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 발표 자료집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일시 : 2009년 10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장소 : 한국기독교회관 주최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마산)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재)5 18 기념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관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설 민주주의사회연구소 (마산)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식 순 10:00 개회사 및 진행안내(사회, 차성환민주공원 전 관장) 10:05 기념사 송기인(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윤광장(5 18기념재단 이사장) 10:20 기조발제 :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0:50 제 1발제 :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토 론 : 김원(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 11:50 점심식사 13:00 제 2발제 : 정태석(전북대 사회교육학부 교수) 토 론 : 김동춘(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14:00 제 3발제 :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토 론 : 조정관(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5:00 휴 식 15:15 제 4발제 : 이은진(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토 론 :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6:15 휴식 16:30 종합토론 : 정성기(경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차 례 기조발제 :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발표 1 : 부마항쟁의 정치 문화적 성격 39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토 론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교육학부) 발표 2 :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85 (정태석, 전북대 사회교육학부) 토 론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부) 발표 3 :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 105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토 론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발표 4 : 한국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1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토 론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기조발제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차 례 1. 머리말 2. 부마항쟁이 대규모 항쟁으로 폭발한 요인 1)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항쟁 2) 정치적 계기 3) 경제적 동인 4) 부마항쟁의 역사적 맥락 3.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부마항쟁의 위상 1)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 2) 소외층이 대거 참여한 민중항쟁 4. 부마항쟁으로 인한 유신체제 붕괴의 의의 1)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10 26거사 2) 대참극의 예방 3) 서울의 봄, 그리고 6월 항쟁으로 5. 맺음말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1. 머리말 2005년 8월 해방(광복) 60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달성 한, 긍지를 가질만한 역사를 가졌다고 강조했다. 2009년 오늘의 시점에서 민주주의도 경제도 어려움이 있지만, 오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가졌다는 점은 한국인이 자랑할만 하다. 1950년대에 이승만정권의 압제와 부정선거, 비리. 부패가 끊이지 않았 는데, 만약에 4월혁명이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정의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 전체에서 가장 억압이 심했고, 동시대 제3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권위주의 독재권력이었던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싸운 반유신운동-부마항쟁이 없었더 라면 우리는 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점은 광주항쟁, 1980년대의 역동적인 민주 화운동, 6월항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이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인권을 사랑한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불굴의 민주화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인은 암울한 역사에 서 벗어나 깨어 있는, 그래서 살아 있는 역사를 가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 다. 찬연히 빛나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우 뚝 솟은 봉우리 같은 존재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 부산민주운동사 에서 는 다음과 같이 간결히 서술하고 있다. 부마항쟁은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 주화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그로써 답보상태에 처해 있던 70년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80년대의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고 향도하였던 것이다. 1) 여기서 잠간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연속성에 관해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부마 항쟁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목표로 한 것이라면, 광주항쟁은 유신잔당 타도하자 유신잔당 전두환 일당을 박살내자 가 주된 구호로 등장했다. 양자 모두 유신체제와 그 체제를 답습하려는 세력에 대한 항쟁이었다. 부마항쟁이 10 26정변을 불러일으켜 유신체제 붕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루어 냈다면,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 중심의 전두 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항해 광주 학생 시민이 궐기한 것이 광주항쟁이었다. 이 광주항쟁과 부마항쟁이 기본동력이 되어 1980년대 내내 거센 민주 화 자주화운동, 민중운동이 일어나 6월항쟁으로 매듭을 짓게 되었다. 이 기조발제에서는 먼저 어째서 다른 지역이 아닌 부산과 마산에서 거대한 항쟁으 로 폭발했는지, 그것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큰 규모로 일어났는지 살펴보겠다. 학생 들은 1회성 시위로 끝내지 않았다. 교내에서 투쟁하다가 시내 곳곳으로 옮겨가면서, 오전에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 또 부마항쟁은 민중항쟁이었던바, 시 민들이 학생들의 투쟁을 비호, 성원했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싸웠다. 다음으로 부마 항쟁이 한국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겠다. 그것과 긴밀히 연계되지만, 부마항쟁이 10 26정변을 어떠한 방식으로 유발하였고, 그로 인한 유신체제의 붕괴는 어떠한 의미, 의의를 갖는가를 고찰하겠다. 이 글에서는 부마항쟁이 발발하는데, 그리고 그것의 계승과 관련해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중을 둘 것이다. 유신체제 붕괴가 전두환 등 신군부의 집권에 의해 역사적 의미가 희석된다는 일부 연구자들과 논의를 달리해서, 유신말기 박정희의 정신 상태가 합리성에서 일탈한 비정상적인 점이 많았다는 점을 중시하고, 박정희의 측근인 김재규 거사의 직접적 요인과 유신체제 붕괴가 지니고 있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 의의 를 고찰하는 것에 각별히 비중을 둘 것이다. 후자는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그것의 1) 부산민주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부산민주운동사, 부산광역시, 1998, 429쪽 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총체적 결산으로서의 6월항쟁과도 연관이 된다. 2. 부마항쟁이 대규모 항쟁으로 폭발한 요인 1)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항쟁 부마항쟁은 그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건 시민이건 아무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 몰랐다. 시위를 막아야 할 경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큰 항쟁의 물결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아예 교문을 벗어난 가두시위가 있으리라는 생 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를 주동한 정광민이나 다른 쪽의 서 클 학생들은 교외 진출 계획이 애초에 없었다. 2) 교내 시위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필자는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반대시위인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경이의 눈길로 바라본 바 있다. 삽시간에 문리대 재학생의 대부분이 합세해 시 위를 벌였고, 여학생도 적지 않게 가담했다. 1967년 이래 수많은 데모를 보았고, 그 이전의 문리대 시위에 대해서 선배들로부터 얘기를 들었지만, 1960년 4 19시위 이후 처음 있는, 놀라운 사건 이었다. 그 이후 수많은 대학에서 그해 12월 초까지 동맹휴학 과 시험거부 투쟁이 전개되어 서슬이 시퍼렀던 박정희가 당황해서 학생 처벌 백지화라 는 항복 을 하게 된 것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1960년 4월 19일에 대학생 데모 주동자들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 몰랐다. 광주항쟁도 비슷했다. 국민운동본부측은 1987년 6 10국민대회가 그렇게 크게 벌어지 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또 6월 10일 하루로 일단락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이후 계획은 나중에 구체화하기로 했다. 다 아다시피 6 10대회가 6월항쟁으로 발전하 2) 위의 책, 409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5
는데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그날 밤 늦게부터 시작된 5일간의 명동성당농성투쟁이 었다. 그런데 6월 11일 오후 농성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국민운동본부 는 당황했다. 이 투쟁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계획에 없었던 뜻밖의 사태였고,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을 가져올까봐서였다. 서울에서 학생들 의 6월항쟁 참여를 주도하게 되는 서울지역대학생협의회(서대협) 리더들도 명동성당농 성 투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일반 학생 시민들의 자발적인 명동성당농성투쟁이 계속되지 않았더라면 6월항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3) 중요 시위나 투쟁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이다. 왜 그와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시위, 항쟁이 일어났을까. 서울대 문리 대의 10 2시위의 경우 김대중납치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나의 계기였다. 그 납치사건 을 보고, 신학자 본 히퍼가 히틀러 나찌정권에 대해서 생각한 바와 비슷하게, 이제 박 정희 유신정권이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유해하고 위험한 권력이라는 인식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유신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주동학생뿐만 아니라 일반학생들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기본적 요인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리대생들은 4 19 이래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들이 주 동자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투쟁을 벌인 이유와 맥락이 유사하다. 주동자들이건 일반학생들이건 시민이건 예상치 못한 대규모 시위가 촉발하고, 그것 도 격렬히 전개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조직 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투쟁을 투쟁의 목표와 연결시켜 끌어나가기 어렵다 는 점도 있다. 운동 또는 경험의 미숙성이 있을 수 있으며, 운동이 계기적으로 발전하 거나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3) 말 제12호, 1987. 8.1. 7쪽 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된 요인은 무엇일까. 박정희정권에서 반박정희 활동을 찾아내고 진압, 분쇄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성격과 폭발 이유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 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 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 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중앙정보부장은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있었고, 그것은 체제에 대한 저항, 정책에 대한 불신과 경제문제가 복합되어 일어난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리고 이러한 부마사태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 발제에서는 부마항쟁이 학생과 시민이 일체가 되어 일어난 것을 정치적 계기, 경 제적 배경, 역사적 맥락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광주항쟁도 이와 같은 세 가지 요 인이 작용했지만, 구체적인 데 들어가면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 정치적 계기 (1) 김영삼 의원제명 1979년 10월의 시점에서 다른 지역이 아니고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7
