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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Transcription:

제42집 2013

차 례 特 集 2013년도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여진천 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방상근 5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박문수 9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 학적 성찰 박준양 139 종합토론 205 硏 究 論 文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김수태 23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김정환 28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조수정 329

차 례 書 評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안창모 375 김정신, 도서출판 미세움, 2012 資 料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83 附 錄 연구소 소식(2013년 7~12월) 433 간행 규정 445 집필 원칙 451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5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여진천* 1. 머리말 2. 신앙의 동기 3. 신앙의 실천 4.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5. 맺음말 국문 초록 이 땅의 천주교는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 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 다. 이들과 달리 정약종은 도교( 道 敎 )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후에 신앙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온 그들은 복음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 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 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소장 신부.

6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 했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 에게 큰 영향을 주어 여러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명도회장으 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정약종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 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 아 집안에 감금되어 1785년 죽음을 당하였다. 1791년 권일신은 정조 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 ( 悔 悟 文 )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지만, 유배 도중 죽 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801년 박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 ( 闢 異 文 )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 고, 1795년에는 유혹문 ( 惑 文 )을 지어 교회를 떠났으나, 잠잠해지 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 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 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 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제어 :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평신도 지도자, 세례, 신앙, 박해, 순교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7 1.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평신도 지도자 5위인 1) 이벽( 李 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이승훈( 李 承 薰, 베드로, 1756~1801), 권철신( 權 哲 身, 암브 로시오, 1736~1801), 권일신( 權 日 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1), 정약종( 丁 若 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등은 믿음의 문을 통하여 교 회에 들어왔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살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고 통과 죽음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이들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런 데 정약종 2) 을 제외하고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연구보 다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에 집중되어 있다. 3) 1) 주교단은 2013년 3월 춘계 주교회의에서 창립 선조, 창설 주역, 창립 주역 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지 않기로 했다. 5위 중 정약종은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에 포함되어 있고, 그 외 4위는 2013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와 동료 132위 에 포함되어 있다. 2) 송석준, 정약종과 유학사상, 한건, 정약종의 신학사상, 원재연, 정약종 쥬교요지 와 한문서 학서의 비교연구, 서종태, 정약종의 주교요지 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주명준,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 실천 ( 한국사상사학 18, 한국사상사학회, 2002) 등이 있다. 3) 이승훈에 관한 연구는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동,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이원순, 이승훈 후손의 천주신 앙,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만천유고 를 중심으로 및 이승훈 관계 한문과 서한 자료가 실려 있다(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02년 2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신앙 세미나에서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서종태, 이벽 이승훈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이성배,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 류한영, 이승훈 권철신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견해, 곽승 룡,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등이 발표되었고, 2005년 5월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이벽 세례자 요한 세미나에서 류한영, 한국의 시복시성 작업과 이벽연구의 의미, 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자료의 종합적 검토,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심상태, 이 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 회사연구소, 2007). 2009년 9월 창설주역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순교사실과 그 평판 세미나 에서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 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 성, 류한영,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최인각, 창설 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심상태,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과

8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앙의 해 (2012. 10. 11~2013. 11. 24)를 지냈고 순교자 124위의 시복( 諡 福 )이 다가오는 이때,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들 5위의 신앙 의 동기와 실천, 그리고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자 한다. 이들의 신앙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신앙의 고백과 실천을 통 해서 신앙을 성장시켰으며, 박해와 시련을 당할 때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항구한 모습을 지녔다. 이들의 이러한 신앙의 특징은 상대주의, 물질만능 주의와 세속주의 등으로 신앙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제시할 것이다. 2. 신앙의 동기 1770년대 말과 1780년 초에 이르러 한문서학서( 漢 文 西 學 書 )에 대 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신앙 운 동이 태동하였다.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의 집안은 전통적 인 유학을 고수해 오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호( 星 湖 ) 이익( 李 瀷, 1681~ 1763)의 학통을 4) 이어받았다. 이러한 성향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케 해 주는 실마리가 되었고,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꾸어 준 극적인 전환의 정점에는 이벽이 있었다. 그는 안정복( 安 鼎 福, 1712~1791) 순교문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 시성추진위원회, 2010). 강원교회사연구소에서 광암 이벽과 포천지역 천주교 라는 주제로 2012년 3월 17일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4) 이익의 문하에 李 用 休, 李 彦 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명학과 公 安 派 의 영향을 받아 파격적 시어를 구사하며 유교적 세계관에서 탈주하였다. 남인학자들의 지향점은 17세기 중반부터 六 經 체제 긍 정과 성리학 비판, 그리고 실천 윤리의 고취였다. 즉 유학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현실을 비판하는 원리주의 경향이었다. 그 경향이 학문으로의 서학에서 신념으로의 서학으로 넘어가는 단초일 것이 다. 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계와 소통 대립 양상, 한국사상사학 34, 한국사상사학회, 2010, 177쪽 각주 6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9 과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774년에 권철신의 스승으로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중시하던 이병휴( 李 秉 休, 1710~1776)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중용 ( 中 庸 )에서 상제( 上 帝 ), 귀신의 실체, 천명( 天 命 )의 실천 등을 강조했던 것은 유학 자체에서 윤리를 보장하는 초월적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특히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정약전( 丁 若 銓, 1758~1816) 등과 함께했던 강학에 참여하였다. 6) 이승훈은 이벽에 대해 그 사람은 이미 우리 종교에 대한 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무익하지가 않았으니, 천주교 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열성은 그의 지식보다 더 했습니다. 그는 나를 가르치고 격려했는데, 우리 는 천주님을 섬기고 또 다른 사람들이 천주님을 섬기도록 서로 도왔으며 라고 7) 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종 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 세례자라는 이름으로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이 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8) 5) 이벽의 중용 에 대한 생각은 정약용, 여유당전서 의 中 庸 自 箴 (2집, 권3)과 中 庸 講 義 補 (2집, 권4)에 부분적으로 전한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朴 齊 家 는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 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 정유고략 ( 貞 稿 略 ) 권2, 四 悼 詩 四 首 )를 쓰기도 했다(이경구,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푸른역사, 2013, 135쪽). 6)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 사연구소, 2007, 27~45쪽 참조 ;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 仲 氏 墓 誌 銘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0~302쪽. 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최석우 역주,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 사연구소, 1992, 172쪽. 8) 달레, 앞의 책, 312쪽 ; 김대건 신부는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고 하였다(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221쪽).

10 교회사연구 제42집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 李 家 煥, 1742~1801)의 영향을 받아 서학의 천문, 역상( 曆 象 ), 특히 수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9) 그의 신앙 동기는 이벽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즉 1783년 10월 동지사행( 冬 至 使 行 )의 서 장관( 書 狀 官 )인 부친 이동욱( 李 東 郁 )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벽이 북경 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비로 전교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 가 가서 만나보고 신경( 信 經 ) 한 부만 구해 달라. 더불어 세례받기를 청하 면, 선교사들이 분명 그대를 매우 사랑하여 기이한 물건과 패물( 玩 好 )을 많이 얻을 것이다.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 라고 10) 하였다. 이에 그는 이벽의 권고와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성당을 찾아갔다. 북당 선교 사들에게 다과를 대접받고 천주실의 ( 天 主 實 義 ) 수질( 數 秩 ), 진도자 증 ( 眞 道 自 證 ), 성세추요 ( 盛 世 芻 ), 기하원본 ( 幾 何 原 本 ), 수리정 온 ( 數 理 精 蘊 ) 등과 시원경( 視 遠 境 ), 지평표( 地 平 表 ) 등을 받았다. 11) 당 시 예수회 선교사 방타봉(Ventavon) 신부는 27세의 이승훈은 박학하 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고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교리를 깊이 연구 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 12) 하였다. 1784년 2월 무렵 북 당 성당에서 그라몽(Grammont, 梁 棟 材 ) 신부는 천주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으로 9)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 활동과 정치적 입지,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39쪽. 10) 황사영, 백서 44행 ; 若 鍾 供 原 初 李 蘖 聞 有 西 洋 學 裝 送 李 承 薰 隨 其 父 東 郁 貢 使 之 行 入 往 洋 人 所 居 之 堂 與 洋 人 結 識 購 得 洋 書 以 歸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0월 27일 경오). 11) 西 洋 人 卽 將 天 主 實 義 數 秩 分 置 各 人 前 有 若 茶 飯 之 接 待 渠 初 不 展 看 納 之 歸 裝 且 語 及 曆 象 則 西 洋 人 又 以 幾 何 原 本, 數 理 精 蘊 等 書 及 視 遠 鏡 地 平 表 等 物 贈 爲 行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40쪽. 12) 방타봉 신부의 1784년 11월 25일자 서한 (최석우, 앞의 글, 11쪽) ; 페레올 주교는 곧은 마음 을 가졌고 특히 천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명민한 이성으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쉽게 인정하여 천주교를 믿기로 했습니다 고 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44년 1월 4일자 서한,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201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1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고 13) 하면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귀국한 그는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 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 었다. 14) 이벽은 1784년 3월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책들을 읽어 교리 를 터득한 후, 가까운 친구들을 설득하여 교화시켰다. 15) 그해 9월 감호 ( 鑑 湖 )에 사는 그는 사류( 士 類 )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에 사는 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며 그의 집을 찾아가 10여 일을 묵으며 교리를 전하였다. 이에 그의 동생 권일신이 입교하여 열심히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성인을 주보 ( 主 保 )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6) 그는 대저 그 학술은 천주( 天 主 ) 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는 의리가 고서 ( 古 書 )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 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 13) 그라몽 신부의 1790년 6월 23일자 서한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 동, 12쪽). 14)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최창현 대질 ; 矣 身 與 丁 若 銓 若 鏞 權 日 身 輩 相 會 於 李 檗 家 而 果 有 代 洗 等 事 依 倣 其 書 而 爲 之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이승훈 공 초) ; 구베아 주교는 그는 천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의 동포들의 전도사가 되어, 몇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영세를 주었습니다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182쪽 ; 而 李 承 薰 稱 號 晩 泉 者 自 爲 神 父 與 矣 兄 弟 互 相 往 來 製 給 矣 兄 弟 別 號 而 矣 長 兄 範 禹 爲 道 摸 次 兄 履 禹 爲 發 羅 所 矣 身 則 馬 頭 ( 邪 學 懲 義, 正 法 罪 人 秩, 김현우조). 15) 황사영, 백서 44행 ; 김대건 신부는 이리하여 1784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과 관인들이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 어받은 오류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하였다(김대건, 앞의 글, 223쪽). 16) 始 李 檗 首 宣 西 敎 從 者 旣 衆 曰 鑒 湖 士 類 之 望 鑒 湖 從 而 靡 不 從 矣 遂 駕 至 鑒 湖 旬 而 後 反 於 是 公 之 弟 日 身 熱 心 從 檗 公 作 虞 祭 義 一 編 以 明 祭 祀 之 義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

