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05 2013 08 August 우리가 함께해요 길 을 열 다 바 른 배 움 의 참 된 가 르 침, 내 일 을 바 라 보 다 어 제 의 혜 안 으 로 www.cha.go.kr
2013. 08 August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弘 益 人 間 의 이념 아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교육의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선조는 지식에 앞서 덕을 쌓기 위한 수양으로서 교육을 행했습니다. 또한 군사부일체 라 하여, 제자는 스승을 또 다른 군주, 부모로서 공경하고, 스승은 제자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모든 행실에 본을 보이고 참된 가르침으로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로움을 끼치기 위한 교육을 통해 민족공영 民 族 共 榮 을 실현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 사랑과 존경, 신의 위에 행했던 교육의 전통은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바참 른된 길배가 을움르 의침, 열 다 본지에 실린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본지에 게재된 글이나 교육 자료를 문화재청의 허락 없이 무단 복사, 전재하는 것을 금합니다. <문화재 사랑>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웹진(e-book)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측 마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 보이스아이 바코드입니다 cover story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으로서 바람직한 인간을 형성하여 보다 가치 있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며 나아가 사회발전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조상은 교육을 국가발전의 기초로서 중시하였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두터운 신의와 정이 자리 잡고 있었습 니다. 표지 이미지는이시대가 되새겨야할전통 교육문화를 일러스트로 표현하였으며, 과거의 혜안으로 미래를 보는 창 을 이미지화 했습니다. contents 특집 어제의 혜안으로 내일을 바라보다 38 Zoom In 무형유산 천년의 학, 고매한 몸짓 04 08 12 : 참된 가르침, 바른 배움의 길을 열다 ❶ 우리 조상,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나 손승남 ❷ 소중한 만남, 스승과 제자 이이화 ❸ 지금의 학교와 한국교육의 미래는? 곽해룡 40 학연화대합설무 김지원 Design Heritage 짝을 이루어 조형미를 갖춘 평상 김동우 16 문화의 숲을 거닐다 44 생동하는 문화재 현장 한식, 그 고유한 원류와 바닷속문화재찾는누리안호가보니 이재유 새로운 흐름의 길목에서 성혜경 20 바람의 여행, 문화의 숨결 46 문화재 사랑과 만나다 연못 위의 정자, 하엽정 이광만 강화, 최후까지 지켜낸 호국의 역사 - 갑곶돈대에서 강화대교까지 신지선 48 이야기가 있는 역사기행 [만화] 신분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의 결실 유환석 24 근현대의 길목에서 야구가 한국인의 가슴에 들어오던 날 김은식 50 함께하는 문화재청 유네스코식 문화유산 관리체계 구축 26 북녘의 무형유산 무형문화유산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영변의 마을축제를 잇는 노무와의 만남 제정 추진 류소명, 강병희 영변성황대제 - 황경순 28 선조들의 음식보감 51 한 문화재 한 지킴이 돌봄과 나눔으로 돕는 전통의 맥 잇기, 한독 성혜경 화합과 절식의 전통음식 생채 황영철 32 자연 愛 물들다 52 독자퍼즐 독자의 소리 산란탑을 만드는 물고기 어름치 최승호 34 문화재 돋보기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 조지 쇼 홍선표 발행일 2013년 8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 문화재청 발행인 변영섭 편집 대변인실 총괄기획 윤순호, 윤혜영, 김수현 편집위원 이종희, 황경순, 오춘영, 장영기, 김성도, 임병천, 임은경, 김윤경, 조은경, 방인아, 차금용, 신동렬 주소 302-701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문화재청 대변인실 전화 (042)481-4677 팩스 (042)481-4679 홈페이지 www.cha.go.kr 기획 디자인 제작 (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m.com
특집❶ 어제의 혜안으로 내일을 바라보다 참된 가르침, 바른 배움의 길을 열다 04 가어무 르떻엇 쳤게을 나 우 리 조 상, 01 02 우리나라 교육의 이념은 삼국유사 에 처음 등장하는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라는 생각 속에는 자기완성과 이타주의를 향한 원대한 이념이 스며들어 있다. 삼국시대에 국가 주도의 학교교육이 시작되었으나 지배계급의 독점물로서 계급적 지위와 학문적 교양을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 다. 고려는 불교를 널리 장려하였으나 정치와 학문의 기본이념으로는 유교식 정책과 제도를 우선시하였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정신적 지주로 자리를 잡아 유학자의 심오한 학문체계를 통한 교육사상및 정신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일상적인삶속에 생활규범으로 자리매김하는데일조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도전을 받으며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의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글. 손승남 (순천대학교 교직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시 및 삼국시대의 교육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교육이념을 이해하는데있어서 가장 중요 한 것은 삼국유사 에 등장하는 단군신화 檀 君 神 話 이다. 이 신화는환 웅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고 다스리기를 희망했다는 데서 인간중 심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홍익인간 弘 益 人 間 은 인간이 사 는 온 세상을 두루 널리 이롭게 하라 는 이념을 담고 있으며, 우리 나라 교육과정의 핵심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이념이 추구하 는 인간상은한마디로 개인의 이익을 넘어 이타적으로 봉사하는 인간이다. 고구려의 태학은 문헌상 최초로 등장하는 교육기관이다. 이는 삼 국사기 소수림왕2년 (372) 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했다 라는 기록에 근거한다. 이를 보면 중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했을것
05 03 05 04 01. 02.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37호 소학당. 조선 성종3년(1472) 김굉필(1454 1504)이 어린 시절 한훤당에서 독서와 수양에 전념한 곳이다. 03. 보물제210호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서원 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04. 사적제170호 안동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 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05. 06. 보물 제214호 강릉향교 대성전. 강릉향교는옛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02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이고, 교육내용 또한5경과3사 (사기, 한서, 후한서) 가 주를 이루었을것 으로 추측된다. 이에 반해 사학 私 學 인 경당에서는 송경 ( 誦 經, 경전을 암송 하는 것)과 습사 ( 習 射, 활쏘기를 연습하는것)를 했다는 점에서 문무일치 교육 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교육제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박사 왕인과 고흥의 활동에 비추어 고구려의 태학과같 은 수준의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왕인 박사는 서기 285년 일본에 논어 와 천자문 을 전하였고,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 를 짓게 하였다. 백제의 선진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문화와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의 교육은 화랑도 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 이전 시기, 그리고 국학 을 대표로 하는 통일 이후로 구분될수있다. 화랑도의 목적 은 인재를 발견하여 조정에 추천 하는데있었으며, 또한 대외 팽창에 따른 군사적 필요성에서 생겨난 조직이다. 화랑도의 수련방법은원 광법사의 세속오계에 기초한 정신교육과 산수유람, 기예및신체단 련 등을 병행한 일종의 문무일치교육이었다. 국학 은 통일 이후확 대된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관료와 유학교육의 필요성, 그리고강 한 귀족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에서 생겨 난 것이다. 이후 원성왕4년 (788) 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유교경 전에 의해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우리나라 과거제도의 전신이 되었 다. 이 시기 최고의 유학자 최치원 ( 崔 致 遠, 857-?)은 견당 유학생으로 당의 황소의난 에 격문을 써서 명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에 귀국하여 유교, 불교, 도교의 조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교교육과 인재등용을 위하여 독서삼품과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유교 와 불교의 조화를 위하여 난랑비서문 을 짓기도 하였다.
06 06 07 고려의 불교문화와 유교교육 고려 전반의 사상적 기반은 불교였다. 삼국시대부터 수용된 불교 는 종전에 국가단위의 종교였던 무속신앙을 민중신앙의 위치로격 하시켰고, 새로운 우주관과 세계관을 통한 국가단위의 종교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렇지만 중국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면서제 도 운영은 유교적인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국자감, 동서학당, 향교와 같은 국가 교육기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형식 적 부분에서는 유교가, 비형식적인 부분에서는 불교와 무속신앙이 영향을 주는 이중적 사상구조가 형성되었다. 토착신앙과 불교는 고려인의 삶의 의식에 깊숙이 침투하여 삶의 지표로서 작용한 반면, 유교는 모든 학문의 기초 교양과 통치술의 내용으로서 작용했다. 고려시대의 교육사상가로는 지눌, 안향, 정몽주를들수있다. 보 조국사 지눌 ( 知 訥, 1158 1210)은선 禪 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 敎 는 부처 님의 말씀이므로 선과 교가 본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지눌은돈 오점수 ( 頓 悟 漸 修, 순간적인 깨달음과 점진적인 수행)의 수행관을 제시하여 선종 과 교종의 통합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문성공 안향 ( 安 珦, 1243 1306)은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으로 전한 인물이다. 그는 공자의 도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학에 서 주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포은 정몽주 ( 鄭 夢 周, 1337 1392)는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면서 주자집주 朱 子 集 註 와 같은 유교서를 강론하였다. 유학을 널리 보급하고자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웠으 며, 일상생활에서 유학의 도를 실천하면서 사는 도덕적인 인간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강조한 교육내용은 유학의 주요경전 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주역, 서전, 시전 등이다. 조선시대 성리학과 실학의 교육 조선조를 창건한주세력들은 고려 후기에 성장했던 신진 사대부들 이다. 이들의 학문적 배경은 고려 후기에 수용된 신유학이었다. 그 러므로 그들은 불교에 사상적 기반을둔고려와 양립할수없었다. 15세기 초에는 새롭게 등장한 유학이 정교 이데올로기로서 부상하 였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는 주자가례, 삼강행실도, 효행록, 소학 등을 보급하여 유교적 풍속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노력하 였다. 학교정책으로는 주로 관학을 통해서 적극적인 장학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교육기관이 성균관 成 均 館, 사학 四 學 그리고 향교 鄕 校 였다. 고려가 불교이념에 입각하여 국민의 교화와 통치를한반면 조선은 유교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유학의 여러 학풍 가운 데서도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조선의 학문, 정치, 교육의
07 07. 08. 보물제141호 서울 문묘및성균관.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으로,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09. 보물제1110-1호 정몽주 초상. 정몽주는 고려 시대의 교육사상가로, 이성계 추대에 반대하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10. 최치원 영정.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으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중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11. 보물제723호 삼국사기. 고구려의 태학은 문헌상 최초로 등장하는 교육기관으로, 이는 삼국사기 소수림왕2년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 했다 라는 기록에 근거한다. 근간이 되었다. 성리학의 목적은 수기치인 修 己 治 人 과 법성현 法 聖 賢 에있 다. 수기는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를 부단히 닦아나가는 것이고, 치인은 정치와 교육을 통하여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존양 存 養 과 궁리 窮 理 를들 수 있다. 존양은 사람이 타고난 선량한 품성을 도야하는 것이고, 궁리 는 우주와 사물의 이치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법성현은 성현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성 현은 교육에서 추구해야할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인간은 누구나부 단히 수양하여 이들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다. 개국 초기 권근, 정도 전과 같은 신진 사대부에 의해 성리학이 정치와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자리를 잡게된후조선중기에 와서 조광조, 이언적, 서경덕, 이황, 조식, 기대승, 이이, 김장생, 송시열과 같은 유학자에 의해서 학문적 심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여러 인물 가운데 이황과 이이는 인격과 학문이 고매하여 문하에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나중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와 같은 사승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조선의 정치와 교육의 근간으로 잡았던 성리학은 실학 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실학의 등장은 국내적으로 양란을 거치면서 민생이 황폐화된 것과, 대외적으로 청조에서 발달 한 고증학 考 證 學 과 서학 西 學 의 유입과 관련이 깊다. 실학자들은 실용성 과 실증성을 중시하는 학문적 방법을 통하여 성리학을 허학 虛 學 이 라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 시 ( 實 事 求 是, 실질적인 것에서 진리를 구함)의 정신을 진작시켰다. 이들은 경세 치용 經 世 致 用 과 이용후생 利 用 厚 生 에서볼수있듯이 국가의 경제발전과 국민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실학자들로는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 가, 이덕무, 김정희, 정약용, 최한기 등을 들 수 있다. 11 09 08 10
