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의 교양-한경 (1)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입력2013-04-19 논술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에는 꽤 다양한 종류가 있어요. 그중에서 전 우리의 삶 을 위한 논술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되면서 우리의 삶을 조금 이라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공부! 전 그런 논술공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술 시험은 글쓰기, 글읽기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논술은 깊 은 생각을 길어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저와 함께 할 이 연재는 한 문장을 통해 글을 읽고 쓰는 재미를 느끼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함께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는 한 문장 속으로 들어 가 볼까요. 우리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가 없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백 가지 폐가 간난에 있다 하지만 간난 중에도 심한 간난은 생각 의 간난이다.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 우 리나라는 우선 물자의 간난 때문에 못사는 나라 아닌가. 중국 평원을 우리에게 주어보 라. 미국의 자원을 우리에게 주어보라. 그래 도 못살 것인가. 금수강산 이름은 좋지만 이 마른 뼈다귀 같은 산만을 파먹고는 힘이 날 수도, 생각이 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래도 생명은 물질의 주인이지. 물자 간난의 원인은 인물 간난에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것은 당파싸움으로 인물을 자꾸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베인 나무는 10년이면 다시 설 수 있으나 인물은 죽으면 백 년 길러도 다시 얻기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정신이란 귀한 것이요 생각은 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재목 은 숲에서야 나고 인물은 종교의 원시림에서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종교가 본래 깊지 못하다. 이것은 몽고민족의 통폐다. 원나라가 세계를 휩쓸었으나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가고 만 것은 깊은 정신문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 는 손바닥 같은 반도지만, 그 문화는 아직 살지 않나. 일본이 크게 못 된 것도 그 종 교의 작고 옅음에 있다. 만주족이 중국을 온통 정복해 300년을 갔지만 깊은 것이 없 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의 고유한 종교가 시원한 것이 없이 않은가. 화랑도라 하지만 그 윤리적철학적인 내용은 다른 데서 배운 것이요, 그 외의 것은 이른바 화랑으로 그치고 말지 않았나. 화랑도로 역사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 옅다. 너무 평면적낙천적이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그러면 625의 뜻도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깊은 종 교, 굳센 믿음을 가져라. 그리하여 네가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리라.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중에서
한 문장의 교양-한경 여기서 종교란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 정신을 뜻하는 것이지 특정 종파를 일컫는 것 은 아니에요. 위대한 종교를 낳자는 것은 위대한 생각을 길어내자는 말이에요. 인간 의 놀라움은 눈앞에 있는 난관에 굴하지 않고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여 결국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데 있지 않나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하지 못 하죠. 인간은 생각하는 힘을 갖고 있어 문제가 생기면 기어코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 어내곤 하죠. 그런 문제 해결 과정이 축적되면 문명과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고요. 가 령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기, 타고 다니는 자동차, 몸이 으슬으슬 떨릴 때면 먹는 감 기약 등은 다 생각의 열매들이에요. 그러니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조 금 비틀어 이렇게 얘기해도 좋을 것 같군요. 생각이야말로 힘이다. 생각이 멈추면 우리의 문명도, 진보도 함께 멈춥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는 말의 의미도 여기에 있어요. 논술은 바로 생각하는 힘을 평가하는 과목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여 러 문제거리를 던져 주고 학생들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참신한 대안을 제 시하는지 확인하는 시험이죠. 그러니 논술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각의 힘을 길러야 해요. 아마 지금 이렇게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누가 생각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는 줄 아나? 어떻게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지가 중 요하지 그렇죠. 그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요? 멋진 근육이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체력 단련장에 가거나 아령을 사죠. 정신의 근육을 기르는 일 도 마찬가지에요. 정신을 단련할 수 있는 정신 전문 단련장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쓴 탁월한 글! 좋을 글을 읽고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는 것만큼 생각의 힘 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어요. 조금 어렵지만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필립 네모_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생기 는 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물음에서 시작되는가? 아니면 먼저 어떤 책이나 사상을 만나 시작되는가? 엠마누엘 레비나스_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슨 충격이나 더듬거림에서 시작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분리나 폭력 장면 또는 지독하게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 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책 - 꼭 철학책이 아니라도 - 을 읽으면서 그러한 충격 들이 물음이 되고 문제가 되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국민문학이 매우 중요 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국민문학을 통해, 단순히 말을 배우는 문제가 아니라 참다운 삶 곧 지금 내 앞에 없어도 결코 유토피아만은 아닌 그런 삶을 본다. 흔히 책을 정 보창고나 지식을 얻는 도구 또는 지침서로 생각하지만 사실 책은 우리의 존재양식이 다. 책의 존재론적 성격을 무시하면 안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 - 또는 정치 - 을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 집착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다. 억지로 영혼을 아름답게 하려는 의도나 이상적인 규범을 찾으려는 의도가 없이도 그렇게 된다는 말 이다. -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중에서 인생을 살며 겪은 여러 경험이 독서과정을 통해 깊은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소
한 문장의 교양-한경 리에요. 레비나스의 말처럼 좋은 글은 좋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탁월한 문장에는 탁월한 생각을 길러 내는 힘이 있어요. 논술시험에서 제시문을 주는 이유도 이 때문 이에요. 제시문은 여러분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들이죠. 글을 읽을 수 있는 독해력,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좋은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사고력이야말로 논술에 있어 꼭 필요한 능력들이에요. 난 은율 학생이 이런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에요. 그래서 오늘부터 매주 좋은 문장을 하나씩 소개하려고 해요. 은율 학생이 생각의 힘 을 기를 수 있을 만한 문장을요. 깊은 생각을 담은 글,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 초대하 는 글, 우리가 깊은 생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글, 그런 문장을 소개하는 것이 이 편지의 목적인 셈이에요. 재밌는 예를 들어볼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너무 나 유명한 말이죠. 하지만 이 문장의 본뜻이 무어냐 묻는다면 의외로 대답하기 쉽지 않을 거에요. 무슨 뜻이긴, 예술은 시간을 거슬러 생명력을 갖는 가치 있는 것이라 는 말 아니겠어? 예술을 찬양하는 것 보니 보나마나 어느 예술가가 한 소리겠군 혹 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저 말의 주인 공은 히포크라테스라는 의사예요. 서양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죠. 인생은 짧지만 기술(의술)은 길다 이것이 그가 본래 의도한 의미에 가까워요. 그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의 위대함을 찬양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제 저 문장을 읽 을 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지 않겠어요? 인간의 삶에서 기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란 어떤 가치를 갖는가? 이처럼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부분 본 뜻을 오해하고 있는 문장을 뽑아 그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이게 매주 우리가 함께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목표란 생각하며 글읽기 혹은 글 읽으며 생각하기 정도 되겠군요.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은 율 학생에게 나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심지어 주입하는 것은 결코 이 편 지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내가 소개한 문장들을 읽고 은율 학생이 스스로 깊 은 생각에 빠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에요. 은율 학생 주변에 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생각하는 힘이 필요 해요. 성실한 정신의 노동만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죠. 책상 앞에 서 흘리는 굵은 땀방울만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에요. 좋은 삶 이란 늘 좋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생각 하는 사람이라야 산다 는 말처럼 요.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2)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입력2013-04-26 오늘 만날 문장은 소크라테스(Socrates BC469?~BC399)의 것이에요. 너무나 도 유명한 철학자죠.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철학 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바로 머리가 아프다고요? 아이고, 그럴 만도 해요. 철학자들이란 쉬운 말도
한 문장의 교양-한경 어렵게 꼬아서 하는 데 특별한 재 능을 가진 별난 사람들이니까요. 하 지만 걱정 마세요. 오늘 공부할 문 장은 이미 여러 번 들어본 말일 테 니까요. 바로 gnothi seauton, 그 노티 세아우톤 입니다. 번역하면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죠.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단순한 명제 가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 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소크라테스 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저 말은 사 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 둥에 새겨져 있던 문구였어요. 당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 을 만큼 유명한 말이었죠. 철학사가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저 말의 주인공은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 한 명이었던 탈레스였다고 해요. 물론 이 역시 정 확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죠. 그 렇다면 왜 저 말이 소크라테스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소크라 테스가 저 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에요.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 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언젠가 한 사람이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 고 해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점을 본 것이죠. 그런데 떡하니 소크라테스보다 지혜 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겠어요.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고민고민 끝에 그는 신탁의 내용을 시험해보기로 했어요.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도대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이 다소간에 현자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터인데. 그렇다면 신 이 나를 두고 가장 현명한 자라고 단언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일 까? (중략 ) 그러다가 저는 그야말로 겨우겨우 이와 같은 식으로 그 뜻을 알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제가 찾아간 겁 니다. 그건 그 신탁에 대해, 어디서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경우에 논박을 하고, 그 신탁의 응답에 대해 여기 이 사람이 저보다도 더 현명한데도, 당신께선 제가 그러하 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선언을 하려고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한 문장의 교양-한경 플라톤 씀, 박종현 옮김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아 테네에는 지혜롭다고 이름난 사람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질문에 척척 대답해줄 사람을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요. 누구도 그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자신이 엄청나게 박식하다고 자신하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 몇 마디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죠. 이렇게 사람들 과 대화하던 중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됐어요. 제 마음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보다야 내가 더 현명하지. 