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이경자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러시아학과 석사과정) Ⅰ. 서론 Ⅱ.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원인과 경과 Ⅲ.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미치는 영향 Ⅳ.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전망 Ⅴ. 결론 I. 서론 1991년 10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남부 코카서스의 산유국 아제르 바이잔은 석유,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2000년대에는 연간 20~25%에 달하는 빠른 경 제성장을 이룩하였고, 2009년부터 전 세계가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을 때도 막 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막대한 자원으로 인해 주목 받고 있지만 사실 아제르바이잔은 오 랜 세월 터키, 이란,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들에 의해 나라가 반으로 쪼개지는 아픔을 겪은 나라이다. 더군다나 아제 르바이잔이 자원 이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웃한 아르메니아와의 분쟁 때문 일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 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영토 분쟁을 겪게 되면서 국토의 1/5 을 상실하고 100만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잔인한 역사의 한 장으로
114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기록된 호잘리(Khojaly) 학살사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이라면 누구나 아르메니아에 대해 치를 떨게 하는 사건이 되었고, 매년 아제르바이잔은 호잘리 사건을 포함하여 아르메니아에 의해 자행된 학살사건들 1) 을 기억하며, 이 사건들로 학살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양국 모두 해당국의 비자사증이나 입국도 장이 여권에 찍혀 있는 사람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및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실 로 대단하다.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였던 나고르노 카라바흐 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이를 시행할 준비를 위해 국방예산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내의 영토와 카 스피해에서 채굴되는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로 유럽국가들은 물론, 러시아, 터키 등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를 빌미로 교역국들이 아르 메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20년 가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뜨거운 이슈로 남 아있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미치는 영향과 분쟁해결 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전망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우선 나고르노 카 라바흐 분쟁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 관계에 미치는 영향 2) 을 살펴본 후, 이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국제 사회의 노력들 을 고찰해 볼 것이다. II.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원인과 경과 3) 1.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역사적 배경 1991년 12월 10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NKR)의 독립을 선언 1)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총 세 번,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들은 1918년 3월 31일, 1990년 1월 20일, 1992년 2월 26일에 발생했고, 1918년 1월 20 일에 있었던 대학살에 관해서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공식적인 국가 추모일(법정 공휴일)로 정 하여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나머지 두 사건에 대해서도 해당 날짜에 전 국민이 1분간 묵념을 하 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2)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서로의 주장하는 바 입장이 다르지 만, 본 논문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을 위주로 정리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3) 국방연구원,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http://www.kida.re.kr/ 류광철, 코카서스 땅, 기름진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21세기북스, 2009. pp. 17~88.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15 하였다. 인구 20만 명의 이 공화국의 주권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르메니아만 인 정하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이 나라를 아르메니아 괴뢰정부로 보고 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이하 NK) 분쟁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NK의 독 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이다.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 나 이후 양국 간에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NK분쟁의 역사는 약 1세기에 이른다. NK 지역을 둘러싸고 최초로 충돌이 일어 난 것은 1905년이다. 그 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 민족주의 정부가 수립되었 던 1918~1920년에 다시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자 남부 코카서스의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각각 독립을 선언 하며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화국의 역사는 1920년 러시아 볼셰비키군이 침공하면서 다시 소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 아제르 바이잔에게 NK의 관할권이 주어졌고, 1923년에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새로 경계가 그어진 NK지역의 주민 중 94%가 아르메니아인이었으나 소련은 이 지역을 아르메 니아가 아닌 아제르바이잔에 복속시켰다 4). 그 이유에 대해서는 1921년에 아르메니 아에서 일어났던 반볼셰비키 봉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NK지역이 아제 르바이잔으로 편입되었지만 소련은 이 지역의 주민 다수가 아르메니아인임을 감안하 여 자치공화국(NKAO)의 지위를 부여 5) 하였다. 언제라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이 같은 지역 통치방식은 엄청난 영토와 수많은 민족을 포괄하게 된 신생 소비에트 연방에서 중앙정부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같은 민족들을 나누어 놓거나 또는 서 로 다른 민족을 섞어 놓는 방식의 또 다른 모습 6) 이라고 할 수 있다. Joshep Nye는 국내외적인 힘으로부터 붕괴(Disruption)가 일어날 때 사람들이 새 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도록 만드는데 민족주의 7) 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Nye의 주장은 20세기 말 소련이 붕괴할 때 당시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 고 있는 15개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한 상황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 4) 1926년 NK에는 11만 7,00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1만 3,000명의 아제르인이 있었다. 5)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공화국이 아제르바이잔의 자치공화국이라는 사실은 1936년과 1977년 소련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1989년 통계에 따르면, NKAO 내에 아르메니아인은 13만 7,200명 (73.4%), 아제르인은 4만 7,400명(25.3%)이다. 6) 북코카서스의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카라차이 체르케스크 같은 공화국들이 서로 다른 두 민족을 합쳐서 만든 대표적인 공화국들이다. 7) Joshep Nye는 그의 책 국제분쟁의 이해 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를 정의한다. Nye는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그룹이 스스 로를 민족이라고 부를 때 그 정체성에는 다양한 원천(인종적 유사성, 종교, 언어 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민족주의는 권력투쟁에서 정치적 용어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근대 세계에서 국가 정통성의 결정적 자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Joshep Nye, 국제분쟁의 이해, 한울아카데 미, pp. 240~247.
