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김 용 철** kimyc64@hanmail.net <ABSTRACT> Japanese artists in colonial Korea had complex characters. Not only were they part of colonial governance, but they were also the target of governance by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 of Korea. As reflected by the Western style painting genre, these artists took on the important role of educators, while also acting as painters attempting to express the local color of Korea. Furthermore, they had a tense relationship with the world of art in mainland Japan. Since the total war system was taken in Korea after the second Sino Japanese War of 1937, these Japanese artists performed the role of the brush of the empire, and participated in the propaganda campaign by creating propagandist paintings. In Japan, they performed the role of messenger of colonial Korea during the period of total war. Therefore, a study of the activity of Japanese artists in colonial Korea of that period would substantially contribute to the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t. Key words: Japanese artists in colonial Korea, war painting, total war, Yamada, Shinichi 47)48) 1. 머리말 식민지시대 재조선일본인은 그 정체성이나 위상이 단순하지 않은 만큼 그들에 대한 다양 한 논의가 필요하다. 제국의 식민자로서 민족의 경계에 존재했던 그들의 활동이 식민지배를 지탱하는 풀뿌리 식민지배 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그들 역시 식민통치권력의 통치대상이었 던 사실은 그들 존재 자체의 복잡함을 보여주는 예다.1) 식민통치권력과의 관계만 보더라도 양면성을 가진 그들은 일본의 패망 당시 약 100만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으로 성장하여 그 규모도 컸지만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복잡다기한 역할을 수행하였다.2) 이와 같은 재조선일본인에 관한 연구는 당시 그들이 차지한 비중이나 그 활동의 의미에 비하면 거의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오랫동안 학문적인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근년에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은 새롭게 그 중요성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3) 미술 분야의 경우 식민지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의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NRF 2007 362 A00019). **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HK교수 1) 高崎宗司, 植民地朝鮮の日本人 岩波新書790(岩波書店, 2002) 2) 약 100만에 달한 재조선일본인의 숫자는 20세기 식민지 거주 식민본국인 가운데서는 영국의 자치령 백인 이민 국가를 제외하고는 알제리에 거주한 프랑스인의 숫자에 버금간다. 森俊夫, 朝鮮終戦の記録 米ソ両軍の進駐と 日本人の引揚げ 1 (巌南堂書店, 1964), pp.2 23
402 日本學報 第100輯(2014.8) 창설을 둘러싼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에 관한 연구나 미술가 개인에 관한 연구 등이 이루어진 바 있지만, 자료발굴이나 소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나 그 위상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4) 더욱이 총력전시기 조선의 미술계에서 그 들의 활동이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그들의 위상이나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과제의 수준을 넘어 식민지시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을 제기해 주기까지 한다. 그것은 그들이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 주도적으로 미술계를 이끈 사실뿐만 아니라, 미술의 프로파간다 기능이 강조되어 순수한 미의 세계를 추구하던 이전 시기와는 다른 의미를 미술이 갖게 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 시기 동안 전개된 한국 근대미술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을 규명하는 일은 필수 적인 과제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을 살펴보 려 한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 의 구호 아래 창씨개 명과 황민화 정책, 국민총력운동 등을 전개하며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여 강화시킨 통제와 압력은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와 같은 여건의 변화로 그들의 정신 적 지향이 한층 분명해졌고, 식민통치권력과의 관계가 단순, 명확해짐으로써 이전까지의 애 매하던 정체성이나 모호하던 개개인들의 입장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이하 본론에 서는 당시 신문 및 잡지에 실린 저술과 작품을 통해 총력전시기 동안 그들이 수행한 역할을 살펴보고, 나아가 당시 그들이 차지하던 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2. 