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사학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2010년 6월 Korean J Med Hist 19 ː 189 208 June. 2010 C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 505X, eissn 2093-5609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박지욱 * 1. 머리말 2. 유엔의 참전과 의료지원 5개국 3. 스웨덴의 파견과 초기 상황 4.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민간 구호활동 5. 스칸디나비안 프로젝트 6. 자료들의 불일치에 관하여 7. 맺음말 1. 머리말 6 25전쟁으로 유엔(United Nations; 이하 UN)의 깃발 아래 16개국 1) 이 대한 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 지만 이 16개국 이외에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지원단(UN Medical Assistance) 을 파견한 스웨덴 왕국, 노르웨이 왕국, 덴마크 왕국, 인디아 공화국, 이탈리 아 공화국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 논문은 이 다섯 나라의 의료지원을 개관하고, 특히 가장 많은 인원으로 가장 오랜 기간 국내에서 활동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Swedish Red * 박지욱신경과의원 주 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1288-1 온누리클리닉 5층 (690-804) 전 화 : 070-8846 -6801 / 팩스 : 0303-3130-6119 이메일 : indigo@live.co.kr 1) 전투병을 파병한 16개국은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 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터키, 영국, 미국이다.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89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Cross Field Hospital)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유엔의 참전과 의료지원 5개국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무력으로 남침하자 6월25일(현지시간)에 긴 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The Security Council; 이하 안보리)는 북한의 무력남침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군사행동의 즉각적인 중지와 더불어 북위 38 선 이북으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2) 하지만 북한은 이 결의를 묵살하고 전투행위를 중단하지 않자 6월 27일(현지시간)에 다시 소집 된 안보리는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이른바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원조(Military Assistance to the Republic of Korea)>결의를 채택하였다. 3) 이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유엔에 군대를 파병하 게 되었다. 7월 1일에는 참전국가들 중 처음으로 미군의 지상군 병력이 부산에 도착 하였고, 7월 7일에는 참전국들의 군사력과 여타의 원조를 관할할 통합 사령 부(Unified Command)의 지휘권을 미국이 갖도록 하는 안보리의 결의가 통과 되었다. 4) 그 결과 유엔의 위임을 받은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 령이 미국의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통합 사령부 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operational control authority)이 통합 사령부로 이양되었으며, 7월 24일에는 다국적 군대의 통합사령부인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UNC)가 일본의 도쿄에 설립되었다. 5) 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유엔 안보리 결의 제 82호(The Security Council.82;1950. Resolution of 25 June 1950[s/1501]). http://daccess-dds-ny.un.org/doc/ RESOLUTION/ GEN/NR0/064/95/IMG/NR006495.pdf?OpenElement (2010년 4월 29일 확인) 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유엔 안보리 결의 제 83호(The Security Council.83;1950. Resolution of 27 June 1950[s/1511]). http://daccess-dds-ny.un.org/doc/ RESOLUTION/GEN/ NR0/064/95/IMG/NR006495.pdf?OpenElement (2010년 4월 29일 확인) 4)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유엔 안보리 결의 제 84호(The Security Council.84; 1950. Resolution of 7 July 1950[s/1588]).http://daccess-dds-ny.un.org/doc/ RESOLUTION/GEN/ NR0 /064/97/IMG/NR006497.pdf?OpenElement (2010년 4월 29일 확인) 5)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 190 l 醫 史 學
12)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전투부대의 파병 외에 다섯 나라가 인도적인 목적으로 의료지원단을 파견 하였다. 제일 먼저 스웨덴이 7월 14일에 UN에 지원 의사를 알린 것을 필두 로, 8월에는 덴마크와 이탈리아가 지원 의사를 밝혔다. 11월에는 인디아가, 그리고 1951년 3월에는 노르웨이가 마지막으로 의료지원단의 파견을 결정하 였다. 이에 따라 1950년 9월에는 스웨덴의 적십자 야전병원이 부산에서 진료를 시작하였고, 6) 12월에는 인디아의 제60 야전 앰뷸런스대대(the 60 th Parachute Field Ambulance 7) Platoon)가 평양에서, 8) 1951년 3월에는 덴마크의 적십자 병 원선(Danish Red Cross Hospital Ship; 유틀란디아호(Jutlandia))이 부산항에서, 9) 1951년 6월에는 노르웨이의 이동 외과병원(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NORMASH)이 의정부에서, 10) 1951년 10월에는 이탈리아의 제68 적 십자병원(the 68 th Red Cross Hospital)이 서울 영등포에서 11) 의료 구호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국가들 중 스웨덴과 인디아는 중립국이었고, 덴마크, 이탈 리아, 노르웨이는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며, 이탈리아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 다. 