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논집 제44집 2016년 2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44, Feb. 2016, pp. 69-96 10.17325/sgjp.2016.44..69 69 활동과 즐거움 34) -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 - 전헌상(서강대) 주제분류 서양고대철학, 윤리학 주제어 즐거움, 활동, 운동, 목적, 완전성 요약문 본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을, 그것과 대비되는 철학적 입장 들과의 연관 속에서 조명한다. 본 논문에서는 특히 즐거움에 관한 과정 이론에 대 한 그의 대응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즐거움을 자연적 성향의 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 이론에 대한 성공적 대응이 되는지를 따져 본다. 본 논문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정 이론 비판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이 론적 도구로 끌어들이고 있는 운동과 활동의 구분을 검토하고, 특히 운동-활동 구 분의 기술 상대성이 활동으로서의 즐거움이라는 견해에 얼마만큼 문제를 발생시키 는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즐거움을 일종의 목적으로 상정하는 것과 고유한 즐거움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쾌락주의 비판과의 연관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고찰한다. I. 들어가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즐거움(hēdonē)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필수적 인 논의 주제가 된다. 첫째, 그는 성품의 덕과 악덕을 즐거움과 고통과 연 관시켜 규정한다. 행위에 수반하는 즐거움과 고통, 즉 어떤 방식으로 즐거 움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가는 행위자의 성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올바른 교육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괴로워해 야 할 것에 고통을 느끼도록 기르는 것이라면, 즐거움과 고통은 이 점에서 도 덕에 관한 논의에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덕은 행위와 감정과 관련되어 투고일: 1월 30일, 심사완료일: 2월 16일, 게재확정일: 2월 16일
70 철학논집(제44집) 있고, 행위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수반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도 덕은 즐 거움과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 1) 둘째, 즐거움은 행복한 삶에 동반한다는 것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행복한 삶은 그 자체로 즐거운 삶으 로 여겨진다. 덕에 따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우며, 덕에 따르는 삶 역 시 그 자체로 즐겁다. 그리고 그 삶은 즐거움을 어떤 장식품처럼 추가적으 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삶 속에 가지고 있다. 2) 따라서 즐거 움에 대한 논의는 행복에 관한 논의에도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본 논문의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의 몇몇 주요 측면들을, 특히 그가 자신의 입장과 대비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 들과의 연관 속에서 조명해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당대의 철학적 논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그의 이론의 핵심적 특징을 이해하 는 데 필수적이다. 그의 이론은,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단순히 즐거움의 본성을 독자적으로 모색해 가는 과 정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입장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 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의 성격을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 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본 논문에서는 특히 그가 가장 주요한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즐거움에 관한 과정 이론(process theory of pleasure)에 대 한 그의 대응 방식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즐거움을 본성적 성향의 활동으 로 규정하는 그의 입장은 과정 이론과의 대비 속에서만 충분히 해명될 수 있음이 이 논의 속에서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본 논문은 또한 아리스토텔 레스가 과정 이론 비판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도구로 끌어들이고 있는 운동(kinēsis)과 활동(energeia)의 구분을 세밀히 검토할 것이다. 운동-활 동 구분 자체의 타당성, 그리고 그것을 즐거움의 본성에 적용하는 것의 적 절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이것들 중 가 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쟁점을 면밀히 살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논 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이 쾌락주의 비판에 갖는 함축들을 검 토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일종의 목 1) NE, 1104b3-16. 2) NE, 1099a7-18.
활동과 즐거움 71 적으로 규정하는데, 이 설명은 쾌락주의 비판이라는 이론적 관심사를 염두 에 두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어떤 점에서 그것 이 그러한지, 그리고 그 관심사가 고유한 즐거움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관 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II. 즐거움에 관한 과정 이론 즐거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하에서 는 NE로 약칭) 7권 11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는 그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우선 즐거움에 대한 다양한 통념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첫 단락 - NE, 1152b8-12 -에서부터 우리는 아리스토 텔레스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주 제는 다름 아닌 즐거움과 좋음(to agathon)의 관련성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의 견해가 소개된다. 첫 번째 견해에 따르면, 즐거움은 전혀 좋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즐거움은 좋은 것이지만, 어떤 즐거 움은 열등하다. 세 번째의 견해에 따르면, 설사 모든 즐거움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to ariston)이 즐거움일 수는 없다. 11장의 나머지 내 용은 사실상 이 세 견해에 대한 논의에 종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즐거움에 관한 다양한 통념들이 모두 앞서의 세 견해들 중 하나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에 대한 아 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즐거움과 좋음의 관계라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관 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후의 논의에 서 점차로 분명해지겠지만, 그의 관심이 가지는 이러한 성격은 즐거움에 관 련된 그의 논의의 방향과 범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NE 7권 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소개된 즐거움에 관한 다양한 통념들의 타당성을 검토해 나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상세히 논의하고 있는 하나의 입장이 눈에 띈다. 이 입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소개되고 있다. 모든 즐거움은 자연적 상태로 가는 지각 가능한 생성(genesis eis physin aisthētē)이다. 어떤 생성도 목적과 동류일 수 없기 때
72 철학논집(제44집) 문이다. 이 밖에도 즐거움에 관련된 다양한 생각들이 열거되고 있지만, 이 후의 논의에서 자세한 분석을 시도되는 것은 오직 이 이론뿐이다. 이 이론 은 흔히 즐거움에 관한 과정 이론(process theory of pleasure) 으로 불리는데, 플라톤의 몇몇 작품들에서 그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필레보스 31d에서는, 동물에 존재하는 자연 상태가 해체될 때 고통이 발생하며, 이 상태로부터 다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자연 상태로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즐 거움이 생긴다고 이야기된다. 즐거움을 육체적인 불균형 혹은 결핍으로부터 의 회복과 연관시키는 이 이론은 당대의 생리학적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 으로 여겨진다. 과정 이론에 따르면, 즐거움은 결핍의 상태로부터 본성적인 충족의 상태로의 과정이다. 이 이론은 즐거움을 느끼는 주체의 자연적인 상 태를 상정하고, 그 상태의 어떤 요소가 결여된 상태를 출발점으로 한다. 갈 증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3) 몸 안에 수분이 충분할 때, 우리는 갈증을 느끼지 않고, 이때가 우리에게 자연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 놓이면, 우리는 갈증을 느낀다. 이것은 자연적인 상태의 해체이며, 이 상태가 다름 아닌 고통이다. 이 상태에서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면, 우리 의 신체는 다시 자연적인 균형 상태를 회복하게 되는데, 과정이론은 바로 이 과정을 즐거움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III. 방해 받지 않은 활동으로서의 즐거움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과정 이론은 즐거움의 본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과정 이론과의 대비를 통해 다 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모든 즐거움이 생성(genesis)이거나 생성과 함께하는(meta geneseōs) 것은 아 니며, 오히려 즐거움은 활동이자 하나의 목적이다(energeiai kai telos). 또 즐거움은 무엇이 생성될 때가 아니라 사용될 때(chōmenōn) 생기는 것이다. 3) 필레보스 31e-32b에서 소크라테스가 들고 있는 예가 바로 목마름과 배고픔이 다.
