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이 국 환** 1) Ⅰ. 머리말 Ⅱ. 미메시스와 카타르시스 Ⅲ. 행동의 이해와 카타르시스: 모래폭풍 - 목 차 - Ⅳ. 허구의 시간과 카타르시스: 달걀 삼키는 남자 Ⅴ. 독서, 카타르시스의 치유 기능 개 요 소설이 독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에 대해 연구하였다. 카타르시스를 문 학 전반의 개념으로 일반화하고자 폴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 의 주 요 개념인 삼중의 미메시스(triple mimesis)를 살펴보았고, 카타르시스 가 독자의 반응을 전제로 한 논의이기에 잉가르덴의 독서현상학, 이저 의 수용미학 등도 포함하여 논의하였다. 이론적 고찰에 머물 수 있는 한계를 감안하여 정미경의 소설 모래폭풍 과 달걀 삼키는 남자 를 텍스트로 인용하여 미메시스의 과정과 이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살펴 보았다. 문학의 언어로 옮긴 이야기가 소설이고, 소설을 읽으며 느끼 는 독자의 카타르시스는 전통적 의미의 정화 와 순화 의 개념을 포함 하면서도 더 큰 의미로 확장해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가치를 추구하여 앎의 세계로 진입하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은 다른 분야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달리 섬세한 상징과 은유가 엮어내는 * 이 논문은 동아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lee8301@dau.ac.kr)
498 石 堂 論 叢 50집 이야기의 담론에서 발생하기에 독자의 삶에 깊이 관여한다. 인간은 본 능적으로 재현의 욕구가 있다. 재현된 형상화를 재형상화하면서 독자 는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 그렇게 삶의 뜻을 다시 풀 어보고 행동을 통해 자기 삶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카타르시 스이고, 그 치유의 원리가 소설의 치유 기능이다. 소설의 치유라는 측 면에서 모래폭풍 의 인물 행동 특성을 파악하였고, 허구의 시간을 통 해 달걀 삼키는 남자 를 분석하였으며,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카타르 시스가 실현될 수 있음을 밝혔다. 앞으로 소설의 치유 기능은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치유의 기능에 적합한 작품을 제시하는 연 구가 이야기 해석학, 독서현상학, 수용미학 등의 문학이론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다양한 이론을 포함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 다. 주제어 : 카타르시스, 미메시스, 이야기 해석학, 수용미학, 치유, 기대 지평 Ⅰ. 머리말 독자는 왜 책을, 그 중에서도 소설을 읽는가. 아마도 소설에는 이야 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의 원조가 농부나 선원이었다고 말한다. 1) 농부 의 시간적 경험과 선원의 공간적 경험은 이야기로 꾸며져 지혜나 조언 을 전달하고 전승한다. 저녁이면 삼삼오오 모여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 울이고, 긴 항해를 마친 배가 입항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선원의 경 1)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98, 165 195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499 험담을 듣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이야기라는 양념 으로 버무린 삶의 지혜나 조언은 즐거움과 유익함을 모두 제공했을 것 이다. 그런데 지금은 경험 보다 정보 가 중시되며 지혜는 폄하되고 경 험의 가치는 평가절하 되는 시대이다. 특히 지식정보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다양한 영상 매체의 확산으로 소설과 같은 전통 적인 이야기 방식은 급격히 퇴조한다. 고독한 개인의 작업에 불과한 소 설이라는 장르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혜나 조언을 전달하지 못하고 침몰할지 모른다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제 왜 소설을 읽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소설 읽기의 일차적 목적은 즐거움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주요 혼 수 품목 중의 하나가 소설책이었다. 2) 소일거리가 부족했던 시대에 소 설 읽기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했을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즐겁 지 않다면 독자는 독서를 중단할 것이고 그 소설은 본질적 가치를 상 실한다. 그런데 같은 소설이라도 독자의 취향에 따라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이며 재미있다 와 지루하다 는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개인적 취향으로만 환원하기는 어렵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유지하며 독자의 폭넓은 지 지를 받는 소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느 끼는 즐거움은 욕망의 충족, 억압의 해소, 금기를 넘어선 쾌락 등 다양 한 요인에서 발생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즐거움이 작품 자체에서 생기기보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점이 다. 물론 어떤 연유로 그러한 즐거움이 나오는지 작품 자체에 대한 환 원적 분석도 필요할 것이다. 한편 소설 읽기의 일차적 목적이 즐거움이다 라는 명제는 소설이란 장르적 특징보다는 소설의 이야기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카치가 2) 정민, 책 읽는 소리, 마음산책, 2002, 81쪽.
500 石 堂 論 叢 50집 말하는 서사시의 시대가 저물고 근대적 소설의 시대가 태동하며, 소설 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허구 뒤에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언어로 발굴하여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 무거운 사명감이 소설을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한 이 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의 위기를 고민하는 한편에서는 이야기 의 범람이 목격된다. 이야기는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함께 스토리텔링 으로 변신하여 문화콘텐츠의 주요 구성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소설이 란 장르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해도 이야기 없는 문화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만화, 디지털 게임을 통해 충분히 제공되고 있어 언어로 재현되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이 지니는 지위는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다. 즉 소설의 위기는 이야기의 위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점유했던 소설의 우월적 지위의 위기이며 근대 이후 소설이 자임했던 인식과 탐구 도구로서의 위기, 혹은 문학적 재현을 통해 세계 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의 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소설을 연결하는 단단한 고리는 어디서 찾아 야 할 것인가. 그 고민의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에서 언급 한 카타르시스를 재론할 필요가 있다. 당대 비극의 미학 이론인 카타르 시스를 문학 전반의 개념으로 일반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다시 소설 읽기에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폴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 의 주 요 개념인 삼중의 미메시스(triple mimesis)는 미메시스Ⅲ의 재형상화 (refiguration)가 카타르시스와 밀접하기에 인용하고자 하며, 카타르시 스가 독자의 반응을 전제로 한 논의이기에 잉가르덴의 독서현상학, 이 저의 수용미학 등도 일부 포함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또한 이론적 고찰 에 머물 수 있는 한계를 감안하여 정미경의 소설 모래폭풍 과 달걀 삼키는 남자 를 텍스트로 인용하여 분석할 것이며, 이를 통해 미메시 스의 과정과 이에 따른 카타르시스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살펴보 아, 독자의 자기 치유에 소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01 Ⅱ. 미메시스와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에 나타나는 비극의 정의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극은 그 끝까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으로서,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에 따라 각기 다양한 종류의 양념으로 맛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비극의 재현은 이야기가 아닌 극의 등장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3) 비극의 정의에서 일차적으로 논란이 되는 용어는 재현(mimesis)이 다. 미메시스를 모방 으로 해석할지 재현 으로 해석할지는 여전히 논 란거리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은 플라톤의 그것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이나 복제, 즉 이미 존재하는 이데아나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행동 또는 행동하는 사람들 을 창조적으로 재현 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창조적 이 란 말은 미메시스의 언어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물 을 언어로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플라 톤이 구분하고 있는 완벽한 모방(미메시스)과 불완전한 모방(디에제시 3) 아리스토텔레스, 김한식 역, 시학 (머리말 츠베탕 토도로프/ 서문 및 주해 로즈린 뒤퐁록, 장 랄로),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31쪽. 4) 이상섭, 천병희, 최상규 등 시학 을 번역한 여러 번역자들은 미메시스 (mimesis)를 모방으로 번역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28쪽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2002, 49쪽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최상규 역, 시학 (LEON GOLDEN 영역, O.B.Hardison, Jr 해설), 예림기획, 2002, 24쪽 참조.
