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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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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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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전>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 이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 유는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함께 했던 사람의 이야기 가 나와 있는데 에스라 7장은 거듭해서 그 비결을

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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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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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의 유토피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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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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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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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24면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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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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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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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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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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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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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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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30년 선배의 직장생활 개념노트

하늘미션-4호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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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보광31호(4)

성공회잡지 3호(3교).indd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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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칼럼 쁜 활동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질투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예수께서 이 집에 오시면 언제나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그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는데 도무지 아니라고 대접받고 휴식을 취했던 것으로

대학연합교회 샤인 강단 문서답같은 대답을 제자들에게 주 었던 것은 사실 숨겨진 칭찬이었습 무식하고 가난한 제자들이었 생활, 사회생활 등 말씀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많습 특별 히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주일예 신앙인 것입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경고하시는 부분이

안동교회 90년사(pdf).PDF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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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야기 온누리 선교 사역 소개 온누리교회 미전도종족 입양 어제와 오늘 Intro_ 2000선교본부 신원석 목사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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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프로그램 2 Ⅱ. 여는예배 4 Ⅲ.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8 이홍정 목사(총회 사무총장) Ⅳ. 주제강의: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13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기획위원장,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Ⅴ. 발제: WCC 제10차 총회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방안 22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Ⅵ. 패널토의 35 - 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과제 / 35 장 상 목사(WCC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 겸 대회장) - 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 48 장윤재 목사(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논찬1: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수) / 61 - 논찬2: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학교 교수) Ⅶ. 마침기도 65 Ⅷ. [부록] WCC 제10차 총회 관련 자료 외 1. 기독교와 정의 박성원 목사 / 67 2. WCC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 선교성명서 / 77 3. WCC 제10차 총회 및 에큐메니즘 특강 강사 명단 / 110 4. WCC 제10차 총회 일정표 / 112 5. WCC 제10차 총회 참가신청서(영문) / 113 6. WCC 제10차 총회 참가자 가이드: 부산으로 떠나는 순례 / 11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

프로그램 제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 일 시 : 2013년 2월 15일(금) 오전 11시 - 오후 5시 2. 장 소 :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소강당 3. 주 제 :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4. 일 정 : 10:30-11:00 등 록 11:00-11:30 여는 예배 - 인 도: 우영수 목사(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서기) - 기 도: 김근철 장로(에큐메니칼위원회 회계) - 설 교: 김동엽 목사(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11:30-12:00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 사 회: 정철민 장로(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회계) - 강 사: 이홍정 목사(총회 사무총장) 12:00-13:00 점심식사 13:00-13:05 격려사: 김영주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13:05-13:45 주제강의: (WCC 제10차 총회 주제 해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 사 회: 곽재욱 목사(에큐메니칼위원회 서기) - 강 사: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 기획위원장) 13:45-14:05 WCC 제10차 총회 프로그램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 강 사: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14:05-14:25 질의 및 응답 14:25-14:40 휴 식 14:40-16:40 패널토의 - 사회: 정경호 목사(영남신학대학교 교수) - 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미래 장 상 목사(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 겸 대회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

- 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장윤재 목사(이화자여대학교 교수) - 논찬: 1.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수) 2.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학교 교수) 16:40-17:00 마침기도회 - 인 도: 민경자 장로(여전도회 전국연합회장) - 기 도: 박요한 회장(청년회 전국연합회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

예 배 여 는 예 배 인도 : 우영수 목사(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서기) 정의와 평화의 인사 인도자: 정의와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회 중: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목사님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자: 우리의 마음을 모두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회 중: 아 멘. 예배로의 부름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 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 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생명의 하나님,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 참된 빛과 소망으로 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은 저희들이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게 하옵소 서. 이 시간 주님을 사모하는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 리오니 기쁘게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 송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다같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

기 도 김근철 장로 (에큐메니칼위원회 회계) 성 경 에베소서 4:1-6 인도자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 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 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 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말씀선포 한 소망으로 부르신 은혜 김동엽 목사 (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찬 송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다같이 축 도 김동엽 목사 (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이홍정 목사 (총회 사무총장) 시작하는 말: 분열과 혼돈은 일치와 질서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장 1. 21세기 에큐메니칼 총회/대회의 주제: 치유와 화해의 관점으로 주제 읽기 1998 WCC 제8차 하라레 총회 주제: 하나님께 돌아와 소망 가운데 기뻐하 라 (Turn to God, Rejoice in Hope!) 2005 WCC 아테네 세계선교와 전도대회 주제: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를 치유하 고 화해케 하소서 (Come Holy Spirit, Heal and Reconcile Us!) 2006년 WCC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 주제: 하나님 당신의 은총 가운데 세상을 변혁시켜 주옵소서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2013년 WCC 제10차 부산 총회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

2. WCC 제10차 부산 총회 전후 교단의 에큐메니칼 정책과제 2.1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 (2012년-2022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Church as the Healed and Reconciled Life-Community in Jesus Christ 구심적 비전: 모이는 교회의 값비싼 친교와 일치(costly koinonia and unity) 선교와 디아코니아의 동력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치유하고 화해하는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Church as the Healing and Reconciling Life-Community to Participate in the Mission of the Trinity of God) 원심적 비전: 흩어지는 교회의 선교와 디아코니아(mission and diakonia)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공동체와 우주적 생명공동체의 일치 상호의존된 하나의 세계를 향한 복음의 온전성(Wholeness)과 총체성 (Totality)의 증언 영적 수직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사회적 수평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생태적 우주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2.2 민족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3년 (2013년-2015년) 역사적 좌표: 2013년(정전협정 60주년) 부터 2015년(광복 70주년) 까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

목표: 냉전의식을 넘어 민족의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이끄는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자리 설정 분단의 상처 치유 분단사회의 사회적 화해 과정 참여 생명의 안전을 우선하는 평화통일 추구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서의 <생명 정의 평화> 만들기 부산 총회 전후 WCC의 프로그램과 실천과제 설정 WCC 4개 회원교단과 NCCK의 동북아 실무(Working) 그룹 구성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 에큐메니칼 포럼: 제2 도잔소 프로세스 추진 2.3 개혁주의에 근거한 글로벌 에큐메니칼(Global Ecumenical) 총회 지향: 선교 정책의 재정립 총회와 노회 각 부서 사업에 글로벌 에큐메니칼 차원 담보 양적 선교에서 질적 영향력을 중시하는 선교로 전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

현지교회와 협의회적 의사결정과정 수립: 협력관계에 근거한 초대받은 선 교 - 현지선교회 중심에서 선교협의회 중심으로 다양성 속의 일치를 통한 에큐메니칼 배움의 기회 확장 노회 대 노회의 상호교류 증진을 통한 지역교회의 세계성 개발 세계교회와 공유할 수 있는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 개발 3.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섬김의 에큐메니즘 3.1 냉전적 신학의식의 극복 에큐메니칼(Ecumenical)과 에반젤리칼(Evangelical)에 대한 역사적 이해: 상황신학 복음의 온전성(wholeness)과 총체성(totality)에 대한 본질적 이해 증진: 상황신학의 상대성(relativity)과 부분성(partiality) 인정 3.2 지역에큐메니즘의 강화: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 지역교회생태계 생명망 강화 지역사회의 생명자본 증진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일치와 공동의 증언의 상관성 3.3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치학 실천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협의회적 과정을 이끄는 리더십 복음의 온전성과 총체성에 대한 공동의 증언을 위해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상호 배움의 자세 교회연합운동의 정신에 부합되는 원칙의 정립 맺는 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부정이 주는 존 재의 힘; A Kenotic Ecumenism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

[주제 강의]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 기획위원장,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총회를 유치한 지 3년이 되었고 올해는 총회가 열리는 바로 그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있습니 다. 한창 어려울 때 하도 마음이 어수선해서 9순이 넘으신 아버지께 제가 책임을 좀 벗어놓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만 아버님이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어허이,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을 맡은 사람이 한다, 안한다 하면 되나?! 그렇습니다. WCC 총회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 님께서 온갖 풍파를 넘어서 원하시는 곳을 가리라 생각합니다. WCC 로고를 보면 십자가를 담은 에큐메니칼 보트가 험한 풍파를 헤쳐 나가는 상징인데 부산 총회도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파도를 헤치고 가고자 하시는 곳으로 가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총회를 목전에 앞두고 우리 교단이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를 가지고 WCC총 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려 합니다. 오늘 제게 맡겨진 부 분이 WCC 총회 주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주제성찰 이므로 여기에 집 중하겠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이 주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가 무엇일까요? WCC 총회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편안한 장소에서 얼마나 잘 먹고 얼마나 깔끔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3

게 회의진행을 했느냐는 물리적 부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WCC 총회의 성공여부 를 평가하는데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총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WCC 총회의 예배는 정말 은혜스럽습니다.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 같은 성령을 고백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함께 고백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는 예배는 정말 감격적입니다. 특히 이번 부산 총회는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 한국교회의 예배 특징을 반영하여 언 어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그대로 쓰고 통성기도를 하되 개인의 기복이 아닌 세계 의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는 에큐메니칼 의미도 담아서 시행하기 때문에 세계교회 의 예배영성과 한국교회의 예배영성이 어우러져 승화되는 그런 경험도 하게 됩니다. 꼭 참여하여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예배에 이어 정말 중요한 성공의 열쇠는 총회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부분이 곧 이 시대를 향한 WCC 총회의 복음증거이고 그 복음증거는 바로 주제성찰에서 나 옵니다. WCC 총회는 창립총회 때부터 세계역사변혁에 중요한 방점들을 찍어왔습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창립총회의 주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Man s disorder and God s Design)이었는데 이 주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완전히 무질서로 폐허화시킨 인간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참회하고 폐허가 된 세계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재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 망 (Jesus Christ Hope of the World)이었는데 두 번의 세계대전 후에도 인간 은 동서냉전, 인종차별 등으로 계속 절망의 역사로 이어지므로 희망은 예수 그리스 도에게만 있다는 고백을 하고 이 에반스톤 총회 이후에 인종차별철폐를 이 시대에 가장 급박한 복음의 증언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1961년 인도, 뉴델리에 열린 제3차 총회 이후에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은 교회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4

책임임을 성찰했고 이 후에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 안에 사회부가 창설되게 했습니 다. 우리 총회의 사회봉사부가 창설된 것도 바로 이 흐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모든 총회를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이렇듯 이후에도 WCC 총회는 정의롭고 주민참여적인 사회개발, 여성의 권익문제, 난민에 대한 관심, 인권신장, 민 주화에 대한 교회의 참여,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등 시대적 상황에 대한 복음의 증 언과제를 계속 발굴해 왔습니다. 동서냉전체제가 무너진 90년대 이후에는 세계와 사회의 갈등이 신자유주의 경제세 계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경제정의와 생태문제에 대해 계속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 경제에 대한 촉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제10차 부산 총회에서 기대되는, 아니 부산 총회가 인식해야 할 21세기 의 세계상황에 대한 부산 총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명의 하나님, 우 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이 기도는 무슨 메시지로 연결되어야 하는가? 생명, 정의, 평화,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세 가지 모두를 말하기에 는 시간이 부족해서 첫 번째만 이야기하고 정의 는 첨부한 제 글, 기독교의 정의 를 참고하시고 평화 에 대해선 다음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생명의 하나님 에 집중하겠습니다. 기도문 형식의 주제는 이렇게 생명의 하나님 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생명, 정의, 평화가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주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한 가지씩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을 구체화하여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교회가 부르는 생명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집중 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영성의 문제입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5

인류역사가 21세기에 진입하는 당시에 불란서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21세기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Le Vingt-et-unieme siecle sera spirituel ou il ne sera pas!) 21세기가 영성의 세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절박감은 여러 세계 지성들 에 의해서 계속 표현되어 왔습니다. 체코 대통령 바츠라브 하벨(Vaclav Havel)은 현대문명의 딜레마와 관련하여 이렇 게 정리했습니다: 1) 현대문명의 영적 상태에 직접 관련이 있다. 2) 그 영적 상태는 한 마디로 상실(loss)이다. 3) 상실은 바로 가치의 상실이다. 하벨은 종교인이 아니 었는데도 가치상실의 원인으로 형이상학적 확실성에 대한 상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험의 상실, 초인간적인 도덕적 권위에 대한 상실, 보다 지고한 가치의 상실 등으 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 의미 있는 존재이며 모 든 것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계는 그 인간적 차원을 상실하며 인간은 자기를 통제할 힘을 잃어버린다. 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유럽이 주도한 근대문명이 이 때문에 세계를 문명의 딜레마로 몰아넣고 있다 고 보고 그 대안으로 그는 인간이 초세상적인 권위(extramundane authority)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이나 우주의 질서, 도덕적 질서와 그 초인간적인 근원, 절 대적 존재에게 우리 자신을 향할 때에만이 이 땅의 삶이 '거대집단자살 '(megasuicide)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다른 말로 하자 면, 진정으로 인간적 차원이 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하벨은 이 시대는 영적 갱 신이 필요한 시대라고 단정했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실존혁명'(Existential Revolution)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전형적인 복음주의 설교자의 내용 같은 이 분석은 바로 인간이 역사와 창조의 주 체 라는 유럽주도의 근대문명의 핵심적 딜레마를 지적한 것입니다. 유럽이 냉전체제 이후에 유럽을 재편할 때 이런 정신사적 인식을 하고 유럽의 정신(Soul of Europe) 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유럽연합형성 과정에서 잠깐 보였지만 동시에 거대하게 세 계를 몰아붙인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쓰나미에 의해 이 인식은 휩쓸려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6

버리고 21세기를 영성실종의 시대로 계속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후 2008-2009년 제63회기 유엔총회 의장을 지낸 니카라과 외교관 미구엘 브로크만(Miguel d'escoto Brockmann)은 WCC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 오늘 이 시대는 온갖 종류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그 핵심에는 영적 위기가 있다."고 같은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같은 지적들이 35년간을 네델란드 외교관으로 지낸 한스 요나스(Hans Jonas)와 같은 세속지도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사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2001년에 미국과학재단과 상무부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21세기 초반을 이끌던 정보기술 (Information Technology)시대가 마감되고 2020년에는 융합기술(Convergence Technology)이 이끄는 새로운 르네상스가 도래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 융합기술 을 선점해서 미국이 2020년 이후에도 계속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획을 하는 것입니다. 융합기술(CT)이란 서로 다른 학제적 이론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융합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이를테면 경영학 마케팅에 신경학을 융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물을 지 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보았으나 이제는 이성이 아닌 감성, 특히 신경이 결정한다고 보고 이를 경영학마케팅에 융합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재의 컴퓨터공학의 기술, 정보기술, 뇌 과학의 발달, 나노기술, 인공지능, 합성생물학기술 등 모든 기술을 다 융합하면 사람과 기계가 상호작용(interface)을 하게 되는 시대가 2020년 이후에 열리게 될 것이고 이는 이미 실현단계에 돌입했습 니다. 이 융합기술에 의하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과거에는 철학이나 종교나 인문학 이 정의를 내렸으나 앞으로는 과학기술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런 시각에서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접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접근도 그 차원에서 할 것이고 이런 접근이 결국 생명 자체에 대해서 도, 더 나아가서 사랑, 삶의 의미와 같은 철학적, 종교적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 하는 후기 인간시대(post human era)를 넘은 초월적 인간시대(trans human era)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7

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학제간의 융합은 필요합니다. 구분하는 것이 불합리하지만 생각을 위해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면 물질세계는 정신세계를,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와 교감을 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융합적 사고가 통전적 인식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이 아니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철저히 정신세계, 심지어 영적세계 조차도 결 국은 물질세계, 특히 자본주의에 종속화되는 것입니다. 소위 모든 것이 마케팅에 종 속됩니다. 음악도, 미술도, 종교도, 예배도, 인간의 감성도, 심지어 영혼도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바벨론 패망의 증상들이 죽 열거되는데 12절에 가면 제 국이 팔고 사고하는 무역품목이 나오고 13절에는 이렇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계피 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도 상품화된 상황입니 다. 바로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영혼도 상품화하는 시대입니다. 요즈음 마케팅 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놀랍게도 인문학이나 종교적 언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세속도시 (The Secular City)를 쓰면서 미래 사회가 탈영성적 세속화 문명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오늘의 사회가 오히려 영성으로 몰 입하고 있다고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영성 문제에 다시 집중했는데 제가 생각하 기에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의 영성추구는 영적 공허감을 메우려는 가치관의 정립이 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 같은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경쟁주의, 이익창출 지상 주의, 효휼성 지상주의 등으로 인간을 압박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 때 문에 도피하려는 도피성 영성추구 현상이 더욱 많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많이 등 장하는 힐링(Healing)이란 현상도 바로 이 선상에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영성갈망의 현상이 어쩐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가치관 과의 융합이라는 긍정적인 길의 추구가 아닐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물론 극 단적으로 구석으로 내어 몰린 인간의 영성추구가 하벨이 말하는 대로 가치관 추구로 연결되는 실존혁명이라는 인간영혼의 진보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희망적으로 진화하지 않아 왔기 때문에 일말의 우려의 자락을 떨쳐버 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8

문제는 이렇게 인간문명이 영성마저도 마케팅전략에 융합시키는 있는 인류문명의 꼼수를 보고 있노라면 21세기는 영성의 세기가 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 라는 앙드레 말로나 인간이 초월적 가치로 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며 실존혁명의 필요를 제안했던 하벨의 탄식을 교회가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명을 과연 하나님의 가치와 제대로 융합시키는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는데 우리의 기도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 꾸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인식하에 이번에는 좀 더 생명의 하나님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바로 생태위기의 문제입니다. 생태위기의 문제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하나님 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으로 부르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를 우리는 지금 인간의 모든 능력과 탐욕을 동원하여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정의했는데 인간에 의한 생태파 괴는 하나님을 떠난 정도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생명창조를 파괴 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문학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만약 신앙인이 자연 파괴를 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죄, 영혼의 죄 보다도 더 심각한 죄인데 교회가 이를 인식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죄가 심각하냐 하면 이제 교회가 아닌 세속사회가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립실험연구소(National Laboratory)의 로렌스 리버모어 칼데이라 (Lawrence Livermore Caldeira)에 의하면 지금 세대의 생태계파괴가 과거 3억년 동안의 생태계 파괴와 맞먹고 있다고 합니다. 이라크 무기사찰단장을 지냈던 한스 브릭스(Hans Blix)는 앞으로 지구에 가장 무서운 것은 3차 대전도 4차 대전도 아닌 바로 지구온난화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기 후 변화가 테러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고 이대로 인류문명이 진행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9

하면 지구는 종말을 향해 간다고 경고했습니다. 네덜란드 그로밍엔(Gromingen) 대학교의 존 판 클리네큰(John Van Klinek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850년부터 1950년까지 1세기 동안에는 1년에 한 종의 생물 이 사라졌는데 1989년에는 하루에 한 종이 2000년에 들어와서는 1시간에 한 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50년 안에 지구 생물의 25%가 사라 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엔 기후변화위원회는 2050년까지 지구 생물의 약 5분의 1 이상이 멸종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국립대기연구센터(National Centre for Atmospheric Research(NCAR) 선임연구원 클라라 데저(Clara Deser) 박사는 2008년 3월 한국의 한 신문과의 인 터뷰에서 2007년 한 해 동안에 향후 10년 내지 20년 녹아내릴 북극의 빙하가 앞당 겨 녹아내렸다고 하면서 빙하해빙의 속도가 10년 내지 20년 앞당겨지고 있다고 했 습니다. 2013년의 통계는 이것 보다 훨씬 더 심해졌을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 한국은 기후변화로 엄청난 추위로 시달렸는데 얼마 전에 남아프리카공 화국 친구에게 전화하니까 거기는 예전보다 훨씬 더워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통계에 보니까 48개의 인접한 나라들이 107년 만에 최고로 더운 여름을 지냈다고 합니다. 추운 데는 극도로 춥고 더운 데는 훨씬 더 더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생태위기는 이제 생태혼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 예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도 농부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벌은 생명 의 연계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벌이 사라지면 생명의 연계가 어려워질 것입니 다. 뿐만 아닙니다. 생태위기는 지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바다 속에 미치는 영향이 훨 씬 더 큽니다. 기후변화로 땅위의 사막화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지금 바다 밑의 사막 화현상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는 전부 북쪽으 로 이동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바다에는 최근 해수욕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파리처 럼 동남아시아의 고기떼가 밀려오고 있고 이것은 생태갈등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무제한적 개발과 소비에서 기인되는 것입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0

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최근 50년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한 양이 인간이 땅에 출현하여 1950년까지 생산하고 소비한 양과 맞먹는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속학자들이 물리적 차원에서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도 한국사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4대강을 파헤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일본 후쿠시마의 엄청난 경험에도 불구하고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가동시키는 일 이나 원전의 세계 수출을 주도하는 반생명적 정책을 펴고 있고 교회는 이에 대해 신 앙고백적 차원의 성찰을 하기 보다는 지지하고 축복하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로 이어져오고 오늘의 첨단기술문명, 생명공학, 융합공학으로 치닫는 후기산업사회의 문명이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으 로 치닫는 오늘의 선악과 상황이며, 인간문명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달하자는 오늘 의 바벨탑 건설의 상황이라고 신학적으로 진단합니다. 지금 인간은 인류역사상 최대 의 죄악을 범하고 있는 상황이며 인간과 우주의 생명에 가장 가혹한 죽음과 불의, 그리고 폭력을 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WCC 부산 총회가 이 문제를 이 시대의 최대의 과제로 인식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WCC 총회가 8년 만에 한 번씩 열리므로 다음 총회는 2021년에 열리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다음 총회 열리는 바로 그 전 해인 2020년은 세 속적으로 이미 회자되고 있는 생태위기의 해입니다. 그렇다면 부산 총회 이후 다음 총회 기간 동안은 인류역사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교만으로 파괴될 수도 있는 그런 정도의 심각성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부산 총회는 에코총회가 되어야 하고 생태정의, 생태평화의 총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산 총회의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라는 부산 총회의 주제는 이런 차원에서 성찰하고 기도하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인간중심의 근대문명을 창조주중심의 생명문명으로 전 환해야 한다는 영성혁명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1

[발 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 WCC 제10차 총회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방안 -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세상의 만물은 때 가 있다. 힘 있게 자라날 때가 있고, 활짝 피는 때가 있다. 88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대회가 한국사회에 그러한 계기가 되었다. 70,80년대의 민 주화운동과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삼아서 88올림픽 이후의 한국사회는 크게 발전했 다. 월드컵대회를 통해서 한민족은 식민지의식을 버리고 세계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2013년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그러한 변화의 계기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교 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가 10월 30일부터 열흘 동안 부산에서 개최되는 까닭이 다. 세계사의 변화와 WCC 제10차 총회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가 개최되는 21세기 초반의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 돌이를 지나서 20세기 말에 공산주의 블록이 몰락하고, 21세기에 후기자본주의 사회 의 대두를 목격하고 있다.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세계화된 지구촌이 되 었으며, 지식기반사회를 향하여 문명사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다. 국경이나 문화의 제 한을 벗어나서 자본의 무한 경쟁을 의미하는 시장화가 이루어졌다. 1789년 프랑스혁 명 이후에 시작된 세속화 경향이 서구 사회에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는 인 구의 폭발, 에너지의 고갈, 식량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 새로운 질병의 대두로 인하 여 고통을 겪고 있다. 2011년의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건으로 과학기 술에 대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신화도 무너졌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2

