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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경기부양을 위한 지방채 발행 년 2월 국무원에서 발표한 2009년 지방정부 채권 발행에 관한 보고 에 따라 지방채 발행이 초읽기에 들어감 -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시행될 2009년 지방채 발행 규모는 2,000억 위안에 달할 전망이며, 지방채로 조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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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國 樂 P폈융 文 集 第 1 1 輯 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군악대나 찬송가는 본질적으로 지역적 계층적 종교적으 로 한계가 분명한 음악 내지 음악문화인 것이다. 중요힌 것은 일제의 음악교육이다. 그들에 의해서 이식된 창가 가 한국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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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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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7단원 1(252~269)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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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法 의 실시, 良 役 變 通 의 논의 등 사회 경제적 변화가 추진되는 양상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체제구축과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은 어 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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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면



세계 비지니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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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초 정재연구\(수정 및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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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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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21)송 방 송* <국문초록> 본고는 오늘날 국립국악원에 전승되는 포구락( 抛 毬 樂 )이나 무고( 舞 鼓 ) 등의 궁중 무용, 곧 정재( 呈 才 )를 앞으로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는 세계인류무형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희망 아래 일반인들에게 궁중무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 마련한 글이다. 그러므로 본고의 내용은 정재의 역 사적 배경과 관련된 세 소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로 궁중무용이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 및 오례의( 五 禮 儀 ) 와 어떤 관련 속에서 공연됐는지를 살펴보았고, 둘째로 조선시대의 궁중잔치 때 어떠한 정재의 종목이 공연됐는지를 역사적 관점에서 개관하였다. 셋째로 조선후 기의 궁중잔치 및 정재와 관련된 의궤( 儀 軌 )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의궤의 정재 사료적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인 유가( 儒 家 )의 예악사상에서 노른자에 해당하는 오례, 즉 국가의 제사와 관련된 길례( 吉 禮 ), 왕실의 경사스러운 의식과 관련된 가례( 嘉 禮 ), 국가 간의 친화를 높이기 위한 빈례( 賓 禮 ),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군례( 軍 禮 ), 그리고 국가적 장례의식과 관련된 흉례( 凶 禮 ) 중에서 정재는 궁중잔치와 관련 된 가례의식에서 필수적이었다. 정재가 공연된 가례의식을 풍정( 豊 呈 ) 진풍정( 進 豊 呈 ) 진연( 進 宴 ) 진찬( 進 饌 ) 진작( 進 爵 )이라 문헌에 기록했고, 여러 궁중잔치에서 공연된 정재 관련의 공연사료는 여러 종류의 의궤( 儀 軌 )에 전한다. 오늘날 서울대 학교 규장각도서관( 奎 章 閣 圖 書 館 )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 ) 장서각 ( 藏 書 閣 )에는 수많은 종류의 의궤가 소장되어 전한다. 정재사료를 전하는 최고의 의궤는 1630년(인조 8) 인목대비( 仁 穆 大 妃 )를 위한 궁중잔치의 전말( 顚 末 )을 담은 풍정도감의궤 ( 豊 呈 都 監 儀 軌 )이다. 이 풍정도감의 궤 는 병인양요( 丙 寅 洋 擾 ) 때 프랑스군에 의해서 약탈당해 국립파리도서관에 보관 *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한국음악사학회 이사장 119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됐다가 현재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풍정도감의궤 를 비롯해 규 장각과 장서각 소장 여러 종류의 진연의궤 ( 進 宴 儀 軌 )와 진찬의궤 ( 進 饌 儀 軌 ) 및 진작의궤 ( 進 爵 儀 軌 )의 일부는 국립국악원가 간행하는 한국음악학자료총서( 韓 國 音 樂 學 資 料 叢 書 )의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현행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와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의 여러 종목이 2001년의 종묘제 례악( 宗 廟 祭 禮 樂 ), 2003년의 판소리, 2009년의 강강술래, 2009년의 처용무( 處 容 舞 ), 2010년의 가곡( 歌 曲 ), 그리고 2012년의 아리랑처럼 머지않아 유네스코가 지 정하는 인류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되기를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핵심어: 정재( 呈 才 ),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 의궤( 儀 軌 ), 가례( 嘉 禮 ) 목 차 Ⅰ.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과 궁중공연예술( 宮 中 公 演 藝 術 ) Ⅱ. 조선왕조의 예악사상과 오례의( 五 禮 儀 ) Ⅲ. 궁중잔치 때 공연된 정재의 역사적 개관 Ⅳ. 조선후기 궁중잔치 및 정재와 관련된 의궤( 儀 軌 ) Ⅴ. 정재와 정재사료의 새로운 이해 Ⅰ.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과 궁중공연예술( 宮 中 公 演 藝 術 ) 오늘날 국립국악원( 國 立 國 樂 院 )에 전승되는 포구락( 抛 毬 樂 )이나 무고( 舞 鼓 ), 그리고 가인전목단( 佳 人 剪 牧 丹 ) 등을 비롯한 정재( 呈 才 ) 곧 궁중공연예술의 꽃은 조선왕조의 찬 란한 문화유산이자 소중한 무형문화재( 無 形 文 化 財 )의 한 갈래이다. 이러한 정재의 올바 른 이해는 조선왕조의 500여 년 동안에 이룩한 귀중한 궁중공연예술의 가치와 중요성 120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해야만 가능하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궁중잔치 때마다 공연된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와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의 여러 종목은 진풍정( 進 豊 呈 ) 진연( 進 宴 ) 진찬( 進 饌 ) 진작( 進 爵 ) 등의 궁중잔치에서 공연된 음악과 무용을 관장한 왕립음악기관 장악원( 掌 樂 院 ) 소속의 무동( 舞 童 )과 정재여령( 呈 才 女 伶 ) 에 의해서 후대 전승되었다. 조선왕조의 멸망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 李 王 職 雅 樂 部 )를 통해서 명맥을 이은 정재가 광복 이후에는 국립국악원에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다. 조선왕조가 이룩한 궁중공연예술의 꽃, 정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갈래로 구성될 것이다. 여러 형태로 벌어진 궁중잔치는 조선왕조의 건 국이념인 유가( 儒 家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에서 노른자인 오례의( 五 禮 儀 ) 중 가례( 嘉 禮 ) 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첫째로 정재의 역사적 배경을 알기 위하여 예악사상과 오례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국립국악원의 현행 정재는 조선왕조의 향악정재 및 당악정재를 전승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정재의 역사적 개관이 둘째로 뒤따를 것이다. 세 번째로 개관할 내용은 정재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된 궁중공연예술을 기록한 각 종 의궤( 儀 軌 )에 대하여 주목하자는 것이다. Ⅱ.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과 오례의( 五 禮 儀 ) 유교( 儒 敎 )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1392년 건국한 조선왕조는 유가( 儒 家 )의 예악사상( 禮 樂 思 想 )을 반영한 의례( 儀 禮 )를 중요시한 국가였다. 새 왕조의 국가적 의례는 다섯 갈래 의 의례인 오례( 五 禮 )로 집약된다. 나라의 대사( 大 祀 ) 중사( 中 祀 ) 소사( 小 祀 )와 같은 각 종 제사와 관련된 길례( 吉 禮 ), 조하( 朝 賀 ) 혼례( 婚 禮 ) 진연( 進 宴 ) 등 왕실의 경사스런 의 식과 관련된 가례( 嘉 禮 ), 국가 간의 친화를 목적으로 제도화시킨 빈례( 賓 禮 ), 활쏘기 강 무( 講 武 ) 대열( 大 閱 ) 등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군례( 軍 禮 ), 국가적 장례 의식이나 종묘( 宗 廟 )에 신주( 神 主 )를 모시는 부묘( 祔 廟 )의식 등을 포함한 흉례( 凶 禮 ), 이 러한 다섯 의례가 오례이다. 