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 鮮 科 學 史 JB409.11-1 洪 以 燮 (홍이섭) 著 - 東 京 : 三 省 堂 出 版 ( 株 ) 1944년( 昭 和 19) [서론] 一. 과학사의 방법 인류의 행복의 증진은 과학과 자연과의 투쟁에 관련된다. 국가의 국방적 건설과 국토 계획 이야말로 국민생활의 최고의 지표인데 그 기초적 문제는 과학에 있다. 그러므로 현대 인류생 활의 기술적 문제로서의 과학의 수준이야말로 그 국민생활을 규정하며, 과학의 발달은 국민문 화의 모든 것에 제약을 줄 것이다. 지금은 과학의 연구가 역사과학의 각광을 받아 사학분야에 등단하여 가장 긴요한 위치에 이르렀다. 과학의 역사야말로 인류가 건설한 역사이다. 라고 말 한 듀이, 보아, 레이먼드의 참된 의미는 인류사는 곧 과학발달 그 자체의 역사에서만 파악된 다는 것이다. 二. 조선 과학사의 연구대상과 그 범주 조선인은 과거의 생활사에서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면과 기술의 규정, 진화를 알아야 과학사 에 관심을 가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이 들의 현실적 요인인 사회, 경제와의 관련에서 종합적 전체적으로 취급하고, 정치형태 내지 관 념형태와의 상호관계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조선에 전해오는 조선 문화에 관한 문헌에서는, 너무 특수화한다든지 또 한편으로는 당연히 과학적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을 말살하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조선과학사의 학문적 입장으로서는 과학적 가치의 말살과 문화의 특 수화 등 비과학적이며 너무나도 문화적인 방법은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한 과학적 입장 에서 정당한 비판에 의하여 이해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분적 특성보다도 더 일반적 인 생활사인 과학, 기술의 역사를 인식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 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원시시대의 기술부터 구명해야 할 과학의 면모를, 영세한 고문헌과 수집한 유물로서 복원 할 것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자의 발전 및 통일에 의한 과학 기술의 변천된 출토유물인 침묵사 료와 영세한 문헌 및 중국과학사, 일본과학사로부터의 자료의 相 補 와 다음 고려 봉건사회는 전기에 통일한 신라의 것을 승계하고 또 당시의 외국문화의 수입에 의하여 발전시키고 고려를 승계한 이조 봉건사회의 과학은 소위 세종시대를 중심으로 한 왕권적 궁정과학의 편성을 보며, 후의 영정 2대의 군주에 의한 청조문화의 수입에 의한 궁정과학의 재정비와
실사구시학파의 실증적 학풍이 일어나므로 서구적인 과학사상의 유입을 본 것 등이 인식 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조 봉건사회 최종의 절대적 왕권주의자 대원군에 의하여 그 싹은 잘리고 말았다. 따라서 다단한 전기가 될 근대적 개방에 의하여 재건하려던 서구적 교육 즉 구한국시대의 극 히 단시일간의 신학문 수립에의 정열은 이미 역사적 정치적 기조가 없는 것으로 되었다. 이후 한일합병에 의한 이조사회의 해체는 동시에 그 봉건적 과학의 지양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런데 동양적 봉건사회의 일원이었던 古 조선의 과학사는 정체된 것이었고, 실제 시민 발전에 영향을 끼칠 정도까지 되지 못하였다. 과거에는 중국에의 예속관계에다가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비실용적, 비현실적 家 禮 論 의 발달이 초래한 당쟁의 영향이 있었고, 금후의 과학 발달에도 이런 영향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태에서의 조선 과학사 연구는 부분적으로는 絶 無 하다. 