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 발표 자료집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일시 : 2009년 10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장소 : 한국기독교회관 주최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마산)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재)5 18 기념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관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설 민주주의사회연구소 (마산)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식 순 10:00 개회사 및 진행안내(사회, 차성환민주공원 전 관장) 10:05 기념사 송기인(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윤광장(5 18기념재단 이사장) 10:20 기조발제 :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0:50 제 1발제 :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토 론 : 김원(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 11:50 점심식사 13:00 제 2발제 : 정태석(전북대 사회교육학부 교수) 토 론 : 김동춘(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14:00 제 3발제 :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토 론 : 조정관(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5:00 휴 식 15:15 제 4발제 : 이은진(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토 론 :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6:15 휴식 16:30 종합토론 : 정성기(경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차 례 기조발제 :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발표 1 : 부마항쟁의 정치 문화적 성격 39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토 론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교육학부) 발표 2 :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85 (정태석, 전북대 사회교육학부) 토 론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부) 발표 3 :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 105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토 론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발표 4 : 한국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1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토 론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기조발제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차 례 1. 머리말 2. 부마항쟁이 대규모 항쟁으로 폭발한 요인 1)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항쟁 2) 정치적 계기 3) 경제적 동인 4) 부마항쟁의 역사적 맥락 3.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부마항쟁의 위상 1)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 2) 소외층이 대거 참여한 민중항쟁 4. 부마항쟁으로 인한 유신체제 붕괴의 의의 1)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10 26거사 2) 대참극의 예방 3) 서울의 봄, 그리고 6월 항쟁으로 5. 맺음말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1. 머리말 2005년 8월 해방(광복) 60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달성 한, 긍지를 가질만한 역사를 가졌다고 강조했다. 2009년 오늘의 시점에서 민주주의도 경제도 어려움이 있지만, 오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가졌다는 점은 한국인이 자랑할만 하다. 1950년대에 이승만정권의 압제와 부정선거, 비리. 부패가 끊이지 않았 는데, 만약에 4월혁명이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정의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 전체에서 가장 억압이 심했고, 동시대 제3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권위주의 독재권력이었던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싸운 반유신운동-부마항쟁이 없었더 라면 우리는 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점은 광주항쟁, 1980년대의 역동적인 민주 화운동, 6월항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이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인권을 사랑한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불굴의 민주화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인은 암울한 역사에 서 벗어나 깨어 있는, 그래서 살아 있는 역사를 가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 다. 찬연히 빛나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우 뚝 솟은 봉우리 같은 존재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 부산민주운동사 에서 는 다음과 같이 간결히 서술하고 있다. 부마항쟁은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 주화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그로써 답보상태에 처해 있던 70년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80년대의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고 향도하였던 것이다. 1) 여기서 잠간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연속성에 관해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부마 항쟁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목표로 한 것이라면, 광주항쟁은 유신잔당 타도하자 유신잔당 전두환 일당을 박살내자 가 주된 구호로 등장했다. 양자 모두 유신체제와 그 체제를 답습하려는 세력에 대한 항쟁이었다. 부마항쟁이 10 26정변을 불러일으켜 유신체제 붕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루어 냈다면,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 중심의 전두 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항해 광주 학생 시민이 궐기한 것이 광주항쟁이었다. 이 광주항쟁과 부마항쟁이 기본동력이 되어 1980년대 내내 거센 민주 화 자주화운동, 민중운동이 일어나 6월항쟁으로 매듭을 짓게 되었다. 이 기조발제에서는 먼저 어째서 다른 지역이 아닌 부산과 마산에서 거대한 항쟁으 로 폭발했는지, 그것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큰 규모로 일어났는지 살펴보겠다. 학생 들은 1회성 시위로 끝내지 않았다. 교내에서 투쟁하다가 시내 곳곳으로 옮겨가면서, 오전에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 또 부마항쟁은 민중항쟁이었던바, 시 민들이 학생들의 투쟁을 비호, 성원했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싸웠다. 다음으로 부마 항쟁이 한국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겠다. 그것과 긴밀히 연계되지만, 부마항쟁이 10 26정변을 어떠한 방식으로 유발하였고, 그로 인한 유신체제의 붕괴는 어떠한 의미, 의의를 갖는가를 고찰하겠다. 이 글에서는 부마항쟁이 발발하는데, 그리고 그것의 계승과 관련해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중을 둘 것이다. 유신체제 붕괴가 전두환 등 신군부의 집권에 의해 역사적 의미가 희석된다는 일부 연구자들과 논의를 달리해서, 유신말기 박정희의 정신 상태가 합리성에서 일탈한 비정상적인 점이 많았다는 점을 중시하고, 박정희의 측근인 김재규 거사의 직접적 요인과 유신체제 붕괴가 지니고 있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 의의 를 고찰하는 것에 각별히 비중을 둘 것이다. 후자는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그것의 1) 부산민주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부산민주운동사, 부산광역시, 1998, 429쪽 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총체적 결산으로서의 6월항쟁과도 연관이 된다. 2. 부마항쟁이 대규모 항쟁으로 폭발한 요인 1)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항쟁 부마항쟁은 그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건 시민이건 아무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 몰랐다. 시위를 막아야 할 경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큰 항쟁의 물결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아예 교문을 벗어난 가두시위가 있으리라는 생 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를 주동한 정광민이나 다른 쪽의 서 클 학생들은 교외 진출 계획이 애초에 없었다. 2) 교내 시위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필자는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반대시위인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경이의 눈길로 바라본 바 있다. 삽시간에 문리대 재학생의 대부분이 합세해 시 위를 벌였고, 여학생도 적지 않게 가담했다. 1967년 이래 수많은 데모를 보았고, 그 이전의 문리대 시위에 대해서 선배들로부터 얘기를 들었지만, 1960년 4 19시위 이후 처음 있는, 놀라운 사건 이었다. 그 이후 수많은 대학에서 그해 12월 초까지 동맹휴학 과 시험거부 투쟁이 전개되어 서슬이 시퍼렀던 박정희가 당황해서 학생 처벌 백지화라 는 항복 을 하게 된 것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1960년 4월 19일에 대학생 데모 주동자들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 몰랐다. 광주항쟁도 비슷했다. 국민운동본부측은 1987년 6 10국민대회가 그렇게 크게 벌어지 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또 6월 10일 하루로 일단락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이후 계획은 나중에 구체화하기로 했다. 다 아다시피 6 10대회가 6월항쟁으로 발전하 2) 위의 책, 409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5
는데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그날 밤 늦게부터 시작된 5일간의 명동성당농성투쟁이 었다. 그런데 6월 11일 오후 농성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국민운동본부 는 당황했다. 이 투쟁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계획에 없었던 뜻밖의 사태였고,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을 가져올까봐서였다. 서울에서 학생들 의 6월항쟁 참여를 주도하게 되는 서울지역대학생협의회(서대협) 리더들도 명동성당농 성 투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일반 학생 시민들의 자발적인 명동성당농성투쟁이 계속되지 않았더라면 6월항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3) 중요 시위나 투쟁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이다. 왜 그와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시위, 항쟁이 일어났을까. 서울대 문리 대의 10 2시위의 경우 김대중납치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나의 계기였다. 그 납치사건 을 보고, 신학자 본 히퍼가 히틀러 나찌정권에 대해서 생각한 바와 비슷하게, 이제 박 정희 유신정권이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유해하고 위험한 권력이라는 인식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유신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주동학생뿐만 아니라 일반학생들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기본적 요인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리대생들은 4 19 이래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들이 주 동자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투쟁을 벌인 이유와 맥락이 유사하다. 주동자들이건 일반학생들이건 시민이건 예상치 못한 대규모 시위가 촉발하고, 그것 도 격렬히 전개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조직 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투쟁을 투쟁의 목표와 연결시켜 끌어나가기 어렵다 는 점도 있다. 운동 또는 경험의 미숙성이 있을 수 있으며, 운동이 계기적으로 발전하 거나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3) 말 제12호, 1987. 8.1. 7쪽 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된 요인은 무엇일까. 박정희정권에서 반박정희 활동을 찾아내고 진압, 분쇄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성격과 폭발 이유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 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 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 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중앙정보부장은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있었고, 그것은 체제에 대한 저항, 정책에 대한 불신과 경제문제가 복합되어 일어난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리고 이러한 부마사태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 발제에서는 부마항쟁이 학생과 시민이 일체가 되어 일어난 것을 정치적 계기, 경 제적 배경, 역사적 맥락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광주항쟁도 이와 같은 세 가지 요 인이 작용했지만, 구체적인 데 들어가면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 정치적 계기 (1) 김영삼 의원제명 1979년 10월의 시점에서 다른 지역이 아니고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7
난 것은 그해 5월 이후 정국의 격랑, 파국으로 치닫는 정치정세가 직접적인 매개가 되 었다. 5월 30일 김대중의 지원을 받으며 신민당 총재가 되자 김영삼은 유신체제를 강 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6월 11일 카터 미국대통령의 방한이 유신정권을 도와준다면 우 리 국민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김총재의 발언은 박정희의 아픈 데를 정면으로 찔렀 다.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난폭 한 진압작전으로 1명이 사망하고 신민당 당직자를 포함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김영삼과 박정희의 대립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9월에 들어와 김영삼 총재직무정지가 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정운갑이 직무대행이 된 것도 상궤를 일탈한 행위로 국민을 자극했지만, 10월 4일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전격 처리한 것은 정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었고, 박정희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신민당 의원 66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냈고 통일당 의원 3명이 동조한 것은 분노한 국민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 취재자료인 부산지방 대학생 소요사건 발생보고서 에는 김영삼 신민당총재 제명에 따른 일련의 정국사태에 불만을 표시하는 소요를 벌였다 고 쓰여 있고, 4) 부산 시경의 부마사태의 분석 에 따르면 정치적 배경으로 공화당 장기집권에 대한 전체 국 민의 염증과 함께 신민당 김영삼총재에 대한 제명과 동당( 同 黨 )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 결의가 제시되어 있다. 5) 부산과 마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어서 1979년 여름과 초가을의 정치 사태에 다른 지역사람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김영삼의 의원 제명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할 수 있었다. 당시 엠네스티 부산지방 간사였던 허진수는 18일에 김영삼 제명 철회! 의 구호가 많이 나왔다고 증언하였지만, 6)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중에 김영 4)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자료편찬위원회(부산) 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학술분과 편, 부마민 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산) 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 1989, 35 쪽. 앞으로 이 책은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으로 표기할 것임 5) 위의 책, 71쪽 6) 위의 책, 141쪽 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삼과 관련된 구호가 많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7) 그렇지만 부산항쟁 첫날밤 10시쯤에 광복동에서 김영삼! 김영삼! 하고 연호가 터 져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이 위해 데모했 나? 라는 핀잔섞인 반론이 나온 데서도 8)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시위군중속에는 김영삼 지지자가 많았지만, 김영삼을 지지하기 때문보다 김영삼제명에 분노해서 항쟁 에 참여한 시민도 있었고, 김영삼 제명을 계기로 해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해 쌓인 불만이나 분노가 폭발한 시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경우건 김영삼의 의원직 박 탈은 부산과 마산 시민 학생들을 궐기시키는 데 기폭제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영삼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논의할 것은 학생들의 경우 시민들보다 제명사건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김하기는 김영삼! 을 연호하는 구호가 나온 것은 10월 16일 오후 6시 이후 시청 앞 시위가 처음이라고 기술했다. 9) 부산대 교정에서의 시위에서는 김영삼 제명과 관련된 구호가 나오지 않았고, 나왔다 하더라도 그다지 주 목을 받을만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학생들이 김영삼 제명에 무관심했다는 것은 아니다. 10월 15일 부산대에 뿌려진 민주선언문 에는 의회에서 야비한 수법을 썼다고 하여 간접적으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10) 많은 학생들이 이 시기 의식화 가 진전되면서 권력투쟁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보다 YH사건 등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 민중문제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역시 15일 부 산대에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 에는 대다수 저임금 노동자의 문제를 상당한 비중으 로 언명하고 있고, 11) 10월 16일 부산대에 뿌려진 선언문 에서는 폐정개혁안 으로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을 명시해서 요구했다. 12) 7) 이은진,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99쪽 참조 8)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91쪽 9) 김하기, 부마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73쪽 10)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31쪽 11) 위의 책, 34쪽 12) 위의 책, 32-33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9
그 당시 김영삼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인상을 가진 시민도 있었다. 1975년 4월 인 도차이나사태 이후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가 발 동되었다. 그 직후인 5월 2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이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진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김옥선의원 의원직 사퇴사건에 대해서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비난을 받았다. 곧 이어 이철승한테 야당 당수직까지 넘겨주게 되어 김영삼에 대해서 비판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부마항쟁에서 김영삼이 차지하는 위상과 광주항쟁에서 김대중이 차지하는 위상은 달랐다. 그것은 두 항쟁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주민들은 1971년 대통령선거 에서 김대중이 분패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김대 중에 대한 생명의 위협과 지역차별이 한층 심화되었고, 그럼에 따라서 김대중에 대한 박해와 지역차별이 동일시될 수 있었다. 10 26정변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그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신잔당이 12 12쿠데타 에 이어 5 17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내란죄 등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구속해 생명 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산산히 무너뜨림과 동시에 지역차별이 또다시 심 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하에서 광주민중항쟁은 폭발한 것이다. (2) 유신체제 반대 부마항쟁은 김영삼제명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주요한 투쟁 목표는 유신체제타도였 다. 10월 15일 부산대 교정에 뿌려진 민주선언문 에서는 유신헌법을 악의 근원 이라 고 규정했고, 같은 날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 에서는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 이라고 했으며, 부산대시위가 시작된 10월 16일의 선언문 에서는 유신체제를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 라 하여 학생들이 유 신체제 타도의 선봉에 나서자고 촉구하였다. 13) 부산민주운동사 에는 그 점이 선명히 서술되어 있다. 시위에 나선 많은 시민 학생들의 압도적인 구호가 유신철폐 독재타 도 였다고 한다.(388쪽) 10월 16일 점차 어둠이 짙어가면서 학생시위대 가 민중시위대 13) 위의 책, 31-34쪽 1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로, 시위형 투쟁 이 항쟁형 투쟁 으로 변모해갔지만,(416쪽) 밀려왔다 밀려가는 거대한 조수와 같은 5만여 인파의 장엄한 행렬은 학생들처럼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면 서 어둠을 불살랐다는 것이다.(417쪽) 부산에서 민심이 유신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1978년 12월 12일 치른 총선 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1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공화당은 4명밖에 당선 이 안 되었다. 5명은 신민당 소속이었고, 한 명은 무소속의 예춘호였는데, 그는 야당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선된 공화당 4명도 1위가 한 명도 없었고, 다 차점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여당은 전반적인 득표율 문제 외에 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드러난 상대적 열세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 이라고 논 평했다. 14) 부산만이 아니었다. 12 12선거에서 폭압의 유신체제로, 박정희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통제되고 있었는데도 신민당이 32.82%를 득표해 공화당의 31.70%보다 1.1%나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신민당보다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통일당이 7% 이상의 득 표를 한 것까지 감안하면, 15) 공화당의 패배는 더욱 분명했다. 동아일보가 12월 13일자 에서 오랫만의 흥분 이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박정희에게는 충격이었고, 야당을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게 했다. 12 12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장기집권으로 만성적 독주를 하는 정권측에 대해 비판 적인 입장, 16) 즉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서 뚜렷했지만, 지방에서도 분명했다. 장기집권 - 이것은 긴급조치 9호하에서 에둘러 표현한 것이고, 장기집권과 직결된 유신체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에 대 14) 한국일보 1978. 12. 14. 15) 12 12선거에서 기타 야당의 득표율은 7.4%였는데, 그것은 거의 다 통일당 표였다. 무소속은 1973년 의 선거보다도 거의 10%나 높은 28.1%의 득표율을 보였는데,(손호철, 1979년 부마항쟁의 재조명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이매진, 2006, 189쪽) 그것이 얼마나 야당표에 가까운 지가 명확하지 않아 이 글에서는 야당표로 넣지 않았다. 16) 동아일보 1978. 12. 14.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1
한 비판 외에도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벼 품종이름) 피해, 3대 스캔들사건, 재벌 비호 인상의 제법안들이 두루 작용했다. 17) 1979년 6월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은 한층 더 커졌다. 잇단 정치적 파동은 어 디로 어떻게 달릴지 알 수 없는, 폭주하는 자동차처럼 보였다. 거기에다가 경기는 뒤 에서 서술하겠지만, 12 12선거가 있었던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 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민심의 이반이 급격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산과 마산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큰 규모의 항쟁 으로 먼저 나타났다.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는 주로 대학생들과 지식인층에 있었고, 농민 을 포함한 일반대중은 묵시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지지한 것으로 주장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나 반대는 시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 만, 적어도 1978년 12 12선거에서는 농촌까지도 싫어하는 기색이 적지 않았고, 그 다 음해에는 훨씬 심했다. 그 점은 부마항쟁의 전개과정을 볼 때 아주 뚜렷이 나타난다. 3) 경제적 동인( 動 因 )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한 중요 이유의 하나가 경제 문제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다. 박정희의 치적하면 대부분이 경제발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유신 붕 괴 전해인1978년 12 12총선에서 유신체제인데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패배한 데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피해, 재벌 특권층 중심의 경제가 큰 역할 을 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이 민란 또는 민중봉기의 형 태로 일어나고, 다른 5대 도시에도 확산될 것으로 파악한 것은 유신체제 및 정치파동 에 대한 불만과 물가고 조세저항 등 경제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점 때문이었 다. 부산계엄사령부가 중심이 된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 침체에 17) 동아일보 1978. 12. 14. 1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을 부산항쟁의 첫째 이유로 꼽았고,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그에 항의하여 제출한 야당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고 한 정치적 이 유가 두 번째로 제시되어 있다. 18) 경제적 불만의 심각성을 읽을 수 있다. 유신말기에는 경제적 병폐와 사회적 모순이 노정되고 있었다. 10월 16일 부산대에 뿌려진 선언문 은 특히 경제문제와 사회 부조리를 이렇게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 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 박케...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 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특혜금융 등에 의한 재벌의 비대화와 노동자들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 극명하 게 대립각을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2 12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자 청와대에서 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는데, 부가가치세, 물가고, 노풍피해, 각종 스캔들 등도 요인이었지만, 공화당 위에 재벌 있다 는 야당공세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은 중화학공업이 진전되는 것이 비례하여 해마다 커져갔다. 그 리하여 1979년의 경우 전체 제조업 출하액에서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다. 20) 재벌의 경제적 장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벌이나 특권층은 스캔들이나 퇴폐향락산업이 시 사하듯 1970년대에는 사회적 비리가 많이 노정되었고, 정경유착으로 부정부패도 심했 다. 12 12선거의 결과와 관련해 한 언론인은 계층간의 위화감이 심해졌음을 지적했 다. 요즈음 상류층은 물도 따로 사마시고 심지어는 혼인도 그들끼리만 한다는 것이었 18) 조갑제, 有 故! 1, 한길사 1987, 53쪽 19) 조갑제, 앞의 책 1, 69쪽 2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한국의 사회정의지표, 민중사, 1986, 3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3
다. 21) 물가도 문제였다. 1970년대 내내 거의 해마다 물가가 두 자리수여서 서민들이 주름 살을 펼 때가 없었지만, 1979년에는 제2차 오일쇼크로 당장 7월 10일에 석유제품이 59%, 전력요금이 35%나 올라버렸다. 1977년부터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어 중소상공인들 을 울게 했는데, 조세부담률이 1970년대 하반기에 계속 높아져 1979년에는 17.2%가 되었다. 22) 주택보급률도 70년대 하반기에 60% 미만으로 좋지 않았고, 저임금 노동자 들은 셋방살이도 힘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투기가 1977년 행정수 도 이전설로 불붙었고, 1978,79년에는 광풍이 되어 빈부격차를 한층 더 실감나게 했 다. 토지가격이 1978년에 무려 49%나 급등해 23) 박정권은 급기야 그해 8월 8일 이른바 8 8투기억제조치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항쟁과 관련해 김종철은 유신독재 빈부격차로 유신말기에는 불을 당기기만 하면 폭발하게 되어 있었고, 농촌피폐, 기층 민중의 사회적 불만이 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24) 그의 진단은 부마항쟁 참여자 대부 분이 공감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유신쿠데타 다음해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산업의 구조를 바꿔놓은 중화학공업이 유신체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재벌의 판도는 정경유착과 관계되 기도 했지만, 정부 보증으로 얼마나 큰 규모의 중화학 설비를 위한 차관을 도입하느냐 에 의해 판가름났다. 대재벌들은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끌어들여 중화학산업의 평 균자기자본비율이 22%에 머물었는데, 25) 과도한 중복투자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1979년 5월 총투자규모의 약 30%나 투자보류 또는 중지시킨 대규모 투자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9,80년에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가동율은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이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26) 21) 동아일보 1978. 12. 14. 22)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앞의 책, 18쪽 23) 통계청, 통계로 본 한국의 변화, 2004, 125쪽 24) 부마민주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209쪽 25) 박병윤, 중화학공업계의 내막, 신동아 1980. 5월호, 200쪽 26) 김의균, 중화학투자조정의 내막, 신동아 12월호, 253-255쪽 1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설상가상으로 중화학공업계가 불황에 허덕이자 경기는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외채가 1979년 말로 200억 달러를 넘어서 외채망국론이 제기되었다. 1976년 14.1%, 1977년 12.7%의 경제성장율이 1978년에 9.7%로 낮아진 것도 상대적으로 불경기를 느끼게 했 는데, 1979년에는 6.5%로 크게 낮아지고, 그 다음해에는 마이너스 5.2% 성장률을 보 여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사태를 맞았다. 김영삼 의원제명이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데, 부산과 마산의 경제가 다른 지역보다 나빴던 것도 부마항쟁에 민중을 적극 가담케 했다. 부산 주민의 총생산증가율은 1976,78년에 각각 30.5%, 16.7%로 전국 국민총생산량의 증가율보다 월등 높았는데, 1979년에는 5.6%로 국민총생산성장률보다 낮아 27) 불황의 체감이 컸다. 지역별 임금격 차도 부산이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1979년에 서울을 100.0으로 할 경우 74.3으로 전 북의 67.6을 제외하면 최하위였다. 28) 같은 대도시 주민으로 서울에 대해 반발을 가질 수 있는 요소였다. 부도율도 아주 높아 1979년에 전국의 2.4배, 서울의 3.0배였다. 부 산은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인데도 1979년 증가율이 10.2%로 전국 증가율 18.4%보다 크게 낮았다. 마산의 수출공업단지는 저임금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29) 거기에다가 1979년 9월 현재 24개 업체가 휴 폐업에 들어갔고, 5-6천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30) 최 대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의 하나인 창원공업지대에도 불황이 심했다. 마산항쟁과 관 련해 10월 18일 경남대시위를 주동한 정인권 등 여러 증언자들이 노동자의 저임금 등 마 창지역의 암울한 경제 상황을 강조하였다. 31)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요인이지만, 부산과 마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도 부마 27)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33쪽 28)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앞의 책, 39쪽 29)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평균임금이 다른 수출공단의 평균임금보다 많이 낮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은진, 앞의 책, 79쪽 참조 30) 한겨레신문 1988. 10. 16.(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90-91쪽) 31) 정인권, 이진욱 김종철 이선관 이학룔 등의 증언 참조(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165-165, 186, 209, 214, 216쪽). 마산지역 경제의 열악함에 대해서는 차성환, 참여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 항쟁성격의 재조명,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01-103, 120쪽 참조된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5
항쟁의 배경이었다. 32) 유입인구는 노동자건 룸펜층이건 대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 이 많았다. 4) 부마항쟁의 역사적 맥락 10월 18일 오후 3시 30분경 33) 조금 지나 휴교령이 발표된 이후 50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국제개발학과 2학년인 정인권이 선동하면서 경남대 시위는 시작되었다. 34) 시위 가 전개되었으나 교문을 뚫고나가기가 어렵자 학생들은 이틀전 부산대학생들과 비슷하 게 시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학생들은 3 15의거탑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약속된 오후 5시경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3 15의거탑 주변에 집결했다. 마산항쟁의 거센 불꽃이 타올랐다. 한 나라나 지역에 역사적인 자부심을 가질만한 경험은 두고두고 기억되어 다시금 역사에 살아 있게 된다. 마산학생 주민들이 3 15의거를 기억해내고 3 15의거탑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항쟁, 4월 11-13일에 걸친 제2차 마산항쟁이 없는 4월혁명은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제2차 마산항쟁은 4 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이 두 항쟁을 마산사람들은 3 15의거로 뭉뚱거려 기억하고, 자신들이 마산사람인 것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부산사람들도 4월혁명에 자부심이 있었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들의 시위에 32) 부산은 1970년에 187만여명이던 인구가 1975년에 245만여명이 되었고, 1980년에는 315만여명이 되 었다.(동아일보사, 동아연감 1985, 559쪽) 5년마다 30% 정도씩 증가한 것인데, 이것은 같은 시기 전국인구 증가율은 말할 나위 없고, 서울의 증가율보다도 높았다. 마산의 경우 1971년에 19만여명이 었는데, 1976년에 33만여명으로 증가했고, 1980년에는 38만여명이 되었다.(이은진, 앞의 책, 58-59 쪽) 수출공단이 생긴 이후 급격히 인구가 는 것을 볼 수 있다. 33) 경남대에서 몇 시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는지, 그때 모인 학생수가 몇명이었는지는 참가자 증언이 다 르다. 이 글에서는 이은진교수 주장에 따랐다.(이은진, 앞의 책, 133-151쪽) 34) 이때 정인권은 지금 부산에서는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피를 흘리고 있다. 3 15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 라고 연설했다고 10 18마산민중항쟁의 전개과정. 에는 쓰여 있으나,( 부마민주항쟁10주 년기념자료집, 279쪽) 정인권의 증언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170-171쪽) 1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부터 3 15에 이르기까지 시위는 고등학생 중심이었는데, 부산에서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고등학생들이 이 시기 데모에 참여했다. 더 나아가 3 15마산항쟁 이후 3월말까 지 부산의 고교생들이 다른 지역보다 가장 많이 참여했다. 3 15의거 불씨를 살렸다고 볼 수도 있었다. 4 19전날인 4월 18일 동래고생 1천여명의 시위는 고려대의 시위와 함께 기억할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4 19 하면 서울을 떠올리지 부산과 광주에서 피의 화요일 인 그 날 얼마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날 11시 조금 지나 경남 공고생과 데레사여고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4 19부산시위는 비내리는 오후에 격화 되었다.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투석을 하면서 소방차와 경찰 지프차 를 뒤집어엎고 불을 질렀다. 곧 경찰이 데모대를 정면으로 겨누며 총을 쏘았고, 7,8명 의 젊은이가 풀잎처럼 쓰러졌다. 시위대에 실업자 껌팔이 구두닦이 등이 합류했다. 동 부산경찰서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오후 5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35) 19년 뒤의 부마항쟁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4 19항쟁으로 부산에서는 13명(4월 22일까지의 집계 임)이, 광주에서는 경찰관 1명을 포함해 6명이 사망했다. 4월혁명이 아니더라도 부산과 경남지방은 진보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거 점이었다. 선거를 통해서 그 점을 살펴보자. 1950년 5 30선거에서 이승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함께 부산에서 바람 이 불어 중도파 민족주의자인 장건상과 김칠성이 옥중 당선되었다. 최초로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인 1952년 8 5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 만후보는 523만여표를, 차점자인 조봉암후보는 79만여표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경우 이후보가 105,917표, 조후보가 81,873표로 발표되어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산도 각각 15,750표, 11,262표로 큰 차이가 나 지 않았다. 36) 1956년 5 15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과 조봉암이 각각 504만여표, 35) 옥일성,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4월민주혁명추모회, 1960, 220-234쪽 36)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1, 1973, 997쪽. 득표의 경우 1971년 선거까지는 이 책에 의 거했음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7
216만여표로 발표되어 차이가 줄어들었으나, 부산에서는 꽤 큰 차이가 난 것은 심한 부정선거가 영향을 미쳤다. 37) 그 점은 곧 이어 치러진 지방자치선거에서 어느 정도 확 인해준다. 공권력의 방해공작으로 특히 부산 경남지역에서 야당인 민주당원들은 입후 보하기조차 힘들어 부산의 경우 시의회의원에 3명밖에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다. 38) 1971년의 대통령선거는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와 함께 격전의 연속이었고, 야당후 보의 정견이나 공약이 참신했다. 1971년 선거에서 부산은 야당후보 선거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으로 의미가 있다. 김대중후보는 부산을 첫 번째 중요 유세지로 정했다. 4월 10일 김후보의 부산유세장에 16만 인파가 몰리면서 선거는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다. 선거 결과 부산에서 박정희후보가 김후보를 8만여표 앞질러 5.6대 4.4의 비율을 보여, 영남과 호남 전체를 통하여 지방색이 가장 적었다. 부산시경에서 부마항쟁을 분석한 것 중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부마항쟁의 간접 원인으로 서울 등 전국 대학가의 연쇄적인 소요 사태 파급 영향 과 함께 물리적 작 용에 의한 부산지역 대학가 소요 유발의 장기억제(*10 16 이전 사태 전무) 등을 꼽 고, 직접 원인으로는 국립대학으로서 체면유지 데모를 해야 한다는 전체 학생들의 잠 재의식 과 10 15 유신철폐 내용의 불온유인물 살포 를 제시했다. 39) 너무 단순한 분 석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으나, 간접원인이든 직접원인이든 오랫 동안 부산지역 대학가 에서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부마항쟁과 같은 큰 시위를 불러일으켰다고 파악하면 서, 그 점을 중시하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강한 학생들한테, 더구나 자신의 지역에 대한 강한 자 부심이 일종의 전통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 내려오고 있는 곳에서, 반독재투쟁이 없 었을 경우 일반 학생들의 경우도 자괴감을 가질 수 있다. 반유신시위투쟁이 없었던 마 산과 부산의 경우 특히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을 수 있다. 부산 37)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사비평사, 1999, 150-156쪽 참조 38)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71-172쪽 참조 39)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71쪽 1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과 마산의 학생시위가 주동학생이 생각했던 것보다 폭발적으로 크게 일어난 하나의 요 인으로 이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0월 18일 경남대 도서관 앞에 약 5백명의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정인권은 우리 경남대학은 대학생연맹에도 가입하지 못했고 경남대학생은 돼지새끼만 모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하여 학생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 불명예를 씻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40) 이날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와 3 15의거탑에 모이자, 학 생들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탑 앞에서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 주십시오. 우린 전국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시위를 벌일 때 학교당국의 농간으로 유신찬성 데 모 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 라고 묵념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독재타도 박정권 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41) 당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 사이에는 서울의 모모 여대에서 가위를 보냈다느니, 면도칼을 보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로부터 시위소식을 접할 때 마다 유신대학 이란 오명에 대한 강한 모멸감과 자괴심을 금할 수 없었다. 대다수 학 생들이 느끼고 있었던 공통된 감정이었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들이 10 16시위에서 학 생들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고 증언했다. 42) 앞에서 서울대문리대의 1973년 10 2시위가 유신쿠데타 1년이 다 되도록 이대로 가 만히 있는 것은 문리대 학생으로서 있을 수 없다는 감정이 작용했음을 기술한 바 있 다. 1960년 4 19도 유사점이 있었다. 대학생들은 제2차 마산항쟁에 해인대(경남대 전 신) 학생 50여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4월 18일 전에는 데모에 나서지 않 았다. 그래서 중고등학생들이 언니들은 너무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제2차 마산항쟁을 보고 더 이상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있었다. 4월 18일 먼저 고려대 학생들이 뛰쳐나왔고, 그 다음날 아무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을 몰랐지만, 이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집을 나섰다. 40) 위의 책, 77쪽 41) 위의 책, 95쪽 42) 위의 책, 266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9
역사적으로 긍지를 가진 지역에서 꽤 긴 시간 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여건이 성숙해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 불을 당기면 일거에 확 타오르게 되어 있는 경우 그러한 불을 앞서서 당긴 매개체로서의 역할은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부산대에서 10월 15일 유인물을 살포한 이진걸팀이나 신재식팀, 10월 16일 부산대 교내시위를 선도한 정광민 등과, 10월 18일 경남대 학생시위를 불붙이는데 역할을 한 정인권 등은 선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부산 김형기 등의 양서조합은 부산지역운동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 다. 3.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부마항쟁의 위상 1)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쿠데타가 일어난 1972년 10월 이래 최대 규모의 유신철폐 시위였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기 1년전 위수령으로 군대를 풀어 학원에 투 입했고, 23개 대학에서 177명을 제적시켜 대부분을 군대에 끌고갔다. 유신체제에 시위 로서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을 일치감치 철저히 제거한 것이었다. 유신권력은 철옹성처럼 강력해보였으나, 1971년 10 15위수령발동 2년, 유신 계엄령 선포 1년쯤 된 1973년 10월 2일부터 반유신투쟁이 격화되었다. 그렇지만 시위는 규모 가 큰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대학이 동맹휴학과 시험거부 방법으로 싸웠다. 긴급조 치 1호 발동을 전후해서 전국 각 대학을 연결해 동시다발 시위를 전개해보고자 했으 나, 1974년 긴급조치 4호 발동과 함께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조작으로 큰 탄압을 받았을 뿐이었다. 1975년 봄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규모가 큰 학내 시위, 가두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어느 것이나 1979년 10 16 부산대 교내 시위의 규 모를 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2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1975년 4월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보수 냉전세력의 위기의식과 결합해 각양 각색 의 안보궐기대회가 일어나고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박정희 유신권력은 다시 강고해 진 것으로 보였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에서 김상진군 장례식 및 추도식 을 거행한 뒤 5백여명이 교문밖을 나섰으나 해산당했다. 그뒤 1976년 10월이 되어서야 시위는 다 시 시작되었으나, 규모는 크지 않았고, 짧은 시간에 봉쇄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 경찰 정보형사, 전투경찰대, 대학 직원에 때로는 교수까지 동원되 어 1970년대 후반에 시위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붙잡힐 순간까지 몇분만이라도 버티면서 더 많은 학생 을 모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1977년 10월 연세대 에서 대강당 4층의 폐쇄된 박물관 유리창을 깨고 플래카드를 내려보내면서, 1975년 봄 이후 최대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3,4천명이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히 시위했다. 11월에 는 서울대에서 규모가 큰 시위가 있었고, 다음해인 1978년 봄에는 시위가 부쩍 늘었 다. 이해 6월 26일에는 여러 대학교 학생 1천여명이 참여하여 광화문에서 1979년 10 월 16일 부산시위와 흡사하게 해산했다가 다시 집결하는 방식으로 오후 6시 40분경부 터 10시반경까지 시위를 해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10월 17일의 광화문 연합시위는 권력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1978년부터 그 다음해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전국 각 대학에서 유인물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또 버스 환 기통 등을 이용해 시민들한테 유인물을 살포하였고,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부마항쟁은 유신쿠데타 이후 최대의 반유신 시위투쟁이었다. 유신체제라는 극단적 독재권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것이 부마항쟁이었다. 나아가 부마항쟁은 4월혁명 이후 최대의 시위로 기록될 수 있다. 4월혁명 이후 유 신쿠데타에 이르기까지 가장 규모가 큰 시위는 1964년에 한일회담과 박정희정권에 반 대해서 일어난 6 3사태였다. 6월 3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고, 경 찰서를 습격하고 군용트럭을 탈취하는 일도 있었다. 이날 오후 늦게 계엄령이 선포되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1
