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년 9 월 저 11 권제 2 호 외무부부인회 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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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 않 證 1990. 9. l 축 사 / 5 방안에서의 여행 강인숙 제 1 권 제 2 호 6 선배닝을 모시고 톡 집 / 통일로가는독일 8 독일의 통일을 지쳐 보면서 성우인 10 독일은지금 민선홍 11 베를린장벽 소감 양정숙 13 신 게르만민족 대이동 황문숙 / 15 해여,조국의 해여 박명성 16 부인회소식 18 좌당: 엄지로떠나며 외교활동 // 23 뉴욕, 뉴욕, 뉴욕 마복자 25 우간다의 W. I.M.A. 김민선 27 이디오피아에서 2년반 정재욱 29 노래에 소망을 싣고 서정 애 년l 겸소묘 / 31 아프리카의 밤 김영희 32 어느바다이야기 한정숙 33 삶의 작은톱니바퀴 김정화 표지 김순자 1맹3년생 35 부다페스트의 붉은별 김연주 36 어머님을 그리며 유고에서 김경수 김승호주코트디브와르 38 카리프해의 흑진주 김성분 대사부인 중앙아프리카,불란서, 40 중동에서 있었던 일 한만숙 스웨덴에서생휠
{ 가족이야기 7 그;;t c:c: C그 - 기행문 58 42 모로코에 부는 태권도 바람 44 솔밭길 45 유치원에 보내며 46 수리남의 파란꿈 47 와싱턴의 아이들 7 57 꿀벌과별꿀 62 세계의 문화예술 64 67 70 72 풍물기 76 78 81 82 7 시리아유적 기행 Nevado del Ruiz 여행기 7 멕시코벽화 내가본고야의 작품 필리핀의 대냐무악단 인도의 종교와건축양식 7 미래의 나라 : 브라질 오만의 혼인잔치 사막나들이 일본,일본사람들 여승구 박애련 권오축 박성 이 조정주 흉혜선 김태숙 안계숙 백희영 장숙희 소 스 ι 여 박은주 유현자 김옥란 박회복 한덕순 84 만 화 송미숙 { 생활정보 7 85 강의 안내, Bridge 1쨌년 저 11 권 제 2호 발 행 : 1쨌년 9월 15일 발행인 : 외무부부인회 펀집인 : 이 우 겸 한돈자 이 경 애 성 우 인 발행소 외교안보연구원 인쇄소 (주)법 신 사 86 88 90 92 93 97 98 요 리 꽃꽂이 한복의 맹시 관저의 실내장식 Herbs at Home 쇼펑가이드 펀접후기 위공자 김성숙
i 離 }빼 鍵 뿔~N홈을 구싱힐1꼬계섭니까? L --. _---------- -----~ 톨흩홈S 뭔페톨톨-옳 중공업제품수출자금대출 대외경제협력자금대출. 기술용역수 출자금대출 수 출 보 험 해 외 투자자금대.::;:z:. 걱룰r 주요자원수입자금대출 해 외 투자정보제 二 묘 장훌훌 흩훌훌폐 出 윷홈 11 본 접 (15 0-010 1 서율특업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6-1 Y. P. O. BOX 641. T EL, 102 1784-102 1. 784-7071 TELEX,K26595 EX IM BK FAX, 102 1784-1030 부 신지점 600 0 12 부신직 힐시 중구 증앙동 2기 44 1 T EL ' (051) 245-3981 - 3 FAX, (051) 246-3810 굉주출질소 \50 0 030 1 굉주직 잉시 욱구 누운돌 138 TEL, 10621526-3851 - 2 FAX, 1062 1526-3850 해외사무소 뉴욕런던,도쿄, 0배언,로스언엠레스홍콩,신 EIO I'l,자치르티 파리
촉사 방안에서의 여행 강인숙 ( 건국대 교수, 문회부장관 부인) 방학이 되면 생활의 리듬을 바꾸기 위해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 다. 그런데 금년에는 방학이 되자마자 병이 났다. 일주일을 누워 보내는 한가한 신세가 된 것이다. 덕택에 외 교 燈 을 독파할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신열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씌어 있는 글들을 통해 나는 볼리비아에서 시작하여, 시에라리온, 파푸아 뉴기니, 중앙 아프라카, 와가두구, 피 지, 리비아등을 두루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의 풍물과 생활정보, 문화등을 그 글들을 통하여 익히면서 나는 외교관 부인들의 애환과 긍지를 함께 터득할 수 있었다. 외교관 부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외교관 부인에게는 봉급이 없다. 외교관 부인에게는 자유도 없다. 그 러면서 외 교관 부인은 해박한 지식을 지녀야 하고, 호스 테 스 에 걸맞는 우아함과 세련된 화술, 부지런함과 겸손함을 겸비해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은 또 숙련된 요리사여야 하며, 이사짐 꾸리기 선수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언서를 조건없이 받아들 이 는 착한 기독교인처럼 소리없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동해야 하는 남편의 뒤에 별책부록처럼 끼워져 옮겨 다녀야 하는 운명 속에서 그들은 때로는 카멜레온이 되어야 하며, 때로는 성자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거짓말장이가 되어야 한다.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가슴 밑바닥에 묻어 놓고 늘 환하게 웃는 얼굴을 지녀야 하는 그 생활의 곡예 속에서 버리기 연습에 숙달 되어야 하는 고달픈 여인 들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침체가 없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주한 일상 속 에서 그들은 온 세상 사람 다 만나는 행운을 누리며, 외지에 한국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역할에 긍지를 느끼고, 척박한 땅에 과일나무를 심는 기적을 행한다. 이따금 산타크로스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관광안내원이 되기도 하는 그 다양한 역할은 그들에게 정신적인 성장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외교 燈 의 매력은 절절한 체험이 지니는 현실감과, 소재의 다양함, 풍물소개와 문명비평, 생활 정보등을 고루 갖춘 내용의 풍요함에 있다. 이 여름에 내가 가장 큰 감동을 느끼며 읽은 이 잡지의 성장을 기원한다. 1990년 8월 5
선배님을 모시 고 최 영 준 7월 의 어 느날 오후 최영준선배넘(윤석헌 전 주 프랑스대사 부인)을 모시고 오랜 외교관생활의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윤석헌대사넘께서는 1954년에 외교관생활을 시작하시고 와싱톤, 본, 카이로 등지의 근무를 마치신 후, 필리핀, 프랑스,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셨다. 최영준선배께서는 1949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시고 Arneriæn Univer허ty대학원 과 Aædemie de la grande αjawlliere에 서 도 수학하셨다. 1974년 에 는 Le Salon des Artistes Francasis 展 에 서 은상을 수상하셨다. 선배넘께서는 5회의 개인전을 가지고 각종 단체전에 참가하시며 활동을 해 오셨다. 선배님과의 환담중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소양과 태도에 대한 지혜로운 충고가 많았기에 여기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외교관부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입니다. 독일근무 일년이 채 안되었을 때, 갑자기 카이로로 떠나라는 전화통보를 받고 카이로가 어디냐 고 물었어 요. 그러나 곧 또 하나의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내 앞에 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기쁜 마 음으로 갔어요. 그러 니 까 그곳 생활이 하나도 어렵지가 않더군요 시간을 아끼는 자세도 몽에 익혀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이 검소하고 부지 런 하지 않습니 까? 시간은 기계와 같이 잘들 지키며 바쁜 생활 중 에 서도 취 미 생 활이나 사회봉 사 에 시 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근변과 시간절제는 우리가 꼭 배울 점입니다 6
외교관의 아내는 남편과 더불어 주재국 사회에서의 비중이 높고 일상생활 그 자체가 외교활동 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의 일거일동이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인격과 교양을 쌓는데 부단 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젊은 후배들은 수준높은 교육과 생활환경의 향상으로 우리가 옛날 어렵던 시절, 해외생활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은 교양과 지식, 언어능력을 이미 다 갖 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경험을 쌓으세요. 집에서 자신있게 입고 나간 옷 이 막상 모임의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낄 때가 있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7" 그러나 자기가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견의 위험은 피해야 합니다. 각 지역사회는 각각의 특징이 있고 각 근무지에는 모두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경직된 사고를 경계하며 해외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상황에 유연성있게 대처하는 것은 현명한 외교관부인의 소양입니다. 매사에 신축성을 가지고 임하면 자연히 남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현명함도 몸에 배어서 해외생활 의 보배로운 존재가 됩니다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안에서 자기성취를 위해 노력하며 보람을 찾도록 하세요. 해외생활에서 때로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지요.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개발하여 노력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기평온을 찾을 수 있읍니다. 나의 경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어요. 아마 그림이 없었다면 어렵고 외로운 기간을 극복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펼요 했을 겁니다. 젊은 부인들이 남편의 내조자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성취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이런 후배들이 해외에서 우리나라의 얼굴로서 활동하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은 선배로서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변 큰 일을 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30년이 넘는 외교관부인의 생활을 대과없이 끝낼 수 있었다는데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힘에 겨울 정도로 쫓기듯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 다는 것에 후회없읍니다. 지금도 그 생활에 습관이 되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 하고는 미소지을 때가 있읍니다 7
통일로 가는 독일 온 민족이 성사되기를 열망하던 8.1 5의 남북 민족의 대 교류 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제의는 하나의 시작으로서 가까운 장래에 우리도 통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 주었 다. 같은 분단국으로서 익어가는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언젠가는 우 리도 같은 입장에 처하리라는 가정하에서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는 여러 콧의 시각을 여기에 모아 보았 다. 서울에서, 서독의 수도인 본에서, 그리고 베를린 현장의 우리 총영사관에서의 인상들이다. 독 일의 통일 을 지 켜 보면 서 성 우 인 1989년 11 월 9 일 자정을 기해서 베를린장벽이 붕 괴되었다. 세계의 이념적 분단을 상징하면서 두가지 가치체계의 대립을 지켜보던 28마일의 장벽이 하루 아침에 없어졌다. 세계역사의 커다란 지각변동이 바 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10 7~ 월. 지켜 보기에도 현기증이 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두개 의 독일은 통일을 향해 달리고 있 다. 독일국민 들 이 언 젠 가 라고 희망하던 통일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확연히 다가오고 있는 것 이 다. 흑자는 독일의 통일을 역사의 산물 이라고 평한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없었더라면, 동구의 변혁이 없었더라연 결코 오늘과 같은 통일은 기대할 수 없 을 것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던 역사의 선물 이라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건을 보 는 시각은 이것을 우연의 連 鎭 로 보는 견해와 정연 한 인과관계의 連 鎭 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因 果 性 을 무시하고 역 사에서 교훈을 얻기는 어렵다. 오 늘날 공산주의의 급격한 쇠락은 근본적으로 그 이념 8
