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洲法學 아주법학제 7 권제 4 호 (2014. 02.)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A Study on the Death Penalty under the USAMGIK 이덕인 부산과학기술대학교경찰경호계열교수 L E G A L R E S E A R C H I N S T I T U T E A J O U U N I V E R S I T Y
L E G A L R E S E A R C H I N S T I T U T E A J O U U N I V E R S I T Y 亞洲法學 아주법학제 7 권제 4 호 (2014. 02.)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이덕인 부산과학기술대학교경찰경호계열교수 국문초록 미군정기의경찰제도와사법제도의주된목적은일제강점기의기본구조를그대로유지하면서군정활동의방해요인들을직접적인물리력을행사하여해체시키고저항운동을주도하는주요인물들을사법처리함으로써군정의통치체제를안정화시키는데있었다. 따라서이시기의사형제도도그연장선상에서이해될수있으며, 사형선고의기준이나사형을재판하는사법절차또한포괄적이면서자의적이었음을부인하기어렵다. 이시기에는고등군법회의의판결에따라사형이집행된 5명의군인에대한경우를제외하면 48명의사형확정자에대한집행이있었다. 이러한실증적통계가건국이후대한민국역대정권의통계와비교할때상대적으로많았다고할수는없다. 그보다전시군사재판의성격이강했던미군정의재판체계는사형을정치적으로활용하였고, 그것은결국건국이후이승만정부가역대정권가운데가장많은사형선고와집행을, 그것도민간법원이아닌군사법원을동원하여시도하게되었던원인을제공하였다. 그러나자주적인사법권을행사할수없었고형사규범도불완전한한계가작용하는가운데사형판결을가급적회피하려고노력했던미군정소속조선인재판관들의태도는돋보인다. 이연구를통하여사형이정치적으로남용되는결과를방지하려면결국국가형벌에서사형을완전히일소하지아니하는한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67
이를극복하기가어렵다는사실을확인할수있었다. 주제어 : 점령사법, 육군점령재판소, 국방경비법, 사형양형기준, 미군정기의사형제도 168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목차 Ⅰ. 문제의제기 Ⅱ. 치안상황과사법절차그리고사형통계 Ⅲ. 사형선고기준과사형재판의실재 Ⅳ. 맺음말 Ⅰ. 문제의제기 법무부가발표한바에따르면우리나라는 1949년 7월 14일, 건국이래처음으로사형을집행하여 1997년 12월 30일까지국가의이름으로흉악범죄는물론사상 정치범을포함하여모두 920명을단죄하였다고한다. 1) 그러나이와같은통계를그대로신뢰하기도어렵지만더욱근본적인문제는우리사회의사형선고와집행에대한내용을객관적으로조명하는작업이그간도외시되어왔다는점에있다. 이것은비단정부수립이후에나타나는현상이아니며그출발지점은일제강점기이후국가주권을회복하기이전이던미군정기로거슬러올라가야한다. 해방과동시에약 2년 11개월간지속되었던미군정의형사사법은정의실현이라는본연의목적보다점령사법으로서그통치의강제성과효율성이강조되고이를위한수단가운데하나로활용되었음을부인하기어렵다. 사형제도또한이러한맥락아래운용되었으며이시기사형을둘러싼쟁점과논란들은이후한국사회에서형벌의의미를유월하여그것이정치적으로오용내지남용되는원인을배양하게되었다고보아도과언은아니다. 따라서 1945년 9월 7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로특정되는이시기의사형제도가어떠한형상으로존재하였는지를관찰하는것은사형이라는형벌을탐색하기위한전제조건가운데하나라고할수있으며, 이를바탕 1) 2009 9 8,.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69
으로어떠한기준아래사형이양형으로선택되고사형재판의실재가어떠 했는지를규명해보는일은우리나라의사형제도전반에대하여비판적인 논증을가능하게하는계기가될것으로확신한다. Ⅱ. 치안상황과사법절차그리고사형통계 1. 미군정기치안과범죄의개요 (1) 해방직후의치안상황과재소자처리일제강점기의마지막사형집행은강도살인및사체유기죄로 1945년 3월 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의하여사형이확정되어 6월 28일, 평양형무소에서집행된것이다. 2) 이로부터불과 40여일이경과한 8월 15일, 해방과함께익일자로조선전역의각형무소에수감되어있던사람들가운데사상범은물론경제사범, 노무관계위반자및일반형사범들도형기 3분의 1을경과한경우는석방되었으나나머지수형자들은계속구금되어있었다. 3) 8월 16일부터 10일동안에만경찰관서를비롯한행정관청및일본인과조선인경찰관그리고민간인에대하여 914건의폭행, 협박, 약탈, 점거, 파괴행위가야기되었고, 4) 살인사건도발생하는등어수선한치안상황이었으나, 형무소의재소자들이탈주하는사태가벌이지지는않았다. 그러나당시수형시설에어느정도의사형확정자가미결구금되어있었고이들에대한사후처리가 2) 5544, 1945 7 27, 88. 3),,, 2,039 ( 1,543, 496 ). 1,223 320., (6), 85 2,, 1974, 36 ; 320. 4) / ( ), 1 :,, 1979, 94. 170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어떠했는지를알려주는구체적인정보는발견되지않고있다. 5) (2) 미군정기범죄현상의특징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말까지검찰이취급한형사사건의수리건수는 16만390건 (34만8천858명) 에달하였고, 이가운데 7만1천708건 (11만 1천929명 ) 이기소되었다. 가장심각했던범죄는절도로 3만9천145건 (6만 7천72명 ), 그다음으로상해 1만4천502건 (3만9천542명), 포고령제2호위반 7천399건 (2만7천540명) 순이었다. 6) 이기간살인은 1,192건이발생했으며, 살인사건의피의자는 3,326명이었다. 특히군정통치가제자리를잡지못하여치안사정이상대적으로열악했던 1946년의경우연간남한각형무소에수감된재소자는 118,866명이었는데, 형이확정되어수감된인원가운데가장높은비율을보였던범죄또한절도 (34,698명), 상해 (18,399명), 포고령위반 (14,244명) 순이었다. 그런데 1946년에살인을저지른범죄자가 1,729명으로파악되지만사형이선고된사람은 4명에불과하였다. 7) 당시남한의인구대비범죄발생률이현재의수준과비교할때높았던것은사실이지만이를통하여조선인재판소의형사법관들이비록소극적이었으나살인범죄에대한대웅으로써생명을박탈하는엄형의선택에는신중하였음을확인할수있다. 2. 미군정기형사사법의목적과방향 (1) 형사사법정책의방향과사법기구의정비 1945 년 9 월 11 일, 미군사령부정보책임자헤이워드중령은법조계에서 5) 1944~1945 2011 KBS 3.1,. 6) 1948 9 3, 2. 7) 1947 4 2, 2.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71