12 교회사연구 제42집 니다 고 17) 하였다. 여기서 천주를 공경한다는 것은 서경 ( 書 經 ) 상서 태갑 ( 商 書 太 甲 ) 상편( 上 篇 )에 나오는 임금이 덕을 밝히려고 새벽부터 일 어나서 노력했다는 뜻과 통한다고 밝힌 것이다. 즉 그는 서경 에 나오는 상제천( 上 帝 天 )에 대한 관념을 원용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공경을 논하는 천주교를 동양고래의 사상과도 합치되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18) 권철신은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 온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었을 때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받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그는 신앙 동기에 대해 제 동생이 인천에서 저에게 편지 를 보내 말하기를, 그 학문에 대해 처음에 들었을 때는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책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재하는 이를 흠숭한다는 말과 생( 生 ), 각( 覺 ), 영( 靈 ) 등 삼혼설( 三 魂 說 ), 화( 火 ), 기( 氣 ), 수( 水 ), 토( 土 )의 사행설( 四 行 說 )은 참으로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책을 깊이 이해한 뒤에 공격 해야지, 뭇사람을 따라 대충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 로 저도 보았습니다 고 19) 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적 신앙 이해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고, 보유론( 補 儒 論 )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이해하며 그 신앙 의 타당성을 말했던 것이다. 20) 이를 대학자로서 세례를 받은 신자라는 사 실을 더하여 생각해 보면, 그런 단순한 서술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숨어있 는 핵심적인 진술, 바로 영과 진리로써 주재자를 흠숭해야 한다는 것, 그 17) 大 抵 其 學 以 天 主 爲 重 而 其 寅 畏 謹 事 之 義 暗 合 於 古 書 昧 爽 丕 顯 嚴 恭 寅 畏 之 訓 故 其 時 果 爲 看 閱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8)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116쪽. 19) 矣 弟 自 仁 川 抵 書 矣 身 斡 其 學 之 初 頭 所 聞 盧 不 可 信 矣 其 後 得 看 其 書 則 其 中 欽 崇 主 宰 之 說 生 覺 靈 三 魂 之 說 火 氣 水 土 四 行 之 說 誠 有 至 理 不 可 誣 者 須 熟 看 此 書 然 後 攻 之 不 可 隨 衆 泛 斥 故 矣 身 亦 看 此 書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20)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16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3 래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다 라는 신앙고백 으로 볼 수 있다. 21) 이벽의 방문과 동생의 권유로 입교한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의 한 분인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를 주보로 하여 세례를 받 았다. 이때 실학자 안정복은 1784년 그에게 보낸 셋째 서한에서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지금 세상에 사문이 기대를 걸고 친구들이 믿고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후배들의 종주가 될 사람이 공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 異 學 )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라고 22) 하였다. 유학자였던 권철신이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탈주자학 적 학풍에 기인한다. 그는 공자( 孔 子 ), 맹자( 孟 子 ), 순자( 荀 子 ) 사상의 중 심인 선진유학( 先 秦 儒 學 )을 학문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삼아 주자학에 구 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도덕적 실천 공부를 극단적으로 강화해 나갔다. 23) 또한 서명( 西 銘 )과 서학 사상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 데, 주어사 강학 때에 정약전, 김원성( 金 源 星 ), 권상학( 權 相 學 ), 이총억( 李 寵 億 ) 등과 함께 해 질 녘에는 서명을 외었다. 24) 정약용은 이 서명의 실천 2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0, 129~134쪽. 22) 안정복은 권철신 이가환 정약전 이승훈 이벽과 이기양의 아들인 이총억 이방억 등이 천주교 교리를 학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안정복, 覆 稿 권10, 與 權 旣 明 弟 三 書 兼 呈 士 興, 갑진 12월 ; 이만채, 벽위편 권2, 安 順 菴 乙 巳 日 記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 가문과 천주교 수용, 42~43쪽, 각주 53) 재인용). 23)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2010, 101~103쪽. 24) 嘗 於 冬 月 寓 居 走 魚 寺 講 學 會 者 金 源 星 權 相 學 李 寵 億 等 數 人 鹿 菴 自 授 規 程 日 入 誦 西 銘 莊 嚴 恪 恭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 仲 氏 墓 誌 銘 ) ; 영조는 장횡거가 西 銘 에서 말한 백성은 나 와 한 핏줄 이란 民 吾 同 胞 를 즉위 초에 諸 臣 於 國 事 或 不 能 視 若 自 己 事 則 何 能 有 爲 也 張 橫 渠 曰 民 吾 同 胞 物 吾 與 也 爲 國 之 道 要 不 出 此 라고( 승정원일기 574책, 영조 즉위년 9월 26일조) 강 조하였고, 영조 49년의 소회에서도 喬 木 世 臣 心 豈 木 也 腸 豈 石 歟 莫 云 只 云 說 弊 若 聞 救 弊 予 則

14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학문의 기본이라고 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 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 火 氣 )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 芝 蘭 )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 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와 전원( 田 園 ),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 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 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 게까지 돌려주었다 고 25) 하였다. 이를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백성은 나 와 한 핏줄 의 정신을 집안에서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로 독실하게 실천했다 는 뜻이다. 그러나 서학을 공부한 대학자의 실천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복 음을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정신 그대로 받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에 대 한 기록이나 마찬가지이다. 26) 정약종은 그의 형제들과 남인 계열의 다른 인물들보다는 늦게 입교하 였다. 그는 과거 시험에 뜻이 없었고 선도( 仙 道 )를 배워서 불로장생( 不 老 長 生 )하고자 했으며, 천지개벽설( 天 地 開 闢 說 )을 믿었다. 그러나 개벽이 되 면 신선도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 끝에 신선설 및 개벽설 자체에도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를 통해 지상천국적 현세나 미래 사회에 대한 갈망을 천주교 신앙 안 曰 體 君 體 先 貞 白 一 心 常 誦 張 子 西 銘 也 夫 라고 西 銘 정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강조했다(박 광용, 조선의 18세기, 국가 운영 틀의 혁신, 정조와 18세기, 역사학회 편, 푸른역사, 2013, 67쪽). 25) 정약용, 앞의 책,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26)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1~132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5 에서 용해시켜 나가게 되었다. 즉 도교( 道 敎 ) 신앙 내지는 후천개벽설에 대한 비판과 청산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가 초기 교회의 입교자들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유학보다 는 도교가 종교적 성격이 더욱 강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는 초기 입 교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보다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 27) 그는 1786년 3월 중형( 仲 兄 )인 정약전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 었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아우구 스티노(Augustino, 354~430)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면서, 이 성인을 주보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28) 세례받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29) 구베아(Gouvea, 1751~1808) 주교 가 표현한 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그렇게 허약한 도구를 사용 하여, 세례에 필요한 것을 간신히 배운 그 젊은이가 그의 동포들의 사도와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힘을 지니게 하는 전능 의 큰 기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 복음이 전파된 기원과 그 발 전은 분명히 하느님이 하신 일이었다 라고 30) 하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유로이 응답한 이가 바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 꾼 이벽이었다. 그의 권유대로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 교회 의 반석이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전교로 인해 신앙을 받아들인 권일신 27) 황사영, 백서 35행 ; 달레, 앞의 책, 440~445쪽 ; 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 사, 2010, 391~393쪽. 28)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 供 曰 若 鍾 之 神 父 李 承 薰 代 父 權 日 身 而 神 父 者 領 洗 之 謂 也 代 父 者 敎 授 之 稱 也 ( 辛 酉 邪 獄 推 案, 1801년 2월 13일 최창현 공 초) ; 달레, 앞의 책, 441쪽. 2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1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25쪽. 30)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3쪽.

16 교회사연구 제42집 과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갖고 있다가 개종한 정약종 등 초기 교회 지도자 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자유로이 응답하여 세례 를 받았다. 초기 지도자들의 신앙 동기는 다양했다. 스스로 혹은 권유에 의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신앙의 출발이 필요한 것이다. 31) 이렇듯 초기 교회는 사 제 없이 평신도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힘의 원동력은 세례성사 였던 것이다. 32) 세례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의 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그 사람들 중에서 다시 전도사들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이승훈) 베드로보다 더 열심해져서 머지않아 천 명이 넘은 남녀 동포들이 세례를 받고, 새 조선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 33) 하였다. 이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로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 로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된 신입 교우들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리하 여 5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약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고 34) 하였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거룩한 교회가 널리 확산된 것이다. 3. 신앙의 실천 이벽은 1784년 4월 15일 누이( 丁 若 鉉 의 첫 부인)의 기제( 忌 祭 )를 지 낸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마재에서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오면서 그 31)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3항. 32)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자 21면. 33) 이승훈이 1789년 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쪽. 34) 구베아 주교가 Sant Martino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앞의 책, 189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7 들에게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였 다. 이때 정약용은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 河 漢 )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그 후 서울로 찾아온 그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등 을 보여주었는데, 정약용은 1787년 이후 4~5년간 천주교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 35) 1784년에서 1785년 무렵에 이가환에게서 한문서학서들은 식견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논리적으로 대답하 자, 그가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가환에게 천학초함 ( 天 學 初 函 ) 과 성년광익 ( 聖 年 廣 益 )을 빌려주었는데, 이가환은 정독한 후 이것은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라고 하면서, 비밀리에 그와 왕래하였다. 36) 이 사 실은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요즈음에 정조( 庭 藻, 이가환), 자술( 子 述, 이 승훈), 덕조( 德 操, 이벽) 등이 서로 긴밀히 언약하고 신학( 新 學 )의 학설을 익힌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네 라고 37)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어 그는 찾아온 실학자 이기양( 李 基 讓, 1744~1802)에게 천지의 존재 이유, 세상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의 아름다운 질서, 4원소( 元 素 )의 조화와 하느님의 섭리의 다양한 원리,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교리, 상선벌악 등 한마디로 견고하고 공략할 수 없는 원리들에 기댄 천주 교의 진리와 명확성의 명백한 증거를 갖고 설명하였다. 이에 이기양은 토 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38) 35) 정약용, 앞의 책, 先 仲 氏 墓 誌 銘 附 見 閒 話 條 ; 甲 辰 下 從 李 檗 舟 下 斗 尾 峽 始 聞 西 敎 見 一 卷 書 자찬묘지명 ( 集 中 本 ) ; 旣 上 庠 從 李 檗 游 見 西 敎 見 西 書 丁 未 以 後 四 五 年 頗 傾 心 焉 자찬묘지 명 ( 壙 中 本 ). 36) 황사영, 백서 47~48행. 37) 안정복, 覆 稿 권10, 與 權 旣 明 弟 三 書 兼 呈 士 興, 갑진 12월. 38)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é(1860), vol. 4, M.E.P, pp. 5~17 (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3쪽).