116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역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아르메니아 민족의 다수가 살고 있는 NK자치공화국을 독립된 공화국으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소련해체라는 역사적 격동 기가 없었다면 NK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2.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경과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간에는 NK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로 자유화 물결이 일면서 NK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주민들은 NK를 아르메니아에 귀속 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키기 시작하였 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NK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일부라고 반박하며, NK의 현상유지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NK분쟁의 사실상의 직접적인 계기라고 볼 수 있는 숨가이트 사 건 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사건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인종학살에 대한 잔인한 기억 을 되살리기에 충분하였다. 1988년 2월 20일 NK 소비에트가 아제르바이잔인에게 추방령을 내리는 결의서를 채택하면서 NK 지역에서 살던 대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 들이 바쿠로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일순간 험악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월 22 일에 아제르바이잔 청년들이 NK지역에서 과격 아르메니아 청년들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제르바이잔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고, 그 분노는 곧 아제르바 이잔의 제3의 도시이자, 공업도시인 숨가이트에서 폭력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2월 26일 발생한 소규모 시위는 걷잡을 수 없는 폭동으로 바뀌어 아르메니아인 색출이 시작되었고, 주택습격,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등으로 번져갔다.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고, 결국 아르메니아 인의 대다수가 숨가이트를 떠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20세기 초 터키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8) 을 연상케 하면서 당시 35만에 달하는 아제르바 이잔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결국 이들이 아제르바이잔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아르메니아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이것이 아제 르바이잔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NK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 였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민족갈등이 격화되자 1989년 1월 소련최고회 8) 아르메니아 대량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5년에서 1916년 사이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집단 사망한 사건이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17 의는 이 지역에 대한 모스크바 당국의 직할 통치를 결정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당국 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근본적 인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하였다. 1990년 1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아르메니 아인들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며, NK지역에서도 유혈 사태가 발생하여 수십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소련 최고회의는 1990년 1월 15일 아 제르바이잔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소련군이 직접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바쿠를 공격함으로써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는 1991년 5월부 터 초기의 중립적 입장을 버리고 소련에 잔류를 원하는 아제르바이잔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러한 러시아의 편향적인 정책에 대해 아르메니아는 반러시아, 반아제르바이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즉시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가 져왔고, 1991년 8월 소련 내에 쿠데타 9) 가 발생하여 중앙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 되자,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1992년에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면서 아제르바이잔은 정치적 으로 극심한 정국 불안 10) 을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인종 대학살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NK 분쟁의 여러 사건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 바로 호 잘리(Khojaly) 대학살 사건이다. 이는 아르메니아 무장세력과 구소련 366연대가 함 께 저지른 반인도적인 범죄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로 부터 크게 주목 받지 못하였다. 1992년 2월 25일~26일에 걸쳐 아르메니아 무장세력은 구소련 연합의 366연대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호잘리시를 침략하였다. 새벽 5시쯤 도시 전체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으며 도시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지역의 중심이자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거주지인 아그담(Aghdam)으로 대피하고자 했으나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 63명, 여성 130명, 노인 70명을 포함하여 약 600명 이상이 살해당하였고, 1,000명의 시민들이 이 사건으로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9) 1991년 8월 18~21일에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국민 저항으로 실패하면서 러시아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민주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10) 온건파 무탈리보프 대통령이 1992년 NK분쟁으로 인해 실각하게 되고, 급진 민족주의자인 엘 치베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엘치베이가 이끄는 인민전선과 반정부군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엘치베이 대통령이 나히체반으로 도피하면서, 아제르바이잔 최고회의는 6 월 15일 엘치베이의 대통령 권한을 박탈하고 알리예프를 최고회의 의장 및 대통령 권한대행으 로 임명하였다. 그 해 10월 알리예프는 단독 출마한 대선에서 98.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된다.
118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8가정이 몰살당하였으며, 130명의 어린이들이 한 부모를 잃었고, 25명의 어린이들은 양 부모를 모두 잃게 되었다. 게다가 1,275명의 무고한 거주민들이 인질로 잡혔으 며, 150명은 실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11). 잔인하게 전개되던 전투는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993년 7월초에 다시 재개되었으 며, 아르메니아는 NK지역과 아그담 및 주변도시를 점령하였다. 또 9월에 아르메니 아가 아제르바이잔 남서부 최후 거점인 제길란을 공격하자 분쟁은 국제전으로 번져 갈 양상을 보인다. 이란과 터키가 분쟁에 직접 개입을 시사하였고 러시아도 평화유 지군의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가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면서, 9월 25일에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에 정상회담이 열렸고, NK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잔인한 사건들로 돌이킬 수 없는 민족간 분쟁으로 치닫던 전쟁은 1994년 5월 마침내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무력충돌이 그쳤을 때 NK지역은 이미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후였고, 이러한 결과 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제르바이잔은 매년 국방예산을 확대하며 12) 전쟁이라도 불사 하여 자국 영토를 되찾겠다는 입장을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NK 분쟁을 언 분쟁(frozen conflict) 아닌 조속한 해결을 하고자 애쓰고 있다 13). NK문제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핵심문제이다. 1992~94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전 국토의 20%나 되는 땅을 잃었으며,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4). 아제르바 이잔 전체 인구가 2011년 기준 910만 명임을 고려할 때 인구 1명당 난민의 수가 가장 많고, 인구 10명 중 1명은 NK 전쟁 난민인 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17 년이 지난 현재도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난민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일부에서 는 난민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지 않을 시 난민문제가 현 정부에 위협이 될 수도 있음 을 지적한다. 11) Trend, http://en.trend.az/news/karabakh/1817572.html,(검색일: 2012. 1. 24.) 12)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비는 2010년 34억1천3백만$에서 2011년에 34억1천7백4백만$으로 증가 하였다. 이 금액은 국제위기그룹(ICG)의 계산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13) Assa-Irada, Aliyev: Azerbaijan will not stand freezing Karabakh conflict, 2012. 1. 16. 14) 아제르바이잔은 NK분쟁으로 국토의 20%, 난민 100만 명 이상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빼앗긴 영토는 NKR을 포함하여 아그담(Aghdam), 피줄리(Fizuli), 자브라일(Jabrayil), 장길란(Zangilan), 구바들리(Gubadly), 라친(Lachin), 캘바자르(Kelbajar)이다. 