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연구 제13권 제3호: 251~280 한국법철학회 2010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 홍성수**1)2)g I. 들어가며 세계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인권문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고, 인권이 론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가 아닌 사 적 행위자들에 의한 인권침해이다. 문제는 국가와 개인의 대립을 전제하는 근 대자연법론이나 헌법이론으로는 이 문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관적 공권으로서의 기본권의 효력 범위를 사적 영역으로 확대하는 기본권의 대사인적 효력이론이 제시되기도 하고, 국제법상 권리와 의무를 갖 는 주체를 국가로 한정하지 않고 비국가행위자로 확대하는 이론구성이 시도되 * 본 연구는 숙명여자대학교 2009학년도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해 수행되었음. 이 논문 은 2009년 11월 28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법학전문대학원생을 위한 인권포럼에서 발표된 바 있다. 초고를 읽고 유익한 조언을 해준 정성훈 교수(서울시립대)와 김연식 선생(영국 에딘버러대 박사과정)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 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다. **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조교수, 법학박사. *** 투고일자 2010년 11월 10일, 심사일자 2010년 12월 1일, 게재확정일자 2010년 12월 20일.
252 법철학연구 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구성은 국가/개인, 국가/국가의 대립항을 벗어 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제에 전면적으로 대처하기에 미흡한 면이 있 다. UN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초국적 기업의 인권책임에 대한 행동강령이 나 규범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을 해왔지만, 공식적인 국제규약 하나 제정하지 못하고 있는 저간의 사정에는 기업의 강력한 반대도 있었지만, 이론의 빈곤도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루만(Niklas Luhmann)의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은 특별한 의미 를 가지고 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인간이나 인간집단, 인간의 행위나 의식을 이론적 분석단위로 삼지 않는 인간이 없는 사회이론 이다. 역사의 주역이었던 인간은 사회의 환경으로 밀려나고, 국가/개인의 대립항은 체계/환경의 차이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무시되거나 인권이 무의미해지는 것 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체계이론에 의해 인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 운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체계이론 의 시각에서 인권 이 어떻게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비규 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체계이론이 가장 규범적인 영역인 인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아래에서는 먼저 루만 체계이론의 전반적인 개요를 인간이 없는 사회이론이라는 점에서 요약하고(II), 체계이론이 현대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관련하여 인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III). 이어서 루만의 체계이론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토이브너의 논의를 통해 체계 이론적 인권이론을 더욱 풍부하게 설명해볼 것이며(IV),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이 기존의 인권이론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새로운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V). II. 인간이 없는 사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 1. 사회이론의 분석단위로서의 소통체계 루만의 체계이론은 오늘날 가장 유력한 사회이론 중 하나이다. 1) 특히 루만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53 의 이론은 거대이론이 종말을 고하고, 미시적 해체적 분석이 유행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체계이론은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개념의 어휘 를 발전시 킴으로써, 복잡하고 다원적인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2) 이러한 시도가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 혁명에 필적하는 패러다임 전환 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그 중요한 출발점은 인간을 사회이론의 기본적 분석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다. 루만의 사회이론은 인간이나 인간의 집단, 인간의 의식, 인간 사이의 관계 등에서 출발하는 전통적 사회이론과는 달리, 소통 (Kommunikation)을 사회분 석의 기본단위로 상정한다. 4) 소통은 인간의 육체나 의식의 외부에 있다. 의식 1) 루만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이론개요에 대해서는 노진철, 루만의 자기준거적 체계 이론과 성찰적 현실진단, 과학사상, 제35호 (2000) 참조. 2) S. Holmes, and C. Larmore, Translator s Introduction, in N. Luhmann, The Differentiation of Socie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xiii쪽; 그 런 점에서 스스로의 이론을 개념의 혁명 (conceptual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N. Luhmann, The Autopoiesis of Social Systems, in F. Geyer and J. van der Zouwen (eds), Sociocybernetic Paradoxes: Observation, Control and Evolution of Self-steering Systems (London: Sage, 1986), 178쪽. 3) N. Luhmann, A Sociological Theory of Law, trans. E. King and M. Albrow, ed. M. Albrow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5), xii쪽; J. Bjarup, Niklas Luhmann s Paradigm and his Theory of Law, Rechtstheorie, 23 (1992), 320-326 쪽; M. King and C. Thornhill, Introduction, in M. King and C. Thornhill (eds), Luhmann on Law and Politics: Critical Appraisal and Application (Oxford: Hart Publishing, 2006), 8쪽 참조. 4) Luhmann, 위의 글(주2), 177쪽. 루만의 소통은 인간의 의사와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는 점에서, 화자와 청자의 의사 가 상호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을 뜻하는 하버마스 (Habermas)의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의사소통보다는 소통 이라 고 번역하거나 (G. Kneer and A. Nassehi, 정성훈 역,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갈무리, 2008], 105쪽 주 16 참조; 하지만 정성훈 교수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커뮤니 케이션 으로 학계의 용어를 통일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커뮤니케이션 이라고 음 역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남복, 말 과 글 의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사회체계 로서 커뮤니케이션, 사회이론, 2004 봄 여름호, 85-116쪽; 이철, 루만의 자기생 산 체계 개념과 그 사회이론사적 의의, 담론 201, 13-3 (2010), 93쪽; 김성재, 체계 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아래에서는 일단 소통 으로 번역어 를 통일했다.
254 법철학연구 은 소통에 영향을 미치지만, 소통과 의식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의식과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5) 소통과 의식은 서로에게 불투명하고, 서로 조종하 지 못하며, 서로에게 오로지 잡음(noise)이나 교란(disturbance, perturbation)으로서 만 작동한다. 6) 이들은 어떤 상위의 슈퍼체계(supersystem)에 의해 통합되거나 조정되는 것도 아니며, 서로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7) 루만의 사회이론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소통이다. 예컨대, 예술적 소통을 관찰한다는 것은 예술작품의 저자의 의식을 들여다보 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소통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의식은 관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의식(저자의 의도)은 소통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화가의 의식이 뇌를 거쳐 화가의 손에 명령을 내리지만, 화가의 의식은 그림으로 완벽 하게 이전될 수 없다. 심지어 저자 자신도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이미 그려진 그림에 대한 소통은 저자의 의도와는 독립적일 수밖 에 없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의식도 소통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루만의 체계이론은 화가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의식 대신, 예 술적 소통 그 자체를 사회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루만은 소통의 귀속주체에 대한 관심을 접고, 대신 소통 그 자체만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만 관찰 가능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인간은 소통 을 직접 통제할 수 없으며, 소통체계는 그 작동이 닫혀 있다. 즉, 루만의 사회이 론의 대상인 사회적 체계는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작동적, 폐쇄적 사회체계 이다. 8) 여기서 자기생산성 (autopoiesis)의 개념이 등장한다. 자기생산성이란 스스로의 구성요소를 스스로 생산해낸다는 뜻이다. 소통은 외부의 환경(예컨대 인간)에 의해 자극을 받고 교란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구성요소를 스스로 생산해내며, 환경의 자극에 단순히 순응하지 않는다. 인간이 의식의 명령에 의 해 육체의 목숨을 끊으면(자살), 의식체계와 생명체계는 자기재생산을 멈추게 5) N. Luhmann, How can the Mind Participate in Communication?, in H. U. Gumbrecht and K. L. Pfeiffer (eds), Materialities of Communica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380쪽. 6) Luhmann, What is Communication?, Communication Theory, 2-3 (1992), 257쪽. 7) Luhmann, 위의 글(주5), 382쪽. 8)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Suhrkamp, 1997), 205쪽 (이하에서는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로 인용).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55 되지만, 소통은 멈추지 않는다. 9) 소통은 스스로의 작동을 중단하는 시도 자체 가 불가능하다. 10) 이렇게 소통은 소통이 소통을 낳는 자기지시적, 자율적 과정 속에서 재생산되며, 여기서 인간은 사회의 환경 에 불과하며, 인간의 의도나 결정은 사회현실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다. 11) 소통이 작동하려면 인간이 필 요하지만, 인간은 소통에 필요한 외부조건 일 뿐 소통과 사회의 필수 요소 가 아니다. 12) 루만은 소통의 자기생산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인간은 소통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의 뇌도 소통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도 소통할 수 없다. 오로지 소통만이 소통할 수 있다. 13) 루만은 소통이 정보(Information), 통지(Mitteilung), 이해(Verstehen)의 3가지 요소의 선택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14) 소통되기 위해 정보가 선택되고, 정 보를 통지하기 위해 전달 방법이 선택되고, 이것은 여러 방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정보, 통지, 이해의 종합을 통해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식 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창발적 사건 (emergentes Geschehen)이 성립한다. 15)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으로 작동되면서, 소통체계는 인간의 의식 등 환경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자율적인 질서를 형성한다. 16) 요컨대, 루만에게 인간이나 인간의 행 9) N. Luhmann, The Individuality of the Individual: Historical Meanings and Contemporary Problems, in T. Heller, M. Sosna and D. E. Wellbery (eds), Restructuring Individualism Autonomy, Individuality and the Self in Western Though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6), 325쪽. 10) 이것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공자나 칸트가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소통되고, 유훈통 치 같은 것이 가능한 것은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11) N. Luhmann,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Frankfurt/ M: Suhrkamp, 1984), 288쪽 (이하에서는 Soziale Systeme으로 인용). M. King and A. Schütz, The Ambitious Modesty of Niklas Luhmann, Journal of Law and Society, 21-3 (1994), 266-267쪽 참조. 12) H. Moeller, 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 (Illinois: Open Court, 2006), 8쪽. 13) Luhmann, 위의 글(주5), 371쪽; 또한 N. Luhmann, On the Scientific Context of the Concept of Communication, Social Science Information, 35-2 (1996), 265쪽 참조. 14) Luhmann, Soziale Systeme, 4장; Kneer and Nassehi, 위의 책(주4), 114쪽 이하 참조. 15) Luhmann, Soziale Systeme, 196쪽; 정성훈,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대한 하나의 이해, 진보평론 40호 (2009), 243-244쪽. 16) Kneer and Nassehi, 위의 책(주4), 100쪽.