18 교회사연구 제42집 명례방에 사는 역관 출신 김범우( 金 範 禹, 토마스)의 집에서도 공동체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벽은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전했고, 그는 입교 후 온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쳐 입교시 켰다. 39) 이벽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도 모임에 대해 이벽이 라는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 있 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 라고 하면서 책을 옆에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여 깨우쳐 주는 것이 유가의 사제 간 예법에 비해 더욱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모이는데 약 두어 달이 지나니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되어 들어가 보니,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 괴하고 이상스러웠다 고 40) 하였다. 이렇듯 그는 정약전 형제와 권철신 형제를 찾아가서 전교하고 이가환 등 찾아오는 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켰고, 신앙을 적극 전파하였으며, 거룩한 전례에 주 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그를 사당( 邪 黨 )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괴( 巨 魁 )가 되는 자 41) 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훈이 저술한 만천유고 ( 蔓 川 遺 稿 )에 수록된 천주공경 가 ( 天 主 恭 敬 歌 ), 한문본 성교요지 ( 聖 敎 要 旨, 협주 첨부본)와 임신년 (1932년)에 뎡 아오스딩 이란 이름으로 필사(전사)된 한글본 셩교요지 등은 42) 이벽의 저술로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저술되거나 전사된 39) 달레, 앞의 책, 318쪽. 40) 이만채, 앞의 책, 乙 巳 秋 曹 摘 發, 進 士 李 龍 舒 等 通 文 回 文. 당시 정약종도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는 1786년에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를 들었기 때문에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41) 正 言 李 毅 采 疏 略 曰 噫 彼 李 檗 者 最 是 邪 黨 中 渠 魁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1일 정해) ; 執 義 柳 疏 略 曰 若 論 邪 黨 之 渠 巨 魁 則 李 檗 是 已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5일 신묘). 42) 성교요지, 하성래 이성배 공역, 가톨릭출판사, 1976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 릭출판사, 1979 ;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1979(수정증보판, 2001) ; 이이화,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9 자료라는 측면에서, 또 이 자료들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43) 이승훈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그는 교 회에서 물러남과 다시 나옴을 거듭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신앙에 대한 입장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명했다. 44)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했 던 45) 그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乙 巳 秋 曹 摘 發 )사건 시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사르는 동시에 칠언율시( 七 言 律 詩 ) 두 편을 짓자, 벽이문 ( 闢 異 文 )을 지어 형조판서 김화진( 金 華 鎭, 1728~1803)에게 보내었으며, 벽 이시( 闢 異 詩 )를 지었다. 46) 그런데 이는 일시적으로 신앙이 흔들렸던 것에 불과하였다. 즉 그는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러는 동안 박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만천유고 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 김동원 편저, 영성의 길 광암 이벽의 성교요지, 하상, 2012. 43) 차기진은 천주공경가 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째, 잡철의 성격을 지닌 만천유고 의 저자(편자)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천주공경가 에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기해년(1779) 섣달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이 지은 가사 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본 성교요지 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천학초함 을 읽고 광암 이벽이 작성하여 주를 붙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성교요지 에 있는 구약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구약 의 내용이 조선에 알려진 시기는 훨씬 후대로 추정되고 있다 고 하였다(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 자료의 종합적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84~186쪽). 44)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9~ 80쪽. 그는 박해와 신앙고백의 거듭된 엇갈림에 대해 7개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했다. 1) 교회 창설 전후기(1783년 말~1785년 초) 신앙심과 교회 활동, 2) 최초의 박해 전후기(1785년 봄~1786년 여름) 최초의 배교 선언과 세례성사의 지속적 수행, 3) 반촌 강습회 전후기(1786년 후반~1788년 후반) 가성직제도의 실시와 심적 갈등, 4) 2차례 밀사 파견 전후기(1789~1790년) 회개와 신앙고백, 퇴거의 모색, 5) 진산사건 전후기(1791~1794년) 두 번째 배교 선언과 신자로 서의 관직 생활, 6) 예산 귀양살이 전후기(1795~1796년 봄) 세 번째 배교와 성리학자로의 회귀 표명, 7) 신유박해 전후기(1796년 여름~1801년 2월 26일) 죽음을 앞둔 당파적 의리와 死 信 의 향방 등이다. 45) 李 承 薰 諺 飜 之 事 曾 所 目 擊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46)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 벽위문에서 천당지옥설 과 위 천주횡행설 을 비판했고, 天 彛 地 紀 限 西 東 暮 堅 虹 橋 靄 中 一 炷 心 香 書 共 火 遙 瞻 潮 廟 祭 文 公 이라는 벽이시 를 지었다(이기경, 闢 衛 編, 서광사, 1978, 84~85쪽).

20 교회사연구 제42집 해가 일어나서 우리 가족은 어느 가족보다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나의 형제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세를 중단시키지 않기 위해 다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대신하게 하였습 니다 라고 47)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권일신과 함께 교회를 이끌었는데, 정약용은 서양의 호인 베드로를 칭하고 다녔다 고 하였고, 최창현은 신부로서 활동하였다 고 하였으며, 정약종에게 세례를 베풀기 도 하였다. 48) 이렇게 그는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승훈도 여러 차례 을사년(1785) 이후에는 배척했다고 진술했지만, 과연 을사년 이후에 한 번 이 천주학을 믿었으며, 몇 년 동안 단념할 수 없었 다 고 49) 고백하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회를 봉행 하였습니다 고 50) 하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배교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 고, 이는 외척내수( 外 斥 內 守 ) 내지 외배내신( 外 背 內 信 )의 이중적 모습으 로 자신의 내면적 천주 신앙을 지킨 것이다. 51) 1786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심과 선교열을 북돋우려 가( 假 )성무집행제도 52) 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1787년 이 제도가 4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48) 달레, 앞의 책, 322~328쪽 ; 問 曰 李 承 薰 招 內 乙 巳 以 後 改 革 云 而 以 矣 供 觀 之 則 承 薰 之 稱 西 洋 號 與 矣 身 同 遊 乃 在 乙 巳 之 後 承 薰 豈 非 誣 罔 乎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정 약용 공초) ; 供 曰 若 鍾 旣 受 領 洗 於 李 承 薰 則 其 爲 神 父 之 狀 已 告 於 前 招 而 矣 身 亦 嘗 以 承 薰 爲 神 父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6일 최창현 공초). 49) 矣 身 果 於 乙 巳 以 後 一 審 爲 此 術 而 數 年 未 能 斷 念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공초). 50) 隨 後 厥 父 嚴 禁 惡 友 亂 謗 承 薰 猶 忍 耐 奉 敎 (황사영, 백서 44행~45행). 51)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49쪽. 52) 이 제도를 흔히 가성직제도 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사영은 백서 에서 妄 行 聖 事 (48행)라고, 달레는 교계제도 (앞의 책, 323쪽)라고, 노용필은 신자교계제도 (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한 국사학, 2008, 237쪽)라고 하였으며, 원재연은 모방성직제도 (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36쪽), 조광은 가성무집행제도 (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325쪽)라고 하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1 잘못된 일임을 알고 중단하였다. 그리고 1789년 북경에 밀사 윤유일( 尹 有 一, 바오로)을 파견하면서 보낸 서한에서 이 제도의 실시로 인한 잘못 때 문에 이승훈은 깊은 죄의식에서 나온 절박한 구원 의식을 드러냈다. 즉 나는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또 자진하여 마귀의 종이 되 어, 성사들을 집전하는 일에 관여하기까지 엄청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것은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하였으므로 나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53) 고 하였다. 그는 1787년 겨울 반촌 ( 泮 村 ) 김석태( 金 石 太 )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기경( 李 基 慶 )은 정 미년 10월 무렵부터는 승훈의 무리들이 다시 천학( 天 學 )을 숭상한다는 말 이 귀에 시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고 54) 하였다. 1790년 4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 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결정하였다. 55) 그해 7월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보 내며 쓴 서한에서 결국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우리에게 보다 효력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제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서야 떨어진 깊은 구렁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라고 56)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밀사의 파견과 이승 훈의 서한은 북경 교회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크게 감동시켰다. 구베아 주교의 요청에 따라 비오(Pius) 6세(1717~1799) 교황은 1792년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교황청과도 간접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그것 은 이미 5년간에 4천 명의 신자를 갖게 된 조선 교회 발전의 기반을 더욱 53) 이승훈이 1789년 말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1쪽. 54) 至 丁 未 十 月 間 承 薰 輩 復 崇 天 學 之 說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3일 갑신). 55) 구베아 주교의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183쪽 ; 有 一 懇 請 於 主 敎 以 邀 出 神 父 爲 約 而 庚 戌 春 還 來 之 後 與 承 薰 樂 敏 等 日 夜 謀 議 專 以 請 來 神 父 爲 計 矣 ( 邪 學 懲 義, 移 還 送 秩, 유관검조). 56) 이승훈이 1790년 7월 11일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8쪽.

