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선생 장원급제 과거시험 답안지 최초 발견 日本 名古屋 蓬左文庫에 있는 策文 속에서 정몽주 선생 對策文 확인 (관련기사12쪽) 제1회 포은학회 전국학술대회 거행 2009년 3월 14일(토) 대구대학교 본관 1층 성산홀에서 (관련기사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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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馨檜翠夏荷新 鼓瑟吹笙怡友臨 恰似謝王歡會稽 猶如李杜樂石門 싱그러운 난향, 푸르른 회백 연꽃이 성할 때 벗님네들 오셔서 기쁨 겨워 잔치하네 사영운과 왕마힐이 회계땅에 즐기는 듯, 이백과 두보가 석문에서 노니는 듯 鄕俗待客偏憑酒 人雅邀朋總以文 兩地心通結永好 笑觀東海度船頻 향리의 습속에는 술로써 대객(待客)커든, 아치 높은 벗님들과는 글로써 화답하네 양국의 마음 통하여 우의를 영원토록 맺고자 하니 간찰(看察)컨대 동해에는 왕래하는 배 더욱 빈번하노네. 山川異域 사는 곳의 산과 내는 서로 다르지만 嶺南春早不見雪 風月同天 영남의 봄이 일러 눈을 볼 수 없지만 달과 바람은 같은 하늘아래에 있네. 臘月街頭聽賣花 섣달의 거리에는 매화꽃 파는 소리 海國人家除夕近 연안의 백성들에 제석은 가까운데,»城微雨濕山茶 온 성에 뿌리는 세우(細雨) 동백이 젖는구나. 구충효 (邱忠孝) 중국 시가 학회회원 중국 세계문예가협회 고급연구원 중국 곡부의 제명서예가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하다 시문 번역 = 권혁범 중국 거주 포은학회 이사 위의 시화작품은 구충효 선생의 작품으로 중국내에서 여러곳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장개징 (蔣開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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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작가작품 雲庵 鄭 仁 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영일정씨 대구종친회 총무 서예작품 활동 30년 원로작가
공민왕 8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큰 위 기를 겪은 고려는 홍건적이 다시 침입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고려가 당면한 가 장 큰 현안 문제는 홍건적 방비일 수밖 에 없었다. 그리하여 시험관인 김득배와 한방신은 공민왕 9년 과거 시험 문제인 策問으로 홍건적 퇴치법을 제시했다. 근래 홍건적이 강을 건너 침략해 왔지 만, 격퇴시킨 것은 우리 임금의 덕의 소 치이지만, 피할 수 없어 武威를 본받고 자 한다면, 太公望 司馬穰 孫賓 吳起 孔明 李靖 등의 兵書가 있는데 어떤 책이 그것을 위한 핵심 兵書이고, 어떤 술수가 義에 합치되는가 를 과거 정몽주 대책문 시험 문제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몽주의 대답인 對策의 핵심 내용은 문무를 겸용한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무를 함께 쓰는 것은 왕이 따라야할 대법이고, 만세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요순삼대 이래 문무를 함 께 천하가 다스려졌는데, 진한수당을 거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하였고 원의 세조가 문무를 써 태평을 이 루었지만 근년에 이것이 무너졌다. 태조 왕건이 문과 무를 함께 사용하여 500년간에 성대한 치세를 이 루었고 공민왕도 이를 본받아 문과 무를 함께 일으켜 침입해온 홍건적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 太公望, 司馬穰, 諸葛孔明, 孫賓 등은 인의로서 武를 행한 인물로 지금의 장수된 자들이 이들을 몰라 서는 안된다. 兵書에 담긴 이치를 통달하는 것은 오직 사람에 달려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은 문무를 겸 비한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홍건적을 방어하는 대책의 핵심에는 文武를 겸비한 사람을 등용 하는데 있고, 이를 통하여 孝悌忠信의 덕과 戰術을 가르쳐 이민족을 막을 수 있다 고 하였다. 