그건, 실은 우리 중에서 어느 쪽도 훌륭하디 훌륭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이 사람은 자기가 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야, 사실상 내가 알지 못하듯, 알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 때 문이지. 어쨌든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사소한 한 가지 것으로 해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 라고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소크라테스가 현명한 사람이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는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을 너 자신의 무지함 을 깨달아라 는 말로 이해했어요.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무지( 無 知 )의 지( 知 )!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요? 지혜 없음의 지혜! 혹시 지금 이런 생 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니 무지( 無 知 )의 지( 知 )라니 이게 무슨 말장난이 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말이 아니에요. 앞에서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 버지라고 부른다는 얘길 했었죠? 우리가 철학 이라는 말로 번역한 영어 필로소피 (philosophy)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왔어요. 필로 와 소피아 는 각각 사랑하다 와 지혜 를 뜻하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필로소피아의 뜻은 무엇인가 요? 그렇죠. 필로소피아란 지혜를 사랑함 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스스로가 이미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과 아직 무지하다 고 생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를 사랑할까요? 자신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 는 사람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을 거에요. 공부란 스스로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죠. 그러니 지혜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사람이 추구 하는 것이에요.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혜를 얻기 위한 첫 걸 음인 셈이죠.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붙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 의 무지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에는 단지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라는 뜻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라는 청년과 대화하는 도중 너 자신을 알 라 는 말에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중략 ) 자 신을 알려면, 혼을 들여다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혼의 훌륭함, 즉 지혜가 나타나는 혼의 이 영역을 들여다봐야 (하네) -<알키비아데스 Ⅰ>, 플라톤 씀, 김주일정준영 옮김 인간은 영혼, 혹은 이성을 갖고 있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지 않나요? 인간에게 이 성이 있다는 건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뜻하는 것이 죠.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그 가능성을 알라는 말이기도 해요. 그 러니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두 가지 상반된 호소로 이해할 수도 있겠네요. 먼저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달으라는 요구입니다. 다음은 우리 안에 지혜를 알게 해 주는 이성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인간은 느리더라도 조금씩 진보 할 수 있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에요. 이성을 갖고 있는 덕분이죠. 소크 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무지함과 불완전함을 깨닫지만 거 기서 멈춰 좌절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그 말을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가르침으로 이 해하기도 했으니까요. 지혜를 찾게 해줄 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멈추 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라! 그러니 어떤 인간도 오늘의 누추함만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되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한 마디였습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3) 플라톤, 동굴의 비유 입력2013-05-03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 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동굴의 비유> 중에서 (플라톤) 영화 매트릭스 (1999)의 주인공 네오는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 습니다. 모피어스라는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믿기 힘든 이 야기를 들려줍니다. 현재는 1999년이 아니라 2199년이며, 지구는 이미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지배하고 있고 인간은 인공 인큐베이터 안에서 사육되고 있다는 것이 었죠. 컴퓨터에 의해 뇌에 직접 주입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에 갇혀 있다는 얘기 도 듣습니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건네줍니다. 파란 알약은 지금까 지의 모든 기억을 잃고 매트릭스 안에 머물게 도와줍니다. 반면 빨간 알약은 매트릭 스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로 돌아오게 해줍니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믿어보기로 했 습니다. 빨간 알약을 먹은 것이죠.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네오에게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이렇게 인사를 건넵니다. 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
니다(Welcome to desert of the real). 진실은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이런 상상력은 사실 오래된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됐 느냐고요?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00년은 넘었습니다. 플라톤(BC 427~BC 347)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 으니까요. 그는 서양 역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천재 적인 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라는 현대 철학자는 서양 철학 2000년은 모두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 과할 뿐 이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플라톤은 엄청나 게 유명한 스승과 제자를 둔 행운아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만나 본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스승이며,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또 한 명의 천재 철학자가 플라 톤의 제자입니다. 스승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은 매우 많은 책을 남겼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 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대부분 제자 플라톤이 남긴 기록 덕분입니 다. 한편으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플라톤의 책은 내용이 그리 딱딱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비유적인 이야기로 설명하는 데 탁월한 재능 을 가진 사람이었죠. 그가 남긴 수많은 이야기 중 가 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국가 라는 책에 들어 있는 동굴의 비유 입니다. 우리의 성향을 이런 처지에다 비유해 보게나.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 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 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 국가 중에서(박종현 옮김) 동굴 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동굴 벽만 쳐다보도록 묶여 있습니다. 뒤에는 불이 피어 있고 그 앞으로 여러 모양의 인형들이 지나다닙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벽에 비친 인형의 그림자뿐입니다. 그림자를 진짜(real)라고 착각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우연히 포박을 끊고 동굴 밖에 나가게 됩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 에서 가상세계에서 탈출한 네오처럼 진짜 세상 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어리둥절했을까요. 평생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들이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진실을 안 그 는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갑니다. 동굴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아직도 그림자를 실물 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진실을 전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에 게 돌아온 것은 환영과 감사가 아니라 비난과 욕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중략) 그렇지만, 만약에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 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도 하기 전의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 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 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 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 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 국가 중에서 밝은 곳에 있다 갑자기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오니 더듬거리며 앞을 잘 보지 못했 나 봅니다. 역설적으로 진리를 깨달은 이후, 그는 오히려 일상적 삶(동굴 속 생활)에 더 서툴러졌습니다. 동굴 속 사람들이 그를 못마땅해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아마도 이렇게 투덜거렸겠죠. 우리가 지금껏 속아 왔다고? 자신만이 진리를 안다고? 앞도 제대로 못 보고 저렇게 비틀거리는 사람이? 동굴 속 사람들은 지금 스스로가 무지 한지 모릅니다. 평생 봐온 그림자를 두고 가짜니 거짓이니 말하는 사람이 곱게 보였 을 리 없습니다. 조금씩 불만을 토해내던 이들 중 누군가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을 죽여 버리자! 마치 소크라테스를 고소하고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처럼요. 진리를 남들보다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전한다는 건 정말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인 듯합 니다. 우린 이 이야기에서 진리는 감추어져 있으며, 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실제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플라톤은 이 세계를 현상계 라고 부릅니다)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이데아(idea)라는 진리는 형상계 라는 곳에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 렇게 두 세계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영화 속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와 실제세계 가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요. 이를 두 세계론(two-worlds theory)이라고 합니다. 우 리가 사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니!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플라톤의 생각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닙니다. 철학자 남경희 님의 말을 들 어볼까요? 플라톤이 말한 형상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나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으리라 우리가 믿는 완전한 실현태를 의미한다. 철학이나 학문의 목표, 나아가 윤리적 실천 의 목표는 이런 실재자들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실재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인간 은 영원히 수인의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틀 속에서 무반성적으로 사 는 삶이란 그림자의 세계에 안주하는 삶인 반면, 철학적인 삶이란 빛 속에서의 삶 또는 빛 속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 플라톤-서양철학의 기원과 토대 (남경희 씀)