이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다. 페레스트로이카 도 40여년간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한 결과, 고르바 초프와 소련국민이 선택할 수 밖에 대안이었다. 독일의 통일도 국제환경의 없었던 유일한 변화 속에서 역사의 흐름이 그 거대한 물꼬 리 를 틀 때 기회 를 놓 치지 않고 거머쉴 수 있는 준비를 꾸준히 해왔기 때 문이다. 통일을 위한 정치적인 기 반조성 은 20 여년 전 시작되었다. 1969 년 브란트 수상은 독일갱책 (벼lte뼈nd Politik) 과 동방정 책 ß )st Politik)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문제에 대해 우 리 자신 이 소극 적 이연 독일안 운명은 제삼자에 의해 정해진다 는 신념 을 가지고 통독을 상대로 한 독일정책 을 추진 하였다. 동독에 대한 원조를 통하여 상호개방을 촉구 하고 양독국민의 동질성유지를 위한 교류를 계속하 였다. 그 결과 1 972년에는 동 서독 기본조약을 체결 하여 상호 실체 를 인정하였다. 브란트 수상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 동독의 잔인한 공산정권에 합법성을 부 여한다는 세찬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정책은 장 기적으로 볼 때는 독일 통일과정 에서 동독국민의 지 지 를 얻는 결정적인 기반 을 조성하였 다. 대 외적으로 는 동방정책 을 통하여 동구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서 소 련의 거부권 행사없 이 동 서독이 나란히 유엔에 가 입할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독일의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은 미 영 불 소, 즉 세계 제 2차대전의 전승 4개국과 주변국 가들과의 관계개선 문제였다. 서독은 패 전 이후 중립 을 추구하지 않고 1950년대에 이미 북대서양조약기 구 (NA1D)와 구주공동체 (EC) 에 가입하였다. 서방측 과 정치 경제적으로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이들의 뿌 리깊은 대 게 르만민족에의 불신감을 무마하였다. 일의 통일논의가 시작된 후 서독은 NA1D의 일원으 로 계속 남을 것임을 천명하여 통일에 대한 서방측 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소련에 대해서는 이 천만의 동독인을 적으로 잡고 있는 것보다는 팔천만의 독일 인을 친구로 갖는 것이 낫다 는 논리와 경제협력으로 독 통일에 대 한 동의를 확보하 였다. 그러나 독일 의 통일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지 난 40여년간 쌓아올린 막강한 경제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독의 경제력은 지 금 수천억 달라에 이른 다는 막대한 통일비용 을 감당하고도 다시 소련 에게 통일을 묵인하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실 력이다. 지난 3월의 동독총선에서 기민당을 중심으로 한 독일동맹이 가장 신속한 통일방법인 서 독 에의 흡 수통합방식을 내세움으로써 동독국민의 압도적인 지 지를 받았다. 이것도 사실 동독과 서독화폐의 等 價 교 환을 약속한 서독 콜총리의 승리이자 서독 마르크 貨 의 승리였다. 이제 독일의 통일열차는 10월이변 종착역에 도착 한 다. 지난 45년간 세계 를 지배하던 냉전체제가 무너 지고 세계질서가 재편되려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독 일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고 세계질서의 재편을 선도하고 있다. 같은 상황에 있던 분단국으로써 독일 의 통일을 지켜보는 우리는 독일과 다른 우리의 처 지를 한탄하고, 문을 꼭 잠그고 있는 북한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남북한 간에는 동 서독 과 달리 6. 25라는 뼈아픈 동족상잔의 전쟁 이 있었고 단절된 상태에서 상호불신의 골 이 갚 이 패 어져 있 다. 그러나 독일민족보다 결코 약하지 않 은 웅집력을 가진 한민족이 이런 불신의 벽을 제거하지 못할 리 없다. 미래를 향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꾸준한 노 력을 계속한다면 우리에게도 언젠가 하는 통일 의 날 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 다. 註 :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J, Zbigniew Brzezinski 의 rthe Grand Fai lure : the Birth and the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rury J, Ti m e 誌 및 일간신문등을 참조. 1951 년생 이준희 서구1 과장부인 캐나다, 우루과이, 네덜란드에서 생훨 9
독일은 지금 민 선 흥 지난 3월 5일 우리가 서독대사로-부임하기 위해 켈 른-본 (Köln-Bonn) 비행장에 도착한 날은 갯빛하늘에 서 막 비가 쏟아질것 같은 유럽특유의 음산한 날씨 였다. 중세기의 아름다운 성들이 우뚝 솟아 있고 저 아 래 멀리 내려다 보이는 라인강(Rhine) 의 긴 물줄기를 따라 나무창살문 많은 삼각지붕의 예쁜 집들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다. 그러나 한 순간 평온해 보이는 이 도시 이 땅에선 지금 통독이라는 역사적인 대과엽이 진행 되고 있고 나는 바로 그 현장에 와 있구나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며 긴장감이 돈다. 이곳에 와서 몇달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나는 벌 써 그들에게서 우리와는 다른 변을 많이 볼 수 있었 다.준법정신,정직,상호신뢰감,정확성,검소,절약 등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살아온 그들의 사회는 훨 씬 밝고 질서가 잡혀 있다. 그리고 지금 독일인들은 조금도 들떠 있지 않고 차분하게 냉철한 눈으로 현 실을 지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신뢰 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나라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의 의사를 토대로 정책을 세워 실행에 옮기며 지금은 국민과 정부가 모두 일심통체가 되어 통일로의 대로 를 굳건히 행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그들은 40여년 동안이나 이념과 체제 가 달랐던 분리된 국가가 하나로 합치는 힘겨운 과 정을 이처럼 놀라운 속도로 밟아 나가고 있을까? 나 는 나름대로 그 요인들을 생각해본다. 첫째로 1989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동서국가 간 의 냉전 대립상태가 화해무드로 바뀌고 헝가리를 위 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다른 대혁명을 가져 오게 한 국제정세 변화를 들 수 있다. 두번 째로는 공산체 제를 배격하고 자유와 평등을 외쳐대며 마침내 베를 린장벽을 무너뜨리고 만 동독시민들의 총봉기, 그리고 세번 째로는 서독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더불 어 막강한 경제력으로 통독에 대해 꾸준한 경제원조 를 하면서 인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민족상호간의 동질성을 유지해 오도록 노력해온 점 들을 들 수 있 다. 이러한 중요 요인들 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통 독을 주도해온 헬무드 콜 서독 수상과 독일인들의 게르만 민족론 이다. 콜수상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통일의 적기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탁월한 정치감 각을 기초로 한 정책과 통일과정의 일정표를 세우고 강한 의지로 이를 밀어 나가고 있다. 자세한 통독일 정을 되풀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는 제 일차적으로 중요했던 통화통합을 7월 1 일 실시하고 완전 자유왕 래를 실시 하였다. 이제 이차적인 정치통합의 마무리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던 독일의 나 토가입 문제도 지난 7월 16 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 통령과의 회담에서 그의 전격적인 수락을 얻어 냄으 로써 이제 그의 각본대로 통독의 연내실현이 눈 앞 에 다가온 것 이 다 ímr. Germany J 란 타이 틀과 함 께 지난 7월달 rtrrnej 표지를 장식한 그의 얼굴은 새로운 유럽사회를 이끌어 갈 독일 재상으로서의 당 당하고 권위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항상 중간계충 의 보통사람 임을 강조하는 콜수상은 통독의 모든 성공적 수행은 오로지 어려운 현실에 슬기롭게 대처 해 나갈 줄 아는 독일인 스스로가 이룩한 것 이라고 그 공을 국민에게 돌리고 있다. 통화통합후 물밀듯 밀려 들어온 서독 상품들이 진열된 상점 앞에서 부 러운 눈으로 바라 보면서도 사재기 를 억제하고 있 는 동독인들의 모습이 TV 화변에 나올 때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플레를 방지하고 오히려 마르크화의 강세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우리 10
도 같은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 라에서 만연되고 있는 호화결혼식, 외제선호 등의 나 날이 더 심해져가는 사치풍조가 우리 를 주시 하고 있는 외국인들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추어질까? 나 는 통일성 취 를 가져오게 한 많은 요인 들 가운데서도 통일에 임하는 독일인들의 자세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 본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몇 번이고 강 조 하고싶다. 1933년생 신동원주서독대사부인 영국,일본,미국, 멕시쿄,인도에서 생휠 베를린 장벽 소감 양 정 숙 독일 통일 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각자가 다르 리라. 더러는 찬양과 더불 어 우려의 표명 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럴 수 가 있는 것일까고 놀랄 것이고, 나와 같 이 분단국에 서 온 사람 은 허물어져 가고 있는 베 를린 담장 앞에 서 조국의 38션을 떠올리게 되곤 한다. 두터운 콩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였던 베 를 린에 온 지 2년 여 만에 말끔히 헐려진 브란멘부르그문 앞을 가연 언제 이곳에 담장이 있었던가 싶다. 불과 수개 월 전 만해도 브란덴부르그문 앞은 마치 채석장과 같았다. 괴상한 그림들로 뒤덮힌 그 벽돌담을 깨어 역사의 증거물로 간직하려는 관광객들과 그 역사의 조각 을 깨어 잇속을 취하려는 장삿꾼들의 쇠망치 소 리, 그리고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려는 신사숙녀 들의 부산한 웅직임 등은 마치 인류전체가 이념과 주의를 깨뜨리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 다연 지나친 표 현일까. 사람들이 베를린 을 붉은 바다 위에 떠있는 외로 운 섬 이라고들 표현한다. 섬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다가 아닌 벽돌담과 철조망으로 둘 러싸였다는 차 이라고나 할까.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답답하게하 던 베 를린장벽은 동서독간의 어느 국경, 아니 세계의 어느 국경보다 더 많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럴것이, 2차대전의 장본인인 히틀러의 수 도이자, 파리의 4배가 된다는 거대한 베를린이며 세계의 수 도로선 가장 물과 숲이 많은 아름답고 전원적인 도 시 임은 물론 4대 전승국들의 군화소리가 드높던 점 령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 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역시 이 도시의 심장 을 꿰뚫어 놓았던 그 시멘 트 담장이리라. 그 비 극의 장 벽은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서 감수해야 했던 대가이 기도하다. 그러 나, 바로 그 이념과 주의의 산물인 장 벽이 정치가, 예술가, 관광객 등 수 없는 사람들의 발 길을 끌었고, 그들의 마음을 그려내 는 붓끝은 우중충 베를린시 11
한 담장을 기괴한 그림으로 단장했다. 만약 그 담장 이 없었더라면, 통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지금과 는 달랐을 것이며, 이념과 주의의 개념이 나의 피부 에 이처럼 절실히 와닿지 않았을 것 이란 생각도 든 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하면, 베를린담장은 통독의 주역이자, 여러 모로 베 를린 시민 들의 비운에 큰 보상 을 한 셈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 나라 통일 의 밑거름은 베를린장벽이나 행운같은 것이 아니라 독일국민의 성실성, 실질성, 준법정신 그것이라 믿어 진다. 그곳 사람들은 수퍼마켈을 가는 남녀 노소치고 나 처럼 지갑만 달랑 들고 가는 사람을 보기 드물다. 바구니, 비닐봉지 등등 옛날 우리가 시장갈 때의 모 습과 같다. 우리 돈으로 40원 정 도하는 비 닐봉지 값을 아끼고자 함은 물론이고, 그 많은 비닐공해 를 다소나 마 줄 이 기 위한 그 시민 정신, 하우스 만 (아내역할의 남편)이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의 체면아닌 실질 성, 자전거 길까지 따로 만들어 놓고 어김없이 지키는 그 준법정신 은 내게는 불편하기도 하고 감탄스럽기 까지 하다. 우리나라처럼 반세기라는 긴 세월의 분단 상태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라는 러시아단어가 채 나 의 귀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통일 을 이루는 이 민족 은 참으로 기이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독에서의 아슬아슬한 평화적 시위가 일어난게 어제 같고, 풍선을 타고 동독을 탈줄해 오던 한 의사가 풍선이 가로수에 걸려 죽었다는 소문을 들 은지 잊그 제 같은데 벌써 오늘은 통일이다. 누가 붙들새라. 셋 트기같이 빠르게, 구렁이 담넘어 가듯 매끄럽다. 나라사랑은 일상생활의 일부이며, 그 이상도 그 이 하도 아니 라는 듯, 누구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함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 이라도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인이라는 관념과 자부 심 또한 대 단하다. 더 대단한 것은 분수에 맞게 살 줄 아는 검소하고도 검소한 민족이란 점이다. 이들은 통 일, 통일, 애국, 애국을 외치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윗쪽을 쳐다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앞만 보고 사는 민족이란 생각도 해본다. 베를린은 우리에게 전쟁의 아픔 을 상기시키는 역 사의 현장이다. 그것의 첫 째는 도시 중앙의 장벽이 고, 둘째는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는 부서진 교회이 고, 셋째는 구 베를린역이라고 할 수 있다. 허물고 다 시 짓지않는 이유는 후손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보여 준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역사의 소중함과 두려움 을 아는 민족이라 여겨진다. 나무와 물이 감싸고 있 는 베를린시를 2차대전이 계속되고 있는 곳 이 라 농 아닌 농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은 최 전선 이라고 표현하는 동서이념의 주둔꾼들 대결장이 다. 그러나, 이 민족은 이념과 주의의 노예이기 이 전 에 빵보다는 자유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전쟁을 치 룸 으로써, 이념의 장벽을 넘겨다 봄으로써 몸으로 체험 해 왔을 것이다. 우리의 동족상잔은 세월과 더불어 잊혀져 가지만, 이곳은 전쟁의 흔적을 보존함은 물론 장벽으로 인한 끊임없는 희비극이 일어나 왔고 또 일어나고 있다. 이 들은 재 결합 이 라는, 남들이 더 흥분하는 거 대 한 케엌을 바로 코 앞에 놓고도 더없이 조용하다. 브 란 멘 부르그문 양쪽담장이 헐리던 날의 열광을 씻은 듯 잊었는지 모두의 마음은 일상으 로 돌아간지 오 래 이고 다 된 케엌 장식 생각에 신명이 나고 있을 헬 무트 콜 수상만 더없이 바빠 보인다. 반년 전과 다 른 점이 있다변 동독인들의 서베를린으로의 나들이 다. 시가지가 붐비고, 값이 약간 저렴한 알 디 가게 앞에 참을성 있게 줄서 있는 동독사람들, 메 르쩨 데 쓰 크란쓰 라고 베 를린 시민 들이 명명한 귀엽게 생긴 동 독차들로 체증이 일어난 도로뿐이다. 기이 한 민 족임 에는 틀림이 없는 것같다. 의 자유를 찾아 탈출해 오던 수 많은 동독 젊은이 들 희생과 성실하고 검소하며 준법정신 투철한 이 민족의 저력이 통 일에의 길을 닦았다고 믿으며, 통일 을 과제 로 안고 있는 나라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 러움과 더불어 찬사를 보내고 싶다. 1쨌년생 박동규 주 베를린 층영사 부인 오스트리아, 자이르, 희 랍, 말레이지이에서 생활 12
