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부림과 용부림꾼 : 용과 기우제 최 종 성 * 목 차 Ⅰ. 용으로의 초대 Ⅱ. 숭배와 퇴치 Ⅲ. 용부림 Ⅳ. 용부림꾼 Ⅴ. 흥분과 경건 : 한국종교의례의 양면 Ⅰ. 용으로의 초대 용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기나긴 동안 인간이 용에 대한 관념의 화석 1) 과 의례적 행위 를 전수해 오면서, 용은 문화적인 동물로 숨쉬어 왔다. 이 상징존재의 호흡을 제대로 교감하기 위해 현대의 연구자들은 대략 다음 두 가지를 제안한다. 우선, 용을 독자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즉 유교, 불교, 무속 등의 독립적인 문화전통과 대등한 의미로 용전통 을 확립하여, 그것을 독자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자는 것 이다. 이른바 독자적인 tradition 으로서의 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2) 둘째, 확보된 연구대상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독립된 연구관점을 확립하자고 제 안한다. 즉 용을 문학, 역사학, 민속학, 심리학, 인류학 등의 관점에서 파편적으로 이해하기 * 서울대 종교학과 강사 1) 여기서 사용한 관념의 화석 이라는 말은 아라까와 히로시가 사용했던 말을 그대로 쓴 것이다( 荒 川 紘, 1997, 龍 の 起 源, 紀 伊 國 屋 書 店, 285쪽). 그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화석으로 존재했었던 공룡에 빗대어 비생물학적 차원에서 문헌 및 도상으로 전해지는 용에 대한 흔적들을 관념의 화석 이라고 불렀다. 그 는 이러한 관념의 화석들을 근거로 용의 기원과 진화를 추적한다. 2) 이혜화의 연구가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그는 여타의 사상 전통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용사상 의 영역을 전제하여 용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한국문학에 입체화하고자 하였다(이혜화, 1993, 龍 사 상과 한국고전문학, 깊은샘, 17~8쪽 참조).
보다는 용에 대한 독자적인 분석이 가능하도록 이론적 준거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러한 입 장에서 이른바 독자적인 연구관점으로서의 dragonology 를 전제한다. 3) 우리는 독자적인 연구대상과 연구관점을 전제한 귀중한 연구 덕분으로 용의 숨결을 독 립적이고도 종합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연구에서 어떤 아쉬움을 느낀다. 본고에서 재차 용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나 관념의 총체를 체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미 동서양의 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 선보였기 때문이다. 4) 이들 종합적인 선행 연구들은 도상의 상징이나 문헌 혹은 설화 차원에서 관념화된 용의 이미지를 추출하 여 구조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용과 관련된 행위 상징이나 제의과정에서 드러나는 역동성 을 다룬 것은 상대적으로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다. 5) 본고는 관념화된 용보다는 양식화된 행위로 표현된 용을 한국의 문화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른바 용을 매개하거나 전제한 종교의례들이 본고의 주요한 연구대상이 된다. 용은 기본적으로 물( 水 神 )과 관련되는 상징이다. 중국 전통은 말할 것도 없으며 6), 서양 전통에서도 용은 원초적인 물 자체 혹은 혼돈의 물을 상징하였다. 인도의 경우에도 물( 水 3) Qiguang Zhao는 신화학자, 민속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도상학자, 신학자, 역사학자, 동물학자, 문학 자 등의 용에 대한 개별 연구를 지양하는 차원에서 주로 문학, 민속학, 심리학의 이론을 준거틀로 통 합하는 학문분과로서 dragonology 를 제언한다(Qiguang Zhao, 1992, A Study of Dragons, East and West, New York;Peter Lang Publishing INC.). 4) 용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단행본으로는 앞서 인용했던 이혜화( 龍 사상과 한국고전문학 )와 Qiguang Zhao(A Study of Dragons, East and West)의 연구서가 있으며, 이밖에 인도, 중국, 일본의 용 관련 문헌자료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한 고전인 M. W. De Visser의 저술(1913, The Dragon in China and Japan, Amsterdam, Johannes Müller), 동서양의 용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용의 기원 과 전개과정, 그리고 현대의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한 荒 川 紘 의 연구서(1997, 龍 の 起 源, 紀 伊 國 屋 書 店 ), 세계 각지의 용의 근원을 이집트로 간주함으로써 비판받기도 했던 Elliot G. Smith의 저술 (1919, The Evolution of the Dragon,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등을 추가할 수 있 다. 5) Michael Loewe는 그의 책(1994, Mythology and Monarchy in Ha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제 7장에서 春 秋 繁 露, 論 衡, 淮 南 子 등의 자료에 근거하여 중국 고대의 기우의식과 용의 례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용과 관련된 행위기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6) 용과 물의 관련성을 전하는 중국의 고대문헌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左 傳 昭 公 29년조. 龍 水 物 也 水 官 棄 矣 故 龍 不 生 得 ( 楊 伯 峻 編 著, 1981, 春 秋 左 傳 注 修 訂 本, 中 華 書 局 ). 楚 辭 권 11, 惜 誓. 神 龍 失 水 而 陸 居 兮 爲 螻 蟻 之 所 裁 ( 中 華 書 局, 1985, 楚 辭 王 逸 章 句 2 冊, 120쪽). 淮 南 子 권 1, 原 道 訓. 蛟 龍 水 居 虎 豹 山 處 天 地 之 性 也 ( 高 誘, 1984, 淮 南 子 注, 世 界 書 局, 5쪽). 管 子 권 1, 形 勢. 蛟 龍 得 水 而 神 可 立 也 ( 支 偉 成, 1923, 管 子 通 繹, 泰 東 圖 書 局, 6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3 神 )과 관련된 나가(naga)의 전통이 강하였다. 용과 물의 상징연합의 유구한 전통을 염두할 때 용과 관련된 의례행위의 규명에도 용과 물의 연합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 적인 과정에서 용과 관련되어 행해진 의례는 대부분 물, 특히 기우( 祈 雨 )와 관련된 것들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문화에서 용의 관념은 다종다양하였지만, 빈도수나 강도면에 있어서 용을 의례화한 것들은 대부분 물과 관련된 기우의식이었다. 결국 본고에서 다룰 용 관련 의례행위들은 기우의식과 깊이 관련된다. 종교문화에서 용은 이중적인 대접을 받아 왔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용은 극복되거나 퇴 치되어야 할 상징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인 기원이나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한국 종교문화 혹은 종교의례에 있어서는 후자 쪽에 비중 이 놓인다. 한국의 종교문화 상황에서 용이 긍정된 측면이 강하다고 하지만 용과 관련된 행위 양상을 보면 단순한 기원이나 경건한 숭배의 양상과 구별되는 갖가지 의례상징이 확 인된다. 가령, 용과 관련된 의례들은 용에게 단순히 기원하기보다는 상황과 인식에 맞게 용을 부린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묻는다. 먼저,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용을 부리 는 방식, 즉 용을 매개로 한 행위기법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것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는 용 관련 의례의 양상과 면면에 대한 관찰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그런 다양한 의례상 징을 주관한 전문가, 즉 용을 부린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는 용관련 의례와 종교전문가 간 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을 부리는 강렬한 의례행위들은 종교문 화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이는 한국종교사 내에서 차지하는 용 관련 의례들의 의미와 비중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물음으로 우리는 용의 숨살이를 시도하고자 한다. Ⅱ. 숭배와 퇴치 설화나 도상으로 표현된 용의 관념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지역성과 문화권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용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운위되었는데, 용의 전 통은 대략 동서( 東 西 )로 크게 이분되는 실정이다. 7) 7) 용의 상징적 의미를 크게 동서양의 두 축으로 정리한 저서로는 앞에서 제시한 Qiguang Zhao의 것이 참고할 만하다. 필자 역시 동서양의 용의 특징을 서술하는 데 그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밝힌다. 이 외
우선 고대 중근동과 서부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을 대변하는 서양의 용은 부정적인 이미 지로 관념되었다. 용은 혼돈의 물을 상징하거나 혼돈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져 세계 의 창조나 종말의 즈음에 신적인 존재나 영웅에 의하여 퇴치되어야 할 괴물로 여겨졌다. 즉 용은 창조론과 종말론에서 신에 반하는 혼돈의 적대자(chaotic enemy)로 규정되었다. 여러 신화자료에서 세계의 질서와 우주의 구성에 있어 신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용으로 등장하는 것들에는, 마르둑의 적대자 티아맛(바빌로니아)을 비롯해, 태양신 라의 적대자 세 트(이집트), 바알의 적대자 로단(가나안), 제우스의 적대자 타이폰(그리이스), 베어울프의 적대자 드라곤(영국) 등이 있다. 서양의 용은 외양은 다양하더라도 상징적으로는 악마적 이미지로 통일되어 있으며, 질 서에 대한 장애물로 여겨졌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의 원수, 적 그리스도, 이단 등으로 비 유되었으며, 시편(104), 요한계시록(12:9), 욥기(41:18~21), 이사야(27:1, 51:9) 등에 표현된 용, 뱀, 사탄, 리바이어던, 라합 등은 그 구체적 표현들이다. 원초적 물의 상징인 용에 불을 뿜어내는 상징이 더해짐으로써 악마적 이미지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8) 적대자 혹은 악마적인 존재로서의 용은 성자나 기사도의 용 살해담(dragon-slayer tale) 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며, 그 중에 St. George담이 유명하다. 9) 서양의 용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용은 강력하면서도 원조적( 援 助 的 )인 이미지로 받아 들여진다. 따라서 악마적 존재로 단일화된 서양 용의 이미지와는 달리 물, 하늘, 제왕, 국 가 등과 관련되어 상징화되었다. 우리의 용도 동양의 용 이미지의 일부분이다. 용의 상징적 의미가 아무리 상이하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용은 물과 관련된 다. 악마적 존재를 부각하는 차원에서 불을 뿜는 용으로 표현되는 서양의 용도 원초적인 물을 상징하며 물에 거하는 존재로 지속적으로 설화되기도 한다. 동양의 경우도 가장 원초 적으로 물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용이 제왕, 국가, 권위, 하늘 등을 상징하지만 그것 에도 여러 문화권에 존재하는 용의 상징을 정돈한 荒 川 紘 의 위의 책도 유용하다. 8) Qiguang Zhao는 혼돈의 물을 상징하던 서양 전통의 용이 악마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차원에서 불을 뿜는 용으로 강화되고 물의 이미지는 퇴색된 것으로 본다(Qiguang Zhao, op.cit., 110~116쪽). 따라서 동양의 용=물, 서양의 용=불 등으로 대비시키기도 한다(61~65쪽). 9) 서양의 용 살해담(Stith Thompson, Motif 300)은 질서, 체제의 적대자로서의 용의 이미지를 내장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용이 적 그리스도나 이단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들을 처단하는 전사나 주교에 대한 설화가 많이 발견된다. 특히 성 조지와 성 앤드류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용 살해담에는 보통 용 으로부터 소녀를 구출하는 모티프가 동반되는데, 용을 찾아 방랑하는 기사도와 구출된 숙녀와의 로맨 스와 용 살해담이 묘한 결합을 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Qiguang Zhao의 위의 책 제6장(The Dragon-Slayer)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용부림과 용부림꾼 5 은 물의 상징으로부터 유추된 것이라 보여진다. 10) 위에서 크게 동서양의 용의 이미지를 구분해 보았다. 세계의 보편적인 상징을 이분화하 는 데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 당장 인도의 경우 신의 적대자로서의 용(인드라:브리트라), 나가(Naga)와 같은 수신적 존재로서의 용, 불법을 수호하는 神 衆 으로서의 용 등으로 다양 하다. 따라서 인도의 용에 있어서는 부정적 이미지와 긍정적이고 원조적인 이미지가 동시 에 존재하므로 동서의 구분으로는 잘 포섭되지 않는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 지역의 용 관념도 용의 상징을 담아내고 있는 설화(신화, 전설, 민담)에 따라, 또 그러한 설화를 향유한 계층에 따라 여러 층위를 보이면서 긍정적 이미지 혹은 부정적 이미지를 구축하였 기에 엄격한 동서양의 구분에는 여전히 틈새가 존재한다. 11) 그러나 동서양의 고정된 이분법을 확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지역적 특성과 층위를 고려할 때 용은 이중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고, 긍정적이고 원조적인 존재로도 여겨졌다. 용의 상징을 원초적으로 물과 관련시킨다 해도 용과 물( 혹은 기우) 과의 관계성에도 차 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서양의 경우, 용의 서식처가 물이지만 강우를 위해선 용이 퇴치 되어야 한다. 용을 타도한 신이야말로 비를 내리는 권능을 가진다. 반면 동양의 경우, 강우 와 직접 관련되는 존재야말로 용이다. 우리의 종교문화 상황에서 용은 강우를 위해서 퇴치되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제의의 10) 수신( 水 神 )이 치수( 治 水 )와 권력 간의 상관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즉 수신이 수리전제정치와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Ibid., 96~99쪽 참조. 11) 엄격한 의미에서 동서양의 용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여러 층위를 고려하여 동서양의 용 을 비교한 Qiguang Zhao의 의견은 받아들일 만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이미지(외양)와 상징(내적 의미)을 구분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 동양의 용은 외양이 동질적인데 비하 여 상징적 의미는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반면 서양의 용은 갖가지 동물이나 괴물의 형태로 외양이 이질적인데 비하여 상징적 의미는 악마적 존재로 동질적이다. 둘째, 상징의 수용태도에 있어 내재화 (esoteric)와 외재화(exoteric)를 구분한다. 전자는 어떤 상징을 수용함에 있어 기존의 상징과 조화시 켜 자신의 것으로 정체화하는 반면, 후자는 이를 외적인 것으로 외면하고 퇴박을 놓는다. 동양의 경 우 용의 상징은 내재화의 태도로 수용되어 신적이고 원조적인 존재로 조화를 이루며 다양화된 의미 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용은 외재화의 태도로 이방적이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가 령 정복민이 토착민의 신앙의 대상이나 체제를 외재화의 태도로 거부하면서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이단적인 것, 혹은 반체제적인 것을 용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셋째, 용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신화, 전 설, 민담의 차원을 구분한다. 용의 상징은 그것을 매개하는 이야기의 차원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동 양의 경우 신화적인 차원에서는 지고하고 원조적인 상징의 용이 표현되지만 민담의 차원에서는 서 양과 같은 용 살해담이 보여진다(Ibid., 3~10쪽).
