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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권 4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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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한국학연구 55(2015.12.30), pp.85-114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1)김윤정 *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와 관점을 달리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문인 계층 이 고려 사회의 주류가 되고, 元 代 文 人 관료들과의 적극적인 交 遊 등으로 형 성된 사대부 문화가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에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에 대 한 문제를 살펴보았다. 14세기에 제작되는 세 점의 문양 구성 요소와 표현 방 법, 배치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도상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왕희지 觀 鵝, 도 연명과 국화, 李 膺 과 登 龍 門 과 같은 故 事 가 도해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고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인식이 14세기 이전에는 단순히 글의 소재 정도였다면, 이제현, 이곡, 이색, 정도전 등 14세기에 활약한 문인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감회를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그들의 삶과 행적을 쫓 고자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남기고 있다. 14세기에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문 인들의 인식 변화가 상감청자와 같은 기명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 하였다. <지정11년명대접>의 경우도 1351년에 제작되었다는 편년 자료로서의 측면만이 언급되어 왔지만 무덤에 부장되는 生 器 로 제작되었다는 본질적인 의미를 논증하였다. 이를 통해서 당시 중국 강남 지역에서 성행한 주자성리학 자 黃 幹 의 사상과 저술이 유입되어 고려의 喪 禮 과정에 새로운 성리학적 인식 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 14세기 전반 경의 상감청자에서 상징성이 강한 故 事 의 내용이 문양으 *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조교수(도자사 전공)

86 한국학연구 55 로 표현되는 것은 원대 문인 문화의 풍조나 器 皿 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 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선왕이 연경에 만권당을 건립하고 이제현 등의 고려 문 인 관료들이 조맹부, 주덕윤 같은 원대 문인들과 직접 교유하고 있었다는 점이 나 남송의 주자성리학을 계승한 중국 남방 지역의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원대 문인들이 선호하던 고사인물 을 주제로 한 그림과 기명 등이 고려에 유 입되어 영향을 미쳤던 상황을 유추하여 볼 수 있었다. 주제어: 고사인물, 고려 14세기, 상감청자, 도연명, 왕희지, 순자, 예론, 생기 Ⅰ. 머리말 고려 14세기 상감청자는 기형, 문양 등 조형적인 면에서 이전 시기에 비해 거의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서 그릇의 종류가 단순해지고 두께가 두 꺼워진다거나 문양의 세부 형태와 구성의 밀도가 떨어지는 등 간략화 되 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감청자의 일부 기종과 문양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14세기 상감청자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1) 본고에서는 관점을 달리하여 성 리학적 소양을 갖춘 문인 계층이 고려 사회의 주류가 되고, 元 代 文 人 관료들과의 적극적인 交 遊 등으로 형성된 사대부 문화가 고려 14세기 상 감청자에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 려 말기에는 원의 영향과 함께 수용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 등을 통해 出 仕 한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사대부라는 세력으로 성 장하여 점차 고려 말기 사회의 주류 계층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2) 일부 1) 이종민, 14세기 後 半 高 麗 象 嵌 靑 磁 의 新 傾 向 -음식기명을 중심으로-, 美 術 史 學 硏 究 201호, 한국미술사학회, 1994, 5~38쪽; 김윤정, 高 麗 後 期 象 嵌 靑 磁 에 보이는 元 代 磁 器 의 영향, 미술사학연구 249, 한국미술사학회, 2006, 163~205쪽; 박정 민, 14 世 紀 前 半 高 麗 象 嵌 靑 瓷 梅 甁 의 새로운 變 化, 미술사학 21호, 한국미술사 교육학회, 2007, 183~202쪽. 2) 李 基 白, 韓 國 史 新 論, 一 潮 閣, 1990, 218쪽. 신진사대부 는 충렬왕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신흥세력으로, 鄕 吏 출신의 中 小 地 主 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87 상감청자의 문양과 명문 자료에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문인 사회의 성 격을 반영한 예들이 확인되며, 본고에서는 이를 중점적으로 파악해 보고 자 한다. 고려 14세기에 특정 계층의 문화와 사상이 磁 器 에 어떤 영향을 어떻 게 미쳤는지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는 문헌 자료나 유물이 많지 않기 때 문에 연구하는데 기본적으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14세기에 제작되는 특정한 네 점의 상감청자를 중점적으로 고찰하는 방법을 사용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상감청자 세 점의 문양 구성 요소와 표현 방법, 배 치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도상 해석을 통해서 상감청자 문양의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상감청자 문양에 새롭게 보이는 故 事 人 物 의 주제가 14세기 이전과 이후 문인들에게 어떻게 인 식되었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즉 유교 경전이나 史 書 에 등장하는 역사 적 인물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봄으로써 14세기 상감청자 문양에서 보이는 변화와 그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에 1351년이라는 편년 자료로서만 언급되었던 < 至 正 十 一 年 銘 대접>의 명문 내용에 등장하는 生 器 의 의미를 통하여, 순자 禮 論 과 주자성리학의 수용 과정에서 상장례의 변화가 14세기 상감청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4세 기 고려 문인이 원대 문인 관료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사상 이나 삶의 지표가 상감청자 문양의 주제나 도상에 영향을 미쳤고, 이들 의 출신 지역에서 성행한 주자성리학의 수용으로 인해서 14세기 상감청 자에 성리학적 인식의 변화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접근해 보 고자 한다.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과거에 급제하여 出 仕 한 관원으로 정의하였다; 김당택, 高 麗 後 期 의 士 族 과 士 大 夫, 全 南 史 學 제11집, 전남사학회, 1997, 277~293쪽. 사대부는 士 族 출신의 현직 관리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하였으며, 무신란 이전에 도 존재하며, 고려 후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학자적 관료라는 견해를 부정하였다.

88 한국학연구 55 Ⅱ. 14세기 상감청자 문양의 신경향과 도상적 의미 1. <청자상감와옥인물문편병>의 故 事 人 物 文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靑 磁 象 嵌 瓦 屋 人 物 文 扁 甁 >은 동체의 양 면을 편평하게 누른 형태로, 고려 말기에 제작되는 새로운 기형이다. 편병 의 양 면에 시문된 문양은 도상의 의미가 분석되지 못한 채 단순히 와옥인물문 정도로 인식되었다. 편병 양 면의 화창 안에 표현된 문 양의 구성 요소는 건물, 인물, 대나무, 국화, 수금류로 동일하여 같은 장소와 공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같은 건물을 다른 방향에서 도해하면서 인물의 위치와 자세가 달라졌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문양의 구성 요소를 분석하여 도상의 의미를 파악한 후에 두 개의 문양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도1, 1-1. 먼저, 한 면에는 맞배지붕의 건물이 있고, 건물 안에 인물, 건물 밖 도1. 청자상감와옥인물문편병 고려 14세기 전반 높이 25.1cm 국립중앙박물관 도1-1. 청자상감와옥인물문편병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89 에 물가를 거니는 水 禽 類 두 마리, 건물의 오른편 끝에는 대나무 두 그루와 국화 두 송이, 완만하게 휘어진 댓가지에도 새 두 마리가 표현 되었다. 水 禽 은 짧은 다리, 통통한 몸체와 긴 목을 가지고 있는 거위 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물가를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건물은 지붕과 기둥이 맞닿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투시도법으로 도해되었는데, 집이라기보다 누각과 같은 개방된 공간 으로 보인다. 인물의 왼손은 누각 기둥을 잡았고 오른손은 앞으로 뻗 어서 바로 앞에서 물가를 거니는 두 마리의 거위를 가리키고 있어서 이 인물이 거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1. 편병에 상감된 도상의 구성 요소와 표현은 원대 화가 錢 選 (1235~1307 이전)이 그린 < 王 羲 之 觀 鵝 圖 >의 일부분과 매우 유사하다 3) 도2. 전선의 <왕희지관아도>에는 물가에 쌓은 석축 위에 맞배지붕의 누각이 있고, 그 안에 난간을 잡고 서서 물에서 헤엄치는 흰 거위 두 마리를 바라보는 王 羲 之 (303~361)와 그 뒤로 侍 童 이 서 있다. 누각 주변에 빽빽한 대나무숲 과 무성한 수목을 묘사하였다 도2-1. 편병과 전선의 그림에서 공통적으 로 보이는 맞배지붕의 개방된 누각, 대나무, 축대, 깨끗한 연못 등의 표 현은 왕희지관아 를 주제로 하는 다른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특히 누각 주위에 배치된 대나무는 왕희지가 永 和 9 年 에 文 士 들과 修 禊 를 지내기 위해 모인 蘭 亭 주변을 묘사한 것인데, 전선은 그림 의 제시에서 직접 난정 주변의 대나무 숲을 언급하고 있다. 4) 도2. 전선, 왕희지관아도, 원, 23.2 92.7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3) 김윤정, 元 代 瓷 器 에 보이는 故 事 人 物 紋 의 도상과 畵 本, 동아시아미술문화 2호,