조선왕실의 궁중잔치를 뜻하는 용어는 문헌에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 ( 朝 鮮 王 朝 實 錄 )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오는 풍정( 豊 呈 ) 진풍정( 進 豊 呈 ) 같은 명칭이나 12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조선후기 왕실 및 국가의례와 관련된 각종 행사에 대하여 기록한 의궤( 儀 軌 )에 보이는 진연( 進 宴 ) 진찬( 進 饌 ) 진작( 進 爵 ) 수작( 受 爵 ) 등의 명칭은 모두 궁중잔치와 관련된 용 어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기록된 조선왕조의 궁중잔치는 모두 오례 중에서 가례의 범주 에 드는 연례의식( 宴 禮 儀 式 )이다. 1.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의 건국초( 建 國 初 ) 오례의( 五 禮 儀 ) 조선왕조를 건국한 개국공신( 開 國 功 臣 )들은 유가( 儒 家 )의 예론( 禮 論 )에서 핵심인 오례 ( 五 禮 )를 정치질서의 기본구조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이 오례를 새 왕조의 정치이념으 로 삼아 도덕적 국가기강( 國 家 紀 綱 )을 튼튼히 하였다. 따라서 오례의( 五 禮 儀 )는 새 왕조의 국가질서 및 왕권의 절대우위를 강조하는 명분논리( 名 分 論 理 )의 근거가 되었다. 조선왕조 의 건국 초에 정립한 오례의는 고려왕조의 오례의 및 중국 명나라의 홍무예제 ( 洪 武 禮 制 )를 바탕으로 마련한 것이다. 세종실록 ( 世 宗 實 錄 ) 소재의 오례의가 바로 그것이다. 선초( 鮮 初 ) 오례의와 관련된 실제 작업은 태종(1400-1418) 때부터 의례상정소( 儀 禮 詳 定 所 )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세종실록 권128 131의 길례( 吉 禮 )는 허조( 許 稠 1369-1439)가 완성시켰다. 1) 세종조의 오례의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책이 성종(1469-1494) 때 출간한 국 조오례의 ( 國 朝 五 禮 儀 )다. 건국 초의 궁중의식과 관련된 음악과 정재( 呈 才 ) 및 악기( 樂 器 )와 복식( 服 飾 ) 등을 기록한 문헌이 1493년(성종 24)에 편찬된 악학궤범 ( 樂 學 軌 範 )이다. 국조오례의 는 의식의 진행과정을 자세히 적었을 뿐 아니라, 의식에 쓰이는 주요한 의물( 儀 物 ), 예컨대 장례( 葬 禮 ) 도구나 의장( 儀 仗 ) 또는 제사 그릇이나 악기 등을 도설 ( 圖 說 )함으로써, 이런 의식도구가 없어지더라도 쉽게 복원할 수 있도록 대비한 문헌이 다. 국조오례의 처럼 악학궤범 도 궁중잔치와 제례의식에서 사용되는 음악이론 악기 진설( 樂 器 陳 設 ) 정재도( 呈 才 圖 ) 악기도설( 樂 器 圖 說 ) 의물도설( 儀 物 圖 說 ) 및 관복도설( 官 服 圖 說 ) 등 궁중의식 관련의 지침서( 指 針 書 )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 나 악학궤범 이 궁중의례의 표준서였지만, 구체적인 실행 지침 서는 아니다. 가령 궁중잔치에 참가하는 임금의 행차( 行 次 ) 때 장악원( 掌 樂 院 )의 악공이 등가( 登 歌 )나 헌가( 軒 架 )에서 무슨 곡을 어느 절차에서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 지와 같은 세부 지침까지를 국조오례의 나 악학궤범 에 담지 못했다. 이 밖에도 시대에 따라서 1) 宋 芳 松, 鮮 初 五 禮 儀 에 반영된 儒 家 의 禮 樂 思 想 : 吉 禮 의 宗 廟 祭 禮 樂 을 중심으로, 韶 巖 權 五 聖 博 士 華 甲 紀 念 音 樂 學 論 叢 (서울: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2000), 347-90쪽. 이 논문은 필자 의 朝 鮮 朝 音 樂 史 硏 究 (서울: 민속원, 2001), 343-91쪽에 복간됐으며, 필자는 복간된 글을 참조함. 122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조선왕조의 궁중의례에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으므로, 그런 변화양상을 기록으로 담지 못한 한계성이 두 문헌에 남아 있다. 궁중음악이나 궁중무용 곧 정재와 관련된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왕조 는 국조오례의 와 악학궤범 을 기본으로 삼아 궁중의례를 집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시대변화에 따른 의례를 개별적으로 기록하여 따로 의궤( 儀 軌 )를 편찬하였다. 가 령 어느 왕을 위한 궁중잔치의 의식절차에 무슨 악곡을 연주했고, 어떤 종류의 정재를 공연했으며, 잔치비용과 잔치를 관장한 관원 명단, 그리고 차비악공( 差 備 樂 工 )과 정재여 령( 呈 才 女 伶 ) 등의 명단을 의궤에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궤의 상세한 기록은 국조오례의 나 악학궤범 의 것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러므로 궁중잔치를 집행 할 때마다 앞 임금 시절의 의궤를 참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왕조의 건국 이래 의궤가 편찬됐으리라고 추정되지만, 임진왜란(1592) 이전의 의 궤는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奎 章 閣 )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 書 閣 ) 소장의 현존하는 각종 의궤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편찬된 것들이다. 궁중잔치 와 관련된 의궤에는 궁중공연예술 관련의 자료 외에도 잔치를 총괄한 진연도감( 進 宴 都 監 )이나 진연청( 進 宴 廳 ) 또는 진찬소( 進 饌 所 )와 관련된 공문서 등이 포함됐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은 의궤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 준다. 조선후기의 각종 의궤는 이렇듯 조선 왕조 기록문화의 정수( 精 髓 )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므로, 당시의 문화 수준을 가늠 할 수 있는 문헌사료이다. 의궤가 지닌 이런 기록문화의 정수( 精 髓 )는 2007년 유네스코 (UNESCO)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지정하는 데 근거가 되었다. 2. 오례의( 五 禮 儀 ) 중 가례( 嘉 禮 )와 궁중잔치 궁중잔치와 관련된 가례( 嘉 禮 )는 다음과 같은 궁중의식을 포함하였다. 조선전기의 국 조오례의 ( 國 朝 五 禮 儀 ) 및 조선후기의 춘관통고 ( 春 官 通 考 )나 문헌비고 ( 文 獻 備 考 )에 의거하건대, 2) 가례의 내용은 왕을 비롯한 왕세자( 王 世 子 )나 왕세손( 王 世 孫 )의 혼례의식 ( 婚 禮 儀 式 ), 왕세자 왕세손 등의 관례의식( 冠 禮 儀 式 ), 왕의 등극( 登 極 )을 비롯한 여러 정 치적 의식, 대왕대비( 大 王 大 妃 ) 왕대비( 王 大 妃 ) 대비 등에게 드리는 존호의식( 尊 號 儀 式 ), 왕세자 왕세손 등의 책봉의식( 冊 封 儀 式 ), 각종 하례의식( 賀 禮 儀 式 ) 및 연례의식( 宴 禮 儀 式 )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궁중잔치는 각종 하례의식 및 연례의식과 관련하여 거행되었다. 성종(1469-1494) 당시의 가례와 관련된 여러 연례의식의 기록이 악학궤범 2) 가례, 우리나라 전례체계에 대한 연구 (서울: 총무처 예문관, 1997), 140-201쪽. 12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권2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권2의 아악진설도설( 雅 樂 陳 設 圖 說 ) 항목에는 오례의등가( 五 禮 儀 登 歌 )와 오례의헌가( 五 禮 儀 軒 架 )(<도판 1>) 및 성종 당시의 시용등가( 時 用 登 歌 )와 시용헌가( 時 用 軒 架 ), 그리고 세종(1418-1450) 때의 회례연등가( 會 禮 宴 登 歌 )와 회례연헌가( 會 禮 宴 軒 架 )(<도판 2>)의 악기편성이 도설되었다. 3) 이 도설에는 악기의 배치는 물론이고, 악공( 樂 工 )이나 악생 ( 樂 生 )의 인원수 및 그들의 복식( 服 飾 )까지도 기재되었다. 예컨대, 오례의의 등가에 출 연하는 악생 62명은 모두 개책( 介 幘 )을 쓰고, 비란삼( 緋 鸞 衫 )에 백주중단( 白 紬 中 單 )을 바쳐입고, 백주고( 白 紬 袴 )를 입고, 금동혁대( 金 銅 革 帶 )를 띠고, 백포말( 白 布 襪 )에 오피리 ( 烏 皮 履 )를 신었다. 악사( 樂 師 )는 복두( 幞 頭 )를 쓰고, 강공복( 絳 公 服 )을 입고, 금동혁대 와 비백대대( 緋 白 大 帶 )를 띠고, 백포말( 白 布 襪 )에 오피리( 烏 皮 履 )를 신었다. 4) <도판 1> 오례의등가( 五 禮 儀 登 歌 )와 오례의헌가( 五 禮 儀 軒 架 ) 樂 學 軌 範, 권2.1ab 3) 李 惠 求 역주, 新 譯 樂 學 軌 範 (서울: 국립국악원, 2000), 101-108쪽. 원본의 출처는 新 譯 樂 學 軌 範, 934-40쪽( 악학궤범, 권2.1a2-3b12) 참조. 4) 李 惠 求 역주, 위의 책, 101-102쪽. 124

조선왕조(朝鮮王朝) 정재(呈才) 및 정재사료(呈才史料)의 서설(序說) <도판 2> 세종조회례연의(世宗朝會禮宴儀) 樂學軌範, 권2.22b2-23b1 모자의 일종인 악생의 개책(<도판 3>)이나 악사의 복두(<도판 3>) 및 악생의 비란삼 (<도판 4>) 백주중단 백주고와 악사의 강공복 같은 의상, 그리고 금동혁대나 비백대대 및 오피리 같은 복식의 그림과 설명은 악학궤범 권9의 관복도설(官服圖說)에 전한다. 악학궤범 권9의 이런 도설은 조선후기 의궤 편찬 때 규범(規範)이 되었다. 예컨대, 그 대표적일 사례가 정조 을묘년(1795) 정리의궤 (整理儀軌) 곧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 乙卯整理儀軌)의 수많은 도설이고, 원행을묘정리의궤 이후의 여러 의궤에 보이는 복 식도(服飾圖) 역시 악학궤범 의 도설을 본받아 제작한 또 다른 사례이다. <도판 3> 관복도설(官服圖說) 중의 복두(幞頭) 개책(介幘) 樂學軌範, 권9.1ab 12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도판 4> 관복도설 중의 비란삼( 緋 鸞 衫 ) 홍녹주의( 紅 綠 紬 衣 ) 樂 學 軌 範, 권9.4ab 세종(1418-1450) 때의 회례연( 會 禮 宴 )에서 왕에게 아홉 번 술잔을 올리는 구작행례 ( 九 爵 行 禮 )에서 연주된 곡명과 정재명은 악학궤범, 권2.22b2-23b2에 전하고, 성종 당시의 하례 및 연향 때 연주된 곡명은 악학궤범, 권2.21b9-22b2에 전한다. 성종(1469-1494) 당시 임금이 출궁( 出 宮 )할 때에는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또는 <성수 무강만( 聖 壽 無 疆 慢 )>을 연주했고, <여민락령( 與 民 樂 令 )> 또는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환 궁악( 還 宮 樂 )>은 임금이 환궁( 還 宮 )할 때 연주되었다. 세종 때에는 <몽금척정재( 夢 金 尺 呈 才 )>를 임금께 여섯째 잔을 올리는 제6작 때 무동( 舞 童 )이 춤을 추었고, 제7작 때에 는 <오양선정재( 五 羊 仙 呈 才 )>를 공연하였다. 그리고 제8작 때에는 무동이 <동동정재( 動 動 呈 才 )>를 추었고, <무고정재( 舞 鼓 呈 才 )>는 제9작 때 공연되었다. 