선배학자들 한 둘의 논고로부터 과학사 연구에 원용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할 수는 있 으나, 개별적인 專 門 史 는 지금부터라도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조선 과학의 발전과정 이라 하기보다도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조선과학사의 임무로 하고 싶다. [본론] 시대별로 본 조선 과학사 목차 제1편 원시 조선의 기술과 과학 조선반도에 언제쯤부터 인류가 살게 되었는지 이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러나 유물, 유적으 로 보아 조선에서의 인류의 역사는 석기, 골각기, 토기 등을 사용한 석기시대에 시작되고, 더 구나 유물의 성질로 보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조선사강의- 藤 田 亮 策 ). 인류의 발전은 미개단계를 거쳐 경험을 기초로 하는 기술단계에 이르러 과학의 지식 존재가 추리되고, 자연을 소재로 하여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은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극히 간단 한 도구의 사용으로부터 석기의 사용, 불의 사용, 활의 사용 그리고 점차 마석기의 사용에 이 르렀을 것이다. 이 야만의 상태로부터 정주생활이 실제화 되자 토기 제조, 가축, 식용식물의 재배로부터 농업으로 발전 목축, 동기로부터 철의 발명이라는 과정을 밟는다. 이것이 국가성 립 이전의 원시사회의 발전일 것이다. 원시시대 과학의 흔적 연구는 고문헌의 비판과 출토유 물인 침묵자료의 정리라고 생각된다. 제2편 고대사회에의 추이 제1장 삼국시대의 과학과 기술 소위 낙랑문화의 과학적 의의를 말한다. 문화사상으로 낙랑문화, 곧 한문화의 조선에의 파 급은 BC 108년, 한 무제 때 그들이 조선에 來 寇 하여 진주지에 四 郡 을 설치했다. 사군은 313 년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약 420년간 漢 代 문화가 사군을 중심으로 조선에 이식되어 그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하게 되고, 이것이 조선과학 기술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의 문화를 말하는 고분의 유물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동기 博 山 爐, 솥, 거울. 도기 옹기, 잔, 병 칠기 책상, 판, 함 무기, 마구, 포백(마포. 견직), 금속 服 飾 物, 옥석류, 돈 등
제2장 고구려의 과학 기술 고구려는 한사군시대 현토군 치하에 고구려현이란 이름이 보이나, 보다 이전부터 국가적 발 전을 이루어 조선 고대국가 중 가장 유력한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남방 한족 국가보다 현저히 발전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외형적으로 대국가를 건설하게 된 내부조건은 일반적으로 평민의 노동으로 농업생산을 발달시키고 부를 형성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룬데 있다. 또 晉 宋 이래의 조공의 형식에 의한 국제무역은 선박의 건조, 항해술의 약진 등 중국문화의 수입계기가 되었 으며, 각종의 기술 등의 발전은 고구려의 과학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고구려의 과학은 후에 신라과학과 기술의 일부로 포섭된다. 고구려의 과학과 기술을 소개한다. 1. 천문학 삼국사기 중의 고구려본기에 실린 천문관측의 기록과, 삼국사기 찬술 당시의 중국문헌을 인 용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있으나 사기 기록만이 정확한 경우가 다수 있다. 예를 들면 일식관계 기록은, 사기와 중국문헌을 비교할 때 사기 쪽이 정확하다. 천문학과 함께 지진, 기 상 등의 기록도 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여럿이 보이며 고구려의 과학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 다. 2. 지리학 지리학에 관한 과학 문서는 없다. 3. 의학 조선과학의 연원은 중국의학에 있으며 조선은 이를 수용하였다. 서력 459년 일본이 의원파 견을 백제에 요청한바 백제는 고구려의 醫 員 德 采 를 보냈으며, 414년 신라로부터 한의방( 韓 醫 方 )이 일본에 건너갔다. 삼국의 의술의 정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으나 실제의 내용을 전하는 과학문헌은 없다. 4. 수학과 築 造 과학의 발전은 광범한 수공업을 일으켰으며, 수공업은 농업으로부터의 분리로 기술상에 일 어난 변천이다. 기술상의 발전은 건축에서 두드러졌으며, 공법과 자재에 대한 기술도 높아졌 다. 공법에서의 역학, 수학 등의 공간적 측정에 필요한 교육과 자재에 있어서의 금공, 목공, 석공, 벽돌, 가와의 제조기술을 발전시켰다. 