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관광 핵심이야기 99선 서울의 숨겨진 99개 이야기 2015.12 서울시 관광정책과
목 차 자연/경관 1 1. 한양도성의 경계가 된 선바위 3 2. 싸움은 화합의 씨앗? 싸움의 터에서 사랑의 터로 바뀐 천변 풍경 5 3. 억새인 듯 억새 아닌 억새 같은 갈대! 7 4. 서울의 전망 좋은 곳. 9 5. 큰 결정은 이곳에서. 11 6. 숯에서 나온 검은 물, 탄천 13 7. 정선의 그림으로 보는 한강의 풍광 15 8. 21세기 한강의 기적, 도심 속 비무장지대 밤섬의 부활 17 9.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19 10. 희어질수록 흥하는 소나무, 백송 21 11. 이름 속에 이야기를 품은 서울의 고개들 23 12. 서울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준 선유도 25 13. 쓰레기더미에서 피운 장미꽃, 난지도 27 14. 옷 갈아입는 조각상의 비밀 29 15. 철길 따라 떠나는 산책길, 구로구 항동 철길 31 16. 화살이 꽂혀 살꽂이, 그리고 살곶이다리. 33 17. 풍수지리, 서울 35 18. 곰달래 마을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 38 19.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간직한 아차산 40 거리/마을 43 1. 조선시대 정육점, 성균관 다림방 45 2. 응답하라 1990, 홍대 앞 문화 변천사 47 3. 사랑을 쓰려거든, 효자동으로. 49 4. 부암동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51 5.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덕수궁 돌담길 53 6. 서울의 브룩클린, 성수동 55-3 -
7. 노동자들을 달래주는 벽화, 이화마을 57 8. 강남의 테헤란로, 이란의 서울로? 59 9. 낭만 가득한 철길이 있는 연남동 기찻길. 61 10. 서민들의 공간에서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해방촌 63 11. 서울에도 있다! 문래 예술창작촌 65 12. 서래마을을 이어주는 누에다리에 소원을 빌어봐. 67 13. 노동자들의 터전, 구로디지털단지 69 14. 공부 좀 해? 모여! 노량진, 신림 고시촌 71 15. 노룬산 금닭의 전설 73 16. 서울 최초의 카페가 있던 정동길 75 17. 잠시 쉬어가는 서울 가는 길, 떡전교 77 유적/건축물 79 1. 의연하게, 늠름하게. 서대문형무소의 두 미루나무 81 2. 국권 피탈에 맞선 여장부, 마지막 황후가 있던 낙선재. 83 3. 천년 만에 기적처럼 깨어난 백제 유적 85 4. 대통령들에게 둘러싸인 창빈 안씨 묘역 이야기 87 5. 단비가 기쁜 곳, 희우정( 喜 雨 亭 ) 89 6. 맥주공장이었던 시민공원 91 7. 기네스북 in 서울 93 8. 교황이 다녀간 서울의 성지, 절두산 성지와 서소문 순교지 95 9. 한글의 위대함을 알리는 한글누리. 97 10. 서민 옆에 잠든 독립유공자들, 망우리 공원 99 11. 한양도성과 효녀 도리장 101 12. 쌀바위 전설이 담긴, 늘 닫혀있던 숙정문 103 13. 국회의사당에는 태권브이가 있을까? 106 14. 시간은 흘러도 그 자리에 변함없는 명동극장. 108 15. 낙성대학교? 아니,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 落 星 垈 )! 110 16. 서울을 향한 불기운을 막아라 112 17. 만병통치약 시구문 돌가루 114-4 -
18. 공사 실명제로 쌓은 한양 도성 116 19. 프랭크 게리도 극찬한 DDP 118 20. 해방의 날, 정월 대보름 수표교 다리밟기 120 21.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종묘와 종묘제례악. 122 22. 63빌딩 어디까지 알고 있니? 124 23. 음기가 강한 숙정문을 가뭄에 열었던 사연은? 126 24. 혜화문의 봉황을 찾아서 128 25. 낭만을 간직한 한국 최초의 상설극장, 우미관 130 26. 우리가 모르던 서울의 군사시설들 132 27. 한국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팔다, 웨스틴 조선호텔 134 28. 강남 이색 건축물, 무엇을 닮았을까요? 136 29. 얼음을 지켜라! 조선시대 냉동고 서빙고. 138 30. 동룡이네 집 어디니? 140 31.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남영동 대공분실 142 32. 행복한 마음의 궁전, 딜쿠샤 144 인물 147 1. 서촌에서 무엇을 했을까? 모던보이 천재시인, 이상 149 2. 안경점이 자리 잡은, 세종대왕 나신 곳 151 3. 명동에 성룡이? 명동 거리를 수놓던 배우들의 흔적 153 4. 정릉에 남겨진 사랑이야기 155 5. 시인 백석 의,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 자야. 157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국의 의서 동의보감 159 7. 조선의 예언가, 흙집 지어 살던 마포나루 162 8. 일제로부터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164 9. 금을 던진 투금탄 나루, 공암나루 166 10. 아차산에 전해오는 아기장수 전설 168 11. 이순신 장군의 터전이 영화인의 메카로 충무로. 170-5 -
쇼핑/먹거리 173 1. 국내 최대 패션시장, 시작은 군대로부터 175 2.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혼상제는 광장시장 177 3. 김 첨지의 그 음식, 설렁탕 179 4. 접수할 수 있겠어? 마장동 축산물시장 181 5. 실수의 미( 味 )학, 무교동 낙지 183 6. 알몸으로 시작, 완전군장 실시 이상 무! 남대문시장 185 7. 세계가 매료된 이태원 양복 187 8. 사랑을 타고 오는 재래시장, 방산시장. 189 9. 노량진 수산시장의 변신은 계속된다 191 10. 전문적이야, 서울 시장 193 11. 서민의 삶을 달래준 시장 먹거리 195 12. 멋쟁이 DJ오빠가 있던 맛있는 신당동 떡볶이 타운. 197 엔터테인먼트 199 1. 주체할 수 없는 끼, 버스킹 홍대 201 2. 너와 나의 사랑의 연결고리, 남산의 자물쇠. 203 3. 아기 공룡이 사는 쌍문동 205 4. 불멸의 명작, 아리랑 촬영지 아리랑 고개. 207 5. 남산에 가면,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있다! 209 6. 서울의 다양한 영화관, 이제는 각자의 길로 211 7. 유령역에 유령보다 더 자주 출몰한다는 것은? 213 8. 악기시장계의 기네스북, 낙원상가 215-6 -
자연/경관 1. 한양도성의 경계가 된 선바위 2. 싸움은 화합의 씨앗? 싸움의 터에서 사랑의 터로 바뀐 천변풍경 3. 억새인 듯 억새 아닌 억새 같은 갈대! 4. 서울의 전망 좋은 곳 5. 큰 결정은 이곳에서 6. 숯에서 나온 검은 물, 탄천 7. 정선의 그림으로 보는 한강의 풍광 8. 21세기 한강의 기적, 도심 속 비무장지대 밤섬의 부활 9. 서울의 가장 오래된 나무 10. 희어질수록 흥하는 소나무, 백송 11. 이름 속에 이야기를 품은 서울의 고개들 12. 서울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준 선유도 13. 쓰레기더미에서 피운 장미꽃, 난지도 14. 옷 갈아입는 조각상의 비밀 15. 철길 따라 떠나는 산책길, 구로구 항동 철길 16. 화살이 꽂혀 살꽂이, 그리고 살곶이다리. 17. 풍수지리, 서울 18. 곰달래 마을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 19.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간직한 아차산 - 1 -
1. 한양도성의 경계가 된 선바위 조선의 도읍을 세우기 위해 지금의 서울인 한양 땅을 살펴보던 정도전과 무학대사. 두 사람은 인왕산 자락에 있는 바위 하나를 앞에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된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이 싸움이 서울의 경계는 물론이고 훗날 서울이라는 이름까지 좌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문제의 바위인 선바위( 禪 岩 )는 마치 장삼을 입은 스님이 참선하 는 모습이라 해서 선바위 로 불리는 바위인데, 무학대사는 이 선 바위를 승려 의 상징으로 판단하여 조선왕조에서 불교가 배척당 하지 않도록 성 안쪽에 두려고 했다. 반면 정도전은 선바위가 도 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하고 유교가 성할 것이라 판단하고 이 를 반대한 것. 두 사람은 조금도 서로의 입장을 양보하지 않고 싸움은 커져만 갔다. 그런데 정작 이 싸움에서 곤란한 입장에 놓인 것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였다. 두 사람 모두 조선건국을 도와준 일등공신들이기 때 문에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 다. 하지만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 태조의 근심은 깊 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성계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모두들 그의 갑작 스런 결정에 깜짝 놀라지만, 사실 그 계기는 의외로 한 번의 꿈 으로 결정이 난다. 그 꿈의 내용은 이렇다. 서울에 큰 눈이 내렸 는데, 선바위가 있는 바깥쪽까지는 눈이 녹지 않고 그 안쪽으로 만 눈이 녹았던 것이다. 이성계는 이를 하늘이 내린 징조라 보고 - 3 -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는 즉시 선바위 안쪽으로 성을 짓도록 명했고, 결국 선바위는 도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길고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게 된 다. 오늘날 서울 이라는 명칭이 눈을 뜻하는 한자어 설( 雪 ) 에 울타리를 뜻하는 울 이란 우리말이 합쳐진 설울 에서 왔다는 설 은 이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후 불교는 실제로 배척당하게 되고, 조선은 유교국가로 발전하 게 된다. 오늘날 선바위는 종로구 무악동의 인왕산에 있는 한양 도성 구간을 오르는 도중에 볼 수 있다. 그 주변에 모여 있는 많 은 절들을 보면 무학대사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시 태조의 결정에 무학대사는 이제 중들은 선비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오늘 날의 이 같은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진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선바위, 인왕산, 한양도성 위치 : 종로구 무악동 석불각 이야기 태그 : 정도전, 무학대사, 한양도성, 조선 천도 - 4 -
2. 싸움은 화합의 씨앗? 싸움의 터에서 사랑의 터로 바뀐 천변 풍경 1930년대 발표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은 청계천변을 배경 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근대화 변화의 바람 속에 여전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던 당시 청계천변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 군상과 외면풍경이 어우러져 마치 카메라로 영사하듯 묘사해나가 는 새로운 방식을 구사했던 문학작품이다. 그 안에, 흥미로운 광 경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의 피해는 깊숙한 다리 안에 자리 잡은 깍정이들의 몸 위에 더 커서 갑자기 불은 개천 물에 집이며, 아끼던 물 건 넣어 놓은 궤짝이며 다 잠기고 말았다. 날이 개자 사람들이 천변가에 몰려 나와 불어난 개천물에 떠내려 오는 물건들을 건져내려고 한판 시 합을 벌인다.> - 천변풍경 본문 中 아이들의 팽이치기, 달밤의 태껸놀이, 연말부터 정월보름까지 연 날리기, 정월 대보름날 다리 밟기, 개천 바닥에서 돌팔매 싸움 등 장안 사람들의 뜨락으로 사랑을 받았던 청계천. 한여름이면, 그곳 은 전쟁터가 되곤 했던 것이다. 홍수에 청계천변까지 떠내려 온 귀중품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가난했던 당시 한국의 어려 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다. 자꾸 싸우다보면 정든다고 했던가. 그런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터를 꾸려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촌락을 꾸리게 된 것이다. 처음엔 떠내려 오는 물건들 위주로 생계를 꾸리던 그들 은, 점점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게 됐다. 근처에 벼룩시장이 형성 되고, 철물점 등이 운영되며, 그렇게 과거 청계천은 사람들이 모 여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 5 -
지금은 현대적으로 개발돼, 많은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편하게 오 갈 수 있게끔 조성되어있다. 그 옛날 귀중품을 차지하기 위해 몸 싸움을 벌이던 이곳은 이제 연인들이 손을 맞잡고 사랑을 속삭이 는 장소가 됐다. 과거 싸움의 터인 청계천변이,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여행객들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마치 인간사 전체를 대변하는 것만 같은 청계천의 모습. 싸움으 로 시작됐을지라도, 세월이 흐를수록 나타나는 인간의 본래 모습 은 결국 역시 화해와 사랑인 것이 아닐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청계천, 주변상가, 광화문광장 위치 : 종로구(서린동, 종로5가) 이야기 태그 : 청계천, 천변풍경 - 6 -
3. 억새인 듯 억새 아닌 억새 같은 갈대!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기는 썸 인지 아닌지 구별 하는 것만큼 헷 갈리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설프게 아는 하수들이나 하는 말이다. 진정한 고수는 주변만 둘러보고도 갈대인지 억새인 지 알아 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서식지의 차이를 보고 알아내는 방법이다. 억새와 갈대는 사는 곳부터 확연히 차이가 있다. 억새가 사는 곳에 갈대 는 살 수 없고, 갈대가 사는 곳에 억새는 살지 않는다. 억새는 보통 산이나 들판 같은 곳에서 산다. 이유는 바로 억새의 뿌리에 있다. 억새의 뿌리는 땅에 얽혀있어서 다른 식물들과 함께 자라 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반대로 갈대는 강가, 습지, 호수, 그리고 바닷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갈대는 물을 좋아하는 식물로 물이 많은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서식지를 봐도 갈대와 억새의 차이를 모르겠다면 두 번째 방법은 키 차이로 알 수 있다. 갈대나 억새가 모두 길게 쭉쭉 높이 뻗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억새는 갈대보다 작은 것이 특 징이다. 갈대는 평균 2-3미터까지 자라난다. 일반 사람들의 키 를 훌쩍 넘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 억새는 조금 작은 키를 자랑한다. 1.2미터 정도로 자라는 것이 평균이라고 한다. 억새인 지 갈대인지 헷갈리면 근처에 가서 내 키와 비교해 보는 것도 좋 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꽃이 만개하는 시기를 보고도 알 수 있다. 억새꽃은 보통 9월부터 10월까지 핀다고 한다. 그래서 억새 축제는 9월부 터 시작된다. 하얀 꽃이 핀 시기가 9월에서 10월사이라면 더 고 - 7 -
민할 것도 없이 눈앞에 있는 것은 억새일 것이다. 그리고 갈대의 경우는 11월에 꽃이 만개한다고 한다. 억새보다 약 한달 정도 늦 게 꽃이 핀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 공원 내 하늘공원에서는 매년 10월 억새꽃이 만개할 시기에 억새 축제를 연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매워 공원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 하늘 공원은 생태공원으로 낮에는 시민들을 위해, 밤에는 야생동물들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 다. 밤에는 시민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억새 축제의 기간 동 안에는 야간 개장하여 시민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억새 축제를 찾아, 억새풀 사이를 거닐며 가족, 연인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하늘공원, 메타세콰이어길, 하늘계단 위치 : 마포구 상암동 이야기 태그 : 상암동 월드컵공원, 하늘공원, 억새 축제 - 8 -