두 세계를 가정하는 것은, 현실과는 다른 이상향을 세우는 일은, 현실을 아직은 부족 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어줍니다. 요즘 긍정의 힘 을 강조하는 분이 많은데,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아마 좋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 습니다. 비판이 전제되지 않은 긍정은 사람들을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 문이죠. 현실에 대한 비판적 투덜거림, 진보를 위해선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비 판이라는 건 건설적이어야 합니다. 플라톤이 옹호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비판, 이 상향에 도달하기 위한 비판입니다. 비판에 충실한 공부, 애정 어린 고민이 필요한 이 유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4) 플라톤의 시인추방론 "모든 시인은 모방자들이다" 입력 2013-05-10 15:02:20 수정 2013-05-10 15:02:20 이번 주제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 입니다. 시인을 추방하자니. 참 엉뚱한 말입니다. 시인만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 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서 시) 20대 중반인 시인이 바라는 것은 부나 명예가 아닙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과 약자에 대한 사랑뿐이 었죠. 맑고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시인이란 인간에 대한 살뜰한 애정을 가진 이들입니다. 누구도 거 들떠보지 않는 거지 아이의 가련한 효심을 시인만은 알아봅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 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 삼, 장편 2 전문) 시인들은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소 박한 것들에 감사 할 줄도 압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 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 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평생 가난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고까지 치르며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시인은 고 된 삶이 소풍처럼 즐거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추방하자니. 플라톤 이 사람, 정말 큰 일 낼 사람입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를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저런 과격한 주장을 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에요. 먼저 플라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아보는 게 순서입니다. 시인추방론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이데아론 이라고 불리는 플라톤의 진리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세계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현상의 세 계, 감각적 사물의 세계이고, 두 번째 세계는 정신의 사유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이념의 세계입니 다. 이 이념의 세계는 근원적인 형태의 세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현실의 감각적 세계를 있게 하는 존 재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는 수많은 삼각형 형태의 사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삼각형들 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요. 내가 가진 삼각자와 옆집 다민이, 동생 다연이가 그린 삼각형의 모습은 확 실히 서로 다를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다양한 삼각형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삼각형이라는 하나의 원형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형태의 삼각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의 삼각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현상이 가장 완전한 자신의 원형, 즉 원래 의 형태를 가지는데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고 부릅니다. 모든 현실의 사물은 이데아를 나누 어 가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식물들은 식물의 이데아를 조금씩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식물로 분 류될 수 있는 것이고,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에 책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이데아는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닌 이성의 활동을 통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데아를 볼 수도 만질 수 도 없지만 이성의 능력을 동원하여 이데아를 그려 낼 수 있습니다. (서용순 지음,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중에서) 지난주에 살펴본 동굴의 비유 를 기억하나요? 동굴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와 진짜 세계가 무엇인지 깨닫는 이야기였죠. 동굴의 비유는 바로 이데아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마치 동굴 안에 사는 사람과 같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보고 만지는 것들은 실은 허상에 불과한 것들이죠. 진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동굴 밖)에 있습니다. 현 실 너머에 있는 진리를 그는 이데아라고 부릅니다. 현실은 그 이데아라는 진리를 모방한 그림자에 지 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죄다 불완전하죠. 가령 누구나 완벽한 이상형을 꿈꿉니다. 하지만 처음엔 아무리 멋져 보이는 사람도 만나보면 실망스 럽고 아쉬운 부분은 있기 마련입니다. 인기 많은 연예인을 만나면 다를 거라고요? 아닙니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부족한 부분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결국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플라톤 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현실이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 이라고, 완벽한 사람(사람의 이데아)은 현실 너머에 있다고 말이죠.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현실에는 없으며 오로지 이성을 통해 상상해낼 수 있을 뿐인 거죠. 이데아론을 이해했다면 플라톤이 예술을 비난한 이유를 아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이데아를 알게 해주기는커녕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을 다시 모방할 뿐이라는 게 플라톤 의 생각이었습니다. 플라톤 : 답답하긴. 가령 장인이 침대를 만든다 하세. 먼저 뭐가 필요하지? 무턱대고 톱과 망치를 휘 두르면 침대가 만들어질까? 아리스 : 아니죠. 먼저 설계도가 있어야죠. 플라톤 : 그렇지. 장인의 머리속 설계도를 침대의 이데아라 부르기로 하세. 장인은 이 설계도에 따라 평생 수백, 수천 개의 침대를 만들어낼 걸세. 물론 침대들은 모두 이데아의 모방이겠지?
아리스 : 예. 그것도 물질이라는 불순물이 섞인 불완전한. 플라톤 : 자, 이제 어떤 환쟁이가 붓과 물감으로 이 침대를 그린다고 하세. 그건 뭘하는 걸까? 아리스 : 당연히 침대를 모방하는 거죠. 플라톤 : 그렇지. 그나마 또 한번 불완전하게 말일세. 결국 예술이란 가상의 가상, 그림자의 그림자 란 얘기 아닌가? 이렇게 예술은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는 거라네. 알겠나? (진중권 지 음, 미학 오디세이 1 중에서)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므로 결국 예술은 그 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예술이 진리를 알려 주기는커녕 오 히려 진리(이데아)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여긴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즐거움에 취해 진리를 망각하는 삶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술에 취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 철학자)으로서 아테네 시 민들이 예술이 제공하는 즐거움과 향락에 취해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게을러지면 큰일이라고 걱정했 습니다. 그가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 ) 시가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기에, 우리가 그때 이 나라에서 시를 추방한 것은 합당했다는 데 대한 변 론이 이것으로써 된 것으로 하세나. 우리의 논의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니까 말일세.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국가 중에서) 물론 시대적 맥락도 있습니다. 본래 아테네에서 교육은 오랫동안 서사시와 비극 등 문학이 담당했습 니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철학 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 방식이 등장하게 되었죠. 즉, 문학이라 는 이전의 교육방식과 철학이라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충돌하던 때, 플라톤은 철학의 입장에서 문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5) 르네 지라르 "오직 소설가들만이 욕망의 모방적 성 격을 드러내준다" 입력 2013-05-21 10:39:09 수정 2013-05-21 10:39:09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존 레넌이 부른 이매진(Imagine) 이라는 곡의 일부입니다. 내 용은 이렇습니다.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욕심을 부릴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 한 형 제처럼 / 모든 사람이 /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봐 요. 누군가의 탐욕과 다른 누군가의 배고픔, 그 바탕에 깔린 소 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가수가 본 아픈 현실입니다.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는 호소도 잊지 않습니다. 이 노래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이 이렇게 포개져 있습니 다. 예술은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현실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를 추방해야 한다. 지난주에 살펴본 시인추방론 (플라톤)의 주된 논리입니다.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요? 예술은 분명 현실을 담고 있죠. 현실과 무관한 시, 삶과 동떨어진 노래에 우리는 감동하지 못합니다. 예술이 현실을 단순히 모방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은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진 실을 알려주곤 합니다. 좋은 예술작품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진실을 보게 해주고, 자신과 세계를 새 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 결과 자신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죠. 현실에 대한 단순 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예술, 그런 예술은 하나의 작은 혁명과도 같습니다. 존 레넌의 저 노래처럼요. 예술이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비판은 그래서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전해주는 위대한 예 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만나볼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심지어 예술만이 진리를 보여준 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현실이 아니라 소설 속에 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이라는 책에 들어 있는 그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볼까요? 낭만적인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 하거나,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지만, 자신의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거의 신에 가까운 자아의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사실상 타인으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 이 도그마들은 현대인이 열렬히 애착을 지니고 있는 욕망의 자율성 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환상을 옹호하고 있다. ( ) 낭만주의 작가들이나 신낭만주의 작가들과 달리, 스탕달이나 플로베르나 세르반테스 같은 작가들은 그들의 위대한 소설작품 속에서 욕망의 정체를 밝 히고 있다.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중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먹고 싶
어 할 때,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할 때, 그 식욕과 소유욕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요. 즉, 스스로를 욕망의 주인으로 여깁니다. 지라르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욕망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날씬 한 모델이 선전하는 건강음료를 마시고 싶어하는 여성을 생각해보죠. 그녀가 원하는 건 건강음료라 고, 욕망의 대상은 다름아닌 음료수라고 말하는 게 상식적이겠죠. 하지만 지라르라면 다르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녀가 실제로 욕망하는 것은 건강음료가 아니라 그 모델이라고요. 그 여성은 건강음료 를 통해 날씬한 모델과 같아지고 싶은 것이지 건강음료 자체를 욕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료수는 수 단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건 날씬한 모델입니다. 기사 이미지 보기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 주체-욕망매개자-대상 이라는 삼각형 구조를 갖는다는 게 지라르의 주장입니 다. 우린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욕망하는 것을 따라서 욕망하고 있습니다(모든 욕망이 다 이런 모방욕망적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지라르는 욕망과 욕 구를 구분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에 대해 느끼는 것은 욕구에 해당합니다. 반면 텔레비전 드라마 에 나온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욕망에 가깝습니다). 중요 한 것은 모방욕망이라는 진실이 일상적으로는 감춰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주 체가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낭만적 거짓 입니다. 인간이 진실을 발견하는 건 오히려 소설을 통해서 입니다. 지라르는 이를 소설적 진실 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지금 플라톤과는 전혀 반대의 주장을 하 고 있습니다. 진실은 오로지 예술(소설)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재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 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는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 다.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중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에서 지라르는 이와 같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소설을 분석합니 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등의 작품이 진실을 보여주는 위대한 소설들입니다. 이 작품들에서 등장 인물 은 항상 욕망을 타인으로부터 빌려옵니다. 예를 들어 돈키호테 를 읽으며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 취급하곤 합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단순한 광인이 아닙니다. 극 중 돈키호테는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즉, 아마디스를 욕망하고 있습니다. 위대 한 기사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돈키호테를 지배하고, 그는 아마디스의 행동을 충실하게 모방합니
다. 전설 속 인물을 흉내내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우스꽝스러운 기행의 원인은 바로 여 기에 있습니다. 돈키호테 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모방욕망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 밑바탕에는 타인을 향한 질투와 경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통찰, 이것이 지라르가 위대 한 소설들을 통해 발견한 삶의 진실입니다. 타인과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한 우리 안의 갈등과 싸움, 끝없는 경쟁의식의 원인을 우린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곤 끝없는 갈 등과 싸움 속에 살아가겠죠. 플라톤이 비난한 대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데 급급한 소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 은 소설도 있습니다. 우린 때로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작품들을 만나곤 합니다. 감춰 진 진실을 드러내주는 소설, 우리를 진리로 더 가까이 이끄는 예술. 지라르는 그런 예술이 있다고 말 합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는 모르지만요. 문득 저는 누구를 모방하고 어떤 것을 욕망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해줄 좋은 소설이나 하나 찾아봐야겠군요.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6) 만인의 1인에 대한 폭력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대해 입력 2013-05-24 15:00:48 수정 2013-05-24 15:00:48 지난주엔 르네 지라르와 함께 욕망의 본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인간이란 마치 동생의 장난감을 기어코 빼앗으려 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정작 빼앗은 후에는 이내 흥 미를 잃고 장난감을 내던져버리는 그런 심술궂은 아이 말이죠. 정말 심통맞군! 이렇 게 비난하고 말 일은 아닙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아니, 지라르는 저 아이가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아이가 진짜 로 원한 건 장난감이 아니라 동생처럼 재밌게 노는 것입니다. 장난감을 원한 것도 그것을 가지면 자신도 동생처럼 재밌게 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욕망의 진