친일성향의인물이었던강병순, 소완규, 이홍종으로부터조선의법조실정을청취하고, 이튿날다시이들과사령부관계관, 그리고총독부법무국장소우다 ( 早田福藏 ) 가합석한자리에서사법기관접수에관한간담을가졌으며, 10월 11일에와서야고등법원및각복심원과지방법원의일본인법조관리들은전원파면되었다. 같은날미군정은변호사김용무를대법원장에임명한다음, 재판소관리는 6주내에완전히조선인에게맡기기로하고, 이에따라대법원 [( 구 ) 고등법원 ], 공소원 [( 구 ) 복심원 ], 지방법원및소년심판소등의사법인력은전원조선인으로충원되었다. 8) 따라서두달남짓계속되었던재판중단의사법공백이정리되고사법절차를재가동하게된것은 1945년 10월중순부터였다. 9) 그런데미군정기남한에서의형사사법모델은해방공간의사회혼란과무질서를수습하고범죄를통제하는데중점을두고설계되었고, 이에따라 사회다수의보호를위한범죄자의엄격한색출이중요시되었으며, 경우에따라서는무고한사람이범죄자로희생되더라도이를불가피한현실 10) 로당연시했을것이다. 물론그방향은이상론으로식민치하의체제극복과민주화를희구하였으나, 현실에서는군정의방해요인을제거하려면구체제를유지해야하는이율배반적상황의제약아래놓여있었다. 따라서이시기의경찰제도와사법제도는일제강점기의기본구조를그대로유지하면서전자의경우군정활동의방해요인들을직접적인물리력을행사하여해체시키는데동원되었던반면후자는저항운동을주도하는주요인물들을사법처리함으로써군정의통치체제를안정화시키는역할을담당하였으며, 이와같은경찰및사법기구재편은미군정이초기에추진했던정치기관의 한인화 (Koreanization) 가무엇을의미하고, 그초점을어디에두고있었는지를추정할수있게한다. 11) 8) 1945 10 11, 12. 9),, 1995, 174~175. 10),, 43, 2011, 68. 11), 179 ;,,, 2010, 612~631. 172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2) 군정사법기관의역할과책무대법원장김용무는점령사법의재판을총괄관리하는데적임자였는지모르지만조선인재판소에미군정이간여하는현실에대하여이를저지하는바람막이의역할을감당하지는못하였다. 또한그자신이스스로정치적성향을드러내어재판의독립성을훼손하는행위를하는등논란의중심에서게되자임명후불과넉달여만인 1946년 2월 25일, 40여명의판사와검사들에의하여불신임안이제출되었다. 12) 그는사표를제출하지만미군정이이를반려하여재신임된직후인 1946년 6월 9일, 광주지방법원을방문한자리에서 법원의중립성이나객관성을언급하는자는사법부관리로서의자격이없다. 미군정정책에반대하는자나신탁통치와좌파이데올로기에찬성하는자는그들의범법행위를증명할만한충분한증거가없더라도엄중처벌해야한다. 13) 고훈시한바있다. 이보다앞서검사총장김찬영은독립의완성을촉진하려면사회질서유지와치안확보가절대적으로필요하고구체적으로 무릇범죄는그성질여하와정상의경중을물론하고국가독립을방해한다는것을명심하여엄밀히수사하여하나도빠짐없이기소하되엄벌주의로처한다. 살인, 강도, 강간, 폭행, 협박, 공갈, 소요, 총검폭발물의부정사용등범죄로써특별한이유가있다고확인되는자이외에는최종형으로집행한다. 물자를감춘다거나매점비밀매매기타폭리행위는특별엄밀히수사검거하여철저박멸을기도한다. 일반사회운동및정치운동및정치방면의악질비행을감시하여범죄로인정되는때는엄정한입장에서검거한다. 14) 는대범죄투쟁의기본방침을제시하기도하였다. 이와같이군정사법기관의조선인책임자였던이들이언명한내용을통하여미군정이당시의법원과검찰등사법기관에요구했던역할과책무가어떠한것이었는지를짐작할수있다. 12) 2009 5 26, 18. 13) 1946 4 16, 2. 14) 1945 12 28, 2.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73
(3) 당시형사사법은표면적으로사회다수의보호라는명분을내세웠으나, 그이면에는사실상체제유지의목적을달성하고자무차별검거와무력행사를동원한경찰국가적특성을여실히드러내는수단이었다. 이러한사정은일제강점기보다더욱중앙집권적이면서조직화된경찰권력을허용하는계기가되었고, 그결과는이후등장하는이승만정권이경찰국가화의길을자연스럽게답습하는배경이되었다. 특히이시기의경찰권력은본연의기능보다정치적인문제를해결하는첨병의역할을담당하였는데, 군정은그들의나라인미국에서는전혀허용되지않는권력을군정경찰에부여하고활용하였던것이다. 이에따라막강한힘을거머쥔경찰은군정정책의수행에필요한준군사적행동도불사하는조직으로변모하게되었다. 더불어지역경찰관서단위까지설치된사찰기능은과거일제강점기의악명높은실력을발휘하여남한사회의정치 사회단체에관한정보를수집하고, 집회, 집단행동, 시위등을사전에차단하면서반군정적행위에대한사법처리의전위노릇을도맡게되었다. 15) 3. 미군정기사형집행의실제 이시기의사형집행은일제강점기와마찬가지로 ( 구 ) 형사소송법제538 조내지제542조와 ( 구 ) 형법제11조및감옥법제71조내지제75조에규정된절차를밟아처리되었다. 16) 그러나어느정도의사형집행이있었는지를정확히가늠할수있는자료는아직발굴되지않고있다. 다만대검찰청은 1948년 1월, 대검찰청은해방후 3년간사형집행을받은사람이 33명이고미집행자는 12명인데, 이가운데일본인 5명과중국인 2명이포함되어있다고발표한바있으며, 17) 언론보도에서는 8월 26일, 강도살인으로각사형 15),, 3,, 2012, 200. 16),, 2005, 143. 17), 1948 1 17, 2. 174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이확정된 8명에대한사형집행이있었고, 이집행결과를포함하여 47명과 39명으로각각엇갈린집계내용이발견된다. 18) 그러나관련자료의관리주체는아마도미군정사법부산하검찰국내지형정국이라고생각되지만별도의기록보존사실을확인할수없었다. 따라서군정기간의관보와일간신문, 그리고 1946년부터 1948년사이의집행원부를대조하여이기간의사형집행을살펴보기로한다. (1) 미군정관보공고에나타난사형집행군정기간의관보에서확인가능했던사형집행은모두 20건으로최초의집행은 1946년 9월 6일, 경성과대구형무소내집행시설에서각 1건씩종료된것이다 [ 표1]. 관보를기준으로하면해방후 1심에서선고된사형판결가운데가장앞선것은 1945년 11월 27일, 부산지방법원에강도치사혐의로기소된사안인데, 대법원은이사건을 1946년 3월 26일, 상고기각으로확정하였다. [ 표1] 미군정청관보상게재된사형집행 1 46.03.06. 46.04.23. 46.09.06. 46.11.05. 45.11.27. 46.03.26. 46.09.06. [ 19 ] 46.01.22. 46.04.09. 47.04.18. 47.06.06. 46.04.16. 46.04.16. 47.04.18. [ 49 ] 46.05.26. 46.08.30. 47.06.12. 46.06.19. 46.09.06. 47.06.17. 46.06.19. 46.09.06. 47.06.17. 46.04.08. 46.07.02. 47.06.17. 47.07.02. [ 51 ] 47.07.21. [ 52 ] 18), 1948 8 31 2 47, 2 39.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75
