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연구 44(2013.3.30), pp.35-79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 1) 2)김승우 ** 국문초록 본고는 용비어천가 에 수록된 각종 사적들의 연원을 탐색하고, 전거 차용상의 특징을 검토하는 한편, 그러한 전거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 되어 현재와 같은 체재의 용비어천가 가 성립되었는지 분석하는 데 목 적을 둔다. 고성의 사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자치통감 과 같은 정사류 사서에서 발췌된 것으로 확인되며, 개별 사적에 대한 제가의 사론들까지 반영하여 노랫말을 지은 사례 또한 여럿 발견된다. 이는 세종대 경연에서 이루어 진 각종 사서 강독을 통해 역대사와 사론에 대한 이해도가 심화되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한편, 옛 제왕들에 얽힌 일화나 기담 등과 관련해서 는 태평어람, 태평광기 등 설화집류가 다수 활용된 점도 특징적이다. 용비어천가 의 제작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전적은 <용비어 천가>가 제진되기 얼마 전 완성된 치평요람( 治 平 要 覽 ) 임을 여러 부면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용비어천가>에 포함된 사적들 가운데 상당 수가 치평요람 에도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용비어천가>의 선사에는 * 이 논문은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 행된 연구임(NRF-2010-327-A00291).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 한국문화연구단 연구교수(고전문학 전공)
36 한국학연구 44 이적( 夷 狄 ) 출신 군주들과 고려 태조의 사적들까지 육룡의 위업과 부합하 는 선례로서 취택되었는데, 이러한 특징은 후세에 감계가 되는 것이라면 중화와 이적, 동국의 사적을 가리지 않고 포괄하였던 치평요람 의 편찬방 침과 일치한다. 더 나아가 역대의 사적을 중국과 동국 이 아닌 고( 古 )와 금( 今 ) 으로 갈라 편재한 치평요람 의 체재는 최항이 척고의금( 摭 古 擬 今 ) 이라 설명했던 <용비어천가>의 찬술방식과 잇닿아 있기도 하다. 주제어:용비어천가( 龍 飛 御 天 歌 ), 전거( 典 據 ), 치평요람( 治 平 要 覽 ), 자치통감( 資 治 通 鑑 ), 자치통 감강목( 資 治 通 鑑 綱 目 ), 정인지( 鄭 麟 趾 ), 최항( 崔 恒 ) 1. 서론 본고는 용비어천가 에 수록 또는 반영된 각종 사적들의 연원을 탐색 하고, 전거 차용상의 특징을 검토하는 한편, 그러한 전거들이 어떠한 방 식으로 활용되어 현재와 같은 체재의 용비어천가 가 성립되었는지를 특 히 선사( 先 詞 )에 게재된 고성( 古 聖 )의 사적과 연관 지어 분석하는 데 목 적을 둔다. 1) 기본적으로 <용비어천가>는 역사가 문학화된 텍스트이다. 따라서 <용 비어천가>의 제반 특징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사적들이 작품 속으로 시화( 詩 化 )된 궤적을 추적하는 연구가 필요하며, <용비어천가>에 활용된 전거를 정밀하게 찾아 정리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실 제로 해당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들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바 있 다. 가령, 각 장( 章 )의 차사( 次 詞 )에 주로 게재된 조선조 조종( 祖 宗 )의 사 적들 대부분이 태조실록( 太 祖 實 錄 ), 정종실록( 定 宗 實 錄 ) [ 공정왕실 1) 논의의 혼란을 막기 위해, 본고에서는 용비어천가 가 시가( 詩 歌 ) 작품에 대한 지칭 으로 쓰일 경우에는 <용비어천가> 로, 10권 5책의 서책에 대한 지칭으로 쓰일 경우 에는 용비어천가 로 구별하여 표기한다. 다만, 둘 사이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거나 포괄적인 지칭이 필요할 경우에는 용비어천가 로 통일하여 부른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37 록( 恭 靖 王 實 錄 ) ], 태종실록( 太 宗 實 錄 ) 및 고려사( 高 麗 史 ) 등에서 발 췌 활용되었다는 점은 정두희, 박찬수, 김승우 등의 연구에서 이미 논의 되었으며,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2) 이처럼 차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논의가 여러 측면에서 진척된 반면, 선사에서 다루어진 고성, 즉 역대 제왕( 帝 王 )들의 사적이 어느 전적에 서 연원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종래 거의 조명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 다. 자치통감( 資 治 通 鑑 ), 서경( 書 經 ), 한서( 漢 書 ), 당서( 唐 書 ) 등 이 활용되었으리라는 점이 간간히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각 장의 전거 를 일일이 탐색하는 연구는 아직 시도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 조 임금들의 사적 또한 태조실록 총서( 總 序 ) 나 고려사 만이 그 주 요 원천으로 논의되었을 뿐, 또 다른 전적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서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문제점도 발견된다. 따라서 조종과 고성의 사적을 아우르는 보다 종합적인 전거 조사가 필 요한 상황이며, 본고에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는 사항도 바로 이 부분 이다. 물론, 전거 조사 자체가 본고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다. 전거 조 사가 단지 노랫말의 원천 사적을 밝혀내는 단계에서 마무리된다면 그다 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전거 조사를 바탕으로 보다 깊이 있게 검토되어야 할 사항은 용비어천가 의 구성 방식이나 체재와 연계 된 제반 내역들이다. 즉, 각종 전거들이 언제 어떠한 경위로 수합되었고, 2) 정두희(1994), 조선건국사 자료로서의 용비어천가, 진단학회 편, 한국고전 심포 지엄 4, 일조각, 104~125면; 박찬수(1994), 용비어천가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57~73면; 김승우(2012), 용비어천가 의 성립과 수용, 보고사, 57~91면. 박찬수는 <용비어천가>의 차사에 게재된 내용을 실록에서 찾아낸 후 그 습용( 襲 用 ) 형태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목록화하였고, 김승우는 자료 탐색의 범위를 고려 사 등 실록 이외의 전적으로까지 확장하여 보다 종합적으로 전거 조사를 하였다. 아 울러 정두희와 김승우는 각각 고려사( 高 麗 史 ) 의 수찬( 修 撰 ) 및 실록 개수( 改 修 ) 사 안과 연관 지어 <용비어천가> 찬술의 정치적 배경을 검토하였다. 한편, 정구복은 용비 어천가 에 포함된 역사의식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직계의식의 혈족주의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됨, 역사적 지식을 실용적으로 활용함, 조 선의 건국이 사대부의 도움보다는 왕실 선대로부터의 공덕과 태조의 뛰어난 무술의 힘 으로 달성되었다는 점이 강조됨, 원( 元 )나라의 고려 지배에 대한 비판의식이 결여됨, 국가를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표출됨. [정구복(2000), 용비어천가 에 나타난 역사의식, 한국사학사학보 1집, 한국사학사학회, 15~42면.]
38 한국학연구 44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용비어천가 에 활용 반영되었으며, 고성과 조종의 사적을 정사대( 正 事 對 )의 대우( 對 偶 )로 엮어내는 <용비어천가>의 독특한 체재는 어떻게 고안된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 본고에서 주안을 두는 사항 이다. 이를테면, 전거 조사를 통해 용비어천가 의 면면을 세종대의 학술 적 역량과 관련 지어 한층 정교하게 재검토해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의 2장에서는 우선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종합적으로 탐색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 전 거 차용상의 주요 특징들을 고찰한 후, 4장에서는 용비어천가 를 제작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되는 치평요람( 治 平 要 覽 ) 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2. 용비어천가 의 전거 탐색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고려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용비어천가 는 시가 작품만으로 우선 제작되어 세종에게 진상 되었고, 이 단계에서는 어떤 사적이 작품을 짓는 데 활용되었는지에 관 해 별다른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같은 사정은 최항( 崔 恒 )의 용비어천가발( 龍 飛 御 天 歌 跋 ) 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3) 세종 은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지어올린 <용비어천가>를 받아 본 후 사람들 이 그 내용을 알아보지 못할까 염려하여 작품에 해설을 달도록 명한다. 비록 <용비어천가>에 활용된 사적이 사서에 기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를 일일이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염려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주해를 맡 3) 용비어천가발, 용비어천가, 1a~2a면. ( ) 歲 乙 丑, 議 政 府 右 贊 成 臣 權 踶, 右 参 贊 臣 鄭 麟 趾, 工 曹 參 判 臣 安 止 等, 製 爲 歌 詩 一 百 二 十 五 章 以 進, 皆 據 事 撰 詞, 摭 古 擬 今, 反 覆 敷 陳, 而 終 之 以 規 戒 之 義 焉. 我 殿 下 覽 而 嘉 之, 賜 名 曰 龍 飛 御 天 歌. 惟 慮 所 述 事 蹟, 雖 載 在 史 編, 而 人 難 遍 閱. 遂 命 臣, 及 守 集 賢 殿 校 理 朴 彭 年, 守 敦 寧 府 判 官 臣 姜 希 顔, 集 賢 殿 副 校 理 臣 申 叔 舟, 守 副 校 理 臣 李 賢 老, 修 撰 臣 成 三 問, 臣 李 塏, 吏 曹 佐 郞 臣 辛 永 孫 等, 就 加 註 解. 於 是 粗 敍 其 用 事 之 本 末, 復 爲 音 訓, 以 便 觀 覽, 共 一 十 卷. ( )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39 은 최항 이하 집현전 소장 학사들은 <용비어천가>의 원 제작자들이 어떠 한 전적을 바탕으로 노랫말을 지어 내었는지 파악하여 각 장 아래에 해 당 사적을 수록하는 작업을 실시하게 되며, 과외로 난해어구나 한자음에 대한 설명까지도 세세하게 협주( 夾 註 )로 부기하였던 것이다. 당초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용비어천가>, 즉 노 랫말을 지어내는 데 실제 소용된 사적들을 탐색해야 하는 것이 원칙적으 로 타당하다. 그러나 실제 어떠한 사적이 노랫말에 반영되었는지 <용비 어천가>만을 가지고는 알아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최항 등이 작성한 주해가 대개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기는 해도 노랫말의 바탕이 된 사적들 을 빠짐없이 수록해 놓은 것임에는 분명하므로 해설 부분을 통해서 전거 를 탐색해 가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유효하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용비어천가>가 제작되던 인접 시기의 다른 전적들, 특히 편람서( 便 覽 書 )들과의 관계를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세종은 경체사용( 經 體 史 用 )의 학술관을 지니고 있던 군 주로서 재위 기간 내내 경연( 經 筵 )에서 각종 사서를 강독하였고, 그 결과 물을 수종의 훈의서( 訓 義 書 )로 정리하여 간행토록 한 바도 있다. 세종 재 위 후반기에 이르러 강독의 결과물을 활용하는 방식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특히 주목되는 전적이 <용비어천가>가 제진되기 불과 한 달 전에 완성된 치평요람 이다. 치평요람 은 정치의 득실을 밝히기 위해 역대의 사적들을 매우 광 범하게 수집하여 시대별로 정리한 대단위 편람서로서 용비어천가 를 제작하는 데 치평요람 의 내용이 일부 활용되었으리라는 추정은 선행 연구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으나, 고성의 사적과 관계된 몇몇 사례만이 검토되었을 뿐 구체적인 단계로까지 논의가 진척되지는 못하였다. 4) 용비어천가 의 찬자와 주해자들이 재래의 각종 사서에 수록된 기사들 을 면밀하게 고려하면서 노랫말을 짓거나 해설 작업을 진행했을 것임 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1차 전적과 더불어 치평요람 과 같은 2차 전적 4) 김승우, 앞의 책, 146~154면.