제2차 대전 이후와 19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거 서구의 식민지에 서 독립했으나 세계 유일의 제국이 된 미국이 지배하는 신식민주의가 자본의 시장경 제를 통하여 구현되고 있다. 최근 아랍 세계의 오렌지혁명이나 99%를 위한 사회를 부르짖는 미국과 서구의 오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은 미국의 세계 지배가 약화되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9 11테러와 그에 따른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불안정 한 모습을 수반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중국이 세계 2대 강국의 하나로 대두하는 한편 인도, 브라질, 러시아 가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G2 사이의 협력을 추진하면서 갈등도 불 사하고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중국은 차항출해( 借 港 出 海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 전략에 따라 향후 10년간 북한 청진을 비롯한 세계 19개 항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중국와 일본, 일본과 한국, 중국과 필리핀 등의 사이에서 영토 분쟁이 심화되고 있어서 갈수 록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21세기 세계교회의 변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에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와 더불어서 세계 교회의 한 축을 담당한 기독교 내부에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던 서 구 기독교 국가 영국,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의 성공 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주류 교회가 1970년대 이후에 교 세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 가 매년 약 5%의 비율로 교인들이 감소하여 매 10년마다 교인이 1/2로 감소하고 있다. 국가에 따라서는 전성기의 약 1/10에 불과할 만큼 급격한 교세의 감소를 보이 고 있다. 반면에 18세기 이후에 서구 기독교의 선교에 따라서 세워진 아시아 아프리 카 지역의 신흥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은 한국과 인 도, 미국 서부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20세기 초의 부흥운동의 여파로 20세기에 들 어서면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세계기독교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유럽과 북미대륙 의 기독교는 급격한 교세 감소로 인해 새로운 선교적 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3

째,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신흥교회들이 급성장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서면 서 비서구기독교인의 비율이 75%에 달하고 있다. 셋째,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오순 절주의 교파는 크게 성장하였고 은사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세계교회에 큰 영향을 미 치고 있다. 넷째, 사회주의 통치 아래서 고대신앙전승을 지켜온 동방정교회가 1991 년 소련의 해체 이후 다시 부흥하고 있다. 다섯째, 세계기독교는 에반젤리칼 과 에 큐메니칼 사이의 갈등을 뛰어 넘어 수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여섯째, 총체적인 생명의 위기 속에서 복음에 입각하여 새로운 영성으로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수 많은 여성, 청년,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도 나타나고 있 다. 일곱째로는 주류 교파의 쇠퇴를 대신하여 교파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들이 대 거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 한국교회는 퇴조하는 서구교회와 급격하게 성장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 사이에서 징검다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는 서구교회의 영적 유산을 갈무리하는 한편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 시대를 향한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한국사회의 경제적인 번영과 한국교회의 종교적인 열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식 민지 종주국과의 미묘한 감정의 기복을 피해서 피압박 민중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미 세계 선교 현장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3세기에 걸쳐서 서구 교회가 키워놓은 선교단체의 실무자와 책임자를 배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적 자산을 공유하려는 관심이 서구교회 지도자들 사이 에서 높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참여와 지도력은 글로벌 선교 영역에서 이미 확인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그 동안의 성과를 점검하고 징검다리의 사명을 감당하 기 위한 선교 전략을 세워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난 130여 년에 얻은 부흥 성장 과 사회참여의 열매를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와 나누어야 한다. 21세기 한국교회의 현실과 과제 한민족은 지난 세기에 일곱 번에 걸친 큰 전쟁에 휘말리며 고통을 겪었다. 하나하 나의 전쟁이 동아시아나 세계의 패권을 바꾸어 놓은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이었다.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고통도 겪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전쟁을 치 루는 비극도 경험했다.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로부터 산업화되 고 정보화되는 급격한 문명의 변화도 경험하였다. 도시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되고 핵가족이 일반화되었다. 한국 거주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어섰는가 하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4

해외로 이주한 한민족도 700만 명 이상에 달하고 있다. 가히 온 민족이 삶의 뿌리 뽑힌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발전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130년 가까운 선교 역사에서 크게 볼 때 두 가지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는 교회가 부흥 성장한 것이고, 둘째는 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하나님께서 한민 족을 위해서 주신 은총임에 틀림이 없다. 첫째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세계교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놀라운 것이다. 이 러한 부흥 성장은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종교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인 초 대교회 교인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의 피 위에서 이 루어졌다. 1907년에는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꺼져가는 민 족의 운명 앞에서 신앙을 내면화하였다. 부흥운동은 60년대의 민족복음화운동으로 다시 점화되었고,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1985년에는 선교 100주년 기념행사에는 연인원 1,600만 명이 참가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 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90만 명의 교인과 700여명의 목회자를 기록했다. 세계 10 대 교회 중에서 6개가 한국교회라는 놀라운 기록도 남겼고,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 사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성장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한민족에 뿌리를 내렸다. 세계 개혁교회연맹(WARC) 제22차 총회(1989)와 WCC JPIC대회(1990)가 서울에서 개최 되었다는 사실이 세계교회로부터 주목받는 한국교회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한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민족을 섬겼다. 초기부터 애국 계몽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수난에 참여하였고,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다양한 봉사를 통하여 민족을 섬겼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IMC(세계선교협의회)와 YMCA의 지원을 받아서 전개한 30년대의 농촌운동은 IMC 를 통하여 세계 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 불참여 운동을 전 개하여 수난을 받았고, 해방이후에는 남북분단의 와중에서 순교자를 배출했다. 70년 대 이후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인권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꾸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민주화인권운동 참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의 아파타이트철폐운동, 미국의 흑인해방운동, 독일의 평화운동과 함께 20세기 교회 사의 두드러진 사회참여운동이었다. 80년대 이후 민족의 통일과 환경보전을 위한 운 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회운동과 함께 고아원 양로원을 비롯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5

다양한 사회봉사를 통하여 민족을 섬겼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게임 이후 에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교회의 민주화인권운동 참여도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교 회의 성장을 통하여 성공적인 목회자로 사회에 소개된 지도자들도 성공은 하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이 차례대로 대통령으 로 선출되면서 민주화인권운동의 지도자들도 정권에 참여하면서 민주화인권운동의 성과가 사유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목회자의 과다 배출, 이단 사이비 세력의 발호, 교회 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분열, 교회 지도력의 약화, 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 등 으로 인하여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기보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 가 되었다. 전환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서구 기독교가 지닌 신학과 교회법, 교회 연합과 선교의 경험을 유산으로 받아서 남 반구 국가의 교회와 나누는 것이다. 대체로 급성장하는 남반구 지역의 교회는 지도 력이 취약하거나 혹은 토착 종교의 배척이나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 역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보수와 진 보 양 진영이 상호존중과 신뢰회복을 통하여 분열적인 갈등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노 력해야 한다. 이는 하나 되라 하신 그리스도의 절대명령에 순종하는 길이다. 성장의 성과를 사유화하여 종교권력을 쌓거나 교권을 대물림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봉사를 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가난한 민중들을 순수하게 섬겨야 한다. 사회 참여의 열매를 사유화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교회가 되는 섬김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 목회후보생의 수를 조절하여 목회자의 질적 성숙 을 기하여야 한다. 갈수록 공격적인 양상을 보이는 사이비 이단 세력의 위협을 직시 하고 초대교회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개혁교회답게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 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한다. 서구사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6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와 WCC 부산 총회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에큐메니칼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선교의 세기 인 19세기의 결실이었 다. 19세기 말에 복음 선교를 위해서 교회가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1900 년에 뉴욕에서 선교사들과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단체 대표가 모여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가 에큐메니칼 과 선교 를 직접 연결시킨 첫 대회였다. 대회는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개회예배에는 전 세 계로부터 2,500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모였다. 벤자민 해리슨 미국 대통령이 참석해 서 개막연설을 했다. 이 대회의 준비모임에서 뉴욕 그레이스교회를 담임하는 윌리엄 헌팅톤목사는 에큐메니칼을 이렇게 설명했다: 솔로몬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사 는 곳이면 지구의 어디에서든 지혜를 찬양합니다. 어디든 에큐메니칼 세계는 사 람들이 거주하는 세계입니다. 이처럼 복음 선교를 위한 협력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처럼 세상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교회의 역사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16세기 초반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서구의 개신교회는 17세기에 신학과 교회 체제의 정비를 일단락지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와 북미의 경계를 벗어나 세계를 향하여 나갔 다. 19세기를 마칠 무렵에는 땅 끝 에 위치한 한반도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로써 19 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 가 되었다. 선교 운동의 바탕 위에서 교회 연합운동이 전 개되자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 가 되었다. 어린 나무가 자라서 거목이 되듯 이 세계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온 땅의 생명이 깃드는 큰 숲이 되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꽃은 1948년에 이루어진 WCC의 창립이다. 1900년대 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거기 에 있다 는 것은 알아도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교회와 교회가 서로 소식을 나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교회에 편지를 보낼 주소 조차 찾기 어려웠다. 어쩌다 오가는 개척자들을 통해서 신비한 여행담을 나누고 살 았다. 19세기에 점차 활발해진 미전도지역 선교도 선교단체나 교파와 지역을 중심으 로 전개되었다. 때로는 교파간의 갈등이나 경제적 낭비와 같은 문제도 드러났다. 연 합하고 협동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7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 선교사와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00 년대 말에 런던, 리버풀, 뉴욕에서 10년을 주기로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1900년에 모인 뉴욕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주후 313년에 콘스 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뒤 모인 에큐메니칼 공의회 전통을 되살려 낸 것이다. 324년부터 787년까지 일곱 차례 모인 공의회를 통해서 초대 교 회는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를 확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드디어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모인 선교대회가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교회 대 표들이 선교사들과 선교단체 대표와 함께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 작했다. 그 결실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이루어졌다. 암스테르담의 옛 루터교회에서 개 최된 WCC 창립예배에는 네덜란드의 비트릭스 여왕을 비롯해서 모두 5백 여 명의 회중이 모였다. 이들은 147개 회원교회가 보낸 351명의 대표와 독일정부와 암스테 르담 시 관계자, 유럽과 미국에서 온 방문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유럽과 북미 의 개신교가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곧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대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기독교세계를 향해서 연합을 향한 강한 메시지를 던 졌다. 1961년에 인도의 뉴델리에서 모인 제3차 총회에서는 제3세계 신생교회들과 2 천 년 역사를 지닌 정교회들이 대거 회원교회로 가입했다.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세 계 기독교를 대표 하는 단체가 되었다. 현재는 110개 국가의 349개의 개신교회와 정 교회가 가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 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의 네 교회가 회원교회이다. 한국정교회도 그리스정교회의 일원으로서 회원교회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 회원교회 교인 수가 모두 5억 6천만 명 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협의체이다. 이런 WCC의 설립을 포함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이면에는 감동적인 이야기들 이 적지 않다. 에딘버러선교대회를 성사시킨 존 모트는 이를 위해서 280만 km를 여 행했다. 자그마치 지구를 70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이다. 미국 감리교회의 평신도였 던 모트는 한국도 두 번이나 방문했다. 1907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방문했을 때 평 양대부흥운동을 장대현교회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1910년의 에딘버러선 교대회에 한국교회 대표가 15명이나 참석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윤치호선생이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를 했다. 2010년에 모인 에딘버러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윤치호 선생의 3대 후손인 윤경남 권사가 남편 민석홍 장로와 함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8

참석해서 만찬 석상에서 윤치호 선생에 대한 회고담을 전하기도 했다. WCC는 2013년 10월 30일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제10차 총회를 개최한다. 회원교 회 대표 825명 외에 옵저버, 참관인, 초청인사, 선교단체 관계자, 언론인 등 5천 여 명이 참석하는 최대 규모가 될 것이다. 총회를 방청하는 지역교회 교인들까지 포함 하면 최대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도 공식적 으로 초청을 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도 참석할 것으로 전망된다. 20세기 말부터 세계 기독교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 하고 있다. 서구 교회가 약화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급성장했다. 성령의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의 교회에서 세계 최대의 교회가 나왔다. WCC 부산 총회는 이러한 변화에 직면한 세계 교회의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기를 청 한다. 가시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WCC 교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 아들인다는 점에서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유일한 경전으로 받아 들인다. 삼위 하나님의 신비한 일치를 믿고, 주어진 일치 를 받아들이는 것이 에큐메 니칼 운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일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20세기 에큐메니 칼 운동은 주어진 일치 (God-given Unity)를 확인하고, 그것을 기초로 흩어진 교 회의 가시적인 일치 (Visible Unity)를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WCC도 1948년 창립총회 때부터 교파 간의 차이를 확인하며 주어진 일치 를 발 견하려 노력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 나됨을 지향하고 있다. 이 일치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일치이다. 이러한 주어진 일치 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바로 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관심이요, 또한 바로 그 관 심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주님이시오, 머리되신 분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하나됨 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과 같이 교회는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갖고 있 다(고전12:12). 그 여러 지체들은 머리되시는 주님께 속해 있다. 교회는 그의 신부요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9

신랑 되신 그분과 연합해 있다. 이것이 일치의 진정한 기초이다. 주어진 일치 는 하나임을 확인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갈 라진 틈을 극복하게 한다. 교회와 교회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협의함으로써 친교를 나누어 왔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공동의 신앙 이해와 선교를 위하여 협의하고 협력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동시에 교회는 세상을 섬김으로써 갈라진 인류에게 하나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었다. WCC가 추구 하는 교회일치는 결코 획일적이거나 한 교파로의 흡수 통합과 같은 일치추구가 아니 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치이며, 성령 안에서 누리는 친교를 통해서 하나임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치와 다양성은 한 쌍의 짝을 이루고 있다. 주어진 일치 는 다양성 속의 일치 인 것이다. 오래 동안 한국교회는 하나의 성경책과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해 왔다. 어느 교회 에 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관계없이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 연합집회를 가질 때에도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 다른 번역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사용하기도 했 으나 곧 일치를 이루어 왔다. 한국교회 백주년을 맞이할 때나 1907년 대부흥운동 백 주년 맞이할 때에도 교파를 초월해서 함께 기념예배를 드렸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 면 연합예배를 드리며 주어진 일치를 확인해 왔다. 요즘 찬송가를 둘러싼 논란을 보 면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온 땅에 흩어진 교회가 주어진 일 치 를 확인하고, 가시적인 일치 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한다. WCC 부산총회는 어떤 모임인가? WCC 부산총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사귐의 기회이며, 21세 기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세계교회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기회 이다. 이 총회에 110개국의 349개 교단이 약 825명의 총대를 보낼 것이다. 이들은 전세계 5억 6천 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 총대 외에 옵저버, 초청인사, 총회 를 운영하기 위한 실무자, 기독교계의 여러 국제기구 대표, 교회와 협력하는 국제단 체 대표, NGO 대표, 해외 언론인 등 해외 참가자만 약 2천 5백여 명에 달할 것이 다. 적게 잡아도 4천 여 명 이상 모이는 지구촌 기독교의 큰 잔치가 부산에서 열리 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몇 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WCC 부산총회를 준비 하고 있고, 중앙정부와 부산시 당국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0

WCC 부산총회의 주제는 무엇인가? WCC 부산총회의 주제에는 21세기 세계 문제에 대한 응답이 담겨 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라는 주제는 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뿌 리를 두고 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고난당하는 종 에 대한 예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생명의 하나님 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명이 위협당하는 세계 속에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정의 와 평 화 에 대한 강조는 불의하고 평화롭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있다. 그 희망은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갈망이며 기도이다. 생명의 하나님께 돌아갈 때 비 로소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담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 을 다스리실 때 생명은 온전함에 이르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선언이 다. 이는 경제위기, 생태위기, 영적 위기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 통을 겪는 이웃을 향한 복된 소식이다. 이처럼 총회의 주제에 정의와 평화의 문제를 다룬 것은 WCC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다. WCC 부산총회는 어떻게 진행되나? 총회 라고 하면 회무처리를 위한 딱딱한 회의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WCC 부 산총회는 이전의 총회와 같이 예배와 성경공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매일 예배로 시작해서 기도회로 하루를 마친다. 성경공부는 미리 준비한 교재에 따라서 20-30명 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된다. 일곱 명의 성경공부 집필자 중에는 우리 교단 WCC 총대인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물론 예배와 성경공부 는 총회 주제에 대한 신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예배 중에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수용하여 통성기도 순서를 담고 있고,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에도 함께 진행한다. 특이한 것은 통성기도 라는 말을 다른 말로 옮기지 않고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배와 성경공부 외에는 7가지 주요 과제를 다루는 전체 모임과 21가지 소주제별 로 진행되는 에큐메니칼 대화, 85개의 마당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다양한 전시 프로 그램이 준비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2주일에 걸쳐서 독일 베를린에서부터 모스크바를 거쳐 북경까지 이어지는 평화열차순례를 기획하고 있다. 전세계 150명의 젊은 신학 자들이 모여서 2주간 동안 토론하는 글로벌에큐메니칼신학원(GETI)도 운영하고, 한 국의 각 신학교 학생 220명이 모이는 한국에큐메니칼신학원(KETI)도 운영한다. 여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1

성과 청년, 원주민, 장애인이 각각 총회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사전대회를 갖는다. 각 부문의 관심사를 총회에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WCC 헌장을 개정하거나 향후 8년간의 세계교회의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회무처리도 갖게 된다. WCC 부산총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나? WCC 부산총회는 세계교회가 시대의 도전 앞에 공동의 선교 과제를 확인하고 함 께 헌신하는 신앙의 축제이다. 우리 교단을 비롯해서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정교회 등 한국의 5개 WCC 회원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 회(NCCK)와 함께 총회를 준비하고 있다. 구세군이나 한국정교회, 대한성서공회도 총대를 파견한다. 부산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약 1,500여 명이 자원봉사자로 총회를 돕게 된다. 부산장신대는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도록 도울 예정이고, 호남신 학대학은 약 200여명의 신학자와 신학생을 초청하는 주말 프로그램을 가질 예정이 다. WCC 본부는 누구나 총회를 방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약간의 참가비를 부담하면 총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참가 등록을 할 수 있다. WCC 총회를 방문하는 해외 교회의 대표를 교회로 초청할 수도 있다. 각 교회마다 WCC 총회 방문단을 구 성해 보면 어떨까? 적은 수라도 대표를 선정해서 참가하도록 교회가 돕고, 참가한 분들이 교회 앞에 보고하면 유익할 것이다. 마침 우리말이 총회의 공용언어 중의 하 나로 채택되어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니 좋은 기회일 것이다. 해외 교회 대표를 주 일학교에 초대해서 신앙 체험을 나누면 그것도 유익할 것이다. 물론 기도로 돕는 것 은 기본일 것이다. 총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해 왔나? 본 교단 총회는 2009년 8월에 WCC 제10차 총회 개최지가 부산으로 결정된 뒤, 그해 11월에 제94회기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위원장 이용남 목사)를 조직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2010년 5월과 6월에는 전국 5개 지역에서 WCC 제10차 총회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의 역할 을 주제로 일제히 WCC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WCC 제 10차 총회를 소개하는 2권의 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매 회기마다 WCC제10차 총회준비위원회(제95회기 위원장 이승영 목사, 제96회기 위원장 고시영 목사, 제97 회기 위원장 김동엽 목사)를 조직하고 관련 업무를 계속해서 추진해 왔다. 그 동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2

총회를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정책 세미나 개최, 부산 경남지역 7개 노회장 연석회의 개최, WCC 총무 일행 영접, 부산장신대학교와 영남신학대학교의 WCC 모의총회 개 최, 총회장 손달익 목사의 WCC 총무 트베이트 목사 방문 회담 등의 사업이 이루어 졌다. 적지 않은 수의 본 교단 인사들이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원회(KHC)에 참 여하여 준비과정을 돕기도 했다. 총회는 WCC 제10차 총회의 해 인 2013년을 맞이 하여 마무리 준비를 도우며, 국내 회원교단들과 협력하여 총회 산하 노회와 교회의 참여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 총회를 위해 기도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노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2012년 12월에 열린 제97회기 4차 총회 임원회는 본 교단 산하 65개 노회가 2013년 봄 노회 시에 WCC 총회를 위한 특별 순서를 배정하도록 결정하였다. 세부 적인 내용은 (1) 전국의 각 노회가 일제히 WCC 부산총회와 관련된 특강을 듣고, (2) WCC 제10차 총회 홍보동영상을 시청하며, (3) WCC 부산총회의 성공적인 개최 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총회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는 WCC 총회와 에큐메니즘 을 강의할 특강 강사 명단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각 노회로 배포 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또, 총회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는 2013년 봄 노회 를 마친 뒤에 각 지역의 노회협의회가 WCC 부산총회와 관련된 특별집회를 개최하 도록 제97회기 6차 총회 임원회에 청원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총회가 요청하는 일 외에 노회가 WCC 총회 준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준비할 수도 있다. 이를 테면, 광주지역의 세 노회는 지역의 기장 노회와 감리교 지방회와 협력하여 광주지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WCC 총회 기간 중에 호남신학대학교를 방문할 해외 신학자와 신학생을 영접하기로 하는 한편 지역 신학생들의 WCC 총회 참여를 격려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각 교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2013년 1월에 개최된 제97회기 5차 총회 임원회는 오는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을 WCC 주일 로 정하고 전국교회가 일제히 부산총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하기 로 결의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월 24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고, 한국기 독교장로회는 우리와 같이 5월 19일(성경강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기로 하였다. 이 일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예배용 동영상 제작, 모범 설교집 제작, 성경공부 자료 제작, 포스터 제작, 현수막용 컴퓨터 파일 총회 홈페이지 게시 등의 실무를 국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3

WCC 회원교단들이 연합하여 나누어서 준비하고 있다. WCC 부산총회가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함께 준비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항목 가 운데 교회 형편에 따라 적당한 것을 선택하여 동참하여 기도로 섬기기를 바란다. (1) 2013년 5월 19일(성령강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고 WCC 부산총회를 위 하여 기도하는 일. (2) 성령강림주일을 전후하여 금요심야기도회나 수요기도회를 이용하여 WCC 부산 총회를 위한 특별집회를 갖고, 강사를 초청하여 교인들에게 WCC를 이해하는 기회를 갖는 일. 형식은 특강, 세미나, 기도회 등 다양하게 취할 수 있음. (3) 교회 지도자들이 - 목회자, 당회원, 남선교회 여전도회 청년회 임원 등 - WCC 총회에 등록하여 참관하거나 자원봉사자로 등록하여 돕는 일. (4) WCC 총회에 참가한 해외 참가자를 주말(11월 2일과 3일)을 이용하여 교회로 초청하고 교인들과 교류하거나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게 하는 일. 청년이나 여성 대표를 초청하여 청년회와 여전도회가 교류하게 할 수 있고, 주일학교를 방문 하여 나누게 할 수도 있다. (5) 지역의 청년회나 여전도회가 연합하여 특별집회를 갖는 일. 이 때 부활절연합 예배와 같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집회를 가질 수 있음. (6) 7월 27일 무렵에 부산에서 개최될 한국 참가자 사전대회에 참가하는 일. (7) 교회 예배나 집회 때에 WCC 총회나 세계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함께 기도하도록 돕는 일. 세계교회는 이미 2013년 부산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교회 지도자들 은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기독교의 변화양상을 보면, 이번 WCC 부 산총회는 21세기 기독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한 대회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서 준비한 선교에 관한 문서나 신앙직제에 관한 문서도 20~30년 간의 논의를 모은 중요한 문서들이다. 우리는 항간의 불필요한 논란을 불 식하고 WCC 부산총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기도하며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께 서 주신 귀한 기회를 선용하여 연합하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남은 기간 동안 힘 써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는 최근 한반도의 주변정세를 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하나님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하 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이 한껏 고양되는 은혜의 반전이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할 때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4