90 한국학연구 55 예를 들어 台 北 故 宫 博 物 院 소장 馬 遠 의 < 王 羲 之 玩 鵝 圖 >는 전선의 그림 과 달리 물가에 있는 소나무 둥치에 오른팔을 걸치고 앉은 왕희지가 연꽃 과 연잎이 가득한 연못 속에서 헤엄치 는 두 마리의 거위를 보고 있는 모습 으로 표현되었다 5) 도3. 원대 14세기에 제작된 < 銀 製 陰 刻 故 事 人 物 文 甁 >(이 하 <은제병>)에 새겨진 왕희지관아문 에서도 물가에서 원통 모양의 의자에 앉은 왕희지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 도2-1. 왕희지관아도 부분 락으로 연꽃이 가득 찬 연지를 헤엄치 는 거위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6) 도4, 4-1. <은제병>은 14세기 에 제작되었지만 왕희지 관아 의 도상 구성과 표현은 마원의 그림과 비 슷한 점이 많다. <은제병>에서 능화형 화창 안에 문양을 표현하는 것은 상감청자 편병과 비슷하지만 상감청자에 표현된 왕희지 관아 의 도상 구성은 전선의 그림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상감청자 편병의 문양 요소에서 주목되는 점은 송 원대 왕희지 관아 의 도상에서 볼 수 없는 국화와 대나무 위에 앉은 두 마리 새의 표현이 다. 여기에 편병의 반대 면에 표현된 인물의 위치와 자세를 주의 깊게 볼 고려대학교 동아시아미술문화연구소, 2011, 34쪽. 4) 왕희지의 < 蘭 亭 序 >에도 난정 주변에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 茂 林 修 竹 ]가 있 다고 하였으며, <왕희지관아도>에 전선이 직접 쓴 題 詩 에서도 난정 주위에 긴 대나 무 숲을 언급하였다.[ 脩 竹 林 間 爽 致 多, 蘭 亭 坦 腹 意 如 何. 爲 書 道 德 遺 方 士, 留 得 風 流 一 愛 鵝.] 5) 國 立 故 宮 博 物 院, 故 宮 書 畵 圖 錄 2, 臺 北 : 故 宫 博 物 院, 2001, 183~184쪽. 6) James C. Y. Watt, The World of Khubilai Khan : Chinese Art in the Yuan Dynast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Yale University Press, 2010, p. 279. 이 책에서는 <은제병>에 표현된 문양 중에 周 敦 頤 愛 蓮 文 만 언급되었으나 이외에도 王 羲 之 觀 鵝, 陶 淵 明 歸 去 來 등의 故 事 를 주제로 한 도상이 능화형 화창 안에 시계 방향 으로 배치되었다.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91 도4-1. 은제병에 시문된 왕희지관 아문 도3. 마원, 왕희지완아도 남송 115.9 52.4cm 台 北 故 宫 博 物 院 도4. 은제음각고사인물문병 높이 51.4cm 江 西 省 德 興 市 博 物 館 소장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왕희지 관아 의 도상에서는 인물이 오른팔을 들어서 거위를 가리키고 있지만 반대 면에는 건물 밖으로 나온 인물이 왼 손으로 국화를 가리키고 있다 도1-1. 국화는 陶 淵 明 과 관련되며, 그가 귀 거래한 후에 지은 飮 酒 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왕희지 觀 鵝 와 함께 대표적인 고사인물문의 소재로 원대 14세기 청화백자나 朱 漆 盒 등에 문양 으로 사용되었다. 湖 北 省 博 物 館 소장 <백자청화고사인물문매병>과 任 仁 發 (1255~1327) 가족묘에서 출토된 <주칠합>에는 공통적으로 도연명과 함 께 국화가 꽂힌 화병을 들고 있는 侍 童 으로 도상이 구성되어 있다. 7) 도5, 7) 北 京 藝 術 博 物 館, 元 靑 花, 石 家 庄 : 河 北 敎 育 出 版 社, 2009, 17~18쪽. 이 매병은 湖 北 省 鐘 祥 市 에 위치한 주원장의 24번째 아들 郢 靖 王 朱 棟 (1388~1414)의 무덤에서 2005년에 출토되었다. 매병의 네 면에 능화형 화창을 두르고 王 羲 之 愛 蘭, 陶 淵 明 愛 菊, 周 敦 頤 愛 蓮, 林 逋 愛 梅 鶴 을 각각의 상징적인 소재로 구성된 도상으로 시문하였 다; 沈 令 昕 許 勇 翔, 上 海 市 靑 浦 縣 元 代 任 氏 墓 葬 記 述, 文 物 第 7 期,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1982, 54~58쪽. 원대 유명한 水 利 專 門 家 이면서 畵 家 인 任 仁 發 (1255~1327) 의 가족묘는 1327년에서 1353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지만 임인발의 묘는 이미 도굴 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유물의 副 葬 時 期 는 1338년에서 1353년 사이로 보았다.

92 한국학연구 55 6. 상감청자 편병에 국화 이외에 다른 요소가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반면에 원대 기명에서는 국화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도6. 고사인물문주칠합 직경 12.1cm, 1338년~1353년 任 仁 發 가족묘 출토 상해박물관 도7. 靑 磁 象 嵌 陶 令 花 盃 銘 盃 고려 14세기, 높이 8.6cm, 국립중앙박물관 도5. 백자청화고사인물문매병 높이 38.7cm, 郢 靖 王 朱 棟 墓 출토 湖 北 省 博 物 館 소장 상감청자 편병 문양에 추가된 국화와 댓가지 위에 앉아있는 두 마리 새는 도연명과 국화 고사의 유래가 됐던 음주 시의 구절을 좀 더 구 체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시의 내용을 보면 조용한 시골집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꺾어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보고, 날이 지면 새들도 짝과 함께 돌아온다[ 採 菊 東 籬 下, 悠 然 見 南 山, 山 氣 日 夕 佳, 飛 鳥 相 與 還 ] 는 구절에서 국화와 함께 짝하여 돌아오는 새는 상감청자 편병의 문양 요소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靑 磁 象 嵌 牡 丹 文 盃 >는 몸체에 陶 令 花 盃 라는 명문이 시계방향으로 흑상감되 어 있다. 陶 令 은 도연명이 마지막으로 역임했던 彭 澤 令 이라는 관직 때문 에 붙은 호칭으로, 고려 14세기에 도연명에 대한 인식이 청자 제작에 영 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도7. 고려 상감청자 편병에서는 두 개의 故 事 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소재들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93 을 하나의 도상에 복합적으로 구성한 후에, 인물의 위치와 자세를 다르게 하여 두 개의 문양으로 표현하였다. 편병에 시문된 문양의 도상을 보면, 왕희지 관아문 에서 국화와 두 마리 새는 필요하지 않은 요소이고, 도연 명 국화문 에서 누각, 거위, 대나무는 불필요한 구성 요소인 것이다. 즉, 같 은 공간 안에서 왕희지와 도연명의 故 事 를 동시에 표현하여서 한 인물이 누각 안에서는 거위를 보는 왕희지가 되고, 밖에서는 국화를 바라보는 도 연명이 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원대 청화백자나 금속기에 표현되는 고사 인물문 은 서로 연계되는 것은 아니고, 각각의 故 事 에 맞게 정립된 도상이 독립적으로 시문되었다. 예를 들면, 周 敦 頤 와 연꽃, 林 逋 (967~1028)와 매 화 학, 도연명과 국화, 도연명과 귀거래, 왕희지와 蘭, 왕희지와 관아 등 각각의 도상은 고사인물과 관련되는 주요 소재만으로 구성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8) 즉, 14세기 고려와 원의 기물에서 모두 능화형 화창 안에 고사 인물의 주제를 문양으로 표현하는 공통적인 현상을 볼 수 있지만 도상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원에서 문양 주제로 사용된 故 事 속의 인물은 대부분 문인들 이 좋아하는 儒 者 의 소양을 갖춘 詩 人 이나 田 園 에서 閑 居 하는 隱 逸 者 가 많았다. 원대 기명에는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역사속 인물의 고사가 나 열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상감청자 편병에 표현된 인물은 왕희지나 도 연명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살고 싶은 주문자 를 의미하는 것이다. 편병 의 화창 안에 인물은 거위를 보며 왕희지가 되고 국화를 보면서 도연명 이 되어서, 그들의 삶과 행적을 쫓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Ⅳ장에서 당시 고려 문인들이 이러한 고사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 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왕희지와 도연명의 삶을 동경하 고 그들의 행적을 쫓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8) 김윤정, 앞의 글, 32~34쪽.

