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제43-3의 규정에 의한 사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조사구간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며,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적의 보존방안을 수립하기 위함. 2. 調 査 地 域 및 範 圍 조사구간의 行 政 的 위치는 慶 尙 南 道 固 城 郡 栗 垈 里 산 35 番 地 일원이다. 조사를 의뢰받은 면적은 123,882m2이다. 시간적인 범위는 考 古 歷 史 資 料 의 경우 20세기 전 엽을 하한으로 삼고, 人 類 民 俗 學 地 名 分 野 의 조사는 현재까지를 시점의 하한으로 삼 았다. 3. 調 査 期 間 및 日 程 그간의 조사일정은 아래에 정리된 바와 같다. 1) 계약기간 ; 2003년 11월 08일 11월 27일(20일간) 2) 문헌조사 ; 11월 08일 11월 09일(2일간) 3) 현장조사 ; 11월 10일 11월 11일(2일간) 4) 자료분석 ; 11월 12일 11월 20일(9일간) 5) 원고작성 ; 11월 21일 11월 26일(6일간) 6) 자료제출 ; 11월 27일 - 1 -
소요일수 조사내용 2일 4일 13일 19일 20일 구성비 1. 자료수집 및 분석 10% 2. 현장조사 30% 3. 자료분석 30% 4. 보고서 작성 20% 5. 보고서 제출 10% 6. 조사진행계획 10% 40% 70% 90% 100% 100% 4. 調 査 團 構 成 번호 직 위 성 명 소 속 분 야 직 책 1 조사단장 이범홍 경남발전연구원 고고학 센터장 2 책임조사원 최헌섭 경남발전연구원 고고학 조사연구부장 3 조사원 박태성 경남발전연구원 지명학 비상근 연구위원 박원철 경남발전연구원 인류 민속학 연구원 5. 調 査 方 法 조사는 文 獻 調 査 와 現 場 調 査, 資 料 整 理 分 析 및 報 告 書 發 刊 단계로 나누어 실시하 였다. 조사의 전단계에서는 조사지역을 대상으로 조사 정리된 자료를 수집하여 조사 지역에 대한 정보의 개황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는 아래의 표에 제시된 바와 같다. 현장조사는 考 古 歷 史, 地 質 地 形, 地 名, 民 俗 등 4개 분야에 걸쳐 수행되었다. 1) 文 獻 調 査 우선 조사지역을 대상으로 간행된 자료를 수집 분류 분석하였다. 이 때, 수집된 자료의 종류와 간행 시기 등을 분류의 기준으로 삼았을 때, 다음 쪽의 표 3>과 같 은 분류표를 얻을 수 있었다. - 2 -
번호 출 전 내 용 개 요 1 三 國 志 卷 第 三 十 고성지역 정치 弁 辰 亦 十 二 國 중략 弁 辰 古 資 彌 凍 國 이하략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체에 관한 최초 夷 傳 의 기록 2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浦 上 八 國 이 加 新 羅 本 紀 二 奈 解 尼 師 十 四 (209) 秋 七 月 浦 上 八 國 謀 侵 加 羅 이하략 羅 를 침범함 今 3 奈 解 尼 師 今 時 人 也 중략 時 八 浦 上 國 同 謀 伐 阿 羅 고성지역의 옛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國 중략 後 三 年 骨 浦 ( 昌 原 馬 山 ) 漆 浦 ( 漆 原 ) 古 史 浦 소국이었던 古 十 八 列 傳 八 勿 稽 子 傳 ( 固 城 ) 三 國 人 來 攻 竭 火 城 ( 蔚 山 凡 西 ) 史 浦 國 의 등장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固 城 郡 本 古 自 郡 景 德 王 改 名 今 因 之 領 縣 三 蚊 火 良 통일신라시대까 4 十 四 雜 志 第 三 地 理 縣 今 未 詳 泗 水 縣 本 史 勿 縣 景 德 王 改 名 今 泗 州 尙 善 지 고성군의 연 一 縣 本 一 善 縣 景 德 王 改 名 今 永 善 縣 혁변천 5 고성이 小 伽 耶 三 國 遺 事 卷 第 一 五 伽 耶 중략 小 伽 耶 ( 今 固 城 ) 이하략 의 이름으로 등 紀 異 二 장한 최초의 예 6 第 十 奈 解 王 卽 位 十 七 年 壬 辰 (212) 保 羅 國 古 自 國 ( 今 固 고성이 古 自 國 三 國 遺 事 卷 第 五 城 ) 史 勿 國 ( 今 泗 州 ) 等 八 國 倂 力 來 侵 邊 境 중략 ( 二 ) 의 이름으로 등 避 隱 八 勿 稽 子 十 七 年 乙 未 骨 浦 國 ( 今 合 浦 也 ) 等 三 國 王 各 率 兵 來 攻 竭 장 火 城 ( 疑 屈 弗 也 今 蔚 州 ) 이하략 7 日 本 書 紀 卷 第 十 五 年 (544) 十 一 月 중략 久 嗟 旱 岐 이하략 고성이 久 嗟 의 九 欽 命 天 皇 이름으로 등장 신라에 의해 加 8 耶 ( 任 那 )가 멸망 日 本 書 紀 卷 第 十 二 十 三 年 (562) 春 正 月 新 羅 打 滅 任 那 官 家 ( 一 本 云 二 됨. 그 중 한 나 九 欽 命 天 皇 十 一 年 (560) 중략 古 嗟 國 이하략 라가 고성의 古 嗟 國 임 9 固 城 縣 本 小 加 耶 國 新 羅 取 之 置 古 自 郡 景 德 王 改 今 名 高 麗 史 第 五 十 七 고려시대까지 爲 郡 成 宗 十 四 年 爲 固 州 刺 史 後 降 爲 縣 顯 宗 九 年 屬 巨 濟 志 卷 第 十 一 地 理 二 固 城 의 연혁 변 後 置 縣 令 元 宗 七 年 以 郡 陞 爲 州 忠 烈 王 時 倂 于 南 海 尋 復 慶 尙 道 康 州 固 城 郡 천사 舊 別 號 鐵 城 固 城 縣 본디 小 伽 倻 國 인데, 新 羅 에서 이를 취하여 古 自 郡 을 설치하고, 景 德 王 이 固 城 郡 으로 고쳤다. 高 麗 에서 縣 으로 고쳐서 顯 宗 戊 午 年 에 巨 濟 任 內 에 붙였다가, 뒤 世 宗 實 錄 150 地 에 縣 令 을 두었는데 本 朝 에서 그대로 따랐다. 조선 전기 世 宗 10 理 志 慶 尙 道 晉 州 牧 別 號 는 鐵 城 이다. 部 曲 이 1이니, 坤 義 요, 지금은 없 朝 까지 固 城 의 固 城 縣 어지고, 直 村 이 되었다. 鄕 이 2이니, 曲 山 鹿 鳴 이다. 연혁 변천사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直 村 이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巨 濟 見 乃 梁 에 이르기 40리, 서쪽으로 泗 川 에 이르기 26리, 남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기 1리, 북쪽으로 鎭 海 에 이르기 33리이다. - 3 -
번호 출 전 내 용 개 요 11 固 城 縣 本 加 耶 國 新 羅 取 之 置 古 自 郡 景 德 王 改 今 名 조선 전기 中 宗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高 麗 成 宗 時 爲 固 州 刺 史 後 降 爲 縣 顯 宗 屬 巨 濟 後 置 縣 令 朝 까지 固 城 의 卷 三 十 二 固 城 縣 元 宗 陞 爲 州 忠 烈 王 時 倂 于 南 海 尋 復 舊 恭 愍 王 朝 降 爲 縣 연혁 변천사 令 本 朝 因 之 12 歷 代 紀 年 下 東 方 伽 倻 로 기록된 固 城 縣 ( 本 伽 倻 國 竝 爲 新 羅 所 取 ) 二 十 七 國 都 固 城 13 東 國 歷 代 總 目 附 고성이 小 伽 倻 固 城 ( 古 小 伽 倻 國 ) 新 羅 智 證 王 取 之 爲 郡 地 誌 國 임을 기록 小 伽 倻 를 甘 文 14 修 山 集 卷 十 一 東 중략 小 伽 倻 卽 甘 文 小 國 也 하략 으로 잘못 비 史 世 家 伽 倻 世 家 정한 예 中 國 正 史 의 15 海 東 繹 史 續 輯 三 謹 按 東 史 新 羅 智 證 王 六 年 ( 梁 武 帝 四 年 ;505) 取 小 伽 解 題 로서 고성 地 理 考 三 韓 下 弁 辰 倻 하략 이 古 資 彌 凍 國 이었음을 고증 16 상략 又 按 新 羅 之 史 智 證 王 時 取 小 伽 耶 ( 今 固 彊 域 考 一 弁 辰 考 위와 비슷한 예 城 ) 하략 17 辰 韓 弁 韓 初 皆 六 國 後 各 十 二 而 迦 羅 之 六 國 者 史 家 失 소가야의 멸망 其 六 也 鏞 謂 중략 凡 在 黃 水 濫 水 之 南 者 最 東 曰 연대에 대한 丁 彊 域 考 二 弁 辰 別 金 海 次 西 曰 熊 川 曰 昌 原 曰 漆 原 曰 咸 安 曰 鎭 海 曰 固 城 曰 泗 若 鏞 의 설. 