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보고 제1호 9월 2일 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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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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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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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일본군 노즈( 野 津 ) 제5사단장의 북상 행군로와 선산 해평병참부 신 영 우(충북대 명예교수) <차 례> 1. 머리말 2. 일본군 보병제5사단과 노즈 사단장 3. 노즈 미치츠라 제5사단장의 조선 파병과 육로 북상 1) 제5사단 후속 부대의 조선 증파 결정 2)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의 북상 행군로 4. 선산 해평병참부와 전주최씨가 5. 맺는 말 1. 머리말 일본정부가 청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참모본부 안에 대본영 설치를 결정한 날은 1894년 6월 5일이었다. 일본 정부와 육해군은 즉시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청국군의 조선 출병을 지시한 것은 전날인 6월 4일이었고, 천진조약에 따라 그 사 실을 일본에 통고한 날은 6월 6일이었다. 청국이 일본에 파병을 통고하기 하루 전에 이미 전쟁 지휘부인 대본영 설치를 결정했던 것이다. 청국군은 6월 8일부터 12일까지 순차적으로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25일 도착한 병력까지 합하면 약 2,800명에 달했다. 이 병력은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 해 파견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출병부대의 규모를 전시편제가 되면 8,000명으로 증원하는 혼성여단으로 정했 다. 1차출병 부대로 차출된 것은 히로시마에 주둔한 제5사단 소속의 제9여단이었다. 이토 히 로부미 총리는 6월 7일에 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 大 島 義 昌, 1850~1926) 소장에게 조선에 파견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에서 밝힌 출병의 제1목적은 공사관 영사관과 일본인 보호 였지만 실제는 조선 침략과 청국에 도발하는 것이 임무였다. 일본에 있던 오토리 게이스케( 大 鳥 圭 介, 1833~1911) 공사가 6월 10일 해군 육전대 430명 과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 16일에는 혼성제9여단 선발대인 4,000병력이 인천에 상륙해서 서 울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혼성제9여단 참모와 공사관 무관부 소속에 후쿠시마 야스마사( 福 島 安 - 1 -

正 ) 중좌를 비롯한 우에하라 유사쿠( 上 原 勇 作 ) 무라키 마사미( 村 木 雅 美 ) 육군소좌와 이주인 고로( 伊 集 院 五 郞 ) 해군소좌, 아오키 노부즈미( 靑 木 宣 純 ) 대위와 야마네( 山 根 ) 소좌 등을 증원 해서 동행시켰다. 이미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던 니이로( 新 納 ) 해군소좌 등을 포함하면 노련 한 정보장교들이 서울과 인천에 등지에 집결해 있었다. 전주화약은 이러한 상황 급변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일 양국의 군대가 국내에 들어오는 위기 속에서 동학농민군이 6월 11일 전주성에서 물러나자 청국군은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상 륙지인 아산 인근에 머물러 일본군의 동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도 전쟁을 도발 할 명분을 잃게 되었고, 7월까지 청국과 공동으로 조선내정의 개혁을 진행시킨다는 제안을 하거나 조선정부와 노인정회담에서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등 퇴거 요청에 핑계를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6월 21일 일본의 제안에 대해 청국이 거부의사를 전하자 일본정부는 혼성제9여단 후속부대의 파견을 결정했다. 6월 27일 잔여 2개대대 병력이 기선 8척에 분승하고 순양함 나니와함의 호위를 받아 인천에 도착해서 여단 8,000 병력이 모두 들어왔다.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영국과 러시아도 이 사태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인 영사재판권을 폐지하는 조약개정을 교섭하고 있었는데 영국 외상이 청일 간의 갈등에 조정의사를 표명하였다. 6월 30일 주일 러시아공사는 일본의 철병을 강력히 요 구하는 공문서를 무쓰 무네미쓰( 陸 奧 宗 光, 1844~1897) 외상에게 전달하였다. 열강의 간섭으 로 일본은 개전에 지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7월 중순까지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전라도 일대의 상황이 진정되고, 청국은 조선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일본 요구를 거부하였다.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이 시작된 위에 조선정부는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였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조선정부를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청국과 개전하는 방안이 은밀하게 추진되 었다. 혼성제9여단을 따라 조선에 온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히로시마대 본영에서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구( 川 上 操 六, 1848~1899) 중장 등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 다. 가와카미 참모차장은 청일전쟁을 기획하고 정보장교를 조선과 청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에 피견해서 정탐을 지휘하였던 지휘관이었다.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가 서울에 도착한 직 후 군사행동이 시작되었다. 7월 23일 서울 도성 안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혼성제9여단 병력이 4대문을 장 악해서 통행을 막고, 장위영을 비롯한 경군 병영을 기습해서 무장을 해제시키며, 경복궁을 점령해서 국왕과 왕비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척족 민씨들을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 으로 세운 뒤에 일본과 협력했던 인물들을 정부에 등용시켰다. 경복궁 출입을 일본군이 통 제하는 가운데 대신들은 일본공사가 시키는대로 조일동맹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었다. 그것 은 청국군 축출을 일본에 요청하고, 전쟁 협조를 명시한 내용이었다. 경복궁 점거 직후 혼성제9여단 병력은 서울에서 청군이 주둔한 성환으로 행군하였다. 그 렇지만 청국과의 전단을 연 것은 해군 함대였다. 히로시마대본영은 7월 19일 연합함대 사령 장관 이토 스케유키( 伊 東 祐 亨, 1843~1914) 중장에게 작전명령 제1호를 내렸다. 첫째 조선 서해안의 풍도 및 안면도 부근을 점거해서 근거지를 삼고, 증파 병력을 태우고 오는 청국함 대와 운송선을 파쇄하라는 명령이었다. 7월 9일 청국은 영국의 조정안을 듣자 일본군의 철병을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말하면서 거부하였다. 이를 비난하면서 일본정부가 청국과 국교 단절을 표명하는 결정을 하자 청국 광서( 光 緖 )황제가 격노해서 이홍장에게 개전의사를 전달했다. 이홍장은 7월 18일 아산에 주 - 2 -

둔한 청국군 지휘관이 해상 철군이 어려운 사실을 알리고 증원군을 요청하자 2,300여 병력 을 증파하였다. 이 증원군을 태우고 온 수송선과 호위했던 북양함대의 군함을 노리고 일본 함정이 아산만으로 접근하였다. 7월 25일 오전 7시 45분 일본 해군의 제1유격대 함정이 선전포고 없이 풍도 부근에서 조우한 북양함대 소속 방호순양함 제원( 濟 遠 )과 어뢰순양함 광을( 廣 乙 )을 포격함으로서 청일 전쟁이 해전으로 시작되었다. 육전은 7월 29일 새벽 서울에서 내려간 일본군 혼성제9여단 이 성환역 주변의 청국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두 전투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식 군대로 첫 번째 벌인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기선 제압에 성공하였다. 7월 30일 히로시마대본영은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野 津 道 貫, 1841~1908) 중장에게 제5사단 잔여 부대의 조선 파병을 명령하였다. 청국군 구원병이 평양으로 집결하고, 성환에 서 후퇴한 청국군이 평양에 합류하자 확전을 결정하였다. 그 첫 조치가 제5사단 전체를 동 원하여 조선에 보내는 명령이었다. 이 글은 노즈 제5사단장이 부산에 상륙해서 서울로 북상한 행군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 다. 이 북상로는 이후 청과 전쟁을 벌이면서 히로시마대본영이 전투지역과 군용전신망이나 병참망을 연결하는 노선이 된다. 이 군용전신망과 병참망 중 하나가 선산 해평에 있었다. 전주 최씨의 저택을 탈취해서 사용했던 해평병참부는 낙동강을 건너서 육로로 가거나 배를 이용해서 낙동강 수로를 이용할 때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더구나 해평병참부로 사용된 건 물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에 병참부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중장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과정을 참모총장 아리스가와 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有 栖 川 宮 熾 仁 親 王 ) 대장에게 사단보고( 師 團 報 告 ) 제1호 1) 로 직보 하였다. 이 글은 이 사단보고를 토대로 노즈 미치츠라 제5사단장의 북상 행군로에 대해서 검토하고, 선산 해평의 병참부에 관해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일본군 보병제5사단과 노즈 사단장 일본제국의 육군 제5사단은 1873년에 설치한 히로시마 진대( 鎭 台 )를 모체로 1888년에 개편해서 만든 동원사단이다. 시마네현( 島 根 縣 )과 히로시마현( 廣 島 縣 ), 그리고 야마구치현( 山 口 縣 )에서 병사들을 징집해서 편성한 사단으로 히로시마가 위수지역이었고, 사령부는 히로 시마성 안에 두었다. 육군이 7개의 상비사단을 편성한 해가 1888년이었다. 사단배치표를 보면 전국에 포진한 6개의 사단은 진대의 근거지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진대제는 지역수비가 주요 임무인 프 랑스편제를 본딴 것으로 프랑스 교관을 초빙한 시기에 갖춘 체제였다. 보불전쟁 이후 프러 시아식으로 전환한 육군은 동원사단 체제를 갖추었다. 지역수비를 주임무로 한다면 사단은 동원체제를 갖춰서 원정군의 역할, 즉 대외침략을 가능하게 만든 부대편제를 말한다. 여기 에 궁궐 수비와 행사 때 의장병 역할이 임무인 근위사단까지 모두 7개의 동원사단을 확보 하였다. 다음은 메이지 유신 후 간략히 정리한 군사 확충과정을 정리한 표이다. 1)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0166500 明 治 27 年 秘 密 日 淸 朝 事 件 第 5 師 團 混 成 旅 團 報 告 綴 ( 防 衛 省 防 衛? 究 所 ) - 3 -

