 기준을 마 련하였다(김호, 2000: 134). 동의보감 의 저자 허준( 許 浚, 1539-1615)은 화 담학파 북인계 인물들의 삼교회통( 三 敎 會 通 ) 사상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 (김호, 2000: 136-150). 이지함( 李 之 菡, 1517-1578)은 화담학파로서 천문 지 리 복서 의약에 정통하였으며, 4) 정개청( 鄭 介 淸, 1529-1590)은 역학과 율 려신서( 律 呂 新 書 ), 황극경세서( 皇 極 經 世 書 ),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병법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5) 17 18세기 북인학풍의 의학연구의 전통은 허목을 거쳐서 경기도 안산과 3) 金 得 臣, 柏 谷 集 冊 六 北 窓 傳, 北 窓 姓 鄭 名 磏 字 士 潔 號 北 窓 東 方 之 異 人 也 生 而 天 稟 甚 高 聰 明 出 衆 凡 書 一 寓 目 而 盡 誦 天 文 地 理 醫 藥 卜 筮 曆 算 律 呂 華 語 聖 學 禪 學 仙 方 皆 不 學 而 能. 4) 李 之 菡, 土 亭 先 生 遺 稿 序 土 亭 先 生 遺 稿 序 ( 鄭 澔 撰 ), 先 生 姿 稟 甚 高 氣 度 異 常 學 無 師 承 神 解 宏 博 凡 天 文 地 理 醫 藥 卜 筮 律 呂 算 數 知 音 察 色 神 方 秘 訣 無 不 通 曉. 5) 鄭 介 淸, 困 齋 先 生 愚 得 錄 附 錄 上 困 齋 先 生 事 實, 若 至 易 學 及 律 呂 新 書 皇 極 經 世 書 用 力 益 篤 而 天 文 地 理 醫 藥 卜 筮 算 數 戰 陣 之 法 皇 王 帝 覇 道 功 德 力 之 術 靡 不 歷 究.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61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충청도 예산 지역의 북인계와 성호학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이 지역의 북인계 인물들과 성호학파 인물들 사이에는 선대에 같은 기원을 갖 고 있었던 터라 많은 상호 교류가 있었다(강경훈, 2001: 59-70). 허목은 의학 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졌다(김남일, 2011: 37-38). 또한 이익은 주지하듯 이 허목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김성수, 2008; 강민구, 2014). 이익과 직 간접적으로 학문적 영향관계에 있었던 경기도 안 산과 충청도 예산지역의 문화류씨, 진주류씨, 진주강씨, 여주이씨, 전주이 씨, 나주정씨 인물들은 의학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 로는 문화류씨 류상( 柳 瑺,?-?) 류중림( 柳 重 臨, 1705-1771), 진주류씨 류경종 ( 柳 慶 種, 1714-1784), 진주강씨 강세황( 姜 世 晃, 1713-1791) 강이오( 姜 彛 五, 1788-?), 여주이씨 이익 이철환( 李 嚞 煥, 1722-1779) 이삼환( 李 森 煥, 1729-1813) 이용휴( 李 用 休, 1708-1782) 이재남( 李 載 南, 1755-1835) 이재적( 李 載 績, 1758-1811), 전주이씨 이헌길( 李 獻 吉,?-?), 나주정씨 정약용 정학연( 丁 學 淵, 1783-1859) 등의 지식인들이었다. 경기도 안산지역 지식인들 가운데에서 의학에 관하여 가장 먼저 두각을 나 타내었던 가문은 문화류씨들이었다. 류상은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하면서 유 명해졌다(정연식, 2005: 106). 그의 아들 류중림은 아버지의 의업을 전수 받 았다. 그는 1741년부터 두의( 痘 醫 )로 이름이 높았고 태의원의약( 太 醫 院 醫 藥 ) 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내의에 종사하였다. 그는 홍만선( 洪 萬 選, 1643-1715) 의 산림경제( 山 林 經 濟 ) 를 증보하여 증보산림경제( 增 補 山 林 經 濟 ) 를 편찬 하기도 하였다. 6) 류중림은 의술뿐만 아니라 병학( 兵 學 )에도 많은 관심을 표 명하여 병학대성( 兵 學 大 成 ) 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7) 당시 안산의 대표적인 북인계 가문의 한 사람이었던 진주류씨 가문의 류 6) 李 圭 景,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서울: 동국문화사, 1959) 上, 卷 32, p. 934 增 補 山 林 經 濟 辨 證 說, 按 文 城 柳 氏 譜 柳 重 臨 柳 知 事 瑺 後 孫 瑺 以 進 士 爲 議 藥 同 參 官 至 知 事 以 痘 醫 鳴 於 一 國 重 臨 字 大 而 以 進 士 爲 執 事 於 軍 門 又 入 太 醫 議 藥 之 任 官 至 外 任 嘗 撰 輯 山 林 經 濟 增 補 至 十 一 卷 之 多 歲 丙 戌 處 暑 西 河 任 希 聖 子 時 爲 之 序 行 于 世. 7) 趙 龜 命, 東 谿 集 卷 1 兵 學 大 成 序. 462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경종 또한 의학에 해박하였다. 류경종은 성호학파의 문인으로서 조부인 류명 현( 柳 命 賢, 1643-1703) 대에 형성된 청한당( 淸 聞 堂 ), 경성당( 竟 成 堂 ) 등에 소 장된 많은 서적들을 통하여 명물도수지학( 名 物 度 數 之 學 )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 지역 남인 소북 문인들의 교류에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강경훈, 2001: 60-62). 박성원( 朴 聖 源, 1697-1767)은 류경종이 경사( 經 史 )에 해박하였고 천 문, 지리, 의약, 복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은둔지사로 살았다고 하였다. 8) 류경 종의 처남 강세황은 그에 관하여 여항과 시골의 이야기들, 물건 이름과 도량 형의 명칭 등을 반드시 기록하여 밝혔고, 인간의 일상생활과 온갖 물정도 모 두 붓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기발한 의견과 훌륭한 논평이 많았 다 9) 고 회고하였다. 진주강씨 강세황 가문의 의학에 대한 관심도 류경종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류경종과 강세황은 처남 매부 사이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 를 평생 가졌다. 이를 통하여 류경종의 명물도수지학과 의학에 대한 관심은 강세황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가령, 강세황은 불회목( 不 灰 木 )이 부스럼이나 검게 멍들었을 때 이것에 불을 붙여 배꼽에 붙 이면 붉게 되고 윤기가 돈다고 하였고, 또한 금창( 金 瘡 ) 등 여러 병을 치료하 는 데에 사용되는 것임을 적었다. 10) 이와 함께 강세황은 안경에 대해서 상세한 의학적 지식을 가졌다. 그는 8) 晉 州 柳 氏 慕 先 錄 編 纂 委 員 會, 晉 州 柳 氏 文 獻 總 輯 卷 2 愚 亭 柳 公 事 略 ( 朴 聖 源 ), 公 博 學 善 經 史 兼 通 天 文 地 理 醫 藥 卜 筮 之 類 常 以 奇 氣 自 負 不 肯 苟 附 於 靑 雲 之 士 故 如 蘭 混 衆 草 不 能 聞 香. 9) 姜 世 晃, 豹 菴 稿 卷 6 海 巖 柳 公 行 狀, 街 巷 俚 野 之 談 名 物 度 數 之 分 必 記 錄 而 發 明 之 人 生 日 用 事 爲 物 情 亦 皆 收 拾 筆 墨 間 其 中 多 有 奇 言 至 論 公 於 東 方 故 事 尤 極 該 博 檀 箕 以 後 降 至 麗 末 談 說 滾 滾 本 朝 故 實 歷 歷 如 昨 日 事 明 宣 之 際 名 公 鉅 卿 出 處 文 章 擧 皆 洞 貫 惟 其 喜 談 東 事 博 觀 諸 集 故 碑 碣 狀 誌 參 互 共 貫 某 氏 之 籍 某 鄕 某 人 之 爲 某 孫 無 不 瞭 然. 10) 姜 世 晃, 豹 菴 稿 卷 5 不 灰 木, 不 灰 木 昔 曾 見 於 京 都 一 人 家 形 似 乾 民 石 魚 之 去 鱗 者 盖 色 白 而 性 柔 又 如 破 帛 之 摺 疊 作 砧 石 衣 者 元 非 木 類 也 以 小 片 燃 而 燈 心 蘸 油 燃 火 火 卽 燃 燃 盡 而 燈 心 未 嘗 焦 也 又 納 於 烈 火 中 終 不 焦 爛 亦 奇 物 也 云 是 滑 石 之 根 形 雖 柔 軟 石 性 故 在 所 以 入 火 不 焦 也 惟 以 牛 糞 燃 火 而 投 之 卽 成 灰 云 亦 理 之 不 可 詰 醫 方 亦 有 用 處 或 云 痘 瘡 黑 陷 者 以 此 爝 爛 附 臍 中 亦 皆 紅 活 如 神 考 本 草 亦 用 於 金 瘡 諸 病 云 偶 閱 謝 在 杭 五 雜 組 有 未 嘗 目 覩 之 語 可 想 此 物 之 希 異 也 又 吸 毒 石 色 灰 靑 成 塊 凡 有 惡 瘡 毒 腫 蟲 蛇 毒 以 此 摩 之 毒 盡 去 非 産 東 國 者 其 價 亦 甚 貴 云 而 本 草 無 其 名 未 知 別 有 他 名 而 未 能 卞 耶.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63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안경이 볼록하고 오목한 것과 시력이 밝고 어두운 것이 모두 같지 않으며 또 멀리 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이 모두 다르다. 혹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 함 부로 눈에다 걸치고 망령되이 좋다 나쁘다 칭하니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1) 고 하였다. 강세황은 류경종의 부탁으로 약명시( 藥 名 詩 )를 써 주기도 하였다. 12) 이러한 강세황의 의학에 대한 관심을 전승한 이는 그의 서 손이었던 강이오( 姜 彛 五, 1788-1857)였다. 그 또한 의학에 관심이 많아서 약산호고종방촬요( 若 山 好 古 腫 方 撮 要 ) 와 약산호고( 若 山 好 古 ) 라는 저작을 남겼다. 13) 본 글의 중심인 여주이씨 이익 가문은 경기도 안산과 충청도 예산 지역에 서 활동하였고, 대체적으로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익의 종조숙부였던 이 원진( 李 元 鎭, 1594-1665)과 형 이서( 李 漵, 1662-1723)는 모두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14) 이러한 학풍 속에서 이익 또한 자연스럽게 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 졌으리라고 생각된다. 15) 우선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이익의 증손자였던 이 재남과 이재적은 박식고아( 博 識 古 雅 )하였고 의술에 정통했다. 특히 이재남 과 이재적이 신농술( 神 農 術 )에 능통하였다는 심능숙( 沈 能 淑, 1782-1840)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본초학( 本 草 學 )에 특장이 있었던 듯하다(김영 진, 2005: 122). 16) 11) 姜 世 晃, 豹 菴 稿 卷 5 眼 鏡, 惟 眼 鏡 爲 老 人 昏 眸 之 助 然 鏡 之 隆 凹 與 眼 之 明 暗 各 自 不 同 又 且 遠 視 近 觀 亦 各 殊 異 或 有 鹵 莽 者 加 於 眼 而 妄 稱 美 惡 不 可 不 細 察 也 又 以 琉 璃 方 板 背 塗 水 銀 以 代 銅 鏡 亦 有 極 朗 澈 者 此 亦 古 所 未 有 想 出 於 西 洋 也. 12) 姜 世 晃, 豹 菴 稿 卷 5 書 藥 名 詩 後. 13) 姜 彛 五, (국역)약산호고종방촬요 식의심감, 안상우 외 역 (대전: 한국한의학연구원, 2010), pp. 137-140. 14) 李 瀷, 星 湖 全 集 卷 67 從 祖 叔 父 太 湖 公 行 錄, 經 傳 子 史 無 不 旁 通 午 貫 凡 聲 律 陰 陽 兵 陣 卜 筮 星 經 地 理 書 射 計 數 之 類 各 極 臻 妙 嘗 曰 六 藝 惟 御 非 世 習 也 其 餘 吾 皆 能 之 至 於 鳥 獸 草 木 之 名 緖 餘 多 識 顯 廟 患 目 疾 使 貿 空 靑 於 燕 市 不 辨 眞 贗 上 曰 試 訪 諸 李 某 可 得 也 公 曰 眞 矣 但 色 不 潤 恐 津 液 內 竭 驗 之 果 然 金 參 判 始 振 號 博 物 遇 諸 道 取 草 中 罕 見 者 叩 之 公 曰 於 意 云 何 金 曰 此 某 名 也 公 曰 此 物 本 草 名 某 而 鄕 藥 名 某 各 方 不 同 子 所 聞 卽 嶺 南 諺 稱 也. ; 李 瀷, 星 湖 全 集 卷 68 三 兄 玉 洞 先 生 家 傳, 汎 及 於 律 歷 之 書 甘 石 岐 黃 之 術 大 小 相 銜 本 末 兼 該 無 不 參 互 著 明. 15) 이익의 의학에 대한 관심은 (김성수, 2008; 강민구, 2014) 참조. 16) 沈 能 淑, 後 吾 知 可 二 冊, 安 山 李 隱 君 兄 弟 惺 翁 之 孫 博 識 古 雅 明 於 軒 岐 之 術 知 舊 以 病 往 464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충청도 예산에 거주하던 이익의 조카 이광휴( 李 廣 休, 1693-1761)의 아들들 인 이철환과 이삼환은 성호학파 의학 연구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 다. 