502 石 堂 論 叢 50집 스)은 언어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며, 완벽한 모방은 모방이 아니라 사 물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게 된다. 또한 재현은 뮈토 스, 즉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행위를 뜻한다. 시학 에서 아리 스토텔레스는 줄거리가 바로 행동의 재현이다 라고 말한다. 재현한 다 는 것은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줄거리를 통해 사건들을 체 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며, 그 결과 이야기되고 있는 현실은 의미를 갖 게 된다. 우리는 개연성 혹은 필연성에 따른 줄거리 구성을 통해 사건 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결 국 미메시스라는 포괄적 범주 아래 비극은 극적 재현 이 되는 것이고 서사시는 서술적 재현 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로즐린 뒤퐁록과 장 랄로는 시학 의 주해를 달면서 미메시스를 기존의 모방 이 아니라 재현 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이야기한다는 것은 재현, 눈앞에 없는 것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 보는 것이다. 재현은 단순한 모방이나 복제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재현하는 사람의 시점, 즉 해석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 다. 자기가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대로 보는 것이다. 예술의 환영은 인지를 전제로 한다 6)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다 면 그 사물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재현은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곰브리치가 예술이란 결국 환영 (illusion) 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러한 환영을 통해 현실의 새로운 모 습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7) 그렇다면 러시아 형식 5) 김한식, 문학과 카타르시스, 프랑스어문교육 제8집, 2004, 444 445쪽 참조. 6) 곰브리치, 차미례 역, 예술과 환영, 열화당, 1992, 참조. 7) 김한식, 텍스트, 욕망, 즐거움, 불어불문학연구 74집 2008년 여름호, 2008, 108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03 주의와 구조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은 서사학 또는 서사기호학에서 이 야기를 폐쇄된 기호체계로 보는 관점은 이야기와 삶과의 실존적인 관 계를 소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쾨르는 이야기를 언표( 言 表 énoncé)의 차원을 넘어 말하는 주체와 듣는 주체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담론(discours)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이 세상에서 일어났고 일어나 고 있으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행동이 되고, 행동의 재현이 사 건을 만들고 사건들이 얽혀 줄거리가 된다. 여기에는 머릿속에서 일어 나는 생각과 느낌, 그리고 기억과 기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재현 은 표현의 수단이 됨과 동시에 재현의 한계를 오히려 힘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고 특정 양식을 넘어 현실은 끝없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은 이처 럼 텍스트 세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텍스트의 의미(진리)를 재구성하는 수용자의 주관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이며 삶과 텍 스트를 잇고자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적이다. 리쾨르는 그처럼 확장 된 재현의 개념을 토대로 이야기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세 겹의 미메시스, 즉 경험을 재현하고 재현된 경험을 통해 이를 다시 재현하는 해석학적 논리의 체계를 세운다. 8) 리쾨르는 이야기 고유의 논리, 즉 경험을 이야기하고 이야기된 이야 기를 통해 다시 경험하는 해석학적 논리를 밝히기 위해서 행동을 재현 하는 행위-미메시스의 현상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미메시스는 미메시스-뮈토스-카타르시스 라는 삼 단계의 재현 활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리쾨르는 이를 미메시스I, 미메시스II, 미메시 스III이라는 일종의 해석적 순환과정 이해, 설명, 적용 으로 체계화한 다. 이를 토대로 좁게는 서사 텍스트(이야기), 넓게는 문학 창조 일반에 대한 해석의 규칙을 리쾨르는 마련한다. 9) 8) 김한식, 앞의 논문, 109 110쪽 참조. 9) 삼중의 미메시스에서 미메시스, 전( 前 )형상화(préfiguration)는 행동의 뜻을
504 石 堂 論 叢 50집 카타르시스는 미메시스 Ⅲ 단계에 속한다. 이 단계에서 허구 세계가 잠재적 현실의 세계를 거쳐 실재 세계로 이행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 체험된 시간의 층위에서 풀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미리 그려본다 (figuration)는 것은 이야기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되기 이전의 행동의 뜻 을 이해하려는 행위이며 의지다. 미메시스Ⅱ, 형상화(figuration)는 미메시스 Ⅰ에서 이해된 행동의 뜻을 줄거리로 꾸며 실제로 이야기기로 옮기는 과정 이다. 즉 현실을 재현(mimesis)하는 창조행위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해 석이 들어가고 이야기라는 틀에 맞춘다. 리쾨르는 이를 작품의 내적인 코드 (장르)에 따른 이야기의 자기-구조화(auto-structuration) 라고 말한다. 이 단계에서 리쾨르는 이야기 구조분석의 성과를 포함한다. 이야기의 기호체 계를 구성하는 여러 기호들(스토리, 작중인물, 배경 등)이 시점과 목소리의 다양한 양태들과 결합하는 방식을 통해 이야기 특유의 모습을 더 많이 설 명할수록 이야기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메시스 Ⅲ, 재형 상화(refiguration)는 텍스트 세계와 독자 세계의 교차지점이다. 독자가 이 야기의 뜻을 풀어 삶의 뜻을 찾아가는 작업이며 독서행위를 통한 카타르시 스가 생기는 것도 이 단계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대로 독자에 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이야기의 뜻을 나름대로 풀어 스스로 삶 의 뜻을 찾는다. 이야기의 서술적 기능은 현실을 이야기의 틀(서술 코드)에 따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독자가 속한 현실세계와 관계를 맺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처한 현 실을 돌이켜 보게 하고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삼중의 미메 시스 과정을 거치는 것은 독자 및 (자기 작품의 최초의 독자로서의) 작가이 다. 이 과정을 정리하자면, 독자는 삶을 살면서 일정한 행동방식을 익히게 되고(미메시스Ⅰ), 이 행동방식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거나 읽으며(미메시스 Ⅱ), 이야기를 읽은 후 그 영향으로 새로운 행동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 다(미메시스Ⅲ). 결국 인간의 행동에 대해 선취한 이해에 따라 텍스트의 줄 거리를 구성하거나 이해하게 되며 그러한 텍스트의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 의 삶을 다시 이해하게 됨으로써 독자는 자신의 서사적 정체성(identité narrative) 을 형성하고 수정해나간다. 폴 리쾨르, 김한식 역, 시간과 이야기 1, 문학과지성사, 1999, 128 168쪽 참조. 유기환, 이방인의 살인사건과 리쾨르의 삼중의 미메시스, 프랑스어문교 육, 제35집, 2010, 391 340쪽 참조. 김한식, 폴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 국어국문학 146집, 2007, 222 225 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05 라감으로써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어떤 의미(진실)를 찾아가고 발견하 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아울러 그렇게 찾아낸 의미를 삶의 세계로 다시 가지고 와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앎의 뜻은 그렇게 삶의 뜻과 연결된다. 리쾨르가 말하는 재형상화란 현실을 가리키고 재현한다는 단순한 대상지시를 넘어 현실을 드러내고 변형시킨다. 돌이켜본 삶은 변화된 삶, 다른 삶이라는 뜻에서 변형시키는 것이다. 10) 문학 작품은 오로지 독서의 매개를 통해서만 완전한 의미성을 획득 하며, 형상화의 역동성이 그 여정을 끝마치는 것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 다. 그리고 텍스트의 형상화가 재형상화로 변모하는 것은 독서를 넘어 서, 받아들인 작품으로 인해 알게 된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서다. 미메 시스 Ⅲ은 텍스트 세계와 청자 또는 독자 세계의 교차점, 그러니까 시 를 통해 형상화되는 세계와 그 한복판에서 실제적인 행동이 펼쳐지고 그 특유의 시간성을 펼치는 세계 사이의 교차점을 나타낸다. 허구 작품 의 의미성은 그러한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11) 또한 그 교차점에 서 카타르시스도 발생한다. 비극의 기원과 관련하여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는 정화( 淨 化 purgation) 와 순화( 純 化 purification) 라는 상반된 의미로 이해되었다. 정화 로서의 카타르시스는 하제( 下 劑 )를 통한 배 변, 즉 사하요법( 瀉 下 療 法 )를 뜻하는 용어이다. 여기에는 어떤 기질이 비정상적으로 농축되면 병리학적 상태의 원인이 되고, 쾌감은 그런 기 질의 배출과 관련이 있다는 전제가 있다. 따라서 의학적으로 말하면 그 것은 동종이 동종을 쫓아낸다(like drives out like) 는 동종요법 (homeopathy)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더 뜨겁게 하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몸을 더 차게 하는 것, 슬플 때 슬 픈 영화를 보고, 성욕이 일어날 때 포르노를 봄으로써 슬픔과 욕정 같 은 해로운 감정을 배설 하고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프로 10) 폴 리쾨르, 김한식 역, 시간과 이야기 3, 문학과지성사, 2004, 304 305쪽. 11) 폴 리쾨르, 앞의 책, 306 307쪽 참조.