활동과 즐거움 73 그리고 모든 즐거움이 자신과 다른 어떤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며, 본성의 완성으로 이끄는 즐거움만이 그러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즐거움이 지각 된 생성(aisthēte genesis)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자연적 성 향의 활동(energeia tēs kata physin hexeōs)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 지 각된 대신에 방해 받지 않은(enempodiston)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 떤 사람들은 즐거움을 생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즐거움이 엄밀한 의 미에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활동이 생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둘은 서로 다르다.(NE, 1153a9-18)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의 핵심은 명확하다: 즐거움은 생성이 아니라 활 동이다. 잠시 후 우리는 이 대조의 의미와 타당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볼 것이다. 그에 앞서 우선은 인용문에 등장하는 몇몇 표현들의 정 확한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 명백히 과정 이론의 옹호자들을 의식하면서 - 즐거움을 지각된 생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이라고 말한다. 즐거움은 지각된 생성이 아니라, 자연적 성향의 활동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각된 이 아닌 방해 받지 않은 것이 이 규정에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지각된 은 배제되고 방해 받지 않 은 은 추가되어야 하는가? 우선 방해 받지 않은 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 표현의 의미를 밝히기 위 해서는 이와 대비되는 방해 받은 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 다. 어떤 경우에 활동은 방해 받는가? 그 단서는 - 위의 인용문이 포함된 NE 7권이 아닌 - NE 10권에서 주어진다. NE 10권 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는 활동에 고유한(oikeia) 즐거움과 활동에 이질적인(allotria) 즐거움을 구분 하면서, 전자의 즐거움이 활동을 증진시키는 반면, 후자의 즐거움은 활동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활동에 고유한 즐거움은 활동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즐 거움이다(NE, 1175b22). 그리고 이 즐거움은 활동을 증진시킨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그 예로 즐거움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더 잘 분별 하고 더 정확하게 판단을 내린다는 점을 든다. 기하학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기하학에 관한 사항들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 각각을 즐거움을 가지고 행할 때, 자신의 고유한 기능에서 진보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질적인 즐거움은 활동 자체와
74 철학논집(제44집)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한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은 그 활동을 방해한다 (empodios). 예를 들어, 피리 연주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소리를 듣게 되면 토론에 집중하는 데 방해를 받을 것이다. 요약하면, 고유한 즐거움은 활동을 더 정확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낫게 만드는 반면, 이질적인 즐거움 은 그 활동을 망가뜨린다(NE, 1175b14-15). 이상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 활 동의 방해 받음은 활동 외적인 어떤 요인에 의해서 활동이 완전하게 수행 되는 것이 방해 받는 상황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활동이 방해 받 지 않은 상황은 그 활동의 완전한 수행을 방해하는 외적 요소가 없는 상황, 그래서 그 활동이 그것이 실현해야 할 바를 부족함 없이 실현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렇다면 즐거움의 규정으로부터 지각된 이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우선 우리는 즐거움의 개념에 내포된 애매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사전적으로 즐거움 은 즐거운 느낌이나 마음 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 에서 알 수 있듯이, 즐거움은 일차적으로 의식을 가진 주체가 내적으로 느 끼는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그는 그곳에서 열정이 충만한 젊은 음악가와 만난 것에 더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의 미로 즐거움 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즐거움 은 때로 즐거움을 주는 활 동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교외 가로수길이나 공 원의 호젓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번째 의 미로 즐거움 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5) 이 구분을 염두에 두고 다시 텍스 4) 이때의 외적 요소가 반드시 공간적 의미로 좁게, 즉 공간적으로 행위자와 다 른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행위자의 어떤 심리 적인 상태 때문에 즐거움의 실현이 방해를 받은 경우에도 그것은, 문제의 활 동이나 그것과 직접 연관된 내적 능력과는 다른 요소라는 점에서, 외적인 방 해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이러한 두 의미의 구분은 영어의 pleasure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Pleasure 는 a feeling of happiness, enjoyment, or satisfaction : a pleasant or pleasing feeling 의 의미와 something or someone that causes a feeling of happiness, enjoyment, or satisfaction 의 의미를 모두 가진다.(Meriam-Webster Dictionary)
활동과 즐거움 75 트를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지각 은 즐거움에 포함된 주체의 의식적, 인지적 요소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 내용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현재 이 야기하고 있는 즐거움 은 즐거움의 의식적, 지각적 측면을 배제한 즐거움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즉 그는 자신이 지금, 예를 들어 <라보엠> 을 듣는 일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으로부터 청자가 의식 속에서 느끼는 즐거 움의 요소는 빼고, 그 즐거움의 원천으로서의 객관적 활동, 즉 <라보엠>을 듣는 행위에만 논의를 한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인가? 사실 NE 7 권에서의 즐거움에 관한 논의와 NE 10권에서의 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 리가 존재하며, 그 분리의 핵심은 NE 7권에서는 활동으로서의 즐거움이 논 의되고 있는 반면, NE 10권의 주제는 느낌으로서의 활동, 다시 말해서 즐김 이라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6) 위와 같은 해석은 NE 7권 과 NE 10권에서의 논의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입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더 그럴법해 보이는 해석은 문제의 지각된 이 불 필요한 중복이기(redundant) 때문에 제거되어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활동이 방해 받지 않고 완전히 현실화되었을 때, 즐거움 역시도,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해, 필연적으로 함께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때문에 굳이 추가적으로 지각 된 이라는 조건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해석 이 옳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김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그것을 가져다주는 객관적 활동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도에 명확 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굳이 지각된 이 즐거움의 정의에 포함 되어야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객관적, 활동적 조건 들이 모두 만족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추가적으로, 주체에 의해 지각되어야 만 비로소 즐거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7)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6) Owen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G. E. L. Owen, Aristotelian Pleasures,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72, 1971-2, 135~52. 7) 이 점과 관련해서, 문제의 지각됨 이 플라톤적 연원을 가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연적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이 천천히 조금씩 일어나는 경우에