각국의 활동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 1. 의료지원국의 현황 12) 국가 참전인원(명) 배치인원 연인원 지원 형태 활동 지역 활동 기간 스웨덴 170 1,124 적십자 야전병원 부산 1950년 9월 - 1957년 4월 go.kr/10/200201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6)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go.kr/20/200317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7) 앰뷸런스(ambulance)는 야전병원(field hospital)을 의미하기도 한다. 8)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 go.kr/20/200318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9)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go.kr/20/200319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10)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go.kr/20/200320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11)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 koreanwar60.go.kr/20/2003210200.asp (2010년 4월 29일 확인). 12) 이 도표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http://www.koreanwar60.go.kr/20/2002000000.asp#n2 (2010년 4월 29일 확인).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91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국가 참전인원(명) 배치인원 연인원 인디아 70 627 지원 형태 활동 지역 활동 기간 제60 야전 앰뷸런스대대 평양, 대구, 가평, 문산 1950년 11월 - 1954년 2월 덴마크 100 630 적십자 병원선 부산항, 인천항 1951년 3월 - 1953년 8월 노르웨이 105 623 이동 외과병원(MAS H) 의정부, 동두천 1951년 6월 -1954년 10월 이탈리아 72 128 제68 적십자병원 서울 영등포 1951년 10월 -1955년 1월 3. 스웨덴의 파견과 초기 상황 영세 중립국가 13) 였던 스웨덴은 유엔 안보리의 7월 7일 결의에 의거하여 7 월 14일에 외무부 장관(the Minister for Foreign Affairs)이 유엔 사무총장 (Secretary-General)에게 한국의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 in Korea)에 전투 병력을 파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신에 스웨덴이 인력과 비용을 부담하는 야전병원(field hospital)을 남한(South Korea)에 파견하겠다 고 통보했다. 8월 10일에 야전병원 파견 결의안이 스웨덴 국회를 통과하자 스웨덴 정부는 야전 병원의 파견 준비를 자국의 적십자사에 위임했다. 아울러 스웨덴 정부는 '육 전( 陸 戰 )에서의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사정을 개선시키기 위한 1949년 8 월 12일자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 이 자신들의 야전병원의 임무에 적용할 수 있다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통보하였던 것 14) 으로 보아 철저하게 중립국으로서 인도적 목적을 가진 적십자 병원을 파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3) 1805년에 스웨덴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영국-오스트리아의 동맹에 합류했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러시아-오스트리아의 동맹군 을 격파하자 영국은 철군하고 스웨덴은 프랑스에 패전한다. 동맹국의 패배로 인한 19세기 의 대외정책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스웨덴의 외교입안자들은 훗날 더욱 신중한 태도를 갖 게 되었고,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선언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토니 그리피스,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유럽 스칸디나비아 (미래의 창, 2006) 34-5쪽. 14) Marc Giron, To The Association of Swedish Field Hospital for Korea (Stockholm: Royal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of Sweden, 1971). 192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파견이 확정된 8월 10일 경에는 한반도의 상황 은 급박하였다. 8월 초에는 유엔군은 대한민국 국토의 10%에 해당하는 부산 교두보(Busan Perimeter)를 지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 르고 있었다. 이 방어선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구마 대구( 邱 馬 ) 고속국도, 북 쪽 경계선은 경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경부( 京 釜 ) 고속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8월 한 달을 버티는 동안 북한군의 전투력을 50~60%로 격감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는 있었다. 15) 하지만 이러한 수세( 守 勢 ) 의 지연작전으로 전선에서는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스웨덴 각지에서 자원한 600명의 스웨덴인들 중 176명이 파견 인원으로 최 종 선발되었고, 병원장으로 그루트(Dr. Carl-Erik Groth)대령이 임명되었다. 