94 한국학연구 55 2. <청자상감어룡문병>의 魚 變 成 龍 文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靑 磁 象 嵌 魚 龍 文 甁 > 의 몸체 全 面 에는 거센 물살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표현되었고, 네 곳에 원형 화창을 배치하여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용문을 상감하였다. 9) 도8. 거센 물살을 헤엄치는 물고기 들과 용의 모습을 결합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듯한 문양은 이전 시기 청자에서 보 이지 않는 구성과 표현으로, 登 龍 門 고사를 연상하게 한다. 원래 龍 門 은 黃 河 상류의 河 津 이라는 지역으로, 물살이 강해 배가 다닐 수 없 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들도 급류를 거슬러 올 도 8. 청자상감어룡문병 라갈 수가 없었다. 강과 바다의 큰 물고기들이 고려 14세기, 높이 36.2cm 용문의 아래에 수천 마리나 모였지만 올라갈 도쿄국립박물관 수 없었는데, 그 중에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고사이다. 10) 용문은 예전 대홍수 시대에 禹 임금 이 도끼로 쪼개어 갈라서 물이 통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서 禹 門 이라고도 한다. 龍 門 이나 禹 門 은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과거 시험과 같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본 왕희지나 도연명 故 事 와 마찬가지로 등용문 故 事 도 이미 고려 말기 이전부터 李 奎 報 (1167~1241)와 같은 문인들의 글에서 과거 급제와 관련하여 차용된 예를 볼 수 있다. 다만 이색(1328~1396)과 같은 9) 한 공간 안에서 거센 파도 속에 물고기와 용이 함께 표현되는 문양 구성은 14세기 상 감청자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15세기 초에 제작되는 상감분청사기에서도 확인된다. 일 부는 파도문이 생략되고 물고기와 용만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분청사기상감파어용문매병>,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상감어용문매병> 등이 있다. 10) 後 漢 書 卷 67 黨 錮 列 傳 第 57 李 膺 以 魚 爲 喩 也. 龍 門, 河 水 所 下 之 口, 在 今 絳 州 龍 門 縣. 辛 氏 三 奏 記 曰 河 津 一 名 龍 門, 水 險 不 通 魚 鼈 之 屬 莫 能 上. 江 海 大 魚 薄 集 龍 門 下 數 千 不 得 上, 上 則 爲 龍. 也.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95 14세기 문인의 글에서는 登 龍 門 고사를 차용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많고, 거센 물결을 헤치고 올라온 물고기들이 용문을 오르는 과정과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표 1>. 이색은 龍 門 歌 라 는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14세기에 과거제를 통해 출사한 士 族 세력이 득세하고, 고려 문인 관료들이 원의 과거제에 응시하고 급제 하는 일이 국가적인 시책으로 시행되었던 당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1) 이색 자신도 고려의 과거제뿐만 아니라 원의 制 科 에 두 번에 걸쳐 급제하였다. 12) 번호 出 典 내 용 1 2 3 4 5 표 1. 東 國 李 相 國 集 과 牧 隱 詩 藁 에 차용된 龍 門 관련 글 東 國 李 相 國 集 第 3 卷 古 律 詩 畫 鯉 魚 行 東 國 李 相 國 集 第 18 卷 古 律 詩 李 樞 副 仁 植 見 和 復 答 之 牧 隱 詩 藁 卷 之 二 詩 瑞 州 牧 隱 詩 藁 卷 之 二 詩 中 場 牧 隱 詩 藁 卷 之 二 詩 遼 陽 路 도화랑이 하늘에 닿을 듯 불어날 때면 / 我 恐 桃 門 燒 尾 欻 飛 起 용문에 들어가 꼬리 감추고 훌쩍 날아볼까 / 去 入 龍 門 燒 尾 欻 飛 起 장원 급제가 한때의 영광이긴 하지만 / 飛 騰 桂 籍 一 時 榮 반드시 하늘 멀리 만 리를 나는 건 아니라네 / 未 必 雲 霄 萬 里 行 용문에 이마 찧은 것 그대는 안타까워 말라 / 點 額 龍 門 君 莫 恨 벼슬 높고 재주 갖추었으니 한평생 만족할걸 / 位 高 才 備 足 平 生 우문의 삼급 물결에서 용으로 변화하면 / 龍 化 禹 門 三 級 浪 후일에 반드시 뜻밖의 명성을 얻으리라 / 他 年 須 趁 一 聲 雷 갑자기 잉어가 날아서 그곳을 통과하여라 / 忽 有 鯉 魚 飛 得 過 거센 물결 용문이 여기가 바로 천문일세 / 龍 門 蕩 蕩 是 天 門 나는 동해의 고기와 같이 / 我 如 東 海 魚 용이 되어 용문에 오르려는데 / 化 龍 登 禹 門 11) 裵 淑 姬, 元 代 科 擧 制 와 高 麗 進 士 의 應 擧 및 授 官, 東 洋 史 學 硏 究 第 104 輯, 동 양사학회, 2008, 128~130쪽, 145쪽. 고려 정부에서 원의 制 科 에 응시하는 것을 지원 한 시기는 1315년부터 1354년까지이다. 공민왕 5년(1356)에 반원 운동이 진행되어 원의 세력을 배척하고 왕권을 회복하였던 정책과 관련되어 더 이상 원의 과거에 응 시하지 않았다. 12) 裵 淑 姬, 위의 글, 141~142쪽.

