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04 방송의 날 특집 2013년 9월 15일(일요일) 174호 방송사료, 이렇게방치해도부끄럽지않은가 김성호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객원교수 아시아CGI애니메이션센터설립추진위원장 나는 요즘 집필과 강의로 부담스러 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집필에 대한 부담이란 방송역사에 관한 저술 프로 젝트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인데, 지난 연초에는 방송문화진흥회가 발주한 한국 아나운서 통사 (나남출판, 429p)를 출간한데 이어, 지금은 한국 방송학회에서 부여한 한국방송 인물 사 연구 저술을 연말까지 완료해야 하 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강의는 이 가을 학기에 학부 두 강좌, 대학원 한 강좌로 모두 세 과목을 준비하고 실행하자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 다. 이 황망(慌忙)한 와중에, 이 기고를 마다할 수 없었던 것은 평소 방송 사 료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때 이 분야의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도 한 엄효섭 회 장께서 두 차례나 직접 부탁을 한데다 마침 막 '방송의 날'을 보낸 터라 시의 적절한 테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메아리도 없는 메시지를 허공 에 쏟아내는 독백일 것 같아 마음은 편치 않다. 앞서 방송역사서의 집필 일화를 피 력했는데, 사서(史書)의 저술은 사료 가 기초 관건인지라 명확한 준거(準 據) 없이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신뢰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관련 사료의 탐 색이 첫 걸음인데, 내가 참고할 사료 가 수장되어 있음직한 큰 기관을 찾아 가 열람해보니 낙담을 넘어서 절망스 러움뿐이었다. 일례를 들어 얼마 전에 방문한 국회도서관, 중앙국립도서관, 서울대도서관,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KBS 자료실 등을 다 찾아가 봐도 내 가 참고해야 할 조선방송협회보, 조선방송협회 역원급직원명부 등 은 전무한 상태였고 1950, 60년대 사 료인 <주간방송>,<방송>(타블로이드 8면) 등은 내 개인 소장분 분량만큼도 수장되어 있지 않았다. 참으로 통탄스 러운 마음이 지나쳐서 분노가 치솟기 도 했다. 사료 방치로 일실(逸失)된 한국방송 역사 나는 지난 몇 년간에 걸쳐 포럼 발제, 칼럼 집필 기회 등을 통하여 <한국방 송박물관 설립 추진방안>, <더 늦기 전에, 다 잃기 전에 방송박물관 건립 을> 등을 발표하면서 여론을 환기시 킨 바 있다. 특히 한국방송계 수장들 에게는 당신들이 권한을 가졌을 때 발 동이라도 걸어달라고 읍소했지만, 코 딱지만한 반응도 얻지 못했다. 방송계 가 옛날처럼 외계인이 원주민을 학대 하던 시대도 아니고 방송전문인들이 수장이 되었어도 자신과 선후배들이 살아온 역사 사료를 방치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더욱이 세계 -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한국방송계 풍토 속에 한국을 부각시킨 1등 공적의, 방 송이 쌓아 올린 발자취들(서울올림픽, 서울월드컵, 한류의 리소스 등)이 사 라져 가는 판국인데도 말이다. 며칠 전 모셨던, 여러 방송 창설을 주 관한 존경받는 우리나라 최고의 방송 원로 최창봉(1925~ ) 선생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일자리>라는 표지석 이 세워진 KBS당진송신소 초대 소장 를 걸 수 있을 텐데, 모두 다 남의 일 보듯 하고 있다. 방송박물관 설립을 다시 읍소(泣訴)하며 지난 6월에 사단법인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최창봉, 회장 장한성)가 방송 박물관 설립의 절박성을 인지하고 한 양대에서 포럼을 개최했을 때, 나는 주 목동 방송회관 3층 로비에 마련된 방송 자료 전시장. 을 지낸 박경환(1927~ ) 선생 등은 한 결같이 방송계의 이 풍토를 아쉬워하 면서 나에게 어떤 방도가 없느냐고 하 시지만, 이 역사(役事)야말로 제도권 의 정치인이나 방송계 수장들이 나서 지 않고서야 될 것 같지가 않다는 하 소연 이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렇다. 지금 영향력 있는 현직 수장 들이 좀 심기일전하여 용단을 내리는 방도밖에 없을 것 같다. 현직 당사자 들은 지난 날 임기 중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떠벌이다 어느 것 하나 버젓하게 해놓은 것 없이 영화만 누리 다 떠난 수장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았 으면 참으로 좋겠다. 방송이 늙어가고 있다. 그 찬란했던 지상파의 위력이 스러져 가고 있다. 더 늙기 전에, 다 스러지기 전에, 선배 들과 더불어 자신들이 일구어 놓았던 영광의 순간들을 더 버려지고 다 없어 지기 전에 집대성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로 접어 든 몇 년까지는 <한국의 방송>이 우리 나라를 세계 속에 굳건하게 부각시키 고 국민들을 세계인화 하는데 결정적 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당장 그 기 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고 계승하는 작업을 추진할 사람과 조직 과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1회성 <방 송의 날> 행사 비용만으로라도 단초 제 발표를 통해 몇 가지 대안을 반복적 으로 제기하였다. 