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ussion Paper Series No. 0806 November 2008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of Modern Korea Hun-Chang Lee Th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 Korea University Anam-dong, Sungbuk-ku, Seoul, 136-701, South Korea, Tel: (82-2) 3290-1632, Fax: (82-2) 928-4948 Copyright 2008 IER.
한국 근 현대의 국제환경 한 중 일 관계를 중심으로 ***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of Modern Korea) 李 憲 昶 ( 高 麗 大 学 校 政 經 大 学 経 済 学 科 ) Hun-Chang Lee Department of Economics, Korea University E-mail: leehc@korea.ac.kr Office tel: +82 2 3290 2214 HP: 011-9709-3171 * 이 글은 2008 년 7 월 26 일 大 阪 經 濟 大 學 의 黑 正 塾 講 演 會 에서 강연한 20 世 紀 朝 鮮 史 の 国 際 環 境 을 수정, 보완하여 이 대학의 日 本 經 濟 史 硏 究 所 에서 발간하는 經 濟 史 硏 究 12 호(2008)에 수록될 예정의 논문을 번역하면서 다소 수정하였다. 번역상 문투나 호칭의 변화는 있다. ** 1945 년 해방 이후 한반도를 북한과 일본에서는 조선으로 부르지만, 남한에서는 한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강연에서는 朝 鮮 史 란 호칭을 사용하였지만, 여기서는 한국사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호칭이 달라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조선의 호칭은 조선반도의 북부와 만주 일대에 자리 잡은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 - B.C. 108)에서, 한국의 호칭은 기원 전후 반도의 남부를 삼한이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하였다.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 명칭은 조선이고 일제시대의 지역명도 조선이었다. 1392-1945 년간은 조선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경위를 오히려 설명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왕인 고종은 1897 년에 大 韓 帝 國 을 선포하여, 대한제국기(1897-1910)에 대해서는 한국이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일본인은 처음에는 이 국호를 사용하다가 식민지로 병합하자마자 조선이라는 호칭으로 변경하였으며, 식민지화 이전의 조선시대(1392-1910)를 이씨조선시대, 또는 줄여서 李 朝 시대라고도 불렀다. 일본인은 지금까지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다. 식민지도 조선시대라 부를 수 있는 일본에서는,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시대라는 호칭의 사용도 권장할 만하다. 1919 년 상해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大 韓 民 國 임시정부가 성립하였다. 해방 후 남한 정부는 이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그 국호를 받아들인 것이다.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것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되 정치체제를 군주제가 아니라 民 主 共 和 制 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익 해방운동세력은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없었기에 조선이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그래서 북한의 사회주의국가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남북간에 국호가 달라졌으므로, 일본인은 종래 익숙한 호칭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남의 체제가 북의 체제보다 우위에 서는 사실이 명백해짐에 따라, 최근 일본에서도 한국이라는 호칭이 점차 확산되는 것 같다. 조선왕조 이전에는 고려왕조(918-1392)가 있었는데, 앞으로 남과 북이 통일되면 고려라는 호칭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Korea 는 고려로부터 유래하였다. 만약 일방적인 흡수 통일이 아니면, 통일국가의 호칭은 고려가 될지도 모른다. 필자는 조선시대(1392-1910), 개항기 또는 개화기(1876-1910), 대한제국기(1897-1910), 식민지기 또는 일제시대(1910-1945)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해방 후 남쪽 국가를 남한 또는 한국이라고 부르고, 북쪽 국가를 북한 또는 북조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시기의 역사는 한국사라 부른다. 이것은 남한 학계의 일반적인 호칭법이다. 개항기란 근대세계로의 편입이라는 세계사적 규정성을 중시하는 호칭이라면, 개화기란 이 시기 조선인의 능동적 대응을 중시하는 호칭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일제시대, 일본인은 식민지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한국인이 일제시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지배를 받은 사실을 잊지 말자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 의식을 더욱 강조하여 日 帝 强 占 期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학자도 있다. 식민지기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한국인 학자는 일제시대라는 호칭이 일본을 주체로 삼는 문제점이 있고 식민지라는 상황이 그 시대를 잘 대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1. 머리말 이 글은 서로 연관되는 다음 세 가지를 다룬다. 첫째, 한국 근현대의 국제환경은 어떠하였던가. 한국 근대의 기점은 1876 년 朝 日 修 好 條 規 로 잡는다. 이것은 제 3 절에서 다룬다. 둘째, 한국 근현대사에서 국제환경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이것은 제 4 절에서 다룬다. 셋째, 근현대 국제환경은 어떻게 인식되었던가. 이것은 제 2 절과 제 5 절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글의 대상에 대해서도 다음의 점을 미리 말하고 싶다. 첫째, 여기서 근현대 국제환경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전 시기도 간단히 살펴본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 위에서 21 세기를 전망한다. 둘째, 국제환경 중에서는 동북아시아 3 국의 관계, 그중에도 한일관계에 중점을 둔다. 셋째, 국제환경을 경제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이것은 필자의 전공 때문만이 아니라, 근대에는 경제적 관계가 특히 중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외교군사적 관계와 문화적 교류도 중요하며, 이들 각 측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 과제를 다루고자 한다. 2. 국제환경을 바라보는 관점 한국인이 국제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들이 소속된 세계의 주도적 가치판단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문명과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근대에 그 관점은 세 차례의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1) 제 1 단계: 문명과 야만의 국제관계론 1870 년대까지 조선은 중화세계질서에 깊게 편입되어 있었다. 주지하듯이, 전근대 중국의 세계관은 華 =문명과 夷 =야만을 준별하였다. 중국의 明 이 멸망한 1644 년 이후에는 조선은 자신이 문명의 중심지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여기에 반대하여 18 세기에는 淸 이 여전히 선진문명으로서 학습의 대상이라고 보는 북학파가 출현하였다. 북학파에 속하는 洪 大 容 은 서양의 地 圓 說 을 받아들여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세계질서관을 극복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근대문명이 성립한 후에, 미개한 전근대문명으로부터 근대문명으로 진보한다는 계몽주의 역사관이 성립하였다. 유럽문명이 중국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화이관을 가진 사람이 그것과 친화적인 계몽주의 문명관을 수용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새로운 문명관을 동북아시아 3 국 가운데서는 일본이 가장 신속히 받아들였다. 福 沢 諭 吉 는 1875 년부터 發 賣 된 文 明 論 之 槪 略 에서 구미를 최상의 문명국 으로, 아시아 제국을 半 開 의 나라 로, 아프리카를 야만의 나라 라 하였다. 그는 문명- 半 開 -야만이 상대적인 명칭이지만, 인류가 마땅히 経 過 해야 할 단계 로 보았다. 그는 半 開 와 야만을 인간 정신의 탓으로 돌렸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인 兪 吉 濬 은 1886-1892 년간에 집필한 西 遊 見 聞 에서 개화의 등급을 개화- 半 개화- 未 開 化 =야만으로 나누었다. 그는 福 沢 諭 吉 의 문명관을 그대로 수용했던 개화파이다. 조선의 1880 90 년대는 華 夷 観 과 계몽주의 문명관의 투쟁기였던 것이다. 20 세기초에는 새로운 문명관의 승리가 확고했으나, 이 시점에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동아시아문명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에 빠져 있던 중국인은 조선인보다도 유럽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하기가 힘들어서, 梁 啓 超 는 1899 년의 自 由 書 에서 계몽주의역사관을 피력하였다. 華 夷 観 은 문명국이 야만국과 공존하면서 도덕적 감화로 문명을 전파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문명관은 한편으로는 문명국의 야만국에 대한 문명화의 사명을 내세우고, 2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진화론을 통해 문명국에 의한 미개국의 지배를 適 者 生 存 의 결과로 정당화하였다. 광대한 구중국은 대외 진출에 관심이 약했던 반면, 유럽과 일본의 근대국민국가는 대외 진출의 열망이 강렬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福 沢 諭 吉 가 새로운 문명관뿐만 아니라 문명화의 사명을 선구적으로 주창하였다. 그는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 사이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이 조선에 文 明 流 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협력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자는 입장이었으나,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변혁을 추구한 조선의 1884 년 갑신정변의 실패에 실망하고, 1895 년에 일본이 아시아 동방의 대오를 1 이탈하여 서양 문명국과 進 退 를 함께 하자는 脫 亞 入 歐 論 을 집필한 바 있다. 식민지기까지도 일본인이 국제환경을 보는 시각은 福 沢 諭 吉 의 이러한 문명관에 바탕을 두었다. 고대에 아시아가 유럽보다 선진적이었다는 것을 알던 유럽인은 근대에 거꾸로 후진적으로 변한 아시아사회의 停 滯 論 을 만들었다. 이 사론은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문명화의 사명관을 지원하였다.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 이전이 조선이 선진적인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마찬가지로 조선사 정체론을 제기하였다. 그것은 문명화 사명론과 더불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기능하였다. 