신 게르만 족 대이동 화 스 WEST GERMANY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의 동 서독 끊임 없는 행 렬을 다루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엄마, 서독으로 탈출하 는 동독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고등학교 일학년에 다니는 아이의 느닷없는 물음 에 왜?"하고 나는 의아해 했다. 아빠는 항상 너희 들은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버 리 고 떠나잖아요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람 은 누 구나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는데 그곳에선 그렇지 못하니까 그렇겠지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기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 되잖아요?" 우리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듯이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아이에게 어 떻게 설명을 해 줘야하나. 우리 나라도 남북으로 갈라진 뒤 공산 치하의 억 압에 못이겨 월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그들은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정든 고향을 떠나온 사람 들이야. 동독 사람들도 인간답게 살고 싶어 그런단 다 베를린 장벽 붕괴 홍미와 스렬을 갖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지켜보 던 어느날, 정확히 말해 작년 11월9일은 세상 사람들 을 환호와 탄성으로 몰아넣은 기사가 신문 1 면톱을 커다렇게 장식했다. 세상에, 어쩌면!" 감탄만 할 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 위에서 삼페인을 터뜨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은 나의 가슴 을 뭉클하게 했다. 625 이후 남북분단이 완전 고착된지 벌써 40년이 된 우리나라. 독일과는 같은 분단국의 슬픔을 함께 하는 동병상린으로 한가닥 위안을 받고있던 터였는 데 이제 저들은 통합으로 가는 첫 관문인 벽을 허문 것이다. 우리의 삼팔선도 저들처럼 언젠가 없어질 날이 올 까하는 기대와 회의가 교차되었다. 나는 독일에 있을 때 가본 베를린 장벽을 떠 올렸 다. 당시 서베를린 하면 괜히 두렵고 불안한 곳으로 여겨졌었다. 지도를 펴 보면 동독땅 가운데 동그라니 떠 있는 조그만 섬과 같은 도시. 그곳을 가려면 자동차를 타 고 논스톱으로 동독 영토를 지나야 했다. 13
처음 우리가 서독 국경을 벗어 날 때는 동독으로 향하는 서독 자통차들 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그 많던 서독 자동차들은 다 어디로 빠 졌는지 보이지 않고 낡고 허술한 동독 자동차들만 스쳐 갈 뿐이었다. 적지에 홀 로 있다는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일어났 다. 어쩌다 간혹 서독 자동차를 보면 왜 그렇게 반 갑던지 우리는 혹시 길을 잘못 든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도로 표지판과 지도를 몇 번이 고 확인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이는 우리가 서베를린으로 나가 는 길을 지나쳐 온 건 아니겠지? "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요 하면서도 나는 내심 초조 하고 불안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처 만 치에 서베를린 이란 표지 판이 눈 속에 들어왔다. 여보, 저기 봐요. 서베를린 이 나왔어요! "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쳤 다. 그것은 우 리에겐 구원의 등불과도 같았다. 이념과 체제가 다 른 사회 가 우리 에 게 준 경험을 톡톡히 한 셈이다. 거 대 한 동독땅에 비 하면 해변의 한줌 모래알 같은 도시 서베를린.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상정으로 고고 하게 빛나고 있었다. 형언할수 없는 감동을 지닌 채 우 리 는 먼저 베 를 린 장 벽 으로 향했다. 장벽 앞에는 여 러 분은 지금 동 베를린과의 경계 앞에 서 있습니다.J라는 뱃말이 우 리의 주의를 끌었다.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인들을 막 기 위하여 1961 년 동독측에 서 축조했다는 베 를린 장벽. 그 장벽 이 축조된 이 래 70여명의 동독 주 민이 장벽넘어 서독으 로 탈주 하려다 숨 져 갔다. 그 중에는 탈주도중 동독 경비병에게 들켜 총 에 맞아 쓰 러 져 간 어 린 소년 의 슬픈 얘 기와, 건물 밑 땅을 파서 탈출 하려다 숨진 사 람의 안타까운 얘기 등 수많은 사 연들 이 우리의 마 음 을 아프 게 했다. 자유가 무엇 이 길래 그들은 그렇게 귀중한 목숨과 바꾸어야 했나? 새삼스 럽 게 경건 하고 엄 숙한 마음으 로 고개 를 숙 였다. 그런 한 사연들을 간직한 채 30년 을 버려 오던 장벽이 이제 무너 졌 다니 먼저 간 이 들 의 영혼을 어떻 게 위로해 줘야 하나?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서 독과 동독은 통합작업을 숨가쁘게 추진해 왔다.7월 l 일부터 兩 獨 의 경 제 사회 통합이 정식으로 발효되었고 1 2월 중순경엔 총선을 치러서 정치적인 통합을 한다고 한다. 외견상 그들의 통합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 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통구에 울밀듯이 밀려온 민 주화 물결의 소산 이 다. 그러나 서독은 벌써 20년 전 부터 통일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동독과의 상호교류 를 서서히 시작해 왔다. 1 969년 서독은 당시 社 民 黨 의 브란트 수상의 동방 정책의 일환으로 상호방문교류와 경제협력 등을 추 진했다. 그리하여 1972년 동독과의 상호교류를 골자 로 한 兩 獨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초청장을 가진 서독주민은 30 일 이내에 동독을 자유롭 게 여행할 수 있었고 6 5세 이상의 연금대상자와 서독내의 직계가 족에 긴요한 용무가 있을 때는 동독주민도 서독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후 1982년 야당인 基 民 黨 이 집권을 한 후에도 동방정책은 계속되었다. 서독은 경제적인 부강을 바탕으로 동독에 경제적 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對 동독 무 역특혜 조치로 관세장벽철폐, 동서독 여객기 전면 운항합의, 양독 정 상회담 개최등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한 兩 獨 의 움직임 에, 여타 유럽 국가들은 일말의 불안감 을 가지면서도 독일이 통합 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 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우월성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 고 있는 그틀은 합 리 적이고 실질적인 사고방식의 바 탕위에,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마침내 통합이라는 열매를 얻은 것이다. 아! 우리에게도 빨리 그런날 이 왔으면! 그래서 고 등학교 다니는 두째 아이에게도 명확하고 귀 중한 해 답을 줄 수 있기를. 1947년생 권영민 청와대 의전 비서관 부인 오스트리아 독일, 요르단에 서 생훨 14
해여, 祖 國 의 해여 북미대륙에 5년 구라파에 3년 바 며 서 --, c그 c> 조국의 해를 못 보는 복역수 ( 服 投 因 ) 로 살다보니 가뜩이나 근시인 눈에 잘 보이는 것 아무것도 없구나. 자주 흐린 하늘 아래 부슬비 듣고, 피어오르는 안개 속 에 전설처럼 도사린 고성 ( 古 城 ) 은 있어도 조국의 해 없는 곳에선 나는 언제나 나그네일 수 밖에 고아일 수 밖에 해여, 조국 의 해여! 영예롭고 찬란하고 자유로운 해여! 절제하고 육성하고 또 포용하는 해여! 나는 네 품에서 사물을 본다. 네 품에서 사랑받고 사랑을 주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한다. 네 품에서 웃고 울고, 노래하고 춤춘다. 해여, 조국의 해여! 어서 내 수의( 因 衣 )를 찢어 다오. 그리곤 푸르디 푸른 조국의 하늘로 발가숭 이 내 알폼을 데려 다가 네 해빛 속에 잠기게 해다오. 눈부신 빛의 포망( 補 網 )에 아주 나를 얽어서 다시는 나들이도 못 나가게 잡아다오, 붙잡아 다오. - 독일에서- 남흥우 대사부인 미국, 독일, 시에라리온, 후쿠오카가나에서생활 15
부인 회 소식 외교 燈 창간호 발간 외무부 및 주재관 부인들의 글 을 모은 간행물인 외교 燈 이 오 래 동안의 준비 끝에 1990년 3월 1 일자로 2,000부가 발간 되 었다. 원고 모집에서부터 편집 삽화 표지등의 모든 작업 이 부인들의 솜씨였기 에 이 잡지의 발행을 특 히 뜻갚은 일이 라고 생 각한다. 합실 어린이 집 방문 외무부 부인회는 시청의 부녀 복지과의 추천을 받아 합실 어 린이 집 을 방문하고 부모와 자 녀들, 보육원 직원들을 격려하였 다. 이 행사는 5월 가정의 달 에 불우 이웃을 돕는 행사의 일환으 로 이루어졌다. 부인회에서는 자모용 유아용 교직원용 티셔츠 200점을 준비하 외교관부인 애환담은 회지 외 교 燈 발간 외무부부 인회 회 장 金 千 銘 씨 (53. 崔 浩 中 외 무장관부인 ) 는 최근 회 원들의 글을 한데 모아 외교 燈 이 라는 회지 를 발간했다. 우리 회원들은 외 교관의 아내 로서 해외에 근무하는 동안 겪었 던 애환 이 나, 자녀교육 문제들을 서로 털 어 놓다가 우리들이 겪었 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후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게 된 겁니다.JJ 이 회지는 4 x 6배판형, 7 5쪽으 로 외교관 아내로서의 역할 각국의 풍물기 등 이 실려 있다. 주간조선기사 내용 고 각 가정에서 수집한 완구등을 선물로 전달했다. 합실 어린이 집 은 저소득층 거주지역에 있는 서울시 산하 탁 아원 중에서 규모가 영세한 곳으 로 맞벌이 부부들의 어린 자녀들 을 맡아 돌보아 주고 있다. 효택 보훈 병원 위문 및 봉사활동 본부의 심의관급 이상 간부 부 인들은 1 986년 5월 이래 한국 보 훈 병원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다. 1 2월과 1 월, 7월과 8월을 제외한 8개월 동안 매월 셋째 월요일 마다 모여 입원 가 료중인 애국지사 및 상이군경등 국가 유공자를 위로하고 병원 내 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 한 것 이 그 목적이다. 자선 실내악 연주회 1990년 5월 3 일 오후 외 무부 장관 공관에서는 강영훈 국무총 랴 부 인 을 비롯하여 국무위원 부 인들, 주 한 외교사절 부인등 200 여명을 초청하여 자선 실내악 연 주회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16
이 연주회를 위하여 피아노에 박지혜씨(이기주 경제 차관보 부 인) 바이올린에 김경민 교 수(서 울 예고와 경희대 강사), 플루트 에 김대원씨(뼈S 교향악단 수석 연주자 )가 수고하셨다. 오랫만에 있었던 실내악 연주회이었기에 청중들의 반응은 좋았으며 연주 후에는 다과를 즐기며 즐거운 교 제시간을 가졌다. 이화 여대 방문 외무부 간부 부인들은 1990년 6월 15 일 이화여대의 김옥길 이 사장의 초청을 받아 동 대학을 방뮤하였다. 이화여대는 외무부직 원 자녀들이 가장 많이 재학하고 있는 대학이다. 일행은 정의숙총 장을 예방하여 외무부직원 자녀 들에게 보내주는 후의에 감사 를 드렸다. 현대 시설로 새로이 완공된 도서관과 박물관 및 도예 실을 견학하였다. 특히 김옥길 이사장을 방문했 을 때는 이사장님댁의 소문난 냉 면과 빈대떡을 준비하시어 큰 잔 치를 베풀어 주시고 격려의 말씀 을 해주셨다. 직원 자녀들을 위한 오찬 외무부직원 자녀들을 위한 오 찬이 1990년 7월 26 일 정오 외무 부부인회 주최 로 한남동 공관에 서 있었다. 이 오찬회에는 기숙사 생 26명과 사감선생님, 그리고 본 부근무 직원들의 대학생 자녀 46 명 및 간부부인들이 참석하였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이 행사에 올해는 대학원생과 군대 에 복무중인 자녀들도 참석하여 더욱 즐거운 모임이 되었다. 최호중장관 부인은 특히 방학 중에 부모님들께 가지 않고 서울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부 를 계속하는 기숙사생들을 따뜻 이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이런 정례적인 행사 가 발전하여 서로간에 친목을 다 질 수 있는 모임으로 정착되기를 희망하였다. 17
c.1- I그 임지로 떠나며 정들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살림살 이 를 꾸려 생소한 곳으로 움직이는 작업을 몇차례나 해야하는지 막연한 가운데, 피곤하고 힘들어도 우리들은 사명감을 갖고 훌훌 털고 일어난다. 외교관은 자기가 있는 곳이 자기나라 영토 라는 생각을 갖지 않으변 영원히 집도 절도 없는 떠돌 이 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곳으로 우리의 할 일을 찾아 용감하게 떠난다. 때 : 1990년 6월 18일 콧 : 외무부장관공판 참석자 : 서 복 자 유종하 외무부차관 부인 미국, 영국, 수단, 벨기에에서 생활 김 용 규 노영찬주프랑스대사부인 멕시코, 프랑스, 세네갈, 샌프란시스코, 포르투갈에서 생활 조 성 권 김좌수 주 불가리아대사 부인 로마교황청, 태국에서 생활 정 윤 자 선준영 주 체코슬로바키아대사 부인 미국, 이란, 영국, 브라질, 제네바에서 생활 이 은 주 박동순 주 카이로 총영사 부인 스웨덴, 쿠웨이트, 오스트리아, 요르단에서 생활 이 정 희 권영순 주 몽고 대사 부인 멕시코, 아르헨티나, 제네 바, 베네주엘라, 파라과이에서 생활. 이 경 희 김항경 주 미얀마대사 부인 아가나, 뉴욕에서 생활 18
각자 다른 각오로 준비 알려져 있지만, 이번에 처음 수교되는 몽고, 체코슬 로바키아, 불가리아등에 대해서는 궁금한 점이 많군 요. 서복자 : 바쁘신 중에 시간을 내주 셔서 감사합니다. 해외근무에는 부임전 이사준비로부터 임지에서 정착 및 활동할 때까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지요. 특히 북방외교의 결실에 따라 창 설공관에 가시는 분들은 보람도 크시겠지만 걱정도 많이 되실 줄 압니다. 우선, 부임 전의 마음가짐과 이사준비에 관한 이야기 부터 나누 어 보기로 할까요? 김용규 : 파리에 참사관을 거쳐 대사직으로 다시 가 게되니 기쁘기도 하고 감흥이 새롭습니다. 발령을 받 게되면, 새 근무지의 사회 문화 생활정보부터 수집하 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저는 그런 수고는 던 셈이라 고나 할까요? 이정희 : 몽고하면, 텐트속에서 생활하며 광활한 초원 을 말을 타고 달리는 정기스칸을 상상하게 되지요. 몽고는 세계에서 오직 소련하고만 교류를 했던 고립 된 나라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근무한 임지가운데 가 장 미지의 냐라이지요. 우선 기후만 보더라도 영하 40' -50 'c에서 영상 40' -5Q'c 를 오르내린다니 모두 힘든 근무지라고 해요. 그러나 우리 내외는 취향이 여 행을 하면서도 남이 다 가는 아스팔트 길보다 포장 안된 좁은 시골 길을 즐기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면 흙이건, 풀밭이건 그것이 바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에 우선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몽고는 인종적, 문 화적으로 우리와 흡사한 갚은 관계가 있는 곳 아니 겠어요. 국립 박물관에서 몽고 다라니경 특별 전시회를 보니, 관심을 갖고 유물들을 수집하다보면 우리가 잊 고 있던 우리 문화의 소박한 원형을 몽고에서 발견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은주 : 저도 지난 번 임지인 요르단에 이어, 같은 아랍문화권인 카이로에 가게 되어서 생소하지는 않습 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적극적으로 사람을 많이 사귀 면서, 모든 일에 능동적인 자세로 행동하면 그런 대 로 성공적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요르단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중동여성이면서도 매우 활동적 이고 진취적이었어요. 이집트 여성들도 비 슷하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김용규 : 카이로에 여행을 가보니 고대의 피라미드와 초현대적인 호텔들이 공존했습니다. 거리에는 벤츠가 다니는가 하면, 마차, 자전거가 다니고, 여성들도 활 기차게 보였습 니다. 불란서, 이집트등은 비교적 잘 조성권 : 불가리아도 우리나라와 처음 수교관계를 맺어 생소한 나 라이지만 지리적으로 그리스, 이 태리와 가깝고, 유럽문화권 에 있 는 나라이므로 크게 서투르리라고 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 막 급격한 개혁을 시작한 사회주 의 국가로 사회적인 안정을 이루어 가기 전에 넘어야 할 수 많은 고비가 있을텐데 이런 어려운 점을 어떻 게 잘 해결해 나가려는지 호기심도 있고, 걱정도 되 어 불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세계 정세의 추세로 보아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19