40 한국학연구 44 역시도 이 과정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을 개연성은 다분하다. 특히 치평요람 은 수록 내용과 관련하여서만 용비어천가 에 영향 을 미친 것이 아니라 용비어천가 의 독특한 체계를 구성하는 데에도 그 전범으로서 포착되었던 흔적까지 발견되므로, 이 같은 사항들을 구 체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1차 전거, 즉 원천 사 적과, 2차 전거, 즉 치평요람 에 재인용된 사적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5)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하여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다음과 같은 지침 에 따라 조사한 후 그 내역을 아래에 표로 정리한다. [일러두기] 1 전거 분석의 대상은 용비어천가 의 해설 본문에 수록된 내역 전체이다. 해설 가운데 협주에 수록된 내용은 글자의 음 또는 훈을 설명하는 문구이거나 해당 사적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니지 않는 부수적인 부분인 경우가 많으므로 전거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2 용비어천가 의 각 장을 선사[1행]와 차사[2행]로 나눈 후, 각 행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을 먼저 앞부분 인물 란에 표시하였다. 단, 제1장은 1행, 제125장은 3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장은 선 차사 구분을 하지 않았고, 125장은 선 중 차사로 행을 구분하였다. 특정 행에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경 우에는 인물 란에 - 로 표시하였다. 3 용비어천가 의 원천 사적, 즉 1차 전거를 각 장별로 조사하여 1차 전거 란에 기입하되, 여러 전거가 순차적으로 활용된 경우에는 해설에 수록된 순서대로 그 내역을 모두 나열하고 각 전거 사이는 점선으 로 구분하였다. 단, 특정 사적이 복수의 선행 전적에 수록되어 있어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주로 활용하였 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경우, 고성의 사적은 자치통감, 조종의 사적은 고려사 를 가장 주요한 전적으 로 지목하여 우선 수록한 후 그 밖의 전적을 필요에 따라 같은 난에 부기하였다. 4 1차 전거는 서명과 편명까지 기입하였다. 다만, 1차 전거가 실록 기사일 경우에는 해당 조의 실록을 밝 히고 기사의 날짜를 적었다. 아울러 태조실록 총서 는 그 내역이 장황하므로 총서 에 수록된 기사 5) 이는 용비어천가 에 인용된 사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치평요람 에도 이미 수록되 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용비어천가 의 제작에 치평요람 이 구체적으로 어떠 한 부면에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본고의 4장에서 항목별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41 의 순서를 # 뒤에 따로 표시하였다. 5 용비어천가 의 해설 부분이 치평요람 에서도 발견되는 경우, 해당 내역을 2차 전거 란에 표기하였 다. 2차 전거가 여러 개 순차적으로 활용된 경우에는 1차 전거와 마찬가지로 그 내역을 모두 나열하고 각 전거 사이는 점선으로 구분하였다. 6 용비어천가 의 해설 부분이 1차 또는 2차 전거에서도 발견되되 그 내용이 축약된 경우에는 따로 [축 약] 이라 표시하였다. 7 치평요람 에는 왕조 이외에는 별도의 편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2차 전거를 표시할 때에는 치평요람 의 권차와 해당 기사가 시작되는 첫 면을 모두 밝혀 적었다. 아울러 이미 출간된 치평요람 영인본의 권 차(a)와 페이지(b)도 [a-b] 형태로 부기하여 찾아보기 쉽게 하였다. 8 앞서 나온 사적을 반복적으로 활용하여 작시( 作 詩 )한 후 해설에 見 上. 上, 第 章 也. 로 적은 경우에는 별도로 2차 전거를 기입하지 않고 1차 전거 란에만 장 과 같은 형태로 표시하였다. 한편, 제98장 차 사의 경우 제108장에 나오는 내용을 먼저 가져다 활용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108장 이라 적었다. 9 조선조 조종의 사적이 어느 전적에서 활용 및 발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박찬수[앞의 논문, 65~73면] 와 김승우[앞의 책, 61~63면]에 의해 표로 조사 정리된 바 있으므로 전거 조사 과정에서 이들 내역을 활용하되, 미비한 부분을 다수 보충하였다. 10 전거 조사에 주로 활용한 자료는 사고전서( 四 庫 全 書 ), 고려사, 각조 실록, 치평요람 등이며, 구체적 인 서지는 참고문헌의 기본자료 항에 나열하였다. 11 치평요람 에 수록된 사적들의 원천 전거에 대해서는 오항녕(2007), 조선초기 치평요람 의 편찬과 전거, 아세아문화사에서 모두 분석된 바 있으므로, 용비어천가 의 해설에 수록된 내용이 치평요람 에도 수록되어 있는 경우, 그 원천 전거, 즉 1차 전거를 별도로 탐색하지 않고 오항녕의 선행 연구에서 조사된 바를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하였다. 12 전거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전거불명 이라 표시하고 해당 부분의 어구 첫머리를 안에 적었다. 13 치평요람 전체 150권 가운데 현전하는 것은 권38, 39를 제외한 148권이다. 실전된 두 권은 한나라 말기를 다루고 있는데, <용비어천가> 제80장의 선사에 반영된 촉( 蜀 ) 선주( 先 主 ) 유비( 劉 備 )의 사적이 권 38 또는 권39에 수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제80장 선사의 2차 전거 란에는 治 平 要 覽 권 38 또는 권39 [ 缺 ] 이라 표기하였다.
42 한국학연구 44 [표 1] 용비어천가 의 전거 장차 인물 1차 전거 2차 전거 2 3 4 5 6 7 8 9 10 11 1 - - 先 - - 次 - - 先 주 태왕 史 記 권4, 周 本 紀 4 次 목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 先 주 태왕 3장 次 익조 3장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9 先 주 태왕 詩 經, 大 雅, 文 王 之 什, 緜 次 익조 4장 先 주 태왕 3장 次 익조 4장 先 주 문왕 尙 書 帝 命 驗 권1 次 도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9 先 주 계력 論 語 集 註, 泰 伯 8 次 환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1 先 주 무왕 史 記 권3, 殷 本 紀 3 書 經, 周 書, 武 成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2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3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4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5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6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7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9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14년 전거불명 後 宣 宗 皇 帝 時 先 주 무왕 9장 次 태조 9장 先 주 무왕 9장 論 語 集 註, 泰 伯 8 9장 次 태조 高 麗 史 권133, 列 傳 46, 辛 禑 1 治 平 要 覽 권1, 7a면 [35( 補 遺 1)-57] [축약] 治 平 要 覽 권149, 28a면 [34-297] 治 平 要 覽 권149, 30a면 [34-301] 治 平 要 覽 권149, 30b면 [34-302] 治 平 要 覽 권149, 33b면 [34-308]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43 12 13 14 15 16 高 麗 史 권133, 列 傳 50, 辛 禑 5, 14년 高 麗 史 권126, 列 傳 39, 姦 臣 2, 曺 敏 修 高 麗 史 권45, 世 家 45, 恭 讓 王 1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00 治 平 要 覽 권149, 35a면 [34-311] 治 平 要 覽 권150, 8b면 [34-374] 高 麗 史 권45, 世 家 45, 恭 讓 王 1, 2년 治 平 要 覽 권150, 10b면 [34-378] 先 주 무왕 9장 전거불명 自 高 麗 恭 愍 王 薨 太 祖 實 錄 권14, 7년 8월 26일(기사)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治 平 要 覽 권150, 13b면 [34-384] 高 麗 史 권116, 列 傳 29, 沈 德 符 高 麗 史 권119, 列 傳 32, 鄭 道 傳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28 高 麗 史 권117, 列 傳 30, 鄭 夢 周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29 高 麗 史 권117, 列 傳 30, 鄭 夢 周 治 平 要 覽 권150, 58b면 [34-474]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31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恭 讓 王 2, 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34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恭 讓 王 2, 4년 治 平 要 覽 권150, 63a면 [34-483]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28일(정미) 太 祖 實 錄 권1, 1년 8월 23일(임신) 太 祖 實 錄 권8, 4년 11월 24일(갑신) 太 祖 實 錄 권8, 4년 11월 27일(정해) 太 祖 實 錄 권8, 4년 12월 8일(정유) 전거불명 又 賜 材 瓦 令 造 居 第 太 祖 實 錄 권8, 4년 12월 22일(신해) 太 祖 實 錄 권14, 7년 5월 26일(임신)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33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太 祖 實 錄 권2, 1년 12월 16일(임술) 治 平 要 覽 권150, 63b면 [34-484] 先 주 무왕 9장 9장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恭 讓 王 2, 3년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17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恭 讓 王 2, 3년 治 平 要 覽 권150, 42b면 [34-442]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18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治 平 要 覽 권150, 68b면 [34-494] 先 주 무왕 史 記 권4, 周 本 紀 4 次 태조 13장 先 진 시황제 金 陵 百 詠, 秦 淮 次 태조 高 麗 史 권2, 世 家 2, 太 祖 2, 26년 治 平 要 覽 권100, 7b면 [21-364]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83, 隋 紀 7 治 平 要 覽 권69, 35b면 [14-72] 資 治 通 鑑 권186, 唐 紀 2 治 平 要 覽 권70, 44a면 [14-201] 次 태조 高 麗 史 권122, 列 傳 35, 方 技, 金 謂 磾
44 한국학연구 44 高 麗 史 권11, 世 家 11, 肅 宗 1, 6년 高 麗 史 권12, 世 家 12, 肅 宗 2, 9년 通 鑑 總 類 권1 下 治 平 要 覽 권69, 48b면 [14-98] 治 平 要 覽 권68, 27b면 [13-396] 治 平 要 覽 권68, 38a면 [13-417] 資 治 通 鑑 권180, 隋 紀 4 治 平 要 覽 권68, 38b면 [13-418] 治 平 要 覽 권68, 40a면 [13-421] 治 平 要 覽 권68, 43a면 [13-427] 治 平 要 覽 권68, 49b면 [13-440] 資 治 通 鑑 권181, 隋 紀 5 治 平 要 覽 권68, 52a면 [13-445] 治 平 要 覽 권68, 56b면 [13-454] 通 鑑 紀 事 本 末 권26 上 治 平 要 覽 권69, 3a면 [14-7] 17 先 수 양제 治 平 要 覽 권69, 3b면 [14-8] 資 治 通 鑑 권181, 隋 紀 5 治 平 要 覽 권69, 6b면 [14-14] 治 平 要 覽 권69, 8a면 [14-17] 전거불명 左 候 衛 大 將 軍 段 文 振 治 平 要 覽 권69, 8b면 [14-18] 資 治 通 鑑 권181, 隋 紀 5 治 平 要 覽 권69, 9a면 [14-19] 治 平 要 覽 권69, 10a면 [14-21] 資 治 通 鑑 권182, 隋 紀 6 治 平 要 覽 권69, 13a면 [14-27] 治 平 要 覽 권69, 18b면 [14-38] 通 鑑 紀 事 本 末 권26 上 治 平 要 覽 권69, 27a면 [14-55] 資 治 通 鑑 권183, 隋 紀 7 治 平 要 覽 권69, 34b면 [14-70] 資 治 通 鑑 권185, 唐 紀 1 治 平 要 覽 권70, 20b면 [14-154] 次 도조 3장 18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7, 秦 紀 2 史 記 권8, 高 祖 本 紀 8 治 平 要 覽 권15, 34b면 [37( 補 遺 3)-184] 次 도조 3장 資 治 通 鑑 권39, 漢 紀 31 19 先 한 광무제 전거불명 會 故 廣 陽 王 子 接 資 治 通 鑑 권39, 漢 紀 31 治 平 要 覽 권26, 14a면 [4-141] 次 익조 4장 20 先 한 광무제 19장 次 익조 4장 21 先 송 인종 佛 祖 歷 代 通 載 권27 次 익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1 22 先 한 고조 18장 次 도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8 23 先 후당 태조 舊 五 代 史 권25, 唐 書 1 次 도조 7장 資 治 通 鑑 권291, 後 周 紀 2 治 平 要 覽 권102, 3b면 [22-126] 24 先 송 태조 春 秋 集 義 권42, 昭 公 資 治 通 鑑 권292, 後 周 紀 3 治 平 要 覽 권102, 18b면 [22-156]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45 25 26 27 28 29 30 通 鑑 總 類 권11 下 治 平 要 覽 권102, 22b면 [22-164] 資 治 通 鑑 권293, 後 周 紀 4 治 平 要 覽 권102, 25b면 [22-170] 治 平 要 覽 권102, 26b면 [22-172] 次 환조 高 麗 史 권29, 世 家 29, 忠 烈 王 2, 7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7 高 麗 史 권38, 世 家 38, 恭 愍 王 1, 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3 高 麗 史 권38, 世 家 38, 恭 愍 王 