장에 요청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다만 정성스런 숭배와 기원에 의해서 요청된 것이 아니 다. 강우를 위해 용의 요소와 기능을 적절히 활용하여 부리는 차원에서 의례가 준행되었 다. 그리고 그 용부림은 흥분과 고조 속에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Ⅲ. 용부림 裘 錫 圭 의 연구에 의하면, 이미 갑골문의 卜 辭 에 용을 기우에 활용한 사례가 빈번하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12) 이는 기우제의 의례행위로 용이 사용된 예가 상고대로부터 연원하 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하지 않는 용을 어떻게 상고대로부터 의례에 유치 하여 왔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실제하지 않는 용을 제작하거 나 그려서 의례의 장에 조형물로 형상화하는( 像 龍 ) 것이다. 흙( 土 龍 ), 짚( 芻 龍 ), 모래( 砂 龍 ) 등의 재료로 입체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기우하는 造 龍 기우와 용을 그려서 기우하는 畵 龍 기우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용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특정 생물체를 선택하여 용을 대신하는( 代 龍 ) 것이다. 주로 도마뱀( 蜥 蜴 )이나 도룡뇽( 蛇 醫 ) 등이 용을 대신하여 의 례에 동원되었다. 세째는 像 龍 과 代 龍 과 같이 용을 직접 형상화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서 도 용소( 龍 所 )의 잠룡( 潛 龍 )을 전제하여 용을 재촉한 의례행위들이 있다. 용이 거한다고 생각되는 연못, 개울, 강, 바다 등에서 동물(개, 돼지, 호랑이), 식물(나무, 독초), 혹은 비생 물체(금속, 돌, 토사, 재, 배설물) 등을 이용하여 수중에 잠룡을 자극하는 의례행위가 여기 에 해당된다. 이 장에서는 위의 세 가지 분류에 따라 우리의 종교문화에서 발견되는 像 龍 祈 雨, 代 龍 祈 雨, 潛 龍 祈 雨 등의 용부림 행위를 서술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자료에서 해명 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웃 문화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1. 像 龍 祈 雨 1 3 ) 12) 商 代 의 卜 辭 자료에 무당을 태우거나( 焚 巫 ), 햇볕에 노출시키는( 暴 巫 ) 기우행위의 자료와 더불어 토룡 을 만들어( 作 土 龍 ) 기우했다는 자료가 동시에 확인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裘 錫 圭, 1983, 說 卜 辭 的 焚 巫 尫 與 作 土 龍, 甲 骨 文 与 殷 商 史 ( 胡 厚 宣 主 編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참조. 13) 입체적인 구조물이나 회화같은 조형물로 공간에 용을 형상화하는 것을 상용( 像 龍 ) 이라 명명 한다. 상용은 조소( 彫 塑 )나 회화( 繪 畵 )의 양식을 빌어 용의 형체를 만들거나 그린 것을 지칭 하는 것으로 쓰겠다.
용부림과 용부림꾼 7 1 ) 造 龍 화룡기우 이외에 용의 구조물을 입체화하여 기우한 사례가 우리의 문헌자료에 보이기 시 작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려시대 이래로 전개된 造 龍 祈 雨 에 이용된 형상물 은 대부분 토룡(earthen dragon)이었지만, 간혹 추룡(straw dragon)이나 사룡(sand dragon) 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불승들의 龍 王 道 場 을 사찰, 궁중, 선상에 설치하여 기우한 사례 14) 가 보이지 만, 여기에서 용의 조형물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용의 형상물을 분명하게 이용한 사례는 아래와 같다. 현종 12년(1021) 5월 경진일에 南 省 ( 尙 書 都 省 ) 뜰 한 가운데에 토룡을 만들고 무격을 모아 비를 빌었다( 五 月 庚 辰 造 土 龍 於 南 省 庭 中 集 巫 覡 禱 雨 ). 15) 선종 2년(1085) 4월 신축일에 가뭄이 오래 계속되므로 토룡을 만들고 민가에서 용을 그려 비를 빌기를 관리가 청하니 왕이 따랐다( 辛 丑 有 司 以 久 旱 請 造 土 龍 又 民 家 畵 龍 禱 雨 王 從 之 ). 16) 인종 원년(1123) 5월 갑자일에 (남성에) 토룡을 만들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 甲 子 造 土 龍 于 都 省 廳 聚 巫 禱 雨 ). 17) 이미 裘 錫 圭 의 연구에서 확인하였듯이, 토룡기우는 商 代 에서부터 존속해왔다. 그러나 우 리 문헌자료에서는 훨씬 후대인 고려시대에 이르러 처음 발견된다. 그 시간의 간격만큼 토 룡기우가 우리 역사과정에서 실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토룡기우가 실재했음에도 불 구하고 이를 대변할 문헌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유보할 수밖 에 없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바는 토룡기우 뿐만 아니라 무당기우 역시 중국에서는 상고 대부터 존재했었지만 우리의 문헌에는 고려 현종시기에 이르러 토룡기우와 동일한 자료 석상에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18) 14) 高 麗 史 세가 11, 숙종 1 및 숙종 6년 4월 을사. 設 龍 王 道 場 于 臨 海 院 祈 雨. 高 麗 史 세가 17, 의종 1 및 의종 5년 7월 임인. 壬 寅 設 龍 王 道 場 於 貞 州 船 上 禱 雨 七 日. 15) 高 麗 史 세가 4, 현종1 및 현종 12년 5월. 高 麗 史 지 8, 오행 2, 금. 16) 高 麗 史 지 8, 오행 2, 금. 17) 高 麗 史 세가 15, 인종 1 및 인종 1년 5월 갑자. 高 麗 史 지 8, 오행 2, 금. 오행지의 기록 에는 于 都 省 廳 이 추가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자료에만 의존하면, 토룡기우를 왜, 또 어떻게 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따라 서 몇몇 중국의 자료에 의지하여 고려시대의 용부림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먼저 山 海 經 에 나타난 토룡기우를 살펴보자. 대황( 大 荒 ) 동북쪽 끝에 흉려토구( 凶 犁 土 丘 )라는 산이 있다. 응룡( 應 龍 )이 남쪽 끝에 거하는데, 치 우와 과보를 죽인 후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지상에는 가뭄이 자주 들었는데, 그때 마다 응룡의 형상을 만들면 큰 비가 내렸다. 19) 위 글에서 가뭄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다. 즉 날개 달린 응룡이 승천하지 못할 때 가뭄이 들며, 응룡의 형상을 만들어 기우할 때 그것이 타개된다. 그런데 郭 璞 이 당시 漢 代 에 통용되던 土 龍 이 바로 이 응룡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 今 之 土 龍 本 此 )임을 논 평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발의 원인으로 지목된 지상의 용을 승천시키기 위해 취해 진 주술적인 의례가 토룡기우임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봄에 승천하였다가 가을에 연못에 다시 잠긴다( 春 分 而 登 天 秋 分 而 潛 淵 ) 20) 는 인식 아래, 용이 주기적으로 혹은 계절적으로 승천하지 못한 채 잠연하여 있으면, 강우가 불가능할 것 이라는 인식이 가능했을 법하다. 따라서 잠연한 용을 승천시키기 위한 시도가 토룡기우로 표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淮 南 子 에 土 龍 致 雨 의 기록이 보인다. 이에 대해 高 誘 는 가뭄이 들 때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면 구름이 그 용을 따르게 되어 비가 오게 되는데, 은의 탕왕도 이와 같이 하였다( 湯 遭 旱 作 土 龍 以 像 龍 雲 從 龍 故 致 雨 也 ) 21) 고 논평하고 있 18) 사실 용과 관련된 의례 중에서도 유독 토룡기우가 무당과 깊게 관련된다. 卜 辭 자료에 토룡 기우와 焚 巫 求 雨 혹은 暴 巫 求 雨 사례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고대부터 이미 토룡을 만들어 기우하는 것과 무당기우는 어떤 상관성을 지녔을 것이다. 물론 은대의 巫 와 후대(진한 이후)의 巫 의 성격을 동일시할 수 없으므로 은대 자료에 보이는 토룡기우와 무당 기우의 친화성을 후대에도 그래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적어도 暴 巫 나 토룡기우 와 같은 기우의식과 관련된 은대 巫 의 역할은 후대의 巫 에게도 용청되는 전형이었다. 실제로 토룡기우를 규정하고 있는 후대의 여러 중국의 자료에서 토룡과 무당의 친화성은 쉽게 확인 된다. 우리사료에서 토룡기우와 무당기우가 동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의 현지자료에도 토룡기우와 무당기우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치루어지고 있다. 토룡과 무당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9) 山 海 經, 大 荒 東 經, 大 荒 東 北 隅 中 有 山 名 曰 凶 犁 土 丘 應 龍 處 南 極 殺 蚩 尤 與 夸 父 不 得 復 上 故 下 數 旱 旱 而 爲 應 龍 之 狀 乃 得 大 雨 ( 郝 懿 行, 1991, 山 海 經 箋 䟽, 海 王 邨 古 籍 叢 刊 영인, 中 國 書 店 ). 20) 說 文, 龍 ( 說 文 解 字 注, 黎 明 文 化 事 業 公 司, 1984, 588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9 다. 결국 구름이 일어나야 비가 내리는데, 이 구름을 능히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은 용에게 있다는 논리가 토룡기우의 전제가 된다. 구름과 용을 매개하는 논리는 周 易 에 보이는 동류는 동류끼리 서로 호응한다( 同 聲 相 應 同 氣 相 求 ) 는 논리이다. 이러한 호응논리에 입 각해 구름은 용을 따라가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雲 從 龍 風 從 虎 ) 22) 는 인식이 깊어가면서, 비를 일으키는 구름과 용이 긴밀하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한시대에 행해진 토룡기우는 潛 淵 한 용을 승천시킴으로써 구름이 따라 일어나게 하여, 끝내 강우를 얻어내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다. 後 漢 書 禮 儀 志 에서도 이것이 쉽게 확인된다. 後 漢 書 禮 儀 志 에 인용된 桓 潭 의 주에서는 용이 나타나면 곧바로 바 람과 비가 일어나 용을 맞이하고 보내므로, 그 같은 용을 모방하여 토룡을 만든 것 23) 이라 하여, 토룡기우가 모방행위에 근거한 공감적 주술형태의 일례임을 잘 보여 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전한시대의 기록과 이에 대한 후한시대의 주석에서 전한 및 후한 당시에 토룡기우가 일대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뭄이 들면 토룡으로 기우하는 것 이 당시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譬 若 旱 歲 之 土 龍 疾 疫 之 芻 狗 ). 24) 전한시대에 이 미 동중서는 春 夏 季 夏 秋 冬 에 따라 토룡의 크기, 색깔, 방위, 제관 등의 원칙을 세 부적으로 규정하였다. 25) 후한 이래로 토룡기우는 가뭄을 타개하기 위한 국가의 의례과정 에 항상 포함되었으며 26), 송대 眞 宗 에 이르러서는 토룡기우에 대한 절차, 장식, 숫자, 대소 21) 淮 南 子 권 4, 墜 形 訓 ( 高 誘, 1984, 淮 南 子 注, 世 界 書 局, 60쪽). 한편 土 龍 致 雨 를 탕의 토룡 기우와 관련지어 논평한 高 誘 의 의견에 대해 裘 錫 圭 는 실제 은대의 복사에 토룡기우가 실행 되었던 것을 들어 긍정하고 있다( 裘 錫 圭, 앞의 책, 33쪽). 22) 周 易 乾 卦 文 言 ( 黃 壽 祺 張 善 文 撰, 1994, 周 易 譯 主, 上 海 古 籍 出 版 社 ). 23) 後 漢 書 志 5, 禮 儀, 劉 歆 致 雨 具 作 土 龍 吹 律 及 諸 方 術 無 不 備 設 潭 問 求 雨 所 以 爲 土 龍 何 也 曰 龍 見 者 輒 有 風 雨 興 起 以 迎 送 之 故 緣 其 象 類 而 爲 之 ( 中 華 書 局, 1987, 後 漢 書 11 冊, 3120쪽). 24) 淮 南 子 권 17, 說 林 訓 ( 高 誘, 1984, 淮 南 子 注, 世 界 書 局, 289쪽). 25) 春 秋 繁 露 권 16, 求 雨 ( 賴 炎 元 註 譯, 1986, 春 秋 繁 露 今 註 今 譯, 臺 灣 商 務 印 書 館, 399~407쪽). 26) 隋 書 권 7 志 2 禮 儀 2, 秋 分 以 後 不 雩 但 禱 而 已 皆 用 酒 脯 初 請 後 二 旬 不 雨 者 卽 徙 市 禁 屠 皇 帝 御 素 服 避 正 殿 減 膳 撤 樂 或 露 坐 聽 政 百 官 斷 傘 扇 令 家 人 造 土 龍 雨 澍 則 命 有 司 報 ( 中 華 書 局, 1987, 隋 書 1 冊, 128쪽). 舊 唐 書 권 24 志 4 禮 儀 4, 孟 夏 以 後 旱 則 祈 雨 審 理 冤 獄 賑 恤 窮 乏 掩 骼 埋 胔 先 祈 嶽 鎭 海 瀆 及 諸 山 川 能 出 雲 雨 皆 於 北 郊 望 而 告 之 又 祈 社 稷 又 祈 宗 廟 每 七 日 皆 一 祈 不 雨 還 從 嶽 瀆 初 祈 後 一 旬 不 雨 卽 徙 市 禁 屠 殺 斷 緻 扇 造 土 龍 雨 足 則 報 祀 ( 中 華 書 局, 1989, 舊 唐 書 3 冊, 912쪽). 新 唐 書 권 145, 黎 幹 傳. 大 曆 八 年 復 召 爲 京 兆 尹 時 大 旱 幹 造 土 龍 自 與 巫 覡 對 舞 彌 月 不 應 使 毁 土 龍 帝 減 膳 節 用 旣 而 霪 雨 ( 中 華 書 局 영인본, 1989, 四 部 備 要 27, 1202쪽). 通 典 권 43, 秋 分 後 不 雩 初 祈 後 一 旬 不 雨 卽 徙 市 禁 屠 殺 斷 扇 造 大 土 龍 雨 足 則 報 祀 ( 中 華 書 局, 1988 通 典 校 點 本 2 冊, 1206쪽).