<표 1> 일본의 군사제도 정비 과정 연도 군사제도 정비 비고 1869 병부성 설치 율령제의 무관 무기 담당 부서 1871 친어병 창설(근위병 1891근위사단) 4개 진대 1872 육군성과 해군성 분리 육군 제2차 프랑스군사고문단 친어병 창설근위병 1873 징병령 6개 진대 확대 해군 영국 더글러스교관단 1874 육군사관학교 설립 대만 출병 1876 해군병학교(전신 해군조련소) 설립 1877 세이난전쟁 1878 육군성에서 참모본부 독립 1885 병력 확충, 전시 6개사단 편제 1886 참모본부 해군부 설치 1883 육군대학교 설치, 프랑스 교관 초빙 1885 육군대학교 독일 메켈 소좌 교관 초빙 1888 진대제에서 사단체제로 전환 상설 7개사단 체제 1889 해군 4개 진수부 설치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마 이즈루 1894 산요( 山 陽 )철도 히로시마 개통(6월) 1901 산요철도 시모노세키 개통 1893년 12월에 규정한 전시 사단편제는 총원이 18,492명이었다. 사단사령부는 사단장을 비롯해서 참모부와 부관부 등의 정원이 177명이었고, 그 아래 2개 보병여단이 소속되었다. 보병사단에서 주력은 보병연대였다. 5,806명이 정원인 보병여단은 각기 2,896명의 보병연 대 2개를 거느렸다. 보병연대는 962명 정원의 대대가 3개씩 소속되어 있었고, 정원 222명 의 중대가 4개가 그 아래 있었다. 여단에서 중대까지 본부의 인원은 모두 98명이었다. 이와 함께 사단에는 전투병과로서 기병대대(정원 509명), 포병연대(정원 1,267명), 공병 대대(523명), 대가교종열( 大 架 橋 縱 列, 336명)과 소가교종열( 大 架 橋 縱 列, 120명)이 부속되었 다. 대가교는 큰 다리, 소가교는 작은 다리를 부설하는 임무인데 공병에 속한 부대였다. 지 원부대는 탄약대대(정원 1,508명)과 치중병대대(1,328명), 그리고 위생대(정원 416명)과 야 전병원(정원 116명)이 있었다. 사단장은 2성장군인 中 將 이 보임하였다. 일본군 무관의 관등 중 장관( 將 官 )급 장교는 소 장( 少 將 ) 중장( 中 將 ) 대장( 大 將 )의 3등으로 구분되었다. 2) 좌관( 佐 官 )은 대좌 중좌 소좌가 있 었고, 위관( 尉 官 )은 대위 중위 소위로 구분되었다. 하사( 下 士 )는 조장( 曹 長 ) 군조( 軍 曹 ) 오장 ( 伍 長 )으로 편성되었다. 이 때는 하사관으로 장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준위( 准 尉 ) 계급은 설치되지 않았고, 보병 포병 공병 치중병 헌병에 특무조장( 特 務 曹 長 )이 있었다. 병사는 병장 2) 陸 軍 武 官 官 等 表, 明 治 6 年 5 月 8 日 太 政 官 布 達 第 154 號 ( 明 治 6년, 法 令 全 書 175쪽) - 4 -

상등병 일등병 이등병 순이었다. 일본제국의 육군에서 소장은 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중장은 사단장과 군사령관을 담당했 다. 대장은 참모총장과 육군대신( 陸 軍 大 臣 ), 또는 군사령관에 보임되었다. 원수( 元 帥 )는 명예 직으로 육군대장이 1898년 원수부조례( 元 帥 府 條 例 )를 제정한 후 원수부에 속해서 통수권자 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1894년에 제5사단장이었던 노즈 미치츠라( 野 津 道 貫 ) 중장은 육군의 최상층부에 속한 인 물이었다.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이후 만든 명단을 보면 육군 내 서열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 山 縣 有 朋 )과 오야마 이와오( 大 山 巖 )에 이어 3위에 올라있다. 3) 이 시기에 사단장은 실병력 을 지휘하는 육군의 핵심 지휘관이 맡는 직책으로서 노즈 미치츠라는 사단장 중에도 경력이 비슷한 제1사단장 야마지 모토하루 중장과 함께 선임 위치에 있었다. 당시 각 사단 주둔지와 사단장은 다음과 같다. 근위사단 도쿄,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신노( 小 松 宮 彰 仁 親 王, 1846~1903), 황족 제1사단 도쿄, 야마지 모토하루( 山 地 元 治, 1841~1897) - 도사번 출신 제2사단 센다이, 사쿠마 사마타( 佐 久 間 左 馬 太, 1844~1915) 죠슈번 출신 제3사단 나고야, 가쓰라 타로( 桂 太 郞, 1848~1913), 조슈번 출신 제4사단 오사카, 기타시라가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 北 白 川 宮 能 久 親 王, 1847~1895), 황족 제5사단 히로시마, 노즈 미치츠라( 野 津 道 貫, 1841~1908), 사쓰마번 출신 제6사단 구마모토, 구로키 타메모토( 黑 木 爲 楨, 1844~1923), 사쓰마번 출신 7개사단은 도쿄를 비롯해서 혼슈의 동해안 주요 도시와 세토내해의 요지인 히로시마와 규슈의 구마모토에 주둔하였다. 사단장의 출신지역을 보면 메이지정권의 실체를 알 수 있 다. 황족 출신 2명의 사단장을 빼면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각각 2명씩, 그리고 도사번 출신 1명이 5개의 사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과 사쓰마번, 그리 고 토사번 출신이 육군 사단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5사단장인 노즈 미치츠라 중장은 제1사단장인 야마지 모토하루 중장과 함께 사단장 중 에서도 군내 서열이 가장 높은 장성이기도 했다. 그는 사쓰마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가고 시마성 아래의 조선인마을인 고라이마치( 高 麗 町 )에서 성장했다. 1868년의 보신전쟁( 戊 辰 戰 爭 )에 소대장으로 참전해서 서전인 도바 후시미전투( 鳥 羽 伏 見 の 戰 い)을 비롯해서 아이즈전 투( 會 津 戰 鬪 )과 하코다테전투( 箱 館 戰 鬪 )에서 활약하였다. 1871년 도쿄에 가서 뒤에 근위사단으로 확대되는 고신페이( 親 御 兵 )로 들어가 육군소좌로 임명된다. 징집령에 의해 군대가 확장하여 고속 승진을 하게 되면서 다음해인 1872년 중좌, 1874년에는 대좌가 된다. 1878년에는 소장에 올라 도쿄진대의 사령관이 된다. 1884년 육 군경( 陸 軍 卿 ) 오야마 이와오를 수행해서 유럽의 군사제도를 시찰하였다. 1884년은 임오군란 이 일어난 2년 후이고 갑신정변이 발생한 해였다. 이 시기는 청국을 적국으로 간주해서 해 군 증강을 위한 증세를 제기하면서 군사력 확충을 추진하던 때였다. 오야마 육군경은 메이지유신 다음해인 1869년에 유럽에 가서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싸운 보불전쟁( 普 佛 戰 爭, 1870~1871)을 시찰한 적이 있었고, 1870년부터 1873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 유학했던 그가 다시 소장 장교를 대동하고 군사시찰을 간 것이다. 이때 수행한 인 물 중에는 미우라 고로( 三 浦 梧 樓 ), 가와카미 소로쿠( 川 上 操 六 ), 가쓰라 타로( 桂 太 郞 )와 함께 3), 陸 軍 現 役 將 校 同 相 當 官 實 役 停 年 名 簿, 明 治 36 年 7 月 1 日 - 5 -

