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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창원시의 해양관광 현황과 개선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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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2009) : 173~218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시민사회의 시각* 1) 박 은 홍** Ⅰ. 문제의 제기 민주주의와 민주화는 구분된다. 민주주의란 인민이 기본적 자유 를 수단으로 진정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체계이다. 이때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인민 스스로가 성취하고자 하는 정 치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는 수단이 다. 민주주의 하에서 정부는 법치에 근거하며 주요 공직자들은 경쟁 적 선거를 받아들여야 한다(Velasco 1997: 80-81). 요컨대 권위주의에 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은 강제된 질서 (imposed order)에서 조 정 가능한 분쟁 (regulated conflicts)으로 나아가는 변화이다. 이때 민주주의는 선거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 혹은 절차적 민 주주의(procedural democracy)와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ve democracy) 로 구분된다. 전자는 주기적이며 비교적 공정하고 정직하며 평화적 인 선거를 통해 정치 지도자들을 선택하며, 이 과정에서 주요 정당들 간의 권력 교환이 이루어진다. 후자인 실질적 민주주의는 대부분의 * 이 논문은 2006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 아 수행된 연구임(KRF-2006-B00234).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74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인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권리까지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개발 (maldevelopment)에 대비되는 인간중심의 개발 (people-centered development)을 의미한다. 주목할 것은 민주화가 시민적 정치적 권 리와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격차(gap)의 문제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Arat 1991). 이때 빈곤, 실업, 불평등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저발전과 인간중심의 개발의 실패는 앞서 발전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의 개발은 민 주화 이후 민주주의 국면에서 지속적 민주주의 (sustainable democracy) 의 전제조건이 된다. 1) 이 글은 동남아시아 민주화 이행의 대표적 사례인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에서 시민사회의 팽창,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 그리고 과두제의 변형 (oligarchy transformation)이라는 단계적 진화에도 불구 하고 민주주의가 안정화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실질적 민주주의, 즉 인간중심의 개발의 결핍과 시민사회의 분열의 관점에서 검토하 고자 한다. Ⅱ. 기존연구와 분석틀 모색 1. 개발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 지속적인 경제성장( 개발 ), 대중적 정치참여( 민주주의 ), 시민권 존중( 인권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다양했다. 쉐보르스 1) 권위주의적 요소를 청산하지 못한 신생민주주의를 가리키는 용어로 위임민주주 의 (delegated democracies),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illiberal democracies), 제한적 민주 주의 (limited democracies), 결손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ies), 미공고화된 민주주 의 (unconsolidated democracies),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 (low-quality democracies), 선거권 위주의 (electoral authoritarianism) 등이 있다.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75 키와 라이몽(Przeworski and Limongi 1997)은 교차국가 분석을 토대로 경제개발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민 주주의를 보다 강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롱드레 건과 풀(Londregan and Poole 1996)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과 민주주 의 간에 긍정적 관계를 발견한다. 이들은 성공적인 개발이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끌 것이라는 이른바 부-민주주의 이론 (wealth-democracy thesis)을 지지한다. 던(Dorn 1993: 601-607) 역시 경제적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자치권(right to self-governance)의 관점에서 보면서, 이것이 정 치적 자유, 민주주의, 법치에 대한 갈망으로 확산될 것으로 본다. 즉, 시장이 발전하게 되면 정치적 민주주의까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 다. 2) 이들의 논의는 아래 <그림 1> A유형의 긍정적 관계 곡선에 해당한다. A유형 <그림 1>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의 관계 2)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기본적인 권리(fundamental rights)라기보다 는 민주적 경쟁에 부합하지 않는 목표로 간주한다. 민주주의를 단지 법적, 절차적 것으로 보는 이들의 견해는 인권을 무시하면서 자본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Eldridge 2002: 25). 이들 시장근본주의자들과 거리를 두려는 사회적 신자유주의(social neo-liberalism)는 시장으로의 이행 (market transition)을 시장참여권, 시장접근 동등권 등을 포괄하는 시민권의 확장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접근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시각으로서, 개발을 빈곤퇴치, 시장경제 안에서 주변화된 사회계층의 생존역량 강화, 권력과 부의 집중에 저항하는 밀도있는 사회적 연결망 기술 가치 규범의 구축에까지 확장한다(Robison 2006: 6).

176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B유형 출처: Arat(1991: 45) 이때 맞교환 이론 (trade-off theory)은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인권에 대한 제한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제기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 면, 먼저 욕구에 대한 맞교환 (the needs trade-off)은 투자를 극대화하 기 위해 기본 욕구에 대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평등의 가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평등에 대한 맞교환 (the equality trade-off)이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성장을 방 해할 수 있는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제 한이 불가피하다는 자유에 대한 맞교환 (the liberty trade-off)이 있다 (Donnelly 1999: 626). 그렇지만 경제개발이 장기적으로도 빈민층에 혜택을 가져다주고 불평등을 감소시킬 것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강 력한 힘을 갖고 있는 기득권층이 자신의 경제적 권력을 불평등을 방 어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Donnelly 1999: 164-166; Freeman 2002: 138-139).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만 해도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아닌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인권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Arat 1991: 3). 그러나 도널리(Donnelly 1999: 618)는 단순한 절차적 민주주 의는 비민주적 혹은 반민주적 형식주의로 쉽게 퇴행한다고 주장한 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퇴행은 위 <그림 1> B유형의 긍정-부정 관계 곡선에 해당한다.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77 역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약속된 빠른 경제개발과 전면적인 인권상황의 개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Monshipouri 1995: 167). 정치 지도자들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이끈 정치 지도자들의 기회주의와 후원주의 추구, 기존 국가 엘리트들과의 관 계, 이 모든 것들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성숙 단계에 이르는 자유화가 없는 한 민주화는 인권보호와 본 질적인 연관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선거로 선출된 독재 자와 권위주의적 정파의 출현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취약한 개도국 민주주의의 경우 평화와 번영이 수반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 다(Rothstein 1991: 57). 그러기에 오도넬과 슈미터(O'Donnell and Schmitter 1986: 12)는 민주화의 2차 이행 (second transition)으로서 사 회화 (socialization)를 제기한다. 이 때 사회화의 핵심은 부, 소득, 교육, 위생, 주택, 정보 등을 균등하게 공급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 다. 그것은 곧 인간중심의 개발을 제도화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이다. 2. 분석틀 민주화 이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민사회의 폭발적 분출이다 (O'Donnell and Schmitter 1986: 49) 이때의 시민사회란 다양한 사회운 동과 다양한 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시민조직들 변호사단체, 언론인단체, 노조, 기업인단체 등 이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을 내 세울 수 있는 영역이다(Stepan 1987). 특히 비정부기구(NGO)의 확산 은 국가에 개혁을 압박하고, 사회적 약자계층을 조직하고 동원함으 로써, 또 정당, 노조, 언론과 같은 전통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대체함 으로써 시민사회를 강화한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권리란 피지배 집단과 국가간 투쟁의 산물이다(Foweraker and Landman 1997). 또한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비정부기구(이하 NGO)는 사회 경제

178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적 개발 과정에서 국가와 사적부문이 책임지지 못하는 영역을 보완 하는 제3섹터 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NGO는 빈곤층에게 서비 스를 제공하는 사적부문이며, 좌파 활동가들에게 NGO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운동의 중앙집중화 경향을 예방하는 신정치 (new politics) 이다(Clarke 1998: 9).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시민사회는 구 체제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행위자였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 시민사회는 민주화 이후 분열의 양상을 보인다. 반면 국가의 전환 양상에서 볼 때, 필리핀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자본가집단 혹은 지주계급으로 중심이 되는 과두제(oligarchy)가 일관성이 없는 관료제로부터의 지대(rents)의 흐름 을 결정했다면, 인도네시아는 관료집단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수취된 지대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림 2> 민주화와 과두제의 변화 양상 주: 는 진행 방향을 의미하는 것임.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79 전근대적 사적 이익집단이 국가 위에 군림하는 가산제 과두 제 (patrimonial oligarchy) 하에서는 경쟁적 시장 증진을 향한 규제개혁 (regulatory reform)이 추진되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형 과두 제 (administrative oligarchy) 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규제개혁의 실행 가 능성은 높다. 필리핀은 민주화 이전에 가산제적 과두제를 경험한 반 면, 인도네시아는 행정적 과두제를 경험하였다(Robison 2006: 9). 반면 타이는 전근대적 권력 엘리트로서의 국왕과 근대적 엘리트로서의 군부가 지배동맹을 이룸에 따라 가산제와 행정형의 특성이 공존하 는 혼합형 과두제 (hybrid oligarchy)에 해당되었다. 이때 필리핀과 타이는 민주화를 계기로 민주적 과두제 (democratic oligarchy) 혹은 신과두제 (new oligarchy)로 전환하였다(조희연 외 2009: 14).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경우 전근대적 지주세력 혹은 소수의 전통적 가문의 지배가 계속되었으며, 타이의 경우 탁신 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국왕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적 지 배세력의 영향력이 오히려 확고해졌다(위의 <그림 2>에서 I 과 II). 반면 인도네시아는 비록 민주화가 가장 늦었지만, 민주화 이전에 전 근대적 지배세력의 영향력이 주변화되어 있었던 까닭으로 신과두제 보다는 발전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약자계층의 이해가 과소 대표 되는 제한적 다두제 (limited polyarchy)로의 이행 와중에 있다고 가정 할 수 있다(위의 <그림 2>에서 III).

