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鴨 綠 江 水 電 ( 株 ) 의 연구 정 안 기* 요지 이 연구의 목적은 1930년대 조선형특수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1937년 9월 이래 압록강 수력개발을 전담했던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설립과 경영의 전체상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1937년 8월 조선과 만주국은 압록강 발전사업에 관한 鮮 滿 協 定 과 공동경영 약정서를 체결해서 각각 자본금 5,000만 원의 압록강수력발전(주)을 설립하였다. 특히,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전액 정부출자와 특수법인의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과 달리 민간출자와 보통법인을 특징으로 하였다. 또한, 조선총 독부는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개발권과 소유권 배분에 깊이 관여 하였고, 사업 전반에 걸친 경 영감독권을 설정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鮮 滿 鴨 綠 江 公 同 技 術 委 員 會 와 鴨 綠 江 水 力 發 電 開 發 委 員 會 를 설치해서 압록강 수력개발의 조사, 설계, 시공을 주도하였다. 전체 계획은 압록강 본류 총 6개 지점, 발전량 합계 164만 kw였고, 이 가운데 제1기 발전계획으로 세계적인 규모의 수풍발전소(64 만 kw) 건설을 추진하였다.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미국으로부터 최신예 댐 기술을 도입해서 수 풍발전소 건설에 착수하였고, 1941년 8월 부분 가동을 개시하였다. 수풍발전소의 가동은 북선지역 에서 전력다소비형 산업을 중심으로 군수 중화학공업화를 급진전시키는 기간 에너지원이었다. 해방 이후 수풍발전소 건설의 개발 패키지는 20세기 시스템을 대표하는 동아시아 개발주의의 식민지적 원형이 되었다. 조선형특수회사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조선중공업(주) 등의 사례연구와 같이 조 선총독부가 역내외 민간자본과 경영역량을 동원해서 기간산업을 개발 정비하고자 하는 전략적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자본체였다. 따라서 식민지기 조선총독부는 단순한 식민통치의 헤게모니에만 그쳤 던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경제환경에 대응하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제도와 정책의 설계자라는 경제사적 의의를 갖는다. 핵심어: 조선공업화, 조선형특수회사,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 압록강공동기 술위원회,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 鮮 滿 一 如 Ⅰ. 머리말 이 연구의 목적은 1930년대 조선형특수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당시 鮮 滿 一 如 의 金 字 塔 으로 회자 되었던 압록강 본류 수력개발을 담당했던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주)의 설립과 경영의 전체상을 실증 적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는 만주국과 선만 수뇌의 圖 們 회담을 개최해서 鮮 滿 一 如 슬로건의 합창과 함께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을 결정하였다. 1937년 8월 양측은 鮮 滿 協 定 과 공동경영 각서를 체결해서 각각 자본금 5,000만 원의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과 만주압록강수력 발전(주)의 별도 법인의 설립과 상호출자 그리고 경영진의 겸직을 결정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압록강의 공동이용과 관리를 전담하는 鮮 滿 鴨 綠 江 公 同 技 術 委 員 會 와 함께 내부조직으로 鴨 綠 江 水 力 發 電 開 發 委 員 會 를 설치해서 조사, 설계, 시공을 주도하였다. 전체 계획은 압록강 본류 총 6개 지점, 발전량 합계 164만 kw 가운데 제1기 발전계획으로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수풍발전소(64만 kw)의 - 1 -
건설이었다.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최신예 댐 기술을 도입해서 1937년 10월 이래 수풍발전소 건설에 착수하였고, 1941년 8월 가동을 개시하였다. 1944년 완공한 수풍댐의 제 원은 높이 106.7m, 연장 898.7m, 체적 320만 m3, 총저수용량 116억 m3에 달하였다. 또한, 발전기 는 당시 세계 최대급 출력의 일본 도시바제 5기와 독일 지멘스제 1기의 합계 6대를 설치하였다. 1940년대 수풍발전소의 가동은 서북선지역에서 경금속을 비롯한 전력다소비형 산업의 발흥과 함께 군수 중화학공업화를 급진전시키는 기간 에너지원이었다. 해방 이후 수풍발전소 건설의 개발 패키 지는 20세기 시스템을 대표하는 동아시아 개발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이 되었다. 그 동안 1930년대 조선 공업화 연구 혹은 일본 식민지 경제사 연구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2년 전쟁론에 입각한 군수공업화론 1), 식민지 공업화에 주목하는 식민지 자본주의 성립사론 2), 일제의 제도이식과 자본수출 중시의 조선 경제발전론 3), 1920년 후반 세계적인 농업공황과 상대가격 변화 론 4), 전간기 방적업과 전력업의 산업정책 무효론 5) 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小 林 연구를 예 외로 하면, 나머지 연구들은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경시하였다. 또한, 小 林 의 연 구가 비록 정부의 역할을 중시했다고는 하지만, 그 논의 틀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전형적 인 정책결정론으로 조선총독부를 단지 일제 독점자본에 포섭된 식민지 경제수탈의 대리기구만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1930년대 조선공업화와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경제사적 해명은 여전히 불 충분한 상황이라 하겠다. 그러나 최근 1930년대 조선송전(주), 조선중공업(주), 조선임업개발(주)에 주목한 조선형특수회 사 연구는 1930년대 조선 공업화와 관련한 식민정부의 역할에 대한 경제사적 재평가를 시도하였 다. 6) 1934년 조선송전(주) 혹은 1937년 조선중공업(주)의 설립과 관련해서 조선총독부를 주어진 경제환경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경제제도와 정책의 설계자 7) 로 간주해서 조선총독부의 역할을 강 조하였다. 실제로,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공업화 자금의 조 달을 둘러싼 만주국과의 경쟁에 직면하였고, 그래서 만주국의 특수회사제도와 달리 역내외 민간자 본을 유치 동원해서 조선형특수회사라는 자본체를 설립하고, 기간산업을 개발 정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민간자본의 과도한 영리성을 억제하고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또 다른 민간자 본을 동원하는 雙 對 的 統 制 의 지배구조를 설계하고, 개발권과 소유권 배분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조선형특수회사는 만주형특수회사 8) 와 구별되는 역내외 민간자본의 공동출자와 경영활동의 상대적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형성된 관계의존형 정부-기업 관계는 1930년대 통제경제의 桎 梏 과 束 縛 으로부 터 이탈해서 경영의 자유도를 확보하고자 하는 일본 자본의 왕성한 조선 진출과 식민지 공업화를 급진전시키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결국,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주도해서 설립한 조선형특수회 사는 후발국 공업화의 일 유형으로 만주국의 헤게모니 주도형 경제개발과 명확히 구별되는 경제정 *고려대학교 연구교수(joungak@naver.com). 1) 小 林 英 夫 (1975), 大 東 亞 共 榮 圈 の 形 成 と 崩 壞 御 茶 の 水 書 房. 2) 堀 和 生 (1995),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有 斐 閣. 3) 김낙년(2003), 일제하 한국경제 해남. 4) 차명수(1996), 국제 쌀 시장의 통합과 분단, 1878-1936 경제사학 제20권. 5) 주익종(2003), 일제하 한국의 식민정부, 민간기업, 그리고 공업화 경제사학 제35권. 6) 정안기(2014), 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林 業 開 發 (주)의 연구 경제사학 제57호. 정안기(2014), 1930년대 電 力 國 策, 朝 鮮 送 電 (주) 의 연구 동방학지 제166집. 정안기(2014), 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重 工 業 (주) 의 연구 사회와 역사 제102집. 7) 정안기(2014), 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重 工 業 (주) 의 연구 사회와 역사 제102집. 8) 片 倉 衷 (1967), 挫 折 した 理 想 國 : 滿 洲 國 의 興 亡 の 眞 相 現 代 ブック 社, 215-216면. 정안기(2014), 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重 工 業 (주) 의 연구 사회와 역사 제102집. 鈴 木 邦 夫 編 (2007), 満 州 企 業 史 研 究 日 本 経 済 評 論 社. - 2 -
책이었고, 식민지 조선을 자본축적의 자유로운 낙토 혹은 新 天 地 임을 선전하는 적극적인 아웃사이 드화 정책으로 일본으로부터 민간자본을 유치해서 산업개발을 추진하고자 하는 식민정부 차원의 전 략적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자본체였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주도해서 설립한 전력국책의 담당자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을 조선형특수회사 9) 의 또 다른 사례로 간주해서 설립과 경영의 구체적인 실태를 실증적으로 검토하고 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정부와 기업의 상호작용과 관계의 동태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 의 구성은 제2장에서 1936년 이래 압록강 수력개발을 둘러싼 민간측의 동향과 鮮 滿 協 力 의 전개 실 태 그리고 1937년 말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소유와 경영의 특질을 검토한다. 제3장에서는 1937년 제1기 수풍 수력 지점의 선정 경위와 개발계획의 확정 그리고 전체적인 개발 실태를 검토 한다. 제4절에서는 수풍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자금수급과 파이넌스 전략, 1943년 전력국가관리에 따른 경영체제의 변질 그리고 1941년 8월 이후 개발전력의 수급구조와 영업성적을 검토한다. 이 연구는 선만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과 관련한 국내외의 여러 자료를 발굴 활용해서 식민지기 압록강 수력개발의 구체성과 역사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또한, 이 연구는 단지 1930년대 조선형특수회사 연구를 비롯해서 식민지기 조선 전력업사 혹은 1930년대 선만 관계사의 실증연구 축적에 기여하고 자 한다. Ⅱ. 1930년대 압록강의 공동 수력개발과 鮮 滿 협력 먼저, 1936년 압록강 수력개발을 둘러싼 선만협력의 추진 경과와 실태 그리고 1937년 9월 조선 압록강수력발전(주)의 설립 실태를 검토해 보자. 특히 압록강 수력개발을 둘러싼 논의와 추진 경과 를 민간자본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1) 紛 爭 의 河 川, 압록강의 수력개발과 圖 們 會 談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서 조선의 북서부 유역 약 800km를 가로질러 중국과 경계를 이루는 대규모 국경하천이다. 압록강은 1907년 러일전쟁 이래 조선과 중국의 접경수로였기 때문에 양측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경제적 공간이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국경도시 신의주와 안동 은 1907년 안동항의 개항과 러일전쟁 전후 일제의 진출, 1910년 신의주항 개항 그리고 1912년 압 록강 철교가설에 따른 安 奉 線 과 京 義 線 이 접속하면서 대륙의 관문이자, 물산의 집산지로 발전하였 다. 그러나 압록강 수로는 河 床 의 급경사와 도처에 산재한 암초와 여울( 淺 瀨 ) 및 河 床 島 嶼 으로 遡 上 運 航 이 곤란한 峽 流 하천이었다. 嵌 入 曲 流, 河 心 彎 曲, 河 幅 狹 隘 이라는 전형적인 蛇 形 河 川 의 압록강은 항상적인 수량부족과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였다. 매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 결빙기까지 압록강은 선박의 출입은 물론이고 항행마저 불가능했고, 그래서 수로의 활용 가치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의 급격한 水 勢 와 지형적 특질은 발전수력자원으로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東 三 省 保 安 總 司 令 張 作 霖 의 명예고문이었던 일본군 육군 예비역 대위 町 田 武 馬 가 중일 합작사업으로 압록강 본류의 발전수력 개발을 추진하였다. 10) 그러나 당시 압록강 9) 전전기 일본은 별도의 회사령을 공포해서 다수의 외지관계 특수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 특수회사는 정부출자 (현물출자를 포함)가 중심이었다. 이러한 외지관계 특수회사에 대한 정부출자와 관련해서 당시 野 田 經 濟 硏 究 所 編, 戰 時 下 の 國 策 會 社 (1940년)는 이는 식민지에서 사업이 기업적으로 보아서 다양한 곤란과 위험을 동 반할 우려가 많았기 때문에 민간출자에 의존하기가 곤란하였고, 정부의 자본적 원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식민지 경영과 중요 국책적 사업을 일개 재벌 혹은 사업가에게 맡기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 이라 지적하였다. 그러나 외지관계 특수회사 가운데 정부출자가 전혀 없는 예외적인 존재는 조선지역 특수회 사에 한정되었는데, 이 연구가 대상으로 하는 조선광업진흥(주)을 비롯해서 선만척식(주)과 조선임업개발 3사 였다. 따라서 당시 野 田 經 濟 硏 究 所 는 외지관계 특수회사 가운데 조선지역 특수회사의 특질을 간과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堀 經 夫 (1944), 外 地 經 濟 の 硏 究 嚴 松 堂 書 店, 123-124면. - 3 -
