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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병원소식지-6월

Transcription: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통일과 인문학 김성민 (건국대 교수)

C O N T E N T S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1. 통일인문학의 의미 6 2. 통일인문학의 필요성 10 3. 사람의 통일과 통일인문학 15 1. 소통의 개념과 방법 22 2. 소통과 남북관계 26 3. 남북 간의 소통 전략 35 1. 역사적 트라우마 48 2.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58 3.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방향 66 제2장 소통과 통일 제3장 치유와 통일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통일과 인문학 제4장 통합과 통일 1. 사람의 통일 76 2. 민족공통성 및 협력의 아비투스의 생성 85 3. 한민족 네트워크의 형성과 민족적 합력의 창출 94 제5장 통일인문학의 활성화 방향 1. 통일인문학의 의의 100 2. 통일인문학의 활성화 방향 105

1장 제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1. 통일인문학의 의미 2. 통일인문학의 필요성 3. 사람의 통일과 통일인문학

제1 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1. 통일인문학의 의미 1) 통일과 인문학의 만남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일인문학 이란 용어는 통일 과 인문학 을 결합한 단순한 통 조어( 造 語 )가 아니라, 인문학적 관점에서 통일담론을 성 찰하려는 인문학자들의 주체적 의지를 담은 말이면서, 객관적으로는 통일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은 당장 사회 발전 도구로서는 쓸모 가 없다고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자신의 관심과 사유도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에서 유리된 경우가 많았다. 분단 현실에서 통 일은 우리의 미래를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인 문학 영역에서 분단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이론화가 빈약했다. 6

인문학이 통일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한 것은 통일을 정치 경 제적인 체제통합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 본적으로는 70여년의 오랜 분단을 거치면서 우리의 정서와 욕망 그 리고 생활습관이 분단현실에 길들여져 있던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분단이 공동체의 바람직한 발전과 개인의 자유로운 삶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분단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불감증이 만연하면서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의 진척을 가로막아 왔던 것이다. 통일인문학 은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 생성되어야 할 인간적 가치 를 추구하는 인문정신에 입각하여 이상과 같은 인문학의 학문적 상 황을 반성하고, 지금 여기의 분단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비판 적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살아 있는 통일연구가 절실히 필요하 다는 자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세계적 냉전이 끝난 직후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향 하기 위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될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그 첫 번째 산물이 남북의 상호 인정, 화해 협력을 합의한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 로 규정함으로써 남북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상호교류와 협력을 통해 통일로 나아갈 것을 합의하였다. 이러한 탈냉전 이후의 정세가 통일인문학 곧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의 길을 열어 놓았다. 7

통일이 개방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상호이해와 교류를 심화 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통일에 이르는 길은 그에 걸 맞는 새로 운 통일론을 요구한다. 이는 남북의 평화 공존이 절실한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의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될 통일 이후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통일의 과정은 언제나 예 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체제통합이 먼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체제통합 역시 결국 구성원들 사이의 가치와 정서와 그리고 문화의 소통과 통합을 요청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문학적 통일론이 여 전히 중요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2) 통일인문학의 의미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통일인문학은 사회구조와 체제보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중 심에 두는 통일담론이다. 기존 통일담론은 체제이념 중심, 사회구조 적 맥락을 중심에 두고 있다. 정치 경제적인 거시적 연구에 기초한 남북의 체제 비교 평가가 중심이 됨으로써 사람과 무관하며 일상과 분리된 통일담론이었다. 이에 비해 통일인문학은 정치와 경제 등 이 념, 구조 중심의 통일담론보다는 사람과 삶의 방식을 중시한다. 통일 인문학은 정치 경제적 의미의 통일이 아닌 이질적인 사람끼리 조화 롭게 사는 사람의 통일에 초점을 두며, 또한 살아 있는 구체적인 나 의 존재가 포함된 통일담론을 지향한다. 사회과학이 사회제도와 절차, 구조의 문제들에 집중한다면 인문학 8

은 인간의 가치와 의미, 정서들에 집중한다. 사회과학적 지식은 주로 인간을 그 내면이나 주체의 측면에서 다루기보다는 외면적으로, 그 리고 수량화하여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고뇌, 욕망, 이상 등은 사상( 捨 象 )되고 만다. 이에 반해 인문학은 인간의 주체성, 욕망과 정서, 좌절과 희망 등 온갖 다양한 인간적 태도, 가치를 탐구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 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서와 욕망, 사랑과 증오, 기대와 좌절 등 인 간의 내면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람다움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면서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을 수행하 며, 인간의 삶에서 부단히 제기되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를 사유한다. 우리가 단순한 정치 경제적인 체제의 통일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 람끼리 조화롭게 사는 통일에 초점을 둔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 문학의 토대 위에 설 수밖에 없다. 통일인문학은 인간의 주체성과 감 수성, 욕망을 중시하기 때문에 분단으로 인한 여러 상처와 고통을 치 유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통일인문학은 한 마디로 말해 정치 경제 적인 체제통합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 통일담론을 넘어서 가치 정 서 생활상의 공통성을 창출하는 통일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그렇다면 통일을 정치 경제적 통합 이전에 가치 정서 문화의 통 합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치 정서 문화의 통합 은 정치 경제의 통합을 떠받치는 바탕이자 통일을 진정한 사회적 통 9

합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남북은 지난 70년 동안 적 대와 대립을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 정서 생활문화 를 형성해왔다. 따라서 가치 정서 생활문화의 통합노력 없이 통일 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면 통일 이후 우리는 양 지역 사이의 이질성과 배타성, 통합 과정에서의 상처로 인해 극심한 갈등과 사회통합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사회문화적 통합 노력 없이 진행되는 분단극복의 과정은 체제통합 이후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회변동에서 바뀌기 어려운 것은 체제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 배 어있는 가치 정서 문화적인 습성이다. 분단의 흔적은 비록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일상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일 인문학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긴 분단의 흔적과 상처들, 남북 생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활세계에 대한 차이와 공통성에 대해 성찰함은 물론 이를 통해 분단 을 극복할 수 있는 통일 한반도의 가치와 미래상, 곧 통일의 인문적 비전을 모색한다. 2. 통일인문학의 필요성 1)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는 통일의 인문적 비전 오늘날 세계질서는 국가우선이든 민족우선이든 기존의 통일담론 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냉전질서 해체와 함께 10

세계화의 급진전은 국가와 민족 양자의 의미를 급격히 감소시키고 있다. 이처럼 국민국가의 위상 자체가 현저히 달라지고 있을 뿐만 아 니라 인권과 생태 등 인류보편적 가치가 확산되고, 민족이라는 집단 적 정체성 외에도 개인적 차원에서 전지구적 차원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기존 통일담론은 체제통합 과 단일 민족국가 형성을 부동의 전제로 삼고 있어 이런 21세기적 사 상지형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이 함께 하는 통 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에 그치지 않고 기존 통일방안이 담아 내지 못하는 전지구적 사상지형 까지 포괄할 수 있는 한반도 통일의 비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세계는 생태 위기가 전인류적 위기로 부각되고 인권이념이 전세계 적으로 확산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 인권과 환경의 보편적 가치에 대 한 범세계적인 자각과 대안이 모색되는 상황에서, 자유와 평등의 조 화, 생태적 모순의 극복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지향을 담아내는 통일 담론이 요구된다. 단순히 같은 민족이기에 단일 민족국가를 수립하 자는 것이 아니라 단일 민족국가의 수립이 인류보편적 가치를 적극 적으로 끌어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뿐만 아니라 국가주도의 통일논의나 민족주의적 단일 주체 모형 을 넘어 시민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통일론의 정립이 요청된다. 이는 통일을 20세기형 국민국가의 실현, 분단 이 전의 민족공동체 회복이라는 단선적이고 정형화된 틀로 이해하는 것 에서 벗어나,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과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 11