첫째로, 한국방송박 물관 설립은 국가적인 범방송계 사업 이니만큼 방송관련 정부 부처인 방송 통신위원회와 방송단체인 한국방송협 회가 앞장서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것 이다. 이 두 기관 단체가 선두에 서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 可知)이며 또한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 이다. 이들 기관은 계획을 입안할 맨 파워, 자금을 동원할 머니 라인, 특히 ' 작동의 버튼'을 누를만한 힘이 있기 때 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국가적, 역사적 당면 과제를 추진하지 않는 것은 국민 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도덕적 차원 에서는 직무를 방기한 처사로 확대 해 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KBS가 앞장서 추진하는 방 안이 그것이다. KBS는 법적으로 극명 하게 명시되어 있는 국가기간방송사 이다. 그리고 방송역사가 가장 오래됐 을 뿐 아니라 그동안의 추진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나 축적된 사료 또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참고 로 내가 방송박물관설립추진위원으로 서 활동을 마감할 시점인 2005년 연말 현재, KBS가 보유하고 있는 사료는 무 려 40,656점이었다. 그 후 작고한 원로 방송인들의 기증본을 보태면 더 많은 사료가 수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부터 현재까지 방치 현상은 지속 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KBS는 국 가기간방송사의 역할이나 방송종주사 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로, 궁여지책의 차선책으로 보 일지 모르지만, 평판이 좋고 이미지가 깨끗한 기업이나 개인으로부터 기부 를 받아 설립하는 방안이 있다. 이 방 법은 자칫 순수성이 결여되고 소유권 분쟁의 소지 등이 발생할지 모르니 정 부기관이나 방송협회와 공동사업으로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기부문화가 급격히 늘어나 고 있다. 이 바람직한 현상은 우리나 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확실한 징 표이며 지수이다. 우리 주변의 유명, 무명의 인사들이 만년에 재산을 사회 에 환원하는 현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각 대학에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인사인데도 기부를 통하여 큰 건물을 지어주는 독지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거울삼아 독실한 기업 이나 인사를 찾아서 방송박물관을 설 립하는 방안도 제시해 본다. 넷째로, 한국방송박물관 자리는 남 산에 있는 옛 KBS 라디오 청사 터에 건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다. 내가 여러 채널을 통하여 한결같 이 주장한 바 있지만, 그 이유는 1957 년 세워진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 어 있고, 사유화 되지 않아 공공적 자 산인데다, 남산의 정취어린 풍광으로 순례객들에게도 안성맞춤이며 교육장 으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울시가 이 청사를 애니메이션센터 로 활용하고 있는데, 상암동 디지털 단지로 이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국 가적 차원에서 서울시와 방송계가 환 지 또는 대토 등의 방안을 모색하여 대승적 차원에서 해결되었으면 한다. 이는 KBS가 여의도 청사를 지을 때, 서교동의 연희송신소 터와 교환한 아 름다운 전례가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이를 위해 파워가 있는 현직 의 방송계 수장과 주요 인사들이 적극 나서주기를 당부한다. KBS는 2007년 방송 80년사를 내지 않았고, MBC는 작년 창사 50주년에 50년 사사조차 방치했다. 흩어진 사 료는 이러한 역사서 편찬 계기를 통 해 수집하고 정리하여 수장되는 것인 데,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스럽다. 역 사는 기록되어야 하고 기록은 보존되 어야 하며 보존은 전승되어 후대들에 게 유산으로 남아 교훈이 되어야 한 다. 작금의 한국방송계의 사료 방치 풍토를 고려한다면 얼마 전에 화려하 게 치른 <방송의 날> 행사가 외화내 빈의 허장성세(虛張聲勢)처럼 보이기 만 한다.
06 174호 2013년 9월 15일(일요일) 2013년도 지원 자격 전 현직 방송 언론인 지원 분야 취재, 조사, 연구에 관한 내용으로 독창성 있는 주제 선발 인원 3명 지원 금액 1인당 500만원 (선발 후 20%, 츨판 후 80%) 지원 조건 출판/배포와 관련한 사항은 저자가 주관. 표지 또는 목차 앞부분에 "이 책은 홍성현 언론기금의 지원을 받아 저술되었습니다." 명기. 저작물에 관한 모든 권리는 저자가 소유. 저술 주제는 변경 불가. 선발 확정일로부터 1년 이내에 저작물 출판. 저작물이 출판된 후 10일 이내에 15권을 한국방송기자클럽에 납본. 제출 서류 지원자 이력서(주소, 연락처, 사진 첨부) 저술계획서(주제 및 목차, 저술 계획, 소요 기간 등) 접수 기간 2013년 8월 16일(금)~10월 16일(수) 접수 방법 마감일까지 한국방송기자클럽에 직접 또는 우편으로 제출 문의 782-0002/1881