96 한국학연구 55 6 7 牧 隱 詩 藁 卷 之 三 詩 龍 門 歌 牧 隱 詩 藁 卷 之 二 十 五 詩 잉어가 떼를 이뤄 하늘을 우러러 뛰다가 / 鯉 魚 成 群 仰 天 躍 천둥의 나는 불에 꼬리를 보존 못한 채 / 霹 靂 飛 火 尾 不 存 슬퍼라 이마를 다쳐 옛 굴로 돌아가고 / 哀 哉 點 額 還 舊 穴 우문의 한 소리 천둥에 고기들 뛰어라 / 禹 門 魚 躍 一 聲 雷 높이 올라서 뭇 용으로 변화하여 왔네 / 矯 矯 羣 龍 變 化 來 그러나 고려 14세기 문인 관료들에게 등용문 고사가 단지 과거 급제 와 관련된 것만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李 齊 賢 (1287~1367)은 자신의 시 한 수에서 용문을 향하여 이응 보기 부끄 럽네[ 羞 向 龍 門 見 李 膺 ] 라는 구절을 남겼다. 13) 용문과 이응 이라는 인물 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원래 등용문에 대한 故 事 는 後 漢 書 黨 錮 列 傳 李 膺 傳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後 漢 말기에 살았던 이응 (110~169)은 당시 환관과 외척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淸 流 派 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환관과 외척들이 사대부와 호족 세력을 견 제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감옥에만 가둬두는 終 身 禁 錮 로 탄압하였는 데, 이것이 후한 시대에 유명한 黨 錮 의 禍 이다. 이응은 강직하고 올곧 은 성격으로 꿋꿋하게 대항하여 명성을 더해가면서 太 學 의 젊은 儒 生 들 에게 천하의 모범은 이응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응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섰지만 이응은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응 을 만나서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아서 龍 門 에 올라간 것과 같다고 하여, 登 龍 門 에 비유하게 된 것이다. 14) 黨 錮 之 禍 는 중국 후한의 桓 帝 와 靈 帝 때 환관들의 무고로 李 膺 陳 蕃 등의 문인 관료들이 하옥되고 수많은 太 學 生 들에게 禁 錮 를 처하여 벼슬길을 막아 버린 사건이다. 15) 이때 鉤 黨 으로 몰린 儒 者 들은 후대의 13) 李 齊 賢, 益 齋 亂 稿 卷 第 一 詩 二 陵 早 發 14) 後 漢 書 卷 67 黨 錮 列 傳 第 57 李 膺 是 時 朝 庭 日 亂, 綱 紀 穨 阤, 膺 獨 持 風 裁, 以 聲 名 自 高, 士 有 被 其 容 接 者, 名 爲 登 龍 門. (이때 조정이 날로 어지럽고 기강이 무너 졌지만 이응은 홀로 풍재를 지켜서 명성이 스스로 높아지니 유생[ 士 ] 중에 그를 직 접 만나는 자가 있으면 이름하여 등용문이라고 했다.) 15) 後 漢 書 卷 8 孝 靈 帝 紀 第 8 建 寧 二 年 冬 十 月 丁 亥, 中 常 侍 侯 覽 諷 有 奏 前 司 空 虞 放, 太 業 杜 密 長 樂 少 府 李 膺 司 隸 校 尉 朱 㝢 潁 川 太 守 巴 肅 沛 相 荀 昱 河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97 유학자들에게 지조있는 賢 人 으로 칭송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이응이 가 장 명성이 높았다. 당고지화 의 사건은 이제현이 龍 門 고사에서 이응 을 연상시켰던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등용문 고사에 등장하는 주요 구성 요소는 물고기 거센 물결 용 이면서, 고사의 내용은 魚 變 成 龍 이라는 결과이다. <청자상감어용문병>에 표현된 떼 지어 있는 물고기들, 거센 물결, 원 안의 용 은 등용문 고사의 구성 요소들이 모두 갖춰진 것이다. <청자상감어용문병>을 보면, 등용문 고사를 떠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後 漢 시기의 이응 이라는 인물이 연관되는 것이다. 결국 14세기에 등용문 고사와 같은 주제가 상감청자의 문양으로 도해될 수 있었던 것은 14세기 에 성리학적인 사고와 인식의 깊이가 이전 시기와는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청자상감수파문편병>과 水 波 文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靑 磁 象 嵌 水 波 文 扁 甁 >도 앞서 살펴본 <청자상 감와옥인물문편병>과 마찬가지로 고려 14세기에 주로 제작되는 편병의 형태이면서 앞 뒤 면에 능화형 화창을 두르고 일렁이는 수파문이 주문양 으로 상감되어 있다 도9. 화창 안에 상감된 물결무늬는 이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경향으로 송대 문인들이 좋아하던 畵 題 중에 하나였 다. 북송대 대표적인 문인인 蘇 軾 (1036~1101)은 畵 水 記 에서 當 代 화가 인 포영승은 살아움직이는 물[ 活 水 ]을 잘 그렸지만 동우와 척씨의 물그 림은 죽은 물[ 死 水 ]이라고 하여 물그림에 대한 비평을 하였다. 소식 자신 도 포영승과 함께 24폭짜리 물그림을 그려서 여름마다 벽에 걸어두면 스 內 太 守 魏 朗 山 陽 太 守 翟 超 皆 爲 鉤 黨, 下 獄, 死 者 百 餘 人, 妻 子 徙 邊, 諸 附 從 者 錮 及 五 屬. 制 詔 州 郡 大 擧 鉤 黨, 於 是 天 下 豪 傑 及 儒 學 行 義 者, 一 切 結 爲 黨 人. (169년 10월 정해일에 중상시 후람이 풍자하여 有 司 에게 전 사공 우방 태복 두밀 장락소부 이응 사예교위 주우 영천태수 파숙 패국 상 순욱 하내태수 위랑 산양태수 적초 등이 모 두 구당이라고 아뢰어서 하옥했다. 죽은 사람이 백여 인이고 처자식은 변방으로 쫓 겨 가고,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錮 ] 오속에 처했다. 제압하는 조서를 州 郡 에 내려서 구당[함께 어울리는 무리]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이에 천하 호걸과 儒 學 者 중에서 의를 행하는 자들을 일체 黨 人 으로 몰았다.)

98 한국학연구 55 산한 바람이 엄습하여 머리카락이 서기까지 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16) 소동파는 고 려와 원대 문인 서화가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시와 서화관이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 17) 특히 그가 한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유배나 좌천 등으로 점철 된 일생을 보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현실 긍정적인 작품이 많은 점도 원이나 고려 후 기에 때를 만나지 못한 지식인들에게 선망 도 9. 청자상감수파문편병 과 위안의 대상이 되었다. 18) 이후에 물 을 고려 14세기 주제로 그린 작품은 남송대 마원이 물을 12 삼성미술관 리움 개의 화제로 그린 < 水 圖 卷 >이 남아 있다. 상감청자 편병에 표현된 것처럼 구획을 두르고 물결문을 시문하는 것 은 송대 그림과 벽화에서 확인되는 수파문이 그려진 병풍과 유사한 경향 이 있다. 李 公 麟 (1049~1106)의 < 高 會 習 琴 圖 >에서 琴 을 타는 문인 뒤에 물결문이 그려진 병풍이 세워져 있다. 19) 이외에도 수파문이 그려진 병풍 은 북송대 11세기에 지어진 太 原 晋 祠 聖 母 殿 聖 母 座 의 벽화 병풍 20), 1099년 북송 백사 1호묘 전실 서벽 벽화 21), 남송대 蘇 漢 臣 (1094~1172) 이 그린 보스톤미술관 소장 < 妝 靚 仕 女 圖 > 22) 등을 보면, 송대 문인의 공 16) 蘇 軾, 蘇 軾 文 集 卷 十 二 畫 水 記 銘 嘗 與 余 臨 壽 寧 院 水, 作 二 十 四 幅, 每 夏 日 挂 之 高 堂 素 壁, 卽 陰 風 襲 人, 毛 髮 爲 立. 17) James C. Y. Watt, ibid, pp. 282~284, 291~292. 18) 허권수, 소동파 시문의 한국적 수용, 중국어문학 제14집, 영남중국어문학회, 1988, 53~54쪽; 조규백, 고려시대 문인의 蘇 東 坡 詩 文 受 容 및 그 意 義 (1), 退 溪 學 과 韓 國 文 化 제39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6, 347~356쪽. 19) 國 立 故 宮 博 物 院, 故 宮 書 畫 圖 錄 第 一 冊, 臺 北 : 故 宮 博 物 院, 1997, 273~274쪽. 20) 太 原 晋 祠 성모전은 北 宋 天 聖 年 間 (1023~1031)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崇 寧 元 年 (1102)에 중수된 것으로 전하며, 현재 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史 岩 主 編, 中 国 美 術 全 集 雕 塑 编 5 五 代 宋 雕 塑, 北 京 : 人 民 美 術 出 版 社, 1988 참조.) 21) 宿 白, 白 沙 宋 墓,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2002, 38쪽. 22) Roderick Whitfield, "Ceramics in Chinese Painting", IMPERIAL TASTE, Percival David Foundation of Chinese Art, 1989, p. 128, pl.5 참조.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99 도10. 주인도, 1호묘 전실 서벽 북송 1099년, 河南省 白沙鎭 도11. 소한신, 장정사녀도 남송 12세기 보스톤미술관 소장 간, 궁중, 祠堂에서 수파문이 그려진 병풍이 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 다 도10,11. 송대에서는 문헌기록과 그림 속 병풍에서 물결문이 확인되 지만 원대 14세기에는 길주요 자기와 경덕진 청화백자에서 수파문이 주 문양으로 등장하는 변화가 보인다. 대영박물관 소장 <백지철화당초문쌍 이병>에도 상감청자 편병과 마찬가지로 화창 안에 물결문이 시문된 예가 있다.23) 도12. 양자는 화창 안에 일렁이는 모습의 수파문을 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는 14세기 고려와 원의 문인들에게 소동파와 같은 문인들의 송대 문화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Ⅲ. < 지정11년 명청자>의 生器 의미와 荀子 禮論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靑磁象嵌柳文 至正11年 銘大楪>(이하 < 至正11年 銘대접>)은 대접 외면에 음각으로 명문이 남아 있어서, 제작 시기를 1351년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편년 유물이 23) 三上次男 編, 世界陶磁全集 13 遼 金 元, 東京:小學館, 1981, 124쪽. 강서성 길주 요 자기에 시문된 파도문이 경덕진 청화백자에 보이는 물결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 친 것으로 파악하였다.