현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정치공동체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을 미래지향적 정치공동체의 수립으로 이해할 때, 한민 족 전체의 미래적 비전과 희망을 담은 보다 풍부한 통일논의의 지평 이 열릴 수 있다. 2) 분단현실에 대한 총체적 이해 분단현실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은 구조론적 접근이 대부분이며, 분단현실을 설명하는 데 흔히 동원되는 용어는 분단체제 혹은 분단 구조 와 분단질서 다. 분단 이후 대립과 적대를 되풀이한 남북관계는 그것을 지속시킨 구조적 힘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방법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1) 그러나 분단체제 혹은 분단구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조 는 남북의 체제대립만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속에 살고 있는 남 북 주민의 일상적 삶 속에서 내면화되어 있다. 분단체제는 인간의 의 식과 행위, 욕망의 매개 없이 그냥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삶의 방식과 인간 내면에서 작동하는 분단서사 2) 를 통해 재생산된다. 분단 의 상처와 적대, 그리고 사회 구성원의 내면 속에 체화된 부정적인 분 단서사는 분단체제의 모순 못지않게 그러한 모순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삶의 방식도 동시에 문제 삼을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1) 이병수, 분단트라우마의 유형과 치유방향, 통일인문학 제52집, 2011, p. 49. 2) 서 사 ( 敍 事, narrative)는 인간 행위와 관련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드러내는 양식으로, 문학, 담론, 영화, 나아가 인간의 삶의 방식 등에 폭 넓게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분단서사란 분 단체제 아래 우리의 일상에 뿌리를 내린 삶의 방식으로, 남북의 적대성을 강화하는 정서 적이거나 이념적인 믿음과 성향을 가리킨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분단 및 통일에 대한 기존의 담론은 주로 정치 경제적인 거시적 연구에 기초한 남북의 체제 비교 평가 가 중심이 됨으로써 인간에 대한 문화적이고 내면적인 접근을 결여 하고 있다. 하지만 분단체제가 단순히 체제 및 이념 대립의 차원을 넘어 적대와 원한,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 이산가족의 상처 등 남북주민의 정서와 욕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이러한 인 간 삶의 내면적이고 문화적 차원을 해명하는 인문학적 연구는 당연 히 필요하다. 분단 상황 속에서 남북 주민의 일상적 삶에 분단의 상 처, 생활문화 그리고 가치관 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기존의 구조 론적 접근을 방법론적으로 보완하여 분단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 는 데 도움을 준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3) 인문학적 성찰 오늘날 인문학은 통합적 시각이 부재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 앞 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추상적인 개념의 나열은 있으되 개 념의 구체적 현실적 의미맥락이나 살아 있는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흔히 비판 받는다. 그 동안 인문학은 서구중심의 인식틀에 종 속된 나머지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 뿌리박지 못했으며, 사유와 현실의 한반도적 맥락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인문학이 우리의 현실 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가 분단현실에 대한 인문학적 사 유의 빈곤이다. 한국의 인문학은 우리의 현재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단 극복과 통일의 과제를 본격적으로 사유하지 않았다. 13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적 발전과 양극화, 민주주 의, 환경, 양성평등 등 다양하지만, 다른 나라에 볼 수 없는 우리 사회 만의 고유한 문제는 분단극복과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현실은 이른바 보편적 인 서구적 이론만으로는 설명 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 특유의 현실을 서구적 보편성에 비추어 우 연적인 요소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서 구적 보편이 보편성의 준거로 여겨진 것은 서구중심의 패권적 질서형 성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진행된 우리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이기도 했다. 서구=보편, 한반도=특수 의 이분법은 이 과정의 산물이다. 서구적 보편을 보편의 대명사로 여기는 과잉보편화 의 시 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국 인문학의 주체성은 극복될 수 없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한국 인문학의 학문적 주체성은 서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반도 의 특수성을 특권적으로 이상화하는 과잉특수화 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우리 자신의 특수한 현실 속에서 보편적 요소를 발전적으로 재구 성하는 데 있다. 즉 한국 인문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길은 우리의 역사, 경험, 현실 속에서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서 보편적 공감을 갖 는 요소를 발견하는 데 있다. 서구적 가치와 제도의 재현으로는 해결 하기 어려운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열려있는 인문학적 성찰의 구체성과 주체성을 획득하 는 데 있어 중요한 과제다. 14

3. 사람의 통일과 통일인문학 1) 사람의 통일 과 통일 패러다임의 전환 토마스 쿤(Thomas Kuhn)에 따르면 패러다임 은 해당 학문 분야 의 지배적인 접근 방법이나 공유하는 관점으로서 문제를 다루고 해 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어떤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가이드라인 을 제시해 준다. 기존 통일담론은 이질적인 남북의 두 정치 경제적 체제가 통합된 하나의 국가를 상정하면서 통일의 주제와 내용을 설 정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데 익숙하다는 점에서 정치 경 제적인 연구에 기초한 체제 중심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기간 동안 남북은 분단 극복과 통일은 이념과 체제를 하나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민족사적 당위성 차원 에서 단일한 국민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했 다. 정치 경제적인 거시적 연구에 기초한 체제 중심의 통일담론은 이러한 관념의 산물이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체제 중심의 통일담론은 우선 분단을 냉전적인 체제대립으로 환원 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은 남북 사회체제의 특징뿐만 아니라 문화현 상으로부터 개인의 일상적 행위와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 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분단은 단순히 정치경제 체제의 분열 만이 아니라 그 체제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가치 정서 문화의 분 열이기도 하다. 또한 체제 중심의 통일담론은 통일을 서로 다른 두 15

개의 정치 경제 체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 나 하나의 체제로 통합된 단일 국민국가를 목표로 하는 통일은 분단 국의 통일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 히 한반도의 경우, 체제갈등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비화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체제통합을 지향한 통일은 그것이 쟁점화 될수록 오히려 통일에서 멀어질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중심의 기존 통일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 운 통일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것은 통일이 단순히 체제의 통합만 이 아니라 남북 주민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 문 화적 통합, 곧 사람의 통일 이라는 관점이다. 3) 독일 통일은 사회 문 화적 통합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체제상의 통일을 맞았기 때문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에 통일이 된 후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독일보다 분단기간이 더 길 고 적대성이 훨씬 첨예한 한반도의 경우,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의 노 력과 적대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통일 한반도를 건설하는 과제는 단순히 두 국가나 체제를 하나로 통합하 는 차원을 넘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 아가는 사람의 통일을 요구한다. 남북의 소통과 치유과정이 생략된 체제통일은 전쟁 등 극단적 방식을 함축한다. 분단 역사에서 빚어진 남북의 상처를 보듬지 않고 이루어지는 통 일은 혼란과 파국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교 3) 김성민 외 지음, 철학의 시대, 해냄, 2013, p. 200. 16

류 확대와 상호 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의 축적과 사람들 사이의 욕망 과 정서적 교감을 확장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은 사람의 통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2) 통일인문학의 패러다임 사람의 통일 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론은 남북 주민들 사이의 정서적 문화적 소통, 분단 상처의 치유 그리고 가치 정서 생활상의 통합을 창출하려는 소통 치유 통합의 노력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곧 소통 치유 통합의 통일 인문학 은 체제이념 중심, 정치 경제적인 거시적 연구에 기초한 기 존의 통일 패러다임을 넘어서, 사람의 통일 이란 관점에서 남북이 소 통함으로써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하는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첫째, 소통의 패러다임 이다. 남북의 소통은 정치나 경제 교류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내면화된 적대적 생활문화를 극복하고 서로를 내 면적으로 이해하는 정서의 교감을 포함한다. 왜냐 하면 경제적 이익 과 실용성 혹은 이념적 가치체계를 앞세우는 태도만으로는 남북 사 이에 소통과 교감의 지평을 여는 데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통 은 타자성 을 배제하는 자아중심적 독백을 벗어나 가르치고 배우면 서 규칙을 만들어가는 미래 생산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남북소통 은 상대를 자신과 동일화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각자를 변화시키려 는 의지를 동반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통만이 세계사에 17

서 유래 없는 장기간의 휴전체제를 종식시키고 교류협력 과정을 활 성화하며, 평화 공존의 틀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한다. 둘째, 치유의 패러다임 이다. 분단 70년 동안 남북 사이에는 엄청 난 군사비 지출과 군사적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북 은 단순한 체제 간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하면 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였으며, 이는 남북 주민들의 정서와 가치 관 그리고 생활문화 등 일상적 삶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리하 여 남북이 긴장관계에 있을 때마다 증오와 불신의 집단심리적 결집 을 불러오는 등 상호 적대성이 일상적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 서 정치구조적 차원에서 남북 평화와 소통의 틀을 만들어가는 노력 은 물론, 일상적 삶 속에서 내면화된 원한과 적대 감정을 극복하는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것이 중요한 과제다. 치유는 원한과 적대의 감정 속에서 남북 주민의 집단적 인격형성 을 왜곡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새로 운 남북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다. 곧 치유는 분단체제의 사회심 리 (적대성)를 극복하고 통일의 사회심리, 남북의 새로운 문화를 만 드는 데 있다. 셋째, 통합의 패러다임 이다. 통합은 통일한국의 공통적인 가치 정서 생활문화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0년 동안 분 단의 적대성과 상처의 악순환이 이어졌고, 분단체제 속에서 내면화 된 정서와 가치, 그리고 생활문화의 이질성이 심화되어왔다. 따라서 18

통합은 단순히 민족동질성의 회복이 될 수 없다. 남북의 통합은 한민 족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혈연, 언어, 관습 등을 기준 으로 단일화된 민족동질성의 회복이 아니라, 남북의 이질성이 서로 부딪혀 새로운 민족적 공통성을 창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시 말해 민족공통성은 한민족공동체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 라 남북 주민들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서 미래적으로 생성되어야 할 공통의 가치 정서 문화 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통합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운데 남북의 상호소통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가 치 정서 생활문화의 공통 규칙을 서서히 그리고 새롭게 형성하는 미래기획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4) 제1장 통일의 인문학적 접근 4) 같은 책, p. 204. 19

12장 제 소통과 통일의 통일 인문학적 접근 1. 소통의 통일인문학의 개념과의미 방법 2. 소통과 통일인문학의 남북관계 필요성 3. 남북 사람의 간의 통일과 소통통일인문학 전략

제2 장 소통과 통일 1. 소통의 개념과 방법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소통이란 글자 그대로 트여서 통함( 疏 : 트일 소+ 通 : 통할 통) 을 의미한다. 통한다 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과 어떤 것이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 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둘 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만일 동일한 위치와 부피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물통을 연결한다면 그 사이에서 물은 흐르지 않는다. 따라서 통한다 는 것은 항상 두 개의 개체만이 아니라 그것도 서로 다른 두 개체라는 것을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트인다 는 것은 그 둘 사이에 무언가 가로막힌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일 두 개의 물통 사이에 막힌 것이 없 다면 그것은 굳이 트이게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말 대화 라는 표현에 대응하는 영어식 표현인 dialogue 는 어원상 둘 사이를 통과하여(dia) 흐르는 말(logos)에서 나 22

온 것이며 의사소통( 意 思 疏 通 )이라는 말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둘 이상의 사람이, 또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 이라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모든 개념 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단순한 둘 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둘 이라는 존재론과 둘 사이에 존재하는 막힘 이라는 장애물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소통이란 서로 다른 두 개체 사이에 존재하는 다름 과 막힘 을 뚫는 말 을 나누는 만남과 대화의 과정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소통 의 출발점이 되는 둘 의 차이 와 막힘 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만나서 대화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 들은 특정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나 오해가 발생하면 만나서 이야 기하다 보면 다 돼! 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대화를 한다 는 것은 그들이 서로 무언가 다른 게 있거나 막힌 것 이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소통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그가 만나거나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욕망과 가치 등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둘 이라는 점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제2장 소통과 통일 그러나 이런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식만으로 소통할 수 없는 관계 도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이제 막 서로의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다름과 차이 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쉽게 소통의 길 은 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만나서 지내온 역사가 많은 두 사람 23