08 174호 2013년 9월 15일(일요일) "CEO는고통스러운자리, 남다른책임과부담느껴야죠" - 경쟁력 갖추고 공익성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 다할 것 다른 플랫폼과 상생 방안도 고민해야 - 문재철 KT스카이라이프사장 임기 안에 "미디어 산업 융합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는 문재철 사장. 18년간 언론 현장을 누비다 어느 날 벤처사업가로 변신했 다. 이후 통신업계에 몸을 담았고 지난 해 3월 중순, 위성방 송 KT스카이라이프 대표이사가 됐다. 방송과 벤처기업, 통 신과 위성방송을 아우르며 방통융합이라는 미디어 환경을 온몸으로 경험한 문재철 사장. 일 생각만 하면서 지낼 때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그를 만나봤다. 없다. 가장 효과적인 전 략은 스카이라이프가 추진해 왔던 일 중에서 잘된 것은 계승하고 잘 못된 일은 바꿔가는 것 이었다. 그래서 취임 이 후 크고 작은 혁신 과제 를 600개 정도 제시했고 직원들의 발 빠른 대응 으로 대부분의 과제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그 러나 아직도 부족한 게 많고 해야 할 일이 많다. 너무 정신없이 지나왔 던 터라 1년 6개월이라 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 갔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1년 6개월 동안 가장 잘한 것과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 인가. -기자 시절부터 이어온 한 가지 원칙 은 꼼수를 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칙과 상식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해 -스카이라이프가 방송 통신 융합의 최선봉에 서서 출발했지만 사업 초기부터 힘든 점이 많 았다. 위기와 극복의 역 (경력) 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 - KBS 입사(81) 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 KBS 사회부, 외신부, 정치부 기자(81~93) 서 스카이라이프의 파이 - KBS 워싱턴 특파원(93~94) 를 키워 나가기 위한 방 - YTN 워싱턴 지국장(96~98) 안을 다각도로 연구했 - YTN 국제부장(99~00) 다. 지난 해 8월 '스카이 - STG시큐리티(주) 대표이사(00~08) T 쇼핑' 채널을 출시하면 - SKT 상임 고문(08~11) 서 T 커머스(데이터 방송 - KT BS 추진실장/전무 (12) 을 보면서 리모컨으로 - 현 KT스카이라이프 사장(12.3~) 원하는 상품을 골라 제 품 설명을 보고 구매와 결제까지 할 수 있는 서 KT스카이라이프 사장으로 온 지 1년 6 비스) 시장에 진출했고, 폭력과 선정 개월 가량 지났다. 그동안 정신없이 지내 성이 없는 진짜 공익 채널을 만들자는 왔을 것 같은데. 뜻에서 '힐링채널 휴'를 출시했다. 수 익 창출과 공익성을 동시에 고민한 결 -매일 전쟁 속에서 살고 있는 기분 과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속적으 이다. 미디어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 로 논란이 됐던 접시 없는 위성방송 하다 보니 경쟁력을 키우고 성장하 법 개정을 이끌어낸 것도 성과다. 아 려면 미래 쉬운 점은 를 예측하 집에서도 새벽 2~3시까지 채널 모니터링 방송 시장 고 전략을 에서 형평 잘 짜 야 일 생각 하면서 지낼 때가 마음 가장 편해 성에 어긋 한다. 또 나는 규제 방송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영리를 나 관행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공익성을 살려 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안할 수 현재 위성방송업계의 최대 현안은 -방송법과 IPTV법 개정을 통해 KT 와 IPTV 스카이라이프 합산규제의 움 직임이 있다. 또 지상파 CPS(Cost Per Subscriber: 유료방송 업체가 지상파 방송을 재송신 하는 것에 대해 지불하 는 가입자당 요금)를 둘러싼 지상파와 의 갈등도 문제다. 합산 규제는 스카 이라이프의 공익성을 오히려 해치는 일이고 CPS도 사실 더 낮춰야 한다. 업계의 이해관계 때문에 시청자들이 희생돼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런 차원 에서 함께 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경영 철학이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고 모험과 도전을 하는 게 나에겐 즐거운 일이었 다. 물론 도전할 때마다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은 건 어느 자리에 있든 성공을 하려면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잘 때 자고 쉴 때 쉬고 놀 때 놀아서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기자 시절부터 휴가를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스카이라이프 채널을 일일이 모니터링하다 새벽 2~3시에 잠이 든다. 특히 기자는 조직 속에서 한 개인이지만 지금은 내가 조 직을 이끌어 가야 한다. 훨씬 고통스 러운 자리다. 