특집❷ 어제의 혜안으로 내일을 바라보다 참된 가르침, 바른 배움의 길을 열다 08 스 승 과 제 자 소 중 한 만 남, 01. 허균생가터 교산시비.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문인으로서의 허균( 許 筠 )과 허난설헌( 許 蘭 雪 軒 )을 비롯한 허씨5문장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5기가 허균의 생가 터를 중심으로그주위에 세워져 있다. 02. 손곡산인전. 조선중기에 허균( 許 筠 )이 자신의 스승인 손곡을 주인공으로 지은 전기 소설이다. 03. 조선해어화사( 朝 鮮 解 語 花 史 ). 1926년 이능화가 역대 기생들의 실상을 기록한 책으로, 황진이를 출중한 재주와 경국의 미색을 갖추었을뿐아니라, 한시와 시조에도 뛰어난 명기로 꼽았다. 04. 송악산( 松 岳 山 ). 서경덕은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 즉 꽃 피는 연못 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연유하였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05. 초의 의순( 草 衣 意 恂 )이 그렸다고 전하는 다산 정약용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02 01 옛 동양권에서는 군사부 君 師 父 일체 라는 말이 있다. 곧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한몸이라는 뜻이다. 여기의 임금은 나라를 뜻한다고볼수 있고, 나를 바르게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는 스승,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를 바르게 받들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단순하게 풀이하면 스승이 있어야 제자가 있고 제자가 있어야 스승이 있다는 의미이다. 공자는 평생 동안 가장큰사업으로 제자3천명을 길렀고 맹자는 세 가지 즐거움 속의 하나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면 즐겁지 아니 한가 라고 말하면서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하여 스승을잘받드는게제자의 도리임을 일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성립되었고 사적인 교육기관으로는 서당과 서원에서 성립되었다. 가르침을 받는 것은 같을지 몰라도 대체로 공적인 교육기관의 스승은 범상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드는몇가지 사례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글 사진. 이이화 (역사학자)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합콘텐츠 서경덕 (호: 화담) 과 황진이의 특이한 만남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를 두고 일화거리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그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것같다. 허균 ( 許 筠, 1569~1618)의 아버지인 허엽 ( 許 曄, 1517~1580)은 서경덕의 충실한 제자였는데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 惺 翁 識 小 錄 의 한 대목을 보자. 평생에 걸쳐 화담의 사람됨을 숭모했다. 늘 거문고 와 술을 싸들고 화담의 거처에 찾아가서 마음껏 즐기고 돌아갔다. 늘 말하길, 지족선사는 30년 동안 면벽 面 壁 을 했다지만 내가 품에 끌어 안아 보았다. 오직 화담선생만은 여러해아양을 떨어보았지만 끝내 흩트러지지 않았다. 이 분은 참으로 성인이다. 황진이는 놀이에만 빠졌던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경서를 배우기도 했다. 서경덕 ( 徐 敬 德, 1489~1546)은 바로 인간 평등을 외친 사상가였으니 이를 배웠을것아닌가? 김택영 ( 金 澤 榮, 1850 1927)은또 송도인물지 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비단이나 관을 쓰지 말고옛동 문밖물가 모래밭에 시체를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
09 이가내살을 뜯어 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나를 거울삼도록해 주시오. 그녀는 스승 서경덕이 죽은뒤, 거지 차림을 하고 스승이찾 아다녔던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돌아보면서 스승의 체취를 맡았 다. 이처럼 애절하고 두터운 스승과 제자 관계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달과 허균의 두터운 이해 이달 ( 李 達, 1539~1612)은 유명한 시인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지만 서자여서 차별을 받았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낙백의 세월을 보냈다. 허엽은딸허난설헌과 막내아들 허균의 스승으로 이달을 초청했다. 두 어린 천재는 이달에게서 당시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이달은 서자 신분으로 잠시 낮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전국을 떠돌 이 생활을 했는데한때는 원주 손곡마을에 살았던 탓으로 호를손 곡이라 했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시3당시인으로 꼽혔으나 방탕생활을 하면서 걸림이 없었고 속된 예절을 익히지 않았으며 또 떠돌이 생활을할적에 밥도 빌어먹었다. 그런 그가한때허균 에게 시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허균은 그가 죽고난뒤 손곡산 인전 을 써서 스승의 간단한 행적을 알렸다. 신라, 고려 이후로 당시를 짓는 자들은 모두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몸은 곤궁했 으나 썩지 않는 것이 있으니 어찌한때의 부귀로이이름과 바꿀 03 04 05
10 것인가? 아아, 달의 시는 참으로 기특할진저! 이 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허균은 여기저기 흩어진 스승의 시를 모아4권으로 묶어 냈다. 그러고는 서자들을 평생 친구 또는 동지로 삼았는데 이것이 스승의 삶을 동정해서일까? 06. 이덕무의 시가 실려있는 한객건연집( 韓 客 巾 衍 集 )]. 1777년 청나라에서 간행되어 이덕무의 이름을 중국 시단에까지 알리게 되었다. 07. 연암집. 조선후기의 문신 박지원( 朴 趾 源 )의 시문집으로,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을 엿볼 수있는 중요한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08. 소치 허련( 許 鍊, 1808~1893)의 <일속산방도( 一 粟 山 房 圖 )>. 소치가 황상이 거주하던 일속산방을 그린 그림이다. 09. 1700년대 후반 청나라의 수도 연경을 그린<연경성시도( 燕 京 城 市 圖 )>. 청나라 수도의 번화함을 보여주는 지도로, 이덕무와 박제가가 북경 연행 중에 중국 문인들과만 났던 장소인 북경유리창도 나타나 있다. 평생 뜻을 같이한 박지원과 그 제자들 박지원 ( 朴 趾 源, 1737~1805)은 많은 제자를둔것으로도 행복했을 것이 다. 그는 고향 광주를 떠나 운종가 탑골 언저리에서 살았다. 그는 술을 좋아해서 종로의 상인들과 어울려 피막골의 주점에서 술잔을 스스럼 없이 기울였다. 이런 자리에 탑골 뒤편에 사는 이덕무를비 롯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이서구 등 제자들이 어울렸다. 이들은 청년 문사로 거의 서자들이었는데 정조의 배려로 창덕궁에 있는 규장각의 검서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틈만 나면 박지원을찾 아와서 고담준론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서자로 청년문사인 박제가 가 자주 찾아 문장을 논하고 이용후생의 학문을 물었다. 곧 청나라 의 실질 있는 문물을 재워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이론이다. 박지원이 청의 수도 북경에 다녀와서 명저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를 저 술했을 때 이들 제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자리 에서는 비판의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박지원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지원은 가난해서 제자들을 도울 재물이 없었고 되레 술을 얻어 마셨다. 이들 제자들은 당시에도 주옥같은 많은 시문을 남겼고 훗날에는박 제가의 북학의 와 같은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책도 저술했다. 특히 박지원은 여느 경우와는 달리 당파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뜻 을 같이한 것만으로도 제자를 삼았다. 06 07 외로운 처지의 정약용과 황상 정약용 ( 丁 若 鏞, 1762~1836)은 20여 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세도정치세력에 줄을 대던 고을 수령들도 무서워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강진의 이웃 고을인 해남 등지에서 젊은이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들었다. 그들 속에 황상이란 젊은 이가 있었다. 08
11 열다섯 살짜리 소년인 황상 ( 黃 裳 )은 제가 너무 우둔하고 융통성이없 고 답답하다고들 합니다. 저 같은 애도 공부를할수있겠습니까? 라고 조금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약용은 배우는 사람은세가 지 결함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민첩하게 금방 외우는 것이다. 둘째 날카롭게 글을 짓는 것이다. 셋째 재빨리 깨닫 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무엇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근 ( 勤, 부지런함)해야 한다고 이르고는 삼근계 三 戒 勤 를 지어 주었다. 황상은 이를 평생 지키면서 정약용을 받들었다. 정약용은 영특하고 예리하고 아이디어가 번쩍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근면을 통해 불후의 명작을 양산해냈다. 그리해 우리나라 최대의 사상적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황상은 근면했으나 별 저술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니 삼근계 를꼭성취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황상은 충실한 제자였다. 그런데 정약용은 잦은귀 양살이 끝에 늙어서야 마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집으로 돌아왔으니 제 자를 제대로 기를 시간 여유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빛바랜 오늘날의 스승의 모습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열은 중국인도 감탄할 정도로 높았고 스승을 받드는 법도도 있었다. 한데 오늘날에는 공리교육의 탓으로 사도 師 道 가 얕보임을 받고, 졸업을 하고나면 관계가 단절된다. 예전 스승은 제자를 찾아 나서, 문하생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고, 장학 금도 대주고 생활을 돌보기도 했다. 또 제자는 바른 스승을 찾아헤 매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스승은 제자를 자식보다더아꼈고 제자는 스승을어 버이보다더받들었다. 왜? 바로 스승은 성현의 가르침을 일러주고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비해 제자는그가르침을 스승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굳게 잇는 것이다. 그러니 가정의 효도보다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처의 법을 전한 사리불등10제자, 공자의 도를 받든 안연등10 철, 예수의 진리를 전파한 베드로등12사도는 저절로 만들어진게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우연한 인연관계가 아니라 사상이 나 이념으로 맺어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승이 제자의 취직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스 승의 길로 잘못 아는 풍토로 바꾸어지고 있다. 새로운 스승과 제자 의 만남을 통해새사조와 가치관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있 다 하겠다. 09
특집❸ 어제의 혜안으로 내일을 바라보다 참된 가르침, 바른 배움의 길을 열다 12 미한 래국 는 교? 육 의 학 교 와 지 금 의 01 한국사회의 발전을 막고 있는 것은 지금의 과열된 경쟁교육이다.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오늘날 학생과 교사와 학교가 신음하고 있다. 인성교육을 배제한 지식교육은 지식을 탐욕추구의 도구로만 사용 하는 불량시민 을 양성할 위험성이 높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도한 경쟁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한 미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선행조건이다. 글. 곽해룡 (명지고등학교 교사, 연구교과부장) 사진. 연합콘텐츠, 병점고등학교 01. 경기 화성시 병점고에는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이 없이 수업 참여가 활발하다. 학생 들이 직접 만든 14개를 비롯, 36개의 동아리는 오히려 수업에 대한 흥미를 높여준다. 02. 2012년 11월 25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열린 학생들이 원하는 좋은학교 만들기 에서 전국에서 참여한 학생,학부모, 대학생 멘토들이 풍선을 들고 하트모양을 만들고 있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건 (경기신문 2008.6.19) 은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한다. 현실은 잠시 풍랑이 일었지만곧아무 일도 없었다는듯과도한 경쟁의소 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티클리츠 (J. E. Stiglitz) 는 불평등의 대가 에 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경제 성장 잠재력의 장애가 된다. 는 말을 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성장과 분배는 대칭적인 것으로받 아들여 성장론자들은 이른바 부유층의 투자 소비 증가가 저소득 층의 소득 증대로까지 영향을 미쳐 전체 국가적인 경기부양효과로 나타나는 현상인 낙수효과 落 水 效 果 를 들먹이며 성장을 통해더큰 분배를 가져온다고 하였지만 현실에선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교육 위기에 봉착한 한국 교육 해방이후 한국사회 역동적인 성장의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라는사 실은 부인할수없다. 그러나 지금의 과열된 경쟁교육이 한국사회 의 발전을 막고 있다. 교육은 출세와 발전의 도구적 가치만 중시되 었고, 이에 기인한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오늘날 학생과 교사와 학교가 신음하고 있다. 어느 특목고에서 성적이 전국 상위 1%안에 드는3학년 학생이 입시 도 과도한 경쟁이 가져오는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시 작했다. SBS에서 주관한 경쟁의 딜레마-공존의 신생태계를 찾아 서 (2011.11.2 제9차 미래한국리포트, SBS) 라는 제목 하에 무한경쟁 한국교육, 정작 경쟁력은 있는가? 의 소주제가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95% 이상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소위 3~5% 명문대 입학을 위한 경쟁지 옥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학벌 경쟁으로전국민 이 오랜 기간 삶의 스트레스에, 열등감에 시달리며, OECD 최고의
