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회고 1968년 그해 영광과 곤욕 -JP 특종, 차관필화( 借 款 筆 禍 )- 김진배 전 국회의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고려대 법대 졸업 영국 톰슨신문연구소 경향신문 수습기자 논설위원 동아일보 기자 부장 언론자유 투쟁으로 해직 국회의원 우리들 올챙이 여섯 마리의 생일은 정월 초이튿날이었다. 1959년 1월2일 무척 추운 날 아침 우리는 소공동 경향신문 2층 총무부 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터덕터덕 올라갔다. 총무부장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서자 거무스름한 턱수염 자국이 힐끗힐끗 보이는 50대 의 건장한 주인이 문 앞에서 우리들 올챙이 손을 덥석덥석 잡았다. 우리는 옆으 로 나란히 사장님 맞은편에 섰다. 주인공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령 장을 주었다. 한창우( 韓 昌 愚 ) 사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여섯 마리 올챙이들 여러분은 6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승자가 됐다. 왜 이렇게 머리 좋 은 대학생들이 우리 경향신문에 많이 몰리는가. 아직도 동아나 조선 같은 신문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73
은 견습기자를 뽑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작년에 이어 벌써 견습 2기를 뽑 았다. 신문사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하의 인재를 맞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더 구나 여러분 경향신문 기자들은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지 똑똑히 알고 있을 줄 믿는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는 독재정권의 탄 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민주주의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제군들은 언 론자유의 투사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이때가 얼마나 어려운 시기인가. 이승만 정권은 천하의 악법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무술경관을 동원, 야당의 원들을 개 끌듯이 끌어냈다. 한 사장의 말대로 조선 1기는 3월, 동아 1기는 4월 입사다. 그때 사람들은 동아 경향 을 야당지로, 조선 한국 을 중립지로 치고 있었다. 어떻든 내가 경향신문 기자 시험을 본 것은 한 사장이 격려한 것처럼 그런 거창한 투사가 되 려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 3학년 때 꼭 붙을 것으로 믿었던 고등고시 사법과(8 회)에겨우5명만 합격하는 것을 보고 정이 떨어져 신문사 시험이나 보자 한 것 이 운 좋게 붙은 것이다. 시험은 1958년 12월 14일 이화여고에서 있었다. 과목은 국어, 영어, 논문, 상식. 1차 합격자 발표는 21일자 경향신문에 났다. 응모자 367명 가운데 20명 이 합격하였다. 이 가운데 최종합격자는 6명, 여영무( 永 茂, 대구, 고대 법과), 신 광일( 申 光 日, 서울, 연세대 사학과), 정태경( 鄭 泰 卿, 충남, 서울상대 경제과), 임판호 ( 判 鎬, 전남, 서울법대 법과), 김진배( 珍 培, 전북, 고대 법과), 조규진( 曺 圭 晋, 경남, 연세대 정외과)(이상 수험번호 순)이었다. 신광일 군은 말씨가 아주 부드럽고 상냥스러웠다.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서울이라고 하지 않고 마포 라고 한 것이 인상에 남는다. 정태경 군은 키가 훤 칠한 데다 얼굴이 희멀게서 첫 인상이 아무래도 은행에 가야 할 친구가 잘못 온 듯싶었다. 묻기 전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지만 웃을 때만은 시원스럽게 웃어젖 혔다. 임판호 군은 유달리 눈이 작았다. 게다가 키까지 작았다. 그러면서도 당 돌하여 처음 만나자마자 너 전라도지? 전라도 어디야? 하고 대뜸 반말이었 다. 조규진 군은 처음부터 영감이었다. 에, 우리 경향신문으로 말할 것 같으 74 관훈저널 봄호
면 앞으로 우리 견습들 배치는 말이야 하며 무슨 희한한 정보라도 갖고 있는 듯이 폼을 잡았다. 여영무 군은 나와 고대 법과 동기다. 이 친구는 4년동 안 줄곧 같은 과였지만 별 접촉이 없었다. 1학년 때부터 영어 잘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네 영문과 가지 왜 법과 왔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법과 간다는 바람에 왔다. 억세게 센 백 우리가 맨 처음 배치된 곳은 교정부에서 게라(일본말, galley) 초교를 보는 일 이었다. 다음이 경찰취재를 하는 사쓰마와리(일본말)였다. 수습기자 발령받은 며칠 뒤였다. 편집국을 둘러보던 한 사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견습기자 김진배 어디 있나? 교정부 말석에 앉아 열심히 게라를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앞으로 가야 하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김진배 이리 오라우! 억센 평안도 말이 튀어나오더니 내 쪽으로 손을 까불었다. 정치부장 자리에 떡 버티 고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 옆에 사장님이 서 계신다. 고려대학 놈들은 지 꼬붕밖에 몰라. 이놈이 논문 1등이야? 서울에 첫눈 그것도 잘 썼더라 이거지? 네, 사장님 저놈 별놈입니다. 그래 견습을 정치부에서 시키잔 말이지? 허허, 고려대학 놈들 별놈들이야. 정치부장 소원대로 하시오, 국회가 손이 바쁘다니까. 교정 보던 나는 당장 정치부장 옆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고 통신을 정리해서 자잘한 기사들을 넘겼다. 김진배 이놈, 특별히 여기다 앉혀 놓았으니까 일 잘해. 내가 자네 쓰겠다고 했어. 사장이 나보고 직접 훈련시키라는 거야, 알았나? 전화 잘못 받으면 너는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75
