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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초 정재연구\(수정 및 첨가\)

Transcription: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2014년 2월 28일 115~152쪽 2)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1) 정 경 원** I. 들어가는 말 II. 인디오주의와 모더니즘 III. 구성주의 IV. 표현주의 V. 앙드레 드랭과 노베첸토 VI. 벽화주의 VII. 나가는 말 차 례 <국문초록> 다양한 인종과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역동적인 힘이 만들어졌다. 생동감과 독창성 그리고 경이로움으로 대변되는 라틴아메리카 예술은 바 로 이 다양한 문화적 도가니에서 태어났다. 이질적 문화 요소들이 시각적 예술로 표 현되기까지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이 유럽이나 북미지역의 경 우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기반이 약하고 자생적 정치이론도 확고하게 확립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의 정체 성을 형성할 시기에 정치 분야의 역학적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문학과 예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들에 대한 높 은 존경심과 예술을 통한 국가적 정체성 구현이라는 명제는 적지 않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에게 국가의 정체성 구현을 위해 글을 쓰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가 들은 국가와 동일시되고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여러 국가들의 통합체는 라틴아메리카 * 이 논문은 2013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연구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

116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였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예술행위를 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작품들을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모호하기만 했다. 일단 지역마다 정체성의 내용이 차이가 있고 예술가들 사이에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가 뚜 렷하지가 않았다. 어쩌면 문화의 다양함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서론에 서 언급했듯이, 예술가들이 하위계층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출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예외 없이 유럽에 유학을 다녀온 소수 엘리트들이었다. 예술작품들이 국민들의 정서를 폭넓게 수렴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향후 라틴 아메리카 예술계가 고민하며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회화를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상존하는 다문화가 어떻게 상호 연관 속에 형성되었는지를 천착했다. 주제어 : 다문화, 라틴아메리카 예술, 벽화주의, 노베첸토, 추상주의, 구성주의, 인디 오주의, 모더니즘, 입체주의 I. 들어가는 말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복자들은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후 인디오 들과 쉽게 동화하였다. 특히 에르난 꼬르떼스 Hernán Cortés는 그의 인디오 통역사이 자 안내자였던 말린체 Malinche 사이에 마르띤 Martín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그리고 정복자들 중 유태인 중개 상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보다 더 자유분방한 기풍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멕시코는 태평양 연안의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극동지역 국가들과 교역을 이루었다. 그리고 식민지 사업을 염두 에 둔 이베리아 출신의 정복자들은 노동력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아프리카 서부의 흑 인들을 노예로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또 20세기 들어 일본 사람들이 대규모로 브라질 로 이민을 가기 시작하여 상파울루시는 세계에서 일본교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교류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역동적인 힘이 만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17 들어지기 시작했다. 생동감과 독창성 그리고 경이로움으로 대변되는 라틴아메리카 예 술은 바로 이 다양한 문화적 도가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적 요소 가 시각적 예술로 표현되기까지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이 유 럽이나 북미지역의 경우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라틴아메리카의 미술사에서 막스 이론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이유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기반이 약하고 자생적 정치이론도 확고하게 확립되지 못한 데 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할 시기에 정치 분야의 역학적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문학과 예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과 화가들에게 매우 특별한 지위 를 부여해 주었다. 다시 말해 피카소와 같은 유럽의 모더니스트 예술가 그 누구도 멕 시코의 디에고 리베라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예술가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예술을 통한 국가적 정체성 구현이라는 명제는 라 틴아메리카 예술에서 글 쓰는 행위 자체를 매우 단순화시켰다. 예술가들은 국가와 동 일시되고 모든 국가들의 통합체는 라틴아메리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과 거리가 있었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예술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추 구했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여전히 모호했다. 그 이유는 존경을 받는 예술가 들이 소위 소수의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이다. 창작행위의 주체인 예술가가 상류층의 엘리트뿐만 아니라 하위 계층의 일반 서민들에서도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이론이 제기된다. 따라서 재현의 민주화로서 엘리트가 하위주체 1) 를 대변하고 창작행 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주체가 스스로를 대변하고 재현하는 문화의 민주화 가능 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하겠다(우석균, 2010: 71). 그러나 본고에서는 연구 성격 상 사회학과 정치학 분야와 연관된 행위의 주체와 객체에 대한 문제는 접어놓고 라틴 아메리카의 이질적인 문화들의 집합체 속에서 태동한 그들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통 해서 거꾸로 상존하는 다문화가 어떻게 상호 연관 속에 형성되었는지를 천착해 보기 1) 하위주체 연구는 가르시아 깡끌리니 식의 혼종문화론과 미국식 다문화주의를 경계한다. 이질적 인 문화를 혼종 문화라는 하나의 범주로 동질화시키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체계화하려는 지식인 의 엘리트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Rodríguez, 1998: 104-105). 혼종문화론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현상을 서술할 뿐 문화적 헤게모니 문제나 문화적 차이가 지배-종속 구조 와 맞물려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식 다문화주의도 문화 간 차이에 대한 현상적 논의에 그치거나 차이의 인정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서 궁극적 으로는 원주민 하위주체 문제의 탈정치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우석균, 2010: 65-66)

118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로 한다. 예술이 사회를 비춰보는 거울이거나 또는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사료된다. 이를 위해 시기적으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회화를 중심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II. 인디오주의와 모더니즘 우리가 라틴아메리카 예술을 분류할 때 전통적으로 지역적인 기준을 따른다. 마르 따 뜨라바 Marta Traba에 따르면, 태평양을 끼고 있는 국가들이 대서양을 접하고 있 는 국가들보다 더 폐쇄적이다. 즉 인디오 원주민 영향이 큰 멕시코, 페루, 에콰도르 그리고 볼리비아는 인디오 원주민이 적은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국가들보다 닫 힌 문화적 특성을 보인다. 1900년 우루과이 언론인인 호세 엔리께 로도 José Enrique Rodó의 아리엘 Ariel 이 출판되면서 인디오주의는 두 사회의 형태를 비교하면서 차별화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 용어가 되었다. 칼리반은 물질주의와 공리주의 자로 미국을 상징하였고 아리엘은 정신적인 가치를 위해 물질적 이익을 기꺼이 희생 하는 엘리트를 상징하였다. 로도 자신에게 이러한 이타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 산이지만 점진적으로 아리엘주의Arielismo는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적 본질을 추구하 는 정신이 되었다(정경원 2001, 738). 이는 또 다른 면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콜럼 버스 이전의 인디오문화의 뿌리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인디오주의는 예술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인 현상으로 멕시코를 비롯한 페루와 과테 말라에서 나타난다. 페루의 호세 까를로스 마리아떼기 José Carlos Mariátegui는 라 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막스주의자였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막스주의자들에게 잉 카제국의 멸망은 새롭고 평등주의의 전형을 만드는 전환점이라고 주장했다. 페루의 인디오 농부는 리마시의 산업주의와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하급계층으로 머물지 않고 물질주의자로서 혁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혁명정신에 고취되어 센데로 루미노 소 2) 게릴라들이 페루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2) 마오쩌둥[ 毛 澤 東 ] 사상을 추종하는 페루혁명단체로서 페루 공산당이 여러 분파로 분열되면서 1970년 조직되었다.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라는 명칭은 페루 공산당의 창설자 호세 카를로스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19 과테말라의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는 1949년 출간한 옥수수 인간들 Los hombres de Maíz 에서 인디오의 주식인 옥수수 경작 과정을 전통적인 유기농과 자 본주의체제의 기업농과 비교하는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그는 마야 신화에 근거한 마 야의 전통을 자신의 소설에 특유의 시각으로 그려냈다(정경원, 2001: 899). 그러나 과테말라나 페루에서 모더니즘시대 하에 시각 예술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고의 수준 을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럽과 인디오의 새로운 문화적 융합은 멕시코에서 태동 되었다. 인디오문화가 있는 지역과 없는 국가들을 문화적으로 비교하면 흥미롭다. 호 세 에르난데스 José Hernández는 미국의 카우보이를 이상화한 아르헨티나의 가우초 마르틴 피에로를 통해서 팜파에서 인간적 자유를 추구한다. 가우쵸 마르틴은 인디오 가 아니라 백인이다. 그는 유목인들인 인디오 부족들로부터 팜파 평야를 지키려고 한 다. 그러나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자 인디오 부족들에게로 탈출하여 그들과 생활을 하지만 너무 야만적인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부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명사회로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잃어버린 낙원이란 유럽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 의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물질적인 번영만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과의 믿음을 깨어버리는 보수적인 스페인식 가부장제 국가형태이다(정경원, 2001: 483-495). 지금까지 인디오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유럽에서 건너온 문화 들을 대처하는 방안으로 단지 인디오들이 과거로부터 그들의 문화를 지켜왔던 방법을 견지하는 대신에, 현재 라틴아메리카문화에 대해 논의되고 있는 보편적인 필요성을 수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필요성은 배경에 상관없이 토착적이고 모두가 공감 하는 신화를 창출하는 것이다. 신화는 원래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이 공유하는 공통적 분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예술에서 인디오문화의 배경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대조적인 면에서 유럽의 모더니즘도 또 다른 배경으로서 라틴아메리카의 예술 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서구 모더니즘예술을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분명 모더니즘이 라틴아메리카 에서 태동되지는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 Vicente Huidobro(1893-1948)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는 감수성을 발전시켜 총 체적 미학이론인 창조주의를 탄생시킨 대표적인 작가이다(정경원, 2001: 820-823). 마리아테기가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의 빛나는 길을 열 것이다"말에서 유래했다.

