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 究 論 文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오현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통합과정 수료, 한국고대사 전공 98kid2000@hanmail.net I. 머리말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V. 맺음말
I. 머리말 근대사학 도입 이후 수많은 고조선사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형성지 및 그 중심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연구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도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견해가 요서설 1), 요동설 2), 평양설 3) 이다. 그런데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와 관련해서 주로 논의되는 주제는 갈석산( 碣 石 山 )과 요수( 遼 水 )의 위치, 연( 燕 ) 진( 秦 ) 장성( 長 城 )의 동단이 어디냐이다. 그 위치 비정에 따라 고조선의 위치 및 영역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갈석산은 고조선의 전기 중심지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주목을 끌어왔 다. 그런데 사료상에는 갈석산이 하북성 지역인 현재의 갈석 외에 내륙 지역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나와, 연구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고 있다. 만약 갈석산이 현 하북성 지역의 그것이라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자연 난하( 灤 河 ) 유역으로 비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갈석산이 내륙 지역에도 존재했다면,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중심지는 해당 지역으 로 귀결될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갈석은 문헌 기록에서 요수와 관련해서도 나온다. 요수에 대해서는 고래로부터 여러 견해가 있었으나, 크게 난하설 4) 과 요하설 5) 로 1) 김석형, 고조선의 연혁과 그 중심지들에 대하여, 고조선에 관한 토론론문집 (과학 원출판사, 1963), 106쪽; 金 廷 鶴, 韓 國 上 古 史 硏 究 ( 汎 友 社, 1990), 151쪽; 李 亨 求, 大 凌 河 流 域 의 殷 末 周 初 靑 銅 器 文 化 와 箕 子 및 箕 子 朝 鮮, 한국상고사학보 제5집(한국상고 사학회, 1991), 27 30쪽; 林 炳 泰, 考 古 學 上 으로 본 濊 貊, 韓 國 古 代 史 論 叢 제1집(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所, 1991), 94쪽; 吳 江 原, 古 朝 鮮 位 置 比 定 에 관한 硏 究 史 的 檢 討 (2), 白 山 學 報 第 48 號 ( 白 山 學 會, 1997a), 105 106쪽; 吳 江 原, 昌 黎 縣 位 置 에 관한 一 考 察 古 朝 鮮 位 置 문제와 관련하여, 淸 溪 史 學 第 13 輯 (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 淸 溪 史 學 會, 1997b), 47쪽. 2) 황철산, 고조선의 종족에 대하여, 고고민속 1호(과학원출판사, 1963), 7 8쪽; 尹 乃 鉉, 韓 國 古 代 史 新 論 ( 一 志 社, 1986), 106 116쪽; 徐 榮 洙,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韓 國 史 市 民 講 座 제2집( 一 潮 閣, 1988), 50쪽; 盧 泰 敦, 古 朝 鮮 중심지의 變 遷 에 대한 연구, 韓 國 史 論 제23집(서울 大 學 校 人 文 大 學 國 史 學 科, 1990), 53쪽; 李 鍾 旭, 古 朝 鮮 史 硏 究 ( 一 潮 閣, 1993), 82쪽. 3) 李 丙 燾,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博 英 社, 1987), 36쪽; 력사편집실편,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4); 북한문제조사연구소, 북한의 <단군릉> 발 굴관련자료 사회과학원 <보고문> 및 학술논문 (1994); 윤내현, 고조선 연구 ( 一 志 社, 1999), 339 357쪽; 이형구 엮음, 단군과 단군조선 (살림터, 1995). 4) 尹 乃 鉉, 앞의 책(1986), 43 44쪽. 5) 吳 江 原, 앞의 논문(1997b), 42 43쪽. 268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나뉜다. 그런데 요수의 발원지에 대해, 사기 와 통전( 通 典 ) 에서 진( 秦 ) 나라 장성이 낙랑군 수성현( 遂 成 縣 )의 갈석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우선은 요수를 연 진 의 장성과 관련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따라서 연 진의 장성 유적이 현재의 어디까지인지 밝힐 수 있다면 요수의 위치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전기 중심지를 밝힐 수 있는 갈석 요수 장성과 관련해서는 고대 문헌 중에서 회남자( 淮 南 子 ) 의 시칙훈( 時 則 訓 ) 인간훈( 人 間 訓 ) 추형훈( 墜 形 訓 ) 편에 기재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조문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또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이어서 그렇게 해서 밝혀진 고대의 갈석 요수와 장성의 동단은 현재의 어디인지 규명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기초 로 하여,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구체적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그동안 물질문화 자료의 꾸준한 축적으로 고조선사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시점을 이미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를 활용치도 못하면서 중심지 문제에 몰두하는 모습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를 밝힘으로써,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논란을 마무 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였다. 이 글에서는 갈석과 요수에 대해 다소 선험적이고 추상적으로 접근했던 기왕의 연구에서 한 걸음 나아가, 각종 고대 문헌과 주석서들을 활용하여 그 구체적인 위치 비정을 하고, 이로부터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확정짓도록 할 것이다.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회남자 의 시칙훈 편에는 五 位, 東 方 之 極, 自 碣 石 山, 過 朝 鮮, 貫 大 人 之 國. 이라는 조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간훈 편에는 見 其 傳 曰, 亡 秦 者 胡 也, 因 發 卒 五 十 萬, 使 蒙 公 楊 翁 子, 將 築 脩 城, 西 屬 流 沙, 北 擊 遼 水, 東 結 朝 鮮. 이라 했고, 추형훈 편에서는 遼 出 砥 石. 이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 조문들을 통해, 고조선의 상대적 위치를 알려주는 갈석과 요수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69
단, 이들 조문들의 사료적 가치가 먼저 검증될 필요가 있기에, 우선 회남자 의 문헌적 성격 및 성서 시기와 관련하여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회남자 는 전한 초기에 회남왕이었던 유안( 劉 安, 기원전 179 122) 과 그의 빈객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다. 고유( 高 誘 )가 지은 회남홍열 해서( 淮 南 鴻 烈 解 敍 ) 에는 저술에 참여했던 학자들로 소비( 蘇 飛 ), 이상( 李 尙 ), 좌오( 左 吳 ), 전유( 田 由 ), 뇌피( 雷 被 ), 오피( 伍 被 ), 진창( 晉 昌 ) 등 8인과 유학자였던 대산( 大 山 ), 소산( 小 山 ) 등을 열거하고 있다. 6) 유안은 무제(기원전 141 87) 즉위 초에 본서를 무제에게 헌상하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본서가 저술되었을 것인데, 정확한 저작 연대는 본문 중에는 나와 있지 않다. 회남자 의 저작 시기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학자들은 문( 文 ) 경제( 景 帝 )대로 파악하고 있으나 7), 경 무제대로 생각 하기도 한다. 8) 웅예회( 熊 禮 滙 )는 본서가 무제 건원( 建 元 ) 원년(기원전 140)에 시작하여 건원 2년 10월에 성서되었다고 보아, 저작 시기를 가장 늦추어 보았다. 9) 그런데 한서 회남형산제북왕전( 淮 南 衡 山 濟 北 王 傳 ) 에는 유안이 회남자 를 무제에게 바칠 때, 전분( 田 蚡 )이 태위( 太 尉 )의 직위에 있다가 10) 건원 2년(기원전 139) 10월에 태위직을 사임했다고 나온다. 11) 그렇다면 유안이 회남자 를 바친 것은 전분이 태위의 직위에 있던 건원 원년이나 2년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 본서가 저술된 시기는 대략 무제 이전의 경제 시기(기원전 157 141)로 추정할 수 있겠다. 12) 6) 高 誘, 淮 南 子, 淮 南 鴻 烈 解 敍. 於 是 遂 與 蘇 飛, 李 尙, 左 吳, 田 由, 雷 被, 毛 被, 伍 被, 晉 昌 等 八 人, 及 諸 儒 大 山, 小 山 之 徒, 共 講 論 道 德, 總 統 仁 義, 而 著 此 書. ; 淮 南 子 의 저작 자에 관한 문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기 바람. 陳 靜, 淮 南 子 作 者 考, 中 國 哲 學 史 1 期 ( 北 京 : 中 國 哲 學 史 學 會, 2003), 116 119쪽. 7) 高 曉 榮, 新 時 期 大 陸 學 界 淮 南 子 硏 究 綜 述, 安 徽 文 學 第 2 期 ( 曲 阜 : 曲 阜 師 範 大 學 歷 史 文 化 學 院, 2008), 307쪽. 8) 陳 廣 忠, 淮 南 子 的 成 書, 傳 播 與 影 響, 船 山 學 刊 2 期 ( 長 沙 : 湖 南 省 社 會 科 學 界 聯 合 會, 1996), 102쪽; 陳 麗 華, 淮 南 子 硏 究 初 探, 蘭 台 世 界 20 期 ( 西 安 : 西 安 交 通 大 學 人 文 社 會 科 學 學 院, 2007), 45쪽; 馬 慶 洲. 六 十 年 來 淮 南 子 硏 究 的 回 顧 與 反 思, 文 學 遺 産 第 6 期 ( 北 京 : 清 華 大 學 出 版 社, 2010), 137쪽. 9) 熊 禮 滙, 淮 南 子 寫 作 時 間 新 考, 武 漢 大 學 學 報 ( 哲 學 社 會 科 學 版 ) ( 武 漢 : 武 漢 大 學, 1994), 104 107쪽. 10) 班 固, 漢 書 卷 44, 淮 南 衡 山 濟 北 王 傳 第 14. 