100 한국학연구 55 다 도13, 13-1. 이 대접은 선행 연구에서 14세 기 중엽경의 상감청자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 로 언급되었지만 본고에서는 편년 자료로서 의 의미보다 명문 내용을 통해서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당시 새롭게 인식되었던 성리 학적 상장례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 지정11년 명대접>의 명문은 몸체 외면에 두 줄로 음각되어 있고, 유약에 묻혀서 식별 이 쉽지 않은 상태이다. 명문 내용은 일단 至 正 十 一 年 六 月 十 二 日 生 器 件 造 / 野 京 鉢 貼 一 百 二 十 으로 판독하였다. 24) 명문 내용은 첫째 줄에 음각된 至 正 十 一 年 六 月 十 二 日 生 器 件 造 는 지정11년(1351) 6월 12일에 생기를 도 12. 백지철화당초문쌍이병 원 14세기, 높이 44.8cm 제작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음 문장은 길주요, 대영박물관 野 京 鉢 貼 一 百 二 十 으로 판독되며, 장소 기종 수량 등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명문에서 확실한 내용은 상감청자 대접이 至 正 11년(1351) 6월 12일에 生 器 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1351년, 生 器, 상감 청자 대접 이라는 세 가지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도14. 먼저 생기 라는 용어의 典 據 와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생기는 戰 國 時 代 사상가 荀 子 가 禮 論 에서 喪 禮 를 논하면서 언급한 것이다. 25) 생기를 갖추어서 무덤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사가는 것을 본뜬 것이다. 24) 韓 盛 旭, 高 麗 後 期 靑 瓷 の 硏 究, 總 合 硏 究 大 學 院 大 學 文 化 科 學 硏 究 科 博 士 學 位 論 文, 2006, 127쪽. 이 글에서는 < 至 正 11 年 銘 대접>의 명문 내용을 至 正 十 一 年 六 月 十 二 日 生 器 件 造 野 京 所 ( 鉢 ) 貼 ( 胎 ) 幷 ( 宝 ) 一 百 二 十 五 으로 판독하였다. 25) 巫 鴻, 生 器 的 槪 念 與 實 踐, 文 物 第 1 期,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2010, 87쪽. 순자(기 원전 315~230)는 喪 禮 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상례 과정에 대한 해석을 하여 戰 國 時 代 의 사상가로서 지위를 확실히 하였다.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01 도13. 靑磁象嵌柳文 至正11年 銘大楪 1351년, 입지름 18.4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13-1. 지정11년명 대접의 외면 간략하게 하여 다하지 않고 모양만 있고 실제가 있지 않으며, 수 는 몰고 가서 무덤 속에 묻으면 서 방울이나 가죽 장식, 고삐와 가슴띠는 넣지 않 는 것은 사용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사하 는 것을 본뜨는 것도 쓰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모 두 슬픔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기는 장식[文]은 하지만 공교하지 않게 하고, 명기는 모양은 갖추지만 쓸 수 없게 하는 것이 다.26) 순자는 喪禮篇에서 生器와 明器를 언 급하고 있는데, 모두 무덤 안에 놓는 부 장용기임을 알 수 있다. 생기는 간략하 도14. 도 13의 명문 세부 生器 (원안) 게 모양만 갖추어서 실제가 없는 것으 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하였다. 또 한 생기의 장식은 공교하게 하지 않고, 明器는 모양만 갖추고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26) 荀子, 禮論 具生器以適墓 象徙道也. 略而不盡 貌而不功 趨輿而藏之 金革轡 靷而不入, 明不用也. 象徙道, 又明不用也 是皆所以重哀也. 故生器文而不功 明器 貌而不用. (순자, 김학주 옮김, 荀子, 을유문화사, 2001, 663~664쪽.)

102 한국학연구 55 < 지정11년 명대접>은 실제 문양이 간략하고 磁 化 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인데, 생기처럼 간략하게 모양만 갖추어서 사용할 수 없 게 제작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순자의 예론 에 언급된 상례 의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14세기 고려에 전해졌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순자의 상례 내용에 注 를 달고 해석을 한 연구서는 남송대 黃 幹 (1152~1221)의 儀 禮 經 傳 通 解 續 과 衛 湜 의 禮 記 集 說 이 있다. 27) 황간은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일평생 주자학을 연구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주자가 일찍이 古 禮 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서 儀 禮 經 傳 通 解 를 편찬하였고, 喪 禮 와 祭 禮 부분의 편수 책임을 황간에게 맡겼으나 주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황간이 주자의 遺 志 를 이어서 1220년에 儀 禮 經 傳 通 解 속권인 喪 禮 를 완성하였다. 28) 황간의 저서가 중요한 것은 황간의 학문이 고려와 관련되는 원대 강남 지역의 성리학자들에게 이어 지기 때문이다. 황간은 순자의 具 生 器 以 適 墓 象 徙 之 道 也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注 를 달았다. 생기는 용기이다. 弓 矢 盤 盂 류가 변화하는 것이다. 거주를 옮긴다 는 것은[ 徙 道 ] 살아있을 때의 道 器 가 29) 마땅히 집에서 무덤으로 가는 것 이다. 사람의 행동으로 상징하는 것인데, 일상에서 행하는 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로 고쳐지는 것이다. 30) 27) 위식은 남송대 학자이자 관료이며, 자는 正 叔 이며 昆 山 人 이다. 開 禧 (1205~1207) 嘉 定 (1208~ 1224)에 禮 記 諸 家 의 설에 注 를 달아서 禮 記 集 說 160권을 완성 하였다. 28) 지준호, 黃 幹 -주자의 도통을 전수받은 주자학의 전도자, 선비문화 13호, 남명학 연구원, 2008, 26~28쪽. 황간은 喪 禮 의 편수는 완성하였지만 제례 는 완성하지 못하고 서거하였으며, 그 후에 주자의 문인이자 황간의 문인인 楊 復 이 제례 를 중 수하여 儀 禮 經 傳 通 解 續 를 완성하였다. 29) 道 는 형상이 없는 것, 규율과 법칙 등을 의미하며, 器 는 형상이 있는 것, 구체적 인 사물 등을 의미한다. 30) 黃 幹 儀 禮 經 傳 通 解 續 卷 15 喪 禮 義 喪 禮 13 補 生 器 用 器 也 弓 矢 盤 盂 之 屬 徙 遷 改 也. 徙 道 其 生 時 之 道 器 當 在 家 今 以 適 墓 以 象 人 行 不 徙 常 行 之 道 更 徙 他 道 也.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03 * 徙 道 = 遷 居, 更 徙 = 變 遷 황간은 生 器 가 用 器 와 같다고 하였는데, 近 思 錄 의 注 에는 明 器 는 神 明 에게 쓰는 그릇이고, 用 器 는 생전에 사용하였던 그릇이라고 하였 다. 31) 이후에도 생기와 용기의 개념은 부장품 중에서 死 者 가 生 時 에 사 용하던 기물 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32) 다만 순자가 특별하게 강조한 것은 무덤 안에 놓일 때 사용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표시해야 한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항아리[ 甕 ]나 술통[ 廡 ]은 비워서 채우지 않고, 대 자리는 있지만 평상은 없고, 생황과 우는 갖추기는 하지만 함께 연주하 지 않고 금슬도 벌여 놓기는 하지만 줄을 뜯지 않고, 수레는 묻지만 말은 되돌아온다. 이것들이 모두 쓰지 못함을 알리는 표시인 것이다. 33) 지금까지 무덤에 부장되는 기물은 모두 명기 의 개념으로만 접근했지 만 성리학적인 상장례 과정에 生 器 의 개념도 있었다는 것을 주의할 필 요가 있다. 즉, 명기는 애초에 귀신의 그릇으로 산 사람이 쓸 수 없게 축 소해서 작게 만드는 것이고, 생기는 死 者 가 살아있을 때 사용하던 물건 을 의미하여 死 者 를 위해서 살았을 때 사용하던 물건처럼 형체는 갖추지 만 문양 등을 간략하게 하여 사용할 수 없음을 표시하여 부장하는 것이 다. 생기는 死 者 를 살아있듯이 꾸며서 그의 죽음을 보낸다 는 순자의 상 례에 대한 정의에서 볼 때, 귀신을 위해 만드는 명기와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순자는 薦 器 [장례에 쓰는 물건]에 명기와 생기를 포함시키 고, 명기와 생기를 대등하게 파악하여 서로 보완하여 완성되는 相 輔 相 31) 沙 溪 全 書 卷 16 檀 弓 檀 弓 篇, 近 思 錄 註 曰, 子 游 所 作, 子 思 曰 喪 三 日, 註, 明 器 用 器. 明 器 神 明 之 器 也, 用 器, 生 時 所 用 之 器 也. ; 近 思 錄 은 중국 南 宋 의 철학자 周 熹 와 呂 祖 謙 이 공동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로, 송대 理 學 家 周 敦 頤 程 顥 程 頤 張 載 4 명의 어록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晉 州 목사로 있던 李 仁 敏 에 의해 간행된 근사록 이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도입된 것 으로 추정된다.( 宋 熹 準, 近 思 錄 의 도입과 이해, 韓 國 學 論 叢 25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131~145쪽 참조.) 32) 巫 鴻, 앞의 글, 87쪽. 33) 荀 子, 禮 論 甕 廡 虛 而 不 實 有 簟 席 而 無 牀 笫. 竽 笙 具 而 不 和 琴 瑟 張 而 不 均 輿 藏 而 馬 反 告 不 用 也.