이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등용하라는 과거 시험 답안은 당시 약화된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 로운 인재선발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실력있는 무장의 선발과 이에 바탕을 둔 양반 관료제를 재 정비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의 문무 겸용에 의한 인재등용론은 유학의 인의론, 교화론이 전제된 무학 진흥을 제시하여 홍건적과 같은 이민족을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는데, 뒤에 여말 의 군제개혁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몽주가 제출한 이 답안지는 공민왕 9년 10월 최우수 글로 뽑혀지게 되었다. 정몽주의 대책문은 공 민왕 9년 무렵의 정국 상황과 공민왕대 정몽주의 현실인식과 대응론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시험 대책 문의 형식과 내용을 파악하여 과거제 연구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봉좌 문고의d策文e 처 럼 일본에 있는 한국학 관련 자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도현철(都賢喆) 연세대 사학과 및 대학원 사학과 졸, 연세대 사학과 교수(2001~ ) 주요 논저_d高麗末 士大夫의 政治思想硏究e, 일조각, 1999. d經濟文鑑e 의 典據로 본 鄭道傳의 政治思想, d歷史學報e165, 2000. 高麗末 尹紹宗의 현실인식과 정치활동,d東方學志e131, 2005. 이색의 경학관과 그 지향,d震檀學報e102, 2006. 고려말 염흥방의 정치활동과 사상의 변화,d東方學志e141, 2008. 13
구한말 궁중비사 정환덕 시리즈 上 영일정씨 시조 형양공 정습명 선생 26세손 정환덕 기록 조선 최후 궁중 비사 남가록 (南柯錄) (上) 영일정씨 시조 형양공 습명(滎陽公 鄭襲明)선조의 26세손 퇴산 정환덕(退山 鄭煥德 : 관직 시종원부경=종2품, 현 청와대비서실 장 겸 경호실장)선생이 구한말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고종(제 26대), 순종 황제(제27대) 두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면서 꿈속 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을 빌려 쓴 남가록 (南柯錄 : 관련기사 본 보 제12호 2008년 가을호 108페이지 고종황제 시종원부경 손자 정부용씨)의 구한말(舊韓末) 궁중비사 가운데 퇴산 정환덕 선생 에 관련된 내용만 간추려 上 中 下로 나누어 싣기로 했습니다. 주(註) : ①영일정씨의 시조공이나 정환덕 선조를 씨(氏) 또는 선생으로 표기했습 니다. ②남가록(南柯錄)이란 남가몽(南柯夢) :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으로 우리 근대사의 격동기인 구한말(1897~1910) 13년 동안의 궁중비 사를 당시 고종, 순종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고 있던 시종원부경 정환덕 선생이 꿈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형식을 빌려 기록한 책으로 1993년에 처음 발견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③위의 자료는 남가록을 직접 쓰신 정환덕 선생의 손자 정부용(영일정씨 시조공의 28세손)씨가 제공한 남가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구한말 궁중비사를 생생히 담은 南柯錄의 표지 자료제공 = 영일정씨 시조공 28세손 정 부 용씨 바로잡습니다 종보 제12호(2008.10. 1일자 발행 가을호)에 실린 고종황제 시종원부경 (비설실장) 손자 정부용씨 제목의 글을 고종황제 시종원부경(비서실장) 손자 정부용씨 로 바로잡습니다. 