初 安 入 朝, 獻 所 作 內 篇, 新 出, 上 愛 秘 之. [ ], 雅 善 太 尉 武 安 侯. 11) 班 固, 漢 書 卷 4, 文 帝 紀 第 4, 太 尉 潁 陰 侯 灌 嬰 爲 丞 相 에 대한 王 先 謙 의 補 注. 建 元 二 年, 丞 相 嬰 太 尉 蚡 免 12) 金 容 燮, 淮 南 子 의 구성과 문제의식, 韓 國 의 哲 學 第 19 號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1), 5쪽. 270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그리고 유안이 그의 빈객들과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무제 집권 초기라는 짧은 시간에 저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원 자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과거의 문적을 참고했을 것이므로, 결코 일시에 저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회남자 의 구체적인 저작이 경 무제대에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성서과정은 오히려 문 경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싶다. 물론 회남자 는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성서 연대의 고증은 곤란하나, 갈석 과 요수 조문들은 최소한 무제 이전의 자료들을 근거로 했을 것이다. 유향( 劉 向 )이 이 책을 회남( 淮 南 ) 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고유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회남자 내편( 內 篇 ) 의 이름을 홍열( 鴻 烈 ) 이라 하였 다. 13) 반고의 한서 회남형산제북왕전 에서 내서( 內 書 ) 21편과 중 서( 中 書 ) 8권이 언급되어 있고 14), 왕선겸( 王 先 謙 )은 내서 21편, 외서 33편을 언급하고 있다. 15)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내서 뿐 이다. 이 내서 와 외서 에 대해, 일찍이 안사고( 顔 師 古 )는 내편은 도를 논하였고, 외편은 잡설이다 16) 라고 하였다. 즉, 외서 의 저작에는 방술( 方 術 )의 무리들이 참가했던 반면에, 내서 는 앞에서 열거한 작자들이 위주가 되어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17) 그러므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회남자 는 외서 중서 와 달리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본서의 조선 관련 조문을 무조건 배척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동쪽 경계에 갈석산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음을 알려주는 시칙훈 편의 조문을 사료로서 고려해볼 수 있다. 사실 조선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관자 의 규탁( 揆 度 ) 편과 경중갑( 輕 重 甲 ) 편이다. 이 양자와 비교 해본다면, 시칙훈 편 조문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자 에 13) 高 誘, 淮 南 子, 淮 南 鴻 烈 解 題. 然 其 大 較 歸 之 於 道, 號 曰 鴻 烈. 鴻 大 也, 烈 明 也, 以 爲 大 明 道 之 言 也, [ ], 光 祿 大 夫 劉 向, 校 定 撰 具, 名 之 淮 南. 又 有 十 九 篇 者, 謂 之 淮 南 外 篇. 14) 班 固, 漢 書 卷 44, 淮 南 衡 山 濟 北 王 傳 第 14. 淮 南 王 安 爲 人 好 書, [ ], 招 致 賓 客 方 術 之 士 數 千 人, 作 爲 內 書 二 十 一 篇, 外 書 甚 衆, 又 有 中 篇 八 卷, 言 神 仙 黃 白 之 術, 亦 二 十 餘 萬 言. 15) 班 固, 漢 書 卷 44 淮 南 衡 山 濟 北 王 傳 第 14. 作 爲 內 書 二 十 一 篇, 外 書 甚 衆 에 대한 王 先 謙 의 補 注, 管 本 考 證 云, 按 藝 文 志 雜 家, 淮 南 內 二 十 一 篇, 外 三 十 三 篇. 16) 班 固, 漢 書 卷 30, 右 墨 六 家 86 篇, 淮 南 外 三 十 三 篇 에 대한 顔 師 古 의 注. 內 書 論 道, 外 篇 雜 說. 17) 徐 復 觀, ( 增 訂 ) 兩 漢 思 想 史 卷 2( 臺 北 : 學 生 書 局, 1984), 179쪽.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71
서 조선 을 발( 發 ) 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시칙훈 편과 큰 차이를 보인다. 즉, 발 의 이탈은 조선의 색채가 좀 더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시칙훈 편의 기록은 규탁 경중갑 편보다 후대의 기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시칙훈 편의 갈석 조문은 최소한 전국시대의 기록 일 가능성이 높다. 문헌상에도 춘추시대 제( 齊 )나라 환공( 桓 公 )이 하북성 중 북부의 북 방 세력을 물리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중원 세력이 하북성 동쪽 끝의 갈석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적극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산융( 山 戎 )의 유병식동검문화 ( 有 柄 式 銅 劍 文 化 ) 지역에서 기원전 6 5세기경에 청동기 제작 능력이 고조되는 양상을 알 수 있다. 18) 또 제나라 환공의 북벌 이후에도 산융의 활동 기사가 여전히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 산융은 기원전 6세기까지 하북성 북부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20) 그렇다면 연나라가 하북성 일대를 완전히 강역화한 시기는 적어도 기원전 6세기대 이후에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한편 시칙훈 편 조문에서는 중원 세력이 갈석을 지나면 고조선에 닿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전국시대의 고조선은 최소한 요하 이동 지역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하북성의 갈석을 지난다고 해서 곧바로 고조선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조문에서의 갈석을 최소한 하북성의 갈석으로 본다면, 하북성의 갈석과 요동 지역은 난하로부터 요하에 이르는 대단히 광대한 공백 지대가 남는다. 따라서 이 조문은 춘추시대가 아니라 연나라가 요동 지역까지 진출했던 전국시대 후기 이후의 상황이고, 또 이 시기 갈석이 하북성 지역 이외에 요령성 지역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중원 세력이 동북쪽으로 확장되면서 동방의 끝을 경계지었던 갈석의 명칭이 요령성 지역으로 이전되었음을 논증한 바 있다. 21) 그리고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가능한 시기는 연장 진개의 고조선 18) 이 시기 有 柄 式 銅 劍 文 化 는 玉 皇 廟 단계로서 齊 桓 公 의 침입 이후에도 기원전 6 5세기까 지 건재하였다. 오강원,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 제작과 용범, ( 崇 實 大 學 校 ) 韓 國 基 督 敎 博 物 館 誌 제2호(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07), 111 112쪽. 19) 杜 預, 春 秋 左 傳 正 義 卷 第 29, 襄 公 4 年 條. 無 終 子 嘉 父 使 孟 樂 如 晉, 因 魏 莊 子 納 虎 豹 之 皮, 以 請 和 諸 戎. 20) 吳 江 原, 靑 銅 器 時 代 中 國 東 北 地 方 의 主 要 種 族 = 山 戎 族 에 관한 硏 究, 白 山 學 報 53( 白 山 學 會, 1999), 32쪽. 272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공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시대 후기 요령성 지역세어 갈석의 위치를 밝힐 수 있다면, 당시 고조선의 대략적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인간훈 편과 추형훈 편에 기재되어 있는 요수에 대해서는, 현재의 난하로 비정했던 연구가 주목받은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요수 난하설 은 입론에서부터 큰 모순을 가지고 있다. 난하설 논자들은 추형훈 편에 대한 砥 石, 山 名, 在 塞 外, 遼 水 所 出, 南 入 海. 遼 水 出 碣 石 山, 自 塞 北 東 流 直 遼 東 之 西 南 入 海. 라는 허신( 許 愼 )의 주석에 주목한다. 이들은 허신의 주석에 근거했는데, 갈석산 근처를 흘러 요동의 서남쪽 지역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큰 강은 지금의 난하밖에 없다고 한다. 22) 그러나 난하설 논자들의 주장처럼 추형훈 편 조문 속의 갈석이 현재 갈석의 위치와 일치하고,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난하라고 한다면 허신의 주석은 명백한 오류가 된다. 허신은 요수가 갈석산에서 발원한다고 했고, 이어서 새( 塞 )로부터 북동으로 흘러 요동 지역의 서남 지대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난하는 갈석산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석산이 마지막 종착점이 된다. 또 요수는 갈석산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발해로 들어간다. 요수가 갈석을 지난 후, 새 나 요동 으로 불릴 만한 지역으로는 전혀 흘러갈 수가 없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요수 난하설은 명백한 오류로서, 요수는 하북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추형훈 편에서 요수가 갈석산에서 나온다고 했으며, 인간훈 편에서는 진나라의 북쪽에 요수가 있다고 하였다. 물론 전자의 갈석은 위에서 보았듯이 현 하북성의 갈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훈 편에서는 요수가 진( 秦 )나라의 동쪽이 아니라 북쪽으 로 기술되어 있다. 만약 난하를 요수로 본다면, 이 지역은 이미 연나라 시기부터 중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가 다시 난하 일대를 친다는 개념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수는 진나라 의 북쪽에 있어야 맞는 표현이며, 현재 진나라의 북쪽에서 요수로 상정할 수 있는 강은 요령성 지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럼 이와 같은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조문들에 대한 정보들을 21) 吳 江 原, 앞의 논문(1997a), 76쪽. 22) 윤내현, 앞의 책(1999), 177쪽.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73
