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프로그램 2 Ⅱ. 여는예배 4 Ⅲ.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8 이홍정 목사(총회 사무총장) Ⅳ. 주제강의: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13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기획위원장,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Ⅴ. 발제: WCC 제10차 총회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방안 22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Ⅵ. 패널토의 35 - 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과제 / 35 장 상 목사(WCC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 겸 대회장) - 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 48 장윤재 목사(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논찬1: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수) / 61 - 논찬2: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학교 교수) Ⅶ. 마침기도 65 Ⅷ. [부록] WCC 제10차 총회 관련 자료 외 1. 기독교와 정의 박성원 목사 / 67 2. WCC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 선교성명서 / 77 3. WCC 제10차 총회 및 에큐메니즘 특강 강사 명단 / 110 4. WCC 제10차 총회 일정표 / 112 5. WCC 제10차 총회 참가신청서(영문) / 113 6. WCC 제10차 총회 참가자 가이드: 부산으로 떠나는 순례 / 11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
프로그램 제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 일 시 : 2013년 2월 15일(금) 오전 11시 - 오후 5시 2. 장 소 :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소강당 3. 주 제 :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4. 일 정 : 10:30-11:00 등 록 11:00-11:30 여는 예배 - 인 도: 우영수 목사(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서기) - 기 도: 김근철 장로(에큐메니칼위원회 회계) - 설 교: 김동엽 목사(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11:30-12:00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 사 회: 정철민 장로(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회계) - 강 사: 이홍정 목사(총회 사무총장) 12:00-13:00 점심식사 13:00-13:05 격려사: 김영주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13:05-13:45 주제강의: (WCC 제10차 총회 주제 해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 사 회: 곽재욱 목사(에큐메니칼위원회 서기) - 강 사: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 기획위원장) 13:45-14:05 WCC 제10차 총회 프로그램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 강 사: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14:05-14:25 질의 및 응답 14:25-14:40 휴 식 14:40-16:40 패널토의 - 사회: 정경호 목사(영남신학대학교 교수) - 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미래 장 상 목사(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 겸 대회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
- 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장윤재 목사(이화자여대학교 교수) - 논찬: 1.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수) 2.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학교 교수) 16:40-17:00 마침기도회 - 인 도: 민경자 장로(여전도회 전국연합회장) - 기 도: 박요한 회장(청년회 전국연합회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
예 배 여 는 예 배 인도 : 우영수 목사(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 서기) 정의와 평화의 인사 인도자: 정의와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회 중: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목사님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자: 우리의 마음을 모두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회 중: 아 멘. 예배로의 부름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 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 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생명의 하나님,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 참된 빛과 소망으로 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은 저희들이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게 하옵소 서. 이 시간 주님을 사모하는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 리오니 기쁘게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 송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다같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
기 도 김근철 장로 (에큐메니칼위원회 회계) 성 경 에베소서 4:1-6 인도자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 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 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 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말씀선포 한 소망으로 부르신 은혜 김동엽 목사 (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찬 송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다같이 축 도 김동엽 목사 (부총회장, 에큐메니칼위원장,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장)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6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7
WCC 제10차 부산 총회와 <생명 정의 평화>의 길을 향한 교단의 정책과제 이홍정 목사 (총회 사무총장) 시작하는 말: 분열과 혼돈은 일치와 질서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장 1. 21세기 에큐메니칼 총회/대회의 주제: 치유와 화해의 관점으로 주제 읽기 1998 WCC 제8차 하라레 총회 주제: 하나님께 돌아와 소망 가운데 기뻐하 라 (Turn to God, Rejoice in Hope!) 2005 WCC 아테네 세계선교와 전도대회 주제: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를 치유하 고 화해케 하소서 (Come Holy Spirit, Heal and Reconcile Us!) 2006년 WCC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 주제: 하나님 당신의 은총 가운데 세상을 변혁시켜 주옵소서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2013년 WCC 제10차 부산 총회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8
2. WCC 제10차 부산 총회 전후 교단의 에큐메니칼 정책과제 2.1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 10년 (2012년-2022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Church as the Healed and Reconciled Life-Community in Jesus Christ 구심적 비전: 모이는 교회의 값비싼 친교와 일치(costly koinonia and unity) 선교와 디아코니아의 동력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치유하고 화해하는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Church as the Healing and Reconciling Life-Community to Participate in the Mission of the Trinity of God) 원심적 비전: 흩어지는 교회의 선교와 디아코니아(mission and diakonia)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공동체와 우주적 생명공동체의 일치 상호의존된 하나의 세계를 향한 복음의 온전성(Wholeness)과 총체성 (Totality)의 증언 영적 수직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사회적 수평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생태적 우주적 차원의 치유와 화해 2.2 민족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3년 (2013년-2015년) 역사적 좌표: 2013년(정전협정 60주년) 부터 2015년(광복 70주년) 까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9
목표: 냉전의식을 넘어 민족의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이끄는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자리 설정 분단의 상처 치유 분단사회의 사회적 화해 과정 참여 생명의 안전을 우선하는 평화통일 추구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서의 <생명 정의 평화> 만들기 부산 총회 전후 WCC의 프로그램과 실천과제 설정 WCC 4개 회원교단과 NCCK의 동북아 실무(Working) 그룹 구성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 에큐메니칼 포럼: 제2 도잔소 프로세스 추진 2.3 개혁주의에 근거한 글로벌 에큐메니칼(Global Ecumenical) 총회 지향: 선교 정책의 재정립 총회와 노회 각 부서 사업에 글로벌 에큐메니칼 차원 담보 양적 선교에서 질적 영향력을 중시하는 선교로 전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0
현지교회와 협의회적 의사결정과정 수립: 협력관계에 근거한 초대받은 선 교 - 현지선교회 중심에서 선교협의회 중심으로 다양성 속의 일치를 통한 에큐메니칼 배움의 기회 확장 노회 대 노회의 상호교류 증진을 통한 지역교회의 세계성 개발 세계교회와 공유할 수 있는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 개발 3.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섬김의 에큐메니즘 3.1 냉전적 신학의식의 극복 에큐메니칼(Ecumenical)과 에반젤리칼(Evangelical)에 대한 역사적 이해: 상황신학 복음의 온전성(wholeness)과 총체성(totality)에 대한 본질적 이해 증진: 상황신학의 상대성(relativity)과 부분성(partiality) 인정 3.2 지역에큐메니즘의 강화: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 지역교회생태계 생명망 강화 지역사회의 생명자본 증진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1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일치와 공동의 증언의 상관성 3.3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치학 실천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협의회적 과정을 이끄는 리더십 복음의 온전성과 총체성에 대한 공동의 증언을 위해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상호 배움의 자세 교회연합운동의 정신에 부합되는 원칙의 정립 맺는 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부정이 주는 존 재의 힘; A Kenotic Ecumenism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2
[주제 강의]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박성원 목사(WCC 중앙위원, KHC 기획위원장,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총회를 유치한 지 3년이 되었고 올해는 총회가 열리는 바로 그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있습니 다. 한창 어려울 때 하도 마음이 어수선해서 9순이 넘으신 아버지께 제가 책임을 좀 벗어놓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만 아버님이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어허이,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을 맡은 사람이 한다, 안한다 하면 되나?! 그렇습니다. WCC 총회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 님께서 온갖 풍파를 넘어서 원하시는 곳을 가리라 생각합니다. WCC 로고를 보면 십자가를 담은 에큐메니칼 보트가 험한 풍파를 헤쳐 나가는 상징인데 부산 총회도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파도를 헤치고 가고자 하시는 곳으로 가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총회를 목전에 앞두고 우리 교단이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를 가지고 WCC총 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려 합니다. 오늘 제게 맡겨진 부 분이 WCC 총회 주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주제성찰 이므로 여기에 집 중하겠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이 주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가 무엇일까요? WCC 총회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편안한 장소에서 얼마나 잘 먹고 얼마나 깔끔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3
게 회의진행을 했느냐는 물리적 부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WCC 총회의 성공여부 를 평가하는데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총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WCC 총회의 예배는 정말 은혜스럽습니다.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 같은 성령을 고백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함께 고백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는 예배는 정말 감격적입니다. 특히 이번 부산 총회는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 한국교회의 예배 특징을 반영하여 언 어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그대로 쓰고 통성기도를 하되 개인의 기복이 아닌 세계 의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는 에큐메니칼 의미도 담아서 시행하기 때문에 세계교회 의 예배영성과 한국교회의 예배영성이 어우러져 승화되는 그런 경험도 하게 됩니다. 꼭 참여하여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예배에 이어 정말 중요한 성공의 열쇠는 총회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부분이 곧 이 시대를 향한 WCC 총회의 복음증거이고 그 복음증거는 바로 주제성찰에서 나 옵니다. WCC 총회는 창립총회 때부터 세계역사변혁에 중요한 방점들을 찍어왔습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창립총회의 주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Man s disorder and God s Design)이었는데 이 주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완전히 무질서로 폐허화시킨 인간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참회하고 폐허가 된 세계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재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 망 (Jesus Christ Hope of the World)이었는데 두 번의 세계대전 후에도 인간 은 동서냉전, 인종차별 등으로 계속 절망의 역사로 이어지므로 희망은 예수 그리스 도에게만 있다는 고백을 하고 이 에반스톤 총회 이후에 인종차별철폐를 이 시대에 가장 급박한 복음의 증언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1961년 인도, 뉴델리에 열린 제3차 총회 이후에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은 교회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4