은 국경획정과 유역개발을 둘러싼 중일관계의 긴장을 초래하는 동북아시아 복잡한 국제관계의 뇌 관 11) 이었고, 압록강의 영유권을 장악한 조선총독부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부터 1929년에 걸친 제2차 발전수력 조사를 실시해서 압록강 본류 41개 지 점, 포장수력 합계 124만 kw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압록강 본류 수력지점의 개발은 역시 정 치외교적 곤란을 동반하는 紛 爭 의 河 川 이라는 이유 때문에 1930년 제1회 조선전기사업조사회가 자 문한 발전계획 및 송전망계획에서 제외되었다. 12) 결국, 1920년대 압록강 수력개발은 막대한 포장 수력과 경제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선만 양측의 뜨거운 감자 에 불과하였다. 13) 그러나 선만 국경의 대동맥 압록강 본류의 수력개발은 1931년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政 治 的 困 難 14) 이 완화되면서 본격화하였다. 만주국은 1934년 11월 만주전업(주) 15) 을 설립해서 종래 도시 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분산형 중소 화력발전소를 일원화하는 한편, 고압 송전망 시설에 따른 광 역 발송전 체제로 전환이라는 전력업 재편을 추진하였다. 16) 또한, 1934년 만주국은 전력다소비형 중화학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개발5개년계획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기간 에너지원 확보가 불가피하 였고, 그래서 水 主 火 從 의 대대적인 전원개발전책을 결정하였다. 만주국의 신전력정책은 신경과 하얼 빈 중심의 北 滿 블럭, 봉천, 안산, 본계호, 안동, 대련을 잇는 南 滿 블럭, 三 江 지역의 東 滿 블럭의 3대 광역단위를 대표하는 송화강, 압록강, 경박호의 수력개발을 모색하였다. 17) 특히, 만주국의 입장에서 압록강 수력개발은 동변도의 치안숙정과 경제개발을 연계하는 주요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만주국 의 입장에서 압록강 수력개발은 당시 압록강의 영유권을 장악한 조선총독부의 양해와 협력이 불가 결한 사안이었다. 1930년대 압록강 수력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던 인물은 당시 만주국 상공부 광공국 산하 임시산업 부조사국 수력전원조사반 주임이자, 당시 과학적 몽상가로 회자되었던 阿 部 孝 郞 18)였다. 阿 部 는 10) 每 日 申 報 1919, 11.3/12.27. 11) 朝 鮮 總 督 府 (1925.11), 鴨 綠 江 保 全 工 事 及 國 境 線 劃 定 の 件 第 五 十 一 回 帝 國 議 會 說 明 資 料. 12)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1914년에 걸친 4개년 사업으로 渴 水 量 기준의 제1회 발전수력 조사를 실시해서 발전지점 80개소, 이론발전력 약 5만 70,00kW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유리한 전력개발이 가능한 수력지점은 겨우 39개소, 이론발전력 2만 5,000kW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22년부터 착수한 제2차 발전수력조사는 하천의 이용율을 높이고자 平 水 量 또는 高 水 量 을 수량 표준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조사 과정 에서는 일본과 달리 조선의 지리적 특질을 고려한 流 域 變 更 의 저수지식 발전방식을 채용해서 수력지점의 발 전력 증대를 꾀한다는 방침이었다, 그 결과, 18개 水 系, 수력지점 147개소, 총발전력 최대 223만 kw에 달하 였다. 그 가운데 압록강 수계 123만 kw는 전체의 약 55%, 그 다음 한강수계가 약 18.7%를 차지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8.8), 朝 鮮 の 電 氣 事 業 ( 大 野 綠 一 郞 文 書 ). 13) 1930년 10월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제1회 조선전기사업조사회 참고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 전체의 수력지 점은 148개소, 발전력 합계 225만 6,644kW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들 수력지점 가운데 압록강 본류 6개 지점과 두만강 본류 5개 지점, 발전력 합계 51만 3,780kW는 兩 江 이 전부 河 身 을 境 界 로 해서 領 土 를 달리하는 國 境 河 川 이어서 이를 제외 하였고, 나머지 137개 지점, 발전력 합계 174만 2664kW를 발전계획 및 송전망계획으로 확 정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0.10), 發 展 計 劃 及 送 電 網 計 劃 參 考 案, 47면. 14)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8.8), 鴨 綠 江 水 力 發 電 計 劃 槪 要 ( 大 野 綠 一 郞 文 書 ). 15) 만주전업(주)의 설립은 1933년 3월 1일 만주국 정부가 발표한 만주국 경제건설 요강의 전기사업에 관한 방 침에 기초한 것으로, 만주 전역의 9개 전기회사를 통합해서 1934년 11월 자본금 9,000만 원(현물출자 8,250 만 8,000원과 현금출자 719만 2,000원)으로 설립되었다. 1940년 12월 만주전업은 칙령 제327호에 따라 특 수회사로 개조되었다. 滿 洲 經 濟 社 (1942), 満 州 企 業 の 全 面 的 検 討, 33면. 16) 須 永 徳 武 (2005), 満 州 における 電 力 事 業 立 教 経 済 学 研 究 제59권 제2호. 17) 1937년 조선의 수화력 발전량은 합계 66만 kw(수력 52만 kw, 화력 141만 kw)에 기록하였고, 미개발 수화 력 발전량은 85만 kw(수력 80만 kw, 화력 5만 kw)에 달하였다. 또한, 당시 조선은 일본의 수화력 발전총량 약 600만 kw의 10%에 불가했지만, 수화력 비율은 일본의 57대 43에 대해서 78대 22을 기록하였다. 大 藏 城 管 理 局 (1950), 日 本 人 の 海 外 活 動 に 関 する 歴 史 的 調 査 朝 鮮 編 第 六 冊, 51면. 18) 阿 部 孝 郞 (1876-1941년) 동경시 築 地 工 手 학교를 졸업한 無 慾 恬 淡 한 토목기사로 대만의 민정장관 後 藤 新 平 으로부터 크게 신뢰를 받았고, 後 藤 新 平 이 만철 초대총재에 취임 이후에는 만주로 이주하였다. 특히, 만주국 총무장관을 역임한 星 野 直 樹 은 잊을 수 없는 만주의 일본인 이라 회고하였다. 1934년 만철의 기술고문 糟 俗 - 4 -
1935년 11월 당시 大 分 縣 대의사였던 松 重 重 治 의 소개로 일본 別 府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日 窒 톤 체른의 총수 野 口 遵 (당시 63세)을 방문해서 선만 합작의 압록강 수력개발을 제안하였다. 19) 野 口 의 쾌락을 획득한 阿 部 는 1936년 초 당시 野 口 의 오른팔이자 장진강수전(주)의 상무였던 久 保 田 豊 과 압록강 수력개발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후 阿 部 는 만주국 수뇌부를 설득해서 1936년 6월 만주국 실업부 차장 椎 名 悅 三 郞 을 단장으로 압록강 본류 전원조사에 착수하였다. 20) 6월 17일 椎 名 은 선만 합동조사단(만철계획부, 만철경제조사과, 만주산업연구소, 만주전업, 조선총독부, 장진강수전 관계자 20여명)을 편성해서 장진강수전(주)과 조선질소비료(주) 흥남공장을 견학한 이후 3박 4일 일정으로 평북 신갈파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압록강 본류 전원 조사를 실시하였다. 21) 당시 조사단에 참가했던 장진강수전(주) 공무부장 佐 藤 은 댐 지점이 풍부해서 전체 하천의 낙차를 거의 90% 이상 이용 가 능하다는 점에서 압록강은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유리한 지점 22) 이라 간주해서 합계 100-200만 kw에 달하는 대규모 전력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久 保 田 豊 (당시 46세)은 1936년 7월 말 宇 垣 총독과 小 磯 조선군사령관을 피서를 명목으로 해발 1,100m에 달하는 장진강 호반산장으로 초청하였다. 23) 이는 앞서 阿 部 와 久 保 田 가 구상한 압 록강 수력개발계획을 제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래서 久 保 田 는 선만 공동출자의 압록강 수력개발 계획을 피력하였다. 제안에 대한 宇 垣 총독의 반응은 참으로 과감한 계획이다. 그러나 조 선과 만주의 국경하천을 개발하면,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 가 24) 라고 반문하였다. 宇 垣 총독의 반문은 당시 관동군이 만주국에서 대동아공영권의 理 想 을 실천 한다는 입장에서 기성 자본가와 정당 정치가는 국가를 말아 먹는 자들에 불과하며, 이러한 구질서 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에 대해 서도 결코 협력적이지도 않았다. 또한, 압록강 수리권이 조선 혹은 만주국 귀속 여부의 문제는 상당 의 소개로 椎 名 悅 三 郞 이 주도해서 설치한 임시산업부조사국(국장급 대우)에 취직하였다. 阿 部 는 일제가 추진 하는 대륙경영의 최일선에서 수력자원 조사에 투신하였고, 제2 송화강 풍만댐 건설을 추진하였다. 1937년 수 풍댐의 착공과 임시산업조사부 해체 이후 장진강수전(주)의 촉탁으로 전직하였다. 安 部 는 임시산업조사국 전 원조사반 주임자격으로 제2송화강, 太 子 河, 灣 河, 압록강 등 만주 전역의 전원조사를 완료한 이후 만주국 관 계자 앞으로 중국의 황하강 전력개발을 제안하였다. 이와 관련한 그의 지론은 黃 河 를 다스리는 자는 天 下 를 다스린다. 일본은 뛰어난 기술로 중국에게 그 실적을 보여야 한다. 언제까지 철포를 쏘아대면 위세나 부리는 것은 바보같은 짓 이라는 이른바 테크노 제국주의론 을 주장하였다. 또한, 椎 名 悅 三 郞 의 회고에 따르면, 阿 部 는 수력개발 기획의 天 才 였고, 南 關 東 軍 사령관, 板 垣 征 四 郞 관동군참모장, 산업부차장 岸 信 介 등으로부터 전면 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日 窒 재벌 총수 野 口 는 日 本 帝 國 의 國 士 로까지 높이 평가하였다. 1941년 1월 5일 사 망(향년 65세)하면서 野 口 의 제안으로 압록강 수풍댐 부근에 南 총독 친필의 阿 部 孝 郞 記 念 碑 가 건립되었다. 阿 部 는 압록강 수력개발과 관련해서 자신의 꿈(압록강 수력개발)을 실현하는 자는 일질의 野 口 遵 이외는 없다. 자신은 불쏘시게에 불과하며, 개발 여부는 野 口 遵 이 결정하고, 久 保 田 豊 이 구체화 한다 는 논지로 만주국 정 부와 관동군사령부 관계자를 설득하였다. 그래서 安 部 는 野 口 가 추진하는 대륙진출의 기획통을 담당한 인물 혹은 無 慾 恬 淡 의 滿 洲 浪 人 의 典 型 으로도 회자되었다. 高 梨 光 司 (1952), 滿 洲 國 關 係 者 座 談 會 野 口 遵 翁 追 懷 錄 野 口 遵 翁 追 懷 錄 編 纂 會, 600면; 星 野 直 樹 (1963), 見 果 てぬ 夢 - 滿 洲 國 外 史 - ダイヤモンド, 147면. 吉 岡 喜 一 (1962), 野 口 遵 フジ インターナシヨナル コンサルタント, 292-297면. 19)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295면. 原 田 淸 司 (1942), 世 界 一 電 力 科 學 の 殿 堂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展 株 式 會 社 水 豊 發 電 所 工 事 大 觀 土 建 文 化 社, 152면. 20) 관련해서 전후 椎 名 悅 三 郞 의 회고에 따르면, 압록강도 조사하고자 하였지만, 국제하천이고, 조선총독부 세력 도 강대해서 상당히 번잡하였기 때문에 만철을 조사의 주체로 조선과 만철측이 합류해서 3자의 조사안을 고 안하였다. 만철은 일본법인이고 만주국에 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씨의 안이 통과하였다. 그러나 만철 스 탭은 거의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지도권은 安 培 孝 良 군이 장악하였다 는 것이다. 高 梨 光 司 (1952), 滿 洲 國 關 係 者 座 談 會 野 口 遵 翁 追 懷 錄 野 口 遵 翁 追 懷 錄 編 纂 會, 978면. 21) 每 日 申 報 1936년 6월 15일. 22) 佐 藤 時 彦 (1969), 土 木 人 生 五 十 年 中 央 公 論 事 業 出 版, 137-138면. 23)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宇 垣 日 記 1936년 7월 30일자( 久 保 田 豊 의 회고록 오류). 24)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188면. - 5 -