180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Ⅲ. 필리핀: 가산제 과두제 로부터의 전환 1. 국가의 전환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독재체제를 붕괴시킨 피플파워 (people power)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개화시기가 한풀 꺾이면서 서민대통 령임을 자임한 에스트라다가 부패로 단명하고 뒤이어 취임한 아로 요 대통령도 선거 부정혐의 등으로 인해 여러 스캔들과 인권단체의 저항에 봉착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공식적인 입법제 도로 사회적 균열이 연결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매개조직들의 발 전도 차단되고 있다(Jayasuriya and Rodan 2008: 777). 1986년 민주화를 계기로 아키노 정권이 등장하고 이어 라모스 정 권으로 이어진 필리핀에서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무역 자유화, 자 본시장 개혁, 금융개방 등과 같은 경제개방, 경제자유화가 추진되었 다(박기덕 1998; 우수명 1996). 이때 시장지향적 개혁은 포퓰리즘과 함께 진행되었다. 3) 일례로 라모스정권은 강도 높은 과두지배의 척결 이라는 정치적 수사( 修 辭 )를 사용하면서 후원주의, 만성화된 폭력을 수단으로 오랫동안 국가기구를 완전히 장악한 지대추구형 족벌과두 제를 청산하겠다는 광범위한 개혁 의제를 들고 나왔다. 또 이를 위한 강한국가의 구축과 사유화, 규제완화와 같은 시장지향적 정책의 추 진도 내걸었다. 이른바 아시아의 병자 (sick man of Asia)에서 역내 호 랑이 경제체제 로의 진입을 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라모스의 시장지향 개혁도 보호산업부문, 경제민족주의, 조직화된 좌파세력 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지지부진한 결과만을 낳았다. 이를테 3) 이 글에서는 포퓰리즘(populism)의 번역어인 민중주의, 대중영합주의 등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되어 별도의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포퓰리즘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는 박은홍(2007: 132-133)을 참조하기 바란다.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81 면 집권초기부터 경쟁적 시장기제의 도입을 천명하였던 라모스였지 만 통신시장의 독점체인 PLDT(Philippine Long Distance Telephone Company)에 대한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박승우 2007: 221). 라모스에 뒤이어 조셉 에스트라다는 뜨라포(Trapo: 행주라는 의미 의 따갈로그어)로 불리우는 구 정치인에 대해 염증을 갖고 있던 시민 사회의 정서와 계급정치의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여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그는 당선 직후 빈곤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농업 및 소상인 부문과 같은 사회적으로 낙후된 부문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약속하 였다. 이러한 포퓰리즘 수사에도 불구하고 에스트라다는 신자유주 의자로 알려진 경제학자들을 기용하고 라모스가 추진하던 규제완화, 자유화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시장친화 정책과 일자리 창출, 안전망 공급을 위한 재정확장 정책을 동시에 폈다. 4) 그러나 에스트라다의 친( 親 )빈민정책은 재정 부실화로 이어 졌다. 에스트라다의 반대세력들은 필리핀의 주변국들이 이미 1997 년 금융위기에서 탈출한 반면 에스트라다의 정책은 또다시 필리핀 경제를 뒤처지게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여기에다가 그의 오랜 파 트너인 루이스 차빗 싱손 주지사가 에스트라다를 불법도박의 영주 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대통령에게 뇌물을 전달한 배달책이었음을 폭로함에 따라 에스트라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중적 압력이 고조 되었고 여기에다가 군까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에스트 라다체제가 종언을 거두었다. 뒤이어 취임한 아로요 역시 1990년대에 라모스에 의해 시작된 신 자유주의적 처방을 통한 경제회생 전략을 이어갈 것임을 표명하였 다. 흥미롭게도 아로요는 에스트라다의 주요 지지기반인 빈곤층을 4) 에스트라다는 라모스정권 시기의 안전망 프로그램을 확장함과 동시에 사적으로 '빈 민을 위한 소매운동 (ERAP), 사리사리 소토어(ERAP-SSC), 인민시장(Palenk and Bayan 혹은 ERAP-PS) 등과 같은 식량공급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Castro 2007: 137).

182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의식하여 전임자인 에스트라다가 구사하였던 포퓰리즘 정책을 구사 하였다. 이를테면 국가식량청에 마닐라 빈곤층을 상대로 한 미곡 매 각을 지시하였다. 그의 자문단과 미디어 컨설턴트들은 아로요 대통 령이 필리핀의 철의 여인, 유능한 경제전문가 와 같은 이미지로 비추어지도록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친( 親 )에스트라다-반( 反 )아로요 세력들이 그녀가 있는 말라카낭궁을 포위하였을 때도 그녀는 즉각 주동자를 체포하도록 명령하고 우리는 당신네들을 분쇄하고 말 것 이다 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공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세력의 저항이 거세지자 아로요는 2006년 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 하고 59명의 국회의원, 군장교,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 렸다. 하지만 대규모 군중시위의 힘과 군의 에스트라다 지지 철회라 는 비헌정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 오른 아로요의 정치적 정당성 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반( 反 )아로요 세력과 아로요세력 간의 대 치상황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Castro 2007: 128-140). 요컨대 필리핀에서는 민주화 이후에도 만성적 실업이 지속되고 있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저임노동을 하고 있다. 법제화된 최소 노동 권 개념도 없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침해는 감소하였지만, 필리핀 2000 으로 지칭되는 라모스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사 회 경제적 권리에 대한 침해는 증가하였다. 즉, 개발침략 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박사명 2001). 5) 구체적으로 1997년 6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UN 인권위원회 및 UNESCO가 후원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UN 보고서에는 필리핀을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도시 빈민 들을 축출하는 사례가 많은 나라의 범주에 넣었다. 이 보고서는 민주 화가 시작된 1986년 이후 해마다 10만 여 명이 수도 마닐라에서 쫓겨 5) 개발침략 (development aggression)이란, 부적절하고 권한이 부여되지 않으며 지속적이 지 못한 개발 계획을 부과함으로써 인권과 환경을 대거 공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 신속한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는 개발계획을 강행함으로써 야기되는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의미한다.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83 났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6년에 APEC정상 회담 준비를 위해 마닐 라의 주요 도로에 있는 도시 빈민가 판자집을 철거하는 와중에 공화 국법 7279(도시발전 및 주택법) 하에 제시된 여러 안전보장 조치들, 즉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든지, 판자촌 철거 30일 전에 통보를 해야 한다든지 등의 조항들이 지켜지지 않았다(페러 2000). 2. 시민사회의 전환 민주화에 따른 개방적인 정치 환경은 필리핀 사회내에서 사회정 의와 평등을 기치로 한 다양한 사회세력과 민중운동을 분출시켰다. 당시 필리핀 사회는 핵심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분 산시키고 빈곤퇴치를 위해 소득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작업이 필요 했으며, 특히 토지개혁을 통해 자원을 합리적으로 유용해야 했다 (Bello et al. 2004: 35-36). 특히 필리핀에서 토지개혁은 모든 행정부의 기본 과제였다. 무엇 보다 종합농지개혁법이 정부 입법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홍보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개발의제로 전적인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 다. 다시 말해 역대 정부는 토지개혁을 핵심 프로그램이라고 선전만 했을 뿐 명확한 실행 틀을 만들지 않았다. 1986년 민중봉기가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전체 인구의 20%가 80%의 토지를 소유하였다(Tadem and Tingo 2006: 47). 그러기에 혁명정부 는 토지개혁을 사회정의, 평 등, 정치불안, 농촌소요 등과 같은 국익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안으로 인지하였다. 특히 아키노 정부 초기에 자유주의적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면서 개혁에 대한 기대가 컸다. 아키노부터 국가혁신을 위한 개발전략의 일환으로서 농업개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농업부 문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혁명적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추진하겠다