1 조장성 살인 46.02.23. 춘천지심 46.08.11. 대법원 47.07.03. 경성 최을남 살인 46.02.23. 춘천지심 46.08.11. 대법원 47.07.03. 경성 박창환 강도살인 46.05.02. 청주지심 47.03.07. 대법원 47.07.05. 경성 오경환 강도살인 46.11.16. 경성지심 47.03.07. 대법원 47.07.05. 경성 양준영강도살인 46.07.04. 경성지심 46.11.15. 대법원 47.07.07. 경성 황운섭강도살인 46.07.04. 경성지심 46.11.15. 대법원 47.07.07. 경성 임명복강도살인 46.06.19. 경성지심 46.12.24. 대법원 47.07.09. 경성 47.08.08. [ 공고제 53 호 ] 유성옥강도살인 46.06.19. 경성지심 46.12.24. 대법원 47.07.09. 경성 조춘식강도살인 46.08.09. 대구지심 46.12.10. 대법원 47.07.11. 대구 신금련 ( 여 ) 살인 46.05.13. 대구지심 46.08.23. 대법원 47.07.12. 대구 최숙 ( 여 ) 살인 46.08.09. 대구지심 46.12.27. 대법원 47.07.12. 대구 김묵식살인 46.05.24. 대구지심 46.10.11. 대법원 47.07.10. 대구 47.10.04. [ 공고제 59 호 ] 군정초기에는이와같이사형집행을관보에공고하였으나 1947년 7월 12일, 대구형무소에서집행된 2건에대한내용을끝으로더이상군정청관보에는게재하지않았다. 이들은전원원심판결에불복하여 2심체제아래에서대법원에상고하였으나모두기각되었다. 여섯차례공고의내용을정리해보면집행된 20건가운데정치범은없었으며, 강도살인 14건, 살인 5건, 강도치사 1건등일반형사사범들이었다. 사형수의성별은남성 18명, 여성 2명으로파악되며, 집행장소는경성형무소 14건, 대구형무소 6건이었다. (2) 일간신문의사형관련기사 1945년 8월 15일이후의국내일간신문을검색 확인한바에따르면 1946년 1월 30일, 살인혐의로사형이선고되어 12월 6일에집행된내용이군정기간의사형집행가운데가장빠른것으로소개되지만, 이미이때의 176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집행은해방후 4차집행에해당하는것이었다. 그런데관보와신문보도가일치하는내용은 1947년 7월 2일자군정청관보에공고제51호에서확인된 3건의사형집행뿐이며, 이외의경우관보에공고된내용을신문보도에서는찾을수없었다. [ 표2] 미군정기일간신문의사형관련기사 19) 46.01.30. 46.12.06. ( 4 ) 46.12.06. 46.04.12. 3,. 46.04.16. 46.08.30. 47.06.12. ( 5 ). 47.06.13. 46.06.19. 47.06.18. 20, 19), 2, ( 6 ). 47.06.19. 46.11.05. -,. 46.11.20. -,. -, 46.12.07.. 46.12.14. 19) 1 1946 5 23,. 1946 5 25, 2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77
46.12.07. 46.12.14. ( 2 ), 47.02.17.. 47.03.02. 47.03.17. 10,. 47.03.28. 47.07.31. ( ), ( 2 ). 47.08.01. 47.09.08. ( ). 47.09.09. 48.03.15.,. 48.03.17. ( 2 ):. 48.04.01.,.. 48.04.02. 48.04.29. ( ),, 7 23. 48.05.01. 48.05.28. ( ) 48.06.01. 178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48.08.03. ( 4.3 :,, ), (1946). 48.08.08. 48.08.26. ( ). 48.08.31. ( ). 48.08.31. 48.08.26. ( ). 48.08.31. ( 4.3 : ), 48.08.14. 48.09.23. (1946) 34, 2, 2. 48.09.24. 신문보도를통하여사형집행사실을확인할수있었던것은모두 15건인데, [ 표1] 의군정청관보에게재된집행가운데중복되는 3건을제외하면, 미군정기사형집행으로특정할수있는사례는관보상의 20건과신문보도상의 12건등모두 32건이다. 따라서 1948년 8월 31일자신문보도에서와같이그집행인원을 47명으로잡는다면 15건, 39명으로파악하더라도 7건의집행사례를확인할수없었다. (3) 국가기록원소장집행원부현재국가기록원에는미군정시기의사형집행자료로대검찰청공판송무부집행과가생산한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집행원부 (BD0078248, BD0078249, BD0078250) 3권이보관되어있으나진행번호, 기록번호, 주임검사, 좌명, 피고인의성명 연령, 재판또는처분 ( 법원또는검찰청, 연월일,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79
형명, 기타 ), 상소 ( 제기일, 취하일, 포기일 ), 재판확정일, 지휘일, 촉탁일, 수탁청, 비고등집행의개요만이기재되어있을뿐이다. 20) 이원부는양형이유를규명할수있는구체적인내용이포함되어있지않고, 훼손상태가심각하여이마저도파악이어려웠다. 21) 아울러군법회의에의한사형집행을확인할수있는것으로는국방부법무관리관이 1972년부터 (1973년기록누락 ) 1984년까지생산한 13권의 사행집행관련기록 ( 참조코드 AG31/S13) 이있는데군법회의에서사형이확정된범죄자에대한사형집행명령서와사형집행계획, 법원확정명령서, 사형집행종료보고서, 군법회의 대법원의형사판결문과증빙기록들이편철되어있다. 그러나이기록물의경우정부수립이전미군정기의국방경비대가군법회의를통하여사형을선고하거나집행한내용은해당연도전체의자료가누락되어있다. 22) (4) 소결신문보도를통해서는불완전하지만다음과같은이시기사형선고와집행의특징및경향을추정 분석할수있었다. 즉, 미군정이군사위원회를통하여직접심리한사건들의경우사형은선고하되집행을하지않았다. 특히앞의 [ 표2] 와같이미군정은 1946년 10월발생한대구폭동이후정치적으로중대한고비에직면하게되는데이시기한달여의기간동안무려 22 명에대하여사형을선고하였다. 그러나이들의사형은확정지었으나추후 20) 1950 1952 (BA0155548). 1951 2 9 1952 6 16 37 (, ),,,,. 21) 1, 2.,. 22) (BD0107514, BD0107515), 4 3 2,530,. 4281 12 4282 7 ( ), 1948 12. 180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무기징역등자유형으로감형을하였다. 즉, 군정초기미군이피해자로관련된일반형사사건에서사형을선고하기도했지만대체로미군정이사형을선고한것은정치적인사건이주류를이루었는데, 사형을선고하되군정장관의확인절차와연합군총사령부 (GHQ/SCAP) 책임자인맥아더가감형하는형식의조치를취하여군정통치의수단으로사형을활용했음을확인할수있다. 이와는대조적으로조선인재판소가살인 강도살인등일반형사사건으로사형을확정한경우는재심내지감형혜택이주어지지않은채집행이이루어졌다. 그런데집행원부를제외하면이시기는물론이고건국이후 1951년 2월 9일이전의사형집행관련국내공문서자료는그행방이묘연하다. 