히 어려운 과제였고 이러한 미묘한 관계를 융화해서 양자 협동으로 압록강에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거의 꿈같은 일 25) 이었기 때문이었다. 26) 1936년 7월 장진호 호반회견을 계기로 조선측 수뇌부의 양해를 획득한 久 保 田 은 1936년 8월 초 당시 만주국이 추진하는 제2 송화강( 豊 滿 댐) 수력개발의 자문을 명분으로 만주국을 방문하였다. 27) 이를 계기로 久 保 田 는 당시 만주국 정부의 椎 名 悅 三 郞 과 星 野 直 樹 등 압록강 수력개발 적극파의 지 원으로 植 田 관동군사령관과 관동군사령부참모장 板 垣 征 四 郞 등 관동군 수뇌부로부터 압록강 수력개 발에 대한 잠정적인 양해를 확보하였다. 그 때문에 1936년 9월 野 口 가 만주국을 방문할 당시 만 주국은 이미 대사업을 野 口 에게 담당하게 한다는 방침 28) 이었고, 그래서 관동군사령부참모장 板 垣 征 四 郞 과의 단 한번의 회합만으로 압록강 수력개발 인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관련해서 당시 일본 에서는 겨우 1만 kw 허가라도 1-2년이 걸리는데 단지 하루만에 그것도 개인에게 허가 29) 되었다. 이러한 관동군사령부의 결정은 1920년대 후반 이래 野 口 가 식민지 조선에서 추진한 부전강과 장진 강 수력개발에서 발휘한 발군의 기술자적 리더쉽과 그 성과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30) 이후 압록강 수력개발 계획은 1936년 8월 4일 宇 垣 총독이 사임하면서 南 총독으로 승계되었다. 31)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산업경제조사회를 개최해서 만주국의 요청에 따라 국경하천의 발 전수력 조사 를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압록강 및 두만강 본류에서 풍부한 발전수력(100 만 kw 이상 예상)의 개발을 꾀하는 것은 일만 산업개발상 가장 긴요한 것으로 발전수력 조사를 시 행할 필요 32) 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33) 결국, 압록강 본류 수력개발의 급진전은 阿 部 (중개자), 野 口 (결정자), 久 保 田 (실행자)라는 치밀한 구상과 협력의 성과였다. 한편, 압록강 수력개발은 일개 민간회사와 만주국 차원의 비공식 합의만으로는 계획의 실현이 곤 란하였고, 그래서 역시 식민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정치적 합의가 불가결한 사안이었다. 그 때문에 25)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188-189면. 26) 당시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1936년 이래 4개년 계속사업으로 65만 원의 예산을 편성해서 조선지역 발전수력 조 사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37년부터는 3개년 계속사업으로 조사비 35만 원을 계상해서 압록강과 도문강 발전수력 조사에 착수하였고, 압록강의 포장수력을 약 100만 kw로 산정하였다. 每 日 申 報 1936.8.26. 27)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28)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302면. 29) 原 田 淸 司 (1942), 世 界 一 電 力 科 學 の 殿 堂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展 株 式 會 社 水 豊 發 電 所 工 事 大 觀 土 建 文 化 社, 122면. 30)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31) 1936년 8월 宇 垣 총독으로부터 南 총독으로 중요 사업 인계서의 鴨 綠 江 發 電 水 力 調 査 에 관한 件 에 따르면, 압록강 발전수력은 100만 kw 이상을 예정하며, 이미 선내 사업자로서 이를 사업화하고자 계획하는 자도 있 다. 압록강 및 두만강의 국경하천은 그 발전력이 풍부해서 국가자원의 개발 이용을 꾀하는 것은 원래 그 전원 의 위치 여부로서 日 滿 産 業 의 興 隆 을 기하는데 가장 적당하다. 시급히 발전수력 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는 것이었다. 이들 발전수력 조사의 필요경비는 1937년부터 3개년 계속비 총액 30만 6,351원이었고, 필요 요원은 사무관 1명, 기사 2명, 서기 2명, 기수 11명을 예상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6.8), 重 要 事 業 引 繼 書 ( 大 野 綠 一 郞 文 書 ). 每 日 申 報 1936년 8월 5일.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친 4개년 사업으로 제3회 발전수력 조사를 실시하였고, 발전수력 포장량 400만 kw을 확인하였다. 이 같은 규모는 조 선이 km² 당 약 20kW에 달하는 포장수력을 보유하는 세계 유수의 수력지대였음을 시사한다. 大 藏 城 管 理 局 (1950), 日 本 人 の 海 外 活 動 に 関 する 歴 史 的 調 査 朝 鮮 編 第 六 冊, 52면. 32) 東 亜 経 済 新 報 社 (1936.11.10), 画 期 的 意 義 ある 産 業 経 済 調 査 会 答 申 案 東 亜 経 済 時 報. 33) 당시 압록강 수력개발을 둘러싼 자본간 경쟁과 개발권 배분과 관련해서 압록강 발전문제는 선만협력에 의 해 발전지점의 조사를 추진해서 만주국, 만철, 조선총독부, 조선질소, 일본전공 등에서 각각 기업계획을 준비 하였다. 이미 판명된 수력지점이 10개소에 달해서 그 總 出 力 은 110만 kw를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출 력에 대해서는 일본전공의 森 直 旭 씨가 20만 kw의 전력발전을 신청하였는데, 최근 조선질소 계열은 총독부 앞 으로 총출력 40만 kw 발전계획을 신청하였다. 압록강 수력문제는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서도 만주측 위원과의 사이에도 문제가 되었다. 총독의 지론인 선만의존의 강화와 관계확충을 위해서 조기 개발방침으로 금후 선만간 절충이 주목할 만한 하다 는 것이었다. 每 日 申 報 1936.10.25. - 6 -
1936년 10월 말 鮮 滿 수뇌( 南 총독과 植 田 관동군사령관)는 압록강 수력개발 등 양측이 당면한 정치 경제적 현안을 논의하는 圖 們 會 談 을 개최하였고, 같은 회담에서 南 총독은 처음으로 鮮 滿 一 如 슬 로건을 제창하였다. 34) 당시 도문회담에 임하는 만주국의 입장은 압록강 수력개발을 위한 조선측의 경제적 협력이었고, 조선측은 당시 만주국에서 치외법권 철폐에 따른 재만조선인의 지위 개선에 대 한 만주국측의 정치적 배려였다. 결국, 도문회담에서 양측은 당시 만주국이 당면한 압록강 수력개발 과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추구하는 조선측의 정치적 현안을 맞교환함으로서 선만 양 당국은 공동으 로 수력전기 개발에 대한 양자의 의견이 일치 35) 할 수 있었다. 36) 그 때문에 1930년대 후반 압록 강 수력개발은 南 總 督 의 鮮 滿 一 如 政 策 의 俱 現 37) 혹은 鮮 滿 一 如 의 金 字 塔 38) 으로 膾 炙 되었다. 1937년 1월 12일 선만 양측은 경성에서 압록강의 공동이용과 관리 등 선만협력의 제도화를 목 적으로 鮮 滿 鴨 綠 江 共 同 技 術 委 員 會 를 설치하였다. 39) 위원회는 선만 양측 각각의 위원장을 포함한 3 명, 합계 6명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양측의 위원장은 당시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大 竹 十 郞, 만주국측 은 交 通 部 路 政 司 長 平 井 出 貞 三 이었다. 40) 특히, 조선측 大 竹 위원장은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내부 기구로 설치한 鴨 綠 江 水 力 發 電 開 發 委 員 會 위원도 겸하였다. 선만압록강공동기술위원회 활동은 주로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과 관련한 압록강의 수로이용과 관리문제였다. (2)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의 계획과 쟁점 한편, 1936년 12월 관동군사령부, 만주국, 조선총독부, 장진강수전(주) 관계자는 압록강 수력개발 을 위한 구체적인 교섭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교섭은 압록강 수력개발을 담당하는 회사 설립과 국 적문제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실제로, 당초 양측의 계획은 1억 원의 선만 양 국적의 일대 특수회 사를 설립해서 만주국과 조선총독부가 공동으로 감독한다는 방침 41) 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수력 개발 사업이 國 營 이었고, 그래서 신흥 만주국의 面 目 을 중시하는 관동군사령부가 신경 본사를 절 대 고집했고, 조선측도 野 口 계가 장악하는 경성 일변도였기 때문 42) 혹은 만주국측은 體 面 을 걸고 본사를 만주국에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발 주체는 조선측에 있었기 때문에 野 口 등이 이들 제안을 간단하게 수용 43)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1937년 1월 양측은 재차 회합을 개최해서 여러 타협안을 검토하는 와중에서 偶 然 의 一 致 인지 하늘의 啓 示 44) 인지 野 口 가 一 卵 性 雙 生 의 자매회사 34) 圖 們 會 談 의 개최 경위와 내용 그리고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정안기(2011), 1936년 鮮 滿 首 腦 의 圖 們 會 談 과 鮮 滿 一 如 만주연구 제12집. 35) 東 洋 協 會 (1937.2), 鮮 滿 一 如 の 具 現, 鴨 綠 江 水 力 電 氣 開 發 東 洋. 36) 1936년 9월 관동군사령부가 주도했던 湯 崗 子 회의에서 최초로 등장한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 초안에서 수 력개발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1936년 11월 1일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 현지안에서는 압록강 수력개발 계획 이 등장하였다. 실제로, 1936년 말 당시 만주국의 전력생산은 단지 화력발전 중심의 45만 9,00kW에 불과하 였다. 그러나 1936년 11월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 당초안은 화력 81만 5,000kw, 수력 59만 kw, 합계 140 만 5,000kw의 전력증산을 게재하였다. 이 가운데 수력개발분 59만 kw는 압록강 39만 kw와 제2송화강 20kw를 예정하였다. 이후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 수정안에서는 화력 133만 kw와 수력 124만 kw, 합계 257 만 kw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수정계획에서 각 지역별 수력개발분의 비중이 불명하지만, 1982년 椎 名 悅 三 郞 의 회고에 따르면, 압록강 수력개발분 63만 4,000kW를 계상하였다고 한다. 椎 名 悅 三 郞 追 悼 錄 刊 行 會 (1982), 記 錄 椎 名 悅 三 郞 ( 上 ) 椎 名 悅 三 郞 追 悼 錄 刊 行 會, 116면. 田 代 文 辛 (1998), 滿 洲 産 業 開 發 5 個 年 計 劃 と 滿 洲 電 業 株 式 會 社 ( 北 海 學 園 大 學 ) 經 濟 論 叢 제46권 제3호. 37) 朝 鮮 文 化 普 及 會 (1938), 朝 鮮 大 觀, 387면. 38) 朝 鮮 總 督 府 (1936), 南 總 督 植 田 關 東 軍 司 令 官 會 談 要 領 ( 國 立 國 會 圖 書 館 ). 39) 정안기(2014.9.27), 만주국의 유산과 1960년대 조-중 국경조약 체제: 국경협력 기구의 설치와 활동을 중심 으로 2014년도 만주학회 추계 학술회의 발표 논문. 40) 朝 鮮 總 督 府 政 務 摠 監 (1937.2.26), 鮮 滿 鴨 綠 江 共 同 技 術 委 員 會 設 置 ニ 關 スル 覺 書. 41) 東 京 日 日 新 聞 1937.3.13. 42)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2면. 43) 柴 村 羊 五 (1981), 起 業 の 人 野 口 遵 伝 有 斐 閣, 303면. - 7 -
설립안 45) 을 제시하면서 회사 설립 원칙에 합의할 수 있었다. 46) 그 내용은 조선과 만주국 양측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고, 주주와 임원을 겸직한다는 것이었다. 1937년 1월 13일 만주국, 조선총독부, 野 口 계열 관계자는 선만압록강공동기술위원회 제1회 회합 에서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의 논의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화하였다. 47) 당시 논점은 1920년 이래 만 철이 실시했던 발전수력 지점조사에 기초해서 8개년에 걸쳐 8개 지점(지점 당 10만 kw), 합계 80 만 kw의 수력전원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총공사비는 kw 당 300원으로 2억 4,000만 원을 예상 하였고, 제1차 발전계획의 지점은 당시 만철과 만주국이 주장하는 평북 碧 潼 지점이었다. 48)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1936년 6월과 12월에 걸쳐 여러 지점의 현장 조사를 실사한 阿 部 와 佐 藤 時 彦 은 제 1차 발전계획으로 벽동지점 전원개발의 경제성과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상하류에 걸친 전면 적인 추가조사를 결정하였다. 49) 1936년 말 만철경제조사위원회는 전력증산5개년계획에서 벽동지 점, 발전용량 39만 kw, 건설비 6,192만 원을 계상한 상황이었다. 50) 이후 만주국실업부, 만철조사 부, 조선총독부, 장진강수전(주) 관계자는 압록강 전역에 걸쳐 전면적인 수류조사를 실시하였고, 당 초 예상을 크게 넘어서는 합계 약 150만 kw의 대규모 포장수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에 기초해서 양측은 1937년 3월 10-12일 조선총독부에서 압록강 수력전기 개발의 鮮 滿 協 議 會 51) 을 개최하였다. 52) 협의회의 논점은 수력개발을 담당하는 기업형태와 개발방법의 결정이 었고, 구체적인 내용은 (1)압록강 수력발전에 대한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정부의 감독 등 기타 사항 의 협정과 (2)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및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의 공동경영에 관한 약정 체결을 결정함으로서 特 異 하지만, 合 理 的 인 企 業 形 態 를 새롭게 신설할 것 53) 에 합의하였다.