를 정하여 지방에까지 반포하기에 이른다. 27) 구름이 일어나야 비가 내린다는 자연적 지식과 더불어 구름은 용의 움직임에 따른다는 초월적인 믿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용의 승천을 유도하는 토룡기우가 동종주술(homeopathic magic)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28) 토룡기우가 地 上 水 中 에 서식하는 용으로 하여금 구 름을 얻어 승천하게 하는 것보다는 天 上 雲 中 에 거처하는 용으로 하여금 구름을 얻어 강하 시키게 하는 것이라는 지적 29) 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용을 천상적 존재로 한정 시킨 데에서 오는 설명이다. 용과 관련된 많은 기우 의식들은 오히려 용의 거처인 수중에 서 용을 상승하도록 강권하는 주술이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0) 용의 승천을 유도하는 방식은 대부분 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극하거나 용의 서식처 인 물의 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용의 승천을 자극하기 위한 방식 중에는 태양에 토룡을 노출시키는 暴 龍 이 있었다.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 에는 가뭄에 용을 사 슬에 묶어 뙤약볕에 방치하는 기우방식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暴 龍 이다. 31) 용을 폭로( 暴 露 )한 사례는 春 秋 繁 露 에서도 확인된다. 春 秋 繁 露 는 春, 夏, 季 夏, 秋, 冬 의 기 우제에 대한 규정을 제시한 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시 모두 물의 날에 반드시 정결한 흙으로 용을 만들며, 만드는 과정에서 가리개를 덮어 두었다 가 용이 완성되면 그 가리개를 치우고 용을 드러낸다. 32) 용이 제작되기까지는 가리개로 덮어두었다가 용이 완성되어 기우의식에 쓰일 때는 가리 2 7 ) 송대 토룡기우제의 반포에 대해서는 中 村 治 兵 衛, 1992, 中 國 シャ-マニズムの 硏 究, 刀 水 書 房, 제6장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한편 송대 진종의 토룡기우에 대해서는 文 獻 通 考 권 77, 郊 社 考 10, 雩 조를 참 조할 수 있다. 이를 아래에 소개한다. 甲 乙 日 擇 東 方 地 作 壇 取 土 造 靑 龍 長 吏 齋 三 日 詣 龍 所 汲 流 水 設 香 案 茗 果 餈 餌 率 羣 官 鄕 老 日 再 至 祝 酹 不 得 用 音 樂 巫 覡 以 致 媒 瀆 雨 足 送 龍 水 中 餘 四 方 皆 如 之 飾 以 方 色 大 凡 日 干 及 建 壇 取 土 之 里 數 器 之 大 小 龍 之 脩 廣 皆 取 五 行 生 成 數 焉 詔 頒 諸 路 及 令 祀 雨 師 雷 神. 28) 出 石 誠 彦 는 토룡기우를 동종주술의 사례로 꼽고 있다. 出 石 誠 彦, 1973, 上 代 支 那 の 旱 魃 と 請 雨 -その 說 話 と 事 實 と-, 支 那 神 話 傳 說 の 硏 究, 中 央 公 論 社, 456쪽. 29) 전한부터 후한까지의 용의 형태 변화에 주목했던 白 鳥 淸 은 운우를 담당하는 천공( 天 空 )의 영( 靈 )으로 서의 용을 강조하여 용의 승천보다는 천상적 존재인 용의 하강에 토룡기우의 초점을 맞추었다( 白 鳥 淸, 1934, 龍 の 形 態 に 就 いて 考 察, 東 洋 學 報 21~2, 東 洋 協 會 學 術 調 査 部, 254쪽). 30) M. W. De Visser, 1913, The Dragon in China and Japan, Amsterdam, Johannes Müller, 118쪽. 31) James Georges Frazer, The Golden Bough(김상일 역, 1990, 황금의 가지 上, 을유문화사), 116쪽. 32) 春 秋 繁 露 권 16, 求 雨, 四 時 皆 以 水 日 爲 龍 必 取 潔 土 爲 之 結 蓋 龍 成 而 發 之 ( 賴 炎 元 註 譯, 1986, 春 秋 繁 露 今 註 今 譯, 臺 灣 商 務 印 書 館, 407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11 개를 제거하여 용을 햇볕에 폭로시켰다는 기록이다. 鬼 丸 紀 는 덮개( 蓋 )에 감싸여진 토룡은 연못에 잠긴 용을 상징하며, 덮개가 제거되어 폭로된 토룡은 연못에서 나온 용을 상징한다 고 해석하였다. 33) 이러한 해석을 승인한다면, 토룡을 햇빛에 쬐이는 것 자체가 용의 서식 에 필수적인 요소인 물을 제거하는 것이며, 덮개의 제거는 잠연해 있는 용을 강권으로 끌 어내어 용을 고통스럽게 만듦으로써 용으로 하여금 그 고통의 해소를 위해 승천하여 운우 를 부르게 하려는 주술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가 풍족히 내리면 토룡은 다시 수중에 보내 지기도 하였다( 雨 足 送 龍 水 中 ). 34) 사실 기우제에서는 신상( 神 像 ), 통치자, 무당 등이 폭로되는 경우가 많았다. 35) 의례적 폭 로(ritual exposure)에 대해 다각적으로 검토했던 E. H. Schafer는 기우제의 暴 龍 이나 暴 巫 는 인간이나 작물의 풍요를 확보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세계를 조정하는 주술적인 행위로 서, 세계 여러 종교현상에서 초자연적 세계를 제압하는 주술적인 힘을 제공하기 위해 벌이 는 제의적 나체화(nudity)와 동일한 맥락을 갖는 종교현상이라고 보았다. 36) 토룡의 폭로는 용의 승천을 유도하려는 차원에서 취해진 주술적 행위이며, 그것은 제의적 나체화의 일환 으로서 인간의 풍요를 보장하는 강력한 주술적 힘의 행사였다. 폭룡 이외에 토룡을 파기하거나 소음으로 자극하여 운우를 보장받으려는 주술이 빈번하 게 확인된다. 토룡을 만들어 기우했지만 응험이 없자 토룡을 훼손시킴으로써 강우를 얻은 사례가 있다. 37) 가뭄에 용을 줄지어 끌고 다니거나 용을 협박하여 파기시키는 중국의 사 례가 황금의 가지 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38) 이러한 용의 파기와 협박은 暴 龍 의 수준을 33) 鬼 丸 紀, 1981, 暴 巫 考 - 雨 乞 いに 關 一 考 察, 中 國 哲 學 第 10 号, 北 海 道 中 國 哲 學 會, 3쪽. 34) 文 獻 通 考 권 77, 郊 社 考 10, 雩. 35) 중국의 민간신앙과 도교적 풍습을 전하고 있는 앙리 마스페로는 중국 여러 지역에서 가뭄에 성황신 상이나 지방관을 폭로시켜 기우하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Henri Maspero, Le Taoїsme et les Religions Chinoises(신하령 김태완 공역, 1999, 도교, 까치글방, 110쪽) 참조. 한편 무당을 강제로 햇볕에 쬐이면서 기우케 한 사례에 대해서는 졸고, 1998, 國 行 무당 祈 雨 祭 의 歷 史 的 硏 究, 震 檀 學 報 86, 震 檀 學 會 를 참조할 것. 36) 그는 폭로의례를 주술의 극대화를 위한 나체화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토룡의 주술적 동기 즉 용의 승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주술적 힘에 촛점을 맞추어 풍요를 위한 강 력한 주술적 힘의 행사로서 손색이 없는 폭룡을 거론한다(Edward H. Schafer, 1951, Ritual Exposure in Ancient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14(1~2), Harvard Yenching Institute, 149쪽). 37) 新 唐 書 권 145, 黎 幹 傳, 大 曆 八 年 復 召 爲 京 兆 尹 時 大 旱 幹 造 土 龍 自 與 巫 覡 對 舞 彌 月 不 應 使 毁 土 龍 帝 減 膳 節 用 旣 而 霪 雨 ( 中 華 書 局 영인본, 1989, 四 部 備 要 27, 1202쪽). 38) James Georges Frazer, The Golden Bough(김상일 역, 1990, 황금의 가지 上, 을유문화사), 115쪽.
넘어 주술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다. 토룡에게 채찍을 가하며 꾸짖거 나 39) 토룡을 행진시키면서 갖가지 소음으로 괴롭히는 경우, 또는 각종 악기와 춤으로 용 을 고무시키는( 鼓 舞 土 龍 ) 행위도 마찬가지로 용의 승천과 강우를 자극하는 극단적인 처방 이었다. 우리는 짤막한 고려의 토룡기우 기사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중국의 토룡기우를 살펴 보았다. 정결하고 경건한 태도로 기원하는 것이 기본적이었지만, 용을 직접적으로 처리하 는 행위양식에 있어서는 다소 격렬하고 자극적이었다. 강우를 얻기 위해서는 운우( 雲 雨 )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진 용을 승천시키는 것이 관건이었고, 그것을 위해 폭로, 파기, 협박, 가무, 소음자극 등의 주술적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용부림의 방식을 통해 용을 강요 하는( 要 龍 ) 행위가 곧 서양의 용에서 보이는 퇴치나 살해의 모티프와는 거리가 멀다. 서양 과는 달리, 용은 적대자가 아니라 강우를 유도할 수 있는 기능자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고려시대의 토룡기우는 유지되었다. 현존하지 않는 詳 定 古 今 禮 文 에 실린 기우제 절차의 말미는 토룡기우로 장식되고 있다. 즉 토룡기우는 악진해독( 嶽 鎭 海 瀆 ), 북교( 北 郊 ), 사직, 종묘에서의 기우제와 우제( 雩 祭 )를 거듭 거행해도 비가 오지 않 을 경우 취해지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40) (1) 악 진 해 독 북교 사직 종묘 우제 (2) 악 진 해 독 북교 사직 종묘 우제 (3) 토룡기우 式 으로 이어지는 기우제의 순 서는 수당 이래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구도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토룡기우를 전하는 문헌은 수없이 많다. 조선의 토룡기우는 대부분 오방토 룡제( 五 方 土 龍 祭 )로 집약된다. 오방토룡제에 대한 기본원칙은 동중서의 春 秋 繁 露 에서 비 롯된다. 春 秋 繁 露 求 雨 편에는 오행의 방향, 색, 수, 성격에 따라 토룡을 제작하여 기우하 39) 冊 府 元 龜 권 702, 令 長 部 能 政, 李 元 懿, 泥 龍 求 雨 無 應 李 令 笞 龍 責 之 卽 日 雨 足 ( 中 華 書 局, 1971, 8372쪽). 40) 太 宗 實 錄 권 21, 태종 11년 5월 庚 辰. 경진일에 예조에서 가뭄을 대처하는 사의( 事 宜 )를 올렸다. 삼가 文 獻 通 考 와 고려의 詳 定 古 今 禮 를 살펴보니, 대개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제도를 본받았습니다. 수 당대의 제도는 대개 서울과 지방 에 초여름 이후에 가뭄이 들면, 악 해 진 독에 기우하고 북교에서 능히 운우를 일으킬 수 있는 산 천에 기우합니다. 또 사직과 종묘에서 7일마다 한번씩 빌며,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먼저 했던 것 과 같이 악 독부터 다시 합니다. 가뭄이 심하면 우제( 雩 祭 )를 지내고 처음 빌고 10일이 지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시장을 옮기고 도살을 금하고 일산과 부채를 사용하지 않고 토룡( 土 龍 )을 만듭니다 ( 庚 辰 禮 曹 上 憂 旱 事 宜 謹 按 文 獻 通 考 及 前 朝 詳 定 古 今 禮 倣 隋 唐 古 制 有 曰 凡 京 都 孟 夏 以 後 旱 則 祈 嶽 鎭 海 瀆 及 山 川 能 興 雲 雨 者 於 北 郊 又 祈 社 稷 宗 廟 每 七 日 一 祈 不 雨 還 從 嶽 瀆 如 初 旱 甚 則 修 雩 初 祈 後 一 旬 不 雨 則 徙 市 禁 屠 殺 斷 傘 扇 造 土 龍 ).
용부림과 용부림꾼 13 였다. 봄에는 동방을 상징하는 甲 乙 일에 청룡( 蒼 龍 )을 동방의 숫자인 8 丈 의 크기로 만들고, 靑 衣 를 입은 小 童 8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여름에는 남방을 상 징하는 丙 丁 일에 적룡( 赤 龍 )을 7 丈 으로 만들고, 적의( 赤 衣 )를 입은 청년( 壯 者 ) 7인이 춤춘 다. 늦여름( 季 夏 )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戊 己 일에 黃 龍 을 5 丈 크기로 만들고, 황의( 黃 衣 )를 입은 장년( 丈 夫 ) 5인이 춤춘다. 가을에는 서방을 상징하는 庚 申 일에 백룡( 白 龍 )을 9 丈 크 기로 만들고, 백의( 白 衣 )를 입은 홀애비( 鰥 者 ) 9인이 춤춘다. 겨울에는 북방을 상징하는 壬 癸 일에 흑룡( 黑 龍 )을 6 丈 크기로 만들고, 흑의( 黑 衣 )를 입은 노인( 老 者 ) 6인이 춤춘다. 春 秋 繁 露 는 오행의 법칙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다. 가령 기 우제는 여름을 전후에 집중되는데, 오행을 의식하여 겨울에까지 무리하게 준칙을 삼은 것 이 그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가뭄에 오방토룡제를 지낼 때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갑을일에 동쪽에 청룡을 만들어 동자에게 춤추게 하고, 병정일에 남쪽에 적룡을 만들어 놓고 장정에 게 춤추게 하며, 무기일에 중앙에 황룡을 만들어 놓고 장정에게 춤추게 하고, 경신일에 서 쪽에 백룡을 만들어 놓고 노인에게 춤추게 하며, 임계일에 북쪽에 흑룡을 만들어 놓고 노 인에게 춤추게 하는 완화된 법식이 주를 이루었다. 41) 그러나 조선초기 토룡기우제에는 이러한 원칙마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오방토룡제의 거행위치는 오행의 방향에 맞았으나 해당날짜는 일치하지 않았다. 42) 다만 대개 2~3일 간 격으로 동방, 남방, 중앙, 서방, 북방 등의 순서로 토룡기우를 진행하였다. 토룡기우의 제장 은 오행에 따라 설정되었다. 먼저 동방토룡제의 제장은 흥인문 밖 先 農 壇 곁이었고, 남방 토룡의 제장은 한강 북쪽 부근(지금의 한남동)이었고, 중앙토룡의 제장은 종각 옆이었고, 서방토룡의 제장은 양화도 부근(지금의 절두산)이었고, 북방토룡의 제장은 북교 여단 근처 였다. 43) 실제로 春 秋 繁 露 나 事 文 類 聚 의 오방토룡제의 전거가 고려조의 예문에 실리지 않은 관계로 조선 전기에는 해당 방위에 맞는 제장을 선택하여 토룡을 만들어 기우했을 뿐 해당일을 반드시 지키거나 해당일에 맞는 제의전문가(동자, 청장년, 노인 등)를 선정하 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44) 41) 事 文 類 聚 前 集 卷 五 天 道 部 禱 雨 ( 事 文 類 聚 天, 博 而 精, 70쪽). 42) 그러나 순조에 이르러 오방토룡제를 실행하는 경우 오행의 규정에 맞는 날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 純 祖 實 錄 권 14, 순조 11년 5월 기묘). 43) 이긍익, 燃 藜 室 記 述 별집 2권. 東 壇 在 先 農 壇 傍 南 壇 在 漢 江 傍 中 央 壇 在 鐘 閣 傍 西 壇 在 楊 花 渡 傍 北 壇 在 北 郊 厲 壇 傍 및 世 宗 實 錄 地 理 志 경도한성부. 44) 中 宗 實 錄 권 93, 중종 35년 5월 신축. 皆 古 制 也 而 禮 文 無 據 故 祖 宗 朝 只 作 土 龍 而 祭 之 耳 今 亦 依 前 例 爲 之 何 如.