스 웨덴 적십자사는 15일이라는 단기간에 준비를 마치고 8월 24일에 스톡홀름 (Stockholm)을 출발하여 16) 미국을 거쳐 한 달만인 9월 23일 토요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단이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9월 초에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가 부산으로 철수하였고 부산도 전선에서는 50~100 km 거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유엔군 사 령부는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위치를 부산으로 정하고 미국의 제 8군(the Eighth United sates Army) 관할을 받게 하였는데 이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 유엔 회원국들이 미군에 배속되기로 한 7월 7일의 안보리 결의사항 제 84호 에 의거한 것이다. 17) 병원 위치로 처음 내정된 곳은 부산항에서 북쪽 10 Km 지점에 있는 하야 리아 부대(Camp Hialeah) 18) 의 영내로 스웨덴 측의 계획대로 병원 공사가 일 15)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www.koreanwar60. go.kr/10/2002010300.asp 16)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 기념탑에는 8월 24일, 6 25전쟁 60주년 기념 사업회는 8월28일로 주장한다. 17) 미국 육군성(Department of the Army; DPTAR)이 도꾜의 극동군사령관(Commander in Chief, Far East definition; CINCFE)에게 보내는 기밀문서(confidential) W95137, 1950 참조. 이런 이유로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직원들은 미군의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스웨덴이 표시 된 적십자 기장을 달았고 여기에 스웨덴을 표시하였다. 18) 하야리아 부대는 1950년 9월부터 주한 미군이 부산기지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최근까지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93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부 시작되었었다. 하지만 더 많은 병상이 필요하다는 유엔 사령부의 희망으 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9월 14일 본진에 앞서 부산에 도착한 병원장 그루트 대령은 병원 부지를 방문하여 미군 제2 군수기지사령부(2nd Logistical Command)의 군의관과 토의를 거쳐 하야리아 부대의 남쪽에 소재한 부산상업 고등학교(이하 부산상고) 19) 에 병원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20) 하지만 다른 자료를 살펴보면 부산상고에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을 설치 할 계획은 이미 2개월 전에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로는 부산의 변 두리였던 서면의 부산상고는 7월 12일에 유엔군에 징발되었다. 21) 최초에는 이동부대의 임시 주둔지로 사용되었다가 7월 말부터는 미군 건설부대가 2개 월에 거쳐 교실 30개를 병원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9월 23일 토요일에 야전병원단의 본진이 부산에 도착하였지만 미국에서 선적된 화물들은 9월 24일 저녁에 도착하였다. 하역 작업이 철야로 이루어져 9월 25일 월요일 정오경에 마무리 되었다. 2.5톤 트럭 10대와 약 300개의 상 자로 꾸려진 화물들이 부산상고 본관으로 운송되어 9월 25일 월요일 저녁 6 시 50분부터 진료가 시작되었다. 첫 날에만 68명의 환자를 보았다. 22)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학교의 교사( 校 舍 )에 2개의 병동, 16개의 병실, 그리고 진찰실, 수술실 등을 갖추었다. 아울러 운동장에도 간호사 기숙사, 입 원실, 식당 등의 조립식 퀀셋(quonset) 건물들을 세워 병원 시설로 이용했다 (부산상고동창회, 1995: 221-3). 개원시의 병원 현황은 200병상 규모로 92명의 의료진, 76명의 행정직, 목사 1명을 포함하는 총 169명 23) 의 스웨덴인들이 근 미군의 주요 보급기지였다. 2006년 8월에 폐쇄되었고 2010년 1월에 부산광역시로 반환되 었다. 19) 부산상업고등학교는 1989년에 학교를 이전하였고, 2004년에는 개성고등학교로 이름이 바 뀌었다. 부상상고 옛 터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서면점)이 들어서 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스웨덴 참전을 기념하여 1971년에 세워진 스웨덴 참전 기념비가 이전 설치되어 있다. 20) Carl Erik Groth, A Report to Swedish Red Cross, 1950. 21) 유엔군 사령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7월 24일이 일이고, 7월 1일에 미군 지상군이 처 음으로 부산에 상륙하였기에 미군일 가능성이 높다. 22)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pp.8-10; Carl Erik Groth, A Report to Swedish Red Cross, 1950. 23) Swedish red Cross, Personal vid Svenska sjukhuset i Korea (Stockholm). 168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극동군사령부(Commander in Chief, Far East definition; CINCFE)가 주한 8군사령부 (Eighth United States Army in Korea; EUSAK)에 보낸 기밀문서(confidential) C51618. 1950년 194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무했다. 그들 외에 200여명의 한국인들이 청소부, 잡역부, 세탁부, 경비원 등 으로 취업하였다. 부산에서의 스웨덴어의 통역은 불가능하여 부산상고에 근무 하였던 조병효 교사가 병원이 철수할 때까지 영어 통역을 맡았다(부산상고동 창회, 1995: 221-3). 그 외에 경기중학생으로 부산에 피난을 왔던 한영우가 아 르바이트로 통역 일을 시작하여 나중에 병원장의 통역까지 맡았다고 한다. 24) 표 2. 개원 당시의 의료진의 구성 구분 이름 병원장 Carl-Erik Groth (45세) 외과의사 Gerhard A Rundberg (47세) 위생-역학 전문가 Bj rn N E Hildebrand (41세) 신경/정신의학 경력 Ivar Spak (32세) 외과 Karl R Grunewald (29세) 정신과 경력 의사 N Arne str m (28세) 외과경력 (9명) Jarrl A Wetterfors (28세) 외과/산부인과경력. Anders G Karl n Lars E T Hedwall Sven O Bj rlin 치과의사 (1명) Bo Platon 약사 및 조수 Arne C G Pilz 외 1명 간호사 Ester Svensson (간호감독) 외 16명 간호조무사 Kerstin S Svensson 외 13명 방사선 기사 Ingvar E G Jarnald 외 2명 준 의료요원 Josef E Johansson 외 44명 총 합 92명 (Swedish Red Cross, Personal vid Svenska sjukhuset i Korea (Stockholm).) 