256 법철학연구 위가 아니라 소통 만이 진정한 사회적 사건 (social occurrence)일 수 있으 며, 17) 루만 사회이론의 분석대상은 바로 인간이나 행위 아니라, 소통으로 구 성되는 사회적 체계들이다. 18) 2. 소통체계와 인간 인간의 의식과 육체로부터 분리된 소통체계가 상정되면서, 인간은 생명체 계, 의식체계, 그리고 사회적 체계 (soziale Systeme)로 동시에, 즉 삼차원적으 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19)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생명을 부 여받으며 의식체계를 발전시켜서 사회적 체계의 소통에 참여한다. 이 세 체계 들은 각자 자기재생산을 하고 있는 자율적인 체계이고 서로에 닫혀 있다. 예컨 대, 의식은 소통을 결정할 수 없고, 소통이 육체(감각기관)를 통해 의식으로 전 달되는 과정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평등하며, 어느 것 이 본질적이라거나 중심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인간은 단일한 자기생산체계가 아니 라 육체로서, 정신으로서, 사회로서 존재한다. 20) 생명체계, 의식체계, 사회적 체계는 각각 독립적인 자기생산체계이지만, 어느 한 체계도 인간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인간은 어느 한 곳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 회의 구성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보기 위해서는 3개의 체계를 각각 작 동단위로 해서 관찰해야 한다. 21) 루만의 사회적 체계이론은 이 중 사회적 체계 를 그 대상으로 삼는 이론이다. 22) 17) Luhmann, 위의 글(주13), 263쪽. 18) N. Luhmann, Ökologische Kommunikation (Opladen: Westdeutcher Verlag, 1996), 269쪽. 19) Moeller, 위의 책(주12), 80쪽. 20) Luhmann, 위의 글(주9), 323쪽; Kneer and Nassehi, 위의 책(주4), 199쪽. 21) 정성훈, 인간적 사회와의 작별: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관을 통한 새로운 사회비판의 출발점 모색, 시대와 철학, 18-2 (2007), 90쪽. 22) 마찬가지로 생명체계이론은 생명체계를, 의식체계이론은 의식체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57 3. 인간이 없는 사회이론 사회이론에는 여러 가지 조류가 있지만, 대개 인간 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 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인간다움(humaneness)의 쇠퇴를 우려하는 비관 주의 나 인간사회의 밝은 전망에 대한 낙관주의 는 정반대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유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루 만은 인간을 중심에 놓는 이론은 세상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23) 그의 체계이론에서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자기생산적 단일체(unity) 는 없으며, 24) 인간 그 자체는 체계이론에서 특별한 이론적 위치 를 가지고 있지 않다. 25) 자연스럽게 루만은 인간의 진보나 계몽에도 관심이 없 으며, 그의 이론은 완성(perfection)에 대한 이론도 인류의 완성가능성 (perfectibility)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26) 이러한 접근은 전통적인 인간중심주 의 의 전통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사회이론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 미가 있다. 27)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인간이나 주체성 등의 개념을 해체하려고 하거나, 28) 23) Moeller, 위의 책(주12), 3쪽 이하, 79쪽 이하 참조. 24) Luhmann, 위의 글(주9), 323쪽. 25) Moeller, 위의 책(주12), 10쪽. 26) Luhmann, 위의 글(주9), 325쪽. 27) 정성훈, 위의 글(주21), 81-116쪽; 이철, 위의 글(주4), 81-106쪽; 이것은 한편으로 데카르트(Descartes)로 대표되는 주체철학의 전통과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반이성주의, 반주체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니체(Nietzsche), 데리다(Derrida), 보드 리야르(Baudrillard), 리오타르(Lyotard) 등의 해체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 되기도 한다. 리오타르와 루만에 대해서는 W. Rasch, Niklas Luhmann's Modernity: The Paradoxes of Differentia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84-123쪽; 홍사현, 니체의 비극 이론과 루만의 관찰 개념 비교;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니체연구 제7집 (2005); 41-70쪽; 서규환, 니클라스 루만의 시 스템 이론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하여, 정책분석평가회보 제11권 제2호 (2001), 11-13쪽 참조. 반면, 루만의 체계/환경 구분이 인식주체/세계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주체철학의 유산을 답습하고 있다는 하버마스의 비판도 있다; J. Habermas, 이 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424-442쪽 참조. 28) R. Laermans and G. Verschraegen, Modernity and Individuality: A Sociological Analysis form the Point of View of Systems Theory, in A. van Harskamp and
258 법철학연구 인간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인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루만에 따르면,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은 전통적인 인간주의에 비해 인간 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29) 인간을 배제한 이론이 인간을 오히려 더 보호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다음에서 살펴볼 인권 에 대한 체계이론의 이해 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될 것이다. III. 현대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인권의 기능 1. 사회 분화의 유형들2 앞서 살펴보았듯이 루만은 인간의 육체 및 의식과 분리된 사회적 체계 (soziale Systeme)를 사회분석의 기본단위로 삼는다. 사회적 체계는 소통체계로 서의 특징을 가지며 상호작용체계, 조직체계, 사회체계(Gesellschaft)로 구성된 다. 30) 상호작용체계는 개별 인격들이 서로의 인지에 기초하여 소통하는 체계 이고, 조직체계는 구성원의 자격과 가입조건에 근거하는 체계이고, 이를 모두 포괄하는 사회적 체계가 바로 사회체계이다. 루만은 사회체계가 분화형태에 따라 발전한다고 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분화형태들을 제시한다. 31) 루만은 근 대 사회 이전에는 분절적(segmentär) 분화 와 계층적(stratifikatorisch) 분화 가 지배적이었다고 본다. 분절적 분화는 하부체계가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분 A. W. Musschenga (eds), The Many Faces of Individualism (Leuven: Peeters, 2001), 121쪽. 29) Luhmann, Soziale Systeme, 288쪽; N. Luhmann, Operational Closure and Structural Coupling: The Differentiation of the Legal System, Cardozo Law Review, 13 (1992), 1422쪽. 30) 이에 대한 설명으로 Kneer and Nassehi, 위의 책(주4), 71쪽 이하 참조. 31) 사회진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자세한 것은 N. Luhmann, The Differentiation of Society, trans. S. Holmes and C. Larmor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Luhmann, Soziale Systeme, 5장, 10장;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4장; 김종길, 니클라스 루만: 중심없는 사회, 현대사회의 구조와 변동 (사회비평사, 1996), 75쪽 이하; Kneer and Nassehi, 위의 책(주4), 150쪽 이하 참조.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59 화형태이며, 계층적 분화는 하부체계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분화형태이 다. 그리고 17 18세기의 근대유럽사회에서는 기능적 분화 가 지배하는 새로 운 시대가 열린다. 사회(체계)는 경제, 과학, 정치, 예술, 그리고 법 등 각각의 체계로 해당 체계가 부담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 에 따라 분화된다. 