죽는다. 정치부 기자라니, 내가 국회출입을 하게 되다니, 아 이거 운수라는 것도 있구 나 싶었다. 전화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기자들은 국회의원들처럼 본토 말, 사 투리 악센트가 세다. 우선 히어링이 문제였다. 누구할것없이처음듣는목 소리다. 통영 출신의 정종식( 鄭 宗 植, 뒤에 연합통신 사장)씨는 알아듣기는 어려워도 천 천히 또박또박 끊어서 불러주어 그런대로 편했다. 용인 출신 이웅희( 雄 熙, 문 화방송 사장, 국회의원)씨는 말이 어찌나 빠른지 천천히 천천히 를 말이 끊어 질 때마다 부탁해도 받든지 말든지 부르면 그만인 투다. 한번은 나도 짜증이 나 서 이 선배님 기사는 다른 분이 받도록 하시죠 하고 전화를 끊었다. 2차대전 때 미군이 쓰던, 육중한 쇳덩어리에 파란 베 조각을 댄 야전 전화통이다. 대구 출신의 권오기( 權 五 琦, 뒤에 동아일보 사장, 통일원 장관)씨는 아주 천천히 똑똑하 게 불러주어 기사에 착오가 없다. 아마 견습 시절 단단히 당했거나 며느리 사정 을 잘 챙겨주는 시어머니다. 글은 칼날 같으면서도 글씨는 네모지게 또박또박 쓰는 타입이다. 홍일점 윤금자( 尹 錦 子 )씨는 출입처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중앙청, 외무부여 서 그렇게 급한 기사가 아니다. 행사나 인사, 담화 등 대부분 들어와서 쓴다. 어 쩌다 기사를 보낼 때도 미안해하며 그 고운 목소리로 김진배씨 괜찮아요? 하고 나서야 기사를 부른다. 평양 아가씨, 어느 신문사에도 정치부에 여기자가 없던 시절 미모의 이 여성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발음이 똑똑해서 불 편한 게 하나도 없다. 마지막으로 서천 출신의 방일홍( 方 一 弘, 뒤에 국회의원)씨 는 견습 선배답게 항상 수고한다는 말이 입에 올랐다. 말도 느릿느릿한 데다 잘 들려요? 알겠어요? 를 다짐하는 자상한 선배였다. 76 관훈저널 봄호
街 人 과의 대화 국회가 휴회 중일 때는 법조를 나갔다. 정달선( 鄭 達 善 ), 윤양중( 尹 重 ) 선배 를 따라 우선 공판 기사나 영장 기사부터 훈련을 받는다. 밑도 끝도 없이 긴 데다 고리타분한 한문 투의 말을 신문기사 스타일로 바꾸는 것은 귀찮은 일 이었다. 어느 날 윤 선배가 가인( 街 人 )을 아느냐면서 아마 정치부장이 무슨 이야기 할 거라고 했다. 며칠 뒤 송원영 정치부장이 북창동 가인 김병로( 街 人 炳 魯, 초대 대법원장, 1887 1965) 선생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 넙죽 큰절을 했다. 저 경향신문에 있는 송원영입니다. 호, 어찌 이렇게 누추한 집까지. 송 부장은 정치부장임을 밝히면서 당신의 회고록 수상단편( 隨 想 斷 片 ) 의구 술을 이 김군에게 받아쓰게 하시면 어떻겠는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그것은 신문사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가인은 힐끗 말을 마치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고등고시 보겠다더니 신문기자 됐구먼! 뭘 하든지 열심히 해야지. 그 건 그렇고 고군도 잘 있고? 네? 누구 말씀입니까? 작년 정초엔가 여기 같이 왔던 고( 高 ) 대법관 말이어. 대법관을 따라 세배 왔을 때 학교 나오면 뭐 하겠느냐 고 물으시기에 무심 코 시험(고등고시)이나 다시 볼 생각 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그런 지나가는 말까지 기억해낸 것이다. 연탄 냄새가 72세 노인의 방에까지 짙게 풍겼다. 방은 한 네댓 평 될까. 방바 닥 군데군데 거멓게 장판이 타거나 눌어 있었다. 작고 얄따란 요 위에 무명 흰 한복저고리에 남색 조끼를 받쳐 입은 주인공이 앉아 있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사방 한 자쯤 되는 조그만 상이 놓인다. 200자 원고지를 상 위에 놓았다. 평소 내가 쓰던 잉크병을 상 한쪽에 놓았다. 내 철필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77
끝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기다린다. 다 됐소? 한번 히여 볼까? 하하. 그제야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의치를 낀다. 이렇게 우리의 일과는 시작되고, 두세 시간 걸려 이틀치 원고가 완성된다. 하 루걸러 오전 11시에 와서 오후 2~3시에 간다. 맞담배 그러고 보니 나는 벌써 15세가 되었고. 가인의 말은 끊기는 데가 없다. 심지어 문장 하나가 원고지 석 장을 넘어가는 데도 그냥 이어간다. 당신이 거기서 끊고! 해야 마침표를 찍고, 줄을 바꾸어 서! 해야 줄을 바꾼다. 답답한 일과지만 막간의 즐거움이 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거 읽어 드릴까요? 한번 딱 부르는 걸 받아썼으면 그만이지 읽기는 뭘 읽어?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때면 으레 5cm쯤 되는 아주 짤막한 파이프에 담배를 꽂는다. 양담배 필터를 두 엄지손가락으로 끊어낸 다음 담배 개비를 반 토막으 로자른 반쪽 담배 다. 담배는 완전연소다. 탁 하고 재떨이에 터는 소리는 나 는데 나오는 건 꽁초가 아니라 새똥만 한 하얀 재다. 참으로 신기한 가인식 흡 연법 이었다. 이럴 때면 나는 으레 밖으로 나간다. 젊은 사람이 차분하게 앉아 있지, 뭘 하러 밖에는 들랑날랑하시는 거여? 바람 쐬려고요. 바람? 안 봐도 다 알아! 노형 담배 피우려고 밖에 나가는 거지? 안 그리 여? 마침 점심상이 들어왔다. 정종 한 잔 따라주셔서 고개를 돌리고 마신다. 이제 내 좀 따져야겠어. 왜 내 앞에서 술은 마시면서 담배는 못 피워? 노형 쫌보 고만, 하하 쫌보여! 신문기자는 탁 트여야지. 청년들은 좀 건방지다는 말 을 들을 만큼 당당하고 대담해야 돼. 안 그리여? 내새담배한갑줄게여기서 78 관훈저널 봄호
피워봐, 맛이 어떤가.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피웁니까? 더구나 선생님께서는 대법원장을 하신 분인데. 허허, 노형 할아버지 앞에서는 안 피워도 나는 할아버지 아니니까 피워도 좋아. 이거 내가 붙여줄게. 가인은 살렘 한 개비를 빼주시며 사자표 곽성냥을 그었다. 1934년생, 25세 의 수습도 안 떨어진 신문기자가 1887년생, 72세의 초대 대법원장과 맞담배 질을 하게 된 연유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어른 외에는 아무리 나이 많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담배를 꼬나물었다. 윤보선 대통령, 허정 수반, 곽상훈 의장, 유 진오 총장, 고재호 대법관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도, 유진 산, 김영삼, 김대중 총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있는 회사 회장, 사장 앞에서도 피우라면 사양하지 않았다. 가인의 수상단편 은 뜻하지 않은 경향 폐간으로 41회로 중단되었다. 폐간 통고는 4월30일 저녁 늦게 공보실 직원이 편집국 당직기자에게 전했다. 정부 수립 이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 군정법령 88호라는 해괴한 법을 끄집어내 경 향을 죽였다. 국가원수 모욕,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간첩도피 방조 등 어마 어마한 죄를 뒤집어씌웠다. 사설, 칼럼, 경무대 기사, 시경과 검찰 기사 등을 문 제 삼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었다. 나는 이튿날 아침 가인 댁으로 갔다. 내년 선거(정부통령선거) 끝나면 복간된다지만 세상일 누가 알겄소? 복간되 면정종한곱뿌(컵) 합시다. 그는 이렇게 위로하며 앉아 있던 요 밑에 손을 넣었다. 며칠 전 신문사에서 한달치(30회) 원고료로 부친 우편환 봉투였다. 돈 찾는 사람 이서란에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우편환은 1만 3천환이었다. 내 월급이 2만 6천환 때다. 첫 촌지였다. 대법원장을 지낸 70 넘은 원로의 300장이 넘는 원고, 거기다 특 별고료라는 것이 쌀 한가마치도 안 됐다. 가인은 4년 뒤 돌아가셨다. 나는 윤보선, 허정, 이인 등 정계 최고 원로들의 추도사를 대필했다. 1인 3역. 빈소에서 이분들이 하는 말을 정리하여 경향을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79
