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 觸 후 中 華 主 製 } 음악적 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송지 원 * 목차 1. 머리말 Il. 본론 1. 朝 빡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 1) 大 報 밸의 음악( 皇 i핍양 )1 ) 2) 정조와 서명응의 악서편찬을 통한 음악의 이 론적 정 비 3) 뼈체과 觀 歸. 2. 폐 文 物 수용의 의의 1) 洋 琴 의 유입 2) 의 한국적 수용 ill. 맺음말 1. 머리 말 한국의 전통음악은 그 형성과정 에 따라 雅 樂.,활 樂 柳 梁 이란 세 범주로 구분되 어 파악 되었다. 1 ) 이 가운 데 아악과 당악은 그 뿌리가 원래부터 외래 적 인 것 이고, 또 향악의 범주에 속하는 음악 가운 데에 도 외래의 것 이 포함되 어 있다.(특히 삼국시대 서역계와의 활발한 문 화교류가 이 를 뒷받침한다. ) 따라서 역사적 형성과정 에 의해 한국의 전통음악을 볼 때 외래 * 宋 효썼, 서 울대 국악과 박시과정 1 ) 한국의 전통음악을 떼쌓 뽑쌓 柳 쌓으로 구원}는 방법은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의미 로서의 구분법 이디. 그러므로 이러 한 구분법 에 의하떤 조선후기 에 발생 하는 여러 새 로운 장르의 음악들을 포괄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악 딩악 향악의 구분은 올라갈 때 그 형성과정을 알려 주는 구분법 이 므로 적용해 보았다. 한국 전통음악의 유래를 소급해
232 國 樂 院 論 文 集 第 11 輯 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이 는 비단 한국의 문화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문화 유기체의 일반적 속성이기도 하다. 문화는 흐르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라는 문화의 속성을 잘 드러 내 는 명제에 서처럼, 하나의 문화란 태어나 유전하면서, 그 문화가 전파되어 닿는 곳에 각자의 모습을 형 성하게 되고 또다시 전파.2) 확산되거나 소멸되는 일반적 속성을 지닌다. 문화의 일반적 속성에서 나타니는 현상처럼 한국음악에는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 이 섞여 있다. 그 유래야 어떻든 이미 한국음악 이란 범주 안에 확실히 들어와 있는 것에서 외래적 인 요소를 굳이 골라내어, 어 느 것 이 고유의 것이고 어 느 것이 외래적인 것인지 를 가려내어 생각해 보는 작업은 그 뿌리 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래적인 것이 낯선 땅에 유입되어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이 버려 지고 무엇이 취해지며 또 어떤 특성 이 강화되는지의 양태 를 살피 는 일일 것이다. 외래 문화 가 어떤 곳에 들어가면 그 문화에 잘 융화되어 전파되고 자연스레 뿌리 를 내리 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잠시 선을 보이다가 도태되고 결국 소멸되기도 한다. 그러한 현상에 는 물론 그 니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래음악의 한국적 수용 이란 과제 를 추적해 가는 것도 위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일 것 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통시적인 면을 다루어야 하겠고 공시적 측면에 대한 접근도 아울러 이 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 다룰 시기는 조선후기 ( 17-19세 기)가 그 대상이기 때문에 조선후기 에 들어온 외래음악에 대한 접근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외래음악이 조선후기라는 시점에서 는 어떻게 수용 또는 변용이 이 루어지 는지, 또 그 수용과 변용은 어떤 입장에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라는 사회 는 외래문화로 유입되었던 성리학이 朝 빡 性 理 學 으로 토착화되 면서 朝 빡이 中 華 라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회였던 만큼 그 문화적 자부심이 강하였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서울의 도시적 성장에 힘입어 부가 축적 되어 가는 시기였기에 조선의 문화는 그 어 느 시기에 비해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때이다. 한편 18세기의 홍대용, 박지원 등의 인물은 당시 노론학계의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도 北 學 思 想 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제시한다. 이 사상의 배후에 는 새 로 변화하는 현실에 대 한 직시와 士 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해야 한다는 의미로서의 새 로운 학문내용, 학문방법의 모색이 전제되고 있었다. 이 들은 여러 차례의 웰 行 을 통하여 노출된 淸 문물 수용에 긍정적 2) 문화전파의 형식은 두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자연적 전파로서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기운데 진행된다. 즉 어떤 특색은 자연적으로 전파되어 가는 데, 전파는 중심 지 로부터 주변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적인 전후 관계가 파악된다 문화 영역의 변두리에 있는 문화 특색은 중심지 에 가까이 있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전 파로서 이 경우 문화는 의식적으로 개척 활동 전쟁 포교 활동 둥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파된다 C. Wissler, Man a뼈 Culture, New York, 1923.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으 I 233 인 입장을 가지는데 이 들에 의해 새로운 악기가 조선후기에 수용된다. 따라서 뒷부분에서는 북학파에 의해 청으로부터 새로 들여옹 洋 琴 의 수용과 정착과정, 이들이 연행 후 조선에 돌 아와 琴 의 한국적 수용을 이루어낸 움직임 등을 살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추구한 음악은 어떤 것인지를 살피려 한다. 또 청 문물 수용에 긍정적인 북학파의 입장에서 새로 들여온 청 문 물로서의 음악은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고찰하려 한다. 11. 본론 1. 횡 購 中 華 主 義 의 음약적 실현 조선 중화주의 라는 개념은 조선의 문화적 자신감의 소산이다. 17세기 중반 明 淸 이 교 체되어 국제질서가 새로이 형성되 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 을 차지하자, 중국에서의 중화문화의 전통은 단절되고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조선이 중화 라는 의식, 곧 조선중화주의 의식이 구체화된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사회 전반에 점차 팽배해지기 시작하여 조선의 문화창달에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이 곧 중화 라는 문화자존 의식은 조선후기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 친다. 이 는 음악방면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전례정비의 과정을 통하여 그러한 흐 름을 잘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음악부문을 논함에 있어서 는 음악만을 따로 떼어 살피기보다 는 전례정비라는 큰 틀에서, 그 양상을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왜란과 양란을 거친 후 조선의 전례는 전반적으로 피폐해 있었다. 그렇기 때 문에 기존의 전례를 복구해야 하는 책임감도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이 중화라는 의식이 전례의 복구는 물론이고 과거 수 백년 동안 시행되 지 않았던 전례의 거행까지 이루어지게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으 로서 뿔 本 國 으로서 매우 중시했던 親 親 親 韓 의 국가 전례정비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또 북방의 東 秋 인 여진족이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운 후 중화의 적통은 조선에 있다는 조선 중화의 의식에서 시작된 대보단(황단) 제의, 정조와 서명웅의 악서편찬을 통한 음악 3) 정옥자 w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 서울 : 일지사, 1993. 최완수, 조선왕조의 문화절정기, 진경시대 w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서울 : 돌베게, 1998)
234 國 樂 P뒀융 文 集 第 11 輯 의 이 론적 정비 등을 다루어 조선중화주의의 음악적 실현이란 명제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다만 전례의 모든 부분을 다 거 론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살펴야 하는 점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긴다. 1 ) 大 報 遭 의 음악 ( 皇 瓚 樂 )4 ) 大 報 밸이란 1704년(숙종 30), 명나라가 청 나라에게 망한지 (1644) - 週 甲 되는 해에 창덕 궁 禁 짧 에 설치된 明 나라의 두 황제, 곧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파견하여 이 른바 再 造 之 功 을 세웠다는 神 宗 과 마지막 황제인 殺 宗 의 제사를 위한 제단이대) (1 8, 1 9세기 전반기까지 는 皇 훤 으로 별칭되기도 한다). 조선에서 명의 두 황제의 제단을 세운 사실은 한동안 타기 되어야 할 事 大 主 義 의 상징 물로 인식되어왔다.6 ) 그러나 병지-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그 후유 증을 극복하려는 노력 이 계 속되 어온 이 후의 조선사회에서 대보단이 상당한 비 중으로 연대 기에 디루어지는 현상을 볼 때 그 의미분석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러한 대 보단에서 쓰인 음 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피려 한다. 당대인의 세계관에서 볼 때 청은 기 존의 국제질서 를 깨뜨린 무리였다. 청은 문화적 기반 없이 무력만을 배경으로 밀고 들어온 북방족이므로 오랑캐로 간주되었고, 결국 명이 멸망한 후 이 를 계승할 딩λ}자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깊 이 체화시켜 받아들인 조선 이 될 수 밖에 없 다는 인식 7), 즉 조선이 중화라는 입장-8)이 팽배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 보단(횡단)제 향이 시작되었다. 대보단 악장은 대 보단이 창설된 해 대제학 송상기( 宋 相 珞 )가 지어올렸는 데 사직의 제 도 를 따라 등가에서 연주하는 전폐 초헌 철 변두에만 악장만을 지었다.9) 4) 황단악에 대한 논문으로 김종수, 조선후기 황단악 연구 Ii' 국악원논문집 J (서 울 : 국립국악원, 1996) 제 8집이 있다. 5) 정옥:A}, Ii' 조선후기 조선중화시상연구J (서 울 : 일지사, 1998), 69쪽. 6) 정옥자, 앞의 책, 69쪽. 7) 정옥자, 앞의 책, 89쪽. 8) 조선국왕 멀 李 停 은 감히 殺 宗 烈 훌 帝 께 u집 告 하오니 빛 나는 휠 明 애 代 하여 華 렷 主 (마l 華 와 렷 秋 의 주 인, 즉 당시 세계를 지칭하는 천하의 주인)가 되어... 옴소 제사를 행합니다... ( Ii' 숙종실록 권 39, 숙종 30년 3 월 D<: 午 ) 라고 쩔 文 에서 밝혔다. 이 는 곧 조선 이 明 의 후계자이며 天 下 의 주인 임을 공식으로 발표하는 행위였다 정옥자, 앞의 책, 48쪽 9) Ii'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 1 2월 정해 속악을 쓰는 종묘제향에 는 登 펌:. ílíf 架 에 모두 악장이 있지만 아악을 쓰는 社 짧에 는 등가에서 연 주하는 전폐 초헌 칠 변두에만 악장이 있다. 황단의 제 도는 기존의 게밑에 없었던 것 이 므로 그 논 의가 매우 많이 이 루어진다 따라서 황단의 제 도를 정하는 처음에 는 위의 세 악징만을 지었다 이 후 종묘악에 영신, 송신악장이 있디는 예를 따라 영신 송신 에 약정을 구비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정 조 3 년 (1779) 송덕상의 차자) 시행이 되지 않았고 이 는 고종 딩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러 나 古 빠 의 예를 따르자면 제향아악에 영, 송신 악장이 없는 것은 결 여 된 것 이 아니라 제 대로 된 예이디.