패널 토의-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과제 - 코이노니아의 악수를 하라- 장 상 박사(전 이화여대총장, 신약학) 1.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 구약성서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전승이 있다 :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이다. 제사장 전승은 성전예배가 핵심이며 제사장들이 중심역할을 담당한다. 제사장의 역할 은 기존구조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예언자 전승에는 조직이나 제도는 없으며 하 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개인에 의해서 수행된다. 예언자는 위기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제사장 전승의 타락을 경 고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적 발전을 선포하고 예언한다. 예언자들의 활동은 백성 들을 회개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치유의 기능이 있다. 이는 위기의 성격에 따라 심판일 수도 있고 개혁과 갱신일 수도 있다. 제사장 전승은 보수적인 반면 예언자적 전승은 개혁적이다. 그러나 성전예배가 타락하였다 해서 성전예배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며, 예언자 전승만으로는 구약신앙을 대변할 수 없다. 구약시대는 이 두 전승의 종말과 함께 마감된다. AD 70년 유대전쟁에서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전 파괴와 더불어 성전제사는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제사장 전승의 종말을 의미하며 그 후로는 회당이 성전예배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회당제도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었던 바빌론 포로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에스라 8:15, 느헤미야 8:2, 9:1). 회당제도에서는 제사장들이 아닌, 평신도 주로 바리새인 들이 중심이 되었고, 회당 예배의 핵심은 제사가 아니라 율법이었다. 초대교회의 예 배 형식은 회당의 것을 많이 채용하였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5

예언자전승도 구약의 말라기를 끝으로 종말을 맞는다(B.C. 450경). 누가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눅 16:16). 2. 예수의 시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옛 계약의 시대는 끝이 나고 새 계약의 시대가 열린다. 예 수의 사역이 모세, 엘리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 선상에서 이해되는 측면이 있으나 (눅 4:17-21; 마 17:2) 예수는 스스로 예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 언자 이상이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만이 옛 계약을 새롭게 완성한 유일한 대제사장이며(요 17:19f) 그는 완전한 희생으로써 단 한 번에 드려진 제물이라는 신학도 발견된다(엡 5:2, 히 9:14). 그는 만민의 속죄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고, 그 희생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 사건으로서 그는 새 언약의 중보 이시다. 예수의 사랑의 두 계명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첫 번 설교인 희년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있었다(눅 4:14-21). 예수의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613개의 계명이 두 계명으로 수렴된다(신 6:4, 레 19:18). 이 계명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보도되고 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37). 예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사랑의 두 계명을 제시한다. 마가복음에서 질문자 는 서기관이나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는 율법학자이다. 마가복음서의 분위기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이나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자못 적대적이며 부정적이다. 마가복음 서의 관심은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 이며 마태복음서는 위대한 계명 이다. 누가복 음서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 는 영생을 얻는 처방계명에 관심을 둔다. 세 복음서의 기술은 조금씩 다르나, 공통된 것은 세 복음서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 라,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두 계명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서는 이것들보다(복수)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을 사 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이 함께 가장 큰 계명이다. 마태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6

는 두 번째 계명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그와 같으니 라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대로 먼저 언급된 계명과 후에 언급된 계명이 다 같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마 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라고 강조한다. 누가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 하나 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번역해야 한다. 사랑하라는 동사는 하나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동일한 계명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이 두 계명은 나란 히 언급되나,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대등하고 독립된 의미와 중요성과 권위 가 부여된다. 동시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계명으로 밀접한 내적 연결에서 그 완 결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실한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두 계명은 서로 구별되나, 분리해서 실천할 수가 없다. 3. 교회의 시대 누가의 글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신학은 구속사 신 학이며 구속사적 틀(구약시대, 예수시대, 교회시대)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의 시대가 시작된다. 예수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사랑의 두 계명이 예수의 교훈대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실천이 되었는가는 별 문제이다. 교회에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계명에 더 우선권을 주기도 하고, 또는 이웃 을 사랑하라 에 무게를 두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두 계명이 함께 크고 첫째 되 는 계명이 되는 것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사도회의 개최의 배경: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는 기독교 최초의 정상회담이 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 교회는 팔레스타인을 넘어 빠르게 헬라세계 로 뻗어갔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교회는 우선 유대인 동족을 위한 선교에 관심을 기 울였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세상 종말 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직접적 구원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한 선교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방인을 위한 선 교는 상상 이외로 생명력 있는 선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성공은 심각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7

문제를 야기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유대적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할례 및 유대교의 제의적 규례와 음식법 준수를 부과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감정적으로, 이념적으로, 실제적으로 매우 심각하였다. 유대인들 의 민족적 자부심은 뿌리 깊은 선민의식과 관련되어 감정적 차원을 지니고 있었다. 이방사도로 지칭하는 바울까지도 유대인을 첫째 로 여기는 경향이 발견된다. 아직도 성전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던 흩어져 있는 소위 예루살렘 유대인들/팔레스타인 유 대인들에게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지만 구원은 모세의 율법을 떠나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베드로에게도 바울의 신앙처럼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전부였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수 천 년의 전통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산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교 전통과 율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 이방인들에게 새 이스라엘의 문이 열리는 것을 염려했고 저항했다. 특히 할례는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의무였던 것처럼(행 2:10) 그리스도 인이 된 모든 이방인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극단적인 우익에 속한 자들이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이 먼저 유대 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엄격한 입장을 지닌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는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이념적 측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수용하기 매우 어려웠 던 것 같이, 또한 바울을 비롯한 이방선교의 차원에서도 할례는 심각한 문제였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위해 필요 충분함 으로 타협이 불가능하며, 할례는 복음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적으 로 초대교회의 선교적 측면에서 할례나 음식법의 부과는 상당한 어려움을 제기했다. 유대인 입장에서 할례가 유대교의 이방선교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었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선교의 실질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문제점이 선교 초기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 도인, 팔레스타인 유대인 그리스도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 베드로가 중심인 예 루살렘 교회와 바울이 중심인 이방인교회 간에 긴장과 갈등이 있었고, 분열의 조짐 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8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관한 보도: AD 4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던 최초의 사도회의에 대한 기록은 갈 2:1-11과 행 15:1-29에서 발견된다. 갈 2:1-11은 사도 회의의 주역으로 참석했던 바울에 의한 보도이다. 사도회의 이후 4-5년이 경과된 시 점 49년 경,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목적에서 쓴 기록이다. 반면 행 15:1-29은 정 상회담 이후 3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 제 3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그 시대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계기가 이 루어졌음을 강조하며, 바울의 역할이 돋보인다. 후자에서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영 성과 선교의 의미 를 명백히 하고 있다. 바울의 보도(갈 2:1-10) 바울은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기독교를 헬라세계 로 몰고 간 주역으로서, 기독교의 세계화의 길을 연 최대의 선교사이다. 더 나아가 그는 초기 기독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주도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사도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사도에게는 그의 선교활동을 어렵게 하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다. 우 선 그의 사도직 권위가 도전 받고 있었다. 바울은 지상의 예수를 따르지 않았고, 부 활의 주님을 만나지도 않았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의 사도직 의 정당성,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소위 자칭 사도 라는 것이다. 동시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예루살렘의 12사도와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 운 것이 아니므로 복음의 온전성이 의심받았다(갈 1:18-24 참고). 특별히 바울은 이 방인 선교에 주력하며, 율법이나 할례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였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의 정당성이 문제시 될 수밖에 없었다. 갈 2:1-11은 바울이 AD 53-4년 전후로 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 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은 여기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 자체를 보고하기 위한 것 보다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변호하려 는 의도가 있었으나 그것은 초대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바울의 신학적 노력과 직결된다. 바울의 선교와 신학을 꿰뚫고 있는 2대 관심사는 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으 로 요약될 수 있는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었다. 이 두 핵심적 관심 또 는 과제를 지키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는 생명을 다하도록 수고, 투쟁, 헌신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 내의 분열의 위험성을 상당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9

염려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방세계에서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 사 도들에게 제출하였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권위를 의식하듯 누구의 강요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시 로 인해서 이방선교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를 방문했으며, 유력자들 에게 복음을 제시했으나 사사로이 하였다는 것을 부자연 스러울 만큼 강조한다. 그 결과 소위 유력한 자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세계에 전한 복음에 전혀 이의가 없었으며, 오히려 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이가 자신에게도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다고 바울은 자랑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사도 직의 권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성, 바울의 선교의 정당성이 확인된 것이다. 그 리고 친교의 악수 가 이루어졌다.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바울에 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 이것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와 바울의 코이노니아 의 악수(갈 2:9-10): 예루살렘 교회 기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오른 손을 주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의 미의 화해, 일치 또는 친교를 상징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지만, 한편이 다른 한편 에게 오른손을 주는 행위로 상징되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기둥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오른 손을 주면서 동등하게 여겼는가?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는 오른 손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기둥들이 우월한 위치를 인정하는 관계였는가? 당시 헬라사회에서 오른 손(δεξὰς διδοναι)은 서약, 또는 상호계약 체결을 상징했다. 친교로 번역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의 의미는 다양하나 대체로 나눔, 협력, 참여, 동반자를 뜻한다. 친교의 오른손을 준 행위는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대 등한 동역관계의 계약을 맺는 일이며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에서 표현되듯이 하나님의 복음을 연합하여 전파하는 공동의 목적을 인정하는 교회 의 일치와 연합 을 의미한다. 복음전파에서 선교대상 및 영역의 구분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 합의는 사실 상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사도회의는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방사도들은 사도회의 이후 예루살렘 교회와의 일치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코이노니아의 악수는 단일교회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정, 존중, 협력하는 일치와 연합, 파트너십을 이루는 상징적 행위였다. 코이노이아의 악수로 상징된 계약의 두 번째 내용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사업의 과제였다. 이것은(10절) 계약에 첨가된 요구가 아니라 계약자체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0

일부였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 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요청은 그 앞에 μόνο ν 이 강조됨으로써 그것 외에는 다른 요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헌금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사도행전 11:30에 나오는 기근구호와 동 일한 것인가? 또는 정기적 헌금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란 누구인가? 바울 과 바나바도 예루살렘 기둥들에게 어떤 특별한 요청을 했는가? 이들의 요구가 동역 관계의 동등성을 저해하거나 악화시킨 것은 아닌가? 등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울은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일은 본래 열심히 하던 일이라고 강조한다. 로마서 15 장에서 바울은 헌금의 신학적 의의를 설명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았다. 이방인 그리스 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방인들의 의존적 위치를 보 여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신령한 것 을 함께 나누도 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대등하게 나누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것은 은혜인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빚진 자들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그것을 예 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예루살렘 성도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도회의 참석자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바울은 교회일치의 최종적 과정은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만 달려있 는 것이 아니라 각기 지도자들이 속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도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모금과정에 많은 오해와 반대,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성적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열성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헌금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하여 모금을 계속하였다. 헌금에 대한 바울의 헌신은 그가 친히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계획을 세우고 신변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무릅쓰고 전달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누가의 보고 (행 15:1-29) 상황의 심각성: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 다. 바리새파라고 하는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1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여서 소위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자 유주의자들 인 이방인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함께 검토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일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서의 권위가 아직 있었고 주의 형제 야고 보가 주도하고 있었다. 민주적인 해결의 장: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온 안디옥 교회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고 경청과 소통과 논쟁이 이루어지는 공개적 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도자들의 영성: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상당한 논쟁이 있었으나 베드로 와 야고보의 지도력에 의해 이 회의의 역사적인 결과가 성취되었다. 베드로의 호소: 베드로는 자신의 사도됨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 고넬료의 회심사건을 회 상(11:11-18)했다. 고넬료 가정의 회심사건에서 베드로는 깨끗한 것 과 깨끗하지 않은 것 에 대한 유대인의 전통적 기준이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깨달았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는 공정해서 유대 인과 이방인을 구별치 않으시고 동일하게 예수의 은혜로 구원하셨다 는 것을 감동적 으로 호소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믿음이외의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어깨에 올려놓은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을 저주한 예수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이방인들은 오직 신앙과 세례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러나 여전히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교인들의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11:1-8, 18 참 조) 그것은 갈라디아서 2:11-14에서 나타나는 대로 안디옥에 예루살렘의 극보수주의 자들이 나타나자 베드로, 바나바 등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중단하 는 유감스런 사건이 발생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담대하게 베드 로를 공개 비난하는 사건이 있었다. 야고보의 지도력: 야고보는 마치 회의의 의장처럼 보인다. 내 말을 믿으라 말만 아니라 그에게서 지도자의 실천적인 지혜와 용기를 발견한다. 그는 토론 끝에 회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2

가 수용한 것을 요약하며 선교의 의의는 한 백성 을 이루는 것이라는 핵심적인 개 념을 제시하면서 베드로의 입장을 옹호한다. 한 백성 이란 대체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사용하였으나(아모 스 9:11-12, 70인 역, 예레미야 12:15, 이사야 45:21) 야고보는 하나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곧 교회에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했다. 그 는 마침내 하나님께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말라 는 권위 있는 권면과 함께 실천적 결론을 제시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준수를 부과하려는 유대인 그리 스도인들의 요구는 기각되고 할례준수의 요구 대신 4개의 실천적 금령이 채택된다. 행 15:31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낸 권면 안을 기쁘게 받아들였 다고 기록되었다. 1964년 전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었던 사도회의의 과정, 결과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이나 집단의 임의적 개입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보고, 경청, 토론이 가능한 회의 라는 합리적 기제를 선택한 것은 기 독교교회의 민주적 과정의 기초가 되었다. 당사자인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교회인 안디옥교회 양측의 참여를 통한 합의과정을 거침으로써 신뢰성이 보장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의 발생의 진원지였으므로 모교회로서의 어느 정도 권위가 있었고 지도력 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압적이거나 종속,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 권고, 의견제안 등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지도자들의 영성: 모든 사회적, 인간적 걸림돌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감 지하는 영성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과 헌신이 돋보인다. 또한 선교의 주역 은 하나님이시며, 사도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천명한다. 교회일치와 선교영역의 확대: 바울의 이방선교의 정당성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코 이노니아의 악수를 통해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교회와 이방 인교회의 일치와 선교협력의 길이 열렸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사도행전의 중심인 15장에 기록되었다. 행 1장-14장에는 유대인에 대한 선교와 관심이 발견되나 행 16장-28장에서는 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3

방선교에 대한 선교와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사도들의 근거지, 거점 역할의 위치를 행사하지 않는다. 사도회의를 기점으 로 선교의 축의 변화가 발생한다. 예루살렘이 주도하던 선교는 바울주도의 선교로 바뀌고 예루살렘교회는 퇴조한다. 유대교의 테두리를 넘어 팔레스타인 밖의 이방세계 로의 본격적인 진출이 가능해지면서 그리스도교 선교영역의 획기적 확대가 이루어진 다. 로마 세계로의 진출을 비롯하여, 세계의 그리스도교로 가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 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를 벗어나는 진통의 필연적, 상징적 사 건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만일 복음의 진리가 수호되지 않고 이방선교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유대인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안의 하나의 소종파로 타 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교회의 일치가 수호되지 않았더라면 이방인 그리스도교 회는 복음의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이탈되면서 헬레니즘 사회의 비역사적인 밀의종교 의 형태로 타락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세계 그리스도교회 연합운동의 효시로서 하나님의 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 라서 교회신학은 코이노니아 신학이며, 바로 에큐메니칼 신학의 핵심이 코이노니아 신학인 것이다. 4. 세계 기독교의 미래와 한국교회 21세기의 현실: 21세기는 희망의 시대로 기대됐으나 오히려 위기의 시대로 화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전개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세계화의 등장으로 시작된 21 세기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 생태계 위기, 자원 고갈과 기후변화, 종교간 갈등과 충돌, 영적 정신적 혼돈 등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동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500여 년 전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였고 유럽의 시대였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서양 중심시대가 미 국의 시대라면 태평양 중심 시대는 동북아시아의 시대이다. 오늘날 유럽은 침체되어 있고 미국은 최상/최강의 정점은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부상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21세기 기독교의 현실: 기독교를 세기 별로 특정 짓는다면 19세기는 선교의 세기 였으며 20세기는 성장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떤 세기가 될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4

것인가? 우선 세계교회의 지형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듯 이 기독교의 중심도 한 때는 유럽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서 분명한 것은 유럽과 북 미대륙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 수는 감소하고 사회엘리트층은 교회를 이탈하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외면하면서 교회의 문화 사회적 영향력 감소뿐 아니라 교회자체의 지속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남미, 아프 리카, 아시아에서 신흥 교회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비서구 기독교의 비율이 75%에 이른다. 2011년 미국교회협의회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교세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전통적 교단들의 교인수가 감소하는 반면 비전통 교단의 교회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오순절 계통 교회,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타교단과 비교해 볼 때 주목할 현상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1세기 세계 기독교의 미래를 위한 제언: 시대마다 문제가 있다. AD 50년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교회와 이방인교회의 갈등과 분열의 위험이 심각하였듯이 오늘날 세 계 교회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크게 봐서 세계 교회는 에큐메니칼 그룹과 에반젤리칼 그룹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 교회에 따라서 이 두 그룹이 조화롭게 지내 기도 하지만 긴장과 갈등으로 에너지 소모적인 측면이 농후하다. 21세기의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 그룹과 에반젤리칼 그룹의 코이노니아의 악수를 통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을 어떻 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반드시 일치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떤 경향성은 말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에 비추어보면 에반젤리칼은 제사장 전승에 가깝고 에큐메니칼은 예언자 전승에 가깝다. 예수의 사랑계명에 비추어 보면 에반젤리칼은 하나님 사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에큐메니칼은 이웃사랑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인가? 1948년 창립된 WCC는 20세기 후반 들어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일치와 공동선교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국제기구이다. 동시에 회원교 회 안팎으로부터 상당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WCC의 메시지와 활동은 확실히 예언자적 증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WCC의 10차 총회주제인 정의, 평화, 생명이 잘 증언하고 있다. 에큐메니칼에서 말하는 일치란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구조적인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일치 를 의미한다. WCC는 달리 표현하면 교회의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이다. 에큐메니칼은 ὀικο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5

υμενη(만물이 거주하는 세상) 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은 전 세계적이며 지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일치는 전 세계적 일치, 연합, 협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차원에서 볼 때 교회들의 친교영역은 광범위하며 에큐메니칼하다. 바꾸어 말하면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이다. 구약성서에서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 이 각기 그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이며 어느 한 전승이 약화, 쇠 퇴될 때 구약 시대는 끝이 났다. 예수의 교훈을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성 실하게 기록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은 구별은 되 나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21세기 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 아의 악수에서 새로운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에반젤리칼이 에큐메니칼과 분리될 때 하나님의 선교는 미완성이며 하나님의 주권은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과 분리될 때 에큐메니칼의 노력은 공허해질 수 있다. 21세 기 기독교의 방향과 동력의 발견은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아 악수에 있으며 에큐메니칼은 에반젤리칼을 품고 에반젤리칼은 에큐메니칼을 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한국교회도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사회에서는 교회가 상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분열과 사회적 신뢰, 도덕적 신뢰의 결여, 복음보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것과 같은 물 량주의 물질주의의 팽배가 위험수위로 다가가고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에 비하면 생동감이 있는 공동체이다. 예배에 열심이며, 기도에 열심이며, 성서를 읽는 교인들이 많으며, 선교정신이 살아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분명히 세계 기독교의 미 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이와 같은 성찰에 비추어 한국교회를 위한 몇 가지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우선 WCC 총회는 준비과정에서부터 일치와 협력의 과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아의 악수의 역사적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교회가 예언자적 경향성이 강하다면 에반젤리칼 교회는 영성적 경향이 강하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영적 전승과 예언자적 전승이 분리될 때 교회는 약해지 며, 일치 협력할 때 교회는 강해진다. 유럽교회의 쇠퇴의 원인의 하나는 지나치게 예 언자적 역할에 의존하여 영적 전승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비 서구 교회는 신학은 약하고 에큐메니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나 영적 전승이 강하다는 것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6

이다. 동북아 시대에 세계 기독교의 중심적 역할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나? 세계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한국교회는 분명히 중심에 있다. 한국교회 역사에는 유감스럽게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질에 대한 많은 오해와 왜곡이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경청과 소통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WCC는 하나님의 비전을 공유 하는 자리가 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교단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지도 자들의 영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과제에 감사 하며 이런 과제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7

패널 토의-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즈음하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교수, 기독교학부)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과제다. 이 세 계 그 어느 곳보다 배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신앙이 강한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대화와 관용의 문화가 자리 잡기는 참 힘들어 보인다. 잘 참고 대 화하다가도 너 몇 살이냐? (How old are you?)면 그것으로 모든 대화가 끝나는 게 한국적 풍토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면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모 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고단하고 힘들었나 보다. 상호 소통 능력이 빈약한 가부장 문화 와 군사주의 문화 에 배타적인 근본주의 신 학 이 결합하면서 한국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피우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보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한국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제2 의 도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대의 과제이며, 제10차 WCC 부산총회는 바로 그것 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글에서 주장해 보 려 한다. Ecumenical vs Evangelical 에큐메니칼(ecumenical) 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15번 사용된 그리스어 오이쿠 메네(oikoumene) 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한다. 내 지역, 내 교파, 내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즉 지구 전체를 사고의 지평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8