그의 考 ( 亦 名 迦 羅 考 ) 川 最 西 曰 昆 陽 羅 史 謂 之 浦 上 八 國 皆 指 此 類 중략 설도 역시 오류 但 浦 上 八 國 所 謂 骨 浦 者 今 合 于 昌 原 所 謂 漆 浦 者 今 之 漆 原 를 범함 所 謂 古 史 浦 者 似 指 固 城 ( 本 名 古 自 浦 ) 餘 不 可 考 也 18 嶺 南 邑 誌 三 十 一 伽 倻 蚊 火 良 廢 縣 ( 金 富 軾 云 新 羅 時 爲 高 成 郡 領 縣 今 未 固 城 府 邑 誌 古 蹟 條 詳 ) 19 大 韓 疆 域 考 二 增 상략 東 史 固 城 爲 小 伽 耶 則 亦 任 那 之 屬 國 고성을 小 伽 耶 補 任 那 考 耳 의 고지로 비정 20 固 城 地 區 古 墳 發 掘 考 古 美 術 해당사항 없음 調 査 報 告 116. 20 文 化 遺 蹟 總 覽 固 城 城 址 를 비롯한 읍내의 유적 17개소 소개 21 小 伽 倻 의 뿌리 고성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地 誌 22 固 城 東 外 洞 貝 塚 고성 동외동 패총에 대한 조사보고서 上 老 大 島 23 伽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調 査 報 告 書 - 慶 南 固 南 山 城 址 를 비롯한 유적 4개소 소개 城 郡 - 24 고고학상에서 본 소 소가야의 문화는 해양을 통해 일본열도 및 중국의 嶺 南 考 古 學 가야 문화의 제문제 화남지방 등지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 1. 25 舞 妓 山 과 長 鼓 墳 송학동 고분에 대한 前 方 後 圓 墳 說 제기 26 固 城 栗 垈 里 古 墳 發 掘 嶺 南 考 古 學 율대리 2호분 발굴에 대한 개보 調 査 23. 27 加 耶 의 社 會 發 展 段 小 伽 倻 의 명칭이 三 國 時 代 가 아니라 羅 末 麗 初 에 형 한국 고대국 階 성되었을 것이라 봄. 가의 형성 28 固 城 栗 垈 里 2 號 율대리 2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보고서. 고성지역 고 墳 총분의 성격을 규명함 - 4 -
번호 출 전 내 용 개 요 29 固 城 貝 塚 1960년대 고성패총에 대한 발굴보고서 30 慶 南 文 化 財 大 觀 해당사항 없음 31 小 加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地 表 調 査 報 告 고성군에 분포하는 선사 고대의 유적 소개 32 小 加 耶 土 器 의 成 立 소가야 지역 출토 토기의 성립과 전개양상에 대해 과 展 開 고찰한 연구논문 동외동 의례유구의 발굴결과를 중심으로 제사유적에 33 제사고고학의 연구 대한 연구의 회고와 전망을 시도. 당산 구릉 정상부에 성과와 과제 축조된 수혈식 의례유구의 조사에 대한 내용의 개황 및 조문청동기 등의 자료소개. 고고학의 로운 지향 34 韓 國 古 代 社 固 城 古 自 國 의 形 成 고자국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문헌사적 연구. 포상팔 會 의 地 方 支 과 發 展 국전쟁을 중점적으로 고찰함. 配 교역을 통해 성장한 고자국이 3세기초 소가야연맹체 35 小 伽 倻 聯 盟 體 의 成 를 형성. 포상팔국의 난을 주도하여 금관가야를 공격 민족문화논 立 과 그 推 移 하였으나 실패하고 쇠퇴. 562년 대가야의 멸망과 함 총 17. 께 신라에 복속. 36 考 古 學 으로 본 小 加 고고학을 통 소가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논문. 耶 해 본 가야 고성지역의 특징적인 고분 축조원리인 墳 丘 墓 의 전 37 통을 살피고, 소가야 정치체와 관련된 土 器 樣 式 과 그 묘제와 출토 小 伽 耶 地 域 의 古 墳 분포 및 주변지역과의 關 係 性 에 대해 검토. 百 濟 및 유물로 본 소가 과 出 土 遺 物 新 羅, 주변 加 耶 國, 倭 와의 交 流 를 지시하는 자료가 야 묘제 및 유물상으로 확인됨. 기존에 이 지역 정치체의 명칭으로 통칭된 小 加 耶 는 나말여초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며 古 自 國 이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언. 소가야의 성장배경으로서 청동 38 기시대 이래의 支 石 墓 집단에서 이후의 세형동검 문 歷 史 的 으로 본 小 加 화의 파급으로 사회적 統 合 이 진전되어 古 自 國 을 형 상동 耶 의 政 治 體 성. 3세기 전반경에는 세력 중심이 고성읍으로 이동, 4세기대에는 浦 上 八 國 의 난을 주도. 5세기 후반 이후 대가야연맹의 번영에 반비례하며 衰 退 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고자국의 성장과 흥망에 대한 고찰. 39 古 自 國 의 역사적 전 고자국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해 고찰하고 아울러 가야각국사의 개와 그 문화 고자국의 문화에 대해 논함 재구성 문헌사에서 본 고자국사에 대한 시각. 고고자료를 인 40 古 自 國 史 와 加 耶 용하며 포상팔국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의함. 송학동 1호분의 조사성과를 토대로 한 韓 中 日 3국 古 自 國 ( 小 加 耶 )의 의 국제 심포지움 자료. 송학동 고분군에 대한 前 方 後 41 타임캡슐 松 鶴 洞 古 墳 圓 墳 論 爭 의 새로운 장을 제시. 1호분의 형태가 기왕 群 의 이해와는 달리 서로 다른 3기의 묘가 따로 조영되 어 현재의 외형을 이룬 것으로 파악함. 새 상기한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 조사구간에는 어떠한 문화재의 분포 사실 도 확인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5 -
2) 自 然 生 態 分 野 조사지역의 각종 古 地 誌 및 古 地 圖, 지질도와 지형도 등을 구하여 지질 및 지형 적 특성의 이해를 圖 謀 하였다. 이와 같은 자료의 분석결과 본 조사구역은 頁 巖 을 기반암으로 하는 丘 陵 地 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考 古 歷 史 分 野 우선 위 표 3)에서 구해진 바와 같이 旣 刊 된 자료를 일별하여 조사구간에 대한 사전 정보를 구하였다. 그 결과 당 조사구간에는 어떠한 유적도 분포하지 않는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 역사분야의 조사는 구간의 전역을 대상으로 한 지표면의 관찰을 통해서 이루 어지게 된다. 현장조사에서는 지표면에 대한 관찰을 기본으로 하면서 절개지에서 드러난 단면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상기한 조사와 함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조사와 지명조사에서 확인된 내용을 토대로 유적을 확인하고자 노력하였다. 5) 地 名 分 野 조사지역에 포함된 마을의 주민들과의 質 疑 調 査 를 바탕으로 하였다. 아울러 조 사지역의 地 名 의 形 成 과 變 遷 過 程 을 밝히는데 주력하였고, 특히 지명이 조사지역의 문화재의 분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유용한 정보를 얻고자 애썼다. - 6 -