조선 후기에는 기우제의 골격이 12제차로 정형화되어 이후 기우제의 전형이 되었다. 45) 그 순서, 제장, 그리고 파견관은 아래와 같다. 제차 初 次 再 次 三 次 四 次 五 次 六 次 七 次 八 次 九 次 十 次 十 一 次 十 二 次 제장 삼각 목멱 한강 풍운뇌우 용산강 산천 저자도 雩 祀 파견관 三 品 官 宰 臣 宰 臣 북교 사직 宰 臣 (북교) 重 臣 (사직) 종묘 삼각목 멱한강 용산강 풍운뇌우 산천 저자도 雩 祀 重 臣 近 侍 官 重 臣 重 臣 북교 慕 華 館 池 邊 重 臣 (북교) 武 臣 嘉 善 大 夫 (모화관) 사직 慶 會 樓 池 邊 大 臣 (사직) 武 臣 嘉 善 大 夫 (경회루) 종묘 春 塘 臺 池 邊 大 臣 (종묘) 武 臣 嘉 善 大 夫 (춘당대) 오방토룡제 堂 下 三 品 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차-2차-3차-4차-5차가 이어지고 다시 1 2 3차가 6차-7차-8차 로 반복되며, 4차는 9차-10차로 나뉘어 반복되고 5차가 다시 11차에 반복되고, 최종적으로 12차인 오방토룡제가 제차를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와 조선 전기에 행해지던 기 우제 순서인 (1) 악 진 해 독 북교 사직 종묘 우제 (2) 악 진 해 독 북교 사 직 종묘 우제 (3) 토룡기우 式 과 대동소이하다. 기우제차는 비가 올 때까지 2~3일 걸 러 차수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오방토룡제는 국가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노력에도 비가 오지 않을 때 최종단계에서 실행되는 마지막 카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방토룡제가 堂 下 三 品 官 의 관리 하에 경건한 제의만으로 치루어졌을까? 그렇 지 않다. 토룡기우제는 최종단계에 치뤄지는 비장한 의례였지만, 용을 자극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같다. 임금이 하교하였다. 대저 토룡제는 기우제 중에서도 가장 지극한 것인데 용을 매질하는 것( 鞭 龍 ) 에 있어서는 오만불손하기( 褻 慢 )가 짝이 없다. 이 후로는 일체 제거하라. 46) 위 기사는 1753년(영조 29)의 기록이다. 실제로 大 典 通 編 (1785년) 이후의 법전에서는 토룡을 채찍질하는( 鞭 土 龍 法 ) 용부림의 방식이 제거된다. 그러나 이는 경건한 제의를 지향 하는 국가차원의 바램이었을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조치였다. 4 5 ) 기우제 12제차는 숙종 3 0 년에 정형화되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과 기우제등록 에 각각 4일간의 편차를 두고 기재되어 있다. 肅 宗 實 錄 권 39, 숙종 30년 6월 갑오. 祈 雨 祭 謄 錄 책 3, 갑신 6월 30 일(숙종 30년 6월 무술). 숙종 이후 법전에 기재된 기우제차에 대해서는 졸고, 1998, 國 行 무당 祈 雨 祭 의 歷 史 的 硏 究, 震 檀 學 報 86, 진단학회, 69쪽 참조. 46) 英 祖 實 錄 권 79, 영조 29년 5월 庚 午. 敎 曰 凡 土 龍 祭 祈 雨 之 極 者 而 至 於 鞭 龍 褻 慢 甚 矣 此 後 一 切 去 之.
용부림과 용부림꾼 15 그 일례로 우리가 논의를 미루어 왔던 추룡( 芻 龍 )의 예를 살펴보자. 정약용의 보고에 의 하면, 지방의 수령들이 한발에 짚으로 용( 芻 龍 )을 만들어 붉은 흙을 칠한 뒤 동네 아이들 로 하여금 끌고 다니며 채찍과 매질을 하게 해서 욕을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47)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성의 없이 치뤄지는 불경스러운 행위이지만, 강우를 바라는 대중에게는 자신들의 열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용부림의 핵심인 것이다. 추룡기우와 유사한 초룡기우 ( 草 龍 祈 雨 )가 조선 태종 때에 불승( 佛 僧 )에 의해 경건하게 치루어진 사례가 있긴 하지 만 48), 대부분의 造 龍 祈 雨 의 용부림 방식이 추룡 및 초룡기우에 적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다. 중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추룡기우는 경건한 제사이기보다는 용을 태우면서 행진하는 자극적인 주술행위로 치루어졌다. 49) 이러한 造 龍 기우는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村 山 智 順 에 의하면, 20세기 초 善 山 의 토룡기우제는 산천기우의 효험이 없을 때 진행되었다. 천변으로 移 市 하고, 도로에 토 룡을 만들어 巫 盲 僧 의 주관 하에 기우제가 거행되었다. 대략 길이 15~20간에 직경 1.5~2척이 되는 통나무 둘레에 빈 가마니를 감은 뒤, 그 위에 백토를 바르고, 흙이 마른뒤 청홍의 비늘을 채색하고, 키로 입을 만들고, 원형의 나무로 龍 珠 를 만들고, 말꼬리털로 수 염을 만들고, 나뭇가지로 뿔을 만들어 용을 완성시킨다. 용은 동민의 분담과 협조 하에 만 들어진다. 造 龍 의 머리부분에서는 巫 가 기우가를 주송하고, 몸통부분에서는 盲 僧 이 북을 치며 독경하고, 꼬리부분에서는 僧 徒 가 염불을 한다. 50) 무녀의 무악 연주, 맹승의 독경, 승 도의 염불 이외의 채찍질 등은 용에게 직접적으로 강우를 강요하는 용부림으로서 이전의 토룡기우의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1930년대 강릉의 용굿의 경우에는 토룡의 진흙 덩이가 비에 씻겨 내릴 때까지 무당이 용의 주위에서 무악에 맞춰 가무( 歌 舞 )를 계속했다고 한 다. 51) 이 역시 축원굿의 형태를 띠지만, 비가 내릴 때까지 폭로시키고 용이 스스로 그 고 통을 해소하기 위해 비를 내릴 때까지 용을 고무시킨( 鼓 舞 土 龍 ) 강렬한 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47) 丁 若 鏞, 牧 民 心 書 권 18, 禮 典 六 條 祭 祀. 今 之 守 令 遇 旱 令 作 芻 龍 塗 以 朱 土 羣 童 曳 之 鞭 笞 示 辱. 48) 태종 16년 흥천사에 불승 100명을 모으고 한 몸에 머리가 아홉인 草 龍 을 만들어 불교식의 의례로 祈 雨 精 勤 하게 하였다. 太 宗 實 錄 권 31, 태종 16년 6월 갑자. 祈 雨 於 興 天 寺 舍 利 殿 造 草 龍 一 身 口 頭 十 餘 聚 僧 一 百 設 祈 雨 精 勤. 49) 白 鳥 淸, 1934, 龍 の 形 態 に 就 いて 考 察, 東 洋 學 報 21~2, 東 洋 協 會 學 術 調 査 部, 247쪽의 中 華 全 國 風 俗 志 4책의 내용 재인용. 50) 조선총독부, 1938, 釋 奠 祈 雨 安 宅, 85~86쪽. 51)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민속종합보고서 강원도편, 144쪽.
造 龍 기우를 마감하면서 언급하지 않았던 砂 龍 기우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 역시 村 山 智 順 이 전하는 바이다.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예전에 훈련장이었던 광장에 砂 龍 을 제작한 다. 사룡을 만든 후 물비리굿( 雨 乞 굿)이라는 기우 의례를 행한다. 모든 읍내 거주자는 지게 나 세수대야를 지참하여 細 砂 를 담아 훈련장에 운반하여 2일 간 사룡을 만든다. 사룡은 높 이 4척 폭 4척의 크기로 지상에 횡으로 만들고 길이는 약 70척으로 한다. 머리는 북향으로 하고, 꼬리는 개울로 향하게 하며, 용체는 훈련장의 중앙으로 구불구불하게 만든다. 유리옥 으로 눈을 만들고 버들가지로 뿔을 만든다. 官 巫 女 1인을 主 巫 로 삼아 의례를 진행케 한 다. 밤에 사룡의 두부 좌우에 불을 사르고 한밤중까지 용두를 향해 舞 樂 을 연주한다. 이렇 게 하여 사룡으로 하여금 용왕에게 강우를 빌도록 하게 한다. 이 물비리굿은 일주간 혹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52) 사룡에 불과 열을 가하고 무악으로 고무시키는 용부림의 방식은 토룡기우와 다를 바 없다. 강우의 유도를 위해 사룡은 불과 소음으로 처절하게 부 림을 당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거행되던 造 龍 기우가 어느새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행의 례의 마지막 보루로 자리잡았고,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방에서 맹위를 떨쳤다. 흙 으로, 짚이나 풀로, 혹은 모래로 구조화된 용은 점잖은 자세로 신위( 神 位 )의 위엄을 호령하 기보다는 폭로, 채찍, 파기, 가무, 소음 등의 자극으로 강우를 강요받았다. 가뭄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가뭄으로 인한 자신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용이 밉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아예 장사지낼 수는 없었다. 용은 적대자가 아니라 그래도 자신들의 복지를 책임질 기능자였다. 기능자의 제대로 된 기능의 발휘를 위해 거친 造 龍 기우의 용부림이 시도된 것이다. 2 ) 畵 龍 실제하지 않는 용을 의례의 장에 조형물로 형상화( 像 龍 )하는 두번째의 방식은 용을 그 려서( 畵 龍 ) 기우하는 것이다. 화룡기우 역시 앞서 살펴본 조룡기우와 제의의 동기, 목적, 그리고 제의화의 원리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조룡기우 사례에 대한 문헌자료가 고려조에 등장하는 것에 비해 화룡기우 사례는 일찌 기 삼국시대의 자료에 등장한다.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화룡기우 자료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50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 夏 大 旱 移 市 畵 龍 祈 雨 ). 53) 52)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33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17 (고려) 선종 3년 4월 신축일에 가뭄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 해당관리가 토룡기우와 민가에서의 화룡기우를 제안하자 왕이 이를 수용하였다( 辛 丑 有 司 以 久 旱 請 造 土 龍 又 於 民 家 畵 龍 禱 雨 王 從 之 ). 54) (고려) 선종 6년 5월 을해일에 가뭄이 들어 해당 관리에게 명하여 용을 그려 기우할 것과 시장 을 골목으로 옮길 것과 죽은 자의 뼈를 묻어줄 것 등을 준행하게 하였다( 六 年 五 月 乙 亥 以 旱 命 有 司 畵 龍 禱 雨 巷 市 掩 骼 ). 55) 신라 진평왕과 고려 선종( 宣 宗 ) 때의 화룡기우에 대한 기록은 너무 간략하여 의례에서 차지하는 용의 비중과 역할, 의례의 동기와 양상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 중국의 경우 토룡기우와 더불어 화룡기우는 송대에 이미 법적으로 규정되어 각지에 반포되어 시행될 정도로 일반화된 양식이었다. 56) 조선시대의 화룡기우도 이미 송대에 반포된 규정을 따라 시행된 것이었기에 57), 송대의 화룡기우 규정을 관찰하면 우리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연못이나 강 또는 숲이 깊은 곳을 택한다. 경 신 임 계일에 지방관이나 원로가 재계하고 술과 포를 가지고 사직에 아뢴다. 제단은 3단으로 높이 일척 넓이 1장 3척으로 설치하며, 제단 20보 밖 에 흰줄로써 경계를 삼는다. 제단 위에는 대나무 가지를 꽂고 화룡을 늘어 놓는다. 그 그림은 흰 비단위에 그린다. 그림의 상단부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검은 물고기( 黑 魚 )와 그 주위 를 둘러싼 천구( 天 龜 ) 십성( 十 星 )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중앙부에는 백룡( 白 龍 )이 검은 구름을 토해내고 있으며, 하단부에는 물결 위에 왼쪽을 돌아보고 있는 거북이 흑기( 黑 氣 )를 길게 내뿜고 있다. 용의 형체는 금색, 은색, 적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에 기를 설치하고 거위 목을 베어 피 를 취해 쟁반 속에 넣는다. 버들가지로 용에 물을 뿌린다. 3일 동안 비가 풍족히 내리는 것을 기 다려서 숫돼지로 보답하는 제사를 지낸 후 화룡을 수중에 넣는다. 58) 53) 三 國 史 記 권 4, 신라본기 4, 진평왕 50년. 54) 高 麗 史 권 54, 志 8, 五 行 2, 金. 55) 高 麗 史 권 54, 志 8, 五 行 2, 金. 56) 화룡기우는 송대 眞 宗 景 德 3년(1006년) 5월 병진에 법식으로 반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文 獻 通 考 (권 77, 郊 祀 考 10, 雩 ), 宋 大 詔 令 集 권 151, 宋 史 禮 志, 長 編 권 63 등을 참조할 것. 57) 太 宗 實 錄 권 29, 태종 15년 5월 병오. 임금이 이제부터의 화룡기우는 송조 경덕 3년에 반행된 법 식에 따라 행하라고 攸 司 에 명하였다( 命 攸 司 自 今 畵 龍 祈 雨 依 宋 朝 景 德 三 年 頒 行 規 式 行 之 ). 58) 文 獻 通 考 권 77, 郊 社 考 10, 雩. 其 法 擇 潭 洞 或 湫 濼 林 木 深 邃 之 所 以 庚 辛 壬 癸 日 刺 史 縣 令 帥 耆 老 齋 潔 先 以 酒 脯 告 社 令 訖 築 方 壇 三 級 高 一 尺 闊 丈 三 尺 壇 外 二 十 步 界 以 白 繩 壇 上 植 竹 枝 張 畵 龍 其 圖 以 縑 素 上 畵 黑 魚 左 顧 環 以 天 龜 十 星 中 爲 白 龍 吐 雲 黑 色 下 畵 水 波 有 龜 亦 左 顧 吐 黑 氣 如 線 和 金 銀 朱 丹 飾 龍 形 又 設 皀 幡 刎 鵝 頸 取 血 置 槃 中 楊 枝 酒 水 龍 上 俟 雨 足 三 日 賽 以 豭 取 畵 龍 水 中.