정윤자 : 1968년 프라하의 봄 이래 체코슬로바키아는 의 외교활동 지원 외에 공관식구들간의 인화단결을 민주화의 기초를 꾸준히 닦아온 나라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것도 싫어한다 는군요. 작년도에 우리나라와의 교역량이 일억 불이 된다는데 자동차, 가전제품 같은 소비재를 수입하고, 방직기계, 공작기계 같은 고도산업기술을 수출한 사 실로보아 2차대전 전세계 10대 공업국으로서 아직도 탄탄한 저력이 있나 봅니다. 체코의 문화는 드보르작, 스메타나의 음악 뿐아니라, 현재 체코 대통령 하벨이 쓴 청중 이라는 연극이 우리 대학로에 소개되었고, 보헤미안 크리스탈도 시내 백화점에 많이 진열되었 더군요.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의 제약을 벗고, 각 분 야에서 도약하려는 순간인 이 때에 현장의 목격자로 처음 부임하게 되어 큰 의의를 느낌니다. 돕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요. 김용규 : 특별히 부인들 간의 인화 단결이 공관 분위기에 좋은 영향 을 주지요. 집안에서 남자마음이 편해야 밖에서 의욕적이 될 수 있 다는 사실이지요. 대사부인은 직 원 부인들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작 은 공관에서는 직원들과 부인들의 성격까지도 다 파 악되지만, 수십명씩 있는 공관에서는 일일이 살필 수 가 없어 안타까울 때가 있지요. 이경희 : 우리나라 신문에 未 決 의 나라라고 특집기 사로서 실렬 만큼 미얀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아웅산의 참사로 인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버마, 랑군 이란 친숙한 이름 대신, 미얀마, 양곤이라고 부르니 오히려 먼 나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미얀 마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모델로 배워서, 오랜 사회 주의 결과로 나타난 궁핍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 고 있다고 들었어요. 우리와 경제분야의 교류가 확대 될 전망이랍니다. 그곳은 심오한 불교문화를 간직하 고 있어서 그 분야를 공부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 습니다. 서복자 : 큰 공관에서 개인적인 관심과 접촉은 오히 려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 전체 부 인회를 조직하여 활용하면 서로서로 폭 넓게 알 수 있으니까요. 부인회에서 새로 부임해 오는 가족을 위 해 어떻게 도와줄까 알아보기도 하고, 미리 김치라도 준비해 주변 좋지 않겠어요? 집안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쁨을 나누고, 우환이 있을 때는 서로 위로 하면서 상부상조하고 지낼 수가 있지요. 때에 따라 서, 친분있는 교수나 음악인을 초빙하여 그 나라의 예술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연 부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좋은 기회도 된답니다. 이경희 : 제가 전에 해외에서 모시던 어떤 선배님은 부인회의 역할과활용 서복자 : 대사부인의 역할중에서 중요한 것이 대사넘 늘 남들만 대접하지 말고 반대로 근사한 대접을 한 번 받아보라고 하시며 매 달 일류 식당에서 점심을 사 주셨는데, 오래 기 억에 남습 니 다. 그런 기회를 통 해 용기도 얻고, 견문도 넓히는 기회가 되었어요. 20
조성권 : 회원의 수가 많으면 그런 점심모임을 갖기 관에서는 비품관리에 신경쓰이는 일이 많이 있지요. 는 힘들겠어요. 집집 마다 돌아가면서 간단히 티 모임 그릇은 많은 것 같은데 막상 쓸 수 있는 그룻은 모 으로 해도 좋겠지요. 부인들 의 살림솜씨, 어요. 자연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성격까지도 짐작하게 되지 않겠 자란다거나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을 때 가 많지요. 국산품을 쓰는 경우는 부족한 부분을 신속하게 공급 해 주는 부서가 외무부 내에 있었으면 해요. 남자가 하기 어려운 일이니 가능하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은주 : 잘못하면 시어머니가 며느 라 살림 점검하는것이라 생각할수 도 있겠으나, 아마도 젊은 사람들 은퇴한 부인들이 관리한다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 지 않을까요. 필요하면서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어려운 문제이지요. 사는 모습에서 배우는 점이 더 많 을테 니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김용규 : 그래서 현지에서 구입할 때 예산이 빠듯해 해요. 틀림없 이 기말한 아이디어들을 도 반드시 몇 개의 여유분을 두고 비품을 사야 해요. 서로 나누며, 음식이나 살림에도 디너세트나 크리스탈 잔의 패턴은 계속 생산되는 것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은 데요. 인 지 확인한 후에 구입하기로 하고, 그 이름과 구입 장소등은 기록으로 반드시 남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해요. 처는 그 기록이 없 어서, 같은 무늬 잔 한개를 정윤자 :제 경우에 부인회의 활발한 활동은 근무지 의 추억 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답니 다. 찾기 위해, 시내 상점을 샅샅이 뒤진 적이 있지요. 겨 우 구입한 상점을 찾았는데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서복자 : 그렇습니다. 처음 겪는 해외생활에서 언어 패턴이라고 해서 낭패한 적이 있었답니다. 문제라든가 소심한 성격때문에 부끄러워 하던 부인 들도 여러 모임을 갖고 권유하연 대개는 안정감을 찾고, 소극적이던 사람이 오히려 인환단결에 큰 몫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부인회 활동이 궤도에 오르 면 대사부인은 누구든지 와서 마음을 열어놓고 의논할 수 있도록 하고, 불편한 점은 참작하여 공평한 판단 으로 조정해 주변 좋지요. 목사나 신부의 역할과 비 슷하다고나 할까요. 서복자 : 관저에 쓰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그릇 이 많 을 때, 따로 장부를 만들어서 공사나 직원들 집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계속 그 비품은 후임자들에 게 인계하는 방식으로 정리하면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정윤자 :발령받으면 실질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 생활정보 등을 알 아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가정부문제는 현실적으로 대사부 현명한공관살림 이정희 : 신설공관은 문제 가 좀 다 르 겠지만, 기존 공 인에게 어느 의미에서는 제일 큰 일 인 것 같아요. 가정부의 자질문 제, 임금문제등 어려운 점이 많지 않습니까? 21
조성권 : 사실 가정부의 자질과 임금문제는 점점 더 는로마사람처럼 이란 말은 정 말 우리 들 이 동감하게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 실입니다. 케이크나 디저트 되 지 요. 등의 요 리 법을 아는 고급기술의 요리사를 구하기는 커 녕 한국요리라도 잘 할 줄 아는 가정부를 구하는 일도 쉽지않게 되었습니다. 또 대부분 허락된 한 사 서복자 : 특히 청소나 정원관리는 사정이 허락하는대 람의 가정부를 데리고 혼자서 현관 접대에서부터 요 로 현지식 을 따 르 면 좋아요. 청소전문업체를 이용하 리까지 잘 하기를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면 효과적이지요. 그 나라에 맞는 기구와 청소약품들 을 사용해서 우리가 하는 것보다 완벽하게 현관, 화 장실등을 깨끗 이 정돈해 주 기 때 문에 바뿔 때 일 일 김용규 : 다른 나라의 경우엔 의례 가정부가 있 어서 이 손 댈 필요가 없게 된답니다. 전화도 대사부인이 직접 받는 경우는 드물지 요. 제 경우에 외국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잠깐 기다려 이경희 : 국내의 임금 을 생각한다 달라고 하고 약간 목소리를 바꾸어 조금 있다가 얘 면 경제적으로도 현지의 전 문가들 기한 적 도 있답니 다. 직접 내 가 대사부인 이라고 하 변 상대 방 이 믿질 않더 군요. 간단하게라도 영어를 할 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 은 방법 이라고 생 각됩니다. 무엇에서 든지 수 있는 가정부가 정 말 아쉬 웠 어 요. 그 나라 방식을 따 르 거 나, 주재국 의 물건을 사용해 주는 것도 주재 국에 대 한 우리의 예 의 가 될테니 까요. 이정희 : 전화는 그렇게 하더라도 방문을 받을 때는 더욱 난처합니 다. 대사부인이 직접 현관 문을 여 는 경우는 관례 상 드물거 든요. 서복자 : 현 지 인 운전 기사에게 현 관 영 접 과 웨 이 터 일을 보도록 임 기 웅 변 으로 대처해 보는 방법도 있겠 지 요. 서복자 : 외 교 관의 부인들은 정부시책의 홍보 내 지 실천으로부터 개인적인 일상 문제까지 척척 풀어나 가는 재치와 적극적인 생활태도를 보여야 할 것 같 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곧 각자 다 른 부임지로 떠 나시게 되는데, 대사부인으로서의 능 력 과 열성이 우 리나라 외교와 국가발전에 좀 더 구체적 으로 공헌할 이은주 : 그래서 현지에서 많 은 친구들을 사귀어 그 것으로 믿고 기대해 봅니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시 간 좌담회에 자리해 들 의 의견과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로마에서 22
외교활동 요 요 요 ìt -==t, ìt -==t, ìt -==t, 마 복 자 었을까 내 생일이 되어 우리는 뉴짧젊 의 첫번 데 이 트를 약속하였다. 우리는 강건너 따뼈파핑의 아파트 에 보금자리를 꾸였고, 유엔본부가 있는 맨해턴은 지 % 하철로 30 분 거리밖엠 되지 않았다 두 아이들을 시누님댁에 맡기고, 셜리l 이는 마음으로, 내 딴에는 있는 대로 성장을 하고X약솜시간 에 30분, 타임즈스퀘어 지하철 종점으로 향했함 나는 r 분명 타임즈스퀘어 종점에서 지하철을 내행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나가 는 쪽으로 따라나가 한 출입구로 나왔다.6시 30분, f 지하철 출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찾아올 것 으로 생각하고 기다렀다.30분이 지났다. 날이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훌끔훌끔 쳐다보 기도 하며, 어떤 남자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말올 컬 기도 했다. 두번째로: 타보는 지하철이었지만 별 움은 없을 줄로 알았눈 데, 점점 겁이 나지 시간은 7시 30분. 약속을 안 지키는 남자가 아닌데, 무슨 사고라도 난 것 일까? 길을 잃었을까?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니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뉴욕에 와서 공중전화는 처음 걸어놓는 것인데 아무튼 어떻게 해 서 시누넘댁에 통화가회었다. 깜짝 놀라시며 남편은 나를 찾아 헤매다가 전휩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길표시를 찾아보라고, 두리번거려 보 니, 7AV. 42ST. 표 λ않 호였다. 이제 근처 시계탑이 있는 높은 건물앞으홉 가변 남편올 만날 것이라 일 러주셨다. 나는 허둥씨흙많짧을 쳐다 보며 급히 가던 중, 남편의 차와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차솜으로 뛰어들며 뿔 화가 나서인지 너무도 반갑고 원망스러워서인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My짧때y"를 보려던 계획은 이미 시간이 늦어버 렸다r 뉴욕에서의 첫번 데이트는 간신히 만나 저녁만 먹는μ닐패작이 되고 만 것이다. 알고보니 우리가 뉴 향을 너 함로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타임즈스퀘어 지하철 종점에는 수십 곳의 출입구가 있었으니 오히 려 서로 만날 수 있었다는 일이 기적이었다. 예비지 식없이 부임초기에 겪은 잊지못할 에피소드가 되었 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된 나의 뉴욕생활 이야기에서 외교단가족을 위한 UNHα;Pl떼ity Cornrnittæ" 에 대한 소개를 빼 놓을 수 없다. 1960년 초 한 아프리카의 외 교관부인이 뉴욕에 적응하지 옷하고 너 무도 외로운 끝에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에 뉴욕에 사는 뜻깊은 여성자원 봉사자들 이 단체를 조직하고, 외 국인들이 뉴욕에 와서 생활을 웰 때 조금이 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시 작한 것이다. 이들은 각국 외교단의 가족상황을 늘 파악하고, 무 슨 일이든지 어떤 경우어표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보람과 긍지로써 움직인다. 주택을 구하는 문제, 계 약하는 방법등 생계의 근본문제부터, 자녀교육, 관광, 취미활동 퉁 모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가르 쳐 주고, 각자 나름대로힘 러 분야의 프로그램에 등록하 여 뉴욕을 쉽게 알고.친구들도 쉽 게 사뀔 수 있도록 주선해 준다. 뉴욕의 i 명소관광, 박물관이나 미술관 견학, 오페라, 연극, 발러1], 뮤지칼, 음악회등의 티켓도 미리 - 활보해횡앞화는4외교관들에게 편의 제 공을 해 23