책임임을 성찰했고 이 후에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 안에 사회부가 창설되게 했습니 다. 우리 총회의 사회봉사부가 창설된 것도 바로 이 흐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모든 총회를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이렇듯 이후에도 WCC 총회는 정의롭고 주민참여적인 사회개발, 여성의 권익문제, 난민에 대한 관심, 인권신장, 민 주화에 대한 교회의 참여,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등 시대적 상황에 대한 복음의 증 언과제를 계속 발굴해 왔습니다. 동서냉전체제가 무너진 90년대 이후에는 세계와 사회의 갈등이 신자유주의 경제세 계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경제정의와 생태문제에 대해 계속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 경제에 대한 촉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제10차 부산 총회에서 기대되는, 아니 부산 총회가 인식해야 할 21세기 의 세계상황에 대한 부산 총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명의 하나님, 우 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이 기도는 무슨 메시지로 연결되어야 하는가? 생명, 정의, 평화,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세 가지 모두를 말하기에 는 시간이 부족해서 첫 번째만 이야기하고 정의 는 첨부한 제 글, 기독교의 정의 를 참고하시고 평화 에 대해선 다음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생명의 하나님 에 집중하겠습니다. 기도문 형식의 주제는 이렇게 생명의 하나님 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생명, 정의, 평화가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주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한 가지씩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을 구체화하여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교회가 부르는 생명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집중 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영성의 문제입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5
인류역사가 21세기에 진입하는 당시에 불란서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21세기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Le Vingt-et-unieme siecle sera spirituel ou il ne sera pas!) 21세기가 영성의 세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절박감은 여러 세계 지성들 에 의해서 계속 표현되어 왔습니다. 체코 대통령 바츠라브 하벨(Vaclav Havel)은 현대문명의 딜레마와 관련하여 이렇 게 정리했습니다: 1) 현대문명의 영적 상태에 직접 관련이 있다. 2) 그 영적 상태는 한 마디로 상실(loss)이다. 3) 상실은 바로 가치의 상실이다. 하벨은 종교인이 아니 었는데도 가치상실의 원인으로 형이상학적 확실성에 대한 상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험의 상실, 초인간적인 도덕적 권위에 대한 상실, 보다 지고한 가치의 상실 등으 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 의미 있는 존재이며 모 든 것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계는 그 인간적 차원을 상실하며 인간은 자기를 통제할 힘을 잃어버린다. 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유럽이 주도한 근대문명이 이 때문에 세계를 문명의 딜레마로 몰아넣고 있다 고 보고 그 대안으로 그는 인간이 초세상적인 권위(extramundane authority)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이나 우주의 질서, 도덕적 질서와 그 초인간적인 근원, 절 대적 존재에게 우리 자신을 향할 때에만이 이 땅의 삶이 '거대집단자살 '(megasuicide)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다른 말로 하자 면, 진정으로 인간적 차원이 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하벨은 이 시대는 영적 갱 신이 필요한 시대라고 단정했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실존혁명'(Existential Revolution)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전형적인 복음주의 설교자의 내용 같은 이 분석은 바로 인간이 역사와 창조의 주 체 라는 유럽주도의 근대문명의 핵심적 딜레마를 지적한 것입니다. 유럽이 냉전체제 이후에 유럽을 재편할 때 이런 정신사적 인식을 하고 유럽의 정신(Soul of Europe) 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유럽연합형성 과정에서 잠깐 보였지만 동시에 거대하게 세 계를 몰아붙인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쓰나미에 의해 이 인식은 휩쓸려가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6
버리고 21세기를 영성실종의 시대로 계속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후 2008-2009년 제63회기 유엔총회 의장을 지낸 니카라과 외교관 미구엘 브로크만(Miguel d'escoto Brockmann)은 WCC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 오늘 이 시대는 온갖 종류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그 핵심에는 영적 위기가 있다."고 같은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같은 지적들이 35년간을 네델란드 외교관으로 지낸 한스 요나스(Hans Jonas)와 같은 세속지도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사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2001년에 미국과학재단과 상무부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21세기 초반을 이끌던 정보기술 (Information Technology)시대가 마감되고 2020년에는 융합기술(Convergence Technology)이 이끄는 새로운 르네상스가 도래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 융합기술 을 선점해서 미국이 2020년 이후에도 계속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획을 하는 것입니다. 융합기술(CT)이란 서로 다른 학제적 이론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융합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이를테면 경영학 마케팅에 신경학을 융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물을 지 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보았으나 이제는 이성이 아닌 감성, 특히 신경이 결정한다고 보고 이를 경영학마케팅에 융합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재의 컴퓨터공학의 기술, 정보기술, 뇌 과학의 발달, 나노기술, 인공지능, 합성생물학기술 등 모든 기술을 다 융합하면 사람과 기계가 상호작용(interface)을 하게 되는 시대가 2020년 이후에 열리게 될 것이고 이는 이미 실현단계에 돌입했습 니다. 이 융합기술에 의하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과거에는 철학이나 종교나 인문학 이 정의를 내렸으나 앞으로는 과학기술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런 시각에서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접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접근도 그 차원에서 할 것이고 이런 접근이 결국 생명 자체에 대해서 도, 더 나아가서 사랑, 삶의 의미와 같은 철학적, 종교적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 하는 후기 인간시대(post human era)를 넘은 초월적 인간시대(trans human era)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7
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학제간의 융합은 필요합니다. 구분하는 것이 불합리하지만 생각을 위해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면 물질세계는 정신세계를,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와 교감을 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융합적 사고가 통전적 인식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이 아니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철저히 정신세계, 심지어 영적세계 조차도 결 국은 물질세계, 특히 자본주의에 종속화되는 것입니다. 소위 모든 것이 마케팅에 종 속됩니다. 음악도, 미술도, 종교도, 예배도, 인간의 감성도, 심지어 영혼도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바벨론 패망의 증상들이 죽 열거되는데 12절에 가면 제 국이 팔고 사고하는 무역품목이 나오고 13절에는 이렇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계피 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도 상품화된 상황입니 다. 바로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영혼도 상품화하는 시대입니다. 요즈음 마케팅 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놀랍게도 인문학이나 종교적 언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세속도시 (The Secular City)를 쓰면서 미래 사회가 탈영성적 세속화 문명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오늘의 사회가 오히려 영성으로 몰 입하고 있다고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영성 문제에 다시 집중했는데 제가 생각하 기에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의 영성추구는 영적 공허감을 메우려는 가치관의 정립이 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 같은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경쟁주의, 이익창출 지상 주의, 효휼성 지상주의 등으로 인간을 압박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 때 문에 도피하려는 도피성 영성추구 현상이 더욱 많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많이 등 장하는 힐링(Healing)이란 현상도 바로 이 선상에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영성갈망의 현상이 어쩐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가치관 과의 융합이라는 긍정적인 길의 추구가 아닐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물론 극 단적으로 구석으로 내어 몰린 인간의 영성추구가 하벨이 말하는 대로 가치관 추구로 연결되는 실존혁명이라는 인간영혼의 진보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희망적으로 진화하지 않아 왔기 때문에 일말의 우려의 자락을 떨쳐버 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8
문제는 이렇게 인간문명이 영성마저도 마케팅전략에 융합시키는 있는 인류문명의 꼼수를 보고 있노라면 21세기는 영성의 세기가 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 라는 앙드레 말로나 인간이 초월적 가치로 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며 실존혁명의 필요를 제안했던 하벨의 탄식을 교회가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명을 과연 하나님의 가치와 제대로 융합시키는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는데 우리의 기도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 꾸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인식하에 이번에는 좀 더 생명의 하나님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바로 생태위기의 문제입니다. 생태위기의 문제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하나님 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으로 부르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를 우리는 지금 인간의 모든 능력과 탐욕을 동원하여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정의했는데 인간에 의한 생태파 괴는 하나님을 떠난 정도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생명창조를 파괴 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문학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만약 신앙인이 자연 파괴를 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죄, 영혼의 죄 보다도 더 심각한 죄인데 교회가 이를 인식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죄가 심각하냐 하면 이제 교회가 아닌 세속사회가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립실험연구소(National Laboratory)의 로렌스 리버모어 칼데이라 (Lawrence Livermore Caldeira)에 의하면 지금 세대의 생태계파괴가 과거 3억년 동안의 생태계 파괴와 맞먹고 있다고 합니다. 이라크 무기사찰단장을 지냈던 한스 브릭스(Hans Blix)는 앞으로 지구에 가장 무서운 것은 3차 대전도 4차 대전도 아닌 바로 지구온난화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기 후 변화가 테러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고 이대로 인류문명이 진행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19
하면 지구는 종말을 향해 간다고 경고했습니다. 네덜란드 그로밍엔(Gromingen) 대학교의 존 판 클리네큰(John Van Klinek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850년부터 1950년까지 1세기 동안에는 1년에 한 종의 생물 이 사라졌는데 1989년에는 하루에 한 종이 2000년에 들어와서는 1시간에 한 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50년 안에 지구 생물의 25%가 사라 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엔 기후변화위원회는 2050년까지 지구 생물의 약 5분의 1 이상이 멸종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국립대기연구센터(National Centre for Atmospheric Research(NCAR) 선임연구원 클라라 데저(Clara Deser) 박사는 2008년 3월 한국의 한 신문과의 인 터뷰에서 2007년 한 해 동안에 향후 10년 내지 20년 녹아내릴 북극의 빙하가 앞당 겨 녹아내렸다고 하면서 빙하해빙의 속도가 10년 내지 20년 앞당겨지고 있다고 했 습니다. 2013년의 통계는 이것 보다 훨씬 더 심해졌을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 한국은 기후변화로 엄청난 추위로 시달렸는데 얼마 전에 남아프리카공 화국 친구에게 전화하니까 거기는 예전보다 훨씬 더워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통계에 보니까 48개의 인접한 나라들이 107년 만에 최고로 더운 여름을 지냈다고 합니다. 추운 데는 극도로 춥고 더운 데는 훨씬 더 더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생태위기는 이제 생태혼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 예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도 농부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벌은 생명 의 연계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벌이 사라지면 생명의 연계가 어려워질 것입니 다. 뿐만 아닙니다. 생태위기는 지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바다 속에 미치는 영향이 훨 씬 더 큽니다. 기후변화로 땅위의 사막화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지금 바다 밑의 사막 화현상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는 전부 북쪽으 로 이동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바다에는 최근 해수욕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파리처 럼 동남아시아의 고기떼가 밀려오고 있고 이것은 생태갈등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무제한적 개발과 소비에서 기인되는 것입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0