506 石 堂 論 叢 50집 이트 이후 치료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카타르시스 요법(the cathartic method) 을 창안하여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정화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12) 반면에 순화 라는 개념은 해로운 감정을 조절하고 훈련시킴으로써 그러한 감 정들을 다스린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 에 개진된 윤 리학적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 즉 순화 의 관점으로 카타르시스를 이 해하면 일종의 도덕적 조절작용(moral conditioning)이 된다. 13) 12) 독서치료(bibliotherapy)는 이러한 정화 의 관점에서 카타르시르를 이해하 고 있는데, 특히 이러한 독서치료를 임상적 독서치료(clinical bibliotherapy)라고 한다. 임상적 독서치료는 정신과의사, 심리치료사와 같 은 전문가들의 협조를 얻어 전체 치료 프로그램의 하위 단위(adjunct)로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의사와 병원사서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서구 독서치료와 달리 한국에서는 아동교육자, 독서지도자, 문헌정보학자, 민간인을 중심으로 독서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즉 치료 한다는 명목으로 독서 치료를 남용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을 읽고 느끼 는 카타르시스는 섣불리 치료(clinic)로 접근하기보다 치유(healing)의 개 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김정근, 독서치료의 현단계, 나의 체험적 독서치료론, 대진문화사, 2005, 453쪽 참조. 이소라, 독서치료의 개념과 상담자의 역할, 교육연구논총 27집 2권, 2006, 45쪽 참조. 13) 군인들이 전쟁에서 수없이 죽음을 목격한 후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듯이, 비극의 관객도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인생의 사건들을 비극을 통 해 목격함으로써 그러한 사건들 앞에서 유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 린이 동화에 끔찍한 이야기가 많은 것이 어른이 되어 겪어야 할 일을 미리 알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대비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순화론의 영향이 라 할 수 있다. 예쁜 구두를 탐한 죄로 결국 춤을 멈추지 못하고 사형집행 인의 도움을 받아 도끼로 다리를 자른다는 빨간 구두 등 전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많은 동화들이 어른의 잔인한 세계를 미리 체험하게 한다. 즉 순화론은 도덕적 교훈이나 도덕적 학습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최상규 역, 시학 (LEON GOLDEN 영역, O.B.Hardison, Jr 해설), 예림기획, 2002, 241 242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07 뒤퐁록과 랄로는 정화 와 순화 라는 일견 상반된 카타르시의 원리를 근본적 층위 와 부수적 층위 라는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근본적 층 위에서의 카타르시스는 재현활동 자체가 주는 효과이다. 관객은 재현 된 형태(비극의 경우에는 두려움과 연민의 형태)를 관조함으로써 순 화 된 감정을 체험하고,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법칙을 발견(학습)함으로 써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부수적인 층위에서 카타르시스는 동종요 법에 따라 고통을 해소하는 쾌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화 라고 본다. 즉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동종요법에 의한 의학적 치료효과라는 의미보 다는 재현의 미학, 미적 체험과 진리와 관련된다. 이점에서 뒤퐁록과 랄로의 해석은 카타르시스 개념을 이야기를 포함한 재현 장르 일반의 미적 체험과 진리 문제와 연관시킬 수 있게 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학과 정신분석 등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을 통해 개념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14)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제Ⅱ편 8장에서 연민이란 타인들이 억 울하게 당하고 또 우리 자신이 당할 가능성도 있는 어떤 파괴력과 고 통을 수반하는 악을 우리가 목격하였을 때 발생되는 고통의 느낌이라 고 정의할 수 있다 (1385b 13)고 말한다. 즉 연민과 두려움은 교호( 交 互 )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낄 때 우리 자신 때 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즉, 비극의 사건들은 억울 한 것이기에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닥쳐올지 모 른다는 것을 우리가 두려워하기에 부당한 불행을 겪는 타인의 두려움 이 결국 우리의 연민을 자아낸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쳐올 수 있 14) 카타르스시스에 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뒤퐁록과 장 랄로가 자세하게 주해를 단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머리말 츠베탕 토도로프/ 서문 및 주해 로즈린 뒤퐁록, 장 랄로/ 김한식 역)과 아리스토텔레스, 최상규 역, 시학 (LEON GOLDEN 영역, O.B.Hardison, Jr 해설), 김한식의 논문 텍스트, 욕망, 즐거움 및 문학과 카타르시스 를 참조할 것.
508 石 堂 論 叢 50집 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자신의 입장에서, 연민은 타자의 입장에 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15) 작가의 입장에서 비극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우선 작가는 두려움과 연민을 자아내는 일련의 사건들을 선택한다. 그 다음 작가는 사건들을 단일한 행동 속에 통합하고 개연성과 필연성의 원리에 따라 재현한다. 재현은 줄거리를 꾸미는 것이고, 줄거리를 꾸민다는 것은 그대로 복사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판단을 전제로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역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가 체계적으로 배 열한 사건들 사이에서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를 깨닫고 무언가를 배우 고 인지하게 된다. 즉 기대와 반전 그리고 인지( 認 知 )라는 긴장과 이완 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 을 알게 됨으로써 독자는 즐거움을 얻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사건 자 체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16) 비극의 원리로서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순화 의 논리, 즉 학습을 강 조하다 보면 교훈을 강조하는 텍스트가 카타르시스를 효과적으로 가져 15) 아리스토텔레스, 최상규 역, 시학 (LEON GOLDEN 영역, O.B.Hardison, Jr 해설), 예림기획, 2002, 217쪽 참조. 16) 하디슨(Hardison)은 시학 해설에서 이러한 원리를 통찰체험(insight experience) 과 연관시킨다. 하디슨에 따르면 텍스트를 통해 조우하는 비 극적 체험은 실제 체험과 달리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 즐거움은 학습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인데, 학습이란 특수한 사항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일반 개념에 의하여 특수 사항들 사이의 관 계를 발견하는 일과 연관되는 것이다. 귀납적으로 볼 때, 소설을 읽고 비 슷한 유형의 비극적 체험을 거듭하게 되면 독자는 그 개별성과 특수성을 관통하는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원리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학습은 연역적 사고에 의해 보편적 전제로 발전하고 이를 통해 독자는 다 시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비극과 맞닥뜨려도 연민과 두려움을 쉽게 극복하 는 통찰을 지니게 된다. 또한 이러한 통찰은 리쾨르의 삼중의 미메시스에 서 강조한 미메시스의 선순환 을 가져오게 된다. 즉 이해(comprehension) 의 선순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09 올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독서 행위가 없다면, 카타르시스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독자의 즐거움이 없이는 순화 의 학습도 의미가 없다. 즉 저자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보다 독서와 독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기에 독서 이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늘 똑같은 길을 걷다보면 긴장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낯선 길, 혹은 익숙한 길이라도 걷 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제대로 길을 찾을 때의 즐거움이 클 것이다. 누 구라도 짐작할 수 있듯 진부한 의미는 더 이상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 한다. 갈등과 극적 반전, 결말로 이어지는 줄거리 구성은 긴장과 이완 의 변증법 을 통해 문학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는 미 메시스-미토스-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무질서의 억압을 해소(배설)하고 무엇을 인지하고 발견한다는 인식론적 기능과 더불어 긴장과 이완을 통해 감정을 정화하고 순화함으로써 쾌감을 불러일으킨 다는 미적 기능을 갖는다. 17) 하지만 현대소설은 이러한 재현의 미학을 종종 벗어나거나 거부한다. 심지어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들은 이야기 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한다. 독서이론이 문학이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어렵고 골치 아 픈 작품 들, 관습적인 기대지평 18) 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이른바 누 보로망 류의 소설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저자가 이야 17) 김한식, 텍스트, 욕망, 즐거움, 불어불문학연구 74집 2008년 여름호, 2008, 129쪽, 116쪽. 18) 기대지평( 期 待 地 平 expectation horizon)은 만하임(K. Manheim)의 사회학 적 용어를 야우스가 차용한 용어로, 수용자 입장에서 그 작품에 대한 이해 의 범주 및 한계를 의미한다. 텍스트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지평이 충족될 때, 친숙한 지평 이 발생한다. 낯선 소설 앞에서 독자들은 텍스트의 새로 운 지평 과 마주치고 독자의 친숙한 지평 과 텍스트의 새로운 지평 사이 의 이러한 충돌로 지평의 전환 이 생겨난다. 이러한 전환은 곧 독자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기대 지평 이 된다. 이 과정은 리쾨르의 삼중의 미메시 스 의 순환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리쾨르도 자신의 이야기 해석학 에서 야우스의 수용미학을 수렴하여 논의하고 있다.