그만큼 책임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일 생각만 하면서 지내는 것 같다. 특별한 취미는 없나. 문재철 - 1958년 8월 8일 대구 - 경북고등학교(77)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81) 야지 단기간의 이익에 몰두하면 결국 신뢰도 잃게 된다. 지금도 특별한 노 하우 같은 건 없다. 부지런히 뛰어다 니는 게 노하우라면 노하우다. 기자 시절의 경험이 지금 하는 일에 어 떻게 도움이 되고 있나. -기자는 늘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회사 안에서도 경쟁이고 타사와도 경 쟁을 해야 한다. 긴장 속에서 늘 경쟁 을 하는 게 몸에 뱄다. 그리고 현장을 누비던 동료나 선후배들이 지금은 방 송사의 경영진이나 보도국 간부가 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일을 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기자를 하다 벤처사업가, 기업의 사장 까지 하게 됐다. 기자를 그만두고 벤처사 업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아직은 일 생각만 하면서 지낼 때 가 부담이 되면서도 가장 마음이 편 하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크기 때 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사실 없 다.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방송사 선 후배들을 만나는 게 그나마 사적인 활동인 것 같다.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 -공교롭게도 지상파, 케이블, 통신, 위성방송까지 모든 플랫폼을 경험해 봤다. 그게 나에겐 큰 자산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스카이라이프가 급변하 는 미디어 환경에 잘 대처하면서도 경 쟁력을 갖춰나갈 지 늘 고민한다. 아 직 더 고민해야겠지만 "미디어 산업 융합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박성희 기자 bjc@kbjc.net
174호 2013년 9월 15일(일요일) 09 그 때 그 현장 데스크는'튀고' 애송이는'상' 받고 엄효섭 본 클럽 회장 전 SBS 해설위원 - 新軍部 시절 씁쓸한 特種記 감히 역사로 남기고자 이 글을 쓰는 崔 次長은 "얘기 된다"면서 어디론가 長은 내가 취재한 기사에 대해서는 지 정을 받은 터에 아무리 기사가 된다고 것은 아니다. 거의 지워져가는 기억들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당시 김명년 나치리만치 관대했다. 다만 기사거리 한들 평지풍파를 부를 이유가 어디 있 을 이제 와서 조각보 깁듯 다시 짜맞 부시장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내년 가 모자랄 경우 그는 양복 이 주머니 는가? 그러나 部長의 판단 기준은 내 추어보는 것은 80년 암담했던 시절이 에 현 청사를 헐기 시작해 83년까지 저 주머니를 뒤적이는 습관이 있었다. 가 갖고 있는 기준 그 이상의 높은 곳 주는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내 강남으로 이전하되, 현 위치에는 도심 그러면 음식점 휴지 아니면 광고 전단 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분 역시 기자였 가 전수받은 이 직종의 고유 '정신'을 공원과 함께 도서관을 건설할 계획'이 지 아니면 이면지 등이 몇 건씩 나왔 다. "내보내쇼" 단호한 어조와 함께 張 공유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내 영혼이 라는 것이었다. 다. 거기에는 이름이나 예산액, 지번, 部長의 두 손은 허리춤에 가 있었다. 살아있는 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情 한 통화의 전화로 완벽하게 마무리 날짜 등 잊어서는 안 될 사항들이 적 신명이 나다 못해 구름 위를 걷는 기 理' 때문이다. 해주는 1진 앞에 무능한 나 자신을 부 혀 있었고 모두가 훌륭한 기사거리였 분이었다. 길고 긴 하루였지만 내일 어떤 기사가 특종인지 묻는다면 답 끄러워하기보다, 역시 助手는 射手를 다. 2진의 한계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 아침 방송이 무사하다니 얼마나 다행 이 궁하다. 30년 넘게 취재 전선을 지 잘 만나고 봐야 할 일이란 말을 떠올 던 마음 씀씀이였다. 그러니 '수도권 한 일인가. 킨 기자라면 老兵이 무용담 한두 가 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사천리 뉴스'가 늘 풍성할 수밖에. 다음 날 출근해 보니 뉴스부 전체가 지씩 갖고 있듯 몇 건 정도 특종에 대 로 쓴 기사를 직접 들고 시청으로 뛰 그뿐 아니다. 78년 현대아파트 특혜 괴괴하기 상엿집 그대로였다. 그리고 한 추억이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가 보도검열단(당시 신군부는 시청 분양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崔 次長과 部長의 얼굴이 안 보이는 조 석간이 1면 톱으로 받아야만 특 강당에 신문 방송 검열단을 두고 있었 40여명의 추악한 언론인 가운데는 崔 것이었다. 한 선배의 귀띔인 즉 "당신 종으로 인정하는 회사의 불문율에 적 다)에 집어넣었다. 次長도 끼어 있었다. 분양권에 프리 기사 때문에 튀었다"는 것이다. 검열 합한 기사를 썼고 특종상과 함께 거 그러나 마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미엄이 붙어 기존 아파트 시세의 2배 단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구나 하는 금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상 줄이야. 