었다. 그러나 10월 16, 17일의 부산항쟁보다 규모가 작았다. 부마항쟁은 1960년 4 19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수일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차이 가 있다. 1979년 10월 16일 10시 조금 전부터 시작된 부산대 교내 시위는 4천여명으 로 불어났고, 이날 부산 중요 거리의 야간시위에는 5만여명이 참여했다. 43) 유신쿠데타 발발 7주년이 되는 10월 17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어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18일 저녁에도 2천여명의 시위대가 시청으로 전진했다. 18일 오후 3시 반쯤 경남대 교정에서부터 시작된 마산시위는 밤에 1만여명의 인파 가 44) 격렬한 시위를 벌여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고, 군부대가 들어온 19일에 도 저녁 8시경부터 격렬히 시위가 전개되어 20일 새벽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계속 되었다.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는 마 창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계기적으로 규모가 큰 시위가 전개된 것은 부마항쟁 이전에는 1960년 4월 25, 26일 의 서울 시위와 제2차 마산항쟁이 있었다. 4월 25일 교수들이 오후 5시 50분경부터 시위에 나서면서 시작된 서울시위는 일부가 광화문 일대의 탱크 위에까지 올라갔고, 다음날 새벽 두시경까지 계속되었다. 26일 통금해제 시간이자 동틀 무렵인 5시경부터 오전 9시경에 3만인파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고, 콩볶는 듯한 공포탄 발사가 조금 지난 10시 20분경 계엄사령부 선무반은 이승만 하야를 발표했다. 승리의 화요일 이었 다. 4월 11일부터 시작된 제2차 마산항쟁은 제1차 3 15항쟁보다 규모가 커져 오후 6 시경에 약 3만명이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부마항쟁처럼 여러 날에 걸친 투쟁이 계속된 것은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 있다. 이 러한 점에서도 부마항쟁은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과 함께 민주화운동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43)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09-417쪽. 부마민주항쟁의 전개과정 부마민주항쟁10주년 기념자료집, 274쪽에는 18일 야간시위에 3-5만명이 참여했다고 쓰여 있다. 44)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11-212, 285쪽 등 참조 2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 소외층이 대거 참여한 민중항쟁 부마항쟁은 민( 民 )이 대거 참여했고, 어둠이 깔린 이후의 투쟁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고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 중요한 특색이다. 이러한 민중항쟁적 성격의 시위투쟁은 부 마항쟁 이전에는 사례가 드물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1960년 2월 28일부터 1990년대초까지 학생운동이 계속되었다. 진보적이거나 민족적 활동을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학생들이 맡은 경우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동서 양 진영으로 갈라진 엄혹한 냉전체제의 한복판에 서 민족주의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고, 그 냉전체제에서 극우반공주의가 이 땅을 휩쓸 다시피 했기 때문에 진보세력이 조봉암 진보당과 4월혁명 이후 1년 정도 활동한 혁신 계를 제외하면, 6월항쟁 이전에는 정당형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1970,80년대의 재야민주세력도 투쟁방식이 제한되어 있어 학생층이 시위투쟁을 주도했다. 1964년 3 24투쟁에서부터 부마항쟁 이전까지는 거의 모든 투쟁이 학생에 의해 이 루어졌다. 일반 시민이 가세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6 3사태의 경우 일부 시민과 불 우한 청소년, 실업자가 가담을 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2월 28일에서부터 4월 26일까지 계속된 1960년 3,4월항쟁은 학생혁명이라고 불리울 만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4월 19일 서울의 경우 오전 11시 50분경 학생 시위대 가 중앙청으로 향할 무렵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실업자 넝마주이 등의 불우한 청 소년, 청년들이 벌떼같이 달려왔지만, 경무대 앞에서, 또 다른 지역에서 투쟁의 주역은 대학생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가담한 학생층이었다. 이날 광주는 학생 중심이었고, 부 산의 경우 초기에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나중에 실업자와 반( 半 )룸펜층 등 이 다수 가담했는데, 이 부분은 자료를 더 확보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마산항 쟁의 경우 시위 촉발은 학생이 아니라 민주당청년당원이었고, 1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저녁 밤 시위에 시민들이 대거 가담했다. 3만명 안팎이 참여한 제2차 마산항쟁의 첫 날 시위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했는데, 4월 12,13일의 시위는 중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3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면밀히 비교 검토하여야겠지만, 부마항쟁, 그중에서도 마산에서 민들이 대거 참여한 양상은 광주항쟁이나 6월항쟁에 민들이 참여한 양상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광주항 쟁의 경우 광주사회의 리더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산층 또는 중간계층도 다수가 참여했다. 6월항쟁에서 시민 참여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성당 교회 사찰 등이 중 요한 매개를 이루었고, 다수의 시민이 사전에 인지하고 참여했다. 부산민주운동사 에는 10월 16일의 부마항쟁 첫날 시위가 저녁 6시경까지는 학생들 이 주도하였지만, 어둠이 깔리면서 시위의 주도권이 점차 시민들에게로 넘어가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진 것으로 기술했다. 도심의 대로가 시위 인파로 넘쳐흐르던 7시경 학생들은 소수였고,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회사원에서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의 종업 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 등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구호를 외치고 투쟁했다는 것이 다. 45) 부마항쟁에는 시민들이 학생 시위를 적극 성원하고 옹호했으며, 학생과 더불어 싸 웠고, 나중에는 시민이 시위대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이어서 야유와 욕지거리가 쏟아지는 속에서 경찰의 대응은 힘들었고, 심지어 경찰 작전차에 불길이 솟아 경찰 간부 가 작전차를 구하기 위해 돌격을 명령했는데, 경찰이 따르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46) 부산시위와 마산시위의 참여층은 얼마간 차이가 보이지만, 대체로 영세상인, 영세기 업 노동자들과 반실업상태의 자유노동자,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접객업소 종사자. 상점 종업원, 도시룸펜 부랑아나 무직자가 대종을 이루었고,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 도 상당수 호응한 비조직적 민중항쟁이었다. 47) 그리하여 공룡처럼 커진 재벌, 정경유 착, YH사건이 말해주는 비윤리적 기업가. 돈 있는 자들의 부동산투기, 각종 스캔들, 퇴폐 향락산업과 밤문화가 한쪽으로, 다른 한쪽으로 고물가, 경제불황, 과다한 세금, 영세 상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실업, 셋방살이, 좌절과 체념 무력 45)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16-417쪽 46) 조갑제, 앞의 책 2, 11쪽 47)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25-426쪽 2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감, 전도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생활, 자신들의 고향인 농촌의 피폐 등이 대칭을 이루 고 있었고, 후자에는 극명한 빈부격차, 박정희 유신체제의 노선(정책), 비리, 부패와 억 압, 금제( 禁 制 ), 장기집권과 정치적 폭주( 暴 走 )가 거대한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은 김재규가 말한 대로 민란이나 봉기의 성격은 지니고 있었지만, 난동 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시위참여자들은 유신독재의 주구라고 본 치안기관, 공화당당 사와 그밖의 공공기관, MBC KBS 등의 언론기관, 차량 등을 공격하고, 파출소 안에 있 는 박정희사진을 내동댕이치고, 마산에서는 상류층과 관련있는 자가용차나 고급스러운 간판 건물에 대한 파손도 있었으나,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는 그대로 놔두었고 흉 기도 지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간인의 재산이나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손을 대지 않았으며,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학생들과 같이 유신철폐, 독재 타도, 김영삼제명 철회, 언론자유, 부가가치 세 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급진적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 점에서 부마항쟁은 민주화운동이었다. 그와 함께 참여층을 볼 때 박정희의 경제정 책에 대한 전반적인 수정을 요구한 투쟁이었다. 필자는 198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부 르주아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투쟁을 벌인 면이 크다고 주장한 바 있다. 48) 그 점은 천 황제 철폐를 주장했던 일본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6월항쟁시기 학생시위를 주 도한 학생운동 리더층이나 일부 재야인사들은 급진적 정치이념을 주창했지만, 6월항쟁 은 6 29선언으로 귀착되었다.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이승만정권 타 도, 박정희 유신 철폐, 유신잔당인 전두환 신군부정권 타도 등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를 실현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역사적 과제였다. 마산야간시위에서는 불을 끄라는 외침이 많았다. 스크럼을 짜고 나가면서 학생들은 48) 서중석,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관과 계급관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연구, 지식산업사, 1989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5
불을 꺼주시요 하면서 상점과 민가에 협조를 요청했고, 불을 끄지 않은 건물에 투석을 했다. 49)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많은 일반 시위대도 마산 어시장과 극동 예식장 사이에서 불을 끄지 않는다고 2층 유리창을 박살내는 등 소등을 요구했다. 시 위는 어둠속에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부마항쟁에 참여한 시민은 거의 다 미조 직 군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부산시위에서 아직은 부산운동권이 고립, 분산적 수 준을 벗어나지 못해 민중항쟁을 이끌어가기가 어려웠고, 항쟁은 주로 미조직 군중의 자발적이고도 폭발적인 참여에 의존해서 증폭되어갔다. 50) 조갑제는 10월 16일 밤 시위 에서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의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나, 그 다음날에는 셔터를 내렸고, 반면에 국제시장의 영세상인들은 17일에도 적극 지원했다고 기술했다. 51) 부유 한 상인층은 명백히 비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마산시위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끄게 하는 등 소등을 요구한 것은 익명성을 보장받으려는 행위로, 군인 출동 등 공권 력이 거세게 나오면 시위가 더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4. 부마항쟁으로 인한 유신체제 붕괴의 의의 1)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10 26거사 김제규의 10 26거사가 없었더라면 유신체제 붕괴는 늦추어졌거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4월혁명과 비교해보면 그 점이 분명하다.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은 85세로서 아무리 권력욕이 강했다 하더라도 노쇠현상이 있어 한계가 있었 다. 그 반면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62세로 권력의 집념이 원기왕성할 때였 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초부터 중앙정보부라는 권력을 지탱해주는 막강한 정보 사찰기 관인 중앙정보부를 갖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그렇지 못했다. 4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된 49)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44쪽 50)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424-425쪽 51) 조갑제, 앞의 책 2, 24, 39-40쪽 2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이후 군은 이승만의 명령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인 면이 있 었고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유신말기에도 박정희는 군을 확고히 장악했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는 충성을 다짐했고, 다른 부대도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 하기 어려웠다. 박정희는 휘하에 자신이 직접 명령할 수 있는 공수특전단과 같이 진압 을 목적으로 한, 큰 규모의 특수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승만정권의 제2인자인 이기붕은 유약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이 아니었고, 군부대로 피신하다가 일가족이 자살했다. 그렇지만 김재규를 제치고 제2인자 노릇을 했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박정희 신도로서 반박정희운동에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언론 또한 이승만에게 대단히 비판적이어서 데모를 크게 보도했는데, 부마항쟁에 대한 언론 보도가 말해주는 바 그대로 긴급조치 9호 등에 묶여 언론은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다만 미국이 4 19 이후 이승만정권을 지지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박정희정권에 대 해 비판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정권에 비해 박정희 유신정권은 미국에 대해 더 많 은 자율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을 비교해볼 때 10 26이 없었더라면 유신체제 붕괴는 늦추어졌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4 19와 같은 시위의 존재였다. 이승만한테 최후의 타격을 입힌 것은 교수단 데모와 그것에 뒤이어 발생한 4월 25, 26일의 시위였지만, 4 19로 이승 만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19 이후 1주일만에 4 26이 있었 는데, 부마항쟁이 있은 지 6,7일만에 10 26이 발생했다. 6월항쟁이 없는 노태우의 6 29선언은 있을 수 없다. 비슷하게 부마항쟁 없는 10 26은 상정하기 어렵다. 김재규는 1979년 5월말 신민당 당권경쟁에서 연금 상태에 있는 김대중이 외출할 수 있게 해주어 당원들에게 김영삼을 지원하도록 말할 수 있게 했다. 박정희의 명령을 어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7
긴 것으로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수 없는 행위였지만, 그것에서 김재규의 유신체제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영삼의 총재 당선은 박정희의 의원 제명을 몰고와 부마 항쟁을 촉발했는데,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유신권력의 입장에서 보지 않았다. 부마항쟁은 10 26거사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한 18일 0시가 조금 지난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해 보고를 받았다. 김재규는 7 년 동안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되는 사이에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팽배해졌다고 판단했는데, 결국 부마항쟁 같은 국민적 항거라는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 로 나타났음을 확인했다. 52)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박정희에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 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 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 라고 보고했으나 박정희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박정 희는 10월 26일 저녁에도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말하면서 - 여기서 광주사 태에 김대중이 개입했다는 전두환 신군부의 주장이 상기될 것이다 - 부산사태에는 아 무 것도 모르는 식당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이 가담했다고 억지를 썼다. 53) 김재규는 부산에 갔다 와서 태도가 달라져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가 유신의 심장 을 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한 것은 부산에 갔다와 박정희에게 보고한 직후로 보인 다. 김재규가 10월 24일 이후락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로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나, 김재규가 존경했고, 김재규 요청으로 유정회소속 의원을 떠맡았던 이종찬장군이 더 이상 유정희의원을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 요 라고 말한 것도 54) 생각이 있어서였다. 2) 대참극의 예방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기로 결심한 것은 부마항쟁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너무나 52) 김대곤, 앞의 책, 104쪽 53) 위의 책, 215쪽 54) 조갑제, 앞의 책 2, 77-78쪽 2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도 충격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5대 도시로 확산될 거라고 덧붙이자, 박정희가 화를 버럭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 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 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 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 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 라고 큰소리쳤다. 55) 차지철이 과장하여 말했을 수 있지만, 대 참극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었다. 10월 26일 궁정동 회식에서도 김재규가 신민당이 초 강경으로 돌아서서 공작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하자 차지철은 까불면 싹 쓸어버리겠 다 고 내뱉었다. 56)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 민란 비슷한 시위가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으로 생 각했는데, 10월 23일 신민당 황낙주의원에게도 난국을 수습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57) 대참사가 벌어질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 다. 부마사태가 일어난 정치적 계기나 경제적 동향은 부산 마산만의 현상이 아니고 전 국적인 현상으로 다른 지방도 비슷했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재벌의 팽창, 비윤리적 기 업주, 부동산 투기 행위, 향락 산업, 스캔들도 그렇고 영세상인의 어려움, 저임금, 열악 한 노동환경, 셋방살이, 좌절과 무력감, 전도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층의 광범위한 존재도 그렇다. 또 서울에서는 반유신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지방에 파급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이후 계속된 정치적 파행이 더 심각한 양상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전두환 신군부 와도 달랐다. 성격도 차이가 나지만, 명령계통도 훨씬 단순화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 短 氣 )와 비슷한 성격, 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이 있었 55) 김대곤, 앞의 책, 258쪽. 이와 함께 이 책 216쪽 참조. 56) 위의 책, 219쪽 57) 조갑제, 앞의 책 2, 120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9
다. 그는 의회정치를 싫어하고 효율의 극대화를 주장한 일본 군국주의 장교들이 일으 킨 1936년 2 26쿠데타에 심취되어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군 숙청이 전개되었을 때 남로당프락치였던 그가 살아남은 것은 육사 동기생 등의 프락치 관계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오치성내무장관 해임안으로 유발된 10 2항명파동에서 공화당 중진이자 그의 둘째형 동지였던 김성곤과 오랜 측근이었던 길재호가 중앙정보 부에 끌려가 혹독히 당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를 인지시켰다. 그 점은 중앙정보부장을 가장 오래했던 김형욱의 죽음에서도 짐작된다. 소위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8명이 처형된 것은 유신체제 보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 든지 할 것이라는 것을 확고히 보여준 법살( 法 殺 )이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말기에 정신적으로 몰리고 있었고, 판단력에 이상 증후가 있었 다. 앞에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행태인가를 지적했지만, 그는 김영삼을 구속까지 시키려 하였다. 부마항쟁 처리과정도 문제가 있었다. 부산지역이 포함되는 2관구사령관 장성만소장 은 구태여 군 동원을 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부마사태를 잘 알고 있는 구자춘 내무장관, 노재현 국방장관, 박찬현 문교장관도 반대했는데, 박정희가 독단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는 위수령 발동 이전에 두 번이나 직접 계엄사령관에게 마 산사태를 도와주라고 전화해서 부산에 내려온 2개 공수특전사 여단 중 1개 여단이 마 산에 급파되었다. 장성만소장의 발언에 대해 차지철은 화를 냈다. 차지철은 국방장관 이나 육군참모총장과 사전 상의 없이 월권으로 18일 새벽에 서울지역 공수여단을 부산 으로 공수하고 군수사령관 박찬긍중장에게 계엄 선포 및 계엄사령관 임명을 맨처음 통 고했다. 58) 비정상적인 권력 행태였다. 차지철의 월권행위, 권력남용에 대한 박정희의 태도도 얼마나 위험하게 국정을 운영 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군 58) 위의 책 1, 162쪽, 위의 책 2, 43, 48-50, 79쪽 3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단장급 중장을 경호실 차장에, 차장보에는 사단장 급 소장을 앉혔다. 유엔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경호실에 사단병력을 배치할 것을 요구하다가 탱크와 헬기, 중화기 를 갖춘 30경비단 4개 대대를 휘하에 두는 등 국군지휘체계와 행정지휘체계를 문란케 했다. 장관이나 참모총장에게도 안하무인격이었다. 이 시기 차지철과 김재규가 심한 갈등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박정희는 모른 체 했다. 박정희의 여자 관계도 비정상적이었고, 유신말기에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웠다. 혼자 여자관계를 갖는 소행사 도 문제가 있지만, 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이 동석하는 대행사 는 정상적인 여자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조금 있다가 행위 를 할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국사 등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유신체제 말기에 소행사와 대행사의 빈도가 매우 높아서 사흘만에 한 번 꼴로 궁정동 안가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59) 말 썽 많았던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장녀 근혜와 최태민에 대한 김재규의 조사보고에 대한 박정희의 조치도 상궤를 벗어난 행위였다. 60) 차지철도 그렇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성격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중대한 사태에 대한 결정 과정이 유신정 권 말기는 한층 더 단순화되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고 그것 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으며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단기나 결기가 순간적으로 발동되어 즉각 극단적인 초강경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었다. 정치적 파행과 급격히 나빠지고 있던 경제적 상황,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의 급격한 증가, 반유신운동의 치열함 등을 볼 때 부마항쟁과 같은 사태가 나타날 가능성은 개연 성이 높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성격과 권력 행태를 볼 때, 특히 유신말기에 보여준 비정상적인 면을 볼 때, 부마항쟁과 같은 민중항쟁이 나타날 경우 대참극이 일어날 가 능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아니 59) 김재홍, 군 2, 동아일보사, 1994, 195-216쪽 60) 조갑제, 앞의 책 1, 24-27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1
할 수 없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들어온 공수부대의 행위는 광주항쟁에서의 그것을 상기시킨 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18일밤 시위에 공수부대가 대검 꽂은 총으로 시위대를 헤집으며 닥치는 대로 총을 휘둘렀다. 건방지다고 지나가던 사람이 개머리판으로 맞아 뇌수술을 받았다. 부산항쟁으로 발생한 11명의 중상자중 5명이 18일밤에 피해를 입었 다. 경찰도 공수부대원 10여명으로부터 얻어맞았다. 61) 부마항쟁에서 사망자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0월 16일 부산 대 교내 시위에 대해 경찰은 미숙하게 대응했을 뿐 아니라, 거리에서의 민간인이 합세 한 시위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10월 18일 마산의 시위도 경찰력이 부족했고, 적절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시위하고 빠지는 게릴라식 방법으로 시위를 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시위를 했기 때문에 경찰은 힘을 쓰지 못했다. 경찰은 1960년 3 15마산시위 때와는 달리 학생 시민항쟁에 잔혹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마산의 이틀간 시위에서 체포된 500여명은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 이 아니고, 상당수가 뒷전에서 체포되었다는 지적은 62) 시사하는 바가 많다. 가장 중요 한 것은 시위대가 군과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대결한 경우가 광주에서와는 달리 별반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진압되었다는 점이다. 3) 서울의 봄, 그리고 6월항쟁으로 필자는 4월혁명으로 새로운 사고, 새로운 기풍이 진작되어 알게 모르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63) 수구냉전적인 사고가 팽배한 극우반공 정권이 무너 지면 크든 적든 이와 같은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다. 10 26이후부터 광주항쟁에 이 61) 위의 책, 61-64쪽 ;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422쪽 62)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290쪽 63) 서중석, 4월혁명 직후 민주화 이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 개, 2009, 209-213쪽 3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르는 과정은 한홍구교수가 발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몇 가지만 간략 히 언급하려고 한다. 학생들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점차 활기를 띠었고, 5월에 들어서자 서울대에 서 1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갖는 등 규모가 큰 집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5 월 14일 전국에서 6만여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가두투쟁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 역 앞에 10여만명의 학생과 시민이 집결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부터 규모가 큰 학 생집회 시위가 일어나 16일에는 9개대에서 3만여명이 집결했다. 시위가 끝난 뒤 학생 들은 특별한 일 이 발생하면 다음날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5 17쿠데타가 발생하자 18일 전남대 교문 앞에서부터 광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비록 살얼음을 디디는 것 같은 서울의 봄이었지만, 박정희유신체제와 전두환 신군부의 유 신잔당 에 대한 항거는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광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 그리하여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은 노동운동을 촉진했다. 노동조합 결성, 어용노동조합 반 대, 노동조합의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많은 사업장에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전개되었다. 서울의 봄 마지막 시기에는 한국노총에 대해 민주화 요 구가 일어났다. 64) 이중 4월 하순에 발생한 사북사태는 폭발적으로 분출할 것 같은 유 신말기의 상황과 서울의 봄이 결합되어 일어난 일종의 봉기였다. 10 26이 일반 대중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 점도 과소평가하는 것은 문제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서울의 봄 으로 소생하는 듯했지만, 12 12쿠데타로 군 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5 17쿠데타를 일으키자, 일반 대중은 일단 그것 에 순응하거나 체념상태였다. 그러나 10 26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강렬했던 광주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그후 일반 대중도 2 12총선에서 상당수가 선명야당을 지 지했으며, 6월항쟁에 나섰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6월항쟁으로 진전된 것이었다. 64) 김영곤, 한국노동사와 미래 2, 선인, 2005, 221-227쪽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3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박정희유신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박정희 유신정권을 전두환정권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 만, 미국의 압력과 함께 4월혁명의 영향이 작용해 5 16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하겠다 고 안 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하게, 부마항쟁-10 26-서울의 봄-광주항쟁과 사회여건 변화 등으로 양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우선 대통령의 임기와 선출방법, 대통령의 권한이 달랐다. 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9호까지 선포했지만, 전두환은 비상사태령도 내리지 못했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 의라는 주권적 수임기관을 좌지우지했지만, 전두환은 그런 것이 없었다. 국회의원 선 출 방식도 달랐다. 12 12총선과 5 30전당대회 이후 김영삼에 대한 행태를 볼 때 박 정희는 2 12총선과 그 이후의 사태를 묵과했을까. 박정희는 걸핏 하면 계엄령 위수령 으로 군을 출동시켰지만, 전두환은 1981년 이후 군을 출동시키기가 어려웠다. 민주화 운동에는 언론의 보도태도가 중요한데 그 점도 달랐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보도는 비슷했지만, 유신말기의 부마항쟁은 계엄령 이전에도 보도를 하지 못했으나, 전두환정 권 말기에 일어난 6월항쟁에 대해 전두환정권은 보도통제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권 안보와 직결된 반공 반북교육도 박정희유신정권과 전두환정권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자가 심했다. 부마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서 광주항쟁 6월항쟁으로 이어졌지만, 부산지역에 서의 과정을 보더라도 2 12총선을 거쳐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전두환정권을 곤경 으로 몰고간 1985년 2 12총선에서, 김영삼바람이 작용한 것이지만, 부산은 서울보다 도 월등 신민당후보와 다른 야당후보를 많이 당선시켰다. 서울에서는 민정당후보가 13 명, 신민당후보가 14명, 민한당후보가 1명 당선되었는데, 부산에서는 민정당후보를 3명 만 당선시킨 반면 신민당후보를 그 두 배인 6명, 기타 다른 당 후보를 3명 당선시켰 다. 6월항쟁이 발발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한 1979년 1월 14일 박종철고문사망사건으로 3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2 7국민추도회가 열렸을 때,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은 서울과 함께 시위대 규모가 가 장 컸다. 6월항쟁에서 부산지역은 항쟁을 확대, 진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월 12일부터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해 18일에는 수십만명의 인파가 중심가를 가득 메 웠다. 65) 부산의 기록적인 대시위는 바로 전국에 알려져 6월항쟁을 고조시키는데 강력 한 힘이 되었다. 5. 맺음말 굴곡은 있지만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를 갖게 된 것은 이승만정권 박정희유신정권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맞서 끊임없이 민주화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에 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각별히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부마 항쟁의 경우 발발했을 때에도 보도통제로 다른 지방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이후에 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다른 반유신시위와 비교가 안 되게 규모가 컸고 폭발적이었으며, 1960년 4월혁명 이후로 보더라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부마항쟁은 그 이전의 다른 시위와 달리 1979년 10월 16일에서부터 10월 20일 새벽까지 규모가 큰 시위가 여러 날에 걸쳐 격렬히 계속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비슷한 지역에 서 여러 날에 걸쳐 시위가 계속된 것은 1960년 4월 11일에서부터 13일까지 있었던 제 2차 마산항쟁을 제외하면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없었으며, 그 이후에 광주 항쟁과 6월항쟁이 있을 뿐이다. 65)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548쪽에는 서면에 30만명 이상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고 기 술되어 있고,(548쪽), 고호석의 부산의 6월항쟁, 6월항쟁을 기록하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에는 중심가에 30만 인파가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고,(47쪽) 그 당시 나 온 말지에는 서면 로타리 일대에 10만명, 그 이후 부전시장에서 부산역까지의 도로에 추정 불가능 한 인파(국민운동본부 40만명, 신문사 8만명)가 몰렸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말 제12호, 1987 8. 1. 13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6월민주화대투쟁 1987.7.에는 개관에서 30만명으로,(64쪽) 일지 에서 4시 39분에 서면로타리에 6만여 시위군중 운집 등등으로(144쪽) 기술되어 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5
부산과 마산에서의 항쟁은 학생들이 선도했지만, 낮보다 더 큰 규모로 전개된 야간 투쟁은 두 지역 모두다 일반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 었다.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도 참여했지만, 영세 상인,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노동 자, 식당 접객업소 상점 종업원, 반룸펜층, 부랑자, 실업자 등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사회적으로 몹시 소외당했던 층이 많았다. 4월혁명 이후 시위는 학생들의 전유물이다 시피 했는데,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시위는 그렇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부마항쟁 은 광주항쟁 6월항쟁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마항쟁은 유신말기에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나 비판의식이 얼마나 컸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부산과 마산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규모로 시민과 학생들이 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것 은 박정희가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 만, 전반적으로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였다. 그와 함께 빈부격차, 경제 악 화, 세금 가중, 투기붐, 퇴폐향락풍조, 비리 부조리가 저임금노동자, 소외계층의 심한 반발을 초래한 것이 기본 동인이었다. 민간인 참여층은 빈부격차를 격화시킨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크게 반발했다. 또한 마산은 4월혁명의 발상지였고, 부산도 4월혁명에 대 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이후 반유신 시위투쟁을 벌이지 못한 것 도 부마항쟁을 격화시킨 배경이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김재규 10 26거사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6월항쟁 없는 6 29선언을 생각하기 어려운 곳 과 비슷하게 부마항쟁 없는 10 26은 생각하기 어렵다.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 부마 사태를 보고받고 자신이 우려하던 사태가 왔다고 직감했다. 그가 박정희에게 보고했을 때 보인 박정희와 차지철의 반응은 결국 유신의 심장을 쏘는 길밖에 없다는 결심을 하 게 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데 기여했다. 유신말기의 3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정치적 폭주와 독재, 장기집권, 경제 악화, 빈부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사태의 악화에 따라서 제2의 학생 민중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전두환 신군부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 졌고,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유혈참극이라도 불사 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독재자일수록 자제력을 가지고 냉혹하게 현실 을 파악해야 할 터인데, 유신 말기 박정희와 차지철은 판단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 26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고, 그것은 살얼음판 비 슷했지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었다.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활기가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5 17쿠데타로 민주화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1985년 2 12총선에 부분적으로 표출되었고, 6월항쟁으로 진전하였다.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연속성이 강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차별정책과 정치 적 생명을 위협한 박해로 10 26 이후 민주화와 김대중에 대한 기대가 컸던 광주지역 은 전두환 신군부가 5 17쿠데타를 일으켜 다시금 특정지역을 업고 유신체제를 부활 하려 하자 거센 항쟁을 전개했다. 부마항쟁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쳤다면, 광 주항쟁에서는 유신잔당 타도, 유신잔당 전두환 물러가라 가 주된 구호였다. 유신체제 와 같은 독재권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양자는 일치했고, 그것은 광주항쟁 이 후 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6월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37
발제 1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차 례 1. 간단한 소묘 2. 물음 3. 국가의 내적 모순과 식민지 백성의 곤경 4. 박정희의 독재와 국가의 내적 모순 5. 부마항쟁과 김영삼 6. 부끄러움의 힘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1. 간단한 소묘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 문제라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 다. 1)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1975년 이후 단 한 번의 데모도 일어나지 않아 유 신대학이라 조롱받았던 부산대학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실패의 반복) 처음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학생들은 경찰들이 대학구내로 페퍼포그차를 앞세우고 진입 하자 금세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오랜 가뭄으로 말랐던 저수지에 폭우가 쏟아 져 물이 가득 차면 자연히 둑을 넘어 넘쳐흐르듯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부산 시 내 도심지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소식을 듣고 시내에서 가까운 동아대학과 고려신학 대학의 학생들까지 합세해 시내에서는 경찰과 학생들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 되었다. 경찰은 늘 그랬듯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학생들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학생들 은 경찰이 쫓아오면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로 흩어졌다 경찰이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열린 도로로 밀려 나왔다.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이 희귀한 경기를 지켜 보던 거리의 시민들은 압도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했고, 그 중 다수는 학생들과 함께 시 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부산시내 중심가를 물결처럼 흐르며 독재타도와 유신철폐를 외쳤다. 그것은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고 개정 이나 폐기를 청원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일을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긴급 1) 조갑제, 2007, 264. 시국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부마사태와 10 26사건처럼 명확히 밝혀진 예도 드물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1
조치 9호 아래서 상상할 수 없었던 저항의 목소리였다. 그런 구호 사이로 애국가 와 선구자 와 우리의 소원 같은 노래들이 이어졌다. 소박한 노래였으나, 또한 모두가 부 를 수 있는 노래였다. 부산대 학생들은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 대학교, 부산대학교 로 끝나는 교가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학생들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외치노니 음주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로 자조적으로 개사 하여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다. 금지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자기를 걸고 저항함으로써 그들은 한갓 음주의 자유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 게 목이 터지게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쫓기는 동안 하루가 저물어, 시위대도 경찰도 지 쳐 시위는 소강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경찰은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채 철수하고 학생들 역시 이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한 여인이 나타나 젊은이들에게 일일이 음료수를 따라주자 돌연 그들이 일어나 애국가 를 부르더니, 새 힘을 얻은 듯 다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처음처럼 다시 밤의 시위가 대규모로 그리고 더욱 격렬하게 시작되었다. 이제 시위대는 단순히 구호를 외치면서 이리저리 흐르지 않았다. 수만 명 시위대가 마치 파리 시민들이 바스 티유 감옥을 향했듯이 부산 시청을 향해 나아가자 경찰은 낮보다 더 광포하게 시위대를 공격했다. 그것이 시위대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들은 먼저 지금까지 온갖 거짓과 왜곡보도를 일삼아 온 동양방송 차량에게 돌멩이를 던지더니, 이어서 남포동 파출소를 시작으로 파출소들을 공격하고 파괴했다. 이날 저녁에만 11곳 파출소가 파괴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부마항쟁은 17일에도 이어졌다. 이날은 휴교령이 내린 부산대학교와 는 달리 정상수업이 이루어진 동아대학교에서 먼저 학생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내려왔 다. 그러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위를 이끈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시민들이었다. 이날 의 시위는 전날보다 더욱 격렬하여 시민들은 세무서와 방송국을 공격하고 역시 파출소 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이 날 모두 21개의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불탔으며 기독교방송 국을 제외한 모든 언론사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했다. 다음날 부산의 주요 거리 에는 5미터에 한 사람씩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2)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 4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으나, 그 저항이 죽음을 뛰어넘지는 못했으니, 부산은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하지만 같은 날 마산의 학생들이 시위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경남대와 마산 대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하자 3 15의거의 도시 마산 시민들은 열렬히 그에 호응했다. 시위대는 이번에도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찰서와 시청 및 세무 서 그리고 방송국들을 공격했다. 마산의 시위는 처음부터 격렬한 양상을 띠었는데, 19 일 정부는 창원의 39사단 소속 1개 대대와 부산에서 보낸 공수부대 1개 여단으로 시 위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항쟁을 이어갔다. 급기야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다시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강경진압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16일에서 20일까지 이어진 이른바 부마항쟁은 이렇게 끝이 났 다. 하지만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었다. 4 19 이후 아니 5 16으로 권력을 찬탈한 뒤 처음 맞는 새로운 봉기에 직면해 박정희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이미 스스로 전제군주가 되어버린 독재자에게 타자적인 것에 합리적으 로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엿새 뒤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수습 을 숙의하기 위해 최측근 부하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스 스로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절대군주답게 호언했다. 그 순간 동석했던 당시 중앙정보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총을 들고 들어와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로써 광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략 이것이 우리가 거칠게 요약해본 부마항쟁의 전말이다. 2. 물음 부마항쟁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었다. 4 19를 통해 이승만 2) 조갑제, 같은 책, 298. 당시 투입된 군 병력은 3개 공수여단과 1개 해병연대 병력 총 9,100명이었고 약 1,800명의 경찰병력이 합해져 모두 10,900명이 계엄병력으로 투입되었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3