비롯 동아, 조선에 보냈다. 1984년20주기 추도식을 맞아 나는 가인 김병로 라는 전기를 썼고 고대 총장 유진오, 전 대법관 고재호씨 등을 모시고 추도행사 를 주관했다. 그때는 11대 국회의원이어서 일하기가 여러 가지로 좋았다. 그의 장손 김종인( 鍾 仁 ) 의원 등 가인 유족들도 많이 도왔다. 베개 하나, 담요 한 장 사들고 폐간은 직장을 빼앗아가고 자존심을 짓밟은 데 그치지 않았다. 거저 밥 먹고 잠자던 내 생활을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말았다. 대학 때는 물론 신문기자가 된 이후에도 나는 줄곧 초등학교 아이를 맡은 가정교사로서 숙식을 걱정한 일이 없다. 친일거두 한 아무개가 지었다는 가회동 10번지의 대지가 300평이 넘고 집이 입구( 口 )자로 된 주정회사 사장 집, 신문로 높은 지대, 큼직한 적산가옥을 차지한 당대 내로라 하는 은행가 집, 명륜동 현직 대법관 집에서 아이들 가정 교사로 지냈다. 신문사에 들어간 후에도 그대로 있었다. 김 선생, 신문기자 월급이 몇 푼이나 된다고 나간다고 그러세요. 견습 끝나 면 나가서 자유롭게 지내세요. 마치 자식에게 타이르듯이 말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신문사가 날아 가 버렸으니 더 있을 명분이 없다. 5월 어느 날 저녁식사 후 나는 대법관 내외 께 하직을 고했다. 어디로 가려고? 다시 고시공부나 할까 해서요. 그저 하는 말이었다. 참 잘 생각했네. 김 선생 신문기자 붙었다 해서 그저 축하하기는 했지만 속 으로는왜그험한길을택했을까 생각했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주인집의 침구로 편히 잤다. 막상 떠나려니 갈 곳도 없 거니와 당장 칫솔 치약, 비누 수건도 없다. 호주머니에는 1천환짜리 두어 장, 쌀 한말 값이다. 주인집 사모님은 1만환을 봉투에 넣어 이 갈 곳 없는 실직자 주머 80 관훈저널 봄호
니에 넣어주셨다.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군용 담요한장사고, 군용베개하나 사고, 폈다 접었다 하는 야전용 침대 하나 사고,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 북어 한 마리 사서 배낭 속에 넣고 내수동 게딱지 같은 집에 들어섰다. 지금 세 종문화회관 뒤쪽이다. 견습동기 임판호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일을 생 각 않기로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 출근시간이 되면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다가 점심때 가까이 되어 소공동 신 문사에 나간다. 일만 안하지 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남의 신문을 보거나 장기바 둑, 잡담으로 소일하다 누가 자장면이고 설렁탕이고 먹으러 가자 하면 우우 하 니 따라나선다. 더치페이 라는 게 없던 때다. 먹자고 말한 사람이 내거나 윗사 람이 내는 게 우리 동네 풍속이다. 더러 경향 재판을 하는 법정에 나가기도 하 고, 가끔 국회기자실에 나갔다. 신문 없는 기자, 제집처럼 스스럼없던 법원, 검 찰, 국회가 남의 집처럼 느껴졌다. 기자실 친구들은 깜짝 반가워하다가도 이내 너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취재 현장으로 뛰쳐나갔다. 창피한 생각이 들어 발을 끊었다. 하숙비가 석 달째 밀렸다. 몸이 불편한 남편과 사는 40대 여인이 네댓 사람 하숙을 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다. 밀린 하숙비는 형편이 될 때 내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는 뭘 먹고 살아요, 생 각해보세요. 아무리 직장이 없어 월급이 안 나온다지만 서울에서 대학 다녔을 정도면 고향집은 괜찮을 것 아니에요? 내일 아침부터 김씨 밥상 안 올립니다. 야박하다 생각 마시고 그리 아세요. 주인아주머니의 최후통첩이었다. 임판호 씨는요? 임씨는 두 달째잖아요. 김씨는 석 달 밀리고. 깔끔한 서울토박이 아주머니, 경우가 밝다. 목을 쳐도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81
걸 안 바에야 더 봐줄 필요가 없었을 게다.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넓은 천지에 갈 곳이 없다. 정말로 이튿날 아침 상에 올라온 밥은 임군 밥 한 그릇뿐이었다. 나는 담배 한 대 길게 뿜어대며 서 울역으로 향했다. 이듬해 봄 경향이 복간된 지 얼마 뒤 나는 밀린 석 달치 하숙비를 들고 나를 쫓아낸 내수동 집으로 갔다. 아주머니는 그 가운데 반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저는 몽땅 떼인 걸루 알았는데 공돈 들어온 거지 뭐예요. 아, 경향 복간이 그 야속하게 보였던 하숙집 아주머니까지 우리 어머니 로만 들었구나! 전북일보 박 사장 명절이 이렇게도 슬프고, 고향이 이렇게도 남의 세상처럼 보일까. 5대가 묻 혀 있는 선산은 바로 동네 앞 신작로 가에 있다. 일찍 추석 성묘 하고 나니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다. 슬슬 마을 앞 가게로 나갔다. 미군용 지프를 개조, 하 드톱을 씌운 차가 가게 앞에 선다. 가무잡잡하고 작달막한 키, 전북일보 박용상 ( 朴 相 ) 사장이었다.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노계동, 박 사장이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러 왔다가 잠깐 길가 가게에 들른 모양이다. 그가 나를 보더니 대뜸 말 했다. 선거 전에는 복간 안 된다. 너 잘 만났다. 서울서 비실비실하지 말고 전주 가 서 나하고 같이 있자. 정말 남의 일 같았다. 박 사장은 나와 한동네였고 선고와는 각별한 처지였다 고 한다. 1947년 내가 최고로 좋은 사범학교 들어갔다고 좋아하는데 신문사 편집국장이던 그는 대뜸 북중학교(전주고등학교 전신) 가지 그랬냐? 그놈의 학 교는 빨갱이 좌익판이다 하시며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경향신문에 들어갔을 때도 박 사장은 축하는커녕 너 그 좋은 머리 가지고 동아일보나 합동통신 들 어가지 왜 신파 기관지 거기 들어갔지? 하며 엉뚱하게 섭섭해하셨다. 그런 82 관훈저널 봄호
분이 이제 불문곡직하고 지금 당장이차타고전주가서 나하고 같이 일하자 니 목이 멨다. 바로 박 사장 차 뒷자리에 타고 전주에 온 나는 그날 밤 사장님 집에서 잤다. 사장님은 아침 출근 전에 동생인 영업국장과 매제인 편집국장을 고사동 집으 로 불렀다. 동생, 야(이 사람) 방 하나 주고 밥 좀 주어야겠다. 한 댓 달, 길어야 내년 봄까 지. 1만환 월급으로 어디서 하숙하겠냐? 밥은 사장님이 주라면 주지만 방이 있어야지요. 동생 쓰는 방, 이놈 주어. 허 참, 형님도! 경향신문이 없어졌으니까 이런 놈 우리가 천신이나 하지, 억만금 주어도 이 놈이 전주로 내려올 놈인가. 우선 오늘 저녁부터 그렇게 히여 주어. 경향 폐간되는 바람에 제 방만 진배한테 뺏겼습니다, 형님! 세상 그런 것이네. 동생 고맙네. 조금 뒤 편집국장이 왔다. 내 국장한테 말도 안하고 이놈 데리고 왔어. 이놈 잘 알지? 김경섭( 慶 燮, 정치부장)이 따라서 도청 내보내면 어떨까? 김경섭 씨나 본인 말 들어봐서요. 진( 陳 ) 국장, 발령 바로 내도록. 언제 본인 말 듣고 인사발령하나? 박 사장은 왕이었다. 며칠 새 나는 편집국에서 기사를 제일 많이 쓰는 기자가 되었다. 그래서 내게 최고기자 라는 별명이 붙었다. 기사며 가십이며 좌담회 정리며, 심지어 사장 의 사설이나 가십의 구술, 대필까지 맡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일을 해 도 피곤하지 않았다. 고마워서라도 열심히 일했고, 잘한다 잘한다 하는 바람에 더 잘했다. 특히 같은 연배인 견습 출신 신참기자들과는 틈만 나면 차를 마시고 술을 마셨다. 이호선( 鎬 ), 고광준( 高 光 駿 ), 신동백( 申 東 百 ), 김현수( 金 賢 洙 ), 채 원( 蔡 袁 )씨와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아주 좋은 선배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사범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83