중일전쟁 발발과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활동여건 변화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은 이미 식민지 초기부터 이어진 활동여건에 더 하여 중일전쟁 이후 급격히 달라진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었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이전 시기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초기부터 이어진 활동여건이란 정규미술학교의 부재상황을 비롯하여 1922년 조선총독부가 설치하여 매년 개최한 조선미전, 그리고 조선인 미술가나 일본인 미술가들이 결성한 각종 미술단체의 활동과 그들이 개최한 전람회가 개최되던 사정을 뜻한다. 3) 기유정, 1920년대 경성의 유지정치 와 경성부의회, 서울학연구 28(2007.2), pp.1 34; 우치다 쥰, 총력전 시 기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아세아연구 131(2008.3), pp.14 52; 이형식, 재조일본인연 구의 현황과 과제, 일본학 37(2013), pp.245 283 4) 이중희,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에 대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1996), pp.94 146; 김주영, 在朝鮮 일본인 화가와 식민지 화단의 관계 고찰, 미술사학연구 233/234(2002.6), pp.301 327; 井内佳津恵, 美術家と朝鮮(1), 紀要 2007(北海道立近代美術館), pp.5 57 및 美術家と朝鮮(2), 紀要 2008(北海道立近代美術館), pp.3 75, 그 리고 경성일보 기사로 본 그룹활동,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7(2014), pp.87 154; 原田正俊, 山田新一の在 朝鮮時代, 이중언어 공간 속의 그들 ; 재한일본인들의 미술 활동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년 국제학술대 회 발표자료집(2013), pp.17 24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03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활동을 전개한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은 주로 조선미전을 무대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경성제이중학교 미술교사였던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나 경성고등공업학교 미술교사 가노 간라이(加納莞蕾)의 예에서 보듯이 미술교사로서 조선인 과 일본인이 뒤섞인 후진을 양성하며 미술가로서 작품활동을 전개한 경우나 사설 미술학원 을 운영하며 작품제작을 계속한 경우 등이 있었지만, 주목할 것은 그들이 조선미전의 중심 적인 미술가였다는 사실이다. 조선미전이 회를 거듭하며 엘리트 미술가들의 윤곽이 드러날 무렵인 1932년에는 동양화부 특선 화가 7명 가운데 5명이 일본인이었고 서양화부 특선화가 14명 가운데 11명이 일본인이었으며 1935년에는 5명의 동양화 특선 가운데 4명이 일본인이 었다.5)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영역에서는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의 저술도 중요 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경성일보 나 조선 등 일본어 신문 및 잡지에서 그들은 유력 한 필진이었다. 그들의 저술이 일본어로 씌여진 만큼 그것이 지니는 파급력에는 한계가 있 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선총독부 관계자나 여타 재조선일본인 미술가, 일부 조선인 미술 가 사이에서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하였다. 1923년 도쿄미술학교를 졸 업하고 조선에 온 야마다 신이치의 경우 조선미전이 열리면 전시회 비평을 통해 개개인 미 술가들의 작품을 평하고, 조선적인 로칼 칼라 즉, 지역색을 부각시킨 작품을 장려함으로써 조선 거주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킨 작품을 권장하였다.6) 그들의 견해가 일본에서 파견된 조선미전 심사원들의 견해와 일맥상통한 점도 주목되지만,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겸 하고 있던 그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들은 미술계 유지 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존재였던 것 이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미전 창설 이후 미술계에서 그들의 영향력 또한 줄곧 유지, 강화되 어 관변 여론주도집단을 형성하였던 셈이다. 중일전쟁 이후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여건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 급격 한 변화는 조선이 중국 침략의 병참기지화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전시체제로 전환해간 것 을 배경으로 초래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변화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도 이전과는 다르게 설정되었다. 특히 내선일체 의 구호 아래 창씨개명이 이루어지고 국민정신총동원법의 제정 으로 일견 대등한 듯이 보이는 관계가 설정됨으로써 미술계도 이전과는 다른 과제를 안게 되었다.7) 예를 들어 이전까지 조선적 지역색을 강조하던 조선의 미술계도 조선의 지역적 특 수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점차 내선일체 의 슬로건이나 황민화 정책 아래 화필보국(畫筆報國), 직역봉공(職役奉公) 등 국가주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8) 그 시기 미술가들의 활동여건 변화에서 또 하나 구체적인 영향을 준 것이 물자부족이다. 당시의 물자부족은 일본 본토에서처럼 미술자재를 통제하는 단체가 결성될 정도의 구체적인 5) 조선일보 (1935.5.27.) 및 동아일보 (1935.5.17.) 6) 山田新一, 鮮展洋画への希望, 朝鮮及び満州 (1939.6), pp.51 52 7) 임종국, 친일문학론 (민족문제연구소, 2013), p.94 8) 원동석, 일제 미술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한국현대미술의 형성과 비평 (미진사, 1985), pp.45 46
