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공감 하십니까? S A N G S A N G F E S TA 2 0 0 9 I N T E R V I E W B O O K
상상 페스타 2009 : 미래공감은 지금껏 현재형에 머물던 축제형식을 미래형으로 이끌어낸 복합문화예술축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제한 未 來 共 感 은 현재형 현안들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KT&G 상상마당은 상상마당과 함께 했던, 혹은 함께 해나갈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S A N G S A N G F E S TA 2 0 0 9 I N T E R V I E W B O O K 대한민국 문화예술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작금을 살피고 未 來 共 感 하고자 본 내용을 채록한다.
未 來 共 感 I N T E R V I E W E R & I N T E R V I E W E E 未 來 共 感 김노암 KT&G 상상마당 전시감독 고낙범 현태준 신창용 자신만의 작품세계로 다가올 未 來 를 자유롭게 채워나가는 美 티스트들과의 만남 INTERVIEWER_김노암 KT&G 상상마당 전시감독 未 來 共 感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최희진 장형윤 INTERVIEWEE_고낙범 / 현태준 / 신창용 未 來 共 感 이동민 KT&G 상상마당 운영간사 하신화 석정현 오화진 未 來 共 感 임진모 음악평론가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 매니저, 웹진 이즘, 황우성 불나방스타 소세시클럽 김마스타 와이낫 에이첼 메리제인 4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오로지 작품만으로 화답하는작가, 고낙범과의 축구전 같은 자유 人 터뷰 고낙범 작가와의 인터뷰는 엉뚱하게 축구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고낙범 화백은 인터뷰라는 형식을 그다지 신뢰치 않아 개인작품이나 전시활동에 관련된 것 외 에는 인터뷰를 잘 안하기로 소문난 작가이다. 작품 발표회 때 간혹 언론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도 어떻 게든 그 상황을 모면해(?)나갔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이 건네는 관심에 엄격한 태도를 유지해 온 그에게 내가 대 뜸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친분을 빌미로 한 인,터,뷰 단어까지 꺼내 들면서. 그의 대답은 역시나, 상상마당 인터뷰 목차에도 없는, 축구 이야기. 1라운드 결과는 out! 고낙범은 홍익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년간 학예연구사로 활동하다가 1995년부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서양화가이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 부분의 시간을 홍대 앞에서 보냈다. 아마도 홍대 부근에서 꽤 오랫동안 작업한 작가들 중 한 명에 속할 것이다. 이에 나는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시도해 보았다. 홍대 앞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셨는데 그동안 어떠셨어요? 나의 질문은 역시나 no goal! 그런 얘긴 좀 식상하지 않나? 그냥 다른 얘기나 하지.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人 터뷰는 무슨. 그런 것 말고 사는 이야기나 나누자고. 난 요즘 축구 보는 재미로 살아. 글쎄 어제는 맨체스터한테 리버풀이 졌지 뭐야. 하하, 인생사 한 치 앞 모른다고 축구 경기는 승패 가름조차 안 되는 거야, 그 어떤 경기라도 말이지. 그래서 축구야. 축구는 그 런 맛에 보는 거라고. 안 그래? 그럼 이런 건 어때요? 최근 기획전에 초대 받으셔서 젊은 작가들과 작업 하셨는데 기획전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2000년대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음...시대가 변했으니 확실히 전시준비과정이나 작업환경도 다른 거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작가들 또는 요즘의 기획전들은 과거에 비해 실용적이거나 기능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 이전 80~90년대에 소그 룹전이나 기획전을 준비했던 작가들은 좀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거나 낭만적인 작품들이 많았거든. 돌이켜보면 나는 고낙범 작가와 꽤 오랜 인연이다. 내가 미대를 막 들어간 직후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한 적 있는 데 그도 같은 학원 강사로 활동했었다. 물론 나는 신출내기 강사였고 고 작가는 경험 풍부한 베테랑 강사였다. 내가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알게 됐으니 족히 23~24년은 된 인연이다. 당시 그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 었는데 미술계에 있어서는 비평적이고 냉소적이었으나 창작얘기만 나오면 재기발랄하고 열정적으로 변했다. 사담이지만 이런 추억도 있다. 그 즈음 우리는 와우산 중턱에 있는 허름한 목욕탕을 자주 드나들었다. 실은 목욕 탕 안에 몇 평 안 되는 작업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활동을 고심하던 젊은 화가 지망생들은 밤만 되면 그곳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술도 마시며 작품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고낙범 작가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작업했고 색채에 대한 개인지론도 분명히 해두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그래서 몇몇의 분쟁도 있었 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작품 세계가 명확했다. 6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7
나는 몇 작품 반짝해서 세간에 관심 받는 일 엔 관심 없어. 그냥 꾸준히 작업하고 싶을 뿐 이야. 소설로 치면 스테디셀러 같은 거지. 작가님은 자신이 어떤 화가라고 생각하세요? 이를테면 한국미술사를 훑어볼 때 작가님의 작품은 90년대를 대 표하는... 단박에 말을 끊는 고 작가. 역시나 만만찮은 인터뷰이다. 하이구야, 다들 왜 그런 게 궁금할까? 나는 뻔하고 지루한 거 싫은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세요? 나는 몇 작품 반짝해서 세간에 관심 받는 일엔 관심 없어. 그냥 꾸준히 작업하고 싶을 뿐이야. 소설로 치면 스 테디셀러 같은 거지. 고 화백의 작품은 그의 말 대로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쉽게 흥행하는 베스트셀러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늘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작가의식이 강한 그의 작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는 반증이겠다. 작품 얘기로 들어가 본다면, 고낙범 작가는 고전미술작품들을 칼라를 요소로 한 분할과 해석 을 주제로 내놓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친구 혹은 지인들을 모델로 모노크롬의 대형 인물초상 시리즈를 제 작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작가 자신의 사생활의 단면을 거대한 초상 이미지로 제작해낸, 기념비 같은 작업이었 다. 일종의 과장된 사생활의 표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사회가 개인의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90년 대 발표한 작품으로 본다면 작가의 시선은 무척이나 신선하고 흥미롭다. 이후 그는 사진에 기반 한 사실적 인 초상화 작가로 불리게 되면서 대중에게도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은 매 번 새로운 주제의식을 담고 관객을 만난다. 전쟁과 파괴를 자연적 대상에서 추출한 오각형에 담은 오각형 이라든지 시각적인 인식을 동시대 미디어 환경으 로 바라본 반증하는 눈: 디지털 스팩트럼전 과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최근 모노크롬의 플라워 와 격자무늬의 스킨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여전히 섬세한 칼라감각, 정교한 관찰 및 표현, 그리고 사색적인 배려는 그의 작품을 꾸준히 흥미롭게 한다. 90년대 한 갤러리에서 빨간 스니키 진에 빨간 운동화를 신고 관객들에게 꽃을 선사하던 그의 모습까지 떠올랐으니 말이다. 아마도 화가 고낙범은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색상의 문제를 가장 극한까지 밀고나가는, 국내에서 흔치 않는 작가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가 늘 반갑다. 어찌됐건 인터뷰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 흔한 질문까지도 그에겐 쉽지 않다. 예술가의 말은 곧 예술 활동의 실천이라는 개인의 지론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고 작가에게 있어 말은 곧 작품 이니 그의 뜻을 간과할 순 없다. 따라서 본래 듣고 싶었던 홍대 앞 문화의 변화, 혹은 변질에 대한 고 작가의 소견은 끝내 듣지 못했다. 그러나 미 디어를 통해 일반 대중들이 인식하고 있는 홍대 앞의 이미지완 다른, 그가 체험한 홍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몇몇의 정황으로 살펴 볼 때 고 작가가 바라보는 한국문화상황이 그리 유쾌해 봬진 않 다. 요새같이 황당한 시대를 살고 있는 화가들에겐 우리문화의 현실은 답답함과 깔깔함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어찌 되었건 고낙범 화백은 개인의 주제의식과 미의식을 고집스럽게 만들어나가는 작가임은 틀림없겠 다. 그래서 오늘의 인터뷰는 결과적으로 goal in이다. 언제나 그러하였듯 그가 말이 아닌 작품으로 우리문화예 술의 현재를 이야기해 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작가님, 리버풀 다음 경기는 어느 팀이라구요?! 8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9
대한민국대중문화사를 뽈랄라 채집해나가는 현태준 작가의 공사다망한 이야기 우선 현태준 작가를 소개해야 하는데 그를 설명하려면 꽤나 분주해진다. 우선 그는 비주류 이미지를 생산하는 전방 위 예술가이자 여행작가이다.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 작업을 했고 수필가로, 장난감 연구가로, 그리고 21세기 소 년소녀시대 에 이어 금년 홍대 앞에 뽈랄라 수집관 을 개관하면서 수집관장이란 타이틀도 덧달았다. 그가 상상마당과 인연하게 된 것은 2007년 상상마당 개관 첫 번째 작가로 우리가 현태준을 초대하게 되면서부터이 다. 상상마당이 현태준 작가를 주목했던 이유는 그가 80~90년대를 세월 하였지만, 홍대 앞이라는 서울의 평균적 인 대학가 앞에서 성장한 젊은이 문화의 독특한 자생적 감성, 생산적 이미지가 스펙터클하기 때문이었거니와, 그러 한 풍경을 만들고 유포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예감은 적중했다. 2007년 9월 상 상마당 갤러리에서 전시한 <현태준 개인전 -국산품>은 대한민국 기성세대의 미학적 규범과 통상적인 윤리 관습 을 해체시키는 변화지점으로 두기엔 탁월하게 충분했다. 이러한 연유로 여타의 곳 아닌 홍대에서 그의 오랜 꿈이자 분신인 개인 수집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복합문화예 술을 지향하는 상상마당에서도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타이틀만치나 분주할 그를 만나기 위해 홍대 부근에 위치하였다는 그곳으로 향했다. 뽈랄라 수집관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홍대 앞 어디를 둘러봐도 그렇게 개구지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정감어린 만화 광고판이 거리에 턱 버티고선 곳은 흔치 않다. 현태준 작가가 개인 수집관을 열었다. 금년 4월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항상 개인전 발표일정처럼 수집관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한 그가 그의 꿈을 드디 어 개관한 것이다. 나는 얘들아 어서오렴, 갱년기 연인들의 데이트 필수 코스, 어서 오세용... 말풍선 한가득한 스탠드형 만화광고 판 넬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덥수룩한 수염이 여전한 현태준 작가가 나를 흔쾌히 반긴다. 최근 근황을 물었더니 이런저런 기획전에 초대되기도 하고 미국에서 작품 전시회를 두 번 열었다고 한다. 얼마 전 여행책자인 대만 여행기 집필을 마쳤고 지금은 파주 헤 이리의 20세기 소녀소녀관 과 홍대점 뽈랄라 수집관 기획,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현 작가, 늘 그렇듯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힘들 진 않아요? 다른 건 괜찮은데, 뽈랄라 수집관 을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게 좀 힘들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돈 되는 일 이라면 뭐든 다 해요. 얼마 전에 구동희 작가의 예술영화에 배우로도 출연 했어요. 하여튼 별의 별 일을 다 하죠. 그 렇게 벌어서 여기 뽈랄라 수집관에 다 쏟아 붓고 있어요.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현작가가 광고모델을 했던 기억이 문득 선다. 그래서 광고 쪽은 어떠냐고 물었다. 10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11