76 철학논집(제44집) 지각된 을 빼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즐거움은 완전한 활동이 이루 어지면, 다른 어떤 독립적이고 추가적인 내적 조건 없이도, 그 활동과 함께 발생하는 어떤 것이었던 것이다. 이후의 논의에서 좀 더 구체화되겠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의 핵심적 아이디어에 부응하 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각된 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필요한 중복 조건이기 때문에 배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그 럴법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즐거움이 자연적 성향의 활동 이라는 주장의 의미를 고찰 해야 하는데, 그 전에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이론적 틀, 즉 생성과 활동의 구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 다. 그가 이 구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성 보다는 운동(kinēsis) 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하의 논의에는 이 구분을 운동-활동 구분으로 부를 것이다. IV.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즐거움 NE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과 운동을 구분하는 기준들을 몇 가지 제 시한다. 첫째, 운동은 그것의 실현에 시간이 걸리는 반면, 활동은 그렇지 않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과 시간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 든 운동은 시간 안에(en chronōi) 있으며 (집을 짓는 것처럼)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추구한 바를 만들어냈을 때, 완성되는(teleia) 이기 때 문이다. 그것이 그 시간 전체에서 완성되는 것이든, 그 시간에 완성되는 것 이든 말이다(NE 1174a19-23). 집을 짓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하나의 과정 이고, 그것이 완료되는 시점은 그 과정 중의 어느 한 시점도 아닌, 오직 그 일의 궁극적 목적인 집이 완성된 시점이다. 따라서 운동의 경우 그것이 완 는 즐거움이나 고통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저작들 속에서 언급된 다; 필레보스 31d-32e, 국가 585b-586b, 티마이오스 64a-65b.
활동과 즐거움 77 료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가를 묻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 다. 활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활동의 예로 위의 인용문 바로 앞에서 아리스 토텔레스가 제시하는 것은 봄(seeing)이다. 그런데 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 특정한 시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완료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 문에,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보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 가를 묻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지 않다. 활동과 운동이 구분되는 또 하나의 기준은 활동은 어떤 순간에도 완성되 어 있는 반면, 운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운동은 그 어느 시간에서나 완성된 것은 아닌 것 같고, 많은 운동들은 완성되지 않는 것들이며 서로 간 에 그 종류에 있어 구별되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to pothen poi)가 운동의 종류를 만드는 것인 한(NE, 1174b3-5). 운동은 그 본성상 어디서부 터 어디까지의 운동이다. 즉 그것은 시작점을 가지고 끝점을 가진다. 그것 이 끝점에 도달하지 못한 어떤 시점에도 그것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 다. 반면 활동은 임의의 시점에서 완성되어 있다. 봄은 어떤 시간에서도 완성된 것 같다. 봄은 나중에 생겨나서 봄의 형상을 완성하게 할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NE, 1174a14-16).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9권 6장에서, NE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또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준은 활동을 표현하는 동사의 시제와 관련되어 있다. 한계(peras)를 가진 행위들은 그 어떤 것도 목적이 아니며 그것들은 목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살을 뺌이 그러하다. 누군가가 살을 뺄 때, 몸의 부분들 자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 즉 그 운동이 향하고 있는 바에 이미 도달해 있지는 않은 방식으로 운동 중에 있다. 이것은 행위, 혹 은 적어도 완전한(teleia)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이 안에 있는 것은 행위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 고 있는(horai) 동시에 본(heōake) 것이고, 이해하고 있는(phronei) 동시에 이 해한(pephronēke) 것이며, 생각하고 있는(noei) 동시에 생각한(nenoēken) 것이 다. 반면 우리는 배우고 있는(manthanei) 동시에 배운(memathēken) 것이 아 니며, 치료되고(hygiazetai) 있는 동시에 치료된(hygiastai) 것이 아니다. 우리 는 잘 살고(eu zēi) 있는 동시에 잘 산(eu ezēken) 것이며, 행복한 (eudaimonei) 동시에 행복한(eudaimonēken)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을 빼
78 철학논집(제44집) 는 과정이 그렇듯이, 그것은 어떤 시점에서 멈춰야 할 텐데, 실상 그것은 그렇지 않고, 우리는 살고 있는 동시에 산 것이다. 이것들 중 한 쪽을 우 리는 운동이라 부르며, 다른 한 쪽을 활동이라 부른다(1048b18-28). 여기서 활동과 운동의 차이는 관련된 동사의 현재형이 완료형을 함축하 는가의 여부로 설명되고 있다. 즉 어떤 (넓은 의미에서의) 활동 φ에 대해서, φ하고 있음이 φ했음(완료형)을 함축하면, φ는 활동이고, φ하고 있음이 φ했 음을 함축하지 않으면, φ는 운동이다. a가 O를 보고 있음은 a가 O를 보았 음을 함축하며,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보고 있음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보았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봄은 활동의 예가 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피리 연주를 배우고 있음은 그가 피리 연주를 배웠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배움은 운동의 예가 된다. 활동-운동 구분이 즐거움의 규정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논의하기에 앞 서, 우리는 이 구분과 관련해서 종종 지적되어 온 난점 하나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난점은, 만약 그것이 정말로 심각한 난점이라면, 즐거움을 운동이 아닌 활동으로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에도 상당한 훼손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는 활동-운동 구분을 통해 아리 스토텔레스가 의도했던 바가 (운동-활동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어떤 활 동이 현실화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운동-활동 구분이 (넓은 의미 의) 활동을 어떻게 기술하는가에 상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동일한 활동이 어떤 기술(description) 하에서는 운동으로, 또 다른 어떤 기술 하에 서는 활동으로 규정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8)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예를 통해 이 점을 설명해 보자. 걷기(badizein)는 전형적인 활동의 예이다. 9) 일견 걷기는 그가 제시한 활동의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 인다. 형이상학 에서의 조건을 적용해 보면, 소크라테스가 걷고 있음 은 8)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논문이 J. L. Ackrill, Aristotle s Distinction between Energeia and Kinesis, R. Bambrough, ed. New Essays on Plato and Aristotle, London, 1965이다. 9) 걷기의 예는 형이상학 (1048b31-32)과 NE(1174a30) 모두에서 언급된다.