404 日本學報 第100輯(2014.8) 움직임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예를 들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에서 수입하던 각종 화선지의 수입이 막혀 동양화가의 작품제작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9) 전통회화인 동양화의 경우 필묵의 표현이 종이의 지질에 큰 영향을 받는 만큼 중국 화선지의 수입금지가 화가 개 개인에게 준 영향은 컸던 것이다. 당시 화가들 가운데에는 종이를 구하지 못하여 조선미전 출품을 단념한 사례까지 나왔고, 그 여파로 동양화의 출품수량이 줄어 1938년에는 101명의 화가가 153점을 출품한 데 비해 1939년에는 100명의 화가가 139점을 출품하는 감소현상을 보였다.10) 같은 시기 서양화나 조소공예와 같은 장르에서는 출품수가 증가한 사실을 고려하 면 중일전쟁의 여파는 동양화에 가장 먼저 미쳤던 셈이다. 이후 1940년에는 공예 장르의 출 품수가 줄었고, 1941년에도 서양화부를 제외한 동양화, 조각공예 장르는 출품수가 줄어 물자 부족의 영향이 확산되었다. 전 장르에 걸친 총 출품수도 한 동안 증가하여 20회에 1185점, 가장 많았던 21회에는 1269점에 달하였으나, 22회에는 1193점, 마지막회인 23회는1040점이 출품되어 점차 감소추세를 보였다. 한편, 총력전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 연맹으로 확대개편되자 미술가들의 활동은 구체적인 동원체제에 편입되었다. 당시 미술가들 이 관여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는 조선인, 일본인을 불문하고 가입해야 했고 1941년에는 이상범, 심형구 등 조선인과 야마다 신이치, 도다 가즈오(遠田運雄), 미키 히로시(三木弘) 등 일본인을 포함한 68명이 문화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11) 이후 각 부문별 연락위원회가 선정되어 조선미술가협회 경성거주 회원들의 경우 1943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락계통도에 따르면 204명의 미술가들이 28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12) 총력전 체제는 조선미전의 운영에도 변화를 불러왔고, 조선미술가협회와 같이 재조선일본 인 미술가가 중심이 된 관변 단체의 활동비중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조선미전에서는 1940년 수상제도의 변화로 이전까지 수여되던 특선이나 창덕궁상, 조선총독상 외에 국민정 신총동원 조선연맹 총재상이 제정되어 전시체제에 협력한 미술작품에 수여하였다.13) 바로 그 시기 조선미술가협회는 1942년부터 3회에 걸쳐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 를 개최하였고 1943년에는 기구개혁을 통해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한 부서처럼 사업을 전개 했다.14) 전시체제와 밀착된 조선미술가협회의 활동이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밀접해짐에 따라 그 활동이 조선미전과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이지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의 개 9) 迫内裕司, 戦時下における美術制作資材統制団体について, 明治画説 13(明治美術学会, 2004), pp.104 127 10) 鮮展 앞두고 畵紙 飢饉, 매일신보 (1939.5.14) 11) 京城日報 (1941.1.30) 12) 28명의 반장은 일본인과 창씨개명한 조선인, 그리고 김은호, 이상범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28명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일본인이고 각 반의 구성에서 일본인 반장의 반에 소속된 조선인은 많으나 조선인 반장의 반에 소속된 일본인은 거의 없는 점으로 볼 때 일본인 중심으로 반을 구성한 점 또한 주목되는 부분이다. 13) 미전 특선작 금일 발표, 朝鮮日報 (1940.5.30.). 1941년까지 2년만 운영된 이 상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물자 부족이 심화되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4) 京城日報 (1942.11.1)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05 최나 결전미술전람회의 후원 등에서 보듯이 침략전쟁을 수행하던 시기 선전선동미술의 핵심 에 조선미술가협회가 있었다. 3.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지위와 역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역할은 당시 그들이 속해 있던 단체나 기구 에서 맡고 있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의 주된 작품 발표의 장 가운데 하나로, 영 향력에서 볼 때 당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는 조선미전이었다. 조선미전의 경우 중일전 쟁 발발 1년 전인 1936년 규정을 개정하여 일본에서 파견된 심사원 외에 심사참여 제도를 도입하고 조선의 미술가들이나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을 심사참여에 임명하였다.15) 1937년 부터 임명되어 활동한 심사참여의 면면은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미전 개설 초기부 터 출품하여 수차례 특선에 입상한 소위 엘리트 미술가들로 채워졌다. 3명의 심사원과는 별 도로 전부 7명이 임명된 심사참여 가운데 동양화부의 김은호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인 사실은 조선미전에서 압도적이었던 그들의 비중을 웅변해준다. 조선미전 참여를 거부한 미술가들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반도미술계의 금자탑 으로도 불린 조선미전이 심사참여 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대부분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를 임명하 였다는 사실은 식민지 관전인 조선미전의 성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일면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조는 1940년대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표.2>에 나와 있듯이 설치 20주년을 맞아 실시 한 조선미전 공로자 표창에서도 일본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행정을 담당한 사무관 계 2명을 포함하여 전체 25명 가운데 23명이 일본인인 사실은 조선미전이 철저하게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들을 위한 제도였던 동시에 그들에 의해 지탱된 제도였음을 보여준다. <표 1>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참여 장르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제3부 조소 및 공예 심사참여 松田正雄 加藤倹吉 김은호 山田新一 遠田運雄 浅川伯教 五十嵐三次 <표 2> 조선미전 20주년 기념 공로자 장르 제1부 제2부 제3부 사무관계 공로자 이상범 松田正雄 堅山坦 加藤倹吉 김은호 이용우 宇野佐太 郎 이영일 田中文子 山田新一 遠田運雄 日吉守 三木弘 이인성 星野二彦 大塚与志 山下一彦 松崎嘉美 浅川伯教 五十嵐三次 강창규 戸張幸男 宗高猛 高橋濱吉 加藤灌覚 15) 陣容を新たにして改革された鮮展, 京城日報 (1937.4.20.)