병원장인 그루트 대령은 소련과 핀랜드 사이에 벌어진 겨울전쟁(Winter War; 1939.11.30. - 1940.3.13.) 중에 핀랜드를 돕는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군 의( 軍 醫 )로 일했다. 1945년에는 미국에서 군( 軍 ) 의료시스템을 익혔으며, 군 병원위원회(hospital bureau)의 의장을 역임한 스웨덴 군 의료계의 주요 인사였 12월 1일. 24) 한영우는 나중에 서울의대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닌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웁살라대학을 졸 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현재까지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한영우와의 인터뷰(2010년 5 월 3일); 장정수 기자, 방한한 노벨박물관 한영우 수석고문, 한겨레신문, 2005년 6월 9 일; 김윤덕 기자, 내 소원은 한국 과학자가 노벨상 타는 것, 조선일보, 2009년 12월 3 일; 심재우 기자, 린드스텐 스웨덴 학술원-한영우박사, 둘도 없는 50년 우정, 중앙일 보, 2004년 6월 4일; 장정수 기자, 방한한 노벨박물관 한영우 수석고문, 한겨레신문, 2005년 6월 9일.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95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다. 임기를 마치고는 본국으로 귀환하였다가 195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외교 사절단으로 내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이때는 해군 소장으로 제 독(Rear Admiral Royal Swedish Navy)의 지위였다. 25) 나중에는 의무사령관 (Surgeon Genera)의 지위에 올랐다. 26) 간호감독으로 파견된 스벤슨(Ester Svensson)은 외과 영역에서 20년을 일한 베테랑이었다. 그 외 외과, 소아과, 정신과 등에서 경력을 가진 8명의 임상의사와 1명의 치과의사가 파견되었고 특이하게도 보건 역학 전문가 1명도 개원 당시에 근무하였다. 방사선 촬영을 위한 시설은 개원 당시부터 갖추었다. 추가적으로 치과 진 료를 돕기 위한 치과 기술자는 1951년 7월부터, 치과 간호사와 조수는 1951 년 11월부터 파견되었다. 물리치료사들은 1952년 10월부터 파견되었으며, 본 격적인 아동 구호 진료를 위해 소아과 간호사들이 휴전 후인 1954년 1월부터 파견되었다. 개원시의 병원내 군 최고 책임자는 Nyby, N Gunnar 대령이었다. 직원들의 근무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체류 기간을 연장하거나 재파견을 자원 한 경우도 많아 1~2년 이상의 장기근무자들도 있었다(국방전사연구소, 1998: 425). 27)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이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한 9월 말에서 시월 초의 시기는 인천상륙작전(9월15일)에 이어 서울수복(9월 28일)이 이루어졌으며 동 시에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38선 이남이 지역을 거의 다 회복한 때였다. 그 여파로 전선으로부터 많은 부상병들이 부산으로 유입되어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10월 초에는 400 병상으로, 나중에는 600병상으로 증설되었다. 야전병원은 개념상 전선에 가까운 후방에 설치하는 임시병원으로 전황에 따라 이동할 수 있는 병원이다. 하지만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철수할 때 까지 계속 부산에 남았다. 당초에는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전선에 가까운 함 25) 이승만대통령 스칸디나비아사절단 Carl-Erik Froth 해군 소장 접견 악수. (서울: 공보처 홍 보국, 1959)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T 0082847-2. 공보처 홍보국, 1959년. 26) Regular Correspondent. Swedish Field Hospital to Korea, the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3, 1950, p.257; Koreanska Sällskapet i Sverige, Stockholm. 27) 하지만 스웨덴 측의 자료인 Swedish red Cross, Personal vid Svenska sjukhuset i Korea (Stockholm)에 따르면 전체 1,124 중 163명이 이 경우에 해당하여 15%의 비율이다. 196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경남도의 흥남( 興 南 )과 원산( 元 山 )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우고 현지답사까지 마쳤지만 유엔군의 후퇴로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28) 결국 최후 방에 남게 된 병원은 야전병원에서 후송병원(evacuation hospital)으로 기능이 변경되었다. 그 결과 전선의 전상병들은 항공편이나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후 송되어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에 입원하였고(이춘식, 2008: 9-13) 그 중 상태 가 위중한 부상병들은 항공기 및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이나 미국으로 다시 후송되었다(국방부, 1980: 817). 29) 1950년 가을, 연합군의 38선 이북지역의 북진하여 부산 지역이 전선에서 멀어지게 되자 병원으로 유입되는 전상자들의 수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11월 말에 중공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펴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병원으로 유 입되는 부상병들의 수는 다시 증가했다. 아울러 개전 후 첫 겨울을 맞으며 동상( 凍 傷 ) 환자들도 급증하였다.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주된 임무는 유 엔군 전상병( 戰 傷 兵 )들의 치료였지만 한국 군병원으로부터 의뢰되어오는 위 중한 한국군은 물론, 북한군이나 중공군 포로들도 치료했다. 이는 스웨덴이 중립국이었고 병원 운영 주체가 적십자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0) 4.