노즈 미치츠라가 포함되었다. 노즈 미치츠라가 펴낸 구미순회일지( 歐 美 巡 廻 日 誌 ) 4) 3권을 보면 2월 16일 출발해서 다음해 1월 25일 돌아오기까지 군사 선진국인 유럽 여러 나라의 군사시설을 둘러본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상권은 홍콩을 지나 아라비아해와 지중해를 거쳐 이태리와 프랑스 에 들어가서 시찰하는 여정을 기록하였다. 중권은 벨기에와 러시아, 그리고 독일 3국을 순 회하는 내용이다. 하권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보고 프랑스 영국을 거쳐 미국을 지나 태 평양을 통해 돌아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육군경 직위로 방문한 오야마는 유럽 국가의 참모총장 등은 물론 국왕까지 알현할 수 있 었고, 대규모 훈련장을 참관하거나 주요 군 부대를 찾아가 필요한 자료를 요청해서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 전반에 관해 획득한 정보들은 일본제국의 육군 편제의 개혁이나 무기 확보 등에서 즉각 활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1885년에는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을 수행해서 참모본부의 정보장교들인 육 군소좌 츠치야 미츠하루( 土 屋 光 春, 1848~1920) 육군대위 후쿠시마 야스마사( 福 島 安 正, 1852~1919), 육군대위 야마네 타카스케( 山 根 武 亮, 1853~1928) 등과 함께 청국을 방문하 였다. 5) 츠치야 미츠하루 소좌는 조선과 청국의 정보수집을 담당한 관서국의 핵심이었으며, 후쿠시마 야스마사 대위는 명치 7년 육군 참모국에 있으면서 지도와 지리학을 익히는 동시 에 외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영어 독어 불어 러시아어 중국어의 5개 언어를 능숙히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78년에는 청국공사관 무관으로 2년 간 근무하였다. 야마네 타카스케 대위는 경시청 순사로서 육사 1기생으로 입학해서 석차 3위로 졸업하였다. 참모본부는 그를 청국에 파견해서 베이징 부근 5만분의 1 군사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청국을 다녀온 노즈 미치츠라 소장은 의견서를 제출한다. 6) 그것은 1 각 진대에 속히 기병을 배치하고, 기포병( 騎 砲 兵 )을 신설하는 것, 2 교선( 橋 船 ) 재료의 필요성 3 청국의 지형과 언어를 익힌 장교 양성, 4 장관( 將 官 )급 장교를 파견해서 현지를 보고 오도록 하는 것 등이었다. 이 의견서는 청국과 전쟁을 대비해서 청국 화폐조사와 원정 군의 질병 치료까지 대책을 세워서 건의하였다. 이때 청국에서 정탐한 직예성 현재군( 現 在 軍 )의 병력 수를 보고하고 일본군의 증강을 강 력히 요청했던 것이 두드러진다. 직예성에는 보병 64,071명 기병 14,038명 포병 6,139명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병 대대에는 간간이 포병 1개중대가 편성되어 있고, 그 수는 보고 한 6,139명의 포병에 들어있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노즈 미치츠라는 1885년 5월 중장으로 승진하고 히로시마 진대사령관에 취임한다. 7) 1888년 5월 진대가 사단으로 개편되고 상설 6개 동원사단 체제로 확대되면서 그대로 제5 사단장을 맡았다. 1894년 12월 제1군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 대장이 물러나면서 청일전 쟁 와중에 제1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제5사단을 떠난다. 진대사령관부터 헤아리면 노즈 미 치츠라 중장은 무려 10년 동안 제5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8) 4) 著, 歐 美 巡 廻 日 誌 上 中 下, 명치 19 年 (1886) 6 月, 廣 島 鎭 台 文 庫. 5)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A01100293500 公 文 錄 明 治 十 八 年 第 百 七 十 一 卷 明 治 十 八 年 一 月 ~ 二 月 官 吏 進 退 ( 陸 軍 省 )( 國 立 公 文 書 館 ) 少 將 野 津 道 貫 外 五 名 特 派 全 權 大 使 伊 藤 博 文 ニ 隨 行 淸 國 ヘ 差 遣 ノ 件 6) 陸 軍 中 將 子 爵 野 津 道 貫, 明 治 18 5 意 見 書 7) 陸 軍 省, 陸 軍 現 役 將 校 同 相 當 官 實 役 停 年 名 簿, 明 治 36 年 7 月 1 日 8) 노즈 미치츠라는 청일전쟁 와중에 제1군사령관이 되고, 1895년에는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작위도 백작을 받는 다. 1895년 11월에는 근위사단장으로 보임되고, 東 京 防 禦 總 督 東 部 都 督 敎 育 總 監 軍 事 參 議 官 을 지낸다. 1907 년에는 侯 爵 에 오르고, 또 귀족원 의원이 된다. - 6 -

제5사단은 보병제9여단과 제10여단이 주축이었다. 제9여단은 보병제11연대와 21연대로 구성되었고, 제10여단은 보병제12연대와 22연대로 구성되었다. 제11연대는 편성지와 주둔 지가 히로시마였다. 이 연대는 조선과 관련이 깊었다. 이미 1882년 임오군란 때 1개 보병 대대가 해군 육전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된 바가 있었다. 21연대도 히로시마성에서 편성했는 데, 뒤에 시마네현의 하마다( 浜 田 )로 이전해서 주둔하게 된다. 제10여단의 제12연대는 시코쿠( 四 國 )의 가가와현( 香 川 縣 ) 마루가메( 丸 龜 )에서 편성해서 주둔하게 됨으로서 마루가메 연대로 불렸다. 제22연대도 시코쿠의 에히메현( 愛 媛 縣 ) 마쓰야 마( 松 山 )에서 편성해서 역시 마쓰야마에 주둔하였다. 이와 함께 포병제5대대와 공병제5대대, 그리고 치중병제5대대가 창설 때부터 예하부대로 있었으며, 기병중대와 위생대, 야전병원이 소속되었다. 보병제5사단의 사령부는 히로시마성에 위치했으나 관할하는 지역은 주고쿠( 中 國 )라고 불 렸던 혼슈의 히로시마현과 야마구치현, 그리고 시마네현 일대까지 포함하였다. 또한 시고쿠 ( 四 國 )의 가가와현과 도쿠시마( 德 島 縣 ), 그리고 에히메현과 고치현( 高 知 縣 )까지 방어하는 사 단이었다. 따라서 사단사령부와 여단사령부를 비롯해서 각 지원부대는 히로시마, 야마구치, 오노미치, 마쓰야마, 우와지마, 마루가메, 다카마쓰, 도쿠시마, 고치, 이마바리 등 넓은 지역 에 퍼져 있었다. 3. 노즈 미치츠라 제5사단장의 조선 파병과 육로 북상 1) 제5사단 후속 부대의 조선 증파 결정 대본영이 전쟁을 결정하고 육해군 장교에게 그 사실을 처음 알린 날은 1894년 6월 1일 이었다.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중장은 보병제11연대와 제21연대를 주축으로 지원부대를 증강시킨 혼성제9여단을 편성하였다. 6월 6일에는 대본영에서 혼성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 마사( 大 島 義 昌, 1850~1926) 소장에게 선발대인 제1대대가 8일 오후 우지나( 宇 品 )에 도착하 니 수송선 와카노우라마루( 和 歌 の 浦 丸 )에 승선시켜서 인천으로 보내라는 전보 명령을 내렸 다. 9) 혼성제9여단은 선발대에 이어 2차에 걸쳐 인천에서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청국과 전쟁을 감행하려는 일본군도 본격적인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오래 동안 대비해온 근대식 전쟁을 추진해나갔다. 먼저 참모 조직을 통해 전쟁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혼성제9여단 선발부대에 정보장교들인 후쿠시마 야스마사( 福 島 安 正 ) 중좌와 우에하 라 유사쿠( 上 原 勇 作, 1856~1933) 소좌, 그리고 이주인 고로( 伊 集 院 五 郞, 1852~1921) 해군 소좌를 동행시켰다. 이미 조선과 청국공사관에 파견된 무관들의 첩보와 함께 새로 파견된 정보장교들의 비밀정탐, 대외조종, 기술조사, 물자조달 등에 관한 보고가 전술 마련에 중요 한 근거가 되었다. 10) 정보장교를 지휘한 인물은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이었다. 청일전쟁은 그가 이끄는 대 본영에서 전반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실제로 서울에서 경복궁을 침범하거나 청군의 정보를 수집해서 군사작전을 지도한 핵심은 가와카미 소로쿠의 지시를 받은 이들 정보장교들이었 다. 11) 9) 命 令 電 報 明 治 27 年 6 月 6 日 10)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13110361200 日 淸 韓 史 講 義 摘 要 錄 第 1 卷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11)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1756600 明 治 27 年 自 6 月 至 9 月 混 成 第 9 旅 團 第 5 師 團 報 - 7 -