난 것은 그해 5월 이후 정국의 격랑, 파국으로 치닫는 정치정세가 직접적인 매개가 되 었다. 5월 30일 김대중의 지원을 받으며 신민당 총재가 되자 김영삼은 유신체제를 강 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6월 11일 카터 미국대통령의 방한이 유신정권을 도와준다면 우 리 국민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김총재의 발언은 박정희의 아픈 데를 정면으로 찔렀 다.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난폭 한 진압작전으로 1명이 사망하고 신민당 당직자를 포함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김영삼과 박정희의 대립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9월에 들어와 김영삼 총재직무정지가 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정운갑이 직무대행이 된 것도 상궤를 일탈한 행위로 국민을 자극했지만, 10월 4일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전격 처리한 것은 정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었고, 박정희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신민당 의원 66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냈고 통일당 의원 3명이 동조한 것은 분노한 국민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 취재자료인 부산지방 대학생 소요사건 발생보고서 에는 김영삼 신민당총재 제명에 따른 일련의 정국사태에 불만을 표시하는 소요를 벌였다 고 쓰여 있고, 4) 부산 시경의 부마사태의 분석 에 따르면 정치적 배경으로 공화당 장기집권에 대한 전체 국 민의 염증과 함께 신민당 김영삼총재에 대한 제명과 동당( 同 黨 )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 결의가 제시되어 있다. 5) 부산과 마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어서 1979년 여름과 초가을의 정치 사태에 다른 지역사람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김영삼의 의원 제명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할 수 있었다. 당시 엠네스티 부산지방 간사였던 허진수는 18일에 김영삼 제명 철회! 의 구호가 많이 나왔다고 증언하였지만, 6)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중에 김영 4)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자료편찬위원회(부산) 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학술분과 편, 부마민 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산) 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 1989, 35 쪽. 앞으로 이 책은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으로 표기할 것임 5) 위의 책, 71쪽 6) 위의 책, 141쪽 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삼과 관련된 구호가 많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7) 그렇지만 부산항쟁 첫날밤 10시쯤에 광복동에서 김영삼! 김영삼! 하고 연호가 터 져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이 위해 데모했 나? 라는 핀잔섞인 반론이 나온 데서도 8)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시위군중속에는 김영삼 지지자가 많았지만, 김영삼을 지지하기 때문보다 김영삼제명에 분노해서 항쟁 에 참여한 시민도 있었고, 김영삼 제명을 계기로 해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해 쌓인 불만이나 분노가 폭발한 시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경우건 김영삼의 의원직 박 탈은 부산과 마산 시민 학생들을 궐기시키는 데 기폭제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영삼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논의할 것은 학생들의 경우 시민들보다 제명사건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김하기는 김영삼! 을 연호하는 구호가 나온 것은 10월 16일 오후 6시 이후 시청 앞 시위가 처음이라고 기술했다. 9) 부산대 교정에서의 시위에서는 김영삼 제명과 관련된 구호가 나오지 않았고, 나왔다 하더라도 그다지 주 목을 받을만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학생들이 김영삼 제명에 무관심했다는 것은 아니다. 10월 15일 부산대에 뿌려진 민주선언문 에는 의회에서 야비한 수법을 썼다고 하여 간접적으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10) 많은 학생들이 이 시기 의식화 가 진전되면서 권력투쟁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보다 YH사건 등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 민중문제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역시 15일 부 산대에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 에는 대다수 저임금 노동자의 문제를 상당한 비중으 로 언명하고 있고, 11) 10월 16일 부산대에 뿌려진 선언문 에서는 폐정개혁안 으로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을 명시해서 요구했다. 12) 7) 이은진,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99쪽 참조 8)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91쪽 9) 김하기, 부마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73쪽 10)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31쪽 11) 위의 책, 34쪽 12) 위의 책, 32-33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9
그 당시 김영삼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인상을 가진 시민도 있었다. 1975년 4월 인 도차이나사태 이후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가 발 동되었다. 그 직후인 5월 2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이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진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김옥선의원 의원직 사퇴사건에 대해서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비난을 받았다. 곧 이어 이철승한테 야당 당수직까지 넘겨주게 되어 김영삼에 대해서 비판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부마항쟁에서 김영삼이 차지하는 위상과 광주항쟁에서 김대중이 차지하는 위상은 달랐다. 그것은 두 항쟁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주민들은 1971년 대통령선거 에서 김대중이 분패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김대 중에 대한 생명의 위협과 지역차별이 한층 심화되었고, 그럼에 따라서 김대중에 대한 박해와 지역차별이 동일시될 수 있었다. 10 26정변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그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신잔당이 12 12쿠데타 에 이어 5 17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내란죄 등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구속해 생명 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산산히 무너뜨림과 동시에 지역차별이 또다시 심 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하에서 광주민중항쟁은 폭발한 것이다. (2) 유신체제 반대 부마항쟁은 김영삼제명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주요한 투쟁 목표는 유신체제타도였 다. 10월 15일 부산대 교정에 뿌려진 민주선언문 에서는 유신헌법을 악의 근원 이라 고 규정했고, 같은 날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 에서는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 이라고 했으며, 부산대시위가 시작된 10월 16일의 선언문 에서는 유신체제를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 라 하여 학생들이 유 신체제 타도의 선봉에 나서자고 촉구하였다. 13) 부산민주운동사 에는 그 점이 선명히 서술되어 있다. 시위에 나선 많은 시민 학생들의 압도적인 구호가 유신철폐 독재타 도 였다고 한다.(388쪽) 10월 16일 점차 어둠이 짙어가면서 학생시위대 가 민중시위대 13) 위의 책, 31-34쪽 1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로, 시위형 투쟁 이 항쟁형 투쟁 으로 변모해갔지만,(416쪽) 밀려왔다 밀려가는 거대한 조수와 같은 5만여 인파의 장엄한 행렬은 학생들처럼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면 서 어둠을 불살랐다는 것이다.(417쪽) 부산에서 민심이 유신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1978년 12월 12일 치른 총선 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1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공화당은 4명밖에 당선 이 안 되었다. 5명은 신민당 소속이었고, 한 명은 무소속의 예춘호였는데, 그는 야당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선된 공화당 4명도 1위가 한 명도 없었고, 다 차점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여당은 전반적인 득표율 문제 외에 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드러난 상대적 열세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 이라고 논 평했다. 14) 부산만이 아니었다. 12 12선거에서 폭압의 유신체제로, 박정희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통제되고 있었는데도 신민당이 32.82%를 득표해 공화당의 31.70%보다 1.1%나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신민당보다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통일당이 7% 이상의 득 표를 한 것까지 감안하면, 15) 공화당의 패배는 더욱 분명했다. 동아일보가 12월 13일자 에서 오랫만의 흥분 이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박정희에게는 충격이었고, 야당을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게 했다. 12 12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장기집권으로 만성적 독주를 하는 정권측에 대해 비판 적인 입장, 16) 즉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서 뚜렷했지만, 지방에서도 분명했다. 장기집권 - 이것은 긴급조치 9호하에서 에둘러 표현한 것이고, 장기집권과 직결된 유신체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에 대 14) 한국일보 1978. 12. 14. 15) 12 12선거에서 기타 야당의 득표율은 7.4%였는데, 그것은 거의 다 통일당 표였다. 무소속은 1973년 의 선거보다도 거의 10%나 높은 28.1%의 득표율을 보였는데,(손호철, 1979년 부마항쟁의 재조명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이매진, 2006, 189쪽) 그것이 얼마나 야당표에 가까운 지가 명확하지 않아 이 글에서는 야당표로 넣지 않았다. 16) 동아일보 1978. 12. 14.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1
한 비판 외에도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벼 품종이름) 피해, 3대 스캔들사건, 재벌 비호 인상의 제법안들이 두루 작용했다. 17) 1979년 6월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은 한층 더 커졌다. 잇단 정치적 파동은 어 디로 어떻게 달릴지 알 수 없는, 폭주하는 자동차처럼 보였다. 거기에다가 경기는 뒤 에서 서술하겠지만, 12 12선거가 있었던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 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민심의 이반이 급격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산과 마산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큰 규모의 항쟁 으로 먼저 나타났다.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는 주로 대학생들과 지식인층에 있었고, 농민 을 포함한 일반대중은 묵시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지지한 것으로 주장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나 반대는 시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 만, 적어도 1978년 12 12선거에서는 농촌까지도 싫어하는 기색이 적지 않았고, 그 다 음해에는 훨씬 심했다. 그 점은 부마항쟁의 전개과정을 볼 때 아주 뚜렷이 나타난다. 3) 경제적 동인( 動 因 )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한 중요 이유의 하나가 경제 문제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다. 박정희의 치적하면 대부분이 경제발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유신 붕 괴 전해인1978년 12 12총선에서 유신체제인데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패배한 데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피해, 재벌 특권층 중심의 경제가 큰 역할 을 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이 민란 또는 민중봉기의 형 태로 일어나고, 다른 5대 도시에도 확산될 것으로 파악한 것은 유신체제 및 정치파동 에 대한 불만과 물가고 조세저항 등 경제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점 때문이었 다. 부산계엄사령부가 중심이 된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 침체에 17) 동아일보 1978. 12. 14. 1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을 부산항쟁의 첫째 이유로 꼽았고,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그에 항의하여 제출한 야당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고 한 정치적 이 유가 두 번째로 제시되어 있다. 18) 경제적 불만의 심각성을 읽을 수 있다. 유신말기에는 경제적 병폐와 사회적 모순이 노정되고 있었다. 10월 16일 부산대에 뿌려진 선언문 은 특히 경제문제와 사회 부조리를 이렇게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 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 박케...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 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특혜금융 등에 의한 재벌의 비대화와 노동자들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 극명하 게 대립각을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2 12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자 청와대에서 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는데, 부가가치세, 물가고, 노풍피해, 각종 스캔들 등도 요인이었지만, 공화당 위에 재벌 있다 는 야당공세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은 중화학공업이 진전되는 것이 비례하여 해마다 커져갔다. 그 리하여 1979년의 경우 전체 제조업 출하액에서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다. 20) 재벌의 경제적 장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벌이나 특권층은 스캔들이나 퇴폐향락산업이 시 사하듯 1970년대에는 사회적 비리가 많이 노정되었고, 정경유착으로 부정부패도 심했 다. 12 12선거의 결과와 관련해 한 언론인은 계층간의 위화감이 심해졌음을 지적했 다. 요즈음 상류층은 물도 따로 사마시고 심지어는 혼인도 그들끼리만 한다는 것이었 18) 조갑제, 有 故! 1, 한길사 1987, 53쪽 19) 조갑제, 앞의 책 1, 69쪽 2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한국의 사회정의지표, 민중사, 1986, 3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3