준다. 뉴욕이 워낙 방대해서 지역별로 외교단부인들 의 모임을 조직해 주고 서로 친목하는 기회도 마련 해 준다. 별장이 있는 사람들은 온 가족들을 초대해 준다든가, 젊은이들의 사교를 위한 댄스파티를 개최 한다든가 하여 그야말로 뉴욕생활에서 fæl-athome" 할 수 있도록, 항상 계절별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프 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영어가 서투른 사람들에 게는 영어회화모임이 있고, 불어나 스페인어 등 언어 별로 모임이 있어 누구든지 쉽게 의사소통하며 모일 수도 있다. 요리강좌도 있어 서로 시식해보고, 좋은 요리법을 나누기도 하고, 음악, 미술, 여행, bridge등 취미와 관심에 따라 흥미본위의 모임에도 참가할 수 가 있다. 나는 영어도 배우고 싶고,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에 도 관심이 많았으나, 애들이 어린 관계로 수윌하지 않았다. 나의 사정 을 알고 Mrs. Schwariz란 분을 소개 해 주었다. 그 분은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남편과 둘이서 단출하게 사는 전형적인 유태계 미국부인이 었다. 부인은 매주 하루를 나를 위해 봉사해 주기로 하고, 영 어 로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서툰 영어회화를 도와 주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아이들까지 데리고 공원에 나가 피크닉도 하고, 자기네 클럽 (p끼vate club) 에 서 수영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쇼핑도 함께 다니며, 싸고 질 좋은 가게도 소개해 주고 마치 어머 니처럼 자상하게 모든 것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 다.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며 마음으로부터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원봉사의 귀중함을 되새겨 본다. 시간이 지 남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하고 방대한 도 시, 뉴욕에서의 생활이 합리적이고 편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바둑판처럼 놓여진 길을 따라 지도하나만 가 지변 지하철을 타고 뉴욕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아이들도 성장해서 여 러 모임에도 참석하게 되 었다. 유엔대표부인클럽 (UN Ißlegation Women 's Club) 은 한달에 한번 유엔 각 회원국의 외교관 부인들이 이 삼백명씩 모이는 데, 매번 어 느 한 나라가 host가 되어 그 나라에 관한 행사를 마련하고 주관하였다. 그러변 자기나라를 소개하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전시회, 티파티등을 준비하게 된다. 한번 차례 가 오려면 1507H 국이 넘으니 몇 해씩 기다려야 하는 데 우리에게 1983년 기회가 와서 한 국의 날 로 정했 다. 우리는 한국식 안방을 꾸미고 고가구와 그림, 공 예품등을 전시하고, 음식과 고전음악을 곁드린 전통 한국춤까지도 선보이게 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부인클럽은 요리강습, 춤, 꽃꽂이, 독서, bridge등 취미생활 모임도 주관했다. 내가 참석했던 bridge그 룹에서는 보통 점심으로 모였는데 당시 우리와 국교 가 없었던 동구권 외교관 부인들과도 왕래해서 남편 들보다 앞서 북방 외교를 한 셈이다. 또 요리강습 때 에는 우리 불고기와 잡채가 인기가 좋아서 후에 다 른 외교관 부인들에게 당변을 사주느라고 바쁘기도 했었다. 클럽은 임원회가 있어서 회장등 12 명 이 주축이 되 어 운영되었다. 우리나라는 UN회원국은 아니었지만 클럽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임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나도 일년간 회계를 맡아 좋은 친구들을 사궐수 있었으며, 그 기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좋은 추억 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모임을 통해 사뀐 친구 들을 리셉손이나 다른 행사에서 만나 남편에게 소개 시켜주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외교의 일 역을 담당한다는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뉴욕이라는 근무지는 도시자체가 제 공해 주는 문화등 다양성 때문에 자기가 부지런하기 만 하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곳이라 생각된다. 물론 맨해턴에 살아야 이러한 뉴욕 의 참 맛을 느끼고 향유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하루 속히 유엔에 가입하게 되어, 보다 많은 우리 젊은 외교관과 가족들이 맨해턴에서 살면 서 뉴욕생활을 더욱 즐겁고, 보람있게 보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37년생 이시영 외교정책추진 특별반장부인 뉴욕,세네길에서생활 24
우간다의 w. 1. M. A. 김 민 선 世 界 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호수를 끼고 있고 나일 강의 시초로서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려지는 캄팔라 市 는 오랜 내전으로 완전히 역사를 뒷걸음 한 상태 였다. 군데 군데 총구멍이 나 있는 건물벽과 포탄 에 맞아 허물어진 건물들, 오랫동안 버려진 상태로 있는 폐허같은 거리에 상점의 쇼우윈도우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고 유리창이 있는 곳은 모두 감옥같이 굵은 쇠창살이 둘러져 있었다. 전기사정 이 고르 지 않아 항 상 컴컴한 곳에서 무엇을 파는지 일일 이 들어가 보 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떨어질대로 떨어진 신과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어 린아이들을 보면 나자신은 편안히 차를 타고 있으면 서도 사십년 전 육이오 동란의 잊혀졌던 기억 들이 다 시 되살아 났다. 한때는 무척 아름답고 평화로왔다는 데 전쟁은 이렇게 갚은 상처를 이 나라에 남겨 놓았구나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1975 年 ~78 年 까지의 2 년 반 동안 옆나라 케냐에 근무한 경험으로 동부 아프리카의 기후는 좋다고 생각 했지만 우간다의 기후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보다도 더욱 좋다. 적당히 건습하고 맑고 화창한 날과 푸르 른 자연환경은 꼭 지상의 낙원처럼 느껴진다. 채소와 콕물이 다양하고 빅토리아호수에서 잡히는 장정 만하 게 큰 나일퍼치와 붕어류의 맛은 그런대로 괜찮다. 비 교적 오염되지 않은 육류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다 른 나라에 비하면 물가도 아주 싼 편이다. 얼마 전에 이곳 고아들 을 위한 부인회 모임에서 영국대사로 몇년 있 다 온 루지타 (Ru외ta) 외 무차관 부인은 자기나라가이렇게된것을팩 걱정스 럽게 얘 기하였다. 우리 한국은 사십년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되 다시피 부서졌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복구하였고, 우 간다는 아름다운 기후와 공해에 물들지 않은 자연환 경, 풍부한 자원으로 농업과 수산업 특히 관광(서부 우간다의 관광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동 물과 풍경이 있다)으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다시 아 프리카의 진주를 찾을 수 있다고 격려했다. 앞으로 평화만 유지되연 이 나라는 확실히 무한한 밝은 미 래를 갖게 되리라 믿는다. 1960 年 代 에는 우리나라 의사들 약 50명 정도가 캄 팔라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봉사했었다. 전쟁 이 있 은 후 이들은 거의 떠나고 현재는 우리나라 정부 파 견 의사 두명만 있다. 서방 여러나라 특히 이태리가 우간다 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고 있으며 그외 독일, 영국, 미국퉁이 많은 관심을 갖고 무상원조를 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농기구를 원조하고 있다. 인 플레가 심하여 돈을 주는 것 보다는 의료시설이나 25
약품같은 물건을 보내주는 것이 더 나은데 내륙이어 서 케냐의 몸바사 항구에서 캄팔라까지 운송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다. 지난해 9 月 대통령궁에서 있었던 각국 대사부인과 기관의 대표 부인들을 위한 티파티에서 이곳 무세비 니 대통령 부인께서 우간다에는 전쟁으로 인한 고아 들도 많지만 해산하다가 목숨을 잃는 산모들도 많다 고 했다. 그날 모인 부인들이까금을 모아 캄팔라 시 내에 산부인과 전문병원을 설립하는데 도웅을 주변 좋겠다고 하여 국제부인 회 소속 단체로 W1M.A. (Women s Intematio때Matemity Aid) 를 처 음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그때 참석한 부인들 중 여닮명의 병원 설럽 준비위원을 뽑았다. 미국, 영국, 독일, 소련, 유 고 및 한국의 대사 부인과 우간다 측에서는 카테가 야 부수상 부인과 루지타 외무차관 부인이 선정되었 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병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이곳 사정상 무척 힘들고 비용도 많이 필요하였다. 우선 캄팔라 市 소속 건물중 폐허가 되어 사용하지 않으나 잘 수리하면 몇명의 의사가 진료도 할 수 있 고 해산 을 도울 수 있는 수준의 건물 몇 곳을 방문 하였다. 막상 시찰을 해 본 결과 수리를 한다 해도 물자가 귀한 곳이 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플레가 심하여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금 을 모아 응급환자를 대학병원으로 옮길 수 있는 앵 블랜스를 구입하여 기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곳 에 있는 독일인 의사의 조언도 참작하고 몇몇 우간 다 의사의 의견도 들어 보았다. 마침내 우리들은 캄 팔라 市 중심에 위치한 市 소속 보건소 겸 초산모를 위한 교육과 가족계획 사업등을 하는 나구루 (Na 밍ru) 보건소를 시찰하였다. 그곳을 개조 시키고 건물 을 늘리 면 우선 열개의 침대를 수용할 수 있는 산부 인과 전문병원으로 쓸 수 있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첫 단계로 우선 장소와 건물을 정하고 그 다음 단 계로 병원에 펼요한 물품목록을 작성하며 설립 기금 액수를 알아야 했다. 이것 역시 독일 의사와 우간다 의사의 도움으로 이 루어 졌다. 완벽하게 하려면 비용 이 너무 많이 들어서 우선 기금 액수를 나중에 발표 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떤 방식으로 기금을 모으느냐가 문제였다. 기금 마련 을 위하여 이곳에 오 래 근무하였고 기금마련에 참여 해 본 경험있는 부 인들의 의견 을 듣고 참고하기로 했다. 한번에 많은 기금을 모으려고 우선 이곳 상공인과 외교단을 상대 로 g외a e\'밍1lt1g을 Sheraton Hote!에서 하기로 했다. 저 녁 식사와 경매를 같이 하는 gala evening은 준비하는 데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 여 10 月 初 나 중순에 하기로 했다. 일인당 50불 정도의 티켓을 참가자들에게 팔고 저녁값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금으로 하기로 정했다. 이곳 의사나 공무원들의 한달 월급이 1O ~20불 정도 이니 꽤 비싼 저녁이다. 또한 참가 회원들은 g메a everung에서 기금 마련을 위하여 경매를 할 수 있는 적당한 물건이나 현금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태리, 영국, 독일등은 이미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른 병원을 설럽하여 돕고 있으므로, 나구루 산부인 과 병원 설립을 위하여는 대사부인의 개인적인 노력 으로 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독일 대사부인은 본국 의 원조단체로부터 정기총회날 1M 의 침대와 해산 대를 각각 기증 받았다. 미국 대사부인은 5 月 에 아프 리카지역 공관장 회의차 본국에 가서 친구나 친지들 로부터 모금을 할 예정이었다. 이태리 대사부인은 병 원에 필요한 기구를 이태리에서 구입하게 되면 이곳 까지 무상으로 운송해 주겠다고 했다. 이곳 부인들과 외교관 부인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도움으로 이제 나구루 산부인과 병원은 서서히 이루 어지고 있다. 나는 40년 전 전쟁의 폐허속에서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 를 도와 준 여러 우방국들을 기억하 며,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나구루 산부인과 병원 의 설립과 유지를 위하여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인 힘이 되려 한다. 언제나 훈훈한 인정을 베푸는 주위 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격려속에 지구촌의 그늘진 곳에서 이 루 어 지고 있는 조그마한 사업에 큰 보람 을 느끼게 된다. 1944년생 김재규 주 우간다 대사 부인 태국, 오스트레일리 o f. 스웨덴에 서 생훨 26
외교활동 이디오피아에 서 2 년 반 혔 정 재 욱 옛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공주집이었다는 대 사관저에 들어서 니 아카키(따혜6 ) 강 주변에 고목이 울창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첫눈에 정원과 주위를 가 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이 바쁘다고 꽃가 꾸기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살던 내가 일찌기 인 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살면서 여러 해 비워 두었던 대사관저를 수리하면서 얻은 경험을 이곳에서 이렇 게 크고 아름다운 관저를 관리하고 가꾸라고 하나님 께서 나를 훈련시키신 것이라고 믿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우기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정원사들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자카르타 에 서 꺾꽂이 한 적이 있는 빨간 꽃나무를 시작으로 꽃을 피우는 작업부터 시작 했다. 매일 정원사들로 하여금 충분한 물을 주게하였 더니 한달 후엔 뿌리를 내리고 싱싱하게 살아 올라 왔지만 꽃이 피기엔 더 많은 세월이 걸려야 할 것 같았다.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또 다른 작 업을 시작했다. 한국대사 관저는 어둡고 춤더라는 이 압hiopian Cr쨌 곳 친구들의 말이 듣기싫어 어떻게 하면 밝고 화사 하게 꾸밀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던 끝에 꽃밭을 더 많이 만들기로 했다. 관저 입구에 아무 쓸모없는 텅 빈 시멘트 바닥을 깨어내고 흙과 거름으로 채워 꺾 꽂이 한 장미와 다른 외국공관의 관처에서 얻어온 꽃나무들로 메꾸어 가며 공식행사 이외의 모든 시간 을 정원 가꾸는 일로 근 일년동안 매일 정성을 들였 공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향해 달라며 가난과 굶 더니 관저 모습이 날로 좋아져 갔다. 주림에 시달리는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이디오피아 이젠 국경일 행사도 호텔에서 하지 않아도 되겠구 와 아디스 아바바는 별개의 나라같다 고 이곳에 살 나 하는 자신감도 생겨 우리의 관저와 음식을 이곳 다가 온 어느 친구 얘기를 떠올리며 인간이 같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로 마음 먹고 준비를 시작했다. 시대에 살변서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 살고 있다는 전에 언덕을 45 도로 비 스듬히 깎아서 평지를 만들어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글학교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사용하던 곳에 세군 27