정환덕, 이규찬의 소개로 난생 처음 궁중에 들어가 정환덕 선생은 1902년 光武 6년 11월 처음 시종원[侍從院 : 조선말기 1895년(고종황제 32) 을미(乙 未)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안에 설치한 관청으로 주로 임금의 비서 어복 어물 진후 의약 위생 등 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시종(侍從)으로 임명한다는 칙명(勅命 : 임금의 명령)]을 받았다. 이날부터 정환덕 선생은 자신의 몸이 아니고 고종황제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되어야 했다. 정환덕 선생의 대궐의 입궐시각은 고종황제의 기상에 맞춘 매일 낮 12시. 황제가 일어나면 잠시 문안을 드린 뒤 오후 내내 대궐 밖으로 물러나 있다가 초저녁부터 다시 임금 곁 14 2009년 제13호
구한말 궁중비사 정환덕 시리즈 上 엎드려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운수는 길고 멀며 짧고 촉박한 것이 정해진 수(=천재지변)가 없 는 것은 아니나 또한 국가가 다스려지느냐 다스려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확정지어 말씀드리기 는 어렵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시면 500년 뿐아니라 1천년도 더 갈수가 있고 1만년도 가할 것입니다만 잘못 다스리시면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잃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의 얕은 생각으로 는 대개 추측한 운수는 폐하 이후로 부터 11제(帝)의 운입니다. 폐하에게 앞으로 주어진 재위연수는 정 유원년(1897년)이후 11년으로 그쳤으니 이 수는 피할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황상께서 그렇다면 혹 하늘에 빌어서라도 그 수를 늘리는 법이 없는가 고 말씀하심에 인재를 얻으 면 번창해지고 인재를 잃으면 좋지 않게 됩니다. 이밖에는 특별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께서 다시 너는 나가서 자세히 수를 추산하여 다시 아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시면서 현릉참봉 (顯陵參奉)이 비어 있는데 정환덕을 임명한다는 글을 써서 궁내부에 내려주었다.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 격은 다 말씀드리기 어려웠다. 다만 임금을 향하여 사배(四拜)를 하고 그 은혜에 사례하고 물러나왔다. 실제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1907년 정미(丁未)년에 양위하게 되었으니 정환덕이 그것을 꼭 집어 맞추었던 것이다. (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정환덕이 엄비로부터 하사받은 흉배자 정환덕의 시종원 부경 임명장 南柯夢 필사본 고종의 시종관 정환덕이 대원군의 집 권부터 대한제국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 로 기록한 미공개 한말비사 남가몽 의 필사본. 남가몽 은 우리가 흔히 대해온 큰 줄기의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적 사 건의 배경이 되는 권력주변의 음모와 사기 등 당시의 세세 한 정황들을 활동사진처럼 생생하게 담고 있다. 17
한국조폐공사, 한국100인 인물 시리즈 메달출시 고려의 고려의 마지막 마지막 충신 충신 포은 포은 정몽주 정몽주 선생 선생 한국조폐공사(www.komsco.com)는 한국의 경제, 사회, 과학, 역사, 정치, 문화 등을 대표하는 인물 100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 을 2008년 2월부터 매월 2명의 인물메달을 총 50개월 동안 출시하고 있다. 인물의 선정은 여러 분야에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선현의 표준영정 및 이 달의 문화인물 등에서 한국조폐공사가 메달의 제조 적성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였으며 국민들의 기념메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자료로의 활용 등을 고 려하여 슬립 책자형 케이스에 인물과 관련된 유적사진 및 업적 등을 수록하였고 최대 발매량을 1만장 으로 제한하여 희소가치를 높였다. 