510 石 堂 論 叢 50집 기의 죽음 을 시도할 때 독자는 저자의 죽음 을 선언하며 저자의 의도 나 작품의 의미보다 독서와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 리쾨르가 미메시스 Ⅲ와 카타르시스를 논의하면서 웨인 부드의 허구 의 수사학, 미셸 사를의 독서의 수사학, 이저와 잉가르덴의 독서현상학, 야우스의 수용미학 등을 끌어들이는 것도 독서행위가 갖는 중요성과 독자의 위상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미메시스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무엇을 발견하고 변형시키며 창조하는 것이고, 카타르시스도 바로 거기서 생긴다. 결국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 로 다른 지평, 낯설고 이질적인 지평들 사이의 융합을 통해 세계에 대 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해를 통한 즐거움이라는 카타르시스 개념은 힘을 되찾 는다. 이해란 낯선 것을 친숙하게, 먼 것을 가깝게 만드는 것이며, 세계 는 항상 변함없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에 따라 매번 다르게 드러나는 지평이다. 익숙하지 않으면 친숙할 수 없고 익숙하지 않으면 가까이 둘 수도 없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세계를 향한 이해 의 과정이며 독자의 지평과 텍스트의 지평은 끊임없이 교감하며 새로 운 지평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텍스트 세계 에 이끌려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 세계 속에서의 허구적 체험을 안고 다 시 현실로 돌아온다. 정화(purgation)가 동일시의 즐거움이라면 순화 (purification)는 텍스트에서 빠져나와 관조하는 즐거움이다. 돌아온다 는 것, 즉 재형상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 수많은 질문을 숨겨두었고 독자는 그 질문을 찾아가 는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독자에 의해 여백 과 공백 은 메워진다. 물론 그 답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 독자는 19) 텍스트의 불확정성은 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빈자리를 여백과 공백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여백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남겨 놓은 빈자리이고 공백 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가는 빈자리이다. 따라서 여백은 작법( 作 法 )의 측면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11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냄으로써 독서의 긴장은 해소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작가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하고 지평을 열어가 며 작가와 독자의 지평 융합에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즐거움이 태어나 는 것이다. 20)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한 다면, 참을 수 있다 21) 문학의 언어로 옮긴 이야기가 소설이다. 문학의 언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은 인물 과 사건을 중심으로 한 시간의 예술이고 시간의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만들며 독자는 지평을 확대해간다. 이제 카타르시스는 전통적 의미의 정화 와 순화 의 개념을 포함하면서도 더 큰 의미로 확장되어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관습과 규범의 억압을 풀어놓고 결핍을 충족하며, 무지 에서 벗어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하여 앎의 세계로 진입 하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은 다른 분야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달리 섬 세한 상징과 은유가 엮어내는 이야기의 담론에서 발생하기에 독자의 삶에 깊이 관여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재현의 욕구가 있다. 재현된 형상화를 재형상화하면서 독자는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한 다. 그렇게 삶의 뜻을 다시 풀어보고 행동을 통해 자기 삶을 새롭게 만 들어나가는 과정이 카타르시스이고, 그 치유의 원리가 소설의 치유 기 능이다. 에서 보아야 하고, 공백은 독자의 적극적 개입의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 로버트 C. 홀럽, 최상규 역 수용미학의 이론, 예림기획, 1999, 77 113쪽 참조. 20) 김한식, 앞의 논문, 122 125쪽 참조. 21) 한나 아렌트, 이진우 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9, 235쪽.
512 石 堂 論 叢 50집 Ⅱ. 행동의 이해와 카타르시스 : 모래폭풍 리쾨르는 미메시스 I을 통해 전( 前 )이해(pre-comprehension) 가 가 능하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물 행동의 구조적 특성, 상징적 특성, 시간적 특성을 이해한다는 것 이다. 특히 행동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행동은 목적을 내 포하는데, 그 목적에 대한 기대는 예견되거나 미리 말해진 어떤 결과와 는 혼동되지 않으나 행동을 좌우하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게다가 행동 은 누가 왜 무엇을 하고 또 했는지를 설명하는 동기를 지시한다. 행동 은 또한 그들의 활동, 또는 일상용어로 하자면 그들의 행위로 간주되는 일을 하고 또 할 수 있는 행동 주체(agents)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이 행동 주체들은 자신의 행동이 낳는 결과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개념망에서 왜 라는 물음에 의해 열려진 무한한 역 진( 逆 進 )은 누구 라는 물음에 의해 열려진 유한한 역진과 모순되는 것 이 아니다. 어떤 행동 주체를 확인하는 것과 그에게서 동기를 식별하는 것은 서로 보완적인 작업이다. 우리는 또한 행동 주체들이, 자기들이 만들지는 않았으나 실천적 영역에 속하는 상황 속에서 행동하고 시련 을 겪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바로 그 상황들이 물리적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 주체들의 개입을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경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 과 더불어 행동한다는 것인데 상호 작용은 협력이나 경쟁 또는 투쟁 의 형태를 띨 수 있다. 그리하여 상호 작용의 우연적 국면은 도움이나 시련이라는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상황의 우연적 국면과 만난다. 마지 막으로 행동의 출구는 행복이나 불행을 향한 운명의 변화일 수 있 다. 22) 22) 폴 리쾨르, 김한식 역, 시간과 이야기 1, 문학과지성사, 1999, 129 131쪽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13 요컨대 행동의 구조적 특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태 로 정리할 수 있다. 누가-주체, 무엇-목적, 왜-동기, 어떻게-상황, 누구와 함께 혹은 누구와 맞서-상호 작용, 결과-출구. 이러한 행동의 구조적 특성을 바탕으로 정미경의 단편소설 모래폭 풍 을 살펴보자. 23) 모래폭풍 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여성의 아픈 사랑 이야기이다. 주인공 수연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취급하는 라이 선스 브랜드 매장의 점원이다. 수연은 열 개도 넘는 셔츠를 꺼내놓고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비틀어서 주름을 만들어보고는 그냥 나가는 고객 들에게도 끝까지 친절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감정노동자 24) 이다. 수요 일 오전, 일주일 전에 사간 드레스셔츠, 격식 차리는 행사에 한 번쯤 입고 나서 다려서 가져온 게 분명한 셔츠를 환불하러온 여자와의 실랑 이로 지칠대로 지친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실랑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지켜본 그 남자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참조. 23) 독자의 입장에서 삼중의 미메시스(triple mimesis)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실현하기 적합한 소설은 많다. 김형경, 정미경, 심윤경, 신경숙, 정한아, 조 선희, 전경린 등의 소설은 마음의 상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그 상 처의 진원지를 가정으로 지목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작가의 통찰도 뛰어나기에 카타르시스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 우선 카타르시스를 성취하기에 적합한 정미경의 소설 두 편만을 다루고자 한다. 24)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을 하는 노동자를 지칭하는 말로, 자신이 속한 조직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자신들의 감정 표현을 조절해야 하는 노동자를 통칭한다. 주로 백화점, 콜센터 등 서비스직 노동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며 심리적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군에 속한다. 김수연 외, 서비스직 근로자의 감정 노동과 우울 수준, 대한산업의학회 지 제14권 3호, 2002, 227 228쪽 참조.
514 石 堂 論 叢 50집 수연에게 다가섰고, 초조함과 갈등과 아름다움에 대한 소년 같은 갈망 이 뒤섞인 표정으로 수연에게 와이셔츠를 골라달라고 부탁한다. 소설 의 주인공은 수연이지만, 행동의 구조적 특성은 현수를 주체로 했을 때 그 의미 파악이 용이하다. 리쾨르에 따르면 최소의 서술 문장은 이러저 러한 상황 속에서 X가 A를 행한다는 형태의 행위 문장이며, 그것은 동 일하거나 다른 상황 속에서 Y는 B를 행한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다. 이야기들은 궁극적으로 행동하고 시련을 겪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 25) 현수는 수연을 유혹한다. 수연은 현수를 돌본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 는 발생하고 작가는 수연의 시련을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 현수는 얼마 되지 않는 대학 시간강사의 벌이로 명품을 좋아하고 번번이 수연에게 돈을 빌려가며 심지어 수연의 방에 얹혀산다. 현수의 목적과 동기는 분 명하다. 수연과의 상호 작용은 협력을 가장한 착취이고 그 출구는 수연 의 불행이 자명하며, 현수는 다시 자신을 돌봐줄 다른 여자를 만나면 그만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러한 착취 구조는 진부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수연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만은 어렵기에 독자는 연민의 감 정을 느낀다. 행동이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그 행동이 이미 기호, 규칙, 규범을 통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행동은 언제나 상징적으로 매개된다. 상 징성은 정신 속에 존재함으로써 행동을 이끌도록 되어 있는 심리적 활 동이 아니라, 행동에 통합됨으로써 사회적 유희의 다른 당사자들이 해 독할 수 있는 의미 작용이다. 26) 가위표로 그어지고 말 취소전표 같은 25)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1, 문학과지성사, 1999, 131쪽. 26) 상징체계는 개별적인 행동들에 대한 기술( 記 述 )적 문맥을 제공한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바로 어떤 상징적 관례에 따라서 어떤 동작을 이러저러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팔을 드는 동일한 동작이 상황에 따라서 인사하거나 택시를 부르거나 또는 표결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 석을 거치기에 앞서, 상징은 행동에 내재하는 해석체인 것이다. 폴 리쾨르, 앞의 책, 133 135쪽.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15 수연의 인생 앞에 나타나 소년 같이 맑은 미소로 셔츠를 골라달라고 하는 행동부터 현수의 행동은 철저히 수연을 이용하기 위한 접근법에 불과했다. 안 돼. 며칠 동안 왜 전화도 못 했는데. 그 말 들을까 무서웠어.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다투더라도 헤어진단 말 은 하지 말자. 마른기침을 하느라 현수의 말은 두 번쯤 끊어진다. 기 침을 쏟아내며 날 바라보는 눈은 그대로이다. 셔츠를 골 라주기를 원하던 그 눈빛. 27) 어깨만큼 챙이 넓은 솜브레로를 쓰고 아카풀코 해변에 누워 있자고, 지상에서 가장 호사스런 무덤인 네루다의 묘지를 가보는 것도 괜찮겠 다고, 새들이 가서 죽는 곳, 페루의 해변도 언젠가는 보여준다며 힘들 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28) 라고 유혹하는 현수 앞에서 수연은 속절없 이 무너진다. 중요한 것은 독자 및 자기 작품 최초의 독자로서의 작가 는 이미 현수 행동의 상징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직 주 인공 수연만이 이를 모른 채 비극과 파국의 출구로 향하고 있다. 소년 같이 맑은 미소와 세련된 몸가짐, 어떤 여성도 반할 뛰어난 말 솜씨를 지닌 남자와 그 남자에 반해 몸과 마음과 돈을 바친 여자. 서로 다른 욕망이 교유하는 이 지점에서 여자의 욕망은 연민의 대상이 되는 반면 남자의 욕망은 독자의 규범에 의해 부정적으로 감정된다. 29) 수연 27) 정미경, 모래폭풍,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생각의 나무, 2006, 159 쪽. 28) 정미경, 앞의 책, 162쪽. 29) 리쾨르가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행동들에 대한 기술이나 해 석의 규칙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의미로서의 규칙 관념을 도 입한다. 행동은 문화에 내재하는 규범과 관련해서 평가되거나 감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도덕적 선호도에 따라 행동을 판단할 수 있다.