각각의 부 분체계들은 각자가 맡고 있는 전문화된 사회적 기능에 따라 분화되며, 각각 체 계 고유의 합리성을 발전시킨다. 이 기능체계들은 서로 위계가 없이 평등하며, 서로를 자극하면서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서로의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다. 32) 모든 체계를 통제하거나 지휘하는 단일한 체계도 없으며, 사회통합은 어떤 중심 조직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루만은 현대사회를 초질서적 심급(übergeordnete Instanaz) 이나 정점 (Spitze)이 없는 중심없는 사회 라고 설명한다. 33) 2. 근대사회와 제도로서의 인권 계층적 분화가 지배했던 전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원리는 사회적 지위 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신분이나 가족 등을 통해 각각 지위와 직분을 부 여받고 그에 따라 인격을 얻는다. 인간은 어떤 집단(예컨대, 부족, 가족, 국가 등) 에 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통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 았다. 34) 이렇게 인간은 각각의 집단에 완전히 포함되어 그 지위가 변하지 않 고, 두 개 이상의 집단에 동시에 소속될 수 없기 때문에, 소속에 따라 부여되는 사회적 지위가 한 인간의 인격(personality)의 가장 안정된 특징이 된다. 35)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에 직접 포함 또는 완전한 포함 (total inclusion or full i 32) Luhmann, 위의 책(주18), 97쪽. 루만은 후기저작에서 법, 경제, 정치, 과학, 종교, 교 육, 예술 등 다양한 기능체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을 시도한다. 예컨대, 법에서는 N. Luhmann, Das Recht der Gesellshaft (Frankfurt/M: Suhrkamp, 1993) (이하에서는 Das Recht der Gesellshaft로 인용), 예술에서는 N. Luhmann, Die Kunst der Gesellschaft (Frankfurt/M: Suhrkamp, 1995) 참조. 33) Luhmann, 위의 책(주18), 222쪽; N. Luhmann, 김종길 역, 복지국가의 정치이론 (일신사, 2001), 29-30쪽; 김종길, 위의 글(주31), 79-85쪽 참조. 34) Luhmann, 위의 글(주9), 318쪽. 35) Luhmann, 위의 글(주9), 318쪽.
260 법철학연구 clusion)에 의해서 그 인격이 표상되는 것이다. 36) 사회적 지위에 따라 소통의 기회도 불평등하게 주어진다. 37)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지위에 따라 그에 합당한 소통에만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농노의 지위를 부여받아 태어난 사람은 정 치적 소통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된다. 하지만,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함께 인간은 어느 특정 체계에 소속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의 지위는 극도로 취약해졌다. 38) 근대사회에서 인 간은 사회적 지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누렸던 보 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그들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인 주관적 권리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인권은 전근대사회에서 의 모든 확실한 지위들의 상실에 대한 보상 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39) 따라서, 루만의 사회이론에서 인권 40) 은 근대사회에서 특별한 기능을 갖는 제 도이다. 41) 즉, 인권은 초역사적인 보편적 규범이거나 신비로운 기원을 가진 36) Moeller, 위의 책(주12), 87쪽. 37) Luhmann, 위의 책(주31), 234쪽. 38) 이에 대한 개요는 Luhmann,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 Studien zur Wissenssoziologie der modernen Gesellschaft, Bd. 3 (Frankfurt: Suhrkamp, 1989), 149쪽 이하; Luhmann, 위의 글(주9), 313-325쪽; Laermans and Verschraegen, 위의 글(주28), 121쪽 이하 참조. 39) Luhmann, Das Recht der Gesellschaft, 487-488쪽. 체계이론의 인권이론이 사회진 화에 따른 구조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적 정초 이고, 이 구조의 문제를 해 결하는 기능의 관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기능적 정초 라고 설명하는 정성훈, 형이 상학 이후의 인권이론 모색: 루만과 하버마스로부터, 고려법학 제58호 (2010), 131-133쪽 참조. 40) 루만은 1965년 제도로서의 기본권 이라는 단행본을 발표한 이후, 이후의 저작에서 는 인권 또는 주관적 권리 라는 용어가 더욱 빈번히 사용된다. 루만이 제시한 인권 과 기본권의 기능 에 주목하는 본 논문에서 이 두 용어의 구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 지 않는다. 예컨대, 현실에서 인권도 기본권도 체계분화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 다. 따라서 아래에서도 구분없이 사용하지만, 인권과 기본권의 구분이 루만의 사회이 론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헌법적 기본권을 인권의 탈역 설화의 한 형식으로 이해하는 정성훈, 위의 글(주39), 135-138쪽 참조. 41) 루만의 인권과 기본권에 대한 이해는 N.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Ein Beitrag zur politischen Soziologie (Berlin: Ducker und Humbolt, 1965), 12쪽. (이하에서는 Grundrechte als Institution로 인용); N. Luhmann, Zur Funktion der subjektiven Rechte, in N. Luhmann, Ausdifferenzierung des Rechts: Beiträge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61 초실정적 규범 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기능적 필요에 따라 탄생한 역사적 산물 인 것이다. 42) 같은 맥락에서 루만은 인권의 제도화를 근대사회의 구조적 명 령 이라고 말한다. 43) 이것은 인권을 근대적 자연법론에서처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거나 규 범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법실증주의에서처럼 인권을 단순히 실정법의 산 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지도 않다. 이러한 자연법적 접근과 법실증주의적 접근 대신 루만은 사실적 사건 (ein faktisches Geschehen)으로서의 인권의 사회 적 기능에 주목한다. 44) 즉, 루만에게 인권은 윤리나 법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 니라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제도 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45) 3. 근대사회에서 인권의 기능 (1) 체계에 접근하게 해주는 인권 앞서 설명한 바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지위를 부여받았던 전근대사회에 서는 인간에게 인권이 불필요했다. 인간을 속박했던 것도 지위와 집단이었지 만, 인간을 보호해주었던 것도 지위와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근대사회 에서는 인간은 어느 특정체계에 소속될 수 없고, 그에 따라 인간의 지위는 불 안해졌다. 이러한 불안한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인권 이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봉건적 속박에서 풀려난다. 이렇게 사회의 속 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제 어떤 체계에 전적으로 속하지 않으며, 인간은 어떤 특정한 체계에 속하지 않고, 대신 여러 체계들의 상호의존에 의존한다. 46) 인간 zur Rechtssoziologie und Rechtstheorie (Frankfurt/M: Suhrkamp, 1999), 360-373 쪽; Luhmann, Das Recht der Gesellschaft, 115-117, 481-490, 571-586쪽 참조. 42) N.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12쪽; Philippopoulos-Mihalopoulos, Niklas Luhmann: Law, Justice, Society (London: Routlege, 2009), 154쪽. 43) Luhmann, Das Recht der Gesellschaft, 115쪽. 44)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13쪽. 45) G. Verschraegen, Human Rights and Modern Society: A Sociological Analysis from the Perspective of Systems Theory, Journal of Law and Society, 29-2 (2002), 262쪽 참조. 46) Luhmann, 위의 글(주9), 319쪽.