바탕으로 하여 이하에서는 이 두 지명을 구체적으로 비정할 것이다. 그런데 회남자 의 조문들로는 구체적인 위치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고대의 각종 문헌과 주석서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갈석에 관한 기사는 총 43회, 요수 관련 기사는 총 14회에 해당하는 기록들이다. 먼저 갈석과 관련된 것은, 상서 에 1회, 전국책 에 1회, 산해경 에 1회, 회남자 에 2회, 염철론 에 1회, 논형( 論 衡 ) 에 1회, 사기 에 8회, 한서 에 3회, 설문해자 에 1회, 수경주 에 1회, 위서( 魏 書 ) 에 1회, 진서( 晋 書 ) 에 1회, 통전 에 2회, 태평어람( 太 平 御 覽 ) 에 18회, 태평환우기( 太 平 寰 宇 記 ) 에 1회, 신당서 에 1회 기록되어 있다. 그리 고 요수와 관련된 것은 산해경 에 1회, 전국책 에 1회, 회남자 에 2회, 사기 에 3회, 한서 에 3회, 수경주 에 4회 기록되어 있다. 문헌의 성서 시대는 전국책 과 산해경 이 전국시대 전한대이고, 회남자 염철론 사기 는 전한대, 논형 한서 와 설문해자 는 후한대, 수경주 는 북위대, 위서 는 북제( 北 齊 )대, 진서 와 통전 은 당( 唐 )대, 태평어람 태평환우기 및 신당서 는 북송대이다. 갈석 기록의 시대 배경은 상서 와 사기 하본기( 夏 本 紀 ) 및 한서 지리지 는 상고시대, 전국책 회남자 와 사기 의 소진열 전( 蘇 秦 列 傳 ) 화식열전( 貨 殖 列 傳 ) 은 전국시대, 회남자 의 추형훈 편은 연 진 한 중의 어느 시기, 사기 의 진시황본기 봉선서( 封 禪 書 ) 와 수경주 의 하수( 河 水 ) 조 및 통전 의 주군( 州 郡 ) 은 진( 秦 ) 대, 사기 의 효무열전( 孝 武 本 紀 ) 과 한서 의 무제기( 武 帝 紀 ) 엄 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 嚴 朱 吾 丘 主 父 徐 嚴 終 王 賈 傳 ) 및 통전 의 변 방( 邊 防 ) 과 태평환우기 는 전한대, 그리고 진서 의 당빈전( 唐 彬 傳 ) 은 진( 晋 )대이다. 요수 기록은 시대 배경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기 어렵다. 이외에 명 청대의 지리학자와 문헌고증학자 및 주석가들이 갈석 및 요수와 관련하여 많이 언급한 바 있는데, 함께 참고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 정자통( 正 字 通 ) 광여기( 廣 輿 記 ) 속문헌통고 ( 續 文 獻 通 考 ) 만주원류고( 滿 洲 源 流 考 ) 독사방여기요( 讀 史 方 輿 記 要 ) 요사지리지고( 遼 史 地 理 志 考 ) 후한서보주( 後 漢 書 補 注 ) 한서지리지보주( 漢 書 地 理 志 補 注 ) 대청일통지( 大 淸 一 統 志 ) 등의 문 헌을 이용하여 갈석의 위치를 개략적으로나마 비정하고, 요수를 확정 짓고자 한다. 274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1. 추형훈 편 기재 갈석 의 위치 비정 추형훈 편의 갈석 은 고조선의 서쪽에 있었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 이로부터는 구체적인 위치 비정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 기재된 갈석의 기사들을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기왕의 견해대로 갈석은 현 하북성의 갈석 이외에, 그 동북쪽 지역에도 또 다른 갈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전국책 과 사기 소진열전 의 기사에서 말하는 갈석은 그 위치상 난하 하류에 있는 현재의 갈석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 연나라가 동호( 東 胡 )와 고조선을 치기 이전에 갈석은 당연히 연나라의 동쪽이었을 텐데, 전국책 의 기사에서는 연나라의 남쪽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연나라의 고조선 침공 이후의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연장 진개의 동정( 東 征 )으로, 연나라는 (동)북쪽으 로 크게 진출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 갈석은 상대적인 위치가 대략 연나라의 남쪽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의 갈석은 하북성의 갈석인 것이다. 상서, 산해경, 사기 하본기, 한서 지리지, 그리고 통전 주군 편의 기록에서 갈석은 해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24) 현재의 갈석산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기 의 진시황본기 효무본기 및 화식열전 은 동북해( 東 北 海 )를 갈석과 연결시키고 23) 戰 國 策 卷 第 29, 燕 1. 蘇 秦 將 爲 從, 北 說 燕 文 侯 曰, 燕 東 有 朝 鮮 遼 東, 北 有 林 胡 樓 煩, 西 有 雲 中 九 原, 南 有 呼 沱 易 水, 地 方 二 千 餘 里, 帶 甲 數 十 萬, 車 七 百 乘, 騎 六 千 匹, 粟 支 十 年. 南 有 碣 石 鴈 門 之 饒, 北 有 棗 粟 之 利. ; 司 馬 遷, 史 記 卷 69, 蘇 秦 列 傳 第 9. ( 蘇 秦 ) 去 游 燕, 歲 餘 而 後 得 見. 說 燕 文 侯 曰, 燕 東 有 朝 鮮 遼 東, 北 有 林 胡 樓 煩, 西 有 雲 中 九 原, 南 有 嘑 沱 易 水, 地 方 二 千 餘 里, 帶 甲 數 十 萬, 車 六 百 乘, 騎 六 千 匹, 粟 支 數 年. 南 有 碣 石 鴈 門 之 饒, 北 有 棗 栗 之 利. 24) 尙 書 卷 3, 禹 貢 第 1, < 夏 書 >. 島 夷 皮 服, 夾 右 碣 石 入 于 河 ; 山 海 經, 北 次 三 經 第 3. 又 北 五 百 里, 曰 碣 石 之 山. 繩 水 出 焉, 而 東 流 注 于 河, 其 中 多 蒲 夷 之 魚. 其 上 有 玉, 其 下 多 青 碧. ; 司 馬 遷, 史 記 卷 2, 夏 本 紀 第 2. 禹 行 自 冀 州 始, [ ], 鳥 夷 皮 服. 夾 右 碣 石, 入 于 海. ; 班 固, 漢 書 卷 28 上, 地 理 志 第 8 上, 大 陸 旣 作, 鳥 夷 被 服, 夾 右 碣 石, 入 于 河 에 대한 安 師 古 의 注. 碣 石, 海 邊 山 名 也, 言 禹 夾 行 此 山 之 右, 而 入 于 河 逆 上 也. ; 杜 佑, 通 典 卷 178, 州 郡 8, < 古 冀 州 > 上. 漢 肥 如 縣, 有 碣 石 山, 碣 然 而 立, 在 海 旁, 故 名 之.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75
있고 25), 설문해자 와 위서 세조기( 世 祖 紀 ) 및 태평어람 에서는 동해( 東 海 )와 창해( 滄 海 ) 및 거해( 巨 海 )를 갈석과 연결시키고 있어 26) 하북성 지역의 갈석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동북해, 동해, 창해는 모두 발해( 渤 海 )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기 의 봉선서 와 한서 무제기 에서는 해상으로 갈석에 이르렀다고 하여 27) 하북성 지역의 갈석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문헌에 기재되어 있는 갈석은 공통적으로 바다와 연관되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위치도 설문해자 에 대한 단옥재( 段 玉 裁 )의 주석과 태평어람 에서는 우북평군( 右 北 平 郡 ) 역성현( 酈 成 縣 )으 로, 통전 에서는 비여현( 肥 如 縣 )으로 보고 있다 28). 이런 인식은 당( 唐 )대 까지 이어져 사기 소진열전 의 주석에서 사마정( 司 馬 貞 )은 갈석을 하북성 지역의 역성현으로, 사기 하본기 의 주석에서 장수절( 張 守 節 ) 은 평주( 平 州 )로 보았다. 29) 그런데 앞서 사기 하본기 와 한서 지리지 에서 우갈석( 右 碣 石 ) 을 명기하고 있어 이에 대하여 좌갈석( 左 碣 石 )을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갈석을 동방의 끝으로 여겼을 것인데, 연 진대 이후 동북쪽으로 영역이 확장되면서 갈석 의 지명도 옮겨졌을 것이고, 이에 따라 후대 기록상에 약간의 혼란이 생겼을 것으로 본 연구가 있다. 30) 25) 司 馬 遷, 史 記 卷 6, 秦 始 皇 本 紀 第 6. 三 十 二 年, 始 皇 之 碣 石, 使 燕 人 盧 生 求 羡 門 高 誓. 刻 碣 石 門. 壞 城 郭, 決 通 隄 防. ; 司 馬 遷, 史 記 卷 6, 秦 始 皇 本 紀 第 6. 二 世 東 行 郡 縣, 李 斯 從. 到 碣 石, 並 海 南 至 會 稽, 而 盡 刻 始 皇 所 立 刻 石, 石 旁 著 大 臣 從 者 名, 以 章 先 帝 成 功 盛 德 焉. ; 司 馬 遷, 史 記 卷 12, 孝 武 本 紀 第 12. 上 乃 遂 去, 並 海 上, 北 至 碣 石, 巡 自 遼 西, 歷 北 邊 至 九 原. ; 司 馬 遷, 史 記 卷 129, 貨 殖 列 傳 第 69. 夫 燕 亦 勃 碣 之 閒 一 都 會 也. 26) 許 愼, 說 文 解 字 卷 9 下. 碣, 特 立 之 石. 東 海 有 碣 石 山 ; 段 玉 裁, 說 文 解 字 卷 9 篇 下. 碣 石 山, 見 禹 貢 地 理 志, 右 北 平 郡 驪 成 縣, 大 碣 石 山 在 縣 西 南, 非 東 海 郡 也, 東 海 字 疑 誤. ; 魏 收, 魏 書 卷 5, 帝 紀 第 五, < 高 宗 紀 >. 二 月 丙 子, 登 碣 石 山, 觀 滄 海, 大 饗 郡 臣 於 山 下. ; 李 昉, 太 平 御 覽, 卷 第 44, 地 部 9, < 大 碣 石 山 > 條. 地 理 志 曰, 大 碣 石 山 在 右 北 平 驛 城 縣 西 南. [ ]. 漢 武 帝 亦 常 登 之, 以 望 巨 海. 27) 司 馬 遷, 史 記 卷 28, 封 禪 書 第 6, 游 碣 石, 考 入 海 方 士, [ ], 二 世 元 年, 東 巡 碣 石, 並 海 南 歷 泰 山 至 會 稽, 皆 禮 祠 之, 而 刻 勒 始 皇 所 立 石 書 旁, 以 章 始 皇 之 功 德. ; 班 固, 漢 書 卷 6, 武 帝 紀 第 6. 元 封 元 年, [ ], 行 自 泰 山, 復 東 巡 海 上, 至 碣 石, 自 遼 西, 歷 北 邊 九 原, 歸 于 甘 泉. ; 班 固, 漢 書 卷 28 上, 地 理 志 第 8 上, 大 陸 旣 作, 鳥 夷 被 服, 夾 右 碣 石, 入 于 河 에 대한 安 師 古 의 注. 碣 石, 海 邊 山 名 也, 言 禹 夾 行 此 山 之 右, 而 入 于 河 逆 上 也. 28) 碣, 特 立 之 石. 東 海 有 碣 石 山 와 이와 관련한 段 玉 裁 의 注. 碣, 特 立 之 石. 東 海 有 碣 石 山 29) 司 馬 遷, 史 記 卷 69, 蘇 秦 列 傳 第 9, 南 有 碣 石 鴈 門 之 饒 에 대한 司 馬 貞 의 注. 戰 國 策, 碣 石 山 在 常 山, 九 門 縣. 地 理 志, 大 碣 石 山 在 右 北 平, 驪 城 縣 西 南. ; 司 馬 遷, 史 記 卷 2, 夏 本 紀 第 2. 以 開 九 州, [ ], 冀 州 旣 載. 에 대한 張 守 節 의 注. 黃 河 自 勝 州 東, 直 南 至 華 陰, 卽 東 至 懷 州 南, 又 東 北 至 平 州 碣 石 山 入 海 也. 276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즉, 고대의 기록을 보면, 난하 유역의 갈석 외에 그로부터 동북쪽에 또 다른 갈석인 좌갈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장벽파( 張 碧 波 )도 두 갈석 의 존재를 상정한 바 있다. 