516 石 堂 論 叢 50집 은 현수를 연민하고 독자는 수연을 연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학 에서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30) 고 말한다. 이때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 는 사람들(등장인물)을 향한 것이며, 두려움은 그 불행이 독자인 자신 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란 점에서 독자를 향한 것이다. 그런 불행 을 겪는 주인공은 보통 사람들처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니라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행을 겪거나 혹은 성장과정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를 개연성 있는 성장 체험이 전제되는 경우 소설의 설득력은 강화된다. 또한 주인공의 잘못이 개인의 의지보 다 사회구조적 요인일 때도 존재적 비극은 설득력을 얻는다. 수연이 자신을 유혹하는 현수를 사랑한 것은 그것이 사랑을 빙자한 착취임을 인지하기 못했기에 분명 잘못이다. 수연이 병원에서 현수의 아이를 지우고 자신의 집으로 갔을 때 수연의 침대에서 현수는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였다. 수연은 여자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들어온 것보 다, 자신의 침대에 다른 여자와 누운 것보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휴지를 침대 옆 휴지통에 버린 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늘 집 안의 모든 휴지통을 비우고야 잠드는 자신의 습관을 현수가 알기에 더욱 그랬다. 현수는 한 번도 수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수연은 망연 자실 그 침대에 앉아 리모컨을 누르고 비디오 화면을 응시한다. 화면 속 어리석은 여자 주인공에 자신이 투영된다. 그리하여 행동은 어떤 행동이 다른 어떤 행동보다 낫다고 말하게 하는 상 대적 가치를 얻게 된다. 윤리성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전적으로 유보하는 양태의 독서는 가능하지 않다. 즉 행동은 결코 윤리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 다는 것이 미메시스Ⅰ의 전제이다. 폴 리쾨르, 이야기와 시간 1, 문학과지성사, 1998, 137 138쪽 참조. 30) 아리스토텔레스, 김한식 역, 시학 (머리말 츠베탕 토도로프/ 서문 및 주해 로즈린 뒤퐁록, 장 랄로),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31쪽.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17 제 눈을 들여다보며 뻔한 거짓말을 하는 남자를 떠나 지 못하는 여자. 비열하고 부도덕하고 거짓말쟁인데다 살 인을 밥 먹듯 하는 남자.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는 박애 주의 이론가인 남자. 추잡한 독재자인 남자. 나는 그런 놈 을 사랑하는 여자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린다. 마스카라도 하지 않았는데 뭐가 두려워 울지 못하겠어. 나는 화면 속 여자에게 물어본다. 그 남자, 어디가 좋아? 31) 자문의 자답은 자명하고, 돌봄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잘못의 대가는 혹독하다. 돌봄(caring)의 기본적 표현은 먹여주고(feeding), 안아주고 (hugging), 쉴 자리를 주는(resting) 것이다. 32) 수연은 현수를 먹여 살 렸고 안아주었으며 자신의 방까지 내주었다. 현수에게 수연이 매력적 으로 보인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여자들 은 보통 자신이 뭔가 해줄 게 많이 남아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도움을 원하는 남자를 찾아내 필요한 것을 주고자 하며, 이는 모성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돌봄이 사랑 이 될 수 없음은, 사랑이라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동적 상호관계이기 때문이다. 현수에게 사랑은 엄마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이 그렇듯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돌봐줌이었다. 하지만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서 알 수 있듯, 돌봄의 사랑은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 자는 것, 섹스의 욕구가 충족되는 수준이다. 33) 인간은 그 이상을 욕망하고 31) 정미경, 앞의 책, 190쪽. 32) 하지현, 사랑과 돌봄의 차이, 관계의 재구성, 궁리, 2006, 203 222쪽 참조. 사랑과 돌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 부분을 참고하였다. 33)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인간의 욕구가 병렬적으로 열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에서부터 충족도에 따라 높은 단계로 성장해가는 것이며,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높은 단계의 욕구는 행동으 로 연결되지 않고 이미 충족된 욕구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았
518 石 堂 論 叢 50집 그것은 혼자 힘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사랑을 통해 파트너를 찾는다. 수연과 현수의 사랑은 돌봄에 머물러 있었고, 그 돌 봄에 안주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던 현수로 인해 수 연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사랑받고 용서받아야 하는 현수를 돌보는 것, 그 연민의 돌봄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수연의 잘못만 이 아니라 젊은 여성의 보편적인 잘못이고 실수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모성본능을 자극하여 애착행동을 보이는 것은 뇌 속의 옥시토신 과 관련되어 있다. 사랑의 시작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아끼 고 돌봐주는 마음이며 이때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돌봄의 모성본능과 돌봄 행위를 유발하는 옥시토신,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 는 뇌의 미상핵 영역은 신뢰라는 사회적 관계 맺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낭만적 사랑을 할 때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영역과 유사 하다. 그런 면에서 초기에 사랑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 본적 돌봄 행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러 한 보편적 감정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독자는 수연을 연민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 두려움 은 불행이 내 것이었거나 언젠가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다. 따라 서 주인공의 불행이 보편적 설득력을 지닐수록 독자가 느끼는 카타르 시스는 커진다. 즉 카타르시스는 인식의 영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다. 욕구단계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안전 욕구(Safety Needs),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 자기존중의 욕구(Esteem Needs), 자아실현의 욕구(Self actualization Needs) 다섯 단 계로 나누는데 생명유지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에 관한 욕구에서 성적 욕구까지 포함하는 생리적 욕구에 머무는 것이 돌봄 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 오혜경 역, 동기와 성격, 21세기북스, 2009, 155 164 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19 그런데 모래폭풍 에서 독자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수연의 비극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돌봄이 곧 사 랑이라 여기는 수연의 착각은 어머니와의 분리 공포에서 비롯된다. 34) 모래폭풍 에서 인물 행동의 상징성이 전이해의 대상이 되었다면, 미 메시스Ⅱ의 형상화 과정에서 역사의 시간을 허구의 시간으로 재구성하 면서 연대기의 불협화음 은 화음 이 되고 이야기는 통일성을 확보한 다. 작가가 수연이 열두 살에 겪은 엄마의 자살 사건을 소설의 후반부 에 배열하는 것도 화음과 통일성 때문이다. 35) 내가 열두 살 때 죽은 엄마는 죽기 얼마 전부터 날 볼 때마다 울곤 했다. 그 무렵엔 엄마가 자살했다는 걸 아무 도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할머 니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로 떠받들려 자라나 결 혼하고서도 꽃핀 화초처럼 보살핌 받는 게 당연했던 엄마 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떠나버린 아버지보다 누군 34) 정화와 순화라는 개념 자체가 깨끗함/더러움, 순수함/불순함 이라는, 사회 적으로 용인되고 전승된 이분법적 범주를 전제한다. 예술은 현실에서 충족 되지 못하는 욕망에 대한 상상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욕망을 체 념하고 포기한다는 금욕 의 뜻도 들어간다. 독서 행위는 말로 할 수 없는 것, 가려지고 억압되어 있는 진실(의미)을 찾아가는 여행이 된다. 그것은 또한 근원적인 분리의 상처가 새겨진 유년기와 벌이는 숨바꼭질 놀이이다. 김한식, 텍스트, 욕망, 즐거움, 불어불문학연구 74집 2008년 여름호, 2008, 128쪽. 35) 역사의 시간은 단선적인 자연적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고 허구의 시간은 다층적( 多 層 的 )이고 복선적( 複 線 的 )인 시간 즉 주관적이고 인간적인 시간 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 자체가 불협화음이라 보았다. 즉 기억 자체는 뒤죽박죽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지만 체험된 시간 이 기억의 호출을 받고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순간 이러한 불협화음은 극 복되고 화음과 통일성을 얻게 된다. 폴 리쾨르, 앞의 책, 52 80쪽 참조.