의 독재가 막을 내렸듯이,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했다. 하지 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부마항쟁의 의의와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마항쟁이 그 자체로서 어떤 성과를 낳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박 정희가 죽임을 당한 것이 부마항쟁의 직접적인 결과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 이 아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도 일단 부마항쟁이 일어난 만큼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졌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거나 아 니면 근본적인 변화를 아래로부터 강요당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독재권력에 대한 본격적인 민중적 저항의 출발이 부마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부마항쟁은 다음해 광주의 5 18로 이어지고 8년 뒤 전국적으로 번진 6월항쟁으로 매듭지어지는 항쟁의 역사에 서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6월항쟁을 민주화를 이룬 시민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부마항쟁은 그 혁명의 시원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해 새삼스럽 게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 시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그 때처 럼 다시 시작하기 위해 과연 30년 전에 하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려 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이 물음이 다시 물어져야 하는 까닭은 오늘에 이르도록 이 물음이 온전히 대답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물음은 대답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물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거칠게 요약했듯이 우리는 부마항쟁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되는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 속하는 낱낱의 사실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그 여러 사실들이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해될 때 에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원리란 여 러 차원에서 이해된다. 먼저 부마항쟁이라는 사건 자체가 어떤 의미로든 고유성과 정 체성을 지닌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다음으로 그 사건이 역사의 총체성 속 에서 규정될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오늘 나 또는 우리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마항쟁의 4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의미 또는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 자체가 말해주지는 않는 것이니, 드러난 사실 뒤에 감추어진 사건의 뜻을 묻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렇게 뜻을 묻는 것은 공허한 사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온전히 이해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자체가 드러내지 않는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여기 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묻고 해명해야 할 과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어떻게 박정 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가능했는가? 둘째 왜 그 사건이 부산에서 시작되었는가? 셋째 왜 그 엄청난 사건이 잊혀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세 물음을 다시 하나의 지평 속에서 매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물음에 관해서 보자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해서 일어났던 봉기였으니 박정 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던 것은 동어반복처럼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마항쟁이 박정희와 모순대당관계 또는 상호부정관계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 마항쟁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마항쟁을 광주항쟁과 비교 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광주항쟁과 모순대당관계에 있는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집단 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5 18을 긍정하면 전두환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반대 로 누군가 전두환을 긍정한다면, 5 18을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5 18은 박정희 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모순대당관계에 있지 않다. 이는 6월항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5 18이나 6월항쟁을 통해서는 박정희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는 입각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5 18과 6월항쟁만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부 마항쟁을 잊어버린다면, 박정희를 필연적으로 부정해야만 할 까닭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박정희가 다시 숭배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직 우리가 부마항쟁을 잊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왜 박정희가 부정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박정희는 부정되어야 했는가? 우리가 이 물음을 진지하게 묻지 않으면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5
안 되는 까닭은 그가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 로서 숭배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고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부마항쟁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 반항했던 철없는 학생들과 폭도들의 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 가된다 하더라도 아무 항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지금 실제로 부산에 서 일어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부마항쟁을 긍정한다면 박정희는 부정될 수밖에 없 다. 반대로 우리가 박정희를 긍정한다면, 부마항쟁은 부정되어야 할 역사일 것이다. 그 러므로 부마항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가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부정 했던 박정희체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그것이 왜 부정되어야만 했는가를 해 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대립을 드러내야 하는 까닭은 그 대립이 우리 역사 에서 반복되는 어떤 근본적인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 대립은 박정희가 권력을 찬탈하 기 훨씬 전부터 한국사를 규정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박정희는 한 쪽 대립항이 인격적으로 실체화된 것과 같다.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는 역 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보편화되고 이념화된 존재로서 칸트적 의미의 이상(Ideal)인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이상이다.(진중권, 2003, 341) 이를테면 이인제씨가 대통령 후보 시절 박정희를 닮기 위해 (주관적으로) 애쓰고 다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씨 또한 객관적으로 박정 희의 복제품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마항쟁 역시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반복 되어온 박정희라는 이상에 대항하는 대립적 이념의 나타남이다. 박정희가 단순히 이른 바 개발독재 시대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지속적 이념을 표상하는 존재라면, 박정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서 부마항쟁 역시 단순히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한 번 일어났다 끝난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 어지는 대항이념의 가장 순수한 표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4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대립을 해명하는 것은 부마항쟁을 우리 역사의 어떤 총체성으로부터 해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역사 의 총체성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사건의 고유성으로부터도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바로 두 번째 질문, 곧 왜 하 필 그 일이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까지 부마항 쟁에 관해 실증적 사실들 사이의 인과관계만을 고찰하는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을 가장 괴롭혀 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신체제 하에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 들은 부마항쟁처럼 대규모 반독재투쟁의 불꽃을 피우기엔 전반적으로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부산대학은 유신대학이라 불렸으며, 경남대학에서는 유신찬 성데모까지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이 어떻게 박정희의 독재를 끝장내는 대규모 항쟁의 불씨를 당길 수 있었는지 외적인 사실은 우 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운동이나 재야단체의 활동 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앞서지도 않았던 부산이나 마산에서 유신독재에 결정적 타 격을 준 시민항쟁이 다른 곳보다 먼저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아직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 고 있다 는 21년 전의 당혹스런 평가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박철규, 2003, 223) 하 지만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계속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면 부마항쟁이 한갓 우발 적인 우연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달리 항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부마항쟁을 오늘에 되살리고 이어가려 한다면, 특히 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해 확고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여 학생운동이 가장 낙후된 곳에 서 가장 먼저 결정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던가? 무엇이, 어떤 내면의 동기가 그 때까지 가장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던 그들을 가장 적극적인 투사가 되게 했던가? 우리가 이 물 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또한 지금 다시 우리를 지배하는 박정희의 우상을 타도하기 위 해 필요한 내면의 변화가 무엇인지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7
반대로 우리가 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면 부마항쟁이 지금처럼 잊혀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박정희의 망령에 저항할 수 있는 역사적 입각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것을 이렇게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부마항쟁을 더 이상 기억하 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박정희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은 모순대당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를 긍정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왜 박정희는 다시 살고 부마항쟁은 잊혀져버린 것일까? 부마항쟁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부마항쟁의 정신을 되살리고 이어가는 길을 발 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길을 따라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 은 그 시작을 위한 회귀이며, 귀향이다. 3. 국가의 내적 모순과 식민지 백성의 곤경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박정희와 부마항쟁 사이의 모순대립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 이다. 형식논리적으로 보자면 모순이란 하나의 주어에 대해 서로 공존할 수 없이 대립 하는 술어가 귀속할 때 발생한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의 모순대립에서 하나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이다. 박정희와 부마항쟁이란 국가에 대한 모순된 두 가지 술어이 다. 그 술어들은 현실 속에서는 힘으로 나타난다. 국가가 사물적 합성체가 아니라 인 륜적 공동체인 한에서, 그 힘은 근본에서 보자면 집단적 의지이다. 그 의지가 개념적 으로 표상될 때 그것이 국가의 이념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둘러싼 모순은 근본에서 보 자면 이념과 이념의 충돌이며 의지와 의지의 충돌인 것이다. 이는 부마항쟁과 박정희 의 모순대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부마항쟁과 박정희 사이의 모순대립 을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국가의 개념으로부터 모 순대립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4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는 자족적이지만 노예상 태는 자족적이지 않다. (정치학, 1291a10)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에서 가장 오 래고 근원적인 국가이해를 정식화하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의 본질은 자족성이다. 자 족성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한 편에서 그것은 노예상태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자유를 의미한다. 이런 입장에 따라 여기서 그는 국가를 노예상태와 대립시킨다. 노예상태의 국가는 국가일 수 없으며 노예들의 공동체 역시 국가일 수 없다. 국가는 오로지 자유 인들의 공동체로서 그 자신 자유로운 한에서만 국가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군대이다. 하지만 자족성은 노예상태의 반대말인 것 처럼 또한 결핍상태의 반대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족성이란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도구적 재화의 조달을 통해 실현된다. 국가는 이런 의미의 자족성을 실현 하기 위해 농부와 기술자와 상인과 육체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과연 저 두 가지 의미의 자족성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이미 아리스토 텔레스 자신에게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즉 노예상태가 아닌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 인 활동에 존립하는 것이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 활동은 엄 밀하게 말하자면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먹어야 산 다는 것, 또는 옷을 입고 집을 지어 추위와 더위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 한에서, 그런 것들을 위한 활동은 강제된 활동, 곧 수동적 활동인 것이다. 개인으로서든 국가로서든 인간의 삶에는 본질적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이 공속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생존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 수동성 역시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삶의 일부이다. 그런데 수동성과 능동성은 그 자 체로서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이니, 그 둘이 인간의 삶에 공속한다는 것으로부터 모 순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방식이 국가의 상이한 형태를 낳 는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49
고대 그리스 국가들은 자유인들이 이 모순을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 그 전형을 보 여준다. 자유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시민들은 인간존재의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시킴 으로써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수동성에 매인 존재 그들이 노예이다. 그들은 타인의 강제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타인의 수동성을 떠맡은 존재이다. 그들의 활동은 오로지 수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동적으로 강제된 노동이다. 그렇게 자신의 수동성 을 타인에게 전가시킨 뒤에 자유인들은 순수한 능동성으로서의 자유를 홀로 향유하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의미에서 국가를 순수한 자유인들의 공동체로서 유지하 기 위해 그렇게 수동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시민에서 배제하고 싶어 했다.(정치 학, 1277b33 아래) 물론 국가를 위해서는 순수한 자유인 이외에 수동적 노동에 종사하 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모두 시민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같은 책, 1278a2) 생각했다. 그리하 여 오늘날로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자유와 시 민권은 얻지 못한 채 노예상태에 놓이게 되고, 자유로운 시민들은 자신들의 수동성을 모두 노예에게 전가시킨 뒤 홀로 순수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노예제 사회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한 나라 안에서 노예 가 되는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사회에서 노예는 원칙적으로 이방인이었다. 근원적으 로 보자면 전쟁포로로 끌려온 자들이 노예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을 노예로 삼 아 자기들의 자유를 지킨 것이 유럽의 정치적 전통이었다. 물론 이 원칙이 현실 속에 서 언제나 동일하게 관철된 것은 아니다. 맨 먼저 그것은 유럽사회가 로마에 의해 하 나의 제국으로 통합되면서 굴절을 겪게 된다. 그 이후 중세와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능동성과 수동성을 내재적으로 통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노예노동을 자기 내부의 약자에게 전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타자에게 존재의 수동성을 전가시키는 것은 서양나라들의 집요한 정 치적 전통으로서, 제국주의적 침략은 그 전통이 근대적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한국인은 바로 그런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노예상태로 전락한 상태에서 근대국가를 5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국가의 시원적 체험이란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시작 되었던 것이다. 노예로서의 삶, 종의로서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근대적 삶의 출발이었 으며, 우리의 근대적 국가는 식민지 국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국가 일반이 본질적 으로 내포하는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모순대립을 자유인은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 함으로써 지양하지만, 전면적인 수동성 속에 사로잡힌 식민지 백성은 그런 식으로 삶 의 내적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은 수동성 속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머물 든지 아니면 자유를 위해 생존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 경에 처하게 된다. 즉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거나 아니면 수동성 속 에서 생존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자유인들은 존재의 수동성을 타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순수한 능동성 속에 머 무르거나, 아니면 자유의지 아래 삶의 필연성을 포섭함으로써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필연성의 노예로서 존재하는 식민지 인민들은 존재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수동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능동적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키는 순간 그들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동적 삶과 능동적 죽음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민족의 곤경 이다. 자유인이 순수한 능동성을 의식할 때 그가 느끼는 것이 긍지이다. 그것은 필연성을 극복한 정신의 자기긍정의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노예가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인식할 때 그가 느끼는 것은 만해가 당신을 보았습니다 에서 표현했듯이 남에게 대한 격분 과 스스로의 슬픔 이다.(한용운, 1996, 49) 그 슬픔의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부 끄러움 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필연성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정신의 자기비하의 감정이 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 이 나라 시인들의 시에서 그런 자기비하의 근본 정조를 어디 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선명한 표현은 서정주 의 그 유명한 시 자화상 일 것이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1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애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 하는 외 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새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서정주) 여기서 시인은 자기가 종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개인사를 말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민족 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 역시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더러는 시인의 외할아버지처럼 갑오년에 동학농민군으로 봉기했다 패배하여 서남해안에 흩어져 있는 섬으로 숨어들어가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살아 서 돌아오지 못했다. 시인은 그 외할아버지를 닮았지만, 외할아버지처럼 봉기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한 그에겐 죄인으로, 천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예 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그 절망의 끝에서 이 시인이 능동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리라는 결단뿐이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뉘우침 은 오로지 자유인에게만 가능한 도덕적 정념이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강 제적으로 발생한 일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뉘우칠 일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워 할 일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부끄러 5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움도 뉘우침도 벗어버린 시인은 이제 시의 찬란한 빛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다. 하 지만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팽개쳐도 병든 수캐처럼 언제나 핏자국을 지울 수 없는 것 이 노예적 삶의 비극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부끄러움을 팽개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는 끝까지 그 부끄러움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올려다 본 하늘은 부끄럽게 푸 르고( 길, 윤동주, 1999, 117), 밤을 새워 우는 벌레도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 ( 별헤는 밤, 윤동주, 1999, 119)이었다. 서정주는 그 부끄러움을 시로 잊으려 하였으나, 윤동주의 경우에는 그조차 가능한 일 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 끄러운 일 이었기(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1999, 125) 때문이다. 그러니 시를 쓰는 것 조차 그에겐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로운 삶 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인만이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식민지 노예에게 허락되는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후쿠오카 의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4. 박정희의 독재와 국가의 내적 모순 우리의 불행은 해방이 된 뒤에도 식민지 시대의 정신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 었다는 데 있다. 물론 그 곤경의 내용은 진화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뒤에도 한국인들 이 온전히 식민지 시대와 다름 없이 자유 빼앗긴 채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신적 곤경이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자유 없는 독재국가를 완성하 고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해방 후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어떤 본질적인 내적 모순을 정립한 사람이다. 물론 그 모순의 시원은 박정희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이미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3
국가는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극소수 지배계급에 의해 사사로이 점유된 수탈기구 에 지나지 않았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국가 구성원 대다수를 노예상태에 묶어두고 홀 로 국가의 주인 노릇을 해온 것이 이 나라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해방이 된 뒤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을 노예화하려는 국가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중이 지속적으로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엮어온 역사가 한국의 현대사 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끊임없이 자기를 절대화하려 하고 민중은 그에 맞서 자 기를 자유롭게 해방하려 하는데, 박정희는 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자기의 절대 권력을 구축했던 독재자였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국가권력은 처음 쿠데타에 의 해 시민 권력으로부터 찬탈된 이래 3선 개헌과 유신독재 그리고 그도 모자라 긴급조치 등을 통해 점점 더 극단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소외된 권력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박정 희 통치 말기에 이르면 국가권력은 조직 폭력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를 지지하는 집단이 있었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권 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특히 쿠데타 직후 그리고 60년대에 그는 비교적 진보 개혁 적인 사람들에게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까지 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비판한 사람은 이 땅의 모든 지식 인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 함석헌밖에 없었다. 대다수 학생과 지식인들은 민주당정권 의 부패와 무능에 염증을 느껴 군인들이 그들을 권좌에서 추방한 것을 차라리 속 시원 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정희에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는 아무런 저 어함 없이 폭력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이를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 통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 그의 통치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해나가는 과정 이었다. 하지만 그는 위태롭기는 했으나 언제나 대중들로부터 무시하지 못할 지지를 얻어냈으며, 3) 사망한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압도적 차이로 가장 높이 평가되는 3) 그러나 이것이 너무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민정이양 이후 실시된 첫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모든 면에서 일방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했다. 71년 김대중후보와 격돌했던 대통령선거에서 94만여 표 차이로 이겼으나, 이것이 광범위 5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똑같은 국가폭력이라도 식민지 국가폭력과 박정희의 국가폭력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윤치호 같은 친일파조차 일제에 대해서는 기 본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 종했던 것이다. 4) 그렇듯이 식민지 권력에 순종하는 것은 이 땅의 대다수 인민들에게 는 어쩔 수 없는 굴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경우는 달랐다. 게다가 그는 이 승만처럼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제힘으로 국가권력을 찬탈하고 그 이후에도 언제나 외세가 아니라 자기중심 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착각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는 무엇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고 무 엇을 통해 협박하며 무엇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낼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드물게 탁월한 마키아벨리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협박에 의해서든 설득에 의해서든 실제로 그 는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지금은 다시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므 로 박정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삶으로부터 생겨난 지속적 욕구의 현실태이다.(진중 권, 2003, 340 아래) 그렇다면 우리 속의 어떤 열망이 박정희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사회과학자들처럼 통계숫자를 가지고 이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박 정희를 일관되게 지지했고 그의 요청에 따라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으며 말년에는 대 통령특별보좌관을 지냈던 철학자 박종홍이 남긴 글을 통해 어떤 욕구가 박정희를 낳았 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원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힘이었다. 피끓는 힘의 이론 (전집 I, 410), 현실적인 힘 (전집 II, 131, 368)이야말로 그가 식민지 시대부터 시 작해 삶을 마칠 때까지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욕구의 대상이었다. 힘이 없어 고통 받 았으니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박정희를 지지한 사람들이 품었던 공통된 욕망 이었다. 한 선거부정에 의한 승리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78년 유신체제, 긴급조치 9호 아래서 치 러진 10대 총선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은 야당에게 총득표수에서 패배했다. 4) 이 점에 대해서는 윤치호의 일기를 참고하시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5
하지만 박정희에 대한 이런 식의 공감은 단지 그에게 부역했던 일부 지식인이나 조 갑제 같은 극우인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박정희 시대를 개 발독재시대라 규정한다. 이 규정 속에는 그가 개발을 위해 독재를 했다는 선이해가 감 추어져 있다. 물론 개발을 위해 반드시 독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므로 그가 독재를 했다는 것은 과오에 속하겠지만, 적어도 개발을 하려 했다는 그 선의 자체는 인정할만 하다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에서 독재적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것이 많은 논자들의 평가이다. 5) 더러는 유신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면서 유신 이전의 박정희는 긍정적이지만 이후의 박정희는 부정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 람들도 있다. 이병천은 한국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는 전례가 없는 돌출물은 아니며 국가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선산업화 후민주화의 패권국 따라잡기 모델이라는 점에 서 비스마르크의 독일, 메이지 일본을 전형으로 하는 19세기 후발개발독재의 아들이 라고(이병천, 2003, 61) 주장한다. 이처럼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이유로 이처럼 박정희의 독재를 두둔하기 시작하면 세 상에 비난받을 독재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독재자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 언 제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 권력에 정당 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독재만 하고 경제성장을 못 이룬 독재자가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에서와 같은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 서 박정희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백낙청, 2005, 293) 이는 그다지 합당 한 주장은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아무렇게나 국경선을 그어 만든 그런 국가가 아니 라, 근대적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서 최소한의 역사적 뿌리와 국가적 정체성을 지 닌 나라치고 독재자가 등장해 경제발전을 시키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싱 가포르의 이광요, 대만의 장개석, 이란의 팔레비, 칠레의 피노체트, 아르헨티나의 갈티 5) 이병천,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과 한국의 경험, 창비, 2003, 51. 그러나 1960-70년대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 말고는 가진 것이 별반 없는 소규모 자원부족 후발국이 압축적으로 산업사회로의 체제이행 관문을 통과하는 데서는, 즉 산업화를 최우선 사회발전 목표로 설정하여 이 를 위해 국민의 의지를 통합하고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 배분하며, 자본을 위한 계급구조적 이윤 기회 를 제공하려면 일정 정도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5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에리, 스페인의 프랑코,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의 푸틴에 이르기까지 자 본주의와 독재정치가 결합한 나라에서 경제가 후퇴하거나 파탄에 이른 경우는 찾아보 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나라의 독재자들과는 달리 가봉의 봉고나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경제발전에 공을 세우지 못한 까닭이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독재자들 자신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따지기보다는 각 나라의 역사와 자연환경 그리고 국민의 교육수준과 종교문화 등을 살펴보는 것이 보다 더 과학적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많은 사람 들이 독재의 개념이 마치 자명한 개념인 것처럼 한 가지 뜻으로 쓰지만, 독재정치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독재가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 대 로마의 공화정 시대에 합법적인 독재관 제도가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 인독재 또는 일당독재 자체가 무조건 나쁜 일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은 누구를 위한 독 재냐에 따라 평가가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참주들 가운데 다수는 기층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유층의 과두적 지배를 철폐했다. 그들 의 독재는 민중을 위한 독재였으며, 아테네의 경우처럼 급진적 민주주의를 위한 발판 이 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경우나 호치민 또는 통일베트남 의 공산당 지배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단순히 지배체제가 일 인지배 또는 일당지배라 해서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 는 한 사람이 지배하든 여럿이 지배하든 아니면 모두가 지배하든, 나라가 모두를 위해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공화국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데, 일인지배체제라 해서 공화적으 로 통치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칸트는 참된 공화국은 오직 한 사람 이 지배하는 군주국가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칸트, 영구평화론) 그러므로 우리는 박정희 체제가 일인지배체제였다는 것을 두둔할 필요도, 비난할 필 요도 없다. 그가 일인 독재를 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 를 위해 장기집권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통치가 공 정한 법에 따라 모두의 공익을 위해 (즉 공화적으로)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자기와 소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7
수의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탈법적,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만약 그의 통치가 모두를 위한 것이었고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그의 통치가 차베스의 경우처럼 다수의 민중에게 호의적이고, 이 땅의 기득권자들에게 도리어 억압적인 것이 었다면, 마치 많은 사람들이 차베스의 대중독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듯이 우리 또한 박정희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정이 부질없다는 것은 박정희의 통치를 두둔하는 사람이라 하 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희는 모두를 위해 통치한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다시 말해 그가 추구했던 것 은 박종홍이 그토록 숭배해마지 않았던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힘 그 자체였다. 하지만 분산된 힘은 힘이 아니다. 오직 모든 힘이 자기에게 귀속하는 한에서만 그것은 순수하 고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집권 초기부터 그는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았 다. 그리고 나중에는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조차 어떤 반대자도 용납하지 않았 다. 1971년 김성곤을 비롯한 공화당 국회의원들의 항명파동에서 보듯, 그는 자기에게 반대하거나 항거하는 것에 대해 오직 잔혹한 폭력으로 응답했다. 이렇듯 그에게 권력의 본질은 정의나 합법성이 아니라 오직 힘, 곧 폭력이었다. 쿠 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중앙정보부를 만든 일이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법이 아니라 음모와 폭력으로 통치하려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그가 처음이라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면, 그의 통치가 뒤로 갈수 록 자유로워졌을 것이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의 통치는 갈수록 탈법적이 되었 고 갈수록 폭력적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루소가 말했듯이(사회계약론) 누구도 자기 혼자 모두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강할 수는 없으므로, 그 역시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한에서만 권 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5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않는 대신 그의 권력기반이 되는 집단 곧 군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했다. 만약 그가 300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승인받아야 했으므로 정치자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군인은 돈을 낭비할 뿐 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약탈하는 것밖 에 없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약탈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본가들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절대권력자로서 재벌기업에 특혜를 주고 그들에게서 필요한 것 을 얻어냈다. 이렇게 군대와 자본을 장악한 뒤에 나머지 집단은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주먹으로 관리하는 것, 이것이 박정희의 통치였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단순히 밤에 엽색행각을 벌이기 위해 권력을 탐 했던 부류의 인간도 아니고,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뒷돈이나 받아 챙기는 건달도 아니 었다. 그가 순수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했던 까닭은 다시 박종홍이 욕구했던 대로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박종홍) 보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박정희는 한갓 마키 아벨리적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니체적 초인이기도 했다. 그는 마치 예술가처럼 정 력적으로 자기의 국가를 능동적으로 형성하고 창조했다. 그는 산에 나무를 심고 도로 를 닦고 항만을 건설하고 댐과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정유공장, 철강공장을 세우고 마 지막에는 핵무기까지 만들려 했다. 이런 일들은 그 시절에는 모두 개별 기업이 할 수 없고 오직 국가적 계획에 따라서만 실현될 수 있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를 창조하듯 국민을 창조하려 했다. 그는 군인이 되기 전에 교사였다. 이미 68년에 그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모든 한국인에 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려 했다. 그것은 박정희의 초인적 광기가 어디 까지 뻗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명이란 어떤 경우에도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삶의 뜻을 표현하는 말로서 오직 개인의 내면성에 속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말 하자면 그것은 삶의 종교적 차원에 속하는 일인 것이다. 그가 민족중흥의 사명을 온 국민에게 주입하려 했다는 것은 그가 국가종교의 교주로 등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광기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절대적 군인으로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59
서 모두를 자기의 명령 아래 지배하려 하면서 동시에 절대적 교사로서 모두의 내면을 통제하려 하였다. 그가 부여한 내면적 사명과 외면적 훈육에 따라 당시 모든 국민은 한편으로는 용감한 군인이 되어야 했고 다른 편으로는 근면한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학생은 교련, 졸업하면 군대, 제대하면 예비군, 그 뒤엔 민방위까지 전 국민이 병사가 되었고 전국가가 병영이 되었다. 오후 다섯 시 온 나라에 애국가가 울리면, 길 가던 사람들은 모두 부동자세로 서서 국기에 예를 표해야 했다. 온 나라가 병영이었고 어디 서나 새마을운동이었다. 예비군가 가사처럼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것이 새로운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 폭력적인 창조의 광기는 단지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창조의 대상으로 사 물화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국민 대중의 욕구와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폭력과 광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언제나 자신의 힘 과 창조적 행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했고 이를 통해 언제나 일정한 지 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박정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언 제나 공존하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나 체제에 대한 주관적인 호불호의 표 현이 아니라 박정희가 당대에 정립하고 후세에 남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어떤 본질적 인 내적 곤경의 표현이다. 그 곤경이란 인간의 삶에 본질적으로 공속하는 수동성을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내 부의 타자에게 전가하는 국가의 내적 곤경이다. 이미 왕조시대부터 이 나라는 노예를 내부에서 정립해온 나라이다. 오랫동안 이 나라는 소수의 지배세력이 다수를 노예상태 에서 착취하고 지배하는 것이 정치적 전통이 된 나라인 것이다. 이를 통해 소수의 지 배계급 곧 양반계급은 삶의 수동성을 내부의 타자에게 전가시킨 채 자신은 순수한 능 동성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은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그들 의 나라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를 완전히 자기 개인의 사적 점유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그가 순수한 능동성의 홀로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6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국가에 대해 하나의 순수한 이상과 원형을 창조해낸 사람 이었다. 그것은 박정희라는 개인이 홀로 주권자가 된 국가, 곧 완벽하게 홀로주체성의 현실태가 된 국가였다. 이처럼 홀로 주체로서 군림하면서 모든 타자들을 예속된 객체로 삼으려 할 때 저항 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인간에게 고유한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집권했던 기간 내내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해야 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던 까닭은 그의 통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이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남한 지역 어디에서나 불어닥 쳤던 좌우익의 피비린내나는 학살극에서 우익에 서서 학살을 자행했던 가해자들이 박 정희의 철저한 반공주의로부터 얻었을 양심의 평안과 심리적 안도 그리고 현실적 안전 이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 4 19가 일어난 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보상문제가 봇물처 럼 터져나왔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270 아 래) 그것은 4 19 이후 아래로부터 일어난 가장 중요한 과거청산운동이었다. 학살극이 다 끝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1960년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피해자들의 기세등등한 분노의 목소리가 가해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현실적 위험이었겠는지 짐작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정희의 폭력적인 반공주의는 그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해주고 동시에 현실적인 안전을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이들이야말로 박정희의 통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자들이었으리라 추측해 도 좋을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기간 내내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안보를 내세워 정권 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뿐이었다면 박정희의 통치는 결코 지속적인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 준 또 다른 지지근거는 박정희가 약 속하고 실현해주었던 경제적 이익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 극적으로 지원했던 군부와 재벌 그리고 그에 경제적으로 귀속하는 중간계층은 말할 것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61
도 없고, 노동자들조차 박정희가 약속하는 이익, 곧 조국근대화 의 주술로부터 자유롭 지 못했다. 6)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가 삼선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해 노골적인 독재의 길을 걷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가 약속하는 번영과 풍요를 기대하고 기꺼이 리바이어던적인 절대권력 앞에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양도했던 것이다. 그런즉 식민지 국가 아래서 이 땅의 민중에게 주어진 내적 곤경이 자유와 생존 사 이에서의 양자택일이었다면, 박정희가 정립한 국가의 내적 곤경 및 내적 대립이란 자 유와 이익의 상호 대립이다. 박정희는 국민에게 언제나 협박하듯이 저 둘 사이의 양자 택일을 강요했다. 자유와 이익이, 정의와 공리가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창조한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는 자유와 이익이 결코 같이 추구될 수 없었 다. 박정희는 하나의 국가형태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해방 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 한민국의 국가체제에 본질적 형식을 부여했는데, 그 형식에 따르면 자유와 이익은 결 코 양립할 수 없는 상호모순적 가치이다. 그 까닭은 박정희가 약속하고 실현해준 경제적 이익과 번영이 내부에서 가장 약한 자들을 착취해서 얻어낸 잉여가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다른 민 족 또는 다른 국가에서 잉여가치를 약탈할 수 없는 후발자본주의국가인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것이 통치의 습속으로 굳어 진 국가의 절대 권력자가 선택한 (그리고 어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초기 자 본주의적 산업화를 위한 본원적 축적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기도 했다고 하는) 경제개발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부에서 잉여를 약탈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억압, 즉 자유의 억압이 필요하다. 자유의 억압을 보편적인 국가형식으로 정립할 때에만 합 법적으로 국가권력을 동원한 약탈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창조 6) 이병천, 같은 책, 50 아래. 한국의 개발주의 성장체제는 재벌이 성장의 대표주자가 되고 병영적 노 동통제 하에서 대중의 삶이 소수 재벌집단의 성장성과에 의존하는, 고생산성과 저임금이 결합된 선 성장 후분배 체제였고 후분배의 약속을 담보로 노동대중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며 선성장 프로젝 트에 동의하고 헌신한 체제인 것이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산업화 축적체제가 제공하는 고용기회와 빠른 임금상승을 통한 잉여의 국민적 확산이 노동자에게 자발적 호응의 유인을 부여하기도 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6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한 국가에서 이익과 번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억압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박정희가 정립한 리바이어던적 국가의 비 밀이다. 즉 그것은 자연상태에 있는 평등한 인간들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 해서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합법적으로 수탈하고 착취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의 주권 자 박정희에게 자기의 자유를 양도하고 그 대신 착취의 이익을 시혜로서 받는 국가이 다. 그리고 이런 국가에서 자유와 이익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야말 로 국민의 내적곤경인 것이다. 5. 부마항쟁과 김영삼 부마항쟁은 이런 내적곤경이 극단적으로 첨예화 된 결과 일어난 봉기였다. 즉 부마 항쟁은 박정희가 상징하는 경제적 이익과 자유의 이념이 충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마항쟁이 일어나던 해, 박정희 국가의 내적곤경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도록 첨예하게 드러낸 사람이 바로 김영삼이었다. 유신 독재 기간 전반적으로 야당은 민중 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납치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가택 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면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었고, 제도 야당이었던 신 민당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던 이철승과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던 김영삼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사실상 유신독재가 그리도 강고히 여러 해 동안 계속될 수 있 었던 것은 야당이 아무런 투쟁도 하지 않고 방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 절 이 땅의 재야세력이 그렇게 비겁한 야당에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 아래의 질의 서는 잘 보여준다. 김지하와 이땅의 많은 지식인, 종교인, 청년학생 그리고 당신들의 일부 동료들이 타는 목 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때, 그리하여 감옥으로 끌려갈 때, 이 땅의 제1야당 신민당은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금, 체포되고 있는지 당신들은 아는가. 그런데 당신들이 하는 짓은 고작 독재에의 굴종과 타협이 아닌가. 당신들은 독재의 편인가, 민주주의의 편인가. 인권이 외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63