그는 산해관 인근 현재의 갈석 이외에 태강지리지( 太 康 地 理 志 ) 31) 와 태평환우기 32) 등을 인용하여 또 다른 하나가 한반도에 위치한 다고 보았다. 33) 그러나 갈석에서 시작한다는 연 진 장성의 경우, 연장성 이 양평현[ 襄 平 縣, 현 요양시( 遼 陽 市 )]의 북쪽 지역에까지 축조되었고 34), 또 사기 에서 연장성이 양평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여 35) 이를 보증해준 다. 그리고 장수절도 괄지지( 括 地 志 ) 를 인용하여 진장성을 요수와 관련시켜 보고 있는데 36), 요수는 대체로 요동 지역에서 찾아야지 결코 한반도 서북부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진나라가 서북한 지역에 직접 침투해 들어왔다는 구체적인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 진나라와 관련된 고고 유물은 모두 압록강 이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37) 진나라의 석읍( 石 邑 ) 명 동과( 銅 戈 )가 관전 현에서 38), 진상군수( 秦 上 郡 守 ) 명 과가 요양에서 39), 여불위( 呂 不 韋 ) 명 모( 矛 )가 무순에서 40), 위계봉( 魏 啓 封 ) 명 과가 신금 후원대( 後 元 臺 )에 서 41), 조춘평후( 趙 春 平 侯 ) 명 검이 장하에서 42), 조양안군( 趙 陽 安 君 ) 명 30) 吳 江 原, 앞의 논문(1997a), 76쪽. 31) 司 馬 遷, 史 記 卷 2, 夏 本 紀 第 2, 夾 右 碣 石 入 于 海 에 대한 司 馬 貞 의 注 引, 太 康 地 理 志 云, 樂 浪 遂 城 縣 有 碣 石 山, 長 城 所 起. 32) 樂 史, 太 平 寰 宇 記 卷 173, 東 夷 2, < 高 句 麗 國 > 條. 碣 石 山 在 漢 樂 浪 郡 遂 城 縣, 長 城 起 於 此 山. 今 驗 長 城, 東 截 遼 水, 而 入 高 麗 遺 址. 33) 張 碧 波 喩 權 中, 朝 鮮 箕 氏 考, 社 會 科 學 戰 線 6 期 ( 長 春 : 吉 林 省 社 会 科 學 院, 1997), 176쪽; 張 碧 波, 古 朝 鮮 研 究 中 的 誤 區 東 北 史 評 之 一, 黑 龍 江 民 族 叢 刊 4( 總 第 59 期 ) ( 哈 尔 滨 : 黑 龍 江 省 民 族 研 究 所, 1999), 46 47쪽. 34) 오강원, 戰 國 時 代 燕 나라 燕 北 長 城 동쪽 구간의 構 造 的 實 體 와 東 端, 先 史 와 古 代 第 33 號 ( 韓 國 古 代 學 會, 2010), 196쪽. 35) 司 馬 遷, 史 記 卷 110, 匈 奴 列 傳 第 50. 燕 亦 築 長 城, 自 造 陽 至 襄 平. 置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郡 以 拒 胡. 36) 司 馬 遷, 史 記 卷 110, 匈 奴 列 傳 第 50, 後 秦 滅 六 國, 而 始 皇 帝 使 蒙 恬, 將 十 萬 之 衆 北 擊 胡, 悉 收 河 南 地. 因 河 爲 塞, 築 四 十 四 縣 城 臨 河, 徙 適 戍 以 充 之. 而 通 直 道, 自 九 原 至 雲 陽, 因 邊 山 險 壍 谿 谷 可 繕 者 治 之, 起 臨 洮 至 遼 東 萬 餘 里. 에 대한 張 守 節 의 注. 括 地 志 云, 秦 隴 西 郡 臨 洮 縣, 卽 今 岷 州 城, 本 秦 長 城, 首 起 岷 州 西 十 二 里, 延 袤 萬 餘 里, 東 入 遼 水. 37) 박준형, 대릉하 서북한 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변동과 고조선의 위치, 한국고대사 연구 66(한국고대사학회, 2012b), 166 167쪽. 38) 岡 村 秀 典, 秦 漢 金 文 の 硏 究 視 覺, 古 代 文 化 第 43 卷 ( 京 都 : 古 代 學 協 會, 1991), 64쪽. 39) 鄒 寶 庫, 釋 遼 陽 出 土 的 一 件 秦 戈 銘 文, 考 古 第 8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92), 757쪽. 40) 撫 順 市 博 物 館, 遼 寧 省 撫 順 市 發 現 的 戰 國 靑 銅 兵 器, 考 古 第 3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96), 86쪽.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77
검이 집안에서 43) 각각 출토되었다. 이것은 진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동쪽 끝으로 해서 주둔했고, 요동군의 관할 범위도 압록강 서쪽 지대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벽파 등이 근거했던 태강지리지 와 태평환우기 의 기록들 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 파생된 역사적 오류이다. 갈석산이 낙랑군 수성현 ( 遂 城 縣 )에 있었다는 기록은 통전 에서도 보인다. 44) 이는 서북한 지역에 설치했던 낙랑군을 요동 지역에 있었던 갈석과 잘못 연결시킨 논리이 다. 45) 그리고 태평환우기 하북도( 河 北 道 ) <평주( 平 州 )>조의 기록 46) 은 낙랑군이 하북성으로 이동하면서 혼동이 발생되어 잘못 기재된 것이 다. 47) 즉, 하북성 낙랑군 갈석 의 관념이 요동 지역 험독 갈석 의 실존과 섞여서 서북한 낙랑군 갈석 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북한의 낙랑군(험독)이 하북성으로 이치되는데, 그곳에는 고래로부 터 갈석산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갈석과 요동 지역 전기 고조선 중심지인 험독 일대의 갈석산과 혼동이 빚어지게 된다. 즉, 하북성에 이치된 낙랑군 인근에 갈석산이 있고, 요동 지역 험독 인근에도 갈석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혼동이 빚어져서 당연히 서북한의 낙랑군(험독) 인근에도 갈석산 이 있었을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연 진 장성의 동단과 갈석의 발원처로 기록된 요수는 결코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요동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벽파의 견해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제2의 갈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통전 41) 許 明 綱 于 臨 祥, 遼 寧 新 金 縣 後 元 臺 發 現 銅 器, 考 古 第 5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80), 478쪽. 42) 旅 順 博 物 館 導 組, 旅 大 地 區 發 現 趙 國 銅 劍, 考 古 第 6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73), 361쪽. 43) 集 安 縣 文 物 保 管 所, 吉 林 集 安 縣 發 現 趙 國 靑 銅 短 劍, 考 古 第 6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82), 666쪽. 44) 杜 佑, 通 典 卷 186, 邊 防 2, < 東 夷 > 條, 碣 石 山 在 漢 樂 浪 郡 遂 城 縣, 長 城 起 於 此 山, 今 驗 長 城 東 截 遼 水, 而 入 高 麗 遺 址 猶 存 에 대한 杜 佑 의 注. 按 尙 書 云, 夾 右 碣 石 入 於 河, 右 碣 石 卽 河 赴 海 處, 在 今 北 平 郡 南 二 十 餘 里, 則 高 麗 中 爲 左 碣 石. 45) 오현수, 管 子 에 등장하는 穢 貉 과 發 朝 鮮 의 역사적 실체 穢 貉 發 朝 鮮 조문의 사료 맥락적 분석을 중심으로, 사림 제43호(성균관대학교 수선사학회, 2012b), 21쪽. 46) 樂 史, 太 平 寰 宇 記 卷 71, 河 北 道 19, < 平 州 > 條, 盧 龍 縣. 朝 鮮 城, 卽 箕 子 受 殷 封 之 地. 47) 오현수, 箕 子 전승의 확대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중국 고대 문헌을 중심으로, 大 東 文 化 硏 究 제79집( 成 均 館 大 學 校 大 東 文 化 硏 究 院, 2012a), 174쪽. 278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주군( 州 郡 ) 과 변방 의 기록에서 우갈석이 해안가에 있었던 것에 반해, 고구려 지역 내에 좌갈석으로 불린 지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8) 그리고 신당서 49) 에서 진( 晋 )대에 모용황( 慕 容 皝 )이 용성( 龍 城 )을 설치 했고, 당( 唐 )대에 하북도 영주( 營 州 )의 치소로 삼은 유성( 柳 城 )은 현재의 조양( 朝 陽 )으로 비정된다. 50) 그렇다면 신당서 각 지명의 배열은 유성 (현 조양) 의무려산( 醫 巫 閭 山 ) 갈석산 의 순서가 될 것이다. 즉, 갈석이 의무려산의 동쪽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좌갈석이 요령성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통전 변방 에서 해안가의 갈석을 알고 있는 두우( 杜 佑 )는 양 지역의 갈석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해, 우( 禹 )임 금과 관련되어 있는 갈석을 우갈석으로, 장성 유적과 관련되어 있는 갈석을 좌갈석으로 구분하여 명칭한 것으로 보인다. 51) 회남자 추형훈 편에서는 요수가 지[ 砥, 갈( 碣 )]석산에서 나온다고 했고, 이에 대해 후한의 허신( 許 愼 )은 요수를 새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요수가 요동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52) 여기서 요수를 현재의 요하, 새를 연 진대의 장새( 章 塞 )로 본다면, 최소한 후한 대에는 난하 유역의 갈석 이외에 요령성 지역에도 갈석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3) 염철론 험고( 險 固 ) 편에서도 연나라가 갈석에 막히고 요수에 둘러 싸여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54),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서요하( 西 遼 河 ) 및 요하이고, 갈석은 지금의 요하가 발원하는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경주 진서 통전 변방 에서의 갈석은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장성의 동쪽에 요수가 있으며, 고려의 유지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55) 요령성의 갈석임이 분명하다. 그곳은 진장성이 48) 杜 佑, 通 典 卷 178, 州 郡 8, < 古 冀 州 > 上. 漢 肥 如 縣, 有 碣 石 山, 碣 然 而 立, 在 海 旁, 故 名 之. 晉 太 康 地 志 云, 秦 築 長 城 所 起 自 碣 石, 在 今 高 麗 舊 界, 非 此 碣 石 也. ; 杜 佑, 通 典 卷 186, 邊 防 2, < 東 夷 > 條. 주 43)과 동일. 49) 歐 陽 修, 新 唐 書 卷 39, 地 理 志 第 29, < 營 州 柳 城 郡 >, 柳 城. 有 東 北 鎭 醫 巫 閭 山 祠, 又 東 有 碣 石 山. 50) 吳 江 原, 앞의 논문(1997b), 41쪽. 51) 吳 江 原, 위의 논문, 39 41쪽. 52) 劉 安, 淮 南 子 卷 第 4, 墜 形 訓, 遼 出 砥 石 에 대한 許 愼 의 注. 砥 石, 山 名, 在 塞 外, 遼 水 所 出, 南 入 海. 53) 오현수, 앞의 논문(2012b), 21쪽. 54) 桓 寬, 鹽 鐵 論 卷 第 9, 險 固 第 50. 燕 塞 碣 石, 絶 邪 谷, 繞 援 遼. 55) 酈 道 元, 水 經 注 卷 3, 河 水 條. 始 皇 令 太 子 扶 蘇 與 蒙 恬 築 長 城, 起 自 臨 洮 至 于 碣 石. ; 方 玄 齡, 晋 書 卷 43, 列 傳 第 13, < 唐 彬 傳 >. 復 秦 長 城, 塞 自 溫 城 洎 于 碣 石 緜 互 山 谷. ;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79