520 石 堂 論 叢 50집 가에게 남편을 빼앗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 이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엄 마가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 리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낳은 두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일에 아무런 고통도 주저도 없었다. 36) 열두 살 때 겪은 엄마의 자살은 수연이 현수를 돌보는 것이 사랑이 라고 착각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그래서 수연은 언제부턴가 나 는, 관계를 맺어놓고 먼저 떠나버리는 사람은 결코 되지 않겠다고 생 각 하며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 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 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 로 사악하다. 37) 고 믿게 된다. 그 믿음 때문에 수연은 현수의 달콤한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현수는 열두 살의 나 38) 가 된다. 수연의 돌봄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겪는, 경험에서 배태된 동물 적 본능이다. 나아가 수연이 현수를 돌보는 것은 열두 살 시절의 자신 을 돌보는 자기 보살핌이기도 하다. 돌봄이 초기의 사랑 형태라면 수연 은 여전히 열두 살의 버림받은 자신을 돌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현수가 수연을 사랑하기보다 이용했듯이 수연도 사실은 현수를 사랑하 는 것이 아니라 열두 살 때 버려진 자신을 돌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 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낳은 두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나 는 일에 아무런 고통도 주저도 없었다 는 고백처럼 이러한 병적인 자 기애는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불신에서 시작해서, 결국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경계심 속에 방어막을 쌓는 것이다. 36) 정미경, 앞의 책, 165쪽. 37) 정미경, 앞의 책, 166쪽. 38) 정미경, 앞의 책, 175쪽.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21 리쾨르에 따르면 독자의 전( 前 )이해(미메시스Ⅰ)는 잘못의 대가를 이미 치른 자와 치르고 있는 자, 치르게 될 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 다. 이에 따라 연민과 두려움의 강도도 다를 것이다. 삼중의 미메시스 의 선순환을 신뢰하는 리쾨르는 독자의 각기 다른 전이해에도 불구하 고 미메시스 Ⅱ란 이해(서술적 형상화)의 해석 과정을 거쳐 미메시스 Ⅲ(후이해)에 이르면 독자가 카타르시스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꿈이 유년기의 상처를 다른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잠의 평화를 지키 는 수호자인 것처럼, 소설은 이야기와 상징으로 무의식의 영역을 재현 함으로 삶의 상처를 치유한다. 재현의 즐거움은 뜻을 이해하는 즐거움 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 계를 나름대로 이해하여 그려보고, 독자로 하여금 그 세계를 다시 그 려보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정미경의 모래폭풍 은 그렇게 앎과 삶의 세계를 잇도록 요구하며, 독자는 그 요구에 응해 지평의 융합을 가져오 고 그 침전의 놀이를 통해 카타르시를 느끼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주 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는 것이다. Ⅲ. 허구의 시간과 카타르시스 : 달걀 삼키는 남자 정미경의 달걀 삼키는 남자 는 달걀과 고양이에 집착하는 스티브 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정아 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러시안블루 종 암컷 고양이 랄라 를 분양하려는 스티브의 글에서 시작한다. 그런 데 스티브가 쓴 고양이 분양 안내 글 어디에서도 랄라를 분양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정아는 고양이가 잠든 채 깨어나지 않게 하는 약을 구해달라고 약사인 친구에게 부탁한다. 스티브에게 랄라는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숙녀 이자 첫사랑 이었다. 정아는 고양이와 연
522 石 堂 論 叢 50집 적이 된 것이었다. 고양이 랄라를 안락사 시키려는 정아와 일본에 데려 가서라도 랄라를 치료하려는 스티브 사이의 줄다리기는 결국 정아가 고양이 사료에 약을 버무려 안락사 시키면서 끝이 난다. 랄라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정아는 자신이 결코 랄라의 연적이 아니었음을, 자 신이 랄라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음을 아프게 깨달으며 소설은 마무리 된다. 리쾨르의 시간 개념에 기대어 이 소설을 역사의 시간 과 허구의 시 간 으로 재구성보자. 달걀 삼키는 남자 를 의미 단위에 따라 나누어 보면 10개의 단락으로 나뉘는데, 이를 환언(paraphrase)하면 다음과 같 은 10개의 연속매듭(sequence) 39) 으로 요약할 수 있다.(S= sequence) S1 랄라 를 분양하라고 재촉해도 스티브가 미온적이자 약사 친구에게 고양이를 안락사 시킬 수 있는 약을 부탁함. S2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하는 스티브는 정아의 만 류에도 달걀 먹기 대회에 나가고 고양이를 버릴 뜻이 없음. S3 겨울, 귀가하던 스티브는 길에 버려진 고양이 미요 를 데려오고 그 때문에 알레르기 비염이 악화됨. S4 비 내리는 여름, 핏자국과 털이 엉겨 피비린내 자욱 39) 시퀜스(sequence)는 원래 영화에서 쓰던 표현을 빌려온 것으로 서술에서 하나의 장면을 지칭한다. 언어학에서는 한 집합체에 속한 여러 요소들이 순서에 따라 놓인 연속체 를 가리킨다. 이 용어의 번역은 기호학 사전에 따라 요소 연속체 혹은 장면 등으로 나타나는데, 시퀜스가 소설 속에서 기와 모양으로 맞물리는 연속체이면서도 각각의 단위가 소설의 전체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의 완결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 용어를 연속매 듭 이라 번역했다. 시퀜스는 다시 거시( 巨 視 ) 시퀜스 와 미시( 微 視 ) 시퀜 스 로 나눌 수 있는데 본고에서 분석한 것은 거시 시퀜스에 해당한다. 따 라서 연속매듭 은 거시 시퀜스 에 해당하는 용어이다.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23 한 고양이를 데려와 억울 이라 이름 지음. S5 한국에서 영어회화 강사를 하다 요리를 배우려고 간 학원에서 요리강사인 정아를 만남. S6 어린 시절 끊임없이 싸우는 부모님. 스티브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전부 그렇게 싸우며 사는 줄 알았음. 결국 부모님은 이혼함. 아버지가 옥수수밭 사이로 끝 없이 차를 몰아 네브래스카에 있는 고모 집에 스티브 를 버리고 옥수수밭 사이로 떠나버림. 스티브에게 애 정이 없던 고모도 스티브가 달걀을 잘 먹을 때만 칭 찬함. S7 스트레스성 급성 신우염으로 랄라의 병원비가 40만 원쯤 나오자 정아는 랄라를 안락사 시킬 결심을 굳히 고 결행함. S8 스무 살 때 맨해튼에 있는 엄마의 오피스로 찾아갔 지만,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복하고 당당해 보였기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다 돌아옴.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으며 도로를 사람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 는 랄라 를 만나 데려옴. S9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랄라를 묻고 돌아오는 길 에 국도에서 스티브의 차가 뱀 위를 지나감. 이러한 9개의 연속매듭을 작품 속에 구현된 시간 과 줄거리의 시간 적 순서 로 재배치된 시간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리쾨르에 따 르면 전자가 허구의 시간이고 후자가 역사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허구의 시간): S 1, 2, 3, 4, 5, 6, 7, 8, 9 (역사의 시간): S 6, 8, 5, 3, 1, 2, 4, 7, 9 달걀 삼키는 남자 를 두 층위의 시간으로 재구성해보면 우리가 체