둘째는 군용전신을 설치하여 전투 현지의 보고를 대본영에서 직접 받고 명령을 내리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군용전선 가설을 서둘렀다. 6월 26일 제5 사단장에게 내린 명령 을 보면 그 긴급성이 드러난다. 2개조의 가설지대를 보내 한쪽은 부 산에서, 한쪽은 서울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중간 지점에서 만나도록 계획하고, 제5사단장이 책임을 지고 지원하도록 하였다. 12) 이와 동시에 대본영에서 직접 보낸 제1지대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대구를 거쳐 성주 추풍령 옥천을 지나 청주까지 전신선을 가설하고, 제5사단에서 편성해서 파견하도록 한 제2지대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청주까지 가설하도록 했다. 13) 이와 함께 조선에서 설치한 국유 전신선도 일본군이 탈취해서 군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4) 셋째는 병참지원을 통해 전투부대의 전투능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혼성제9여단에 치중 병대( 輜 重 兵 隊 )를 배속시켜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군량 등을 공급하도록 하였고, 일본에서 보내는 군수물자는 병참감부( 兵 站 監 部 )에서 병참망을 통해 전투지로 보내게 하였다. 청국의 북양함대로 인해 황해의 제해권을 갖지 못할 때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활용해서 병 참 물자를 보급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울 이남은 남부병참감부를 따로 설치해서 대본영 상석참모로서 병참총감을 겸무하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이 직접 지휘하도록 하였 다. 15) 참모본부의 정보장교들과 함께 파견된 경리관 후지이 츠네오( 藤 井 常 雄 ) 3등군리( 軍 吏 )가 경부 간 병참선로를 실사한 바가 있었다. 16) 가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은 부산에 교두보와 같은 성격인 대본영의 운수통신지부( 運 輸 通 信 支 部 )를 설치하고, 6월 7일 지부장에 참모본부 제2부원 소속 소장장교인 시바 가쓰사부 로( 柴 勝 三 郞, 1864~1938) 중위를 임명하였다. 17) 히로시마에서 조선으로 가는 모든 병력과 군수물자 등은 운수통신지부장 시바 중위의 주 선에 따라 움직였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고되는 긴급 전문과 같은 주요 사항도 시바 중위 를 거쳐 가게 마련이었다. 가장 먼저 시급히 추진해야 할 임무가 군용전선을 가설하는 문제 였다. 군용전선가설은 제5사단장에게 명령을 내려 부설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대본 영에서 제1지대 사령관을 요시미 세이( 吉 見 精 ) 18) 공병소좌로 직접 선임해서 작업을 시작하 도록 하였다. 제2지대는 7월 2일 제5사단장이 바바 마사오( 馬 場 正 雄 ) 공병소좌를 임명하였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12) 참모본부 편, 明 治 二 十 七 八 年 日 淸 戰 史 1, 東 京 印 刷 株 式 會 社, 1965 ; 姜 孝 淑, 日 淸 戰 爭 と 第 二 次 東 學 農 民 戰 爭, 千 葉 大 學 大 學 院 社 會 文 化 硏 究 科 修 士 論 文, 2000, 9쪽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6장 일본군과의 항전 / 1. 일제의 전선가설기대의 설치와 군용전신선 가설. 13) 가와카미 참모차장은 처음 정한 이 노선에서 추풍령을 경유하지 않고 상주에서 충주로 직행하도록 변경하고 7월 11일에 체신대신에게 통보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4권, 六. 歐 文 電 報 往 復 控 一 (229) 電 信 線 의 架 設 經 由 地 변경 통보. (35) 川 上 陸 軍 中 將 requests me to inform you that instructions have been sent to first and second 軍 用 電 信 隊 respectively, that first project for the construction of telegraph line has been altered and new project which is to run from 釜 山 through 大 邱 尙 州 忠 州 to 京 城 has been adopted. 14) 混 成 旅 團 祕 報 7 月 19 日 15)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2110100 明 治 27 年 7 月 28 日 至 8 月 31 日 陣 中 日 誌 第 五 師 團 兵 站 監 督 部 壹 號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16)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13110361200 日 淸 韓 史 講 義 摘 要 錄 第 1 卷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17)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B08090002200 日 淸 韓 交 涉 事 件 關 係 雜 件 第 一 卷 (5-2-18-0-2_001) ( 外 務 省 外 交 史 料 館 ) 朝 鮮 國 釜 山 ヘ 運 輸 通 信 支 部 ヲ 置 ク 旨 川 上 兵 站 總 監 ヨリ 通 告 ノ 件 18) 요시미 세이는 일본육군사관학교 1기생이다. 1886년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독일에서 초빙한 메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 1842~1906) 소좌에게 군사학을 습득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중좌로 진급해서 신 설된 철도대대의 대대장이 된다. - 8 -

다. 제1가설지대는 장교 5명에 하사와 병 142명 그리고 기수( 技 手 ) 9명과 운반부 160명 등 을 합해 345명이나 되었다. 제2가설지대는 장교 4명에 하사와 병 126명 그리고 기수 10명 과 인부 150명을 합해 449명이었다. 말은 각 지대에 5마리씩 배정하였고, 전신주와 전선 등 자재와 부속은 계속 일본에서 수송해왔다. 19) 대본영에서 직접 임명한 제1지대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대구를 거쳐 성주 추풍령 옥천을 지나 청주까지 전신가설을 책임졌고, 제5사단에서 편성해서 파견한 제2지대는 서울에서 시 작하여 청주까지 가설을 맡도록 했다. 20) 전신선로 주변을 정찰하고 호위하는 임무는 부산에 남겨둔 보병제21연대 제5중대 병력으로 맡게 하였다. 21) 군용전신망 연결 노선에는 병참선 로를 결합시켰다. 조선정부는 일본공사 오토리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군용전신선을 설치하도록 승낙하지 않 았다. 오시마 혼성제9여단장이 참모총장에게 올린 7월 13일자 보고에서도 오토리 공사가 조선정부가 전신 가설을 승낙할 전망 없다고 단언했다. 는 말을 전하고 있다. 22) 그러나 7 월 23일 경복궁을 일본군이 기습해서 점거한 다음에는 일본군의 의도대로 갈 수밖에 없었 다. 조선정부에서 군사문제를 전담했던 호위부장 신정희( 申 正 熙 ) 등은 발언권이 줄어들었고,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군용전선 가설이 계속되었다. 대본영의 주요 직책은 참모본부에서 정보를 관장하던 장교들로 임명되었다. 운수통신장관 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內 正 毅, 1852~1919) 대좌였고, 육군참모가 츠치야 미츠하루( 土 屋 光 春 ) 대좌와 도조 히데노리( 東 條 英 敎, 1855~1913) 대좌였으며, 병참총감부 참모장대리가 다무라 이요조( 田 村 怡 與 造, 1854~1903) 소좌였다. 정보와 함께 병참과 통신을 중시했던 대 본영 사정을 잘 보여주는 인선이었다. 사실상 대본영과 참모본부의 소속 장교들의 임무에는 구분이 없었다. 23) 히로시마대본영이 목표한 조선과 청국을 상대로 한 전쟁 도발은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7 월 23일의 경복궁 기습, 7월 25일의 아산 풍도전투, 7월 29일의 성환전투로 확대되었다. 8 월 1일 청국과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파병 가능한 청국군 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청국이 증파한 병력은 속속 평양으로 집결하였다. 그 수는 15,000명 가까이 달하는 병력이었다. 24) 성자군( 盛 字 軍 ) - 총병 위여귀( 衛 汝 貴 ) 병력 5,600명 의자군( 毅 字 軍 ) - 총병 마옥곤( 馬 玉 昆 ) 병력 2,100명 봉천군( 奉 天 軍 ) - 총병 좌보귀( 左 寶 貴 ) 병력 보병 2,574 기병 1,156명 계 3,730명 성자연군( 盛 字 練 軍 ) - 총병 풍승아( 豊 陞 阿 ) 병력 기병 524명 1,500명 19) JACAR(アジア 史 資 料 センター)Ref.C13110302500 命 令 訓 令 自 明 治 27 年 6 月 至 明 治 28 年 6 月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電 線 架 設 枝 隊 職 員 表 와 電 線 架 設 枝 隊 編 制 表. 20) 이 노선은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상주에서 충주를 거치는 것으로 변경하고 7월 11일에 체신대신에게 통보한 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4권, 六. 歐 文 電 報 往 復 控 一 (229) 電 信 線 의 架 設 經 由 地 변경 통보. (35) 川 上 陸 軍 中 將 requests me to inform you that instructions have been sent to first and second 軍 用 電 信 隊 respectively, that first project for the construction of telegraph line has been altered and new project which is to run from 釜 山 through 大 邱 尙 州 忠 州 to 京 城 has been adopted. 21) 위자료, 22)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0786900 明 治 27 年 7 月 ~8 月 着 電 綴 ( 三 )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7 月 13 日 大 島 少 將 發 參 謀 總 長 宛 朝 鮮 政 府 電 信 架 設 を 承 諾 する 見?みなしと 公 使? 言 せり 云 云 23) 東 條 英 敎, 隔 壁 聴 談 第 2 節 軍 事 動 作 ノ 發 展 及 外 交 政 略 ノ 狀 態 24) 三 宅 幹 夫, 日 淸 戰 役 平 壤 ノ 戰 鬪, 昭 和 8 年 3 月 - 9 -