시작하는 곳인데, 고려의 옛 경계와 관련된 갈석은 하북성의 갈석이 아니라, 요령성의 갈석으로 보인다. 이상의 요령성 지역 갈석의 특징을 정리하면, 1 새의 밖에 존재하고, 2 요수가 발원하며, 3 장성의 종착지이고, 4 고조선 중심지(험독) 지역이라는 것이다. 새 라는 것은 연나라가 요동 지역에 진출한 이후에 설치한 군사 요새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연나라가 동북쪽으로 진출한 최말단 지역은 현재의 요동 지역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 요수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현재의 요하로 비정할 수 있다. 그리고 연장성이 양평현( 襄 平 縣, 현 요양시)의 북쪽 지역에까지 축조되었다고 하고 56), 사기 에서 연장성이 양평에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으며 57), 장수절도 괄지지( 括 地 志 ) 를 인용하여 진장성을 요수와 관련시켜 보고 있다. 58) 이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좌갈석은 현재의 요하와 연 진 장성 유적 인근에서 존재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좌갈석은 요령성 일대에서 찾아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요하의 발원지 근처일 것이다. 그런데 하북성의 갈석에 대해서는 우갈석이라고 하면서, 사기 소진열전 의 사마정의 주석과 설문해자 에서는 대갈석( 大 碣 石 )이라고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요령성에 갈석에 대해서는 좌갈석이라고만 하고 있는데, 하북성의 대갈 석에 상응하는 요령성 지역의 소갈석( 小 碣 石 )을 상정해볼 수 있다면, 요령성 지역의 좌갈석은 현 요하 발원처의 그리 크지 않은 산중에서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59) 그리고 요수의 원천지에 대해서 산해경 대황동경( 大 荒 東 經 ) 에서 는 요( 潦, 遼 )수가 위고( 衞 皐 )의 동쪽에서 나온다고도 한다. 60) 그리고 이에 대해 산해경 의 주석가들은 위고산이 새외( 塞 外 )에 있었다고 한 다. 61) 여기서 위고산은 정자통 에서는 위백평산( 衛 白 平 山 )이라 하면서, 杜 佑, 通 典 卷 178, 州 郡 8, < 古 冀 州 > 上, 주 47)과 동일. 56) 오강원, 앞의 논문(2010), 196쪽. 57) 司 馬 遷, 史 記 卷 110, 匈 奴 列 傳 第 50. 주 34)와 동일. 58) 司 馬 遷, 史 記 卷 110, 匈 奴 列 傳 第 50. 주 35)와 동일. 59) 오현수, 앞의 논문(2012b), 22쪽. 60) 山 海 經, 大 荒 東 經 第 14. 潦 水 出 衞 皐 東, 東 南 注 勃 海, 入 潦 陽 61) 주 59)에 대한 郭 璞 의 注. 塞 外 衛 皐 山 玄 菟 高 句 麗 縣 有 潦 山, 小 潦 水 所 出, 西 河 注 大 潦. 潦 陽 縣 屬 潦 東. 袁 珂 의 注. 潦 水 出 塞 外 衛 皐 山, 玄 菟 高 句 麗 縣 有 潦 山, 小 遼 水 所 出, 西 河 南 注 大 潦, 音 遼. 潦 陽 縣 屬 潦 東. 280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새외의 위고산(위백평산)과 관련된 요수는 소요수[ 小 遼 水, 현 혼하( 渾 河 )] 가 아니라, 대요수[ 大 遼 水, 현 요하( 遼 河 )]라고 적시하고 있다. 62) 따라서 좌갈석이 위고산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3) 그런데 한서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 에서도 갈석을 현토군( 玄 菟 郡 )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64) 현토군은 심양( 瀋 陽 ) 지구의 동쪽 지역, 즉 요동의 동쪽 지역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갈석은 중국 측에서 요동의 동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야 한다. 이 외에도 한서지리지보주 대청일통지 에서 大 遼 水 源 出 靺 鞨 國 西 南 山 이라고 하니 65), 갈석산이 말갈( 靺 鞨 )의 서남산( 西 南 山 ) 으로도 불렸던 모양이다. 특히 독사방여기요 에서 遼 水 源 出 塞 外 自 三 萬 衛 라고 하니, 위고산 은 명( 明 )대의 삼만위( 三 萬 衛 ) 로 불린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6) 그렇다면 갈석산은 명대 삼만위의 서북계에서 찾아야 한다. 아직까지 요동 지역 지리 관련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삼만위의 서북계의 산명으 로는 대청일통지 봉천부( 奉 天 府 ) 조 및 곽이나사( 郭 爾 羅 斯 ) 조의 금산( 金 山 )과 평산( 平 山 ) 등이 보인다. 67) 이 중에서 특히 평산은 갈석산, 즉 위백평산과 이름이 일치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산명이다. 62) 張 自 烈, 正 字 通 卷 6, 水 部. 潦 水 出 塞 外 衛 皐 山, 玄 菟 有 大 潦 山 小 潦 山. 所 出 大 潦 卽 今 遼 水, 小 潦 卽 今 渾 源 河. 63) 酈 道 元, 水 經 注 引 水 經 卷 14, < 大 遼 水 > 條. 大 遼 水 出 塞 外 衛 白 平 山, 東 南 入 塞 過 遼 東 襄 平 縣 西. 64) 班 固, 漢 書 卷 64 下, 嚴 朱 吾 丘 主 父 徐 嚴 終 王 賈 傳 第 34 下. 西 連 諸 國 至 于 安 息, 東 過 碣 石 以 玄 菟 樂 浪 爲 郡. 65) 吳 卓 信, 漢 書 地 理 志 補 注 卷 74, 大 遼 水 出 塞 外 南 至 安 市 入 海 에 대한 補 注. 通 典, 大 遼 水 源 出 靺 鞨 國 西 南 山, 南 流 至 安 市 入 海. [ ], 遼 史 地 理 志, 遼 河 出 東 北 山 口 爲 范 河, 西 南 流 爲 大 口, 入 于 海. 今 水 經, 遼 水 源 出 塞 外 自 三 萬 衛, 西 北 入 境, 南 流 大 淸 河, 合 小 淸 河 入 焉. ; 穆 彰 阿, 大 淸 一 統 志 卷 59, 奉 天 府, < 山 川 >. 通 典, 大 遼 水 源 出 靺 鞨 國 西 南 山, 南 流 至 安 市. 遼 史 地 理 志, 遼 河 出 東 北 山 口 爲 范 河, 西 南 流 爲 大 口, 入 於 海. 明 統 志, 遼 河 源 出 塞 外, 自 三 萬 衛, 西 北 入 境, 南 流 經 鐵 嶺 瀋 陽 都 司 之 西 境, 廣 寧 之 東 境, 又 南 至 海 州 衛, 西 南 入 海. 66) 顧 祖 禹, 讀 史 方 輿 記 要 卷 37, 山 東 8, < 遼 水 >. 司 西 百 六 十 里, 又 西 距 廣 寧 衛 二 百 里, 自 塞 外 流 入 三 萬 衛 西 北 境, 南 流 經 鐵 嶺 瀋 陽, 而 至 此, 又 南 至 海 州 衛 西 南 入 海, 行 千 二 百 五 十 里. 67) 穆 彰 阿, 大 淸 一 統 志 卷 59, 奉 天 府, < 山 川 >, 平 山. 在 蓋 平 縣 西 北 四 十 三 里, 明 置 三 萬 衛 鹽 場, 百 戶 所 於 此. ; 穆 彰 阿, 大 淸 一 統 志 卷 538, 郭 爾 羅 斯, < 古 蹟 >. 三 萬 衛 西 北 金 山.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81
2. 인간훈 추형훈 편 기재 요수 의 위치 비정 여기서는 요수를 현재의 어디로 비정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도록 하겠 다. 이와 관련해서는 요동의 개념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곧바로 요수가 현재의 어느 강인지 밝힐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기정의( 史 記 正 義 ) 에서 보면 68) 요동 이라는 인식은 요수의 동쪽 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자 에서도 연나라에는 요동 지역의 특산품인 자( 煮 )가 있다 고 하여 69) 요동 지역이 연나라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전국책 에서도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 고 했는데 70), 여기서 말하 는 조선은 연장 진개의 침략으로 서북한 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한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연나라가 진개의 동정 이후, 현재의 요동 지역 전체를 강역화했는지, 일부 지역에 진출하여 거점식으로 지배했는 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기 흉노열전( 匈 奴 列 傳 ) 에서 연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했 고 71), 또 요동 지역에 연( 燕 )계 유적과 유물이 확산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 당시 연나라는 현재의 요동 지역에까지 어떠한 형태로든지 진출했 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나라가 현재의 요동 지역에 진출하는 시기부터 연나라 사람들에 의해 요동 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요동 이라는 개념은 요수 라는 하천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하여 발생된 명칭으로, 당시 요수의 위치는 자연히 연나라 세력의 진출 이동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연나라 세력의 직접적인 영향은 심양 요양 개 주( 盖 州 ) 대련 지역에까지 미쳐 있었다고 한다. 72) 따라서 요수가 이 68) 司 馬 遷, 史 記 卷 88, 蒙 恬 列 傳 第 28, 遼 東 에 대한 張 守 節 의 注. 遼 東 郡 在 遼 水 東, 始 皇 長 城 東 至 遼 水, 西 南 至 海 之 上. 69) 管 子 卷 第 23, 地 數 第 77, < 輕 重 >10. 齊 有 渠 展 之 鹽, 燕 有 遼 東 之 煮. 70) 戰 國 策 卷 第 29, 燕 1. 蘇 秦 將 爲 從 北 說 燕 文 侯 曰, 燕 東 有 朝 鮮 遼 東, 北 有 林 胡 樓 煩, 西 有 雲 中 九 原, 南 有 呼 沱 易 水, 地 方 二 千 餘 里. 71) 司 馬 遷, 史 記 卷 110, 匈 奴 列 傳 第 50. 주 34)와 동일. 72) 오강원은 요동 지역의 眉 眼 溝 類 型 을 燕 文 化 로 보았다. 