朝 蘇 中 훌훌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35 대보단 악장의 예 는 古 制 를 충실 히 따른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 고제의 악현은 등가에 짧 竹 이 없고 琴 쫓과 노래만 있다. 따라서 제향아악에서 노래는 반드시 등가에서만 불렸다. 그러므로 영신과 송신에서 악장을 써야한다는 일부 논의(각주 9 참조)는 고제와는 어 긋나는 것인 데, 황단악의 악장은 결국 고제를 충실 히 따른 것 이다. 황단의 악기 편성은 고제 를 따라 登 歌 에 는 노래와 금슬 이, 뿌f 架 에 는 포죽 이 설 치되었다. 이 는 사직 의 예와 비 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악현에 있어서 천자의 제사임에 도 현실적 인 이유 10)로 判 젠 11 )을 썼던 점은 여러 번의 건의에도 바로잡지 못하였다. 황단의 악을 쓰는 일을 논하는 처음에는 조선 의 제례의식에서 가장 높은 사직제 를 따르 도록 하였다. 그러 나 三 피 E( 天 神 地 祝.A 鬼 의 제사)의 예 로 볼 때 사직은 地 神 의 제사이 므로 제사지내 는 악의 사용을 地 樂 에서 취할 수 없다는 논의가 이 루어진디{형 조판서 金 鎭 鎭 의 차자). 따라서 주례 의 樂 을 6 變 하면 天 神 에 예 를 올릴 수 있고, 8 變 하면 地 祝 에 예 를 올릴 수 있고, 9 變 하면 A 鬼 에 예 를 올랄 수 있다 는 것을 근거로 인귀에 제사지내는 대 보단은 선농단의 예를 따라 9변을 쓰도록 하여 황단의 영신악에는 인귀의 예에 따라 9변을 쓰기 로 정하였다.1 2) 이처럼 황단의 제사에서 는 尊 周 혜 的 입장을 따랐다. 尊 周 란 주나라를 존중해야 한다는 공자의 春 秋 논리로, 춘추전국시대에 천명을 받들어 정통성을 보유한 주나라만은 존중 되어야 하고 그로써 혼란한 세상의 구심점 이 되어 천하가 평화질서 를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여기에서 周 室 이 란 중호F문화의 상징적 존재 로 제시된 것으로 그 정통성을 보유 한 중화의 실 체 는 시대에 따라 바뀌게 되는 것 이다. 따라서 존주론에서의 周 는 周 室 明 朝 勳 으로 사고의 틀이 전환되며 조선 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성립하게 되었으 며 13) 유교문화의 정통 계승자라는 확인 작업 의 상징물인 대 보단이 창설되었고 여기에서 치러지는 예 는 동아시아의 문화중심 이 조선 에 있다는 조선중화주의의 자부심 에서 이 루어 진 예이다. 2) 정조와 서명응의 악서편찬을 통한 음악의 이론적 정비 정조( 1776-1800)는 음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 를 하고 있는 임금으로서 즉위 초기 부터 10) 현실적인 이유란 난리 를 겪은 이 후 아악기의 산실 로 인하여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실이다. 영조실록 권 1 27 영조행장 11 8년 7월 11 ) 判 縣 은 大 夫 의 경우에 배설하는 악기편성법으로 편종과 편경을 동쪽과 서 쪽애만 배 설한다 天 子 는 宮 縣, 즉 동 서 님 북 사방에 편종 편경 각 세 틀씩 12틀을 펀성하고 특종과 특경도 북쪽 중 앙 子 位 부터 배 열하여 十 二 辰 位 에 12틀을 편성하는 것 이 예에 맞다. 陳 11융 w 樂 뿔~.JI, 권 113. 12) w 숙종실록 권 40 숙종 30년 12월 16 일 ( 임오) 13) 정옥자, 19세기 존화사상의 전개와 척사론의 성격" w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서 울 일지 사, 1998), 208-218쪽
236 國 樂 院 請 文 集 第 11 輯 악제의 불분명함을 인식하여 악서편찬에 뜻을 두고 음률을 아는 유생을 찾았다. 정조의 樂 에 대한 관심은 知 樂 之 닮이라 할만한 서명응을 만나 구체화되어 정조의 樂 通 을 비 롯하 여 서명응의 詩 樂 和 聲.JJ 14) 11 元 音 鋼.JJ 15) 11 國 朝 詩 樂.JJ 16) 11 詩 樂 妙 꽃.JJ 17) 등의 樂 書 편찬이 이 루어진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JJ 18) 제 61 권에 실린 樂 通.JJ 19)은 樂 律, 樂 調, 樂 器, 樂 諾, 樂 縣, 樂 舞 의 여섯 부문으로 나누어 쓰여진 음악이론서로서 1791 년(정조 15)에 편찬되었다.20 ) 11 악 통 에서 는 당시의 아악부흥을 위하여 중국이 론에 대하여 철저 한 고증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정조의 악제에 대한 주체적 인식 을 엿볼 수 있다. 즉 정조는 三 代 의 樂 을 이상으로 하여 古 制 의 회 복에 대한 노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國 朝 에서 이에 가장 가까이 간 것은 세 종 과 박연이 이 루어 놓은 아악부홍의 업적이라 평가한다. 그러나 세 종대 박연의 시도 가운데 서도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을 악통 에서 낱낱이 지적 한다. 예 를 들면 박연이 율관 제 작시 참고한 漢 書.JJ 율력지 가운 데 댄 泰 中 이라는 문구를 거서의 중간 크기 로 오해한 사실 이라든지, 밀랍을 녹여 기장을 만든 것 을 견강부회하여 맞춘 것이라 지적하였고, 황종의 높이 를 한결같이 明 律 에만 맞추려 한 점 (제 l 편 악률) 등 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또 세 종이 명나라 제 도를 그대 로 따른 점 에 대해서 도 세 종이 명의 제도를 따른 것은 천자가 아니면 논의하지 않는다는 의리 때 문이지 명나라 음악을 雅 正 한 음악으로 여겼기 때 문은 아니다 라고 하여 선대의 업적에 대하여 조섬스 레 평가하고 있다. 당시에 보좌한 신하 중에서 박연과 맹사성 같은 이 는 모두 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 나 박연이 척도를 정하고 律 을 고찰할 때 한결같이 명나라 제 도를 쫓았는 데, 명나라 음악은 송의 大 展 樂 을 이어 쓴 것이어서, 황종관의 쩔 1웹 와 響 積 - 의 수가 실은 큰원을 탐구한 것이 14) 송지원, 영 정조학자 서명 웅의 음악이 론서/ ( 11 역주시악화성 의 서평렘) 한국음악사학회, 1997) 제 19 집, 228-234쪽. 15) 11 元 音 鋼 에 대하여 는 졸고, 徐 命 牌 의 元 륨 鋼 " 11 문헌과 해석.JJ (서 울 태 학사, 1998) 통권 4호 참조 16) 11 국조시악 에 대하여는 졸고, 徐 命 땀의 國 朝 詩 樂 " 11 문헌과 해 석.JJ (서울 태학새 1998) 통권 5호 참조 17) 11 詩 樂 妙 꽃 에 대하여 는 졸고, 徐 命 엠 의 詩 樂 妙 꽃 1," r 徐 命 뺨의 詩 樂 妙 찢 2 J 11 문헌과 해석.JJ (서 울 : 태 학사, 1999) 통권 7, 8호, 참조 18) 11 弘 爾 全 書 는 정조의 詩 文 을 규장각에서 편찬하고 간행한 책 이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1765 년 에 지은 시에서 부터 그가 사망한 1800년까지 남겼던 시 문을 글의 종류에 따라 분류, 편집하였는데 수차례의 정리 를 거쳐 1814년 100권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제 I 차편찬은 1799 년(정조 23)의 일로서 규장각 직제학 徐 i밤1갖의 주도 하에 이만수 김조순 이 존수 등과 함께 편찬하였다. 