다. 21) 물가도 문제였다. 1970년대 내내 거의 해마다 물가가 두 자리수여서 서민들이 주름 살을 펼 때가 없었지만, 1979년에는 제2차 오일쇼크로 당장 7월 10일에 석유제품이 59%, 전력요금이 35%나 올라버렸다. 1977년부터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어 중소상공인들 을 울게 했는데, 조세부담률이 1970년대 하반기에 계속 높아져 1979년에는 17.2%가 되었다. 22) 주택보급률도 70년대 하반기에 60% 미만으로 좋지 않았고, 저임금 노동자 들은 셋방살이도 힘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투기가 1977년 행정수 도 이전설로 불붙었고, 1978,79년에는 광풍이 되어 빈부격차를 한층 더 실감나게 했 다. 토지가격이 1978년에 무려 49%나 급등해 23) 박정권은 급기야 그해 8월 8일 이른바 8 8투기억제조치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항쟁과 관련해 김종철은 유신독재 빈부격차로 유신말기에는 불을 당기기만 하면 폭발하게 되어 있었고, 농촌피폐, 기층 민중의 사회적 불만이 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24) 그의 진단은 부마항쟁 참여자 대부 분이 공감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유신쿠데타 다음해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산업의 구조를 바꿔놓은 중화학공업이 유신체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재벌의 판도는 정경유착과 관계되 기도 했지만, 정부 보증으로 얼마나 큰 규모의 중화학 설비를 위한 차관을 도입하느냐 에 의해 판가름났다. 대재벌들은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끌어들여 중화학산업의 평 균자기자본비율이 22%에 머물었는데, 25) 과도한 중복투자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1979년 5월 총투자규모의 약 30%나 투자보류 또는 중지시킨 대규모 투자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9,80년에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가동율은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이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26) 21) 동아일보 1978. 12. 14. 22)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앞의 책, 18쪽 23) 통계청, 통계로 본 한국의 변화, 2004, 125쪽 24) 부마민주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209쪽 25) 박병윤, 중화학공업계의 내막, 신동아 1980. 5월호, 200쪽 26) 김의균, 중화학투자조정의 내막, 신동아 12월호, 253-255쪽 1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설상가상으로 중화학공업계가 불황에 허덕이자 경기는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외채가 1979년 말로 200억 달러를 넘어서 외채망국론이 제기되었다. 1976년 14.1%, 1977년 12.7%의 경제성장율이 1978년에 9.7%로 낮아진 것도 상대적으로 불경기를 느끼게 했 는데, 1979년에는 6.5%로 크게 낮아지고, 그 다음해에는 마이너스 5.2% 성장률을 보 여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사태를 맞았다. 김영삼 의원제명이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데, 부산과 마산의 경제가 다른 지역보다 나빴던 것도 부마항쟁에 민중을 적극 가담케 했다. 부산 주민의 총생산증가율은 1976,78년에 각각 30.5%, 16.7%로 전국 국민총생산량의 증가율보다 월등 높았는데, 1979년에는 5.6%로 국민총생산성장률보다 낮아 27) 불황의 체감이 컸다. 지역별 임금격 차도 부산이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1979년에 서울을 100.0으로 할 경우 74.3으로 전 북의 67.6을 제외하면 최하위였다. 28) 같은 대도시 주민으로 서울에 대해 반발을 가질 수 있는 요소였다. 부도율도 아주 높아 1979년에 전국의 2.4배, 서울의 3.0배였다. 부 산은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인데도 1979년 증가율이 10.2%로 전국 증가율 18.4%보다 크게 낮았다. 마산의 수출공업단지는 저임금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29) 거기에다가 1979년 9월 현재 24개 업체가 휴 폐업에 들어갔고, 5-6천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30) 최 대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의 하나인 창원공업지대에도 불황이 심했다. 마산항쟁과 관 련해 10월 18일 경남대시위를 주동한 정인권 등 여러 증언자들이 노동자의 저임금 등 마 창지역의 암울한 경제 상황을 강조하였다. 31)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요인이지만, 부산과 마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도 부마 27)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33쪽 28)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앞의 책, 39쪽 29)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평균임금이 다른 수출공단의 평균임금보다 많이 낮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은진, 앞의 책, 79쪽 참조 30) 한겨레신문 1988. 10. 16.(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90-91쪽) 31) 정인권, 이진욱 김종철 이선관 이학룔 등의 증언 참조(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165-165, 186, 209, 214, 216쪽). 마산지역 경제의 열악함에 대해서는 차성환, 참여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 항쟁성격의 재조명,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01-103, 120쪽 참조된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5
항쟁의 배경이었다. 32) 유입인구는 노동자건 룸펜층이건 대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 이 많았다. 4) 부마항쟁의 역사적 맥락 10월 18일 오후 3시 30분경 33) 조금 지나 휴교령이 발표된 이후 50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국제개발학과 2학년인 정인권이 선동하면서 경남대 시위는 시작되었다. 34) 시위 가 전개되었으나 교문을 뚫고나가기가 어렵자 학생들은 이틀전 부산대학생들과 비슷하 게 시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학생들은 3 15의거탑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약속된 오후 5시경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3 15의거탑 주변에 집결했다. 마산항쟁의 거센 불꽃이 타올랐다. 한 나라나 지역에 역사적인 자부심을 가질만한 경험은 두고두고 기억되어 다시금 역사에 살아 있게 된다. 마산학생 주민들이 3 15의거를 기억해내고 3 15의거탑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항쟁, 4월 11-13일에 걸친 제2차 마산항쟁이 없는 4월혁명은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제2차 마산항쟁은 4 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이 두 항쟁을 마산사람들은 3 15의거로 뭉뚱거려 기억하고, 자신들이 마산사람인 것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부산사람들도 4월혁명에 자부심이 있었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들의 시위에 32) 부산은 1970년에 187만여명이던 인구가 1975년에 245만여명이 되었고, 1980년에는 315만여명이 되 었다.(동아일보사, 동아연감 1985, 559쪽) 5년마다 30% 정도씩 증가한 것인데, 이것은 같은 시기 전국인구 증가율은 말할 나위 없고, 서울의 증가율보다도 높았다. 마산의 경우 1971년에 19만여명이 었는데, 1976년에 33만여명으로 증가했고, 1980년에는 38만여명이 되었다.(이은진, 앞의 책, 58-59 쪽) 수출공단이 생긴 이후 급격히 인구가 는 것을 볼 수 있다. 33) 경남대에서 몇 시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는지, 그때 모인 학생수가 몇명이었는지는 참가자 증언이 다 르다. 이 글에서는 이은진교수 주장에 따랐다.(이은진, 앞의 책, 133-151쪽) 34) 이때 정인권은 지금 부산에서는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피를 흘리고 있다. 3 15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 라고 연설했다고 10 18마산민중항쟁의 전개과정. 에는 쓰여 있으나,( 부마민주항쟁10주 년기념자료집, 279쪽) 정인권의 증언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170-171쪽) 1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부터 3 15에 이르기까지 시위는 고등학생 중심이었는데, 부산에서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고등학생들이 이 시기 데모에 참여했다. 더 나아가 3 15마산항쟁 이후 3월말까 지 부산의 고교생들이 다른 지역보다 가장 많이 참여했다. 3 15의거 불씨를 살렸다고 볼 수도 있었다. 4 19전날인 4월 18일 동래고생 1천여명의 시위는 고려대의 시위와 함께 기억할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4 19 하면 서울을 떠올리지 부산과 광주에서 피의 화요일 인 그 날 얼마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날 11시 조금 지나 경남 공고생과 데레사여고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4 19부산시위는 비내리는 오후에 격화 되었다.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투석을 하면서 소방차와 경찰 지프차 를 뒤집어엎고 불을 질렀다. 곧 경찰이 데모대를 정면으로 겨누며 총을 쏘았고, 7,8명 의 젊은이가 풀잎처럼 쓰러졌다. 시위대에 실업자 껌팔이 구두닦이 등이 합류했다. 동 부산경찰서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오후 5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35) 19년 뒤의 부마항쟁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4 19항쟁으로 부산에서는 13명(4월 22일까지의 집계 임)이, 광주에서는 경찰관 1명을 포함해 6명이 사망했다. 4월혁명이 아니더라도 부산과 경남지방은 진보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거 점이었다. 선거를 통해서 그 점을 살펴보자. 1950년 5 30선거에서 이승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함께 부산에서 바람 이 불어 중도파 민족주의자인 장건상과 김칠성이 옥중 당선되었다. 최초로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인 1952년 8 5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 만후보는 523만여표를, 차점자인 조봉암후보는 79만여표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경우 이후보가 105,917표, 조후보가 81,873표로 발표되어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산도 각각 15,750표, 11,262표로 큰 차이가 나 지 않았다. 36) 1956년 5 15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과 조봉암이 각각 504만여표, 35) 옥일성,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4월민주혁명추모회, 1960, 220-234쪽 36)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1, 1973, 997쪽. 득표의 경우 1971년 선거까지는 이 책에 의 거했음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7
216만여표로 발표되어 차이가 줄어들었으나, 부산에서는 꽤 큰 차이가 난 것은 심한 부정선거가 영향을 미쳤다. 37) 그 점은 곧 이어 치러진 지방자치선거에서 어느 정도 확 인해준다. 공권력의 방해공작으로 특히 부산 경남지역에서 야당인 민주당원들은 입후 보하기조차 힘들어 부산의 경우 시의회의원에 3명밖에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다. 38) 1971년의 대통령선거는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와 함께 격전의 연속이었고, 야당후 보의 정견이나 공약이 참신했다. 1971년 선거에서 부산은 야당후보 선거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으로 의미가 있다. 김대중후보는 부산을 첫 번째 중요 유세지로 정했다. 4월 10일 김후보의 부산유세장에 16만 인파가 몰리면서 선거는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다. 선거 결과 부산에서 박정희후보가 김후보를 8만여표 앞질러 5.6대 4.4의 비율을 보여, 영남과 호남 전체를 통하여 지방색이 가장 적었다. 부산시경에서 부마항쟁을 분석한 것 중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부마항쟁의 간접 원인으로 서울 등 전국 대학가의 연쇄적인 소요 사태 파급 영향 과 함께 물리적 작 용에 의한 부산지역 대학가 소요 유발의 장기억제(*10 16 이전 사태 전무) 등을 꼽 고, 직접 원인으로는 국립대학으로서 체면유지 데모를 해야 한다는 전체 학생들의 잠 재의식 과 10 15 유신철폐 내용의 불온유인물 살포 를 제시했다. 39) 너무 단순한 분 석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으나, 간접원인이든 직접원인이든 오랫 동안 부산지역 대학가 에서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부마항쟁과 같은 큰 시위를 불러일으켰다고 파악하면 서, 그 점을 중시하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강한 학생들한테, 더구나 자신의 지역에 대한 강한 자 부심이 일종의 전통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 내려오고 있는 곳에서, 반독재투쟁이 없 었을 경우 일반 학생들의 경우도 자괴감을 가질 수 있다. 반유신시위투쟁이 없었던 마 산과 부산의 경우 특히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을 수 있다. 부산 37)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사비평사, 1999, 150-156쪽 참조 38)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71-172쪽 참조 39)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71쪽 1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과 마산의 학생시위가 주동학생이 생각했던 것보다 폭발적으로 크게 일어난 하나의 요 인으로 이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0월 18일 경남대 도서관 앞에 약 5백명의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정인권은 우리 경남대학은 대학생연맹에도 가입하지 못했고 경남대학생은 돼지새끼만 모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하여 학생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 불명예를 씻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40) 이날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와 3 15의거탑에 모이자, 학 생들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탑 앞에서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 주십시오. 우린 전국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시위를 벌일 때 학교당국의 농간으로 유신찬성 데 모 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 라고 묵념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독재타도 박정권 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41) 당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 사이에는 서울의 모모 여대에서 가위를 보냈다느니, 면도칼을 보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로부터 시위소식을 접할 때 마다 유신대학 이란 오명에 대한 강한 모멸감과 자괴심을 금할 수 없었다. 대다수 학 생들이 느끼고 있었던 공통된 감정이었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들이 10 16시위에서 학 생들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고 증언했다. 42) 앞에서 서울대문리대의 1973년 10 2시위가 유신쿠데타 1년이 다 되도록 이대로 가 만히 있는 것은 문리대 학생으로서 있을 수 없다는 감정이 작용했음을 기술한 바 있 다. 1960년 4 19도 유사점이 있었다. 대학생들은 제2차 마산항쟁에 해인대(경남대 전 신) 학생 50여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4월 18일 전에는 데모에 나서지 않 았다. 그래서 중고등학생들이 언니들은 너무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제2차 마산항쟁을 보고 더 이상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있었다. 4월 18일 먼저 고려대 학생들이 뛰쳐나왔고, 그 다음날 아무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을 몰랐지만, 이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집을 나섰다. 40) 위의 책, 77쪽 41) 위의 책, 95쪽 42) 위의 책, 266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9