그렇잖아도 어제 에이전시에서 전자제품 광고 할 생각 있냐고 연락이 왔어요. 공기청정기래요. 하하하. 해야죠. 현태준의 공기청정기라, 재미있겠는데요. 저도 예전에 전문직 모델을 찾는다고 해서 사진 찍은 적 있었는데 그 후 연락이 없네요. 하하. 하하. 저도 작년인가 한 검색포탈회사에서 만나자고 연락 와서 나갔는데, 자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말하라 길래 너무 독점을 하고 1등만 하는 것 같다, 꼴찌도 해보고 그래야 더 잘 되는 데 그게 참 아쉽다 그랬더니 그냥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 후에 아무 연락도 없고요. 사실 덕담 한 건데. 아이쿠 참, 거기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그냥 너희 잘하고 있다고 좋은 말만 했어야죠. 그리고 일 끝마치면 사실 이런 점은 좀 그렇다. 그러니 잘 생각해봐라 그래야죠. 하하. 현 작가는 늘 그랬던 것 같다. 선을 분명히 해야 할 꺼리는 서슴치 않는다. 지난해 상상마당에서 기획했던 개인전 국산품 의 경우도 우리 시대 잊혀져가는, 혹은 잊혀져 가도 크게 모름직한 추억의 장난감 생활용품 등을 어른이 된 아톰 에 함축하여 담뿍 담았다. 더러 가볍다거나 자극적이라고 간과해버리는 미술계 흐름도 있었으나 그는 그의 전 시작이 단순 추억거리에 머무는 것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 및 현대사를 총망라할 수 있는 전방위적 비평적 활동 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다. 지금도 기억새록한 눈치 보지 않는 사회 우리나라 좋은 나라 작품이 그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장난감 수집을 하는지 물었다. 그럼요. 수집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정리하고 분류하는 게 어려워요.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더라구요. 하하 요즘은 어떤 것을 모으고 있어요? 요새는 그야말로 요즘의 것 을 수집해요. 옛날 장난감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현재도 중요한 거 같아 요. 그래서 요즘은 지금의 생활용품 위주로 수집해요. 얼마 전에 아름다운 가게에서 담배케이스를 구했는데, 글쎄 새가 담배를 부리로 집어줘요. 정말 재밌죠? 하하 그거 재밌네요. 그걸 누가 생각했겠어요. 완전 키네틱 아트네. 요즘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이 주택문화관들을 많이 짓잖아요. 그런데 문화 콘텐츠 쪽은 빈약한 거 같아요. 주택문화관에 뽈랄라 수집관 같은 것을 하면 좋지 않 을까요? 좋죠. 다만 전시형식은 안 되고 상설로 가야 해요. 그런데 기업들이 그런 일에 투자하기란 쉽지 않겠죠. 시대가 바 뀌면서 주택변화와 더불어 삶의 문화도 변화시킬 수 있어 좋긴 한데. 이에 나는 준비 중인 전시회가 있는지 물었다. 더불어 미국 전시회 반응도 살폈다. 괜찮았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전시를 또 준비하고 있어요. 전시회 준비할 때가 제일 신나죠. 하하! 만화작업은 어때요? 열심히 삽화 작업하고 있어요. 얼마 전부터 포탈사이트에 연재작업도 하고 있고. 사실, 연재를 해야 작업이 쌓여요. 그래서 앞으로는 캔버스에 페인팅 작업을 병행하려고 해요. 그건 좋은 생각 같아요. 앞으로 전시 같이 할 게 많아지겠는데요. 그럼 끝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수집관 운영을 안정화하는 것이 단기적인 목표예요. 실은 뽈랄라 수집관을 박물관으로 등록하려고 진행 중에 있 거든요. 쉽진 않네요. 그리고 공간을 하나 더 마련하는 것이 중장기 계획이에요. 혼자서는 못하고, 지자체나 기업 하고 함께 해야겠죠. 지극히 현실적인, 그래서 쉽게 간과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곳곳의 대중문화행태를, 생활용품으로, 콜랙션으로, 작품으로, 문화사로 수집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쉼 없는 그의 계획들을 읽은 바, 우리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하는데 있어선 안심해도 되겠다. 종잡을 수 없는 한국대중현대사가, 오늘도 공사다망한 그의 손 에서 채집되고 있으니. 12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13
이소룡 그림으로 대륙까지 진출한 신예작가 신창용과의 팝아트 美 來 대화 중국에서의 2년은 어땠나요? 중국에 있다 한국에 오면 한국의 작업여건이 참 좋고 생활하기 좋다는 걸 정말 많이 깨닫게 돼요. 주로 작가들만 작 업하는 창작 스튜디오에 있었는데 미술용품 사러 가기도 쉽지 않고 말도 안 통해서 여러모로 힘들었어요. 한국과 다 른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웬만한 작업실이어도 120호 이상 그림 그리기 어렵잖아요. 특히 젊은 작가의 경우, 더더 욱 염두도 못내죠,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 그런데 중국에서는 큰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어요. 그럴 여건이 돼요. 한 국에서 200호 짜리 그림 작업을 하고 싶은데... 생활적인 면은 어때요. 생활면에서도 규모가 다른가요? 네. 중국에서는 화장실을 한 번 가려해도 한 참을 걸어야 하고,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자전거를 타고나가 한 바퀴 돌아야 해요. 무엇이건 큼직큼직 하니까 어쩔 땐 감정이 약간 무뎌지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그런 점 때문에 대범해 지기도 하지만. 그런 게 여유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 거 같아요. 중국에 가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니까요. 뉴스를 아예 못 보고 인터넷도 느리다보니 그런 점엔 관심이 덜 가고 제 자신한테 깊이 집중할 수 있어요. 황사가 몰아치는 대기 속에서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죠. 중국 어디에 있었지요? 허거장이라고 798과 북경공항 중간 펑쩡지에의 큰 스튜디오가 있어요. 최근에 입체 작품을 많이 하는 곳이지요. 중 국 활동은 계속하려고 해요. 얼마 전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업갤러리와 관계도 맺었어요. 이소룡을 그리는 작가가 중국에도 몇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치 팝아트 하면 마릴린 먼로나 마오쩌둥을 그리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이에 신창용 작가의 소견을 들어보았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행운아인거죠. 제 또래 작가들에 비해 제 작품을 특화시킬 수 있는 환경도 찾 게 되었고. 기분 좋아요. 아직은 좀 미흡하지만. 신창용 작가는 이소룡 그림으로 대한민국 미술시장 활성화에 영 향력을 주고 있는 신예미술가이다. 대학시절 이소룡만 그린다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유년시절부터 우상시 했던 자신의 영웅을 이소룡과 나 시리즈로 이미지화 하여 세간의 이슈를 낳았다. 2006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팝아트 그룹전 너는 누구 냐 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창용 화가는 이듬해 4월 홍콩의 투자회사인 소버린 그룹이 주최한 전시전에서 아시아 작가 30인 명전에 선정되기도 한다. 중국 베이징의 한 창작스튜디오에서의 2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해 작품활동에 매진 중이라 는 그를 만나보았다.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거칠고, 사내답고, 마초스럽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의 미의식이나 미적 태도는 우리시대 남성미로 표상돼버린 꽃보다 남자 와는 대척점이 있는 듯, 표현이 거칠고 섬 세하지 않다. 나는 의도한 것인지 물었다. 의도한 건 아니고, 잘 그리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고요. 제 나름의 기준은 있는데 항상 미흡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 어요. 신 작가는 지난 9월 텔레비전 12 갤러리에서 smells like sasquatch 를 테마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 제목이 <Smells like Sasquatch>인데 무슨 뜻인가요? 사스콰치는 미국 북서부에 사는 설인 같은 동물인데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혼자 열심히 사는 존재예요. 제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되어서...제게서 사스콰치와 같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짓게 됐어요. 관람객이 많이 왔나요? 작품 판매는? 200~300명 정도 찾아주셨어요. 작품 판매는, 한동안 전시 한 번 하면 작품 반 이상이 팔렸는데, 작년 전후로는 세 14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15
네 번 전시해야 한 작품, 요즘은 대 여섯 번 전시해야 한 작품 팔리는 것 같아요. 그만큼 미술시장이 어렵고 경기도 어 렵단 소리겠죠. 갤러리를 끼지 말고 개인적으로 팔라는 전화가 많이 와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사면 반값에 산다고 생각하는 거죠. 또 그렇게 파는 작가들도 있고. 좀 애매하죠. 개인적으로 사겠다는 전화가 와요? 이번 전시 때 4~5명 정도 문의전화가 왔어요. 사적 거래는 작가한테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작가는 갤러리와 공생관계라 작가가 직판하게 되면 갤러리가 힘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작품을 소개할 전시 기회가 줄어든다. 그리고 또 작품가격이 형성되 지 않아 미술시장이 모호해진다. 행여 형성된다 하더라도 낮게 평정되어 이래저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발생케 된다. 현실은 급급하고 거시적 안목도 필요하고...쉽지 않은 문제이다. 예전엔 전시가 전쟁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전시가 다 전쟁 같이 느껴져요. 전에 참여했던 전시 취향의 전쟁 제목처럼 개인전이든 기획전이든 매치고 토너먼트고 거기서 자기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살아남는 게 목 적인 것처럼 보여요. 한 10~20년 후에는 미술계가 무서워질 것 같기도 하고. 또 긴가민가하기도 하고... 신 작가는 얼마 전부터 그림에 대한 책임감이 커졌다고 토로한다. 과거에는 자유롭게 붓에 손이 갔는데 최근에는 많 은 생각을 해야만 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작품 얘기를 해본다면 이소룡 은 70년대를 대표하는 남성성, 남성다움, 젊음, 영웅의 상이나 아이콘이다. 하여, 당시 시대를 살지 않은 후대의 예술가가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옮기는 작업은 굉장히 실험적이고 팝퓰러하나 그만큼 신중 해야 할 논제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림이미지를 언어화, 텍스트화, 개념화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포착되지 않는 작가라 평단도 했다. 21세기 한국사회에 나타난 문화현상이나 새로운 태도, 그리고 정서변화를 본 작품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다. 오늘 만나본 작가 신창용은 미술계의 흐름과 개인의 창작 영역에서 다양한 혼란을 겪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의 행보를 귀추해 본다. 끝으로, 홍대 부근에서 14년 째 살고 있다는 그에게 홍대 앞 이란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홍대 앞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 살았다면, 혹은 다른 데에서 작업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멘탈리티를 얻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있으려고요. 방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도? 하하! 16 未來共感하십니까 17
未 來 美 徠 未 來 共 感 독립영화로 세상을 美 徠 (예술/위로하다)하는 Film Artist 와의 만남 INTERVIEWER_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INTERVIEWEE_최희진 / 장형윤 18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19
다채로운 표정과 디테일한 내면연기로 한국독립영화계를 이끌어온 배우 최희진 힘든 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그럴 때 자 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꺼리들을 많이 챙겨 두세요. 그래야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어요. 그녀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연기력을 선보였는데, 그것은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경>(2009년, 김 정 연출)과 단편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2009년, 이우정 연출)이다.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내실을 쌓아온 그녀는, 독립영화의 모체인, 일상의 파편 같은 복잡다단한 인간사 심경을, 우리 주변의 인물처럼 이야기한다. 특히 여성에게 벌어지는 지난한 상황을, 절박함과 애절함 묻혀 현실인 양 표현해 내는 연기는, 가히 놀랄 만하다. 비폭력적이고 사색 적인 여인에서, 극한 상황을 맞닥뜨려야 하는 현대인으로서의 변환연기는 배우 최희진이 아니고서는 생각된 바가 없 다. 이러한 그녀에게 우리 삶의 분기점인 성장통 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글쎄요. 유년시절의 성장통은 기억이 잘 안 나고요. 실은, 지금이 제일 고민스러워요. 2005년에 졸업하여 사회로 나 온 지 꽤 됐는데, 지금의 고민이 더 크네요. 배우 최희진은 초 중 고 시절에 신문반과 방송반 활동을 했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항상 무언가를 갈망했다는 그녀 는 고교 시절 EBS TV에서 방영한 나문희 주연의 연극 <어머니>를 보고 배우로서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연기자에 대한 동경은 중앙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영죽무대]라는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본격화된다. 난생 처음 오른 무대에서 선배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자, 그녀는 후배들과 함께 2학년 워크샵 공연을 진행한다. 열심히 준 배우 최희진은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에 출연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독립영화계에서는 이미 7년 전부터 작품 활동을 해온 연기 잘 비해서 잘하고 있는 후배들 모습을 선배들한테 면면히 보여 낼 심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청천벽력의 일이 되고 마 는데, 그것은 바로 이번 워크숍은 못 올리겠다. 공연 엎어라. 라는 한 선배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자신 은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으나 선배들과 소통하지 않은 채 열정만 과열되었던 것이다. 충격과 상처로 힘든 나날 을 보낸 그녀는 그 때 연극 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연극과 연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하는 배우 이다. 디테일한 연기로 인상 깊은 캐릭터를 연기해온 렇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살다보니 세 번의 학사경고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 중앙대 경제학과를 2년 만에 중단하 그녀는 실제로 만나보면 얌전하고 수더분한 그녀의 외모처럼 평 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범하고 친구 같은 여인이기도 하다. 연극이 좋았지만, 연기할 때가 행복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던 그녀는 미래계획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서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단편영화계에서 한 명 모은 돈으로 20여 일 간의 중국여행을 떠난다. 이쯤하면 귀국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법도 한 데 정작 그녀의 발길은 통 의 배우에게 시선을 두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배우 최희진은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2004) 을 통해 작 품은물론 배우가 궁금해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배우 최희진은 해마다 주요 단편 작품에 출연하면서 대중과의 간극 신동호회 나우누리의 연극동아리였다. 그렇게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체계적인 배우교습에 갈증 하였고 이에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지원케 된다. 연극원에서 출연한 첫 번째 단편영화는 <날씬한 고백을 원하십니까?>(2002년작, 최선정 연출)이다. 본 영화에서 그녀 가 맡은 역할은 남자친구 때문에 방황하지만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가는 현영이라는 22살의 여성이다. 최희진은 2009 년 상상 페스타 특별전에서 재상영한 본 작품을 보면서 그래도 저 때가 가장 용감했던 것 같다 며 견고히 웃었다. 을 좁혀나갔다. 20 未來共感하십니까 21