2차편찬 은 1800년 정조가 죽을 때가지 약 반년간의 저술을 덧붙여 1800년(순조 I 년) 12월 에 심^J-규가 주가 되어 편찬하였다 11 홍재전서 의 최종본은 2차에 편찬된 정 리 본을 바탕으로 하여 1814년 整 理 字 版 으로 출간되었다. 김문식 11 국역홍재전서.JJ (서 울 : 민족문화추진회, 1998) 해제 19) 11 홍재전서 의 번역 은 최 근 민족문화추진회의 번역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樂 通 도 김종수에 의해 번역이 이 루어 졌다 본고에서 는 악통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20) 11 樂 通 의 편찬시기는 增 補 文 敵 備 考 권245 籃 文 考 4와 國 朝 寶 @빠 第 73 卷, 정조 15 년 12월.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37 아니다라고 하여 선대가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사실을 고증을 통해 확인하며 잘 못된 점을지적한다. 樂 通 의 제 l 편 익률 부분에서는 황종관의 경위, 벽적, 길이에 관한 문제에 대해 宋 代 에 이루어진 작업부터 지적하며 시작한다. 宋 의 李 照 가 기장을 세로로 쌓아 R 을 만들었는 데 기장 1700날알이 담기고 胡 援 은 기장을 가로로 쌓아 척을 만들었는데 관에 기장 1300알 이 담겨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하였고 위한진의 律 數 로 만들어진 송의 대성악21 )도 긴-사와 아 첨으로 뭉쳤다 고 주자가 평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는 천지의 和 를 족히 말할 수 없는 것 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정조의 악통 은 古 樂 회복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준 저 술이라 할수 있다. 서명응은 이미 영조대에 대악후보i영조 35, 1759), W국조악장.JJ W증보문헌비고.JJ 악고 등의 악보, 악서 편찬으로 知 樂 之 멀으로서의 업적이 있었다. 정조대에도 그의 악서편찬 작 업은 계속되는데 시악화성.JJ W 元 륨 鎬.JJ W 국조시악.JJ W 시악묘계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음악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이 론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중앙의 핵심관료이면서 국가 전례에 대해서 막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던 서명응의 음악과 관련된 일련의 작업은 古 짧의 본지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으로 드러난다. 이 는 古 樂 이 이미 樂 의 본지를 찾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등가 와 헌가에 대한 논의는 그의 대부분의 악서에서 큰 비 중을 두고 다루어진다. 옛닐의 성인은 왕업을 일으키고 돕고 바로잡는 업적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樂 으로 천지조 화에 상정을 세우면 그 은미함과 정밀함이 더욱 깊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造 化 와 流 行 은 비 록 극 도로 넓고도 깊지만, 그 기운데에는 조리 가 정연하고 각기의 鋼 紀 가 있다. 두병( 斗 #뺨 2)은 천상으 로부터 지상을 가리키고, 일전 (13 빠 3)은 하늘 가운데서 천상에 응하니 하나의 經 과 하나의 *합} 그 功 化 를 이룬다. 따라서 악에서는 鉉 歌 를 당상에 올려 日 腦 을 상정하고, 짧 竹 을 딩하에 배열하 여 斗 建 을 상징한다 "24) 21) 위한진은 역사를 닐조하였다. 황제가 황종률을 만들었고, 夏 禹 는 황제를 본받아 자기 오른손 중 지 세 마디 제 4지 세 마디와 제 5지 세 마디의 길이를 이어서 9촌으로 하고, 이 를 황종 율관의 길 이 로 삼았디{ ~ 宋 史 권 12 8)는 것이다. 그후 위한진은 또 자신의 가짜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황제였던 송 휘종의 세 손가락의 길 이 를 이어 황종 율관의 길 이로 삼자고 건의하였다 이런 주장 은 황제의 구미에 들어맞아 그의 건의만이 황제의 동의를 얻었다. 숭녕 4년(1 105) 송 휘종은 특별 한 조서 를 내 려 위한진이 개정한 新 樂 을 인정하고 大 昆 樂 이란 명칭을 붙였다. 楊 陰 測 지음, 이 창숙 옮김 中 國 古 代 흡 樂 史 鎬 ~ (서울: 솔출판사, 1999), 588쪽. 22) 斗 炳 : 북두칠성의 지루 23) 日 歐 : 해가 운행하는 궤도 24) 徐 冷 맴 F 詩 찢 妙 꽃 ~ 後 序 上 古 聖 Å, 財 成 쩨 相 之 業 多 옷. 其 以 쌓 立 象 於 造 化, 則 尤 其 微 密 精 深 者 也. 何 則 造 化 流 行, 麻 極 於 펜꽤, 然 其 中 條 理 井 井, 各 有 網 紀. 斗 炳 멈 天 上 建 手 地 上, 日 } 越 엽 天 中 應 千 天 上 經 - 衛 以 行 其 功 化. 故 凡 樂, 登 鉉 歌 ; 於 堂 上 以 象 日 腦, 잦 IJ행 竹 於 堂 下 以 象 斗 建
238 國 樂 P덮굶 文 集 第 11 輯 서명응이 설명하는 당상 당하악의 근거는 일전, 월건지설, 즉 해가 운행하는 궤 도와 북두 칠성의 자루가 가리키 는 방향, 곧 천지 자연의 조화에서 오는 것 이다. 이러한 원리는 당상, 당하악의 악기편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두건을 상징함에 식물 중에서 는 오직 포죽만이 바깥이 둥글고 속이 비어 하늘의 형 체와 같으니 천지의 元 聲 과 元 妙 를 간직할 수 있다. 이에 포죽으로 당하의 斗 建 之 짧을 삼으니 이 는 氣 의 유사 성을 따른 것 이다. 일전을 형상함에 태양은 火 로써 천체와 五 星 의 중심 에 있고 인체의 五 職 가운 데 있다. 누에는 화에서 생겨나 한 해 가운데 5월의 가운데에 있으니 곧 해와 마음과 누에는 모두 화의 中 氣 가 된다. 이에 누에가 토한 실로 현악기를 만들고 J L 思 에서 나온 것으로 노래를 만들어 서로 절실한 것으로 딩상의 日 熾 之 樂 을 연주하니 기의 유사성 을 따른 것이다. 이에 그 상정 을 세 운 것 이 탁월하고 피빼?