학교 6년 선배인 전영래( 全 榮 來 )씨, 부안 선배인 신현근( 辛 鉉 根 ), 박완식( 朴 完 植 ), 김완수( 完 洙 ), 수복 뒤 우리 마을에 주둔하던 전경대에 있던 이치백( 治 白 )씨 나 김안수( 金 安 洙 ), 이정열( 廷 )씨 등은 친형처럼 정다웠다. 진기풍( 陳 錤 豊 ) 편집국장과 강제천( 姜 濟 天 ) 차장 등은 엄청나게 많은 일거리를 맡겼다. 사람들 은 저놈은 무엇이 저렇게 좋은지, 서울 기자들은 다 저렇게 일에 미치는지 궁금 해했다. 세계통신 12월초 도청에 나갔더니 지사실에서 부른다고 한다. 지사실에는 박정근( 朴 定 根 ) 지사와 전북일보 박 사장 그리고 다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박 사장이 그 분에게 인사를 시켰다. 김 전무, 이놈 경향신문에 있던 놈인데 내가 데려왔지. 일 잘해. 똑똑하고. 지사님, 이놈 빠리빠리하지요? 빠리빠리 라는 말은 시원스럽게 일을 척척 잘한다는 일본말이다. 나는 이분 들이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대화를 옆에서 듣기가 거북하여 저 나가 보겠습니 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얼굴이 네모지고 어깨가 떡 벌어진 거무 튀튀한 그 손님이 앗, 참! 하며 박 사장에게 말했다. 저 친구 똑똑하다고만 말고 나 주소. 저런 친구 시골에 놓아두면 완전 촌놈 돼. 저 친구 나 주소. 지금 데리고 가야겠네. 친구끼리 무슨 강아지나 송아지 한 마리 달라는 투다. 거 무슨 소리야! 추석 때 데려온 놈을 해가 가기도 전에 자네 주다니 말이 되 나! 서너 달 데리고 있었으면 되지 않나. 저 친구는 이제 서울에서 기자 해야 돼! 도청이 아니라 국회출입을 해야 할 사람이란 말이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 이놈 잡아가려고 여기 왔나. 그 이야기 그만 해, 이 사람아! 84 관훈저널 봄호
허, 박 사장, 내 한마디하지. 박 사장도 서울에서 신문기자 했으면 서울에서 큰 신문사 사장 했을 거 아닌가. 뭐가 모자라나. 불같은 정의감, 사심 없는 청 렴. 하지만 세상은 몰라줘. 고향 버릴 수 없다고 전라도 땅에 주저앉은 것이 전 라도 신문 사장 된 거 아닌가. 똑똑한 친구 왜 촌에서 썩히려 하나? 못 보내네. 백번 이야기해도 이놈은 안 갈 걸세. 물어보소. 자네가 물어보소, 갈 건지, 안갈 건지. 박 사장이 졌다. 그날 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분을 따라 야간침대열차를 타 고 상경, 독립문 근처에 있는 그분 집에서 잤다. 실질적으로 회사운영 전반을 맡고 있는 세계통신 전무 김동극( 東 極 )씨였 다.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이자 공보실장을 지낸 이철원( 哲 源 )씨는 이름만 사 장이었다. 김 전무는 내 손을 잡고 3층 편집국으로 올라가 고병순( 高 炳 舜 ) 편집 국장, 윤임술( 尹 壬 述 ) 부국장, 김환영( 煥 榮 ) 정치부 차장에게 차례로 인사를 시 켰다. 정치부장은 박권상( 朴 權 相 )씨였지만 마침 세계연감 을 처음 내도록 돼 있어 출판부장을 겸하는 바람에 실무는 거의 김환영 차장의 전권이었다. 박 부 장은 박 사장의 동생이다.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아주 어려서부터 그 형제들을 알았다. 한 사나흘 지났을까. 자네 왔어! 일 잘하게. 전북일보 있었다면서? 김 전무가 전주 형님 한테서 뺏어왔다고 그러데. 박 부장도 좋아했다. 만송 아니면 사람 없나? 김환영 차장은 목소리가 컸다. 부산 악센트의 완전보유자, 훤칠한 키, 떡 벌 어진 어깨에 오리걸음, 거기에다 두 손을 번쩍번쩍 들어 휘젓는가 하면 아무에 게나 눈을 부라리며 이 보소! 앙 그렀나? 다. 나보다 10년도 위로 보였다. 통신사는 여당계 일색이었다. 야당 주장은 거의 무시되기 일쑤였지만 이 거물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85
의 거동은 오만하기가 여야 가릴 것 없었다. 한희석( 韓 熙 錫 )이라면 자유당 강경 파의 거두이자 24파동의 책임을 지고 부의장 자리를 내놓은 사람이다. 그는 자 유당 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바로 이기붕 의장실에서 한 부의장을 만났 다. 호, 김 동지 오랜만이오 하고 인사하는 손을 그대로 잡은 채 한마디로 응 수했다. 한 부의장, 이거 자유당 선거 치루겄나? 만송( 晩 松 ) 아니면 사람 없나? 국 회도 못 나오는 사람이 대통령 하겄나? 허, 김 동지, 대통령이 아니라 부통령으로 모시자는 거지. 지금부터잘좀도 와줘요. 이 대통령 표야 한 90% 나오겠지만 만송 표도 80%는 넘어야겠지? 김 동지, 안 그래? 어림도 없다. 4년전장면( 張 勉 )이한테 떨어지지 않았나. 멤버 첸지는 못하 나? 한 부의장 그거 한번 연구해보소! 무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여당지 기자가 자유당 강경파의 최고 거두 에게 말이다. 민주당 원내총무 유진산( 珍 山 )은 풍채며 말씨며 금도가 어느 최고위원 못 지않은 야당의 실력자였다. 진산의 무대는 서울 도심 통로에 색동 주단까지 깐 최초의 호화다방 희( 喜 )였다. 진산과 몇 마디 말을 나눈 김 부장은 금방 다방마 담 앞 계산대 앞에 매달아놓은 전화통으로 가더니 민주당 원내총무 유진산 의 원은 하고 큰 소리로 기사를 불러 젖혔다. 민주당에는 심히 불리한 기사였 고, 특히 앞에 있는 유 총무의 말이라 해서 쿼트 까지 하며 보내는 데는 기가 질릴 일이었다. 하지만 진산은 조용히 김 차장의 귀에 대고 말했다. 김 동지, 전화 좀 빨리 쓰소. 니 전화까? 저리 가소. 이거 기사검열하는 긴가! 도리어 큰소리다. 어허, 다른 사람도 있지 않나. 기사를 보내려면 바로 건너 광화문우체국에 가서 보낼 일이지 남의 영업 방해해서 되겠냐 이 말이야. 이게 진산 다방인가? 민주당이 이 다방 샀나? 86 관훈저널 봄호