성공은 바라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연극을 하면서도 카메라와 떨어져 있는 것이 걱정 되고 영화를 하면서도 무대가 그리워지는 게 걱정이에요. 이번에 의정부에 있는 극단에서 올리는 연극도 잘 하고 싶고, 카메라 앵글이 나 조명, 편집도 공부해서 필름 연기도 잘하 고 싶어요. 지금까지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우리 주변에 있지만 쉽게 만나긴 쉽지 않은 인물들이다.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여성 파출소장(<11>), 북한에서 온 택시운전수(<처음 만난 사람들>), 지방에서 올라온 자존심 강 한 회사원(<잘돼가? 무엇이든>), 담배를 피워 주위의 눈총을 받는 공무원(<날아라 펭귄>), 갑자기 해고를 당하는 비정규 직 마트 직원(<마음>). 적극적인 성격의 지방 신문사 기자(<경>)에서 <박쥐>의 간호사 역할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그녀는 배역이 갖춘 이미지에 충실하기보다는 내면적 갈등에 기인하여 필름에 남겼다. 특히 그녀의 표정연기는 인물 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굉장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래서 배우 최희진을 흔히 클로즈업이 잘 어울리는 연기자라 고 말한다. 짓는 표정 아니라 인물을 관통한 배어나오는 표정인 게다. 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미장센 단 편영화제 연기상을 받았고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장편 영화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바람은 영원히 배우로 살아가는 것이란다. 성공에 대한 기대가 없느냐 재차 묻자 성공은 바라지 않아요. 그것 보다는 연극을 하면서도 카메라와 떨어져 있는 것이 걱정되고 영화를 하면서도 무대가 그리워지는 게 걱정이에요. 이 번에 의정부에 있는 극단에서 올리는 연극도 잘 하고 싶고, 카메라 앵글이나 조명, 편집도 공부해서 필름 연기도 잘하 고 싶어요. 하고픈 건 정말 많은데 요즘 자꾸 쫓기기만 해서 큰일이에요. 이러한 그녀의 모습이 지난 7년 간 묵묵히 배우 생활을 지켜온 원동력일 터. 사실 독립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이 다채롭지는 못하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인물들을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 중책을 배 우의 몫으로 두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러한 점들이 연기 스팩트럼을 쌓는데 도움닫기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배우 최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7년 간 보여주었던 그녀의 연기가 그러하였듯이. 끝으로 배우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하자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심신당부다, 아 무리 힘들어도 말이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인터뷰를 마친 날 저녁 그녀는 내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주었다. 힘든 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그럴 때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꺼리들을 많이 챙겨 두세요. 그래야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어요... 소박해 뵈지만 다채로운 표정과 똘똘한 눈을 가진, 내면이 꽉 찬 배우, 최희진! 독립영화계에서 좋은 배우가 새로이 배출 된 듯 해 반가움과 책임감이 두루 앞선다. 그녀의 바람처럼 10년 후 20년 후 에도 언제나 우리 곁에서 배우 최희진의 다양한 연기를 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다. 22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23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안돼 는 독립영화계의 무림일검, 장형윤 감독 작가는 조건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해요. 작가는 원하면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수 반되는 여러 상황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열정과 개인의지가 우선해야 된다고 봐요. 장형윤 감독은 <아빠가 필요해>(2005)와 <무림일검의 사생활>(2007)로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상을 휩쓸면서 한국독 립애니메이션계의 가능성을 주목케 한 장본인이다. 단편작으로 발돋움하여 최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장편 애니메 이션 영화를 제작 중인 그를 만나보았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 창작을 꿈꿔왔던 것은 아니고요. 미술 분야에 관심이 지대했지만 진로문제로 고심하던 끝 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어요. 초년생 시절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데 어느새 제가 [그림촌]이라는 미술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고 있더군요. 입학하고 몇 달도 채 안 돼 말이지요. 그때부터 엄청 바쁘게 지냈어요. 그림 그리랴 선배들이랑 일배하랴...(웃음) [그림촌]에서 동고동락 지내다가 군 입대를 며칠 남겨두고 제대 후 무엇을 할까 생각해보니 애니메이션 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더라구요. 그래서 군 제대하자마자 [미메시스 애니 메이션 워크샵](1999)에 지원 했습니다. 학과 졸업도 전에 자신의 진로를 최종 우회한 장형윤 감독은 [미메시스 애니메이션 워크샵] 과정을 거치면서 애니메 이션 분야의 견문을 넓히고 그의 스승인 전승일 감독(독립애니 내일인간 으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교육영화상 수상)과 이성강 감독(장편 애니 마리이야기 로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 대상 수상)의 영향으로 독립애니메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계가 유례없는 활기를 띄고 있다. 극장용 장 편 애니메이션이 한해에 한편 나오기도 힘든 한국영화산업구조 속 에서 매년 200편 이상의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는 등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수준이 뛰어나고 장르 와 주제가 광범위해졌다는 점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소재면에서 도 현대인의 일상을 심도 있게 고찰한 작품에서부터 사회 정치는 물론 세계평화와 지구환경등을 다룬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여 판타 지에만 국한되었던 독립애니메이션계에 다양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불모지나 다름없던 비주류 독립 애니 장르를 지금에 이르게 한 데에는 수많은 필름 아티스트들의 노고 와 독창성이 수반되었을 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애니메이션 스 튜디오 [지금이 아니면 안 돼]의 장형윤 대표는, 한국독립애니메이 션계의 분기점과 같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독립영화감독이다. 24 未來共感하십니까 이션의 창작의지를 다져나갔다. 이와 더불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 <안개 속의 고슴도치>의 유리 놀스타인(러시아 애니메이션 감독)과 <안개 속의 풍경>의 테오 앙겔로풀로스,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즐겨보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면면히 구축해 나갔다. 제 첫 작품이 <어쩌면 나는 장님인지도 모른다>인데, 워크샵 치고는 꽤 오래 시간동안 준비했어요. 워크숍 제출품 아닌 작품 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 때는 혼자 작업하기도 했고 좋은 영화가 워낙 많다보니 제 실력에 비해 목 표치가 높았던 거죠.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후 2002년 [인디포럼]에서 상영했는데 스크린 영상으로 제 작 품을 보니 다시는 저렇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더군요. (웃음) 사람마다 다양한 습성 있지만 그 당시 좀 어두 운 본성을 부각시켰는데 작품이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운 거예요. (웃음). 그 때 알게 된 거죠.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 하다는 것을. 이후 그는 영화아카데미 를 지원한다. 애니메이션 전공자가 아닌 그였기에 영상을 이해하고 분석해나면서 자신 의 애니메이션 창작영역을 관철해나가기 위함이었다. 25
우리나라 영화시장이 근본적으로 협소하기 때문에 상업 애니메이션 장르가 시도조차 힘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 는 독립장편을 하려고 합니다. 상업적인 장 편을 만들까 생각해본 적도 있는데 독립장 편을 만들려고요. 제가 하면 되겠죠? 영화아카데미를 거치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애니메이션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워크샵 과정만으로 는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영화 아카데미 수료과정을 통해 영상을 알아나갔고 제가 하고픈 애니메이션 창작 작업 에 완전 몰입했어요. 장형윤 감독은 <어쩌면 나는 장님인지도 모른다>, <Tea Time>, <편지>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그 림체와 주제의식을 확장해나간다. 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편지>는 수많은 영화제 초청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영화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의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편지를 공룡이 먹어치우는 <편지>처럼 밝고 명랑해보이지만 대부분 외롭거나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아내도 없이 홀로 사는 늑대가 갑자기 찾아온 아이를 숙명처럼 키우는 <아 빠가 필요해>와 자판기로 환생한 과거의 무사가 애정고백도 못하는 소심한 남자로 등장하여 혜미와의 사랑을 이어 가는 <무림일검의 사생활> 등이 그러하다. 작가는 조건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원하면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 상황들을 극복 해 나갈 수 있는 열정과 개인의지가 우선해야 된다고 봐요. 무엇보다 경제적인 면이 쉽지 않은데 그것을 자신이 어떻 게 해결해 나가고 대처하느냐 고단한 현실을 받아들이느냐 없느냐에 따라 창작욕구가 용기로 발현될 수 있고 작품 활동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제작현실이 쉽게 바꿔질 리 만무하거니와 현실이 나아진다 해 도 좋아지는 것과 나아지는 것이 다르니 현실을 해쳐나갈 개인의지가 중요한 거죠. 더러 학생들이 그림을 못 그린다 고 걱정하는데 저는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 말해요. 그것보다는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전문기술은 키울 수 있지만 가능성은 누가 대신해주지 못하니까요. 자신의 그림을 인정하는 수준이 되면 그들은 정 말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 있을 겁니다. 제 작품이 제 성향과 비슷한 거 같아요. 저도 겉으로는 상당히 활달해 보이지만 어둡고 우울한 부분들이 많거든요. 학창시절에 사람들하고 잘 어울렸는데도 본질적으로는 내가 이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며 지냈어요, 내가 그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한다랄까. 그런데 애니메이션을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정말 편안하고 나하고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좋 아요. 그래서 조금은 음지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밝게 그리고 싶은가 봐요. 최근 독립 애니메이션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고 작가군도 많아지는데 반해 장편 애니메이션이 나오지 않는 현상에 대해 물었다. 애니메이션 작가를 희망하는 후배들을 위한 메시지를 부탁하자 그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라고 개구지게 말한다. 돈 벌어서 애니메이션 한다는 사람들 중 실현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무슨 일이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바로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다면 지금 하세요. 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10년 안에 장편 애니메이션을 2~3편 이상 만드는 것이다. 부득불 여러 상황들 때문에 장편 제작이 불가 피하다면 단편작업을 이어서라도 애니메이션의 끈을 놓지 않을 거라 말한다. 다부진 그의 모습에서 장형윤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라는 그의 말처럼 감독 장형윤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안 돼. 그것도 바로 지금 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읽혔다. 우리나라 영화시장이 근본적으로 협소하기 때문에 상업 애니메이션 장르가 시도조차 힘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래서 저 같은 경우는 독립장편을 하려고 합니다. 상업적인 장편을 만들까 생각해본 적도 있는데 독립장편을 만들려 고요. 제가 하면 되겠죠?(웃음) 그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독립애니메이션이 짧은 시간 내에 지금 처럼 급성장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혹자는 그를 두고 한국독립애니메이션계의 구원투수 라고도 일컫는 데 바로 이러한 점을 두고 한 말 일게다. 그는 십 억 원 이상의 펀딩투자를 기다리기보다는 기본 조건만 갖춰지면 자신의 색깔에 맞는 독립장편을 추진해나갈 참이다. 10 여 년 동안 애니메이션만 작업해온 그가 내린 최선의 방편인 게다. 그는 최근 관련대학 학과강좌와 워크숍 등지에서 애니메이션 강의를 맡았는데, 학생들에게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을 심어주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그는 [지금이 아니면 안 돼]라는 타이틀로 그동안 작업해온 단편애니메이션을 DVD에 담아 곧 출시할 예정이다. 이 와 더불어 <마법소녀와 얼룩소>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법과 사랑, 액션 과 노래가 어우러진 그의 장편 작품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장형윤이 아니면 안 돼 는 그의 영화를! 26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27