이제 악학궤범, 권 2.22b2-23b2의 기사에 의거하여 세종 때 회례연의 구작행례에서 공연된 연례악곡과 정재를 정리한 것이 <표 1>이다. <표 1> 세종( 世 宗 ) 때 회례연( 會 禮 宴 )의 구작행례( 九 爵 行 禮 )에서 연주된 연례악곡( 宴 禮 樂 曲 )과 정재( 呈 才 ) 일람표 의식절차 악현 헌가 등가 악곡명 전하( 殿 下 ) 출궁( 出 宮 ) - 융안지악( 隆 安 之 樂 ) 왕세자 배례( 拜 禮 ) - 서안지악( 舒 安 之 樂 ) 왕세자 제1작( 第 一 爵 ) - 휴안지악( 休 安 之 樂 ) 의정( 議 政 ) 제2작 - 휴안지악( 休 安 之 樂 ) 진찬( 進 饌 ) 진화( 進 花 ) - 휴안지악( 休 安 之 樂 ) 정재명 126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의식절차 악현 헌가 등가 악곡명 정재명 진소선( 進 小 膳 ) - 수보록지악( 受 寶 籙 之 樂 ) 제3작( 第 三 爵 ) - 문명지곡( 文 明 之 曲 ) 문무( 文 舞 ) 진탕( 進 湯 ) - 근천정지악( 覲 天 庭 之 樂 ) 제4작( 第 四 爵 ) - 하황은지악( 荷 皇 恩 之 樂 ) 문무( 文 舞 ) 진탕( 進 湯 ) - 수명명지악( 受 明 命 之 樂 ) 제5작( 第 五 爵 ) - 무열지곡( 武 烈 之 曲 ) 무무( 武 舞 ) 진탕( 進 湯 ) [ ] - 당악 서자고지악( 瑞 鷓 鴣 之 樂 ) 제6작( 第 六 爵 ) - [ ] 몽금척( 夢 金 尺 ) 진탕( 進 湯 ) [ ] - 당악 수룡음지악( 水 龍 吟 之 樂 ) 제7작( 第 七 爵 ) - [ ] 오양선( 五 羊 仙 ) 진탕( 進 湯 ) [ ] - 당악 황하청지악( 黃 河 淸 之 樂 ) 제8작( 第 八 爵 ) - [ ] 동동( 動 動 ) 진탕( 進 湯 ) [ ] - 당악 만년환지악( 萬 年 歡 之 樂 ) 제9작( 第 九 爵 ) - [ ] 무고( 舞 鼓 ) [ ] - 당악 태평년지악( 太 平 年 之 樂 ) 진대선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무동입작 ( 進 大 膳 ) - [ ] 정동방지곡( 靖 東 方 之 曲 ) ( 舞 童 入 作 ) 전하( 殿 下 ) 환궁( 還 宮 ) - 융안지악( 隆 安 之 樂 ) 필자주: 도표 속의 네모 괄호 [ ] 표시는 원본에는 언급되지 않은 필자의 추정임. 세종(1418-1450) 때에는 전하( 殿 下 )의 출궁( 出 宮 )과 환궁( 還 宮 ) 때 및 제1작에서 제5 작까지는 <융안지악( 隆 安 之 樂 )> 등의 아악곡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제5작의 진탕( 進 湯 ) 때부터 진대선( 進 大 膳 )까지는 <서자고지악( 瑞 鷓 鴣 之 樂 )> 등의 당악곡과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정동방지곡( 靖 東 方 之 曲 )>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성종조(1469-1494)에 이르러서 는 아악곡이 연주되지 않았고, 그 대신에 향악곡과 당악곡이 연향악( 宴 享 樂 )으로 연주 되었다. 그러나 성종 당시 술잔을 올리는 절차에서 어떤 향악곡 또는 당악곡이 연주됐 는지는 악학궤범 권2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식무용의 일종인 문무( 文 舞 )와 무무( 武 舞 ) 대신에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나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 중에서 임금이 낙점( 落 點 ) 한 종목을 임금에게 술잔을 올릴 때마다 공연하였다. 이제 악학궤범, 권2.21b9-22b2 의 기록에 의거하여 5) 성종 당시의 하례( 賀 禮 ) 및 연향( 宴 享 ) 때 연주된 곡명과 정재명 을 정리하여 제시하면, 아래의 <표 2>와 같다. 5) 李 惠 求 역주, 新 譯 樂 學 軌 範, 186-87쪽. 12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표 2> 성종조( 成 宗 朝 )의 연향( 宴 享 ) 때 연주된 연례악곡( 宴 禮 樂 曲 )과 정재( 呈 才 ) 일람표 의식절차 전하( 殿 下 ) 출궁( 出 宮 ) 악현( 樂 懸 ) 殿 庭 樂 殿 後 樂 殿 上 樂 軒 架 樂 - [ ] 악곡명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또는 성수무강만( 聖 壽 無 疆 慢 ) 배례( 拜 禮 ) 때 - - [ ] 낙양춘( 洛 陽 春 ) 진주기( 進 酒 器 ) - - - 계우( 啓 宇 ) 진찬안( 進 饌 案 ) - -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진소선( 進 小 膳 ) - -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진화( 進 花 ) - - - 절화삼대( 折 花 三 臺 ) 진탕( 進 湯 ) - - - [ ] 제일작( 第 一 爵 ) - - [ ] - 제이작( 第 二 爵 )부터 - - [ ] - 제구작( 第 九 爵 )까지 - - [ ] - 수룡음( 水 龍 吟 ) 또는 하운봉( 夏 雲 峰 ) 억취소( 憶 吹 簫 )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혹은 여민락령 금전악( 金 殿 樂 ) [향악곡 또는 당악곡 중에서 선정됨] 정재명 초무( 初 舞 ) 금척무( 金 尺 舞 ) 향악정재 당악정재 중 낙점( 落 點 ) 진대선( 進 大 膳 ) - -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파연작( 罷 宴 爵 ) - - [ ] - 정동방곡( 靖 東 方 曲 ) 사수무( 四 手 舞 ) 전하( 殿 下 ) 환궁( 還 宮 ) - [ ] 여민락령( 與 民 樂 令 ) 또는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환궁악( 還 宮 樂 ) 필자주: 도표 속의 네모 괄호 [ ] 표시는 원본에는 언급되지 않은 필자의 추정임. <표 2>의 악현( 樂 懸 )에 나오는 전정악( 殿 庭 樂 )은 전정 곧 헌가( 軒 架 )의 고취악대( 鼓 吹 樂 隊 )가 연주한 음악이라는 뜻이므로 헌가악( 軒 架 樂 )을 가르킨다. 또한 전상악( 殿 上 樂 ) 은 전상 곧 등가( 登 歌 )에서 연주한 음악을 뜻하는 등가악( 登 歌 樂 )이다. 그리고 전후악 ( 殿 後 樂 )은 전후고취( 殿 後 鼓 吹 )가 연주한 음악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종 당시 임금이 출 궁할 때나 환궁할 때에는 전정고취( 殿 庭 鼓 吹 )와 전후고취( 殿 後 鼓 吹 )가 음악을 연주했고, 잔치 절차에서는 등가악과 현가악이 번갈아 가며 음악연주와 정재반주를 맡았다. 조선 전기 연향악의 이러한 전통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의 진풍정( 進 豊 呈 ) 이나 진연( 進 宴 ) 진찬( 進 饌 ) 진작( 進 爵 ) 또는 수작( 受 爵 ) 때에도 지속됐으며, 조선후기 궁중잔치에서 공연된 정재와 음악의 모든 기록은 의궤에 전한다. 성종 당시에 공연된 당악정재나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은 <표 2>에 제시되지 않았지만, 당 악정재와 향악정재의 반주곡명은 악학궤범 권4에 전한다. 예컨대, 당악정재 헌선도( 獻 仙 桃 )(<도판 5-1>)의 반주음악은 <회팔선인자( 會 八 仙 引 子 )> <헌천수만( 獻 天 壽 慢 )> <헌천수 128

조선왕조(朝鮮王朝) 정재(呈才) 및 정재사료(呈才史料)의 서설(序說) 최자(獻天壽嗺子)> <금잔자만(金盞子慢)> <금잔자최자(金盞子嗺子)> <서자고만(瑞鷓鴣 慢)> <서자고최자(瑞鷓鴣嗺子)> <천년만세인자(千年萬歲引子)>, 이상 여덟 곡으로 구성되 었다.6) <도판 5-1> 헌선도(獻仙桃)의 초입배열도 (初入排列圖) 樂學軌範, 권4.4a <도판 5-2> 무고(舞鼓)의 초입배열도 (初入排列圖) 樂學軌範, 권5.10a 향악정재의 <무고(舞鼓)>(<도판 5-2>)의 공연 때 악사가 악공 16명을 거느리고 들어 가면, 정재여령(呈才女伶)들이 정읍사(井邑詞)를 부른 후에 악공들이 연주한 <정읍만기 (井邑慢機)> <정읍중기(井邑中機)> <정읍급기(井邑急機)>에 맞추어 무고정재(舞鼓呈才) 를 추었다. 그리고 향악정재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도판 6>)의 공 연에서는 여러 반주곡이 연주되었다. 즉 처용만기(處容慢機)로 알려진 <봉황음일기(鳳凰 吟一機)> <봉황음중기(中機)> <봉황음급기(急機)> <삼진작(三眞勺)> <정읍급기(井邑急 機)> <북전급기(北殿急機)> <영산회상만기(靈山會相慢機)> <보허자령(步虛子令)>, 이상 여 덟 곡이 반주곡으로 연주되었다.7) 6) 李惠求 역주, 위의 책, 233-43쪽. 7) 李惠求 역주, 앞의 책, 330-1쪽(무고) 및 333-49쪽(학연화대처용무합설). 129

國樂院論文集 제27집 <도판 6-1>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오방작대도 <도판 6-2>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五方作隊圖) 樂學軌範, 권5.12a 초입배열도 樂學軌範, 권5.11b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정재종목 중에서 유일하게 처용탈(<도판 7-1>)을 쓰고 공연 했을 뿐 아니라 그 의상 역시 다른 정재여령의 것과 달리 독특했기 때문에, 악학궤범 권9에 처용관복(處容冠服)이라고 따로 항목을 만들어 도설하였다(<도판 7-2>). 성종 때 보여준 처용복식도(處容服飾圖)의 이러한 전통은 양란 이후의 여러 의궤에 전승되었다. <도판 7-1> 처용관복(處容冠服)의 사모(紗帽) 樂學軌範, 권9.11a 130 <도판 7-2> 처용관복(處容冠服)의 의(衣) 앞과 뒤 樂學軌範, 권9.12a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Ⅲ. 궁중잔치 때 공연( 公 演 )된 정재( 呈 才 )의 역사적( 歷 史 的 ) 개관( 槪 觀 ) 1. 선초( 鮮 初 )의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와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됐을 때 궁중잔치에서 공연된 정재는 고려왕조에서 공연되던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였다. 고려사 악지( 樂 志 ) 소재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종목들은 악학궤범 권3에 전한다. 고려왕조 때 공연된 당악정재는 <수연장( 壽 延 長 )> <연화대 ( 蓮 花 臺 )> <오양선( 五 羊 仙 )> <포구락( 抛 毬 樂 )> <헌선도( 獻 仙 桃 )>, 이상 다섯 종목이다. 그리고 고려의 향악정재는 <동동( 動 動 )> <무고( 舞 鼓 )> <무애( 無 㝵 )>, 세 종목이다. 이러한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를 바탕으로 선초( 鮮 初 )에 새로 창제된 정재종목 및 성종 (1469-1494) 때 공연된 정재종목은 모두 악학궤범 권4 및 권5에 전한다. 악학궤범 권 4에 전하는 성종 때의 당악정재는 <곡파( 曲 破 )> <근천정( 覲 天 庭 )> <금척( 金 尺 )> <성택 ( 聖 澤 )> <수명명( 受 明 命 )> <수보록( 受 寶 籙 )> <수연장> <연화대> <오양선> <육화대( 六 花 隊 )> <포구락> <하성명( 賀 聖 明 )> <하황은( 荷 皇 恩 )> <헌선도>, 이상 열네 종목이다. 이 14종목 중에 선초에 창제된 당악정재는 <곡파> <근천정> <금척> <성택> <수명명> <수보 록> <육화대> <하성명> <하황은>, 이상 아홉 종목이다. 여섯 명의 정재여령( 呈 才 女 伶 )이 꽃을 들고 추는 육화대( 六 花 隊 )는 송나라의 대곡( 大 曲 )에 나오는 <화무( 花 舞 )>를 본떠서 창작된 정재이다. 1425년(세종 7) 고려 때의 곡파 를 기억하는 노기( 老 妓 )가 재현한 곡파( 曲 破 )는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석노교곡파( 惜 奴 嬌 曲 破 )와 관련된 정재이다. <몽금척( 夢 金 尺 )>의 준말인 <금척( 金 尺 )> 및 <수보록( 受 寶 籙 )>은 1393년(태조 2) 정도전( 鄭 道 傳 )이 창작한 악장( 樂 章 )을 바탕으로 창제된 당악 정재이다. 