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최근 50년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한 양이 인간이 땅에 출현하여 1950년까지 생산하고 소비한 양과 맞먹는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속학자들이 물리적 차원에서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도 한국사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4대강을 파헤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일본 후쿠시마의 엄청난 경험에도 불구하고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가동시키는 일 이나 원전의 세계 수출을 주도하는 반생명적 정책을 펴고 있고 교회는 이에 대해 신 앙고백적 차원의 성찰을 하기 보다는 지지하고 축복하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로 이어져오고 오늘의 첨단기술문명, 생명공학, 융합공학으로 치닫는 후기산업사회의 문명이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으 로 치닫는 오늘의 선악과 상황이며, 인간문명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달하자는 오늘 의 바벨탑 건설의 상황이라고 신학적으로 진단합니다. 지금 인간은 인류역사상 최대 의 죄악을 범하고 있는 상황이며 인간과 우주의 생명에 가장 가혹한 죽음과 불의, 그리고 폭력을 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WCC 부산 총회가 이 문제를 이 시대의 최대의 과제로 인식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WCC 총회가 8년 만에 한 번씩 열리므로 다음 총회는 2021년에 열리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다음 총회 열리는 바로 그 전 해인 2020년은 세 속적으로 이미 회자되고 있는 생태위기의 해입니다. 그렇다면 부산 총회 이후 다음 총회 기간 동안은 인류역사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교만으로 파괴될 수도 있는 그런 정도의 심각성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부산 총회는 에코총회가 되어야 하고 생태정의, 생태평화의 총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산 총회의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라는 부산 총회의 주제는 이런 차원에서 성찰하고 기도하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인간중심의 근대문명을 창조주중심의 생명문명으로 전 환해야 한다는 영성혁명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1
[발 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 WCC 제10차 총회 소개 및 노회 교회의 참여 방안 - 변창배 목사(총회 기획국장) 세상의 만물은 때 가 있다. 힘 있게 자라날 때가 있고, 활짝 피는 때가 있다. 88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대회가 한국사회에 그러한 계기가 되었다. 70,80년대의 민 주화운동과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삼아서 88올림픽 이후의 한국사회는 크게 발전했 다. 월드컵대회를 통해서 한민족은 식민지의식을 버리고 세계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2013년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그러한 변화의 계기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교 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가 10월 30일부터 열흘 동안 부산에서 개최되는 까닭이 다. 세계사의 변화와 WCC 제10차 총회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가 개최되는 21세기 초반의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 돌이를 지나서 20세기 말에 공산주의 블록이 몰락하고, 21세기에 후기자본주의 사회 의 대두를 목격하고 있다.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세계화된 지구촌이 되 었으며, 지식기반사회를 향하여 문명사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다. 국경이나 문화의 제 한을 벗어나서 자본의 무한 경쟁을 의미하는 시장화가 이루어졌다. 1789년 프랑스혁 명 이후에 시작된 세속화 경향이 서구 사회에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는 인 구의 폭발, 에너지의 고갈, 식량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 새로운 질병의 대두로 인하 여 고통을 겪고 있다. 2011년의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건으로 과학기 술에 대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신화도 무너졌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2
제2차 대전 이후와 19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거 서구의 식민지에 서 독립했으나 세계 유일의 제국이 된 미국이 지배하는 신식민주의가 자본의 시장경 제를 통하여 구현되고 있다. 최근 아랍 세계의 오렌지혁명이나 99%를 위한 사회를 부르짖는 미국과 서구의 오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은 미국의 세계 지배가 약화되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9 11테러와 그에 따른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불안정 한 모습을 수반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중국이 세계 2대 강국의 하나로 대두하는 한편 인도, 브라질, 러시아 가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G2 사이의 협력을 추진하면서 갈등도 불 사하고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중국은 차항출해( 借 港 出 海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 전략에 따라 향후 10년간 북한 청진을 비롯한 세계 19개 항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중국와 일본, 일본과 한국, 중국과 필리핀 등의 사이에서 영토 분쟁이 심화되고 있어서 갈수 록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21세기 세계교회의 변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에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와 더불어서 세계 교회의 한 축을 담당한 기독교 내부에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던 서 구 기독교 국가 영국,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의 성공 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주류 교회가 1970년대 이후에 교 세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 가 매년 약 5%의 비율로 교인들이 감소하여 매 10년마다 교인이 1/2로 감소하고 있다. 국가에 따라서는 전성기의 약 1/10에 불과할 만큼 급격한 교세의 감소를 보이 고 있다. 반면에 18세기 이후에 서구 기독교의 선교에 따라서 세워진 아시아 아프리 카 지역의 신흥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은 한국과 인 도, 미국 서부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20세기 초의 부흥운동의 여파로 20세기에 들 어서면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세계기독교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유럽과 북미대륙 의 기독교는 급격한 교세 감소로 인해 새로운 선교적 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3
째,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신흥교회들이 급성장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서면 서 비서구기독교인의 비율이 75%에 달하고 있다. 셋째,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오순 절주의 교파는 크게 성장하였고 은사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세계교회에 큰 영향을 미 치고 있다. 넷째, 사회주의 통치 아래서 고대신앙전승을 지켜온 동방정교회가 1991 년 소련의 해체 이후 다시 부흥하고 있다. 다섯째, 세계기독교는 에반젤리칼 과 에 큐메니칼 사이의 갈등을 뛰어 넘어 수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여섯째, 총체적인 생명의 위기 속에서 복음에 입각하여 새로운 영성으로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수 많은 여성, 청년,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도 나타나고 있 다. 일곱째로는 주류 교파의 쇠퇴를 대신하여 교파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들이 대 거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 한국교회는 퇴조하는 서구교회와 급격하게 성장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 사이에서 징검다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는 서구교회의 영적 유산을 갈무리하는 한편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 시대를 향한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한국사회의 경제적인 번영과 한국교회의 종교적인 열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식 민지 종주국과의 미묘한 감정의 기복을 피해서 피압박 민중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미 세계 선교 현장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3세기에 걸쳐서 서구 교회가 키워놓은 선교단체의 실무자와 책임자를 배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적 자산을 공유하려는 관심이 서구교회 지도자들 사이 에서 높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참여와 지도력은 글로벌 선교 영역에서 이미 확인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그 동안의 성과를 점검하고 징검다리의 사명을 감당하 기 위한 선교 전략을 세워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난 130여 년에 얻은 부흥 성장 과 사회참여의 열매를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와 나누어야 한다. 21세기 한국교회의 현실과 과제 한민족은 지난 세기에 일곱 번에 걸친 큰 전쟁에 휘말리며 고통을 겪었다. 하나하 나의 전쟁이 동아시아나 세계의 패권을 바꾸어 놓은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이었다.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고통도 겪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전쟁을 치 루는 비극도 경험했다.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로부터 산업화되 고 정보화되는 급격한 문명의 변화도 경험하였다. 도시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되고 핵가족이 일반화되었다. 한국 거주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어섰는가 하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4
해외로 이주한 한민족도 700만 명 이상에 달하고 있다. 가히 온 민족이 삶의 뿌리 뽑힌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발전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130년 가까운 선교 역사에서 크게 볼 때 두 가지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는 교회가 부흥 성장한 것이고, 둘째는 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하나님께서 한민 족을 위해서 주신 은총임에 틀림이 없다. 첫째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세계교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놀라운 것이다. 이 러한 부흥 성장은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종교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인 초 대교회 교인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의 피 위에서 이 루어졌다. 1907년에는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꺼져가는 민 족의 운명 앞에서 신앙을 내면화하였다. 부흥운동은 60년대의 민족복음화운동으로 다시 점화되었고,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1985년에는 선교 100주년 기념행사에는 연인원 1,600만 명이 참가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 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90만 명의 교인과 700여명의 목회자를 기록했다. 세계 10 대 교회 중에서 6개가 한국교회라는 놀라운 기록도 남겼고,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 사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성장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한민족에 뿌리를 내렸다. 세계 개혁교회연맹(WARC) 제22차 총회(1989)와 WCC JPIC대회(1990)가 서울에서 개최 되었다는 사실이 세계교회로부터 주목받는 한국교회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한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민족을 섬겼다. 초기부터 애국 계몽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수난에 참여하였고,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다양한 봉사를 통하여 민족을 섬겼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IMC(세계선교협의회)와 YMCA의 지원을 받아서 전개한 30년대의 농촌운동은 IMC 를 통하여 세계 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 불참여 운동을 전 개하여 수난을 받았고, 해방이후에는 남북분단의 와중에서 순교자를 배출했다. 70년 대 이후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인권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꾸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민주화인권운동 참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의 아파타이트철폐운동, 미국의 흑인해방운동, 독일의 평화운동과 함께 20세기 교회 사의 두드러진 사회참여운동이었다. 80년대 이후 민족의 통일과 환경보전을 위한 운 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회운동과 함께 고아원 양로원을 비롯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5