한국조폐공사의 우수한 디자인 및 조각기법을 적용하여 예술적 작품성을 부여한 특별 기획 시리즈 메달 중 하나인 2009년 첫 출시 메달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고려의 학자 정치가인 포은 정 몽주 선생 을 선정하였다. 메달의 구입은 한국조폐공사 전자쇼핑몰(www.koreamint.com)에서 선착순으로 구입할 수 있고, 공 사 쇼핑몰에서는 매월 구입자 50명을 대상으로 이벤트도 시행하고 있다. 영일정씨 포은공파종약원을 통해서도 구입하실수 있으며 종약원에서의 구입기간은 2009년 3월 말 까지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 기념메달은 전국 포은선생 후손을 비롯하여 일반인들까지 깊은 관심을 나 타내어 약 3000여개가 팔려 나갔다.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 - 정몽주 디자인-2009년 1월 29일 발매] 24. 포은 정몽주 선생 앞면 뒷 면 단심가 청동/ 40mm / 33g 글 _ 배수현 과장 한국조폐공사브랜드마케팅부 28 2009년 제13호
第1次 圃隱學會 全國學術大會 開催 여말선초의 세계관과 정몽주의 사상 포은학회에서는 제1차 전국학술대회를 2009년 3월 14일 대구대학교 본관 1층 성산홀에서 개최하였 다. 영일정씨 대구 경부지역종친회(회장 鄭奉道)의 주최로 실시한 이번 학술행사에는 2백여명의 회원 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포은학회는 창립이후 圃隱先生胸像奉安事業, 日本九州 圃隱先生遺跡調査를 실시하였으며, 圃隱學 術叢書를 매년 刊行하여 圃隱學硏究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노력해 왔다. 또한, 圃隱學의 학문적 업적을 提高하기 위하여 제1차 國際學術大會와 韓中學術大會를 개최하고, 국내외 학자들을 초청하여 발표 및 討議를 거듭한 결과, 多大한 成果를 거두어 왔다. 이번에 제1차 全國學術大會를 大邱大學校에서 개최 한 것은 國內에서의 연구 분위기를 振作하기 위한 것이다. 제1차 전국학술대회 행사일정 진행: 김성환, 엄경흠 13:00-13:20 참가자 등록 정봉도 13:20-13:25 개회사/ 정봉도(영일정씨포은공파경북대구종친회장) 13:25-13:30 환영사/ 최병준(포은학회장) 13:30-13:35 축사/ 정춘영(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 이사장) 13:40-14:10 제1발표 麗末鮮初 士大夫의 '奉使詩'에 나타난 世界觀 비교 발표자: 안장리(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자: 김종서(성균관대) 발표자 : 안장리 30 2009년 제13호 최병준
기획 Ⅰ 한국민이 알아야 할 포은 정몽주 선조 명시 감상 종보 제13호부터 매호 2수씩 연속 게재 2009년 4월 포은 정몽주 선생 순절 617주년을 맞아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은 종보 제13호부터 포은선 생 명시감상 을 연속기획으로 게재키로 하였습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말의 왕조를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정치가, 유학자, 문인으로 서도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며, 문학활동을 통하여 고려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 다. 포은집 에 실려 전해오는 포은선생 시 310여수 가운데 명시(名詩)만을 가려서 1회에 2수(首)씩 싣기로 하 였습니다. 시선(詩選)과 집필은 현재 한림대학교 기초교육대학교수이며 포은학회 출판이사로 활동 중인 하정 승(河政承)박사가 맡았으며, 원문과 해설, 그리고 감명 깊은 시평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 감상 속으 로 빠져들게 할 것입니다. /편집실 詩를 통해 經世와 輔國의지 확고히 다져 고려 말 격변기를 살다 간 포은 정몽주 선생은 평생을 때로는 使行과 從軍으로, 또 때로는 복잡한 정 계에서 활동하며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만고의 충신이었다. 