두 정재는 태조 이성계( 李 成 桂 )의 건국을 칭송한 내용의 춤이다. 1402년(태종 2) 하륜( 河 崙 )의 악장을 근거로 창제된 <근천정( 覲 天 庭 )>과 <수명명( 受 明 命 )>은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오해( 誤 解 )를 풀고 황제로부터 왕의 인준( 認 準 )을 받아 기뻐하는 내용의 당악정재이다. <하황은( 荷 皇 恩 )>은 세종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인준을 받아 온 백 성이 기뻐한다는 내용의 악장을 근거로 창제된 당악정재이다. 1419년(세종 2) 변계량( 卞 季 良 )이 지은 악장을 바탕으로 창제한 <하성명( 賀 聖 明 )>은 명나라 황제가 등극( 登 極 )한 이래 여러 상서( 祥 瑞 )가 나타나 우리나라 백성들이 기뻐한다는 내용의 정재이다. 그리 13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고 성택( 聖 澤 )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창제된 당악정재이다. 악학궤범 권5에 전하는 성종(1469-1494) 때의 향악정재는 <교방가요( 敎 坊 歌 謠 )> <무고( 舞 鼓 )> <문덕곡( 文 德 曲 )> <보태평( 保 太 平 )> <봉래의( 鳳 來 儀 )> <아박( 牙 拍 )> <정 대업( 定 大 業 )> <학무( 鶴 舞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鶴 蓮 花 臺 處 容 舞 合 設 )> <향발( 響 鈸 )>, 이상 열 종목이다. 이 10종목 중 <무고> <아박>은 고려왕조의 향악정재를 전승한 종목이 고, <봉래의> <정대업> <보태평>은 세종(1418-1450) 때 창제된 정재이다. 그리고 <교방 가요> <문덕곡> <학무> <학연화대처용무합설> <향발>은 성종 때 창제된 정재이다. 고려사 악지 소재의 <무고> <동동> <무애>, 이상 세 종목의 향악정재 중 <무애정 재( 無 㝵 呈 才 )>의 창사( 唱 詞 )가 불가( 佛 歌 )라는 이유 때문에 선초 향악정재에서 제외됐 고, 무고와 동동 두 종목만 조선왕조에 전승되어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동동정재 ( 動 動 呈 才 )>는 성종 때 <아박무( 牙 拍 舞 )>라는 정재명으로 바뀌었고, <무고정재( 舞 鼓 呈 才 )>만이 고려 때의 정재명으로 조선왕조에 전승되었다. 세종 때 창제된 <봉래의( 鳳 來 儀 )>는 조종( 祖 宗 )의 공덕( 功 德 )이 성대함과 건국의 간난 ( 艱 難 )함을 형용한 용비어천가( 龍 飛 御 天 歌 )를 바탕으로 정재여령이 관현반주에 맞추어 공연하도록 만든 악가무( 樂 歌 舞 )의 종합공연물이다. 조상의 무공( 武 功 )을 칭송한 내용의 <정대업( 定 大 業 )>과 조상의 문덕( 文 德 )을 찬양한 내용의 <보태평( 保 太 平 )>은 세종 때 창 제된 용비어천가에 의거해 창작된 정재이다. 교방헌가요( 敎 坊 獻 歌 謠 )의 준말인 <교방가 요>는 임금의 환궁( 還 宮 ) 때 교방여기( 敎 坊 女 妓 )가 한문으로 쓴 가요의 축( 軸 )을 임금에 게 올리는 내용의 정재이다. 정도전( 鄭 道 傳 )이 태조의 문덕을 칭송한 내용의 <문덕곡( 文 德 曲 )>은 정재여령이 문덕곡의 개언로장( 開 言 路 章 ) 보공신장( 保 功 臣 章 ) 정경계장( 正 經 界 章 ) 정례악장( 定 禮 樂 章 )을 노래 부르면서 추는 정재이다. <연화대( 蓮 花 臺 )>와 함께 공 연되는 <학무( 鶴 舞 )>는 학이 연통( 蓮 筒 )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 童 女 )가 나오는 줄거 리의 정재이고, 향발무( 響 鈸 舞 ) 또는 향발정재( 響 鈸 呈 才 )로 알려진 <향발>은 8명의 교방 여기가 양손의 모지( 母 指 )와 장지( 長 指 )에 향발을 끼고 추는 정재이다. 그리고 <학연화 대처용무합설>은 학무 연화대 처용무의 합설로 공연된 종목이다. 선초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은 아래의 <표 3>에 정리됐듯이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여민락령 ( 與 民 樂 令 )>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정읍만기( 井 邑 慢 機 )> <봉황음( 鳳 凰 吟 )> <소포구락 령( 小 抛 毬 樂 令 )> 등이다. 춤 도중에 정재여령이 노래부르는 창사( 唱 詞 )는 치화평( 致 和 平 ) 취풍형( 醉 豊 亨 ) 정읍사( 井 邑 詞 ) 동동사( 動 動 詞 ) 미타찬( 彌 陀 讚 ) 본사찬( 本 師 讚 ) 등이다. 132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표 3> 鮮 初 鄕 樂 呈 才 의 반주음악 및 唱 詞 일람표 정재명 반주음악 창사 및 진구호( 進 口 號 ) 치어( 致 語 ) 보태평( 保 太 平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熙 文 ) 등 기명( 基 命 ) 귀인( 歸 仁 ) 등 정대업( 定 大 業 ) 향당교주( 昭 武 ) 등 독경( 篤 敬 ) 탁정( 濯 征 ) 등 봉래의( 鳳 來 儀 ) 향당교주 여민락령( 與 民 樂 令 ) 등 치화평( 致 和 平 ) 취풍형( 醉 豊 亨 )의 해동장( 海 東 章 ) 등 아박( 牙 拍 ) 동동만기( 動 動 慢 機 ) 중기( 中 機 ) 동동사( 動 動 詞 ) 향발( 響 鈸 ) 향당교주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등 오양선정재( 五 羊 仙 呈 才 )의 가사 무고( 舞 鼓 ) 정읍만기( 井 邑 慢 機 中 機 急 機 ) 정읍사( 井 邑 詞 ) 학무( 鶴 舞 ) 步 虛 子 令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 鶴 蓮 花 臺 處 容 舞 合 設 ) 봉황음( 鳳 凰 吟 一 機 中 機 急 機 ) 삼진작( 三 眞 勺 ) 복전( 北 殿 ) 영산회상만기( 靈 山 會 相 慢 機 ) 등 처용가( 處 容 歌 ) 미타찬( 彌 陀 讚 ) 본사찬( 本 師 讚 ) 관음찬( 觀 音 讚 ) 교방가요( 敎 坊 歌 謠 ) 여민락령 별곡( 別 曲 ) - 문덕곡( 文 德 曲 ) 소포구락령( 小 抛 毬 樂 令 ) 문덕곡의 개언로장( 開 言 路 章 ) 보공신장( 保 功 臣 章 ) 등 향악정재 문덕곡의 치어( 致 語 )나 반주음악은 당악정재의 양식( 樣 式 )을 따랐지만, 그 치어의 내용은 태조 이성계의 치적( 治 績 )을 칭송한 것이다. <아박정재( 牙 拍 呈 才 )>의 공 연 때 정재여령이 노래 부르는 창사 동동사( 動 動 詞 )의 원문과 현대 말은 다음과 같다. 동동사의 원문 德 으란 곰 예 받 고 福 으란 림 예 받 고 德 이여 福 이라호 나 라 오소이다. 아흐 動 動 다리 현대 말 덕을란 뒷배에 받자옵고, 복을란 앞배에 받자옵고, 덕이여 복이라 한 것을 드러려 오소이다. 아으 동동다리. 12월 그믐 하루 전날에 열리는 나례의식( 儺 禮 儀 式 ) 중 구나( 驅 儺 ) 행사 뒤에 지당판 ( 池 塘 板 )을 설치하고 장악원( 掌 樂 院 )의 악사( 樂 師 )와 악공( 樂 工 ) 및 여기( 女 妓 )가 <학연 화대처용무합설>을 공연하였다. <처용만기( 處 容 慢 機 )>의 반주음악에 맞추어 여기는 처 용가( 處 容 歌 )를 불렀고, 중간에 삼진작( 三 眞 勺 )의 연주 후에 16명의 여기가 내 님을 그 리 와 우니다니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더니 )로 시작되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학( 鶴 )과 연화대( 蓮 花 臺 ) 의물을 갖추고 나서 <영산회상만기( 靈 山 會 相 慢 機 )>를 연주하고 13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제창( 濟 唱 )으로 영산회상불보살 ( 靈 山 會 相 佛 菩 薩 )을 세 번 부르고 난 후 <미타찬( 彌 陀 讚 )> <본사찬( 本 師 讚 )> <관음찬( 觀 音 讚 )> 같은 불가( 佛 歌 )를 제창하고 공연을 마쳤다. 2) 조선후기( 朝 鮮 後 期 )에 창제( 創 製 )된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와 당악정재( 唐 樂 呈 才 )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 1592)과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 1636)을 거치면서 조선후기에 이르 러 음악의 역사는 새로운 지평( 地 平 )을 열었다. 이러한 변천의 물결에서 정재의 전통도 예외적일 수 없었다. 조선전기의 정재에서 발견되지 않은 조선후기 궁중무용의 특징은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특징은 순조(1800-1834) 때 새로운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많이 창제됐다는 것 이고, 둘째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셋째 는 새로 창제된 정재 중에는 이전에 없었던 <춘앵전( 春 鶯 囀 )>이나 <무산향( 舞 山 香 )> 같 은 독무( 獨 舞 )의 출현이고, 넷째 특징은 조선전기에 악기편성의 용어였던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가 1719년(숙종 45)부터는 정재반주의 한 곡명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다섯 째 특징은 1828년(순조 28)부터 정재반주곡의 아명( 雅 名 )이 사용됐고, 1829년(순조 29) 부터 정재반주곡의 본명 대신에 원무곡( 原 舞 曲 )이라는 대명사가 사용된 사실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孝 明 世 子 1809-1830)는 부왕( 父 王 )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827년 (순조 27) 대리청정( 代 理 聽 政 ) 시절 수많은 정재를 창제하였다. 이 때 창제된 새 향악정재는 <가인전목단( 佳 人 剪 牧 丹 )> <검기무( 劍 器 舞 )> <경풍도( 慶 豊 圖 )> <고구려무( 高 句 麗 舞 )> <공막무( 公 莫 舞 )> <관동무( 關 東 舞 )> <광수무( 廣 袖 舞 )> <만수무( 萬 壽 舞 )> <망선무( 望 仙 舞 )> <무산향( 舞 山 香 )> <박접무( 撲 蝶 舞 )> <보상무( 寶 相 舞 )> <사선무( 四 仙 舞 )> <선유락 ( 船 遊 樂 )> <영지무( 影 池 舞 )> <첨수무( 尖 袖 舞 )> <첩승무( 疊 勝 舞 )> <초무( 初 舞 )> <춘광호 ( 春 光 好 )> <춘대옥촉( 春 臺 玉 燭 )> <춘앵전( 春 鶯 囀 )> <침향춘( 沈 香 春 )> <향령무( 響 鈴 舞 )> <헌천화( 獻 天 花 )>, 이상 24종목이다. 또한 당시 지방에서 궁중으로 수용한 잡극( 雜 劇 ) 계통의 정재로는 <사자무( 獅 子 舞 )>와 <항장무( 項 莊 舞 )>가 있다. 순조 때 창제된 향악정재의 대부분은 순조 무자년( 戊 子 年 : 1828) 진작의궤 ( 進 爵 儀 軌 )와 기축년( 己 丑 年 : 1829) 진찬의궤 ( 進 饌 儀 軌 ) 및 헌종 무신년( 戊 申 年 : 1848) 진찬의궤 에 도설되어 전한다. 새 향악정재의 춤사위는 정재무도홀기 ( 呈 才 舞 圖 笏 記 )에 전하고 있다. 새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은 주로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와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이다. 그러나 가곡의 <계락( 界 樂 )>이 <향령무>의 반주음악으로, <영산회상( 靈 山 會 相 )>이 <사 자무>의 반주음악으로, <대취타( 大 吹 打 )>가 <선유락>과 <항장무>의 반주음악으로 각각 연주되었다. 향당교주가 반주음악으로 쓰인 향악정재는 <가인전목단> <경풍도> <고구 134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려무> <만수무> <무산향> <박접무> <보상무> <사선무> <침향춘> <처용무> <첩승무> <춘앵전> <헌천화>이고, <보허자령>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한 정재는 <만수무> <초무> <헌천화> 등이다. 