짜 대상은 장난감이 아니라 동생인 셈입니다. 장난감은 동생처럼 되기 위한 수단인 것이고요. 장난감을 향한 아이의 욕망이 실은 동생이라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 것 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이 지라르가 본 욕망의 본모습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욕망 혹은 열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혹은 가끔씩 모방적인 것이 아니 고 그야말로 항상 모방적이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중에서)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이라는 책에서, 욕망이 모방적이라는 진실 이 드러나는 공간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진짜 모습은 소설 에 담겨 있습니다. 소설을 분석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지 만 그는 단지 문학작품 분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모방욕망의 무대를 몇몇 소 설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로 확장합니다. 바르베리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을 쓰신 뒤에 선생님이 왜 인류학에 빠 져드셨는지 그 과정을 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라르 : 방금 언급하신 그 책은 유럽 소설가들을 연구한 책입니다. 그 소설가들은 인간의 욕망과 경쟁이 모두 모방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책을 쓰고 난 뒤 저는 그 욕망이 진짜로 보편적인 것인지, 다시 말해 서구가 아 닌 문화권에서도 혹은 고대 문화에서도 이런 욕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지 정말 궁 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류학의 고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모방의 흔 적을 찾는 일에 문자 그대로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을 어떻게 분 류해야 할지도 잘 몰랐습니다. 집단 살해와 집단 폭력에 관한 제 주장을 정리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중에서) 긴 연구를 거쳐 지라르는 인간의 역사란 곧 모방욕망의 역사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역사의 굽이마다 모방욕망의 영향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니까요. 문제는 상호 간의 모방욕망이 사람들의 관계를 꽤나 삭막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모방욕망 의 고리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경쟁에는 끝이 없습 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은 심화됩니다. 한 모방자가 그의 모델들에게서 그들 공통의 욕망의 대상물을 빼앗으려 할 때 그 모델은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이리하여 욕망은 양측에서 모두 강해진다. 이 모델 은 이 모방자의 모방자가 되는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적대자들을 점점 더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갈수록 완벽해져가는 이런 이중 모방 속에서는 모든 역할은 서로 바뀌고 서로를 반사한다. (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중에서) 명품을 가진 친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렵게 돈을 모아 같은 제품을 삽
니다. 욕망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명품이라는 사물은 욕망의 진정 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욕망한 것은 타인, 즉 자신의 친구였으니까요. 친구처 럼 되고 싶은 것이지, 그가 가진 사물을 단순히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 방욕망은 다시 시작됩니다. 게다가 친구라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또한 이 내 욕망 경쟁에 참여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도 경쟁을 시작합니다. 모방하는 자의 따라잡기와 모방되는 자의 따돌리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모방욕망은 사람들 사이의 욕망 경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욕망 경쟁의 끝이 상호폭력의 구렁텅이라는 데 있습니다. 같은 대상 을 향하는 두 욕망은 서로의 장애물이 되고,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모방>은 자 동적으로 갈등으로 귀착 되고 맙니다(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사 회적 폭력은 증폭되고 공동체는 위기에 빠집니다. 인간 폭력의 주요 원인은 모방적 경쟁 관계다. 인간의 폭력은 우연한 결과도 아니 고, 공격 본능 이나 공격 충동 의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모방적 경쟁 관계가 심해 지면 경쟁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경쟁자들은 서로의 소 유물을 빼앗고, 서로의 배우자를 유혹하고, 심지어는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중에 서) 모방욕망 때문에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지라 르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방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인류는 어떻게 해결해온 것일까. 대답을 찾기 위해 그는 세계 각 지역의 신화와 전설을 연구합니다. 그러고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죠.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공통 된 폭력 해소 방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 을 만인의 일인에 대한 폭력 으로 변환하는 것이었죠.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참 간단한 방법입니 다. 상호 간의 폭력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슬쩍 한마디 해주면 됩니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야. 모두 저 사람 잘못이지. 그렇습니다. 희생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 향하게 한다는 말이다. 희생 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들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 부분적인 만 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소수의 희생양을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합니다. 모든 잘못은 희 생양에 돌리고 그들을 처형함으로써 사람들은 그간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소거 합니다. 즉,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파멸로부터 구원받습니
다.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희생양으론 보복의 가능성이 없는 약자가 좋습니 다. 주로 외국인, 여성, 아이, 장애인 등이 선택됩니다. 이들에 대한 꽤 세련된 가공 과정도 필요합니다. 희생양을 죽어 마땅한 존재로 만들거나 신성한 순교자로 포장해 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양에 대한 사회적 폭력의 추악한 본모습을 감출 수 있으니까 요. 지라르의 말을 듣자니 좀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지라르의 말을 무작정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이론이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고민 해볼 일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7) E.H.카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입력 2013-05-31 14:42:25 수정 2013-05-31 14:42:25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정체성이란 어디서 오나요? 다양한 답이 있죠. 우선 몸 은 나 를 이루는 중요 요소입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어제까지 남성이었던 사 람이 자고 일어났더니 여성으로 바뀌어 있다고 해보 죠. 그가 이전과 동일한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 을까요? 사회적 관계 또한 자기정체성의 중요한 근거 입니다. 나 를 알고 기억하는 내 주변 사람들, 가령 부모님이나 친구와의 관계없이 나 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몸이나 사회적 관계만큼, 혹은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 입니다. 사고로 기억상실증 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어제의 자신과 동일한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체의 변화가 전혀 없더라도, 사회적 관계가 고스란히 유지되어 있 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그 사람이 기억하지 못 한다면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역사 를 안다는 건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역사는 공동체의 기억이니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는 공동체나 자신을 잃어버리긴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더 듬어보는 것만큼이나 집단적으로 공동체의 역사를 되 짚어보는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역사를 기 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그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는 말이 있죠.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나라는 과 거의 잘못을 딛고 일어서 진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 역사의식 을 갖고 있는지가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동
체의 과거를 잘 살펴봐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이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마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카(E H Carr, 1892~1982, 영국의 역사학자)라는 학자가 쓴 역사란 무엇 인가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은 1장에 들어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바로 1장 내용입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의 백미는 저 뒤 5장입니 다. 5장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1장의 정의를 수정합니다. 1장 내용은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 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5장까지 읽어야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5장 내 용은 다음주에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 볼까요. 카는 우선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합니다. 실증 주의적 역사관이란 역사학을 객관적 사실의 집적( 集 積 )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 사적 사실을 모아 잘 정리하는 것, 그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보는 것이죠.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역설하는 실증주의자( 實 證 主 義 者 )들은 그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여 이 사실 숭배를 조장했다. 우선 사실을 확인하라, 그런 다음 사실에서 결론을 추출해야 한다 고 실증주의자 들은 말했다. 영국에서는 이 역사관이 로크(Locke)에서 러셀(Russell)에 이르는 영국 철학의 지배적 조류인 경험론의 전통과 완전히 조화되었다.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 로 한다. 사실이란 감각적인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부터 관찰자에게로 부딪쳐 오는 것이며, 따 라서 관찰자의 의식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상식적인 관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 이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 集 成 )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된다. 역사는 허구적 공상으로 이뤄진 문학과는 다릅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니까요. 그러니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카의 말대로 우리의 상식에 잘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카는 이 입장을 못마땅해 합니다. 왜 일까요? 역사가의 주관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란, 그의 생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사실은 그 자체로써 말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역사가가 사실에 입김을 불어넣 었을 경우에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실에 어떤 순서, 어떤 문맥으로 발언을 허용하느냐 하 는 것도 역사가의 소임이다.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한다. 그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그 시대에 얽매여 있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말 그 자체, 즉 민주주 의, 제국( 帝 國 ), 전쟁, 혁명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뉘앙스를 지니며, 역사가는 이런 말들을 그 뉘앙스 에서 분리할 수 없다. 역사서술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 니까요. 가령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책을 쓴다고 가정해볼까요? 몇 년도에 태어났고 어떤 업적을 남겼 는지 등 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이야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특 정 관점을 갖고 그 사실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가는 더 중요한 사실과 덜 중요한 사실을 구분하고 그 것을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무미건조한 연대표 를 작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렇다고 역사서술이 완전히 주관적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주관적 해석 작업이 될지언정 역사는 언제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사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역사서술은 하나의 문학이 될 따름입니다. 그렇게 역사인 척하는 문학은 늘 역사왜곡을 낳기 마련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이 달라 보인다고 해서 산은 원래 객관적으로 형태가 없다든가, 무한한 형태가 있다든가 할 수는 없다. 역사상의 사실을 설정할 때 필연적으로 해석이 작용한다고 해서, 또