이철환은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사람들이 병에 대하여 물어오면 침약( 鍼 藥 )으로 처방하였다고 한다. 17) 당시에 마진( 痲 疹 )에 대한 처방으로 유명했던 전주이씨 이헌길은 이철환의 제자였다(최진우, 2007: 8-9). 18) 이삼환의 경우 에도 의학연구에 정통하였다. 특히 그는 마진에 특장을 발휘하였으며(곽호제 2004: 59), 19) 또한 동생이 기질( 奇 疾 )에 걸리자 자신의 의술로 그를 고치고자 하였다. 20) 그 밖에 이익의 조카 이용휴는 본초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21) 이익의 조카 이병휴( 李 秉 休, 1710-1776) 또한 의술에 조예가 깊었다. 22) 성호학을 계승한 정약용의 경우에도 의학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는 천연두를 앓을 때에 이헌길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경험을 통하여 마진 등 의 질병에 관심을 갖고서 마과회통( 麻 科 會 通 ) 을 저술하였으며, 그 밖에 당 대 의학의 문제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정리하여 기술한 의령( 醫 零 ) 을 남겼 다. 그의 아들 정학연 또한 의원을 열 정도로 의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정 약용은 정학연에게 의술을 펼침에 있어서 신중히 처신할 것을 권고하였다. 23) 叩 則 輒 施 之. 17) 李 東 允, 樸 素 村 話 地 제172화, 李 嚞 煥 居 德 山 人 有 問 病 者 命 以 針 藥 輒 效 種 樹 治 圃 皆 有 方 事 半 功 倍 與 有 道 僧 論 佛 經 奧 義 僧 莫 不 屈 服 嚞 煥 當 丙 申 春 仰 觀 天 象 歎 曰 有 氣 犯 紫 薇 垣 國 家 必 有 事 是 日 英 廟 昇 遐 嚞 煥 可 謂 能 通 天 文 地 理 兵 家 等 書 而 有 所 前 知 者 歟. 18) 이헌길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七 卷 蒙 叟 傳. 19) 李 森 煥, 少 眉 山 房 藏 ( 近 畿 實 學 淵 源 諸 賢 集 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2) 附 錄 行 狀 p. 135, 歲 乙 未 痲 疹 大 行 時 運 極 險 先 生 乃 取 馬 氏 麻 科 彙 編 着 心 究 會 得 其 要 領 先 試 之 於 家 間 而 效 次 試 之 於 隣 里 而 效. 20) 李 是 鉷, 六 懷 堂 遺 稿 ( 近 畿 實 學 淵 源 諸 賢 集 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2) 附 錄 木 齋 先 生 墓 誌 銘 p. 544, 弟 遘 奇 疾 先 生 旁 究 黃 岐 之 書 手 致 藥 物 得 以 少 延. 21) 李 用 休, 惠 寰 雜 著 卷 12 本 草. 22)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五 卷 貞 軒 墓 誌 銘, 九 經 四 書 二 十 三 史 以 至 諸 子 百 家 詩 賦 雜 文 叢 書 稗 官 象 譯 算 律 之 學 牛 醫 馬 巫 之 說 惡 瘡 癰 漏 之 方 凡 以 文 字 爲 名 者 一 叩 皆 輸 寫 不 滯 又 皆 硏 精 核 實 一 似 專 治 者 然 問 者 駭 愕 疑 其 爲 鬼 神. 23)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八 卷 示 學 淵 家 誡, 汝 忽 成 醫 人 何 意 哉 有 何 益 哉 汝 欲 藉 此 術 交 結 時 宰 圖 宥 乃 翁 耶 不 但 不 可 抑 且 不 能 世 俗 有 所 謂 虛 德 色 汝 知 之 乎 吹 不 費 之 脣 以 悅 汝 志 歸 而 冷 笑 者 滔 滔 汝 尙 不 覺 乎 微 示 炙 手 之 熱 使 之 屈 躬 伏 地 汝 果 陷 於 術 中 不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65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이와 같이 성호학파 관련 인물들은 이전 시대부터 의학에 조예가 깊었고, 그러한 점에서 유의의 전통을 가졌다. 이러한 유의의 전통과 토양 속에서 기 존 금원사대가 중심의 의학에 의문을 품고서 새로운 의학에 관심 갖는 풍조가 발생할 수 있었다. 성호학파 구성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던 의학에 대 한 관심은 본 글이 다루고자 하는 성호학파의 고학 연구와 본초학에 대한 관 심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다 음에서 그들의 의학 연구가 어떠한 문제의식 속에서 전개되었는지를 이익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고학적 학술경향과 본초학의 상호관련성 이 부분에서는 고학적 학술경향과 본초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 관련성 을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경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몸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인 질서 속에서 규정하고 해석하는 의학이론 체계였다고 할 수 있 다(야마다 게이지, 2002: 89-140). 이 내경학의 이론체계는 그것이 성립된 고 대사회 이후 매우 오랫동안 동아시아 의학이론의 기본체계를 규정하였다. 여 기에는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와 같은 이론들이 주를 이루었고, 전근대 동아시 아 의학자들은 이것을 인간 몸의 장부( 臟 府 )에 결부시키면서 그 내적 관계와 상응의 체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주진형( 朱 震 亨, 1281-1358), 이고 ( 李 杲, 1180-1251) 등 금원사대가( 金 元 四 大 家 )의 논의들과 만나면서 그 절정 에 달하였다(야마다 게이지, 2002: 223). 송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지식체계 와 내경학은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그 추상성과 이론성을 극도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이론들은 명나라 시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명대 학술계에서는 송대의 형이상학적인 학술체계에 대한 비판작업이 넓 愚 人 哉 凡 人 有 高 官 淸 銜 盛 德 邃 學 者 旁 道 醫 理 其 身 不 至 太 賤 然 且 病 家 不 敢 直 問 須 設 三 梯 四 階 僅 得 一 方 如 獲 重 寶 猶 之 可 也 今 汝 大 放 厥 聲 大 開 其 門 冷 熱 卑 高 邪 正 之 流 日 塡 其 巷 魚 頭 獸 面 閒 雜 之 輩 不 問 來 歷 不 詳 本 行 皆 傾 蓋 許 交 典 其 館 穀 斯 何 變 也 此 後 之 事 吾 猶 有 耳 如 其 不 悛 不 唯 生 不 通 信 抑 亦 死 不 瞑 目 汝 其 唯 意 爲 之 吾 不 再 言. 466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은 범위에서 수행되었다. 수많은 제자백가 문헌들이 출간되면서 선진양한의 사유와 문장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겨났고, 이를 통하여 송대 주자학( 朱 子 學 )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바탕으로서 고학의 학술경향이 마련되었다. 송대 학술을 넘어서 선진양한 학술에 대하여 관심 갖는 풍조는 학술 전반에 있어 서 고( 古 ) 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井 上 進, 2002: 281-319).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본 글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이들은 조선과 일본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던 왕세정( 王 世 貞, 1526-1590)과 이 반룡( 李 攀 龍, 1514-1570)과 같은 진한고문파 문인들이었다.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조선에서 허목과 윤휴( 尹 鑴, 1617-1680) 및 이를 계승 한 이익의 성호학파, 정약용 등이 이 명대 고학풍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학맥 에 속해 있다면,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와 그 제자들이 대표적인 인물들이 었다. 이들은 우주와 세계를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이론체계로 바라보기보다 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논의들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비판적이었다. 가령 오규 소라이는 형이상학적인 음양 오행론을 비판하였고, 실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일에서 유학의 도를 찾고자 하였다( 寺 澤 捷 年, 2013: 79-82). 정약용은 맹자요의( 孟 子 要 義 ) 에서 주자학의 형이상학이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고서, 이를 근거로 선진 유학( 先 秦 儒 學 )의 본의를 되살리고자 하였다. 24) 이렇게 주자학의 형이상학이 갖는 추상성을 배제하고 파악할 수 있는 구 체적인 사물과 사실에서 진정한 유학적 고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경향은 의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대 이후에 이루어진 금원사대가에 대한 비판은 고의 의미를 새롭게 회복하려는 명대의 복고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사실 금원사대가에 대한 비판은 송학이 구축한 주자학적 형이상학의 붕괴와 그에 대한 명나라 학술의 대응이라는 점 24)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二 集 經 集 第 六 卷 孟 子 要 義 盡 心 第 七 盡 其 心 者 知 其 性 章, 所 謂 始 於 一 理 散 爲 萬 殊 未 復 合 於 一 理 也 此 與 趙 洲 萬 法 歸 一 之 說 毫 無 不 差 蓋 猶 宋 諸 先 生 初 年 多 溺 於 禪 學 及 其 回 來 之 後 猶 於 性 理 之 說 不 無 因 循 故 每 曰 佛 氏 彌 近 理 而 大 亂 眞 夫 旣 曰 未 近 理 則 其 中 猶 有 所 取 可 知 也.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67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Unschuld, 2010b: 197). 그렇다면 그 대응은 어떠 한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우선 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그 이론들이 갖는 추상성을 걷어내고 구체적인 상황, 그 자체에 착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재발견되었던 것은 한대 장중경의 상한론 이었다. 중국에서 상한론 이 송대 이후 다시 부각되면서 의학의 복고운동이 일어났 던 것은 송대 주자학에 대한 반성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명말청초 시기였 다. 25) 대표적인 인물과 저작으로는 방유집( 方 有 執, 1523-1593)의 상한론조 변( 傷 寒 論 條 辨 ), 유창( 兪 昌, 1585-1665)의 상한상론편( 傷 寒 尙 論 篇 ), 의문 법률( 醫 門 法 律 ), 황원어( 黃 元 御, 1705-1758)의 상한현해( 傷 寒 懸 解 ), 가금( 柯 琴, 1662-1735)의 상한론주( 傷 寒 論 注 ), 상한론익( 傷 寒 論 翼 ), 상한부익 ( 傷 寒 附 翼 ) 등이 있었다( 寺 澤 捷 年, 2013: 7-8; 조기호, 2008: 204). 요시마스 토도도 넓게 보면 이러한 중국의 의학복고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물론 이 러한 의학의 복고운동이 명대 의학체계의 전체 변화인 것으로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명대에도 금원사대가의 학술적 전통은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던 것이 다( 嚴 世 芸, 2011, 531-537). 