향당교주는 조선전기에는 본래 악기편성의 용어였다. 그렇지만 양란( 兩 亂 ) 이후에는 그 용어가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1719년(숙종 45) 숙종조기해진연의궤 (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에 의하면, 칠작행례( 七 爵 行 禮 )의 진대선( 進 大 膳 ) 절차에서 연주된 여민락과 향당교주는 처용무의 반주음악으로 연주됐다. 이 향당교주라는 용어가 숙종 실록 에서는 향당교작( 鄕 唐 交 作 )으로 나오고, 영조실록 에서는 향당악( 鄕 唐 樂 )이라고 기록되었다. 숙종(1674-1720) 때부터 향당교주는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연주됐고, 순조 무자년(1828) 진작의궤 와 기축년(1829) 진찬의궤 에 나오는 <향당교주>는 모두 정재 반주의 곡명이다. 1828년(순조28) 악곡의 본명 이외로 쓰인 아명( 雅 名 )은 연례악곡( 宴 禮 樂 曲 ) 및 정재반 주곡에서도 모두 사용되었다. 아래의 <표 4>에 제시했듯이 당악 <오운개서조( 五 雲 開 瑞 朝 )>의 아명은 <매화인( 梅 花 引 )>이고, <낙양춘( 洛 陽 春 )>의 아명은 <만세성지곡( 萬 歲 聲 之 曲 )>이다. 향악 <정읍만기( 井 邑 慢 機 )>의 아명은 <경신년지곡( 慶 新 年 之 曲 )>과 <제수창지 곡( 帝 壽 昌 之 曲 )>이며, <여민락( 與 民 樂 )>의 아명은 <전전환지곡( 殿 前 歡 之 曲 )>과 <천추세 지곡( 千 秋 歲 之 曲 )>이다. <표 4> 1828년(순조 28) 자경전( 慈 慶 殿 )에서 연주된 연례악곡( 宴 禮 樂 曲 )의 아명( 雅 名 )과 본명( 本 名 ) 및 정재( 呈 才 ) 일람표 의식절차 아명( 雅 名 ) 본명( 本 名 ) 정재명( 呈 才 名 ) 왕세자 출배위( 出 拜 位 ) 매화인( 梅 花 引 ) 오운개서조( 五 雲 開 瑞 朝 ) - 왕비 출대차( 出 大 次 ) 천향봉소지곡( 天 香 鳳 韶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전하 왕비 승좌( 陞 座 ) 오운가육용지곡 광수무( 廣 袖 舞 ) 향당교주 ( 五 雲 駕 六 龍 之 曲 ) 왕세자 등 사배( 四 拜 ) 만수영무강인( 萬 壽 永 無 彊 引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 왕세자 진욕위( 進 褥 位 ) 성인무우지곡( 聖 人 無 憂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 내시 봉휘건( 奉 揮 巾 ) 만년낙지곡( 萬 年 樂 之 曲 ) 향당교주 - 내시 봉어찬( 奉 御 饌 ) 경풍년지곡( 慶 豊 年 之 曲 ) 향당교주 - 진화( 進 花 ) 금전만년환지곡 ( 金 殿 萬 年 歡 之 曲 ) 향당교주 - 앵천유지곡( 鶯 穿 柳 之 曲 ) 향당교주 - 염외화지곡( 簾 外 花 之 曲 ) 향당교주 - 13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의식절차 아명( 雅 名 ) 본명( 本 名 ) 정재명( 呈 才 名 ) 전하( 殿 下 ) 제1작 제수창지곡( 帝 壽 昌 之 曲 ) 정읍만기( 井 邑 慢 機 ) 향악( 鄕 樂 ) 아박무( 牙 拍 舞 ) 전하 거작( 擧 爵 ) 전전환지곡( 殿 前 歡 之 曲 ) 환환곡( 桓 桓 曲 ) 여민락 ( 與 民 樂 ) 향악 왕세자 부복( 俯 伏 ) 황상길지곡( 黃 裳 吉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 왕비( 王 妃 ) 제1작 경신년지곡( 慶 新 年 之 曲 ) 향당교주 왕비 거작( 擧 爵 ) 천추세지곡( 千 秋 歲 之 曲 ) 환환곡( 桓 桓 曲 ) 여민락 아박무( 牙 拍 舞 ) ( 與 民 樂 ) 향악 진소선( 進 小 膳 ) 헌천화지곡( 獻 天 花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 진탕( 進 湯 ) 경선화지곡( 慶 宣 和 之 曲 ) 향당교주 - 진대선( 進 大 膳 ) 풍신년지곡( 豊 新 年 之 曲 ) 향당교주 - 진만두( 進 饅 頭 ) 장생락지곡( 長 生 樂 之 曲 ) 향당교주 - 왕세자 진욕위( 進 褥 位 ) 여산지곡( 如 山 之 曲 ) 향당교주 - 전하( 殿 下 ) 제2작 만방녕지곡( 萬 方 寧 之 曲 ) 보허자( 步 虛 子 ) 당악 향발무( 響 鈸 舞 ) 전하 거작( 擧 爵 ) 수제천지곡( 壽 齊 天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왕세자빈 부복( 俯 伏 ) 곤녕지곡( 坤 寧 之 曲 ) 향당교주 - 왕비( 王 妃 ) 제2작 경태평지곡( 慶 太 平 之 曲 ) 보허자( 步 虛 子 ) 당악 - 왕비 거작( 擧 爵 ) 경수락지곡( 慶 壽 樂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 진다( 進 茶 ) 천선자지곡( 天 仙 子 之 曲 ) 향당교주 - 봉휘건( 奉 揮 巾 ) 유초신지곡( 柳 初 新 之 曲 ) 향당교주 - 봉어찬( 奉 御 饌 ) 태평춘지곡( 太 平 春 之 曲 ) 향당교주 - 공주( 公 主 ) 부복( 俯 伏 ) 서일화지곡( 瑞 日 和 之 曲 ) 향당교주 - 전하( 殿 下 ) 제3작 만수장락지곡( 萬 壽 長 樂 之 曲 ) 향당교주 수연장지무 전하 거작( 擧 爵 ) 승평악지곡( 昇 平 樂 之 曲 ) 향당교주 ( 壽 延 長 之 舞 ) 공주( 公 主 ) 부복( 俯 伏 ) 경만년지곡( 慶 萬 年 之 曲 ) 향당교주 - 왕비( 王 妃 ) 제3작 수연장지곡( 壽 延 長 之 曲 ) 향당교주 수연장지무 왕비 거작( 擧 爵 ) 청평악지곡( 淸 平 樂 之 曲 ) 향당교주 ( 壽 延 長 之 舞 ) 왕세자 등 사배( 四 拜 ) 만세성지곡( 萬 歲 聲 之 曲 ) 낙양춘( 洛 陽 春 ) 당악 - 왕세자 등 취위( 就 位 ) 감황은지곡( 感 皇 恩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 왕세자 거음( 擧 飮 장생보연지악( 長 生 寶 宴 之 樂 ) 수천춘지곡( 壽 千 春 之 曲 ) 향당교주 향당교주 첨수무( 尖 袖 舞 ) 왕세자빈 거음( 擧 飮 ) 요계락지곡( 堯 階 樂 之 曲 ) 향당교주 경방춘지곡( 慶 芳 春 之 曲 ) 향당교주 무고( 舞 鼓 ) 진탕( 進 湯 ) 희신춘지곡( 喜 新 春 之 曲 ) 향당교주 - 진만두( 進 饅 頭 ) 창운송지곡( 昌 運 頌 之 曲 ) 향당교주 - 진다( 進 茶 ) 하성조지곡( 賀 聖 朝 之 曲 ) 향당교주 - 136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의식절차 아명( 雅 名 ) 본명( 本 名 ) 정재명( 呈 才 名 ) 영남산지곡( 永 南 山 之 曲 ) 향당교주 진별행과( 進 別 行 果 ) 포구락( 抛 毬 樂 ) 만화신지곡( 萬 花 新 之 曲 ) 향당교주 전선( 典 膳 ) 행주( 行 酒 ) 취태평지곡( 醉 太 平 之 曲 ) 향당교주 - 성수영지곡( 聖 壽 永 之 曲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당악 - 퇴찬과( 退 饌 果 ) 낙매춘곡( 落 梅 春 曲 ) 무환지곡( 武 桓 之 曲 ) 향악 - 왕세자 등 사배( 四 拜 ) 태계평지곡( 泰 階 平 之 曲 )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당악 - 전하 입대차( 入 大 次 ) 응화지곡( 凝 和 之 曲 )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처용무( 處 容 舞 ) 왕비 입대차( 入 大 次 ) 봉취지곡( 鳳 吹 之 曲 ) 향당교주 왕세자 입소차( 入 小 次 ) 수용음( 水 龍 吟 ) 원악( 原 樂 ) 당악 - 합계 51곡 10곡 8종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에는 정재반주곡의 본명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원무 곡( 原 舞 曲 )이라는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1828년(순조 28)의 궁중잔치에서 연주된 정재 반주곡의 본명은 <향당교주( 鄕 唐 交 奏 )> <정읍만기( 井 邑 慢 機 )> <보허자( 步 虛 子 )> <여민 락만( 與 民 樂 慢 )>, 이상 네 곡이다. 그러나 1829년(순조 29)부터 정재반주곡의 본명 대신 에 사용되기 시작한 <원무곡>이라는 대명사는 1902년(광무 6)까지 사용되었다. 고종 신 축년( 辛 丑 年 : 1901) 정재무도홀기 ( 呈 才 舞 圖 笏 記 )에 의하면, <원무곡>은 <보허자령( 步 虛 子 令 )> <향당교주> <여민락령( 與 民 樂 令 )> <정읍만기> <계락( 界 樂 )>의 대명사로 사용 되었다. 8) 1828년부터 사용된 수많은 아명( 雅 名 )의 등장 및 1829년부터 등장한 <원무곡( 原 舞 曲 )>의 출현은 모두 정재반주곡과 관련된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러한 아명과 원무곡의 출현은 순조 때 창제한 여려 정재를 위하여 장악원의 악사( 樂 師 )들이 새로 반주곡을 창 제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궁여지책( 窮 餘 之 策 )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정 재반주곡의 본명을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았고, 아명과 원무곡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반주곡의 인상을 임금과 대신들에게 보이려는 장악원 악사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8) 宋 芳 松, 朝 鮮 後 期 呈 才 의 原 舞 曲 探 索, 韓 國 樂 器 學 제4호(서울: 한국퉁소연구회, 2006), 48-92쪽. 本 書 의 제1편 제6장으로 復 刊 된 글 참조. 13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Ⅳ. 조선후기( 朝 鮮 後 期 ) 궁중잔치 및 정재( 呈 才 )와 관련된 의궤( 儀 軌 ) 1. 조선후기( 朝 鮮 後 期 ) 의궤( 儀 軌 )의 종류 조선전기 화려했던 궁중잔치의 전통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겪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후기 궁중잔치의 음악연주와 정재공연에 관한 기 록을 전하는 의궤는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모두 열아홉 가지다. 이 19종목의 의궤 중에 서 두 가지는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파리국립도서관에 전하고, 나머지는 서울대학 교 규장각도서관( 奎 章 閣 圖 書 館 ) 및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藏 書 閣 )에 전한다. 국내에 없는 두 의궤는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의 기사진표리진찬의궤 ( 己 巳 進 表 裏 進 饌 儀 軌 )와 파리국립도서관 소장의 풍정도감의궤 ( 豊 呈 都 監 儀 軌 ) 9) 다. 기사진표리진찬 의궤 는 순조의 어머니 수빈( 綏 嬪 ) 박씨의 회갑을 경축하는 내용을 담은 순조 기사년 (1809) 진찬의궤 이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 의 진찬도( 進 饌 圖 ) 진표리도( 進 表 裏 圖 ) 등 을 포함한 열 종류의 도판은 1998년 음악학계에 소개되었다. 10) 필자는 최근에 기사진 표리진찬의궤 의 필사본을 영인한 카피를 입수했으나 필자의 의궤 속의 우리춤과 음악 을 찾아서 (2008)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11) 그러나 풍정도감의궤 는 1983년 국립국악원에서 한국음악학자료총서 ( 韓 國 音 樂 學 資 料 叢 書 ) 권13에 영인본으로 출간됐고, 1999년에는 국역본이 출간되었다. 12) 이 풍정도 감의궤 의 원본은 프랑스 국립파리도서관(도서번호: 2431)에 소장됐다가 반환되어 현재 9) 豊 呈 都 監 儀 軌 는 1886년(고종 23) 丙 寅 洋 擾 때 프랑스군이 江 華 島 에서 약탈해간 문헌의 하나이 다. 