역사적으로 긍지를 가진 지역에서 꽤 긴 시간 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여건이 성숙해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 불을 당기면 일거에 확 타오르게 되어 있는 경우 그러한 불을 앞서서 당긴 매개체로서의 역할은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부산대에서 10월 15일 유인물을 살포한 이진걸팀이나 신재식팀, 10월 16일 부산대 교내시위를 선도한 정광민 등과, 10월 18일 경남대 학생시위를 불붙이는데 역할을 한 정인권 등은 선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부산 김형기 등의 양서조합은 부산지역운동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 다. 3.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부마항쟁의 위상 1)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쿠데타가 일어난 1972년 10월 이래 최대 규모의 유신철폐 시위였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기 1년전 위수령으로 군대를 풀어 학원에 투 입했고, 23개 대학에서 177명을 제적시켜 대부분을 군대에 끌고갔다. 유신체제에 시위 로서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을 일치감치 철저히 제거한 것이었다. 유신권력은 철옹성처럼 강력해보였으나, 1971년 10 15위수령발동 2년, 유신 계엄령 선포 1년쯤 된 1973년 10월 2일부터 반유신투쟁이 격화되었다. 그렇지만 시위는 규모 가 큰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대학이 동맹휴학과 시험거부 방법으로 싸웠다. 긴급조 치 1호 발동을 전후해서 전국 각 대학을 연결해 동시다발 시위를 전개해보고자 했으 나, 1974년 긴급조치 4호 발동과 함께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조작으로 큰 탄압을 받았을 뿐이었다. 1975년 봄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규모가 큰 학내 시위, 가두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어느 것이나 1979년 10 16 부산대 교내 시위의 규 모를 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2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975년 4월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보수 냉전세력의 위기의식과 결합해 각양 각색 의 안보궐기대회가 일어나고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박정희 유신권력은 다시 강고해 진 것으로 보였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에서 김상진군 장례식 및 추도식 을 거행한 뒤 5백여명이 교문밖을 나섰으나 해산당했다. 그뒤 1976년 10월이 되어서야 시위는 다 시 시작되었으나, 규모는 크지 않았고, 짧은 시간에 봉쇄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 경찰 정보형사, 전투경찰대, 대학 직원에 때로는 교수까지 동원되 어 1970년대 후반에 시위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붙잡힐 순간까지 몇분만이라도 버티면서 더 많은 학생 을 모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1977년 10월 연세대 에서 대강당 4층의 폐쇄된 박물관 유리창을 깨고 플래카드를 내려보내면서, 1975년 봄 이후 최대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3,4천명이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히 시위했다. 11월에 는 서울대에서 규모가 큰 시위가 있었고, 다음해인 1978년 봄에는 시위가 부쩍 늘었 다. 이해 6월 26일에는 여러 대학교 학생 1천여명이 참여하여 광화문에서 1979년 10 월 16일 부산시위와 흡사하게 해산했다가 다시 집결하는 방식으로 오후 6시 40분경부 터 10시반경까지 시위를 해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10월 17일의 광화문 연합시위는 권력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1978년부터 그 다음해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전국 각 대학에서 유인물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또 버스 환 기통 등을 이용해 시민들한테 유인물을 살포하였고,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부마항쟁은 유신쿠데타 이후 최대의 반유신 시위투쟁이었다. 유신체제라는 극단적 독재권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것이 부마항쟁이었다. 나아가 부마항쟁은 4월혁명 이후 최대의 시위로 기록될 수 있다. 4월혁명 이후 유 신쿠데타에 이르기까지 가장 규모가 큰 시위는 1964년에 한일회담과 박정희정권에 반 대해서 일어난 6 3사태였다. 6월 3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고, 경 찰서를 습격하고 군용트럭을 탈취하는 일도 있었다. 이날 오후 늦게 계엄령이 선포되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1
었다. 그러나 10월 16, 17일의 부산항쟁보다 규모가 작았다. 부마항쟁은 1960년 4 19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수일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차이 가 있다. 1979년 10월 16일 10시 조금 전부터 시작된 부산대 교내 시위는 4천여명으 로 불어났고, 이날 부산 중요 거리의 야간시위에는 5만여명이 참여했다. 43) 유신쿠데타 발발 7주년이 되는 10월 17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어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18일 저녁에도 2천여명의 시위대가 시청으로 전진했다. 18일 오후 3시 반쯤 경남대 교정에서부터 시작된 마산시위는 밤에 1만여명의 인파 가 44) 격렬한 시위를 벌여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고, 군부대가 들어온 19일에 도 저녁 8시경부터 격렬히 시위가 전개되어 20일 새벽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계속 되었다.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는 마 창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계기적으로 규모가 큰 시위가 전개된 것은 부마항쟁 이전에는 1960년 4월 25, 26일 의 서울 시위와 제2차 마산항쟁이 있었다. 4월 25일 교수들이 오후 5시 50분경부터 시위에 나서면서 시작된 서울시위는 일부가 광화문 일대의 탱크 위에까지 올라갔고, 다음날 새벽 두시경까지 계속되었다. 26일 통금해제 시간이자 동틀 무렵인 5시경부터 오전 9시경에 3만인파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고, 콩볶는 듯한 공포탄 발사가 조금 지난 10시 20분경 계엄사령부 선무반은 이승만 하야를 발표했다. 승리의 화요일 이었 다. 4월 11일부터 시작된 제2차 마산항쟁은 제1차 3 15항쟁보다 규모가 커져 오후 6 시경에 약 3만명이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부마항쟁처럼 여러 날에 걸친 투쟁이 계속된 것은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 있다. 이 러한 점에서도 부마항쟁은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과 함께 민주화운동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43)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09-417쪽. 부마민주항쟁의 전개과정 부마민주항쟁10주년 기념자료집, 274쪽에는 18일 야간시위에 3-5만명이 참여했다고 쓰여 있다. 44)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11-212, 285쪽 등 참조 2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 소외층이 대거 참여한 민중항쟁 부마항쟁은 민( 民 )이 대거 참여했고, 어둠이 깔린 이후의 투쟁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고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 중요한 특색이다. 이러한 민중항쟁적 성격의 시위투쟁은 부 마항쟁 이전에는 사례가 드물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1960년 2월 28일부터 1990년대초까지 학생운동이 계속되었다. 진보적이거나 민족적 활동을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학생들이 맡은 경우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동서 양 진영으로 갈라진 엄혹한 냉전체제의 한복판에 서 민족주의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고, 그 냉전체제에서 극우반공주의가 이 땅을 휩쓸 다시피 했기 때문에 진보세력이 조봉암 진보당과 4월혁명 이후 1년 정도 활동한 혁신 계를 제외하면, 6월항쟁 이전에는 정당형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1970,80년대의 재야민주세력도 투쟁방식이 제한되어 있어 학생층이 시위투쟁을 주도했다. 1964년 3 24투쟁에서부터 부마항쟁 이전까지는 거의 모든 투쟁이 학생에 의해 이 루어졌다. 일반 시민이 가세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6 3사태의 경우 일부 시민과 불 우한 청소년, 실업자가 가담을 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2월 28일에서부터 4월 26일까지 계속된 1960년 3,4월항쟁은 학생혁명이라고 불리울 만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4월 19일 서울의 경우 오전 11시 50분경 학생 시위대 가 중앙청으로 향할 무렵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실업자 넝마주이 등의 불우한 청 소년, 청년들이 벌떼같이 달려왔지만, 경무대 앞에서, 또 다른 지역에서 투쟁의 주역은 대학생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가담한 학생층이었다. 이날 광주는 학생 중심이었고, 부 산의 경우 초기에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나중에 실업자와 반( 半 )룸펜층 등 이 다수 가담했는데, 이 부분은 자료를 더 확보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마산항 쟁의 경우 시위 촉발은 학생이 아니라 민주당청년당원이었고, 1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저녁 밤 시위에 시민들이 대거 가담했다. 3만명 안팎이 참여한 제2차 마산항쟁의 첫 날 시위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했는데, 4월 12,13일의 시위는 중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3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면밀히 비교 검토하여야겠지만, 부마항쟁, 그중에서도 마산에서 민들이 대거 참여한 양상은 광주항쟁이나 6월항쟁에 민들이 참여한 양상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광주항 쟁의 경우 광주사회의 리더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산층 또는 중간계층도 다수가 참여했다. 6월항쟁에서 시민 참여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성당 교회 사찰 등이 중 요한 매개를 이루었고, 다수의 시민이 사전에 인지하고 참여했다. 부산민주운동사 에는 10월 16일의 부마항쟁 첫날 시위가 저녁 6시경까지는 학생들 이 주도하였지만, 어둠이 깔리면서 시위의 주도권이 점차 시민들에게로 넘어가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진 것으로 기술했다. 도심의 대로가 시위 인파로 넘쳐흐르던 7시경 학생들은 소수였고,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회사원에서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의 종업 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 등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구호를 외치고 투쟁했다는 것이 다. 45) 부마항쟁에는 시민들이 학생 시위를 적극 성원하고 옹호했으며, 학생과 더불어 싸 웠고, 나중에는 시민이 시위대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이어서 야유와 욕지거리가 쏟아지는 속에서 경찰의 대응은 힘들었고, 심지어 경찰 작전차에 불길이 솟아 경찰 간부 가 작전차를 구하기 위해 돌격을 명령했는데, 경찰이 따르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46) 부산시위와 마산시위의 참여층은 얼마간 차이가 보이지만, 대체로 영세상인, 영세기 업 노동자들과 반실업상태의 자유노동자,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접객업소 종사자. 상점 종업원, 도시룸펜 부랑아나 무직자가 대종을 이루었고,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 도 상당수 호응한 비조직적 민중항쟁이었다. 47) 그리하여 공룡처럼 커진 재벌, 정경유 착, YH사건이 말해주는 비윤리적 기업가. 돈 있는 자들의 부동산투기, 각종 스캔들, 퇴폐 향락산업과 밤문화가 한쪽으로, 다른 한쪽으로 고물가, 경제불황, 과다한 세금, 영세 상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실업, 셋방살이, 좌절과 체념 무력 45)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16-417쪽 46) 조갑제, 앞의 책 2, 11쪽 47)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25-426쪽 2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감, 전도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생활, 자신들의 고향인 농촌의 피폐 등이 대칭을 이루 고 있었고, 후자에는 극명한 빈부격차, 박정희 유신체제의 노선(정책), 비리, 부패와 억 압, 금제( 禁 制 ), 장기집권과 정치적 폭주( 暴 走 )가 거대한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은 김재규가 말한 대로 민란이나 봉기의 성격은 지니고 있었지만, 난동 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시위참여자들은 유신독재의 주구라고 본 치안기관, 공화당당 사와 그밖의 공공기관, MBC KBS 등의 언론기관, 차량 등을 공격하고, 파출소 안에 있 는 박정희사진을 내동댕이치고, 마산에서는 상류층과 관련있는 자가용차나 고급스러운 간판 건물에 대한 파손도 있었으나,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는 그대로 놔두었고 흉 기도 지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간인의 재산이나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손을 대지 않았으며,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학생들과 같이 유신철폐, 독재 타도, 김영삼제명 철회, 언론자유, 부가가치 세 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급진적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 점에서 부마항쟁은 민주화운동이었다. 그와 함께 참여층을 볼 때 박정희의 경제정 책에 대한 전반적인 수정을 요구한 투쟁이었다. 필자는 198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부 르주아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투쟁을 벌인 면이 크다고 주장한 바 있다. 48) 그 점은 천 황제 철폐를 주장했던 일본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6월항쟁시기 학생시위를 주 도한 학생운동 리더층이나 일부 재야인사들은 급진적 정치이념을 주창했지만, 6월항쟁 은 6 29선언으로 귀착되었다.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이승만정권 타 도, 박정희 유신 철폐, 유신잔당인 전두환 신군부정권 타도 등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를 실현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역사적 과제였다. 마산야간시위에서는 불을 끄라는 외침이 많았다. 스크럼을 짜고 나가면서 학생들은 48) 서중석,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관과 계급관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연구, 지식산업사, 1989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5