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민간 구호활동 1951년 여름이 되면서 전선은 개전 직전의 상태로 되돌아갔고, 전선은 교 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7월 10일부터는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전선에서 적 극적인 작전의 전개가 줄어들자 전상자들의 숫자도 많이 줄어 31) 병원의 업 무 부담이 완화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부상병들의 치료 외에 민간인 구호활 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51년 6월 1일부터 1952년 6월 30일까지 13개 28)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pp.8-10. 29) Ingrid s Job is done, LIFE 30, 1951, pp.179-80. 30) 1950년 11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통역으로 일했으며 현재 스웨덴에서 의사로 활동 중인 한영우는 당시에 가장 많이 치료한 환자들은 북한에 의용군으로 입대했던 포로들이라고 밝혔다. 한영우와의 인터뷰(2010년 5월 3일). 31) 미군의 경우 1951년 6월까지 전사망자는 21,300명이고, 부상이 53,100명이며, 실종 및 포 로가 4,400으로 인명 피해는 8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기간 3년 동안 발생한 피해의 60%가 이 처음 1년 동안 발생한 것이다.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http://www.koreanwar60.go.kr/10/2003020100.asp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97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월 동안의 민간인 진료 실적은 입원 약 900명, 연 치료일수는 약 23,000일, 방사선 촬영은 약 7,800명, 촬영사진은 10,000장 이상으로 집계된다(국방전사 연구소, 1998: 424). 민간인 환자들의 대부분은 부산 지역의 민간병원에서 치료가 힘들어 이송 된 중환자들이었다. 당시 부산의 민간병원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 있었다. 개 전( 開 戰 )과 동시에 많은 의사들이 자원 입대하여 의사 수가 부족하였고, 물자 부족으로 병원의 시설과 장비 그리고 의약품들의 질도 낮은 상태였다. 반면 에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본국 적십자사로부터 공급받는 의료 기자재나 수술 장비의 질이 좋았고, 의약품이나 수혈 등에서도 여유가 있었다. 더하여 본국의 저명한 의사들도 자진 방한하여 봉사하는 경우도 있어 전반적으로 수 준 높은 의술을 펼쳤다(부산광역시청, 1991: 185; 국방전사연구소, 1998: 425). 시간이 갈수록 민간인에 대한 진료의 폭은 점점 확대되어 부산 철도병원 ( 鐵 道 病 院 )이나 적기병원( 赤 崎 病 院 )에는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간호사들 이 상주하여 민간인 구호를 도왔다. 1951년 가을부터는 매주 1회씩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사들이 이들 병원으로 나가 직접 한국인 환자들을 진료 하며 동시에 한국인 의사들에게 의술을 지도하였다. 아울러 상태가 위중한 환자들은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국방전사 연구소, 1998: 424; 부산광역시청, 1991: 184-5). 1952년 5월초부터는 민간인 환자들을 외래( 外 來 )에서 보기 위한 독립된 부속시설(진료소)을 갖추어 운영 하기 시작했다(국방전사연구소, 1998: 424). 32) 1953년 4월에는 결핵환자들을 위한 병상을 신설하였다. 이전에는 외래에서 만 처치했거나 수술 후 민간병원으로 입원시켰던 결핵 환자들을, 이후로는 수술 및 입원까지 할 수 있도록 병상 5개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10월부터는 25명을 수용하는 막사 1개 동( 棟 )을 결핵 환자들을 위한 전용 병동으로 사용 하였다. 이 병동은 늘 만원이었고 물론 진료비는 무료였다(대한결핵협회, 1998: 384-5). 나중에는 만연한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의료진들이 부산에서 32) Sir. Neil Cantlie, Impression of a Visit to Korea and Japan, British Medical Journal 4796, 1952, pp.1253-55. 198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BCG 접종 사업을 펼치기도 하는 등 결핵 예방에 큰 열의를 보였다.(국방전 사연구소, 1998: 425). 33)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야전병 원의 이름을 버리고 부산 스웨덴 병원(Swedish Hospital in Pusan) 으로 이름 을 바꾸었다. 하지만 1년 정도는 전상자의 치료도 병행하면서 전쟁 난민들과 극빈자들을 무료 진료하였다. 1954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민간인 진료에 주 력하였고, 1955년 5월에는 학교를 징발당해 가교사( 假 校 舍 )에서 수업을 진행 해오던 부산상고의 환수 요청을 받아들여 국립부산수산대학교( 國 立 釜 山 水 産 大 學 校 ) 34) 내로 병원을 이전하였다(이승영, 2004: 14-5). 이 무렵 부산 스웨덴병원은 여전히 미8군의 관할 아래에 있었지만 주된 진료대상은 민간인이었다. 이즈음의 병원은 150 병상에 외래진료를 더한 종 합병원 체계를 갖추고 연간 외래에서 53,000 명 정도를 진료하였는데 내원 환자들의 대부분은 결핵(tuberculosis)과 기생충(parasite) 질환으로 집계되었다. 급증하는 한국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 11명과 간호사 35명으로 이루 어진 스웨덴 의료진 이외에 의사 19명과 간호사 40명으로 이루어진 한국인 의료진도 함께 일했다. 아울러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혈액은행(blood bank)도 갖추어 1955년에만 5,870 파인트(pint)의 혈액을 공급하였다. 35) 하지만 정전 이후에도 계속하여 주둔하는 것은 적십자 정신에 위배된다는 본국의 여론에 따라 부산 스웨덴병원은 1957년 3월에 병원 문을 닫았고(부산 광역시청, 1991: 186), 4월에는 한국을 떠났다. 스웨덴 병원이 부산에 체류한 기간은 6년 6개월이며 그 동안 총 1,124명이 스웨덴인들이 이곳에서 일했으 며 20개국에서 온 200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돌보았다(주한스웨덴대사관, 2009: 15-6). 