다행이집행원부가운데내용확인이전혀불가능했던 1948년의집행원부를제외하고, 1946년집행원부에서 19건, 1947년집행원부에서 20건의집행사실만은확인할수있었다. 특히군정기의첫사형집행은 1946년집행원부에서발견되는데 [ 표1] 의군정청관보공고제19호에게재된내용보다앞선 4건의사형집행이있었고, 이가운데가장빠른것은 1946년 3월 20일대법원에의하여확정된강도살인사건으로 6월 26일대구지검의촉탁에따라당일자로집행된것이었다. 이러한결과와군정청관보상의사형집행에대한공고내용, 일간신문에보도된사형집행사실을각대조 취합하면미군정기의사형집행은제주4 3사건으로 1948년 8월 3일, 9월 23일, 각사형이집행된군인 5명을포함할경우 53명, 23) 이들을제외한순수민간인에대한사형집행만을집계하면 48명이된다. 24) 23) 1948 9 23, 2 1948 8 14, 1) 1949 7 14. 24) (NARA), (RG 59), (RG 153), (RG 332), (RG 338).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81
4. 미군점령치하일본인사형수처리의문제 1948년부터 1951년까지미군점령치하일본에서집행한 46명의사형수와관련된최근발굴자료가운데에는본적지가대한민국으로되어있는사례가 7건포함되어있는데, 당시일본의사법기관은이들에대한사형선고에있어서자국민에비하여양형상엄격한판단을내렸을가능성이제기된다. 이점에대하여문제의식을가지고있던연합국총사령부는한국국적자에게선고된사형판결의일부를재검토하기도하였다. 25) 그런데 1947년 2월 11일, 일본사가현 ( 佐賀縣 ) 에서부산으로향하던석탄운반선의일본인선원들이그선박에편승하여밀항하려는조선인 2명을살해한후시신을바다에유기한사건에대하여부산지방심리원은 1947년 4월 30일, 관련일본인가운데 5명에게강도살인죄로사형을선고한후, 그해 10월 31일, 대구고등심리원에서상고기각으로사형을확정하였다. 26) 이들은당초 12월 2일, 사형집행이예정되어있었으나군정은이를계속연기하다가 1948년 7월 19일, 전원을군정장관딘 (W. F. Dean) 의직권에따라감형한후일본으로추방한바있다. 27) 따라서동일한시기피점령아래있었던남한과일본에서의사형을둘러싼미군당국의전혀상반된태도는주권을회복하지못한남한에서의해방이의미하는바를다시생각하게만드는부분이다. 25), GHQ:,, 2013, 18 ; 1947 4 15, 5 8, 7 8, 1948 4 17, 4. 26) 1947 5 6, 2 ; 1947 (BD0078249). 27) 1948 8 31, 2. 182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Ⅲ. 사형선고기준과사형재판의실재 1. 사형양형의준거 (1) 포괄적 자의적사형양형의가능성급작스러웠던광복의결과는의도하지않았던군정의실시를가져왔고, 이에따라미국은태평양미육군최고지휘관맥아더의이름으로 포고제1 호 를발하여 1945년 9월 7일자로북위 38도이남의조선지역을점령하게된다는사실을알리고, 점령군에대하여반항행동을하거나질서보안을교란하는행위를하는자는용서없이엄벌에처한다고규정하였다. 아울러같은날의 포고제2호 는점령지역공중치안질서의안전을기하기위하여발령된포고, 명령, 지시를범한자, 미국인과기타연합국인의인명, 소유물또는보안을해한자, 공중치안질서를교란한자, 정당한행정을방해하는자그리고연합군에대하여고의로적대행위를하는자를점령군군율회의에서유죄로결정한후사형또는타형벌에처한다고명시하였다. 이렇듯미국은포고령을통하여군정의성격과이를유지하기위한수단가운데사법정책의방향이결코조선주민을위한것이아니라는점을분명하게선언하였다. 특히군정최초의형벌규범으로평가되는포고제2 호는포괄적이면서자의적해석이가능하였는데, 이후로중범죄의사법처리를전담했던군사점령재판소인군사위원회 (Military Commission) 가정치적인사건들에서손쉽게사형을선고하는규범적근거로작용하였다. (2) 형사실체법의식민체제유지과거의사법체계를대체할수있는현실적인여건이나역량이충분히갖춰지지아니한채미군정은남한에서의점령을개시할수밖에없었기때문에 1945년 10월 9일, 식민지배체제에서의법률가운데일부만을폐지하는군정청법령제11호를발령하게되었다. 이에따라기본적인형벌규범은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83
조선전시형사특별령에근거한 ( 구 ) 형법 (1941) 이조선인재판소가취급했던일반형사사건에서여전히법해석과적용의준거가되도록하였다. 28) 형사특별법상사형선고가가능한규정도그효력을발휘할수있었고, 29) 특히일제강점기전시형사특법법 (1944) 에규정된형법상의범죄를가중처벌하여사형을선고할수있는조문들도여전히생명력을유지하게된다. 30) 물론식민시대법률의폐단을일소하고우리국정에알맞은법률을제정하고자군정기말조선법제편찬위원회를발족하여그산하에형법분과위원회를조직하는노력이전개되기도하였다. 특히형법과관련된요강을마련하면서그내용에있어서는법정형에서사형의범위를축소할것을포함시키려는계획이있었다. 31) 그러나완성된 형법기초요강 을살펴보면법정형에서사형을축소하기위한구체적인논의는나타나지않았고, 32) 미군정기의형사재판은일제강점기의유산에의하여현실적인지배와구속아래있었다. 2. 군정시기제정형사법령과사형규정범죄구성요건 (1) 죄형법정주의를무시한형사입법의시도 점령군재판소에서의형사재판을포고제 2 호라는명확성원칙에반하는 28) ( ) 81 ( ) 82 1 ( ), 77 1 1 (), 82 2 ( ), 83 ( ), 85 1, 2 (), 108 ( ), 117 1 ( ), 119 ( ), 199 (), 200 ( ), 240 ( ), 241 ( ) 14. 29) ( 74 ) 1,. 30),,, 2005, 188 ; ( 18 2 ) ( 1 1, 4 1, 5 1 2, 7 1, 7 2 1, 9 1 1, 10 1, 16 1 3 4, 18 1 2 ) 14. 31) 1948 4 29, 2. 32), /( ),,, 2003, 45. 184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규정만으로처리하는데한계를절감한미군정은 1946년 5월 4일, 군정위반에대한범죄 ( 법령제72호 ) 를제정하여발효시켰다. 이법령은군정위반에대한범죄를포고제2호또는당시까지공포된법령외에모두 87개범죄행위유형으로규정하고 ( 제1조 ), 제2조에서는제1조에해당하는범죄를범한자에대하여점령재판소의판결에의하여처벌된다고명시하였다. 이와같이새로운법령을제정하였으나범죄구성요건은여전히구체적이지않았고, 법정형또한명시하지않아근대형법이라면예외없이취하였던죄형법정주의를무색하게만들었다. 더욱이제3조에의하면제1조에열거된범죄의예비, 공모, 동의, 권고, 방조, 기도, 야기자또는대략범인임을인정함에도불구한보고의불이행자, 체포, 수사, 유죄판결또는형벌을면케하기위하여한범인방조자까지주범과동일한형벌로처벌하도록하였다. 33) 이또한자의적인해석과범죄의범위를무한정확대하고있어서법령자체가법제화된폭력임을알수있다. 다행스럽게도이군정법령은효력발생한달여만인 6월 17일, 대법원장김용무에의하여정지담화가발표되고다음날군정장관러치 (A. L. Lerche) 도직접기자회견을열어그실시를보류하게되었다. 34) 만약이법령이계속효력을발생하여당시사회에통용되었더라면제헌헌법부칙제 100조에따라경찰국가로특징지어지는이승만정권이이를악용하여불안한사회현실과반공주의를관철하는체제수호수단으로다른법률에의지하지않고서도손쉽게사형판결을양산하는법적근거로삼았을것이다. 그러나이법령은규범적효력이유보되기는하였지만결과적으로는이후포고제2호에규정된범죄행위를해석 판단하는준거가되었다. 35) 33) 72 1946 5 4. 34) 1948 4 8, 183. 35),, 1925-1950,, 2012, 204~205.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85