즉, 정체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근대문명의 施 惠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제 2 단계: 억압과 수탈의 국제관계론 華 夷 観 을 고수하는 조선의 衛 正 斥 邪 派 는 구미의 洋 夷 를 利 欲 만 추구하는 침략세력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양이와의 무역조차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계몽주의 문명관을 받아들인 개화파는 원래 근대세계의 침략성에 대한 경계 의식이 약하였으나, 그중에도 萬 國 公 法 질서 아래 弱 肉 强 食 의 적자생존경쟁이라는 현실을 直 視 하는 인사가 늘었다. 이들은 일본에 의한 조선의 주권 침탈이 자유, 정의 및 평화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해친다고 비판하였으나, 제국주의를 알 수 없었다. (반)식민지화를 문명화 사명으로 정당화하는 paradigm의 극복을 위한 자극은 주로 Marx-Lenin 주의에서 제공되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 지배가 낡은 아시아사회를 멸망시키는 파괴의 사명, 그리고 서구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아시아에 놓는 再 生 의 使 命 을 함께 가진다고 보았다. 2 마르크스는 문명화의 사명을 중시하였으나, 그가 제시한 국내 착취와 억압의 논리는 국제관계에 원용될 수 있었다. 레닌 등의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측의 경제적 이익을 일방적으로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유럽 열강의 대외 진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을 제공하였다. 그러면 제국주의측은 자신의 일방적인 이익의 추구를 위해 억압과 수탈을 불사한다는 관점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제 1 차 세계대전 후 미국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을 주창하고, 레닌은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지하였다. 민족자결론과 제국주의론은 조선 등이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을 촉발하였다. 1919 년에 일어난 거족적 반일운동인 3 1 운동이 민족자결론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강론적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사회진화론을 널리 수용하였으나, 식민지화된 후에는 식민지화를 적자생존의 결과로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3 식민지기에 일본에 의한 문명시혜론이 압도하는 가운데 조선인 학자들이 조선인 산업의 위축 등 식민통치의 부작용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1945 년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식민지기를 帝 國 主 義 收 奪 史 로 바라보는 시각의 1 吉 野 誠 東 アジア 史 のなかの 日 本 と 朝 鮮 明 石 書 店, 2004, pp. 239-240. 2 田 中 正 俊 中 國 近 代 經 濟 史 硏 究 序 說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73, p. 268. 3 張 圭 植 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주의 연구 혜안, 2001, pp. 116-7. 3
전환을 낳았다. 1910 년대 토지조사사업은 국유지의 창출을 위한 토지 수탈의 과정으로, 1920 년대 산미증식계획은 미곡 수탈을 위한 農 政 으로, 1930 년대 군수공업화는 자원과 노동력의 약탈과정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1960 년대부터는 조선후기에 資 本 主 義 萌 芽 등 근대지향적 요소가 출현하였다는 내재적 발전론이 대두하였는데, 이 사론은 이러한 요소가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로 인하여 왜곡, 壓 殺 당하였다는 시각을 제공하였다. 4 이리하여 (반)식민지화를 문명화 사명으로 간주하는 paradigm의 극복을 위한 사론이 갖추어졌다. 1960 년대에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기를 설명하는 제국주의수탈론은 통설이 되었다. 1970 년대부터는 종속이론이 제 2 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남조선=한국의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논리로서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종속이론은 남미의 저개발(Underdevelopment)이 선진자본주의와의 불평등한 거래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으로부터 성립한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과 제국주의수탈론은 해방 후 한국을 설명하는 종속이론과 잘 결합될 수 있었다. 5 제 1 단계와 제 2 단계의 국제관계론은 민족주의와 관련을 가진다. 제국주의 국가는 문명화사명론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후진국에 진출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데에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국민적 지지를 불러모았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지역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그것은 저항세력의 결집에 이용되었다. 민족자결론은 피압박지역의 민족주의에 대한 국제적 배려라 하겠다. 조선에서 민족의 형성과정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조선말기 국가 존망의 위기 가운데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별 異 論 이 없다. 이 민족주의가 있었기에 1919 년의 거족적 반일운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내재적 발전론, 제국주의수탈사론 및 종속이론이 확산되는 데에 지원하였다. (3) 제 3 단계: 근대세계의 형성 심화론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主 流 경제학의 史 論 으로서 냉전시대에 성립한 성장사학은 식민지기를 개발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20 세기 후반에 세계는 자본주의의 번영과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하였고, 세계 학계에서는 경제사를 포함하여 주류경제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압도하게 되었다. 성장사학에서는 근대를 연평균 3% 이상의 지속적 성장이 가능한 시대로 보았는데, 1970 년대에 溝 口 敏 行 과 徐 相 喆 은 전시통제기를 제외한 1940 년 이전 식민지기의 평균성장률이 3% 이상이라고 추계하였다. 6 그후의 더욱 정확해진 추계에서도 그러한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7 이러한 추계는 식민지기 개발론에 결정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1980 년 후반의 현실은 한국사학의 새로운 paradigm 으로의 전환을 촉구한 중대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1986-8 년간 호황기에 다액의 무역흑자가 발생하여 외채문제가 해소되었다. 1987 년에는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그 배경에는 경제발전이 있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종속이론이 발붙일 현실적 근거를 박탈한 셈이며, 나아가 식민지기를 해방후 경제발전의 前 史 로서 접근하는 학풍을 대두시켰다. 4 식민지기 조선에 관한 연구의 동향은 이헌창 韓 國 經 濟 通 史 (제 3 판), 法 文 社, 2006, 제 7 장 제 1 절을 참조하고, 그에 관한 주를 생략한다. 5 이대근 편 한국자본주의론 까치, 1984. 6 溝 口 敏 行 台 湾 朝 鮮 の 経 済 成 長 岩 波 書 店 1975; 徐 相 喆 (Sang-Chul Suh), Growth and Structural Changes in the Kore an Economy, 1910-1940,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7 溝 口 敏 行 梅 村 又 次 編 旧 日 本 植 民 地 経 済 統 計 推 計 と 分 析 東 洋 経 済 新 聞 社 1988;김낙년 편 한국의 경제성장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4
1980 년대말부터 동구 사회주의국과 소련이 붕괴하였고 1990 년대 북조선의 경제위기가 알려졌기 때문에, 좌익 성향이던 학자들도 점차 남조선의 북조선에 대한 체제 우위를 인정하게 되고, 남조선=한국의 미래를 낙관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독재체제 아래 사회주의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것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학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존속시켰다. 그것은 1980 년대까지 강화되었으나, 1980 년대 후반 이후 국내외 현실의 변화로 인해 1990 년대부터 빠르게 약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그 자리를, 경제사학계에서는 성장사학 등 주류경제사학이 점차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에 한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는데, 종속이론은 그것을 불행으로 받아들였다. 종속이론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1990 년대부터는 그것이 한국의 경제 정치발전을 크게 도운 국제환경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1990 년대 이후 한국사학계에서도 성장사학 등 주류경제사학이 발언권을 점차 강화하여 21 세기에 들아와서는 Marxism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식민지기를 개발기 내지 근대화기로 보는 관점이 대두하여 영향력을 증대하여왔다. 이 식민지근대화론은 제국주의수탈론의 논거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한 반면, 제국주의비판론의 입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강한 반발도 있다.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이 조선후기의 발전상을 과대평가하였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는데, 이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지원하였다. 1990 년대 이후 한국은 Globalization의 물결에 깊게 편입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가운데 민족주의가 약화되었다. 그러자 민족주의의 영향이 내재적 발전론과 제국주의수탈론의 객관적 역사 인식을 손상하였다는 비판도 이루어졌다. 새롭게 대두하는 사론에 의하면, 문호개방 이후 동아시아 3 국의 역사는 근대문명의 도입과정이었고,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경험은 그 8 일환이었다. 이것은 제 1 단계의 문명사관에 접근하면서, 심화된 이론과 실증에 토대를 두어 주관적 가치판단의 여지를 한층 줄일 수 있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수용자가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아직 일제시대의 이해를 둘러싼 대립이 심하다. 사론의 전환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4) 史 論 의 진전을 위한 제언 이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福 沢 諭 吉, 兪 吉 濬 등이 인식하였듯이, 문호개방 당시 구미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은 현격한 수준차를 가졌으며, 동아시아 3 국이 문호개방 이후 경험한 가장 중요한 변혁은 근대화로 집약될 수 있다. 인류사의 2 대 변혁은 농업혁명에 의한 농경사회와 문명의 성립, 그리고 산업혁명 등에 의한 근대문명의 성립이었다. 근대화를 정치적으로 민주화, 경제적으로 공업화(Industrialization), 사회적으로는 시민사회의 성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의 혁명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국주의 지배 하의 식민지에서 근대화가 진행된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19 세기 중엽 문호개방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근대화론 이상으로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국제환경을 바라보는 제 3 단계의 시각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제 1 단계의 福 沢 諭 吉 식의 문명사관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 하면 동북아시아 3 국은 모두 전근대로서는 발전된 문명을 달성하였으므로, 문호개방 이후 동북아시아의 변화를 집약하는 용어로서는 문명화보다는 근대화가 더욱 적절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전근대문명으로부터 근대문명으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문명사관은 무방할 것이다. 8 이영훈,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humanist, 2004, pp. 43-4 에서는 조선사정체론의 원조로 비판을 받은 福 田 德 三 에 대하여 처음으로 한국사를 문명사의 시각에서 연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5