36) 하지만 이후에도 병원에서 근무했던 소아과 의사 Dr. Aino Vainola 와 간호 사 Kerstin Persson은 한국인 의사들과 협조하여 투베르쿨린 검사와 BCG 접 33) Swedish Red Cross, Monthly Reports from Dr. Aino Vainola to the Korea (Stockholm). 34) 지금은 국립 부경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35) Foreign Letters. Swedish Hospital in Korea, the Journal of Aerican Medical Association 6, 1956, pp.551-2. 36)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pp.8-10.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199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종을 하기 위해 여러 병원이나 보육원 들을 방문하면서 결핵 퇴치 사업을 벌 였다. 1957년 4월부터 1958년 9월까지 총 61,172명에게 투베르쿨린 검사를 시 행하여 그 중 24,983명에게 BCG 접종을 시행하였다. 37) 5. 스칸디나비안 프로젝트 의료지원단을 파병한 5개국 중 스칸디나비아 3개국, 즉 스웨덴, 덴마크, 노 르웨이는 각각 적십자 야전병원, 적십자 병원선, 이동 외과병원을 한국에 파 견하였다. 이 3개국은 전쟁으로 와해된 한국의 의료체계를 복구하기 위한 논 의를 1951년부터 시작했다. 전후에 이들이 철수하게 되자 정부는 열악한 국 내 의료환경을 들어 스칸디나비아 3개국에 의료단이 계속 진료해줄 것을 요 청했다. 이에 따라 스칸디나비아 3개국, 유엔 한국부흥위원회(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그리고 한국 정부가 협력하여 스칸디 나비아 교육병원을 짓기로 합의, 1958년에 서울시립시민병원 38) 의 옛터에 국 립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을 세웠다(국립의료원, 2008: 51-3). 부산 스 웨덴 병원의 의료진들 중 일부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일했다. 39) 6. 자료들의 불일치에 관하여 본 연구를 통하여 필자가 발견한 문제점은 국내에 남은 스웨덴 적십자 야 전병원의 자료들이 부족하고, 남은 자료들조차 서로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국내 상황이 전란 중이라 정확한 기록이 어려웠을 것이 지만 한 편으로는 부산의 스웨덴 야전병원이 가진 다양한 성격 때문에 다양 한 관점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병원은 군복을 입은 군의관들이 근무하며 미군의 지휘를 받는 야전병 원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스웨덴 적십자가 운영하는 적십자 병원이 37) Swedish Red Cross, Monthly Reports from Dr. Aino Vainola to the Korea (Stockholm). 38) 현, 시림동부병원을 일컫는다. 이 병원은 1957년 5월에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 하였다. 39)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pp.8-10. 200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었고 나중에는 민간진료에 전력한 구호 병원이었다. 동시에 미수교국인 스웨 덴의 민간인들이 부산 지역의 학교를 빌어 7년 가까이 활동한 병원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이 병원에 대한 기록을 남긴 주체들은 군사( 軍 事 ), 외교( 外 交 ), 지역사( 地 域 事 ), 병원사( 病 院 史 ), 교육사( 敎 育 史 ) 등의 관점으로 자신의 시각으 로만 자료를 정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60년이 지나는 역사 동안 이 병원에 관해 흩어져 있던 기록들이 한데 모여 정리되지 못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 한 오류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파견 인원 수에 대하여서는 서로 엇갈리는 주장들이 있다. 국립 중앙의료원(국립의료원, 2008: 50), 국방부, 40) 육군 41) 은 모두 160명을, LIFE지 (March 13, 1951)와 the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1950; 257)는 176명을, 대한민국 정부(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170명 근무에 연 인원 1,124명을 주장하고 있다. 6년 6개월의 파견 기간 중 늘 일정한 인원이 근무하지는 않았을테지만 160~170명 정도의 인원 규모는 병원의 규모나 다른 의료지원단 파견국가의 지원 인원들과 고려해보면 근무 인원 수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한 스웨덴 대사관도 연인원 1,124명을 주장하므로(주한스웨덴 대사관, 2009: 15) 연인원 1,124명, 근무인원 160~170명 정도의 선으로 수정되 는 것이 옳다고 본다. 병원단이 부산에 도착한 날짜에도 이견이 많다.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기 념탑 과 한겨레신문에는 9월 23로, 육군 홈페이지, 국방부, 한국-스웨덴재단 은 9월 28일로 기록한다. 진료를 시작한 날짜도 부산상고 100년사 에는 9월 23일로,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기념탑 에는 10월 5일로 기록되었다. 2005년 9 월 23일(금요일)에는 현지에서 중립국 감시위원단 스웨덴 대표부의 주최로 개원 55주년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42) 필자는 당시 초대 병원장인 그루트 의 기록을 따라 9월 23일에 도착하여 9월 25일부터 진료를 시작한 것으로 본 40)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국방부 UN군 참전개황. 참전규모편. (http:// www.mnd.go.kr/common_include/index7.jsp) 41)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http:///www.army.mil.kr/history/%c0%da%b7% E1%BD%C7/%C2%FC%C0%FC/battle/hospital.htm) 42) 최상원 기자, 국립의료원 모태 스웨덴야전병원 개원 55돌, 한겨레신문, 2005년 9월 20 일.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201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다. 43) 병원의 철수 일자에 대해서도 한국결핵사 에는 1956년에 철수하였다 고 하지만 잘못된 주장으로 보인다(대한결핵협회, 1998: 385). 