120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담론의 논리적인 구문상의 연결 을 서정적이고 음악적인 연결 로 대체한다. 그는 파 리의 피에르 레베르디 Pierre Reverdy(1889-1960) 등과 같은 전위주의자들과 친분 을 유지하며 문예 잡지 남과 북 Nord-Sud 을 같이 출판하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모더니즘은 1920년대 일련의 기념비적 행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922년 브라질 상파울로의 모던예술 주간 Semana de arte moderna, 1924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창간된 문예잡지 마르띤 피에로 Martín Fierro, 1927년 빅또르 마누엘 Victor Manuel이 주도한 산 알레한드로 쿠바 예술원에 대한 반 기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예술 활동이 문학이나 시각예술과 관련된 것으로 많은 시민 들의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열린 시각을 갖게 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스타일의 예술 작품이 논리성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가들의 관심을 정치적 사 회적 문제로 돌렸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경향은 1920년대와 30년대 라틴아메리카 예술작품에 반영되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 예술은 전 세계적으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한 예로 멕시코의 벽화주의는 지금도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정수라고 평가된다. 멕시코의 벽화 주의는 한 때 파리의 입체주의에 빠져있던 디에고 리베라가 1921년 멕시코로 귀국해 정착하면서 입체주의를 청산하고 만들어낸 예술양식이다. 벽화주의는 해외에 망명 중 이던 쿠바의 위프레도 램Wifredo Lam과 칠레의 마따 에차우렌 Roberto Matta Echaurren와 같은 라틴아메리카 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소개되었던 초현실주의와 적지 않은 경우에 대비되었다. 1. 위프레도 램(1902-1982) 중국 광동에서 쿠바로 이민 간 중국인 아버지 램 얌 Lam Yam과 원주민과 흑인간 의 혼혈인으로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막내였 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84세였다. 그의 대모는 아프리카 흑인 춤과 의 식인 깡돔베 Candombe 사제인 연유로 어려서부터 흑인 문화를 접하며 성장하였다. 1923년 스페인 마드리드로 유학하여 15년 동안 체류하며 초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 다. 그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쉬 Bosch의 그림을, 인류박물관에서 구석 기, 신석기 그리고 이베리아 예술작품을 연구하였다. 그 후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21 공화정파를 지지하고 뒤늦게 파리로 떠났다.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 중 그는 피카소의 오랜 친구이자 조각가인 마놀로 우거 Manolo Huguë를 만났다. 스페인에서 더 이상 예술가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하자 1938년 프랑스로 떠났다. 램은 마놀로의 추천서를 통해 쉽게 피카소와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램은 그의 인간성, 독특한 출신성분과 이 국적인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명분을 지지함으로써 피카소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피카소는 램을 거래상들과 예술가들에게 소개하며 함께 전시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1939년 뉴욕의 펄스 갤러리 Pearls Gallery에서 공동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램 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시 초현실주의 거장인 앙드레 브레통과 벤자민 뻬레 Benjamin Péret를 소개받은 일이었다. 피카소와 당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램에게 아프리카 및 오세아니아 원시예술 primitive art을 소개했다. 그들은 램의 출신 배경 과 외모를 감안했을 때 램이 원시예술을 통해 그들과 같은 예술적 안목을 가질 것이 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원시예술에 영감을 받고 그의 조 국 쿠바로 돌아간다. 파리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은 피카소의 영향이 지대하다. 1930년 후반기 피카소 작품보다 초창기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 Demoiselles d'avignon [그림]1(1907) 과 소위 흑인시대 기간 동안의 작품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림속의 처녀들은 전통 적인 여성미 대신에 세파에 시달린 아비뇽의 창녀들의 모습이다. 특히 가면을 쓴 듯 한 우측 여성은 아프리카 여성의 얼굴모습이다. 이러한 아프리카풍의 영향은 램의 정글 에서 나타난다. [그림 1] 아비뇽의 처녀들 3) 3) 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1489605.jpg