13 02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도한 경쟁 논리 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한 미래 사회를 건설할수있다는 인식이 다. 실제 교육 문제의 중심은 사람이다. 교사와 학생으로 대변하는 지금의 사제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사제관계는 비오는 거리에서 스승을 만난 위당 爲 堂 정인보가 젖어서 질퍽한 땅바 닥에 앞뒤 가리지 않고 엎드려 스승에게 큰절을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권위를 강조하는 교사들은 이런 모습을 그리워하겠지만
14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상상조차할수없는 낯선 광경일 것이다. 현재 교사들의 인식변화는 교육의 소비자로서 학생을 바라보며 전통적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실존주의 교육철학자 볼노오 (O. F. Bollnow) 는 만남이 교육에 선행한 다. 고 했다. 이는 교육 이전에 교사 와 학생 사이에 어떤 관계 가 형성되는가에 따라 교육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즉 교사가학 생에게 감동의 마음으로 끌릴때비로소 제대로된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학부모들이 교육이 잘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녀가 교사를 존경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사제 간의 인격적 만남은 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데반드시 선행되 어야할필요조건이다. 인성교육을 배제한 지식교육은그효과가바 람직하지 않으며, 지식을 탐욕추구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불량시민 을 양성할 위험성이 높다. 인성및윤리가 미약한 전문가 교육은 명백 한 의료과실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책임회피와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의료인이 양성되거나 법률적 지식을 활용하여 탈법을 연구하 는 데 앞장서는 법조인을 등장케 한다. 한국교육, 희망과 실망의 몸짓들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교사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수업하러복 도를 오가면서 실내에서 휴지를 줍는 것부터 시작하여 교사들의 희생, 헌신, 봉사등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정신들이 지금도 요구된 다. 또한 무엇보다 교사는 매의눈 이 필요하다. 높이 날아올라먼 창공에서 학생들의 잠재력을 바라보며 지혜롭게 조언하고 소탐대 실 小 貪 大 失 하지 않도록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세대는 생소하겠지만 70년대 유명한 남성듀엣가수 서수남, 하청일 이 있다. 오랫동안 한사람은 크고 다른 한사람은 작은 키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은 서수남씨가 장신 長 身 이어서 당시 표준보다 큰 키였던 하청일씨가 상대적으로 작게 보였을 뿐이다. 학생들을 개개인의 특성으로 파악해야지 비교하기 시작하면 편견으로 잘못 바라볼 위험이 있다. 교사를 꿈꾸는 교생들이 실습기간에 매우 소극적이거나 힘들여업 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모습들이 일부 눈에 띈다. 교직도 직업으로 서의 안정성, 신붓감으로 최고라는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선호도로 만 작용할 뿐 교사로서의 소명감, 희생, 헌신, 봉사, 성실, 적극성등 이 적어진다면 문제가 있다. 자녀가 하나인 경우가 많아 귀하게만 성장한 학생들은 자기중심적 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교육적 동기유발과관 심을 불러일으킬 학습주제와 장 場 이 마련되면 학생들은 조별 발표에 협력하여 활기차게 수업에 참여한다. 또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시 험대비 핵심요약을 위해 친구들과의 협동학습이 늘고 있다. 아직은 03
15 미숙하고 자신의 필요성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50대 후반의 중년 교사들이 오랜만에고1 담임업무를 맡게 되었다. 수십 년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노하우 (know-how) 가 있음에 도 불구하고 어느 쪽으로 튈지알수없는 럭비공 같은 아이들로인 해 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시에 청년 시절 가졌던 교육에대 한 열정과 성취감이 다시 생성됨을 이야기 한다. 그들의 어려움은 최근 담임을 연임한 교사들의 조언과 격려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교육적 경험들을 교사전구성원들이 공유할수있는 공동체적 접근 이 뒷받침 된다면 학생들에 대한 이해와 지도의 어려움이잘해결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 충동의 가능성에 대한 심리적 조사에 따른 학생및학부모 상담, 전문가 안내 등이 있다. 학생들을 옛날처럼교 사 한사람의 소신과 교육 철학으로 교육을 시키기에는 어려워진환 경이다. 분야별로 전문가 집단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잦은 간섭과 지시를 하거나,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즉흥적으로 땜질식 처방이 난무할 경우 교사는 쉽게 피로해지며 당혹스러워진 다. 경쟁체제에서 부모들이 자기 자녀만 생각하는 이기적 생각과태 도로 인해 교사들이 감정적 상해를 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문제 학생의 부모들은 이전과 다른 교육적 환경은 감안하지 않고교 사에게 과도한 요구를 한다. 이로 인해 관심과 손길을 기다리는대 다수 학생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게 된다. 금년도 서울 공립 중등학교 교사임용고사에서 채용 규모가 작년보 다 대폭 늘었다고 한다. 이는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중년의 교사들이 예년보다 많이 교단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둘러 싼 교육적 환경이 변화해야 한다. 사회전체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교육에 관심을 표방해야 한다. 과열된 경쟁 논리가 가져오는 부작용 을 공감하고, 교육의 주체인 교사, 학생, 학부모들이 서로를 신뢰하 며 각각의 역할을 인정해야할것이다. 언제나 대화, 타협, 양보, 주체적인 참여 기회의 제공및책임부여, 공정성에 기반한 성과급 03.한 일반고에서 학생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일반고는 면학 분위기 진작을 내걸고 사실상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 등 각종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04. 서울시교육청은 2012년 11월 7일 서울지역 초중고교에서 폭력 없는 평화로운 학교문화를 위한 인성교육 프로그램 친구사랑! 우리는 친구데이, 117 Day 를 운영했다.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우면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친구 들에게 칭찬하는 말 써주기 활동을 하고 있다. 05. 부산 동래향교에서 열린 초등학생 인성교육 에서 어린이들이 무더위 속에서 전통예절을 배우고 있다. 04 개선 (예를 들면 획일적인1년단위의 성과급보다는 분야별로 학생지도, 자기계발, 행정업무 부문 등의 우수자 포상) 등의 여건이 마련되어 이러한 기제 機 制 에 익숙해질때 훨씬 더 교육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으리라고 본다. 05
문화의 숲을 거닐다 16 01 한식, 그 고유한 원류와 새로운 흐름의 길목에서 문화는한사회가 공유하는 행동양식이며, 그한범주인 예술은 미적 감동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음식은 가장 예술적인 예술이다. 맛과 향미는 물론, 시각, 촉각, 청각까지 모든 감각을 통해 미감을 전할수있기 때문이다. 음식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감동은 바로 추억이다. 몸이 아플때어머니가 쑤어 주셨던 죽이 떠오르는 것도 음식이 추억을 담고 있어서다. 그래서 음식은 사람들 사이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주고,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 요리연구가이며 푸드스타일리스트인 박서란은 우리 한식의 고유한 가치를 알리고이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며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글. 성혜경 사진. 이대영, 푸드오페라
17 요리에 빠진 스튜어디스 할머니를 모시고 대가족 속에서 자랐어요. 우리 여섯 형제만 해도 북적북적한데 손님도 끊이질 않았죠. 게다가1년이면 제사를 열두번 씩 지냈어요. 자랄땐몰랐는데 자연스럽게 예절을 배운것같아요. 어른들께 예의와 배려에 대해 인이 박히게 들었고, 형제가 많다 보니 서로 나눠 먹고 양보하는 습관이 저절로 몸에밴거죠. 요리연구소 푸드오페라 에서 만난 박서란은 서글서글하기보단 화려한 이목구비 에 언뜻 서구적인 인상을 주는 외모였다. 스튜어디스 출신이라는선 입견도 없지 않아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가진 정서는 누구보다 토속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질은 단지 배경이었지 삶의 방향이될줄은 몰랐었다. 젊은 시절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했던 박서란은 세계 각국을다 니며 다양한 음식을 맛볼수있었고 그러면서 차츰 요리에 심취했다. 애초에 관심사는 외국음식이었다. 그녀는르코르동 블루의 프랑스 02 요리, 싱가포르 선라이즈 아카데미의 동남아 요리를 비롯해 이탈리 아, 홍콩, 일본 요리를 현지의 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 나라마다 다른 음식문화를 알아가는 것이 흥미로웠고 각양각색의 음식이 가진 진미 를 내보고 싶었다.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다가와 있던 길 그렇게 셰프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가던 그녀가 한식으로 길을 바꾼 계기는 10여 년 전, 외국음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스스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이잖아요. 사람들은 각자아 플때생각나는 음식이 있기 마련인데, 그건 음식 자체보다는 따뜻한 기억, 그 속에서 힐링이 되는것같아요. 다른 나라 음식을 하면서아 무리 조리법을 배우고 연습해도 흉내를낼뿐이지 깊이가 없다는생 각이 들었어요. 그래서내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박서 란은 한식으로 방향을 바꿔 전통음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통의 가치와 깊이를 알게 되면서 한식에 점점더심취했 다.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재료를 구하려 다녔어요. 궁중음식 부터 반가음식, 사찰음식 배울수록 재밌고 순간순간 경이로운거 예요. 만드는 과정과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요리의 기초라면그속에 박서란 전통요리연구가, 푸드스타일리스트 01. 전통요리연구가 박서란.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연구하고 한편 으로는 현대인의 기호와 생활에 맞는 새로운 조리법을 개발하며 한식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02. 푸드스타일링의 기본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박서란. 소박한 다과에도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 담겨있다.
18 03 04 들어있는 문화와 더 깊은 곳의 정신을 아는 것은 근본이며 핵심이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 담겨있는, 순리를 따르는 자연스러움과 기다릴 줄 아는 은근의 정서가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삶의 방식에 담겨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절기에 맞춰 생활이 이뤄졌잖아요. 가장 자연스러 운 삶이죠. 우리가 말하는 인륜지대사가 모두 자연에 맞춘 생활양식 이거든요. 우리 조상이 물려준 음식, 옷, 의례와 같은 전통문화에는 자연에서 배운,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가 담겨있다. 그것은 고리타 분한 구습도, 근거 없는 미신도 아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고 일에 허덕이는 요즘 사람들은 그런 지혜들을 거스르며 살아가기가 쉽다. 알고 있으면서 간과하기도 하지만 인지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더 많기에 박서란은 한식의 가치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시장에 나와 있는 한식 중에 진짜 한식은없 다고 봐요. 너무 맵고 짜고, 조미료 맛이 강한 음식이 대부분이죠. 진짜 전통음식의 조리법은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데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다른 어떤 나라의 음식보다 과학적이면서 철학과 정성이 담겨 있죠. 무엇보다 한국인의 몸에 가장 좋은게한식이 라는 거예요. 한식의 가치를 알리는 일의첫번째는 한식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 그녀는 근대화를 거치며 자연재료를 대체하게 된 인스턴트 재료와 변질된 조리법을옛방식 그대로 바로잡기위 해 노력하고 있다. 아쉬움만큼 큰욕심 그와 동시에 박서란은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키고, 세계화를 위해 외국음식과 퓨전을 시도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면서 다양하게 응용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 들의 입맛에는 우리의 떡이 맞지 않는 거 같아요. 너무 쫀득쫀득해서 오히려 싫다는 거예요. 한식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먼저 외국인들의 취향과그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해요. 배려가 필요한 거죠. 음식 의 기본은 배려라고 말하는 박서란. 한식이 옛것, 우리것 에 머무 르지 않고 요즘 젊은 사람들과 세계인들이 반기는 음식이 되기를그 녀는 바란다. 그럴때우리 한식이 온건 穩 健 히 후대로 보전될수있을 것이다. 더불어 한국음식을 소개할수있고 가까이에서 접할수있도록 만들 기 위해서는 투자와 정책적인 지원도 따라야 한다. 우리나라에 한식 당이 있는 호텔이 한 곳도 없어요. 얼마 전까지 궁중음식연구원에서
19 05 06 운영하는 곳이 남아있었는데 재정난을 겪다가 결국 문을 닫았죠. 한 식은 비싼 돈을 내고 즐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운영하는 입장 에선 조리하는데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데비해 수익은 따라주지않 을 거구요. 그렇지만 경제적인 기준으로 가치를 따져선안되는게있 다고 생각해요. 가치를 알아야만 지킬수있고, 경험을 해보지 않고 서는 절대 가치를 느낄수없다. 그래서 그녀는한명이라도더한식 을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나가려 한다. 어머니께선 저희들에게 간식을줄때도 대접하는 마음으로 하셨던 것 같아요. 떡을 쪄서 주실 때도 접시에 수국 잎사귀를 깔고그위에 정갈하게 떡을 올려서 주셨죠. 그런게바로 푸드스타일링인것같아 요.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이 표현되고 마음이 전해지는 것이죠. 박서란에게는 푸드스타일링까지도 보기 좋게 하기 위한 기교나 꾸밈 이 아니라 감동을 전하기 위한 진지한 작업이다.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요리연구소의 이름을 푸드오페라 라고 지은 것은 오페라처럼 종합예술인 우리 음식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서란은 욕심이 많다. 방송활동을 통해서, 강 의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그녀는 우리 음식, 한식을 전파할수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보고 싶다. 03. 박서란은 한식만큼이나 우리의 그릇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한국의 도자기는 한식을 담아도 양식을 담아도다잘어울린다. 소박하고 꾸민것같지 않지만 격식이 있고 아름답다. 04. 박서란은 쉽고 편한 것도 좋지만 음식만큼은 신경을 써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그기본은 재료다. 비싼 재료가 아니라 지금 가장 싸고 흔한 제철음식이 가장 좋다. 05. 06. 음식을 조리 하는 과정만큼이나 먹기 좋게 그릇에 담고 먹음직스럽게 장식하는 과정에도 정성이 깃든다.
