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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저널(10월호).ok 2013.10.4 1:42 PM 페이지50 DK 전문가 연재 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포니의 출현은 참으로 모험이었으나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개발로 포니신화 (legend of Pony) 를 만들었다. 포 니신화 는 훗날 파산에서 기아자동 차를 건져낸 봉고신화 가 나올 때 까지 현대자동차의 상징이 되었다. 울산공장에서 제작된 포니는 대 부분 울산공장 출고소에서 출고되 었지만, 일부 고객들은 서울에 가까 운 출고소에서 차를 받기를 원했다. 현대자동차는 기흥IC 가까운 기흥 읍 중리에 서울출고사무소를 운영 그림 3-7 울산공장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포니운반차-고유모델 포니는 자가용이라 했다. 그만큼 자가용 수요가 늘었기 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부지는 정주 점유하고 있었다. GM코리아로서도 돌파구를 마련하기 영 회장이 일찍이 경부고속도로 제1구간을 시공하면서 위해 대항마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미리 마련한 토지로 알려지면서 그의 선견지명을 칭송 정부는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에서 소형승용차의 가격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기흥IC에서 상당히 떨어진 골 을 2,000달러 내외로 잡았고 현대자동차 기획실에서도 짜기 안쪽 저수지 아래 마련한 토지였으므로 투기꾼들 2,000달러로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실제로 포니가 시 에게도 인기가 없었고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판되기 시작하자 그 가격으로 생산할 수 없음을 알게 되 깊숙한 곳이었다. 그는 서울에 더 가까운 용인시 구성면 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서독의 VW의 딱정벌레 에도 깊숙이 넓은 땅을 마련하였는데, 훗날 현대자동차 (Beatle)와 NISSAN의 닷산(Datsan)이 2,300달러를 넘지 자립의 본산이 되는 마북리연구소가 들어설 자리였다. 않는 실정을 고려할 때 포니의 제조원가는 시판 초년에 이제 포니는 택시만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가용 이미 4,000달러에 달하여 경쟁력이 없었다. 이제 과제는 수요가 훨씬 많아졌다. 현대자동차는 택시용 포니에는 생산단위를 확대하면서 제조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어 페인트칠 한 흑색범퍼를 달고 자가용에는 크롬도금의 세계시장에 뛰어드는 일뿐이었다. 현대자동차는 포니의 빛나는 범퍼를 달아 자가용 고객을 유혹했다. 이 범퍼는 생산원가를 낮추려고 부품업체를 계열화하고 기술지도 새로 세운 [현대정공]에서 제작했는데, 현대정공이 훗날 를 하는 등 원가절감과 판촉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그리 현대모비스로 세계적인 부품회사로 성장하리라고는 정 고 화물자동차의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7년 초 1 주영 회장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장 톤 카고트럭 포터 를 시판한지 얼마 되지 않아 7월 26 이었던 정몽구 씨가 2000년대 세계자동차계의 기린아인 일 3톤 카고트럭 바이슨 을 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트 정몽구 회장이라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림 3럭 시장에서 기아산업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국내 경쟁 7]에서는 기흥출고사무소로 올라오기 위해 국도를 달리 사인 기아산업과 GM코리아에서는 무엇보다도 포니에 는 포니운반차를 보여준다. 경쟁할 차종의 생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GM코리아는 시보레 1700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 위 GM코리아의 카미나는 엔진은 포니보다 컸으나 성능 해 1976년 4월 1,492cc엔진의 카미나를 시판하였다. 그 면에서 뛰어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1976년 동안 한 러나 포니의 인기는 대단하여 승용차 시장의 43.6%를 50 기계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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