화룡기우는 백룡( 白 龍 ) 뿐만 아니라 물과 관계된 거북과 물고기, 그리고 비와 관계된 구 름을 견포에 그려 기우한 것이다. 따라서 서방과 북방을 상징하는 경 신 임 계일에 의 례가 시작된다. 경건한 의례로 시작되지만 버들가지로 물을 뿌리는 주술을 거행하거나 용 을 수중에 던짐으로써 의례를 마감하는 것이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화룡기우 역시 제단을 설치하고 장식하는 것 이상으로 용부림의 주술이 중요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위의 자료에서는 그러한 단면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화룡으로 용 을 초치하는 유감주술적 측면은 王 充 의 論 衡 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儒 者 가 물었다. 楚 나라 葉 公 이 용을 좋아하여, 담벽과 소반 및 사발에 모두 용을 그려 놓았다. 형상이 비슷하다고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면, 葉 公 의 나라에는 항상 비가 왔을 것이 다. (왕충이) 말하였다. 楚 나라 葉 公 이 용을 좋아하여, 담벽과 사발 및 단지에 에 모두 용을 그려 놓았다. 진짜 용이 이를 알고 내려왔다. 대개 용은 운우( 雲 雨 )와 동기( 同 氣 )이므로 같은 類 를 따 라 능히 감응한다. 葉 公 은 용의 형상을 그려 진짜 용을 불러들인 것이다. 어찌 운우를 부르지 못 하겠는가? 59) 논형 에 의하면, 형상물에 의한 동기감응을 부정하는 儒 者 의 입장에 대해 왕충은 楚 葉 公 이 그린 용은 진짜 용과 흡사하여 용은 물론 용과 동류인 운우도 함께 부를 수 있다 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을 승천시키기 위한 주술보다는 용을 초치하는 유 감주술에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혹자는 용의 하강과 강우를 관련시키기도 하지만 60), 토룡 기우나 화룡기우 모두 용을 형상화하여 眞 龍 으로 공감하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에 해당된 다. 문제는 그런 전제 뒤에 행해지는 주술적인 행위, 즉 용부림의 방식과 원리이다. 화룡기우의 의례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룡기우의 용부림이 잘 드러나는 자료를 확 인할 필요가 있다. 10세기말 내지 11세기초의 도교서인 雲 笈 七 籤 에는 우물가의 벽에 용 을 그려 놓고 기우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만약 가뭄이 들면 취중에 있는 사람이 벽에 그려진 화룡을 맹렬히 조롱한다고 한다. 특히 그 사람은 우물 난간에서 하늘이 내린 가뭄 59) 論 衡 亂 龍. 儒 者 或 問 曰 楚 葉 公 好 龍 墻 壁 盤 盂 皆 畫 龍 必 以 象 類 爲 若 眞 是 則 葉 公 之 國 常 有 雨 也 曰 楚 葉 公 好 龍 墻 壁 盂 樽 皆 畫 龍 象 眞 龍 聞 而 下 之 夫 龍 與 雲 雨 同 氣 故 能 感 動 以 類 相 從 葉 公 以 爲 畫 致 眞 龍 今 獨 何 以 不 能 致 雲 雨 ( 黃 暉 撰, 1995, 論 衡 校 釋 3 冊, 中 華 書 局 ). 60) 白 鳥 淸, 1934, 龍 の 形 態 に 就 いて 考 察, 東 洋 學 報 21~2, 東 洋 協 會 學 術 調 査 部, 254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19 에 대해 대체 용이 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큰 소리로 따지며 반문하고, 급기야는 커다란 돌 로 화룡의 발을 마구 친다고 한다. 61) 우리는 여기에서 조롱과 함께 화룡의 발을 치면서 용에게 강우를 강요하는 화룡기우의 강렬한 용부림을 확인할 수 있다. 벽에 그려진 용을 자극하는 것은 화룡에 초치된 실제의 용을 가정하고 벌이는 의례행위이다. 따라서 화룡기우는 실제의 용을 화룡에 초대함으로써 강우를 얻고자한 것이기보다는 흥분과 고조 속에서 초대된 용을 강권하여 강우를 초래하 게 한 직접적인 주술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및 고려의 자료가 이러한 방식의 의례행위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토룡과 같이 화룡에 초치된 용을 자극하여 강우를 획득하고자 한 열망에서 진행된 의례였을 것이 라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11년 5월 양진( 楊 津 )에서의 화룡제 62) 를 비롯하여 빈번하게 화룡 기우제가 실시되었다. 특히 저자도( 楮 子 島 )에서의 화룡기우는 이후 기우제의 전형으로 잡 혀나가기 시작했으며 63), 특히 맹인에 의한 화룡기우의 사례가 확인된다. 64) 화룡기우와 토 룡기우는 단독적으로 행해지기도 했지만,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복합적으로 추진되기도 하 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격( 巫 覡 )과 소동( 小 童 )에 의해 의례가 주관되기도 하였다. 65) 앞에서 거론했거니와 조선시대의 화룡기우는 토룡기우와 마찬가지로 송대 眞 宗 시기에 반행된 규정을 따르는 것으로서 중국의 화룡기우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에 이르면, 중국 式 의 화룡기우에 대한 반성도 제기된다. 가령, 영조 때에는 화룡기우제 말 미에 용의 그림에 제물을 싸서 수중에 버리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여타 제사의 망료( 望 燎 )와 같이 화룡을 축문과 함께 불사르게 하였다. 66) 즉 화룡을 수중에 던져 버리는 행위 자체를 신을 모멸하는( 慢 神 ) 행위로 규정하면서 화룡기우의 주술적 행위를 비윤리적 행위 로 간주하고 있다. 61) M. W. De Visser, 1913, The Dragon in China and Japan, Amsterdam, Johannes Müller, 117~118 쪽에서 재인용. 62) 太 宗 實 錄 권 21, 태종 11년 5월 신사. 又 遣 檢 校 參 議 崔 德 義 設 畵 龍 祭 于 楊 津. 63) 태종 때에 이미 저자도에서 화룡기우가 시작되었고( 太 宗 實 錄 권 26, 태종 13년 7월 임오. 又 以 羣 巫 禱 于 漢 江 遣 檢 校 工 曹 參 議 崔 德 義 行 畵 龍 祭 于 楮 子 島 ), 성종 5년 예조에서는 기우 행사의 아홉 가지 요건으로서 저자도의 화룡기우와 오방토룡제를 선정하고 있다( 成 宗 實 錄 권 44, 성종 5년 윤 6월 계사). 64) 太 宗 實 錄 권 27, 태종 14년 6월 경술. 畵 龍 于 楮 子 島 盲 人 等 請 禱 雨. 65) 成 宗 實 錄 권 143, 성종 13년 7월 갑신. 又 爲 畵 龍 土 龍 令 巫 覡 小 童 祈 禱. 66) 英 祖 實 錄 권 116, 영조 47년 5월 계묘.
뿐만 아니라 정조 때에도 용산과 저자도의 화룡기우에서 신위를 지방으로 할 것( 神 位 用 紙 牓 )과, 용그림을 정결하게 할 것과 의례를 끝낸 후에는 다시 용을 투기하지 않고 태상시 에 봉안할 것 등을 법식으로 제도화하였다. 67) 유교의 의례적 경건성을 화룡기우에 적용하 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대목이다. 조선후기에 성숙된 유교적 경건성에 의해 토룡기우와 화룡기우의 주술적 행위들이 위축 받게 되지만 20세기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주술적 행위들이 재현되었다. 경남 울산에서는 시장 터에 토룡을 만들고 용을 그려 걸어 놓고 3일 내지 4일간 무당이 비를 빌기도 하였 는데, 돼지머리를 제물로 사용하고, 용에 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68) 1935년 경주지역에서도 용을 그려 기우한 사례가 발견된다. 경주에서는 무녀들이 주최하여 토룡 및 화룡기우제를 거행하는데, 길이 1장 정도의 종이에 용을 그리고 그 앞에 기를 두르고 배를 놓는다. 무녀 들은 버들가지로 만든 관을 쓰고 무악을 연주하며 기우하였다. 69) 일제시대에 거행된 화룡 기우는 토룡기우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토룡기우에서의 용부림 양식이 거의 그 대로 준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려진 용 역시 조룡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다. 조소( 彫 塑 )와 회화( 繪 畵 )의 양식을 빌 어 형상화된 용은 용 살해담 에서와 같이 완전히 퇴치되어 죽고 마는 운명은 아니었지만, 삶의 위기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인간들에 의해 반쯤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런 용부림의 상황만이 가뭄으로 야기된 인간의 흥분과 격정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2. 代 龍 祈 雨 실제하지 않는 용을 造 龍 이나 畵 龍 으로 형상화하여 용을 부린 것과 또 다른 방식의 용 부림 방식이 확인된다. 그것은 용과 유사한 생물체를 골라 용을 대신한( 代 龍 ) 기우방식이 다. 이 역시 상룡기우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용을 부린 행위이다. 대개 도마뱀( 蜥 蜴 )과 도룡뇽( 蛇 醫 )류가 代 龍 에 소용되었다. 도마뱀과 도룡뇽 이외에 물과 관련되는 개구리나 두꺼비를 기우 주술에 사용하는 것은 특정 문화권에 국한되는 사례가 아니었다. 70) 보통 이러한 작은 동물을 작은 용기에 넣어 67) 正 祖 實 錄 권 48, 정조 22년 5월 을유. 68)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30~131쪽. 69)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43쪽. 70) James Georges Frazer, The Golden Bough(김상일 역, 1990, 황금의 가지 上, 을유문화사), 114~
용부림과 용부림꾼 21 막대기로 치거나 소음으로 자극하여 비를 구하는 주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 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도마뱀과 도룡뇽을 이용한 기우의식은 다른 것과는 달리 용과 관련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용부림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용과 관련된 의례연합 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蜥 蜴 (도마뱀)은 石 龍 子, 山 龍 子, 泉 龍 등으로 불리면서 유사룡( 類 似 龍 )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도마뱀은 작은 용으로서 기우에 대용된 것이다. 71) 李 圭 景 은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 서 蜥 蜴 이나 蛇 醫 를 이용하여 기우한 의식을 용과 관련된 기우와 동일한 범주( 祈 雨 祭 龍 辨 證 說 )에 포함시켜 논하였다. 그는 석척의 모습이 용과 흡사하여 龍 과 서로 氣 가 상통할 수 있으므로 용을 대신하여( 代 龍 ) 비를 구하는 것이라고 석척기우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72) 이러한 논리는 토룡기우의 전제와 다를 바 없다. 토룡 및 화룡이 용으로 간주되었듯이 도 마뱀이나 도룡뇽도 살아있는 용으로 간주된 것이다. 代 龍 기우에는 蜥 蜴 이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유사한 용어와 방언들이 많이 등장한 다. 本 草 綱 目 에서는 도마뱀이나 도룡뇽을 (1) 산과 바위에 사는( 生 山 石 間 ) 蜥 蜴, 石 童, 豬 婆 蛇 등의 류, (2) 풀과 못에 사는( 生 草 澤 間 ) 蛇 醫, 蛇 師, 蛇 舅 母, 蠑 螈 등의 류, (3)지붕 이나 벽에 사는( 生 屋 壁 間 ) 蝘 蜓, 守 宮 등의 류로 삼분하고 있다. 73) 그러나 (1)과 (3)은 지 상 생물로 흔히 일컫는 도마뱀류이고, (2)는 수중에 사는 도룡뇽류로서 이분화된다. 따라서 대룡기우는 蜥 蜴, 守 宮, 蝎 虎 등의 도마뱀류와 蛇 醫, 蛇 師, 蠑 螈 등의 도룡뇽류로 구분된다. 그러나 대룡물의 차이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며, 실제로 대룡기우의 운용에 있 어서는 대동소이하다. 대룡기우는 당대에 갖춰져 송대에 고정된 의례규정으로 반포되기에 이른다. 唐 代 에 지 어진 酉 陽 雜 俎 에 의하면, 돌로 만들어진 독( 石 甕 ) 2단지에 도룡뇽( 蛇 醫 )을 각각 2마리씩 넣어 물에 띄운 후 밀봉하여 시끄러운 곳( 鬧 處 )에 두고 분향하며, 10세 이하의 아동 10여 명으로 하여금 대나무( 靑 竹 )로 독을 주야로 치게 하였다. 74) 송대 神 宗 熙 寧 10년(1077)에 이르면, 독에 도마뱀을 넣고 童 男 (10세~13세) 28명이 靑 衣 를 입고 얼굴과 수족에 청색을 115쪽. 71) M. W. De Visser, 1913, The Dragon in China and Japan, Amsterdam, Johannes Müller, 74~75쪽. 72) 李 圭 景,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권 24, 祈 雨 祭 龍 辨 證 說. 取 蜥 蜴 者 其 狀 如 龍 其 氣 與 龍 相 通 故 代 龍 致 雨 者. 73) 本 草 綱 目 鱗 43권, 石 龍 子 ( 張 紹 棠 重 訂, 1967, 本 草 綱 目, 國 學 基 本 叢 書 140~22, 臺 灣 商 務 印 書 館, 62쪽). 74) 事 文 類 聚 前 集 권 5, 天 道 部 禱 雨 甕 盛 蛇 醫 ( 事 文 類 聚 天, 博 而 精, 72쪽).