1, 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4 高 麗 史 권111, 列 傳 24, 趙 暾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5 治 平 要 覽 권146, 33a면 [33-403] 先 송 태조 宋 史 全 文, 宋 太 祖 1 治 平 要 覽 권102, 50b면 [22-220] 次 환조 24장 資 治 通 鑑 권190, 唐 紀 6 治 平 要 覽 권71, 43a면 [14-315] 治 平 要 覽 권71, 55a면 [14-339]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91, 唐 紀 7 治 平 要 覽 권72, 1a면 [14-343] 治 平 要 覽 권72, 5a면 [14-351] 治 平 要 覽 권72, 13a면 [14-367] 資 治 通 鑑 권194, 唐 紀 10 治 平 要 覽 권73, 15a면 [15-31] 次 환조 高 麗 史 권39, 世 家 39, 恭 愍 王 2, 10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7 治 平 要 覽 권146, 33a면 [33-403] 先 당 태종 太 平 御 覽 권349, 兵 部 80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3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4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7, 秦 紀 2 史 記 권8, 高 祖 本 紀 8 治 平 要 覽 권15, 34b면 [37( 補 遺 3)-184] 高 麗 史 권111, 列 傳 25, 李 達 衷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2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2 治 平 要 覽 권146, 33a면 [33-403] 太 祖 實 錄 권9, 5년 4월 27일(갑인)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30 先 촉 선주 資 治 通 鑑 권60, 漢 紀 52 治 平 要 覽 권33, 29a면 [5-395] 資 治 通 鑑 권65, 漢 紀 57 治 平 要 覽 권35, 15b면 [6-142]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7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8 次 태조 전거불명 身 長 而 直 耳 大 絶 異 太 宗 實 錄 권4, 2년 9월 28일(무신) 전거불명 時 太 祖 行 天 寶 山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治 平 要 覽 권150, 68b면 [34-494] 先 후당 태조 資 治 通 鑑 권255, 唐 紀 71 治 平 要 覽 권93, 32a면 [20-6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4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31 先 당 태종 26장
46 한국학연구 44 32 33 34 35 36 37 38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1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2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宋 史 全 文 권15, 靖 康 元 年 治 平 要 覽 권121, 50a면 [27-333] 歷 代 通 鑑 輯 覽 권82 治 平 要 覽 권122, 1a면 [27-349] 治 平 要 覽 권122, 1b면 [27-350] 九 朝 編 年 備 要 권30 治 平 要 覽 권122, 30b면 [27-408] 宋 名 臣 言 行 錄 續 集 권4 治 平 要 覽 권122, 40a면 [27-427] 先 송 고종 歷 代 通 鑑 輯 覽 권82 通 鑑 續 編 권13 治 平 要 覽 권122, 41a면 [27-429] 資 治 通 鑑 後 編 권104 治 平 要 覽 권122, 42a면 [27-431] 續 夷 堅 志 歷 代 通 鑑 輯 覽 권83 治 平 要 覽 권123, 5a면 [28-11] 宋 史 권379 治 平 要 覽 권123, 30b면 [28-62]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0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82, 隋 紀 6 治 平 要 覽 권69, 31a면 [14-63] 高 麗 史 권39, 世 家 39, 恭 愍 王 2, 10년 高 麗 史 권113, 列 傳 26, 安 祐 高 麗 史 권126, 列 傳 39, 姦 臣 2, 林 堅 味 治 平 要 覽 권146, 51a면 [33-439]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7 高 麗 史 권113, 列 傳 26 安 祐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9 治 平 要 覽 권146, 53a면 [33-443] 高 麗 史 권40, 世 家 40 恭 愍 王 3, 12년 先 금 태조 遼 史 권28 本 紀 28 治 平 要 覽 권120, 33b면 [27-184] 次 태조 33장 先 당 태종 歷 代 名 臣 奏 議 권341 治 平 要 覽 권72, 15b면 [14-372]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0 高 麗 史 권40, 世 家 40 恭 愍 王 3, 11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1 次 태조 高 麗 史 권133, 列 傳 46 辛 禑 1, 2년 治 平 要 覽 권147, 1b면 [34-4]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1 高 麗 史 권40, 世 家 40 恭 愍 王 3, 11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1 治 平 要 覽 권70, 1a면 [14-115] 資 治 通 鑑 권70, 隋 紀 8 先 당 태종 治 平 要 覽 권70, 5b면 [14-124] 李 衛 公 問 對 권 上 次 태조 35장 先 촉 선주 資 治 通 鑑 권62, 漢 紀 54 治 平 要 覽 권34, 11a면 [6-23] 太 平 御 覽 권186, 居 處 部 14 高 麗 史 권113 列 傳 26, 安 遇 慶 高 麗 史 권131 列 傳 44, 叛 逆 5, 崔 濡 治 平 要 覽 권147, 6b면 [34-14] 治 平 要 覽 권147, 17a면 [34-3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2 高 麗 史 권133 列 傳 46, 辛 禑 1, 3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2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은 탕왕 孟 子, 滕 文 公 章 句 下 次 태조 35장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47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3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4 治 平 要 覽 권147, 18a면 [34-37] 39 40 41 42 先 한 고조 18장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7 治 平 要 覽 권147, 45a면 [34-91] 先 당 고조 新 唐 書 권1, 本 紀 1 太 平 御 覽 권310, 兵 部 41 次 태조 39장 資 治 通 鑑 권196, 唐 紀 12 治 平 要 覽 권74, 27a면 [15-167] 治 平 要 覽 권74, 43a면 [15-199] 資 治 通 鑑 권197, 唐 紀 13 治 平 要 覽 권74, 51b면 [15-216] 治 平 要 覽 권74, 53b면 [15-220] 治 平 要 覽 권74, 55b면 [15-224] 治 平 要 覽 권75, 1a면 [15-227] 治 平 要 覽 권75, 2a면 [15-229] 資 治 通 鑑 권197, 唐 紀 13 治 平 要 覽 권75, 2b면 [15-230] 治 平 要 覽 권75, 3a면 [15-231] 治 平 要 覽 권75, 4a면 [15-233] 三 國 史 記 권5, 新 羅 本 紀 5 資 治 通 鑑 권197, 唐 紀 13 治 平 要 覽 권75, 4a면 [15-233] 唐 鑑 권6 治 平 要 覽 권75, 7b면 [15-240]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5b면 [15-236] 唐 鑑 권6 治 平 要 覽 권75, 7b면 [15-240] 治 平 要 覽 권75, 5b면 [15-236]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7b면 [15-240] 治 平 要 覽 권75, 8b면 [15-242] 전거불명 胡 寅 曰 兵 豈 易 用 哉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8b면 [15-242] 三 國 史 記 권22, 高 句 麗 本 紀 10 三 國 史 記 권21, 高 句 麗 本 紀 9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8b면 [15-242] 唐 鑑 권6 治 平 要 覽 권75, 10b면 [15-246]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11a면 [15-247] 治 平 要 覽 권75, 13a면 [15-251] 資 治 通 鑑 綱 目 권40 治 平 要 覽 권75, 13a면 [15-251] 治 平 要 覽 권75, 12b면 [15-250] 次 태조 39장 先 원 태조 通 鑑 續 編 권20 治 平 要 覽 권136, 6b면 [31-128] 治 平 要 覽 권135, 55a면 [31-111]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6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9 治 平 要 覽 권147, 53b면 [34-108]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6
48 한국학연구 44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先 당 현종 陜 西 通 志 권6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3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당 선종 樂 書 권18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5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資 治 通 鑑 권8, 秦 紀 3 治 平 要 覽 권15, 44a면 [37( 補 遺 3)-203] 先 한 고조 治 平 要 覽 권15, 51a면 [37( 補 遺 3)-217] 資 治 通 鑑 권9, 漢 紀 1 治 平 要 覽 권15, 52a면 [37( 補 遺 3)-219]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6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당 고조 舊 唐 書 권51, 列 傳 1, 后 妃 上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6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1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당 태종 27장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1 治 平 要 覽 권148, 33b면 [34-182] 先 금 태조 金 史 권2, 本 紀 2 次 태조 47장 資 治 通 鑑 권253, 唐 紀 69 治 平 要 覽 권93, 1b면 [20-4] 治 平 要 覽 권93, 4a면 [20-9] 治 平 要 覽 권93, 4b면 [20-10] 治 平 要 覽 권93, 8b면 [20-18] 治 平 要 覽 권93, 10a면 [20-21] 資 治 通 鑑 권253, 唐 紀 70 治 平 要 覽 권93, 8b면 [20-18] 治 平 要 覽 권93, 11b면 [20-24] 先 후당 태조 治 平 要 覽 권93, 12b면 [20-26] 治 平 要 覽 권93, 18a면 [20-37] 資 治 通 鑑 권253, 唐 紀 69 治 平 要 覽 권93, 3a면 [20-7] 資 治 通 鑑 권253, 唐 紀 70 治 平 要 覽 권93, 12a면 [20-25] 治 平 要 覽 권93, 14a면 [20-29] 治 平 要 覽 권93, 23b면 [20-48] 資 治 通 鑑 권253, 唐 紀 71 治 平 要 覽 권93, 27a면 [20-55] 治 平 要 覽 권93, 29a면 [20-59]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4 治 平 要 覽 권148, 32a면 [34-179] 次 태조 高 麗 史 권133, 列 傳 46, 辛 禑 원년 治 平 要 覽 권148, 34b면 [34-184] 高 麗 史 권133, 列 傳 46, 辛 禑 2년 治 平 要 覽 권148, 40a면 [34-195] 先 당 현종 資 治 通 鑑 권209, 唐 紀 25 治 平 要 覽 권79, 17a면 [16-265] 治 平 要 覽 권79, 18b면 [16-268]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6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92 先 원 태조 通 鑑 續 編 권19 治 平 要 覽 권134, 28b면 [30-384] [축약] 次 태조 50장 先 후당 태조 49장 次 태조 49장 53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93, 唐 紀 9 治 平 要 覽 권73, 4b면 [15-10]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49 54 55 56 57 58 59 60 61 資 治 通 鑑 권193, 唐 紀 9 治 平 要 覽 권72, 51a면 [14-44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8, 4년 12월 14일(계묘) 太 祖 實 錄 권1, 1년 8월 18일(정묘) 太 祖 實 錄 권2, 1년 9월 11일(기축) 太 祖 實 錄 권2, 1년 윤12월 28일(갑진) 太 祖 實 錄 권2, 3년 9월 9일(병오) 太 祖 實 錄 권12, 6년 8월 6일(을유) 太 祖 實 錄 권3, 2년 6월 16일(경인)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11, 漢 紀 3 治 平 要 覽 권16, 24a면 [37( 補 遺 3)-277] 史 記 권113, 列 傳 53, 南 越 尉 佗 治 平 要 覽 권16, 52a면 [37( 補 遺 3)-33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5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綱 目 권2 下 次 태조 53장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28a면 [15-281] 治 平 要 覽 권75, 45b면 [15-316] 資 治 通 鑑 권199, 唐 紀 15 治 平 要 覽 권75, 47b면 [15-320] 治 平 要 覽 권75, 49b면 [15-324]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200, 唐 紀 16 治 平 要 覽 권75, 51a면 [15-327] 治 平 要 覽 권75, 52a면 [15-329] 資 治 通 鑑 권201, 唐 紀 17 治 平 要 覽 권76, 24b면 [15-390] 資 治 通 鑑 권203, 唐 紀 19 [축약] 治 平 要 覽 권77, 13a면 [16-27] 資 治 通 鑑 권204, 唐 紀 20 治 平 要 覽 권77, 37a면 [16-75] 資 治 通 鑑 권206, 唐 紀 22 治 平 要 覽 권78, 10b면 [16-136] 次 태조 53장 先 금 태조 金 史 권2, 本 紀 2 治 平 要 覽 권117, 46b면 [26-322]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8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9 治 平 要 覽 권149, 5a면 [34-251]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0 資 治 通 鑑 권188, 唐 紀 4 治 平 要 覽 권71, 18b면 [14-266] 治 平 要 覽 권71, 19b면 [14-268] 通 鑑 紀 事 本 末 권27 下 治 平 要 覽 권71, 21a면 [14-271] 先 당 태종 治 平 要 覽 권71, 21b면 [14-272] 資 治 通 鑑 권188, 唐 紀 4 治 平 要 覽 권71, 23b면 [14-276] 資 治 通 鑑 권189, 唐 紀 5 治 平 要 覽 권71, 24a면 [14-277] 治 平 要 覽 권71, 27a면 [14-28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6 治 平 要 覽 권149, 17a면 [34-275] 先 당 태종 58장 次 태조 58장 先 당 태종 58장 次 태조 58장 先 당 현종 50장 次 태조 58장