하지만 분명히 이전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상한 론 인식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변화의 모습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26) 본 글은 이러한 질적 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내경학이 오장육부에 음양오행의 기호를 선험적으로 부여하고, 그것의 전 체적인 조화와 균형 속에서 전체가 부분을 통제한다는 구조적인 인간 몸에 대 한 이해를 가졌다면(김희정, 2008: 213-283), 상한론 의 의학정신은 이와는 구분되었다. 상한론 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해와 논란이 있지만, 상한론 이 내경학과 크게 달랐던 점은 몸을 음양오행이나 오운육기처럼 형이상학적 25) 중국에서는 11-12세기에 제1차 상한론 의 유행이, 16-17세기에 제2차 상한론 의 유행이 있었다고 한다(조기호, 2008: 204). 26) 상한론 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데에는 의학의 복고운동 이외에도 명말청초 시기 전염병 의 유행도 그 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1408년부터 1643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전국적 인 역병이 유행하였다고 한다(김기욱 외, 2006: 252). 468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인 이론의 구조물로 전제하지 않고서 주로 증상을 정밀히 관찰하고 이를 치 료하는 약을 처방하는 것에 집중하였다는 점이다(야마다 게이지, 2002, 169-171; 김용옥, 1993: 132-135; 박경모 최승훈, 1995: 289). 상한론 은 변증시 치( 辨 證 施 治 )에 가장 충실한 임상의학서였던 것이다. 병의 증상과 그 병을 치료하는 약재와 처방 그 자체에 착목한다는 점에서 상한론 은 그 증상을 치료하는 약( 藥 )의 성( 性 )과 능( 能 )을 명확히 규정하는 본초학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경학과 상한론 의 차이를 논하는 데 있어서 약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는 각각의 이론 체계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달랐는가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서진( 西 晉, 265-317)의 황보밀( 黃 甫 謐, 215-282)이 이윤( 伊 尹 )이 성인과 버금가는 재주로 탕액( 湯 液 ) 을 지었고 장중경은 이윤의 탕액 을 넓혀서 십수 권의 책 을 지었다 27) 고 한 것은 상한론 이 가졌던 본초학과의 관련성을 말해준다(야 마다 게이지, 2002: 170-171, 175-176). 무희옹( 繆 希 雍, 1546-1627)이 자신이 저술한 본초학 문헌 신농본초경소( 神 農 本 草 經 疏 ) 에서 나는 일찍이 장중경의 법을 준수하여 모든 외사( 外 邪 ) 가 병이 됨을 다스렸으니 하나도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장중 경의 말이 아니라면 만세의 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28) 고 하면서 장중경의 상한론 을 극찬한 내용과 상한론 을 숭상한 요시마스 토도가 본 초학 문헌 약징( 藥 徵 ) 을 저술한 사실 또한 상한론 과 본초학의 상관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장중경이 체계적 상응이론(음양오행론)과 본초 학을 연결시키고자 했다는 논의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운슐트, 2010a: 135-136). 반면에 내경학 속에서 본초학은 의학행위의 주류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있었다. 신농본초경( 神 農 本 草 經 ) 은 원래 오행의 이론에 대해서 전혀 고려 27) 黃 甫 謐, 黃 帝 三 部 鍼 灸 甲 乙 經 序, 伊 尹 以 亞 聖 之 才 撰 用 神 農 本 草 以 爲 蕩 液 仲 景 論 廣 伊 尹 蕩 液 爲 十 數 卷 用 之 多 驗 近 代 太 醫 令 王 叔 和 撰 次 仲 景 遺 論 甚 精 皆 可 施 用. 28) 繆 希 雍, 神 農 本 草 經 疏 ( 上 海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1994) 卷 1 論 五 運 六 氣 之 謬 p. 317, 予 嘗 遵 仲 景 法 治 一 切 外 邪 爲 病 靡 不 響 應 乃 信 非 仲 景 之 言 不 可 以 爲 萬 世 法.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69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하지 않았듯이 본초학은 처음에 내경학 속에서 부수적이거나 거의 포섭되지 못했다(Unschuld, 2010b: 115). 음양오행의 체계적 상응을 전제로 인간 몸의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내경학의 사유 속에서 본초학과 같은 외부 적인 약에 의한 치료행위는 중시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외부적인 약에 의한 치료행위, 즉 본초학이 강조된다면 내경학이 갖는 인간 몸의 본원 적인 전체성과 완전성은 그 만큼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29) 이러한 측면에 서 내경학은 본초학이 배제된 의학(Medicine without Pharmaceutics) 이라 고 할 수 있었다(운슐트, 2010a: 127). 그러한 이유로 본초학은 내경학의 이 론체계, 즉 음양오행론과 불완전하게 결합하는 형태로 종속적인 생명력을 유 지할 수밖에 없었다. 30) 이점에서 음양오행과 오운육기론을 의식하지 않는 고대 의학인 상한론 의 복권은 내경학으로부터 본초학이 독립되는 이정표가 될 수 있었다. 31) 상한 론 의 복권과 함께 본초학 관련 문헌들이 명나라 말기에 증가하였던 것은 우 연이 아니었다. 명대에 등장한 이시진( 李 時 珍, 1518-1593)의 본초강목( 本 草 綱 目 ) (1578), 이후 등장하는 명나라 이중립( 李 中 立,?-?)의 본초원시( 本 草 原 始 ) (1612), 예주모( 倪 朱 謨,?-?)의 본초회언( 本 草 滙 言 ) (1624), 무희옹의 신 농본초경소 (1625)는 명나라 시대 본초학의 성과들을 보여준다. 파울 U. 운 슐트(Paul U. Unshuld)는 명말 청초 새롭게 본초학이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갑자기 사람들은 전에 몰랐던 사실, 즉 약효의 실 체를 설명하는 이론이 부적절함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다시 성분과 눈에 보 이는 효과라는 현실로 돌아왔다(운슐트, 2010a: 281). 이것은 명 말기 본초학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며, 이 시기 본초학에 29) 黃 帝 內 經 靈 樞 의 다음 언급은 이와 관련이 있다. 黃 帝 問 于 岐 伯 曰 余 子 萬 民 養 百 姓 而 收 其 租 稅 余 哀 其 不 給 而 屬 有 疾 病 余 欲 勿 使 被 毒 藥 無 用 砭 石 欲 以 微 針 通 其 經 脈 調 其 血 氣 榮 其 逆 順 出 入 之 會 令 可 傳 于 後 世 必 明 爲 之 法 令 終 而 不 滅 久 而 不 絶. ( 黃 帝 內 經 靈 樞 卷 1 九 鍼 十 二 原 第 一 法 天 ) 30) 이 문단의 서술은 (운슐트, 2010a: 127-133)의 내용을 참조하여 구성하였음. 31) 파울 U. 운슐트는 위 책에서 장중경의 상한론 에 대해서 의학이 배제된 본초학 (Pharmaceutics without Medicine) 이라는 표현을 썼다(운슐트, 2010a: 134-136). 470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관심 가졌던 이들이 상한론 을 숭상하고 오운육기설을 부정하는 의미들을 잘 설명해준다. 이제 번쇄한 형이상학적인 이론보다는 눈에 보이는 약의 효 과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32) 그러한 이유로 명청대에 송대 학술의 전 반적인 퇴조 속에서도 본초학은 유지 발전될 수 있었다(운슐트, 2010a: 294). 오운육기학설을 부정하고 장중경의 상한론 을 새롭게 주장한 무희옹의 신 농본초경소 와 요시마스 토도의 약징 은 이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오운육기설과 같은 연역적이고 선험적인 학술에 대한 부정이 새롭게 본초학 에 대하여 관심 갖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약용 또한 오운육기 설 비판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33) 이 세 사람들의 오운육기설 비판의 논 리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희옹 대저 오운육기( 五 運 六 氣 )의 설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한위( 漢 魏 ) 의 시대에 기원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장중경( 張 仲 景 )은 한나라 말기의 사람인데 그 서적에는 오운육기설이 실려 있지 않았다. 화 원화( 華 元 化 )는 삼국시대( 三 國 時 代 )의 사람인데 그 서적에는 또한 오운육기설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 전에는 월( 越 )나라 사람에게 도 그 문장이 없고 이후에는 왕숙화( 王 叔 和 )가 그 설을 드물게 말 하였으니, 나는 이 때문에 그것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 으로 치료( 治 療 )에 무익( 無 益 )하며 후대 학자들을 오류에 빠지게 할 것임을 알겠으니 학자들은 마땅히 깊이 그것을 분변해야 한다. 이후에 나의 마을 조소재( 趙 少 宰 ) 가문에 소장되어 있는 송 판( 宋 版 ) 중경상한론( 仲 景 傷 寒 論 ) 은 모두 북송( 北 宋 )대의 선판( 善 板 )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검토해보니 이 설이 실려 있 지 않았다. 육경치법( 六 經 治 法 ) 가운데 또한 아울러 한 자도 그것 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이에 나의 견해에 오류가 없음과 이것 이 결단코 상한( 傷 寒 )과 외감( 外 感 )을 다스리는 설이 아님을 명료 32) 이러한 깨달음은 사실 주자학의 형이상학적인 번쇄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을 모색했던 명나라 말기 학술계와도 닮아 있었다. 33)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六 卷 麻 科 會 通 六 醫 零 六 氣 論 一, 二, 三 ;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四 集 樂 集 第 一 卷 樂 書 孤 存 一 辨 吹 律 不 可 以 正 五 音, 譬 如 醫 者 僞 冒 五 運 六 氣 之 說 及 其 臨 病 而 投 藥 也 實 無 所 擧 而 措 之 者 又 安 所 用 之 哉.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71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하게 믿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중경( 仲 景 )의 법을 준수하여 모든 외사( 外 邪 )가 병이 됨을 다스렸는데, 하나도 잘 들어맞지 않는 것 이 없었다. 이에 중경의 말이 아니라면 만세의 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34) 요시마스 토도 (1) 음양( 陰 陽 )이라는 것은 천지( 天 地 )의 기운이니 의학( 醫 學 )에서 취할 것이 없다. 기타 육경( 六 經 )의 음양( 陰 陽 )과 같은 것 은 억지로 그것으로 설( 說 )을 만들면 안된다. 치료에 무익할 뿐 만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35) (2) 오행의 설은 우서( 虞 書 )와 홍범( 洪 範 )에 이미 보이며, 아래로 는 한( 漢 )나라 유학자들에 이르러 그것을 적극 말하였다. 