식민지기 조선에서 공업화를 포함한 근대화가 진전하고 그 경제성장률이 3% 이상으로 높았다는 사실의 확인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국주의 지배 아래 근대화의 한계 내지 비용이 가볍지 않았다. 공업자본금 중 조선인의 비중은 줄곧 10% 미만이었다. 그리고 교육기회와 고용의 민족별 차별 등으로 인해 조선인 기술자의 성장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역량의 성장은 제약을 받았다. 중등 고등 대학교의 조선인 취학률은 1930 년대 이래 빠르게 늘었지만, 1945 년에도 각각 4.6%, 3.2%, 0.7%에 불과하였다. 戰 時 期 일본인 징용으로 조선인 기술자가 빠르게 늘었지만, 1942 년에도 조선인은 공업기술자는 18%를 차지하는 데에 불과하였다. 조선인은 국가를 다스리고 사회를 통합하는 경험을 쌓을 수 없었다. 식민지 지배로 인한 무형의 비용이 가볍지 않았다. 예컨대 개인적 지위향상노력이 親 日 과 결부되기 쉬워서, 해방 후 식민지기의 친일 문제로 논란에 말려들어왔던 것이다. 둘째, 제국주의 지배가 아니고서는 아시아의 후진국이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호개방 후의 조선은, 일본에는 못미쳤으나, 근대적 변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근대화란 결코 일방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은 아니어서 후진국이 근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고려해야 한다. 선진기술을 흡수하는 역량은 사회적 역량(Social Capabilities)이라 불린다. 9 아시아가 아프리카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과를 거둔 것은 사회적 역량이 더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식민지화 직후부터 연평균 3% 이상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것으로 추계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세력의 근대화 작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식민지화 이전에 축적된 사회적 역량의 지원을 받은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근대화할 전망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면, 식민지기의 근대화가 제국주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근대세계의 선물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근대는 전근대와 달리 높은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시대이고, 세계시장의 형성과 더불어 성립한 근대문명의 전파력은 전근대문명보다 훨씬 강력하다. 근대화에 먼저 성공하여 활기차게 성장하는 일본의 이웃 나라라는 것은 조선의 근대화에 큰 이점이었는데, 그런 이점을 제거한다면 식민지 지배 자체가 조선의 근대화에 유리하였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근대화의 성숙이 국내정치에서는 개인의 권리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면, 국제정치에서는 국가주권이 존중되는 만국공법 질서로 볼 수 있다. 국가주권이 짓밟히는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제 2 단계의 국제관계론을 수용한 근대화론이 요청되는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1919 년에 조선인은 3 1 운동을, 중국인은 5 4 운동을 통해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였는데, 10 이것은 ( 半 )식민지민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다. 근대화란 구미문명의 충격(impact)나 식민지 지배를 통해 단기간에 완수되는 성질은 아니다. 구미문명의 충격 이전의 동북아시아에는 근대화의 수용을 준비하는 축적이 있었다. 그 충격 이후 공업화와 민주화는 장기에 걸쳐 진전되어, 남한은 1980 90 년대에 근대화의 성숙을 이루었고, 중국은 그 시기에 공업화의 성숙 국면으로 나아갔다. 요컨대 근대화란 외부로부터의 일방적인 전달로 인해 성숙될 성질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소화한 다음에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9 Abramovitz, Moses, "Catching up, forging ahead and falling behind," Journal of Economic History 46(2), 1986. 10 Erez Manela, The Wilsonian Moment: Self-Determination and the International Origins of Anti-Colonial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6
이상의 점에서 강연자는 식민지화 이전 한국사의 발전, 식민지기 근대화, 그리고 제국주의의 비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역사상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은 조선시대, 개화기, 식민지기, 해방후 시대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자력적 근대화의 기반을 축적한 다음에, 박정희정부에 의한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는 경제전략의 적극적인 추진에 힘입어 1960 년대에 경제적 도약(take-off)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3. 국제환경의 변화 (1) 개항=개국으로 인한 국제환경의 변혁 동아시아 역사상 국제환경에서의 최대의 변혁은 19 세기 중엽 구미국가에 대한 개방으로 인한 근대세계로의 편입이었다. 중국이 먼저 1842 년의 南 京 條 約, 일본이 이어서 1854 년의 美 日 和 親 條 約, 끝으로 조선이 1876 년의 朝 日 修 好 條 規 과 1882 년의 朝 美 條 約 을 기점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는 開 國, 한국에서는 開 港 이라 불리나, 중국에서는 특별한 호칭이 없다. 이것은 3 국이 각각 이 사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强 度 의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인이 개국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그 문명사적 전환의 의의를 깊게 인식하여 자국을 변혁시키려는 태세를 갖추었음을 드러낸다. 중국은 구미와의 교류를 제한하기는 했지만, 조선 일본과 달리 구미에 대한 쇄국정책을 단행하지는 않았다. 長 崎 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류한 일본이 그런 무역항조차 없던 조선보다 덜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쇄국 하의 일본이 중국보다 유럽문명을 더욱 열심히 학습하였다. 조선에서는 1392 년 조선왕조의 창건을 개국이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에, 용어의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문호개방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한 인식의 사회적 확산은 일본만큼 신속하고 급격하지 않았다. 중국의 반응이 가장 느렸는데, 문명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멍에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용어가 어떻게 선택되었던, 오늘날 역사가가 보면, 이 사건은 3 국 모두에게 혁명적인 의미를 가졌다. 동북아시아 3 국을 모두 근대세계체제에 편입시킨 근대의 기점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20 세기의 국제환경은 이러한 변혁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제환경의 변혁과 결부되어 각국에서는 근대적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3 국 모두가 개방 전에 시장의 발달, 사회의 변동, 사상의 발달 등에서 근대초기=근세적 양상을 경험하였지만, 민주사회와 산업혁명의 전망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개항이 조선의 국제환경에서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자. 개항은 양이 국가에 대한 쇄국을 해제하고 나아가 개방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개항전에 人 臣 無 外 交 라는 동북아시아 고래부터의 외교원칙이 관철되어, 외교사절을 경유하지 않는 민간의 교류는 허용되지 않았다. 무역도 외교사절에 수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외교사절과 무관한 자국민의 해상진출을 금지하는 海 禁 정책이 추진되고, 나아가 조선과 일본은 구미국가에 대해 교류를 전면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조선은 洋 夷 처럼 변한 명치정부의 전통적 의례를 따르지 않는 외교문서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다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해 1876 년에 일본과 수교하고, 나아가 1882 년부터는 자발적으로 양이인 미국 영국 등과 수교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개항장에서의 민간 자유무역이 허용됨에 따라 폐쇄적인 조공무역체제=관리무역체제가 붕괴되었다. 해금은 조선에서 가장 늦게 1882 년이 되어서야 해제되었다. 세계시장에 편입되어 자유무역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무역이 급증하였다. 표 1 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개항기(1876-1910)을 거치면서 실질무역액이 15 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7