활동과 즐거움 79 분명 그가 걸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행위를 소크라테스 가 피레우스로 걷고 있음 으로 기술하는 순간, 그 행위는 운동의 예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논변의 편의상 그가 그 이전에 한 번도 피레우스로 걸어간 적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그가 피레우스로 걷고 있음은 그가 피레우스로 걸 어갔음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활동-운동 구분의 기술 상대성(description relativity)을 아리스토텔레스 자 신이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것의 존재가 활동-운동 구분 자체의 실 패를 의미하는지는 논란거리이다. 10) 이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는 지면 의 한계 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이 문제를 즐거움에 대한 논 의와 연관되어 있는 범위 내에서, 즉 활동-운동 구분의 기술 상대성이 즐거 움을 운동이 아닌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과연 문 제를 발생시키는지, 만약 발생시킨다면 어느 정도의 문제를 발생시키는지에 한정해서 다룰 것이다. 운동-활동 구분은 즐거움이 운동이 아닌 활동임을 말해준다. 즐거움은 어떤 전체이며(NE, 1175a17), 즐거움의 형상은 어느 시간에서나 완성된 것 이다. 따라서 즐거움과 운동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 그리고 즐거움이 전 체로서 완성된 어떤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때도, 즉 운동한다는 것은 시간의 지속 안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즐거워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볼 때도 참인 것처럼 보인다. 즐거워한 다는 것은 순간 속에 있는 어떤 전체이니까(NE 1174b5-9). 을 즐기고 있 다 는 을 즐겼다 를 함축한다. 어떤 사람이 한 잔의 카푸치노를 즐기고 있다면, 그는 그 카푸치노를 즐긴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은 형이상학 에서 의 기준을 만족시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을 즐기고 10) 이 문제를 쟁점화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Ackrill은 운동- 활동 구분에 심각한 혼동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We seem [ ] forced to conclude that there is a serious confusion in Aristotle s exposition of the energeia-kinēsis distinction. J. L. Ackrill, Aristotle s Distinction between Energeia and Kinesis, 155. Bostock의 평가는 더 냉정하다. I conclude that the tense-test was simply a mistake on his part. D. Bostock, Aristotle s Ethics, Oxford, 2000.
80 철학논집(제44집) 있다 고 말할 때, 이 즐거움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흘러 특정한 시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완료됐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구도 나는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지만, 그것을 다 마신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을 즐긴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 다. 즐거움은 그것이 실현되는 매 시점에서 이미 완료된 것이며, 따라서 순 간 속에 있는 하나의 전체이며, 따라서 운동이 아닌 활동이다. 하지만 운동-활동 구분의 기술 상대성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질 문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즐거움은 운동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말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정을 즐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명백히 활동이 아닌 과정의 예로 보이는 것을 즐기는 상황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감상 하는 것을 즐긴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가 느낀 즐거움은, 아리스토텔 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활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열정> 소나타의 연주도 그것의 감상도, 그것이 일정한 시간을 경과해 특정한 시점에 완료되는 것이 라는 점에서, 활동이 아닌 운동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연주의 매 순간을 각각 하나의 완성된 어떤 것으로서 즐겼다기보다는, 연주 전체를, 세 개의 악장과 각 악장의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조적 총체로서, 그리고 그 요소들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면서 감상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즐겼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 경우 그가 즐긴 것을 활동이 아닌 운동이라고 말하면 안 된단 말인가? 두 개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문제점 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그 하나이고, 그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다른 하나이다. 여 기서 학자들의 견해는 갈린다. 다수의 학자들은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11)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준비된 답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 답 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 그가 즐기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과정 자체가 아니라 활동이다. 집 을 짓는 일을 즐기는 사람을 생각 해 보자. 1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예에 11) A. Gosling/T. Bostock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활동과 즐거움 81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해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이 경우 그가 즐기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과정으로서의 집 지음이 아니다. 즉 그가 즐기는 것은 집의 구조가 갖춰져 가는 것, 재료들의 모습과 위치가 차례로 변해가는 것 자체가 아니 다. 그가 즐기는 것은 그의 기술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구 체적인 결과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에 과 정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에도, 즐거움은 그 과정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즐 거움은 그것의 주체가 가진 능력과 본성이 구현에 있다. 13) 우리는 일단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으로 보이는 일을 즐기는 것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즐거움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은 주어진 각각의 주제에서 더 잘 분별하고 더 정확하 게 판단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기하학자가 되 고, 각각의 것들을 더 잘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집 짓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kodomoi),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좋아 하는 사람들도 각각 자신의 영역에서 기쁨을 느낄 때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에서 진보하게 되는 것이다(NE, 1175a31-36). 집 짓는 일은 명백히 활동이 아닌 운동의 예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운동이 즐거움의 대상 이 될 수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는, 두 번째의 해석을 취하는 학자들의 생각처럼, 운동을 즐기는 예도 일 종의 활동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점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각했을 개연성 이 높아 보인다.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필자는 두 번째의 해석에 동의한 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이런 대응은 제기된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소책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첫 번째의 비관적 해석을 취하 는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의 한계를 적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 각한다. 모든 운동의 향유를 그것의 향유자가 가진 능력의 실현으로 재기술 하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실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 는 것이 곧 즐거움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나름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하 12) 집짓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이 활동이 아닌 운동의 예로 거명하고 있는 것 이다.(NE, 1174a20, 형이상학, 1049b30) 13) S. Broadie, Ethics with Aristotle, Oxford, 1991, 344.