사실 포은선생은 정치현실에 참여하면서도 항상 귀거래를 소망했으나, 고려 말의 숨 가빴던 정치현실은 포은으로 하여 금 한가롭게 자연에 은거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며, 포은 또한 經世濟民하는 儒者로서의 삶을 포기하기 에는 經國에 대한 그 자신의 의지가 너무도 컸다. 그는 무려 6차례에 걸쳐 명나라로 사행을 떠났으며, 태풍을 맞이하여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가는 경험도 하였다. 또한 일본에 가서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외 교적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또 수차례에 걸친 종군의 체험으로 그 시대 백성들의 어려운 현실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사행과 종군 등 이러한 다양한 경험 들은 포은으로 하여금 더욱 더 經世와 輔國에 대한 의지를 확고하게 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 시를 통해 우리는 국가의 정치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포은 선생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이 호계가로 돌아갔으니 上人歸去虎溪頭 응당 풍류 아는 두 노인과 함께 놀리라 應共風流二老遊 부귀는 과연 헌 신 버리듯 하였고 富貴果能同弊 ł 생애는 빈 배를 띄운 듯하네 生涯還似泛虛舟 北江이 바다로 흘러가니 흰 무지개 뻗치고 北江朝海白虹走 東岳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나는 새 슬퍼하네 東岳入雲飛鳥愁 삼가 머무르며 산수만 사랑하지 마시오 愼莫淹留愛山水 임금께선 高樓에서 정사에 힘쓰시고 계신다오 君王勤政御高樓 36 2009년 제13호
日城府院君 얼이 깃든 啓賢齋를 돌아본다 300여년간 이어온 齋舍 여러 차례 중건 재중건 경 북 영천시 임고면 도일동 임고서원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계현재(啓賢齋)는 포은선 조의 아버지인 휘 운관 일성부원군 선조의 묘재(墓齋)이다. 일성군재사는 1754년(영조 甲戌) 에 후손 찬술공(삼도통제사)이 제공 한 벼 40섬을 기반으로 하여 오늘처 럼 번듯한 모습으로 변천했으며, 일 성부원군의 제사 또한 300여년 동 계현재 안 후손과 이 고장 유림들에 의해 봉 향되어 왔다. 재사(齋舍)는 그후 오랜 세월 탓으로 많이 훼파되어 1864년에 영남 후손들에 의해 허물고 현 판은 영당에 간수한 후 근 50여년 동안 재사 없이 제사를 지내왔다. 계현재 재창건은 1912년 원교(元敎) 종손이 재사건립을 계획하고 일영(一永) 후손이 발론(發 論)하여 영남 종중과 일성부원군 후손들이 건물을 짓고 계현재 란 현판을 달았다. 이때 선용공(善鎔公)이 시종 성조도감(成造都監) 일을 총괄했다. 이어 1960년 문충공파보 간행을 계기로 계현재 옛 재실을 모두 허물고 새로 재사 4칸을 중 건하였으며, 이때 총 공사비는 120만 환이고 재역 주관은 두영(斗永), 일화(一和)씨가 수고했다. 그 뒤 1998년부터 계현재 관리는 포은공파 종약원으로 이관되었고, 계현재 재중건은 2005년 에 대지를 더 확보한 후 전통 목조한식으로 문화재급 수준에 맞게 잘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계현재가 영구히 보존되고 후손들의 융성과 효심이 누대(累代)에 이어가기를 간절히 기원 드리는 바이다. 영천 / 글ㆍ사진 _ 정연갑 42 2009년 제13호
기념특집 鄭圃隱先生 誕生六百年 紀念誌 정포은과 고려말의 정계(政界) *지난호(12호)에 이어 계속됩니다. 글 싣는 차례 (1)포은 선생의 간략한 전기(차상찬) (2)정포은과 역사성(홍명희) (3)정포은과 우리나라 유학(이병도) (4)정포은과 고려말의 정계(문일평) (5)시인 정포은을 논함(이은상) (6)포은 선생 연보 (7)내가 보는 정포은(황의돈 외 15명) 글쓴이 : 문일평 (文一平 : 1888~1936) 종보 제10호(2007. 가을호) 기념특집으로 鄭圃隱先生 誕生六百年 紀 念誌 (조선일보사 출판부편)에 실린 (1)포은선생의 간략한 전기(차상찬) (2)정포은과 역사성(홍명희) (3)정포은과 우리나라 유학(이병도) (4)정포 은과 고려말의 정계(문일평) (5)시인 정포은을 논함(이은상) (6)포은선생 연보 (7)내가 보는 정포은(황의돈외 15명) 등을 7회로 나누어 싣기로 했 습니다. / 편집자 인물이다. 