22 교회사연구 제42집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57) 1791년 11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평택 현감이던 이승훈은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때 홍낙안( 洪 樂 安, 1752~?)은 채제공( 蔡 濟 恭, 1720~ 1799)에게 장서 ( 長 書 )를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 權 尙 然, 야고보)을 사형 에 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 사교의 무리를 일망타진할 것을 촉구했다. 형조 신문에서 이승훈은 구서( 購 書 ), 간책( 刊 冊 ), 반회( 泮 會 )를 모두 모함이며,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삭직( 削 職 )을 당했 다. 58) 정약종도 신해 이후에는 이승훈이 서학에 전심하지 아니했으므로 그를 심복하지 않았다 고 했고,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올 당시 지황( 池 璜, 사바)은 이승훈의 서한을 휴대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때 이승훈은 이 미 반교를 하고 있었다 고 59) 하였다. 그럼에도 미약하게나마 교회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홍익만( 洪 翼 萬 )은 저는 갑인년(1794)에 이승훈에 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 60) 하였다. 이에 대해 황사영은 신해년에 체포 되어 배교하고는 성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 61) 하였다. 1795년 4월 주문모( 周 文 謨, 야고보) 신부 실포( 失 捕 ) 사건이 일어나 자, 그해 7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승훈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사학 가운데서 가장 요상하 고 도리에 어그러진 말들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깨부수고 미혹됨을 깨우 57)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 활동, 22쪽. 58)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14일 이승훈 공초. 59) 辛 亥 以 後 則 承 薰 不 爲 傳 心 此 學 故 矣 身 不 爲 心 服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정약종 공초) ; 至 矣 身 來 時 池 璜 不 待 李 承 薰 之 書 字 蓋 其 時 彼 已 叛 敎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基 讓 等 推 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공초). 60) 至 於 甲 寅 年 間 又 見 中 國 出 來 冊 子 故 種 種 講 論 於 家 煥 承 薰 若 鍾 嗣 永 等 家 而 受 邪 號 於 承 薰 稱 以 安 堂 亦 受 領 洗 之 法 矣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洪 翼 萬 ). 61) 황사영, 백서 45행.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3 치는 글 ( 惑 文 )을 지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62) 이처럼 1785년, 1791년, 1795년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승훈은 그 사건의 관여자로 지목되었는데, 그의 한문서학서 구래( 購 來 )가 천주 교 관계 사건의 원인 내지는 원죄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63) 그 는 1785년 박해에 벽이문 을 짓고, 1791년 박해에 삭직을 당하였으며, 1795년 박해에 귀양가서 유혹문 을 지었다. 즉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마다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거나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신앙을 배척했다. 그러나 박해가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 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세례를 주고, 가성무집행제도를 만들 어 활동하며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등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박해 와 하느님의 위로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64) 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신앙의 동태에 대해 을묘년에 신부님이 이 나라에 왔다는 말을 듣 고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얼마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자 두려워 다시 움츠렸습니다 고 65) 하였다. 권일신은 장인 안정복에게 천주교는 참으로 진실한 학문이고 천하의 큰 근본과 통달한 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거듭 권유하기도 하였 다. 66) 1785년 아들 권상문( 權 相 問, 세바스티아노)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 62) 일성록, 정조 19년 7월 26일 을해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유혹문 ( 惑 文 )의 내용은 降 生 救 贖, 天 堂 地 獄 說, 그리고 위천주횡행설( 爲 天 主 橫 行 說 )을 배격하였을 것이다(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78~80쪽). 63)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2쪽. 6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새 천년기 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14쪽. 65) 황사영, 백서 45행. 66) 向 來 省 吾 權 日 身 之 字 力 勸 此 學 余 聞 若 過 耳 之 風 其 後 又 移 書 勸 之 謂 此 學 眞 眞 實 實 天 下 之 大 本 達 道 專 在 於 是 (이만채, 앞의 책, 安 順 菴 乙 巳 日 記, 答 李 士 興 乙 巳 春 ).

24 교회사연구 제42집 서 있었던 신앙공동체 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사건이 일어나자 형조에 아 들, 이윤하( 李 潤 夏 ), 이총억, 정섭( 鄭 涉 ) 등을 데리고 가서 압수한 서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요구였다. 67) 이 사건 이후 그는 조동섬( 趙 東 暹, 유스 티노)과 함께 용문산에 있는 절에 가서 8일 동안 피정을 하였다. 68) 1786년 봄 가성무집행제도하에서 신부로 활동하다가 69) 1787년 봄 성무 활동을 중단하고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구베 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 70) 을 담은 사목 서한을 받고 이승훈 등 일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책자 간행에도 참여했고, 71) 1791년 정광수( 鄭 光 受, 바르나바)에게 교리를 가 르쳤다. 72) 충주 공동체를 세웠던 이기연( 李 箕 延 )의 결안에는 권일신과 67) 비변사는 權 日 身 之 溺 於 邪 學 卽 親 知 所 共 聞 知 曾 於 乙 巳 年 自 秋 曹 推 金 姓 中 人 之 際 日 身 以 士 夫 之 子 自 入 法 曹 之 庭 願 與 金 姓 同 被 其 罪 卽 此 一 款 爲 渠 斷 案, 故 親 知 皆 與 之 相 絶 이라고 하였고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그는 則 乙 巳 年 間 中 人 忘 其 名 金 姓 人 以 尊 奉 西 學 事 被 訊 推 而 渠 與 金 哥 爲 相 親 之 間 伊 時 以 渠 與 金 哥 同 看 天 主 實 義 之 故 頗 爲 衆 口 之 指 目 厭 然 自 諱 有 所 未 安 果 挺 身 自 服 於 曹 庭 要 爲 卞 破 解 紛 之 計 라고 하였다(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8) 달레, 앞의 책, 322쪽. 69)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1789년 말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3쪽 ; 황사영, 백서 48행 ; 김대건 신부는 그 당시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즉 이단 원, 최창현, 유항검 등이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사제들을 선출하고 세례, 견진, 고해 등 온갖 성사들을 집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들은 북경 주교님은 앞으 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행하지 말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 로 순종하였고 그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223~227쪽). 70) 중국 의례에 대한 찬 반 논쟁은 1715년 3월 19일 글레멘스 11세의 칙서 Ex illa die 를 통해 중국 의례에 대한 7가지 금지령이 선포되었고, 1742년 7월 11일 베네딕도 14세는 Ex quo singulari 를 선포하여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은 중국의례에 관한 훈령 을 통해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허용은 아니라도 상당히 관용적 인 조치를 취하였고, 1958년 한국 주교단은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 에서 제 상례에 관하여 허용 및 금지 의식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허용 의식은 시체나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의식은 제사에 있어서 축문( 祝 文 ), 합문( 闔 門 ), 장례에 있어서 고복( 皐 復 ), 사자밥, 반함( 飯 含 ) 등이다. 71) 罪 人 權 日 身 家 所 藏 邪 書 使 之 一 一 搜 來 矣 回 告 內 以 爲 所 有 書 冊 無 遺 搜 閱 而 別 無 關 於 邪 學 冊 子 只 有 辛 亥 瞻 禮 爲 名 長 廣 數 寸 一 冊 書 帖 冊 後 面 列 錄 邪 學 諸 書 名 目 一 冊 及 邪 書 目 錄 謄 書 紙 一 片 ( 승정원 일기,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72) 辛 亥 年 始 學 邪 書 於 日 身 處 受 號 巴 爾 納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鄭 光 受 ).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5 연결되어 사학에 깊이 홀렸다. 집안의 제사에 참석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터 가까운 동네에 이르기까지 남녀들을 속이고 꾀어내어서 한 고을을 미혹시켰다.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즐겨 사학의 괴수가 되었다 고 73) 하였다. 그는 최창현, 이존창( 李 存 昌, 루도비코), 유항검 등과 더불어 신자 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열성을 배가하던 중, 1791년 11월 3일 교주( 敎 主 )로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총회장 최창현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르는 사람이 권일신, 정 약종, 이존창 이고, 74) 정약전도 가장 존경하여 믿은 자는 권일신 이 며, 75) 이존창도 자신과 최필공과 권일신 을 사학의 괴수로 지목하였 다. 76) 이처럼 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했던 그는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했 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해지자 책임을 지려고 했 을 정도로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했고, 구베아 주교의 가성무집행제도 금 지령에 따라 교도권에 순명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권철신이 신앙을 받아들이자 온 가족이 믿고 따랐고, 77) 그는 양근 일대에 살던 이들에게도 전하였다. 78) 신유박해에 그에게 천주교를 배운 73)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各 道 正 法 罪 人 秩, 結 案 招 締 結 日 身 沈 惑 邪 學 不 參 家 祭 先 自 家 內 以 至 隣 里 誘 男 女 誤 一 邑 自 作 窩 主 甘 心 邪 魁 眞 贓 已 露 情 踪 難 掩 究 其 罪 狀 萬 戮 猶 輕 云 云 辛 酉 十 二 月 正 法. 74) 矣 身 最 所 尊 仰 者 則 權 日 身 丁 若 鍾 李 存 昌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 현 공초). 75) 其 時 尊 信 者 卽 權 日 身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정약전 공초). 76) 京 中 崔 必 恭 爲 魁 湖 中 則 矣 身 未 悟 之 前 得 魁 萃 之 名 楊 根 則 權 日 身 爲 魁 首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7일 이존창 공초). 77) 황사영, 백서 11~12행 ; 鹿 菴 之 弟 日 身 首 離 刑 禍 死 於 壬 子 之 春 盡 室 皆 被 指 目 鹿 菴 不 能 禁 (정 약용, 앞의 책, 녹암권철신 묘지명 ) ; 경기감사 이익운은 日 身 罪 斃 之 後 渠 之 同 黨 尙 不 知 改 依 舊 爛 漫 往 來 不 絶 則 權 哲 身 之 全 家 稔 惡 不 待 輸 款 而 皎 然 矣 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권2, 순조 원년 2월 21일 정묘). 78) 심문관들이 到 今 陽 根 一 境 無 非 邪 學 是 遣 問 其 所 從 來 則 皆 自 矣 身 之 家 是 如 乎 矣 又 況 所 謂 矣 身