122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1940년 독일의 침공으로 파리를 떠나 보르도로 피난을 간 램은 마르세이유에서 초 현실주의의 핵심멤버들과 합류한다. 당시에 그들과의 교류로 입체주의 영향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정통 초현실주의에서는 많이 이탈하였다. 1942년 브레통을 비롯한 프랑스의 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서인도제도로 여 행을 떠난다. 인류학자인 클라우드 레비스토로스 Claude Lévi-Strauss도 이 여행에 동행하였으며 후에 여행담을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라는 책으로 남겼다. 마르띠니크에 도착해 모든 여행자들이 섬에 머물렀다. 램은 브레통을 통해 그 섬 출 신 시인인 에메 세제르 Aimée Césare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무렵 그의 첫 걸작인 귀국노트 Cahier d un retour au pays natal 의 일부를 출판하였다. 그의 작품은 새롭게 지식인 사이에서 불기 시작한 검은색 열풍의 이정표였다. 나에게 나의 춤들은 나의 나쁜-검둥이 춤들은; 나에게 나의 춤들은 숨막히게 균열하는 춤 감옥을 탈출하는 춤 검둥이라는 게 좋고 멋있고 올바르다고 말해주는 춤(Lucie-Smith, 2004: 85). 램은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한지 7개월 후에 쿠바로 돌아간다. 그가 오랜 공백 기간 후 쿠바로 돌아갔지만 조국 쿠바에 대한 그의 인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의 이런 심정을 비평가인 막스-폴 푸쉐 Max-Pol Fouchet에게 털어놓았다. 파리에서 나는 모든 걸 내 등 뒤로 버렸기 때문에, 마치, 나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 은 나를 고뇌에 휩싸이게 했다. 왜냐면 내가 쿠바를 떠나기 전에 내 앞에 그 어떤 미래 도 보장될 가능성도 없다고 느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바나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내 첫 인상을 당신이 물었다면, 잔인할 정도로 슬프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당시 아바나는 기쁨이 충만하고 달콤했으며 맘보와 룸바 소리가 끊이지 않았 다. 그러나 흑인은 그림으로 묘사되는 인물일 뿐이었다. 흑인 자신들은 백인을 흉내 냈 으며 하얀 피부를 갖지 못한 걸 원망했다. 그들은 분열되었다. 흑인들은 물라토들을 저 주했고 물라토들도 자신들의 피부를 더 이상 부모들의 피부색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경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23 멸했고, 그렇다고 백인도 아니었다.(Id.) 램은 유럽에 오랜 기간 체류하고 돌아온 후 과거와 차이가 전혀 없는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현실을 철저하게 흑인정신을 표출 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이런 내적 충동으로부터 바로 표현된 램의 그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그만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이러한 예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 정글 La Jungla 이다. 그 는 카리브해의 흑인 정체성을 숙고하면서 아이티로 4개월 간 여행을 한다. 이 여행 중 부두voodoo의식 4) 에 참여하며 카리브해에 존재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가슴에 새긴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인 화가로 거듭 태어난다. [그림 2] 정글 5) 정글 은 위프레도 램의 완숙기에 탄생한 대표작이다. 유럽의 전위주의와 차별 화하고 그의 조국 쿠바의 문화에 뿌리를 내린 화가임을 보여주는 40년대의 작품이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는 예술 기법으로 어린 시절 자연에서 받았던 가물가물한 인상 을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되찾아 나가며 그렸다. 이렇게 어린 시절 상상속의 정 글은 1940년대에 램이 그린 정글에 관한 그림 속에 되살아났다. 다차원의 세계로 구 4) 부두교는 아이티의 여러 수호 정령들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원래 서아프리카 지역의 전통적인 부 족 종교에서 유래했다. 부두(Voodoo)라는 단어의 어원은 인간사를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하는 'Vodun'(이후 로아 Loa)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 신앙형태는 정령신앙과 조상숭배, 주 물숭배(Feticism)가 결합된 것이다. 시사상식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68645&cid=103&categoryId=103 5) http://1.bp.blogspot.com/_xemirh76sw8/ttgcnqohooi/aaaaaaaacig/1sfslncxuqm/s320/

124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성된 1943년 작 정글 은 사탕수수와 피카소의 초현실주의 창조물을 연상하게 하 는 괴물의 형상들이 있다. 그러나 피카소와 다르게 램은 아프리카 조각품과 원시예술 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그 형상들에게 기념비적인 효과를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빽빽 한 식물 사이사이 마다 여러 가지 형상으로 가득 채워 형상의 다양함을 강조하였다. 정글 의 산 생명체나 식물들의 기하학적 모습을 열대의 무질서와 일치시키고 있 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성과 폭력의 환상으로 탄생된 듯한 이 생명체들은 암울 한 빛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정경원 외 2000, 212-213). 램이 식물과 유 기체의 형태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위대한 화가들인 살바도르 달리 Salavador Dalí의 고유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의 숲에 관 한 그림과도 큰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마따 Matta의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마따는 램처럼 그가 구사하는 비유적 기법과 추상성이 완연한 형상 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이미 추상적 표현주의를 예견하는 것 같았다. 여하튼 멕시코의 벽화주의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지향했다면 위프레도 램의 정글은 라틴아메리카 사 람들이 아닌 외국인을 상대로 라틴아메리카를 알리려는 의도로 그린 그림이다. 2. 로베르토 마따 에차우렌 마따는 성인이 된 이후 조국 칠레를 잠시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주한 적이 없 다.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그는 칠레 국민이기보다 쿠바 국민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 의 선조들은 바스크, 스페인, 프랑스 인들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칠레의 중상류층 가정 출신이고 산티아고의 예수회대학인 가톨릭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정교육과 학교의 교육방법에 불만을 품고 1932년 칠레를 떠난다. 그의 불만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까를로스 이베네스 델 깜뽀 Carlos Ibáñez del Campo가 1931년 실각한 이후 칠레에서는 정부가 18개월 동안 10번이나 바뀌었다. 마따는 파리로 가서 브라질 출신으로 세계적인 모던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의 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마따의 화가로서의 미래를 생각할 때 잘못된 출발이었다. 코르뷔지에는 입체주의자들, 구성주의자들과 교감을 가지고 활동을 한 반면 그가 참여한 합리주의 종파는 칠레의 젊은 층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 다. 유럽에서 일찍 그가 친분을 맺은 사람은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 Rafael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25 Alberti와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ía Lorca였다. 이 시기에 그에게 영 향을 준 사람은 화가이기보다는 문인들이었다. 칠레의 시인인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Gabriela Mistral은 마따를 호세 마르띠 José Martí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1936년 로 르까는 마따를 그의 오랜 친구인 살바도르 달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달리를 통해 그 는 1937년 운명적으로 브레통을 만나 초현실주의 작품전시회에 출품을 한다. 1938년 에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달리를 통해 초현실주의에 다가갔지만 그의 작품은 달리와 같이 세심하고 진리를 파고드는 질적인 성향을 추구하기보다는 심리형태 학 (1939)[표3]에서 보듯이 전통적으로 초현실주의에서 확립되고 시도해온 자동기 술법을 원용해 그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정경원외, 2000: 214-215). 유럽이 정치적으로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28살의 어린 나이에 초창기 라틴아메리카의 전위주의 예술가들을 유럽의 미학에 다가 가도록 하는 데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가 미국에서 창작한 초기 작품들에서 당시 시대상을 담은 이미지와 동시에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화법에서 파 생된 기법이 엿보인다. 무질서에서 탄생한 휘몰아치는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미지들이 우연을 통제적으로 사용한 결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따가 구사하는 우연의 화법 적인 사용은 아메리카의 추상적 표현주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마따의 생체를 표현하는 이미지의 구사는 그의 지속적인 에로티시즘에 대한 애착이고, 이는 에쉴레 고르키 Arshile Gorky를 비롯한 아메리카의 화가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림 3] 심리형태학 6) 6) http://matta-art.com/psycho39b.jpg

126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1941년 마따는 로베르또 마더웰 Roberto Motherwell과 함께 처음으로 멕시코를 방문했다. 이 멕시코 방문은 마따가 10년 전 칠레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라틴아메리 카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당시 리베라의 명성과 벽화주의의 인기는 최고조 에 다다랐지만 마따는 이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를 사로잡은 건 인디오들의 태 양력이었다. 이 태양력은 환상적이고 성스러운 존재에 의해 통치되는 복잡하게 구조 화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열쇠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따는 내심 이러한 개 념들을 현대과학의 에너지 및 신비와 연결시킬 자신이 있었다. 1940년 중반부터 줄곧 그의 작업은 환상의 많은 예들일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이전의 신들의 계층 구조들을 뜻하는 기계들을 그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이러한 방법으로 은하(무한의 신비주 의) (1942)[표4]에서 보듯이 공상과학 소설을 연상케 하는 개인적 신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반면에 표준을 지향하는 부르주와 문화의 세련됨에는 반기를 들었다. 마따는 대중 예술Pop Art이 출현되기 오래전에 파리에서 대중에 뿌리를 둔 전형적인 도시 식 자층 문화에 본능적으로 애착을 보였다. [그림 4] 은하(무한의 신비주의) 7) 그가 1960년대 이후 특히 데생과 회화에서 보여준 대로 해학적인 만화 8) 에 빠지는 7) http://matta-art.com/popup.htm?galaxies.jpg 8) 여기서 만화란 영어로 comic strip으로, 책, 신문 또는 잡지에 스토리를 가지고 그리는 여러 컷 의 그림을 뜻한다.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27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아스텍, 미스텍 및 마야의 고문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홍수와 히에로니무스 보쉬 Hieronymus Bosch 9) 의 그림 등과 같이 유럽 적인 소재를 혼합해서 [그림 5] 하늘로부터의 추방 (1961)같이 그만의 독특한 만 화를 그려냈다. 다형태성(polymorphism)은 그의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1950년 대 말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예술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 시점에서 마따는 분명 선구자 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를 평가하면 고립된 인 물이었다.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의 측면에서 보면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보다는 뉴욕 의 추상적인 표현주의자 1세대들에게 중요한 선구자였다. 이러한 면에서 루시-스미 스는 그가 없었다면 추상적인 표현주의는 오늘의 모습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 한다(Lucie-Smith, 2004: 92). 1948년 마따는 초현실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며 유럽에 거주하기 위해 미국을 떠난 다. 이탈리아, 파리 그리고 런던에 거주하면서 스스로를 좌익의 명분을 추구하는 라틴 아메리카 예술가라고 자처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바 같이 램과 마따는 라틴아메리 카 문화에서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진수는 초현실주의라는 동의를 이끌어 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림 5] 하늘로부터의 추방 10) 9)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 는 피카소가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미술시대를 열었듯이 중세 시대에 독특한 바보 라는 주제를 가지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든 인물이다. 10) http://www.matta-art.com/exilz.jpg