104 한국학연구 55 成 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34) < 지정11년 명대접>에 표기된 생기 의 용어와 의미도 황간의 저술서 를 통해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우리에게 생기 라는 용어가 생소한 이유는 고려말 조선초 상장례의 기본서인 주자가례 에서 확인되 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말 공민왕 6년(1357)에는 이색 등이 주자가례 의 三 年 喪 을 따를 것으로 건의하여 법제가 마련되는 등의 건의가 있기 전부 터 상장례 과정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5) 순자의 예론 을 주해한 황간의 儀 禮 經 傳 通 解 續 은 고려 말에 유입되어 당시 성리 학자들의 상례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고, < 지정11 년 명대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Ⅳ. 상감청자의 신경향에 대한 성리학적 인식과 배경 14세기 상감청자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왕희지, 도연명, 이응 등의 고 사인물문이나 파도문은 성리학적 성향의 문인들이 좋아하는 소재였으며, 상감청자에 표기된 生 器 라는 용어 역시 순자의 예론에서 출발하여 정 립된 성리학적 喪 葬 禮 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14세기 고려 상감청자 에 보이는 새로운 경향들이 당시 문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고, 이전 시기와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문집에 있는 기록들을 통해서 구체적 으로 살펴볼 것이다. 또한 고사인물문과 파도문 등이 기명의 주제 문양 으로 사용되는 경향은 고려뿐만 아니라 원대 제작된 자기, 금속기, 칠기 등에서도 새롭게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고려와 원의 문인들의 공통 된 취향과 함께 交 遊 상황도 그 배경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4) 巫 鴻, 明 器 的 理 論 和 實 踐 - 全 國 時 期 禮 儀 美 術 中 的 觀 念 化 傾 向, 文 物 第 6 期,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2006, 77쪽. 35) 高 麗 史 卷 39 世 家 恭 愍 王 6 年 冬 十 月 辛 巳 諫 官 李 穡 等 請 行 三 年 喪, 從 之. ; 이문주, 주자가례 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 敎 文 化 硏 究 제16집,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2010, 39~40쪽. 정몽주는 주자가례 에 따른 喪 制 를 행하였고 家 廟 를 세워 제례를 행할 것을 士 庶 人 에게 권하였다.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05 14세기 고려 문인들에게 왕희지, 도연명, 이응의 故 事 는 어떤 의미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졌을까. 먼저, 왕희지가 書 聖 으로 칭송되는 東 晋 시대 의 유명한 서예가였기 때문에 글씨와 관련해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 다. 고려 14세기 이전의 문인들도 왕희지가 會 稽 山 陰 [ 浙 江 紹 興 ]에 거 주할 때 거위 보기를 좋아하여 도사에게 道 德 經 을 써 주고 도사가 기 르는 거위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글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36) 그런데 왕희지가 14세기에 고려 문인 관료들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 게 되는 배경에는 원대 문인이자 관료였던 趙 孟 頫 (1254~1322)가 구사한 송설체의 대유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맹부는 大 德 年 間 (1297~1307)에 定 武 本 蘭 亭 序 를 접하여 왕희지 서법을 탐닉하면서 송 설의 서풍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한다. 조맹부가 자신의 송설체를 완성했을 즈음에 만권당에 출입하면서 충선왕(1275~1325)이나 李 齊 賢 (1287~1367)과 직접적인 교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시 이제현도 조맹부 서법이 왕희지 서체를 본받아 완성된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37) 만권당 을 통해서 들어온 조맹부의 서법이 고려말과 조선초 서예사에 큰 흐름으 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38) 조맹부도 <도연명귀거래사도>와 같이 고 사인물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원대 문인들의 이러한 성향이 고려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도연명과 관련된 고사도 14세기 이전부터 술이나 국화와 관련된 고려 문인의 글에서 차용되어 사용되었다. 39) 그러나 고려 14세기 문인들은 역 36) 李 奎 報, 東 國 李 相 國 集 第 11 卷 古 律 詩 右 軍 換 鵝 費 盡 溪 藤 始 掃 殘, 滿 籠 剛 換 白 鵝 還 ; 同 書, 第 15 卷 古 律 詩 崔 書 記 見 和 復 題 鵝 豈 費 黃 庭 37) 李 星 培, 고려말 李 嵒 의 書 藝 와 松 雪 體, 湖 西 史 學 제49집, 호서사학회, 2008, 77쪽. 이제현은 조맹부의 글씨가 왕희지의 <난정서>를 닮아 크게 변했으며, 그런 조맹부를 만나 행운이라고 내용의 시를 남겼다. ( 益 齋 亂 藁 卷 1 詩 和 呈 趙 學 士 風 流 空 想 永 和 春, 풍류와 공적한 생각은 永 和 九 年 의 봄이고 / 翰 墨 遺 蹤 百 變 新 한묵의 자취 는 크게 변해 새로워라 / 千 載 幸 逢 眞 面 目 천년 뒤 진면목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 況 聞 家 有 衛 夫 人 하물며 집안에 위부인이 있어서야.) 38) 李 星 培, 위의 글, 75~78쪽. 당시에 고려에서 坦 然 風 의 王 羲 之 體 가 다시 성행하고 있 었기 때문에 송설체가 수용될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고, 일부 사대 부들 사이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39) 李 奎 報, 東 國 李 相 國 集 第 14 卷 古 律 詩 詠 菊 二 首 有 酒 何 人 辜 負 汝 莫 言 陶 令 獨