으로 삼으니 그것은 태생적으로 포용적이고 탈( 脫 )경계적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 서 이러한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에큐메 니칼 대 에반젤리칼 이라는 잘못된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 잘못된 이분법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 상황이 낳은 불행한 산물이다. 1) 에큐메니칼 의 반대말은 에 반젤리칼 이 아니다. 에큐메니칼 의 반대말은 섹테리안 (sectarian), 즉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 다. 2) 분파주의/당파주의란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과 진리에 대한 이 해가 마치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근본주의 적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분파주의/당파주의이며, 따라서 에큐메니칼한 시각이 결여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편협한 공동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사 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정확히 대비되는 자세다. 3) 분파주의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 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복음을 사유화 (privatization) 한 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칼이란 교파적 신앙고백(confession)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 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고전 12:25) 하려는 정신이고 문화이자 운동이다. 그것 은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에큐메니칼 은 철저한 에반젤리칼 이다. 에반젤리칼(evangelical)이 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evangelion)을 최우선시 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헌신한다 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그의 선 포(Mission State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 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1) 서방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가입한 세계 최대의 에큐메니칼 기관인 WCC를 용공단체로 매도 하고 1959년 예장 합동이 갈라져 나간 것도 분단상황이 낳은 뼈아픈 역사입니다. 2) Wesley Ariarajah, "Some Basic Theological Assumptions of the Ecumenical Movement," in Our Pilgrimage in Hope: Proceedings of the First Three Seminars of the Asian Movement for Christian Unity (CCA and FABC, 2001)에서 인용. 3) 사도 바울은 참 에큐메니칼적입니다. 그가 얼마나 한 성령 같은 성령 을 강조하는지 보십시오. 은 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 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 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 라. (고전 12:4-1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9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즉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 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이 복음적 이상들 (evangelical ideals) 은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해온 최우선의 가치다. 한국과 세계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바로 이와 같은 복음적 이상들의 구현 을 위해 앞장 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태 7:20)고 하셨다. 에큐메니칼은 탈복음주의 도 후기 복음주의 도 혹은 세속주의 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충실하려고 하는 지극히 복음주의 적인 운동이다. 에큐메니칼을 에반젤리칼에 반대되는 말로 오해되는 이분법적 도식부 터 극복해야 한다. 에큐메니즘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 라 교회가 하나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 과 교회의 교회됨 교리는 분열시키고 봉사는 일치 시킨다 (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 라는 말이 있다. 이 주장의 요지는 교리적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세계 안으로 뛰어 들어 함께 선한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주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 만 우리의 경험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교리적 문제만큼이나 사회참여와 봉사에서도 분열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어떤 정치경제 체제가 가난한 자들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경제적 발전이 그들을 위해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해서 는 의견이 상이하다. 때문에 우리는 교단 간(inter-denominational) 그리고 기독교 내(intra-Christian)의 대화와 일치의 노력, 즉 교회의 하나됨 을 위한 노력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대화는 공동의 증언과 봉사를 위한 신학적 토대다. 오늘날처 럼 이렇게 깊이 분열된 세계 속에서 교회가 구원의 신성한 상징 (sacrament of salvation)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신학적 교리적 예전적으로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멀리 가기 위한 토대이다. 아프리카에 이런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라. 그러나 멀리 가 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but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하지만 교회의 하나됨 이 교회의 교회됨 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 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일치를 위한 일치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0

각한다. 무엇을 위한 일치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근래 교회연합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또 개혁과 통합을 말하지만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교회다움 을 회복하기 위 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묻지 않으면 분열은 물론 일치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조직이나 기구적 제도를 인위적으 로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총체적 위기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일치 는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됨을 추구할 때, 교회가 교회다움 을 회복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다른 말로 이 세계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응 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하나님이 극진히 사랑하사 독생 자까지 내어주신(요 3:16) 세계다. 영어로 the world'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뜻 하는 'cosmos'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듯 (롬 5:20), 교회사를 되돌 아보면 불의가 가득한 곳에 교회일치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곤 했다.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70-80년대의 교회가 그랬고, 인종차별정책(apartheid)으로 고통 받던 남아 프리카의 교회들이 그랬으며, 독일교회가 바르멘 선언으로 히틀러의 폭정에 대항할 때도 그랬다. 사실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교회 내적인 요구에서라기보다 위 기에 접한 세상으로부터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한 성찰이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이렇게 말한다. The saints do not see things that others do not see; rather, they see what everyone else sees but in a different way. (성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 람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되 그것을 다르게 보는 사 람들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남다른 눈으로, 즉 신앙의 눈 으로 이 시대의 징조 를 읽고 이 세계의 위기에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공동의 신앙운동이다. 실로 희망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됐던 21세기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변화 와 생태계 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세대 간 문화 간 단절, 그리고 영적 정신적 혼돈 등,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이다. 이 4) 김동선, 일치의 딜레마에 대한 신학적 고찰과 교회의 본질,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 발전을 위 한 학술대회와 공청회, 2004. 11. 1. 김동선은 갱신 없는 연합은 분열의 죄를 계속하는 것일 뿐 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1843년 두 개의 교회로 나누어졌다가 1929년 하나가 된 스코틀랜드장로 교회의 모습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교회의 통합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예를 듭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진지하게 묻지 않고 교회 내적인 이 해관계로 진행된 일치의 한계를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1

시대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 께 고통을 겪고 있는 (롬 8:22)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힘을 모아 세상 앞 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등불 들고 서있어야 한다. 세 종류의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즘에는 세 종류의 에큐메니즘이 있다. 1 기독교 내 (intra-christian), 2 기독교를 넘어선 (beyond Christian), 그리고 3 심층 (deep) 혹은 우주 적 (cosmic) 에큐메니즘이다. 이러한 구분은 학문을 위한 인위적 구분이 아니라 실 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발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구분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 이전의 기독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축으로 한 기독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책임사회 (Responsible Society) 라는 이념이 제기되었고, 제3차 뉴델리 총회(1968)와 제4차 나이로비 총회 (1975)를 거치면서 세계교회들은 제3세계의 빈곤과 억압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사회 변혁의 가치들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밴쿠버(5차)와 캔버라(6차)와 하라레(7차) 총회 를 거치면서는 이제 생명의 시각에서 신학과 선교를 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에큐메니칼의 패러다임은 1 개인 인격의 변화와 영 혼 구원에 중심을 둔 선교에서, 2 교회의 성장과 확대를 중심한 선교로, 그리고 거 기에서 3 교회를 넘어선 세속적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 로, 그리고 4 인간중 심적 하나님 선교를 넘어선 생명 중심의 선교로 패러다임이 확대 심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5) 5) 박충구는 에큐메니칼 가치와 한국 교회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도표화 합니다. 구분 구원개념 세계관 교회의 의미 선교의 성격 신학적 패턴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영적 구원 사회적 구원 해방적 구원 온 생명체의 구원 영육 이분법에 기초한 자유주의 책임사회 3세계의 인간 억압의 정황까지 인식 우주적 생명 파괴의 정황 인식 교회는 구원받는 자들의 공동체 사회질서의 기독교화 인간해방의 영성을 지닌 교회 생명권 보호의 전사, 변호사들의 공동체 신앙 의인의 교리적, 교회중심적 선교 이성적 설득이 가능한 사회복음적 선교 인간의 해방과 평등을 확대하는 선교 죽음의 문화에 대한 생명권 옹호적 선교 영적 구원을 위한 보수 근본주의적 신학 사회책임과 기독교화를 지향한 자유주의 신학 인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해방을 지향한 정치신학 문명비판적, 우주적 창조 중심의 생명신학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2

첫째로 기독교내(intra-Christian) 에큐메니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에큐메니즘이 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드리신 그의 간절한 고별기도에, 6) 그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에서, 7) 이 에큐메니즘의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의 핵심적인 신학적 전제는, 웨슬리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가 잘 지적하듯이, 교회의 일치가 선물 임과 동시에 목표 라는 것이다. 8) 완고한 교파주의 와 개교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이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은 언제나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의 성패는 개교회와 지 역교회의 참여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제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참여가 없는 에큐메 니칼 선언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군사정 부 하에서 사회 모든 부문이 숨죽일 수밖에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시대 가 변화했다. 에큐메니칼 운동 선구자들의 기도와 헌신과 희생이 이러한 변화를 이 루게 하였다. 이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밖 일부 전문가들의 운동이라는 오해에 서 벗어나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저변운동 (grassroots movement)이 되어야 하겠고, 그것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실천되어야 하겠다. 교회 내 에큐메니칼 인프라 를 구축하기 위한 에큐메니칼 목회 론 이 개발되고 실험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9) 또한 목회자의 영향력이 서구교회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인식을 전환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는 6)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 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 다. (요 17:21-22) 7)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 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 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1-6) 8) Wesley Ariarajah, "Some Basic Theological Assumptions of the Ecumenical Movement," 9) 권오성, 교회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목회론의 내용은 에큐메니칼 신학을 가진 교회 란 어떤 교회이고, 성경 해석과 설교의 내용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며, 사회봉사와 증언은 개 교회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것이라고 권오성은 제안합니다. 또한 에큐메니칼 입 장에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설교문, 교회 교육 자료, 교회 활동의 예를 계속 제공할 때 기존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 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업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과 또 에큐메니칼 목회연구원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제안합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3

지적도 매우 중요해 보인다. 10) 둘째로 우리는 기독교를 넘어선(beyond Christian)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 겠다. 지금까지 에큐메니즘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만의, 그리고 종종 개신교회의 전유 물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교단 통합 보다 더 큰 운동이다. 원래 에큐메니칼 운동의 동력과 생명력은 교단 안에서 생 긴 것이 아니었다. 이 힘은 교권 밖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에큐메니 칼 운동은 교회와 세계의 교차점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하는 오이쿠메네 (oikoumene) 자체가 벌써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에큐메니즘은 교회 교파간의 대화와 일치를 넘어서 타종파와의 대화와 협력을 지향한다. 특히 아시아의 에큐메니즘 은 교회 내적 대화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깊은 종교 문화적 전통과 대화하기를 요청받고 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기독교화 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기독교의 아시 아화 를 배워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주적(cosmic) 혹은 심층(deep)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겠 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하는 오이쿠메네 (oikoumene)는 또한 집 으 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집에는 우리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이 함께 살고 있다. 그 집은 창조세계 라는 큰 집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 지금도 날마다 이 지구상에서는 100종의 생명체가 멸종하고 있으며, 2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고, 8천6백만 톤 의 기름진 땅들이 침식되고 있으며, 1억 톤의 이산화질소가 내뿜어지고 있다. 인류가 멸종과 자기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생태학자들의 경고는 일부러 겁주기는 아닌 것 같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2에서,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 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 씨가 궃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 10) 한국일, 에큐메니칼 공동고백과 실천, NCCK 교육훈련위원회 에큐메니칼 강좌 (2005. 6. 14) 한국일은 이런 현상은 이미 농어촌 교회에서 이미 찾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농어촌 교 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이나 정신을 배우지 않아도 농어촌 사회의 구조상 에큐메니칼 정신 이 구현되고 있습니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도시상황에서 철저한 개교회주의에 근거하여 경쟁 적이며 물량주의적 방식을 사용하는 도시교회와는 달리, 농어촌 교회들은 지역사회와의 연대 적 관계에서 지역교회들과 연합운동을 통해서 마을을 섬기며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의 신뢰를 받으며 발전적으로 이끌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바람직한 에큐메니칼 정신을 목회적 차원에 연결하기 위해 농어촌 교회의 폭넓은 선교활동과 경험으로 부터 배우며 신학화 할 필요가 있다고 한국일은 제안합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4

별하지 못하느냐? 고 질타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하늘의 징조 곧 날씨가 시대 의 징조 가 되어버렸다. 지금 한반도가 아열대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 도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를 등한시 하고 초자연적인 것에만 관심하는 경향이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 안에 너무 강하다. 11) 이제 우리는 듣는 말씀 (성서)과 보는 말씀 (자연) 사이에 끊어졌던 연결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뿐인 우리의 지구는 잠시 묵었다 가는 호텔 (hotel)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거하는 집 (home)이다. 우리가 지 구를 우리의 집 으로 인식하지 않고 잠시 지나가는 외부인쯤으로 여기는 동안 우리 의 집 은 하늘에도 땅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권력과 부에 관심이 있는 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은 1961년 뉴델리 총회 이 후 교회중심적 인간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에 깊이 관심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성서의 신앙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sm)이다. 12) 에큐메니칼은 그 폭에 있어서 전 지구적 관점과 그 깊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에 관심 하는 넓고 깊은 개념이다. 때문에 에큐메니즘은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 든 생명에 화해와 정의와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참여와 기여 그런데 제 아무리 에큐메니칼 이상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참여 (participation)가 없이는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서는 여성과 청년과 평 신도의 참여와 발언과 역할이 매우 저조하다. 과거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리나 직제 의 일치에 관한 것으로 국한될 때 종종 그것은 전통적으로 신학자이며 사제이며 결 11) 레이건 행정부 1기 내각의 내무장관이었던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왜 레이건 행정부가 선진 적인 환경정책을 채택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는데 그런 것은 왜 필요합니까? 라고 어처구니없는 응답을 했다고 합니다. 12) 뉴욕의 시립도서관(Public Library)에서 보았던 한 어린이 그림동화책은 창세기 1:26을 새롭게 해 석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 들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수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무리하게 이 구절이 성서에 최초로 나타난 삼 위일체에 관한 구절이라고 하지만, 그 그림동화책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해석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림책은 하나님이 첫째 날부터 창조하신 것들을 하나하나 차례차례 보여준 다음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모아 놓고 원탁회의 를 여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 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에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 앞서 창조하 신 모든 피조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우주만물의 모습을 닮을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신학자도 아닌 동화작가가 이런 참신한 해석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랄 따름이었습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5

정권자들이었던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 여성과 청년과 평신도들, 나아가 장애인들과 원주민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 장하고 그들의 선교적 사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과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 사회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목회자들보다 평신도의 참여를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현재의 목회자 중심구조는 교회 내 엄청난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다양한 탤런트가 꽃피게 해야 한다.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에큐메니칼 2세 지도력의 재 생산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필자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CA)의 공동의장으로 피선되어 5년을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경 험을 가지고 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지도해준 에큐 메니칼 선배들의 노력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빚진 자 가 되었다. 국제 에큐메니칼 기관에 청년이 배정되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그것이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 미래에 투자하는데 인색 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안에 비전과 열정과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 과 자기 분야의 전문성 과 해외 교 회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을 체계적으로 키워주는 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하다. WCC 총회를 앞두고 이제 총회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왜 WCC가 시리아가 아니라 한국(부산)을 차기 총회 개최지로 선정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10차 총회의 실무총책을 맡고 있는 WCC의 한 책임자는 이번 총회 개최지를 결정할 때 무엇이 한국교회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상이었는지 소개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초대장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협력의 느 낌 (strong sense of togetherness)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제9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냈던 초청장과 제10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낸 초청장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 가 난다고 한다. 10차 총회 초청장에는 WCC 회원교회를 넘어 많은 한국교회 지도 자들의 서명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도 크게 작 용했다. 한마디로 WCC는 한국의 다음과 같은 매우 독특한 상황과 잠재성에 끌린 것이다. 아시아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 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유혈충돌이 없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6

들과 오순절교회와 에큐메니칼과 정교회가 협력하는, 그래서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 을 잠재력으로 가진 나라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후인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30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50% 이상은 아프리카에, 그 다음 남미와 카리브 해에, 그 다음은 아시아에, 그리고 유럽에, 마지막으로 북미에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세계교회 지형의 거 대한 변화다. 세계기독교백과사전 (데이비드 바레트)에서 가져온 아래의 통계는 출현 하고 있는 기독교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준다. 13) 1990년 20억 기독교인들 번호 대륙 기독교인 수 1 유럽 5억 6000만 명 2 라틴아메리카/캐리비안 4억 8000만 명 3 아프리카 3억 6000만 명 4 아시아 3억 1300만 명 5 북 아메리카 2억 6000만 명 2025년 26억 기독교인들 번호 대륙 기독교인 수 1 라틴아메리카/캐리비안 6억 4000만 명 2 아프리카 6억 3300만 명 3 유럽 5억 5500만 명 4 아시아 4억 6000만 명 2050년 30억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다수는 아프리카에 있게 될 것이고 그 뒤를 어어 남미/캐리비언, 아시아, 유럽, 북미의 순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지형변화 속에 서 그동안 전통적으로 에큐메니즘에 참여해 온 기성 교회들은 오순절 운동과 복음주 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회들과 만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 간 협력과 일치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과 틀 그리고 접근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WCC 안에서 는 지금 이제까지 WCC 안에서 누려온 교회 간의 친교를 로마가톨릭과 오순절교회 그리고 복음주의교회로 넓히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 부산총회에서는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운동 새 판 짜기 가 계속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이 21세기 에큐메니즘 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의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 오순절과 정 13) 사무엘 코비아 전 WCC 총무의 한 발제문 중에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7

교회,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톨릭이 어떻게 함께 WCC 총회를 계기로 서로 협력하고 이웃종교와 대화하며 위기의 세상 앞에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기독교적 봉사의 삶을 살 것인가가 바로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인 것이다. 세계교회 지형변화 의 축소판으로서의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새로운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신과 방법 그리고 모형을 보여줄 수 있다. 촛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을 넓히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행사(event)로서의 WCC 총회가 아니라 지속적인 교회의 삶(life)의 한 표현으로서 WCC 총회가 되도록 한국교회는 지금부터 대화와 협력과 자기 비움과 일 치의 에큐메니칼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WCC 총회 유치를 반대하는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1959년에 WCC 가입문제를 놓고 교회가 분열되는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부정적으로 WCC를 보는 입장은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실린 한 교단 총회장의 담화문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그 는 WCC와 함께 할 수 없고 일치될 수 없는 이유를 19가지나 나열했는데, 비슷한 것끼리 묶으면 1 WCC 회원에 공산권 교회들이 대거 가입되어 있다는 점, 2 WCC가 제3세계의 혁명이나 폭력 활동을 지원한다는 점, 3 가톨릭을 포함한 타종 교에 관용적이고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점, 4 성경무오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5 복음의 토착화에 관용적이고 동성애자 교회 등을 인정한다는 점들이었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 지구상에는 더 이상 공산권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WCC의 회원 교회 가운데 동방 정교회가 가장 큰 회원 교회이긴 하지만 이 교회는 더 이상 공산권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다. 현재 WCC 의 회원 가운데는 장로교(28%), 루터교(16%), 감리교(11%)를 포함해 개신교회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보내 이 땅에 장로교회가 있게 한 미장로교회(PC-USA)도 현재 WCC의 정식 회원 교회다. 우리는 설사 UN에 공산국 가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소극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현재 WCC에는 공산권 교회들이 대거 가입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는 21 세기 세계화 시대에 교회가 아직도 과거 동서냉전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미래와 선교를 위해서도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WCC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그 핵심은 대화(dialogue) 다. WCC는 서로 다른 배경과 역사와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 그동안의 다툼과 분열과 상쟁의 역사를 회개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려는 대화의 장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루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8

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 느냐! (누가 19:42)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오늘 세상보다 더욱 깊이 분열된 교회를 보시고 또한 평화의 길 을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가 아니라 세상의 주가 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 에 (에베소 4:6) 계신다. 따라서 WCC의 대화는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고 타종교로, 인류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모든 창조의 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던 것이다. WCC는 분명 빈곤과 인권과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참여 의 신학을 강조했다. 하지 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정치적 해방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결코 개인의 사후 영혼 구원으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믿 음 때문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다 (요한 3:16)고 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이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이 세 상(cosmos), 즉 온 우주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이고 그의 사랑은 온 세상 을 통치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교회만의 머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가 되 시기에, 그가 다스리는 이 세상이 불의와 폭력과 생명파괴로 얼룩질 수 있도록 내버 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WCC가 해 온 교회의 공적 증언 (public witness)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같은 교회가 이것을 세상 권세자의 눈으로 불 온시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수세기 동안 각 종교 전통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여러 종교가 한 지역에 공 존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는 각 종교 공동체들이 상호 고립을 깨고 새로운 관계를 맺 을 것을 촉구해 왔고, 그 결과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종교 간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물론 종교 혼합주의에 대한 우려와 종교간 대화가 선교의 절박 함을 약화시킨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WCC가 종교간 대화를 꾸준하게 이끌어온 이유 는 오늘날 이 세상에 기독교적 대답만 요구하는 기독교적 문제는 없다고 보기 때문 이다. 경제적 불평등, 전쟁과 테러리즘,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한 대규모 파괴 등,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오직 기독 교인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 모든 종교 공동체가, 나아가 전 인 류 공동체가 초당적 으로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다름 을 존중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태도다. 오늘날 많은 타종교인들과 일반인들이 한국 교회의 선교를 공격적 이라고 말한다. 물론 선교는 세상의 권세에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9

대한 위협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마저 교회의 선교를 위협 으로 느낀 다면 우리는 그것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위 협이 아니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선교가 잘 될 것이다. 나아가며 이제 한국교회는 경쟁적이고 개교회적인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질적인 성숙 과 내실화를 도모할 때를 맞이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절대 절명의 위기를 있 는 그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팽창과 성장과 경쟁의 모델이 한국교회가 나아갈 모델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지만 가장 빨리 노화 혹은 퇴화할 것으로 진 단받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제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바로 이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의 관건이 에큐메니칼 정신이고 운동이다. 그것은 21세기 한국교회를 살리고 재도약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 것이다. 2013년 WCC 총회의 한국 유치는 바로 그런 패러다임 전환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 라고 믿는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주셨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런 복된 초대 앞에 과거의 오해와 편견과 상처와 아 집을 다 털어버리고 인간의 지혜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아직 한국교회 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믿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 길은 에큐메니칼로 뻗은 길이다. 그 길은 광야와 같이 거친 길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가 못이 되게 하 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 (이사야 41:18)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0

[패널토의-논찬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과제: 코이노니아의 악수를 하라 에 대한 논찬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수) 장상 박사님의 강연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선 신약학자로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신약성경의 근거를 가 지고 제시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무게 있는 권위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5장에 사도회의를 통해 세계 에큐메 니칼 운동의 중요한 원칙인 교회의 협의회적 친교(concilia koinonia)와 다양성 속 의 일치의 근거를 짚어 주신 것이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을 최초의 에큐메니칼 사도 라고 명명하심으로써 에큐메니칼 운 동의 사도적 전승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흔히 기존 교회에서는 사도바울이 복음의 전도자요, 위대한 선교사요, 이신칭의 신학을 정립한 신학자로 평가를 하는데 동의합 니다. 그러나 오늘 장 박사님은 그것을 넘어 사도바울이 교회의 일치를 위해 사도회 의에 참여했으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구제하기 위해 모든 이방인교회를 하나 로 묶어 헌금하게 했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와서 체 포된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장상 박사님은 바울의 전문가답게 다른 분들이 강조하지 못한 중요한 부분을 알려주셨습니다. 세 번째 이 강연은 시기적절하게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학 술적 성과는 그 시대의 과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강연은 한국교회가 WCC 부산 총회를 앞두고 찬반 논쟁이 일어나고, 찬성하는 분들의 내부에서도 리더 십과 방향의 문제와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혼란스러운 시점에서 성경적 원칙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1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제시해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강연은 내용적으로 흥미롭게 구성을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제사장 전승과 예 언자 전승이 두 개의 바퀴로 흘러오면서 통전성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두 전 승이 예수께로 이어지면서 하나님 사랑 과 이웃사랑 의 계명으로 표현됩니다. 그리 고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이 계명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가하는 점도 아주 새롭고 흥미로웠습니다. 마가 (12:28-34) 마태 (22:34-40) 누가 (10:25-37) 질문자 서기관 율법학자 율법학자 예수의 태도 긍정적 부정적 부정적 질문자의 관심 첫째 계명 위대한 계명 영생을 얻는 법 예수의 답변 이것들(복수)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의 동사) 장 박사님은 예수의 사랑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양 계명의 통전성이 성경의 뜻이라 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대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의 코이노니아 악수를 통해 어떻게 하나를 이루었는가 하는 중심으로 들어갔습 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악수가 구약성경과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떤 연속선상에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제사장 전 승과 예언자 전승의 양대 흐름이 끝나고 새롭게 유대문화와 복음 대 이방문화와 복 음이라는 대립 항이 설정되는 데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악수 부분에서 눈에 띠는 강조점은 공동의 목적을 인정하는 교 회의 일치와 연합 이라고 봅니다. 단일교회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정, 존중, 협력하는 일치와 연합, 파트너십을 이루는 상징적 행위 였다는 점입니다. 중심 점은 일치의 과정이 협의회적 친교 를 거쳤고 다양성 속의 일치 를 추구했다고 강 조하는 것입니다. 논찬자가 발표자의 글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은 사도바울이 교회일치를 가시화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2