이 원본은 김영삼 정권 때 프랑스 미떼랑 대통령이 떼제베 고속철도의 상담을 위해 한국을 방 문했을 때 江 華 史 庫 에서 탈취한 문헌을 영구임대형식으로 반환하기로 언약한 결과로 현재 국립중 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10) 李 在 淑 外,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의 도판 1 10. 11) 金 鍾 洙 박사의 후의로 입수한 己 巳 進 表 裏 儀 軌 의 도판과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 (1998)의 도 판 순서와 내용에 상이점이 발견됐고, 영인한 필사본의 장수와 쪽이 불분명하여 다른 의궤와 같은 체제로 주제색인을 작성하기 어려웠으며, 일반인들이 영인본 마져 입수하여 활용할 수 없기 때문 에 제외시켰다. 이 의궤의 주제색인은 후에 원본의 올바른 영인본을 입수한 후의 과제로 남긴다. 12) 宋 芳 松 高 芳 子 外, 國 譯 豊 呈 都 監 儀 軌 (서울: 민속원, 1999). 이 국역본의 원고는 1980 90년대 嶺 南 大 시절 필자가 조직한 韓 國 音 樂 史 料 硏 究 會 에서 한학자 錦 溪 鄭 德 潤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련 되었다. 國 譯 豊 呈 都 監 儀 軌 는 韓 國 音 樂 史 料 硏 究 會 의 國 譯 叢 書 2로 출간하였다. 138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의궤의 영인본이 음악학계에서 출간됐을 뿐 아니 라, 국역본에 풍정도감의궤 의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13) 풍정도감의궤 (1630) 이후의 의궤를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즉 숙종 기해 년(1719) 진연의궤 ( 進 宴 儀 軌 )을 비롯하여 영조 갑자년(1744) 진연의궤, 영조 을유년 (1765) 수작의궤 ( 受 爵 儀 軌 ), 원행을묘정리의궤 ( 園 幸 乙 卯 整 理 儀 軌 )로 알려진 정조 을 묘년(1795) 정리의궤, 자경전진작정례의궤 ( 慈 慶 殿 進 爵 整 禮 儀 軌 )로 알려진 순조 정해 년(1827) 진작의궤 ( 進 爵 儀 軌 ), 순조 무자년(1828) 진작의궤, 순조 기축년(1829) 진찬 의궤 ( 進 饌 儀 軌 ), 헌종 무신년(1848) 진찬의궤, 이상 아홉 의궤는 고종(1863-1907) 이 전의 궁중잔치와 관련된 의궤이다. 이 의궤 중에서 국역본으로 출간된 의궤로는 숙종조의 진연의궤 (1719), 영조조의 진연의궤 (1744), 정조조의 정리의궤 (1795), 순조조의 진 작의궤 (1828)와 진찬의궤 (1829), 그리고 헌종조의 진찬의궤 (1848)가 있다. 14) 고종(1863-1908) 재임시절에 열린 아홉 차례의 잔치 기록을 담은 의궤는 무진년 (1868) 진찬의궤, 계유년(1873) 진작의궤, 정축년(1877) 진찬의궤, 정해년(1887) 진찬의궤, 임진년(1892) 진찬의궤, 신축년(1901) 진찬의궤 와 진연의궤, 임인년 (1902) 4월의 진연의궤 및 11월의 진연의궤 다. 고종조의 의궤 중에서 국역본으로 출간된 의궤는 신축년의 진연의궤 (1901) 뿐이다. 15) 1863년 고종이 즉위한 이래로 대왕대비 신정왕후( 神 貞 王 后 1808-1890)를 위하여 네 차 례의 진찬례( 進 饌 禮 )를 올렸다. 즉 1868년(고종 5) 신정왕후의 회갑을 경축하는 진찬을 거 행했고, 1873년(고종 10)에는 신정왕후의 왕대비 책봉( 冊 封 ) 40년을 경축하기 위하여 진작 례( 進 爵 禮 )를 올렸다. 그리고 1877년(고종 14)에는 대왕대비의 칠순( 七 旬 ) 잔치를 열었고, 1887년(고종 24)에는 다시 신정왕후의 팔순( 八 旬 )을 경축하는 진찬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13) 豊 呈 都 監 儀 軌, 韓 國 音 樂 學 資 料 叢 書 권13(서울: 국립국악원, 1983), 7-87쪽; 宋 芳 松 高 芳 子 外, 위의 책, 179-248쪽. 14) 宋 芳 松 朴 貞 蓮 外,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서울: 민속원, 2001); 宋 芳 松 高 芳 子 外,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서울: 민속원, 1998); 장철수 외, 역주원행을묘정리의궤 (수원: 수원시, 1996); 이의강 번역, 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서울: 보고사, 2006); 宋 芳 松 金 鍾 洙 外,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서울: 민속원, 2007);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국역헌종무신진찬의 궤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2004 2006).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는 韓 國 音 樂 史 料 硏 究 會 의 國 譯 叢 書 1로,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는 韓 國 音 樂 史 料 硏 究 會 의 國 譯 叢 書 4로,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는 韓 國 音 樂 史 料 硏 究 會 의 國 譯 叢 書 6으로 각각 출간됨.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세 권은 한국공연예술사료번역총서 6 7 8로 출간됨. 15) 학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1 2002).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세 권은 한국공연예술사료번역총서 2 3 4로 출간됨. 139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신정왕후를 위하여 네 차례의 궁중잔치를 거행한 것은 철종(1849-1863)이 후사( 後 嗣 ) 없 이 세상을 떠날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는 흥선군( 興 宣 君 ) 이하응( 李 昰 應 )의 둘째 아 들로 익종( 翼 宗 )의 대를 잇게 하고 왕위에 앉혔는데, 그 왕이 바로 고종이다. 익종의 양아 들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신정왕후에게 효도해야 할 처지였으므로 네 차례의 진찬례를 거행했던 것이다. 진연( 進 宴 ) 진찬( 進 饌 ) 진작( 進 爵 ) 같은 궁중잔치는 임금 또는 대비의 회갑이나 임금의 기로소( 耆 老 所 ) 입소, 또는 왕이나 대비의 망육순( 望 六 旬 : 51세)이나 망팔순( 望 八 旬 : 71 세), 그리고 임금의 등극( 登 極 ) 30년과 같은 왕실의 경사 때 거행되었다. 먼저 임금의 보령 ( 寶 齡 )이 육순을 맞아 기로소에 입소하게 됐을 때 거행된 진연의 사례가 조선후기에 세 번 있었다. 첫째로 열린 1719년(숙종 45)의 진연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경축한 잔치였고, 둘째 사례로 1744년(영조 20)에 거행된 진연은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한 잔치였으며, 셋째 경우로 1902년(광무 6)의 진연은 고종황제의 기로소 입소를 경축한 잔치였다. 임금의 어머니인 자전( 慈 殿 )의 회갑 때에도 진찬례가 열리는 것은 궁중에서의 관례였 다. 1795년(정조 19) 화성( 華 城 )의 봉수당( 奉 壽 堂 )에서 거행한 잔치는 정조의 어머니 혜 경궁( 惠 慶 宮 ) 홍씨( 洪 氏 )의 회갑연( 回 甲 宴 )이다. 그리고 1809년(순조 9)의 진찬은 순조의 어머니 수빈( 綏 嬪 ) 박씨( 朴 氏 )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하여 열린 잔치였고, 1868년(고종 5)의 진찬은 신정왕후의 회갑연이다. 영조의 망팔순을 경축하는 잔치는 1765년(영조 41)에 거행된 수작( 受 爵 )이고, 1887년(고종 24)에 열린 진찬은 신정왕후의 팔순을 경축 하는 잔치였으며, 1901년(광무 5)에 열린 진찬은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明 憲 太 后 1831-1904)의 망팔순(71세)을 경축하기 위하여 열린 잔치다. 이런 왕실의 여러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열렸던 궁중잔치의 전말( 顚 末 )을 전하는 19종의 의궤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 5>이다. 각 의궤의 문헌적 해제는 음악학자에 의해서 발표된 바 16) 있으며, 일반 교양인을 위한 의궤 해제도 역사학자 17) 에 16) 宋 芳 松,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解 題,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9-47쪽; 豊 呈 都 監 儀 軌 의 文 獻 的 再 檢 討, 國 譯 豊 呈 都 監 儀 軌, 9-46쪽;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解 題,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7-57쪽; 이현우,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解 題,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解 題, 권 1.27-31쪽; 金 鍾 洙, 慈 慶 殿 進 爵 整 禮 儀 軌 進 爵 儀 軌 進 宴 儀 軌 進 饌 儀 軌, 藏 書 閣 所 藏 儀 軌 解 題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108-159쪽: 1) 1719년(숙종 45) 耆 老 所 入 所 와 [ 己 亥 ] 進 宴 儀 軌 10) 1892년(고종 29) 보령 41세와 즉위 30년 경축 연향과 [ 壬 辰 ] 進 饌 儀 軌, 규장각 소장의궤해제집 (서울: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 권1.3-175쪽; 1) 1901년( 光 武 5) 孝 定 王 后 71 세 경축 연향과 [ 辛 丑 ] 進 饌 儀 軌 3) 1902년( 光 武 6) 高 宗 의 耆 老 所 入 所 와 [ 壬 寅 ] 進 宴 儀 軌, 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 (2004), 권2.417-69쪽; 헌종무신진찬의궤 해제, 國 譯 憲 宗 戊 申 進 饌 儀 軌, 권1.15-23쪽; 순조기축진찬의궤 해제,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권1.11-21쪽. 140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의해서 이미 정리되었다. <표 5> 조선후기 궁중잔치와 관련된 의궤( 儀 軌 )의 연도별 일람표 의궤명 왕력 서기 연향 목적 I. 豊 呈 都 監 儀 軌 仁 祖 8 年 1630 年 II. 기해 進 宴 儀 軌 肅 宗 45 年 1719 年 III. 갑자 進 宴 儀 軌 英 祖 20 年 1744 年 仁 穆 大 妃 內 宴 耆 老 所 入 所 耆 老 所 入 所 IV. 을유 受 爵 儀 軌 英 祖 41 年 1765 年 望 八 旬 V. 을묘 整 理 儀 軌 正 祖 19 年 1795 年 VI. 기사 進 饌 儀 軌 純 祖 9 年 1809 年 VII. 정해 進 爵 儀 軌 純 祖 27 年 1827 年 VIII. 무자 進 爵 儀 軌 純 祖 28 年 1828 年 IX. 기축 進 饌 儀 軌 純 祖 29 年 1829 年 X. 무신 進 饌 儀 軌 憲 宗 14 年 1848 年 XI. 무진 進 饌 儀 軌 高 宗 5 年 1868 年 XII. 계유 進 爵 儀 軌 高 宗 10 年 1873 年 XIII. 정축 進 饌 儀 軌 高 宗 14 年 1877 年 XIV. 