아산군( 牙 山 軍 ) - 엽지초( 葉 志 超 ) 섭사성( 聶 士 成 ) 병력 3,000명 계 14,950명 야포 4문, 산포 28문, 기관포 6문 여기에 성환에서 일본군 혼성제9여단의 기습을 막지 못하고 후퇴한 청국군도 평양 집결 지로 합류하였다. 25) 평양 감사 민병석은 청군을 지원하였다. 혼성제9여단 기병대는 임진강 일대를 정찰하며 청국군의 동정을 살폈다. 다음 전투는 평양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히로시마대본영은 일본군 병력을 증파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이 조선에 파견되면서 병참 보급의 문제가 심각하 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혼성제9여단 2개 연대의 병력이 서울 일대에서 한 달여 동안 주둔하였다. 11연대는 3개 대대의 12개중대에 3,095명이 소속되어 있었고, 21연대는 3개대대의 12개중대에 3,070명 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막사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주어야 했다. 기병 중대는 장병 208명에 말이 127마리였다. 산포병대대는 장병 523명에 승마용 말 38마리와 짐말 160마리가 딸려 있었다. 공병중대도 292명의 병력이었고, 치중대는 154명의 병력에 41마리의 말이 수반되었다. 혼성제9여단은 총 8,055명 병력에 말 290마리, 짐말 160마리 모두 450마리를 유지하였다. 혼성제9여단 병력은 이미 7월의 무더위를 겪었고, 8월의 혹서기가 다가왔다. 위생도 좋 지 않아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는 병사들이 늘어갔다. 이들에게 공급해야 할 군량과 말먹이, 무기와 탄약, 피복과 생활용품, 치료약품과 병원물품 등이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계속해서 보급해야 군사력이 유지될 수 있었다. 6월 29일자와 7월 19일자로 파악된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 26) 용산 : 여단사령부 제11연대 기병대 포병대 공병대 병참사령부 병참부 군악대 아현동 : 제21연대 인천 : 제2야전병원 병참감부 병참부 공덕동 : 위생대 제1야전병원 여기에 공병으로 이루어진 가설지대가 작업 중이었고, 전신지대는 광나루에 위치하고 있 었다. 혼성제9여단의 보급품 중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품목은 군량과 같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막사 자재와 전신주 재료에 이르기까지 결국 일본에서 수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내의 병참망 구축은 전쟁 승패와 직결하는 문제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도로 사정은 열악하였다. 전선가설지대가 가설공사를 시작하면서 부딪친 난 제가 사람과 말이 통행하기 어려운 도로부터 먼저 정비해야 하는 문제였다. 27) 도로를 확장 하고. 행군 노선에 있는 논밭을 매립하며, 자연석을 무른 땅에 깔면서, 붕괴 우려가 있는 길 은 수선도 해서, 인마와 화물 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선박으로 올라온 군수물자를 25), 梅 泉 野 錄 제2권, 高 宗 31년 甲 午 (1894년), 청국군의 평양 진주. 淸 國 總 兵 衛 汝 貴, 馬 玉 崑, 豊 陞 阿, 左 寶 貴 등이 평양에 들어오자 葉 志 超, 聶 士 成 등이 그곳으로 가서 會 同 하였다. 이달 15일경이다. 그리고 그들의 병정들은 34 營 을 합하여 15천명이 있었으며, 諸 將 들은 통솔하는 元 帥 가 없으므로 직위가 서로 같았고 호령도 한결같지 않아 군대의 대열에 기강이 없었다. 26) 明 治 27 年 6 月 29 日 軍 隊 槪 見 表 明 治 27 年 7 月 19 日 軍 隊 槪 見 表 27)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B07090595500 日 淸 韓 交 涉 事 件 二 際 シ 軍 事 上 ノ 設 計 二 關 スル 韓 國 政 府 ト 協 議 雜 件 (5-2-2-0-3)( 外 務 省 外 交 史 料 館 ) 1. 朝 鮮 國 ニ 於 テ 軍 隊 行 動 ニ 付 道 路 修 繕 其 他 施 設 ヲ 要 スル 件 - 10 -

낙동강 연안에 하륙시키는 정박장도 조성해야 했다. 이러한 공사를 할 때 주민과 지방관에 게 협조가 필요하였다. 혼성제9여단의 행군로인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도 병참부를 설치해서 군수물 자를 운송했으나 어려운 점이 있었다. 28) 부산과 서울까지의 행군로는 더 길고 험할 것이 우 려되었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이 제5사단 잔여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가라는 히로시마대본영의 명령받은 것은 7월 27일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우지나군항을 통해 부산에서 가서 육로로 북 상하면서 병참망과 군용전신망의 실태를 세밀히 점검하는 것이 사단장의 주요 임무가 되었 다. 2) 노즈 제5사단장의 육로 북상 제5사단 잔여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히로시마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모든 부대가 즉각 조 치에 나섰다. 제5사단 병참감부가 먼저 행군로에 병참 보급을 준비하는 업무를 개시하였다. 7월 28일 제5사단 병참감 후루가와 노부요시( 古 川 宣 譽, 1849~1921) 대좌를 중심으로 본부 를 꾸리고, 각 부서를 포함시킨 지부를 편성했다. 헌병을 비롯해서 감독부, 금궤부, 양향부, 군의부, 우편부와 함께 인부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증원을 요청하였다. 29) 이 지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설치하였다. 각 요지에 16개의 병참사령부를 두었고, 후비 보병제10연대를 파견한 후 제1대대 병력을 각 병참부에 분산 주둔시켰다. 그리고 이 북상 로를 중로( 中 路 )라고 하고, 이를 관장하는 병참감을 중로병참감이라고 하였다. 경상도와 충 청도 지역의 병참망은 다음과 같다. 30) <표 2> 중로병참감 관할 병참부와 수비병 지역 병력 사령관 31) 비고 부산 대대본부 제3중대 삼랑진 물금 1소대 1분대 가다오카( 片 岡 ) 소좌 다케다( 武 田 ) 소좌 제2중대 밀양 1분대 마쓰무라( 松 村 ) 소좌 대구 청도 1소대 1분대 우마야하라( 馬 屋 原 ) 소좌 소다( 曾 田 ) 소좌 제2중대 본부 다부원 1분대 와다나베( 渡 邊 ) 소좌 낙동 해평 1소대 1분대 이마하시( 今 橋 ) 소좌 가가와( 香 川 ) 소좌 제2중대 태봉 1분대 토키자와( 時 澤 ) 소좌 문경 반소대 데와( 出 羽 ) 소좌 제1중대 28)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2102700 明 治 27 年 7 月 1 日 至 7 月 25 日 陣 中 日 誌 第 1 軍 兵 站 監 部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7 月 5 日 兵 站 景 況 報 告 29) JACAR(アジア 歷 史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2110100 明 治 27 年 7 月 28 日 至 8 月 31 日 陣 中 日 誌 第 五 師 團 兵 站 監 督 部 壹 號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30) JACAR(アジア 史 資 料 センター)Ref.C06062205400 明 治 27 年 9 月 中 路 兵 站 監 督 部 陣 中 日 誌 第 2 号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9 月. - 11 -