기사를 대강 훑어본 검열요원 가 넘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큰 짐작이 들었다. 군부는 마음에 안 드 의 이면에는 기막힌 사연 는 기사가 보도될 경우 툭 이 서려있다. 하면 해당 기자나 그 상사 33년 전인 1980년. 사건 를 연행해 육체적 고통과 팀을 갓 졸업한 나는 동아 정신적 모멸감을 안겨주 방송(DBS) 2진으로 서울 던 시기 아닌가? 변명이나 시청을 맡고 있었다. 1진 항의는 부질없는 짓이었 은 崔東鎬 次長(전 KBS 부 다. '튀는 것'이 상책이었 사장. 전 세종대학교 이사 다. 그러나 나로 인해 두 장). DBS는 아침 7시 종합 분이 고초를 당하는구나 뉴스에 이어 5~7분짜리 ' 생각하니 작은 내 몸 하나 수도권 뉴스'를 별도로 편 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성, 일요일을 포함해 365 출입처에서는 '시청 이전' 일 방송하던 시절이었다. 보다는 '동아방송 1진이 높은 청취율에 광고단가 튀었다'는 얘기가 더 큰 화 또한 제일 비쌌기 때문. 따 제 거리였다. 드러내놓고 라서 단전, 단수와 같은 단 측은해 하는 공무원도 있 신을 포함해 하루에 최소 었다. 사고무친의 비애감 한 7~8건 정도는 손에 쥐 을 느껴야 했다. 어야 하기에 나는 풀방구 어느 절간으로 피신했는 리 쥐 드나들듯 각 국, 실 지, 아니면 도피여행길인 을 누벼야 했던 때이다. 지 연락이 두절된 채 나흘 2월 7일 점심때 구내식 이 지난 2월 12일, 최규하 당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 대통령의 서울시청 연두 다리는데 내 앞에 섰던 세 순시가 이뤄졌다. 제1 보 당시의 조 석간(좌)과 상장(우). 동아일보는 방송 쪽이 먼저 보도해서인지 1면 두번째 톱으로 이 기사를 다뤘다. 무과 김 모 계장이 옆구리 고사항이 바로 '시청 이전' 를 툭 치더니 자신의 구두 건이었다. 우선 석간들이 코를 바라보며 "시청 옮긴데..."라고 혼 은 일언반구도 없이 <보도보류>라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崔 次 1면 톱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이는 곧 잣말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뭐? 언 붉은 색의 도장을 골라 원고 각 페이 長은 사건화 되기 훨씬 이전에 부모 DBS에 대한 '보도보류' 조처가 해제됨 제? 어디로?" 물을 틈도 없었다. 그의 지마다 손목에 힘을 주어 찍는 것 아 를 모시면서 월세를 벗어나지 못해 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내 張 部長과 시선은 이미 앞사람 뒤통수에 가 있었 닌가? 기사라고는 오직 이것 하나뿐인 애쓰고 있는 한 방의 동료에게 입주 崔 次長의 환한 얼굴이 뉴스부에 나타 다. "당신이 기자라면 취재해 보쇼."라 데 당장 내일 아침방송을 무엇으로 하 권을 건네준 사실이 회사 자체 조사 났다. 다음 날 조간들도 마찬가지 1면 란 말인가 드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에서 확인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톱이었다. 는 의미 아닌가? 이었으나 기사는 이미 보류함속에 던 그 동료를 대신해 고마워 할 정도였 崔 次長-"조간, 석간이 1면 톱으로 '보도 보류'에 눈물이 져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재갈을 물 다. 그는 그런 인품의 인물이었다. 썼는데 이거 특종 아닌가요?" 릴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 張 部長-"맞아, 중이 제 머리 깎겠 오후 내내 내 나름대로 온갖 취재력 흘러내렸다. 그 분 역시 기자였다 어? 최 차장이 대신 좀 챙겨서 상신 을 동원했으나 '서초동 444블록(현 대 崔 次長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보고 하쇼." 법원 자리)'으로 옮긴다는 사실 하나만 2진 염두에 둔 마음 씀씀이 받은 張淳在 部長(전 KBS 해설위원. 확인했을 뿐 빈손이었다. 단 한 줄의 떠오르는 얼굴은 1진밖에 없었다. 또 2012.5. 별세)은 보류된 기사를 놓고 기사도 작성할 수 없는 극히 미진한 동아방송은 그해 신군부에 의해 영 취재 결과였다. 이실직고 할 수밖에. 이실직고 할 수밖에. 사실 崔東鎬 次 장고에 들어갔다. 이미 '보도보류' 판 원히 문을 닫았다.
174호 2013년 9월 15일(일요일) 11 "스포츠와 맺은 인연 20년,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할 수 있어 행복했죠" - KBS 스포츠취재기자1기로입사 전종목취재하며스포츠취재노하우쌓아 박현철 KBS 스포츠취재부장 서 현장에서 오 히려 멀어진다 는 게 사실 아쉽 긴 해요." 현장을 떠난 것 만이 아쉬운 건 아니다. 후배들 의 열정 하나하 나를 고스란히 지켜줄 수 없다 는 것도 아쉬움 중 하나다. "현장에 있을 때는 제가 맡은 종목만 열심히 취재하면 되니 까 오히려 마음 이 편했던 것 같 아요. 그런데 지 금은 스포츠 뉴 스에 대한 시청 자들의 관심이 기자의 해설보 다는 영상, 특정 종목에 대한 보 도보다는 스포 츠 스타에 대한 보도에 쏠려 있 거든요. 그러다 보니 여러 비인 지금은 데스크로서 후배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박현철 부장. 기 종목을 취재 하는 후배들은 그 종목의 룰에 94년, KBS 스포츠 취재기자 1기로 대해 공부하고 열심히 취재해도 리 입사했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에서 포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적거든요. 