난민은 아르메니아로부터 떠나온 피 난민 25만 명과, 점령지로부터의 국내피난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 66만 명, 아르메니아 와 점령지점의 국경에 위치한 지역들에서 발생한 피난민 10만 명이다. AzDipservis, Azerbaijan. Information Digest. 2007, p. 176. 이 수치는 국제위기그룹(ICG)의 수치와 차 이가 있다. ICG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16%, 난민 약 68만 명으로 추정한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19 III.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미치는 영향 전쟁 당사국이자, 자국 영토의 20%, 무수한 난민이 발생한 직접적인 가장 큰 피 해자로서 아제르바이잔은 분쟁해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강경하다. 아제르바이잔의 일간지와 TV 뉴스의 첫 방송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NK분쟁 관련 보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NK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가적인 시급한 해 결을 촉구하는 문제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은 아 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어 아르메니아의 편에 서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며, 중요한 교역국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경우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후 분쟁으로 정국혼란을 겪다 가 정전 협정을 맺은 후 대통령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친서방정책 및 에너지주도의 경제정책으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헤이다르 대통령의 뒤를 이은 아들 일함 알리예프 역시 에너지 기반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경 제성장률을 10%로 유지하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에너 지 부국으로써 국제사회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아제르바이잔은 대외관계에서 에너지 를 중심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요컨대, 아제르바이잔의 대외정책 기조 15) 는 NK 분쟁해결과 안정적인 에너지 판 매시장 확보를 위한 에너지 수송루트 다변화 정책이다.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대외 관계는 NK분쟁과 석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상호보 완적인 관계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NK분쟁에 대한 입장에 누구의 편을 들어주느냐 하는 문제가 아제르바이잔의 에너지 외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 한다. 에너지 정책이 NK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없지만 NK문제 때문에 에너지와 관련된 대외관계, 국제관계가 마찰 빚은 적은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9년부터 2010년 사이에 있었던 아르메니아 터키간의 관 계 정상화 사건이다. 외교 정상화의 상징으로 국경 개방을 놓고 아르메니아와 터키 가 의정서에 서명을 하고자 하였지만 아르메니아 내의 반대 변수, 아제르바이잔의 비난 등과 맞물려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아르메니아 - 터키간 국경개방 제안과 함께 터키와 아르메니아간 관계 정상화의 과정은 아제르바이잔에게 있어 터키의 배신으로 비춰져 불신과 의심을 낳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아르메니아의 화해, 특히 터키-아르메니아의 국경개방은, 아르 15) 외교통상부, 아제르바이잔 개황, 2012. 1, p. 23.
120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메니아가 점령한 영토에서 철군을 할 때까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터키 를 압박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의 우려는 아제르바이잔-터키의 논쟁에서 에너지자원의 가격상 전략적 수송노선의 우위를 가진 터키가 추구하는 정책에 의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반응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수용 16) 하면서 석유와 가 스수출의 새로운 루트를(예를 들어 흑해를 경유하는) 신속하게 찾는 것이었다. 터키 - 아르메니아간의 관계 개선의 시도가 좌절된 후에 터키 -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다시 개선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가스수출을 위해 터키가 지불하는 가격에 대한 장기간의 논쟁을 끝내고 두 국가는 2010년 가스 거래에 서명을 하였고, 또 2010년 8월에는 양국의 우호적인 연계를 재확인하면서 아제르바이잔 - 터키간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와 상호협력(Strategic Partnership and Mutual Co-operation)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에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는 Shah Deniz 2단 계 가스 수송에 관한 협정에도 서명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이후, 현재 터키는 유럽으로 가는 카스피해 가스의 주 수송국 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NK 분쟁해결에 있어 확고하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을 지지 하고 있다. 분쟁해결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중재국들 또한 아제르바이잔이 가진 막대한 에너지 자원으로 인해분쟁해결에 있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이나 EU, 모두 아제르 바이잔을 에너지 확보 차원 17) 에서 중시하고 있고, 러시아는 코카서스지역에서의 영 향력 유지와 에너지 분야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친아르메니아 노선을 유지하면서 도 경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과 긴밀한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 10월 24일 아제르바이잔은 UN총회에서 UN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에 선출 18)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선출을 위해 이슬람국가들이 상당한 지지를 한 것 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아제르바이잔은 2년 임기(2012~13년)로 국제사회 및 지역에 16) 터키 - 아르메니아간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일어날 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전부를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 제르바이잔은 2011년 12월 중반 러시아로의 가스수출을 2012년부터 연간 30억 입방 미터(기존 에는 20억 입방 미터)로 늘리는데 동의하였다. EIU,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2.1 17) EU는 러시아로부터의 가스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가스수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2011년 1월 EU집행위원장이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하여 알리예프 대통령 과 Southern Gas Corridor 구축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8) 아제르바이잔은 동유럽의 슬로베니아, 헝가리와 경쟁했으나 헝가리가 9라운드에서 탈락한 후 17라운드에서 아제르바이잔이 113표, 슬로베니아가 77표를 얻으면서 탈락하고, 최종투표에서 155개국의 지지를 얻어 선출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21 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제르바이잔은 임기 동안 안보리에서 장기간 끌고 있는 NK문제를 부각시키며 19)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20). 이미 아제르바이잔은 NK문제를 UN으로 가져가 해결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분쟁해결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자, 2008년 3월 NK문제를 UN으로 가져가 아제르바이잔의 주권과 영토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유 엔총회 결의안 21) 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 안은 찬성 30개국(다수의 이슬람국가들), 반대 7개국(민스크 그룹 3개국과 아르메니아 등), 기권 100개국(그 가운데 EU, 한 국, 일본 등)으로 채택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이 결의안이 당사국 간의 협상을 거치지 않았으며 민스크 그룹의 협상을 저해한다는 절차적 측면뿐만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 도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외교부는 한국의 기권과 관련하여 유감 을 표명하며 해명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22). 이처럼 NK문제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최우선 과제인 만큼 대외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며 향후에도 대외관계를 좌우하는 우선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IV.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전망 1. NK 분쟁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전망 앞서 살펴보았듯이, NK분쟁의 역사는 1세기 남짓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직전에 잠재된 충돌은 수면아래에서 꿈틀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1년 소비에 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1992~1994년간의 전 쟁은 약 22,000~25,000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두 국가 사이에 100만 이상의 난민이 발생되었다. 아르메니아 군대가 NK를 통제하고 있고, NK 인근의 아제르바이잔 영 토도 점령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은 NK지역에 살고 있는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자결권 과 독립권을 주장한다. 깨지기 쉬운 정전은 1994년 이래로 시행되고 있다. 19) 아제르바이잔 외교부 엘마르 맘마디아로프(Elmar Mammadyarov) 장관은 UN안보리에서 장기 간 끌고 있는 아르메니아와의 NK분쟁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선출 직후에 밝힌 바 있다. 20) EIU,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1.12. 21) 결의안은 첫째, 군대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주권 및 영토 보전 (이는 아제르바이잔 주권 하의 NK 자치를 의미), 셋째, 난민 귀환권 재확인을 언급하고 있다. 22) 외교통상부, 위의 책, p. 32.