(2) 미군정이마련한사형규정범죄구성요건이후군정에의하여사형이가능한범죄구성요건이법제화된것은군정종식이목전으로다가온시점에서였다. 정상적인공포절차를거친입법으로는 1948년 7월 21일, 제정된 항명죄및해적죄기타관계범죄 ( 법령제 208호 ) 에나타나는상대적사형범죄구성요건이다. 36) 이법령제1조는항명죄를규정하고 ( 가 ) 항에서남조선치적선박의선원으로서선장그선박또는그에게위탁된물품을방위하기위하여집무하는시에이를방해또는제지하기위하여폭행을가한자는사형또는무기징역에처하도록규정하면서, 제2조의해적죄에도 ( 카 ) 항에공해또는남조선해사관할구역내의수역에서국제법에규정한해적을범한자는사형또는무기징역에처하도록규정하고있다. 37) 이보다우선하여 1948년 7월 5일, 군정에의한제정이추정되지만그효력에논란이있는법률인 국방경비법 과 해안경비법 이마련되었다. 38) 이들법령은제주4 3사건과그에따라발생한박진경중령살해, 조선해안경비대원의잇따른월북발생그리고경비대내의좌익활동에대한심각한우려가제정배경이되었다고한다. 39) 그런데 1948년의국방관련경비법들은근본적으로 공포될수없는법 이었으나, 40) 현실에서는본연의목적범위를넘어서전환기한국사회가당면한체제위협의도전에대응하는공안규범으로기능하였다. 36) 208 1948 7 21. 37). 1946 ( 1946 2 10, 2 ),,, ( 1946 9 17 4 ), 10 ( 1948 7 11, 2 ). 38),, 99, 2007, 271~281. 39),, 34, 2007, 112~114. 40), -, 53 4, 2010, 13. 186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 표 3] 국방경비법 (1948) 의사형범죄구성요건 9 10 15 16 18 19 27 ( ) 28 ( ) 29 30 ( ) ( ) 32 ( ), 33 ( ) ( ) 34 48,, 3 따라서국방경비법등은한국현대사에있어서가공할공포와위력을행사하며무수한사형선고와합법을가장한집단적사법학살의원흉이되었다. 양법률에서사형선고가가능했던범죄구성요건을요약하여정리해보면 [ 표3], [ 표4] 과같은데, 국방경비법과해안경비법에서특히논란이되는것은군인, 군무원은물론이고민간인까지규율대상으로삼았던국방경비법제32조와해안경비법제8조의2의이적죄와간첩죄를규정한국방경비법제33조와해안경비법제9조이다.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87
[ 표 4] 해안경비법 (1948) 의사형범죄구성요건 8 1 2 3 4 5 6 7 8 9 10 8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8 2 9 10 188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3) 미군정이거부한사형규정범죄구성요건생존권과직결된양곡문제에미군정은각별한관심을기울였으나초기에취한정책의실패는조선민중으로부터신뢰를상실하게되는원인가운데하나로부상하게되었고, 사회적으로는쌀을비롯한생필품의매점매석을통하여폭리를취하려는경제사범을사형으로처벌해야한다는여론이구체화되기도하였다. 41) 해당행위에대한처벌근거를 1945년 10월 30일, 발효된군정법령제19호제3조에서구하고, 42) 이에대한위반은제6조에따라군정재판소의결정에의하여처벌할수있으므로사형을포함한무제한의형벌이가능하다는것이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 15일, 미군정은 미곡밀수출등의처벌 ( 법령제127호 ) 법령을법제화하게되지만법정최고형으로는절대적무기징역을선고할수있도록하되, 그객관적구성요건을양곡밀수로적발된자가 3범이상인누범인경우로제한하였다 ( 동법령제2 조 ( 가 ) 항 ). 43)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반민족행위처벌법 (1948) 의전신이라고할수있는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간상배에대한특별법률조례 를마련하여친일파와독립운동자를학대한자, 밀정행위를한자, 변절하고부일협력을한자, 독립을저해할목적으로조직된정치단체의대표간부가운데죄적이현저한자, 민족반역자들에대하여사형, 무기또는 10년이하의징역에처하고자하였다. 이법령은 1947년 7월 2일, 과도입법의원을통과하였으나군정장관의인준보류로시행되지는못하였는데, 그이유는미군정의동맹세력인친일경찰, 관료, 정치인등에대한소급처벌을대상에포함하고있었기때문이다. 41) 1946 2 11, 2 ; 1946 10 13, 3. 42) 3 :. 43) 1948 10 9, ( 7 ) 10 1.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89
4. 미군정에의한형사재판의실재 (1) 군사법원과민간법원이공존하는이중적사법체계미군정기남한사회에서특히민간인에대하여사형선고를할수있었던사법기구는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제21호에따라설치된군사위원회와조선인재판소인데, 이들은군정이종식될때까지양립되어있었다. 44) 그러나 1947년 2월 26일, 조선변호사회중앙협의회는미군정에대하여 13 개조의건의서를작성하여제출했는데, 그가운데조선인에대한재판을전부조선인재판소가처리할수있도록하고, 재판의삼심제도를신속히실시할것을요망하였다. 45) 군정은 4월 11일부로조선인에게는군정재판을적용하지않겠다는발표를하였으나, 46) 이와같은조치는당시사법부장김병로조차제대로그내용을전달받지못한채일방적으로내려진것이었으며, 며칠후실지로미군정은군사위원회등에기소된사건들을조선인사법부로이관하였다. 이러한조치는미소공동회의의재개를앞두고비판받아왔던남한의사법체계에대한결함을조율하기위한측면에서전개된것으로조선인의입장을고려한사법권의이양이나개선을의미하는것은아니었다. 그리고일체의형사재판을중지하고미군과관련된현행범도조선인재판소에송치하게되는 1948년 8월 1일까지는군정이직 간접적으로군정재판을주도하였기때문에군정기간내내남한에는이중의사법체제가유지되었다. 47) 그런데여기서눈여겨볼대목은군사위원회라는기구의성격이일종의계엄상황아래에서개최되는고등군법회의와유사했다는점이다. 군인이검찰관과변호인이되고, 재판관이되며, 심지어는배심기능을담당했던군사위원들조차전원군인으로만채워진재판의성격은설령이들이일정한 44),, 26, 2008, 421. 45), 1947 2 27, 2. 46), 1947 4 13, 2. 47),, 633 1948 3 13 4. 