골프, 피겨, 체조, 양궁, 요트까지 거 그런 부분이 안타까울 때가 많지만 의 모든 스포츠 종목의 취재 현장에 현장을 뛰는 기자들은 자신이 맡은 있었다. 올해 초 부장으로 발령이 나 종목을 취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 면서 현장은 잠시 떠나게 됐지만 20 고 저는 데스크로서 어떤 아이템을 년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취사선택해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것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박현철 KBS 인지를 고민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 스포츠취재부장. 각해요." "스포츠를 워낙 좋아해서 자연스럽 20년간 스포츠 취재 현장을 지켜온 게 택하게 된 길이예요. 20년 동안 오 만큼 굵직한 국제대회 현장에도 물론 아테네 스페셜올림픽 특별히 기억에 남아 국민들이 열광하는 현장에 있었던 건 행운 직 스포츠 분야만 취재한 덕에 인기 종목, 비인기 종목 할 것 없이 모든 스 포츠 종목을 한 번은 취재해 본 것 같 아요. 개인적으로도 기자로도 쉽게 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죠. 경험 이 쌓이고 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면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올림픽보다는 패럴림픽과 더 인연이 깊었고 그래서 스포츠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올림픽 시즌에는 개최지에 가서 취 재하는 것보다 서울 수신팀에서 기사 를 쓴 적이 더 많았어요. 올림픽 현장 취재와 인연이 좀 없었던 셈이죠. 그 런데 유난히 패럴림픽과는 인연이 깊 었어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패 럴림픽, 2004년 아테네 하계 패럴림 픽, 2006년 토리노 동계 패럴림픽, 2010년 밴쿠버 동계 패럴림픽 등 웬 만한 패럴림픽 취재는 다 다녔죠. 그 러면서 스포츠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 라지더라고요. 사실 스포츠가 상업화 된 지 오래잖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패럴림픽도 상업화돼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러나 2011년 아테네 스페셜올림 픽을 취재하면서 이런 아쉬움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과도한 경쟁도 없고 승자나 패자, 메달의 색깔도 중요하지 않았죠. "모 두가 챔피언"이라는 대회 슬로건이 그대로 반영된 대회였죠. 대회 초반 에 아테네에 갔는데 대회를 지켜보다 가 더 있고 싶어서 대회가 끝나는 날 까지 남아 있었어요. 20년간 스포츠 분야를 취재해왔지만 선수들에게 진 심으로 동화돼 응원하고 있는 저를 데 후배 기자가 한 번 인터뷰를 한 적 이 있는데 저의 안부를 물었다고 하 더라고요. 사실 놀랐어요. 수많은 취 재진을 만나고 인터뷰를 할 텐데 그 중 하나였던 저를 기억한다는 건 그 만큼 사람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않 는다는 뜻이잖아요. 이승엽 선수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언론 을 통해 노출이 됐는데 선수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배울 점이 참 많다 는 생각을 했어요." 다양한 종목을 취재하다보니 생각 지도 못한 분야에서 취미가 생기기 도 했다. "요트 담당 기자를 한 적이 있었는 데 그 때는 취재만 했지 특별히 요트 에 대해 관심을 갖진 않았거든요. 그 러다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내친 김에 자격증까지 따게 됐어요. 얼마 전에는 시운전도 했고요. 그런데 요 트가 결코 우아한 스포츠가 아니더라 고요. 멀미에 파도에 배를 타고 나가 면 그 때부터 사실 고생이거든요. 그 래도 새로운 취미에 도전했다는 게 요트 종목 취재하다 자격증까지 따기도 데스크 역할에 대한 고민 끊임없이 해야 보면서 이 대회가 주는 의미가 참 남 다르다는 생각을 들더라고요. 스포츠 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취재 현장은 곧 역사의 현장이고 그 래서 기자들에게는 현장만큼 매력적 인 곳은 없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국민들이 열광하는 바로 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다는 게 늘 매 력적이었어요. 그때마다 참 운이 좋 구나라는 생각을 했고요. 물론 늘 즐 겁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특정 스포 츠는 경기가 끝나는 시간을 알 수 없 기 때문에 리포트를 위해서 한없이 대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죠. 야구 가 특히 그런 편인데 그럴 땐 좀 지치 기도 했죠." 다양한 분야의 스포츠 종목을 취재 해 온 만큼 울림을 주는 존재도 있다. 이승엽 선수가 대표적이다. "이승엽 선수와 인터뷰를 몇 번 하 긴 했지만 특별히 저와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사적으로 만 난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를 기 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런 개인적으로는 보람이 있더라고요." 