다양한 사회봉사를 통하여 민족을 섬겼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게임 이후 에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교회의 민주화인권운동 참여도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교 회의 성장을 통하여 성공적인 목회자로 사회에 소개된 지도자들도 성공은 하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이 차례대로 대통령으 로 선출되면서 민주화인권운동의 지도자들도 정권에 참여하면서 민주화인권운동의 성과가 사유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목회자의 과다 배출, 이단 사이비 세력의 발호, 교회 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분열, 교회 지도력의 약화, 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 등 으로 인하여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기보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 가 되었다. 전환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서구 기독교가 지닌 신학과 교회법, 교회 연합과 선교의 경험을 유산으로 받아서 남 반구 국가의 교회와 나누는 것이다. 대체로 급성장하는 남반구 지역의 교회는 지도 력이 취약하거나 혹은 토착 종교의 배척이나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 역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보수와 진 보 양 진영이 상호존중과 신뢰회복을 통하여 분열적인 갈등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노 력해야 한다. 이는 하나 되라 하신 그리스도의 절대명령에 순종하는 길이다. 성장의 성과를 사유화하여 종교권력을 쌓거나 교권을 대물림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봉사를 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가난한 민중들을 순수하게 섬겨야 한다. 사회 참여의 열매를 사유화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교회가 되는 섬김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 목회후보생의 수를 조절하여 목회자의 질적 성숙 을 기하여야 한다. 갈수록 공격적인 양상을 보이는 사이비 이단 세력의 위협을 직시 하고 초대교회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개혁교회답게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 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한다. 서구사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6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와 WCC 부산 총회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에큐메니칼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선교의 세기 인 19세기의 결실이었 다. 19세기 말에 복음 선교를 위해서 교회가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1900 년에 뉴욕에서 선교사들과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단체 대표가 모여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가 에큐메니칼 과 선교 를 직접 연결시킨 첫 대회였다. 대회는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개회예배에는 전 세 계로부터 2,500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모였다. 벤자민 해리슨 미국 대통령이 참석해 서 개막연설을 했다. 이 대회의 준비모임에서 뉴욕 그레이스교회를 담임하는 윌리엄 헌팅톤목사는 에큐메니칼을 이렇게 설명했다: 솔로몬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사 는 곳이면 지구의 어디에서든 지혜를 찬양합니다. 어디든 에큐메니칼 세계는 사 람들이 거주하는 세계입니다. 이처럼 복음 선교를 위한 협력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처럼 세상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교회의 역사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16세기 초반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서구의 개신교회는 17세기에 신학과 교회 체제의 정비를 일단락지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와 북미의 경계를 벗어나 세계를 향하여 나갔 다. 19세기를 마칠 무렵에는 땅 끝 에 위치한 한반도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로써 19 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 가 되었다. 선교 운동의 바탕 위에서 교회 연합운동이 전 개되자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 가 되었다. 어린 나무가 자라서 거목이 되듯 이 세계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온 땅의 생명이 깃드는 큰 숲이 되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꽃은 1948년에 이루어진 WCC의 창립이다. 1900년대 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거기 에 있다 는 것은 알아도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교회와 교회가 서로 소식을 나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교회에 편지를 보낼 주소 조차 찾기 어려웠다. 어쩌다 오가는 개척자들을 통해서 신비한 여행담을 나누고 살 았다. 19세기에 점차 활발해진 미전도지역 선교도 선교단체나 교파와 지역을 중심으 로 전개되었다. 때로는 교파간의 갈등이나 경제적 낭비와 같은 문제도 드러났다. 연 합하고 협동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7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 선교사와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00 년대 말에 런던, 리버풀, 뉴욕에서 10년을 주기로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1900년에 모인 뉴욕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주후 313년에 콘스 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뒤 모인 에큐메니칼 공의회 전통을 되살려 낸 것이다. 324년부터 787년까지 일곱 차례 모인 공의회를 통해서 초대 교 회는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를 확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드디어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모인 선교대회가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교회 대 표들이 선교사들과 선교단체 대표와 함께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 작했다. 그 결실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이루어졌다. 암스테르담의 옛 루터교회에서 개 최된 WCC 창립예배에는 네덜란드의 비트릭스 여왕을 비롯해서 모두 5백 여 명의 회중이 모였다. 이들은 147개 회원교회가 보낸 351명의 대표와 독일정부와 암스테 르담 시 관계자, 유럽과 미국에서 온 방문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유럽과 북미 의 개신교가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곧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대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기독교세계를 향해서 연합을 향한 강한 메시지를 던 졌다. 1961년에 인도의 뉴델리에서 모인 제3차 총회에서는 제3세계 신생교회들과 2 천 년 역사를 지닌 정교회들이 대거 회원교회로 가입했다.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세 계 기독교를 대표 하는 단체가 되었다. 현재는 110개 국가의 349개의 개신교회와 정 교회가 가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 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의 네 교회가 회원교회이다. 한국정교회도 그리스정교회의 일원으로서 회원교회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 회원교회 교인 수가 모두 5억 6천만 명 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협의체이다. 이런 WCC의 설립을 포함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이면에는 감동적인 이야기들 이 적지 않다. 에딘버러선교대회를 성사시킨 존 모트는 이를 위해서 280만 km를 여 행했다. 자그마치 지구를 70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이다. 미국 감리교회의 평신도였 던 모트는 한국도 두 번이나 방문했다. 1907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방문했을 때 평 양대부흥운동을 장대현교회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1910년의 에딘버러선 교대회에 한국교회 대표가 15명이나 참석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윤치호선생이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를 했다. 2010년에 모인 에딘버러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윤치호 선생의 3대 후손인 윤경남 권사가 남편 민석홍 장로와 함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8
참석해서 만찬 석상에서 윤치호 선생에 대한 회고담을 전하기도 했다. WCC는 2013년 10월 30일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제10차 총회를 개최한다. 회원교 회 대표 825명 외에 옵저버, 참관인, 초청인사, 선교단체 관계자, 언론인 등 5천 여 명이 참석하는 최대 규모가 될 것이다. 총회를 방청하는 지역교회 교인들까지 포함 하면 최대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도 공식적 으로 초청을 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도 참석할 것으로 전망된다. 20세기 말부터 세계 기독교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 하고 있다. 서구 교회가 약화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급성장했다. 성령의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의 교회에서 세계 최대의 교회가 나왔다. WCC 부산 총회는 이러한 변화에 직면한 세계 교회의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기를 청 한다. 가시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WCC 교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 아들인다는 점에서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유일한 경전으로 받아 들인다. 삼위 하나님의 신비한 일치를 믿고, 주어진 일치 를 받아들이는 것이 에큐메 니칼 운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일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20세기 에큐메니 칼 운동은 주어진 일치 (God-given Unity)를 확인하고, 그것을 기초로 흩어진 교 회의 가시적인 일치 (Visible Unity)를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WCC도 1948년 창립총회 때부터 교파 간의 차이를 확인하며 주어진 일치 를 발 견하려 노력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 나됨을 지향하고 있다. 이 일치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일치이다. 이러한 주어진 일치 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바로 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관심이요, 또한 바로 그 관 심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주님이시오, 머리되신 분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하나됨 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과 같이 교회는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갖고 있 다(고전12:12). 그 여러 지체들은 머리되시는 주님께 속해 있다. 교회는 그의 신부요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29
신랑 되신 그분과 연합해 있다. 이것이 일치의 진정한 기초이다. 주어진 일치 는 하나임을 확인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갈 라진 틈을 극복하게 한다. 교회와 교회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협의함으로써 친교를 나누어 왔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공동의 신앙 이해와 선교를 위하여 협의하고 협력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동시에 교회는 세상을 섬김으로써 갈라진 인류에게 하나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었다. WCC가 추구 하는 교회일치는 결코 획일적이거나 한 교파로의 흡수 통합과 같은 일치추구가 아니 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치이며, 성령 안에서 누리는 친교를 통해서 하나임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치와 다양성은 한 쌍의 짝을 이루고 있다. 주어진 일치 는 다양성 속의 일치 인 것이다. 오래 동안 한국교회는 하나의 성경책과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해 왔다. 어느 교회 에 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관계없이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 연합집회를 가질 때에도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 다른 번역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사용하기도 했 으나 곧 일치를 이루어 왔다. 한국교회 백주년을 맞이할 때나 1907년 대부흥운동 백 주년 맞이할 때에도 교파를 초월해서 함께 기념예배를 드렸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 면 연합예배를 드리며 주어진 일치를 확인해 왔다. 요즘 찬송가를 둘러싼 논란을 보 면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온 땅에 흩어진 교회가 주어진 일 치 를 확인하고, 가시적인 일치 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한다. WCC 부산총회는 어떤 모임인가? WCC 부산총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사귐의 기회이며, 21세 기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세계교회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기회 이다. 이 총회에 110개국의 349개 교단이 약 825명의 총대를 보낼 것이다. 이들은 전세계 5억 6천 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 총대 외에 옵저버, 초청인사, 총회 를 운영하기 위한 실무자, 기독교계의 여러 국제기구 대표, 교회와 협력하는 국제단 체 대표, NGO 대표, 해외 언론인 등 해외 참가자만 약 2천 5백여 명에 달할 것이 다. 적게 잡아도 4천 여 명 이상 모이는 지구촌 기독교의 큰 잔치가 부산에서 열리 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몇 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WCC 부산총회를 준비 하고 있고, 중앙정부와 부산시 당국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0