50 한국학연구 44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91, 唐 紀 7 治 平 要 覽 권72, 1a면 [14-343] 治 平 要 覽 권72, 2b면 [14-346]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2 治 平 要 覽 권149, 17a면 [34-275] 先 후당 태조 49장 次 태조 49장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4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금 태조 金 史 권2, 本 紀 2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6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당 태종 通 鑑 紀 事 本 末 권29 上 治 平 要 覽 권73, 44b면 [15-90]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3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2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資 治 通 鑑 권9, 漢 紀 1 治 平 要 覽 권16, 7b면 [37( 補 遺 3)-244] 資 治 通 鑑 綱 目 권2 下 治 平 要 覽 권16, 8a면 [37( 補 遺 3)-245] 史 記 권91, 列 傳 31, 黥 布 治 平 要 覽 권16, 13a면 [37( 補 遺 3)-255]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10, 漢 紀 2 治 平 要 覽 권16, 18b면 [37( 補 遺 3)-266] 資 治 通 鑑 綱 目 권3 上 治 平 要 覽 권16, 48a면 [37( 補 遺 3)-325] 史 記 권55, 世 家 25, 留 侯 治 平 要 覽 권17, 1a면 [3-3] 資 治 通 鑑 권9, 漢 紀 1 治 平 要 覽 권16, 10a면 [37( 補 遺 3)-249] 史 記 권104, 列 傳 44, 田 叔 治 平 要 覽 권16, 42a면 [37( 補 遺 3)-31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7 治 平 要 覽 권148, 55b면 [34-226] 先 원 세조 歷 代 通 鑑 輯 覽 권94 治 平 要 覽 권142, 8a면 [32-357] 次 태조 9장 先 원 세조 67장 次 태조 9장 治 平 要 覽 권26, 17b면 [4-148] 資 治 通 鑑 권39, 漢 紀 31 治 平 要 覽 권26, 18a면 [4-149] 先 한 광무제 治 平 要 覽 권26, 20b면 [4-154] 資 治 通 鑑 권40, 漢 紀 32 治 平 要 覽 권26, 22b면 [4-158] 治 平 要 覽 권26, 24a면 [4-161] 次 태조 9장 전거불명 讖 書 有 十 八 子 正 三 韓 之 說 先 당 태종 長 安 志 권16, 縣 6 전거불명 太 宗 葬 文 德 皇 后 於 昭 陵 次 태조 八 駿 圖 誌 治 平 要 覽 권79, 30b면 [16-292] 資 治 通 鑑 권210, 唐 紀 26 先 당 현종 治 平 要 覽 권79, 37a면 [16-305] 讀 史 管 見 권19, 唐 紀, 睿 宗 治 平 要 覽 권79, 38a면 [16-307] 高 麗 史 권115, 列 傳 28, 李 穡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95 治 平 要 覽 권149, 54a면 [34-349] 次 태조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辛 昌 治 平 要 覽 권149, 57b면 [34-356] 高 麗 史 권45, 世 家 45, 恭 讓 王 1 治 平 要 覽 권150, 8b면 [34-374] 太 祖 實 錄 권2, 1년 10월 22일(경오) 治 平 要 覽 권150, 68b면 [34-494]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51 72 73 74 75 76 77 78 太 祖 實 錄 권3, 2년 2월 15일(경인) 太 祖 實 錄 권11, 6년 4월 17일(기해) 先 당 태종 17, 41장 次 태조 9, 71장 先 후주 세종 資 治 通 鑑 권294, 後 周 紀 5 治 平 要 覽 권102, 41a면 [22-201] 전거불명 後 粱 太 祖 姓 朱 氏 高 麗 史 권118, 列 傳 31, 趙 浚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96 治 平 要 覽 권149, 38a면 [34-317] 11장 先 원 세조 通 鑑 續 編 권23 治 平 要 覽 권139, 7b면 [32-16] 治 平 要 覽 권139, 11a면 [32-23]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11 治 平 要 覽 권150, 39b면 [34-436] 高 麗 史 권45, 世 家 45, 恭 讓 王 1, 2년 次 태조 高 麗 史 권45, 世 家 45, 恭 讓 王 1, 2년 太 祖 實 錄 권11, 6년 3월 8일(신유) 先 당 태종 62장 次 태조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恭 讓 王 2, 4년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26 治 平 要 覽 권150, 47a면 [34-451] 資 治 通 鑑 권11, 漢 紀 3 治 平 要 覽 권16, 34b면 [37( 補 遺 3)-298] 先 한 고조 前 漢 書 권35, 列 傳 5, 荆 燕 吳 讀 史 管 見 권20, 唐 紀, 玄 宗 上 治 平 要 覽 권81, 5b면 [17-12]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1 治 平 要 覽 권150, 55a면 [34-467]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9 治 平 要 覽 권150, 55a면 [34-467] 先 당 태종 26, 53장 次 태조 12장 66장 資 治 通 鑑 권11, 漢 紀 3 治 平 要 覽 권16, 32b면 [37( 補 遺 3)-294] 前 漢 書 권34, 列 傳 4, 韓 彭 英 盧 吳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11, 漢 紀 3 治 平 要 覽 권16, 39b면 [37( 補 遺 3)-308] 治 平 要 覽 권16, 40b면 [37( 補 遺 3)-310] 通 鑑 紀 事 本 末 권2 上 治 平 要 覽 권16, 48b면 [37( 補 遺 3)-326] 左 氏 博 議 권7 治 平 要 覽 권16, 49a면 [37( 補 遺 3)-327] 通 鑑 紀 事 本 末 권2 上 治 平 要 覽 권16, 48b면 [37( 補 遺 3)-326] 史 記 권8, 本 紀 8, 漢 高 祖 治 平 要 覽 권16, 49a면 [37( 補 遺 3)-327] 資 治 通 鑑 권12, 漢 紀 4 治 平 要 覽 권16, 49b면 [37( 補 遺 3)-328] 十 先 生 奧 論 註, 前 集 권3, 雜 論 史 記 권53, 世 家 23, 蕭 相 國 治 平 要 覽 권16, 50a면 [37( 補 遺 3)-329] 資 治 通 鑑 권12, 漢 紀 4 治 平 要 覽 권16, 51b면 [37( 補 遺 3)-332] 治 平 要 覽 권16, 55a면 [37( 補 遺 3)-339] 史 記 권53, 世 家 23, 蕭 相 國 治 平 要 覽 권17, 2b면 [3-6] 李 衛 公 問 對 권 下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2, 1년 9월 16일(갑오)
52 한국학연구 44 太 祖 實 錄 권2, 1년 9월 26일(갑진) 太 祖 實 錄 권2, 1년 윤12월 13일(기축) 太 祖 實 錄 권6, 3년 6월 24일(임진) 太 祖 實 錄 권6, 3년 11월 4일(경자) 太 祖 實 錄 권7, 4년 3월 20일(계축) 太 祖 實 錄 권8, 4년 10월 30일(경신) 太 祖 實 錄 권10, 5년 8월 28일(계축) 太 祖 實 錄 권10, 5년 9월 5일(경신) 太 祖 實 錄 권13, 7년 2월 5일(임오) 太 祖 實 錄 권13, 7년 3월 1일(무신) 太 祖 實 錄 권14, 7년 7월 11일(갑신) 79 先 한 고조 78장 次 태조 78장 先 촉 선주 資 治 通 鑑 권75, 魏 紀 7 治 平 要 覽 권38 또는 권39 [ 缺 ]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80 80 次 태조 高 麗 史 권112, 列 傳 25, 韓 復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47 治 平 要 覽 권147, 45a면 [34-91] 高 麗 史 권137, 列 傳 50, 辛 禑 5, 辛 昌 81 先 송 태조 宋 史 全 文 권1, 宋 太 祖 1 治 平 要 覽 권103, 19a면 [22-277]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0 治 平 要 覽 권150, 54a면 [34-465] 82 先 원 세조 高 麗 史 권105, 列 傳 18, 鄭 可 臣 治 平 要 覽 권143, 13a면 [33-27]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24 治 平 要 覽 권150, 54a면 [34-465] 83 先 고려 태조 高 麗 史 권1, 世 家 1, 太 祖 1 治 平 要 覽 권97, 1a면 [21-3] 次 태조 13장 資 治 通 鑑 권23, 漢 紀 15 治 平 要 覽 권21, 18b면 [38( 補 遺 4)-142] 84 先 한 선제 前 漢 書 권8, 宣 帝 紀 8 治 平 要 覽 권21, 32a면 [38( 補 遺 4)-169] [축약] 資 治 通 鑑 권23, 漢 紀 15 治 平 要 覽 권21, 16a면 [38( 補 遺 4)-137]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治 平 要 覽 권150, 68b면 [34-494] 85 先 송 태조 宋 史 권1, 本 紀 1 宋 史 권1, 本 紀 3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太 祖 實 錄 권3, 2년 2월 15일(경인) 86 先 태조 28장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9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55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01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1년 7월 17일(병신) 治 平 要 覽 권150, 68b면 [34-494] 87 先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31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02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103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1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88 先 태조 35, 37장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53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63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次 태조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4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75 治 平 要 覽 권148, 35a면 [34-185] 先 태조 58, 37장 次 태조 9장 先 당 태종 26장 新 唐 書 권2, 本 紀 2 次 태종 71장 太 宗 實 錄 권1, 總 序 先 당 태종 26장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1, 總 序 治 平 要 覽 권150, 58a면 [34-473]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98, 唐 紀 14 治 平 要 覽 권75, 18a면 [15-261] 次 태종 전거불명 自 三 國 以 來 君 薨 先 후주 세종 24장 次 태종 12장 先 송 고종 32장 太 祖 實 錄 권3, 2년 5월 23일(정묘) 太 祖 實 錄 권3, 2년 6월 1일(을해) 次 태종 太 祖 實 錄 권4, 2년 8월 15일(무자) 太 祖 實 錄 권6, 3년 6월 1일(기사) 太 祖 實 錄 권6, 3년 11월 19일(을묘) 先 당 태종 16장 太 祖 實 錄 권9, 5년 6월 26일(임자)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1, 總 序 太 宗 實 錄 권34, 17년 8월 6일(기축) 先 한 문제 資 治 通 鑑 권15, 漢 紀 7 治 平 要 覽 권17, 54a면 [3-109] 治 平 要 覽 권17, 54b면 [3-110] 次 태종 太 祖 實 錄 권11, 6년 5월 18일(기사)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8, 秦 紀 3 治 平 要 覽 권15, 45b면 [37( 補 遺 3)-206] 次 태종 太 祖 實 錄 권1, 總 序 #28 太 宗 實 錄 권1, 總 序 先 전진 부견 資 治 通 鑑 권104, 晉 紀 26 資 治 通 鑑 권105, 晉 紀 27 治 平 要 覽 권48, 12a면 [8-369] 太 祖 實 錄 권14, 7년 8월 26일(기사)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1, 1년 1월 10일(경오) 108장 先 당 현종 71장 太 祖 實 錄 권14, 7년 8월 26일(기사) 定 宗 實 錄 권3, 2년 1월 28일(갑오) 次 태종 太 祖 實 錄 권15, 7년 9월 12일(갑신) 定 宗 實 錄 권3, 2년 1월 28일(갑오) 定 宗 實 錄 권3, 2년 2월 1일(병신)