184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고 공언하였다. 적지 않은 농민들이 아키노를 평화적 농업개혁의 마 지막 희망 으로까지 간주하였다. 그러나 아키노는 농업개혁 프로그 램의 최종 운명을 지주계급이 지배하고 있는 의회에 맡겼고, 결국 의회는 이 법안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종합농지개혁법안은 무능 력하고 보수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Bello et al. 2004: 35-36). 이렇듯 농촌의 토지개혁문제는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전근대적 지주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의 지연작전으로 인해 제대로 해결될 수 없었 다. 6) 이와 마찬가지로 1987년 개정헌법에 과두지배 엘리트 및 정치 명문가들에 의한 정치권력의 세습적 독점을 금지하는 반( 反 )다이너 스티 조항도 실효를 보지 못했다. 7) 1998년 3월 정부와 공산계열의 민족민주전선(NDF, National Democratic Front)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이른바 인권과 국제인 도주의법 준수에 관한 포괄 협정 (CARHRIHL, Comprehensive Agreement on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을 맺는 것에 합의하였다. 정부쪽에서는 기념비적인 협정이라고 추켜세웠고, 민족민주전선(이하 NDF) 쪽에서도 이를 필리핀 인민, 특히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여성, 어민, 소수종족, 여타 필리핀 사 회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부문의 열망을 토대로 타결된 것이라 공표 6) 필리핀의 구( 舊 ) 엘리트는 미국 식민지하에서 미 무역상, 투자자들과의 친분을 맺으 면서 전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기술과 연결망, 그리고 후원체제(patronage)를 구축하 였다. 이를테면 1970년대 초 계엄령 이전까지만 해도 120개 가문이 국가 소득의 60% 를 점하였다. 이들 주요가문으로는 루손지역의 로렐(Laurel), 코주앙코(Cojuangco), 임 페리얼(Imperial), 네포무체노(Nepomuceno), 퀴리노(Quirino), 크리솔로고(Crisologo), 비 사야(Visayas) 지역의 오스메나(Osmena), 쿠엔코(Cuenco), 로페즈(Lopez), 아라네타 (Araneta), 두라노(Durano), 몬테리바노 록사스(Montelibano Roxas), 아얄라 클란(Ayala clan), 그리고 민다나오(Mindanao) 지역의 알멘드라스(Almendras), 플로렌도(Florendo), 펠레즈(Pelaez), 디마포라(Dimapora), 타마노 클랜(Tamano clans) 등을 들 수 있다. 7) 1986년 2월 피플파워 이후 치루어진 1987년 5월 11일 선거 결과를 보자면, 선출된 200명 하원의원 중에 130명이 이른바 전통적 정치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다른 39명이 이들 가문의 친척이고 단지 31명만이 이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McCoy 2002: 312).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85 하였다. 그러나 협정을 맺은 지 13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와 NDF 간에 포괄적 평화협정이 실현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 몇 년에 걸쳐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고, 전투 분쟁 와중에 살해된 숫자도 늘어났다.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임의 체포 구금, 고문, 비사법적 처형, 비자발적 실종, 강제 이주 등이 더욱 빈번해졌다. 이 와중에 정부와 NDF는 평화정착에 대한 진정한 의지가 없다고 서로 비난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 양쪽이 모두 평화정착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와 NDF 양쪽 모두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과 같은 고상한 주장들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의 작동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즉, 여전히 NDF에게 현 정부는 약탈적 과두 엘리트와 뜨라포의 헤게모니적 지배이며, 반대로 현 정부에게 NDF 는 전체주의세력이라는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Quimpo 2006: 35, 48). 더 큰 문제는 필리핀의 좌파가 전통적 세력을 대신해서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빈곤과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빈민층을 기반으로 하는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근본주의 성향의 교회의 지지를 받았던 에 스트라다 집권 시기에 좌파활동은 주변부로 더 내몰렸다. 그러나 빈 민의 대부 임을 자처하였던 에스트라다는 도덕성 문제로 급격하게 붕괴하였다. 필리핀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마닐라 교구 하 이메 신(Jaime Sin) 대주교는 공개적으로 에스트라다가 필리핀 국정에 대한 도덕적 지배권 을 상실하였다고 선언했다(코로넬 외 2008: 30). 이것은 2차 피플파워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2차 피플파워에 따 른 에스트라다의 추방에 불만을 가진 그의 추종세력과 빈곤층 주도 로 일어난 2001년 5월의 대규모 시위는 실패한 3차 피플파워였다고

186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할 수 있으며, 이는 1, 2차 피플파워와는 달리 계급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실패한 3차 피플파워는 두 번에 걸친 피플파워에도 불구하 고 엘리트가 빈곤층과 부를 공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Tadem 2009: 147). 아로요는 집권과 함께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에 동참하면서 진보 적 인사들에 대한 납치와 살해를 방조하였다. 2001년 이래 친 필리핀 공산당(CPP, Communist Party of the Philippines) 계열 합법 조직에 속하 는 수백 명의 활동가들과 간부들이 마피아식 처형의 희생자가 되었 다. 이러한 비사법적 처형은 대부분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 주로 수도 마닐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앙 일간지들과 인권단체들, 그리고 유엔과 국제 앰네스티 대표들의 강력한 비난이 뒤따랐다. 흥 미로운 것은 암살이 벌어지는 지방의 경우 마닐라와 달리 이에 대한 분노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중앙 언론과 해외 언론은 이러한 침묵을 냉담이나 무관심 혹은 반대자들을 무난하게 제거해낼 수 있 었던 아로요의 능력과 연관시켰다. 8) 반면 필리핀 공산 계열 역시 지 방 정파들과 편의상 동맹 관계를 맺거나 심지어 내부 정파 갈등을 정치적 살해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9) 심지어 필리핀 공산당(CPP)의 군사부인 신인민군(NPA, New Peoples Army)이 혁명세를 받는 댓가로 지방에 할거하는 정파들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Abinales 2008: 30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목을 받는 정치세력이 친공산 계열의 민족 8) 마닐라 소재 인권단체 필리핀인권운동협의회(PAHRA, Philippine Alliance of Human Rights Advocates) 의장인 막스 드 메사(Max de Mesa)는 필리핀 인권단체들을 필리핀 공산당(CPP)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는 우파성향의 PATH, 좌파활동가들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는 NDF 계열의 KARAPATAN, 중도성향의 TFDP, PAHRA 등 세 범주로 나누었다(면담일: 2007년 2월 15일). 9) 좌파활동 경력을 갖고 있는 에두아르도 타뎀(Eduardo Tadem) 국립 필리핀대학 교수는 2001년 아로요 집권 이후 800건이 넘는 정치살해 중에 극히 일부이지만 정부의 주장 대로 필리핀 공산당 내부에서의 정파간 갈등과 관련된 살해도 있다고 지적했다(면담 일: 2007년 7월 19일).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87 민주주의자들(NDs 혹은 natdems)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민중민주주 의자들(popdems)이다. 자주적 좌파 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사회민주 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환경운동가, 좌파 민족주의자, 종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중간계층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노동 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민중민주주의자들은 민족민주주의 자들의 분파행위 와 무장투쟁 노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들은 경쟁관계에 있는 모든 정치집단, 정당, 조직들이 정치 시스템에 참여 하여 긴급한 국가적, 사회적, 영토적 현안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았 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아키노 정권 초기 다양한 이념세력이 참여한 무지개 내각 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아키노 정권을 마르코스 의 억압적 법령을 폐기하고 사회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담은 헌정체 제의 확립을 비롯하여 제반 민주적 제도의 복원을 가져올 수 있는 진일보한 체제로 보았다. 이미 신정치 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념은 1986년 2월 피플파워 직후에 예정된 1987년 선거를 겨냥하여 구체화 되었다. 특히 이들은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농지개혁과 노동자 권리 의 보장을 요구하였다(Tadem and Tingo 2006: 44-45). 반면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을 대표하는 전통적 사회운동과도 연 대하는 이러한 신운동 은 도시와 중간계층에 기반을 두면서 과거 계급문제에서 배제되었던 인권, 개발, 환경 등을 포괄하고, 좀 더 균 등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겨냥한다(Tadem and Tingo 2006: 44-45). 이들 운동은 집단의지의 형성 과정 속에서의 의식, 문화,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사회운동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러한 필리핀 사회운동의 변화는 특히 NGO와 민중조직(PO) 중 심의 개발 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NGO와 민중조직은 좌파활 동가들에게 농촌지역에서 경제 프로젝트의 실행을 통해 대중에 봉 사할 수 있는, 또 마르코스 독재체제와 투쟁했던 중도세력 을 활용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이들은 전쟁 피로증에 시달리는

188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신인민군(NPA) 영향력하의 지역사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다 루는 환경, 성(gender) 등과 같은 신정치 의제들은 중간계층에 호소 력을 지녔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마르코스 이후 시기는 NGO 부흥 기를 이루며 매우 활발한 NGO 공동체를 구축하게 되었다(Tadem and Tingo 2006: 52). 물론 대부분의 NGO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활동 그 자체만을 목 적으로 하지 않고 주변화된 사회부문의 경제적 해방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다. 이들은 형식적 민주주의 하에서, 또 신자유주의 조건하에서 국가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 하는 도시 빈민층과도 연대한다(Huthison 2006: 41). 그렇지만 시민사회진영은 집권세력이 추진하는 경제자유화 정책 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통일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박승우 2009: 221). 민주화 이후 주요 부처에 각료로 참여한 진보적 인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정실주의와 배제만을 재생산했다. 국가가 비판적 목소리는 배제하면서 시민사회 특권층 을 포섭한 결과이다. 또 어떠한 진보성향의 정당도 3석 이상을 넘지 못한 까닭으로 단일 의 진보블록을 구축하지 못하였다(Huthison 2006: 58). 이러한 배경하에 필리핀 시민사회는 에스트라다의 포퓰리즘에 동 원되었고, 그 이후 이로부터 거리를 둔 2차 피플파워 에 따른 에스 트라다의 퇴진을 계기로 친( 親 )에스트라다세력과 반( 反 )에스트라다 세력으로 분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엘리트 지배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표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사회를 민주적인 것인 양 포장해주는 허울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진보적 성 향의 군부 중심의 비헌정적 수단을 통한 과두체제의 폐기를 옹호하 고 있다. 10) 10)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전 국립 필리핀대학 총장을 지낸 프란시스코 느멘조가 있다. 그는 2003년 쿠테타를 시도했던 안토니오 뜨릴라네스 해군장교가 옥중에서 상원의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89 Ⅳ. 타이: 혼합형 과두제 로부터의 전환 1. 국가의 전환 타이는 1992년 민주화 이후 점진적으로 경제 자유화 노선을 걷다 가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속도와 폭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바 야흐로 시장화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강요에 의한 시장화는 경제 민족주의를 자극하게 되고, 특히 1997년 12월 국왕이 자신의 생일에 공표한 공동체 자족경제 (เศรษฐก จช มชนพอเพ ยง) 개념은 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와 해외 자본에 대한 경 계심을 고조시켰다. 이때의 자족경제 란 불교의 중용 개념에서 이끌 어낸 개념으로서 지구화로 야기된 급속하면서도 광범위한 사회 경 제적, 환경적, 문화적 변동에 따른 경제위기를 인내, 성실, 지혜, 신중 으로 극복하자는 것이 그 골자이다. 이렇듯 국왕까지 드러낸 경제민족주의 정서를 당의 정강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집권에 성공한 것이 탁신 친나왓의 타이애국 당이다. 탁신은 NGO를 비롯한 시민사회조직의 인간중심의 개발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서민들을 위한 기초의료보장제도 공급, 농가 채무이행 유예, 농촌개발기금 공급 등 안전망 공급과 빈곤퇴치 를 위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방콕 중산층들로부터 탁신이 자신들이 낸 세금을 농촌에 뿌려 농촌 유권자들의 표를 사들 이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다시 말해 탁신은 농촌에서 축적할 수 있었던 정치적 자본의 양만큼을 방콕에서는 상실할 수밖에 없었 원에 출마했을 때 그의 선거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진보적 군 엘리트에 의한 혁 명적 행동 만이 현재의 필리핀 과두제 사회를 혁파할 수 있으며, 실제 뜨릴라네스는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이념을 갖고 있는 진보적 군인이라고 말했다(면담일: 2007 년7월18일). 이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을 상세히 정리한 것으로 Nemenzo(2009)를 참 고하기 바란다.