26 교회사연구 제42집 죄로 양근 조응대( 趙 應 大 )는 강진으로, 윤지겸( 尹 持 謙 )은 진해로, 윤학겸 ( 尹 學 謙 )은 사천으로, 며느리 숙혜( 淑 惠 )는 순천으로, 행랑에 살던 순덕( 順 德 )은 칠원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회장 강완숙( 姜 完 淑 )의 서찰을 받기도 하였다. 79)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과 친인척들이 앞장서서 천주교를 수용 하여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하였다. 즉 광주( 廣 州 ) 공동체의 정약전 형제들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여주 공동체의 김건순( 金 健 淳, 요사팟)은 여러 차례 찾아와서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강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내포의 이존창은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문하로 옮겼다. 포천 공동체의 홍교만( 洪 敎 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 의 고종사촌이고, 충주의 이기연, 권상익( 權 相 益 ), 이재섭( 李 載 燮 ) 등은 그 의 사돈, 조카, 사위이다. 80) 특히 충주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 및 양근, 광주 등의 지역과 밀접히 연결된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 하여 양근의 권일신 일가는 충주를 통혼권( 通 婚 圈 )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 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 관계를 통하여 충주에 천주교가 전해졌던 것이 다. 81) 그리고 호남의 유항검( 柳 恒 儉, 아우구스티노)은 천주교를 연구하려 고 찾아오기도 하였고, 진산의 윤지충( 尹 持 忠, 바오로)은 정약전을 통해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82) 輩 敎 友 皆 指 矣 身 爲 鄕 中 之 窩 窟 矣 라고 물었다(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79) 역주 사학징의 1, 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회, 2001, 262~264쪽 ; 矣 身 常 書 札 往 復 處 則 丁 若 鍾 丁 若 鏞 及 吳 錫 忠 權 哲 身 文 榮 仁 等 家 書 禮 相 通 處 段 哲 身 及 哲 身 妹 家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姜 完 淑 ). 80) 권일신의 동생인 權 得 身 의 아들 권상익은 충주에 살던 이기연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기연의 아들 李 仲 德 은 신유박해에 전라도 장수로 유배되었고, 며느리 權 阿 只 連 은 충주에서 1801년 8월 순교 하였다. 권상익은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이기연은 12월 충주에서 순교하였다(여진천, 권철신 권일신 후손들의 천주신앙,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2013, 234~237쪽). 8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49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7 그는 1791년 동생 권일신의 죽음 이후 드러내놓고 신앙 활동을 하지 는 않았다. 83) 그럼에도 그는 도량이 크고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여러 사람 의 신임을 얻고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서 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고문으로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가엾은 사람들 같으니! 그로 인해 그들이 반평생 거둬들인 노고를 헛되 게 하고 아무 보상도 없는 형벌을 받으니 참으로 유감스럽구나! 라고 한 탄하였다. 84) 이는 저명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 로 벗어버리지 않았고, 자기 삶의 원칙을 공부한 대로 실천한 독행자로서 의 명망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퇴거(은수)의 삶은 성리학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라기보다 천주교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었다. 85) 당시 교회 안팎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즉 강세륜( 姜 世 綸 )은 그 소굴 속에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조정의 벼슬아치로 는 이가환이 있고 경기에는 권철신과 정약종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라 고 하였고, 황사영( 黃 嗣 永, 알렉시오)은 서양의 천주교를 하는 사람 중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로는 양반의 경우 저와 권철신, 정약종 무리들이다 고 86) 하였다. 이가환은 사학의 괴수로 호중( 湖 中 )의 이존창, 양근의 권철 82)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99~101, 106~107쪽 참조. 83) 그는 신해년(1791) 이래로 문을 닫아걸고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고 하였다(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 황사영, 백서 12행. 84) 罪 人 權 哲 身 卽 日 身 之 兄 而 與 其 弟 欽 崇 邪 書 酷 信 三 魂 四 行 之 說 及 夫 日 身 罪 斃 之 後 迷 不 知 變 致 使 楊 根 一 境 愚 惑 訛 誤 寔 繁 其 徒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 달레, 앞의 책, 440쪽. 85)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4~136쪽. 86) 以 窩 窟 之 世 所 共 知 者 言 搢 紳 則 有 李 家 煥 近 畿 則 有 權 哲 身 丁 若 鍾 輩 (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25일 임오) ; 洋 敎 中 表 著 者 在 士 夫 則 矣 身 及 哲 身 若 鍾 輩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28 교회사연구 제42집 신, 서울의 최필공이라고 하였다. 87) 이처럼 그는 1784년부터 1791년까 지 보여주었던 실천적 삶과 가르침은 친인척들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존경을 받았고, 여러 지방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1791년부터 그의 드러나지 않는 삶은 복음적인 퇴거(은수)로 볼 수 있다. 정약종은 입교한 이후 항구한 열심으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특히 그 는 재혼한 아내 유( 柳 ) 세실리아와 금욕을 하며 살 생각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던 정덕관( 貞 德 觀 )에 따라 재혼한 이후에도 금 욕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환과( 鰥 寡 )의 정( 貞 ) 을 지향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엄격주의적 신앙을 나타내며, 개인 윤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교적 완덕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88) 그는 1794년 홍익만과 한문서학서를 가지고 교리를 토론하였고, 1795년 이후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여러 신자, 즉 양반 황사영, 중인 최창현, 현계흠( 玄 啓 欽 ), 손인원( 孫 仁 遠 ), 이합규( 李 逵 ), 손경윤( 孫 敬 允 ), 홍필주( 洪 弼 周 ), 강완숙, 그리고 양인( 良 人 ) 김계완( 金 啓 完 ), 백정( 白 丁 ) 황일광( 黃 日 光 )과 황차돌( 黃 次 乭 ), 89) 각수( 刻 手 ) 송재기( 宋 再 紀 ), 포 수( 砲 手 ) 김한빈, 고공( 雇 工 ) 임대인( 任 大 仁, 토마스), 총모장( 帽 匠 ) 장 덕유( 張 德 裕 ), 김일호( 金 日 浩 ) 등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90) 그는 임대인 87) 湖 中 之 李 存 昌 陽 根 之 權 哲 身 京 中 之 崔 必 恭 爲 之 云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이가환 공초). 88) 정덕의 세 등급 중 가장 아래 등급은 부부의 정숙함, 중간 등급은 홀아비와 과부의 정조, 으뜸 등급 은 동정이라고 하였다(판토하, 박완식 김진소 역, 칠극, 전주대출판부, 1996, 252~25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4, 441쪽. 89) 罪 人 黃 日 光 學 習 邪 書 於 李 存 昌 移 接 若 鍾 隔 隣 受 洗 受 號 號 以 深 淵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 황일광은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 고 하였다(달레, 앞의 책, 474쪽). 90) 邪 書 出 自 承 薰 而 若 鍾 樂 敏 輩 相 與 之 爛 漫 討 論 有 何 傳 襲 之 可 言 乎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 역주 사학징의 1, 162, 170, 190, 199, 203, 215, 222, 230, 235쪽 ;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9 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황차돌에게 십계명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91) 이 렇게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던 그의 실천적 사상은 종교 운동가로서의 면 모를 강하게 드러내는데, 양반 지배층 중심의 기존 질서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와 사상이 이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92) 그는 주일에 첨례할 때 최창현이 만들어 보내준 금장단선( 錦 帳 緞 ) 으로 된 휘장을 천주상( 天 主 像 )에 걸고 무릎 꿇고 앉아서 경문을 외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였다. 93) 그는 천주교의 전파와 보급에 상당한 기 여를 했던 명도회( 明 道 會 )의 회장으로서 주문모 신부와 자주 연락하면서 자신의 집에 여러 번 맞아들였고,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며 교리를 연구하 고 전파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황사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속 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회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였고,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고통을 모르는 사 람 같았습니다. 혹 한 가지 조그만 도리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자고 밥 먹는데 맛이 없었으며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 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싫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깨 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하고 나서는 곧 강론을 펴기 시작해서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으므로, 다른 이 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혹 자기가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2월 12일 임대인 공초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91) 丁 書 房 敎 誘 矣 身 先 學 十 戒 七 克 而 被 捉 臟 物 矣 兄 日 光 往 接 于 廣 州 分 院 若 鍾 家 行 廊 矣 漢 彬 爲 名 漢 亦 爲 來 留 其 行 廊 而 始 學 十 戒 於 若 鍾 處 是 白 遣 ( 邪 學 懲 義 권2, 作 配 罪 人 秩, 任 大 仁, 黃 次 乭 ). 92)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7쪽 ;,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08쪽. 93)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공초, 2월 12일 정약종 공초.