하며 意 外 를 출입하니, 천지의 성인이 아니라띤 누가 여기에 함께 할 수 있 겠는가'(2 5) 서명 응은 鉉 歌 를 당상에 배치하는 것은 일전을 상징하고 짧 竹 을 당하에 배 열하는 것은 두건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딩-상의 노래와 당하의 연주는 북두칠성 자루가 왼쪽으로 돌고 해가 운행하는 궤 도는 오른쪽으로 도는 원 리, 즉 성인 이 전부터 있었 던 우주 자연의 원리이기 때문에 결코 어 긋나서 는 안되 는 법칙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은 三 代 이래 로 유전하는 설 인데, 수당 이 후로 악리 를 따지지 않고 귀의 즐거 움만을 고려하여 당 상에도 포죽을 배 열하고 당하에도 현가를 배 열하였는 데 이 는 고악의 본지를 잃은 것 26) 이라 서명 응은 비난한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의 경우에 도 예외 는 아니어서 이처 럼 고악의 본지 를 잃은 상태 를 그대 로 따라왔다. 중앙의 핵심관료로서 전례정비에 관한 막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는 학자 서명 웅의 여러 저 술27)( 1i'시악묘계.JJ Ii'시악화성.JJ Ii' 원음약.JJ Ii'국조시악 등)에서 집요하게 제 기되는 이 러한 본 지 의 회복 에의 주장은 조선후기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중국에서 도 아직 古 樂 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 론적으로도 정비 되지 못한 상황이지만 바로 조선에서 는 서명응에 의 해 이 론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는 명나라가 망한 이 후 조선 이 곧 중화 라는 의 식 이 바탕에 깔린 웅직임 이며 조선 성리학의 완결과 함께 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25) 徐 命 Ilil Ii' 詩 짧 妙 랫~ 後 序 象 斗 젤, 故 f때 之 i:þ, 11탑갱 竹, 外 떠1 디J~, ftj] 天 之 랩, 쉽당 鼠 天 地 之 元 i많 元 썼. 1.사 是, 以 짧 /[1 寫 堂 下 斗 建 之 쌓, 從 氣 類 也 象 B 빠, 故 쐐 日 以 火, 位 天 體 五 星 之 中 心, 以 火 }콤 A 身 五 l 輝 之 中. 짧 以 火 生 季 五 月 之 中, ~ I J 夫 日 與 心 與 ~, 均 寫 火 之 中 氣.1.간옮 以 짧 l 止 之 物, ~~*:M:*" 心 恩 之 發, I\J I]짤l쁨; 詩, 相 切 以 奏 於 堂 上 日 뺑 之 樂, 從 氣 셨 也. 是 其 立 象, 卓 越 1쩨, 出 入 펀: 表, 非 때 固 天 地 之 떻 人, 夫 핑L 能 與 7j 此 랬?" 26) 徐 命 써, 앞의 책 27) 서 명웅의 음악관련 저술 가운데 패때 樂 章 과 詩 영헬 D ~많 은 淸 代 의 띠 庫 全 휩; 總 目 提 要 으l 사업 을 제승하여 이 루어진 縮 {I~띠댄 全 뿔; 總 目 짧 要 에 실려있 다. 로는 성현의 樂 t 鋼 LWTI냐, 정약용의 잊&휩iJ[\ 存 이 더 있다. 참고로 여기에 실린 우리의 樂 짧저술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39 물론 서명응이 제기하는 설이 모두 실행 에 옮겨진 것도 아니며 단지 이론적 주장으로, 또 는 이상향으로 제시되기만 한 것도 많다. 그러 나 이러한 작업은 동아시아 유교문화의 중심 에 서 있는 조선으로서 예악문화의 본지를 찾아야 한다는 의식의 소산으로 평가된다. 3) 親 흙과 親 醫 親 親 28)과 親 魔 29)은 先 앓과 先 歸 제향을 지낸 후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한 의미의 의식으로 실행되었다. 친잠의 예 는 성종 8년(1477) 3월에 중궁이 처음으로 친잠례를 행한30) 이래(음악은 역성장과 여민락령을 연주함) 3 백여년 동안 행해지지 않던 의식을 영조 때 거 행한 것 이다. 이때의 행사는 r 친잠의궤.Jl 31)( 영조 43 년, 1767) 에 남아있다. 영조는 15년 l 월 28 에 선농단에서 籍 田 몇%참 을 행하였다. 다음날 인정전에 나가 친경 후에 교서를 領 布 宣 臨 하고 노주 례 를 행하였다. 이때의 교서 가운데 이런 내 용이 있다. 대저 하은주의 성세에서는 모두 천하를 앞장서 이 끌어 농사를 밝혔고 한당송 같은 中 治 의 때 에도 큰 근본을 능히 알아서 적전을 닦았다. 이는 다 나라의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 때에 따라 행하 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재단에 나아가 선농을 제사하되 음악은 태주에 맞추었다 쟁기를 밀 때에 는 일곱 또는 아홉 번 하는 차례가 있었다... 백년동안 폐지되었던 진례를 거행하는 것이 어 찌 태평하고 안락한 뜻에서 나왔겠는가 라고 하여 당시 친경의 의미 를 밝혔다. 영조는 당대 치러지던 의식이 태 평하고 안락한 뜻 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라 하였다. 이 는 과거 한동안 치러지지 않았던 국가 전례를 다시 찾 28) 親 챔 :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에게 농업의 중요성 을 인식시키고 널리 농 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 친경의식을 하던 곳은 先 앓딸이었던 지 금의 동 대문구 용두동 138 번지 남쪽이다. 선농제를 지낸 뒤 에 친경행사가 있었다 1 476년(성종7)에 는 이 곳에 級 힘t-~휠 를 쌓 았고, 왕이 친경힐 때에 는 왕세자 종신 그리고 나이가 많고 복 많은 농부들이 순서 대로 뒤이어 적 전을 갈았다. 1767년 (영조 43)에 제정된 親 刺 {꿇lV LJJ 를 보면 왕은 5 推 꾀많 세손은 7추례, 종신 이하 는 9추례를 행하여 왕비가 친잠할 때와 같이 가는 횟수를 직함에 따라 규정하였다. 종이 마지막 행사를 하고 일제강점기 에 들면서 폐지되었다 정신문화연구원), 권 22.74 1. 친경의식은 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성남 : 한국 29) 짧 鏡 : 왕비가 직접 누애 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일련의 의식이다. 친장은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 을 인식시키고 이 를 널리 장려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식을 갖춘 級 짧 禮 와 收 蘭 禮 로 나눌 수 있다. 실제로 친잠례를 갖춘 것은 1476년(성종7) 왕궁 후원에 시 설힌 孫 짧펄에서 실시한 것 이 최초 이다. 왕비는 세자빈, 봉작을 받은 내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실시하였는 데 친잠의궤 에는 왕비는 디섯게, 내외병부는 일곱게, 2, 3품의 내외병부는 아홉개 가지의 뽕잎을 댔다 영조 43 년 (1 767) 편찬한 친장의궤 가 남아있다 30) w 成 宗 實 錄 권78, 成 宗 8년 8월 3 일( 辛 E) 31) ~ 親 짧 짧파 奎 14543 3 월 예조에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시전 ~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권22껴7.