Ⅱ. 調 査 內 容 1. 自 然 生 態 分 野 固 城 邑 은 험준한 花 崗 巖 質 로 이루어진 壯 年 期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盆 地 내에 발달한 老 年 期 의 shale층을 기반암으로 하는 구릉성 산지에 입지하고 있다. 이 분 지는 화강암과 shale층의 差 別 侵 蝕 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 조사구간은 고성분지의 남측 외연을 에우른 철마산의 남록 말단부에 해당된다. 지형적으로는 산록의 말단부와 이에 연한 扇 狀 地 性 沖 積 地 로서 경사가 거의 없다. 산록은 임야와 밤나무 과수원, 묘역, 밭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선상지는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선상지의 전면으로는 분지저인 고성들 이 펼쳐져 있다. 지금의 고성들 은 높 은 생산력을 가진 농경지로 화하였지만, 고고학적 조사의 대상시기인 고대 이전에 는 바다 혹은 이에 가까운 干 潟 地 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지형 및 고성들 과 이에 인접한 분지 외곽의 家 屋 構 造, 鹽 生 濕 地 性 식물인 갈대 群 落 등을 통해 유 추해 볼 수 있다. 현재의 고성들 은 과거에는 바다 내지는 干 潟 地 였던 것이 근래로 오면서 자연적 인 퇴적과 함께 인공적으로 干 拓 한 평야로 변화된 것이다. 지금도 고성천의 하류에 는 간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거류면의 덕촌마을 일대의 취락은 현재는 농업을 영위하고 있지만, 漁 村 의 취락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 면, 가옥의 규모가 작고, 지붕도 낮으며, 房 數 도 적고, 타작마당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家 屋 의 密 度 도 일반적인 농촌에 비해서 높다. 이것은 이 마을이 형성될 당시 에는 어업이 基 盤 産 業 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고성들 이 과거에 는 당항포 바다의 연장인 灣 奧 였다는 것이다. 현재 大 可 貯 水 池 에서 발원하는 固 城 川 은 고성들 을 적시며 南 東 流 하다가 고성들 의 중앙에 와서 크게 90 이상의 각도로 꺽여 그 流 路 를 바꾸어 北 東 流 하면서 唐 項 浦 로 유입된다. 그러나 고성천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에서 7km 떨어져 있는 대평마을 의 대평교 까지 鹽 生 植 物 인 갈대가 자라고 있고, 또한 고성천을 따라서도 염생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이것은 대평교 까지 과거에는 바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성들이 과거 당항포에서 연장된 內 灣 이었음을 방증하는 또 다른 예는 고고자 료에서도 구해진다. 그것은 지석묘의 분포대를 예시할 수 있는데, 고성분지의 외곽 에는 거류면과 대가면, 고성읍 일대에서 많은 수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이 가운데 가장 저위면에 입지하는 것으로는 거류면과 고성읍 수남동에 분포해 있다. 그 입지 고도는 해발 10m대 미만으로서 그 이하의 고도대는 청동기시대 당시로서는 高 燥 地 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 7 -
2. 考 古 歷 史 分 野 1) 考 古 歷 史 資 料 로 본 人 文 環 境 固 城 郡 에서 인간활동이 이루어진 연원은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는 한 靑 銅 器 時 代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유적에 대해 발견 보고된 예가 45개소 1) 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이전 단계인 新 石 器 時 代 의 존재를 쉽게 상정할 수 있으며 2), 앞으로의 조사에 따라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이 발견되 리라 여겨진다. 고고자료로 볼 때, 청동기시대의 고성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역동적이었던 것으 로 드러난다. 고성군의 선사 고대유적을 대상으로 한 지표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자 료가 청동기시대에 조영된 유적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점을 잘 방증하고 있다. 이 자료의 대부분은 지석묘와 그 존재로써 그려지는 유물산포지이다. 최근, 內 山 里 古 墳 群 과 松 鶴 洞 古 墳 群 의 발굴을 계기로 고성을 대상으로 한 지역 사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2000 2001년 동안 3차례에 걸친 학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고, 고자국에 대한 연구논문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三 韓 時 代 에는 三 國 志 弁 辰 傳 에 등재된 弁 辰 古 資 彌 凍 國 혹은 三 國 史 記 勿 稽 子 傳 에 등장하는 浦 上 八 國 중의 일국인 古 史 浦 國 혹은 日 本 書 紀 의 古 嗟 國 으로 비정된다. 3) 이 시기의 유적 으로는 저명한 고성패총과 송천리 솔섬석관묘유적을 들 수 있다. 三 國 時 代 의 固 城 은 六 加 耶 의 일국인 小 伽 耶 國 이었음은 학계의 공통된 의견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 異 論 의 여지가 없다. 4) 그러나 三 國 遺 事 에 보이는 小 伽 耶 라는 표현은 당시인들이 자신들을 작은 가야라는 의미인 소가야로 불렀을리 만무하며, 某 加 耶 의 형태는 가야시대 당시의 명칭이 아니라 羅 末 麗 初 에 등장한 것이라는 견해 가 참고할 만하다. 5) 이와 같은 견해를 염두에 둔다면, 삼국시대 고성지역에 존재한 소국의 명칭은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의 古 自 郡 과 三 國 遺 事 避 隱 編 의 古 自 國 의 용례에 근거하여 古 自 國 으로 불려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6) 1) 1994년 당시까지의 조사에서는 모두 42개소에 이르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확인 보고되었다. 1999년 봄 필자 에 의해 거류면 佳 麗 里 薛 召 史 旌 閭 碑 곁에서 3기, 대가면 琴 山 里 月 村 마을에서 2기의 지석묘가 발견되었고, 고성읍 校 社 里 에서는 이 시기의 聚 落 으로 추정되는 遺 物 散 布 地 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유물산포지는 경남문화 재연구원의 시 발굴조사결과 住 居 址 와 石 棺 墓 등으로 구성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昌 原 文 化 財 硏 究 所 慶 南 大 學 校 博 物 館, 1994, 小 加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地 表 調 査 報 告 - 先 史 古 代 -, p. 3. 2) 고성군과 인접한 사천시 구평리패총, 하동군 목도패총을 비롯하여 통영과 거제 등지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유적의 예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히 헤아려 진다. 3) 三 國 志 卷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第 三 十 弁 辰 傳.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八 勿 稽 子 傳. 三 國 遺 事 卷 五 避 隱 八 勿 稽 子. 日 本 書 紀 卷 第 十 九 欽 命 天 皇 五 年 十 一 月. 4) 三 國 遺 事 卷 一 紀 異 二 五 伽 耶. 5) 金 泰 植, 1990, 加 耶 의 社 會 發 展 段 階, 韓 國 古 代 國 家 의 形 成, pp.55~56. 6) 白 承 玉, 2001, 古 自 國 史 및 浦 上 八 國 聯 盟 史, 古 自 國 史 와 加 耶, 고성문화원, P. 4. - 8 -