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54) 44)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2면. 45) 그러나 당시 회합에서 野 口 가 제안했다는 선만 별도 법인 설립안은 偶 然 의 一 致 혹은 하늘의 啓 示 가 아니 라 1936년 8월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담당하는 국책 이민회사(선만척식과 만선척식) 설립안을 참고한 것으로 추 정된다. 朝 鮮 公 論 社 (1937.2), 朝 鮮 公 論 제25권 제2호. 정안기(2011), 만주국기 조선인의 만주 이민과 선만 척식(주) 동북아역사논총 제31호. 46) 관련해서 일본질소비료(주) 내부자료에 따르면, 압록강 발전공사의 대사업을 어떠한 형식의 회사로 실시할 것인가는 최초의 논의 주제였다. 국제하천에 걸친 국경은 그 하류의 중심선상에 존재한다. 완성한 제언은 조 선측 하천으로부터 만주국 하안까지 하나로 통하는 것으로 발전소도 동일 건물을 두 개로 나눌 수도 없다. 본 사를 만주에 두면, 만주국 법인이 되고, 조선에 두면, 일본국 법인이 된다. 더구나 건물은 하나로서 양자 공통 의 재산이 아니면 안된다. 논의는 끝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경우, 전례에 따르면, 먼저 일본과 만주 양 제국 간에 회사 설립에 관한 조약(의정서)을 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시일을 소비하고 수속의 번잡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案 出 된 것이 조선과 만주 兩 社 案 이었다는 것이다. 日 本 窒 素 肥 料 株 式 会 社 編 (1940), 日 本 窒 素 の 諸 事 業, 126면. 47) 東 亞 經 濟 時 報 1937.2.10. 48) 京 城 日 報 1937.1.17. 49)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285-317면. 50) 滿 鐵 經 濟 調 査 委 員 會 (1936.11), 具 體 的 戰 力 增 産 五 個 年 計 劃. 51) 東 亞 經 濟 時 報 1937.4.10. 52) 협의회 참석자는 만주국측의 경우, 관동군사령부참모 國 分 중좌, 국무원 松 田 기획과장, 실업부 岸 총무과장 3명이 었고, 조선측은 大 竹 내무국장, 山 田 체신국장, 相 川 외사과장, 조선군사령부 井 原 중좌, 조선군사령부참모 深 堀 중좌, 체신국 今 井 전기과장, 堂 本 사무관, 조선질소 관계자였다. 관련해서 당시 山 田 逓 信 局 長 은 압록강을 접경하는 양 국은 만주국은 정부, 조선은 민간이 출자해서 양국에 걸쳐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이지만, 본사 설치 장소 등이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에 조선 발전회사와 만주 발전회사를 설립해서 압록강 수력발전을 공동으로 경영한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금번 회의에서는 정부간, 회사간 약정에 관한 근본 방침을 결정하고, 이에 기초해서 각사의 정관을 作 制 한다 는 것이었다. 京 城 日 報 1937.3.13. 53) 기업형태와 관련해서 선만 양지에서 법제의 상이와 일 기업으로 한다면, 본사 문제와 기타 사전에 많은 곤 란이 예상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東 亞 經 濟 時 報 1937.4.10. 54) 滿 洲 評 論 제12권 제11호, 1937.3.30. - 8 -
(1)조선내에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만주국내에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을 설립해서 각 회사는 양사 공동경영을 추진한다. (2)각사 자본금 5,000만 원 2사, 합계 1억 원으로, 만주국측은 정부가 5,000만 원, 조선측은 조선질소의 野 口 자본이 5,000만 원을 출자하고, 각사 모두 5,000만 원의 자본금을 선만 양측이 2,500만 원씩을 합자한다. (3)개발전력은 150만 kw이지만, 제1기 계획은 50만 kw로 한다. (4)회사 감독은 만주국과 조선총독부 양측이 협정을 체결하고, 회사 경영은 상호 약정서를 작성한다. 압록강 수력개발의 제1기 발전계획은 자본금 1억 원, 3개년 사업으로 50만 kw의 수력전기를 개 발하고, 장래 자본금을 3억 원으로 증자해서 최종적으로 150만 kw의 발전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 다. 제1기 발전계획은 평북 벽동지점으로 주위 60km²에 걸친 대규모 저수지(부전강의 2배)를 건설 한다는 것이었고, 개발전력은 만주국과 조선측이 각각 절반씩 소화한다는 것이었다. 55) 또한, 선만 양측의 별도 회사의 출자형태와 관련해서 만주국의 경우, 満 鉄 과 満 洲 電 業 이 각 2,000만 원, 나머 지 1,000만 원을 만주국 정부가 출자하고, 조선측은 野 口 계열이 단독 출자한다는 것이었다. 56) 이후 협의안에 대한 양측 수뇌부의 검토와 결재를 거쳐 1937년 4월 선만협정의 조인과 회사 설립에 착 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937년 4월에 이르러서도 당초 예정과 달리 압록강 수력개발을 위한 정부간 협정은 물론 이고 회사 설립마저 크게 지체되었다. 57) 그 경위와 관련해서 당시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건설부 장으로 수풍댐 건설을 진두지휘했던 佐 藤 時 彦 의 회고에 따르면, 만철측이 주장하는 벽동지점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고, 이를 재고해서 수풍지점을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을 지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58) 당시 佐 藤 은 압록강이 당시 일본 하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하천이었기 때문에 댐 건설의 시행방법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만주국 정부는 만철 조사에 기초해서 청수, 벽동, 위원 3개 지점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佐 藤 는 만철의 계획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전문가들이 작성한 것으로 기술적 견지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실제 사업으로 개발에 착수하고자 하면, 여러 문제점 59) 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37년 4월 이래 조선총독부와 일본질소비료 관계자는 공동으로 발전수력조사반을 편성해서 수풍지점에 대한 상세한 측량, 지질, 수류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에 따라 1937년 5월 野 口 일본질소비료 사장과 청부회사 수뇌진이 수풍 현지를 시찰해서 제1기 발전계획으로 수풍지점을 최종적으로 낙점할 수 있었다. 60) 실제로, 野 口 계열이 제1기 발전계획으로 벽동지점보다 약 10km 하류에 위치한 수풍지점을 선정 이유는 (1)개발 원가상의 우위, (2)단기간 최대 발전력의 획득, (3)자재 운송의 편리성, (4)전력 수 55) 당시 조선측은 제1기 계획분 6만 kw에 달하는 개발전력의 소화가 문제였다. 당시 서선지방의 전기수요는 장진강수전(주) 최종 계획의 완성만으로도 충분하였고, 조선질소비료(주)의 전력수요도 장진강과 황수원강 수 력개발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즉, 야구계의 황수원강 대발전이 실현하기 때문에 야구계 사업으로서 도 飽 滿 에 가까운 상태여서 압록강 수전을 소화할 수 없는 사정 이었다. 따라서 6만 kw 과잉전력 소화방법으 로 알미늄 전해공정과 같이 巨 量 의 전력을 소화하는 화학공장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1기 6 만 kw의 선내 소비는 서선지역 신의주 방면에서 대규모 화학공업이 발흥하는 前 奏 라는 것이었다. 京 城 日 報 1937.3.16. 56) 東 京 日 日 新 聞 1937.3.13. 57) 京 城 日 報 1937.3.13. 58) 압록강 수력을 이용한 대규모 수력전기회사의 설립은 1910년대 후반 이래 안동 상공업계의 주요 현안이었 다. 또한, 당시 만철도 이미 압록강 발전수력 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안동 상공업계는 압록강의 수력전기를 확보해서 안동과 신의주 상공업계를 電 氣 化 하는 동시에 저렴한 전기를 공급해서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장래 산림철도를 시설해서 동절기 목재 반출과 운송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1922년 3월 안동상공회의소는 조선총독부 앞으로 압록강 수력개발을 위한 발전수력 조사를 청원하기도 하였다. 당시 만철 조사에 따르면, 1-2만 kw의 수력전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약 1,000만 원 상당의 사업비 계상과 함께 발전지점도 안동으로부터 약 100-150리 상류 지점이 아니면, 필요 발전력 확보도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였 다. 每 日 申 報 1922.5.15. 佐 藤 時 彦 (1969), 土 木 人 生 五 十 年 中 央 公 論 事 業 出 版. 59)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205면. 60)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205면. - 9 -
요지의 근접성 때문이었다. 61) 관련해서 당시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상무체체역 久 保 田 은 (1)대량 의 전력을 단기간에 획득할 수 있다. (2)양질의 자갈과 모래를 풍부하게 채취할 수 있다. (3)수로공 사가 용이하고, 홍수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 (4)공기와 관련해서 수풍지점의 경우, 定 州 로부터 자 재운반용 철로 연장이 120km이지만, 도중에 장거리 터널굴착이 불가피하다. 수풍지점으로부터 10km 상류에 위치한 벽동지점은 수풍지점 보다 난공사가 예상되면서 도저히 단기간 완성이 불가능 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62) 더욱이, 수풍지점은 벽동지점과 달리 단일지점으로 압록강 수계 전체 발전총량 3분의 1에 상당하는 대규모 전원개발이 단기간에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63) 또한, 그 과정에서 선만 양측은 당초 압록강 본류 6개 지점, 합계 158만 kw 전원개발을 계획하였지만, 만주국의 요청으로 9만 5,000kW의 집안(중강진) 지점을 추가하면서 [표1]과 같이 7개 지점, 합계 164만 kw의 개발계획으로 바뀌었다. 64) 결국, 제1기 발전계획은 벽동에서 수풍지점으로 바뀌면서 수풍지점의 발전량 확대(당초 50만 kw에서 64만 kw)와 함께 집안지점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그래 서 압록강 본류 수력개발계획도 전체적으로 크게 확장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65) 61)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40), 鴨 綠 江 水 力 發 電 計 劃 の 槪 要 와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41.12), 水 豊 堰 堤 の 建 設 朝 鮮 제319호. 62)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85-317면. 63)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41.12), 水 豊 堰 堤 の 建 設 朝 鮮 제317호. 64)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2), 東 拓 ノ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ノ 件. 65)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발전소는 (1)미국의 워싱턴주 그랜드 쿨리(Grand Coulee)발전소는 총출력 197만 4,000kW, 제1기 계획 약 34만 kw로 1942년 완성을 예정하였다. (2)미국의 네바다주 볼더(Boulder)발전소는 계획출력 131만 7,500kW, 제1기 계획 37만 kw를 1936년에 완성하였다. (3)소련 토니에블발전소는 출력 55 만 8,000kW였고, 1933년 완성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8), 鴨 綠 江 水 力 發 電 計 劃 槪 要 ( 國 立 國 會 圖 書 館 ). - 10 -
[표1]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의 당초계획과 수정계획 1937년 9월 당시 계획 1942년 당시 계획 수력지점과 명칭 유역면적 제방 저수량 유효저수량 유효낙차 최대발전력 공사비 유효낙차 발전기출력 발전기대수 최대발전량 (km3) 높이(m) 길이(m) (억m3) (억m3) (m) (만kw) (만원) (m) (만kW) (대) (만kW) 厚 昌 제7지점 10,935 96 450 30.0 13.1 79 15.5 4,600 79.0 3.1 5 15.5 臨 江 제6지점 11,810 53 460 6.7 2.0 45 9.5 2,300 45.0 2.4 4 9.5 慈 城 제5지점 14,331 55 600 9.4 6.0 40 10.4 2,750 31.0 3.0 5 15.0 滿 浦 제4지점 17,266 84 渭 原 제3지점 25,986 50 730 450 29.0 7.8 76 23.4 6,500 1,05.0 10.0 5 50.0 4.2 3.1 44 18.4 3,500 43.5 3.7 5 18.4 水 豊 제2지점 45,535 107 899 116.0 76.0 92 70.0 10,000 81.5 10.0 7 70.0 義 州 제1지점 48,163 33 2,000 8.2 4.3 20 17.3 5,750 20.6 3.3 6 20.0 합계/평균 174,026 478 5,589 203.5 112.3 396 164.5 35,400 192.9 5.1 37 198.4 (자료)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40), 鴨 綠 江 水 力 發 電 計 劃 槪 要. (자료) 朝 鮮 總 督 府 (1942.10), 電 氣 事 業 槪 要. - 11 -