개항 직전 무역총액의 국내총생산에 대한 비중이 1.5% 전후이던 것이 1911 년에는 19%로 올랐다. 개항 후에는 처음으로 외국자본이 유입되고 외국기업이 진출하였다. 표 1 개항 이후 조선의 경제와 무역 연도 인구 1 인당 GDP 무역액 (만명) (1990 년 달러) /GDP (%) 1870 1,550 550 1.5 1893 1,600 600 3.0 1911 1,700 660 19.3 1940 2,433 1,200 53.5 1947 1,989 648 1 1962 2,642 1,122 21.7 1980 3,812 4,114 80.3 2000 4,726 14,343 65.0 무역액의 국별 구성(%) 중국 일본 미국 96 4 36.6 62.6 11.5 68.2 5.9 11.9 82.1 1.1 48.2 0.3 10.0 0 27.6 48.6 0.1 22.3 23.8 9.3 15.7 20.1 주) 1947 년부터는 남조선만의 통계. 1911 년 이전의 인구는 權 泰 煥 愼 鏞 廈 朝 鮮 王 朝 時 代 人 口 推 定 に 関 する 一 試 論 ( 東 亞 文 化 14 輯, 1977)의 추계를 하향 조정 1 인당GDP는 1990 international Geary-Khamis dollars로 표시. 1948 년 이후 1 인당GDP는 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Historical Perspective, OECD, 2003; 1940 년 이전 1인당 GDP는Hun-Chang Lee, When and how did Japan catch up with Korea? A comparative study of the pre-industrial economies of Korea and Japan, CEI working paper series, No. 2006-15, Hitotsubashi University. 1870 년의 무역의존도는 李 憲 昶 韓 國 前 近 代 貿 易 の 類 型 と そ の 變 動 に 関 す る 硏 究 ( 經 濟 史 學 36 号, 2004)에서의 추정 1893 1947 년의 무역의존도는 필자의 개략적 추정임. 1911 1940 년의 무역의존도는 金 洛 年 編, 앞의 책, 11 장, 표 1-1 의 추정이고 국민총소득(GNI)로 계산한 것 1870 년 무역의 국별 구성은 姜 德 相 李 氏 朝 鮮 開 港 直 後 における 朝 日 貿 易 の 展 開 歷 史 學 硏 究 265, 1962 p. 10. 1910 1939 년의 국별 무역구성을 1911 1940 년의 난에 표시함. 1893 1910 1939 1947 년 국별 구성은 한국무역협회 한국무역사 1972, pp. 135, 175-80, 228. 1893 년 일본ㆍ중국의 무역은 구미제품의 중계무역을 포함. 1947 년 중국의 무역에 홍콩(19.2%)가 포함. 1962 년의 무역에는 다액의 원조가 포함. 1962 년 무역의 국별 구성과 1962 1980 년의 무역의존도는 통계청, 통계로 본 한국의 발자취, 1995, pp. 319, 329-331 에서, 1980 2000 년 무역의 국별 구성은 관세청 무역통계연보 (http://www.kosis.kr/)에서 구함. 개항은 중국 중심의 외교질서를 변혁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일본과 달리 조선은 중국과 국경을 共 有 하는 관계로 중국 중심의 외교질서인 조공책봉체제에 깊게 편입되었다. 개항 직후 조선은 만국공법의 질서를 알게 되고 1881 년 중국에 조공관행의 변경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중국 중심의 외교질서를 동요시켰다. 조선정부가 구미 국가와의 조약 체결에 적극적인 데에는 중국에 대한 견제의식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개항장 무역의 성장은 조공책봉체제의 실질적인 요소인 조공사절에 수반한 무역체제를 무력화시켰다.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조공질서가 붕괴되었다. 개항은 조선이 중국문명권으로부터 벗어나 洋 夷 가 만든 근대세계에 편입되어 조선인의 문명관이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개항 전에도 조선은 유럽의 종교와 과학기술의 충격을 받았으나, 지정학적 요인, 주자성리학의 강한 지배력 등으로 인해 중국 일본보다 그것에 대한 거부의식이 강하고 이해도는 낮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882 년에 정부가 東 道 西 器 論 의 정책을 천명한 것은 늦은 대응은 아니었다. 동도서기론은 중국의 中 體 西 用 論 처럼 유교 윤리를 기본으로 삼으면서 서양의 기술을 학습하고 제도도 제한적 범위로 도입하자는 정책이념이었다. 일본의 明 治 維 新 에 상응하는 변혁을 추구하는 變 法 開 化 派 가 1884 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들이 바라던 수준의 개혁은 1894 년의 갑오개혁으로 8
달성되었으나,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부와 곧 무너졌다. 조선의 국가와 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점차 근대문명권에 깊게 편입되어갔다. 문명관의 전환은 세계관의 전환을 수반하였다. 1402 년 조선에서 제작된 混 一 疆 理 歷 代 國 都 之 圖 는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로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를 포괄하였다. 그 이후 세계지도의 제작기술은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17 세기초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식 세계지도가 전해져서, 일부 지식인의 세계관이 변하였다. 그런데 사회 전반은 華 夷 의 천하관을 고수하였고, 동북 아시아 지역 외에는 무관심하였다. 개항 이후 화이의 천하관이 무너지면서 전세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비로소 나타났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서 1883 년부터 발간된 漢 城 旬 報 는 외국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그 1 호에는 地 球 圖 解 地 球 論 論 洲 洋 이라는 논설을 수록하였다. 이 논설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개항을 기점으로 조선은 중화세계 속의 내륙지향적 국가로부터 지구적 세계 속의 해양도 중시하는 국가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개항을 계기로 조선과 교류하는 중심적인 국가는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변하였다. 개항 전 조선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중국 문명을 열심히 학습하였으나, 중국과의 교류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에게 두번째로 중요한 나라는 일본이었으나, 조선이 일본에 관심을 가진 주된 동기는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부차적인 동기는 비자급품의 수입이었다. 그래서 1637-1874 년간 중국으로의 사절 파견은 474 회에 달한 반면, 1606-1874 년간 일본에 파견된 通 信 使 는 12 회에 불과하였다. 개항 전 조선시대에도 대일관에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15 세기 일본사절을 통해 일본경제가 조선보다 번창하다는 사실이 보고되었고,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인은 일본의 강한 군사력을 체험하였고,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를 통해 소수 학자는 일본의 문화 발달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제한된 범위에 국한되어, 일본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려는 발상은 개항전에 확산되지 않았다. 17 세기 일본 銀 유입의 급증으로 17 세기 후반에는 한국사에서는 처음으로 대일무역이 대중국무역과 대등해졌으나, 18 세기 전반 일본 은 유입이 급감하였다. 개항 후부터 청일전쟁까지는 일본과 중국은 조선에 대등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동북아시아 역사상 두 중심지가 존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근대문명의 위력은 일본을 중국과 대등한 중심지로 부상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압도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고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동아시아의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1880 년의 제 2 차 일본시찰단의 보고 이후 조선은 일본을 근대문명의 주된 도입창구로 삼았다. 개항 직전 중국무역과 일본무역은 각각 3 백만 圓, 12 만원 정도였으나, 1881 년경부터는 일본무역이 중국무역을 능가하였다. 개항 후 조선의 수출대상국은 계속 압도적으로 일본이었다. 수입에서는 중국의 비중이 1893 년에 49%까지 증가하여 일본과 대등해졌으나, 청일전쟁 후 격감하여 1910 년에는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개항을 기점으로 조선의 역사적 무대가 동북아시아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후기신라시대(676-918)에는 인도에 불교를 배우러 간 스님들이 있었고, 이슬람국가와 교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물론 동북아시아를 벗어난 신라인은 소수였고 동북아시아 이외와의 무역은 미미하였다. 이후에는 점차 조선인의 외국진출이 약화되고 교류의 지역적 범위가 축소되었다. 그래서 개항 전 2 세기 이상 동안 조선은 중국 일본 이외의 국가와 교류한 적이 없다. 17 세기 이후에는 중국을 통해 유럽의 과학기술이 소개되고 기독교가 유입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일본의 蘭 学 과 같은 것은 없었다. 1880 년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구미국가와 수교하였다. 조선의 경제교류는 일본과 중국에 편중되었지만, 구미의 사람 재화 정보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구미열강이 조선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9
없다. 개항 이후 조선은 다원적인 국제교류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은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 일본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관계에 들어갔다. (2) 제국주의시대의 국제환경 국제관계는 외교군사적 차원에서 평화-대립-전쟁, 그리고 정치적 차원에서 대등- 종속-지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항전 조선은 중국과는 수직인 사대외교관계를, 일본과는 수평적인 교린외교관계를 맺었다. 중국과의 불평등한 조공책봉관계는 조중간 평화를 장기간 제공하여, 신라가 당의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 기도를 막아낸 676 년 이후에는 조중간에는 전쟁이 없었다. 滿 蒙 세력이 종종 조선반도를 침공하였으나, 원, 이어서 청의 성립으로 만주에서의 독자적 정치세력이 소멸되면서 그러한 갈등이 없어졌다. 1592 년 침략한 일본의 대군이 완전히 철수한 1598 년 이후, 그리고 청의 대군이 침략한 1636 년 이후부터 1874 년 일본의 台 湾 出 兵 까지 2 세기 이상 동안은 동북아시아 3 국간에는 조그만 군사적 충돌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시대였다. 조선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유럽 열강의 개방 압력을 늦게 받았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제국주의시대가 성립한 시점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만국공법의 질서는 불평등한 조공책봉체제를 동요시키고 수평적 국제관계의 기대를 낳았지만,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지배체제가 성립하였다. 조선정부는 自 强 을 도모하지 않고서는 만국공법으로도 열강에 의한 약소국의 주권 침해를 막을 수는 없는 현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1881 년 일본을 시찰한 魚 允 中 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춘추전국시대보다 치열하게 爭 覇 하는 大 戰 國 시대와 같으며, 그속에서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여간 것은 근대화 역량이 약함에 반해 국제환경이 가혹하였기 때문이다. 조일수호조규부터 불평등조약이었고, 조약의 불평등성은 갈수록 심해졌다. 조선의 국제조약의 불평등성이 일본보다 가혹하였고 중국보다 덜하지 않았다. 중국, 일본 및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적 지배까지 노렸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시대가 성립하는 가운데 중국은 조선과 의례적 성격의 조공책봉관계를 실질적인 지배종속관계로 전환하고자 했다. 중국은 1879 년 일본의 琉 球 합병에 자극을 받아 조선에 대한 개입을 적극화할 생각을 굳히고, 1882 년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외교와 내정의 자주성을 침해하였다. 이 중국의 압력이 조약의 불평등을 심화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일본은 임오군란에 대한 중국의 개입을 계기로 조선을 둘러싼 중국과의 대결노선을 굳혔고 1890 총리대신이 利 益 線 인 조선을 지키자는 시정방침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11 년에는 1880 년대 중엽 이후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구미 열강을 자극하고 제국주의적 대립을 촉발하였다. 조선의 자주적 변혁을 좌절시킨 최대의 외압이 중국과 일본의 경쟁적인 개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항된 지 6 년만에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은 조공체제의 붕괴를 낳은 동시에 일본의 조선을 지배하는 데에 1 차 걸림돌을 제거하기도 했다. 1874 년 일본의 대만 出 兵 부터 1953 년 한국에서의 終 戰 까지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가장 치열한 대립이 장기간에 걸쳤던 시기였다. 그 정점에 위치한 사건은 1910 년 일본의 11 芝 原 拓 自 日 本 近 代 化 の 世 界 史 的 位 置 岩 波 書 店 1981 第 6 章 10