240 國 樂 F폈융호 集 第 11 輯 아 정비해 나가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이어 같은 해 2월 5 일에 친경하는 일 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 데 일부에서는 친경의 예 를 크게 한다논 염려가 있었다. 이에 영조는 친경하는 일은 예문에 실려 있는 것도 오히려 줄인 것이 많았는데 경 들은 혹 크게 한다는 염려 를 하고 있다 라고 하여 친경을 세상에 드 문 성대한 전례로 여겼다. 영조의 이러한 생각 또한 전례정비 강화의 측면에서 해석된다. 영조 43년에 는 親 해 徵 의 절차가 확립 되었는 데 登 歌 휩 架 의 배치에 있어 등가는 觀 챔 臺 위에 설치하고 헌가는 應 A 의 밭가는 위치( 科 位 ) 서남쪽에 모두 북향으로 설치한다고 하였고 음악이 연주되는 절차도 상세히 제시하였다)2) 같은 날의 徒 [J 製 領 敎 文 은 영조의 조 선중화의주의 의식을 잘 드러내는 부분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하례 를 받는 것은 내 뜻이 비 록 굳다 하더라도 농업의 일이 중요하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 는가? 이미 東 밸에서 다섯 번 미 는 예를 행하였고, 또 北 햇에서 다섯 가지 를 따는 예를 행하여 3 백 년 이래의 성대한 일을 다시 거행하고, 몇 천년 된 古 피뽑를 이에 닦게 되었다.. 옛사람의 말에 周 r빠 는 바로 주공이 행하지 못한 예이다 라고 하였는 데, 이제 내가 천만 꿈밖에 예 를 하루 인에 함 께 행하고... "33) 라고 하여 주공도 행하지 못했던 예 를 영조가 행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몇천년 된 古 禮 를 다시 회복했다는 자부심은 비단 친경 친잠의 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당시의 여러 국가 전례의 정비와 그 흐름을 같이한다. 또 영조 43년 3월 23 일(병술)에 친경 친잠의 의의에 대해 이 렇게 하교한다. 친경은 열조에서 이미 행하였으나 관예 에 이 르러서 는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없으므로 감히 황 병 선종의 고사를 이 끌어 행한 것이다... 헌종 장종의 일을 유신으로 하여 금 주 례 외 예기 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이에 과연 古 禮 가 있었음을 알았다. 이번의 친경 친잠은 바로 3 백년 만에 두 번 있는 일이니 懷 文 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친잠의주 는 속의례의 에 추록되어 있으 니 이미 상고한 후에는 古 꾀뿔를 마땅히 회복하게 된다 "34) 영조에게 고례의 회복이란 매우 큰 과제이며 책임감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과 두 차 례의 호란(1627, 1636) 이후 小 中 華 로 자처하면서 농경사회의 안정된 경제기반 위에 문화국 가를 지부하던 시기를 지낸 후 영조대에 이르는 동안 명은 멸망하고 훗 秋 인 청 왕조가 집 권하면서부터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조선 이 소중화도 아닌, 조선이 곧 중화 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된다. 조선후기, 특히 영조대의 전례정비 강화의 측면은 다름 아닌 조선중화주의 32) Ii' 英 祖 實 錄 권 108 英 祖 43 년 2월 26 일(J훗 申 ) 33) Ii' 英 祖 實 錄 권 108, 영조 43 년 2월 26일( 康 申 ) 34) Ii' 英 피또함 錄 권 108 영조 43 년 3 월 3 일( 丁 ~~)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으 I 24 1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물론 영조의 이러한 의식은 정조대로 이어진다. 친경에서 행해 지는 예에 대한 정비는 정조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된다. 정조 5년 윤5월 5 일의 실록기사에는 정조가 서명응에게 관예 때 쓸 악장을 지을 것을 명 하는 기록이 있다,3 5) 정조의 명을 받은 서명웅은 바로 다음날 관예악장을 지어 올린다,3 6) 관예악장은 先 朝 (영조)때에 지어진 것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것은 다소 소루한 곳이 있다 하여 서명응에게 새로 지 을 것을 명한 것이다. 서명응은 명 을 받은 바로 다음 날 관예 악장 을 지어 올리는데 이 악장은 당시의 관예례에 바로 쓰이게 된다. 이때 지어진 악장은 서명 응의 國 朝 詩 樂 에 실려 있다.37) 2.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18세기 의 홍대용{ 1731-1783), 박지원(1737-1805) 등의 인물은 딩시 노론학계의 분위기 속 에 성장하면서 자신의 성장기반을 반성하는 가운데 새 로운 사상체계인 北 學 思 想 을 제시하 였다. 이 는 기존의 사상체제와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기존의 北 代 관념과는 상 반되는 北 學 이라는 주장이 그렇고, 그 배후에 는 새 로이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士 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하는 새로운 학문내용, 학문방법의 모색이 전제되고 있었다,3 8)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들을 위시한 북학파들은 利 用 훔 生 經 濟 名 物 之 學 으로 요약되 는 새 로운 학문경향을 모색하였고 이 는 조선에 없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확인으로 나아가는 데 39) 이것이 청 문물을 수용의 전제조건이 되었고 청이 계 승한 중화의 남아 있는 제도 ( 中 華 之 遺 法 )를 배운다는 논리 로 전개된다. 북학론을 제시하던 이 들 대부분은 蘇 行 에 수행하면서 청의 선진문물에 대하여 익히 보고 35) w 정조실록 권 11, 정조 윤5 년 5 월 5 일( 丁 未 ) 구례에 친경에는 악장이 있지만 관예에는 악장이 없 었으므로 선조 정묘년애 비 로소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관예 때에 는 간흑 자구 를 고쳐서 사용하리고 명한 때가 있었으니 일정한 熾 文 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숭강대 와 막차에 출입할 때의 악장은 친경할 때의 악장에 견주어 보면 여기에는 있는데 저기에는 없는 경우가 이미 많았다 노주례는 본디 석 잔으로 하도록 되어 있으며 악장도 또한 소루한 곳이 있 다 더구나 이제 관예가 하루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이런 때에 널리 고증하여 법식을 만드는 것이 합당하다 전 대제학 서명웅은 일찍이 선조 때 명을 받들어 국조의 악장을 편차하고 고증하였으 니, 예조판서 및 시임 원임 각신들과 함께 충분히 상의하여 악장을 橫 出 하도록 하라 36) w 정조실록 권 11, 정조 5 년 윤5월6 일(찌 申 ) 37) 송지원, 서명응의 국조시악" Ii'문헌과 해석 ~ (서울 : 문헌과 해석사, 1998) 통권 5호 Ii'국조시악 은 영조대의 국조악장 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분류하여 정조의 명으로 다시 펴낸 것인데 국가 전례에 쓰이는 악장의 정비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8) 유봉학 Ii' 熊 廠 - 派 北 學 思 想 冊 究 ~ (서울 : 일지사, 1995), 79쪽. 39) 박지원, 던짜않 I J 양'.iì~ r 잃 器 如 欲 ij 其 器 械 則 莫 如 學 中 國
242 國 樂 院 論 文 集 第 lli 輯 들어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에 청으로부터 수용한 새로운 문물과 소식의 많 은 부분이 연행을 통한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연행을 다녀온 후 남긴 기록40) 의 역사적 가치는 재삼 거 론할 필요도 없으며 또 북학파의 持 論 이 이 연행록에 반영된 것이 많으므로 조선후기 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들은 여러 차례의 연행을 통하여 노출된 청 문물 수용에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는데 이 들에 의해 새로운 악기가 조선후기에 수용된다. 따라서 북학파에 의해 청으로부터 새로 들 여온 양금의 수용과 정착과정을 살피고, 기존에 들어왔던 악기 가운데 조선 후기에 한국적 수용을 이루어 낸 움직임 등을 고찰해 보려 한다. 1 ) 洋 琴 의 유입 조선후기 淸 에서 들어온 문물 가운데 음악분야의 대표적인 것은 西 洋 琴 녁 1) 이다. 양금이 들어온 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문헌 기 록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이다. 먼저 양금의 고악보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조조 편찬의 歐 週 鐵 絲 琴 字 5휩 에 의하면 대 략 1 8세기 후반의 어 느 무럽 에 들어온 것 이라 기 록되어 있고(악보 편찬 당 시 로부터 60여년 전이므로 대 략 1770년경), 장악원 전악 박보안이 연경에 가서 양금 연주법 을 처음 배워와 東 륨(우리나라 음악)으로 번역했다고 히였다.42) 그러나 다른 문헌을 참조하면 양금이 들어온 연대에 약간의 가감이 있다. 강세황 (1 713-1791)의 Ii'~션줍놓 遺 f펌 중의 八 物 志 J4 3) 에 는 西 洋 琴 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자료는 그 가 50세 나이인 1762년의 것 이다. 