래품인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절대지상의 가치가 그것을 억압하는 독재체제와 중도통합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도시빈민과 농민과 노동자가 살던 집, 살던 고향, 일하던 작업장으 로부터 쫓겨나 울며 거리를 헤맬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김정남, 2005, 299) 그런데 신민당이 중도통합을 내세운 이철승 총재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1978년 12월 총선에서 이 땅의 유권자들은 신민당에게 총득표수에서 1.1% 더 많 은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 유신 독재에 타협하지 말라는 무언의 요구와 도 같았다. 그 후 1979년 3월 1일, 윤보선과 함석헌 그리고 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김대중이 공동의장이 되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을 발족하고 그 선언문에서 민주정부에 대한 요구를 명확히 표현하였다. 같은 해 5월 30일에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그는 총재에 당선되자마자 공화당 정권은 이미 총선에서 국민으로부터 불신임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존립할 능력도 명분도 없다.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안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하라 면서 강경투쟁을 선언했다. (같은 책, 303) 생각하면 이런 도발은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 아래서는 상상할 수 없 는 용기의 표현이었다. 김영삼은 계속해서 구속인사 석방을 요구하고, 김일성과의 면담 용의를 밝히는가 하 면, 7월 23일에는 급기야 국회본회의 대표질의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트라고 요 구했다. 박정희는 격분했으나 야당총재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했다. YH 사건은 바로 그런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그 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이 공장문을 닫고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을 내쫓자 갈 곳 없는 여공들이 마포에 있던 신 민당사로 찾아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것은 70년대를 통틀어 추방당한 노동자가 처음으 로 야당 당사를 도피처인 동시에 투쟁의 거점으로 선택한 사건이었다. 만약 당시 김영 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노동 자들은 결코 신민당사에 몰려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의 신민당이 절 대 권력에 맞서 정면으로 대항하는 용기를 보였을 때, 비로소 노동자들은 야당을 자기 들의 동지로 인정하고 야당 당사를 투쟁의 거점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6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는 이렇게 노동자가 학생과 종교계뿐만 아니라 야당과 연대하는 상황을 묵인하지 않았 다. 농성을 시작한지 이틀이 지나기 전에 경찰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그 와중에서 YH노동자 김경숙이 숨졌다. 유신독재 아래 다른 종류의 저항이 일체 보도되지 못했지 만 이런 사건까지 보도를 금지할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하고 그 대신 8월 13일 신민당 내 김영삼 반대파를 사주하여 총재직무정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게 만들었다. 당시 부산의 국제신문 기자였던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삼은 당할수록 크게 반발하 는 성격대로 행동했다. (조갑제, 2007, 259) 그는 박정희가 밟을수록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갔다. 8월 27일 그는 통일당의 양일동 당수와 만나 양당 합당을 선언했다. 9월 8 일 서울민사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 렸다. 김영삼의 총재직은 정지되고 법원에 의해 정운갑이 총재직무대행으로 지명되었 다. 그러자 9월 10일 김영삼은 투쟁의 수위를 한 단계 더 높여 민주회복을 바라는 모 든 계층의 국민적 역량을 집결하여 범국민적 항쟁을 할 것이며, 이 항쟁을 통하여 박 정권 타도운동을 할 것임을 선언한다. 또한 여기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 한다 면서(김정남, 2005, 299) 박정희와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박정희는 10월 4일 국회에서 여당단독으로 아예 김영삼의 의 원직 제명징계를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김영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나를 국회에서 축 출하고 감옥에 가둔다 해도 민주투쟁을 위한 나의 소신과 시국관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 이라면서 계속적인 투쟁을 선언했다.(같은 책, 304아래) 이로써 김영삼은 긴급조치 9호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신체제 역시 종말에 이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는 가장 흥미로운 대중 드라마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에는 그 드라마를 끌고 갈 주연배우가 없거나 무대 뒤에 갇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김영삼이라는 정치가는 새로운 드라마를 이끌고 갈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65
전태일이 지식인을 낮은 곳으로 불렀다면, 김영삼은 당시의 대중과 기층 민중들을 투 쟁으로 불렀던 외침이었다.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던 학생들이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때문에 봉기를 계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환시대의 논리 도 씨 의 소리 도 읽지 못한 부산과 마산의 대중들과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봉기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듣고 보았던 김영삼의 용기와 부름이 아니었다면 결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마항쟁을 위한 마지막 뇌관이었다. 그 를 통해 노동자와 학생과 종교계의 연대에 이어 이제 정치권이 결합하게 되었다. 그리 고 이로써 부마항쟁을 위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납치하고 가택연금하고 또 투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충 분히 야만적인 폭력이기는 하였으나 표면적으로는 자기의 정적( 政 敵 )인 한 개인에 대 한 박해였다. 그리고 그 박해에 야당이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한에서 그 박해는 성공 적인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그것은 모든 야당정치인들에게 무언의 협박의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이 가세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박정희가 선택할 수 있 는 대안은 김영삼을 김대중처럼 투옥하든 다른 방식으로든 개인적으로 처리하거나, 아 니면 제도나 법률을 통해 야당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앞의 방법에 부담을 느낀 박정희 는 입으로는 김영삼을 투옥할 수 있다고 협박하긴 하였으나, 애써 합법적인 방식으로 신민당내 반대파를 사주하여 법원을 통해 총재직무를 정지시키고 국회를 통해 김영삼 의 의원직을 제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합법의 탈을 쓴 이런 조치들은 박정희의 국가에서 입법부와 사법부는 물론 야당조차 모두 박정희 한 개인의 절대 권 력에 완벽하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말기적 징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이처럼 국가가 통째로 권력자 한 사람의 수중에 사적으로 전유되어야 한 다는 것은 멀리는 5 16에서부터 가까이는 10월유신에서부터 이미 정립된 박정희 국 가의 본질이었다. 그 국가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주권자요, 한 사람만이 자유로워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한편에서는 국가의 위기상황을 빙자하여 다른 한편에서 6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는 경제발전이라는 환상을 이용하여 그 본질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신 마지막 해 김영삼이 박정희 독재와 정면승부를 하기 전까지는 박정희 국가가 독재국가라는 것 은 아직 대중들에게 명확하게 대자적으로 의식되어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 령은 박정희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의 투쟁은 박정희의 국가가 야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국가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이 더도 덜도 아니고 독재국가라는 것, 그 나라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오직 굴종만이 허락될 뿐이라는 사실을 선명 하게 드러내고 대중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대자적으로 의식하게 만들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무관심이 말해주듯, 대중은 권력의 억압과 박해가 예외적인 일이 라고 생각하는 한, 그에 대해 관용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억압과 박해가 예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에 저항하기 시작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이 예외가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신기간 동안 이 땅의 대다수 민중이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수난에 그 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도 있지만 아 직 그런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특별히 모난 사람들의 수난이라는 의식도 있었을 것이 다. 하지만 김영삼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신문과 방송에 중계되는 연 예인과 다름없는 정치인이었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에서 야당의 총재가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라 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영삼이 이철승과 달리 자기에게 정면으로 반대 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박정희의 국가에서 야당은 여당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그어 놓은 한계 내에서 여당을 보완하는 한에서만 용납될 수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그 한계를 넘어버림으로써 박정희의 국가에서 어느 누 구도 박정희에게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대중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게 만 들었다. 김영삼의 선명한 반독재투쟁의 의미는 이를 통해 박정희가 건설한 국가의 내적 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67
경을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에게 (공산주의로부터의) 안전과 번영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의 국가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유를 그에게 양 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양도하고 그의 국가에 서 가축처럼 복종하면서 그가 주는 양식으로 살든지, 아니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든지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 곤경은 처음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유신 말기로 오면 올수록 첨예해졌으며, 김영삼의 정면투 쟁은 이 곤경을 모두에게 명확하게 폭로했던 것이다. 그 폭로는 모두에게 심각한 질문 을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과연 자유를 저당 잡히고 허락된 안일 속에서 비굴하게 살 아야 하는가, 아니면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 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대학에서는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데모가 다른 어떤 해보다도 거세게 일어났다. 9월 3일에는 강원대생 800여 명, 9월 4일에는 대구 계명대생 1500여 명, 9월 11일에는 서울대생 1500여 명, 9월 20일에는 다시 서울대생 1000여 명, 그리고 9월 26일에는 이대생 3000여 명이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데모를 했 다. 생각하면 김영삼의 지역구는 부산이고 그의 고향은 경남이었다. 하지만 남쪽에서 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6. 부끄러움의 힘 우리가 부마항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만든 국가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종류의 곤경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내부의 노예로서 약탈당하는 자 들의 고통과 분노이다. 약탈의 수혜자들이 자유와 이익 사이에서 정신의 곤경에 처할 때, 약탈당하는 약자는 식민지 시대 노예 상태에 사로잡힌 민족이 처했던 것과 동일한 곤경에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된다. 그들이 바로 박정희의 국가의 빈민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와 생존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곤 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국가의 수혜자들이 자유를 양도한 대신 이익을 얻었 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자유를 빼앗기고도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했다. 자유를 박탈당 6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하고 그들이 받은 대가는 순수한 생존뿐이었다. 하지만 그 생존은 도구화된 생존으로 서 그들은 오로지 착취당하기 위해서만 생존을 허락받은 노예들이었다. 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들에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삶은 오직 절망일 뿐이었다.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죽음밖에 없었다. 전태일 의 분신은 바로 그 비극이 현실적으로 분출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은 박정희 국가의 내적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박정희 독 재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희생을 통해 70년대 노동자와 학 생 및 지식인과 종교계의 연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은 남쪽으로는 동국대, 북쪽으로는 성균관대와 서울 문리대 법대 의대 그리고 동쪽으로는 서울사대를 지척에 두고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내내 그들 대학생들과 평화 시장 노동자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 며(조영래, 1991, 174) 혼자 노동법 책을 들고 씨름하다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몸 에 휘발유를 끼얹고 산화했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가 집권했던 60년대에는 70년대에 비해 훨씬 더 빈번하게 대규모 학 생 데모가 일어났지만, 노동자나 빈민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은 한 번도 없었다.(이재 오, 1984, 401아래) 그것은 모두 한일회담반대, 삼성밀수규탄, 부정선거규탄, 3선개헌반 대 등 언제나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때까지 학생운동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 신은 그때까지 추상적 대의에 입각하여 전개되던 학생운동을 일거에 민중의 고통에 대 한 응답으로 전환시켰다. 70년대 학생운동은 표면적인 사건을 두고 보면 어떤 시기보 다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유신헌법이 발효된 이후 그리고 긴급조치가 선포된 이후 모 든 집단행동이 불법화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는 학생운동이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 기였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69
전태일은 그 불씨를 당긴 첫 번째 불꽃이었다. 그 불꽃은 즉각적으로 학생운동으로 옮겨 붙었고, 그 이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하면서 겨레의 자 기해방의 역사를 같이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70년대 노동운동과 학 생운동을 매개했던 종교계가 있었다. 이처럼 학생운동이 낮은 곳을 향한 것은 다른 무 엇보다 야학의 확산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것은 결코 급진적인 운동도 아니었고 외적 으로 보더라도 유신독재에 대해 아무런 정치적 타격도 가하지 못했으나 다가올 봉기의 진정한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시 야학은 대학생과 노동자가 만나는 장소, 곧 이 땅의 지식계급이 시대의 가장 큰 고통 과 만나는 장소였다. 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자각하고 시대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였으며, 대학생들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인간의 고 통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모두가 상호 고 립에서 벗어나 연대할 수 있었고 그 연대가 이후 4 19와 같은 보편적 봉기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많은 야학이 교회나 성당 내에 있었는데, 이 점에서도 당시 진보적 종교계는 대학생 및 지식인과 노동자 및 농민들의 만남을 매 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중부교회의 사례에서 보듯 부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종교계는 70년대 진보적 사회 운동의 가장 중요 한 세 축이었다. 부마항쟁은 크게 보자면 이처럼 전태일에 의해 촉발된 70년대 학생과 노동자 그리 고 종교계의 연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마항쟁은 70년대 초 에 이처럼 새로이 조성된 민중적 연대로부터 분출한 화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이 어떻게 가능했던지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전태일 한 사람의 희생이 그토록 즉각적이고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까닭을 먼저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한 사 람의 분신이 그토록 큰 반향과 즉각적인 응답을 불러왔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전의 학생운동의 문법을 고려한다면 결코 당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을 했던 사건 그 자체가 충격적이 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7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지 그것뿐이라면 그 반향의 정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동정심 이외엔 아무 것도 아 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정심은 어떤 경우에도 지속적인 운동의 동력이 될 수는 없 다. 왜냐하면 이미 칸트가 말했듯이 동정심은 수동적인 정념이어서, 자극이 사라지면 같이 잦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칸트,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물론 동정심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으로서 그것이 없다면 또한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도 있을 수 없 다. 하지만 그 응답이 지속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동정심 이상의 도덕적 동기가 필 요하다. 전태일의 분신이 그토록 크고도 지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까닭은 그의 분신이 단순히 고통 받는 노동자의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준엄한 도덕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요구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따르라는 부름이고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권리로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했던 것인가? 아니 왜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가? 레비나스(E. Levinas)는 약자가 그 절대적 약함과 무기력 함으로 우리에게 명령한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레비나스) 하지만 전태 일은 분명히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절망적 약자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레비나 스가 말하는 식의 무기력한 타자, 그리하여 우리가 책임져야 할 타자는 결코 아니었 다. 도리어 그는 우리에게 자기를 책임지고 고통에서 구해 달라고 동정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앞서 활동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스스로 투쟁하는 타자였고 우리 모 두에게 자기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부르고 외치는 타자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부름 에 응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그렇게 즉각적으로 그의 부름에 응답하 게 했던가? 그것은 그의 부름 자체가 또한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싸웠던 싸움은 단순히 자기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약한 노동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었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71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조영래, 1991, 238아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쓴 이 글에서 전태일은 자기의 마음의 고향이며 이상이 바로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임을 고백한다. 그 자신이 이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약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자기보다 더 약한 인간을 위해 바친 삶이었다. 내 죽 음을 헛되이 말라던 그의 외침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에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 라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의 삶과 죽음이 단순히 자기의 권리를 위한 투쟁뿐이 었다면, 우리는 그의 명령을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누구에 게도 도덕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부름, 그의 명령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모범을 보여준 약자의 고통에 대한 선구적 응답 앞에서 우리 모두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끄러움의 자각이 야말로 전태일이 남긴 선물이었다. 80년대의 운동이 5 18이 불러일으킨 분노에서 시 작되었다면 전태일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킨 이 부끄러움이야 말로 7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동기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마항쟁을 탄생시킨 근본적 동인이 된 시대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부끄러움의 정체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70년대를 지배했던 이 부끄러움은 식민지 시대 시인들에게서 원형적으로 표현된 것 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서 전승되어 온 유서 깊은 부끄러움이 70년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모되어 나타나는지를 다른 누구보 다 신경림 시인의 70년대 시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70년대 출간된 그의 시집 두 권은 70년대 민중시의 가장 빛나는 성과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견고한 민중성을 견지하면 서도 김지하의 시처럼 분노를 분출하거나, 고은의 시처럼 명령하고 선동하는 것을 통 해 민중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는 한용운과 김소월 그리고 윤동주에서 볼 수 있는 내면성의 전통에 굳게 뿌리박음으로써 우리에게 그 시대 깨어 있는 정신의 내 면적 곤경을 가장 깊이 드러내 보여준다. 7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그는 70년대에 두 권의 시집을 냈는데, 75년에 출판한 농무 그리고 79년 출판한 새재 가 그것이다. 이 두 시집에서 그는 한 편으로는 당시 민중의 절망스런 고통을 형상화하면서 다른 한편 그 고통 앞에서 시적 자아가 느끼는 곤경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두 시집 사이에는 4년의 시차를 두고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모두 60편이 실려 있는 첫 시집에서 그가 집요하게 반추하는 민중의 절망적인 고통은 죽음이다. 60편 가 운데 20편에서 그는 죽음이란 말을 명사로 형용사로 동사로 사용한다. (그 중 한번은 살인 및 시체) 직접적으로 죽음이란 말이 나오지 않더라도 피 라는 낱말을 통해 죽음 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죽음이란 말이 같이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6편이 다. 그 외에도 총소리 같은 표현을 통해 죽음을 회상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농무 에 서 절반 이상이 죽음에 대한 회상이다. 시인이 회상하는 죽음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전 쟁 중에 일어난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었던 죽음, 억울하고 어리석게 (신경림, 2004, 28) 죽은 죽음이다. 그 죽음을 통곡과 울부짖음이 뒤따른다. 60편의 시 가운데 울음(통곡과 울부짖음 포함)이 명사나 동사로 표현된 것이 21편이다. 그 눈물 속에서 탄식과 절망과 분노와 저주가 죽은 자의 시체 위에 떨어진다. 이것이 시인이 첫 시집에서 형상화하는 민중의 절망적인 고통과 슬픔 이다. 하지만 거기엔 절망이 있을 뿐 아직 저항의 몸짓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듣는다. 그들의 함성 과 울부짖 음, 피맺힌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 달려가는 발자욱 소리,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 한숨 과 성난 채찍 소리 와 노랫소리 도 듣는다. 그 모든 소리는 그에게 말하 라고 명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20년이 지나도 고향은 달라진 것이 없다 가난 같은 연기가 마을을 감고 그 속에서 개가 짖고 아이들이 운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외쳐댄다 말하라 말하라 말하라 아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73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빼앗긴 두 눈으로 무덤의 석상처럼 두 개의 눈으로 지 켜보는 것(같은 책, 45) 그리고 갈대처럼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 뿐이었다.(같은 책, 69) 그리하여 인간의 고통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시인은 부끄러움에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처럼 싸늘한 초저녁 풀 이슬에도 하얀 보름달 에도 우리는 부끄러웠다 고(같은 책, 29) 고백한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시인의 자의 식을 쌍둥이처럼 언제나 같이 괴롭힌다. 7) 끝내 시인은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워 내 모습은 초췌해간다 고(같은 책, 89) 고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서정주의 부끄러움이 그를 자유를 향한 결단으로 인도하지 않았듯이 농무 에 표현된 부끄러움 역시 아직 시인을 보고 듣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능동적 결단이나 행위로 이끌지 않는다. 다만 그 는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면서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하고(같은 책, 59 아래) 제 자신에게 물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 만 결국 시인이 돌아오는 곳은 통곡 일(같은 책, 58) 뿐이다. 그리하여 농무 에서 표현된 부끄러움은 아무런 적극적인 규정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부정, 곧 아니다 로 남 을 뿐이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질척이는 골목의 비린내만이 아니다 너절한 욕지거리와 싸움질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중략)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쓸개 빠진 헛웃음만이 아니다 7) 농무 에 실린 시 어둠 속에서 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공속을 가장 잘 형상화하고 있다. 7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겁에 질려 야윈 두 주먹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까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그리하여 끝없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부끄러움의 정체를 스스로 알지 못 하는 시인은 부끄러움으로부터 어디로도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다만 지나간 봉기 를 추억할 뿐이다.(같은 책, 96아래) 하지만 이런 양상은 79년 출판된 새재 에서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 시집에는 첫 시집에서 한 번도 쓰이지 않았던 낱말이 둘 등장한다. 그것은 사랑 과 용기 이다. 서 른두 편의 시 가운데 꼭 한 번씩 등장하는 저 낱말은 두 번째 시집에서 일어나고 있 는 변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도 여전히 귀신은 통곡하고 시인은 두려워하며 사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느 순 간 강과 산에서 내가 마주치는 것은 죽음이요 되살아 오는 것은 죽음의 얘기뿐이었지 만 나는 문득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는(같은 책, 138) 비약을 경험한다. 무엇이 시인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용기를 준 것일까? 그것은 그가 보는 모습과 듣는 소리가 단순히 무기력하게 희생당하는 자들의 절망적인 죽음만은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 이었다.(같은 책, 129) 시인은 그들의 몸짓으로부터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같은 곳) 물론 여전히 구름은 두 텁게 빛을 가리고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쳐 왔다. 그러나 시인은 더 이상 절망 속에 침잠하지 않는다.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죽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사람의 노래가 되고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75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같은 책, 130) 내어쫓김과 억눌림과 죽음이 그리고 아우성과 울음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나, 그것 들은 더 이상 시인을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죽음도 울음도 이제는 나와 구별되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와 내가 같이 속 하는 우리 의 일이 된 것이다. 용기는 바로 이 만 사람의 우리됨에 존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시( 함성 )에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다. 처음에 시인이 과거형으로 회상하는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 이란 앞 뒤의 문맥으로 볼 때 의심의 여지없이 4 19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후반부에서는 이 제 라는 현재시제로 용기 있는 자들 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4 19의 경험이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집에 실린 4월 19일, 시골에 와서 라는 시에서 시인은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 하면서,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리라 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고(같은 책, 112) 노래했었다. 하지만 함성 에서 는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이제 이 땅에 봄이 영원하리라 했으나 그 희망을 배반하 고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를 기억하면서도 결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는 비관으로 시를 끝내지 않는다. 이는 70년대 후반부에 시인에게 급격한 역사의식의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든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쳐대는 친구 의(같은 책, 131) 부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씨 의 소리 창간 7주년을 기념하여 쓴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시를 끝맺었다. 오직 절망하고 절망하고 뉘우치고 7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다시 술에 취해 쓰러져 있을 때 친구여 너는 부르짖었다 일어나라고 일어나라고 어두운 거리에 깔리는 저 아우성을 들으라고 친구여 한밤에도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쳐대는 친구여(같은 책, 132) 그런즉 시인의 내면적 전환은 그 모든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 하지만 농무 에서 도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거기서 시인은 그 들의 함성을 듣는다 거나(같은 책, 35) 그 가 눈오는 밤에 나를 찾아 와 입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거나(같은 책, 40) 그들 이 성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거나(같은 책, 46) 나아가 억울한 자여 눈을 뜨라 짓눌린 자여 입을 열라 고 노래하는 새소리를 들었다 는(같은 책, 76) 것은 모두 자기를 부르는 부름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왜 그는 거기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했던가? 그 까닭은 그 모든 부름이 죽 은 자의 부름이었기 때문이다. 산자들에게서 그가 듣는 것은 다만 탄식과 한숨과 통곡 과 주정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응답하고 싶어도 누구에게도 응답할 수 없었다. 하지 만 씨 의 소리 는 죽은 자의 원한 맺힌 탄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 한밤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깨어,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쳐대며 자기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런 까닭에 그 부름은 시인이 오직 절망하고 뉘우치고 다시 술에 취해 쓰 러져 있을 때 그를 그 무기력한 절망의 나락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살아있는 만남이야말로 시인의 고립된 정신을 역사로 불러낸 힘이었다. 그 리고 이것은 단순히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깨어 있는 정신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살아 있는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는 그 만남의 의 미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만남이 시인의 정신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것이 어떻게 그를 새로운 능동성으로 이끌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0년대를 본질적으로 규정했 던 또다른 만남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 만남은 시인을 부끄럽게 했던 어린 누이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77
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라는 시는 그 만남이 시인의 내면 을 어떻게 변화시켰던지를 이렇게 보여준다.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 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서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래 속에 빛을 보았을 때(같은 책, 127) 여기서 시인은 자기가 아니라 어린 누이 앞에서 부끄러워한다. 이것 자체가 심오한 7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변화이다. 이전에 시인의 부끄러움은 자기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 은 자기의 비겁함과 두려움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자폐적인 것 으로서, 그 형식에서 보자면 홀로주체적인 자기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홀로주체성 속에서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길, 역사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할 수는 없 다. 거기서도 그의 부끄러움은 역사와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익명적인 현실이거나 아니면 이미 과거의 어둠 속에 가라앉아 더 이상 그가 다가갈 수 없는 종결된 역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끄러움은 그를 외부의 현실 로 나아가게 만들지 못하고 다만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게 만들 뿐이었던 것이다. 하 지만 79년 새재 에서 시인은 더 이상 단순히 내면적인 자기성찰 속에서 자기의 비겁 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부끄러움은 고립된 자기성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어린 누이 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모두 두 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먼저 어린 누이의 가난 과 분노의 눈물 과 삶의 어려움 앞에서 자기를 부끄러워한다. 이 부끄러움은 동정심이 나 연민이라기보다는 도덕적 가책이나 뉘우침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인데, 그 까닭은 시 인이 살아가는 거리와 도시가 그들의 힘으로 살쪄가고 그들의 땀으로 기름져가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어린 누이의 고통스런 삶에 대해 시인 역시 공범이라 할 수 있다. 70 년대 급속한 산업화가 가져다 준 삶의 풍요는 라면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앞에서 분 노의 눈물 을 삼키던 어린 누이들의 가난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상 은 오히려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고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한다. 이 뻔뻔함에 대해 시 인이 같이 분노하기 전에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 또한 누이의 가난에 빚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시인이 여기서 보편적으로 형상화해주고 있는 이 부끄러움, 이 가책이야말 로 많든 적든 70년대 많은 대학생들을 사로잡았던 공통된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 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 시인들에게서 시원적으로 나타났던 부끄러움에 뿌리박고 있기 는 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부끄러움도 자랐기 때문이다. 70년대 우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79
리가 느꼈던 부끄러움은 빚지고 있음의 의식이 낳은 부끄러움이다. 우리가 70년대 학 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정점으로서 부마항쟁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부끄러움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빚지고 있음의 의식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의무감의 원천 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시대도 학생운동이 완전히 근절된 시대가 없었 지만, 70년대처럼 그것이 소박하고도 강렬한 의무감에 의해 추동된 시대도 없을 것이 다. 우리가 그 의무감을 어떻게 평가하든지간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의무감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칸트는 의무감을 가장 중요한 도덕성의 원천으로 드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디서 비롯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리하여 의무감이 정신의 순수한 능동성과 자유의 표현이라 하면서도 그 자유를 문맥 없는 추상성 속에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의무감은 결코 아무 근거 없이 발생하는 정념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선행적인 빚지 고 있음에 대한 의식으로부터만 발생하는 일종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누구에게 도 아무 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도 의무감을 느낄 까닭이 없었 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타인을 위한 희생이나 헌신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심의 결과일 것이 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연민과 동정심은 수동적인 정념인 까닭에 그것만으로는 결코 지속적인 용기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오직 의무감만이 연민과 결합할 때, 그것은 지속적인 행위근거가 되는 것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지만, 의무감은 그 고통이 자기 때문이며, 자기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발생하는 정념이다. 타인의 고통에 나의 행복이 빚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가책과 부끄러움이야말 로 우리에게 그 빚을 갚으라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형상화하는 부끄러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시의 둘째 연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부끄러움은 어린 누이들에게서 본 내일의 빛 앞에서 그가 느끼는 부 끄러움이다. 그 빛은 시인이 4 19 이후 잊고 있었던 희망의 빛이다. 다시 그날의 종 소리가 들리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 을 깨치고 시인이 내일의 빛에 대한 소망을 발견한 것은 바로 어린 누이들이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였다. 1978년에 8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있었던 동일방직 사건을 암시하는 이 시는 전태일 분신 이후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었 던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던지를 증언 하는 고백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 함성 에서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 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고 시인이 노래했을 때 그 한 사람이 전태일이었다면 천 사람은 동일방직 여공들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은 백 사람의 헌신을 부르고 천 사람의 용기는 다시 만 사람의 용기를 부르는 것 이 역사이다. 무기력한 희생과 겁에 질린 민중들 사이에서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 었던 시인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 어린 누이들이었다. 가장 약하고 어린 누이들이 굴종 을 거부하고 쓰러지고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는데, 왜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 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 겨우내 술놀음 으로 허송했단 말인가? 시인의 그 부 끄러움은 그 시대 모든 깨어있는 지식인의 부끄러움이기도 했으니, 밤은 깊을수록 그 작은 별들은 더욱 더 총총히 빛나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 리는 부마항쟁 역시 그 부끄러움이 피워 올린 불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간 단히 말하자면, 역사는 인간의 부름과 응답을 통해 생성된다. 다시 신경림 시인의 표 현에 기대자면 그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 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같은 책, 117) 인간의 많은 행위가 구조에 의해 규정되고 그때그때의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마항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까지 그 원칙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희생을 수반하 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에 따른 행위가 문제라면 우리는 어떤 구조가 어떤 환경적 원인이 인간을 특정한 행위로 떠밀었는지를 탐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희생을 수반하는 행위가 문제라면 그것은 사물 적 원인이나 객관적 구조를 통해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적 원인도 객관적 구조도 도덕적 결단과는 전혀 다른 종류에 속하는 존재인 까닭에 그 둘 사이에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81
인과성을 상정하는 것은 다른 류로의 비약 (metabasis eis allo genos)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 결단과 행위에 관해서는 오직 정신적 원인을 통해 정신적 결 과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 은 구 조도 환경도 아니고 형제들의 아우성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마항쟁을 촉발시킨 대학생들의 동기 역시 신경림 시인이 느꼈 던 바로 그 아우성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첫 날 시위를 계획했던 이진걸은 김지하나 양성우와 함께 신경림 시인의 판금된 시집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거니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자료), 굳이 그의 시를 읽지 않 았다 하더라도 당시의 대학생들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 뒤에서 이렇게 아우성 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쟁참여 학생 하나가 증언했듯이 당시 대학생들에게 유신은 큰 죄의식이었고 십자가 였던 것이다.(부마민주 항쟁기념사업회, 1989, 134) 하지만 왜 그 일이 하필 가장 조용했던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것인가? 우리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것은 그 도시가 가장 조용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부산과 마 산의 대학생들에게 더 큰 부끄러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대학의 경우 학생들이 자기 학교가 유신대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얼마나 큰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많지 않은 증언이지만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증언보다 도 리어 더 강렬하게 우리에게 그 자괴감을 증언해주는 것은 사건 자체이다. 즉, 그것은 봉기가 실패한 첫날 학생들의 기다림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이 오지 않는 시위 주 동자를 수백 명의 학생들이 선언문에서 모이라고 적혀있는 도서관 앞에서 한 시간 남 짓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렸던 것이다. 그 모습은 유신 시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희귀한 광경이었다. 그 기다림은 누군가 그 길고도 치욕스런 침묵을 깨뜨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었으며, 누군가의 부름에 언제라도 응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망과 의지의 근저에는 너무 오랫동안 시대 의 아우성에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했다는 부끄러움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 8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부산대학생들의 마음에 다시 한 번 얼마나 큰 자괴감을 불러일으켰을지는 굳이 증언들을 인용하지 않는다 하 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증폭된 부끄러움이야말로 다음날 수많은 학 생들이 나가자 는 부름에 그토록 즉각적으로 주저 없이 응답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 다.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83