오강원, 기원전 3세기 遼 寧 地 域 의 燕 나라 遺 物 共 伴 遺 跡 의 諸 類 型 과 燕 文 化 와의 관계, 韓 國 上 古 史 學 報 第 71 號 ( 韓 國 上 古 史 學 會, 2011), 14쪽, 23쪽. 282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일대의 안쪽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또한 사기 몽염열전( 蒙 恬 列 傳 ) 과 사기 흉노열전 에서 진( 秦 )나라는 요동 지역 에까지 장성을 축조했다고 했는데 73), 현재 장성 유적이 어디까지인가를 본다면, 요수의 상대적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요수가 장성 유적의 이내 지역에 있었을 것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연나라와 비교적 근접한 시대에 편찬된 사기 흉노열전 에서 연장 성이 양평에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고, 이보다는 훨씬 후대의 자료이기 는 하지만 사기정의 에는 진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4) 그런데 연장성은 양평현(현 요양시)의 북쪽 지역에까지 축조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75) 그리고 한서 지리지 의 <요동군> 조에서도 대요수가 새외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성( 安 市 城 )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 했을 때 76) 이 대요수는 분명 요령성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요동 에 대한 개념과 연나라의 동북방 지역으로의 진출 및 연 진 장성의 축조 상태로 보아 당시의 요수는 현재의 요동 지역을 흐르던 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서 지리지 의 <현토군>조에서 말하는 요수 77) 의 위치도 현토군 새외라는 표현에서 요동 지역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수경주 에서도 소요수는 요산( 遼 山 )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현을 경유하여 대양수( 大 梁 水 )와 합해진다고 했고 78), 이 소요수가 서쪽으로 흘러 양평현을 경유하여 담연( 淡 淵 )이 되고, 또 양평현을 경유하 여 대양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79) 그러므로 양평현은 현재의 요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요수는 새외의 위백평산으로 나와 동남으로 흘러 새로 들어가고, 이어서 요동군 양평현의 서쪽을 지난다고 했기 때문에 80), 73) 司 馬 遷, 史 記 卷 88, 蒙 恬 列 傳 第 28, 始 皇 二 十 六 年, 蒙 恬 因 家 世 得 爲 秦 將, 攻 齊 大 破 之, 拜 爲 內 史. 秦 已 幷 天 下, 乃 使 蒙 恬 將 三 十 萬 衆 北 逐 戎 狄, 收 河 南. 築 長 城, 因 地 形, 用 險 制 塞, 起 臨 洮, 至 遼 東. ; 司 馬 遷, 史 記, 匈 奴 列 傳. 주 35)와 동일. 74) 주 72)의 遼 東 에 대한 張 守 節 의 注. 遼 東 郡 在 遼 水 東, 始 皇 築 長 城 東 至 遼 水, 西 南 至 海. 75) 오강원, 앞의 논문(2010), 196쪽. 76) 班 固, 漢 書 卷 28 下, 地 理 志 第 8 下, < 遼 東 郡 > 條, 縣 十 八. 襄 平 ( 有 牧 師 官. 莽 曰 昌 平.), 新 昌, 無 慮 ( 西 部 都 尉 治.) 望 平 ( 大 遼 水 出 塞 外, 南 至 安 市 入 海, 行 千 二 百 五 十 里.) 77) 班 固, 漢 書 卷 28 下, 地 理 志 第 8 下, < 玄 菟 郡 > 條, 縣 三, 高 句 驪. 遼 山, 遼 水 所 出, 西 南 至 遼 隊 入 大 遼 水. 又 有 南 蘇 水, 西 北 經 塞 外. 78) 酈 道 元, 水 經 注 卷 14, 小 遼 水 條. 遼 水 出 遼 山, 西 南 流 逕 遼 陽 縣, 與 大 梁 水 會 79) 朱 謀 㙔, 水 經 注 箋 卷 14, 小 遼 水 條. 小 遼 水, 又 西 南 逕 襄 平 縣 爲 淡 淵, [ ], 小 遼 水 又 逕 襄 平 縣, 入 大 梁 水. 80) 酈 道 元, 水 經 注 引 水 經 卷 14, 大 遼 水 條. 大 遼 水 出 塞 外 衛 白 平 山, 東 南 入 塞, 過 遼 東 襄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83
새외에서 남쪽으로 흘러 오늘날의 요양의 서쪽을 지나는 강으로는 요하 외에는 없다. 이와 같은 문헌상의 기록을 여전히 불신한다면, 좀 더 확실한 금석문 자료를 증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955년 요양시 북교에 위치한 삼도호( 三 道 壕 )에서는 한대의 촌락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중 구연부에 창평( 昌 平 ) 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홍도부( 紅 陶 釜 )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81) 그런데 수경주 대요수 조에서 보면, 진( 秦 )나 라는 요동군을 설치했고, 신( 新 )나라의 왕망( 王 莽 )은 요동군의 치소를 창평으로 고쳤다고 한다. 82) 그렇다면 창평 명 홍도부가 발견된 현재의 요양시가 진대 요동군의 치소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특히 요하가 양평현의 서쪽을 지나고, 혼하(소요수)는 양평현을 경유하여 태자하(대양수)에 유입되는 곳에 위치한 것은 바로 요양이라 할 수 있 다. 83) 한편 산해경 대황동경 에서 요수가 위고산의 동쪽에서 나오고, 요수가 동남 방향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84) 대황동경 조문에서 보면 85), 하북성 요령성 지역에서 동남 방향으로 흐르다 발해로 빠지는 강을 요하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런데 이 조문에서 요수는 분명히 요양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가도 주하기 를, 위고산은 새외에 있다고 했고, 현토군 고구려현에 요( 潦, 遼 )산이 있으며, 요양은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하였다. 86) 그리고 현재의 요하( 遼 河 )는 동 서 요하가 만나는 지역에서 1 동남으 로 흐르다, 2 다시 서남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고 있다. 즉, 대황동경 조문은 2가 생략된 채, 1만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황동경 조문을 가지고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는 근거로 삼을 平 縣 西. 81) 東 北 博 物 館, 遼 陽 三 道 壕 西 漢 村 落 遺 址, 中 國 考 古 集 成 10( 北 京 : 北 京 出 版 社 1997), 992 995쪽. 82) 酈 道 元, 水 經 注 卷 14, 大 遼 水 條. 遼 水. 亦 言 出 砥 石 山, 自 塞 外 東 流, 直 遼 東 之 望 平 縣 西, 王 莽 之 長 說 也. 屈 而 西 南 流, 逕 襄 平 縣 故 城 西. 秦 始 皇 二 十 二 年 滅 燕, 置 遼 東 郡, 治 此. 漢 高 帝 八 年, 封 紀 通 爲 侯 國, 王 莽 之 昌 平 也. 故 平 州 治, 又 南 逕 遼 隊 縣 故 城 西. 83) 吳 江 原, 앞의 논문(1997b), 42쪽. 84) 주 59)와 동일 85) 山 海 經, 大 荒 東 經 第 14, 遼 水 出 衛 皇 東, 東 南 注 勃 海, 入 療 障 86) 주 60)과 동일. 284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수는 없다. 독사방여기요 의 기록에서 요수가 명대의 삼만위라고 불린 지역으로 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에 87) 요수는 오히려 현재의 요하로 보아 야만 한다. 고대의 요수가 곧 명 청대의 요하임은 광여기 와 속문헌통고 의 기록에서 편린을 찾을 수 있다. 이들 기사에 따르면, 요하는 새외의 삼만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철령심양도사( 鐵 嶺 瀋 陽 都 司 )의 서쪽 경계 와 광령의 동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해주위( 海 州 衛 )의 서남쪽으 로 흘러들어 와 발해로 들어간다 88) 고 하였다. 새외의 삼만위에서 시작한 하천, 즉 고대의 요수와 명 청대의 요하는 지역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89) 만주원류고 에 따르면, 요하는 크게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에 서는 길림성의 고륵눌와집( 庫 勒 訥 窩 集 )에서 나온 혁이소하[ 赫 爾 蘇 河, 동 요하( 東 遼 河 )]이고, 또 하나는 서쪽의 황하[ 潢 河, 서요하( 西 遼 河 )]로, 이 두 물줄기는 개원현에서 만나서 철령심양도사를 지난다 고 한다. 90) 갈석 은 현토군으로 가는 길목, 즉 개원 일대에 있었다. 그리고 요수는 이러한 갈석에서 원출( 原 出 )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요하의 두 물줄기가 개원현에서 만나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명인 요수는 현재의 요하였다는 것을 확인하 였다. 87) 顧 祖 禹, 讀 史 方 輿 記 要 卷 37, 山 東 8, < 遼 水 >, 遼 水. 司 西 百 六 十 里, 又 西 距 廣 寧 衛 二 百 里, 自 塞 外 流 入 三 萬 衛 西 北 境, 南 流 經 鐵 嶺 瀋 陽, 而 至 此, 又 南 至 海 州 衛 西 南 入 海, 行 千 二 百 五 十 里. 88) 陸 應 陽, 廣 輿 記 卷 23, 九 邊, < 錦 州 府 >, 遼 河. 源 出 塞 外 自 三 萬 衛, 故 城 西 北 入 境. 唐 太 宗 征 高 麗 至 遼 澤, 泥 淖 二 百 餘 里, 人 馬 不 能 通 布 上, 作 橋 卽 此. ; 王 圻, 續 文 獻 通 考 卷 11, 田 賦 考, < 遼 東 都 指 揮 使 司 >, 遼 河. 源 出 塞 外 三 萬 衛 西 北 入 境, 南 流 經 鐵 嶺 瀋 陽 都 司 之 西 境, 廣 寧 之 東 境, 又 南 至 海 州 衛 西 南 入 海, 行 一 千 二 百 五 十 里. 89) 穆 彰 阿, 大 淸 一 統 志 卷 59, 奉 天 府, < 山 川 >. 通 典, 大 遼 水 源 出 靺 鞨 國 西 南 山, 南 流 至 安 市. 遼 史 地 理 志, 遼 河 出 東 北 山 口 爲 范 河, 西 南 流 爲 大 口, 入 於 海. 明 統 志, 遼 河 源 出 塞 外, 自 三 萬 衛, 西 北 入 境, 南 流 經 鐵 嶺 瀋 陽 都 司 之 西 境, 廣 寧 之 東 境, 又 南 至 海 州 衛, 西 南 入 海. 90) 阿 桂, 滿 洲 源 流 考 卷 14, 山 川 1, < 白 平 山 >. 山 海 經, 遼 水 出 白 平 東. 水 經, 大 遼 水 出 塞 外 御 ( 亦 作 衛 ) 白 平 山. 水 經 注, 遼 水 亦 言 出 砥 石 山 ( 案 遼 河 有 兩 源, 東 源 出 吉 林 之 庫 勒 訥 窩 集, 西 源 卽 潢 河 也. 白 平 砥 石 之 名, 或 古 今 稱 名 之 異 ). ; 阿 桂, 滿 洲 源 流 考 卷 15, 山 川 2, < 遼 河 >. 按 遼 河, 東 源 出 吉 林 城 西 南 之 庫 勒 訥 窩 集, 爲 赫 爾 蘇 河, 北 流 出 邊 西 北, 繞 鄧 子 河, 又 西 南 折 爲 潢 河, 會 其 西 源 卽 潢 河 也. 二 河 合 流, 自 開 原 縣 入 邊, 經 鐵 嶺.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85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앞에서 갈석의 위치를 요동 북부 지역의 개원 심양 일대로 비정했고, 요수를 현재의 요하로 고증하였다. 그렇다면 연장 진개 침입 이전의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이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유일한 당대 사서인 사기 에서는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왕험( 王 險 )이라 고 하였다.