190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법의식과법률적인소양을겸비하고있었다하더라도동일한사안을민간법원의태도와는전혀다른방향에서재판할수있음을시사한다. 더욱이미군정기의광범위한군사재판은단지이시기만의경험에그치지아니하고건국직후그리고그후로도오랫동안일반국민에대하여재판권을과도하게행사하게되는결과를가져왔고, 그것이의도적이면서악의적인사법학살이든기계적이고무의식적인사법오류에해당하든결과적으로는체제수호를위한수단으로작용하였다고평가할수있다. (2) 기준없는양형과재판관할권의전횡군정재판에관한조선사회의반응은판결의공정성과타당성에숱한의문을제기하였고종국에는사법불신으로이어지게되었다. 군정재판을일반인들은 고무줄양형 내지 엿장수재판 이라고비난하였으며, 48) 법률전문가들은재판관할권의혼란을문제시하였다. 1946년 7월말, 조선정판사위폐사건재판정에서시위를벌인 50명가운데 44명을무더기로포고령위반으로징역 3~5년의중형을선고한것이계기가되어사법제도에대한깊은이해가부족했던일반인들조차미군의횡포가일본인못지않다는비판을가하게된다. 한편, 법률전문가들은동일한사안을누가심리하는재판소에회부할것인지에대한결정이군정장관의의도에따라전횡되는것을비판하고, 법령이제대로정비되지아니한상황에서임시방편으로마련되었던포고령을군정이안정화된이후에도 도깨비방망이 처럼사용하는것은사법제도에대한신뢰를저해하는요인이라고지적하였다. 그러나근본적인측면에서이기간의군정재판이남긴후유증은군정종식이후들어선이승만정권이제주4 3사건과여순사건그리고한국전쟁에서의민간인에대한사법처리과정에서여실히드러났다. 즉, 고등군법회의를동원하여민간인에대한사형선고와살육에가까운집행을서슴지않을 48) 1947 1 27 2 1 1, 6, 2, 5. 1947 2 8, 2.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91
수있었던것은군정재판이일상적으로재판관할을무시하고전횡했던경 험을학습한효과에서비롯된것이라고할수있다. (3) 사형판결의확인과감형사형이선고되더라도군정사령관에게는이를감형할권리가있었고, 연합국총사령부사령관의확인절차를거치기전까지는집행되지않도록되어있었다. 49) 이에따라 1946년 7월 28일, 남한에서첫감형이이루어진이래 1948년 4월까지수차례각종범죄에대하여확정된형벌을감형하는조치가취해졌다. 특히 1947년 3월 13일에는 1946년 10월이후대구지역을중심으로일어난폭동으로사형이선고된 19명가운데 9명에게무기징역으로의감형을, 1명에게는무죄를선고하였고, 50) 6월 20일에도군정사령관하지의명령에따라포고령제2호위반으로군정재판을받은 669명을석방하였는데, 사형이선고된자들은전원맥아더사령관의명령으로무기징역으로감형되었으나조선인재판소에서사형선고를받은자들은제외하였다. 51) 5. 군사위원회가사형을선고한재판사례 (1) 대한민청사건재판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감찰부장으로활약하던김두한과그의부하들은조선공산당산하의조선청년전위대소속정진용등 2 명을납치감금하여상해치사한후체포되어서울지방심리원에기소된다. 1947년 7월 3일, 1심에서주범김두한은사건현장부재를이유로당시암시장에서거래되는담배두보루가격에해당하는 2만원의벌금형을선고 49), -, 30 1, 2006, 70 30. 50) 1947 3 14, 2. 51) 1947 6 20, 2. 192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받고, 다른관련피고인 13명도 7년이하의징역형에처해진다. 이판결에대해검찰관이서울고등심리원에상고하였으나미군정은검찰과 1심재판부가모두극우편향적이라고판단하여사건을 11월 22일, 조선인재판소가아닌미육군제24군단군사위원회에회부하였다. 수사를전담했던미군방첩대 (CIC) 는수사결과에기초하여살인죄로조선인사법부검찰에송치하였기때문에김두한등에대한엄형선고를확신하고있었다. 그러나예상과다르게조선인검찰관의기소내용이상해치사죄로특정되고재판부역시비교적경미한형벌을부과했던것이다. 미군정은대륙법계를따르는한국법체계가 죽이려는의도 를갖지않고 때리려는의도 로만폭행하면최대 9년형의단일유죄판결만내릴수있다는사실을이해하지못하였다. 52) 미군 CIC의보고서에따르면이사건을미군정이직접다루고자했던의도는첫째, 테러리스트들은유죄판결을받는다는것과남한의사법제도가양호하다는점을보여주고, 둘째, 군정과경찰은정치폭력배를보호하지않는다는것을과시하기위해서라고밝히고있다. 53) 사실상상고심절차가되었던군사위원회의재판을통하여 1947년 12월 12일, 김두한등 14 명에대하여포고령제2호위반으로사형을선고하였으나, 1948년 3월 15 일, 김두한을제외한 13명은재심과정에서하지중장에의하여, 김두한은 5 월 17일, 맥아더사령관에의해서각종신형으로감형되었다. 그러나불과석달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수립되자대통령이된이승만은특별사면으로대전형무소에수감되어있던김두한을석방하게된다. 이사건을통하여미군정이결국상해치사사건에대한법리적인해석보다는자신들이통치하고있는남한지역에서나름의법질서가통용되고있다 52) ( ) 205 1 2, 220 1 3 5. 221 220,, 2. 53) HQ, USAFIK CIC, Weekly Information Bulletin, No.1(23 April 1947), p.13; HQ, USAFIK, 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 Semi-Monthly Report, No.14(15 July 1947), pp.8~10; HQ, USAFIK, 971st Counter Intelligence Corps Detachment, Annual Progress Report For 1947, pp.90~91.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93
는사실을증명하기위한정치적인수단으로사형을사용했던의도를엿볼 수있다. (2) 장덕수살해사건재판한국민주당정치부장장덕수의살해사건은처음부터미군정의군사위원회가취급하였는데, 이사건의피고인들은 1948년 2월 21일, 포고령제2호위반으로기소되어 3월 1일, 중앙청제1회의실에서공개재판을받게되었다. 기소사실가운데장덕수살해와직접관련된부분은 피고인 8명이공동행위로또공동의사에의하여서울에서 1947년 12월 2일에또는그날경에악의를가지고고의적으로숙고적으로불법적이며계획적으로장덕수를카빈총으로살해하였다 54) 는것이었다. 변호인은범행을직접실행한 2명이외에는물적증거가불충분하고다만진술서가있을뿐이라는점을지적하면서그것이자발적으로작성된것이라고볼수없고더구나사건을정황증거만으로처단한다는것은위험하다는취지의변론을하였다. 그러나미군검찰관은이사건을처음부터정황증거만으로도기소한다는점을말하였고또한피고인들의자백기타여러가지물적증거로볼때음모, 교사, 범행이서로밀접한관계를맺고있는것이드러났는데법률에의하면범행을교사한자는범행한자와같이처단할수있으며, 아울러군정재판규정에의하여피고가한사람이상인경우한사람의진술만으로도충분한증거가된다는반박을하였다. 공판은무려한달간 21회에걸쳐개정되었고검찰관과변호인의논박이거듭된가운데군사위원회는 4월 1일, 실행범은물론교사범들에게도각교수형을선고하였다. 