조선병합과 1930-45 년간 일본의 중국침략전쟁이었다.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드러나듯이, 구미열강이 동북아시아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표 1 에 의하면, 제국주의시대에 조선의 무역이 급성장하였고, 그중 조일무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일본과 식민지의 사이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무역의 팽창 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식민지에 일본의 자본재도 다량 공급되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일본자본의 대거 유입과 결합하여 조선의 공업화를 낳았다. 12 세계의 식민지 가운데 일본의 식민지에는 식민지 모국민의 비율이 특히 높았고, 1941 년 조선의 1 인당 해외순자본 73 달러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1913-41 년간 일본과 그 식민지의 경제성장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13 (3) 1945 년 終 戰 後 국제환경 1945 년 종전후 제국주의체제가 해체되는 동시에 국가주권을 존중하는 국제환경이 조성되어 조선은 독립을 얻었다. 1945 년 종전과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대립국면을 맞이하는 가운데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50-3 년간 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개항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환경에서 근대세계로의 편입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20 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체제와 20 세기 후반의 사회주의체제이다. 이 제국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는 근대세계의 派 生 物 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국가의 대외팽창 욕구가 제국주의시대를 낳았으며,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출현한 사회주의체제는 20 세기말부터 소멸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20 세기 세계사에만 국한할 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회국가의 출현과 붕괴라 할 수 있겠다. 제 2 절에서 설명한 제 1 단계와 제 3 단계는 근대화론의 관점이라면, 제 2 단계는 제국주의 비판의 관점이며, 사회주의적 관점과도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는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사회주의체제를 다루지는 않고, 해방 후에는 남조선=한국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해방 후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1876 년 이전의 중국과 동일한 위상을 가진 선진국으로서 학습의 대상이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양국간 불가침을 위해 필요했던 반면, 미국과의 외교관계는 사회주의국과의 군사적 대치를 지원하는 데에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중국은 조선에 필요한 물품을 수출하는 존재였으나, 미국은 중요한 수입지일 뿐만 아니라 비중이 높은 수출시장도 제공해주었다. 해방 후 한국은 1950 년대까지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으나, 1958 년부터 원조가 감소하는 가운데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의 자본 기계 부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협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는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1965 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였다. 그 후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부의 선택의 옳았다는 인식은 점차 확산되어 20 세기말에는 대세를 이루었다. 한일국교정상화의 1965 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최대 수출국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최대 수입국과 최대 자본도입국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1961-95 년간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장기자본은 총 133 억 달러인데, 총무역적자액은 1,102 억달러였다. 20 세기말에 사회주의국가의 개방정책 또는 붕괴, 그리고 세계화(Globalization)시대의 도래는 한국의 국제환경을 변혁시켰다. 한국은 사회주의국가인 12 堀 和 生 編 著, 東 アジア 資 本 主 義 史 論 ミネルバ ァ書 房, 2008, 総 論 13 Angus Maddison,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2030 A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Table 3.14, 3.15, and 3.17. 11
중국 러시아 북조선과 경제교류를 확대하였다. 1992 년 한 중수교 이래 양국간 경제교류가 급격히 확대된 결과, 2004 년에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하였으며, 해외투자 대상국의 수위 자리는 2002 년에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였다. 표 1 에 드러난 바와 같이, 20 세기 후반 일본과 미국을 합한 무역액의 비중이 하락하는 추세였다. 1950-80 년대에는 무역액의 과반을 미 일이 차지할 정도로 경제교류가 편중되었으나, 1990 년대부터는 사회주의국가뿐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 등 세계 각지와의 무역이 특히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다원적인 국제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국제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의 해외진출능력의 향상에도 기인하였다. 4. 국제환경과 역사발전 福 沢 諭 吉 는 정신을 문명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지만, 오늘날 학설로 본다면, 기술과 제도가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정신문화는 주로 환경의 산물로서 문명발전의 부차적 요인으로 보인다. 오늘날 경제학계는 경제발전의 지역간 격차를 낳은 중심적 요인을 지리, 무역 및 제도로 잡는다. 무역은 국제교류의 중심적 구성요소이므로, 국제환경은 경제발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타인과 교류하면서 배우고 경쟁하는 것이 개인의 발전에 중요하듯이, 국제교류는 국가의 정치 경제 등의 발전에 긴요하다. 어떤 국가도 필요한 기술과 제도를 다 발견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지식과 정보의 교류가 없는 인류문명의 발전은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 속의 국제분업을 통해 성립하였다는 월러스틴의 이론은 국제관계가 근대화를 설명하는 본질적 요소임을 보여준다. 14 표 1 은 20 세기에 조선경제가 성장하였고, 그것은 무역성장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무역이 빠르게 성장하는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경제가 성장하였다가, 해방 직후 무역과 더불어 경제가 급격히 위축하였으며, 고도성장기에는 무역이 급성장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중세까지 세계 최고의 선진 문명을 달성한 중국에 인접한 지정학적 환경에 힘입어 선진적인 국가체제를 일찍 수립하였다. 그런데 한대 이후 중국은 경제발전이 완만해져 중세에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전한 서유럽에 16-17 세기 전후 추월당하였다. 조선도 중국처럼 완만히 발전하는 데에 그쳐 서유럽과 일본에 추월당하였다. 19 세기 전반에 조선은 1 인당 소득으로는 세계 하위권이나 인구 밀도, 문화 정치 수준 및 사회적 역량을 고려한 문명 전반의 수준에서는 중위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朴 齊 家 는 1778 년에 집필한 北 學 議 에서 작은 반도국가인 조선이 해상무역으로 부유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금지하여 가난해졌다고 했다. 조선의 해상진출은 9 세기에 활발하였으나, 10 세기부터 약화되어 14 세기말에 두절되었다. 그리고 근세에 유럽이 기술 발전, 나아가 공업화에서 선두에 선 중요한 요인을 정치적 분열로 새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이 중국이나 이슬람세계보다 훨씬 빈번히 이주할 수 있었던 국제환경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15 동북아시아의 폐쇄적인 국제환경은 유럽에 추월당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고, 그중 가장 폐쇄적이고 작은 조선에게 가장 심각한 타격을 14 Wallerstein, Immanuel, The Modern World system I ( N ew York: Academic Pres s, 1974). 15 Deirdre McClosky, "1780-1860: a survey," The Economic History of Britain Since 1700,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Reprinted 2000), p. 270. 12
가하였다. 일본의 도쿠가와시대에는 3 都 와 領 國 으로 구성되는 축소형 세계경제가 존재하고 16 네덜란드로부터 유럽 학문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쇄국정책이 심각한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조선은 왜 근대문명의 도입에 늦었던가. 첫째, 조선은 구미인이 찾아오기 힘든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둘째, 조선은 조공체제에 깊게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공체제로부터 벗어난 구미인의 무역 요구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華 夷 관념이 강하고 무역이익 추구에 소극적인 주자성리학이 영향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국경을 같이 하여 조공체제에 깊게 편입되고 유학의 영향력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근대문명의 도입에 늦은 주된 요인은 국제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반면 개항 후 조선에 근대사상이 빠르게 도입되고 1880-4 년간 근대화정책이 진전하였는데, 그것은 근대문명을 성공적으로 도입하는 일본이 가까이서 강한 자극을 제공한 데에 크게 힘입었다. 그런데 2 절에서 설명하였듯이, 국제환경의 가혹함은 근대화정책에 지장을 주었다. 1910-40 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 이상인 것은 거의 확실시된다. 그렇다면 이 기간에 1 인당 생산은 연평균 1 2% 증가한 셈이 된다. 