데 계단을 만들고 중앙 계단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우리 태극기와 이디오피아 국기를 선인장과 각종 장 미꽃 들, 초록색 화초로 장식했다. 때마침 충분히 비 가 내려 출렁이는 아카키 강물을 배경으로 더 아름 다워 보였다. 500여 명 모인 손님들의 찬사에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정원일에 매달렸다. 한번은 이곳 Hortic내twal Society에 서 우리 관저의 정원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ι 그러나 아직 은 좀 부족한 점도 있고, 또 전문지식을 갖고 보는 이들에게 내놓을 만큼은 못 되는것 같은 생각이 들 어 망설이연서도 이런 기회가 있어야 우리 관저도 어느 수준의 정원을 갖게 될 것이란 생각에 89년 1 월 14 일에 정원을 개방하기로 했다. 막상 날짜를 정 하고 나니 3CXX)평이나 을 대야 할지 몰랐다. 되는 마당을 어디서 부터 손 꽃을 꺾어 심고 백합 꽃밭을 만들고 산보길을 만들고 잔디를 심었다. 계단 양옆에 만들어 놓은 태극기와 이디오피아 국기의 꽃들도 피 워야 하고... 정원 개방 전날 밤까지 작업이 계속 되었다. 드 디어 1월 14 일. 농과대학 교수들, 원예 전 문가들을 포함해 서 원예에 흥미있는 회원 들이 %여 명 름, 모였다. 정원의 구석구석을 돌 면서 나무마다 이 원산지 등을 알려주고 특이하고 진귀한 것들을 서로 나누어 가져 갔다. 이 기회를 통해서 우리 정원 에 밤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부임해서 두번째 맞은 국경일 행사때는그동안평 지가 두배로 늘어났고 꽃들도 다 피었다. 잔디도 제 자리가 잡히고 양국의 국기들도 아름답게 피어서 누 가 봐도 국기라는걸 알 수 있게 되었다. 꽃꽂 이 장식용 장미와 아스파라가스도 충분하게 되었다. 행 사가 끝 나고 많 은 사람들이 아디스 아바바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파티였다는 얘기를 할 때 2년 통안 땀흘려 애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며 피로도 가시는 것 같았다. 이젠 우리가 꽃을 넉넉히 쓰고도 남아 우 리나라와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나라의 국 경일에 꽃을 선물로 보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이곳 Intemational Women s Qub의 할 회원으로 Hospi때ity 0뻐rlady의 직책을 맡아 일하고 있다. 이 국제 부인회의 모임은 한달에 한 번씩 Hilton Hote!에 서 커피 모닝을 갖으며 각 나라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로 Koræ Moming을 할 차례 가 되 어 11월 2일 우리 관저 에서 모이기로 했다. 이왕에 하는 것이니 되도록 많은 사 람이 참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선오찬을 하기 로 회원 들과 결정을 보았다. 이곳 화폐 20 Birr씩하는 티켓 220장을 만들어 팔고 30 명 은 우리의 손님으 로 초청하기로 하여 우리나라와는 수교가 없는 나라 의 대사 부인들과 정부 관리 부인들, 외무성 직원 부 인들을 초청했다. 오전엔 바자를 하고 내가 전에 공 부한 지압과 얼굴 미용에 관한 강의를 했다. 점심은 모두 한국 음식으로 준비하였다. 15가지의 음식을 각 각 큰 접시로 8접시씩 120접시를 만들고 70생의 불 고기와 이웃 셋다에서 구입해온 30kg의 새 우를 숭불 에 구웠다. 후식만 40접시를 준비했는데 모두 차리기 가 바쁘게 없어졌다. 수입금은 전부를 기증해서 부인 회 회원 모두가 고마워했 다. 그 이외에도 한국부인회원들이 크 리 스마스 바자라 든지, 코리아 모닝을 하면서 모아두었던 수익금을 전 액 AddisA벼ba Fist피aHαlj)l때에 기증했다. 이 병원은 늙은 노부부 의사가 가난한 임산부들을 위해 사재 를 들여 세운 병원이다. 이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도와주며 사는 것을 보고 이제까지 살 아온 나의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 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다니 보람이 있었 다. 그동안 이 나라의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하는 보람을 갖고 용기를 잃지 않고 활동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더 많이 소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활태도는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좋을뿐만 아니라 대외관계 및 외교활동의 중요한 비 결이 된다 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1942년생 고침수 주 시애톨 층영사 부인 독일,제네바시카고, 인도네시아, 이디오피아에서 생활 28
노래에 소망을 싣고 서 정 애 지난날, 대학의 첫 음악이 론 강의실에서 많은 여자 J17.수님들 가운데 몇 분 안되는 남자교수넘 한 분 이 말씀하셨다. 여 러분들은 4년 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 을 장아 올리지만 한 명의 훌륭한 연주가가 탄생하는 것은 너무나 멀고 힘든 일이다. 그 러나 무엇보 다 열 심 히 공부하는 가운데 음 악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자 기 것으로 만든다는 데 긍지를 가지도 록 하라 그때는 나름 대로 포부와 희망을 가졌었기 에 그 말 씀이 마음속에 섭섭하게 전해 왔었다. 하지만 졸엽과 동시에 약속이나 한듯이 다들 제각각 좋은 남편 만 나 결혼하 고, 본격적 인서양음악을연구하겠다고 외 국으로 유학떠난 두 친구들도 도중에 결혼해서 지금 은 자녀 들을 두고 다복하게 지내고 있다. 나 역시 남 편따라 두 아이들과 이 곳저곳 임지에 도착하여 새 삶 을 시 작하 고 적응하느라고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노 래 한번 제대 로 불러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4월의 어느 하루 파키스탄 항구도시 카라치공항에 도착했을 때 는 무더운 날씨와 도시의 삭막하고 가난 한 풍경에 앞으로 정착해서 지낼 날들이 조금은 서 글프게 마음에 닿아 왔다. 카라치는 인구 4백만 도시 가 몇년 동안에 배로 늘어 나고, 이웃나라 아프가니스 탄의 전쟁 난민들까지 몰려와 천만의 사람이 사는 콧 이 되었다. 전기와 수도는 잘 공급되지 않았고, 공 공건물은 전혀 위생시설이 되지 않아 불결하기 말할 수 없었다. 매일 지내기 짜증스럽고 힘든 나날이었 다. 그곳의 우리 교민들이라곤 각 상사에서 지사근무 로 나온 가족과 또 그곳에 정착해서 조그만 사업으 로 생계를 이어 오는 순수교민 두 가족등 모두 25가족 이었다. 대부분 젊은 부부와 어린 자녀들로서 더운 기후와 불편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잘 견디 며 하루하 루를 즐겁고 보람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회 사와 수출한국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조용 히 뒷바라지하는 이 부인들이 한없이 대견하고 아름 답 게 보였다. 부인들은 부인회를 조직하여 여러가지 보람된 일을 해서 가난한 이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노 력하였는데 몇 개월마다한번씩 각 가정에 서 가족이 나 자녀들이 쓰던 옷이나 물건을 모아 판 매하여 조그마한 기금을 고아원에 기증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고아원을 맡은 수녀님 한분이 계셨는데 정말 고맙게 기금을 받아 가셨다. 29
또 부인 회 회원중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부인 열명 드디어 연주회날, 관저에서 All Nations Women s 이 모여 서 합창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합창 Club의 회원들을 모 시 고 오창 겸 음악회를 가졌다. 단에 입단할 때 는 벌써 3년이나 유지되고 있었다. 합 사회도 내가 맡아서 하 였으므 로 전날 밤에 남편에게 창지도는 어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해 온 영어교육도 받았다. 약 50명의 회원 앞에서 연주를 대우지사의 직원부인이 맡았고 반주는 대학에서 피 아노를 전공했던 금성사에서 나온 젊은 부인이 하고 했는데 대단한 성공이었다. 모두들 얼마나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는지 그때의 감격을 그 고운 부인들의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소프라노, 메조, 알 합창소리와 함께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손님들중에 토 세 파트로 열심히 연습하는 부인들이 참으로 젊 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합창은 벌써 여러 곡을 연습 해 두어 훌륭히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 아 름다운 노래를 들어줄 청중이 없어 가끔 한 번씩 남 편들과 자녀들을 모아놓고 발표회를 했다고 한다. 그 래서 나는 언젠가 조그만 콘서트를 한번 마련해 주 기로 마음먹었다. 파키스탄은 회교국이라서 자기나라 특유의 악기와 선율만을 연주하고 우리 상식의 연주회나 문화행사 란 거의 없어서 무 척 단조롭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 야 했다. 마 침 외 국부인들로 구성된 꾀1 Nations 는 그당시 미수교국인 체코, 항가리, 유고의 총영사 부인들도 참석했지만 그중에서도 북경대학의 기악과 교수로 재직중인 중국 총영사 부인이 참석해서 그날 의 노래와 피아노가 너무나 좋았다고 몇번이고 칭창 하였다. 어떤 계기로 이렇게 좋은 음악 회 를 열게 되 었는지 여러가지 질문도 하였다. 다음날 클럽의 회장인 독일부인이 합창했던 부인 들이 즐길 커다란 치즈케엌과 감사 카드를 갖고 왔 다. 감사 카드에는 그가 이 치즈케엌을 아름다운 합 창단을 위해서 정성들여 만들었고 그 아름답고 매혹 적인 합창의 선율은 카라치 생활중 제일 기쁜 순간 Women s Club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날을 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다음날 모임에 나갔더니 모두 구상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 들 좋은 콘서트였다고 듬뿐 칭찬을 하였고, 클럽의 각하고 이 기회 에 우 리 콘서트를 하기로 했다. 합창 곡목을 선정하고 거기에 피아노 독주와 성악 독창을 총무인 영국부인은 회원 일지에 합창과 독창, 피아노 독주의 곡목을 하나하나 기 록해 두었다가 참석 하지 넣기로 프로그램을 짜놓았다. 독창은 내가 맡기로 하 못한 회원들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고 오페라 아리아 한 곡과 우리 가곡 두 곡으로 정 며칠후 다른 파키스탄 부인회에서 우리 합창단의 하고 나는 발성연습부터 완전히 다시 노래를 배우듯 연주를 제의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미 이곳 파 열심히 연습하였다. 피아노 독주는 베토벤 소나타 로 푸아뉴기니로 발령이 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 정하고 반주를 하는 젊은 부인이 맡기로 하였 다. 합 다. 처음 카라치 도착 당시 황량했던 마음이 떠날 때 창콕은 합창으로 편곡한 쇼팡의 야상콕과 영화음악, 그리고 우 리 가곡 등에서 선곡하고 만약 의 앙코르 에 대비 해서 불란서 상송도 준비하였다. 는 보람과 추억 으로 가득 갔다. 나는 이 조그마한 일 들이 미국이나 유럽등 선진국에서 근무하며 체험했 던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며 작은 일에도 소 연주는 l 월 중순에 있었기 때문에 합창지 휘 자가 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카라치 의 두달 후 있을 연주를 위해서 엄하게 지도하고, 나는 합창단을 생각할 때마다 되새기게 된다. 관처에서 연습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호박죽과 녹두 죽도 대접하며 격 려 하 였 다. 그해 정월 초하루 관저에 서는 우리 한인가족들 이 모두 모여 신년 하례식겸 연주회날 입을 한복을 곱게 입고 드레스 리허설을 가졌다. 1명4년생 최남준 주 파푸아뉴기니 대사 부인 시 카고, 노르웨이, 뉴욕, 파키스E때서 생활 30
심경소묘 아프리카의 밤 별빛 초롱 달빛 초롱 칠흑 ( 像 黑 ) 이 무너 져 내려 차라리 초롱이 빛 나 어 둠을 밝히 우고 世 %의 때 홈 困 의 때 찌들은 때 감싸 안아 오히 려 넉넉 함 넘쳐 홀홀히 벗 기우고 熱 沙 의 더위 太 古 의 더 위 까땅게 다 태 우고 재마저 다 태우고 온누 리 하나 되어 벼버 다님l 2 :>;: 은 -yç 녹아 넘쳐 천 고 ( 千 苦 ) 의 넋 두리 긴긴밤 삼키우리 1952년생 강선용 아프리카2과 과장부인 중앙아프리카제네바, 밸기에에서 생활 31
심경소묘 어 느 바 다 이야기 한 정 스 요근래에 바 다 라는 말은,..-/ 나에게 무척 가 깝기도 하고 멸 게도 느껴진다. 1985년 8월부터 1987 년 8월까지 모리셔스라는 바다 속 용궁같 은 섬에서 살았 다. 위치상으로 는 아프리카대 륙과 더 가까이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지내보 면 그 섬은 동양과 유럽에 더 가깎다는 것을 알게된 다. 인구의 75% 는 인도인이고, 15% 는 영국인, 불란 서인, 5% 는 아프리카인, 5% 는 중국인들이다 아프리 카 대륙 남동쪽 마다가스카르섬 바로 옆에 있는 섬 으로서 웬 만한 지도에는 잘 나타나 있지도 않는 나 라로 인구는 백만이고 크기는 제주도만하다.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후지금은영연방에 속한다. 이 모리셔스의 기억중에 내 머리속과 눈속에 아직도 깊 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멋진 바다 이다. 그 바다에는 유럽 전지역에서 햇빛과 자연에 굶주 린 사람들이 일년 내내 여름휴가, 겨울휴가, 허니문등 으로 몰려오는 곳이다. 요새도 가끔 패션잡지나 해외 토픽난에 보면 반나체의 모나코공주가 휴가를 즐기 는 모습이라며 모리셔스의 해변이 그 배경으로 등 장한다. 우리가족이 그콧에 갈 때만해도 모리셔스라는 나 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 름이었고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못했다. 시카고 생활 2 년반이 되는 여 름 휴가도중 남편은 모리셔스로 발령을 받고 그곳에 처음으로 공관창설을 하러가게 되었다. 대형서점에서 한 시간이나 걸려 겨우 찾은먼지같은 점 이 우리가 가야 할 모리셔스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렇게 전혀 모르는 곳, 다른 곳 은 시간과 공 간에 있어서의 불확실하고 두려운 미래 이 다 r모르는 곳 과 내일 속에 담겨있는 측정할 길 없는 잠재력 과 가능성이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가슴을 부풀게 한 다. 나도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이 동화같은 작고 도 작은 나라에 도착했다. 마크 트 웨인도 모리셔스를 지상의 전국 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도착한 다 음 날 알게 되었다. 어느 나라나 그 도시에 도착한 후 처음 며칠의 인상이 그 도시의 모습으로 오래도 록 남아있게 된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아주 작고 깜 깜한 길과 간혹 불빛이 보이 는 마을들을 지나고 좁 고 꼬불꼬불한 사탕수수 밭 사이를 지나 한시간 반 이나 울퉁불퉁한 길을 달렸다. 알고보니 공항에서 호 텔까지는 섭의 끝에서 끝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호텔방을 나가보니 어셋밤 달려온 길과는 상상도 안되게 근사한 호텔과 바다가 보였 다. 진분홍, 보라, 흰색 등의 조그만 크리스마스 종모 양의 부갱빌리아 꽃들이 소복하게 덮히고, 야자열매 가 주렁주렁 매달린 야자수 정원사이로 끝없 이 넓고 맑은 바다가 보였다. 파랑색 물감을 한번에 부은것처 럼 선명한 하늘 아래 에메랄드와 코발트색이 기막히 게 었다. 어우러진 바다 앞에서 나는 잠 시 나를 잊고 서있 발 밑에 느껴지는 새하얀 밀가루와 설탕을 섞 은 것같이 보드랍고 촉촉한 모래사장, 모래위에 띄엄 띄엄 송이버섯처럼 서있는 짚으로 된 파라솔, 그 밑 에 너무나도 편안하게 이 세상 모든 시름과는 무관 하게 길게 드러누워 있는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유 럽의 미남미녀들, 눈부 시게 빛나는 바다 위에 떠있는 알록달록한 요트들. 나는 내가 어디에, 왜, 이렇게 와 32