살아서는 한 나라의 주춧돌이 되고 죽 어서는 만대의 사표(師表)가 되니 삶과 죽음을 통 하여 포은의 존재는 진실로 위대하다 하겠다. 후세에 와서 포은을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비 조로 추앙하나 당시에 있어서 포은은 군왕을 보좌 하는 재목이었던 만큼 정치적인 업적도 뛰어났다. 이것을 외교면에서 보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나 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일에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고, 안으로는 구습의 개혁과 새로 운 제도의 건설에 영향을 미친 공이 많았다. 고려말의 정치는 공민왕 때부터 삐걱거리기 시 작하여 우왕 때에 이르러서는 실타래처럼 엉클어 져 다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욱이 우왕 14년에 일어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인 하여 혼란으로 치닫던 고려 말의 정치는 마침내 급속한 국면의 전환을 보게 된다. 당시 이성계 일 파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조성된 힘을 국내 의 정치투쟁으로 돌려 무력을 배경으로 반대파를 일망타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최영을 제거 하고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켜 시해한 뒤 정 46 포은은 최도통(崔都統 : 즉 崔瑩)과 함께 자기들의 심복들을 조정에 배치하여 언론과 정권 각각 고려말의 문(文) 무(武)를 대표한 을 함께 수중에 넣음으로써 후일에 이성계를 추대 2009년 제13호
화제 Ⅳ 정성교 용인시청 주민생활지원국장 등 4형제 모두 모범공무원가족 포은공파별좌공계 후손으로 가문의 자랑 용인시청 청사 용인시청 주민생활지원국 국장 정성교 한가족 4형제가 모두 용인시청을 비롯 경기도청과 용인시 관내 읍 면 사무소에서 고위직 모범공 무원으로 봉직하는 공무원가족 이 있어 화제다. 아들 4형제 공무원 가족 들은 영일정씨포은공파 별좌공계 후손들로 맏형인 정성교(鄭誠敎 포은 공 22세손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영문리 사진)씨는 지난 1월 2일 정기인사때 용인시 하수도사업 소장에서 본청 주민생활지원 국장(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정성교국장은 나이 20세 때인 1970년 3월 공무원 생활을 시작, 42세 때 고향인 용인시 포곡면장 으로 발령받아 8년 5개월 동안 포곡면장으로 재직하면서 고향지역발전에 헌신했으며, 그 후 용인시 양지면장, 용인시청공보과장, 세정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뛰어난 행정수완을 발휘, 많은 동료 직원들로부터 부러움과 칭송을 받아왔다. 첫째 동생인 인교씨도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용인시 포곡면이 포곡읍으로 승격하면서 초대 포곡읍 장으로 부임해와 당시 포곡면장으로 근무하던 맏형(성교씨)과 읍장 이 취임식을 형제간에 하는 진 풍경이 벌어지기도 한 아주 우애돈독한 형제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둘째 동생 훈교씨 역시 수원시 고등동장으로 근무하다 현재는 경기도청 세정과 계장직에 있으며, 셋째 동생인 진교씨는 현재 용인시 교통행정과 계장으로 근무하는 등 4형제가 모두 현직 공무원 가 족으로 용인시청과 경기도청 산하 전체 공무원들에게 모범공무원가족으로 부러움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다. 4형제 모두 한 달에 1번씩 맏형(성교씨)댁에 모여 87세 되는 노모에게 효를 베풀고 형제간에 우의 를 다지는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며, 가까이 포은선조 묘소에도 자주 들러 선조의 음덕에 늘 감사 함을 표한다고./편집실 72 2009년 제13호