의 경우, 이런 차이나 다름에 대한 인식만으로 소통으로 나아가기 어 려운 경우가 많다. 왜냐 하면 그들 사이에는 차이 나 다름 이외에 이전부터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 속에서 형성된 막힘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들의 만남이나 대화는 그들이 가진 차이와 다름에 대해서 존중하고 배려함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실패하는 경우 가 많다. 이것은 그 둘 사이에는 서로의 말이나 몸짓, 대화를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합리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가족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 나 대화는 종종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며 사랑하다가 지금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이런 사례들이 극명하게 드러난 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만남과 대화는 단순히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나누는 것만으로 되지 않으며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막힘 을 뚫는 것이다. 막힘 은 나의 욕망에 대해 거리 를 두고 상대의 욕망을 고려하면서 그 차이를 냉정하게 보는 이성적 사유 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둘 사이의 만남이나 대화는 막힘 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것을 뚫기 위해서 상대의 욕망 가치 정서들을 고려한 보다 복잡한 소통의 전 략을 필요로 한다. 남과 북의 만남과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과 북은 같은 민족 임에도 불구하고 6 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분 단 이후 서로를 불신하고 위협하는 적대관계 로 지낸 온 역사를 가지 24

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북 간의 만남과 대화만을 주장하는 경 우가 많다. 그러나 만남과 대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복잡하게 뒤엉킨 가족사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보 여주듯이 남북관계 또한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막힘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남과 북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서로 공통 의 합의를 이끌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것이 서로 간의 불신과 적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관계에서의 소통적 관계맺음은 단순히 차이와 다름 에 대한 인식만으로 부족하며 남북의 적대적 대립관계가 만들어온 상호 불신과 적대라는 막힘 을 풀어가는 소통의 전략 이 필요하다. 또한, 그것은 단순한 정치 경제적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적 판단으 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합리적인 판 단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감정적 대립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대화가 막힌 것 을 뚫고 흐르는 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는 사람의 가치와 욕망, 마음을 헤아리는 인문학적 지혜 와 둘의 철 학 에 근거한 소통의 전략 이 필요하다. 제2장 소통과 통일 또한,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대화만을 주장하면서 남북이 만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남과 북이 만나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동의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식의 낙관주의 에 빠지거나 그와 반대로 몇 번의 만남이나 대화에서 합의나 동의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한 대화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남북관계 25

를 풀 방법이 없다는 식의 회의주의 를 벗어나 남과 북의 만남과 대 화 에는 소통을 만들어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남북 의 차이와 다름, 막힘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따져보고 이를 뚫고 흐 르는 말을 생산하는 소통의 전략 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2. 소통과 남북관계 1) 남북관계의 특수성 남북관계는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집단 간의 관계이지만, 이것 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또한 지니고 있다. 남북관계는 한국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미국, 한국 중국, 한국 영국과 맺는 관계들과 동일하지 않다. 대한 민국 정부에 외교부 이외에 통일부 가 있는 것처럼 남북관계는 이 런 국가들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인 특수 관계 라는 점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소통적 관계맺음은 통일 지향의 관계 라는 독특 성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 통일의 당위성은 기본적으로 남과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 와 전통,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민족 이며 서로가 같은 민 족이라는 동일화의 욕망 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한민 족은 삼국통일 이래 하나의 정치체로서의 국가(states), 즉 홉스봄 26

(Hobsbawm)이 말하는 역사적 국가(historical states) 5) 를 형성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어떤 다른 종족들이나 국민들에 비해서 강 한 동일화의 욕망 과 민족주의적 열정 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남북 관계의 소통이 시작될 수 있는 첫 번째 지점은 이런 민족적 동일화의 욕망을 승인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와 같은 남북의 민족적 동일화의 욕망을 승인하고 남북관계의 독특성을 반영한 최초의 합의문은 7 4남북공 동성명 이었다. 1972년 남북 정상은 분단 이후 적대적이었던 남북관 계를 청산하고 조국통일 3대원칙 하에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7 4 남북공동성명 을 발표하였다. 이 때 조국통일 3대원칙에 대한 제2장 소통과 통일 합의를 이끌어낸 근본적인 지점은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적 동일화 의 욕망과 통일의 당위성 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73년 우리 정부는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6 23 선언) 을 발표 하였다. 이것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남과 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조치로 제안된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남북한이 유엔 에 동시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남쪽이 6 23 선언 을 발표한 바로 그 날, 북한은 체코공산 당 대표단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정책을 5) 홉스봄(Eric John Hobsbawm), 강명세 옮김,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창작과 비 평사, 2008, p. 94. 27

두 개의 조선 이라는 민족 분열 책동이라고 맹비난했다. 6) 대신에 그 들은 이틀 후인 6월 2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 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의 역사적 기원이 되 는 조국통일 5대 방침 을 발표 7) 하였고, 이후 줄곧 남북한 유엔 동시가 입 정책을 비난해 왔다. 북한은 같은 민족 이라는 점만을 내세워 남한 의 유엔 동시가입 정책을 반민족적 인 것으로 매도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북한은 남북합의서 내용 중 우리 민족끼리 만을 내세우면 서 남한이 과거 남북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 다. 남한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 하고 있는 평화정착 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1990년 9월에 이루어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한반도가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현실적으로 분단 되어 있다는 점을 승인함으로써 적대적 대결을 청 산하고 평화를 가져온 공헌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북한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두 개의 조선 정책이며 민족의 분 6) 김일성,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 김일성 저작집 28권, 조선로동당 출 판사, 1984, pp. 390-392. 7) 김일성,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단결 10대 강령, 김일성 저작집 44권, 조선로동당출판 사, 1996, pp. 161-164. 북은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이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정신을 오 늘의 현실에 맞게 발전시킨 것 (김일성, 조국통일의 유일한 출로는 전민족의 대단결이다, 김일성 저작집 44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p. 166)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것이 정착되어가는 역사적 과정은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회의 연설에서 내놓은 조국통일 5대 방침, 1991년 8월 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 측본부 간부들과의 담화를 거쳐 1993년 4월 5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 령 으로 정립되었다. 28

단을 영구화하는 정책이라고 맹비난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남북 한 유엔 동시가입이 가져온 결과는 오히려 이와 정반대였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진 다음해인 1991년 12월에 남북기본합의서 가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의 두 정상은 쌍 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 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 하고 있다. 여 기서 남과 북은 모두 평화통일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둘 로 자 리매김 되어 있다. 물론 남북기본합의서도 전문에 7 4 남북공동성명 의 역사적 계승 을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7 4 남북공동성명의 출발점이 되었던 같 은 민족 이라는 민족적 욕망 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기본합의서는 통일의 문제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 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 계 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듯이 과정으로서의 통일 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전 진시켜 놓았다. 즉, 7 4 남북공동성명이 민족적 동일화의 욕망에 근 거한 통일의 당위성을 명문화하면서 남북관계를 열어놓았다면 남북 기본합의서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남과 북 이라는 둘을 도입하고 평 화로운 관계 구축 으로 나아간 것이다. 제2장 소통과 통일 그러므로 7 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에 작동하는 민족 이라는 유대 29

의 끈을 활용하여 남북이 하나임을 주창하고 그들 사이에 막혀 있던 관계 를 뚫고 남북의 소통을 구축한 사례라고 한다면, 남북기본합의 서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통해서 형성되는 국제관계를 이용하여 남과 북이라는 둘 을 도입하고 그 둘이 함께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 정으로서 통일 이라는 소통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 라서 남북기본합의서는 한국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통해서 북 을 통일 이라는 공동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둘 로 조직해낸 소통의 역사적 사례 라고 할 수 있다. 2) 남북 소통의 출발점: 민족과 평화의 변증법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했듯이 민족은 공동체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로 상상된다. 왜냐 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 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 료 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 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 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 때문이 다. 8) 게다가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는 오랜 역사 동안 형성 되어 온 정치, 경제, 문화적인 동일성을 토양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민족주의적 열정을 부정하면서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는 없다. 8) 베네딕트 앤더선(Benedict Anderson), 윤형숙 옮김,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 파에 대한 성찰, 나남출판, 2003, p. 27. 30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민족주 의는 매우 강력한 동일화의 환상체계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트라우마를 남북의 적대성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위험 또한 매우 강 하게 가지고 있다. 9) 특히, 분단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민족이면서 도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남북은 분단을 극복하려는 강한 민족주의적 열망 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체제로 분단되어 살아오면서 각자가 속한 정 치체제 속에서 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가치 정서 문화적 분열과 더 불어 6 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남과 북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강렬한 동 일성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좌절된 욕망이 낳는 적대적 증오의 감정 제2장 소통과 통일 과 남과 북의 가치 정서 문화 적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 간의 대화는 이런 문제들을 감안하면서 장애물 을 극복하는 방 향에서 지혜롭게 고안된 전략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 북기본합의서는 남과 북 이라는 둘을 도입함으로써 이런 민족적 동 일화 의 위험성들을 제어하면서 평화 를 통일 과 거의 동일한 위상에 서 다루고 있다. 7 4 남북공동선언에서 평화의 원칙 은 단순히 평 9) 민족적 리비도의 개념 정의 및 좌절된 욕망의 상처로서 분단의 트라우마와 관한 논의는 김성민 박영균, 분단의 트라우마에 관한 시론적 성찰, 시대와 철학 제21권 2호, 한국철 학사상연구회, 2010을, 이와 관련된 쟁점에 대한 논의는 박영균, 분단의 사회적 신체와 심 리 분석에서 제기되는 이론적 쟁점, 시대와 철학 제23권 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2 참조하시오. 31