소 문( 素 問 ) 과 난경( 難 經 ) 은 이것을 가지고 천하의 모든 이치를 총괄하고 사람의 모든 질병을 궁구하고자 하였다. 그 설이 마 치 부계( 符 契 )와 같았다. 비록 그러하나 요컨대, 모두 논설( 論 說 )의 말일 따름이다. 지금 그 설을 가지고 이 술( 術 )로 치료하 면 오류가 천리만큼이나 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오행( 五 行 ) 을 취하지 않는 이유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 이론을 늘리고 부 연하여 궁극적인 이치라고 과장하는데, 무용( 無 用 )의 무리라 고 말할 수 있다. 36) (3) 오운육기( 五 運 六 氣 )라는 것은 병( 病 )에 증험할 것이 없다. 사 천( 司 天 )과 재천( 在 泉 )을 살펴서 태과불급( 大 過 不 及 )을 미루어 보고 한열온량( 寒 熱 溫 凉 )을 정하여 주된 병을 살피고 맥에 응 34) 繆 希 雍, 神 農 本 草 經 疏 ( 上 海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1994) 卷 1 論 五 運 六 氣 之 謬 p. 317, 原 夫 五 運 六 氣 之 說 其 起 源 于 漢 魏 之 世 乎 何 者 張 仲 景 漢 末 人 也 其 書 不 載 也 華 元 化 三 國 人 也 其 書 亦 不 載 也 前 之 則 越 人 無 其 文 後 之 則 叔 和 鮮 其 說 予 是 以 知 其 爲 後 世 所 撰 無 益 于 治 療 而 有 誤 乎 來 學 學 者 宜 深 辨 之 後 從 敝 邑 趙 少 宰 家 藏 宋 版 仲 景 傷 寒 論 皆 北 宋 善 板 始 終 詳 檢 並 未 嘗 載 有 是 說 六 經 治 法 之 中 亦 並 無 一 字 及 之 余 乃 諦 信 予 見 之 不 謬 而 斷 爲 非 治 傷 寒 外 感 之 說 予 嘗 遵 仲 景 法 治 一 切 外 邪 爲 病 靡 不 響 應 乃 信 非 仲 景 之 言 不 可 以 爲 萬 世 法. 35) 吉 益 東 洞, 東 洞 全 集 ( 東 京 : 吐 鳳 堂 書 店, 1918) 醫 斷 陰 陽, p. 447, 陰 陽 者 天 地 之 氣 也 無 取 於 毉 矣 其 他 如 六 經 陰 陽 不 可 强 爲 之 說 非 唯 無 益 於 治 反 以 惑 人. 36) 吉 益 東 洞, 東 洞 全 集 ( 東 京 : 吐 鳳 堂 書 店, 1918) 醫 斷 五 行, p. 448, 五 行 之 說 已 見 虞 書 及 洪 範 下 至 漢 儒 熾 言 之 素 問 難 經 欲 由 是 以 總 天 下 之 衆 理 窮 人 身 之 百 病 說 之 若 符 契 然 雖 然 要 皆 論 說 之 言 已 今 執 其 說 施 之 匙 術 則 致 謬 千 里 是 吾 黨 所 以 不 取 也 後 人 增 演 其 說 以 誇 窮 理 可 謂 無 用 之 徒 也 已. 472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하는 것을 시험하는 것은 그 증험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우활 하다고 말할 수 있다. 37) 정약용 (1) 예기( 禮 記 ) 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과 같은 무리에 해야 하며, 사물을 비길 때도 또한 그러하다. 비교함에 있어서 그 무리가 아닌 것에 하면 곧 논하고자 하는 바의 본래 사물의 리( 理 )는 또한 반드시 그릇되고 명확하지 않게 될 것이 다. 오히려 육기( 六 氣 )의 가운데에 깊이 빠져서 망연히 그 두서를 가리지 못하니, 또한 어떤 병이 그것으로부터 말미암는 지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38) (2) 이것은 모두 잘못된 논의이다. 추연( 鄒 衍 ) 이후 참위가( 讖 緯 家 )들이 혼란스럽게 한 바이지 결단코 삼대( 三 代 ) [결( 缺 )] 물가 ( 物 家 )의 말한 바는 아니다. 39) (3) 의자( 醫 者 )들은 리( 理 )를 밝히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 기는데, 진실로 분배부회( 分 排 傅 會 )의 설을 어리석게도 맹신 한다면 해 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이다. 40) 이와 같이 무희옹 이후에 직접적으로 음양오행과 오운육기론을 비판하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무희옹은 장중경의 논의에 오운육기의 설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오운육기설은 한( 漢 )나라에서 위( 魏 )나라(220-265)로 이 어지는 즈음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였다. 요시마스 토도는 오운육기 설은 한나라 학자들에 의해서 활발히 논의되었으며, 이것은 우주자연의 논의 37) 吉 益 東 洞, 東 洞 全 集 ( 東 京 : 吐 鳳 堂 書 店, 1918) 醫 斷 運 氣, p. 448, 五 運 六 氣 者 無 驗 於 病 也 考 司 天 在 泉 推 大 過 不 及 定 寒 熱 溫 凉 按 主 病 試 應 脈 者 無 有 其 驗 可 謂 迂 矣. 38)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六 卷 麻 科 會 通 六 醫 零 六 氣 論 一, 禮 曰 儗 人 必 於 其 倫 儗 物 亦 然 儗 非 其 倫 卽 其 所 論 本 物 之 理 亦 必 謬 戾 而 不 明 矣 顧 乃 沈 淪 於 六 氣 之 中 茫 然 不 辨 其 頭 緖 又 何 病 繇 之 足 論 哉. 39)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六 卷 麻 科 會 通 六 醫 零 六 氣 論 二, 此 皆 謬 悠 之 論 鄒 衍 以 後 讖 諱 家 之 所 濁 亂 斷 非 三 代 ( 缺 ) 物 家 之 所 可 言 也. 40)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六 卷 麻 科 會 通 六 醫 零 六 氣 論 三, 醫 者 最 要 明 理 苟 於 分 排 傅 會 之 說 矇 然 奉 信 爲 害 不 淺 矣.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73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이지 인간 몸에 대한 논의로 볼 수 없음을 언급하였다. 가장 후기에 오운육기설을 비판한 정약용은 그만큼 가장 정리된 입장을 보 였다. 그는 (1)에서 사물과 사람의 범주를 명확히 해야 하니 육기론에 빠져서 사물과 사람의 범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2)에서는 오운육기설은 추연( 鄒 衍, BC 305-240 이후 발생한 것으로 하( 夏, BC 2070-BC 1600) 은( 殷, BC 1600-BC 1046) 주( 周, BC 1046-BC 256) 삼대시대의 논의가 아니라 는 점을 명확히 하였으며, (3)에서는 의사는 이치를 따라야 하며 견강부회하 는 설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들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첫째, 오운육 기설은 한 대 이후의 논설로 삼대시대의 논의가 아니며, 둘째, 우주자연의 논 의와 인간 몸에 대한 논의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며, 셋째, 이러한 이유로 의 사는 근거 없는 견강부회한 설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본초학의 발전은 이와 같이 우주와 인간 몸을 함께 통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음양오행, 오운육기 논의의 퇴조와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 본초학에서 병과 약의 효과 이외에 인간 몸에 대한 유기적이고 정합적인 설명 그 자체는 그렇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동안 절대시되었던 음양오행론과 오운육기 론의 대안적인 세계이해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본초학의 발 전 배후에 있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음양오행론과 오운 육기론은 단순히 의학이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변화와 생성을 총 체적으로 이해하는 사유의 틀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비판할 때는 그것에 대 한 대안도 함께 제시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어떻게 마련되었는가. 명대에는 주자학의 자연천에 대항하면서 고학의 학술경향에 영향을 받아 천( 天 )의 인격성에 주목하는 논의가 발전하였다. 명대 고학적 학술경향에 영 향 받았던 왕세정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허목, 오규 소라이 또한 천의 주재적 인격성에 주목하였다(조성산, 2014b: 167-184). 주 자학은 천뿐만 아니라 귀신( 鬼 神 )의 존재, 인간을 모두 이기론( 理 氣 論 ) 안에 서 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子 安 宣 邦, 2002: 127-174), 명대에 와서 는 이러한 사조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이기론을 넘어 인간과 다른 474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천과 귀신의 독특한 위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논의들이 다시 사회 저 변에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명나라에서 활발히 유통되었던 주재적 인격 천( 人 格 天 )과 유귀론( 有 鬼 論 )을 전제로 한 선서( 善 書 )의 유행은 이러한 변화 된 사조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酒 井 忠 夫, 2000: 85-86). 요시마스 토도의 사례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요시마스 토도는 음양오행론과 오운육기와 같은 물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이해 와 결별하고서 인격적인 천을 숭상하는 종교담론과 새롭게 만났다. 그는 오 규 소라이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천도( 天 道 )에 대한 종교적 함의를 수용하고, 오직 인도( 人 道 ), 즉 의술에만 집중하였다. 41) 앞서 언급했듯이 오규 소라이는 명대 고학적인 학술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시마스 토도의 의학철학 은 인간의 병을 증상을 통하여 이해하고, 이를 고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는 인격적인 하늘에 맡기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寺 澤 捷 年, 2013: 32-34; 館 野 正 美, 2014: 134-141). 하지만 이러한 결합이 요시마스 토도에게서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명대 고학의 영향은 조선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이 영향 속에서 허목, 윤휴, 이익, 정약용에게서는 천을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격적 인 존재로 상정한 사천학( 事 天 學 )의 학술경향이 도래하였다(조성산, 2014b: 167-184). 근기남인 성호학파의 선조는 북인계 인물들로서 앞서 언급하였듯 이 그들은 소옹 상수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자연히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이론 과 상당한 학문적 친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1623) 이후 북인정권의 퇴패과정에서 그들의 소옹학에 대한 관심은 사천학이라는 천의 종교성을 강 조하는 논의로 새롭게 대체되어 갔다. 그러면서 소옹학의 논의들은 언급되지 않거나 위축되어 갔다(조성산, 2014b: 167-184).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음 양오행과 오운육기와 같은 논의들도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천학은 이후 일부 성호학파 지식인들에 의해서 천주교 신앙으로까지 발전 41) 오규 소라이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오운육기의 설은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服 部 敏 良, 2007: 54-62).