4. 서울의 전망 좋은 곳. 서울시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숨겨진 장소가 있다. 바 로 서울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된 북악산 곡장이다. 북악산의 곡장은 조선시대 방어기지였다고 한다. 이곳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시설이다. 성의 일부를 자연의 지세에 맞춰 돌출시켜 적의 진입을 막는 형태이다. 곡장, 혹은 치성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생김에 따라 구분되어 진다.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어 치 라는 이름을 붙였고, 각이 진 곳은 치성으로 둥글게 반원형으로 굽은 곳을 곡장이라고 불렀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하는 중요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만큼 일 반 시민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 그런데 유일하게 북악산 의 곡장은 군사작전지역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여 시민들의 출 입이 자유롭다. 북악산의 곡장에 가기 위해서는 한양도성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 데,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다 보며 또 다른 아름다운 전망지를 발 견할 수 있다. 바로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백악마루 이다. 이곳은 한양도성 전체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구간이 라고도 한다. 백악마루에 서면 서울 도심이 한 눈에 보이는데, 한 양도성 전 구간에서도 손에 꼽히게 전망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가파른 경사 아래로 펼쳐진 서울 도심이 성곽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산에 있는 잠두봉도 빼 놓으면 섭섭한 전망이 아름답기로 유명 한 장소이다. 남산의 잠두봉은 남산 N타워에 남쪽으로 오르는 길 에 발견할 수 있는데, 현재는 많은 관광객과 남산에 출사를 나온 - 9 -
카메라 동호회 회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무 데크로 포토아일랜드라는 장소를 지정해 두었는데, 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가장 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나온다 한다. 특히 포토 아일랜드에는 남산에서 서울 시내의 야 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잠두봉은 근처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위급한 소 식을 전하기 위해 설치한 봉수대는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도록 높 고 시야에 걸리는 것이 없는 산봉우리에 설치하였다. 이렇듯 잠 두봉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와 야경과 경치를 즐 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북악산의 곡장과 남산의 잠두봉 포토아일랜드에 들려서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하고 추억에 남을 사진을 남겨보자.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북악산 스카이웨이,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위치 : 종로구 부암동 / 용산구 후암동 이야기 태그 : 서울 조망장소, 북악산, 잠두봉, 북악스카이웨이, 잠두봉포토아일랜드 - 10 -
5. 큰 결정은 이곳에서. 인생에 있어 큰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 다. 큰 결정을 앞두고 혼자만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도 당연 한 일이다.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던 무학 대사도 마찬가 지였다. 무학 대사가 한양을 내려다보며 천도를 결심했다는 장소 가 바로 국망봉이다. 국망봉은 삼각산 봉우리 중 하나로 만경대 라고 불리기도 한다. 만경대에 올라서 한양을 내려다보면 만 가 지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 학 대사는 이 봉우리에 올라서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고 전해진 다. 무학 대사가 풍수지리에 능하고 남다른 식견이 지녔고, 이성 계가 훗날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도 무학 대 사라 알려져 있다.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데 요즘은 큰 결정을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그곳은 남산의 팔각정이다. 남산의 팔각정에는 특히 새해 첫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일출을 보고, 새해의 결심을 다 진다고 한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그동안 내리지 못했 던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에 빠 지기도 한다고 한다. 남산의 팔각정은 서울에서 가장 일출을 보 기 좋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 새해를 맞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팔각정을 찾아 일출을 감상한다고 한다. 팔각정에서는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시민들을 위해 재미난 볼거리와 즐길 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대북공연이나, 해오름 - 11 -
함성, 행복기원 만세 삼창, 풍물패 공연 등의 볼거리와 떡국 나누 기 행사와 같은 따듯한 먹거리를 행사도 기획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남산의 팔각정에 올라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중요 한 결정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남산공원, N서울타워, 남산팔각정 위치 : 중구 예장동 이야기 태그 : 한양천도, 이성계, 남산 팔각정, 서울 일출명소 - 12 -
6. 숯에서 나온 검은 물, 탄천 성남시의 중앙부를 남에서 북으로 관류하는 한강의 지류 탄천( 炭 川 ). 이 탄천이라는 이름은 숯내 라는 순수한 우리말에서 비롯되 었다고 한다. 이것을 풀이하면 숯에서 나온 검은 물이 흐르는 냇 물 이라는 뜻이 되는데, 도대체 탄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이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은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인물에서 에서 비롯된다. 아주 옛날 옛적에 삼천갑자 동방삭( 三 千 甲 子 東 方 朔 )이라는 사람 이 있었는데 글자 그대로 갑자년을 삼천 번 산 것이니 햇수로 따 져보면 약 18만여년을 산 사람이다.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은 인간 에게 허락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천상, 천하를 막론하고 큰 골칫거리가 되었기에 모두가 그를 잡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워낙 오래 살다보니 뛰어난 능력과 지혜를 겸비하고 있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천상의 옥황상제는 동방삭을 잡기로 결 심하고, 사자( 使 者 )를 지금의 탄천 부근으로 보낸다. 이미 그 주 변에 동방삭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가지 계략을 짜낸 것 이다. 옥황상제는 사자에게 이르러 모습을 평범한 사람처럼 바꾸 고 탄천에서 숯(목탄)을 씻고 있도록 명령을 내린다. 사자는 옥황상제의 지시대로 탄천에서 열심히 숯을 씻기 시작한 다. 냇물에다 숯을 씻으니 물은 자연적으로 검은색으로 탁해졌다. 이윽고 근처를 지나던 동방삭은 검은 물이 흐르고 있는 탄천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여긴다. 얼마 안 되어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 는 건장한 남자를 만나게 된 동방삭은 숯을 씻고 있는 남자에게 - 13 -
다가가 왜 숯을 물에 씻고 있느냐 고 물어보았다. 인간의 모습 을 한 사자의 대답은 숯이 희어지도록 씻고 있는 중 이라는 것 이었다. 동방삭은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숯이 희어진다는 건 불가능했기 에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나는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어 서 희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남자를 비웃으며 떠나 려는 순간, 사자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동방삭이 틀림없음을 확신하고 재빨리 동방삭을 붙들어 잡는다. 모든 것은 동방삭이 스스로 자기 정체를 밝혀 붙잡히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이 다. 옥황상제 앞에 끌려간 동방삭은 그렇게 자신의 길고 긴 인생 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과 신흥동 일대의 옛 지명은 탄리, 탄동인데, 모두 숯을 생산해내고 보관하던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 숯 생산으로 인해 탄천에는 실제로 검은 물이 흐르기 도 했을 것이다. 동방삭 전설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성남시 수정 구에서는 지금도 매년 숯골축제가 벌어진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한강 탄천길, 서울특별시탄천물재생센터 위치 : 송파구 일원 이야기 태그 : 탄천, 옥황상제, 동방삭, 한강, 자전거길 - 14 -
7. 정선의 그림으로 보는 한강의 풍광 한국 미술사에 손꼽히는 화가 겸재( 謙 齋 ) 정선. 그가 양천 현감으 로 부임 한지 얼마 안 돼 먼 곳에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 편 지에는 한시( 漢 詩 )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 던 정선은 붓을 들어 그가 다스리는 양천 관아 풍경을 그리기 시 작했다. 그 그림은 한시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정선에게 한시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평생의 친구였던 사천 이병 연이었다. 정선의 현감 부임으로 두 사람은 한양에서 헤어지며 ' 시화환상간( 詩 畵 換 相 看 )'을 약속했다.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겸 재는 그림을 그려 서로 교류를 멈추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와 그림을 엮은 시화첩이 조선 회화사에 빛나는 '경 교( 京 郊 )명승첩'이다. 화첩에는 만년의 정선이 한강의 명승지들을 그린 서른세 점의 그림과 사천의 시가 실려 있다. 그중 20편의 그림이 한강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양천현감으로 부임해 가던 때는 65세 무렵, 당시 완숙의 경지에 오른 정선이 한강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다. 영조가 정선을 양천 현령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한 강변 경치를 마음껏 그려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교명승첩의 우천( 牛 川 )은 정선이 그린 한강변 풍경 중에 가장 상류지역에 속한다. 우천은 용인에서 광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드는 경안천의 하류지역을 일컫는데, 팔당댐이 지어진 뒤에는 거 대한 호수가 되었다. 송파진( 松 坡 津 )이란 그림에는 송파나루터가 그려져 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사람들과 사람들이 쉴 천막 등이 오밀조밀 그려져 있고, 멀리로는 남한산성이 보인다. 현재는 송파나루터의 흔적만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고 근방의 석촌호수 - 15 -
가 옛 풍광의 증거로 남아있다. 옛 광나루의 모습을 그린 광진 ( 廣 津 )을 보면, 현재의 아차산이 그림 한 가운데 우뚝 서 있고, 산 중턱에 조선시대 세도가들의 별장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오늘 날에는 같은 자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다. 남산을 소재로 그 린 목면조돈( 木 覓 朝 暾 )이라는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목면은 남 산의 옛 이름으로,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아침 해가 남산 봉우 리 언저리에 걸려 있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강서구 가양동, 과거 양천이라 불리던 그 곳의 궁산 정상에 오르 면, 겸재가 그림을 그렸던 소악루 라는 누각이 남아 있다. 당시의 풍광들은 그곳에서 겸재의 손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경교명승첩에는 곳곳에 백문방인( 白 文 方 人 ) 천금물전( 千 金 勿 傳 ) 이라는 문구가 남겨져 있다. 천금이나 되는 큰돈을 준다 해도 남 의 손에 넘기지 말라. 는 뜻이다. 과연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서 울의 풍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겸재정선미술관, 궁산근린공원 위치 : 강서구 가양동 이야기 태그 :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한강 풍경 - 16 -
8. 21세기 한강의 기적, 도심 속 비무장지대 밤섬의 부활 여의도와 마포를 잇는 서강대교를 건너다보면, 번잡한 도시 속에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가 하나 있다.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보 이는 그곳, 밤섬. 두 개로 나뉜 이 섬은 사실 한 때, 사람들이 옹 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다. 고려 때, 죄인을 귀양 보내던 섬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밤섬. 밤섬 이란 이름은 섬이 밤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길이가 7 리(약 2.75km)로 작지 않은 섬이었다. 밤섬은 해방 전까지 율도 ( 栗 島 )정으로 서강 서부동회에 속했었으나, 1968년 2월10일 한강 개발사업에 따라 폭파됨으로써 창전동에 속하게 되었다. 명종실록 의 기록에, 밤섬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방하고,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며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또 한 동성동본이나 반상을 따지지 않고 의논에 맞춰 살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마 馬 씨, 판 判 씨, 석 石 씨, 선 宣 씨등 희귀성의 소유자들로 한강물을 그대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체제 속에서 생활을 영위했다. 외부로의 왕래 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 활을 영위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밤섬에 특이하게도, 대대로 전승되어온 마을굿이 있다. 밤섬부군당도당굿 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마을의 태평과 풍요를 목적으로 행하는 굿의 하나이다. 밤섬은 고려시대 유배지로 약 6 백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오랜 기간 이어져온 것 이다. 실제로 섬 어귀 바위언덕에 수호신을 모신 부군당이 있었 - 17 -