화적 방법, 즉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 적 방법으로 실현 한다는 정도의 의미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 북기본합의서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파괴 전복행위 금지(4조) 와 상 대방에 대한 무력 사용금지(9조) 등을 포함하여 평화관계의 구축을 남북소통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또한, 이런 평화 의 중대한 의미는 최근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제기 되는 평화담론 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담론 중 탈분단 평화론 은 평화 라는 보편적 가치의 우위만을 주장하면서 통일이라 는 개념 자체 를 등한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10) 게다가 탈분 단평화론은 사실상 서구적인 환경에서 정립된 평화 의 의미만을 한 반도에 적용하면서 남북관계에서 작동하는 평화 의 독특한 의미와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평화 의 우선성을 앞세워 통일이라 는 개념 자체 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와 그 이후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평화 라는 개념을 벗어나 있으며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평화 의 개념을 통 일과 연결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사용되는 평화 는 전쟁이 없는 상태(absence of war) 를 의미한다. 여기서 평화 란 현상유지 라는 소극적 평화 개념으로, 국가 간의 정치 군사 외교 적 힘의 균형 등을 통한 세력 균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남북관 10) 권혁범, 통일에서 탈분단으로: 민족동질성 회복론 및 민족번영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통일문제연구 22, 2000, pp. 5-6. 32

계에서 그것은 현재의 분단체제를 단순히 관리하는 데 머무를 수밖 에 없다. 11) 그러나 이것만으로 남북관계는 상호 신뢰와 소통적 관계 를 만들어갈 수 없다. 왜냐 하면 남북관계에서 평화구축은 필연적으 로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한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남북한 유 엔 동시가입이라는 역사적 사례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6 23 선언을 정부가 내놓았을 때, 남쪽 내부에서조차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7 4 남북공동성명의 자주의 원칙 과 민족대단결의 원 칙 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있었다. 과거 동서독이 유엔 에 동시가입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가 특수한 관계라는 것을 밝 히는 기본조약을 체결한 이후 유엔에 동시 가입했지만, 남과 북은 이 런 과정 없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현상적 제2장 소통과 통일 으로 볼 때 분단이 고착화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남북관 계를 두 국가의 분단고착화 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지향하는 특 수 관계 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비정상적인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평 화의 제도화를 위한 기초를 13) 이룩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나 11) 현상유지 와 소극적 평화 개념에 대한 논의는 김명섭, 평화학의 현황과 전망, 하영선 편, 21세기 평화학, 풀빛, 2002, pp. 127-128. 12) 남북기본합의서와 동서독기본조약에 대한 비교 연구는 박정진, 남북기본합의서와 동서 독기본조약 비교: 분단국갈등관리론 모델의 적용, 국제정치논총 제53권 2호, 한국국제 정치학회, 2013 참조. 13) 김진무, 중장기적인 남북기본합의서에 기초한 한반도평화체제구축방안 정립, 북한 439호, 북한연구소, 2008, p. 75. 이런 점에서 남북기본합의서는 평화공존의 장전 이라 33

아갔다. 따라서 평화가 생활의 문제이자 동시에 세계 시민으로서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인식되면서 특수한 가치로서의 즉, 한반 도적 맥락에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통일의 과제와 평화의 과제가 분 리 14) 해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위한 통일 과 통일을 위한 평화 라는 변증법적 관계 15) 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북한처럼 민족대단결 과 같은 원칙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이라는 둘 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는 평화 의 원칙 속에 서 남과 북의 소통을 만들어가는 전략을 세워 가야 한다. 즉, 남북의 소통은 둘 의 인정과 평화의 제도화 라는 조건 위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통일을 추구해 가는 소통의 전략 을 만들어가야 한다. 왜냐 하면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은 과정으로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서 통일 을 촉진하는 전제조건의 창출이라는 현실적 의미로 해석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16) 고 규정하기도 한다.(송영대, 남북기본합의서 20년과 김정은 체제, 통일한국 339호, 평 화문제연구소, 2012, p. 8) 14) 정영철, 한반도의 평화 와 통일 : 이론의 긴장과 현실의 통합, 북한연구학회보 제14권 제2호, p. 201. 15) 같은 글, p. 191. 16) 같은 글, p. 209. 34

3. 남북 간의 소통 전략 1) 둘의 철학에 근거한 소통의 전략 모든 소통의 전략이 그러하듯이 남북의 소통전략 또한 사람들 사 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 의 일반적인 형태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남북의 만남과 대화가 비록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 간 의 대화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남과 북을 대표하는 정부 정책 담당자 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거나 남북의 두 주민들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남북의 소통전략 또한 기본적으로 만남과 대화 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남 북의 소통전략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대화와 만남에서 두 관계가 소통 적 관계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다음의 세 가지 지점에 대한 인 식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제2장 소통과 통일 첫째, 소통의 전략을 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둘의 맺고 있 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 둘이 하나의 관계맺음으로 발전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그들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나누는 특 정한 욕망의 합류가 있기 때문이며, 그 관계 안에서 서로가 특정한 가치나 향유 등의 만족감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둘 이 전적으로 같다거나 모든 측면에서 욕망이 합치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각각의 특수한 관계 35

들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수히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관계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형식과 방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작동하는 두 사람의 욕망이 동일 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제각각 그 관계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이 다르며 그에 따라 그들이 맺는 관계의 형식도 다르다. 예를 들어 사 랑하는 연인관계를 맺고 있는 두 사람이 친구 나 부모 와 맺는 관계 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여 그것을 획득하길 원한다면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상대도 나도 연 인관계에서 서로 원하는 것은 그들의 관계에서만 독특하게 작동하는 욕망이며 그것이 둘을 묶는 끈 이기 때문이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더 나아가, 각각의 관계맺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그들 관계맺 음의 방식과 대화의 태도와 형식들을 규정한다는 점에서도 각각의 관 계맺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대하는 말투와 방식, 대화법으로 연인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진행한다면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맺는 관계는 무수히 많지만 각각의 관계 맺음의 특성에 따라 나는 다른 대화법과 관계맺음의 형식들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남북관계에서도 소통의 전략을 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나라들과 다른 남북관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다. 36

둘째, 관계맺음의 독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소통의 핵심적 출발점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 모든 만남과 대화를 소통적 관계로 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있는데도 왜 그(그녀)는 내 맘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 나 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 나? 라고 상대를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가 자신 을 몰라준다 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의 대화에서 내가 가진 욕망을 투 영하여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 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상대를 몰라주고 있는 것은 그가 아 니라 내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욕망이다. 같은 민족 이라는 믿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 에 우리는 같다고 믿는다. 그러나 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실 제로 둘이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면 같은 민족 이라는 생각은 곧바 로 벽에 봉착하며 좌절 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가 다른 국가들의 관계와 달리 보다 어렵고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남남인 관계에서 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거리를 두기 때문에 다름에 대해 크게 당 황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다름 은 더 큰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여기서 진짜 문 제가 되는 것은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욕 망에 사로잡혀 상대의 차이와 욕망을 보지 못하고 있는 나 이다. 제2장 소통과 통일 바로 이런 점에서 둘의 철학 을 주장하면서 사랑을 설파하는 알랭 37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 주의 이며 내 사랑이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 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 는 자아 17)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연인 이고 가족 이 고 친구 라는 특별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관계일수록 오히려 그와 같 은 욕망이나 믿음이 서로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통의 전략은 내가 가진 욕망을 통해서 상대 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고 현재 둘 사이의 소통을 가 로막는 차이 와 장애물 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보면서 이를 고려한 전략이 되어야 한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셋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당사자가 동일한 욕망에서 나온 동일 한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호 대립적인 다름 조차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 가 아니라 우리 가 서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공통의 목표를 추 구해 간다는 차원에서 소통의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 람들은 목적의 동일성을 내세워 성급하게 동의, 합의 라는 하나됨 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설사 목적이 같다고 하더라도 추구하는 방법이나 가치, 정서 등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그 과정에서 상호 충돌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목표 로서 통일 은 둘 이 만들어가는 과정 의 결과로서 획득된다는 관점을 17)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도서출판 길, 2011, p. 71. 38

가질 필요가 있다. 즉, 바디우가 말한 바와 같이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 18) 이라는 관점에서 대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여기서 둘의 관점은 나의 관점과 너의 관점이라는 두 개의 관점이 평행선을 긋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 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저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는 바 로 그러한 사실을 내가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둘이면서도 서로 상 대에 대해서 무관심한 둘 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둘을 초 과하여 함께 공통의 세계 를 만들어가는 둘 이라는 관점이 요구된다. 그런데 그렇게 둘이 만들어가는 공통의 세계로서 대화 를 만들고 자 한다면 소통의 전략 은 상대를 나와 함께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가 는 주체로, 그와 나를 공통의 목표 안으로 조직해 간다는 조직가의 관점에서 기획해 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으며 각기 자 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나름의 전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전 략들을 고려하지 않고서 특정한 목표를 향한 공통의 발걸음을 만들 어낼 수는 없다. 따라서 상호 이해의 충돌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나의 목표 안으로 조직하면서 그를 우리의 편으로 만드는 소통의 전략 이 필요하다. 제2장 소통과 통일 18) 같은 책, p. 41. 39

