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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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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뉴스레터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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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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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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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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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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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석.hwp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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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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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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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2010 9월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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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016학년도 수시모집 전형별 면접질문(의예과포함)(최종 ).hwp

한반도포커스_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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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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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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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아산서평모임 1회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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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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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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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영상기술연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뉴 뉴웨이브 세대란 60년대 일본의 영화사에서 과거세대와는 단 절된 뉴웨이브 의 흐름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뉴웨이브 세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뉴 뉴웨이브 세대로 불린다. 뉴 뉴웨이브 세대 감독들의 경향은 개인적이고 자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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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교육실습 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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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술회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 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Ⅰ) 날 짜: 2009년 11월 6일(금)~7일(토) 장 소: 그랜드힐튼호텔(홍은동) 공동주최: 동아시아사연구포럼, 동북아역사재단

초대의 말씀 가을 하늘이 더없이 높고 푸르고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저희 동아시아사연구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이번에 역사의 시각에서 본 동아 시아 세계 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를 하나의 세계 로서 인식하려는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나, 정작 동 아시아 세계 가 무엇인지, 그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또 그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뚜렷이 정리된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동 아시아 세계 의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 세계 를 단일한 실체로 전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동아시 아 세계 안에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 아시아 세계 의 정체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양성의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동아시아 세계 의 정체성이 제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저희는 동아시아 정체성의 문제를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동아시아의 밝은 미래를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이번 학술회의를 기획했습니다. 올해로 3회가 되 는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동아시아 지역의 관련 연구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공동 번영 과 평화를 위해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고, 또한 진정한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2009년 11월 동아시아사연구포럼 운영위원장 이태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정재정

Invitation It is that time of year when autumn skies are brilliantly blue and breathtakingly beautiful. The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and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re holding an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 on the theme "Identity and Diversity of the World of East Asia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There have long been discussions on viewing East Asia as a single 'world,' but there are no clear definitions of what the 'World of East Asia' is, what its identity is, and whether it really exists. For this reason, the conference aims to take an in-depth look at the identity of the 'World of East Asia.'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the 'World of East Asia' is presumed to be a single entity. The 'World of East Asia' embodies great political,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diversity. If an identity of the 'World of East Asia' exists, it probably is an aggregation of diversity. The identity of the 'World of East Asia' will be properly defined only when attention is given to this aspect of diversity. We are holding the academic conference so that it serves as an arena for discussions that will lead to a bright future for East Asia by addressing the matter of East Asia's identity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We sincerely hope that this third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 presents an opportunity for researchers in East Asia to come together to engage in communication and exchange of information for East Asian prosperity and peace. YI Taejin Chairperson,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CHUNG Jaejeong President,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November 2009

목 차 Keynote Speech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 步平 (BU Ping) 9 Panel 1-1 東아시아(Asia) 世界 에 관한 認識과 그 多樣性 中日近代不同历史经历和发展道路对东亚地区认同的影响 梁云祥 (LIANG Yunxiang) 5 4 日本近世史研究における 鎖国 の 見直しと東アジア 木村直也 (KIMURA Naoya) 3 6 60年来不同历史视角下的中国与东亚世界 姜义华 (JIANG Yihua) 7 8 近代韓國 東아시아 認識의 起源과 轉換 최덕수 (CHOI Deoksoo) 1 1 7 Panel 1-2 東아시아(Asia)의 多文化主義: 談論과 政策 多文化主義なき多文化共生 岩渕功一 (IWABUCHI Koichi) 1 7 4 韓國社會의 多文化 談論에 對한 省察的 接近 설동훈 (SEOL Donghoon) 1 6 9 다문화주의 를 거슬러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김영옥 (KIM Youngok 1 9 3 Panel 2-1 東아시아(Asia)의 域內移動과 아이덴티티(identity) 战后初期留日学生 华侨的选择和国家认同 王雪萍 (WANG Xueping 2 1 9 19世紀函館外国人居留地と華商 函館華僑から北海道華僑へ 小川正樹 (OGAWA Masaki 2 8 1 1940年代後半における日韓間の人の移動と米軍による監視 小林聡明 (KOBAYASHI Somei) 5 0 3 同順泰文書를 통해 본 近代轉換期 朝鮮華商의 他者認識 강진아 (KANG Jina) 3 4 1 Panel 2-2 歷史 記憶과 解析 中国的东亚意识与东亚叙述 徐秀丽 (XU Xiuli) 3 7 9 大东亚 想像 以近代中国话语为中心 雷 颐 (LEI Yi) 3 9 9 韓國 高等學校 敎育課程과 東아시아史 科目 장세윤 (CHANG Seiyoon) 5 4 歷史理解的單位 1930年霧社事件的記憶與詮釋 吳密察 WU Micha 4 7 9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步 平 ( 中国社会科学院近代史研究所)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_ 9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步 平 (中国社会科学院近代史研究所) < 目 次> 一 东亚共同体 与东亚地区的认同性 identity 二 建立跨越国境历史认识的努力 三 历史问题对话的不同层面 四 历史认识如何跨越国境 一 东亚共同体 与东亚地区的认同性 identity 日本民主党取得政权后 首相鸠山由纪夫正式向中国建议建立以欧洲联盟为模式的东亚共同体 而且表示 希望同中国建立兄弟般的友好关系 作为 构建的东亚共同体的焦点 中国也表示 致力 于同包括日本在内的东亚各国进一步深化东亚合作 朝着东亚共同体的目标不断迈进 值得重视的 是 中国的网络调查表明 支持中日共建东亚共同体 比率达到63 但是 也有对中日共建东 亚共同体表示反对的意见 认为中日之间还存在待解的历史遗留问题 也有人质疑 日本可能只是 借此提议缓解其国内经济压力 并非真心想与中国坦诚合作 对日本依然存有戒心 1) 其实 提出 东亚共同体 的主张 并非从鸠山首相开始 这些年来 关于在东亚或亚洲各国间建 立更密切的联系 协调地区经济 安全 政治等问题的主张有许多 2008年澳大利亚总理陆克 文就提出了打造类似欧盟的 亚太共同体 的构想 1991年 马来西亚前总理马哈蒂尔也提出过 东亚经济共同体 的设想 而在这些 构想 提出之前 亚洲地区其实也已经存在有亚太经合组织 东 盟10 3等相对成熟且机制化的合作模式 如果我们把眼光再向前看一些 还会发现 日本在上个世纪的前期 曾经以推翻英美的殖民统 治 解放东亚各民族为标榜 提出过建立以 大东亚共荣圈 为标志的以日本为中心的 大东亚秩序 的 主张 当然 当时还存在石原莞尔主张的 东亚同盟论 也有三木清 Miki Kiyoshi 尾崎秀实 Ozaki Hidemi 等人提出联合中国的社会主义革命 改革日本 进而以日本为首的东亚民众为主 体 对东亚进行社会主义改造的 东亚协同体论 的主张 2)等等 作为历史学者回顾各种各样关于 东亚共同体 的主张 固然存在对这些主张肯定或否定 抑或态 度积极或是消极的问题 但更重要的是应从总结历史经验与教训的角度 对建立东亚共同体的主张 进行深刻的思考 从区域合作的角度看 目前欧洲确实是走在前面 而亚洲相对落后 其实 中世纪晚期西欧经历 了剧烈的分裂的过程 基督教世界分裂成一个个 民族国家 民族国家 的形成导致基督教 西方帝 国 的瓦解和中世纪的结束 同时 它们之间的相互冲突就变成近代西欧国际关系的主题 同时也 1) 时 报报报报年9月18日 2) 日田 弘(Uchita Hiroshi) 三 御茶房 2006年版 第2

10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带动了世界的整体冲突 造成大战 从某种意义上说 欧洲近代史就是 民族国家 间的战争史 但 是 到了20世纪后期 欧洲却突然走向了联合 现在 欧洲联盟 EU 已经成为事实 然而 欧洲的模式却在亚洲 特别是东亚引起了种种关于同一性的争议 一种意见认为 欧洲存在 我们是欧洲人 We,Europeans 的自觉 即成功地创立了基于欧洲 的认同 而东亚却还没有建立这样的认同认识 3)也有的学者认为 欧洲认同的建立与欧洲的历史 相关 认为欧洲虽然有诸多国家 但是存在统一性的文明 即如法国历史学家基佐 Guizot,Franois Pierre Guillaume 所提出的 欧洲文明 这种 欧洲文明 可使欧洲诸国形成一个 超民族主义 的政治体系 保护欧洲共同的文化遗产 同时也存在避免争斗的途径 而对于欧洲历 史上发生的征战 则被解释为三个层面 区域 国家与民众 认同的冲突 4)赞成这一意见的人认 为 欧洲本来就与亚洲有很大的不同 我们是欧洲人 的同一性自觉在亚洲是十分微弱的 因此亚 洲不可能实现欧洲那样的联合 建立欧盟那样的共同体则也是 乌托邦 式的幻想 也有人对近代欧洲政治文化发展进行分析后认为 近代欧洲的发展一直平行地存在两条脉络 一条线是近代国家形态的出现 即 民族国家 成为欧洲的普遍现实 另一条线反映欧洲人相互 认同 感 即 欧洲观念 前者通向主权国家 后者通向所谓 欧洲统一 过程 这两条线都承接于中世 纪 所以 要了解近代 乃至当代欧洲的政治哲学 必须抓住这两个 观念 民族观念和欧洲观 念 或者称作 民族主义 和 欧洲主义 民族观念通向民族国家以及多民族的 联邦制国家 欧洲观 念通向今天的欧洲联盟(或欧洲一体化进程) 5) 赞成这一意见的人认为所谓 我们是欧洲人 的同 一性 其实是为了欧盟的建立而特意被突出出来的 无论对欧洲同一性的作用做如何的判断 许多人在对东亚存在如欧洲那样的构成认同性的历史基 础这一点上认识大体是一致的 这就是人们经常强调的东亚地区确实处于汉字文化及儒教文化为标 志的文明圈的影响之下 当然 许多研究证明 即使处于同一的文明圈中 各民族与国家的价值观 的差异仍然很大 甚至派生出不同的文明 所以仅以此来证明东亚的认同性仍然缺乏说服力 从某 种意义上 从历史上东亚秩序的演变过程中可以看出东亚认同建立的艰巨性与复杂性 历史上出现的各种建立 东亚共同体 的主张 其目的都在于建立维持东亚地区国际关系 解决地 区国际问题所适用的某种特定范式 亦即东亚秩序 在近代意义的国家产生之前 古代东亚地区占 主导地位的被费正清教授概括为 华夷秩序 the imperial tributary system 的国家间关系 尽管对 华夷秩序 的评价见仁见智 但在 华夷秩序 被打破后 东亚地区迄今为止仍没有建立过真正意义上 的可以称之为 共同体 的体制 华夷秩序 之所以能够成立 首先是因为有一个 强大的 和 富有的 中国 以及相对弱的周边 不 过 华夷秩序 并不意味 甚至也并不谋求对周边实行直接的统治 作为 中央 的中国希望以册封周边 国家君主的方式保持安定局面 间接地发挥其影响力 而周边的国家和民族则希望通过与中国的朝 贡关系来保障国家的安全与维持内政 外交的自主空间 这样的东亚秩序中不存在明确的支配从属 的位阶关系 与近代世界中的帝国主义对周边的支配关系不同 而且当时亚洲的一些国家 如日本 也仿照 华夷秩序 的模式 建立了以自己为中心的 小规模朝贡体制 希望以此改变中国中心的秩 序 被视为是对这一区域秩序的挑战 6)到了16世纪末期以后 以中国中心的秩序更受到来自周 3) 澤弘治 Kakizawa Hiroji アジアは一つ いまこそ 東海平究所編 東アジアに 共同体 はできるか 評論社 2006年 第224 230頁 4) 木畑洋一 Kihatake Youichi :洲的性 EC 载莲重彦 Hasumi Sigehiko 昌之 Yamauchi Masayuki 今 なぜ民族か 京出 1994年 第204 21 5) 陈民 周弘 洲文明 生活读新知联 2003年 第106 10 6) 日 浜下武志(amasita Takesh) 朝貢システムと近代アジア 岩波書店 1997年