統 一 新 羅 時 代 에 이르러 景 德 王 이 古 自 郡 을 固 城 郡 으로 고쳐 蚊 火 良 縣, 泗 水 縣, 尙 善 縣 등 세 곳을 領 縣 으로 두었다. 7) 高 麗 成 宗 14년(996년)에 固 州 刺 史 가 되었다가 뒤에 縣 으로 강등되었다. 현종 9 년(1018년)에 거제에 속했다가 뒤에 縣 令 을 두었다. 元 宗 7년(1266년)에는 郡 을 州 로 승격시켰으나 忠 烈 王 時 에 南 海 에 일시 병합하였다가 다시 복구시켰다. 옛날의 별호는 鐵 城 이다. 8) 朝 鮮 時 代 前 期 에는 高 麗 末 의 恭 愍 王 朝 에 縣 으로 강등시킨 예를 그대로 따랐다. 9) 宣 祖 37년(1422년)에 三 道 水 軍 統 制 營 을 巨 濟 縣 오아포에서 두량포로 이전하였다 가 光 海 君 9년에 固 城 縣 으로 移 管 하였다. 近 代 에 이르러서는 高 宗 7년(1870년)에 固 城 府 로 승격시키고 府 의 치소를 統 制 營 내로 이전하였다. 高 宗 9년(1872년)에는 府 의 치소를 고성으로 복귀하였다. 甲 午 更 張 을 거치면서 고종 32년(1895년)에 행정 구역을 固 城 郡 으로 개편하고 水 軍 統 制 營 을 폐지하였다. 1938년에 固 城 邑 으로 승격 되었다. 10) 2) 周 邊 遺 蹟 당 조사구간과 가까운 유적으로는 가야시대의 고총고분군인 율대리고분군을 들 수 있다. (1) 栗 垈 里 古 墳 群 固 城 邑 栗 垈 里 789-1 동외리 남동측의 밤대라 불리는 구릉에 입지해 있다. 원래는 4기의 고총분이 있었으나 1기는 1972년 한국전력 고성변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 유실되었고, 11) 또 다른 1기는 국도 14호선의 확장구간에 포함되어 1989년 국립진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당시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본 고분군의 구조와 성격 등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 구조는 외곽에 周 溝 를 가진 多 槨 式 封 土 石 槨 墳 이며, 여러 기의 석곽들은 追 加 葬 에 의한 것이다. 墳 丘 의 구축은 원지형면에 대한 整 地 後 그 상면에 흑색 점토를 20-30cm 정도로 고르게 깔아 基 礎 를 마련하고 그 위에 盛 土 墳 丘 를 구축한다. 埋 葬 主 體 部 는 이 성토분구를 다시 파내어 그 안에 마련하였 다. 12) 이러한 분구의 구축 방식은 당시로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었지만 이후의 內 山 里 와 松 鶴 洞 에서도 동일한 분묘축조방식이 확인되어 이러한 아이디어는 고성지역의 특징적인 墳 墓 築 造 法 으로 이해된다. 발굴조사에서는 시기와 지역 양식을 뚜렷이 반 7)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四 雜 志 第 三 地 理 一. 8) 高 麗 史 第 五 十 七 卷 志 第 十 一 地 理 二 慶 尙 道 康 州 固 城 郡 9) 世 宗 實 錄 150 地 理 志 慶 尙 道 晉 州 牧 固 城 縣,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三 十 二 固 城 縣 10) 고성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pp. 536-545. 11)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1977, 文 化 遺 蹟 總 覽 中 卷, p. 574. 12) 國 立 晉 州 博 物 館 固 城 郡, 1990, 固 城 栗 垈 里 2 號 墳.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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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고 있는 도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도기는 먼저 在 地 的 양식을 띤 것, 大 加 耶 系, 新 羅 系 등으로 대별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지역양식의 도기가 공반되는 양 상은 당시 고성지역이 가진 역동적인 대외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예라 볼 수도 있겠 으나 그 시기가 6세기 중엽경에 비정되는 것이어서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古 自 國 의 位 相 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3) 遺 蹟 現 況 당 조사구간에는 조선시대의 와요지와 분묘, 최근세의 서당 등이 분포하는 것으 로 조사되었다. (1) 栗 垈 里 瓦 窯 址 固 城 郡 栗 垈 里 山 外 구릉지와 선상지 고위면이 접속되는 漸 移 帶 에 입지한 조선시대의 와요지이다. 요는 산록의 경사면에 축조된 오름가마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수풀이 무성하여 요는 확인할 수 없었다. 구릉과 선상지의 接 觸 帶 에는 작은 내가 개설되어 있다. 이 내는 雨 期 에만 흐르는 乾 川 으로 그 아래쪽이 扇 狀 地 임을 지시하는 결정적 자료이다. 이 하천에서 다수의 와편이 채집되었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과거에는 많은 양의 와편이 퇴적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 퇴적물에 묻혀 그 일부만이 드러 나 있을 뿐이다. 채집된 와편의 기종구성은 平 瓦 위주이며, 문양은 무문양이 대부분 이나 부분적으로 蒼 海 波 文 이 시문된 예도 있다. 이 밖에 요의 壁 體 를 구성한 것으 로 여겨지는 토제 燒 成 品 덩어리 등이 채집되어 이 유적은 朝 鮮 時 代 에 조업한 瓦 窯 임을 알 수 있게 한다. (2) 栗 垈 里 近 世 墳 墓 群 固 城 郡 栗 垈 里 山 서당으로 이르는 산록에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분묘군이 있 다. 분형은 원분이고, 상석이나 망주석 등 묘역에 배치되는 시설물은 없다. (3) 栗 垈 里 二 樂 齋 固 城 郡 栗 垈 里 山 율대 농공단지 배후 구릉에 있는 木 造 瓦 家 의 건축물이다. 이 건축물은 일제강 점기하인 1941년에 건립된 晋 陽 姜 門 의 서당이다. 지금은 크게 퇴락하여 湮 滅 危 - 11 -