2) 남북 소통의 장애물과 극복전략 우리가 소통을 한다는 것은 서로의 문화적 가치와 삶의 방식 전체 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이를 통해서 둘이 공통으로 나누는 가치 정서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지향의 남북관계는 두 가지의 장애물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분단 때문에 동족을 살해하 고 끊임없이 서로 적대해 왔던 분단의 상처 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의 가치 정서 문화가 서로 다른, 매우 이질적인 체 계를 가지고 있는 분단된 사회적 신체 라는 점이다. 따라서 남북의 소 통은 이 두 가지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첫 번째 장애물인 분단의 상처 는 현재 남북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적 증오를 낳으면서 자꾸만 과거의 상처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따라서 이런 생채기를 내는 트라우마에 대한 환기의 구조 를 해체하 는 데에서 대화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Freud)는 반복강 박증 과 공포증 의 원인을 실재적 불안(realistic anxiety) 이 아니라 신경증적 불안(neurotic anxiety) 에서 찾았다. 그러나 분단의 트라 우마 는 남과 북의 군사적 대립과 같은 실재적 불안 과 분단국가에 의한 정치적 냉전과 기억의 환기, 그리고 이를 통한 부정적 통합으 로 작동한다. 따라서 남북의 소통은 정치 군사적인 적대성을 해체 하고, 부정적 통합을 중단하는 소통이 되어야 한다. 40

두 번째 장애물은 남북의 분단이 남쪽과 북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의 분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의 분단을 고려하지 않는 대 화는 소통 으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 정서 문화적 계열체계를 따라 상대와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규칙이나 문법을 따라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대화 하는 것이며, 따라서 대화 자체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과 북이 쓰는 말과 글이 동일하다고 믿으면서 이런 말과 글의 분단 에 유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라타 니 고진( 柄 谷 行 人 )이 말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비대칭적 의사소통 이 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진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언어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 은 결국 자신의 언어규칙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대 화 이며 독백 라고 단언하면서, 19) 대화란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와의 사이에만 있다. 그리고 타자란 자신과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아니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일 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사소통이라는 개념, 즉 나의 생각과 주장을 서로 동등하게 상호 교환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뒤집어 오히 려 가르치고-배우는 비대칭적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상 태 라고 말한다. 20) 제2장 소통과 통일 19) 가라타니 고진( 柄 谷 行 人 ), 송태욱 옮김, 탐구 1, 새물결, 1998, p. 82. 20) 같은 책, pp. 13-16. 41

그러므로 남북의 소통전략 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세워지고 실 행되어야 한다. 첫째, 남북의 소통 전략은 우선적으로 타자의 타자 성(otherness of other) 을 배우고 가르치는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 다. 남과 북은 분단체제 하에서 매우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통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린 한 민족이야! 라는 민족적 동일성 회복을 강력히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 간 의 유대와 연대 를 만들어내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 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 하면 한 민족이라고 믿음에도 불구하 고 나와 전혀 다른 언어문법과 규칙,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타자와 대화를 이어가기 때문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선입견과 오해, 편견 만 쌓여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에는 반드시 타자 가 그냥 타자가 아니라 민족애 와 같은 특별한 욕망에 부합하는 상호 배려의 원칙 이 작동해야 한다. 남과 북은 일반적인 다른 국가들의 관계처럼 남 이냐 북이냐 의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 이루어질 수 없다. 일반적인 국가 간의 관계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이해타산적인 등가성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통일 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공 유하는 관계이며, 민족공동체 라는 특별한 환상을 동반하는 관계이 다. 따라서 거기에는 동포애 와 같은 특별한 감정에 기초한 호혜성 의 원리 가 작동해야 하며, 남이냐 북이냐 가 아니라 남과 북 이라는 한반도 전체의 차원 에서 접근해 나가야 한다. 42

셋째, 남북 간에는 한민족 전체를 함께(communi) 돌보거나 나 누면서(care) 통일 한반도의 미래 규칙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소통 이 되어야 한다. 의사소통, 즉 communication 은 어원상 함께 돌 보는 것, 또는 공통의 나눔 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공, 공통, 함께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 커먼(common) 과 그 동사형 코 뮤니카레(communicare), 즉 함께, 공통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communi 와 나눔, 돌봄 을 뜻하는 care 가 합쳐진 말에서 나왔다. 따라서 남북관계도 한민족 전체를 함께 돌보는 것 또는 공통의 나눔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함께 돌봄 으로서 의사소통은 남북관 계에서 단순히 돌보거나 나누는 데 멈추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남과 북의 대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통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는 함께 돌보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통일국가의 가치와 이념을 만 제2장 소통과 통일 들어가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또한, 그렇기에 남북관계는 남과 북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화 이후 이산( 離 散 ) 되었던,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포함하는 한민족 전체의 합력 을 창출하는 소통이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과 북의 통일지향적 관계는 분열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식민지배 이후 겪어왔던 한민족의 수난과 고통이 낳은 아픔을 치유하고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민족적 합력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 21) 이런 점에서 라카프라는 한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트라우마의 정치적 이용문제는 물론 극단적인 사건과 트라우마의 관계는 한국, 일본, 중국, 북한 간의 역사적 관계 연구 43

따라서 통일 지향의 소통 은 남과 북이라는 한반도 중심주의를 벗어 나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포함하여 공통의 수난의 역사를 극복 하는 소통이자, 그들을 포함하는 동포애 에 기초한 나눔과 연대, 민 족적 합력 의 창출하는 소통으로 기획되어야 한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 육영 수 엮음,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 푸른역사, 2008, p. 424). 44

13장 제 치유와 통일의 통일 인문학적 접근 1. 역사적 통일인문학의 트라우마 의미 2. 한민족의 통일인문학의 역사적 필요성 트라우마 3. 한민족의 사람의 통일과 역사적 통일인문학 트라우마 치유방향

제3 장 치유와 통일 1. 역사적 트라우마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사적 트라우마 (Historical Trauma)는 역사학이나 문학에 역서 주로 사용되어 온 개념으로서, 그 트라우마가 단지 과 거의 역사적 사건이 요인이 되어 발생했다는 의미로만 사용되어 왔 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언제나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불명 료한 개념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 념에 비추어 보더라도 트라우마는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현재 라는 시간성에 비추어 이 개념 을 정의하는 것을 넘어 역사적 트라우마가 집단 트라우마라는 점, 그 리고 그것이 후세대에게까지 전승되는 트라우마라는 점을 밝힐 필요 가 있다. 48

1) 트라우마의 일반적 의미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이산( 離 散 ) 그리고 남북분단, 6 25 전 쟁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상처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는 과거 의 사건으로 끝났는가? 한반도가 경험했던 상처의 역사는 현재 에도 재연되고 있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 다. 그것은 여전히 한 일 혹은 남 북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상처의 기억 을 재생하면서 코리언의 정신세계에서 현재화되고 있기 때문이 다. 예를 들어 독도 영유권이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일제 식민지 지 배를 연상하게 한다. 또 천암함 연평도 사건과 같은 남북 간의 충돌 은 6 25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현재 에 살고 있지만 연상 관계를 가지는 사건이 발생하면 마치 과거 로 돌아가는 듯이 상처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억의 재생이 단지 역사적 사실(fact)을 떠 올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사람들은 역사에 대 한 기억과 함께 불안, 공포, 분노와 같은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예 를 들면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6 25 전쟁을 연상하며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불안해한 다. 어떤 사람들은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들이기도 하고, 피난을 떠올 리기도 한다. 더 극단적인 반응은 상대를 파멸시켜야 한다는 전쟁불사론을 주장 49

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이들은 전쟁이 우리에게 입힌 상처가 엄청나 며 그로 인해 현재까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상처의 역사를 반복하려는 듯 필요하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 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작용이 주어지면 반작용이 일어나 는 것처럼 기계적인 반응체계를 따르는 것과 같다. 즉, 과거의 트라 우마를 연상시키는 현재의 계기가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증상을 보이 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 따르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 애(PTSD) 는 외상 경험자가 현재 를 살아가고 있지만 후사건적 계기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트리거, trigger)가 주어지면 과거 로 퇴행해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 면하면서 회피/정서적 마비, 과각성( 過 覺 醒 ) 22) 과 같은 증상을 보이 는 정신병리학적 진단명이다. 물론 이는 현대와 와서 세워진 개념이 지만, 프로이트(S. Freud)는 일찍이 1920년 쾌락원칙을 넘어서 에 서 트라우마에 대한 증상과 원인을 리비도(Libido) 경제학적 관찰방 법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리비도 경제학은 리비도의 운용을 경제학 의 투자와 생산에 비유한 표현인데,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총량이 제 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이 제한된 양을 효과적으로 투자 22) 과각성(hyperarousal)은 트라우마의 한 증상으로 외상 사건과 관련된 특정 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말한다. 각성의 상승은 깨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잠 자는 도중에도 지속되어 다양한 유형의 수면장애가 나타난다. 보통사람들보다 잠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소리에 민감하여, 밤중에 더 자주 깬다. 50

하여 항상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정신세계를 보호하 고 있던 장벽에 어떤 파열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극의 양이 과다할 경우 파열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에너지를 묶는 작업 은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 23) 따라서 그것은 의식의 영역에 남아 있 을 수 없으며 무의식으로 억압 되면서,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회피 하거나 혹은 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억압된다는 것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것은 다시 의식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것의 회귀 는 기억을 재생하는 플레시백(flashback) 효과처럼 나타나며 그 사 건 당시와 유사한 정서적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경험 이후 어떤 특정한 요인으로 인해 그것 이 치유되지 못할 경우, 그 후 연상적 사건이 있으면 처음 트라우마 를 겪었던 사건이 사후적으로 원인이 되어 그 상처를 반복적으로 재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재경험의 조건으로서 연상적 사 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처음 경험하였던 사건은 단지 과거의 일이지 만, 유사한 연상적 경험이 이루어질 경우 처음의 사건은 일상적인 삶 을 방해하는 증상을 형성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23) S. Freud, Werke aus den Jaheren 1920-1924, Gesammelte Werke, Bd.13, S.FISCHER VERLAG, 1976a, s.29. 51