WCC 부산총회의 주제는 무엇인가? WCC 부산총회의 주제에는 21세기 세계 문제에 대한 응답이 담겨 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라는 주제는 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뿌 리를 두고 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고난당하는 종 에 대한 예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생명의 하나님 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명이 위협당하는 세계 속에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정의 와 평 화 에 대한 강조는 불의하고 평화롭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있다. 그 희망은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갈망이며 기도이다. 생명의 하나님께 돌아갈 때 비 로소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담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 을 다스리실 때 생명은 온전함에 이르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선언이 다. 이는 경제위기, 생태위기, 영적 위기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 통을 겪는 이웃을 향한 복된 소식이다. 이처럼 총회의 주제에 정의와 평화의 문제를 다룬 것은 WCC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다. WCC 부산총회는 어떻게 진행되나? 총회 라고 하면 회무처리를 위한 딱딱한 회의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WCC 부 산총회는 이전의 총회와 같이 예배와 성경공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매일 예배로 시작해서 기도회로 하루를 마친다. 성경공부는 미리 준비한 교재에 따라서 20-30명 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된다. 일곱 명의 성경공부 집필자 중에는 우리 교단 WCC 총대인 배현주 목사(부산장신대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물론 예배와 성경공부 는 총회 주제에 대한 신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예배 중에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수용하여 통성기도 순서를 담고 있고,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에도 함께 진행한다. 특이한 것은 통성기도 라는 말을 다른 말로 옮기지 않고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배와 성경공부 외에는 7가지 주요 과제를 다루는 전체 모임과 21가지 소주제별 로 진행되는 에큐메니칼 대화, 85개의 마당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다양한 전시 프로 그램이 준비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2주일에 걸쳐서 독일 베를린에서부터 모스크바를 거쳐 북경까지 이어지는 평화열차순례를 기획하고 있다. 전세계 150명의 젊은 신학 자들이 모여서 2주간 동안 토론하는 글로벌에큐메니칼신학원(GETI)도 운영하고, 한 국의 각 신학교 학생 220명이 모이는 한국에큐메니칼신학원(KETI)도 운영한다. 여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1
성과 청년, 원주민, 장애인이 각각 총회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사전대회를 갖는다. 각 부문의 관심사를 총회에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WCC 헌장을 개정하거나 향후 8년간의 세계교회의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회무처리도 갖게 된다. WCC 부산총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나? WCC 부산총회는 세계교회가 시대의 도전 앞에 공동의 선교 과제를 확인하고 함 께 헌신하는 신앙의 축제이다. 우리 교단을 비롯해서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정교회 등 한국의 5개 WCC 회원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 회(NCCK)와 함께 총회를 준비하고 있다. 구세군이나 한국정교회, 대한성서공회도 총대를 파견한다. 부산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약 1,500여 명이 자원봉사자로 총회를 돕게 된다. 부산장신대는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도록 도울 예정이고, 호남신 학대학은 약 200여명의 신학자와 신학생을 초청하는 주말 프로그램을 가질 예정이 다. WCC 본부는 누구나 총회를 방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약간의 참가비를 부담하면 총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참가 등록을 할 수 있다. WCC 총회를 방문하는 해외 교회의 대표를 교회로 초청할 수도 있다. 각 교회마다 WCC 총회 방문단을 구 성해 보면 어떨까? 적은 수라도 대표를 선정해서 참가하도록 교회가 돕고, 참가한 분들이 교회 앞에 보고하면 유익할 것이다. 마침 우리말이 총회의 공용언어 중의 하 나로 채택되어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니 좋은 기회일 것이다. 해외 교회 대표를 주 일학교에 초대해서 신앙 체험을 나누면 그것도 유익할 것이다. 물론 기도로 돕는 것 은 기본일 것이다. 총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해 왔나? 본 교단 총회는 2009년 8월에 WCC 제10차 총회 개최지가 부산으로 결정된 뒤, 그해 11월에 제94회기 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위원장 이용남 목사)를 조직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2010년 5월과 6월에는 전국 5개 지역에서 WCC 제10차 총회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의 역할 을 주제로 일제히 WCC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WCC 제 10차 총회를 소개하는 2권의 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매 회기마다 WCC제10차 총회준비위원회(제95회기 위원장 이승영 목사, 제96회기 위원장 고시영 목사, 제97 회기 위원장 김동엽 목사)를 조직하고 관련 업무를 계속해서 추진해 왔다. 그 동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2
총회를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정책 세미나 개최, 부산 경남지역 7개 노회장 연석회의 개최, WCC 총무 일행 영접, 부산장신대학교와 영남신학대학교의 WCC 모의총회 개 최, 총회장 손달익 목사의 WCC 총무 트베이트 목사 방문 회담 등의 사업이 이루어 졌다. 적지 않은 수의 본 교단 인사들이 WCC제10차총회한국준비위원회(KHC)에 참 여하여 준비과정을 돕기도 했다. 총회는 WCC 제10차 총회의 해 인 2013년을 맞이 하여 마무리 준비를 도우며, 국내 회원교단들과 협력하여 총회 산하 노회와 교회의 참여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 총회를 위해 기도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노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2012년 12월에 열린 제97회기 4차 총회 임원회는 본 교단 산하 65개 노회가 2013년 봄 노회 시에 WCC 총회를 위한 특별 순서를 배정하도록 결정하였다. 세부 적인 내용은 (1) 전국의 각 노회가 일제히 WCC 부산총회와 관련된 특강을 듣고, (2) WCC 제10차 총회 홍보동영상을 시청하며, (3) WCC 부산총회의 성공적인 개최 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총회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는 WCC 총회와 에큐메니즘 을 강의할 특강 강사 명단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각 노회로 배포 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또, 총회WCC제10차총회준비위원회는 2013년 봄 노회 를 마친 뒤에 각 지역의 노회협의회가 WCC 부산총회와 관련된 특별집회를 개최하 도록 제97회기 6차 총회 임원회에 청원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총회가 요청하는 일 외에 노회가 WCC 총회 준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준비할 수도 있다. 이를 테면, 광주지역의 세 노회는 지역의 기장 노회와 감리교 지방회와 협력하여 광주지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WCC 총회 기간 중에 호남신학대학교를 방문할 해외 신학자와 신학생을 영접하기로 하는 한편 지역 신학생들의 WCC 총회 참여를 격려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각 교회는 WCC 부산총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2013년 1월에 개최된 제97회기 5차 총회 임원회는 오는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을 WCC 주일 로 정하고 전국교회가 일제히 부산총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하기 로 결의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월 24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고, 한국기 독교장로회는 우리와 같이 5월 19일(성경강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기로 하였다. 이 일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예배용 동영상 제작, 모범 설교집 제작, 성경공부 자료 제작, 포스터 제작, 현수막용 컴퓨터 파일 총회 홈페이지 게시 등의 실무를 국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3
WCC 회원교단들이 연합하여 나누어서 준비하고 있다. WCC 부산총회가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함께 준비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항목 가 운데 교회 형편에 따라 적당한 것을 선택하여 동참하여 기도로 섬기기를 바란다. (1) 2013년 5월 19일(성령강림주일)을 WCC 주일로 지키고 WCC 부산총회를 위 하여 기도하는 일. (2) 성령강림주일을 전후하여 금요심야기도회나 수요기도회를 이용하여 WCC 부산 총회를 위한 특별집회를 갖고, 강사를 초청하여 교인들에게 WCC를 이해하는 기회를 갖는 일. 형식은 특강, 세미나, 기도회 등 다양하게 취할 수 있음. (3) 교회 지도자들이 - 목회자, 당회원, 남선교회 여전도회 청년회 임원 등 - WCC 총회에 등록하여 참관하거나 자원봉사자로 등록하여 돕는 일. (4) WCC 총회에 참가한 해외 참가자를 주말(11월 2일과 3일)을 이용하여 교회로 초청하고 교인들과 교류하거나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게 하는 일. 청년이나 여성 대표를 초청하여 청년회와 여전도회가 교류하게 할 수 있고, 주일학교를 방문 하여 나누게 할 수도 있다. (5) 지역의 청년회나 여전도회가 연합하여 특별집회를 갖는 일. 이 때 부활절연합 예배와 같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집회를 가질 수 있음. (6) 7월 27일 무렵에 부산에서 개최될 한국 참가자 사전대회에 참가하는 일. (7) 교회 예배나 집회 때에 WCC 총회나 세계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함께 기도하도록 돕는 일. 세계교회는 이미 2013년 부산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교회 지도자들 은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기독교의 변화양상을 보면, 이번 WCC 부 산총회는 21세기 기독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한 대회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서 준비한 선교에 관한 문서나 신앙직제에 관한 문서도 20~30년 간의 논의를 모은 중요한 문서들이다. 우리는 항간의 불필요한 논란을 불 식하고 WCC 부산총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기도하며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께 서 주신 귀한 기회를 선용하여 연합하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남은 기간 동안 힘 써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는 최근 한반도의 주변정세를 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하나님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하 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이 한껏 고양되는 은혜의 반전이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할 때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4
패널 토의-발제1 세계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과제 - 코이노니아의 악수를 하라- 장 상 박사(전 이화여대총장, 신약학) 1.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 구약성서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전승이 있다 :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이다. 제사장 전승은 성전예배가 핵심이며 제사장들이 중심역할을 담당한다. 제사장의 역할 은 기존구조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예언자 전승에는 조직이나 제도는 없으며 하 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개인에 의해서 수행된다. 예언자는 위기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제사장 전승의 타락을 경 고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적 발전을 선포하고 예언한다. 예언자들의 활동은 백성 들을 회개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치유의 기능이 있다. 이는 위기의 성격에 따라 심판일 수도 있고 개혁과 갱신일 수도 있다. 제사장 전승은 보수적인 반면 예언자적 전승은 개혁적이다. 그러나 성전예배가 타락하였다 해서 성전예배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며, 예언자 전승만으로는 구약신앙을 대변할 수 없다. 구약시대는 이 두 전승의 종말과 함께 마감된다. AD 70년 유대전쟁에서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전 파괴와 더불어 성전제사는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제사장 전승의 종말을 의미하며 그 후로는 회당이 성전예배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회당제도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었던 바빌론 포로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에스라 8:15, 느헤미야 8:2, 9:1). 회당제도에서는 제사장들이 아닌, 평신도 주로 바리새인 들이 중심이 되었고, 회당 예배의 핵심은 제사가 아니라 율법이었다. 초대교회의 예 배 형식은 회당의 것을 많이 채용하였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5
예언자전승도 구약의 말라기를 끝으로 종말을 맞는다(B.C. 450경). 누가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눅 16:16). 2. 예수의 시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옛 계약의 시대는 끝이 나고 새 계약의 시대가 열린다. 예 수의 사역이 모세, 엘리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 선상에서 이해되는 측면이 있으나 (눅 4:17-21; 마 17:2) 예수는 스스로 예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 언자 이상이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만이 옛 계약을 새롭게 완성한 유일한 대제사장이며(요 17:19f) 그는 완전한 희생으로써 단 한 번에 드려진 제물이라는 신학도 발견된다(엡 5:2, 히 9:14). 그는 만민의 속죄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고, 그 희생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 사건으로서 그는 새 언약의 중보 이시다. 예수의 사랑의 두 계명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첫 번 설교인 희년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있었다(눅 4:14-21). 예수의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613개의 계명이 두 계명으로 수렴된다(신 6:4, 레 19:18). 이 계명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보도되고 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37). 예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사랑의 두 계명을 제시한다. 마가복음에서 질문자 는 서기관이나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는 율법학자이다. 마가복음서의 분위기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이나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자못 적대적이며 부정적이다. 마가복음 서의 관심은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 이며 마태복음서는 위대한 계명 이다. 누가복 음서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 는 영생을 얻는 처방계명에 관심을 둔다. 세 복음서의 기술은 조금씩 다르나, 공통된 것은 세 복음서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 라,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두 계명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서는 이것들보다(복수)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을 사 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이 함께 가장 큰 계명이다. 마태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6