190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다. 여기에다가 탁신의 탈세 행각이 포착되자 반( 反 ) 탁신세력은 눈 덩이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탁신진영과 탁신퇴진운동을 이끈 민주주 의민주연대(PAD,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간의 대치 상황에서 왕실 수호와 부패 정치인 추방이라는 명분을 내건 쿠테타가 일어나 국민헌법이라고까지 불리던 1997년 헌법과 더불어 탁시노크라시 (Thaksinocrcy)가 종언을 거두었다. 쿠테타는 타이의 정치시계를 훨씬 뒤로 후퇴시켰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탁신을 몰아낸 2006년 9월 쿠테타는 타이에서 의 민주적 이행의 성격 혹은 그 정도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갖게 하 였다(Jayasuriya and Rodan 2008: 767). 9월 쿠테타는 근대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세력과 보수적 존왕주의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 군 지도자 들은 탁신의 부패, 그의 양극화 정치, 헌법상 보장된 독립기관에 대 한 침해, 군주제에 대한 위협 등을 들어 자신들의 반( 反 )헌정적 행위 를 정당화하였다. 지식인들, 정당, NGO, 보수적 엘리트에 반대하는 사회 세력들에 의해 기본적인 교육 수혜, 토지개혁, 공동체 권리, 노 조가입권, 시민주체의 법률 공포권, 자방자치권 등이 반영되었던 1997년 헌법도 폐기되었다. 그렇지만 이 쿠테타는 1992년 민주항쟁 으로 훼손된 군의 자존심과 정치적 역할을 복원시켰다. 또한 쿠테타 는 보수주의자들과 존왕주의자들에게 정치 규칙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렇듯 쿠테타는 타이 정치의 보수적 변형의 발 단이 되었다. 군부에 의해 수상직에 임명된 수라윳 장군은 국왕이 제시한 자족경제 개념이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가 될 것임을 선언 하였는데, 이것은 기업가 정신의 제고를 강조하는 탁신의 경제개발 방식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Hewison 2007: 939-940). 무엇보다도 수라윳 과도정부는 군부 엘리트와 존왕주의자들로 채 워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1992년 수친다 군사정권에 관계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임명직 의회도 방콕 출신 엘리트들로 채워졌다. 거기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91 에 노동자, 농민, 정당 대표들은 없었다. 탁신정부의 전복을 지지했 던 중간계층은 자신들의 운명을 군부와 보수적 존왕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탁신을 지지하고 또 그에게 표을 던진 유권자들을 무지하 거나 현혹되었거나 매수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빈 민, 무산자, 노동자계급, 농민들이 아직 민주주의를 누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빈민과 무산자들 에게는 이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매수되지 않을 때까지 투표권을 주 지 않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반탁신운동을 이끌었 던 손티 림통꾼은 반탁신운동을 자신들의 표를 판 대가로 중간계층 이 낸 세금의 혜택을 받고 있는 빈민들과의 계급전쟁으로 보았다. 이러한 반탁신운동을 통해 왕실은 전례없이 강력해졌고 군부와 관 료들은 과거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게 되었으며, 나아가 방콕 엘리트들은 정치적 사회적 권리에 관한 담론을 장악하였다 (Hewison 2007: 940). 군부와 왕실 관계도 보다 확고해졌다. 군부와 왕실은 1950년대 말 부터 돈독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특히 쁘렘 수상 시절에 국왕의 지위는 일층 격상되었다. 관례적으로 국왕은 왕실자문기구인 추밀 원에 전직 군 수뇌들을 임명하였다. 2006년 쿠테타 이후 군과 왕실에 연을 맺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 공직에 임명되었다. 군부가 임명한 의회는 2007년도 군 예산을 50% 증액시켰다. 군부는 공직자에 대한 정화작업을 벌이고 지방행정의 중요 자리에 군 장교를 임명하였다. 공직 수행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이름하에 분권화도 후퇴하였다. 나아가 군과 보수주의자들은 관료기구가 정치 지도자와 의회의 통 제 및 감시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했다(Hewison 2007: 941). 2007년 신헌법에 따라 민정이양이 이루어졌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그러기에 일각에서는 자유권을 통제하는 관료적 정체

192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의 부활을 우려한다. 11) 타이에서는 반( 半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1980년대 내내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있었지만 불균등 발전과 그에 따른 불평등이 심화되었 다(Eldridge 2002: 57). 그러기에 1992년 민주화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와 대조적인 성공의 위기 (crisis of success)에 따른 민주화였다. 1992 년 5월에 군부와 정면으로 부딪혔던 학생, NGO, 민중조직, 정당들의 민주화 시위로 군부가 병영으로 퇴각하고 민주화를 위한 정초선거 (founding election)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민주당의 총재 추언 릭 파이가 수상직에 올랐다. 1992년 민주화 이후 정치적 변화는 1997년 신헌법 제정을 통해 절 정에 이르렀다. 물론 정치개혁의 상징으로서의 신헌법 제정은 정치 권력의 도덕적 해이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본 1997년 7월 경제위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개혁헌법으로서의 신헌법은 행정의 안정성 과 정책적 연속성을 보장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정치적 자유주 의에 기초하여 정치권력 상의 견제와 균형의 묘를 살리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견제장치로서 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 부패방지위원 회, 인권위원회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다른 일각으로부터 신헌법 이 참여정치에 대한 고려가 취약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 인 예가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으로서 학사 이상을 명시해놓은 규정 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헌법을 두고 투자자를 위한 헌법, 탁상공론식 지식인 특권층 주도로 만들어진 헌법이라는 비판도 있었다(Brown 11) 2008년 10월 7일 반탁신운동세력인 민주주의민중연대(PAD)와 경찰이 유혈충돌이 있었을 때 아누퐁 육군총사령관은 나 같으면 수상직에서 물러나겠다 라는 발언으 로 솜차이 수상의 퇴진을 압박하였다. 민주주의민중연대(이하 PAD)가 공항을 점거 하면서 솜차이 내각에 대해 총공세를 펴고 있었을 때는 아누퐁 육군총사령관이 사 태 해결방식으로 솜차이 내각에는 의회해산을, PAD에는 점거투쟁 철회를 제안하였 다. 2006년 9월 쿠테타 직후 입법의원을 지낸 바 있는 수리차이 완께오 쭐라롱껀대 교수도 군부의 공공연한 정치적 발언이 잦아졌음을 인정한다(면담일: 2008년 10월 20일).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93 and Hewison 2004). 1999년을 경과하면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주의 감정은 파산 및 외 국인소유법 등 11개 법안에 대한 반대 캠페인으로 나타났다. 국제통 화기금(IMF)이 요구한 고통스러운 처방을 거의 받아들였는데도 불구 하고 경제회생의 기미가 없자 추언 릭파이가 이끌던 민주당의 정치 적 기반이 와해되었다. 2001년 총선에서의 탁신이 이끄는 타이애국 당의 경이적인 압승은 재정긴축으로부터 재정확장정책으로의 전격 적인 전환을 선언한 차별화된 정책공약의 성과였다(Apichat and Kitti 2007: 181). 이른바 탁시노믹스 (Thaksinomics)는 경쟁력있는 경제체제를 구축 함과 동시에 국내자본을 보호하는 복선형(dual track)개발전략 을 내 걸었다. 이는 사유화와 같은 시장지향적 개혁과 사회적 약자계층의 참여라는 이중목표 의 병행 추진과 같은 맥락상에 있다(Pye and Schahhar 2008: 47). 그렇지만 이러한 탁신의 포퓰리즘 정책은 다른 한편으로 독선적 성격을 띠면서 언론매체와 방송위원회 위원 선정 등에 개입하는가 하면, 그가 소유하는 친 그룹의 광고물을 지렛대로 언론보도를 조종 하였다. 또한 헌법상에서 그 독립성이 보장된 헌법재판소, 선거관리 위원회, 반부패위원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 였다(Brown and Hewison 2004). 뒤이어 법과 질서 캠페인 도중에 군 과 경찰에 의한 고문도 확대되었으며, 2003년 3개월 동안의 마약 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는 2,500명 이상이 법정 선고 없이 살해되었 다. 12) 이같은 배경 하에서 반탁신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급기야 탁신 12) 이외에도 탁신은 다른 정당들과 정파들을 흡수하거나 불량한 지방정치인들을 매수 하는 방식으로 타이애국당의 규모를 키웠는데, 이는 말레이시아 집권당인 통일말레 이국민기구(UMNO)형 통치방식을 모방한 것이다(McCargo and Ukrist 2005, 237).