1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_ 1 边国家的批判 小中心自身的认同性逐渐体系化 华夷秩序 被动摇了 以中国为中央的 华夷秩 序 虽然具有 帝国性 7) 但确实是当时东亚世界的基本秩序 这种秩序也许并不是理想的东亚国 际秩序的模式 但也不失为探索替代帝国秩序方式的一种思想资源 进入近代以后 日本借助与英国的同盟体制 在阻止俄国势力南下的同时 上升为地区的 中 心 在得到美国的支持后 吞并台湾 朝鲜 进而进入中国东北 而日本的这一兴起恰好伴随着 曾经处于地区中央位置的清朝的没落 于是东亚秩序被改变了 从表面上看 以主权观念为基础的 万国公法 所阐述的国际关系秩序的原则有取代东亚传统秩序的倾向 各国至少在形式上具有平等 的地位 但平等原则在实际上很少被遵守 占主导地位的是资本主义的动力及作为其强制手段的武 力 即 弱肉强食 的原则 日本提出推翻英美的殖民统治 解放东亚各民族 实际上是企图取代传 统的 华夷秩序 突出日本的主体性 建立大日本帝国的自给自足的体系 这就是以 大东亚共荣圈 为标志的以日本为中心的 大东亚秩序 其思想基础是日本在摆脱中华秩序过程中形成的亚细亚主 义 在发动了侵略中国的战争后 为了尽快结束持久的战争状态 和平 地建设东亚的新秩序 还 提出 东亚新秩序论 这种标榜 万国公法 和文明的东亚国际秩序 似乎是尊重主权原则的理想状 态 其实是由霸权国家来主导的 战后的冷战期间 东亚的国际关系长期从属于以美国与苏联为首的两大阵营的对立 而美国通过 经济 技术 军事合作等手段力图使东亚各国采用美国的社会体制 在经济方面 其实是部分复活 了日本为中心的垂直地域分工体制的大东亚共荣圈的经济联系网 在军事方面则建立以美国为首的 东亚安全保护秩序 总之仍然不可能建立关于东亚的认同 进入后冷战时期的东亚 在国际化与经济全球化的冲击下 其内部也在发生着重要的结构性变 化 中 日 韩三个东亚地区主要国家的实力对比发生了并正在发生着重大的变化 从东亚秩序的 角度看 今天的东亚与历史上东亚的最大不同就是已经不存在 一强称雄 的局面 当代东亚国家间 与民众间密切的往来与交流 正在突破建立共同体的三大障碍 即 地理障碍 历史障碍 与 同一 性障碍 8)对于建立东亚地区的认同来说 目前是公认的比较好的时机 但是也有人相对冷静地指 出 尽管日 中 韩三个经济大国间的经济相互依存的关系越来越密切 但仍然没有培育起 共同 体意识 尽管二战结束已经60年 但是在日中 日韩之间 围绕历史认识 教科书 靖国神社参 拜等问题 仍然存在政治性 感情性的鸿沟 阻碍了共同体意识的萌芽 9) 因此 在培育共同体意识方面 首先需要解决历史问题带来的障碍 而建立跨越国境的历史认 识 则是其重要的一步 二 建立跨越国境历史认识的努力 这些年来 关于历史认识的国际间对话是人们比较关注的题目 特别是德国与法国共同编写教科 书 1945年后的欧洲与世界 (Europe and the World since 1945) 的努力和结果被认为是 在这一方面比较成功的典范 10)与欧洲的情况相比 亚洲 特别是东亚地区的中国 日本 韩国等 7) 白永瑞 东的地域秩序 超越 走东共同体 思想 第3期 天下东 第12 白永瑞 东 的地域秩序 超越走向共同体导批社 2005年 首尔 8) 日一(Sintou Eichi) 平川均(Hirakawa Hitoshi 东共同体设 日经济评社 2006年 第 9) 日 谷口(Taniguchi Makoto) 东共同体 岩波 2005年 第4 10) Claudia Schneide:The Japanese History Textbook Issue Viewed through the Prism of European Experiences and the Current Situation in East Asi

12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国之间在历史认识问题方面的差异被凸显出来 那么 地处东亚地区的中日两国间是否可以进行历 史问题的对话 进而建立跨越国境的历史认识呢 其实 近年来中日韩三国学者间也在为跨越国境 的历史认识的建立而进行着有意义的尝试与努力 值得重视的是 东亚各国的多数历史学者和教师都已经注意在历史教育面向世界的方面进行积极 的努力 新的历史教育都力图把本国的历史放到世界历史的背景下 以本国历史作为世界历史舞台 上的一部分 尽量从世界性的视野认识本国历史的发展与变化 上个世纪90年代后期 日本一些大学分别组织了由日本 美国 中国 包括台湾 韩国学者 参与的关于 东亚的相互认识与误解 的研究 就东亚历史认识的问题点进行讨论 并提出了研究报 告 11) 同一时期 日本与韩国的教育机构及学术团体分别建立了共同研究的机制 如首尔市立大学历史 教科书研究会与日本东京学艺大学历史教育研究会组织的 日韩历史教科书讨论会 两国历史学与 历史教育的10个团体建立的 日韩历史学会共同历史研究讨论会 等 这些研讨会以日本在90年 代中后期出现的历史修正主义的思潮和编写 新历史教科书 的狭隘民族主义的动向 以东亚各国民 众间历史认识的相互理解为目标 进行了活跃的讨论 提出了东亚的共生与历史教科书的问题 12) 并分别提出了以共同研究为基础的成果 13) 进入21世纪后 东亚各国学者与教师的共同研究的局面有了新的进展 并且出现了新的成果 其中有代表性的 例如 从2002年开始 中日韩三国学者 教师和市民团体的代表组织每年一届的 历史认识 与东亚和平论坛 在讨论的基础上 建立了中日韩三国共同历史编纂委员会 经过3年的共同研 究与讨论 2005年在三国共同出版了 面向未来的历史 东亚三国的近现代史 14)这本书 以历史辅助教材的形式出现 在三国的中学都得到一定程度的利用 三国的学生还每年举办相应的 历史学习夏令营等交流活动 现在 三国学者与教师组成的共同委员会仍在继续进行努力 对第一 本共同编写的教科书副教材中的缺陷进行深入研究 在充分讨论与研究的基础上共同编写第二本和 第三本 2001年 日本东京大学教授三谷博等日本学者与在日中国学者刘杰教授等成立了 日中年 轻历史学者会议 讨论以历史问题为背景的中日两国的社会变动的情况 经过数年努力 200 6年在日本与中国同时出版了 跨越国境的历史认识 就中日历史认识中涉及近现代史方面的突 出问题 进行了深入的讨论与研究 15) 2007年 在经历了多次日本与韩国学者 教师间的共同研讨会后 东京学艺大学教授君岛和 彦与韩国学者共同出版了研究成果 日韩交流的历史 从古代到现代 16)此外 如日本广岛县 教职员工会与韩国大邱市教职员工会还组成了日韩共通历史教材制作组 共同编写了 朝鲜通信 使 从丰臣秀吉侵略朝鲜到友好 17)日韩两国的妇女团体组成共同历史教材编纂会 联合编写了 从女性的角度看日韩近现代史 等 11) 日 山室信 国际研讨会文集 日本 鲜的相认识与解的表象 1998年 上育学东亚 东史 表象 与对 2002年 二 21认识与国理解 韩 日本的 2004年 12) 日学会围绕的韩对 共研讨 大店 2004年 13) 日 和彦 的思想 日与韩的近代史 すずさ店 1996年 韩国日本 育的思想 すずさ 店 1998年 14) 面向史 东的代史 中文行12 13万部 日文行7万部文行55万部 15) 跨境认 中文版由出版社2006年出版 日文版京出2006年出版 16) 日 和彦等 交流史 古代代 明店 2007年 17) 共材制 通信使丰臣秀吉侵略到友好 日本明店 2005年出版韩 出版社2005年出版

3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_ 1 上述跨越国境的共同历史研究与编写教材的努力虽然表现形式不同 共同研究的深入程度不一 但建立跨越国境的历史认识的目标是共同的 即一是力图摆脱各国在世界历史的叙述中受西方中心 论影响较大的问题 提高关于亚洲叙述的比重 二是处理本国历史与东亚历史的关系 特别是思考 能否建立 超越本国历史框架的东亚史 的问题 在这里 超越 是一个很重要的概念 处理本国历史与东亚历史的关系 可以有不同的角度 比较常见的是从本国史开始向地域史扩 大 开放 这种方法被有些人归纳为 同心圆史观 但是这样的方法能否超越本国史是需要思考的 问题 提出所谓 同心圆史观 的人 其实仍然是在强调本地区为单中心的民族主义的历史认识 18) 针对这一现状 有的学者提出了 东亚视角 或 东亚史观 的概念 如有的韩国学者提出要从本国史 的解体开始 首先废除国史的名称 将韩国史与世界史合一 思考 世界史中的韩国史 与 韩国史中 的世界史 作为中间阶段 提出 东亚史 再实际一些 先思考 中日韩三国关系史 19) 超越本国历史 超越国民国家的历史记忆 认识共有的东亚历史 需要历史学家统合相互不同的 历史记忆 探索其中的关联性 思考其中的共同性 哪怕这种关联共同性十分微弱 也需要认真研 究 才能实现历史认识的共有 这一时期 由政府主导的历史共同研究也拉开了序幕 先是日本与韩国在2002年开始了共同 历史研究 在2005年告一段落后 于2006年开始了第二期的共同研究 中国与日本的共同 历史研究在2006年末开始 到现在进行了近两年 中日共同历史研究分为古代 包括中世纪 与近现代史两个组 拟定了共16个题目 古代史方面7个 近现代史方面9个 特别是近现代 史部分 不仅确定了题目 而且还确定了每一题目之下的关键词 双方都应根据共同的题目和关键 词撰写文章 进行讨论 所以使研究得到了进一步的深化 三 历史问题20)对话的不同层面 对于上述在历史认识问题上跨越国境的努力 各方评价大不相同 有的表示欢迎 有的感到不可 思议 甚至有的提出批评 表示反对 究其原因 是对历史问题对话的不同层面没有加以区分 东亚地区历史问题主要反映在政治 感情与学术研究三个不同的但又相互联系的层面 厘清产生 历史认识分歧与争论的不同层面 才有可能就历史问题进行对话 首先是政治层面的对话 即明确关于日本进行的殖民统治与侵略战争性质的政治判断 从20世纪初开始 日本与东亚主要国家的关系就处于极不正常的情况下 首先 日本通过三次 与韩国缔结的 协约 逐渐把持了韩国的外交 内政及军队 到1910年在朝鲜设立总督府而强 行实施了合并 在那里进行了殖民统治 进而又通过发动1931年的九一八事变和1937年的 卢沟桥事变 从侵占中国东北到发动全面侵华战争 那么 战后日本对这一战争是否进行了思考与 反省呢 从1065年日本与韩国缔结 基本条约 到1972年的 中日联合声明 或197 8年的 中日和平友好条约 的内容来看 日本政府已经做出了正面的积极表态 1993年担任 首相的细川护熙明确认为当年日本发动的战争是 错误的战争 是 侵略战争 1995年担任首 18) 曾担任育 的杜胜了突出的同 提出的 同 杜 新生 新之路 台北 三局 2004年 但正如 者的是的中心 的民族的实保持距离的 去化 的王晴佳 代湾述重 思想 台北 2006年 第120 12 19) 白永瑞 为东和平史 海文化 2004年 东亚述的可能性 城 2004年 东的地域秩 序 超越 走东共同体 思想 第3期 天下东 20) 里的中问 指存在于中两国就近认识域问 而不包与史 至今而或正在的中系中现实问 弃武问钓鱼海 田问

14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相的村山富市更发表了至今仍为历届日本首相所明确认可的关于战后50周年的谈话 21)如果不是 日本社会右翼与保守势力 尤其是部分保守议员及官僚对上述反省的态度进行激烈的反对 政治层 面的对话似乎是不必要的 但不幸的是 战后以来 日本政界始终在否认侵略战争的性质 特别是 五五体制 确立后 日本社会始终活跃着复古主义的暗流 肯定 大东亚战争 的历史观回潮现象极 为普遍 有些政治家口头上关于 反省 的表态与其对侵略战争的真正认识并不一致 甚至是对立 的 22)这种态度对后来的日本政治家的影响很大 80年代对战后40年政治的 总清算 思潮 9 0年代的修正历史认识和编写 新历史教科书 的 自由主义史观研究会 的活动 以及首相一再参拜 靖国神社的行动 与否认侵略战争责任的认识有密切联系 1995年105名自民党议员成立 历史研讨委员会 否认日本合并朝鲜的强制与不合法性 制造 南京大屠杀虚构论 声称 从军慰 安妇 属于商业性质等等 全面否认战争中日本军队的责任 从而否认殖民统治的非法与战争的侵 略性质 直到最近 日本自卫队航空幕僚长田母神俊雄否认日本是侵略国家的文章还受到奖励 这 些情况说明 政治层面的对话仍然是关于侵略战争性质的大是大非的原则判断问题 而这一层面的 对话主要是在政府与政治家的层面进行的 其次是民众层面的对话 即解决东亚各国民众因不对称的历史体验而产生的认识的差异 无庸置疑 东亚各国民众 包括日本民众关于战争历史的记忆 最深刻的侧面是战争中的被害 例如 在中国 关于侵略战争的关键词 有 南京大屠杀 731细菌部队 三光作战 等概念 而在韩国 有 从军慰安妇 创氏改名 殖民统治 等概念 而在日本 则主要有 广岛长崎的原子 弹爆炸 东京大空袭 冲绳作战 等 这些关于战争的历史记忆毫无疑问是事实 但是并不对 称 对于同时具有战争被害与战争加害双重角色的日本国民来说 如果被局限在 本国内部的狭隘 的视野 中 23)就会导致 加害意识的缺失 的情况 不可能了解同一历史过程对于战争被害国国民 的体验 如战后日本的反战 反核运动是日本民主主义与和平运动发展的重要的出发点 但在对加 害于其他民族的战争责任缺乏反省的情况下强调原子弹爆炸伤害的 被害体验 就不可能得到广泛 的理解 24) 战后50年的时候 日本广岛的原子弹爆炸资料馆的展览未能顺利地在美国展出 就 是典型的证明 当然 日本民众对中国与韩国民众的战争被害情况的不了解 与战争时期日本军国 主义政府的舆论控制有关 责任并不在民众方面 而战后以来两国民众未能在这一问题上进行充分 的交流与沟通 也导致了认识的差异 所以 由于不同的历史体验造成的两国人民的认识的差异 具有比较明显的感情因素 与解决政治层面的问题不同 需要民间的深入交往而达到相互理解 第三是学术层面的对话 主要解决两国历史学研究中因资料的使用 研究方法的差异及历史体验 的不同而产生的认识差异问题 东亚各国的近代历史都始于在西方列强的武力下的被迫 开国 但是此后各国在近代的发展过程 中产生了相当大的距离 各国学者对这一时期历史的学术研究方面也存在相当大的差异 中国对于 被迫向国际社会开放 出于对国家与民族命运与前途的忧虑 应对西方的挑战 争取中国的复兴 一次一次地改革和与列强抗争 又一次一次失败 忧患意识不断加重 与列强的冲突与矛盾不断尖 21) 熙(Hosokawa Morihiro)首相明确表示日发战是 侵战 是错战 村山富市 (Murayama Tomiichi) 首 相表示 在不久去一期策错 走战的道路 民陷入存亡的危机 殖治和侵给家 洲人带了巨大害和痛苦了 避免重错 我心待毫无史此再次示深刻的反省和由衷的歉意 时向史中受到的所国外人士表示深痛的哀 悼 日 内(Takeuchi Minoru 21世紀国総編 日交集 蒼蒼社刊 2005年 第440 4 41頁 22) 岸信介(Kisi Nobusuke)在时自辩 日本是 认为太平战争应反省 即使反省 也只是反战 日 原 彬久(Hara Yoshishisa )著 岸信介 权的政治家 岩波 第121 122頁 1995年 23) 日 大沼保昭(Onuma Yasuaki) 判战争任任 第14信堂(Tousinntou) 2007年 24) 日 吉田(Yoshita Hiroshi 現戦責任 店 1997年 第183 18