524 石 堂 論 叢 50집 험하는 시간이 불협화음 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결국 보이지 않 는 시간을 보이게 하는 것은 이야기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단절과 분열 과 균열 속에서 불쑥 왔다가 사라지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그러한 시간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화음을 이루어내는 것이 이야기이다. 이 야기가 행동을 재현 하는 것이라면 그 행동은 시간과 더불어 일어난다. 행동이 사건을 만들고 사건들이 모여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일어난 사 건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란 사 건들을 처음, 중간, 끝으로 나누어 재배열하여 줄거리를 구성한다. 일 어난 모든 일을 연대기로 배열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이야기는 이야기되는 사건들의 시간(스토리의 시간)과 그 사건들을 이 야기하는 시간(이야기의 시간) 사이의 관계를 비틀어 시간을 서술적으 로 형상화 하고, 정신의 시간이 겪는 불협화음과 균열을 극복하고 화 음과 통일성을 얻으려는 의지와 갈망을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이야기 를 통해 시간은 육체를 부여받고 볼 수 있는 것이 되며, 독자는 이야 기를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다시 그려본다. 이야기는 시간의 파 수꾼 인 것이다. 40) 달걀 삼키는 남자 는 스티브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 며 그 시간은 시계의 시간 이 아니라 숙명적 시간 이다. 고양이와 달걀 에 대한 과도한 애착은 모두 스티브가 겪은 숙명적 시간에 말미암은 것이다. S2에 나타난 달걀 애착에 관한 독자의 호기심은 S6에서 해결된다. 연대기 시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S6은 허구의 시간에 의해 재배치 되면서 시간의 형상화 전략은 극대화된다. 고모는 날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어. 사람을 처 음부터 끝까지 의무감으로만 대한다는 게 얼마나 나쁜 건 40) 김한식, 시간의 시학:뒤라스의 여름날 저녁 열시 반, 프랑스어문교육 제22집, 2006, 319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25 지 넌 몰라. 고모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어. 그러고는 항 상 덧붙였지. 사랑스런 아이가 되어 있으면 아빠가 널 찾 으러 올 거야. 41)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스티브를 유일하게 받아준 사람이 고모였다. 고모에게 인정받는, 다시 버림받지 않을 아이 가 되고 싶은 스티브의 욕망은 최초로 고모로부터 칭찬을 받은 계기가 달걀 때문이었기에 달 걀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스티브는 코를 떠먹는 것처럼 달걀이 싫었지만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고모에게 야단만 맞던 터라, 그에게 달걀 먹기란 날달걀을 하나씩 삼킬 때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 어주는 것 같은 은 안도감을 주었다. 스티브에게 달걀 먹기란 더 이상 버림받을 수 없다는, 지각된 유기공포(fear of abandonment)를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42) 유년시절의 이 경험은 스티브가 성인이 41) 정미경, 달걀 삼키는 남자,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생각의 나무, 2006, 136쪽. 42) Kurdek과 Berg는 지각된 유기공포(fear of abandonment)를 자녀가 부모 와의 관계 안정성과 생활의 연속성에 대하여 과도하게 걱정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Baumeister와 Leary는 유기공포를 개인이 돌봄을 받고 안정 적인 집단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위협당하는 상태로 가정하였다. 즉 이혼 가정 자녀의 경우 어느 한쪽 부모가 가정을 떠나면, 자녀는 떠난 부모와 접촉을 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장차 함께 살고 있는 부모조 차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유기공포 지각은 특히 불안 증상과 유의미한 상관을 보이는데, 스티브는 부모의 이혼 이후 편부가 자신을 고모집에 맡겼기에 극단적인 유기공포에 시달린 것으로 보 인다. 특히 인지적 측면에서 불안은 전형적으로 위험 및 유해에 대한 기대 와 관련된 인지를 핵심으로 하고, 정서적 측면에서 불안의 핵심 정서는 공 포이다. 스티브가 버려진 고양이에 집착하는 것은 유기공포가 촉발한 불 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연옥 이민규 김은정, 이혼 가정 자녀의 유기공포 및 상실지각과 불 안 및 우울간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건강 Vol.12 No.1, 2007, 173 175쪽 참조.
526 石 堂 論 叢 50집 된 이후에도 삶의 철학으로 체화한다. 정아. 사는 일과 닮지 않았니? 달걀을 삼킨다는 것 말 이야. 씹지 않고 삼키는 것. 삼키고 싶지 않아도 기어이 삼켜야만 하는 것. 43) 고양이 랄라 에 대한 애착도 독자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지만 연대기 시간은 허구의 시간에서 지연되고 소설의 후반부인 S8에서 그 이유가 나타난다. 스무 살에 스티브는 처음으로 엄마의 직장으로 찾아간다. 엄마가 한 번 찾아오라며 직장 주소를 불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유리 칸 막이 너머 일에 열중하는 엄마와 어른이 된 자신이 꼭 닮았음을 느낀 다. 그런데 비서는 엄마가 아들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얘길 하지 않았 는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미팅을 하고 있는 엄마는 그대로 완벽했어. 누구도 필 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복하고 또 당당해 보였어. 유리창 너머로 엄마를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여기가, 심장이 뻐 근하게 아파오더라. 아니오, 다음에 찾아올게요. 비서가 물었어. 메모를 전해드릴까요? 아니오. 다음에. 그게 마지막으로 엄마를 본 거였어.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갈 까 서 있다 랄라와 눈이 맞은 거지. 44) 자신이 약을 먹여 안락사 시킨 랄라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정아는 정아. 내 안에서 누가 울고 있어. 비 오는 밤에 버려진 고양이처럼. 그 게, 나일까? 45) 라는 스티브의 말을 들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과 랄 43) 정미경, 앞의 책, 138쪽. 44) 정미경, 앞의 책, 146쪽.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27 라는 연적이 아님을, 랄라가 곧 스티브라는 사실을 대면한다. 유기공포 로 더 이상 성장을 멈춘 스무 살의 스티브, 유리창 너머 엄마를 보고도 그 유리창에 막힌 듯 다시 엄마에게 버려진 스티브가 곧 버려진 고양 이 랄라였던 것이다. 랄라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저녁의 국도에서 스티브의 차가 뱀을 치 면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낮 동안 데워진 아스팔트의 온기에 이끌려 올라오는 뱀. 작가는 그 온기가 그리워 도로 변으로 나왔다 토막 나는 뱀 이야기를 결말에 던져놓으며 독자에게 깨 달음을 요구한다. 도로에 몸을 부비다 토막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본 능적으로 온기가 그리워 도로 위로 기어오르는 뱀처럼 인간도 일생 동 안 온기를 구걸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달걀 삼키는 남자 에서 나타나듯 소설은 시간의 예술이다. 그런데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 자체가 불협화음이다. 앞서 밝혔듯이 기억 자체 는 뒤죽박죽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지만 체험된 시간이 기억의 호출을 받고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순간 이러한 불협화음은 극복되고 화음과 통일성을 얻게 된다. 이야기가 행동을 재현 하는 것이라면 일어난 모 든 일을 연대기로 배열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리쾨르 는 전형상화(미메시스 Ⅰ), 형상화(미메시스 Ⅱ), 재형상화(미메시스 Ⅲ)라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시간의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이끈다. 이 야기가 인간의 행동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우선 이야기되기 이전 행동 의 세계가 있을 것이며 이야기는 줄거리 구성을 통해 이를 텍스트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독자는 독서를 통해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는데, 이 러한 해석학적 순환 과정에서 시간성의 모순은 이야기의 시학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찾는다. 즉 상징, 은유, 이야기와 같은 담론으로 형 상화된 세계와 맞닥뜨린 독자는 미메시스 Ⅲ(후형상화)를 통해 세계를 45) 정미경, 앞의 책, 149쪽.