194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을 축출하는 쿠테타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2006년 9월 19일 쿠데 타를 사실상 국왕이 주도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 층들은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 국왕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 고, 정부당국은 이들에게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왕실모독죄 를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비난하는 인터넷 사이트 가 예전에 볼 수 없을 만큼 증가하였으며, 급기야 정부당국은 왕실을 모독한 2,300개의 사이트를 폐쇄하였다(The Nation 2009/1/6). 지식인 들의 표현의 자유 에 대한 제약도 점차 심해졌다. 2008년에는 저명 한 원로 사회운동가인 술락 시와락이 왕실모독죄로 입건되었다. 그 는 이미 같은 혐의로 3번이나 입건되었다. 쭐라롱껀대 짜이 응빠껀 교수는 왕실을 비난한 저서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입건되자 영국으 로 피신하였다. 또한 지난 2009년 4월 3일에는 30대 남자가 인터넷 상에서 왕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The Nation 2009/4/4). 2. 시민사회의 전환 타이 NGO들은 주로 1970년대, 1980년대에 동남아시아의 비공산 권국가로서 가장 중앙집권적이면서, 농업과 농촌빈민을 홀대하였던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73-1976년 짧은 시기에 군부통 치가 의회민주주의로 대체되면서 개발 NGO들은 급속히 번성하였 다. 타이 최초의 개발 NGO는 1969년에 타이중앙은행 총재 뿌이 응 파껀에 의해 설립된 타이농촌부흥운동(TRRM, Thailand Rural Reconstruction Movement)이었다. 그러나 1976년 군부 쿠테타 이후 NGO들은 불온시 되면서 탄압을 받았다. 이 시기에 타이농촌부흥운동을 비롯해 대다 수 개발 NGO들이 해산해야 하였으며, 지도부와 상근활동가들이 지 하로 잠적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재개된 것은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95 1980년대 초 쁘렘 띤슐라논 장군의 유화정책이 시도되면서부터였다 (Clarke 1998: 30-31). 주목할 것은 1970년대, 1980년대 초부터 계급에 기반한 사회운동 이 민주주의와 인권, 정부의 경제정책, 쌀값, 토지개혁을 포함한 농 촌/농업 개발문제, 소수자 권리, 환경 등에 초점을 맞춘 이슈 중심의 사회운동으로 분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타이공산당(CPT, Communist Party of Thailand)의 경우 1976년 군사 쿠테타와 연이은 반란 진압작 전으로 파편화되고, 이들 중 일부가 NGO와 민중조직(PO, People's Organiztion)에 들어가 이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자선단체 들을 지원하였던 기업들도 점차 NGO의 개발 사업 지역사회 조직 화, 환경보존, 민주화 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 반, 1990년대 초반에 와서는 과거 매우 응집력이 높았던 학생운동도 이념, 인맥 등에 기초하여 다양한 조직으로 분화되었다(Clarke 1998: 27). 이로써 시민사회는 군부, 국왕, 자본과 함께 타이 정치과정에 중요한 행위자가 되었다(Freedman 2006: 33). 요컨대 민주화, 경제 자유화, 지구화의 동시적 진행은 자원을 둘러 싼 갈등, 주민공동체 파괴, 생활방식의 교란 등을 초래했지만, 동시 에 정치적 기회를 확장하고 사회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특히 새로운 운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정치적 목소리 로부터 배제된 사회적 약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점차 자신 들의 사회적 역할과 권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냉전 종식과 독재시대의 종말이 좋은 여건으로 작용하였다. 식민지 경험이 없었기에 대중적인 정치운동, 즉 반식민지 운동도 없었고, 민 족주의는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었고, 냉전의 영향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분쇄되는 등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타이에 새로운 공동체운동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특히 타이 사회운동진영은 부실한 타이 의회민주주의에 대해 불

196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만을 갖고 있었다. 금권정치의 폐단은 반부패 헌법개혁운동을 하고 있던 사회운동진영이 중간계층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계층의 의미 있는 대변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에 대한 불만이 헌법개혁 캠 페인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다양한 운동세력들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공직자라기보다는 군림하는 카스트(caste)에 가깝다는 인식 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공감대는 공동행동의 기초가 되었다. 빈민회 의(Assembly of the Poor)도 원래 헌법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헌법개혁운동을 지지하였다. 많은 활동가들은 사회적 약 자들의 권익운동에 도덕적, 조직적 지원을 보냈다. 특히 절반에 가까 운 운동단체들이 자원권을 다루는 환경문제에 관여하였다. 지난 반 세기가량 천연자원은 국익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약탈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은 그러한 개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러기에 이러한 개발을 중단시키고 주민의 일상적 삶 을 보호해내는 것은 다양한 배경을 갖는 사회운동집단의 연대사안 이 되었다. 이때 빈민층과 소외집단의 문화와 정체성은 운동의 도덕 적 자원이 되어 계급 운동에 비해 그 기반을 훨씬 더 넓혔다(Pasuk 2002: 13-16). 이러한 가운데 정부도 NGO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97년 신헌법에서는 정책결정과정에 NGO가 참여하는 것을 공식화 하였다(Shigetomi 2002: 137). 반면 NGO쪽에서는 참여와 견제라는 두 개의 가치를 두고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Chantana 2004). 1997년 국왕 생일 연설에서 제시된 공동체 자족경제 개념도 농 촌문화개발운동에 관계하는 사회운동조직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 다. 이들은 음식, 보건, 주택, 의류 등과 같은 기초 생필품에 대한 농 촌의 자급자족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시장, 소비주의, 물질주의, 도 시화, 산업화 등은 무분별한 자본주의적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97 관용, 상부상조, 평등, 연대, 친환경, 민간지혜 등을 특징으로 하는 농촌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또 개발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욕 망이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면서 지구화(globalization), 서구화를 신식 민지화와 동일시한다. 이들에 의하면 시장과 교역은 착취의 기제이 며,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타이 문화와 가치의 토대는 불교의 가르침 과 농업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매우 윤리적인 이러한 공동체주의를 상상속의 과거를 낭만적으로 구성해내는 보수주의로 평가한다. 이 러한 공동체주의야말로 국가, 종교, 국왕 으로 표현되는 왕실과 군 부에 의해 주도된 국가 가부장주의(state paternalism)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회고적 (backward-looking) 전략이라는 것이다(Hewison 2000: 285-291). 나아가 국왕 역시 싸얌상업은행을 비롯한 여러 기업들의 대주주이자 엘리트 사회의 한 축인 이상 그가 제기하는 자족 의 진 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Ji 2007: 53).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탁신의 포퓰리즘이 지구화의 타협지점을 점 차 확대하자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활동가들이 탁신진영 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탁신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 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잇달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는 농민단 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2006년 2월 반탁신 대규모 시위가 있은 직 후 민중민주주의동맹(CPD, 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사무처장 수리야사이는 탁신을 축출하기 위해 학계, 재계, 농민, 도시빈민, NGO, 노동자, 학생 등을 대표하는 40개 조직이 민주주의민중연대 (PAD,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를 결성하였음을 공식 선언하였 다. 13) 그러나 대부분 사회운동 집단들이 민주주의민중연대(이하 연 대 )에 가입한 주목적은 탁신의 퇴진이었지 국왕의 개입은 아니었다. 13) 수리야사이 민주주의민중연대(PAD) 대변인은 탁신이 농촌 문제를 의제화한 것은 큰 의미가 있으나 그의 포퓰리즘은 농민의 생활개선을 진정으로 원했다기 보다는 단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면담일: 2008년 10 월 19일).