는 두 번째 계명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그와 같으니 라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대로 먼저 언급된 계명과 후에 언급된 계명이 다 같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마 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라고 강조한다. 누가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 하나 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번역해야 한다. 사랑하라는 동사는 하나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동일한 계명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이 두 계명은 나란 히 언급되나,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대등하고 독립된 의미와 중요성과 권위 가 부여된다. 동시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계명으로 밀접한 내적 연결에서 그 완 결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실한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두 계명은 서로 구별되나, 분리해서 실천할 수가 없다. 3. 교회의 시대 누가의 글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신학은 구속사 신 학이며 구속사적 틀(구약시대, 예수시대, 교회시대)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의 시대가 시작된다. 예수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사랑의 두 계명이 예수의 교훈대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실천이 되었는가는 별 문제이다. 교회에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계명에 더 우선권을 주기도 하고, 또는 이웃 을 사랑하라 에 무게를 두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두 계명이 함께 크고 첫째 되 는 계명이 되는 것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사도회의 개최의 배경: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는 기독교 최초의 정상회담이 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 교회는 팔레스타인을 넘어 빠르게 헬라세계 로 뻗어갔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교회는 우선 유대인 동족을 위한 선교에 관심을 기 울였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세상 종말 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직접적 구원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한 선교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방인을 위한 선 교는 상상 이외로 생명력 있는 선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성공은 심각한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7
문제를 야기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유대적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할례 및 유대교의 제의적 규례와 음식법 준수를 부과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감정적으로, 이념적으로, 실제적으로 매우 심각하였다. 유대인들 의 민족적 자부심은 뿌리 깊은 선민의식과 관련되어 감정적 차원을 지니고 있었다. 이방사도로 지칭하는 바울까지도 유대인을 첫째 로 여기는 경향이 발견된다. 아직도 성전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던 흩어져 있는 소위 예루살렘 유대인들/팔레스타인 유 대인들에게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지만 구원은 모세의 율법을 떠나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베드로에게도 바울의 신앙처럼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전부였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수 천 년의 전통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산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교 전통과 율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 이방인들에게 새 이스라엘의 문이 열리는 것을 염려했고 저항했다. 특히 할례는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의무였던 것처럼(행 2:10) 그리스도 인이 된 모든 이방인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극단적인 우익에 속한 자들이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이 먼저 유대 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엄격한 입장을 지닌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는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이념적 측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수용하기 매우 어려웠 던 것 같이, 또한 바울을 비롯한 이방선교의 차원에서도 할례는 심각한 문제였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위해 필요 충분함 으로 타협이 불가능하며, 할례는 복음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적으 로 초대교회의 선교적 측면에서 할례나 음식법의 부과는 상당한 어려움을 제기했다. 유대인 입장에서 할례가 유대교의 이방선교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었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선교의 실질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문제점이 선교 초기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 도인, 팔레스타인 유대인 그리스도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 베드로가 중심인 예 루살렘 교회와 바울이 중심인 이방인교회 간에 긴장과 갈등이 있었고, 분열의 조짐 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8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관한 보도: AD 4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던 최초의 사도회의에 대한 기록은 갈 2:1-11과 행 15:1-29에서 발견된다. 갈 2:1-11은 사도 회의의 주역으로 참석했던 바울에 의한 보도이다. 사도회의 이후 4-5년이 경과된 시 점 49년 경,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목적에서 쓴 기록이다. 반면 행 15:1-29은 정 상회담 이후 3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 제 3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그 시대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계기가 이 루어졌음을 강조하며, 바울의 역할이 돋보인다. 후자에서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영 성과 선교의 의미 를 명백히 하고 있다. 바울의 보도(갈 2:1-10) 바울은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기독교를 헬라세계 로 몰고 간 주역으로서, 기독교의 세계화의 길을 연 최대의 선교사이다. 더 나아가 그는 초기 기독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주도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사도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사도에게는 그의 선교활동을 어렵게 하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다. 우 선 그의 사도직 권위가 도전 받고 있었다. 바울은 지상의 예수를 따르지 않았고, 부 활의 주님을 만나지도 않았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의 사도직 의 정당성,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소위 자칭 사도 라는 것이다. 동시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예루살렘의 12사도와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 운 것이 아니므로 복음의 온전성이 의심받았다(갈 1:18-24 참고). 특별히 바울은 이 방인 선교에 주력하며, 율법이나 할례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였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의 정당성이 문제시 될 수밖에 없었다. 갈 2:1-11은 바울이 AD 53-4년 전후로 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 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은 여기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 자체를 보고하기 위한 것 보다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변호하려 는 의도가 있었으나 그것은 초대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바울의 신학적 노력과 직결된다. 바울의 선교와 신학을 꿰뚫고 있는 2대 관심사는 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으 로 요약될 수 있는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었다. 이 두 핵심적 관심 또 는 과제를 지키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는 생명을 다하도록 수고, 투쟁, 헌신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교회와 이방인 그리스도교회 내의 분열의 위험성을 상당히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39
염려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방세계에서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 사 도들에게 제출하였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권위를 의식하듯 누구의 강요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시 로 인해서 이방선교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를 방문했으며, 유력자들 에게 복음을 제시했으나 사사로이 하였다는 것을 부자연 스러울 만큼 강조한다. 그 결과 소위 유력한 자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세계에 전한 복음에 전혀 이의가 없었으며, 오히려 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이가 자신에게도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다고 바울은 자랑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사도 직의 권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성, 바울의 선교의 정당성이 확인된 것이다. 그 리고 친교의 악수 가 이루어졌다.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바울에 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 이것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와 바울의 코이노니아 의 악수(갈 2:9-10): 예루살렘 교회 기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오른 손을 주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의 미의 화해, 일치 또는 친교를 상징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지만, 한편이 다른 한편 에게 오른손을 주는 행위로 상징되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기둥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오른 손을 주면서 동등하게 여겼는가?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는 오른 손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기둥들이 우월한 위치를 인정하는 관계였는가? 당시 헬라사회에서 오른 손(δεξὰς διδοναι)은 서약, 또는 상호계약 체결을 상징했다. 친교로 번역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의 의미는 다양하나 대체로 나눔, 협력, 참여, 동반자를 뜻한다. 친교의 오른손을 준 행위는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대 등한 동역관계의 계약을 맺는 일이며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에서 표현되듯이 하나님의 복음을 연합하여 전파하는 공동의 목적을 인정하는 교회 의 일치와 연합 을 의미한다. 복음전파에서 선교대상 및 영역의 구분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 합의는 사실 상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사도회의는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방사도들은 사도회의 이후 예루살렘 교회와의 일치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코이노니아의 악수는 단일교회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정, 존중, 협력하는 일치와 연합, 파트너십을 이루는 상징적 행위였다. 코이노이아의 악수로 상징된 계약의 두 번째 내용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사업의 과제였다. 이것은(10절) 계약에 첨가된 요구가 아니라 계약자체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0