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75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하였으며, 이것은 오규 소라이가 언급한 천도의 인격적인 모습과 매우 흡사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성호학파와 오규 소라이, 요시마스 토도는 인격 적인 주재천 상정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특히 정약용은 성호학파 안에서 상제( 上 帝 ) 관념을 통하여 주재적인 인격 천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최정묵, 2014: 503-513). 정약용의 학문은 공자( 孔 子 ) 시대의 원시유학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수사학적( 洙 泗 學 的 ) 구 조를 지녔다(이을호, 1965: 102-104; 금장태, 2000: 25-36). 수사는 산동지역 의 수수( 洙 水 )와 사수( 泗 水 )를 지칭하며, 공자가 이 근처에서 강학 활동을 했 던 이유로 수사학은 공자시대의 원시유학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정약 용에게 있어서 고의 의미는 하 은 주 삼대시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앞 서 언급하였듯이 그가 주자학조차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 부정 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것을 보여준다. 42) 정약용은 성호학파 인물들 가운데 고 학의 본연에 가장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약용은 마침내 오운육 기설을 부정하였고, 기존의 사천학을 상제설로 좀더 구체시켰다. 다시 말해 서 정약용과 요시마스 토도는 오운육기의 부정, 고학과 사천학의 측면에서 매 우 흡사한 점들을 공유하였다. 정약용은 박취( 薄 醉 ) 라는 시에서 장중경의 학설을 익혔다고 하였고, 43) 그 를 의가지조종( 醫 家 之 祖 宗 )이라고 하였으며 44) 마과회통서( 麻 科 會 通 序 ) 의 초촬제가성씨서목( 抄 撮 諸 家 姓 氏 書 目 )에서 상한론 을 짧게 소개하였다. 45) 이와 함께 정약용은 무희옹과 이시진의 본초학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 42)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二 集 經 集 第 六 卷 孟 子 要 義 盡 心 第 七 盡 其 心 者 知 其 性 章, 所 謂 始 於 一 理 散 爲 萬 殊 未 復 合 於 一 理 也 此 與 趙 洲 萬 法 歸 一 之 說 毫 無 不 差 蓋 猶 宋 諸 先 生 初 年 多 溺 於 禪 學 及 其 回 來 之 後 猶 於 性 理 之 說 不 無 因 循 故 每 曰 佛 氏 彌 近 理 而 大 亂 眞 夫 旣 曰 未 近 理 則 其 中 猶 有 所 取 可 知 也. 43)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四 卷 詩 集 詩 薄 醉, 薄 醉 排 炎 瘴 長 風 憶 水 亭 性 豪 憐 摯 鳥 身 繫 羨 浮 萍 病 習 張 機 論 飢 抛 陸 羽 經 鄕 愁 與 國 計 朝 暮 視 滄 溟. 44)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四 卷 麻 科 會 通 四 吾 見 篇 蛔 蟲 第 八, 張 仲 景 醫 家 之 祖 宗. 45)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一 卷 麻 科 會 通 一 麻 科 會 通 序, 張 仲 景 傷 寒 論 名 機 光 武 時 人. 476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였다. 무희옹의 사진론( 痧 疹 論 )은 약성( 藥 性 )을 배열하고 그 의기( 宜 忌 ) 를 변별하였으니 가장 의거( 依 據 )할 만하다. 대개 무희옹과 이시진 은 본초학에 밝았고 깊이 약성을 알았던 까닭에 반드시 대탑입방( 對 搭 立 方 )할 필요가 없었으니 병을 다스림에 해가 없었다. 그 세운 바의 여러 방제는 또한 모두 정밀하고 새로워 취할 만하니 도습경 략( 蹈 襲 影 掠 )의 무리가 아니다. 46) 정약용이 말한 대탑입방( 對 搭 立 方 )과 도습경략( 蹈 襲 影 掠 )의 무리는 기본 적으로 의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기존 이론만을 베껴서 이용하는 자들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논의를 구체화해보면 당시 조선의 주류 의학이론이 금원사대가들의 내경 이론이라고 할 때, 정약용이 비판하고 자 한 이들은 기존 금원사대가들의 논의들을 그대로 묵수하는 자들이라고 추 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사례도 정약용의 고학 연구가 그의 본초학에 대한 관심에 어떻게 투 사되어 나타났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옛 문장을 베껴서 문장을 짓는 사람들 을 기존 처방만을 외는 사람들에 비교하였다. 기존 처방만을 외는 이들은 구 체적으로는 조선의 주류 의학이론인 금원사대가의 논의들을 베껴서 무비판 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학의 정신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본초 학에 대한 관심 또한 제고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정약용에게 본초학은 의학 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복암( 茯 菴 ) 이기양( 李 基 讓 )이 철교( 碓 橋 )의 우사( 寓 舍 )에서 소갈병( 消 渴 病 )이 들어 의원 또한 치료할 수 없었다. 내가 가서 위 46)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三 卷 麻 科 會 通 三 吾 見 篇 古 醫 第 一, 繆 仲 淳 痧 疹 論 分 列 藥 性 辨 其 宜 忌 最 有 依 據 蓋 繆 與 李 時 珍 明 於 本 草 之 學 深 知 藥 性 故 不 必 對 搭 立 方 而 無 害 於 治 病 也 其 所 立 諸 方 亦 俱 精 新 可 採 非 蹈 襲 影 掠 之 倫 也.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77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로하고, 인하여 그가 복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처방을 보고서 고하 기를, 의가( 醫 家 )에 약초가 있는 것은 마치 문장가( 文 章 家 )에 문 자( 文 字 )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의술을 행하는 자들은 약초 의 뿌리마다 그 약성( 藥 性 )을 분변하여 그 병에 맞게 사용하였는 데, 후세에는 이미 만들어진 처방[ 成 方 ]을 고집하고서 전체의 병에 투약하니 의술이 이 때문에 더럽혀졌습니다. 옛날 문장을 하는 자 들은 글자마다 그 뜻을 분변하여 문리에 맞게 사용하였는데 후세 에는 이미 이루어진 글귀[ 成 句 ]를 외어다가 그 전체를 표절하니 문 장이 옛 것만 못합니다 했더니, 복암이 베개를 기대고 신음하다 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자리를 바로 하고 용모를 가다듬고서 내 손을 잡고는 큰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말이 이처럼 이치에 맞는 가! 자네의 말을 들으니 내 가슴이 시원하여 한 첩의 청량산( 淸 涼 散 )보다 낫네 하였다. 47) 정약용은 의가( 醫 家 )에 약초가 있는 것은 문장가에 문자가 있는 것과 같다 고 전제하였다. 그는 옛날에 의사들은 약초의 약성을 하나하나 상세히 분변 하여 그 병에 알맞게 사용하였는데, 후세에는 형식화된 처방으로 전체의 병에 대응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에게 옛날의 문장 하는 이들이 글 자 하나하나를 터득하여 사리에 맞게 구사하였던 데 비해서 근래 문장가들은 옛 문장을 글귀채로 그대로 표절모의하여 결국 좋은 문장을 구사할 수 없게 된 사실과 맥락상 같았다. 정약용에게 있어서 옛 것을 그대로 베끼는 의고적( 擬 古 的 ) 문장가들과 옛 처방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후세의 의원들은 같은 존 재들이었다. 다음의 글도 이러한 정약용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옛날에 의학( 醫 學 )은 본초( 本 草 ) 를 전문으로 습득하였다. 모든 초목의 성( 性 ) 기( 氣 ) 독( 毒 ) 변( 變 )의 법제를 강구( 講 究 )하여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병에 임하여 약을 씀에 있 47)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三 卷 蒙 學 義 彙 序, 昔 茯 菴 李 子 於 碓 橋 寓 舍 病 消 渴 醫 且 不 能 治 余 往 而 勞 之 因 觀 其 所 餌 諸 方 而 告 之 曰 醫 家 之 有 藥 草 猶 文 家 之 有 文 字 古 之 爲 醫 者 根 根 而 辨 其 性 則 用 中 其 病 後 世 執 成 方 而 投 其 全 醫 之 術 以 汚 古 之 爲 文 者 字 字 而 辨 其 旨 則 使 中 其 理 後 世 誦 成 句 而 勡 其 全 文 莫 猶 古 也 茯 菴 方 據 枕 呻 吟 忽 起 身 危 坐 整 容 握 余 手 而 大 言 曰 何 言 之 中 理 至 是 也 聞 子 之 言 吾 胸 爽 豁 勝 一 貼 淸 涼 散 矣. 478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어서 혹 병이 하나의 중함만이 있어서 하나의 성( 性 )을 가진 하나 의 독( 毒 )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하나의 재료를 사용하고, 혹은 병 에 여러 원인이 있어서 얽히고 맺혀서 풀기 어려운 것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조제해서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술도 정 밀하고 효력도 빨랐는데 후세에는 본초 를 익히지 아니하고 오로 지 고방( 古 方 )만을 왼다. 마치 팔미탕( 八 味 湯 )은 온보( 溫 補 )하는 것으로만 알고, 승기탕( 承 氣 湯 )은 양사( 凉 瀉 )하는 것으로만 알고 서 곧장 전방( 全 方 )을 들어서 마치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하는 것처 럼 하니, 어찌 하나하나 병에 적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소학( 小 學 )이 폐해지자 문장( 文 章 )이 일어나지 않고, 본초 가 어두워지 자 의술( 醫 術 )이 정밀하지 못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48) 고학을 숭상한 정약용의 학술은 아언각비( 雅 言 覺 非 ) 와 자설( 字 說 ) 에서 도 볼 수 있듯이 학문에 있어서 기초학습을 중시하였다. 49) 이는 위 인용문에 서 소학( 小 學 )이 폐해지자 문장( 文 章 )이 일어나지 않고 라는 말에 대응된다. 또한 그는 기초적인 학습 없이 기존 성리학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 고 그것을 진리인양 믿는 자들을 경멸하였고, 실제적인 경세의 일을 중시하 였다. 50) 이러한 학문태도는 의학에 대한 관점에서도 드러났던 것이다. 고학 을 통하여 기존 주자학의 형이상학 이론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던 그 가 형이상학적인 이론이 상대적으로 부재한 본초학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그의 본초학 관심에 내재되어 있었던 사 상적 맥락이었다. 한편, 명대 고학과 본초학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것으로 왕세정 과 이시진의 관계 또한 흥미로운 부분이다. 