다고 한다. 1968년 여의도 개발사업으로 밤섬은 폭파된다. 그렇게 여의도가 생겨나고 밤섬은 사라지고 만다. 밤섬에 살던 약 60여세대가 마 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집단 이주한 뒤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부군당 짓기였다. 실향민의 아픔을 간직한 굿을 이어가며,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해온 것이다. 그런데, 자연이란 정말 놀랍고 신비롭다. 파괴되었던 이 섬이 해 가 갈수록 원래의 섬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살 이 돋듯 모래톱과 갯벌이 늘어가며, 폭파로 두 동강 났던 섬도 점점 하나로 원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강제로 삶의 터전을 폭 파당한 이주실향민들의 염원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남녀가 평등하고 모두가 의논에 맞춰 사는, 현대적 민주주의가 살아있던 과거의 밤섬. 허생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의 유토피 아 율도국( 栗 島 國 )과도 한자가 같은 이곳은, 만인이 평등하고 모 두가 잘 사는 것을 꿈꾸던 홍길동의 마음과도 닮아있었던 곳이었 다. 오늘날 밤섬의 자연적 부활이야말로, 진정한 한강의 기적은 아닐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밤섬 생태경관 위치 : 영등포구 여의도동 이야기 태그 : 밤섬, 부군당도당굿, 한강 조망 - 18 -
9.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전국에는 약 800그루의 많은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 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에도 상당히 많은 은행나무가 특별한 보 호를 받고 있다. 모두가 400~500년 정도 오래된 나무들이다. 300년 정도 된 나무는 어린 축에 속할 정도. 방학동 연산군묘 앞 에는 도봉구 10대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나이가 무려 830살을 헤아린다고 한다. 높이 는 25m에 둘레는 10.7m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이렇게 오래된 은행나무의 공통점은 그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영등포 당산동에 위치한 530년 된 은행나무는 1925년 대홍수로 일대가 침수되었을 때에 동네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어 주었기에 이후부터 부근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처음에 언급한 830년 된 방학동 은 행나무는 예로부터 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긴 다고 해 애국나무 로 불린다. 실례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 큰 불이 나서 소방차를 동원해 간신히 불을 껐다고 한다. 강서구 외발산동의 은행나무는 예부터 경사가 있을 때마다 떡이 며 과일 등을 먼저 진상했다고 하고, 용산 미군부대 근처에 있는 315년 된 은행나무는 나무에 신령이 있다 하여 정월대보름날에는 고사를 지내 주민 화합을 유도하였다. 나무할아버지 라는 이름으 로도 불릴 정도. 이처럼 은행나무가 마을의 일원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는 이 유는, 은행나무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래 사는 나무이기 때문 - 19 -
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면서 대를 이어 온 생명체 가운데 하나다. 대략 3억 년 전 화석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니 은행나무를 흔히 화석나무 라고도 부를 정도다. 그래서인 지 오랜 생명을 이어가는 은행나무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 올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은행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과 함께 해왔다. 서울 시민의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의 순간 모두를 함께 해온 것이 다. 계동 중앙고등학교 정문 안쪽에 있는 500살이 넘는 은행나무 는 학교 안에서 벌어진 3 1운동을 비롯한 6 10 만세 운동 등 항 일운동들을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은행나무는 서울 시민 옆에서 역사를 함께하며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서울의 보호수 위치 : 종로구/중구/은평구/강서구 이야기 태그 : 오래된 나무, 은행나무, 애국나무, 나무할아버지, 서울의 나무 - 20 -
10. 희어질수록 흥하는 소나무, 백송 돌풍이 불던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은 1990년 7월 17일. 청와대 는 발칵 뒤집혔다. 청와대 남서쪽 통의동에 서 있던 백송 한 그 루가 쓰러진 것이다. 이 통의동 백송이 쓰러진 것을 뉴스에서 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백송을 살려내라고 엄명을 내린다. 영양제 주사 등 갖가지 노력이 쏟아지지만 백송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도대체 이 나무가 뭐길래 대통령까지 나서게 된 것일까? 백송의 흰 색깔이 개인과 집안, 나아가서 국가의 영화( 榮 華 )에 따 라 더욱 희어진다는 속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통의동 백송이 쓰러지고 나서 가장 오래된 백송 이라는 영예를 이어받은 것은 재동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 이 백송은 3호선 안국역에 인 접한 재판소 본관 뒤쪽에 서 있는데, 키가 14미터이고 줄기 둘레 가 4미터에 이르며, 위로 올라갈수록 V자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 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자리는 영조 때 유명한 재상이었던 조상경의 집이었다. 조상 경은 7번이나 판서를 하면서 조선조 후기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 치를 이곳에서 펼쳤다. 1819년에는 조민영의 어린 딸이 세자빈으 로 간택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가는데, 나중에 고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대원군 이하응은 이곳을 자주 드나 들며 조씨들과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는 작업을 추진 했다. 이 무렵 백송은 그 껍질이 더욱 희어져, 대원군은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 후 집의 주인이 개화파의 거두 박규수로 바뀐다. 물론 백송은 박규수 대감의 중사랑 뜰을 지키고 있었다. 이 사랑방에는 유대 - 21 -
치나 오경석 등 개화를 열망하던 중인들을 비롯해 김옥균, 박영 효 등이 드나들며 자주적인 개항의 방법론을 고민했던 곳으로 유 명하다. 개화파의 산실이었던 이 일대는 그 후 1880년대에 외교통상업무 를 맡아보던 외아문이 설치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으며, 3 1운동의 주역인 최린의 집과 월남 이 상재 선생의 집도 헌법재판소 구내 지하주차장 입구 자리에 있었 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재동의 백송은 하얀 자태를 지키며 바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백송의 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져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근대사가 참으로 파란만장하게 느껴진다. 1990년 쓰러진 통의동 백송의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690년 때 심은 것으로 확인돼 나이가 300살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 지만 공교롭게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36년 동안에는 나이 테가 전혀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백송을 아끼는 마음속에서 나라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백송, 헌법재판소 위치 : 종로구 통의동 이야기 태그 : 백송, 통의동 백송, 근대사 - 22 -
11. 이름 속에 이야기를 품은 서울의 고개들 현재 중구 충무로2가에 있던 '진고개'는 옛 중국대사관 뒤쪽에서 세종호텔 뒤쪽까지 이르는 곳이었다. 남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오면서 형성된 이 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였지만, 흙이 몹시 질어 비만 오면 길바닥이 진흙이 돼 완전히 길이 끊길 정도였다 고 한다. 한자로 '진흙 이( 泥 )'자를 써서 이현( 泥 峴 )이라고도 불렀 다. 크고 작은 8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산줄기에서 뻗어 나온 230여개의 고개들이 있는 도시다.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흔하게 고개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진행된 도로확장 계 획에 따라 길이 새로 닦이며 수많은 고개가 깎여나가고 콘크리트 로 덮여버렸다. 하지만 더불어 고개에 얽힌 이야기들마저 사라지 고 덮이는 현상은 안타깝다. 고개들의 이름은 진고개의 경우처럼 지형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 많다. 용산구 후암동 두텁바위고개는 모양이 둥글고 큰 바위가 고개 중간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신내동 새우고개는 신내동의 새고개마을에서 경기도 구리시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새우등같이 꺾여 있는 모양 덕분에 명칭을 얻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연을 가진 고개들도 있다. 중구 무학동 중부소 방서 뒤쪽에는 '무당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조선시대 빈민을 구제하고 전염병을 치료하던 동활인서( 東 活 人 署 )라는 기구가 중 구 신당동에 자리 잡고 있던 턱에 자연스럽게 굿으로 잡귀를 쫓 아 병을 고치는 무당들도 인근에 많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무당 고개라는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다. - 23 -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된 고개들도 많다. 무학대사의 이름 에서 유래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을 잇는 '무악재'가 역사적 인물을 통해 지어진 이름이라면,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묘( 死 六 臣 墓 ) 부근에 있는 '아차고개'에는 역사적 사건이 녹아있다. 단종 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한 선비가 처형을 멈추도록 임금에게 간청하기 위해 급히 도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선비는 이 고개를 오르던 도중 이미 사 육신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아차! 늦었구나!"라는 탄식 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아차고개'로 불렸다. 진고개가 있던 충무로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이름인 본정 ( 本 町 : 혼마치)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가, 광복 후 1946년 우 리 식으로 동명을 개정할 때 충무로( 忠 武 路 )로 고쳐졌다. 세종로 을지로 등의 명명도 같은 시기에 정해졌다. 흔하디흔한 고개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후대에게 전해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일화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서울의 고개들 위치 : 중구 충무로2가/용산구/중구, 이야기 태그 : 서울의 고개, 진고개, 두텁바위고개, 새우고개, 무당고개, 아차고개 - 24 -
12. 서울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준 선유도 영등포에 인접해 양화대교 옆에 떠 있는 선유도가 본래 섬이 아 니라 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선유봉이라는 산 이 선유도라는 섬 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속에는 서울시 의 개발을 위한 선유도의 고마운 희생이 숨어 있다. 마치 아낌없 이 주는 나무처럼 말이다.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 仙 遊 峰 ) 라는 이름처럼 원래 선유도는 빼 어난 절경과 풍류를 자랑하던 봉우리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이 즐겨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 만 지나치게 눈에 띄는 봉우리여서였을까, 혹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바위의 쓰임새가 좋아서였을까, 이렇게 아름다웠던 선유봉 은 서울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게 된다. 그 시작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으며 시작한다. 홍수에 취 약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제방이 축조되었는데, 거기에 사용될 암석을 선유봉에서 채취하게 된 것이다.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 해 봉우리가 제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봉우리 의 흔적은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0년대에 이르러 여의도 경비행장 건설을 위해 다시 선유봉에서 모래와 자갈이 채취되면서, 아름다움 봉우리가 완전 히 자취를 감추고 평지에 가까운 땅으로 변모하게 된다. 다시금 선유봉은 여의도의 비행장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게 봉우리를 잃은 뒤에는 1960년대 제2한강교 건설과 한강 개발사업 을 통해 선유봉은 육지와 완전히 분리가 되어 섬인 선 - 25 -
유도가 되고 만다. 서울시민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육지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선 유도의 희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선유도는 서울 서남부 지역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그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러다 2000년 12월 정수장 이 폐쇄된 이후에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휴 식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 마지막으로 밑 둥밖에 안 남은 자기 위에 앉아 쉬 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홍수를 막는 제방으로, 그리고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로, 그리고 강 개발을 위해 섬이 되어 수돗물 정수장으로, 그리고 다 시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그 모습을 바꿔온 선유도의 역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떠오르게 한다. 더 이상 봉우리를 볼 수 없는 지금 모습은 마치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를 떠올리지만, 선 유도의 희생으로 우리 삶은 더욱 아름답게 바뀌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선유도공원 위치 : 영등포구 당산동 이야기 태그 : 선유도, 아낌없이 주는 선유도, 선유도공원, 한 강, 정선 - 26 -