2) 후천적인 집단 트라우마 하지만 역사적 비극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자아심리학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우선 PTSD를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상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의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일제 식민 지 지배도 분단도 그리고 6 25 전쟁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이다. 이들은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과 시간적 간극을 가지 고 있는 후세대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자신이 그 것을 경험한 것처럼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사후적으로 원인이 되는 것은 경험적 사건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사건 이라 할 수 있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트라우마가 역사적 비극 이라는 실제적 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은 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질서 혹은 규범체계로서 인간 존엄성, 존중과 우정 등을 포함하 여 욕망하던 대상의 상실 (loss) 24) 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것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인간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면서 필 연적으로 경험하는 존재론적인 결핍 이나 부재 의 문제로 볼 수 없 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비극은 기존에 사람들이 살아오던 질 24) 라카프라는 부재를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일반화된 없음 으로, 상실을 잃어버린 대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없음 으로 구분한다. (이명호, 역 사적 외상의 재현(불가능성):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적 읽기, 비평과 이론 제10 권 1호, 2005, p. 144) 52

서체계를 우연적으로 뒤흔드는 사건이기에 원래부터 없었던 것을 의 미하는 결핍이나 부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트 라우마는 원래 있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욕망 가능한 대상이 있었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대상을 상실하면서 발 생한 후천적 트라우마 이다. 그렇지만 역사적 트라우마는 특정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 이 가진 트 라우마이다. 이때 집단 은 철도사고와 같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으로 모여 있는 개개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인간 존 재 일반으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으며, 또 죽음은 항상 자 신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무엇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이 들이 경험하는 트라우마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점에서 집단 트라우마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그로 인해 사후에 기차도 타지 못한다든지 또는 일종의 공황장애와 같은 증 상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즉, 사람마다 성장배경이나 심리적 조건 에 따라 트라우마 경험 이후 반응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비록 다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집단 전체가 아 니라 개별적인 치유 혹은 치료가 가능한 독립적인 개인의 문제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그렇기에 역사적 트라우마는 자아심리학이 아닌 사회심리학적 차 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트라우마가 집단 무의식을 전 제로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집단 트라우마 역시 개인 적인 트라우마와 마찬가지로 집단의 욕망 즉, 집단적 리비도가 좌절 53

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적 리비도라는 것은 단지 개인들이 공집합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것 이라는 의미를 넘어 서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인간 개인으로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문화 속에서 구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리비도는 특정 사회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치 경제 시스템 혹은 역사적 경험 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성격 을 통해 조직된다. 사회적 성격이란 같은 문화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누어 갖고 있는 성격구조의 핵 으로서 그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하여 개인들의 심리적 에너지를 묶어 집단적 열망이 특정 대상으로 향하도록 하면서 같은 이념과 이상을 받아들이 는 기능을 하게 하는 사회적 무의식 의 구조이다. 25) 따라서 역사적 트라우마가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집단 트라우마라고 했을 때 집단 은 사회적 무의식으로서 집단 욕망 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한국인, 한민족과 같이 국민 혹은 민족 정 체성을 통해 묶일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하며, 역사적 트라우마는 집단 전체가 특정 시기에 대내외적 조건하에서 가지고 있는 열망이 좌절 되고 그럼으로써 집단이 공유하고 있던 정신적인 질서 체계가 붕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25)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성격 을 어떤 주어진 사회에 의해 그 사회의 독특한 기능을 발휘 하는 데 유용하도록 형성된 심리적 에너지의 특수 구조 로 정의하면서 사회적 성격이 있는 곳에 항상 사회적 무의식이 존재한다 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문국주 역, 불복종에 관하여, 범우사, 1996, pp. 79-80) 54

3) 전승( 傳 承 )되는 사회구조적 트라우마 역사적 트라우마가 집단 트라우마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진 독특한 점은 경험자 집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경험자, 그것도 동 시 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후세대 집단에게 까지 전승 된다는 것이다. 26) 그래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역사적 사건 이후 발생한 트라우 마가 타인에게 전염되는 이차적 트라우마 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염이라는 것이 전염병과 같이 개인들 간의 접촉을 통해 옮아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7) 물론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경우 주변의 가족 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전이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처음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경험자가 트라우마를 지니게 제3장 치유와 통일 되고, 그 경험이 그의 주변인 또 그 주변인의 주변인으로 연쇄적으로 옮아간다는 것만으로 역사적 트라우마의 전승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보균자와 접촉하였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전염은 그것이 가능한 조건 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일어난다는 점에 서 전염이 집단 전체로 이루어지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트라우마의 전승 메커니즘을 26) 도미니크 라카프라, 육영수 외, 치유의 역사학으로, 푸른 역사, 2008, p. 238. 27) 라카프라는 전이를 타자 안에서 활동적인 어떤 경향 혹은 타자에 투사된 경향을 자신의 담론이나 행위 안에서 반복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전염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그에게 있어 전염은 투사적 합일시 혹은 합일적인 동일시의 결과로 이루어지 는 것이다.(도미니크 라카프라, 앞의 책, pp. 217, 226) 55

밝힌다는 것은 그 조건을 해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그 전 염이 개인 대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 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 조건이 단순히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있는 사회구조적인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집단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요인을 구조적 차원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집단 트라우마는 사회적 성격에 따라 형성되 어 있던 집단 리비도가 좌절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이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 사회의 대내외 적 조건, 예컨대 정치 경제적 환경과 역사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라고 한다면, 사건 이후의 사회적 성격은 그 이전과 동일한 것일 수 없다. 더구나 트라우마 경험은 이해하기도 믿기도 힘든 그래서 비재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현적인 것으로서 외상적 실재를 남긴다는 점에서 더더욱 사회적 성 격을 변화시킬 요인을 형성하는 것이다. 외상적 실재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의 균열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상실된 대상을 가지고 있던 온전한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집단은 그 균열 지점을 어떻게 해 서든지 처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집단은 더 이 상 유지 존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28) 하지만 집단 트라우마의 경우 28) 개인의 경우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욕망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면서 그 대상으로 향하던 리비도를 다른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러운 사 고로 죽었을 경우 충분한 애도(Trauer)를 통해 그 사람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것을 인정 하고 자신의 미래적 삶을 위한 대상에 리비도를 투여하게 되면 별 문제없이 일상적인 삶 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 애도작업(Trauerarbeit)이 가로막히고 제대로 이 56

상실된 대상이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또 대 체적으로 그것은 집단과 집단 간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트라우마 이전의 과거상태를 환상 속에서 돌아가려 하거나 혹은 새로운 대상( 對 象 )을 통해 현재 상실한 대상( 對 象 )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고자 한다.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 만 일제 식민지 지배의 경우 상실한 대상은 국가 였으며, 이에 사람들 은 민족 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전이시키고 그 결과 저항적 민족주의 를 형성하였다. 이는 곧 일본 제국주의의 극복과 해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한민족 집단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집단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성격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무의식은 그 트라우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일 수 제3장 치유와 통일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구조 자체가 트라우마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구조는 개개인들의 신체와 무관하지 않다. 구조는 집 단 사회의 장( 場, champ)속에서 지배적인 상징, 더 정확하게 말하 자면 트라우마적 상징을 통하여 그 구성원들의 신체(corp)를 조직한 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신체는 내면화된 트라우마적 성향을 통해 사회를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구조는 신체를 다시 신체는 구조를 생 산하는 이러한 방식은 그 집단이 경험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고 지속되는 한, 트라우마는 그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로 루어지지 못한다면 우울증과 같은 멜랑꼴리(Melancholie)의 상태에 빠져 자존감이 상실 되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욕망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 고 상상계적으로 퇴행하여 리비도의 투여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환각이나 망상 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57

남을 수밖에 없다. 즉, 구조화된 구조, 구조화하는 구조 인 아비투스 (habitus)를 통해 트라우마가 전승된다는 것이다. 2.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특정 집단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 은 현재 로부 터 출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가 항상 현 재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 이다. 예컨대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발생한 한민족 상 처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이 현재 중국과 한국 간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현재에 아무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트라우마는 이미 과거로 남겨져 있으면서 미 래로 나아가기 위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특정 집단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분석할 때 그 역사는 모두 소급되어서 는 안 되며, 현재의 증상과 관련이 되는 역사만을 그 대상으로 해야 한 다. 따라서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 문제가 되 고 있는 남 북, 한 일, 북 일 혹은 남남 갈등과 충돌에 바탕이 되고 있는 일제 식민지 지배와 분단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 식민 트라우마 : 국가 민족 의 어긋남 19세기 말 한반도는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보여주듯이 대외적으로 58

는 서구열강의 개방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한반도를 교두보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과 러시아 간의 마찰은 한반도를 풍전등화와 같은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반면 내적으로는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등에서 드러나듯이 반제반 봉건이라는 개혁적 요구가 분출되고 있었다. 대한제국( 大 韓 帝 國 )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부국강병의 근대적인 독립국가 건설이라 는 목표를 향해 대중들의 리비도를 흡수하여 집단적인 열망으로 조 직하면서 탄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열망은 오래가지 못하고, 이미 서구적 식민주의를 내면 화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1910년 한 일 강제병합을 통해 국권을 상실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놓 이게 된다. 그것은 곧 민족=국가 가 민족 국가 라는 어긋남으로 바 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적 특수성에 비추어 본 다면 너무나도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에릭 홉스봄이 지 적하듯이 한반도는 삼국통일 이후 단일 종족(ethnic) 집단으로 중앙 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고 살아온 역사적 국가 혹은 역사적 민족 이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만큼 강한 유대감에 기초한 집단적인 모 둠살이를 오랫동안 유지해왔고, 더구나 전제군주제 하에서 미래발 전적인 국가상을 목표로 사람들의 욕망을 집중화시켜왔기 때문에 그 좌절이 가져다준 상처는 그 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더구나 일본이라는 국가는 한민족이 열망하던 국가가 아니었다. 그 국가는 나의 아버지=국가 를 폭력적으로 추방하고 어머니=민족 59