이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으로서 근대경제성장의 요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경제성장률은 0.2 0.3%로 추정되므로, 식민지기의 경제성장률은 그 10 배 이상이다. 17 그런데 식민지화된 직후부터 경제성장률이 3% 이상으로 추계된 것으로 보건대, 개항기(1876-1910) 무역의 급증, 그리고 근대적 사상 기술 제도의 도입 등으로 근대적 성장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식민지기에 민족간 소득격차가 심하였지만, 전시통제기를 제외하면 조선인의 생활수준은 하락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뚜렷한 향상을 본 것은 아니었다. 통설은 대량 미곡의 일본 반출로 인해 조선인의 식생활이 악화되었다고 보는데, 각종 식품 소비를 보아 1 인당 총칼로리 섭취량이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미숙련노동자의 임금은 정체하였으나, 숙련노동자의 임금은 상승하는 추세였다. 조선인의 신장이 별 변화가 없다는 연구도 있다. 18 식민지기 조선의 1 인당 소득은 일본의 절반이거나 그 이하였다. 19 朝 鮮 總 督 府 의 조사에 의하면, 1930 종사하였는데, 農 家 戶 數 의 48.3%가 보리가 수확되기 전인 3-5 春 窮 農 家 였다. 조선인 중ㆍ하층의 생활수준은 困 窮 하였던 것이다. 년 有 業 者 人 口 의 78.5%가 농업에 월에 식량이 떨어지는 16 이헌창, 前 近 代 商 業 に 關 する 比 較 史 的 視 點 東 アジア 專 制 國 家 と 社 會 經 濟 靑 木 書 店, 1993, pp. 236-7 17 Simon Kuznets 에 의하면, 근대적 성장률은 1 인당 소득 연평균 2%와 인구 1%를 합친 3% 정도이며, 이것은 중세초부터 19 세기까지의 유럽 성장률보다 10 배 정도 높다( Modern Economic Growth: Findings and Reflections,"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63, No. 3, 1973). 18 Mitsuhiko Kimura, "Standards of Living in Colonial Korea : Did the Korean Masses Become Worse off or Better off under Japanese Rul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Vol. 53, No. 3, 1993;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05; 주익종, 민간인소비지출의 추계 김낙년 편, 앞의 책, 2006; 최성진 식민지기 신장변화와 생활수준 경제사학 40, 2006; 차명수ㆍ이우연 식민지기 조선의 임금 수준과 구조 경제사학 43, 2007. 19 1990 년 국제물가로 표시한 1934-6 년간 조선의 1 인당 생산은 662 달러로 일본의 당시 일본의 38%에 불과하는 추계가 있다(Fukao, Kyoji, Debin Ma and Tangjun Yuan, 2006, Real GDP in Pre-War East Asia: A 1934-36 Benchmark Purchasing Power Parity Comparison with the U.S., Hitotsubashi University Research Unit for Statistical Analysis in Social Sciences, Discussion Paper No. 132, Tokyo: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Hitotsubashi University). 13
유럽인은 멀리 떨어진 데다가 질병 등으로 정착하기 힘들었던 열대 지방의 식민지에서는 단기적 이익을 챙기는 데에 주력하여 제도 정비와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20 그에 비해 일본인은 기후가 정착하기에 좋고 일본 제국의 방어와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선에 대해 한편으로는 자치의 봉쇄, 문화의 말살 등 강압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21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의 개혁과 사회간접자본 공업의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일본자본주의가 빠르게 팽창하였기 때문에, 일본 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일본과의 무역이 급증하였다. 그래서 식민지기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경제와 생활수준은 전시통제기에 후퇴하였고, 표 1 에 나타나듯이, 해방 후에 더욱 급격히 후퇴하였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에 반대하여 개발 없는 개발 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22 한국은 고도성장을 개시하던 1963 년에도 가난한 나라였고 농림어업이 취업자의 63%, 국내총생산(GDP)의 43%를 차지한 농경사회였다. 1940 년의 광공업 비중인 19.4%나 지출 중 투자의 구성비인 16.5%를 회복하는 것은 1965-6 년경이었다. 23 분단과 전쟁이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나, 1950 년대 미국의 대량 원조로 남한의 산업설비는 재건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식민지기에 일본인이 공업자본의 9 할 이상을 차지하고 고급 인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인의 인적 자본의 축적을 억제하여 해방 후 경제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조선경제가 일본제국의 한 영역으로 편입된 것도 경제후퇴의 한 요인이다. 表 1 에 나타나듯이, 식민지기 조선의 무역의존도가 높은 가운데 일본 무역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전자는 세계시장으로 통합의 진전으로 볼 수 있겠으나, 후자는 일본경제로의 종속 심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 후 조선은 근대적 성장을 지속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상으로 보건대, 장기적 관점에서 보아 식민지지배를 통한 근대문명의 이식이 한국의 주체적인 일본 학습보다 사회와 경제의 성숙에 유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해방 후 정치적ㆍ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후퇴는 이러한 가설을 지지한다. 1963-96 년간은 고도성장기였다. 1973 년에는 농림어업 종사자가 취업자의 절반 이하로 줄고 1978 년부터 부가가치 생산에서 제조업이 농림어업을 능가하였다. 1979 년 OECD 보고서는 10 개의 新 興 工 業 國 (NICs)을 선정한 가운데 한국을 포함하였다. 中 村 哲 에 의하면, 한국은 1960 70 년대의 발전으로 中 進 資 本 主 義 國 이 되었다. 24 1986-9 년간 호황기에는 외채 누적문제가 해소되었다. 한국인 생활수준의 향상은 대부분 고도성장기에 실현되었다. 메디슨(A. Maddison) 추계 등을 참조하면, 1990 년 국제물가로 표시한 한반도의 1 인당 생산(GDP)은 서력 기원으로 바뀔 무렵 450 달러 정도, 1900 년경 600 달러 정도였다. 전근대에는 1 인당 생산은 그다지 증가하지 20 D. Acemoglu, S. Johnson & J. A. Robinson, The Colonial Or igins of Comparative Development: An Empirical Investig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91, 2001. 21 일본이 문화억압 정책을 추진한 것은 문화수준의 격차가 크지 않은 식민지를 지배하고 나아가 동화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22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05. 23 김낙년 편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p. 296. 24 中 村 哲 著 ㆍ 安 秉 直 譯, 世 界 資 本 主 義 와 移 行 의 理 論, 比 峰 出 版 社, 1991, 제 1 장. 14
않아서, 19 세기 이전의 2 천여년간에 2 배 이상 증가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10-40 년간 650 달러 정도로부터 1,200 달러 정도로 증가하였으나, 해방 직후 대략 1910 년 수준으로 격감했다. 1950 년대 원조에 의존하여 경제가 만회되었지만, 1962 년에도 한국은 1 인당 생산이 1,122 달러에 불과한 몹시 가난한 나라였다. 1 인당 생산은 2000 년 14,343 달러이니 20 세기에 약 24 배 증가하였는데, 1963-96 년간 고도성장기에 1 인당 생산이 13 배 상승하였다. 25 제 2 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체제가 붕괴한 이후 세계경제가 번영을 구가하는 가운데 무역자유화가 진전하고 자본과 기술이 국가간에 원활히 이동하였는데, 전후 경제발전은 이처럼 유리한 국제환경의 덕을 크게 보았다. 1948 년 출범한 한국정부는 민주적인 헌법을 마련하였으나,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은 1987 년 이후였다.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개방된 국제환경에서 선진민주주의국가와의 교류도 정치발전을 낳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15 세기의 조선은 국가체제 문화 과학기술에서는 높은 수준이었으나, 시장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시장이 성장하였지만, 높은 수준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국가제도 문화 과학기술의 성숙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 반면 20 세기 후반의 경제발전은 정치 사회의 성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15 세기에 시장이 낮은 수준에 머문 중요한 요인은 민간무역의 억압이었던 반면, 고도성장을 낳은 중요한 요인은 대외지향적 전략이었다. 26 조선시대에 해상무역이 금지된 것은 내륙지향적인 중화세계의 지정학적 질서에 깊게 편입되었기 때문이고, 20 세기 후반 무역국가로서 한국의 발전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깊게 편입된 데에 크게 힘입었다. 국제환경과 그에 대한 국가전략은 한국사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림 1 을 통해 동북아시아 국가간 1 인당 생산(GDP) 격차의 추이를 살펴보자. 이것은 소득격차를 결정한다. 메디슨의 각국별 1 인당 생산 추계는 20 세기 전반 이전에는 시기가 멀어질수록 정확도가 낮아지나, 대체적인 추이를 보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도쿠가와( 德 川 )시대 일본의 경제적 성취가 중국ㆍ조선을 능가하여, 18 세기부터 일본과 조선ㆍ중국의 사이에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1880 년대 일본이 먼저 공업화에 성공하여, 그 격차는 더욱 확대되어 1910 년대에 일본의 소득은 조선과 중국의 2 배 정도 되었다. 이 격차는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축소되지 않다가, 종전 직후에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래서 1970 년 일본의 1 인당 GDP 는 한국의 5 배로 양국간 격차가 가장 컸다. 대만은 한국보다 소득이 약간 높았다. 중국 사회주의의 낮은 성과와 한국의 고도성장으로 한ㆍ중간 소득격차도 1960 년대부터 커져 1991 년에 한국은 중국의 5 배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의 공업화가 차례로 진전됨에 따라 소득격차가 축소되었다. 1992 년부터 한국의 1 인당 생산은 일본의 절반을 넘게 되었다. 1992 년부터는 한ㆍ중간 소득격차가 축소되어왔다. 이렇게 본다면, 20 세기 후반에는 동북아시아 국가간 소득격차가 가장 현저하게 확대되었다가 축소되는 추세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공업화의 시차를 반영한다. 25 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Historical Perspective, OECD, 2003; Hun-Chang Lee, When and how did Japan catch up with Korea? A comparative study of the pre-industrial economies of Korea and Japan, CEI working paper series, No. 2006-15, Hitotsubashi University. 26 대외지향적 전략을 추진한 1963 년부터 수출확대가 산업생산의 증가에 크게 기여한 사실은 잘 밝혀져 있다(이헌창, 앞의 책, p. 557). 15