13. 쓰레기더미에서 피운 장미꽃, 난지도 95m 높이의 윗부분이 편편한 쓰레기산( 山 ) 2개. 매립된 쓰레기의 양 1억 2천만 톤. 8.5톤 트럭으로 1,300만대 분. 지금은 시민공 원으로 탈바꿈한 마포구 난지도의 옛 모습이다. 상암동 인근의 난지도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매립하여 왔는데, 그 기간 동안 쌓인 쓰레기의 양은 상상을 초월 한다. 처음에는 국제적인 매립장의 일반 높이인 45m까지 매립할 계획이었으나 새 수도권매립지 건설이 늦어지면서 세계에 유래가 없는 95m 높이까지 쓰레기가 쌓인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흔 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난지도가 서울시민을 위한 생태공원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기대하는 것이나 같다. 던 과 거 한 영국 기자의 조롱을 빗대어 말해보자면, 대한민국에서 민 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는 있을지언정, 난지도가 시민을 위한 생 태공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쓰레기 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암 새서울 타운의 건설과 더불어 난지도는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새 천년의 화두인 환경재생 의 공간으로, 녹지공간과 여가 휴식공간을 갖출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쓰레기 더미였던 난지도의 최우선 과제는 생태 환경으로의 회복. 먼저 침술수, 매립가스 등 매립지의 환경문제를 완벽하게 처리해 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많은 노력 끝에 이것을 해결하고 나자, 옛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난지한강공원, 노을공원, 하늘공원과 이 - 27 -
들을 연결하는 연결다리와 복합연결통로가 완공되며 하나의 생태 환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95m의 거대한 쓰레기 산 대신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평화의 공원 연결다리 앞에 설치된 거울분수는 난지한강공원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요소로 물을 뿜을 때마다, 아 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볼거리와 즐 길 거리를 선보인다. 또한 생태 습지원의 보행연결다리는 자연 상태의 초지 및 식물 군락 등 수변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돕고 있고, 주변에 조성된 난지캠핑장은 바비큐를 즐 기며 야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포구 시민들에게 뿐만 아니 라 서울시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다. 한번 망가진 자연환경은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서서 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난지생태공원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 운 방식으로 그것을 증명해낸 경우이다. 다시 말해, 쓰레기통에서 꽃피운 장미인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난지한강공원 위치 : 마포구 상암동 이야기 태그 : 난지도, 난지한강공원, 생태공원, 상암동 - 28 -
14. 옷 갈아입는 조각상의 비밀 어린 시절 학교 괴담에는 밤마다 움직이는 동상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 한 밤이면 운동장에 있던 동 상들이 움직인다는 이야기 인데, 성동구의 한 조각 공원에는 실 제로 이런 동상이 있다고 한다. 바로 성동구 살곶이 조각공원에 있는 남매의 조각상의 이야기이다. 살곶이 조각공원에 있는 여러 조각상 중에 단연 화제는 자그마한 남매의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아무도 모르게 매주 옷을 갈아 입는다고 한다. 조각상이 진짜 스스로 움직여서 옷을 입을 리도 없는데,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더욱 신기한 일 은 옷을 갈아입는 조각상은 있는데, 옷을 갈아입히는 사람은 없 다는 것이다. 아직도 누가, 왜, 언제, 조각상들의 옷을 입히고 있 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매서운 추위에 옷을 입지 않고 서있는 남매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자발적 인 행동이었다는 것만 알려졌다. 주민 한 명이 아닌 여러 주민들 이 조각상의 부모를 자처하였고,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만들어 낸 행복한 해프닝이었다. 주민들의 훈훈한 마음 때문인지, 살곶이 조각공원에 옷 갈아입는 남매의 조각상을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온다 고 한다. 따뜻한 옷을 입은 남매의 모습만큼이나 따뜻한 주민들 의 마음이 살곶이 조각공원을 찾아오는 시민들의 마음에도 전해 지고 있다. 남매의 조각상은 동네에서 제일가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다. 맞춤 옷을 입듯 몸에 딱 맞는 옷과 멋을 더 해줄 패션 소품들을 두르 - 29 -
고 있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일 때는 목도리와 모자, 귀마개 등으 로 따뜻함을 강조한다고 한다. 또한 패션을 아는 조각상답게 T.P.O(Time, Place, Occasion)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월드컵 시즌에는 붉은 악마의 의상을,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복으 로 여름에는 시원한 푸른 컬러를 매치한 옷을 입는다. 요즘은 남매 옷을 책임져 주는 디자이너들이 있다고 한다. 바로 한양여대 패션 디자인과 동아리 학생들이 그 디자이너라고 한다. 학생들의 참신하고 통통튀는 디자인이 남매의 패션철학과 잘 맞 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패션에 대해서 한 수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성동구 조각공원의 옷 갈아입는 남매 조각상을 보러 가보면 어떨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살곶이 조각공원 위치 : 성동구 이야기 태그 : 살곶이, 살곶이 조각공원, 남매조각상 - 30 -
15. 철길 따라 떠나는 산책길, 구로구 항동 철길 기차보다 사람이 다니기 좋은 철길이 있다. 서울 구로구의 항동 철 길 이 바로 그곳이다. 항동 철길은 철길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평범한 주택가에서 시작된다. 마법과도 같이 나타난 이 철길을 따라 걷다보면 마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의 세계로 들 어가는 것 같다. 복잡한 도심은 점점 사라지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분위기만 가득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곳을 아는 사 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환상의 세계는 언제나 그렇게 비밀스럽게 숨 어있기 마련이다. 항동 철길은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경기 부천시 옥길동까지 4.5km에 걸쳐 이어진다. 1959년 경기화학공업주식회사가 원료와 생 산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화물용으로 만든 이 철길의 정확한 명칭은 오류화학선. 최전성기 때는 하루 10회 이상 화물차가 수시로 다녔지 만, 지금은 매주 목요일에만 군용 물자를 나르는 열차가 1~2회 정도 오갈 뿐으로 한적하다. 철길을 따라 주택가를 빠져나오면 이곳이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의 고즈넉한 길이 나타난다. 양쪽 언덕 사이에 긴 철길이 이어지는데, 풀과 자갈이 덮인 레일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옛 시골길을 걷는 느 낌이다. 텃밭 풍경이 나타나면 철길 밑으로 하천이 흐르기도 해서 그런 느낌은 더해진다. 봄과 가을에는 철길을 따라 유채꽃과 코스모 스가, 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개해 환상의 세계를 안내한다. 철길의 곳곳에 설치된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 다. 선로에는 마치 철길 자체가 여행자에게 건네는 듯한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길은 열려있다, 힘들 땐 쉬어가세요, 혼자라고 생각 - 31 -
말기 등의 글귀들은 긴 산책길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길고 긴 철길 여행을 끝마쳤을 때는 아마도 도심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철길 인근에 위치한 항동저수지와 푸른수목원 은 그 치유를 돕는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구로문화재단은 2015년 항동철길이 주는 사색의 감성을 돕기 위해 간이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현판, 열차시간표, 간이역에 걸리는 그림 등 항동철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성스런 손길로 꾸 며져서 방문객들을 반긴다. 주민들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항동철 길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항동철길 위치 : 구로구 오류동 이야기 태그 : 항동철길, 사진 찍기 좋은 곳 - 32 -
16. 화살이 꽂혀 살꽂이, 그리고 살곶이다리.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엔, 살곶이다리[ 箭 串 橋 ]라 부르는 투박한 돌다리가 있다. 지금의 한양대학교 부근 과 성수동 방면을 이어주는 이 돌다리는, 난간이 없는 단순한 구 조이다. 왠지 모르게 우직한 느낌과 더불어, 따뜻한 정감이 느껴 지는 이 다리, 그 이름 살곶이 에는 특별한 설이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거쳐 다른 아들을 모두 죽이고 태종으로 등극한다. 이에 태조는 분개 하여 옥새를 가지고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 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차사(특별임무 를 받은 왕의 사신)를 보내는데, 가는 족족 태조에게 죽임을 당하 거나 붙잡히게 된다. 이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탄생한다. 이성계의 옛 친구 박순의 간곡한 청으로 태조는 함흥에서 한양으 로 돌아오기로 마음먹는다. 반가운 이방원은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엄밀히는 옥새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신의 다른 아들을 모두 죽이고 왕자의 난을 일으킨 서 자 이방원을, 태조가 달가워할 리 없는 법. 태조는 이방원을 보자 마자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명사수 태조는 이방원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고, 이를 예상한 신하가 미리 세워둔 기둥 뒤로 이방원은 몸을 숨긴다. 이 바람에 태조의 화살은 기둥에 꽂히게 된다. 이에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 여겨, 옥새를 내주고 왕위를 넘긴다. 그렇게 이곳은 화살이 꽂힌 곳 이라 하여 살꽂이, 그것이 변해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33 -
이후 태종과 정종이 이곳 살곶이와 광나루 근처의 전각으로 자주 행차하니, 개천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해지자 태종은 다리 공사를 명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당분간 중 지됐다가, 50여년 후 이곳을 오가는 백성들을 위해 성종의 명령 으로 살곶이다리 가 만들어졌다. 결국 살곶이다리는 선정릉(성종과 중종의 능)과 헌인릉(태종과 순 조의 능)으로 가는 왕의 배릉(국왕이 선대 국왕의 능에 참배하는 의식)길이 되었으니, 왕위를 놓고 다툰 두 부자의 지역이 결국 이 후 자손들의 참배길이며 백성들의 일상길이 된 아이러니한 역사 를 간직한 다리가 되고 말았다. 600여 년 동안을, 옛 교각 그대로를 간직한 모습으로 조선시대 수많은 왕과 백성들이 밟았을 이 다리. 이곳에 고스란히 녹아있 을 조선 전체의 역사가 신비롭기만 하다. 첨단 스마트 시대의 우 리네 사람들도, 아직 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살곶이다리 위치 : 성동구 이야기 태그 : 살곶이다리 - 34 -
17. 풍수지리, 서울 서울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조선 건국 이후로 600년이 넘 는 세월 동안 숱한 역사적 굴곡을 겪으면서도 한국의 경제 정치 적 중심지로서 위상을 굳건히 지켰다. 이제는 1000만여 명의 시 민이 거주하는 삶의 터전인 서울. 이런 곳에서 터 란 것은 당연 히, 삶을 영위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이다. 간략한 풍수지리로, 자 기가 살고 있는 서울 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 물 위에 뜬 연꽃, 강동 강동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북 쪽은 아차산의 맥(땅속으로 흐르는 기맥이 뻗은 워커힐 호텔 일 대가 모두 명당이다. 특히 광진구 일대는 용마봉의 좋은 기운이 강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수도를 정했을 정도다. 남쪽으론 탄천, 동쪽으로 법화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천마 산과 검단산 등으로 이어진다. 물 위에 뜬 연꽃과 같은 형세를 이뤄, 귀인, 현인군자, 학자, 사업가 등 다방면으로 출중한 인물 을 배출한다. - 백성들의 동네, 강서 강서는 수영산을 중심으로 우장산 개화산 봉제산 인근 화곡동과 발산동이 명당으로 꼽히며 강서구청 일대에는 서울 내에서도 비 교적 큰 규모의 재물 기운이 형성됐다.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살 펴보면 잠룡입수형( 潛 龍 入 首 形 )으로 산의 기운이 광활한 들판으 로 떨어져 부드럽게 서로 이끌고 서로 이어지는 형세다. 큰 격변 이 일지 않아도, 백성들이 살아가기에 안전하고 편한 곳으로 여 겨진다. - 35 -
- 재물 운이 모이는 강남 현재 강남은 수원 광교 백운산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가 좌측으로 관악산을 타고 우면산에서 멈추고 우측으로는 구룡산과 대모산에 서 멈추는 중간 위치에 있다. 우면산은 소가 누워있는 형세로 부 자가 많이 나오고 수도산은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내려오는 모습으 로, 호랑이, 즉 인물이 나올 지역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런 좋 은 기운을 받은 서초동과 대치동을 명당으로 꼽을 수 있다. 한강의 W 형태와 땅의 모양으로 닭이 알을 품는 모양이 형성되 는데, 그곳에 바로 압구정동이 있다. 재운의 기운이 많고 소비가 활발한 곳이다. 재미있게도 압구정동은 옛날 부자 자제들인 소위 오렌지족 의 주 무대이기도 했다. 청담동과 삼성동 일대는 황금 거북이 숨어 기를 모으는 모양이 다. 재물이 모이는 모양인 것이다. - 서울 최고 명당들이 모인 강북 강북은 백두대간에서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일러, 도봉산 북 한산 인왕산으로 흐르고 인왕산에서 우로는 와우산, 좌로는 남산 에서 멈춰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형국이다. 조선시대 왕궁이 전부 모여 있는 강북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건 유명하다.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도 있고,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 도 생기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것이 인간사이자 전 우주 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 풍수지리만은 일등이다. 재미로 보는 풍수지리지만, 서울의 어느 한 군데 빠지 는 곳 없이 전부 좋은 해석이 나왔다. 어려운 일이 생기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긍정적인 기운이 언제나 서울을 감싸고 있음 을 기억하자. - 36 -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서울의 생활공간 위치 : 전 지역 이야기 태그 : 서울의 풍수지리 - 37 -