바람의 여행, 문화의 숨결 QR코드를 스캔하면 강화 갑곶돈대를 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강화 江 華, 최후까지 지켜낸 호국의 역사 갑곶돈대 甲 串 墩 臺 에서 강화대교 江 華 大 橋 까지 강화 江 華 의 역사는 피비린내의 역사였다. 서울의 주요 방어 기지이자 외적이 침입했을 때 왕실이 피난하는 제일의 후보지. 고려부터 조선을 거쳐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현재도 강화는 최후의 순간까지 나라를 지켜내는 전방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차로 건너면 3분 남짓, 뜨거운 여름 햇살을 뒤로 하고 강화에서 바라보는 물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
22 강화도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 인천 강화군, 우리나라에서4번째로큰섬, 38년 간 임금을 품고 있었던 고려의 도읍,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그자리를지키고 있 었던 호국의땅. 강화에는 이렇게도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또그런수 식어에걸맞게수많은역사유적들과문화,기록들이전해지기도하는곳이 강화도다. 강화도의8경은이런전쟁의상흔들이고스란히남아있는곳들 이다.해안수비진지의하나인광성보가그렇고강화 4경인 초지진이 그 렇고 강화 2경인 갑곶돈대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오늘은강화대교를건 너자마자바로만날수있는갑곶돈대를둘러보기로한다. 선정비와 자연보호 표석, 삼충사적비가 있는 비석군 碑 石 群 갑곶돈대를 보려고 일단 강화군 전적지 일괄관람권을 끊는다. 하나만 끊어도 갑곶돈대, 광성보, 덕진진, 고려궁지, 초지진을 모두 관람할 수 있으니 좋겠다 싶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들어선곳, 포를쏘 고 방어를 했던 기지답지 않게잘정돈된 공원 같은 느낌이다. 들어서 자마자 한쪽으로 나란히 늘어선 비석들이 보인다. 이곳의 이름은비 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선정비와 인조 14년 청나라 침입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한 삼충 사적비등6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이중특히 재미있는 것은 1703 년 (숙종 29) 강화유수부 (고려궁지) 앞 등지에 세웠던 금표인데 자세히 보면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 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우리 조상들도 자연 보호에 신경을 썼구나 싶으니 갑자기 멀게만 느껴졌던 할아버지의할 아버지들이 아는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지키고 또 지켰던 역사, 갑곶돈대 비석군을 지나니 오르막이 나온다. 정갈하게 쌓여진 성곽 길을 따라 강화8경 중 2경에 해당하는 갑곶돈대에 오른다. 1232년부터 1270년 까지 무려 38년 동안 몽고의 전쟁에 맞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올라선 돈대 아래로 김포와 강화 사이의 해협인 염하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로저해협을 건너지 못해 몽고군이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했다는 건가? 하긴 갑곶 이라는 이름도 고려 때 몽고군이 염하 강을 건너지 못했을 때 우리 군사들 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수있을 텐데 라는 한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갑곶돈대가 모든 외세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 다. 조선시대 때는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에 의해 수많은 침탈을 당했고 고종3년병인양요 때는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 01 02
23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 바 있다. 또한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가 상륙하여 강화도조약을체 결한 곳이기도 하다.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후로 갑곶돈은 허물어졌고 이것을 1976년 복원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가능한 화기였다고 한다. 정자 같은 곳에 보호하고 있는 것은 사정 거리 700m에 이르는 홍이포, 붉은 오랑캐의 화포라고 불렸단다. 무 시무시한 대포 앞에 서니 치열했던 전투의한장면이 마치 눈앞에펼 쳐지는 듯하다. 8문의 포를 둔 전략적 요새 갑곶돈대가 군대의 주둔지가된것은 병자호란 이후이다. 당시 나라 에서는 청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과진, 보, 돈, 등의 군사 시설을강 화하였는데 갑곶은 숙종5년에 이르러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그모 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이곳에 대포8문을 두고 소대 규모의 군대를 배치한 것이다. 돈대란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이곳에 돈대를 위치시킨 것은그 만큼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곽의 밖은 높이 쌓아 올리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했다. 적의 동태를 정찰하기 쉽고바 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들을 포격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려 다본길에는한눈에 염하 강이 들어온다. 접근하는 모든 것이한눈 에 들어오니 갑곶돈대는 과연 요새 중의 요새라는 생각이 든다. 돈대를 둘러보고 길을 따라 가니 이번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불랑 기와 소포가 보인다. 이 대포는 조선시대때쓰이던 것이라는데 소포 는 사정거리가 300m에 이르는 화기였다고 하고 불랑기는 연속 사격 전망 좋은 정자, 이섭정 利 涉 亭 촤르르 놓인 돌계단을 지나 이섭정에 오른다. 이층으로된정자. 높은 곳으로 올라 잠시 땀을 씻고 간다. 피부에와닿는 햇살이 따스하다 못해 따갑게 느껴지는 팔월, 그래도 강이저멀리로 내다보이니 시원 한 기분이 든다. 이섭정은 1398년 (태조7) 강화부사 이성이 세운 것으로 무너진지오래 되었다가 1976년 다시 복원되었다. 태평성대에 이곳 에 정자를 지은 이유는 당연히 전망이 좋은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세 월이 좋을 때는 풍류를 읊었을 이곳. 그러나 몽고, 청나라, 프랑스, 일 본에 말할 수 없이 무참한 침탈을 당했을 이곳.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잃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숙연해진다. 시선을 훌쩍 건네 보니저멀리 강화대교가 보인다. 한 눈에도 김포시 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강화대교를 바라보며 다시 갑곶에 서서 염하강을 바라본다. 바로 이곳에서 비교도 되지않 을 만큼 대군인 몽골군과 대치했다는 말이지? 이대로 나라를 지킬수 있을 것인가, 뜬 눈으로 보초를 섰다는 거지? 저 대교를 건너면 겨우 3분 거리. 지척에 무시무시한 적들을 두고뜬눈으로 밤을 새웠을병 사들, 전쟁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호국의 의지를 불태웠을 병사들, 어 쩌면 현재의 우리나라는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지켜진게아니었을까 싶다. 희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화대교는 오늘도그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새삼 호국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03 01. 강화비석군.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선정비와 인조14년 청나라 침입시 적과 싸우다 장렬 하게 전사한 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한 삼충사적비등6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02. 이섭정. 1398년(태조7) 강화부사 이성이 세운 것으로 무너진지오래 되었다가 1976년 다시 복원되었다. 03. 강화대교. 종래 강화도에 가려면 김포쪽나루에서 만조가 되기를 기다려 간만의 조위차( 潮 位 差 )가 8m에 이르렀을때차를 나룻배에 실어 건너갔는데, 이 다리의 건설로 30분이 걸리던 도강시간이 3분으로 단축되었다.
근현대의 길목에서 24 야구가 한국인의 가슴에 들어오던 날 보통 한국야구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의 지도로 황성 YMCA 야구단 이 창단한 1905년이다. 하지만 문화의 전파란 그저 전해주고 전해 받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문화가 삶의 방식을 말한다면, 어쨌든 삶에 뿌리 내릴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934년 일본을 방문한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시범경기에 투수로 나선 17세 소년 사와무라 에이지가 거구의 베이브 루스, 루게릭등을 연신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골리앗 잡는다윗 이 되어 우리도 미국을 이길수있다 는 용기를 자극한 것이 야구가 일본의 국기 國 技 로 자리 잡게된출발점이었듯, 한국에서도 역시 한국인들 의 가슴에 불을 지른 사건들이 없이는 야구가 뿌리를 내릴수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계기란 다름 아닌 한일전 의 역사였다. 글. 김은식(저술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1 01. 1928년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야구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중절모와 갓을 쓴 관중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02. YMCA야구단 단체사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해, 기독교 청년회 간사였던 필립 질레트의 지도 아래 황성 YMCA야구단이 결성되었다. 03. 1928년 한용단 모습. 당시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되어 고려야구단이라는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다. 02
25 그날한용단은 이미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국가대표팀이나다 름이 없었고, 연전연승하며 우승 목전에 도달한그모습은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서 좌절한 식민지 백성의 눈앞에 펼쳐진 재기와 희망의 이미 지였다. 일본의 동지 同 志 라는 팀과 맞붙은 결승전에서 일본인들로 구성된주 3 1운동의 여진 속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야구팀, 한용단 1920년,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며 매일 서너 시간을 함께 보내던 인천의 소년들이 한용단 ( 漢 勇 : 용감한 남자)이라는 야구팀을 만들 었다. 바로한해전3 1운동의 물결을 경험하며 조숙해진 16,7세 소년 들의 의기와 포부와딱그만큼의 낭만이 녹아든 이름이었다. 그 팀은 결성 자체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3 1운동때선전물을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뒷날 독립운동가로, 또 정치가로성 장하여 1~5대 의원을 지내게 되는 곽상훈이라는 청년이 주도해 도서 관을 짓고 문예지를 발간하는 등의 문화사업들을 벌이겠다는 장기적 인 목표를 세우고 야구를 각지의 청년단체들과 교류하며 뜻을 모으는 수단으로 설정한 민족주의 단체가 바로 한용단이었기 때문이다. 창단 초기 서울, 개성 등의 청년단체들과 친선경기를 하며 경기경험을 쌓고 기틀을 다진 한용단은 창단2년째인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인 팀들에 도전장을내주말마다 웃터골 이라는 공터에서 결전을치 르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야구가 뭔지도잘모르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한용단을 응원하곤 했다. 야구는 당시 한반 도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수있는 거의 유일 한 전장 戰 場 이었고, 한용단은그싸움에서 이따금이라도 승리를 맛보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서러움과 분노 속에서 시작된 한일전의 역사 특히 본격적인 한용단 신화 가 만들어진 것은 다시 이듬해인 1922년 이었다. 한국인팀3개, 일본인팀7개가 참가했던그해5월 전인천 춘계야구대회 에서 한용단이 한국인팀중유일하게1회전을 통과해 결승전까지 진출하자 다시 수천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 열광했다. 03 최측과 심판은 편파판정을 남발했지만, 한용단은9회말까지 꿋꿋이6 대5로앞서고 있었다. 그리고9회말마지막 수비의2사3루, 2스트라 이크3볼풀카운트 상황에서 한용단의 투수가 동지 팀의 마지막 타자 에게 던진 공에 승리와 우승의 주인공을 동시에 결정하는 마지막3번 째 스트라이크가 선언됐고, 순간 한용단의 모든 선수들은 마운드 위로 몰려들어 뒤엉킨 채 감격을 나누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일본인 심판은 조용히 스트라이크 판정을 볼로번 복했고, 한용단 선수들이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사이3루에 있던동 지 팀의 주자가 도둑처럼 홈을 밟아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해괴한짓 을 벌이고 말았다. 한용단 선수들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끼고 얼싸안았던 팔을 풀었을때, 점수는6대6, 주자1루의 상황에 서 동지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관중들이 그걸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노한 수천의관 중들이 심판을 향해 쇄도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심판은 냅다 줄행랑 을 치고 말았다. 관중들의 격렬한 항의는 일본인 경찰들이 출동해 한바 탕 몽둥이찜질이 이어지고또수십 명이 잡혀간 뒤에야 가라앉았다. 그 리고그사건을 계기로 한용단은 강제 해산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한 국인들이 뭉치는 단초가 된다면 무엇이든 일단 자르고 봐야겠다는총 독부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땅에 뿌려진 야구의 씨앗한 알은 바로 그 날 그런 분노 속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야구, 전설과 영웅과 삶의 힘을 길러내다 그렇게 해방전조선 땅에도 야구가 있었다. 한용단의 슬픈 전설이있 었고, 또한 조선 반도 출신으로 전일본 대표로 선발돼 베이브 루스와 일합을 겨룬 홈런왕 이영민의 장한 소식도 있었다. 전설은 씨앗이 되어 영웅을 불러내고, 그 영웅은 다시 세월과 함께 전설이 되며, 고단한삶 의 힘이 되어주는 역사가 그렇게 이 땅에서도 시작됐던 것이다.
북녘의 무형유산 26 영변의 마을축제를 잇는 노무 老 巫 와의 만남 영변성황대제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이정연 보유자 01 02 영변사람들의 삶과 염원이 담긴 마을축제이자 무속의례인 영변성황대제 寧 邊 城 隍 大 祭. 이를 남녘에서 이어가는 큰무당 이정연 보유자를 만나 그녀 가 꾸려온 삶과 바람을 들어본다. 글. 황경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 문화재청 영변성황대제의 무계 巫 系 영변성황대제 뿐만 아니라 이북지역의 굿은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무녀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어요. 이제는몇남지 않은 2,3세대 무녀 들이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영변성황대제보존회의 총무가 그간의 사정을 전해준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무 老 巫 이정연 보유자는 옆에 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영변성황대제는 월남하여 창덕궁 근처에 살던 이선호 만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명 대궐할머니 라불 린 그녀는 1972년에 영변성황대제를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품하는등평안도 굿의 대표적인 전승자로서 활동했다. 그녀의 뒤를 정대복 만신이 이었고, 지금의 이정연 보유자가3대째 성황대제 큰무당의 뒤를 이어왔다. 이를테면 영변성황대제는 뼈대 있는 무계보 巫 系 譜 를 통해 오늘까지 전승 되고 있는 셈이다.