불을 꺼주시요 하면서 상점과 민가에 협조를 요청했고, 불을 끄지 않은 건물에 투석을 했다. 49)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많은 일반 시위대도 마산 어시장과 극동 예식장 사이에서 불을 끄지 않는다고 2층 유리창을 박살내는 등 소등을 요구했다. 시 위는 어둠속에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부마항쟁에 참여한 시민은 거의 다 미조 직 군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부산시위에서 아직은 부산운동권이 고립, 분산적 수 준을 벗어나지 못해 민중항쟁을 이끌어가기가 어려웠고, 항쟁은 주로 미조직 군중의 자발적이고도 폭발적인 참여에 의존해서 증폭되어갔다. 50) 조갑제는 10월 16일 밤 시위 에서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의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나, 그 다음날에는 셔터를 내렸고, 반면에 국제시장의 영세상인들은 17일에도 적극 지원했다고 기술했다. 51) 부유 한 상인층은 명백히 비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마산시위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끄게 하는 등 소등을 요구한 것은 익명성을 보장받으려는 행위로, 군인 출동 등 공권 력이 거세게 나오면 시위가 더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4. 부마항쟁으로 인한 유신체제 붕괴의 의의 1)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10 26거사 김제규의 10 26거사가 없었더라면 유신체제 붕괴는 늦추어졌거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4월혁명과 비교해보면 그 점이 분명하다.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은 85세로서 아무리 권력욕이 강했다 하더라도 노쇠현상이 있어 한계가 있었 다. 그 반면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62세로 권력의 집념이 원기왕성할 때였 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초부터 중앙정보부라는 권력을 지탱해주는 막강한 정보 사찰기 관인 중앙정보부를 갖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그렇지 못했다. 4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된 49)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44쪽 50)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24-425쪽 51) 조갑제, 앞의 책 2, 24, 39-40쪽 2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이후 군은 이승만의 명령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인 면이 있 었고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유신말기에도 박정희는 군을 확고히 장악했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는 충성을 다짐했고, 다른 부대도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 하기 어려웠다. 박정희는 휘하에 자신이 직접 명령할 수 있는 공수특전단과 같이 진압 을 목적으로 한, 큰 규모의 특수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승만정권의 제2인자인 이기붕은 유약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이 아니었고, 군부대로 피신하다가 일가족이 자살했다. 그렇지만 김재규를 제치고 제2인자 노릇을 했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박정희 신도로서 반박정희운동에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언론 또한 이승만에게 대단히 비판적이어서 데모를 크게 보도했는데, 부마항쟁에 대한 언론 보도가 말해주는 바 그대로 긴급조치 9호 등에 묶여 언론은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다만 미국이 4 19 이후 이승만정권을 지지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박정희정권에 대 해 비판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정권에 비해 박정희 유신정권은 미국에 대해 더 많 은 자율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을 비교해볼 때 10 26이 없었더라면 유신체제 붕괴는 늦추어졌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4 19와 같은 시위의 존재였다. 이승만한테 최후의 타격을 입힌 것은 교수단 데모와 그것에 뒤이어 발생한 4월 25, 26일의 시위였지만, 4 19로 이승 만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19 이후 1주일만에 4 26이 있었 는데, 부마항쟁이 있은 지 6,7일만에 10 26이 발생했다. 6월항쟁이 없는 노태우의 6 29선언은 있을 수 없다. 비슷하게 부마항쟁 없는 10 26은 상정하기 어렵다. 김재규는 1979년 5월말 신민당 당권경쟁에서 연금 상태에 있는 김대중이 외출할 수 있게 해주어 당원들에게 김영삼을 지원하도록 말할 수 있게 했다. 박정희의 명령을 어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7
긴 것으로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수 없는 행위였지만, 그것에서 김재규의 유신체제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영삼의 총재 당선은 박정희의 의원 제명을 몰고와 부마 항쟁을 촉발했는데,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유신권력의 입장에서 보지 않았다. 부마항쟁은 10 26거사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한 18일 0시가 조금 지난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해 보고를 받았다. 김재규는 7 년 동안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되는 사이에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팽배해졌다고 판단했는데, 결국 부마항쟁 같은 국민적 항거라는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 로 나타났음을 확인했다. 52)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박정희에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 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 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 라고 보고했으나 박정희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박정 희는 10월 26일 저녁에도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말하면서 - 여기서 광주사 태에 김대중이 개입했다는 전두환 신군부의 주장이 상기될 것이다 - 부산사태에는 아 무 것도 모르는 식당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이 가담했다고 억지를 썼다. 53) 김재규는 부산에 갔다 와서 태도가 달라져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가 유신의 심장 을 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한 것은 부산에 갔다와 박정희에게 보고한 직후로 보인 다. 김재규가 10월 24일 이후락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로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나, 김재규가 존경했고, 김재규 요청으로 유정회소속 의원을 떠맡았던 이종찬장군이 더 이상 유정희의원을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 요 라고 말한 것도 54) 생각이 있어서였다. 2) 대참극의 예방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기로 결심한 것은 부마항쟁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너무나 52) 김대곤, 앞의 책, 104쪽 53) 위의 책, 215쪽 54) 조갑제, 앞의 책 2, 77-78쪽 2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도 충격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5대 도시로 확산될 거라고 덧붙이자, 박정희가 화를 버럭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 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 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 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 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 라고 큰소리쳤다. 55) 차지철이 과장하여 말했을 수 있지만, 대 참극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었다. 10월 26일 궁정동 회식에서도 김재규가 신민당이 초 강경으로 돌아서서 공작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하자 차지철은 까불면 싹 쓸어버리겠 다 고 내뱉었다. 56)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 민란 비슷한 시위가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으로 생 각했는데, 10월 23일 신민당 황낙주의원에게도 난국을 수습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57) 대참사가 벌어질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 다. 부마사태가 일어난 정치적 계기나 경제적 동향은 부산 마산만의 현상이 아니고 전 국적인 현상으로 다른 지방도 비슷했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재벌의 팽창, 비윤리적 기 업주, 부동산 투기 행위, 향락 산업, 스캔들도 그렇고 영세상인의 어려움, 저임금, 열악 한 노동환경, 셋방살이, 좌절과 무력감, 전도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층의 광범위한 존재도 그렇다. 또 서울에서는 반유신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지방에 파급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이후 계속된 정치적 파행이 더 심각한 양상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전두환 신군부 와도 달랐다. 성격도 차이가 나지만, 명령계통도 훨씬 단순화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 短 氣 )와 비슷한 성격, 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이 있었 55) 김대곤, 앞의 책, 258쪽. 이와 함께 이 책 216쪽 참조. 56) 위의 책, 219쪽 57) 조갑제, 앞의 책 2, 120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9
다. 그는 의회정치를 싫어하고 효율의 극대화를 주장한 일본 군국주의 장교들이 일으 킨 1936년 2 26쿠데타에 심취되어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군 숙청이 전개되었을 때 남로당프락치였던 그가 살아남은 것은 육사 동기생 등의 프락치 관계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오치성내무장관 해임안으로 유발된 10 2항명파동에서 공화당 중진이자 그의 둘째형 동지였던 김성곤과 오랜 측근이었던 길재호가 중앙정보 부에 끌려가 혹독히 당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를 인지시켰다. 그 점은 중앙정보부장을 가장 오래했던 김형욱의 죽음에서도 짐작된다. 소위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8명이 처형된 것은 유신체제 보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 든지 할 것이라는 것을 확고히 보여준 법살( 法 殺 )이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말기에 정신적으로 몰리고 있었고, 판단력에 이상 증후가 있었 다. 앞에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행태인가를 지적했지만, 그는 김영삼을 구속까지 시키려 하였다. 부마항쟁 처리과정도 문제가 있었다. 부산지역이 포함되는 2관구사령관 장성만소장 은 구태여 군 동원을 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부마사태를 잘 알고 있는 구자춘 내무장관, 노재현 국방장관, 박찬현 문교장관도 반대했는데, 박정희가 독단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는 위수령 발동 이전에 두 번이나 직접 계엄사령관에게 마 산사태를 도와주라고 전화해서 부산에 내려온 2개 공수특전사 여단 중 1개 여단이 마 산에 급파되었다. 장성만소장의 발언에 대해 차지철은 화를 냈다. 차지철은 국방장관 이나 육군참모총장과 사전 상의 없이 월권으로 18일 새벽에 서울지역 공수여단을 부산 으로 공수하고 군수사령관 박찬긍중장에게 계엄 선포 및 계엄사령관 임명을 맨처음 통 고했다. 58) 비정상적인 권력 행태였다. 차지철의 월권행위, 권력남용에 대한 박정희의 태도도 얼마나 위험하게 국정을 운영 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군 58) 위의 책 1, 162쪽, 위의 책 2, 43, 48-50, 79쪽 3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단장급 중장을 경호실 차장에, 차장보에는 사단장 급 소장을 앉혔다. 유엔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경호실에 사단병력을 배치할 것을 요구하다가 탱크와 헬기, 중화기 를 갖춘 30경비단 4개 대대를 휘하에 두는 등 국군지휘체계와 행정지휘체계를 문란케 했다. 장관이나 참모총장에게도 안하무인격이었다. 이 시기 차지철과 김재규가 심한 갈등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박정희는 모른 체 했다. 박정희의 여자 관계도 비정상적이었고, 유신말기에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웠다. 혼자 여자관계를 갖는 소행사 도 문제가 있지만, 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이 동석하는 대행사 는 정상적인 여자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조금 있다가 행위 를 할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국사 등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유신체제 말기에 소행사와 대행사의 빈도가 매우 높아서 사흘만에 한 번 꼴로 궁정동 안가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59) 말 썽 많았던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장녀 근혜와 최태민에 대한 김재규의 조사보고에 대한 박정희의 조치도 상궤를 벗어난 행위였다. 60) 차지철도 그렇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성격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중대한 사태에 대한 결정 과정이 유신정 권 말기는 한층 더 단순화되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고 그것 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으며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단기나 결기가 순간적으로 발동되어 즉각 극단적인 초강경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었다. 정치적 파행과 급격히 나빠지고 있던 경제적 상황,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의 급격한 증가, 반유신운동의 치열함 등을 볼 때 부마항쟁과 같은 사태가 나타날 가능성은 개연 성이 높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성격과 권력 행태를 볼 때, 특히 유신말기에 보여준 비정상적인 면을 볼 때, 부마항쟁과 같은 민중항쟁이 나타날 경우 대참극이 일어날 가 능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아니 59) 김재홍, 군 2, 동아일보사, 1994, 195-216쪽 60) 조갑제, 앞의 책 1, 24-27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1