30 교회사연구 제42집 알아 깨닫게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딱하고 민망 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말이 술술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놓아도 가려내 는 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 뀜이 없었고,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습니다.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 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고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94) 그는 1799년 선교사 영입을 위한 서양의 큰 배를 청해오려던 계획에 동참하여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95) 또한 당시 한문서학 서는 한글로 많이 번역되었는데, 96) 그는 번역에 그치지 않고, 교인 가운 데 우매한 사람 ( 敎 中 愚 者 )을 위해 한글로 된 교리서 쥬교요지 (2권) 를 97) 저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이 성세추요 보다 더 우수하다고 평가하면서 인준하였다. 또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 기 위한 성교전서 ( 聖 敎 全 書 )의 편찬을 시도하였다가 박해로 중단하였 다. 98) 이 책의 저술을 통해서 그는 조선 교회에서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해 주었다. 99) 이처럼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면서, 복음의 권고대 94) 황사영, 백서 36~38행. 95) 김유산의 1801년 4월 26일자 진술에 언급된 중국 천주당 신부에게 보내는 서찰을 쓴 서울에 사는 丁 生 員 은 정약종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 사학징의 1, 102쪽 각주 79). 96) 1801년 당시 형조에 압수되어 소각된 천주교 서적은 모두 120종 117권 199책이었는데, 한글로 씌어진 책은 83종 111권 128책이었다(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91~95쪽). 97) 정약종이 엮은 우리말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히면서 이단을 배척하는 일종의 호교서이고, 하권은 천주의 강생 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조한건, 정약종의 쥬교요지 에 미친 서학서의 영향, 서강대 석사 학위논문, 2006). 98) 황사영, 백서 36~38행. 99)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03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1 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적 친교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명도회장 으로서 주문모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복음 전 파에 온갖 열정을 다했다. 그는 주보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신앙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듯이, 그도 믿음을 통 하여 스스로 강해졌다. 또한 성인이 방대한 저술들을 통하여 믿음의 중요 성과 믿음의 진리를 설명하였듯이, 100) 그도 교리서를 저술하여 당시 신자 들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4.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 시 이부만( 李 溥 萬 )은 아들 이벽에게 신앙 을 버리도록 강요하면서 목에 끈을 매달고 죽으려고 하였다. 그는 부친의 박해를 받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부인하겠는가? 또 어떻게 부친을 죽도 록 내버릴 수 있는가? 라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친에 대한 효 사이에 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101) 그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 겠다는 배교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회의 말을 사용해서 닥친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그는 부친에 의해 감금된 상태에서 말할 수 없 는 고통을 받다가 병 102) 에 걸린 지 8~9일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부친과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신앙 100)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교서, 믿음의 문 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9쪽. 101)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é(1860), vol. 4, M.E.P, pp. 26~ 27(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7쪽) ; 달레, 앞의 책, 320~321쪽. 102) 당시 페스트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다블뤼는 la peste(중국에서는 Jo ping이라고 하는), 달레도 페스트(중국에서 Io ping이라고 불리는 티푸스의 일종)라고 하였다. 리델이 엮은 한불 자전 에 peste는 염병( 染 病 )이라고 하였다.

32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선택한 최필제( 崔 必 悌, 베드로) 등과 같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과 부친 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즉 묵언의 거룩한 행동으로 신앙과 효를 증거한 것이다. 103) 그는 부친을 위시한 다른 가족들로부터 갖은 수단으로 범주적( 範 疇 的 ) 신앙 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범주적 신앙 도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말 로 부친의 죽음을 저지시킴으로써 효를 실천하는 초월적( 超 越 的 ) 신앙 도 아울러 성 취하였다. 그는 극도로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범주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고 증거한 신앙으로 처신하였던 것이다. 104) 1791년 목인규와 홍낙안은 권일신을 교주 라고 고발하였다. 105) 그 는 그해 11월 3일 체포되어 7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천주교 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이후 서학서를 보기가 어려워 보지를 못했다고 했 다. 3차 심문에서 천학문답 ( 天 學 問 答 )을 지은 안정복과 입론( 立 論 )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 103)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이벽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07~226쪽 ;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 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258~263쪽 ; 곽승룡 신부는 그의 침묵을 심리적 상징적 사목적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침묵(마르 15, 2-5)과 연관되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곽승룡, 한국천주교 창설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한 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29~143쪽). 104)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 연구소, 2007, 291~293쪽. 105) 亦 欲 打 破 其 窩 窟 而 偃 然 以 敎 主 自 處 不 畏 典 章 不 避 指 目 反 以 爲 榮 者 自 有 其 人 卽 權 日 身 是 也 (이만 채, 앞의 책, 睦 進 士 仁 圭 與 發 通 諸 儒 書 ) ; 前 都 正 睦 萬 中 所 製 通 文 及 進 士 睦 仁 圭 抵 書 士 林 以 斥 其 自 作 敎 主 之 罪 焉 日 身 (이만채, 앞의 책, 洪 樂 安 問 啓 ) ; 館 學 儒 生 宋 道 鼎 等 上 疏 曰 李 承 薰 之 貿 冊 乃 其 作 俑 之 凶 權 日 身 之 敎 主 卽 護 法 之 賊 也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6일 정축).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3 였다. 그런데 5차 심문에서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 邪 學 )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 든가 사람들에게 충효( 忠 孝 )를 느끼게 한다 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 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 妖 書 )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6차 심문에서 직방외기 ( 職 方 外 紀 )와 천주실의 를 읽었다고 하면서, 예 수의 사람 됨의 사정( 邪 正 )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 모에게 효도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 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 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7차 심문에서 그 학술은 대체로 공( 孔 ) 맹( 孟 )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 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 邪 學 )입니다 고 106) 하였다. 11월 5일 비변사는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 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 라고 107) 하였다. 또한 형조는 그가 교주라는 칭 호에 대해서는 뜬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예수에 대해 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 한 매를 치면서 묻는 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 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 108) 하였다. 106) 矣 弟 當 初 四 五 年 沈 溺 之 故 浮 謗 無 以 得 免 是 白 乎 矣 第 有 可 證 者 他 邪 學 者 廢 祀 而 矣 身 家 則 不 廢 祀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107) 大 抵 日 身 之 自 入 秋 曹 願 被 同 罪 者 大 是 的 贓 明 驗 其 爲 妖 學 之 窩 主 可 以 知 之 雖 於 乙 巳 之 後 渠 若 悔 悟 自 責 復 歸 正 學 則 一 世 之 指 目 豈 至 於 此 乎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108) 其 敎 主 之 稱 歸 之 於 浮 言 之 科 極 口 發 明 獨 於 耶 蘇 終 不 斥 言 其 邪 妄 嚴 訊 之 下 一 辭 如 前 可 見 其 沈 溺 迷 惑 雖 於 施 威 之 下 始 於 邪 學 二 字 遲 晩 至 於 敎 主 書 冊 兩 段 事 不 可 以 其 發 明 有 所 準 信 請 更 加

34 교회사연구 제42집 이처럼 1, 3차 진술로 볼 때, 신앙을 실천하지 않은 것처럼 진술하였 고, 7차 진술에서 제사 폐지를 언급하면서 이 점에서는 사학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5, 6차 진술에서 요서라고 할 수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척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11월 11일 그 에 대한 회유를 직접 지시했기에, 집중적이고 집요한 회유를 받았다. 16일 형조는 그가 15일 옥중에서 회오문 을 작성했다고 보고하였으며, 이에 정조는 위리안치( 圍 籬 安 置 )에서 호서로 이배( 移 配 )토록 하였다. 109) 결국 그는 유배지 예산으로 가는 도중에 엄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을 당 하였다. 그런데 11월 11일부터 집중적인 회유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15일 에 지은 회오문 을 보면, 다만 이전의 잘못됨을 고치고 뉘우침으로써,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 의) 성스러운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80세 노모께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 르고, 형제들은 무고하게 잡혀 들어오니 라고 110) 하였다. 이 글은 자신 이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천리( 天 理 )의 공( 公 )에 입 각한 삶과 인욕( 人 慾 )의 사( 私 )에 입각한 삶을 각각 2조목씩 들고 있다. 보통 사대부의 글이라면, 하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임금의 뜻에 집중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사람 되 嚴 刑 期 於 取 服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09) 仍 命 權 日 身 崔 必 恭 等 處 曉 諭 義 理 使 之 自 新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1일 임오) ; 班 之 魁 日 身 中 之 魁 必 恭 若 痛 自 尤 悔 歸 於 正 學 則 其 徒 不 過 遇 風 之 鴻 毛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 移 配 權 日 身 於 湖 西 使 開 誘 爲 邪 學 者 日 身 於 獄 中 作 悔 悟 書 刑 曹 以 啓 上 意 其 眞 箇 革 心 使 之 移 配 於 有 邪 學 地 方 欲 其 立 跡 自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 日 身 始 抵 死 不 屈 擬 配 濟 州 旣 上 論 之 誨 之 日 身 自 獄 中 作 悔 悟 文 上 之 流 配 禮 山 出 獄 未 幾 而 死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녹암권철신 묘지명 ). 110) 矣 身 沈 惑 異 端 不 知 末 流 之 弊 終 至 於 滅 倫 亂 常 有 甚 於 夷 狄 禽 獸 將 使 家 敗 身 亡 不 免 凶 禍 矣 身 之 罪 百 死 難 贖 而 至 今 假 息 國 恩 罔 極 粉 骨 碎 身 無 以 報 答 惟 有 改 悔 前 非 以 副 愛 欲 生 之 至 意 人 其 人 之 聖 念 八 老 母 奄 奄 號 絶 兄 弟 無 辜 竝 被 矣 身 於 此 眞 是 得 罪 於 五 倫 忽 忽 念 此 不 覺 叩 心 而 泣 血 日 前 口 招 矣 身 旣 以 耶 蘇 之 學 妖 邪 不 正 (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5 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 앞에 상위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는 부분 이 특징적이다. 이 부분에 그가 말하고자 했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사적 인 삶으로는 자식 된 도리로서 노모의 임종까지는 지켜야 한다는 보은을 강조했지만, 공적인 삶으로는 하늘이 사랑하여 살리려고 한다는 점을 지 적하였다. 이를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춰본다면, 초기 교회의 지탱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성직자 영입이 실패한 직후였으므로, 이를 성공시킬 때까지 는 자신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11) 이처럼 임금의 지 시에 의한 집중적인 회유를 받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공권력이 아닌 압제 로 변질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 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112) 결국 그는 신앙에 관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범주적 그리스도 신앙 을 간직하면서 받게 된 귀양 판결 후 하늘의 뜻에 따라 팔순 노모께 대한 효도를 다하며 살 것을 종용한 임금의 뜻에 순응하였다. 그는 익명( 匿 名 ) 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신앙 도 성취한 뒤에 감형을 받고 나서 즉 시 닥친 죽음을 맞았다고 보기에, 순교로 신앙적 삶을 마쳤다고 볼 수 있 다. 113) 그렇지만 이러한 내밀한 심정을 추론할 수 있지만, 정조의 회유 지시에 의해서 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 에 없다. 114) 그런데 당시 유생들은 권일신이 천주교를 버렸는지 알 수 없고, 또 나오자마자 다시 믿었다고 하였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진술로 보이지만, 1795년에 관학유생 박영원( 朴 盈 源 )은 경기 지방의 권일신과 호서의 이 11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8~146쪽. 112) 가톨릭교회 교리서 1787, 1903항. 113) 심상태,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의 천주신앙, 453쪽. 114)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1~162쪽.