18. 곰달래 마을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 양천구에는 곰달래라는 예쁜 마을이름이 있다. 양천구 신월3동 신원 초등학교가 있는 뒷산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마을로, 달빛이 맑게 비 치는 마을 이라는 데서 고운 달 동네 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곰달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자명으로 고음월( 古 音 月 )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에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곰달래 사랑 이라는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시대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한강유역 이 백제 땅이었을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 音 召 )와 음월( 音 月 ) 이라는 젊은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가 세력을 점차 키워 끊임없 이 백제를 위협해오자 백제에서는 군대 징집 명령이 각 고을로 내려 진다. 물론 음소에게도 이 같은 부름이 전해지고, 두 사람은 작별하 게 되었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슬픔으로 가득 찬 순간. 차마 연인을 전쟁터로 보낼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여자를 보며 음소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파온다. 그는 끝내 자신을 놓지 못하는 음월을 위해 한 가지 약속을 한다. 만약 전쟁에 이겨서 살아 돌아오게 되면 동산 위에 둥근 보름달이 떠오를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반대로 달을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 모습을 가리면 싸움에 져 목숨을 잃은 것이 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음소는 당연히 보 름달이 떠오를 것이니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전장으로 떠 난다. 남자가 떠나고 난 뒤, 음월은 매일같이 밤만 되면 언덕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연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나날이 이어지던 신라 - 38 -
와 백제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동산에는 손톱만큼 작은 조 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보름달이 되었다. 음월은 뛸 듯이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달을 가려 주변은 순식간에 캄캄한 밤으로 바뀌게 된다. 음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음월 에게 이 같은 현상은 비극을 알리는 신호였다. 절망에 가득 찬 음월 은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산위로 올라가 몸을 날려 스 스로 목숨을 끊는다. 얼마 안 되어 구름은 걷히고 다시 달이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얼마 후, 음소는 밤새 먼 길을 달려 왔지만, 이미 여자는 이 세상 사 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슴을 치며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후회했다. 언덕 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음월을 묻고 돌아서 는 음소는 '이제 끝이다. 거친 세상 끝이구나'라고 말했다. 고( 古 )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 는 뜻으로 쓰이는데 바로 음 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는 뜻으로 고음월이란 말의 어원이 된다. 그리 고 두 사람의 사랑에 감복한 마을 주민들은 그 말을 따서 마을의 이 름을 지었다. 앞으로도 마을의 이름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기려 질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곰달래 마을 위치 : 양천구 신월동 이야기 태그 : 곰달래, 곰달래 전설, 사랑이야기 - 39 -
19.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간직한 아차산 아차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한강을 차지하 기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격전지다. 이곳의 전쟁에 뛰어 든 수많은 이들 중에는 평강공주의 도움으로 장군의 자리까지 올 랐다는 바보온달도 있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이곳, 아차산에서 끝을 맺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잣거리의 유명한 바보였던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 그리고 그 녀가 온달을 최고의 장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 다. 이후 고구려 영양왕 때 장군의 자리까지 올라간 온달은 옛 광개토대왕이 점령하였으나 지금은 신라에게 빼앗긴 남쪽의 한강 유역을 다시 찾아오겠다며 출정 허락을 받는다. 한강을 향해 출 정하는 온달은 한강이북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오 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는 한강 하류의 아차산성에 이르 러 신라군과 맞닥뜨린다. 신라군의 저항에 맞서 선두에서 공격을 퍼붓는 온달 장군. 결국 세찬 공격에 못 이겨 아차산이 고구려군 에게 함락될 즈음이었다. 신라의 진평왕이 직접 남한강의 물줄기 를 따라 1만 여 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아차산성에 당도한다. 한 창 지쳐있던 고구려군에게 백제의 구원군은 큰 타격이었다. 황망 하게 흐트러지는 고구려군을 향해 소나기 같은 화살이 날아들었 고 그중 하나가 온달장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끝내 꿈을 이루 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온달은 죽어서도 주먹을 굳게 쥔 채였다고 한다. 그 온달의 주먹을 닮은 주먹바위가 아직 아차 산에 남아 온달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 40 -
고구려 군은 온달장군의 시신을 평양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꿈 을 이루지 못한 그의 의지 때문이었는지, 그의 관이 꿈쩍도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평강공주는 죽음을 무릅쓰 고 전쟁터인 아차산성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온달 장군의 관을 어루만지며 온달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제야 온달장 군의 관은 움직였고, 온달장군의 관은 평양으로 옮겨져 양지바른 곳에 묻히게 된다. 이렇게 신분을 뛰어넘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아 차산 기슭에서 안타까운 끝을 맞이하게 만다. 온달의 주먹을 닮 은 주먹 바위 맞은편에는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을 끌어안고 통곡 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통곡의 바위가 남아 두 사람의 죽음을 넘 어선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아차산생태공원, 용마폭포공원, 영화사, 고구려정, 아차산성, 워커힐, 한강호텔 위치 : 광진구 일원 이야기 태그 : 아차산 전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 41 -
거리/마을 1. 조선시대 정육점, 성균관 다림방 2. 응답하라 1990, 홍대 앞 문화 변천사 3. 사랑을 쓰려거든, 효자동으로 4. 부암동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5.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덕수궁 돌담길 6. 서울의 브룩클린, 성수동 7. 노동자들을 달래주는 벽화, 이화마을 8. 강남의 테헤란로, 이란의 서울로? 9. 낭만 가득한 철길이 있는 연남동 기찻길. 10. 서민들의 공간에서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해방촌 11. 서울에도 있다! 문래 예술창작촌 12. 서래마을을 이어주는 누에다리에 소원을 빌어봐 13. 노동자들의 터전, 구로디지털단지 14. 공부 좀 해? 모여! 노량진, 신림 고시촌 15. 노룬산 금닭의 전설 16. 서울 최초의 카페가 있던 정동길 17. 잠시 쉬어가는 서울 가는 길, 떡전교 - 43 -
1. 조선시대 정육점, 성균관 다림방 정육점이 없던 시절에는 가축고기를 어떻게 구해먹었을 지 상상 해 보자. 고기가 필요할 때마다 소나 돼지를 잡는다고 생각하기 는 쉽지만, 한 끼 식사에 필요한 양을 얻기 위해 끼니때마다 한 마리씩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왕이나 상류층 귀족들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식문화일 수밖에 없는 것 이다. 서민들이 고기를 쉽게 구해 먹게 된 것은 짐승을 도축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해주는 중간 상인들의 등장과 함께 가능해 졌다. 조선시대 또한 이 같은 중간 상인이 필요했다. 때문에 한양에서 쇠고기를 독점 판매하는 다림방의 출연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성균관이 문묘 제사에 바칠 희생( 犧 牲 )용 고기 마련을 위 해 설치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균관의 재정이 부족해지 자, 성균관의 노복들이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확보하여 상인과 일 반 소비자에게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의 육류 판매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처음에 다림방은 성균관 노복들이 사는 반촌( 泮 村 ) 근처인 동소 문 성균관 관동( 館 洞 ),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인근에 위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육류소비가 급격한 변화를 맞 이하면서 다림방의 수요는 크게 늘어난다. 양반층을 비롯해 중인 층을 중심으로 육류소비가 크게 늘어나고, 소도살 엄금 정책이 완화되면서 양반과 중인들이 사는 북부, 중부 지역뿐 아니라, 동 부의 이교(현재의 동대문 근처), 광례교(현재의 명륜동 근처), 남 부의 광통교(현재의 종각 근처), 저동, 호현동(현재의 회현동 인 근), 의금부 근처, 서부의 육조거리 등지에까지 다림방이 설치된 - 45 -
것이다. 이는 조선의 생활수준 전체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일부 소수의 귀족들만이 향유했던 육류소비 를 일반 시민들까지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도성 밖 왕십리, 소의문 밖, 마포 등지에도 다림방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육류 식문화가 일반 백성 사이에 폭넓게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은 이후에도 종각의 피맛골, 왕십리의 곱창, 마포의 갈비 등 다양한 고깃집과 음식점으로 이어지면서 서민들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공급하는 중심지가 되어 오늘에 이 르고 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성균관, 마포 먹자거리 위치 : 종로구 명륜동 이야기 태그 : 성균관, 다림방, 조선시대의 정육점 - 46 -
2. 응답하라 1990, 홍대 앞 문화 변천사 서울에서 놀 곳, 먹을 곳, 신나는 곳, 재미있는 곳을 찾는다면? 단연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 바로 홍대 앞일 것이다. 한 대학교 의 앞인 이곳이, 어떤 과정이 있었기에 다른 대학가들과는 차별 화된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1946년 처음 설립된 홍익대학교. 1961년 대학정비령 때, 일시적 이지만 홍익미술대학으로 개편됐을 정도로 미술로 유명한 것은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적인 상식. 그러다보니 홍대 주변은 미대 교수들, 미대생들의 그것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1990년 전후 홍대 모습은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 전체 건물의 대 부분이 단독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주택에 딸린 주차장 상당수를 미대생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작업실로 개조해서 말이다. 홍대입구 주변 일대가 미술학도들의 거처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부터 미술가를 꿈꾸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찾게 되 는 곳이 되었다. 미술학도를 꿈꾸는 수험생들도 많이 몰리게 되 고, 자연스럽게, 미술학원도 많아지게 됐다. 이곳 미술학원에서 수험생활을 끝낸 학생들은, 이후에도 자꾸 찾 게 된다. 이곳에서 보낸 추억이 그립고, 어느새 이곳 지역문화에 녹아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해, 먹고, 마시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예술 활동을 즐기던 그곳 홍대입구는 자연스럽게 20대 초반의 젊 은 기운으로 채워지게 되고, 그들 나름의 문화가 전반을 지배하 게 된다. 또한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 47 -
모여들어, 그들이 운영하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홍대 특유의 지역 문화적 성격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한다. 그렇게 청춘남녀 사교 의 장인 댄스클럽, 가난할지언정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만의 음악을 선보이는 라이브클럽, 젊음의 패기와 톡톡 튀는 아이디어 로 창업하는 각종 식당, 그리고 패션, 악세사리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미술학도를 꿈꾸며 학창시절을 보내고, 그 추억을 되새기며 새로 운 청춘을 맞이하는 이곳 홍대. 거리미술전이 시작되고, 외국인 시낭송이 정기적으로 펼쳐지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홍대 거리 에 섞여갔다. 젊은이들 특유의 개방적인 마음가짐과, 변화에 민감 한 의식이 어우러져 최신유행을 선도하는 또 한 곳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인가 이곳은 피 끓는 남녀들이 예술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곳으로 점점 진화하게 된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위치 : 마포구 홍대 앞 일원 이야기 태그 : 홍대, 홍대앞, 홍대문화, 홍대 앞 역사 - 48 -