건축의 예로는 고분의 축조이며, 이는 고구려 건 축의 발전과정을 알게 한다. 四 神 冢, 星 冢, 三 墓 등 많은 고분이 있다. 5. 생산기술 고구려의 생산기술은 농경 목축, 방적 공예 등에서 그 수준의 높음을 알 수 있으나, 특히 공예품은 출토품에 많이 있으며 고구려시대의 공예수준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제3장 백제국가의 과학 기술 백제는 건국 이후 그 땅의 고급문화였던 낙랑군, 대방군에 남아있던 한국문화를 섭취하여 자신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삼국정립시대에 북은 고구려, 남은 신라의 발흥을 대 비하는 데 여념이 없으면서도 과학 기술을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또 대륙문화를 일본에 전하 는 임무를 다하면서 자기 문화를 해외에 전하였다. 660년 백제 역사는 끝나고 이렇게 하여 백
제의 화려한 문화, 빛나는 과학 기술은 신라의 통제 하에 새롭게 편입된다. 천문, 지리, 의학, 수학과 축조, 농업기술, 수리사업, 공예, 해상교통, 선박 등도 고구려 못 지 않게 발전하였다. 제4장 신라의 과학 기술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후진국이었으나 삼국사기의 연대기에 의하면 가장 선진국으로 기 록되어 있다.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찬술의 조략( 粗 略 )함을 지적하고 있다. 사기의 신라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본기보다 일부 허구적인 가설이 포함되어 있으나, 신라는 역사적 궤도에 따라 발전하였고, 정복적인 국가로서의 신라국의 출현은 대략 3세기말 이 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지리적 강역은 진흥왕(540 574 재위)의 巡 狩 碑 로서 알 수 있다. 북방 강역인 패강( 浿 江 =대동강)부터 德 源 에 이르는 지점의 이남이 신라의 강역이다. 신라의 과학사를 고찰한다. 1. 과학 기술의 진용 자연과학 부문은 실제 응용한 部 面 과, 정치적 기구에 의해 官 吏 가 배치된 부면이 있다. 신 라의 관리로 과학부면에 배치된 부서명을 소개하면, 천문박사, 의학교수, 약전 등 부서와, 기 술방면으로는 사원, 궁전의 조영, 造 池, 造 塔, 金 工 品, 鑄 造 와 다양한 수공업 기술 분야 등이 있으며 唐 제도를 수입한 것이다. 2. 천문, 역학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보유한 기록이 풍부하며 연구 분야는 비슷하다. 첨성대는 당나라의 麟 德 曆 이나 천문도의 수입 이전에 독자적으로 천문연구의 시설이다. 현존 동양 最 古 의 천문대 이며 당시의 과학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3. 수학의 응용 신라도 고구려, 백제처럼 중국으로부터 실용적 동양수학을 수입하고 算 學 제도로 算 博 士 를 두었으며 수학교과서도 있었다. 신라인의 수학지식은 매우 높았다고 한다. 신라의 일반수학의 발달을 알기 위해서는 건축에 응용된 수학적 이론의 실제적 부면을 생각하면 알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국사 다보탑의 等 比 級 數 的 遞 減 의 적용과, 석굴암의 석굴구조에 응용된 正 六 角 形 의 一 邊 과 外 接 圓 의 關 係 등 건축에 기하학적 계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의학 고구려 백제 참조 5. 건축 벽돌, 기와 제조의 발전에 따라 대규모의 건축은 실용적 수학 지식과 병행하여 크게 발전하 였다. 노동자를 권력으로 구사하고,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건축기술 등으로 통일 후의 신라 건 축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수공업의 분업화, 노동력의 집중유도, 새로운 불교적 관념을 수단 으로 하여, 왕궁 성곽, 능묘 사원 건축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6. 공예기술 신라는 금의 산지로서 옛날부터 알려져 왔다. 처음은 露 天 法 에 의하여 동, 철, 금, 은을 채 광하였으나 통일국가로서의 발전 및 무기, 장식품, 범종, 불상주조 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굴을 파고 채광하였고, 야금법도 爐 의 구축이 필요한 것 같다. 신라 생산의 광물은 당나라에 의 선물 및 국제 무역품으로 해외에 수출되었으며, 그 가공품은 정교하기로 명성이 있었다. 