하기 위해서 온 이방교회가 구제 헌금 하도록 하고, 그 헌금 에 깊은 에큐메니칼 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목숨을 걸고 이루려했던 점을 강조한 것 입니다. 사실 에큐메니칼 권의 학자들은 예루살렘 공의회 사건을 자주 인용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구제헌금에 에큐메니칼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글은 그 후에 민주적 의사결정과정과 지도자의 영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 였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권위로 바울을 누르지 않았고 민주적 협의회를 거쳤습니다. 발표자는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양측의 참여를 통한 합 의과정을 거침으로 신뢰성이 보장되었다 고 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여기서 바울이 함 께 동행했던 바나바와 디도의 위치와 역할 및 그들의 영성도 함께 언급했더라면 이 부분이 더 부각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발표자는 세계기독교의 미래와 한국교회 부분에서 세계기독교의 지형변화를 언급 하면서 에반젤리칼과 에큐메니칼의 악수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 예수의 하나님사랑 및 이웃사랑의 계명의 통전 성을 에반젤리칼과 에큐메니칼의 수렴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제 언>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다양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1. 바울의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 로 보아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당시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를 주도하였다면 교회의 선교 가 되었고 역사 속에 소멸되었을 것입 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했지만 바나 바는 바울과 함께 할례 없는 이방인 선교 를 지지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 고 하나님은 역사의 촛대를 이방인선교로 가져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선교 가 하나님 선교 를 거스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봅니다. 2. 개종 (proselytism) 문제입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새 이스라 엘(new Israel)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조차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전통을 따르는 개종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교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3

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가 친교의 악수를 했다면 서로 개종 시키는 일은 없 어야 하고, 공동증언 (common witness)를 위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여 집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극우와 극좌가 있었고 그것이 불협화음을 낳았 습니다. 오늘날 개종문제는 2010년 로잔운동의 남아공 케이프타운 선언에서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대교 그리스도교회와 이방 그리스도교회 사이의 문제는 오늘날 선교학에서 다 루어지는 문화와 복음의 관계, 전통과 복음의 관계, 선민의식과 복음의 관계에 해 당되는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역사 속에서 이 부분을 사도회의를 통해 넘 어섰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하고 고무적인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도회의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지도자들과 그 합의절차, 영성과 인격 이 부분 들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질 문> 1.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린 시점이 언제인가요? 사도행전은 1차 전도여행(45-47 년경) 이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린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발표자의 견해 에 따라 갈라디아서가 기록된(49년) 4-5년 전이면 45년경으로 판단됩니다. 그러 면 사도 바울과 안디옥 교회가 1차전도 여행 이전에 이 교회분열 문제를 해결하 려했다는 점이 상당히 놀랍습니다. 2. 원론과 현실적용은 늘 큰 간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교회가 WCC 총회를 앞 두고 보수, 진보갈등, NCC회원교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화하지 않고 진영을 고수하던 그룹들이 갑자기 정치적으로 문제 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려움 같습니다. 이 시기 모든 관계자들이 오 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제일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4

논찬: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컬 운동: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즈음하여 배현주(부산장신대학교) 장윤재 교수는 청년 시절부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력에 참여한 살아있는 경 험이 있는 신학자로서, 이 강연을 통하여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맞이하며 홍역을 앓고 있 는 한국교회를 위한 사랑과 소망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 세계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응 으로 정의하고, 일치를 향하여 교회가 노력하는 목적이 일치 자 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다운 증언과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것임을 잘 설명했는데,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회연합 운동으로 축소시키는 오해와 현실적 위험에 대한 시의적절한 경고라고 하겠다. 또한 세 종류의 에큐메니즘에 대한 구분은 이 단어의 풍부한 의미,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광범위한 지평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이해 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이 한국교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높은 기대와 한국교회의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며있는 본문들은 깊은 공감을 유발한다. 사소하고 기술적인 착오를 지적하자면 제3차 뉴델리 총회의 연도가 1968년이 되고 제4차 웁살라 총회가 빠지면서 총회 개최 도시와 총회 순차의 부조화가 도미노 식으로 일어나 게 된 점이다. 1) 필자는 이 강연의 주장과 정신에 전반적으로 깊이 공감하면서 부산이라는 한 지역에서 신학교육에 종사하는 신학자로서 몇 가지 강조점을 부각시키고 발전시키고자 한다. 1 WCC 제10차 부산총회와 에큐메니칼 대각성 (eumenical awakening) 2) 필자는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남다른 눈으로, 즉 신앙의 눈 으로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이 세계의 위기에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공동의 신앙운동 이라는 문구가 매우 반가왔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신앙운동 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기본 전제가 쉽게 간과되고 마치 사회 운동 혹은 소수 글로벌 활동가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현실에 부딪힐 때가 종종 있 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에큐메니칼 정신과 운동은 WCC나 NCC 같은 에큐메니칼 기구나 에큐메니칼 활동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뜨거운 영적 각성 운동, 선교적 열정, 성서의 재발견 1) 참고로 역대 총회의 개최도시, 연도, 총회 주제를 소개한다: 1차(암스텔담, 1948)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섭리 2차(에반스톤, 1954) 그리스도-세상의 소망 3차(뉴델리, 1961)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 4차(웁살라, 1968)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5차(나이로비, 1975)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신다 6차(뱅쿠버, 1983)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 7차(캔버라, 1991)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8차(하라레, 1998) 하나님께 돌아가자, 소망 중에 기뻐하자 9차(포르토 알레그레, 2006)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10차(부산, 2013)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2) 배현주, 에큐메니칼 교회론 정립을 위한 성서적 고찰: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제10차 총회를 맞이하며, 신학논단 69집(2012), 119. - 1 -

등이 WCC 창설 뿌리에 놓여 있다는 점, 그리고 교회가 시대의 표징을 읽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일치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과제라는 점 등에 주목 해야 한다. 역사의 유일한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세 계대전을 두 번 치른 20세기를 보내고도 21세기 지구촌은 발전된 기술공학에 의거한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을 경험하고 있다. 한반도는 어떠한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지도 못한 채 60년을 보낸 지금,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도 핵무장까지 고려해서 공포의 균형 을 맞추어야 한다 는 담론이 대두되고 있다. 이미 무기 수입국 서열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는 대한민국이 이제 핵무장까지 고려하면, 핵지뢰밭인 동북아의 평화지수는 더욱 낭 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 앞에서 한국교회는 힘을 모아 세상 앞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등불 들고 서있어야 하건만, 소모적인 갈등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지만 가장 빨리 노화 혹은 퇴화할 것으로 진단 받는 상황 속에서 절대 절 명의 위기 앞에 서 있는 한국 교회가 다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에큐메니칼 정신과 운동 에 있다는 장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신교 성서학자인 필자에게 있어서 에큐메니 칼 정신은 곧 성서적 정신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하나님의 축복과 기대와 도전이 담겨 있는 WCC 부산총회를 통해서 한국교회 지도부는 에큐메니칼 대각성 을 통하여 거듭나고자 하는 의지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현재 침체되어 가는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일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성서적 신학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문제와 더불어, 21세기 한국 사회와 인류 를 위한 생명과 평화 의 범민족적 범세계적 비전에 교회가 어떻게 실질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 21세기 한국교회가 생명과 평화의 실천 공동체 로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구 중 심이나 소수 활동가 중심에 머물지 않고 목회자와 평신도를 포함하는 교회 전체의 신앙고백적 운동으로 발전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즘 정신에 입각한 생명교회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회적으로 시대의 표징에 대한 올바른 통전적 이해 릃 공유해야 한다. 3) 2 세 종류 에큐메니즘의 구현 단위로서의 지역교회의 중요성 장윤재 교수는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의 성패가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참여에 달려 있다 고 했는데, 기독교내 에큐메니즘만이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선 에큐메니즘, 그리고 우주적 에 큐메니즘도 지역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씨름하는 지역교회들을 통해서 함께 실천되어질 수 있다고 보여진다. 필자는 예장 통합이 작년까지 실시한 생명살리기 운동 10년 이 한국형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정신으로 목회와 선교를 전개해온 지역목회자들과 활동가들을 강사로 모시고 생명목회 생명선교 라는 신대원 필수과목을 만들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목회와 생명선교 사역을 해 온 목회자들과 기독교 리더십들, 생명농업에 관여해온 농어촌 3) 배현주, 21세기 한국교회의 생명살리기 운동과 에큐메니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에큐메니칼위원 회 엮음, 21세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339-40. - 2 -

교회, 녹색교회 등에서는 장윤재 교수가 언급한 세 종류 에큐메니즘이 다 가능해진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생명목회 생명선교의 비전과 인식을 지닌 목회적 선교적 주체들은 아직 소수이 다. 이러한 지평의 확대를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인식 심화를 촉진할 수 있는 목회자 평생 재 교육의 장이 마되어야 한다. 교회에 회의를 품은 어느 기독청년이 지역 사회의 아픔이 기도 제목으로 개교회 주보에 실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점점 더 어려워져가 는 목회 현실과 씨름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영육이원론 등을 극복하고 성서적인 에큐메니칼 목회 철학을 가질 수 있도록 장기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역의 노 회들이 지역 사회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비전을 지니고 서서히 발전해나 갈 수 있도록, 각 지역에서 이미 이런 주체적인 생명목회와 생명선교를 일구어가시는 분들이 구체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길들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총회가 생명살리기 운동 10년 의 후속으로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 10년 을 결정하고 또 지역 에큐메니즘 활성화를 정책으 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정신과 노력을 통하여 지역의 저변운동으로부터 발전해나가는 창조적 인 한국형 에큐메니칼 운동의 초석이 닦여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에큐메니칼 영성의 확립과 실천의 중요성 장윤재 교수의 강연에서 등장하는 대화, 다름의 존중, 경청, 협력, 일치, 자기 초월, 자기 비움 등은 에큐메니칼 영성의 근본 덕목이라고 하겠다. 한 운동이 추구하는 비전이 운동 주체 개개인의 영성, 곧 삶과 생활문화 속에서 먼저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 운동은 생명력을 상실한다. 당신은 당신이 추구하는 변화를 먼저 몸으로 보여야 한다 (you need to embody the changes you are seeking)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표어는 참 좋은 사람은 이미 좋은 세 상 이라는 싯구를 연상케 한다. 에큐메니칼 영성이 없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생동력이 없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은 평신도이자, 여성이고, 청년들이다. 국내외 의 에큐메니칼 공간에서 효과적으로 기여하려면, 만인사제설의 구체적 의미를 체득하여야 한 다. 특별히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사생활의 영역에서부터, 그리고 교회와 기관의 삶에서부터 여성, 청년, 평신도(전도사 포함)들을 진정한 의미의 파트너요 교회의 미래를 위한 공동책임자 들로 인정하고 동역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체화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유교적 가치관이 깊이 배어 있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 고 개인의 인격과 독자적 의견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은 시민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일 뿐만 아 니라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앞으로 효과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체들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생활문화에 대한 성찰, 그리고 WCC가 세계 교회교육의 내용 으로 출판하기까지 한 긍정적 남성성 (positive masculinities)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 다. 삶과 영성 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근본주의적인 종교를 극복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적 대안을 파급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장자교단 이라는 정체성과 이미지의 타당성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장자교단 이라는 어휘는, 유교적 가부장주의를 존속시키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타교단과의 관계를 위계질서적으로 구상하는 반에큐메니칼적이고 중심주의적인 멘탈리티를 강화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4.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중요성. WCC의 태동은 20세기 전반기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 가장 창조적 사고 - 3 -

를 하는 탁월한 사상가들이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 위에서 준비되었다. 심지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속 문명에 대처하기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시인 등 일류 지 성 (first-class minds)을 결집해서 기독교적 싱크 탱크 를 만들기도 하였다. 세계의 지성계 와의 대화를 늘 염두에 두고 있던 WCC가 지닌 위험에 대해서 엘리띠즘(elitism), 서구 지역 주의(provincialism), 선택성(selectivity), 비운동성(immobility) 등 네 가지 위험이 제기되기 도 하였다. 4)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일류 지성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에큐메니칼 전통과는 정 반대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 교계 지도자들의 계몽 이 필요하다는 평신도들의 불만과 염려 가 들려오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라 고 하였고(고전 14:20) 영으로 기도하는 만큼 마음으로도 기도하라고 권고하였다(고전 14:15).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은 목회자 재교육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자 수는 아시아 전체의 신학자 수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 신학대학들은 세계 특히 남반구 신학교육의 한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예측도 제기된다. 특히 예장 통합이 전국 각 지역에 7개 신학교를 소속 신학교육기관으로 지니고 있다는 유례없 는 강점을 적극 활용한다면, 앞으로 지역 에큐메니즘을 활성화시켜나갈 수 있는 차세대 리더 양성을 위한 에큐메니칼 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앞 으로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5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책임적 공동체로서의 예장 통합 필자는 2011년 자마이카 평화대회에 참석을 했는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치과학 연구소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담고 있는 설문지를 받았다: 당신이 소속한 교회는 자마이 카 대회의 에큐메니칼 선언 (Ecumenical Call to Just Peace)에 대해서 동의합니까? 당신의 교회와 국가에 영향을 주는 평화 이슈가 이 선언에 반영되어 있습니까? 이 선언에 부족한 점 은 무엇입니까? 대안적인 제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이 소속한 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선 언 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어떻게 수용되고 논의되고 있습니까? 국제적 보호 책임 (the International Responsibility to Protect=R2P)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시리아의 현 사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사회의 갈등과 분쟁 해결에 대하여 당신이 소속한 교회는 구체적인 입장을 지니고 토론하고 있습니까? 국제적 차원의 평화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WCC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까? WCC와 UN의 상호협력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어느 개인 신학자의 입장이 아니라, 예장 통합을 대표할 수 있는,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 대한 진지한 일상적 논의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세계 에큐메니 칼 운동에 책임적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총회나 행사를 위해서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위원회 를 넘어서서 세계적이고 한국적인 에큐메니칼 이슈들에 대한 전문적 연구와 장기적 논의의 공 간이 필요하다. 문서적 대응까지 할 수 있는 이런 노력이 전제되어야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대 4) 에큐메니칼 운동에 세계의 공인된 일류 지성의 공헌을 추구하다 보니까, 지성적 성취에 전념하지 않 은 기독교인들의 공헌을 무시하는 위험도 발생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뿌리가 서구에 있다 보니까 서구의 지성적 전통을 그 기준으로 삼는 서구 지역주의의 위험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 에 부합하는 지성적 논의만을 선택하는 선택성의 위험, 그리고 어느 특정 상황에 대한 철저한 지성적 분석에 치우치다 보니까 행동하지 않는 사변으로 끝나는 위험도 무시할 수가 없다. 이 마지막 위험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만하고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맑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Marlin VanElderen, Introducing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Geneva: WCC Publications, 1990), 122. - 4 -

화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한국의 선교 네트워크에는 세계 교회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좋은 모델들이 많이 있음 에도 불구하고 WCC 차원에서 한국 선교의 부정적 이미지들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의 에큐메니칼적 목회들과 선교들의 사례들을 발굴해서 세계 교회와 차세대에 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료로 제작 보급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겨진다. 6 맺는 말 지난 1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WCC 부산총회 성경공부 집필자 워크샵의 예배 시간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충분한 어 리석음으로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기를 기 도합니다 (May God bless you with enough foolishness to believe that you really can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so that you are able, with God s grave, to do what others claim cannot be done)라는 기도문을 함께 읽었다. 성서연구 집필자들은 자신의 성 서연구 마지막의 기도문에 모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용기를 교회에게 주소서 라는 기도문을 반복하기로 결정했다. 맘모니즘과 패권주의의 시대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 하는 어리석음과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서만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WCC 부산총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세계 속의 한국 그리고 세계교회 속의 한국교 회'의 책임적인 위상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와 인류와 지구의 위기 앞에 일치의 지헤 를 발휘하여 협력함으로써 세계교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21세기 에큐메니즘 의 새로운 파라 다임을 창출하는 한국 교회가 되는 일에 예장 통합이 소중한 공헌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 5 -

[마침기도회] 인도 : 민경자 장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장) 사도신경 다같이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 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 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 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 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 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찬 송 오소서 오소서 다같이 오소서 오소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5

성 경 로마서 12:14-18 인도자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 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 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 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기 도 박요한 회장 (청년회전국연합회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6

[부록 1] 기독교와 정의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 기획위원장,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때아니게 한국에는 요즈음 정의 공부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과거 독재 정권 때는 절실한 개념인데도 쉽게 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즈음은 마이클 샌델의 책이 날개 돋힌듯이 팔리고 여기저기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명박 정 부가 독재 정권보다 더 불의하다는 반증인가? 한국사회의 이 정의열풍 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이 있는 것 같다. 결국 한국사회는 지금 정 의 에 목마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정의에 대한 막연한 개념이 느낌이 아니라 정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리라.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 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 주제에도 정의가 들어있다. 생명의 하나 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WCC 총회 주제는 보통 그 시대적 징조에 대한 세계교회의 복음증언의 과 제와 총회가 개최되는 나라를 포함한 해당 대륙의 제안으로 정해지는데 부산총회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제안한 핵심개념은 생명 이었고 한반도 분단상황을 고려해 평화 의 개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2010년 11월 아시아교회대표와 신학자들이 모여 아 시아적 관점에서 WCC 총회 주제에 대해 논의했을 때 아시아교회대표들은 생명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정의가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였다. 정의 없 는 생명도 진정한 생명이 아니고 정의 없는 평화도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었 다. 진정한 생명과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 이다. 따라서 부산총회 주제에 함유된 개념은 생명, 정의, 평화이지만 그 중심 개념 은 정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정의는 항상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물론 속죄, 구원, 성결, 성화 등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7

종교적 개념이외에 사랑, 자비, 평화, 생명 등이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지만 정의는 항상 기독교 가치의 중심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면 기독교가 생각하 는 정의는 어떤 개념인가? 성서는 정의를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 정의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광범위한 주제여서 전체를 다 다룰 수 없지만 핵심적 관점을 이해 하기 위해서 경전인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개념을 살펴본 후 이의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방법으로 좁혀서 집중하려 한다. 성경적 정의 언어 성경에서 정의를 가리키는 말에는 구약에는 체데크, 미슈파트 란 히브리어가 있 고 신약에는 디카이오수네 란 희랍어가 있다. 먼저 체데크(tsedeq)란 개념을 살펴보자. 이 단어는 짜다크란 어근에서 파생했다. 서부 셈어 계통에서 발생한 이 어근은 아카드어에서는 올바르다, 정당하다 란 뜻이 다. 아모리어에서는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종종 나타나는데 이 말도 정당 함 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남부 아랍어에서는 의무를 이행하다. 란 뜻을 가지고 있고 명사로서는 권리, 의무, 진실, 사실 등을 뜻한다. 형용사로서는 행복하다 만족 스럽다 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마이클 센델의 1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추구, 2개인 의 자유와 권리존중, 3도덕적 이상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란 세 가지 정의 개념 중의 첫 번째가 이것과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행복이란 개념이 여기에 나 온다. 우가릿어에서는 합법적이다 혹은 정당하다 란 의미로 사용된다. 위의 어근이 의미하는 바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대체로 fairness, 혹은 justice 란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체데크가 동사원형으로는 41회 사용되었고 그 의미는 의롭다. 옳 다. 정직하다. 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속에는 원래 똑 바르다. 란 뜻이 내포되 어 있다. 이 말에는 자( 尺 ), 저울을 가리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 정의를 가리 키는 상징에 저울이 쓰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른다. 이 체데크란 말에 는 결국 윤리적, 도덕적 개념으로 표준 혹은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표준, 혹은 기준은 하나님의 표준, 혹은 기준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기 에 옳고 정당한 것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후에 기술하겠으나 체데크에는 바르게 하 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는데 이것은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 다. 따라서 하나님에세는 반드시 바르게 하는 정의의 의지가 숨어 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8

성경에는 짜다크 동사의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로 남성형 체데크와 여성형 츠다카 가 각각 119회, 157회 나오는데 이 둘의 뜻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체데크는 주로 재판과 관련하여 쓰이며(시 48:11, 전 5:8, 습 2:3, 신 16:20, 잠 2:9) 이 때 재판관 은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즉 빼앗긴 사람, 곤 핍한 사람의 편에서 판결하는 재판의 행위와 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때 재판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한다. 여성명사인 츠다카는 주로 자비 와 상호 관련되어 쓰인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을 보살피며 나그네와 손님을 잘 보살핀 것을 의미하는데 쓰인다.(욥 31:21-32). 구약에서 또 하나 쓰이는 정의란 단어는 미슈파트 이다. 구약성경에서 422회 정도 나타난다. 미슈파트는 통치의 모든 기능을 지칭하는 사역동사인 쉬파트(Shaphat)에 서 파생했는데 이 쉬파트 동사는 구약에서 202회 쓰였고 한글로는 판단하다. 재판 하다. 판결하다. 다스리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명사 미슈파트는 율례, 규례, 법도, 제 도 등으로 주로 쓰였고 공의, 재판, 판단, 판결, 의 등의 단어로 등장한다. 정해진 원칙이나 규칙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법률개념으로 말하면 민사행정 상의 정의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입법, 사법, 행정상의 기능이 분리되지 않은 상 태에서 통치자의 바른 심판의 종합적 기능을 대표하는 말이다. 해리스(R. L. Harris)는 이 정의 는 하나님의 속성이되, 하나님의 법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정 당한 요구 라고 정리한다. 신약에서의 정의는 디카이오쉬네이다. 어원은 디케 이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관습, 관습적인 것 이란 뜻인데 이 후에 사법적으로 사용되면서 재판, 소송, 형벌, 민족 등의 의미로 쓰였다. 디케의 명사형인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약 92회 나타난다. 그 뜻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정직하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공민적 미덕을 가리킨다. 마이클 센델의 세 가지 정의 중의 하나인 도덕적 이상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가 바로 이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성서적 정의의 신학적 의미 성경의 정의 언어도 평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 정의 언어와 특별히 다른 것이 없 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 개념을 신학적 차원에서 성찰하면 상당히 그 폭이 달라진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9

첫째, 성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시각 에서 보는 정의이다. 성서의 정의는 분명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정당한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지만 체데크에는 바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정의에는 굽은 것을 반드시 바르게 하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 태하고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로 하나님의 의지를 노래한다. 내 영혼 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였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 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46-5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 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 기가 매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곳아 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 여 질 것이요 모든 육제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눅 3:5) 하나님은 그 속성이 굽은 것을 바르게 하시고 험한 것은 평탄케 하시며 높은 것은 낮추시며 낮은 것은 높 이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이다. 이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다. 그 정 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 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 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하나님은 그의 정의를 반드시 이루려는 의 지를 가지고 계신다. 둘째, 성서의 정의는 관계 의 정의이다. 성서가 정의를 말할 때는 평면적 혹은 일반론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 계적 차원에서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든지 언제나 관계적 차원에서 말한다. 아프리카 철학 개념에 우분투 (Ubuntu)란 개념이 있다. 그 의미는 I am because we are. We are because I am.', 즉 내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0