36 교회사연구 제42집 존창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에서 모두 자복했었는데 옥문( 獄 門 ) 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고 115)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 李 秉 模 )는 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 니다. 이른바 권일신의 무리는 지금 이미 죽었으나 그 이웃 마을에 점점 물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다시 이전과 같으며, 호남까지도 선동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고 116) 하였다. 그리고 이만채( 李 晩 采 )는 일신이 유배되 기 전에 도중에 죽어서, 진정한 감화 여부는 알 수 없게 되어 애석하 다 117) 하였다. 교회 측 기록은 그의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달레는 그의 생 애 중에 그렇게도 위대하였고, 형벌 중에서 그렇게도 위대한 것을 보아 온 그 사람이 이렇게 그의 최후 순간을 비겁한 나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을 보게 되니 이 무슨 광경인가. 그러나 또 얼마만한 교훈인가. 물론 기록들 이 별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굴복 행위의 정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을 공공연한 배교로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승리를 이 야기하지 않고 이 풀 수 없는 의문 앞에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안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 118) 하였다. 권철신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의금부에서 2월 11일 두 차 례, 18일, 19일, 21일에 각 한 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양근 일대를 천주교에 물들게 만든 괴수임을 자백하라고 하자, 이러한 비방은 동생과 함께 이 책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책을 보았습니다. 115) 畿 縣 之 日 身 湖 西 之 存 昌 年 前 刑 獄 渠 皆 自 服 而 出 獄 門 又 復 如 前 ( 정조실록 권43, 정조 19년 7월 24일 계유). 116) 近 年 以 來 邪 學 日 益 熾 盛 所 謂 權 日 身 之 類 今 雖 已 斃 而 其 隣 里 鄕 黨 之 間 漸 染 猶 復 如 前 至 於 湖 南 亦 不 無 煽 動 之 慮 云 (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5일 임술). 117) 日 身 未 及 發 配 而 徑 斃 未 知 眞 箇 感 化 與 否 可 惜 (이만채, 벽위편 권3, 刑 曹 啓 目 權 日 身 刑 招 ). 118) 달레, 앞의 책, 360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7 신해년(1791) 제 동생이 이 때문에 형벌을 받았으며 나라에서 금지하는 일도 매우 엄했습니다. 또 그때 제 동생이 살아나왔습니다. 임금님의 은혜 가 한이 없어서 문을 닫아걸고 감읍( 感 泣 )하였습니다. 저는 자청해서 제 동생이 베껴놓은 사서( 邪 書 ) 오십여 권을 감영에 바치고 감영 마당에서 불태웠습니다. 이 뒤로는 집에 한 권의 책도 없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제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사학( 邪 學 )에는 오륜( 五 倫 )이 없습니다 고 하 였다. 그리고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한두 명의 교주를 고발하라고 하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 니다. 제 자신의 혐의도 벗지 못하는데, 누가 교주임을 무슨 이유로 알 수 있겠습니까? 천주학 패거리에 대해서는 조무래기들이나 우두머리를 막론하고 참으로 정확히 지적하여 아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또한 최필공을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그리고 가까운 고을에 사는 정가( 丁 哥, 정약종)가 이 학을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눈으로 보지 못한 내용이라고 하였다. 정약종이 했던 학문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기와 같은 비방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날 신장 5대를 맞았다. 119) 18일 3차 심문에서, 신해년 이후에 신부가 된 이가 바로 권철신이라 고 여러 사람이 지적했다고 하자, 그는 제 동생 권일신의 일로 숱한 지목 이 모두 저에게 씌어졌으나, 저는 지금 이미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여 끊고 믿지 않습니다. 배척하여 끊은 사람에게 어떻게 신부와 대부의 칭호 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19일 4차 심문에서 윤유일의 흉악스럽고 비밀스런 일(1790년 북경 방문)에 대해서는 과연 알았으나 관아에 고발하 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정황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죄 라는 것 119)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38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늦게나마 자복합니다 고 하였고, 신장 30대를 맞았다. 120)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그는 1791년 이후 교회와 관계가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그런데 1차 심문에서 국은이 망극하여 이에 보답하 려 노력했다는 것은 정조에 대한 모반죄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이 모두 지목한다는 물음에 동생 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 는데, 이는 퇴거 (은수) 상태에 대한 일관된 설명이지만, 다른 교우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는 심문을 받을 때,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에 대한 고발을 하지 않았다. 1차 심문에서 최필공, 정약용 형제를 아느냐는 질문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 다. 2차 심문에서는 우두머리 및 일반 신자들을 고발할 사람이 없다고 하 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1791년 이후에도 그는 교회 활동을 드러 나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경기 감영에 갇혀있는 이중배가 천주교 를 믿는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 라고 하자, 마마의[ 痘 醫 ]로서, 또 동네의 잔칫집에 왔다가 방문한 것이라고 121) 하였다. 그리고 김건순 (요사팟)이 양부가 세상을 떠난 18세(1793) 이후부터 22세(1797) 사이 에 권철신을 밤에 찾아가서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 강생의 신비를 듣 고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122) 또한 황사영은 교우 중에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자 중에 쓸 만한 자로 양반에 있어서는 자신, 권철신, 정약종 등 이 라고 123) 하였기 때문이다. 3차 심문의 진술 자체로만 보면, 교회를 배척하여 끊었다고 볼 수 있 120)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19일 권철신 공초. 121) 問 曰 李 中 培 被 囚 於 畿 營 納 供 以 爲 往 見 邪 學 人 權 哲 身 云 爾 則 矣 身 之 到 今 發 明 豈 成 說 乎 供 曰 村 中 過 婚 家 衆 人 齊 會 時 李 中 培 亦 來 過 而 仍 訪 矣 身 家 而 已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9일 권철신 공초) ; 供 曰 李 中 培 以 痘 醫 來 留 村 中 伊 時 矣 孫 之 痘 一 二 次 尋 見 矣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권철신 공초). 122) 달레, 앞의 책, 490~491쪽. 123) 辛 酉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9 다. 그러나 1791년 이후 신부든, 대부든 이를 인정하게 되면 계속적으로 연루자가 생겨나게 되는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답변은 배교한 것이라기보다는 본인과 관계없음을 진술함으로써, 다른 교우들을 계속해서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의 진술일 것이다. 124) 그가 가혹한 형 벌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배교했 다고 겉으로는 진술한 것과 달리, 속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 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문관 앞에서 배교하고, 그것을 믿게 하려고 한 것 은 단지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꾸며댄 것이지,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변하여 진실로 그것을 버리거나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25) 교회 측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즉 황사영은 그가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선사( 善 死 )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고 126)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체포되어 판관들 앞 에 서자, 그는 상세하고 조리 있게 천주교와 신앙 실천을 설명했으며, 형 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답변하여, 직 책상 심문에 참석했던 가장 악착스러운 적들 중 한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서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심문을 받는 다른 죄인 들을 보면, 모두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나, 권철신만은 고문을 받는 가운 데서도 잔칫상에 차분히 앉아있는 사람처럼 답변한다. 심리가 끝나기도 전인 음력 2월 21일 권 암브로시오는 66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어떤 이들 에 의하면 매를 맞고 사망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에 의하면 상처의 후 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감옥 밖에서 마지 막 숨을 거두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정황이 그들로 하여금 그 124)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47~152쪽 참조. 125) 서종태, 이벽 이승훈 권철신의 순교여부에 대한 검토, 68~71쪽. 126) 황사영, 백서 52행.

40 교회사연구 제42집 의 항구심에 약간의 의혹을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떠한 자료에도 근거하지 않은 단순 한 의혹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토록 수많은 세월 동안 형벌을 받기까지 감정과 행동에 있어 의연함을 보여준 이 교우에 대한 우리의 추억을 얼룩 지게 하지는 못한다 고 127) 하였다. 그는 주재자의 존재를 진리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흠숭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서학에는 오륜( 五 倫 )이 없다 고 유학과 천주교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결정했던 제사 금지령을 거부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실천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순교적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천주교에 대한 신 앙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128) 1801년 2월 9일 사헌부에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사학치성 ( 邪 學 熾 盛 )의 원흉으로 주벌( 誅 罰 )할 것을 청하면서, 이승훈이 구입해 온 요서( 妖 書 )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 ( 家 計 )로 삼았습니다 고 129) 하였다. 이승훈은 그다음 날 체포되어 2월 18일까지 6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 여정에 대해 추궁을 당하자, 1791년 이후에 천주 교를 떠났고, 1795년 예산 유배 시 지은 유혹문 을 필사하여 각 면리( 面 里 )에 일일이 돌려서 예산 일대가 다시는 물들지 않도록 했다고 하였 다. 130) 또한 자신이 주자학에 전념했다고 하면서, 주자백록동연의 ( 朱 子 127) St. A. Daveluy, Notes pour l Histoire des Martyrs de Coreé(1859-1860), vol. 4, M.E.P, pp. 108~109(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8~319쪽) ; 달레, 앞의 책, 440쪽. 128)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2~163쪽. 129) 李 家 煥 李 承 薰 丁 若 鏞 之 罪 可 勝 誅 哉 承 薰 則 傳 其 父 所 購 之 妖 書 甘 心 護 法 作 爲 家 計 ( 순조실 록 권2, 순조원년 2월 9일 을묘). 130) 矣 身 乙 巳 後 雖 未 斷 意 斥 絶 辛 亥 後 則 果 永 斷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1 白 鹿 洞 衍 義 )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척사인( 斥 邪 人 ) 이기경도 자신의 척사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척사론자이며 혼척( 婚 戚 )이 되는 심유( 沈 )와 교류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증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정학 ( 正 學,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사학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131) 그럼에도 그는 이가환이나 정약용을 집권층 내부로부터 제거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구서전법 ( 購 書 傳 法 )한 사실을 집 중적으로 추궁받았으며, 자위교주 ( 自 爲 敎 主 )가 되었음을 비난받았다. 그 는 천주교를 조선에 전파한 원흉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 던 것이다. 132) 2월 25일 이병모는 이승훈은 당초에 사서를 구입해 가지 고 와서 온 세상에 전하여 배포하였으니 인심이 함닉되고 세도가 어그러 진 것은 진실로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가 작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 다. 문서에 적발된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신부 등의 말은 명호를 만든 것인데 신과 같이 앙모하는 자를 신부라고 일컬으니 신을 대신할 수 있다 는 말이요, 아비를 대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인들과 난만 하게 왕래하고 있는데 그 실정을 구명해 보면 지극히 흉참하였으니, 이 또 한 일률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 133) 하였다. 결국 그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 공초) ; 원재연은 매우 중대한 害 敎 행위이자 비난받아야 마땅한 적극적인 배교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심리적 변화을 일으킨 요인은 첫째, 예산 유배(1795년 7월 하순부터 이듬 해 봄까지)는 그전까지 맛볼 수 없었던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이 있었고, 둘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신자들을 억압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한 정약용과의 교류, 즉 두 사람도 처음에는 갈등을 느꼈을 것이나, 차츰 교회를 탄압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들 의 양심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천주교 신앙을 완전히 지워버렸을 것이라고 하였다(원재연, 이 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65, 67~68쪽). 131)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132)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7~78쪽. 133) 李 承 薰 則 當 初 購 來 邪 書 傳 布 一 世 人 心 之 陷 溺 世 道 之 訛 誤 苟 求 其 源 莫 非 渠 所 作 俑 以 現 捉 於 文 書 者 言 之 神 父 等 說 做 作 名 號 仰 之 如 神 者 謂 之 神 父 可 代 神 父 則 謂 之 代 父 至 與 洋 人 爛 漫 往 復 究 厥 情 跡 至 凶 至 此 亦 宜 用 一 律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5일 신미).