현존하는 해석이 어느 것이고 완전히 객관적이 아니라고 해서 어느 해석이든 차이가 없다든가, 역사 상의 사실은 원래 객관적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기가 연구하는 시대를 볼 때 반드시 자기 시대의 눈을 통해서 보고, 과거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현재의 문제에 대 한 열쇠로서 작용하는 것이라면, 역사가는 아주 실용주의적 사실관( 事 實 觀 )에 빠져서, 옳은 해석의 기 준이 현재의 어떤 목적에 대한 적합성이라는 주장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이런 가설을 받아들이면, 역 사상의 사실은 무( 無 )가 되고 해석이 전부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역사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주관적일 수도 없습니다. 이제 카는 두 입 장을 절충해 역사에 대한 저 유명한 정의를 내놓습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는 뿌리 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여기서 역사란 무엇인 가? 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을 하기로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 하나 가 되는 것처럼 역사도 과거 사실과 현재 역사가가 만나 나누는 대화를 통해 완성됩니다. 역사는 자 신의 입장에서 과거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 사실은 다시 역사가의 관점을 바꿉니다. 역사는 이렇게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을 거쳐 서술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역사서술은 모두 그런 대화의 산물입니다. 어떤 역사서술을 읽을 때, 그것이 과거 사 실을 객관적으로 다뤘는가와 함께 서술자의 관점이 무엇인가도 꼭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8) E.H.카 "어떤 역사를 쓰느냐가 사회의 성격을 암시한다" 입력 2013-06-07 15:11:40 수정 2013-06-07 15:11:40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2) 뜻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 지난주에 이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 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복습을 해볼 까요. 개인에게 기억이 그런 것처럼 공동체에는 역사가 정체성의 뿌리입 니다. 한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를 어 떻게 기억하고 교육하는가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의 저자 E H 카 역시 이 렇게 말합니다. 한 사회가 어떤 역 사를 쓰느냐, 어떤 역사를 쓰지 않느 냐 하는 것보다 더 그 사회의 성격을
그러니 오늘의 한국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됩니다. 우린 무엇을 기억 하지 않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요? 역사를 어떻게 교육하는지를, 어떤 역사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 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역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봤습니다. 역사 서술이란 단순하게 과거의 사실을 모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역사가 마음대로 주관적 해석을 해서도 안 됩니다. 역사를 쓰는 건 오늘을 사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 은 일입니다. 오늘의 입장에서 과거를 조명하고, 과거를 통해 오늘을 반성하는 것. 역사 서술이란 그 런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대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 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인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 자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듭니다. 주관적 해석자인 역사가가 과거 사실과의 대화를 거쳐 구성하는 역사가 과연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역사가와 과거 사실이 대화를 나눈다면 그 대화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 는 것일까요? 아마도 역사가일 것입니다. 최종 서술자는 결국 역사가이니까요. 그렇다면 아무리 과거 사실과의 부단한 대화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역사는 끝내 역사가의 역사가 돼버립니다. 주관적 해 석은 불가피해지고 자칫 잘못하면 도를 넘어선 역사 왜곡마저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역사가가 객관적 입장을 취하면 되는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가 또한 사람인 이상 어떤 입장을 미리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나름의 문화적 이해와 배경지식, 신념체계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석할 때는 그러한 배경 이해의 틀 속에서 해석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죠. 카 또한 이것을 지적합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여러 나라에서 그 축적에 참 가해온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즉, 그 행위를 연구하는 당사자들만 하더라도 진공 속에서 행위한 고 립된 개인이 아니라 과거 어느 사회의 문맥 속에서, 또 그것에 충동을 받으면서 행위하고 있었던 것 이다. ( ) 그는 다른 많은 개인과 똑같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대변인이다. 그런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카의 말대로 역사가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입니다. 그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를 해석의 틀로 갖고 있기 때문이죠. 역사 논쟁이 특정 역사가에 대 한 마녀사냥으로 흘러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 서술은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니 까요. 가령 동아시아에서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역사 서술 밑바탕에는 (역사서술가의 왜곡된 시선 이전에) 많은 일본인의 잘못된 역사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 서 최근 우리 사회의 역사 논쟁이 특정 집단에 대한 비난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어떤 역사 서술이 어느 정도 사회적 호응을 얻었다면 그것은 이미 한두 사람의 역사서술가의 문제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사가는 그리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역사가에 따라 역사 서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 다. 그러니 역사의 객관성은 꽤나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칫 역사는 주관적 왜곡에 불과한 일이 되버릴 수도 있습니다. 카 또한 더 좋고 더 객관적 인 역사 서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역사 서술이 다른 것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 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달리 묻자면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카의 말을 들어볼까요?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그 역사가가 사회와 역사 속에 놓여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제한된 시야를 뛰어넘는 능력, 지난번 강연에서 말 한 바와 같이 반쯤은 어떻게 자기가 이 상황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가를 인식하는 능력, 즉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 역사가가 자 기 견해를 미래에 대해 투입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상황에 전적으로 국한되어 있는 역사 가들보다는 과거에 대해 더 깊고 더 지속적인 통찰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완전한 역사 를 쓸 수 있다는 액턴의 자신감에 동조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에 비해 보다 영속적이고, 또 완전성과 객관성이 더 많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 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므로 지난번 강연 때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여러 사건과 차차 나타나는 미래의 여러 목적 간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옳았을 것이다. 역사 서술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역사가 자신이 객관적이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 신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할 때 역사가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테니까 요. 더 중요한 것은 미래적 가치입니다. 카의 말은 이렇습니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올바른 미래적 전망을 확보하고 그것을 기준삼아 과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좋은 역사가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좋 은 세상의 청사진을 그려내어 그에 비추어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가령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야 할 세상이 자유로운 세상이라면, 우린 자유라는 가치에 비추어 과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평화 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평화가 과거 해석의 기준이 되겠지요. 역사란 과거에서 과거만을 보는 게 아 니고, 과거와 함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읽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 읽기란 과거를 향한 회고라 기보다 미래를 향한 도약입니다. 그래서 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역사란 과거 사건들과 미래의 목적 간의 대화이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9) "나치즘은 유럽문명 안에서 배양된 야만이다" 입력 2013-06-14 15:01:02 수정 2013-06-14 15:01:02 이번 주에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 비를 찾아서 라는 책을 읽으려 합니다. 저 자 서경식은 도쿄에 있는 한 대학의 교수 이자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과 마르코폴 로상을 받은 뛰어난 에세이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꽤 성공한 인생인 듯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재일조선인입니다.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그는 깊고 시린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렇 게 외로웠다면 한국으로 오지 그랬어? 누군가 쉽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겐 한국도 따뜻한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두 형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유학을 왔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 고 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원래 형들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그 사건
때문에 그는 결국 일본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 형제에게는 일본도, 한국도 타지일 뿐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형들과 달리 안전한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그는 말합니다. 부끄 러움을 잊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형들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습니다.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 시간은 그에게 내쫓기고 배제된 이들에 대한 섬세함 공감능력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가 자신과 아 무런 연관이 없는 쁘리모 레비라는 사람의 고통에 그토록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 이었습니다. 쁘리모 레비.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입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수 용소에 모아 그들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합니 다.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를 서경식은 한 증언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화 쇼아 에도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필립 뮐러는 특별작업반으로서 가체 처리작업에 종 사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가스실에서의 살육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몇 알의 치클론 B가 가스실 바닥에서 승화하면, 희생자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도망치려 고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좀 더 살겠노라고 아직 독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찾 아서 쓰러진 사람들 위로 올라섰다. 15분 내에 가스실 안의 전원이 사망했다. 약 30분 후에는 문이 다시 열렸다. 시체는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앉은 채로 죽은 자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은 자도 있었다. 밑에는 아이나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에 녹색 반점이 있었고, 피부는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사체나 코피를 흘리는 사체도 있었다. 대소변으로 뒤범벅이 된 사체도 있었 고, 임신 중인 여성 중에서는 출산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쁘리모 레비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증언한 작 가입니다. 고통스런 기억을 회상하는 쁘리모 레비의 글에서 서경식은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느낀 서러 움, 감옥 속에 억울하게 갇힌 형들의 고통, 옥바라지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을 함께 읽어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기록한 쁘리모 레비의 책은 서경식이 인간과 폭력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서경식은 홀로코스트가 소수의 미치광이들이 저지른 우연한 사건이라 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유럽인이 저질러 온 학살과 폭력적 지배. 유대인 대학살은 유럽인들의 오래된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여지껏 밖을 향하던 폭력이 유럽 내부를 향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나치즘은 유럽문명의 외부에서 밀어 닥친 야만 이 아니라 유럽문명 내부에서 배양된 야만 이 분출한 것 이라는 그의 지적은 옳습니다. 괴 물을 키워온 것은 다름아닌 유럽 자신이었으니까요. 중세 이후 반유대주의, 히스테리컬한 패권욕과 식민지 획득욕,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우생 사상, 인종주의 그리고 효율 에 대한 물신숭배와 테크놀로지 신앙,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승작용해 폭발한 것이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 지배로 지탱돼 온 유럽 근대문명의 자가중독이며 자기파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은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가 오랫동안 유럽의 바 깥에서 자행해 온 것과 동일한 행위를 단기간에 안을 향해 터뜨린 것에 불과했다. 인간은 비인간이 다 라는 원리가 바깥 세계인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향하던 때, 엔젠 스베르거가 말한 대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형태로 유럽의 안을 향했고, 자신들의 이웃에게 미치게 되자, 비로소 인간이라는 이념의 보편성을 둘러싼 그들의 자기모 순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아우슈비츠)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 에 내재한다.