406 日本學報 第100輯(2014.8) 그러나 이와 같은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이, 달라진 시국상황에 맞추어 질적인 면 에서 변화를 나타내기까지는 수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937년 조선미전 심사참여가 된 야 마다 신이치의 경우 조선에서 이루어진 그의 활동은 한 동안 큰 변화를 보이기보다는 이전 과의 연속성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도 그는 조선미전에 관련한 시론이나 그 것에 대한 비평문을 잡지에 게재하는 한편 작가로서 조선미전에 출품하며 이전의 활동을 이 어갔다. 1939년에 발표한 글 선전 제2부의 수준(鮮展第二部の水準) 에서는 주제에서나 조형 적인 면에서 조선색을 드러낼 것을 권장하는 이전의 지론을 견지하였다. 다만, 저술의 내용 을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조선미전에 대한 인식에서 약간의 변화를 드러내어 조선미전 출신 미술가들이 제전의 입선자나 이과전과 독립전에 출품자를 배출한 것을 조선미전의 공적으로 평가하고, 점차적인 중심부 진출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거나 조선미전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 인 제언을 하는 정도였다.16) 그것은 조선미전 성장의 지지부진함이나 출품자의 수준이 부끄 러움을 지적하던 이전의 입장과는 작은 차이였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국에 관해서는 소 극적인 태도에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이듬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주최한 좌담 회에 참여하여 조선미술의 장래에 대해 발언할 때에도 일본의 심미교육 부재나 미술교육의 문제점 등 미술계의 총체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였지 변화된 시국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의 태도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것이다.18) 그와 같은 태도는 당시 그가 그린 잡지 총동원 의 표지화(도판.1)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 표지화는 산을 클로즈업 시켜 그린 풍경화일 뿐 전시 분위기를 띈 그림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조선총독부와의 밀착이 이후 시기의 변화를 예고하는 듯 하여 흥미롭다. 그 밀착의 실상은 정규미술학교 설립에 관 해 오랜 기간 조선 여론의 압력을 받은 조선총독부가 1939년 8월 조선미술연구회 내에 조선 미술연구소의 설립을 약속했을 때, 야마다 신이치 또한 도다 가즈오, 아사카와 노리타카, 김 은호, 이상범과 함께 지도책임교사로 선정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19) 그가 조선미술연구회 책임교사로 선정된 것은 전시체제로 전환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요청의 결과로 추측된다. 16) 山田新一, 鮮展第二部の水準, 朝鮮 290(1939.7), pp.32 37 17) 山田新一, 鮮展洋画への希望, 朝鮮及び満州 (1939.6), pp.21 22 18) 山田新一외, 鮮展審査員を中心に 朝鮮と芸術を語る 座談会, 総動員 (1940.6), pp.66 84 19) 미술학교 설립에 대한 요구를 담은 기사로는 각방면의 요망 높은 미술학교 설치기운, 매일신보 (1939.6.2.), 신문사설로는 사설 미전 발표를 보고, 東亞日報 (1939.5.31.), 사설 미전의 개막과 지도기관 요망, 每日新 報 (1939.6.4.), 鮮展의 장래, 每日新報 (1939.6.24) 등 참조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07 도판 1. 山田新一 < 總動員 표지화> 1940 도판 2. 山田新一 조선지원병 1939 총동원체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조선에서의 활동에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야마다 신이치가 같은 시기 일본에서 열린 이벤트에 대해서는 그것과 다르게 대응한 사실은 주목을 끈다. 1939년 일본에서 열린 성전미술전람회에 전쟁화를 출품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새로운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직접 밝힌 그림설명에 따르면 남산의 조선신궁을 배경으로 지 원병훈련소에 입소하려는 조선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묘사하였다는 <조선지원병>(도판.2)에서 그는 조선인 특별지원병의 모습을 강조하여 묘사하였다. 배경에 그려진 지원병 어머니와 일 장기를 든 소녀의 모습이 조선인 지원병의 훈련소 입소 당시의 착잡한 광경을 리얼하게 형 상화하였다고도 할 이 그림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애국열의 굉장함을 예시 하려 했다는 그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지만, 성전미술전람회가 개최된 지역과 성격을 고려하 면 이 시점에서 그는 이미 이전과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조선의 문화적 전통이 나 지리적 풍토에 비중을 둔 조선적 향토색의 묘사에 머물지 않고 전시체제하의 조선상황을 일본에 전하는 전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20) 조선미전에서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작품에 소위 시국색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 한 것은 1940년 제19회전에서부터다. 이전까지 주로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물동 이를 이고 가는 모습, 갓을 쓴 늙은이의 모습, 시장의 광경 등 이국취미에 바탕을 둔 조선적 향토색이 중심주제였던 그들의 작품(도판.3)이 19회전에서는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 이다. 특선 무감사 작품으로서 완전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에구치 게이시로(江口 敬四郎)의 <병사>(도판 4)나 심사참여 자격으로 천인침을 뜨는 여성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 다 가즈오의 작품 등이 출품되었고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나 비평가들로부터 호평 을 받았다. 같은 전람회에 출품된 심형구의 <흥아를 지킨다>와 같이 조선인이 그린 전쟁화 20) 박계리, 일제시대 조선적 향토색, 한국근대미술사학 4, (한국근대미술사학회,1996), pp.65-210