128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유럽의 초현실주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이 멕시코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멕시코는 태생적으로 초현실주의 국가라고 선언했다. 1940년 멕시코시에 서 주요 초현실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서 디에고 리베라 와 그의 부인 프리다 칼로 Frida Kahlo가 출품하였다. 리베라와 칼로 그리고 다른 출 품자들이 곧이어 초현실주의자들과 노선을 달리한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 전시회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인디오의 벽화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전 환점이 되었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과 유럽의 모더니즘의 사이의 관계는 상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거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로부터 상징주의와 같은 예술운동은 라틴아메리카 화가들과 조각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구성주의와 표현 주의가 매우 중요하였다. III. 구성주의 1. 호아낀 또레스 가르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구성주의는 논의될 부분이 많다. 우루과이의 호아낀 또레스 가르 시아 Joaguín Torres García는 유럽과 미국에서 40여 년간 작품 활동 후, 1921년 귀 국하였다. 까딸란 출신의 아버지와 우루과이 어머니 사이에서 1874년 몬떼비데오에 서 태어났다. 그가 17살일 때 가족이 스페인으로 이주한다. 예술에 열망이 많았던 또 레스 가르시아는 자신의 첫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에서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유 행하고 있던 슈타인렌 Steinlen 과 뚤루즈 로뜨렉 Toulouse-Lautrec의 세기말 fin de siècle 스타일을 구사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젊은 피카소와 함께 전위주의자 동 호인모임에서 활동하였다. 사실 당시 그의 꿈은 프랑스 상징주의자 삐에르 뿌비 드 샤바네 Pierre Puvis de Chavannes 화풍을 따르기 보다는 공공예술과 벽화 같은 데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스페인 문화적 정서와 정치 사정으로 그의 뜻을 펼치지 못 하고 1920년 뉴욕으로 간다. 거기서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조셉 스텔라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29 Joseph Stella, 막스 베버 Max Weber와 작곡가 에드거 바레세 Edgar Varèse와 교류 한다. 처음에는 미국사회의 개방성과 우호성에 호감을 갖지만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림 6]뉴욕 거리의 풍경 11) 1921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에서 거주하지만 무쏠리니의 파시즘 독재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1926년 파리에 정착한다. 뉴욕거리의 풍경 (1921)이 미국에 거주할 때의 작품이고, 도시의 풍경 (1928)이 파리의 거리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7]도시의 풍경 12) 이렇게 그의 미국과 유럽사회에 대한 경험은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는 데 큰 도 움이 되었다. 1918년 이후 또레스 가르시아는 나무 인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이 11) http://www.oilpainting-frame.com/upload1/file-admin/images/new12/joaquin%20torres- Garcia-987598.jpg 12) http://www.rau.edu.uy/uruguay/iconos/torres3.jpg

130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는 그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이 목재상을 운영했던 시절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단 순한 소재를 가지고 빌딩, 다양한 자세의 동물 그리고 자동차와 결합하여 복잡한 예 술적 복합체를 만든다. [그림 8] 두 백인 남자 13) 또레스 가르시아는 장난감 만드는 작업을 예술 창조행위라기보다는 늘 실패했지만 윤택한 삶의 수단으로 여기는 듯 했다 두 백인 남자 (1929) [그림 8]. 여하튼 그에 게 중요한 변화는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얽히고설킨 복 잡한 구성도 단순한 벽돌 쌓기 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데 있다. 그는 파 리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초현실주의에 반대하여 설립되고 있는 국제 구성주의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이 모임을 통해 그는 데 스틸 De Stijl 잡지의 창시자인 테오 반 두 스뷔르흐 Theo van Doesburg를 만났고 두스부르흐는 또레스-가르시아를 극찬하였 다. 그는 벨기에의 젊은 비평가 미셀 쉬포르 Michel Seuphor를 통해 피에트 몬드리 안 Piet Mondrian 14) 을 만났다. 1929년 쉬포르와 함께 국제 구성주의 단체인 <원과 13) http://museumpublicity.com/2010/02/21/joaquin-torres-garcia-constructing-abstractionwith-wood-at-the-san-diego-museum-of-art/joaquin-torres-garcia-3/ 14) 몬드리안의 구성주의에 관여한 다음 신조형주의라 명명하고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한다. (1) 색상은 기본색인 빨강, 노랑,파랑 또는 무채색인 검정, 회색 및 흰색을 사용한다. (2) 표면은 사각형 또는 각기둥을 사용한다. (3) 미적균형은 대조를 통해 유지한다. (4) 구성적 요소는 직선 또는 사각형이어야 한다. (5) 대칭은 피한다.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31 사각형 Cercle et Carré>을 결성한다. 이 모임은 짧은 시간에 파리에 거주하는 저명 한 화가들이 참여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또레스-가르시아는 상징성의 결 여로 구성주의 풍의 그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동안 가끔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아 나무재질을 사용해 구성을 한 다음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주 그린 스타일은 도시건축을 소재로 격 자를 사용한 복합체의 그림이었다. 1938년작 빨강, 흰색, 검정색으로의 구성 [그림 9]이 한 예이다. 이 복합체적 그림들에는 상징적인 물건들이 많이 포함되어있다. 예 를 들면, 생선, 시계, 닷, 열쇠, 별, 배 등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마치 하나의 텍스 트 같은 그림이다. 파리와 후에 몬떼비데오에서 또레스-가르시아는 가끔 완전히 상 징적인 작품이나,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조용한 삶, 머리, 바다경치 등을 소재로 창작 활동을 한다. 이런 스타일의 작업은 그의 동포인 뻬드로 피가리 Pedro Figari가 일찍 이 구사했던 원초주의 15) 를 생각나게 한다. [그림 9]빨강,흰색, 검정색으로의 구성 16) 1932년 세계경제 불황으로 또레스-가르시아는 파리를 떠나 조국 우루과이로 귀국 (6) 균형과 리듬은 비율이나 위치의 관계에 의해서 향상된다. 15) 산업혁명 이후 서구사회의 합리화와 기계화에 반기를 들고 비서구적 세계에 현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16) http://2.bp.blogspot.com/_hlbmnwl4o4o/sepzru4fmbi/aaaaaaaaacs/w5fxhdkpkke/s660/ composicion+en+rojo,+blanco,+y+negro.gif