55) 이사건과관련하여군정장관은재판이개정되기전부터이례적으로두차례나직접자신의입장을표명하였다. 즉, 1947년 12월 5일, 장덕수사 54), 1948 3 3, 2. 55) 1948 4 1, 4 2, 2. 194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망의애도성명에서실행범인은물론배후교사자에대한극형처단의의지를밝힌후, 56) 12월 27일에도단호한처벌의지를특별담화의형식으로발표하였는데, 테러사건의조장그모든책임자와공범자, 선동자는군정재판에회부하여신속하고완전한재판을받아야할것이며, 그범죄의정도에따라극형에처하게될것 57) 이라고언급하고있다. 민주국가적사법절차가작동하기어려운군정체제라는사실을인정하더라도재판이시작되기도전에남한에서전권을좌우하는사람의이러한의사표시는수사와기소, 그리고재판의전과정이흘러가야할방향을미리설정한것이나다름없었다. 58) 6. 조선인재판소에의한사형재판 (1) 사형양형기준마군정시기에사형을선고한대법원판례를살펴보면사형양형의기준이나이유가명확히드러나지는않는다. 다만변호인이상고이유에서 범행수단이잔인하지아니하고단순살인죄에대한과거양형의상례는최악의경우에도사형을선택하는바가극히희소하며본건은최악의경우가아님이명백하므로원심판결의사형양형은심히과중함이현저 59) 하다거나, 사실의착오에의하여범행대상이변경되어버린사안에서도해방후살인사건의처단을예시면서송진우살해범에게는징역 15년, 여운형살해범에게는무기형을선고하였으며남방의폭동사건, 즉음모계획하에경찰서를폭격하여다수경관과그가족까지살상한범인에대한양형을거론 56), 1947 12 6, 2. 57), 1947 12 28, 1. 58), 1948 4 23, 2 ; 1948 4 22,, 4, 2 10. 59) 1948. 6. 1.., 4281 42 [,, 5133].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95
하며원판결에서사형의양정이심히부당하다는주장에대하여, 60) 일관되게기록을정사하여범정기타제반사정을참작하였으나원심의양형이심히부당하다고할만한현저한사유가없으므로논지는이유가없다고판시하고있다. 존속을살해한사안에서도사형선고에있어피고인의심신상실여부가고려될수있으나그판단은반드시전문가에의한정신감정을요하지않는다는정도의내용이보인다. 61) 그런데 ( 구 ) 형법에는현행형법제51조와같은구체적인양형의조건에관한명문규정을두지않았다. 그러나 1931년마련된일본의개정형법가안 ( 改正刑法假案 ) 총칙제57조에는양형에있어서고려해야할사항을 8가지로나누어규정하고있었고, 62) 그것이일본의형법개정으로이어지지는못하였지만당시형사재판의양형에참조되었을것이므로식민체제아래에서법률실무를담당했거나법학교육을받았던군정의조선인재판관들도그영향으로사형선택에이러한양형기준을검토했을것이다. (2) 형사소송절차의불완전성일제강점말기전시특례하의조선전시형사특별령에근거한 2심제재판은 1948년 4월 1일군정법령제181호로폐지될때까지지속되었기때문에군정의조선인재판소에서사형이선고된일반형사사건도 2심제로처리되었다. 아울러 1948년 4월 1일이전까지는수사절차에서영장없이인신구속이가능했던것은물론이고, 피의자, 피고인에대한변호인선임과접견교통권이제대로보장되지않았으며, 63) 경찰이무고한사람을혐의자로지 60) 1948. 6. 8.., 4281 48 [,,, 5, 5134]. 61) 1948. 3. 10.., 4280 177 [, 3]. 62) 1.,, 2., 3., 4.,,,,,,, 5.,,,, 6., 7., 8.. 63). 1948 2 24, 1 196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목하여법적근거가소멸된예비검속후경찰관서의유치장에장기간불법감금하더라도이를적절히통제할수있는제도적장치가존재하지아니하였다. 64) 따라서이러한사정아래불법구속에의하여자유권침해가야기되고무고한사람이억울하게누명을쓴채사형선고와집행이되었을가능성도전혀배제할수는없다. (3) 형사법관의소극성정치요인살해범, 예컨대송진우와여운형의살해범을사법기관이극형에처하지않아정치테러가계속되고있으므로이를방지하려면정치적인살인사건을사형에처해야한다는여론이제기되었다. 이에대하여대법관이상기는 어떠한범죄에대하여서도기록을보기전에예단이있어서는아니된다. 우리는재판관의입장에서기록에의하여공정히처결하였을따름이며여기에대한사견을이야기할수는없다. 사회사조를따라여기에대한비상법같은것이제정되어있다면여기에의해처단할것이다. 그런법률은아직없다. 남조선의사법당국은큰범죄의관계자는흐지부지놓아주고조그마한범죄만처단한다는비난이있으나범죄의일체조사는검찰관이하게되므로협의의책임은재판관에있지않다. 우리는오직기록에의하여판결할뿐이다. 이라며소극적입장을취하였다. 아울러조선인재판소는군정의지휘밑에있는군정재판소의일부를구성하고있으므로군사점령관계상상부의명령에의하여사건을처리해야한다는입장을대한민청사건을미군정의군사위원회에이송하면서우회적으로피력한바있다. 65) 1, 1. 1948 2 25, 2. 64) 1948 3 20, ( 176 ). 176, 176, 16, 1995, 117. 65), 1947 12 17, 2.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97
(4) 사형판결의신중성당시조선인형사법관들이소극적이었음을부정할수없지만사형판결에는신중함을보였다는점도부인할수없다. 이들이격변하는사회정세속에서일정한예외를인정할수있지만대체로여론의요동이나주변의압력에굴하지않고, 형사재판이정치적도구로전락하는것을최대한저지하고자법과양심에따라임하려했던점은우리사법사 ( 司法史 ) 에있어서높이평가해야할부분이다. 당시의포고령제2호나현행형법만큼이나정치적이면서윤리적색체가강렬했던 ( 구 ) 형법을형사재판의기준으로삼았음에도사형판결을양산하지않고자제하려했던것이다. 예컨대 [ 표5] 과같이정치인살인및살인미수사건에대하여 1심의검찰구형은각사형이었으나조선인법원의양형은무기징역에그쳤고, 대법원의확정결과에서는기수의경우무기징역과 15년의징역형을, 미수에그친경우는징역 7년을선고하였다. 그러나장덕수살해사건을직접처리한미군정은 1심구형결과와양형이사형으로일치하고있다. [ 표5] 미군정기주요정치인에대한살인및살인미수관련자사법처리현황 66) 1 1 15 47.02.14. 48.03.29. 7 47.12.28. - 48.04.21. 아울러 1948년 4월, 경찰과무장폭도사이에서벌어진무력충돌로발단된제주4 3사건에대한조선인재판소의초기사법처리에있어서도 5월 31 일부터 6월 11일까지이루어진기소와공판절차에서는사형선고가가능한포고령제2호위반을적용하였으나최고형으로는 4건의무기징역 ( 살인죄, 방화죄각 1건, 살인미수 2건 ) 을선고하는데그쳤을뿐사형선고를하지는 66),. 198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않았다. 양형에서사형을배제한이유는기소된사람가운데폭도측소요책임자가하나도구속되지않았고, 공판에회부된것도 19세내지 25세정도의청년들로서이들은아무것도모르고기계적으로행동한자들이라는사실이참작되었기때문이었다. 67) 더욱이군정종식후제주4 3사건의관련자를본격적으로처벌하기위하여이승만정권이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 ~7월, 두차례에걸쳐단심으로처리한고등군법회의에서 ( 구 ) 형법제77조 ( 내란죄 ) 와국방경비법제 32조 ( 이적죄 ), 제33조 ( 간첩죄 ) 를적용, 384명에게사형을선고하고이가운데 288명을집단적인총살형으로처리한결과와대조해본다면, 68) 미군정기의조선인재판소가사형선고에있어서얼마나신중한태도를견지했는지를알수있다. Ⅳ. 맺음말 우리현대사에서미군정기는비록 3년이라는짧은경험이었으나정부수립이후대한민국에긍정적이기보다는부정적영향을가져다주었으며, 형사사법의영역에있어서도이러한사정은뚜렷이부각되고있다. 이시기에는당시헌법규범의불비등으로대법원의최종적심사를받지못한채고등군법회의에의하여사형이집행된 5명의군인에대한경우를제외하면민간인 48명의사형집행을확인할수있었다. 그러나이기간의사형집행이건국이후대한민국역대정권의통계와비교할때상대적으로많았다고는평가할수없어보인다. 그보다중요한문제는전시군사재판의성격이강했던미군정의재판체 67),,, 1948 7. 68) 4 3, 4 3, 2003, 448.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199