機 에 처하였다. 건물의 중앙에는 二 樂 齋 라 刻 한 현판과 그 좌우측에 記 文 과 銘 文 이 게시되어 있다. 아래의 기문으로 보아 이요재는 1941년인 辛 巳 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문과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記 文 鐵 城 姜 君 淸 汝 姿 性 溫 謹 好 古 知 學 其 大 人 君 爲 築 小 亭 居 之 使 無 關 於 家 務 俗 事 而 專 力 讀 書 亭 在 碧 芳 山 下 龍 山 里 碧 芳 山 之 東 則 海 也 其 巖 巒 孤 截 磅 礴 之 氣 江 海 風 濤 浩 渺 之 狀 雲 卷 浪 湧 擧 八 於 几 案 之 中 一 目 千 里 晨 夕 萬 變 儘 可 樂 也 君 之 友 崔 君 大 汝 命 名 曰 二 樂 蓋 取 魯 論 仁 者 樂 山 智 13) 者 樂 水 之 語 也 君 問 嘗 造 余 請 爲 文 記 其 事 以 子 貢 稱 孔 子 仁 且 智 子 其 聖 矣 紫 陽 先 生 亦 謂 我 慚 仁 智 心 偶 自 愛 山 水 子 之 所 以 爲 聖 與 紫 陽 先 生 之 所 以 爲 心 其 義 爲 何 如 而 可 得 以 易 與 淸 汝 勉 哉 曰 不 然 聖 人 者 有 仁 之 厚 重 不 遷 而 山 似 之 有 智 之 周 流 無 滯 而 水 似 之 此 以 氣 象 言 氣 象 者 德 之 符 也 未 及 乎 此 者 觀 於 山 之 厚 重 不 遷 而 識 其 仁 觀 於 水 之 周 流 無 滯 而 識 其 智 此 以 體 驗 言 體 驗 者 學 之 則 也 學 之 不 已 而 體 驗 之 功 加 密 則 其 氣 象 亦 漸 可 以 見 矣 苟 爲 不 然 徒 曰 山 吾 知 其 高 而 已 矣 水 吾 知 其 湥 而 已 矣 則 是 未 必 眞 能 爲 樂 而 山 水 亦 不 爲 吾 樂 矣 淸 汝 其 諸 顧 名 思 義 而 加 進 於 學 也 哉 辛 巳 三 月 旣 望 晉 山 河 謙 鎭 記 銘 文 結 茅 爲 亭 碧 芳 之 陰 山 高 峽 長 母 闊 溪 湥 一 俯 一 仰 昭 哉 至 理 仁 靜 智 動 其 樂 在 是 余 以 淺 此 何 可 論 然 余 有 聞 志 必 求 源 況 又 本 然 聖 我 同 一 有 爲 可 若 在 我 功 密 扁 以 二 樂 常 目 是 憑 動 靜 體 驗 庶 幾 有 能 13) 知 의 誤 ; 筆 者 註 - 12 -
지도 2) 이요재 및 근세 분묘군 분포도 - 13 -
지적도 1) 조선시대 와요지 분포도 - 14 -
5. 人 類 民 俗 分 野 인류 민속분야에서는 해당 지역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의식이 반영되 어 있는 유 무형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해당지역에 대한 기초적인 문헌조사를 실시하였고, 보충하거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준비된 설문지와 함께 현지조사를 통한 주민들과의 직접 인터뷰로 사실 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사에 포함된 항목들은 고성군의 지리적 위치 인접지역 인구추이 행정 구역 등 지역의 일반현황, 실제 조사마을의 가구구성 및 씨족분포, 생계경제 유형, 비공식 모임, 민간신앙 그리고 농공단지 조성에 따라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 로 생각되는 주민들의 입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調 査 地 域 : : 고성군 거류면 용산리 1) 고성군 및 거류면 일반현황 경상남도의 중앙부 최남단에 위치한 고성군은 동, 서, 남 등 삼면이 바다와 연해 있는 농어촌지역이다. 인접한 지역을 살펴보면, 서로는 사천시, 남으로는 통영시와 거제시, 동북으로는 마산시, 서북으로는 진주시와 접해 있다. 고성군의 면적은 516.9km2로 경상남도 전체면적의 4.9%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14), 동서의 길이는 39km, 남북의 길이는 32km이다 15). 고성군의 세대 및 인구는 각각 22,366세대에 59,257명으로 경상남도 전체인구인 3,134,060명의 1.89%에 불과하며, 이는 도내 20개 시 군 가운데에서는 16번째에 해당될 정도로 적은 인구규모이다 16). 고성군의 행정구역은 1읍 13면 119개 법정리 262개 행정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表 3 고성군 관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행정구역 인구(단위/명) 행정구역 인구 고성읍 24,556 삼산면 2,307 개천면 1,559 상리면 1,978 구만면 1,362 영오면 2,009 거류면 5,093 영현면 1,253 대가면 2,002 하이면 3,348 동해면 4,268 하일면 2,503 마암면 2,464 회화면 4,555 14) 고성군 홈페이지(http://goseong.go.kr), 고성군 소개 중 일반현황 참조 15) 동단: 동해면 용정리 산49, 서단: 하이면 덕호리 895-10, 남단: 하이면 덕명리 산203-3, 북단: 개천면 가천 리 산111-1 16) 경상남도 통계연보 중 시 군별 세대 및 인구 참조 - 15 -
表 3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사지역인 거류면은 고성읍 다음으로 많은 인 구규모를 갖고 있으며, 면적은 36.5km2로 고성군 전체면적에서 7.1% 가량을 점하고 있다. 거류면은 9개 법정리 17), 22개 행정리, 49개의 자연마을, 63개의 반의 행정구 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의 동쪽은 당동만, 서쪽은 고성읍, 동북쪽은 동해면, 남 쪽은 통영시 광도면에 접해 있다. 2) 거류면 용산리 마을 조사 용산리의 가구수는 총 186호 가량이다. 이중에서 적어도 3대 이상 거주한 토박이 라 할 수 있는 가구는 130호 남짓 된다. 마을 내 가구를 주요 성씨별로 구분해서 살펴보면, 김해 김씨와 김영 김씨가 46호 가량 있으며, 그 밖에도 전주 이씨와 함 안 이씨가 29호, 수원 백씨 27호, 진양 강씨 22호, 함안 조씨 8호 가량으로 이들 성씨들이 마을 내 가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성씨들이 마을 내 주요한 토박이 가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마을 내 혹은 인접한 지역에 이들 씨족의 선산과 문중재실이 있어 서 이 같은 사실을 실제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이번 조사의 직접적인 배 경이 된 농공단지 조성 예정지에는 수원 백씨의 선산과 진양 강씨 문중 소유의 서 당이 인접해 있어서 앞으로 이들 문중과도 충분한 협의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 인다. 마을 내 주요한 경제 형태로는 농업이 주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최근에 이 곳에 들어온 가구들 중에서는 요식업과 직장생활을 하는 가구도 몇 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농업가구들은 대체로 벼농사 위주로 토지를 이용하고 있으 며, 토지보유면적은 적게는 1,000평 정도에서 많게는 20,000평 이상의 농토를 소 유하고 있는 가구가 5호나 될 정도로 가구 당 토지면적이 비교적 넓다. 그 외 시설 하우스를 통한 딸기 재배 가구가 2호 있으며, 돼지나 한우를 사육하는 축산업 가구 도 14호 가량 있다. 마을 내 주민들 간의 관계성을 확인할 수 있는 비공식 모임으로는 무궁화봉사 계 18) 가 있다. 