528 石 堂 論 叢 50집 나름대로 이해하고 다시 그려보는 여정을 완수한다. 그 여정에서 독 자는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며,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통 해 스스로를 치유한다. Ⅳ 독서, 카타르시스의 치유 기능 소설을 읽고 위로를 받거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는 경험은 주위 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테베의 도서관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 이라 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문학에 담긴 위로하고 치유 하는 힘을 증명해왔다. 46) 이러한 치유를 위해서는 소설이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드러나는 교훈적 이야기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읽고 독자 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어렵다. 현대 소설의 등장과 함께 독서 행위 는 텍스트의 기만(déception) 전략 47) 에 대한 맞대응이 되는 경향이 있 다. 마치 밑그림이 없이 그림 조각 맞추기를 하듯 독자는 자신의 기대 지평에 기대어 텍스트와 마주선다.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진술된 인물 들과 사건들을 그려보려고 노력하며 적극적으로 여백과 공백을 메운 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는 매번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악보 48) 가 된 다. 비유컨대 악보(텍스트)를 연주(독서)하며 독자는 즐거움을 느끼고 작중 인물을 동일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때 카타르시스는 앞 서 논의했듯 독서 치료의 핵심 과정인 통찰(insight)을 포함한다. 49) 코 46) 조셉 골드, 이종인 역, 비블리오테라피, 북키앙, 2003, 341쪽. 47)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 나 국내의 이인성, 최수철 등의 소설 이 잘 보여주는 전략이다. 48)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3, 문학과지성사, 326쪽. 49) 독서 치료의 원리는 일반적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 카타르시스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29 헨(Cohen)은 상상문학을 사용하는 독서치료와 자기조력도서( 自 己 助 力 圖 書 )를 사용하는 독서치료를 구분하였다. 50) 자기조력독서의 대상은 자기조력매뉴얼이나 프로그램화된 교습서 같은 비문학 작품이다. 상상 문학은 일련의 문학텍스트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이 분야의 독서치 료는 문학치료 라는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독서치료에서 사용하는 비문학 텍스트의 경우에서 (catharsis), 통찰력(insight) 등의 원리로 나눌 수 있다. 동일시 란 문학적 텍스트를 읽어 가는 가운데 등장인물과 자신을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은 사 람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 가운데 하나다. 동일시는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 적인 방향 모두에서 일어날 수 있다. 즉, 등장인물 가운데 특정한 사람에 게 호감이 가는 것은 긍정적인 면의 동일시라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적인 면의 동일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 학작품을 읽어 가는 가운데 책 속의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모 두 동일시의 결과다. 카타르시스 란 감정의 정화, 정동해발( 情 動 解 發 )이라 고도 한다. 치료적인 면에서 볼 때는 대상자의 내면에 쌓여 있는 욕구불만 이나 심리적 갈등을 언어나 행동으로 표출시켜 충동적 정서나 소극적인 감정을 발산시키는 것을 말한다. 앞서 밝힌 카타르시스의 원리 중에서 정 화 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통찰 이란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객관적인 인식을 체득하는 것으로 카타르시스의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통찰은 계속적인 치료 과정을 통하여 책 속 등장인물의 행동을 스 스로 깨닫도록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동기 조성이 욕구를 달성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감정적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자 는 작중 인물을 의인화하여 동일화, 카타르시스, 통찰을 통하여 이 가상의 인물 과 상호 작용함으로써 모방하고 반응하며, 이러한 대리경험이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태도나 행동의 변화까지 기대하게 되는 것이 다. 한복희, 독서지도의 방법으로서 독서치료 연구, 문헌정보학회집 제8 집, 2002, 40쪽 참조. 이영식, 독서치료 어떻게 할 것인가, 학지사, 2006, 99쪽 참조. 손정표, 신독서지도방법론, 태일사, 2003, 345쪽 참조. 50) 이소라, 자기조력도서의 평가기준 수립 및 자기조력 독서치료의 효과에 대한 연구, 충남대 박사논문, 2007, 27쪽.
530 石 堂 論 叢 50집 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문학 텍스트가 독자의 심미적, 정서적 공감에 호 소하는 텍스트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 텍스트는 비문 학 텍스트의 담론체계와는 달리 독자의 상상 체험을 통한 다양한 의미 구조를 생성하고 완성시켜 가는 의미 생성의 개방적 구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51) 결국 카타르시스를 통한 치유 기능에 적합한 소설은 이저 가 말한 독서 활동의 세 가지 변증법을 통해 선별될 수 있을 것이다. 52)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정미경의 모래폭풍 과 달걀 삼키는 남자 는 비극적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카타르시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두 소설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하나의 연주법에 불과하다. 독자는 독서 과정 전체를 통해 수정된 기대와 변형된 기억들을 바꾸는 놀이 를 계 51) 변학수, 문학치료, 학지사, 2005, 25쪽. 52) 첫 번째는 확정성의 결핍/과잉이다.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창조적 활동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작품은 권태롭다. 반대로 지나치게 어려운 작품은 독자를 짓누를 위험이 있다. 그래서 독서는 결국 저자가 말을 가져오고 독 자는 의미작용을 가져오는, 그러한 소풍놀이가 된다. 두 번째는 불협화음/ 화음의 변증법이다. 지나치게 확정적이고 화음만이 있는 작품은 의미의 빈 곤을 가져오며, 불확정적이고 불협화음이 심한 작품은 의미의 과잉을 불러 온다. 그러한 일관성의 탐색이라는 지평 위에 세 번째 변증법, 즉 친숙함/ 낯섦의 변증법이 모습을 드러낸다. 탐색이 너무 성공하면 친숙하지 않은 것이 친숙해지고, 독자는 자신이 작품에 의기투합하여 그것을 믿고, 결국 그 속에 빠져버린다. 그러므로 구체화는 본다고 믿는다는 뜻에서의 환상이 된다. 반대로 탐색이 실패하면 낯선 것은 낯설게 남아 있고, 독자는 여전히 작품의 문 앞에 남게 된다. 따라서 좋은 독서란 어느 정도의 환상을 허용 하는 동시에, 그 환상에 대한 반증을 받아들이는 독서다. 그리고 작품에 대 한 좋은 거리란 환상을 계속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견딜 수도 없게 만드는 거리다. 독자를 가장 존중하는 저자란 가장 손쉽게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 키는 저자가 아니라, 친숙한 주제를 독자와 공유하되 그 규범과 관련하여 낯설게 하는 전략 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저자다. 폴 리쾨르, 김한식 역, 시간과 이야기 3, 문학과지성사, 2004, 327 331쪽 참조. 김한식, 문학과 카타르시스, 프랑스어문교육 제8집, 2004, 455 456쪽 참조.
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31 속해야 한다. 이러할 때 독서는 이저가 말한 독서 활동의 세 가지 변증 법을 통해 살아 있는 경험 이 된다. 리쾨르는 미메시스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발견하고 변형시키는 것 이며, 문학해석학은 미학적 특성, 즉 앎과 즐거움 사이의 관계를 이해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텍스트의 기대 지평과 독자의 기대 지평을 혼동하지 않고 혼합하는 것이 이상적인 유형의 독서이며 이 과정이 리쾨르가 말한 미메시스Ⅲ, 재형상화이다. 소설의 치유 기능 은 카타르시스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독자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독서도 윤리적 잣대로부터 자 유로울 수 없다. 미메시스Ⅰ(전이해)를 통해 텍스트를 읽고, 미메시스 Ⅲ(후이해)에 이르러 독서를 통한 깨달음이 앎과 삶 사이를 가교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카타르시스가 일시적 쾌락이나 배설의 쾌락뿐 아 니라, 즐거움을 통한 깨달음이란 소중한 가치를 통해 독자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소설이 어떤 독자에게 가장 유효할지에 대한 고민과 소설 구조 속의 어떤 요소들이 치유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 한 논의가 앞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존의 독서치료 활 동에서 소설을 치유서로 선정하면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 분석을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독서치료에 대한 논의를 문학계의 논의로 끌어들임으로써 독 서치료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논의까지 한 차원 높이기 위해서는 문학에 대한 기왕의 논의들이 독서치료에 대한 논의로 변환 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 53) 이란 주장은 일 리가 있다. 그러할 때 문학계의 연구 성과는 치유로서의 독서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53) 정운채, 시화에 나타난 문학의 치료적 효과와 문학치료학을 위한 전망, 고전문학과 교육 1집 1권, 1999, 168쪽 참조.
532 石 堂 論 叢 50집 텍스트가 독자의 기대지평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해석에 대한 모든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해석의 전범은 아니라 도 해석의 모범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치유의 기능에 적합한 작품을 제시하는 것도 문학 연구의 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 막연한 미답의 영 역에서 앞으로 활발한 연구가 전개되길 바란다. 또한 그 연구는 이야기 해석학, 독서현상학, 수용미학 등의 문학이론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다양한 이론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2011년 5월 30일에 투고 되어, 2011년 6월 8일부터 6월 26일까지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2011년 6월 29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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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치유 기능과 카타르시스 / 이국환 535 Abstract The healing function of the novel & Catharsis Lee, Kook-Hwan I studied about catharsis that say in Aristotle's Poetics thinking what novel can give to reader. As I studied triple mimesis that is importance concept of Paul Ricoeur's Narrative Hermeneutics to understand comprehensively catharsis and catharsis presupposes reader-response, include and studied Ingarden's Reading Hermeneutics, and Iser's Aesthetic of Reception. I thought limit that can stay in theoretical study, and quote Jeong Mee Kyung's novel The Sandstorm and The Man Who Swallow Egg and study mimesis' process and catharsis. I think that story that move in literary language is novel, and think that must extend to more large meaning as catharsis that read novel and reader feels includes concept of traditional meaning Purgation, Purification. Catharsis is pleasure that make off value that pass over stereotype to the world of pursue knowledge. Is concerned deeply in reader's life to happen in story's discourse that the pleasure is different from pleasure that other field offers and its delicate symbol and metaphor produce. Human has mimesis' desire instinctively. Reader figuration doing re-figuration world and own life understand. Process that reader so realize again hope of life and form own life through action newly is
536 石 堂 論 叢 50집 catharsis, and the healing's principle is healing function of novel. Key Words : Catharsis, Mimesis, Narrative Hermeneutics Aesthetic of Reception, Healing, Horizon of Expec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