408 日本學報 第100輯(2014.8) 의 예가 있긴 하였지만, 에구치 게이시로나 도다 가즈오의 그와 같은 시도는 이듬해 여타 재조선일본인 화가들은 물론이고 조선인 화가들에게도 파급되었다. 즉, 조선미전의 출품작에 서 시국색을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 그들은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다. 도판 3. 도판 4. 江口敬四郎 兵士 1940 宇野逸雲 緑陰一憩 1922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문화예술 분야에도 그 영향이 커져가는 가운데 단체나 조직에서 새 로운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941년부터다. 그해 1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에는 문화부가 설치 되어 문인, 미술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표면화되었다. 이후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은 조선 미전 심사참여의 경우와는 별도로 미술가 단체의 운영이나 새로운 미술가 단체의 결성에 주 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단체가 1941년 2월에 결성된 경성미술 가협회다. 이듬해에 조선미술가협회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 관료와 조선인, 재 조선 일본인을 망라한 반관반민 단체였다.21) 이 단체의 설립취지문에는 당시의 상황인식과 그들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을,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 래서 일억일심으로 직역봉공(職役奉公)해야 할 때로 인식하고, 미술가 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하기 위해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고 밝혔다. 사실 조선미술가협회는 발족 이후 조선의 미술계를 주도한 단체다. 발족 이듬해인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매년 11월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주최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기구개혁을 단행하여 5명의 화가를 생산현장에 파견하는 등 전시체제에 부응한 선도적인 사업을 전개하 였다.22) 그밖에도 일본정신의 진수를 체득하게 하기 위한 일본의 성지순례나 군인 경찰 관 21) 임종국, 황국신민시절의 미술계, 계간미술 (중앙일보계간미술,1983.봄), pp.34 39 22) 화단의 신발족, 매일신보 (1941.2.23)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09 리의 위문을 위한 만화가 파견,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개최 등이 조선미술가협회가 계획한 사업들이다. 조선미술가협회 발족 당시 평의원의 한명이었고 점차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가던 야마다 신이치는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그 이듬해에는 단광회( 丹 光 會 )를 결성하였다. 명칭에서부터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단광회는 야마다 신이치 가 주도한 단체로, 창립 당시 참여한 미술가들은 야마다 신이치 외에 김인승, 심형구 등 도 쿄미술학교 출신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23) 야마다의 경우 김인승이나 심형구보다 10여 년 먼 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선배로서 그들을 규합하여 조선미술가협회의 별동대 성격을 가지 는 단광회의 결성에 이른 것이다. 이 단체는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하여 19명의 회원이 공 동으로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화>(도판.5)를 제작하였다.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화>를 배경 으로 한 기념촬영(도판.6)에서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야마다 신이치의 위치가 상 징적으로 보여주듯이 당시 그는 단광회의 중심적 존재였고, 1943년 1월에 촬영한 이 사진에 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화>는 그 해 6월 14일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됨 으로써 당시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5. 단광회 회원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1943 도판 6. <제1회 단광회전시회 기념촬영> 1943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전시체제가 강화된 가운데 1944년 개최된 결전미술전람회는 당시 상황에서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역할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경성일보사 가 주최한 이 전람회는 조선군보도부와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 조선연맹, 조선미술가 협회가 후원하였다. <표 3>에 나타나 있듯이 장르를 불문하고 일본인 미술가들의 비중이 절 23)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학, pp.50 53