바른 후 날마다 교대로 주문을 외면서 기우하는 석척기우법을 공식적으로 반포하기에 이 른다. 75) 抱 朴 子 에 따르면, 방사( 方 士 )들이 병 속에 4~5마리의 용을 넣어 기르다가 가뭄 이 든 지역에 가서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연못가에서 병 속의 용을 꺼내어 여러 주술을 행사했다고 한다. 76) 병 속에 넣은 용은 아마도 대룡물인 도마뱀이나 도룡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룡기우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확인된다. 기우 방식은 중국의 것과 대 동소이하다. 77) 조선 태종 7년 6월 궁 동쪽에 있는 광연루에서 시험적으로 석척기우가 시 행되었다. 임금이 광연루 아래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석척기우는 물이 찬 두 개의 독을 뜰 에다 놓고, 석척을 잡아 넣고 자리를 베풀어 분향한다. 동자 20명으로 하여금 靑 衣 를 입고 버들가 지를 가지고, 석척아 석척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가 흥건하게 내리면 너를 돌려 보내리라 라고 주문을 외운다. 이대로 이틀 동안이나 빌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동자들에게 각 각 쌀 1석씩을 주었다. 78) 위의 석척기우는 당 송대의 석척기우를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석척동자들이 독을 두드리며 외는 주문 역시 동일하다. 이후에도 광연루 이외에 上 林 園 등지에서 동자 수십명 을 모아 놓고 3일간 석척기우를 행했으며, 특이하게도 조선시대에 국행 기우제에 참여했던 무격에게는 공식적으로 의례참가에 대해 보상하지 않았으나 석척동자에게는 쌀이나 포를 베풀었다. 79) 석척기우는 점차적으로 참여인원과 의례기간이 증가하여 수주일 동안 수백명 이 동원되는 대규모의 기우제로 치뤄지기도 하였다. 80) 제장도 경회루, 모화루, 춘당대로 고정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모화루 연못가의 석척기우는 성종 때에 구성된 기우제 9 요 75) 中 村 治 兵 衛, 1992, 中 國 シャ-マニズムの 硏 究, 刀 水 書 房, 153쪽 참조. 76) 抱 朴 子 內 篇 佚 文, 壺 中 或 有 四 五 龍 以 少 水 養 之 以 疏 物 塞 壺 口 國 常 患 旱 災 于 是 方 士 聞 餘 國 有 少 雨 屢 旱 處 輒 齎 龍 往 賣 之 一 龍 直 金 數 十 斤 擧 國 會 斂 以 顧 之 直 畢 乃 發 壺 出 一 龍 著 淵 潭 之 中 因 復 禹 步 吹 之 一 吹 一 長 輒 長 數 十 丈 須 臾 而 雲 雨 四 集 矣 ( 王 明, 1996, 抱 朴 子 內 篇 校 釋 ( 增 訂 本 ), 中 華 書 局, 359쪽). 77) 조선은 실제로 송대 희녕 10년에 반포된 원칙에 의해 석척기우를 행하였다( 中 宗 實 錄 권 93, 중종 35년 5월 신축). 78) 太 宗 實 錄 권 13, 태종 7년 6월 계묘. 卽 命 試 之 於 廣 延 樓 下 其 法 置 盛 水 二 瓮 於 庭 捕 蜥 蜴 納 之 瓮 中 設 席 焚 香 令 童 男 二 十 人 衣 靑 衣 持 遊 技 祝 曰 蜥 蜴 蜥 蜴 興 雲 吐 霧 降 雨 滂 沱 放 汝 歸 去 旣 二 日 不 得 雨 於 童 子 各 賜 米 一 石. 79) 太 宗 實 錄 권 26, 태종 13년 7월 기묘 및 신사. 80) 睿 宗 實 錄 권 6, 예종 1년 7월 계사.
용부림과 용부림꾼 23 건 중에 하나였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행사였다. 81) 숙종 30년(1704)에 확정된 기우제 12제 차에 9차 모화관 연못가의 석척기우, 10차 경회루 연못가의 석척기우, 11차 종묘 춘당대 연못가의 석척기우 등이 각각 병행될 정도로 석척기우는 국행 기우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 하였다. 이후 1865년의 大 典 會 通 에 이르러 10차와 11차 석척기우가 폐지되고 9차 모화 관 연못가의 석척기우만이 실행되었지만, 석척기우는 무격이나 맹인의 기우와는 달리 유교 적인 의례정비 이후에도 조선말까지 국행 기우제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82) 석척기우는 관념적인 동물인 용을 대리 생물체로 가시화하여 용을 부린 의례였다. 용부 림의 방법은 주로 소음과 주송( 呪 誦 )이었다. 만약 비를 내리지 않으면 생물체인 석척은 꼼 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토룡기우나 화룡기우에서 보이는 직접적인 위협이 나 폭력행위보다는 어린이의 주문에 의해 용을 압박하는 간접적인 방법이 더욱 강력한 용 부림이 될 수도 있다. 조선후기 석척동자들의 주문에 대한 비윤리성이 검토되긴 했지만 83), 석척기우는 조선말을 거쳐 일제시대에도 각 지역에서 거행되었다. 84) 3. 潛 龍 祈 雨 造 龍 과 畵 龍 과 같이 용을 형상화하는 像 龍 기우나 도마뱀과 도룡뇽 등으로 용을 대신하 는 代 龍 기우는 모두 제장 내에 용의 상징(조형물, 생물)을 드러낸다. 우리는 용부림의 세번 째 방식으로 다소 낯선 용어이기는 하나 像 龍 과 代 龍 과 같이 용을 직접 형상화하거나 대 체하지 않으면서도 강우를 위해 용을 상정하여, 그것을 재촉하고 자극한 暫 龍 祈 雨 를 살펴 보고자 한다. 잠룡기우는 가시적인 용의 상징물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용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여겨지는 연못, 개울, 강, 바닷가에서 潛 龍 을 자극하는 갖가지 의례행위를 거행한다. 용을 자극하는 매개물은 실로 다양하다. 잠룡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된 매개물은 여자와 같이 사 람일 수도 있고, 개, 돼지, 소, 호랑이, 제비 등과 같이 동물일 수도 있고, 나무, 독초 등과 81) 成 宗 實 錄 권 44, 성종 5년 윤 6월 계사. 82) 조선시대의 석척기우 및 국행 기우제차에 대한 정리된 도표는 졸고, 1997, 國 行 祈 雨 祭 와 民 間 祈 雨 祭 의 비교연구-시체처리와 제물처리를 중심으로-, 宗 敎 學 硏 究 1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88쪽 에서 확인할 것. 83) 英 祖 實 錄 권 116, 영조 47년 5월 계묘. 蜥 蜴 祭 童 子 祝 殆 無 倫 理. 84)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44~145쪽. 선산의 석척기우제 참 조.
같이 식물일 수도 있고, 금속, 돌, 토사, 재, 배설물, 신발 등과 같은 무생물체일 수도 있다. 효과적으로 잠룡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용의 好 不 好 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 소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용의 호불호에 대한 인식은 本 草 綱 目 에 잘 드러나 있다. 용의 본성은 거칠고 맹렬하며 아름다운 옥과 보석, 그리고 구운 제비를 좋아한다. 그는 철, 菵 草, 지네( 蜈 蚣 ), 楝 葉, 오색비단실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제비고기를 먹은 자는 물 건너기를 회피한 반면, 비를 비는 기우전문가는 제비를 이용했다. 물의 재앙(홍수)을 진정시키려는 자는 철을 이용 하였으며, 용을 자극하여 비를 내리게 하려는 자는 망초를 이용하였고, 굴원을 제사하는 자는 楝 葉 과 오색실을 만두에 싸서 물에 던졌다. 85) 이러한 용의 호불호를 전제로, 용이 선호하는 것을 이용하여 潛 龍 을 유인할 수도 있고, 용이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潛 龍 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 외에 혐오스러운 오염물질로 용 의 처소를 더럽힘으로써 潛 龍 을 자극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잠룡기우에는 마 지막 두 방법이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1 ) 유 인 ( 誘 引 ) 용의 기호( 嗜 好 )를 살펴 잠룡한 용을 꾀어 승천시키는 방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本 草 綱 目 에서 보았듯이, 보통 이무기( 蜃 )의 음식으로 여겨지는 제비 86) 를 용이 선호한다고 한다. 따라서 제비고기를 먹은 사람이 물을 건널 때에는 용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용의 성질 때문에 기우시에 제비가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용은 매우 외설적이어서 여자를 밝힌다는 인식이 있다. 五 雜 俎 에 따르면, 용을 유혹하기 위해 연못에 단이 설치되며 벌거벗은 여자가 단에 위치하게 된다. 사람들은 여자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주술적으로 방해를 받은 용이 핏대가 나 하늘로 치솟아 큰 비를 내릴 것이라고들 믿었다. 87) 잠룡기우는 대부분 용이 위협과 혐오를 느낄 것이라고 믿어진 매개물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용의 기호를 활용하여 용을 유인하는 기우제의 행위방식은 그리 흔 하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 같은 상황은 우리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5) 本 草 綱 目 鱗 部 龍, 龍 性 粗 猛 而 愛 美 玉 空 靑 喜 嗜 燕 肉 畏 鐵 及 菵 草 蜈 蚣 楝 葉 五 色 絲 故 食 燕 者 忌 渡 水 祈 雨 者 用 燕 鎭 水 患 者 用 鐵 激 龍 者 用 菵 草 祭 屈 原 者 用 楝 葉 色 絲 裏 糉 投 江 ( 張 紹 棠 重 訂, 1967, 本 草 綱 目, 國 學 基 本 叢 書 140~22, 臺 灣 商 務 印 書 館, 62쪽). 86) M. W. De Visser, op.cit., 69쪽. 87) Ibid., 120쪽에서 재인용.
용부림과 용부림꾼 25 2 ) 위 협 용이 선호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통해 잠룡을 유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용이 꺼리는 것 으로 용을 위협하여 강우를 획득하고자 하는 용부림이 있다. 용이 꺼린다고 생각되어 잠룡 기우로 널리 사용된 것이 호랑이(머리, 뼈)이며, 이밖에 本 草 綱 目 에 지적된 철, 菵 草, 지 네( 蜈 蚣 ), 楝 葉, 오색비단실 등도 널리 이용되었다. 먼저 虎 頭 나 虎 骨 을 이용한 용부림의 방법은 沈 虎 頭 로서, 수중에 호랑이를 집어 넣어 용호상박의 적대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9세기에 나온 尙 書 故 實 에 의하면, 한발에 虎 頭 骨 을 긴 줄에 매어 물 속에 던졌다 당기면 구름이 일어나 비가 내리는데, 그 이유는 호랑이가 용의 적이듯이 마른 호랑이뼈 역시 그러하여 용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88) 虎 骨 을 연못에 넣으면 잠연한 용이 거동하므로 虎 頭 로써 기우제를 행했던 것이다( 龍 淵 投 虎 骨 龍 起 故 祈 雨 沈 虎 頭 也 ). 89) 조선시대부터 침호두의 기우법이 상당히 빈번하였는데 90), 주로 박연( 朴 淵 ), 양진( 楊 津 ), 한강( 漢 江 ) 등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세 곳에서의 침호두가 조선전기 기본적인 기우제행사 로 정착되었다. 91) 이즈음 침호두의 기우행사는 지방 각지로 확대되어 보편화되었다. 92) 경 향 각지에서의 침호두 행사가 보편화되면서 조선후기 기후제 12제차 중 제6차에 한강의 침호두가 정례화되어 조선말기까지 준행되었다. 수중에 던져진 虎 頭 나 虎 骨 은 水 神 인 용신에게 바쳐지는 단순한 희생공물이 아니었다. 즉 어렵사리 구한 호랑이는 정성스런 제물이기보다는 용부림을 위한 촉매였다고 할 수 있 다. 그것은 용신의 흠향을 위해 바쳐진 것이 아니라 용호상박의 긴박한 적대관계를 형성하 기 위해 준비된 자극물이었다. 93) 88) Ibid., 120쪽에서 재인용. 南 中 久 旱 卽 以 長 繩 繫 虎 頭 骨 投 有 龍 處 入 水 卽 數 人 牽 制 不 定 俄 頃 雲 起 潭 中 雨 亦 隨 降 龍 虎 敵 也 雖 枯 骨 猶 激 動 如 此. 89)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권 24, 祈 雨 祭 龍 辨 證 說. 90) 조선왕조실록 과 기우제등록 에 보이는 침호두의 규정, 논의, 실행 등에 대한 사례에 대해서는 졸 고, 1997, 國 行 祈 雨 祭 와 民 間 祈 雨 祭 의 비교연구-시체처리와 제물처리를 중심으로-, 宗 敎 學 硏 究 16, 서울대학교종교학연구회, 186쪽의 도표를 참조할 것. 91) 成 宗 實 錄 권 44, 성종 5년 윤 6월 계사. 92)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된 지방 침호두 장소는 모두 6곳으로, 밀양의 臼 淵 (권 26, 밀양도호부), 함 안의 道 場 淵 (권 32, 함안부), 은산의 進 樂 山 (권 33, 은산부), 고산의 龍 淵 (권 34, 高 山 縣 ), 홍천의 가리 산 龍 淵 (권 46, 洪 川 縣 ), 맹산의 圓 池 (권 55, 孟 山 縣 ) 등이다. 93) 침호두의 기우행사와 제의원리에 대해서는 졸고, 1997, 國 行 祈 雨 祭 와 民 間 祈 雨 祭 의 비교연구-시체처 리와 제물처리를 중심으로-, 宗 敎 學 硏 究 1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85~191쪽을 참조할 것.