262 법철학연구 은 여러 기능체계로 분배될 수 있고, 경제, 사법, 정치, 교육, 예술 어느 체계에 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47) 인간은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상 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경제적 소통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교육적 소통에, 정치에 관여할 때는 정치적 소통에 참여할 수 있다. 48) 어느 한 체계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었던 전근대사회에서와 달리, 근대사회의 모든 인간은 모든 기능 체계에 대해 모두 보편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기능적 포함 (multi-functional inclusion)이 실현된다. 49) 인간은 원칙적으로 모든 체계에 대한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보장받는다. 부와 권력에 상관없이 어 느 부분체계에도 참여할 수 있다. 재산이 없다고 해서 투표를 못하는 것도 아 니고, 신분이 낮다고 해서 어떤 상점에 출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평등이 모든 사람이 모든 체계에 똑같은 정도로 참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 떤 사람은 특정 체계의 소통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법조인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법적 소통에 많이 참여한다. 하지만 그들도 상점에 가면 경제적 소통을 하고, 선거가 있으면 투표를 통해 정치적 소통을 한다. 루만은 이러한 (전근대 사회 로부터의) 배제 와 (근대 사회 에의) 포함 이 개 인과 사회 의 새로운 종류의 (탈-자연법적) 극적 긴장(Dramatik)에 대한 구조적 기초 라고 본다. 50)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어떠한 기능체 계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인권의 기능이다. 즉, 자유, 평등, 인권은 보편적 포함 의 상징이다. 51) 비유적 47) Luhmann, 위의 책(주38), 158-159쪽;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744쪽, 1066쪽; Luhmann, 위의 글(주9), 318쪽; 인간은 복수의 소통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마을회관에서 열린 토론에 참여하면서, 앞에 놓인 컴퓨터로는 인터 넷쇼핑몰에서 상품을 구매하고 있는 사람은 정치적 소통과 경제적 소통에 동시에 참 여하고 있는 것이다. 48)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각 소통체계에 참여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지 실 제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예전처럼 신분에 의해 상점 출입 이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화폐가 없다면 현실적으로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없다. 49) Verschraegen, 위의 글(주45), 266쪽; A. Braeckman, Niklas Luhmann s Systems Theoretical Redescription of the Inclusion/Exclusion Debate,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32-1 (2006), 70쪽; Moeller, 위의 책(주12), 60쪽. 50) Luhmann, 위의 책(주38), 158쪽. 51) Braeckman, 위의 글(주49), 72쪽.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63 으로 얘기하자면, 인권은 한편으로 체계분화를 유지시켜주는 모눈판 (grid)의 역할을 하면서, 다른 한편, 인간이 어느 한 체계에 고정되지 않은 채 여러 체계 에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게 해주는 탈 것 (vehicle)의 기능도 한다. 52) 근대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의 목록들은 이러한 소통체계에 참여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을 마련한다. 생명과 신체의 완전성과 거주 이전의 자유는 인간 이 소통체계에 참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53) 또한 인간은 법에 의 하지 않고서는 구금되지 않아야 하며, 고문을 받거나 잔인한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할 권리도 부여되 어야 하고, 이를 언론, 집회, 결사, 정당 등을 통해서도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 다. 평등이나 차별받지 않을 권리 역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소통체계에 참여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54) 이러한 자유권들은 인간이 소통체계에 참여하 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를 보장하는 기능을 한다. 사회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면, 기능체계에 대한 참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정치나 문화적 소통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현실적으로 제약된다. 여기서 사회권은 기능체계에 대한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로 기능한다. (2) 체계분화를 유지하게 해주는 인권 기능적 분화된 현대사회를 다시 탈분화 55) 시키는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정치 체계의 확장이다. 기능적 분화에 따라 정치체계는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정치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 다른 체계 를 정치로 통합하는 경향, 즉 탈분화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56) 여기서 인 52) Philippopoulos-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56쪽. 53) G. Verschraegen, Systems Theory and the Paradox of Human Rights, in M. King and C. Thornhill, Niklas Luhmann s Theory of Politics and Law (Hampshire;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3), 115쪽. 54) Verschraegen, 위의 글(주53), 117-119쪽. 55) 탈분화 는 Entdifferenzierung(dedifferentation)의 번역어로서 분화 (Ausdifferenzierung)의 반대말이다. 근대사회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들의 경계가 무너지 고 다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는 것, 즉 재통합 을 의미한다.
264 법철학연구 권은 정치체계에 의한 (다른 체계의) 포섭(Korrumpierung) 57) 을 제한하는 사 회적 제도로 기능한다. 예컨대, 종교의 자유의 제도화를 통해 종교에 대한 정 치 개입이 제어될 수 있고, 언론 출판의 자유의 보장을 통해 언론에 대한 국 가의 통제가, 예술의 자유의 보장에 의해 예술에 대한 경제의 개입이 제한될 수 있다. 즉, 인권(과 이를 기본권으로 제도화한 헌법)은 정치의 탈분화 경향에 맞서 정치체계의 자기-제한 을 제도화하는 사회적 대항-제도(counterinstitution) 라고 할 수 있다. 58) 여기서 인권은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권리가 아 니라, 각 부분체계가 서로의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기능한다. 자신의 경계 영역을 넘어서 확장하려는 경향은 정치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 체계에서도 동일하다. 59)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체계가 탈분화의 경향을 갖는다. 언론은 정치나 법의 소통을 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가두려고 하고, 종 교는 정치나 경제를 종교적 소통으로 환원하려고 한다. 여기서 인권은 다양한 사회적 체계들의 기능적 분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60) 예컨대, 예술의 자유 가 권리로서 제도화되면, 예술에 경제나 정치가 개입할 가능성이 제한된다. 학 문의 자유가 권리로서 제도화되면, 학문에 정치, 종교, 경제 등이 직접 영향을 미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자유와 인권의 제도화는 정치의 확장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기능적 하부체계의 분화를 유지시켜줌으로써 탈분화의 위험 을 막고, 근대사회의 분화된 구조 를 보호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61) 4. 포함과 배제 전근대사회에서의 속박에서 풀려난 근대의 인간은 인권이라는 제도를 통해 모든 기능체계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 56)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97쪽. 57)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37쪽. 58)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856쪽; Verschraegen, 위의 글(주45), 271-272쪽; 강희원, 루만의 체제이론과 현대법의 이해, 한국법철학연구회, 현대법 철학의 흐름 (법문사, 1996), 383-384쪽 참조. 59) Verschraegen, 앞의 글(주53), 112쪽. 60)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71-72쪽; 강희원, 위의 글(주58), 383쪽 참조. 61) Luhmann, Grundrechte als Institution, 24, 71-72, 135쪽.