발제 2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정태석 (전북대 사회교육학부) 차 례 1.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부마항쟁 2. 부마항쟁의 주체들과 성격논쟁 3. 부마항쟁과 민중 4. 사회적 적대들의 분화와 응축으로서의 부마항쟁 5. 부마항쟁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읽자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정태석 (전북대 사회교육학부) 1.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에 거쳐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는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 하였다. 대학생의 시위를 계기로 다양한 민중들이 참여하여 박정희 유신체제의 억압에 항거하였고 또 경제적 불만을 격렬하게 표출하였는데, 이러한 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을 통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부마항쟁 이라 불리는 이 항쟁은 궁극적으로 10.26정변을 통한 박정희 정권과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불러일으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단기간에 진압되 고 또 투쟁의 중요한 목표였던 박정희 정권이 곧이어 붕괴되면서 현실적인 정치적 관 심에서 멀어져버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의의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 가 항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고 있어 보다 심층적인 해명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부마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를 되살리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져 왔 는데, 특히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을 기억하고 그 의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관심과 노력들이 지속되었고 이를 통해 부마항 쟁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꾸준히 축적되어 왔다. 사실 그동안의 축적된 연구들을 검토해 보면, 어떤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를 고민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87
할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 심층적인 분석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비록 새로운 자 료들이나 생생한 증언들이 덧붙여진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연구가 기존 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학자 카(E. H. Carr)의 말처 럼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고 한다면,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은 현재적 관심과 관점을 통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내려는 노력은 지속 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무시하고 역사적 사실 을 왜곡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보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맥락 속에서 다 양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의미를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부마항쟁에 대한 자료들이 발굴되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다 양한 해석들이 생겨났고 또 크고 작은 논쟁들이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논쟁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아마도 부마항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여기서 중심적 인 쟁점은 부마항쟁이 민주항쟁이냐, 민중항쟁이냐, 아니면 도시봉기냐 하는 것이다. 이 쟁점은 무엇보다도 부마항쟁의 참여주체가 누구이며, 어떤 동기와 목표로 저항하였 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 하는 점들과 관련되어 있다. 각각의 관점들은 참여주체가 넓 은 의미의 민중 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 구체적 성격과 참여 동기 및 목표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부마항쟁의 주체에 대한 기존의 논쟁을 검토함으로써 부마항쟁 의 성격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규모 항쟁들에 는 내적으로 다양한 요구들, 목표들을 지닌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이 분화 되거나 통합되는 방식에 따라 항쟁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갔다. 물론 항쟁의 구 체적 상황에서 지배세력의 대응방식 등 다양한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지만, 사회의 분 화정도와 구조적 성격에 따른 사회적 적대들, 갈등들, 불만들의 다원화는 항쟁주체들 의 다양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마항쟁을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배경을 종합 8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적으로 살펴보면서 다원적 적대들의 분화와 응축 이라는 관점에서 부마항쟁의 성격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의의를 적절히 밝혀내고자 한다. 2. 부마항쟁의 주체들과 성격 논쟁 부마항쟁은 일반적으로 1970년대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민주 화운동 과정의 한 사건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부마항쟁을 주도하거나 참여한 주 체들 또는 세력들의 성격, 그리고 항쟁의 동기들, 목표들, 방식들 등에 대한 구체적 연 구가 진행되면서 부마항쟁이 지니고 있던 다양한 성격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기존의 해 석을 넘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하고 있다. 차성환은 최근까지 이루어진 연구들을 종합하면서 부마항쟁 해석의 관점들을 크게 세 흐름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것들은 민 주항쟁론, 민중항쟁론, 도시봉기론 등이다(차성환, 2009: 3-6). 일반적으로 집합행동 또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참여주체의 성격 과 규모, 참여 동기, 운동의 목표와 요구, 조직화의 형태와 정도, 운동방식 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부마항쟁 역시 이러한 항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마항쟁을 설명하는 세 가지 관점은 각각의 항목들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부마항쟁을 규정하는 세 이론의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민주항쟁 은 항쟁의 목표나 요구를 강조하고 있는 반 면에, 민중항쟁 과 도시봉기 는 항쟁의 주체를 강조하면서 암묵적으로 항쟁의 목표나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 명칭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강조점의 차이는 곧 세 이론의 시각 차이를 어느 정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명칭의 차이를 포함하여 왜 이러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 해명 하는 것은 부마항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참여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89
주체의 성격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전체적인 해석 차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부마항쟁을 해석하는 세 이론을 각각의 항목에 따라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 여 기서 각 항목별 차이를 통해 쟁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항쟁 주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민주항쟁론과 민중항쟁론은 모두 민중 이 항쟁의 주체였다고 말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민주항쟁론이 초기 지도세력인 대학생의 역할에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 는 반면에, 민중항쟁론은 초기에 대학생이 지니고 있던 주도권이 항쟁이 격화되면서 곧바로 민중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민중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면서 항쟁을 주도 했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중은 대학생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폭넓은 개 념인데, 대체로 도시빈민 위주의 기층민중에 중간층 시민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도시봉기론에서는 민중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 인 주체를 명기할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 도시하층민 이 항쟁의 주체였다고 말한다. 도시하층민은 도시노동자, 도시빈민, 실업자, 도시하층 서비스업 종사자 등을 포괄하는 이질적이고 비균질적인 집단이며, 상대적으로 통일적이며 균질적인 집단을 규정하는 민중, 대중, 계급 등의 개념으로는 항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김원, 2006: 424). 이에 대해 차성환은 도시봉기론이 도외시하는 중간층 시민이 항 쟁의 주체로서 참여한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도시봉기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차성환, 2009: 41). 이러한 논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부마항쟁을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도시봉기 등 특정한 운동사의 맥락에서 일률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이다. 부마항쟁이 발생했던 1979년은 정치적으로 유신독재에 의한 억압이 강화되었으 면서 경제적으로 국가의 자본주의 발전전략과 경제정책에 따른 서민층의 불만이 팽배 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이러한 불만들을 특정 지역으로 집중시키는 상황들과 조건들이 9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양한 갈등과 저항의 요인들을 살펴보면서 부마항쟁의 주 체들의 다양성과 항쟁의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표 1> 부마항쟁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 민주항쟁론 민중항쟁론 도시봉기론 항쟁 주체 지도 학생(초기) 민중 민중 도시하층민 참여 학생, 기층 민중, 중간층 시민 민중 도시하층민 항쟁 주체 및 조직화의 성격 자발성자연발생적 봉기, 폭동 비균질적 도시하층민의 자연발생적 봉기, 이질적, 분산적 참여 항쟁 동기/ 원인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 (연속론) 경제적 궁핍과 억압에 대 한 반발(단절론) 도시하층민에 대한 차별 과 배제, 경제적 양극화, 조세저항 항쟁 목표/ 요구 민주화(독재타도, 민주회 복) 민주화(연속론) 경제적 불만 해결(단절론) 국가와 부유층에 대한 투 쟁, 정치경제적 변화 추 구 항쟁 방식 집회, 시위, 대응 폭력 적대적, 폭력적 폭력적 파괴 항쟁의 주체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항쟁의 발생 원인과 동기, 목표와 요구도 다양하 다는 것을 함축한다. 민주항쟁론은 유신정권의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 동기였다고 보며, 민중항쟁론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반발과 경제적 불만이 저항의 복합적인 동기 였다고 본다. 민중항쟁론은 입장에 따라 연속론과 단절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연 속론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항쟁 주체가 민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에, 단절론은 항쟁의 주체가 민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쟁의 동기에서도 경제적 불만과 저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차성환, 2009: 29). 연속론이 부마항쟁을 민중이 1) 이 표는 기본적으로 기존 논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차성환(2009, 13-49)이 제시한 표와 분석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91
주체가 된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반면에, 단절론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경제적 문제 해 결을 요구한 민중운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도시봉기론은 도시하층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불만 등이 저항의 중심적인 동기였다고 본다. 경 제적 양극화는 도시하층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에 따라 타났 다는 것이다(김원, 2006). 이러한 원인이나 동기에 대한 차별적 해석은 참여 주체에 대한 강조점과 성격규정 에서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민주항쟁론은 대학생의 역할과 중간층 시민들의 참여에 보다 주목하며, 이러한 해석은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민주화를 요구 하는 대학생들과 중간층 시민들의 특징에 보다 주목하도록 한다. 민중항쟁론은 항쟁의 촉발과정에서 대학생들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본격적인 항쟁 과정에서 강한 경제적 불 만을 지니고 있던 기층 민중들의 참여를 보다 강조한다. 그런데 연속론에서는 기층 민 중들 역시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불만을 지니면서도 대학생, 중간층 시민들과 더불어 반독재 민주화와 자유를 추구하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마항쟁은 반독 재 민중항쟁 으로 규정된다(정광민, 1989: 330-333). 반면에 단절론은 당시의 경인지역 중심의 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 사이에 현실적 연계가 없었으며, 부마항쟁은 부산, 마 산 지역의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경제적 불만을 표출한 민중항쟁 이었다는 점을 강조 한다. 도시봉기론은 경제적 불만이 항쟁의 동기였다는 점에서 민중항쟁론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항쟁 주체로서의 민중의 구체적인 성격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도시하층민들은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 자,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상점종업원, 고교생 등 이질적이고 상이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저항이 분산적이었다는 것이다(김원, 2006: 435). 지금까지 부마항쟁의 참여 주체, 동기/원인, 목표 등을 중심으로 세 가지 해석들 - 민주항쟁론, 민중항쟁론, 도시봉기론 - 을 비교해 보았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몇 가지 9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쟁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세 이론이 모두 동의하고 있는 항쟁 주체로서의 (도시 하층민을 포함하는) 민중은 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는가? 민중은 반독재의 민주화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경제적 궁핍에 저항한 민중운동의 주체인가? 민중은 민중운동의 통일적 집단인가, 아니면 도시봉기의 분산적, 이질적 소수자들인가? 둘째, 부마항쟁을 경제적 궁핍에 저항한 민중운동 또는 계급운동으로 본다면, 자연발생적이 고 조직화되지 않은 저항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셋째, 부마항쟁의 복합적인 성격을 하나의 시각에서 통합하려는 시도는 적절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대 안적 해석이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명은 아마도 부마항쟁의 주체와 성격에 대한 이해를 보다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기존 이론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이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 보기로 하자. 3. 부마항쟁과 민중 기층 민중이라고 부르든 도시하층민이라고 부르든 부마항쟁의 중심적인 주체는 넓 은 의미에서의 민중이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민중이 왜 항쟁에 참여하였고, 무엇을 요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참여한 민중은 통일적이고 집합적인 존재였 는가, 아니면 이질적, 분산적 존재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쟁점에 대해 해명하기 위 해서는 우선 당시의 사회구조적 조건들이 민중들을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도록 했는지 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단순히 민중들의 객관적 존재조건들만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가치, 정서, 이데올로기 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회적 조건들, 상황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부마항쟁이 발생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본다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유신독재 체 제가 지속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대외의존적 개발독재를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 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반공주의/안보논리, 성장주의가 강력한 통치 이데올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93
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의 경험에 기반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고 성장주의는 경제발전에 따라 대중들이 절대 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또 다른 정당성의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부에 의한 문화적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정치적으로는 수출지향적, 대외의존적 경제개발 과정에서 1970년대 초에 발생한 경제위기와 국민대중의 생활고에 따른 민심이반에 따 라 정권 재창출의 위기 상황에서 빠져든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의 제정을 통해 유신 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세력들과 야당 세력을 각종 긴급조치권 을 통해 탄압하는 과정에서 선명노선을 내세운 야당 총재 김영삼을 제명하면서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마산 지역의 국 민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이것이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주한미군 철수와 자주국방 등을 둘러싼 미국 카터 정부와의 불화와 갈등도 박정희 정권의 위상 을 떨어뜨려 유신체제를 위기로 몰아가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손 호철, 2003). 경제적으로는 1970년대 초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 화를 선언한 이후 국가주도의 중화학공업 집중투자와 기업육성이 이루어지고, 1970년 대 말에 재벌과 독점자본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중복, 과잉투자가 이루어졌다. 1960 년대의 경공업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화학공업 역시 외자도입에 의한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대외의존성의 심화와 독점강화가 지 속되었다. 금융, 생산기술, 시설재, 상품시장 등 투자, 생산, 판매의 전반적 과정에서 대외의존이 심화었되고 잉여의 유출이 이루어지면서 노동 수탈적 축적구조가 심화되었 던 것이다. 국내 산업의 분업연관이 취약하고 국내 수요시장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 서 이루어진 대외의존적 경제성장은 대외채무의 누적과 무역수지 적자의 확대로 이어 졌고, 투자의 지원과 수출촉진정책에서 배태된 구조적 인플레이션의 증대는 급격한 물 가상승을 가져와 한국경제가 의존해왔던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제가 지속되기 어렵게 9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만들었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황과 고금리 시대 의 도래는 외자도입에 기반한 수출지향적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부마민 주항쟁기념사업회, 1989: 226-231). 경제위기로 인한 물가상승과 해고, 임금수준의 하락 등 노동시장의 취약성은 수출지 향적,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던 부산, 마산에 더 큰 경제적 충격을 주었다. 부산의 인구는 1960년 116만 명에서, 1970년 205만 명, 1979년 317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것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광공업 분야의 일자리 확대와 관 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홍장표/정이근, 2003: 108). 부산지역은 저임금에 바탕을 둔 수출지향적,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1981년 기준으로 보면 섬유, 의복, 가죽 제조업에서 72.9%, 화학품 및 관련 제조업에서 55.6%를 여성노 동력이 차지하고 있었다(이행봉, 2003: 16-17). 부산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영세하고 부 가가치가 낮은 공업의 비중이 높았는데, 1979년 기준으로 종업원 수는 전국대비 16.6%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부가가치는 전국대비 12.9%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러 한 부산경제의 현실은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최저의 생활 을 강요받고 있었으며 경제적 불황에 따른 임금하락과 해고의 고통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소비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도시영세 민, 빈민들의 삶 역시 더욱 힘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9: 236-245). 문화적으로 보면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안보논리에 바탕을 둔 반공주의 이데올로 기와 군사주의 문화의 확산, 언론에 대한 통제와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 및 감시의 강 화, 지식인, 여성노동자, 도시 빈민들에 대한 억압과 배제 등은 대중들을 공포상태로 몰아갔다. 그렇지만 이러한 억압과 배제는 동시에 대학생, 지식인, 노동자, 도시 빈민 등 피지배대중들의 저항의 잠재력을 형성하였고, 지속적인 저항운동, 민주화운동으로 분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김석준, 2003).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95
부마항쟁이 발생하게 된 사회구조적 조건들과 상황들을 살펴보면, 민중들은 1960-70 년대의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 산업별, 계급별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농민, 생산직노동자, 사무직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단순서비스노동자, 도시빈민 등으로 다양 화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수적으로 증대하면서 생존권 요구가 분 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점차 조직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산이 나 마산과 같은 공업도시 지역의 민중은 도시적 특성으로 인해 분산적, 이질적 소수자 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통일적 집단이 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마항쟁의 동기와 목표가 무엇이었고, 이것들이 민중을 조직화할 수 있는 힘이 이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초기에 대학생들 이 주도한 부마항쟁의 동기는 우선적으로 유신독재체제의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화운동 이었다. 그런데 조직화된 항쟁이 아닌 상황에서 광범한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는 항쟁 과정에서 다양한 불만과 요구의 표출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부 산과 마산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노동자들, 도시하층민들 등 기층 민중들의 경제적 불만이 분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유신독재체제가 단순히 정치적 자 유를 억압한 것만이 아니라 기층 민중들에게 경제적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부마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동기나 요구를 민주화라는 특정한 내용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중은 독재와 억압에 대한 불만을 표출 하는 동시에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였고, 항쟁의 조직적 중심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에 이질적 민중들이 분산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부마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은 유신독재체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위기에 따른 생활상의 고통으로 다양한 불만을 지니고 있던 존재들이었고, 이들은 대학생을 중심으 로 한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부마항쟁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따른 다양 한 불만과 요구를 분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산과 마산이라는 도시의 민중 은 그 자체로 분산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으며,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반 대에는 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경제적 불만에 따른 분산적, 이질적 목소리, 분노를 표 출하였다고 하겠다. 게다가 대학생이 지속적으로 항쟁의 조직적 중심이 되었던 것도 9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아니었고 노동운동도 조직화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도시봉기적 성 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별개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마항쟁은 복합적인 민중항쟁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도시봉기론을 주장하는 김원은 대중독재론 과 민중운동론 이 동일한 문제틀의 거울상으로서 도시하층민을 타자 로 남겨둔다고 비판한다. 민중 이라는 용어가 당대 담론 생산자 층 - 아마도 저항적 지식인층 - 이 스스로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지닌 타자들 을 무차별적으로 통합-배제하려는 일련의 정치적 기획 가 운데 하나 라는 시각에 동의하면서, 대중 또는 민중 이라는 명명 자체가 매우 이질적 이며 상이한 주체들을 독재에 공모한 대중 또는 민주화운동 혹은 민중운동 이라고 부르는 언어 구조 자체가 부산과 마산에 존재했던 이질적인 도시하층민을 타자 로 남 겨두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의식적 욕망 의 산물이 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산과 마산의 도시봉기의 주체인 도시하층민은 대중, 민중이나 계급으로 회수불가능한 주체 라고 주 장한다(김원, 2006: 449-451). 물론 민중 에 대한 통일적 이미지를 부여하거나 조직화 된 저항의 주체로 규정하려는 생각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민중운동 자체가 도시 하층민을 배제했다거나 도시하층민이 민중이나 계급으로 회수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적 절해 보이지 않는다. 분화되고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민중은 자연스럽게 분산적, 이질적이 된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발생한 항쟁 또는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참 여자들의 통일성은 쟁점이나 목표의 통일성, 생활공간이나 노동공간의 공통성과 상호 작용의 정도, 항쟁의 전개과정과 조직화의 정도 등에 따라 형성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모든 항쟁이나 사회운동은 분산적이고 이 질적이라는 주장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 사회적 적대들의 분화와 응축으로서의 부마항쟁 앞서 보았듯이 부마항쟁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한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경제적 불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97
만의 해결을 요구한 민중운동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마항쟁 이 경제적 궁핍에 저항한 민중운동 또는 계급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그 한계가 무엇이며 이후의 상황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산민주운동사 는 부마항쟁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 반독재 민주항쟁 이 중심이 되었지만 기층 민중의 경제적, 계급적 요구가 잠재되어 있었다고 보면서, 항쟁의 주체 와 목표 사이에 탈구현상이 있었다고 본다(부산민주운동사 편찬위원회, 1998: 428; 차 성환, 2009: 23-24). 이에 대해 차성환은 민중의 정치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 는 해도 탈구현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 라고 비판한다(차성환, 2009: 44). 그런데 여기서 탈구라는 평가가 계급적 목표를 기준으로 주체의 한계를 판단하는 과도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양자가 동일한 사고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이라는 객관적 존재조건에 걸맞은 계급의식을 형성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항쟁 자체는 자본주의 경제의 계급적 성격으로 인한 경제적 궁 핍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면서 저항한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본주의 경제의 계급적인 성격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통한 계급적 연대를 통해 저항한 것은 아니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항쟁의 참여자들이 객관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속한다고 해서 항쟁이 계 급운동 또는 노동운동이었다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마 항쟁을 한국사회 최초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한 운동 이라는 규정하는 것(손호철, 2006; 윤소영, 2006)은 사후적, 결과론적 해석일 수는 있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노동자 를 비롯한 기층 민중들의 의식수준을 고려한 객관적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도시하층민들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조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항쟁 과정에서 공공 시설과 부유층에 대해 공격을 하였지만,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경제적 불만의 자생적 표출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노동 자들의 항쟁 참여를 보면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화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 별적, 분산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9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이처럼 부마항쟁은 도시의 이질적, 분산적 대중들이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와 경제적 불만을 동기로 하여 집합적으로 표출한 복합적인 항쟁이자 사회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 다. 말하자면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과 상황 속에서 잠재되어 있던 민주주의 적 대와 계급 적대가 복합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은 민주주 의 적대가 표출되도록 하였다면, 자본주의 경제위기에 따른 경제적 불안과 빈곤은 계 급 적대가 표출되도록 하였다. 물론 계급 적대는 앞서 보았듯이 자연발생적, 미조직적, 분산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이것은 이후 계급 적대의 발전에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마항쟁의 복합적 성격을 하나의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시도는 적절하 지 않으며, 부마항쟁의 복합성을 사고할 수 있는 대안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적대, 갈등, 긴장 들이 존재한다. 사회적 조건 들, 상황들의 사회적 구조와 역사적 변화는 적대나 갈등의 다양성과 정도를 변화시킨 다. 예를 들어 환경 적대는 산업화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며, 성 차별은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갈등과 적대로 표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대 사회가 발전해 오면서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기존에 존재했던 문제들 이 갈등과 적대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이 분화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적대나 갈등 들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가 하는 것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회구조적 조 건들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다양한 사회적 적대나 갈등 들이 서로 분산되어 표출될 수 도 있고, 서로 응축되어 표출될 수도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발생과 이후 다양한 사 회운동들의 분화과정을 보면 이러한 점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다수준적 이고 복합적인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생겨난 다양한 적대, 갈등, 긴장 들이 민주주의 적대를 중심으로 응축되어가고, 이러한 적대관계 속에서 종속적, 저항적 위치에 있었 던 행위자들이 특정한 촉발요인에 의해 사회운동에 집합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태석, 2002: 252). 한편 민주화운동에는 노동운동, 통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 동, 지역주민운동 등 다양한 민중운동의 세력들이 참여하였지만, 군사정권이라는 상황 과 국가의 비민주적, 억압적 통제정책으로 인해 계급적대를 비롯한 다양한 적대들은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99
민주주의 적대의 틀 속에 포섭되어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 접합에 내재해 있던 잠 재적 분열은 6월 항쟁이 일정한 제도적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곧 현실적 분열로 나타났다 (정태석, 2002: 251-252). 이러한 다원적 적대들의 분화와 응축 이라는 사고는 부마항쟁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유신독재체제 하에서의 민주주의 적대의 형성,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과정에서의 계급 적대의 형성, 그리고 미미했지만 공업화에 따른 공장주변 환경오염으로 인한 환경 적대, 여성교육의 확대와 성평등 의 식의 확산에 따른 성 적대 등 다원적 적대들이 형성되었거나 형성되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적대들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주주의 적대를 중심으로 응축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다양한 적대들, 특히 계급 적대 의 상대적 자율성은 민주주의 적대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성격이 부마 항쟁의 복합성으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부마항쟁이 진압되었지만, 부마항쟁은 간접적 으로 10.26정변의 발생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의 발 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부마항쟁에서 민주주의 적대와 계급 적대의 복합적 표출 은 10.26정변과 이후 신군부의 쿠데타 및 1980년 5월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민주 주의 적대 중심의 응축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비교해 본다면, 광주항쟁은 부마항쟁에 비해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보다 강하다. 왜냐 하면 광주항쟁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라는 동기와 민주화라는 목표가 뚜렷한 항쟁이었으며, 전개과정에서 저항의 대상과 요 구가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광주항쟁에 참여한 다양한 민중들은 신군부집단 의 폭력적 진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는데, 군사력을 동원한 신군부의 진압에 더 이 상 저항할 수 없게 되어 항쟁은 결국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 지만 광주항쟁은 이후 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분 노의 잠재력이 되어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광주 10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항쟁은 민주화운동의 맥락 속에 보다 분명하게 위치지울 수 있다면, 부마항쟁은 민주 화운동의 맥락 속에만 위치지울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부마항쟁과 6월 항쟁을 비교해 보면, 6월 항쟁 역시 민주화운동의 맥락에 위치지울 수 있지만 항쟁 참여세력들이나 요구들은 광주항쟁보다 복합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격은 이후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부 마항쟁의 복합성은 6월 항쟁의 복합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부마항 쟁은 민주화의 성취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복합성의 표출이 지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중들 또는 피지배대중들은 사회구조적 분화와 다원화, 국가권력의 성 격, 자본주의 경제의 성격 등에 따라 다양한 불만과 저항을 표출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적대들이 사회운동이나 항쟁으로 분출될 때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은 하나의 적대 또는 목표로 응축되기도 하고 분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분화와 응축은 사회적 조건들, 참여자들의 성격, 항쟁 대상과 목표의 성격, 항쟁의 전 개과정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부마항쟁 역시 산업화와 도시화, 유신독 재체제와 1970년대 말의 경제위기 등의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 적대와 계급 적대의 복 합적 표출로 나타났고, 이런 점에서 당시의 정치적 억압의 상황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사회운동의 분화를 예고한 복합적 민중항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부마항쟁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읽자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회적 모순들, 적대들, 갈등들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요구 해온 민주화운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부마항쟁의 복합성을 인정한다면, 그 의미를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도시봉기 등 특정한 하나의 맥락 속에 고정시키려는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101
시각은 불필요하다. 말하자면 부마항쟁을 한국사회의 다원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과정 속에서 복합적인 위치를 지녔던 사회운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 치적 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민주주의, 분배적 정의를 추구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다원적, 복합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부마항쟁이 지니고 있었던 한계들을 이해함으로써, 현재에 분출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들, 적대들을 심 층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마항쟁을 민주주의 발전의 시금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석준(2003). 부마민주항쟁의 사회 문화적 배경,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김 원(2006). 부마항쟁과 도시하층민, 정신문화연구 제29권 2호. 김진영(2003). 부마민주항쟁과 양서협동조합,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박철규(2003). 부마민주항쟁과 학생운동,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자료편찬위원회/부마민주항쟁 십주년 기념사업회 학술분과(1989).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마민주항쟁 십주년 기념사업회. 부산민주운동사 편찬위원회(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 부산시사편찬위원회. 손호철(2003). 부마민주항쟁의 정치적 배경,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손호철(2006). 1979년 부마항쟁의 재조명: 정치적 배경을 중심으로, 해방 60년의 정치, 서울: 이매진. 오재환(2003). 부마민주항쟁과 부산지역사회의 변화,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 원. 윤소영(2006).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 이행봉(2003). 부마민주항쟁의 개관, 성격 및 역사적 의의,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정광민(1989). 부마항쟁 10년 되새겨보는 역사적 의미, 사회와 사상 제15호. 10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정주신(2003). 부마민주항쟁과 5 18 민중항쟁,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정태석(2002). 사회이론의 구성, 한울아카데미. 정태석(2007).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들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주무현(2003). 부마민주항쟁과 노동운동,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 차성수(2003). 부마민주항쟁과 부산정치지형의 변화,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 원. 차성환(2009). 참여 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항쟁 성격의 재조명, 부산대학교 대학원 정 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홍장표/정이근(2003). 부마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 원. 부마항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103
발제 3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의 비교연구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차 례 1. 머리말 2. 집권 블록의 대응 1) 부마항쟁과 10 26 사건 이후 집권 블록의 대응 2) 5 18민주항쟁을 전후한 시기 집권 블록의 대응 3. 공수부대의 폭력 1) 부마항쟁과 공수부대 해병대의 진압 2) 5 18민주항쟁과 공수부대의 진압 4. 시민들의 반응 5. 맺음말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의 비교연구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1. 머리말 부산민주공원이라는 이름이 중앙공원으로 바뀐 올해에 우리는 부마항쟁 30주년을 맞는다. 박정희가 죽고 꼭 30년이 된 올해 2009년,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 통령을 떠나보냈다. 30년이라면 꼭 한 세대가 흐른 것이기도 하지만, 두 대통령의 서 거는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을 거치면서 시작된 질풍노도와 같았던 민주화의 시대 가 마무리되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힘들게 한 발 한 발 이뤄온 민주주의가 브레이크도 먹지 않게 고속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오늘, 우리는 민주화의 시대를 향한 변화의 시기 의 문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열어젖힌 부마항쟁과 그 변화의 몸부림이 장 엄하게 패배했던 5 18민주항쟁을 돌이켜 보려고 한다.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은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친 한국 사회의 권력 재편기에 발생한 대규모의 격렬한 민중항쟁이었다. YH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급속히 촉발된 반유신투쟁은 부마항쟁을 통해 한 단계 비약하면서 끝내 유신체제의 정 점에 서있던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이 바로 유신체제의 몰 락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유신체제의 권력 엘리트들은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혼란에 빠졌으나, 나중에 신군부 라고 불리게 된 한 분파가 12 12군사반란 등을 통해 치고 나갔고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재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마항쟁 으로 촉발된 박정희의 죽음에서 신군부가 헌정질서를 유린한 1980년 5월 17일까지의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07
기간을 우리는 흔히 서울의 봄 이라 부른다.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가 갑자기 머리를 잃고 헤맬 때 국민들은 한편으로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감에 싸인 채 봄 같지 않은 봄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 의 봄은 부산에서 시작되어 서울에서 불안한 꽃을 피우고 광주에서 처절하게 마무리 되었다. 부마항쟁이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친 한국 사회의 권력 재편기의 서막을 연 것이었다면, 5 18민주항쟁은 이 권력재편의 마무리단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12 12군사반란에서 5 17계엄확대조치까지가 세계에서 가장 긴 쿠데타 였다면, 부 마항쟁의 시작에서 광주항쟁의 장엄한 패배까지는 민주주의를 향한 하나의 운동기간으 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한 세대가 지난 오늘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마항쟁에서 5 18 민주항쟁까지의 기간은 하나의 전환기이고, 이행기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 현실의 정치에서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은 불행하게도 서로 경합하는 위치에 놓이곤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20여 년 간 한국정치는 극심한 지역감정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집권자의 출신지역에 따라 국가나 시민사회가 어떤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에서도 분명 온도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이 연속 성을 갖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영호남 지역감정의 악화 속에서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 서조차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을 같은 궤도에서 보지 않고 경쟁관계 또는 우열관계 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일부이지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부마항쟁 당시 전라도 군인들이 와서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을 마구 패댄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광 주에서는 경사도 군인들이 와서 전라도 사람들을 다 죽인다라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 다. 이 유언비어는 국민의 군대여야 하는 국군이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 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나름대로 합리적 으로 설명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이후의 현실정치에 음험한 규정력을 지니게 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역 량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지역으로 갈라져 버린 상황은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이 동일한 궤도에 놓인 연속적인 사건이며,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망 각하게 만들었다. 민란 수준의 대규모 시위에 대한 지배권력의 유혈 참극을 불사하는 강경진압을 막아보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0 26사건 거사 동기는 부마항쟁과 10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5 18민주항쟁의 숙명적 연결고리였다. 본고는 부마항쟁의 발발에서 5 18민주항쟁의 진압에 이르는 기간을 하나의 이행기 로 보는 전제 하에, 이행기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두 사건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이 두 사건은 분명 동일한 궤도상에 놓여있으나, 사용된 폭력의 강도, 군부와 시민의 대 응,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대응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본고는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에 대한 집권블럭의 상황인식과 대응양태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두 항쟁에 대하여 각각 어느 정도의 폭력이 행사되었으며, 두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 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에 대하여 어떻게 서로 다르게 대응하였는지 검토할 것이다. 또 한 항쟁을 촉발하고 발전시켜 나간 변수로서 두 지역이 각각 배출한 유력한 정치인인 김영삼의 제명과 김대중의 체포가 미친 영향과 항쟁 발발 이전에 지역의 민주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의 비교연구는 한국 사회의 격렬한 권력재편기에 발생한 민중항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역사적 전환기의 성격과 그 전환기에 축적되고 성숙해 간 민중역량의 한계와 가능성을 밝히는 시도라는 의미를 지닌다. 2. 집권 블록의 대응 1) 부마항쟁과 10 26 사건 이후 집권 블록의 대응 부마항쟁이나 5 18민주항쟁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통해 항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후적 인 설명은 사건 발생 당시에 항쟁의 당사자나 항거의 대상이 된 집권 블럭 모두 항쟁 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는 사실과는 잘 맞아 떨어 지지 않는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데모가 일어나지 않았던 부산대학에서 발생한 시위 가 파출소와 세무서의 습격이라는 과격한 양상으로 번지고, 거기에 수만 명의 시민이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09