한편 침호두 이외에 쇠조각이나 금속 부스러기, 독성이 있는 풀이나 나무, 지네 등이 강 우의 유도를 위해 수중에 투척되기도 하였다. 철이나 특정한 식물의 독성에 의해 용의 신 체(눈)가 상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것이다. 이규경이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祈 雨 祭 龍 辨 證 說 에서 方 以 智 의 物 理 小 識 를 인용하면서 철, 지네, 제비, 개구리, 망초 등의 효과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례가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자주 발견된다. 철은 本 草 綱 目 에서 보이는 것처럼 용을 억제시 킴으로써 水 患 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용이 꺼리는 철로써 더이상 용이 수 중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자극하는 쪽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실 제로 일본의 경우에는 철기구나 금속부스러기를 이용하여 용을 자극한 사례가 종종 발견 된다. 철을 두려워하는 용은 바늘 하나에도 위협을 느끼므로 연못에 그것을 투척하면 거센 폭풍우와 함께 비가 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일본인들은 철과 금속 부스러기를 자주 이용하였다. 94) 용을 위협하는 것으로 철의 효과를 굳게 믿었던 그들은 가뭄의 해결 뿐만 아니라 폭풍우와 같은 강력한 기상현상을 기대하는 측면에서도 금속 부스러기를 이용하였 다. 95) 3 ) 오 염 혐오스럽거나 더러운 오염물을 이용하여 潛 龍 을 자극하는 방법은 흔히 부정화의 방식으 로 소개되어 왔다. 이는 오염물로써 수중을 메우거나 더럽혀 용의 안정적인 서식처를 박탈 하고자 하는 용부림이며, 그렇게 하면 용이 자신의 서식처를 정화하기 위해 비를 내릴 것 이라는 기대가 섞여 있는 기우방식이다. 즉 정화용 비를 부르는 부정화의 조건형성이라 할 수 있다. 더러운 것( 穢 物 )으로써 수중을 메워 강우를 얻은 사례가 高 麗 史 에 소개되어 주목된다. 감찰어사 (함유일)이 황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황주군에 속하는 鳳 州 에는 암연( 岩 淵 )이 있는 데, 그 못 속에 영물이 있다고들 한다. 사람들을 모아 더러운 것으로 연못을 메우니 갑자기 구름 이 일어나고 폭우와 천둥번개가 동반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잠시 후에 날이 개이자 연못 을 메웠던 더러운 것들이 멀리 언덕에 쌓여 있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근신( 近 臣 )을 보내어 제사 94) M. W. De Visser, Op.cit., 178쪽. 95) 일본의 18세기 자료에 의하면, 쌀을 산 상인들이 쌀값 폭등을 위해 금속부스러기를 연못에 침수시켜 강한 폭풍우를 얻고자 하였다. 폭풍우와 비에 의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게 되면 곧 쌀값이 뛰기 때문 이었다(Ibid., 174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27 지내게 하니 비로소 사전에 등재되었다. 96) 위의 기록은 처음부터 기우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연못에 서식하는 신령한 용을 더러운 물질로써 자극하여 비를 얻은 사례에 해당된다. 위의 기록대로 봉주 연못에서 의 용부림은 국가사전에 편입되어 공식적인 의례로 정례화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 하면, 이곳에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을 내려 의례를 행했으며, 기우제에 효험이 커 태종 9년에 소재관( 所 在 官 )으로 하여금 춘추로 의례를 거행케 할 정도였다. 97) 高 麗 史 의 기록에 보이는 더러운 것, 즉 穢 物 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토사나 목석을 이용해 연못을 더럽히는 기우행사가 거행되는 사례가 다소 발견된다. 村 山 智 順 은 안성 서운산, 공주 잠연, 함종 쌍어산 등지에서 확인되는 토사나 목석으로 연 못을 메우는 행위를 강우를 위한 부정화의 시도라고 정리하고 있다. 98) 경남 하동군 악양 면과 경남 밀양 삼랑진읍에서도 용소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투석하여 메우는 행위가 설화 자료에 기재되어 있다. 99) 용이 거하는 성스러운 곳을 더럽히는 방식으로 일본에서는 말똥이나 오래된 신발이 사 용되기도 하였다. 즉 津 久 井 縣 에서는 말똥이나 오래된 더러운 신발을 침수시켜 기우한 사 례가 발견된다. 100) 한편 중국의 경우에는 재를 뿌려 용소를 더럽히는 경우도 있었다. 101) 용의 서식처를 더럽히는 적나라한 방법으로 개나 돼지의 피나 머리가 사용되기도 하였 다. 이러한 용부림의 방식은 최근까지도 민간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부정시되는 개나 돼지 의 피를 신성지역에 바르거나 침수시켜 잠룡을 자극하는 행위는 여러 조사보고서와 설화 자료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있으므로 그것으로 대신하 고자 한다. 102) 96) 高 麗 史 권 99, 列 傳 12, 咸 有 一. 轉 監 察 御 史 出 爲 黃 州 判 官 屬 郡 鳳 州 有 岩 淵 世 謂 靈 湫 有 一 集 郡 人 塡 以 穢 物 忽 興 雲 暴 雨 雷 電 大 作 人 皆 驚 俄 頃 開 霽 悉 出 穢 物 置 遠 岸 王 聞 之 命 近 臣 祭 之 始 載 祀 典. 97) 世 宗 實 錄 地 理 志 황해도, 황주목, 봉산군. 98)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48쪽. 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한국구비문학대계 8~14, 571~572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한국구비문학대계 8~8, 52~54쪽. 100) M. W. De Visser, Op.cit., 175쪽. 101) Ibid., 119쪽. 102) 한국민속종합보고서, 한국구비문학대계, 釋 奠 祈 雨 安 宅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오염적 동물 의 유혈을 살포하는 기우방식과 제의원리에 대해서는 졸고, 1997, 國 行 祈 雨 祭 와 民 間 祈 雨 祭 의 비교 연구-시체처리와 제물처리를 중심으로-, 宗 敎 學 硏 究 1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1~194쪽을 참조할 것.
이처럼 잠룡기우는 별도의 용의 조형물이나 대체물 없이 용을 전제하고 거행한 의례이 다. 용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거나 대리 표현한 것이 없다고 하여 용 의례로서의 특질이 약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잠룡기우는 용의 호불호와 같은 용의 특성을 분명하게 관념 하거나 전제하지 않으면 의미화될 수 없는 의례였다. 그만큼 잠룡기우는 철저하게 용을 분 석하여 용을 부린 것이다. 눈에 보이는 용을 괴롭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용을 전제하여 갖가지 유인과 위협, 그리고 부정화를 가했던 용부림의 당사자들이 흥 분과 고조 속에서 떠올렸을 상상들을 다시 상상해보라. 그것은 인내에 한계를 느낀 용이 거친 숨을 몰아내면서 구름을 휘감고 승천하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한국인들은 용 부림을 통해 용의 숨결과 진동을 경험하고 가슴의 안정을 도로 찾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 였을 것이다. 용부림을 경거망동으로만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Ⅳ. 용부림꾼 역사적으로 비를 멎게 하는 지우제( 止 雨 祭 )보다는 비를 바라는 기우제에 훨씬 상세하고 치밀한 의례의 절목과 규정이 마련되어 왔다. 용부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용과 관련 된 의례에는 분명히 경건성과 정성이 담겨진 일반 제사행위가 기본적으로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기본적인 제사 뒤에 혹은 제사와 더불어 혹은 제사와는 별개로 강렬한 용 부림 행위가 대대적으로 치뤄졌다. 용을 본떠 공간에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거나( 像 龍 ), 도마 뱀 혹은 도룡뇽을 이용하거나( 代 龍 ), 아니면 아예 별다른 용의 표상물 없이( 潛 龍 ) 龍 所 에 서 벌인 의례들 모두 용의 상징연합에 포섭될 수 있는 의례행위이다. 왜냐하면 외형적으로 는 전혀 다른 상징들을 이용하였지만 모두 용을 직접 드러내거나 대체하거나 간접적으로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용의 관념을 살피고자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관심은 관념화된 용이 아니 라 누군가에게 부려진 용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용을 능숙하게 부렸는가? 단언하지만 우 리문화에서 용 관련 의례를 담당해온 전문가들은 서양 전통에서 보이는 용살해자(dragonslayer)가 아니라 용의 속성과 기능을 잘 이해하고 관리한 용부림꾼(dragon-ruler)이었다. 용 부림꾼들은 용을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숭배하였다기보다는 흥분과 고조 속에서 용을 효과 적으로 부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용부림의 유희와 예능화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103) 103) 용이 부려지는 의례는 경건한 제사방식으로 진행되는 의례에 비해, 놀이의 경쟁적 요소( 龍 船 레이스)
용부림과 용부림꾼 29 1. 무 격 ( 巫 覡 ) 무당이 용을 부린 흔적의 대부분은 토룡기우에서 확인된다. 裘 錫 圭 의 연구에서 이미 은 대에 토룡을 만들어( 作 土 龍 ) 기우하는 것과 무당 기우가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했었다. 즉 卜 辭 자료에 토룡기우와 焚 巫 求 雨 또는 暴 巫 求 雨 사례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다. 104) 상고대부터 존재한 양자 간의 친화성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卜 辭 이후의 당대 및 오대의 자료를 검토해보자. 여간은 가뭄이 계속되자 남문( 朱 雀 門 ) 가에서 비를 빌었다. 토룡을 만들고 성 안에 모든 무격을 용이 있는 곳( 龍 所 )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였다. 105) 가뭄이 극심하여 하남부( 河 南 府 )에 알려 시장을 옮기고 오방토룡을 만들고 무격을 모아 빌게 하 였다. 106) 위 기록을 단순히 토룡제와 무격기우제의 병기로 볼 수만은 없다. 비에 대한 욕구를 높 이기 위해 토룡제도 하고 무격기우제도 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제작된 토룡에 무격이 구체적인 의례를 행사하였다. 무격이 토룡에게 기우제를 행한 것은 분명히 경건한 기원행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악과 춤으로 용을 자극하거나 기타 용부림의 동작 을 통해 용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용을 잘 부리기 위해서는 용의 기호를 잘 헤아리는 것이 기본이다. 左 傳 은 용을 좋아 했던 董 父 가 용의 기호( 耆 欲 )를 잘 알아 길렀기( 畜 龍 )에 순임금으로부터 豢 龍 氏 (dragonrearer)라는 성씨를 부여받은 내용과 환룡씨에게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웠던 劉 累 가 孔 甲 으로부터 御 龍 氏 (dragon-ruler)라는 성씨를 부여받은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107) 白 鳥 淸 은 그의 연구에서 용의 기호를 잘 살펴 용을 잘 기르고 잘 다루었던 환룡씨와 어룡씨가 천상 적인 존재인 용을 부리는, 따라서 天 意 를 파악하고 전달하는 무격이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나 예능적 요소( 獅 子 舞 )의 삽입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104) 裘 錫 圭, 앞의 글, 33쪽. 105) 太 平 廣 記 권 260, 黎 幹. 京 兆 尹 黎 幹 以 久 旱 祈 雨 於 朱 雀 門 街 造 土 龍 悉 召 城 中 巫 覡 舞 于 龍 所 ( 中 華 書 局, 1961, 太 平 廣 記 6책, 2032쪽). 106) 舊 五 代 史 권 32, 莊 宗 紀 6, 同 光 3년 4월 辛 巳, 以 旱 甚 詔 河 南 府 徙 市 造 五 方 龍 集 巫 禱 祭 ( 中 華 書 局 영인본, 1989, 四 部 備 要 28, 158쪽). 107) 左 傳 昭 公 29년.
있다. 108) 이러한 주장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무격은 rain-maker로서 용의 기호를 잘 파 악해 그를 잘 부릴 줄 아는 의례적 환룡씨요, 의례적 어룡씨라 할 수 있다. 한편 抱 朴 子 內 篇 에는 연못가에서 주술적인 춤사위( 禹 步 )와 신비적인 호흡법( 吹 氣 )을 통해 용을 띄워올리고, 용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方 士 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 다. 109) 이 이야기가 비록 方 士 의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지만, 예로부터 비를 부르기 위해 禹 步 (곧 巫 步 )와 같은 기우춤(rain dance)을 춘 rain-maker는 무당이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禹 步 와 吹 氣 로써 용을 부린 방사의 이야기는 곧 무격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 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앞에서 지적한 대로 고려시대에 국가 중앙기관( 尙 書 都 省 )의 너른 뜰에 토룡을 만들고 무격을 모아 기우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리 사료에서 토룡기우와 무격의 기우가 동시에 처음으로 그것도 같은 자리에서 기 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 간의 친화성과 상관성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현재로선 어떤 결 론을 내릴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나 앞서 인용했던 당대와 오대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 시대의 자료도 토룡제와 무격기우를 단순히 병렬시킨 기록이 아니다. 기록상으로 구체적인 의례행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토룡을 부린 의례주체가 무격이란 점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각종 기우제의 절차와 형식을 규정한 예문( 禮 文 )에도 용 관련 의례의 전체 책임자인 파견관은 기록되어 있으나 정작 의례행위의 주관자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 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인류학적 방법의 일환으로 20세기까지 전개된 각종 용부림의례에서 의 무격의 비중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현지자료에 의하면, 토룡기 우와 무당기우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 치루어지고 있다. 村 山 智 順 이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토룡기우에는 무녀의 무악과 춤이 항상 동반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무( 官 巫 )의 주관 하에 砂 龍 祈 雨 즉 물비리굿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110) 특히 무녀는 토룡이나 사룡의 頭 部 에 108) 白 鳥 淸, 1934, 豢 龍 氏 御 龍 氏 に 就 いての 臆 說, 東 洋 學 報 21~3, 東 洋 協 會 學 術 調 査 部, 320~325쪽. 그 는 특별히 천상적인 존재로서의 용을 강조하였으므로, 그가 말하는 용을 부린다는 것은 천의 정령 인 용을 부린다는 것이고, 그것을 부리는 무격이란 바로 天 意 를 전달하고 靈 聲 을 들을 수 있는 샤 먼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는 수중의 용, 그리고 그를 직접적으로 부리는 의례자로 서의 무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109) 抱 朴 子 內 篇 佚 文, 使 者 甘 宗 所 秦 西 域 事 云 外 國 方 士 能 神 祝 者 臨 淵 禹 步 吹 氣 龍 卽 浮 出 其 初 出 乃 長 十 數 丈 于 是 方 士 更 一 吹 之 一 吹 則 龍 輒 一 縮 至 長 數 寸 方 士 乃 掇 取 著 壺 中 ( 王 明, 1996, 抱 朴 子 內 篇 校 釋 增 訂 本, 中 華 書 局, 359쪽). 110) 村 山 智 順, 1938, 朝 鮮 に 於 ける 雨 乞 行 事, 朝 鮮 280, 朝 鮮 總 督 府, 130쪽. 133쪽. 143쪽.