이 모임은 주민들 간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1년에 두 세 차례 정도 정기모임을 갖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수시로 임시회의를 개 최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모임은 마을 내에서만 특정 구역에 따라 세 개나 조직되 어 있을 정도로 모임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마을회관 위편 은월쪽에 위치한 웃담(45호 가량),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담(22 17) 거류면 관내 9개 법정리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가려리, 감서리, 거산리, 당동리, 송산리, 신용리, 용산리, 은월리, 화당리 18) 무궁화봉사계 란 공식명칭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모임의 본래 목적은 마을 내 흉사와 길사 그리고 때에 따 라서는 마을대동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주민들 간의 상부상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궁화 봉사계가 실제로 운영되는 것을 살펴보면, 주로 마을 내 초상 이 났을 경우, 계원들이 상가에 몸부조 위주로 도움을 주는 등의 활동만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명칭만 그렇지 실제로는 상포계로서의 기능만 행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 16 -
호 가량) 그리고 간이 버스정류장이 위치한 도로변의 아랫담(50호 가량)에서 구분 되어 조직되어 있다. 마을 내에서 행해지는 민간신앙으로는 동제가 있다. 동제는 섣달 그믐 자장을 즈음하여 행해지고 있으며, 제장은 본래 마을회관 앞의 돌탑, 중간담의 큰샘, 큰샘에 인접한 당산목, 아랫담의 작은샘, 벅수 등 모두 다섯 군데이지만 현재는 돌탑과 큰샘 등 두 곳에서만 제를 지내고 있다. 동제를 주 관하는 제관은 원래 마을주민들 중에서 당해 생기복덕이 가장 좋은 사람을 선정하 였으나, 제관이 된 후 제약받게 되는 행동과 여러 가지 금기사항에 대한 부담감으 로 제관이 되기를 꺼려 현재는 스님에게 맡겨서 제를 주관하게 하고 있다. 동제가 행해지는 절차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동제 당일 오전부터 동제가 행해지는 제장에는 마을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 여 주변청소를 깨끗이 하고, 왼새끼로 꼰 금줄과 황토를 뿌려 놓는다. 금줄과 황토 가 뿌려진 이후부터는 마을주민들도 함부로 제장 주변을 얼씬거려서는 안 되며, 임 신부와 개 등도 될 수 있으면 마을 밖으로 보낸다. 특히, 제를 지내는 시간에는 마 을 앞길과 뒷길로 차량이 이곳을 지나지 않고 외곽으로 우회해서 가도록 차량통제 를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운전자와 주민들 간에 잦은 마찰을 빚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제가 행해지는 시간은 해시 경부터 자시까지이며, 앞서 언급한 것처 럼 제가 행해지는 장소는 본래 돌탑 큰샘 당목 19) 작은샘 벅수의 순으 로 차례대로 행해졌다. 그러나, 동제를 지내는 데 따르는 절차상의 번거로움 등으로 현재는 돌탑과 큰샘 등 두 군데서만 제를 지내고 있다. 제물은 스님이 제를 주관하기 때문에 육류의 진설은 삼가고 있으며, 대체로 메, 과실, 나물, 물, 대추, 밤 등의 제물이 진설된다. 제물 장만 및 동제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동네기금으로 마련되고 있으며, 부족할 시에는 주민들로부터 일정액을 염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조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지닌 농공단지 조성에 대해 인접한 주민들이 갖고 있는 입장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았다. 먼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농공단지 조성예정지에는 수원 백씨의 선산과 전답, 진양 강씨의 서당이 인접해 있다. 이들 문중에서는 농공단지 조성으로 인해 자신들 의 조상들이 편히 쉬면서 후손들을 돌볼 수 있는 공간이 훼손될 지도 모른다는 데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문중에서는 농공단지 조성에 대해서 그다지 호 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이며, 발주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문중과 충분한 협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현재 계획되고 있는 농공단지 이전에도 이미 이곳에는 식품 공장과 가 스 공장 등이 들어선 상태인데, 이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시설물에 인접한 용산리의 주민들에게는 이와 관련하여 별다른 의사를 묻지 않고 공사를 진행시켰다 19) 중간담의 우물 옆에 위치한 당목은 주민들로부터 귀신나무 로 불리기도 한다. 수종은 버드나무이며, 주민들 에 의하면 수원 백씨 성을 가진 주민이 백 년 전 쯤 심었다고 한다. - 17 -
는 데 대해서도 주민들은 언짢게 생각하고 있다. 주민들로서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식품공장이 행정구역 상으로 율대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자신들이 권 리를 주장할 수 없을지 몰라도, 식품공장의 설치로 인해 실제적인 피해는 자신들이 입고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식품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연기와 메케한 악취로 인해 주민들은 평상시에도 밖에 나와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생활의 불편을 겪 고 있는 상태이며, 특히 마을에 바로 인접해 있는 가스공장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 치게 만들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주처에서는 이 러한 건물이 들어서는 데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용산리 주민들에게 한 번도 의사를 묻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은 현재 계획되고 있는 농공단지에 대해서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건설을 추진 중일 것이며 자신들은 또 예전처럼 철저히 무시당할 게 뻔하다는 비판 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발주처에서는 공사 자체의 목적을 살리면서도 이 러한 주민들의 입장 또한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농공단지의 성격과 기능 등의 기본적인 정보를 주민들에게 제공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할 제반사안에 대해서도 주 민들과 충분한 협의과정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6. 