오늘날 그 뛰어난 가공품은 장신구 장식품, 무기 마구, 용기 기타 금속가공 제품으로, 황룡사 범종, 분황사불상 등은 신라 금속문화의 일면을 보이는 것이며, 조선 과학기술상 한 획을 긋는 신라 문화의 전반적 수준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3편 고려 봉건국가의 과학과 기술 제1장 서문 1. 신라의 붕괴와 봉건적 과학진의 편성 신라 말에 후백제를 표방하는 남방의 견훤( 甄 萱 )과 후고구려를 표방하는 궁예( 弓 裔 )가 대립 하여 싸웠다. 견훤의 군대는 질적으로 우수했으나, 궁예는 부하인 왕건이 두각을 나타내자 소 멸하고 말았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견훤과 전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후백제에 내란이 일 어나자 견훤은 고려왕조에 투항하고, 이어 신라 경순왕도 왕건에게 항복하니 56왕 992년의 긴 역사의 신라도 해체되었다. 사실상 신라의 붕괴와 고려왕조의 조선 재통일은 고구려의 위 대한 부흥을 목표로 하여 완수된 것이다. 신라가 唐 制 를 수입하여 편성한 과학 기술의 진용은 고려국가의 성립과 함께 편성을 바꾸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訓 要 중에 나타나 있다. 고려의 여러 학제기구 중에 궁정과학의 여러 기관이 설립되고, 과학자 기술자의 양성과 배치도 행하였다. 기관의 예를 몇 개 들면, 書 雲 觀 천문, 曆 數, 측후, 刻 漏 등을 맡았다. 典 醫 事 의약과 치료를 맡았다. 司 醞 署 酒 禮 와 양주에 관한 일을 맡았다. 典 農 寺 농업에 관한 일을 맡았다. 繕 工 寺 토목과 영선을 맡았다. 軍 器 寺 병기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2. 宋 代 문화의 수입과 몽고의 문제 광종은 950 975년간에 후주와 국제적 서신무역을 하였으며, 태조 스스로 남방중국의 오, 월에 왕래한 적도 있었다. 송대 상인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여진, 琉 球 로부터 온 외래상인들도 대우받았다. 선박 등도 고려 스스로 건조하였으며 상인을 중개로 수입한 과학지식, 생산기술 에 관한 성과도 컸다. 고려정부는 몽고정부의 강제적 욕구에 따라 전함의 건조를 명받았으며, 또 몽고의 병마가 고려를 짓밟았을 때도 정부는 강화에서 佛 恩 에 귀의하여 악마적인 몽고군을 항복케 하도록 전란 중에도 대장경의 판각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이 룩한 기술적 사업은 고려사회의 문화적 유산으로 후세에서 그 가치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몽고와의 투쟁이 끝난 후 세계의 각지에서 모여든 이민족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과학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중화적인 한민족과는 다른 고도의 고유문화를 쌓았다. 제2장 고려국가의 과학과 기술 신라의 모든 것을 계승한 고려는 과학의 목표도 신라로 되돌아간다는 데 두었다. 앞에서 소 개한 과학에 관한 機 構 들도 본질적으로 신라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려의 과학 기술을 간략 하게 소개한다.
1. 천문관측과 역상 천문대, 측후, 역법 등은 서운관을 두고 총괄하게 하였으며, 제도 등은 역대의 왕에 의하여 다소의 변혁은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달라짐이 없고 이조에 계승되었다. 2. 수학과 그 운용 각 관서에 계산담당자인 산사( 算 士 )가 배치되었으나 순수과학으로서의 수학은 없었으며, 실 용적, 경험적 입장에서 이해되었을 정도였다. 국립 최고교육기관인 國 子 監 에도 九 品 末 職 에 산 학박사 두 사람의 배속이 있었고, 고려 수학 발전의 길은 폐쇄되어 시민적 발전은 거부되었 다. 3. 의학 의학은 관리채용제도인 과학시험에 의하였고 신라보다 진보 정비된 각 분과의 연구가 이루 어졌으나, 그 과학으로서의 진보는 呪 術 的 색채를 씻지 못하는 봉건성 때문에 중세기적 관념에 정체되었다. 관료적 제도로서는 독점적으로 의학의 지식과 기술을 포용한 典 醫 寺 ( 大 醫 監 ), 奉 醫 署 ( 尙 藥 局 )가 설치되었으며, 많은 전문의 및 관원이 배치되었으며, 특히 呪 噤 師 2명과 呪 噤 工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奉 醫 署 는 宮 中 의 시약 담당자이며, 일반 국민에 대하여는 東 西 大 悲 院, 濟 危 寶, 惠 民 局 등 자선기관이 있었으며 시약 및 의료사업을 시행하였다. 