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65 한 자유가 실현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루만은 이 문제를 포함과 배 제 의 문제로 다룬다. 62) 근대사회에서의 포함은 배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63) 즉,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의 풀려나야(배제) 하지만, 역설적 으로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시 기능체계에 속해야 한다. 근대사회에 서 기능체계들은 인간들의 모든 체계에의 포함 (all-inclusion)을 목표로 한 다. 64) 원칙적으로 기능체계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개방되어 있다. 종교, 성별, 인종 때문에 기능체계에의 참여가 배제되는 일은 없다. 요컨대, 전근대사 회에서의 완전한 포함은 근대사회에서 독특한 형태의 배제를 통한 모순적인 포함 으로 대체된다. 65) 하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실제로 평등한 것은 아니 다. 근대사회에서 평등한 것은 사회적 체계들일 뿐, 인간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부자와 빈자의 차이 등 불평등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더 이상 계급이나 신 분과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 지위에 의한 불평등은 아니다. 근대 사회 에서의 불평등은 좀 더 교묘하다. 모든 사회체계들에 사람들은 평등하게 참여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2차적 배제형태 (a second form of exclusion)이다. 66) 이는 전근대 62) 루만은 포함과 배제의 차이가 다음 세기의 지배적 차이 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N. Luhmann, Beyond Barbarism, in Moeller, 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 [Illinois: Open Court, 2006], 270쪽 이 글은 루만의 1997년 저작 사회의 사회 에서 발췌한 것이다), 1998년 루만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포함과 배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618-634쪽; N. Luhmann, Soziologische Aufklärung 6: Die Soziologie und der Mensch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1995), 237-264쪽; Philippopoulos- 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21쪽 이하; 윤재왕, 포섭/배제 새로운 법개념?: 아감벤 읽기 I, 고려법학 제56호 (2010), 265-270쪽; 정성훈, 루만의 다차원적 체 계이론과 현대 사회 진단에 과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215 쪽 이하; 정성훈, 법의 침식과 현대성의 위기, 법철학연구 제12권 제2호 (2009), 346쪽 이하 참조. 63) Philippopoulos-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21쪽. 64) Moeller, 위의 책(주12), 60, 93쪽. 65) Moeller, 위의 책(주12), 87쪽. 66) Verschraegen, 위의 글(주53), 120-122쪽. 루만이 배제의 현실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 은 1990년대 브라질의 빈민촌 favelas를 방문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Philippopoulos-
266 법철학연구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체계 참여권을 보장받지 못해 다시 배제된 것을 말한다. 기능체계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인 간의 실질적 체계 참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재산의 유무에 따라 정치참여가 법적으로 제한되지는 않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에게는 정치적 소통 에 참여할 기회는 말할 것도 없고, 잠깐 시간을 내서 투표를 할 여유조차 없다. 법적 소통에도 누구나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고 이것은 법 앞의 평등 이라는 헌법적 원리로 보장되어 있지만, 법률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오지나 변 호사를 고용하기 힘든 경제적 여건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법적 소 통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되어 있다. 그렇다고 기능체계로부터 벗어나서 고립 된 삶을 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67) 산간오지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전기나 상수도도 없이 자급자족하면서 살지 않는 한, 현대의 모든 인간은 기능 체계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2차적 배제는 현실에서 악화일로를 겪게 된다. 권위주의 국가나 독재 체제에서는 정치적 참여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체계에 대한 참여에 어려 움을 겪는다. 예컨대, 극도의 빈곤은 교육, 정치, 사법에의 참여를 어렵게 만든 다. 그래서 루만은 포함의 긍정적 통합력은 약하고, 배제의 부정적 통합력은 강하다고 말한다. 68) 즉, 한 체계로의 포함은 다른 체계로의 포함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하나의 사회체계로부터의 배제는 다른 체계에서 반복을 통해 배제 가 강화되는 증폭 효과 또는 도미노 효과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69) 이것은 세계화의 그늘이기도 하다. 기능체계는 국가적 경계에 의해 제한되 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능체계로 구성된 사회는 그 자체로 세계사회 이다. 70) 세 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22쪽; 윤재왕, 위의 글(주62), 267쪽 참조. 67) 정성훈, 위의 글(주21), 111-112쪽. 68) Luhmann, 위의 글(주62), 270쪽;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631 쪽; Das Recht der Gesellschaft, 584쪽. 69) Luhmann, 위의 글(주62), 270쪽;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630 쪽 이하; Braeckman, 위의 글(주49), 76쪽. 70) N. Luhmann, The World Society as a Social System, in his Essays on Self-Referenc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175-190쪽; N. Luhmann, Globalization of World Society: How to Conceive of Modern Society, International Review of Sociology, 7-1 (1997), 67-79쪽 참조.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67 계시민은 원칙적으로 누구나 글로벌화된 기능체계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 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화된 소통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기능체계의 발전 정도는 세계적으로 균등하지 않고, 실제로 세계화에서 배제 된 사람들은 기능체계에 참여할 수 없다. 제3세계의 사람들은 세계적 소통에 참여할 기회가 실질적으로 박탈되어 있다. 극도의 빈곤에 신음하는 아프리카 의 빈민들과 분쟁지역에서 고통 받는 난민들에게 기능체계에의 참여는 사실상 보장되지 않는다. 문제의 해결도 쉽지 않다. 어느 한 체계에서의 배제는 다른 체계의 배제로 쉽게 연결되지만, 어느 한 체계에의 참여는 다른 체계로의 참여 로 쉽게 확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제체계에서의 배제는 정치, 예술, 과학에서의 배제로 이어지지만, 정치체계에의 참여가 보장된다고 해도 경제, 예술, 과학체계로의 참여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기능적 분화는 한편으로 원리상 전부 포함을 전제했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배제 (mass exclusion)를 동시에 낳았다. 71) 루만은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가 완전-포함이라는 가정을 현실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72) 여기서 인권이 라는 제도는 인간은 배제 없이 모든 기능체계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보편적 포함의 환상 을 구축할 뿐이다. 73) 배제는 포함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또 다른 2차 배제를 낳는 것이 현실이라면, 제도로서의 인권의 기능은 근대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이제 긴급한 문제는 배제가 아니라 포함의 가능성과 한계 이다. 74) 71) Luhmann, 위의 글(주62), 269쪽 이하; Moeller, 위의 책(주12), 61-62쪽 참조. 경험 적 차원에서, 주변부 국가에서 사회의 분화는 제한적이며, 따라서 주변부 국가의 체 계의 자기생산 (autopoiesis)은 현실은 아니며 (other라는 뜻의 그리스어 allos를 앞 에 붙여) 타자생산 (allospoiesis)의 현실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M. Neves, From the Autopoiesis to the Allopoiesis of Law, Journal of Law and Society, 28-2 (2001), 242-264쪽. 72) Luhmann, 위의 글(주62), 270쪽. 73) Philippopoulos-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56쪽. 74) Braeckman, 위의 글(주49), 72쪽.