일부였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 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요청은 그 앞에 μόνο ν 이 강조됨으로써 그것 외에는 다른 요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헌금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사도행전 11:30에 나오는 기근구호와 동 일한 것인가? 또는 정기적 헌금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란 누구인가? 바울 과 바나바도 예루살렘 기둥들에게 어떤 특별한 요청을 했는가? 이들의 요구가 동역 관계의 동등성을 저해하거나 악화시킨 것은 아닌가? 등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울은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일은 본래 열심히 하던 일이라고 강조한다. 로마서 15 장에서 바울은 헌금의 신학적 의의를 설명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았다. 이방인 그리스 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방인들의 의존적 위치를 보 여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신령한 것 을 함께 나누도 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대등하게 나누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것은 은혜인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빚진 자들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모금을 하여 그것을 예 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예루살렘 성도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도회의 참석자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바울은 교회일치의 최종적 과정은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만 달려있 는 것이 아니라 각기 지도자들이 속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도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모금과정에 많은 오해와 반대,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성적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열성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헌금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하여 모금을 계속하였다. 헌금에 대한 바울의 헌신은 그가 친히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계획을 세우고 신변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무릅쓰고 전달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누가의 보고 (행 15:1-29) 상황의 심각성: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 다. 바리새파라고 하는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1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여서 소위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자 유주의자들 인 이방인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함께 검토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일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서의 권위가 아직 있었고 주의 형제 야고 보가 주도하고 있었다. 민주적인 해결의 장: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온 안디옥 교회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고 경청과 소통과 논쟁이 이루어지는 공개적 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도자들의 영성: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상당한 논쟁이 있었으나 베드로 와 야고보의 지도력에 의해 이 회의의 역사적인 결과가 성취되었다. 베드로의 호소: 베드로는 자신의 사도됨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 고넬료의 회심사건을 회 상(11:11-18)했다. 고넬료 가정의 회심사건에서 베드로는 깨끗한 것 과 깨끗하지 않은 것 에 대한 유대인의 전통적 기준이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깨달았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는 공정해서 유대 인과 이방인을 구별치 않으시고 동일하게 예수의 은혜로 구원하셨다 는 것을 감동적 으로 호소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믿음이외의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어깨에 올려놓은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을 저주한 예수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이방인들은 오직 신앙과 세례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러나 여전히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교인들의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11:1-8, 18 참 조) 그것은 갈라디아서 2:11-14에서 나타나는 대로 안디옥에 예루살렘의 극보수주의 자들이 나타나자 베드로, 바나바 등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중단하 는 유감스런 사건이 발생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담대하게 베드 로를 공개 비난하는 사건이 있었다. 야고보의 지도력: 야고보는 마치 회의의 의장처럼 보인다. 내 말을 믿으라 말만 아니라 그에게서 지도자의 실천적인 지혜와 용기를 발견한다. 그는 토론 끝에 회의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2
가 수용한 것을 요약하며 선교의 의의는 한 백성 을 이루는 것이라는 핵심적인 개 념을 제시하면서 베드로의 입장을 옹호한다. 한 백성 이란 대체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사용하였으나(아모 스 9:11-12, 70인 역, 예레미야 12:15, 이사야 45:21) 야고보는 하나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곧 교회에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했다. 그 는 마침내 하나님께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말라 는 권위 있는 권면과 함께 실천적 결론을 제시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준수를 부과하려는 유대인 그리 스도인들의 요구는 기각되고 할례준수의 요구 대신 4개의 실천적 금령이 채택된다. 행 15:31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낸 권면 안을 기쁘게 받아들였 다고 기록되었다. 1964년 전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었던 사도회의의 과정, 결과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이나 집단의 임의적 개입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보고, 경청, 토론이 가능한 회의 라는 합리적 기제를 선택한 것은 기 독교교회의 민주적 과정의 기초가 되었다. 당사자인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교회인 안디옥교회 양측의 참여를 통한 합의과정을 거침으로써 신뢰성이 보장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의 발생의 진원지였으므로 모교회로서의 어느 정도 권위가 있었고 지도력 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압적이거나 종속,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 권고, 의견제안 등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지도자들의 영성: 모든 사회적, 인간적 걸림돌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감 지하는 영성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과 헌신이 돋보인다. 또한 선교의 주역 은 하나님이시며, 사도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천명한다. 교회일치와 선교영역의 확대: 바울의 이방선교의 정당성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코 이노니아의 악수를 통해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교회와 이방 인교회의 일치와 선교협력의 길이 열렸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사도행전의 중심인 15장에 기록되었다. 행 1장-14장에는 유대인에 대한 선교와 관심이 발견되나 행 16장-28장에서는 이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3
방선교에 대한 선교와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사도들의 근거지, 거점 역할의 위치를 행사하지 않는다. 사도회의를 기점으 로 선교의 축의 변화가 발생한다. 예루살렘이 주도하던 선교는 바울주도의 선교로 바뀌고 예루살렘교회는 퇴조한다. 유대교의 테두리를 넘어 팔레스타인 밖의 이방세계 로의 본격적인 진출이 가능해지면서 그리스도교 선교영역의 획기적 확대가 이루어진 다. 로마 세계로의 진출을 비롯하여, 세계의 그리스도교로 가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 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를 벗어나는 진통의 필연적, 상징적 사 건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만일 복음의 진리가 수호되지 않고 이방선교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유대인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안의 하나의 소종파로 타 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교회의 일치가 수호되지 않았더라면 이방인 그리스도교 회는 복음의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이탈되면서 헬레니즘 사회의 비역사적인 밀의종교 의 형태로 타락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세계 그리스도교회 연합운동의 효시로서 하나님의 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 라서 교회신학은 코이노니아 신학이며, 바로 에큐메니칼 신학의 핵심이 코이노니아 신학인 것이다. 4. 세계 기독교의 미래와 한국교회 21세기의 현실: 21세기는 희망의 시대로 기대됐으나 오히려 위기의 시대로 화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전개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세계화의 등장으로 시작된 21 세기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 생태계 위기, 자원 고갈과 기후변화, 종교간 갈등과 충돌, 영적 정신적 혼돈 등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동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500여 년 전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였고 유럽의 시대였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서양 중심시대가 미 국의 시대라면 태평양 중심 시대는 동북아시아의 시대이다. 오늘날 유럽은 침체되어 있고 미국은 최상/최강의 정점은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부상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21세기 기독교의 현실: 기독교를 세기 별로 특정 짓는다면 19세기는 선교의 세기 였으며 20세기는 성장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떤 세기가 될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4
것인가? 우선 세계교회의 지형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듯 이 기독교의 중심도 한 때는 유럽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서 분명한 것은 유럽과 북 미대륙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 수는 감소하고 사회엘리트층은 교회를 이탈하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외면하면서 교회의 문화 사회적 영향력 감소뿐 아니라 교회자체의 지속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남미, 아프 리카, 아시아에서 신흥 교회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비서구 기독교의 비율이 75%에 이른다. 2011년 미국교회협의회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교세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전통적 교단들의 교인수가 감소하는 반면 비전통 교단의 교회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오순절 계통 교회,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타교단과 비교해 볼 때 주목할 현상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1세기 세계 기독교의 미래를 위한 제언: 시대마다 문제가 있다. AD 50년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교회와 이방인교회의 갈등과 분열의 위험이 심각하였듯이 오늘날 세 계 교회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크게 봐서 세계 교회는 에큐메니칼 그룹과 에반젤리칼 그룹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 교회에 따라서 이 두 그룹이 조화롭게 지내 기도 하지만 긴장과 갈등으로 에너지 소모적인 측면이 농후하다. 21세기의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 그룹과 에반젤리칼 그룹의 코이노니아의 악수를 통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을 어떻 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반드시 일치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떤 경향성은 말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에 비추어보면 에반젤리칼은 제사장 전승에 가깝고 에큐메니칼은 예언자 전승에 가깝다. 예수의 사랑계명에 비추어 보면 에반젤리칼은 하나님 사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에큐메니칼은 이웃사랑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인가? 1948년 창립된 WCC는 20세기 후반 들어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일치와 공동선교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국제기구이다. 동시에 회원교 회 안팎으로부터 상당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WCC의 메시지와 활동은 확실히 예언자적 증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WCC의 10차 총회주제인 정의, 평화, 생명이 잘 증언하고 있다. 에큐메니칼에서 말하는 일치란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구조적인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일치 를 의미한다. WCC는 달리 표현하면 교회의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이다. 에큐메니칼은 ὀικο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5