4. 지리학 음양지리학은 고려, 백제, 신라 등의 撰 地 에도 보이며, 음양오행설에 의한 안주할 땅의 선택 은 고려봉건국가 수립 당시부터 사상적으로 강력히 작용하였다( 先 覺 國 師 碑 銘 에 표현됨). 고려 지리학에서 유일한 과학적 사업은 繪 畵 的 지도의 제작이며 고려사에 실려 있다. 5. 화학공업 고려의 화학공업은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발달이 있었다. 해당분야를 간단히 소개한다. 야금 고려 기공은 금속공예, 무기주조, 불교관계주조, 금속활자주조 등이다. 요업 조선의 요업 곧 도자제조기술은 고려시대에 그 정수를 발휘하였다. 고려청자의 진 취적이며 기능적인 새로운 개척은, 다양한 종류와 그 뛰어난 예술성으로 가히 세계적이다. 청자를 통하여 당시의 화학공예의 최고 단계를 실현시킨 고려인의 과학기술의 우수함을 자 연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의 세계성을 糾 明 하는 것은 장래의 연구의 한 과제이다. 화약 고려의 화약은 元 代 가 되어 처음으로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그 폭발력은 강력하였 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377년( 辛 禑 3년) 軍 器 寺 판사 崔 茂 宣 의 建 白 에 의하여 화통도 감( 火 㷁 都 監 )을 설치하고, 개성 이외의 각 사원에 火 㷁 放 射 軍 의 정원제를 행하였다(고려사 권 81). 火 砲 는 전함에 장착되고 해상방위의 수군이 실지 운용하였다. 고려사 권 114 羅 世 傳 에 世 等 至 鎭 浦 用 茂 宣 所 製 火 炮 焚 其 船 烟 焰 漲 天 賊 守 船 者 燒 死 殆 盡 이라 하였는데 폭 약의 위력을 알 수 있다. * 賊 = 倭 寇 제지와 인쇄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사용 및 세계에 과시할 대장경의 각판에 따르는 다량 의 인쇄용지의 생산은 당연히 제조기술을 높이고 진전시켰다. 또 서적원을 설치하여 인쇄 에 관한 전반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종이의 종류로는 皮 紙, 저지( 楮 紙 ), 藤 皮 紙, 淡 黃 金 紙, 金 粉 紙 등이 있었으며, 鍊 金 術 의 발전으로 생산되는 금분지는 화려하였다.
농업기술 고려시대의 농업기술은 전제적 봉건사회의 토지제도에 기조를 두고, 권력적 정부의 권농정책에 따랐다. 농업기술과 농구 등은 신라가 남긴 것을 개량 사용하여 증산을 꾀하였다. 농업의 발전은 국가 정책으로 권농 監 農 이 행해지고, 해당기구인 典 農 寺, 農 務 都 監 을 두었다. 수리정책으로서는 水 車 이용을 장려하였으며 이는 중국 강남의 수차제를 수입한 것이다. 건축 고려 건축은 고도의 발전과 과학적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신라 건축의 계승이었으 나 불교의 발전에 따라 불교 사원, 석탑, 석등, 부도 등이 건립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기술 의 퇴보와 조잡함을 보였다. 불교의 발전으로 사원 등의 건축기술은 뛰어났으리라 생각되 지만, 고려시대 사찰 건축을 알 수 있는 현존 자료는, 고려 중엽부터 말엽에 건조된 것 두 셋이 남아 있으며 한국 最 古 의 목조건물인 浮 石 寺 의 無 量 壽 殿 이 있다. 제4편 이조 봉건국가의 과학과 기술 제1장 서론 고려는 태조부터 공민왕까지 通 計 31왕 430년의 역사를 마치고 이조로 전환되었다. 이조의 관료적 학술사상과 선조 때 金 孝 元 과 沈 義 謙 에서 발단된 동서분당은 이조시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학술방면에도 그 분파성을 침투시킨 것은 과학사에서도 관과할 수 없 다고 한다. 아마도 남인학파의 사람들은 吏 文, 詞 章 등 과학과 취향을 달리하는 학문의 연구 를 시작하였는데, 柳 馨 遠 의 經 世 의 學 은 이조시대 실학파(실사구시학. 실증학)의 선구였다. 그 후 이조 학술계에 등장하는 유명한 학자들도 거의 모두 그 풍모를 갖추고, 이용후생의 실질적 연구를 하였다. 이것이 곧 조선과학사상의 신 기운이며 明 末 淸 初 서구화된 漢 문화, 漢 譯 된 구 주문화의 수입과 천주교의 도래 등은 모두 실증학파인 남인학자에 의한 바 다대하다. 조선에 있어서는 과학은 관료적 잡학으로 취급되었으며,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발전적 경로를 바로 걸어야 할 과학이, 반대로 침체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고 필연적 결과였 다.