그는 대체로 행복한 기자 시절을 보 냈고 지금도 그 순간에 놓여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시간이 지속되길 꿈 꾼다. "20년간 취재 현장을 누볐고 이제 데스크로서 후배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어 요.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지사 지더라고요. 후배들이 어떤 얘기라도 할 수 있게 귀를 열고 분위기를 만들 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년이 15년 정도 남은 만큼 저에게 더 많은 길이 열려 있다고 생 각해요. 지금까지 축적한 노하우를 좀 더 확장된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 다면 좋겠죠. 기자로서도 더 넓은 시 야를 확보하려면 스포츠 제작, 사업 분야까지 일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번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만큼 제가 쌓 은 노하우를 활용할 기회가 주어진다 면 기꺼이 쏟아내야죠." 박성희 기자 bjc@kbjc.net
12 174호 2013년 9월 15일(일요일) 입은재앙의문이다 유희근의논어이야기(17) 1. 전전긍긍 전전긍긍(戰戰 兢兢)하여, 여림심 연(如臨深淵)하며, 여리박빙(如履薄 氷)하라. 전하고 긍 긍하여, 깊은 못에 유희근 임한 듯이 하고, 청소년 적십자 후원회 부회장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논어 중에서 <태백편>에 나온다. 이 말은 본래 사서삼경 중에서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증자가 죽음에 이르러 제자들을 모 아놓고 유언하면서 시경의 이 구절을 인용 한 것이다. 여기 전전긍긍이라는 말이 나 온다. 우리는 이 말을 "무엇을 이루기 위해 서 초조한 나머지 잠 못 이루고, 좌불안석 (坐不安席)하는 것"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전쟁터에 임한 듯, 조금도 허 점을 보이지 말고 조심하라."는 뜻이다. 2. 권력을 함부로 전전(戰戰)은 두려워함이고 긍긍(兢兢)은 경계하고 삼가라는 뜻이다.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고, 돈으로 권력과 결탁하지 말고, 여색을 조심하라는 뜻과 같다. 재벌 그룹 총수로부터 수십만 달러와 최고급 시 계를 받은 국세청 간부들이 좁은 감방에 수감됐다. 건설업자로부터 돈을 받은 고위 층 인사들이 철창신세를 지고 있다. 외국 에서 국가대사를 앞두고 술과 여자에 얽힌 일로 국가적 망신을 초래한 사람도 있다. " 전쟁터에 임한 듯 조금도 허점을 보이지 말고,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조심하라." 특히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 게 딱 맞는 말이다. 3. 입은 재앙의 문 면,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라. "입은 재앙 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 죽이는 살육과 부정부패가 휩쓸던 때였다. 아무리 조정에서 불렀지만 그는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5. 멸사봉공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행을 조심 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러 나 국민의 지도자라는 국회의원들은 오히 려 이와 반대로, 언행을 함부로 한다. 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들이 앞뒤 안 가리고 폭 언을 퍼붓는다. 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말 잘하는 사 람을 다음과 같이 송곳처럼 찔렀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 그러 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망을 갖 추고 있지는 않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재주 때문에 유명해지는 것이지, 반드 시 덕망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 풍도가 쓴 다음의 시를 잘 새겨보자.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요, 설시참신도 (舌是斬身刀)라.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이 4. 천하에 도(道)가 없으면 과거에 훌륭한 인물은 천하가 바르게 다 스려지지 않고 간신들이 우굴 거릴 때는 벼슬길에 나아가질 않았다. 자신의 바른 뜻을 가슴속에 감추고 일체 조정에 나타나 지 않은 채 숨어 지냈다. 여리박빙처럼 살 아간 것이다. 진(晉)나라가 남쪽으로 달아 나 동진(東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때이다. 동진시대 최고의 명문집안 출신으로서 사안(謝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벼 슬을 마다하고 당시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 던 왕희지 등과 어울리면서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문벌들이 서 로 권력을 차지하려 이전투구를 하는 바람 에 나라가 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나라에 도(道)가 서지 못하고 서로 죽고 그러다가 권력싸움에서 문벌들이 대장군 의 손아귀에 청소를 당했다. 