5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_ 1 锐化 中国学术界关注近代中国面对的 数千年来未有之变局 25)和对 不平等条约体系 的抗争 韩 国学术界同样关注在走向近代的过程中的主权的守护及外来的压迫与干涉 特别是在成为殖民地后 的独立运动与斗争 26)而这一时期日本以 脱亚入欧 的方式 摆脱了亚洲的卑陋 转移至西洋文 明 所以要 与西洋文明共进退 用西洋人对待 支那朝鲜 的方式处理与亚洲的关系 27)与中 国对待传统是以 中学为体 西学为用 的方式不同 日本批评依恋 古风旧惯 表面虚饰 的 不知 廉耻 认为 接受世界各国通行的道理 就会跨入国际法公约的门槛 28) 相对中国与韩国来 说 日本近代史研究关注从西方接受下来的 国际法秩序 所带来的利益 而到了1931至194 5年的战争期间 由于中日两国参加不同的国际集团 历史体验完全不对称 更形成了历史认识的 不同的思维逻辑 对于中国来说 无论这一期间发生什么事件 面对的战争对手基本是日本 所以 是抗日战争 而对于日本来说 九一八事变 与 卢沟桥事变 后 其对手是中国 而太平洋战争爆 发后 其主要的对手变成了美国与欧洲 最后期甚至有苏联 上述历史认识问题的三个层面 在现实中并非泾渭分明 相反 三个层面的问题相互交错 相互 影响 呈现出十分复杂的局面 这就是历史认识问题至今仍在困扰东亚同一性建立的重要的原因 四 历史认识如何跨越国境 在上述三个层面的历史问题中 政治层面的问题涉及到对侵略战争性质的认识 需要的是在大是 大非的原则问题面前毫不含糊的明确判断 而民众层面与学术层面的认识的不同是由于历史体验的 不同而产生的 解决这一问题需要促进两国民众间的相互沟通与理解和两国学者间的共同研究 所 谓历史认识跨越国境是指在这两个层面 而不是政治层面 当然 由于三个层面的问题相互渗透和 相互影响 实际操作起来相当复杂 如上所述 东亚各国国家与国民在近代以来 特别是战争期间的历史体验不同 而建立在这一不 同基础上的认识的分歧 往往会被保守的政治力量利用而上升到政治层面 战后审判与处理的不彻底导致的加害意识的缺失 使许多日本国民仅仅感到自己是军部的欺骗宣 传的牺牲品 但是对包括殖民地统治 从军慰安妇问题 南京大屠杀问题及细菌战和毒气战等日本 军队的战争犯罪 则了解不多 战争责任感迟钝 于是 否认这些战争责任的言行的狭隘民族主义 便可大行其道 在社会上有相当的影响力 煽动历史体验本来就不对称的两国民众的感情 产生狭 隘的民族主义情绪 使感情问题成为政治问题 同样 一些 实证研究 方面的问题本来属于学术研 究的层面 29)但是如果在研究过程中片面地强调某一个侧面 尽管在 考证事实 的名义下 能提供 一些史料来证实发生在这一历史断面的一部分事实的真相 但不可避免地被一些势力从政治层面加 以利用 而且考虑到民众间不对称的历史体验的背景 那种 实证研究 的结果不仅不能得到民众感 情上的接受 相反会加剧了国家间和民众间的对立 正如日本历史学者指出的 历史修正主义者以所谓的历史事实的认识不同 如被害者的人数问 题 为平台进行讨论 用历史认识问题取代责任问题 回避政治责任 一方面为掩盖政治目的而把 历史事实的问题作为研究对象进行操作 挑起认识问题的争论 另一方面用历史观 历史认识问题 25) 26) 27) 28) 29) 章 筹海防折 李文忠公 奏稿 21 李元淳等 韩史 日本明店 2005年第2版 泽吉 脱亚 泽吉全集 第10卷 第24庆应 岩行 泽吉 或随 泽吉全集 第20卷 第1庆应 岩行 包括 田中奏折 文件的存否问 南京大的者具量问等 这

16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取代政治性的意识形态的问题 用所谓 人类历史上有战争就有民众的伤害 为什么只要求日本负 责任 等言论回避战争责任 30) 比如关于太平洋战争的研究 有些日本学者不对发动珍珠港奇袭的责任进行深入的思考 却在寻 找发生战争的客观理由 美国的铁屑禁运 对日经济封锁政策等 更有甚者则坚持战前军国主义政 府宣扬的所谓 ABCD包围圈 的理论31) 另一方面则强调日本政府做出的避免日美开战的种种外交 努力 认为1941年12月的 赫尔备忘录 是美国拒绝谈判的最后通牒和开战的原因 这样的研 究表面上看是在学术层面 但是如果得出 这次战争是在忍无可忍的情况下被迫发动的 32)结论 就 直接触及民众的感情 甚至会影响国家关系了 日本社会近年来反映在战争观上的 复合型战争 观被强化 有的政治家在国会的答辩时就认为日 本 对中国有过侵略行为 对朝鲜半岛有过殖民统治 但对美英荷的战争 能否说是侵略战争 我 是有疑问的 33) 这种认识与战争期间日本军队鼓吹的对美国 法国 荷兰的战争 自存自卫战争 即 大东亚战争 的认识已经没有根本的区别 进而发展到认为1945年8月是苏联违背中立条约 的原则 非法地 侵占了 满洲 34)90年代中期是日本新旧政治体制和新旧政治家的转换与交接 期 日本的媒体 政界的论调确实发生了很大的变化 新生代政治家 往往认为 那场战争在我们出 生前十几年前就结束了 对过去战争的负疚感和赎罪感已不能与老一辈政治家相比 战后已经结 束 这一观念以及历史修正主义言论十分活跃 如鼓吹 已经结束的战后 要求对太平洋战争等进行 了 历史的重新评估 等 新民族主义更把矛头指向和平宪法 民主主义教育等一系列日本战后出现 的新现象 不承认日本政府对历史认识问题上的发言与行动 35)公然要求改写 战后 公然提出要 修改宪法第九条 在这样的背景下 民众感情层面和学术研究层面的问题也被打上了政治的烙印 不同层面的历史认识问题 需要思考不同的解决的方式 政治层面的问题与中日关系的结构性变化紧密相联 或者说是两国结构性变动的结果 随着结构 性的变动的延续和基本趋势的明朗化 特别是在大的国际环境下中日两国战略互惠关系的真正的建 立 政治层面的问题可能找到新的解决方法 作为学者 更需要关注感情层面与学术层面的历史认识的分歧与争论 在这一方面 学者应当通 过对资料的掌握和对问题的理解 以及共同交流的经验 首先在学术层面对中日历史认识中的分歧 与争论进行对话 在此基础上促进两国民众间的相互理解 而在这一方面 需要注意几个问题 1 厘清学术研究 民众感情与政治外交三层面的问题 把政治层面的问题作为学术研究的问题思考 就会失去方向 被导入无尽无休的争论 期望通过 经院式的讨论使民众感情层面的问题获得缓解 也是理想主义的表现 但对于本来是属于学术研究 领域的问题 或者是从学术问题衍生出来的涉及政治或感情方面的历史认识问题 学者也需要从学 术领域进行研究 注意不要使这些分歧扩大到两民众的感情层面 更不要转化为政治问题 对于已 经影响到两国民众的感情和两国政治外交的问题 如果存在学术因素的话 就应首先将其中的学术 问题研究清楚 同时思考从感情与政治的层面加以解决的途径 30) 日口雄三(Mizoguti yuuzou) 的京出 2004年 31) 即太平战争开前政府国媒体竭力的 美英中日圈 的这论仅是传并有任何实据照江口圭一(Eguchi Kaichi) 日本の侵略と日本人戦争 岩波ブックレット 1995 2 32) 太平戦への道 7 朝日新聞社 1963 这的代表著作 33) 日 朝日 1994年10月25日 34) 日 中村(Nakamura Masanori) 后史 岩波 2005年版 35) 日 荒井信一(Arai Sinichi) 历史和解是否可能 第282页 岩波书店 2006年

7 东亚的同一性与历史认识跨越国境 _ 1 2 注意民众的多数并未经历战争历史的背景 战争已经结束60年 直接经历过战争的人到现在越来越少 他们的战争体验对后代人的影响力 也越来越小 据统计 现在的人口中 战后出生的占70 以上 40 60岁的人 可能从上 一辈人的口中得到关于战争的部分感性知识 而20岁左右的青少年 甚至从父母的口中 也难以 得到关于战争的感性的认识 所以 对于多数人来说 应当避免在战争历史的认识上的空洞化与抽 象化的倾向 对于许多年轻人来说 战争是久远的过去 而对于自己这一代人来说 战争就像游戏 一样 只有在电脑的虚拟的空间中可以看到 36)持有这种空洞化与抽象化的战争认识的青年人 很 容易被引导到错误的道路上 特别是引向狭隘的民族主义的方向 为消除这种危险的倾向 学者要 引导青年一代对战争历史有更深刻和全面的了解 特别是要通过历史教育使青年一代扩大视野 从 更广阔的视角思考东亚的历史与未来 3 实现历史事实的共有 创造相互理解的条件 相互理解作为解决历史认识问题的手段 需要时间与条件 其基础性的工作 首先就是历史事实 的共有 只有在共有历史事实的基础上 才有可能建立跨越国境的历史认识 当然 即使是在本国 的同胞之间 实现历史事实的共有也有相当多的困难 解决这一问题 需要安静的学术环境与冷静 的学术思考 对于目前正在活跃地开展的东亚政府间与民间的学术交流 尽管评价不一 甚至也有 批评 但建立在 本国史观 基础上的封闭状态被打破 已是不争的事实 迄今为止的学术交流的重 点 首先就要解决历史事实共有的问题 随着学者层面的交流越来越密切 历史事实共有的程度越 来越深入 学术研究便越来越能够实现跨越国境 总之 跨越国境的历史认识的建立 不仅对于建立稳固的东亚各国间的关系有积极的意义 也不 仅是基于各自国家的外交战略的互惠要求 更重要的实现东亚 乃至亚洲及世界范围内的包含社 会 文化层次相互理解的基本条件 虽然不能期待一朝一夕的变化 但是必须扎扎实实地努力 36) 日山田(Yamada Akira)史修正主義の克服 高2001月第10 1頁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부핑(步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 목 차> Ⅰ. 동아시아공동체 와 동아시아 정체성 identity Ⅱ.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구축을 위한 노력 Ⅲ. 역사 문제 대화의 각 층위 Ⅳ.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Ⅰ. 동아시아 공동체 와 동아시아 정체성(identity) 민주당 집권 이후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EU를 모델로 하는 동아시아 공동 체 구축을 중국에 공식 제안하면서, 중국과 형제처럼 좋은 사이가 되어 동아시아 공동체에서 포커스 로서 역할하고 싶다고 밝혔다. 중국측도 이에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과의 협력을 한층 심화시켜 동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 계속 매진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에 찬성 의견이 63 로 나타난 중국 인터넷 여론 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 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미해결 역사 문제를 이유로 이에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를 빌미로 일본 국내의 경제 압력을 완화하려는 속셈일 뿐이라며, 일본이 진심으로 중국과 협 력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며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1)는 입장도 있다. 사실 동아시아 공동체 는 하토야마 총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아니다. 최근 동아시아 또는 아 시아 각국의 긴밀한 관계 정립이나 역내 경제, 안보, 정치 등 분야의 협력에 관한 제안이 많았 다. 2008년 호주 러드 총리는 EU와 비슷한 아시아태평양 공동체 구상을 제안하였고, 1991년 말 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역시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 구상을 내놓았다. 사실 이러한 구상 이 나 오기 전부터 아시아에는 이미 APEC, ASEAN 한중일과 같은 제도적 틀을 갖춘 협력 방식이 마 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조금 더 예전으로 눈길을 돌려 본다면,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영미 식민 통치에 맞서 동아시아 각 민족의 해방을 표방하면서 대동아 공영권 이라는 일본 중심의 대동아 질서 구축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동아연맹론 도 있었고, 미키 기요시(三木淸), 오자키 히데미(尾崎秀實) 등의, 중국과 연합한 사회주의 혁명으 로 일본을 개혁하여 일본을 필두로 동아시아 민중이 주체가 되어 동아시아를 사회주의로 개조한 다는 동아협동체론 2)도 있었다. 역사학자로서 동아시아 공동체 에 관한 갖가지 주장을 되돌아보면, 나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 1) Global Times時 200년월1일 2) 日田弘(Uchita Hirosh) 三,御茶,200년 판,2페이지