안보 1분대 모리토( 森 戶 ) 소좌 충주 가흥 장호원 1소대 반소대 1분대 (하담)다이쿠( 大 供 ) 소좌 하타노( 波 多 野 ) 소좌 곤지암 반소대 이천 1분대 우메사키( 梅 崎 ) 소좌 송파진 1소대 야마가타( 山 顯 ) 소좌 조현 1분대 시바( 芝 ) 소좌 제1중대 본부 제1중대 일본에서 오는 병력의 상륙지인 부산에는 대대본부와 함께 1개중대 병력을 주둔시켰고, 중간의 주요 거점인 삼랑진 대구 낙동 문경에도 1개소대나 1개소대의 절반 병력을 배치하 였다. 거점 병참부 인근에 문제가 생기면 여기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중장은 8월 5일 우지나군항을 출발해서 다음날 오전 9시 15분 부 산에 도착하였다. 먼저 부산으로 가서 상륙 준비를 시킨 센바 타로( 仙 波 太 郎 ) 참모 32) 는 중 로의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여 포병 연대본부 그리고 포병 1대대본부 및 포병 1중대는 와카우라마루를 타고 원산으로 직행하도록 했다. 대본영도 동일한 보고를 받고 제5사단 잔여부대의 일부를 원산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중로로 상륙하 는데 사단장은 속히 서울에 가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에 따라 가가와현 마루가메에서 온 제12연대 제1대대도 토토미마루( 遠 江 丸 )에 승선하여 원산으로 향하게 했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막료와 기병 1개소대로 30여 일행 33) 을 꾸려서 서울로 북상하였 다. 8월 8일 오전 4시 50분 부산을 출발해서 오후 2시 20분 양산에 도착한 다음 사척동( 砂 脊 洞 ) 고개부터 마필 통과가 심히 곤란했다고 언급하였다. 이뿐 아니라 북상길 전 구간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34) 서울 도착 후 보고한 요약에서는 주요 문제점 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35) 도로는 험악하고 더구나 한국 화폐는 없고 고용할 사람이나 마필( 馬 匹 ) 부족으로 군대가 행진하는데 곤란한 상황은 여러 번 전보로 보고한 것과 같습니다. 그 도로는 험악하여 대부 분 돌길이었고, 또 도로라고 부르기가 어렵게 논두렁길( 畦 道 )로 지나가는 부분이 간혹 있어 심한 험로였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통과한다고 생각했지만 휴대품이 있어 곤란하였고 또 많은 물품을 운반하는데 많은 인부가 필요했습니다. 한국 인부( 韓 夫 ) 사용에는 곤란한 점이 심했고(인부를 얻기도 어렵고 얻더라도 행진이 느리고 재촉하면 놀라서 도망칠 우려가 있는 등) 또 물품을 지방에서 조달했지만 실로 주선이 너무 늦어 결국 다음날 행군을 중지 31) 병참지부의 사령관 명단은 8월 25일 부산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 室 田 義 文, 1847~1938)이 오토리 공사 에게 보낸 보고에 나온 것으로 뒤에 교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2권, 二. 京 城 釜 山 仁 川 元 山 機 密 來 信 (9) 日 本 兵 站 部 소재지 지방관의 편의제공. 32) 센바 타로(1855~1929)는 에히메현 출신으로 하사관 양성소인 육군교도단을 거친 뒤 1878년 육사 舊 2기로 임관하였다. 1885년 육군대학교를 1기로 마친 다음 참모본부 참모를 지냈고, 독일 유학 후에는 제5사단 참모 로 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03년 의화단사건 후 청국주둔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러일전쟁시 청국 내부의 정보수집, 아오키 노부즈미( 木 宣 純, 1859~1924)의 러시아 후방 파괴공작을 지원하였다. 33) 錦 藩 集 略 別 啓, 1894년 7월 25일 34) 노즈 사단장은 기록을 꼼꼼하게 남겼다. 앞에서 언급한 歐 美 巡 廻 日 誌 도 방문지와 만난 사람을 상세히 기 록해서 당시 사정을 잘 전해준다. 35)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0166500 明 治 27 年 秘 密 日 淸 朝 事 件 第 5 師 團 混 成 旅 團 報 告 綴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 12 -

하는데 이르렀습니다. 불편한 점으로 지적한 것은 여러 가지였다. 1 도로가 험악하고 좁다. 2 군장과 무기 휴 대에 어렵다. 3 물자 수송에 인부가 많이 필요하다. 4 인부 확보가 어렵고 확보해도 속도 가 느리다. 5 인부를 독촉하면 놀라 도망한다. 6 운임 지불에 필요한 한국돈 확보가 어렵 다. 7 지방에서 물품 조달이 어렵고 주선이 너무 늦다. 일본군 행군을 위한 도로 개선은 결국 공병대가 도로 개설과 수선 공사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고성부사 오횡묵은 경상도에서 일본 공병대가 했던 도로 공사를 도 로가 좁은 곳은 넓혔고, 높은 곳은 파내고 낮은 곳은 메우며, 돌을 뽑고 나무를 잘라 평탄 하게 만든 사실 을 전해주고 있다. 36) 일본인을 말하면 5월부터 동래에서 내지를 따라 상경한 사람이 5~6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나는 길은 3백 명씩 혹 대를 지어 3일 기한으로 10리를 수리하는데 좁은 곳은 전 답을 따지지 않고 높은 곳은 파내고 낮은 곳은 메워서 돌을 뽑고 나무를 잘라 기어이 평탄 하게 하였다. 대략 40리에 하나씩 병참을 두어 동래 밀양 청도 대구 독명원 해평 낙동 태봉 문경은 대참( 大 站 )으로 일병이 많으면 2~3천명에 이르고 적어도 천명 이하가 아니다. 그 나 머지 소참( 小 站 )에도 1~2백 명이 된다고 한다. 병참부 사이의 거리를 40리라고 하면서 지명도 기록하였다. 당시 이 일대의 사람들이 갑 자기 일본군이 들어와서 하는 일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수물자 운반은 육로만 이 용하고 있지 않았다. 낙동강 수로도 활용하였다. 강가에 이르니 4~5척의 돛단배가 모두 일본인의 군량과 물자를 운반해가는 것이다. 근 일에 지나간 바가 쌀과 보리가 몇 만 석이 된다고 하고 비록 작폐하는 일은 없었으나 인심 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형세가 없을 수 없는 바이다. 37)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돛의 방향을 엇갈리게 하고 강의 좌우 끝까지 번갈아 가서 조금씩 올라가야 했다. 평양전투에 대비해서 한창 군사 력을 집중시키던 9월 중순에 목격한 내용이다. 일본군은 일본에서 군량 등을 가져오면서 또 한 경상도 일대에서 곡식을 사들이고 있었다. 곡식은 제값을 주고 매입한 것이지만 주민들 에게 내키지 않은 거래였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인질로 삼으며 내정간섭을 하는 일 본인에게 협력을 하는 분위기는 나오지 않았다. 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중장은 대구의 경상감영에 가서 군사용으로 사용할 한국 돈 38) 을 강압적으로 확보하였다. 조선에서 사용하는 돈을 확보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우선 인 부 임금을 주어야 했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여러 산을 넘고 하천을 건너면서 운반하려면 평 소에 비슷한 노동을 해왔던 인부가 필요하였다. 일을 시키고 임금을 지급할 때 일본돈은 통 용되지 않았다. 한국 돈과 관련한 사건이 대구에서 일어났다. 12연대 제2대대장 한다 다카토키( 半 田 隆 36), 固 城 府 叢 瑣 錄 1894년 9월 6일(양력 10월 4일). 37) 吳 宖 黙, 固 城 府 叢 瑣 錄 1894년 8월 17일(양력 9월 16일). 38)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조선 돈을 모두 한국 돈으로 기재하고 있다. - 13 -