54 한국학연구 44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太 宗 實 錄 권16, 8년 10월 6일(경진) 등 世 宗 實 錄 권2, 즉위년 11월 2일(무신) 등 先 송 태조 文 獻 通 考 권313, 龍 蛇 之 異 宋 史 全 文 권1, 宋 太 祖 1 治 平 要 覽 권102, 50b면 [22-220]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1, 總 序 先 당 태종 36장 次 태종 12, 98, 99장 先 한 고조 66장 次 태종 99장 先 요 태조 資 治 通 鑑 권268, 後 粱 紀 3 治 平 要 覽 권96, 25a면 [20-397] 次 태종 99장 先 당 태종 資 治 通 鑑 권187, 唐 紀 3 治 平 要 覽 권71, 5a면 [14-239] 讀 史 管 見 권16, 唐 紀, 高 祖 治 平 要 覽 권71, 5b면 [14-240] 次 태종 定 宗 實 錄 권4, 2년 5월 8일(임신) 定 宗 實 錄 권5, 2년 8월 1일(계사) 先 한 고조 資 治 通 鑑 권11, 漢 紀 3 治 平 要 覽 권16, 29a면 [37( 補 遺 3)-287] 治 平 要 覽 권16, 29b면 [37( 補 遺 3)-288] 定 宗 實 錄 권5, 2년 7월 2일(을축) 世 宗 實 錄 권2, 즉위년 11월 24일(경오) 次 태종 世 宗 實 錄 권2, 즉위년 12월 29일(갑진) 世 宗 實 錄 권2, 즉위년 12월 30일(을사) 世 宗 實 錄 권34권, 8년 12월 3일(임술) 陽 村 集 권20, 序 類, 題 吉 再 先 生 詩 卷 後 序 先 송 태조 歷 代 通 鑑 輯 覽 권71 治 平 要 覽 권102, 53b면 [22-226] 太 祖 實 錄 권14, 7년 8월 26일(기사)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2, 1년 11월 7일(신묘) 治 平 要 覽 권150, 58b면 [34-474] 定 宗 實 錄 권3, 2년 2월 1일(병신) 太 宗 實 錄 권23, 12년 5월 17일(경자) 先 당 고조 資 治 通 鑑 권191, 唐 紀 7 治 平 要 覽 권72, 5a면 [14-351] 次 태종 太 宗 實 錄 권3, 2년 4월 22일(갑술) 先 고려 신혜왕후 高 麗 史 권88, 列 傳 1, 后 妃 1 高 麗 史 권92, 列 傳 5, 洪 儒 治 平 要 覽 권97, 1a면 [21-3] 次 원경왕후 98장 先 주 후비 詩 經 集 典, 國 風, 周 南, 卷 耳 次 원경왕후 太 祖 實 錄 권14, 7년 8월 26일(기사) 定 宗 實 錄 권3, 2년 1월 28일(갑오) 先 사조 3, 4장 次 - - 先 사조 4장 次 - - 先 태조 포괄 次 세종 전거불명 宣 宗 皇 帝 賜 我 殿 下 纏 身 莽 龍 衣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55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先 태조 포괄 次 - - 先 태조 33, 50장 次 - - 先 태조 42, 54장 次 - - 先 태조 55장 次 - - 先 태조 50장 次 - - 先 태조 53장 次 - - 先 태조 태 종 76, 99장 次 - - 先 태조 73장 次 - - 先 태종 106장 次 - - 先 태조 80장 次 - - 先 태종 104장 次 - - 先 태종 107장 次 - - 先 - - 中 - - 次 하 태강왕 書 經, 夏 書, 五 子 之 歌 3. 전거의 차용 방식과 그 특징 위와 같은 분석의 결과를 바탕으로 전거의 차용 방식 및 그 특징과 관 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될 수 있는 사항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용비어천가>의 찬자들이 고성의 사적을 작품화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활용했던 전적은 사마광( 司 馬 光 )의 자치통감 임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 은 후주( 後 周 ) 세종( 世 宗 )까지의 역대 중국사를 통괄하는 대 단위 사서이기 때문에 역시 주대( 周 代 ) 이래 여러 중국 제왕들의 사적을
56 한국학연구 44 작품 속에 옮겨 왔던 <용비어천가>를 제작하는 데에도 그만큼 적극적으로 소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대( 漢 代 ) 이래 제왕들의 등극 과 정이나 영웅적 활약상 등과 관련된 사적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자치통 감 의 기사로부터 연원한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아울러 자치통감 이 후주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용비어천가 는 송( 宋 )과 원대 ( 元 代 )의 사적까지도 작품 속에 포함하고 있는 만큼, 송의 건국부터 원대 까지의 사적을 다룰 때에는 자치통감 의 속편인 통감속편( 通 鑑 續 編 ) 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처럼 통감류의 전적이 <용비어천가>를 제작하는 데 빈번하게 활용 되었던 것은 작품 제작자들이 그만큼 통감류 전적에 대한 이해와 조예 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세종대 경연에서는 세종 자신의 제안에 따라 세종과 신료들이 자치통감 은 물론 진경( 陳 桱 )의 통감속편 까지 완독한 바 있다. 6) <용비어천가>의 찬자들이 조선조 조 종의 사적을 굳이 고성의 사적과 교직하려 시도했던 것 역시 경연에서 이루어진 강독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통감류 전적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한편, 작품 제작자들이 중국 역대의 사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사적에 대한 재래의 사론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하게 논의될 만하다. 이 부분은 자치통감강목 의 강독과 연계 지어 검토할 필요가 있다. 통감류 전적에 대한 강독이 끝난 후 세종과 경 연관들은 자치통감강목 을 강하면서 역대사에 대한 제가의 사론을 섭렵 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종합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 思 政 殿 訓 義 資 治 通 鑑 綱 目 ) 으로 엮어내기에 이른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동일한 사 적에 대한 서로 다른 사론들을 비교 분석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게 되 었던 것이다. 7) 6) 세종대의 경연 교재에 대해서는 김중권(2004), 조선 태조 세종연간 경연에서의 독서 토론 고찰, 서지학연구 27집, 서지학회, 300~303면에서 일자별로 정리된 바 있다. 7) 세종대 경연에서의 자치통감강목 강의와 관련된 사항은 오항녕(2007), 자치통감 강목 강의의 추이,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6 1~266면에서 자세히 논의되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57 용비어천가 에 제가의 사론이 활용된 궤적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 우선 노랫말과 필연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해당 사적에 대한 사론을 해설에 삽입해 놓은 사례가 발견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용비어천가 의 해설에는 노랫말에 직접 관련되는 사항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맥락까지도 매우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어의 인명 지명 관직 등에 관해 추가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로 협주가 활용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해당 사적과 관련된 제가의 사론이 전해온다면 그 가운 데 주요한 것들을 선별하여 빠짐없이 해설에 반영하였고, 그러한 사례로 서 제 18, 24, 41, 66, 78, 84장 등에서는 응소( 應 劭 ), 반고( 班 固 ), 호안국 ( 胡 安 國 ), 범조우( 范 祖 禹 ), 호인( 胡 寅 ), 사마광, 소식( 蘇 軾 ), 여조겸( 呂 祖 謙 ), 이덕유( 李 德 裕 ) 등 여러 사가들의 사론이 한서( 漢 書 ), 춘추집의 ( 春 秋 集 義 ), 당감( 唐 鑑 ), 자치통감, 자치통감강목, 독사관견( 讀 史 管 見 ), 소식문집( 蘇 軾 文 集 ) 등 각종 전적에서 발췌되어 옮겨졌던 것 이다. 8) 다음으로 노랫말 속에 당초부터 사론이 반영된 사례들 역시 적지 않은 데, 이는 사론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된 경우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에 서도 제76장은 사론이 노랫말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宗 室 에 鴻 恩 이시며 모딘 相 니 실 千 載 아래 盛 德 을 니 兄 弟 예 至 情 이시며 모딘 니 실 오 나래 仁 俗 일우시니 제76장의 선사와 차사에서는 각각 한 고조( 高 祖 )가 종친들을 천하에 봉하여 안정을 꾀했던 일과, 태조가 조카들을 지정( 至 情 )으로 길러내었 8) 이로 미루어 보면, 용비어천가 의 해설은 단지 노랫말을 풀이하려는 의도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역대사에 대한 세종대의 이해도 내지 학술사적 성취도를 세간에 내보이기 위한 목적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넓게 보아 자기과시 라고도 칭할 수 있는 이러한 사정에 관해서는 백연태(2007), 문학가 의 자기과시에 대하여, 한국학연구 27집,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55~307면 에서 여러 전례가 분석된 바 있다.
58 한국학연구 44 던 행적이 서술된다. 특히 오왕( 吳 王 )으로 봉했던 종친 유비( 劉 濞 )의 얼 굴이 반역자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한 고조가 개의치 않고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선사에서는 고조의 후덕한 인품이 부각되고 있다. 이때 선사의 말미에 천 년 전의 성덕을 일컫다[ 千 載 아래 盛 德 을 니] 라는 부분에서 천 년 뒤에 한 고조의 성덕을 칭송했던 인사는 바 로 소식임을 다음의 해설 부분을 통해 간취할 수 있다. 소식이 말하기를, 제( 齊 ) 환공( 桓 公 )은 경중( 敬 仲 )을 죽이지 않았고, 초 ( 楚 ) 성왕( 成 王 )은 중이( 重 耳 )를 죽이지 않았고, 한 고조는 유비를 죽이지 않았고, 진( 晉 ) 무제( 武 帝 )는 유연( 劉 淵 )을 죽이지 않았고, 부견( 苻 堅 )은 모 용수( 慕 容 垂 )를 죽이지 않았고, 명황( 明 皇 )은 안록산( 安 祿 山 )을 죽이지 않 았으니, 모두 성덕( 盛 德 )이 깃든 일이다. 9) 여기에서 소식은 적신( 賊 臣 )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었던 역대 제왕들 을 나열하면서 그들의 비범한 인덕을 칭송한다. 그 가운데 한 고조가 유 비를 용인했던 내역이 포함되어 있으며, <용비어천가>의 제작자들은 바 로 이 부분을 들어 [소식이] 천 년 뒤에 [한 고조가 유비를 용인하였던] 성덕을 일컬었다. 라는 표현을 노랫말에 삽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역대의 사적 자체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제가의 사론들까지 반 영하여 노랫말을 지은 사례는 제71, 104, 105장 등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며, 10) 이는 <용비어천가>의 제작자들이 해당 사적들의 맥락을 충 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 그에 대한 해석적 안목까지도 각종 전적에 서 습득하여 노랫말을 짓는 데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위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설화집류의 전적이 활용된 궤적도 발견된다. 자치통감 및 제가의 사론들이 실제 역사적 사건을 작품화하는 과정에 주요한 자산으로 활용되었던 것과 대비적으로 제왕들에 얽힌 일화나 기담 9) 용비어천가 권8, 43a~44a면. 蘇 軾 曰 : 齊 桓 公 不 殺 敬 仲, 楚 成 王 不 殺 重 耳, 漢 高 祖 不 殺 劉 濞, 晉 武 不 殺 劉 淵, 苻 堅 不 殺 慕 容 垂, 明 皇 不 殺 安 祿 山, 皆 盛 德 事 也. 10) 71장과 104장에서는 호인, 105장에서는 사마광의 사론이 각각 활용되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59 ( 奇 譚 ) 등과 관련해서는 설화집 성격이 가미된 재래의 전적들이 여럿 활용 되었던 것이다. 그 전거를 탐색하면 여기에 해당될 만한 것으로 상서제명 험( 尙 書 帝 命 驗 ), 태평어람( 太 平 御 覽 ), 태평광기( 太 平 廣 記 ), 악서 ( 樂 書 ) 등이 발견되는데, 이들 전적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정확하게 서술 하기보다는 일화나 기담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해당 설화집으로부터 <용비어천가>로 반영된 내용들 역시 역사적 사건 과는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대개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때로 허황되게 느껴지거나 그 신빙성이 의문시될 수도 있는 이러한 설 화집류의 내용들이 <용비어천가>와 같은 관찬 악장( 樂 章 )에 그처럼 빈번 하게 삽입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지만, 그 배경을 추론해 내기는 그 다지 어렵지 않다. 즉, 역대 제왕들의 일화나 기담이 <용비어천가>의 선 사에 다수 게재된 것은 역시 차사와의 대응을 고려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실상 차사의 조선조 사적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대개 그 재료가 한 정되어 있다. 태조의 경우조차도 그가 개경( 開 京 )의 정계에 알려지기 이 전의 소싯적 행적은 과히 풍부하게 남아 전하지 않는 데다, 특히 추존 사 조( 四 祖 )의 경우에는 사적이 더욱 빈한하여 북관( 北 關 )의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들까지도 빠짐없이 탐문해 올리도록 해야 할 처지였다. 11) <용비어 천가>와 같은 장편 악장을 지어내기 위해서는 그처럼 부족한 조종의 사 적들을 따로 선별해 볼 여지가 크지 않으며 기존에 알려져 있거나 조사 된 내역들을 별다른 예외 없이 모두 노랫말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이 있 11) 세종실록 권77, 19년 4월 2일(신유). 傳 旨 咸 吉 道 監 司 : 本 道 乃 祖 宗 肇 興 之 地, 穆 祖 以 下, 歷 世 遷 居 州 里 名 號, 某 祖 王 某 邑 某 里 來 居, 某 祖 王 某 邑 某 里 誕 生, 某 某 祖 王 子 孫 等, 族 屬 幾 人, 某 邑 居 住, 備 細 廣 問. 且 邑 里 古 今 名 號, 竝 皆 分 辦 啓 達. ; 권78, 19년 7월 29일(정사). 咸 吉 道 監 司 書, 進 穆 翼 度 桓 列 聖 遷 居 之 處, 及 其 誕 生 之 地, 與 其 子 孫 族 譜, 所 居 州 里 名 號. ; 8월 1일(무오). 傳 旨 咸 吉 道 監 司 : 近 得 所 啓, 翼 祖 誕 生 宜 川 南 村 湧 珠 社, 從 穆 祖 遷 入 孔 城, 避 狄 人 入 留 于 赤 島, 還 于 宜 川. 右 赤 島 連 陸 乎? 在 海 中 乎? 今 爲 何 州 之 地 乎? 若 在 海 中, 則 考 其 水 路 相 距 遠 近, 島 中 險 阻 平 夷, 周 廻 長 廣 里 數 及 卽 今 人 民 住 居 與 否, 土 田 膏 瘠, 墾 闢 之 數, 水 路 險 惡 則 除 差 人 審 視, 止 訪 問 以 啓. 등.