3. 사랑을 쓰려거든, 효자동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의 경성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데이트 를 했을까? 요즘처럼 자유로운 연애가 힘들었던 만큼 데이트라는 것도 없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여기 그런 생각을 싹 없애줄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애인을 데리고 갈만한 사랑의 하이 킹 코스 이것은 바로 1936년에 경성시대에 발행된 잡지의 기사 제목이다. 현재에나 통할 것 같은 제목의 잡지 기사의 내용은 더욱 더 흥미 진진하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좋은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고 있 다. 동대문에서 뚝섬, 삼각산을 지나 봉은사까지 가는 길, 창경원 에서 우이동 가는 길, 북악산에서 남산 코스, 남산 봉수에서 창덕 궁과 서대문 등의 데이트 코스를 설명하며 효자동 코스도 알려주 고 있다. 기사 안에서는 가는 방법과 당시 전차의 요금까지도 상 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시에 시내 전차 승차 요금은 8전으 로 저자는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들에게는 왕복 15리 의 길을 걸 어야 한다며 비장한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빨갛게 핀 진달 래나 철쭉을 한 줌씩 꺾어오라며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는 팁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효자동 길도 1936년대 못지않게 여전히 젊은이들의 데이 트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효자동 길에는 작고 예쁜 카페들이 있 고, 다양한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등이 모여 있다. 특히 효자동의 서촌은 요즘 한창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데이트 장소 로 각광받고 있다. 서촌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날로그적인 느낌 을 느끼려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서촌은 청와대 와 가까운 위치 때문에 높은 건물 없고,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 49 -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지 서촌은 연인들이 걸 으며 데이트하기 좋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 을 꼭 붙잡고 서촌을 골목을 누비며 데이트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16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1936년을 살았던 사람들 에게도 효자동은 데이트 코스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효자동, 서촌, 갤러리 위치 : 종로구 효자동 이야기 태그 : 서촌, 효자동, 데이트 코스 - 50 -
4. 부암동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부암동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크기 2미터의 커다란 바위가 있 다. 이 바위에 소원을 빌려면 특별한 행동을 꼭 따라야 한다. 일 단 첫 번째로 평평하고 작은 돌멩이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바위에 돌멩이를 자신의 나이만큼 문지르며 소원을 빈다. 그 후 에 작은 돌멩이가 이 바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에 한 새댁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결혼 첫 날밤을 치룬 부부에게 청천벽력의 사건이 일어난다. 남편이 몽골군에 끌려가 버린 것이다. 아내는 첫 날밤을 치르자마자 병 든 시어머니를 모시는 생과부 처지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에게 매일 부암동 붙임바위에 가서 정성을 다해 남편의 무사 귀 환을 위해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여자는 새벽마다 소복을 갈아 입고 부암동의 붙임바위에 올랐다.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돌을 붙여보았지만, 번번이 돌은 바닥으로 맥없이 미끄러졌다. 오 늘은 바위의 산신이 소원을 들어 주었을까하고 기대하던 시아머 니도 힘이 빠져 돌아온 며느리를 보고 실망하곤 했다. 몇 달이 지났을까, 고려 땅 안에 매일 기도를 드리는 새색시를 모르는 사 람이 없어졌다.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드리던 순간이었다. 매번 바닥으로 떨어지던 돌멩이가 무슨 일인지 바위에 철썩 붙었던 것 이다. 새색시는 드디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생각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날 밤, 정말 기다리던 남편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 왔다. 사정은 이러했다. 매일을 정성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새색시의 이 야기는 고려 전체를 돌아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새색시 - 51 -
의 정성에 감동하여 남편을 풀어줄 것을 몽골에 청했다고 한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자 시어머니의 병환도 씻은 듯이 나았고, 이후에는 떡 두꺼비 같은 손자를 바라며 부암동의 붙임바위에 올 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는 붙임 바위에는 유난히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찾아오는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붙임 바위의 산신이 아들을 잘 점지해 준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미신이 오래도록 있 었다고 한다. 부암동의 부침 바위는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사람 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붙임바위, 인왕산, 북악산, 백사실계곡 위치 : 종로구 부암동 이야기 태그 : 부암동, 기자바위, 붙임바위 - 52 -
5.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이라고도 불리는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에서 아름답기로 손 꼽히는 곳이다. 그런데,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곧 헤어진다는 재미난 속설이 존재한다. 이 속설이 시작된 이야기를 찾아가자면 조선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는 덕수 궁은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를 위 해 마련해 준 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선조가 이 곳으로 대피하여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경운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후 순종 때에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황궁이 되었다. 덕수 궁이 경운궁이었던 시절, 경운궁 안에 왕의 승은을 입지 못 한 후궁들을 위한 거처가 있었다고 한다. 왕의 승은을 입지 못한 후 궁들이 경운궁에 모여 살았고, 이후 그들의 한 맺힌 원혼이 덕수 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을 시기한다고 한다.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후궁들의 질투가 연인들을 갈라놓는다고 생각했다. 후궁들 의 한은 몇 백 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속설은 예전 이곳에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전 해진다. 가정법원으로 향하는 커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가 야 했고, 이 때문에 돌담길을 걷는 커플이 헤어진다는 속설이 생 겼다고 한다. 현재는 가정법원 대신 서울 시립 미술관으로 들어 서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커플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찾아온다. 덕수궁 돌담길은 가을에 특히 아름다 운데, 노랗게 물들은 은행나무 잎이 돌담길을 수놓고 있기 때문 이다. 노란 은행나무들은 고궁을 따라 이어져 있다. 또한 덕수궁 돌담길 주변으로는 서울 시립 미술관과 정동극장 등이 위치해 있 - 53 -
어 문화생활을 즐기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은 천천히 걸어도 20분 남짓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이 짧은 거리의 산책로 안을 살펴보면 재미난 곳들이 많이 있다. 과거 가정법원이었던 서울 시립 미술관은 재미난 전시들로 연중 문전성시를 이룬다. 또한 조선시대 개항에 맞춰 들어온 선 교사들이 지은 정동교회와 그 옆으로는 정동극장이 자리하고 있 다. 정동길 위로는 조선시대 고종황제와 왕세자가 궁을 떠나 1년 간 기거했다는 아관파천의 러시아 공사관도 찾을 수 있다. 그 옆 으로는 이화학당과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이었던 손탁 호텔의 터 가 자리하고 있다. 사계절 어느 때에 가더라도 아름답다는 정동 길을 걸으면 고즈넉 한 궁궐과 근현대식 건물의 색다른 조화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 서 나와 대한문 옆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방통행 차로를 따라 들어가면 서울시청별관,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이 차례로 나온 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덕수궁, 정동극장, 돌담길 위치 : 중구 정동 이야기 태그 :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 54 -
6. 서울의 브룩클린, 성수동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는 성수 역 부근, 성수동이 요즘 젊 은 아티스트들에게 핫한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의 공장지 대 중 하나인 성수동이 변하고 있다. 회색의 칙칙하고 우울한 이 미지를 벗고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붉은 벽돌 의 낡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젊은 예술가들의 감성을 자 극시켰다. 낡고 투박한 공장들과 젊은 예술가들의 만남은 공간의 변화부터 가지고 왔다. 개성이 넘치는 공방이 생겨나고, 작은 공 간을 활용한 카페와 음식점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장의 겉면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꾸며서 작업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젊은 예술가들의 신선한 상상은 실제가 되어 성수동을 변화시켰 다. 창고로 사용되었던 공간은 주말이면 젊은이들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플리마켓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패션 행사가 끊이지 않 고 열리며 트렌디 한 패션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성수동을 뉴욕의 브루클린과 비교하기도 한 다. 성수동이 한때 가죽공장과 구두공장으로 가득 한 공장지대였 던 것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브루클린도 주요 공업지대였다. 그러 던 브루클린에 1970년대 후반 예술가들이 이주해 오면서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현재 브루클린은 젊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열정 을 불태우는 장소로 유명하다. 브루클린과 성수동은 공장지대에 서 예술가들의 공간이 되었다는 비슷함이 있다. 물론 주변 지역 에 비해 값싼 임대료도 이곳에 이주해 오게 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옛 공장의 거칠고 투박함이 예술가들의 어떤 영 - 55 -
감을 일으키고, 공장들의 정제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면과 붉은 벽돌들의 매력에 젊은 예술가들의 감성이 사로잡혀 버린 것이 아 닐까? 현재 패션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들이 속속 모여 변화하는 성수동 은 예술적인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 차를 두고 좁은 골목 사이 사이를 걸어 다니며 성수 동 구경에 나서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성수동, 플리마켓, 수제화거리 위치 : 성동구 성수동 이야기 태그 : 성수동, 성수동 수제화 거리 - 56 -
7. 노동자들을 달래주는 벽화, 이화마을 서울 최초의 벽화 마을인 이화마을의 변신은 극적이었다. 낡은 계단과 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지고, 이렇게 총 천연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달동네는 점차 예술마을로 입소문을 타게 된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계기가 2010년 KBS 예능프 로그램 1박2일. 방송 중 이른바 이승기 벽화 로 불리는 천사날 개가 유명세를 타면서 이화마을의 전성기는 시작되었다. 밑으로는 대학로의 번화가, 위로는 낙산공원을 품고 있는 이화마 을은 그 독특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금만큼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은 아니었다. 이 커다란 변화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걸 까? 사실 이화마을은 가난한 서민들의 삶과 그 역사를 함께 해왔다. 일제강점기 때 남겨진 적산가옥들을 중심으로 1950년대 후반 판 자촌이 형성된 마을은 60~70년대 판잣집을 철거하며 지금의 주 택들이 지어졌다. 이후 2006년 소외지역 환경 개선을 목표로 추 진된 낙산프로젝트 에 의해 그림이 그려지고 조형물이 설치하면 서, 마을은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됐다. 덕분에 이곳은 한양 도성과 적산가옥, 달동네 주택과 벽화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공간 이 될 수 있었다. 60~70년대 가난했던 시절을 묘사한 벽화와 기 념품이 전시된 잘살기기념관 은 그런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천사 날개 벽화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작업복을 입은 여성 이 미싱으로 박음질하는 모습을 표현한 대형 벽화가 있다. 이화 동은 인접한 충신동, 창신동과 함께 반세기 전부터 동대문시장의 - 57 -
생산 기지였다. 동대문시장에서 판매되는 의류, 침구류, 신발, 수 예, 커튼, 액세서리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부부 또는 직원 서너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봉제업체가 이화동 곳곳에 산재 해 있다. 2006년 이화동 일대에서 진행된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 트 도 봉제 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화마을의 예쁘고 아기자기한 변신은 가난의 초라함을 예쁜 그 림으로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변신은 마을 사람들의 고 단했던 삶과 노동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거기에 바치는 존경과 헌사에 더 가까웠다. 그런 예쁜 마음이 전해져 사람들은 더욱 이 곳을 사랑하고 자주 찾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이화마을, 벽화, 낙산공원 위치 : 종로구 이화동 이화마을 이야기 태그 : 이화마을, 벽화마을, 낙산공원 - 58 -