할 수 없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들어온 공수부대의 행위는 광주항쟁에서의 그것을 상기시킨 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18일밤 시위에 공수부대가 대검 꽂은 총으로 시위대를 헤집으며 닥치는 대로 총을 휘둘렀다. 건방지다고 지나가던 사람이 개머리판으로 맞아 뇌수술을 받았다. 부산항쟁으로 발생한 11명의 중상자중 5명이 18일밤에 피해를 입었 다. 경찰도 공수부대원 10여명으로부터 얻어맞았다. 61) 부마항쟁에서 사망자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0월 16일 부산 대 교내 시위에 대해 경찰은 미숙하게 대응했을 뿐 아니라, 거리에서의 민간인이 합세 한 시위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10월 18일 마산의 시위도 경찰력이 부족했고, 적절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시위하고 빠지는 게릴라식 방법으로 시위를 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시위를 했기 때문에 경찰은 힘을 쓰지 못했다. 경찰은 1960년 3 15마산시위 때와는 달리 학생 시민항쟁에 잔혹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마산의 이틀간 시위에서 체포된 500여명은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 이 아니고, 상당수가 뒷전에서 체포되었다는 지적은 62) 시사하는 바가 많다. 가장 중요 한 것은 시위대가 군과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대결한 경우가 광주에서와는 달리 별반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진압되었다는 점이다. 3) 서울의 봄, 그리고 6월항쟁으로 필자는 4월혁명으로 새로운 사고, 새로운 기풍이 진작되어 알게 모르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63) 수구냉전적인 사고가 팽배한 극우반공 정권이 무너 지면 크든 적든 이와 같은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다. 10 26이후부터 광주항쟁에 이 61) 위의 책, 61-64쪽 ;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422쪽 62)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90쪽 63) 서중석, 4월혁명 직후 민주화 이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 개, 2009, 209-213쪽 3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르는 과정은 한홍구교수가 발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몇 가지만 간략 히 언급하려고 한다. 학생들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점차 활기를 띠었고, 5월에 들어서자 서울대에 서 1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갖는 등 규모가 큰 집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5 월 14일 전국에서 6만여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가두투쟁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 역 앞에 10여만명의 학생과 시민이 집결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부터 규모가 큰 학 생집회 시위가 일어나 16일에는 9개대에서 3만여명이 집결했다. 시위가 끝난 뒤 학생 들은 특별한 일 이 발생하면 다음날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5 17쿠데타가 발생하자 18일 전남대 교문 앞에서부터 광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비록 살얼음을 디디는 것 같은 서울의 봄이었지만, 박정희유신체제와 전두환 신군부의 유 신잔당 에 대한 항거는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광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 그리하여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은 노동운동을 촉진했다. 노동조합 결성, 어용노동조합 반 대, 노동조합의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많은 사업장에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전개되었다. 서울의 봄 마지막 시기에는 한국노총에 대해 민주화 요 구가 일어났다. 64) 이중 4월 하순에 발생한 사북사태는 폭발적으로 분출할 것 같은 유 신말기의 상황과 서울의 봄이 결합되어 일어난 일종의 봉기였다. 10 26이 일반 대중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 점도 과소평가하는 것은 문제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서울의 봄 으로 소생하는 듯했지만, 12 12쿠데타로 군 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5 17쿠데타를 일으키자, 일반 대중은 일단 그것 에 순응하거나 체념상태였다. 그러나 10 26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강렬했던 광주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그후 일반 대중도 2 12총선에서 상당수가 선명야당을 지 지했으며, 6월항쟁에 나섰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6월항쟁으로 진전된 것이었다. 64) 김영곤, 한국노동사와 미래 2, 선인, 2005, 221-227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3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박정희유신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박정희 유신정권을 전두환정권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 만, 미국의 압력과 함께 4월혁명의 영향이 작용해 5 16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하겠다 고 안 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하게,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광주항쟁과 사회여건 변화 등으로 양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우선 대통령의 임기와 선출방법, 대통령의 권한이 달랐다. 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9호까지 선포했지만, 전두환은 비상사태령도 내리지 못했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 의라는 주권적 수임기관을 좌지우지했지만, 전두환은 그런 것이 없었다. 국회의원 선 출 방식도 달랐다. 12 12총선과 5 30전당대회 이후 김영삼에 대한 행태를 볼 때 박 정희는 2 12총선과 그 이후의 사태를 묵과했을까. 박정희는 걸핏 하면 계엄령 위수령 으로 군을 출동시켰지만, 전두환은 1981년 이후 군을 출동시키기가 어려웠다. 민주화 운동에는 언론의 보도태도가 중요한데 그 점도 달랐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보도는 비슷했지만, 유신말기의 부마항쟁은 계엄령 이전에도 보도를 하지 못했으나, 전두환정 권 말기에 일어난 6월항쟁에 대해 전두환정권은 보도통제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권 안보와 직결된 반공 반북교육도 박정희유신정권과 전두환정권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자가 심했다. 부마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서 광주항쟁 6월항쟁으로 이어졌지만, 부산지역에 서의 과정을 보더라도 2 12총선을 거쳐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전두환정권을 곤경 으로 몰고간 1985년 2 12총선에서, 김영삼바람이 작용한 것이지만, 부산은 서울보다 도 월등 신민당후보와 다른 야당후보를 많이 당선시켰다. 서울에서는 민정당후보가 13 명, 신민당후보가 14명, 민한당후보가 1명 당선되었는데, 부산에서는 민정당후보를 3명 만 당선시킨 반면 신민당후보를 그 두 배인 6명, 기타 다른 당 후보를 3명 당선시켰 다. 6월항쟁이 발발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한 1979년 1월 14일 박종철고문사망사건으로 3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 7국민추도회가 열렸을 때,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은 서울과 함께 시위대 규모가 가 장 컸다. 6월항쟁에서 부산지역은 항쟁을 확대, 진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월 12일부터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해 18일에는 수십만명의 인파가 중심가를 가득 메 웠다. 65) 부산의 기록적인 대시위는 바로 전국에 알려져 6월항쟁을 고조시키는데 강력 한 힘이 되었다. 5. 맺음말 굴곡은 있지만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를 갖게 된 것은 이승만정권 박정희유신정권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맞서 끊임없이 민주화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에 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각별히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부마 항쟁의 경우 발발했을 때에도 보도통제로 다른 지방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이후에 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다른 반유신시위와 비교가 안 되게 규모가 컸고 폭발적이었으며, 1960년 4월혁명 이후로 보더라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부마항쟁은 그 이전의 다른 시위와 달리 1979년 10월 16일에서부터 10월 20일 새벽까지 규모가 큰 시위가 여러 날에 걸쳐 격렬히 계속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비슷한 지역에 서 여러 날에 걸쳐 시위가 계속된 것은 1960년 4월 11일에서부터 13일까지 있었던 제 2차 마산항쟁을 제외하면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없었으며, 그 이후에 광주 항쟁과 6월항쟁이 있을 뿐이다. 65)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548쪽에는 서면에 30만명 이상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고 기 술되어 있고,(548쪽), 고호석의 부산의 6월항쟁, 6월항쟁을 기록하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에는 중심가에 30만 인파가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고,(47쪽) 그 당시 나 온 말지에는 서면 로타리 일대에 10만명, 그 이후 부전시장에서 부산역까지의 도로에 추정 불가능 한 인파(국민운동본부 40만명, 신문사 8만명)가 몰렸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말 제12호, 1987 8. 1. 13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6월민주화대투쟁 1987.7.에는 개관에서 30만명으로,(64쪽) 일지 에서 4시 39분에 서면로타리에 6만여 시위군중 운집 등등으로(144쪽) 기술되어 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5
부산과 마산에서의 항쟁은 학생들이 선도했지만, 낮보다 더 큰 규모로 전개된 야간 투쟁은 두 지역 모두다 일반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 었다.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도 참여했지만, 영세 상인,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노동 자, 식당 접객업소 상점 종업원, 반룸펜층, 부랑자, 실업자 등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사회적으로 몹시 소외당했던 층이 많았다. 4월혁명 이후 시위는 학생들의 전유물이다 시피 했는데,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시위는 그렇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부마항쟁 은 광주항쟁 6월항쟁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마항쟁은 유신말기에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나 비판의식이 얼마나 컸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부산과 마산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규모로 시민과 학생들이 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것 은 박정희가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 만, 전반적으로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였다. 그와 함께 빈부격차, 경제 악 화, 세금 가중, 투기붐, 퇴폐향락풍조, 비리 부조리가 저임금노동자, 소외계층의 심한 반발을 초래한 것이 기본 동인이었다. 민간인 참여층은 빈부격차를 격화시킨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크게 반발했다. 또한 마산은 4월혁명의 발상지였고, 부산도 4월혁명에 대 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이후 반유신 시위투쟁을 벌이지 못한 것 도 부마항쟁을 격화시킨 배경이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김재규 10 26거사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6월항쟁 없는 6 29선언을 생각하기 어려운 곳 과 비슷하게 부마항쟁 없는 10 26은 생각하기 어렵다.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 부마 사태를 보고받고 자신이 우려하던 사태가 왔다고 직감했다. 그가 박정희에게 보고했을 때 보인 박정희와 차지철의 반응은 결국 유신의 심장을 쏘는 길밖에 없다는 결심을 하 게 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데 기여했다. 유신말기의 3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정치적 폭주와 독재, 장기집권, 경제 악화, 빈부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사태의 악화에 따라서 제2의 학생 민중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전두환 신군부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 졌고,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유혈참극이라도 불사 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독재자일수록 자제력을 가지고 냉혹하게 현실 을 파악해야 할 터인데, 유신 말기 박정희와 차지철은 판단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고, 그것은 살얼음판 비 슷했지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었다.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활기가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5 17쿠데타로 민주화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1985년 2 12총선에 부분적으로 표출되었고, 6월항쟁으로 진전하였다.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연속성이 강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차별정책과 정치 적 생명을 위협한 박해로 10 26 이후 민주화와 김대중에 대한 기대가 컸던 광주지역 은 전두환 신군부가 5 17쿠데타를 일으켜 다시금 특정지역을 업고 유신체제를 부활 하려 하자 거센 항쟁을 전개했다. 부마항쟁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쳤다면, 광 주항쟁에서는 유신잔당 타도, 유신잔당 전두환 물러가라 가 주된 구호였다. 유신체제 와 같은 독재권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양자는 일치했고, 그것은 광주항쟁 이 후 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7