용부림과 용부림꾼 31 위치하여 요란한 무악이나 기우가로 용을 자극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물론 1930년대까 지 강릉지방에서 거행된 용굿의 경우에도 빗물에 토룡의 진흙이 쓸려 내려갈 때까지 8명 의 무당이 악공의 반주(징, 장고, 북, 날날이 등)에 따라 용의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고 한다. 111) 무당은 책임있는 용부림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사료에 토룡기우와 무당기우가 동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 우연이기보다는 토룡-용부림-용부림꾼의 얼개가 우리의 자료에 드디어 제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하 는 것이다. 2. 동 자 ( 童 子 ) 흔히 천진무구성, 순수성, 단순성 등으로 수식되는 어린이는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많은 영웅신화에서는 어린이를 등장시켜 미래에 대한 잠재력을 표현하고 있으며, 현대의 발달심리학에 있어서도 미래의 진행과 방향을 가늠하고, 성숙을 향한 중요 한 지표로서 어린이가 부각된다. 종교전통에서도 분화 이전의 원초적이고 신비적인 통일성 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어린이를 등장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어린 예수와 크리슈나에 대한 열망어린 존경과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어린이의 종교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용부림의 여러 형태를 점검하면서 또 다른 어린이의 특성을 발견한다. 어린이의 종교성, 즉 숭배대상으로서의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의 제의성, 즉 제의전문가로서의 어 린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제사받는 어린이가 아니라 제사를 이끄는 어린이에 대해 주 목하게 된다. 어린이 즉 동자는 대룡기우로 일컬어지는 용부림을 이끈 용부림꾼이었다. 무격이 무악 과 춤으로 용을 부렸다면, 동자는 몇 마디의 呪 誦 과 소음으로 용을 부렸다. 복합적인 제의 적 테크닉을 요하는 제의와는 달리 단순한 주술에 의한 영력의 발휘에 어린이가 소용된 것이다. 어린이의 간단하고 단순한 주술에 오히려 분명한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단 몇 마리의 代 龍 에 대해 수십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석척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주력을 가했다. 어린이 집단이 간단한 주송을 몇 일 밤낮으로 반복하면서 힘을 더해갔을 용부림의 상징을 상상해 보라. 특이한 것은 국가의 사전체계가 명분과 형식에 있어 체계화를 이루면서, 불승, 무격, 맹 111)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민속종합보고서 강원도편, 144쪽.
인 등의 기우의례가 점차 국행의례에서 배제되고 있을 때에도 석척동자의 기우는 조선말 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112) 국행기우제에 관한 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용부림꾼은 동자 즉 어린이였다. 3. 도 류 ( 道 流 ) 석척동자가 짤막한 노래로 용을 부렸다면, 도류들은 좀더 긴 노래로 용을 부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과 양진에서 도류의 용왕경 독경이 행해졌으며 113),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가뭄에 대처하는 기우제의 필수 요건 중에 하나로 자리잡았다. 114) 마찬가지로 성종 때의 기우제의 필수 요건 중에 하나였던 저자도의 화룡제에도 항상 도류의 용왕경 독경이 있었다. 115) 결국 도류 역시 국가가 공인한 용부림꾼이었다. 사실 우리 종교문화사에서 무격과 도교전문가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당 장 독경 기우제에 빈번하게 동원된 맹인을 어느 부류로 범주화할 지 무척 당혹스럽다. 맹 인을 무격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로 여길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당시에 독경식 기우를 도 가자류의 기우의식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맹인을 도류의 용부림꾼으로 분류하고 자 한다. 흔히 종교사에서 눈 은 영혼과 지혜의 창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는 눈의 상실 자체가 위대한 통찰력과 초자연적인 힘의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화적 인물 중에는 간혹 시력의 상실로 인해 신비한 지식과 주술적인 힘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 다. 116) 맹인과 주술력의 연관성은 우리의 의례문화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맹인들은 독경을 통해 집중된 주술력을 행사하며, 거대한 용을 부렸다. 맹인들은 무당과 동자와 더불어 조 선 중기까지 국가 주도의 기우제에 동시에 동원된 기우 파트너였다. 그러나 불승 무격 맹인 으로 이어지는 국행기우제에서의 배제화의 흐름에 따르는 운명을 겪었다. 더 이상 맹 112) 국가 주도의 기우제에서 1단계로 불승의 기우가 사라지고(문종), 2단계로 무격의 기우가 사라지고 (인조 25년), 3단계로 맹인의 기우가 사라졌다(숙종 11년). 그러나 석척동자의 기우는 정례화된 기우 제차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국가의 기우전문가의 운영단계에 대해 서는 졸고, 1998, 國 行 무당 祈 雨 祭 의 歷 史 的 硏 究, 震 檀 學 報 86, 震 檀 學 會, 67쪽 참조. 113) 端 宗 實 錄 권 14, 단종 3년 5월 계해. 讀 龍 王 經 於 漢 江 楊 津. 114) 成 宗 實 錄 권 44, 성종 5년 윤 6월 계사. 115) 그러나 선조 때에 이르러 독경가의 용왕경이 산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宣 祖 實 錄 권 62, 선조 28년 4월 기사). 116) Mircea Eliade(eds.), eye,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5,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용부림과 용부림꾼 33 인은 국가 공인의 용부림꾼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맹인의 독경에 의한 용부림은 지방과 민간에서 여전히 효력을 지녔다. 국가공인 의 용부림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용부림꾼으로서 맹인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20세기에 보 고된 여러 자료에 의하면, 토룡기우제에서의 맹인 도류의 독경은 여전히 토룡을 고무시키 는 용부림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17) 4. 불 승 ( 佛 僧 ) 불승의 기우법회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만큼 내력과 생명이 긴 의례이다. 특히 용을 대상으로 하는 불승의 의례에 있어서도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승의 용부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불승에 의한 사찰, 궁중, 선상에서의 龍 王 道 場 이 베풀어졌다. 뿐만 아니 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흥천사에서 기우제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태종 16년 흥 천사 사리전에서는 일신구두( 一 身 九 頭 )의 草 龍 10여개가 제작되었고, 불승 백여명에 의해 기우제가 실시되었다. 10여개에 달하는 초룡에 대한 처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불 승의 용부림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자료에 근거하면, 불승의 용부림에 대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선산 에서는 토룡을 만들어 무당, 맹인, 불승에 의해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무당은 용의 머리부분 에서 기우가를 주송하고, 맹인은 용의 몸통부분에서 독경하고, 불승은 용의 꼬리부분에서 불화를 걸고 염불을 하였다고 한다. 118) 무악의 연주, 맹인의 독경, 채찍질 등과 함께 거행된 불승의 염불은 용을 일깨우는 용부림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불승은 용을 숭배하기 위해 의례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질로 용을 부리기 위해 동참한 용부림꾼이다. Ⅴ. 흥분과 경건: 한국종교의례의 양면 우리는 관념화된 용보다는 흥분과 고조 속에서 강렬하게 부려진 용을 검토하여 왔다. 그리고 용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단순한 공경과 숭배보다는 용의 기능과 역할을 유도하고 117) 조선총독부, 1938, 釋 奠 祈 雨 安 宅, 85~86쪽. 118) 조선총독부, 1938, 釋 奠 祈 雨 安 宅, 85~86쪽.
강권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용이 등장하거나 대체되거나 전제되거나 간에 우리는 그것을 모두 용부림의 의례로 연합시켰고, 그러한 의례연합을 주도하는 의례전문가를 용부 림꾼이라 했다. 이제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용부림꾼에 의한 용부림의 문화에 대해 우리는 어떤 종교 문화사적인 의미와 평가를 내릴 것인가? 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용부림과 용부림꾼의 저켠에 서있었던 의례경건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용부림은 국가가 주도하는 기우제절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었다. 특히 모든 절 차에도 불구하고 강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 추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도 역시 용부림(오방토룡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부림의 위상과 비중에도 불구하고 용부림에 대한 견제와 비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고제( 古 制 )와 전적( 典 籍 )에 의거하여 규정을 세우 거나 따라하기에 급급했던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용부림에 대한 비례성( 非 禮 性 )과 비윤리성이 성토되기에 이른다. 119) 영조는 용부림의 대표격인 토룡기우 자체를 인정하였지만, 용에 채찍을 가하는 편룡( 鞭 龍 )에 대해서는 경건하지 못한 행위( 褻 慢 )라고 비판하면서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120) 따라 서 그 이후 기우제차를 다룬 법전의 예문( 大 典 通 編 )에서 편룡기우법이 제거된다. 문제는 토룡기우 자체가 아니라 토룡에 채찍을 가하는 용부림의 불손함이었다. 鞭 龍 뿐만이 아니라 화룡기우 이후에 화룡을 수중에 침수시키는 행위도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져 여타 제의의 망료( 望 燎 )와 같이 하도록 규정하였다. 121) 이 역시 화룡기우 자체보다는 화룡을 처 리하는 방식이 문제가 된 것이다. 더우기 정조는 화룡기우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화룡을 정결히 할 것과 의례종료시 화룡을 투기하지 않고 재봉안할 것을 법식으로 정하였다. 122) 비판은 토룡기우나 화룡기우에 그치지 않았다. 대룡을 압박하던 석척동자들의 주문에 대해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23) 결국 용을 자극하거나 강요하는 용부림의 핵심요소들이 경건성과 윤리성의 차원에서 문제시되었다. 119) 조선전기만 해도 正 道 의 명분보다는 古 制 에 대한 선호와 함께 모든 정성과 제사를 두루 거행하려는 靡 神 不 擧 의 열망이 국각 위난시의 權 道 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음사로 규정될 수 있는 여러 기우의 례가 고제라는 이름으로, 또 미신불거의 명분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1998, 國 行 무당 祈 雨 祭 의 歷 史 的 硏 究, 震 檀 學 報 86, 震 檀 學 會, 61~64쪽을 참조할 것. 120) 英 祖 實 錄 권 79, 영조 29년 5월 庚 午. 敎 曰 凡 土 龍 祭 祈 雨 之 極 者 而 至 於 鞭 龍 褻 慢 甚 矣 此 後 一 切 去 之. 121) 英 祖 實 錄 권 116, 영조 47년 5월 癸 卯. 122) 正 祖 實 錄 권 48, 정조 22년 5월 을유. 123) 英 祖 實 錄 권 116, 영조 47년 5월 癸 卯.
용부림과 용부림꾼 35 용부림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정약용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정약용은 여타 기우제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도마뱀이나 도룡뇽을 이용한 대룡기우, 오룡을 춤과 악 기로 고무시키는( 鼓 舞 五 龍 ) 오방토룡제, 芻 龍 에 채찍을 가하여 욕보이는 추룡기우 등은 오 만불손( 戱 慢 褻 瀆 )하여 예에 크게 어긋났다고( 大 非 禮 ) 비판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건치 못한 용부림의 양식을 버리고, 마음을 경건히 하고( 虔 心 ) 주변을 정화 하여( 齊 沐 ) 신의 도움을 묵묵히 바라는 것( 黙 禱 神 貺 )이었다. 124) 절제와 근신을 의례의 미덕 으로 삼는 의례경건주의자의 눈에는 용을 기만하거나( 欺 龍 ) 용을 강요하는( 要 龍 ) 용부림은 엄금되어야 할 그릇된 풍속으로 여겨진 것이다. 영 정조와 정약용의 비판의식은 유교적 의례경건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들은 밖으로 는 제물을 다하고, 안으로는 뜻을 다하는 것을 의례의 핵심( 外 則 盡 物 內 則 盡 志 此 祭 之 心 也 ) 125) 으로 받아들였다. 의례경건주의의 입장에서 신을 압박하고 강요하고 유인하는 용부 림의 행동양식과 그것을 주도한 용부림꾼이 용납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례경건주의와 대치되었던 용부림의 진동과 용부림꾼의 아우성을 우리는 어 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카랑카랑한 의례경건주의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용을 강권하던 흥분과 고조를 우리의 종교문화사에서 가볍게 텃치할 수 없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용부림 꾼에 의한 용부림이 과연 경거망동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삶의 지혜였는지. 용부림은 삶의 위기에서 순순히 신에게 운명을 맡기기보다는 직접 삶의 위기를 개척하 려던 적극적인 삶의 모색이며 방식이었다.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외재화된 상징에 고개숙이 기보다는 외재화된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삶의 정화(catharsis)와 평정을 경험한 것 이다. 삶의 위기에서 절제와 금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경건한 삶의 자세가 긍정될 수 있 는 만큼, 강렬하고도 극적인 행동양식을 통해 삶의 좌절을 극복하고 삶의 카다르시스를 추 구하려는 삶의 태도 역시 긍정될 수 있는 것이다. 경건과 흥분은 우리의 종교의례를 이끌 어온 두 축이다. 용부림은 우리 종교문화사에서 가시지 않을 삶에 대한 애착과 적극성을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삶의 증거들이며, 용부림꾼은 그 삶을 증거하는 전사이다. 이제 댐과 저수지가 정비되었고 수자원공사가 이러한 거대한 용을 관리한다. 가뭄보다 는 한차례의 물난리가 여름 한철의 걱정거리를 대변한다. 사람들은 한발( 旱 魃 ) 귀신보다 수마( 水 魔 ) 귀신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기우제 문화보다는 기청제( 祈 晴 祭 ) 문화가 더 124) 丁 若 鏞, 牧 民 心 書 권 18, 禮 典 六 條 祭 祀. 125) 禮 記, 祭 統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1993,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