122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NK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1992년 CSCE(현 OSCE)가 아제르바이잔 과 아르메니아를 신규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1993년 UN안전보장이사회 는 4개의 결의서를 채택해 적대행위의 즉각 중지, 점령지로부터의 점령군 철수, 경제 활동 재개, 난민과 강제 이송된 주민귀환 등을 요청하였다. UN과 OSCE결의는 모두 주권과 영토존중, 국경 불가침 등 국제법 원칙에 따라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OSCE의 중재로 1994년 5월 12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7년 리스본 정상회담 에서 미국, 러시아, 프랑스 3국을 공동의장국으로 하는 민스크 그룹(Minsk Group) 23) 을 설치해 분쟁해결을 주도하였다. 그 동안 민스크 그룹의 중재로 수차례 양국 간 협상을 벌였으나 정전 그 이상의 아무런 변화도 없이 현상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NK 분쟁해결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자 분쟁 당사국들뿐 아니라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들에 대한 비판도 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2년 이래로 OSCE 민스크 그룹에 의한 협상은 분쟁의 확대를 방지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 언 분쟁 frozen conflict)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현상유지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NK공화국은 휴전 덕분에 국가구조가 공고화되었고, 아제 르바이잔 대통령은 1990년대 초반의 정치적 혼란 뒤에 국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으며, 러시아가 휴전을 통해 남부 코카서스의 탈소비에트 국가들에게 영향 력을 발휘하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그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휴전을 사용하였다. 프랑 스와 미국은, 이 지역에 존재하며, 지배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민스크 그룹에 합류한 만큼 분쟁해결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24) 표면적으로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 회담은 꾸준히 있어 왔다. 2009년에는 아르메 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여섯 차례나 회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평화회담이 교착되기 시작한 2009년 하반기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간에 최전선을 따라 소규모의 전투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고, 군비가 증강되고 있으며, 격 한 비방이 일어나고 있다. 양국은 무력을 사용하면서, 평화회담이 완전히 결렬될 경 우 전면전의 가능성을 준비하면서 협상테이블에서 상대를 압박하고자 새로운 전쟁의 위협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에 의해 미리 계획된 공격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나, 언제라도 전쟁으 23) 초기에 민스크 그룹은 단계적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다. 우선 NK지역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메니아군이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여 NK를 비군사지역화 하고, 이후에 양측은 NK의 정 치적 지위문제, 라친회랑, 슈샤 및 샤우미안의 거취문제 등 모든 관련 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침이 었다. 24) Tomasz Sikorski, Perspectives for Solving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Regional and European Consequences, Polish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2010. 8. 25.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23 로 이어질 수 있는 긴장감이 최전선에서 증대되고 있다. 게다가, 만약 회담에서 돌 파구를 찾지 못하게 되거나,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에너지 기반 경제 성장이 몇 년 내에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한 쪽 또는 양쪽이 공격으로 갈 결정을 할 실제적인 가 능성이 있다. 새로운 전쟁에 대한 가능성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의 국방예산이 증가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1994년 휴전 협정이래로 분리된 아제르바 이잔과 아르메니아 군사력의 접촉지점 110마일을 따라 지뢰 부설지역과 지하 터널 로 완비된 무서운 방어요새가 확장되어 세워졌고, 충돌의 수와 강도와 사상자가 증 가하고 있다. NK당국은 2010년에 일어난 정전 폭력이 2009년과 비교해 53%나 증 가하였다고 진술한다. 국제위기그룹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공식 국방비 지출은 일함 알리예프 임기 동 안 20배나 증가하였다 25). 2003년 135백만$에서 현재 312천만$로 연 평균 약 50% 나 증가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국가 예산의 전반적인 증가와 일치하는데, 전통적 으로 국방비는 총 국가예산의 10~14%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2011년 국방비 지 출은 국가 총 지출의 20%나 되고, 전년보다도 급격히 증가한 수치이다. 이는 2007 년 대통령 알리예프의 공약을 실행한 것으로 아르메니아 국가 전체 예산을 초과하는 금액이다. UN과 OSCE의 무기 수출금지가 두 국가에 구속력이 없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적극적으로 군비증강을 하고 있다. 양국 간의 폭력의 횟수와 강도의 증가, 국방예산의 확대는 OSCE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에 의해 중재되는 평화 협 상의 실패를 말하고 있어 더욱 우려를 낳고 있다. 2009년과 2010년에 러시아, 미국, 프랑스 대통령은 국제법(UN헌장, Helsinki Final Act)의 규정과 원칙에 기반하여 최종 해결, 특히, 무력사용과 무력에 의한 위 협 금지, 영토 통합, 국민들의 자결권, 평등권에 관해 제안하였다. 명확하게 그들은 기본원칙(Basic Principles) 26) 의 실행에 동의하는 측면에서 명명하였고, 보편적인 평 25) 국제위기그룹(ICG)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비 지출은 2004년 30%(2003년 135백만$ -> 175백만$로 증가), 2005년 70%(300백만$), 2006년 120%(660백만$), 2007년 66%(11억 $), 2008년 68%(18억 5천$), 2009년 8%(20억$), 2010년 7.5%(21억 5천$), 2011년 45%(31 억 2천$)로 증가하였다. 아르메니아의 국방비는 2011년에 390백만$이었고, 일부 분석가들은 NK를 합치면 약 600백만$에 이를 것으로 본다.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26) 2005년에 최초로 공식화한 후, 2007년부터 마드리드 원칙 으로 알려진 기본원칙은 합의문을 찾는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가들에 의해 수정되고 업데이트되었다. 