그때서야 그 는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드디어 재상에까 지 오르게 되었다. 그 후 북쪽에서 동진을 멸망시키려고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백만 대군을 앞세워 쳐들어 왔다. 그는 동 생과 조카들을 앞세워 군사를 몰아, 피비 린내 나는 혈투 끝에 부견의 백 만 군대를 패퇴시키며 대승을 거뒀다. 이처럼 옛사람 들은, 때가 아니면 벼슬을 마다하고, 여리 박빙(如履薄氷) 즉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 처럼 조심스럽게 살아갔다. 그러다가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했 다.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태반이 아닐까? (12) 명인명창 사관학교 '권번' 3 1독립선언의 33인 대표 의암 손병희 (義菴 孫秉熙 1861~1922)는 서출이었다. 청주 부유한 집안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적 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냉대와 괄시를 받았 다. 집안의 푸대접은 소년 손병희에게 불 우한 이웃들에 눈을 뜨게 해 후에 동학농 민혁명에 가담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단초가 된다. 손병희의 독립운동 여정엔 평양권번의 주월산(朱月山)이 있었다. 평양기생 주월 산은 기예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도 깊어 의암의 독립운동 후원자이자 절친이었다. 손병희가 일군에 쫓길 때는 권번은 초기의 유부기시대를 거친 후 20 세미만의 어린여성들을 선발해 본격적인 기생양성에 들어간다. 시조, 음곡, 무용, 서 예는 물론 예절교육까지 시켰다. 활동범위 가 넓어지면서 경기민요, 서도소리까지 이 수시켰다. 3년 과정을 거치면 졸업과 동시 에 기생자격을 주었다. 요즘 음악교육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전문음악교육기 관이 없던 시절에 권번은 당연히 명인명창 의 산실이 되었다.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 을 두고 요정에 나가 화대를 받고 세금도 냈다. 20대 중반이면 벌써 노기취급을 받 아 퇴출되었다. 개화기에 서양문물이 유입 되면서 권번의 인기도 높아졌다. 서울에만 한성, 조선, 한양, 종로 등 4개 권번이 성업 했고 소속기생이 1천500여명까지 이르렀 다. 평양, 부산, 대구, 함흥, 진주에도 권번 이 있었다. 조선권번의 중심에는 근세가곡의 거장 하규일이 있다. 금하 하규일(琴下 河圭一 1867~1937)은 서울 출신으로 소시 때 음 악수업을 받았으나 31살에 한성재판소 판 김철호 전 MBC 해설위원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자금도 지원했다. 의 암이 출소 후 와병 중일땐 꾸준히 병상을 지켰고 사후엔 무덤에 뜨거운 눈물을 여러 번 뿌렸다. 상을 치른 뒤 기생을 접고 동경 유학을 다녀와 독신으로 지냈다. 권번(券番)은 민족항일기에 기생들의 노 동조합으로 출발했다. 관기시절엔 궁중에 적을 두고 약방이나 상방에서 약을 달이 고 바느질을 하다가 궁중 항연 때 노래와 춤을 추었다.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가 관 기제도를 폐지하자 관기들이 모여 광교조 합(廣橋組合)을 결성한다. 광교조합은 뒤 에 한성권번으로 개칭되는데(1914) 이것 이 조선 최초의 권번이다. 권번 기생들은 초기엔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들이었 다. 예의범절이 밝고 남편 외의 다른 남자 와의 방사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어떤 친 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한성권번의 산 홍을 소실로 삼으려하자 산홍은 "기생에 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 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해 의기의 맥을 이었다. 사로 벼슬길에 오른다. 전남 독쇄관과 진 안 군수를 지낸 뒤 국권 상실 후엔 벼슬을 구하지 않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하규일은 서울에서 대동권번과 조선권번을 잇달아 창립했는데 조선권번은 서울의 대표권번 으로 1920~1930년대에 3천여명의 기생 을 배출했다. 조선권번의 기생들은 이제 막 전파를 타 기 시작한 경성방송(JODK)에 본격적으로 출연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권번기생 빼고는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방송 출연은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가 주도 했다. 이들은 소위 연예인의 효시로 대중 의 인기를 끌었다. 영화계도 기생판이었 다. 무성영화시절 잘 나가던 여우 트로이 카 이월희, 석금성, 복혜숙도 권번 출신이 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의 주연 신일 선까지 평양 기성권번의 김옥엽은 가곡, 가사, 경 기민요, 궁중무용이 탁월해 권번안에서는 <13면에 계속>
16 2013년 9월 15일(일요일)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