日本學報 第100輯(2014.8) 410 대적으로 컸고, 양화부의 경우 야마다 신이치는 심사원으로서 <사진도 가는 조선학도 출진>, <미명의 천진(天津) 부근 전투>(도판.7), <일하는 포로들> 등 3점을 출품하여 열의를 과시하 였다. <미명의 천진 부근 전투>에서 보듯이 배경의 건물이나 병사들의 모습은 리얼리티가 결여된 채 묘사되어 있어 그가 그린 전쟁화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가노 간라이, 다카하 시 다케시, 하야시 도시오가 각각 조선군사령관상, 특선, 조선미술가협회장상을 수상하였고 네즈 소이치는 경성일보사장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전람회에 심사원으로 참여한 심형구나 김인승, 특선한 조병덕의 존재가 있긴 하였으나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우위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던 것이다. 특히 단광회 회원이었던 야마다 신이치나 심형구, 김인승이 심사원을 맡 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마다 신이치의 주도로 운영된 단광회는 전시체제가 강화된 가운데 결전미술전람회와 같은 선전 이벤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표 3> 결전미술전람회 심사원 및 수상자 장르 서양화 조소 일본화 심사원 山田新一 심형구 星野二彦 三木弘 日吉守 遠田運雄 김인승 戸張幸男 金城景承(김경승) 今田慶一郎 江口敬四郎 이상범 수상 특선 根津荘一(경성일보사장상) 伊東正明(국민총력조선연맹 홍보부장상) 林敏夫(조선미술가협회장상) 加納莞蕾(조선군사령관상) 조병덕 高橋武 早川巌 岡島正光 山下一彦 朝岡寛一郎 松崎嘉美 伊東孝重(윤효중)(경성일보사장상) 細川順(총독부 정보과장상) 佐伯輝一 조규봉 佐仲三森 石村豊子(경성일보사장상) 김기창(조선군보도부장상) 石見静江 정종여 이건영 木戸一秀 도판 6. 山田新一 미명의 천진(天津) 부근 전투 1943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11 4.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위상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이 총력전시기에 들어 수행한 역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그들의 위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식민지 조선 미술계의 대표자였는가, 아니면 제국 일본의 대 리인이었는가? 그 둘 다 아니라면 또 어떤 위상을 점하고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들이 조선의 미술계나 일본의 미술계와 형성한 관계나 지위, 역할 등과 연관되어 있는 만 큼 단순하지 않다. 조선총독부와 같은 통치권력과 미술 분야가 밀착된 시기인 점도 고려해 야만 한다. 또한 당시 그들의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 미술계 내부의 위상에 더하여 조선의 통치권력과 그들이 맺은 관계나 일본 본토 미술계와의 연관, 그리고 각각이 보인 시 간적 추이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제반 여건 가운데 먼저, 당시 조선 미술계 내부의 사정을 고려한 그들의 위상은 지도급 미술가의 그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미전의 심사참 여로서 일본에서 파견된 심사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 미술계의 권력으로서 조선 미전의 심사결과를 좌우하던 심사원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 미술계의 유력자로서의 지 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미술계 유지 라고 할 만한 위상을 그들이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근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수용된 서양화 장르에서 정규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들의 위상 은 각별하였다. 최고급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관여하거나 프랑스 유학경력을 가진 작가로 서의 활동을 전개해간 그들이었던 만큼 조선의 미술계에서는 가장 비중있는 미술가였다. 사 실 이는 전통회화인 동양화 장르에서 전근대와의 연속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우들과는 구별된 점이기도 하였고, 야마다 신이치와 같은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특별한 위상을 말해 주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 식민통치권력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그들은 전시체제의 적극적인 협력자로서 침 략전쟁을 수행하는 제국의 붓 이었다. 그들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의 결성 이후 단체의 운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은 물론이고 국민총력 조선연맹에 소속되어 전시체제에 돌입한 제국의 통치방침에 순응한 총력전 구현자이자 실천자였던 것이다. 