27 지역민의 축제, 영변성황대제 묘향산맥이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며 뻗어 있고, 김소월 시인의 진 달래꽃 시에 등장하는 관서팔경 關 西 八 景 약산 藥 山 이 자리한 평안북도 영변군. 이곳 마을 사람들은 평안을 위해 수호신으로서 성황신 城 隍 神 을 섬겼다. 짚으로 지붕을 얹고 오색천이랑 조화 造 花 로 성황당을장 식했다고 해요. 보통일년에 한번이나 격년마다 성황대제를 올리는데 5일 동안 연일 계속되고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제단 祭 壇 을 북당 北 堂 과 남당 南 堂 두 곳에서 모셨으니 어마어마했겠지. 신내림을 받고난후, 신어머니로부터 들은 영변성황대제의 모습은 그녀에게 굿문서만큼 01. 마을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변성황대제. 이정연 보유자의 굿은 언제나 사람 들을 몰고 다닌다. 02. 영변성황당굿 이라고 불리는 영변성황대제의 젯상차림 03.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영변성황대제 이정연 보유자. 04. 대감놀이를 비롯한 굿거리가 5일간 계속된다. 05. 이정연 보유자가 소장하고 있는 무복( 舞 服 ). 소중하게 간직해온듯하다. 시장상인들이 장터계 契 를 조직해서 대제 에 소요되는 경비를 내고 일부는 마을 사람들이 기부할 만큼 평북지 역 내에서도 영변성황대제는큰행사였다. 지역사람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하면서 정성스럽게 영변성황대제를 올린 것은 마을의괴 병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노무의 바람 옛날부터 평안도 굿은 대동강물을 먹고 자란 무당이어야 굿을 제대 로할수있다는 말이 있어요. 나도 신어머니를 통해서 굿문서 익히 고 엄하게 배웠지. 북녘 출신의큰무당들 문하에서 엄격하게 배우 고, 이를 다시 젊은 무녀들에게 전하는 이정연 보유자. 그의 표정에 서 자부심과 책임감이 묻어난다. 2007년도에 영변성황대제가 이북 5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단 말이야. 참 고마운 일이야. 그런데아 직 사람들이 이북에서 전해오는 이런 무형문화재가 있는지잘몰 라. 누군가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까지 무녀로서 북녘의 영변성황대제를 이어온 것이 아니지만, 뭇사람들의 격려와 공감에 목이 말랐을 것이다. 일주일간 무속인의 몸을 빌린 성황신을 모시기 위해 집집마다 정성껏 제비 祭 費 를 내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흥 겹게 어울렸던 마을 사람들의 자리를 이제는 우리가 채워 가기를기 대해 본다. 03 04 05
선조들의 음식보감 28 화합과절식의 전통음식 생채 生 菜 01
29 생채 生 菜 란 삶아 익히거나 데치거나, 쪄내거나 하지 않고날것의 채소나 나물을 그대로 조리하여 먹는 자연음식을 말한다. 음식 조리법에 따라 살짝 데친 것도 생채라 하지만 자연의 기운을 보존하면서 때론 쌉쌀하고, 풋내가 나는 저마다 특유의 향과 질감을 살려 조리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이렇듯 생채음식의 근간이 되는 나물과 채소 같은 푸성귀를 때론 그 나물에그밥 이라며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비유하지만 생채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건강식이나 제철별미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한국의 오래된 전통음식이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한국의 고유한 식문화인 생채음식을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즐겨 먹어왔을까. 밥상은그시대의 기록 유산이다. 상차림, 음식, 조리법등을 통해 당시대의 풍속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문화를 엿 볼수 있기 때문이다. 글. 황영철 (푸드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2 03 고려시대부터 즐겨 먹기 시작한 생채음식 우리 식 食 문화에서 채소나 나물을 식재료로 지금 과 같은 생채음식이나 쌈음식류를 발달시킨 장본인 은 고려 사람들이다.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이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했던 숭불 崇 佛 정책으로 살생 殺 生 이 금지되면서 생채음식이 발달하게된것이다. 하 지만 이보다 앞서 삼국시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중에 병사들이 음식을 싸서 먹는 음식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의 병사들이 어떤 식재료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국, 중국, 일본세나라의 생채음식에 관한 가장오 래된기록으로6세기, 초 楚 나라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중국의 세시풍 속서 형초세시기 荊 楚 歲 時 記 에 초나라에서는 정월1월1일부터7일간 생야채만 먹는 풍습이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려 사람들처럼 즐겨 먹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고려인들이 즐겨먹고, 고려의 생채음식 문화를 발달시킨 채소는 무엇이었을까. 순우리말로는 부루 라고 하며, 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 東 醫 寶 鑑 에서는 와거 帛 瞰 라고 불렀던 상추 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의서 醫 書 인 고려시대의 향약구 급방 鄕 藥 救 急 方 에 상추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 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의 실용학문서인 성호사설 星 湖 僿 說 권5에 고려인들은 생채 잎에 밥을 싸서 먹는데, 고려의 생채는 맛이 좋다 라고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 是 議 全 書 에는 상추를 날것으로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해동 역사 海 東 繹 史, 물산지 物 産 志 편에는 청대의 문헌인 천록여식 天 錄 餘 識 을 인용하여, 고려 상추는 품질이 좋아 천금 千 金 을 줘야 구할수있을만 큼 값이 비싸다는 의미로 천금채 千 金 菜 라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 럼 상추는 고려시대 야채를 대표하고 있으면서 고려인들은 신선한채 소나 살짝 익힌 채소, 해조류까지 밥을싸먹는 생채음식 을 본격적 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 생채 식문화를원 元 나라까지 유행시켰 던 한식 세계화의 선구자들이였다. 조선시대 입춘 절식 이었던 생채음식 이후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날 것의 채소에 밥을 얹어 쌈으로 먹는 것을 복 福 을 먹는다는 의미로 복쌈 이라 한다고 동국세시기 에 기록 01. 대표적인 생채 재료인 상추는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채소로, 중국에는 당나라 때인 713년 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우리나라는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 02. 노각 생채. 노각의 껍질을 벗겨서 속은 다빼고, 살을 채썰어 소금에 절였다가꼭짜서 초고추장 양념으로 무친 음식이다. 03. 미삼생채. 동의보감 에는 인삼은 독이 없어 장기간 복용해도 해가 없으며 불로장생에 도움을 주는 상약( 上 藥 )의 대표적인 약으로, 주로 기허( 氣 虛 서양의학적으로 생리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치료하는 중요한 보기약( 補 氣 藥 )으로 쓰인다 고 기록되어 있다.
30 생채음식은 단순히 찬품의 개념보다 더불어 헤아리고, 더불어 배려하고, 더불어 화합을 생각하게 하는 맛 의 음식이기 전에 융합의 음식 이었다 04 되어 있을 만큼, 상추쌈이 생채음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상추 외에도 숙주나물, 깻잎, 콩잎, 취나물, 미나리, 머위잎, 돌나물, 소루쟁 이, 아주까리잎, 호박잎 등을 이용한 다양한 생채음식 요리법의 발달 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쓴세시풍속지 경도잡지 京 都 雜 志 나 세시풍 속집인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 경기도 여섯 지역 (양주, 청평, 포천, 가평, 삭령, 연천) 사람들은 입춘날, 눈 밑에서 돋아난 움파, 새순, 산갓, 마늘, 자총이, 당귀싹, 무릇, 달래, 부추 가운데 매운맛이 나면서 노랗고붉 고 파랗고 검고 하얀색이 나는 다섯 가지 봄나물을 골라 입춘날, 궁중 에 진상하였는데 이를 오신반 五 辛 盤 혹은 오신채 五 辛 菜, 진산채 進 山 菜, 입춘채 立 春 菜 라 한다 고 기록하였다. 조리법은 오신반을 겨자와 함께 무쳐 지금의 샐러드처럼 생채로 먹었으며, 그릇에 담을 때도 음양오행 설을 따랐다. 모든 색의 중심을 상징하며 왕을 상징하는황 黃 색 채소를 무쳐 한가운데 담고, 동서남북을 따라 신하들을 상징하는청 靑 적 赤 흑 黑 백 白 의 사색나물을 배치하는 융합의 의미와 함께, 임금과 신하가 함께 나눠 먹음으로써 사색당파를 배제하고자했던 정치적 의미가배 어 있었던 생채음식이었다. 백성들도 궁중의 입춘 절식의 의미에 따라 오신채에 다른 채소를 섞은 채소요리를 이웃에 선물하거나 함께 나눠 먹는 춘반 春 盤 이라는 입춘절 식의 세시풍속을 통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할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 예지신 仁 義 禮 智 信 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05 채소요리 전문가까지 두었던 궁중의 생채음식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의 수라상에 올릴 생채음식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게 전한다. 신선한 채소공급을 위해 서울 뚝섬에 농푸꼬지기 라는 일꾼을 별도로 두었거나, 궁중에 서 필요한 채소를 기르는 내농포 內 農 圃 를 설치해 관리인을 두었으며, 수 라간에 채증색 菜 蒸 色 이라는 채소요리 전문가 6명을 별도로 두었다. 수라상에 올리는 12첩 반상 (찬품) 에 숙채 熟 菜 라 하여 채소를 익혀 조리한 반찬과 채소를 날것으로 조리한 반찬인 생채를 올렸는데, 대표적인 궁중의 생채요리로는 잡채 雜 菜, 수삼채소생채, 겨자채, 구절판, 도라지 생채, 더덕생채, 무생채, 무굴생채, 죽순채, 삼색무생채, 미나리강회
31 06 등으로 조리법이 여간 복잡하고 섬세한 것이 아니 어서, 채소 본질의 고유한 질감과 향을 조미료 등으 로 무시하는 지금의 생채요리와는 다소 비교된다. 죽순채는 죽순을 얇게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아서 데친 숙주와 미나리, 볶은 쇠고기를 한데 넣어 새콤한 초간장 으로 무쳐내는 것이 특징이고, 겨자채는봄갓의 씨를 가루낸후, 사 발에 되직하게 개어서 한지로 덮어 부뚜막에 두었다가, 매워지기 시작 하면 수저로잘저어서 매운맛을 충분히낸후, 생채와 익힌 고기, 해 물을 겨자즙으로 무친 생채요리이다. 이 중에서, 잡채 雜 菜 는 당면이들 어간지금의 잡채와는 형태가 다른 요리로, 잡 雜 은 섞다, 모으다 라는 뜻이고, 채 菜 는 나물과 채소를 의미하여 여러 가지 채소를 섞은 생채음식을 말한다. 조선후기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飮 食 디 味 方 에 잡 채는 살짝 데쳐 가늘게 찢은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나물에 오이,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숙주나물을 날 것으로 썰어 넣고, 기름간장에 볶아낸후, 고명으로 후추나 생강을 뿌린다 라고 적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표 적 궁중요리인 구절판 九 節 板 에도 신선한 생채가 반드시 들어간다. 재료 의 특성에 따라 살짝 볶거나 데친 숙채나물이나, 쑥갓 홍당무생채 양배추채등의 생채를 빛깔을 맞추어 담았다. 조리법에 따른 맛에있 어서도 생채의 질감과 향을 살리기 위해감 ( 甘 : 단맛) 신 ( 酸 : 신맛) 고 ( 苦 : 쓴 맛) 랄 ( 辣 : 매운맛) 함 ( 咸 : 짠맛)의 다섯 가지 맛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어 떤 것을 먼저 사용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꼼꼼하 게 기록하여 둘 만큼 조선시대 궁중의 생채요리는 섬세하였다. 더욱이 궁중의 입춘 절기 음식이었던 오신반 五 辛 盤 처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된점 을들수있다. 조선왕조 27명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50세 정 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83세까지 살아 최장수왕으로 기록되었 다. 이를 후대에 들어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 는 세종대 왕과 비교하면서 식사 때마다 신선한 생채 (채소) 를 즐겨 먹었던 식습관 때문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현대의 영양학적 측면에서 보더라 도 신선한 채소 섭취는 무기질, 비타민, 철분, 칼슘 성분의 생리적역 할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해주고 있다. 우리 선조가 상추 로 시작하여 만들어 먹어 오기 시작한 생채음식은 단순 히 찬품의 개념보다 더불어 헤아 리고, 더불어 배려하고, 더불어화 합을 생각하게 하는 맛 의 음식이 기 전에 융합의 음식 이었다. 04. 무생채. 가늘게채썬무를 고춧가루로 물들인후식초, 다진파, 마늘, 설탕, 소금 등의 양념 으로 무친 것이다. 시의전서, 조선요리제법,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에 소개되어 있다. 05. 수라상에 올리는 12첩 반상에 숙채라 하여 채소를 익혀 조리한 반찬과 채소를 날것으로 조리한 반찬인 생채를 올렸다. 06. 오이생채. 어슷하게썬오이와 굵게채썬양파에 고추장, 고춧가루, 식초, 다진파, 마늘, 설탕, 소금 등을 넣고 무친 것이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에 소개되어 있다. 07. 더덕생채. 더덕을 소금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후두들겨 가늘게 찢어서 매콤새콤하게 무친 생채로 입맛을 돋우는 찬물이다. 08. 죽순. 대표적인 궁중의 생채요리중하나인 죽순채는 생죽순 을 삶아 익힌 후에 쇠고기를 넣고 볶아 만든다. 07 융합 과 화합 의 의미가 깃든 생채음식 이렇듯 조선왕조의 궁중 생채요리의 가장큰특징은, 제철에 나는신 선한 생채재료만큼이나 궁중음식을 만드는 식재료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음식의 종류도 많았다. 맛내기에 있어서는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아 대부분이 담백한 맛을 내고, 밑간 역시 우리나라 전통 간장으로 농도에 따라 진장, 중장, 청장으로 구분되는데, 나물과 채소의 특성 이나 조리법에 따라 진장은5년이상, 중장은 3~4년, 청장은 1~2년 정도 발효된 것을 쓰면서, 색과 염도를 조리법에 따라 달리 썼다. 08