명대 고학풍의 중심인물들 가운 48)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卷 醫 說, 古 者 醫 學 專 習 本 草 凡 草 木 之 性 之 氣 之 毒 之 變 之 制 無 不 講 究 認 明 臨 病 用 藥 或 病 有 一 崇 可 以 一 性 一 毒 療 之 者 則 用 一 料 或 病 有 多 端 纏 結 難 解 者 卽 用 諸 料 劑 合 相 濟 故 術 精 而 效 捷 後 世 不 習 本 艸 專 誦 古 方 如 八 味 湯 知 爲 溫 補 承 氣 湯 知 爲 涼 瀉 直 擧 全 方 如 使 一 料 安 得 一 一 中 病 哉 故 曰 小 學 廢 而 文 章 不 作 本 草 晦 而 醫 技 不 精 云. 49)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二 卷 雅 言 覺 非 序 ;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卷 字 說. 50)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一 卷 五 學 論 一.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79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데 한 사람이었던 진한고문파 왕세정은 이시진의 본초강목( 本 草 綱 目 ) 의 편 찬을 돕고 그것의 서문을 써주었다. 왕세정은 이시진의 본초강목 에서 특히 이 저작이 갖는 격물( 格 物 )의 우수함과 박고( 博 古 )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 였다. 51) 이것은 그의 고학 정신과 본초강목 이 격물과 박고에서 만나고 있었 음을 보여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 이 명대 대표적인 진한고문파 문장가 왕 세정의 후원 속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고학과 본초학의 연관성을 보여준 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요컨대, 명대 고학의 발흥과 상한론 의 복권은 본초학의 발전과 연결되었 고, 내경학과는 다른 의학철학이 명대 이후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음을 의미 했다. 증상에 따른 약에 의한 치료 그 자체를 강조하는 상한론 과 본초학의 발전은 결국 체계적 상응을 강조하는, 즉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와 같은 내경 학의 이론체제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고학을 통한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의학 분야에서도 내경학의 형이상학 적인 이론체계보다는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상한론 과 그에 따른 본초학에 대한 관심을 이끌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송학의 형이상학적 담론이 퇴 조하는 명나라 시대였다. 명나라 고학의 학술풍조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던 성 호학파 인물들에게서 본초학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어 나 타났으며, 나아가 그것이 그들이 가졌던 경세학의 정신과 어떻게 부합했는가 는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4. 성호학파의 본초학에 대한 관심과 민간의료에 대한 문제의식 앞서 언급했듯이 본초학은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고학의 학풍을 배경으 로 기존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조선 51) 李 時 珍, 本 草 綱 目 (( 文 淵 閣 ) 四 庫 全 書 772, 臺 灣 : 商 務 印 書 館, 1983) 本 草 綱 目 序 ( 王 世 貞 撰 ), 玆 豈 僅 以 醫 書 覯 哉 實 性 理 之 精 微 格 物 之 通 典 帝 王 之 秘 菉 臣 民 之 重 寶 也 予 方 著 弇 州 巵 言 恚 博 古 如 丹 鉛 巵 言 后 乏 人 也 何 幸 覩 玆 集 哉 玆 集 也 藏 之 深 山 石 室 無 當 盍 鍥 之 以 共 天 下 後 世 味 太 玄 如 子 云 者. 480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의 성호학파에게서도 보였다. 성호학파의 본초학에 대한 문제의식은 우선 기 존 금원사대가의 화제( 和 劑 )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익은 다 음과 같이 말했다. 후대에는 주진형( 朱 震 亨 ) 공(정)현( 龔 ( 廷 ) 賢 )의 무리가 가장 경 험이 뛰어난 의사들로 일컬어지는데, 벌여놓은 여러 처방들이 점 차로 번다( 繁 多 )한 데 이르렀으니, 비유하면 마치 말이 간결하지 못하면 더욱 미란( 迷 亂 )함이 드러나서, 그물을 넓게 펼쳐 놓고 토 끼를 잡으려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52) 이익은 주진형과 공정현( 龔 廷 賢, 1522-1619)의 처방이 지나치게 번쇄하여 간결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에는 금원사대가의 체계적 상응이론에 대 한 직접적인 비판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익은 그들의 처방이 번다 하여 핵심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음은 인지하였다. 그러면서 이익은 단순하고 간결한 고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 요점을 아는 자의 말에 이르기를, 약제( 藥 劑 )의 발생은 삼방( 三 方 )에 불과하였으니 기( 氣 )에는 사군자탕( 四 君 子 湯 )을 쓰고, 혈 ( 血 )에는 사물탕( 四 物 湯 )을 쓰며, 담( 痰 )에는 이진탕( 二 陳 湯 )을 썼 는데, 모두 한 처방에 네 가지 재료였다. 후인들은 증손좌사( 增 損 佐 使 )하여 경하고 중한 허다한 약재를 두고, 진찰은 정밀하지 않아 약 쓰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고, 약재를 조합하는 것은 많고 선별하 는 것은 적으며, 근본은 버리고 겉만 화려하게 하여 8에서 9는 허망 할 따름이었다. 산야( 山 野 )에서 넓게 그물을 쳐놓고 한 마리의 토 끼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나는 전적 ( 典 籍 )들이 많아지자 유도( 儒 道 )가 쇠퇴하였고 의서( 醫 書 )가 번잡 해지자 방술에 미혹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밀히 살피고 가리지 못 하고는 의술이 무익( 無 益 )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는 물이 불을 이 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53) 52) 李 瀷, 星 湖 僿 說 卷 17 人 事 門 本 草, 後 來 朱 震 享 龔 賢 之 屬 最 稱 折 肱 其 鋪 列 衆 方 漸 至 繁 多 比 如 言 辭 之 不 簡 逾 覺 迷 亂 有 廣 絡 獲 兎 之 失 也. 53) 李 瀷, 星 湖 僿 說 卷 14 人 事 門 醫, 知 其 要 者 之 言 曰 藥 劑 之 起 不 過 三 方 氣 用 四 君 子 血 用 四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81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이 글에서 이익은 옛날의 화제는 기( 氣 )에는 사군자탕( 四 君 子 蕩 ), 혈( 血 )에 는 사물탕( 四 物 蕩 ), 담( 痰 )에는 이진탕( 二 陳 蕩 )을 썼는데 모두 한 처방에 네 가지 약이 들어있어 단순하였는데, 이후 화제가 복잡해지고 진단이 정밀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대부분 효과가 없이 허망하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약의 주치( 主 治 ) 개념이 흔들리자, 결국 군신좌사( 君 臣 佐 使 )라는 명분으로 미 봉책의 약들과 처방만이 횡행하게 된 당시의 세태를 이익이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익은 서적들이 많아져서 유도( 儒 道 )가 쇠퇴하게 되고 의서( 醫 書 ) 가 번잡해져서 방술( 方 術 )에 미혹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익 은 동의보감 의 단점으로 번쇄함 을 들기도 하였다. 54) 물론 동의보감 또한 단방( 單 方 )에 의하여 치료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 고, 이것은 동의보감 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였다(오재근, 2013: 9-26; 오 세창 김광중, 2006). 하지만 흥미롭게도 허준은 약은 간요한 것을 귀히 여 긴다( 藥 貴 簡 要 ) 는 단방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하면서 장중경의 상한론 을 비교적 올바른 예로 들었다. 허준은 상고시대에는 약 하나로 병 하나를 치료 하였으며 한나라 장중경에 이르러서도 약이 불과 3-5가지를 벗어나지 않았지 만 후세에 이르러서는 2-30가지의 약재를 사용하고도 그치지 않았다 고 하였 던 것이다 (오재근, 2013: 2). 이를 통하여 보면 동의보감 의 단방에 대한 문 제의식은 결국 장중경의 상한론 과 같은 고방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귀속됨 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익이 동의보감 을 번쇄하다고 일컬은 것 은 이익이 가졌던 기본 관점이 고방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55) 物 痰 用 二 陳 皆 一 方 四 料 後 人 增 損 佐 使 有 許 多 輕 重 之 劑 診 視 不 精 用 料 不 審 多 合 而 少 擇 舍 本 而 治 標 八 九 是 妄 耳 何 異 於 廣 絡 原 野 冀 獲 一 兎 耶 余 謂 典 籍 廣 而 儒 道 衰 醫 家 繁 而 方 術 迷 不 能 審 擇 以 醫 爲 無 益 者 是 謂 水 不 能 勝 火 者 也. 54) 李 瀷, 星 湖 僿 說 卷 28 詩 文 門 武 經 經 傳, 近 世 醫 官 許 浚 作 醫 鑑 先 著 內 經 靈 樞 之 類 如 小 學 首 二 篇 次 著 丹 溪 河 間 說 如 小 學 之 嘉 言 後 載 治 病 之 實 及 諸 方 如 小 學 之 稽 古 善 行 模 則 得 矣 但 務 多 而 義 略 人 又 病 之 聞 北 使 之 至 多 齎 以 還 上 國 人 亦 必 審 之 矣. 55) 이 밖에도 향약집성방( 鄕 藥 集 成 方 ) 원서( 原 序 )와 최명길이 쓴 향약집성방 발문에서도 단방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강연석, 2006: 44-45). 이것은 단방에 대한 문제의식이 오랜 연 원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명대 고학의 영향으로 조선후기 성호학파 482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정약용에게서도 이익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발견되었다. 정약용은 고방은 모두 간략하여 혈에는 사물탕을, 기에는 사군자탕을, 담에는 이진탕을 쓴다 고 하였다. 고방( 古 方 )은 모두 간략하여 혈( 血 )에는 사물( 四 物 )을 주로 하고 기( 氣 )에는 사군자( 四 君 子 )를 주로 하며 담( 痰 )에는 이진탕( 二 陳 蕩 )을 주로 하였다. 점점 약재를 첨증( 添 增 )함이 더해져서 많아지 면 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게 되었으니 증세에 따라 잡되게 다 스려서 도리어 원본을 상해하였다. 향촌은 단과( 單 科 )로써 전공( 專 攻 )하여 왕왕 효험이 많으니 약의 힘이 전일하기 때문이다. 56) 이것은 내용의 유사성으로 볼 때, 정약용이 이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가 짐작된다. 정약용은 시대가 내려오면 올수록 약이 증가되고 어지러워졌다 고 당대 의료환경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향촌에서는 단과전공( 單 科 專 攻 ) 으로 왕왕 효험을 보는 일이 있다고 적었다. 이는 약의 주치를 주장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이익과 정약용은 기존의 형식화된 화제가 아닌 좀더 간결하고 병에 적중하는 약의 조합을 찾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익은 본초학 자체에서부터 정확하고 간결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신농( 神 農 )의 본초( 本 草 ) 는 풀의 맛을 본 것이다. 