82 철학논집(제44집) 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예들이 하나의 과정으로서 향유된다는 사실, 그 리고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그것의 향유에 필 수적이라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둑을 둠으로써 얻어지는 즐거 움에 관해서, 그것은 바둑 실력의 실현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실력의 실현은 오직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만, 즉 흑의 첫 수로부터 시작해 한 쪽이 마지막 공배를 매우거나 돌을 던지는 순간으로 종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 실이다. 그리고 바둑을 두는 사람이 무엇을 즐기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물 론 자신의 바둑 실력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답은 그가 즐기는 것은 승리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한 치열한 경합의 과정이라는 것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단순히 자체로 성립 가능한 하나의 설명 방식이 아니라, 경쟁 이론을 결정적으로 논파하려 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이었다면, 그 목적은 전적으로 성공적으로 성취되 지는 못했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적인 판단이다. V. 활동의 완전성과 즐거움 이제까지의 논의는 주로 부정적인 각도에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 움 이론에 제기된 반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제부터는 그의 이론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에서, 즉 그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의 의미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핵심적인 과제는 즐거움이 자연적 성향의 활동이라는 규정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규정이 주어지는 NE 7권의 범위를 넘어 NE 10권에서의 논의를 함께 다루 어야 할 필요가 있다. 관련된 주요한 단서들은 오히려 전자가 아닌 후자에 서 중점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지각의 예를 통해 즐거움의 본성을 설명한다. 모든 감각은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대상에 관계해서 활동하는데, 가장 완 벽하게 활동하는 것은 좋은 상태의 감각이 그 감각에 해당하는 감각 대상
활동과 즐거움 83 들 중 최선의 것에 관계할 때이다. (완전한 활동이란 무엇보다도 바로 이 러한 것인 듯 보인다. 감각 자체가 활동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든 감각기 관이 활동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든 아무 차이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각각의 감각에 있어서 최선의 활동이란 가장 좋은 상태의 감각이 그 감각 에 해당하는 감각 대상들 중 가장 훌륭한 것에 관계할 때 나오는 활동이 다. 바로 이 활동이 가장 완전하며 가장 즐거울 것이다(NE, 1174b14-20).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 지각의 예를 통해 자신의 즐거움 이론을 개진하 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과정 이론이 당대의 의학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주로 기본적인 신체적 즐거움을 염두에 둔 이론임을 상기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여기에 과정 이론 의 한계가 있다고 본다. 과정 이론은 결여와 그것에 수반하는 고통을 전제 로 하지 않는 즐거움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즐거움을 자연적 상 태로의 복귀로 규정하고, 따라서 자연적이지 않은 상태와 그에 수반하는 고 통을 즐거움이 생겨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가 보기에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즐거움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그 반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NE 7권에서 관조 활동을 제시 한다. 예를 들어, 관조 활동처럼 고통과 욕망을 수반하지 않는 즐거움이 있으며, 이러한 활동의 경우 본성은 어떤 결핍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NE, 1153a1-2). NE 10권에서는 좀 더 많은 예들이 제시된다. 배움에서의 즐거움들과 감각에 따른 즐거움들 중 후각을 통한 즐거움들, 그리고 많은 소리들과 볼거리들, 기억과 희망, 이런 것들은 모두 고통 없이 일어나기 때 문이다(NE, 1173b16-19). 과정 이론은 고통을 자연적인 것의 결핍으로, 즐 거움을 그것의 충족으로 설명하지만(NE, 1173b7-8), 위의 예들은 어떠한 결 핍 없이도 즐거움이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각 지각과 관조를 통한 설명은 앞서 NE 7권에서 제시된 즐거움의 규 정, 즉 자연적 성향의 활동 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했던 바를 잘 드러 내 준다. 감각 지각과 관조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영혼의 성향 혹은 능력 감각 지각의 경우 감각 능력(to aisthētikon), 관조의 경우 지성(nous) 의 실 현이다. 그리고 이 실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활동(energeia)이라고 부 르고 있는 것이다 은 각각의 성향이 최선의 방식으로 현실화되었을 때 완
84 철학논집(제44집) 전한 것이 된다. 감각 지각의 경우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감각 능력이 최선 의 상태에 있고 감각 지각의 대상이 최상의 것일 때 이루어진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활동이 최상의 즐거움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 화시켜 말하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본성적 성향 혹 은 능력을 완전히 실현할 때, 즐거움은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14) 아리 스토텔레스가 즐거움은 지각된 생성이 아니라 자연적 성향의 활동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바의 핵심은 바로 이 점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단락이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즐거 움은 활동을 완전하게 한다(teleioi). 그런데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은 감각 대상이나 감각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과 동일하지 않다. 마치 건강과 의사가 동일한 방식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의 원인은 아니듯이 말이다(NE, 1174b23-27). 이 구절이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간 단하다. 앞서 NE 7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방해 받지 않은 본성 적 성향의 활동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 규정에서 즐거움을 일종의 활동이라 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위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 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규정에서는 그는 즐거움이 어떤 종류의 활동이라고 말하는 대신,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어떤 것, 따라 서 그 활동과는 다른 어떤 것인 듯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외 견상의 불일치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 자체의 의미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완전함을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가 피하게 이 부정적이고 간접적인 단서들로부터 최선의 추정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은 감각 대상이나 감각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다. 앞 서 논의된 대로 감각 기관 혹은 능력이 완전하게 활동하는 것은 그가 자신 14) 반대로, 감각 대상이나 감각 능력 중 어느 한 쪽이 좋은 상태에 있지 않을 때, 즐거움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는 있지만 청각이 좋지 않 은 경우나 예민한 청각은 있지만 소음만이 가득한 경우 즐거움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활동과 즐거움 85 이 좋은 상태에 있고, 감각 대상들 중 최선의 것과 관계할 때이다. 최상의 시각 능력과 최상의 시각적 대상이 관계 맺을 때, 보는 활동은 완전하게 된 다. 최상의 청각 능력과 최상의 청각적 대상이 관계 맺을 때, 듣는 활동은 완전하게 된다. 결국, 감각 지각의 활동의 경우, 감각 능력과 감각 대상은 최상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전제조건으로서 그 활동을 완전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차이를 마치 건강과 의사가 동일한 방식으로 건 강하게 되는 것의 원인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의미 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건강과 의사가 건강하게 되는 것의 원인이 되는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각 각 후자의 형상인과 작용인으로서이다. 이 사실로부터 학자들은 아리스토텔 레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완전하게 하는 방식의 차이가 곧 네 원인들 간의 차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즐거움이 그것이 완전하게 하는 활동 의 어떤 원인인가 하는 것이 된다. 선택지는 대략 둘로 좁혀졌다. 즐거움은 그것이 완전하게 하는 활동의 형상인이거나 목적인이다. 15) 하지만 이런 문 제 설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건강과 의사의 예를 사원인설의 틀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건강과 의사 각각이 네 개의 원인들 중 특정한 원인인 것처럼, 즐거 움도 네 원인 중 하나로서 활동을 완전케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그는 단순히, 건강과 의사가 건강하게 됨의 원인이 되는 방식이 다르듯 이,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은, 비록 완전하게 함이라는 동일 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감각 대상과 감각 능력이 감각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16)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 원인설의 틀 안에 한정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는 단지 즐거움과 활동 의 독특한 연관 관계에 주의를 환기시키려 했다고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5) Gauthier and Jolif는 목적인을(L Éthique à Nicomaque II, 839), Gosling and Taylor는 형상인을 주장한다.(The Greeks on Pleasure, 244) 16) S. Broadie/C. Rowe, Aristotle - Nicomachean Ethics, Oxford, 2002, 436.