106 한국학연구 55 사 속 인물의 행적을 담은 故 事 를 이전 시기처럼 단순하게 글의 소재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사상과 삶을 본받고 싶어 하고 실천하 기 위해서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고 려 말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관료였던 李 穡 (1328~1396)은 충의와 절조 를 지키기 위해 隱 逸 한 도연명의 귀거래 이념에 감명 받아서 그의 인품 과 생활을 동경하였다. 이색은 자신이 직접 국화를 심어서 도연명의 삶 을 추구하고자 했는데, 種 菊 이라는 시에서 국화를 심어 나의 맑음[ 淸 ] 을 더하고, 국화를 심어 내 깊은 정취[ 幽 ]를 더하고, 국화를 심어 나 의 隱 逸 을 더하네 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40) 이색은 자신이 도연명 처럼 歸 去 來 를 당장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나 현실에서 실의와 좌절을 겪 으면서 도연명의 隱 逸 觀 으로부터 위안을 받고자하였으며, 도연명의 인품 과 생활을 흠모하여 자신의 스승이라고 언급하였다. 41) 도연명과 국화 故 事 는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에서 녹을 받고 사는 것은 선비의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벼슬길을 떠나서 儒 家 의 가르침인 隱 逸 觀 에 의해 전 원으로 귀거래하여 사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사인물의 주 제가 유교적인 덕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에 적당한 주제였기 때문에 14세기 고려와 원에서 모두 기명의 문양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42) 고려 14세기의 魚 龍 文 도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등용문 의 의 미에서 확대되어 후한대 이응과 黨 錮 之 禍 라는 역사적 사건까지 연결되 었다. 이색의 아버지이자 성리학자였던 李 穀 (1298~1351)이 후한서 靈 帝 紀 와 黨 錮 列 傳 을 읽으면서 느낀 감회를 글로 남겼다. 43) 鄭 道 傳 憐 香 40) 李 穡, 牧 隱 詩 藁 卷 之 五 詩 種 菊 三 首 種 菊 添 我 淸, 種 菊 添 我 幽, 種 菊 添 我 逸, 41) 金 周 淳, 牧 隱 李 穡 의 漢 詩 에 나타난 陶 淵 明 의 隱 逸 觀, 古 詩 歌 硏 究 제25집, 한 국고시가문학회, 2010, 120~129쪽. 42) 김윤정, 앞의 글, 29~30쪽. 43) 李 穀, 稼 亭 先 生 文 集 卷 之 一 雜 著 後 漢 三 賢 贊 余 讀 史, 至 後 漢 靈 帝 紀, 天 下 之 所 謂 名 賢, 皆 指 爲 鉤 黨 而 殄 滅 之 無 餘, 嗚 呼, 禍 亂 至 此 極 耶, 其 間 㓗 身 遜 言, 不 染 其 禍 者, 盖 無 幾 人 耳, 掇 其 尤 章 章 者, 爲 文 以 贊 之. ; 同 書 吊 黨 錮 文 杜 門 讀 書, 尙 論 古 人, 此 不 遇 時 者 之 所 爲 也. 先 儒 有 云 吊 古 泣 舊 史, 余 於 黨 錮 傳 有 感 焉, 爲 文 以 吊 之.(나도 黨 錮 列 傳 을 읽다가 감회가 들기에 글을 지어서 애도하게 되었다.)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07 (1342~1398)도 삼봉집 에서 후한 시기에 환제와 영제의 失 政 이 있는 故 事 를 남겼다. 44) 환관들이 득세하고 이응과 같은 諸 賢 들을 무고하여 하 옥시키는 등의 실정을 하고, 유흥과 聚 斂 을 일삼다가 결국에 죽음에 이 르는 황제의 이야기를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45) 후한 환제와 영 제 때의 상황은 고려 말기의 상황과도 유사하며, 정도전은 이러한 중국 역사 속의 황제들의 失 政 을 교훈 삼아서 진정한 君 道 를 얘기하고 싶었 을 것이다. 14세기 이전 문인들의 글에서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고 감회를 느끼고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그들의 삶을 쫓아가고자 하는 구체적인 인식을 찾아볼 수 없지만 14세기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문인들 은 이러한 인식뿐만 아니라 생활에서 사용하는 기명에까지 표현하는 단 계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원대 문인 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14세기에 성리학적 사고를 가진 士 族 들이 득세하면서 만들어낸 고려 14 세기의 새로운 문화가 상감청자에 미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4세기 전반경은 고려와 원나라 문인들과의 교류가 여러 부분에서 촉 발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원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원 관료의 파견이 전 시기에 비해 수적으로 많아졌다. 또한 원의 制 科 에 합격한 고려 출신 급제자와 원나라 同 年 間 에 교류가 빈번해졌다. 46) 따라서 상감청자 편병 44) 鄭 道 傳, 三 峯 集 卷 之 十 一 經 濟 文 鑑 別 集 上 君 道 桓 帝 太 后 猶 臨 朝, 梁 冀 專 政, 肆 作 威 福, 殺 李 固, 杜 喬, 以 重 其 威, 繼 殺 袁 著, 以 杜 天 下 議 己, 至 殺 陳 授, 邴 尊, 帝 始 震 怒, 與 宦 者 單 超 等 五 人, 定 議 誅 冀, 元 惡 雖 除, 五 侯 嗣 虐, 流 毒 四 海, 而 成 瑨 劉 瓆 翟 超 黃 浮 李 膺 等 諸 賢, 皆 犯 宦 官 之 怒, 誣 告 膺 等 誹 訕 朝 政, 疑 亂 風 俗, 帝 震 怒, 下 膺 等 獄, 辭 連 及 杜 密 陳 詡 陳 寔 范 滂 之 徒, 而 錮 黨 之 禍 作 矣. 45) 鄭 道 傳, 三 峯 集 卷 之 十 一 經 濟 文 鑑 別 集 上 君 道 靈 帝 帝 初 卽 位, 太 后 臨 朝, 陳 蕃 竇 武 同 心 輔 政, 徵 用 名 士 李 膺, 杜 密 等, 天 下 想 望 太 平. 惜 其 謀 誅 宦 官, 機 事 不 密, 反 爲 曹 節, 王 甫 等 矯 詔 所 殺, 於 是 群 凶 得 志, 侯 覽 諷 朱 並 告 張 儉 黨 人, 曹 節 諷 有 司 復 擧 膺 等 黨 錮, 名 節 誅 戮, 濫 及 無 辜, 生 民 之 類 幾 息 矣. 帝 又 西 園 賣 官, 後 宮 列 肆, 弄 狗 駕 驢, 甘 爲 下 流 之 態, 一 意 聚 斂, 惟 奄 寺 之 言 是 聽, 未 幾 帝 崩. 46) 裵 淑 姬, 앞의 글, 131~144쪽. 이 글에 언급된 원 제과 고려 급제자와 교유했던 원나 라 同 年 급제자와 출신 지역을 표로 작성하였다. 고려인 급제시기 원나라 同 年 급제자 및 교유 文 人 崔 瀣 1321년 辛 酉 科 宋 本 (1281~1334) 安 軸 1324년 甲 子 科 鄭 端 學 (1278~1334, 江 浙 慶 元 路 ) 李 穀 1333년 癸 酉 科 宇 文 公 諒 ( 江 浙 湖 州 路 ), 達 兼 善 ( 江 浙 建 德 路 ), 成 遵 ( 南 陽

108 한국학연구 55 에 표현된 고사인물문도 이러한 교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려 문인들 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충선왕을 모시고 중국에 오래 머물렀던 李 齊 賢 (1278~1367)이 교유한 원의 문인들 중에는 전선처럼 절 강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趙 孟 頫 (1254~1322)와 朱 德 潤 (1294~1365)이 있 었다. 이제현은 조맹부가 연경에 머물던 1313년부터 1319년 사이에 교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7) 주덕윤은 浙 江 省 吳 興 에서 활동하였는데 延 祐 6년(1319)에 조맹부의 추천으로 충선왕과 인연을 맺었고, 이제현과도 친 하게 교유하여서 시나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였다. 48) 앞장에서 살펴본 <왕희지관아도>를 그린 전선도 주덕윤과 마찬가지로 절강성 오흥을 중 심으로 활동하였고 조맹부와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주덕 윤이나 조맹부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고려에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높 다고 판단된다. 49) 원대 문인들과의 교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되는 부분은 이들이 대부 분 중국 강남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충숙왕 8년(1321)에서 공민왕 5년 (1356) 사이는 고려 정동행성에 유학제거사가 가장 많이 파견된 시기이 며, 이들은 대부분 중국 남방지역 출신으로 남송대 주자성리학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서 주자성리학이 고려에 전수되었을 가능 성이 높다. 50) 앞서 설명했지만 황간은 주자의 도통을 이은 학자였으며, 府 鄧 州 ) 程 益 ( 濟 南 路 錄 事 司 人 ), 周 璿 ( 眞 定 路 錄 事 司 ) 李 仁 復 1342년 壬 午 科 宋 鸌, 拜 住 (몽고족) 李 穡 1354년 甲 午 科 牛 繼 志, 曾 子 白, 王 景 初, 趙 致 安 ( 眞 定 路 ), 拜 住 (몽고인) 47) 朱 瑞 平, 益 齋 李 齊 賢 의 中 國 에서의 行 蹟 과 元 代 人 士 들과의 交 遊 에 대한 硏 究, 南 冥 學 硏 究 제6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6, 148~153쪽. 익재와 교유한 중 국의 유명 인사로는 趙 孟 頫, 元 明 善, 張 養 浩, 虞 集, 湯 炳 龍, 朱 德 潤 등이 있으며, 교 유 시기는 延 祐 年 間 (1314~1320)에 집중된다. 48) 朱 瑞 平, 위의 글, 152~153쪽. 주덕윤이 익재에게 送 李 益 齋 之 臨 洮 라는 시를 지어 주거나 < 燕 山 曉 雪 圖 >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49) 錢 選 (1235~1307 이전)은 浙 江 省 吳 興 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남송이 멸 망한 후 원에 出 仕 하지 않고 평생을 은거하며 그림을 팔아 생활하였다.(박은화 엮음, 중국회화감상, 예경, 2001, 123 ~127쪽 참조.) 50) 張 東 翼, 征 東 行 省 의 置 廢 와 그 運 營 實 態, 高 麗 後 期 外 交 史 硏 究, 一 潮 閣, 1994, 75~77쪽, 99~101쪽.