42 교회사연구 제42집 황사영은 그의 순교 여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가 환, 정약용, 이승훈 등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회를 해쳤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가까운 옛 친구를 만나면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 는 교회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그것이 선사( 善 死 )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 134) 하였다. 그러나 달레는 배교자로 죽 었다고 단정하였다. 즉 이승훈의 죽음은 이가환의 죽음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였다.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는데,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러운 비겁이 하느님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 모양이었던지 그는 자기 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고 통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 두었다. 맨 먼저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 聖 洗 )와 복음을 가져 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참수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고 135) 하였다.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갈망하던 구도의 과정에서 이 땅에 천주교가 전해졌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조상 제사 거부를 통해 서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가치 인정에 매우 인색했다. 그는 보 유론의 입장에서 천주교에 입교하였지만, 그 보유론이 당국과 교회로부터 모두 부정되던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천주교 신앙과 전통적 문화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이때 그가 드러내었던 행 134) 황사영, 백서 17, 45~46행. 135) 달레, 앞의 책, 448~449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3 동은 천주교회를 떠나고 전통문화로 회귀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교자 ( 棄 敎 者 )였지 이른바 배교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조 선에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영예와 함께, 18세기 지식인 중 하나로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와 새 시대의 도 래를 예시해 주는 새로운 문화와의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뇌를 겪었 던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136) 정약종은 1801년 1월 19일 임대인을 시켜 책 궤짝을 포천 홍교만의 집에서 아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되었다. 좌포청은 2월 8일 정 약종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1일부터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저는 본래 이 가르침을 정학( 正 學 )이라고 알았을 뿐 사학이라고 알지 않았 습니다. 압수한 서책은 과연 저희 집에서 나왔습니다. 교주는 제가 문자를 다소나마 이해했던 까닭에 따로 가르치고 전수하는 자가 없었으며 소굴이 나 도당에 관해서는 문을 닫고 홀로 있었던 까닭에 따로 고할 사람이 없습 니다. 제가 만약 사학이라고 인식했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했겠습니까? 그 가르침은 대공지정( 大 公 至 正 )하고, 가장 진실된 지식의 도리입니다. 때 문에 몇 년 전 나라에서 금한 이후에도 처음부터 바꾸려는 마음이 없었습 니다. 비록 만 번 형벌을 당해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 다. 삶을 바라고 죽음을 꺼리는 것은 사람의 일상적 감정인데 어찌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등지고 살고자 하는 데에 이르러 서는 천지간의 죄인이 되어서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도당을 지적하라고 하는데, 조정에서 정도로 인식하고 현인으로 지목하여 관직을 주고 상을 준다면 어찌 가리켜 고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 여 번번이 형륙을 가하니 어찌 고할 수 있겠습니까? 137) 136)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84~85쪽.

44 교회사연구 제42집 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대공지정( 大 公 至 正 )하며, 자신의 신앙을 정도( 正 道 )로, 또한 배교를 의를 등지고 사는 행위라고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우고 가르친 자와 와굴 및 도당은 없고, 체포되지 않은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도 서양과 중국에는 신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다며 138) 천주교 공동체 보호를 위해 끝까 지 함구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남겨둔 기록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즉 나라 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이며, 집에도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 ( 國 有 大 仇 君 也 家 有 大 仇 父 也 )라는 말이었다. 139) 당시 십이자흉언 ( 十 二 字 凶 言 )으로 불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임금과 부친이 천주교 신앙을 금 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임금과 부친의 존재 가치까지 거부하면서, 천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보급하고자 했다.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로의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충효일 맥의 교화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있던 사회에서 충효라는 구래의 가치 보다 더욱 중요한 새로운 가치가 있음을 140) 주장하고, 자신들에게 적용 되는 왕법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절대적인 왕권을 상대화하는 작업을 137)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8) 至 於 敎 主 則 矣 身 粗 解 文 字 故 別 無 師 授 而 窩 窟 徒 黨 則 杜 門 獨 處 故 別 無 可 告 之 人 矣 西 洋 及 中 原 皆 有 神 父 而 此 地 方 別 無 之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9) 이기경의 闢 衛 編 에 작은 細 字 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窮 凶 之 言 云 者 搜 探 文 書 中 渠 之 日 記 有 曰 國 有 大 仇 君 也 家 有 大 仇 父 也 十 二 字 伊 時 諸 臣 兩 司 諸 臺 請 對 施 以 不 待 時 之 律 以 不 忍 筆 諸 文 字 之 意 漏 於 公 私 文 蹟. 이기경, 闢 衛 編, 31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쪽, 각주 105) 재인용.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다. 즉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 태 10, 35-36). 140) 선교사들이 천주를 천지의 大 君 大 父 로 소개하고 천주에 대한 공경이 충 효를 포함하는 더 근원적인 윤리라고 설명한 것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사회 운영에 대한 큰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주라는 존재 앞에 군신, 부자는 평등한 존재가 되고 세도 실현은 천주 공경으로 귀속하기 때문이었다. 천주를 대군, 대부로 인정하여 충효를 포괄하는 새로운 가치로 설정하고 이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 일은 조선 입교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 계와 소통 대립 양상, 167~168쪽).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5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당시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말이어서 조정에 박해의 정당성을 확실히 부여해 주는 사건으로 확 대되었다. 141) 그래서 다른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던 요언혹중죄( 妖 言 惑 重 罪 )보다 더 무거운 범상부도죄 를 적용받게 되었다. 142)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고, 143) 그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 하였다. 그는 순교하러 갈 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라 고 했고, 서소문 밖에 있던 이들에게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 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 아서 행하시오 라고 말했다. 칼에 한 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 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다시 엎드 렸다. 144) 앵베르(Imbert, 1796~1839) 주교는 그가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고 해서 (관례대로 엎 드려서가 아니라 나무토막에 대고 누워서)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하고자 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 라고 145) 하였다. 14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28~129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416쪽 ; 罪 人 丁 若 鍾 文 書 日 記 中 有 向 父 罔 測 之 說 向 國 不 道 之 說 參 鞫 時 原 任 大 臣 金 吾 堂 上 相 率 請 對 以 爲 若 鍾 斷 不 可 晷 刻 容 貸 今 旣 輸 款 當 用 不 待 時 之 律 矣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2일 무신) ; 권엄 등 63인 상소문 중에 乃 有 今 番 窮 凶 極 惡 絶 悖 不 道 之 言 至 發 於 文 書 此 誠 前 古 所 無 之 變 怪 也 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8일 갑자). 142) 丁 若 鍾 則 不 但 爲 邪 術 之 魁 鞫 庭 嚴 問 之 下 一 味 頑 悍 之 死 靡 悔 妖 獰 慝 振 古 所 無 而 於 渠 猶 屬 餘 事 以 渠 梟 心 腸 至 向 君 親 肆 發 凶 言 臣 等 憤 之 已 悉 於 日 前 請 對 而 此 賊 不 可 但 用 妖 言 惑 衆 之 律 當 以 犯 上 不 道 結 案 正 法 ( 승정원일기 97책, 순조 원년 2월 25일) ; 天 主 大 君 也 大 父 也 不 知 事 天 生 不 如 死 祭 祖 先 拜 墳 墓 皆 謂 以 罪 過 甚 至 於 謂 父 爲 大 仇 向 君 上 亦 作 罔 測 之 說 滅 倫 敗 常 莫 此 爲 甚 以 犯 上 不 道 捧 遲 晩 正 法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143) 問 曰 又 向 矣 身 之 父 忍 爲 罔 測 之 說 至 於 向 國 家 肆 發 不 道 之 言 尤 萬 萬 至 凶 絶 悖 苟 有 一 分 秉 彛 豈 忍 崩 於 心 而 筆 諸 書 乎 供 曰 矣 身 自 知 罪 今 始 追 悔 矣 問 曰 矣 身 當 初 何 忍 爲 此 等 凶 言 乎 供 曰 萬 死 無 惜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44) 황사영, 백서 39~40행. 145)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 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