(3)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설립과 경영체제의 특질 한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는 내부조직으로 압록강개발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개발계획을 구체 화하는 한편, 만주국 정부와의 수차례에 걸친 절충을 반복하였다. 그 결과, 1937년 7월 30일 양측 은 만주국 수도 신경 군인회관에서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 설립과 함께 지난 3월 회합에서 결정한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의 양해각서 조인을 결정하였다. 66) 만주국 정부는 8월 18일 양해각서 조인과 함께 만주압록강수력발전회사법을 공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8월 25일 만주국측의 佐 久 間 大 使 館 書 記 官, 中 村 外 務 局 事 務 官, 谷 満 洲 国 新 義 州 副 領 事, 吉 田 実 業 部 電 気 科 長 代 理 事 務 官 이 참석 가운데 大 野 政 務 総 監 이 鴨 緑 江 및 図 們 江 발전사업에 관한 각서 조인을 완료하였다. 67) 각서의 요지는 압록강 공동 수력개발에 대한 양측의 협력이었다. 주요 내용은 (1)양측의 법률(조선은 보통법인, 만주국은 특수법인)에 기초해서 각각 별도의 수력발전회사를 설립한다. (2) 鮮 満 양측의 자본금은 각각 5,000 만 원을 출자해서 합계 1억 원이며, 제1회 납입자본금은 4분의 1이다. (3)출자에 대해 만주국측은 전액의 정부 출자를 명시하였지만, 조선측은 総 督 府 라 하지 않고 단지 朝 鮮 側 으로 명기해서 民 間 協 力 으로 5,000만 원을 출자한다. (4)제1기 발전계획으로 최대출력 160만 kw를 개발한다는 것이 었다. 개발전력 160만 kw는 1936년 3월 당시 각각 양측의 발전력 합계(조선측 약 43만 kw, 만주 국측 약 42만 kw)를 고려하면, 양측 합계의 약 2배에 상당하는 규모였다. (5)중역진은 양사 겸임이 며, 만주국은 이사장, 이사, 감사, 조선측은 사장, 취체역, 감사역이다. (6)개발전력의 공급구역은 만 주국측의 경우, 東 辺 道 를 중심으로 大 連 과 奉 天 일대의 남만주, 조선측은 신의주, 평양, 경성지역이 었다. 각서 조인 완료 직후 大 野 政 務 総 監 의 담화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68) 금일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정부는 鴨 緑 江 및 図 們 江 발전사업에 관한 覚 書 를 조인한 것은 총독 각 하가 앞서 唱 導 했던 鮮 満 一 如 방침의 현저한 구현의 하나이며, 鮮 満 양측의 산업 진전에 커다란 초석 이다. 양 하천이 包 蔵 하는 전력자원은 막대한 것으로 鴨 緑 江 本 流 만으로도 160만 kw에 달한다. 따라 서 양 하천의 수력을 이용한 발전은 그 풍부한 전력으로 새롭게 대규모 화학공업의 출현도 가능하며, 그 개발은 国 策 上 지극히 중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 강은 国 境 河 川 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개발방법이 없었지만, 작년 이래 만주국과의 大 國 的 見 地 에 기초해서 협의를 반복한 결과, 다행스럽 게도 양자가 원만하게 협정해서 鮮 満 2개 회사가 공동으로 발전사업의 開 発 経 営 을 담당하게 되었고,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정부는 협력해서 그 사업수행에 대한 지도 감독을 담당하게 되었다. 양 회사는 당장 압록강 수력발전 개발에 착수하겠지만, 이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鮮 満 양지에 풍부하고 저렴한 전력이 공급되어 압록강 강안에 대규모 중요 공업이 발흥하기에 이르렀다. 수력개발 계획과 관련해서 (1)개발 방법은 조선과 만주국에 각각의 회사를 설립해서 양사가 담당 한다. (2)발전력은 압록강 본류 수개소에 언제를 축조해서 160만 kw를 발전하지만, 그 가운데 제1 기 계획은 하류지방 2개 지점에 1941년까지 합계 약 80만 kw의 발전소를 건설한다. 그 가운데 약 66) 당일 선만 관계자 13명이 참석하였고, 조선측은 강진전강수전(주) 상무취체역 久 保 田 이 참가하였다. 조선측 의 입장에서 주요 현안은 (1)전기사업 경영 허가신청서 및 수리사용원 제출, (2)발기설립이 아닌 일반 모집의 설립 형태. (3)주식 인수의 건, (4)발기인주의 할당, (5)회사 발기인 총대 및 창립위원장 선임, (6)창립사무소 설치, (7)주금납입 기일(1937년 8월 20일), 조선은행 본점, 만주흥업은행 본점과 지점. 통지기일 1937년 8월 16일, (8)창립총회 예정은 조선의 경우는 1937년 9월 4일 경, (9)사명은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 (11)본 건 은 조선총독부와 동척측의 승인을 거쳐 결정한다. (12)설립비용은 7만 원 이내로 한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發 起 ニ 關 スル 打 合 セ 要 項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67) 1937년 8월 20일 압록강 및 도문강 발전사업에 관한 각서 의 조인 주체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경성) 大 野 綠 一 郞, 간도주재일본국총영사(신경) 川 村 博, 안동주재 일본국영사(안동) 龍 山 靖 次 郞, 만주국산업부대신( 新 京 ) 呂 榮 寰, 신의주주재 만주국 영사대리(신의주) 谷 中 山 이었다. 內 務 大 臣 官 房 (1937.9.4), 鴨 綠 江 及 圖 們 江 發 展 事 業 ニ 關 スル 覺 書. 68) 京 城 日 報 1937.8.21. - 12 -
30만 kw는 1940년까지 발전한다. (3)회사명은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와 만주압록강수력발전 주식회사이며, 양사가 공동으로 사업을 경영한다, (4)양사의 본사는 朝 鮮 측의 경성과 만주국측의 新 京 에 설치하고, 기타 필요에 따라 지점 혹은 영업소를 설치한다. (5)회사 조직은 조선의 경우, 朝 鮮 民 事 令 에 따른 보통법인, 만주국의 경우는 특수회사법에 따른 만주국 특수법인으로 설립한다는 것 이었다. 1937년 8월 30일 만주국은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法 69)을 공포해서 만주압록강수력발전 (주)을 설립하였고, 조선측은 조선민사령에 기초해서 9월 7일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을 설립하였 다. 양측은 회사 설립과 함께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와 발전사업의 공동경영 약정서 70) 을 체 결하였다. 약정서에서 규정한 양사 관계는 자본금의 상호출자와 양사 임원의 겸임 그리고 자산 및 부채의 공유 및 손익의 균등분배를 규정하였다. 결국, 양사 관계는 이른바 一 心 二 體 혹은 一 體 不 可 分 의 관계였다. 71) 양사 경영진은 [표2]와 같이 각각 10명 가운데 野 口 遵 이 사장(만주국 이사장), 久 保 田 豊 이 상무취체역(만주국 상무이사), 나머지는 양사의 이해관계자가 각각 취임하였다. 결국, 양 사는 사실상 野 口 계열이 경영권을 담당하는 경영진 구성이었다. 결국, 압록강 전원개발의 주체는 선만 양측 자본금 5,000만 원의 2개 회사로 구분되었지만, 그 내실은 자본금 1억 원의 단일회사와 같은 것이었다. 72) 양사의 출자관계는 [그림1]과 같이 만주국 측의 경우, 전액 만주정부 출자였지만, 조선측의 경우는 일본질소(주)와 東 洋 拓 植 (주)이 각각 2,000 만 원을, 나머지 1,000만 원을 조선송전(주) 73) 이 출자하였다. 따라서 제1회 납입자본금은 선만 양 측의 각각 2,500만 원, 합계 5,000만 원이었다. 더구나,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경우, 회사 정관 제26조는 취체역 사장과 취체역 그리고 감사역은 본 회사의 주식 1,000주 이상을 소유하는 주주 로부터 주주총회에서 선거해서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서 이를 정한다 74) 는 것으로 출자와 경영진 선임은 조선총독부의 주요 허인가 사항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野 口 의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 고 동양척식의 40% 출자는 명령하였다. 75) 69)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法 은 만주특수회사법으로 1937년 8월 18일 칙령 250호로 공포되었고, 1938년 7월 21일 칙령 168호로 개정되었다. 특수회사는 발기인 7명 이상에 의한 정관 작성과 공증인에 의한 공증을 조건을 하는 일반 민간회사와 달리 정부가 임명하는 설립위원만으로 정관을 작성하고, 당해 특수회사법에 따른 정부의 인가에 따라 설립되었다. 滿 洲 經 濟 社 (1942), 滿 洲 企 業 の 全 面 的 検 討, 160면. 70) 滿 洲 日 日 新 聞 1937.9.1.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の 件. 71)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37.9.7),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定 款. 72) 東 洋 協 會 (1937.5), 東 洋. 73) 1934년 5월 설립의 조선송전(주)은 당시 野 口 계열의 장진강수전과 동양척식 그리고 여러 배전회사 출자와 지 배구조의 특징으로 하였다. 정안기(2014), 1930년대 전력국책 朝 鮮 送 電 (주)의 연구 동방학지 제166집. 74)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37.9.7),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定 款. 75) 당시 압록강 수력개발과 관련해서 당시 森 矗 旭 와 동척은 압록강수전회사 주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자 강 력한 운동을 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野 口 씨는 직계의 장진강수전과 조선송전을 앞세워 3분의 2의 주식을 차 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森 과 동척은 마치 平 家 의 落 武 者 와 같이 첩첩산중의 강계에서 수전을 개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척식의 출자 경위를 고려하면, 압록강 수력개발을 둘러싼 자본간 경쟁이 치열했 음을 시사한다. 朝 鮮 公 論 社 (1938.7), 化 学 工 業 戦 覇 戰 に 躍 る 野 口 遵 を 裸 にする 朝 鮮 公 論 제26권 제7호와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216면. - 13 -
[표2] 선만 압록강수력발전 의 경영진 구성 조선압록강수력발전 만주압록강수력발전 1937년 9월 1944년 11월 1937년 9월 1944년 11월 사장 野 口 遵 사장 久 保 田 豊 이사장 野 口 遵 이사장 久 保 田 豊 久 保 田 豊 玉 置 正 治 久 保 田 豊 玉 置 正 治 상무취체역 陳 悟 陳 悟 상무이사 陳 悟 陳 悟 취체역 감사역 高 橋 康 順 이사 橫 地 靜 夫 高 橋 康 順 이사 橫 地 靜 夫 德 楞 颜 佐 藤 時 彦 이사 德 楞 颜 佐 藤 時 彦 上 內 彦 策 色 部 貢 上 內 彦 策 色 部 貢 大 島 英 吉 大 島 英 吉 大 島 英 吉 大 島 英 吉 村 尾 重 孝 감사 永 井 四 郞 村 尾 重 孝 감사 永 井 四 郞 永 井 四 郞 際 彪 감사 永 井 四 郞 思 彪 思 麟 思 麟 (자료)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과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營 業 報 告 書 로부터 작성. - 14 -
한편,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지도 감독 및 허인가 사항은 회사 정관에서 (1)공동경영 약정의 체결 및 변경, (2)정관의 설정 및 변경, (3)기타 사업겸영 및 투자, (4)이사장 및 상무이사의 타업 종사, (5)임원의 선임 및 해임, 이익금의 처분, 사채 모집, 합병 및 해산의 결 의, (6)사업계획 및 자금계획, (7)공동사업의 계산, (8)중요재산의 양도 및 담보권 설정을 규정하였 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은 발전시설에 대한 상호 협의 및 감독과 함께 조선과 만주압록 강발전주식회사의 전기사업(전력공급 계약의 체결 및 변경과 중요 전기공작물의 시설 및 변경)은 그 영역에 따라 각국의 전기사업령에 따라 만주국 정부 또는 조선총독부의 감독 76) 을 규정하였 다. 77) 이상, 선만 양측은 1935년 11월 이후 수차례에 걸친 협의와 절충을 거쳐 1937년 8월 압록강 수 력개발 각서를 조인해서 夫 婦 別 性 의 奇 妙 한 提 案 과 構 成 78) 의 선만 양측의 압록강수력발전(주)를 설립하였다. 이는 형식적으로 日 滿 平 等 의 원칙에 입각한 것으로 표면상은 회사 기업이지만, 실질적 으로는 국책사업이다. 만주회사는 명확하게 特 殊 法 人 으로 특별한 보호 감독을 받았고, 조선회사는 普 通 法 人 이지만, 사업허가명령서 및 행정지도면에서 국책회사에 상당하는 보호 감독 79) 혹은 양사 의 신설이 이른바 2 人 3 脚 의 개발사업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이러한 기업형태가 日 滿 블럭에서 최 초의 경험이며, 그 成 否 는 日 滿 을 一 體 化 하는 건설 경제의 試 金 石 80) 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주목 할만한 점은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이 특수회사법에 입각한 전액 정부출자의 특수법인이었던 반면, 76)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設 立 要 綱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77) 법정적립금은 이익금의 5% 이상, 임원상여금은 이익금의 3% 이내, 주주배당금은 이익금에 전기이월금을 추 가한 금액으로부터 임원상여금을 제한 잔액으로 산정하였다.