을 유린한 반민족적 국가 였다. 욕망 대상의 상실 이후 한민족의 집 단적 리비도는 상상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우 리 민족은 상실된 국가=민족 을 회복하고자 상상적인 민족 으로 자 신의 욕망을 퇴행적으로 전이시키게 된다. 그 결과 민족은 과잉화되 면서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바탕으로 저항적 민족주의 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 일제로부터의 해방투쟁이 그토록 지속 적이고 강렬했던 것은 바로 한민족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민 족적 열망의 좌절이라는 식민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은 우리민족에게 국가 민족 이라는 어긋남을 극복하고 국가 =민족 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찬탁과 반탁 을 둘러싼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립 속에서 신탁에 찬성하고 있던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좌파진영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미 소 중심의 신탁통치는 결정되었으며, 한반도는 다시 분단되 면서 또다시 우리 민족을 분리시켜 놓았다. 그것은 코리언들에게는 동일한 열망에 대한 두 번째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듯이 그에 대한 상처 또한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동경재판에서 식민지 지배와 전쟁 수행에 관여하였던 수많 은 일본의 책임자들이 대부분 면죄부를 받고 전후 일본 건설의 주역 으로 다시 등장하였고, 국내에서도 친일파 청산이 차질을 빚는 등, 해방 이후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 던 것이다. 이처럼 식민 트라우마는 분단이라는 사건과 식민지 지배 60

미청산으로 인해 치유될 수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도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이다. 2) 분단 트라우마 : 하나의 민족, 두 개의 체제 식민지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종결되었다. 그것은 곧 우리민족이 상실된 국가=민족 을 회복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서구 열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또 한 번의 비극은 예 비되어 있었다.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이남과 이북을 각 각 분할점령하면서 민족 분단을 낳은 것이다. 분단은 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이 재차 좌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 서 분단은 식민 트라우마를 현재화하는 계기로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분단 트라우마는 식민 트라우마라는 근원적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형성된 파생적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제3장 치유와 통일 그러나 분단 트라우마와 식민 트라우마는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분단 트라우마가 식민 트라우마와 다르게 아버지=국가 가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체제로 나눠지면서 형성된 것이 라는 점이다. 이는 형제간에 서로 어머니=민족 이 욕망하는 아버지= 국가 의 적자임을 자처하며 공석의 아버지 자리를 놓고 벌어진 다툼 에 비유될 수 있다. 즉, 국가=민족 에 대한 에로스(사랑)가 타나토스 (증오)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욕망 대상을 사랑의 방식 61

으로 얻지 못할 경우 증오에 사로잡혀 폭력적으로 쟁취하는 것처럼, 6 25 전쟁은 같은 민족이라는 에로스적 욕망이 좌절되면서 상대와 폭력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 25 전쟁은 남과 북 누구의 승리도 아닌 상태로 38선을 휴전선으로 대체하였을 뿐, 분단의 고착화라는 결과만을 낳았다. 문 제는 남과 북이 누구도 완전히 민족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결손국가(a broken nation states) 29) 라는 점이다. 따라서 남과 북은 자신의 결 핍을 은폐하고 봉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남과 북은 형제를 살해하였 다는 전쟁이 남긴 죄의식을 피해자의 논리로 전화시키고 나아가 전쟁 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전치시켰다. 아울러 남과 북은 스스로 민족 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며 상대를 민족의 순결성을 오염시키는 괴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뢰집단으로 타자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민지 시기 이래 남북이 공 유했던 강렬한 민족의 파토스 30) 를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활용 하였다. 그것은 곧 국가주의의 강화를 의미한다. 국가는 결코 부정되거나 비판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서, 배제-죽 음 과 포함-생명 의 선택지를 통해 공포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 29) 임현진ㆍ정영철, 21세기 통일한국을 위한 모색,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p. 17. 30) 파토스(pathos)는 객관적, 합리적, 논리적인 사유를 의미하는 로고스(logos)와 달리 주관 적, 체험적, 정서적인 정념( 情 念 )이나 열정을 의미한다. 민족의 파토스 란 고대 이래 유구 한 역사와 우수한 민족문화를 발전시켜온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 심과 열망을 뜻하는 것으로, 식민지 하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이유를 제공하였다. 서영채, 민족, 주체, 전통: 1950~60년대 전통논의의 의미, 민족문학사연구 제34권, 2007, p. 29. 62

와 결합하여 남과 북은 서로를 절대적인 악으로 등치시키고 국가주 의적 국민윤리 를 통해 이를 국민의 신체에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북한의 경우 자본주의=악=괴뢰집단= 이라는 기표의 연쇄 를 통해 정치 경제의 영역을 윤리적 차원에서 의미화하고, 주체사 상을 악( 惡 )에 맞선 선( 善 )의 숭고한 윤리적 실천으로 승화시킨다. 바 로 분단의 사회적 신체는 그러한 선의 실현체로서 내적 검열 체제를 통해 생산된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러한 분단의 사회적 신체 31) 를 생 산하는 방식이 부정적 통합방식에만 기대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은 민족의 발전 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 발전주의라는 긍정적 통합방 식과도 결합하여 자생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3) 이산( 離 散 ) 트라우마 : 강제적 분리와 거주국의 폭력 제3장 치유와 통일 오늘날 한반도 주변의 중 일 러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의 수는 전 체 재외 동포 중 57%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제의 수탈과 폭압을 피해 혹은 강제적으로 이 주하면서 비롯된 결과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한 이후 1918 년 토지조사사업, 1938년 국가총동원법 등을 통해 우리의 식량뿐만 아니라 신체까지 약탈하였다. 이때 이주한 동포들은 당시 한반도의 인구 약 2천 5백만 명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250여 만 명에 이른 31) 분단의 사회적 신체란 남북분단이 남북 주민들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긴 성향과 믿음들 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남북 사이의 적대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 의 일상적 삶 속에 내면화되어 있고 우리의 신체에 아로새겨져 있는 어떤 것이다. 63

다. 이처럼 이산 트라우마는 고국으로부터의 강제적 분리가 낳은 상 처이면서, 일제 식민지배가 낳은 또 하나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된 경험이 이산의 상처가 가 진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낯선 타향 땅에서 멸시와 차별뿐만 아니라 극한의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면서 이산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대표적인 예로는 1923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 1966년 문화대 혁명 시기 조선족 탄압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산 트라우마는 거 주국에서의 국가폭력과 사회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주한 국가에서의 차별과 배제 그리고 폭력은 이 시기에 그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재일 조선인의 경우에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으로 인해 일본 국적이 박탈당하면서 어떠한 국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난민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적 32) 을 가진 사람들이 북한 국적자로 분 류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 이후 불거진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일 북 관 계에 따라 일본 국가와 사회로부터 테러수준의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 32) 조선적 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이후 한국이나 북한의 국적을 보유하지 않았 지만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부여된 일본 외국인 등록제도상 편의상의 적( 籍 )을 말한다. 따라서 조선적 은 현재 북한이라는 국가의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64

출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산 트라우마는 국가 폭력 트라우마 와 사회 폭력 트라우마와 함께 현재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산 트라우마는 거주국 내에서의 문제로만 제한되지 않는 다. 그것은 한반도의 남과 북의 관계에서도 환기된다. 이들은 분명 자발적으로 이주한 자들이 아니며 또 모국으로부터의 강제분리라는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과 생활문화는 거주국에서 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변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이들의 언어, 생활방식 등을 민족문화의 변질로 규정하면서 모국으로부터의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모국으로부터의 차별과 배제가 어떻게 제3장 치유와 통일 가능한가? 이는 이산과 코리언 디아스포라 33) 에 대한 기억이 한반도 에서는 망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분단과 전쟁 트라우마를 지배적인 트라우마로 환기시키면서 과잉화된 정통성 경 쟁을 지속해왔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 전체를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만이 피해자라는 편향된 인식을 강화하여 왔던 것이다. 33) 원래 추방당한 유대인들의 민족 이산( 離 散 )을 가리켰던 디아스포라(Diaspora) 개념은 오 늘날 다양한 민족들의 이산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코리언 디아스포라 의 문자적 의미는 한민족(Korean)이면서 한반도 밖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 는 존재, 즉 민족으로부터 분리(dia)되어 흩어져( 離 散, spora) 떠도는 존재(Diaspora)를 가 리킨다. 이를테면 구한말 이후 해외로 이주한 재중 조선족, 재러 고려인, 재일 조선인 등을 말한다. 그 동안 해외동포(해외한인) 혹은 재외동포(재외한인) 로 지칭되어왔지만, 한민족 이라는 혈연적 문화적 동질성을 넘어 거주국별로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통합적으로 해 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최근 코리언 디아스포라 란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65

그렇기에 한반도를 벗어나 있는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트라우 마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이산 트라우마 역시 주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지난 70년 동안 분단체제 속에서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남과 북 이 아닌 비교적 중립적 위치에서 남북한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인 중 러 일은 한반도의 통일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국가라는 점에서 통일의 중개자 역할을 기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상처를 공감하고 치유를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3.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방향 1) 아비투스 34) 의 변화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은 환상 속에서 그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 34) 아비투스(Habitus)는 구조화된 신체, 신체화된 구조 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사 회구조적으로 지배적인 상징체계가 개인의 신체에 내면화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신체가 사회구조의 상징체계를 재생산하는 성향체계이다. 따라서 분단의 아비투스는 남북 분단 으로 인한 적대성을 사회구조와 개인의 신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하 는 반면에 통일의 아비투스는 그 적대성을 해체하고 남과 북이 협력과 상생을 모색하려 는 성향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66