9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1 인 면이 모두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여 동아시아 공동체 구 축 제안에 대해 깊이 있는 사고를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지역 협력의 각도에서 볼 때, 현재 유럽은 확실히 앞서 가고 있고 아시아는 뒤처져 있다. 사 실 중세말 서유럽이 극심한 분열을 겪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계는 각각의 민족 국가 로 분열되었 고, 민족 국가 의 형성은 기독교 서방 제국 의 와해시키고 중세를 마감하였다. 이와 함께 민족 국가 사이의 충돌이 근대 서구 국제 관계의 테마가 되었고, 이에 따라 세계의 총체적인 충돌, 즉 세계 대전을 배태했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 근대사는 곧 민족 국가 사이의 전쟁사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들어 유럽은 갑자기 통합의 길로 들어서, 이제 유럽연합(EU)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모델은 아시아에서 특히 동아시아에서 정체성에 관한 일련의 논쟁을 불러일으키 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럽에 우리는 유럽인(We, Europeans) 이라는 자각이 있었기에 유럽에 기반한 아 이덴티티를 성공적으로 구축했지만, 동아시아에는 이러한 정체성 인식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본 다.3) 또한 유럽 정체성의 구축과 유럽의 역사와 관련하여, 유럽은 수많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지 만 통일된 문명, 즉 프랑스 역사학자 기조(Guizot, Franois Pierre Guillaume)가 말한 유럽 문명 이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유럽 문명 이 유럽 각국을 하나의 하이퍼 내셔널리즘 적 정치 시스템으로 묶어내 유럽 공동의 문화 유산을 지켜냈으며, 동시에 싸움을 회피하는 경로가 있었 다는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일어난 정복 전쟁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층위(지역, 국가, 민중)의 정 체성 충돌로 해석한다.4)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유럽은 본래 아시아와는 완전히 다 르고, 우리는 유럽인 과 같은 정체성 자각이 아시아에서는 매우 취약하여 유럽과 같은 통합은 실현 불가능하므로, EU같은 공동체 구축은 유토피아 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반대로 근대 유럽의 정치 문화 발전을 분석한 결과, 근대 유럽의 역사는 늘 두 맥락이 평행선 을 그렸는데, 하나는 근대 국가 형태의 출현, 즉 민족 국가 가 유럽의 보편적 현실이 되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유럽인의 상호 정체성, 즉 유럽 관념 을 반영한다. 전자는 주권 국가를 지향했 고, 후자는 소위 유럽 통일 과정을 지향했다. 는 의견도 있다. 두 선은 모두 중세기를 계승했 다 따라서 근대 나아가 현대 유럽의 정치 철학을 이해하려면 민족 관념과 유럽 관념이라는 두 개의 관념 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혹자는 이를 민족주의 와 유럽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민족 관념은 민족국가 및 다민족 연방제 국가 를 지향하고, 유럽 관념은 오늘의 유럽 연합(또는 유럽 통합 과정)을 지향한다. 5) 이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은 소위 우리는 유럽인 이라는 정체성 이 사실은 EU 구축을 위해 일부러 강조된 개념에 불과하다고 본다. 유럽 정체성의 역할을 어떠한 판단하든, 동아시아에 유럽과 같은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역사 적 기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인식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늘 강조하 는, 동아시아가 한자 문화와 유교 문화로 대표되는 문명권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물 론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동일한 문화권에 속해 있지만 각 민족과 국가의 가치관 3) 澤弘Kakizawa Hiroj), アジアは一つ いまこそ,東海平究所編 東アジアに 共 はできるか,評論,200 년,2223페이지 4) 木畑洋Kihatake Youich),洲的性 EC,重Hasumi Sigehik)昌Yamauchi Masayuk) 엮음 今 なぜ民族か,京 出,199년,2021페이지 5) 民&周弘, 洲文明,生活讀新知店,200년,1010페이지.

20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의 차이는 여전히 크며 심지어 서로 다른 문화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정체성을 증명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변화하 는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 정체성 구축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과제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갖가지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 주장들은 모두,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유지 시켜 역내 국제 문제 해결에 적용 가능한 특정한 패러다임, 즉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는 목 적을 가지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탄생하기 전에,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도적 지위 를 차지했던 것은 정칭(正淸) 교수에 의해 화이질서(the imperial tributary system) 로 개괄된 국 가 관계였다. 화이질서 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화이질서 가 무너진 이후 동아시아에는 아직 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 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는 구축되지 않았다. 화이질서 의 성립 배경에는, 우선 강대 하고 부강 한 중국과 상대적으로 약한 주변부가 있었 다. 하지만 화이질서 는 결코 주변부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의미하지도 심지어 추구하지도 않 았다. 중앙 으로서 중국은 주변국 군주를 책봉하는 방식으로 정세 안정을 유지하여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에 주변국과 민족은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통해 국가의 안전과 내 정과 외교의 자주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 속에는 지배 복종과 같은 분명한 위계 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근대 제국주의의 주변부에 대한 지배 관계와는 구별된 다. 게다가 당시 아시아 일부 국가,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화이질서 를 모델로 삼아 스스로를 중심으로 소규모 조공 체제 를 형성하여 중국 중심의 질서를 바꾸려고 했는데, 이는 화이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6) 16세기 말 이후에 이르러 중국 중심의 질서는 주변 국가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소중심 스스로의 정체성이 점진적으로 체계화되면서, 화이질서 는 흔들리게 되었 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화이질서 는 비록 제국성 은 있었지만7),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기본 질서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러한 화이 질서는 이상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모델은 결코 아니지만, 제국질서를 대체할 방식을 모색할 때 사상적 자원으로서 부정될 이유도 없다. 근대 들어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 체제를 강화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한편, 지역 의 중심 으로 자처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업고 타이완과 조선을 병합하고 나아가 중국 동북 지역 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두는 공교롭게도 과거 이 지역의 중심이던 청나라의 몰락과 함 께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살펴볼 때, 주권 관념을 기반 으로 하는 만국공법 으로 기술되는 국제관계 질서의 원칙이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대체하는 경 향을 보여, 각국은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지위를 가졌다. 하지만 평등의 원칙은 실질적으 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자본주의의 동력이자 그 강제 수단인 무력, 즉 약육강식 의 원칙이었다. 일본은 영미 식민 통치에 맞선 동아시아 각 민족의 해방을 주 장했지만, 사실상 기존의 화이 질서 를 대체할 일본이라는 주체를 내세워 대일본제국의 자급자 족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대동아 공영권 으로 나타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질서 였다. 그 사상적 기반은 중화질서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형성된 아시아주의였다. 중 국 침략 전쟁을 시작한 이후 지구전 양상으로 흐르는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평화 적으 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한다는 동아신질서론 도 제안했다. 만국공법 과 문명적 동아시 6) 日 浜下武志(amasita Takeshi), 朝貢システムと近代アジア,岩波書,199년 7) 백영서,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로, 思想, 第3期 天下,東,,12페 이지. 백영서,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서론, 창비사,200년, 서울.

1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2 아 질서를 표방하는 이러한 주장은 마치 주권 원칙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상태인양 보이지만, 사 실은 패권 국가가 주도하는 질서였다. 전후 냉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 관계는 오랫동안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의 대립에 종속되었다. 미국은 경제, 기술, 군사 협력 등의 방법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미국식 사회 체제를 선택하도록 했고,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 분업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아공영권 형태의 경제망을 부활시켰으며, 군사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동아시 아 안전보장 질서를 구축하여,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정체성은 여전히 형성될 수 없었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선 동아시아는 세계화와 경제 글로벌화의 충격 속에서 내부적으로도 중요 한 구조적 변화가 일고 있다. 동아시아의 주요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의 역량 차이에도 큰 변화 가 일어나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동아시아와 역사 속의 동아시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1강 헤게모니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현대 동아시아 국가와 민중 사이에는 긴밀한 교류와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동체 구축의 3대 장애물인 지리적 장벽, 역사적 장벽 및 정체성 장벽 을 뛰어넘고 있다.8) 동아시아 정체성 구축에 있어 지금이 최적기 라고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한중일 세 경제대국의 경제 의존 관계는 점점 더 긴밀해지 고 있지만 공동체 의식 은 키우지는 못했으며, 2차 대전이 끝나고 벌써 60년이지만 중국과 일 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 인식,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정치적이고 감정적인 틈이 남아 있어 공동체 의식의 싹을 짓밟고 있다. 9)는 냉정한 판단도 있 다. 따라서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 위해서 우선 역사 문제로 인한 장애물을 해결해야 한다. 이 가 운데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구축이 곧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Ⅱ.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구축을 위한 노력 최근 역사 인식에 관한 국제 대화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 교과서[ 1945년 이후의 유럽과 세계 (Europe and the World since 1945)] 프로젝트의 노 력과 성과물은 이 분야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10) 상대적으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의 한중일 간에는 역사 인식 차이가 보다 뚜렷하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지역에 속한 중일 양국 은 역사 대화가 가능할까? 대화를 통해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구축이 가능할까? 사실상 최근 한중일 학자들 역시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구축을 위해 의미 있는 시도와 노력을 해왔다.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 각국의 수많은 역사학자와 교사들은 모두 역사 교육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 왔고, 새로운 역사 교육은 자국의 역사를 세계 역사 속에 넣어 자국사를 세계 역사의 일 부로서 세계적인 시야에서 자국 역사의 발전과 변화를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일부 대학에서는 일본, 미국, 중국(타이완 포함), 한국 학자가 참여하는 8) 日一(Sintou Eichi,平川均(Hirakawa Hitoshi 엮음,東共設,日評200년,페이지 9) 日 谷(Taniguchi Makot),東共,岩波,200년,4페이지 10) Claudia Schneide,The Japanese History Textbook Issue Viewed through the Prism of European Experiences and the Current Situation in East Asi.

22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동아시아 상호 인식과 오해 연구 프로젝트를 각각 조직하여, 동아시아사 인식 문제를 논의하고 연구 보고서를 냈다.11) 비슷한 시기, 일본과 한국의 교육 기관과 학술 단체도 각각 공동 연구의 틀을 구축했다. 서울 시립대학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 동경학예대학 역사교육연구회가 조직한 한일 역사교과서 연 구회 와 양국 역사학 및 역사 교육 관련 10개 단체로 조직된 한일 역사학회 공동역사 연구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 단체는 90년대 중후반기 일본에 나타난 역사 수정주의 편향과 새역사교과 서 관련 극우주의 동향에 대해 동아시아 각국 민중의 상호 역사 이해를 목표로 활발한 토론을 벌인 결과, 동아시아의 공생과 역사 교과서 문제를 도출했다.12) 또한 각자 공동 연구를 기반으 로 하는 성과물을 내놓았다.13) 21세기 들어 동아시아 각국의 학자와 교사들의 공동 연구에 새로운 진전이 생기면서 새로운 성과가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물은 다음과 같다. 먼저, 2002년부터 한중일 학자, 교사, 시민단체 대표가 매년 한 차례 열고 있는 역사 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 은 토론을 거쳐 한중일 세 나라의 공동 역사 편찬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3 년의 공동 연구와 논의를 거쳐 2005년 세 나라는 미래를 여는 역사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 사 를 내놓았다.14) 이 책은 역사 부교재의 형식을 취하면서, 세 나라 중고등학교에서 어느 정 도 활용되고 있으며, 세 나라 학생들은 또한 매년 역사 여름 캠프와 같은 교류 활동을 갖고 있 다. 현재 세 나라 학자과 교사들로 구성된 공동 위원회가 후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동 역 사 교과서를 1권으로 삼고, 그 부족한 부분을 연구하여 충분한 논의를 기반으로 2권과 3권을 공 동 편찬할 예정이다. 2001년 일본 동경대학 미타니 히로시(三谷博) 교수 등과 류제(劉杰) 등 재일 중국학자들이 중 일 청년 역사학자 회의 를 조직하여, 역사 문제를 배경으로 중일 양국의 사회 변동을 다루었다. 다년 간의 노력을 거쳐 2006년 일본과 중국에서 동시에 출판한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을 통해 중일 역사 인식 가운데 근현대사 관련 주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다.15) 여러 차례 한일 학자 및 교사가 참여한 공동 심포지엄을 진행하면서, 2007년 동경학예대학 기 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교수와 한국 학자들은 연구 성과물을 한일 교류의 역사 선사부 터 현대까지 16)로 펴냈다. 이 밖에도 일본 히로시마현 교직원 노조와 한국 대구시 교직원노조 는 한일 공통 역사 교재 제작팀을 구성하고, 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우 호의 조선통신사 17)를 공동 편찬하였다. 한일 양국의 여성단체로 구성된 공동 역사 교재 편찬 회 또한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 를 함께 출판했다. 이와 같은 국경을 넘는 공동 역사 연구와 교재 편찬의 노력은 비록 표현 형식이 다르고 공동 11) 日 山室信一 엮음, 國討會文集 日本 的相識與解的表象,199년; 上育東, 東史表象,200년; 二夫 엮음, 21史識與國理解 韓 日本的,200년. 12) 日研음, 围史教的 共史研究討, 大店,200년. 13) 日 和, 教的思想 日與韓的近代史,すずさ,199년.정재정,韓國日本 史教育的思想,すずさ,199년 14) 미래를 여는 역동아시아 삼국의 근현대. 중국어판은11만 부, 일본어판은만 부, 한국어판은만천 부 발간 15) 국경을 넘는 역사 인 중국어판은 중국사회과학문헌출판사 文献出版)에서200년 출판하고, 일본어판은 동 경대학풀판회京出)에서200년 출판하였다 16) 日 和 외, 交流史 从古代到现代,明,200년 17)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우호의 조선통신, 한국은 한길사 에서200년 출판일본은明에서200년 출판