198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반면 2006년 3월 초 전국 각지에서 올라 온 주민들이 탁신을 지지 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 대부분은 농민, 소상인, 택시기사를 포함 한 노동자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무지하거나 속았거나 매수 당한 것으로 폄하하였지만 탁신에 대한 이들의 지지 입장은 명확했 다. 탁신이야말로 30바트 보건 프로그램, 1백만바트 지역사회 개발 기금, 채무변제 유예정책 등을 통해 빈민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 설사 탁신과 그의 정부가 부패했다고 치더라도 역대 수상치고 부 패하지 않은 수상이 없다는 것이다. 14) 이들에게 반탁신과 친탁신의 대립은 (전근대적) 후원체제 대 민주주의 대립이다. 15) 이들에게는 탁 신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 진실이고 탁신의 농촌 중심의 친( 親 )빈곤정 책도 진실이다(Pye and Schahhar 2008: 45). V. 인도네시아: 행정형 과두제 로부터의 전환 1. 국가의 전환 인도네시아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 지만 만성적인 실업과 빈곤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거시경제는 안 정을 되찾았지만 풍족한 식탁과 일터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직선제로 탄생한 대통령 유도요노는 그의 정직성과 통합성 으로 기득권 집단에 맞설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인정받 14) 탁신 내각에 합류한 학생운동 혹은 사회운동 경력 인사로는 짜뚜론 차이쌩(교육부 장관), 아디썬 피양껟(농업부 차관), 써라앋 끌린쁘라툼(정보통신기술부 장관), 분탐 웻차야차이(교통부 차관, 타이애국당 부사무총장) 등을 들 수 있다. 15) 탁신집권 말기에 탁신의 대변인 역을 맡았던 짜크라폽 펜케가 2007년 9월 외신기자 클럽에서 밝힌 견해이다. 그는 2009년 4월 반정부시위 주동 혐의를 받고 도피 중에 있다.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199 았다(Weiss 2007). 그렇지만 그가 이끄는 민주당의 경우 전체 의회의 석의 10%만을 차지하고 있는 약체 정당이기에 행정부는 수하르토 시기 집권 여당 인사까지 참여한 연립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자연히 정치 경제개혁의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국영기업 의 사유화 프로젝트도 다양한 세력의 반대로 지지부진해졌다 (Perdana and Friawan 2007). 수하르토 이후 시기는 과거 수하르토 통치 시기 신질서 엘리트 들 (New Order elites)이 새로운 제도인 선거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 엘 리트로 다시 부상하면서 금권정치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구 기득권 집단이 개혁된 의회의 문지기로 변신하면서 금권 정치와 연결된 정치폭력과 협박이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와 공존하 게 되었다. 특히 행정적, 정치적 권위가 분권화되면서 금권정치의 지 방화, 강력한 지방 자본가집단에 의한 지방자치기관의 포획 등과 같 은 현상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지방정부에 관한 법령 22호와 중앙정부와 지 방정부간의 재정균형에 관한 법령 25호는 정치권력의 분권화를 통 해 새로운 방식의, 보다 지방화된 정치참여 방식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신질서 정치인들을 포섭해낸 정치적 동맹은 종종 폭력배와 준( 準 )군사조직을 활용하기도 한다(Jayasuriya and Rodan 2008: 767-788). 다시 말해 수하르토 시기의 과두지배세력과 그 측근 들은 정당과 의회로 특징져지는 새로운 민주주의 내에서 새로운 약 탈동맹을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회 정치적 권력을 재 구성하였다는 것이다(Robison and Hadiz 2004: xiv). 이러한 측면에서 인도네시아는 약탈적 지배와 자유 시장-민주주의 그 중간 지점에 있 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노골적인 국가폭력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고도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서 볼 수 있었던 금권정치, 정치적 협박, 납치 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군 개혁을 시도했던 와히

200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드 대통령은 군부의 지지 없이는 어떠한 대통령도 살아남을 수 없음 을 보여주었고, 그의 뒤를 이었던 메가와티 집권 시기에는 군이 최고 위 군 장교 임명권을 돌려받았는가 하면 대( 對 ) 아체 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Robison and Hadiz 2004: 256-257). 결국 새로운 체제는 새로운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냈다. 특히 새로 운 경쟁자들이 출현함에 따라 정치과정도 쉽게 통제될 수 없게 되었 다. 일부는 이 체제 안에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고 있는데 구 지배세력을 대체하려는 새로운 자본가집단과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 최근에 이들은 민족주의적 정서 혹은 포퓰리즘에 의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소규모의 자유주의적 개혁파들과 급진주 의자들은 보다 폭넓은 변화를 추구한다. 현재로서는 보다 근원적으 로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세력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적다. 오히 려 구체제를 유지하려 하거나 포획하려는 세력들이 돋보인다. 심지 어 이들은 의도적으로 권력의 분권화, 분산화를 통해 구체제를 수정 하기도 한다(Robison and Hadiz 2004: 223). 일찍이 수하르토 대통령은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종교가 아닌 개발과 세속적 국가철학인 빤쨔실라(pancasila)로 바꾸었다. 그 렇지만 경제성장이 진행되던 1971-1981년 시기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수하르토와 그의 측근에 의해 독점되었다. 오로지 수하르토 일가의 측근인 승인된 사업가 들에 의해 교역독점, 과도한 투자규 제, 관세 및 비관세장벽 철폐 등이 좌지우지되었다. 정치적 통제는 여러 정당들을 3개로 통합시키고 공산주의자 및 무슬림 과격파 등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군 정보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지속적 인 경제성장으로 인도네시아가 제3세계 개발모델로 간주되기까지 하던 그 시점에서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를 침략하였다. 국제사 회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사이공이 함락되던 와중에 인도네시아가 지역 내 반공블록의 중요한 기지로 간주되고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01 있던 냉전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한 수하르토의 신질서체 제는 시민사회를 조직적으로 파괴하였다. 그 결과 국가권력의 실질 적 개혁을 추구한 다양한 조직들의 자주적 역량이 무력화되었다. 수하르토 국가자본주의는 1974년 반일( 反 日 ) 폭동을 계기로 외국 인 투자를 금하는 산업부문을 확대하고 모든 외국인 투자자들이 현 지 파트너와 합작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보호 와 보조금을 기조로 하는 민족주의 정책에 따라 강력한 대기업들과 정경유착형 재벌들이 독점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6) 이렇듯 대기업과 재벌은 기존 국가독점 부문에서 특혜를 받았다. 규제가 완 화된 은행부문으로 진입한 대기업들과 정치성향을 띤 일가들은 법 적 대출한도를 무시하고 거래를 하였다. 1997년 통화위기는 내재되 어 있던 불씨에 불을 지핀 것과 같았다(Robison and Hadiz 2006: 121-124). 이는 경제개방과 시장규제의 완화가 약탈적 관료와 지대추 구형 자본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Robison and Hadiz 2006: 111).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정계와 유착된 재벌이 붕괴되고 그들 의 자산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매각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 나 그들의 생존투쟁은 성공했고 외국인 투자자의 진입은 사실상 실 패로 끝났다. 외국인들의 공격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자처하는 재벌 들이 금권정치를 통해 인도네시아 거버넌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카드 를 꺼내게 되었다(Hadiz 2007: 11). 2004년 마침내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신중한 이미지를 갖춘 군 장성 출신 유도요노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를 넘어 16) 이를테면 시멘트, 종이, 합판, 그리고 화학비료 부문에서 국내 교역 카르텔이 계속해 서 존재하였다. 단적인 예로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던 합판생산자 연합체인 아쁘 낀도(Apkindo)는 수하르토의 사업 파트너인 밥 하싼(Bob Hasan)에 의해 장악되어 있 었는데, 여기에서 가격과 수출 할당량이 정해졌다.

202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서면서 그에 대한 낙관적 기대도 퇴색하고 복합적 위기를 종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해졌다(Barton 2008: 125-126). 그나마 2004년 12 월에 발생한 쓰나미라는 엄청난 자연재해로 인해 그동안 봉쇄되었 던 아체 지역에 대한 국내외 원조가 가능하게 되면서 수십 년에 걸쳐 광기의 폭력이 반복되던 이 지역에 평화가 찾아왔다. 과거 권위주의 시기에 중앙정부 주도 개발의 희생자였던 아체의 강한 분리 독립 움 직임에 대해 이전의 민주정부들은 자바주의를 넘어선 해결책을 제 시하지 못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유도유노 집권 이후 아체와 중앙정부간의 극단적 대립은 자치( 自 治 ) 수용으로 일단락되 었다. 그것은 개발에 대한 자결권의 부여였다. 그러나 아체와 마찬가지로 수탈적 개발의 피해지역으로서 소수종 족이 움집해 있는 말루꾸(Maluku), 뽄띠아낙(Pontianak), 서깔리만딴 (West Kalimantan), 파푸아(Papua)에서의 인권실태는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준군사조직들이 각기 상이한 정당들과 연을 맺 고 있다. 특정 정치인들이 거리 시위대를 동원하고 준군사조직을 통 해 반대세력에 폭력을 가한다. 또 비사법적 처형이 이루어진다. 불법 벌목, 무분별한 어획 등은 종파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의 수입원 이 되고 있다. 나아가 매표, 후원-수혜관계, 취약한 사법수단 등이 공정한 제도의 정착을 방해하고 있다(Freedman 2006: 96-97). 2. 시민사회의 전환 신질서체제의 부산물로서의 중간계층은 1970년대 후반 이후로 대 졸 경력의 NGO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풀(pool)이 되었다. 이를테면 1970년에 법의 지배라는 관점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법률 지원 을 할 목적으로 법률구호재단 (LBH, Lembaga Bantuan Hukum)이, 그 리고 1980년에는 WALHI(Wahana Lingkungan Hidup Indonesia)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03 약자를 쓰는 인도네시아 환경포럼 이 각각 출범하였다. 경제위기를 전후로 해서는 인도네시아 개발을 위한 국제NGO포럼 (INFID, International NGO Forum on Indonesian Development)이라 불리는 인도 네시아-국제 NGO 연대조직, 교회에 기반을 둔 야코마(Yakoma), LBH, 자카르타사회재단 등 도시지역에 활동 근거지를 둔 NGO들은 노동 권 확보를 선결과제로 두었다. 주목할 것은 1997년에 들어와서는 1994년과 1996년에 있었던 구금의 여파로 노동자들을 조직해내는 NGO의 역할이 감소하면서 주된 활동이 나이키(Nike, Inc) 반대와 같 은 국제운동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수하르토 군부정권은 NGO 활동을 통제하였지만 1981년 이후 석 유수입 감소로 국제수지가 요동함에 따라 국가개발 프로그램 비용 을 축소하고, 그 대신 경제자유화와 지역사회의 개발참여를 유도하 였다. 특히 농촌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하는 NGO들의 역할을 인정하 면서 이들이 해외 기금을 보다 원활히 수급토록 자율성을 부여하였 다(Clarke 1998: 38). 일찍이 수하르토 체제 붕괴 직후 일각에서는 인도네시아가 발칸 화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강력한 분리 주의 무장운동세력은 자유아체운동(GAM, The Gerakan Aceh Merdeka) 뿐이었는데 아체 사례는 국가안보논리에 악용되었다. 암본 지역의 남말루꾸공화국(RMS, Republik Maluku Selatan) 잔당세력들도 마찬가 지 예였다. 자유파푸아운동(OPM, Organisasi Papua Merdeka)이 좀 더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하였으나 이들 역량 역시 취약했다(Barton 2008: 129). 수하르토 몰락 이후 인도네시아는 지역 내에서 언론 자유의 중심 지로 부상하였다. 수하르토 치하에서는 불가능했던 많은 양의 보도 와 비평이 분출하였다. 그렇지만 아체 같은 지역에서는 언론매체가 법적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기자에 대한 폭행이 빈번해