2010년 초에 그들은 업데 이트 된 마드리드 원칙 을 선보였으나 그것은 이전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다. 아제리 외교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점령한 아제르바이잔 영토 다섯 개의 지역으로부터 아르메니아가 즉각적으로 철수하고, 뒤이어 5년 이내에 점령한 켈바자르 구역(라친 회랑의 대부 분)으로부터 철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124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화협정의 기본에 맞는 통합된 총체로서 고안해 냈다.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점령한 NK 주변 영토의 반환 - 안보와 자치를 보장하는 NK의 임시지위 - NK와 아르메니아로 연결되는 통행로 -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NK의 최종지위의 궁극적 해결 - 난민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 - 평화유지활동을 포함한 국제적인 안전보장 이 합의는 양측으로 하여금 기본원칙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였으나, 그 대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입장은 더욱 확고해졌고, 그들은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은 의지를 가질 뿐이었다. 호전적인 비방은 증가하였다. 2010년에 최소 9개의 대중 연설에서 대통령 알리예 프는 회담에서 명백한 진전이 없을 경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였고, 2011년 초에는 오랫동안 아제르바이잔 영토가 점령당한 만큼, 아르메니아는 공포 (두려움) 속에 살게 될 것이고, 오랫동안 우리의 땅이 점령하에 있는 만큼, 아르메니 아와 그 리더들은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에 의해 언제라도 그들이 소유한 땅에서 군사 작전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회는 국제법에 의해 제공되었 다 라는 연설을 하였다. 이에 대해 아르메니아 대통령 역시 완고한 입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2009년 전반기에 강하게 일어났던 분쟁 해결에 관한 낙관주의는 2010년 후반기에 완전히 증발되어버렸다. 상술하였듯이, 2009년에 알리예프와 사르키샨 대통령은 여 섯 차례나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2010년에는 그 횟수가 절반으로 감소한, 고작 세 차례만 만났을 뿐이다. 민스크 그룹의 셔틀 외교도 역시 냉랭했다. 비록 OSCE가 2010년 12월의 정상회담을 위한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를 얻고자 하였지만, 양측 대 통령들은 국제법적 원칙과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들의 2009년 이탈리아에서 있었 던 G8정상회담(Muskoka/L Aquila)의 성명을 기반으로 해결을 찾는 모호한 약속과 서로의 만남을 거절하였다. 분쟁 해결을 위한 러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간의 3자 회담이 2012년 초 27) 에도 한차례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27) 2012년 1월 23~24일 러시아 흑해의 소치에서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 아르메니 아 대통령 세르지 사르키샨,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NK분쟁 해결에 대한 기본원 칙에 대한 합의에 이르고자 회담을 가졌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25 이런 상황 가운데 분쟁 해결에 관하여 부정적인 전망은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전 망은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 더욱 크게 논의된다. 시간은 대통령 알리예프를 압박 해오고 있는데, 1994년 정전 협상을 한 이후로 20주년이 임박해 오고 있고, 아제르 바이잔 난민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빼앗긴 국토 역시 여전히 아르메니아의 점령하 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에 알리예프는 세 번 연속 대통령으로 당선되길 바라고 있어, 이를 위해 NK분쟁 해결과 같은 중대한 과업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다 수는 에너지공급에 의한 성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수송로와 같은 전략적 위치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 나 아제르바이잔의 오일 기반의 경제 성장은 2010년에 한계에 도달했고 28), 오일 수 익의 감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을 취소할지도 모른다 29). 2. NK분쟁 해결에 대한 각국의 입장 30) 과 분쟁해결에 대한 전망 2.1.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직접적인 분쟁 당사국으로 NK를 독립된 공화국으로 선포한 장본인 이다. 분쟁해결을 위한 협상에서 NK의 민족자결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를 그들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자, 적대국인 아제르바이잔과 비우호적인 터키로부터의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과 2010년에 아르메니아는 NK문제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자체적으로 터키와 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사르키샨 대통령의 신뢰와 전략적 행동의 여지는 터키와의 화해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2010년에 저하되었다. 국내의 반대세력 들은 국제법 안에서의 아르메니아 인종학살의 해결을 방해하고, NK 양보를 강요하 는 터키의 은밀한 노력으로서의 2009년 10월 의정서(프로토콜)를 강하게 비난하였 다. 결국 아르메니아는 2010년 4월에 서명을 연기하였고, 이 모든 것의 결과로 NK 회담은 양측에 의해 더욱 경화되었다. 28) EIU 보고서에 의하면 아제르바이잔의 12-16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3.4%로 예상되는데 이는 07-11 기간에 달성한 10.1%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는 더 느린 오일 생산 확대 (Slower expansion in oil production)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는 향후 아제르바이잔 경제성장에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Economist Intelligence Unit,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2. 1. 29)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30) 외교통상부, 위의 책, pp.23~30. Tomasz Sikorski, Perspectives for Solving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Regional and European Consequences, Polish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2010. 8. 25.