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곧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 우분투는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성서의 하나님도 그냥 홀로 독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 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계약관계로 출발하고 계약관계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체데크 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 이다.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맺은 구원의 계약, 홍수심판 뒤에 결코 물로써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계약, 아브라함을 통하여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언약, 다윗의 위를 영원무궁토록 하겠다는 언약, 그리고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맺은 새 계약까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계약의 목적은 인간과 피조물을 끝까지 보호하며 구원하고자 함이 목적이다.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관계는 하 나님, 그리고 이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은 성서적 정의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관계적 사랑을 인간 이 하나님을 향한 행위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감 을 의미하고 이렇게 살 때 그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한편 인간이 이웃에게 대해 츠다카/체데크 를 행한다는 것은 그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시 15:2). 이웃을 참소치 않으며, 행악지 않고, 훼방치 않으며(시 15:3~5),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의로운 사람 이 된다.(사 58:8-9 겔 18:5~9) 그러므로 체데크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나아 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 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상거래의 기 본은 체데크의 저울 이다. (레 19:36; 신 25:15; 겔 45:10) 이래서 체데크가 단순한 의무만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행해야 마땅할 바를 실행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독특한 성서적 정의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죄의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범한 죄 (Commission)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ommission)이 있 다.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서 부자는 거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 는 범하지 않았다. 그가 범한 죄는 가난한 자에게 보여야 할 부자의 의무를 행하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1

않는 죄이다. 이처럼 성서적 정의의 관계적 개념은 약자에 대한 부자의 마땅한 배려 인데 이 때 배려는 자선적이거나 시혜적 배려가 아닌 연대와 사랑의 배려여야 하며 바로 이런 배려가 정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성서적 정의는 구원 을 위한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계약적 관계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시편 48: 9-11 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생각하였나 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 의(체데크)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미슈파트)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시 48:9-11)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의(체테크)는 어떤 절대적 윤리규범으로서의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관계적 사랑(헷 세드)의 발로로서 생기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고는 안 되는 사랑을 실천하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정의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사랑하는 자에 대한 구원이 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원수의 손에서 위협을 당할 때 미슈파트(심판의 공의) 를 행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그 행악으로부터 구원해내시는 정의를 실행하시는 하 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야웨는 의로우시다 라고 선포되는 모든 서술문에 이런 모습들 이 잘 나타나 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시 7:9) 하나님의 정의의 응답은 구원을 목말라 하는 요구가 있을 때 빠짐없이 나타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 31:1)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 5:8),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35:24)에서 보듯이 자신의 백성들이 원수들로부터 억울하게 능멸당하고 있을 때, 심지어 원수들로부터 구원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길까지 곧게 하는 일을 한다든지, 정의가 뒤집어져 불의를 범한 자는 기뻐하고 불의의 희생자는 오히려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정의를 세워달라는 간구를 계속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는 정의의 존 재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2

는 데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이 구원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반복적인 계약파기,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까 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다. 넷째, 성서의 정의는 사회적 약자 편향적 정의 이다. 앞서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남성형 명사 체데크는 재판관이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즉 빼앗긴 사람, 곤핍한 사람의 편에서 판결하 는 재판의 행위와 주로 연결되어 쓰인다고 했고 여성명사인 츠다카는 자비 (헤세드) 와 서로 관련되어 쓰이는 말로서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을 보살피며 나그네와 손님을 잘 보살핀 것을 의미하는데 쓰인다고 했는데 이처럼 성서의 정의는 보편적 정의가 아닌 가난한자, 사회적 약자 편향적 정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WCC에서는 이 개념을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 (God s preferen tial option of the poor)란 개념으로 정리하고 쓰고 있다. 성경의 또 다른 정의의 언어인 미슈파트가 쓰이는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 미슈 파트 는 하나님의 법도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를 가리키는 말로서 ' 법, 재판, 규례 혹은 심판'까지 넓은 의미 영역을 지니게 된다. 츠다카와 미슈파트 혹은 정의와 공평이 다루어지는 주된 현장은 구약에서 주로 성문( 城 門 ) 이다. 성문은 우물이 존재하는 곳으로(삼하 23:15) 이스라엘의 공동체생활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누군가의 덕행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잠 31:23), 거래가 이루어 지기도 했다. (왕하 7:1) 그러나 성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판'이었다. (룻 4:1이 하 신 21:18~21; 22:13~21; 25:7)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회 전체에 죄가 만연케 된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성읍의 장로들이 앉은 곳에서 호소한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증언해준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곧 츠다카를 실행하는 것이다. 성읍의 장로들은 이 호소를 듣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되, 이 가난한 사람을 억울케 한 사람들의 ' 외모'-그들의 권세, 부귀 혹은 인맥-나 그들이 가져다주는 뇌물에 현혹되지 않은 채 곧게 판결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 곧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3

가난한 자의 억울함이 풀어질 때, 그 사회는 미슈파트가 살아있는 사회, 츠다카와 미 슈파트가 실행되는 사회, 즉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뇌물과 불의로 인해 그 억울함이 풀려지지 않을 때,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친히 그 부르짖음을 듣고 친히 미슈파트를 세우시 며 불의를 징벌하고 책망하며 나아가 때로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하신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준수 여부는 그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 해 정면으로 드러난다. 구약의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표현은 고아, 과부, 이방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외에 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이들의 보호자이시다.(시 68:5; 140:12)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케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공의(미슈파트)가 세 워지지 못한다.(암 5:12,15) 이렇게 궁핍한 자가 억울케 되는 주된 원인은 뇌물이 다.(암 5:12) 성문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명히 밝히는 사람들-증인이든, 재판장이 든, 혹은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사 29:21; 암 5:10)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기를 애쓰는데(사 29:21), 이들은 강 포한 자 혹은 경만한 자 로 불리며, 이들이 사라지게 될 때 겸손한 자 와 빈핍한 자 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한다.(사 29:19~20). 그래서 구약의 많은 본 문들에서 미슈파트는 자비 를 뜻하는 헤세드 와 함께 쓰이곤 한다. 그런즉 너희 하 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헤세드)와 공의(미슈파트)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 라볼찌니라"(호 12:6);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 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슥 7:9~10).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긍휼에 기반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단순히 구 제사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들을 재물로 도와야할 때가 있지만 (charity), 구약의 본문들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을 억압과 압박 속에서 건져내는 것,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 의 수립이다.(시 146:6~9 사 1:16~17). 그런 점에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의가 핍박을 받는 자의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 고, 자기 권리를 빼앗긴, 이른바 압제자의 모든 희생자들을 의인 으로 간주했다. 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4

편 시인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가난한 자들, 피억압자들, 감옥에 갇힌 자들, 과부 들, 고아들, 나그네와 같은 고난받는 자 혹은 사회적 약자 들을 의인 과 동의적 평 행법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산상수훈에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 업의 소유주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이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도 노동자들이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소리라고 했다.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성경에는 인권이란 단어가 따로 없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구 원을 호소할 때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하시는 그 행위가 바로 성서적 인권의 개념이 다. 히브리노예들이 애굽에서 극심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응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인권 개념이다.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고는 다른 곳에 호소할 수 없는 자를 향한 응답이 하나님의 인권이고 하나님의 정의이다. 다섯째, 성서적 정의는 윤리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 이다. 이스라엘의 왕의 기본적인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체데크와 미슈파트를 실행하는 것이다.(시 72:1~3) 왕이 체데크와 미슈파트를 실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 로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 는 것이다.(시72:4,12~14, 잠31:8~9, 단4:27)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공(미슈파트)과 의(체데크)로 다스렸다.(삼하 8:15)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체데크와 미슈파트에 의한 통치에 대한 기대이다.(사32:1; 9:7; 16:5; 렘 22:15-16; 23:5; 33:15) 그러므로 미슈파트와 체데크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하다.(렘 22:30)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서에서 메시야 가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의 성격에 대해 표현하는데 메시야가 다스리시는 그 나라 는 평화의 세상이며 이는 정의와 공평의 통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 9:6~7; 11:1~5) 하나님의 나라는 체데크와 미슈파트 에 기반한 평화의 세상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타협없이 고발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체데크와 미슈파트 인데 이스라엘은 예배와 제사를 종교적 의무의 열매로 여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5

겼다. 예언자들은 체데크와 미슈파트가 없는 제사는 공허한 것이며 백성을 미혹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예레미야는 이웃들 사이에 공의(미슈파 트)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삶이 없는 채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무익하다고 선언하면 서(렘7:5~6) 성전에 예배하러 온 이들을 향해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 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는 무익한 거짓말 을 믿지 말라고 선포했다.(렘 7:4,8)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는 공의를 행하는 자이다.(시 15:2) 이러한 공평과 정의를 행하 지 않은 채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이요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 1:11~15) 아모스의 선포는 여 호와를 찾는 것이 성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암 5:4~5) 성문으로 나가서 그 곳에서 공의를 세우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암5:14~15, 미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존재의 의미는 제사하는 백성이 아 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 즉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삶 을 살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만민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며 그 복을 함께 누리게 된 다. 이 어구가 특히 이사야서에서 신실한 (hnman) 혹은 이 단어의 변화형과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사1:21,26-27, 11:4-5, 16:5, 28:16-17, 33:5-6) 이 어구가 단순 한 사회정의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London: T & T Clark, 2006), 135. 사실 사회정의 혹은 사회윤리라는 말은 체데크와 미슈파트가 하나님백성의 삶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명령이라는 점을 흐리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적 삶 이 있고, 마치 체데크와 미슈파트는 그것에 별도로 부가되는 또 다른 윤리처럼 여기 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을 부 르신 목적에 관한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전부는 예배나 제사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이다. 체데크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 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윤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 님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암 5:24)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는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윤리나 도덕의 일이 아닌 바로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가 되는 것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6

[부록 2]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 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A New WCC Affirmation on Mission and Evangelism 세계교회협의회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 지음 / 정병준 옮김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2006년 포르토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 회 이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확언을 채택하기 위해 수고하며 공헌하였다. 이 새 로운 성명서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된 이래로 지금까지 WCC 가 선교와 전도에 대해 표한 공식성명서는 1982년에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 (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 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번 새로운 선교성명서는 2012년 9월 5일 그리스 크레타 섬 에서 열린 WCC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성명서는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에큐메니칼 통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성명서는 WCC회원교회들과 그 협력선교기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7

구들을 너머 더 광범위하게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물을 위한 생명의 풍요를 향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Ⅰ.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 님께서는 온 세상(oikoumene)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계속 일 하시면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 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요 3:16)으로 믿는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 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시 여자( 施 與 者 )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생명을 지탱시키고, 생명에 힘 을 주시며, 온 창조물을 새롭게 하신다(창 2:7, 요 3:8). 생명을 부정하는 것은 생 명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 리기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하게 생명을 누리는 비 전을 증거하도록 권능을 주셨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사역을 어떻게,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거룩한 삼위를 하나로 묶는 그 사랑은 온 인류와 창조세계로 넘쳐흐른다.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신 선교사 하 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요 20:21)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주신 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생명을 축하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살아있는 증 인이 되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 (요 20:22)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령의 선 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 안에서 어떻 게 하나님 선교에 대해 다시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3.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며, 우리가 무엇을 왜하는가 어떻게 우리 삶 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 공하며 우리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거룩한 선물이며 생명을 긍정하고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이러한 선교영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14) 특별히 지적하지 않는 경우 성경인용은 신정표준개정판(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이 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8

사람들의 영적 헌신을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변혁의 역동성을 갖는다. 우리는 어떻게 선교를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 재요구할 수 있을까?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고 또한 우리에게 부분적 구원을 주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창조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를 우주적 차원에서 인 식하는 것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서 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위협들 이 명백한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과 그것들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5. 기독교 선교역사는 선교의 한 중심지로부터 미전도 지역, 혹은 땅 끝까지 이르 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의 다수 가 남반구와 동양에 살고 있거나 그 곳에서 태생한 세계 기독교 (World Christianity)라고 표현되는 급속한 교회의 지형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15) 이민 은 기독교의 지형을 재형성하는 전세계적이고, 다방향적인 현상이 되었다. 강력한 오순절 및 은사 운동들이 다양한 지역에서 출현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 한 세계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무게 중심의 변화 가 선교와 전도의 신학과 의제와 실천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는가? 6.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사회특권층으로부터 소외계층으로 일어나는 운동 이라고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자신들을 선교의 주된 역 할을 하는 대리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하고 있다. 선교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러한 역할의 반전은 강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하 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들을 택하셔서(고전 1:18-31)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선교를 진전시키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을 향한 선교 에서 주변으로부터의 선교 로 선교개념의 전환이 일어났 다면, 그 주변 출신 사람들의 독특한 공헌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선교와 전 도를 재 구상 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경험과 비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 엇일까? 7. 우리는 돈(mammon)에 대한 숭배가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시장 이념은 글로벌 시장이 무한대로 성장하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15) Cf. Todd M. Johnson, Kenneth R. Ross eds., Atlas of Global Christianit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9.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9

는 선전을 퍼트리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영적 인 삶까지, 인간성만이 아니라 온 창조세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 로벌 시장 안에서 어떻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또한 시장의 영 을 이길 수 있을까? 글로벌 규모의 경제적, 생태적 부정의와 위기의 한가운데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8. 모든 기독교인들, 교회들, 그리고 회중들은 구원의 좋은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울려 퍼지게 하는 메신저로 부름 받았다. 전도는 담대하지만 겸손하게 우 리의 신앙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당연한 참된 신앙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 안에서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방법 가운데 필수적인 전도에 대해 새롭게 헌신해야 한 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을까?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도 세계인 들이 서로의 정체성과 일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역 적으로 또한 세계적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 랑, 평화, 정의가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종사한다. 다원성은 교회가 만나는 도 전이고,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와 문화 간의 소통에 대한 진지한 참여는 피할 수 없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있는 세계 안에서 생명 살리기 선교를 공동으로 증언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에큐메니칼 신념들을 가져야 하는가? 10.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선 물이다. 교회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우리의 세상 안에 계신 하 나님의 사랑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분열과 긴장들 을 극복하면서 일치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하며,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믿고 하나가 될 것이다(요 17:21).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커뮤니온(communion) 으 로서 교회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어떻게 선교적이 되도록 자신을 갱신하고, 함께 생명의 충 만함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까? 11. 이 선교성명서는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선교(mission Dei) 안에 성령의 선교를 이해함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발전을 강조한다. 이 성명서는 네 가지 제목 아래 그 내용을 다루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0

선교의 성령: 생명의 숨결 해방의 성령: 주변으로부터의 선교 공동체의 성령: 움직이는 교회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들과 만유를 위한 복음 이러한 관점들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기독교 지형 속에서 역동성 (dynamism), 정의, 다양성, 변혁을 선교의 중심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우리 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오늘날 선교와 전도에 대한 10가지 확언을 응답 으로 제시하면서 마칠 것이다. Ⅱ. 선교의 성령: 생명의 숨결 1. 성령의 선교 12. 하나님의 영(ru ach)은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창 1:2) 생명과 인간 숨결 의 근원이 되셨다(창 2:7).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 영은 - 지혜(잠 8)와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사 61:1), 마른 뼈에서 생명을 일으키시고(겔 47), 꿈꾸게 하시고 (욜 2),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으로 개혁을 일으키시며(대하 7:1) - 하나님의 백 성들을 인도하였다. 13. 창조 때에 수면 위를 운행했던 동일한 하나님의 영은 마리아에게 임하여(눅 1:35) 예수를 낳으셨다.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에게 권능을 주시고(막1:10), 선 교하도록 파송하신(눅 4:14, 18) 분은 성령이셨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영혼을 포기하셨다(요 19:30). 그는 성 령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무덤의 냉기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다(롬 8:11). 14.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동체에 나타나셨고, 그의 제자들을 선교로 파 송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22). 위로부터 오는 능력 인 성령의 은사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에 대해 증거 하는 새 공동체를 이루었다(눅 24:49, 행 1:8). 초대교회 는 일치의 영 안에 함께 살면서 성도들 사이에 소유를 나누었다(행 2:44-45).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1

15. 성령의 창조세계 안에서 경륜의 보편성과 성령의 구속 사역의 특수성은 둘 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 가 되실(고전 15:24-28) 새 하늘 과 새 땅을 향한 성령의 선교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은 종종 우리의 상 상을 넘어서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일하신다(눅 1:34-35, 요 3:8, 행 2:16-21). 16. 성경은 성령의 선교적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음을 증언한다. 그 중에 한 견해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완전히 의존적이고, 보혜사이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아 버지께로 가신 이후에 위로자와 변호자로서 오실 분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은 선교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파송과 확장을 강조하는 선교학을 낳는다. 그러므로 기 독교 선교에 대해 성령론적으로 집중하면 선교는 본질적으로 기독론에 근거하며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련된다고 인정하게 된다. 17. 또 다른 견해는 성령은 우리를 온전한 진리 (요 16:13)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 이며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시며(요 3:8) 그래서 온 우주를 끌어안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러므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근원(source)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 안에 하나님 백성들의 종말론적 모임(synaxis)으로 선포한다. 이러한 두 번째 견해는 성도들이 성만찬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감지하고 미리 맛보는 체험을 한 후에 평화롭게 (선교로) 나아가는 것을 이론화 했다. 그래서 파송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예배 후에 예배 16) 라고 부른다. 18.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성령에 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중심에 있는 사랑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모든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의 역동적 참여를 항구적 으로 확증하는 기독교적 증언이 나온다.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2. 선교와 창조세계의 번성 16) Cf. Ion Bria, The Liturgy after the Liturgy: Mission and Witness from an Orthodox Perspective, Geneva, WCC, 1996. 이 용어는 본래 대주교 아타스타시오스 야노울라토스 (Anastasios Yannoulatos)가 처음 사용했고 이온 브리아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2

19.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하나님 선교는 창조행동 과 함께 시작되었다. 창조세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서로 엮여 있다. 하나님 의 영의 선교는 항상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행동 안에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소한 인간 중심적인 접근을 넘어서 모든 창조된 생명과 우리 의 화해된 관계를 표현하는 선교 유형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땅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땅이 인 간의 부정의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창 4:10). 20. 그 중심에 창조세계를 두고 있는 선교는 생태정의,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그리 고 땅을 존중하는 영성들의 발전을 위한 캠페인들을 통해 우리 교회들 안에서 이미 긍정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온 창조가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 인 화해된 일치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고후 5:18-19). 우리는 창조세계는 버림받고 오직 영혼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땅과 우리의 몸은 모두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것이 틀림없다. 이사야의 비전과 요한계시록이 증언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은 새로워질 것이다(사 11:1-9; 25:6-10; 66:22; 계 21:1-4). 21. 우리의 선교참여, 창조세계 안에 존재함, 성령의 삶의 실천은 상호 변혁적이기 때문에 함께 엮여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머지 둘 없는 하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이웃에 소속되지 않아도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 고 잘못 믿는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일탈하게 되고, 다른 창조물들이 아파하고 호 소하는 동안에, 단순히 자기의 기분을 달래주는 영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22.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와 관련해서 우리의 선교 안에 새로운 겸손을 요구하 는 새로운 회개(metanoia)가 필요하다. 우리는 선교를 인간이 다른 대상들을 향 해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들은 창조 세계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서 창조주의 사역을 찬양하는데 참여할 수 있다. 창조세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을 향한 임무를 수행한다. 예를 들면 자연 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혜문서는 창조세계가 그의 창조주를 찬양한다고 확언한다(시 19:1-4, 66:1, 96:11-13, 98:4, 100:1, 150:6). 창조세계 안에서 창조주의 즐거움과 경이는 우리의 영성의 원천들 중에 하나가 된다(욥 38-39장). 23. 우리는 창조세계와 우리들의 영적인 관계를 확언하고 싶지만, 현실은 지구가 오 염되고 있으며 착취당하고 있다. 소비주의는 무한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자연자원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3

의 착취를 촉발했다. 인간의 탐욕은 지구온난화와 다른 형태의 기후변화의 원인 이 되고 있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되고 땅이 치명적으로 손상되면, 우리는 어 떤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겠는가? 다른 창조세계가 멸망하는데 인간만 구원받을 수는 없다. 생태정의는 구원과 분리될 수 없고 땅위의 모든 생명의 요 구들을 존중하는 새로운 겸손이 없이 구원은 올 수 없다. 3. 영적 은사와 영분별 24.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고전 12:7; 14:26)과 온 창조세계의 화해(롬 8:19-23)를 이루기 위해 나누어야 하는 은사들을 값없이 공평하게 주신다(고전 12:8-10; 롬 12:6-8; 엡 4:11).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는 영분별이다(고전 12:10). 우리는 피억압자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들의 치유와 화해, 창조의 회 복을 포함하는 모든 차원에서 생명의 충만이 긍정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 별한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세력과 생명의 파괴가 만연한 곳에서 악령들을 분별 한다. 25. 초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많은 영들이 있는 세계를 경험했 다. 신약성경은 악령들, 섬기는 영들 (천사들, 히 1:14), 통치자들 과 권세들 (엡 6:12), 짐승(계 13:1-7), 그리고 선하고 악한 다른 권세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들에 대해 증언한다. 사도바울은 또한 일부 영적투쟁(엡 6:10-18, 고후 10:4-6)에 대해 진술하며 악을 대적하라(약 4:7, 벧전 5:8)고 명령한다. 교회들은 세상에 파송되어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고,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실현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행 1:6-8).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영은 종종 전복시키고, 우리를 한계 밖으로 이끌어내 시고,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응답을 요청받는다. 26.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내적, 개인적, 공동체적이지만, 또한 선교적인 노력에 있어서 우리를 바깥으로 인도한다. 성령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들과 명칭 들(불, 빛, 이슬, 샘, 기름부음, 치료, 녹이기, 따뜻하게 함, 위로, 위안, 힘, 휴 식, 씻음, 비추임)은 성령이 우리의 삶과 친숙한 것과 선교와 관계되는 관계성, 생명, 창조의 모든 영역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양한 상황과 순간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점들, 만남의 공간, 그리고 중요한 투쟁 장소로 인도함을 받는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4