한마디로 쏘아붙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김 차장 은 자기 볼 일 다 보고 나더니 진산 옆에 와서 히죽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내 영업 끝났으니 이제 진산께 사과한다. 하지만 기사 보내는데 옆에서 시 비하는 거 아이다. 다방주인은 따로 있는데. 김환영씨가 오야붕(보스), 정치전망과 정당 국회를 통괄하고, 곽지용( 郭 址 湧 ) 선배가 여당인 자유당을, 내가 야당인 민주당을 담당했다. 통신은 속보가 생명 이다. 기자의 점수는 그날 그날 채점된다. 편집국장 뒤 벽에는 통신사별 분야별 게재건수가 그래프로 표시된다. 전재율이 생명이다. 통신기자들의 경쟁은 신 문기자에 비길 바 아니다. 경쟁시간, 경쟁강도가 다르다. 미치게 뛰어다녔고, 엄청나게 많이 썼다. 4월의함성속에경향복간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중대성명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태평로 국회에서 덕수궁 담을 끼고 순화동까지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갔다. 장면 부통령 사임성 명이었다. 선거부정에 항의하여 부통령이 사임하면 그 여파는 바로 한달 전 이 승만 이기붕을 뽑은 정부통령선거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4 19 데모 는 이제 사태 에서 혁명 의 단계로 치닫고 있는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가 눈에 훤히 보였다. 기사를 보내려고 야전 전화통을 돌리는데 수화기에 서 깨질 듯이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어디 있노? 장면이 그거 필요 없다. 서대문(국회의장 집, 흔히 서대문 경 무대라 불렀다.) 가라. 이 의장이 부통령 당선 을 사퇴한다. 김진배 알았나? 지 금 바로 택시 타고 가라. 현직 부통령 사퇴는 기사 한줄 못 부르고 부통령 당선자 사임은 장황하게 늘 어 뺐다. 대통령 계승자가 될 자유당 제2인자의 정치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의 헐떡거리는 마지막 비명은 찬송가처럼 불러대면서 야당 출신 현직 부통령 의목맺힌 살신 은 네댓 줄의 기사로 깔아뭉개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 라디오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87
가게에선 이 대통령 사임성명이 쾅쾅 울렸다. 이미 국회는 할 일이 없었다. 이 격동의 순간에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누가 죽고, 집이 불타고, 대통 령이 그만두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 관심은 오직 하나 경향신문이 언제 나오느냐는 것이었다. 국회 기자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대법원으로 갔다. 김갑 수 대법관이나 고재호 대법관은 나를 보자 개선하는 병사처럼 좋아했다. 곧 합의에 들어갈 텐데 대법관 몇 분이 아직 오시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 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경향신문 정간에 대한 행정처분취소송은 대법원으로 보면 별로 급한 일이 아니었다. 4 19가 나서도 그랬다. 이 대통령 사임성명이 나오자 대법원은 급해졌다. 정부가 행정처분으로 풀기 전에 대법원이 판결로 권위를 세우려 서둘렀다. 부랴부랴 부활선고 를 하려 했지만 소재파악조차 되 지 않는 한두 분이 있어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한달음에 소공동 경향신문 편집국에 들어섰다. 벌써 많은 기자들이 웅성거 렸다. 경향신문 복간! 김순영( 淳 榮 ) 편집부장이 신문지 양면 크기의 흰 종이에 큼직하게 호외를 쓰고 있었다. 법조에 나가던 윤양중 선배와 나도 몇 장 거들었다. 빨리 가서 대법원 판결문을 베껴 오시오. 주문은 즉각 보내고. 세로로 줄을 친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인찰지에 묵지를 대고 골필로 쓴 판 결문은 10여장. 우선 전문이 필요한 경향신문이 먼저 받아쓰기로 하고 누군가 죽 불렀다. 2개로 나누어 전반부는 윤 선배가 베껴 써서 신문사로 먼저 뛰어가 고 후반부는 내가 받아썼다. 윤 선배는 글씨를 잘 쓰고 빨리 쓰기로 우리 신문 에서 1등으로 소문나 있었다. 나도 속필에서 알아주는 처지였다. 우리는 한 시 간 남짓 시간에 1960년4월26일 복간 첫날 경향신문지면 한 쪽을 거의 메울 엄청난 분량을 소화했다. 88 관훈저널 봄호
순창 선거 무소속의 김병로 전 대법원장과 민주당 소장의 한 사람인 홍영기( 洪 英 基 )씨 와의 대결인 순창 선거. 1960년7월 내가 묵고 있는 전주 선강여관에 전주 출 신유청( 靑 ) 의원과 이철승( 哲 承 ) 의원이약속이나한듯거의동시에들이닥 쳤다. 서로 자기가 순창 가는 승용차편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편의 를 사양하고 이튿날 새벽 순창 가는 첫차를 탔다. 아침에 김, 홍 두 후보 쪽에서 각기 유세장에 가라며 여관에 지프를 가지고 왔다. 이것도 거절했다. 가인은 무 소속, 홍씨는 민주당이었다. 가인과의 관계는 오래였고, 홍씨와는 송원영 부장 이나 이철승 의원이 각별히 부탁한 처지다. 지금은 혁명기요. 개인적인 인연을 떠나서 당신이나 나나 민주당을 밀어야 해. 홍영기 좀 도와줘. 송 부장은 내게 이렇게 부탁했었다. 그렇다, 혁명기다. 그렇다고 가인이 자 유당이란 말인가, 반민주당이란 말인가. 누구도 특별히 봐줘야 할 이유가 없 다. 나는 이렇게 맘먹었다. 자전거포에 가서 보증금을 내고 하루 자전거를 빌렸다. 유등초등학교까지는 한 20리라던가. 그런데 건천이던 개천 물이 불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할 수 없이 바지를 벗어 혁대로 묶고 자전거를 끌고 100m가 넘는 강을 건넜다. 3시 에 열도록 돼 있는 후보자 정견발표는 냇물이 부는 바람에 길이 막혀 한 30분 늦어졌다. 나는 그동안 교장실에 가서 옷을 말리고 넥타이를 고쳐 맸다. 양쪽 후보자들이 나를 보자 깜짝 반가워했다. 정견발표장에서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프를 타고 도 도하게 물줄기를 가르며 강을 건너던 사람들이었다. 저 맨발로 자전거 끌며 끙 끙거리던 별난 사람이 알고 보니 서울 기자였으니 다시 쳐다볼 만도 했으리라. 서울에서 온 기자는 나 하나였다. 그들은 나를 확실한 자기 편 으로 믿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확 실한 기자 편 이기를 다짐했다. 순창우체국에 가서 정말 맘먹고 내 깐에는 공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89
정한 기사를 보냈다. 서울로 돌아와 우리 신문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기사는 간데없고 순창에서 김진배특파원 발 로 된 이름 석 자만 살아 있 을 뿐 허위 왜곡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순창 같은 산골에도 민주당 바람이 불어 초대 대법원장이 고전하고 있다는 투였다. 4 19로 살아난 경향신문이 4 19 로 없어진 세계통신과 무엇이 다른가. 혁명의 총아는 갑자기 서글펐다. 동아일보로 1963년 10월 3일 개천절 날 나는 경향 정치부에서 동아 정치부로 옮겼다. 이른바 민정이양 을 앞두고 10월 15일 대통령선거 막바지였다. 동아일보 김 성열( 聖 悅, 정경부장, 뒤에 동아일보 사장)씨를 소공동 신문사 건너편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말은 들었지만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디 교수나 은행 가 같은, 키가 작고 얼굴이 흰 데다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아주 나이가 든 40 대였다. 말씨가 매우 느리고 조용조용했다. 우리 동아일보 이웅희씨나 박경석( 朴 敬 錫 )씨한테 자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요 몇 달 동안 자네 기사 아주 잘 보았지. 어때요, 동아일보에서 우리 같이 일하 는 게. 월급이야 양쪽이 비슷하지만 우리 쪽은 보너스가 200%야. 그리고 무엇 보다 신문사가 안정돼 있어. 사람을 아끼고. 자네 고대지? 고향은 전라도 어디 지? 초면에 자네였다. 어색하게 들렸다. 하지만 내 기사를 보았다는 데는 기분이 좋았고, 보너스란 말에 구미가 당겼다. 선거 끝나면 가겠다 했더니 내일 당장 오라고 독촉이었다. 경향 정치부의 김경래( 景 來 ), 이환의( 桓 儀 ), 최서영( 崔 瑞 泳 )씨 등이 미쳤냐며 동아일보 같은 꽉 막힌 곳 에서 어떻게 일하겠느냐 며 만류했다. 견습동료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악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 연도 좋지만 초면의 대선배와의 약속을 버릴 수 없었다. 90 관훈저널 봄호