86 철학논집(제44집)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어떤 것 이라면, 최소한 이 말은 즐거움과 그것이 완전하게 하는 활동이 동일한 것 이 아님을 함축하는 것 같다. 과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였는가? 다음의 구절에서 그는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즐거움은 활동을 완전하 게 하되, 내재하는 성향(hexis enhyparchousa)이 완전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 라, 한창 때의 젊은이들에게 hōra가 그런 것처럼, 어떤 수반하는 목적 (epiginomenon telos)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NE 1174b31-33).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식은 내재하는 성향이 활동을 그렇게 하는 것과 대비된다. 활동은 그것의 주체가 그 활동이 온전히 수행될 수 있는 훌륭한 내재적 상태에 있는 경우에 완전해진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타고난 자질 과 꾸준한 연습을 통해 익혀진 기량이 그 안에 갖춰짐으로써 완전해진다. 축구 선수의 완벽한 플레이 역시 볼을 다루는 활동에 필요한 신체적 조건 의 의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방 식은 이런 예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즐거움은 활동의 실현을 위해 갖춰져 야 할 내적 조건이 아니라 활동에 수반하는 어떤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즐거움과 활동의 관계를 젊은이와 hōra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hōra 의 애매성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을 야기한다. hōra 는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는데, (1) 한창 때의 젊은이들이 발산하는 생명력이 나 아름다움이 그 하나이고, (1)이 발현되는 시기가 또 다른 하나이다. hōra 를 둘 중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수반하는 목적 의 해석 역 시 달라지게 된다. 고슬링과 테일러는 두 가능성 중 (2)의 손을 들어준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미가 (1)이었다면, 젊음이라 는 완전한 상태에 추가된 또 하나의 완전함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 될 텐데, 이것은 그들의 표현을 빌면 용서받지 못할 급작스러움(unforgiveable suddenness) 를 동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 고 있었던 것이 (2)의 의미였다면, 그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 은 한창때의 시기가 그 시기에 있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 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사실상 한창 때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사람은 완전성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완전성에 또 하나의 완전성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지게
활동과 즐거움 87 된다. 17) 고슬링과 테일러의 해석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개의 완전성이 아닌 하나의 완전성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그의 입장을 한결 단순한 것으로 만든다. 만일 그가 하나 가 아닌 두 개의 완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우리는 어떻게 그 둘이 다르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 을 찾아내야 하는, 전혀 쉽지 않아 보이는 과제를 떠맡게 되게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고슬링과 테일러의 해석은 문제의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둘이다. 우선, 젊음의 시기가 젊은이들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함의 의미를 극도로 약하게, 혹은 좀 더 냉 정히 판단하자면 거의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고슬링과 테일러 는 이 점을 사실상의 이점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해석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하고 얻어진 이점이라는 점에서, 과연 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또 그들의 해석은 수반하는 목적(epiginomenon telos) 의 의미도 극도로 약화시킨다는 약점도 가진다. 그 정확한 의미가 무 엇이든, epiginomenon 은, 특히 접두어 epi- 의 일반적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어떤 것에 부수적이고,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 연스럽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일종의 telos 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은 그가 즐거움을 그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그 정확한 방식이 어떤 것이든, 동반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무언가로 간주하고 있다는 해석을 좀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렇다면, 앞서의 hōra 를 젊음의 시기가 아닌 젊은이들이 전형적으로 발현하는 생명력이나 아름다움 으로 보는 쪽이 더 개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의 생명력이나 아름다움은 젊음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 토텔레스는 즐거움을 활동에 수반하는 어떤 목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즐거움 은 활동 자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 리는 그가 활동과 즐거움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에도 반대했음을 기억해 야 한다. 그는 수반함 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즐거움이 원래의 활동과 독립 17) J. C. B. Gosling/C. C. W. Taylor, The Greeks on Pleasure, 212.