204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졌다. 마침내 민간기업들과 군부가 민법을 이용하여 언론을 통제하 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개혁성향의 일간지 템포(Tempo)의 편집장 밤방 하르무티의 경우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업인인 또미 윈따따가 직물시장을 소실시킨 화재사고로 수익을 보았다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아체에서의 전쟁 과 평화협상을 다루는 기사에 대한 검열이 가해지는 등 언론인에 대 한 협박, 자기검열 등과 같은 구태가 부활하였다(Freedman 2006: 91). 특히 2004년 9월에 군부에 의해 자행된 인권운동가 무니르(Munir) 독 살사건은 민주화 이후에도 과거 기득권세력의 수구적 행태가 지속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7) LBH, 임파르시알(Impartial)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인권운동단체 들은 시민권을 증진하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LBH는 노동자의 권리 옹호를 위한 법률지원 뿐만 아니라 수하르토의 정치 공작으로 메가 와티가 인도네시아 민주당 당수직을 박탈당했을 때 70여명의 자원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200개가 넘는 소송을 준비하였다(Clarke 1998: 41). 이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 씽크탱크와 재단들도 늘어났다. 합법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감시, 협박, 간섭하였다. 국가정보국(BIN, Badan Intelijen Negara)은 국내외 NGO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 난하고 나섰다. 경찰도 국가정보국이 확인한 인도네시아인 활동가, 외국인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공표하였다(Freedman 2006: 92). 민주화 도상의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특성은 조직적 분산성 과 정치적 온건성 이다(전제성 2005: 84). 민주화 이후 신생 노조들이 대거 출현하였지만 전체 노조들을 대표해서 정부와 협상을 취할만 17) 인권감시단체 임파르샬(Impartial)의 소장이었던 무니르는 38세의 나이로 2004년 9월 7일 자카르타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가던 인도네시아 국영 항공 가루다 항공기 안에서 사망했다. 이후 무니르의 사망이 독극물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풍키 2006).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05 한 구심이 건설되지는 못했다. 2001년 중반 경 많은 노동자 조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익에 해가 될 것 같은 노조를 해산할 수 있음을 명시한 새로운 노조관련법을 통과시켰다. 노동자들은 지 속적인 고실업과 고용주들의 저항 속에서 주기적으로 최저 임금 인 상을 요구하였지만 급격한 물가 상승과 특정 부문에 대한 정부 보조 의 중단이 실질 임금을 지속적으로 하락시켰다. 나아가 한국과 일본 에서 온 투자자들이 자본파업의 일환으로서 임금 인상과 노동분규 압박이 덜한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으로 투자처를 옮김에 따라 노 동자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임금인상 동결과 노 조통제로 대응하였다(Hadiz 2004: 124-125). 직선 대통령으로서의 유도요노의 집권 이후 자유권은 많이 신장 되었다.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이끈 개혁세력들의 운동은 과거 기득권세력들이 제압하고 있는 국가-자본 유착구조의 외곽에 묶여 있다. 특히 이들은 노동법에 관련된 사안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에 매몰되어 있는 양상이다. 그렇 기 때문에 관료제나 국가영역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 이다. 이들의 주된 활동기반은 지역주민조직 혹은 협동조합과 같은 자치조직이다. 이렇듯 개혁세력들은 정치과정에서 공식적 혹은 비 공식적으로 주변화되어 있기에 지역수준은 전국적 수준에서도 권력 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못하고 있다. 이는 정부기구나 형식적 법 적 정치적 대표성을 무시한 결과이다. 개혁세력들이 지방선거에서 대부분 패배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반면 기득권세력들은 새로 이 도입된 민주적 수단들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이들의 전략이 소위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라고 한다면, 개혁세력들의 직접 18) 과거 수하르토 집권 시기 템포 편집장으로 언론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밤방 하리무티는 현재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가 필리핀, 타이에 비 해 가장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면담일: 2007년 8월 19일).

206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민주주의 모델은 아래부터 요구 혹은 시민사회에 기반한 것이다. 이 합집산을 거듭하는 비정치적 개혁운동의 경우 NGO들과 활동가 조 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권력기반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사 회 문화적 윤리에 기반하고 있다(Subono et al. 2008: 106-110). 요컨대 구 지배 엘리트들은 새로이 출현한 민주적 국가 하에서 민주주의를 증진시킨다고 보는 수단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NGO들은 보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 민주 주의 수단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정치적 과두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수단들에 대한 탈독점화를 의미한다. 19) 물론 1999년 이후 정치적 포용성이 확장되면서 시민적 자유가 확대되고 분권화에 따른 지방자치단체의 구성과 새로운 정 당들이 출현하면서 투명성과 정부의 책임성을 의제로 삼은 시민사 회조직, NGO, 지역사회조직들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의 도전이 일어 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종종 파업과 같은 공격적인 대중운동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민주주의 개발 패러다임 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Priyono et al. 2008: 89-92).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가 이슬람급진주의자 들의 목표에 잘 부합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특히 수백만의 인도네 시아 청년층과 빈곤층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감을 갖고 있으면서 이슬람국가 건설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급진적 요구를 내걸 고 있다. 저학력에 실업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이슬람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수하르토의 신 질서 시기에 인도네시아 사회는 응집력 있는 사회주의, 사회민주주 의, 자유주의적 정치 등을 탈취 당했기 때문이다(Hadiz 2007: 10). 19) 자카르타에 소재하고 있는 재야 연구소인 데모스(Demos)의 연구원 쁘리요노 역시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된 유도요노 체제하에서도 과두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급진 전략이 유효함을 피력하였다(면담일: 2007년 8월 22일).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07 Ⅵ. 결 론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민주화를 경험한 대 표적인 국가들이다. 이때 민주화는 지구화의 지역적 현상으로서의 경제적 자유화와 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화는 매우 완 만한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경제적 특권집단, 좌파, 공동체주의 자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급진적 방식이 아닌 점진적 방식 의 경제 자유화가 사회적 약자와의 동의를 얻는 가운데에서 이루어 지는 인간중심의 개발 전략이거나 민주화 이전의 개발침략 을 회 피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대안적 개발 패러다임을 의식한 국가권력이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방식을 선택했음에 유의할 필요 가 있다. 필리핀에서는 민주화 이후 포복형 (creep)의 양상을 띠던 포 퓰리즘이 에스트라다 시기에 와서 폭발형 (eruption)의 양상으로 발 전하였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경제적 사 회적 권리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빈민층의 정치적 욕구를 에스트 라다가 조직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의 탁신 역시 민주화라는 정치적 공간 속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빈민층의 경제적 욕구를 다양 한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포퓰리스트 는 공교롭게도 부패문제로 각각 마닐라 정치 와 방콕 정치 의 강력 한 도전을 받아 붕괴하였다. 이후 전례없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한 에스트라다와 탁신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던 사회적 약자층의 좌절은 투표, 혹은 폭동으 로 표현되었다. 특히 필리핀에서의 실패한 피플파워라고 할 수 있는 2001년 5월의 대규모 에스트라다 지지 시위와 타이에서 2009년 4월 에 있었던 탁신 지지 시위는 민주화 이후 시민적 정치적 권리 못지 않게 경제적 사회적 권리가 중요함을 자각한 빈민층의 직접행동이