화제 Ⅵ 어명이요!! 강원 삼척 준경묘역(濬慶墓域) 금강송 벌채 국보1호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 용재로 쓰기위해 2008년 12월 10일 오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 149번지 준경묘(濬慶墓 : 강원도 기념물 43호)역에서는 금강송 벌채를 알리는 고유제가 있었다. 고유제는 문화재청과 마을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올 려졌으며 산림전문가와 도편수 입회아래 어명이요 라고 외치며 큰 도끼로 금강송 한 그루를 시범적으로 내리쳤다. 문화재청이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쓰일 금강송을 전국적으로 찾았으나 삼척의 준경묘역 금강송으 로 결정하였다. 이번에 벌목 된 금강송은 모두 20여 그루로 수령이 110 년, 지름 74, 높이 25m의 대경목으로 준경묘 봉분이나 묘정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일정규모 이상의 금강송 이다. 벌채 된 금강송은 얼마전 헬기로 서울로 소송되었 다. 2008.12.10.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 목재로 쓰일 준경묘 부근 금강송을 어명이요 하며 시범 벌목했다. 삼척 / 글ㆍ사진 _ 정용화 종약원 이사 전국시조경창대회 심사위원 74 2009년 제13호
행사로 많은 시민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고. 그런데 우경실 이장과 박승국씨 등 마을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2009년도에 정 효자각이 너무 낡아 보수정화사업을 하려는데 마을자체예산은 한 푼도 없고, 1천여 만원이 드는 돈을 영주시와 장수면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나 시로부터 7백만원 밖 에 지원할 수 없다고 하여 나머지 3백만원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라며 하루 빨리 지 방문화재라도 지정해 주었으면 향토문화발전과 이 마을 청소년들 충효 교육에 큰 우경실 이장 도움이 되겠다 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위 글은 정도창 효자비문의 한자원문. 자료제공 : 영주 / 글ㆍ사진 _ 정연흡 종약원 감사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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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점은 여름철 이곳 방문객의 땀방울을 식혀주는 훈훈한 바람을 비져내는 역할을 한다. 국내 관광객이나 외국 관광객에게 우리의 고유문화를 알리기 위한 사업으로는 한문서당운영, 한시 작법수련, 서예교실운영, 사군자교실운영 등이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그 밖에 전통혼례, 다도시 연, 우리고유한복전시, 민화전시, 매듭공예전개최, 딱종이공예전 등이 민속공예관을 비롯한 전통한옥 에서 전시함으로써 많은 관광객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청학동 서당을 닮은 한옥촌 서숙 남산한옥촌에 한문서숙을 유치한 시기는 1999년 초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산 한옥촌에 민속자료인 전통한옥을 이전 복원하고 밀려드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사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문화를 재현한다 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의 청운 김택춘 선생이 강의를 맡게 된 것은 2000년 후반 기부터 시작되었다. 선생은 고향이 제주도이며 광산김씨 명문가의 후예로서 제주도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서울특별시로 전입되어 각 구청에서 과장직을 거치면서 서울시민의 복리를 위하여 청백리 로서 공직의 본분을 다하신 훌륭한 모범공직자 상을 후배들에게 남기셨다. 처음에는 논어, 맹자, 시전, 서전 등을 차례로 강논하셨 청운 김택춘 선생 는데 한번 배운 문생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청강하면서 정 확한 발음, 명쾌한 해석, 진지한 강의 모습에 도취되어 갔다. 