발제 1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차 례 1. 간단한 소묘 2. 물음 3. 국가의 내적 모순과 식민지 백성의 곤경 4. 박정희의 독재와 국가의 내적 모순 5. 부마항쟁과 김영삼 6. 부끄러움의 힘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1. 간단한 소묘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 문제라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 다. 1)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1975년 이후 단 한 번의 데모도 일어나지 않아 유 신대학이라 조롱받았던 부산대학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실패의 반복) 처음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학생들은 경찰들이 대학구내로 페퍼포그차를 앞세우고 진입 하자 금세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오랜 가뭄으로 말랐던 저수지에 폭우가 쏟아 져 물이 가득 차면 자연히 둑을 넘어 넘쳐흐르듯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부산 시 내 도심지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소식을 듣고 시내에서 가까운 동아대학과 고려신학 대학의 학생들까지 합세해 시내에서는 경찰과 학생들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 되었다. 경찰은 늘 그랬듯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학생들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학생들 은 경찰이 쫓아오면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로 흩어졌다 경찰이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열린 도로로 밀려 나왔다.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이 희귀한 경기를 지켜 보던 거리의 시민들은 압도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했고, 그 중 다수는 학생들과 함께 시 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부산시내 중심가를 물결처럼 흐르며 독재타도와 유신철폐를 외쳤다. 그것은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고 개정 이나 폐기를 청원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일을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긴급 1) 조갑제, 2007, 264. 시국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부마사태와 10 26사건처럼 명확히 밝혀진 예도 드물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1
조치 9호 아래서 상상할 수 없었던 저항의 목소리였다. 그런 구호 사이로 애국가 와 선구자 와 우리의 소원 같은 노래들이 이어졌다. 소박한 노래였으나, 또한 모두가 부 를 수 있는 노래였다. 부산대 학생들은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 대학교, 부산대학교 로 끝나는 교가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학생들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외치노니 음주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로 자조적으로 개사 하여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다. 금지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자기를 걸고 저항함으로써 그들은 한갓 음주의 자유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 게 목이 터지게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쫓기는 동안 하루가 저물어, 시위대도 경찰도 지 쳐 시위는 소강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경찰은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채 철수하고 학생들 역시 이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한 여인이 나타나 젊은이들에게 일일이 음료수를 따라주자 돌연 그들이 일어나 애국가 를 부르더니, 새 힘을 얻은 듯 다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처음처럼 다시 밤의 시위가 대규모로 그리고 더욱 격렬하게 시작되었다. 이제 시위대는 단순히 구호를 외치면서 이리저리 흐르지 않았다. 수만 명 시위대가 마치 파리 시민들이 바스 티유 감옥을 향했듯이 부산 시청을 향해 나아가자 경찰은 낮보다 더 광포하게 시위대를 공격했다. 그것이 시위대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들은 먼저 지금까지 온갖 거짓과 왜곡보도를 일삼아 온 동양방송 차량에게 돌멩이를 던지더니, 이어서 남포동 파출소를 시작으로 파출소들을 공격하고 파괴했다. 이날 저녁에만 11곳 파출소가 파괴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부마항쟁은 17일에도 이어졌다. 이날은 휴교령이 내린 부산대학교와 는 달리 정상수업이 이루어진 동아대학교에서 먼저 학생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내려왔 다. 그러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위를 이끈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시민들이었다. 이날 의 시위는 전날보다 더욱 격렬하여 시민들은 세무서와 방송국을 공격하고 역시 파출소 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이 날 모두 21개의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불탔으며 기독교방송 국을 제외한 모든 언론사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했다. 다음날 부산의 주요 거리 에는 5미터에 한 사람씩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2)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 4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으나, 그 저항이 죽음을 뛰어넘지는 못했으니, 부산은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하지만 같은 날 마산의 학생들이 시위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경남대와 마산 대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하자 3 15의거의 도시 마산 시민들은 열렬히 그에 호응했다. 시위대는 이번에도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찰서와 시청 및 세무 서 그리고 방송국들을 공격했다. 마산의 시위는 처음부터 격렬한 양상을 띠었는데, 19 일 정부는 창원의 39사단 소속 1개 대대와 부산에서 보낸 공수부대 1개 여단으로 시 위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항쟁을 이어갔다. 급기야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다시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강경진압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16일에서 20일까지 이어진 이른바 부마항쟁은 이렇게 끝이 났 다. 하지만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었다. 4 19 이후 아니 5 16으로 권력을 찬탈한 뒤 처음 맞는 새로운 봉기에 직면해 박정희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이미 스스로 전제군주가 되어버린 독재자에게 타자적인 것에 합리적으 로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엿새 뒤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수습 을 숙의하기 위해 최측근 부하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스 스로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절대군주답게 호언했다. 그 순간 동석했던 당시 중앙정보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총을 들고 들어와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로써 광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략 이것이 우리가 거칠게 요약해본 부마항쟁의 전말이다. 2. 물음 부마항쟁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었다. 4 19를 통해 이승만 2) 조갑제, 같은 책, 298. 당시 투입된 군 병력은 3개 공수여단과 1개 해병연대 병력 총 9,100명이었고 약 1,800명의 경찰병력이 합해져 모두 10,900명이 계엄병력으로 투입되었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3
의 독재가 막을 내렸듯이,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했다. 하지 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부마항쟁의 의의와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마항쟁이 그 자체로서 어떤 성과를 낳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박 정희가 죽임을 당한 것이 부마항쟁의 직접적인 결과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 이 아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도 일단 부마항쟁이 일어난 만큼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졌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거나 아 니면 근본적인 변화를 아래로부터 강요당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독재권력에 대한 본격적인 민중적 저항의 출발이 부마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부마항쟁은 다음해 광주의 5 18로 이어지고 8년 뒤 전국적으로 번진 6월항쟁으로 매듭지어지는 항쟁의 역사에 서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6월항쟁을 민주화를 이룬 시민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부마항쟁은 그 혁명의 시원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해 새삼스럽 게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 시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그 때처 럼 다시 시작하기 위해 과연 30년 전에 하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려 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이 물음이 다시 물어져야 하는 까닭은 오늘에 이르도록 이 물음이 온전히 대답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물음은 대답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물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거칠게 요약했듯이 우리는 부마항쟁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되는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 속하는 낱낱의 사실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그 여러 사실들이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해될 때 에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원리란 여 러 차원에서 이해된다. 먼저 부마항쟁이라는 사건 자체가 어떤 의미로든 고유성과 정 체성을 지닌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다음으로 그 사건이 역사의 총체성 속 에서 규정될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오늘 나 또는 우리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마항쟁의 4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의미 또는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 자체가 말해주지는 않는 것이니, 드러난 사실 뒤에 감추어진 사건의 뜻을 묻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렇게 뜻을 묻는 것은 공허한 사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온전히 이해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자체가 드러내지 않는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여기 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묻고 해명해야 할 과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어떻게 박정 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가능했는가? 둘째 왜 그 사건이 부산에서 시작되었는가? 셋째 왜 그 엄청난 사건이 잊혀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세 물음을 다시 하나의 지평 속에서 매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물음에 관해서 보자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해서 일어났던 봉기였으니 박정 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던 것은 동어반복처럼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마항쟁이 박정희와 모순대당관계 또는 상호부정관계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 마항쟁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마항쟁을 광주항쟁과 비교 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광주항쟁과 모순대당관계에 있는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집단 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5 18을 긍정하면 전두환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반대 로 누군가 전두환을 긍정한다면, 5 18을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5 18은 박정희 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모순대당관계에 있지 않다. 이는 6월항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5 18이나 6월항쟁을 통해서는 박정희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는 입각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5 18과 6월항쟁만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부 마항쟁을 잊어버린다면, 박정희를 필연적으로 부정해야만 할 까닭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박정희가 다시 숭배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직 우리가 부마항쟁을 잊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왜 박정희가 부정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박정희는 부정되어야 했는가? 우리가 이 물음을 진지하게 묻지 않으면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5