총후미술전람회와 같이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회가 열릴 경우 심사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생산현장 파 견과 같이 조선미술가협회가 수행한 여타사업에서는 생산현장에 파견되어 현지의 광경을 형 상화하여 보고하는 등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24)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며 제국의 붓 으로 활동한 그들의 위상을 식민본국과 식민지의 관 계를 개입시켜보면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식민지 상황의 전달자 으로서의 위상이 다. 특히 이 시기 개최된 성전미술전에 참가한 야마다 신이치는 조선에서 실시된 징병제와 관련된 장면을 형상화하였다. 그 작품을 제작하고 출품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가 조선 현지의 사정을 식민 본국 일본에 알리는 메신저였다는 점이다. 이후 그는 조선인 전사자의 전사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을 출품하는 등 미술을 통한 식민지 조선의 대변인 역할 을 수행함으로써 일본 본토 거주 미술가들이 대신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조선인 미술가들 24) 山田新一, 死闘する計画造船, 朝鮮公論 362(1943.5), p.57
412 日本學報 第100輯(2014.8) 이 아직 수행하지 못한 역할을 그들보다 한발 앞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위상을 한층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일본 본토 미술계와의 연관이다. 그들은 항상 중심 을 의식하고 또, 그것을 지향하는 주변의 미술가 였다. 물론 그 주변의 미술 은 단순히 열등감에 매몰된 중심지향성은 아니었다. 그들의 저술 에는 도다 가즈오, 이인성, 에구치 게이시로, 미키 히로시, 야마구치 다케오 등 조선에 거주 하고 있던 조선인 혹은 일본인 미술가들이 식민본국이자 중심인 일본 미술계에 진출한 사실 을 둘러싸고 본토 일본의 미술계에 대한 콤플렉스와 지향성을 동시에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의 미술이 불만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 본토미술의 대안적 성 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려는 의도도 드러내었다.25) 거기에는 대안적 주변 의 가능성이 내 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야마다 신이치의 경우 그와 같은 불만이나 콤플렉스가 종전 이후 GHQ점령기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전후 그는 GHQ에 협력하여 아시아태 평양전쟁기 일본의 프로파간다에 사용된 전쟁화의 수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26) 5. 맺음말 총력전체제가 전개된 중일전쟁 발발 이후 태평양전쟁 종전까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미 술가들의 활동이 가진 복잡한 성격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들은 식민자로서 조선 에 와서 식민통치세력의 일부를 구성했지만, 조선총독부의 통치대상이었다. 서양화 장르의 경우에서 보듯이 미술교육이나 작품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그들은 조선미전을 무 대로 한 엘리트미술가로서 조선의 지역색을 표현하려 하였고, 그와 동시에 일본 본토 미술 계와는 긴장관계를 형성하였다. 총력전 체제에 돌입한 1930년대 말 이후 그들의 활동은 제 국의 붓 으로 규정될 만큼 전시체제에 협력한 프로파간다 미술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 였다. 조선미술가협회나 국민총력 조선연맹 문화부, 단광회 등의 활동은 그 일부로서 조선미 술가협회가 주최하거나 후원한 반도총후미술전람회나 결전미술전람회 등, 그들이 주도적으 로 조직하거나 관여하여 다수의 조선인 미술가들도 참여한 전람회는 침략전쟁 선전의 일환 이었다. 또한 그와 같은 일련의 활동은 당시 다수의 조선인 미술가들과도 연관되어 있어 해 방후 논란이 된 친일미술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곧 한국근대미술사 연구에 직결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위상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그들이 식민지 상황의 메신저였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열린 성전미술전람회에 징병제 실시와 같은 당대 조 선의 현실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여 출품한 사실은 그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그 25) 山田新一, 鮮展洋画への希望, 朝鮮及び満州 (1939.6), pp.51-52 및 三木弘, 朝鮮洋画団, 朝鮮公論 361(1943.4), p.32 26) 河田明久, 戦争記録画 に関する三のリスト 対照及び解題, 鹿島美術研究 年報第15号別冊(鹿島美術財団, 1998), pp.410 428 및 http://www.coara.or.jp/~fujita/again_masked.htm 참조
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13 들은 같은 시기 조선의 미술가들보다 한발 앞서 작품을 통해 조선의 사정을 본국 일본에 알 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로서 한편으로는 식민본국 일본의 미술 계를 중심 으로 인식하는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그들의 위상이 총력전시기에 들어 달라진 일면이다. 치마 저고리, 흰옷이나 상투, 초가집 등 상징적인 모티프로 이국취미를 형상화하 던 시기와 달리 전시체제하의 시국색을 리얼타임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바로 그 점은 그들 이 조선의 미술계를 대안적 주변 으로 인식한 일면과 함께 그들의 위상이 가지는 복잡한 단 면을 드러내준다.