근대 유럽인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사는 이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지배와 착 취의 대상으로 보는 일이 훨씬 많았죠. 그렇게 타자를 향하던 폭력이 내부를 향하게 되고, 결국 홀로 코스트라는 광기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타자를 향한 폭력이 언젠가는 증폭된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치는 사라졌고, 유대인 대학살은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쁘리모 레비의 생각은 다릅니 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는) 젊은이들에게 라는 1972년의 글에서는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않은가 라고 밝히고 그리스, 소련, 베트남, 브라질에 여전히 강제수용소가 존재하며, 모든 국가에 감옥, 소년원, 정신병원 같은 인간에게서 이름, 존엄, 희망을 빼앗는 시설 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후 브레히트의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아직도 건재하다 는 말을 인용했다. 유럽인이 비유럽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내국인이 외국인을 서슴없이 모욕하고, 남 성이 여성을 일상적으로 억압하고, 강자가 약자를 잔혹하게 착취하는 사회에서 홀로코스트는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폭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안전한 일본에 있던 서경 식이 끊임없이 한국에 있는 형들의 고통을 상상했던 것처럼, 지금 나와는 무관해 보이는 폭력에도 민 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의 약자들이 당하는 폭력에 예민하게 반 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폭력도 용인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야만은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세월 동안에도 우리에게 쁘리모 레비-그리고 20세기의 산증인들-의 경고가 지닌 무거움은 급속도로 더해갔다.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 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10)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의 신' 입력 2013-06-21 14:42:41 수정 2013-06-21 14:42:4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에 대하여 몇 해 전 디 워 라는 영화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 습니다. 영화 한편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렇지 않습니다. 논쟁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100분 토론 이라 는 한 시사 프로그램의 토론 주제로 선정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이 영화에 열광한 사람은 참 많았습니다. 그 뜨거운 관 심은 총 관객수 840만명, 2007년 흥행 1위,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0위라는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모두 환호한 것은 아닙니다. 못마땅해 한 사람들도 있었죠. 대표적인 사람이 평 론가 진중권입니다. 그는 애국심 마케팅 덕분에 흥행한 것일 뿐,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매우 부족하다며 디 워 의 가치를 평가절하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누리꾼이 그를 비판하기
도 했죠.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언급하냐고요? 그때 진중권 평론가가 디 워 를 비판하면서 거론한 한 마디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칼럼에선가 디 워 가 결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를 도입했다고 비판 했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무슨 말일까요? 그리고 왜 이것이 디 워 에 대한 비판에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우리는 이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서양 역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특별한 사제관계로도 유명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스승이고, 대제국을 건설한 젊은 황제 알렉산더가 그의 제자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플라톤이 세운 서양 최초의 학교인 아카데미아에 17살에 들어갔습니 다. 그곳에서 20여년간 플라톤에게 철학을 배웠죠.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아를 떠나 잠깐 동 안의 방랑기를 겪고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그후에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워 평생을 공부에 매진했죠.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스승 플라톤은 그에게 책벌레 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장점은 폭넓은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생물학, 천 문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문학과 예술 또한 그가 큰 관심을 보였던 분야였죠. 일리아스 나 오디세이아 와 같은 서사시나 오이디푸스 왕 이나 안 티고네 와 같은 비극 작품의 열정적인 독자였던 그는 결국 문학 창작에 대한 이론서를 쓰기도 했습니 다. 그 결과물이 바로 시학 입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서양 최초의 문예 비평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문학의 본질과 구성요소, 좋은 문학의 요건 등을 다룹니다. 모두 매우 오랜 기간 서 양의 문예 비평에 큰 영향을 끼친 내용들입니다. 심지어 우리조차 시학 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카타르시스 이론입니다. 카타르시스. 많이 들어본 표현이죠? 이 개념을 예술과 관련 해서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본래 정화 혹은 배설 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 은 그에 의해 예술을 통한 감정의 정화 및 해소라는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짜릿한 액션 영 화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이야기할 때, 우린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규정을 따르고 있는 셈 입니다. 시학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작품이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이야기의 개연성과 일관성이었습니다. 인물의 성격도, 표현의 아름다움도 모두 중 요하지만, 이야기의 짜임새가 허술하다면 결코 좋은 문학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를 예로 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 어떤 시인이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그리고 조사 와 사상에 있어서 훌륭하게 손질된 일련의 대사를 차례차례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비 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다 하더라 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이 훨씬 더 중요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 호메 로스는 오디세이아 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디세우스 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을 가장한 사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디세이아 를 구성했던 것이다. 일리아스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 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 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 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을 언제 사용하나 요? TV 드라마에서 사건이 전혀 개연성 없이 이어질 때 그렇게 말하곤 하죠. 느닷없이 출생의 비밀 이 밝혀진다든지 악인이 사고로 죽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 가 지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합니다. 문학 작품의 완성도는 사건들의 결합이 얼마나 필연적으로 연관 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개성 있는 인물과 감각적인 대사가 잠시 이목을 끌 수 있을지는 모르 지만 이야기 자체가 부실하다면 최종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나요? 그렇다면 이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의 의미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아리스 토텔레스의 말을 들어보죠. 성격에 있어서도 사건의 구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필연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추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하며, 두 사건이 이어서 일어날 때는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혹 은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도 플롯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메데이아 나 일 리아스 에서 그리스 군의 출범이 저지당했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 장치에 의존해서는 안 됨이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해결이 플롯 자체에 의한 것이어야지 기계 장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기계 장치가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 장치의 신 입니다. 고 대 그리스의 연극 문화를 알아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그리스 연극에는 거중기와 비슷 한 형태의 기계 장치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기계 장치를 이용해 사람을 공중에 띄우고 그가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게 했던 것입니다.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마치 신처럼 모든 문제를 일거 에 해결하도록 한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이야기 자체의 힘 으로 해소돼야지 느닷없는 신적 개입으로 마무리되는 건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이었죠. 이야기가 부실한 영화, 소설, 드라마를 볼 때,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초인 혹은 백마 탄 왕자 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여전히 유효한 비평 개념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11)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 입력 2013-06-28 14:45:11 수정 2013-06-28 17:35:17
악법도 법이다. 참 유명한 말이죠? 다소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국가가 정한 법은 따라야 한다는 이 말의 출처는 소크라테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 관련한 모든 자료를 다 찾아봐도 그가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꾸며진 말이었던 것입니다. 독재자들에 의한 날조라는 말도 있지만,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가 생 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상황을 보면, 이런 말을 했으리라 짐작할 만도 합니 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서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참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매일 하는 일이라곤 광장에 나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뿐 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의 대화법이 사람들을 묘하게 불편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마치 하이 에나 같았습니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워낙 집요하게 캐물었기 때문이죠. 그 모습에 많은 사람이 질색했고 더러는 그를 미워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미움에 여러 이유가 더해지고 그는 억울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처형될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크 리톤 이라는 책에는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 크리톤의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이미 수차 례 탈옥을 종용한 일이 있는 크리톤은, 사형 집행이 있기 전날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제발 목숨을 아껴 도망치자는 것이었죠. 모든 준비는 이미 크리톤이 마친 상태였습니다. 여보게 소크라테스! 지금이라도 내 말에 승복하고 자신을 구하게나. 만약에 자네가 죽으면, 그건 나 에게는 한 가지 불행이 아닐세. 내가 결코 다시는 찾지 못할 그런 가까운 친구를 빼앗기게 되는 것 말고도, 더 나아가서는 나와 자네를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한테는, 내가 돈을 쓰려고 했던들 자넬 구할 수 있었는데도, 내가 무관심했던 것으로 생각될 것이니까 말일세. 