132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한다. 이후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은 변화가 없지만 우루과이의 특수한 상황을 담아내 는 일환으로 벽화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멕시코의 벽화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예를 들면 멕시코의 벽화는 이젤크기보다도 더 큰 규모의 벽화를 선호한다. 원래 젊었을 때부터 벽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또레스-가르시아는 몬떼비데오가 문화적으로 유럽 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콜럼버스 이전의 예술을 눈 여겨 보기 시작했 다. 이 당시 그가 고안한 개인적인 알파벳은 아메리카 문자체계이기보다는 페니키아 문자에 근거하였고 그의 1933년 작 우주적 구성 [그림 10]에서 문자 문형이 상징 으로서 주요 역할을 한다. 또레스-가르시아의 작가로서의 마지막 활동 시기에 인디 오를 주제로 한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1939년 몬떼비데오의 로도 공원에 설치된 3차 원의 공간을 활용한 우주기념비 the Cosmic Monument [그림11]이다. 이 작품 은 아즈텍이나 마야 사원의 축소모형을 흉내 내면서 표면을 상형문자로 마감하였으며 오랜 기간 준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림 10]우주적 구성 17) 그리고 1934년 그의 나이 59세 때 영구 귀국하였다. 외국 체류 중 그는 전위주의 그룹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활동한 그룹 중 앞서 언급한 <원과 사각형 Cercle et Carré>은 회원 전체가 국제적 구성주의와 긴밀한 네트워킹을 갖고 활동하 17) http://ts2.mm.bing.net/th?id=h.4832067067382241&pid=15.1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33 였다. 몬떼비데오에서 또레스 가르시아는 <구성주의 예술 협회 Asociación de Arte Constructivo>를 창립했고 1944년에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워크숍을 활성화하기 위 해 <또레스 가르시아 작업실 Taller Torrres-García>을 만들었다(정경원 외 2000, 219~220). [그림 11] 우주기념비 18) IV. 표현주의 표현주의 기법의 회화에서는 라틴아메리카적 요소와 유럽적 요소를 분간하기가 모 호했다. 표현주의 화가인 라사르 세갈 Lasar Segall은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태 어났으며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활동했고 표현주의 화가로서는 다른 작가보다 먼저 남아메리카를 방문했다. 1913년 브라질을 방문하였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으로 건너갔다. 1923년 브라질로 돌아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상파울로에 거주하는 동안 교사 및 예술기획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며 젊은 브라질 예술가 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표현주의는 20세기 라 틴아메리카 미술사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레 통이 라틴아메리카를 태생적 초현실주의 라고 칭했듯이 태생적 표현주의 라고 칭할 수 있다. 루시-스미스는 구체화되지 않은 표현주의가 디에고 리베라의 동료들인 호 세 끌레멘떼 오로스꼬 José Clemente Orozco와 다빗 알파로 시께이로스 David 18) http://ts2.mm.bing.net/th?id=h.4903711438735681&pid=15.1

134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Alfaro Siqueiros의 벽화에서 나타났다 고 주장한다(Edward Lucie-Smith 2004, 16). 표현주의 영향에 대해서는 벽화주의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V. 앙드레 드랭과 노베첸토 1. 앙드레 드랭과 에밀리아누 지 까발깐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끔 수용하기 어려운 정치적 풍자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 만 라틴아메리카의 모더니즘에 영향을 준 3번째 요소가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 안 유럽에서 성행했던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예술의 조류가 당시 라틴아메리카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한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1880-1954) 19) 의 후기 작품에서 비롯된다. 드랭은 세계대전 전의 야수파의 경향을 떨쳐버리고 모더니즘운동과 꼬로 Corot 20) 와 꼬베Courbet 21) 로 대변되는 기존 의 프랑스 전통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는 수집가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세계대전기간 중에 브라질 화단을 선도하는 에밀리아누 지 까발깐치 Emiliano Di Cavalcanti 등과 같은 화가들을 매혹시켰으며 그들의 그림에서 그의 기법 이 구사되었다. 에밀리아누 지 까발깐치Emiliano Di Cavalcanti(1897-1976)는 1922년 상파울루 시에서 <모던아트주간>을 기획하였으며 리우 데 자네이루 태생이지만 상파울루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물라또의 여인들과 리우의 밤거리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2년경의 작품들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등이 혼합된 느낌을 주고 있지만 19) 초기의 야수파의 경향을 버리고 P.세잔과 흑인조각의 단순한 구성에 호감을 가져 입체파 탄생 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전통을 현대로 계승시킨 신고전주의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20) 쟝 밥티스트 까미유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감 으로 자연의 풍광에 시와 음악의 분위기를 화폭에 연출하였다. 빛을 색조로 절묘하게 처리하여 인상파 화가의 선구자적 존재로 평가된다. 21) 구스타브 꼬베(Gustave Courbet 1819 1877). 사실주의의 창시자이자로서 프랑스 최고의 화가 이다.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35 후반기에는 정통 입체파의 화풍을 따른다. 1923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 브라크, 마티 세, 레제 등과 만나 교류하며 당시 유럽화단의 경향을 파악한다. 그런가 하면 멕시코 의 벽화주의자들의 영향도 받는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입체 주의자인 피카소이다. 이렇게 유럽과 멕시코에서 받은 화풍의 기법으로 브라질의 토 속적인 사회상을 그린 그림이 1930년 작 과라팅게타의 다섯 소녀 이다. [그림 13] 과라팅게타의 다섯 소녀 22) 2. 노베첸토 동시에 라틴아메리카 예술에서 이탈리아의 마리오 시로니 Mario Sironi(1885-1961)로 대변되는 노베첸토 23) 그룹의 고전적 영향이 지대했다. 그들의 영향은 1920 년대와 30년대 아르헨티나 대표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 중 대표적인 작가는 이탈리아 후손인 리노 스필림베르고 Lino Spilimbergo(1896-22) http://1.bp.blogspot.com/_kz3_kntnpus/skkgaubq1wi/aaaaaaaaaeo/fxkmgrar7pg/s400 /arte9.jpg 23) 1922년 밀라노에서 일련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과거 전성기 이탈리아의 재현예술로 되돌아 갈 것을 다짐한 운동. 노베첸토란 이탈리아어로 20세기를 뜻하며 민족주의적 성격이 농후해 파시즘에 동조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 아르투로 마르티니, 화가 오토 네 로사이, 마시모 캄필리, 카를로 카라, 마리오 시로니, 펠리체 카소라티 등이 있다.