88 철학논집(제44집) 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종속해서 발생한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활동 자체는 아니지만, 후자와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즐거움은 후자가 온전히 구현되었을 때, 더불어 발생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즐거움이 활동을 완전하게 한 다는 말 역시도 너무 강하게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그들의 젊음을 완전하게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전자 가 후자에 영향을 미쳐 그것이 생겨나게 한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즐거움에 관해서도 유사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즐거움은, 독립적으로 존재하 는 또 하나의 활동이 원래의 활동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쳐 후자를 특정 한 상태에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은, 젊은이들의 피어나는 생명력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징표 혹은 상 징이라는 의미에서, 즉 하나의 활동이 가장 완벽하게 실현되었을 때 더불어 구현되는 것으로서, 그 완전성을 증언하는 징표로서, 그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로 완전한 활동과 즐거움의 관계를 밀접함을 넘어,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활동이 완전하게 실현 되고 그것이 방해 받지 않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즐겁다는 것이다. 18) 일 견 이것은 지나치게 강한 주장으로 보인다. 우리의 직관은 하나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그것으로부터 경험하는 즐거움 사이에 필연적 연관관계 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러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완벽 한 연주를 해 낸 연주자가 개인적인 이유로 전혀 즐겁게 연주를 하지 못하 고 오로지 프로의식과 의무감에서 그렇게 했을 상황을 우리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심한 우울증으로 힘겨워하는 중에도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해 멋진 플레이를 보여준 스포츠 선수도 우리는 충 분히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은 설사 많은 경우에 완전하게 수행된 18) 각각의 품성상태가 방해 받지 않는 활동을 갖는 한, 모든 품성상태의 활동이 행복이든 그것들 중 어떤 품성상태의 활동이 행복이든, 그 활동이 방해 받지 않는 것이라면 가장 선택할 만하다는 점은 아마 필연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즐거움이다. (NE, 1153b9-13)
활동과 즐거움 89 활동이 즐거움을 산출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 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을 완벽하게 해 내 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경험하는 즐거움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 은 필요조건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열등한 종류의 즐거움이 분명 존재하며, 그런 즐거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완전한 활동을 구현한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의 완벽한 수행과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이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는 예들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 영역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추측이 옳다면, 그는 아마도 그러한 예들이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근원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예들은 매우 특수하고 한정된 상황들 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 완전하게 자신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최고의 즐거움을 느 끼면서 그 활동을 수행할 것임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는 또한 그 즐거움은 평범한 수준의 기량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며, 해당 활동의 완전함을 증언하는 진정한 징표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것이 다. 물론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실력은 형편없지만 나는 매일 피아노 소품을 연습하는 일이 즐겁다고 반박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 텔레스는 아마도 그의 윤리학에서 왜 즐거움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가를 다 시 한 번 상기시킬 것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된 대로, 즐거움은 덕과 행복이라는 주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한 윤리학적 주제가 된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 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는 모든 종류의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즐 거움을 아우르는 가장 일반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덕을 실현하는 삶, 진정으로 행복한 삶에서 즐거움이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에 수반하는 즐거움의 성격을 구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즐 거움 이론은 저열한 인간의 저열한 즐거움을 설명하는 데 난점을 발생시킨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래서 그는 NE, 1152b33-1153a7에서, 일견 과정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
90 철학논집(제44집) 일 수 있는 상황, 즉 본성적 상태가 회복될 때 느끼는 즐거움을 어떻게 설 명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다. 그러한 경우, 본성적 상태로 회복시키는 운 동은 오직 우연적으로만(kata symbebēkos) 즐거울 뿐이다. 이 즐거움은 정상 적인 상태에 있는 성향과 본성의 활동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윤리적인 손상의 경우는 어떤가? 즉 가장 저열한 인간이 가장 저열 한 활동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적용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그런 예에까지 자신의 이론이 적용될 것을 의 도했는가? 이런 경우에까지 그가 완전한 활동, 그 완전성으로부터 필연적으 로 수반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려 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은 결국 그의 즐거움 이론이 가지는 (심리학적이 아닌) 윤리학적 관심을 고려할 때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9) VI. 나가는 글 - 즐거움의 고유성과 쾌락주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론에 내포된 여러 난점들은, 완전히 해소되 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가 그 이론을 통해 비판 혹은 극복하고자 했던 철 학적 입장이 무엇이었는가를 고려하면 상당 부분 이해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즐거움이 전혀 좋음이 아니라는 입장에 반대하 고자 했다. 과정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이 관심사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다. 과정 이론의 옹호자들은 보통 육체적 즐거움을 즐거움의 전 형적인 예로 생각해, 그것이 훌륭한 삶에 아무런 기여를 하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방해한다고 여긴다. 여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과정 이론이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육체적 즐거움 외에도 다양한 즐 거움이 존재하며, 그것들 중에는 결핍 상태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것들이 존 19) D. Frede, Pleasure and Pain in Aristotle s Ethics, ed. R. Kraut, The Blackwell Guide to Aristotle s Nicomachean Ethics, 2006, 269. [ ] But such explanations would be desperate remedies. It comes as no surprise then, that Aristotle, with the exception of such less than satisfying side-remarks, leaves the bad man s pleasures aside in the Nicomachean Ethics.
활동과 즐거움 91 재함을 지적한다. 즐거움은 과정이 아니라 좋은 본성적 상태의 현실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정 이론에 대한 비판을 보다 고차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그는 과정 이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에 초점을 맞춘다. 일반적으로 즐거움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 과 같은 이유들을 댄다. 모든 즐거움은 자연적 상태로 가는 지각된 생성 (genesis eis physin asthēte)인데, 그 어떤 생성도 목적과 동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집을 짓는 생성의 과정은 절대로 집과 동류일 수 없다는 것이 다. (NE, 1152b12-15) 즐거움은 좋음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 근거로 즐거움은 생성이고, 생성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는 것이다. 20) 여기에 대해 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을 운동과 대조시키면서, 즐거움을 활동을 완성시 키는 일종의 목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응한다. 이 점은 그가 활동이 완성되 어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21) 완성되어 있는(teleios) 과 목적(telos) 의 언어적 친연성은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활동은, 운동과 달리, 그것이 실현되는 매 순간에 이미 그것이 실현해야 할 바, 즉 한마디로 그것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다. 만일 즐거움이 활동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혹은 그 자체의 실현을 목적으로 갖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목적은 좋은 것의 부류에 속한다는 형이상학적 원리 20) 이 구절은 플라톤의 필레보스 53c-54d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곳에서 소크 라테스는 어떤 기발한 사람들 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즐거움은 언제나 생성이지, 전혀 존재가 아니다. (53c) 소크라테스는 일련의 논의를 거쳐 정말 즐거움이 생성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의 부류와는 다른 부 류에 속하는 것 (54d)이라고 결론 내린다. 생성은 언제나 존재를 위해 있는 것 이고, 따라서 생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존재를 그것의 목적으로 가지 는데, 좋은 것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목적이기 때문이다(54c). 21) 운동은 그 어느 시간에서나 완성된 것은 아닌 것 같고, 많은 운동들은 완성 되지 않는 것들이며 [ ] (NE, 1174b3-4) 봄은 어떤 시간에서도 완성된 것 같 다. 봄은 나중에 생겨나서 봄의 형상을 완성하게 할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NE, 1174a14-16)