만물은 결국 먹 고 마시는 것의 도구인 까닭에 그 맛이 중요하다. 그러나 초목의 뿌리 싹 꽃 잎의 모양과 색깔은 각각 다르니 이것으로 분별할 수 있다. 후세에 도홍경( 陶 弘 景 )이 신농의 유의( 遺 意 )를 얻어 물고 기와 금석( 金 石 ) 등의 본성을 분별해서 편찬하여 그 한 가지의 재 에 의하여 단방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었다는 본 글의 주장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고 학은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걷어내고 간결함과 구체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할 때 오랜 연원을 갖는 단방의 전통은 조선후기 고학의 학술경향에 의하여 다시 소환되어 강 조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6)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七 集 醫 學 集 第 六 卷 麻 科 會 通 六 醫 零 雜 說 七, 古 方 皆 簡 血 主 四 物 氣 主 四 君 子 痰 主 二 陳 漸 益 添 增 愈 多 愈 亂 隨 症 雜 治 反 傷 原 本 鄕 村 以 單 料 專 攻 往 往 多 驗 藥 力 專 也.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83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료에 허다한 파별( 派 別 )이 있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따라 서 진위( 眞 僞 )를 분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를 깊이 믿 지 않는다. 57) 이익은 각 초목의 뿌리, 싹, 꽃, 잎의 모양과 색깔에 따라서 맛을 잘 구별 하여 서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도홍경( 陶 弘 景, 456-536)은 한 가지 재 료에 그 용도를 여러 갈래로 분류하여 놓았으니 무엇을 좇아 참되고 거짓됨 을 골라낼지 모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이익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 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요시마스 토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도 흡사하였다. 대저 만물은 하늘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것을 성 ( 性 )이라고 이른다. 성은 오직 하나이고 그 능력 또한 오직 하나이 다. 이것을 양능( 良 能 )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그 다양한 능력이 있 음은 성이 나뉘어 갈라진 것이지 성의 근본은 아니다. 이것을 여분 의 능력이라 한다. 사람들이 여분의 능력에 현혹되어 성이 원래 많 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본초강목 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약의 주치( 主 治 )를 거론한 것이 매우 많았 다. 대저 주치라는 것은 성의 능력이다. 한 사물의 성이 어찌 이렇 게 많은 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58) 요시마스 토도는 일약일능( 一 藥 一 能 )의 원칙 속에서 약의 치료목표를 과 다하게 기술한 본초강목 의 번다함을 비판하였다. 앞서 이익이 한 가지의 재료에 허다한 파별( 派 別 )이 있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따라서 진위( 眞 僞 )를 분변할 수 있겠는가? 라고 비판한 부분과 그 논지가 같다. 57) 李 瀷, 星 湖 僿 說 卷 17 人 事 門 本 草, 神 農 本 草 嘗 其 味 萬 物 終 是 飮 食 之 道 故 味 爲 重 然 根 苗 花 葉 形 色 各 殊 所 以 能 別 也 後 陶 隱 居 得 神 農 之 遺 意 別 撰 魚 金 石 之 性 其 一 材 之 用 有 許 多 派 別 人 何 從 而 辨 出 眞 僞 故 余 未 之 深 信 也. 58) 吉 益 東 洞, 東 洞 全 集 ( 東 京 : 吐 鳳 堂 書 店, 1918) 藥 徵, p. 172, 夫 萬 物 生 于 天 也 故 天 命 之 謂 性 性 唯 一 也 其 能 亦 唯 一 也 謂 之 良 能 然 其 有 多 能 者 性 之 所 枝 而 岐 也 非 性 之 本 也 謂 之 嬴 能 人 之 眩 嬴 能 而 謂 性 多 能 者 多 矣 余 嘗 讀 本 草 擧 其 主 治 甚 多 夫 主 治 也 者 性 之 能 也 一 物 之 性 豈 有 此 多 能 哉. 484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사실 향촌에서는 번다하고 현학적인 의학이론을 논할 겨를이 없었다. 또한 값비싼 약재( 藥 材 )를 쓸 수도 없었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병을 치료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약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파울 U. 운슐트의 다 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본초학의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본초학은 이론적 해 석 없이도 잘 버텨왔다. 누구든 원하기만 한다면 나름의 본초이론을 생각하 고 따를 수 있었다. 이론의 타당성이라든지 정치적 요구와는 상관없이 누구라도 원한다면 개별약물이나 처방의 효과에만 기대어 치료할 수 있었다 (운슐트, 2010a: 294). 이것은 본초학이 민중의료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내면 에 가졌음을 말해준다. 장중경의 상한론 이 출현했던 역사적인 배경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 시기는 전란의 시기였으며, 그러므로 고상한 형이상적인 이 론보다는 신속히 병을 치료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더욱 절실하였다(야마다 게 이지, 2002: 171-173). 이렇듯이 본초학의 필요성은 재야의 열악한 민간의료 환경에서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실태를 이익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향촌 같은 곳에서는 전혀 의술이 없으므로 단지 어떤 물건으로 어 떤 병을 다스린다는 것을 들으면 단과( 單 科 )로 오로지 치료하여 왕 왕 효험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 약의 힘이 전일하기 때문이다. 근 자에 백합꽃 한 종류가 있었다. 흰 색깔이고 모양은 작은 병과 같 으며 여름 가물 때에 풍성하다. 어떤 의원이 목구멍 병에 사용하 여 문득 효험이 있었다. 방서( 方 書 )를 참고해 보았으나 이러한 말 은 없었다. 단지 백합은 지렁이다. 이것은 목구멍 병을 치료하는 것 이라고 운운하였다. 이에 이것으로 미루어보니 어린아이의 회 질( 蚘 疾 )을 치료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구하면서 좋은 처방 이라고 하였다. 이런 종류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또 월수( 月 水 )가 열( 熱 )을 다스리고 미역이 산부( 産 婦 )를 위한 좋은 약이 되 는 것과 같은 것은 동속( 東 俗 )의 중요한 처방이나 의서( 醫 書 )에는 보이지 아니한다. 이는 필시 저쪽에는 빠지고 이쪽에는 전해지는 것일 따름이다. 59) 59) 李 瀷, 星 湖 僿 說 卷 17 人 事 門 本 草, 如 鄕 村 絶 無 醫 術 只 聞 某 物 之 治 某 病 單 料 專 攻 往 往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85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이익은 시골에서는 전혀 의술이 없으므로 어떤 약재로 어떤 병을 다스린다 는 말을 들으면 곧 그 약재로 치료하여 효험을 보니 약의 효능이 전일하기 때 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의서( 醫 書 )에 기록되지 않는 월수( 月 水 )가 열( 熱 ) 을 다스리고 미역이 임산부에 좋다는 조선의 민간요법도 중요한 처방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익의 이 말은 의료환경이 열악한 민간에서 본초학이 어떠 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민간에서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풀들이 좋은 약재가 될 수도 있었다. 이용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세 한 의원이 약을 쓸 적에 단지 하나의 맛으로 하나의 증세를 치료한다. 작게는 오동나무 잎과 벼줄기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기 이한 효험이 많아서 사람들이 깊이 신묘하게 여겼지만 어느 처방 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병중에 우연히 본초강목 을 보고서 비로소 그 방법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개 본초강목 가운데에는 허다히 많은 품종에서 모두 이르기를 어떤 것은 어떤 증세에 합당하고 어떤 것은 어떤 중한 병을 치료 하기에 합당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세속 의원들이 배워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심장을 보충함에는 인삼이고 간화( 肝 火 )를 내 리게 하는 데에는 청피이고 신장을 따뜻하게 함에는 부자이고 폐 를 시원하게 함에는 석고라고 하고서 다른 것은 거론하지 않는 것 이 많으니 애석하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 유독 의술뿐이겠는가! 대 저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에는 각각 마땅한 바가 있으니 아무개는 예 를 관장할 만하고 아무개는 음악을 담당할 만하고 아무개는 무기 를 맡을 만하고 아무개는 무기를 주관할 만하고 해서 마치 증세에 대해서 약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서 취하는 바의 것은 문벌과 과거 급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오동나무 잎과 벼줄기라는 것은 일찍이 한 번도 시험을 당해 보지 못하게 되니 뭇 정사들이 아마도 병폐에 빠지는 것이 많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므 로 느끼는 것이 있어서 쓰기를 이와 같이 한다. 60) 多 驗 藥 力 專 也 近 有 百 合 一 種 花 白 色 狀 如 小 壺 夏 旱 時 方 盛 有 醫 者 用 於 喉 病 而 輒 效 考 諸 方 書 無 此 說 但 云 百 合 爲 蚯 蚓 也 此 其 所 以 治 喉 病 也 於 是 因 此 推 之 治 小 兒 蚘 疾 人 皆 來 求 以 爲 良 方 此 類 不 可 不 察 也 又 如 月 水 爲 治 熱 海 藿 爲 産 婦 聖 藥 東 俗 要 方 而 醫 書 不 見 是 必 彼 漏 而 此 傳 耳. 60) 李 用 休, 惠 寰 雜 著 卷 12 本 草, 近 世 一 醫 用 藥 只 以 一 味 治 一 症 微 而 至 梧 葉 稻 稈 之 類 多 奇 486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이용휴는 근세 한 의원이 약을 쓸 적에 다만 하나의 맛으로 하나의 증세를 치료하면서 약재로 사용한 것은 오동나무 잎, 벼줄기와 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음을 소개하였다. 이어 그는 그러한 치료법은 본초강목 에 연유한 것으로 여기에는 매우 많은 품종의 약재가 있고, 그 약재에는 각기 그것이 치료할 수 있는 병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음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그 는 최근에 조선의 의사들은 인삼, 청피, 부자, 석고와 같은 몇몇 약재에만 의 지하니 이는 수많은 인재들을 버려두고 오로지 몇몇 가문의 인물들만 등용하 는 세태와 같다고 하여, 당시 조선의 의료계와 사회를 함께 비판하였다. 