3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2 연구의 수준도 차이가 있지만,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을 구축하려는 목표는 공통된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각국의 세계사 서술에서 과도한 서구 중심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시아 기술의 비 중을 높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국사와 동아시아사의 관계로서, 특히 자국사의 틀을 뛰어넘는 동아시아사 구축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뛰어넘기 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자국사와 동아시아사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비교적 보편적인 견해는 자 국사에서 시작해 지역사로 확대 개방하는 방식으로, 이는 동심원사관 으로 총칭되기도 한다. 하 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자국사를 뛰어넘는 것이 가능한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소위 동심원사 관 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실상 이 지역을 단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사관을 강조하기 때문이 다.18)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동아시아 시각 이나 동아시아 사관 이라는 개념을 제 시하기도 한다. 일례로 일부 한국 학자는 자국사의 해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사 라는 이름부터 폐기하고 한국사와 세계사를 하나로 묶어 세계사 속의 한국사 와 한국사 속의 세계사 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 단계로서 동아시아사 를 제안하지만, 보다 실질적으로 는 한중일 삼국 관계사 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19) 자국사를 넘어서, 국민 국가의 역사 기억을 넘어서, 인식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역사를 위해서 는 역사학자들이 서로 다른 역사 기억을 통합하여 그 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고 공통성을 사고 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성과 공통성이 아무리 취약하다 하더라도, 진지하게 연구할 때 우리는 역사 인식의 공유를 실현할 수 있다. 바로 이 때 정부 주도의 역사 공동 연구도 서막을 열였다. 먼저 한국과 일본이 2002년부터 공 동 연사 연구를 시작해 2005년에 종료하고, 다시 2006년부터 2차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공동 역사 연구는 2006년 말 시작되어 지금까지 거의 2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중일 공동 역사 연구는 고대(중세 포함)과 근현대사 두 그룹으로 나뉘어, 모두 16개 과제(고대사 7개, 근현댄사 9개)를 선정하였다. 특히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과제명뿐 아니라 그 밑의 키워드까지 결정하여, 양측은 같은 제목과 키워드를 가지고 각각 논문을 작성하고 토론을 진행하게 되어 관 련 연구가 깊이를 더하게 된다. Ⅲ. 역사 문제20) 대화의 각 층위 이상의 역사 인식의 국경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환영 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 비판하면서 반 18) 타이완교육부 장을 역임했던두정성杜)은 소위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면서,동심원 사을 주장했다.杜, 一 个新, 新之路,台,三,200년 참조. 하지만 일각의 비판처럼, 이는 타이완의단일중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의 표현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중국 대륙과 거리를 두기 위한 소위탈중국화去의 절차에 불과하다.王晴, 当代台述的双重, 思想,2,台,200년,1212페이지 참고 19) 백영서,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역사 읽기, 黄海文化,200년; 关東亞述的可能,城,200년. 동아 시아의 지역질서,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 思想,第3期 天,東,台湾 20) 여기서 중일 역사 문제는 중일 양국 사이에 근대사 인식 영역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이 버리고 간 화학무기 처리 문제, 댜오위(센카쿠) 섬, 동해 석유가스 자원 등 역사와 관계 있으면서 지금까지 현안 으로 남아 해결되지 못하였거나 지금 해결 중인 중국과 일본의 현실적인 영토 및 자원 문제는 포함하지 않는다

24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대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역사 대화의 각 층위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문제는 주로 정치, 감정, 학술 연구라는 각각 다르지만 서로 관련된 층 위에 반영된다. 따라서 역사 인식의 차이와 쟁점을 낳는 각 층위를 구분할 때 역사 문제에 대한 대화가 가능하다. 먼저 정치 층위의 대화는, 일본이 진행한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의 성격에 대한 정치적 판단 을 명확히 내리는 것이다. 20세기 초부터 일본과 동아시아 주요 국가의 관계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였다. 첫째, 일본은 3차에 걸쳐 한국과 협약 을 체결하면서 한국의 외교, 내정 및 군대를 야금야금 장악했으며, 1910 년에는 조선에 총독부를 두어 강제로 병합하고 식민통치를 하였다. 나아가 다시 1931년의 918 사변과 1937년의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통해 중국 동북 지역을 차지하고 결국 중국을 상대 로 전면전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전후 일본은 이 전쟁에 대해 사고하고 반성했는가? 1965년 한일협정 부터 1972년의 중일 공동 성명 또는 1978년의 중일 평화 우호 조약 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일본 정부는 이미 긍정적인 자세를 적극 보였다. 1993년 취임한 호소카와 모리 히로(細川護熙) 총리는 당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잘못된 전쟁 이며 침략 전쟁 이라고 명확히 밝혔고, 1995년 취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역대 일본 총리로서는 가장 명확히 인정한 전후 50주년 담화21)를 발표했다. 일본 사회의 우익 보수 세력, 특히 일부 보수파 의원과 관료들이 이상과 같은 반성에 극렬히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정치 층위의 대화는 거의 불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후 일본 정계는 시종일관 침 략 전쟁의 성격을 부인했다. 특히 55년 체제 가 확립된 이후 일본 사회 저변에 복고주의의 흐름 이 흐르면서 대동아 전쟁 을 긍정하는 사관 역류 현상이 극히 보편화되었다. 일부 정치가는 입 에 올리는 반성 과 침략 전쟁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립하 기도 한다.22) 이러한 태도는 이후 일본 정치가에 대해 큰 영향을 미쳤다. 80년대 전후 40년 정 치에 대한 총청산 물결, 90년대 역사 인식 수정과 새역사교과서 작업을 한 자유주의사관연구 회 의 활동 및 계속되는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은 침략 전쟁의 책임을 부인하는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5년 105명의 자민당 의원은 역사 검토 위원회 를 조직하여, 일본의 조선 병합의 강제성과 위법성을 부인하고 난징 대학살 허구론 을 만들어 내었으며 종군위안부 는 상 업적 성격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등,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대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나아가 식민 통치의 위법성과 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부인하였다. 최근까지도, 일본은 침략국가가 아니 라고 부인하는 일본 자위대 항공 막료장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의 논문이 상을 받았다. 21) 호소카와 모리히로,Hosokawa Morihir) 총리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침략 전이며잘못된 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Murayama Tomiich) 총리는일본이 멀지 않은 과거에 한 때 국책이 잘 못되어 전쟁의 길로 걸어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많은 나라를 식민 통치하고 침략했다. 특히 아시아 각국 국민들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다. 앞으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솔직하게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이 역사 사실을 직시하며, 이에 다시 한번 심각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를 표한다.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피해를 입은 모든 국내외 인사들에게 침통한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日 竹内 (Takeuchi Minoru 21世紀総研, 日交文献集,蒼蒼社,200년,4444페이지 22) 키시 노부스케岸信,Kisi Nobusuk)는 감금 당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일본은정당 방였다고 주장하였 다. 그는 태평양 전쟁을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굳이 반성해야 한다면 왜패했 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日 原彬Hara Yoshishis), 岸信介 权势的政治家,岩波,199년1212 페이지 참고

5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2 이러한 상황은 정치 층위의 대화가 아직도 침략 전쟁의 성격과 근본적인 시비를 가리는 원칙적 판단 문제이며, 이 층위는 대화는 주로 정부와 정치가들 사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다음으로 민중 층위의 대화는, 동아시아 각국 민중의 비대칭적인 역사 체험으로 인한 인식의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 역사에 대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 민중의 기억에서 가장 중요 한 측면은 전쟁의 피해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침략 전쟁에 관한 키워드는 난징 대학살, 731 세균 부대, 삼광(三光) 작전 등의 개념이고, 한국에서는 종군 위안부, 창씨개명, 식민 통치 등 의 개념이며, 일본에서는 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도쿄 대공습, 오키나와 작전 등이 다. 전쟁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기억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결코 대칭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한 일본 국민들은 자국 내부의 협소한 시 야 에 머물러 있는다면23), 가해 의식의 결여 를 초래해 같은 역사 과정에서 전쟁 피해 국민들의 체험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전후 일본의 반전 반핵 운동의 경우, 일본 민주주의와 평화 운 동 발전의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입힌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을 결여한 상태에서 원자탄 피해만을 강조하는 피해 체험 은 광범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24) 전후 50년 동안, 일본 히로시아 원자폭탄 자료관의 전시회가 미국에서 순조롭게 열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물론, 일본 민중이 중국과 한국 민중의 전쟁 피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전쟁 당시 일본 군구주의 정부의 여론 통제와 관련되므로, 책임이 민중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전후 양국 민중이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교류와 대화를 하지 못한 것 역시 인식의 차이를 초래했다. 서로 다른 역사 체험으로 인한 양국 민중의 인식 차이는 감정적 요인이 비교적 크다. 따라서 정치 층위의 문제 해결과는 달리, 민간의 깊이 있는 왕래를 통해 상호 이해에 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학술 층위의 대화로, 주로 양국 역사 연구 속에서 자료의 활용, 연구 방법론의 차 이, 역사 체험의 차이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식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사는 모두 서구 열강의 무력 앞에서 개국 을 강요당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후 각국은 근대 발전 과정에서 상당한 거리를 노정했고, 당시 역사에 대한 각국 학자 들의 학술 연구 측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국은 국제 사회에 개방을 강요당하면서, 국가 의 미래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해 서구의 도전에 대응했고, 중국의 부흥을 위해 싸운 끊임 없는 개혁과 열강과의 항쟁에서 계속 실패하면서, 우환 인식이 계속 가중되고 열강과 의 충돌과 갈등 역시 계속 첨예해졌다. 중국 학계는 근대 중국이 직면했던 수천년에 없었던 변 고 25)와 불평등 조약 체계 에 대한 항쟁에 주목한다. 한국 학계도 마찬가지로 근대로 걸어가는 과정에서의 주권 수호와 외부의 압박과 간섭, 특히 식민지가 된 후의 독립 운동과 투쟁에 주목 한다.26) 당시 일본은 탈아입구 의 방식으로 낙후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으로 전이 하 였으므로, 서양 문명과 진퇴를 함께 하여 서양인이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식으로 아시아 23) 日 大沼保Onuma Yasuak),京审判争责任后责任,14페이지,Tousinnto,200년 24) 日 吉田(Yoshita Hirosh), 現代歴と戦争責任,青,199년,1818페이지 25) 李鸿, 海防, 李文忠公, 奏稿,2,1페이지 참고 26) 李元 외,韓史 日本明店200년 판

26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와의 관계를 다루어야 27) 했다. 전통을 중체서용 의 방식으로 대했던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구 습 에 연연하면서 겉 만 꾸미는 염치를 모르는 행동 을 비판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통용되는 이 치를 받아들여야, 국제법 공약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다. 28)고 보았다. 중국과 한국에 비해, 일본의 근대사 연구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국제법 질서 가 가져온 이익에 주목한다. 1931 년부터 1945년의 전쟁 기간 중일 양국이 서로 다른 국제적 그룹에 참여하면서, 역사 체험이 완 전히 비대칭적이 되고 나아가 역사 인식에 대한 서로 다른 논리와 사고를 형성하였다. 중국으로 서는, 당시 어떤 일이 발생했든 맞서 싸우는 전쟁 상대가 기본적으로 일본이었으므로, 항일전쟁 이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918사변 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적수는 중국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주적은 미국과 유럽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심지어 소련까지 들어간다. 이상과 같은 역사 인식의 세 층위가 현실 속에서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세 층위의 문제가 상호 교차하고 영향을 미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역사 인 식 문제가 지금까지 동아시아 정체성 구축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Ⅳ.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상술한 세 층위의 역사 문제 가운데, 정치 층위의 문제는 침략 전쟁의 성격 인식과 관련한 것 으로, 근본적인 시비를 가리는 원칙으로 모호함을 제거한 명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하지만 민중 층위와 학술 층위의 인식 차이는 역사 체험의 차이로 인해 생겼으므로, 이 문제 해결에는 양국 민중의 상호 대화와 이해 및 양국 학자의 공동 연구가 추진되어야 한다. 소위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란 정치 층위가 아니라 이 두 층위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세 층위의 문제가 서로 섞여 있 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실천 과정은 상당히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 각국과 국민들은 근대 이후 특히 전쟁 당시 역사 체험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체험의 차이 위에서 형성된 역사 인식의 차이는 종종 보수 정치 세력들에 의해 이 용당해 정치 층위로 번지기도 한다. 철저하지 못한 전범 재판과 전후 처리로 인한 가해 의식의 결여로 인해, 많은 일본 국민들이 스스로를 군부의 사기 선전의 희생물로만 느낄 뿐, 식민지 통치, 종군 위안부, 난징 대학살, 세균 전, 독가스전 등 일본 군대의 전범 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전쟁에 대한 책 임감도 극히 무딘 편이다. 그리하여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언행을 하는 극우주의가 활개를 치고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역사 체험이 원래 비대칭적인 양국 국민의 감정을 부 추겨 쇼비니즘적 정서를 형성하면서, 감정 문제는 정치 문제가 된다. 또, 실증 연구 문제는 원 래 학술 연구 층위에 속하지만29), 연구 과정에서 일부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할 때 사실 고 증 이라는 명목으로 당시 역사의 부분적인 진상을 밝히는 일부 사료를 제공하는 행위조차 일부 세력에 의해 정치적 층위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게다가 민족의 비대칭적인 역사 체험이라는 배 27) 福, 亞, 福吉全集,1,24페이지.慶應 엮음,岩 출판 28) 福, 或云随, 福吉全集,2,1페이지.慶應 엮음,岩 출판 29) 다나카 상주문田中奏의 문서로서의 존재 여부, 난징 대학살의 중국 피해자 숫자 등의 문제가 모두 이러 한 예이다