268 법철학연구 IV. 토이브너의 인권이론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의 이론적 의의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토이브너 (Gunther Teubner)의 인권이론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75) 토이브너는 루만의 체 계이론적 시각에서 인권의 의미를 분석하면서도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기본권개념을 제시하고 있어서 논의를 풍부하게 만드는데 참고가 될 수 있다. 1. 세계화와 인권 토이브너가 인권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인권침해 양상 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본래 근대적 인권개념은 주로 시민과 국가와의 대 립 속에서 형성되어 왔지만, 오늘날에는 사적 영역의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도 잠재적 인권침해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76) 비국가행위자들의 인 권침해문제는 먼저 국가의 의무의 차원에서 다뤄졌다. 즉, 비국가행위자들의 인권침해를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아동노동 을 시키고 있다면, 국가가 근로기준을 법으로 만들어서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 고 그 기업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그런 국가중 심모델은 한계에 봉착했다. 초국적 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 77) 의 영향이 점점 커지게 되면서, 심지어 국가주권이 사실상 초국적 기업에 넘어갔다는 지 적도 나오고 있을 정도지만, 78) 이를 국내법이나 국제법으로 효과적으로 규제 75) 토이브너에 대해서는 양천수, 1980년대 이후 전개된 독일 법사회학의 현황: 토이브 너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여, 법과 사회, 30 (2006), 123쪽 이하 참조. 76) 조효제, 인권의 문법 (후마니타스, 2007), 184-186쪽. 77) 비슷한 뜻으로 다국적 기업(multinational corporations 또는 multinational enterprises)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만, 초국적 기업이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P. Muchlinski, Multinational Enterprises & the Law (2n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5-8쪽 참조. 78) M. K. Addo, Human Rights and Transnational Corporations: An Introduction, in M. K. Addo (ed), Human Rights Standards and the Responsibility of Transnational Corporations (The Hague; London; Boston: Kluwer Law International, 1999); F. van Ho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Obligations for Companies and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69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먼저,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활동하는 초국적 기업 에 대해 어떠한 특정 국가의 관할권이 작동하기 힘들다. 국제법적 차원의 규율 역시 간단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국제법에서 초국 적 기업이 국제(인권)법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 다. 79) 물론 사적 개인이나 사적 기관들도 국제인권법상 인권의무의 영역에 있 다. 실제로 초국적 기업의 인권책임은 세계인권선언이나 기업과 인권에 관한 UN 문서들, ILO 삼자원칙, 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 등의 국제적 규범 들에 의해 근거지어 진다. 하지만, 기업이 국제법상 권리/의무의 주체라는 점 이 인정되어도, 이것이 기업에 의무와 책임을 직접 부과할 수 있는지는 또 다 른 문제이다. 이것은 기업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했을 경우, 그 기업의 인권침 해에 대해서 국제법적인 책임을 직접 물을 수 있는 것이냐의 문제로서, 흔히 국제법의 제3자효 또는 수평적 효과에 관한 문제로 다뤄진다. 80) 2. 인권이론의 재구성 (1) 행위자 에서 소통절차 로 토이브너의 인권이론은 위에서 간단히 설명한 세계화시대의 인권문제에 대 한 이론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인권침해의 문제를 개별 행위자 Domestic Court: An Unlikely Combination?, in M. Castermans-Holleman et al. (eds), The Role of the Nation-State in the 21st Century: Human Rights, International Organisations and Foreign Policy Essay in Honour of Peter Baehr (The Hage; Boston; London: Kluwer Law International, 1999), 47-59쪽 참조. 세계 화와 인권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M. Freeman, 김철효 역, 인권: 이론과 실천 (아르 케, 2005), 205-214쪽 참조. 79) 다국적 기업의 국제법상 지위에 대한 논의로 정경수, 다국적기업의 인권의무 확립 을 위한 국제법적 모색: 국제인권법의 수평적 효과를 중심으로, 민주법학 제22호 (2002), 216-221쪽; 박미경, 인권을 침해하는 다국적 기업에 관한 규율방안, 법학 논총(한양대), 26-1(2009), 430-433쪽; Hoof, 위의 글(주78), 52-54쪽; N. Jägers, The Legal Status of the Multilateral Corporation Under International Law, in M. K. Addo (ed.), Human Rights Standards and the Responsibility of Transnational Corporations (Hague: Kluwer Law International, 1999), 261-267쪽 참조. 80) Hoof, 위의 글(주78), 54-57쪽.
270 법철학연구 들 사이의 충돌 에서 익명의 소통절차와 개인의 충돌 문제로 전환한다. 81) 루 만의 체계이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소통의 외부에 있고, 소통은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이 소통체계는 고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팽창하면서,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체계이론에서 실재 하는 이 자기생산적 소통체계는 인간이 통제할 수도 없고, 인간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근대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절단되어진 사회적 체계의 연합이며, 사 회적 체계의 작동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 82) 여기서 토이브너는 인권침해의 주체를 단순히 국가에서 사적 행위자로 확대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초국적 기업이라는 사적 주체 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권침해의 또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체 계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의 문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토이브너는 초국적 제 약기업의 가격정책이 AIDS환자의 생명권을 침해한 것인지에 대한 사례를 통 해 이러한 재구성을 시도한다. 8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국적 기업이라는 사적 행위자의 행위 가 아니라, 소통연관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개인이나 개인의 집단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익명의 매트릭스, 즉 집단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자립화된 소통절차 (제도, 기능체계, 네트워크)에서 기인하는 위험을 포착해 내 는 것이다. 84) 예컨대 명령계통을 통한 살해, 익명의 시장의 힘이 낳은 착취 공 장, 종교적 소통이 낳은 종교적 박해 등에 대하여 이를 어떤 특정한 행위자의 작품 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기생산하는 소통체계가 초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다. 나치의 생체실험 역시 단순히 국가에 의한 과학의 예속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의 팽창주의적 경향이 국제 경쟁의 압력과 결부된 결과로 간주된다. 85) 초 81) G. Teubner, Die anonyme Matrix: Zu Menschenrechtsverletzungen durch private transnationale Akteure, Der Statt: Zeitschrift für Staatslehre und Verfassungs- geschichte, deutsches und europäisches öffentliches Recht, 44 (2006), 165쪽 (이하에서는 Die anonyme Matrix 로 인용); 이 논문은 영역본으로도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 The Anonymous Matrix: Human Rights Violations by Private Trans- national Actors, Modern Law Review, 69-3 (2006), 327-346쪽; 한국어 번역으로는 홍성수 역, 익명의 매트릭스: 사적 초국적 행위자에 의한 인권 침해, 인권이론과 실천 제6호(2009), 45-70쪽. 82) 서도식, 시스템과 인간, 대동철학 제17집 (2002), 14쪽. 83) Teubner, Die anonyme Matrix, 161-162쪽. 84)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9쪽.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71 국적 제약기업이 높은 가격을 책정한 것이 AIDS 환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인 지를 다룰 때 역시, 그 기업의 행위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제약산업의 국제적 경제체계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2) 분할적 기본권개념 에서 생태적 기본권개념 으로 토이브너는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분할적 기본권개념 (divisionale Grundrechtskonzepte)에서 생태적 기본권개념 (ökologische Grundrechtskonzepte)으 로의 이행이라고 부른다. 86) 분할적 기본권개념이란 사회를 개별적 주체로 분 할 해 놓고 이들의 균형을 찾는 방법으로 기본권개념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국가 는 전체 사회를 대표하고, 그 국가에 부분(주체) 들이 속해 있고, 인권은 바로 이 주체들의 권리인 것이다. 국가가 사적 주체들의 권리를 침해하 건 사적 주체들 상호간에 인권침해가 일어나건 분할과 균형의 원리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된다. 국가와 개인의 대립을 전제하는 전통적 기본권이론은 물론 이고, 기본권의 효력을 사적행위자로 확대하는 이른바 대사인적 효력론 은 모 두 이러한 구도 하에서 이론이 전개된다. 반면 생태적 기본권개념이란 체계-환경 의 차이라는 루만 체계이론의 기본 적인 사회분석틀을 토대로 하여 기본권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 제는 체계들과 그들의 환경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정당하게 설정할 것인가로 문제가 전환된다. 체계이론에서 인간은 소통으로부터 분리되며, 인간은 소통 체계의 환경이다. 소통체계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고유 영역을 확대하 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이 소통이 인간의 통합성을 위협하 는 것이 새로운 인권문제로 등장한다. 여기서 기본권은 (앞서 살펴본 루만의 제도로서의 기본권이론과 마찬가지로) 소통체계의 경계를 구획하고 제한하는 제도로 이해된다. 여기서 인권문제를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와 인권이 침해되는 대상으로 이분화하여 이해하는 고전 적인 접근은 철저히 배제된다. 인권은 기능적 분화된 체계의 경계를 유지시켜 85)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6쪽. 86) Teubner, Die anonyme Matrix, 165-173쪽.