자연 愛 물들다 32 어 름 치 물 고 기 만 드 는 산 란 탑 을 지정번호 천연기념물 제259호 소재지 전국 일원 지정일 1978년8월18일 학명 Hemibarbus mylodon 01 어름치는 주둥이가 아래쪽에 있으며한쌍의 수염을 갖고 있다. 몸에는 검은점모양으로 7~8개의 줄이 늘어져 있으며 등지느러미, 뒷지느 러미에는 3줄, 꼬리지느러미에는 3~5줄의 검은 줄무늬가 있는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물고기이다. 어름치는 하천의 중 상류의 물이 맑고 자갈이 많이 깔린 곳에 살며 주로 물속 곤충과 다슬기를 즐겨 먹고 산다. 알을 낳는 시기는4월말에서5월중순이며 여울의 윗부분에 자갈이 많은 곳에 알을 낳고 다시 자갈로 알을 덮어 산란탑을 만들어 보호하는 매우 독특한 산란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최대 30cm 정도까지 자란다. 우리나라 한강, 임진강과 금강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이지만, 금강의 자연 서식 개체군은 1980년대에 거의 사라진것 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금강의 어름치는 복원된 개체군이다. 글. 최승호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 전문위원) 사진. 홍양기 (순천향대학교 멸종위기어류복원센터 연구원) 한강수계 (한강, 임진강) 와 금강의 맑고 깨끗한 흐르는 물에 서식하는 어름 치는전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고유종이다. 그러나 금강 의 어름치는 서식지의 파괴및수질오염 등으로 인하여 거의 사라졌고, 한강과 임진강의 물이 맑고찬상류 수역은 대형댐축조 등으로 인하 여 어름치의 서식환경이 사라져 점차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 어름치는 산란탑을 쌓는 독특한 산란습성을 갖는 것이잘알려져 있다. 산란탑은 여울의 윗부분에 깊이 5~8cm, 지름 30~50cm, 높이 10~20cm 정도의 돌무덤 모양이며, 바닥의 자갈을 파내고 알을 낳은 후에 파낸 자갈과 주변의 자갈을 하나하나 입으로 물어와 쌓아 만들어 진다. 이러한 산란행동을 보이는 물고기는 오직 어름치뿐이다. 어름치는 아주 민감하여큰물고기나 사람이 접근하면 재빨리돌틈으 로 숨기 때문에 이들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산란과 산란 탑을 쌓는 과정이 야간에 이루어져 더욱 어름치가 산란탑을 쌓은 모습 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는데, 최근한방송사에서 어름치가 산란탑을쌓 은 모습을 촬영하여 산란탑은 오직 암컷만이 쌓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러나 먼저 자갈을 파서 알을 낳을 자리를 만드는건수컷인지, 암컷인 지 촬영되지 않아 확실히알수없지만, 아마도 수컷이 알을 낳기 위한 자리를 만들고 암컷은 알을 낳고 자갈을 덮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럼왜어름치는 산란탑을 쌓는 걸까? 첫 번째는 알의 보호이 다. 알은 영양분이 매우 풍부하여 주변에 있는 물고기들이 가장 좋은 먹잇감이다. 따라서 알을 낳고 자갈로 덮어 다른 물고기들이 알을 먹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풍부한 산소의 공급이다. 알의 부화를 위해서는 많은 산소가 필요한데 산란탑에 부딪치는 물이 자갈 틈으로 들어갈때흐름이 빨라져 산소가 풍부한 신선한 물이 알에 공급
33 02 되게 하여 부화를 돕는다. 이런 산란행동은 오직 어름치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으로 우리만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자연의 유산이다. 금강의 어름치는 1980년대 말에 자연 서식 개체군이 급격히 줄어들어 금강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2년부터 정부 의 노력으로 금강의 어름치 복원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어 치어를 생산 하여 이후약5년간 매년 금강에 방류하였고, 이후 금강에서도 어름치 의 산란탑이 확인되어 복원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금강 에 서식하는 개체수가 적어 2009년부터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등관 련 단체에서 매년 어름치 치어를 방류하고 있다. 사실 어름치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활동이다. 그중 하나 는 불법 다슬기 채취이다. 어름치의주먹이는 다슬기인데 어름치서 식지에서 불법으로 다슬기를 채취해 점점 먹이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 다른 위협은 산란기에 행해지는 래프팅이다. 어름치의 산란탑은 수심이 50cm 전후의 얕은 곳에 있어 래프팅 보트가 지나가며 산란탑 을 파괴한다.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는 지난 6월22일 옥천군 이원면 학생야영장 앞금강에 어름치 3천500마리를 방류했다. 이날 방류된 어름치는 지난해 한강의 어름치 알을 인공부화시켜1년간 기른 것이 다. 금강의 어름치 보존을 위해서는 이러한 활동과 함께 어름치 서식 지에서 다슬기 채취와 래프팅을 자제하는등국민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01. 어름치 산란탑. 어름치는 여울의 윗부분에 자갈이 많은 곳에 알을 낳고 다시 자갈로 알을 덮어 산란탑을 만들어 보호하는 매우 독특한 산란습성을 가지고 있다. 02. 어름치. 어름치는 주둥이가 아래쪽에 있으며한쌍의 수염을 갖고 있다. 몸에는 검은점모양으로 7~8개의 줄이 늘어져 있으며 등지느러미,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에는 검은 줄무늬가 있는 수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물고기이다.
문화재 돋보기 34 2012년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은 외국인의 수는총46명 (중국 31명, 미국5명, 아일랜드2명, 영국 5명, 캐나다2명, 일본 1명)이다. 아일랜드인의 경우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도볼수있어 다소 정확하지 않을수있다. 중국인이 가장 많은 것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 유일한 일본 인은 변호사 후세 다츠지 ( 布 施 辰 治, 1880~1953)이다. 본 글에서 소개하는 조지 쇼는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특출한외 국인중한명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 대한 포상은 1963년에 이루어졌으나 훈장이 수여되지 못하다가 2012년 8월 16일 비로소 손녀인 마조리 허칭스에게 전달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쇼의 죽음 이후 그동안 후손 간의 연락이 단절된 때문이었다. 쇼의 활동상을 되돌아보면서 한국독립 운동을 도운 외국인의 사례가 어떠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글.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합콘텐츠 01
35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 조지 쇼 01. 조지 쇼(George Lewis Shaw, 1880~1943). 아일랜드계 영국인 사업가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의 망명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02. 1919년3월1일을 기해 거국적으로 만세운동 (3 1운동)이 일어났다. 조지 쇼는 3 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시작했다. 02 조지 쇼는 어떤 인물인가 조지 쇼 (George Lewis Shaw, 1880~1943) 는 중국 푸젠성 ( 福 建 省 ) 푸저우 ( 福 州 )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사무엘 루이스 쇼와 어머니 알렌 오의 장남으로출 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10대 때부터 선원생활을 하며 동방에서 무역업 에 종사하였고 1868년부터 푸저우의 파고다 아일랜드에 정착해 해사 검정인으로 활동했다. 쇼는 이런 부친의 도전적인 상인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1900년경 한국의 은산금광 회계로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과 첫 인연을 쌓았다. 은산금광의 채산성이 맞지 않자 1907년 중 국 안동현 (지금의 단동) 으로 옮겨 무역회사겸선박업을 하는 이륭양행을 설립했다. 쇼는 1912년 일본인 사이토 후미와 결혼했는데 이후 그의 둘째 아들 루이스 리도 역시 일본인과 결혼했다. 이 같은 결혼으로쇼 의 집안은 부친부터 아들까지3대에 걸쳐 일본인 아내를 맞이한 독특 한 집안이 되었다. 3대에 걸쳐 일본인 아내를 맞이한 집안 내력을볼때일본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쇼의 활동을 보면 철저하게 반일 적이었다. 대체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사업상 일본인과 경쟁 하는 처지여서 반일적인 성향을 가졌다. 때문에 1914년 상하이에서일 본상품배척운동이 전개될 때 쇼도 앞장서서 반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쇼의 반일적인 성향은 사업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민족 해방을 꿈꾸는 아일랜드인의 혈통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쇼에게큰영 향을 미쳤다. 아일랜드는 16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그후독 립과 자치를 사이에 두고 지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쇼 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1916년 4월 아일랜드인들은 부활절 봉기 를 일으켜 영국과의 혈전을 감행하였고 1919년 1월부터 본격적인 독립전 쟁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1921년 겨울 애영조약 愛 英 條 約 의 체결로 1922 년1월아일랜드자유국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영국 자치국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평소 식민지한 국인의 처지를 아일랜드인과 비교하며 동정하던 쇼는 때마침 아일랜 드인들이 전면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인 1919년에3 1운동이발 발하자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을 돕기 시작하였다. 쇼는 망국민을동 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독립의 열망을 가진 한국인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다.
36 쇼와 한국 독립운동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5월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 건물2층에 정보수집과 연락을 담당하는 통신기관 인 안동교통지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설치는 사전에 쇼와 임정 요인 들 간의 교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그해10월 17일 새로운 편제로 기존 명칭을 바꾼 안동교통사무국은 쇼의 비호아래 독립운동 자금모 집, 국내의 정보수집, 임정 지령및서류의 통신, 주요 인물의 소개, 무 기 수송등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쇼는 이륭양행을 통해 국내나 만주및상하이로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길잡이 역할을해주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선박을 이용하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김구 는 3 1운동 직후 쇼의 도움으로 무사히 상하이로 망명할수있었고 육삼정의거 六 三 亭 義 擧 의한사람인 백정기는 동지4명과 함께 안동을 방문했을 때 쇼의 도움으로 봉천에 있는 이강훈을 만날수있었다. 또 쇼는 자신의 선박 계림환 械 林 丸 에 승선한 임정 요인들을 일본 군경이 체포하려 하자 이를 막아내 무사히 상륙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 쇼가 얼마나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는지는 일제측이 작성한 심문보 고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이륭양행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증거를무 수히 확보한 기록에서도 잘 드러났다. 일제의 구금과 영일간의 외교분쟁 일제는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국내및만주지역을연 결하는 안전통로이자 독립운동 단체들의 거점, 또는 전진기지의 하나 로 평가하였다. 그리고그배후 인물로 쇼를 지목하고 철저한 감시대 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조선총독부는 1920년 7월 11일 처자를맞 이하기 위해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가던 쇼를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계획적으로 체포하였다. 임정및독립운동 세력의 안동지역 활동을 발본색원할 기회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쇼를 내란죄 명목으로 기소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시켰다. 치외법권을 가진 쇼의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은 영국정부의 반발을 초래했다. 일제는 1902년부터 영일동맹을 맺은 이후 영국과 비교적 호의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영일동맹은 1921년 7월 13 일 종료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물론 영국의 국회와 언론 들이 제기하는 쇼의 무조건 석방 요구를 일본 정부는 무시할수없었 다. 일본 내각은 쇼를 수감한지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 보석으 로 석방시켰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영국 정부가 계속 쇼의 무죄를 주장하자 결국 일제는 보증금마저 쇼에게 되돌려 주고 사건을 종결 시켰다. 03. 2012년 8월 16일, 대한민국 독립의 숨은 영웅 조지 쇼의 손녀인 마조리 허칭스에게 건국공로 훈장이 전달됐다. 04. 사적 제299호 화성 제암리3 1운동 순국 유적. 3 1운동때 일제가 독립 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03 04
37 05 일제의 축출공작 출옥후안동으로 돌아온 쇼는 일제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정의와 인도를 위해 더욱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 다. 이러한 쇼의 행동에 대해 임정은 1921년 1월 상하이에서 환영회를 개최하고 금색 공로장을 수여하였다. 1921년 5월 쇼는 김문규를 이륭 양행의 직원으로 채용해 비밀통신, 정보수집, 군자금 모집등안동교 통사무국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922년8월8일 김문규가 일제에 체포됨으로써 안동교통사무국은 사실상 해체되고말 았다. 1923년 2월 쇼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촉구하고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들 간의 상호 교섭계획을 추진하였 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의열단의 국내거사계획의 지원, 통의부와 정의부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무기 수송, 김승빈의서 울 밀파 협조 등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동안 쇼를 감시하며 사업방해를 서슴지 않았던 조선총독부는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어용회사인 대안기선공사를 설립해 이륭양행 매수공작과 쇼의 축출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축출공작에 따라 쇼는 1935년 2월 대안기선공사에 이륭양행의 선박과 압록강 항로권을 매각 하였고 1938년 4월 경영난을 못 이겨 이륭양행의 본점을 푸저우로이 전시켰다. 쇼가 떠남으로써 안동을 거점으로한독립운동의 지원활동 도 막을 내렸다. 쇼의 경우와 달리 대부분 수많은 외국인들은 한국 독립문제에 대해방 관자적 입장을 취하였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취한 외국인들을 비판하 거나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유독 한국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후원하거나 몸소 뛰어든 외국인들에 대해선 결코 무관심하거나 냉담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고난과 역경 속에 빠져 있었을때기꺼 이 도와주었던 그런 외국인들의 후의를 결코 잊어서는안되고 오히려 더 발굴하고 더 선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 06 07 05.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쇼는 이륭양행을 통해 국내나 만주및 상하이로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길잡이 역할을해주었다. 예컨대 김구는3 1운동 직후 쇼의 도움으로 무사히 상하이로 망명할수있었다. 06.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은 외국인 46명 중 유일한 일본인으로, 1920년대 비타협적 항일운동을 펼친 의열단 관련 사건을 맡아 변호했다. 07.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3 1운동 민족대표 34인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전에 근무하던 1919년 독립운동 이 일어나자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했다.