정해 進 饌 儀 軌 高 宗 24 年 1887 年 XV. 임진 進 饌 儀 軌 高 宗 29 年 1892 年 惠 慶 宮 回 甲 綏 嬪 朴 氏 回 甲 純 元 王 后 尊 號 純 元 王 后 四 旬 登 極 30 年 純 祖 四 旬 純 元 王 后 六 旬 神 貞 王 后 回 甲 神 貞 王 后 冊 封 40 年 神 貞 王 后 七 旬 神 貞 王 后 八 旬 高 宗 登 極 30 年 원본 소장처 奎 章 閣 藏 書 閣 外 國 圖 書 館 [H.13*] - 奎 14358 H.13 奎 14360 H.30 奎 14361 H.30 파리 圖 書 館 번호: 2431 - - - - - - 奎 14532 - - - - 奎 14536 H.13 奎 14364 H.3 奎 14367 H.3 奎 14371 H.6 英 國 大 英 博 物 館 藏 2-2858 - 藏 2-2859 藏 2-2860 - 藏 2-2873 - 藏 2-2874 - 奎 14374 - - 奎 14375 藏 2-2861 - 奎 14376 奎 14397 奎 14405 奎 14428 藏 2-2875 - 藏 2-2876 藏 2-2877 藏 2-2879 藏 2-2880 - - 17) 한영우, 7) 인복대비를 위한 풍정(연희)과 풍정도감의궤 19) 고종 어극 40년 경축 연향과 [고종임인십일월]진연의궤, 조선왕조 의궤 (서울: 일지사, 2005), 103-798쪽. 궁중잔치와 관 련된 각종 의궤의 해제는 다른 종류의 의궤 해제와 함께 서술됐으므로, 시작쪽과 끝쪽을 표기함. 이 책의 <부록> 의궤종합목록 에는 의궤의 원소장처 및 서지사항이 연도별로 정리되었음. 14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의궤명 왕력 서기 연향 목적 XVI. 신축 進 宴 儀 軌 光 武 5 年 1901 年 XVII. 신축 進 饌 儀 軌 光 武 5 年 1901 年 XVIII.임인 進 宴 儀 軌 XIX.임인 進 宴 儀 軌 光 武 6 年 光 武 6 年 1902 年 4 月 1902 年 11 月 高 宗 皇 帝 五 旬 明 憲 太 后 望 八 旬 耆 老 所 入 所 高 宗 御 極 40 年 원본 소장처 奎 章 閣 藏 書 閣 外 國 圖 書 館 奎 14464 H.24 奎 14446 H.23 奎 14479 14496 奎 14499 14515 藏 2-2868 - 藏 2-2881 - 藏 2-2869 - 藏 2-2867 藏 2-2871 필자주: [H.13*]의 H는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의 한글로마자 첫 자의 약자임. 따라서 H.13은 한국음악학자료총서 권13에 영인됐음을 의미함. - 2. 각종 의궤( 儀 軌 )의 사료적( 史 料 的 ) 가치( 價 値 )와 의미( 意 味 )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정수( 精 髓 )로 꼽히는 의궤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 수량 역시 엄 청나게 많지만, 18) 모두가 조선후기에 편찬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의궤 가운데 궁중잔치와 관련된 의궤로는 열아홉 종류가 학계에 알려졌다(<표 5>). 각종 의궤 중 궁 중잔치와 관련된 의궤가 담고 있는 공연사료적 가치는 헤아리기 어렵게 막대하다. 그렇 지만 이런 의궤가 지닌 사료적 의미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로 하나의 의궤는 그 임금의 재위 시절 거행한 궁중잔치를 집행하는 모든 과정, 즉 당시의 행정적 매카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컨대, 궁중잔치를 총괄한 진 연청( 進 宴 廳 )이나 진연도감( 進 宴 都 監 ) 또는 진찬소( 進 饌 所 )는 육조( 六 曹 ) 소속의 여러 중 앙관아의 도움이 필요했고, 지방의 관찰사( 觀 察 使 )와 수령( 守 令 )의 협력은 필수적이었 다. 가령, 잔치에 필요한 음식재료의 준비 때에도 그렇고, 잔치의식과 공연에 필요한 차비여령( 差 備 女 伶 )이나 정재여령( 呈 才 女 伶 )을 위하여 진연청은 각도의 관찰사에게 지시 하여 잔칫날 이전에 선상여기( 選 上 女 妓 )를 상송( 上 送 )하도록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영 조 갑자년(1744)의 진연의궤 에 의하면, 진연청의 감결( 甘 結 )에 나오는 중앙관아는 공 조( 工 曹 ) 관상감( 觀 象 監 ) 광흥창( 廣 興 倉 ) 교서관( 校 書 館 ) 군기시( 軍 器 寺 ) 군자감( 軍 資 監 ) 금위영( 禁 衛 營 ) 기로소( 耆 老 所 ) 내궁방( 內 宮 房 ) 내섬시( 內 贍 寺 ) 내시부( 內 侍 府 ) 내 18) 한영우, 부록: 의궤종합목록, 조선왕조 의궤, 873-966쪽. 867쪽에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奎 章 閣 에 553종, 藏 書 閣 에 293종, 파리국립도서관에 191종, 일본 宮 內 廳 에 69종, 이상 총 1,106종 이 학계에 알려졌음. 142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자시( 內 資 寺 ) 내주방( 內 酒 房 ) 돈녕부( 敦 寧 府 ) 등을 포함하여 훈련원( 訓 練 院 )까지 모두 97기관이나 되었다. 19) 또한 진연청은 궁중잔치를 원만히 거행하기 위해서 하부기구를 따로 설치하여 운영하 였다. 진연청의 하부기구로는 일방( 一 房 ) 이방( 二 房 ) 삼방( 三 房 ) 별공작( 別 工 作 ) 등이 설치되었다. 일방에서는 궁중잔치의 공연과 관련된 업무, 예컨대 연주할 음악의 종류와 악곡, 차비공인( 差 備 工 人 )의 관복( 冠 服 ) 제조나 보수( 補 修 ), 악기풍물( 樂 器 風 物 )의 신조 ( 新 造 )와 보수, 수고한 관리와 차비들에게 내린 상전( 賞 典 ) 등을 관장하였다. 이방에서는 잔치에 쓰일 반찬이나 음식물과 관련된 찬품( 饌 品 ) 및 각종 상탁( 床 卓 )이나 그릇의 마련 과 보수 그리고 각종의 꽃 마련 등의 임무를 수행했고, 삼방은 잔치의 그림이나 반차도 ( 班 次 圖 )의 제작과 의식절차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각 방에서 담당했던 기록의 한 사례를 예로 들건대, 일방 이방 삼방에서 관장한 모든 전말을 담은 일방의궤( 一 房 儀 軌 ) 이방의궤( 二 房 儀 軌 ) 삼방의궤( 三 房 儀 軌 )가 영조 을유년(1765) 수작의궤 권2에 전한다. 둘째, 의궤에는 잔치와 관련된 재정의 수입과 내막이 자세하게 전한다. 예컨대, 악기 를 만드는 경비로 얼마를 썼고, 관복의 수리와 제조에 든 옷감 마련에는 얼마의 비용이 들었으며, 잔치에 수고한 관원과 차비( 差 備 )들에게 내려준 상전( 賞 典 )으로 든 비용도 포 함되었다. 궁중잔치가 끝나면 잔치 관련의 고관( 高 官 )에게는 말이나 활 같은 물건을 하 사( 下 賜 )했고, 중하급 관리들에게는 승진의 기회를 주었으며, 차비공인( 差 備 工 人 )과 정 재여령( 呈 才 女 伶 )에게는 옷감을 주었고, 대한제국 시절에는 정재여령의 신분을 해방시 켜주는 면천( 免 賤 )의 은전( 恩 典 )을 베풀었다. 의궤에 전하는 수입과 지출의 내막은 당시 의 물가와 월급 혹은 일당의 수준을 알려주는 사료의 구실을 한다. 셋째, 의궤는 조선왕실의 궁중생활문화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데 의의 가 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 왕실문화에 대한 연구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왕 실의 궁중생활문화에 대한 이해는 미궁( 迷 宮 ) 속에 묻혀버린 상태이다. 궁중잔치에 쓰 인 찬품( 饌 品 )이 어떻게 조달됐고, 어떤 종류의 음식물이 왕실의 어른과 내명부( 內 命 婦 ) 의 위계에 따라서 어떻게 차려졌으며, 고급 관리와 하급 관리 및 차비공인들에게는 어 떠한 음식물이 제공됐는지 등에 대한 고찰 때 궁중잔치 관련의 의궤는 기본적인 학술정 보를 제공해주는 문헌이다. 넷째, 의궤에 포함된 수많은 도설( 圖 說 )이나 반차도( 班 次 圖 )와 같은 도판자료를 통해 행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런 도설이나 반차도는 미술사연구( 美 術 史 硏 究 )나 19) 宋 芳 松,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解 題,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42-44쪽의 <표 6> 참조. 14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복식사연구( 服 飾 史 硏 究 )의 기본 사료이다. 가령 의궤에 나오는 쌍포구락( 雙 抛 毬 樂 )과 쌍 무고( 雙 舞 鼓 ) 등과 같은 정재도( 呈 才 圖 )도 그렇고, 선유락( 船 遊 樂 )정재의 공연 때 반주 음악을 담당했던 내취수( 內 吹 手 )들이 연주한 내취악기도( 內 吹 樂 器 圖 )는 미술사연구 뿐만 이 아니라 정재사연구( 呈 才 史 硏 究 )나 음악사연구( 音 樂 史 硏 究 )에도 필수적인 공연사료라 는 데 의궤의 사료적 가치가 있다. 끝으로 궁중잔치에서 연주된 연례악곡과 정재와 관련된 자료는 의궤의 공연사료적 의 미를 높이는 근거가 된다. 현재 조선후기 음악사의 서술은 나라에서 펴내거나 궁중 밖 의 풍류방의 풍류객들이 남긴 고악보( 古 樂 譜 )에 의거하여 연구되는 실정이므로, 대체로 음악사 서술은 음악양식사( 音 樂 樣 式 史 )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의 궤 속의 공연사료는 궁중의례에서 연주된 실상을 모두 전하기 때문에, 음악문화사적 서 술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료이다. 가령 <여민락령( 與 民 樂 令 )>이나 <여민락만( 與 民 樂 慢 )> 등의 연례악곡을 누가 궁중잔치의 어느 의식절차에서 어떻게 연주했는가에 대 한 의문은 의궤의 의주( 儀 註 )에 의거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의궤의 의미를 상기할 때 의궤의 공연사료적 가치는 조선후기 궁중 공연예술사 연구를 위해서 막중하다. 조선왕조실록 ( 朝 鮮 王 朝 實 錄 )이나 승정원일기 ( 承 政 院 日 記 )처럼 의궤( 儀 軌 )도 역시 조선왕조의 통치 행위를 사실대로 그림과 함께 철 저하게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드문 자랑스러운 기록문화의 백미( 白 眉 )다. 2007년 유네스코(UNESCO)가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지정한 것 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의궤의 문헌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 Ⅴ. 정재( 呈 才 )와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새로운 이해( 理 解 )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奎 章 閣 ) 소장 546종 2,940책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 書 閣 ) 소장 287종 490책의 의궤( 儀 軌 )는 훈민정음( 訓 民 正 音 : 1997) 조선왕조실록 ( 朝 鮮 王 朝 實 錄 : 1997) 승정원일기 ( 承 政 院 日 記 : 2001)에 이어서 2007년 6월 제18차 유네 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되었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소중한 조선왕조의 의궤 중에서 궁중잔치 때 공연된 공연예술의 꽃인 정재 관련의 기록을 담은 18종의 의궤를 앞 <표 5>로 정리하였다. 