JP 정계은퇴 특종 1968년 정계은퇴를 선언한 거물 정치인이 그로부터 40년 뒤까지 은퇴는커 녕 정치일선에 건재하다면 그때 그 일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특종에도 시효가 있는 건가. 심한 당착을 느낀다. 1968년 5월 30일 금요일의 공화당 정례 당무회의는 1단짜리도 안 되는 뉴 스였다. 마감 전에 기자실에 내려온 김재순 대변인(뒤에 국회의장)은 별 이야기 가 없었고, 묘지문제를 검토했다 고 연막을 피웠다. 기자들은 다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김용태( 泰 ), 최영두( 崔 永 斗 ) 등 쟁쟁한 JP 직계 중진의원들을 본인의 해명 하나 듣지 않고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에 연루 혐의를 걸어 목을 치는 이 살벌한 판에 당의 최 고집행기관이라는 당무회의에서 말이 없었다니 납득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 은 혁명동지 사전조직 의 핵심 아닌가. 김종필 당의장의 측근의원 몇 사람 집에 전화, 골프장에 갔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워커힐 근처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나오는 JP 승용차를 목격, 뒤 따랐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몇 번을 놓쳤다가 청구동 집 대문 앞에서야 따라 잡았다. 골프 복장 그대로였다. 차에서 내리는 당의장 팔을 꽉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제주도에서 제가 찍은 사진 보여드리지요. 주스 한 잔 주세요. 당의장을 그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첫 창에 찌르지 못하면 창이 아니다. 인 터뷰도 마찬가지. 의장님 당을 할 겁니까, 안할 겁니까? 왜 당의장 그만두고 쉬겠다는 겁니 까? 혁명의 지도자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이 판에 묘지나 다루고 골프나 칩니 까? 무슨 실직자도 아니고. 그러자 그는 단숨에 뱉듯이 말했다. 안하겠습니다. 다아 그만두었습니다. 아니, 당의장직을 이미 사퇴했습니까? 앞으로 사퇴하겠다는 겁니까?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91
사퇴요? 왜 사퇴합니까. 탈당했습니다! 당신 말대로 이제 오늘부터 실직이 지! 나는 자세를 고쳤다. 이제는 차분하게 물어보아야 할 차례다. 가무잡잡하고 축 처진 그의 눈초리가 새삼 무섭게 보였다. 그의 두 손이 탁자 위를 더듬거린 다. 라이터를 켜 담뱃불을 붙여드렸다. 내가 한마디 물으면 당의장은 열 마디나 했다. 한 30분, 내가 먼저 일어났다. 이건 특종이다. 더 듣고 말 시간이 없다. 청 구동 비서실에서 우선 호외용 기사를 불렀다. 아니 그걸 부르면 어떡합니까? 아직 보고도 못 드렸는데. 김진봉 비서를 시켜 부여지구당에 탈당계를 냈다는 걸 기사를 다 보내고 나 서야 알았다. 회사에 들어오니 벌써 호외 윤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김종필씨 공화당 탈 당 특호 활자에 의원직 등 모든 공직 사퇴, 국민복지회 사건과 관련 있는 듯, 본사 기자 단독회견 말 그대로 주먹처럼 콱콱 박혀 있다. AP통신은 정직하게 동아일보를 인용, JP 정계은퇴 를 세계에 알렸다. 다른 신문들이 당의장 정계 은퇴를 직접 확인한 것은 동아일보 특종 72시간 뒤였다. 신문사에서는 특종상 을 주었고, 기자협회는 기자상(제2회)을 주었다. 3주일 동안의 동남아 여행경비 일체의 특전이었다. 남산 지하실 그해 11월 25일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날 오후, 김포비행장 트랩 밑에는 저승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의장실에서 나왔습니다. 검역증이랑 여권이랑 주시지요. 짐표도요. 고단 하실 텐데 바로 나가시도록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초면인데도 정중했다. 그들은 차나 한잔하자며 공항 구내 2층 사무실로 올 라가더니 곧 수화기를 들었다. 십이 시 삼십 분 도착했습니다. 십오 시 전에 들어가겠습니다. 92 관훈저널 봄호
열두 시가 아니고 십이 시라, 이건 분명 당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니었다. 해외여행 중 누구를 만났는지 좀 물어볼 게 있어 어디 잠깐 들러 갑시다. 그들은 여전히 상냥했다. 35세의 동아일보 국회팀장은 그들의 차에 실려 남산으로 호송되었다. 남산 본관 지하 10여평 됨직한 방에는 흰 커버를 씌운 회전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 고, 그 양옆에 소파 한 개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 한쪽 구석 세면대 수도꼭 지에선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 4시에야 나는 기다란 소파 한 쪽에 앉혀졌다. 1968년 신동아( 新 東 亞 ) 12월호에 특집으로 실린 차관( 借 款 ) 기 사(김진배 박창래 공동집필)가 문제된 것이다. 수사관은 내가 쓴 부분을 빨간 잉크로 줄을 그은 신동아 책과, 깨알같이 쓴 신문할 골자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확인해 나갔다. 선거와 돈-이 돈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돈의 출처는 대략 세 가지 루 트, 즉 첫째 상업차관, 연불수입, 현금차관 등 크게 보아 외국 빚에서 떨어지는 커미션, 둘째 500억원 이상에 달하는 정부에서 사들이는 물품과 공사계약에 서 떨어지는 커미션, 셋째 3천억원 내외에 달하는 산은 저리융자 커미션 등. 이 중 적어도 3~5%는 집권층으로 들어가고 극히 일부의 돈이 야당으로 새나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공화당의 한 실력자는 선거가 끝난 뒤 1천만 달러 이상 차관을 얻었거나 연불수입 현금차관을 한 업자들은 그래도 상당한 성의를 보이고 있다고 실토한 일이 있다. 50대가 훨씬 넘어 보이는 일제 때 압록강변 어디 수사기관에 있었다는 카 이젤 수염 은 말했다. 우리가 당신 기사를 면밀하게 검토했다. 차관 도입에 따른 커미션의 출처며 분배방식이며 권력층의 내막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행세깨나 하는 놈들 이조 직적으로 동아일보에 제공한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출처만 대면 당신은 죄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물어물하면 이건 반공법 4조1항에 해당된다. 적(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다. 그는 배석한 수사관과 나를 번갈아 둘러보며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쳤다.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93