Zoom In 무형유산 38 천년의학, 고매한몸짓 학연화대합설무 01 02 01. 학무. 임금을 송축하기 위해 학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 고려 때부터 궁중의례에서 행해 왔으며, 새의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02. 학무의 뛰고 날아도는 사위. 03. 상대무. 한국 전통무용에서, 상대방 무용수를 마주 대하고 추는 춤동작을 말한다. 대무( 對 舞 ) 라고도 한다. 04. 백학과 청학. 무대앞중앙에는 등이 있고그양쪽에는 꽃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신성이 조화를 이룬 주변에는 백학과 청학이 동발을 든 악사에 의해 점잖게 등장한다. 학연화대합설무 중요무형문화재제40호로 지정된 궁중무용. 학무 鶴 舞 와 연화대 蓮 花 臺 가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궁중무용에서 대작 大 作 에 속하는 작품. 고려사악지에서는 학춤과 연화대무가 불가분의 관계의 춤인데 반해 악학궤범에서는 학춤이 따로 독립되어 기록되어 있다. 글. 김지원 (한국무용가) 사진. 문화재청 학무 와 연화대무 가 더해진 춤사위의 진수 무대 앞 중앙에는 등이 있고그양쪽에는 꽃이 놓여 있다. 뒤로는 등과 꽃의 사이로 연통 蓮 筒 이 동서로 갈리어 있고 꽃이 나란히 일자로 수를 놓는 듯 가지런하다. 신성이 조화를 이룬 주변에는 청학과 백학이 동발을든악사에 의해 점잖게 등장한다. 신비한 기운마저 감돈다. 청하하고 맑은 춤사위가 이어진다.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 무대뒤 편의 지당판 池 塘 板 에 나와 때론 가뿐하게 나는듯춤을 추다가 구부려서 먹이를 쪼아 보기도 하고긴숨을 들이키려는듯머리를 들어 하늘을 주시하기도 한다. 돌아서며 나는듯서로 마주하고 머리를 들어 부리 를 마주치기도 한다. 고운 춤사위를 이어가다 지당판으로 올라가 연통 을 쪼아댄다. 연통이 벌어지고 순간그속에서두어린 무동이 나타나 니 학이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나간다. 연통속어린 무동이 지당판으 로 내려오면또다른 무희두사람과 죽간자 竹 竿 子 두 사람이 나와 동서 로 나누어 서고 음악이 그치고 죽간자가 구호를 칭한다. 이어 죽간자 가 좌우로 나가서고네무동은 앞으로 진보하여 서로 마주보기도 하고 돌기도 하면서 사뿐사뿐 춤을 이어 나간다. 학과 무동들의 춤은 각각 학무, 연화대무 로 서로 주고받는 말을 잇듯 연결하여 추는 춤이바 로 학연화대합설무 라는 춤사위의 진수를 보여준다.
39 왜 학이 등장하는가? 학은 시대와 종교적 이념에 상관없이 유교나 불교, 도교에서도 매우 신성시 여겼던 동물이다. 불교에서는 학이 동물의 업보를 가지고 태어 난 새가 아니라 법문을 전하기 위해 아미타불께서 변한 것이라 한다. 도교적인 무위자연 無 爲 自 然 의 입장에서 보면 학은 신선이 타는 동물또 는 신선자신을 지칭하기도 한다. 유교에서도 학의 고고한 인격과 철학 을 높이 숭상하여 기품 있는 선비의 품성을 대표하였다. 그러기에사 자가 서역의 동물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숭상되었던 것에 비하면, 단 군신화의 곰 토템을 넘어서 토착적으로 가장 오래 신성화된 영물이바 로 학이 아닌가 싶다. 북청사자놀음 에서도 사자의 탈을 쓰고 춤을 추긴 하지만 놀이로서 유희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 학춤은 학의생 태를 연구하고 학을 모방하는 춤으로그모습만으로도 숭상하는 마음 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왜 궁중무용인가? 학연화대합설무의 악기는 삼현육각으로 편성된다. 학무의 반주음악은 세령산, 삼현도드리, 타령 음악을 사용하고 연화대무에서는 당악계음 악인 보허자 步 虛 子, 삼현도드리, 잦은도드리타령, 잦은타령, 타령으로 모두 궁중음악만으로 이루어진다. 궁중무용은 윗사람 (임금) 에게 드리는 재주를 뜻하는 정재 呈 才 로 궁중의 의식에 드리는 기예를 뜻한다. 학연화대합설무에서 보이는 학무가 민속의 학춤과는 다르듯, 궁중무용은 절제하는듯기품 있는 형식으로 추어지며 연희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궁중무용은 조선 후기 순조때 황금기라할수있다. 이 무렵은 왕의 진연 進 宴 때마다 새로운 정재를 만들어 바쳤을 정도로 다양한 궁중무용을 만들었다. 궁중무는 유형에 따라 당악무용 唐 樂 舞 踊 과 향악무용 鄕 樂 舞 踊 으로 나뉘는 데, 당악무용은 고려 문종때송 宋 나라로부터 도입된 춤으로 춤의 시작 과 끝을 죽간자 竹 竿 子 (무구의 하나, 또는 그것을든사람)가 인도하고, 한문으로된 노래가사를 부른다. 이에 반해 향악무용은 한국 고유의 춤으로 조선 세종 이후 체계화되었으며, 춤을 추는 사람이 죽간자의 인도 없이무 대에 등장하여 한글 가사로된노래를 부르는 것이 훨씬 자유로운형 식을 띤다. 학무, 한국의 선비정신으로 우뚝 서다 선비들의 관복에는 가슴과등문양에 수놓아진 학의 수로써 서열을구 분하는 징표로 삼았다. 학자들이 즐겨 입은 검은 깃으로 두른 흰색의 복은 평소 학과 같이 깨끗한 품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른 심성의 표출 이라고 볼수있다. 학은 특별히 어떠한 종교나 이념적인 체제 안에서 도 동요되지 않고, 한국의 풍류도와 같이 때론 복합적인 이념을 아우르 면서 민족혼을 표상하는 신화적인 소재임에 틀림없다. 학을 모방한춤 은 고고한 선비의 이미지와 함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학의 형상을본 따 이상세계를 지향하고 복을 바라는 뜻에서 추어진다. 학춤은 기개와 품위, 관용, 이상향에의 지향을 고고하게 기품 있는 몸짓으로 이야기한 다. 신이 인간에게 전해야 하는 바른 정념을 신성한 영물을 통해 들려 주는 얘기가, 음악이 신의 목소리이며 우주의 구현이라고 했던 예술의 태동에서 학춤의 예술성은 선비의 기개가 단연 돋보인다. 03 04
Design Heritage 40 [Design Heritage] 짝을 이루어 조형미를 갖춘 평상 01 논어 論 語 공야장 公 冶 長 에 낮잠을 자던 재여가 공자에게 꾸지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읽었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낮잠은 좋지 않은 습관으로 여겨졌으리라 짐작되지만, 더운 여름날에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으리라. 이것은 평상이라는 기물 器 物 과 평상에서 잠을 자거나 누워있는 장면을 담은 조선시대 그림이 여실히 증명해 준다. 단순한 사각형을 더하여 몸과잘어울리고 움직일수있는 여유 공간을 가지고 있는 평상은 자기를 낮추어 사용하는 사람의 생활의 품격을 높였다. 네 개의 선으로 가장 넓은 면적을 만들어내는 사각형의 실용성과 우리네 전통 가구에 스며있는 균제미를 평상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글. 김동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호암미술관
41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는 평상 생활 풍속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를 살펴보면,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들은 입식 立 式 생활을 했음을알수있다. 4세기 중엽에 축조된안 악3호분의 주인공은 중국의 망명자였던 동수 冬 壽 라는 설과 미천왕이 나 고국원왕 같은 고구려 왕이라는 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덤의주 인공이 장막을 두른 평상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 있다. 408년 경에만 들어진 덕흥리 고분에도 무덤의 주인공인진 鎭 이 평상에 앉아있는모 습으로 그려져 있다. 약수리 무덤 (5세기 전반) 과 쌍영총 (5세기 후반) 에는무 덤의 주인공 부부가 평상에 나란히 앉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보 이는 낮은 평상은탑 榻 인데, 한 사람이 앉을수있는 것은 독탑 獨 榻, 두 사람이 같이 앉을수있는 것은 합탑 合 榻 이라 한다. 탑은 중국 한대 漢 代 의 좌식 坐 式 가구가 생활방식이 다른 고구려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 기도 한다. 덕흥리 무덤과 쌍영총 벽화의 탑은 사각형으로4개의다 리가 있으며, 앉은면아래에는 화염문 火 焰 文 또는 톱니 모양의 돌기를 내어 장식하였다. 약수리 무덤의 탑과 함께 모두 검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 나무로 만들고 칠을 입힌 가구임이 분명하다. 平 床 02 고려의 평상 중국송 宋 나라 관리로 고려 인종 仁 宗 원년 (1123) 에 사신으로온서긍 徐 兢 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 宣 和 奉 使 高 麗 圖 經 에는 좌탑 坐 榻 과 와탑 臥 榻 이 소개되어 있다. 좌탑은네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큰 자리를 얹어놓는 다. 관사 안에 지나다니는길사이에 두고, 관리들이쉴때사용하였 다. 와탑은3면으로 난간이 세워져 있으며, 비단 보료가 깔리고큰자 리가 놓여 있다고 하였다. 단지 국왕과 귀한 신하에 대한 예식이 있거 나, 중국 사진을 접대할 때만 사용한다고 서긍은 전했다. 이렇듯 고려 에서도 밖에 두고 쉴 때 사용하는 좌탑과 실내용 가구로서의 와탑등 의 평상이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이 사용한 평상 퇴계 退 溪 이황 ( 李 滉, 1501~1570)의 제자 이덕홍 ( 李 德 弘, 1541~1596)은 선생은 한가히 있을 때에도 온종일 단정히 앉았고, 혹 기운이 피로하고 몸이 곤하더라도 어디에 기대거나 자세가 풀어지는 기색이 없었다. 고퇴 계의 몸가짐을 전했다. 퇴계와 같은 선비는 평상에서 낮잠을 자는 01. 19세기 조선시대 평상(호암미술관 소장). 느티나무로 판각을 두른 판재는 상부의 힘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신뢰성을 주고 있다. 은행나무 난간은 연당초문을 투각하여 상부를돋 보이게 하며, 두 짝으로 구성된 입구에는 낮은 난간을 설치하여 아늑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02. 증보산림경제( 增 補 山 林 經 濟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서재와 사랑방 가구에 대해 기록하면 서 평상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03. 고구려시대 무용총 벽화에 나타나 있는 평상. 03
42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김시습 ( 金 時 習, 1435~1493)은 산중에열가지 경취 景 趣 를 말했는데, 이중 아홉째가 평상 위에서글읽는 것을 꼽았다. 경 기도 광명시에 있는 오리 梧 里 이원익 ( 李 元 翼, 1547~1634) 종택 宗 宅 의 사랑채 에는 평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류중림의 증보산림경제 增 補 山 林 經 濟 (1766)에는 서재와 사랑방 가구가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평상이 있다.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윤두서 ( 尹 斗 緖, 1688~1715)가 그린 수하오수도 樹 下 午 睡 圖 에는 여름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평상을 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인물이 표현되었다. 단원 檀 園 김홍도 ( 金 弘 道, 1745~1806?)가 1801년에 그린 삼공불환도 三 公 不 換 圖 에도 사랑채 대청마루에 평상을 놓고, 그 위에 사람이 누워 있는 장면이 있다. 전원의 즐거움을 삼공 의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 는 것이 제목의 뜻이다. 선비가나 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크게 부끄러워하지만, 평상의 즐거움도은 근히 누렸던 것이다. 조선시대 평상은 바닥을 띠살로 하고, 난간이 있으며, 2~3개 정도를 붙여서 사용한 형태가 많다.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대청마루나 누 樓 마루 등에 놓고 앉거나 눕거나 하는 침상이다. 평상 위에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손님과 더불어 차를 마시거나 수담 手 談 을나누 었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자리를 깔고 사용하기도 하였 고, 사랑채 온돌방에 두고 사용하였다. 바닥이 띠살로 되어 있는 평상 은온돌의 온기나 마루의찬기운이 스며들어 계절에 따라 사용자를따 뜻하게 혹은 시원하게해준다. 3면을 살창같이 얕은 난간을 두고 금속 으로 장식한 것을 살평상이라 하고, 평판을 댄 것을 널평상이라 한다. 平 床 04. 조선시대에 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평상. 사랑방에서 침상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동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05. 김홍도필<삼공불환도( 三 公 不 換 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일부분. 한가로우면서도 시정이 깃든 전원의 생활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평상에서 쉬고 있는 선비의 모습 도 보인다. 06. 전통 평상의 형태와 디자인을 응용한 원목소파. 평상의 안정감과 현대적 디자인 을 접목시킨 것이 특징이다. 04