未 來 共 感 스무 사람이 손을 바친다는, 함께 共 그러나 우리문화현실은 孔 (구멍/틈/헐거움/부족함) 共 과 孔 의 간극을 좁힐 것. INTERVIEWER_이동민 K&G 상상마당 운영간사 INTERVIEWEE_하신화 / 석정현 / 오화진 28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느리게 걷고 싶은, 하지만 그 누구보다 충만한 전투력을 소유한 두 명의 작가 작가로서의 수명? 스스로 만든 틀 속에서 예리하게 발산하지 못하는 작가들, 왜 그럴까? Q.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Q.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나? 각 분야에서 분명한 방점을 찍고 있는 두 명의 작가, 더불어 자신 만의 스타일로 또렷한 변별점을 인정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석정현과 코스튬플레이어 하신아는 따로 또 같이 라는 말처 럼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고 하고 있는 인접장르 작가이면서, 동 시에 여전히 비주류로 분류되어 앞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미션이 더 많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때론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는 치열함과 또 한편으론 모 선거에서 나왔던 30대 기수론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중간다리 역할로 고민하고 뒤돌아보기를 반복 하는, 참으로 뇌가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작가들이다. 어떤 것이 누구의 말인지 중요하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서있는 자리 는 다르지만 그들의 시선은 분명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 을 받았다. 오늘 그들은 할 말이 참 많은 사람들처럼, 일말의 틈 새도 없이, 우선적인 현안문제를 꺼내들고 소통의 창을 열었다. 체샤 하기 싫고 정서적으로 부대끼는, 일 로서의, 작업은 안했으면 해요. 그런 용기 필요하다고 봐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문제죠. 분명 한 건, 그러하지 못하면서 점점 작은 울타리 속에 자신을 가두다 보니 창의 나 상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더 한 고통 아닐까요. 창작과 현실, 그 무엇도 아닌... Q. 주변 상황은 어떠한가? 석작가 의학적으로 볼 때 40세가 되면 세포의 신생활동이 정지되고 현상 유지만 된다는데, 그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얘기만은 아닌 듯해요. 한 때 개 혁적인 성향을 띄었던 또래나 선후배들도 그 즈음이 되면 자의든 타이든 어 느 순간 고이는 층에 속해져서 자신이 움직여야 할 능동의 층을 판단 못하고 의미 없는 잣대만 들이대는 걸 지켜봐 왔어요. 이를테면 그들이 건네는 같 이 생각해 보자 라는 말은, 종국엔, 내 얘기를 들어라 라는 식으로 변 이되는 거죠. 이 분야로 접어든 후배들 중에는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또 한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른 채 방황의 연속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꿈을, 못, 가지고, 뜻을, 못, 세우는 게, 단언 컨데, 그 친구들만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체샤 변주 가능한 영역이 코스튬플레이인데, 경직된 사고로 스스로를 틀 에 가두려는 후배들을 볼 때면 가슴이 막막해져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나 스스로에게도 발견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워요. 이게 뭐지? 왜 이래야 하지? 석작가 막상 열어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작가들, 천편일률적인 교 육시스템으로 자유로움과 자가 발산이 터부시 돼버린 현실, 이 시점이 안 타까울 뿐. 체샤 말 빨리하면 천재소리 듣는 사회, 판사 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 회, 좌뇌의 능력이 우선시되는 영역에서의 가치가 절대적 평가를 받는 사 회, 비언어적 표현활동을 정신적인 취미활동 정도로 뒤 켠으로 배제시키는 사회, 그러나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축적된 인식의 시간이 너무 길었 다는 것에 있겠죠. 석작가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려있어도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게 문제 라면 문제겠죠. 의식 항거 속도에 비해 막상 그 상황이 도래했을 땐 창작자 들이 즐기고 발산할 수 있는 정서적 발전이 뒤따라주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관조만 할 수도 없잖아요. 체샤 놀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구축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교육과정 인데,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교육 받은 이미지에 자신을 구속시키고 있 어요. 마치 그래야 되는 것처럼...단절 시기 동안 한국사회는 비단 작가뿐 아 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뇌적으로 놀아본 적이 없는 거죠. 그야말로, 진짜 놀 이를 해 본적이 없다, 라는! 석작가 대한민국의 현재가 그러한 것 같아요. 여전히 많은 부분 자유롭 지 않지만, 과거에 비해 열려있음에도 불구, 그 문을 연 사람들조차 세상 속 에 부합하는 발산행위를 적응치 못하고 부류하는 데 그쳐요. 그런데 과연 이 것이,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해도 될까요? 체샤 그 간 미뤄두었던, 혹은 우연인 양 간과시켰던, 한국사회의 우뇌활 동 가치에 의한 재정립이 필요하고 소통단절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을 치 유 복원해야하지 않을까요? 30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31
그저 노력하는 것은, 음모다. 시대에 따른 작가의 사명이 있다면 지금은 무얼 해야할까? 석작가 내가 아는 어떤 잘 나가는 작가도 작가는 노력이란 단어와는 해당사항 없다! 라고 말하더군요. 체샤 작가에게 열심히는 죄악이죠! 열심히 라는 단어 자체가 쇼가 아 닐까요?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라는 건 열심 이란 틀 속에서 유 영하란 얘긴데... Q. 본 문제를 두고 자의든 타인에 의함이든 스스로를 괴 롭힌 적 있었는지? 석작가 최근 3년간 너무 힘들었고 이것이 그 흔한 슬럼프 라 생각 해서 고통스러웠는데, 이보다 더 한 고통은 3년 내내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 했구나 에 있었어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분히 일적인 것 외 엔 아무 발전 없는 표상들을 힘겹게 채워 넣던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절 망감이란... 의식적으로 노력하던 태 를 상당 부분 벗어던지고 나니 이 제 서야 굴레에서 빠져나온 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좋아요. 맘에 들어요. Q. 현 관점에서 볼 때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석작가 세상에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기 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즐기며 노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형태와 행태들이 우 글와글 웅성왕성 거리는 광대의 역할이 필요한 시기니까요. 체샤 또 하나, 작가들이 자신의 분야에만 갇혀있다 보니 상상력이 단조 롭거나 측면적으로 한정되어 있어요. 통섭의 구현이라는 지점에서만 따져 봐도 창작자 개인의 감성과 창조 인식범위를 확대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 런 의미에서 볼 때 상상마당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한 거죠. (웃음) 석작가 또 하나, 작가들이 자신의 분야에만 갇혀있다 보니 상상력이 단 조롭거나 측면적으로 한정되어 있어요. 통섭의 구현이라는 지점에서만 따 져 봐도 창작자 개인의 감성과 창조 인식범위를 확대시켜야 하지 않을까 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상상마당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한 거죠. (웃음) 체샤/석작가/이동민 오호/하하/음... 체샤 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나란 사람은 표면 그대로 빤히 들여다보 이는 삶을 살아온 듯 한데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 않더군요. 되레 그런 세상 을 비웃던 내가 기업경영 하듯 코스튬플레이는 ~한 비전을 그리면서 ~ 하게 발전해 나가야지 않겠어? 를 두고 제 자신과 동료들에게-코스튬플레 이를 처음 시작할 때의 희열과 설렘을 묻어버릴 만큼의-강박관념에 갈마들 면서 상당기간 슬럼프에 빠진 적 있어요. 호되게 겪고 나니 이제는 그냥 본 연의 모습 그대로를 이어가면 된다는 걸 알게 된 거 같아요. 결과적으로 봤 을 땐 나쁘지 않아요. 32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33
상상마당을 비롯해서 문화공간을 기획하는 조직이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체샤 무엇을 어떻게 해라, 보다는, 창작자를 자극케 할만한, 매력적인 기획력이 필요해요. 급식소만 봐도 음 식 배치법, 장소만 바꿔놓으면 등한시하던 메뉴에 손이 가는 효과를 톡톡히 보잖아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선택설 계만 잘해주셔도 작가는 긍정의 자극을 확보하고, 기획자는 공간운영/기획을 넘어선 시너지 효과를 얻을 거라 확 신합니다. 석작가 창작가, 기획자,클라이언트가 저마다의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생 적응과정을 인내하고 지켜나 갔으면 좋겠어요. 인간 Vs 인간으로 부대끼면서 서로의 성향을 파악해나가는, 그야말로 관계 형성을 향한 축적과 정 말이요. 역시나 두 작가는 작업 스타일만큼이나 격하고 직설적인 표현들로 우리의 현재를 내뱉었지만, 빙빙 돌리지 않고 고 민지점을 확고히 토로한 그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비록 활동영역은 이 사회에서 비주류로 분 류되지만, 그들의 날선 감성과 작가의식,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하고 있는 창작의지와 가열찬 열정은 이미 일류의 그 것이었다. 이들의 5년, 10년 후가 궁금해진다. 34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35
구분과경계를 괘념치않는공간에서 미술하는사람으로 살고픈작가 오화진 이 땅에 사는 작가라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짊을 묵묵히 헤 쳐가고 있는 그녀에게도 결코 풀리지 않는 두 가지 화두가 그녀를 바삐 지치게 하나보다. 작가임과 동시에 사회인이 기도 한 괴리감 있겠거니와 미술계에서 팽배하고 있는 묵 시적인 장르 구분은 그녀를 꽤나 부담케 만든 듯 서로에게 약속된 두 시간 동안 그녀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쉬이 내려 놓지 못했다. Q. 섬유디자인 전공자이자 파인아트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의 현실적 문제는? 조소과에서도 회화과에서도 미디어를 배우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아요? 그 런데 현장 전시기획자들을 만나면 어, 섬유 하셨네요? 섬유작업 같진 않은 데... 라고 하시면서 섬유...라는 타이틀로 잠정 분류 해버려요. 평론가들도 주목 자체를 다르게 하는 거 같아요. 현장 기획자는물론 평론가 들조차도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참여 작가와 청주공예비엔날레 참 여 작가를 달리 두고 살피시더라구요. 이를테면 조소하면 누가 좋으냐? 회화는 누가 괜찮아?. Q. 섬유미술에 대해 말해 달라 제가 전공한 섬유미술은 공예 외에도 조형예술 영역까지 폭넓게 다룰 수 있 는 분야예요. 사실 공예계는 공예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쓰임 에 대한 기본정의가 나름 중요한 요체인데 현장에서는 더러 쓰임 목적에 부합되는 공예작 업을 하기도 해요. 때에 따라 미술작업의 재료로 공예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 어요. 저도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인데 전공 교수님께서는 제 작업을 두고 전통적 의미의 공예 작업의 여부를 논하진 않으세요. 학계에서도 여전히 공 예예술의 입지와 영역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단 거겠죠. 미술계에서는 신진작가 발굴이나 기획 프로젝트를 구성할 때 섬유미술을 비 롯한 공예 쪽은 참여자 명단을 따로 작성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공예 와 순수미술 은 정체성이 다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 볼 수도 있겠지 Q. 미술대학에 대한 개인의 생각은? 만, 중요한 문제는 공예계 내에서 순수미술 에 가까운 조형작업을 제작 체계적인 학과과정을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미대를 다니면서 엉성하 했을 때에요. 사실 좀 예민한 문제죠. 그럼 공예는 뭔가? 라는 담론부 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제대로 된 미술사, 큰 맥락의 흐름을 정확하게 터 시작해야 하니까요. 전달받지 못한 터라 내가 하는 작업이 어떤 선상에 있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더군요. 그로인해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이 참 많았어요. 그냥 알아서 학과과정이 필수코스인 양 버텨서 있는 거대한 사회적 필터링 제도를 선택 하라 는 분위기가 대부분인데 지식에서 창작의 범주를 넘으려면 배움이라 권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음도 개탄할 일이나, 교정을 떠난 창작자의 길마 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선무 라는 탈북 작가가 한국의 저, 본인의 의지완 무관하게 외부 저항할 수 없단 사실은 뜻밖이자 충격이 미대에 들어와서 힘들었든 점도 바로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하는 얘기라고 봐 다. 작가섭외 및 추천도 공예 비엔날레 쪽으로 치우친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 2008년 3층 아트마켓 매니저가 전해 준 포트폴리오를 보고 손이 요. 그의 인터뷰를 본 미대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거예요. 대학이라는 곳 으면서 과연 현대미술이 보여주는 양태 속에서-때론 과도 분방하게-작 이 학위수료를 위한 통과의례로 그치지 않으려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주 참 많이 가는 작업이라는 느낌으로 시작한 오화진 작가와의 만 가의도완 무관하게 분류 해버리는 부담스러운 틀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 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유야무야 형식뿐인 통과의례 때문 남. 3층 아트마켓에서 개인전을 함께 준비하고 다시 일 여 년 쯤 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에, 전공을 분류당하는, 그래서 창작마저 방해받는, 아이러니함을 생각하면 지나서 만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노선을 꿋꿋이 걷고 있는, 그런 작가였다. 상상마당과 오화진의 인연은 상상마당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유제안 이라는 공개채널을 통해서이다. 그 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음에도 그녀는 기획 담당자인 내가 미안하 어쩔 땐 좀 허탈도 해요. 물론 미술이 개인의 창의 발현 분야이기는 하지만, 비싼 등록금 내면서 미술 대학이라는 관문을 반드시 거쳐야만 미술작가로 진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한국사회의 무언의 저변은 분명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현재 창 달 정도로 우리와 함께 한 짧은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 작가로 입문했음에도 기본기에 대한 중요성을 놓고 싶지 않겠다는 그녀의 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세상과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턱없이 부 한마디는 상당 부분 명쾌하면서도 기획자인 나와 같은 지점의 고민이라 시 족한 창작인의 현실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원한 듯 묵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36 未來共感하십니까 37