하지만 친구들보다도 돈을 더 귀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이것 이상으로 부끄러운 평판이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많은 사람 은, 우리는 열성적이었는데도 자네 자신이 이곳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일세. (플라톤, 크리톤 중에서) 자신의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탈옥을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크리톤에게 반문합니다.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 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 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 크리톤 중에서) 자신의 탈옥이 아테네라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 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경구는 소크라테스에 썩 잘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평소 신념에 비춰볼 때, 이는 오해에 가깝습니다. 그가 제일 중요하게 여 긴 것은 정의로운 삶, 바로 올바른 삶이었습니다. 탈옥을 권하는 크리톤을 이렇게 꾸짖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되네. 크리톤과 나누는 내화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률을 악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다만 법을 집행한 시민들이 지혜롭지 못하다고는 생각 했죠). 만약 국가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요구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아테네 법정에서 한 변론 내용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철학적 대화 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는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반기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리고 할 수 있는 동안까지는, 지혜를 사랑하는(철학 하는) 것도, 여러분께 충고를 하는 것도, 그리고 언제고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 만나게 되는 사람한테 이 점을 지적하는 것 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 ) 제가 달리 처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설령 몇 번이고 죽는다 할 지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배심원이 내리는 법적인 판결보다 신의 명령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신의 명령이란 어떤 종교적인 내용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사명으로 안 철학을 일컫는 말이었죠.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진리로 이끄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철학을 그만두라고 국가가 요구하더라도 그 명령만은 따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그는 실제로 추방형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사형 선고를 선택합니다). 그는 지금 국가의 법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옳지 못한 법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국가가 올바른 걸 요구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명령이 정의롭지 않다면, 그땐 국가를 설득해야만 합니다. 우린 소크라테스의 다음 말 에서 일종의 시민불복종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 대해서는 설득을 하거나 조국이 명하는 것들을 이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조국이 무 엇인가를 묵묵히 치르도록 지시하면 치러야 한다는 것을, 두들겨 맞거나 투옥되거나 하는 것도, 싸움 터로 이끌고 가서 부상당하거나 전사하게 하더라도, 이는 해야만 한다는 걸, 그리고 또 올바른 것은 이런 것이란 걸 말이야. 또한 굴복해서도 아니 되며 후퇴해서도 아니 되고 전열을 이탈해서도 아니 되며, 싸움터에서건 법정에서건 또는 어디에서고 나라와 조국이 명하는 바는 무엇이나 이행해야 된다 는 걸, 아니면 올바른 것(to dikaion)이 그 본성에 있어서 어떤 것인지를 나라에 납득시켜야만 된다는 것을 말이야. ( 크리톤 중에서) 그러니 그가 악법도 법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는 왜 탈옥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악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는 탈옥을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살펴본 대로, 그는 철학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형을 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삶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 즉, 철학적 대화를 통해 아테네 시민을 보다 훌륭한 삶을 이끄는 일에 죽을 때까지 헌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이었습니다. 아테네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간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꺾이게 됩 니다. 그러니 평생을 올바른 삶을 추구해온 그가 어떻게 탈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목숨보다 올바른 삶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12)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입력 2013-07-05 14:48:17 수정 2013-07-05 14:48:17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아버지 대신 성에 갇힌 벨이라는 여인과 그녀를 사랑하는 야수의 이야기를 그린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를 보면 가슴 아픈 이별의 장면이 나옵니다. 벨이 아버지 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야수가 그녀를 놓아주는 장면 입니다. 벨을 보내며 야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를 보 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 에 보내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렇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야수의 저 말은 사랑이란 게 어떤 것인지 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좋습니다. 오 늘은 사랑 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죠.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원래 훈남 왕자였습니다. 어느 요정이 건 마법 때문에 야수가 된 것이죠. 마법을 풀 열쇠는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도 그 사람에게 사랑받으 면 야수는 다시 왕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수는 과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 하면 요정이 내건 조건은 참 짓궂은 것이었습니다. 왜냐고요? 일단 이렇게 물어보죠. 진정한 사랑이 란 무엇인가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이마누엘 칸트 사람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이라는 이름의 이 명제는 사랑에도 그대로 적 용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돈 때문에, 배경 때문에,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우린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죠. 대상이 수단화되어 있으니까요. 가령 누군가를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사랑 의 대상은 돈이지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은 돈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죠. 생각해보세요. 두 연인이 대화를 나눕니다. 널 사랑해 왜? 너희 아버지가 부자니까! 아이고. 저들의 관계가 이 다 음에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 목마름입니다. 상대방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는 사랑.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수단화하지 않는 사랑. 그런 것 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수는 참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셈입니다. 요정이 정한 게임의 룰이 뭐였죠? 마법을 풀려면 사랑을 하라는 것이었죠. 잘 생각해보세요. 야수는 왜 사랑을 해야 하죠? 왕자로 돌아가기 위 해서입니다. 사랑은 마법을 풀 열쇠입니다. 결국 야수는 누구를 사랑하든 그를 수단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정이 만든 이 게임에선 사랑이 애초에 목적(마법을 푼다는)을 이룰 수단 으로 설정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야수는 마법을 풀고 자기 자신을 되찾길 원하죠. 그를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누굴 사랑하든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마법을 풀기 위한 수단화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수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마법에서 풀려날 수 도 없습니다. 그러니 요정은 얼마나 짓궂은가요. 야수를 빠져나올 길이 없는 미궁에 가둬두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해야 목적(왕자로 돌아가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 목적을 버리면 이제 사랑을 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야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수는 어떻게 했나요?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냈죠? 이제 이 행동의 의미를 살펴볼 차례입 니다.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사랑이란 자기임 을 포기하고 자신을 타자 속에서 완전히 상실하는 것 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깊은 늪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만 봐도 알 수 있습 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린 사랑에 빠졌다 고 표현하죠? 영어권에서는 falling in love 라고 말합니
다. 깊은 숲 속을 걷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웅덩이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한다 는 말은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합니다. 사랑은 내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랑이란 빠지고 떨어지고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 사랑에 빠.져.버.리.고.야. 말았어. 그러니 사랑은 단순한 떨어짐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 같은 것 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사랑 안에서 죽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예전의 자신 은 없으니까요.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상대방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상대방 속에서 잃어버린 후였으니까요. 마치 하나뿐인 보석을 보석상자에 맡긴 것처럼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 또한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보석상자와 함께 보석도 사라진 것이죠.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가 죽은 순간 이미 함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살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죽음으로써 동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줄리엣의 죽음이 로미오를 죽이고, 로미오의 자살이 줄리엣을 죽이고. 그 들은 상대방의 죽음이라는 살인행위에 의해 타살된 희생자들이며, 그들의 자살은 그러한 타살의 결과 적 현상일 뿐입니다. 아직 어린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어진 생의 길이를 거슬렀으나, 그 역행은 사랑 의 본질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참된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하여 자신을 다른 자기 속에서 망각하는 데 있으며, 이 러한 소멸과 망각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데 있다. -헤겔 헤겔의 말을 한마디 더 덧붙여보죠. 그는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 이 가져오는 상실의 밤을 알았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회복의 아침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자기상실을 통해 오히려 본래적인 자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에는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 다 는 통속적인 말처럼요. 사람은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지만, 또 그 사랑 덕분에 진짜 자기를 만나 게 됩니다. 자기상실과 자기발견의 역설. 사랑이 신비스러운 일인 이유입니다. 너무 멀리 돌아왔나요? 이제 다시 괴로워하는 야수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는 어떻게 했나요? 마법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벨을 그냥 보내줬죠. 벨을 옆에 두었다면 그는 아마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그는 마법에서 풀려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벨을 사랑한 것입니다. 벨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좋아! 야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벨을 만나기 전까 지 야수에게 전부는 왕자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에겐 벨이 전부입니다.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대로 야수는 벨을 사랑했고, 그래서 그녀를 보내줬습니다. 벨을 보냈다는 건 야수가 왕자로 돌아가기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 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그가 벨을 향한 사랑을 수단화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그 사랑 안에서 완전히 상실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그녀를 보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이 진 짜임을 입증했습니다. 야수는 이제 진정한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헤겔의 말처럼 자기를 포기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될까요? 쉽게 말해, 야수는 다시 왕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 영화의 결말이 어땠는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는군요.