136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1964)이다. 그는 1925년 독일, 이탈리아 및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의 예술적 안목 을 넓혔다. 그리고 1926년 파리에 체류하면서 그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앙드레 로 뜨 André Lhote 24) 와 함께 연구했다. 그의 작품경향은 신고전주의 계열이지만 세잔의 구성주의적 입체주의와 이탈리아의 형이상학적 화풍과 초현실주의 색깔 등도 엿보인 다. 이러한 그의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이 1929년 작 산 후안의 정경 [그림 13]이 다. [그림 13] 산 후안의 정경 25) 라틴아메리카예술가들은 대의명분에 이끌려 노베첸토의 이론에 쉽게 동의했다. 첫째 로 이탈리아 후손이 많은 아르헨티나에서 문화적으로 우월한 이탈리아 문화를 동경했 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적인 면이다. 노베첸토 예술은 무쏠리니의 열성적인 후원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파시즘과 동일시되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도 파시즘은 매우 중요한 통치 모델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도 1930년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서 후안 뻬론 Juan Perón장군에 의해 종식되는 1943년까지 지속되었다. 브라질 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는데 1930년 제툴리오 바르가스 Getúlio Vargas 대통령 정부도 무쏠리니의 독재통치술을 많이 원용했다. 예술가들이 가끔 통치 행정부를 지지 할 때 이들이 조성한 문화적 풍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라틴아메리 카국가에서 이탈리아 요소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다음 무쏠리니 24) 앙드레 로뜨André Lhote (1885 1962)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이를 고전주의와 절충하여 새 로운 표현방식을 창안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25) http://vivelatinoamerica.files.wordpress.com/2013/09/paisaje-de-san-juan-1939.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37 정부는 그들의 우호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 국가들과의 연대를 도모했다. VI. 벽화주의 20세기 전반부에 라틴아메리카 예술이 유럽 예술과 다른 점은 대규모의 벽화를 제 작한다는 점이다. 예술가들 사이에 공공건물에 인디오 문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 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이후 사라져 버린 원주민 문화의 경이로운 복원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이 벽화예술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맥 락에서 멕시코 벽화주의자들은 이전까지 멕시코 화단을 지배했던 유럽의 모더니즘과 단절하고 벽화를 통해 혁명성, 계몽성 그리고 대중성을 추구해 나갔다. 벽화주의자 중 에 뛰어난 사람은 끌레멘떼 오로스꼬, 다빗 알파로 시께이로스,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 였다. 오로스꼬는 표현주의 기법의 정치풍자만화를 그렸고, 리베라는 파리에서 보헤 미안 생활을 하며 인상주의부터 큐비즘에 이르는 유럽의 주요 화풍을 연구하였으며, 멕시코 혁명에 직접 참여한 시께이로스는 초기의 온건한 인상주의를 벗어나 구성주의 나 미래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 디에고 리베라 산 까를로스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 꼬로Corot와 폴 세 잔Paul Cezanne 26) 을 연구하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라틴아메리카의 마야 원주민도 보남빡 벽화를 남겼다. 8세기 말엽의 것으로 추정 되는데 사실주의 풍의 벽화다. 이 벽화는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그려진 벽화와 유사 한 점이 많다. 유럽벽화의 직접적인 원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화 27) 이다. 리베 26)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은 순간적 인상보다는 지속하는 실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뿔, 구, 원통 등 세 가지의 기하학적 모양으로 대체하고자 했 다. 자연의 사물을 단순화하는 작업은 후에 피카소, 브라크 등 20세기 입체파 화가들의 탄생을 불러 왔다. 27) 프레스코는 덜 마른 회반죽 위에 수용성 물감으로 채색한 벽화로서, 벽이 마르게 되면 수용성

138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라는1922년 멕시코로 귀국하기 바로 전까지 지오토Giotto 28) 와 삐에로 델라 프란체 스카Pierro della Francesca 29) 의 작품을 연구하며 프레스코화의 기법과 엔카우틱(밀 납)기법 30) 을 체득했다. 귀국하여 보남팍의 인디오의 벽화전통을 바탕으로 원주민과 농민을 주제로 삼아 유럽식 벽화기법으로 표현한 벽화를 창작해 냈다. 1922년부터 1929년 사이 멕시코 국립고등학교와 교육부 건물 벽화를 그렸다. 자본주의에 대항하 는 노동자, 농민, 군인의 능동적인 삶을 프레스코화와 엔카우틱화법으로 창작했다. 제당 공장 El trapiche (1923)[그림 14]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 14]제당공장 31) 물감이 벽에 스며들면서 고착되어 색채가 견고하게 붙는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기원전부터 로 마인이 이 화법을 썼다고 한다. 28)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 ~ 1337)는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1303-1305년 까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의 아레나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스크로베니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완성한다. 29)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 ~ 1492년)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투시 도법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그의 작품에다 응용하였다.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벽화나 초상화 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도미니크 베네치아의 제자로서 1445년경의 <자바의 마돈나>는 현존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오래 된 제단화라고 전해진다. 성 프란체스코 사원의 프레스코화 <성 십자가 이야기>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세련된 색채와 완전한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30) 안료를 벌꿀이나 송진에 녹인 것을 불에 달군 인두로 벽면 또는 화면에 발라 색을 입히는 기법. 인화라고 하는 고대 회화 기법으로서 엔카우스틱(encaustic)또는 밀납화라고도 한다. 31) http://img143.imageshack.us/img143/8822/eltrapicheru8.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39 이 밖에도<5월1일>, <땅을 소유하는 가련한 농민> 등이 있다. 그 후 국립농업학 교의 벽화를 통해 순수하고 원초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색채와 형상미로 사람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된 시 라고 평한다. 벽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 인 그림이다. 해방된 땅을 상징하는 이 누드는 물, 바람, 불의 자연 요소들에 둘러싸 여 한 손으로는 축복 다른 한 손으로는 꽃이 핀 화초를 들고 있는데, 풍요 다산의 상 징이다[그림 15]. 그리고 1930년과 36년 사이에 멕시코 정부청사의 벽화를 그린다. 이 벽화의 주인공들은 무명의 투쟁하는 인디오들과 노동자들이다. 리베라는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디트로이트 미술학교, 록펠러 센터 등에 벽화를 남겨 명성을 얻었다. 특히 록펠러 센터에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시 도가 미국정부로부터 제지당하자 미련 없이 멕시코로 귀국한다. 역설적으로 공산주의 자인 리베라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예술가가 되도록 지원하고 키워준 나라는 미국이 었다. 여하튼 공산당원인 리베라는 예술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기 위해 모더니즘 경향을 멀리했다. [표15]비옥한 대지 32) 32) http://www.oilpaintingfactory.com/pic/oil%20painting%20masterpieces%20on%20canvas/ Diego%20Rivera%20Mexico%201886-1957/5-the-liberated-earth-with-the-powers-o f-nature-controlled-by-man-1927-diego-rivera.jpg

140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2. 호세 끌레멘떼 오로스꼬 호세 끌레멘떼 오로스꼬 José Clemente Orozco(1883-1949)는 과달하라 태생이 지만 멕시코시티에서 성장하였다. 훌리오 루엘라스Julio Ruelas, 호세 과달루뻬 뽀사 다 José Guadalupe Posada 및 아뜰 박사의 영향을 받았다. 1922년 국립고등학교 벽 화의 일부를 그렸다. 1927년에 1932년까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을 여행하 며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했다. 그리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멕시코 혁명과 비인간화 된 사회를 주제로 벽화를 그렸다. 시카고 예술원, 퍼모나 대학, 뉴욕의 신사회연구학 교, 다트머스 대학 등에 벽화를 남겼다. 특히 1930년에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에 있는 퍼모나대학 휴게실에 그린 대형 벽화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회비판과 역사적 주제 대신에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벽화 의 주제로 삼았다. 기법적인 면에서 기존의 안정된 스타일에서 탈피했다. 마치 시스티 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그림 17]에서 미켈란젤로가 고통 받는 인물들의 표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듯이 아뜰의 소묘를 회상하면서 팽팽하게 근육을 긴장시켜 전력을 다 해 운명의 굴레에 맞서는 거인의 모습으로 프로메테우스를 그려냈다[그림 16]. [그림 16]프로메테우스 33) 33) http://art.pomona.edu/wp-content/uploads/orozco-prometheus-central-panel-1930-1024 x836.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41 [그림 17]최후의 심판 34) 1932년에 잠시 유럽을 여행하면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의 예술을 경험했다. 그는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감명을 받았지만 로마와 라벤나에 있는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에 더욱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다트머스대학의 위대한 벽화 연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프레스코화가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그림 으로 보여주듯이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켓찰코아틀 35) 의 도래와 귀환이라는 두 장면 을 주제로 한 연작벽화에 담아 표현했다. 여기서의 2분법은 인간이 비그리스도교적인 태초의 낙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자본주의의 지옥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 이다. 켓찰코아틀 벽화는 기이하면서도 거친 힘을 느끼게 하는 독특함을 보여준다[그 림 18], [그림 19]. 오로스꼬는 그의 작품에서 멕시코의 고야 36) 라는 애칭에 걸맞게 감정이 실린 격정 적인 분위기와 폭력적인 면까지도 연출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외적인 면보다는 그가 처한 환경 속에서 표정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내적 고뇌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34)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3/jugement_dernier.jpg 35) 깃털을 가진 뱀 이라는 뜻의 아스떼까 제국의 신으로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선을 상징했다. 36)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다양한 주제를 표현하였 으며 특히 인간의 본질을 잘 묘사하였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 나는 듯 한 어두운 그늘이 있다.