地 名 分 野 調 査 地 域 : 고성군 거류면 용산리 지명을 단순히 땅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명은 일정한 지역의 문화와 어떠한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 명을 언어학이나 역사학 문학 혹은 민속학 등에서 어느 한가지 기준으로 해석하려 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몇 가지 기준을 축으로 형성되는 지명을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명의 형성에서 가장 기초적 작용을 하는 것이 방향이다. 즉 동서남 북( 東 西 南 北 )의 방향을 기준으로 지명이 정해진다. 동면 서면 남면 북면 등이 그것 이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지칭하는 우리말은 동은 서는 남은 북은 이다. 여기서 모음 ㅏ 혹은 아래 는 ㅓ ㅗ ㅜ ㅡ ㅣ 등으로 변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즉 시대의 흐름이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음운변화가 생 길 때 이에 따른 단어의 변화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령 동을 뜻하는 우리말 가 시대나 지역적 여건에 따라서 솔 살 새 실 술 등의 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동서남북을 뜻하는 우리말은 처음 기록문자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한자 로 차자표기하였다. 즉 한자의 음이나 훈을 빌어서 표기하였는데 가령 솔은 松 으로 살은 矢 로 새는 新 草 등으로 술은 酒 로 실은 實 谷 등으로 한자의 음이나 훈을 따 서 표현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전혀 엉뚱한 전설과 연관되기도 한다. 가령 송정( 松 - 18 -
亭 )이라는 마을이 처음에는 동쪽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가 나중에는 실재 소나무와 연관 시킨다든지 시문( 矢 門 )이라는 지명 역시 동쪽 문이라는 뜻인데 마을 모양이 화살촉처럼 생겼다거나 실재 화살과 연관되는 전설이 후대에 만들어져 전해지는 경 우가 그것이다. 둘째, 지명은 지형적 특성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지형이 거북이 모양 으로 생겨서 거북섬, 길게 용이 누운 것 같다고 해서 와룡산 등으로 형성되는 것이 다. 이 경우 사람들은 풍수와 연관지어 그 지역의 특성을 억지로 설명하려는 경향 이 짙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명은 역사적 사건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통영과 같이 통제영 이 있어서 생긴 지명이 있거나 이충무공으로 인하여 충무라는 지명이 정해지는 경 우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심지어는 중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연관되는 경우 도 있다. 넷째, 지명은 옛 유적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절골 부처고개 말산 장 군봉 고래장터 가장골 애장골 입석 왕당터 등이 그것이다. 사찰이나 돌부처 돌미륵 고분 아기장터 선돌 고인돌 등과 연관되는 것이다. 다섯째, 지명은 전설을 바탕으로 혹은 지명이 전설의 산실이 되면서 형성되는 경 우가 있다. 즉 만날고개라든지 울음고개 감나무봉먼데이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시 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만남, 누이와 오빠와의 관계, 대홍수설화 등에 연관되는 지 명이다. 이외에도 지역의 특성이나 일정 지역만의 자연조건 지형적 조건 등이 지명을 결 정한다. 해안 지방의 --끗, 어장막 등이나 산골 벌목지의 움터, 광산지역의 --굴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지명은 다양한 축으로 형성이 되고 또 시대의 변이에 따라서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명으로 원래 지명이 가 지고 있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며 그 의미는 무엇인 가를 찾는 것이 지명연구의 목적이다. 이러한 기준을 축으로 다음의 지역을 조사하 려고 한다. 율대 : 율대( 栗 垈 )는 고성읍 동쪽의 마을이다. 율대의 동북쪽에는 송학리 송산리 등이 있다. 율대의 율( 栗 )은 동쪽을 나타내는 우리말 를 나타내는 차자표기 이다. 즉 우리말이 없을 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차자표기이고 이 경우 한자의 훈을 따거나 음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한다. 율의 훈에는 수리가 있다. 수리의 고어가 이다. 상수리나무에서 수리가 밤을 뜻하는 율로 바뀐 것이다. 송 학( 松 鶴 ) 송산( 松 山 )의 松 은 동쪽을 나타내는 우리말 의 차자표기이다. 송의 훈은 솔이다. 동쪽이라는 의미인 이 솔로 표기된 것이다. 이처럼 일정지역을 중심으로 일정방향에 있는 지명들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군락을 형성한다. 가령 중심에서 동 쪽에 처음 마을이 하나 형성될 때 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옆에 또 다른 마 - 19 -
을이 생기면 를 표기하는 다른 글자를 붙여서 이를 표시한다. 이 경우 서로 변별이 생기는 다른말로 동일한 의미를 표기한다고 할 것이다. 용산리 : 용산리( 龍 山 里 )의 원래 이름은 오오촌이었다고 한다. 오촌( 午 村 )으로 추 정된다. 午 는 12 支 에서 말에 해당되는 간지이다. 은 우리말 머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龍 의 우리말은 미르 밀이다. 이 역시 머리를 뜻하는 우리말 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용산과 오산( 午 山 )은 같은 말로 추정된다. 용산 은 중심이 되는 곳 즉 우두머리 혹은 수장 혹은 가장 큰 곳이 되는 것이다. 1462년 세조 7년 성주배씨가 처음 입주할 때가 오오촌이다. 1662년 현종 3년 백씨 강씨 김씨가 들어왔을 때는 갈촌이었다. 갈촌( 葛 村 )은 현재의 고성읍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은 남쪽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이다. 이를 차자 표기 하는 경우 갈( 葛 )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1850년 철종 2년에 용산리로 개 칭되었다. 원래의 마을의 표기인 오오촌을 다른 말로 표기한 것이다. 농공단지 : 용산마을 앞 율대의 가장 동쪽 산아래 자락에 있는 공장들이다. 코박등 : 용산에서 통영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첫 번째 등성이다. 용산마을 가장 동쪽과 마주보이는 곳으로 고성 통영으로 연결되는 길 건너편에 있다. 사람의 코처 럼 앞으로 약간 높게 솟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은 바위의 방언이다. 비암골 : 코박등 동쪽 첫 번째 골짜기이다. 뱀과 연관시키나 그 의미는 불분명하 다. 생시골 : 비암골 동쪽의 골짜기이다. 의미는 불분명하다. 재넘골 : 코박등에서 농공단지 쪽으로 있는 골짜기이다. 