있는지 조차 잊은 채 그저 멍청히 서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은 아주 멀리 있었고, 모든 것 은 평화스러웠고, 그 순간 내가 진짜 천국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엄 마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렀고 이 곳은 천국이 아니라 앞으로 2년 정도를 지내야 할 새로운 곳이란 것을 알았다. 공항에서부터의 그 지저분하고 초라한 거리풍경에 대한 실망과 새로운 곳에 대한 막연했던 두려움이 어느새 기대와 호기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런 처 음의 흥분된 감정은 6개월 정도의 세월과 함께 조금씩 싫증과 외로움에 밀려 퇴색해가고 있었다. 시 간이 지남에 따라 바다에 대한 나의 애정도 식어가 고 감탄도 줄어들고, 나는 슬슬 탁하고 번잡스럽지만 다양한 생활과 편리한 문명이 있는 큰 도시의 생활 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습기때문에 생 기는 풍토병이 나를 슬슬 괴롭히며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황홀했던 바다의 아름다 움도 나에겐 아무런 위안이나 치료가 되지 못했다. 그 바다에서의 철저한 평화, 고요, 감미로운 낭만, 싱 그러움등 모든 것들이 나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 하고, 하루하루의 생활이 너무 힘들고 길게만 느껴졌 다. 바다를 바라보면 마치 내가 몽테크리스트백작 이나 빠삐용 이 되어있는것 같았다.바다가운데 영원 히 갇혀있는 기분이 들면서 하루 속히 그 바다를 떠 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결국 어떤 것에라도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기에 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을 알았다. 모 든 것들은 바로 나를 중심으로 내 감정과 건강상태 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치가 아주 쉽게 변할 수 있다 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모리셔스 의 바다는 아름다운 추억과 철저 한 외로웅의 기억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1953년생 이경우 주 영국 참사관 부인 프랑스 세네갈, 시카고, 모리셔스에서 생활 삶의 작은 톱니바퀴 김 정 화 태어나서 23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외교관이라는 서 들려 주시던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아마 외교관 생 직업과 나를 진지하게 연결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 활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끼게 한 입문쯤 됐을까? 이 었다. 대학원 1 학년 봄 축제때 만난 참 착하게 보 이 상하게도 정작 골머리를 앓으며 주녹들게 공부해야 는 사람이 외무고시를 보고 발표를 기다린다더 니, 또 했던 국제법 판례들은 다 잊어 버렸는데, 마치 지나 얼마후 외무부에 출근을 한다고 얘기할 때 도 난 나 가는 잡담처럼 특유의 그 느릿느릿한 점잖은 영어로 하고 별로 상관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물 수업시간 내내 허리를 펴지 못하도록 웃게 만들었던 여닮살에 결혼을 하면서도 아무래도 난 결혼을 너 이야기들이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난다. 무 일찍 하는 것 같애! "하고 있었으니까, 누구 부인 이미테이션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간 어떤 외교관 이 되고 더구나 외교관 부인이 되고 하는 복잡한 일 부인이 다른 사람의 진짜 디자이너 옷을 보고 살짝 이 실감 이 날 턱이 없었다. 졸도한 척해서 왔던 차로 도로 실려가 그 자리를 모 대학원 다닐 때 당시 연세 대에 잠깐 계시던 함병 면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차라리 코메디처럼 들렸었 춘 교수께서 국제 법 강의 를 출강하셨는데, 한번에 70 다. 회의 나 파티에서 자리 서열 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80페이지씩 일사천리 로 나가는 진도를 마1y quæ- 든지, 옛날 30 년전쟁 때 스워l 멘 여왕에 대해서 Tr용 tions?" 한마디로 끝내고 나머지 시간을 몽땅 할애해 Puiæante( 最 彈 의)를 빼먹고 Sérénissi.me ( 廠 下 )로만 부 33
르는 바람에 나중에 열심히 사과를 하고도 베니스의 중재 제의가묵살당해 버렸다 든 지 하는 이야기등등, 대범함 (7) 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외교관계의 까다 로운 에티켓과 형식도 별로 내 체질에 맞는 것같지 가 않았다. 게다가 우리나라 외교관부인들은 요리솜 씨가 뛰어나야 한다는데 타고나기를 그쪽으로는 영 자신이 없는지라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어쨌든 외교관생활의 세련되고 화려한 변에 대한 환상보다는 자신도 없고 세세한 구체적인 일들에 걱 정이 많아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왜 하필이면 외교 관이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직업과 결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니까, 언 제나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맑고 따뜻한 사람으로 바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데 망설임은 전혀 없었 다. 직업의 특성때문에 당장 내가 택하고 싶었던 길,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일들을 가슴이 저릴만큼 아깝게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까운 마음을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역할에 쏟으면서 보람을 찾을 생각이다. 외무부에 들어온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군대복 무, 연수, 국내근무 뿐이었지 아직 외교관자격 으로 해외근무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외교관생 활이 어떤지, 어떻게 처신을 하고 지내야 하는지 아 는 바가 없다. 우리에게 첫 외국생활이라고 할 2년간 의 연수는 공부하느라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쨌 다. 그러나 우린 아무래도 외국체질인가봐 할 만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 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응도 빨랐고, 이질적인 문화나 사고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이나 찬탄 보다는 이해심을 갖고 냉정하게 장단점을 볼 수 있게 한 좋은 기회였다.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어느 사 이에 피부색이나 생긴 모양이 별로 의식되지 않고, 그냥 같은 인간으로서 애정을 갖고 대할 수 있을만 큼 익숙해지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폭과 갚이를 위해 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외교관생활에는 단순한 외국생활보다는 더 갖추어야 할 자질이 많을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하 게된다. 요즘은 정상외교의 비중이 커지고 정보의 교 류도 직접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이라 직업외교 관의 기능이 많이 단순해지는 감도 있다. 그래도 세 상일이란 사람손을 거쳐서 이루어지 는 것인 만큼 외 교관이라는 직 업에 요구되는 역할을 잘 파악하고 적 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명아리 외 교관시절에야 거 창한 각오까지 하고 지낼만한 일도 없겠지만, 큰 일 이든 작은 일이든 철저한 직업의식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 기분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흔히 외교관이라면 세련된 신사의 이미지 뒤에 권모술수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깔려있는 것으 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 건 어천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연륜이 쌓이면서 넉넉한 분위기와 기풍을 잃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하고 계신 분들을 주위에 서 보면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하고 마음을 놓을수가 있다. 하기야 도덕성과는 별 상관없는 인물로 치부되었 고 나폴레옹이 비단 스타킹에 진흙을 채워 넣은 것 같은 인간 이라고 평했다는 Talleyrand조차도 외교는 표리부동과 속임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면서 충성 심과 정치협상에서의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닌지 모른다. 어쩌면 그가 기막힌 변신 을 거듭하면서 블란서혁명과 공화정, 나폴레옹 치세, 왕정복고, 입헌군주제의 격변기에 유럽을 주름잡은 거물 외교관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것은, 세평이야 어 찌됐든 프랑스와 유럽의 질서를 위한다는 나름대로 의 원칙과 대의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계대전의 광란에 절망한 Sorokin같은 이는 국제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만연하는 니힐리즘에 지배되 고 있다 고 했다지만 21세기를 바라보는 요즘의 세 상은 그래도 뭔가 애쓰면서 살 만한 세 상이고 나날 이 긴밀해지는 국제관계에서도 할 일이 많아 보인 다. 내가 당장 고민해야 할 일은 어떻게 채를 예쁘게 썰고 어떻게 양념을 맛있게 할 것인가가 우선이겠지 만, 내가 인생을 함께 가기로 한 사람 곁에서 마음을 크게 열고 더 넓은 하늘 아래서 작은 톱니바퀴가 되 어 소중한 내 삶의 시간들을 가득 채워 갈 기회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다. 1958년생 박효성 주 토론토 영사 부인 뉴욕총영사관연수 34
심경소묘 헝가리안 랩소디 의 아름다운 선율밖에는 아는 것이 없는 채, 우리나라 북방외교정책으로는 처음으 로 동구권 국가중에 수교된 헝가리에 발령을 받고, 나로서는 맨처음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게 되 었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나 라 지방공항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허름한 모습에서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실체구나 하는 불안한 느낌 뿐이었다. 헝가리도 유럽국가중의 한 나라이므로 다른 나라 와 별로 다르 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도착해서 인지, 이념이 다른 사회가 이렇게도 인간생활에 다르 게 영향을 주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첫 인상이 어 둡기만 했다. 다뉴브강 은 유럽에 있는 여넓나라를 유유히 지나 며 흐르고 있고, 비엔나와 베오그라드등 세 수도를 통 과한다. 부다패스트는 이 강이 도시를 갈라서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진 이 름 이다. 이콧에 아름답고 또 아름 다운 다뉴브강을 가로 질 러 연결되는 개성있는 다리 들.1840년대에 제일 처음으로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 했다는 다뻐n Bridge. 한강과도 비슷한 넓직한 강을 오랜 전통을 과시하며 묵묵하게 역사를 말해주는 듯 이 걸려있는 α뻐nbridge는 저녁이 되면 찬란하게 조 명이 된다. 건너편 언덕 위에 옛 왕궁이었다는 박물 관은 은은하게 조명 이 되고, 조화속에 조용히 흐르는 다뉴브강의 물결을 마치 보석의 흐름처럼 느끼게 된 다. 부다페스트를 다뉴브강의 진주 라고 비유하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누구나 공감하기 때문이 리라. 낭만적인 느낌과는 동떨어지게 강변의 웅 장하고 화려한 국회의사당 건물 꼭대기에는 거대한 빨간 별이 세워져 있고, 모든 공공 국가기관 건물 위 에도 어김없이 붉은 별이 있어 가뜩이나 긴장된 나 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또 웅장하고 아름 다운 석조 건물들에 낀 검은 때, 부스러진 벽들 그것 들을 전혀 보수도 하지 못한 채 놓아둔 모습이란 인 간의 활기를 빼앗아가는 황폐한 공산주의의 참 모습 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는 전연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 다. 어느날 갑자기 생활필수품이 없어져서 며칠씩, 몇달씩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건의 귀함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물건 사재기의 요령을 배우게 되었 다. 바다에 접해 있지 않은 관계로 바다 생선이라고 는 없는 이곳에, 간혹 러시아제 냉동 생선이 나오면 조심스레 냉장해 두고, 조금씩 약처럼 먹어야했다. 무엇이나 흔한 서울에서 모르고 지냈던 물건에 대한 고마움에, 또, 편리했던 생활에 다시금 감사하게 되 었다. 그렇지만, 이곳 헝가리에는 옛 영화와 전통이 대단 해 보인다. 마치 망해버린 양반 부자집을 연상케 되는 데 그들의 박물관에 진열된 물품들이나 Hélend깅그룻 의 오묘한 수제품의 무늬와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들의 말처럼 조상들이 지하에서 지금의 헝가리를 보고 통탄해 하고 있다 는 말에 동감하게 된다. 낮 의 실생활에 대한 어려움은 어디로 가버리고, 한편 밤마다 매일 같이 음악회나 오페라가 열리는 것을 보 변 헝가리인들의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여 유, 그들의 높은 수준을 느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35