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실직고하지 않고 공산당의 책동에 놀아나 대한민국 정부를 농락하고. 이놈 다른 방으로 끌고 가! 정보부라고 다 정보부가 아닌 모양이다. 물어보는 곳도 있고, 조지는 곳도 있 다더니 정말 그럴까. 같은 수사관이 똑같은 피의자를 다뤄도 순간순간 대하는 자세와 말투가 천사와 악마의 1인2역, 3역이다. 너 6 25 때 총 들고 의용군 했지? 여기 경찰보고 갖고 있다. 사실이다. 총 들었다. 수류탄도, M1도, 칼빈도, 박격포도! 전투경찰로 싸웠 다. 그것은 약과다. 네 애비는 남로당 세포고, 3 22폭동(1947년) 때 인민위원장한거우리가 다 알고 있어. 이런 자이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대한민국에 해가 되는 기사 를 써서 민심을 혼란시키고. 이 말이 떨어지자 나는 그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님은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국민학교 5 학년 때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 을 겁니다. 이 새끼가 덤벼? 이런 빨갱이 새끼가! 순간 내 눈엔 보이는 게 없었다. 옆에 놓인 걸상을 번쩍 들어 책상 위에 던지 며 소리쳤다. 이런 개 같은 새끼! 너 이 새끼, 6 25 때 뭐 해먹은 놈이야! 네 애비는 뭐 해 먹었어! 보이는 게 없나, 이 새끼가! 내 열여덟에 총 들고 싸웠다. 그때 죽었을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 이놈의 새끼, 너 같은 건 내가 죽여! 정말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옆에 한 놈이 있든, 열 놈이 있든 그런 건 쥐 새끼로 보였다. 그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손도 들지 못했다. 이런 미친놈 보았나 이런 미친 새끼 이 새끼 이제 보니 깡패구나! 나는 그들 한두 놈쯤은 정말 죽일 듯이 살기가 돋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는 다시는 빨갱이다, 공산당이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와 우리 아버지를 빨 94 관훈저널 봄호
갱이로 몰던 수사관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치자금 내막 폭로 수사관의 신문은 밤낮없이 계속된다. 밑줄 친 부분을 하나하나 캐묻는다. 작년 여름 집권층 정치자금 관리인이 누구냐는 의문이 제기된 일이 있었다. 공화당의 정치자금은 누구 혼자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4인이 공동관리한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 4인 공동관리설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 지는 밝히지 못했었다. 이 구절 하나만 가지고 10시간 이상 승강이가 벌어졌다. 청와대나 정보부까 지 정치자금 창구로 보는 놈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아, 어떤 새끼가 이후락( 厚 洛 )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리 부장님( 炯 旭 )을 끌고 들어가더냐 고 진저리가 날 만큼 따졌다. 나는 절대로 이 네 사람의 이름을 박아 쓰지 않았다고 버텼다. 지금 당신이 쓴 원고를 우리가 압수했어. 그래도 부인해? 이거 안 되겠어. 원고에는 누구누구 사람 이름까지 박아서 썼어. 원고를 보여줄까? 성역을 건드린 죄를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뱃심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정 면돌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가 출판물입니까? 신동아 책이 출판물이지! 사건은 10여일 뒤에야 낙착되었다. 연행된 사람은 공동필자인 경제부 박창 래( 朴 昌 來 ) 기자를 비롯한 10여명. 신동아 주간 홍승면씨와 손세일 부장은 처음 에는 신동아 차관 사건으로 다뤄지다가 북괴와 중소분쟁 이라는 외부기고로 구속 수감되었고, 사표는 구치소에서 받아갔다. 정보부는 불과 2주일 만에 최대부수를 자랑하는 야당지 동아일보를 쑥대밭 으로 만들었다. 발행인이 김상만 부사장에서 고재욱 사장으로 바뀌고, 편집인 이던 천관우( 千 寬 宇 ) 주필의 목을 쳤다. 30을 전후하여 조선일보와 민국일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두루 거친 역사학자이기도 한 강골 천 주필은 점심때면 으레 소주 한 병에 설렁탕 두 그릇을 시키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신동아 사건이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95
터지자 벌을 줄 일이 아니라 상을 줄 일 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곧 편집국 장 책임을 맡도록 된 김성열 국장대리를 허울 좋은 런던특파원으로 쫓아냈다. 나는 출판부로 쫓겨났다. 기자협회 강령 만들고 내가 기억하기로 기자협회 태동은 윤리위법을 통과시킨 군사정부의 언론정 책에 대한 반작용이 결정적 계기를 이루지 않았나 싶다. 그걸 맨 먼저 속닥거린 곳이 국회출입 기자와 법조출입 기자들이었다. 한국일보에서 국회 나오던 한 남희( 韓 南 喜 )씨, 그가 언론노조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10년도 넘는 선배였고, 별로 기사를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 구찌(입)가 세고 직선적이었다. 느리고 억센 부산 악센트가 우리들의 대장 으로 모실 만했다. 경향신문에서 같이 국회에 나가던 이환의( 桓 儀 )씨나 최서영( 崔 瑞 泳 )씨도 신문노조 해야 한다 고 열을 올렸다. 민국일보 이상우 씨나 한국일보 이덕주 씨도 창립 초기 멤버들 이다. 소공동 경향신문 바로 옆 동화통신의 국회출입 곽지용( 郭 址 勇 )씨나그옆 연합신문 김영수( 榮 洙 )씨도 만날 때마다 우리 그것 하나 만들어보자 고속닥 거렸다. 그러나 다른 출입처에서는 우리가 지사지 노동자냐 며 빈정거렸고, 동아 조선 등은 아예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좀 뜸을 들이자고 차일피일하던 것이 5 16으로 언론노조 문제는 뻥끗도 못 하게 됐다. 그렇게 지내다 꺼진 불처럼 일어난 것이 윤리위 파동이다. 나는 기자 협회 규약 초안을 만들고 선언문 강령에 손을 댔다. 규약을 만드는 데 내가 잘 아는 어떤 대법관의 자문을 받았고, 선언문과 강령은 참고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어 일본 신문노조 것을 대본으로 삼고 3 1 독립선언문의 문투를 빌려 썼다. 기자협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은종관( 殷 鍾 琯 )씨다. 1952 년 피란수도 부산에서 장택상 총리 비서를 하던 풍채 좋은 이분은 시골에서 정 미소를 하며 심심하면 서울에 올라와 기자들에게 술을 샀다. 민주당 신 구파 할 것 없이 발이 넓었다. 특히 동아일보 법조 왕초인 이강현( 綱 鉉 )씨와는 가까 96 관훈저널 봄호