υμενη(만물이 거주하는 세상) 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은 전 세계적이며 지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일치는 전 세계적 일치, 연합, 협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차원에서 볼 때 교회들의 친교영역은 광범위하며 에큐메니칼하다. 바꾸어 말하면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이다. 구약성서에서 제사장 전승과 예언자 전승 이 각기 그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이며 어느 한 전승이 약화, 쇠 퇴될 때 구약 시대는 끝이 났다. 예수의 교훈을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성 실하게 기록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이웃을 사랑하라 는 두 계명은 구별은 되 나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21세기 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 아의 악수에서 새로운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에반젤리칼이 에큐메니칼과 분리될 때 하나님의 선교는 미완성이며 하나님의 주권은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과 분리될 때 에큐메니칼의 노력은 공허해질 수 있다. 21세 기 기독교의 방향과 동력의 발견은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아 악수에 있으며 에큐메니칼은 에반젤리칼을 품고 에반젤리칼은 에큐메니칼을 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한국교회도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사회에서는 교회가 상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분열과 사회적 신뢰, 도덕적 신뢰의 결여, 복음보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것과 같은 물 량주의 물질주의의 팽배가 위험수위로 다가가고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에 비하면 생동감이 있는 공동체이다. 예배에 열심이며, 기도에 열심이며, 성서를 읽는 교인들이 많으며, 선교정신이 살아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분명히 세계 기독교의 미 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이와 같은 성찰에 비추어 한국교회를 위한 몇 가지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우선 WCC 총회는 준비과정에서부터 일치와 협력의 과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코이노니아의 악수의 역사적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교회가 예언자적 경향성이 강하다면 에반젤리칼 교회는 영성적 경향이 강하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영적 전승과 예언자적 전승이 분리될 때 교회는 약해지 며, 일치 협력할 때 교회는 강해진다. 유럽교회의 쇠퇴의 원인의 하나는 지나치게 예 언자적 역할에 의존하여 영적 전승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비 서구 교회는 신학은 약하고 에큐메니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나 영적 전승이 강하다는 것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6
이다. 동북아 시대에 세계 기독교의 중심적 역할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나? 세계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한국교회는 분명히 중심에 있다. 한국교회 역사에는 유감스럽게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질에 대한 많은 오해와 왜곡이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경청과 소통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WCC는 하나님의 비전을 공유 하는 자리가 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교단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지도 자들의 영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과제에 감사 하며 이런 과제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7
패널 토의-발제2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즈음하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교수, 기독교학부)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과제다. 이 세 계 그 어느 곳보다 배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신앙이 강한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대화와 관용의 문화가 자리 잡기는 참 힘들어 보인다. 잘 참고 대 화하다가도 너 몇 살이냐? (How old are you?)면 그것으로 모든 대화가 끝나는 게 한국적 풍토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면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모 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고단하고 힘들었나 보다. 상호 소통 능력이 빈약한 가부장 문화 와 군사주의 문화 에 배타적인 근본주의 신 학 이 결합하면서 한국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피우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보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한국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제2 의 도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대의 과제이며, 제10차 WCC 부산총회는 바로 그것 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글에서 주장해 보 려 한다. Ecumenical vs Evangelical 에큐메니칼(ecumenical) 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15번 사용된 그리스어 오이쿠 메네(oikoumene) 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한다. 내 지역, 내 교파, 내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즉 지구 전체를 사고의 지평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8
으로 삼으니 그것은 태생적으로 포용적이고 탈( 脫 )경계적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 서 이러한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에큐메 니칼 대 에반젤리칼 이라는 잘못된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 잘못된 이분법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 상황이 낳은 불행한 산물이다. 1) 에큐메니칼 의 반대말은 에 반젤리칼 이 아니다. 에큐메니칼 의 반대말은 섹테리안 (sectarian), 즉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 다. 2) 분파주의/당파주의란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과 진리에 대한 이 해가 마치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근본주의 적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분파주의/당파주의이며, 따라서 에큐메니칼한 시각이 결여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편협한 공동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사 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정확히 대비되는 자세다. 3) 분파주의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 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복음을 사유화 (privatization) 한 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칼이란 교파적 신앙고백(confession)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 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고전 12:25) 하려는 정신이고 문화이자 운동이다. 그것 은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에큐메니칼 은 철저한 에반젤리칼 이다. 에반젤리칼(evangelical)이 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evangelion)을 최우선시 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헌신한다 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그의 선 포(Mission State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 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1) 서방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가입한 세계 최대의 에큐메니칼 기관인 WCC를 용공단체로 매도 하고 1959년 예장 합동이 갈라져 나간 것도 분단상황이 낳은 뼈아픈 역사입니다. 2) Wesley Ariarajah, "Some Basic Theological Assumptions of the Ecumenical Movement," in Our Pilgrimage in Hope: Proceedings of the First Three Seminars of the Asian Movement for Christian Unity (CCA and FABC, 2001)에서 인용. 3) 사도 바울은 참 에큐메니칼적입니다. 그가 얼마나 한 성령 같은 성령 을 강조하는지 보십시오. 은 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 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 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 라. (고전 12:4-11)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49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즉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 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이 복음적 이상들 (evangelical ideals) 은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해온 최우선의 가치다. 한국과 세계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바로 이와 같은 복음적 이상들의 구현 을 위해 앞장 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태 7:20)고 하셨다. 에큐메니칼은 탈복음주의 도 후기 복음주의 도 혹은 세속주의 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충실하려고 하는 지극히 복음주의 적인 운동이다. 에큐메니칼을 에반젤리칼에 반대되는 말로 오해되는 이분법적 도식부 터 극복해야 한다. 에큐메니즘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 라 교회가 하나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 과 교회의 교회됨 교리는 분열시키고 봉사는 일치 시킨다 (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 라는 말이 있다. 이 주장의 요지는 교리적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세계 안으로 뛰어 들어 함께 선한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주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 만 우리의 경험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교리적 문제만큼이나 사회참여와 봉사에서도 분열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어떤 정치경제 체제가 가난한 자들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경제적 발전이 그들을 위해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해서 는 의견이 상이하다. 때문에 우리는 교단 간(inter-denominational) 그리고 기독교 내(intra-Christian)의 대화와 일치의 노력, 즉 교회의 하나됨 을 위한 노력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대화는 공동의 증언과 봉사를 위한 신학적 토대다. 오늘날처 럼 이렇게 깊이 분열된 세계 속에서 교회가 구원의 신성한 상징 (sacrament of salvation)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신학적 교리적 예전적으로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멀리 가기 위한 토대이다. 아프리카에 이런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라. 그러나 멀리 가 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but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하지만 교회의 하나됨 이 교회의 교회됨 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 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일치를 위한 일치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0
각한다. 무엇을 위한 일치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근래 교회연합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또 개혁과 통합을 말하지만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교회다움 을 회복하기 위 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묻지 않으면 분열은 물론 일치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조직이나 기구적 제도를 인위적으 로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총체적 위기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일치 는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됨을 추구할 때, 교회가 교회다움 을 회복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다른 말로 이 세계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응 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하나님이 극진히 사랑하사 독생 자까지 내어주신(요 3:16) 세계다. 영어로 the world'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뜻 하는 'cosmos'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듯 (롬 5:20), 교회사를 되돌 아보면 불의가 가득한 곳에 교회일치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곤 했다.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70-80년대의 교회가 그랬고, 인종차별정책(apartheid)으로 고통 받던 남아 프리카의 교회들이 그랬으며, 독일교회가 바르멘 선언으로 히틀러의 폭정에 대항할 때도 그랬다. 사실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교회 내적인 요구에서라기보다 위 기에 접한 세상으로부터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한 성찰이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이렇게 말한다. The saints do not see things that others do not see; rather, they see what everyone else sees but in a different way. (성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 람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되 그것을 다르게 보는 사 람들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남다른 눈으로, 즉 신앙의 눈 으로 이 시대의 징조 를 읽고 이 세계의 위기에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공동의 신앙운동이다. 실로 희망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됐던 21세기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변화 와 생태계 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세대 간 문화 간 단절, 그리고 영적 정신적 혼돈 등,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이다. 이 4) 김동선, 일치의 딜레마에 대한 신학적 고찰과 교회의 본질,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 발전을 위 한 학술대회와 공청회, 2004. 11. 1. 김동선은 갱신 없는 연합은 분열의 죄를 계속하는 것일 뿐 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1843년 두 개의 교회로 나누어졌다가 1929년 하나가 된 스코틀랜드장로 교회의 모습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교회의 통합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예를 듭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진지하게 묻지 않고 교회 내적인 이 해관계로 진행된 일치의 한계를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제 97회기 에큐메니칼 정책세미나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