208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었다. 그러나 그들의 직접행동은 대안적인 그들의 정치적 대표를 찾 지 못한 채 폭도민주주의 (mob democracy)로 전개되고 이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반면 필리핀과 타이에 비해 10년가량 늦게 민주화의 문턱을 넘은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 사회적 권리와 관련된 의제를 반영한 개발 주의를 적극적으로 띄운 포퓰리즘 정치는 아직까지 없었다. 지난 32 년간 신질서 군부권위주의 시기에 포퓰리즘은 억압되었고, 사회는 탈정치화되었으며, 최고의 포퓰리스트였던 인도네시아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과 연관이 있는 모든 정치 사회세력은 정화 대상이 되었다. 이들 정화작업을 추진한 주역들과 구 기득권세력들 은 민주화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선거정치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 데 일부 사회적 약자계층은 이슬람국가 건설을 내거는 급진적 이슬 람정당의 지지계층이 되었다. 이는 사회운동진영이 이렇다 할 대안 적 개발 패러다임과 대중정당 구축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회운동진영 역시 신정치 와 신운동 을 내세우고 있지 만 여전히 반( 反 )개발, 반자본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서 선거정치 국면에서 위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아래 <그림 3>의 시민사회 발전단계가 보여주듯이 사회운동진영은 분열되었 다. 에스트라다의 포퓰리즘이 빈민층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도 진보 진영의 대안부재, 나아가 분열 때문이었다. 타이 시민사회도 탁신의 포퓰리즘을 두고 시민사회내의 인식 격차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 하더니, 쿠테타에 따른 1997년 헌법 폐기, 반탁신세력의 탁신 후계세 력의 정부구성 불인정 투쟁 등의 정치 상황을 거치면서 제 3지대가 매우 협소해지고 반탁신과 친탁신 진영으로 완전 분열하였다. 시민사회가 초기 팽창 단계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경우 시민사회 의 분열 양상은 아직까지 약하다. 단지 민주화 직후 과거 권위주의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09 시기 중앙정부 주도 개발의 희생자였던 아체 사회의 강한 분리독립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민주정부들은 자바주의에 갇힌 국가주의로 대응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폭력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유 도유노 집권 이후 아체와 중앙정부간의 극단적 대립은 개발 자치에 대한 수용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림 3> 민주화 이후 인권의 격차와 시민사회의 발전 시민 정치적 권리 a 인 권 격 차 사회 경제적 권리 a b b 팽창 (인도네시아) 분화 분열 (필리핀 타이) 시민사회 발전단계 주: 이 그림은 Arat(1991: 10)을 약간 변용한 것임. a와 b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완만한 개선을, a'와 b'는 개선에서 후퇴로의 역진을 각각 의미. 요약하자면 위의 <그림 3>이 보여주듯이 3개국 모두 민주화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격차로부터 시작되 었다. 우선, 필리핀과 타이의 경우 경제 자유화가 매우 완만한 속도 로 진행되었을지라도 인간중심의 개발 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210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사회적 약자층에게는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발전이 정체상태이거 나 심지어 퇴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실제 양국 모두 포퓰리즘 시기 에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완만한 발전이 있었으나 다시 또 후퇴로 접어들었다(b'의 예). 이때 필리핀의 경우 포퓰리즘이 끝나는 시기 부터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고, 타이에서 는 탁신의 포퓰리즘 시기부터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통제가 서서히 진행되어 2006년 9월 쿠데타 이후 그 통제가 보다 심각해지 고 있다(a'의 예). 이는 신과두제와 무관하지 않은 비자유주의적 민 주주의(illiberal democracy) 혹은 선거권위주의(electoral democracy) 현상 이다. 특히 양 국가에서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제약은 국가 비상사태 혹은 계엄령 선포로 표현되었다. 시민사회가 아직 생성단계에 있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민주화 초 기에 차별적 개발의 희생지역인 아체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후퇴 조짐이 있었으나 유도요노 집권 이 후부터 매우 완만하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사회적 권리 가 개선되고 있다. 잠정적 수준에서 필리핀과 타이와는 달리 전근대 적 지배세력이 비교적 주변화되어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절차적 민 주주의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 민주주의로서의 인간중심 의 개발 가능성이 비교적 높음을 가정해본다(a와 b의 가능성). 주제어: 인권, 인간중심의 개발, 잘못된 개발, 과두제의 변형, 가산제 과두제, 혼합형 과두제, 행정형 과두제, 개발침략, 시민적ㆍ정치적 권리, 경제적ㆍ사회적 권리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11 <참고문헌> 박기덕. 1998. 라모스정권의 경제개혁과 민주체제의 공고화. 동 남아시아연구 6. 박사명. 2001. 필리핀의 민주주의와 인권. 민주주의와 인권 1(2). 광주: 전남대 5 18연구소. 박승우. 2007. 필리핀의 과두제 민주주의: 정치적 독점의 해체없는 민주화., 민주사회와정책연구 12.. 2009. 민주주의 이행 이후 필리핀의 사회경제적 독점과 그 변형적 재편. 아시아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동 학. 서울: 한울. 박은홍. 2007. 타이 민주주의의 전환: 과두정치로서의 포퓰리즘 의 진화. 민주사회와정책연구 12. 우수명. 1996. 필리핀 경제개발정책의 성과. 지역경제 3. 전제성. 2005. 국가의 온정주의와 노동의 보완적 교섭전략. 노동 사회. 조희연 박은홍 이홍균 편. 2009. 아시아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동학. 서울: 한울. 코로넬, 쉐일라 외. 2008. THE NEWS. 서울: 푸른숲. 페러, 미리암 코로넬. 2000. 필리핀의 인권과 민주주의.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5.18 20주년 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 자 료집. 풍키 인다르띠. 2006. 인도네시아의 인권을 위한 장기 항전과 무니 르(Munir)의 삶. 미간행 발표문. Arat, Zehra F. 1991. Democracy and Human Rights in Developing Countries. Boulder & London: Lynne Rienner Publishers. Abinales, Patricio N. 2008. The Philippines: Weak State, Resil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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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Asia. Chiang Mai: Silkworm Books. Weiss, Stanley. 2007. What's Holding Indonesia Back. Herald International Tribune September 1(2). 면담자료 프란시스코 느멘조 전 국립 필리핀대학 총장(면담일: 2007년 7월 18일) 에두아르도 타뎀 국립 필리핀대학 교수(면담일: 2007년 7월 19일) 막스 드 메사(Max de Mesa) 필리핀 인권단체 PAHRA 의장(면담일: 2007년 2월 15일). 쁘라윗 로자나프록 타이 영자일간지 <더 네이션> 기자(면담일 2008 년 10월 22일) 짜란 디타아피차이 전( 前 ) 타이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면담일 2008년 10월 23일) 수리차이 완께오 타이 왕립쭐라롱껀대 교수(면담일: 2008년 10월 20일) 수리야사이 타이 민주주의민중연대(PAD) 대변인(면담일: 2008년 10 월 19일) 쁘리요노(AE Priyono) 인도네시아 데모스(Demos) 연구원(면담일: 2006 년 8월 20일). 밤방 하리무티 인도네시아 전 템포 편집장(면담일: 2007년 8월 19일). (2009. 4. 23 투고; 2009. 5. 7 심사; 2009. 6. 1 게재확정)

동남아시아의 민주화 이후 개발 과 인권 의 갈등적 공존 217 <Abstract> The Confrontational Co-existence of Development and Human Rights after Democratic Transition in Southeast Asia: A Civil Society Perspective Park Eunhong (Faculty of Social Science, Sungkonghoe University) Bring this analysis down to people-centered development perspective and looking through democratization in the Philippines, Thailand and Indonesia, we find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among them related with the intensity of conflicts between development and human rights in the process of democratization in line with global transformation. Civil society in the Philippines criticized the developmental path in the Philippines which failed to implement land reform and eradication of poverty under the transition from 'patrimonial oligarchy' to democracy. In Thailand the coalition of military and the royalists had consolidated its power since Sarit military regime, which later paved the way 'hybrid oligarchy' era. Most Thai civil society organizations has regarded their developmental experience rather as 'maldevelopment' which disregarded economic and social rights. It has been especially believed by Thai localists that the stimulation of local markets and the building of autonomic community society will form the alternative economy without going against the conservative banner of nation, religion

218 동남아시아연구 19권 2호 and king. Thaksin as a populist successfully took advantage of Thai localist ethos in favour of taking the seat of power. He projected himself as a modernizer focused on economic growth and cleaner politics. However Thaksin's procedural legitimacy was overthrown by counterattacking from military-royalist alliance, pretexting that Thaksin caused internal conflicts and lacked morality. Soeharto's New Order regime which can be called 'administrative oligarchy' had an antipathy towards notions of economic and social rights as well as civil and political rights.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fall of Soeharto opened the political space for democratic civil society organizations which had long struggled with development aggression and human rights abuses, there have been continuously a strong political and military reaction against human rights activists, NGOs and ethnic minorities such as Aceh and Papua. Nevertheless, Indonesian democracy is more promising than Philippine's and Thai democracy in terms of comparatively less pre-modern legacies. Key Words : human rights, people-centered development, maldevelopment, oligarchy transformation, patrimonial oligarchy, hybrid oligarchy, administrative oligarchy, development aggressi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economic and social ri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