272 법철학연구 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적 제도이고, 현실의 인간은 결과적으로 이 러한 제도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일 뿐이다. (3) 사회체계들의 통합적 경향과 인권침해의 위협 분화된 체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정치체계이다. 정치는 다른 자율적 영역 들을 정치로 통합시키려고 하고, 인간의 의식과 육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감 행한다. 87)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위협은 정치로 한정되지 않으며, 세계화된 경제, 언론, 종교, 기술, 과학 같이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난 사회 체계들이 새로운 잠재적 위협으로 등장한다. 88) 실제로 이들의 경제적, 사회적 권력은 점점 커지고 인간에게 (심지어 국가보다 더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헌법상의 기본권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지만, 지금은 거꾸로 경제체계가 정치의 자율성에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다. 89) 그런 관점에서 토이브너는 고유한 합리성을 발전시킨 모든 사회 적 영역들이 다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뻗치려고 하는 경향, 즉 사회의 부분 적 합리성의 통합화 경향 90) 을 지적한다. 이전의 인권문제가 주로 국가행위자들의 자의적 활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인권의 문제는 사회적 소통의 소극적 한계 91) 를 정하 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인권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정 치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체계들의 확대경향에 대한 사회적 법적 대항제 87)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3-175쪽. 88) C. B. Graber and G. Teubner, Art and Money: Constitutional Rights in the Private Sphere?, Oxford Journal of Legal Studies, 18-1 (1998), 70쪽; G. Teubner and A. Fischer-Lescano Cannibalizing Epistemes: Will Modern Law Protect Traditional Cultural Expressions?, in C. B. Graber and M. Burri-Nenova (eds), Intellectual Property and Traditional Cultural Expressions in a Digital Environment (Chelteham; Northampton, MA: Edward Elgar, 2008), 28쪽; P. T. Muchlinski, Human Rights and Multinationals: Is there a Problem, International Affairs, 77-1 (2001), 31-47쪽; Verschraegen, 위의 글(주45), 273쪽; Verschraegen, 위의 글(주53), 112쪽 참조. 89) Graber and Teubner, 위의 글(주88), 70쪽. 90)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7쪽. 91) Teubner, Die anonyme Matrix, 181쪽.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73 도들(Gegeninstitutionene) 이라고 할 수 있다. 92) 루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 권은 체계가 자기 경계를 넘어서 확대되지 않도록 하여 체계분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권리는 사적 개인들의 상호적 위협에 관한 것이 아 니라, 제도, 인격, 개인의 통합성을 위한 익명의 소통 매트릭스(제도, 담론, 체 계)에 의한 위해 에 관한 것으로 재해석되며, 93) 여기서 인권의 기능과 역할은 사회적 영역을 침탈하려는 경향에 맞서 사회적 영역들의 자율성을 보장 94) 하 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토이브너의 인권이해에서는 국가와 인간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독립적이고 서로 평등한 소통체계의 경계문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더 이상 기본권이론은 두 사적 행위자들 사이의 평형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를 대신하는 것은 자립 화된 소통 매체의 익명의 매트릭스 의 경계 문제이다. 95) 예를 들어, 어떤 지역 의 문화적 지식이 사적 기업에 의해 상업화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근 대법이 상정하는 개인의 권리는 전통적 지식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상호적 성 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96) 여기서 기본권은 개인뿐만 아니라 익명의 소통과정 에 귀속되며, 이 경우 권리의 수익자는 어떤 집단도 개인도 아닌 전통 지식 그 차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97) 이 때 개인이나 집단의 권 리 대신, 그 지역 고유의 문화권 자체가 권리의 세 번째 하이브리드 형태 로 등장한다. 98) 여기서 기업이라는 행위자와 원주민 개인(또는 집단)의 권리 충돌 은 전통지식 이라는 소통체계와 이를 자본화하려는 세계화된 경제적 소통체 계 의 경계 문제로 전환된다. 물론 이 경계가 적절하게 구획되면, 결과적으로 그 지역의 원주민들 개인 또는 그 집단은 자신들의 문화적 지식에 대한 권리를 92)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8쪽; Teubner and Fischer-Lescano, 위의 글 (주88), 27쪽 참조. 93) Teubner, Die anonyme Matrix, 178쪽. 94) Teubner and Fischer-Lescano, 위의 글(주88), 27-28쪽. 95) Teubner, Die anonyme Matrix, 180쪽. 96) Teubner and Fischer-Lescano, 위의 글(주88), 32쪽. 97) Teubner and Fischer-Lescano, 위의 글(주88), 41쪽 이하 참조. 여기서 토이브너와 피셔-레스카노는 이러한 문화적 지식을 공동체, 연합, 조합, 가족, 혈통 등 공동체나 집단의 권리로 해석하려는 기존의 시도를 비판한다. 98) Teubner and Fischer-Lescano, 위의 글(주88), 32쪽.
274 법철학연구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체계이론에서 인권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가 아니라 체계분 화를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국가-개인의 대립에서 출발하는 전통적인 인권개념을 배제하는 것이며, 대신 체계-환경의 문제, 체계- 체계의 경계 문제로 인권의 문제를 전환하는 것이다. 체계이론에서 독자적인 이론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체계의 환경에 머물러 있는 머물러 있는 인간은 이러한 인권의 기능에 의해 결과적으로 수혜를 얻게 될 뿐이다. V.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의 유용성? 지금 통용되고 있는 보편적 인권규범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후 이후 인간의 보다 나온 상태 를 위해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쓸모 있 는 인권이론이라고 한다면, 인권의 소송가능성을 높여서 법원이 이를 수용할 수 있게 하거나 인권의 실질적인 이행가능성을 높이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론의 유용성을 이해한다면, 루만의 체계이론은 쓸모없는 이론 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체계이론적 인권이해는 매우 추상적 수준에서 전개되 며, 인권의 보편성과 상대성, 이주자의 인권 등의 구체적인 인권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권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실천적 지 침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99) 사실 이 문제는 인권뿐만 아니라 체계이론의 유용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 기되는 문제이다. 루만은 스스로 자신의 체계이론이 건강한 상태에 대한 이 론 (a theory of healthy states)은 아니라고 말한다. 100) 그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어떤 이념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 려고 하는 이론이나 행동주의에도 회의적이다. 101) 실제로 루만의 체계이론은 99) Verschraegen, 위의 글(주45), 281쪽. 100) Luhmann, 위의 글(주9), 325쪽. 101) Moeller, 위의 책(주12), 99-10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만의 체계이론에는 탈분화 의 위험 을 경고하는 어떤 유사-규범성 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Philippopoulos- Mihalopoulos, 위의 책[주42], 146쪽; W. T. Murphy Modernising Justice Inside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75 실천적 함의가 있는 어떤 목표나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만의 체 계이론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강 력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자체는 중요한 공헌이다. 102) 또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청사진을 제공하려고 하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과장된 것임을 밝 혀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유용한 이론이라는 시각도 있다. 103) 그렇다면 이러한 체계이론의 유용성이 인권이론의 차원에서는 어떠한 함의 를 주는 것일까? 루만에게서 인권은 규범적 척도가 아니라, 기능적 분화를 유 지시켜주는 사회적 제도일 뿐이다. 따라서 루만에게 인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꾸자 104) 와 같은 구호는 성립되기 어렵다. 루만의 인권이해는 현대사회에서 의 인권의 기능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관찰하려고 하는 사회학적 관찰이다. 이러한 루만의 관찰은 현재의 인권논의에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기존의 인 권에 대한 논의는 그 철학적 정당화나 (국제)법적 이행을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하는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왔다. 105) 하지만 인권의 인플레 (human rights inflation) 106) 를 우려하거나, 인권담론의 진보성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 107) UK PLC : Mimesis, De-differentiation and Colonisation, in J. Priban and D. Nelken (eds), Law s New Boundaries: The Consequences of Legal Autopoiesis [Aldershort: Ashgate/Dartmouth, 2001], 219쪽 참조). 실제로 루만은 한 인터뷰에서, 기능적 분화가 긍정적 가치 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즉답을 피하면 서도, 우리가 분절적 또는 위계적 분화로 회귀하는 것은 파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Answering the Question: What is Modernity? An Interview with Niklas Luhmann in W. Rasch, Niklas Luhmann's Modernity: The Paradoxes of Differentia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203쪽 이하 참조. 102) W. T. Murphy, From Subject to System: Some Unsystematic Systems- Theoretic Thoughts on Race Equality and Human Rights, in M. King and C. Thornhill (eds) Luhmann on Law and Politics: Critical Appraisal and Application (Oxford; Portland, Oregon: Hart Publishing, 2006), 56-58쪽; W. T. Murphy, The Oldest Social Science: Configurations of Law and Modernity, Oxford: Clarendon Press, 1997), 163쪽 참조. 103) M. King and C. Thornhill, Niklas Luhmann s Theory of Politics and Law (Hampshire;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3), 51-52쪽. 104) 한국의 인권단체 인권연대 의 캐치프레이즈. 105) 예컨대, 인권의 사상사적 기원을 밝히거나 인권의 보편적 정초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인권학의 오랜 과제였다. 인권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M. Ishay, 조효제 역, 세 계인권사상사 (길, 2005), 41쪽 이하, 1장, 2장 참조