27. 성령은 지혜의 영(사 11:3, 엡 1:17)이며, 모든 진리로 인도한다(요 16:13). 성 령은 인간의 문화와 창의성을 고취시키고, 그래서 각자 문화와 상황(context) 안 에 생명을 살리는 지혜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우리 선교의 부분이 된다. 우리는 식민지 건설과 연결된 선교활동이 종종 지역 주민의 문화를 폄하하고 그들의 지혜를 인정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생 명을 긍정하는 지역의 지혜와 문화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우리 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멸시와 조롱을 받아온 전통들 속에 살아 온 사 람들의 진술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지혜는 창조세계 안에서 성령의 생명과 우 리를 다시 연결할 수 있고,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는 방법을 사고하도 록 돕는 긴요하고 새로운 정위력( 定 位 力 )을 제공하기도 한다. 28.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 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 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포함하는 성령의 열매(갈 5:23)를 맺으라고 교회를 격려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른 사람 들이 성령의 사랑과 능력이 활동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4. 변혁적 영성 29. 신빙성 있는 기독교적 증언은 선교에서 우리가 행동만이 아니라 선교적으로 사 는 방식에도 나타난다. 교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안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영성들은 우리의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그것은 삶의 여정을 자극하고 그것에 동기를 부여하고 역동성 을 부여한다. 그것은 충만한 삶을 위한 에너지이며 생명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축 소시키는 모든 세력들과 권세들과 체제들에 저항하는 헌신을 요청한다. 30. 선교 영성은 늘 변혁적이다. 선교영성은 경제와 정치 안에 심지어 우리의 교회 들 안에라도 생명을 파괴시키는 가치와 제도가 있다면 그 모든 것들에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값없는 생명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우상숭배 수준의 거만함, 불공평한 제도, 독재정치, 현 세계경제질서 속에 있는 착취와 대결하도록 한다. 경제와 경제적 정의는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의 핵심에 닿아있기 때문에 항상 신앙의 문제가 된다. 17) 17)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s and Earth (AGAPE): A Background Document,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5

선교 영성은 하나님의 생명의 경제에 기여하고, 개인의 탐욕을 만족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생명을 나누고, 현상 유지를 원하는 권력자들의 자기 이익에 도전하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31.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하고 말씀하셨다. 무한성장정책은 세계 자유 시장을 통해 가난한 사람과 자연으로부 터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면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부와 번영을 창출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거짓 약속을 한다. 18) 그것은 끝없는 착취를 통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부( 富 )가 무제한 성장하도록 보호하는 돈의 글로벌 제도이다. 이러한 탐욕의 탑은 하나님의 온 가족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돈의 제국에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32. 변혁은 파스카 신비의 빛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 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딤후 2:11-12). 억압과 차별과 상해의 상황들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의 구원의 능력이다(고전 1:18).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들 의 신앙적 증언을 위해 생명을 지불함으로써 제자도의 모든 고통을 우리에게 상 기시킨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순교에 직면해서도 신념에 따라 살도록 용기를 준다. 33. 십자가는 선교와 교회 안에서의 잘못된 권력사용과 남용에 대해 회개를 요청한 다. 교회와 세계 안에서 우리를 분열시키고 괴롭히는 힘의 불균형과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을 겪으면서, 우리는 회개하며, 권력 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권 력 구조를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19) 성령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강한 자가 스스로 자기의 특권을 버리도록 도 전하신다. 34. 성령 안에서의 생명경험은 생명을 충만하게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있 게 하신 만물을 축하하고, 절망과 염려(시 23편, 사 43:1-5)의 강을 건너기 위 해 함께 행진하면서, 생명을 향한 운동을 증언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선교는 성령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도전하시며, 우리의 개인적이고 Geneva, WCC, 2005, p.13. 18) The Accra Confession, Covenanting for Justice: in the Economy and the Earth,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2004, 10. 19) Edinburgh 2010, Common Call, 2010, 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6

집단적인 여정들의 시공간에 새로움과 변화를 주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 안 에 자극한다. 35. 성령은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결코 길들여지거나 다룰 수 있는 분 이 아니다. 령의 놀라운 활동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주변으로 여겨지는 장소들 로부터 배척당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방법들이 있다. Ⅲ. 해방의 성령: 주변으로부터의 선교 36.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 혜로 이미 창조하신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억 압된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임재를 선포 하기 위함(눅 4:16-18)이라고 선언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시 대에 주변화 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로 선택하시고 그의 선교를 완수하시려 두 루 다니셨는데, 그것은 온정주의적 자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 세 상의 죄악을 입증했고, 그들의 생명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 문이었다. 37.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과 대결하시고 그것들을 변혁하기 위해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끌어안았다. 그것들은 빈곤, 차별, 비인간화를 초래하며 유지시키고, 사람과 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들과 제도들을 포함한다. 주변으로부터의 선교는 권력의 역학, 글로벌 제도 들과 구조들, 그리고 지역의 상황적 현실들의 복합성들을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기독교 선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변으로 계속 밀려나는 사람들과 연대하신다 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방법들을 통해 이해되고 실행되었다. 그러므로 주변으 로부터의 선교는 만물들이 생명 충만을 누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하 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사명으로, 선교를 재구상하도록 교회를 초대한다. 1. 왜 주변 사람이며 주변화인가? 38. 주변으로부터의 선교는 삶과 교회와 선교 안에 있는 부정의들과 대항할 것을 요 구한다. 그것은 오직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특권 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7

는 자가 소외된 자에게 선교할 수 있다는 인식을 거부하고 대안적인 선교운동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접근방법들은 억압과 주변화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의 선교는, 중심이 되는 것은 자기 권리와 자유와 개성이 긍정되고 존중 받는 체제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주변에 사는 것은 정의와 존엄에서 배제 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사는 것은 자체 교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대리권을 가지고 있고 중심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연약한 지위들 가운데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어떠한 배제 세력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지 알고, 그들의 투쟁의 절박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특권층 사람들은 주변적 조건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투쟁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39. 주변 사람들은 능력개발이 박탈되고, 기회와 정의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받았으나 충분히 사용하지 못한다. 대신 주변 사람 들은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해 적극적인 희망과 집단적 저항의 담지자 들, 그리고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데 필요한 인내의 담지자들이 된다. 40. 선교활동의 현장(context)은 선교의 범위와 성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모든 선 교사역자들의 사회적 위치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선교학적 성찰을 할 때 선교적 전망들을 형성하는 서로 다른 가치정향들(value-orientations)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주변으로부터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주변에 있게 함으로써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 들과 맞서는 것이다. 교회들은 오히려 권력 구조들을 변혁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41. 과거와 현재에 선교에 사용되고 있는 주요한 표현들은 주로 사회의 주변부 사람 들을 향해 사용되어 왔다. 그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주변부 사람들을 선교 활동의 적극적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보아왔다. 이런 방식으로 수행된 선교는 종종 억압적이고 생명을 죽이는 체제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특권층 주류와 제휴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들에 도전하는데 실패했다. 주류에서 출발하는 선교는 온정주의적 태도와 우월의식이 동기로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동일시했고, 그 러한 주변화로 희생된 사람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42. 주변부 사람들은 사회들, 문화들, 문명들, 국가들, 심지어 교회들까지도 모든 개 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에 공동 관심을 가지고 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8

다. 주변화와 억압을 가져오는 불평등의 근거에는 부정의가 있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은 하나님의 본성과 주권과 분리되지 않는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 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 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 10:17-18). 그러므로 모든 선교활동은 각 인격적 존재와 땅의 성스러운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참조 사 58). 2.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 43. 하나님 선교(missio Dei)를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와 창조세계 안에 구체적인 실재와 상황들(context) 속에서 행동하시고,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 하여 온 땅의 생명 충만을 추구하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을 통해 하나님의 지속되는 해방과 화해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화 하는 마귀들을 분별하고 가면을 벗기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적 이 념들을 해체하고, 토착민들을 위한 자결권을 옹호하며, 인종주의와 카스트제도의 사회적 뿌리에 도전하는 것을 수반한다. 44. 교회의 희망은 약속된 하나님 통치가 성취되는 것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 사이에 바른 관계 회복을 포함한다. 이러한 비전은 비록 종말론적 실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종말 이전 시기 안에서 일어나는 현재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도록 우리에게 깊은 활력과 정보를 준다. 45.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 고(막 10:45),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눅 1:46-55), 상호관계와 상호성과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충만함 을 방해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정의, 인간존엄, 생명 의 대의를 지키는 운동에 참여하고 솔선하는 모든 사람들과 흔쾌히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한다. 3.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46.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좋은 소식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된다는 약 속과 관련된다. 포용성은 인류와 창조세계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창조세계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9

상호인정하고, 또한 각자의 성스러운 가치에 대해 상호존중하고 가치를 지탱하는 정의로운 관계를 양육시킨다. 그것은 또한 각 사람이 공동체의 삶 속에 온전하게 참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공동 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장벽들을 극복해 냄으로써 이러한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 는 평생의 임무를 갖는 것이다(갈 3:27-28). 그러므로 인간을 해치는 어떤 종류 의 차별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 47. 예수님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마 20:16). 교회가 사회에 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철저한 호의를 베푸는 만큼,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가치들 을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사 58:6). 교회가 자기중심주의를 삶의 방법 으로 택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하나님 통치가 인간의 실존에 스며드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적인 상호작용은 물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 안에서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표명을 할 때 폭력을 포기하는 만큼, 이 세상에 서 활동하는 하나님 통치를 증언하는 것이다. 48. 그러나 현실적으로 선교, 돈, 정치권력은 전략적 동반자들이 되어있다. 비록 우 리의 신학적, 선교학적 대화는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는 교회의 선교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때때로, 실천적으로 부자들과 밥을 먹으며, 교회 관료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확보를 위해 로비 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거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특권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복음은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전한다. 49.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 긍정의 계획을 진술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가치들과 관습들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차별의 형태들 안에 있는 죄성을 인 정하고 부정의한 구조들을 변혁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러한 소명으로 인해 교회 에 대해 확실한 기대가 생겨나게 된다. 교회는 그 서열구조 안에 억압적인 권력 들이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 대신 대항문화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로서 활동해야 한다. 신구약성경 안에서 언약공동체를 향한 명령은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마 20:16)는 언명으로 특징 지워진다. 4. 치유 및 온전성으로서의 선교 50.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치유와 삶의 온전성을 향한 행동들을 선교의 중요한 표현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0

들이다. 치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적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에게 그 사역을 지속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의 특징이기도 하다(마 10:1). 치유는 또한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 12:9, 행 3). 성령께서는 한편으로 기 도, 목회적 돌봄, 전문적 보건을 포함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고난의 뿌리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 부정의를 일삼는 구조들의 변혁 및 과학적인 탐구를 포함하는 생 명양육의 선교를 위하여 교회에게 능력을 주신다. 51. 건강은 육체적, 정신적 복지 이상의 것이고, 치유는 본래 의학적인 것이 아니었 다. 건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성경적, 신학적 전통과 일치하는데 그것 은 인간을 다차원적 통일체로 보고 몸 혼 정신을 상호관련적, 상호의존적으로 본 다. 그래서 이러한 건강 이해는 개성과 온전성이 지닌 사회적, 정치적, 생태학적 차원을 긍정한다. 건강은 온전성이라는 의미에서 현재에는 실질적 가능성이고, 종말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조건이 된다. 20) 온전성은 정( 靜 )적인 조화 의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창조세계가 함께 공동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부정의는 공동체 건설을 방해하는 장벽들이고 그러므로 온전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에이즈와 면역결핍증을 포함하여 의학적 조건이나 장애를 근거로 한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거역하는 것이다. 방치되었 던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삶의 모든 부분들이 포용될 때 그리고 차별받고 소외 되었던 사람들이 사랑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서 그러한 온전성이 경험될 수 있고,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통치의 징표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52. 사회들은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나 혹은 해결되어야 할 의학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학적 모델은 개인의 결함 으로 여겨지는 것을 교정하거 나 치료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주변화 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부족 하거 나 병든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성경은 많은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예수 님은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치유하셨고, 공동체 구조 안에 그들의 정당한 자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치유는 결함으로 이해 되는 그 어떤 것을 교정하는 것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물론 온전해지기 위해서 손상된 부분들은 교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치료를 고정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적 관점을 진척시키기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관점이다. 선교는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와 사회의 삶 속에 온전하게 참여하도록 촉진시켜야 한다. 20) Healing and Wholeness: The Churches' Role in Health, Geneva, WCC, 1990, p.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1

53. 기독교 의료선교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질 높은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도 록 한다는 의미에서 만인 건강의 성취라는 목적이 있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교회는 건강과 치유에 참여할 수 있고 현재에도 참여하고 있는 많은 방법들 이 있다. 교회는 진료소와 선교병원들을 세우고 지원하며, 상담하고, 보살피는 단체들과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역 교회들은 병든 교우들을 방문하기 위 한 모임을 조직할 수 있다. 치유과정들은 병자와 함께하는 기도 혹은 병자를 위 한 기도, 고백과 용서, 안수, 기름 바르기, 카리스마적인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고전 12장)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용하여 치유자가 영광을 누 리거나 거짓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승리주의적 치유집회 등, 부적절한 예배형태는 사람들에게 깊은 해악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경우 처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일어나는 치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54.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고통 속에 신음하며 구속을 바라는 창조세계의 일부로서 기독교 공동체는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의 한 표현이 될 수 있다(롬 8:22-24). 성령은 여러 방법으로 정의와 치유를 위 해 일하시며 그리스도의 선교를 구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특별한 공동체 안에 거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Ⅳ. 공동체의 성령: 움직이는 교회 1.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생명 55. 교회의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기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 다 (요일 4:8). 선교란 창조세계와 구속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초대하신다. (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커뮤니온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같은 운동을 하는 우리 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개방시킨다(고후 5:18-21).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교회는 모든 사람들과 생명체를 위해 좋은 소식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나눔은 모든 선교 와 전도의 원천이다. 56. 성령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 21) 에서 그리고 모든 21)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der Paper no.111, 1982, 19.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2

문화들과 상황들을 위해 온 인류에게 주시는 영감적인(inspirational) 선물이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성령의 강력한 현 존은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 충만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내주( 內 住 ) 하시면서 세상 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그 성도들에게 그러한 목적 실현에 참여하 도록 힘과 자격을 주신다. 57. 교회는 역사 안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 경험적으로, 선교를 위 해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와 선교는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숙한데 그것은 선교하는 교회에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또 한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과 동시에 교회 안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타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58. 하나님 선교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from below)의 교회론적 접근에 도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 가 교회를 소유하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들을 확장하는 계획이 아니라, 이 세상에 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현하는 교회(the Church)의 계획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교회의 사도성에 대해 역동적인 이해가 나온다. 사도성은 이어지는 시대들을 통 해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 다. 이처럼 교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교적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일치 59.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선교에 참여하는 중요한 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속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히 10:25).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하나의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 다. 교회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그 존재 안에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통 치의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언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함께 모임(coming together)이고 평화 가운데 나아감(going forth)이다. 60. 신학적으로 실천적으로 선교와 일치는 서로에게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3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통합된 것은 중요한 발판이 되 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선교와 교회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용기를 준다. 그러나 이 목적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기( 世 紀 )에 교회가 진정 선교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신선한 시도들을 하면서 이 여정을 지속해 가야 한다. 61. 오늘날 교회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들이 아직 하나님 선교의 적절한 구현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때로는 선교와 교회를 분리하는 의식이 여전히 우세 하다. 선교 안에 온전하고 실질적인 일치가 부족해서 이 세상 안에 하나님 선교 가 성취되는 것에 대해 신빙성과 신뢰성이 여전히 손상되고 있다. 주님은 그들 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 도하셨다(요 17:21). 이처럼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일치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더 광범위한 일치 이해로, 즉 인류의 일치 및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온 창조세계의 우주적 일치로 개방해야 한다. 62. 자유시장경제의 대단히 경쟁적인 환경은 불행하게도 남을 이기고 승리자 가 되 려고 추구하도록 일부 교회들과 유사교회(para-church) 운동들에게 영향을 끼 쳤다. 이것은 심지어 한 교회에 소속된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교파 소속을 바꾸 라고 설득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하도록 할 수도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 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타인 존중의 태도와 공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권력과 돈이 아니라 자기 비움(kenosis)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손한 이 해는 우리의 선교방법들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본성이며 본질이 된다. 교회는 하나님 선교의 종이고 주인이 아니다. 선교적 교 회는 자기 비움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63. 다양성을 지닌 기독교 공동체들은 서로 존경하고 책임지는 복음전도 형태를 포 함하는 동반자 관계와 협력정신을 가지고 공동 증언하는 방법을 확인하고 실천하 도록 요구 받고 있다. 공동 증언이란 비록 분열되었지만 교회들이 특별한 공동 노력을 통하여, 이미 그들이 함께 나누고 경험한 하나님 주신 진리와 삶의 은사 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22) 22) Thomas F. Best, Günther Gassmann eds., On the Way to Fuller Koinonia: Official Report of the Fifth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Santiago de Compostela 1993, Faith and Order Paper no.166, Geneva, WCC, 1994, p. 25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4

64. 교회의 선교적 본성은 또한 교회들과 유사교회(para-church) 구조들이 더 가깝 게 관계할 수 있는 길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MC와 WCC의 통합은 교회일치와 선교에 대해 사고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일치에 대한 논의는 주 로 제도적인 문제들과 관계되는 반면에, 선교 단체들은 선교에 있어서 유연성과 독자적 결정구조를 표현한다. 유사교회 운동들은 교회의 중심 진리를 통해서 책 임성과 방향성을 찾는 반면에, 유사교회 구조들은 교회들에게 자신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성격을 망각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65. 협력과 일치에 솔선을 보였던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선교 안에서 일치(unity in mission)를 표현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하는 구조를 제공한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 CWME는 세계도처의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 교, 복음주의, 오순절, 토착교회들로부터 나오는 선교와 일치에 대한 새로운 이 해들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WCC의 상황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가까운 실무관 계들을 촉진시켰다. 복음주의자들과의 협력증진은, 특히 로잔 세계복음화운동 (LMWE)과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관계는 일치 안에 선교(mission in unity)라는 주제에 대해 에큐메니칼 신학적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 였다. 우리는 온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 세계 안에(in the whole world)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증언해야 한다는 공동의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다. 23) 66. 일치의 영이신 성령은 또한 다양성 속에 일치를 알리기 위해 주도적이고 건설적 으로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포용적이고 상호책임적인 공동체 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안전하고 적극적인 육성환경(nurturing environment) 에서 서로의 차이들을 탐구하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동적 상황과 자원을 제공 하신다. 3. 하나님께서는 선교하고 있는 교회에게 힘을 주신다. 67.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내주 하시면서 그 성도들 에게 힘과 에너지를 주신다. 그래서 선교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23) Cf. The Whole Church Taking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 Reflections of the Lausanne Theology Working Group, 2010.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5

깊은 요청에 근거한 긴급한 내적 충동이 되고(고전 9:16),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서 신빙성 있는 삶을 평가하는 시험과 척도가 되기에, 예수께서 가져오신 생명 충만을 나누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에 참여 하는 일은 특별한 개인들이나 전문 단체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24) 68.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를 신뢰성 있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 장소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공동으로 증언하 고, 우리 안에 있는 희망(벧전 3:15)의 이유를 설명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그래 서 교회들은 풍요로운 공동선언들을 발표해 왔는데, 그 선언들의 일부는 연합교 회(uniting) 혹은 연합된 교회(united)들로부터, 또한 일부는 교회 간 대화 모임 들을 통해 생산된 것이고, 하나의 살아있는 치유와 화해의 조직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회복을 추구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치유와 화해 안에서 재발견 하는 일은 오늘날 선교신학의 중심이 되었는데, 중요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지 니고 있다. 25) 69. 교회들 사이에 가시적 일치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구조 차원에서만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선교의 대의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선교 안에 서의 일치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바탕이 되며, 교회 직제를 위해서도 의 미가 있다. 일치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정의를 찾으라는 성경적 요구와 조화를 이 루어야 한다.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의 소명은 때로는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 하는 거짓된 일치를 타파하는데 관련된다. 진실한 일치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성과 존경을 수반한다. 70. 오늘날 광범위한 세계적인 이민 상황은 교회들이 아주 실천적인 방법으로 일치 에 헌신하도록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는 말씀을 듣고 있다. 교회들은 이민 공동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또한 문화 간의 교류를 위해 의도적 인 중심지들이 될 수도 있다. 26) 교회들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서 24) 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CWME Study Document, 2000, 13. 25) Cf. Mission as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Jacques Matthey ed.,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Statements on Mission by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0-2005, Geneva, WCC, 2005, pp.90-162. 26) Report of WCC Consultation on Mission and Ecclesiology of the Migrant Churches, Utrecht, the Netherlands, 16-21 November 2010,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100.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6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기 위해 하나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다양성 안에서 공동 증언의 표현으로서 다문화 목회와 선교를 창조해 내야 한다. 이것은 이민정책과 관련해서 정의를 옹호하고,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차별에 대 해 저항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여성, 어린이, 미등록노동자들은 모든 상황에 있 는 이주민들 가운데 가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여성들은 또한 자주 새로운 이민정책의 첨단에 놓여있다. 71. 하나님의 환대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집단들을 주인으로 이주민과 소수자들을 손 님으로 보는 우리의 이층구조 개념을 극복하도록 요청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환 대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고, 우리는 모두 겸손과 상호성을 가지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성령에 의해 초대 받는다. 4. 지역회중들: 새로운 창의적 주도성 72. 하나의 교회(the one Church)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소중하게 여겨 야 하지만, 각 지역회중(local congregation이 성도들의 상황적 실재들에 응답 하기 위해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방법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날 변 화된 세계는 지역회중들이 새로운 주도권을 발휘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속화되고 있는 북반구에서 신수도원주의 (new monasticism), 이머징 교회 (emerging church), 프레쉬 익스프레션 (fresh expression)과 같은 새 로운 형태의 상황적 선교(contextual mission)가 교회들을 재정의하고 재활성 화 하고 있다. 상황에 알맞게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은 특별히 젊 은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북반구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대중술집(pubs), 커피숍, 개조된 영화관에서 모이고 있다. 온라인을 교회의 삶에 끌어들이는 것은 비선형 적(non-linear), 시각적, 실험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73.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같이 지역회중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해 나타 나는 공동체를 조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수 용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지역회중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과 연관되어 있고, 그것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변혁의 동인( 動 因 )이 될 수도 있 2011, pp. 104-107.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7

다. 27) 그러므로 지역회중들이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선교의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역회중들은 선교의 전선들이며 주요 대리자들이다. 74. 예배와 성례전은 변혁적 영성과 선교를 교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경을 상황에 맞게 읽는 것은 지역회중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전하는 메 신저와 증인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선교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만 온 전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회중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자신들의 편안한 지대 밖으로 나가야 하고 경계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75. 오늘날 지역회중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적, 인종적 경계들을 넘어가도록 강조하고, 문화적 차이를 성령의 선물로 긍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들은 이민을 하나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새롭게 재발견 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민은 지역 차원에서 문화간교회들(intercultural)과 다문화교회들(multicultural)을 창립하 는 기회들을 제공한다. 모든 교회들은 상이한 문화공동체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 을 제공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상황에 알맞게 문화간선교를 표현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들을 포용할 수 있다. 76. 지역회중들은 또한 과거에는 결코 불가능했던 글로벌 연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다른 상황들에 놓여 있는 교회들 사이에 영감( 靈 感 ) 있고 변혁적인 연결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 들은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혁신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점점 대중화 되는 단 기 선교여행 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동반자 관계 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일부의 경우에 가난한 지역교회들에게 지 나친 부담을 주거나 현지 교회들을 전부 무시하는 경우가 발행하기도 한다. 그 러한 여행들 도처에 위험과 염려가 있기만 다양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상황에 노출되는 기회는 그 여행자가 자국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장기 사역을 결정하도 록 인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체들 안에서 온 교회(the whole church)를 세우는 영적 은사들을 실행하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다(고전 12-14). 77. 정의를 옹호하는 일은 국회들이나 중앙 관청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지역교회들의 참여를 요구해야 하는 증언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WCC의 폭력극복 10년 27) Christopher Duraisingh ed., Called to One Hope: The Gospel in Diverse Cultures, Geneva, WCC, 1998, p. 5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8