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대해 학계에서는 현 서북한의 평양 지역이라는 것에 이론이 없다. 이러한 왕험에 대해서 사기 의 주석가인 신찬( 臣 瓚 )은 왕험성이 낙랑군으로, 패수( 浿 水 )의 동쪽에 있다 고 하였는 데 91), 이는 앞의 갈석과 요수의 고증과 불일치한다. 그러나 또 다른 주석가인 응소( 應 劭 )는 요동군의 험독현( 險 瀆 縣 )이 조선 왕의 옛 도읍지다 92)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치통감보( 資 治 通 鑑 補 ) 에서는 요동군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고, 이곳이 고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93) 이들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요동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요수와 갈석이 요동 지역으로 비정됨에 따라 이들 주석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하에서는 과연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을지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한서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 과 통전 에서 갈석산을 낙랑군과 연결시키고 있다. 94) 물론 여기서 낙랑군은 서북한 지역에 설치했던 한사군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랑군 을 요동 지역의 좌갈석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좌갈석 인근의 요동 지역에도 한때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었던 것을 방증해 준다. 즉, 요동 지역에서 좌갈석 및 요수와 관련된 지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위만조선의 도읍지와 혼동을 일으켜서, 서북한의 낙랑군 을 요동의 좌갈석 관련 지역에다 잘못 부회하여 기술했을 것이다. 91) 司 馬 遷,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第 55, 王 險 에 대한 臣 瓚 의 注. 王 險 城 在 樂 浪 郡, 浿 水 之 東 也. 92) 주 89)의 王 險 에 대한 應 劭 의 注. 地 理 志 云, 遼 東 有 險 瀆 縣, 朝 鮮 王 舊 都. 93) 司 馬 光, 資 治 通 鑑 卷 第 95, 晉 紀 17, < 顯 宗 成 皇 帝 中 之 上 >. 或 以 仁 昭 之 謀 告 皝, 皝 未 之 信, 遣 使 按 驗. 仁 兵 已 至 黃 水 ; 嚴 衍, 資 治 通 鑑 補 卷 第 95, 晉 紀 17, < 顯 宗 成 皇 帝 中 之 上 >. 黃 水, 卽 潢 水, 在 棘 城 東 北, 距 唐 營 州 四 百 里. 據 載 記, 黃 水 當 在 漢 遼 東 郡 險 瀆 縣. 94) 班 固, 漢 書 卷 64 下, 嚴 朱 吾 丘 主 父 徐 嚴 終 王 賈 傳 第 34 下. 주 63)과 동일; 杜 佑, 通 典 卷 186, 邊 防 2, < 東 夷 > 條. 주 43)과 동일. 286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한서 지리지 에서 험독은 요동군에 속하는데, 후성현[ 候 城 縣, 중부 도위치( 中 部 都 尉 治 )]과 요양현 등의 인근에 있었을 것이라 한다. 95) 그런데 후성은 요동군의 중부도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체 요동군의 중간 지대, 즉 요동군의 동부도위와 서부도위 사이에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 다. 96) 그리고 후성은 현토군에 소속된다는 것으로 보아 97) 요동군에 속하면서도 현토군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지역으로는 전체 요동군 중부도위 중에서도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험독은 이와 같이 요양과 후성 인근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요동 북부 중에서도 현재의 심양 일대였을 것이다. 98) 이와 같은 추론은 회남자 에 기재된 요수를 현재의 요하로, 갈석산을 개원 일대(삼만위 서북부)로 보았던 앞의 양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요수 및 갈석이 고조선의 중심지와 관련되어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리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양 지역에서, 한 문화의 중심 지역으로 상정해도 될 만큼의 부장 수준을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해준 다. 심양의 정가와자( 鄭 家 窪 子 ) 고분군은 그 위치와 묘역 조성상에서 두드러진 특색이 있다. 99) 제3지점 언덕 정상부에 6512호와 652호 대형 목곽묘가 세트로 단독 묘역을 형성했고, 이로부터 북쪽으로 80여 미터 떨어진 낮은 언덕과 저지에 12기의 소형 토광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100) 특히 정가와자 M6512호는 청동기시대 요동 지역 유일의 대형 목곽묘일 뿐만 아니라, 청동화살촉 169건을 포함하여 청동기를 무려 400여 건이나 부장하고 있다. 101) 즉, 이곳은 다뉴경( 多 紐 鏡 )과 함께 수점의 원개형동기 ( 圓 蓋 形 銅 器 ) 청동무기 마구류 및 각종 장신구가 부장되어 있어 요동 지역 최대급의 청동기 부장묘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국( 國 )의 형성을 95) 班 固, 漢 書 卷 28 下, 地 理 志 第 8 下, < 遼 東 郡 > 條. ( 遼 東 郡 ): 襄 平, 新 昌, 無 慮 ( 西 部 都 尉 治 ), 望 平, 房, 候 城 ( 中 部 都 尉 治 ), 遼 隊, 遼 陽, 險 瀆. 96) 오현수, 앞의 논문(2012b), 20쪽. 97) 王 先 謙, 後 漢 書 集 解, 候 城 故 屬 遼 東 에 대한 注. 按 顧 炎 武 救 文 格 論 云, 候 城 改 屬 玄 菟. ; 王 先 謙, 後 漢 書 集 解, 侯 城 에 대한 注. 錢 大 昕 曰, 玄 菟 郡 有 候 城, 云 故 屬 遼 東 則 此. 98) 오현수, 앞의 논문(2012b), 21쪽. 99) 吳 江 原, 靑 銅 器 文 明 周 邊 集 團 의 墓 制 와 君 長 社 會 遼 東 과 吉 林 地 域 의 支 石 墓 와 社 會, 湖 西 考 古 學 26( 湖 西 考 古 學 會, 2012), 140쪽. 100) 瀋 陽 故 宮 博 物 館 瀋 陽 市 文 物 管 理 辦 公 室, 瀋 陽 鄭 家 窪 子 的 兩 座 青 銅 時 代 墓 葬, 考 古 學 報 第 1 期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1975), 141쪽. 101) 瀋 陽 故 宮 博 物 館 瀋 陽 市 文 物 管 理 辦 公 室, 위의 논문, 143 151쪽.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87
논할 수 있을 것이다. 102) 기원전 6세기 중반 정가와자 유적을 필두로 하는 집단은 군장사회로 진입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는 동시기 주변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03). 이 지역이 한 사회체의 중심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 5세기 정가와자유형의 출현으로, 정가와자유형과 요동 지역 토착 지역군의 교섭관계가 급변하여, 정가와자유형의 생산품과 제작 기술이 요동 지역에 급속하게 유통하게 된다. 그 결과 요동 동부를 제외한 요령 전역이 청동기에서는 동질적인 단위로 묶이고, 요동 북부에 서는 석관묘 양식이 쇠퇴하며, 요동 남부에서는 고인돌이 사라지게 된 다. 104)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은 비파형동검문화의 정가와자유형을 고조선의 문화로 볼 수 있을지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위만조선의 물질문화는 세형동검문화인데, 이 문화의 기원이 어디인지 밝힐 수 있다면, 연장 진개의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형동검문화가 연장 진개의 침입 이후 와해된 요령성의 비파형동검문화 의 후속 문화라는 것은 이미 검증된 바이다. 105) 특히 검병두식( 劍 柄 頭 式 ) T자형청동제검손잡이 선형동부( 扇 形 銅 斧 )의 변천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의 순서였다는 견해 106) 는 주목된다. 이러한 비파형동검문화는 기원전 6 5세기에 심양을 위주로 한 요동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 이후에 는 중원 세력에 밀려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세형동검문화가 형성된다고 한다. 107)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고조선 이동설 과 정확히 부합한다. 이러한 고조선은 한 세기가 지난 기원전 4세기부터 새로운 도전에 102) 이청규, 國 의 形 成 과 多 紐 鏡 副 葬 墓, 先 史 와 古 代 제14집( 韓 國 古 代 學 會, 2000), 37 38쪽. 103) 吳 江 原,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東 洋 學 第 51 輯 ( 檀 國 大 學 校 東 洋 學 硏 究 所, 2012b), 29쪽. 104) 오강원, 앞의 책(2006), 472 473쪽. 105) 趙 鎭 先, 細 形 銅 劍 文 化 의 硏 究 (학연문화사, 2005), 219쪽. 106) 오강원, 遼 寧 西 北 韓 地 域 中 細 形 銅 劍 에 관한 硏 究, 淸 溪 史 學 第 16 17 輯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淸 溪 史 學 會, 2002), 22 24쪽; 吳 江 原, 東 北 亞 地 域 扇 形 銅 斧 의 型 式 과 視 空 間 的 樣 相, 江 原 考 古 學 報 第 2 號 ( 江 原 考 古 學 會, 2003), 79 81쪽; 오강원, 琵 琶 形 銅 劍 細 形 銅 劍 T 字 形 靑 銅 製 劍 柄 의 型 式 과 時 空 間 的 樣 相, 韓 國 上 古 史 學 報 第 41 號 ( 韓 國 上 古 史 學 會, 2003), 23 24쪽; 오강원, 遼 寧 韓 半 島 地 域 琵 琶 形 銅 劍 과 細 形 銅 劍 의 劍 柄 頭 飾 硏 究, 북방사논총 제2호(고구려연구재단, 2004), 21쪽. 107) 趙 鎭 先, 앞의 책, 219쪽. 288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의 상황은 위략( 魏 略 ) 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연나라가 왕호를 칭하고 동쪽으로 고조선을 침공하 려 하자, 고조선도 이에 대응하여 왕호를 칭하고 연나라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고 한다. 108) 고조선에서 있었던 후( 侯 )에서 왕( 王 )으로의 변화와 기원전 3세기에 왕위가 부( 否 )에서 준( 準 )으로 부자 세습되었던 상황은 고조선의 국가적인 성장을 시사해준다. 109) 한편 전국시대 연나라의 북방에는 동호가 활동하고 있었다. 