142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그는 바로크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로 인해 바로크 화풍의 영향이 그의 후기 작 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벨라스케스 37) 와 카라바조 38) 의 작품처럼 명암이 대비 되는 가운데 검은색의 농도를 변화시켜 작품의 묘미를 더해가는 기법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밝고 어두움이 창출하는 연극무대의 효과를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 후 영국으로 향했지만 영국인들의 차갑고 비정열적 특성 에 식상해 당시 유행 했던 화풍의 경향을 파악하려고 파리에 머문다. 그리고 곧 고국 멕시코로 돌아가 다 시 공공건물의 벽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림 18]켓찰코아틀의 도래 39) [그림 19]켓찰코아틀의 출발 40) 37)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바로크시대의 궁정화가로서 초상화에 유능했다.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화 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네가 대표적인 화가이다. 38) 카라바조 Caravaggio(1571~1610는 바로크회화의 주요 특징인 명암법을 잘 구현하였다. 종교 적인 주제 대신에 거리의 삶을 소재로 사실적인 그림을 남겼다. 39) http://hoodmuseum.dartmouth.edu/images/p934135.jpg 40) http://hoodmuseum.dartmouth.edu/images/p94221.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43 오로쓰꼬가 과달하라의 오스삐시오 까바냐스 Hospicio Cabañas에 그린 벽화는 미 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와 비교된다. 벽화주의의 중요성은 대중예술로 서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 확립과 정치적 이념의 전달을 위한 역동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러한 면은 동시대의 행해진 유럽의 모더니즘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점이고 미국에서도 벽화예술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라틴아메리카 벽화예술처럼 커다란 반향 을 일으키지 못했다[그림 20]. [그림 20]불의 남자 41) 풍부하고 원숙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러 확고한 명성을 얻은 그는 1934년 당당하게 멕시코로 돌아왔다. 멕시코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예술의 전당 Bellas Artes 벽화 카타르시스 Catharsis [그림 21]를 완성했다. 종말론적인 이 작품은 한 창녀 가 혁명의 폐허 속에 누워서 웃고 있는 모습이다. 무섭고 기계화된 세계를 잘 표현하 고 있다. 이러한 염세주의는 끊임없이 심화되어 과달라하라 벽화에서 절정에 달한다. 41) http://31.media.tumblr.com/c7cd4dc4a7b377c0ba823b3856469bf8/tumblr_mmr50039ze1qcpul 6o1_1280.jpg

144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그림 21]카타르시스 42) 리베라와 달리 오로스꼬는 멕시코 정신이 안고 있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고전적 인 형식과 현대적인 색감을 이용한 웅변적인 상징에 의존한다. 그는 공산당을 비판하 는 것과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했으며 인간 본연 의 도리를 고양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격렬한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3. 다비드 알파로 시께이로스 시께이로스(1898-1974)는 대조적인 기법으로 혁명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어 작품 분위기가 오로스꼬보다 극적이고 거칠다. 인디오를 소재로 기이한 표정을 담아내는 조각품을 남기고 새로운 재질을 사용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면을 추구하였다. 후에 뉴욕에서 오로스꼬를 만나 그와 함께 조국 멕시코의 예술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이 후 파리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콜럼버스 이전의 인디오 전통 예술을 현대적 감각 으로 표현하는 기념비적이고 영웅적 인 그림을 구상한다. 1921년 시께이로스는 <아 메리카 신세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현 시국정세에 관한 3가지 호소문>을 발표하며 원주민 예술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또한 예술은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민중 을 위해 미를 창출하는 것이 그 목표라고 말했다. 시께이로스는 잭슨 폴록이 추상적 표현주의를 완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42) http://uploads5.wikipaintings.org/images/jose-clemente-orozco/catharsis-1934.jpg!blog.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45 중의 한 사람이다. 1936년 뉴욕에서 시께이로스가 회화, 조각, 건축을 융합하여 실험 적이고 혁신적 작업실을 운영했을 때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여하튼 시께이로스는 고국의 전통예술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그가 배운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의 액션 페인팅기법 43) 을 사용해 그의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그의 그림은 미래주의, 표현 주의와 추상주의가 어우러진 특성을 보인다. [그림 22]인류의 행진 44) 멕시코시티에 있는 Polyforum 문화 공원의 벽화인 인류의 행진 은 면적이 4,600m²에 달한다. 작품 속에서 그의 격정적인 성품과 생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묻어 난다. 생동감 있는 색체, 도전적 전망, 강한 표현력, 그리고 기념비적인 웅장함이 벽화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는 형식적인 면에서 역동성을, 주제적인 면에서 서사적 사실주의풍의 야생적 현 존감 또는 구체화되지 않은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시께이로스의 강력한 힘과 활력의 산물인 이 작품은 상징주의의 영향이 농후하며 많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다 른 벽화주의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대규모의 웅장함을 연출하고 관람객의 눈높이를 43) 1952년 헤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1906~1978)가 잭슨 폴록의 창작기법을 명명한 용어이다. 액션페인팅은 완성된 그림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그 자체가 작품의 일부 이다. 앵포르멜과 같이 작가의 즉흥적인 직관력과 그림의 재료가 나타내는 시각적 특성을 중요 한 표현 요소로 삼는다. 뉴욕의 액션페인팅이나 파리의 앵포르멜 모두 다다이즘(Dadaism)과 맥을 같이한다. 문명에 대한 회의와 전통미술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성보 다는 비합리성, 엄격한 구성보다는 즉흥과 우연의 효과를 통하여 무의식, 초현실의 세계를 가 시화했다. 44) http://www.lavozdelsandinismo.com/img/info/la-marcha-de-la-humanidad-2007-04-24-38 72.jpg