8. 강남의 테헤란로, 이란의 서울로? 강남에는 테헤란로가 있다, 그렇다면 이란에는 서울로가 있을까? 강남 한 복판 세련된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곳에 테헤란로가 있 다. 언뜻 들어도 낯선 이 이름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온 이 름이다. 서울 시내에 왜 이란의 수도 이름으로 도로 명을 붙이게 되었을까. 바로 1977년 이란의 테헤란 시장이 서울에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서울시장과 테헤란시장은 우호의 의미로 각 국의 도시 의 이름을 붙인 커다란 도로를 건설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서울 시장은 우리 서울이 이란의 테헤란만큼 큰 발전을 이루었으면 좋 겠다는 바램을 가졌다고 한다. 1977년의 서울의 경제상황은 이란 보다 좋지 못했고, 이란은 당시 큰 발전을 이룩한 나라였다고 한 다. 테헤란로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외국어로 된 도로 명이라고 한다. 테헤란을 부러워하며 만들어진 테헤란로는 30여년이 흐른 현재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있다. 테헤란로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거리로, 높은 고층 빌 딩 숲을 가로지르며 한국 it의 중심지로 발전해 있다. 테헤란로는 약 1000억 달러 이상의 투자가 이루어지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 해 있다. 재미있는 것은 테헤란에도 똑같이 서울로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 로 역시 서울의 테헤란로와 마찬가지로 넓고 시원하게 뚫려있다. 서울로가 생길 당시만 해도 테헤란을 부러워하던 서울이었지만 지금은 이란보다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지금은 이란이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부러워하는 상황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서울의 테헤란로는 한때 테헤란벨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적도 - 59 -
있었다.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따와서 테헤란벨리라고 불렸는데, 실리콘벨리에서처럼 벤처기업들이 생기고, IT, 소프트웨어 등의 붐이 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테헤란에는 안철수 연구소, 두 루넷, 네띠앙등이 입주해있었다고 한다. 테헤란로의 또 다른 모습의 밤에 찾아와보는 것도 좋다. 밤늦도 록 환히 불을 밝힌 테헤란로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야경, LG아트센터, 포스코센터, 코엑스 위치 : 강남구 이야기 태그 : 강남, 테헤란로, 강남거리 - 60 -
9. 낭만 가득한 철길이 있는 연남동 기찻길. 이번 주말에 연트럴파크에 가볼까? 바로 아! 하고 알아차렸다면 어디 가서 유행에 뒤처진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트렌드세터들이 홍대를 찾는 이유,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다면 연남동에는 연트럴파크가 있다. 연트럴파크는 연남동에 조성된 경의선 숲길을 부르는 말이다. 사실 연남동에 있던 기찻길은 원래부터 유명한 곳이었다. 다만, 모두에게 유명한 곳은 아니었을 뿐이다. 인디밴드들의 아지트 역 할을 하기도 하고, 저렴하고 양 많은 음식점이 많았던 공간이었 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두컴컴하고 버려진 느낌의 공간이었다. 그런 기찻길이 연트럴파크라 불리며 사람들이 걷고 싶어 하는 공 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서 실개천이 흐르고, 편하게 앉았다 갈 수 있는 벤치도 곳곳에 설치되었다. 게다가 푸 른 잔디와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예전의 컴컴한 비밀아지트 같은 느낌이 사라졌다. 대신 따뜻하고 밝아서 온 가족과 함께 놀러오 고 싶은 곳이 되었다. 경의선 숲길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철거하지 않은 오래된 철 길이 등장한다. 산책로에 무심하게 툭 튀어나오는 철길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예전에 선로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바닥에 깔려있는 철길은 경의선 숲길, 공원만의 색다른 분위기를 준다. 이 철길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선로를 따라 걸어보기도 한다. 또한 산책로 양 옆으로 들어서 있는 작고 예쁜 가게들과 카페를 구경하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다. 연남동에도 젊은 예술가들의 - 61 -
작업실이 많이 있다. 공방 겸, 작업실 겸, 가게로 사용하는 곳들 이 많다. 산책을 하다가 신기하다 보면 신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 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서 구경해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경의선 숲길은 공항철도 및 경의선이 지하에 조성되면서 상부에 만들어진 공원이라고 한다. 홍대 입구 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 로 경의선 숲길의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 경의선 숲길을 따라 산책도 하고, 연인과 손잡고 선로 위를 걸으며 색다른 추억을 쌓 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덤으로 주변에 있는 예쁜 카페들을 찾 아가보는 재미도 있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동진시장, 게스트하우스, 세계각국의 맛집 위치 : 마포구 연남동 이야기 태그 : 연남동, 연남동 기찻길, 연트럴파크,, 경의선 숲 길 - 62 -
10. 서민들의 공간에서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해방촌 이국적인 공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해방구, 해방촌 가파른 비탈길과 좁은 골목들,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이 모여 있 는 해방촌이 젊음의 열기로 들썩이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도 낙 후된 곳으로 유명했던 해방촌 골목 이곳저곳에 개성 넘치는 카페 들이 들어섰다. 또한 싼 임대료에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공 방도 생겨났다. 특히 옛 건물의 개성과 청년들의 감성을 살린 빈 티지한 느낌의 건물과 가게들은 트렌드세터들의 발길을 붙잡았 다. 이들의 SNS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특색 있는 가게들은 해 방촌으로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며 활기를 띄게 만들었다. 해방촌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높고 가파른 언덕들을 보면서 한숨 을 쉬기 마련이다. 골목골목을 헤매다 보면 대체 내가 어디를 지 나가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해방촌의 매력임을 곧 깨닫게 된다. 골목마다 숨겨져 있는 보석 같은 가게 들을 찾는 재미와 과거와 현대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주택의 풍경 을 보는 재미도 있다. 투박한 느낌의 건물들은 자유로운 모습 그 대로의 젊은이들과 매우 닮아있다. 젊은이들은 해방촌이라는 공 간을 훼손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해방촌을 매우고 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작은 공간에 맞게 지어진 주택과 빌라들이다. 어느 한 집도 똑같은 생김이 없을 정도로 다 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진 아파트에 자라고 살아왔던 젊은이들에게 개성과 자유로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해방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개성이나 자유로움과 는 거리가 먼 곳이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 63 -
곳은 해방이후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특히 6.25 전쟁이 끝난 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마을로 굳어지게 되었 다. 해방촌을 보며 사람들은 판자촌, 달동네 등으로 부르기도 했 다. 해방촌은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애환이 담긴 동네이다. 이태원과 가까이 있지만, 이태원처럼 시끄럽지 않은 곳, 경리단길 옆에 붙어있지만 아직은 상업적인 냄새보다 사람냄새가 나는 곳 이 바로 해방촌이다. 해방촌으로 놀러 올 때에는 편안한 운동화 와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이면 충분하다. 차는 두고 오는 것 을 추천한다. 운동화를 신고 해방촌 골목 구석구석 돌아다녀 보 면서 나와 감성이 딱 맞는 가게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해방촌 마을 위치 : 용산구 용산2가 해방촌 이야기 태그 : 이태원, 해방촌, 경리단길 - 64 -
11. 서울에도 있다! 문래 예술창작촌 서울의 한 귀퉁이에는 각종 금속 자재로 만들어낸 예술품들과 벽 화가 가득한 곳이 있다. 예고 없는 예술품에, 그곳을 거닐다보면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게 된다. 한 쪽 구석에서는 작업 복을 입고 철강을 재단하는 기술자들이,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또 다른 작업복을 입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이 있는 문래 예 술창작촌. 이곳은 그 삶의 터전 자체가 예술품이다. 과거, 철강제품과 관련된 모든 것은 문래동에 모여 있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근 양평동과 대림동 일대까지 철공소였지 만, 경기 침체와 중국산 저가제품의 유입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 는다. 또한 최악의 공기오염을 자랑하던 문래동이었기에, 이 때 맞물려 서울시는 그 동네에 조성됐던 철강판매 상가를 외곽으로 이전시키려 했다. 그렇게 문래동 철강 산업은 쇠락했고, 텅 빈 건물들만 가득했다. 그런데 그 때, 예술가들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공업지대에 공장들이 떠나가고 나면, 건물은 남고 땅값은 떨어진다. 그런 곳 에 예술가들이 자리 잡는 것은 전 세계 공통된 현상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몇 철강소와 예술인들이 공존하는 이곳.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요소가 합쳐지니 말로 표현 못할 상충효과가 느 껴진다. 낮은 건물이 즐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골목길이 늘어진 가운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술작품들이 오히려 드문드문 보이는 철강 기술자들의 쇠 다듬는 풍경과 어울린다. 생업 종사 자들과 예술가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들이 미세하게 조절해 철강을 다듬는 모습 또한 예술이며, 예술가들이 열정을 - 65 -
불태우는 모습 또한 생업인 것이다. 베를린이나 파리, 브루클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예술촌 의 풍경이기에, 문득 이국적인 느낌까지 들게 한다. 서울 한복판 에서 느낄 수 있는 문래 예술창작촌은, 한국인이기에 더 친근하 게, 더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곳이다. 공짜로 이렇게까지 감상해도 되는 것인가, 미안한 마음마저 들게 만든다. 위치도 편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에서 길 따라 조금만 걸어오면 문 래예술창작촌 INFO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산업에 따른 도시의 변화를 거치며, 일상과 예술이 만날 수 있음 을 느낄 수 있는 이곳 문래예술촌. 이 공간이 형성된 그 역사와 과정을 볼 때, 타국의 예술촌과는 완전 다른 서울만의 개성을 느 낄 수 있다. 머지않아 재개발이 올 것이라는 소식은 다소 슬픈 일이지만, 전 세계 공통된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그들은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문래 예술창작촌, 어벤져스2 촬영지, 철강거리 위치 : 영등포구 문래동 이야기 태그 : 문래술촌, 문래 술창작촌, 철강거리, 어벤져스2 촬영지 - 66 -
12. 서래마을을 이어주는 누에다리에 소원을 빌어봐. 소원을 들어주는 누에가 서초구에 있다. 누에를 떠올리기만 해도 징그럽다면 이제 생각을 달리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누에는 사실 예로부터 매우 신성시 여겨진 곤충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준 곤충 이라고 해서 천충이라고 불렸다. 게다가 누에는 매우 깨끗한 것 을 좋아하는 깔끔쟁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뽕잎이라도 조금만 더 러우면 입에도 데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워낙 예민해서 오염된 지역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다. 누에의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은 비단으로 만들고, 남은 물체는 당뇨병과 간질환, 치매 등에 매우 좋다고 한다. 누에의 똥은 가축의 사료로 쓰거나 염료로 사용하며, 번데기는 식용이나, 사료, 비누의 원료 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처럼 깨끗하고 하나버릴 것 없는 누에가 소원까지 들어준다니 더 없이 반가운 일이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누에는 누에다리 앞 에 위치하고 있다. 누에다리 앞에는 두 마리의 누에가 붙어서 둥 글게 몸을 말고 있는 모양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위에 누에의 입 부분이 있는데, 입에 손을 데고 소 원을 간절히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벌써 수많은 시민들이 누 에의 입에 손을 데고 소원을 빌어서 누에의 입부분이 반질반질 금색으로 빛난다는 사실. 누에다리는 서초 경찰서와 국립 중앙 도서관 사이에 있다. 워낙 커다랗게 존재감을 뽐내는 탓에 못 보고 지나칠 레야 그럴 수가 없다. 누에 다리는 누에를 상징하는 다리답게 희고 둥근 모형을 하고 있다. 누에의 둥근 몸을 통과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 67 -
한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서 고치를 만들 듯 다리에도 사선으로 얼기설기 구조물이 엮어져 있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구조물들 사이로 국립중앙 도서관과 고속버스 터미널의 모습이 한 눈에 보 인다. 누에 다리 아래로는 10차선의 넓은 도로가 뚫려 있다. 이 누에다리는 도로로 단절되었던 서래마을과 우면산 산책로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누에다리의 진면목은 야간에 드러난다. 누에다리를 감싸 고 있던 구조물에 조명이 들어오면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을 낸 다. 환하게 빛나는 누에다리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탄성이 질러 진다. 누에다리가 있는 서래마을을 찾아서 우면산을 산책하고, 몽마르 뜨 언덕에서 피크닉을 즐겨보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누에의 입 에 대고 소원을 빌어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서래마을, 우면산 산책로, 누에다리 위치 :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이야기 태그 : 서래마을, 누에다리, 우면산 산책, 몽마르뜨 언 덕 - 68 -