여기에는 서양금을 만드는 법과 연주하는 법, 음색의 특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강세황은 자료의 말미에 우리나라 사람이 간혹 사오는 자가 있는 데 그 연주법과 聲 調 는 알지 못한다 라고 하여 당시로서 는 악기 연주법을 터 득하지 못했고 단 지 奇 物 로서 사오는 정도 이상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柳 慶 種 의 海 嚴 챔 권7 계미년(1763)의 기록에 는 어느 집에 갔다가 우연히 서양금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다. 종이에 콕보를 써서 뒤에 붙여놓았는 데 알아볼 수 없다".44) 40) 연행 후에 남겨 놓은 기 록은 두 가지 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행사의 줬 務 를 맡은 담딩관인 휩 狀 官 이 임무를 마친 후에 조정 에 제출하는 보고서인 H 總 이 있고 또 하나는 그 사행 을 다녀왔던 사 람 가운데 개별적으로 기 록한 것 인 術 f 錄 이 그것 이다. 연행록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간단한 附 錄 에 비하여 훨 씬 다양하고 풍부한 기 록내용을 가지 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부분의 둥록은 현재 규장각에 있으며 개인의 연행 록은 刊 本, 氣 本 으로 남아있거나 文 集 애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41) 주지하듯이 洋 琴 은 구리파의 악기 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악기인데 利 짜첩(Matteo Ricci, 1552-1610)로부터 비 롯된 것이디{ 이규경 w 구리-칠사금자보 박지원 w 열하일기 ~ 망양록 J) 42) w 歐 避 織 絲 琴 字 댐... 有 洋 琴 之 템, 流 出 我 東, fflj 幾 止 六 +jl파, 終 빡 麻 rtt l, 徒 作 文 房 奇 摩 美 而 E. 正 宗 꽤 年 當 {갖 考 年, 행:~[ 洗 典 짧 朴 줬 安 첸, I않 使 入 페 始 ( 學 값 法, mjj 以 東 音 43) 八 物 이 란 B~ 鎬, gsì푼확, 筆, 紙,1íYL, 짧, [댐뿔{ 印 章 ), 怪 石 의 여 닮가지 를 말한다 44) w 海 熾 챔 卷 7 쫓 未 年 A 家 偶 見 西 洋 琴, flj l[ 度 調 累... 紙 훨! 拍 짧P. ò 之 背, 不 可 辯 어 느 집 에 갔다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43 는 기록이 있어 위의 두 자료에 의하면 적어도 1762년에 이미 누군가의 藏 行 시에 사 들여 온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의 연행록인 열하일기 중의 꽤 1짧 i 步 筆 에 는 양금의 적극적 수용의 예 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라철현금을 우리나라에서 는 서양금이라 부르며, 서양인들은 天 琴 이라 하고 중국인들은 이 를 짧 琴 또는 天 琴 이라 부른다. 이 악기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 왔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土 調 (우리나 라 음악의 조)에 맞추어 풀어 내기 는 홍덕보(홍대용)로부터 비 롯되었다. 건륭 임진년4 5) 6월 18 일 에 내가 홍덕보의 집 에 가 앉았을 때인데, 西 H총쯤에 이 악기 를 해득하였다. 홍덕보는 음악을 감식함에 꽤 예민해 보였고 비 록 이것이 작은 기예에 불과하긴 하지만 처음 비 롯되 는 것 이기 때문에 내가 그 일시를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 이다. 이 것은 그 뒤로 널 리 퍼져 지 금까지 9년 사이에 제 榮 師 들이 이 칠현금을 타지 못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46) 위의 기록은 비 록 양금이 들어 온 해를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외래 악기의 적극적 수용, 즉 양금을 土 調 로 풀어 낸 것 이 담헌 홍대용{ 1731-1783)에 의해 1772년에 이 루어 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다. 홍대용의 양금은 1765년 11 월 三 節 年 頁 템 恩 의 목적으로 使 行 47)하던 당 시 휠 狀 官 洪 穩 48) 의 자제군관으로 수행했을 때 직접 사 온 것 이다, 49) 연행을 다녀 온 이 후 홍대용은 양금이라는 외래악기 를 가지 고 여러 해 고민을 한다. 결국 이 양금을 土 調 로 풀어낸 것 50 )은 위의 자료에 밝히고 있듯이 1765 년의 사행으로부터 7년이 가 우연히 서양금을 보았는데 그 모양새가 괴이하다.. 종이에다 곡보를 써서 뒷 등에다 붙여 놓 았는데 알 수가 없다. 그 복부에는 구멍 이 있는데 越 모양과 같다. 杰 兄 ( 杰 濟 즉 %행의 또 다른 호)이 그 제도를 그림으로 그릴 터인데 내( 柳 慶 種 )가 먼저 이에 대 한 시 를 지었다 45) 건륭 임진년 : 1772 년 46) 朴 빠 源 熱 河 B 記 ~ 洞 I짧 j 步 짧 J, l웬싫 械 썼 琴, 홈 東 템 之 맨 洋 琴, 西 洋 A 稱 天 琴, 中 I웰 I A휘 觸 ; 琴, 亦 짜 天 琴. 此 짧 之 出 我 束, 未 9i1J 何 11용, 페 其 以 土 調 f앤뻐, 始 千 ì3=l~æ잎 保, ~ t l옳또 辰 六 月 十 八 티, 奈 坐 j표n,!되 :M 立 見 其 jfjlfo Jl:[j냥띠. 빠 見 싸 之 jffá.l싹 審 품, 而 I J 향없 系 始, 故 숭 詳 錄 其 日 時. 其 f핑 途 댐, 千 今 7L 年 之 l 댐, 댐 琴 師 無 不 會 iii. 47) 1 여4년 이전에 는 뺏 行 이 q: 4 회(뿔 術 í, 正 꽤, 쌍 至, 千 秋 )였으나 이후 완화되어 三 節 했 年 貴 使 로 正 때 에 다 가서 보는 것 이 상 례 화 되었다. 48) 洪 않( 1722-1 809) : 홍대 용의 伯 父 49) 홍대용은 딩시 使 行 을 다녀온 뒤 ζ떠 蘇 댐봤 과 r 했 記 를 남겼다. 이 두 연행록은 모두 그의 문집 인 港 Ilf뿔: 外 集 에 실려 있디. 50) 양금의 연주법을 스스로 터 득한 홍대 용은 소년 시 절부터 가야금을 탔는 데 그 연주수준이 꽤 높았 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연경 에 갈 때에 도 가야금을 싸갈 정도의 광이었디. 홍대용은 당시 장악원 의 악시인 김억 에게도 양금을 가르쳐 주었고 김억은 흉대 용, 박지원 등의 연암그룹의 인물들과 음 악적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음악 진문인과 북학파 인물들과의 음악적 교류는 조선후기 음악을 풍 성하게 하는 데 기여 를 하였다. 이 들의 교류는 딩시 세 인들로부터 交 不 웰;A 즉 사람을 가리어 사귀지 않는디 는 비 난의 대상이 되기 도 하였다. 당대 악λL 악공과 연암그룹 인불들과의 음악적
244 國 網 l앓융 文 集 第 11 輯 지난 1772년의 일이었다. 土 調 로 해독된 이후 제 악사들이 타지 못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고 하니 51) 외래 악기가 수용되어 한국화 된 후 상당한 인기 를 끌었다는 사실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홍대용의 음악면에서의 업적을 평가해 볼 만하다. 양금은 현재 영산회상 가곡 시조 등의 반주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2) 琴 의 효댁적 수용 중국악기인 금은 r서경 에도 소개 52)되어 있듯이 짧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악기이다. 한국 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시대의 일로서 53) 그 역사가 깊다. 이후 고려 예종 11 년(1116)에 송에 서 보낸 대성아악에 포함되어 들어왔고 Ii'고려사 권 105 安 패 條 에 는 琴 을 사오라는 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 또 공민왕 19년(1370) 성준득 이 연경에서 돌아올 때 명 태조가 금을 보냈 다는 기록.5 4 ), 조선 태종5년 (1405) 명에서 금이 들어오고 6년에 종묘제향에서 사용하였고 세 종조에 편찬된 r오 례의 의 아악등가에 금이 사용되었고, 회례연에서 등가 헌가에서 역시 금 이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금은 문헌을 통해 볼 때 두 가지 경우에 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는 오직 아악에서만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일부 사대부가 餘 技 로 탄주하여 그 보급 정도가 극히 한정되었고 결코 통속적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55) 그러나 이 후 금의 연주에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던 듯하다. 실록에는 함 琴 과 쪼 寶 이 음 률을 잘 이루지 못한다고 하여 영조 41(1765) 쪽 至 의 使 行 때 전악 장천주로 하여금 홈 琴 과 짧 簽 을 사고56) 그곳의 음률을 배워오게 한 기록.5 7) 이 나오는데 금은 생황과 마찬가지로 여 교류를 보여주는 지 료는 成 大 中 記 짧 春 應 떻 會 큼중 城 集 卷 6, 박지원하야연기 등이 있다. 송 지원, 朝 떼 後 期 마IA 音 짧의 社 會 史 的 冊 究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2, 74-91 쪽 51) 주 46)의 내용 참조 52) Ii' 書 웬~ 益 樓 양헨티끊1뿔 11,텅r;J(, tuj.