Q. 창작가로서 홍대 앞은 어떤 곳인가? Q. 미술작가로 입문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 홍대 앞이 그래도 작업하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이곳은 심리적으로 괜스럽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려면 작품 수가 많아야 한다고 얘기 많이 들었어요. 기까지 한 자유로움을 줘요.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용인 받을 수 있는 분위기 피카소가 대중에게 기억되는 작품은 몇 안 되지만, 작품 양은 정말 엄청 나잖 가 형성돼 있고. 그런데 이런 홍대 앞에서도 굉장히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아요. 미술시장에서 유통 되려면 명작 열 개 가지고는 불가능해요. 작품수가 자유롭지 못한 작가들을 많이 봤어요. 그렇게 본다면 어느 정도 혼재된 공간 받쳐줘야지 콜렉터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그래야 화상들이 이랄까. 열린 사람, 닫힌 사람, 진보적인 사람, 보수적인 사람...비율 문제이 유통시장에 돌릴 수 있어요, 시장이 형성되어야 하니까. 작품의 질이 중요하 지 어찌 보면 여느 집단과 그리 다르진 않은 거죠. 어떨 땐 저 사람이 그림 지만, 작품수도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작가로 입지를 다져가려면. 그리는 사람이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꽉 닫힌 사람도 많이 봤어요. 나름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미술계에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만. 열린 듯 고루하달까. Q.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관객들의 시각적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서 어설픈 손재주로 메시지만 잔 누구나 홍대 앞이라는 지역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자유로움, 들 뜩 나열하는 식의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아요. 미술작업 특성 상 대중에게 환 뜬 활기참 등 인데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과 얘기해 봐도 크게 다 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정 부분의 우상화가 형성되긴 하는데 제 자신이 르지 않다.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제대로 된 실력과 작가의식을 두루 갖춰야 한다고 생각 인문사회학적으로 분석하자면 딱히 정의내릴 순 없겠으나 그냥 이곳은 이 해요. 그에 덧붙여 아이디어+테크닉이 함께 간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오 미 규정되어진-현실이 그러하건 그러하지 않건- 손에 잡히지 않는 분명한 겠죠. 자연스레 제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도 생겨날 거구요. 작업할 수 있는 환타지를 갖고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어 뵌다. 더불어 이러한 대중 인식이 이 작업장에,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구요. 헌데 지금은 그 지역의 자산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살짝 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냥...미술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편파와 잣대에 괘념치 않고, 미술 하는 사람이요, 그냥 미술 하는 사람. Vicious Circle / acrylic on canvas / 2008 Yesterday s Present / pastel, colored pencil and acrylic on paper / 2006 Q. 생계문제는 어떻게 유지하는지? 두 시간 여 남짓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처음과 시작은 같아버렸다. 지금은 시간강사하고 있어요. 이후는 뭐, 어떻게 살아봐야죠. 어떤 사람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술계는 아직도 전공에 의한 장르 구분에 여념 은 그래요, 그냥 작품에만 올인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요. 덕담인 건 알겠는 없을 테고 당연해야 할 창작가의 작업장과 발표공간이 자본의 순환고리와 데 현실적으로는 작업만 할 순 없어요. 시간강사 힘들지 않냐고 걱정 하시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예술가들에게 버거운 문제임은 피할 길 없다. 기획자인 분도 많은데, 사실상 괜찮아요. 일단 아르바이트 하는 것보단 수입도 괜찮고 나조차도 쉬운 문제가 아니니. 정확한 날짜에 입금 되고, 하하 이 얘기 하면 어떤 분들은 웃더라구요. 정확 그러함에도, 지금껏 인류 역사 속에서 여전히 매력 발산하며 존재하고 있는 한 날짜에 입금 되는 거,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엄청 중요한 문제인데. 안 그 이 예술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그녀는 인터뷰가 끝난 오늘에도 그냥 미술 래요? 하하. 암튼 현재는 그렇게 잘 버티고 있어요.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는 말을 내 귓가에 남겨놓는지 알 길이 없다. 나 또한 심상한 늦가을 밤, 다음 기획전에 무엇 하면 좋을 지 궁리하고 있는 이 회심(灰心)을 알 길이 없다. 예술이 무얼까. 무엇이 길래 이 지난한 문제 끌어안고도 여전하게 그 속에서 무연생성 되고 있는 걸까...? 38 未來共感하십니까 39
未 來 共 感 메리제인 인디는 대중 共 感 을 위하기도 하지만 개체의 다양성을 보살피는 음악 監 들이기도 한. INTERVIEWER_임진모 음악평론가, 웹진 이즘 황우성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 매니저 INTERVIEWEE_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 김마스터 / 와이낫 / 에이첼 인 어 스토리 / 메리제인 40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41
불나방스타 쏘세지클럽 Interviewer _ 임진모 음악평론가 최근에도 KT&G 상상마당에서 공연했는데 몇 번째인가? 지난 9월25일 금요일에 황신혜 밴드와 함께 했죠. 저에게 영향을 준 선배 밴드였기 때문에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상상마당에서 한 것은 서너 번 정도 되요. 호러 특집인가 2월 겨울에도 했었죠. (다른 팀보다는 많이 했다고 하자) 우리는 가본 데만 가요. 9월12일 KT&G 상상마당 앞 주차장거리에서 열린 2회 상상페스타 야외 공연장에는 무대와 객석에 잔디가 깔 렸다. 느낌이 어땠나? 도시풀장을 콘셉트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앞마당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시야가 확 트인 게 좋았어요. 다만 비 가 와서 젖어가지고 무대에서 움직이니까 흙탕물이 튀더라구요. 조금 불편했지만 기분은 나던데요. 관객들은 더 좋 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은 멤버가 6명이지만 조 까룰로쓰의 1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전혀 관계없는 세 가지 유기체가 만나는 것을 상정해봤어요. 불나방과 쏘세지 그리고 스타. 그냥 만난 거죠, 우주 의 신비에 의해. 즉흥적이고 장난스런 작명이지만 이렇게 된 것은 우주의 책임이죠. 우주의 책임으로 돌리는 거죠. 음악을 들었을 때 음악 또한 그러한 즉흥성에 많이 기초 하는 것 같다. 저희는 음악을 만들어가면서 무대에 섰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앨범을 만들고 음악을 준비해서 무대에 선 방식이 아니죠. 그냥 전형적인 라이브죠. 밴드 결성은? 이름은 2000년 초에 만들었구요. 밴드 사운드로 구체화한 것은 2004년 초입니다. 앨범 수록곡이자 우리의 대표곡 이라고 할 시실리아 는 이 당시 만든 곡이에요. 장난스럽게 만들었어요. 그때는 음악에 목숨을 건 사람이 아니 라 그저 좋아하는 사람일뿐이었는데 순간 제가 직접 만든 음악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라이브를 하면서 공연에 직 접 서기 시작하고 관객들의 반응과 상황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조금씩 붙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곡이 된 겁니다. 데뷔 앨범의 곡들은 단기간 내에 쓴 것이 아니라 라이브하면서 곡들을 모은 거죠. 독수리 라는 곡을 가장 최근 에 썼어요. 시실리아 를 만들고 이후 독수리 를 만든 4년이 넘는 시간차가 존재하는데 그동안 지향이 변하지는 않았 는지. 아니요. 초반에는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걸 많이 찾았는데 혼자가 아닌 밴드를 하고 나니까 후반으로 갈수록 밴드음악이 나오게 되더라구요. 데뷔 앨범의 사운드 핵심을 이루는 악기는 멜로디언이다. 이 악기는 페이소스를 풍기고 하류적인 애환의 음색을 지 닌다. 멜로디언을 선택한 이유는? 처음은 혼자하려고 했던 것인데 밴드를 하게 되면서 멤버들이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저를 포함해 서 그래서 그 상황에 맞는 것을 찾아야 했어요. 멜로디언이 우리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죠. 말씀하신대로 애환이 있는 장터음악 같은 것, 그런 쪽으로 콘셉트를 잡았어요. 저희는 욕심을 안냈어요, 그냥 우리 가 가진 상황에 맞췄어요. 인디음악의 소박함이 우리와 맞았고 우리도 그렇게 시작을 했죠. 한마디로 촌빨(?) 날리 는 음악을 하고 싶었던 거죠. 라틴의 이국적인 사운드에 흥이 있으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는 애 락(哀樂) 정서가 공존하는 밴드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다. 멜 앨범의 제목이 고질적 신파 다. 로디언, 퍼커션, 어쿠스틱 기타가 주를 이루는 독특한 사운드패 1980년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재미면 재미고, 감동이면 감동 하나로 가야하는데 그러다 꼭 어영부영 신파로 끝나 턴의 이 밴드는 올해 가장 주목받는 인디 밴드로, 이들의 공연을 찾는 마니아층 관객이 존재할 만큼 인디 신에서 나름의 성과를 잖아요. 그러한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키덜트(Kidult)적인 면도 살 리고 싶었어요. 동요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어른들이 만든 거잖아요. 듣다보면 섬뜩한 부분도 있더라구. 예를 들어 악어 떼를 노래하게 하면서 악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런 훈련을 시키죠. 어쩌면 음모론적인 생각이 드는 거죠. 거두었다. 데뷔 앨범도 출시하고 지산 록페스티벌, 수차례 KT&G 상상마당 공연 등으로 보여준 가파른 행보는 그들을 2009년의 밴 올해 초부터 밴드에 대한 반응이 좋은데. 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룹의 지휘자인 조까를로쓰 장기하에 묻어가는 거죠(웃음). 하지만 음악적인 지향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은 장기하와 는 인터뷰를 통해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으로서의 활동은 이제 함께 붕가붕가 레코드 소속이다) 마지막이며 곧 새롭게 바꿀 것 이라고 말했다. 42 未來共感하십니까 43
아니다? 그럼 차이점이 있다면 뭔가. 공통점으로 많이들 재미를 얘기하지만 장기하와 우리가 재미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죠. 비슷한 게 있다면 가사 전 달, 보컬 위주라는 것? 그것을 제외하고는 색깔도 많이 다르고, 그리고 저희는 직접적이에요. 그쪽은 은유적이에 요. 저희가 더 자극적이죠. 데뷔 앨범의 수록곡인 수지수지 나 미소녀대리운전, 마도로스K의 모험 등과 리얼한 제목의 음악을 들 었을 때 이게 과연 상상으로서의 날개를 핀 것인지 아니면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인지 궁금한데... 경험도 당연히 반영 되었어요. 경험에 기초한 것도 있고, 그냥 소스(재료)로 택한 것도 있어요. 큰 이야기는 미디어 를 통해 얻은 상상력이죠. 음악팬들은 분명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을 재미를 추구하는 밴드로 여길 것 같다. 재밌는 밴드는 장수하지 못한다 는 불안감은 없나. 저희는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앨범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작업했어요. 그 뒤에 다른 프로젝트로 바꿀 거예요. 저희 는 사실 하루하고 없어질 밴드라고 생각했어요.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죠. 앨범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게, 꾸준히 한 사람도 아닌데 무대에도 많이 서고... 만약 다음의 개인 프로젝트가 나온다면 아직 정해지지 않았겠지만 어떤 형태가 될 것이라고 보나? 말씀 드렸듯이 제가 하루 하고 사라질 활동을 많이 했죠. 락, 헤비메탈, CCM(기독교대중음악) 등 안 해본 게 없 죠. 앞으로도 뭔가를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메이저가 되면 식상해지기 때문에 인디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을 겁니 다. 언제나 비주류를 하고 싶어요. 3, 4등으로서 1, 2등 상위권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하고, 보여주고 싶었고 앞으 로도 그렇습니다. 주목을 받게 된 지금의 기분은? 이미 저는 끝까지 다 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추락한 일만 남았다고.(웃음) 팬들은 저희 존재만 중요시해요 저희 가 독특한 재미를 추구하니까. 그래서 불나방 음악에 대한 소비와 이해는 저조한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계점을 알아요, 사실. 인터뷰 잘 안한다고 들었는데. 재밌는 위주로 생각하시고 그런 것만 물어보셔서. 실컷 이야기했는데 잘못 나오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인터넷뉴스 에도 한번 나왔는데 너무 자극적이고 재밌게만 나와서 제가 검토하지 않는 이상 못 보겠더라구요. 불나방의 공연 그리고 이번 앨범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져준 팬들에 대한 주문이 있다면?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데 가볍게만 생각해주지 말아주세요 사람들이 너무 개그 쪽으로 몰아가는 게 좋으면서도 싫은가? 그래요. 좋으면서도 싫어요. 실생활에서는 도움이 안 되죠.(웃음) 간단하게 불나방의 음악을 정의한다면. 음.. 정의가 좀 그런데.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자체가 프로레슬링 같다고 할까요. 왜 이름을 까룰로쓰라고 붙였나, 이것도 즉흥적인 건가. 초반에 제3세계 음악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남들이 안하는 거 하면 괜히 좋아 보이는 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나이를 밝힐 수 있나. 저희는 45살이라고 하고 다녀요. (실명도, 나이도 공개를 거부했다!!) 어떤 의미인가. 격투 그러나 사람들은 재미로만 본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구요. 프로레슬링을 보면 선과 악도 있고, 기술적으로 승부하는 사람도 있고 콘셉트로 승부하는 사람도 있고 반칙을 쓰는 사람도 있죠. 다양하죠. 저는 그중에서 반칙 캐릭터를 선택한 거예요. 남들이 잘 안 쓰는 기술, 개 그 기술, 얼굴을 공개 안하는 기술을 쓰는 캐릭터? 제대로 된 기술로는 주목을 못 받아서 이상한, 반칙의 기술을 사 용하는 그런 캐릭터라고 할까요. 44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45