춘추시대 에 제나라 환공의 북벌로 산융이 무너지면서, 이후 연나라는 동호와 직면하게 된다. 동호는 전국시대 초기부터 연나라를 수세에 몰아넣는 등, 북방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변법( 變 法 )을 통한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던 연나라는 동호와 전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충돌은 연나라의 승리로 돌아갔고, 연나라는 상곡( 上 谷 ) 어양 ( 漁 陽 ) 우북평( 右 北 平 ) 요서( 遼 西 ) 요동( 遼 東 )의 5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4세기에 중국 동북 지역에서 북방 청동기문화가 일제히 쇠퇴 소 멸하는 반면, 전국 연문화의 유물 요소가 하북성 북부와 요서 지역 모두에 공반하던 모습은 연나라의 팽창을 여실히 보여 준다. 110) 그리고 그 충돌의 여파는 고조선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연나라는 동호를 격파한 후, 계속하여 조선후가 통치하던 고조선을 공격했고, 그리하여 고조선은 서북한으로 중심지를 이동하게 된다. 연나라가 고조 선을 침공한 후, 고조선과의 경계가 되는 만번한( 滿 番 汗 )은 요동 지역의 문현( 文 縣 ) 일대로 비정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1) 이 지역은 108) 陳 壽, 三 國 志 卷 30, 魏 書 30, < 韓 傳 >. 魏 略 曰, 昔 箕 子 之 後 朝 鮮 侯, 見 周 衰, 燕 自 尊 爲 王, 欲 東 略 地, 朝 鮮 侯 亦 自 稱 爲 王, 欲 興 兵 逆 擊 燕 以 尊 周 室. 其 大 夫 禮 諫 之, 乃 止. 使 禮 西 說 燕, 燕 止 之, 不 攻. 後 子 孫 稍 驕 虐, 燕 乃 遣 將 秦 開 攻 其 西 方, 取 地 二 千 餘 里, 至 滿 番 汗 爲 界, 朝 鮮 遂 弱. 109) 박대재, 古 朝 鮮 의 王 과 國 家 形 成, 북방사논총 제7호(고구려연구재단, 2005), 159 166쪽; 박대재, 古 朝 鮮 과 燕 齊 의 상호관계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 전쟁 기사 를 중심으로, 史 學 硏 究 第 83 號 ( 韓 國 史 學 會, 2006), 10쪽. 110) 오강원, 요령 지역의 청동기문화와 북방 청동기문화 간의 상호 작용과 교류, 오르 도스 청동기문화와 한국의 청동기문화, 한국고대학회 2007년 국제학술발표대회문 집, 148쪽. 111) 滿 番 汗 에 대해서는, 丁 若 鏞 ( 與 猶 堂 全 書 第 6 集, 地 理 集 第 1 卷, < 疆 域 考 >, 朝 鮮 考. 漢 書, 遼 東 郡 屬 縣 有 文 縣, 有 番 汗 縣. 後 漢 書, 遼 東 郡 屬 城. 有 汶 縣 番 汗 縣, 滿 潘 汗 者, 汶 番 汗 也. ), 신채호[ 朝 鮮 史 硏 究 草, 註 釋 朝 鮮 上 古 文 化 史, 丹 齋 申 采 浩 先 生 記 念 事 業 會, 1998(원전 1926), 264 266쪽], 盧 泰 敦 (앞의 논문, 49 51쪽), 徐 榮 洙 (앞의 논문,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89
묘도열도를 통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잦은 왕래가 있던 곳이 었다. 112) 그런 관점에서 제나라를 무너뜨린 연나라 소왕( 昭 王 )은 요동 지역에 있던 고조선을 공격하여, 제나라의 잔여 세력과 고조선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했을 것으로 본다. 113) 그러므로 연장 진개의 침입은 앞에서 문헌과 고고학상으로 증명했던 심양 일대에서 평양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케 한 국제적인 큰 사건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위만조선 의 물질문화는 세형동검문화로, 이는 연장 진개의 침입 이후 와해된 요령성의 비파형동검문화의 후속 문화라는 것은 이미 검증된 바여서 이 논설은 확실시된다. V. 맺음말 이 글은 회남자 의 시칙훈 인간훈 추형훈 편의 조선 관련 조문에서 갈석 과 요수 가 등장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에 대해 본격적으 로 분석하기에 앞서, 이 조문들에 대한 사료 맥락적 분석을 통한바, 연장 진개 침입 이전의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었다. 먼저 갈석에 대해서는, 역대에 두 개의 갈석이 존재했는데, 시칙훈 편 에서 말하는 갈석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구체적으로 는 평산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회남자 인간훈 편과 추형훈 편에 기재된 요수에 대해서는, 각종 문헌 자료와 연장성의 축조 상태로 보아 현재의 요하로 비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갈석과 요수의 위치 비정과 관련된 여러 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들어,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현재의 심양 일대로 보았다. 41쪽), 박대재(앞의 논문, 2006, 26쪽), 박준형( 古 朝 鮮 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a, 144쪽) 등이 遼 東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112) 劉 俊 勇 著, 崔 茂 藏 譯, 中 國 大 連 考 古 硏 究 ( 學 硏 文 化 史, 1997), 43 45쪽; 佟 偉 華, 㬵 東 半 島 與 遼 東 半 島 原 始 文 化 的 交 流, 考 古 學 文 化 論 集 2(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1989), 78 94쪽; 許 玉 林, 遼 東 半 島 新 石 器 時 代 文 化 初 探, 考 古 學 文 化 論 集 2(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1989), 106 107쪽; 盧 泰 敦, 앞의 논문, 50쪽; 박준형, 古 朝 의 대외 교역과 의미 春 秋 齊 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북방사논총 2호(2004), 86 89쪽; 段 天 璟, 馬 城 子 諸 洞 穴 墓 葬 遺 存 的 分 期 與 相 關 問 題, 邊 疆 考 古 硏 究 第 7 輯 (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2008), 75 77쪽. 113) 박대재, 앞의 논문(2006), 27쪽. 290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4호
이와 같이 이 글은 고조선과 관련된 갈석과 요수의 위치, 그리고 여러 문헌 자료 및 정가와자 유적 등을 통해,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를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작으나마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글의 한도 내에서는 위치 비정 이상의 사학적 연구로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진개 침략 이전인 기원전 6 5세기 고조선의 문화, 그리고 그 영역 및 영역 내에서의 지배 양태, 여기에 더하여 고조선의 대외 교섭 체계와 같은 본질적인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의 폭을 넓히지 못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전기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기왕의 연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논자마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원하는 사료들을 인용하면 서, 왜 그것들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지 합리적인 설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즉, 각 문헌의 조선 기재 조문들에 대한 사료 맥락적 분석을 철저히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 논자마다 상호 이해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을 타개하고자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와 관련된 요수와 갈석의 위치를 각종 문헌 자료를 통해서 구체적 으로 비정하였다. 아울러 기왕의 연구에서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는 정가와자유형을 들면서도 문헌적으로는 요동군 의 치소와 관련된 요양(양평) 혹은 요동 남부 일대로 보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심양 일대로 확정지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앞으로 관련 연구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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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와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는 주제는 갈석산과 요수 의 위치, 연 진 장성의 동단이 어디냐이다. 그 위치 비정에 따라 전기 고조선의 위치 및 영역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갈석 요수 장성과 관련해서는, 고대 문헌 중에서 회남자 시칙훈 편과 인간훈 추형 훈 편에 기재되어 있다. 우선 이들 조문에 대해 사료 맥락적 분석을 시도했 는데, 전국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았다. 갈석의 경우, 하북성의 갈석( 右 碣 石 ) 외에, 요령성 지역에도 갈석( 左 碣 石 )이 있었는데, 좌갈석의 위치는 넓게 잡아 요동 북부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요동 북부 지역의 평산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 다. 그리고 요수를 현재의 요하로 비정했는데, 전기 고조선과 관련된 좌갈석의 위치와 연장성 유적의 동단이 요동의 북부 지역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갈석과 요수의 위치 비정을 근거하여 연장 진개 침입 이전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도 요동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었는 데 문헌과 고고학상의 자료를 토대로 하여 심양 일대로 구체화하였다. 투고일 2012. 9. 20. 수정일 2012. 11. 6. 게재 확정일 2012. 11. 20. 주제어(keyword) 회남자(Huainanzi ), 갈석(Jieshi), 요수(Liaoshui), 연장성(Yan Great Wall), 고조선(Go Jo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