가세하였다는 사실은 유신정권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학내 시위를 주 도했던 사람들이나 시내에서의 가두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들 모두 시위가 폭발적으로 번져간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1)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이라는 초강경 조치를 취한 것은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의 계엄법 은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 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2) 부산의 상황은 충격적 인 일이긴 했지만, 계엄법이 정한 비상계엄의 선포 요건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부산에서의 데모에 대해 아주 신속하게 과잉대응을 한 바닥에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3) 유신체제는 일체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극도로 경 직된 체제로 모든 비판을 철저히 통제하려 하였다. 유신체제가 너무나 쉽게 무너진 비 밀은 바로 그 경직성에 있었다. 유신체제라는 절대 권력은 권력에 대한 비판에 대해 아무런 내성을 갖지 못했기에 작은 충격도 견디질 못했다. 박정희는 또다시 군을 동원하였다. 1972년 10월의 유신 친위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7년 만에 군을 동원한 것이다. 사실 박정희는 빈번하게 군을 동원했다. 1964년 6 3사 태 당시의 계엄령, 1965년의 한 일 회담반대시위에 대한 위수령, 1971년의 교련반대 시위에 대한 위수령, 1972년의 유신 쿠데타를 위한 계엄령 등에서 보듯 박정희는 위기 상황이 닥치면 군을 동원하거나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박정희가 동원한 부대는 공수부 대와 해병대였다.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폈다. 군이 투입되기 이전에 파출소, 세 무서, 언론사 등에 대해 습격과 파괴, 방화 등 대단히 과격한 행동을 하던 시위대는 군의 강경진압 작전에 흩어지고 말았다. 부산과 마산에서 공수부대 등이 대단히 강력 한 폭력을 행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진압군의 폭력성은 당시의 부상자 통계에 서 잘 나타난다. (총 부상자 000명 중 명이 두부 부상 /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1) 자료집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정광민 증언: 111 2) 국가법령정보센터 3) 조갑제, 유고 2, 1987, 한길사, 49쪽 11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두들겨 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자파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 부파열상, 후두부열창, 안면열창, 안면부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손상. : 조갑제 닷컴, 부마사태와 김재규) 부산에서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위대는 깨어지고 무수한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 산시내에는 다시 강요된 침묵 으로 빠져들었다. 4) 부산과 마산에서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투입한 초강경 조치로 시위의 불길은 일단 잡히는 듯 했다. 유신 정권은 부산과 마산에서 사태 진압 에 성공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일단 시 위가 잠잠해졌지만, 계엄령의 충격 속에서도 시위의 불길은 다른 지역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10월 19일에는 서울대에서 학생운동 관련 학생들을 강제로 휴학시키는 지도 휴학제 실시에 항의하는 데모가 있었고, 10월 22일에는 경북대학교가, 10월 23일에는 영남대학교가 각각 휴교에 들어갔다. 10월 24일에는 외국어대학교, 25일에는 숭전대학 교에 각각 반정부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10월 25일에는 대구 계명대생 2천명이 데모를 벌였다. 5) 1960년의 4월혁명이 대구 2 28사건과 마산 3 15의거를 거치며 서서히 확 산되었듯이, 반유신투쟁의 불씨도 꺼지지 않은 채 퍼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가장 정 확히 읽고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박정희의 집권 기관을 통틀어 중앙 정보부는 체제유지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부마항쟁이 발발하자 김재규는 10월 18일 새벽 2시 부산으로 날아가 부산의 민심을 직접 보고 듣고, 서울로 돌아와 박정희 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부마항쟁에 대한 김재규와 박정희의 서로 다른 상황 인식과 대 책은 10 26사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조금 길지만, 김재규 자신의 설명을 들어 보자.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 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4) 자료집, 94쪽 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신동호, 70년대 캠퍼스 2, 338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11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 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 다. 본인이 부산에 다녀오면서 바로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 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 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 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 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 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 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 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 만에 그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도 하여 보았지만 박대통령은 이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 19와 같은 사 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 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 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게 이미 4 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 니다. 6) 부산과 마산에서 군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국내외의 정보를 총괄하는 김재규의 입장에서 볼 때 민란 의 전국적 확산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재규 는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 는 대신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호언했고,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 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들먹이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 겠습니까 라며 강경책을 부추겼다. 김재규가 친형 처럼 따르던 박정희를 야수의 심정 으로 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필연적으로 확산될 반체제시위에 대한 강경유혈진압을 피해보려는 것이었다. 부마항쟁의 충격은 유신체제를 즉사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유신 체제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열흘 뒤에 정점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6)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11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김재규는 박정희를 사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육군본부로 갔다가 헌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민주혁명을 꿈꿨던 김재규의 거사는 그의 체포로 실패로 돌아갔다. 유신잔당들은 유신체제의 머리는 잃어버렸지만 몸통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 1960년 4월혁명 당시 이승만의 하야 직후의 상황과 는 다른 것이었다. 이승만의 하야는 이승만 체제 자체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이었지 만, 10 26사건은 자연인 박정희의 죽음으로 축소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4월혁명 당 시는 이승만 체제가 시민들과 학생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다면, 10 26 직후의 상황은 이와는 달랐다. 부마항쟁에서 공수부대의 폭력이 난무했지만,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 었다. 10 26사건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인명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피를 흘리지 않은 상태에서 독재자가 먼저 피를 흘린 것이었다. 때문에 상황 은 유동적이었다. 민주화로 갈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지속될 것 인가? 과연 야당이나 민주화운동 진영이 집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유신체제 내부 의 특정집단이나 개인이 머리 잃은 괴물, 유신체제의 새로운 수장으로 등장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신체제 붕괴의 구조적 필연성을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그 붕괴의 과 정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솔직히 아무도 유신대학 이라 불리던 부산대학 7) 에서 유신체제붕괴의 단초가 열리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5년 만에 처음 일어난 학내 시위가 5만 명 이상의 대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아무도 예상 하지 못했고,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고 정부가 바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유신정권의 오른팔이 머리를 쏘리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예기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상황에 가장 신속하고 기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전두환 등 신군부 였다. 군 내부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박정희가 영남 출신 정규육사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키워 온 군부 내의 한 분파였다. 이들은 박정희와 차지 철의 비호 속에 군 요직과 청와대 경호실 등을 오가며 세를 형성한 정치군인 집단이었 는데, 군부 내에서는 선망과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10 26사건은 이들에게 커다란 재앙이었지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하나회 회장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 7) 자료집, 87, 107, 120, 147쪽의 증언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13
작전차장보와 1사단장을 거쳐 10 26사건 당시에는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10 26사건 당시 궁정동 역사의 현장에 있던 사람은 유신체제의 권력서열 1~4위에 해 당하는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경호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었다. 이 밖에 사건 후 계엄사령관을 맡게 되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도 김재규의 초대로 궁정동 안가 네의 다른 건물에 와 있었다. 정승화는 그 때문에 혹시 김재규와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이는 유신체제가 위로부터 무너지면서 엄청난 권력의 공백 이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유신체제의 정점에 엄청난 힘의 공백이 생기고, 계엄사령관 인 육군참모총장마저 대통령 살해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고, 보 안사령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인 중앙정보부는 역적 기관이 되어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계엄 하의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다는 것은 신군부 에게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유신체제 내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던 신군부는 박 정희의 피살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기득권의 유지를 넘어 정권의 장악을 향 해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육군 소장에 불과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권력의 쏠림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전두환을 보안사령 관에서 해임하여 지방으로 좌천 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정보가 누설되어 전두환은 거꾸로 정승화를 체포하게 된다. 이른바 12 12군사반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가 모든 정보를 장악한 유리한 위치에서 과감하게 움직인 반면, 야 당과 재야민주세력과 학생들은 당면 목표였던 유신 철폐 를 넘어 박정희의 피살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의 전개에 당황해 했다. 독재자 박정희의 제거는 민주세력으로서도 내심 바라는 바였을 테지만, 그를 쏘아죽인 사람이 유신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중앙정보 부의 수장 김재규였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전두환 등 유신잔당들은 적극적 으로 김재규를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로 몰아갔지만, 민주세력은 여기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김재규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하여 10 26사건이 김재규 발 민주혁명으 로 나아가지 못하고 권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만 축소된 상황에서 민주세력은 김재 규를 옹호할 계기를 찾지 못했다. 인권변호사들조차 처음에는 김재규를 변호해야 하는 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가, 점차 그의 인품에 매료되고 민주혁명에 대한 그의 진정성 11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을 이해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야 일각에서 김재규의 구명운동이나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김재규의 재판이 대법원에서의 최종 판결을 앞둔 1980 년 4월의 일이었다. 재야민주세력으로서는 부마항쟁으로 일격을 당하고 뿌리부터 흔들 리기 시작한 유신체제를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뜨릴 기회를 김재규의 때 이른 거사로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탄식했을지도 모른다. 재야민주세력은 유신헌법을 대체할 개헌 일정과 새로운 헌법에 따른 정치 일정이 제시되는 대신,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 민회의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를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하겠다는 일정이 발표되 자, 더 이상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재야민주세력은 11월 24일 영동 YWCA회관에 서 결혼식을 위장한 집회를 열어 거국민주내각의 구성과 조속한 정치 일정의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야당은 야당대로, 재야는 재야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각 새로운 상 황에 대한 조직적 준비가 너무나 부족했다. 학생들은 겨울방학 기간을 학생회 부활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잡았고, 1980년 봄 학기 개학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을 학내 민주화 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의 종언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재야민주세력 이나 학생세력은 그 필연의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에는 주체적인 역량이 부족했 다. 그것은 유신체제가 남기고 간 저주였다. 2) 5 18민주항쟁을 전후한 시기 집권 블록의 대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마항쟁을 맞이했을 때, 유신체제의 집권 블록은 그 대응방 안을 놓고 총을 쏘아야 할 만큼 균열되었다면, 5 18민주항쟁을 전후한 시기에 집권 블록은 내부적으로 단결돼 있었다. 5월 17일 계엄확대조치를 앞두고 5월 16일 열린 전 군지휘관회의에서 군의 정치개입에 대하여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 중장이 반대 의견 8) 을 폈고, 5 18민주항쟁에 대한 과잉진압에 향토사단장인 31사단장 정웅 소장이 반발 하고, 안병하 전남 도경국장이 군 투입에 반대하는 등 국가기구의 상층부에 있던 인물 들이 모두 신군부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국가권력의 핵심을 장악 한 신군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했 8) 국방부과거사위 보고서,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15
던 대통령 최규하는 모든 권력을 신군부에게 내줘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는 국민들, 특히 중산층의 동향이었을 것이다. 부마항쟁은 시 민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부마항쟁에 대한 모든 자료는 시민 들이 얼마나 뜨겁게 시위대를 지지하고, 김밥과 음료수 등을 제공하고, 도피처를 제공 하고, 나아가 시위에 직접 참여했는지를 감격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10 26사건은 부 마항쟁이나 다른 지역의 반유신투쟁이 요구하고 기대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박정희 의 죽음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무려 18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은 국 민들에게 독재의 종말이라는 환희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부마항쟁이나 5 18 민주항쟁에 대한 선행연구 일부에서는 10 26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한국정치의 장 래에 대해 낙관 9) 했다고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 몹시 불안해했다. 5월 13일과 14일, 15일 3일에 걸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시민들은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3 1운동 이후의 학생운동사에서 이 정도 규모로 학생들이 몰려나왔을 때, 시민들이 이렇게 지켜보기만 했었던 적은 딱 이 때뿐이었다. 신군부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불안심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고, 오히 려 부추겼다. 대표적인 사례는 1980년 5월을 전후한 남침설의 조직적 유포였다. 당시 에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은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첩보 를 입수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온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는 병력이동의 징후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이 첩보가 가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임시국무회의에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인 전두환은 <북괴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했고, 정부는 군과 경찰에 최근 국내 소요 사태에 편 승하여 북괴의 대남도발 침투가 예상된다 며 비상경계체제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 다. 이는 육군본부의 담당부서가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에 신빙성이 없다 고 판단했음에도 신군부가 학생들의 시위와 이 첩보를 연결시켜 국가 위기 상황을 조 장하면서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 시켰다 는 것 10) 을 의미한다. 9) 정주신, 10 26 사건의 배경 분석, 부마민중항쟁연구논총, 2003, 민주공원, 114쪽 10) 국방부과거사위 보고서, 366쪽 11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전두환 등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상관을 체포하고, 정보를 왜곡하여 국가위기 상황을 부풀리는 등 집권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보였다. 그들의 집권의지는 유혈사태 도 불사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신군부는 12 12군사 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뒤 시위와 폭동을 진압하는 충정훈련을 대폭 강화했다. 이런 등 등의 이유로 민주진영 일각에서는 신군부가 확실한 집권 명분을 얻기 위해 광주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혼란을 부추겼다고 믿고 있다. 5 18민주항쟁에 대한 공 수부대의 강경진압을 음모설 이나 사전계획설 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한 예로 박현채는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광주를 선택하였다면서 역사적 반동의 길은 광주가 아이었더라도 다른 어디에서든 일어나게 되어 있었지만 당시 강경 군부는 정 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승부처를 끈덕진 저항의 역사를 가지면서 경제력으로 약하고 좌절과 또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으로 선택 하였다고 주장했다. 11) 이에 대해 정해구는 신군부 측의 소요 유도의 고의성 또는 계획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이 같은 주장들의 맥락에서 본다면, 공수부대 의 무자비한 진압은 광주에서 소요를 확대시켜 신군부 측 쿠데타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계산의 산물 인데, 이런 강경진압이 과연 신군부 측의 고의적인 계획에 기인한 것 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신군부 측 입장에서 볼 때 저 항 발생의 최대 우려 지역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이었으며, 신군부는 이 때문에 수 도권에 훨씬 더 많은 공수부대를 배치했다고 강조했다. 12) 3. 공수부대의 폭력 1) 부마항쟁과 공수부대 해병대의 진압 박정희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11) 김진균 정근식, <광주5월민중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민중항쟁>, 풀빛, 1990, 91쪽 12) 정해구, 5 18민중항쟁사, 2001, 광주광역시 5 18사례편집위원회, 270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17
정병주는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이나 쿠데타에 자주 이용된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공 수부대는 집권자로서는 아주 써먹기 좋은 부대이다. 기동성이 있고 경량화돼 있어 간 편한 부대이다. 전투력은 또 일당백이 아닌가. 더구나 일선 부대를 빼낼 때처럼 미군 과의 절차 문제 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공수부대는 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벗어난 최초의 부대였으며, 특정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에 자유 로웠다. 부마항쟁의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계엄군은 시내에 투입될 때부터 착검을 하고 무력시위를 했으며, 무수한 부상자를 내 면서 혹독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계엄군이 시내를 장악하면서 정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4) 부산의 언론기관에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행을 호소하는 제보가 빗 발쳤다고 한다. 15) 계엄군은 심지어 폭행을 말리는 경찰관들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 다. 젊은 군인들의 폭행은 무지막지한 것이어서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 으로 되어 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 도 주지 않는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 고 한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 거나 젊어 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 이 많았다. 천천히 걸으면 빨리 안 간다고 붙들려갔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수상 하다고 붙들려갔다 는 것이다. 16) 일부 자료는 공수부대에 비해 해병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서 오히려 시위대에게 두들겨 맞았고, 그 때문에 시민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7) 그러나 정작 해병대 병사로서 부산의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된 한 사람은 공수부대보다 해병대가 더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며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3) 조갑제닷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1) 14) 자료집, 이은우 증언, 157쪽 15) 한겨레신문, 1988년 10월 18일자, 자료집, 94쪽 16) 조갑제, 유고 2, 63~64쪽 17) 서정근, 부마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신동아 2007년 11월호 11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쫓기는 학생들은 동네 슈퍼로, 혹은 다방으로, 당구장으로 심지어는 워낙 다급한 나머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리의 공중 전화박스로도 몸을 숨겼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전 의 공수부대나 일반 육군 계엄군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1대 1 로 끈질긴 추적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어느 쪽이 데모하는 학생이고 어느 쪽이 진압군인지,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상황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1대 1로 추적하는 데모 진 압은 진압 사상 전후무후 했다. 지휘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병사들 각각의 자발적인 의지로 일어난 행동이었으며 마치 동네 건달들의 패싸움 같은 마구잡이식의 난투극이었 다. 혈기 왕성한 해병대들이 개개인을 상대로 죽기살기로 맞서 싸우는데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겁 많은 민간인인 대학생들이 당해낼 재간이 어디 있겠는가. (...) 딱 한 번 그런 소동이 일어난 이후로 극렬한 시위의 본고장이며 저 유명한 부마사태로 악명을 떨치던 부 산과 마산은 너무나 조용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데모하다 걸리면 해병대 계엄군에게 맞아 죽는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대학생들 사이에 퍼졌나갔다. 무엇보다 1대 1로 죽기살기로 끝까지 추적하는 계엄군이 무서웠던 것이다. 체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맞붙어 싸우며 안 죽을 만큼 패 닦는 것이 목적인 계엄군은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데모하던 학생들이 말하기를 [에고! 해병대 놈들은 사람 새 끼도 아녀! 완전히 미친 놈들이라구. 상대하면 절대로 안 돼] 라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 다. 18) 부산에는 비상계엄령이, 마산에는 위수령이 실시되었지만, 그런 법적인 차이가 현장 에서의 시위진압 방식의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부산과 마산, 공수부대와 해병대 를 가릴 것 없이 계엄군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많은 부상자를 낳았다. 계엄군의 강경진압으로 시위가 끝나버렸다는 데 대해서는 부마항쟁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일치 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의문은 왜 똑같은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무자비한 진 압을 펼쳤는데 부산과 마산에서는 시위가 진압된 반면, 광주에서는 오히려 시위가 확 산되었는가하는 점이다. 2) 5 18민주항쟁과 공수부대의 진압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이 시기적으로는 7개월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두 항쟁 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부대도 똑같은 공수부대였고, 무자비한 진압을 펼쳤다. 그렇다 면 우리는 두 지역의 시민들이 다르게 대응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이 18) 이강석, 부마사태와 5,18 광주사태, http://cafe.daum.net/gumnara/3beb/264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19
유는 진압군 측과 시민들의 두 방향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부마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같은 부대였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1, 3, 5, 7, 9, 11공수여단과 같은 부대의 차 이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부대라 할지라도 7개월 사이에 큰 변화를 겪을 수 있고, 군대라는 특성상 지휘관의 지휘 방침과 현장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은 공수부대가 부마항쟁을 성공 적 으로 진압하였다는 사실이다. 부마항쟁 직후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소요 사태 교훈 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출동부대가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 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 주어야 하며, 총기피탈 방지. 화염병 등의 기습 공격에 대비 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또 사회일각에 서 발생되는 사소한 불안요소라 할지라도 이를 예의주시 필요시에는 즉각 출동, 초동 단계에 완전히 진압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며, 사회불안의 요인이 도리 수 있 는 학원과 종교, 기타 행정관서에 인접해 있는 각급 부대들을 지역 내 소요에 능동적 이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기 위하여 평상시 출동역량의 확보와 철저한 폭동진압 계획 및 훈련 등 대비책이 요망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었던 권정달도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는 반성론이 제기 된 바 있다면서 이 교훈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 작전의 기본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이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 경진압 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 한다고 1996년 전두환 일당 의 내란사건 수사당시 검찰에서 진술했다. 20) 요컨대 신군부가 장악한 보안사령부는 부 마항쟁 당시 시위가 확산된 이유를 초동단계에서 강경하게 진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19) 보안사, 부마지역 학생소요 사태 교훈 (1979), 383-1980-100, 601쪽, 국방부 과거사위보고서 378 쪽에서 재인용. 20) 조갑제닷컴 12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고 생각했다. 보안사가 보기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던 시위는 공수부대가 투 입되어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과감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잦아든 것이다. 신군부는 1980년 봄이 되면 대학가가 시끄러워 질 것으로 보고 군을 동원하여 시위 를 초기에 진압해야 한다고 보았다. 육군본부는 1980년 2월 18일 공수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충정훈련이란 폭동 진압훈련을 말하는 데, 공수부대의 경우 원래 교육과정에는 1주일에 4시간 정도의 충정훈련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거의 모든 교육훈련을 포기하고 충정훈련만을 집중적으로 실시 했다고 한다. 21)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도 하사관이 주축인 공수부대원들이 1980년에 들어와서는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강도 높은 충정훈련을 계속 받았다고 기술 하고 있다. 22)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공세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시위가 폭동에 해당될 경우에 적용되는 작전 개념 이었다. 23) 신군부는 강력한 충정훈련을 계엄 확대조치 직전 인 5월 15일과 16일까지도 전국의 충정부대에서 실시하는 한편, 군을 투입하여 시위와 소요를 진압하는 충정작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24) 신군부는 대학가의 개학을 앞둔 3월 4일부터 사흘간 충정작전의 실효성을 검토하고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CPX 및 FTX훈련을 실시하고, 이어서 3월 6일 1980년도의 제 1차 충정회의를 소집했다. 25) 다 음은 이 회의에 제출된 충정작전의 개요와 충정부대장들이 내린 회의의 결론이다. 충정작전의 개요 26) 구분 소요 폭동 학생및 사회집단이 희사를 비정적인 방 다중이 집단이 사회 법질서를 파괴할 정의 법으로 표현 (법질서를 위협) 목적으로 폭도화 (법질서를 파괴) 21)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 다큐멘터리 1980, 1990, 98쪽. 22)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 378-379쪽. 23) 박만규,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과 미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제3권 1호, 2003, 214쪽. 24) 자세한 것은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를 참조할 것. 25) 정상용 외, 앞의 책, 101쪽. 26) 충정부대장 회의록,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 다큐멘터리 1980, 101쪽에서 재인용.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21
진압책임 경찰 군, 경찰 작전성격 수세적 저지 공세적 진압 작전목표 장비 확산방지, 자진해산 (이해설득, 봉쇄 저지) 자기보호 우선 (방석모, 방석복, 방패 등) 돌격, 와해, 재집결 불허 (분쇄, 주모자 체포) 경무장 : 기동에 유리 기본화기 회대활동(진압봉 휴대 : 와해 후 체포시 필요 충정부대장 회의 결론 27) 가) 개강후 부분적인 저항운동은 예상되나 대규모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핵심요원은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배경 등에서 부정적 요소에만 집착된 이상주의 적 맹목저항 세력임 나)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의 선도와 보호조치는 요망되나 문제 학생, 교수는 강경대 책으로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요망됨 다)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요망됨. 공수부대가 장기간에 걸쳐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첫 째, 충정훈련에서 가상적 은 폭도 들이다. 훈련의 강도가 높다는 것은 단지 훈련이 고 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휘관들이 보기에 진압의 강도가 약하다거나 폭도들 에게 밀린다거나 하면 가혹한 얼차려가 따르기 마련이고,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달간 반복되다 보면 폭도에 대한 적대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기 마련이다. 둘째, 공수부대 내에서는 공수부대가 부마사태 를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28) 11공수 출신의 한 병사는 1980년 5월 출동을 앞두고 부마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으로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 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 하였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정신교육을 받았 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였다고 회고했다. 29) 공수부대를 취재한 27) 위와 같음. 28) 윤재걸. 1988. 작전명령-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4쪽 12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조갑제도 특전사에선 부마사태의 진압을 성공적으로 평가했고 이런 자신감이 광주사 태에서 강경진압으로 나서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면서 광주항쟁 진압 당시에 3여 단 장병들은 우리는 부마사태를 진압했던 부대다 라고 시민들에 게 겁을 주기도 했다 고 서술했다. 30) 오랜 충정훈련에 지친 공수부대 장병들의 분위기도 부마항쟁 진압당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살벌했지만, 지휘관들은 이런 병사들을 자제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경 과잉진압을 부추겼다. 광주항쟁의 진압에 참가했던 한 공수대원은 부대가 진압을 마치 고 주둔지인 조선대 연병장으로 돌아왔을 때, 중대장이 화를 내며 병력을 집합시키더 니 구타를 강력하게 하지 않는다고 더 강하게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라 고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31) 문제는 지휘관의 이런 지시가 지휘관 개인의 이상성격이나 돌출행동에 의 한 것이 아니라 군의 공식 지휘체계 - 이미 신군부에 의해 장악 된 - 를 통해 거듭 하 달 된 방침이었다는 점이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상부의 지시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 진압을 부채질했다 면서 군 상층부가 어떤 식 으로 강경한 방침을 연속해서 하달했는지를 생생히 밝히고 있다. 계엄사 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총장 황영시는 전남대학교 소요에 단호한 계엄사의 조치를 보여주기 위하여 보안사 계통에서 전교사령관에게 지휘 조언, 강력하게 다루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망 했으며, 2군사령관은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 하여 주모자 체포 하고 단호한 조치 를 취하고,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 격하여 타격 및 체포 할 것을 거듭 지시했다. 32) 2군사령관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이 본격화 된 5월 20일에 가서는 계엄군의 이성적 행동 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 마 계엄군의 과격한 행위가 있었음을 인정 했지만, 동시에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이적 행위 로 규정했다. 광주항쟁의 소문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자,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5 29) http://cafe.daum.net/kookhmoon/hzds/44852?docid=19oer HZds 44852 20080518055039&q= %BA%CE%B8%B6+%B0%F8%BC%F6%BA%CE%B4%EB&srchid=CCB19Oer HZds 44852 20080518055 039 30) 조갑제닷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31) 윤재걸, 1988, 앞의 글, 38-41쪽. 32)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 379-380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23
월 21일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불순분자 나 고첩 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는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 으 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 쳤다. 여기에다 현장에 유포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원들이 불순분자 의 소행으로 확신 케 했으며,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격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라고 결론지었다. 33)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광주에서 행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미국 의 책임문제가 제기되자, 부마사태 때 공수부대의 행동으로 보아 우리는 광주에서 그 토록 잔혹한 만행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한국군의 행동범위에서 트게 벗어난 것이었다. 사실 광주에서의 첫 보고는 너무 무시 무시한 것이어서 그 같은 잔학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정도였다 라고 말했다. 34) 그러나 미국정부는 공수부대가 부마항쟁을 어떠한 방식으로 진압하였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충정훈련을 강화하자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 다. 출처가 삭제된 국방정보국의 한 전문은 79년 10월 부마사태 당시 특전사 장교와 사병들은 대갈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자세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라고 쓰고 있다. 미국 은 더 나아가 공수부대가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발포할 수도 있으며 그럴 때 파급될 수 있는 문제까지 검토 하기도 하였으며, 광주에서 상황이 벌어진 뒤에는 특전부대의 진압방법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판단 했다. 35) 요컨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와 똑같은 부대였 지만, 박정희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12 12 군사반란 당시의 결정적 역할을 경험했다. 1980년에 접어들어서는 강도 높은 충정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현장에 투입된 뒤에 는 일선 지휘관과 군 상층부 모두로부터 강경진압을 요구받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지휘 33) 같은 책, 381-382쪽. 34) 이삼성, 광주학살, 미국 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역사비평 계간 34호, 1996 가을호, 135쪽; 항쟁일지 로 본 5 18과 미국, 5.18 구속부상자회 광주시지부 카페 게시글. 35) 박만규, 앞의 글, 213, 220, 235쪽. 12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관과 군 상층부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불순분자 와 고첩 의 선동에 의해 폭도 로 돌변 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충분한 동인을 갖고 있었다. 반면, 조갑제는 부 마사태에서 공수부대가 한 역할은 과장된 면이 많다 고 주장했다. 부산에 투입된 공수 3여단은 10월 18일 저녁 8시 쯤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3백 명의 시위대와 딱 한 번 부딪혀 순식간에 이들을 박살내 버렸다 는 것이다. 그 뒤로 공수부대가 한 일은 시위 진압이 아니라 주로 행인들의 구타 였다고 한다. 36) 부산에서도 공수부대는 무자비했지 만, 폭력의 강도는 광주 때에 비하면 임계점을 넘을 만한 강도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군부는 공수부대가 부마항쟁을 성공적 으로 진압했으며, 시위 발발 초기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력하게 진압했으면 시위가 확산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교 훈 을 얻었다. 신군부와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진압의 성과 에 도취되어 광주에서는 시 위가 발발하자마자 보다 강력하게 진압에 나섰다. 결과는 신군부의 예상과는 반대였 다.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이 대학생과 일부 시민들의 소규모 시위를 거대한 민중항쟁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시민들의 반응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이 광주항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저항 주체가 이 폭력을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했는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 은 부마항쟁과 12 12 사건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크게 변화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 다. 이런 상식은 많은 경우 지켜지지만, 때로는 처절하게 배반당한다. 한국전쟁 전후 광범위하게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서 국군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제주 4 3 사건 당시에 김익렬 연대장이 이끄는 군이 보인 태도는 서북청년단같은 우익단체나 친 일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경찰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군에 대한 긍 정적인 이미지는 4월혁명 당시 계엄군이 시위군중에게 보인 평화적인 태도 때문에 널 36) 조갑제닷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25
리 퍼지게 되었다. 아이들이 탱크위에 올라타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만큼 민과 군의 친화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전 국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부산과 마산 의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출현은 군에 대한 기존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마구 두들겨 패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광주에서 훨씬 더 심하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시민들은 경상도 군 인이 와서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린다 는 말을 만들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이 렇게라도 설명하려고 했다.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산과 마산에서도 전라도 군인이 와서 경상도 사람 다 죽인다 라는 말이 일부에서 떠돌았다고 한다. 37) 12 12군사반란 을 거치면서 군의 이미지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실추되었다. 육군참모총 장과 특전사령관이 부하들에게 끌려가고,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등 어제까 지 동료였던 반란군이 쏜 총에 목숨을 잃었고,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은 반란 군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군의 공식 지위체계가 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함으로써 한국군은 자기들끼리 총질하는 그런 군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근식은 부마항쟁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부마에서는 왜 광 주항쟁처럼 공수부대에 대한 전시민들의 저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시위가 수그러들었 는가라는 의문 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이 의문에 답하지 않고 인권을 유린하는 동 물적 국가폭력은 때때로 공포를 통한 침묵을 낳고, 때때로 강력한 저항을 낳는데, 이 런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인은 여전히 모호하다 라고 서술했다. 38) 그로부터 10년이 흘 렀지만, 아직 이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언제 대중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 것인가 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후적으로라도 설명하기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문을 피해갈 수는 없다. 부마항쟁이나 5 18민주항쟁을 다룬 연구는 한 결 같이 지역의 운동전통을 강조하 고 있다. 그러나 마산에서 1960년 3 15의거의 기억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 이외에 부 산과 광주에서 지난 시기의 운동의 기억이나 전통이 항쟁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는 37) 조갑제, 유고2, 65쪽. 38) 정근식, 2000, 부마항쟁과 79-80 레짐, 지역사회학 2호, 한울, 267-268쪽. 12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항쟁 발발 이전 각 지역의 반유신민주화운동의 역량이 항쟁을 일으키는데 작용했다는 근거도 보이지 않는다. 39) 주대환은 10 18항쟁은 자연발생적 인 대중봉기였다고 본다. (...) 지역적으로 경인지방 중심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일부 민 주인사 학생들 중심이었던 70년대 민주화 투쟁과 부마항쟁은 직접적 관련은 없다. 자 꾸 그 연장선상에서 보려고 하면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김영삼의 제명이 직접 계기 가 되었다 라고 평가했다. 40) 부산의 경우 지역의 중심적인 대학인 부산대학교와 동아 대학교에서는 1974년 이래 한 번도 학내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부마항쟁에 적극 참 가한 부산대 학생들은 유신대학 이라는 오명을 부끄러워했고, 이화여대 등에서 남자의 성기와 가위를 그린 편지가 왔다는 근거 없는 풍문이 떠돌았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41) 광주의 경우,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 를 발표하였다 가 전원 해직되고 두 명이 구속이 되는 등 크고 작은 민주화운동이 부산에 비해서는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이 운동이 광주항쟁 발발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부마항쟁이나 5 18 민주항쟁에서 기존의 운동진영은 그야말로 대중 속 에서 1/n로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의 경우 항쟁이 부산과 마산에 비해 장기간 지속되고 잠시나마 해방공간 이 열림에 따라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쟁의 발발 자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부산과 마산, 그리고 광주에서 보다 중요했던 것은 시민들의 참여였다. 참여한 시민 들의 의식을 놓고 본다면 부산과 마산에 비해 광주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고 이야 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신체제의 동요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특히 유신체제 하에서 오랜 기간 핍박받았던 김대중이 공개적 인 정치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광주시민들을 포함한 호남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매우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 당시의 부산과 마 39) 송기인 신부는 부마항쟁은 우발적으로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부산지역 재야의 오랜 뿌리들이 버텨 서 예견되고 철저히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인 것이 아 닌 축적된 힘의 표출이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 전국 최초로 유신에 대한 대중적 항거가 일어 날 수 있었다는 것은 시민의식의 결집으로 표현 된 민주역량은 상당하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라 고 말했지만, 그 근거는 대단히 모호하다. 자료집, 143-144쪽 40) 자료집, 213쪽. 41) 자료집, 87, 89, 107, 120, 134, 147쪽의 증언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27