126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휴전 첫 해의 현상유지는 아르메니아를 위해 도움이 되었으나, 점차 이 지역의 불 안정한 상황의 비용은 상당히 증가하였다. 현재, 언 분쟁 은 육지에 둘러싸인 아르 메니아(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외국인 투자 유치에 고군분투했던 때로부 터 멀어진)의 경제적 문제를 배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 니아는 국방비를 증가시키며, 만약의 경우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이 에 맞서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분쟁 당사국이자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점령국으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다. 2.2. 터키 아제르바이잔에게 터키는 일종의 형님 국가 이다. 민족, 언어, 문화, 역사적 동질 성을 바탕으로 1민족 2국가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 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는 2010년 8월 군사협력이 포함된 전략적 동반자 관 계와 상호협력협정(Agreement on Strategic Partnership and Mutual Support)을 체 결 31)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BTC(바쿠-트빌리시-제이한) 석유 파이프라 인과 BTE(바쿠-트빌리시-에르주름) 가스 파이프라인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긴밀감으로 인하여 터키는 NK분쟁에 있어서 아제르바이잔 편에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실제로 터키는 NK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에 대해서 1993년 이래 국경 폐쇄 조치를 취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압력으로 아르메니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나 아르메니아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NK문제 를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2002년부터 권력을 잡고 있는 터키의 정의와 개발당(AKP) 은 "이웃과 아무 문제가 없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터키는 아제르바이잔과의 파트너십을 유 지하면서도 아르메니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 한 아르메니아와의 국경개방 의정서를 채택하고자 한 사건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 건으로 아제르바이잔과 상당한 마찰이 빚어지기도 하였고, 국내 반발도 있어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NK 분쟁은 남부 코카서스에서 터키의 전략적 행동의 기회와 행 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어, 터키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2.3. 러시아 러시아의 정책은 아르메니아가 그루지야, 이란, 유럽연합과 협력하면서 더 이상 31) 이 협정으로 아제르바이잔 내 전쟁 발발 시 터키로부터의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27 고립을 유지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아르메니아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이 지역에서 터키와 유럽연합이 그들의 중재를 강화했다 면, 러시아는 2008년 그루지야에서의 전쟁 후에 손상된 중재자로서의 신뢰성과 함께 더욱 자발적으로 새로운 평화 계획을 수락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아르메 니아에 압력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에서 러시아는 남부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영향력 유지와 에 너지 분야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제르바이잔과의 협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1992-1994년 간 NK 분쟁 시 러시아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 분쟁 해결을 위한 회담 시 아르메니아에 편향적인 자세를 나타냄으로 기본적 으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다. 그러나 최우선 국가과제인 NK분쟁 해결에 회담을 주선하는 등, 러시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러시아에 대한 불만을 자 제하면서 러시아와 적절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는 OSCE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들 중 가장 활발하게 분쟁해 결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2012년 초까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간에 10차례 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2.4. 미국 미국은 EU와 마찬가지로 유라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위치 및 카스피해의 에너지자원 확보차원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분쟁해결에 있어 미국의 역할은 일찍이 미국 내의 영향력 있는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의 위치를 고려하는 한편, 뒤늦게 아제르바이잔과의 에너지 협력의 필요 에 의해 친아르메니아와 친아제르바이잔 간의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추구함으로 시 작부터 한계에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비 확산과 중동 분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NK분쟁 해결에의 참여가 활발하지 않았 고, 앞으로도 활발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은 미국이 인권보고서 등을 통해 자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으나, NK분쟁 해결이 속 시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OSCE 민스크 그룹의 공동의장국이기도 한 미국 측의 적극적 역할 기대하고 있다. 2.5. 유럽연합(EU)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후 아제르바이잔은 국가재건 및 경제 발전을 위해 EU와의 긴밀한 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EU 역시 아제르바이잔의 지리적 위치 및 카스피해의 에너지 자원 확보 차원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아제르바이잔은 EU
128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의 Eastern Partnership 대상국가 32) 로, 이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자국의 인권, 법치 주의, 시장경제, 거버넌스(Good Governance) 등 기본 가치들을 EU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해 나가고 있다. EU는 남부 코카서스에서의 불안정한 미해결된 분쟁을 동쪽 이웃정책(ENP) 과 Eastern Partnership 프로그램으로 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분쟁 해결의 실패는 안보 상의 이유로 해로울 뿐 아니라 남부 코카서스에서의 EU의 외교정책의 약점을 입증 하며, 좋은 거버넌스와 지역 협력, 경제성장을 겨냥한 EU프로젝트의 효율성을 위태 롭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양국 관계가 냉랭하고 또 다른 전쟁의 위협이 대두되는 이때 더욱 적극적으로 분쟁 해결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NK 분쟁과 관련하여 EU의회는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한 바 있다. 2009년 7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G8정상회의에서 OSCE의 민스크 그룹 의 장국이 채택한 공동성명과 2010년 5월 20일에 채택된 NK분쟁 해결을 위한 마드리 드원칙을 지지하고, 아울러 난민들의 NK복귀와 아르메니아 군의 NK로부터의 철수 를 주장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이 그것이다. 3. NK분쟁 해결을 위한 제안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은 NK분쟁 해결을 위한 환경 개선과 새 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 33) 을 하고 있다. 