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술계에서 미술학교의 부재나 식민지 관전인 조선미전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면 조선의 미술계에서 유력 재조선일본 인 미술가들의 존재는 식민지시대 전시기에 걸쳐 미술계 유지 로 규정해도 손색이 없다. 조 선미전의 설치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그와 같은 양상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총력전 체제가 가동되며 심화되어갔다. 조선총독부와 밀착된 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큰 비중을 차지 한 만큼 동시대 조선인 미술가들의 활동영역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점 또한 간과하 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이와 같은 다면성은 재조선일본인미술가의 전부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다면성을 통하여 주요 화가들의 위상을 규정하고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것으로 이전까지 사각지대에 놓여있 던 그들의 활동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결과적으로는 한국근대미술사나 식민지시대 문 화예술 분야의 양상에 대한 연구도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Reference) 기다 에미코(2010), 재조선 일본인 화가에 대한 정치적 편견을 지우자, 플랫폼 19, 인천문화재단. Kida, E.(2010), Jaejoseon ilbonin hwagae daehan pyeongyoneul jiuza, Platform19, Incheon Cultural Foundation, p.50. 기유정(2007), 1920년대 경성의 유지정치 와 경성부의회, 서울학연구 28, 서울학연구소. Ki, Y.(2007), 1920nyeondae Gyeongseongui yuji jeongchi wa Gyeonseonbu euihoe, Seoulhak Yeongu28, Seoulhak Y eonguso, pp.1 34. (2008),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과 조선의식 의 형성 3 1운동 직후 內地延長主義 를 중심으로, 大東文化硏 究 제76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Ki, Y.(2008), Sikminji Joseonui Ilboningwa Joseonuisik ui hyeongseong, Daedongmunwha Yeongu76, Sungkyunkwan Univ. Daedongmunhwa Yeonguso, pp.375 403. 김용철(2004), 도쿄미술학교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학 6, 동악미술사학회. Kim Y.(2004), Tokyo misulhakgyo iphak jedowa Joseonin yuhak saeng, Dongak Misulsahak6, Dongak misulasa hakhoe, pp.78 93. 김주영(2002), 재조선일본인화가와 식민지화단의 관계 고찰, 미술사학연구 233/234, 한국미술사학회. Kim J.(2002), Jaejoseon ilbonin hwagawa sikminji hwadanui gwangye gochal, Misulsahak Yeongu233/234, 한 국미술사학회, pp.301 327. 나카바야시 히로카즈(2012),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과 재조일본인 교원 통제, 東方學志 제157집, 연세 대학교국학연구원. Nakabayashi H.(2012), 1910nyeondae Joseon chongdokbuui gyoyuk jeongchaekgwa jaejoseon ilbonin gyowon tongjye, Dongbanghakji157, Yonsei Univ. Gukhak Yeonguwon, pp.327 384. 박계리(1996), 일제시대 조선향토색, 한국근대미술사학 4, 한국근대미술사학회. Park C.(1996), Ilje sida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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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 총력전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의 역할과 위상 415 <要 旨> 중일전쟁 발발 이후 태평양전쟁 종전까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은 복잡한 성격을 갖 고 있다. 총력전 체제에 돌입한 1930년대 말 이후 그들은 제국의 붓 으로 규정될 만큼 침략전쟁을 수행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미술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식 민본국에 전하는 메신저이기도 하였다. 이전시기까지 조선미술계의 유지 였던 그들이 조선미술가협회나 국민총력 조선연맹 문화부, 단광회 등을 통해 전개한 활동은 그 일부다. 그들은 조선미술가협회가 1944 년 개최한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와 같은 전람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거나 관여하였고, 일본에 서 1939년 열린 성전미술전람회(聖戰美術展覽會)에도 참가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조선인 미술가들 의 행적이 해방후 친일미술 시비를 불러온 사실을 고려하면 같은 시기 재조선일본인 미술가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미술사 연구와 직결되는 이유도 자명해진다. 주제어: 재조선일본인, 전쟁화, 총력전,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투 고 : 2013. 05. 31. 심 사 : 2013. 06. 15. 심사완료 : 2013. 0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