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37.9.7),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定 款. 78) 谷 川 竜 一 (2008), 流 伝 する 人 々 転 生 する 構 造 物 ー 朝 鮮 半 島 北 部 における 水 風 ダムの 建 設 とその 再 生 ー 思 想 第 1005 号. 79)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4면. 80) 東 亞 經 濟 時 報 1937.9.10. - 15 -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조선민사령에 입각한 민간출자의 보통법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 총독부가 만주국과는 달리 재정적인 제약을 野 口 계열과 동양척식(주)의 공동출자로 해소하고자 하 였음을 시사한다. Ⅲ.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주) 의 수풍발전소 건설 다음은 1939년 9월 이래 본격화했던 제1기 수풍 수력지점의 선정과 개발계획 그리고 수풍발전 소 건설 실태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당초 만철이 주장하는 벽동 지점으로부터 수풍 지점으로 변경되었던 경위와 수풍댐의 건설 실태 그리고 1941년 8월 이후 조업 개시의 경과이다. (1)수풍지점의 선정과 수력개발 계획 압록강수력발전(주)의 제1기 발전계획은 총사업비 1억 원으로 발전총량 64만 kw의 발전소 건설 계획을 결정하였다. 이는 당시 단일 규모로서 세계 제1위 미국 네바다주 콜도라도강 볼더댐을 넘어 서는 것이었다. 1937년 9월 당시 조선압록강수력발전은 같은 해 10월 댐 공사에 착공해서 1940년 까지 약 30만 kw에 달하는 발전설비 일부를 완공하고, 1941년까지 64만 kw의 발전설비를 완공해 서 선만 양측의 전력공급을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81) 제1기 공사는 최대출력 64만 kw, 총건설비 1억 원으로 전력원가는 kw 당 167원을 예정하였다. 이후 전력수요에 대응해서 점차 義 州, 渭 原, 輯 安, 慈 城, 臨 江, 厚 昌 으로 개발지점을 확대한다는 방침이었다. 수풍댐의 제원은 [표3]과 같이 높 이 96미터, 제방연장 900미터, 유효낙차 83미터, 최대출력 64만 kw, 평균출력 35만 kw였고,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10만 kw급 수차와 발전기 6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82) 다음은 수풍발전소의 건설계획이다. 83) 첫째, 자재운반이다. 자재운반에는 동절기의 결빙과 하절기 출수와 갈수를 우려해서 하천을 이용 한 船 運 이 불안해서 전용철도 시설이 불가피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선만 연락과 지역개발에 겸한 철도시설을 계획해서 조선측에서도 정주-수풍(약 115km), 만주측의 관구-수풍(약 60km)의 사설 전용철도를 건설하고, 철도시설비는 각각 1,000만 원과 600만 원으로 합계 1,600만 원을 예상하였 다. 또한, 공사용 필요전력 약 6,000kW는 조선송전(주)과 서선합동전기(주)로부터 수전한다는 것이 었다. 둘째는 자금조달이다. 압록강 본류 전체 발전량 160만 kw의 개발비는 약 3억 5,000만 원을 예 정하였고, 제1기 발전계획 60만 kw의 개발비는 1억 원으로 압록강수력발전(주) 양사가 각각 5,000 만 원, 합계 1억 원의 주금 납입으로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도 부설비 1,600만 원과 시멘 트제조공장 건설비 약 500만 원 그리고 舟 運 통제 500만 원의 합계 약 2천 600만 원은 전액 외부 차입금으로 충당한다는 방침이었고, 기별 필요자금 예정액은 [표4]와 같았다. 84) 셋째, 제1기 수풍 수력개발 이후 예상수지이다. 총사업비 1억 원(철도부설을 포함한 부대사업은 81)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38.8), 朝 鮮 の 電 氣 事 業 ( 大 野 綠 一 郞 文 書 ). 82) 그러나 조선압록강수력전기(주)의 수풍발전소 공사시행 인가 신청서에 따르면, 기허가 64만 kw에 대해서 常 時 출력 35만 kw, 常 時 尖 頭 출력 45만 kw, 最 大 尖 頭 출력 70만 kw로 수정하였다. 이상의 발전력 변경은 常 時 出 力 의 경우, 과거 13개년 流 下 量 조사에 따라 연간 7개월에 걸쳐 35만 kw 발전량 감소가 불가피하였기 때 문이고, 常 時 尖 頭 출력의 경우, 저수지 最 低 水 位 標 高 를 95m로 산정한 경우이며, 最 大 尖 頭 출력의 경우, 저수지 수위 표고를 112.6m 이상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효낙차의 경우도 기허가 77.4m에 대해서 최대 92m, 최소 64.6m, 상시 76.6m로 각각 변경되었다. 満 州 日 日 新 聞 1937.9.23. 83)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1), 起 業 目 論 見 書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84)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1937.8.12), 東 拓 ノ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ノ 件. - 16 -
별도의 수익으로 간주)의 수지는 [표5]와 같았다. 그 가운데 (1)수입의 경우, 최대 발전력 60만 kw 에 대한 연평균 발전력 35만 kw를 예정하였지만, 한발과 상류 댐 미완성에 따른 영향으로 실질적 인 매전 예정량을 30만 kw의 26억 2,800만 kwh(30만 kw*8,760h)로 산정하였다. 이 가운데 발 전소 자체 소비량을 제외한 26억 kwh의 평균단가는 5 厘 였고, 수입총액은 1,300만 원이었다. (2)지 출의 경우, 합계 630만 원으로 수익 1,300만 원에 대한 연간 당기순이익은 670만 원으로 자기자본 수익율 6.7%를 예정하였다. - 17 -
[표3] 수풍발전소 건설과 제원 구분 1937년 당초계획 1942년 수정계획 기타 높이(m) 96 106.7 川 床 岩 盤 으로부터 제 언 최대수심(m) 92 - 川 床 으로부터 제언연장(m) 900 898.7 제언양식 시멘트중력식 - 溢 流 口 축조/수문설치 - 鞍 部 를 開 鑿 해서 설치 저 수 지 면적(만m2) 320 345 연장(km) 본류 170, 지류 50 본류 164, 지류 34 지류는 만주측 琿 江 저수용량(억m3) 전체 100, 유효 55 76 발 유효낙차(m) 83 97 전 사용수량(입방매초) 정시 500, 최대 860 - 정시는 연평균 정량 량 발전력(Kw) 정시 35만, 최대 60만 정시 45만, 최대 70만 최대출력은 발전기 설비 용량 (자료) 東 洋 拓 殖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電 氣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자료) 朝 鮮 總 督 府 (1942.10), 電 氣 事 業 槪 要. - 18 -
[표4] 수풍발전소 건설비 구성과 자금계획 (단위: 천원) 구분 금액 기타 용지보상비 8,000 하천 제외한 용지 약 220평만km, 가옥, 기타 공사시설비 8,000 송배전설비, 모래채취, 시멘트제조기, 기타 제언공사비 34,000 締 切 掘 鑿 및 시멘트량 270만 m3 일류로공사비 2,500 수문 1식 지 출 발전소공사비 35,000 발전기계 1식 부대설비비 3,000 유벌로, 부대도로, 기타공사 총계비 2,500 측량조사감독비 2,500 공사중금리 2,500 예비비 2,000 합계 100,000-1937.7 25,000 제1회 주금납입으로 충당 1939.1 8,000 1939.7 12,000 조 달 1940.1 17,000 이 가운데 7,500만 원은 주로 주금납입 조달 1940.7 20,000 1,600만 원은 차입금으로 조달 예정. 1941.1 10,000 1941.7 15,000 1942.1 9,000 합계 116,000 - (자료) 東 洋 拓 殖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電 氣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넷째, 사업경영의 방침이다.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은 제1기 발전계획으로 일단 2개 지점(수풍과 의주), 합계 80만 kw에 달하는 발전소 건설을 목표로 하지만, 이후 선만지역의 전력수요와 정세 변화에 따라 곧바로 제2기 개발계획에 착수한다는 방침이었다. 개발전력은 선만 양측의 주파수에 따라 동일조건으로 50%를 공급하고, 송전율은 양측의 협의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다섯째, 개발전력의 소화계획이다. 수풍발전소 개발전력은 그 절반을 만주국 산업개발5개년계획 의 기간 에너지원으로 간주해서 남만주(봉천, 무순, 안산, 안동, 영구, 대련)에서 발흥하는 電 氣 冶 金, 電 解 苛 性 소다, 비료제조 등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한다는 방침이었다. 반면, 조선측은 주로 생산력확 충계획의 기간전력으로 서선공업지대에서 발흥하는 전기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전기합금, 전기제철, 경금속, 가성소다, 펄프 등 전력 다소비형 산업의 전력수요에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85) - 19 -
[표5] 수풍발전소 운영과 예상수지 (단위: 천원) 구분/항목 금액 기타 수입 연간 13,000,000 30만kw*8760=26억3,000만kw,1kwh=0.5전 발전비 300,000 인건비/소모품비 유지수선비 1,000,000 공작물/기계유지/수선비 舟 筏 路 비 800,000 저수지내 曳 舟 비 등 지 본사비 500,000 본사 인건비/기타총계비 조세공과 1,000,000 소득세/기타 출 종업원퇴직위로 200,000 적립금 감사상각비 2,500,000 원가의 2.5% 소계 6,300,000 법정적립금 350,000 5% 이상 이 임원상여금 200,000 3% 이하 익 주주배당 600,000 0 처 후기이월금 150,000 분 합계 6,700,000 (자료) 東 洋 拓 殖 株 式 會 社 (1937.8.11),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電 氣 株 式 會 社 株 式 引 受 申 請 ノ 件. (2)수풍발전소 건설과 조선총독부의 대응 한편, 조선총독부는 압록강 수력개발을 전담한 압록강수력개발위원회를 결성해서 정부 차원의 사 전작업에 착수하였고, 野 口 계열도 특유의 卽 決 主 義 에 따라 발전지점의 실측을 비롯한 공사재료 운 반방법, 기술자의 해외파견 등을 추진하였다. 86) 이하에서는 1937년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추진한 압록강 수력개발을 준비작업의 실태를 검토해 보자. 첫째, 1937년 5월 조선총독부는 내부적으로 체신국을 주무관청으로 압록강 수력개발의 설계와 시공 및 기술행정을 전담하는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 87) 을 설치하였다. 위원회의 목적과 활동 은 (1)수력개발 계획의 실현에 따른 항운, 유벌, 농림업, 광업 및 광대한 수몰지의 민생에 미치는 영향 및 피해대책의 심의, (2)발생전력의 소화계획 및 공장지대 건설계획 그리고 개발공사용 자재 확보대책의 심의, (3)거대 발전시설의 설계 및 시공에 따른 분과회의( 鴨 綠 江 堰 堤 技 術 委 員 會 ) 설치 88) 85)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1940), 鴨 綠 江 水 力 發 電 計 劃 槪 要 ( 國 立 國 會 圖 書 館 ). 86) 東 亞 經 濟 時 報 1937.9.10. 87) 朝 鮮 總 督 府 (1937.5.12), 朝 鮮 總 督 府 鴨 綠 江 水 力 發 電 開 發 委 員 會 規 程. 88)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 설치와 관련해서 조선총독부는 수풍댐 공사가 세계 굴지의 규모였기 때문에 설계 및 시공과 관련한 기술상의 신중함과 아울러 주도면밀한 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설치한 것이었다. 그 때문 에 조선총독부는 압록강개발위원회 규정을 개정해서 내무성 技 監 中 川 吉 造 박사( 世 界 堰 堤 委 員 會 일본 부회 회장)를 위원장으로 일본 제국권에 걸쳐 댐 건설과 기술자를 위원으로 초빙해서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를 동경 에 설치하고, 댐의 건설기술에 관한 심의를 담당하게 하였다.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는 일부 업무를 내무성 산 하 토목시험소에 위탁해서 대규모 모형시험을 실시해서 계획의 만전을 기하기도 하였다. 압록강언제위원회는 - 20 -