이용 휴의 언급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의학의 문제를 사회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약초가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각각 균등의 지점들 을 가지고 있듯이, 모든 개인들도 국가에 균등히 공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본초학이 가졌던 의학적 의미와 함께 사회적 의미를 말해준다. 다음 정약용의 촌병혹치서 또한 일약일능과 주치의 개념을 통하여 민간 의료 환경을 개선하려는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내가 장기( 長 鬐 )에 이른지 수개월에 내 자식이 의서( 醫 書 ) 수십 권 과 약초( 藥 草 ) 한 상자를 부쳐왔다. 적소( 謫 所 )에 서적이 전혀 없 으므로 이 책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병이 들었을 때도 또한 결국에 는 이 약으로 치료하였다. 하루는 관인( 館 人 )의 아들이 청하여 이 르기를, 장기( 長 鬐 )의 풍속은 병이 들면 오직 무당으로 굿을 하고, 굿을 했는데도 효험이 없으면 오직 뱀을 먹고, 뱀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면 호연( 浩 然 )하게 죽어갈 뿐입니다. 공( 公 )은 어찌하여 공이 보신 것으로 이 궁벽한 마을에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십니까! 하기 에, 나는 말하기를, 좋다. 나는 그대를 위하여 그것을 하겠다 하 였다. 이에 의서 중에서 간이한 여러 처방들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驗 焉 人 甚 神 之 然 不 知 出 何 方 也 余 病 中 偶 看 本 草 始 覺 其 術 之 出 于 此 也 盖 本 草 中 許 多 諸 品 皆 云 某 當 療 某 症 某 當 治 某 崇 而 今 俗 醫 所 習 用 者 只 是 補 心 人 蔘 瀉 肝 靑 皮 溫 腎 附 子 凉 肺 石 膏 而 他 則 多 不 擧 焉 惜 哉 雖 然 豈 獨 醫 也 夫 天 生 人 才 各 有 所 宜 某 可 掌 禮 某 可 司 樂 某 可 主 兵 某 可 理 財 如 對 症 生 藥 也 而 世 之 所 取 者 不 出 于 門 閥 科 第 之 外 然 則 彼 梧 葉 稻 稈 者 曾 不 得 一 試 而 庶 務 其 多 癏 矣 余 故 感 而 書 之 如 此 云.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87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겸하여 본초( 本 草 ) 에서 주치( 主 治 )의 약재를 채록하여 각 병( 病 ) 의 끝에 붙였으며, 보조 약재로서 네 개, 다섯 개 나열되어 있는 것 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생산되는 약물이나 희귀한 약품 들로 시골 촌부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책 은 모두 40여 장이니 간략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것을 이름하여 촌병혹치( 村 病 或 治 ) 라고 하였다. 약을 이미 간략하게 하고 반드시 주된 처방만으로 하였다. 아마도 그 효과를 취하는 것이 전 일하고 신속하지 않겠는가! 61) 그는 병의 증상에 맞는 주치의 약재를 가려 뽑아서 간략한 처방집을 만들었 으니 그 효과가 전일하고 빠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주치의 약재를 골라서 제 시한 점은 병 치료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정약용의 촌병혹치 는 주치를 통한 화제의 간결함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재를 사용하여 민 간의료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성호학파가 본초학에 대해서 가 졌던 민간의료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총결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이 익과 정약용은 본초학이라는 학문 자체보다는 본초학이 가졌던 사회적 의미 와 역할에 더욱 주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컨대, 이익과 정약용은 당대 의술이 지나치게 번쇄하고 기존 화제,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조선의 주류 의학담론이었던 과거 금원사대가의 화 제만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주치에 해당하는 약재를 통하 여 간결한 화제를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약재 하나하나의 특성을 상세 히 알아야 했으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본초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병에 맞는 주치의 약재를 정확히 알아낸다면 의료 환경이 열악한 향촌사회에서 의 료비용은 현격히 절감될 수 있을 것이다. 향촌사회에서는 사실 현학적인 의학 61)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第 一 集 詩 文 集 第 十 三 卷 村 病 或 治 序, 余 至 鬐 城 之 數 月 家 兒 寄 醫 書 數 十 卷 及 藥 草 一 籠 謫 中 絶 無 書 籍 不 免 以 是 書 寓 目 有 病 亦 遂 以 是 藥 療 之 一 日 館 人 之 子 請 曰 鬐 之 俗 得 病 唯 巫 禳 禳 而 不 驗 唯 食 蛇 蛇 而 不 效 浩 然 長 逝 已 矣 公 盍 以 公 所 寓 目 者 惠 玆 僻 鄕 余 曰 善 吾 爲 若 爲 之 於 是 選 其 中 簡 易 諸 方 錄 之 兼 採 本 草 主 治 之 品 而 附 之 各 病 之 末 佐 使 列 四 五 者 不 錄 也 遠 物 稀 品 樵 蘇 之 不 知 名 者 不 錄 也 書 凡 四 十 餘 葉 可 謂 簡 矣 名 之 曰 村 病 或 治 藥 旣 簡 必 其 主 方 也 其 取 效 不 專 且 速 乎. 488 醫 史 學

조성산 : 조선후기 성호학파( 星 湖 學 派 )의 고학( 古 學 ) 연구를 통한 본초학( 本 草 學 ) 인식 이론을 논하거나 비싼 약재를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주변의 흔한 약재들을 통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이 마련되어야 했다. 본초학 은 이러한 향촌의 의료 환경을 개선시켜 주는 좋은 대안이었다. 이것은 본초 학에 대한 성호학파의 사회적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지향하였 던 경세학의 문제의식과도 통하였다. 성호학파가 의학논의에서 보여준 문제 의식은 기존 성리학 담론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상논의, 나아가 적극적인 경세학의 모색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과 거의 부합하였다. 5. 맺음말 명대에 형성된 고학적인 학술경향은 한문학과 경학 부분에서 조선과 일본 의 학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 주자학적 경전이해가 여전히 주 류였다는 측면에서 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학의 영향은 성호학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이고 두터웠다. 따라서 정도의 차 이는 있지만 조선과 일본에서 고학의 학술경향은 지식인들이 송학에 대한 비 판 작업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글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본 의학 분야도 이러한 비판 작업의 연장선 안에 있었다. 이 고학의 학술경향은 조선과 일본의 의학 지식인들로 하여금 금원사대가 의학이론을 비판하고, 새 로운 의학이론을 찾는 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오운육기론을 비판하는 의견을 제기하였고, 인간 몸의 형이상학적인 이해보다는, 병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 그 자체에 더욱 관심을 갖는 논의 또한 주장하였다. 이를 통하여 장중경의 상한론 과 본초학이 다 시 새롭게 의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 것 이 바로 일본의 고방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호학파의 경우, 여전히 주자 학의 영향력이 컸고, 고학의 영향은 일본 지식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 하였다. 의학에 있어서도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서, 고학으로서의 상한론 연 구는 비록 그러한 문제의식은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운동이나 학파를 통 제24권 제2호(통권 제50호) 457-496, 2015년 8월 489

CHO Sung-san : The Seongho ( 星 湖 ) School s Study of the Ancient Learning ( 古 學 ) and Its Influence on the Debate about Materia Medica in the Late Joseon Dynasty 하여 적극적으로 표면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한론 의 핵심사항, 즉 병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라는 의식 속에서 본초학에 대하여 관심 갖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본초학에서는 인간 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나 정합적인 이해가 그렇게 많이 요구되지 않았다. 오히려 병의 정확한 진단과 약의 효능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였다. 이렇게 볼 때, 본초학에 대한 관심은 기존 오운육기 중심의 의학 이론이 퇴조함을 의미하였다. 명나라 말기 무희옹은 오운육기설을 비판하였 고 그 대안으로 장중경의 상한론 과 본초학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요 시마스 토도 또한 오운육기설을 비판하였고, 상한론 을 중시하고 본초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정약용에게서도 보였다. 주자학의 형이상학 을 비판하고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 속에서 새로운 사상적 대안을 찾고자 했던 정약용이 오운육기설을 비판하고 본초학에 관심 가졌던 것은 고학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학을 통하여 송대 주자학을 비판하고자 하였던 성호학파 지식인들 사이 에서 본초학에 대한 관심은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이익, 정약용 등은 정확 하고 간결한 처방의 중요성을 중시하였으며, 민간의료 환경을 개선하려는 방 법으로 본초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인간 몸에 대한 복잡한 형이 상학적인 이론보다는 병의 정확한 진단과 그에 따른 약에 의한 치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본초학에 대한 관심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체 계에서 벗어나, 사물 사물의 구체성을 찾는 그들의 고학적인 학술경향과 궤 를 같이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성호학파의 본초학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지 향하였던 학술체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색인어: 성호학파, 이익, 정약용, 고학, 본초학, 장중경, 상한론, 요시마 쓰 토도 투고일: 2015. 06. 29 심사일: 2015. 07. 15 게재확정일: 2015. 08. 04 490 醫 史 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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