92 철학논집(제44집) 를 받아들인다면, 즐거움은 좋은 것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즐거움을 목적으로 만듦으로써 그것과 좋음을 분리시키려는 시도 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즐거움이 목적이고 따 라서 좋음이라면, 이것은 쾌락주의, 즉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즐거움 이라는 이론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즐거움을 좋음과 분리하는 것에 못지않게 양자들 동일시하는 것에 도 반대한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이 이론이 드 러내는 여러 문제점들은 궁극적으로 그가 그 이론을 통해서 동시에 두 개 의 극단적인 입장을 거부하려 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는 한편으로 즐거움을 일종의 완성된 목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즐거움과 좋음의 분리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즐거움이 활동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것에 내재하는 목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즐거움을 좋음과 동일시하는 쾌락주 의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쾌락주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즐거움의 다양 한 종류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즐거움을 동질적으로 취급해, 그것 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즐거움에는 바람직한 즐거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즐거움과 그렇지 못한 즐거움의 객관 적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활동에 종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훌륭한 활동에 수반해 발생할 때, 그 즐거움은 훌륭한, 가치 있는 즐거움이 된다. 반대로 저열한 활동에 수반해 발생할 때, 그 즐거움은 저열한, 가치 없는 즐거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특수화한다. 즉 즐거움을 느끼는 모든 존재 에 공통적인 즐거움을 상정하는 대신, 각각의 존재마다 자신의 본성에 따른 상이한 즐거움을 배분한다. 그가 즐거움에 관한 논의의 마지막 장을 즐거움 의 다양한 종류에 대한 논의에 할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각각의 동물에 고유한 일(ergon)이 있는 것처럼 고유한 즐거움 (hedonē oikeia)도 있는 것 같다. 그 활동을 따르는 즐거움이 고유한 즐거움 이니 말이다 말이 느끼는 즐거움, 개가 느끼는 즐거움, 인간이 느끼는 즐 거움이 각각 다르며,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귀는 황금이 아 니라 여물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귀에게는 황금보다 먹을거리가 더
활동과 즐거움 93 즐거운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종류가 다른 동물들의 즐거움은 그 종류에 따라 다르고,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들의 즐거움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사 리에 맞을 것이다(NE, 1176a3-9). 상이한 종의 동물들은 각각 고유한 특징 적 활동(ergon)을 가진다. 그리고 즐거움은 그것이 수반하는 활동에 상응하 기 때문에, 각 종의 동물들은 고유한 즐거움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과는 구분되는 고유의 즐거움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개개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즐거움을 느끼 는 것들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경우에 있어 서는 즐거움들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 동일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싫은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겁고 사랑스럽기 때문이 다. (NE, 1176a10-12) 쾌락주의자들은 인간은 모두 즐거움을 추구하며, 따라서 보편적 추구의 대상인 즐거움이 바로 좋음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그 성향에 부응하는 다양 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 강조점을 찍는다. 그들의 상이한 성향은 그 성향에 상응하는 상이한 활동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 활동의 상이 함에 상응하는 상이한 즐거움이 뒤따라 생겨날 것이다. 즐거움은 활동에 수 반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는 즐거움의 보편적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활동이 개인 간의 성향의 상이함 때문에 상 이한 만큼, 그것에 수반하는 즐거움도 서로 상이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런 식으로 즐거움을 성향의 차이에 따라 특수화함으로써, 그는 보편적인 즐거움을 전제로 하는 쾌락주의의 논제를 약화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94 철학논집(제44집) 참고문헌 김영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있어서 즐거움의 문제 -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과 10권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제12권, 1995, 67~8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길, 2011. Ackrill, J. L., Aristotle s Distinction between Energeia and Kinesis, ed. R. Bambrough, New Essays on Plato and Aristotle, London, 1965, 121~41. Annas, J., Aristotle on Pleasure and Goodness, ed. A. O. Rorty, Essays on Aristotle s Ethics, California, 1980, 285~99. Bostock, D., Aristotle s Ethics, Oxford, 2000. Broadie, S., Ethics with Aristotle, Oxford, 1991. Broadie, S./Rowe, C., Aristotle - Nicomachean Ethics, Oxford, 2002. Frede, D., Rumpelstiltskin s Pleasures: True and False Pleasures in Plato s Philebus, Phronesis, 30, 1985, 151-80; reprinted in G. Fine, ed. Plato 2, Oxford, 1999, 345~72., Pleasure and Pain in Aristotle s Ethics, ed. R. Kraut, The Blackwell Guide to Aristotle s Nicomachean Ethics, 2006, 255~275. Gauthier, R. A./Jolif, J. Y., L Éthique à Nicomaque, introduction, traduction et commentaire, Nauwelaerts, 1958-9.(reprinted 2002) Gosling, J. C. B./Taylor, C. C. W., The Greeks on Pleasure, Oxford, 1982. Gottlieb, P., Aristotle s Measure Doctrine and Pleasure, Archiv für Geschichte der Philosophie, 75, 1993, 31~46. Hardie, W. F. R., ed. Aristotle s Ethical Theory, 2nd(enlarged), Oxford, 1968. Owen, G. E. L., Aristotelian Pleasures,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72, Oxford, 1971-2, 135~52. Riel, G. van, Pleasure and the Good Life: Plato, Aristotle, and the NEoplatonists, Brill, 2000. Rorty, A. O., Acrasia and Pleasure: Nicomachean Ethics Book 7, ed. A. O. Rorty, Essays on Aristotle s Ethics, California, 1980, 26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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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철학논집(제44집) <Abstract> Activity and Pleasure - Aristotle s Theory of Pleasure - Chun Hun-Sang (Sogang Univ.) This article explores Aristotle s theory of pleasure in relation to the theories he has in mind when he constructs his own theory. This article examines how and to what extend his theory deals with the so-called process theory of pleasure, which was Aristotle s main target, especially by defining pleasure as the activity of the natural state. This article also scrutinizes the distinction between movement and activity, what is the main theoretical tool he uses in attacking the process theory, addressing some difficulties in the distinction and considering whether these difficulties cause trouble to his theory of pleasure itself. Finally, this article discusses the implications of Aristotle s presentation of pleasure as a kind of end and his conception of proper pleasure in relation to the criticism of hedonism. Key words: Pleasure, Activity, Movement, End, Perf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