와 심의, (4)만주국과의 교섭(수몰주민의 만주국 이주, 발전사업의 감독 문제 등)에 관한 방침과 심 의였다. 89)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는 주로 공사 설계와 시공과 관련한 하천행정과 기술행정의 조 정 그리고 감독행정을 담당하였다. 또한, 위원회는 수풍발전소 개발전력의 소화를 위한 개별 기업에 대한 전력배분의 심의와 함께 압록강 발전용수 및 공작물 설치 등 26개 항목에 달하는 인가권을 장악하였다. 위원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조선총독부 고등관(국장, 지사, 부과장) 및 학직 경험자의 구성이었고, 공식적인 회합은 1937년 7월 제1차 회의를 시작으로 1941년 4월까지 총 제4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90) 위원회는 조선총독부 관료와 만주국 해당 관리가 참여하는 형식이 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참가는 단순한 옵저버(observer) 자격에 불과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91) 둘째, 1937년 7월 조선총독부는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 산하기구로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 를 설치하였다. 92)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는 수풍댐 개발프로젝트가 세계적 규모였기 때문에 합리적인 설계와 시공방법의 선택을 위한 신중한 심의가 불가결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 부는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 규정을 개정해서 일본 내무성 技 監 中 川 吉 造 박사(세계언제위원회 일본대표)를 위원장으로 댐 설계 전문가를 위원으로 초빙해서 위원회 본부를 동경에 설치하고, 수 풍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기술문제 전반을 심의하였다. 실제로,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는 일부 업무를 내무성 산하 토목시험소에 위탁해서 대규모 모형시험을 실시하는 한편, 홍수량, 유벌량, 댐설계, 시 공법, 混 凝 土 배합비율, 시멘트 제조방법 등 세세한 사항까지 심의하였다. 1937년 10월 20일 개최 된 제1회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는 내외지에 걸쳐 수력개발의 권위자 17명을 망라를 하였고, 4일에 걸친 회합으로 수풍댐 건설 전반에 걸친 필요사항을 집중 심의하였다. 셋째, 수풍댐 시공의 민간 청부업자의 선정이다. 1937년 5월 양측의 압록강 수력개발 협의회에서 공사 시공업자를 선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滿 洲 國 土 木 建 築 協 會 이사장이자, 榊 谷 組 의 사장 榊 谷 仙 次 郞 은 조선총독부와 野 口 에 대해 압록강 공사는 출자가 만주와 조선의 반반임으로 공사도 鮮 滿 양국의 적당한 업자를 지명해서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선처할 것 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野 口 는 우리측은 이미 指 定 請 負 人 으로 間, 西 松, 松 本 의 三 組 가 있다. 이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압록강 공사는 이들 三 組 에 맡길 것 이라며, 榊 谷 의 제안을 一 言 之 下 에 거절하였다. 그 결과, 수풍댐 건설 과 부대공사의 청부업자는 1920년대 후반 이래 野 口 계열이 추진하는 부전강과 장진강 수력개발 과 정에서 토목공사를 전담했던 間 組, 西 松 組, 松 本 組 를 지명하였다. 93) 이러한 결정은 당시 선만 양측 이 일본질소의 경영진과 청부업자간의 상호 연대가 극히 강고하고, 동시에 조선의 공사 현장이라 는 특수환경에서 풍부하고 귀중한 공사경험으로 충분히 연성했다 94) 는 댐과 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홍수량, 유벌량, 언제설계, 시공법, 混 凝 土 배합으로부터 시멘트 제조방법에 이르는 세세한 심의를 담당하였다.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는 제1회(1938.10.14-10.20), 제2회(1939.5.17-5.25), 제3회(1940.11.11-11.14)에 걸 쳐 위원회를 개최하였다. 1937년 10월 20일 개최된 압록강언제기술위원회의 면면은 내외지 댐 기술 권위자 17명을 망라를 하였고, 당초 2일간 회합이 4일간으로 연장되면서 신중한 심의와 함께 수풍 수력개발의 필요 사항을 결정하였다.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4-296면 과 朝 鮮 總 督 府 (1941.12), 朝 鮮 제317호. 每 日 申 報 1937.10.25. 89)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195면. 90) 1937년 7월 2일 압록강 수전조사를 위해 압록강수력발전위원회는 제1회 회합을 개최하였다. 위원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었고, 大 竹 내무국장을 포함해서 체신국원안을 심의하였다. 주요 의제는 압록강수력개발에 대한 조선총독부측의 근본방침과 구체안을 결정하는 것으로 (1)압록강수력발전에 관한 만주국측과 협의 결과 의 보고, (2)압록강 수력발전 지점에 대한 결정의 건이었다. 每 日 申 報 1937.7.3. 9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4-296면. 92)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朝 鮮 總 督 府 (1941.12), 朝 鮮 제317호. 每 日 申 報 1937.10.25. 93) 飯 吉 精 一 編 (1969), 榊 谷 仙 次 郞 日 記 榊 谷 仙 次 郞 日 記 刊 行 會 (1937.5.7;5.18). 94)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319면. - 21 -
발군의 시공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넷째, 수풍댐 건설기술 획득을 위한 기술진의 해외파견이다. 1937년 5월 野 口 는 수풍 현지 시찰 당시 장진강수전(주) 공무부장 佐 藤 의 제안을 전격 수용해서 기술진의 미국 시찰을 결정하였다. 그 목적은 부전강과 장진강 수력개발과는 달리 前 代 未 聞 의 대규모 수풍 댐 건설을 위한 콘크리트 중력 댐 설계와 그 시공기술의 획득이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시찰단은 5개월에 걸친 미국 체재와 함께 볼더댐(일명 후버댐)을 비롯해서 마침 콘크리트 타설을 완료한 그랜드 쿨리댐을 시찰할 수 있었 다. 95) 더구나, 기술진의 파견은 단지 일본질소 계열의 본사 사원만이 아닌 시공을 담당하는 청부회 사의 사원마저 포함하였다. 실제로, 일본질소 본사 토목과 기계기사 각 1명, 間 組 의 토목과 기계기 사 각 1명, 西 松 組 의 토목과 기계기사 각 1명 그리고 대규모 크레인 제작 담당의 石 川 島 造 船 (주) 기계기사 2명으로 합계 9명이었고, 1937년 9월 말 미국 시찰을 완료하고 귀국하였다. 96) (3)수풍발전소 건설과 부대시설의 정비 선만 양측은 수풍댐 건설과 관련한 건설자재의 통관수속 간소화와 공사의 신속성 확보를 위해 양 측의 관세법을 개정해서 건설현장의 일부를 보세지구로 지정하였다. 다음은 1937년 9월부터 개시 한 제1기 수풍댐 수력개발과 관련한 철도를 비롯한 부대시설의 정비 실태를 검토해 보자. 97) 첫째, 전용철도 부설과 국제철교의 시설이다. 당시 수풍지점과 접속하는 교통편은 신의주로부터 국경도로를 이용한 자동차와 압록강 본류의 수로항로를 이용한 소형 선박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대 규모 건설공사에 불가결한 시멘트, 철강재, 기계류 등 대량의 중량품 운송을 위해서는 전용철도 시 설이 불가피하였다. 그래서 조선압록강수전(주)은 [표6]과 같이 각각 자본금 1,000만 원의 平 北 철 도(주)와 鴨 北 철도(주)를 설립하였다. 조선측의 평북철도는 경의선 정주역을 기점으로 龜 城 과 朔 州 를 거쳐 압록강 연안의 水 風 과 淸 水 에 이르는 연장 125km의 광폭철도를 시설하였고, 만주측의 압 북철도는 평북 淸 水 역을 기점으로 국제철교를 넘어 만주국 동변도 寬 句 懸 을 관통 북상해서 만주국 국유예정선 灌 水 洞 역에 이르는 연장 80km의 광폭철도를 시설하였다. 평북철도의 부설은 수풍댐 건 설에 필요한 공사용 자재운송이 주요 목적이었고, 주요 시설은 교량 61개소, 대도 18개소, 정차장 15개소, 건설비 총 1,760만 원으로 1937년 10월 착공해서 1939년 10월 완공하였다. 만주국측 압 북철도의 시설은 주로 철도 연선 동변도의 자원개발이었고, 교량 30개소, 대도 3개소, 정차장 8개 소, 건설비 1,160만 원으로 1939년 4월 착공해서 1940년 12월 완성하였다. 평북과 압북철도를 연 결하는 국제가교는 공사비 160만 원으로 연장 667m, 교각 17개, 교각높이 최고 23m에 달하였다. 평북과 압북철도의 전용기관차는 체코산 기관차 10량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서 운용하였다. 98) 둘째, 전용 시멘트 공장의 시설이다. 당초 수풍댐 공사계획은 콘크리트 중력댐 건설을 위한 시멘 트 소요량을 약 75만 톤으로 산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과 만주국에 입지한 기설 시멘트공장의 생산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원활한 소요량 공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건설용 시멘트는 저열성 과 균질성의 특수 품질과 화학적 특성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압록강수전(주)은 압록강언제 95) 間 組 百 年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間 組 百 年 史 間 組 弘 報 部, 636면. 96)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381-382면. 97)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41.12), 水 豊 堰 堤 の 建 設 朝 鮮 제317호. 98) 鴨 北 철도(주)의 경우, 당초 부설계획이 없었지만, 동변도 개발을 위한 만주국의 제안으로 부설을 결정하였고, 주 로 만주국측 수풍댐 건설을 위한 골재운반에 활용하였다. 한편, 평북과 압북철도에 사용하는 기관차는 당시 중국 이 矓 海 線 ( 漢 口 - 天 津 ) 운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문했던 것이었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국 측 인수가 불투명하게 되면서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이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타사로부터 구입한 기관차 10량은 외화 회득과 결제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久 保 田 은 만주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만주산 대 두를 三 井 物 産 (주)을 통해 매각한 외화자금으로 결제할 수 있었다. 永 塚 利 一 (1966),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日 本 窒 素 肥 料 株 式 会 社 編 (1940), 日 本 窒 素 の 諸 事 業, 126-134면. - 22 -
기술위원회의 기술자문과 압록강개발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약 698만 원(승호리공장 393만 원, 수 풍공장 242만 원)의 예산으로 연산 18만 톤에 달하는 전용 시멘트 공장건설을 결정하였다. 시멘트 공장은 평양 외곽에 소재하는 燒 塊 제조의 승호리공장과 燒 塊 분쇄의 수풍 현지공장 건설을 추진하였 다. 이들 시멘트공장의 설계, 건설, 운전, 관리는 朝 鮮 小 野 田 시멘트제조(주)가 담당하였고, 위탁생산 료는 톤 당 1원이었다. 승호리공장은 부지 7,200평으로 1940년 12월 완공해서 본격적인 시운전을 개시하였다. 1939년 완공한 수풍공장은 부지 3,500평으로 일간 1,000톤의 분쇄능력과 저장탱크 4 개를 시설해서 합계 2만 톤에 달하는 대량의 시멘트를 저장할 수 있었다. 수풍댐 현지의 시멘트 저 장시설은 본격적인 시멘트 타설공사에 따른 일간 시멘트 사용량을 1,600톤으로 산정해서 그 부족 분을 동절기 저장량으로 충당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표6] 평북철도(주)와 압북철도 의 부설 구분 평북철도 압북철도 창립연월 1937.11.29 1938.4.19 자본금(만원) 1,000 1,000 사업자금(만원) 1,000 700 본사 경성 신경 취체역사장 野 口 遵 野 口 遵 연장(km) 124.1 75.9 궤간(m) 1.435 1.435 교량(개소) 61 30 대도(개소) 18 8.0 정차장(개소) 15 8.0 건설비(원) 1,760 1,160 기공연월 1937.10 1939.4 준공연월 1939.4 1940.12 (자료) 日 本 窒 素 肥 料 株 式 会 社 編 (1940), 日 本 窒 素 の 諸 事 業, 127면. 셋째, 압록강상의 舟 運 통제이다. 압록강 본류는 蜿 蜒 200리에 달하는 대규모 하천이었고, 압록강 하류에서 상류 혜산진까지 역류 航 程 은 약 100여리에 달하였다. 그래서 압록강 본류의 강운을 이용 하는 舟 運 량도 상당하였다. 舟 運 량은 舟 船 ( 高 瀬 船 )을 시작으로 프로펠러선과 소형기선으로 합계 약 1,700척에 달하였다. 99) 따라서 조선압록강수전(주)은 수풍댐 건설공사 개시와 함께 압록강상의 수 운통제가 불가피하였다. 그래서 종래 만주국의 압록강 수운통제기구였던 鴨 渾 兩 江 航 業 公 會 를 해체 해서 가맹선주의 소유선박 출자와 만주압록강수력발전(주)의 현금출자로 자본금 75만 원의 滿 洲 鴨 綠 江 航 運 (주)을 설립하였다. 또한, 조선측의 경우, 당시 압록강의 항운권자였던 1918년 설립의 鴨 綠 99) 鐵 道 國 吉 田 壽 三 郞 (1930.11), 鴨 綠 江 の 水 運 (1) 朝 鮮 鐵 道 協 會 會 誌 제8권 제11호. - 23 -