그림 1 1820-2001 년간 동북아시아 국가간 1 인당 생산(GDP) 출처: 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Historical Perspective OECD 2003 주:1900 년 이후의 눈금은 그전에 비해 10 배임. 일제시대의 중심적인 工 業 地 帶 가 위치한 북한은 1960 년대까지도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으나, 아마도 1970 년대에 남한에 추월당하고, 이후 남북간 격차가 계속 확대되었다. 그 주된 요인은 북한이 시장을 폐지하고 국가의 강제의 의한 자원의 동원에 의존하는 발전전략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는 사실로서 自 力 更 生 의 자립적 민족경제를 확립하려는 전략을 추구하여 국제적인 자극을 배제하고 국제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북한의 낙후를 초래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북한은 1970 년대부터 서서히 개혁ㆍ개방을 추구하였으나, 그 정책이 소극적이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27 냉전체제 아래 군사적으로 대치한 남 북한은 모두 조속히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북한경제의 침체를 낳은 중압으로 작용한 반면, 뒤에 추진한 남한에서는 가볍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으나 결국 공업고도화에 기여하였다. 남한의 성공은 북한보다 탄탄한 소비재공업의 기반 위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고, 북한과 달리 수출공업으로서 육성하였기 때문이다. 1950 년만 해도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의 1 인당 GDP 가 세계 평균보다 낮았으나, 1950 년대에는 일본이, 1970 년대에는 대만과 한국이 세계 평균을 능가하게 되었다. 1990 년대부터 광대한 중국이 세계 평균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북조선만 1970 년대부터 세계 평균과 멀어지고 있다. 북한을 제외한다면, 20 세기 후반에 동북아시아국가들은 서로 격차를 줄이면서 세계적으로 높은 경제적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27 李 憲 昶, 앞의 책, 12 장. 16
돌이켜보건대, 21 세기에 진입한 오늘날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잘 살게 된 데에는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고대에 위대한 문명을 달성하여 주변 지역의 문명수준을 높이는 데에 공헌하였다. 19 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근대문명을 앞서 발전시킨 것은 주변 국가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19 세기말부터 동북아시아 3 국간 대립이 첨예화되었으나, 20 세기 후반부터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공존공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문명역량을 축적하고 평화적 국제관계를 맺은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20 세기 후반 세계경제의 번영기를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식민주의사학의 半 島 性 論 에 대한 비판 식민지기 일본인의 조선시대관을 집대성한 四 方 博 의 결론은 停 滯 性 의 한 말로 집약된다 고 했다 조선사정체론을 낳은 국제환경은 半 島 性 論 으로, 그 국제관계는 他 律 性 論 으로 설명되었다. 조선이 아시아대륙, 그중 만주 몽고 및 중국 본토, 그리고 일본 열도의 사이에 끼인 반도라는 사실이 이 민족의 운명에 숙명적이라 할 만큼의 영향을 미쳐왔다 고 했다. 극히 소수의 예외(특히 역사의 초기)를 제외하고 항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주변 국가이고 조선측으로서는 그것에 어떻게 순응하여 자가를 온전하게 보존할 것인가에 노력이 집중되었다. 이 수동적 소극적 성격 으로부터 國 是 로서 事 大 主 義 가 生 成 된 것이다. 28 이상은 四 方 博 의 독특한 견해가 아니라 식민지기 일본인 식자층의 공통된 견해였다 해방 후 조선시대가 정체되지 않았다는 연구성과는 다방면에서 제출되었으나, 지리결정론에 대한 거부의식은 국제환경 또는 지정학적 환경에 관심을 박탈하였다. 조선사회정체론과 마찬가지로 지리결정론은 한국사학의 성숙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지리 또는 지정학이 국가운명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중국 만주 및 일본 열도라도 해도 다르지 않다. 일본이 독자적 해양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 그리고 만주 지역이 종국적으로 중국에 흡수된 것은 지리에 의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이 지리환경에 순응하여 자기를 온전하게 보존할 것인가에 노력을 집중하였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주변 강대국 가운데 독립국가를 유지하면서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켜온 성과는 평가되어야 한다. 事 大 主 義 는 강대국 중국과 국경을 공유한 조선의 불가피한 전략이고, 중국과의 장기간 평화를 실현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조선의 예술에 깊은 애정을 가진 柳 宗 悅 은 1919 년 讀 賣 新 聞 에 실린 朝 鮮 人 を 想 ふ 에서 强 大 하고 粗 暴 한 北 方 大 陸 의 漢 民 族 과 일본의 武 士 에 의한 끊임없이 습격하는 外 寇 는 한국사의 견디기 힘든 운명 이었다고 보았다. 29 지금까지도 일본과 중국에 끼인 지정학적 환경을 불행으로 생각하는 조선인이 많으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882 년 임오군란부터 1953 년 조선전쟁이 끝날 까지는 지정학적 환경은 조선의 역사에 가혹한 시련을 안겼다. 1882-1894 년간은 중국과 일본의 양대 세력의 대결에 조선의 운명이 좌우된 유일한 시기였다. 1950-3 년간 조선전쟁은 세계대전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1882 년 이전에 조선이 외침을 특히 많이 받은 것은 아니었다. 676 년 이후 조중간에는 한 차례의 전쟁도 없었다. 993 년 이후 만주ㆍ몽고 세력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지만, 청이 중원을 지배한 이후 그러한 전쟁은 없었다. 이들 북방세력은 약할 때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힘들었고, 강할 때에는 조선보다 광대한 중국을 노렸기 때문에, 조선에 큰 피해를 준 것은 적었다. 왜구의 28 29 四 方 博 舊 來 朝 鮮 社 會 の 歷 史 的 性 格 に 關 して 朝 鮮 學 報 1 2 3 (1951 1952). 柳 宗 悅 選 集 4 朝 鮮 とその 藝 術 春 秋 社, 1972, pp. 4-5. 17
침략은 장기에 걸쳤지만, 조일간 전면전은 663 년과 1592-8 년간의 두 차례뿐이었다. 조선반도에 위치한 왕조의 수명이 길었는데, 그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조선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외침의 빈도수가 많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장기에 걸쳐 내란이 없는 데다가 중화질서가 국제적 평화를 제공하였는데, 이러한 대내외 평화체제에 안주한 것이 군사력과 稅 源 집중력의 약화를 낳아, 19 세기 후반 제국주의시대에 대한 대응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에 반해 1882 년 군란부터 1953 년의 종전까지의 가혹한 시련기에 조선인은, 戰 國 時 代 를 겪은 일본인처럼, 이후 시기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길렀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성립부터 안정적으로 존속한 지배층이 이 기간에 대거 몰락하고 교체된 것도 20 세기 후반의 경제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역사 가운데 단순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적지 않는 것이다. 조선은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세계 평균 이상의 문명을 달성하였는데, 이것은 국제환경의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 고대와 중세에 조선은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중국문명의 전파로부터 이익을 누렸다. 조선은 유럽문명에 대한 거부의식이 특히 강하였으나, 1880 년 이후 근대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된 편이었다. 조선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열심히 학습하면서 문명의 역량을 길렀던 것은 근대의 과학기술와 제도의 흡수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 앞서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본이 가까이 존재한 것은 조선의 근대화에 유리하였다. 1880-4 년간 근대화정책으로의 신속한 전환은 일본의 자극에 힘입었다. 16 세기 이후 유럽문명의 Impact 에 대해 일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일본이 구미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데에는 중국문명을 흡수하면서 쌓은 문명역량이 기여하였다. 1882 년의 임오군란부터 1910 년의 망국까지 조선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끼여 견디기 힘든 운명 에 처했다. 1882 년의 군란을 기화로 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여 내정에 간섭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싼 중국, 일본 및 러시아의 경합과 개입은 조선정부의 근대화 노력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강렬한 경험이 식민지기 국제환경에 대한 관념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역사의 한 국면에서 생성된 관념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지정학적 환경은 자주적 근대화에 불리하게 작용하였으나, 개항 이전 2 천년 이상에 걸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한 문명 역량의 향상이 근대문명의 수용능력을 배양하고 개항 이후의 장기에 걸쳐 인접한 일본이 근대화에 자극을 가한 이점이 있었다. 근대화의 전과정으로 보면 전자의 불리한 점이 후자의 이점을 능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일간에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이웃에 있어서 조선에게는 좋았다. 남북분단 후 남한이 최선진국이자 가장 큰 시장을 제공한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에 깊게 편입한 것은 경제와 정치의 발전에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인접한 일본으로부터도 선진적인 자본을 도입하고 기술과 제도를 학습할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자본재 부품 소재를 수입하여 공산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20 세기 후반 한국 역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1960 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은 정치와 사회의 발전을 낳는 물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20 세기말 중국이 공업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경쟁력을 상실하는 한국의 중소제조업이 속출하여 한국은 고급 기술산업에서는 일본에, 중저위 기술산업에서는 중국에 압도당하여 nutcracker 에 끼인 존재와 같다고 비관하는 견해도 있지만, 선진국 일본과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중국이 제공하는 이점이 그런 불리한 점을 압도한다는 것이 더욱 지배적인 견해이다. 국제환경의 순이익을 얼마나 누릴지는 조선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기의 통념과는 달리, 농경의 성립 때부터의 역사 전체를 보아 남한은 전반적으로는 국제환경의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지금도 고난에 처해 18