146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맞추기 위해, 원래 건물의 구조에 어울리는 벽화를 조성함으로써 작품의 진가를 더하 게 한다[그림 22]. VII. 나가는 말 지난 3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 뿐만 아니라 후기 모더니즘 작가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으로 예술 형태의 경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예술가들은 그들에게 매력적 인 스타일을 구사하기 위해 어떤 재질이나 기법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들에게는 더 이상 회화와 조각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으며 순수예술과 공예를 구분 하는 전통적인 분류방식을 무시했다. 많은 예술작업이 더 이상 3차원적인 작업이 아 니라 주변을 아우르는 환경적인 특성을 띄게 되었다. 모던예술가들이 속한 도시 또는 세련된 문화와 병립하는 민속 문화에 예술가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민속 또는 토속문 화에는 아직도 도도히 과거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 문화와 민속 문화 를 축으로 다양한 문화가 병존하는 현상은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민속예술과 초기예술에 대한 관심이 물론 모더니즘예술의 속성이지만, 유럽의 모 더니즘 예술가들은 모더니즘을 추종하는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즐겼던 민속예술 과 초기예술의 원초성에 접근할 없었다. 피카소가 매료되었던 아프리카 수공예품들은 그에게 이국적인 것이었을 뿐, 결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환경적인 내적 심연에 빠져 들어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예술가들은 정당하게 원주 민들의 인종적 또는 고고학적 역사물들이 그들의 일부라고 느낄 수 있다. 그들 사이 에 혈통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예술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 실질적인 연 대감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원초주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원초적 인 매력은 이국적인 면뿐만 아니라 루소가 중요시하는 감정과 19세기의 계몽주의사 상 등과 함께 어우러져 토속적인 독창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있다. 모더니즘에서 중요시하는 원초주의를 라틴아메리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젊고 유능한 유학파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유럽으로 건너 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유럽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47 의 선진적인 예술기법으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들의 삶을 담아내는 수월성을 보여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유럽의 화풍기법을 구사하면서도 비유럽 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 예로 멕시코 벽화가들은 존경받는 멕시코 역사적 인 물들과 호세 과달루뻬 뽀사다 같은 대중예술가들의 작품 또는 당시 유력지 일간신문 의 삽화 등을 벽화의 주제로 삼아 유럽의 밀납기법으로 스토리 텔링을 구사하면서 벽 화를 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벽화가 당시 유럽과 서구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 예술 의 경향과 방향을 달리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예술이 본 질적으로 융합적이라는 주장은 기존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비롯되 었다. 그 이유는 과거에는 유학을 떠난 제한된 인적교류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에는 YouTube 비롯한 통신매체의 혁신으로 인적교류와 무관하게 문화의 전 세계적인 공유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의 공유로 다양한 문화의 병존과 융 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여전히 존재한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에서 정치적인 불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탈출구로 예술을 통해서 국가의 정체성과 민주화를 이루려고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예술행위를 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작품들을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모호하기 만 했다. 일단 지역마다 정체성의 내용이 차이가 있고 예술가들 사이에 정체성에 대 한 공감대가 뚜렷하지가 않았다. 어쩌면 문화의 다양함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예술가들이 하위계층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출되 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예외 없이 유럽에 유학을 다녀온 소수 엘리트들이었다. 현 실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하위계층이 예술행위를 하기 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 로 예술작품들이 국민들의 정서를 폭넓게 수렴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향후 라틴아메리카 예술계가 고민하며 풀어야 할 숙제이다. 마지막으 로 정치와 예술의 역할론이다. 물론 예술이 정치문제를 다룰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를 대신한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시도하지도 말아야 한다. 단지 예술은 비판적 시 각으로 정치의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대치하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한다면 충분하다 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러한 현실에서 라틴아메리카문화의 융합을 긍정적이고 적극적 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148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참고문헌 Eisenstadt, Todd A. and others(editors)(2013) Latin America s Multicultural Movem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Jung, Kyung Won(2001), Latinamerica Munhaksa Ⅰ,Ⅱ(The history of Latin- American Literature I, II), Seoul: Thaehaksa. Jung, Kyung Won, et al.(2000), Latinamerica Munhwaeui Ihae(Understanding of the Latin-American Culture), Seoul: Hakmunsa. Lucie-Smith, Edward(2004) Lain American Art of the 20th Century, London: Thames & Hudson. Olea, Héctor and others(2012) Critical Documents of 20th-Century Latin American and Latino Art, Resisting Categories: Latin American and/or Latino?, Houston: The Museum of fine Arts,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Arts of The Americas. Rodríguez, Lleana(1998), Hegemonía y dominio: subalternidad, un significado flotante, Santiago Castro-Gómez y Eduardo Mendierta, Teoriás sin disciplina, latinoamericanismo, poscolonialidad y globalización en debate, México, D.F.: University of San Francisco y Miguel Angel Porrúa. Sieder, Fachel(2002) Multiculturalism in Latin America Indigenous Rights, Diversity and Democracy, New York: Palgrave Macmilian. Woo, Suk Kyun(2010) Estudios subalternos latinoamericanos y los derechos culturales, Lim, Sang Rae, et al., Jeohang, Saeroun Yeondae, Damunhwajueui(Resistance, New solidarity, Multiculturalism), Seoul: Park Jong-Chul Publishing Company. 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1489605.jpg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645&cid=103&categoryid=103 http://1.bp.blogspot.com/_xemirh76sw8/ttgcnqohooi/aaaaaaaacig/1sfslncx UQM/s320/ http://matta-art.com/psycho39b.jpg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49 http://matta-art.com/popup.htm?galaxies.jpg http://www.matta-art.com/exilz.jpg http://www.oilpainting-frame.com/upload1/file-admin/images/new12/joaquin%20 Torres-Garcia-987598.jpg http://www.rau.edu.uy/uruguay/iconos/torres3.jpg http://museumpublicity.com/2010/02/21/joaquin-torres-garcia-constructing-abst raction-with-wood-at-the-san-diego-museum-of-art/joaquin-torres -garcia-3/ http://2.bp.blogspot.com/_hlbmnwl4o4o/sepzru4fmbi/aaaaaaaaacs/w5fxhd KpKKE/S660/composicion+en+rojo,+blanco,+y+negro.gif http://ts2.mm.bing.net/th?id=h.4832067067382241&pid=15.1 http://1.bp.blogspot.com/_kz3_kntnpus/skkgaubq1wi/aaaaaaaaaeo/fxkmgrar 7pg/s400/arte9.jpg http://vivelatinoamerica.files.wordpress.com/2013/09/paisaje-de-san-juan-1939.jpg http://img143.imageshack.us/img143/8822/eltrapicheru8.jpg http://www.oilpaintingfactory.com/pic/oil%20painting%20masterpieces%20on%20ca nvas/diego%20rivera%20mexico%201886-1957/5-the-liberated-earth-w ith-the-powers-of-nature-controlled-by-man-1927-diego-rivera.jpg http://art.pomona.edu/wp-content/uploads/orozco-prometheus-central-panel-19 30-1024x836.jpg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3/jugement_dernier.jpg http://hoodmuseum.dartmouth.edu/images/p934135.jpg http://hoodmuseum.dartmouth.edu/images/p94221.jpg http://31.media.tumblr.com/c7cd4dc4a7b377c0ba823b3856469bf8/tumblr_mmr500 39ze1qcpul6o1_1280.jpg http://uploads5.wikipaintings.org/images/jose-clemente-orozco/catharsis-1934.jp g!blog.jpg http://www.lavozdelsandinismo.com/img/info/la-marcha-de-la-humanidad-2007-04-24-3872.jpg

150 중남미연구 제33권1호 <Abstract> The Multicultural Phenomenon of Latin America through the Arts Kyung Won Chung After the Spanish and Portuguese invasions, the mixture of races in Latin America became extremely complex. The Iberian invaders got along with the native American indians. Jewish traders and merchants moved there to find a more liberal atmosphere. American settlers decided to import blacks from Africa as slaves to cultivate the fields. There was trade between Latinamerica and China via Philippines, which also was in possession of Spain, that served an important function as a bridge that connected the two counterparts. During the twentieth century, massive Japanese emigration to Brazil occurred. As a result of this, the hybridization of various cultures was completed and accounted for one of the strengths of Latin American art. The value of Latin American art is based on its vitality, originality and variety. In addition, the Latin American visual arts have a close relation to their social and political context because the Latin American political institutions lacked firm foundation. In this respect, artists play a more important role than political leaders in supporting a sense of national identity. The most of Latin American famous artists studied in Europe and returned home to create their peculiar art-world. This art world was a mixture of folk and tribal cultures of Latin America, and urban or sophistcated cultures of Europe to which the Latin American artists belong. Key words: Multiculture, Lantiamerican Art, Muralism, Novechento, Abstractionism, Constructivism, Modernism, Cubism

예술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의 다문화 현상 151 논문 접수일 : 2014년 2월 6일 심사 완료일 : 2014년 2월 20일 게재 확정일 : 2014년 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