계가자신들의손으로직접사형집행은하지않았으나사형을정치적으로활용하였고, 이러한태도는건국과동시에등장한이승만정부가역대정권가운데가장많은사형선고와집행을, 그것도민간법원이아닌군사법원을동원하여시도하게되었던원인이었음을부정할수없다는사실에있다. 아울러미군정은그종식을얼마남기지아니한시점에서규범적효력을의심할수밖에없는불완전한군법인국방경비법등을무책임하게처리하여국가체제가불안했던정국을통제하는체제유지규범으로악용하도록방치하였다. 다시말해미군정은그들의직접적인영향력을한반도의남쪽에서거둬가면서형사실체법과형사절차에있어서죄형법정주의를파괴하는방법을사형제도라는형벌을통하여그것이의식적이었든무의식적이었든학습시키는역할을했던것은분명하다. 그러나비록자주적인국가주권을행사할수없었던시기였고형사규범도불완전한상태였지만사형판결을가급적회피하려고노력했던미군정소속조선인재판관들의태도는돋보이는것이었다. 이연구를통하여미군정기의사형이정치적으로남용되었음을일부규명한것은의미있는일이지만그것이어떻게오용되었는지를객관적으로검증하는작업으로이어지지못한점에아쉬움이남는다. 국내에현존하는당시사형양형및집행관련기록의부재와훼손으로이에도달하지못한것은추후연구과제로돌리면서사형이형벌이라는그자체의자기목적성을초과하여정치화되는현상은결국완전하게사형이폐지되지아니하는한치유되지않고악순환의연쇄를되풀이할수밖에없다는사실을분명히인식하고, 과거의기억과흔적을사형폐지의정당하고도중요한근거로삼아야할것이다. 200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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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Death Penalty under the USAMGIK Lee Deokin* This study is aimed at exploring how the capital punishment during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from September 7, 1945 to August 14, 1948 was enforced, the criteria of death sentence, and the reality of death penality trial. Even though the trial system of USAMGIK characterized as military trial during times of war did not directly execute inmates, it used death penality for politics. It led the Syngman Rhee government established upon liberation of Korea to give the most number of death sentences and executions, among all former administrations, through military court, instead of civil court. In addition, USAMGIK recklessly handled the Articles for the Government of Korean Constabulary, an imperfect military law whose normative validity was questionable, right before it came to an end. As a result, the law was misused as a norm for maintaining the precarious regime that controlled the national system. This study is meaningful in that it partially clarified the fact that capital punishment of USAMGIK period was politically misused. However, this study also has a limitation of not being able to verify how it was misused on objective grounds. Records on the death sentence examination and execution at the time was inaccessible due to their absence and damage; it should be explored by future studies. Through this study, people should be aware that the phenomenon of death penalty being used politically, beyond its original purpose for * School of Police Administration, Busan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202 이덕인 미군정기의사형제도에대한연구
justice, will inevitably repeat the vicious cycle, unless death penalty is abolished. Furthermore, people should consider the memories and traces from the past as crucial grounds for abolishing capital punishment. Key words : Jurisdiction over the Occupied Territory, Military Occupation Court, Articles for the Government of Korean Constabulary, Death Sentence Standard, Death Penalty in the USAMGIK 제 7 권제 4 호 亞洲法學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