7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2 경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실증 연구 의 결과는 국민 감정상 받아들여지지 못할 뿐 아니라, 반대 로 국가와 민중 사이의 대립만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일본 역사학자가 지적한 바처럼, 역사 수정주의자는 소위 역사 사실의 인식 차이(피해자 숫자 문제와 같은)를 주제로 토론을 진행하면서, 역사 인식 문제로 책임 문제를 대체하여 정치적 책 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들는 정치 목적을 숨기면서 역사 사실의 문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역사 인식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한 편, 역사관이나 역사 인식으로 정치 이데올로기 문 제를 대체하면서 인류 역사상 전쟁이 있으면 늘 민중의 고통이 있다 거나 왜 일본만 책임을 지 라고 요구하는가 와 같은 발언으로 전쟁 책임을 회피한다.30) 또한 태평양 전쟁에 관한 연구의 경우, 일부 일본학자는 진주만 습격의 책임에 대한 깊이 있 는 연구보다는, 미국의 고철 수출 금지, 일본에 대한 봉쇄 정책 등 전쟁이 일어나게 된 객관적인 이유들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심지어 전전 군국주의 정부가 부르짖던 소위 ABCD 포위권 이 론31)을 견지하면서, 미국과의 개전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쏟은 외교적인 노력들을 강조하 면서 1941년 12월의 헐(Hull) 비망록 을 미국이 협상을 거절한 최후 통첩이자 개전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는 표면적으로는 학술 층위로 보이지만, 이 전쟁은 도저히 참을 수 없 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으킨 것 32)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면, 이는 직접적으로 민중의 감 정을 건드리고, 심지어 국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본 사회에서 최근 전쟁관에 반영된 복합형 전쟁 관이 강조된다. 일부 정치가는 국회 답변에 서 일본이 중국에 침략행위를 했고, 한반도에 식민 통치를 했다 지만,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나는 의문이다. 33)라고 했다. 이러한 인식과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전쟁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자위 전쟁 즉 대동아 전쟁 이라는, 전쟁 당시 일본 군대가 고취한 인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나아가 1945년 8월 소련이 중립 조약 원칙을 위배하고 불법적 으로 만주 를 침략 점령했다는 인식으로 발전한다.34) 90년대 중반 은 일본 신구 정치체제의 전환 및 신구 정치가의 교체기로서, 일본의 미디어와 정계 논조에 확 실히 큰 변화가 나타났다. 새세대 정치가 는 그 전쟁은 우리가 태어나기 십여 년 전에 이미 끝 났다. 고 보기 때문에, 과거 전쟁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속죄의식이 구세대 정치가와는 비교가 되 지 않는다. 전후는 이미 끝났다 는 이러한 생각과 이미 끝난 전후 를 고취한다든가 태평양 전 쟁에 대해 역사의 재평가 를 요구한다든가 하는 역사수정주의적 발언이 횡행한다. 뉴라이트는 한술 더 떠 직접 평화 헌법이나 민주주의 교육과 같은 일본 전후의 새로운 현상에 화살을 돌리 면서,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발언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35)면서, 전후 를 다 시 쓸 것을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헌법 제9조의 수정을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민중의 감 정 층위와 학술 층위의 문제에까지 정치적 낙인이 찍히게 된다. 30) 日 沟口雄三(Mizoguti yuuzo), 的,京出,200년 31) 즉,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정부와 국내 언론에서 고취하던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일본을 포위한는 이론을 말한다. 이 이론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 아무런 사실 증거가 없다. 江口圭一(Eguchi Kaichi,日本の侵略と日本人の戦争,岩波ブックレッ,199년,2페이지 참고. 32) 太平洋戦争への道)朝日新聞,196)은 이러한 해석의 대표적 저작이다 33) 日 朝日,199년1월2일 34) 日 中村(Nakamura Masanori,后史,岩波,200년 판 35) 日 荒井信一(Arai Sinichi,史和解是否可能,岩,200년,28페이지

28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각 층위의 역사 인식 문제는 서로 다른 해결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 층위의 문제는 중일 관계의 구조적인 변화와 긴밀히 연결되며, 양국의 구조적 변동의 결 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구조적인 변동이 쌓여가고 기본적인 추세가 점점 가시화되면서, 특히 거시적 국제 환경 속에서 중일 양국의 전략적 호혜 관계가 구축되면서, 정치 층위의 문제는 새 로운 해결 방법을 찾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학자로서 우리는 감정 층위와 학술 층위의 역사 인식의 차이와 논쟁에 더 주목해야만 한다. 이 측면에서 학자들은 자료를 수집하고 문제를 이해하면서 공동 교류의 경험을 통해 먼저, 학술 층위에서 중일 역사 인식의 차이와 쟁점에 대해 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양국 민중의 상호 이 해를 도모해야 한다. 이 측면에서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1. 학술 연구, 민중 감정, 정치 외교 세 층위의 문제 구별 정치 층위의 문제를 학술 연구의 문제로 사고한다면, 방향을 잃고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으로 빠져들게 된다. 스콜라적인 토론으로 민중의 감정 층위의 문제 해결을 바라는 것 역시 지나친 이상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본래 학술 연구 영역에 속하는 문제나 학술 문제에서 파생되 어 정치나 감정 층위로 번진 역사 인식 문제의 경우에는, 학자도 학술 분야에서 연구를 하면서, 이러한 견해차가 두 나라 민중의 감정 층위로 확대되지 않도록 특히 정치 문제로 비화되지 않도 록 주의해야 한다. 이미 양국 민중의 감정이나 정치 외교에 영향을 미친 문제의 경우는, 학술적 요소가 존재한다면 먼저 그 학술 문제를 명확하게 연구하면서 감정과 정치 층위의 해결 경로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2. 민중의 대다수가 전쟁 역사를 겪지 않았다는 배경에 주의 전쟁이 끝난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직접 전쟁을 겪은 이들은 지금 점점 줄어들고, 그들의 전 쟁 체험이 후세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점점 작아진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인구 가운데 전후 출 생자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40~60세 인구는 어른들의 입을 통해 전쟁에 관한 감성적 지 식을 얻을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지만, 20세 전후의 청소년은 심지어 부모의 입을 통해서도 전 쟁에 관한 감성적 인식을 얻기란 힘들다. 따라서 그들에게 전쟁 역사에 대한 인식의 공동화와 추상화 경향이 필연적이다.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머나먼 과거이고, 전쟁은 게임처럼 컴 퓨터 사이버 공간에서만 볼 수 있다.36) 이러한 공동화되고 추상화된 전쟁 인식을 가진 청소년들 은 잘못된 길, 특히 극우주의적인 방향으로 경도되기 쉽다. 이러한 위험성을 해소하기 위해 학 자들은 청소년들이 전쟁 역사를 보다 깊이 있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특히 역사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의 시야를 확대하고 보다 넓은 시각으로 동아시아 역사와 미래를 고민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36) 日山田(Yamada Akira, 歴史修正主義の克服,高文, 2001년 12월, 10~11페이지

9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역사 인식의 국경 넘기 _ 2 3. 역사 사실의 공유 실현과 상호 이해 창출의 조건 역사 인식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 상호 이해에는 시간과 조건이 필요하다. 그 기초적인 작업 은 우선, 역사 사실의 공유가 되어야 한다. 역사 사실의 공유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국경을 넘 는 역사 인식 구축이 가능하다. 물론, 자국 동포 사이에도 역사 사실 공유를 실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안정적인 학술적 환경과 냉철한 학술적 고민이 필요하다.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아시아 정부 및 민간의 학술 교류의 경우, 비록 평가가 일치하지는 않고 심지어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자국 사관 에 기초해 구축된 폐쇄적인 상태가 이미 깨졌 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의 학술 교류는 주로 역사 사실의 공유 문제를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 학자 층위의 교류가 점점 긴밀해지고 역사 사실 공유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학술 연구 자체의 국경 넘기도 점점 가시화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역사 인식의 구축은, 안정적인 동아시아 국가 관계 구축에 긍정 적인 기여를 한다는 측면에서 각국의 상생 외교 전략의 필요성에서만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보 다 중요하게는,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및 세계의 사회, 문화 층위의 상호 이해를 실현하기 위 한 기본 조건이다. 비록 하루 아침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착실하게 노력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30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歩 平 ( 中国社会科学院近代史研究所) < 目 次> 一 東アジア共同体 と東アジア アイデンティティー 二 国境を越えた歴史認識をつくるための努力 三 歴史問題に関する対話の異なる側面 四 歴史認識はどうすれば国境を越えられるか 一 東アジア共同体 と東アジア アイデンティティー 日本の民主党が政権を獲得すると 鳩山由紀夫首相は正式に中国に対してEUをモデルにした 東アジア共同体の構築を提案した 同時に 中国と兄弟のような友好関係を築きたい と述べ これは私が構想している東アジア共同体の焦点である とした 中国側もまた 日本を含む東 アジア各国と更に東アジア合作を深化させることに尽力し 東アジア共同体という目標に向かっ て絶えず邁進する と表明した 注目すべきは中国のネット調査で 中 日が共に東アジア共同 体を設立することを支持する としたユーザーが63%に達していることだ ただ中には反対意見 もあって 中国と日本の間にはまだ解決できていない歴史問題が存在しているし 日本はただこ の提案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経済的プレッシャーを和らげようとしただけで 本心から中国と協 力しようとし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 と疑問を持つ者もおり まだ日本に油断してはいけな い という者もいた*1) 実は 東アジア共同体 の主張をしたのは 鳩山首相が初めてではなかった ここ数年 東 アジアあるいはアジア各国の間でさらに密接な関係を築き 地域の経済 安全保障 政治問題に ついて協調しようとする主張は多かった 2008年オーストラリアのラッド首相も EUに似た ア ジア太平洋共同体 構想を明らかにし 1991年にマレーシアのマハディール前首相も 東アジア 経済共同体 構想を提案していた これらの構想が出される以前 アジア地域にはすでにAPECや ASEANプラス3などかなり成熟した組織的合作モデルが存在していた 少し過去に目を転じれば 日本が20世紀前半かつて英米の植民地統治からアジア各民族を解 放するとして 大東亜共栄圏 を旗印に日本中心の 大東亜秩序 建設を主張したことに思い 至る 当時はまだ石原莞爾が主張した 東亜連盟論 もあったし 三木清 尾崎秀実らは 中国 の社会主義革命と連合して日本を改革し そこから日本をはじめとする東アジアの民衆を主体 に 東アジアを社会主義に変革させようという 東亜協同体論 を主張していた*2) このように歴史学的に様々な 東アジア共同体 構想を振り返ってみると もとよりそこに は肯定的な主張もあれば否定的なものもあるし あるいはその態度が積極的なものもあれば消極 的なものもあるが より重要なのは 歴史の経験と教訓を総括し 東アジア共同体構想について 1) 環球時報 2009年9月18日 2) 内田弘 三木清 御茶の水書房 2006年版 第28頁