김마스터 Interviewer _ 이대화 웹진 이즘 필자 걸 그룹들의 일렉트로닉 댄스가 주류인 요즘에도, 여전히 기타, 건반, 드럼 등을 가지고 우직하리만치 고전적인 음악을 선보이는 뮤지션들이 있다. 이들의 음악은 고맙게도 여전히 음악 안에서 생각할 것과 여운을 남겨준다. 김마스타도 그들 중 하나다. 그의 31 이란 노래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극장 매표소 일도, 커피숍 알바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생각해, 생각해, 있 을 거야,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일.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올해 7월 발표한 4집 <르네상스>에는 김마스타가 아는 사람들 에게서 들은,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본 세상사 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7년 사귄 애인을 보내야 했던 로커, 술을 너무 좋아하는 드러머, 31 은 서른을 넘 긴 청춘들이 겪는 불안과 방황을 묘사했다. 그는 자신이 대중들과 거리가 멀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 앨범엔 훅이 더 확실해졌고, 방송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감상용 음악이 아니라,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를 만 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젠 다른 시간에 눈을 돌려. 내 마음이 이사를 간다. 지금 이 자 인터뷰 장소는 상상마당 7층의 야외 테라스였다. 주로 흡연실 용도로 쓰이는, 직원들을 위한 작은 쉼터 같은 곳 리에서 거기 그 자리로 인데, 홍대 앞 대부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는 지난 9월 바로 아래 주차장골목에서 개최된 KT&G 상상 마당의 2주년 상상 페스타 야외무대 둘째 날을 장식했다. 그걸 떠올린 건지 그냥 여기서 인터뷰 하시죠 라고 했다. 마침 날씨도 따뜻한 가을날의 전형이었다. 이번 4집 앨범은 2CD이다. 하나는 신곡들이고, 하나는 예전 곡들을 다시 실었는데. 2CD로 발표한 이유는 뭔가? 베스트 앨범이랑 더블 시디를 내보고 싶었어요. 그걸 이번에 다 숙청시킨 거죠. 생각보다 2번째 CD의 베스트 곡들이 적다. 베스트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아쉬웠던 것들을 다시 만든 거예요. 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채웠어요. 남들 안 좋 아해줬던 것들. 버려진 자식들을. 숨잔 같은 경우는 뭐가 그리도 아쉬웠나? 그건 그냥 전지한 씨가 건반을 쳤는데, 그 느낌이 좋았어요. 전 녹음을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 서 사운드도 다 다르고. 그런 면이 좀 있죠. 음악이 굉장히 외롭게 들린다. 왜 그런 걸까? 혼자 살고, 작업도 대부분 혼자서 해요. 그래서 그런 게 나오는가 봐요. (웃음) 31 이라는 곡이 좋은데 특히, 내 마음이 이사를 간다 라는 부분은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30대가 되면 느끼는 감 정들을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가 있는데요, 여자 앤데. 7년 동안 대학 총장 비서를 하다가 영국에서 3년을 유학했어요. 그 때 딱 서른한 살이 된 거죠. 그런데 학력 좋은데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아무도 안 불러주는 거죠. 우리 둘이서 롤링 홀 앞에 있는 카페에 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는 극장 매표소 일을 하고 싶은데 안 써준대요. 난 커피숍 알바를 해보고 싶었는데 절 대 안 써준다고 그랬죠. 그런 얘기 하다가 만든 거예요. 술에 관한 노래가 많은 것 같다. 꽐라송, 1 shot, 재규는 개구쟁이 도 사실은 술에 관한 노랜데. 왜 이렇게 술에 대 한 노래가 많은 건가. 대부분 집에 없으면 술자리에 있어요. 하루에 여 다섯 군데에서 전화 올 때도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다 술집에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이런 저런 얘기 하는 것들을,.. 직장이 술집인가? (웃음) 김마스타의 음악을 술에 비유한다면, 와인하고 소주의 중간 같기도 하다. 와인 싫어해요. 주로 한 가지만 먹어요. 와인도 한 너 댓 병 먹으니까 좀 취하더라고.(웃음) 옛날엔 그럴 때 많았지. 요새는 그냥 이모들 하는 포장마차나 식당 잘 가요. 재규는 개구쟁이 의 주인공 재규 씨는 누구인가? 이재규라는 드러머인데요, 그 친구가 스완 다이브(Swan Dive) 내한 공연도 하고, 좋은 거는 다 하죠. 최근에 이소라 씨랑도 작업하고. 다 좋은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요. 더 웃긴 건, 그런데도 북은 잘 쳐요. 취중에 더 잘 칠 때도 있어 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연습 시간 절대 늦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북을 치면서 술을 그만큼 마시는 거죠. 46 未來共感하십니까 47
이번 앨범에 주변 얘기가 많다. 그 동안 내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최근 2년 동안에 주변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줬어요. 로커의 순정 이라 든가, 재규는 개구쟁이, 31, 1 shot 도 그렇고. 로커의 순정 은 어떤 이야기인지? 더 문이란 록 밴드가 있는데, 그 형 얘기예요. 사실은 좀 미화된 건데 17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났는데 헤어졌어요, 직 업이 평생 로커라서. 근데 그 누나가 헤어지고 다음 달에 결혼을 해버렸어요. 그 형 술 상 엎고 난리치길 한두 달. ( 웃음) 사연을 듣고 보니 다 슬픈 내용이다. 그러네...? 주변에 슬픈 사람이 너무 많아 가지고. 내 주변에 희극배우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희극이 비극 보다 더 슬픈 거 알죠? 그런 사람들이 많아. 음... 김마스타가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 앨범이 나왔는데 그걸 듣 다가 갈 길이 열린다 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타를 잡은 건 그보다 좀 더 일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첼로를 사달라고 했는데 부모님이 비싸다고 기타를 사주셨다. 원래는 큰 누나와 미술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잔잔한 음악을 하지만 초반엔 헤비메탈, 하드코어 등을 했다. 정식 데뷔한 건 언제인가. 음악으로 처음 돈을 번 건 중학 3학년 때 했던 조선인 이란 밴드였어요. 그게 처음 시작이고요. 앨범을 낸 데뷔는 2002년 월드컵 때예요. 20살 때 세리 블루스(Seree Blues)라는 밴드를 했는데, 거기 드럼 치는 누나가 갑자기 노래 를 한다고 기타 구할 때까지 쳐달라고 해서 한 두 달 치러 갔다가 한 군데에서 처음 연주한 거예요. 그 때까진 헤비 메탈, 하드코어를 하다가, 그 누나가 애시드 재즈를 하고 있어서 그걸 공부해서 2003년도에 공연을 몇 번 했어요. 2004년 4월 8일에 데뷔 앨범 1집이 나왔는데, 1집이 나오고서 바로 그 누나 앨범을 관뒀어요. 그 그룹의 연주자 팀 이랑 얼떨결에 나왔는데, 그게 데뷔예요. 그 때 우리가 돈 모아서 찍으려고 했는데, 이한철 형이랑 그 때 즈음에 친 분이 생겨서 데뷔 앨범을 내주셨어요. 음악을 하게 된 계기라고 꼽은 봄여름가을겨울은 어떤 면에서 영향을 주었나? 내가 음악인으로 살게 해 준 결정적인 열쇠였어요. 그 음반을 들었을 때 아, 이게 이번 생을 살아가야 될 일이구나. 그런 거란 생각을 하게 했어요. 공연도 많이 가서 보고요. 김종진 씨와 창법도 좀 비슷하던데. 연습할 때 봄여름가을겨울 곡을 많이 했어요. 쇠 양동이 쓰고서 노래 한곡을 86번까지 불러봤어요. 그 분은 스토리 텔러죠. 보컬 싱어들이 대부분 스토리 텔러죠. 잘 하는 사람을 연습했어야 하는데. (웃음) 임재범 이런 거 연습했어 야 되는데. (웃음) 예전에 최화정 파워타임에서 라이브 하는데, 댓글이 진짜 웃겼어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조합 : 이문세+전인권 다 같이 웃었죠, 어떻게 한 사람 목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나오느냐면서. (웃음) 좋아하는 음악인은? 우리들끼리 모임이 있어요, 싱어송라이터들 모임. 우리는 포크니까 옛날 80, 90년대 동아 사단을 계속 생각하고 있 어요. 김현식, 김광석, 봄여름가을겨울, 이런 쪽으로. 그런 것 하고 싶어서 계속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낭만이 있 지. 10월 17일에 싱어송라이터들 모임에서 공연하는데, 매달 해왔고 이번이 10번째예요. 지금 트리하우스라는 이 름을 1년 동안 쓰고 있는데, 1년 채우고는 이름 바꿀 거예요. 검색이 안 되요. 예전에 선글라스라는 이름 썼을 때도 검색이 안 되어 가지고. (웃음) 자기 곡을 써서 자기가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은 지금이 제일 절박한 시기 같아요. 가수들이 지금은 다 곡 받고 부르잖아요. 진짜 가수는 없는 것 같아. 이영훈과 이문세 그런 골든 콤비가 아니고서야. 우직하달 정도로 전통적인 장르에 충실한 음악인 같다. 요즘은 일렉트로닉 댄스나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 등도 많 은데 이유가 뭔가. 내가 웬만하면 음악을 다 듣는데 시끄러운 음악을 잘 못 들어요.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 잠이 와서요. 반복적으 로 쿵쾅쿵쾅 나오면 내가 잠이 와요. ( 보통과는 반대네요? 라고 묻자) 나는 시끄러우면 소음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전통적인 밴드 편곡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면? 돈이 없어서 그래요. 팝은 오케스트라도 쓰고, 건반도 많이 쓰고, 코러스도 많이 쓰고, 난 간소화 된 편성을 그냥 쓰 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나도 좀 멋지게 하고 싶죠, 하지만 돈 드니까. 나중에 평생 직업으로 영화 음악 할 건데, 20 대에 못해 본 것도 다 해봐야죠. 인제 하겠죠 30대에... 언론에서 낭만적 이란 수사를 많이 쓰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도 내가 그냥 다 써달라고 시킨 거예요. (웃음) 실제 인생에 낭만이 없으니까. (웃음) 너무 전쟁 같이 사니까 그 런 식으로 좀 포장하는 거예요. 음악이 너무 거칠면 사람들 기분이 안 좋잖아요. 다들 전쟁 같이 사는데, 전쟁 같은 음악도 그래서 싫어요.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제일 염두에 둔 것은? 최근 내 관심사는 그거였어요. 노래는 따라 부르는 게 좋은 건데, 1, 2, 3집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감상 용 음악이었던 거죠. 그래서 같이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게 이번 흥밋거리였어요. 그래서 후크송 같이 1 shot~ 이 렇게 반복해서 하고. Moonlight 도 그런 면에서 좋은 곡이다. 사실 Moonlight 은 한 3년 전에 녹음된 건데, 녹음했을 때는 그 때가 가을이었나? 그 당시 낙엽 떨어지고 그러니 까 이게 대표곡이다 해서 했는데, 이번엔 여름에 냈잖아요. 그랬더니 주변에서 들어보곤 Moonlight 다 반대하 는 거죠. 다음 앨범 계획은? 상상마당에서 4월 12일에 했던 공연을 라이브로 내려고 마스터링 중이에요. 두 장짜리가 될 거에요. 안 해봤던 것 좀 해보고 싶어서 이때까지 안 해봤던 2가지를 해보려고 해요. 하나는 라운지 앨범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 거기에 관심이 생겨서요. 그 다음엔 피아노랑 노래만 나오는 앨범이요, 소품집 처럼. 탐 웨이츠(Tom Waits)가 딱 어울리겠는데요? 걸렸네. (웃음) 제가 탐 웨이츠를 굉장히 좋아해요. 올해 다 해버려야지~ (웃음). 상상마당에서 열린 상상페스타 공연에 출연했는데, 주차장 골목에 잔디 깔고 공연을 했는데기분이 어땠나? 예술은 역시 돈 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담배인삼공사는 돈 있는 기업이잖아요. 저런 행사를 일개 개인 작업 자, 일개 가수가 할 수는 없죠. 저 길(홍대 앞 주차장 골목)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진짜 잔디를 깔 수도 없을 거 고요. 역시 예술은 돈 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돈 없는 예술보다 돈 있는 예술이 멋있다. 그걸 사람들이 좋아 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김마스타는 음악을 어떤 심정으로 하나? 지금까지는 절박하게 했어요. 음악 하기 위해서 왼 손에 뭘 잡기 위해서 오른 손을 놓고, 또 다른 걸 잡기 위해서 또 다른 걸 놓고,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상태니까 사람이 절박해지죠. 그래서 2집, 3집 때는 아마 무대 중독증 같 은 것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1년에 100번이니까, 3일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했네. 나한텐 음악이 좀 절박했던 것 같 아요. 지금은 무대가 아닌 또 다른 통로로 부업으로 하는 방송 이런 것? 그리고 이때까지 만나왔던 사람들, 그 사람 들하고 이제 뭔가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어요. 이때까지는 무대에 기어서 올라갔다면 이제 좀 걸어서 올라가려고요. 48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49