時 ) 39) 소좌는 대구 감영에 의뢰한 한국 돈 교환이 곤란하자 신속한 행군이 불가능하다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우에다 아리사와( 上 田 有 澤, 1850~1921) 40) 참모장을 급히 대구로 보내서 한다 소좌와 대구병참사령관 마쓰무라( 松 村 ) 소좌에게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고 감사와 담판을 짓게 하였다. 당시 경상감사는 조병호( 趙 秉 鎬, 1847~1910)였다. 41) 친형인 경호( 慶 鎬, 1839~1914)가 흥선대원군의 장녀와 혼인을 해서 그는 국왕과 사돈이 되었다. 그는 주요 경직과 외직을 역임하고 신임 경상감사로 부임하였다. 몇 일만에 일본군 제5사단 장교들을 감영에서 만나 게 되었다. 물론 경상감영은 환전하는 기능이 없고, 막대한 액수의 돈을 갑자기 구해서 교환하는 것 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선교사들이 일본군을 도와주었다. 대구지방 부근의 재산가가 한국돈 등의 저장 경황을 정탐 해서 알려주었고, 우에다 참모장은 경상감사에게 압력을 넣어 지명 한 재산가를 불러들여 한국 돈을 바꿔주게 한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 인부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또 소나 말을 빼앗지 않고 매입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조선에 들어온 초기에는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시도하였다. 경상감사 조병호도 고성부서 오횡묵에게 일본군이 고인( 雇 人 )에게는 10리마다 2~3량을 주고, 소와 말을 빌리 면 4~5량을 준다. 만약 팔고 사면 값을 3배를 올려준다. 이는 해를 끼치거나 걱정되는 일 이 아니지만 오랜 태평시기에 해괴하고 당혹스러움이 있다. 42) 고 말했다. 대구감영의 사례를 통해서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지방관의 활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상감사 조병호에게 한국 돈 교환이나 인부 모집, 말 제공 등을 협조하도록 지시를 내리게 요구하였다. 경상감영에서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각 부대의 선발대에게 지방 관청에 가서 협조 요청을 하게 지시하였다. 인부와 말을 요구 하면 관리는 이에 응하여 인마를 소집하여 군대의 크고 작은 물자 등을 전달하는 편의를 제 공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경상도 지방관뿐 아니었다. 경상감사에게 충청도 및 경기도의 감사에게도 통첩 하게 하 였고, 인부의 임금은 그 부대가 경성에 도착하여 이상의 관청을 경유해서 본인에게 지급 되게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한국 돈 운송의 수가 줄어짐에 따라서 인부의 수용도 크게 줄어 들게 되었다. 43) 지방관의 협조는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국왕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진 하여 협조할 지방관은 없었다. 경상감영에서 군대로 둘러싸고 압력을 가해서 협조를 받은 것처럼 서울 장안을 점령하고 경복궁을 군대로 장악하고 있는 정부를 협박하는 방법뿐이었 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오토리 공사에게 전보를 쳐서 대구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조 39) 다카토키( 半 田 隆 時 ) 소좌는 미야기( 宮 城 ) 출신으로 청일전쟁 때 12연대 2대대장으로 참전해서 전사했 다. 丸 市 土 器 町 의 丸 亀 陸 軍 墓 地 에 비석이 세워졌다. 40) 우에다 아리사와( 上 田 有 澤, 1850~1921) 대좌. 도쿠시마 출신으로 보신전쟁 이후 대위로 임관해서 세이난전 쟁에 참전하였다. 참모본부 관서국원을 거쳐 1894년 6월 제5사단 참모장으로 청일전쟁에 참가한다. 이후 육 군대학교장, 제22여단장을 지낸 다음 제5사단장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1911년 조선주차군사령관이 된 후 대장으로 승진한다. 41) 신영우,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동학학보 34, 2015; 신영우, 경상감사 조병호와 갑오 년의 경상도 상황 동학학보 35, 2015. 42) 吳 宖 黙, 固 城 府 叢 瑣 錄 1894년 9월 6일(양력 10월 4일). 43) 경상감사 조병호가 취한 조치는 일본군 행군에 기여하였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그 사실을 강조해서 기 술하고 있다. 이번 부산 연도에 있어 애를 써가면서 군대행진을 위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은 대구 감사 의 주선이 큰 힘이 되었고 경성에 도착한 뒤에 오토리( 大 鳥 ) 공사에게도 그런 뜻을 알리고 통리아문에도 이런 뜻을 통지했습니다. - 14 -

선정부에게 전국에 공문을 보내도록 강요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조치는 실제로 취해졌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이 낙동강에 왔을 때 오토리공사가 조 선정부에서 전 도에 관문을 발송한 사실을 통보를 해왔다. 상주의 낙동병참부에 도착한 8월 14일에 이 소식을 들은 것이다. 8월 16일 문경 조령을 올랐을 때 두 번째 공문을 수령하였 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의 북상을 보고한 국내 기록은 문경을 지나 연풍으로 갔을 때 연풍 현감 한진태( 韓 鎭 泰 )가 충청감사 이헌영에게 보고한 내용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이 보고문을 국왕에게 별계( 別 啓 )로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4) 오늘 접한 연풍현감 한진태의 보고 내용에, 7월 17일 문경부 공형의 방위사통( 防 僞 私 通 )을 접해 보니, 일본 중장( 中 將 ) 일행 30여 명이 방금 도착하였으며, 고군( 雇 軍 ) 355명을 연풍현에 통문으로 연락하여 내일 이른 아침에 색리를 정하여 안보참( 安 保 站 )에서 인솔하여 기다려 달라고 일본인이 직접 청하러 왔습니다. 이는 동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로의 각 읍 을 통행하는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짐꾼의 삯과 먹을 것에 대한 값은 수대로 내어 주어 처 음부터 폐해를 끼친 일은 없으며, 백미 피모( 皮 牟 ) 간장 큰 나무로 된 반상 사기 솥 등의 물 건들은 요청한 것에 의거해 주겠다고 하였으므로, 고군 355명과 함께 장리( 將 吏 )를 입회하 여 안보참으로 보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갑오년 7월 17일이면 양력으로 1894년 8월 17일이다. 경상감사 조병호가 관내 지방관에 게 보낸 지시에 따라 문경 공형이 연풍에 공문을 보내왔다. 방위사통( 防 僞 私 通 )은 아전끼 리 주고받던 공문으로 사사로운 글이 아니라는 뜻에서 방위( 防 僞 ) 라는 두 글자를 찍어 사 서( 私 書 )와 구별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일본 중장 일행 30여 명이 방금 도착 했다는 것과 짐꾼 355명을 모집해서 안보병참부에서 기다리라 는 것, 그리고 그런 방식이 동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로의 각 읍을 통행하는 관례 라고 한 것이다. 대구에서부터 감사에게 강요해서 지방관의 협조를 받기 시작한 방식을 동래부터 통행하는 관례라며 연풍에서도 받아들이도록 허위로 전했다. 일본군 제5사단의 병참 보급은 원활하지 않았다. 45) 백미 피모( 皮 牟 ) 간장 큰 나무로 된 반상 사기 솥 을 민간에서 소규모로 구입하여 제공하기도 하였다. 피모는 겉보리를 말한다. 정부의 지시에 따라 협조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본군은 각 지역에 군량창고를 만들거 나 수송비용 등에 필요한 조선 화폐를 교환해주는 협력까지 해야 했다. 46) 8월 17일 오전 10시 가흥병참부에 도착한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남한강 수로를 이용 해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수로로 가기 위하여 사람과 말이 함께 배를 탔습니다. 마필은 배 한 척에 3 마리를 태우고 기병과 마부도 거기에 소속시켰습니다. 별도로 한 척의 배를 준비하여 장교 이하 2일 분의 식량과 말먹이를 준비하고 오후 1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물의 흐름이 완만하 고 또 주야로 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느슨한 한국 사람이 밤에 쉬는 일이 염려스러워 각 선 44) 錦 藩 集 略 別 啓, 1894년 7월 25일 45) 三 宅 幹 夫, 日 淸 戰 役 平 壤 ノ 戰 鬪, 昭 和 8 年 3 月, 13 面. 평양전투가 벌어질 때 일본군 군량 사정을 전해 주는 기록이 있다. 휴대식량( 携 帶 口 糧 )은 사단주력 혼성여단 삭녕지대 원산지대 모두 2일분만 있었고, 비상식량 ( 常 食 )늠 사단주력과 원산지대는 없었고 혼성여단과 삭녕지대는 2일분뿐이었다. 4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二. 京 城 釜 山 仁 川 元 山 機 密 來 信 (9) 日 本 兵 站 部 소재지 지방관의 편의제공. - 15 -