이 의궤 속에 전하는 정재 중의 일부가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현행 당악정재( 唐 144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樂 呈 才 )와 향악정재( 鄕 樂 呈 才 )의 여러 종목이 종묘제례악( 宗 廟 祭 禮 樂 : 2001) 판소리 (2003) 강강술래(2009) 처용무( 處 容 舞 : 2009) 가곡( 歌 曲 : 2010) 아리랑(2012)에 이어 머잖아 유네스코(UNESCO)의 인류무형유산의 하나로 지정되기를 바라면서 다시금 그 정재 및 정재사료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하나의 의궤는 그 당시 임금의 재위 시절 거행한 궁중잔치를 집행하는 모든 과정, 즉 행정적 매카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료임을 상기할 때, 첫째로 의궤의 사료적 가치와 의미는 막중하다. 한 시대의 궁중문화 관련의 모든 기록을 담은 의궤는 조선왕조 의 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문헌사료라는 데 두 번째 사료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 셋째 로 의궤는 조선왕실의 궁중생활문화 관련의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데 가치와 의미 가 있다. 의궤에 포함된 수많은 도설( 圖 說 )이나 반차도( 班 次 圖 )와 같은 그림 자료를 통해 행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런 도설이나 반차도는 미술사연구나 복식사연구의 기본 사료라는 사실에 네 번째 가치와 의미가 있다. 끝으로 궁중잔치에서 연주된 연례악 곡과 정재와 관련된 자료는 의궤의 공연사료적 가치와 의미를 높이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공연사료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 정재사료는 머잖아 세계무형유산의 하나로 지 정되어야 할 조선왕조의 궁중공연예술의 꽃, 곧 정재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문헌적 근거 임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조선왕조 오례의 중 가례( 嘉 禮 )에 속하는 궁중공연예술의 꽃, 정재가 세계무용사( 世 界 舞 踊 史 )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으로 필자는 믿어 의심하지 않 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례의 가운데 길례( 吉 禮 )에 드는 종묘제례악을 유네스코가 인류 무형유산의 하나로 지정했듯이, 조선왕조 정재의 가치와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 거니와 정재도 역시 인류무형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참고문헌> 가례. 우리나라 전례체계에 대한 연구. 서울: 총무처 예문관, 1997. 豊 呈 都 監 儀 軌. 韓 國 音 樂 學 資 料 叢 書 권13. 서울: 국립국악원, 1983.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儀 軌 解 題.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 서울: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 헌종무신진찬의궤 해제. 國 譯 憲 宗 戊 申 進 饌 儀 軌, 권1. 순조기축진찬의궤 해제.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권1. 김종수. 慈 慶 殿 進 爵 整 禮 儀 軌 進 爵 儀 軌 進 宴 儀 軌 進 饌 儀 軌. 藏 書 閣 所 藏 송방송. 선초 오례의에 반영된 유가의 예악사상: 길례의 종묘제례락을 중심으로. 韶 巖 權 五 聖 博 士 華 甲 紀 念 音 樂 學 論 叢. 서울: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논문집간행 위원회, 2000.. 朝 鮮 後 期 呈 才 의 原 舞 曲 探 索. 韓 國 樂 器 學 제4호. 서울: 한국퉁소연구회, 2006..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解 題.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豊 呈 都 監 儀 軌 의 文 獻 的 再 檢 討. 國 譯 豊 呈 都 監 儀 軌..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解 題.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송방송 고방자 외. 國 譯 英 祖 朝 甲 子 進 宴 儀 軌. 서울: 민속원, 1998.. 國 譯 豊 呈 都 監 儀 軌. 서울: 민속원, 1999. 송방송 김종수 외, 國 譯 純 祖 己 丑 進 饌 儀 軌. 서울: 민속원, 2007. 송방송 박정연 외. 國 譯 肅 宗 朝 己 亥 進 宴 儀 軌. 서울: 민속원, 2001. 이의강 번역, 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서울: 보고사, 2006. 이혜구 역주, 新 譯 樂 學 軌 範. 서울: 국립국악원, 2000. 이현우.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解 題.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解 題. 이재숙 외.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장철수 외. 역주원행을묘정리의궤. 수원: 수원시, 1996. 146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국역헌종무신진찬의궤.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2004 2006.. 高 宗 辛 丑 進 宴 儀 軌.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1 2002.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 서울: 일지사, 2005.. 부록: 의궤종합목록. 조선왕조 의궤. 14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7집 <Abstract> An Introduction to the Court Dance and Its Literary Sources of the Joseon Dynasty Song Bang-song Emeritus Prof.,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The Joseon( 朝 鮮 ) Dynasty was established in 1392 by the General Yi Sung-gye( 李 成 桂 ) and his followers of Neo-Confucianism in 1392. The scholarship of Neo-Confucianism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ield of rites and music known as yeak( 禮 樂 : li-yüeh in Chinese) by meritorious retainers at the founding of the new Joseon Dynasty. The ideology of yeak is based upon Five Rites called Orye( 五 禮 ), consisting of 1) Gillye( 吉 禮 : Auspicious Rites), 2) Garye( 嘉 禮 : Congratulatory Rites), 3) Pinrye( 賓 禮 : Guest Rites), 4) Gunrye( 軍 禮 : Military Rites), and 5) Hungrye( 凶 禮 : Mourning Rites). The basic obligation of the government officials was the codification of orye, and thus the meritorious retainers of the new Joseon Dynasty had to re-codify the orye of the former Goryeo Dynasty. This study is planned to examine the court dance and music in the literary sources related with Garye which were related with royal banquets in th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deals with such topics as 1) Introduction: Court Performing Arts and Five Rites, 2) Five Rites of the Joseon Dynasty: (1) Fives Rites of the Early Joseon Period, (2) Garye and Court Banquets among Five Rites, 3) A Historical Survey of Court Dance at Royal Banquets: (1) Hyangak Jeongjae( 鄕 樂 呈 才 : Hyangak Court Dance) and Dangak Jeongjae( 唐 樂 呈 才 : Dangak Court Dance) of the Early Joseon Period, (2) Hyangak Jeongjae and Dangak Jeongjae of the Late Joseon Period, 4) Uigwe( 儀 軌 : Official Documents of Royal Events) of Court Dance and Royal Banquets in the Late Joseon Period: (1) Various Kinds of Uigwe, (2) Historical Value of Uigwe, 5. Conclusion: A New Understanding of the Court Dance and Its Literary Sources. In view of our examination of five rites (orye) in the early Joseon period as well as 148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 정재( 呈 才 ) 및 정재사료( 呈 才 史 料 )의 서설( 序 說 ) congratulatory rites (garye) and royal banquets of the Joseon period, the author points out that court dance and music transmitted at the National Gugak Center( 國 立 國 樂 院 : Gukrip Gugakwon) should be reevaluated as one of the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in the world. This is the reason why one should pay attention on such various historical sources of court dance and music as Jinyeoug Uigwe 進 宴 儀 軌, Jinchan Uigwe 進 饌 儀 軌, Jinjak uigwe 進 爵 儀 軌, and so on, which have preserved at the Kyujanggak 奎 章 閣 Collectio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Library and at the Changsŏgak 藏 書 閣 Collection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an'gukhak chungang yŏn'guwŏn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 ). Key Words: Jeongjae, Hyangak Jeongjae, Tangak Jeongjae, Uigwe, Garye 투고일 심사일 게재확정일 2013년 3월 20일 2013년 5월 13~24일 2013년 6월 3일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