43 사각형이 어울린 실용성과 안정감 대개두개가한쌍을 이루어 기능을 발휘하는 평상의 기본형은 사각 형이다. 평상의 길이와 너비는 대개 2:1의 비율로 되어 있다. 두개이 상의 사각형이 모여 전체적으로 쾌적한 비례미를 가지는 우리 가구 는 많다. 농은 기본적으로 2~3개의 상자를 쌓아서2층농, 3층농의 형태를 갖는다. 평상은 농에 비교한다면 사각형을 수평으로 이었다 고할수있다. 이러한 조형원리를 통해 여러 변형을 가능케 하고, 공 간 활용의 융통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구의 특징이다. 평 상에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한 사용자나, 이를 만든 소목장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2~4쪽으로 분할되는, 심지어는 난간도 분리 결합이 가능한평 상은 옮겨 사용하는데큰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중국에서는 평상 과 비슷한 탑이라는 기물이 유행하였다. 평상은 탑에 비해 비교적낮 다. 이는 기본적으로 좌식생활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지만, 평상은낮 아짐으로 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배가 시킨다. 기능적으로 평상 위로 오르내릴 때의 수고로움도덜수있으며, 덜컥 앉아서 쉬기 도 수월하다. 난간이 있는 살평상은 평상 밑으로 사람이나 기물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할뿐아니라 단조로운 사각형 위에 장식 변주를가 미한 것이다. 그리고 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칭의 안정감을 뚜렷 이 부각시킨다. 호암미술관 소장 평상(그림 01)의 난간은 연당초문을 05 투각하여 평상을 사용하는 이의 격을 높이고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용된 평상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는 좌식 생활 방식에 알맞은 모양새를 갖추게되 었다. 실용성과 사각형의 조형미를 모두 갖춘 평상에서 조선 사대부 들의 조화와 여유, 풍류를 엿보는 즐거움을 누려볼 수 있다. 06 06
생동하는 문화재 현장 44 바닷속 문화재 찾는 누리안호 가보니 글 사진. 이재유 (서울경제신문 문화레저부 기자) 일반인이 문화재 발굴 현장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라고 해도 시간 거리적 한계 때문에잘찾아오 지 않는 기회다. 지난 19일 인천 영흥도 해역에서의 발굴조사를 마치 고 곧 진도로 이동할 온누리호를 찾았다. 바쁜 마음과 달리 서울에서 영흥도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오전8시 서울 강남에서 출발했지만 자동차로 꼬박2시간, 다시 선착장에서 40분여를 배로 이동해서야 인천 영흥도에서 작업하고 있는 누리안호 에 닿을수있었다. 누리안호는 문화재청이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 최대 (290톤급) 수중 발굴 및 인양 전용선박. 각종 잠수 장비는 물론, 강 이나 바닥에 덮인 흙을 걷어내는 제토설비와 선체를 끌어올릴 인양장 비인 크레인도 2대 갖추고 있다. 이 날은 2달 여에 걸친이지역 탐사를 마무리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갑판에는 이미 끌어올려진 길이 4m 정도의 선체 외벽조각2점이놓 여있었고, 잠수부들은 조류가 약해지는물때에 맞춰 입수 준비에여 념이 없었다. 이곳은 고려 때인 12세기 말경 침몰한 길이 20~30m 상업용 목선이 침몰한 지역이다. 이날까지이지역에서는 철제 솥과 고려청자, 배 외벽 조각 등을 포함해총800점이 발굴됐다. 발굴된유 물은 태안의 연구시설에서 후처리 과정을 거친다. 첫 잠수부가 바다에 들어가고,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제2, 제3의 인원이 바다로 투입됐다. 잠수부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케이블 뭉치 가 길게 풀어져 물속으로 사라졌다. 케이블을 구성하는4가지선중 노란색 선은 공기 (산소와 질소가2대8 비율), 회색은 수심체크 게이지, 그리 고 라이트와 CCTV 케이블이다. 갑판위2층에 위치한 잠수통제실에 는 잠수부의 머리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수중 유물 발굴 현장이실 시간으로 중계된다. 최대 8명의 잠수부에 대한 산소 공급, 제토 작업 등 수중 발굴작업의 모든 상황을 컨트롤한다. 마지막 잠수부가 입수한지20~30여 분쯤 지났을까, 첫 팀이 먼저선 체 조각을 들고 올라왔다. 크레인으로 내려진긴운반대에 선체 외벽 일부가 단단히 고정된 상태로 인양됐다. 발굴된 배의 선체 조각은배 의 옆면 부분3조각이다. 배 전체로 치면 10~15% 정도 남은 셈이다. 배가 침몰해 바닥에 가라앉은후, 그 안에 실린 철제 솥에 눌린 부분 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떠내려갔다. 01 02
45 인양된세조각도 온통 벌레 먹은 자국으로 구멍이 송송 뚫려있지만, 진흙과 바닷물에 잠겨 있어 800여 년 된 유물로는 상태가 좋은 편이 다. 기본적으로는 태안이나 완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처럼 나무 판을 어금버금 맞물려 받혀놓은 형태에, 최종적으로는 나무못을 끼워 넣어 고정시킨 흔적이 있다. 하지만 연결부분 모양이 약간 달라, 향후 연구에 따라 새로운 건조양식에 대한 발견도 기대됐다. 고려청자와 철제솥등유물들도 차례로 갑판에 올려졌다. 흙과 돌이 엉겨 붙고 부식됐지만, 세로로 속이 깊숙한 모양만은 분명히 드러났 다. 이번 발굴에서는 철제솥20~30점이 대거 발견됐다. 과거 발굴된 선박에서는 선원들의 식사를 위한 솥 서너 개가 나오는 정도였다.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장은 수십 개의 솥이 발견 된 것은 이것이 원래 제작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화물이었다는 점과 그만큼 해상운송이 활발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고려때곡물 도자기 외에도 개경으로 가는 물건이더있었다는 증거다. 선박 발달 사에서 공백기인 12세기 말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 라고 설명했다. 발굴 작업은 밀물과 썰물 때에 맞춰 보통2번, 급할 때는3번까지도 이뤄진다. 현장을 지키고 있는 연구원이 직접 들어갈 때도 있지만, 대체로 민간 잠수부4명이2명씩 조를 이뤄 통상2시간 씩 작업에 들어간다. 시간은 보통 조류가 약한 아침9시와 오후1시, 그리고 오후 7시 언저리다. 이 배는 오랜 기간 물속에서 작업하는 연구자들의 잠수병에 대비한 감압 챔버도 갖췄다. 이 장비가 없으면 작업시간은 깊은 수심에서 수면으로 올라올때, 인체에 작용하는 압력을 단계적으로 줄이는시 간이 필요하다. 즉 작업시간이 앞뒤로 뭉텅 잘려나가게 되는데, 이 설 비로 인해 작업시간을 벌고, 또 그만큼 효율도 높아진다는 얘기다. 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해저발굴에서 가장중 요한건잠수부의 안전이다. 수면 아래 20여 미터를 내려가 땅을 파고 흙을 걷어내고 촬영과 인양까지 하는 과정에서 아찔한 순간이 많았 다. 대개 산소통이나 마스크등주로 장비 문제지만, 탐사중그물에 걸리거나 잠수병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고 말했다. 그의 말처 럼 잠수부들은 바다 바닥을 훑어가며 때로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서 발굴작업에 나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사람 들은 이를 쉽게 잊는다. 일반인들은 보통 뉴스나 신문을 통해 새로운 유물이나 유적 발굴 소식을 전해 듣지만, 그 유물이 사람들 앞에 선보 이기 전까지의 지난한 과정은잘알아주지 않는다. 사회적인 무관심 과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서도 묵묵히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그들 에 보험 가입조차 거부되는 현실은 뭔가 개선점이 필요해 보인다. 누리안호에는 통상 민간잠수사4명과 연구원3명, 선박직원8명등 조사단 20여 명이 탑승하고 있다. 한 번 출항하면 20여 일간 해상에 서 머물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고, 동시에 잠수부4명이 탐사 발 굴 가능하다. 이번 인천 일정을 마친 온누리호는 오는 26일부터 진도 오류리 명량해전지 발굴현장으로 투입된다. 명량해전으로 유명한이 지역에서는 당연히 거북선이나 안택형선 (일본 대형전선), 조총 등을 찾는 것이 제1 과제다. 04 03 01. 누리안호. 아시아 최대의 수중 발굴및인양 전용선박으로, 각종 잠수 장비는 물론, 제토설비 와 크레인도2대갖추고 있다. 02. 누리안호 인양 장면. 크레인으로 내려진긴운반대에 선체 외벽 일부가 단단히 고정된 상태로 인양됐다. 발굴된 배의 선체 조각은 배의 옆면 부분3조각이다. 03. 잠수통제실에는 잠수부의 머리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수중 유물 발굴 현장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잠수부에 대한 산소 공급, 제토 작업등수중 발굴작업의 모든 상황을 컨트롤한다. 04. 발굴된 청자. 발굴 유물은 태안의 연구시설에서 후처리 과정을 거친다.
문화재 사랑과 만나다 46 연못 위의 정자, 하엽정 荷 葉 亭 글 사진. 이광만 (문화재수리기술자) 01 조선시대 사대부 주택의 전형인 달성 삼가헌의 별당마당에는 네모 난 연못과 그 속에 둥근 섬이 있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하늘과땅, 음과 양의 철학적 의미로 해석되는 조선시대 고유의 정원지당 양식 이다. 그리고 그 위에 연꽃잎 정자 가 떠 있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마을은 사육신의한사람인 충정공 박팽년 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묘골마을과 낮은산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 파회 마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택이다. 삼가헌 三 可 軒 이라는 이름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가 1769년 이 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한것에서 유래한 다. 그 뒤 그의 아들 박광석이 1783년에 이웃 묘골 마을에서 이곳으 로 분가하였고, 1826년에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이 집이 삼가헌이라 불리게된이유는 사랑채에 걸려 있는 기문 記 文 에 적혀 있다. 세 가지 가능한일, 즉 삼가 三 可 란 중용 中 庸 에 나오는선 비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 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수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 가 바로 그것이다. 삼가헌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영남내 륙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넓은 대지 에 안채와 사랑채 (삼가헌),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별당채 (하엽정), 그 외 여러 부속채로 구성된 배치 형식은 사대부 가옥의 공간 구성과 생활 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랑채인 삼가헌에서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가면 마당은보 이지 않고 연꽃이 가득핀네모난 연못과못가운데 둥근 섬이 먼저 보인다. 이 연못은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때흙을 파낸 자리에 연을 심어 연당 蓮 塘 으로 가꾼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연못가에 별당채인 하엽정 荷 葉 亭 이 있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파산서당 巴 山 書 堂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뱀의 꼬리를 닮은 파산 巴 山 은 묘골마 을 뒤쪽에 있는 마을의 주산으로 서당의 이름을 여기에서딴것으로 여겨진다. 서당으로 사용된 하엽정은 원래4칸규모의 일자형 건물 이었는데, 그 후 앞에 누마루한칸을 늘려 붙여서 현재의 ㄱ 자형 의 정자를 이루고 있다. 필시 연못을더가까이서 보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방보다1자는더높은 누마루에 올라앉으면 연꽃이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