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13)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입력 2013-07-12 15:04:17 수정 2013-07-12 15:04:18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의 주인공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주변의 어른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매일 저녁 9시 뉴스, 정치기사로 가득한 신 문, 어른 둘만 모이면 시작되는 정치 이야기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인간의 본성인가보다! 이런 생 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 유명한 명제에 대한 오해에 가깝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 고자 한 건 인간이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럼 어떤 뜻이냐고요? 좋습니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정치학 이라는 책을 읽으며 인간이 왜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정치적 동물 이라는 용어부터 다시 따져보겠습니다. 정치적 동물 은 사실 그리 좋은 번역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폴리스적인 동물 이라고 옮기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리스 본문의 뜻에 더 잘 맞습니다. 폴리스적인 동물?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군요. 조금 더 자세히 살 펴보도록 하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 이 필요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지역에는 크 고 작은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있었죠. 옆 동네에는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와 같은 대제국도 있긴 했 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가 더 완전한 국가 형태라고 자부했습니다.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은 한 명의 왕이 다수의 신민을 통치하는 반면, 도시국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민주적으로 국가 를 운영하기 때문에 도시국가가 더 우월한 정치 형태라고 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지역에 퍼져있던 도시국가를 폴 리스 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폴리스적인 동물 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죠? 인간이 본성적 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정치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 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학 을 한국어로 번역한 천병희 님도 정치적 동물 이라는 흔한 번역 을 따르지 않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 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왜 정치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얘기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때문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 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맨 먼저 생겨난 것이 가정이다. ( )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렇듯 가정인데, 그 구성원을 카른다스는 식탁의 동료들 이라고 부르고, 크레테의 에피메 니데스는 식구 라고 부른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최 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는 한 가정에서 아들들과 손자들이 분
가해 나가는 것이다. ( )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완전한 자 급자족이라는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이고,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 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 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정치학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가정과 마을을 이루는 이유를 날마나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 해 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 는 비로소 국가를 통해서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합니 다. 즉, 국가라고 불릴 정도의 공동체가 되면 이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 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는 (당연하게도 개인 혼자서는) 자급자 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의 힘을 충족하려면 반드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해야 만 합니다. 다음으로 국가의 목적이 자급자족에 있다는 말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국 가, 가령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크기가 크지 않은 폴리스가 국가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인간이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볼까요? 국가는 단지 (자급자족 을 하기 위한) 필요의 산물만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통해 비로소 개인이 완전한 인간 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급자족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 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 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 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이로써 인간이 벌이나 그 밖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 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 )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 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다. ( 정치학 중에서)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언어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 로 번역된 로고스logos 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프로네시스phronsis 를 의미합니다. 프로네시스는 우 리말로는 실천적 지혜 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많은 고대 사상가가 그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 의 본질을 이성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 한 실천적 지혜야말로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당연하 게도 실천적 지혜는 폴리스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언어와 의사소통, 그 리고 윤리적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즉,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정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생존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완전한 인간일 수 있을 까요? 자본주의와 사회계약설은 개인의 욕망 충족이 공동체 성립의 유일한 이유인양 얘기하곤 합니다. 하 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면, 성공의 기쁨을 나 눌 가족이 없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공동체가 없다면 그리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
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우린 우리의 이성과 윤리적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도 없습니 다. 탁월한 삶은 골방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광장에서 가능한 것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김영수 S 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한 문장의 교양] (14)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데카 입력 2013-08-09 14:22:15 지면정보 2013-08-12 S14면 서양 철학사는 흔히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와 현대로 나뉩니다. 물론 각 시대의 구분점은 상당히 가변적입니다. 고대와 중세의 경계, 근대와 현대의 경계는 흐릿해서 구분하는 사람마다 말이 다를 정 도니까요. 그나마 고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확실한 편입니다. 근대철학의 시작점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광범위한 합의점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자 앤터니 플루의 말을 들어볼까 요? 철학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는 일은 언제나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다소 인위적이다. 그러나 그러 한 구분 가운데 가장 덜 자의적인 것 하나는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근대 철 학이 데카르트(1596~1650년)와 더불어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방법서설 이 출판된 1637년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간결하고도 기막힌 선언문은 모든 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것들의 전조 였다. -로버트 C. 솔로몬, 캐슬린 M. 히긴스, 세상의 모든 철학 에서 재인용 근대철학의 출발점에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가 쓴 방법서설 이라는 책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데카르트는 1596 년 태어나 1650년 죽었습니다. 이 생몰연대는 꽤 중요합니다. (사실 모든 철학자가 그렇듯) 그의 사 상은 그가 산 시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의 변곡점을 산 사람입니 다. 그가 살던 시기는 그야말로 모든 게 변화하던 때였습니다. 근대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해 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은 세계 전역에서 지리상의 발견을 거듭 하며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종교 영역에서 일어났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톨 릭 교회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교회 문에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구교(가톨 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극심한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그 갈등의 정점이 바로 구교와 신교 간의 전쟁인 30년 전쟁입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일생을 이 전쟁 속에서 보냈습니다. 30년 전쟁은 그가 22세가 되던 해(1618년)에 일어나 그가 죽기 2년 전(1648년)에 끝났으니까요. 그만큼 이 전쟁 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철학자 강유원은 30년 전쟁과 데카르트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 합니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본격 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 ) 데카르트는 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30년 전쟁 시기에 자신의 사색 을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고, 기존의 공동체가 해체되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율적인 상태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30년이나 이어진 긴 전쟁의 끝은 종교의 자유 였습니다. 구교든 신교든 자유롭게 믿자는 합의를 본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진보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큰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가 담보했던 보편적 진리라는 게 사라져 버린 것이니까요. 본래 자유는 불안을 끼고 오는 법입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때부터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함께 몰려 오는 회의와 불안, 책임감 등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를 회피하는 경향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이 죠. 여담이지만 차라리 독재 시절이 낫다는 말이 종종 들리는 데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 는 말인 듯싶습니다. 어쨌든 30년 전쟁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안정적인 세계는 끝났다는 것을 분명하 게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30년 전쟁이 가져온 불안과 불확실성에 맞서 또 다른 확실성의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인들은 가장 확실한 것은 찾기 시작했고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가장 분 명하게 대답한 사람 중의 하나가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확실성의 탐구인 것입니다.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물론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찾기 위해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근 대철학의 아버지일 수는 없죠. 그는 이제 확실성을 신에게서 찾지 않고 도리어 인간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의 가장 찬란한 업적입니다.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킨 것이니까요.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갈대처럼 쉽게 변하는 인간이 어떻게 확실성의 근원일 수 있을까요? 데카르트 가 확실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우선 그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하기로 합니다. 일부러 의심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의심부터 해보고 조금이라도 불확실해 보이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는 식이었죠. 그는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 너무나도 자명해서 어떠 한 회의도 불가능한 것, 그것이야말로 진리요 확실성의 근거이다! 이렇게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서의 의심이라고 해서 이를 방법적 회의(methodical doubt, 方 法 的 懷 疑 )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데카르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 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 만하므로, 감각이 우리 마음 속에 그리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아주 단 순한 기하학적 문제에 있어서조차 추리를 잘못해 오류 추리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