돌아가 재경험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과거의 상 처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역행하여 다시 현재화된다. 그 것은 현재와 과거의 혼동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그 혼동은 환각이 나 망각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은 정상적이 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그러한 시간의 혼동을 경험하지 않 으며, 설사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과거로 기억할 뿐, 현재화시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상은 정상 적 이지 않는 비정상 적인 상태이며, 따라서 치료(theraphy)는 비정상 을 다시 정상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프로이트 치료 방법 역시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 그의 목 표는 증상을 가능하면 적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증상은 무의 식에 억압되어 있는 것이 회귀하면서 그것을 억압하고자 하는 자아 의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을 제거 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 된다. 저항의 제거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 해 회귀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상 지나간 과거에 불과 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재교육 을 통해 이루어진다. 제3장 치유와 통일 하지만 역사적 트라우마는 그러한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적 경계 에 따라 진단되는 병리학적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적 트라우마 는 집단 전체가 욕망하던 대상을 상실하면서 발생한 것으로서 개인 이 아니라 집단 의 문제이며 또 그것이 세대를 거듭하더라도 사라지 지 않고 집단적인 전승체제를 갖추고 있는 사회적 구조 의 문제이기 67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넘어선다는 것은 개개인을 대 상으로 재교육하여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치료의 의미와는 다 르다. 오히려 그것은 적대성에 기초하여 파괴적 힘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 전체의 삶을 우애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창출하여, 좌절된 집단의 리비도를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에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은 생명력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치유 (healing) 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는 어떠한 방식이어야 하 는가? 무엇보다 우리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있어 근원적인 트라 우마는 식민 트라우마였기에 그 치유는 일제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 는 것에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민 트라우마는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국가=민족 의 좌절로부터 발생하였고 남북분단으로 또다시 분단 트 라우마를 낳았다는 점에서 아무리 일본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 사과 를 하고 보상을 한다고 할지라도 분단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다 면 식민 트라우마는 그와 함께 다시 현재화될 수밖에 없다. 즉, 식민 트라우마가 근원적인 트라우마라고 하더라도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 우마 치유에 있어 주요한 트라우마는 분단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따 라서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한반도를 건설하는 것이 한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통일이 분단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치유방법이 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단 트라우마는 분단에 대한 책임을 서 68

로에게 전치시키고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적대성에 기초 하고 있으며, 따라서 단지 두 체제를 통합하는 것은 적과의 동침이 되면서 더 많은 상처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일이 어 느 한 체제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의 통일은 승리 집단과 패배 집단으로 구분되 고, 패배 집단은 열등한 집단으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기존의 상호 간 적대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분단 트라우마 의 치유를 위해서는 그러한 적대성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구조를 변 화시키고 나아가 그를 통해 생산되는 분단의 사회적 신체를 통합의 사회적 신체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즉, 분단의 아비투스를 통일의 아비투스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2) 통합적 서사(narrative)의 재구성 분단의 아비투스는 서로가 가진 차이를 삭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형성되어 왔다. 그러한 점에서 통일의 아비투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위에서 모색되어져야 한 다. 그것은 앞서 소통에 대한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차이를 확인하 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를 형성하는 것을 말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계몽주의적 방식으로 한쪽을 가르치고 한쪽 은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문법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공통의 대화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서로 다른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서로 69

가 지닌 역사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가능해질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가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같이 가해자-피해자의 논리로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 는 결국 서로를 가해자로 지목하고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바탕으로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 왔던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 사적 비극에 대한 책임 소재를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일본의 책임감 있는 사죄와 배상이 이 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분명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현재 서로 간의 적대적 관계는 어떠한 합리적 소통도 만들 수 없으며 나아 가 일상적인 우리의 삶을 불안과 공포 속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는 점 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군비경쟁과 치킨게임을 반복하면서 민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족 역량을 허비하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따라서 통일의 아비투 스는 민족적 합력 창출과 발전적이고 평화로우며 또 안정적인 삶에 대한 미래적인 기획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기초로 한다. 그것은 곧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민족 을 부활시키고 미래 통일 한 반도 에 대한 환상적 구조를 창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의 부활이 우리가 남이가 라는 식의 민족주의나 통일만 되면 된다 는 식의 통 일지상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분단 아비투스를 통일의 아비 투스로 변화시키는 작업이 새로운 사회적 성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유지해왔던 상징체계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서로를 적( 敵 ) 혹은 악( 惡 )으로 규정해왔던 부 70

정성의 윤리를 재편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일방적 사고를 합리적인 사고로 전환하여 미래통합적인 가치체계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로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각자는 서로 상이한 정치경제 그리고 사회적 조건 하에 서 나름의 문화를 변용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특히 코리언 디 아스포라의 경우 거주국에서 생존의 전략적 차원에서 그것은 필수불 가결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시각에서 이들이 민족정체성 을 상실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과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하며, 나 아가 지구화 시대에 이들과의 합력을 창출하는 것을 가로막는 결과 를 낳을 뿐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분단의 역사와 함께 분열된 서 사( 敍 事 )를 코리언 디아스포라까지 포함하는 통합적 서사로 재구성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자기 입장에서 삭제하거나 해석해왔던 역사, 전통, 가치 체계 등을 자기반성과 타자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 라는 입장에서 통합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3장 치유와 통일 3) 치유의 문화 혁명적 성격과 매체의 활용 역사적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 트라우마이면서 사회구조 적인 트라우마라는 점에서 그것의 치유는 사회적 집단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는 문화혁명 71

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치유는 원한과 적대의 심리로 점철되어 있는 문화 전반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문 화를 좁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 질적 공간에서부터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트라우마는 사회적 구조와 사회적 신체 간 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유지 전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평화 라는 이름을 내건 박물관이 사실상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피해의식만을 강화하 는 스토리텔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은 매스미 디어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학교의 교과서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남북 간 혹은 한국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과 일본 간 정치 외교적 심지어 군사적 마찰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장 강력하게 현재화한다는 점에서 국가 시스템의 차원까지 문화라 는 영역에 포함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고 있 는 공간에서부터 그 공간이 지닌 구조 자체가 트라우마를 환기시키 는 틀 이 되고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 틀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문화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 이라고 한다면 그 치유는 개인 병리학적 치료와 같이 상담자와 내담 자 간에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 한 점에서 매체 는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 유에 있어 주요한 기제가 된다. 매체는 음악, 미술, 연극, 영화, 교재 72

등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가진 특성을 고려하여 매우 다양하게 사용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매체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매체가 사용될 수 도 있다. 기존에도 이러한 매체는 치유에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매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매체는 단지 치유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매체를 특권화시켜 그것이 곧 역 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에 있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 다. 중요한 것은 분열 서사를 통합적 서사로 바꿀 수 있도록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즉, 매체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치시키는 역사서술 이 아니라 한반도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서 술, 상대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적 합력을 통해 발전적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야할 대화와 협력의 공생적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담아 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장 치유와 통일 73

14장 제 통합과 통일의 통일 인문학적 접근 1. 사람의 통일인문학의 통일 의미 2. 민족공통성 통일인문학의 및필요성 협력의 아비투스의 생성 3. 사람의 한민족 네트워크의 통일과 통일인문학 형성과 민족적 합력의 창출

제4 장 통합과 통일 1. 사람의 통일 1) 체제 통합 중심의 통일론을 넘어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우리에게 익숙한 통일의 논리는 단순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반도에는 남과 북이 서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니 다 시 하나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 통일론 은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가진 남과 북을 하나로 통합하는 관점에 서 통일의 청사진을 미리 그리는 결과 에 주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통합 중심의 통일론은 통일의 목표를 선명하게 제공하 고 이론적으로도 명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작 동될 때에는 오히려 분단구조를 강화하기도 한다는 문제점을 낳기도 한다. 76

분리되어 있던 둘 을 다시 하나 로 합치려는 욕망이 전면에 나오 면 각각 선호하는 방식과 절차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결과만 강조하게 된다. 이럴 경우 엄연히 대립적으로 실존하는 둘의 차이를 간과하고 상대를 내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 이라는 것만 강조한다고 해서 남과 북이 자동적으로 희 생과 양보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체제 통 합보다 서로를 분열시킨 근원을 인식하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려는 자세일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 면서 그 과정 속에서 막힌 벽을 뚫고 흐르는 소통의 물길을 내는 것 이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 우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통일 시대를 전망하며 우리에겐 남과 북이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떨어 져서 서로의 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해 온 둘 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관계를 두 주체의 만남과 교류로 바라보는 관점이 요구된다. 제4장 통합과 통일 그래서 전쟁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평화 개념이 아니 라, 보다 적극적인 평화체제 의 구축으로부터 통일을 시작해야 한 다는 원칙은 역사적으로 남북의 지도자들이 이미 합의한 사항이다. 일반적으로 국제정치학에서 평화 는 전쟁이 없는 상태(absence of war), 즉 국가 간의 정치 군사 외교적 힘의 균형 등을 통한 현상 유지 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로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이 없는 상태 로서의 평화라는 소극적 평화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남북 간에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을 제 거하는 적극적 평화의 개념을 통일과정의 기본원칙으로 만들고 그 77

속에서 호혜적 협력적 관계 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평화 와 통일 이라는 가치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 북 간에 합의한 중요하고 기본적인 합의서들은 평화와 통일의 원칙을 담고 있다. 그리고 평화통일 에 근거한 이 합의사항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한국 정부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은 한반도 통일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결국 인문 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통일 논의도 남북이 평화 로부터 출 발하여 통일 이라는 결과를 창출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분단구조 의 특수성에 대한 기존의 공동 인식이라는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다가올 통일시대에 필요한 태도는 체제를 우위에 두고 그 주제가 있는 통일 강좌 42 _ 통일과 인문학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체제 통합만을 지향하는 통일론은 겉으로는 통일을 내세 우면서도 실제로는 서로에 대한 적대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보다 생산적이고 우호적인 경험을 쌓아가 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상호 대화나 합의를 지향하기보다 당 위적인 입장으로서 설정된 통일론은 온 민족이 통일을 지향하는 태 도를 취하면서도 통일을 호명하는 주체는 오직 분단된 국가 자신으 로만 설정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는 향후 통일국가에서의 주도적인 위치 선점을 위한 정통성 경쟁이 첨예할 수밖에 없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성도 줄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