안 되는 까닭은 그가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 로서 숭배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고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부마항쟁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 반항했던 철없는 학생들과 폭도들의 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 가된다 하더라도 아무 항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지금 실제로 부산에 서 일어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부마항쟁을 긍정한다면 박정희는 부정될 수밖에 없 다. 반대로 우리가 박정희를 긍정한다면, 부마항쟁은 부정되어야 할 역사일 것이다. 그 러므로 부마항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가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부정 했던 박정희체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그것이 왜 부정되어야만 했는가를 해 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대립을 드러내야 하는 까닭은 그 대립이 우리 역사 에서 반복되는 어떤 근본적인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 대립은 박정희가 권력을 찬탈하 기 훨씬 전부터 한국사를 규정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박정희는 한 쪽 대립항이 인격적으로 실체화된 것과 같다.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는 역 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보편화되고 이념화된 존재로서 칸트적 의미의 이상(Ideal)인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이상이다.(진중권, 2003, 341) 이를테면 이인제씨가 대통령 후보 시절 박정희를 닮기 위해 (주관적으로) 애쓰고 다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씨 또한 객관적으로 박정 희의 복제품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마항쟁 역시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반복 되어온 박정희라는 이상에 대항하는 대립적 이념의 나타남이다. 박정희가 단순히 이른 바 개발독재 시대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지속적 이념을 표상하는 존재라면, 박정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서 부마항쟁 역시 단순히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한 번 일어났다 끝난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 어지는 대항이념의 가장 순수한 표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4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대립을 해명하는 것은 부마항쟁을 우리 역사의 어떤 총체성으로부터 해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역사 의 총체성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사건의 고유성으로부터도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바로 두 번째 질문, 곧 왜 하 필 그 일이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까지 부마항 쟁에 관해 실증적 사실들 사이의 인과관계만을 고찰하는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을 가장 괴롭혀 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신체제 하에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 들은 부마항쟁처럼 대규모 반독재투쟁의 불꽃을 피우기엔 전반적으로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부산대학은 유신대학이라 불렸으며, 경남대학에서는 유신찬 성데모까지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이 어떻게 박정희의 독재를 끝장내는 대규모 항쟁의 불씨를 당길 수 있었는지 외적인 사실은 우 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운동이나 재야단체의 활동 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앞서지도 않았던 부산이나 마산에서 유신독재에 결정적 타 격을 준 시민항쟁이 다른 곳보다 먼저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아직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 고 있다 는 21년 전의 당혹스런 평가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박철규, 2003, 223) 하 지만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계속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면 부마항쟁이 한갓 우발 적인 우연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달리 항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부마항쟁을 오늘에 되살리고 이어가려 한다면, 특히 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해 확고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여 학생운동이 가장 낙후된 곳에 서 가장 먼저 결정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던가? 무엇이, 어떤 내면의 동기가 그 때까지 가장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던 그들을 가장 적극적인 투사가 되게 했던가? 우리가 이 물 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또한 지금 다시 우리를 지배하는 박정희의 우상을 타도하기 위 해 필요한 내면의 변화가 무엇인지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7
반대로 우리가 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면 부마항쟁이 지금처럼 잊혀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박정희의 망령에 저항할 수 있는 역사적 입각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것을 이렇게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부마항쟁을 더 이상 기억하 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박정희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은 모순대당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를 긍정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왜 박정희는 다시 살고 부마항쟁은 잊혀져버린 것일까? 부마항쟁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부마항쟁의 정신을 되살리고 이어가는 길을 발 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길을 따라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 은 그 시작을 위한 회귀이며, 귀향이다. 3. 국가의 내적 모순과 식민지 백성의 곤경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박정희와 부마항쟁 사이의 모순대립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 이다. 형식논리적으로 보자면 모순이란 하나의 주어에 대해 서로 공존할 수 없이 대립 하는 술어가 귀속할 때 발생한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의 모순대립에서 하나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이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이란 국가에 대한 모순된 두 가지 술어이 다. 그 술어들은 현실 속에서는 힘으로 나타난다. 국가가 사물적 합성체가 아니라 인 륜적 공동체인 한에서, 그 힘은 근본에서 보자면 집단적 의지이다. 그 의지가 개념적 으로 표상될 때 그것이 국가의 이념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둘러싼 모순은 근본에서 보 자면 이념과 이념의 충돌이며 의지와 의지의 충돌인 것이다. 이는 부마항쟁과 박정희 의 모순대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부마항쟁과 박정희 사이의 모순대립 을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국가의 개념으로부터 모 순대립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4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는 자족적이지만 노예상 태는 자족적이지 않다. (정치학, 1291a10)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에서 가장 오 래고 근원적인 국가이해를 정식화하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의 본질은 자족성이다. 자 족성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한 편에서 그것은 노예상태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자유를 의미한다. 이런 입장에 따라 여기서 그는 국가를 노예상태와 대립시킨다. 노예상태의 국가는 국가일 수 없으며 노예들의 공동체 역시 국가일 수 없다. 국가는 오로지 자유 인들의 공동체로서 그 자신 자유로운 한에서만 국가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군대이다. 하지만 자족성은 노예상태의 반대말인 것 처럼 또한 결핍상태의 반대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족성이란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도구적 재화의 조달을 통해 실현된다. 국가는 이런 의미의 자족성을 실현 하기 위해 농부와 기술자와 상인과 육체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과연 저 두 가지 의미의 자족성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이미 아리스토 텔레스 자신에게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즉 노예상태가 아닌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 인 활동에 존립하는 것이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 활동은 엄 밀하게 말하자면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먹어야 산 다는 것, 또는 옷을 입고 집을 지어 추위와 더위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 한에서, 그런 것들을 위한 활동은 강제된 활동, 곧 수동적 활동인 것이다. 개인으로서든 국가로서든 인간의 삶에는 본질적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이 공속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생존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 수동성 역시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삶의 일부이다. 그런데 수동성과 능동성은 그 자 체로서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이니, 그 둘이 인간의 삶에 공속한다는 것으로부터 모 순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방식이 국가의 상이한 형태를 낳 는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9
고대 그리스 국가들은 자유인들이 이 모순을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 그 전형을 보 여준다. 자유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시민들은 인간존재의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시킴 으로써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수동성에 매인 존재 그들이 노예이다. 그들은 타인의 강제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타인의 수동성을 떠맡은 존재이다. 그들의 활동은 오로지 수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동적으로 강제된 노동이다. 그렇게 자신의 수동성 을 타인에게 전가시킨 뒤에 자유인들은 순수한 능동성으로서의 자유를 홀로 향유하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의미에서 국가를 순수한 자유인들의 공동체로서 유지하 기 위해 그렇게 수동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시민에서 배제하고 싶어 했다.(정치 학, 1277b33 아래) 물론 국가를 위해서는 순수한 자유인 이외에 수동적 노동에 종사하 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모두 시민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같은 책, 1278a2) 생각했다. 그리하 여 오늘날로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자유와 시 민권은 얻지 못한 채 노예상태에 놓이게 되고, 자유로운 시민들은 자신들의 수동성을 모두 노예에게 전가시킨 뒤 홀로 순수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노예제 사회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한 나라 안에서 노예 가 되는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사회에서 노예는 원칙적으로 이방인이었다. 근원적으 로 보자면 전쟁포로로 끌려온 자들이 노예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을 노예로 삼 아 자기들의 자유를 지킨 것이 유럽의 정치적 전통이었다. 물론 이 원칙이 현실 속에 서 언제나 동일하게 관철된 것은 아니다. 맨 먼저 그것은 유럽사회가 로마에 의해 하 나의 제국으로 통합되면서 굴절을 겪게 된다. 그 이후 중세와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능동성과 수동성을 내재적으로 통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노예노동을 자기 내부의 약자에게 전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타자에게 존재의 수동성을 전가시키는 것은 서양나라들의 집요한 정 치적 전통으로서, 제국주의적 침략은 그 전통이 근대적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한국인은 바로 그런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노예상태로 전락한 상태에서 근대국가를 5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국가의 시원적 체험이란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시작 되었던 것이다. 노예로서의 삶, 종의로서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근대적 삶의 출발이었 으며, 우리의 근대적 국가는 식민지 국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국가 일반이 본질적 으로 내포하는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모순대립을 자유인은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 함으로써 지양하지만, 전면적인 수동성 속에 사로잡힌 식민지 백성은 그런 식으로 삶 의 내적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은 수동성 속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머물 든지 아니면 자유를 위해 생존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 경에 처하게 된다. 즉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거나 아니면 수동성 속 에서 생존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자유인들은 존재의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순수한 능동성 속에 머 무르거나, 아니면 자유의지 아래 삶의 필연성을 포섭함으로써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필연성의 노예로서 존재하는 식민지 인민들은 존재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수동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능동적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키는 순간 그들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동적 삶과 능동적 죽음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민족의 곤경 이다. 자유인이 순수한 능동성을 의식할 때 그가 느끼는 것이 긍지이다. 그것은 필연성을 극복한 정신의 자기긍정의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노예가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인식할 때 그가 느끼는 것은 만해가 당신을 보았습니다 에서 표현했듯이 남에게 대한 격분 과 스스로의 슬픔 이다.(한용운, 1996, 49) 그 슬픔의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부 끄러움 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필연성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정신의 자기비하의 감정이 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 이 나라 시인들의 시에서 그런 자기비하의 근본 정조를 어디 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선명한 표현은 서정주 의 그 유명한 시 자화상 일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