운 사이였고, 이환의씨와도 죽이 맞았다. 산케이신문 서울특파원과는 형제처 럼 지낼 정도였다. 이분은 기자협회가 정식 발족되기 훨씬 전부터 부지런히 서 류를 챙기고 사람들을 만났다. 전쟁 때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출신이라는 간판 이 서울대 후배들에게 잘 먹혔다. 나와는 동향이다. 꼬박 42년을 기자협회와 관훈클럽에서 일한 김영성( 金 永 盛 ) 국장은 내 동생이다. 초대회장을 추대하는데 기자협회 같은 조직을 탐탁지 않게 보던 동아일보에 서, 더군다나 법조출입 가운데서 모셔온 사람도 이 은씨였다. 은씨는 마음만 내키면 그저 퍼주는 기질이었고, 설득력이 대단했다. 여보 이형, 그 나이에 국장을 하겠소, 논설위원을 하겠소. 천하의 이강현이 가 기자들 대장 한번 해보란 말이오. 그 은씨가 기자협회 창립 막후요, 초대 사무국장이다. 이런 내막은 별로 알려 져 있지 않다. 일찍 세상을 떠난 데다 저희들 이야기만 하는 세태 탓이다. 30원짜리 목도장으로 1억 맡긴 신영기금 1977년7월 어느 날이던가, 관훈클럽 회계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조세형 총 무를 따라 태평로 현대건설 사옥으로 갔다. 정주영( 鄭 周 永 ) 회장은 비서실장을 부르더니 조 총무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거 한 장인데 유용하게 써주세요. 정 회장은 작고한 자기 동생을 떠올리며 신영이가 있었으면 조 선생이랑 좋 은 일을 많이 할 텐데 라고 덧붙였다. 하얀 2중 봉투는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있었다. 동그라미가 줄줄 매달린 1억 원이었다. 1천만원 현금이면 두말 말고 고맙게 받고, 주식이나 토지나 연수표 같으면 그 열 배라도 아예 거절하자며 갔었는데 정작 현금 1억원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 클럽 예금통장에는 내 한 달 월급보다도 적은 20 몇만원들 어 있었다. 무교동 도장집에서 30원 주고 목도장을 팠다. 예금주는 서관훈. 서울 관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97
훈클럽 을 줄인 이름이다. 지금 쓰고 있는 통장(관훈클럽)과 차별해서 아예 정기 예금으로 맡기려고 거래은행이던 시청 별관 상업은행 서울시 금고인가에 가서 창구에 1억원짜리 수표를 내밀고 새 통장을 만들었다. 한여름 기금설립 작업 가운데 난관이 등기할 사무실 소재지였다. 방 달라고 쳐들어간 조 총무 관훈클럽은 창립한 지 20년이나 되었는데도 떠돌이 신세 였다. 조 총무와 나는 신문회관에 입주한 수십 개의 신문단체 방 배치도며, 평수를 체크했다. 이 윽고 조 총무는 김종규( 鍾 圭 ) 이사장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전에 한국일보 사 장이었고, 당시 서울신문 사장이었다. 아니, 조 위원이 웬일로 여기까지. 예, 신문사에서 뵙는 것보다 여기서 뵙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김형, 우리 사장님 잘 알지? 아, 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진배 씨라고, 관훈클럽 재단설립 회 계 일을 보고 있어서 같이 왔습니다. 아, 그래, 수고가 많겠어. 그래 잘돼 갑니까? 예, 덕택에. 그런데 한 가지 사장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재단 만드는 데 내가 도와줄 일이 뭐 있겠소? 정주영 씨가 돈 많이 줬다면 서. 그런데 그 돈으로 만드는 재단이 들어갈 방이 없습니다. 우리가 명색이 자 랑할 만한 신문단체인데 어디 가서 셋방을 얻겠습니까. 신문회관 방 하나 주십 시오. 허, 조 위원 말 잘 알아듣겠는데 빈방이 어디 있나. 사람들이 다 들어와 있 고. 더군다나 방 하나 트고 붙이려면 협의하는 데도 몇 달이 걸리는데. 하여간 연말까지는 내 연구해볼게. 조 총무는 빙그레 웃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큰 방들 쪼개면 될 거 아닙니까? 98 관훈저널 봄호
하, 이 사람이! 이게 내 맘대로 붙였다 쪼갰다 하는 방이 아니지 않은가. 그 렇다면 차라리 현대 쪽에 부탁해서 주소를 거기로 하면 어떨까? 다른 방 주시기 어려우면 사장님 방 한쪽 댓 평 주십시오. 한 30평 됩니까? 늘 쓰시는 방도 아니고, 접견실은 따로 있고. 사흘 뒤 조 총무는 다시 그 방으로 쳐들어갔다. 이번에는 나도 한마디 거들 었다. 관훈클럽이 이제는 보따리장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왜 20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새삼스럽게 방 내놓으라고 야단이냐는 듯이 말씀하시는데 새 식구가 생기면 방을 늘리든지 합치든지 쪼개든지 해야지요. 총무 말이 무리한 말이 아 니라고 봅니다. 우선 재단법인 등록에 신문회관 주소를 써도 좋다는 선에서 양해가 되고 입 주는 창립대회 전까지로 못 박았다. 지금 쓰는 14층 그 자리. 처음엔 그 반도 못되는 좁은 방이었다. 신영기금을 만든 건 조 총무의 열정, 끈기의 소산이다. 휴지, 이쑤시개까지 들고 온 부인 관훈클럽 새 사무실 크기는 열 평 남짓, 그러나 이 안에 놓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조 총무와 나는 신문회관 지하다방에 앉아 이 방에 들여놓을 집기며 사 무용품을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한 50여 가지 된 듯하다. 클럽 총무와 기금 이 사장이 같이 쓸 책상 하나와 사무원용 책상 하나, 거기 딸린 의자 2개, 전화, 옷 걸이, 휴지통, 선풍기, 신문걸이, 기역(ㄱ)자형 소파와 탁자, 벽거울과 액자, 철 제 캐비닛과 조그만 손금고. 나와 조 총무는 을지로 입구에서 3가에 이르는 10여개의 사무용품점과 가구점을 여러번 더듬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사지 않 고 미뤘다. 이게 어떤 돈입니까. 한 푼이라도 아껴 씁시다. 유급 직원은 여고 2년의 미스 김 하나. 나와 총무는 월 수 금 격일로 오후 1968년그해영광과곤욕 99
3시에 만나 사무를 본다. 손님이 와도 차 한잔 나오지 않는 사무실이다. 그런 지 며칠 뒤 현대 회장 부인이라며 사무실에 잠깐 들르겠다는 전화가 왔다. 미스 김을 데리고 엘리베이터 밑에까지 가서 영접했다. 높이 1m, 폭 50cm쯤되는3 단 나무찬장과 쟁반, 커피잔 세트, 커피 한 통과 설탕 한 통, 칼과 가위, 심지어 휴지와 이쑤시개까지 겹겹으로 얌전하게 싸인 물건을 가지고 왔다. 보통사람 이 생각할 수 없는 자상한 배려였다. 신영기금이 발족한 지 한참 뒤 기자협회 편집실장 일을 보던 정진석( 鄭 晋 錫 ) 씨를 초대 사무국장으로 맞아 나는 기금 사무국장대리 라는 멍에를 벗었다. 저관 널훈 100 관훈저널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