와이낫 Interviewer _ 임진모 음악평론가 파워풀한 펑크(Funk) 사운드로 각인된 밴드 와이낫(Ynot?)이 올 해 낸 두 번째 앨범은 어쿠스틱 기조를 띠면서 상당한 변화를 보 였다. 스스로도 외도라 말 할 만큼 사운드 폭이 넓어 놀란 팬들 도 많지만 와이낫이 추구하는 낙천적 정서로 볼 땐 많이 다를 것 도 없다. 정말 변하지 않은 것은 인디 신에서 언제나 맹활약하 고 있다는 점. 그렇다, 그들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라이브 톱 인 디 밴드다. 2002년에 1집을 낸 뒤 그 사이 미니 앨범 3장을 냈지 만 정규 앨범으로는 무려 7년 만에 나온 음반이라 변화의 충격 보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와이낫의 프론트 맨인 주몽을 만났다. 지난 9월에 KT&G 상상 페스타 야외무대에 섰다. 어땠나. 재밌던데요? 잔디 위에서 하는 공연. 예전에 잠실 공원 있잖아요. 거기서 몇 번 해본 것 말고 없었어요. 잔디 위에 서 공연한 것도 새로웠는데 지금까진 항상 공연에 특화 된 사람들을 상대로 해왔잖아요, (웃음) 그날은 홍대에 모 처럼 나오신 분들이랑 즐기니까 그게 재밌더라고요. 맛집 찾으려고 홍대 앞 나온 사람들, 클럽 가려고 온 사람들 (그들은 보컬 및 기타의 주몽을 비롯해 기타 김대우, 베이스 황 등 얼마나 재밌어요. 현우, 드럼 퍼커션의 손말리 4인조다) 주몽은 그룹의 지향과 정 잔디 위에서 어쿠스틱 공연 하니까 밟고 뛰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체성을 밝음 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하면서 밝은 표정과 언어구사 로 인터뷰에 임했다. 이전 공연과 2집 어쿠스틱 앨범낸 후의 공연의 차이가 있다면. 완전 다른 맛이죠. 하지만 피자도 맛있고, 매운탕도 맛있잖아요. 각각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연은 좀 뛰어줘야...(웃음) 2집 타이틀곡인 말하고 말하고 는 뽕짝 느낌도 난다. 보통 어쿠스틱으로 변화를 줄 땐 모던하게 처리하는 것이 기 본인데 이유가 있나. 말하고 말하고 는 원래는 앨범의 전체 기조와 안 맞는 곡이었어요. 이런 것도 한 번 해볼까...하는 정도의 접근이었 습니다. 음반의 타이틀곡일 뿐이죠. 마지막 트랙 맏인가? 가 좋더라. 저희도 그 곡이 좋은데 저희만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사실 타이틀곡을 정할 때 우리는 맏인가? 나 나는 얼룩말 과 같은 곡들로 몰려고 했다가 말하고 말하고 의 데모를 들으신 분들이 좋다고 해서 막판 작업 때 헷갈리기 시작한 거 죠. 원래는 나는 얼룩말 을 염두에 두고 자켓 디자인도 했었어요. 맏인가? 는 세상의 모든 맏이를 두고 한 얘기예 요. 옛날에 누군가가 맏인가? 라고 물었더니 마징가로 듣고 제트 라고 답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맏이들이 주로 밴 드건, 가족이건, 회사건 마징가 제트가 되어야만 하는 거니까. 그 생각을 하면서 맏이들은 부담과 고생 자체죠. 그 들에게 바치는 노래에요. 저도 사실 맏이구요. 이번 앨범을 1년 전에 기획 했다지만 멜로딕하고 소프트한 노래가 시점 상 장기하와 얼굴들 의 영향이 아닐까 하 는 생각도 든다. 클럽 <타>는 어쿠스틱 공연 올리기에 적합한 공간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관심 있던 장르였는데, 어느 날 보 니까 클럽 <타>에서 어쿠스틱 음악을 하는 팀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구요. 영미권에서도 어쿠스틱 밴드들이 생겨나고 요. 요즘 흐름에 어긋나고 싶지 않단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와이낫이라는 밴드는 계속 음악할 거니까 잠깐의 외도라 고 생각해요. 다음 앨범은 왓 더 펑크 라는 제목으로 정했어요. 이번엔 펑크 쪽으로 한 번 가보려고요. 앨범 작업할 때 애착이 가는 곡은 뭐였나. Ready to go, ready to fly 라는 곡이요. 앨범 작업할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너무 일에만 매달리 니까 얘가 삐친 거예요. 네가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바쁜 척 하느냐 는 거죠. 생각해보니 그러네. 싶 어서 에잇 그럼 노래로 뜨자. 하다가 만든 곡인데 앨범 나올 시점에 관계가 깨졌어요. 참 의미 없는 노래가 된 거 죠. (웃음) 50 未來共感하십니까 51
이번 앨범은 전체적으로 느낌이 편안하다. 의견 충돌 없이 놀러가는 느낌으로 작업 했어요. 녹음할 때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전까지만 해도 잘 해야지 하는 생각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접근 안 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고 웃으면서 만들었던 앨범이에요. 그 런 게 앨범에 녹아들었나 봐요. 와이낫 공연에는 여성 관객들이 많다. 아무래도 외모? 역시 감출 수 없었던 건가? (웃음) 노래 나는 얼룩말 에서 얼룩말의 의미는? 얼룩말은 회색 말 이 아니라 얼룩말 이라는 거죠. 이번 앨범 성격도 그렇고, 실제 와이낫이란 밴드도 그렇고, 제 안 에 여러 가지 것들이 숨어 있을 텐데, 그걸 대충 내놓지 말고 흰색과 검은색을 다 보여주자, 그렇게 콘셉트 잡고 앨 범 커버 디자인도 했어요. (웃음) 2집 앨범 수록곡은 전부 라이브 공연을 하다가 녹음까지 진행된 것인가. 전체 수록곡 중 1/3 정도가 미리 공연을 했던 곡들인데 말하고 말하고, I need your love 같은 것들이 그래요. 말하고 말하고 는 녹음하면서 색깔이 많이 바뀌었고요. 주몽을 뮤지션으로 만든 아티스트가 있다면. 처음으로 음악을 사랑한 건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요. 그 앨범 처음에 듣고 세상이 열리는 줄 알았어요. 최고의 명 반도 <스릴러>에요. 저더러 무인도에 가져갈 앨범 한 장만 선택하라 그러면 저는 <스릴러> 들고 갑니다. 머릿속에 트랙들까지도 다 기억해 두고 있거든요. 밴드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펑크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이구요. 마이클 잭슨 추도공연에서 존 메이어(John Mayer)가 연주했던 Human nature 봤는지. 좋았죠. 그런데 (그거 나오기까지) 너무 지루한 거예요. 왜 그렇게 추도사도 많고 말들이 많은지. 그런데 존 메이어 가 나와 한 마디도 안 하고 정말 멋진 기타를 보여주니까 모든 게 용서 되더라구요. (웃음) 댄스는 본연적이고 자체가 힙(hip)인 요소가 있다고 보지만 지금의 홍대 신은 댄스가 너무 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밴드가 서는 라이브 클럽은 위기라고 보는데. 저희가 클럽을 한다고 하면 야, 거긴 난 못 들어가잖아? 라고 선배님들은 얘기하세요. 홍대클럽이 댄스 클럽으로 각 인 된 상황인 거죠. 라이브 클럽이라 그런 거 전혀 상관없다고 해도 아, 어떻게 거길 가? 하죠. 안타깝지요. 댄스만 큼이나 밴드 라이브도 활기를 띠었으면 좋겠는데. 잘 되겠지요.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엄마의 편지 는 절절하다. 엄마가 미국에 잠깐 가 계셨을 때 저한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게 앞 뒤 빽빽하게 10장이나 되는 거예요. 제가 읽 은 글 중 가장 감동적인 활자였어요. 10년 전 일인데도 그 때 그 기분 못 잊어요. 그래서 만들 게 됐어요. 와이낫 음악의 정체를 간단히 정의한다면. 밝음 인 것 같아요. 어쨌든 자신들의 성정( 性 情 )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멤버들은 다 유쾌하고 밝 은 사람이예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래서 음악도 그래 라고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우울 한 기조의 밴드들 많잖아요,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한때 우울한 분위기의 곡들을 써볼까도 생각 했는 데, 그건 거짓말이죠.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거고. 대충 꾸며낸 음악은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저 도 창피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홍대 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면?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만 해도 홍대 신은 정말 허파 같은 존재였어요. 밴드들도 줄기차게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했고, 실제로 라이브 클럽만을 찾는 클러버들이 존재했습니다. 오늘은 김마스타 나온다, 보러 가자! 가 아니라 음악 듣고 공연 보러 클럽에 가는 거였죠. 지금은 클럽 주인들이 괜찮은 가수들을 묶어 놓잖아요. 그때는 마냥 즐 기는 분위기라면, 지금은 뜨는 뮤지션들이 생겨났다는 거죠. 한마디로, 미드필더 진이 없어졌다는 생각 들어요. 지 금은 허파 기능을 거의 못하는 거죠. 클럽 <타>를 운영하고 있다. 공동투자였다가 개인소유 되었는데, 운영에 어려움 없는지. 어렵더라구요. 홍대 앞 공연이 주로 금, 토 이틀인데, 나머지 요일들도 너무 아깝구요.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하다 가 서너 달 전부터 주중에도 공연을 하는 버스킹 공연 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왔다 자유롭게 나가 고, 공연이 맘에 들면 얘기 나누다가 모자에 돈을 넣기도 하고. 돈을 떠나서 여기가 계속 음악을 하는 공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요. 그 대신 유명한 사람들은 못 부르는 거죠, 페이를 제대로 못 주니까. 처음엔 아는 동생들하고 제가 했는데 지금은 알음알음 알려져서 넘버원 코리안 도 오고, 하찌 아저씨도 오고, 황신혜 밴드 의 형태 형도 오 고 그래요. 재밌어요. 52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53
밴드 이름이 쉬운 편은 아니다. 어떤 뜻을 가지고 있나?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이 약간씩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통합적인 걸 내세우기 보다는 우리의 취 지를 나타낼 공통분모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든 것이 중성적인 캐릭터 에이첼 이죠. 우리의 이야기를 대 변해주는, 매개체 역할인 가상 모델이에요. 에이첼 은 아첼레란도(곡의 일부분의 속도변화를 지시하는 용어. 보통 accel 로 표기한다)라는 악상용어에서 가져왔구요. 팀은 언제 결성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는지. 2004년도에 베이스 강준형 형과 기타 김우람 형, 그리고 다른 드러머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동국대학교에서 밴드 를 하고 있었어요. 저는 군 제대 후에 오디션 보고 그 해에 합류했고, 기타 백인성은 2005년 1월에 들어왔어요. 그 리고 곧바로(2005년 1월~ 2월 사이) 에이첼 인 어 스토리라는 팀이 결성되었어요. 지금껏 어떤 식으로 활동해왔나. 팀 결성 초기에 가지고 있던 이상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봤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 공감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안타까웠어요. 음악적인 부분에 서는 자부하고 있었는데 관객들 입장에서는 확 와 닿았던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땐 관객이 우리에게 제스처를 취 해주면 반응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음악의 변화를 주었고 EP앨범내고 활동하고 나서 디지털 싱 글을 낼 땐 좀 더 밝은 곡을 썼어요. 그 땐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는 관객 반응 쪽에 더 신경 써서 음악을 했던 거죠. EP 앨범이 2006년 겨울에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밴드를 하다보면 싸우는 일도 많고 의견차이로 밴드 자체가 와해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 어요. 바로 베이스 치는 강준형 형이지요. 멤버들 대부분이 준형이 형이 추구하는 쪽으로 따라가는 편이예요. 팀 결 성한지 4년 정도 되는데 아직까지 해체하지 않고 있는 게 용하다고 다들 말하더라구요. 팀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한 사람의 밴드 마스터와 잘 따라주는 멤버들에게서 우러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에이첼 인 어 스토리 Interviewer _ 조아름 웹진 이즘 필자 홍대 앞에도 어느덧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바람 사이로 지난 여름 기억할 양 강한 볕이 활기차게 쏟아지고 있는 10월의 어느 오후, 그런지 록의 버팀목인 밴드 에이첼 인 어 스토리 의 보컬 이정호 를 만났다. 앨범 작업으로 밤을 새고 온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배어 있었으나 그가 만드는 음악만 큼이나 힘찬 목소리와 눈빛은 걱정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밴드는 기타 김우람, 보컬 이정호, 베이스 강준형 (현재 세션 멤버 이동훈), 기타 백인성, 드럼 김 기원으로 이뤄져있다) 그렇다면 밴드 마스터인 강준형이 리더인가? 처음에는 리더였으나 대외적인 활동이 어려운 점이 살짝 있기 때문에 김우람(기타) 형으로 바뀌었어요. 우람이 형 은 대외적으로 활동이 편한 사람이죠. (웃음) 곡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베이스 강준형 형의 비중이 굉장히 커요. 보통은 한 사람이 곡의 뼈대를 만들어오면 다른 멤버들이 다 같이 살을 붙 여서 곡이 완성되는데 준형이 형은 살까지 거의 다 붙여오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거의 완성된 곡에 각자의 살을 약 간씩 떼어서 붙여요. 지금까지 많은 부분들을 준형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거죠. 에이첼 인 어 스토리는 화려한 이펙터나 샘플링에 비중을 두고 연주하는 팀은 아니지만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와 공연 장에서 연주할 때의 차이점 때문에 신경 쓰는 부분은 분명 있을 것 같다. 어떤가? 투 기타 시스템이기 때문에 무대에서는 기타 사운드 밸런스에 우선적으로 중점을 둬요. 리듬에서는 드럼과 베이스 의 조화에 신경을 쓰고요. 전체적으로 사운드 조화에 애쓰는 편이죠. 앨범 녹음할 때도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쓰려 고 했는데 쉽진 않았던 것 같아요. 54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55