276 법철학연구 의 대두는 인권의 강한 규범성을 논증하고 인권개념에 너무 많은 것을 포함시 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사회에서 는 너무 많은 문제를 인권문제로 포괄함으로써 오히려 인권의 가치가 떨어지 고, 인권의 규범성도 힘을 잃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의 강한 규범성을 주장하고, 그 강력한 집행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권이론을 발 전시키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 반면, 인권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빈곤하다. 108)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가 인 간에게 인권을 부여하게 된 역사적 사실 자체에 천착하는 체계이론의 접근방 법 109) 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루만이 인간의 진보를 위한 인권운동 같은 행동주의에 회의적이라고 해서, 이것이 인권운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루만에게 인권운동은 기능체계로의 전부 포함 을 목표로 하는, 즉 (혁명적이 아니라) 기능체계의 분화에 순응하는 보수적인 운동으로 재해석 된다. 110) 예컨대,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인권운동은 세계화의 과정에 서 배제된 자들의 체계참여권을 옹호하는 것이고, 재소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인권운동은 교도소 내에 있더라도 최소한의 체계참여권을 보장받게 하고, 출 소 후에도 사회에서 배제된 자로 남지 않게 하지 않으려는 운동으로 이해된다. 한편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은 새롭게 제기되는 인권문제를 이해하는데 오히 106) B. Orend, Human Rights: Concept and Context (Broadview Press, 2002), 109쪽 이하; A. Fagan, Human Rights: Confronting Myths and Misunderstandings (Edward Elgar Pub, 2009), 6쪽 이하 참조. 107) New Left Review 234호 (1999 March/April)에 실린 특집: 인권의 제국주의 ; S. Žižek, Against Human Rights, New Left Review 34 (July/Aug 2005); A. Supiot, The Labyrinth of Human Rights: Credo or Common Resource?, New Left Review 21 (May-June 2003); C. Douzinas, Human Rights and. Empire: The Political Philosophy of Cosmopolitanism (London: Routledge-Cavendish, 2007); E. Balibar, A. Badiou and S. Žižek 외, 강수영 역,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사랑, 2008) 참조. 108) 같은 맥락에서 인권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A. Woodiwiss, Human Rights (London: Routledge, 2005) 참조. 109) 정성훈, 위의 글(주39), 130쪽. 110) Moeller, 위의 책(주12), 106-108쪽.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77 려 적실하기도 하다. 현대의 사회문제는 구체적 행위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어떤 구조적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경우가 많다. 삼 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구조적 참사는 물론이고,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나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 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기도 하다. 입법에 의한 인권침 해는 그 법안을 추진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의 문제라고 보거나, 제3세계에서 자행되는 아동착취는 초국적 기업이라는 구체적 행위자가 아니 라 국제경쟁체제의 구조적 압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이를 익명의 소통체계 라고 개념화하는 체계이론적 인권이론 의 접근방법은 문제를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적절하게 이해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와 경제의 영역 확장에 따른 다양한 인권문제 역 시 이를 인간-정치 나 인간-기업 의 대립항 대신 체계-환경의 경계, 체계간 경계 문제로 이해할 때, 문제의 구도가 더욱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문제의 구도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인권개념 구축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예컨대, 자유 권과 사회권 등으로 나뉘어졌던 고전적인 인권목록의 구분은 각 기능체계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111) 과학체계에 대해서는 과학권, 예술체계에 대해서는 예술권이 인간을 주체로 하는 주관적 권리 대신 등장한다. 과학권(예술권)은 과학적(예술적) 소통이 다른 경계로 침범하거나 다른 소통체계가 과학적(예술 적) 소통을 침해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화된 체계의 경계를 유지시켜주는 기 능 을 하는 사회적 제도로 이해된다. VI. 나아가며 지금까지 체계이론의 인권 이해를 살펴보았다. 체계이론적 인권이론은 한마 디로 비인간적이고 비규범적이다.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을 분석단위 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고, 규범적으로 인권을 정당화하려는 시 도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비규범적인 인권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체계이론은 기 111) 정성훈, 위의 글(주39), 145쪽.
278 법철학연구 존의 인권이론과는 달리 인권규범의 철학적 정당화를 시도하거나 인권의 이행 을 위한 제도를 설계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인권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기 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을 시도한다. 루만에 따르면, 인권은 한편 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을 보호하고, 배제된 인간이 다시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근대의 사회적 메커니즘이었다. 토이브너는 이를 발전시켜, 개인이나 집 단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익명의 소통 매트릭스의 경계문제를 통해 인권문제를 새롭게 이해하고 나름의 이론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러한 체계이론의 인권이론이 인간 을 분석단위로 삼지 않고, 인권에 대한 규범적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 의 보호를 방기하거나 인간과 인권의 권리를 무가치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권문제를 국가 -개인, 개인-개인 이라는 구도에서, 체계 사이의 경계문제 로 전환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익명적 인권침해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리하다. 물론, 이러한 이 론의 재구성이 고전적인 의미의 실천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체 계이론은 스스로 그런 의미에서의 실천성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하 다. 112) 하지만 기존의 인간중심적 인권이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인권문제의 양상을 설득력 있게 파악하고, 새로운 인권이론의 발전가 능성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충분한 의의가 있다. 112) 예컨대, 체계이론적 인권 이해가 소송가능성(Justiziabilität)을 제도화하는 이론구성 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초국적 기업의 인권침해문제를 체계이론의 방식으 로 접근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지만, 어떤 법적 관할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법적 규제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Teubner, Die anonyme Matrix, 181-183쪽 참조. 토이브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론적으로 보 여주면서, 부분적 합리성들의 충돌에 반응하는 초국적 분쟁해결기구들의 다원적 성 장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G. Teubenr and A. Fischer-Lescano, Regime-Collisions: The Vain Search for Legal Unity in the Fragmentation of Global Law, Michig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25 (2004), 999-1045쪽; G. Teubner, Altera Pars Audiatur: Law in the Collision of Discourses, in R. Rawlings (ed), Law, Society and Economy (Oxford: Clarendon, 1997) 참조.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279 Abstract A Human Rights Theory without Human Beings? Luhmann s Systems Theory and Human Rights Sung Soo Hong This article deals with human rights theory of Nikilas Luhmann. Luhmann s systems theory is a social theory whose theoretical analysis is not based on human beings, human consciousness or human communities; in this sense, this is called a social theory without human beings. Rather, the unit of his analysis is social systems which consist of communications. Luhmann considers contemporary society as a functionally differentiated society. Society consists of differentiated subsystems, each of which reproduces its own value and order; for example, subsystems of modern society are economy, science, politics, art, and law. In this differentiated society, human rights is understood as an institution which has specific functions. From Luhmann s explanation, the functions of human rights are to preserve system s differentiation and to make sure that individuals can access to systems. However, according to Luhmann, human rights, in fact, do not play a role in performing these functions and this is put forward in terms of the problem of inclusion and exclusion. Teubner, who has applied Luhmann s systems theory to legal theories, provides human rights theory from the system's theoretical approaches. According to Teubner, human rights violators today are no longer refined to private actors, but the anonymous matrix of an autonomised communicative medium emerges as a new violators. Then, he tries to see the problems as an ecological problem. From this point of view, the function of rights is to protect the autonomy of social discourses against the totalising tendencies of the communicative matrix.
280 법철학연구 Form system theory s human rights theory, we can understand that human rights violation are not initiated by an individual or group, but by anonymous communicative processes. This is more persuasive to approach new human rights phenomenon today. Although it can be accepted that systems theory is not so useful from the viewpoint of other traditional human rights theories, it is meaningful and suggestive that systems theory actively points out the weakpoint and limitations of existing other human rights theory, and persuasively shows new aspects of human rights violations today. 색인어 루만(Luhmann), 토이브너(Teubner), 체계이론(Systems Theory), 기 능적 분화(functional differentiation), 인권(human rights), 인권이론 (human rights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