자료의 오류는 이렇게 민간의 주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기록정보센 터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 자료 CET006624 44) 에는 스웨덴병원선 환영식 기 념촬영 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앞서 밝힌 데로 병원선을 파견한 나라는 덴 마크이므로 이것은 심각한 오류라 생각된다. 아울러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홈페이지에는 45) 스웨덴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서울 및 부산 에 야전 병원을 파견했다 고 밝혔는데 스웨덴 야전병원은 부산에만 있어 서울의 야전 병원은 근거가 없다. 서울에 있던 병원은 이탈이아의 야전병원이다. 참전국이 자 우방인 스웨덴의 활동에 대해 외교 당국자들조차 정확한 이해와 관심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외교적 결례를 막기 위해서라 도 조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7. 맺음말 필자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으면서 전란 중 이 땅에서 인도적 구호 활동을 펼친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스웨덴은 영세중립국이면서 인도적인 지원을 펼 수 있는 적십자 야전병원 을 조기에 한국 전선에 투입하여 많은 전상자들을 돌보았다. 아울러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진 때에는 민간인 환자들을 적극 구호하였다. 정전 후에는 병 원 이름을 부산 스웨덴 병원으로 바꾸어 민간인 진료에 주력하였다. 전후의 열악한 한국 의료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부산 스웨덴 병원은 지역에서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하였다. 부산 체류기간인 6년 6개월 중의 절반 이상을 대민 진료에 주력했다. 이한 후에는 서울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연합하여 국립 의료원을 건설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시작부터 이 연구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일단 국내에 산재한 자료들을 한 43)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pp.8-10. 44) 스웨덴병원선 환영식 기념촬영, CET006624,공보처 홍보국, 1952년. 국가기록정보센터 소장. 45) http://swe.mofat.go.kr/kor/eu/swe/affair/relation/index.jsp 202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데 모아 정리하고 오류를 고쳐나가는 노력은 가능했지만 그 자료의 절대량은 아주 부족한 형편이다. 좀 더 나은 연구를 위해서는 스웨덴 현지에 보관되어 있는 방대한 자료와 관련자들의 인터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자료를 찾 는 도중에 관련자들의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고 남은 관련자들도 점점 그 수 가 급격히 줄어드는 실정이라 시급한 자료 수집과 조사 연구가 필요할 것으 로 생각된다. 이 논문이 지난 60년 동안 제자리 매김을 받지 못한 부산 스웨 덴 적십자 야전병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감사의 말씀 국립의료원 50년사를 보내주신 국립중앙의료원, 스웨덴-대한민국 수교50주 년 기념책자를 보내주신 서울주재 스웨덴 왕국 대사관, 부산상고 관련 자료 를 보내주신 백양총동창회 김수철 총무부장님, 동두천 현지답사를 도와주신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임태정님, 관련 자료들의 소재 파악에 도움을 주 신 외교통상부 외교문서 열람실 김현주 사서관님, 한국 스칸디나비아재단 김 수현 간사님, 유엔군 참전국협회 지갑종 회장님, 대한결핵연구원 오수연 과장 님, 국가기록원 문희정 사서님, 한국결핵사를 제공해주신 대한결핵협회 제주 도지부, 부산 관련 자료들을 만들고 보내주신 동서 손창오님, 매부 정영학님, 전쟁 당시 병원의 일들을 회상하여 증언해주신 스톡홀름의 한영우 박사님, 그리고 특별히 스웨덴 현지에서 자료를 찾아주시고 소중한 기록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제공해주신 스웨덴의 한국협회(Koreanska Sällskapet I Sverge)의 Mr. JC Wallenborg 부회장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열정적인 노 력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연결 고리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지막 부산 답사를 동행해주시고 필자 보다 더 큰 지적 호기심으로 격려 해주신 아버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203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사진 1>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평화수호박물관 소장.) <사진 2>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하는 칼 에릭 그로스 초대 병원장. (이승만대통령 스칸디나비아사절단 Carl-Erik Froth 해군 소장 접견 악수. (서울: 공보처 홍보국, 1959)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T 0082847-2.) 204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사진 3>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에 소재한 스웨덴 참전 기념비 투고일 2010. 5. 10. 심사일 2010. 5. 12. 게재확정일 2010. 6. 7. 참고문헌 <자료> 이승만대통령 스칸디나비아사절단 Carl-Erik Froth 해군 소장 접견 악수. (서울: 공보처 홍보국, 1959)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T 0082847-2.)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 기념탑.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소재. 국방부. 1976년 9월 20일 건 립.) 스웨덴 참전기념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 2동 소재. 스웨덴 야전병원협회, 스웨덴-한국협 회 건립. 1971년 10월 1일 건립.) 유엔 안보리 결의 제 82호 - 84호. 유엔홈페이지. (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64/95/img/nr006495.pdf?openelement) 6 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koreanwar60.go.kr) 재 스웨덴 한국협회(Koreanska Sällskapet i Sverige, Stockholm). 