청운선생은 90을 바라보는 연세인데도 아침6시 경기도 성남시 자택에서 떠나 두 시간 넘게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며 오전 9시면 남산골 한문서당에 도착한다. 한때는 강원도 태백에서 기차로 하루 9시간 넘게 서울을 오가 수강하는 학생들의 모습 80 2009년 제13호 수업을 마친 수강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시마당 奉審肅慕殿 菊坡 鄭 昌 和 (호적원부가 있는 곳) 행정기관에 제시하면(우편 으로 접수시 신청인의 주민등록증을 복사하여) 高節丹心永歲明 직계의 모든 분들에게 정정되며(다른 곳에 이사 고절단심은 영원토록 밝고 했더라도 전국어디서든지 정정) 단, 제적부를 받 英靈陟降瑞雲生 은 분의 직계라고 다른 곳으로 전적되었을 경우 는 다시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함. 영령이 척강하니 서기가 나노라 倫綱八域綱同重 필자 정민기씨는 현재 영일정씨포은공파 윤강팔역에 강이 같이 중하고 도암종중에서 총무직을 맡고 있습니다. 忠義千秋義不輕 메일주소 : grandmam@nate.com 전화 (055) 752-0982, 휴대폰 011-9301-6330 충의천추에 의가 가볍지 않노라 壯烈殉身前主守 장렬히 순신하여 전주를 지켰고 孤臣偉蹟大東嗚 고신의 위적은 우리나라에 명성이 높도다 年年奉審儒家事 연년봉심하는 것은 유가의 일이라 龍岳煙霞彩氣成 계룡산 경치에 채색기운이 이루었도다 진주 / 글 _ 정민기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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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약원소식 종약원 소식 기축년 포은선조 설 묘제 봉행 묘소에 눈 쌓여 모현당서 지내다 기축년 설 명절을 맞아 2009년 1월 26일(음력 1. 1.) 오전 포은선조 설 묘제가 용인 포은선조 묘소 아래 모현 당에서 용인과 서울에 살고 있는 포은선조 후손 50여명 이 참사한 가운데 경건하게 봉행되었다. 포은선조 묘소에는 이틀 전에 내린 눈으로 오르막길 이 미끄러워 제수운반이 어려워 부득이 모현당 내에서 봉행하게 되었다. / 편집실 사진 = 정연웅 종약원 사무국장 포은선조배위 기제사봉행 포은선조 배위 경순택주 경주이씨 기제사가 양력 2009년 1월 6일(화) 밤 늦은 시간, 용인 종가 영당에 서 경건하게 봉행되었다. 영하의 밤 날씨에도 구미에서 혁영씨를 비롯 대전의 동교(사예공 종중 회장)씨, 서울인천 묘하 종친 등 30여명의 후손들이 참사한 가운데, 초헌관에는 래정 종손, 아헌관은 춘영 이사장, 종헌관은 동교 회장 이 잔을 드렸으며, 집례는 용교, 대축은 혁영 종친이 수고했다. 사진 = 전종돈 프리랜서 사진 작가 89
포은선조 時享大祭 엄수 원사공ㆍ사예공ㆍ설곡공 등 묘제도 함께 올려 전국에서 포은선조 후손 500여명 참례 시향을 올리는 후손들 용인 포은선조 시향대제례모습 2008년 음력 10월 1일, 2일(양력 10.29~30) 이 첫 날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시향은 포은선조 틀동안 경기도 용인 포은선조 묘소와 고양시 일산 를 제일 먼저 올리고 이어서 원사공(포은선조 맏 구 사리현동 사예공 묘소 시향에는 전국에서 500 아드님 휘 종성), 설곡공(포은선조 손자 휘 보), 여명이 후손들이 참사하여 빛나는 선조의 음덕을 다음으로 휘 윤정(允貞), 휘 희(熹), 휘 세건(世健), 기렸다. 휘 진(震)선조에 이르기 까지 정성을 다해 묘제를 올렸다. 둘쨋 날(음10월2일)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사리현동에 모셔져 있는 사예공(포은선조 둘째 아 드님 휘 종본)묘소에서도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에서 100여 명의 후손들이 참사한 가운데 엄수 되 었다. 특히 사예공 종중 회장인 동교 집례 종친은 앞 으로 모든 제례 참사자는 유건과 도포를 꼭 착용 토록 거듭 당부했다. 포은선조시향대제에 참례한 강원태백종친회 남녀 회원들이 제례 참가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90 2009년 제13호 글 = 정연철 정광화 명예기자 사진 = 정태준 전종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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