산 시민들의 정치의식에 비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일정하게 앞서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광주 시민들이 부마항쟁의 결과 열리게 된 새로운 정치 환경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까지의 기간 은 한국 현대사에서 해방직후의 3년, 4월혁명 직후의 1년과 더불어 드물게 찾아온 열 린 공간이었다. 그 7개월은 유신체제를 지탱해온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옥문이 열리고, 말의 자유가 회복되고, 학생회가 조직되고, 변화의 기대감을 가슴에 품게 된 그런 기 간이었다. 공수부대의 무지막지한 진압을 접했을 때의 상황도 부산과 마산의 경우와 광주의 경우가 일정하게 달랐다. 부산과 마산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단히 격렬한 시위 를 겪은 뒤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파출소의 파괴와 방화, 세무서 습격, 공화당사 습격, 언론사 습격 등은 시민들의 분노가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었지만, 이런 격렬한 행동을 감행한 시민들도 이런 행동이 실정법 위반이며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행동은 시민들의 예상치를 뛰어넘 는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탄압은 올 것이 온 것일 뿐이었다. 반면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폭력진압은 참으로 느닷없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시민들은 먼저 파출소를 파괴하지도 않았고, 세무서를 습격하지도 않았고, 언론사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고, 단 지 구호를 조금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진압에서 시위의 발생 초기에 강력 히 진압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 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광주에서의 공수부대의 폭력은 부산과 마산에서보다 훨씬 강 도 높은 것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유신체제하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격렬한 시위를 통해 그동안의 불만을 한껏 분출하였던 부산과 마산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강력한 진압 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자신들이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박정희가 죽은 뒤 7개월 동안 민주화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키워온 광주시민 들은 아직 자신들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처음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을 때, 광주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쳤다. 비무장의 시민이 잘 훈련되고 악에 바치고 12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무장한 공수부대와 일 대 일로 맞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수부 대의 강경진압이 반복되다 보니 도망가던 시민들도 공수부대의 약점을 보게 된 것이 다. 시위 가담자를 끝까지 추격해 검거하거나, 무자비하게 가격하는 공수부대의 진압 방식은 추격하던 공수부대원들을 개별화시키고 고립시켰다. 분노한 시민들은 결코 혼 자가 아니었다. 5월 18일과 19일 오후까지는 시민들이 공수부대에 일방적으로 쫓겼다 면, 5월 19일 저녁부터는 몽둥이를 들고 바리게이트를 쌓으며 공수부대에 맞서기 시작 했다. 시위의 싹을 초기에 자르려던 신군부의 강경진압이 도를 넘어서게 되자, 시민들 의 강력한 반발이라는 예기치 않은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데모학 생이 맞아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노승일 등 2명이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린 혐 의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시신을 보지 못하였다. 시신이 주는 효과는 컸다. 마 산 3 15의거 당시에도 경찰의 발포로 20여 명이 숨졌다. 그러나 경찰의 발포나 20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시위의 확산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4 19혁명을 직접 적으로 촉발시킨 마산의 2차 의거는 3월 8일 행방불명된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 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4월 11일에 일어났다. 부산의 경우 공수부대의 폭력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 당국이 무료 치료를 결정 42) 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공수부대가 시내 도처에서 폭력을 행사한 광주의 경우 부상자에 대한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특전사가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총 괄) 이라는 문건은 소요진압간 발생 부상자 후송 대책 결여로 장기간 노상방치로 군 중 자극 했다고 분석했다. 43) 계엄군은 5월 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처음으로 발포를 감 행했지만, 시위대를 막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 때 현장에서 희생된 시민 두 명 의 시신이 발견됐다. 시민들은 군용 지프차 뒤에 손수레를 연결해서 그 위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를 덮어 시내로 천천히 지나갔다. 태극기 아래로 피 묻은 맨발이 보 였다고 한다. 44) 시민들은 5월 18일 시작된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여러 명이 희생되었다 고 믿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정부는 단 한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 42) 조갑제, 유고2, 65쪽. 43) 특전사,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총괄), 1980.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 390쪽에서 재인용. 44)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5, 풀빛, 106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29
변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도청에서 공수부대의 대대적인 발포 가 자행된 운명의 5월 21일 오후 1시를 몇 시간 앞 둔 때의 일이었다. 민중운동사 또는 민주화운동사로서의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의 연구에서 뜨거운 감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당시에 처한 상 황이 사건 촉발의 계기로서 얼마만큼 작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처음 시위를 촉발한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김영삼이라는 변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예 컨대 부산대 10 15유인물 사건의 이진걸은 당시 김영삼 씨의 의원직 제명문제에 깊 은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 라고 증언했으며, 당시 경남대생이던 정성기 교수도 김 총재 제명 사건은 계기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45) 이런 입장은 대체로 항쟁 첫날은 10쯤 광복동지역 시위군중 속에서 김영삼!..., 김영삼!... 하고 연호가 터 져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이 위해 데모하 나 라는 즉각적인 반발이 튀어나왔다 라는 서술을 그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 면서도 이 자료는 10월 18일의 남포동지역 시위에서 김영삼제명 철회! 의 구호가 비 교적 많이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46) 당시 엠네스티 부산지부 간사로 활 동했던 허진수는 10월 18일 시위에서는 김영삼 제명 철회! 라는 구호가 다른 때보다 도 상대적으로 많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47) 당시 나름대로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민중적 시각을 갖고자 했던 학생운동의 주역들 이 김영삼의 제명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학생 시위가 일반시민들의 대규모 참여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이라는 변수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현대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민중 봉기인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이 각각 김영삼의 제명과 김대중의 구속이라는 계기 를 갖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 된다. 1987년의 6월항쟁이 폭발적인 대중 참여를 보일 수 있었던 것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 적극적으로 항쟁에 참여하였다는 45) 자료집, 89, 91쪽. 46) 자료집, 275쪽. 47) 자료집, 141쪽. 13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사실을 떠나서 설명할 수 없다. 부마항쟁과 5 18 민주항쟁을 비교하면서 박철규가 던 진 질문, 항쟁이 증폭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부마항쟁의 경 우 김영삼의 제명, 5 18민중항쟁의 경우 김대중의 구속과 학살을 강조하여 설명하면 민중항쟁이 폄하되는 것일까? 만약 김영삼 제명과 김대중의 구속이라는 정치적 압살 행위가 없었더라면 이 두 항쟁의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 다. 48)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변수가 양대 민중항쟁의 촉발에서 갖는 위치를 우리 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두 항쟁이 발발하고 한 세대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지역주의의 저주받은 유산을 떨쳐내기 못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해 진다. 5. 맺음말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지역주의의 영향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때로 부마항쟁과 광 주항쟁이 서로 경합하는 난감한 모습을 경험하곤 했다. 이제 한 세대가 흐른 상황에서 우리는 두 항쟁의 차이뿐만 아니라 두 항쟁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 아야 한다. 두 항쟁을 별개의 또는 서로 대립하거나 경합하는 사건사로 인식하게 만드 는 지역감정이라는 우리 눈에 낀 콩깍지를 벗어야 한다.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광주 5 18민주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부마항쟁과 광주항 쟁은 광주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 러나 이 차이가 두 사건 사이의 운명적인 연결을 가려서는 안 된다. 광주학살은 어쩌 면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졌을지 모를 학살이 김재규의 박정희의 사살이라는 변수 때문 에 시간을 미루고 공간을 바꿔 일어난 것이다. 또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은 한국현 대사에서 하나의 전환기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결절점이기에 정근식이 지적했던 것처 럼 크게 보아 하나의 국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마항쟁은 철옹성 같아 보이던 유신체제의 약점을 강타하였고, 그 결과 유신체제는 머리를 잃고 비틀거리게 되었다. 48) 박철규, 5 18민중항쟁과 부마항쟁, 학술단체협의회 편, 5 18은 끝났는가, 풀빛, 182~183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31
흔히 서울의 봄 이라는 매우 중앙에만 편중된 명칭으로 불리는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 제의 부활이냐, 민주화냐의 기로에 섰던 과도기는 광주에서의 거룩한 패배로 마무리되 었다. 많은 사람들은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을 미완의 항쟁이라 부른다. 3 1운동도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으니 미완이요, 8 15해방도 외세의 개입과 분단으로 이어졌으니 미완이요, 4월혁명도 미완이요, 부마항쟁과 5 18민주항쟁도 미완이요, 6월항쟁도 다 미완의 투쟁이다. 역사란 어차피 만들어가는 것이고, 진행형이기 때문에 어쩌면 역사 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한 세대가 흐른 상황에서 돌이켜볼 때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여전히 미완의 영역에 묶어두어야 할까? 패배의 책임이 어 찌 부산시민과 광주시민에게만 지워져야하는가? 특히 부마항쟁을 미완의 항쟁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크다. 아무도 5년 동안 단 한 번도 꽥 소리 지르지 못했던 부산의 학생운동이 그런 거대한 항쟁을 낳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부마항쟁은 10 26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유신정권의 종식이 최종적으로 권력 내 부의 암투로 인한 최고권력자의 제거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더 큰 항쟁과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 했고, 10 26에서 보여지는 최고권력자의 비극적 죽음 은 부마항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한 것이었지만 49) 부마항쟁은 누구 도 예상하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부마항쟁을 미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역량을 비현실적으로 과대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 마항쟁과 5 18민주항쟁의 발발에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김대중의 구속이 결정적 인 요인으로 작용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태도이다. 분단 과 한국전쟁의 학살과 질식할 것 같은 반공주의가 한국 정치에 가했던 제약과 아울러 민중들의 역량이 철저히 파괴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떠올린다면 대중들이 자기 지역이 배출한 유력한 정치인의 운명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 이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겪고 한 세대가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그 제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9) 정근식, 앞의 글, 279, 281쪽. 13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광주의 투사들이 당시 인식하지는 못했겠지만 -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성과였기에 - 광주항쟁은 부마항쟁이 거둔 성과위에서 시작된 항쟁이었다. 부마항쟁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광주가 한국의 민주화운 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들의 거룩한 패배와 장엄한 좌절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라는 새로운 DNA를 동시 대인들의 가슴 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50) 부마항쟁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경험은 발생 하지 않았다. 정근식은 해방광주 와 생존과 진실 사이에서 미래를 향해 기꺼이 자기 희생을 선택하는 역사적 결단과 그 과정에서의 고뇌 경험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또 공감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부마와 광주의 경험 사이에 정치적 지역주의가 끼어들 여 지를 남겨두었음을 의미한다 라고 지적했다. 51) 광주의 죽음은 부산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열사들을 낳았다. 부마항쟁은 광주항쟁을 낳았고 광주는 6월항쟁을 낳았다. 이제 부마와 광주의 성과였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두 항쟁의 30주년 기념일을 맞게 된다. 이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은 부 마항쟁과 광주항쟁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50)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미발표 원고 죽음의 자각 - 5 18민중항쟁 시기 죽음과의 대면이 민주화운 동에 미친 영향 을 참고할 것. 51) 정근식, 앞의 글, 282쪽.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33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토론문 조정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발제자의 견해에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특히 부마와 광주의 항쟁 전개과정 상의 차이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분석을 제시한 것은 이 글의 큰 성과라고 봅니다. 큰 흐름 에서 한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부마항쟁은 광주항쟁을 낳았고 광주는 6월항쟁을 낳았 다 는 선언에 전적으로 동참합니다! 1. 다만 다소의 이견(혹은 저의 오해?)이 있는 한 가지 점에 대하여 제 의견을 제시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부마항쟁이 만들어낸 직접적인 역사적 결과 혹은 영향에 관한 것입니다. 한교수님과 동일하게 저는 부마항쟁이 10.26과 유신체제 붕괴의 직접적인 배경요인이었고 봅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갑작스런 유신붕괴 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체제 정통성이 낮아진 유사민간화된 군부권 위주의정권 내부의 파벌적 약한 고리를 부마항쟁의 충격이 끊어내어 나타난 현상 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한홍구교수님의 분석과 같이 권위 주의체제의 종말이었지만 상당히 불확실한 결과를 초래하는 종말이었습니다. 특히 유신정권이 유사민간화된 군부권위주의정권 으로써 최고지도자에 대한 대안이 존 재하지 않고 군부내의 파벌들의 정치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었 기 때문에 10.26에서처럼 최고지도자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오히려 훨씬 더 독재 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가능성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유 신의 붕괴가 부마민주항쟁 이라는 민란을 통하여 자극받은 정권 내부의 파벌갈 등의 소산이었기 때문에 10.26이후의 상황에서 보수적인 성격의 과도정부를 운영 했던 유신의 엘리트들도 한국민들의 민주화로의 강한 열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을 붕괴시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35
킨 충격을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교수님의 견해와는 달리 저는 유신이후 과 도기에서 서울의 봄으로의 진행경로를 확정시킨 역할을 하였다고 봅니다. 최규하를 비롯한 과도정부 각료들은 정치력을 지녔다기보다는 단지 기술관료 (technocrat)로서 군부권위주의정권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었고, 유신 말기에 이미 무척 무력화되어있던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과의 긴밀한 유대감도 별로 갖고 있지 않았습니 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높은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박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바로 민주화를 앞으로의 정부 운영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서둘러 나갈 것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없었습니다. 실제 로 그들은 대통령권한대행이던 최규하가 이미 사회적 저항이 충분히 표현된 바 있는 유신헌법에 의하여 정식 대통령으로 먼저 선출되고 그가 그러한 정통성(과거로부터의 법적 정통성: backward legitimacy)을 토대로 점진적인 민주이행의 스케줄을 이행하는 내용으로 정국운영의 틀을 짜서 발표하는 보수성을 보입니다.(Di Palma 1990)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이 1979년의 과도정부가 민주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유신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권위주의 통치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경우는 일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은 10.26 직전 발생했던 부마항쟁이 원인이 되어 유신의 엘리트 일반도 민 중의 강력한 민주화로의 열망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 신말기에서의 민심을 요약해 본다면 한국민 상당수가 속으로는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 었지만 그렇게 쉽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저 는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향한 항쟁이 벌어지고 그리고 그 결과가 곧바로 유신정권의 붕괴로 나타나니, 한국민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있던 중이었다고 봅니다. 당시의 과도정부 엘리트들도 이러한 민심을 읽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1980년 3-5월, 특히 5월에 학생가두시위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던 중산층 시민들의 불안해하던 민심과 1979년 10-12월경의 유신 체제 붕괴국면에서의 유신체제 혐오와 막연한 민주화에의 열망의 민심을 그냥 같은 걸 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유고된 후 두주 만인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 를 발표하고 유신헌법에 의하여 그 절차에 따라 조속히 새로 대통령을 13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선출하기로 하고 그 대통령은 유신헌법상의 잔여임기(약 5년)를 다 채우지 않고 현실 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그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한다는 입 장을 천명했습니다. 이 담화는 내용상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어찌되었건 박대 통령의 장례이후 과도기에 대한 첫 방향설정이라는 점에서 민주화에 대한 중요한 약속 이었습니다. 따라서 12.12쿠데타를 통하여 전두환이 마침내 군부의 최고지도자였던 정 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군내의 모든 권력, 그리고 과도정부 운영에 관해서도 통제력을 장악하였음에도 이러한 기존의 결정과 약속을 쉽게 뒤집기는 어려웠다고 봅 니다. 결국 유신의 적자였던 전두환이 군부를 총 장악하고 있음에도 1980년 봄에는 민 주화 담론이 자유롭게 흘러넘치고, 신군부는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 일에 부마항쟁이 없이 10.26이 있었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유신체제의 제도적 동학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도 독재에 순종적인 관료들과 어떤 군부 파벌간에 새로운 권위주의 를 출범시켰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979년 10월 26일의 박정 희 죽음이후 과도정부가 서울의 봄 이라는 해빙기를 갖도록 된 데에는 어디까지나 부 마항쟁의 경험이 만들어낸 성과가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봅 니다. 또 그런 한에서 부마항쟁은 광주항쟁을 낳았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 다. 2. 한교수님의 글에서 간헐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광주와 부마의 항쟁 기억 에 관한 경쟁 혹은 차이 에 대해서 제가 작년에 마산에서 발표했던 글의 한 부분을 통하 여 나름 설명을 시도해 본 바가 있는 데, 이를 여기서 다시 제시함으로써 토론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문제는 부마항쟁이 한국민주화의 역사속에서 왜 충분히 기억되고 있지 못하는가, 즉 왜 잊혀진 항쟁 이 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바라볼 때 분석가 들은 자연적으로 늘 부마항쟁의 경우와 그 바로 7개월 뒤에 있었던 광주항쟁에 관한 기억 및 기념의 경우를 대비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객관적 조건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좀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객 관적 조건을 먼저 따져보자면, 기억의 측면에서 부마와 광주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37
은 무엇보다도 그 두 사건의 역사적 순서 때문입니다. 1980년 5월을 강타한 서울의 봄 과 광주 항쟁의 뒤물결이 앞에서 그것들이 나오게끔 역할한 부마항쟁을 밀어 내면 서 부마항쟁이 그 속에 휩쓸려 버린 모양새입니다. 또 부마항쟁에 비하여 광주항쟁이 그 규모나 기간 및 역사적 파장 측면에서 훨씬 더 큰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셋째 부마항쟁의 적 은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였는바 1979년을 끝으로 적 어도 표면상으로는 종료한 것이어서 1980년대에 기억을 위하여 더 이상 싸울 것이 없 었던 데에 반하여, 광주항쟁의 적 은 신군부 및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체제로서 1987년 민주화시점에 - 즉 민주화의 기억, 그리고 기억투쟁이 시작되는 시점에 - 현존 하는 권력이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결정적인 민주화과정에서, 특히 1987-90년 사이의 기간에 과거청산에 관한 주요한 담론의 중심에는 광주 가 있었고 부마 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유신의 시대를 반추 하는 과정은 대두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합니다. 유신에 대한 기억이 무대의 중심에 서 려고 했다면, 그 시기는 1980년 서울의 봄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서울의 봄에 서는 유신을 반성하고 진정한 민주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저조하였고, 또 신군부의 권력탈취로 서울의 봄은 너무나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마항쟁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역사적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체적 조건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항쟁 직후, 즉 1980년대 초반에 부마 의 민주화운동 주체들이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해나갈 수 있었던 상황 및 환경이 부재했음이 중요합니다. 광주항쟁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5월 광주를 재현해 하고자 하는 운동은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투쟁의 중심 에서 의례적으로 계속 작동하였습니다. 가장 폭압이 심했던 1980년대 초반에도 5월 광 주는 연례적으로 일깨워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마항쟁을 그대로 이어가 싸워야했 을 당사자 일반은 그러한 운동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고, 또 거기에 강조점을 두는 것 은 위 객관적 조건 세 번째에서 언급한 환경하에서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열리자마자 부산 운동권을 강타했던 부림사건, 이어서 1980년대 반미자주 운동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부산 미문화방화사건의 여파는 지역으로써의 부산 운동권이 감내해 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광주에서와 13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는 달리 주요한 동원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하는데 실패했다. 둘째로 광주의 경우와는 달리 부마에서는 항쟁의 기간이 짧고 첫 발화자였던 운동 권의 조직역량이 충분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기억될 수 있는 항쟁 주체가, 그리고 항 쟁의 기억을 추구하는 주체가 분명히 형성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광주의 경 우에는 1980년 5월 21일의 일제사격이후 계엄군이 광주를 두고 물러나 포위함으로써 광주 시내에서는 시민에 의한 해방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시기가 존재하였고, 세 단 계에 걸쳐 수습위원회 라는 나름의 지도부가 도청에서 형성되어 지식인, 학생, 시민, 기층 민중 등이 어우러질 수 있는 기회구조가 있었습니다. 이 기회구조 하에서 광주는 최초에 학생 및 지식인 그리고 엘리트층으로부터 나중에는 학생 및 기층 민중으로의 지도부 이양이 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쟁중에서나 항쟁이후에나 간에 어떠한 세력 이 항쟁을 이끌었는지에 관한 인식 및 항쟁의 민중 항쟁으로서의 성격은 누구에게나 분명히 노정되었습니다. 따라서 항쟁이후에는 이 지도부를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의 민 중운동으로서의 분명한 성격을 가진 기억투쟁이 전개되었으며, 이는 1980년대 민주민 중민족운동의 하나로서 즉시 자리매김될 수 있었으며 그 운동의 진행을 통하여 항쟁을 기어코 기억해내고자 하는 광주지역공동체 내부의 일정한 합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러나 부마항쟁의 경우에는 그 시간적 공간적 한계 및 자연발생적 성격 때문에 항쟁의 지도부가 분명히 형성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지역공동체 안에서도 이에 대한 합의된 인식을 끌어내기가 어렵기도 하였습니다. 셋째로 1985년 2.12총선을 통하여 정치적 야당이 부활하였을 때 이후로 부마지역의 민주화운동은 다시금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동원에 매몰되었으며 1987-8년의 대통령의 선거 및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부마항쟁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 려는 특별하고 전국적인 문제제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부산 마산 지역의 민주화 에 대한 일반적 열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부족하거나 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보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에 비교해볼 때, 이들 지역공동체가 부마항쟁의 정당성과 그것의 기념 필요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높은 합의를 유지해왔는지에 대해서 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광주의 경우에는 한편으로 박정희이래 지역편중 발전의 피 해자라는 광범한 의식과 다른 한편으로는 1987-88년의 선거를 통하여 확고하게 대두된 놀라운 붕괴, 거룩한 좌절 139
지역주의 열풍의 여파 등이 엘리트층부터 기층 민중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80년 5월 광주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에 대하여 합의되어있었지만, 부마의 경우는 확연히 달랐다 고 봅니다. 특히 마치 광주에서의 봉기에서 불려졌던 김대중처럼 부마항쟁의 직접적 촉발계기이며 지역의 정치적 아이콘이었던 김영삼의 역할이 중요한데, 김영삼은 부마 항쟁의 기억의 부활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의 한 설 명요인은 1990년 1월에 김영삼이 결행한 3당합당과 그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부마지역의 아들 인 김영삼이 신군부세력의 몸통인 민주정의당 및 노태우대통 령과 합당한 사건은 부마항쟁이 지역을 대표하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재정립되고, 전국 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결정적인 한계를 노정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4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발제 4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차 례 1. 민주화운동의 지역성 1) 마산의 민주화 운동 2) 민주화 운동의 지역 전염성 2. 개념과 이론적 틀 1) 지역과 중앙 2) 약한 고리는 쉽게 부서진다 3. 조직 밀도와 새로운 사상의 유입 1) 1946년 2) 1960년 4. 도덕공동체의 형성 1) 생활공간 2) 전통적 사회관계 3) 변방성 5. 국가의 통치능력 1) 1946년 2) 1960년 3) 1979년 6. 저항의 역사적 상징과 전통 7. 토론
14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이 글은 부마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부마항쟁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의 내용에서는 주체세력에 대한 것, 그리고 부마항쟁의 전반적인 역사흐름 속에서의 평가는 다른 발 제에 맡기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주로 지역과 지역을 포괄하는 광역의 지역사이에 발 생하는 운동의 맥락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따라서 글의 순서도 지역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하면서 필자가 연구한 3.15의거와 10.18 마산민주항쟁을 중심으로 마산의 민주화 운동을 개괄하고, 아울러 민주화 운동의 지역적 전이성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왜냐하면, 지역 간 전이성과 그것의 경계를 이루는 곳은 공동체의 경계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단일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내 의 모든 영토에 거주하는 국민들이 동일한 통치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민 주화 추진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물론이고, 조 직의 밀도와 새로운 사상의 유입, 역사적 배경, 그리고 국가 통치 능력이 미치는 정도 에 있어서 매우 이질적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각 지역의 사람들은 국가의 탄압과 저항의 능력이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 고, 마산을 중심으로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분석하였다. 분석의 주된 틀은 지배와 저항 의 고리를 염두에 두고, 이 두 가지 고리가 충돌하고, 취약한 부분에서 폭발하게 되었 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따라서 두 번째 장인 논의를 전개시키기 위한 개념과 이 론 틀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약한 고리 논리를 확장하여 통치 의 고리와 저항의 고리라는 측면으로 나누어서 재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어서 3-6 장에서 부마 민주항쟁 당시에 민주화운동의 전이가 특정 범위에서 머무르게 되었는가 를 설명하기 위해서 교통과 소통구조, 사회관계적 맥락, 그리고 역사적 경험이나 상징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3
의 공유를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현재의 민주화 운동의 잠재적 능력과 가능성을 점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객관적인 상황에서 지역간 상호 의존성은 점차 높아지지만, 또 한 상대적으로 차별과 적대전략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지역간 연대의 가능성은 매우 유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각 지역의 민주화운동 능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소 통의 구조적 조건, 사회관계, 상징의 공유가 동시에 존재할 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1. 민주화운동의 지역성 부마민주항쟁은 이상과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 전개된 정치적, 경제적 모순구조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운동이지만, 체제의 강압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던 유신말기인 1979 년 10월의 시점에서 부산과 마산지역에서만 반유신 저항운동이 발발한 것은 국가적인 반 민주성과 반폭력성 이외에 지역적인 특수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경환, 2000: 9). 1) 마산의 민주화 운동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 3.15, 부마항쟁, 5.18항쟁 등 마산이라는 한 지역의 운동이 전국적 정세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고찰하면서, 지역의 역할을 재인식한다. 마산이라 는 도시는 한국의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만, 해방이후 급격한 사회변 화, 즉 인구 팽창 및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인간간 유대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가 뒤 따랐다. 이에 정치적 폭압, 기본적인 경제적인 생활의 곤란과 동시에 공동체적 해결의 어려움, 새로이 형성되는 공동체의 불확실성이 시기마다 중요한 사회유지를 위한 과제 로 떠올랐다. 이는 국가나 민족의 형성이라는 민족역사적인 과제와는 어찌 보면 다른 차원의 과제이었다. 물론 민족국가라는 것이 지역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에 지대한 영 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 서 국가의 폭압에 맞선 지역민들의 민중항쟁이 지역역사에서는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14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해방 후 마산에서는 1946년 10월, 1960년 3-4월, 1979년 10월, 1987년 6월 등 4차 례에 걸쳐 공권력 행사기관인 파출소가 시위 군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방화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물론 파출소의 파괴가 공권력 전체의 공백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 지만 적어도 공권력의 일부가 일정 시간동안 마비되었다는 점에서 민중들의 저항이 강 렬한 사건으로 기록할 수 있다. 4차례의 사건에서도 시청이 파괴된 적은 있어도, 경찰 서가 민중들에 의해 점령된 적은 없었기에 완전히 도시 전체가 국가기구의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셈이다. 4차례의 사건 중 시위군중이 국가기구의 총 격에 의해, 1946년에는 12명의 사망자, 1960년에는 15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1979년과 1987년에는 사망자까지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국가의 억압적인 폭력 에 의거하여 시위군중 속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4가지 사건은 마산에서 는 1946년에 5천여 명(당시 인구 6만여 명), 1960년에 3천-5천여 명(당시 16만여 명), 1979년 10월 16-17일시위에는 2천여 명(당시 인구 40여만명), 1987년 6월 26일에는 1 만여 명(당시 인구 45만여 명) 등이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으므로, 그 규모면에서는 대 규모 집합행동의 예로서 선정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하였다. 2) 민주화운동의 지역 전염성 각 지역은 홀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민족 국가 공동체에 대한 역사적 헌신에 의해 정치적 공동체(역사적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1960년 마산은 지역이면서도 전국적인 이슈가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이는 1960년 4월 혁명이 지역에서 시작하고 서울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최종적으로 서울에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에 아무도 지역에서 혁명의 도화선이 점화되리라고는 생각지 못 하였다. 마산의 특수성을 마산이 가진 일본에서 귀환동포들, 피난민의 정착이 무산자 이면서, 국가로부턴 받은 피해, 그리고 이를 인식할 정도의 교육 수준, 그리고 의거가 가능하게 된 이주한 무산자 층의 공동체 성을 지적한다. 1960년 4월 혁명은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를 시발로 해서 지역에서 서울로, 그리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5
고 서울에서 다시 지역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고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3-4 월 시위의 발생지와 시기를 분석한 이화수(1985: 149)는 혁명적 행동은 지방에서 시 작되어 서울로 번졌고, 4월 혁명은 시골에서 시작하여 서울로 확산되었다가 다시 시 골로 확산되고 서울에서 완성된 것 으로 결론 짓고 있다. 또는 1960년 4월 혁명자료를 편집한 책에서도 분노는 북으로 북으로 (학민사 편집실 편, 1983)라는 제목을 달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당시 1960년에 타오르는 데모의 흐름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한 점만은 분명하다. 부산의 10월 16-17일 사건이 마산에 전염된 경로: 2. 개념과 이론적 틀 1) 지역과 중앙 지역은 단순히 지역이라는 지리적인 공동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중앙과의 관계에서 주변적인, 그리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의 망 속에 위치한 지역이다. 특히 국민국가체 제에서는 폭력과 이데올로기의 유포를 통해 중앙은 지역을 지배와 동시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세금을 통한 자원동원과 차별적 배분을 통한 착취라 는 방식도 동원된다. 지방민 역시 중앙과 지역이라는 기준을 갖고 그들의 사고, 생활, 행동이 틀 지워 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상호준거화, 기대, 절망, 욕망, 분출, 용기 등이 중앙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 방민이 중앙에 대해 경험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약한 고리는 쉽게 부서 진다. 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경험인 10.18 마산 민주항쟁을 이해함으로써 지역 14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민의 사회적인 조건과 역사적인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계나 지역 의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역사에 대해 애써 무시해 왔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에서도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부마사태 라고 불리우는 부마 민주 항쟁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면서도,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드 물 것이다 (한국 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1762). 필자와 비슷한 과제를 수행한 정경환은 연구의 목적을 부마 민주항쟁을 한국 현대 정치사 전과정을 통괄하는 연속 적인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 (정경환, 2000: 2)이라고 하면서 도, 어떠한 차원에서 연구를 진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 어 있지 않은 상황 (정경환, 2000: 2)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평가하고 있다. 물론 당시 보다는 연구가 많이 축적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전체적인 맥락과 그 역사적 의미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경환은 1979년 부마항쟁을 분석하면서 봉기의 결정적 국면 을 강조하고 있다. 즉 민중에 대한 폭압적인 기구를 통해서 민주배제적인 통치행위를 자행하고 있던 유신정 권하의 공포상황에서 민중들의 과감한 저항운동의 발생은 광범위한 봉기의 결정적인 국면일 경우 민중의 폭발적인 역동성은 목적의 현실화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 으로 인식된다 (정경환, 2000: 14). 이러한 정경환의 지적하는 결정적 국면의 상황적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우리가 강하고 무너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을 언급하고자 한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필자는 이러한 정경환 의 결정적 국면 을 레닌이 러시아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개념인 약한 고리 의 개념을 통해서 유추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 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서구의 맑스주의자들에 대해서 러시아의 자본주의의 침투는 가히 폭력적이고 급진적이라고 주장한다. 제국주의 핵심국의 영향으로 노동자 들이 귀족화되어 가고 있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러시아가 봉건주의적으로 보이 나, 실은 더욱 자본주의적 착취에 시달리므로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한 개념이다. 한편으로 마산은 박정희정권의 통치하에서 가장 급 격한 자본주의적 공업 발전을 이룩한 지역이다. 박정희 정권은 마산과 창원 지역을 유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7
신의 수혜를 받은 지역으로 치부하고 항상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지역으로 자 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의 공업화는, 짧은 시간에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가 혹한 공장내 통제 상황 속에서도, 유랑하는 노동자들의 자유로움이 겹치면서, 한편으 로는 자유로운 사상과 만남의 교류가 확산되고 기존의 연고적 감시망을 벗어난 상황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의 일상적인 감시체제는 강화되어 있었지만, 전국적인 상황에서는 서울과 대도시에 집중적인 감시가 강화되어 오히려 마산과 창원과 같은 유 신의 수혜지역이라고 여겨지는 곳은 폭압적인 감시망이 약화된 상황도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 마산 민주항쟁에 대한 해석의 요체가 있다. 이미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홍장표와 정이근은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해석하 였다. 박정권이 강행하였던 중화학공업화의 모순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제의 노동집 약적 경공업화의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던 부산과 마산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제일 먼저 폭발하였던 것이다 (홍장표, 정이근, 2003: 133). 레닌의 자 본주의 축적체제의 약한 고리라는 측면과 홍장표와 정이근의 경제적인 모순의 심화에 따른 약한 고리가 같은 맥락이기는 하지만, 약한 고리와 강한 고리들, 이들 각각의 고 리들의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필자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고리에 더하여, 억압과 저항의 고리라는 측면을 더하여, 강한 자본주의 고리와 약한 억압과 저항의 고리를 대비하면서, 특히 억압이 저항을 이기지 못하는 고리가 발생하 여 폭발하였다고 하는 은유적인 설명을 분석적으로 시도하였다. 공간의 개념을 외부 지역과의 관계로서 상정한다면, 마산은 상대적으로 중앙국가기 구가 위치한 곳에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대외적인 변 방성은 심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억압 능력의 면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내적인 변방성에도 불구하고, 저항적 집합행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약한 고리 라는 표현에서 보여지듯이, 일상적 지배가 적나라 하게 행사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내부 식민지의 이론에서 설명되듯이, 중앙의 모순 이 지방으로 전가되면서 겪은 경제적 억압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14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것이 옳을 것이다. 약한 고리라는 표현은 한편으로 그 고리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 아울러 고리들의 상 호연결강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지배의 고리가 약하고, 다른 한편 저항 의 고리가 강한 곳에서 고리를 부서질 것이다. 지배의 고리라는 측면에서 국가 역량을 평가하고, 저항의 고리라는 측면에서 자원 동원( 조직, 공동체), 민주화운동의 해석틀( 지역의 역사, 조형물, 지역관련 정치인 해석), 일상적 생활의 공간적 구조화( 정체성 전승)를 차례로 살필 것이다. 3. 조직 밀도와 새로운 사상의 유입 1) 1946년 1946년 당시 창원군 지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극진적인 사상과 조직이 일찍이 발달한 지역으로 지적된다. 즉 인민위와 치안대의 조직이 면, 리 단위까지 조 직되었고, 1946년 10월 6-7일의 폭동시기에도 12명의 민간인이 죽고, 경찰도 죽고 많 은 이들이 다치고, 파출소의 상당수도 불탄다. 약 6천여 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였다 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인구를 6만 명 미만으로 친다면, 전체거주자의 10% 정 도, 아니 성인인구의 20-30% 정도가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성인 남성인구로 따진다면 거의 반수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마산의 10월 폭동 열기 는 죽은 이들 숫자만 따져본다는 진주와 같지만, 대구 폭동의 열기를 5일 후에 이어받 았다는 점에서 매우 가열찬 투쟁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마산, 창원, 진 해, 함안지역이 다른 경남 지역에 비해 급진적인 사상과 조직이 잘되어 있는 지역이었 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초보적이다.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도시화, 이에 따라 북한, 일본에서의 인구이동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 로 앞선 선진적인 사고방식과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정세를 파악하고 해독할 수 있는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49