60 한국학연구 44 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육룡과 관계된 단편적인 일화나 기담들까지도 <용비어천가>를 짓는 데 폭넓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같은 일화나 기담과 대를 이룰 만한 고성의 사례가 자치통 감 을 비롯한 정사류 사서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태조 의 전공이나 등극 과정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그에 비견될 수 있는 사례 들이 옛 제왕들에게서 풍부하게 발견될 뿐 아니라 해당 내역들이 각종 사서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기까지 하므로 이를 작품 속으로 옮겨 오기가 비교적 용이한 반면, 12) 단편적 일화나 기담 등과 관련된 내용들은 정사 류의 사서에서는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경우 태평어람, 태평광기 등과 같은 설화집 성격의 전적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44 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노 셋 바 리실 우희 니 티시나 二 軍 鞠 手 깃그니다 君 命 엣 바 리어늘 겨틔 엇마 시니 九 逵 都 人 이 다 놀라 니 제44장에서는 당 선종( 宣 宗 )과 태조의 격구( 擊 毬 ) 실력을 다루고 있는 데, 태조가 격구에 능했다는 기록은 태조실록 총서 는 물론 후대 임 금의 언급 속에서도 거듭 발견되는 바이다. 13) 격구가 유희거리이기는 하 되, 승마술이 수반되어야 하는 격구 역시 무예의 일종이므로 무장으로서 의 태조의 면모를 부각하는 데 충분히 소용될 만한 것이었다. 때문에 예 의 <용비어천가>에도 이러한 사적이 작품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해설에 서는 고려시대 격구의 규칙이나 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장황하게 서 술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다만 역대 제왕들 가운데 태조와 같이 격구 를 즐겼던 사례를 정사류의 사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려운 만큼 자료 탐색 의 범위를 보다 확대하여 악서 와 같은 예악서에서 단편적이나마 당 선 종의 사적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 12) 실제 이러한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은 당 태종( 太 宗 )의 사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용비어천가> 전체에서 중국의 제왕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거론된 인물이 당 태종일 뿐 아니라, 그의 사적들이 대부분 자치통감 에서 인용 또는 발췌되었기 때문이다. 13) 태조실록 권1, 총서 #35; 중종실록 권92, 34년 10월 18일(임오) 등.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61 이밖에 도조( 度 祖 )가 쏘아 떨어뜨린 두 마리 까치를 큰 뱀이 물어 나 뭇가지에 얹어 놓았다는 상서( 祥 瑞 )가 주 문왕( 文 王 )에게 붉은 새가 제 왕의 도리가 담긴 글을 물어 전해 주었다는 사적과 견주어지고 있는 제7 장이나, 익조( 翼 祖 )의 탄생을 누비옷을 입은 중이 예언하였다는 기담이 송 인종( 仁 宗 )의 전생담과 연계된 제21장, 태조가 두 마리 노루를 하나의 화살로 적중하였다는 일화가 역시 하나의 화살로 두 마리 멧돼지를 잡았 다는 당 현종( 玄 宗 )의 사적과 비교된 제43장 등에서도 설화류 전적이 활 용되었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4. 용비어천가 와 치평요람 의 관계 위의 3장에서 다룬 사항이 모두 원천 전거와 관계된 것이었다면, 4장 에서는 앞서 2차 전거로 추정하였던 치평요람 과 용비어천가 사이 의 상관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분석하는 문맥에 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사항은 세종27년 3월에 제진된 치평요람 이 용비어천가 의 제작 과정에 폭넓게 활용되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용비 어천가 의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이 1차 전적들로부터 곧바로 옮겨지 기보다는 치평요람 에 해당 내용이 한 차례 정리된 후 이것이 용비어 천가 로 재인용된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치도( 治 道 )의 본분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치평요람 은 자 치통감, 통감속편, 자치통감강목 등과 송사( 宋 史 ), 요사( 遼 史 ), 14) 악서 는 북송대 진양( 陳 暘 )에 의해 찬술된 200권 규모의 예악서로서 사고전서에서 는 경부( 經 部 )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진양이 악서 를 찬술하는 과정에서 참조한 전 적은 육경( 六 經 )은 물론 각종 사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면에 걸쳐 있으며, 수록된 내용 역시 다양하다. 일례로 권185에서는 격구가 다루어졌는데, <용비어천가>의 찬 자들이 참고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양의 악서 는 세종대 아악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거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인 사들이 그 내용을 익숙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악 정비에 끼친 악 서 의 영향에 대해서는 김종수(2006), 세종대 雅 樂 정비와 陳 暘 의 樂 書, 온지 논총 15집, 온지학회, 97~120면에서 자세히 검토되었다.
62 한국학연구 44 금사( 金 史 ), 원사( 元 史 ),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고려사 등 정사는 물론 역대 유자( 儒 者 )들의 문집에 포함된 여러 증언과 사론들, 태평어 람 과 같은 설화집들까지 망라하여 주나라 이래의 중국사 및 기자조선 ( 箕 子 朝 鮮 ) 이래 우리의 역사를 각 조( 朝 )별로, 또한 사건별로 정리해 놓은 총 150권 150책 분량의 편람서로서 조선에서 간행된 역사서 중 에서 전무후무한 대작 으로 평가된다. 15) 실상 치평요람 은 <용비어천가>가 세종에게 진상되기 불과 한 달 전 에 완성된 거질의 책이고, 치평요람 과 <용비어천가>가 모두 정인지 등 집현전 소속 관원들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치평요람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취합해 놓은 각종 사적들을 <용비어천가>를 제작하는 데에도 다양하게 활용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될 수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 연구들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된 검토가 뚜렷하게 이루어 지지 못하였는데, 2장에 제시한 표에서와 같이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종합적으로 찾아 나열해 보면, 양자 사이의 관련성을 한층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용비어천가>를 짓는 데 활용된 사적들 가운데 상당수가 치평요람 에 이미 수록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 다. 고성과 조종의 사적을 막론하고 용비어천가 의 해설에 수록된 내용 들 대부분이 치평요람 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나아가 동일 사적에 대 한 각종 기사들을 취합하여 정리해 놓은 치평요람 의 체재가 용비어천 가 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은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치평요람 은 송의 조선료( 趙 善 璙 )가 지은 자경편( 自 警 編 ) 의 선례에 따라 시간적 순차 보다는 개별 사건별로 관련 서술들을 여러 전적에서 발췌하여 응집력 있 게 편재하고 거기에 제가의 사론을 붙이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는데, 16) 이 는 용비어천가 에서 발견되는 특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15) 오항녕(2007), 조선초기 치평요람 의 편찬과 전거, 아세아문화사, 22면. 16) 물론, 치평요람 이 자경편 의 체재를 참고로 하여 편찬되었다고는 하지만, 자경편 에서 발견되는 주제별 분류가 치평요람 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 자세한 사정 에 대해서는 같은 책, 19~22면에서 추정된 바 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63 예컨대, 제32, 41, 66, 78장 등의 사례를 보면, 이들 장은 최소 둘 이 상의 전적들에서 초출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된다. 특히, 당 고조가 신하들을 시종 우대하였다는 미덕을 칭송한 78장의 선사[ 嚴 威 로 처 보샤 迺 終 애 殊 恩 이시니 뉘 아니 좇 고져 리 ]는 자치통감, 사기( 史 記 ), 좌씨박의( 左 氏 博 議 ), 십선생오론주( 十 先 生 奧 論 註 ) 등 여러 전적에 소재한 기사와 사론이 종합된 결과물인데, 시대와 체재를 넘나들며 여러 전적에 복잡하게 산재해 있던 그 같은 내용들이 치평요 람 의 편찬 단계에서 이미 사건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최항 등이 <용비어천가>에 해설을 붙일 때에도 재래 전적을 일 일이 뒤져 가면서 관련 기사와 사론을 초출하기보다는 치평요람 에 기 왕 수합된 내용을 찾아내어 일부 구절과 기사만을 산삭한 후 추가 설명 이 필요한 부분에 협주를 부기하는 방식으로 주해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용비어천가 의 제작에 치평요람 이 폭넓게 활용되었을 가능 성은 전거 조사 내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과정에서 그 단초가 일단 확인된다. 더 나아가, 용비어천가 의 내용이나 형식과 관련하여 그간 의 문시되어 왔던 몇몇 사항들도 치평요람 과의 관계를 고려함으로써 논리 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데, 이를 세 가지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아래에서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1) 이적( 夷 狄 ) 제왕들의 사적 <용비어천가>의 선사에 수록된 사적들 가운데 여타 장들과는 그 성격 이 얼마간 다른 사례가 있다. 선사에는 주 무왕( 武 王 )이나 한 고조, 한 광 무제( 光 武 帝 ), 당 고조, 당 태종, 송 태조 등 이른바 중화( 中 華 ) 왕조 군 주들의 업적과 일화가 주로 다루어졌지만, 때로 요 태조, 금 태조, 후주 세종, 원 태조, 원 세조 등 소위 윤통( 閏 統 )이나 이적 출신 군주들의 사적 들 역시 조선조 육룡( 六 龍 )의 사적과 부합하는 선례로서 취택되기도 하 였다. 가령, 제34장에서는 태조가 신이로운 승마술로 위기를 모면하였던
64 한국학연구 44 사적이 금 태조 아골타( 阿 骨 打 )가 말을 탄 채 혼돈강( 混 同 江 )을 건너 요를 정벌하였던 사적과 견주어지고 있다.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뚜렷했던 당대 에 조선조 창업주들의 위업과 대가 되는 사례로서 이적 제왕들의 사적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고, 17) 선행 논의들에서도 용비어 천가 의 사대적 성격을 부인할 수 있는 단서로서 이러한 특징이 중요하게 거론된 바 있다. 18) 그러나 그렇듯 이적의 사적에 차별을 두지 않았던 방침은 용비어천가 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사항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이전 치평요 람 의 편찬 단계에서부터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 다. 물론, 치평요람 의 편차 자체는 정통 왕조의 세년( 世 年 )에 의거하여 구성되었으나,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이적 왕조들의 사적들 역시 별다른 차별 없이 그 중간에 삽입되어 대등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찬 체재는 정인지가 쓴 치평요람서( 治 平 要 覽 序 ) 에서도 다음과 같이 직접 표명되고 있다. ( ) 국운( 國 運 )의 장단( 長 短 )과 국세( 國 勢 )의 이합( 離 合 )과 본받을 만하 고 경계할 만한 것 가운데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럽혀진 것을 남김없이 포괄하고, 명교( 名 敎 )에 관계되는 일과 치체( 治 體 )에 관계되는 말은 이적의 일일지라도 감히 빠뜨리지 않고 필부( 匹 夫 )의 일일지라도 생략하지 않았습 니다. ( ) 19) 17) 정통과 윤통의 구분은 <용비어천가> 자체에서 직접 표출되기도 한다. 즉, 제98장에 서는 이적 왕조인 전진( 前 陳 )의 부견( 苻 堅 )이 동진( 東 晉 )을 정벌하려다 실패한 사적 을 두고 정통에 마음을 두니[ 正 統 애 有 心 ] 라고 비판적으로 표현하였다. 18) 김기협(1997), 용비어천가 가 사대문자?, 김성칠 김기협 역, (역사로 읽는) 용비 어천가, 들녘, 439~440면 등. 19) 치평요람서, 치평요람, 1b면. ( ) 運 祚 之 長 短, 國 勢 之 離 合, 一 治 一 亂, 可 法 可 戒 者, 包 括 無 餘, 至 若 事 之 關 名 敎, 言 之 係 治 體 者, 雖 在 夷 狄 而 莫 敢 遺, 雖 在 匹 夫 而 不 之 略. ( ) 한편, 이와 유사한 언술은 진치평요람전( 進 治 平 要 覽 箋 ) 에서도 발견된 다: ( ) 國 家 興 衰 與 君 臣 之 邪 正, 政 敎 臧 否 及 風 俗 之 汚 隆, 下 而 匹 夫 之 微, 外 而 四 夷 之 遠, 若 關 彝 倫, 則 雖 小 而 悉 記 ; 有 補 治 體 者, 必 錄 而 不 遺. ( ) [ 진치평요람전, 치평 요람, 2a면.]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65 서문에서 정인지는 비록 이적의 사적일지라도 정치에 감계가 될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수록하였다고 밝힌다. 치평요람 의 편찬 목적이 역사로부터 치도( 治 道 )에 관계된 교훈을 얻어 내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굳이 중화와 이적, 정통과 윤통의 구분을 둘 필요가 없었음을 짐 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적의 군주일지라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거나 반 대로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일을 하였다면 그 내역을 자세히 수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편찬 방침은 치평요람범례( 治 平 要 覽 凡 例 ) 에서 한 차례 더 구체화된다. 일. 자치통감 의 예에 따라서 주, 진, 양한, 진, 송, 제, 양, 진, 수, 당, 오 대, 송, 원을 주로 하여 권마다 맨 먼저 국호를 쓰고 절마다 맨 먼저 모제 ( 某 帝 ) 라 쓰되, 시호( 諡 號 )가 없으면 제모( 帝 某 ) 라 쓰고 정통 이외에 제 ( 帝 )를 칭한 자는 모두 모주모( 某 主 某 ) 라 칭하였다. 20) 일. 사이( 四 夷 )의 일이 권장하거나 경계가 될 만하다면 역시 아울러 수록 하였다. 21) 정통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그 시호를 밝히거나 모제 로 표기하는 반 면, 그 외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모주 라는 지칭을 사용하였다는 데에서 우선 정통과 윤통의 구분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치평요람 에서 요 태조 가 거란주( 契 丹 主 ), 금 태조가 여진주( 女 眞 主 ), 북한 세종이 북한주 ( 北 漢 主 ) 등으로 표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처럼 중화와 이 적을 구분하면서도 후세에 감계가 되는 것이라면 어느 쪽의 사적이든 가 리지 않았다고 하였고, 이 점이 바로 용비어천가 에서도 공통적으로 발 견되는 편찬 방침인 것이다. 실상, 용비어천가서( 龍 飛 御 天 歌 序 ), 진용비어천가전( 進 龍 飛 御 天 歌 20) 치평요람범례, 치평요람, 1a면. 一. 依 通 鑑 例, 以 周 秦 兩 漢 晉 宋 齊 梁 陳 隋 唐 五 代 宋 元, 爲 主, 每 卷 首 書 國 號, 每 節 首 書 某 帝, 無 諡 則 書 帝 某, 正 統 外 稱 帝 者, 皆 稱 某 主 某. 21) 같은 곳. 一. 四 夷 之 事, 可 爲 勸 戒 者, 亦 並 蒐 錄.