(WCC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1)은 국제 에큐메니칼 평 화회담(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에서 교회들은 인권, 젠더 정의, 기후 정의, 일치와 평화를 해칠 수도 있고 진척시킬 수도 있는 일상 의 선택들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28) 는 탄원으로 결론을 맺었다. 지 역교회들이 일상의 삶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데 명분과 동기를 제공한다. 78. 교회는 각 지역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맥락 안에서 봉사(diakonia)하도록 부름 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증언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지닌 믿음과 희망을 삶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봉 사를 통해 종 되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봉사를 통해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는 봉사의 힘이 지배의 힘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 생명을 위한 가능성들을 육성하며,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설명하는 봉사 행동들을 통해 하나님의 변혁하 는 은총을 증언하는 봉사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29) 79. 교회가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깊게 발견할 때, 자신의 외적인 특성이 전도 안에 나타나게 된다. Ⅴ.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 1. 복음화로의 부름 80. 증언(martyria)은 전 세계 안에 있는 전 인류에게 전 복음을 전한다는 구체적인 전도 안에서 형태를 취한다. 30) 증언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을 명확하게 전하는 선교 활동이다. 그것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이 좋은 소식을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하도록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28) Glory to God and Peace on Earth: The Message of the 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 WCC, Kingston, Jamaica, 17-25 May 2011, p.2. 29) Diakonia in the Twenty First Century: Theological Perspectives, WCC Conference on Theology of Diakonia in the 21st Century, Colombo, SriLanka, 2-6 June 2012, p.2. 30) Minutes and Reports of the Fourth Meeting of the Central Committee, WCC, Rolle, Switzerland, 1951, p.6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9

81.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흘러넘치는 것이다. 31)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선 포할 수밖에 없었다(행 2:4, 4:20). 전도는 선교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 대 32) 하는 것을 포함하는 복음을 명확하고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을 전도자로 부르시지만(엡 4:11),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희망 을 설명하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3:15). 개인들뿐만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함께 전 도하도록 부름 받았다(막 16:15, 벧전 2:9). 82. 오늘날 세계는 공동체들을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 고 잔인하게 대하는 종교적 정체성들과 신념들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특징이 있 다. 그런 맥락에서 개종(proselytism)이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 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33) 성령은 사람들의 설교와 복음의 증언과 동역할 것을 선택하시지만(참조. 롬10:14-15, 고후 4: 2-6), 새 삶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다(요 3:5-8, 살전 1:4-6).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폭력적 수단이나 권력의 악용을 통해 개종 을 강요했기 때문에 때 때로 전도가 왜곡되었고 그 신뢰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상황들에서, 억압된 정체성을 가지고 비인간적 조건에서 살아가는 주변화 된 사 람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지배 집단들의 의도에 의해 강제 회심 (conversions)에 대한 고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83. 전도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들을 제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러한 나눔은 신뢰와 겸손을 가지고 할 때, 그리고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 백하는 표현으로 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고 주장하면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그들과 복음을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 나님 혹은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정직성에 대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 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대해 나 누고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31) The Lausanne Movement, The Cape Town Commitment, 2010, Part I, 7(b). 32) Cf.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Doctrinal Note on Some Aspects of Evangelization, No.12, 2007, pp. 489-504. 33) Towards Common Witness: A Call to Adopt Responsible Relationships in Mission and to Renounce Proselytism, WCC Central Committee, 1997.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0

84. 전도는 회개, 믿음과 세례로 인도한다. 죄와 악과 대면하면서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요구한다(요 4:28-29, 참조. 막 10:22). 그것은 태도, 우선순위들, 목표들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심을 촉발한다. 그 결과 전도는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 병든 자들의 치유, 억압당하는 자들과 온 창조세계의 해 방을 가져온다. 85. 전도 는 선교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로운 삶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 34) 하는 것을 포함하면서 복음을 명확하고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35) 서로 다른 교회들은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의 상황들 안에서 전도하도록 부르시는지에 대해 다른 이해들을 가지고 있 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도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적 회심으로 이끄는 것에 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는 억압받는 사람과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 기독교적 증언을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도를 하나님 선교의 한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서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은 선교 와 전도의 측면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 (leitourgia)가 증언(martyria), 봉사(diakonia), 코아노니아(koinonia)와 불가 분리하게 연결되는 지역교회의 삶 속에 근거를 둔 전도를 이해하도록 성령이 우 리 모두를 부르신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2.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전도 86. 전도는 말과 행동으로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언어적 선포 혹은 복음설교 (kerygma)를 통한 전도는 완전한 성경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행이 일치 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말의 선포와 보이는 행 동이 결합되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목적들 을 증언하게 된다. 전도는 일치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서로 사랑하는 것 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을 증명하고(요 13:34-35), 반면 분열은 복음에 방해가 34) Cf.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Doctrinal Note on Some Aspects of Evangelization, No.12, 2007, pp. 489-504. 35) 모든 교회들이 위에서 표현한대로 전도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evangelization 을 missio ad gentes [mission to the peoples] 로 언급하는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일반적인 목회활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반면 new evangelization 은 기독교 신앙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목회적 전도를 뜻하는 것이다. Cf. Doctrinal Note on Some Aspects of Evangelization.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1

된다(고전 1장). 87. 생명의 충만함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의 동역( 同 役 )을 받아 자신의 지역 현장에 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의 충성되고 겸손한 봉사의 본보기들이 역사 속에 있고 현 재에도 있다. 또한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서 멀리 떨어져 선교사로서 살며 사역했 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겸손과 상호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일을 했다. 하나님의 영 도 또한 변혁을 가져오기 위해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활동하셨다. 88. 유감스럽게도 이따금 복음을 성육화하기 보다 배반하는 방식들로 전도가 실천되 어 왔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 르는 선교란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긍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리 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고(참조. 막 10:45, 마 25:45) 착취나 어떤 형태의 미끼 사용도 없어야 한다. 36) 어떤 모습의 기독교인 의 삶을 택할 것인지 자신이 결정하는 오늘의 개인주의화된 상황들 안에서 전도 하는 것을 상품 을 사고 파는 것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만인을 위한 예수의 복음이 자본주의적 용어들 아래서 힘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는 생각을 거절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회심과 변혁을 일으키고 만인을 위한 생명의 충만함을 선포하도록 인도하신다. 89. 신빙성 있는 전도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겸손과 존경심에 근거하고 있으며 대화의 맥락에서 잘 이루어진다. 전도는 말씀과 행위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 및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촉진 시킨다. 연대 없는 전도는 없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 의 메시지를 공유하지 않는 기독교 연대는 없다. 37) 그러므로 전도는 개인 간 관계성 및 공동체 관계성들을 건설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러한 신빙성 있는 관계 성은 지역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육성되어지고,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근거 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증언은 말뿐만이 아니라 현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진술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단순하게 복음을 따 라 사는 것이 아마도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0. 서로 다른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 증언에 관한 다른 해석들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신빙성 있는 전도는 아래의 진술처럼 항상 생명을 긍정하는 가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세계교회 36) World Council of Churches, 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 World Evangelical Alliance,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 2011. 37) The San Antonio Report, p.26; 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 34; Called to One Hope, p. 38.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2

협의회, 교황청종교간대화평의회, 세계복음주의연맹의) 공동성명서 다종교 세계 안에서 기독교적 증언: 행동지침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의 진술: a.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권력 남용을 포함하는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에 의해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차별과 억압을 거부한다. b. 보복이나 협박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 없이 신앙을 준수하고 고백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정의와 평화와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의 선을 증진 하는 일에 서로 존중하며 연대한다. c.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인류 문화들에 대해 존중한다. 반면, 우리 자신의 문화 들 안에 가부장제도, 인종차별제도, 카스트제도 등 복음에 의해 도전을 받아 야 하는 요소들을 분별한다. d. 거짓증언을 포기하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해하기 위해 들어야 한다. e. 개인들과 공동체들이 결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보 장한다. f. 공동선을 위한 깊은 상호이해, 화해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 혹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 관계를 정립한다. 38) 9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에 대해 도전하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그 리고 다른 이념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복음은 궁 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기만과 부정의와 억압을 일삼는 세 력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전도는 또한, 그 영향력의 범위만큼, 희망과 사랑 안 에서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하는 것을 포함하는 예언자적 소명이다(행 26:25, 골 1:5, 엡 4:15).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다. 그것에 대한 선포는 정의롭고 포 용적인 공동체들을 창조해 내려는 목적을 지닌 사회변혁을 포함해야 한다. 92. 악과 부정의에 대항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때때로 억압과 폭력과 만나게 되며, 그 결과 고난과 박해,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신빙성 있 는 전도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우신(빌 2:5-11)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연약 하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로마의 박해 아래서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 었던 것처럼 오늘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증언 38)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 201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3

이 된다. 예수는 그를 따르라는 부름과 영원한 구원을 그러한 자기부인 (self-denial)과 연결시키셨다(막 8:34-38). 3. 전도,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인의 현존 93.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다원성과 복잡함 가운데 상이한 많은 종교들, 이념들, 신 념들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께서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긍정하는 모든 문화들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성령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시기에 우리는 다른 신 앙전통들 안에서 성령의 활동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생명을 살 리는 다양한 영성들 안에 고유한 가치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신빙성 있는 선교는 다른 사람 을 선교의 대상 으로 만들지 않고 선교의 동반 자로 만든다. 94. 대화는 생명을 긍정하고 창조세계를 보전하는 관점에서 우리의 공동의 삶과 목 표들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대화란 우리보다 앞서서 사 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그들과 함께 현존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 대를 가지고 시작할 때만 가능하다. 39)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그곳에 계시기 에(행 17장),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을 운반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재( 先 在 ) 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다. 대화는 양편의 각자가 개방적이고, 참을성 있고, 존중하는 태도로 모든 것을 테이블로 가져 나올 수 있도록 진솔한 만남을 제공한다. 95. 전도와 대화는 차이가 있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에 도달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지만, 전도 가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화는 헌신 자들의 상호 만남 이기 때문 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은 대화 안에서 합당한 자리를 갖는다. 더 나아가 신빙성 있는 전도는 삶과 행동의 대화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대화의 정 신 즉 존중과 우정의 태도 40) 안에서 일어난다. 전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 을 선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 도전을 받고 경험을 넓히는 것을 포함한다(행 10장). 39) Cf. Baar Statement: Theological Perspectives on Plurality, WCC, 1990. 40) Vatican, Dialogue and Proclamation, 1991, 9.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4

96. 특히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대화는 다종교적 상황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소 수 종교집단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보호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선 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창 1:26) 인격의 존엄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와 신앙의 신봉자들은 평등한 권리와 책임을 갖는다. 41) 4. 전도와 문화 97. 복음은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실재들에 참여함을 통해 상이한 맥락들 속에 뿌리를 내린다. 복음이 그러한 다른 실재들 안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곳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적, 상징적 삶의 세계를 존중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래 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곳에 어떻게 현존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이미 활동하고 계시는 곳이 어디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복음은 더 넓은 맥락에 참여하고 대화하 면서 시작해야 한다. 98. 선교역사에서 복음과 식민지 권력의 결합은 서구형 기독교를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충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만들어 왔다. 경제적 힘이나 문화적 패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에 의한 전도는 복음을 왜곡시키 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소유를 빼앗긴 사람들, 소수자 들과 동역관계를 추구해야 하며, 그 약자들의 신학적 자원과 비전들에 의해 모습 을 갖추어야 한다. 99.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개인의 유일성을 손상시 킨다. 바벨은 획일성을 강요하려고 시도하였던 반면에 오순절 날에 제자들의 설 교는 개인의 특수성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는 일치를 가져 왔다. 그곳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들었다. 100.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비전을 보여 주시고 땅 끝까지 가서 각자의 시대 와 장소에서 하나님의 정의 자유 평화의 증인이 되라고 성령으로 힘을 주심으 로, 우리 자신의 왕국, 우리 자신의 해방, 우리 자신의 독립(행 1:6)이라는 좁은 관심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신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나 41)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 201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5

우리의 제도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지시하는 것이고, 자신의 유익보다 다 른 사람의 유익을 돌보는 것이다(참조. 빌 2:3-4). 우리는 하나의 지배문화의 관 점을 통해 성경의 복잡성을 파악할 수 없다. 문화들의 다원성은 우리의 믿음과 상호이해를 더 깊게 하는 성령의 선물이다. 가령, 다문화공동체들이 함께 예배드 리는 문화간(intercultural) 신앙공동체들은 문화들이 신빙성 있게 서로 참여하 는 하나의 방법이고, 문화가 복음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동시에 복음은 문화우월주의적 개념들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하고 사람들의 문화 속에 성육화( 肉 化 )하거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는 어떤 곳에서 복음이 문화에 도전을 주는지, 문화를 승인 하는지, 문화를 변혁하는지 더 잘 분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령의 통찰을 구해 야 한다. 42) 생명을 위하여. Ⅵ. 생명의 잔치: 결론적 확언 101. 우리는 모든 인류와 창조세계에 특별히 생명의 충만함을 고대하는 억압받고 고 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 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증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 (눅 14:15) 로 초대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그 연회를 준비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잔치는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 로부터 흘러넘치는 창조와 풍작에 대한 경축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적인 온 창 조세계의 해방과 화해에 대한 징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에 대해 새 로운 이해를 가지고 이 성명서의 처음에 제시했던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102. 우리는 하나님 선교의 목적은 생명의 충만함(요 10:10)이며 그것이 선교를 분 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이 있는 곳에서, 특 히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그리고 온 창조의 회복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 하도록 부름 받는다. 우리는 상이한 문화들 안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영들을 식별하고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는 선 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도전받고 있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42) Called to One Hope, pp. 21-22; 2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6

세력들과 생명에 대한 거부가 경험되는 곳에서 악령들을 분별하고 대적한다. 103. 우리는 선교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부터 시작되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 에 의해 재창조 가운데 지속됨을 확언한다. 오순절에 불의 혀와 같이 부어진 성 령은 우리의 마음을 채워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셨던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켜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스타 일로 이끄시며, 우리가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신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시고 권 능을 주사 귀신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게 하신다. 우리는 구 속 받은 공동체로서 다른 사람들과 생명수를 나누며 온 창조를 치유하고, 화해 시키고, 갱신하기 위하여 일치의 영을 찾는다. 104. 우리는 영성이 선교적 활동력의 근원이며 성령 안에서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와 영성과 창조 사이에 우리의 관점을 재조정 하려고 노력한다. 예전과 예배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교 영성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그리 고 우리와 더 넓은 창조세계를 재 연결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참여, 창조세 계 안에 존재함, 성령의 삶의 실천은 상호 변혁적이기 때문에 함께 엮여 있어야 한다고 이해한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경축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105.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가 온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생명의 하나님께서 는 자연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창 조보전을 보살피는 책임이 있다. 지속되는 자연파괴를 가져오는 과도한 탐욕과 무절제한 소비는 중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창조세계의 갱신에서 분 리된 인간구원을 선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목적들을 넘어서 하나 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하나님 선교는 모든 생명을 향하고 있기 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선교방법으로 그것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한 지금 행동을 요구한다. 선교는 창조세계를 그 중심에 가지고 있다. 106. 우리는 오늘날 다방향적이고 많은 양상을 지닌 선교운동들이 남반구와 동양으 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확언한다.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남반구와 동양으로 이 동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지역의 상황, 문화, 영성에 근거한 선교학적 표현들을 탐구하도록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상호우애와 동반자 관계를 더 발전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7

시켜야 하고,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 상호의존성을 확언해야 한다. 우리 의 선교적 실천은 고난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 및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전도는 자기 비움의 겸손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또 한 다른 문화들과 신앙들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전도는 이러한 지형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들에 모순되는 억압과 비인간화의 구조들과 문화들에 맞서야 한다. 107. 우리는 주변화 된 사람들이 선교의 대리자들이며 생명의 충만함이 만유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다고 확언한다. 사회에서 주변화 된 사람들은 하나님 선교의 주요 동역자들이다. 주변화 되고, 억압당하고, 고난 받 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그들의 위험해진 삶에 나 쁜 소식인지를 구별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 명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우리 는 주변화 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향해 선교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정의와 연대와 포용성은 주변으로부터의 선교의 중요한 표현들이다. 108.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정의의 가치들에 기초해 있으며, 변혁적 선교는 자유시장 경제 안에 있는 우상숭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경제 지구화는 사실상 생명의 하나님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신, 맘 몬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부당한 부의 축적과 번영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는 그러한 우상숭배적인 비전들에 대해 대안들을 제시하는 대항 문화적이 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 정의, 평화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과 자연에게 불행과 고난 을 가져오는 이러한 거짓 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탐 욕의 경제를 규탄하고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거룩한 경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10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성령 안에서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와 복음 을 전하는 방법 안에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중심성이 있음을 확언한다. 그러 므로 전도는 제도를 가리키기보다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고, 그것은 교회의 존재에 속한다. 교회의 예언자적 소리는 선포되도록 요청 받는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8

그 때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설득, 감동, 확신을 가지고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방법을 갱신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110.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서 필수적이라고 확언한다. 신빙성 있는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인류를 위하여 종교의 자유와 신앙 의 자유를 존중함으로 이루어진다. 폭력적인 수단, 경제적인 이익제공, 혹은 권 력남용을 통해 이루어진 개종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 전도할 때에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중과 신뢰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각각 혹은 모든(each and every)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복음은 특정 단체에 의해 소유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 는 선교지로 하나님을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증 언하는 것이다(행17: 23-28). 성령과 연합한 우리는 생명을 향해 함께 일하기 위해서 문화적 종교적 장벽들을 극복할 수 있다. 1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하기 위해 교회를 움직이게 하며 권능을 주심을 확언한 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계속 수행할 때에 역동적이고, 변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공동증언이 일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교회 는 선교하면서 함께 여행하고, 사도들의 선교를 지속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실 천적으로, 이 사실은 교회와 선교가 일치해야 하며, 서로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 들은 생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11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요 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나니 (사 65:17)라고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확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온 창 조물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소망 가운데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9

[부록 3] WCC 제10차 총회와 에큐메니즘 특강 강사 명단 대한예수교장로회 번호 이름 소속 및 직함 연락처 1 강성열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010-5015-4688 2 김동선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사회윤리 선교신학 교수 010-2386-3631 3 김영동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010-4769-4565 4 김은혜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교수 011-9007-4365 5 김의신 목사 광주 다일교회 011-9006-4706 6 노영상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총장 010-2785-8912 7 박성원 목사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 기획위원장 010-3039-5703 8 배현주 목사 부산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011-9259-0805 9 변창배 목사 총회 기획국장 010-6223-8877 10 송인설 목사 서울장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010-9811-9191 11 신재식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010-9899-0440 12 오상열 목사 기독교평화센터 소장 010-4370-0002 13 오현선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교수 010-8966-9383 14 이근복 목사 KNCC 선교훈련원 원장 010-7333-3298 15 이성희 목사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 실행위원 / 연동교회 02-763-7244(교회) 16 이승갑 목사 한일장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010-7227-0301 17 이승열 목사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010-9045-6018 18 이종록 목사 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011-680-0591 19 이형기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019-262-0833 20 이홍정 목사 총회 사무총장 010-7240-0613 21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 실행위원 / 인명진 목사 갈릴리교회 010-5229-2595 22 임성빈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010-2268-7566 23 임희국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016-9887-3361 24 장윤재 목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010-5003-7271 25 정경호 목사 영남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 010-2274-7011 053-850-0626(연) 26 정병준 목사 서울장신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 010-2274-3651 27 정원범 목사 대전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 교수 010-8808-4048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0

번호 이름 소속 및 직함 연락처 28 정종훈 목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010-7671-1019 29 채은하 목사 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017-650-5575 30 천영철 목사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원회 홍보기획국장 010-3683-5853 31 최무열 목사 부산장신대학교 총장 010-2604-0716 055-320-2500(사) 32 한국일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010-5188-8162 33 WCC제10차총회 부산준비위원회 위원장 / 허원구 목사 산성교회 010-3878-7022 34 홍인식 목사 전 현대교회 담임목사 010-8181-0901 35 황홍렬 목사 부산장신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010-4182-8281 기독교대한감리회 번호 이름 및 직분 소속 및 직함 연락처 1 김정숙 교수 감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010-2410-4679 2 김흥수 교수 목원대학교 교회사 교수 010-9421-4070 3 박도웅 목사 WCC제10차한국준비위원회 행정사무국장 010-8980-4551 4 심광섭 교수 감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010-8880-0739 5 유경동 교수 감신대학교 기독교윤리 교수 010-5472-5812 6 이세형 교수 협성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010-9391-6139 7 이정배 교수 감신대학교 종교철학 교수 011-9097-1921 8 이찬석 교수 협성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010-2326-3928 9 정해선 국장 WCC 중앙위원 및 실행위원 010-6877-2876 한국기독교장로회 번호 이름 소속 및 직함 연락처 1 박경서 박사 이화여대 기독교평화센터 소장 010-2077-0449 2 박성국 목사 WCC제10차한국준비위원회 총회지원국장 010-4248-6645 3 장 상 목사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010-9195-7650 4 천민희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국제협력선교부 목사 010-9243-1237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1

[부록 4] WCC 제10차 총회 일정표 날짜 시간 10/30 (수) 10/31 (목) 11/1 (금) 11/2 (토) 11/3 (주일) 11/4 (월) 11/5 (화) 11/6 (수) 11/7 (목) 11/8 (금) 08:30 09:00 등록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 09:15 성경공부 성경공부 10:15 한국교회 오리엔 들과 테이션 함께하는 10:15 휴식 휴식 한국교회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예배참여 성경공부 성경공부 성경공부 성경공부 위원회 보고 폐회 전체회의 or 보고 10:45 아시아 평화관련 선교관련 연합관련 정의관련 평화관련 개회예배 총회주제 12:15 지역회의 전체회의 전체회의 전체회의 전체회의 에큐메니 12:15 점심 점심 점심 칼 순례 점심 점심 점심 점심 점심 14:00 15:30 개막식 전체회의 전체회의 마당 프로그램 (워크숍) 마당 프로그램 (워크숍) 마당 프로그램 (워크숍) 마당 프로그램 (워크숍) 파송예배 15:30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16:00 17:30 회장 및 총무 보고 에큐메니칼 대화 에큐메니칼 대화 위원회 회의 위원회 회의 에큐메니칼 대화 에큐메니칼 대화 위원회 보고 위원회 보고 17:30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휴식 18:00 19:30 총회주제 전체회의 고백적 회의 지역별 회의 위원회 회의 위원회 회의 선거 위원회 보고 위원회 보고 고해 회의 WCC 중앙위원 회 19:45 20:15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기도회 한국교회 와 만찬 20:30 저녁 저녁 저녁 저녁 저녁 (위원회) 및 기도회 기도회 저녁 (중앙위 원회) X X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2

[부록 5] WCC 제10차 총회 참가신청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3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5

[부록 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7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8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9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0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2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3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4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5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7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8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9

[메 모]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