까j 琴 펼: 以 끓\, 祖 考 來 格 53) Ii' 三 l 園 史 記 ~악-^L, 初 품 A, 以 七 鉉 琴, 送 高 句 麗 54) li' t협 補 文 싸 備 考 ~ 樂 考 J 3 55) 이혜구, 韓 國 의 琴 樂 " Ii'한국음악연구 ~ (서울 ; 민속원, 1996) 56) 홍대용의 蘇 記 애 의하면 딩시 使 行 시에 樂 院 이 짧읍하여 樂 fti1í 한 사람을 보내 함 琴 과 쪼짧을 사오고 아울러 그 음악을 배워 오도록 하였고, 그 일을 당시 上 通 事 李 j짧이 주관하도록 되어있다 고 하였다. 당시 함 琴 의 가격은 l 백 50냥이었다, (홍대용, j 甚 n똘 外 集 권 7 r 蘇 記 琴 純 짧Ij 生 是 行 樂 院 棄 읍, 定 送 樂 ßijî-A, 求 買 }활 琴 及 똘짧, 因 令 學 其 曲 而 來, 使 上 通 事 李 衝 主 其 事.., 問 其 價 鳥 一 百 五 十 兩 긍긍 ",) 이때 수행한 악사는 실록에 의하면 당시 典 樂 랬 天 柱 임 이 확인된대Ii' Ii' 英 祖 實 錄 卷 106 英 祖 41 년 11 월 2 일(쫓맴), 각주 57 참조) 57) Ii' 英 祖 寶 錄 卷 106 英 祖 41 년 11 월 2 일(쫓쩔) 쪽 至 使 )11명 義 君 李 熺 과 金 善 行 共 챔: 등이 하직인 사를 하니, 임 금이 소견하여 어찬을 내리고 四 言 詩 각 2 句 를 몸소 써서 하사하여 그 사행을 영예 롭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활 琴 쪼짧이 소리를 잘 이루지 못한다 하여 榮 工 으로서 껴찍f에 수행하 는 자에게 그 음을 배워 오도록 명하였디 이 듬해인 영 조 42년에 는 사은 정사와 부사를 불러 악 사가 악을 배워왔는지 묻고 연주하게 하여 영조의 음악에 대한 큰 관심을 볼 수 있다. 일행이 모
朝 蘇 中 훌훌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45 전히 조선에서 제작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한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서명응은 시악화성 d) (1780)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 는 大 琴 과 中 琴 의 두 가지 琴 은 없고 단지 I J 琴 만이 있다. 그러나 소금은 반드시 홈 琴 을 중히 여겨, 매번 무역할 때 마다 연경에서 사왔으나 번번히 속임을 당하였다. 목재는 개오동 나무를 사용하였고, 줄은 삶은 명주실을 사용하였으니 비 록 師 y 廣 58)으로 하여 금 조현하게 하여도 능히 소리 를 이 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평범한 악공에게서랴. 동방의 금의 재 료는 본디 천하 제일 이라고 불리웠 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금은 계속 중국에서 들여오고 있음이 드러나지만 연주의 측면에서 볼 때 1 76 5년의 상황에서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고 여전히 음률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정조 2 년(1 778) 11 월 29 일의 실록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 금이) 숲을 불도록 명하고, 또 玄 琴 을 타도록 명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현금은 일 명 홈 琴 이라고 하며 중국에서 나왔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그것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라고 하여 여전히 연주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이 확인된다. 위의 기 록들을 참조해 볼 때 금이 라는 악기는 한국화 되기 힘든 악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역사적으로 끊임없 이 중국에서 들어오고, 사오기도 하고, 배우러 가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조선후기에 와 서도 음률이 잘 맞지 않거나 여전히 잘 연주되지 않는 악기이므로 연경으로 배우러 가야만 하는 악기였다. 한편 금의 악보로서 조선에 전해온 것으로 유예지 의 훔 琴 字 짧 가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琴 음악이 소개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음악을 그대로 소개한 것으로 한국화한 것이 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윤용구와 윤현구 형제가 편자인 F 칠 현금보d)(한국음악학자료총서, 권 16)과 휘 금가곡보i한국음악학자료총서, 권 7)에서는 금이 한국화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금의 한국적 수용이 이루어진다. 이 들이 시도한 琴 樂 의 한국화는 조현법의 한국화 연 주법의 한국화 (거문고 주법과 가까이 하여 절충적 주법을 만들어냄), 기보법의 한국화 (중 국의 감자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간보에 장단표시 기보), 한국음악을 연주 (영산회상, 도드리, 취타, 여민락, 가곡 등)했다는 네 가지 점에서이대 9) 정조 2년 ( 1 778)딩시의 기록에서 우리 나라 사람은 그것( 琴 )을 탈 줄 모릅니다 라고 했듯이(위의 실록기사 참조) 금의 연주는 전승 두 무사히 갔다 돌아왔는가7" 하니 김선행이 대답하기를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樂 師 가 樂 을 배 워 가지고 돌아왔는가-7" 하니 김선행이 말하기를, 배워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악사 장천주에 게 명하여 악기 를 가지고 들어와서 筆 을 불고 琴 을 타게 하여 각각 한 곡씩 연주하게 하였다. 하여 樂 工 을 잘 가르쳐 서 聲 륨을 번거 롭고 촉박하게 하지 말도록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W 英 祖 寶 錄 권 107, 영조 42년 4월 20 일(기미) 58) 師 u,짧은 중국 품나라의 음악을 관장하던 태사 子 野 임 59) 嚴 惠 때, 七 鉉 琴 의 韓 國 的 受 容 서 울대 석사학위논문, 1983. 인
246 國 뺑핸훨 倫 文 集 第 11 輯 이 늘 어려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0여년 후인 1880년에 윤현구가 연 경에 가서 금을 구입해 와 조현법을 터 득한 후 10여년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음조에 맞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수용과정을 볼 때 금의 한국적 수용의 예 는 다른 악기의 한국화 과정 에 비해 상 당히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악기가 들어온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 긴 시 간을 지나 19 세기에 이 르러서야 비 로소 한국적 수용이 이 루어진 것 이다. 이상 조선후기 淸 을 통해 들어 온 洋 琴 과 이미 고구려시대 이 땅에 들어 왔으나 조선 후기 에 이 르러 서야 민간에서 우리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 琴 두 악기의 수용양상을 살펴보았다. 양금은 서양의 것 이 청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와 제 악사 가운데 타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 의 인기 를 누린 악기 로 자리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琴 의 경우 끊임없이 중국을 통해 사 들여 오고 배워 온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착하는 데는 꽤 오랜시간이 소요되 었음이 확인되 었다. 결국 칠현금보 와 휘 금가곡보 단계에 이 르러 서야 비 로소 琴 樂 의 韓 國 化 가 이 루 어 졌 다. 이러한 현상은 별도의 해석 을 요하는 현상이 므로 이 정도에 그친다. 조선후기는 그 이 전시기에 비하여 새 로운 외래음악이 들어 온 예가 드물다. 이러한 현상에 는 明 淸 교체기 이 후 조선 이 문화중심 이라는 자신감도 한 몫을 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미 청 대 로 바뀐 시 점 에 청 문물 수용은 어떠한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中 原 을 차지한 청은 횟까임이 분명 하지만 중화의 문물은 청에 게 계 승되었다는 시 각을 가졌기 때 문에 이 를 수용함에 논리 적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즉 청 이 가지고 있는 문물은 이전부터 중국에 전승되어 온 것 이며 조선의 것보다 우수한 것 이 있 다면 이는 당연히 수용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60 ) ill. 맺음말 본고는 조선후기의 음악사를 조선중화주의 와 청 문물 수용에 적극성을 보이는 북학 이 라는 큰 틀 안에서 해석해 보려 한 시 도이다. 이러한 두 틀을 상정할 수 있었던 것은 기 존 역사학계의 연구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왜 조선후기에 새로 들어온 외래 음악이 적은지, 또 대부분의 고악보의 연대표기에 있어서 왜 明 의 연호를 고수하고 있는지, 영 정조대의 전례 정비 강화의 측면은 어떠한 맥락이었는지, 또 서명 응과 정조가 음악의 이 론적 정비에 심 혈 60) 김문식, 18세 기 후반 서 울 學 A의 淸 學 認 識 과 淸 文 物 도입론" w 규장각~ (서울: 서울대 학교 규장 각, 1994) 17, 34쪽.