66 한국학연구 44 箋 ), 용비어천가발 등에서 언급된 고성 또는 고석제왕( 古 昔 帝 王 ) 등은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뛰어넘는 범주이며, 고성 을 중화의 정통 군 주로만 한정한 흔적은 셋 중 어느 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요 태조 야 율아보기( 耶 律 阿 保 機 )가 동생들의 반란을 인애로써 용서하였다는 사적 [103장]이나 금 태조 아골타가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아 요나라의 사신 을 감복시켰다는 사적[57장], 후주 세종 시영( 柴 榮 )이 농사에 관심을 두 고 평소 농서( 農 書 )를 탐독하였다는 사적[73장], 원 태조 테무친[ 鐵 木 眞 ] 이 과감한 용병술로 내만부( 內 蠻 部 )를 제압했던 사적[51장], 원 세조 쿠 빌라이[ 忽 必 烈 ]가 천명을 받아 송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는 사적[67~68 장], 원 세조가 선비를 예우하였다는 사적[82장] 등이 <용비어천가>에 포 함될 수 있었던 것도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넘어서는 확대된 견지에서 고성 을 상정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이들 내용은 <용비어천가>로 작품화되기 이전에 모두 치평요람 에 이미 자세히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기에 치평요람 이 용비어천가 를 편 찬하는 데 2차 전거로 활용되었으리라는 추정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2) 고려 태조의 사적 치평요람 과 용비어천가 의 편찬을 연계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은 고려 태조 왕건( 王 建 )과 그의 비 신혜왕후( 神 惠 王 后 ) 유씨( 柳 氏 )의 사 적이 <용비어천가>의 선사에 개재된 점에서도 발견된다. 22) <용비어천 가> 제83장에서는 고려 태조가 잠저시( 潛 邸 時 )에 황금으로 된 탑에 올라 가는 꿈을 꾸었다는 사적이 태조가 역시 잠저시에 하늘로부터 금척( 金 尺 )을 내려 받았다는 사적과 등치되고 있으며, 제108장에서는 고려 태조 가 천명을 의심하여 차마 궁예( 弓 裔 )를 처단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신혜 22) <용비어천가>의 선사에 고려 태조의 사적이 등장한다는 점은 김선아(1986), 용비어 천가에 나타난 主 體 性 發 顯 에 대한 고찰, 院 友 論 叢 4집,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원우회, 15면; 신명숙(2005), 여말선초 서사시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95 면 등에서도 독특한 사례로서 논의되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67 왕후가 남편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주며 격려하였다는 사적이 태종의 비 원경왕후( 元 敬 王 后 ) 민씨( 閔 氏 )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와 생사를 함께하였다는 사적과 대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고려 태조와 그 비의 사적까지도 고성 의 범주에 포함되었던 점 또한 매우 특이한 사례로 파악되거니와, 그러한 특성 역시 기본적으 로 치평요람 의 편찬 방식과 동궤에서 검토될 수 있다. 치평요람 의 경우 중국의 사서에 기재된 사적들을 위주로 편찬하였지만, 그 사적의 범위가 반드시 중국의 것으로만 한정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진치평요 람전( 進 治 平 要 覽 箋 ) 과 치평요람범례 에서 이 같은 사정을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 ) 옛 일을 상고하여 주나라부터 국조까지, 동방에서는 기자부터 고려 대까지, 옛 역사의 기록들을 두루 모으고, 소설의 글들[ 小 說 之 文 ]도 곁들여 채집하였습니다. ( ) 23) 일. 중국은 주초( 周 初 )부터 국조까지, 동국은 기자부터 고려까지, 무릇 강 상( 綱 常 )과 정치의 득실과 공전( 攻 戰 )의 승패와 관련하여 권장되거나 징계될 만한 것들을 사서오경( 四 書 五 經 ) 이외의 여러 전적을 수집하여, 자경편 의 예에 따라서 단락에 따라 편집하였으며 연대순으로는 엮지 않았다. 24) 실제로 치평요람 을 편찬하는 데 활용된 전적에는 삼국사기, 고려 사, 동국사략( 東 國 史 略 ), 익재난고( 益 齋 亂 藁 ) 등 우리의 사서나 문 집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25) 중국 역대 왕조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동 23) 진치평요람전, 치평요람, 1b~2a면, ( ) 稽 諸 往 古, 起 周 家 而 迄 國 朝, 至 于 東 方, 始 箕 子 而 終 麗 代. 徧 掇 舊 史 之 錄, 旁 採 小 說 之 文. ( ) 치평요람서 에도 거의 같은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 ) 中 朝 則 起 成 周 迄 于 國 朝, 東 國 則 始 箕 子 終 於 高 麗, 馳 騁 上 下, 泝 流 尋 源. ( ) [ 치평요람서, 치평요람, 1b면.] 24) 치평요람범례, 치평요람, 1a면. 一. 中 朝, 起 自 周 初, 至 于 國 朝, 東 國, 始 自 箕 子, 至 于 高 麗, 凡 關 綱 常 政 治 得 失 攻 戰 勝 敗, 可 爲 勸 戒 者, 除 四 書 五 經 外, 蒐 輯 諸 書, 依 自 警 編 例, 逐 叚 纂 次, 無 編 年. 25) 치평요람범례, 치평요람, 3a면.
68 한국학연구 44 국 왕조의 사적이 해당 왕조편에 함께 엮여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가령, 송, 제, 양, 진, 수, 당, 오대편에 삼국과 통일신라의 사적을 주로 삼국사 기 에서 초출하여 수록하고, 송, 원편에 고려의 사적을 대개 고려사 에 서 정리하여 삽입하는 한편, 26) 김부식( 金 富 軾 ), 권근( 權 近 ) 등의 사론도 역시 각 사적의 말미에 삽입하였던 것이다. 앞서 이적 제왕들의 인품이 나 공적 등을 수록하는 데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국의 사적들도 중화의 것과 함께 다루고자 하였던 치평요람 편찬자 들의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한 사례로 고려 태조와 신혜왕후의 사적 또한 치평요람 권97에 후량( 後 粱 ) 황제들의 사적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용비어천가> 찬자들이 고려 태조와 그 비의 사적을 고성 의 범주에 넣어 각각 제83장과 108장 의 선사를 지어내었던 것도 바로 치평요람 의 편찬 체재로부터 견인된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3) 체재상의 상관성 이상은 주로 <용비어천가> 선사의 내용과 관련 지어 분석한 사항으로 서, 이제 차사의 내용까지 고려한다면 용비어천가 와 치평요람 의 관 계가 보다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치평요람 의 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 다. 총150권으로 이루어진 치평요람 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부분 으로 나눌 수 있는데, 권1부터 권147 전반부까지의 앞부분과 권147 후 반부부터 권150까지의 뒷부분이 그것이다. 먼저 권147 전반부까지에서 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주나라부터 원나라까지 편명으로 설정한 후 해 당 시기의 사적들을 중화, 이적, 동국의 것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함께 26) 물론 이 때의 고려사 는 오늘날 전하는 형태가 아닌 개찬 단계의 것이었다. 약 60년 간 계속된 고려사 의 개수 논의에 대해서는 한영우(1981), 조선전기 사학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6~20, 33~35, 39~48면; 오항녕(2007), 고려사 개수 논의 의 전개와 성격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81~ 212면 등 여러 논저에서 거듭 검토된 바 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69 나열하였는데, 그 마지막은 원 순제( 順 帝 )와 명 태조 주원장( 朱 元 璋 ), 그리고 고려 공민왕대( 恭 愍 王 代 )에까지 미친다. 한편, 치평요람 의 편 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권147 후반부부터 권150까지를 따로 국 조( 國 朝 ) 라 설정하여 앞부분과 구분하였다. 국조 란 응당 조선을 의미 하며, 여기에는 환조와 태조가 고려 정계에 진출한 이래 조선이 건국되 기까지 약 40년 동안의 각종 사적이 편재되었던 것이다. [표 2] 치평요람 의 편차 권 차 편명 권 차 편명 권1~권14전반 주( 周 ) 권70후반~권95전반 당( 唐 ) 권14후반~권15전반 진( 秦 ) 권95후반~권97전반 후량( 後 粱 ) 권15후반~권40전반 한( 漢 ) 권97후반~권99전반 후당( 後 唐 ) 권40후반~권52전반 진( 晉 ) 권99후반~권100전반 후진( 後 晋 ) 권52후반~권56전반 송( 宋 ) 권100후반~권101전반 후한( 後 漢 ) 권56후반~권59전반 제( 齊 ) 권101후반~권102전반 후주( 後 周 ) 권59후반~권64전반 양( 梁 ) 권102후반~권142전반 송( 宋 ) 권64후반~권67전반 진( 陳 ) 권142후반~권147전반 원( 元 ) 권67후반~권70전반 수( 隋 ) 권147후반~권150 국조( 國 朝 ) 즉, 치평요람 은 기본적으로 조선조 건국 이전까지의 시기를 한데 모 아 앞부분에 배치하고, 조선조 창업의 역사를 따로 떼어 그 뒷부분에 수 록해 놓은 형상을 띠고 있다. 비록 분량에 있어서 97.7% 대 2.3% 정도로 전자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국조 를 굳이 특화한 것을 보면 권 147후반~권150 역시 편찬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짐 작할 수 있다. 이처럼 수천년래의 역사적 사건을 편답( 遍 踏 )한 후 조선조 건국의 역 사로써 대단원을 삼는 치평요람 의 체재는 이전의 장편 영사시( 詠 史 詩 ) 또는 세년가( 世 年 歌 )들과도 뚜렷이 변별된다. 가령, 중국과 동국의 사적 을 각각 전 후편으로 배당하여 지어냈던 이승휴( 李 承 休 )의 <제왕운기
70 한국학연구 44 ( 帝 王 韻 紀 )>나 윤회( 尹 淮 ) 권제( 權 踶 )의 <역대세년가( 歷 代 世 年 歌 )> 등 에서는 중국과 동국을 이원적으로 상정하는 지리적 개념이 일차적으로 적용된 반면, 치평요람 에서는 중화와 이적, 동국을 막론하고 조선조 건 국 이전의 옛 일들을 앞부분에 한데 모은 후 요즘 에 해당하는 조선조의 건국사를 뒤에 덧붙이는 시간적 개념의 편찬 방침이 우선적으로 준용된 것이다. 중국과 동국이 아닌 고( 古 ) 와 금( 今 ) 으로 사적을 가르는 이와 같은 체재는, 먼저 옛날 제왕의 자취를 쓰고 다음에 우리 왕실 조상의 일을 서술하였습니다, 27) 또는 옛일을 주워 모아 요즘의 일에 견주었습니 다. 라고 했던 28) <용비어천가>의 찬술 방식을 직접 연상케 하는 사항이 다. <용비어천가>의 찬자들이 언명했던 고성 의 범주에 중화는 물론 이 적, 더 나아가 동국의 군왕들까지도 포괄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중 화와 이적 또는 중국과 동국 이 아닌 고와 금 으로 사적을 양분하여 다 루고자 했던 편찬 방침으로부터 연원된 결과이며, 이는 치평요람 의 단 계에서 이미 그 선례가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적 항 목 <제왕운기> <역대세년가> 29) 사적 구분 방식 사적 수록 범위 사적 수록 원칙 中 : 상권 東 : 하권 中 : 반고( 盤 古 ) ~ 남송 東 : 단군 ~ 고려 충렬왕대( 忠 烈 王 代 ) 中 : 시간순 東 : 시간순 [표 3] <제왕운기>, <역대세년가>의 체재 中 : 상편 [<역대세년가( 歷 代 世 年 歌 )>] 東 : 하편 [<동국세년가( 東 國 世 年 歌 )>] 中 : 반고 ~ 원 東 : 단군 ~ 고려 中 : 시간순 東 : 시간순 27) 용비어천가서, 용비어천가, 4a~4b면. ( ) 不 可 以 詞 語 鄙 拙 爲 解, 謹 採 民 俗 稱 頌 之 言, 撰 歌 詩 一 百 二 十 五 章. 先 叙 古 昔 帝 王 之 迹, 次 述 我 朝 祖 宗 之 事. ( ) 28) 용비어천가발. 용비어천가, 1a~1b면. ( ) 歲 乙 丑, 議 政 府 右 贊 成 臣 權 踶, 右 参 贊 臣 鄭 麟 趾, 工 曹 參 判 臣 安 止 等, 製 爲 歌 詩 一 百 二 十 五 章 以 進, 皆 據 事 撰 詞, 摭 古 擬 今, 反 覆 敷 陳, 而 終 之 以 規 戒 之 義 焉.( ) 29) <역대세년가>의 찬술 배경과 제반 특성에 대해서는 정재호(1966), 歷 代 歌 類 攷, 어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71 전 적 항 목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사적 구분 방식 사적 수록 범위 사적 수록 원칙 [표 4] 치평요람, <용비어천가>의 체재 古 : 권1 ~ 권147전반 今 : 권147후반 ~ 권150 古 : 주 ~ 원 [ 이적 및 동국 사적 포함] 今 : 조선 건국사 古 : 대개 시간순 + 사건별 사적 배치 今 : 대개 시간순 + 사건별 사적 배치 古 : 각 장의 선사 今 : 각 장의 차사 古 : 은 ~ 원 [ 이적 및 동국 사적 포함] 今 : 조선 건국사 古 : 대개 무작위 今 : 시간순 + 주기적 순환 30) 실제로 <용비어천가>의 차사에 시화된 내용, 예컨대 태조의 덕망이나 무공( 武 功 ), 왕조 창업의 경과, 정몽주( 鄭 夢 周 )를 제거한 태종의 결단력 등에 관계된 사적들이 대부분 치평요람 권147 이하 국조 편에 사건 별로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용비어천가>를 제작하는 과 정에서 치평요람 의 해당 부분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개연성은 더 욱 높아진다. 결국, <용비어천가> 선사의 재료가 된 내용은 거개가 치평요람 권1 에서 권147 전반부까지에 수록된 중화와 이적, 그리고 동국의 사적들이 며, 차사에서 다루어진 조선조 건국사는 그 이후부터 권150까지에 갈무 리되었던 내역들이 그 핵심에 놓인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치평 문논집 9호, 안암어문학회, 76~78면; 한영우, 앞의 책, 35~39면; 진재교(1998), <역대세년가> 연구: <동국세년가>를 통해 본 선초 관각문학의 한 국면, 동방한문학 14집, 동방한문학회, 131~159면 등에서 검토된 바 있다. 30) <용비어천가>에서 고성의 사적 가운데 앞부분, 즉 3~14장까지는 주나라의 세계로 일관되지만, 그 이후에는 특별한 순차 없이 여러 왕조대의 제왕들이 등장한다. 한편, 차사의 조선조 사적에서는 사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의 순서로 순차적 진행 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이 순차가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주기적 순환 의 원리가 함께 적용되기도 하였다. <용비어천가>의 구성 원리에 대해서는 성기옥 (1982), 용비어천가의 서사적 짜임, 백영 정병욱선생 환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백영 정병욱선생 환갑기념논총, 신구문화사, 421~424면; 김선아(1985), 용비어천 가 연구: 서사시적 구조분석과 신화적 성격,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9면; 양태순(1992), <용비어천가>의 짜임과 율격, 인문과학논문집 1집, 서원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 양태순(2003), 한국고전시가의 종합적 고찰, 민속원, 374~395면에 재수록]에서 논의되었으며, 김승우, 앞의 책, 16~18면에서 여러 논자들의 견해가 종 합 정리되었다.