첫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정식으로 기본원칙에 서명하고, 협정과 같은 가치가 있는 실제적인 공개토론을 장려하고, 호전적인 비난과 확정된 기간을 요구하 거나 미리 결정된 특수한 결과 또는 NK의 최종 지위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제외시키는 것 등의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당사자들은 최전선을 따라 접촉지점으로부터 저격수를 철수시키는 것을 포 함하여 신뢰구축에 착수해야 하며, 접촉지점(the line of contact) 근처에서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금지하고, 전진을 위해 참호를 파고, 대포를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며 삼 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아르메니아는 NK에서 복무할 정규군 모집을 중단해야 한 다. 셋째, 아르메니아와 NK 당국은 점령한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아르메니아인을 거주 32) Eastern Partnership은 2009년 5월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EU정상회의에서 채택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벨라루스,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이들 6개국이 포함된다. 33)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29 시키거나 과거에 아제르바이잔의 주요 도시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거나, 일방적으 로 고고학 발굴작업을 시도하는 등 아제르바이잔 리더들이나 시민들이 무력사용을 하도록 만드는, 더 이상 아제르바이잔인들로 견디기 어렵게 하는 현상유지를 지원하 는 활동을 중지해야 한다. 넷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의 로마법령(Rome Statute)에 따라야 한다. 다섯째, 국제사회는 이 지역에서의 군비 증강의 위험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OSCE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인 러시아와 다른 국가들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무기수출금지를 지지해야 한다. 여섯째, OSCE와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들은 옵저버 파견단의 폭력 조사와 원격 감시능력을 포함한 자연스러운 모니터링이 권위 있도록, 또 평화협정 실행의 한 부 분으로서 평화유지군이 배치될 때까지의 임시조치로 모니터의 수를 증대시키는 것에 동의하도록 당사국들을 격려해야 한다. V. 결론 소비에트 시절부터 잠재되어 있었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나고르노 카 라바흐 분쟁은 서로 다른 두 민족간의 대립으로 소비에트가 붕괴하면서 본격적인 마 찰을 빚었고, 전면적인 충돌 후 94년부터 정전되었다. 분쟁 해결을 위해 OSCE 내에 특별 그룹이 설치되었지만 현상유지에만 초점이 맞 추어져 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큰 성과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분쟁 당사국들 간에는 적개심이 고조되고 잦은 충돌이 빚어지며, 피차 국방비 를 확대 지출하는 등 언제라도 새로운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분쟁해결의 여부가 양 국가의 현 정권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 에 대한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2011년 10월 아제르바이잔이 UN 안보리 비상 임이사국에 선출되면서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 해결은 새로운 정국을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NK 문제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이나 대외관계의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 는 만큼 임기 동안 아제르바이잔은 적극적으로 분쟁해결을 위한 노력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UN결의안은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 손을 들어준바 있어, 향후에 NK
130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분쟁 해결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분쟁이 아제르바이잔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아제르바이잔의 일방적인 노력 으로는 또 다른 갈등만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OSCE 민스크 그룹 및 국제사회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과 분쟁해결에 대한 의지가 요구된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31 참고자료 *단행본 1. 류광철, 코카서스 땅, 기름진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21세기북스, 2009. 2. 외교통상부, 아제르바이잔 개황, 2012. 1. 3. Joshep Nye, 국제분쟁의 이해, 한울 아카데미, 2003, 9. 4. AzDipservis, Azerbaijan. Information Digest. 2007, 2007. **논문 및 보고서 1. Tomasz Sikorski, Perspectives for Solving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Regional and European Consequences, Polish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2010. 8. 25. 2.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3. Economist Intelligence Unit,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1.12. 4. Economist Intelligence Unit,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2.1 ***기타 자료 1. 국방연구원,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http://www.kida.re.kr/ 2. 아제르바이잔 일간지 Trend, http://en.trend.az/news/karabakh/1817572.html 3. 아제르바이잔 통신사 Assa-Irada, Aliyev: Azerbaijan will not stand freezing Karabakh conflict, 2012. 1. 16.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총 세 번,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들은 1918년 3월 31일, 1990년 1월 20일, 1992년 2월 26일에 발 생했고, 1918년 1월 20일에 있었던 대학살에 관해서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공식적 인 국가 추모일(법정 공휴일)로 정하여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나머지 두 사건에 대해 서도 해당 날짜에 전 국민이 1분간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서로의 주장하는 바 입장이 다르지만, 본 논문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을 위주로 정리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국방연구원,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http://www.kida.re.kr/
132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류광철, 코카서스 땅, 기름진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21세기북스, 2009. pp. 17~88. 1926년 NK에는 11만 7,00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1만 3,000명의 아제르인이 있었 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공화국이 아제르바이잔의 자치공화국이라는 사실은 1936년 과 1977년 소련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1989년 통계에 따르면, NKAO 내에 아르메 니아인은 13만 7,200명(73.4%), 아제르인은 4만 7,400명(25.3%)이다. 북코카서스의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카라차이 체르케스크 같은 공화국들이 서로 다 른 두 민족을 합쳐서 만든 대표적인 공화국들이다. Joshep Nye는 그의 책 국제분쟁의 이해 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전쟁을 일으 키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를 정의한다. Nye는 공통의 정체성을 가 진 사람들의 그룹이 스스로를 민족이라고 부를 때 그 정체성에는 다양한 원천(인종 적 유사성, 종교, 언어 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민족주의는 권력투쟁에서 정치적 용어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근대 세계에서 국가 정통성의 결정적 자원이 되었 다고 말한다. Joshep Nye, 국제분쟁의 이해, 한울아카데미, pp. 240~247. 