江 運 輸 (주)와 1923년 설립의 鴨 綠 江 輸 船 公 司 (주)를 매수 합병해서 자본금 13만 3,370원의 朝 鮮 鴨 綠 江 航 運 (주)을 설립해서 종래 선만 국경의 대동맥이었던 압록강 본류의 수운통제를 완료할 수 있었 다. 100) 넷째, 流 筏 의 처리시설이다. 101) 압록강 상류지역 일대는 압록강재로 널리 알려진 동북아시아 최 대의 삼림지대였고, 그래서 연간 유벌량은 약 90만 m3에 달하였다. 벌목재의 대부분은 流 筏 을 편성 해서 신의주와 안동으로 반출되었고, 그래서 당시 이른바 木 都 로도 회자되었던 신의주와 안동은 제재소와 제지공장이 다수 입지하였다. 102) 그러나 대규모 수풍댐 건설과 일대 저수지의 등장은 유 벌의 통제를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록강수력발전(주)은 약 450만 원에 달하는 유벌 처리 시설비를 계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댐 상류에 100마력 디젤기관을 구비한 25톤 예인 전용 선 40척과 운항에 필요한 항로표식, 급유소, 수리공장 등 부대를 시설을 구비하였다. 또한, 댐 통과 를 위해 저수지 수위와 무관한 높이 100m에서 하류 약 1km 지점의 江 面 에 도달하는 넓이 약 6m 의 콘크리트 斜 路 를 설치하였다. 이는 동력선으로 댐 부근으로 예인된 유벌을 分 筏 해서 댐의 일단 에 위치한 6개의 流 筏 로를 따라 통과시켜서 유벌의 중력과 斜 路 운전수가 조작하는 관수 및 배수에 따라 강면에 도달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분벌된 유벌은 다시 원형을 복귀해서 종래와 같이 강상을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수풍댐 건설에 따른 수몰지 매수와 거주민의 이주보상이다. 103) 수풍댐은 저수지 면적 245km2, 본류 연장 164km, 지류 연장 34km에 달하면서 광대한 수몰지와 대량의 이주민 발생을 불 가피하게 하였다. 매수 용지는 선만 양측 합계 6,000만 평에 달하였고, 이주민은 약 7만 명으로 용 지 매수와 가옥 보상비는 약 2,000만 원에 달하였다. 1937년 11월 설치된 압록강경영대표심의위원 회가 담당한 수몰지 지역민의 이주계획은 1939년 734호, 1940년 1,257호, 합계 1,991호였고, 1941년 3월 말 이주실적은 당초 계획의 95%를 기록하였다. 104) 지역민의 이주지는 대부분이 만주 였고, 일부는 북지로도 이주하였다. 105) 1941년 4월 제4회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 내부자료에 따르면, 이주민(개척민) 가운데 비교적 부유한 자 또는 농업 미경험자가 있어서 처음에는 지도상 다양한 지장이 있었지만, 현재(1941년 3월 말)는 점차 토지의 기후풍토에 적응하면서 순조롭게 농 경에 종사하고 있다 106) 는 것이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수몰지 대책으로 수몰지 행정구역의 변경, 폐지면의 재정구제, 관공서의 이전을 추진하였다. 107) 1941년 3월 말 당시 조선측의 수몰지 매수 실태는 [표7]과 같이 매수면적 3,229만 평, 예정매수 가액 826만 원으로 평당 매수 단가는 25.5전 이었다. 108) 토지매수는 평북도청과 평북도경의 개입으로 단기간에 예정가격에 근접한 조건으로 쉽 100) 大 連 YO 生 (1937.10), 鴨 綠 江 の 水 運 ( 下 ) 朝 鮮 鐵 道 協 會 會 誌 제16권 제10호. 101) 広 瀬 貞 三 (1998), 植 民 地 朝 鮮 における 水 風 発 電 所 建 設 と 流 筏 問 題 新 瀉 国 際 情 報 大 学 情 報 文 化 学 部 紀 要 第 1 号. 102) 安 東 商 工 會 議 所 (1930), 鴨 綠 江 の 木 材 と 滿 洲 に 於 ける 木 材 事 情. 103) 広 瀬 貞 三 (1991), 水 風 発 電 所 建 設 による 水 没 地 問 題 - 朝 鮮 を 中 心 に 朝 鮮 学 報 第 139 号. 104) 조선측은 압록강 연안에 거주하는 주민의 이주보상 문제를 위해 1937년 11월 평북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수뇌부를 비롯해서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군의 각 군수와 서장을 망라하는 압록강수력전기대표심의원회 를 조직하였다. 이후 다섯 차례의 위원회를 개최해서 토의한 결과, 1939년 3월 13일 최종적인 보상가격을 결 정하였다. 보상기준으로 (1)전답은 제1, 제2, 제3지구로 구분해서 최저 최고가격을 결정하였다. (2)이주보상비 는 만주 집단이민(호당 80원)과 조선내 집단이민(60원)으로 구분해서 보상한다. (3)가옥보상은 시가지와 시가 지외로 구분하고 가옥을 기와집과 초가집 등 1, 2, 3지구 지역별로 갑, 을, 병, 정의 종류에 따라 보상한다는 것이었다. 每 日 申 報 1939.2.15. 105) 1939년 만주국측 수몰지 이주민 일부를 만주국 濱 江 省 에 이주시켰고 나머지 2,300호, 1만 6,000명(이 가 운데 조선인 600호, 4,000명)은 1939년 11월부터 41년 5월 중순까지 안동역에서 장대열차를 편성해서 빈강 성 珠 河 를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每 日 申 報 1939.10.29. 106)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302면. 107) 朝 鮮 總 督 府 內 務 局 長 (1939.5.2), 鴨 綠 江 水 田 會 社 施 設 ニ 伴 フ 收 沒 地 帶 ノ 對 策 ニ 関 スル 件. - 24 -
게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이 발전공사의 好 條 件 109) 이었다. [표7] 수풍댐 건설과 조선측 수몰지 면적과 매수가액 구분 면적 가격 단가 총매수예정면적 32,292,829 8,263,110 25.5 매수완료면적 30,134,429 8,009,133 26.5 매수미완료면적 2,158,390 253,977 11.7 (4)수풍댐 건설과 발전소 시설의 경과 다음은 1937년 10월부터 수풍댐 건설의 물막이 공사를 비롯해서 콘크리트 타설 그리고 발전설비 시설에 착수해서 1941년 8월 말 부분 조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하에서는 수풍댐과 발전소 건설 의 경과와 실태를 전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110) 첫째, 수풍발전소의 건설 개요이다. 수풍댐은 압록강 하구로부터 상류 약 120km, 신의주와 안동 으로부터 약 80km 상류 평북 삭주군 구곡면 수풍동에 위치하였다. 댐의 입지는 조선측 강안으로부 터 만주국 관구현 노호초 강안에 걸쳐 압록강 본류에 댐을 건설하고, 발전소는 댐의 직하류 조선측 에 설치한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1944년 완공한 수풍댐의 제원은 높이 106.7m, 연장 898.7m, 체적 320만 m3, 총저수용량 116억 m3, 유효저수량 76억 m3에 달하였다. 본격적인 수풍댐 건설공사 는 조선과 만주국이 양분해서 추진하였는데, 댐 건설과 철도 시설공사는 조선측 間 組, 만주국측 西 松 組 가 각각 담당하였다. 111) 그 외 철도 및 도로공사는 間 組, 西 松 組, 松 本 組 3사가 분담해서 시공 하였다. 112) 댐 공사는 조선측과 만주측을 구분해서 경제적 유인을 전제로 하는 마치 불독 (Bulldog)을 서로 싸우게 하듯이 113) 청부업자간 치열한 경쟁체제로 추진되었다. (단위: 평, 원) 원자료는 1941년 4월 28일 개최된 제4회 조선압록강개발위원회 회의자료, 1941년 3 월 말 기준. (자료)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9면. 또한, 작업능률 향상을 위해 기계력을 활용한 주야간 작업으로 일간 약 1만 m3에 달하는 콘크리 트 타설 기록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1937년 9월부터 댐 공사의 물막이 공사에 착수하였지만, 1938 년 대홍수를 시작으로 1941년까지 수차례 계속되는 홍수피해와 1939년 시멘트 배급제한 등 물자 108) 1939년 1월 중순 압록강경영대책위원회는 수몰지대 이주민 총수는 5,300호. 인구 약 3만 평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3,300호는 각자 행동으로 도내와 조선내 각지에 이주시키고, 나머지 2,000호는 도에서 총독부와 교섭한 결과, 총독부 이주계획에 의해서 봄부터 1940년 말까지 봄과 가을 4회로 나누어 만주에 이식시킬 것을 결정하였 다. 이 가운데 소수는 조선 역내의 염전과 탄광에 이주시킨다는 방침 이었다. 朝 鮮 總 督 府 內 務 局 長 (1939.40.3.11), 土 地 收 用 事 業 認 定 ノ 件. 每 日 申 報 1939.1.16. 109)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99면. 110)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1941.12), 水 豊 堰 堤 の 建 設 朝 鮮 제317호. 111) 당시 청부업자와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과의 공사계약은 종래와 같은 청부계약서에 기초한 청부방식이 아 니라 공사가 완료한 이후 견적서를 산출해서 발주와 청부 양측이 상호 검토한다. 그리고 청부서를 작성한 후 에 총액에 대해 10-20%를 플러스하는 청부계약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공사 착공단계에서는 청부계약은 구 두약속에 불과한 것이었다. 間 組 百 年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間 組 百 年 史 間 組 弘 報 部, 644면. 112) 間 組 百 年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間 組 百 年 史 間 組 弘 報 部, 634면. 113) 佐 藤 時 彦 (1969), 土 木 人 生 五 十 年 中 央 公 論 事 業 出 版, 146면. - 25 -
통제의 영향으로 공기연장이 불가피하였다. 114) 더구나, 수풍댐 건설은 공사개시와 함께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물자통제에 직면하면서 조선총독부는 물론이고 조선군사령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 을 불가결한 조건으로 하였다. 115) 실제로, 댐 건설의 필요한 약 7만 4,492톤의 강재는 육해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수풍댐 건설의 구체적인 경과는 콘크리트중력식 溢 流 型 으로 댐 공사를 3등분해서 중앙부 3분 1 에 해당하는 임시 유수로를 제외한 댐의 양측 각각 3분의 1에 상당하는 물막이 공사를 개시하였다. 댐의 중앙부를 제외한 兩 岸 으로부터 각각 콘크리트 박스형 틀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굴착해서 시멘 트를 타설하는 방식이었다. 물막이 작업은 강재부족을 고려한 현장의 發 案 으로 종래의 越 中 枠 가 아 닌 聖 牛 枠 를 사용해서 荒 水 를 일단 저지한 다음, 中 間 枠 사이에 점토를 채워서 나머지 유수를 저지 하는 방법을 구사하였다. 116) 그리고 兩 岸 의 댐 건설이 상당한 규모에 달한 이후에는 만주국측 제방 의 가배수로를 개방해서 유수의 흐름을 바꾸어 중앙부의 유수력이 격감한 동절기를 이용해서 물막 이 공사와 콘크리트 타설을 추진하는 작업방식이었다. 117) 실제로, 압록강 급류를 제압하는 물막이 공사는 工 事 의 死 命 을 좌우 118) 하였고, 그래서 나름의 자연친화적 그랜드 공법을 도입하였다. 실 제로, 1939년 9월 만주국측 4개의 가배수로 시설을 완료한 이후 댐 중앙부의 물막이 공사에 착수 하였다. 119) 본격적인 콘크리트 타설작업은 1938년 가을부터 개시해서 1941년 완료를 예정하였지 만, 매년의 홍수를 비롯해서 자재와 노동력 부족으로 2년 정도 지연되면서 1944년 11월 완공할 수 있었다. 120) 댐 건설에 필요한 건설자재는 평북과 압북철도의 완성까지 진남포항에 65톤 규모의 기중기 및 하역설비를 시설하고 65톤 중량의 저상차를 특별 제작해서 운반력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댐 건설 에 필요한 300만 m3에 달하는 대량의 자갈과 모래는 수풍댐 하류에서 채취해서 사용하였고, 운반, 저장, 선별을 위한 콘크리트 혼합공장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콘크리트 타설공사의 경우, 혼합공장으 로부터 운반된 콘크리트 바케스를 댐의 횡단해서 설치한 9톤 크레인과 대차를 이용해서 타설지점에 114) 수풍댐 건설과정에서 홍수피해는 1938년 3회, 1939년 1회, 1940년 5회, 1941년 2회 총 11회에 달하였다. 原 田 淸 司 (1942), 世 界 一 電 力 科 學 の 殿 堂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展 株 式 會 社 水 豊 發 電 所 工 事 大 觀 土 建 文 化 社, 87면. 115) 현재 확인되는 수풍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군부의 지원 실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1)1937년 12월 1일 조선 군참모장 久 納 誠 一 이 육군차관 앞으로 발송한 전문에 따르면, 조선압록강수력발전은 공사용으로 건설이 다급한 평북철도(주)의 철도 자재(궤조) 취득과 관련해서 곤란하다는 입장에서 관계 방면에 대해 적당한 수배를 부탁하 였다. 같은 건과 관련해서 1937년 11월 1일 평북철도(주) 사장 野 口 遵 은 조선군사령관 小 磯 国 昭 앞으로 軌 條 入 用 證 明 御 願 을 발송해서 압록강 수력개발이 국가적 대사명의 대사업으로 주요 자재인 궤조의 획득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요청하였다. 朝 鮮 軍 參 謀 長 久 納 誠 一 (1937.12.1), 端 豊, 平 北 鐵 道 敷 設 軌 條 取 得 ニ 關 スル 件 照 會. 한편, (2)1938년 4월 7일 조선군참모장이 육군차관 앞으로 발송한 조선압록강수력전기(주)의 가솔린 기관차 수입의 건 에서 압록강수력발전(주)이 수풍발전소 건설 와중으로 건설용 자재 운반용 기관차를 필요로 하지만, 기관차 및 그 대용품이 일본 국내에서 재고품이 없기 때문에 수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관련해서 1938년 4월 6일 선만 압록강수력발전(주) 사장 野 口 는 小 磯 조선군사령관 앞으로 자재 운반용 10톤 기관차를 일본 加 藤 製 作 所 에 주문했지만, 일본 국내에서 엔진 재고품 및 대용품이 없어서 미국 부다회사로부터 H-326 가솔린엔진 3대(대당 수입가액 4만 2,600원)의 긴급 수입을 요청하였다, 朝 鮮 軍 參 謀 長 北 野 憲 造 (1938.4.7), 朝 鮮 鴨 綠 江 水 力 發 電 株 式 會 社 ノガソリン 機 關 車 輸 入 ノ 件. 116) 日 本 工 營 株 式 会 社 財 団 法 人 日 本 産 業 再 建 技 術 協 会 (1955), 朝 鮮 における 大 水 力 電 気 開 発 の 記 録, 9면. 117) 原 田 淸 司 (1942), 世 界 一 電 力 科 學 の 殿 堂 朝 鮮 滿 洲 鴨 綠 江 水 力 發 展 株 式 會 社 水 豊 發 電 所 工 事 大 觀 土 建 文 化 社, 78-102면. 118) 수풍댐 건설은 1940년 4월 間 組 의 조선인 사원이었던 朴 奎 成 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규성은 홍수가 假 堰 堤 를 溢 流 하는 威 勢, 타설 현장의 지프크레인의 威 容, 압록강을 횡단하는 공중 시멘트 운반삭도, 電 燈 의 夜 景, 매 일 변화하는 공사 진척은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는 것이다. 間 組 百 年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間 組 百 年 史 間 組 弘 報 部, 637면. 119) 間 組 百 年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間 組 百 年 史 間 組 弘 報 部, 640면. 120) 朝 鮮 電 氣 事 業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朝 鮮 電 氣 事 業 史 財 團 法 人 中 央 日 韓 協 會, 285-317면. -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