72 한국학연구 44 요람 의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조선조 조종의 사적을 중심으로 끌어오면 서 그에 대가 될 만한 고성의 사적을 그 앞부분에서 초출해 온 양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용비어천가 의 체재나 내용과 관련하여 그간 주목되어 왔던 사항들, 즉 선사에 이적 제왕의 사적이 빈출하거나 고려 태조까지도 고 성의 범주에 포함된 점, 옛 것을 주워 모아 오늘에 비의[ 摭 古 擬 今 ] 하는 대우가 적용된 점 등은 그 연원을 따져 보면 모두 치평요람 의 편찬 방 식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31) 4. 결론 이상에서 용비어천가 에 활용된 각종 전거들을 조사하고, 전거 차용 상의 주요 특징을 고찰하는 한편, 치평요람 과 용비어천가 의 상관성 에 대해 논의하였다. 앞서 다룬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용비어천가>의 선사에 수록된 고성의 사적, 즉 역대 제왕들의 사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자치통감 과 같은 정사류 사서에서 발췌 활용된 것 으로 확인된다. 이는 세종대 경연에서 이루어진 자치통감 및 통감속편 31) 물론, 용비어천가 에 수록된 내용들이 모두 치평요람 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논단하기는 어렵다. <용비어천가>나 그 해설에 활용 및 인용된 사적들 가운데 치평 요람 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에서조차도 용비어천가 와 치평요람 사이의 관련성은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치평요람범례 의 인용서목 에 따르면 치평요람 을 편찬하기 위해 편수관들이 열람했던 재래의 전적은 경부, 사부( 史 部 ), 자부( 子 部 ), 집부( 集 部 )를 통괄하는 대단히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으며, 전적의 수량 역시 118종을 헤아린다. [ 치평요람범례, 치평요람, 1 b~3a면.] 이들 전적은 치평요람 150권 가운데 단 한 차례라도 인용된 내역이므로 실제 인용되지는 않았더라도 편수관들이 치평요람 을 엮어내는 데 참고하였을 전 적이 이보다 더욱 많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다. 따라서 치평요람 을 편찬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수행하거나 실제 편찬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종 서적 의 집성과 열람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용비어천가 에 활용 수록된 내역 가 운데 치평요람 에서 발견되지 않는 내용들 역시도 본래 치평요람 의 편찬을 위해 갈무리해 두었던 것들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73 의 강독을 통해 작품 제작자들이 이들 전적의 내용을 충실히 파악하고 있었 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2. 개별 사적에 대한 제가의 사론들까지 반영하여 노랫말을 지은 사례 또 한 여럿 발견된다. 작품 제작자들은 세종과 더불어 자치통감강목 을 강하는 과정에서 재래의 사론들을 폭넓게 비교 분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그러한 소양을 <용비어천가>를 짓는 데에도 활용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3. 옛 제왕들에 얽힌 일화나 기담 등과 관련해서는 태평어람, 태평광 기 등 설화집 성격을 지닌 전적들이 다수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육룡의 사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일화나 기담의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와 대가 될 만한 사례를 찾는 과정에서 정사류 사서 이외에 설화집 또한 빈번하게 탐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용비어천가>의 제작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을 지니는 전적은 치평요 람 임을 다음과 같은 여러 부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치평요람 은 <용 비어천가>가 제진되기 불과 한 달 전에 완성되었으며, 둘 모두 정인지 이하 집현전 소속 관원들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치평요람 을 편찬하는 과 정에서 정리해 놓은 각종 사적들을 용비어천가 를 찬술하는 데에도 다양 하게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용비어천가>에 포함된 사적들 가 운데 상당수가 치평요람 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개별 사적에 대한 각종 기사들을 여러 전적에서 취합해 놓은 이 책의 체재는 용비어천가 의 체재 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용비어천가>의 선사에는 윤통이나 이적 출신 군주들의 사적들 역시 육룡의 사적과 부합하는 선례로서 취택되었는데, 이 는 후세에 감계가 되는 것이라면 중화든 이적이든 가리지 않고 수록하였던 치평요람 의 편찬방침과 일치한다. 고려 태조와 그의 비 신혜왕후의 사 적이 고성의 사례로서 선사에 게재된 이유 역시 치평요람 의 체재와 연계 지어 파악할 수 있다. 치평요람 에서는 이적뿐만 아니라 동국의 사적도 중 국 정통 왕조의 것과 동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주 부터 원 까지 편명으로 설정된 치평요람 권1~권147의 전반부에는 해당 왕조대의 사적 이 중화, 이적, 동국의 것에 구분을 두지 않고 수록되었으며, 국조 라 제한 권147의 후반부~권150에는 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조종의 사적이 편재되었
74 한국학연구 44 다. 이처럼 중국과 동국 이 아닌 고와 금 으로 사적을 가르는 체재는 최항 이 척고의금( 摭 古 擬 今 ) 이라 설명한 <용비어천가>의 찬술방식과 잇닿아 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의 찬자들은 치평요람 의 마지막 편인 국조 편에 수록된 조종의 사적을 차사에 끌어온 후 그에 대가 될 만한 고성의 사 적을 치평요람 의 앞부분에서 초출하여 선사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지어낸 양상이 발견된다. 비록 <용비어천가>를 제작하는 데 세종과 집현전 관원들이 대단한 열 의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용비어천가>만을 지어내기 위해서 재래의 수많은 전적을 뒤져 가면서까지 그처럼 방대한 사전 작업을 수행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의문을 가져 볼 만하다. 더불어, 조선조 조종의 사적만으로 평탄하게 서술해 갈 수도 있을 법한 형태를 거부하고 굳이 고성과 조종의 사적을 교직하여 대우로 엮어냄으 로써 오히려 작품의 체계를 번만하게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용비어천가>는 따로 해설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누구의 사적 을 다룬 것인지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고 압축적이며, 이 때문 에 세조대의 양성지( 梁 誠 之 )는 용비어천가 의 내용을 도해( 圖 解 )하여 그 요체만을 정리하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 32) 그처럼 제작 과정에서부터 필요 이상의 공을 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물 역시 별도의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인 용비어천가 를 굳이 현전 형 태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했어야 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본고에서 이루어진 전거 조사와 그 특징에 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의문들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용비어천가 의 제작은 단 지 노랫말을 지어내거나 서책을 간행하는 등의 단일 사안만으로 국한되 지 않는 보다 복잡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용비어천가 32) 양성지가 제작한 용비어천도( 龍 飛 御 天 圖 ) 는 현전하지 않으나, 눌재집( 訥 齋 集 ) 에 전해오는 서문을 통해서 그 대략적인 체재를 되살려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심경 호(2002), <용비어천가>의 구조, 국문학연구와 문헌학, 태학사, 18~22면; 김승 우, 앞의 책, 309~330면 등에서 논의된 바 있다.
용비어천가 의 전거( 典 據 )와 체재( 體 裁 )에 대한 연구 김승우 75 가 제작되기까지에는 선대 임금들과 관련된 수차의 사적 조사, 경연에서 이루어진 각종 사서 강독, 특히 중국과 동국의 사적들을 종합하여 치평 요람 과 같은 대단위 편람서로 엮어내기까지의 단계적이고도 연쇄적인 기반이 필요했으며, 그러한 조건들이 모두 완숙된 시기였던 세종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용비어천가 라는 정교하고도 온축( 蘊 蓄 )된 성과물 이 비로소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본고는 용비어천가 의 전거를 모두 탐색한 후 전거 차용상의 특 징 및 유관 전적과의 관계를 도출해 내는 데 우선 중점을 두었고, 이들 내 용만으로도 한 편의 논문에서 논의할 수 있는 분량을 크게 초과하는 지경 이어서 세부적인 사례 검증은 수행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1, 2차 전거 사 이의 차이나 강조점의 변화를 언급하지 못하였고, 특히 각종 전거가 <용비 어천가>로 문학화된 구체적인 양상 역시 충분히 다룰 수 없었다.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후속 논문을 통해 논의를 지속해 가고자 한다. 33) 참고문헌 1. 기본 자료 고려사. 사회과학원 역, (북역) 고려사 : <http://www.krpia.co.kr/pcontent/?svcid=k R proid=1>. 33) 한편, 용비어천가 와 연관되리라 추정되는 또 다른 전적으로 역대병요( 歷 代 兵 要 ) 가 있다. 전란 및 병술과 관련된 역대의 사적을 모아놓은 역대병요 는 치평요람 과 같은 시기에 편찬이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편찬 실무에 동 원되기도 하였다. [ 역대병요 의 편찬 시기, 편찬 과정 및 편수관 등에 대해서는 이 재범(1998), 역대병요 의 문헌적 고찰, 韓 國 軍 事 史 硏 究 1집, 國 防 軍 史 硏 究 所, 207~241면 참조.] 역대병요 는 <용비어천가>는 물론 용비어천가 에 비해서도 뒤 늦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 관계가 치평요람 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으나, 편찬 단계에서 일단 수합해 놓은 기사들이 <용비어천가>에 간접적으로나마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이 점은 김승우, 앞의 책, 154~160면에서 일부 거론되기도 하였 다. 다만, 본고에서는 용비어천가 와 치평요람 의 관계에 주목한 탓에 용비어천 가 와 역대병요 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 문제에 관 한 해명 역시 후속 과제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