1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_ 3 深く考察を行うことであろう 地域合作という面からみれば 目下のところヨーロッパが先を行き アジアが遅れをとって いることは間違いない 実のところ中世後期にヨーロッパは熾烈な分裂状態を経て キリスト教 世界はそれぞれの 民族国家 に分裂していった 民族国家 の形成はキリスト教 西方帝 国 の瓦解と中世の終焉を導き それら国家間が互いに衝突を繰り返したことが近代ヨーロッパ の国際関係を生み出したのだが 同時にその衝突が世界全体に及ぶと 世界大戦を引き起こすこ とにもなった ある意味ヨーロッパ近代史とは 民族国家 間の戦争史であった しかし20世紀 後半になると ヨーロッパは突然 連合の方向に向かい 今やすでにEUが現実のものとなってい る しかしヨーロッパモデルをアジアに当てはめようとしても 殊に東アジアにおいては様々な アイデンティティーに関する争いを引き起こすだけとなるだろう ヨーロッパには 我々ヨーロッパ人 We, Europeans という自覚があり それがヨーロッ パに共通する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成立に成功をもたらしたが 東アジアにはこのようなアイデ ンティティーが存在していない とする意見がある*3) またある学者は ヨーロッパ アイデン ティティーの成立はヨーロッパの歴史と関連しており ヨーロッパには数多くの国家があるけれ ども 統一性を持った文明が存在していて それはフランスの歴史学者ギゾー Guizot, Franois Pierre Guillaume が提唱した ヨーロッパ文明 のようなものである この ヨーロッパ文明 は ヨーロッパ諸国に一つの 超民族主義 的政治体系を形成させ ヨーロッパ共通の文化遺産 を保護し 争いを避ける道をもたらした ヨーロッパ史上に起こった戦争は 三つのレベル 地 域 国家 民衆 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衝突だと解釈できる とした*4) これに賛同する意見 としては ヨーロッパはもともとアジアと大変大きな違いがあり 我々ヨーロッパ人 という 同一性意識は アジアではかなり稀薄であるから アジアがヨーロッパのように連合することは 実現不可能で EUのような共同体建設もユートピア的幻想にしか過ぎないという またある者は近代ヨーロッパの政治文化の発展について分析し 近代ヨーロッパの発展には ずっと平行して二つの道が存在していた 一つは 民族国家 としてヨーロッパにあまねく現 実となった近代国家形態の出現につながるもの もう一つはヨーロッパ人の相互 アイデンティ ティー すなわち ヨーロッパ観念 を反映したものである 前者は主権国家に通じ 後者はい わゆる ヨーロッパの統一 に通じる道であった この二つの道はいずれも中世からつな がっているもので よって近代ないしは現代ヨーロッパの政治哲学を理解するためには 必 ずこの二つの 観念 民族観念とヨーロッパ観念を把握せねばならない これらは 民族主 義 ヨーロッパ主義 とも呼べるであろう 民族観念は民族国家および多民族の 連邦制国 家 に通じ ヨーロッパ観念は今日のEU あるいはヨーロッパ一体化への道 に通じる *5)こ の意見に賛同する人は 我々ヨーロッパ人 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ーは 実際はEU成立のた めに特別に強調されられたものだ という ヨーロッパの同一性作用に対する判断はどうであれ 東アジアにもヨーロッパのようなアイ デンティティーを構成する歴史的基礎は存在している という認識は多くの人々でだいたい一致 している これはよく強調されることだが 東アジア地域は確かに漢字文化と儒教文化に代表さ 3) 柿沢弘治 アジアは一つ いまこそ 東海大学平和戦略国際研究所編 東アジアに 共同体 はできる か 社会評論社 2006年 第224 230頁 4) 木畑洋一 欧洲的統合与意識形態的重層性 EC 蓮実重彦 山内昌之編 今 なぜ民族か 東京 大学出版会 1994年 第204 216頁 5) 陳楽民 周弘 欧洲文明的進程 生活 読書 新知三聯書店 2003年 第106 107頁

32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れる文明圏の影響下にあった だが多くの研究が証明しているように たとえ同一の文明圏に あっても 各民族と国家的価値観の差がなお大きければ 甚だしい場合別の文明を派生させるこ ともありえた したがってわずかにこれだけでは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証明するに は十分な説得力を持っていない 歴史上の東アジア秩序の変遷過程からは 東アジアにアイデン ティティーを確立することの困難性 複雑性が見て取れる 歴史上出現した様々な 東アジア共同体 建設の主張は その目的がみな東アジア地域の国際 関係を維持させることにあり 地域の国際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適用するある特定のモデル こ れがすなわち東アジアの秩序であった 近代的意味の国家が登場する以前 古代東アジア地域の 主導的な地位を占めていたものとしては 費正清教授が概括した 華夷秩序 the imperial tributary system による国家関係があった 華夷秩序 の評価は人によって異なるが 華夷 秩序 が崩壊して以降 東アジア地域には今に至るまで 本当の意味で 共同体 と称しうる体 制は現れていない 華夷秩序 が成立し得たのは まずもって一つの 強大 で 富裕 な中国と 相対的に弱 い周辺地域が存在したことによる しかし 華夷秩序 には実態は無く 周辺に対して直接統治 を行おうと計画することすら全く無かった 中央 としての中国は 周辺国家の君主を冊封す ることで 地域の安定を保持し 間接的にその影響力を発揮することを望み 周辺の国家と民族 は 中国との朝貢関係を通じて国家の安全保障と内政 外交の自主性を維持することを望んだ このような東アジア秩序には明確な支配 従属関係がなく 近代の帝国主義による周辺支配関係 とは違っていた その上当時日本など東アジアにおけるいくつかの国家が 華夷秩序 を模倣し て 自らを中心とする 小規模朝貢体制 をとり 中国を中心とした秩序を変えようとしたが これはこの地域秩序に対する挑戦だと見なされた*6) 16世紀末以降 中国を中心とする秩序は周 辺国家からの批判を浴びるようになり それぞれの小さな 中心 自身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が 次第に体系化して 華夷秩序 は動揺した 中国中心の 華夷秩序 は 帝国性 *7)を持っては いたが 当時は確かに東アジアの基本秩序であったし 理想的な東アジア国際秩序モデルではな いかもしれないが 帝国秩序方式に代わる思想体系を見出すことは出来なかった 近代に入ると 日本はイギリスとの同盟体制を後ろ盾に ロシア勢力の南下を阻止し 同時に 地域の 中心 に昇り上がった その後アメリカの支持を得て 台湾 朝鮮を併呑し 中国の東 北地方にまで侵出した 日本のこの伸張は かつて地域の中心であった清朝の没落に伴うもの で これにより東アジア秩序は変化を来した 表面だけを見れば 主権観念を基礎とする 国際 法 万国公法 による国際関係秩序の原則が 東アジアの伝統的秩序に取って代わる傾向にあ り 各国は少なくとも形式上は平等な地位を有していた しかし平等原則が実際に遵守されるこ とは稀で 主導的地位を占めたのは 資本主義の原動力とその強制的手段である武力 すなわち 弱肉強食 の原則であった 日本は英米の植民統治から東アジアの各民族を解放することを標 榜したが 実際には伝統的な 華夷秩序 に代わって日本の主体性を突出させ 大日本帝国の自 給自足体系を成立させようと企図した これこそが 大東亜共栄圏 に象徴される日本中心の 大東亜秩序 であり その思想背景には 日本が中華秩序から脱するときに形成されたアジア 主義があった その後中国への侵略戦争を開始したのち できるだけ速やかに持久戦状態を終わ らせるため 平和的 に東アジアの新秩序を建設する 東亜新秩序論 が提唱された これら 6) 浜下武志 朝貢システムと近代アジア 岩波書店 1997年 7) 白永瑞 東亜的地域秩序 超越帝国 走向東亜共同体 思想 第3期 天下 東亜 台湾 第129 頁 白永瑞 東亜的地域秩序 超越帝国走向共同体 導論 創批社 2005年 ソウル

3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_ 3 国際法 や文明的国際秩序を唱えることは 主権尊重の原則からすれば理想状態であったが その実覇権国家によって主導されたものであった 戦後の冷戦期 東アジアの国際関係は長い間アメリカとソ連をリーダーとする二大陣営の対立 に巻き込まれた アメリカは経済 技術 軍事面での協力によって 東アジア各国がアメリカ式 の社会体制を採用するように仕向けた 経済面では実際は 日本を中心とした垂直的な地域分業 体制である大東亜共栄圏の経済システムを復活させ 軍事面では アメリカをリーダーとする東 アジア安全保障秩序を構築した 結局まだ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成立させることはで きなかった 冷戦後の東アジアは 国際化と経済グローバル化の波を受け その内部で重要な構造変化が生 じた 主要国である中 日 韓の実力比が 現在につながるような形に変化したのだ 東アジア 秩序の面から見ると 今日の東アジアは歴史上初めて 一強 が存在しない状態にある 現在の 東アジアにおける国家 民衆間の往来 交流は密接で 共同体を建設する際の三つの壁 地理 の壁 歴史の壁 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壁 は崩れ始めている*8) 東アジア地域のアイデン ティティー成立の面から言えば 現在はこれを公認する比較的良い機会であろう しかし一部の 人の中には冷静に次のように指摘する者もいる すなわち 日 中 韓の三経済大国の間は 経 済の相互依存関係はますます深まりつつあるにもかかわらず 共同体意識 は一向に育ってこ ない 第二次大戦後六〇年になろうというのに 日 中 日 韓の間には 歴史認識 教科書 靖国神社参拝等の問題をめぐり 未だに政治的 感情的な溝があり それが共同体意識の芽生え を阻んでいるのが現状である *9) したがって共同体意識を育むためには まず歴史問題から来る障害を解決する必要がある 国 境を越えた歴史認識を確立することが その重要な第一歩である 二 国境を越えた歴史認識をつくるための努力 ここ数年 歴史認識についての国際間対話は 人々に注目されるテーマとなってきた 特に ドイツとフランスが共同で教科書 1945年以後のヨーロッパと世界 (Europe and the World since 1945) を編纂した努力と結果は この方面における成功例であろう*10) ヨーロッパの状況 に比べ アジア 特に東アジアの中国 日本 韓国の間における歴史認識問題の齟齬は突出して いる それでは同じ東アジア地域に位置する中国 日本において 歴史問題の対話が進められ 共通した歴史認識を持つことは可能であろうか 近年 日 中 韓三国の学者間で共通した歴史 認識を確立しようと 意義のある試みと努力が払われてきている 注目すべきは 東アジア各国の多数の歴史学者 教師が すでに歴史教育の面で世界に目を向ける 積極的努力をしており 新しい歴史教育は自国史を世界史の文脈の中でとらえようとし 自国史を世界 史の一部として 世界的視野から自国の歴史的発展と変化を認識しようとしていた 1990年代後半 日本のいくつかの大学が分担して組織した 日本 アメリカ 中国 台湾を含 8) 進藤栄一 平川均編 東アジア共同体を設計する 日本経済評論社 2006年 第3頁 9) 谷口誠 東アジア共同体 経済統合のゆくえと日本 岩波新書 2005年 第46頁 10) Claudia Schneider, The Japanese History Textbook Issue Viewed trough the Prism of European Experiences and the Current Situation in East Asi

34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む 韓国の学者が参加する 東アジアの相互認識と誤解 に関する研究が進められ 東アジア における歴史認識の問題点について討論が行われ その研究報告が出されている*11) 同じ時期 日本と韓国の教育機関 学術団体がそれぞれ共同研究の機会をつくっている ソ ウル市立大学校歴史教科書研究会と東京学芸大学歴史教育研究会が組織した 日韓歴史教科書シ ンポジウム や 両国の歴史学 歴史教育に関わる10の団体が設立した 日韓歴史学会合同シン ポジウム などがそうである これらのシンポジウムは 日本で90年代中頃に現れた歴史修正主 義的な思潮と 新しい歴史教科書 の編纂に見える狭隘な民族主義の動きに対し 東アジア各国 の歴史認識を相互理解することを目標に活発な討論が行われ 東アジアの共生と歴史教科書問題 について*12) それぞれ共同研究の基礎的成果が発表された*13) 21世紀に入 り 東アジア各国の 学者 教師 による 共同研究 の面で 新たな進展 と成果が 現れ た その中で代表的なものを挙げれば 2002年から始まった日 中 韓の学者 教師 市民団体 を代表とする組織が 毎年一回 歴史認識と東アジア平和に関する論壇 で討論を行った これ を基に日 中 韓の共同歴史編纂委員会は 3年の共同研究 討論を経て 2005年に 未来を開 く歴史 東アジア3国の近現代史 を三カ国共同で出版した*14) この本は歴史の補助教材という 形で出され 三カ国の中学校である程度利用された 各国の学生は毎年歴史学習夏合宿等で互い に交流をはかっている 現在 三カ国の学者 教師による共同委員会はなお継続しており 先に 出版した 未来を開く歴史 の誤っていた箇所についてより深い研究が進められ 充分な討論と 研究を踏まえた上で 第二弾 第三弾の共同出版を期している 2001年東京大学教授三谷博氏など日本の学者と中国の劉傑教授らは 日中若手歴史研究者会 議 をつくり 歴史問題を背景とした日中両国の社会変動情況について討論した 数年間の努力 を経て 2006年 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日中対話の試み を日本と中国で同時に出版し 日中 の歴史認識のうち特に近現代史に関わる問題について 深い討論と研究が進められた*15) 2007年 日本と韓国の学者 教師による幾度 もの共同シンポジウムを経 たのち 研究結果 日韓交流の歴史 先史から現代まで が東京学芸大学 君島和彦教授と韓国の学者によって共 同で出版された*16) その他日本の広島県教職員組合と韓国大邱市教職員組合が組織した日韓共 通歴史教材制作チームは 朝鮮通信使 豊臣秀吉の朝鮮侵略から友好へ を共同編纂し*17) 日韓 の女性団体は歴史教材編纂委員会を組織して 日韓近現代史 ジェンダーの視点からみる を共 同出版した ここに述べたような国境を越える共同歴史研究と教材編纂の努力は 表現の形式が違い 共 同研究の深度も一定ではないが 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をつくるという目標は共通したものだ 11) 山室信一編 日本 中国 朝鮮間の相互認識と誤解の表象 1998年 上越教育大学東アジア研究会 編 歴史表象としての東アジア 歴史研究と歴史教育との対話 2002年 二谷貞夫編 21世紀の歴 史認識と国際理韓国 中国 日本からの提言 2004年 12) 歴史学研究会編 歴史教科書をめぐる日韓対日韓合同歴史研究シンポジウム 大月書店 2004年 13) 君島和彦 教科書の思日本と韓国の近現代史 すずさわ書店 1996年 鄭在貞 韓国と日本 歴史 教育の思想 すずさわ書店 1998年 14) 面向未来的歴史 東亜三国的近現代史 中国語版は12 13万部発行 日本語版は7万部 韓 国語版は5 5万部 15) 跨越国境的歴史認識 中国語版は中国社会科学文献出版社より2006年に出版 日本語版は東京大学 出版会 2006年出版 16) 君島和彦 日韓交流の歴先史から現代まで 明石書店 2007年 17) 日韓共通歴史教材制作チーム編 朝鮮通信豊臣秀吉の朝鮮侵略から友好へ 明石書店 2005年出 版