재는 고개의 우리말이다. 넘은 넘다이다. 용산에서 산넘어에 있는 공지곡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대골 : 재넘골 서쪽의 골짜기이다. 의미는 불확실하다. 굴방먼당 : 논공단지 뒤 재넘골 지대골 등이 있는 산 정상부에 철탑이 있는 부근 의 산꼭대기이다. 먼당은 꼭대기의 경상도 방언이다. 굴방의 방은 바위의 준말이다. 바위의 방언 방구를 줄여서 발음한 것이다. 굴은 굴( 穴 )이다. 즉 큰 구멍이나 굴이 뚫린 바위가 있는 산의 꼭대기라는 말이다. 웃땀 : 용산의 동쪽편 은월 쪽을 말한다. 위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중간땀 : 용산의 중간 마을이라는 말이다. 아랫땀 : 용산의 아래쪽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샛땀 : 마을의 가장 서쪽 들판 가까이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다. 돌탑 : 중간땀 즉 마을 회관 옆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에 돌무더기 말한다. 마을신 앙의 중심이 되는 당산의 기원처가 된다. 조산( 造 山 )이라고도 한다. 큰새미 : 중간땀과 아랫땀 사이에 있는 우물이다. 마을의 중심으로 인식되는 우물 이다. 새미는 샘으로 우물의 경상도 방언이다. 귀신나무 : 큰새미 옆의 당산나무로 무당들이 걸이굿을 자주 하므로 귀신이 깃든 나무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 20 -
대밑작은새미 : 마을의 서쪽 들판쪽에 있는 샘으로 위의 높은 자리를 대( 臺 )로 인 식하고 그 끝에 붙은 샘이므로 대밑새미라고 하고 큰새미는 주로 식수를 공급하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당산나무가 있으므로 크다고 인식하고 작은 새미는 빨래터로 사용되므로 작다고 인식된 것이다. 벅수골 : 현 마을 버스정류장에 옛날에 나무벅수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뒷번덕 : 샛담 뒤로 솔밭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뒷번덕이라고 한 다. 번덕 뻔덕은 산이나 구릉에 넓고 평평한 자리를 말한다. 이요재 : 이요재( 二 樂 齋 )는 용산에서 가장 큰 성씨 중의 한 사람인 강씨의 옛 서 당이다. 지은지 약 80년 된 것으로 강을봉( 姜 乙 鳳 )이란 분이 용산에서 후학들을 양 성하였고 그 아들 강위( 姜 渭 )가 그 가업을 계승하여 후학을 양성하다가 현재 재넘 골 부근에 서당을 지어서 수업을 하였다. 현재까지 강을봉의 손자인 강일삼( 姜 一 三 ) 관리하였으나 2003 태풍 매미로 거의 무너져 버렸다. 강을봉은 겸산유고( 謙 山 遺 稿 ) 라는 문집이 있고 강위는 석암유고( 石 庵 遺 稿 )가 있는데 한말, 한일합방, 한국동란, 신문명 등을 겪으면서 사라져가는 유교의 풍도를 지탱하기 위한 노력과 신문명의 무질서와 철학부재 등에 대한 통탄, 그리고 유학자로서의 수양 등이 주된 내용이다. - 21 -
Ⅲ. 맺음말 1. 調 査 成 果 조사구간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세일층을 기반으로 하며, 지형적으 로는 산록과 이에 연한 선상지로 구성되어 있다. 조사구간에는 조선시대의 와요지와 분묘군, 서당 등이 분포하고 있다. 율대리 용산마을을 대상으로 한 민속조사에서 성황당을 확인하였다. 2. 遺 蹟 의 保 存 方 案 連 番 遺 蹟 名 性 格 時 期 保 存 方 案 1 율대리 와요지 와요지 조선시대 시굴조사후 결정 매장 및 묘지에 관한 법 2 무연분묘군 분묘 조선시대 후기 률 15-2에 의거 처리 3 二 樂 齋 서당 1941년 문중과 협의처리 유적의 보존방법과 관련하여, 사업예정지내에서 확인된 1개소의 고고자료인 와요 지는 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정확한 범위, 분포상과 그 밀집정도를 파악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보존방법을 구체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3. 調 査 團 意 見 - 22 -
參 考 文 獻 三 國 志 卷 第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新 羅 本 紀 二 奈 解 尼 師 今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八 勿 稽 子 傳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四 雜 志 第 三 地 理 一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四 雜 志 第 三 地 理 一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二 三 國 遺 事 卷 第 五 避 隱 八 勿 稽 子 日 本 書 紀 卷 第 十 九 欽 命 天 皇 日 本 書 紀 卷 第 十 九 欽 命 天 皇 高 麗 史 第 五 十 七 志 卷 第 十 一 地 理 二 慶 尙 道 康 州 固 城 郡 世 宗 實 錄 150 地 理 志 慶 尙 道 晉 州 牧 固 城 縣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三 十 二 固 城 縣 歷 代 紀 年 下 東 方 二 十 七 國 都 東 國 歷 代 總 目 附 地 誌 修 山 集 卷 十 一 東 史 世 家 伽 倻 世 家 海 東 繹 史 續 輯 三 地 理 考 三 韓 下 弁 辰 彊 域 考 一 弁 辰 考 彊 域 考 二 弁 辰 別 考 ( 亦 名 迦 羅 考 ) 嶺 南 邑 誌 三 十 一 固 城 府 邑 誌 古 蹟 條 大 韓 疆 域 考 二 增 補 任 那 考 金 東 鎬, 1972, 固 城 地 區 古 墳 發 掘 調 査 報 告, 考 古 美 術 116.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1977, 文 化 遺 蹟 總 覽 中 卷. 固 城 郡, 1983, 小 伽 倻 의 뿌리. 定 森 秀, 1983, 韓 國 慶 尙 南 道 泗 川 固 城 地 域 出 土 陶 質 土 器 について, 角 田 文 衛 博 士 古 稀 紀 念 古 代 學 論 叢.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1984, 固 城 東 外 洞 貝 塚, 上 老 大 島.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1984, 伽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調 査 報 告 書 - 慶 南 固 城 郡 -. 金 東 鎬, 1986, 고고학상에서 본 소가야문화의 제문제, 嶺 南 考 古 學 1, 嶺 南 考 古 學 會. 姜 仁 求, 1987, 舞 妓 山 과 長 鼓 墳,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金 泰 植, 1990, 加 耶 의 社 會 發 展 段 階,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연구회. 김정완 권상열 임학종, 1990, 固 城 栗 垈 里 2 號 墳, 國 立 晉 州 博 物 館 固 城 郡. 김종철 서오선 신대곤, 1992, 固 城 貝 塚, 국립중앙박물관. 창원문화재연구소 경남대학교 박물관, 1994, 小 加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地 表 調 査 報 告 - 先 史 古 代 -.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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