제2장 변혁기의 과학 기술 1. 이조 사회 초기의 과학 기술 봉건적 고려가 이조로의 개편과 함께 과학 기술진도 점차 그 내부구조를 변경해 갔다. 그러 나 동양적 관료적 조직체는 구각( 舊 殼 )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이조가 구제도의 편제를 바꿈에 있어서의 내부적 결함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정체시키는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태조는 원년 7월에 관료제도의 일반을 공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조와 대차가 없었다. 고려말 이조 초에 있어서 유교적 관념적 학자인 鄭 道 傳 은 한편은 경세가이며 실정적 학자였 다. 그가 제작한 조선경국대전은 태조3년에, 경제문감은 태조4년에 편집되고 이를 기초로 한 경제육전은 이조의 정치성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과학 기술의 관료제도로는 다음을 들 수 있 다. 자연과학방면으로는, 書 雲 觀 천문, 曆 日 推 擇, 음양지리학 등 典 醫 監 진찰, 약제, 자선의료기관 등 算 學 수학 방면의 실용적 부문 담당 수공업, 화공방면 군기감 주로 무기 담당, 長 興 庫 포목, 종이 담당, 供 造 署 竹 物 司 醞 署 주류 양주 토목 기공방면 선공감 건축, 司 宰 監 교통, 산업, 司 水 監 선박 관계 담당 인쇄 기술방면 활자주조, 종이제조, 인쇄, 교정업무 담당 제3장 봉건적 과학 기술 이조 초기는 대부분 고려 말기의 여러 과학기술 및 그 제도를 답습함에 그쳤으나, 이조 초 기의 세종시대를 계기로 모든 것이 새롭게 정비되어 이용되고 보급되었다. 과학 보급정책으로 서의 훈민정음의 창제와 정음을 활용하여 국가적으로 과학 문서를 번역 간행한 것은 가장 주 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봉건적 과학 기술의 정비 보급에 대해 약술한다. 1. 천문 역학 관상감에서 천문, 지리, 역수, 점주( 占 籌 ), 측후, 각루( 刻 漏 ) 등을 관장하였으며 다수의 관원 이 전문분야를 맡고 있었다. 관원은 科 學 制 에 의하여 선발시험을 거쳐 등용되었다. 세종조에는 각종의 천문기기가 제작되었으며 후세까지 전해졌다. 당시는 조선 천문학상의 황금시대였다. 세종은 실로 위대한 과학자였다. 이조시대 관측제도에 관하여는 영조, 정조, 순 조의 삼조에 벼슬한 成 周 悳 이 10년에 걸쳐 편집한 書 雲 觀 志 4권에 관측 제반의 제도를 22항 목으로 세분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관측 규정은 오늘날의 과학 견지에서 보아도 일치하는 점이 많고, 그 규정이 과학적으로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고 관측에 대한 실례를 많이 들고 있다. 역학은 관상감을 두고 연구되었다. 2. 지리학 지리학은 풍수지리를 중심으로 한 미신적 방면으로 발달한 한편 인문지리학의 개척과 수립
으로 나아갔다. 인재선발의 제도는 중인계급으로부터 지리업 관리를 뽑았는데, 대체로 과학으 로서의 지리학 문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음양의 지리학으로서 선발하였다. 지도의 제작도 있었다고 하며 이조 초 승려 淸 濬 등의 疆 理 圖 에 시작하여, 세종시대의 地 志 편찬에 그 싹을 보였다. 강리도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종대왕 때 鄭 涉, 梁 誠 之 의 동국지도의 찬술과 성종 때 李 封 의 輿 地 圖 와 그 이후 弘 文 館 의 천하지도의 고증적 작성 등 지도 제작은 점차 정 치적 필요성에 의해 제작되어 갔다. 