능력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이들에게는 당시로서는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삶을 살아갔다는 점에서 극진적인 사회비판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에 나타난 많은 조직의 대표자나 임원의 명단이 나중에 연결되지 않는 점 을 보면 당시에 극진적인 조직에 가담한 이들은 이어지는 정치정세 속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방공간은 한마디로 일본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성하던 커다란 축이었던 대규모 지 주와 자본가계급이 사라지고, 그 대신 조선족 위주의 소규모 자산가와 소작인과 자유 노동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으로 급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해외에서 들어온 남한 전 체 인구의 10% 이상에 달하는 해외 귀환민들(만주와 일본)과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 들이 있다. 해외 귀환동포들 역시 홀몸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고, 이북의 피난민 역 시 그곳에서는 지주였을지 몰라도, 일단 남한에서는 무산자 계급으로 바뀐 사람들이 다. 이에 더하여 식민지 치하에서 대자산가 계급을 이루었던 일제에 대항하여 상당수 의 소규모 자산가 계층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이들 역시 해외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공장이나 군대나 조직에 서 일한 경험을 갖고 있고 국내인들보다는 세계적인 정세나 정보를 보다 보편적으로 갖고 있던 사람들이다. 2) 1960년 마산이라는 도시는 1960년 당시에는 교육과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 거주자들 의 세계관은 매우 근대화 되어 있었으나, 경제적인 상황은 어려움에 처한 지위불일치 의 상황, 아니면 높은 욕구와 낮은 현실적인 만족도를 보여주는 상황이었다고 해석된 다. 마산 지역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귀환동포들의 정착, 한국전쟁 당시 피 난민들이 정착한 점, 전통적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많아 새로운 사상인 사회주의 사상 15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이 쉽게 들어 왔었다는 점, 그러나 서울 정부의 입장에서는 지정학적으로 통치하기에 먼 거리에 있었다는 점 등이 양민학살의 피해자가 많았던 이유라고 지적된다. 국민보 도연맹원들 학살에 대한 원성은 그 무법성에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회주의와는 관계없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도 연맹희생자들은 대부분 직접 적인 사회주의적인 경력은 없으면서 당시에 교육을 많이 받은 귀환동포들이 많았던 것 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지식인 계층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 면 지식인을 배출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집안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양민학살 사건 진상 규명을 주도한 인사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보유한 인사들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마산은 항구의 도시인 만큼 갖가지 사상이 유입되어 혼합되어 있었고, 시장이 발달 하여 다른 지역과의 비교도 가능하고, 또한 근대적인 상인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해방 후와 한국전 당시에도 6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퇴각, 일본에서의 귀환동포들의 유입과 정주, 한국전 당시의 피난민들과 이들의 정착지가 바로 마산이었다. 따라서 마 산은 근현대사의 고민을 경험한 사람들이 제각기 정착하고 있는 도시였다. 이들은 사 회운동의 촉발자로서 작용하게 된다. 즉 헌신적인 참여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운동 에 논리와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언론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는 점, 즉 [마산신문]이 1946년에 등장한 후에 일간지로 계속 활동하고 전국 각 지역의 신문들의 지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로 귀환동포나 피난민중 상당수가 지식인층으로 비판적 지식인으로 기능하였다. 세 번째로 교육기관 이 발달하였다. 즉 1960년 당시에는 해인대학, 간호대학, 마산고, 마산여고, 제일여고, 마산상고, 마산공고, 성지여고 등이 마산에 위치하고 학생은 물론이고, 여기에 종사하 는 사람들이 과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대학생들의 전체 한국 인구 대비 비율은 1,000명당 3.8명에 해당되나, 도시에서는 인구 1,000명당 14.5명의 비율이었다 (이화수, 1985: 149)고 일반화시켜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상당수의 지식계급이 존재하 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51
4. 도덕 공동체의 형성 1) 생활공간 즉 대중 매체에 의존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면접적 상호작용, 주거의 특성상 일 상생활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빨래, 우물, 수돗물, 변소, 골목길과 마당), 시장,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특정시간과 장소에 모이는 상황, 주거지와 붙은 거리를 청소하 면서 이웃과 만나는 것, 거리에 노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상황, 반상회와 같은 공식 적 모임 등은 아무튼 성인들의 경우에도 이웃과 자주 면접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상황 이었고, 이를 통해 면접적 사회적 관계를 통한 감정적 공유가 형성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적 감정적 유대의 숙성은 결국 집합행동 과정 에서도 드러난다. 즉 시위자들이 바로 이웃들이고, 이웃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경우에 는, 이들에 대한 국가의 가시적 억압적 폭력의 사용은 이들에게 감정적 분노를 더욱 쉽게 자아내게 된다. 또한 밤과 같이 국가의 감시체제로부터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상 황에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는 같은 상황에서도 가시적 폭압이 아닌 법의 집행을 가장한 공권력의 형태에 대해서는 집합행동이 폭력적이고 격 렬하게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비가시적 (또는 관료적) 폭력의 행사에 대해서는 감정적 격렬성이 덜 일어나는 것이다. 1960년 3월 15일의 밤시위는 낮에 발 생한 반공청년단, 경찰의 거리에서의 가시적 폭력이 저녁시간을 통해 가족들과 이웃들 에게 전파되었고, 감정적 분노를 자아내게 하여, 시민들이 거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1979년 당시의 노동자의 수는 수출자유지역에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약 3만 명의 여성 10대 후반 노동자들, 그리고 한일합섬의 여성 10대 노동자들 2만여 명, 창원공단 쪽에도 거의 3만 명에 육박하는 노동자들이 새로이 들어서게 된다. 이 중 대다수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대개 인근 함안, 의령 등 농촌에서 충원 되었고, 남성 노동자들은 농촌지역(전남 동부지역까지 포함)의 고등학교를 통해서 집단 적으로 충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집단 15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거주 형태나 공동 생활형태의 거주가 성행하고, 남성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아직 본격 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주택에 의해 공장 주변의 전통적인 촌락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신규로 개발된 마산 산호동 등지에서 머물게 된다. 아무튼 당시의 인구의 반 이상은 공동생활적 거주를 하였다. 아파트 생활이 아닌, 일반 주거지에서의 공동생활이란 그 야말로, 화장실, 수도, 마당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형태이었으므로, 현재 상상하기보 다는 훨씬 면접적 접촉이 많았고, 생활의 공유를 위해 상호작용이 활발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주거면에서 면접적 상호작용이 활발하였다는 것은 일상 생활을 통해 사 회에 대한 정보수집, 평가가 상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에 현재보다는 정보소통수단(텔레비젼)이 부족하였다고 하더라도, 생활 속의 정보 교류 는 매우 활발하였다. 직장 내에서도 현재보다는 훨씬 공장 내부의 사회적 관계가 집단적이었고, 면접적이 었다는 점도 지적하여야 한다. 즉 승용차가 90년대 초반 들어서 보급되기 시작한 것 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에는 걸어서 출근하거나, 회사가 제공하는 통근버스, 아니면 버 스를 사용하였으므로, 교통 수단 면에서도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대화를 듣게 되고 때로는 교통수단에 같이 한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는 경우도 많게 된 다. 공장 내의 생활도 지금보다 노동과정이 그리 엄격하지 않았으므로, 노동 중에도 노동자들끼리 대화가 가능하였고, 퇴근 후에도 상당한 동류 노동자나, 아니면 연고적 인 사회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끼리 시내, 창동이나 오동동 등지에서 사회적 만남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이 아닌 사람들, 때로는 전혀 처지가 다른 사람들끼리의 접촉이 많아짐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 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평가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였음을 의미한 다. 당시에는 다방 (빵집, 우유점), 술집, 음식점이 현재보다 매우 발전하였다.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들은 정보의 확산 및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대외적인 교통망은 당시에 부산과의 버스가 자주 있었고, 다음으로 서울과 대구권이 었다. 따라서 마산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평가의 척도는 아마도 부산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53
이는 남해안 고속도로, 구마 고속도로의 개통, 그리고 동마산 IC, 합성동 터미날, 양덕 3거리를 통해 오동동 자유 아케이드로 들어오는 도로가 가장 활발했었고, 북마산 거리 가 그 다음으로 활발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할 수 있다. 서마산 IC를 통 해 북마산 거리로 들어서는 것이 활발했고, 지금의 6호 광장 - 마산역 간 도로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상태였다. 도로의 발달은 내외부적인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으며, 특히 부마 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외부의 정보와 사상의 유입의 통로는 인 적인 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사회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마산 출신 서울 유학생들 의 영향이었고, 그 다음으로 종교기관들의 활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산 마산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외부 세계의 활동에 대한 정보와 새로운 사상의 수입 은 양서조합 운동이나, 사회과학 서적읽기로 나타났, 종다. 특히 이들 사회과학 서적읽 기는 많은 시민들의 의식적 각성을 도모하였고, 이러한 독서인구의 비율이 상당히 높 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1979년 당시에는 가톨릭 조직인 이미 농민이나 공 장 조직들에 설립되었고, 이는 가톨릭이 전개하는 전국적인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동 시에 가톨릭은 당시 오원춘 사건 등으로 이미 국가의 압제를 받아오면서 많은 민주화 운동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었다. 경남대학교 인근의 성당과 시내 중심부 성당에서 열 리는 시국 미사나 강연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 다. 여기에 더하여 가톨릭 교구는 가톨릭 여성회관을 설립하여, 한일합섬과 수출자유 지역의 10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종교기관은 애초에 오스트리아 린츠 교구의 도움으로 설립되었고, 직접 운영되었다. 애초의 목적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교양을 높이고 사회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회교육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 것 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기관의 의도와 프로그램 참가자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가 된 다. 기관이나 여성회관의 역사에서는 애써 사회적인 각성효과를 부각시키지 않고 있지 만, 여기에 프로그램을 개설하거나, 수강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각성효과가 컸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2) 전통적 사회관계 15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사회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전통적, 또는 전근대적인 사회관계의 연대틀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모성애와 가부장적 상호 기대, 그리고 학생신분의 사회적 기대가 시위참 가의 동기를 만들어 낸다. 자식 또는 자식과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이 국가의 가시적 폭압상태에 이르면, 이에 가족이나 친척들, 그리고 동네 이웃들이 저항하여 시위에 나 서는 형태이다. 이는 1960년 4월 11일 이후에 발생한 시위에서 어머니들(부녀자)이 시 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이다. 즉 3월 15일의 시위진압에서의 폭압성, 그 이후에 발생한 젊은이들에 대한 무차별적 검거와 고문은 결국 4월 11일의 계기를 맞이하여 어머니들의 참여를 야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의 영향은 여성들이 시위에 나설 것을 종용하거나, 여성들이 시위에 나선 것을 보거나, 여성들이 시위에서 폭압에 노출 되었을 경우에는 남성 시민들은 약자인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를 받게 된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남성들은 시위에 참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 는 1960년 3월에 여고 학생들이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시위에 나설 것을 종용한 상황, 그리고 이미 각 학교의 학생지도부들이 소극적인 상황에서도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일 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자, 남성의 우월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약한 여성도 참여하 는 시위에 참여하여야 되는 강한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결국 시위과정에 서도 여성들은 남성들의 보조적인 역할을 자임하여 돌을 나른다거나, 먹을 것을 준비 하거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남성과 여성의 기존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이러 한 상황은 1979년 10월 18일 시내의 시위에서 여학생도 시위에 참여하는 데, 남학생들 은 당연히 참여해야 된다는 거리의 집합적 압력을 받게 된다. 또한 시위 전에도 다른 곳에서는 시위를 하는데, 마산의 남학생들이 시위에 나서지 않는다는 질책을 받기도 한다. 3) 변방성 대한민국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은 동질적일 수 없다. 즉 중심지와 변방지역으로 구 분된다. 이는 국가 권력이 실제로 미치는 측면뿐만 아니라, 특히 거주자들의 심리적인 면에서 강하다. 따라서 지역이라는 곳은 중앙이나 중심지에서 보면 변방이면, 변방이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55
라는 감정을 지역의 주민들이 강하게 체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광주도 지역이 독특성이란 바로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만이 아니라, 다른 측면 즉 지역간의 관계를 조망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군사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그같은 사건(김영삼, 김대중에 대한 압박-필자 첨가)들을 계기로 촉발되었을 뿐이다. 마산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저항운동을 일으킨 민주성지라거나, 광주가 광주학생의 거의 성지라는 이유, 역시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이 부산, 마산이나 광주라는 특정지 역에서 각각 발생한 이유로서 충분치 않다 (박광주, 2000: 3). 중앙의 권력은 항상 위압적이고, 강요하며, 피해를 야기시킨다고 여겨진다. 특히 특 정한 정책들이 나서게 된다면 이는 특히 심해진다. 1960년의 경우에는 세금도 문제이 었지만, 각종 단체들이 요구하는 준세금(강제로 걷는 헌금같은 것들)이 상당한 정도에 달했다. 혹자의 추정에 의하면 세금의 1/3 정도에 달했다. 국가 공식기구들은 재정이 없어서 공무원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못해도, 관변 국민운동 단체들과 정치조직들은 주 민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사적인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였으므로, 주민들의 일상 적인 저항의식은 배양되고 있었다. 1960년 3.15 의거는 투표권의 부정, 그리고 폭압적 인 시위 저지, 4월 11일에 발견된 김주열의 처참한 주검의 모습은 바로 주민들에게 변 방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었고, 이에 대해 강력한 저항행동이 발휘되는 계기를 만 들어 준 것이다. 1979년 10월에는 경남대의 종합대학 승격이 실패하게 된다. 이에 대 한 학생들의 불만은 박종규(전 경호실장, 당시 공화당 지역 국회의원)의 정치적인 위 세를 고려하여 더욱 커지게 되었다. 여기에 오랜 기간동안 유신에 저항하지 못하고, 분명치는 않치만 당시의 학생들은 유신 찬양데모를 했다는 자괴심이 상당한 정도에 달 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의 대구 시위, 1979년의 부산 시위에 의해 변방성의 열등감 이 더욱 고양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실제 당시 항쟁 참가자 들에 대한 관찰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중앙지 역에서의 대우 문제였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부산과 마산시민들에 있어서 정 치적 압제와 경제적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희망의 상징이었다. 김영삼에 대한 정권 적 차원에서의 탄압은 부산과 마산시민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굴종이었고, 분노를 일으 15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키게 하는 요인이었다. 유신체제가 지니고 있었던 체제적 비정당성에 대한 민중의 누 적된 분노, 부산과 마산지역의 경제적 열악에 대한 민중의 처절한 고통이 김영삼 총 재에 대한 제명사건을 최정점으로 하는 정치탄압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였다 고 하겠다 (정경환, 2000: 10). 즉 김영삼은 지역에서 서울로 파견보낸 지역의 상징적 대표자였다. 따라서 김영삼에 대해서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보여준 모욕과 언사들, 그 리고 국회에서의 제명은 중앙정부가 부산과 마산 시민들에게 가하는 억압으로 해석되 었다. 이는 항쟁지도부는 명확하게 거론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시위참가자들이나 잠재 적인 참가자 가능자들에게는 쉽게 전파될 수있는 심정적 동조현상을 일으켰다. 심정적 동조라는 것은 시위 참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억압이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지역민들을 촉발시킬 수 있는 공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필 요하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인 곤란과 감시와 억압의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만든 사건 이 바로 김영삼에 가한 폭력, 총재가처분과 법원에서의 패소, 국회제명으로 누적적이 고 점진적으로 상징적인 억압이 지역민들을 결집시키고 도덕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지역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른 것으로 판단된 것이다. 5. 국가의 통치능력 1) 1946년 해방이후 마산의 현대사에서 소요과 폭동, 아니면 민중들이 항쟁에 나서서 국가와 충돌한 사건인 10월 봉기는 국가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민중들과 미군정당국간의 충돌이 었다. 미군은 일제국가 통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고, 여기에 식민지당국에서 활동한 폭압기구의 인사들을 기용하였다. 미군 40사단이 경남을 지배했고, 하리스 사단장이 경남지사의 역할을 하였으며, 지역의 군수와 시장에는 일제시대 관료들을 대부분 임명 하였고, 창원군수에는 일제시대 김해군수가 임명되었다. 마산을 대표하는 미군정의 자문회의에는 명도석이 뽑혔다. 당시에는 이미 1945년 10월경부터 우익인사들은 따로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57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명단은 남아있고, 이들은 나중에 마산시장 등의 중 요보직을 맡은 사람들이 많다. 신흥방직에 근무한 사람의 구술록에 따르면, 신흥방직 은 산호리에 1만여 평의 규모로 2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미 자치관리 조직 에서 관리를 하고 있어서 이를 물리치고 미군정에 새로 관리인을 뽑은 것으로 되어 있 다. 김종원 중령은 1949년 초(아니면 1948년 말)에 마산에서 창설된 16연대 부연대장으 로 등장한 사람이다. 김종원은 1949년 초부터 시작된 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는 사람 이다. 일본군으로 근무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기관총을 단 짚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반민 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권총으로 쏘아 죽이겠다 고 말하던 사람이다. 반민 특위는 1949년 5월 27일에 반민특위 김지홍 조사관이 진해에서 일제시에 다년간 고등형사로서 동족을 울리고 갖 은 형벌로 극형을 감행했던 오갑수를 체포하고, 29일에는 마산 출신으로 일제시에 사 법형사로 재직하고, 퇴직 후에는 일경관과 내통하여 부민을 밀고한 장자관의 피해자 증언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면 1949년 상반기에 김 종원은 피체포를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후에 1949년 하반기에 접어들 면 이미 반민특위는 흐지부지해지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하부 상호 감시조직으로서 민보단이 1948년 12월에 결성된다. 공식적으 로 국사 책에는 1948년 5월 선거를 앞두고 향보단이 설립되고, 민보단은 1950년에 설 립되었다고 되어있는 신문 기사에는 마산에 민보단이 1948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와서 이것이 옳을 것으로 본다. 각종 정당이나 정치 하부 조직 외에도 대한청년단이 1948 년 말에 세워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국민운동조직 또는 정권의 전위조직으 로서 행정과 사법을 넘어서는 활동을 하는 조직이다. 1949년 12월 12일에 나온 기사 는 대한청년단 창원군 대산면 단장에 대한 것인데, 주로 주민 착취, 특히 좌익 색채가 있는 주민을 대상으로 소를 빼앗는다거나 협박하여 쌀보리, 현금, 나락 등을 빼앗는 방법으로 착취를 일삼고, 또한 청년단의 운영비명목, 구전금 명목으로도 착취하고, 정 158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부를 대신하여 나뉘어주는 세농민을 위한 구호미도 횡령한다. 현금만 대강 계산하여 도 10개월간 540여만 원을 착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48년에 대통령 월급이 5만 원이었던 상황, 그리고 소 한마리가 7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보면, 80여 마리의 소를 착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의 청년단장의 위세를 알 수 있다. 1947년 당시의 마산의 정치적인 성향에 대한 자료로서는 미국의 민간정보처 자료가 있다(제 5차 주한 미군 민간정보처 답사 보고서, 1947. 11. 17 서울 비밀문서 No. 149 미국무부로 보낸 문서, 1947. 10. 12-16일에 마산지역을 조사한 것). 이에 따르면 마산 은 정치적으로는 우익이 지배하고 있으나, 좌익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우익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좌익지도자가 지하로 잠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익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뚜렷한 증거가 보입니다... 문자 해독률, 마을의 라디오 구입에 대한 의사, 주요관심사, 미군 주둔에 대한 태도, 지방정부에 대한 만족도, 토지개혁에 대한 태도, 일본인의 토지에 대한 분배,.. ([사회연구], 1990. 7월 4집: 127-158). 당시의 마산상황은 겉으로 드러 나듯이 반공을 중심으로 한 이념대결을 부추겨서, 민중들의 염원과는 상치되는 상황에 서 발생한 것으로 해석된다. 2) 1960년 당시에 지배층이 사용한 억압기제들은 경찰과 군을 동원한 무력, 공식적인 무력은 아니지만 사적인 폭력 조직인 반공청년단, 그리고 통반조직까지 가진 자유당 조직, 그 리고 통상적인 관료 조직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1960년 마산 의거와 같은 사태를 사전 에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지배당국에서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 다. 그래서 비교적 학생들의 동요가 적었고, 그 데모도 본도 내에서는 끝끝내 없었습 니다. 다만 염려한 것은 본도에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할 것같으면 부산시내에 수도 다음에 가는 도시이기 때문에 부산시내에서 혹 무슨 데모가 있지 않을까? 이런 우려를 했습니다 (신도성, 경남지사, 1960, 국회마산사건 조사위원회 증언, 3월 24일).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59
그러나 시위참여자들은 잠재된 불만을 서로간에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촉발상황 만 전개되면 언제든지 표면화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 즉 내연되고 있는 불만을 가진 마산주민들의 예측치 못한 격렬한 항쟁은 결국, 이영환 (1999: 186)에 의해, 학생들이 촉발한 운동에 산발적으로 힘을 합해 나가는 과정 으로 규정된다. 정부로서는 지나치게 마산이 조용했던 점이 마산을 비교적 소홀히 다루게되는 측면 을 보여준다. 마산에는 200여 경찰과 39사단 군대 병력이 있으나, 마산의 소요보다는 다른 지역의 소요를 오히려 걱정하고 있었다. 권종림 기자의 3월 15일 밤 시위에 대한 서술은 시위대보다는 경찰의 공세가 더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경찰의 총격 시간은 경찰국의 발표나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권종림 기자의 증언이 더 정확할 것으로 판단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학국민학교 앞의 시위대에 대한 총격은 홍중조( 1992?)나 김태룡(1964)이 서술한 것보다 더 공격적인 경찰의 대응자세에서 이루어 졌다고 평가 된다. 3월 16일부터는 경찰은 추가로 보급된 장비와 총기와 실탄을 무기로 하여, 거리 에서 불법적으로 행인들을 상대로 소탕작전을 펼친다. 무학 국민학교 앞 자산동 로타 리의 최후의 보루선을 무너뜨린 경찰기동대는 구마산에 돌입했다. 찦차에 기관총을 장 치하여 구마산 창동 네거리에 집결하고 있는 시민과 퇴각하여 귀가하는 시민들을 추격 하여 소탕하기 시작했다...녹색제복의 반공청년단도 총을 갖고 달아나는 시민들을 학 살했다...집에 숨은 데모 시민까지 색출하여 검거해 갔으며, 집안에서 유탄에 맞아 쓰 러진 자가 속출했다 (김태룡, 1964: 259). 3월 15일 마산의거 이후에 자행된 고문과 살 상은 마산시민들을 격분시켰으며, 마산 찲기동의거는 3월 15일 당일의 부상과 3월 15 일 이후 4월 11일 찲기동의거사이에 경찰이 혐의자를 검거하면서 행한 신체적 고문에 서 비롯된 것이다.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부상자 125명중 적어도 79명(63.2%)이 이 기 간에 발생한 부상자라는 기록은 당시 경찰의 폭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의 증언 도 이를 뒷받침한다.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많이 맞었지 안 맞을 리가 있겠습니 까? (3월 16일 아침에 자기 자식을 찾은 어머니, 43세, 자유당, 김순희의 증언, 1960, 국회 마산사건 조사위원회, 3월 26일). 시간은 흘러 밤 12시 싸이렌이 울렸다(통행금 16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지를 알리는 신호이다). 아마 내가 시청으로 끌려 온지 두시간 정도 지난 모양이다. 나처럼 끌려온 무고한 시민이 150명은 되어 보인다. 살기와 공포가 감도는 시청 내에 는 찬물을 끼얹은 듯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잔인무도한 살인경관 놈들의 만행은 그치 질 않는다. 그야말로 인간 도살장이다 (김무신, 1960/1996: 63). 당시 관료조직의 성격에 대해서는 4월 혁명 후에 나타난 지역 공무원조직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4월 26일의 시위를 당해서 마산시의 대 부분 공무원들은 피신하였다. 또한 중앙국가가 무너진 후에 곧, 마산시의 회원동에서 주민들이 공무원들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났다. 즉 1960년 4월 29일(마산일보, 1960. 4. 30일자) 오전 회원동 일대에는 상당수의 프린트된 삐라가 뿌려졌는데, 그 내 용은 3.15 선거당시 주민들의 주권을 약탈해 간 민주반역자를 규탄한 것으로부터 시작 하여, 민주반역자로 10여 명의 동 직원으로 변모 동장, 문모 서기, 김모 사무장 김모 씨 등등을 거론하였다. 1959년 5월 6일 - 8일 사이의 62회 마산시 의회 본회의에서 의 원들이 새로 임명된 13개 동장이 자유당계라고 하여 민주당 소속의원들이 추궁한 사실 이 있었다. 따라서 동장 임명 건은 이미 자유당의 권력하수인적인 성격이 강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혁명 후의 정 마산시 부시장의 시장직무대리 기간에 이미 상당수의 동장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사표를 수리하였다. 즉 1960년 6월 29일 마산시의회 6차 본회의에서 정 마산시장 직무대리가 답변한 바에 따르면, 동장 9명이 사표를 제출하였 고 이 중 6명은 이미 사임하였다고 한다. 신임 윤시장이 취임한 후인 7월 9일 74회 마산 시의회에서 고또수 의원은 동인사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조속한 동장 인사조치를 촉구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재정의 60%는 미국 원조에 의존하였으며, 1957년부터 미국 무상원조가 유 상 차관으로 바뀌고 있었다. 1959년 12월부터 마산시 공무원의 급여가 제대로 지불되 지 않고 있었으며, 반면 자유당의 선거자금의 형태로 공무원들에게 자금이 지원되고 있었다. 당시 지방자치 예산은 마산시와 동사무소 단위로 편성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즉 동사무소와 마산시가 세금을 거두고, 중앙에서 보쁰무소받고, 모 선면 차입에 의존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61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마산시와 동사무소는 적자재정 속에서, 말단 주민들 통제하기 위한 방(지금의 통 반에 해당된다) 조직비, 시국 대책비는 시와 동 예산에 과다하게 편성되었다가, 특히 1960년에 1959년에 비해 5배가 늘어나고, 그런 결국 4월 혁명 이 후에 다시 줄어 든다. 1956년도에 자유당 마산시 당부에는 3만 2천명의 당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 시 마산인구가 13만 명 정도라고 할 때 인구의 25%정도가 당원이며, 아마도 성인인구 만 가정한다면 마산 성인인구의 40-50%가 자유당 당원이라고 등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완월동에서 이루어진 선거대책기구를 예로 들면, 3,514명의 투표인을 대 상으로 자유당은 입회간부 2인, 중앙정치훈련원생 5명의 명단, 동대책위 부장과 차장 4명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물론 이들 관변 단체와 자유당 조직의 속성상 부풀린 숫자 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하지만, 아무튼 자유당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막대한 조직 이 서로 얽켜 주민들의 사실상 얽어 메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60년 마산의거가 발생한 원인 중의 하나는 자유당조직의 약화와 민주당내 조직갈 등이 의거를 부추켰을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즉 마산의 경우, 민주당인사의 자유당 위원장 임명에서 자유당 조직이 가동되지 않았고, 따라서 경찰이 부정선거를 주도하였 거나, 다른 조직에 의해 주도됨으로 무리한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높다. 또한 민 주당의 대응도 구파와 신파의 경쟁 속에서 아니면 신파의 강력한 단결력에 힘입어 소 수가 강력한 단합력을 발휘하여 대응해 나갔을 것으로도 보인다. 3) 1979년 마산의 저항의 역사성을 간과하고 있는 국가는 항상 지역민들이 역사의식에 대해 둔감할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1960년의 경우에도 부산을 위험하고 여기고 국 가 폭압능력을 이곳에 집중하고 있었고, 1979년에도 시위가 없었던 마산의 잠재적 능 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1960년에는 당시의 경남 도지사가 진술하듯이 부산을 소요가능 162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지역으로 주목하고 있었고, 1979년에는 다른 대도시 지역을 소요 가능지역으로 여겨 서, 여기에 경찰과 정보 인력을 집중 배치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대개 서울지역의 소요 발발가능성이 10월 15일에 발생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마산의 경우에는 유 신체제 이후에 거의 소요가 없었고, 심지어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경남대학생들은 스스로 유신체제 찬성데모를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자괴감을 많이 느 끼고 있었다. 경찰의 상시적인 정보사찰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특별히 감시 수준을 높인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찰측의 자료에 따르면, 학내 감시, 사 복형사의 잠입, 학교 앞 건물에서의 사진촤영에 의한 채증활동 등은 정상적으로 이루 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소요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고, 시위가 발 생하자, 인근의 경찰들을 동원하였고, 이어서 16일밤에는 39사단 병력과 경찰기동대의 동원, 급기야는 부산에 파견되었던 해병대와 특전사가 배치되는 상황까지가게 된다. 따라서 적어도 1979년의 경우에 마산에서는 초기발생을 예측하지 못했고, 또한 소요도 시민들이 대규모로 합세하는 폭력시위로 나아갈 것은 사전에 알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6. 저항의 역사적 상징과 전통 사회적 관계에서 면접성, 상호의존성(상호 기대)이 도덕적 유대감을 발흥시켰다면 또한 지역의 저항과 국가로부터 피해를 받은 것에 대한 역사적 전통은 집합적으로 사 건에 대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즉 개인적 차원이 아닌 지역수준의 집합적 사람들 은 지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생존인물들로부터의 구전, 장소의 기념물, 장소에 대한 기억들로부터 국가의 폭압의 속성, 폭압에 대한 대처법으로서의 민중조직 방식, 지리적 상징성에 대한 기억을 전수받고 재해석하고 구전된다. 마산의 경우에는 한편으로 새로운 성원들의 이입으로 말미암아, 집합적 기억의 전수가 어렵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되지만, 다른 한편, 한국전쟁기의 내부 상호 적대감이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 하고, 또한 좌익에 대한 공포감이 적었으므로, 국가에 대한 비판에 상대적으로 자유로 왔다. 한국전쟁기의 국가폭력으로부터의 피해, 조봉암의 처가 진해사람인 점, 급격한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63
이입증가로 인한 주택, 식량, 직업난, 일본과 북한 등 비교적 근대적인 사회환경을 경 험한 이들에 의한 사회비판 의식의 유입되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인자들의 유입은 기 존의 집합적 기억을 재해석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1960년의 시위에서는 지역성에 관련 된 비판이 적었기는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왕성했다고 볼 수 있 다. 저항의 전통(Biegert, 1998)이라는 표현이나, 제도화된 저항성 (Ekiert and Kubik, 1998)이라는 표현에는 저항의 조건 외에도 저항의 노하우가 전수되어져 내려오는 소수 의 인사들이 존재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이점에서도 마산에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일본에서의 귀환민들이 정착하고 있었으며, 마산 자체도 일제에 의해 근대도시로 개발 되었으며, 특히 일본 육군의 군사항구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상징 성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1996-97년에 발생한 베오그라드의 시위에 대한 연구에 서 드러나고 있다. 즉 베오그라드에서는 도시에서 시민들이 걷는 것,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정치적 분열이 심한 점을 상징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호기의 논 문에서도 광주의 예를 들면서 전통적으로 금남로와 충장로가 기억되고 상징되는 권력 의 중심성이 보여지고 있었다. 마산의 경우에는 구마산이 생활세계의 중심지로서, 그 리고 신마산이 권력 기구의 집합장소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 경계 지점에 3.15 의 거탑이 존재하여, 상징적으로 시민들과 권력 세계와의 경계선에 위치한 것으로 보여진 다. 3.15 의거탑은 경계선의 의미와 동시에 민중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함으로써 일상적으로 시민들은 이를 가시적으로 목격하고, 이러한 상징 을 체화시켰다고 해석된다. 1979년의 경우에는 시내의 집합 장소로 3.15 의거탑이 선정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나, 참가를 요청받은 사람들이나, 아니 시위를 진압할 책임을 진 경찰의 경우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마산의 시위는 3.15 의거탑이 당연 하게 공권력과 시위군중들의 대치점으로 당연하게 설정된다. 이는 구마산(혹자는 원마 산이라고 칭한다)은 시민들의 생활공간, 즉 상가와 유흥가, 사회적 활동의 중심지인데 반하여, 3.15의거탑을 경게로 하여 그어지는 신마산은 경찰서, 시청, 법원, 검찰청, 세 무서, 소방서, 도립병원, 신문사 지사 등, 국가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이다. 따라 164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서 구마산에 모여서 신마산으로 진입하게 위해서는 3.15의거탑이 하나의 경계선의 역 할을 담당한다. 3.15 의거 탑이 없었던 1960년에도 그러하였고, 1979년에도 마찬가지 로 바로 3.15의거탑 부근에서 항상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국가 공권력은 경 계지점을 넘어서면 공권력이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졌고, 시위대는 항상 이 경계선을 넘어야 저항에 공권력에 위협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즉 구마산모여 단순히 시위를 하 는 것은 일상적 생활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공적인 영역에 침입하 고, 간섭하고, 저항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3.15의거탑은 지역의 교통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오고 가는 행인들이 항상, 암묵적으로 경계지점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의 장소와 저항 대상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건에 대한 형 상물에 모이게 된다. 시민들은 시위가 발생하면, 1979년의 경우에는 당연히 3.15의거 탑 주위에 모이는 것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장소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 다. 왜냐하면 공개된 거리 옆에 위치해 있고, 앞서 지적했다시피 구마산과 신마산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 곳은 국가의 공권력으로서도 경계선이 되므로, 처음 부터 이곳을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다. 3.15 의거탑이 빼앗기면, 곧바로, 시청, 세무서, 법원과 검찰청, 경찰서로 진격하므로, 3.15 의거탑은 공적 기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본다면 경계선인 셈이다. 그러나 1960년 3.15의거 후에는 3.15 의거 탑이 시민들의 의 식 속에는 저항의 상징으로 바뀌었으므로, 이곳에서 모인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는 셈이다. 저항의 목표는 시기마다 달랐으나, 대개는 생활공간 속에 있는 국회의원 들의 집, 집권 정당의 당사, 생활공간 속의 파출소가 일차적인 피습 대상으로 선정되 고, 이차적으로 신마산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최후의 저항선은 항상 시청과 경찰서 방 향에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일단 이곳까지 진출하면, 저항은 상당정도의 효과를 보여 주었다고 여겨지지만, 그래도 시청과 경찰서에 대한 공격의 치열성 여부가 저항의 강 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65
7. 토론 한국의 민주화라는 과정에는 지역 시민들에 의한 민주화에 대한 헌신이 작용하였다. 피지배층, 아니 시민층은 지역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역의 민주화운동들 을 통하여 대한민국 민족국가 공동체의 민주화가 달성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언술이 다. 그러나 지역들은 각각 다른 인구구성, 도덕성, 역사성, 그리고 지배와 억압의 측면 에서 보면, 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차별적인 요소가 지역마다의 독특한 민주화 운동을 낳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각 지역은 다른 지역의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경쟁적으로 운동을 펼치게 된다. 인근 지역은 하나의 행동의 준거를 이루면서 상승적 또는 억압적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상승과 억압의 방향성 역시 지역 의 오랜 역사적 전통에 근거할 것이다. 따라서 인구 구성면에서 기층민의 점유, 신규 이입인구에 의한 개방적 사고와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의 유입, 도덕성이 고양될 수 있 는 사회적 조건들과 역사성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분석하였다. 아울러 국가의 지배능력 과 억압능력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아무튼 이번 토론회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역사가 중앙이라는 큰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균질적이지 않은 다양한 무대의 연속 적이고 다른 형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상호의존 성이 강한 지역의 존재, 이들간의 영합적인 경쟁을 상호 공생의 관계로 바꾸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의 민주화 운동의 전이성이 약화되어 국가의 억압성이 강해지고, 민주화의 수준은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의 자 율적인 조직들의 밀도가 높아지고, 이들간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강해져서, 중간수준의 동원 잠재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대한 민국이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 체라는 점이 계속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 해석과 아울러 의례를 통해서 공동의 민주화 상징을 창조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적인 분열 보다는 지역간의 통합이 가능한 조 건은 지배와 억압의 속성을 간파하고 이에 동조하여 억압의 피로감에 휘쓸리지 않고, 신 뢰와 동시에 지역의 민주세력들이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166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참고 문헌> 비판 사회학회, 2009, [시장위기와 사회적 불안] (춘계 학술대회, 4월 24-25일, 부산대에서 열린 학회글들의 모음): 이때 민주화운도의 지역성 분과가 구성되어 최정기, 김희 재, 김태일, 박찬식, 이은진이 참여하여 광부 5.18, 부산 10.16, 대구 2.28, 제주 4.3, 마산 10.18에 대한 각각 발표하였다. 이은진, 2003, 지역성과 사회운동, 김진균 편저,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 I] (문화과학 사): 340-362 이은진, 2004, [근대 마산: 압축된 모순의 폭발지] (경남대학교 출판부) 이은진, 2008,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육군 고등군법회의자료를 중심으로] (도서출 판 불휘) 정해구, 2000, 한국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본 중앙과 지방, 5월 20일, 서울 외교안보연구 원에서 한국정치학회 주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 에서 발표된 글 (발표문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정경환, 2000, 부마민주항쟁의 현대정치사적 의미와 교훈: 지역사회운동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로의 복원 5월 20일, 서울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한국정치학회 주최, 한국 의 민주화 운동의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 에서 발표된 글 박광주, 2000, 부마와 광주의 전국화, 세계화 5월 20일, 서울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한국정 치학회 주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 에서 발표된 글 홍장표, 정이근, 2003, 부마 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 민주공원 편, 부마민주항쟁 연구 논총: Cumings, Bruce, 198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Routledge, Paul, 1996, Critical gepolitics and terrains of resistance, Political Geography, 15, 6/7: 509-531 Staeheli, Lynn, 1994, Empowering political struggle: Spaces and scales of resistance, Political Geography, 13, 5: 387-391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67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토론문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1. <한국의 민주화에서 지역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은 부마항쟁 이나 광 주항쟁 의 경험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비교적 쉽게 접하는 것이지만, 학술적 영역에 서는 별로 제기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에 속한다. 한국의 정치사회구조에서 중앙과 지방, 또는 중심과 주변 이라는 이원적 구성, 그리고 양자 사이의 장벽이나 격차를 학문적 의제로 삼는다는 것은, 중앙중심성을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하 는 풍토에서는 좀 낯설고,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이나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때만 가능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방의 문제는 지역감정 또는 지역주의 라는 화두를 제외한다면, 주로 산업이나 경제적 측면에서의 지역발전의 문 제로 제기되지만,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에 속한 다. 이런 상황에서 이은진교수의 문제제기는 단지 부마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이 를 기념하기 위한 의례적 질문이라기보다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의 재발견 이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두 세계 사이의 장벽을 넘어서고, 점점 커져가는 지역 적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고민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2. 이은진교수는 이번의 발표에서 주로 마산지역에 초점을 두고, 1946년, 1960년, 1979년, 1987년의 시위와 운동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은진교수가 제기한 <한국의 민주화에서 지역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지역에서 발생한 시민저항은 어떻게 레짐 변화에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과 <해방이후 현재까지 지방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나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분석/평가해야 하는가, 그것의 확산메카니즘은 무엇인 가>라는 질문은 약간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더 분석적으로 말한다면, <민주 화>는 운동정치와 선거정치의 복합에 의한 것이며, 이 두 가지 장에서의 지방의 역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69
할은 국면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46년의 문제는 대구에서 시작된 (흔히 폭동이라고 불렸던) 민중적 저항의 전국적 확산의 메카니즘을 분석하는 것이어서 이번의 문제제기에서는 생략하는 것이 간결하다고 본다. 3.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경험한 압축적 근대화과정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는 중 요하게 다루어져야할 주제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전국적 수준에서는 자주 제기되 나 지역적 수준에서는 별로 탐구되지 않았다. 일단, 지역사회연구에서 지역의 민주 화와 지역사회에서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 는 좀 더 명확하게 구별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1960년이나 1979년의 상황에서 산업화정도는 민주화 요구 와 유의미한 관 계 라는 명제는 좀더 세심하게 검증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79-80년의 지역 사회에서의 시민적 대중적 저항을 설명할 때, 산업화정도를 중요한 독립변수로 한 다면, 공업화가 진전되지 않은 지역, 노동집약적 산업화가 이루어진 지역, 자본집약 적 공업화가 이루어진 지역이라는 유형구분과 상대적으로 공업화가 많이 이루어진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는 구분( 상대적 박탈감 의 존재)사이에 어느 것이 더 유용한가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이은진교수는 부마항쟁 당시에 부산에서 시작된 반정부시위가 왜 마산이라는 지역 에 머무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교통과 소통구조, 사회관계적 맥락, 그리 고 역사적 경험이나 상징의 공유를 검토하였다. 마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시 위의 요인을, 산업화 요인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1979년의 시점에서 공업화의 신 진도시들이었던 포항이나 울산과의 비교연구가 유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산업(계 급)변수와 정치적 변수 중 어느 것이 더 유효한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수 있 게 된다. 4. 이은진교수는 이 발표에서, 한국의 각 지역은 국가의 탄압과 저항의 능력의 측면 에서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 고 언급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동의하지만, 한국은 지 리적으로는 물론이고, 조직의 밀도와 새로운 사상의 유입, 역사적 배경, 그리고 국 가 통치 능력이 미치는 정도에 있어서 매우 이질적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는 170 박정희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
부분, 특히 매우 이질적인 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한 국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동질적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구나 본격 적인 산업화정책이 추진되기 이전인 1960년에는 더욱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 확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객관적인 상황에서 지역간 상호 의존성은 점차 높아지지만, 또 한 상대적으로 차별과 적대전략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서 지역간 연대의 가능성은 매우 유동적 이며, 한단계 더 높은 지역간 연대는 소통, 사회관계, 상징의 공유가 동시에 존재할 때 가능 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한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상징 의 공유 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에 나는 광주항쟁 20주년 기념 학술회 의에서 부산, 제주, 광주의 역사적 연대 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상징의 공유 를 강조한 것이며,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이를 넘어서는 차원의 쟁점들 에 대한 전망을 고려한 것이었다. 5. 정치권력 또는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 그들이 부딪쳤던 수 많은 시민적 저항중에서 그것이 발생한 지역(지방)에 따라 정치적 부담이 실제로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자료는 확실하지 않고, 또 지방 의 대중적 저항운동과 수도권의 대중적 저항운동간의 관계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이다. 수도권에서 발생한 저항과 지방에서 발생한 저항의 정치적 영향(또는 효 과)의 차이를 검증하기 위하여 필요한 객관적 자료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확 보해야 하는가는 한국사회의 정치변동에 관한 미시적(구체적) 연구에서 해결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부산-마산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 는 지역적 신념구조는 1960 년과 1979년의 경험에서 (1980년의 광주의 경험과 대비되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는 충분히 해명되지 많은 질문에 속한다.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의 역할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