셋빛으로 침울하기까지 해도 내부에 들어서변 화려 한 장식으로 그 아름다웅 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극 장들,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헝가리인들, 확실히 그 들은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년이 지났다. 지금 헝가리는 잠에서 깨어 나고 있다. 처 음에 나를 그토록 불안케 하던 붉은 별 들이 어느새 하나, 둘 떨어지더니, 이제 모두 떼어버 렸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 기 시작했다. 모두 서 방세계를 동경하더니, 서방세계 사람들이 이곳으로 물밀듯이 몰려오게 되었다. 나는 확실히 변화하는 헝 가리를 목격하게 되었다. 나의 마음도 차츰 밝아졌 고,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는 거리 속에서 낯익은 이 름들을 보게 되었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누비고 다니 는 헝가 리 차량에 sam Stmg, Gdd Star가 등장하게 되 었고, 모두 South Korea를 동경하게 되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니 신장된 국력의 힘 에 고마움 을 느낀다. 식료품을 구하러 여기저기 시장 을 쫓아다니고, 왕 복 9시간이나 걸리는 비엔나를 자주 다니며 구입한 물건으로 생활을 해야 하지만, 너무도 아름답게 가지 각색의 꽃 이 피는 이곳의 오월, 음악소리같은 새소리 를 들으며, 도시를 유유히 흘러가는 다뉴브강을 따라 공산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첫발을 디딘 개척자의 각오로서, 헝가리 역사의 새로운 변화를 목격한다. 1953년생 이원 형 주헝가리 참사관부인 일본, 영국에서 생 활 어머넘을 그리며 유고에서 z1 7:j ~ I그 ζ:; T 어머 니, 그냥 되 돌아 곁으로 가고만 싶은 것을 울 이 질 적인 탓으로 지난 80년 티토대통령의 사망이후 음으로 삼키며 김포공항을 떠나온지 어느새 두달 이 이들 공화국들간의 내 분 이 표변화 되었습니다. 그런 되어갑니다. 은은한 셋빛으로 가라앉은 하늘과 뾰족 가운데 베오그라드에 있는 세 르비아공화국과 발칸반 한 교회탑, 고만고만한 벽돌색 둥근 지 붕들 이 어우러 도 북부에 위치하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국경을 져, 이곳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고즈녁한 분위 기 맞대고 있는 슬로베니아공화 국 이 가장 정치적, 경제 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싱그러운 미류나무 사이로 칠주하고 있는 멋스러 각 기 다른 민족들이 모여 이루어낸 유고의 문화는 운 전차와 다뉴브강 위를 지나는 아취형의 다리가 화려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깊이가 있어서 더욱 더욱 정겹게 느껴 지는 유월, 어떻게 지내시나요. 더 새로운 묘미를 느끼게 합니다. 문명에 쉽게 굴복하지 위를 유난히도 타시는 어머니의 건강이 염려됩니다.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과 아직도 총탄이 박혔던 세계 어느 콧을 가나 그들 나름대로 전통과 문화 자리를 그대로 보존해 온 낡고 오랜 건물들은 제게 가 있지요. 이곳 유고에 역시 오랜 역사와 더불어 찬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과거 를 빨리 지워버리고 란한 예술 문화 가 꽃피 고 있음을 피부로 느 낄 수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에만 익 숙해 있던 저에게 그들의 있습니다. 유고 연방은 당초부터 다양한 민족으로 구 고집스러울 만큼 옛 것을 간직하려는 태도가 귀하고 성된 다민족 국가입니다. 각 공화국들간의 문화풍토가 아름답게 보여 졌기 때문입니다. 36
유고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개방노선을 걸어온 탓인 지, 자유의 숨결을 이곳 저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천막의 노천시장에서, 강변의 낭만적인 식당에서, 그들의 인정과 미소 속에서 저는 자유를 봅니다 어머니, 얼마 전에 베오그라드의 남서부지방으로 차를 달려 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농지, 이상 하게도 비옥한 농지에 심어진 것은 밀과 옥수수, 시 금치, 근대 정도였습니다. 겨울도 섭씨 영도 안팍이니 우리나라처럼 비닐하우스로 얼마든지 가계를 살찌울 수 있을텐데 이콧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나 라체제의 제약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으로 작 업하는 집단농장은 마치 과거의 죽은 도시와도 같았 습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 개인이 직영하는 개인 농 장은 지붕의 색깔부터도 생동감있게 보였고 진한 자 유의 내음을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이곳을 떠날 때 쯤이변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유고는 부유한 나라가 아닙 니 다. 그렇지 만 그들에 게는 소박함과 따뜻한 정이 있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며 칠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저희집 맞은 편에 작 은 오두막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젊은 부인이 선 뜻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긴 했으나 정말 당황했습 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집은 처음 본 것 같았습 니다. 그들은 소중히 간직했음직한 프럼 브랜디와 커 피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나올 때는 남편이 그렸다는 작은 유화 두 점과 마당 한 모퉁 이 에 있는 장미나무에서 가장 탐스러운 송이만을 골라 제 품에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누추하게 살면서도 자신있게 열어보이는 그들의 순수함과 찾아온 손님 에게 무엇 이나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정다운 부부는 오랫동안 제 마음을 촉촉히 적셔 주었습니다. 물질문 명에 도덕심이나 인간성까지도 상실되어가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온 치로서는 가난한 이웃의 나눔이 너 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 다. 시장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빵 한 조각에 야 채 몇가지를 사들고 가는 모습을 흔히 보는데, 그 래 도 그들의 다른 손에는 늘 꽃 한송이가 들려있곤 합 니다. 그들의 삶의 여유이고 사랑이 아닐런지요. 어 머니, 빵 한조각에 붉은 장미 한송이 멋이 있지 요. 정규교육을 받지못한 가난한 유고화가들이 그려 내는 Naive P,뻐1뼈g이 그렇게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삶에서 걸러내는 진실한 사랑과 따뜻함을 그 대로 화폭에 그려 담기 때문인 것 같았습 니다. 유고는 관광국가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철도시스템 이 엉망이라서 수많은 여행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곤 합 니다. 어느 캐나다 외교관 부인은 기차 여행을 하 러 나갔다가 콩나물 시루같은 인파때문에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고, 헝가리에서 오는 친구를 마중나갔다 가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않아 되돌아오니, 새 벽에 느닷없이 일행을 잃어버린 채 도착하더라는 것 이었습니다. 도중에 연착을 알려주려고 역에서 전화 하는 사이에 기차가 떠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 개념이 없는데다가, 신문지를 깔고 아무데서나 식사 를 하는 여행객들로 철도역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고 합니다. 베오그라드의 물가가 상상을 초월하리 만 큼 올라 택시요금도 아연실색할 정도로 비싸졌고, 관 광국가라는 미명아래 그야말로 어두운 변이 없는 것 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면, 싫은변 다 부대 끼고 살다보면 그런대로 정이 들어버리지 않겠어요. 무엇보다도 유고의 인정때문에, 어쩌면 저의 다른 고 향이 탄생하게 될지 도 모르겠습니 다. 저는 이곳 베오그라드에서 행복할 것입니다. 그들 과 같 이 숨쉬고 생활하면서 메말랐던 제 가슴에 유 고의 훈훈한 바람을 가득 채워 넣어야겠습니다. 어머 니 기다리세요. 이곳을 떠날 때는 유고의 바람을 컨 테이너 가득히 실어가 선물로 드리겠습 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십시 요. 창밖을 내다보면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 가슴이 메어집니다. 1 156년생 최병구 주 유고 1 등서기관 부인 영국,필리핀에서 생휠 37
심경소묘 카리브해의 후진주 71 ^'세 흐갇 C그 d L::!:" s "Þ α깅 亡 ;그 ~ 브라질에서 3년간 생활을 마치고 중미 카리브연안 국가인 아이티에 첫 발을 디딘지 2년이 흘렀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검은 피부색의 행인들이 오가는 광경에서, 내 자신이 아프리카대륙에 와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중남미에서도 최빈곤국. 정정 불안국으로 엉성하고 지저분한 거리. 거리를 지 날 때마다 구걸하는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아이티는 정 말 하나님 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나라일까. 아이티라는 국명은 1492년 콜럼버스가 이 섭을 발 견한 직후, 남미 아마존유역에서 7세기경 이주해 온 토착원주민 Arawak종족들을 만났는데 이 들이 Hyiti (산이 많은 나라)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름대로 국토 전체의 70% 이 상이 산으로 덮여있는 산악국가여서인지 주택들이 산속에 숨어 산재해 있다. 아이티는 과거 식민지 국가로서는 미국다음으로 1804년에 불란서로부터 독럽하였으며, 이에 대해 대 다수의 국민들은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러나 빈부의 차가 극심하여 일부 소수 특권층은 상 상도 하기 어려운 호화주택에 사는가 하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의 가난에 허덕이며 지낸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자들 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선망이지, 적개심이 아니 라는 것이다. 그들은 운명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낙관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있다. 모든 일을 급히 서 둘러 한다든가, 미래를 대비 한다기 보다는, 그날 하 루를 즐기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다. 이 러한 국민성으로 말미암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 는것일까. 또한 천주교 국가인 관계로 생활에서 신부님의 영 향력이 강하며, 절대주권자로서, 재판관, 의사, 또는 교육자로 모든 일의 해결, 책임자로서의 위력을 지니 고 있다. 우리 가족이 이곳에 있는 동안 네 차례의 정변발 생과 세 정권이 교체되는 등 정국이 늘 불안하였으 며, 그때마다 식품조달이 어려워 빵을 사려해도 줄을 서서 장시간 기다려야 했다. 식품을 구입해 나오면, 도로 중간중간에 시위대들이 불붙인 타이어로 바라 케이트를 쳐서 오도가도 못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이로 셋길을 찾아가다 길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38
필사적으로 탈출해서 집에 돌아와 안도의 숨을 쉰 게 장식해 놓아 마치 꽃마차처럼 꾸며놓은 것을 보 일들이 주마등같이 기억속에 스쳐간다. 아들 애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등록하였으나 정국 이 불안하여 휴교하게 되었다. 세차례씩 이곳저곳 옮 겨 보다가 결국 보내지 못하고, 이제는 아예 포기하 고 집에서 한글 만을 가르치게 되었다. 정국의 불안은 자연히 외부출입을 삼가하게 했으 며, 집안에서 가사일에나 열중하게 되는 갇힌 생활이 아도 그들의 손재주가 얼마나 뛰어난 가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아이티에는 열대의 강렬한 태양아래 빛나는 비취 색의 바다가 있다. 어찌나 곱고 아름다운지, 주말에 가끔 찾아가변 가족, 친척,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마 저 달래주는 것만 같다. 우리가 이대로 서울에 돌아 가변, 식구대로 진한 갈색피부로 변해서 아이티사람 었다. 그러한 나의 일과는 자연히 지루해졌으나, 한 들이라고 하겠지. 이곳의 자연적인 관광 자원을 조금 편 내 자신을 더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 우리 가정이 기독교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 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이곳 외교단 부인회의 활동이 활발하였는 데, 회원 들과의 친분교제와 미국인 선교사 가족들과의 사권 이 울안에 갇혀사는 나의 생활로부터 유일한 돌파구 가 되었다. 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한국음식을 대 접하 기도 하고, 우리도 초대받으며 더욱 친분이 두터워져 만 개발한다면, 아이티도 인근 도미니카 공화국같이 관광국가가 되어 국가경제 재건에도 일익을 담당하 게 될 터인데, 아쉬운 마음 뿐이다. 5, 6년전만해도 유럽, 미국 등지에서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관광수입이 약 7천만불이 되었다고 한다.86년 2월 듀발리에 독재정권이 물러난 후 지금까지 정정의 불 안으로 현재는 관광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기존 시설까지도 폐허화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갔다. 한번은 그들에게 어느 나라에 가든지 중국음식 일이다. 정국의 안정이 국가이익을 위해 얼마나 중요 점이 있는데 이곳 아이티에만 없다고 하니까, 우리집 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에 중국식 한국식으로 훌륭한 요리사가 있는데 무슨 그렇지만,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가 심각하게 팽 불만이냐고 하며 은근히 칭찬도 해주었다. 외국인들 과의 교제로 그들의 생활방식도 파악할 수 있었고, 배해 있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아이티사람들은 그래 도 때묻지 않은 순수함, 소박함, 공동체의식, 그리고 아이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 인간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나는 이 중미의 었다. 이들의 90% 이 상이 카톨릭신자이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모두 아프리카에서 전래된 토속신앙인 V때 를 믿는 것같다. 아무튼 신앙심이 매우 갚은 국민임 엔 틀림이 없다. 주일이변 무더운 날씨에도 검은색 양복과 모자를 정장하고 성당마다 많은 남자들이 참 흑인의 섬나라를 바다의 귀한 보석인 진주라고 생각 하며, 아 이티 를 카리브해의 흑진주(Black p,없rl in the Canbl:xxm)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외국 친구들과의 많은 만남과, 그들과의 우정 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어려운 지역에서 최 선을 다하는 남편을 보고 가슴 뿌듯한 감사한 마음 석한다. 가난하지만 종교에 대한 열이 강해 기독교 으로 이제 우리 가족의 아이티생활도 마무리 지을 신자들의 숫자도 급증하여 자리가 없을 때는 교회밖 시간이 얼마 남지않은 것만 같다. 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고, 군데군데 그늘 진 곳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도 눈에 뜨인다. 이들은 또한 예술성이 뛰어난 국민이다. 열대 원시 1957년생 적 화풍의 그림과 마호가니로 만든 조각품은 유명하 다. 거리에 명물로 등장하는 대중 교통수단인 픽업을 조병립외무사무관부인 포르투갈, 상파울러, 아이 티에서 생휠 Tap tap( 땅땅)이라고 하는데, 현란한 색체로 화려하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