있는 북한 인민의 입장에서는 분단과 냉전을 낳고 사회주의로의 선택을 유도한 국제환경을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남북한을 모두 고려한 국제환경의 종합적 평가는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그러면 동북아시아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주변 국가이고 조선은 수동적으로 順 應 하기만 했던가? 전근대에는 중국이, 근대에는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조선이 그 정도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조선의 역할이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첫째, 동아시아의 고급문화는 대부분 중국을 발상지로 하였는데, 조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문화를 잘 흡수하면서 고유한 문화를 창출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다양화와 풍요화에 기여하였다. 조선반도와 만주의 東 夷 族 은 청동기시대부터 중화문화권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였고, 30 조선인은 언어ㆍ의식주 등에서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여왔다 31. 둘째, 조선이 선진문명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은 대륙의 고급문명을 소화하고 일본에 전달하여, 일본 고대 문명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1592-8 년간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은 도자기공 인쇄공을 데려갔으며, 17 세기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20 세기 말에는 중국에 앞서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한 한국의 개발 경험과 자본과 기술은 중국의 공업화에 힘을 보태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보면 세나라 서로 교류하면서 동아시아의 문명의 다양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하겠다. 삼국간 문명 교류의 효과가 특히 컸던 시기는 중국의 고대문명의 전파로 조선과 일본에 고대문명이 형성된 시기, 근대문명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일본의 자극이 처음 본격적으로 전달된 1880 90 년대, 그리고 20 세기 후반 삼국간 경제교류의 발전기를 들 수 있다. 고대에는 동북아시아 지역간에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사람들이 활발히 이동하였는데, 이것이 조선과 일본이 대륙의 선진문명의 흡수에 기여하였다. 중국은 명대에 유럽에 추월당하고 조선은 조선시대 중기 무렵 일본에 추월당했는데, 여기에는 대외적으로 소극적 내지 폐쇄적으로 된 점이 작용하였다. 19 세기 문호개방 이후 사람, 돈, 물건 및 정보의 교류가 한층 확대됨에 따라, 구미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조선의 운명이 대륙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이 양국의 운명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지정학적 위치로 동북아시아 평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3 국이 개입된 국제전쟁이 4 회 있었는데, 모두 3 국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 1 회 동북아시아 3 국간 국제전쟁은 663 년에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싸운 백마강 전투이다. 여기서 백제의 명운이 끊기고 이어서 신라의 당의 연합군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후 당은 신라를 지배하고자 했으나, 그 기도는 좌절되었다. 만약 당나라가 신라까지 멸망시켜 중국이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면, 일본의 안전 내지 자주가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그 반면 고려가 몽고에 70 년간 저항하다가 굴복하였기 때문에, 몽고는 고려의 물자를 징발하고 고려의 군대를 데리고 1274 년과 1281 년에 일본을 침공하여, 제 2 회 동북아시아 국제전쟁이 벌어졌다. 이 침공은 실패하였지만, 가마쿠라( 鎌 倉 )막부의 몰락을 낳았다. 만약 고려가 몽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면, 몽고의 일본 침공은 없었을 것이다. 1592 년에 일본이 仮 道 入 明 의 명목으로 조선에 출병하자, 조선은 7 년간 3 국의 전장터가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치열하고 장기에 걸친 이 제 3 회 동북아시아 국제전쟁에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막혔기 때문에, 전장터가 중국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전쟁은 明 淸 교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894 년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고, 이어서 30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1997(2006), pp. 70-4. 31 존 K. 페어뱅크/ 에드윈 O. 랴이샤워/ 앨버트 M. 크레이그, 동양문화사(상), 을유문화사, 1991, pp. 386-7. 19
그 총검을 중국으로 겨냥하게 되었다. 역사는 한반도에 자주독립국가의 존재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필요함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6. 맺음말 조선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였다. 그런데 마음의 거리는 가까운 적도 있었고, 먼 적도 있었다. 고대국가의 형성기까지 반도와 열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것은 B.C.400-A.D.700 동안에 100 만명 정도가 일본에 도래하였다는 埴 原 和 郎 의 推 計 에 잘 드러난다. 32 그런데 고대국가의 성립으로 국경이 생기고 국가간 외교적 군사적 긴장이 발생하면서 상호교류가 제한되고 마음의 거리가 발생하였다. 유럽 근세에서는 국민국가의 성립이 해상교통의 안전을 보장하여 교류를 촉진하였으나, 동북아시아에서는 海 禁 체제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14 세기 후반의 일본해적의 빈번한 습격, 그리고 1592-8 년간 일본 대군의 조선 침공은 일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심어놓았다. 17 세기에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높였다. 명치유신 직후 양국간 외교적 갈등이 있었으나, 1880 년 조선관료의 일본 시찰 이후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선진 문명으로서 학습하고자 했다. 그런데 명치유신을 본받아 시도된 1884 년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1894 년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일본에서는 조선과 중국을 멸시하는 관념과 더불어 脫 亞 入 歐 論 이 대두하였다. 이어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을 침공하였고, 그에 대한 반발이 치열하였다. 동북아시아가 근대세계에 편입된 이래 기술발전과 제도변혁으로 물리적 거리는 한층 가까워지고 국제교류가 활발해졌으나, 제국주의의 시대에 마음의 거리가 크게 멀어졌다. 1945 년의 해방과 동시에 조선의 반일감정이 표면화되었다. 이것은 정치외교적 문제와 맞물려 증폭되었다. 33 조선인의 반일감정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嫌 惡 感 을 낳았다. 그러한 가운데 양국 관계의 반전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1965 년의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 경제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양국인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고도성장기 한국의 경제발전, 1987 년 이후 민주화의 진전에 힘입어 한국인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일본을 재평가하고 양국 관계를 냉정하게 성찰할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한일간 인적 물적 교류의 활성화는 일본문화의 유입을 수반했다. 일본인도 한국의 경제 정치발전과 한류문화를 보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것은 고대국가형성기와 17 세기 조선통신사의 시대에 이어서 역사상 세번째의 관심으로 보인다. 이 세 시기 모두 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는데, 문화의 교류는 마음을 움직인다. 1990 년대부터는 한 일 민간인간의 교류가 한층 활발해지고, 21 세기에 들어와서는 양국민간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경제적 교류에 이어서 문화적 교류, 나아가 마음의 교류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제 고대국가의 성립 이전에서와 같이 마음으로도 가까운 관계로 되돌아오고 있다. 한일간에는 아직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남아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방향을 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교류의 심화라는 역사의 대세가 어려운 문제의 현명한 해결을 유도해주기를 희망한다. 20 세기는 동북아시아역사상 격변기로서, 동북아시아 국가간 대립이 가장 치열한 시대로부터 평화적 교류의 시대로 전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戰 前 보다 전후에 각국의 정치발전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의 성과도 현저하였다. 대립과 전쟁의 국제환경보다 평화적 32 埴 原 和 郎 日 本 人 の 成 り 立 ち 人 文 書 院, 1995. 33 지명관 한일 관계사 연구 소화, 2004. 20
교류의 국제환경이 경제발전에 유리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20 세기 전반에 동아시아인이 전쟁으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20 세기 후반 평화적 교류의 의의가 한층 소중하게 여겨진다. 인적ㆍ경제적 교류의 진전이 평화의 촉진제라는 맨체스터 信 條 (the Menchester creed) 가 19 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대두하였는데, 그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고 평가된다. 34 이 이론은 1945 년 이전의 동북아시아 경험과는 상반된다. 16 세기 후반 국제무역의 활성화로 생성된, 무역 이익을 장악하려는 동기는 1592 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낳은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동북아시아가 문호개방으로 근대세계에 편입된 이후 경제교류가 활성화되는 동시에 군사적 대립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런데 20 세기 후반 경제교류의 심화는 전쟁의 기회비용을 높여 분쟁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경제교류가 한층 성숙한 20 세기 후반의 단계에서 맨체스터이론이 비로소 잘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20 세기 전반 전쟁의 참화가 역사적 교훈으로 작용하고 있다. 21 세기에는 동아시아국가간에 사람, 돈, 정보의 교류뿐만 아니라 마음의 교류도 더욱 진전되어, 항구적 평화체제가 구축되기를 희망한다.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은 그러한 여건을 성숙시키고 있다. 마음 교류의 진전을 위해서는 가장 첨예한 대립이 있다가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전환한 20 세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34 Geoffrey Blainey, The Cause of War, London: Macmillan Press Limited, 197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