공연 때 특별한 징크스를 가진 멤버가 있는지? 징크스는 제가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공연할 때마다 신는 신발이 있는데 다 른 신발을 신으면 공연이 잘 안 풀리더라구요. 그리고 특정한 친구 한 명이 공연을 보러 오늘 날에도 공연이 잘 안돼요. 이상하게도 그 친구만 오면 그 렇더라구요. 밴드 초창기 때는 공연할 때마다 비가 왔어요. 이제는 공연 때 비가 오더라도 우리가 할 때 됐으니 비가 오는 구나 하고 겸허하게 받아들 이게 되죠. (웃음) 이미 똑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베이시스트 얘기가 나온 김에 묻겠 다. 베이스 강준형은 지금 서태지 밴드에서 활동 중인데 어떻게 이뤄진 건지? 그리고 현재 베이스를 맡고 있는 분은 어떻게 만났나? 자세한 건 모르지만 서태지 형 쪽에서 개별적으로 오디션 연락이 왔다고 들 었어요. 지금 베이스를 맡고 있는 이동훈은 친분이 있는 동생이고 잠시 세션 멤버로 우리 팀에서 활동 중이예요. 지금까지 드러머가 한 번 교체 된 것을 빼면 멤버 변동된 사항은 없어요. 서태지 때문에 알려진 인디 밴드가 몇 팀 있다. 에이첼 인 어 스토리에게도 변 화가 있는가?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가 느끼기에 크게 와 닿는 부분이 있죠. 우선 인터넷 팬클럽 회원 수가 많아졌어요. 물론 베이시스트에게 관심을 보 이는 분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쪽에서 보면 팀 홍보가 되고 있는 것이니 좋 긴 해요. 보컬 얘기를 해보자. 중저음의 상당히 안정된 톤이다. 타고난 목소리인가 아니 면 원하는 스타일이 있어서 본인이 만들어 낸 것인가? 타고난 건지는 잘 모르겠구요. 이십대 초반에 홍대 앞에서 밴드를 시작했을 땐 톤이나 음악에 대한 고민은 많지 않았고 오로지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생 각뿐이었어요. 제대 후엔 중저음의 내 목소리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고자 했 는데 그게 포스트 그런지였죠. 그런지를 하는 미국인들 특유의 목소리와 비 슷해지려고 했던 것 같아요. 가사를 보면 사회 비판보다는 사랑과 자신의 길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가사는 누가 쓰나? 곡을 쓰는 강준형 형이 가사도 대부분 쓰는 편이예요. 작곡을 할 때 어떤 얘 기를 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곡을 만드는 것 같아요. 준형이 형 은 항상 추상적으로 글을 쓰는 편이라 가끔 이해하기에 힘든 부분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멤버들은 노래를 쓴 사람의 이야기를 최대한 잘 표현해보자고 의견을 모으죠. 그리고 부분적인 면은 준형이 형과 내가 상의하고 조율해 요. 별도로 얘기하자면 2월 30일, 슬프지만 사실이야, My Sellena 이렇 게 세곡은 연결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요. 연주는 강하고 남성적인 스타일인데 멜로디는 아주 감성적이다. My Sellena 를 보면 남성 락밴드의 곡에서는 보기 힘든 꽃 이란 단어도 있고. 전체적으로 곡 이 부드러운 편이라 여성 팬이 많을 것 같은데 팬 분포도는 어떤가? 여성 팬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한 건 아닌데 여성 팬이 많긴 해요. 멤버들이 남자다 보니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베이스가 무척 감수성이 예민 한 편이예요. My Sellena 라는 곡에 지지 못해 피는 꽃 이란 표현을 굉장 히 마음에 들어 하더라구요. 본인이 원치 않지만 필 수 밖에 없는 꽃에 대한 연민과 애절함. 이런 걸 표현하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은 감성이 참 풍부한 사 람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보컬 톤을 생각해보면 어쿠스틱한 곡도 상당히 어울릴 것 같다. Mr.Big의 To be with you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용한 곡을 해보고 싶은 생 각은 없나?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해보고 싶어요. 발랄한 분위기의 음악을 하는 팀으로 전환이 되었고 그 때문에 밴드가 알려지게 된 점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 응이 덜 오더라도 어쿠스틱한 연주로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공연을 해보고 싶 어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하지 않을까요. 몇 년 동안 활동 해오면서 아쉬운 점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점은 매년 다르 게 와 닿을 것 같다. 지금의 위치에서 생각해봤을 때, 참 잘 한 것 같다는 점 과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은 무엇인가? 멤버 간에 음악적 교감을 유지하고 잘 따라왔다는 점, 서로 존중해주면서 지 금까지 지내왔단 점에 점수를 주고 싶어요. 아쉬웠던 점은, 음악적인 면에 서 한 사람에게 집중된 부분이 많았기에 개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색을 보 여주지 못한 점이랄까... 새 앨범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특별히 해보고 싶은 장르나 신경 쓰고 있는 부 분은 무엇인지. 일단 멤버들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어요. 또 지금까지의 앨범이 조금 중구난 방이었다면 이번 앨범의 곡들은 한 가지 색으로 진지하게 중심을 잡고 준 비 했어요. 곡을 구상할 때 다른 음악을 참고하는 편인가? 멤버들 모두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 30second to mars, 그리고 멤버 모두 가 좋아하는 Incubus 의 음악을 모토로 잡고 작업하고 있어요. 최근 괜찮다고 생각되는 국내 아티스트는? 개인적으로 국카스텐을 굉장히 좋아해요. 무대에 같이 서본 적이 없어서 친 분을 쌓지는 못했지만 공연을 보고 반했죠. 드라이 플라워와 브로큰 발렌타 인의 음악도 좋아해요. 브로큰 발렌타인의 보컬과는 아주 친한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그 친구가 하고 있어요. 서로 잘 되길 응원하고 있죠. (웃음)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서 알려 달라. 지금 준비 중인 EP 앨범에 몇 곡이 실릴지 조율중이긴 한데, 늦어도 내년 1 월까진 나올 것 같아요. 가을에 열리는 몇 개의 음악 페스티벌에도 출연할 예정이구요. 사람들이 어떤 때에 에이첼 인 어 스토리의 음악을 찾길 바라는지? 무언가 붙잡고 싶을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우리 음악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 들으면 와 닿는 게 크지 않을까요? 진부하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인디밴드는 힘들다고 하는데 그만큼 많은 관 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앨범 낼 때 보통 삼고의 고통을 겪어 보지 않고 는 말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힘들게 작업해서 만들고 있다는 걸 요즘 새삼 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얘들 앨범 나왔네? 하고 무심코 지나가기 보다는 한번이라도 챙겨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56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57
메리제인 Interviewer _ 황우성 상상마당 라이브홀 매니저 메리제인은 어떻게 결성 되었나? 제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 홍대 클럽 Just Blues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 거예요. 그 래서 학교친구들과 모여 메리제인 을 결성했고 2006년 5월 Just Blues에서 첫 공연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인디 밴 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메리제인은 무슨 뜻인가? 마리화나의 속어예요. 우선 중독성 있는 음악을 하고 싶었고, 밴드 인원이 전부 여자라서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메리제인 으로 정하게 되었어요. 음악 아닌 다른 일을 한다면? 다른 일은 못할 거 같아요. 음악이 몸에 익숙해져서 다른 일은 적응 못할 거 같아요. 음악은...중고등학교 때부터 해 왔고요. 고등학교 땐 창을 배웠어요. C.A 시간에 앞에 나가서 노래했는데 선생님께서 소질 있다 말씀하셔서 배우 기 시작했죠.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취미로는 괜찮은데 제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란 생각 들더라고요. 그래 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하자 라는 생각으로 밴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그냥 좋아서 시작했는 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음악을 선택한 게 아니라 제가 음악한테 선택 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선택 받았는데 어 떻게 중간에 그만 둘 수 있겠어요? 죽을 때까지 음악을 떠나지 못 할 거 같아요. 음악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재미 가 아니라 생활이니까요. 메리제인 음악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곡도 많이 써야겠지만 카리스마가 있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해나갈 수 있는 것들을 배우고 싶 기도 하고...암튼 그래요. (웃음) 메리제인 노래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곡은? 전,부,다,여서 딱히 하나를 꼽을 수가...(웃음) 메리제인 밴드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사람들한테 밴드 멤버들끼리 사이가 좋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서로간의 애정이 그만큼 많이 쌓여 있 메리제인 은 임지혜(리더/베이스), 조은주(기타), 안현선(보컬), 박아름(드럼)으로 구성된 여성 4 인조 락 밴드이다. 2008년 KT&G 상상마당의 밴드인큐베이팅 2기로 발탁된 후 밴드인큐베이팅 공연은 물론 최근 밴드 이름을 내건 EP 음반까지 출시되어 활발한 활동 중이다. 메리제인이 추구 하는 음악은 2006년 밴드결성 이후 지금까지도 록을 기반으로 한 팝 뮤직이다. 음악을 하는 궁극 는 거죠. 특히 곡을 만들었을 때 멤버들 간의 이견이 별로 없어요. 추구하는 음악이 같다고 할까...그래서 우리 밴드 를 지탱하는 힘은 우리예요. 지금까지 잘 지내온 만큼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상상마당 밴드인큐베이팅 팀에 선정되면서 어떤 점이 제일 좋았나? 합주실 지원이 제일 좋았어요. 2008년 11월에 헬로루키 로 선정 되어서 방송을 한 것도 좋았지만 상상마당에서 공 적인 목표도 락 밴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듣기 쉬운 락 사운드로 대중과 함께 노래 연할 수 있고 연습실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밴드 인큐베이팅 과정을 통해서 동료팀들을 알게 된 것이 정 하는 것이란다. 어쿠스틱 음악이 홍대 인디 신의 대세인 2009년 관객들이 환호할 만한 록 사운드를 말 좋아요. 게다가 상상마당 라이브 홀에서 공연하기 쉽지 않은데 정기적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니, 얼마나 신 들고 무대를 뜨겁게 연주하는 메리제인의 리더(베이스) 임지혜를 만나보았다. 이나요. 저희 팀 목표가 EP 발매였는데 올해 밴드인큐베이팅에 선정 되어서 얼마 전에 EP 음반도 냈지요. (웃음) 58 未來共感하십니까 59
밴드인큐베이팅 팀이 되면서 달라진 점? 저희 밴드에게 앨범 은 밴드 자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거예요. 처음에 밴드 결성하고 활동하기 시작할 때 주변에 서 많은 분들이 데모 음반이라도 만들어야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여러 상황으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앨범작업을 못해봤어요. 그런데 상상마당 밴드 인큐베이팅 팀이 되면서 첫 앨범을 내게 되었어요. 이제야 진짜 밴드 가 된 느 낌이에요. 그리고 공연 기회가 많아지면서 작년과 비교했을 때 팬들이 약 200명 정도 늘었어요. 그래서 현재 430 명. 팬이 더 생기면 좋겠어요. (웃음) 상상마당 밴드 인큐베이팅 팀으로써 2009 상상 페스타 공연도 했다. 어땠나? 저희 팀은 상상 페스타 기간 동안 상상마당 라이브 홀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도시풀장이라고 야외공연장 있었잖아 요. 거기서 공연하면 정말 신나겠더라고요. 내년에도 올해처럼 잔디 위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야외 공연을 꼭 해보 고 싶어요. 야외공연팀, 정말 부러웠거든요. 밴드인큐베이팅 콘서트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밴드인큐베이팅 콘서트는 항상 공연과 음식 콘셉트를 맞추잖아요. 음식을 음악적 스타일로 묶을 수 있는 테마로 진 행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엉뚱한 가요? 밴드인큐베이팅 활동 외에 다른 일을 한 경험은? 엄마의 약속 과 우연히 행복해지다 라고 창작뮤지컬 공연에서 반주를 맡았는데 힘들긴 했지만 음악에 관련된 활 동이라서 좋았어요. 상상마당 외에도 오르고 싶은 공연무대가 있다면? 해외에서는 브릿어워드, 후지락페스티벌에, 그리고 국내에서는 지산락 페스티벌, 펜타포트 같은 무대에 오르고 싶 어요.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핑크플로이드의 공연처럼 연출이 가능한 무대에서 메리제인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 는 공연무대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는 EP를 내고 내년에는 레이블에 들어가서 좀 더 많은 공연기 회를 잡아야겠죠. 많은 인디 밴드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팀들이 무대에 오른다. 이러한 관점에 서 볼 때 메리제인은 언제까지 공연을 할 수 있다고 보나? 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할 거예요. 메리제인으로, 할 수 있는 한 끝 까지. 경제적으로 힘이 들면 서빙을 하거나 라면집을 운영해서라도. 음악을 놓을 순 없을 거 같아요. 현재 인디 신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이나 클럽에 오는 분들이 너무 적어요. 아이돌 그룹 등 매체에서 관심을 갖는 메이저들에 대해서는 음악적 취향이 맞지 않아도 춤이나 다른 비주얼 적인 부분이 좋아서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되거나 호감을 보이잖아요. 그리고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요. 사람들이 자기와 맞는 음 악을 찾아서 들을 수 있는 관객과 인디 음악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메리제인은 지금보다 더 파워풀하고 카리스마 있는 밴드로 발전해 나갈 거 예요. 지켜봐 주시구요. 사람들이 여성밴드 하면 생각나는, 혹은 그래야만 하는, 이미지들이 있나봐요. 샤방샤방 해야 하고, 예뻐야 하고, 몸매도 좋아 야 하고... 이런 저런 볼거리에 많이 치중하셔서 정작 우리 밴드 음악은 많이 몰라주시더라고요. 저희 밴드가 원하는 건 외모나 이미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으로 어떤 팀인가,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무슨 노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등등 음악성을 먼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여 성 밴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저희를 바라보는 게 제일 힘들었거든요. 아무 튼 이걸 보시는 모든 분들이 저희 팬클럽에 들어오시는 그날까지 메리제인 은 최선을 다해 노래를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웃음) 메리제인은 향후 어떤 밴드가 되고 싶은가?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주는 밴드가 되면 정말 좋겠어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음악이 좋으면 멋진 공연도 가능하고 인지도도 얻을 수 있는데 아직은 그러한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어요. 장기하와 얼굴들 을 보 면 매니아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어, 재미있는데 어 좋은데 라고 좋아하시잖아요. 그걸 보면 그리 먼 꿈만 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60 未 來 共 感 하십니까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