13. 노동자들의 터전, 구로디지털단지 1965년 공업단지 조성 이후, 한국 산업화의 중심지이자 노동민주 화의 출발지였던 구로공단.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해 70 년대 후반에는 약 11만 명이 이곳에 종사하게 되었다. 80년대부 터는 재벌들이 주도하는 중공업 산업단지로 변경되었고, 1985년 에는 당시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해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나기 도 하였다. 주로 젊은 여성이었던 당시 노동자들. 그 당시의 근무 환경은 어땠을까? 70년대 중후반 구로공단 여공들은 대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 지 일하곤 했다. 일부 악덕 업주들은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이기 도 했다. 임금체계는 열악해 돈을 모을 수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여공이 퇴근하려면 꼭 센타 라는 몸수색을 받아야만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여성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일일 수밖에 없 었다. 관리자가 상의에서 하의까지 손으로 전부 더듬어 숨긴 물 건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센타 깐다 는 비속 어는 여기서 나왔다고도 한다. 산업구조가 변화하자 입주해 있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줄어갔다. 2000년대 들어 정부 주도로 IT 첨단 산업 단지로 육성하기 시작 하면서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되었다. 이때 구로동맹 파업의 시발점인 대우어패럴 자리에는 오렌지 아울렛 등 패션 타 운이 조성되었고, 서울시 등이 지원하는 각종 혜택으로 인해 제 조업, 정보기술업, 물류업 등 중소기업의 아파트형 공장들도 세워 졌다. 여전히 비정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 69 -
많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의 개막에 맞춰 구로디지털단지 로 이름 도 바뀐 지금, 서울시 차원의 지원으로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노 동조건이기에, 이곳은 앞으로 더 나은 일터가 될 것이라 믿어 의 심치 않는다. 구로 끝자락인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 활체험관 이 있다. 그곳엔 지난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고단했던 삶 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 다. 좁은 집에서 여럿이 모여 살며, 공동 세면장에서 씻고,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며, 그들이 살던 방을 희망의 방 이라고 불렀던 소녀들 산업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반 이상이 20세 미만이 었던 그녀들을 엿볼 수 있는 체험관은, 수많은 여공들의 꽃다운 청춘이 담겨있기에 더욱 가치 있는 곳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쇼핑몰 위치 : 구로구 구로동 구로디지털단지 이야기 태그 : 구로동, 구로공단, 구로디지털단지 - 70 -
14. 공부 좀 해? 모여! 노량진, 신림 고시촌 대한민국의 현대판 과거시험, 고시. 그리고 각종 국가고시를 통해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고시촌. 그런데, 사 람들은 왜 소문난 맛집을 찾으러 그런 고시촌을 찾아 가는 것이 며, 왜 놀 곳을 찾아 고시촌으로 모여드는 것일까? 1970년대 말, 정부의 강북지역 인구밀집 해소책에 따라 종로에 있는 입시학원들을 4대문 밖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종 로의 유명 입시학원들이 1979년 노량진으로 이주하였다. 수험생 과 관련 유동인구가 점차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학원가와 고시촌 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노량진 고시촌의 생성 배경이다. 서울대는 '신림동 고시촌'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1975년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가 신림동으로 이전했고, 서울대의 이전으로 신림동은 '빈민촌'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대학동네'로 바뀌어 갔다. 서울대가 옮겨 오기 전 신림동은 해방 후 몰려든 도시빈민과 1960년대 중후반 철거 정책과 개발에 떠밀려온 철거민들로 빈민 촌 을 형성했다. 열악했던 환경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교통과 문화 가 새롭게 정비되며 바뀌어 갔고, 본격적인 고시촌 이 형성됐다. 물론 서울대가 옮겨오기 전에도 신림동에는 고시 수험생들이 있 었다. 벼슬산 이라 불리던 관악산의 절 방 한 칸을 얻어 공부하 던 이들이다. 고시촌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넉넉하지도, 시간이 많지도 않다. - 71 -
때문에 공부와 잠, 두 가지만 충족돼도 살 수 있는 고시원 이 198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당연히 집값과 음식 값이 주변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값싼 음식을 공급하는 식당이 생기고, 저렴한 여가거리가 많이 늘어나게 된다. 다만 장래 큰 인물이 될 사람들이 모인 지역답게, 저렴하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 특유의 고급 지향 문화는, 싸지만 싸 보이지 않는, 저렴하지만 저질이 아닌 지 금의 고시촌 풍경을 갖춰가게 만들었다. 놀지 않고 공부만 하면 사람을 버린다. 는 외국 속담이 있다. 사 람이 살다 보면, 휴식도 필요하고, 간단한 놀이도, 술 한 잔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고시촌에서 멀지않은 곳에 놀 곳 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공부하러 모인 사람들에 의해 먹 을거리와 놀 거리가 발달하게 됐고, 이제 놀 거리와 먹을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고시촌으로 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흥 미로운 인간군상이 녹아있는 서울 고시촌 풍경이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신림동 먹거리 위치 : 관악구 신림동 이야기 태그 : 노량진, 신림동, 고시촌, 신림동 먹거리 - 72 -
15. 노룬산 금닭의 전설 장도방은 뚝섬나루 부근에서 장사를 하는 큰 부자였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글을 읽지 못 해 셈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겼었다. 게 다가 사람을 믿지 못해 일을 부리지 않고 혼자 항아리에 검정콩 을 넣는 것으로 셈을 했다. 장도방과 거래를 하는 아전이 그에게 젊은 노비 한명을 소개해준다. 나라에 빚을 지고 노비로 전락한 젊은이는 명석하고 혜안이 넓어 장도방의 장사에 큰 도움을 주었 다. 젊은이는 고향에 있는 아내를 데려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장도방에게 부탁했다.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그를 오래도록 자신 옆에 둘 수 있겠다 생각하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장도방은 젊은이의 부인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장도방은 젊은이를 불러 큰돈과 자유의 신분을 약속하며 부인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젊은이는 크게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갔 고, 장도방은 젊은이를 강원도 영월로 보내 돌아오지 못하도록 흉계를 꾸몄다. 영월로 떠나는 날,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는 그날 까지 매일 노룬산에 올라 한강을 보며 기다리겠노라 말했다. 부 인은 매서운 한파에도 매일 노룬산에 올라 남편을 기다렸고, 몇 개월이 지나는 무렵이었다. 장도방은 사람을 시켜 새댁을 조용히 불러냈다. 그는 황금으로 가득 찬 궤짝을 보여주며, 떠난 남편은 잊으라 했다. 젊은이의 아내는 자신과 남편의 마음속에도 이미 금으로 가득하여 어떤 황금도 부럽지 않다고 말하며 다시 노룬산 으로 향했다. 밤이 늦도록 새댁이 돌아오지 않았고, 새댁은 노룬 산에서 망부석이 되어 있었다. 봄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 꼭 돌 아오겠다며 영월로 떠났던 젊은이가 뗏배에 실려 돌아왔다. 사람 들은 아내의 곁으로 돌아온 젊은이를 안타까워하며 그를 노룬산 에 함께 묻어 주었다. 사람들은 하나의 무덤을 만들어 두 사람이 - 73 -
꼭 붙어 있길 빌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금닭의 전설이 된 것은 그 이후에 일이 었다. 장도방과 가족들이 큰 빚을 지고 도망쳐버리고, 일제 강점 기를 거치면서 뚝섬나루는 예전의 활기를 잃어버렸다. 해방 후 사람들이 아차산에 산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앞에 샛노란 노룬산이 선명하게 드러나 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들 눈에 길게 꼬리를 늘어 뜨린 황금 닭 두 마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우아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황금 닭은 해가 떠오르며 사라져 버렸 다. 사람들은 두 마리의 황금 닭이 노룬산에 함께 묻혔던 젊은 부부라는 것을 알아 차렸고, 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다. 현재 노룬산은 노룬산 시장으로 변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 는 곳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유난히 정이 많 고 부부금술이 좋다고 한다. 아마도 죽어서도 함께 하고자 했던 젊은 부부의 사랑이 전해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노룬산 골목시장 위치 : 광진구 뚝섬 이야기 태그 : 노룬산 금닭전설, 노룬산 부부금슬 - 74 -
16. 서울 최초의 카페가 있던 정동길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고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주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런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점은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고종이 덕수궁을 중건한 이후 정동길에 세운 손탁호텔에는 서울 최초의 카페가 있었다고 한다. 정동길에 카페가 들어선 연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은 서울 안에서도 고풍스런 서양건축물과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곳이다. 서구 열강들의 공사관이 설치되면서 철도와 전화, 신문 등 서양의 문물과 문화가 처음 들어온 흔적들 때문이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이 처음 정동에 들어서면서, 정동은 서양세력 의 근거지가 된다. 미국의 뒤를 이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의 공관이 정동에 차례로 들어선 것이다. 뒤이어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은 정동은 선교와 교육, 의료활동의 중심지 가 된다. 이로 인해 한국 최초 라는 수식어를 단 서양식 교육기 관과 종교시설, 의료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섰다. 현재 정동길은 서대문 경향신문사에서 시작돼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이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는 손탁호텔은 1902년에 세워진 서양식 호텔로, 당시 한양에 체류 중이던 독일인 한국어 통역가 안토니 트 존탁(Antoniette Sontag)에게 운영을 맡겼기 때문에, 그녀의 한국식 이름을 따서 손탁( 孫 凙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종은 덕수궁 옆에 황실 소유의 토지를 하사했고,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호텔을 짓게 했다. 이곳의 1층에 서울 최초의 카페가 있 었는데 손탁호텔이 아직까지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75 -
고종황제는 손탁호텔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커피를 즐겨마셨는데, 커피에 독을 타 고종과 황태자를 독살하려 했던 독살미수 사건이 있었을 정도였다. 손탁호텔을 통해 대한제국이 외래문물을 적극 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개방성을 널리 알리고, 그 개방성을 힘으로 삼아 자주성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로 풀이될 수 있겠다. 현재의 정동은 유서 깊은 근대 유산을 소개하고 전해주는 박물 관, 전시관, 미술관이 들어서서 근대문화유입 당시의 활발한 교류 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동길에는 지금도 많 은 카페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외 국의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점은 반갑게 느 껴진다. 고즈넉한 주말 오후, 고종이 맛보았을 커피를 정동길의 카페에서 맛보며 세계 도시로 변모한 서울의 오늘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정동길, 덕수궁 위치 : 중구 정동 이야기 태그 : 정동길, 덕수궁, 근대문화유산, 손탁호텔 - 76 -
17. 잠시 쉬어가는 서울 가는 길, 떡전교 이번 정류장은 서울 시립대 입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떡전교 앞입니다.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서울 시립대학교 앞에는 독특한 이름 을 가진 다리가 있다. 이 떡전교 라는 이름을 버스 안내방송으로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추측해 보게 된 다. 과연 이 특이한 이름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지금은 짧은 고가차도만 존재하지만 원래 이곳에는 떡전고가차도 가 함께 있었다. 이 떡전고가차도가 원래의 떡전교를 가리키는데, 주변 상권과 교통문제로 2004년에 철거 되어 현재의 고가차도만 이 남아 떡전교라는 이름의 명맥을 잇고 있다. 이 다리의 정식명 칭은 청량제2고가차도 이다. 폭 24m, 길이 21m의 작은 크기로 독특한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떡전교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 라가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충청, 강원, 경기 등지에서 서울로 올 라온 사람들이 성문인 동대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 동대문까지 꽤 많은 거리를 더 가 야 했기 때문에 한 차례의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지만, 이 곳 주변에 숲과 샘물이 흐르는 곳이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 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위치한 청량사와 더불어 청량리 라는 지 명은 이런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먼 지방에서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하 룻밤 묵어가기도 했는데, 긴 여행길에 배고픔을 느끼는 경우가 - 77 -
많았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행객을 대상으로 떡을 파는 가게들 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렇게 떡집들이 모여들며 자리를 잡자 사람들은 이곳을 떡전거리 혹은 떡점거리, 한자로는 병점리( 餠 店 里 )라 부르게 된다. 이 떡전거리에 훗날 도로가 확장되면서 전농 동에서 홍릉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생겨 사람들이 이 다리를 떡 전교 라 부른 것이 오늘까지 떡전교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 다. 오늘 날 떡전교 아래로는 선로가 빼곡이 놓여 청량리 역사로 들 어서는 많은 열차들이 지나다닌다. 청량리역은 지하철부터 KTX, 경춘선까지 수많은 열차들이 드나드는 큰 역이다. 지방과 서울은 물론이고 서울 곳곳으로 향하는 열차들을 바라보면 예전 떡전거 리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서울과 지방으로 바 쁘게 오가는 사람들에게 떡전교라는 이름은 잠시 쉬어가는 미덕 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 같다. 관광지 정보 관광대상 : 떡전교 위치 : 동대문구 전농동 이야기 태그 : 떡전교, 떡전고가차도 - 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