극동군사령부가 주한 8군사령부에 보낸 기밀문서 C51618, 1950년 12월 1일, 스웨덴 국가기 록원 소장.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205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미국 육군성(Department of the Army; DPTAR)이 도꾜의 극동군사령관(Commander in Chief, Far East definition; CINCFE)에게 보내는 기밀문서(confidential) W95137, 1950년 10월 28, 스웨덴 국 가기록원 소장. 미국 육군성이 극동군사령관에게 보낸 기밀문서 W95137, 1950년 10월 28일, 스웨덴국가기록 원 소장. 스웨덴 야전병원 전경 사진(표지 사진), 전쟁기념관 소장. 스웨덴 야전병원 전경 사진(사진 1),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소장.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한영우와의 인터뷰 자료(2010년 5월 3일). Marc Giron, To The Association of Swedish Field Hospital for Korea (Stockholm: Royal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of Sweden, 1971). Carl Erik Groth, A Report to Swedish Red Cross, 1950. Carl Erik Groth, Från Kriggjukhus Till Fredssjukhus, Joboseyo 1, 1961. Swedish red Cross, Personal vid Svenska sjukhuset i Korea (Stockholm). Swedish Red Cross, Monthly Reports from Dr. Aino Vainola to the Korea (Stockholm) LIFE, 1951. <연구논저> 국립의료원, 국립의료원 50년사 (서울: 2008). 국방전사연구소, UN군지원사 (서울: 국방부, 1998). 국방부, 한국전쟁사 11 (서울: 1980).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서울: 1998). 부산광역시청, 부산시사 제3권 (부산: 1991). 부산상고동창회, 부상100년사 (부산: 금성기획, 1995). 이승영, 대연 캠퍼스 돌집, 계간 부경저널 14, 2004. 이춘식, 풍운의 별 박정인 장군의 리더십, 국방리더십저널 35-9, 2008. 주한스웨덴대사관, 스웨덴-대한민국 수교50주년 (서울: 2009). 토니 그리피스,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유럽 스칸디나비아 (미래의 창, 2006). Sir. Neil Cantlie, Impression of a Visit to Korea and Japan, British Medical Journal 4796, 1952. Foreign Letters. Swedish Hospital in Korea, the Journal of Aerican Medical Association 6, 1950. Regular Correspondent. Swedish Field Hospital to Korea, the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3, 1950. 206 l 醫 史 學
박지욱 : 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 -ABSTRACT-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during and after the Korean War PARK Jiwook* 46)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Kingdom of Sweden, a permanent neutral nation, dispatched the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SRCFH) instead of armed forces for humanitarian support to the allied forces in South Korea. The Hospital consisted of about 170 Swedes, all volunteers. From the early part of the Korean War, SRCFH took part in the medical assistance in Busan. When the frontline advanced to northern Korea, the number of inflowing casualties to this field hospital decreased. At that time, earnest medical aid for civilians commenced, and many Koreans were treated in available beds in SRCFH. After the armistice in July 1953, SRCFH became the Swedish Hospital in Busan, serving not only the military but also civilians, and continued its humanitarian mission until April 1957 for the Korean who were suffering from a collapsed medical system in the midst of war. When the Hospital returned to Sweden, it had treated over two million patients from twenty countries, including wounded UN allied force, Korean (south and north), Chinese prisoner of war and Korean civilian. Moreover, it left a transformative legacy, the National Medical Center in Seoul which was established in collaboration * Dr. Park's Neurology Clinic, 1288-1 Nohyeong-Dong, Jeju-Si Jeju Special Self Governing Province, Korea 690-804 Tel: 82-070-8846-6801/ Fax: 82-0303-3130-6119 E-mail: indigo@live.co.kr 제19권 제1호(통권 제36호) 189-208, 2010년 6월 l 207
PARK Jiwook : The Medical Assistance of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in Busan with other Scandinavian countries who dispatched medical assistance during the Korean War. Keyword : Swedish Medical Assistance, Red Cross, Field Hospital, Korean War, United Nations, Busan 208 l 醫 史 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