아르메니아 대량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5년에서 1916년 사이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집단 사망한 사건이다. 1991년 8월 18~21일에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국민 저항으로 실패하면서 러시아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민주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온건파 무탈리보프 대통령이 1992년 NK분쟁으로 인해 실각하게 되고, 급진 민족 주의자인 엘치베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엘치베이가 이끄는 인민 전선과 반정부군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엘치베이 대통령이 나히체반으로 도피하 면서, 아제르바이잔 최고회의는 6월 15일 엘치베이의 대통령 권한을 박탈하고 알리 예프를 최고회의 의장 및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하였다. 그 해 10월 알리예프는 단독 출마한 대선에서 98.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Trend, http://en.trend.az/news/karabakh/1817572.html,(검색일: 2012. 1. 24.)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33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비는 2010년 34억1천3백만$에서 2011년에 34억1천7백4백만 $으로 증가하였다. 이 금액은 국제위기그룹(ICG)의 계산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Assa-Irada, Aliyev: Azerbaijan will not stand freezing Karabakh conflict, 2012. 1. 16. 아제르바이잔은 NK분쟁으로 국토의 20%, 난민 100만 명 이상 발생했다고 주장한 다. 빼앗긴 영토는 NKR을 포함하여 아그담(Aghdam), 피줄리(Fizuli), 자브라일 (Jabrayil), 장길란(Zangilan), 구바들리(Gubadly), 라친(Lachin), 캘바자르(Kelbajar) 이다. 난민은 아르메니아로부터 떠나온 피난민 25만 명과, 점령지로부터의 국내피난 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 66만 명, 아르메니아와 점령지점의 국경에 위치한 지역들에서 발생한 피난민 10만 명이다. AzDipservis, Azerbaijan. Information Digest. 2007, p. 176. 이 수치는 국제위기그룹(ICG)의 수치와 차이가 있다. ICG 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16%, 난민 약 68만 명으로 추정한다. 외교통상부, 아제르바이잔 개황, 2012. 1, p. 23. 터키 - 아르메니아간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일어날 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전부를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 인 것은 아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2011년 12월 중반 러시아로의 가스수출을 2012 년부터 연간 30억 입방 미터(기존에는 20억 입방 미터)로 늘리는데 동의하였다. EIU,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2.1 EU는 러시아로부터의 가스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가스수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2011년 1월 EU집행위원장이 아제르바이잔을 방문 하여 알리예프 대통령과 Southern Gas Corridor 구축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 였다. 아제르바이잔은 동유럽의 슬로베니아, 헝가리와 경쟁했으나 헝가리가 9라운드에서 탈락한 후 17라운드에서 아제르바이잔이 113표, 슬로베니아가 77표를 얻으면서 탈 락하고, 최종투표에서 155개국의 지지를 얻어 선출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외교부 엘마르 맘마디아로프(Elmar Mammadyarov) 장관은 UN안보 리에서 장기간 끌고 있는 아르메니아와의 NK분쟁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선출 직후 에 밝힌 바 있다.
134 중앙아시아연구 원우논집 제4집 (2011) EIU,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1.12. 결의안은 첫째, 군대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주권 및 영토 보전(이는 아제르바이잔 주권 하의 NK 자치를 의미), 셋째, 난민 귀환권 재확 인을 언급하고 있다. 외교통상부, 위의 책, p. 32. 초기에 민스크 그룹은 단계적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다. 우선 NK지역의 안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메니아군이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여 NK를 비군사지역화 하고, 이후에 양측은 NK의 정치적 지위문제, 라친회랑, 슈샤 및 샤우미안의 거취문제 등 모든 관련 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침이었다. Tomasz Sikorski, Perspectives for Solving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Regional and European Consequences, Polish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2010. 8. 25. 국제위기그룹(ICG)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비 지출은 2004년 30%(2003년 135백만$ -> 175백만$로 증가), 2005년 70%(300백만$), 2006년 120%(660백만$), 2007년 66%(11억$), 2008년 68%(18억 5천$), 2009년 8%(20억$), 2010년 7.5%(21억 5천$), 2011년 45%(31억 2천$)로 증가하였다. 아르메니아의 국방비는 2011년에 390백만$이었고, 일부 분석가들은 NK를 합치면 약 600백만$에 이를 것 으로 본다.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2005년에 최초로 공식화한 후, 2007년부터 마드리드 원칙 으로 알려진 기본원칙은 합의문을 찾는 민스크 그룹 공동의장국가들에 의해 수정되고 업데이트되었다. 2010 년 초에 그들은 업데이트 된 마드리드 원칙 을 선보였으나 그것은 이전 것과 근본 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아제리 외교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점령 한 아제르바이잔 영토 다섯 개의 지역으로부터 아르메니아가 즉각적으로 철수하고, 뒤이어 5년 이내에 점령한 켈바자르 구역(라친 회랑의 대부분)으로부터 철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2012년 1월 23~24일 러시아 흑해의 소치에서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 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세르지 사르키샨,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NK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아제르바이잔 대외관계에 135 분쟁 해결에 대한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에 이르고자 회담을 가졌다. EIU 보고서에 의하면 아제르바이잔의 12-16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3.4%로 예 상되는데 이는 07-11 기간에 달성한 10.1%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는 더 느 린 오일 생산 확대(Slower expansion in oil production)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는 향후 아제르바이잔 경제성장에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Economist Intelligence Unit, Country Report, Azerbaijan, 2012. 1.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 외교통상부, 위의 책, pp.23~30. Tomasz Sikorski, Perspectives for Solving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Regional and European Consequences, Polish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2010. 8. 25. 이 협정으로 아제르바이잔 내 전쟁 발발 시 터키로부터의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astern Partnership은 2009년 5월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EU정상회의에서 채택 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벨라루스,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이 들 6개국이 포함된다.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licy Briefing, Armenia and Azerbaijan: Preventing War, 2011.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