박마다 당번을 만들어 독촉하게 하고 맨 뒤편의 배에 하사 및 통역을 두어 뒤처진 배가 없 게 되었습니다. 8월 18일 오후 9시30분에 광진의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소형기선이 충주 인근까지 항행하지 않았을 때였다. 낙동강처럼 여러 척의 돛단배에 말까지 태우고 조선인 키잡이에 의지해서 광나루까지 내려갔다. 말은 배 한 척에 3마리를 태웠다고 한 것을 보면 모두 10척 이상의 돛단배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육로보다 수로는 빨라서 17일 오후 1시에 출발하여 18일 오후 9시 30분에 광나루에 도착하였다.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이 중로병참노선을 따라 북상하고 있던 8월은 군용전선 가설이 한 창 진행되던 때였다. 8월 14일 상주 낙동에서 제1전신가설지대의 요시미 세이( 吉 見 精 ) 공병 소좌를 만나서 가설 상황을 보고받았다. 8월 17일에는 제2전신가설지대의 바바 마사오( 馬 場 正 雄 ) 공병소좌가 공사를 진행하는 충주의 가흥병참부를 지나간다. 아직 군용전신 개통이 되지 않던 시기였는데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은 오토리 공사에게 전보를 보내 협의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정부가 설치한 서울과 부산 간의 전신선을 일본 육군의 기술자들이 6월 부터 장악해서 통제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군사비밀 통신은 주로 군용전신을 통했지만 이때 긴급할 때에는 군용으로 조선정부의 전신선도 사용하고 있었다. 47) 4. 선산 해평병참부와 전주최씨가 히로시마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 제5사단은 모두 3개의 노선에 따라 병력을 보냈다. 첫째는 혼성제9여단의 예처럼 인천으로 직행한 노선이었다. 아직 청과 전투 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국 북양함대의 견제가 없는 시기에 인천항에서 상륙할 수 있 었다. 둘째는 동해를 따라 원산으로 북상해서 우회하는 노선이었다.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을 공격하려면 황해를 거쳐 대동강 하류로 올라가야 하지만 제해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해로 를 이용해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셋째는 부산에 상륙해서 육로를 통해 북상하는 노 선이었다. 히로시마대본영은 이 노선을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제5사단 주력을 부산으로 보내 려고 했다. 부산은 일본 해군의 기지가 있는 나가사키현 사세보( 佐 世 保 )나 히로시마현 구레( 吳 ) 군항 과 거리가 가까워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내기에 편리하였다. 대형 운송선을 주선해서 먼길을 가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기도 했다. 북양함대에게 발각되어 침몰될 우려가 있는 시기에 는 가장 좋은 노선이었다. 그러나 부산과 서울로 가는 통행로는 대규모 병력이나 수백 마리가 동원된 기병대의 행 군로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길뿐이었다. 거친 고개와 산길이나 논밭 사이를 지나가는 길도 적지 않았다. 짐말이 끌어야 하는 야포나 산포( 山 砲 )를 이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길이었 다. 하지만 이 노선은 군용전신선을 설치할 때 거리가 가장 짧은 노선이 된다. 전신은 당시 무엇보다 긴요한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보유해야 하는 군사시설이었다. 따라서 어 떠한 난제라도 이겨내고 병참망과 군용전신망을 설치해야 하였다. 47)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4권, 六. 歐 文 電 報 往 復 控 一 (146) 京 釜 電 信 線 수리 지시. 京 城 釜 山 간의 전신선 은 육군기술자들에 의해 양쪽 끝에서 시작하여 신속히 수리될 것임. 그 작업이 日 本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 에 수행되느냐, 아니면 朝 鮮 정부의 요청에 응해 일본 정부가 기술자와 장비들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귀하의 재량대로 할 것. 大 島 가 그 문제에 관해 지시를 받게 될 터이니 그와 상의할 것. 부산 쪽에 서 수리를 시작하도록 준비할 것. 1894년 6월 24일 오후 1시 발신 - 16 -

히로시마대본영도 정보 파악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고 먼저 공병대와 군용전선 가설대를 보내서 공사를 서둘렀다. 48) 전신가설 비용도 적지 않게 들었다. 49) 무려 794명이나 파견해서 가설해나갔다. 50) 전신 가설과 병참부 막사를 시설하기 위한 목재나 석재 등 자재들도 일본 에서 속속 들여왔다. 51) 부산의 시바 중위는 전신가설대의 동정을 파악하는 대로 대본영에 보고하고 있다. 서울과 부산 간 요지에 설치한 병참부도 연달아 밀려오는 제5사단 후속 병력을 맞이하면 서 일정하게 기능을 하게 되었다. 각 병참부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관의 도움이 필요하 였다. 부산 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가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 陸 奧 宗 光 )에게 그런 사 실을 전하고, 외교 차원에서 접근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이 협조를 받았던 전례에 따라 이 도움을 요청하는 공문을 각 지방관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 조선 돈을 구하는 것이었다. 외무대신 김윤식은 경상감사 조병호 에게 보낸 21일자 공문에서 일본돈 1원을 조선 동전 5량을 기준으로 바꾸어주도록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각 지방관에게 관하에 위치한 각 병참부를 지명해서 협 조를 해주도록 지시하였다. 동래부사 관하 : 부산 양산군수 관하 : 구포 물금 밀양부사 관하 : 삼랑 밀양 청도군수 관하 : 청도 대구감사영 관하 : 대구 다부역 선산부사 관하 : 해평 상주목사 관하 : 낙동 태봉 문경부사 관하 : 문경 충주목사 관하 : 안보 충주 하담 여주목사 관하 : 장호원 이천부사 관하 : 이천 광주부사 관하 : 곤지암 조현 송파진 경성영 관하 : 경성 선산부사의 관하에 있는 해평은 대구에서 북상하면 낙동강을 건너는 요지에 위치하였다. 해평 인근의 나루를 통해 강을 건너면 선산 읍성을 들어갈 수 있고, 육로로 상주 경내로 들 어가 낙동 인근에서 강을 건너면 낙동병참부에 이르게 된다. 해평에는 전주 최씨 마을이 있었다. 이 최씨가는 인조대의 영사공신( 寧 社 功 臣 )인 평원군 48)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B07090595500 日 淸 韓 交 涉 事 件 二 際 シ 軍 事 上 ノ 設 計 二 關 スル 韓 國 政 府 ト 協 議 雜 件 (5-2-2-0-3)( 外 務 省 外 交 史 料 館 ) 49)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5121500800 明 治 27 年 7 月 戰 役 日 記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經 理 局 軍 用 電 信 架 設 費 の 件 50)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5121502500 明 治 27 年 7 月 戰 役 日 記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第 5 師 團 電 信 架 設 技 隊 職 員 表 進 達 51) JACAR(アジア 歷 史 資 料 センタ-)Ref.C06061939000 明 治 27 年 6 月 12 日 ~7 月 22 日 玉 手 箱 第 4 號 ( 防 衛 省 防 衛 硏 究 所 ) 參 謀 總 長 より 陸 軍 大 臣 電 信 架 設 材 料 送 付 の 件 - 17 -

( 平 完 君 ) 최산휘( 崔 山 輝 )의 후손가로 서울에서 벼슬이 멀어진 후 향리 해평에 정착하여 자수 성가에 성공을 하였다. 52) 해평은 부자들이 많이 살던 마을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커다란 다 섯 지주의 저택이 모여 있어 그 광경으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이 저택들이 바로 낙동강 연 변의 넓은 경작지를 지배하던 전주 최씨 일가의 소유였다. 해평은 대구 칠곡 왜관을 거쳐 북상하여 낙동강을 건너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해 평에는 보은 장내리에서 영남 내륙으로 왕래하는 동학도들의 출입과 대구 감영에서 북서부 각 군에 오가는 관변측 인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도들 이 세력을 증대시킨 이후에는 다른 지역과 똑같이 지주가들이 시달리게 되었다. 1894년 이 저택의 소유자들이 최봉기( 崔 鳳 基 )와 최용기( 崔 龍 基 ) 형제들은 일가 피신을 결정하였다. 비 어있던 이 최씨가의 저택들에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거리를 보아도 대구에서 북상할 때 병참부가 들어설 적절한 위치였다. 일본군 병참부가 들어설 자리는 넓은 공터가 있어야 했다. 또 관사와 같은 공공건물이 있 으면 접수해서 이용하였다. 조선정부가 운영한 역( 驛 )이나 창( 倉 ) 자리가 적합한 곳이었다. 충청도의 안보역이나 가흥창 자리에 들어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구나 충주와 같 이 도회지에도 위치하였고, 나루가 있어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도 자리를 잡았다. 해평의 전주 최씨가는 저택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병력이 지나갈 때 저택의 여러 가옥에서 하루밤을 묵어가는데 편리하였다. 담장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방어에도 적 절하였다. 선산 읍성과도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유사시 관아를 출입해서 요구사항을 전달하 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뒤에는 반대로 관아에서 병참부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실제 로 동학의 기포령 직후 선산 읍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되었을 때 관아에서 해평병참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해평병참부 주둔병이 선산 읍성을 기습해서 되찾게 됨으로서 관치질서 가 일본군에 의해 회복되기도 하였다. 일본군 제5사단 잔여 병력의 북상길에 설치한 병참부 는 모두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해평병참부도 2차봉기 이후 선산 일대의 동학농민군 을 활동을 제어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곳이었고, 그 성격과 영향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 는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는 곳이다. 52) 증손자인 두추( 斗 樞 )대에 와서 부인 파평 윤씨의 근검절약과 면작면업의 가내수공업에 의해 부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崔 氏 家 는 尹 氏 당대에 千 石 을 모았고 그 孫 子 代 는 6형제가 六 萬 石 을 하는 巨 富 로 성공 을 하였다. 이 성공에는 벼슬길에서 출세한 손자 光 璧 과 理 財 力 있는 손자 光 翊 의 공이 있었다. 光 璧 (1728~1791)은 文 科 에 급제하여 正 言 과 좌승지를 거쳐 兵 曺 參 判 에 올라 後 光 을 과시하고, 光 翊 (1731~1795) 은 進 士 試 에 급제하고는 鄕 里 를 지키면서 治 財 에 전념해 兄 弟 家 모두의 財 富 를 늘려 놓았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해평의 거대한 崔 氏 家 邸 宅 들은 光 翊 이 주선하여 지었다고 한다( 全 州 崔 氏 族 譜 ; 崔 相 鶴 氏 證 言 ). - 18 -

그림 1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野 津 道 貫, 1841~1908) -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