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47 을 기울인 것은 무슨 의미인지, 청에서 새 로 수입된 악기는 어떤 맥락에서 받아들였는지 등 의 궁금증이 이러한 틀 안에서 일부 풀렸 다. 그러나 한편 외래문화의 수입이란 측면에서 조선후기의 초반인 17세 기만을 놓고 볼 때는 그 해석에 있어 좀 달리 해야하는 측면도 있다. 즉 당시 중국의 문물이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明 朝 를 중심으로 하던 동아 시아의 국제 질서 에서 淸 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적 시기 61) 에 경직화 되었던 양국관계에서 오는 폐쇄성이 문화교류의 폐쇄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17세 기의 과도기 를 거친 이후의 조선사회 는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그 문화 발전 이 이 루어진다. 고려시대에 송나라의 성리학이 외래학문으로서 이 땅에 도입된 이후 조선 전기에 이 르러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이 르러서는 조선성 리학 이라는 조선 고유의 사상적 틀이 형성되면서 조선은 곧 중화 라는 조선중화주의 의식으로 문화적 자신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음악 부문에 있어서도 새 로운 것의 수입보다는 문화중심에 서 있는 민족으로서의 전례정비 강화와 음악의 이 론적 정리의 측면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특히 정조와 서명응 의 음악저술을 통한 이 론 정리 작업은 조선 이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으로서 樂 의 본지를 찾으려는 보다 원대한 곳에 이상을 두고 있었다. 명나라가 망한 후 유교문화의 중심국으로 서의 古 樂 회복은 일종의 사명감이기 도 했을 것 이다. 그 위에 明 淸 교체기 이후의 중국을 지켜보면서 청의 문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대 북 학파 인물들에게서 보다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즉 그들은 조선 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갖는다. 그러한 입장이 당시 연경을 다녀오 며 청의 분위기에 노출된 學 A 들에 의해 표명되어 새 로운 악기가 조선으로 유입될 수 있었 다. 또 이미 들어와 있었던 악기를 적극적으로 한국화 하려 는 움직임도 이러한 논리로 해명 된다. 요컨 대 조선사회에서 주자성리학의 수입 이후 이루어지 는 국가전례의 정착과정 62)은 외래 문화가 유입되어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의 추적에 다름 아니다. 낯선 문화가 새로이 유입되 어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문화의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잡는 과정 을 잘 보여주고 있 기 때 문이다. 또 그러한 과정을 거친 이후의 문화적 자신감은 개방성으로 이어져 외래문물 수용의 여지를 만든다. 조선후기의 음악사를 바라볼 때 국가 규모의 전례정비라든지 관찬 악서의 편찬 작업 등 에 대 한 의미 해석은 시도된 바가 없었다. 본고는 조선후기라는 시점에서 이루어지 는 국가 61) 최소자 Ir 명청시대 중 한 관계사 연구~(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7), 63 쪽, 62) 조선시대의 주도적 인 지배이념으로 성립한 주자성 리학이 조선사회 에 어떻게 정착되어 갔는지를 國 家 歲 禮 의 정비과정을 통해 연구한 논문으로 池 斗 煥 心 으로- ~ (서 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가 있다. Ir 刺 蘇 前 期 f 敵 뭔 冊 究 - l 生 理 學 正 統 論 을 中
248 國 樂 院 論 文 集 第 U 輯 치원의 음악관계 사업 들에 대하여 그 의미 를 파악해 보고자 한 것이다. 당대 의 민간음악이 풍성 하게 발달 한 것 에 비해 궁중음악은 피폐화 한 것으로 진단하는 일반적 인식에서 나아 가 다른 해석의 여지 를 조선중화주의와 청 문물 수용이라는 큰 틀로 마련해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자부심이 바탕이 된 결과 나오는 것 이 었으며, 문화 중심 국이라는 자신감에서 온 개방성은 외래 문물 수용에 있어서도 적극적일 수 있는 하나의 논 리 로 작용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成 宗 寶 錄 關 宗 寶 錄 윗 祖 f뚝 錄 正 朝 實 錄 W [행 朝 寶 짧 春 官 通 考 弘 爾 全 훔 W t웹체ìx없ã í햄 考 親 *예 義 뼈L ~ 親 t~ 熾 띠IL~ 휩: 經 三 탱 史 記 弘 濟 全 書 姜 世 용 約 좁 退 精 朴 ~Jl: 源 課 農 小 f~ ~ 朴 ~Jl: 源 熱 河 日 記 徐 f암jiflí 國 朝 詩 樂 徐 ~~앤 國 朝 樂 훌 徐 i암 聊 詩 樂 ψ 렛 徐 命 聊 元 音 鋼 成 大 中 춤 城 集
朝 蘇 中 華 主 義 의 음악적 실현과 淸 文 物 수용의 의의 249 楊 陰 i짧1, W I=j:'탱 古 代 흡쌓 史 網 李 圭 景 歐 鍵 鐵 絲 琴 字 짧 柳 慶 種 海 嚴 橋 陳 場 樂 畵 洪 大 容, 다 轉 T합 外 集 김종수, 이숙희 譯 註 詩 樂 和 聲 ~, 서울. 국립국악원, 1996. 김문식, 18세기 후반 서울 學 A 의 淸 學 認 識 과 j좁 文 物 도입론" W규장각~ (서 울: 서 울대학교 규장각, 1994) 17. 김종수, 조선후기 황단악 연구" W국악원 논문집~ (서 울. 국립국악원, 1996) 제 8 집, 3-29쪽 송지원, 훼 勳 後 期 뎌' Å흡 樂 의 社 會 史 的 1iff 究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2. 송지원, 영 정조대 학자 서명응의 음악이 론서," (!f' 設 註 詩 樂 和 聲 의 서평) W 韓 國 音 樂 史 學 報 ~ (경산: 음악사학회, 1997) 제 19 집, 1997. 한국 徐 冷 聊 의 元 흡 鎬 " W문헌과 해 석 ~, (서 울: 태학새 1998) 통권 4호. ---' 徐 命 땀의 I행 朝 詩 樂 " W문헌과 해석 ~ (서 울. 문헌과 해석사, 1998) 통권 5 호. ---, 徐 命 멤의 詩 樂 妙 햇 1," [j'문헌과 해석 ~ (서 울: 문헌과 해석새 1999) 통권 7호. ---, 徐 命 聊 의 詩 樂 l)!ji햇 2," W문헌과 해석 ~ (서 울: 문헌과 해석사, 1999) 통권 8호 유봉학 減 嚴 一 派 北 學 j탠 想 l짜 究 ~, (서울: 문헌과 해석 λ },.1999) 일지 À }, 1995. 엄혜경 七 鉉 琴 의 韓 I행 的 풍 容 ~, 서 울대 석 사학위 논문, 1983. 이혜구, 韓 國 의 琴 樂 " W 한국음악연구i서울 : 민속원, 1996), 373-381 정옥자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 서 울: 일지새 1993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서울: 일지 사, 1998. 지두환 朝 蘇 - 前 期 f꿇 禮 재f 究 ~, 서울: 서울대 출판부, 1994. 최소자명청시대 중 한 관계사 연구~, 서울 이대 출판부, 1997. 최완수조선왕조의 문화절정기, 진경시대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서 울: 돌베게, 1998. C. Wissler, Man and Culture, New York, 1923
250 國 樂 P젊융 文 集 第 11 輯 The Meaning of Musical Realization of Chosun Chunghwaism and the Adoption of Culture and Science of the Ching China Song Ji-won (Ph. D. Candidate. Seoul National Univ.) The late Chosun 야riod boasted of her culture. It, also 때O뼈 as Chosun Chunghwaism, changed several aspec염 띠 govemmenta1 p이 icy on music. Regulating the ceremo띠 al music rather than importing new rnaterials or re-de 社 ng music theory are good examples of Chunghwaism. Especially, the theoretical writing of the scholar-king Chöngjo with Sö myöng-üng represented the hi양ler goal of Chosun, establishing her status as the c띠 tur머 center of East As i뻐 culture. The time was right after the fall of Chinese Ming Dynasty; the Chosun assumed the responsibility of becoming the ce따er for Confucianism. What was considered to be the most ideal music, that is, to re-discover the music of the past, was emphasized during this period. on the contrary, some sch이 ars from the northem tradition who had been to the Ching china searched for a new type of music and civilization, and adopted yangl1m as a result. π1î s de빼 s with two contrasting efforts by two groups in the late Chosun period. 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