지지의 찬술은 이조 학술 중의 과학적 성과로 볼 수 있는 데 그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8권 8책으로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지리지는 지리 역사의 연혁 및 정치 사회 재정, 경제 산업 군비 교통 등의 조직과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인 문지리학의 선구가 되는 저술이다. 그 내용의 상세함은 조선 지리학의 과학적 발전과정을 과 시함에 부족함이 없다. 3. 의학 동양의학의 정리 및 그 발전을 완수한 이조시대 의학 제도로서는 관료적 의사의 채용에 따 른 시험제도와 律 學 곧 법률의 일부분으로서의 법의학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조선의학의 발 전적 체계화는 醫 方 類 聚, 鄕 藥 集 方 成, 東 醫 寶 鑑 의 삼대 撰 述 書 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치료 와 구급의 기록은 실록에 기재되어 당시를 알 수 있다. 혜민서, 활인서를 민중의료기관으로 설치하고, 많은 치료 구급에 관한 의서의 간행 등, 특히 의서를 한글로 기록함은 민간의 시약 을 알 수 있다. 본초학, 위생학, 부인산과학, 수의학, 군사의학, 법의학이 있었다.(본서 참조 바람)
4. 화학공업 금속공학의 중요한 부문으로는 채광, 제련, 금속자재가 되는 주조물 제조 등이 발전하였다. 주조물로서는 鑄 字, 鑄 錢 등이며 많은 수요가 있었다. 조선 활자는 태종 3년(1403)부터 철종 까지 동활자, 鉛 활자, 주자, 木 활자 등 다양하며, 세종 16년(1434)에는 동활자 20여만 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조 16년(1792) 강희자전 인쇄용 목활자 대소 32만 자와 동활자 대소 30만 자가 쓰였다. 화학공업으로서는 軍 器 화약, 종이, 도기, 칠공도 담당 기구가 있고 기술자와 장 인이 있어 과학적 발전을 도모하였다. 5. 선박 典 艦 司 는 都 提 調, 提 調, 提 檢 등의 관리와 水 運 判 官 을 두었다. 수운의 여러 선박의 크기, 수리 등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으며, 어선도 규정이 있었다. 전함으로서의 거북선은 장갑선의 일종으로 고려 말, 이조 초부터 제작되었으며, 실전에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철갑 선인 거북선으로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실용화되었다. 거북선( 龜 船 )은 철갑선의 세계적 선구로 이충무공전서에 거북선의 규격이 소개되어 있다. 6. 건축 이조시대의 건축기술이 남아있는 성곽, 궁전, 客 舍, 史 庫, 祀 廟, 서원, 사찰, 석탑, 부도에서 그 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경성 성곽은 경성 주위를 연산에 따라 석축하였고, 성에는 대소 八 門 을 두고 있으며 그 중 숭례문, 흥인문이 가장 크다. 수원성은 정조 8년 기공, 20년에 낙 성한 것으로 조선에서 가장 발달된 형식의 성곽이다. 중국식 축성법을 거부하였으며 동양식 축성 기술상에 새로운 전기를 이루었다. 수원성 축조기술에 관해서는 華 城 役 儀 軌 에 전반을 논하고 있으며, 丁 茶 山 의 城 說 에는 수원성 축조에 관한 8개조의 의견이 진술되고 있다. 조 선 궁궐은 가장 대규모로 건조되었으며 경복궁, 창덕궁의 규모가 크다. 또 이조의 특징적 건 축 기교를 제시하는 건물도 많은데 객사, 사고, 사묘, 서원 등에 대하여 고찰한다. 사고는 이 조의 왕실, 조정의 실록을 장서하는 곳으로 대체로 강화, 춘양 태백산, 강릉 오대산, 무주 적 상산에 있었다. 사묘는 경성, 대구, 경주, 개성에 있는 문묘대성전이 선조 연간에 건립되었고, 경주 향교명륜당은 광해군 시대, 안동 문묘대성전은 이조초기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