5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_ 3 一つには各国で世界史を叙述する際 影響を受けてしまっている西洋中心史論から脱し アジア に関する叙述の比重を増やすこと もう一つは自国史と東アジア史との関係を処理し 特に 自 国史の枠組みを超える東アジア史 が可能かどうかを考えること ここにおいて 超える 超越 する ということは重要な概念であった 自国史と東アジア史との関係を処理するには その方法に異なる方向が存在する 比較的よく 見られるのは 自国から地域史に拡大させる方法で これを 同心円史観 に帰納する者もい る しかしこのような方法で本当に自国史を超えることができるかどうかは よく考えてみなけ ればならず いわゆる 同心円史観 の人は 実際は自らの地域を中心にした民族主義の歴史認 識を強調するだけであることが多い*18) この現状に対して 東アジア視角 あるいは 東アジ ア史観 の概念を持ち出すものもいた 例えば韓国の学者は自国史の解体から始めて まず 国 史 の名称をやめて 韓国史を世界史と合わせ 世界史の中の韓国史 と 韓国史の中の世界 史 を 考 えようとした その 中間段階 として 東 アジア 史 を 提唱 し より 実際的 にはまず 日 中 韓三国関係史 を考えようというものだった*19) 自国史を超え 国民国家の歴史記憶を超え 共有の東アジア史を認識するには 歴史学が互い に異なる歴史記憶を統合し その中の関連性を探り その中の共同性を考察する必要がある た とえこの関連 共同性がかなり希薄なものであったとしても たゆまぬ研究によって歴史認識の 共有化を実現せねばならない これと同時期に政府主導による歴史共同研究も開始された まず日本と韓国が2002年に共同歴 史研究を開始したが 2005年に一旦終了し 2006年第二期の共同研究が始められた 中国と日本 の共同歴史研究は2006年末に始められ 現在まで三年近くが経っている 日中の共同歴史研究は 古代史 中世を含む と近現代史の二つのグループに分けられ 16のテーマ 古代史が7つ 近 現代史が9つ が設定された 特に近現代史グループでは テーマを定めただけでなく 一つの テーマの中にキーワードを設定した 両グループともに共同のテーマ キーワードに従って論文 を制作し 討論を行い その結果研究はさらに一歩深められた 三 歴史問題*20)に関する対話の異なる側面 上述したように歴史認識問題について国境を越える努力がなされてきたが 各方面からの評価 は大きく異なっていた ある者は歓迎の意を表し ある者は理解できないと感じて 批判を行 い 反対を表明する者もいた その原因を探れば 歴史問題に関する対話の異なる側面に きち んとした区分がなされていないことにあった 18) かつて台湾の 教育部長 であった杜正勝氏は いわゆる台湾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強調するため 同心円史 観 を提唱した 杜正勝 一个新史観的誕生 新史学之路 台北 三民書局 2004年 しか しある学者が批判したとおり この考えは台湾を 単一中心 とする民族主義を強調する表現に過ぎず 実質的に は中国大陸と距離を保とうとする 去中国化 のための一段階であった 王晴佳 当代台湾歴史論述的双重挑 戦 思想 2号 台北 2006年 第120 121頁を参照 19) [韓 白永瑞 為構築東亜和平而読史 黄海文化 2004年 関于東亜論述的可能性 書 城 2004年 東亜的地域秩序 超越帝国 走向東亜共同体 思想 第3期 天下 東 亜 台湾 20) ここで言う中日歴史問題とは 両国で近代史の認識領域の問題を指し 歴史そのものと関わる部分は含まない 現在に至るまで懸案となってまだ解決していないのは 中日関係における現実問題 例えば遺棄化学兵器の処理 問題 尖閣諸島 釣魚島 東シナ海油田などの領土資源問題である

36_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東アジア地域の歴史問題は主に政治 感情 学術研究の三つの異なる しかし互いに連携した 側面が反映しており 歴史認識の齟齬 争論の異なる側面を整理しなければ 歴史問題について 対話を行うことはできない まず政治面の対話とは 明らかに日本の行った植民統治と侵略戦争の性質に関する政治判断の ことである 20世紀初頭から日本と東アジア主要国の関係は 極めて異常な情況下にあった まず日本は韓 国との三度の 協約 締結により 韓国の外交 内政 軍務を支配し 1910年に朝鮮総督府を置 いて日韓併合を強行し 植民統治を開始した 進んで1931年の満州事変 九 一八事変 と1937 年の盧溝橋事件によって 中国東北部から全面的な中国侵略戦争を始めた では戦後日本はこの 戦争について考え直し 反省を行ったのだろうか 1965年に日本が韓国と結んだ 日韓基本条 約 と1972年の 日中共同声明 あるいは1978年の 日中平和友好条約 の内容から見れば 日 本政府はすでに積極的な態度を表明している その後1993年細川護煕首相は 当時の日本が起こ した戦争は 誤った戦争 であり 侵略戦争 であったと再確認した 1995年村山富市首相 は 現在まで歴代首相が継承している戦後50周年に関する談話を発表した*21) もし日本の右翼と 保守勢力 特に一部の保守議員 官僚が上述の反省態度に対して猛烈に反対しなければ 政治面 での対話は必要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 しかし不幸なことに 戦後日本の政界は常に侵略戦争の 性質を否認し続けた 特に55年体制が確立して以降 日本社会は復古主義の暗流が活躍し続け 大東亜戦争 の歴史観への後戻りを肯定することが広く行われてきた 一部の政治家は口では 反省 をとなえながら 侵略戦争に対する本当の認識は その反省とは一致せず あるいは対 立するものであった*22) この態度が後の日本の政治家に与えた影響は大きく 80年代の戦後40年 政治 総精算 思潮や 90年代に歴史認識を修正しようと 新しい歴史教科書 を編纂した 自 由主義史観研究会 の活動 首相の靖国神社参拝 侵略戦争の責任否認はすべてこれと密接な関 係がある 1995年に105名の自民党議員が 歴史 検討委員会 を設置し 日韓併合の強制性と 非合法性を否認し 南京大虐殺虚構論 を言い出し 従軍慰安婦 の商業的性格を唱えるな ど 戦争中の日本軍の責任を全面的に否認し ひいては植民統治の非合法性と戦争の侵略的性質 を否認した 最近では日本の自衛隊航空幕僚長 田母神俊雄氏の日本は侵略国家ではないとする 論文が表彰された これらの情況は政治面での対話とは やはり侵略戦争の性質に関して根本的 な是非を判断する問題であり この側面の対話が主に政府 政治家によって行われていたことを 示している 続いて民衆の感情面での対話であるが これは異なる歴史体験によって生まれた東アジア各国 民の認識の齟齬を解決することである 疑いようもないことは 日本も含めた東アジア各国の民衆にとって 戦争に関する歴史記憶の うち 最も深い側面が戦争中の被害に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例えば中国では 侵略戦争に関 21) 細川護煕首相は 日本が起こした戦争を 侵略戦争 誤った戦争 であったと明確に表明した 村山富市首 相は わが国は 遠くない過去の一時期 国策を誤り 戦争への道を歩んで国民を存亡の危機に陥れ 植民 地支配と侵略によって 多く の国々 とりわけアジア諸国の人々に対して多大の損害と苦痛を与えました 私は 未 来に誤ち無からしめんとするが故に 疑うべく もないこの歴史の事実を謙虚に受け止め ここにあらためて痛切な反省 の意を表し 心からのお詫びの気持ちを表明いたします また この歴史がもたらした内外すべての犠牲者に深い哀 悼の念を捧げます と表明した 竹内実 21世紀中国総研編 日中国交文献集 蒼蒼社刊 200 5年 第440 441頁 22) 岸信介は戦犯として監禁されていたとき自己弁護を行い 日本の 正当防衛 を主張した 彼は太平洋戦争に対 して当然なされるべき反省を認めず もし反省があるとすれば それはただ一点 敗戦 そのものにたいする反 省である 原彬久 岸信介 権勢の政治家 岩波新書 第121 122頁 1995年

7 東アジア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国境を越える歴史認識 _ 3 するキーワードとして 南京大虐殺 731細菌部隊 三光作戦 などの概念があり 韓国 では 従軍慰安婦 創氏改名 植民統治 などが 日本では主に 広島 長崎における原子 爆弾 東京大空襲 沖縄戦 などがあった これら戦争に関する歴史記憶は間違いなく事実 であるが それぞれウェイトが違うものだった 戦争の被害意識と加害意識が重なる日本国民の 立場から言えば もし 一国内部的な視野の狭隘さ に限定すると*23) 加害意識が欠落 し 同じ歴史過程を経た被害国の国民体験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 戦後日本の反戦 反核運動 は 日本の民主主義と平和運動が発展する重要な出発点であるが 他の民族に被害を与えた戦争 責任に対して反省を欠き 原子爆弾による 被害体験 のみを強調するため 広範な理解が得ら れていない*24) 戦後50年の年に広島の平和記念資料館 原爆資料館 の展覧会が アメリカでは 出展されなかったことは このことを典型的に証明している 当然ながら 日本の民衆が中国 韓国民の戦争被害情況に対して理解できないのは 戦時中の軍国主義政府が世論を制限してい て その責任が民衆にはなかったことに関係している しかし戦後 各国民がこの問題について 充分な交流を進められなかったことが 認識の差に結びついた面もあった したがって異なる歴 史体験による各国民の認識の差には 比較的明確な感情要因を伴っており 政治面の問題解決と は違って 民間で深い交流を行い 相互理解につとめることが求められる 三つ目の学術面の対話は 主に両国の歴史学研究における使用資料 研究方法の差と 歴史体 験の違いによって生まれる認識の差の問題であった 東アジア各国の近代史はどれも 西洋列強の武力に迫られた 開国 から始まるが その後の 近代史発展過程において大きく違いが生まれ 各国の学者がこの時期の歴史を研究する面でも相 当大きな差が存在していた 中国は国際社会から門戸開放を迫られると 国家 民族の命運と前 途を憂慮することから 西洋の挑戦に応戦し 中国の復興を勝ち取ろうとした しかし列強に対 抗しようとした幾度かの改革で相次いで失敗すると 憂国の情はますます深まり 列強との衝突 はさらに激しくなった 中国の学会では 近代中国が直面した 数千年来で初めての非常事態 *25)と 不平等条約体制 との抗争に注目してきた 韓国の学会も同じく近代化過程における主 権の保護と外圧 干渉 特に植民地となって以後の独立運動 闘争に重きを置いていた*26) そ れに対してこの時期の日本は 脱亜入欧 方式をもって 亜細亜の固陋を脱して西洋の文明に 移りたり 西洋の文明国と進退を共にし まさに西洋人がこれ 支那 朝鮮 に接するの 風に従て処分すべきのみ とした*27) これは中国がその伝統に対して 中学為体 西学為用 中国の文化や制度を主体とし 西洋の技術を実用とする とした方法とは異なっていたし 日本はそのことについても その古風旧慣に恋々する もので 外見の虚飾のみを事とし た 不廉恥を極め たものと批判し 世界万国の事情に通じ 万国公法宗と云へる宗門に入 り度ものなり *28)とした 中国 韓国とは対照的に 日本の近代史研究は 西洋から受け入 れた 国際法秩序 がもたらした利益を重視している 1931 45年の戦争中 中日両国は異なっ た国際集団に属していて 歴史体験も全く異なっており 歴史認識についても異なる思考論理が 形成された 中国では この時期に発生したいかなる事件も その相手が基本的に日本であった ため すべて抗日戦争ということになる しかし日本では 満州事変 九 一八事変 と 盧 23) 大沼保明 東京裁判 戦争責任 戦後責任 東信堂 2007年 第144頁 24) 吉田裕 現代歴史学と戦争責任 青木書店 1997年 第183 188頁 25) 李鴻章 籌議海防折 李文忠公全書 奏稿 2 1頁 26) 韓 李元淳等 韓国的歴史 日本明石書店 2005年第2版 27) 福沢諭吉 脱亜論 福沢諭吉全集 第10巻 第240頁 慶應義塾編 岩波書店発行 28) 福沢諭吉 或云随筆 福沢諭吉全集 第20巻 第12頁 慶應義塾編 岩波書店発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