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09 그의 학문이 원대 浙 江 金 華 學 派, 江 西 雙 峰 學 派, 新 安 朱 子 學 派 등에 계승되었다. 51) 고려에 왔던 원의 유학제거사들이 浙 江, 江 西, 新 安 지역 에서 발전했던 황간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당연히 그 의 저술도 고려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황간이 편찬한 儀 禮 經 傳 通 解 續 은 조선초 태종 11년(1411)과 세종 19년(1437)에도 제례를 논할 때 언급 되었기 때문에 고려말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2) 이러한 배경에서 순자의 예론 을 수용한 황간의 사상과 저술이 고려 14세기 성리학자들 에게 수용되어 새롭게 인식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 지정11년 명대접>은 당시 새롭게 인식된 喪 禮 과정이 실제 적용되어 1351년에 生 器 로 제작된 것으로써, 14세기 성리학적 思 考 를 가진 세력이 상감청자 에 미친 영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Ⅴ. 맺음말 14세기 상감청자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문양의 도상학적 분석과 명문 자료에 대한 성리학적인 의미는 지금까지 고려청자에서 연구에서 주목되 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고사인물문이나 파도문과 관련되는 왕희지, 도연 명, 이응, 소식 등은 모두 儒 者 의 소양을 갖춘 시인이나 전원에서 閑 居 하 는 은일자로 14세기 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14세기 상감청자에는 왕희지 관아, 도연명과 국화, 이응과 등용문 등의 고사들이 주제 문 51) 池 俊 鎬, 주자학의 사상적 분화와 전개양상에 관한 연구 - 黃 幹 과 원대 金 華 學 派 의 사상적 연관성을 중심으로-, 한국철학논집 제23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08, 329 쪽. 주자의 도통은 황간에게 전해졌으며, 주자의 문인이었던 동문들도 대부분 황간의 문하생이 되었다. 따라서 남송 이후 元 代 학문을 주도한 학파는 모두 황간의 문하에 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황간의 학문을 전수한 금화학파는 浙 江 지역의 일군의 학자들이며, 원대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대표적인 학파이다. 52) 太 宗 實 錄 22 卷 11 年 10 月 壬 子 條 禮 曹 上 言, 月 令 有 馬 祖 等 祭, 皆 用 剛 日, 儀 禮 通 解 續, 日 用 丁 巳, ; 世 宗 實 錄 77 卷 19 年 5 月 己 酉 條 議 政 府 禮 曹 同 議 朱 文 公 嘗 曰, 喪 禮 當 從 儀 禮 爲 正. 令 門 人 黃 幹 修 撰 儀 禮 經 傳 通 解 續, 古 今 喪 制, 無 不 備 載

110 한국학연구 55 양으로 등장하였으며, 소식과 같은 송대 문인이 좋아하던 수파문까지 모 두 화창 안에 시문되는 공통점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문양의 주제를 강조 할 뿐만 아니라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러한 고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인식이 14세기 이전에는 단순히 글의 소재 정도였다면, 이제현, 이곡, 이색, 정도전 등 14세기에 활약한 문인들 은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감회를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그들의 삶과 행적을 쫓고자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남기고 있다. 이들에 대한 14 세기에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문인들의 인식 변화가 상감청자와 같은 기명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 지정11년명 대접>의 경 우도 1351년에 제작되었다는 양식적인 편년 자료로서의 측면만이 언급 되어 왔지만 무덤에 부장되는 生 器 로 제작되었다는 본질적인 의미를 논증하였으며, 당시 중국 강남 지역에서 성행한 주자성리학의 황간의 사 상과 저술이 유입되어 고려의 喪 禮 과정에 새로운 성리학적 인식이 있었 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 14세기 전반 경의 상감청자에서 상징성이 강한 故 事 의 내용이 문양으로 표현되는 것은 원대 문인 문화의 풍조나 器 皿 의 영향을 직간접 적으로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대에도 14세기 전반 경에 이러한 경 향이 금속기 자기 칠기 등 모든 기명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충선왕이 연 경에 만권당을 건립하고 이제현 등의 고려 문인 관료들이 조맹부, 주덕 윤 같은 원대 문인들과 직접 교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나 남송의 주자성리 학을 계승한 중국 남방 지역의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원대 문인들이 선호하던 고사인물 을 주제로 한 그림과 기명 등이 고려에 유입되어 영 향을 미쳤던 상황을 유추하여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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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4세기 상감청자의 신경향과 그 성리학적 의미 김윤정 113 Abstract New Trend of Goryeo Inlaid Celadon during the 14 th century and the Meaning of Neo Confucianism Kim, Yun-jeong (Yongin University) Apart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existing research, this research examines how the culture of neo-confucian literati, which was formed, after the literati class pursuing Confucianism became the mainstream of Goryeo society, through actively exchanges with the literati officials of the Yuan Dynasty, affected Goryeo Inlaid Celadon in the 14 th century. Iconography is performed in this research through close analysis of the pattern compositions, representation and positions on three Goryeo inlaid celadon wares. Through the iconography, it has been confirmed that famous narratives are decorated on the inlaid celadons, such as Wang Xizhi Watching Geese, Tao Yuanming's chrysanthemum, Li Ying's Deng Longmen ( 登 龍 門 climbing Dragon Gate), etc. While awareness of the narrative figures was limited to simple topics of the writings before the 14 th century, famous literatis in the 14 th century such as Lee Jaehyeon, Lee Gok, Lee Saek and Jeong Dojeon started to react to those writings more specifically, including reading them, expressing their feelings and opinions, performing self-examination and pursuing the lifestyles and philosophies of those literary figures. This research assumes that such a shift in the awareness of those literary figures among the literati class, pursuing Confucianism in Goryeo dynasty during the 14 th century, had an effect even on the decorations of inlaid celadon. Even the inlaid celadon with inscription of eleventh year of Ji Jeong( 至 正, 1351) has been referred to in terms of the datable material,

114 한국학연구 55 but this research argues that it is essentially made as the Saeng Gi( 生 器 the objects of the living) to be buried in the grave. There was Neo Confucianism-based new awareness of funeral rites in Goryeo 14 th century, introducing of the philosophy and writings of Huang Gan 黃 幹, prevalent in China Jiangnan region at that time. The representation of the narratives with strong implications as a pattern on the Goryeo Inlaid Celadon in the early 14 th century suggest that there was direct and indirect influence of the literati culture and various vessels in Yuan dynasty. Such argument can be inferred from the fact that King Chungseon constructed Mangwon-dang in Beijing to let Goryeo literati officials such as Lee Jehyeon interact with literatis in the Yuan Dynasty, such as Zhao Mengfu or Zhu Derun, or the situation in which the paintings and vessels on the theme of the narratives figures preferred by literatis of Yuan dynasty at that time were brought in Goryeo, affecting culture and life of Goryeo 14 th century. Key word: Narrative Figure, Goryeo 14 th century, Inlaid Celadon, Tao Yuanming, Wang Xizhi, Xunzi, the Ritualism, the Objects of the Living, Neo Confucianism 김윤정 소 속 :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전자우편 : hanova99@hanmail.net 논문투고일 2015. 11. 05 / 심사완료일 2015. 12. 15 / 게재결정일 2015.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